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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6회 말씀까지의 거리
2022년 6월 26일 설교 - 로마서 강해 89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8절
“8.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10章8節
“8.では、何と言っていますか。「みことばは、あなたの近くにあり、あなたの口にあり、あなたの心にある。」これは、私たちが宣べ伝えている信仰のことばのこと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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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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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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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89번째 시간으로서 “말씀까지의 거리” みことばまでの距離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지난 주에 전해드렸던 말씀에 대해서 잠시 복습을 하고자 합니다.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본문에서는 그 누구도 사람의 힘으로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모셔 올 수 없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죽음까지 내려가서 예수님을 일으켜드릴 수 없듯이, 예수님께서 오셔서 주신 기쁨과 소망은 물론이요, 예수님의 부활로 인한 용서도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신 은혜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또한 지난 주에는 그 본문이 신명기 30장에서 인용한 것이지만 지난 주에는 로마서의 내용만 살펴보고, 원문인 신명기는 이번 주에 살펴보겠다는 말씀을 드렸었지요.

그래서 이번 주는 인용된 부분의 원문인 신명기 30장 11절~13절까지,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14절도 함께 살펴볼까 합니다. 그 이유는 신명기 30장 14절이 바로 오늘 본문인 로마서 10장 8절에서 인용한 원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신명기 30장 11절~14절을 보시겠습니다.


신명기 30장 11절~14절
“11.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2.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13.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14.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11.まことに、私が今日あなたに命じるこの命令は、あなたにとって難しすぎるものではなく、遠くかけ離れたものでもない。
12.これは天にあるわけではないので、「だれが私たちのために天に上り、それを取って来て、私たちが行えるように聞かせてくれるのか」と言わなくてよい。
13.また、これは海のかなたにあるわけではないので、「だれが私たちのために海のかなたに渡り、それを取って来て、私たちが行えるように聞かせてくれるのか」と言わなくてよい。
14.まことに、みことばは、あなたのすぐ近くにあり、あなたの口にあり、あなたの心にあって、あなたはこれを行うことができる。

모세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전하면서, 이는 어렵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적지 않게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만약에 지키기가 어렵지 않고, 마음만 먹으면 모든 사람들이 지킬 수 있었다면 무엇이 필요 없었을까요?

그렇죠.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 없었겠지요. 하지만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율법을 지킬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만 보더라도 600개가 넘는데 그걸 어떻게 모두 완벽하게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야고보서 2장 10절에서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야고보서 2장 10절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律法全体を守っても、一つの点で過ちを犯すなら、その人はすべてについて責任を問われるからです。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아주 작은 율법 하나를 어기는 것은 율법 모두를 어긴 거나 마찬가지라고 하잖아요.

이는 말하자면 형법 중에서 작은 죄 하나를 저질러도 형법 모두에 있는 죄를 다 저지른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걸어가다가 신호등 하나 어긴 것만 가지고도 살인죄를 포함해서 온갖 흉악범죄를 저지른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그럼 그런 범죄를 저지르게 되면 어떤 벌을 받게 됩니까. 그렇죠. 죽음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하고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웬만한 한국어 성경이나 일본어 성경에는 다 지키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상하다 하고 이런저런 영어 성경을 보니까 딱 하나 KJV, 한국어로 하자면 흠정역이라고 하는 킹제임스 영어 성경 번역본에 힌트가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는 지키기 어렵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말로 하자면 숨겨진 것, 가려진 것이 아니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자면, 너희들이 지켜야 할 것은 내가 하나도 남김 없이 모두 다 말했다. 비밀로 가려 놓거나 숨겨놓은 것은 하나, 모두 다 공개했다, 모두 다 너희에게 알려주었다는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셨지요? 자 그 다음에 또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11절 마지막에는 ‘먼 것도 아니라(遠くかけ離れたものでもない)’라는 말씀, 이 부분도 KJV에 보니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번역본들과 비교해보면 KJV는 분명 ‘거리’를 강조하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그렇게 이 ‘거리’에 대한 의미가 강하지 않나 합니다.

신명기 12절과 13절을 보면 어떻습니까.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신명기 30장 12절~13절
“12.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13.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12.これは天にあるわけではないので、「だれが私たちのために天に上り、それを取って来て、私たちが行えるように聞かせてくれるのか」と言わなくてよい。
13.また、これは海のかなたにあるわけではないので、「だれが私たちのために海のかなたに渡り、それを取って来て、私たちが行えるように聞かせてくれるのか」と言わなくてよい。

이것을 보면 옛날에 즐겨봤던 서유기가 떠오릅니다. 거기에 나오는 손오공이나 사오정, 저팔계 등은 물론 상상 속의 등장인물입니다만, 삼장법사는 실존 인물이었지요. 중국의 승려였던 삼장법사는 현재 인도 쪽인 천축까지 가서 경전을 가져오기 위해 중국 장안을 출발해서 무려 16년에 걸친 길고도 험난한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어떨까요. 한국이나 일본 사람이 성경을 가져오기 위해서 저기 이스라엘이나 그리스까지 머나먼 여행을 했다는 말씀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없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복음이 전해집니까. 그렇죠. 한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습니다만, 먼 나라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들어옵니다. 그리고 수많은 순교의 피가 이 땅에 뿌려졌습니다.

그 결과 이제 우리는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자유롭게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읽을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집에 보시면 성경책이 어느 정도 있으십니까. 교회에 몇 년 다니신 분들 댁에 보시면 적어도 교회에 다니시는 사람 수 이상으로 성경책이 있지 않습니까. 사실 이것만 보더라도 놀라운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불과 천년도 안 된 책들이 국보라고 하는데, 수천년도 더 된 성경책이 집에 막 굴러다녀요.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것을 지금 우리가 읽을 수 있어요. 이것만 보더라도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모릅니다.

저희 교회만 하더라도 개역한글이나 일본 신개역 제3판 성경 같은 책은 너무나도 많아요. 좀 가져가셔서 보실 분들은 가져가셔도 될 만큼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마 안 가져가실 거예요. 왜냐하면 여러분 댁에도 많이 있을 거거든요.

이처럼 우리에게는 말씀이 너무나도 가까이에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펼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30장 14절도 보세요.

신명기 30장 14절
14.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14.まことに、みことばは、あなたのすぐ近くにあり、あなたの口にあり、あなたの心にあって、あなたはこれを行うことができる。

이는 오늘 본문인 로마서 10장 8절과 함께 볼까요?

로마서 10장 8절
“8.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10章8節
“8. では、何と言っていますか。「みことばは、あなたの近くにあり、あなたの口にあり、あなたの心にある。」これは、私たちが宣べ伝えている信仰のことばのことです。”

하나님의 가르침이 하늘에 올라가서 가져오거나, 먼 바다를 건너서 가져와야 하는 것이 아니에요. 마치 우리들 집에 여기저기 있는 성경책처럼 대단히 가깝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종이 책이 아니더라도 인터넷만 있으면 어디서든지 성경을 보실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더라도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오셨을 때를 보세요. 예수님이 어디 한 곳에서 꼼짝도 안 하시면서, 얘들아, 너희들이 와서 내 말을 듣고 싶으면 오고, 아니면 말고……였습니까. 아니에요.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은 밤이나 낮이나 정말로 부지런히 온 이스라엘을 누비셨습니다.


바울도 3번에 걸친 전도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얼마나 많은 거리를 다녔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역사적 기록들을 보면 예수님을 팔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가룟 유다를 제외한다면 가룟 유다를 대신해서 열 두번째 사도가 된 맛디아를 포함해서 모두가 각처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それから、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福音を宣べ伝えなさい。

이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지금도 한국이나 일본이나 국내외를 막론하고 수많은 목사님 선교사님들이 복음을 전파하고 계신 것 아니겠습니까.

한국만 보더라도 조용기 목사님 같은 경우는 전세계 80개국을 방문했는데 전체 여행 거리가 지구를 120바퀴나 되는 거리를 돌면서 복음을 전파하셨다고 하고, 한국도 방문했던 빌리 그래함 목사님도 평생 동안 전세계 방방곡곡을 돌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데에 그 인생을 바치셨습니다.


뭐 제가 그런 분들과는 비교도 안 되지만, 매주 전도지를 들고 군마현 여기저기를 찾아 뵙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전도지를 가져가면 정말 반갑게 맞아 주시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다 그런 건 아니거든요. 제가 들어가면 싸한 분위기가 감도는 경우도 있고, 또는 오지 말라는 곳도 있습니다.

전에도 전도를 하면서 어디를 가니까, 자기는 사실 다른 교회에 나가고 있는데, 거기 목사님이 제가 나누어 드린 전도지를 보셨대요. 그래서, 그 분이 그 목사님한테, 이카호 교회 목사님은 참 열심히 전도를 하고 다니신다는 말을 했더니만, 그 목사님이 그 전도지를 보고 싫어하시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분이 저더러 하시는 말씀이 정말 죄송한데 다음부터는 안 오셔도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뭐,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간에 오지 말라고 하면 안 갑니다. 하지만 거부하지 않은 경우는 끝까지 나누어 드리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촬영을 하고 메일을 보내드립니다. 거기 보시면 제가 종이를 들고 계좌번호를 말하면서 선교후원을 부탁 드리거든요. 그런데 지난 번에는 어떤 분이 저한테 메일을 보내시면서 하는 말씀이, 그러는 게 창피하지 않냐고 해요.


아니, 저라고 자존심이 없습니까. 돈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돈 달라고 매번 종이 들고 부탁 드리는 것이 왜 창피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제 알량한 자존심 하나 상함으로 해서 주님께 영광이 된다면 그게 대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복음을 받은 것처럼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게 되면 믿음이 어디에 있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와 가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시기 전에 또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28장 20절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命じておいた、すべてのことを守るように教えなさい。見よ。わたしは世の終わりまで、いつもあなたがたとともにいます。」

주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와 얼마나 가깝게 계십니까.

그런데 우리는 가끔 이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말씀도 우리와 함께 있고 주님도 우리와 함께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의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말씀이 멀리 있고 주님도 멀리 있는 착각을 일으키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어려움이 닥쳐오면 우리와 함께 있는 주님을 믿고 의지해야 하는데, 주님이 저 높은 하늘이나 저 먼 바다 건너에 계신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무엇을 의지하게 되냐 하면 사람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잠시 욥기 이야기를 해볼까요. 욥기를 보면 욥은 정말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참으로 충성된 의인이라고 하나님이 칭찬하실 정도였어요.


그런데 마귀가 하나님한테 충동(そそのかす)을 합니다.

욥이 하나님이 많은 축복을 줬으니까 그런 거겠죠. 줬던 축복을 다 뺏어 보세요. 금방 하나님을 욕할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럼 어디 한 번 해보라고 하세요.

그랬더니 사탄이 그의 자녀들을 다 죽이고 재산들을 다 빼앗아 버립니다. 하지만 그래도 욥은 죄를 짓지 않아요.


욥기 1장 21절
“21.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21.そして言った。「私は裸で母の胎から出て来た。また裸でかしこに帰ろう。主は与え、主は取られる。主の御名はほむべきかな。」
22.ヨブはこれらすべてのことにおいても、罪に陥ることなく、神に対して愚痴をこぼすようなことはしなかった。

그러자 하나님이 사탄에게 말씀하십니다. 거봐라. 네가 그렇게 다 빼앗아도 욥이 여전히 믿음을 지키지 않느냐. 그러자 사탄이 또 말합니다. 이제 그의 건강을 빼앗으면 하나님을 버릴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또다시 그럼 어디 한 번 해보라고 말씀하세요.

이제 사탄이 욥의 몸을 칩니다. 그러자 어떻게 됩니까.


욥기 2장 7절~8절
“7.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8.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7.サタンは主の前から出て行き、ヨブを足の裏から頭の頂まで、悪性の腫物で打った。
8.ヨブは土器のかけらを取り、それでからだを引っかいた。彼は灰の中に座っていた。

참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풍부하고 부러울 것 없었던 욥이 하루 아침에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그래도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지켰던 것입니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듣고 먼 곳에서 친구 세 사람이 옵니다. 와 봤더니 모습이 정말 비참하거든요. 그래서 얼마나 비참하면 친구 셋이 욥의 그 모습을 보더니만 7일 동안 차마 말을 건네지 못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7일이 지나자 욥과 그 친구들의 대화가 시작돼요. 그런데 말이에요. 욥의 친구들이 처음에는 위로를 하려고 오긴 왔는데, 욥과 대화를 하다 보니까 어떻게 된 게 욥을 책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막판에는 거의 싸움이 날 지경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 세 친구들의 이름이 엘리바스(エリファズ)와 빌닷(ビルダデ)과 소발(ツォファル)인데, 이 친구들이 한 말들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는 화를 내세요.

욥기 42장 7절
“7.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主がこれらのことばをヨブに語った後、主はテマン人エリファズに言われた。「わたしの怒りはあなたとあなたの二人の友に向かって燃える。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しもべヨブのように、わたしについて確かなことを語らなかったからだ。

그래서 누구는 이 욥기야말로 위로자가 어떻게 책망자로 변하는지를 알려준다고 했습니다. 물론 친구들이 잘못 했지요.

아니, 위로를 하러 왔으면 위로를 해야지, 지금 재산 잃고 자식도 잃고, 본인은 지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종기가 나서, 말 그대로 만신창이가 되어서는, 깨진 그릇 조각으로 온몸을 벅벅 긁고 있는 친구를 앞에 두고 책망을 한다면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그야말로 하나님한테 혼이 나도 싸다고 하겠지요.


뭐, 이런 것이 대체적으로 보면 일반적인 평가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지금까지 몇 천년 동안 비난의 대상이 되어 온 욥의 친구들 편을 조금 들어볼까 합니다.

아니, 그렇다고 욥의 친구들이 잘했다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그들에게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뿐입니다.

자, 앞서 말씀 드렸던 것처럼 세 친구가 욥에게 왔는데, 7일 동안 아무런 말도 못 건네고 침묵만 흘렀습니다. 이 침묵을 깬 것은 욥이었습니다.

욥기 3장 3절부터 욥이 친구들 있는 앞에서 입을 엽니다. 이 말이 26절까지 이어지게 되는데, 그 내용은 뭐냐 하면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욥기 3장 1절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そのようなことがあった後、ヨブは口を開いて自分の生まれた日を呪った。


세상에, 자기 생일을 저주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쉽게 말해서 내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냥 태어나지 말고 죽어 버렸더라면 좋았을 것을, 왜 내가 태어나서 이 고생을 하냐는 것입니다.

자, 생각해보세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만, 여러분 친구 중에 어떤 분이 다치거나 병에 걸려서, 여러분이 병문안을 갔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하는 말이, 아이구, 내가 이렇게 아파서 고생할 줄 알았더라면 내가 괜히 태어났어. 내가 태어나지 말고, 그냥 엄마 뱃속에서 죽어 버렸어야 했는데, 괜히 태어나 가지고 이 고생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고통스럽다. 지금이라도 차라리 팍 죽어버리면 좋겠는데 죽으려고 해도 죽을 수가 없네 그래…….

만약 여러분 친구가 여러분 앞에서 그러고 있으면, 여러분은 어떻게 말하시겠습니까. 어, 그래? 알았어. 지금이라도 당장 팍 죽어버리라고 기도할게……. 설마 그러시겠어요?

아니죠. 그럼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아휴……힘든 건 알겠지만 그러면 안돼……라고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랬더니 그 친구가 하는 말이, 이 사람아, 안 되긴 뭐가 안돼. 니가 나처럼 힘들어 봤어? 당해 보지도 않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라고 그 친구가 말했다면 어떤 말이 나오겠습니까. 아니 이게 보자보자하니까 못하는 말이 없네. 니가 뭘 잘못했으니까 하나님한테 벌을 받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그 친구가 이래요. 야, 니가 뭘 알어? 내가 잘못한 게 없다니까 그러네?

그러자 여러분이 말합니다. 어쭈 이게 하나님한테 벌을 받는 주제에 혼자 잘했다고만 하네?

뭐, 이렇게 되지 않겠어요?

사실 좀 거칠기는 하지만, 알고 보면 이게 욥기의 흐름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애초에 어디서 잘못됐냐 하는 것이죠. 물론 지금 아파서 괴로워하고 있는 욥을 책망한 친구들이 잘못한 것은 맞습니다만, 그 시작을 따져보면, 친구들을 앞에 두고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말하자면 자신의 신세 한탄이 그 시작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지요.


그럼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신세 한탄도 못해요? 아니요. 그게 아닙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저라고 신세 한탄할 일이 없을 것 같으십니까. 아니요 있지요. 저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가끔은 신세 한탄도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사실 이런 죽는 소리를 왜 하겠습니까. 아, 자기 힘들어 죽겠다는 소리는, 죽고 싶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살고 싶어서 하는 소리, 살겠다고 하는 소리, 좀 위로 받고 싶어서 하는 소리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을 자기 친구들이나 가족이나 이웃한테 한다면 이는 바로 욥과 그의 친구들의 꼴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럼 누구한테 해야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와 가까이 계신 주님,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께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 보면 사람들이 주님께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냐고 물었더니, 주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이지요.

당시 이 기도를 들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아, 그런 형식으로 기도를 드리면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을까요?


아마도 당시 주님의 기도문을 들었던 백성들은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어? 그런 것도 기도해도 돼” 라고 하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은 또 하나의 형식을 주신 것이 아니라, 네가 말하고 싶은 대로 기도를 하라는 주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9절~11절
“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9.あなたがたも、自分の子がパンを下さいと言うときに、だれが石を与えるでしょう。
10.また、子が魚を下さいと言うのに、だれが蛇を与えるでしょう。
11.してみると、あなたがたは、悪い者ではあっても、自分の子どもには良い物を与えることを知っているのです。とすれば、なおのこと、天におられるあなたがたの父が、どうして、求める者たちに良いものを下さらないことがありましょう。

아들이 부모한테 배가 고프다면서 떡을 달라고 한다면, 아들이 어른이라고 한다기 보다는 아직 미성년자라고 하겠지요.

그러면 집에 있는 나이 어린 아이가 자기 부모한테, 배가 고프니까 밥 달라고 하는데, 거기에 무슨 형식이고 무슨 격식을 차릴 것이 있겠습니까. 그냥 밥 달라고 하면 되는 거잖아요.


시편 94편 9절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耳を植えつけた方が 聞かないだろうか。 目を造った方が 見ないだろうか。

우리는 우선 무엇보다도 앞서 우리 주님께,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께 말씀 드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러면 어디서 말씀을 드려야겠습니까. 뭐, 통성 기도도 좋습니다만, 성경에는 어디서 하나님께 말씀 드리라고 기록되어 있나요?



마태복음 6장 5절~6절
“5.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5.また、祈るとき偽善者たちのようであってはいけません。彼らは人々に見えるように、会堂や大通りの角に立って祈るのが好きだからで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彼らはすでに自分の報いを受けているのです。
6.あなたが祈るときは、家の奥の自分の部屋に入りなさい。そして戸を閉めて、隠れたところにおられるあなたの父に祈りなさい。そうすれば、隠れたところで見ておられるあなたの父が、あなたに報いてくださいます。

방언이든 뭐든 간에 자기가 해석도 못하면서 남들 듣는 앞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욥기를 보세요. 괜히 다른 사람들이 내 기도를 들으면, 어쩌면 욥기의 기록처럼 일이 복잡하게 될 지도 몰라요. 그러지 말고, 그냥 아무도 듣지 않는 골방에 들어가서, 주님한테 할 소리 못할 소리 다 털어 놓으세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어떻게 그런 기도를 할 수 있냐, 하고 혼내지 않으십니다. 시편을 보세요. 특히 다윗의 기도를 보세요. 정말 하고 싶은 말들을 어린 아이가 자기 부모한테 밥 달라고 하듯이 기도를 합니다.

제가 이렇게 열왕기나 시편을 읽어보면 그렇습니다. 다윗이라고 해서 다 잘한 것은 아니에요. 죄를 짓기도 하고 실수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다윗은 하나님만 매달렸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는, 정말 하나님 입장에서 보신다면 이 다윗이 얼마나 이뻤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필요 없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다, 가 아니에요. 힘들면 힘들다고 고백하고, 잘못하면 용서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위기에 처할 때는 제발 살려달라고,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저놈들을 다 혼내 달라고 매달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축복을 부어 주시면, 또 얼마나 어린 아이처럼 기뻐하고 감사해 하는지 몰라요. 하나님 입장에서 본다면 얼마나 이뻤을까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다윗은 왜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말씀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가까운지, 하나님과 나와의 거리가 얼마나 가까운 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주님의 나라에 갈 때까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강하고 담대하게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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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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