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86번째 시간으로서 “실천과 외식” 実践と偽善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로마서 9장 후반부 내용들은 유대인들에 대한 구원 문제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지만, 오히려 그들이 차별하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다.
같은 유대인이라 하더라도 모두가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다.
이와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고, 그리고 오늘 내용은 10장 이후에도 이어집니다만, 오늘 본문은 일차적으로 여기까지의 내용을
정리하는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이요, 자신들이야말로 구원을 받을 유일한 민족이라는
사실, 그리고 자신들 외의 모든 이방인들은 구원 바깥에 있는 존재라는 점에 대해서 의심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뭐라고 말합니까. 그는 반복해서 그런 육적인 의미에서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역설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적인 국적이나 인종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우리가 바로 영적인 유대인이요 영적인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하겠고, 그리고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이방인이라고 해야지만 본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차례대로 말씀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9장 30절~31절
“30.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ローマ人への手紙9章30節~31節
“30.それでは、どのように言うべきでしょうか。義を追い求めなかった異邦人が義を、すなわち、信仰による義を得ました。
31.しかし、イスラエルは、義の律法を追い求めていたのに、その律法に到達しませんでした。
이 말씀을 보시면 조금 헷갈릴 수가 있습니다. 자, 기본적으로 의를 따르면 의를 얻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를 조금 더 쉽게 말씀
드린다면, 좋은 일을 하면 그 결과도 좋은 결과가 따라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의를 따르는 사람이 의를 얻어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요, 의를 따르지 않은 사람은 의를 얻지 못해야 하겠지요.
그런데 이 본문에 의하면 의를 따르지 않은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방인들이 얻은 의는 무엇이냐 하면 이는
믿음에서 난 의라고 합니다.
자, 오랜만에 그 질문을 한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의하면 어떻습니까.
우선 31절에서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다”(律法に到達しませんでした)라고 하는 것은 이를 바꾸어 말하자면 “의를 얻지
못하였다”(義を得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는 말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이 30절과 31절을 단순하게 바꾸어 보면 일단 다음과 같습니다.
의를 따르지 않은 이방인들은 의를 얻었고
의를 따른 이스라엘은 의를 얻지 못했다
義を追い求めなかった異邦人は義を得ることができ、
義を追い求めたイスラエルは義を得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참으로 이상한 말씀 아니겠습니까. 의를 따르는 이스라엘은 의를 얻고, 의를 따르지 않은 이방인들은 의를 얻지 못해야 한다고 해야
하는데, 오히려 의를 따르지 않은 이방인들이 의를 얻고, 의를 따른 이스라엘이 의를 얻지 못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32절입니다.
로마서 9장 32절
“32.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32.なぜでしょうか。信仰によってではなく、行いによるかのように追い求めたからです。彼らは、つまずきの石につまずいたのです。
30절에 보면 의를 따르지 않은 이방인들이 얻은 의는 믿음에서 난 의라고 합니다. 즉, 이방인들은 믿음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어땠냐 하면 행위를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으려고 했다는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의를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에서 난 의는 무엇이고 행위에서 난 의는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겠지요.
우선 행위에서 난 의부터 말씀 드리면 쉽게 말해서 이는 율법을 말합니다. 애초에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613개가 넘는 조항이
있었습니다만, 여기에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이것저것 덧붙여서 마지막에는 2134까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율법에는 이것을 해야 한다 저것을 해야 한다고 하는 내용도 있지만, 반대로 이것을 하면 안 된다, 저것을 하면 안 된다고 하는
내용도 있지요.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은 이 율법만 지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말하자면 그 행위를 중요시 여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여기에는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와 같은 율법을
명령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그 행위만을 말하자면 습관적으로 반복해왔던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려고 했겠지요. 그래서 613개의 율법을 2134개까지 늘린 데에도 처음에는 다른
의도가 없었을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조금이라도 더 잘 지키기 위해서, 이를 보완하기 위한 목적으로 여러 가지
규정들을 더해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점점 늘어가면 어떤 일이 발생하게 되냐 하면,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너희들은 이것을 하면 안돼, 저것을 하면
안돼……하는 규정들을 넣어가면서 종교지도자들 말하자면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이런 규정들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이런 것이 되겠지요. 너희들은 내가 하라는 것을 하고, 내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하지 말라고 하면 너희들은 구원을
받지만, 내 말을 어기면 천벌을 받는다……이런 식으로 백성들 위에 군림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무슨 말이 되냐 하면 이는
자기들이 하나님이 되겠다는 말과 똑 같은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근래에까지 있어왔습니다. 1517년 독일에서 종교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당시 교회에서 사용하던 성경은 모두
라틴어였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하는 사제도 라틴어로 전하고, 하물며 찬송가도 라틴어였습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교인들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요.
그러면 그 사람들이 일요일에 모인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었느냐 하면 바로 성찬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무슨 일들이 발생하냐 하면 사람들이 성경을 전혀 모르니까, 누구의 말을 믿게 되냐 하면 사제의 말을 믿게 되는
것이지요. 자기는 성경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모르는데, 성경에 이렇게 적혀 있으니까 내 말을 들어라……라고 한다면 안 들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왜 당시 사제들이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성경을 쓰지 않고,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라틴어 성경을 사용했겠습니까. 이는
바로 그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는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빌미로 해서 백성들 위에 군림했던 것처럼, 성경을
빌미로 해서 교인들 위에 군림하려 했었던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해서 일어난 사람이 마틴 루터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존 교회에 저항을 하면서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직 말씀, 오직 성경이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가장 처음으로 한 작업이 무엇이었냐 하면, 바로 라틴어로 된
성경을 당시 독일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독일어로 번역을 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보면 종교지도자라고 할 수 있었던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은 이른바 안식일에 대한 논쟁을 하게 됩니다.
율법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분명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냐 하는 점에
대해서도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외에도 이런저런 규정들을 다 갖다 붙였습니다.
그래서 본래 율법에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안식일에는 이것을 하면 안돼, 저것을 하면 안돼 하는 규정들을 만들어서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중의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하셨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요. 이 사실만 가지고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데, 이 사실을 안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난리를 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복음 9장 16절
“16.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すると、パリサイ人のうちのある者たちは、「その人は安息日を守らないのだから、神のもとから来た者ではない」と言った。ほかの者たちは「罪人である者に、どうしてこのようなしるしを行う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と言った。そして、彼らの間に分裂が生じた。
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님께서 보지 못하는 사람을 치료하셨다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 뭐가 핵심이냐 하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가지고 문제를 삼고 있습니다.
이는 당연한 말씀입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치료를 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 드렸던 것처럼
이와 같은 규정은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규정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지금 소란을 피우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에 대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자신들의 권위에 대해
흠집을 냈다는 것에 대해서 불쾌해 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손을 치료하려고 하신 마침 그 때, 이를 두고 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2장 11절~13절
“11.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12.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3.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あなたがたのうちのだれかが羊を一匹持っていて、もしその羊が安息日に穴に落ちたら、それをつかんで引き上げてやらないでしょうか。
人間は羊よりはるかに価値があります。それなら、安息日に良いことをするのは律法にかなっています。」
それからイエスはその人に「手を伸ばしなさい」と言われた。彼が手を伸ばすと、手は元どおりになり、もう一方の手のように良くなった。
이 얼마나 명쾌한 답입니까. 당시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대한 금지규정을 확대해석해서, 말하자면 안식일에는 어떤 목적을 위해서
손가락 하나 까딱 하면 안 된다는 식으로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구덩이에 빠진 양을 안식일이라고 해서 꺼내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냐는 것이에요. 이와 같은 말씀은 무엇이냐 하면
당시 그들이 자기들 멋대로 만들어놓은 규정들이 얼마나 모순 투성이인지를 지적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안식일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2장 27절~28절
“27.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そして言われた。「安息日は人のために設けられたのです。人が安息日のために造られたのではありません。
ですから、人の子は安息日にも主です。」
이 말씀을 알기 위해서는 실제 안식일을 지키라는 하나님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명기 5장 14절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七日目は、あなたの神、主の安息である。あなたはいかなる仕事も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も、あなたの息子や娘も、それにあなたの男奴隷や女奴隷、牛、ろば、いかなる家畜も、また、あなたの町囲みの中にいる寄留者も。そうすれば、あなたの男奴隷や女奴隷が、あなたと同じように休むことができる。
출애굽기 31장 15절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六日間は仕事をする。しかし、七日目は主の聖なる全き安息である。安息日に仕事をする者は、だれでも必ず殺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
이렇게 보면 참 안식일에 대한 규정은 무섭습니다. 그러나 우선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왜 정하셨을까요.
이른바 과로사라고 하는 말은 꽤 오래전부터 들어온 것 같습니다. 너무 많이 일을 했기 때문에 그 피로로 인해서 사망하게 되는
것이고, 근래에는 과도한 업무량으로 인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정규근로시간은 주5일근무. 하루에 8시간으로 주 40시간입니다만, 일주일에 100시간 이상 일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몸에 무리가 안 가는 것이 이상하다고 하겠지요. 육체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고용주에 있어서는 어떻습니까. 초과근무수당 몇 푼 더 주더라도 일을 하게 해서 돈을 더 벌어오면 좋은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무리한 근무환경이 줄어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과도한 초과근무를 하지 않게 하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직원에게 1시간아리도 초과근무를 시키는 상사는 사형에 처한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규정을 만들어 놓으면 어떻겠습니까. 그깟 돈 몇 푼에 목숨을 거는 상사들은 없지 않겠습니까.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야근이나 휴일근무에서 해방되겠지요.
더구나 당시에는 노예까지도 있었습니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직장 상사와 부하 관계보다도 훨씬 더 엄격했지요. 하지만 그와 같은
노예라 하더라도 절대로 안식일에는 일을 시켜서는 안된다……는 규정은 누구를 위한 규정이겠습니까. 그렇죠. 이는 사람을 위한
규정이지 하나님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규정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이를 오해해서 자기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한테까지도 이를 문제 삼았던 것입니다.
예전에 읽었던 책 중에서 일본의 엔도 슈사쿠가 쓴 ‘침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는 옛날 에도 시대 때 일본에 처음으로
기독교……당시 일본은 처음으로 천주교가 전해져 옵니다만, 이 때를 배경으로 한 소설입니다.
종교탄압으로 인해서 일본에서는 이른바 ‘후미에’라고 하는 것을 하게 됩니다. 이는 벼루만한 조각판인데 여기에는 예수님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밟으면 신자가 아니니까 살려두는데, 이를 밟지 않으면 신자라고 해서 체포되고 심한 고문을 당하게 되어,
경우에 따라서는 죽음에 이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일본에서 복음을 전하던 외국인 사제인데, 그 사제도 체포를 당하게 되어서는, 그 예수님이 새겨진 돌판을
밟으라고 명령을 합니다. 하지만 이 사제는 이를 거절하지요.
그러던 중 이 사또가 직접 찾아옵니다. 이봐. 자네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고통을 많이 받고 있어. 그러니까 어서 이
돌판을 밟으시게.
이 말을 들은 사제는 감동을 합니다. 아아, 그래, 지금도 많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이 돌판을 안 밟은
사람들이 많구나.
그러자 사또가 웃으면서 말합니다. 이봐. 그게 아니야. 그들은 이미 자기 신앙을 버렸어. 다만 자네가 이 돌판을 밟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고문을 당하고 있을 뿐이야. 자네가 이 돌판을 밟으면 그들을 석방해주겠네.
참 얼마나 교활합니까. 저 사람들은 이미 신앙을 버렸어. 그럼에도 고문을 당하고 있는 것은 다 너 때문이야. 네가 이 예수님
돌판을 밟으면 그 사람들을 풀어주겠다. 그러나 네가 네 이 돌판을 밟지 않으면, 저 사람들은 계속해서 극심한 고문을 받을 것이다.
만약에 제가 이 사제의 입장이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아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을 꽤 오랫동안 한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저를 보고 위협하면서, 이 돌판을 밟아라. 그렇지 않으면 목숨을 빼앗겠다……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까 하면, 뭐 지금
생각하기에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겠다고 하는 각오는 있습니다.
물론 또 모르죠. 제가 워낙 겁이 많기 때문에, 막상 그 상황이 되면, 아이구, 뭐든지 다 할 테니까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래도 지금 생각은, 그래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겠다는 마음은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그 돌판을 밟지 않으면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받아요. 내가 그 돌판을 밟기만 하면
그 사람들이 고통에서 풀려나요. 만약에 그런 상황에 처해졌다면, 그럴 경우 나는 어떻게 할까……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얼마 전에 명확한 답을 내렸습니다. 내가 그 돌판을 밟음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당장 가지고
와라. 내가 그런 돌판이라면 열 장이든 스무 장이든 박살이 나도록 밟아버리겠다 라고 하는 결론입니다.
생각해보세요. 그 돌판을 밟지 않는 것이 내 믿음을 지키는 것이라면 끝까지 지키겠지요. 그러나, 내가 그것을 밟지 않는다는 것으로
내 이웃이 고통받고 있다면,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것을 안 밟는다는 것은, 그것은 실천이 아니라 외식이 될 수가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나 하나의 외식을 위해서 이웃사랑을 저버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실천과 외식 앞에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외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겉치레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불과합니다. 이를 제일 많이 한 사람들이 누구였느냐 하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7절~28절
“27.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わざわいだ、偽善の律法学者、パリサイ人。おまえたちは白く塗った墓のようなものだ。外側は美しく見えても、内側は死人の骨やあらゆる汚れでいっぱいだ。
同じように、おまえたちも外側は人に正しく見えても、内側は偽善と不法でいっぱいだ。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무덤 겉부분을 하얗게 칠해 놓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정도가 있다고 하는데, 하나는 당시 무덤은
모두 화장이 아니라 매장이기 때문에 당시 율법적으로 본다면 불결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그나마 좀 깨끗하게 보이기
위해서라고도 하고, 그리고 또 하나는 불결한 것을 가까이 하는 겁은 율법에서 금하고 있기 때문에, 어두운 때라도 눈에 띄기 쉽게
하기 위해서라고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자기들이야말로 율법에 있어서 신앙에 있어서 철저한
사람들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회칠한 무덤이나 마찬가지다. 겉은 하얗게 칠해서
결백하게 보일지언정 그 안에는 썩어들어가는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외식하는 자, 즉, 겉모습만 꾸미는 자, 겉보기만 믿음이 좋은 것처럼 행세하는 자라고 비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오늘 본문 32절을 봅니다.
로마서 9장 32절
“32.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32.なぜでしょうか。信仰によってではなく、行いによるかのように追い求めたからです。彼らは、つまずきの石につまずいたのです。
그렇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이야말로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몸을 움직여서 무엇인가를 합니다. 이를 행동이라고 한다면 이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을
의지하는 행동과 행위를 의지하는 행동입니다.
믿음을 의지하는 행동은 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실천은 30배 60배 그리고 100배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하는 행동은 외식일 뿐입니다.
아무리 기도나 금식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실천이 아닌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는 믿음이 좋아 보이는 척, 경건해 보이는 척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서 보듯이 예수님으로부터 엄한 꾸짖음을 당하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실천이고 무엇이 외식이겠습니까. 그 기준은 간단합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즉 성경 전체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입니다. 한 쪽만 있고 다른 쪽은 없는 행동은 실천이 아니라 외식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겉보기에
아름다운 행동이라 하더라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없는 행동이라면, 이는 믿음으로 열매를 맺는 실천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꾸짖음을 당하는 외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늘 마지막 본문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9장 33절
“33.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33.「見よ、わたしはシオンに、つまずきの石、妨げの岩を置く。この方に信頼する者は失望させられることがない」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비교해보면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마태복음 11장 6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だれでも、わたしにつまずかない者は幸いです。」
이 두 말씀은 쉽게 말하면 이런 뜻이지요. 아무리 몸에 좋은 약이라 하더라도 이를 먹다가 목에 걸려서 뱉어 내버리면 전혀 효과가
없습니다. 그리고 처방대로 하지 않고 약을 잘못 먹게 된다면 오히려 몸에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잘 씹어서 올바른 처방에 따라 먹었을 때에는 병이 낫고 건강해지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오해하거나, 그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으로만 행동한다면 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허무한 믿음이 되고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말씀, 예수님 말씀을 올바로 받아서 이를 순종하는 마음으로 온전히 실천한다면 크나큰 축복으로 넘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행위에 의지하여 주님께 꾸짖음을 당하는 외식이 아닌, 믿음에
의지하여 주님으로부터 칭찬받는 실천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순종하며 풍성한 열매를 맺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