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92번째 시간으로서 “전파하는 사람들” 宣べ伝える人たち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중에서 13절은 지난 주에도 살펴본 부분입니다만, 이 구절은 다음 구절까지도 이어져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오늘은
13절까지 포함해서 15절까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은 간단한 질문부터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집에 계십니다. 그런데 밥을 먹으려고 해요. 그러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 밥을 지어야겠지요. 그럼 밥을 짓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 쌀을 씻어야겠지요. 그럼 쌀을 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 쌀을 가지고 와야 하겠지요. 그런데 쌀이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죠. 쌀을 사와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쌀을 사오고, 사온 쌀을 씻고, 그 쌀로 밥을 짓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죠. 밥을 먹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본다면 밥을 먹는다는 것이 바로 최종 목표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그냥 앞서 열거한 내용들을 무작정 다 하면 되는 것이 아니에요. 무엇이 중요하냐 하면 바로
순서입니다.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해서 쌀을 사와서는 그대로 밥솥에 넣어서 스위치르 누르고는, 그 다음에 밥을 씻어요? 그런
사람은 없겠지요.
그러니까 해야 할 것을 그 순서에 맞게 모두 해야지만 마지막 목표인 밥을 먹는다는, 놀라운 임무를 완벽하게 달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좀 이상하게 들릴 지는 모릅니다만, 오늘 본문 말씀도 이런 구도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최종목표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10장 13절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3.「主の御名を呼び求める者はみな救われる」のです。
즉,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 그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비싼 돈을 내고 입시학원에 들어갔어요. 거기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 입시학원에서 수석도 했어요. 그런데 결국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어요.
입시학원에 다니는 유일한 목표가 그 학원에서 1등 하는 거예요? 아니에요.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건 다 완벽하게 했는데 결정적으로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아무리 그 입시학원에서 수석을 했다 하더라도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직분도 받았습니다. 헌금도 많이 냈습니다. 교회도 많이 세우고, 뭐 여러가지 일들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마지막에 결정적으로 구원을 받지 못했어요. 그렇게 된다면 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여러분께서는 마지막 날에 한 분도 남김없이 모두 구원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냐 하면, 일단 확인을 위해서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0장 13절~15절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0章13節~15節
“13.「主の御名を呼び求める者はみな救われる」のです。
14.しかし、信じたことのない方を、どのようにして呼び求めるのでしょうか。聞いたことのない方を、どのようにして信じるのでしょうか。宣べ伝える人がいなければ、どのようにして聞くのでしょうか。
15.遣わされることがなければ、どのようにして宣べ伝えるのでしょうか。「なんと美しいことか、良い知らせを伝える人たちの足は」と書いてあるようにです。”
자, 제가 드리는 말씀을 들으시면서 본문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최종목표는 무엇이었죠? 그렇죠. 13절에 있는 구원을 받는 것, 이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그러면 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최종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대요?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잖아요.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까.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씀이
13절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わたしに向かって『主よ、主よ』と言う者がみな天の御国に入るのではなく、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のみこころを行う者が入るのです。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저 입버릇처럼, 아니면 남들한테 믿음이 좋은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주여 주여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에요.
지난 주에 마태복음 14장 30절에서 살펴본 것처럼, 바람을 보고 베드로가 물에 빠져갈 때에 주님을 부르지 않았습니까. 그게 그냥
입버릇처럼 부른 것인가요?
아니에요. 그것이 아니라 정말 필사적이었습니다.
“주님!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아무것도 의지할 수가 없어요!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나를 살려주세요! 나를
구원해주세요!”
이와 같이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만을 의지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됐죠?
그러면, 아무나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14절 전반부를 봅니다.
로마서 10장 14절 전반부
“14.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しかし、信じたことのない方を、どのようにして呼び求めるのでしょうか。
자,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데, 아무나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는 없다고 해요.
14절 전반부 말씀이 무엇입니까. 쉽게 말해서, 아니, 주님을 믿어야 주님의 이름을 부르든지 말든지 하지, 믿지도 않는데 어떻게
주님을 부르느냐 하는 것이에요.
이는 당연한 말씀이지요? 주님을 부른다는 것은 주님을 의지한다는 말씀인데, 주님을 믿어야 의지하든지 하지, 주님을 믿지도 않는데
어떻게 의지하겠어요.
그러니까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된대요? 예, 주님을 믿어야 한다는 그것입니다.
그러면 믿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냐 하면,
14절 중반부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聞いたことのない方を、どのようにして信じるのでしょうか。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반드시 들어야 합니다. 여기서 듣는다고 하는 것은, 물론 누군가가 하는 말을 듣는다는 것도 되지만,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도 포함된다고 하겠지요.
보거나 듣지도 못한 주님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믿기 위해서는 보고 듣는다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다음으로 어떻게 하면 듣게 될까요.
14절 후반부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宣べ伝える人がいなければ、どのようにして聞くのでしょうか。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 그 때까지는 예수님에 대해서 한 번도 들은 적도 본 적도 없고 전혀 알지도 못했는데, 가만히 혼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예수님을 믿게 되신 분 혹시 계신가요.
그런 경우는 없겠지요. 대부분 누군가로부터 예수님에 대해서 듣게 되거나, 아니면 책이나 영화 등을 통해서 접하게 되어 주님을 알게
되고, 그리고 믿음을 갖게 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도 다 주님에 대해서 듣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전파하는 자가 필요하다고 기록합니다.
전파하는 자는 사람일 수도 있고, 그리고 방금 말씀 드린 것처럼 책이나 영화일 수도 있습니다. 수단과 방법은 어찌 되었든 간에 그
사람에게 전달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전파하는 자>입니다.
자, 조금만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전파하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다음 구절 로마서 10장 15절 전반부를 봅니다.
로마서 10장 15절 전반부
“15.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15.遣わされることがなければ、どのようにして宣べ伝えるのでしょうか。
주님에 대해서 듣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파하는 자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전파하는 자는 자기가 혼자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를 정리해보면 어떻게 되냐 하면, 최종목표가 무엇이었지요? 네,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럼 시작이 어디냐 하면,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이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자,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을 믿기 위해서는 주님에 대해서 들어야 합니다.
주님에 대해서 듣기 위해서는 주님에 대해서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에 대해서 전파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도 좀 말씀이 잘 이해가 안 되는 분이 계시다면, 이를 뒤집어보면 더욱 알기 쉬워집니다.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가, 주님을 전파합니다. 그러면 그 전파하는 사람을 통해서 주님에 대해서 듣게 됩니다. 주님에 대해서
들으면 주님을 믿게 되지요. 그러면 주님을 부르게 되고, 주님을 부르게 되면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좀 이해가 되셨나요?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물론 마지막에 구원을 받는 사람이 제일 중요하지요. 하지만,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제일 처음 있는 사람,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잖아요. 이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없다면 그 이후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어서 비로소 모든 사역들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보내심을 받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1번 목사, 2번 기타.
특히 한국에 가끔 보면 목사라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 신성시 하는 경향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목사가 신성합니까.
예를 들어서 보면요, 성가대가 있잖아요. 저도 한국에서 성가대 생활을 몇 년 했었습니다만, 성가대의 성자가 거룩하다는 글자잖아요.
그러면 성가대원들은 모두 거룩한 건가요? 아니에요.
성가대원이 거룩해서 성가대인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을 드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성가대인 것이지요.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를 이른바 성직자라고 합니다만, 이는 목사가 거룩하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직업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성직자인 것이지요.
요즘도 아직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경우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전에 한국에서 제가 다니던 교회에 보면 그런 말씀을 하시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설교를 하시면서, “……뭐뭐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도대체 무슨 소리에요? 목사인 자기랑 성도님들은 다르다는 건가요?
도대체 이 말은 무슨 뜻인지 아직까지도 이해가 안 갑니다.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기가 저면, 성도님들은
숟가락입니까. 예, 잘 이해가 안 되셨다면, 집에 가서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ㅎㅎ
아무튼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꼭 목사나 교역자 뿐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보내심을 받았을까요.
간단합니다.
성경은 누구 읽으라고 있는 책입니까. 목사만 읽으라고 있는 책이 아니잖아요. 우리 모두, 더 구체적으로는 나 읽으라고 있는 책이
바로 성경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문제입니다. 마가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それから、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福音を宣べ伝えなさい。
이 말씀은 누구한테 하신 말씀이세요? 1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2번 이 말씀을 읽는 모든 사람들.
그렇죠. 예수님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보내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구나가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어디에 나와 있을까요.
예,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9절~20절
“19.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しかし、ペテロとヨハネは彼らに答えた。「神に聞き従うよりも、あなたがたに聞き従うほうが、神の御前に正しいかどうか、判断してください。
私たちは、自分たちが見たことや聞いたことを話さないわけにはいきません。」
이 말씀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지난 주에 살펴본 베드로와 비교하면 어때요? 이런 말씀을 드리면 나중에 천국 갔을 때 베드로한테 혼
날지 모릅니다만, 그 믿음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물속에 빠질 뻔한 베드로에 비하면, 지금 이 베드로, 많이 컸쵸?
지금의 베드로는 예수님한테 혼이 났던 작은 믿음을 가졌던 베드로가 아닙니다. 이제 베드로는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는 강한 믿음의
소유자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모든 것을 보고 들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어요. 한 두 번 보았다면
자신이 헛것을 보았나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며칠 동안 보이셨다고요?
사도행전 1장 3절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イエスは苦しみを受けた後、数多くの確かな証拠をもって、ご自分が生きていることを使徒たちに示された。四十日にわたって彼らに現れ、神の国のことを語られた。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이 땅에 머무시면서 많은 사람들 앞에 나타나셨어요. 이제 사도들은 안 믿을래야 안 믿을 수가
없어요.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 직접 보고 들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전파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물며 죽음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믿음을 지킬 수 있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보고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보고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이 또한 간단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됩니다.
그런데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좀 의문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그런 설교 말씀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 인생이 바뀝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축복을 받습니다. 은혜가 넘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만나서 축복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라는 말씀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이 말씀을 듣고 나서 집에 가는 길에 보면 좀 마음이 공허했던 기억이 있어요.
왜냐 하면,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인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요. 성경책을 펼치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어요. 그럼 성경책을 읽기만 하면 내 인생이 변해요? 성경책만 읽으면 축복 받나요?
그건 아닌 것 같다는 거죠.
그래서 제가 오늘은 여러분도 집에 가시는 길에 공허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주님을 만나는 방법을 알려드릴까 합니다.
자, 지난 주에 공부했던 베드로, 아직 믿음이 작았던 베드로는 물위를 걷다가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바람을 보는 바람에
물속으로 빠지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여러분의 삶, 순간순간마다 감사한 마음이 드시나요?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밥 먹고, 주일 아침이라면 씻고 준비하고
교회까지 왔다가 집에 가는 하루……평일이라면 출근 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잠 자고 다음 날 일어나고……이와 같은 우리의 정말 평범한
삶을 보았을 때, 어느 시점에 우리는 감사를 드려야 할까요.
좋은 일이 있었을 때? 그 때만 감사를 드리면 되고 나머지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면 되나요?
우리에게 감사가 없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크나큰 축복을 축복이라 생각하지 않고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탄탄하고 평탄한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감사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냥 한 번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의사 선생님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작은 그림자가 보이는데, 정밀 검사를 좀 해봅시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경제적인 문제나 직장 문제, 가족문제, 인간관계에 있어서 문제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때서야 깨닫게 됩니다.
“아아, 내가 지금까지 아무 일 없이 지내왔던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구나. 사실은 하루하루가 크나큰 축복의 연속이었구나
나는 평탄한 길을 내 힘으로 걷고 있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출렁이는 물 위를 걷고 있었던 것이구나.
사실은 그 때 순간순간마다 내가 빠지지 않도록 주님이 나를 지켜주고 인도해주시고 계셨던 것이구나”
……하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제 이야기를 할까요. 저는 솔직히 주님을 하루하루 만나고 있습니다. 이는 자랑이 아니에요. 그리고 또한 제가 목사라서 그렇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지금 상황을 본다면 한국에 있는 교단에서 선교비가 지원되는 것도 아니요, 여기 일본에서 생활에 필요한 월급을 꼬박꼬박 받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본다면, 이는 과장이 아니라 벌써 몇 년 전에 짐 싸서 한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한국에 돌아가면 비자 걱정도 없지요. 제 아내도 취직할 수 있고, 저도 뭐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일본어를 가르치면서 어느 정도는
생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한국을 비롯해서 일면식도 없는 분들이 선교 후원을 해주십니다. 솔직히 얼마나 놀라운 지 몰라요. 이와 같은 손길 덕분에
하루하루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생각을 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그런 분들께 복을 안 주신다면 누구한테 주실까. 분명 주님으로부터 큰 축복이
있으실 것입니다.
반면에 저는 어떻습니까.
이건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주님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어요. 그야말로 순간순간마다 주님을 보고 듣고 주님을 느끼면서, 그리고 주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이는 조금도 과장이 아닌 제 진심입니다.
저만이 아니라 모든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내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요, 평탄한 길을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여기에는 감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감사가 없다면 주님을 만날 수도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주님의 축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서 감사가
넘쳐나오게 되고, 그 순간마다 주님을 만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앞서 목사인 저나 여러분이나 똑같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제 마음에는 한 가지 분명 다른 것이 있습니다. 제 마음 안에 깊이
박힌 말씀이 있어요.
고린도전서 9장 16절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私が福音を宣べ伝えても、私の誇りにはなりません。そうせずにはいられないのです。福音を宣べ伝えないなら、私はわざわいです。
여러분이 복음을 전파하면 크나큰 축복이 함께 하시겠지만, 목사인 제가 복음을 전파하면 본전이고, 전파하지 않는다면 나한테 화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회사원이 회사 다니면서 일을 한다는 것이 자랑인가요? 아니요. 당연한 일이지요. 하지만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이는 혼이 날 일이
아니겠습니까.
회사에서 월급을 받고 일을 안 하면 직장에서 짤리듯이 제가 주님의 은혜를 받고 제 할 일을 안 한다면 어찌 제가 주님으로부터
꾸짖음을 안 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목사든 아니든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점이고, 우리가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예수님을 보고 듣고 만나야 하는데, 이는 바로 감사함을 통해서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순간순간마다 감사함 속에서 주님을 만남으로 인해서 아름답고 좋은 소식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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