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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8회 구원해주시는 주님
2022년 7월 10일 설교 - 로마서 강해 91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11절~13절
“11.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ローマ人への手紙10章11節~13節
“11.聖書はこう言っています。「この方に信頼する者は、だれも失望させられることがない。」
12.ユダヤ人とギリシア人の区別はありません。同じ主がすべての人の主であり、ご自分を呼び求めるすべての人に豊かに恵みをお与えになるからです。
13.「主の御名を呼び求める者はみな救われ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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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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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91번째 시간으로서 “구원해주시는 주님” 救ってくださる主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오늘은 본문을 하나하나 간단하게 살펴보고 난 다음에 오늘 본문 말씀에 대한 전체적인 검토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1절입니다.

로마서 10장 11절
“11.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1.聖書はこう言っています。「この方に信頼する者は、だれも失望させられることがない。」

<일본 로마서 <恥を見ることがない>라고도 할 수 있음>

여기서 “성경에 이르되”라고 되어 있다는 것은 성경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아직까지 신약성경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여기서 “성경”이라고 하면 구약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어디서 인용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사야 28장 16절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저는 49장 23절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이사야 49장 23절 후반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이사야 49장 23절 후반부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わたしを待ち望む者は恥を見ることがない。」

사람들은 육체적 고통 보다도 정신적 고통이라고도 할 수 있는 수치를 당하는 것을 괴로워 합니다. 차라리 돈을 잃거나 매를 맞는 게 낫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나 또는 내 가족,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수치를 당하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들고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믿는 사람은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바울은 본문을 인용함에 있어서 새로운 단어를 추가시켰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누구든지’라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든지’ だれも 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면 바로 다음 구절을 봅니다.


로마서 10장 12절
“12.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2.ユダヤ人とギリシア人の区別はありません。同じ主がすべての人の主であり、ご自分を呼び求めるすべての人に豊かに恵みをお与えになるからです。

우선 여기서 “부요하시도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는 풍성한 복이나 은혜, 넘치는 축복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 보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말씀은 이미 로마서 3장에서도 나왔습니다.

로마서 3장 29절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それとも、神はユダヤ人だけの神でしょうか。異邦人の神でもあ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そうです。異邦人の神でもあります。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헬라인이나 이방인이나 한국사람이나 일본사람이나 미국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교회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고 나이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만 하나님입니까. 아닙니다. 교회 다닌 지 얼마 안 되는 사람, 나이가 젊거나 어린 사람들의 하나님도 되시는 것입니다. 남녀노소 관계없이 모든 이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을 믿는 사람”, “주님을 부르는 사람”이라는 조건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부르지 않으면 주님은 우리에게 관심을 갖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찾고, 주님을 부르고, 주님을 믿고, 주님을 의지하는 순간, 주님은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우리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한 방울도 남김없이 피를 흘려 주신 것처럼, 우리를 위해 예비해 주신 모든 축복을 하나도 남김없이 우리에게 부어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주님을 불러야 하겠습니까. 부르지 말아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주님을 불러야 하겠지요.

로마서 10장 13절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3.「主の御名を呼び求める者はみな救われる」のです。

우리가 구원을 받을 조건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부르고 주님을 찾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주님을 부름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성경 속에서 기억 나는 사람이 있습니까.

오늘은 베드로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볼까 합니다.

마태복음 14장 22절부터 32절까지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이 있으신 분은 찾아보시길 바라겠습니다.

조금 길지만 읽어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2절~32절
“22.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24.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25.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22.それからすぐに、イエスは弟子たちを舟に乗り込ませて、自分より先に向こう岸に向かわせ、その間に群衆を解散させられた。
23.群衆を解散させてから、イエスは祈るために一人で山に登られた。夕方になっても一人でそこにおられた。
24.舟はすでに陸から何スタディオンも離れていて、向かい風だったので波に悩まされていた。
25.夜明けが近づいたころ、イエスは湖の上を歩いて弟子たちのところに来られた。
26.イエスが湖の上を歩いておられるのを見た弟子たちは「あれは幽霊だ」と言っておびえ、恐ろしさのあまり叫んだ。
27.イエスはすぐに彼らに話しかけ、「しっかりしなさい。わたしだ。恐れることはない」と言われた。
28.するとペテロが答えて、「主よ。あなたでしたら、私に命じて、水の上を歩いてあなたのところに行かせてください」と言った。
29.イエスは「来なさい」と言われた。そこでペテロは舟から出て、水の上を歩いてイエスの方に行った。
30.ところが強風を見て怖くなり、沈みかけたので、「主よ、助けてください」と叫んだ。
31.イエスはすぐに手を伸ばし、彼をつかんで言われた。「信仰の薄い者よ、なぜ疑ったのか。」
32.そして二人が舟に乗り込むと、風はやんだ。

예수님은 보통 제자들과 함께 이동하시고, 배도 함께 타시곤 하셨는데, 그날따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배에 태워서 먼저 보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혼자 기도하기 위해서 산에 올라가셨다고 해요.

이유는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시니 제자들은 따를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그들은 적지 않게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 전인 마태복음 8장 23절~27절에 보시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는데 막 바람이 불어오고 파도가 칩니다. 그래서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상황이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살려 주셨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자기들끼리만 배를 타고 가다가 혹시 또 그런 일이 있으면 어쩌나……하는 불안감이 열두 사도 중 최소한 몇 명 정도는 가졌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어쩌면 몇몇 제자들은, 아이, 예수님, 그러지 마시고 우리랑 같이 가시지 그러세요……라고 미적거리는 제자들도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14장 22절에 보시면,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재촉하셨다고 해요.


이유도 모르고 영문도 모르지만 예수님이 그토록 재촉까지 하시니 어쩌겠어요. 불안해 하면서도 마지못해 자기들끼리만 배를 타고 떠납니다.

아이쿠 그런데 이 불안감이 적중했어요.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합니다. 파도가 치기 시작합니다. 24절에 보시면 이미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상황이라서 다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사실 그 배에는 베드로를 비롯해서 어부들이 많았습니다. 배 타는 법을 책으로 배운 것이 아니에요. 아주 어릴 때부터 잔뼈가 굵은 사람들입니다. 몸에 배인 사람들이에요.

배에 대해서라면 경험이 아주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들한테도 속수무책입니다.

그들이 배를 타고 얼마나 지난 다음에 폭풍이 불기 시작했을까 한 번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노 젓는 배의 속도가 대략 시속 5킬로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갈릴리 호수를 보면 건너편까지 거리가 8킬로 되는 곳도 있고, 12킬로나 21킬로 정도 되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


이미 많은 거리를 왔는데 아직 갈 길이 멀고 되돌아갈 수도 없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아마도 예정된 항해 거리 중에서 거의 중간 지점에서 폭풍을 만났다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예정된 항해 거리가 8킬로였다는 중간 거리는 4킬로가 되고, 12킬로의 중간지점이라면 6킬로, 21킬로의 중간 지점은 10.5킬로입니다.

배 속도를 5킬로라로 잡는다면 폭풍이 일어나기 시작한 그 중간지점까지 도착하는 시간은, 빠르면 1시간 정도, 아무리 늦어도 2~3시간 정도가 되겠지요.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냐 하면, 23절에 의하면 시간 순서를 보면 제자들을 보내시고 산에 오르시니까 해가 저 물었다고 해요.

그러니까 제자들은 해가 저물기 전에 배를 타고 출발했다는 것이 되고, 그리고 폭풍이 일어나기까지 아무리 길게 잡아도 3시간 정도로 잡는다면 폭풍이 일어나기 시작한 시간은 몇 시쯤 될까요?

계절이 정확하지 않으니까 그 때 일몰 시간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대략 오후 6시라고 하고, 그리고 최대한도로 잡아서 3시간 뒤에 폭풍이 일어났다고 한다면, 오후 9시가 되겠지요?


자, 밤 9시에 폭풍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배는 더 이상 앞으로 가지 않습니다. 이미 육지와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서 돌아가지도 못합니다. 어떻게든 배가 뒤집히지 않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영화에도 그런 장면들이 있습니다만,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힘든 시간이 몇 시간 정도 계속 됐을까요.

25절에 보면 ‘밤 사경’(夜明けが近づいたころ)이라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 신학자들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밤을 셋으로 구분하고,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넷으로 구분했다고 하는데, ‘사경’이라고 되어 있으니 이는 그리스 로마 식으로 보아야 하겠지요.

1경은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2경은 9시부터 12시까지, 3경은 12시부터 3시까지, 그리고 4경은 3시부터 6시까지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밤이 6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니까, 일몰을 6시로 잡는 것이 적당하다고 하겠지요.

자, 해가 지기 전에 제자들이 출발했으니 오후 6시 전에 출발했어요. 그리고 가장 늦게 폭풍이 불어온다 하더라도 밤 9시입니다. 그리고 4경 중에서 제일 이른 시간이라고 하면 밤 3시에요.


이렇게 본다면 그들이 폭풍에 의해 고난을 받았다고 단 한 마디로 적혀 있습니다만, 그 고난 당했던 시간은 아무리 짧게 잡아도 밤 9시에서 새벽 3시까지인 6시간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최소한 6시간 이상 너무나도 힘들고 죽음과 직면한 상황을 보냈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능숙한 뱃사람이라 하더라도 6시간이나 파도와 사투를 벌였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어떻게든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 짐을 다 바닷속으로 던져버립니다.

그러니 먹을 것이라고 있겠습니까.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 배가 뒤집히게 생겼는데, 밥은 고사하고 물도 마실 새가 없었을 것입니다.

잠도 못 자고 밤을 꼬박 새면서 난리를 쳤으니, 이미 체력은 바닥이 났고, 정신도 혼미해졌겠지요.

그런데 바로 그 때, 누군가가 출렁이는 바다 위로 걸어옵니다.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유령이라고 소리칩니다.


물론 그 밤에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어 오신다고는 상상도 못했겠지요. 그리고 아직 해가 뜨기 전이기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미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파김치가 된 상태였겠지요.

사람이 이 지경이 되면 예수님 조차도 유령으로 보일 때가 있다는 사실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줍니다.

정말 힘들 때에는 성경도 보기 싫어지고 기도도 하기 싫어집니다. 그리고 무엇이 주님의 뜻에 맞는지, 무엇이 주님의 뜻에 안 맞는지 구분이 잘 안 될 때도 있지요.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저기서 우리를 보고 계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들이 무서워하고 있자 주님은 자신을 밝히시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만약에 주님이시거든 나도 물위를 걸을 수 있게 오라고 해주세요 라고 말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오라!” 「来なさ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배에서 뛰어내렸더니, 풍덩 하고 빠지지 않고 저벅저벅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여전히 바람은 불어오고 파도는 위 아래로 흔들립니다. 그런데 그 위를 걸으면서 예수님한테 가고 있는 것입니다.

배에 있던 제자들은 이 모습을 보면서 놀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욱 놀랐던 것은 아마도 베드로 자신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지금 온 몸이 곤비한 상태에서, 폭풍이 몰아치는 파도 위에 서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이게 꿈이야 생시야 하고 예수님을 향해 걸어가는데, 그러는 동안에 그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했더니 그 때까지 자신을 받쳐주던 바다가 힘을 잃더니만 물 속으로 빠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마태복음 14장 30절
“30.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ところが強風を見て怖くなり、沈みかけたので、「主よ、助けてください」と叫んだ。

사실 이 장면도 우리는 한순간에 풍덩 하고 빠졌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폭풍 속에서 물속으로 빠져버렸다면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지 않겠어요. 그래서 여러 번역들을 비교해서 살펴보면, <빠진다>는 것이 진행형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어 성경을 보니까 어떻습니까. 한국어 성경에도 “빠졌는지라”가 아니라 “빠져 가는지라” 라고 역시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한번에 물속으로 풍덩 하고 빠진 것이 아니라, 점점점점 물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을 때 주님께 소리를 질렀다고 보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배를 탔을 것입니다. 수영도 남부럽지 않은 실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신없이 몰아치는 폭풍과 파도 속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순간, 그가 의지했던 것은 자신의 힘이나 능력이나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찾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입니다. 주님 만이 나를 구원해 주실 수 있다. 주님만을 의지해야 한다. 그래야 살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14장 31절
“31.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イエスはすぐに手を伸ばし、彼をつかんで言われた。「信仰の薄い者よ、なぜ疑ったのか。」

저는 이 말씀이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가 빠지게 된 것은 예수님 잘못이 아니에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에 빠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꾸짖으신 것이지요.

하지만 언제 꾸짖으셨습니까. 그를 살려내고 꾸짖으셨습니까. 아니면 꾸짖으신 다음에 살려 내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일단 살려 놓으셨어요. 사실 그렇잖아요. 무엇이 어찌 되었든 간에 우선 급한 불은 꺼야 하잖아요.

지금 배가 고파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 네가 무엇을 잘못해서 지금 죽어가는지를 설명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일단 먹을 것을 주고 살려 놔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남은 언제 구원해 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즉시> すぐに 구원해 주셨어요. 참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 주님은 즉시 구원해주시는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셨지요?

마태복음 14장 32절
“32.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そして二人が舟に乗り込むと、風はやんだ。

그렇습니다. 주님과 함께 배에 오르기 전에는 여전히 바람이 불고 거센 파도가 쳤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배에 오르게 되자 바람이 그치고 파도도 잔잔해 졌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배에 돌아온 베드로의 모습을 보고 좀 짓궂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물위를 걸었을 때만 해도 얼마나 놀랍고 자랑스럽고 기뻤을까요. 하지만 그의 믿음이 사라지자 몸이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정신없이 소리쳐서 간신히 구원을 받고는 배로 돌아왔지요.

어쩌면 이 모습을 배에서 보고 있었던 제자들은, 글쎄요, 직접 말은 안 했더라도, “그래,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잘난 척 하고 나서더니만 아주 꼴 좋다”라고 생각한 제자들도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그 사실을 알았겠지요. 아휴, 마지막까지 내가 믿음을 지켰더라면 예수님한테 칭찬도 받고 다른 제자들한테도 인정도 받았을 텐데, 괜히 내가 순간적으로 방심을 해버려서 창피만 당하게 됐다……어쩌면 베드로도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자, 이와 같은 사실을 보고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사실 알고 보면 주님이 없는 우리의 삶은 바람에 약합니다. 파도에 약합니다. 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에는 그 사실을 몰라요.


허, 뭐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네, 예수님 없이도 별 문제 없잖아. 내 힘으로 충분히 살 수 있는데 뭐, 귀찮게 교회 다니고 그럴 필요 있겠어?

그러나 바람이 불어옵니다. 파도가 몰아칩니다. 그러면 그 때까지 아끼고 아끼던 돈이나 재산들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집니다. 고통과 고난이 닥쳐옵니다. 기쁨도 없고 평안도 없습니다. 온통 슬픔과 괴로움으로 휩싸이게 됩니다.

바로 그 때 우리는 주님을 보게 됩니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폭풍과 파도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제 주님만을 믿습니다.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길을 한 걸음씩 나아갑니다.

그랬더니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를 삼키려고 달려들었던 파도가 내 발을 받혀줍니다. 내게 해를 끼칠 줄 알았던 파도가 이제 나의 길이 되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 이것이 믿음이구나. 정말로 놀랍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그 때는 할렐루야! 하면서, 정말 뭐라도 빼줄 것처럼 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 믿음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물에 빠지기 시작한 베드로의 믿음이 언제 사라졌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보지 않고 바람을 보았을 때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길을 가기 시작했다면 계속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바람을 보았습니다. 현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무서워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믿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리고 물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믿음에서 <무서움>이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무서워해야 합니까.

잠언 1장 7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主を恐れることは知識の初め。愚か者は知恵と訓戒を蔑む。

여기서 <경외하다>는 것은 무서워하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했습니다. 이 순간 그는 예수님의 힘보다도 바람의 힘을 보고 무서워했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 순종합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가 무서워하는 사람에게 순종합니다.

우리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한다면 우리는 바람에게 순종한다는 뜻이 됩니다. 세상에게 순종한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람한테 순종해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바람도 다스리고 파도도 다스리고, 그리고 우리 모두를 다스리시는 주님, 이 세상 천하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님을 두려워하고 주님께 순종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불어 닥치던 바람이 언제 멈추었다고 했지요?

마태복음 14장 32절
“32.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そして二人が舟に乗り込むと、風はやんだ。

그렇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는 바람과 파도 속에서, 연이어 터지는 고통과 고난 속에서, 정신을 못 차리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우리 인생에 모셔드리게 되면, 바람이 그치게 됩니다.

파도가 잔잔하게 됩니다.

물속으로 빠지게 되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우리 앞길이 평탄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5장 21절
“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 앞에 있나니 그가 그 사람의 모든 길을 평탄하게 하시느니라”

人の道は主の御目の前にあり、主はその道筋のすべてに心を向けてくださる。

이제 이 세상에서 바람을 보고 두려워하며 폭풍 속에서 고난을 당하며 살아갔던 우리의 모습을 버리고,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을 부르며 나아갈 때, 주님의 이름으로 구원 받아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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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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