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회 우리의 소망
2016년 4월 1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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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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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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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의 소망’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봉독해드린 말씀인 이사야서 53장 5절 말씀. 기억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지난 고난주간 때의 말씀 중 일부입니다. 그 때는 53장 3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만, 오늘은 특별히 이 5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오늘은 원래 다른 말씀으로 준비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제가 생각했던 말씀이 아닌 바로 이 말씀이 자꾸 와닿습니다. 설교 말씀의 출발점이 자꾸 이 말씀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비록 몇 주 전에 살펴본 말씀이긴 합니다만 오늘은 이 5절 말씀을 집중적으로 살펴볼까 합니다. 사실 성경말씀이 그렇습니다. 다른 책도 그렇겠습니다만, 특히 성경말씀은 똑같은 구절이라도 읽을 때마다 다른 감동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에서 우리에게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한 번 이것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말로는 그렇게 하지만, 사실은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나, 또는 지금은 소망이 있다고 믿지만, 어떨 때는 소망이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거나 하지 않습니까. 아, 나 정말 소망이 없어. 희망도 없어. 오직 절망 뿐이야.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이렇게도 일이 안 풀릴 수가 있어? 아이구 내 팔자야.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그리 많이 지었길래. 혹시 그런 생각을 해보신 적은 없으신지요.
알베르 카뮈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수필가이기도 하고 철학자이며, 44세라는 젊은 나이에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대단한 사람이죠. 이 사람은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방인’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뫼르소라고 하는 사형수입니다만, 그는 이 작품을 통해서 그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만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사형수라고 합니다. 그 말은 꽤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사형수나 사형수가 아닌 사람이나 언젠가는 죽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래, 빨리 죽거나 늦게 죽거나 모든 사람은 다 사형수이다…….꽤 멋진 말 같지 않나요? 역시 노벨 문학상 수상자 답다, 뭐 그러면서 말이에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하물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사형수이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인터넷에서 보았습니다.
우리는 사형수입니까? 만약에 사형수가 아닌 사람들이 자신들보고 “우리도 모두 사형수다”라고 한다는 사실을 진짜 지금 철장 안에 갇힌 사형수가 들었다고 한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글쎄요. 아마도 비웃지나 않았을까 합니다. “웃기고 있네. 니네들이 뭘 안다고.” 그러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형수와 우리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모두 사형수다”라고 일반 사람들이 말하면 왜 진짜 사형수들은 비웃을까요.
먼저 사형수들은 일반 죄수들과는 다릅니다. 먼저 수감되는 장소인데, 교도소와 구치소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교도소는 징역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수감되는 곳이고, 구치소는 형이 확정되지 않은 사람이 수감됩니다. 그러니까 구속이 됐지만 아직 수사가 진행중이거나 재판이 진행중이어서 형이 확정되지 않은 사람은 교도소가 아닌 구치소에 수감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형수는 어디에 수감되냐 하는 게 문제인데, 얼핏 생각해보면 사형 판결이 확정되었으니까 교도소에 수감될 것처럼 생각되는데, 사실은 교도소가 아니라 판결이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와 함께 구치소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징역형이 확정되고 교도소에 있는 사람, 예를 들어서 징역 1년이라고 한다면 1년 동안 징역생활을 하면서 죄값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이 교도소에 있는 것인데, 사형수는 교도소에 가서 아무리 일을 해봤자 죄값이 치러지지는 아니라, 죄값을 치르는 방법이 오직 사형집행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방송에서 일본 교도관 출신인 분이 나와서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만, 그 때까지 제가 알고 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 많아서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모든 수감자들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특히 사형수들은 교도관들의 발자국 소리에 매우 예민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발자국소리만 들으면 누구누구의 발자국 소리인지 정확하게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생소한 발자국소리가 들린다. 그것도 조금 인원이 많다. 그리고 그 발자국 소리가 어느 사형수가 수감된 방 앞에 멈춰섰다. 그러면 그건 100% 그날 집행된다는 것입니다. 방문을 잠군 열쇠가 철컹하고 열리고, 교도관이 여럿이 방안에 들어오면 벌써 눈치를 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묻는다고 합니다. “집행입니까.” 그러면 교도관은 “응, 그래, 자, 빨리, 준비해.”라고 합니다. 이렇게 여럿이 가는 이유는 형 집행 사실을 알고 난동을 부리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사형수들은 일반 사람들과 같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 그뿐 아니라 교도소에 수감되어서 징역을 살고 있는 죄수들과도 다릅니다. 그들은 희망이 있습니다. 징역 몇 년이라고 한다면 그 기간만 채우면 밖에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교도소에서 모범수로 지내면 그 형기의 1/3를 지낸 후 가석방 대상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징역 5년이라고 한다면 교도소에서 착실하게 생활해서 모범수가 되면, 잘하면 2년 정도로 나올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희망입니까. 하지만 사형수한테는 희망이 없습니다. 오로지 그분들 앞에는 사형집행일만 있을 뿐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자신한테 닥쳐올 그 날이 언제인지 알 수도 없고, 그저 하루하루 불안 가운데에서 떨면서 5년을, 10년을 지내야 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자기 스스로를 사형수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일반 사람들도 그러한테 하물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사형수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사형수의 특징은 희망이 없습니다. 구치소에서 높은 담벼락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이 바로 사형수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희망이 없습니까?
또 어떤 종교인은 이와 비슷한 취지로 우리 모두가 예비 불치병 환자라고 합니다. 이유는 역시 우리 모두가 죽을 때 언젠가는 질병으로 죽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도 역시 멋지다고 생각이 되시나요? 그럴듯 하다고 생각되시나요? 여러분, 환자가 본인을 아니면 다른 사람을 치료하는 것을 보셨나요? 환자라고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돌보는 것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만약에 자신이 환자라고 한다면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이고, 돌봄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자기가 무슨 예비 불치병 환자라고요? 그렇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이 죽는 날만 기다리는, 저 담벼락 너머에 있는 사형수와 같이 소망도 희망도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겸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말도 안 됩니다.

요한복음 8장 31절~32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そこでイエスは、その信じたユダヤ人たちに言われた。「もし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ことばにとどまるなら、あなたがたはほんとうにわたしの弟子です。
そして、あなたがたは真理を知り、真理はあなたがたを自由にします。」

갈라디아서 5장 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キリストは、自由を得させるために、私たちを解放してくださいました。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しっかり立って、またと奴隷 のくびきを負わせられないようにしなさい。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움을 누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많은 사람을 돌보고 희망을 주어야 하는데, 그런 것을 다 팽계치고 아~나는 사형수네, 나는 불치병 환자네~ 하고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しかし、彼は、私たちのそむきの罪のために刺し通され、私たちの咎のために砕かれた。彼への懲らしめが私たちに平安をもたらし、彼の打ち傷によって、私たちはいやされた。

예수님께서 가시관에 찔리고, 가시돋힌 채찍에 찔리고, 십자가에서 손과 발을 못에 박히고, 그것도 모자라서 십자가 위에서 옆구리까지 창으로 찔리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 때문이요? 아니요, 우리의 허물 때문입니다. 예수님 죄악 때문이요? 아니요,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의 독생자 외아들 예수님께서 모든 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됐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징계를 받음으로 인해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음으로 인해서 우리는 나음을 받았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 부분,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우리가 나음을 받았다는 말씀을 그냥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점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우리 한 번 유심히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겪으신 고난을 두 가지로 압축하면 징계를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우리가 징계라고 하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학생 같으면 정학, 퇴학, 직장인 같으면 휴직, 퇴직, 감봉, 강등, 해임, 파면이라는 식으로 물질적, 정신적인 고통입니다. 그리고 채찍에 맞으셨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말할 수 없는 육체적인 고통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우리가 어려움을 겪고 있나요? 고통을 겪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징계에 해당하는 물질적인 고통이나 정신적인 고통, 그리고 채찍에 해당하는 육체적인 고통, 그것 외의 고통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고통은 모두 이 범위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뭐라고 기록하십니까.

우리가 평화를 누립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합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이미 징계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음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합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이미 채찍에 맞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직도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머물러 있어서 되겠습니까.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권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나음을 받아야 하는 것 또한 권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의무인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자녀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이웃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나 이웃이 곤경에 쳐해있을 때 여러분이 노력해서 그 문제를 해결해주었습니다. 아니면 여러분의 자녀나 이웃이 질병을 앓고 있는데 여러분이 어렵게 약을 구해주었거나, 아니면 여러분이 어렵게 치료비를 마련해준 덕분에 질병이 나았어요. 그런데도 여전히 그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차 있고 시름시름 앓는 소리를 한다면 여러분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바로 그럴 때 우리는 그 자녀나 이웃이 어떻기를 바라겠습니까. 기뻐하기를 바라겠죠. 감사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나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18절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いつも喜んでいなさい。絶えず祈りなさい。すべての事について、感謝しなさい。これが、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あなたがたに望んでおられることです。

에베소서 5장 20절~21절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いつでも、すべてのことについて、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名によって父なる神に感謝しなさい。キリストを恐れ尊んで、互いに従いなさい。

빌립보서 2장 18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あなたがたも同じように喜んでください。私といっしょに喜んでください。


빌립보서 4장 4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いつも主にあって喜びなさい。もう一度言います。喜びなさい。

우리가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은 권리가 아닙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더러 괜히 기뻐하라고 하시나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2천년 전에 우리를 대신해서, 나를 대신해서 내가 받을 징계를 받으시고 내가 받을 채찍을 받으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받을 물질적, 정신적, 육체적 고난을 모두 해결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아직도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야 하는 것입니까.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아마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이고, 홍 목사. 기뻐한다고 지금 내 문제가 해결 돼? 기뻐한다고 병이 나? 기뻐한다고 빚이 해결 돼?”
제가 그 심정을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여러분, 히브리서를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4장 11절~12절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あなたがた家を建てる者たちに捨てられた石が、礎の石となった。』というのはこの方のことです。
この方以外には、だれによっても救いはありません。世界中 でこの御名のほかには、私たちが救われるべき名としては、どのような名も、人間に与えられていないからです。」

히브리서 12장 2절~3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信仰の創始者であり、完成者であるイエスから目を離さないでいなさい。イエスは、ご自分の前に置かれた喜 びのゆえに、はずかしめをものともせずに十字架を忍び、神の御座の右に着座されました。
あなたがたは、罪人たちのこのような反抗を忍ばれた方のことを考えなさい。それは、あなたがたの心が元気を失い、疲れ果ててしまわないためです。

우리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이름,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이름인 예수를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광야에서 불뱀한테 물려서 허덕이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봅니다.

민수기 21장 8절~9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すると、主はモーセに仰せられた。「あなたは燃える蛇を作り、それを旗ざおの上につけよ。すべてかまれた者は、それを仰ぎ見れば、生きる。」
モーセは一つの青銅の蛇を作り、それを旗ざおの上につけた。もし蛇が人をかんでも、その者が青銅の蛇を仰ぎ見ると、生きた。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15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モーセが荒野で蛇を上げたように、人の子もまた上げら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れは、信じる者がみな、人の子にあって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す。」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의 육체적 정신적 문제를 이미 해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고통에 시름하고 고난 속에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아이고 죽겠네…아이고 내 팔자야…이러고만 있는다면 문제는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우리를 위해서 모든 고통과 고난을 겪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평화로 이어지는 길, 나음으로 가는 길을 누군가가 막아선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죠? 그렇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이미 내가 치러야 할 고통, 고난, 문제, 어려움, 이는 모두 예수님이 해결해주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유일한 길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징계를 받음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음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나음을 주신 예수님께 감사하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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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복된 그릇
2016년 4월 3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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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2장 20절~21절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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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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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된 그릇’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한국에서 인기있는 TV프로 중에 ‘진품명품’이라는 방송이 있었습니다. 들어보신 분들도 많이 계실 것입니다. 일본에는 ‘난데모 칸테이단’이라고 해서 매우 인기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들 방송을 보면 자기 집에 있는 이런저런 골동품이 있는데 이게 값어치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모르겠으니 감정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감정이야 굳이 방송에 나오지 않더라도 자기가 전문가를 찾아가서 부탁하면 되겠지만, 여기에는 아무래도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일단 개인적으로 부탁하면 감정비가 들겠죠. 전문가가 시간을 내서 감정을 한다고 하면, 글쎄요, 얼마나 받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공짜는 아니겠죠. 하지만 텔레비전에 나오면 감정료를 내지 않아도 되고,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오히려 출연료까지 받을 수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한 마디로 전문가라고 해도 세상에는 워낙 가짜가 많다보니, 누구를 찾아가서 감정을 부탁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텔레비전 방송에 나오면, 그래도 믿을만한 사람을 데려다가 놨을테니,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되겠지요. 마지막으로 셋째로는, 아무리 정말 믿을만 하고 유명한 사람이 감정을 했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믿어주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방송에 나오면 신뢰할 만한 전문가가 공개적으로 감정을 해주는 것이니 이것만큼 결정적인 증거가 또 없겠지요. 그래서 너도나도 집에 있는 골동품들을 다 뒤져다가 응모를 하고, 그 중에서 선정된 물건이 방송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한국에 있을 때 즐겨봤었고, 일본에서도 어쩌다 TV를 볼 때 타이밍이 맞으면 꼭 보는 방송입니다. 이 방송의 묘미는 바로 시청자들도 함께 참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물건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물건의 소유자가 나와서 이 물건이 무엇이고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 그 경위를 설명합니다. 이런 방송은 일본이 먼저 시작했는데, 저는 한국 방송을 더 좋아합니다. 한국 방송에는 게스트가 세 명 정도 등장하거든요. 물론 이 게스트는 다 비전문가입니다. 그러니까 이 방송을 보고 있는 사람들과 비슷한 시선에서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설명을 듣고 질문을 하고 한 다음에 각각 감정가를 내놓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물건 소유자가 희망감정가를 딱 내놔요. 그러고나서야 이제 전문가들에 의한 진짜 감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방송을 보면 정말 신기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그림이나 글씨 같은 것은, 제가 보면 정말 멋지고 훌륭한 것인데 가격이 별로인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유명한 화가가 그린 큰 그림이라서, 적어도 몇 백만원이나 몇 천만원은 하겠지……하고 있으니까 떡 하고 나온 가격이 0원이래요. 그래서 그 이유를 물으니까 가짜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리지널 유명한 그림이 있는데, 그걸 보고 다른 사람이 그 그림을 흉내내서 그린 거죠. 그냥 못 그린 그림이면 괜찮겠지만, 다른 사람의 그림을 베껴서 그리고 거기에 서명까지 흉내를 냈다면 이건 범죄입니다. 사기죄가 되는 것이죠.
그리고 또 어떤 그림은 멋진 액자에 들어있는 것인데 정말 진짜 같아요. 그런데 가격이 1만원, 2만원……이래요. 좀 가격이 묘하죠? 비싼 건 아니지만 그래도 0원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 이유를 물으니까 그 그림은 직접 거기에 그려진 것이 아니라 인쇄된 거라는 거예요. 그래서 1만원, 2만원이라고 하는 것은 그 그림이나 글씨 가격이라기보다는 그 액자 값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또 어떤 것은 보기에는 별로 볼품 없는 그림이나 글씨, 아니면 도자기라서, 기껏해야 몇 만원 정도겠지……라고 생각했는데, 감정가가 몇 백만원, 몇 천만원까지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태어난 곳이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입니다. 지금은 경기도 광주군이 아니라 광주시가 되었습니다만, 그 분원에는 과거에 도자기를 굽는 가마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거기서 생산된 도자기를 이른바 분원도자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분원도자기가 값이 꽤 나간다고 해요. 옛날에 그 지역에는 도자기 가마가 있었기 때문인지 도자기가 꽤 흔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희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그 중 한 도자기는 개밥그릇으로 쓰기도 했다고 하는데, 서울에서 사람들이 찾아와서는 제발 그 도자기 깨진 조각이라도 좋으니까 달라고 하는 사람들까지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분원도자기가 가끔 그 방송에도 나오는데, 저도 그래도 그 방송을 좋아하니까,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물건들을 많이 보면 좀 그나마 돌파리이긴 하지만 그래도 보는 눈이 조금은 생기잖아요? 그래서 아 저건 얼마쯤 하겠다……하고 하면, 거짓말 안 하고 제가 생각한 가격에 0가 하나 쯤은 더 붙습니다. 그 감정가를 듣고 게스트나 방청객들이 놀라는 모습을 보면, 아마도 저와 비슷한 생각이었겠지요.
그 분원도자기가 그렇게 값이 나가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물론 작품이 뛰어나다는 점입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시면 아시겠지만, 도자기가 백자인데 푸른색으로 그림이 입혀진 모습이 정갈하다고 할까요? 제가 전문적인 표현이 좀 딸려서 그렇습니다만 매우 심플하면서도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분원도자기보다 감정가가 낮은 것들을 보면 더 화려하고 멋지게 만들어진 것도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원도자기의 가격이 높은 이유는 이 뿐만이 아니겠죠. 두 번째로 높은 이유는 제조된 기간이 짧습니다. 보통 도자기를 당연히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것일 수록 값어치가 올라가겠지만, 이 도자기는 조선시대 말기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희귀성이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마지막, 이 점이 중요합니다. 이 분원가마…도자기 굽는 가마를 ‘요’라고 하죠? 이 분원요에서 구워진 도자기는 어디서 쓰였냐 하면 바로 대궐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진품명품에 나오는 물건들을 보면, 그 작품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누가 만들었는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그 글씨를 누가 썼고 그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 하는 것이 안 중요할 리가 없지요.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도자기나 물건이라고 한다면, 그 그릇을 누가 사용했는지도 감정가를 책정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이 도자기는 대궐에서 임금님이 사용하시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니, 이 점으로 볼 때에도 당연히 가격은 최고가 되는 것이지요.

성경에는 그릇이나 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의 예가 많이 나옵니다.
예레미야 18장 1절에서 6절 말씀에 봅니다.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 주리라 하시기로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主からエレミヤにあったみことばは、こうである。
「立って、陶器師の家に下れ。そこで、あなたに、わたしのことばを聞かせよう。」
私が陶器師の家に下って行くと、ちょうど、彼はろくろで仕事をしているところだった。
陶器師は、粘土で制作中の器を自分の手でこわし、再びそれを陶器師自身の気に入ったほかの器に作り替えた。
それから、私に次のような主のことばがあった。
「イスラエルの家よ。この陶器師のように、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することができないだろうか。―主の御告げ。―見よ。粘土が陶器師 の手の中にあるように、イスラエルの家よ、あなたがたも、わたしの手の中にある。



이사야 64장 8절에는,
“8.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しかし、主よ。今、あなたは私たちの父です。私たちは粘土で、あなたは私たちの陶器師です。私たちはみな、あなたの手で造られたものです。

우리를 누가 지었나요?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토기이고 우리를 지으신 토기장이는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시는 과정을 보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제가 미국 드라마는 보지 않습니다만, CSI 뉴욕편 줄거리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예전에 텔레비전을 보니 그 사람은 미국의 한 젊은 남성이었습니다만, 자신의 아내가 911 테러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너무나도 실의에 빠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지낼 수는 없어서, 자신의 부인의 유품들을 처분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옷가지나 그 당시 쓰던 물건들을 처분하는데, 딱 하나 버리지 못한 물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버리려고 해봤지만 도저히 버릴 수 없는 물건이 무엇이었냐 하면 바로 비치볼이라고 합니다. 그 비치볼은 바로 자신의 아내가 불었던 것인데 그 공 안에는 아내의 숨결이 남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버릴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건 드라마 이야기입니다만, 정말 그 마음이 이해가 될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창세기에 보면 사람을 어떻게 만드셨어요?

창세기 2장 7절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その後、神である主は、土地のちりで人を形造り、その鼻にいのちの息を吹き込まれた。そこで、人は、生きものとなった。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자기처럼 흙으로 빚으시고 생기를 코에 불어넣어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무엇이에요? 우리 안에는 바로 하나님의 숨결이 살아 숨쉬고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까 어떤 물건의 가치가 무엇으로 결정된다고 말씀드렸죠? 두 가지가 있었죠? 예, 그렇습니다. 먼저 누가 만들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그 다음에 누가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 때에는 대충 만드는 법이 절대로 없습니다. 저도 직접 본 기억은 없습니다만 책이나 TV를 통해서 보면 토기장이는 반드시 그 그릇의 용도가 있습니다. 꽃병으로 쓸 것인지 항아리로 쓸 것인지 그 장소와 용도를 먼저 정한 다음에 반죽을 시작하는 것이지, 아무것도 정하지 않고는 절대로 그릇을 만드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드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반죽을 하고 도르래로 그릇 모양을 만든 다음에, 건조시키고 그림을 그리고 유약을 바르고……그것으로 끝나나요? 아니요. 이제 마지막으로 가마에서 도자기를 구워냅니다. 그게 한 두시간으로 되는 작업이 아니라 굽는 것만으로도 짧게는 5~6시간, 길게는 3~4일동안이나 잠도 자지 않고 계속 굽습니다. 잠을 잘 수 없는 것이 불의 그 미묘한 강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니, 이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만들어지는 그릇을 토기장이가 어디에 쓸지도 모르는 그릇들을 대충대충 만들 리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실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에베소서 1장 3절~5절에는,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父なる神がほめたたえられますように。神はキリストにおいて、天にあるすべての霊的祝福 をもって私たちを祝福してくださいました。すなわち、神は私たちを世界の基の置かれる前からキリストのうちに選び、御前で聖く、傷のない者にしようとされました。神は、ただみこころのままに、私たちを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ご自分の子にしようと、愛をもってあらかじめ定めておられたのです。


토기장이가 그릇 하나를 만들 때 계획을 짜고 만들듯이 우리를 만드실 때에도, 하나님은 언제부터요? 예, 창세 전부터 우리를 택하셔서 계획을 세우시고 만드셨던 것입니다.
사람을 그릇으로 비유하는 부분은 또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도 바울을 택하실 때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에는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しかし、主はこう言われた。「行きなさい。あの人はわたしの名を、異邦人、王たち、イスラエルの子孫の前に運ぶ、わたしの選びの器です。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시고 예수님께서 쓰시기 위하여 만들어진 그릇입니다. 세상에 이보다도 귀한 그릇이 있겠습니까? 이보다도 아름다운 그릇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 그러면 우리가 평소에 쓰는 물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 가정에도 비싼 그릇, 좋은 그릇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그릇들을 자주 쓰고 계신가요? 비단 그릇이 아니더라도 좋습니다. 남자분도 그렇습니다만 일반적으로 여자분들이 옷에 관심이 많죠? 그렇다면 무조건 비싼 옷이라면 모두 나한테 다 어울리던가요? 유명한 사람이 디자인한 옷이면 모두 내가 입기 편한가요? 남자분들은, 글쎄요. 무조건 비싸기만 하면 모든 넥타이가 다 자기한테 어울리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릇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릇이라고 합니다. 그것만으로 우리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는 그릇, 예수님으로부터 쓰임 받는 그릇이 진정한 가치 있는 그릇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20절~21절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大きな家には、金や銀の器だけでなく、木や土の器もあります。また、ある物は尊いことに、ある物は卑しいことに用います。
ですから、だれでも自分自身 をきよめて、これらのことを離れるなら、その人は尊いことに使われる器となります。すなわち、聖められたもの、主人にとって有益なもの、あらゆる良いわざに間に合うものとなるのです。

그릇 중에서도 두 종류의 그릇이 등장합니다. 귀하게 쓰이는 그릇과 천하게 쓰이는 그릇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쓰임 받기를 원하십니까. 당연히 귀하게 쓰임 받는 그릇이 되어야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시나요? 21절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된다고 기록됩니다.
자고로 그릇이란 무엇이죠? 그렇습니다. 물건을 담는 것이 바로 그릇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담아야 하겠습니까.

예전에 읽었던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어떤 신학과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조금 큰 유리 꽃병을 교실에 가져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학생들 보는 앞에서 그 꽃병 안에 큰 돌맹이 몇 개를 집어넣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큰 돌맹이는 들어가지 않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한테 물었습니다.
“이 꽃병이 가득 찼나요?”
그랬더니 학생들이 “네, 가득 찼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교수님은 거기에 작은 돌맹이들을 넣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안 들어가요? 아뇨. 들어갑니다. 이제 그 작은 돌맹이가 더 이상 안 들어갈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교수님이 물었습니다.
“이 꽃병이 가득 찼나요?”
이렇게 되니까 학생들은 어떻게 대답해야될지 몰라서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 교수님은 가만히 그 꽃병에 모래를 붓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모래가 상당히 많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또 물었습니다.
“이 꽃병이 가득 찼나요?”
이제 학생들은 알았습니다. 모두가 “아니요~”라고 대답합니다.
그 말을 들은 교수님은 “맞습니다. 가득 차지 않았어요.” 라고 대답하고 그 꽃병에 물을 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꽤 제법 물이 많이 들어가더랩니다.
그리고 물을 가득 붓고 난 다음에 교수님이 학생들한테 물었습니다.
“지금 이 꽃병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그러자 어떤 학생이 말합니다.
“아무리 가득 찬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가득차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교수님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듭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바로 “중요한 것을 먼저 담아야 한다” 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죠. 큰 돌을 먼저 담았기 때문에 나중에 작은 돌도 도매로 물도 담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래나 물믈 먼저 가득 채웠다면 나중에 큰 돌이나 작은 돌을 담을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

빌립보서 3장 7절~9절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しかし、私にとって得であったこのようなものをみな、私はキリストのゆえに、損と思うようになりました。それどころか、私の主であるキリスト・イエスを知っていることのすばらしさのゆえに、いっさいのことを損と思っています。私はキリストのためにすべてのものを捨てて、それらをちりあくたと思っています。それは、私には、キリストを得、また、キリストの中にある者と認められ、 律法 による自分の義ではなくて、キリストを信じる信仰による義、すなわち、信仰に基づいて、神から与えられる義を持つことができる、という望みがあるからです。

갈라디아서 1장 10절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いま私は人に取 り入ろうと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いや。神に、でしょう。あるいはまた、人の歓心を買おうと努めているのでしょうか。もし私がいまなお人の歓心を買おうとするようなら、私はキリストのしもべとは言えません。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주인이 선한 일에 쓰시기에 합당한 귀한 그릇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는 많은 것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내 안에 나한테 유익한 것만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 아닌가, 사람의 기쁨만을 위한 것만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 아닌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사람의 힘으로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멋내고 치장을 해도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지 못하는 그릇만큼 비참한 그릇이 어디 있겠습니까.
진정으로 복된 그릇, 복된 사람이란 예수님으로부터 쓰임 받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손떼가 많이 묻은 사람만큼 복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귀하게 쓰이는 그릇이야말로 복된 그릇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를 선한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 내 유익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익한 것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럼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으로부터 유익하게 쓰임 받는 복된 그릇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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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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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20회 부활의 기쁨
2016년 3월 2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시편 103편 1절~5절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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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부활절을 맞이해서 ‘부활의 기쁨’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여러분께 한 가지 여쭤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부활의 기쁨을 맛보고 계십니까? 부활의 기쁨을 누리고 계십니까? 아니, 그 보다도, 부활의 기쁨이 무엇인지 와닿습니까.
저는 여러분께 한 가지 고백할 게 있습니다. 제가 어제 목욕에 다녀왔을 때의 일입니다. 물속에 들어가서 오늘 드릴 설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말씀 주제는 당연히 부활절 예배이니까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당연히 주제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리고 머리 속에서 성경책을 펼치고 그 주제에 맞는 구절들을 추려갑니다. 그리고 이것과 저것과 그것……서론 본론 결론……이렇게 설교 흐름을 잡았습니다. 그럼 이제 된 것입니다. 그 흐름대로 말씀을 이어가고 비어있는 곳을 메우면 됩니다. 설교를 쓰는 시간은 길어봤자 3시간 정도면 됩니다. 그렇다고 3시간만 생각하는 건 아니죠. 무슨 제가 베드로나 바울도 아닌데 설교가 그렇게 빨리빨리 나오나요. 일주일 동안 내내 틈만 나면 말씀을 묵상하고 설교문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제도 여느때처럼 물속에 들어가서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도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제가 무슨 설교를 준비하고 있었나요? 예, 그렇습니다. 부활절 설교말씀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발생한 심각한 문제라는 것은 바로, 저 자신한테 부활의 기쁨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활의 기쁨이 없어요. 느껴지질 않는 것입니다. 전혀 와닿지가 않아요. 그래서 아, 설교가 잘 못된 것 같구나. 다시 한 번 짜보자 하고, 다시 말씀을 묵상하고 구절를 추리고 서론 본론 결론……이렇게 생각을 해갑니다. 이건 자화자찬이지만, 설교 내용만으로 보면 완벽합니다. 전혀 문제가 없어요.

“여러분! 예수 십자가가 내 십자가, 예수 부활이 내 부활인 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
“항상 부활의 기쁨으로 충만한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뭐 이러면 되는 것 아니에요? 그런 게 부활절 설교잖아요? 목욕탕 물속에 들어가서 거짓말 안 하고 완벽한 설교 두 회분을 짰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뭘해요? 저 자신한테 감동이 없는데 두 회분이 아니라 수 백편을 짠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오죽하면 저한테 이런 마음이 들더라구요. 요즘 제가 가는 온천 목욕탕의 노천탕 물이 얼마 전부터 좀 미지근해요. 노천탕의 묘미가 특히 날씨가 쌀쌀한 날에 들어가 있으면, 머리는 차갑고 몸은 따끈따끈한 게 묘미잖아요? 그런데 그 날 같은 경우에는 날씨도 쌀쌀한데 물까지 미지근하니까 뜨거운 물속에 들어가 있는데 추워요. 그게 저만 그런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다 미지근하다고 하면서 나가더라구요. 그래서 그 때는 사람도 많았는데 노천탕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고 안쪽에만 사람들이 바글바글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 저한테 든 생각이 뭐냐 하면, 부활의 기쁨은 고사하고 저 노천탕 물이라도 좀 따뜻했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노천탕은 몸은 따뜻하더라도 머리는 시원하니까 꽤 오랫동안 들어가 있을 수 있어서 아주 목욕을 푹 할 수 있는데, 안쪽에 있는 물은 따뜻하지만, 물밖에 나와 있는 머리까지도 따뜻하니까 오래 못 들어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부활의 기쁨? 죽었다 살아나면 기쁠까? 아니, 그것보다도 저 바깥에 물이라도 좀 더 뜨거웠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고나서 이제 물속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몸을 씻으려고 수도도 있고 거울도 있고 하는 자리에 앉으려고 했는데, 이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날은 한산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심하게 붐비는 날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이제 물속에서 나와서 비누칠도 하고 머리도 감으려고 자리에 앉았었는데, 마침 제 바로 옆에 사람이 앉아요. 아니, 다른 데에 자리가 없는 것도 아닌데, 하필이면 몸집이 큰 제 바로 옆에 앉을 게 뭐예요? 그리고 거기서 샤워를 틀어놓고 비누칠도 하고 머리도 감고 하니까, 저한테까지 비누도 튀고 물도 튀고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다른 자리로 옮기려고 둘러봤는데, 빈 자리가 있어도 천상 다른 사람 바로 옆자리 밖에 없어요. 뭐, 그렇다고 제가 옆에 앉은 사람한테 뭐라 하겠어요? 그렇다고 설마 그 사람이 저한테 일부러 불을 끼얹거나 비누를 튀게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가만히 보니까 나름 조심한다고 하면서 하더라구요. 하지만 그래도 바로 옆에서 하고 있는데, 물이 전혀 알 튈 리는 없습니다.
그러고 있는 제가 한 생각이 뭐겠어요? 부활의 기쁨? 아니, 부활의 기쁨은 됐고 이 옆사람이나 빨리 하고 나갔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구요. 제가 한국에 있을 때 밥을 먹으려고 식당에 들어가는데, 제가 성격이 좀 유별 나서, 밥 먹을 때 쩝쩝 거리면서 심하게 소리를 내면서 드시는 분을 보면 밥을 잘 못 먹습니다. 이것도 다 제가 모자란 탓이죠. 그런데 꼭 그런 분 치고 제 자리 근처에 앉아서 식사를 하십니다. 그러면 아…어서 드시고 나가주셨으면……하는데, 어때요? 그런 분치고 빨리 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천천히 쩝쩝 드시고 나가십니다. 제가 그 날 목욕을 할 때에도. 좀 어서 하시고 나가시면 좋을 것을, 머리는 왜 그리도 자주 감으시는지, 머리를 두 번 감고, 비누칠을 한 번 하고……그리고 다시 또 머리를 감더라구요. 그것 참 난감하더라구요. 빨리 나가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제가 머리를 감아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그리고 저 자신도 불편합니다. 아니, 그 사람이 씻으면 튀는 물이, 그럼 내가 씻는다고 그 사람한테 물이 안 튀겠어요? 그러다보니 저도 당연히 편안하게 목욕도 못하고 그렇습니다. 제가 이렇게 보니까 두 번 머리를 감고, 한 번 비누칠을 하고, 다시 한 번 머리를 감고는, 이제 나가겠지……하니까, 이제 타올을 빨고 꼭 짠 다음에 몸의 물기를 닦기 시작합니다. 아니, 몸의 물기를 닦으려면 저기 나가서 하면 얼마나 좋아요? 괜히 여기저기서 물이 튈 염려도 없고, 앉은 상태에서 닦는 것보다 서서 닦으면 더 닦이도 편할텐데. 그런데도 제 옆에 앉아서 몸을 구석구석 꼼꼼하게 닦습니다. 그러고는 드디어 그 분이 일어나 나갔습니다. 그래서 제가 속으로 아이고, 할렐루야. 기도 응답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했는데, 근데, 잠깐. 이거 지금 부활의 기쁨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게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하고 다시 거울을 보고 샤워를 틀고 머리를 감았습니다. 그런데 머리에 샴푸를 하고 다시 샤워를 틀고서는 비눗물을 씻어내고 옆자리를 보았습니다. 어땠겠어요? 거기 또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기도 응답을 받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또다시 시련이 닥쳐오다니요.
이런 저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까 추려놓았던 성경구절은 제 머리속에서 다 사라지고는, 문득 요나서가 떠올랐습니다.

요나 4장 5절~8절을 살펴봅니다.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ヨナは町から出て、町の東の方にすわり、そこに自分で仮小屋を作り、町の中で何が起こるかを見きわめようと、その陰の下にすわっていた。
神である主は一本のとうごまを備え、それをヨナの上をおおうように生えさせ、彼の頭の上の陰として、ヨナの不きげんを直そうとされた。ヨナはこのとうごまを非常に 喜んだ。
しかし、神は、翌日の夜明けに、一匹の虫を備えられた。虫がそのとうごまをかんだので、とうごまは枯れた。
太陽が上ったとき、神は焼けつくような東風を備えられた。太陽がヨナの頭に照りつけたので、彼は衰え果て、自分の死を願って言った。「私は生きているより死んだほうがましだ。」

아마도 무더운 날이 아니었나 합니다. 요나가 초막을 지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지붕에 박넝쿨을 예비하시고 뜨거운 햇빛을 가리게 하시니까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쁘했대요.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셔서 그 박넝쿨을 갉아먹겠 하니까 그 박넝쿨이 시들었고, 또 설상가상으로 하나님이 뜨거운 바람을 불게 하셨다고 합니다. 요나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어제까지 뜨거운 햇쌀을 가려주었던 박넝쿨은 사라져서 햇살은 뜨겁고, 그것만이 아니라 후덥지근한 바람까지 불어옵니다. 그런데 그것 가지고 요나가 뭐라고 합니까?

요나 4장 8절 후반부에 보니까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彼は衰え果て、自分の死を願って言った。「私は生きているより死んだほうがましだ。」

여러분, 성경을 보면 요나가 초막을 지을 때에는 박넝쿨이 없었어요. 거기에 초막을 지은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박넝쿨을 주셨어요. 그랬더니 세상에, 크게 기뻐했대요. 그러니까 뭐예요? 박넝쿨이 없으면 죽는 곳에 초막을 지었나요? 아니요. 햇살이 강하지만 죽을 곳에 짓지는 않았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선물로 박넝쿨을 주신 거예요. 그런데 그게 없어졌다고 이제 나 죽겠다고 하나님한테 성화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모습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드세요? 부활의 기쁨은 고사하고 목욕탕 물이 좀 더 뜨거웠으면 좋겠다, 물이 튀니까 옆에 앉은 사람이 빨리 좀 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 홍목사나, 지붕에 박넝쿨이 원래는 없었는데 그거 하나 생겼다고 무척 좋아했었는데, 또 그게 없어졌다고 나 죽겠다면서 난리 치는 요나 선지자나...이런 모습을 보면 그래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이 드시나요?
저만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우리는 정말 소중한 것을 잊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2006년에 7년간의 미국생활을 마치고, 몇 푼 안 되는 돈만 가지고서 다시 서울로 돌아갔을 때 하숙생활을 시작했었습니다. 하지만 에어컨이 없었어요. 그래서 여름에는 정말 푹푹 쪘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꽤 괜찮았습니다. 얼마 후 그 하숙집을 다시 짓는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나가게 되었어요. 그리고 간 곳이 고시원이었습니다. 보통 고시원이라고 하면 매우 좁습니다만 거기를 아는 사람이 있어서 가게 됐는데, 일반 고시원보다 조금 더 넓은 편이었어요. 에어컨도 공용이었는데, 바람이 들어오긴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창문이 없어요. 그게 참 아쉬웠습니다. 방은 그래도 하숙집보다 넓긴 해도 창문이 없으니까 답답했습니다. 그래도 거기에 1년 이상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돈을 모아서 이제 드디어 원룸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거긴 에어컨도 있고요, 큰 창문도 있었습니다. 저는 방에 창문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 좋은 것인지 몰랐습니다. 아직도 제가 기억에 남습니다만, 이사하는 첫날, 그 햇살이 들이치는 창문이 너무나 좋아요. 그리고 에어컨이 너무나 좋아요. 그래서 첫날에는 이불도 펴지도 않고 에어켠을 켜놓고 벽에 기댄 채로 황홀하게 잠을 잤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 창문이 얼마나 좋았는지 거기서 사는 2년 동안 커튼을 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좋은 창문이 있는데 왜 커튼으로 가릴 필요가 있겠어요.
너무 좋아요. 수입도 늘어납니다. 생활도 안정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조금 더 넓은 집으로 가고 싶더라구요? 그래서 이사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안 좋아집니다. 수입이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제 예금잔고가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모르게 됩니다. 하나님, 이게 웬 일입니까. 고민도 하고 기도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응답도 없고 막막할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저를 버리신 건가요? 하나님이 요나한테 선물로 준 박넝쿨을 시들게 만들었던 것은 하나님이 요나를 버리셨기 때문인가요? 야곱의 아들 요셉이 애굽에 팔린 것이 하나님이 요셉을 버렸기 때문인가요?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로 이끌어내신 것이 이스라엘 민족들을 버리셨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요셉은 애굽에 종으로 팔려감으로 인하여 약관 서른 살에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로 나옴으로 인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는 요셉이 장차 몇 년 뒤에는 애굽의 총리가 되리라 한 사실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리고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장차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점령하게 된다는 사실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부활의 기쁨? 그게 뭐지? 부활 같은 것은 됐으니까 지금 당장 돈 몇 푼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제가 그 마음을 모르겠어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저를 보시기에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도 이것저것 문제가 많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제가 원룸 방에 있는 창문 하나 가지고 2년 동안 기뻐서 커튼을 안 달고 살았는데, 지금 저희 가족이 살고 있는 이 곳에 창문이 몇 개 있는 줄 아세요? 세어보지는 않았습니다만 무척이나 많습니다.
그 뿐인가요? 제가 동경에서 저희 가족이 살 때에는 참 집이 좁았습니다. 일본에서 사는 12년 동안 제가 문을 닫고 들어갈 개인방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하면, 집안에 가족이 어디 있는지 찾느라고 전화를 걸어야 합니다.
물론 교회가 안정이 되면 여기 교회에 있는 방들은 구역사무실로도 쓰이고 주일학교나 성가대 연습실로 쓰거나 하겠고, 저희 가족은 나가서 살게 되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토록 넓은 곳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저희 가족이 언제 그런 기도를 해본적이 있나요? 이런 넓은 집을 달라고 한 적이 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하면 언제는 정말 응답을 안 하실 때가 있습니다. 지금 당장 넉넉하게 채워주시면 좋으련만 안 주세요.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가난해서 안 주세요? 아니요. 온 천하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무엇이 부족해서 안 주시겠어요. 그러나 때가 차서 하나님이 주실때에는 넘치도록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7장 9절~11절에 보면,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あなたがたも、自分の子がパンを下さいと言うときに、だれが石を与えるでしょう。
また、子が魚を下さいと言うのに、だれが蛇を与えるでしょう。
してみると、あなたがたは、悪い者ではあっても、自分の子どもには良い物を与えることを知っているのです。とすれば、なおのこと、天におられるあなたがたの父が、どうして、求める者たちに良いものを下さらないことがありましょう。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가장 큰 것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16절에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モーセが荒野で蛇を上げたように、人の子もまた上げら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それは、信じる者がみな、人の子にあって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す。」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ひとり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사람은 죄악 속에서 허덕이고 스스로를 구원할 수도 없고 자신의 죄 때문에 영생에 들어가지 못하고 죄악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지만, 오직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예수의 이름을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실만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언제 우리가 예수님을 달라고 구했었나요? 언제 우리 죄를 씻기 위해서 하나님한테 당신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달라고 기도했었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몰랐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심각한 죄 속에 있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냥 대충 절기를 지키고, 짐승으로 제사나 지내면 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가장 아끼는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주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셨는데, 사랑하는 우리를 죄 속에서 건져내시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를 건져내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나무에 달리게 하신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있을 때를 생각해봅니다. 지나고 보면 그 때 그럴 필요도 없었는데 사소한 것에 목숨걸고 화도 내고 성질도 부리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대충대충 살자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그때그때 고민해야 할 것은 있죠. 하지만 세상 일에 대해서 너무 지나치게 안달복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있으면서 그렇게 작은 일에 일희일비 하든 안 하든 지금 생각해보면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면 큰 것으로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겠습니다.

시편 103편 1절에서 5절,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わがたましいよ。主(しゅ)をほめたたえよ。私(わたし)のうちにあるすべてのものよ。聖(せい)なる御名(みな)をほめたたえよ。
わがたましいよ。主をほめたたえよ。主の良くしてくださったことを何一つ忘れるな。
主は、あなたのすべての咎を赦し、あなたのすべての病をいやし、
あなたのいのちを穴から贖(あがな)い、あなたに、恵みとあわれみとの冠(かんむり)をかぶらせ、
あなたの一生を良いもので満たされる。あなたの若さは、わしのように、新しくなる。

하나님께서 주신 것 중에서 가장 큰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우리가 나중에 부활한 후의 일을 생각해봅니다. 지금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아, 정말 지금 당장 돈 백만원이 있었으면 좋겠다. 돈 천만원이 있었으면 좋겠다. 저 꼴보기 싫은 인간은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 좀더 넓은 집으로 이사가고 싶다. 아, 내가 열 살만 젊었으면 좋겠다, 목욕탕에서 내 옆에 앉은 사람이 빨리 나갔으면 좋겠다……뭐 그런 여러가지 소망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부활의 기쁨을 알고난 다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주신 선물은 우리가 받기에도 너무나도 감사한 선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장차 받게 될 선물은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선물들입니다. 우리한테 그 아끼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주셨고, 부활까지도 주셨는데 무엇을 못 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비유가 적절할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예를 들어 세발 자전거를 타는 사람과 대형승용차를 타는 사람의 그릇이 같아서야 되겠어요? 대형승용차를 탄 내가 빨간 신호등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세발 자전거가 나를 추월해 갑니다. 그럼 내가 그걸 보고 자존심 상해야겠어요? 저걸 그냥 확 추월해야지……라는 생각이 들어야겠습니까? 사람이 체통을 지켜야죠. 그럴 때는 그저 허허…… 하고 넘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형승용차라 하더라도 무슨 BMW나 벤츠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의 힘이나 능력으로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최고급 대형승용차를 타고 달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도착지에는 부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뒤에 따라오는 세발 자전거가 추월한다고 자존심이 상하거나, 빵빵 거린다고 신경질을 내서 되겠습니까.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활의 기쁨으로 충만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고 귀에는 들리지 않고 손에는 잡히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고, 우리의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우리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우리 청춘이 독수리 같이 새롭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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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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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19회 예수님의 고난
2016년 3월 2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3절~5절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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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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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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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고난주간을 맞이해서 ‘예수님의 고난’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누구신가 하는 부분부터 살펴보려고 합니다. 교회사를 공부하다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만들어진 피조물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고, 또는 우리처럼 사람이지만 그 능력과 품성이 뛰어나서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아들로 지정되었다고 하는 주장도 있고, 그 외에도 자신의 말로 지어내거나 아니면 성경에 있는 말들을 이것저것 자신의 생각에 맞도록 끼워맞추는 일도 많이 있었습니다.
성경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3절에 의하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初めに、ことばがあった。ことばは神とともにあった。ことばは神であった。この方(かた)は、初めに神とともにおられた。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かた)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かた)によらずにできたものは一つもない。

여기서의 ‘그’라고 하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창세기 1장 1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지만, 이 요한복음 1장 2절과 3절에 의하면,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이 창조 역사를 시작하실 때에 예수님 없이 된 것이 하나도 없다고 기록하십니다.
이 사실을 알고 성경을 보면 우리가 놓쳤던 부분들이 큰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의 장면이 나오는데,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そして神は、「われわれに似るように、われわれのかたちに、人を造ろう。そして彼らに、海の魚、空の鳥、家畜、地のすべてのもの、地をはうすべてのものを支配させよう。」と仰せられた。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흩어짐을 면하자고 하면서 바벨탑을 세우셨을 때를 성경은 창세기 11장 6절~8절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主は仰せになった。「彼らがみな、一つの民、一つのことばで、このようなことをし始めたのなら、今や彼らがしようと思うことで、とどめられることはない。
さあ、降りて行って、そこでの彼らのことばを混乱させ、彼らが互いにことばが通じないようにしよう。」
こうして主は人々を、そこから地の全面に散らされたので、彼らはその町を建てるのをやめた。

하나님께서는 중요한 일을 하실 때에 이처럼 ‘나’가 아닌 ‘우리’로 일을 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태초에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예수님과 함께 계셨고,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빌립보서 2장 6절~8절에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ピリピ人への手紙 2장 6절~8절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方なのに、神のあり方を捨てることができないとは考えないで、
ご自分を無にして、仕える者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たのです。
キリストは人としての性質をもって現われ、自分(じぶん)を卑(いや)しくし、死にまで従い、実に十字架の死にまでも従われたのです。


예수님은 곧 하나님의 본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어서 성경을 조금 더 살펴봅니다.

갈라디아서 1장 4절~5절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キリストは、今の悪の世界から私たちを救い出そうとして、私たちの罪のためにご自身をお捨てになりました。私たちの神であり父である方のみこころによったのです。
どうか、この神に栄光がとこしえにありますように。アーメン。

요한일서 2장 1절에서 2절에는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私の子どもたち。私がこれらのことを書き送るのは、あなたがたが罪を犯さないようになるためです。もしだれかが罪を犯したなら、私たちには、御父の御前で弁護してくださる方があります。それは、義なるイエス・キリストです。
この方こそ、私たちの罪のための、―私たちの罪だけでなく全世界のための、―なだめの供え物なのです。

성경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어 주시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자기 몸을 주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에 예수님이 피조물이었다고 한다면, 우리들도 누군가를 위해서 죄를 대속할 수 있다고, 내가 고난을 받음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의 죄를 씻어줄 수 있다고 할 수 있어야 할텐데, 우리 피조물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다른 사람의 죄는커녕 나 스스로의 죄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었다고 한다면 역시 다른 사람을 위해 죄를 대신 갚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우리만 위할 뿐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고 기록합니다.

私たちの罪だけでなく全世界のための、―なだめの供え物なのです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우리의 죄를 위해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서 사람의 형체로 내려오셨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 예수님은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이라면 우리 같은 인간과는 분명히 다를 거야. 우리한테는 힘든 일이라도 하나님은 쉽게 하실 수가 있어. 사람이 채찍에 맞으면 아프겠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니까 괜찮았을 거야.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면 아프겠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니까 안 아팠을 거야.
혹시 이런 생각을 해보신 일이 있으신가요?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한테 힘든 일 정도가 아니라 우리같은 사람 수 천만 명이 모여도 할 수 없는 일은 예수님은 능히 하실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하시나요?

빌립보서 2장 7절에서,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ピリピ人への手紙
ご自分を無にして、仕える者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たのです。

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을 때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오셨고, 우리와 똑같은 슬픔과 고단함과 아픔을 느끼셨습니다.

마태복음 21장 18절에는,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翌朝(よくあさ)、イエスは都に帰る途中、空腹を覚えられた。


요한복음 4장 6절에 보면,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そこにはヤコブの井戸があった。イエスは旅の疲れで、井戸のかたわらに腰をおろしておられた。時は六時ごろであった。

하나님이 배고픔을 느끼시나요? 아니면 하나님이 피곤함을 느끼시나요? 그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죠. 하지만 성경에서는 곳곳에서 예수님도 우리 인간들과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채찍에 맞으실 때의 고통은요?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까지 가시고, 거기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의 고통은 어떠셨겠습니까. 예수님의 온몸은 피로 물들었고 그 아픔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고통이 그렇다면 과연 그뿐이었을까요? 예수님은 채찍과 십자가에 의한 육체적인 고통만이 아닌 또다른 고통도 느끼셨습니다.

마가복음 15장 17절~19절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そしてイエスに紫の衣を着せ、いばらの冠を編んでかぶらせ、
それから、「ユダヤ人の王さま。ばんざい。」と叫んであいさつをし始めた。
また、葦の棒でイエスの頭をたたいたり、つばきをかけたり、ひざまずいて拝んだりしていた。

누가복음 22장 63절~65절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さて、イエスの監視人どもは、イエスをからかい、むちでたたいた。そして目隠しをして、「言い当ててみろ。今たたいたのはだれか。」と聞いたりした。また、そのほかさまざまな 悪口(あっこう)をイエスに浴びせた。


예수님에 대한 모욕은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도 이어집니다.

누가복음 23장 35절~37절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民衆はそばに立 ってながめていた。指導者たちもあざ笑って言った。「あれは他人を救った。もし、神のキリストで、選ばれた者なら、自分を救ってみろ。」兵士たちもイエスをあざけり、そばに寄って 来て、酸(す)いぶどう酒を差し出し、「ユダヤ人の王なら、自分を救え。」と言った。

이와 같은 치욕적이고도 모욕적인 일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견디십니다.

이 모습을 이사야 53장 7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彼は痛めつけられた。彼は苦しんだが、口を開かない。ほふり場に引かれて行く小羊のように、毛を刈る者の前で黙っている雌羊(めすひつじ)のように、彼は口を開かない。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능력이 없어서, 아니면 스스로의 죄가 많아서 이렇게 그 입을 다물고 견디셨을까요?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베드로가 저항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6장 53절~54절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それとも、わたしが父にお願いして、十二軍団よりも多くの御使いを、今わたしの配下 に置いていただくことができないとでも思うのですか。だが、そのようなことをすれば、こう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書いてある聖書が、どうして実現されましょう。」

제사장들이 보낸 군인들한테 잡힌 후에도,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후에도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고통과 고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힘과 능력과 권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완수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감수하시고 인내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장차 자신에게 일어날 이와 같은 고난을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아직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예루살렘에서 일어나실 일을 모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17절~19절에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さて、イエスは、エルサレムに上ろうとしておられたが、十二弟子だけを呼んで、道々彼らに話された。
「さあ、これから、わたしたちはエルサレムに向かって行きます。人の子は、祭司長、律法学者たちに引き渡されるのです。彼らは人の子を死刑に定めます。
そして、あざけり、むち打ち、十字架につけるため、異邦人に引き渡します。しかし、人の子は三日目によみがえります。」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라,

마가복음 14장 27절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イエスは、弟子たちに言われた。「あなたがたはみな、つまずきます。『わたしが羊飼いを打つ。すると、羊は散り散りになる。』と書いてありますから。

라고도 말씀하십니다. 이방인에게 잡히게 되면 육체적인 고난 만이 아니라, 3년 이상이나 가장 가까이에서 지내왔던 제자들로부터도 버림을 받는, 이와 갈은 인간적인 배신도 당하셔야 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마태복음 27: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三時ごろ、イエスは大声で、「エリ、エリ、レマ、サバクタニ。」と叫 ばれた。これは、「わが神、わが神。どうしてわたしをお見捨てになったのですか。」という意味である。

예수님은 그 때까지 자신을 따랐던 백성들, 그리고 제자들한테서 뿐만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으로부터까지 버림을 받았습니다. 아주 철저하게 버림을 받았던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8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キリストも、多くの人の罪を負うために一度、ご自身をささげられましたが、二度目は、罪を負うためではなく、彼を待ち望んでいる人々の救いのために来 られるのです。

우리가 죄 안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습니다. 우리가 죄인인 상태라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모두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즉,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우리를 대신해서 철저하게 죄인이 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철저하게 죄인이 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을 저주를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셨고, 우리가 받을 심판을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셨고, 우리가 받을 사망을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될 수 있어요?


베드로전서 2장 24절~25절에 보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아멘.

そして自分から十字架の上で、私たちの罪をその身に負われました。それは、私たちが罪を離れ、義のために生きるためです。キリストの打ち傷のゆえに、あなたがたは、いやされたのです。あなたがたは、羊のようにさまよっていましたが、今は、自分のたましいの牧者であり監督者である方のもとに帰ったのです。

우리고 오늘 본문 이사야 53장 5절 말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しかし、彼は、私たちのそむきの罪のために刺し通され、私たちの咎のために砕かれた。彼への懲らしめが私たちに平安をもたらし、彼の打ち傷によって、私たちはいやされた。

이제 우리는 우리를 억누르고 있었던 죄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어떻게 함으로 자유를 얻었나요?

요한복음 1장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しかし、この方を受け入れた人々、すなわち、その名を信じた人々には、神の子どもとされる特権をお与えになった。

우리는 이제 그 이름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값을 모두 철저하게 치러주신 예수의 이름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이 징계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평화를 누릴 수 있고,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았기 때문에 우리는 나음을 받을 수가 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의 죄값을 2천년 전에 모두 해결해주셨습니다. 우리의 문제를 2천년 전에 모두 해결해주셨습니다. 우리의 질병을 2천년 전에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고통과 고난과 질병 가운데에 있습니까? 이는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이미 해결된 것인데 왜 우리가 고통을 받고 있습니까. 이미 빚을 탕감했는데도 왜 우리가 빚쟁이가 들이닥칠까봐 떨고 있습니까.

로마서 10장 10절에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라고 기록합니다.

人は心に信じて義と認められ、口で告白して救われるのです。

마음으로 믿는 것만이 아니라 입으로 시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고민이 있습니까? 문제가 있습니까? 질병이 있으십니까?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다”
입으로 시인하십시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어렵게 어렵게 해결해야 할 문제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미 모든 문제를 십자가 위에서 해결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일은 단순히 옛날에 있었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2천년 전에 있었던 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구원사역은 지금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이 고난주간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고 순간순간마다 십자가의 은혜와 십자가의 능력으로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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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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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18회 불을 견디는 믿음
2016년 3월 1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0절~15절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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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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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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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불을 견디는 믿음’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스포츠 선수들을 보면 당연한 말이겠지만, 체력훈련을 열심히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런닝도 하고 근력단련도 하고 다양한 운동들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냥 무턱대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전에 제가 한국에서 대학생활을 할 때, 다른 학교에 다니는 선배와 함께 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만, 그 분은 상당한 실력을 가진 볼링선수였습니다. 그래서 졸업 후에도 실업팀에서 활약을 하고, 얼마 전 인터넷으로 찾아보니까 지금은 중동 쪽 볼링팀 감독을 맡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 형님이랑 1년 반 정도쯤을 함께 살았는데, 이 형님의 운동방식이 독특했습니다. 이 분이 아령을 가지고 운동을 하는데, 사람들이 운동을 하면 묵직한 아령을 두 손에 들고 이렇게 팔운동을 하지 않나요? 그런데 이 형님이 하는 운동은 좀 달랐습니다. 비교적 작은 아령을 들고 이렇게 손목 운동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그 때도 볼링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아니, 남자가 아령을 가지고 운동을 하면 좀 이렇게 힘차게 해야지, 세상에 요게 뭐냐고 그러면서 비웃었습니다. 참, 무식하면 사람이 이래요. 그런데 이 형님은 그런 저한테 친절하게 알려주었습니다. 볼링을 할 때 어깨 근육이 많으면 오히려 공을 던질 때에 방해가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팔을 뒤로 제쳤을 때 근육이 있으면 똑바로 공을 굴리지 못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팔근육보다는 손목근육이 중요하기 때문에 바로 이런 운동을 해야 한다고 설명해주었습니다. 그 설명을 듣고보니 정말 그럴듯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에는 또 흥미로는 말을 들었습니다. 일본에서 일반적으로 프로야구 선수가 되는 사람들을 보면 고등학교나 대학을 졸업하고 이른바 드래프트 회의를 거쳐서 각 팀으로부터 지명을 받고 프로 팀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프로가 되어서 훈련을 시작하면 근육통을 앓는 선수들이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근육통? 이상하지 않나요? 근육통이라고 하면 보통 운동을 안 하던 사람이 갑자기 운동을 하면 여기저기가 아프고 그러는 것을 말하는데, 아니, 그 선수들은 이미 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상당히 운동을 열심히 해왔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프로에 들어왔다고 근육통을 앓아요? 이건 좀 신기했습니다만, 말을 들어보니까 근육통을 앓는 이유가, 똑같은 야구라고 하더라도 학생 때 쓰는 근육과 프로에서 쓰는 근육은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학생 때 훈련을 열심히 하고 야구에서 좋은 성적을 냈던 선수라고 하더라도 프로에 오면 프로에서 쓰는 근육을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쓰지 않았던 근육을 키워야 하기 때문에 근육통을 앓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보니까 이도 역시 그럴듯하게 들렸습니다.
스포츠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조금 더 해보겠습니다. 이른바 피겨 스케이트 선수나, 리듬체조 선수의 연기를 보면, 우리가 보기에는 그저 우아하고 화려하게 연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작정 보기에 예쁘고 멋진 동작만 하면 우승을 할 수가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그 선수들은 일반 사람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치밀하고 계산된 동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무작정 점프를 많이 하고 스핀을 많이 돌면 되나요? 아니면 리듬체조에서 무조건 공을 높이 던지고 받기만 하면 되나요? 김연아 선수가 어느 토크쇼에 나왔을 때의 이야기인데, 그 진행자가 김연아 선수한테, 그 뱅글뱅글 돌 때 그걸 다 세나요? 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김연아 선수가 뭐라고 했을까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당연하죠!”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정말 그냥 빙글빙글 돌아서 잘 세지도 못할 것 같은데 선수들은 그것을 다 세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어요? 그걸 세고 있는 또다른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세고 있어요? 그렇습니다. 바로, 심사위원들이 세고 있습니다. 스케이트에서 점프 회수가 적어도 감점이지만, 회전 회수가 적어도 또한 감점이기 때문에 심사위원들은 눈에 불을 켜고 회전 수를 세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의 삶으로 눈을 돌려보겠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나 자신,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있지요? 예, 믿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요? 예, 사랑합니다. 성령님을 의지하지요? 예, 의지합니다.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와서 예배도 드립니다. 자, 이제 그럼 되지 않았어? 이 정도면 됐지, 뭘 더해? 이렇게 믿음이 마치 완성된 것처럼 자기 스스로에 만족해본 적이 있지 않나요?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3:10~15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コリント人への第一の手紙 3章12節~15節
「与(あた)えられた神(かみ)の恵(めぐ)みによって、私(わたし)は賢(かしこ)い建築家(けんちくか)のように、土台(どだい)を据(す)えました。そして、ほかの人(ひと)がその上(うえ)に家(いえ)を建(た)てています。しかし、どのように建(た)てるかについてはそれぞれが注意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というのは、だれも、すでに据えられている 土台のほかに、ほかの物を据(す)えることはできないからです。その土台とはイエス・キリストです。もし、だれかがこの土台 の上に、金、銀、宝石、木、草、わらなどで建てるなら、各人の働きは明瞭になります。その日がそれを明らかにするのです。というのは、その日は火とともに現われ、この火がその 力 で各人の働きの真価をためすからです。もしだれかの建てた建物が残れば、その人は報いを受けます。もしだれかの建てた建物が焼ければ、その人は損害を受けますが、 自分自身は、火の中をくぐるようにして助かります。」

우리의 삶은 하루하루가 터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믿음 생활은 오늘 말씀에 의하면 하루하루가 예수라고 하는 터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런데 그 집이 얼마나 뛰어나고 훌륭한 집인지를 평가하는 방법이 조금 독특합니다. 그것은 바로 불에 태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이 타고 난 다음에 남아있는 것 바로 그것에 따라 이 그 사람이 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오늘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왜 불에 태우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겉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겉보기에는 훌륭해 보이고 믿음생활을 열심히 하루하루를 산다고 했지만, 막상 우리가 예수님 앞에 가서, 자, 이제 너의 믿음생활, 내 위에 세운 집 위에 불을 붙여서 무엇이 남는지 무엇이 불에 타버리는지 한 번 보자. 그리고 그 중에서 남아 있는 것만큼 너에게 상을 주겠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내가 평생 동안 쌓아온 집에 불을 붙입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당당할 수 있을까요?
성경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다니엘서 3장에 보면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자신의 모습을 본딴 금으로 만든 우상을 세우고는 그 우상을 향해서 절하지 않는 자는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집어넣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유다에서 끌려온 포로 중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절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비록 포로들이긴 하지만 왕이 특별히 명해서 바벨론 지방을 다스리게 한, 말하자면 왕의 총애를 받는 엘리트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갈대아인 즉 바벨론 사람 중 누군가가 왕이 세운 금신상을 향해서 이 세 사람이 절을 하지 않는다고 고자질을 합니다. 이에 화가 난 느부갓네살 왕이 당장 이 셋을 끌어 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하는 말이 다니엘 3장 14절에서 15절입니다.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이르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

ネブカデネザルは彼らに言った。「シャデラク、メシャク、アベデ・ネゴ。あなたがたは私の神々に仕えず、また私が立 てた金の像を拝みもしないというが、ほんとうか。
もしあなたがたが、角笛(つのぶえ)、二管(にかん)の笛(ふえ)、立琴(たてごと)、三角(さんかく)琴(ごと)、ハープ、風笛(かざぶえ)、および、もろもろの楽器の音を聞くときに、ひれ伏して、私が造った像を拝むなら、それでよし。しかし、もし拝まないなら、あなたがたはただちに火の燃える 炉(ろ)の中に投げ込まれる。どの神が、私の手からあなたがたを救い出せよう。」

벌써 이 말을 들으면, 비록 그런 신고가 접수되긴 했으나 지금이라도 절하면 용서해주겠다고 하는, 정말 이 느부갓네살이 얼마나 그들을 아꼈는지를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제라도 절을 해라. 딱 한 번만 절을 해라. 이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을 이용하는 것이 마귀의 수법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광야로 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고 했을 때 바로가 뭐라고 하죠?

출애굽기 8장 28절에 보면,
“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 パロは言った。「私は、おまえたちを行かせよう。おまえたちは荒野でおまえたちの神、主にいけにえをささげるがよい。ただ、決して遠くへ行ってはならない。私のために祈ってくれ。」

그래, 너희를 보낼게 하지만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이게 무슨 뜻이에요? 예수를 믿어? 하나님을 믿어? 그래. 믿는 것까지는 좋아. 하지만 적당히 믿어. 너무 빠지지는 마. 이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한테도 마귀가 어떤 식으로 유혹하던가요?

마태복음 4장 9절에는,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言った。「もしひれ伏して私を拝むなら、これを全部あなたに差し上げましょう。」

더도 원하지 않아. 딱 한 번만 절을 해. 그러면 될 거 아냐. 편안하게 살아. 이것이 마귀의 유혹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한테도 역시 똑같았습니다. 딱 한 번만 절해. 그러면 살려줄게. 그랬더니 이 셋은 뭐라고 합니까.

다니엘 3장 16절에서 18절을 보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シャデラク、メシャク、アベデ・ネゴはネブカデネザル王に言った。「私たちはこのことについて、あなたにお答えする必要はありません。
もし、そうなれば、私たちの仕える神は、火の燃える炉から私たちを救い出すことができます。王よ。神は私たちをあなたの手から救い出します。
しかし、もしそうでなくても、王よ、ご承知ください。私たちはあなたの神々に仕えず、あなたが立てた金の像を拝むこともしません。」

이미 대화는 끝났다. 타협 같은 것은 기대하지 말아라.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건져내시겠고,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아니할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을 것이고 왕이 세운 금 신상에도 절하지 않을 테니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 말을 들은 왕은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단둘이 있을 때 이 말을 했나요? 아니요. 모든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감히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의 면전에 대고 담대하게 말을 한 것입니다. 왕의 자존심이 보통 상한 게 아니에요. 그래서 화가 단단히 난 느부갓네살 왕이 “풀무불의 열기를 평소보다 일곱배나 뜨겁게 하라.” 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사실 일곱 배 뜨겁든 평소처럼 뜨겁든 어차피 풀무불 구덩이 속에 떨어지면 살아남을 길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 글로 보면 느부갓네살 왕의 화가 얼마나 났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22절에 보면 그 불이 얼마나 뜨거운지 이 세 사람들을 결박해서 끌고 갔던 병사가, 그 끌고 가는 길에 불이 옮겨 붙어서 타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 불구덩이 속으로 이 세 사람은 던져지는데,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나요?

다니엘 3장 24절에서 25절에 보면,
“그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이르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에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하니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옳소이다 하더라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そのとき、ネブカデネザル王は驚き、急いで立 ち上がり、その顧問たちに尋ねて言った。「私たちは三人の者を縛って火の中に投げ込んだのではなかったか。」彼らは王に答えて言った。「王さま。そのとおりでございます。」
すると王は言った。「だが、私には、火の中をなわを解かれて歩いている四人の者が見える。しかも彼らは何の害も受けていない。第四の者の姿は神々の子のようだ。」


왕이 궁금해서 그 속을 들여다보니 이상합니다. 분명히 세 사람을 결박해서, 그것도 일곱 배나 뜨겁게 해서 던져 넣었으니까, 이제 머지않아 비명소리, 뜨거워서 고통에 몸부림을 치는 절규 소리가 들려오고, 살이 타 들어가는 끔직한 냄새가 나야 하는데, 아무런 소리도 냄새도 안 납니다. 이상해서 들여다보니 거기에는 결박하지 않은 세 사람과 또 누가 다니는데, 그 네 번째 사람은 마치 신들의 아들 같다고 합니다. 이 느부갓네살 왕이 본 신들의 아들처럼 보이는 이가 누구이겠습니까. 그렇죠.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고통 가운데에 허덕일 때에, 우리가 가장 힘들어하고 불구덩이 속에 들어 있는 것만 같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8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捨てて孤児にはしません。わたしは、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戻って来るのです。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서 이제 그 셋을 건져올립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들은 어땠다고 하죠?

다니엘 3장 26절에서 27절에 기록하기를,

“느부갓네살이 맹렬히 타는 풀무불 아귀 가까이 가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에서 나온지라 총독과 지사와 행정관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それから、ネブカデネザルは火の燃える炉の口に近づいて言った。「シャデラク、メシャク、アベデ・ネゴ。いと高き神のしもべたち。すぐ出て来 なさい。」そこで、シャデラク、メシャク、アベデ・ネゴは火の中から出て来た。
太守、長官、総督、王の顧問たちが集まり、この人たちを見たが、火は彼らのからだにはききめがなく、その頭の毛も焦げず、上着 も以前と変わらず、火のにおいもしなかった。

그 어마어마한 불구덩이 속에서 나온 그들의 모습이 어땠대요?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탄 냄새도 없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것을 읽고 불에 타지 않은 것이 그냥 아…신기하다…라고만 생각하면 그것은 성경을 반쪽밖에 읽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 12절에서 15절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もし、だれかがこの土台の上に、金、銀、宝石、木、草、わらなどで建てるなら、
各人の働きは明瞭になります。その日がそれを明らかにするのです。というのは、その日は火とともに現われ、この火がその力 で各人の働きの真価をためすからです。
もしだれかの建てた建物が残れば、その人は報いを受けます。
もしだれかの建てた建物が焼ければ、その人は損害を受けますが、自分自身は、火の中をくぐるようにして助かります。

우리가 구원을 받긴 받습니다. 그러나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지만, 공적이 불에 타고 없어진다면 해를 받는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어땠다고 합니까. 불에 타고 없어지기는커녕 머리털도 그을리지 않고 겉옷 빛깔도 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공적입니다.

욥기 23장 8절에서 10절을 보면,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ああ、私が前へ進んでも、神はおられず、うしろに行っても、神を認めることができない。
左に向かって行っても、私は神を見ず、右に向きを変えても、私は会うことができない。
しかし、神は、私の行く道を知っておられる。神は私を調べられる。私は金のように、出て来る。


눈에는 보이지 않고 귀에는 들리지 않고 손에는 잡히는 것이 없더라도 내가 가장 어려울 때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는 길을 우리 주님이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세상과 대충 타협하고 믿음을 저버리고 믿음을 떠나서 기를 쓰고 열심히 산다고 살아봤자 힘은 힘대로 들고 점수는 못 따는 3류 피겨선수나 리듬체조 선수 꼴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서 불이 붙으면 화악 타버리고 사라져버리고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인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 생활을 통해서 영적으로 강해져야만 합니다. 성령 충만해야만 합니다. 물속에 들어가서 아무리 있는 힘을 다해 허우적거려봤자 수영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초등학생을 당해낼 수가 있겠습니까? 실력이 아무리 좋은 피겨선수나 리듬체조 선수라고 해도 무조건 화려하고 힘든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지켜보고 있는 심사위원으로부터 점수를 딸 수 있는 연기를 해야 우승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하나님으로부터 점수를 딸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 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점수를 딸 수 있어요? 그럼 누구는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럼 헌금 많이 내면 점수를 따나? 아니, 축복 받는 길이 꼭 헌금 많이 내는 길밖에 없나요? 지금까지 기도 생활을 별로 안 했어요? 그렇다면 해 보세요. 하루에 한 마디라도 좋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세계적인 목회자인 빌리 그레함 목사님의 집회에 갔을 때에 그 분이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이 한 마디도 훌륭한 기도입니다. 만약에 아니라고 한다면 빌리 그래함이 그랬다고 하십쇼.” 이렇게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그 기도 한 마디가 오늘을 바꾸고 내일을 바꾸고 마침내는 내 인생을 바꾸게 됩니다. 봉사를 안 했어요? 그렇다면 봉사를 해보세요. 성경을 안 읽으셨나요? 이제 성경을 하루에 한 장이라도 읽어보세요. 찬양을 많이 안 해봤어요? 집에서 혼자 있을 때 하루에 한 곡이라도 찬송가를 불러보세요. 내가 수입이 있는데 아직 십 분의 일을 바쳐본 일이 없나요? 그렇다면 다음부터 한 번 바쳐보세요. 이렇게 하나님께 점수를 따는 생활을 했는데도 아무 것도 안 바뀌어요?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을 왜 믿겠습니까.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이 있습니다.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절대 자기만족이 아닙니다.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야호~라고 소리 지르면 속이 후련해질 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단순히 느낌이에요. 하지만 믿음은 느낌도 아니고 스트레스 해소도 아니고, 자기만족이 아닌, 반드시 응답이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마침내 불을 견디는 굳건한 믿음으로 자라서, 모든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단련을 통과해서 순금 같이 되어 나오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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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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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17회 물가에 심어진 나무
2016년 3월 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17장 7절~8절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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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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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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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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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은 성경퀴즈부터 시작해볼까 합니다. 내가 성경은 그래도 좀 읽었지…… 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어렵지 않게 푸실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7가지 문장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이 중에서 성경에 나오는 말은 몇 개일까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 준비 되셨나요?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1. 노력은 쓰나 그 열매는 달다.
2. 고생 끝에 낙이 온다.
3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라.
4.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
5. 사람이 일을 하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린다.
6.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7. 일은 사람이 하나, 이루기는 하나님이 이루신다.

자, 되셨나요? 이 중에서 성경에 실제로 기록된 말씀은 몇 개일까요?

먼저 1번, ‘노력은 쓰나 그 열매는 달다’는 프랑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가 한 말입니다. 2번 ‘고생 끝에 낙이 온다’라는 건 중국 고사성어인 ‘苦盡甘來’에서 왔습니다. 4번,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는 건 그리스 우화에서 나온 말이고요, 5번 ‘사람이 일을 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고 하는 이른바 ‘진인사 대천명’, 그리고 7번 ‘일은 사람이 도모하나 이루기는 하늘이 한다’는 ‘모사재인 성사재천’이라는 말은 모두 삼국지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그리고 6번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은 세종대왕이 편찬한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문구입니다.
정답은 3번인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출애굽기 23장 19절, 34장 26절, 그리고 신명기 14장 21절, 이렇게 3번이나 등장하는 말씀입니다.
이 중에서 인상적인 글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말이죠. 이 말의 뜻은 뭐예요? 하늘은 가만히 있는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돕는 자, 그러니까 스스로 노력하는 사람을 하늘이 돕는 것이지, 자기는 아무런 노력도 안 하는 사람은 하늘도 돕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자로는 천우자조……이렇게 써서 일본 어느 고등학교에서는 이를 그 학교의 교훈으로 삼고 있는 곳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조차도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라고 오해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도 아직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았을 때 저는 이 말씀이 성경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만, 이 말은 외국 격언에서 비롯된 말이고, 정작 성경에는 어디에도 이 글이 나오지 않습니다.
진인사 대천명……이라는 말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는 사람이 먼저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나서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그저 자기는 아무 것도 안 하고 하늘의 도움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람이 열심히 노력을 다 하고 나서, 그러고 난 후에 하늘의 도움을 기대한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천우자조, 사람이 제 할 일을 다 하고 나서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진인사 대천명. 이는 모두 세상적으로 보면 이른바 ‘명언’으로 여겨지는 말이고, 사람에 따라서는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내가 최선을 다 하는 것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세상은 내가 최선을 다 하는 것이 먼저이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나중이라고 말합니다.
먼저 네가 할 도리를 다 해야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부터 의지하는 것은, 어쩌면 염치가 없다고 생각해서일까요?
하지만 이와 같은 말씀을 성경적으로 본다고 한다면 이는 조금 달라집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わたしはぶどうの木で、あなたがたは枝です。人がわたしにとどまり、わたしもその人の中にとどまっているなら、そういう人は多くの実を結びます。わたしを離れては、あなたがたは何もすることができないからです。

예수님은 스스로가 포도나무라고 하시고 우리는 나뭇가지라고 하시면서 우리가 예수님한테 붙어있지 않고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나뭇가지는 나무 줄기로부터 영양분을 받아야지만 잎사귀도 내고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나뭇가지인 우리가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고, 혼자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 먼저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마치 나뭇가지가, 아, 나 줄기에 붙어있지 않아도 되요. 나 혼자서 내 힘으로 좀 열심히 잎사귀도 만들어보고 꽃도 피워 보고 열매도 맺어볼래요. 그러다가 도저히 안 되면 그 때 나한테 영양분을 공급해주세요.
마치 그러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열매를 맺을 수 있나요? 만약에 그래도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자기 집에 있는 나무…… 남의 집에 있는 나무는 안 되고요. 자기 집 마당에 있는 나무의 나뭇가지를 꺾어서 한 번 집에 가져가서, 물에 담그지도 않고 한 번 내버려둬보세요. 그리고 그 나무가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99프로도 아니에요. 꽃이 피고 열매가 맺기는커녕 100프로 바싹 말라 비틀어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성경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고 기록합니다.

私は、私を強くしてくださる方によって、どんなことでもできるのです。


말씀을 읽을 때에는 그 내용도 물론이지만 순서도 중요합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내가 못할 때에만 능력을 주신대요?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먼저 주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그 능력으로, 그 힘으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어디에도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세상에서는 스스로 노력부터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먼저 하나님부터 의지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과 성경의 기준은 다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란 무엇이에요. 요즘도 그런 인사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에서는 서로 뻑하면 부자 되세요, 대박 나세요, 하고 인사를 합니다. 이 말을 하는 분들은 물론 좋은 의미로 덕담으로 말을 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니까 세상에서는 돈 많이 벌어서 부자 되고 대박 나는 것이 성공인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돈 많이 벌면 안 된다는 말씀이 아니에요. 남을 속이거나 무슨 나쁜 짓을 해서 버는 것이 아닌, 열심히 노력해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성공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한 다윗은 어땠습니까. 오랜 세월 동안 사울한테 쫓겨 다니다가 이제 사울이 죽고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부와 권력을 손에 넣게 된 것입니다. 그 다윗이 왕이 된 다음에 이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졌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시편 23편 6절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まことに、私のいのちの日の限り、いつくしみと恵みとが、私を追って来るでしょう。私は、いつまでも、主の家に住まいましょう。

역대상 17장 26절~27절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이 좋은 것으로 주의 종에게 허락하시고 이제 주께서 종의 왕조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두시기를 기뻐하시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복을 주셨사오니 이 복을 영원히 누리리이다 하니라”

今、主よ。あなたこそ神であられます。あなたは、このしもべに、この良いことを約束してくださいました。
今、あなたは、おぼしめしにより、あなたのしもべの家を祝福して、とこしえに御前(みまえ)に続くようにしてくださいました。主よ。あなたが、祝福してくださいました。それはとこしえに祝福されています。」

여호와의 집에 산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건물에 산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영양분을 공급받고 그 힘으로 그 능력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광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수아 5장 6절,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음성을 청종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이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십 년 동안을 광야에서 헤매었더니”

イスラエル人は、四十年間、荒野を旅していて、エジプトから出て来た民、すなわち戦士たちは、ことごとく死に絶えてしまったからである。彼らは主の御声 に聞き従わなかったので、主が私たちに与えると彼らの先祖たちに誓われた地、乳と蜜の流れる地を、主は彼らには見せないと誓われたのであった。

그리고 12절에,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彼らがその地の産物を食べた翌日から、マナの降ることはやみ、イスラエル人には、もうマナはなかった。それで、彼らはその年のうちにカナンの地で収穫した物を食べた。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는 중에도 안식일을 제외하면 하루도 빠짐 없이 만나를 내리게 하셔서 먹이셨고, 이는 광야 생활을 마치고 요단 강을 건너 여리고 평지에 들어갈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광야생활이 무엇을 뜻합니까. 애굽에서 400년 이상 지내면서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우상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그들한테 고난이 닥치니까 뭐라고 합니까.

출애굽기 14장 12절에는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私たちがエジプトであなたに言ったことは、こう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か。『私たちのことはかまわないで、私たちをエジプトに仕えさせてください。』事実、エジプトに仕えるほうがこの荒野で死ぬよりも私たちには良かったのです。」


출애굽기 16장 3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イスラエル人は彼らに言った。「エジプトの地で、肉なべのそばにすわり、パンを満ち足りるまで食べていたときに、私たちは主の手にかかって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のに。事実、あなたがたは、私たちをこの荒野に 連れ出して、この全集団を飢え死にさせようとしているのです。」

출애굽기 32장 1절에는,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民はモーセが山から降りて来るのに手間取っているのを見て、アロンのもとに集まり、彼に言った。「さあ、私たちに先立 って行く神を、造ってください。私たちをエジプトの地から連れ上ったあのモーセという者が、どうなったのか、私たちにはわからないから。」

이처럼 지금 그 순간이 어려워지니까 하는 말이, 차라리 옛날이 낫다, 과거로 돌아가자, 죄로부터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지금보다도 종살이를 할 때가 더 나았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우상을 섬기는 게 낫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 모세를 괴롭힙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살아가면서 선민의식,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자부심과 긍지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저 노예로, 종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데에 만족해 했던 것입니다. 이토록 철저하게 타락한 근성을 고치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광야입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면 단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만을 믿고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없이 사람의 능력으로는 40년은 고사하고 40일도 살아갈 수 없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이 속수무책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물을 공급해주시는 생명을 공급해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40장 6절~7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呼ばわれ。」と言う者の声がする。私は、「何と呼ばわりましょう。」と答えた。「すべての人は草、その栄光は、みな野の花のようだ。
主のいぶきがその上に吹くと、草は枯れ、花はしぼむ。まことに、民は草だ。

이사야 58장 11절,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라고 기록합니다.

主は絶えず、あなたを導いて、焼けつく土地でも、あなたの思いを満たし、あなたの骨を強くする。あなたは、潤された園のようになり、水のかれない源のようになる。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예레미야 17장 7절~8절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主(しゅ)に信頼(しんらい)し、主(しゅ)を頼(たの)みとする者(もの)に祝福(しゅくふく)があるように。
その人(ひと)は、水(みず)のほとりに植(う)わった木(き)のように、流(なが)れのほとりに根(ね)を伸(の)ばし、暑(あつ)さが来(き)ても暑(あつ)さを知(し)らず、 葉(は)は茂(しげ)って、日照(ひで)りの年(とし)にも心配(しんぱい)なく、いつまでも実(み)をみのらせる。」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물가에 심어져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한낱 풀이나 나무에 지나지 않습니다. 풀이나 나무가 자신의 힘으로 물을 찾아 왔다 갔다 할 수가 있나요? 제아무리 뿌리를 길게 뻗어봤자,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있는 힘껏 물을 찾아 봤자, 그 주변에 물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물가는 어떤 곳입니까. 가뭄이 들더라도 강물이 흐른다면 그 땅은 촉촉하고 메마르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라면 더위가 와도 가뭄이 와도 걱정 없이 열매를 맺는다고 오늘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둘째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나무가 살아 있을 때에 심겨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힘을 믿기 때문에, 아니면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간다고 고집을 부리는 나무가 있다면 그 나무가 바싹 마르고 고목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나무가 살아 있을 때 강가에 심겨져야지만 힘차게 자라날 기회가 있는 것이지, 이미 그 생명력을 잃게 되면 무슨 소용이 없는 있겠습니까. 아무리 풍성하게 물이 넘치는 옥토라 하더라도 다 죽은 나무 막대기를 꽂아놔 봤자 거기서는 뿌리도 자라지 않고 나뭇가지도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의지하고 물가에서 영양분을 공급 받는 나무처럼, 예수님이라는 포도나무에 붙여진 나뭇가지처럼 힘을 얻고 열매 맺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셋째로 우리가 물가에 심어져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일본 속담에 桃栗三年かき八年 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복숭아와 밤은 3년이 지나야 되고 감은 8년이 지나야 열매를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나무들이 한 번이나 두 번, 마치 무슨 사람이 발을 담그듯이 잠깐 동안만 발을 담그면 꽃을 피울 수가 있겠어요? 열매를 맺을 수가 있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4장 7절에서 13절에 보면,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民族は民族に、国は国に敵対して立ち上がり、方々にききんと地震が起こります。
しかし、そのようなことはみな、産みの苦しみの初めなのです。
そのとき、人々は、あなたがたを苦しいめに会わせ、殺します。また、わたしの名のために、あなたがたはすべての国の人々に憎まれます。
また、そのときは、人々が大ぜいつまずき、互いに裏切り、憎み合います。
また、にせ預言者が多く起こって、多くの人々を惑わします。
不法がはびこるので、多くの人たちの愛は冷たくなります。
しかし、最後まで耐え忍ぶ者は救われます。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어려움이 닥쳐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렇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끝까지 견뎌야만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시편 125편 1절에 보면,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라고 기록합니다.

主に信頼する人々はシオンの山のようだ。ゆるぐことなく、とこしえにながらえる。

우리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무엇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가뭄이 닥치고 더위가 닥치고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시온 산처럼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견딤으로 말미암아 꽃을 피우고 30배 60배 100배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18회 불을 견디는 믿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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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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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내 눈 속의 들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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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Update 2019. 5. 21

누가복음 6장 42절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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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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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내 눈 속의 들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얼마 전 운전을 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신호가 바뀌자마자 제 맞은편에 있던 차가 갑자기 무리하게 커브를 틀었습니다. 한국에서는 파란신호 때는 반대쪽으로 돌 수 없게 되어있지만 일본은 돌 수가 있습니다. 물론 당연히 맞은편에서 직진하는 자동차가 오지 않을 때 돌 수 있는 것이지, 올 때는 돌 수가 없지요.
저도 그쪽 방향으로 커브를 돌려고 했었는데, 도로교통법상으로 보면 우선순위는 저한테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차가 돌 때 돌더라도 제가 먼저 커브를 하고 자기가 돌아야 할텐데, 우선순위가 낮은 상대방 차가 먼저 돌아버리는 바람에 자칫 서로 부딪힐 뻔했습니다.
아무리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고 한다 하더라도, 다시 말해서 상대방한테 잘못이 있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운전에 있어서의 첫 원칙은 사고회피, 방어운전입니다. 하지만 그 때 순간적으로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일단 충돌을 피하고 난 다음에 경적을 울렸는데, 제 성격에 그것만으로 화가 풀리지는 않죠. 이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 차 앞을 막아서고 내려가지고는 그냥 확……. 아니면 적어도 창문을 열고 그 운전사한테 손가락질을 하면서 이걸 그냥 확……. 해야 직성이 풀릴 상황이었지만 꾸욱 그래도 꾸욱 참고 제 갈 길을 갔습니다. 참으면 그래도 마음이 좀 풀릴까요? 마음씨가 착한 여러분이라면 “그래, 그냥 잊어버리자”하고 넘겨버릴 수가 있으셨겠지만, 그리 온순하지 못한 제 성격으로는 웬만해서 마음의 불편함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요? 기도를 했죠.
“주님, 제가 지금 열불이 터지고 화가 나서 못 견디겠는데, 이걸 어쩌면 좋겠습니까. 이미 그 차는 다른 데로 가버렸기에 지금 쫓아가서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것 참 난감하게 되었네요. 주님도 방금 그때 그 상황을 보셨죠? 아니, 어떻게 거기서 갑자기 그렇게 커브를 돌 수가 있어요? 이거 정말 완전히 돌아버리는 상황 아니에요? 운전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자기가 잘못해서 자기 혼자 사고나면 그걸로 끝나겠지만, 다른 사람이랑 부딪히면 그 사람은 무슨 죄에요? 폐를 끼쳐도 유분수지 어쩜 그렇게 남한테 민폐를 끼칠 수가 있어요? 아~ 정말 화가 나서 못 살겠네요. 열불이 터져서 미쳐버리겠습니다.”
점잖으신 여러분께서는 이 기도를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어떤 분은 그렇게 말을 하십니다.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요. 기도할 시간이 없어요. 그런데 기도가 꼭 교회 성전에 가서 무릎꿇고 두 손 모아 기도를 드리는 것만이 기도는 아니지요. 만약에 그것만이 기도라면,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
“쉬지 말고 기도하라”
라는 말씀을 지키려면, 그럼 다른 일은 하지 말고 하루 온종일 성전에 가서 무릎꿇고 기도만 하라는 것인데, 우리한테 그것은 불가능하죠. 그렇다면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겠어요?
마태복음 28장 20절 중반부 이후에 보면,
“……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데, 그렇다면 기도는 세상 끝날까지 지금 이 순간도 함께 하시는 예수님께 말씀드리는 것, 그것이 진정한 기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이걸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을지 기도를 드렸습니다만, 그 때 마음에 들리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었냐 하면,
“너도 지금까지 남들한테 민폐를 끼치면서 살아오지 않았냐. 네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들한테 끼친 민폐를 생각해봐라.”
이런 마음이 갑자기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제 마음이 부끄러워지고, 아까 그렇게 쌓였던 분노가 사르륵 녹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들한테 끼친 민폐가, 그날 제가 겪은 한낱 그런 미약한 민폐 정도겠습니까. 지금까지 남들을 힘들게 하고 울게 만들고 화나게 만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그런 민폐를 끼치고 지금까지 살아왔는데도 다행이 큰 탈 없이 무사히 살아 올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누가복음 6장 37절~38절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알아야 할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최초로 타락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습니까. 마귀의 꼬임에 넘어간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창세기 3장 5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게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 하나님과 같이 되어서 선과 악을 알 수 있게 된다”
바로 이 말을 믿고 열매를 따 먹습니다. 자,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가 눈이 밝아졌습니까. 밝아졌죠. 무엇이 보였습니까.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자신들이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 자신들을 더 이상 하나님께서 지켜주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되었습니까? 선과 악을 알게 되긴커녕 사람들을 자기들 멋대로 판단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16절에서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이는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하나님 모두 하나님의 판단은 공의로우시기에 그 분의 판단은 참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과 악의 판단을 하나님께서 하시면 그것은 참되고 완전한 판단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인간이 그것을 하려고 한다면 이는 절대로 완전한 판단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세요? 판단하려면 공부를 많이 하고 판단하라? 그렇게 말씀하시나요?
로마서 2장 1절에서 2절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봅니다.
누가복음 6장 42절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이 말씀을 만약에
“너 안에 있는 흠을 없애고 난 다음에 다른 사람을 판단하든지 해라” 라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흠을 없앨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처럼 참되고 공의롭게 판단할 수가 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야고보서 4장 11절에는,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고린도전서 4장 5절에는,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성경에서 뭐라고 말씀하세요? 주께서 오시기 전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판단이라는 것은 뭐예요? 이 사람은 이렇게 안 좋다, 저 사람은 저렇게 나쁘다……. 이런 비방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누구를, 저 사람은 정말 나쁜 인간이야…… 라고 한다면, 내 죄를 위해서는 예수님이 피를 조금 흘려도 용서받을 수 있었지만, 저 사람의 죄를 위해서는 피를 많이 흘려야 용서 받을 수 있어……. 마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가요? 내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는 채찍을 한 번만 맞으셔도 됐었는데, 저 사람의 죄 때문에 채찍을 많이 맞으신 건가요? 아니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 사람이나 나의 죄는 모두가 다 어떻게 해야 용서받을 수 있었습니까.
이사야 53장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의 죄는 예수님께서 채찍에 수도 없이 맞으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리고 돌아가셔야만 용서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한테 있는 죄나 나한테 있는 죄나 전혀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래요?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하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옳고 네가 틀렸다, 내가 잘했고 네가 잘못했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고 분쟁이 일어나서 서로가 미워하고 서로가 다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내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는 내 이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죄나 너의 죄나 결국은 다 똑같다. 우리 모두의 죄를 예수님께서 사해주셨다는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까.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요한복음 13장 34절~35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웬만하면 이웃도 사랑하지 그래? 라고 하는 권고가 아닙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라는 말씀은 뒤집어보면 어떻게 되나요? 서로가 사랑해야지 예수님의 제자이지, 서로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으면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이라는 것을 오늘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 너도 못 났지만, 나도 못 났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잘 나봤자 뭐가 얼마나 잘 났겠냐. 우리가 잘났다면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실 필요도 없었을 것이요,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도 없으셨겠지.
이렇게 생각하면 어떤 마음이 들게 되죠? 그렇죠.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그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3장 8절~9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5장 5절~6절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우리가 우리 힘으로 높아지려는 것은 마치 우리 힘으로 산을 오르려는 것입니다. 제일 높은 산이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에베레스트 산입니다만, 높이가 8848미터입니다. 여기에 오르려면 먼저 오랜 세월에 걸쳐 훈련을 해야 하고 등반준비도 6개월 정도를 해야 하고, 실제로 산에 오르는 시간도 최소한 30일을 잡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도 무사히 정상을 오를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죠.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는 어떻습니까. 일반 여객기의 경우 국내선은 비행고도가 약 6600미터에서 8400미터, 국제선은 7800미터에서 13000미터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면 거기까지 오르기 위해서 사람이 무슨 대단한 훈련이나 고생을 하나요? 아니면 시간이 몇 개월이나 걸리나요?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높아지려고 한다면 이는 그만큼 힘이 들고 오랜 세월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잘못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모든 것을 걸고 위험을 무릅쓰고 올라가봤자 10킬로도 못 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우리의 수고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높여주신다고 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죄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 거룩해질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말합니다.
로마서 7장 14절에서 15절에는,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좋은 줄 알고 지키려고 애를 써요. 그리고 선한 일을, 착한 일을 하려고 합니다.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을 해요. 그러나 인간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그 죄 가운데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해결해줍니까. 이를 해결해줄 분은 바로 우리 구주 예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이웃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만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이웃을 위해서도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이웃보다 잘난 것도 없고 모두 죄인이며,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사랑함 같이 우리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손에 의해 높임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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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2장 13절~14절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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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준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이라고 하면 무엇을 떠올리십니까. 그렇죠.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불러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말씀하시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 인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를 만드시고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의 조상이자 또한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인물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훌륭한 인물이었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많이 있는 위인전은 그 사람의 뛰어난 부분, 자랑할 만한 부분만을 골라서 실려있다고 한다면,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위인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수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고통을 당하지만 그 속에서 회개하고 힘을 얻고 구원 받는 역사가 기록된 책이 바로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처음부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의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보다도 사람의 힘으로, 자기 자신의 지혜와 힘으로 어려움을 헤쳐나가려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렀을 때의 장면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서 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렇게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자, 그 다음에 아브라함이 했던 행동이 바로 다음 구절에 나옵니다.

창세기 12장 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여기서 문제를 내겠습니다. 아브라함의 행동이 옳았나요?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했나요? 아니라면 어디가 잘못되었나요?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어요. 고향과 친척 아비 집인 하란 땅을 떠났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언제 조카 롯을 데려가라고 했나요? 하나님은 순수하게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서 한 민족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시키지도 않은 롯을 데려갔을까요.
그 이유는 어쩌면 매우 인간적인 이유에서였는지도 모릅니다. 함께 데려갔던 종들이 있었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남자 하나가 더 있었으면 좋겠지 하는 생각에 같이 가자고 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고, 또한 어쩌면 본래부터 롯이 큰아버지인 아브라함을 잘 따랐기 때문에, 큰아버지가 집을 나가서 독립한다고 하니 자기도 가겠다고 졸랐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길이 어떤 길입니까. 그냥 어디 놀러 가는 길인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쓰시기 위해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부터 열까지 철저하게 순종을 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유명한 요리사가 저한테 요리 지도를 해줍니다. 지난 번에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저는 요리 초보자입니다. 자, 그런데 그 요리사가 저한테, “거기에는 설탕 몇 그램과 소금 몇 그램을 넣으세요” 라고 해요. 그런데 거기에, 제 생각에는 왠지 고춧가루를 좀 몇 숟갈 넣으면 맛이 있을 것 같아요. 넣어야 해요? 말아야 해요. 물론 맛이 있을지도 모르겠죠. 하지만 저는 요리 초보자입니다. 넣으라는 말이 없으면 넣지 말아야 하고, 정 넣고 싶으면 적어도 그 요리사한테 물어보고 넣든지 말든지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롯을 데려갈지 말지를 물어보았다는 구절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나요? 하나님께서 입을 다물어버리십니다.
하나님은 아직 아브라함한테 구체적으로 어디로 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그저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만 하셨는데, 아브라함이 불순종을 하니까 더 이상 말씀을 안 하게 되신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여전히 하나님이 말씀이 없으니까 그 땅을 지나서 세겜 땅까지 갔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딱 한 마디 하십니다. 창세기 12장 7절 초반에서 중반부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줄게. 이 한 마디만 하시고 또다시 침묵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만,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아무 말씀도 안 하십니다. 그리고 9절에 보면 또 희한한 부분이 나옵니다.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아니, 그 땅을 자손에게 주겠다고 했으면 거기 있을 것이지, 미심쩍어서 슬그머니 옮겨간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키는 일을 안 해도 문제가 생기지만, 하나님이 시키지 않은 일을 해도 문제가 생깁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시키는 일을 안 하는 것이나 시키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이나 둘 다 불순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이제 서서히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12장 10절에 보면,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땅을 떠나 여기저기 방황하고 있었더니 어느덧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기근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전도서 7장 14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이 ‘되돌아보아라’라는 부분이 개역한글에는 ‘생각하라’, 일본어 신개역판에는 ‘반성하라’는 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그렇죠. 기도를 해야죠. 하나님, 하나님이 가라는 곳으로 왔는데 기근이 들었습니다. 가뭄이 들었어요. 내가 뭔가 잘 못했나요? 이제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려주세요. 이처럼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다고 하죠? 기도했다고 했나요? 아니요, 애굽에 거류하려고 내려갔대요. 하나님이 거기로 가라고 하셨나요?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 ‘애굽’이라는 것은 세상을 상징합니다. 이후에도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에 무슨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느냐 아니면 애굽을 의지하느냐 하는 식으로 두 가지가 비교되어서 나옵니다. 여기서도 아브라함은, 자기 생각에, 아브라함의 생각에 거기 가면 좋을 것 같아서, 거기 가면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간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나요? 자기 부인을 빼앗길 위기에 처해지는 수치를 당하고 맙니다. 자기 판단을 의지하는 것은 비단 아브라함만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분은 앞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을 불렀지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를 부르지는 않지 않았느냐, 라고 하실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창세기 2장 24절에 의하면,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라고 되어 있어, 부부는 한 몸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불렀을 때 부인인 사라가 따라가는 것은 이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면 아브라함과 사라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렇죠. 기다려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는 믿고 기다리는 것이 곧 순종입니다. 그런데 사라는 어떻게 했습니까. 아무리 기다려도 아이를 주지 않으니까 자기의 여종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주어서 아이를 갖게 합니다. 이게 누구 생각인가요. 하나님 생각이요? 아니요 사라 자기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라의 여종인 하갈의 정체가 누구인지 성경은 매우 자세하게 놀라운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6장 1절에는 하갈의 정체가 나오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하갈이 어디 사람이요? 그렇습니다. 바로 애굽 사람입니다. 즉, 여기서도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 자신들의 판단으로 애굽 즉 세상을 의지한 것입니다. 결국 하갈은 아브라함의 아이를 잉태하게 되는데

창세기 16장 4절에 보면,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그리고 이후에 사라가 드디어 이삭을 출생하게 되는데,

창세기 21장 9절에 의하면,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이처럼 세상적인 생각에 의한 결과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결과는 서로 물과 기름입니다. 왜냐하면 순종과 불순종이 한 번에 존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낼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일설에 의하면 이 이슬람교의 조상이 이스마엘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기독교와 이슬람교와의 마찰과 갈등, 그리고 지금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른바 IS사태를 생각해본다면 그 당시 경솔했던 아브라함과 사라의 판단이 후세에 얼마나 막대한 악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다시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 롯에 대해서 본다면, 롯을 데리고 있을 때에는 아까 살펴본 바와 갈이 창세기 12장 7절 초반에서부터 중반부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라고 되어 있었는데, 이제 아브라함 집안과 롯 집안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그래서 결국 결별을 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게 되면서, 그제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축복을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3장 14절에서 17절에 보면,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롯과 결별하기 전, 그러니까 순종하기 전에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는 첫 부분부터 다릅니다. 결별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어요?
그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라고만 하셨어요. 이 말씀은 어떻게 보면,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는 주겠지만, 내 말에 순종하지 않은 아브라함 너한테는 안줘” 이렇게 도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제 비로소 순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창세기 13장 15절에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이제 네 자손에게 만이 아니라 너한테도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롯에 대해서도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롯은 아브라함과 결별한 후 선택한 지역이 소돔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소돔입니다. 그런데 롯이 전쟁에 휘말려서 납치를 당합니다. 이 때문에 아브라함은 300여명을 이끌고 가서 롯을 구출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19장에 보면, 여러분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되자 롯의 가족들이 탈출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롯과 그 가족 중에 롯의 두 딸과 약혼한 두 남자는 롯의 말을 곧이 듣지 않고 소돔에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롯의 아내는 탈출하면서 뒤돌아봄으로 인하여 소금기둥이 되고 맙니다. 이제 남은 사람은 롯과 두 딸 뿐입니다. 당시에는 약혼을 했다는 것은 함께 살지 않을 뿐이지, 법적으로는 결혼을 한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 딸은 자기들의 남편 될 사람들이 죽었으니 이제 자손을 남길 수 없게 되었다고 해서, 이 또한 사람의 생각으로 자신의 아버지 롯를 술 취하게 해서 아이를 갖고 출산하게 되는데 그 아이가 큰 딸이 낳은 아이는 모압이고 작은 딸이 낳은 아이는 암몬입니다. 성경을 어느 정도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얼마나 괴롭히게 되는지 모릅니다. 이것도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의 생각, 세상적인 생각을 의지했던 아브라함의 실수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머리로 살아가고자 했던 아브라함, 그러나 절체절명의 순간이 다가옵니다.

창세기 22장 1절에서 2절에 보니,
“1.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서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신 적은 이 때가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번제로 드리기를 원하셨나요? 아니요, 이것은 그야말로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상황을 만드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이제 아브라함의 머리로는, 자기의 생각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드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선택은 이제 두 가지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아니면 불순종 하느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무엇을 선택합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순종입니다.

22장 7절에서 12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와 같이 해서 하나님 앞에 아브라함은 백기항복을 합니다. 그 때까지의 아브라함이었다면 아마도 이삭과 함께 번제할 양도 같이 짊어지고 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아브라함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왜요? 8절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해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나요?

13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그리고 그 다음 구절에 아브라함의 고백이 나옵니다.

14절에,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 이레, 이는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으셔서 사람의 도움을 받기 원하시겠어요? 아니요. 하나님이 바쁘셔서 미처 하실 일을 혼자서는 다 못하시기 때문에 사람이 도와주기를 바라시겠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에게 주실 축복을 이미 준비해놓고 계십니다. 모든 것을 다 마련해놓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이 만약에, 아니요 하나님, 괜찮습니다. 내 생각대로 할게요. 내버려두세요, 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시편 103편 3절에서 5절에는,
“3.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4.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5.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이미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생각을 믿고 의지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창세기 15장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이 어떤 행위를 잘 해서 의로 여기셨다고 하셨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 그것을 의로 여기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우리 생각과 판단으로 어떤 행동을 한다는 것은 본인들만이 아니라 우리 자손들에게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의지할 때에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축복을 받게 되실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모든 일에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판단을 믿고 의지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주신 모든 축복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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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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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13회 실상과 증거
2016년 2월 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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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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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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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실상과 증거’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시골에 부랑자 소년이 있었습니다. 부랑자 홈리스가 대부분 그렇듯이 그 소년도 역시 학교에도 다니지 않고, 배가 고프면 간혹 길가에서 구걸을 하거나 거리를 의미 없이 어슬렁거리는 것만이 그의 일과였습니다. 그에게는 인생의 꿈도 목표도 없었습니다. 꿈이나 목표라는 말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조차도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시간이란 하루하루 그저 무의미하게 흘러가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살고 있는 동네의 강가에 가봤더니, 어느 한 청년이 강 풍경을 캔버스에 담고 있었습니다. 이 부랑자 소년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뭘 하는 건지 궁금해하면서 다가가봤더니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것 참 신기하네…… 하고 저 멀리서 멍하니 보고 있었더니, 낌새를 알아쳐렸는지 그림을 그리던 청년이 그 부랑자 소년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으면서, “보고 싶으면 여기 가끼이 와서 봐.” 라고 말을 해주었습니다. 이 말에 부랑자 소년은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붓끌이 캔버스 위에 그려내는 광경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그림을 그리던 청년이 부랑자 소년한테 “내가 너를 한 번 그려줄까?”라고 말을 하더랩니다. 그랬더니 얼마나 기뻐했겠어요. 저기 저 풍경을 아무 것도 없는 흰 캠퍼스에 이토록 아름답게 그리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신기한데, 그 사람이 자기를 그려준다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어쩔 줄을 몰라 하니까, 이 청년이, “괜찮으니까 그냥 거기 편안하게 서 있어봐.” 라고 말하고는 가방에서 연필과 스케치북을 꺼내들었습니다. 그리고 부랑자 소년을 보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요. 묵묵히 그림을 그리던 청년의 손이 멈추고는 환하게 웃으면서 말합니다. “다 됐다. 자 봐봐.” 청년은 도화지를 뜯어서 소년한테 보여줍니다. 그랬더니 이 부랑자 소년이 그 그림을 보고 놀랐어요. 거기에는 누추한 부랑자 소년의 모습이 아니라, 멋지게 양복을 차려입은 늘씬한 신사 한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랑자 소년이 그림을 그려준 청년한테 말합니다. “이게 뭐예요? 이게 나라구요? 이건 내가 아니에요.” 그러자 이 청년이 소년한테 말합니다. “아냐. 너 맞아. 이건 너의 미래 모습이야.”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부랑자 소년은 기뻐합니다. 어? 이게 내 미래 모습이야? 아주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한테 “이거 나 가져도 돼요?” 라고 하니까 “물론이지. 너 줄게.” 라고 아주 흔쾌히 대답해 주었습니다.
이 소년은 기분이 너무 좋아서 자기 잠자리가 있는 동네 다리 밑에 가서, 그 벽에 이 그림을 붙여놨습니다. 그리고는 이 소년은 하루 종일 아침에 일어나면 밤에 잠이 들 때까지 시간만 나면 이 그림만 보고 있는 거예요. 하루는 주변 부랑자 친구들이 지나가면서 이 소년을 보고 물었습니다. “야, 너 뭐하냐? 벽에 붙여 놓은 게 뭔데? 그걸 하루 종일 보고 있어?” 라고 하니까, 이 소년은 “이거? 이게 나야.” “뭐? 야 그게 어떻게 너야?” “이게 바로 미래의 내 모습이래.” 라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합니다. 그랬더니 이 친구 부랑자들이 뭐랬겠어요? “야, 정신차려. 넌 거지야 임마”라면서 곧이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당연하겠죠. 그 소년은 정말 그야말로 자타가 공인하는 부랑자, 쉬운 말로는 말 그대로 거지였으니까요. 하지만 이 소년은 누가 뭐라든 상관하지 않아요. 히죽히죽 웃으면서 이 그림을 바라봅니다. 이 그림만 바라보면 너무나 기분이 좋아져요. “하하 이게 나야. 이게 바로 미래의 내 모습이야…….”
그러던 중에 소년은 문득 “이런 신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자기가 지금 이대로 있다가는 절대로 미래에 그런 신사가 될 것 같지는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소년은 고심 끝에 부랑자 생활을 청산하고,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학교에 다니기 시작해서, 결국 그로부터 20년 후에는 옛날에 그 청년이 그려주었던 그림 속에 있던 인물 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신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다시 한번 살펴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먼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라는 것은 무슨 뜻인지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이 ‘실상’이라는 단어가 이해하기 어려우실 수도 있습니다만, 다른 번역에 의하면, 새번역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현대인의 성경에는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에 대한 실물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믿는다는 것을 말할 때에는 눈앞에 실제로 보이는 상황을 두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 내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뒤를 돌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당신이 내 뒤에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럼 믿는 게 아니면 뭐예요? 그렇죠. 아는 거죠. 나는 당신이 내 뒤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지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믿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믿는다는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 불확실한 것을 두고 믿는다고 말을 합니다. 나는 당신이 약속을 지킬 것을 믿는다, 라고 할 때에는, 아직 그 일이 일어나기 전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약속을 지킬 수도 있겠지만 어길 수도 있다는 그런 불확실한 상황에 있기 때문에 ‘믿는다’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이른바 증거라고 하는 것은 물증입니다. 즉, 눈에 보이는 또는 귀로 들을 수 있는 또는 만질 수 있는 물건이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탁월한 말솜씨를 자랑한다고 해도, 아무리 감명 깊은 웅변을 뽐낸다 하더라도 증거나 증인이 없다면 재판에서 내 주장을 입증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증거가 뭐라고 하시죠? 그런데 오늘 성경은 무엇이 증거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믿음이 증거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기를 바라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우리의 믿음이 생기겠습니까.

요한복음 20장 29절에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어떤 분은 이 말씀을 좀 독특하게 해석하는 분이 계십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을 믿으면서 뭘 봐서 믿으면 그건 믿음이 작은 것이고, 아무것도 보지 않고 믿어야 좋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해서 무슨 응답을 받고 믿으면 작은 믿음이고, 기도를 하고 응답을 받지 못하고 성령도 받지 못하고 예수님도 만나지 못해도 믿는 믿음이 큰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오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성경을 그 문맥에 따라 이해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다른 제자들 앞에는 나타나셨는데 도마는 마침 그 때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마가 말합니다.

요한복음 20장 25절에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라고, 보기에 따라서는 망언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실제로 보지 못했다면 이 정도로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어, 내가 분명히 봤어. 그런데 너희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말하자면 그런 식이겠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나요? 예수님이 혼내시면서 저주하셨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는 도마 앞에 나타나 주셨어요.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20장 27절에서,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러자 도마가 대답합니다.
20장 28절에서,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가 이 말을 했을 때 예수님께서 아까 살펴보았던 말씀,

요한복음 20장 29절에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고 성령님이 강림하신 후에 믿기 시작한 자들, 이것이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들은 2000년 전,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셨던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고 믿음을 얻었습니다. 바로 이 믿음이 복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지, 응답도 받지 못하고 성령님을 받지 못하고 믿는 믿음이 크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크기는커녕, 나는 교회에 오래 다녔는데도 아무리 기도를 해도 지금까지 응답을 받아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래도 나는 하나님을 믿어요……. 라고 하는 분이 계시다면 저한테 오시거나, 주변에 그런 분이 계시다면 저한테 모셔오시기 바랍니다. 그건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뭔가가 잘못된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안 보여주고 믿으라고 한 적이 있으신가요?
성경을 살펴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서,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라고 하시면서 “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3장 14절에서 15절,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라고 하시면서 역시 “바라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기를 바라고 계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여년을 헤맬 때에 믿음을 끝까지 붙잡고 가나안 땅에 입성할 수 있었던 것은 매일매일 하늘에서 주시는 만나를 먹으면서,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군해갔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0장 1절에서 3절에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라고 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낙심 가운데에 있을 때라도, 우리가 고난의 과정을 통과하고 있을 때라도, 마치 부랑자 소년이 그림 한 장을 바라보면서 소망의 끈을 놓지 않은 것처럼 우리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구주되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무엇을 들어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랬을 때에 비로소 오늘 말씀처럼 우리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되어서 보이지 않는 것에도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 믿음 없는 자가 아닌 믿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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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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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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