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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회 무화과나무를 통해 주시는 교훈
2016년 11월 2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1장 12절~14절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マルコの福音書 11章12節~14
“翌日、彼らがベタニアを出たとき、イエスは空腹を覚えられた。葉の茂ったいちじくの木が遠くに見えたので、その木に何かあるかどうか見に行かれたが、そこに 来てみると、葉 のほかには何も見つからなかった。いちじくのなる季節ではなかったからである。するとイエスは、その木に向かって言われた。「今後いつまでも、だれもおまえの実を食べることがないように。」弟子たちはこれを聞いて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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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무화과나무를 통해 주시는 교훈"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마가복음 11장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목적지인 예루살렘에 도착을 하십니다. 예루살렘의 군중들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라고 크게 환호하며 예수님을 맞아들입니다. 그리고 밤이 늦었기 때문에 베다니로 가셨다고 해요.

이 베다니라고 하는 곳은 예수님에 의해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가 있는 동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에서 나오셨는데 그때 예수님께서 시장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뭔가 잡수실 것이 없나 해서 둘러보았습니다. 둘러봤는데 멀리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래, 저기 한번 가 보자 했던 것이죠. 그래서 다가가서 무화과 열매를 찾으셨겠죠.

뭔가 좀 드실 수 있는 열매가 있나, 이렇게 찾아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성경에서는요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됐겠어요? 아, 그러고 보니 무화과 계절이 아니었네. 무화과가 없는 게 당연하구나. 어쩔수 없지 뭐, 편의점에나 가 볼까, 이렇게 예수님께서 포기 하셨어요? 아니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를 향해서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라고 저주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랬더니 그 나무가 어떻게 되었다고 하나요? 마가복음 11장 20절에 의하면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나무의 윗 부분만 썩었거나 죽은 것이 아니라 아주 나무 뿌리까지, 뿌리째 말라 버렸다, 완전히 말라버렸다는 것입니다. 참 무섭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그와 같은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성경 내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께서 예수님의 하신 행동에 대해 납득하십니까?

여러분께서는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오랫동안 이 구절이 이해가 안 갔습니다. 오죽하면 제가 이 구절에 대해 고민하다가 이런 생각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신 이유가 뭐겠습니까?

바로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서죠.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걸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알고 계셨죠.

내가 이제 십자가에 달리게 되는구나.

이렇게 십자가형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예수님은 좀 예민해져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 다음에는요, 성전 정화 사건이 있습니다

성전에서 환전하거나 장사하는 사람들을 채찍으로 몰아내시죠

그래서 아, 좀 예민하셨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좀 너무 심한 경우라고 할 수 있죠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없었던 이유가 뭐라고 되어 있어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마가복음 11장 13절 후반부를 보면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라고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 이건 너무하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무화과가 열릴 시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무화과 열매가 없다고 그 나무를 죽인다는 것은 이것은 좀 지나치신 거 아니에요? 그런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잘못된 행동을 하신 거에요?

너무 과한, 지나친 행동을 하신 거에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바로 이 점을 조심해야 됩니다

하나님도 실수할 때가 있어, 성경도 잘못 쓰인 부분이 있어 라는 생각을 완전히 없애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지 성경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로마서 9장 14절에서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로마서 9장 14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분명히 바울 사도는 기록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하물며 신학자들 중에서도 가끔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서 성경을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자기 멋대로 해석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실수할 수도 있다, 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도 잘못된 부분이 있다 라고 하는 견해 자체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선하시고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 라고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는 문제가 없다, 하나님께는 문제가 없다 라고 하면 문제가 있는 건 뭐예요?

나한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 되는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그런 관점에서 좀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많은 성경 주석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열매가 열리기 전에 작은 무화과 열매가 열린다고 해요. 그래서 예수님도 무화과가 열리기 전에 있어야 할 작은 무화과를 찾으셨다는 것입니다.

조금 납득이 가십니까?

솔직히 저는 이 주석을 읽고도 저의 물음표를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문맥상으로 도저히 납득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주목하는 부분은 재차 말씀드렸던 마가복음 11장 13절 후반,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에서 무화과 열매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게 무엇이냐

바로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맥상 이렇게밖에 해석이 안 되는 것이죠.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주석도 중요하지만은 원문을 보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은 히브리어, 신약은 헬라어 성경을 연구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죠.

그런데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전문가가 아니라면 자칫 오역을 할 위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같은 단어라 하더라도 문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경우도 적지 않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번역본을 다양하게 보는 방법을 택하고 있습니다.

한글 번역본도 많이 있죠. 우리가 주로 보는 개역개정, 그 전에는 개역한글, 새번역, 표준새번역 등등이 있었고 현대인의 성경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일본어, 영어 성경들을 보고요.

어쨌든 이 구절과 관련하여 많은 번역본을 찾아보니 한국어는 물론이고 영어나 일본어 모두 다 예수님께서 무화과 열매를 찾으실 수 없었던 이유로서 무화과 때가 아니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맥을 무시하면서까지 아니야, 아니야, 그때는 원래 작은 열매가 있을 시기였다고 해석을 하는 것이 오히려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막혀 버렸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을 했습니다. 일본의 형사들에게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현장 백번"

아무리 열심히 정보를 모아도 단서를 찾아낼 수가 없어서 수사가 꽉 막혀 버렸을 때 사건이 일어난 현장에 다시 가 보면 거기서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돌아갈 신앙의 현장은 어디일까요. 그렇죠, 다름 아닌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다시 한번 읽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지금까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재미있는 부분이 보였습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시장하셨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쪽으로 가신 거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달력을 보시고 요즘 무화과가 열릴 시기네, 하고 가셨어요? 그렇지 않죠. 그럼 대체 무엇을 보시고 무화과나무 쪽으로 가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까?

마가복음 11장 13절 전반부를 보시면,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달력을 보시고 무화과 열매를 기대한 게 아니라 그 무성한 잎사귀를 보고 "저렇게 잎사귀가 많으니 열매도 있겠지" 라고 생각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대부분의 나무에는 예외없이 이파리가 달려 있습니다. 그 이파리는 수분과 햇빛과 이산화탄소를 섞어서 영양분을 만들어 내고 이 영양분을 나무 전체 공급합니다.

그렇다면 이 이파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바로 꽃을 피우게 하거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죠. 꽃을 피워 꿀벌 같은 곤충들을 불러들이고 그 곤충에게 꿀을 주면서 화분을 묻혀 번식을 합니다. 나무에 따라서는 열매를 맺고 이 열매를 동물들이 먹으면 그 배설물로 씨를 퍼뜨리는 나무도 있습니다.

그런데 잎사귀만이 무성했고 거기는 꽃도 없고 열매도 없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은 "잎사귀"가 갖는 두가지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번째로 잎사귀는 힘을 의미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잎사귀는 영양소를 만드는 힘, 능력, 권한이 있습니다. 그 능력을 사용해 영양분을 만들어 내고 자기 자신에게 공급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능력을 사용하는 최종적인 목적이 뭐라고요? 그렇죠, 바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매를 맺을 수 없었다면 이것은 뭡니까? 잎사귀가 할 도리를 제대로 못 한 거죠.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주인이 세 명의 종에게 그 능력에 따라서 재산을 맡깁니다

한 사람에게는 5달란트, 또 한 사람에게는 2달란트, 마지막 한 사람에게는 1달란트를 맡깁니다. 그리고 주인이 돌아와서 그들에게 재산을 어떻게 썼는지 묻습니다. 정산을 하는 것이죠. 5달란트를 맡은 종은 장사를 해서 10달란트로 돈을 불렸습니다.

2달란트 맡은 종도 장사를 해서 4달란트로 불렸죠. 이 두 종들은 그 금액에 차이는 있긴 합니다만 주어진 능력과 재산, 즉 주어진 잎사귀를 사용해서 그에 따른 결과를 남겼습니다. 그렇기에 주인은 이 두 종을 향해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라고 아주 똑같은 칭찬의 말씀을 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종은 어떻게 했습니까? 주인이 맡긴 1달란트를 쓰지 않고 땅 속에 묻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것을 캐내어 주인 앞에 내놓았습니다. 이것을 본 주인은 "악하고 게으른 종아" 라고 아주 혹독하게 혼을 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5장 28절에 의하면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그리고 30절에는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그 나무에 이파리가 많이 달려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잎사귀를 주셨죠? 그것은 하나님이 바로 기대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회사 사장이 어떤 사람을 부장으로 임명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을 과장으로 임명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직책에 맞는 권한을 가지게 됩니다. 그 권한이 왜 생기는 것이에요?

그 권한을 써 사장이 기대하는 성과를 올리라는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사장이 기대하는 성과는 없고 부장이나 과장님은 자기 멋대로만 행동하고 부하직원에게 으시대기만 합니다. 만일 그런 직원을 내버려 둔다면 회사가 어떻게 되겠어요?

망하죠.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그런 직원들을 해고하거나 강등시키거나 해서 주어진 권한을 빼앗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성경에서 살펴본 뿌리째 말라버린 무화과나무 혹은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쫓긴 무익한 종의 최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주인처럼 반드시 정산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학교 다닐때는 시험을 치죠. 그럼 언제 시험을 칩니까?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상태에서 시험을 치지는 않습니다.

먼저 여러 과목을 배우고 그 배운 내용을 잘 알고 있는지 시험을 치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반드시 시험의 시기가 도래합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을 믿은지 얼마 안 되는 새신자에게는 오지 않습니다. 교회다니고 몇년 지나고 직분도 받고 권한이 늘어가기 시작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점점 존경의 눈빛을 받기 시작하고 조금 목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할때, 바로 그때 예수님은 여러분에게서 열매를 찾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주님께서 힘을 주셔서 제가 이렇게 성과를 남겼습니다, 라고 열매를 내밀 수 있으면 그야말로 훌륭하게 합격을 한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고 칭찬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아무런 열매도 내밀지 못하고 아무것도 보여 드릴 것이 없고 그냥 나한테 주신 것 그대로 땅에 묻었다가 내 보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말 큰일나는 것이죠. 무익한 종이라고 꾸중을 듣고 바깥 어두운데 쫓겨날지도 모릅니다. 또는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처럼 뿌리채 말라버릴 지도 모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 보면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힘과 능력 그리고 권한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써야 한다는 것을 믿으시고 그대로 행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의 축원합니다.

그리고 잎사귀가 갖는 두 번째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입니다.

교회에서도 가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오로지 하나님과 관련된 일만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이 계세요.

자기 일이 중요해? 하나님 일이 중요해? 자기 일은 중요치 않아, 하나님 일만이 중요해,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인데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20장 8절에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하나님의 날이죠 그래서 거룩하게 지키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너희들 7일 동안 모든 것을 다 나한테 바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했어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출애굽기 20장 9절 보면 "엿새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의 생업도 중요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이죠.

그리고 그 생업을 대충 대충 하나요? 아니에요 열심히 일을 해야만 합니다.

노력이라고 하는 건 당연히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럼 무조건 무작정 노력만 하면 되느냐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목적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예수님이 오신다면 우리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겠죠. 에녹이나 엘리야처럼 하늘로 올라가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누구나 다 똑같이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는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인간의 마지막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되풀이해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우리는 이 심판에서 반드시 합격해야 합니다.

만약 대학이나 취업, 자격증 시험이라면 한번 떨어져도 괜찮아요 다시 기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만은 절대로 떨어지면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의 심판은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시험인 것이죠.

그럼 이를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를 들어 축구경기를 생각해 봅시다. 축구는 어떻게 해야 이깁니까? 공을 상대편 골대에 많이 넣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이길 수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반드시 규칙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골을 많이 넣었다 하더라도 하나도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면 그 골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24절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라고 말씀합니다.

규칙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열심히 뛰기만 한다고 해서 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을 받는 사람은 딱 한 사람, 규칙을 지키면서 경기를 하는 사람이 상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3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무작정 빨리 달리기만 하면 금메달을 받을 수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푯대를 향해서 달려야지만 상을 받을 수 있다고 성경을 말씀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사람의 방법, 사람을 힘만을 의지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두 눈을 딱 감고 그냥 무작정 달리기만 하는 비운의 선수와도 같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잎사귀만 무성하고 꽃도 없고 열매도 없는 무화과나무와도 같은 것입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자기의 지식이나 능력만을 믿고 이 세상의 부, 명예, 권력을 위해 정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달리기만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한 목표점, 진정한 푯대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만 합니다

푯대라고 하는 것은 누가 정합니까?

예를 들은 올림픽에서 마라톤을 할 때 골인지점을 선수가 정합니까?

아니죠. 주최측이 정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푯대, 골인지점은 누가 정합니까?

우리가 정합니까? 내가 생각하기에 내 인생의 목표는 이거다 이렇게 정하면 그것이 우리 인생의 진정한 목표가 됩니까?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푯대는 우리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정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우리의 삶의 주인되신 하나님께서 푯대를 세우시고 우리는 그 골인지점을 통과해야만 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의지해야만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서 주님께서 주신 힘과 능력으로 주님께서 기대하시는 열매를 맺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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ハレルヤ!神様を愛する方はアーメン!と告白しましょう。アメーン。今日は皆さまと一緒に「いちじくの木を通して下さる教え」무화과나무를 통해 주시는 교훈というテーマで恵みを分かち合いたいと思います。

マルコの福音書11章によると、イエス様はとうとう、目的地であるエルサレムに到着し、
「ホサナ。祝福あれ。主の御名によって来られる方に。祝福あれ。いま来た、われらの父ダビデの国に。ホサナ。いと高き所に。」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と、群衆によって大歓声 で迎えられます。そして、夜も遅かったのでベタニヤに行かれました。このベタニヤというところは、イエス様により生き返ったラザロが住む町です。そして次の日、イエス様は弟子たちと共にベタニヤから出てこられますが、そのとき、イエス様は空腹を覚えました。それで何か召しあがれるものはないものかとお探しになったのでしょうね。そうしたら、遠くに 葉 の生い茂ったイチジクの木が目に入りました。よし、あそこに行ってみよう、と思ってその木に近づきました。そして、その木の中であちこちを探されましたが、どうでしたか?はい、いくら探しても 葉の他には何も見つける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
その理由を聖書は、「いちじくのなる季節ではなかったから」だと書き記されております。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その結果どうなりましたか?ああ、そういえばイチジクのなる季節じゃないから、イチジクの実が無いのは当然か、しょうがない、コンビニでも行くか、と諦められましたか?
いいえ、イエス様はその木に向かって「今後、いつまでも、だれもおまえの実を食べることのないように。」と言われたというのです。
そうしたら、どうなりました?

マルコの福音書11章20節によると、
「朝早く、通りがかりに見ると、いちじくの木が根まで枯れていた。」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と書かれています。ただ、枯れたのではなく、木の根っこまで完全に枯れていたというのです。怖いですね。イエス様の言葉にはこのような力があります。
みなさん、聖書のこの内容について皆さまはどう思われますか?皆さんはこのイエス様の行いに納得がいきますか?おなかがすいて、何か食べようと思ってイチジクの木の方に行ったら、何もなかった。それに腹を 立てて、その木を枯らしてしまったんです。
私は長い間、この部分がどうも理解できませんでした。そして、こんなことを思ったこともありました。
「イエス様がエルサレムに行かれた理由は十字架にかけられるためだ。その時が迫ってきてるのだから、あるいはイエス様も神経質になっていたのかもしれない」
しかし、それにしてもこれは厳しすぎますよね。いや、厳しいのはそれだけではありません。イチジクの実が無かったのはどうしてだと言っていますか?

マルコの福音書11章13節の後半、
「いちじくのなる季節ではなかったから」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だと言うんです。
いやいやいやいや、イエス様、これはあんまりでしょう。じゃあ、これはどういうことですか?イチジクがなる季節でもないのに、それが無かったからと言って木を枯らしてしまうというのは、これは、せっかちにもほどがある。あまりにもひどい。そうでしょう?
では、イエス様は間違ったことをされたのですか?私たちが聖書を読むときには一つ気をつけなけらばなりません。それは、「神様は間違 ったこともする」という可能性を全面的に否定することです。

ローマ人への手紙9章14節には、こう書かれています。
「それでは、どういうことになりますか。神に不正があるのですか。絶対に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とパウロは告白しています。神様を信じる人の中にも、ましてや神学者の中にも、ときおり、そのように考えている人がいて、聖書を、そして神様の働きを自分勝手 に解釈してしまう場合がありますが、「神様は間違ったこともする」あるいは、「神様の御言葉である聖書には間違いもある」という見解自体そのものが間違 っていると私たちは信じなければなりません。

私もそのような観点から、この部分を知ろうとしました。何かしら理由 があるだろうと思って、いろいろと調べてみましたが、大概の聖書の注釈書には次のように書かれています。
イチジクのなる季節になる前にも実は、一般的なイチジクの実がなる前の早い時期に、小さなイチジクの実を結ぶ時がある。だから、イエス様もその普通の実がなる前の、その、あってしかるべき、小さいイチジクの実を探されたのだが、見つけ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というのです。皆さんは納得ができますか?もちろん、なるほど、と、思うことはできますが。だとしたら、次の文脈が 理解できません。それは、先ほどにも触れた個所である、マルコの福音書11章13節の後半、「いちじくのなる季節ではなかったから」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だという部分です。
聖書を解釈するのにあたっては、もちろん、原文を見るのが一番いいでしょうが、ヘブル語やギリシャ語を専攻した専門家でなければ、いくら一生懸命勉強 したといえども2~3年です。このような場合 は、浅い知識で原文を解釈すると、誤解を招く恐れも少なくはありません。たとえば、単語や文法的に同じであったとしても、文脈などの関係で二つ以上の解釈が可能な 場合も多々あるからです。ですから、私は、そうした、その道の専門家 が翻訳をした訳文を参考にしますが、日本語はもちろん、英語、韓国語の訳文すべてが、「イエス様がイチジクの実を見つけ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理由 、「イチジクのなる季節ではなかったから」と説明しているのです。この文脈を無視してまでも「いや、その時期には実は小さなイチジクの実があったんだ」と解釈するには少なからず無理がある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した。神学をたくさん 勉強した方たちは納得できたかは知れませんが、私にはどうも納得がいきません。さて、行き詰ってしまいました。では、こうなったときはどうすればいいのか。
例えば、事件を調べる刑事たちにはこのような格言があるといいます。それは「現場百回」という言葉 です。いくら必死に走り回って情報を集めたり資料を調べても何の手掛かりを見つけることができず、行き詰 ったら、どうしたらいいか。それは、事件が起きた現場に戻ってみること、そして、そこから新たに捜査を調べると新しい展開につながることがあるということです。
では、イエス様を信じる私たちにとって信仰の現場とはとこですか?はい、それは、ほかでもない、聖書です。私はもう一度本文 を読んでみました。するとそれまでに気づかなかった面白い部分が見えてきたんです。
今日の本文によると、イエス様は空腹を覚えられました。そして、イチジクの木の方へ行かれたのでありますが、その時、イエス様はカレンダーをご覧 になって、ああ、今はイチジクの実がなっているころだろうから、どれどれ、ちょっと食べてみるか、と思われましたか?いいえ、違います。では、何をご覧 になったと書かれていますか?
はい、マルコの福音書 11章13節 前半によると、
「葉の茂ったいちじくの木が遠くに見えたので…」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ということです。つまり、イエス様はカレンダーをみてイチジクの実を期待されたのではなく、葉 が生い茂っているのを見て、ああ、イチジクの実があるだろうと、お思いになったということです。
皆さん、ほとんどすべての木には漏れなく葉っぱがついています。葉 っぱは木の根っこを通して吸い上げられて水分を使い、太陽の光と二酸化炭素によって光合成をおこない、そうして作られた栄養分を木全体に供給させます。
それでは、この葉っぱの究極的な、最終的な目的は何でしょう。はい、それは、花を咲かせたり、実を結ぶことにあります。花を咲かせてミツバチなどの昆虫 を集め、花粉をつけさせ子孫を増やします。木によっては実を結ばせ、動物たちに食べさせることによって、やはり繁殖をさせます。ですが、葉 っぱだけが生い茂っていて、そこには花もなければ実もないというのは、どういうことでしょうか。今日はここで葉 っぱの持つ二つの意味について考えてみましょう。

まず、第一に葉っぱは力を意味します。先ほど申し上げましたように、葉 っぱがあるというのは栄養素を作る力、能力があるということ、権限があるということです。その力や能力、権限を使うことで養分を作り出し、自分自身 に供給していきます。しかし、そのような能力が使われる最終的な目的は何ですか?はい、実を結ぶことです。ですが実を結ぶことができなかったらどうでしょう。それは何の意味もなさないものになってしまうのです。マタイの福音書25章では、主人が3人のしもべたちにその能力に応じて財産を預けます。一人には5タラント、もう一人には2タラント、そして最後の一人には1タラントを預けました。そして主人が帰ってきて彼らがその財産をどのように使ったのか、検査をします。5タラントをもらったしもべは、 商売をして10タラントに増やしました。2タラントをもらったしもべも商売をして4タラントに増やしました。この二人のしもべは、もちろん、その金額 に違いはあれど、与えられた財産、能力、つまり葉っぱを使い、それに応じた結果を残せたので、主人は二人に対して

『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あなたは、わずかな物に忠実だったから、私はあなたにたくさんの物を任せよう。主人の喜びをともに喜んでく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という、全く同じ誉め言葉を授けます。
しかし、最後のしもべはどうでしたか?主人が預けた1タラントを使わずに地の中に埋めてしまいました。そして、主人が帰ってきた後、それを掘り出して主人に返したのです。これを見た主人は何と言いましたでしょうか。主人は彼に対して、『悪いなまけ者のしもべだ。』 악하고 게으른 종아 とこっぴどく叱ります。それだけではありません。

マタイの福音書25章28節によると、
「だから、そのタラントを彼から取り上げて、それを十タラント持っている者にやりなさい。」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そして30節には
「役に立たぬしもべは、外の暗やみに追い出しなさい。そこで泣いて歯ぎしりするのです。」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と書かれています。
その木に葉 っぱがついているのはなぜですか。それは授けた方がいるからです。そう、神様が授けてくださったんです。どうしてですか?それはまさしく神様が期待するものがあるからです。会社の社長がいます。ある人を部長にしました。ある人を課長にしました。その人にはその 役職 に値する権限が生まれます。その権限とはどんなことでしょうか。それは、その権限を使って社長が期待する成果を上げることに他ありません。しかし、社長がいくら待ってもその部長や課長はその権限を使って威張ってばかりいたり、 自分勝手なことをしています。もしそんな社員を野放 しにしておくと、会社はどうなるでしょう。はい、当然すぐにつぶれてしまいます。ですからそのような事態にならないようにするためには?そうです、そんな社員はいち早く首にするか、または与えれられていた権限を奪うしかないでしょう。まさにこれが、根っこまで枯れてしまったイチジクの木であり、外の 暗闇に追い出された役に立たないしもべのなれの果てです。

私たちが忘れてはならないのは、このマタイの福音書25章に出てくる主人のように必ず検査する時が訪れるということです。
学校では中間試験もあれば期末試験もあります。では、その試験はいつ行われますか?まさか、何も習 っていないのに試験を受けろといは言いません。その試験に出てくる内容をすべて習 った後になって、今まで教わった内容がしっかり頭の中に入っているのかどうかをテストするんです。
信仰の中にあっても、必ずテストの時期が訪れます。でも、まだイエス様を信じて間もない人のところには来ません。教会に通って数年がたち、役職 ももらって権限が増え始める、人々からだんだん尊敬のまなざしを受け始める、ちょっと鼻が高くなり始める、まさにその時、イエス様は私たちから木の実を探し始めます。そして、イエス様の、み前に、「 貴方 が下さった力を用いて、このような成果を修めることができました」と、出すことができたら見事合格です。イエス様は「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と、この上ない誉め 言葉と同時に、素晴らしい褒美を授けられるでしょうが、万が一、何も出すものがないとすると、これは大変なことになります。役に立たないしもべだとして、外の 暗闇に追い出されるかもしれません。または、呪われた木のように枯れてしまうかもしれません。

第一コリント人への手紙10章12節をみると、
「ですから、立っていると思う者は、倒れないように気をつけなさい。」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と、書かれています。 神様が私たちに下さった力や能力、そして権限を神様の意向に沿うように使う必要があるということをわすれないようにしましょう。

そして、葉っぱの持つ二つ目の意味について考えてみましょう。 葉 っぱの持つ二つ目の意味、それは何かというと「人間の努力」です。教会の中でも時々誤解をされている方がおられますが、神様を信じる人は、何事にも神様の仕事だけを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か?もし、そうだったとしたら自分の仕事ができないでしょう。聖書にもこう書かれています。

神様は
出エジプト記20章8節で
「安息日を覚えて、これを聖なる日とせよ。」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と言われましたが、7日間すべてを私に捧げよ、とまでは言われませんでした。
その次の9節では、

「六日間、働いて、あなたのすべての仕事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とおっしゃいます。つまり、私たちの生業もとても大事だと聖書には書かれているんですね。そして、この生業をするためには、一生懸命働 かなくてはいけません。努力は当然大事です。では、とにかく努力さえすればそれでいいのでしょうかというと、必ずしもそうとは限りません。私たちには間違 いなく目的があります。
私たちの生きている間にイエス様が来られれば、私たちは死を経験せずに父なる神様の御国へ入ることはできるでしょうが、そうでない場合 は、誰しも一度は「死」という過程を経ることになります。

ヘブライ人への手紙9章27節によると、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第二コリント人への手紙5章10節には
「なぜなら、私たちはみな、キリストのさばきの座に現われて、善であれ悪であれ、各自その肉体にあってした行為に応じて報いを受けることになるからです。」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人間には最後に必ずさばきがあると聖書は繰り返し私たちに訴えています。私たちはこの裁きを見事パス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が、そのためにはどうすればよいかを考えなければなりません。みなさん、 例 えばスポーツ競技で勝つためにはどうすればいいでしょうか。たとえば、サッカーで勝つためには、もちろん、ゴールにボールをたくさん入れる必要がありますが、それだけで勝つ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ただ、ボールを入れさえすれば、勝てますか?
いいえ、もう一つ、条件があります。それは、ルールを守るということです。


第一コリント人への手紙9章24節には
「競技場で走る人たちは、みな走っても、賞を受けるのはただひとりだ、ということを知っているでしょう。ですから、あなたがたも、賞を受けられるように走りなさい。」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競技場で一生懸命努力をして必死に走っている人がたくさんいます。しかし、優勝して金メダルをもらえるのはただ一人です。どんな人ですか?速く走る人ですか?もちろん、それも大事ですが、もっと大切な要素があります。それは、ゴールに向かって走るということです。

ですからピリピ人への手紙3章14節には
「キリスト・イエスにおいて上に召してくださる神の栄冠を得るために、目標を目ざして一心に走っているのです。」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と記されています。

みなさん、神様のやり方、神様の力に頼らず、人間のやり方、人間の力 だけに頼ることは、それはまるで、ただ目をつぶってやみくもに走り続ける悲運のランナーに過ぎません。それはまさに、葉 っぱだけが生い茂っていて、花もつけず実もみのらないイチジクの木でしかありません。今も、この世の中には自分の知識や能力だけを信じ、世の中の富や名誉や権力だけのために、やがてどこへ向かうかも知らないまま走り続けています。
しかし、私たちは本当のゴールを見極める必要があります。ゴールは選手が決めるのではなく主催者側 が決めるのです。私たちの人生をのゴールは私たちが決めるのではなく、私たちの人生を司られる神様がお決めになることです。そのゴールを通過することによってのみ、神様からの賞をもらうことができるのです。
私たちは自分の力に頼るのではなく神様の力に頼ることで、初めて目が開き、自分がどこに向かうべきか、何をすべきかが見えてくるのです。
言葉を締めくくります。私たちはいつも高ぶることなく、神様の中で忠実なしもべとして、神様から与えられた力 や能力をもって、神様が期待される実を結べる私たちでありますことを切に望み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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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회 감사의 의미
2016년 11월 20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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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kahochurc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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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50장 23절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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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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ハレルヤ!神様を愛する方はアーメン!と告白しましょう。アメーン。今日は皆さまと一緒に「感謝の意味」감사의 의미というテーマで恵 みを分かち合いたいと思います。

今日は何の日ですか?と尋ねられれば皆さんは何と答えられますか?日本語では収穫祭、または感謝祭と呼ばれることもありますが、正確には収穫感謝祭 、そして今日の礼拝は収穫感謝礼拝というべきでしょう。
収穫感謝祭はほかの教会の記念日よりも、歴史が浅いですが、教会だけに限らず世界にはこのような収穫を祝う記念日はたくさんあります。
西洋の収穫感謝祭のルーツに関しては諸説がありますが、大体16世ごろから始まったとみられています。特 にアメリカではローマカトリックからの迫害から逃れるためにアメリカへ渡った移民たちによって感謝祭が執り行われたとされています。そしてアメリカの祝日の中で最も初めて制定された日がこの 収穫感謝祭だと言います。
日本では、「勤労をたつとび、生産を祝い、国民たがいに感謝しあう」日として制定されているのが11月23日の勤労感謝の日です。韓国では中秋節として旧暦の8月15日を前後して国民的な祝日となっています。

人々が主に収入を農業に頼 っていた時代、一般的に収穫は年に一回でした。これは本当にハイ・リスクです。もちろん、今も稲作は年に一度の収穫ですが、もし洪水やその他の天災などで被害を被っても、保険やあるいは国からの補助などの制度が整っていると聞いております。でも、昔はそんなものはありません。災害などでその年の収穫ができなかったら、それこそ一巻の終わりです。年に一度の収穫が無事にできるかどうかには自分だけではなく家族の1年間の生活がそこにかかっているのです。
では、収穫祭と収穫感謝祭とではどう違うでしょう?はい、「感謝」が入っているかいないかの違いです。「感謝」が入っていないとただの収穫祭 で、「感謝」が入っていると収穫感謝祭になります。
そんなことは、子供でも分かります。では、文面ではそうだとして、意味合いとしてはどうでしょう。違いがありますか?それとも、似たようなものですか?
実はこれには決定的な違いがあります。みなさん、「感謝」という気持ち、「感謝」という感情を抱いたことがありますか?もちろん、おありだと思います。では、その時の気持ちを思い浮かべてください。ただ、漠然とした感謝ですか?単純に「感謝」だけの感情で終わりですか?いいえ、違います。

「感謝」という感情を抱く時は、必然的に「感謝の相手」を思い浮かべるのが自然です。それも、漠然とした相手ではなく、たいていの場合 、具体的な相手が私たちの頭の中にはあります。たとえば、誰かが私を助けてくれた、誰かが私にプレゼントをくれた、誰かが私をほめてくれた、誰かがわたしによくしてくれた、その時人々は「感謝の気持ち」を抱くことになりますが、当然、この時はその具体的な「誰か」に対してその感謝の気持ちがわいてくるものです。
もし、自分の力で作物を育て、自分の力で収穫できたと信じる人々は、喜 びはするかもしれませんが、感謝はしません。それは当然でしょう。感謝とはほかの対象にするものであって、自分自身 にす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自分ではない、ほかの力によって何かが成し遂げられた時、人々は感謝するものです。
スポーツを見てみましょう。そうですね。たとえば、卓球やゴルフはどうでしょう。大きな試合に出場し、優秀な成績を修めるために、それこそ寝る間も惜しまず努力した結果、優勝したとしたら、それだけで優勝ができたと思うとしたら、その人は、 喜びはすれど、感謝をしないでしょう。しかし、感謝をする人は、自分の努力、それだけではない、ほかの力 によって成し遂げられたと思うから、その対象に対して感謝をするわけです。
私たち人間は時に、自分の力を過剰に信頼する、自分自身 の力を信頼しすぎる傾向が見られます。人間の学問で、科学で、思想で、何でも究明できると信じ込んでいるきらいがあります。しかし、果たしてそうですか?
例えば、科学はどうでしょう。科学こそ人間が信じるべきもので、科学で証明できないものはない、とまで豪語する人もいます。
でも、ちょっと考えてみましょう。人間はわずか400年前 まで、太陽が地球の周りをまわっていたと信じていました。それが科学です。たくさんの骨が発見された恐竜でも、決してわかることのできないもの、それが、何かお分かりですか?恐竜の色です。恐竜は当時どんな色をしていたのかは、解明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それが、科学です。
人間は遺伝子のコピーのミスによる突然変異で誕生した。これが科学です。これがいわゆる進化論ですが、考えてみるといろんな意味で、とても面白 いです。この進化論の話を詳しくすると、それだけで時間になってしまうので、なるべく、手短にしてみると、こうです。まず、海に生命体 がありました。その中のある魚たちの中で、突然、 遺伝子のコピーのミスによる突然変異で誕生した一部の特殊な魚たちが、陸 を目指し始めました。そして、何度も何度も何度も陸への上陸を試みた結果、ある日突然、成功しちゃったんです。

それまではエラ呼吸をしていましたが、それからは肺というものができて、もちろん、これも「遺伝子のコピーのミスによる突然変異で誕生」したものですが、急にできてしまったんです。それも、この世の中で 一匹 だけできたとしても、子孫を残すことはできません。それに、そのような突然変異が、離れたところで起きたとしても、やはり子孫は残せません。つまり、そのようなとてつもない偶然が、ある 日突然 、それも、地理的にかなり近いところで起きたということです。そして、めでたくその二つは結婚し、突然変異の産物である子孫を残した。しかし、これで終わりではありません。魚の卵はとても柔らかいです。これでは卵を安全に守ることはできない。どうしよう。彼らは悩みました。そうだ、からの堅い卵を産もう。そう考えたその動物たちは、それから一生懸命努力して固い殻をもった卵を産むことに成功しました。これが 爬虫類の誕生です。
しかし、それも不安だ。卵を盗まれてしまっては困る。では、どうしようか。そうだ、卵を体の中でふ化させて産もう。そうすれば卵を盗まれる心配 もない。そうして、また、彼らは一生懸命努力をして、果たしてどのように努力したかは全く分かりませんが、その結果、体の中でふ化させて、赤ちゃんを出産することになりました。これが哺乳類の誕生です。

そして、その中で、突然、これもまた、例の「遺伝子のコピーのミスによる突然変異で誕生」によって、二本足 で歩くものが出てきました。それらは手を使い始めました。そして、それが「アウストラロピテクス」になり、ジャワ原人や北京原人になり、次にネアンデルタール人になり、クロマニョン人になり、そして最後に今の私たちようなホモサピエンスになったというのが科学です。これを信じろというんです。これが科学ですか?私から言わせるとですね、この進化論こそがまさに宗教です。こんなことをですね、たくさん 勉強した偉い先生たちが笑いもせずにおっしゃいます。
では、この進化は今はストップしていますか?そんな根拠はどこにもないはずです。だったら、この世の中で、この進化も進んでいっているはずです。しかし、それだったら大変でしょう。たとえば、法律ではどうでしょう。この世の法律は人間が人間のために作ったものです。ある野生の動物が人間とは何の関係もない他の動物を 襲ったとしても法律で裁くことはできません。
それでは、進化が今も行われているとしたら、法律が適応できる範囲、つまり人間の範囲に関する規定があってもよさそう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か?

もちろん、成年か未成年かというのに関する話は聞きますが、どこからどこまでを人間とする、なんて、そんな規定や決まりがあるという話は聞いたことがありません。
そんな規定や決まりがないというのはどうしてですか?それは、そんなものがなくても誰が人間なのか、人間じゃないのかぐらいは、そんな規定や決まりがなくてもわかるということなんです。
これは、今に限ったことではなく、未来永劫 、変わることはありません。どうしてですか?答えは簡単です。はい、それは、人間は進化しないからなんです。だからと言って、誤解しないでください。進化はしないが進歩はします。 例 えば、ルールを守らなかった人が、教育を受けたりしてルールを守るようになる、走るスピードが遅かった人がトレーニングをすれば速く走れるようになるというのは、進歩です。
しかし、人間でないものが人間になるとか、人間だったものが人間でないものになるとかということは、決して起こりません。もし人間の進化というものが本当にあって、昔、犯した過ちはもう繰り返さないということだったら、何が必要なくなりますか?もし、そのようなことになったら、まず、はじめになくなる物、いえ、なくさなければならないもの、それは、聖書です。そうでしょ?

今のような人間に進化する前の、数百年前、数千年前の人間が犯した罪や過ちを、今の進化した人間はもう犯さないとなったら、これはそれこそ何の意味も取 り柄も価値もない、ただ分厚いだけの本でしかありません。

第二テモテへの手紙には聖書の定義について単純明快に書かれています。

第二テモテへの手紙3章16節
「聖書はすべて、神の霊感によるもので、教えと戒めと矯正と義の訓練とのために有益です。」

디모데후서 3장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人間がもし進化をしているのなら、これは過去形になっているはずです。人間が進化する前は、聖書とはこんなに役に立 っていたんだよ、でも、それは昔の話だよ。という具合です。

しかし、どうですか?数百年前、数千年前 に書かれた本であるにもかかわらず、今でも聖書を開くと、そこに納められた人間の罪深さや神様の愛は、今、21世紀を生きる私たちにも、ありありと伝わってきます。
考えれば考えるほど科学とは、もろいものです。ほかの学問もそうです。例えばこの前、アメリカであった大統領選を見て下さい。開票寸前 、アメリカの大手ニュース専門の放送局であるCNNはヒラリー・クリントン候補の当選確率 を91%だと予想しました。やれ教授だ、やれ評論家だと言う人たちも、かなりの割合で彼女の当選を予測していました。
新聞社たちは、あるいは、彼女の当選が確実された時に使う記事をあらかじめ書いておいたかもしれません。そこには、彼女 が今度の選挙で勝利するしかなかった科学的分析でぎっしり埋められていたに違いありません。あるいは、4年前、オバマ大統領が再選を果たした時に流行 した「ビックデーター」がどうのこうのという内容もあったことでしょう。しかし、結果はどうですか?予想に反してトランプさんが当選しました。

人間の知識や能力が私たちを救ってくれるとお思いですか?人間の学問や経験や理論が私たちを真理へと導いてくれるとお思いですか?

聖書を見てみましょう。

第一コリント人への手紙1章20節
「知者はどこにいるのですか。学者はどこにいるのですか。この世の議論家はどこにいるのですか。神は、この世の知恵を愚かなものにされたではありませんか。」

고린도전서 1장 20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コロサイ人への手紙2章8節
「あのむなしい、だましごとの哲学によってだれのとりこにもならぬよう、注意しなさい。そのようなものは、人の言い伝えによるものであり、この世に属する幼稚な教えによるものであって、キリストに基づくものではありません。」

골로새서 2장 8절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人間の力だけで、いくらあがいても、この世の知識は幼稚でしかありません。いくらこの世の学問や科学を用いて、神を否定し、神の領域 を超えようとしたところで、所詮それは、むなしい限りの、だましごとにすぎないと聖書には書かれています。
それでは神様は私たちに何を望んでおられるでしょう。
ここに幼い子供がいます。パパやママがその子供に何かをしてあげます。何かを買ってあげます。例えば、その子の大好物である、おいしい料理 を作ってあげました。その子のお気に入りの服を買ってあげました。
その時のパパとママの気持ちを考えてみてください。パパとママは何を望むでしょう。私があなたに料理を作ってあげたのだから、あなたもこれから私に料理 を作ってくれと言いますか?私があなたにお気に入りの服を買ってあげたのだから、あなたもこれから私に服を買ってくれと言いますか?そんなご両親 はいないでしょう。では、何を望みますか?何を期待しますか?
そうです。「ありがとう」の言葉です。感謝の気持ちを望んでいるに他ありません。 神様は私たちに望んでおられるのは、私たちの力 で新しい何かをするのではありません。

十字架の上でイエス様は最後におっしゃいました。

ヨハネの福音書19章30節
「イエスは、酸いぶどう酒を受けられると、「完了した。」と言われた。そして、頭を垂れて、霊をお渡しになった。」

요한복음 19장 30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完了した。もう、すべては成し遂げられたと仰ったのです。それでは私たちは何を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か。

マルコの福音書5章36節
「イエスは、その話のことばをそばで聞いて、会堂管理者に言われた。「恐れないで、ただ信じていなさい。」」

마가복음 5장 36절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ローマ人への手紙10章9節
「なぜなら、もしあなたの口でイエスを主と告白し、あなたの心で神は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てくださったと信じるなら、あなたは救われるからです。」

로마서 10장 9절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ただ、キリスト・イエスを信じればいいんです。私たちの口でイエス様を主と告白し、私たちの心で神様は独り子であるイエス様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てくださったと信じるなら、それで、私たちは救われると書かれています。

私たちが神様に感謝をささげることは、神様の力 に頼るという証しであり、神様だけが私の救い主だという告白なんです。神様はこれを望んでおられるということを信じましょう。これこそ、神様が私たちに望んでおられるんです。


詩篇18篇1節~3節
「彼はこう言った。主、わが力 。私は、あなたを慕います。主はわが巌(いわお)、わがとりで、わが救い主、身(み)を避(さ)けるわが岩(いわ)、わが神(かみ)。わが盾(たて)、わが救(すく)いの角(つの)、わがやぐら。ほめたたえられる方、この主を呼び求めると、私は、敵から救われる。」

시편 18편 1절~3절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このような証し、このような告白を神様はとても喜ばれます。


今日の本文をもう一度見てみましょう。

詩篇 50章23節、
「感謝のいけにえをささげる人は、わたしをあがめよう。その道を正しくする人に、わたしは神の救いを見せよう。」

시편 50장 23절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感謝のいけにえをささげる、それは聖書的には什一献金 を収めるのも感謝のいけにえでしょう。感謝の捧げものをするものをすることも、感謝のいけにえです。しかし、それだけではなく、感謝の奉仕を捧げる、感謝のお祈りを捧げる、感謝の心を捧げても、神様は快く受け 取ってくださることと思います。
今日はただ収穫を喜ぶだけの日ではありません。私たちが収穫できたのは私たちの力ではない、神様の力 によるものだと認める日です。神様が私たちを愛し、私たちに収穫を与えて下さったことを喜ぶ日なんです。
とても喜ばしい収穫をお与えになった神様に感謝し、そして神様の愛に報いる私たちでありますことを切に望みます。
제53회 무화과나무를 통해 주시는 교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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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회 움직일 때, 변화할 때
2016년 11월 13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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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第二コリント人への手紙 5章17節
“ですから、だれでもキリストのうちにあるなら、その人は新しく造られた者です。古いものは過ぎ去って、見よ、すべてが新しくなり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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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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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움직일 때, 변화할 때"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얼마전에 인터넷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발견했습니다.
제목은 "교회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 입니다. 잠깐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 오랜 기간 새벽기도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집사님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머릿속에는 목사와 장로가 새벽기도에 빠진 날짜와 횟수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2. 십일조를 정확하게 꼬박꼬박 하는 신자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머릿속에는 십일조를 빼먹거나 제대로 하지 않는 동료 신자들의 목록이 빼곡히 들어 있습니다.

3. 40일 금식기도를 다녀온 권사님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시선에는 너는 금식기도를 하지 않느냐는 무언의 질타가 섞여 있습니다.

4. 크고 건강한 교회를 다니는 성도가 무섭습니다. 그분의 말투에는 작고 별볼일없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이 넘쳐납니다.

5.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신학자가 무섭습니다. 그분 앞에 서면 모든 사람들이 종류별로 차곡차곡 분리되어 버리고 맙니다.

6. 성도 수가 제법 되는 교회 목사님들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권위와 무게가 엄청난 압박으로 성도들을 찌그러뜨립니다.

이 이야기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공감 되는 부분이 있으십니까? 제 생각에 교회 생활을 오래 하신 분일수록 이런 경향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물론 교회만 그런 것은 아니고 세상에도 그런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사회에서 자신의 경력, 성과, 학벌 등등을 내세우는 모습들을 우리는 많이 봅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주일 예배는 물론이고 새벽예배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는 사람, 자기의 수입에서 십일조를 꼬박꼬박 내시는 분, 이런 분들의 우리가 보통 말하는 믿음 좋은 분들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인정해 주셨을 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네 믿음이 좋구나 라는 칭찬을 듣는 것이 그것이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이지 아무리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5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예수님이 오셨을 때 이른바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의 신앙은 무척 깊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신실함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그것으로 권위를 삼으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을 가리켜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다니엘서와 관련이 있습니다. 다니엘서 6장 10절에 보면 다니엘이 하루에 세 번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신앙이 좋은 사람들은 다니엘처럼 하루에 몇 번씩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기도 시간이 정해져 있었지만 중요한 일이 생기면 일을 볼 수 밖에 없겠죠. 그렇게 다른 일을 보고 있는 중이라고 하더라도 기도 시간이 되면 어디에서든 기도를 드렸습니다.그것을 본 사람들은 그의 믿음이 신실하다고 칭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칭찬에 맛을 들인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했느냐 하니, 집에 있다가도 기도 시간이 되면 일부러 바깥에 나가서 큰 소리로 기도를 합니다. 회당이나 큰 거리 어귀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행인이 많은 곳입니다. 그런데 기도시간이 되면 일부러 거기에 나가서 큰 소리로 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기도가 그 사람의 신앙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까? 그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한테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자신을 자랑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행위에 대해 화를 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이미 자신이 받은 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내 소망을 말씀을 드리는 것, 이것은 매우 가치있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가식이나 위선이 아닌 솔직한 우리의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응답하십니다.또 분명히 거기에 대한 상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4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시고 상을 베푸십니다. 우리에게 확실한 답을 주신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게 아닙니다. 그들의 기도는 그저 주변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위한 의미없는 행위에 불과할 뿐입니다.그래서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기쁘게 받아 주시는지 아닌지는 생각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6절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주님이 주시는 응답과 세상 사람이 주는 응답,주님이 주시는 상과 세상 사람이 주는 상, 어느 쪽이 더 크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응답,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간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일곱 철학자, 칠현이라고 하는데 그중 한 사람 탈레스와 관련되어 이런 일화가 전해집니다. 어떤 청년이 탈레스에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탈레스는 자기 자신을 아는 것, 이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럼 가장 쉬운 것은 뭐냐 물으니 다른 사람에게 충고하는 일이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믿음 안에서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4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이것은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고 우리 힘으로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구원을 얻을 수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던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죄에 찌든 우리를 대신해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죄를 대신 짊어지셨던 것입니다. 그 덕분에 우리의 죄가 모두 다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신앙 안에서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바로 이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된 우리는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변해야 합니다. 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 우리는 어제까지의 우리 모습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는 어제까지의 우리가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진 피조물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은 어제 만들어진 피조물이에요? 그렇다면 그것은 과거의 것입니다.

요즘 21세기 첨단과학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전자제품 같은 것은 하루가 다르게 새 모델이 나오고 있죠. 얼마나 빠른가 하면 아무리 최신형 컴퓨터를 산다 하더라도 그것을 사서 집에 가져오면 이미 구형이 되어 버린다는 이야기까지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성경 말씀을 따르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 안에 있다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다고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 성경 말씀을 지금 잘 들었습니다.그러면 그것으로 끝인가요? 그래, 오늘부터 좀 새롭게 되자, 이건 매우 좋은 마음가짐입니다. 하지만 한 번만으로 끝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일이 되면 이미 구형되고 맙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죠? 그렇죠, 매일매일 하루하루 새로워져야 합니다.

8년 전 미국 민주당은 오바마 대통령의 "체인지" 라고 하는 슬로건을 내세워 대선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힐러리 클린턴을 후보로 내세운 이번 대선에서는 많은 전문가들의 예측을 뒤엎고 패배하고 말았습니다.한 번이나 두 번 변한다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그것은 금방 빛이 바래고 맙니다. 구형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이죠.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3장 3절에서 9절 말씀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 3절~9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여기서 씨라는 것은 아버지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 천국 말씀이라고 19절에서 설명하고 계십니다.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뿌려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성장해서 결실할 수 있었던 씨는 좋은 땅에 떨어진 씨 뿐이었습니다.

그럼 좋은 땅은 어떤 땅일까요? 우리가 논밭을 경작한다고 하면 농사를 짓고 수확을 하면 그것으로 끝날까요? 논밭을 좋은 땅으로 유지를 하려면 경작을 게을리하면 안됩니다.

땅을 간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야말로 변화입니다. 바로 새로움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집이나 방을 한번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연말이 다가오니 대청소를 하는 가정도 많을 것입니다. 자, 1년에 한 번 그야말로 대대적으로 대청소를 하면 일 년 동안 청소는 할 필요가 없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항상 깨끗한 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평소 부지런히 청소를 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로 죄가 사해지고 깨끗하게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끝인가요? 이제 아무것도 안 해도 됩니까?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이제 아무것도 안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성경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그 해석을 진짜인 것 처럼 그럴듯하게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이것은 엄연히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변화해야만 합니다. 그럼 변화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렇죠, 바로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릇을 씻기 위해서는 세제가 필요합니다. 몸을 씻기 위해서는 비누가 필요합니다. 그럼 우리를 씻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님의 능력, 성경의 말씀이 필요한 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또 예배가 필요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가 우리 삶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 이것이 영적인 예배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적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우리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이 변화는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의 여지 없이 우리는 변화해야 합니다. 그 외에 구원에 이르는 길,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새로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마귀입니다. 마귀 사탄은 우리가 구원받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의 부정적인 모습이 많이 나오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정말 하나님을 잘 믿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변화를 거부했습니다. 움직이기를 거부했다는 것이죠.

출애굽기에는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탈출하는 과정이 잘 나와 있습니다. 모세는 애굽 왕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민족을 보내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고 몇 번이나 경고합니다.그 때 바로가 모세에게 한 말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출애굽기 8장 28절을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8장 28절
"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2014년 4월 16일 한국에서 발생한 세월호 침몰 사고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승객, 승무원 476명 그 중 325명이 수학여행 중이었던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었습니다. 배가 기울어지고 가라앉기 시작했을 때 안내방송은 가만히 있으라 했습니다. 가만히 있으라고 되풀이해서 방송이 나왔을 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안내방송을 듣고 따른 학생들이나 승객들 295명은 결국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정말 안타깝고 가슴 아픈, 다시는 있어서는 안될 비극입니다.

서양에는 굴러가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우리가 굴러가지 않고 변화하는 것을 멈추면 어떻게 될까요. 이끼가 나지 않기는커녕 마귀의 밥이 되고 맙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우리의 적인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일까요.성경에는 이에 대한 답도 적혀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7절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이 말씀은 정말 짧으니까 기억해 두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에베소서 4장 27절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그렇습니다. 틈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죠.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항상 새로워야 합니다. 그것이 좋은 땅이고 그래야 30배 60배 100배로 결실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끊임없이 변화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하나님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움직이고 변화해서 항상 새롭게 거듭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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ハレルヤ!神様を愛する方はアーメン!と告白しましょう。アメーン。今日は皆さまと一緒に「動く時・変わる時」움직일 때, 변화할 때というテーマで恵 みを分かち合いたいと思います。

先日、ネットで、次のような書き込みを見つけました。タイトルは「教会で最も怖い人」として、六つの人たちが挙げられていました。
先ず、第一、早天礼拝を1日も欠席しなかった執事の視線が怖いです。その方の頭の中には、早天礼拝 を欠席した牧師や長老の回数と日にちが正確に記録されています。
2番目、什一献金を正確にきちんと収める信者の視線が怖いです。その方の頭の中には、什一献金を納めない同僚の信者たちのリストがギッシリ詰まっています。
3番目、40日間断食のお祈りをささげた信徒の視線が怖いです。その方の視線には「どうしてあなたは断食をしないか」という無言の圧力が感じられます。
4番目、規模が大きく素晴らしい教会に通う信者が怖いです。その方の言葉には小さくみすぼらしい教会に通う人たちに対する優越感であふれています。
5番目、神学博士の学位を受けた神学者が怖いです。その方の前に立つと、すべての人たちが、種類別に振り分けられてしまいます。
6番目、信徒数が多い教会の牧師先生が怖いです。 その方の権威と重さがとてつもなく重くのしかかってきます。


1. 새벽기도에 오래도록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한 집사님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머릿속에는 새벽기도에 빠진 목사와 장로들의 빠진 횟수와 날자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2. 십일조를 정확하게 꼬박꼬박하는 신자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머릿속에는 십일조를 빼먹거나 제대로 하지 않는 동료 신자들의 목록이 빼곡히 들어 있습니다.

3. 40일 금식기도를 다녀온 권사님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시선에는 '너는 왜 금식기도를 하지 않느냐'는 무언의 질타가 섞여 있습니다.

4. 크고 건강한 교회를 다니는 성도가 무섭습니다.
그분의 말투에는 작고 별 볼일 없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이 넘쳐납니다.

5. 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신학자가 무섭습니다.
그분 앞에 서면 모든 사람들이 종류별로 차곡차곡 분류되어 버리고 맙니다.

6. 성도수가 제법 되는 교회 목사들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권위와 무게가 엄청난 압박으로 성도들을 찌그러트립니다.

皆さん、特に教会という枠組みの中で長く生活してきた方ほど、このような傾向が見られます。しかし、これは教会に限ったことではありません。世間には、例 えば教会でなくても、職場などで、自分の経歴や成果を見せびらかすということはあるかも知れません。でも、問題はこのようなことが教会でも起きてい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
例えば、日曜礼拝はもとより、早天礼拝までも1日たりとも休まなかった方、自分の収入の中から10分の1を収める什一献金 を欠かさなかった方、このような方の信仰の力というものはとても素晴らしいものがあると見当は付きます。礼拝 を欠かさないというのは、自分の人生のすべてのことについて神様にゆだね、ただ、神様に栄光をささげたいという切実な思いがあるに違いない、と、人々に思わせるに足るものがあります。でも、それは、神様が認めてくださって初めて価値があるものです。「 貴方 は本当に神様を信じる心が深いですね。」と神様から、イエス様から言われて初めて価値があるものなのです。いくら、周りの人から、「すごいですね、大したものですね」と言われても、何の意味もありません。意味がないどころか、逆効果もあるのです。

マタイの福音書6章5節には次のように書かれています。
「また、祈るときには、偽善者たちのようであってはいけません。彼らは、人に見られたくて会堂や通りの四つ角に立 って祈るのが好きだからで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告げます。彼らはすでに自分の報いを受け取っているのです。」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イエス様が来 られた時のいわゆる律法学者やパリサイ人(びと)たちは、信仰心がとても深いと言われました。しかしそれを通り越して、私はこんなにも熱心に神様を信じているんだと人々に見せびらかしたりもしました。ここでイエス様は当時の、 律法学者やパリサイ人(びと)たちを指して、彼らは「会堂や通りの四つ角に立 って祈るのが好き」だと言われました。これは何かというと、旧約聖書のダニエル書6章10節によると、当時の大臣であり、ダリヨス王からもとても厚い信頼を得ていたダニエルは、日に3度、ひざまずき、彼の神の前に祈り、感謝していたと書かれています。ですからイエス様が 来られた当時の信仰心の深い人たちは、一日のうちで時間を決めて、日に3度のお祈りをささげていました。
では、お祈りの時間が決められていたにもかかわらず、どうしても大事な用ができて、出かけるしかないということになったらどうしましょう。そのようなことになっても、お祈りを捧げることを欠かさず、たとえその時間に外にいたとしても、神様にお祈りをささげていました。それをみて、人々は言ったことでしょう。ああ、あの人の信仰はとても素晴らしい。あれを見なさい。自分が外にいても時間になったら祈りを捧げているではないか。などというような称賛を受けました。
ですが、これに味を占めた、律法学者 やパリサイ人(びと)たちはどうしたかというと、祈りの時間になったら逆に外に出ていきました。そして、外に出て大きな声で祈り始めます。ここに出てくる「会堂や通りの四つ角とは」人がたくさん集まるところ、 人通りが多い場所を指していますが、そこに出ていくんです。そして、大声で祈り始めます。
それはその人の信仰を表していますか?その人の祈りは神様に向けれられていますか?いいえ、それは神様に向けられた、心のこもった祈りではなく、周りの人たちに自分を見せびらかすだけです。どうだ?私はこんなにも熱心にお祈りを捧げているんだぞ?すごいだろう?さあ、こんな私を褒めたたえなさい。 言葉 は悪いですが、これは、とても、いやらしい行為です。そうじゃありませんか?皆さんはどう思われますか?本当に恥ずかしい限りですが、実際に当時、行われていたことです。情けないですね。
イエス様はこれに怒っていらっしゃったんです。ですからイエス様はおっしゃいます。「彼らはすでに自分の報いを受け取 っているのです。」これは、どういう意味かというと、祈りを捧げることで、もらうべきものは、もう、もらったようなものだということです。祈りというのは、神様に捧げるもの、神様に私たちの願いと、感謝の心を捧げる、とても価値ある行いです。神様は偽りや飾りのない、率直な私たちの祈りを 喜ばれます。そして、神様はその報いをくださいます。

エレミヤ書33章3節、
「わたしを呼べ。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に答え、あなたの知らない、理解を越えた大いなる事を、あなたに告げよう。」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ヨハネの福音書14章14節、
「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何かをわたしに求めるなら、わたしはそれをしましょう。」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私たちが神様にお祈りを捧げれば、神様は私に報いをくださいます。私たちの祈りに答えてくださるとおっしゃっています。でも、かれら、律法学者 やパリサイ人(びと)たちは、神様の報いを望んだのではありません。そうではなく、ただ単に周りにいる人から、あの人は立派 だ、素晴らしいと、ちやほやされたかっただけなのです。神様に自分の祈りが受け入れられるかどうかが問題ではなく、それだけが、至極安 っぽいとしか言いようがない称賛が目的だったのです。これを神様が喜びになられますか?そんなはずはありません。ですからイエス様はおっしゃいます。

次の節、マタイの福音書6章6節、

「あなたは、祈るときには自分の奥まった部屋 にはいりなさい。そして、戸をしめて、隠れた所におられるあなたの父に祈りなさい。そうすれば、隠れた所で見ておられるあなたの父が、あなたに報いてくださいます。」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皆さん、神様からの報いと、この世の人々からの報いと、どちらが大きいでしょうか。これは愚問ですよね。神様からの報いを欲する皆様 であることを切に望みます。

ギリシャの七賢人の一人、ギリシャの自然科学と哲学の父をいわれるターレスに関してこのような言い伝えがあるそうです。
ある青年に「世の中で一番難しいのは何でしょう?」と聞かれたそうです。この質問に対してターレスは 「自分自身を知ることだ」と答えました。「では、 一番簡単なことは?」と聞かれたターレスは、「他人に忠告することだよ」と言ったそうです。
信仰の中で、自分自身を知ることとは一体どんなことでしょう。聖書には次のように書かれてあります。


ガラテヤ人への手紙1章4節、
「キリストは、今の悪の世界から私たちを救い出そうとして、私たちの罪のためにご自身をお捨てになりました。私たちの神であり父である方のみこころによったのです。」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それは、自分がどうしようもない罪びとであること、自分の力ではどうあがいても、救いを得ることはできないということ、しかし、神様の恵 みによって、神様の一人子であるイエス様がほふられたことによって、犠牲になってくださったことによって、滅 びるしかない罪深き私たちの受けるべき罰を私たちの代わりにすべてをお受けになってくださったおかげで、私たちの罪がすべて帳消しになったこと、これを知ることに他ありません。

これを知った私たちは、では、どうしなければならないでしょうか。そうです。変わ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この、何ものにも代えがたい、神様の御心を知った私たちは、もう、昨日までの私ではないのです。
今日の御言葉をもう一度見てみましょう。

第二コリント人への手紙5章17節、
「だれでもキリストのうちにあるなら、その人は新しく造られた者です。古いものは過ぎ去って、見よ、すべてが新しくなりました。」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そうです。イエス様のうちにある者は、イエス様の御心の中にいる私たちは、昨日までの私たちではなく、新しく作られた者なのだと、聖書には書かれてあります。新しく造られた者とは、昨日、新しく造られた者ですか?それではもう過去の話になってしまいます。
最近の科学技術は目まぐるしく変わっています。いわゆる最新型のパソコンも毎日のように登場しています。ある人はこの様子をこんな言葉 で表していました。「最新型のパソコンといえども、それを買って家に帰ってきたらもう既に旧型になってしまっている」
では、イエス様の教えに従い、聖書の教えに従う、私たちはどうでしょう。

キリストのうちにあるなら、新しく造られた者と聖書は言います。古いものは過ぎ去って、すべてが新しくなったと、神様は今私たちに言って下さいます。この聖書の 言葉を今聞きました。それでおしまいですか?
よし、今日から新しくなろう。そう思うのはとても大事です。ですが、1回限りで終わってしまっては、明日になれば、また古いものになってしまいます。それでは、どう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か?そうです。 毎日毎日新しくな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
8年前、アメリカのオバマ大統領は「チェンジ」というスローガンを掲げて大統領選で勝利致しました。しかし、彼は今度の選挙戦では敗北 を喫してしまいました。それも、対等の相手ではなく、圧勝が予想されたにも関わらず、負けてしまいました。これは何を意味するでしょうか。そうです。1度や2度チェンジ、変化すること、変わるということは、そんなに難しくない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それをそのままにしておけば、それは必ず色あせてしまいます。それこそ旧型になってしまうのです。アメリカの国民が、すでに色あせてしまったチェンジに振り向く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だから負けてしまったのです。


マタイの福音書13章でイエス様は種をまく人のたとえをお話しされます。

マタイの福音書13章3節~9節
「イエスは多くのことを、彼らにたとえで話して聞かされた。「種を蒔く人が種蒔きに出かけた。蒔いているとき、道ばたに落ちた種があった。すると鳥が来 て食べてしまった。また、別の種が土の薄い岩地に落ちた。土が深くなかったので、すぐに芽を出した。しかし、日が上ると、焼けて、根がない
Vために枯れてしまった。また、別の種はいばらの中に落ちたが、いばらが伸びて、ふさいでしまった。別の種は良い地に落ちて、あるものは百倍、あるものは 六十倍、あるものは三十倍の実を結んだ。耳のある者は聞きなさい。」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この種は御国の言葉だと19節では説明しておられます。はい、御国の言葉、父なる神様の国の言葉、天国の言葉 が私たちの心の中にまかれました。にもかかわらず、ここで無事に成長して実を結ぶことができた種は「良い地に落ちた種」だとおっしゃいます。
みなさん、考えてみましょう。田んぼや畑を一度や二度、一生懸命耕 しておけば、それですべてが事足りますか?もう、仕事は終わりですか?さあ、これで1年は仕事をしなくてもいいだろう。そうですか?いいえ、違います。田んぼや畑を「良い地」として保つためには、常に耕してお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耕すとは何でしょうか。これこそ、まさにチェンジ、これこそがまさに、新しさを保つということです。
皆さんの家や部屋を思い浮かべてみてください。はい、そろそろ年末です。大掃除をする家庭もたくさんあるでしょう。じゃあ、1年にそれこそ大々的に大掃除 をしさえすれば、もう、1年は安心、ですか?いいえ、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常にきれいな家、きれいな部屋 を保つためには日ごろから掃除をしなくてはいけないんです。
私たちがイエス様の恵みによって、罪が赦され、きれいになることができました。しかし、それで終わりですか?


ああ、私たちの罪は一度赦されたのだから、もう何もしなくても救われたのだと、聖書を自分勝手 に解釈してた教理をまことしやかに、主張する人たちもいますが、それは明らかに聖書に反している教えです。私たちは常に変わ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それでは、変わるためにはどうしなければならないでしょうか。はい、そうです。常に動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神様の中で、イエス様の中で、常に新しく造られたものであり続けなければなりません。食器を洗うためには洗剤が必要です。体を洗うためには 石鹸が必要です。そして、私たちのここを洗うためには、聖霊の力と聖書の言葉、神様の言葉が必要なんです。そして、礼拝が必要です。

ローマ人への手紙12章1節を見ます。
「そういうわけですから、兄弟たち。私は、神のあわれみのゆえに、あなたがたにお願いします。あなたがたのからだを、神に受け入れられる、聖(きよ)い、生きた供え物としてささげなさい。それこそ、あなたがたの 霊的な礼拝です。」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いわゆる礼拝とは「讃美」や「お祈り」、「捧げもの」、「メッセージ」で構成されますが、それだけでなく、私たちの人生をもって神様に捧げる、霊的 な礼拝だと聖書には書かれているんです。

私たちが私たちの人生を通して、神様に霊的 な礼拝を捧げるために、私たちは変化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変わ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変わってもいいし、変わらなくてもいいというような、安易 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選択の余地はない、変わるしかないんです。それ以外に救いに至る道、父なる神様のみ前に立つ道はないんです。

しかし、この変化を望まない者がいます。それが何者ですか。そうです。それことが悪魔です。悪魔の仕業です。悪霊であるサタンは私たちが救われることを望みません。先に申し上げた 律法学者やパリサイ人たちは、聖書では何かと悪役にされがちですが、彼らが初めからそうだったの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彼等 は彼らなりに、信仰を深めたかった、神様を知りたかった、モーセの律法 を守りたかった人々でした。だが、彼らはしませんでした。何をしなかったのか、それは変化をしなかったんです。

動こうとしなかった、ただそこにそのまま立ち止まっていたかったんです。

出エジプト記 8章28節を見ると、神様が遣わされたモーセによって、イスラエルの民がエジプトを脱出しようとします。そのとき、エジプトの王であるパロはモーセに言った 言葉が大変興味深いです。

出エジプト記 8章28節
「パロは言った。「私は、おまえたちを行かせよう。おまえたちは荒野でおまえたちの神、主にいけにえをささげるがよい。ただ、決して遠くへ行ってはならない。私のために祈ってくれ。」

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そう、「決して遠くへ行ってはならない」変化?まあ、変化はいいよ。でも、ほどほどにしなさい。これが悪魔サタンの望むことです。


おととしの2014年4月16日に韓国、南西沖で発生したセウォル号沈没事故の記憶は未だに鮮明に残っています。乗員乗客476名、その内の325名が当時、 修学旅行中 の高校2年の生徒でした。船が傾き、沈み始めたときに、船内の案内放送では、何度も何度も、ただ「動かないように」と繰り返し、放送があっただけだと言います。そんな大人たちの指示に従った、高校生たちや乗客ら、295人は結局、 冷たい海の中で命を落とすことになってしまいました。そんな中、船の総責任者である船長はいち早く脱出をして救助されていました。本当に悔しい思いです。
私たちが動かなくなる、変化しなくなる。
そうなれば、もう、終わりです。西洋には「転がる石には苔が生えぬ」( A rolling stone gathers no moss )ということわざがあります。私たちがもし、転がることをやめ、神様の御言葉通 りに変化することをやめたらどうなるでしょうか。そうなってしまうと、苔が生えるどころか、悪魔の餌食になってしまうのです。

第一ペテロの手紙5章8節には、こう書かれています。
「身を慎み、目をさましていなさい。あなたがたの敵である悪魔が、ほえたける獅子のように、食い尽くすべきものを捜し求めながら、歩き回っています。」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怖いですね。なんと恐ろしいことでしょう。私たちの敵である悪魔が、ほえたける獅子のように、食い尽くすべきものを捜し求めながら、歩き回っていると聖書には書かれています。
では、私たちはどうすればいいでしょうか。聖書にはそのことに対する答えも書かれています。

エペソ人への手紙4章27節、
「悪魔に機会を与えないようにしなさい。」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そうです。機会を与えないように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スキを見せてはいけないんです。
私たちは神様の中で常に新しい存在でなくてはなりません。それは、良い地であること、それが30倍、60倍、100倍と実を結ぶ秘訣であり、そのためには絶えず動き、変化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

今日の御言葉をもう一度一緒に読んでみましょうか。

第二コリント人への手紙5章17節、
「だれでもキリストのうちにあるなら、その人は新しく造られた者です。古いものは過ぎ去って、見よ、すべてが新しくなりました。」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神様の中で、イエス様の中で、常に動き、常に変化し、常に新しく生まれ変わる私たちであり続けることを切に望み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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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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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회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
2016년 11월 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6장 15절~30절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무리가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지도자가 와서 모세에게 알리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그들이 모세의 명령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모세가 이르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들에서 그것을 얻지 못하리라 엿새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일곱째 날에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그러므로 백성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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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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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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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 神様が下さる糧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 만나를 내려주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만나는 오늘 본문 15절에 기록에 의한 것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양식입니다.
이 만나의 특징을 보면 몇 가지로 정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솔직히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특징을 정리하다보니 다섯가지가 되었습니다만, 이거 하다보니까 너무 많고 복잡해지는 것 같습니다. 사실 무슨 학교 레포트를 쓰고 그런다면 짧은 것도 억지로 늘려서 쓰고 그러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하나님 말씀을 전해드리는데 복잡하고 난해하게 해드릴 이유가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좀 줄여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다섯가지로 정리했던 이 광야에서 허기진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양식인 만나의 특징. 몇 가지로 줄이면 이해하시기가 쉬우실까요? 네 가지요? 아니면 세 가지 정도면 될까요?

예, 단 한 가지로 줄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줄였느냐 하면, 만나의 특징.
<쌓아두면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다>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씀하시기를, 만나를 거둬들인 다음에 그것은 다 그 날에 먹고, 다음 날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 20절에서 하시는 말씀이, 다음 날까지 남겨두면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유통기한이 짧았어요? 하나님의 기술이 그 정도밖에 안 되나요?
여기에는 예외가 있었는데, 그것은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말고 쉬어야 하니까 그 전날에는 다음 날 몫까지 거두더라도 벌레도 나지 않고, 냄새도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걸 보면 하나님의 만나 제조 기술이 떨어져서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복잡하게 하셨을까요? 우리 그런 말 있죠? 아니, 왜 먹는 걸 가지고 그러냐 하고 말이에요.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먹는 것을 가지고 이렇게 어렵게, 복잡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 하필 먹는 것을 가지고 치사하게 그러시나요? 만나를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는 게 아까워서요? 아니면 정말로 하나님이 치사해서요?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요?
그렇다면 왜 그러셨을까 하는 답이 성경에 있습니다.

출애굽기 16장 4절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主はモーセに仰せられた。「見よ。わたしはあなたがたのために、パンが天から降るようにする。民は外に出て、毎日、一日分 を集めなければならない。これは、彼らがわたしのおしえに従って歩むかどうかを、試みるためである。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즉,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안 하느냐를 시험해보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험이 즐거우세요? 솔직히 시험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시험은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시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중요합니까. 그 시험은 바로 축복의 전주곡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축복의 전주곡인 시험은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시험이 시작한 시기입니다. 그것은 이제 16장 1절에 보면, 애굽에서 나온지 두 달 보름이 지난 후에 시작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그 때까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식량이 모두 동이 났을 때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아무리 풀한포기 나지 않는 광야라 하더라도, 내가 내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착각을 갖고 있는 경우라면,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대신에 내가 갖고 있는 재물, 내가 갖고 있는 능력, 내가 갖고 있는 힘을 바라보는 것이 사람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만을 믿고, 하나님 만을 바라보고, 하나님 만을 의지하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아무리 만나를 주셨다 하더라도 자기들이 양식을 갖고 있다면, 하나님을 의지하겠어요? 뭐? 하나님?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고……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그렇게 착각하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 만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볼 때에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학교에 다닐 때 보면, 지금은 학교에 맛있는 식당도 많고 그런 것 같습니다만, 제가 다닐 때만 하더라도 학교 안에 맛있는 식당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또 순진하게, 처음에는 대학교 식당들은 원래 다 맛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가끔 다른 학교에 가보니까 학교 식당이 꽤 맛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야, 너네 학교 식당은 참 맛있구나, 라고 했더니, 그 학교에 다니는 친구가 저를 보고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당연하지~ 맛없으면 누가 사 먹어~ 하는 거예요.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 친구 학교는 시내 한 복판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교문만 나가면 식당들이 넘쳐납니다.
그러니까 학교에 있는 식당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는, 맛이 있는 건 물론이고, 거기다가 가격도 저렴해야지만 경쟁력이 있는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같은 경우에는, 당시에는 저희 학과 건물이 교문이랑 제일 가까웠습니다만, 그래도 교문까지 걸어가려면 꽤 멀어요. 그리고 애써 교문까지 가서, 거기를 나가봤자 이건 산골짜기에 있다보니 식당이라고는 없습니다. 그러니 어째요. 그냥 어쩔 수 없이 학교 안에서 해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 정말 당시 그 학생식당 밥은요, 다이어트 식품으로는 정말 참 괜찮았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된다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해도 되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더라도, 교회에 안 나가도 천국에 갈 수 있다면, 그런데도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진리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시는 참된 구주되신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두 써버릴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의 소유가 동이 났을 때, 이제는 자신들의 힘으로 식량을 얻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쌓아두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자, 그럼 이제 다시 아까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러셨을까요.
이것을 좀 더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우리 한 번 반대로 접근해보았으면 합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양식을 쌓아둘 수 있었다면, 장기간에 걸쳐 보관할 수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러분 같았으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뭐, 금방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하루 치가 아니라 이왕 한 번 하는 것, 한 열흘 치 정도를 한 번에 가지고 올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뭘 귀찮게 매일 나가요. 그냥 온 가족 동원해서 한번에 확 모아오면 되죠. 그래 가지고 두고두고 먹으면 되잖아요? 안 그래요?
여기서 좀 더 머리를 쓰시는 분은 또 어떻게 할까요? 성경에 보면 정확하게 어디를 가야지만 만나가 있을 것이라고 기록은 안 되어 있습니다만, 자세히 보면, 사람들이 만나를 거두러 나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집앞 문을 나서면 곧바로 있는 것이 아니라 들에 나가야 구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만나를 왕창 거둬들여서, 굳이 들에까지 나가지 않더라도 어떻게 해요? 한국에서는 무슨 치킨 배달처럼, 만나 배달, 이런 것 괜찮은 비즈니스 아니에요? 되게 편리할 것 같지 않아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할 줄 알았겠어요? 몰랐겠어요. 아니, 제가 벌써 알만한 것인데 하나님께서 모르시겠어요? 더구나 지금도 유대인이라면 이 장사나 사업을 잘하는 민족으로 알려져 있는데, 옛날이라고 달랐겠어요? 분명히 그럴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막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이 짓궂어서요? 하나님이 우리 잘 되는 꼴을 보기 싫어서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한 번 생각해보십시다. 만약에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한 달에 딱 한 번 몰아서 드리면 어떻게 될까요? 보통 주일예배가 1시간 정도라고 하면, 한 달에 4시간 깔끔하게 예배를 드리고 이제 한 달 동안 쉬는 거예요. 못할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말씀 전하는 시간을 30분 정도라고 하면 4번이면 2시간이면 되잖아요? 어려워요? 아니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한 달에 주일이 4번 있다면, 그 중에 한 번만 예배 드리고 나머지 3번은 교회에 안 나와도 되잖아요? 수요예배요? 그럼 그것도 한 번에 몰아보죠 뭐. 그럼 한 달에 2일만 좀 빡세게 예배를 드리면 이제 한달치 주일예배와 수요예배는 끝났네요?
여러분께 하나 묻겠습니다. 혹시 지난 주에 제가 어떤 말씀을 전해드렸는지, 혹시 기억하세요? 성경 어디 말씀이었는지, 기억하세요? 그렇다면 지지난주는 기억하세요? 그럼 그 전주는요?
아무리 우리가 열심히 목욕을 해도 한 달치 목욕을 한 번에 할 수 있어요? 혹시 그렇다고 우기시는 분을 위해 한 말씀만 더 드리자면, 아무리 숨을 많이 쉰다고 해도, 한 달치 숨을 한 번에 쉴 수 있어요? 이건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주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먹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사랑을 먹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축복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 속에서 감사가 식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만약에 정말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하루에 몰아서 해요? 그렇게 되면 성경에서 만나가 어떻게 된다고요? 예, 냄새가 납니다. 벌레가 생깁니다. 안중근 의사께서는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말을 하더라도 험한 말을 해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뜻입니다만, 우리 마음 안에 하루라도, 아니, 한 순간이라도 주님의 은혜가 없고 주님의 말씀이 없고, 주님의 사랑이 없다면, 우리 마음은 마치 벌레가 기어다니고 썩은 냄새가 나는 것처럼 변해버리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에 가져다가 쌓아놓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을 먹으라고 말씀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누가 배달해주면 될 것 아니냐. 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직접 나가서 거두라고 하셨는데, 다른 사람한테 부탁한다? 물론 어떤 물건이라면, 내가 대신 받아서 가져다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여기 성경에서 말씀하고 계신 만나는 그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이라는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주일 아침에 일어났는데, 아, 교회에 너무 가기가 싫어요. 집에서 좀 쉬고 싶어요.

그래서 교회에 가는 가족 중 누구한테, 예를 들어서 엄마한테, 엄마, 나 오늘 교회 가기 싫으니까 나 대신 내몫까지 교회에 나가줘……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아니, 내가 받을 축복을 다른 사람한테 나 대신 받고, 그것을 가져다줄 수 있나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아니, 이것도 혹시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가요? 그렇다면 이건 어떠세요? 아까 말씀드렸던 예를 다시 들어보죠. 나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목욕을 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내가 좀 깨끗해지나요? 아니면, 나를 대신해서 숨을 쉬어 줄 수가 있어요? 나를 대신해서 밥을 먹어줄 수가 있어요? 그럼 나도 배가 불러지나요? 이것들도 모두 불가능합니다. 축복은 반드시 내가 받아야지 내 축복이 되는 것이지, 아무리 친부모나 친형제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축복을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대신’이라는 말은 딱 한 경우에만 성립합니다. 그건은 언제예요? 예,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가 받을 징벌을 모두 받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구주로 영접하고 믿기만 하면 우리의 죄는 사라지고, 눈보다도 희게 되는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또한 이 만나는 재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능력으로 돈을 많이 벌어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역시 오해입니다. 교만이지요. 얼마 전에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제가 바로 이 말을 했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알고 보면 극히 적다고 했는데, 이 말을 들은 그 사람이 이러더라구요? “에이,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나 자신이 불쌍해지잖아요?”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당신이 노력을 해서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고, 당신이 노력해서 회사에 들어갈 수 있었어? 생각해봐. 당신이 아무리 노력했어도, 당신보다 잘난 사람이 지원을 많이 했었다면 떨어졌었어.” 제 말이 이상한가요? 생각해보세요. 저부터도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저보다도 뛰어난 사람이 어디 한 둘이겠어요? 무지하게 많습니다. 그런데 제가 무슨 시험을 볼 때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이, 제 능력만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아니요. 저보다도 뛰어난 사람들이 많이 몰렸더라면 저는 꼼짝 없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장사를 잘해서 수입이 늘어나나요?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손님이 안 들어오면 굶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 적어도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예를 들어서 식당이라 한다면, 아니, 맛도 좋고, 목도 좋은데, 이상하게 손님이 안 들어오는 식당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하지만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맛도 그저그렇고 위치도 별로 안 좋은데 손님들이 바글바글한 곳도 역시 많이 있습니다. 내가 잘 해서, 내가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장사가 잘 되요? 물론 노력도 중요하지요. 노력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다가 안 되면이 아니라, 아주 맨 처음부터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나가면,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이 역사하기 시작하십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면 나에게 들어오는 수입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감사가 넘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이는 당연한 것이라고, 내가 노력해서 얻어진 성과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거기에는 하나님의 은혜도 없고 감사도 없습니다. 그것을 내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물을 바칠 때에도 아깝고, 십일조를 바칠 때에도 손이 벌벌벌벌 떨리는 것입니다.
누구는 그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고약한 냄새 중에 가장 고약한 냄새가 무엇이인가 하면, 바로 돈냄새라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정치적으로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원칙도 소신도 없이 갈팡질팡 하니까 온 나라가 갈팡질팡입니다. 여기에 단물을 빨아먹으려고 여기저기서 빨대를 꽂습니다.

그러다보니 엉뚱한 사람들이 득세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반드시 돈이 엮여 있습니다. 그것도 백만원, 이백만원이 아니죠. 기본이 몇 백억 몇 천억입니다. 자신이 가진 권력을 남용해서 여기저기서 끌어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켜가면서 자신의 배를 채웁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마치 파리가 몰려들듯이 벌레가 우글거리고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저축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저축은 중요하지요. 하지만 오늘 말씀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오늘 본문 중에서 출애굽기 16장 17절~18절을 봅니다.

출애굽기 16장 17절~18절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そこで、イスラエル人はそのとおりにした。ある者は多く、ある者は少なく集めた。
しかし、彼らがオメルでそれを計ってみると、多く集めた者も余ることはなく、少なく集めた者も足りないことはなかった。各自は自分の食べる分だけ集めたのである。

그렇습니다. 각 사람이 먹을 만큼을 거둔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만나가 얼마나 되는 양이었는지는 정확하게 기록이 안 되어 있습니다만, 21절에 보면, 아침해가 쬐기 시작하면 사라져버렸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무한정으로 보관할 수 있었다면, 만나를 싹쓸이해서 나중에 미처 만나를 거두지 못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비싸게 팔아 먹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리고 그렇게 해서 큰 돈을 벌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노력해서 번 것으로 착각을 하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양식을 지나치게 독점해서 다른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결과입니다. 그것에 어디에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고 은혜가 있겠습니까. 그런 재물에는 벌레가 끓고 냄새가 날 따름인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의 참 주인되심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루하루 주시는 말씀과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배불리 먹고 기쁨과 감사로 충만하여져서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이 세상에서 승리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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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회 성령님과 악령
2016년 10월 3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6절~9절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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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성령님과 악령’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한국에서 있을 때 보면, 글쎄요, 이건 다른 분들도 종종 겪는 일이라고는 합니다만, 특히 제가 많이 겪었던 일은 뭐냐 하면, 이상하게 유독 이상한 사이비 종교 분들이 다가옵니다.
예전에도 있었는데 요즘도 여전히 있는 일입니다만, 서울에서 시내를 걸어다닐 때 보면 가끔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혹시 도에 관심 없으세요?” 라고 말을 걸어옵니다. 그런데 요즘은 좀 바뀌어서 “참 인상이 좋으십니다.” 라는 말로 바뀌었더라구요. 그래서, 아니 뭐, 인상 좋다는데 기분 나빠할 사람 없잖아요? 그래서 무슨 소릴 하나 하고 가끔 들어봤습니다만, 듣고보니 결국 그 묘한 신흥종교와 같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가만히 있으면 자꾸 귀찮게 굽니다. 그래도 뭐 길을 걸어갈 때에 이런 말을 들으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면 됩니다. 하지만 하루는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는데 또 이런 말을 걸어오더군요. 저는 신호등을 건너야 하는데, 자꾸 옆에 서서 인상이 좋다고 해요. 그러면서 이런 말 저런 말을 걸어옵니다.
무슨 세일즈맨이나 영업을 하시는 분들은 직업상 하시는 일이니까, 말로 하면 어느 정도는 통합니다.

하지만 신흥종교, 쉬운 말로 하자면 사이비 종교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육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사람의 힘이 아니라 영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전도할 때는 어때요? 보통 저희 같은 정통 기독교 교회에서 전도할 때에는, 말 첫마디부터 전도지를 보이면서, 우리 같으면 이카호중앙교회에서 나왔습니다, 하고 먼저 밝힌 다음에 말씀을 시작합니다만.
그리고 전도할 때가 아니라 하더라도, 예를 들어서 내가 어딜 가서 어떤 말을 하는데, 누가 나한테, 어? 교회 나가세요? 라고 하면 어떤 마음이 들겠어요? 반갑죠. 안 그래요?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알아보겠어요? 나한테서 예수님의 향기가 난다는 건 아니에요? “예, 맞아요. 저 교회에 다녀요. 혹시 교회 다니세요?” 그리고 그 분이 다니시는 분이라면 반갑게 교재를 나눌 수도 있고, 안 다니는 분이라면 “같이 예수님을 믿어요. 너무 좋아요.” 이렇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가능하다면 자신들의 정체를 끝까지 숨기려고 합니다. 벌써 그것부터가 이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횡단보도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하도 옆에서 귀찮게 하기 때문에 제가 그 사람을 눈을 바라보고 말했습니다. 제가 그 사람의 종교단체를 말하면서, “당신 어디어디에서 나왔죠?” 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자신들의 정체를 말로 밝히니까 벌써 흠칫 놀랍니다. 당황을 해요. 그러면서 “예…….”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겠어요?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 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렇게 옆에서 귀찮게 했던 그 사람이 “수고하세요~” 하고 가버리더라구요. 글쎄요. 교회 다닌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더 뭐라고 해봐야 소용 없겠구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속이 매우 시원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면서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만,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점인데도 불구하고 요즘 교회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소홀히 하는 경우도 간혹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부분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영적인 부분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니는 것을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세상적으로 본다면 ‘종교생활’을 한다고 하겠지요. 하지만 종교라는 것이 무엇이에요?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 또는 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
인간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한다는 것이 잘못된 설명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시작해서 그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어떤 학문이나, 아니면 그저 취미생활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어요? 아니면 무슨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되나요? 그것이 취미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그 앞에,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요? 이른바 어떤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모두 좋은 것입니다. 어느 종교를 믿든지 열심히 믿기만 하면 복을 받습니다……이렇게 말을 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미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있고, 그리고 꽤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입니까.

역대하 6장14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천지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주의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나이다”

「イスラエルの神、主。天にも地にも、あなたのような神はほかにありません。あなたは、心を尽くして御前に歩むあなたのしもべたちに対し、契約と愛とを守られる方です。

하늘에도 땅에도 이 세상 어디에도 하나님은 오직 우리가 믿고 있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삼위일체 하나님 외에는 안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이것 저것 그것, 이렇게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10장 9절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なぜなら、もしあなたの口でイエスを主と告白し、あなたの心で神は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てくださったと信じるなら、あなたは救われるからです。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사해주신 것을 믿느냐, 아니면 멸망이냐 하는 그 선택 밖에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이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어두운 경우가 있습니다만,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 심각하냐 하면, 그것은 바로 마귀의 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마귀가 하와한테 접근할 때,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전이었습니까, 듣고 난 다음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듣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이미 하와는 아담으로부터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다는 사실을 익히 듣고 알고 있었습니다. 말씀을 이미 받았다면 믿음이 오히려 강해져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 틈새가 있었습니다. 그 틈새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심겨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뿌려지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졌다고 하는데, 하와의 경우에는 길 가에 떨어졌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을 내게 해주었는데, 그 말씀이 내게 심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남의 나라 얘기였습니다. 아담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했다던데…? 그 정도입니다. 그 틈새를 사탄은 놓치지 않습니다. 아니야. 절대로 그렇지 않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이렇게 되어 있지? 아니야. 그게 아니야. 그러면서 말씀을 왜곡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난도질을 합니다. 이런 일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잠언 30장 5절~6절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神のことばは、すべて純粋。神は拠り頼む者の盾。
神のことばにつけ足しをしてはならない。神が、あなたを責めないように、あなたがまやかし者とされないように。

요한계시록 22장 18절~19절,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私は、この書の預言のことばを聞くすべての者にあかしする。もし、これにつけ加える者があれば、神はこの書に書いてある災害をその人に加えられる。
また、この預言の書のことばを少しでも取り除く者があれば、神は、この書に書いてあるいのちの木と聖なる都から、その人の受ける分を取り除かれる。


성경에서 분명히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짜깁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더 나아가, 성경이 아닌 다른 책을 마음대로 써서 마치 성경처럼, 나아가 성경보다도 더 값어치가 있는 교리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갈라디아서 1장 7절~8절,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ほかの福音といっても、もう一つ別に福音があるのではありません。あなたがたをかき乱す者たちがいて、キリストの福音を変えてしまおうとしているだけです。
しかし、私たちであろうと、天の御使いであろうと、もし私たちが宣べ伝えた福音に反することをあなたがたに宣べ伝えるなら、その者はのろわれるべきです。

이럴 수가 있을까요? 아니, 천사가 와서 우리한테 복음을 전한다 하더라도 성경 외의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는다고까지 말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말씀을 듣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제가 구체적인 종교 이름을 이 자리에서 대지는 않겠습니다만, 성경 외의 어떤 교리를 믿는 종교에서는 실제로 어떤 예언자가 천사로부터 받은 책을 자신들의 교리로 삼고 있는 경우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이와 같은 일을 2천년 전에 예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절대로 그것을 믿지 말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는 이 성경만을 믿고 우리 죄를 대신 사해주신 예수님만을 구주로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이 영적인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간혹 오해를 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제사를 지냅니다. 차례도 지냅니다. 제사는 뭐고 차례는 뭐예요? 예. 제사는 고인이 돌아가신 날에 지내는 것이고, 차례는 설날이나 추석 같은 날에 지내는 것이죠. 일본에는 불단 같은 것이 있어서 돌아가신 가족들을 가지 집에 모셔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몇 년에 한 번은 法事라고 해서 묘소에서 하는 행사를 치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그와 같은 것들을 하지 않습니다.

이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조상님들을 공경하지 않는다는 둥 이런 말 저런 말을 합니다. 그게 사실인가요? 자기 부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제사나 차례를 지내지 않아요. 그것은 그럼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자기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아서인가요? 이런 것이 바로 오해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살던 사람이 죽으면 저승에 갔다가, 달력보고 어? 오늘이 설날이네, 추석이네, 아니면 내가 죽은 날이네? 하고 그 영이 다시 이 땅에 내려오나요? 성경에는 어떻습니까.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자가 죽었는데 지옥불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래서 부자가 아브라함한테 부탁하는 장면입니다.


누가복음 16장 27절에서 31절까지를 봅니다.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彼は言った。『父よ。ではお願いです。ラザロを私の父の家に送ってください。私には兄弟が五人ありますが、彼らまでこんな苦しみの場所に来 ることのないように、よく言い聞かせてください。』しかしアブラハムは言った。『彼らには、モーセと預言者があります。その言うことを聞くべきです。』彼は言った。『いいえ、父アブラハム。
もし、だれかが死んだ者の中から彼らのところに行ってやったら、彼らは悔い改めるに違いありません。』 アブラハムは彼に言った。『もしモーセと預言者との教えに耳を傾けないのなら、たといだれかが死人の中から生き返っても、彼らは聞き入れはしない。』」
아브라함한테 간청을 합니다. 지금 나는 죽었지만, 내 형제가 아직 다섯이 있는데, 이렇게 내가 지옥에 있다. 이렇게 고통을 받고 있다. 그러니까 이 사실을 나사로를 통해서 알게 해달라. 이렇게 부탁을 합니다만, 아브라함은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뭐라고 하면서 거절해요? 그들에게는 이미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으면 된다. 여기서 “모세와 선지자들”이라고 하는 것이 뭐예요? 이것은 모세와 선지자들에 의해 기록된 것 바로 성경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미 그 사실.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성경을 안 믿어? 그렇다면 죽은 사람이 다시 가서 전한다 하더라도 안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을까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약에서 한 번, 신약에서 한 번입니다. 신약에서 누가복음 9장 29절에서 3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중에 모습이 변화해서 광채가 났다고 하는데, 바로 그 때 그들 앞에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중에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었다고 기록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었을 뿐, 그 놀라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는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왜요? 나눌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바로 그 자리에 계시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천국 복음을 말씀해주시기 위해서인데, 자신들이 예수님보다 높아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면 예수님이 말씀하실텐데, 예수님을 물리치고 자신이 말을 해요? 그것은 그야말로 월권행위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과 대화을 나누었을 뿐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은 이 땅으로 다시 내려와서 우리와 교재를 하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왜요? 이미 그 영혼은 천국이나 지옥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다시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보면 매우 특이한 경우가 있습니다. 어쩌면, 죽은 사람이 다시 나타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근거로 삼을 만한 장면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무엘상 28장에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26절에 보면,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すると、サムエルはサウルに言った。「私はあなたといっしょに帰りません。あなたが主のことばを退けたので、主もあなたをイスラエルの王位から退 けたからです。」

사울이 스스로의 힘으로 왕이 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사울을 택하셔서 왕으로 세우셨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보다도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생각을 앞세우려고만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셨고, 그 왕위를 다윗에게 물려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권력의 맛을 본 사람은 절대로 그것을 내려놓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은 사울왕은 이제 아무리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의지했던 사무엘조차도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왕이 되고 아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이 남았을 때, 무당들을 모두 없앴었습니다.

신명기 18장 10절~12절,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あなたのうちに自分の息子、娘に火の中を通らせる者があってはならない。占いをする者、卜者、まじない師、呪術者、
呪文を唱える者、霊媒をする者、口寄せ、死人に伺いを立てる者があってはならない。
これらのことを行なう者はみな、主が忌みきらわれるからである。これらの忌みきらうべきことのために、あなたの神、主は、あなたの前から、彼らを追い払われる。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자신이 금지시켰던 것을, 이제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되자 그것을 다시 찾아가는, 그야말로 사울 왕이 철저하게 타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무당을 찾아갔더니 그 무당이 사무엘을 불러냅니다. 그러면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합니다.


사무엘상 28장 13절~19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됩니다.
“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하니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하는지라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의 모양이 어떠하냐 하니 그가 이르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하더라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의
v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 하니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다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하지 아니하시기로 내가 행할
v일을 알아보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하더라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여호와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네게 행하사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의
v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라 하는지라”

王は彼女に言った。「恐れることはない。何が見えるのか。」この女はサウルに言った。「こうごうしい方が地から上って来られるのが見えます。」サウルは彼女 に尋ねた。「どんな様子をしておられるか。」彼女は言った。「年老 いた方が上って来られます。外套を着ておられます。」サウルは、その人がサムエルであることがわかって、
v地にひれ伏して、おじぎをした。サムエルはサウルに言った。「なぜ、私を呼び出して、私を煩わすのか。」サウルは言った。「私は困りきっています。ペリシテ人が私を攻めて 来るのに、神は私から去っておられます。預言者によっても、夢によっても、もう私に答えてくださらないのです。それで私がどうすればよいか
v教えていただくために、あなたをお呼びしました。」サムエルは言った。「なぜ、私に尋ねるのか。主はあなたから去り、あなたの敵になられたのに。主は、私を通して告げられたとおりのことをなさったのだ。主は、あなたの手から王位をはぎ 取って、あなたの友ダビデに与えられた。あなたは主の御声に聞き従わず、
v燃える御怒 りをもってアマレクを罰しなかったからだ。それゆえ、主はきょう、このことをあなたにされたのだ。主は、あなたといっしょにイスラエルをペリシテ人の手に渡される。あす、あなたも、あなたの息子たちも私といっしょになろう。そして主は、イスラエルの陣営をペリシテ人の手に渡される。」


사무엘이 나타나서 두 가지를 사울 왕한테 말을 합니다. 첫째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왕위를 너한테서 빼앗아서 다윗에게 주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내일 전쟁에서 너와 네 아들들은 죽을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참으로 끔찍한 내용이지요.

죽은 사람이 다시 이 세상에 나타나서 살아있는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장면을 근거로 삼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하나 살펴보면 그것이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사울은 사무엘을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 대화는 사무엘과 사울 왕과의 대화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신접한 무당과 사울 왕과의 대화입니다. 13절에 보면, 어떤 영을 보았다고 하는데, 사울한테는 안 보입니다. 그래서 그 모양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는 노인이고 또 하나는 겉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이걸 듣고 사울은 그가 사무엘인줄 알았다는 것일뿐, 신접한 무당이 보았다는 영도 자기가 스스로 사무엘이라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둘째, 13절에 의하면 그 영은 땅에서 올라왔다고 기록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영이 땅에서 올라왔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땅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겠습니까. 그것이 천국이요? 아니요. 오히려 그곳은 지옥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훨씬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도 거기서 노인의 영이 올라왔다고 합니다. 한평생을 하나님께 순종했던 사무엘이 지옥에 가 있나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셋째, 사울 왕과 그의 아들들의 멸망을 말하면서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왕으로 세워주신 하나님을 버리고, 그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은 영혼이 갈 곳은 단 한 곳 밖에 없습니다. 지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은 그들이, 평생을 하나님께 순종했던 사무엘과 같이 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지옥에 있는 것은 단 두 종류 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죄인과, 또 하나는 무엇이에요? 그렇죠. 마귀입니다.
넷째, 아브라함은 나사로를 보내기를 거절했었습니다. 부자가 나사로를 나쁜 의도로 보내달라고 했던가요? 아니요, 지옥이라는 곳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달라고, 그래서 주님을 믿으라고, 말하자면 전도 목적으로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아브라함은 이미 성경이 있고, 거기에 모든 것이 적혀 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만, 이미 하나님께서 버린 사울 왕을 위해서 사무엘이 왔다? 그것은 납득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다섯째, 사무엘을 불러낸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렇죠. 무당입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스스로 금하신 무당을 써서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을 불러냈다는 것은 분명히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무당을 사용하셨던 것이 되는데, 하나님께서 금지해놓으시고, 스스로 금지한 것을 사용하신 역사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이 사무엘상 28장에 나타난 사무엘은, 사무엘이 아니라 사무엘을 가장한 악령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결론적으로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영은, 두 가지 영 밖에는 없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렇죠. 성령님과 악령입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과 악령이 똑 같은 힘을 가지고 있어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은 온 천하를 만드시고 지배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시요, 악령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천사가 타락한 마귀입니다.
예컨대 성경에는 대표적인 우상으로 바알이나 아세라 등이 나오지만, 실제로 바알이나 아세라라고 하는 영이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모두가 사람이 우상을 세우고, 그것을 숭배한 결과 마귀 사탄이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악령이 없나요? 아니요, 있습니다.

성경에서 보면 오히려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 알아보지만 악령들은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알아봅니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도 돌아가시면 묘를 만들지요. 그리고 묘를 찾아가서 하늘나라로 간 분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 함께 간 사람들과 그 추억을 나누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음식을 차려놓고 그 사진을 갖다가 거기에 절을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두 영 중 하나를 모시는 것이 됩니다. 두 영이 뭐라고 말씀드렸어요? 예, 성령 아니면 악령을 모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겠습니까. 이미 하늘나라에 간 분의 사진한테 절하는데, 성령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아니요. 그것은 성령님을 모시는 자리도 아니요, 이미 돌아가신 분을 모시는 자리도 아니요, 또다른 우상을 섬기는 자리, 엉뚱한 악령을 모시는 자리가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나 차례를 안 지내는 것이지, 우리의 조상들을 가벼히 여겨서가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10월 말이 되면, 이제 여기저기서 할로윈이라고 해서 마귀차림을 하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아이들이 사탕을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해괴한 분장을 하고 좋다면서 돌아다녀요. 이것이 바로 영적인 무지에서 오는 것입니다. 악령이 흥미롭습니까? 그냥 재미로 해요?

이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악한 영들이 바라는 것은 우리의 타락입니다. 멸망입니다. 그래서 일반 교회에서는 할로윈인 날에는 주일학교에서 교회 행사를 갖습니다. 우리도 교회가 커지고 주일학교가 생기고 하면 그렇게 해야되겠지요.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아무리 천사처럼 가장하여 우리 앞에 나타난다 하더라도 성경과 다른 말씀을 전하게 되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의도라고 해도 우리가 우상을 섬기는 순간 우리는 영적인 올무에 걸리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영적으로 맑아야 합니다. 맑게 하기 위해서는 그럼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항상 찬양과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주님께 경배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온전한 예배를 통해서 주님과 항상 동행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また、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命じておいたすべてのことを守るように、彼らを教えなさい。見よ。わたしは、世の終わりまで、いつも、あなたがたとともにいます。」

우리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사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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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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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회 던져진 나무 하나
2016년 10월 2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5장 22절~25절 전반부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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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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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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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던져진 나무 하나’ 投げられた一本の木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430여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던 이스라엘 민족, 430년이라고 하면 애굽에서 종이 된 신분으로 태어나서 종의 신분으로 죽어간 사람들도 무척이나 많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유인이었던 시절을 모릅니다. 보통 한 세대를 30년으로 치는데, 430년이라고 하면 14세대 이상이 됩니다. 이는 참으로 무척이나 긴 세월입니다. 그 동안에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주인인 애굽인들만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진정한 주인이 애굽인들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잊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400년까지는 참았을지 모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아브람이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5장 13절~14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そこで、アブラムに仰せがあった。「あなたはこの事をよく知っていなさい。あなたの子孫は、自分たちのものでない国で寄留者となり、彼らは奴隷とされ、四百年 の間、苦しめられよう。しかし、彼らの仕えるその国民を、わたしがさばき、その後、彼らは多くの財産を持って、そこから出て来るようになる。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400년이 지나면 이스라엘 민족들을 해방시켜주실 것리고 하신 말씀을 믿고 참았는데, 401년이 지나도 402년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믿음이 식어갑니다. 하나님에 대한 실망감이 커져만 갑니다.
에라 이제 모두 끝났다. 하나님은 무슨 하나님. 뭐 어째? 하나님이 아브라함하고 언약을 맺었어? 아휴 됐어. 그거 다 신화야, 옛날얘기야. 꾸며낸 얘기라구. 그러면서 410년, 420년…이렇게 흘러갑니다. 그리고 429년이 된 해에는 어땠겠습니까. 400년이 지나고 한 세대가 지나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세대는 절망과 낙담과 좌절의 세대일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하나님이 구원을 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430년. 하나님은 모세를 택하셔서 애굽으로 보내십니다. 그렇다면 왜 430년이었을까요. 하나님이 깜빡 졸았어요? 아니면 천국 시계가 잠깐 고장이 났었나요? 그것도 아니라면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을 미워해서 그랬었나요?

오늘은 먼저 이 문제부터 살펴볼까 합니다.
우선 창세기 15장 1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다른 나라에서 객이 되어서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400년 동안 아브라함의 자손을 괴롭힐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방에서 객이 된다는 말씀은 아브라함의 자손, 즉 야곱의 아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야곱과 그의 아들들과 자손들 모두가 애굽에 들어가서 살게 됨으로서 성취가 됩니다. 하지만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애굽으로 들어갔을 때 곧바로 종살이가 시작되었나요? 아닙니다. 바로가 요셉을 총리로 세우고 나서 했었던 말을 기억하시나요?

창세기 41장 40절에 보면,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あなたは私の家を治めてくれ。私の民はみな、あなたの命令に従おう。私があなたにまさっているのは王位だけだ。」


그리고 창세기 41장 42절~43절에 보면,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

そこで、パロは自分の指輪を手からはずして、それをヨセフの手にはめ、亜麻布の衣服を着せ、その首に金の首飾りを掛けた。
そして、自分の第二の車に彼を乗せた。そこで人々は彼の前で「ひざまずけ。」と叫んだ。こうして彼にエジプト全土を支配させた。

이 기록을 보면 바로왕이 요셉을 그냥 2인자로 삼은 것이 아닙니다. 거의 자신의 모든 권한을 요셉에게 주었습니다. 정말 1인지하 만인지상의, 그것도 그냥 보통 나라입니까. 당시 최대 강국인 애굽의 총리였습니다. 그리고 바로왕으로부터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습니다. 어느 누가 그에게 대항하겠습니까. 모두가 요셉 바라보기를 왕 바라보듯 했을 것입니다.

그러했던 요셉 총리의 가족이 애굽으로 들어와서는 좋은 땅에서 살았으며, 창세기 50장 3절에 보면,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애굽 사람들이 70일 동안이나 곡을 했다고 합니다. 정말이지 이런 귀빈 대우가 어디 있겠습니까.
야곱이 애굽에 들어가서 바로왕을 만났을 때의 나이가 130세이고, 세상을 떠난 시기는 147세, 즉 애굽에 들어가서 17년 동안 귀빈으로서 부귀영화를 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을 본다면 30세 때 총리가 되고 7년 풍년이 있었고 그 다음에 2년 흉년이 있은 다음에 야곱을 만났기 때문에 당시 요셉의 나이는 39세.
즉, 야곱이 130세 때 요셉은 39세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39세 때 아버지 다시 야곱을 만났고, 야곱이 17년 뒤에 세상을 떠났으니까 요셉 나이 56세 때였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마지막 구절인 50장 26절에 의하면 요셉이 세상을 떠난 시기는 110세라고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그들에게 고난이 닥쳐옵니다. 언제부터지요?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애굽으로 들어간 이후에 몇 년후부터 이와 같은 어려움이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만,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1장 8절~11절에 의하면,
v“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감독들을
v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さて、ヨセフのことを知らない新しい王がエジプトに起こった。
彼は民に言った。「見よ。イスラエルの民は、われわれよりも多く、また強い。さあ、彼らを賢く取 り扱おう。彼らが多くなり、いざ戦いというときに、敵側についてわれわれと戦い、この地から出て行くといけないから。」そこで、彼らを苦役で苦しめるために、
v彼らの上に労務の係長を置き、パロのために倉庫の町ピトムとラメセスを建てた。

즉, 요셉이 죽고 그를 알지 못하는 다른 왕이 즉위한 다음에 이스라엘 민족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애굽 왕 <바로>가 몇 번 등장합니다만, 당연히 모두 같은 왕은 아닙니다.

여기서 신학적으로 세부적인 분석은 하지 않겠습니다만, 단순하게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요셉이 총리가 된 나이는 30세이고,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애굽에 들어갔을 때가 요셉이 39세 때. 그리고 요셉이 110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적어도 야곱 자손들이 애굽에서 귀빈 대우를 받으며 평안하게 살았던 시기는 요셉이 죽은 나이 110, 여기서 야곱의 자손들이 애굽에 들어갔을 때의 요셉의 나이 39를 빼면 71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 이스라엘 자손이 종살이를 한 기간을 최대한도로 늘려보기 위해서, 요셉이 죽은 해에 요셉을 모르는 왕이 즉위해서 곧바로 이스라엘 민족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고 생각해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애굽에 살았던 햇수가 몇 년이죠? 예, 430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들이 애굽에 살았던 그 햇수를 모두 더해서 400년 후에 애굽을 빠져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아까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었죠? 창세기 15장 13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창세기 15장 13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そこで、アブラムに仰せがあった。「あなたはこの事をよく知っていなさい。あなたの子孫は、自分たちのものでない国で寄留者となり、彼らは奴隷とされ、四百年 の間、苦しめられよう。

여기서 그들이 평안하게 살았던 시기가 몇 년이었어요? 예, 71년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종살이를 했던 시기를 늘려본다 하더라도 그 기간은 몇 년이에요? 430 빼기 71년. 359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본래 몇 년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예, 400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400년은 그들이 애굽에 머무는 총 햇수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뭐라고 말씀하세요?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을 괴롭히는 시기가 400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실제로 괴롭힘을 당한 햇수가 몇 년이었어요? 예, 아무리 늘려본다 하더라도 400년에서 41년이 부족한 359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 400년을 다 채우지 않으시고 그 기한이 다 못 되어서 이스라엘 민족들을 해방시켜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말씀이 출애굽기 3장 9절~10절 부분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시기 위해서 애굽으로 보내십니다. 그때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3장 9절~10절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見よ。今こそ、イスラエル人の叫びはわたしに届いた。わたしはまた、エジプトが彼らをしいたげているそのしいたげを見た。
今、行け。わたしはあなたをパロのもとに遣わそう。わたしの民イスラエル人をエジプトから連れ出せ。」

하나님께서는 본래 400년을 채우려고 하셨으나 이스라엘 자손들의 부르짖음을 보시고 그 마음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기한이 넘도록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힌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시기를 하나님의 자비로움으로 감해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몰랐다면 이스라엘 민족들은 하나님을 원망했을 것이요 하나님을 잊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잊었어도 하나님은 그들을 잊이 않으셨습니다.


출애굽기 2장 23절~25절,
v“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v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それから何年もたって、エジプトの王は死んだ。イスラエル人は労役にうめき、わめいた。彼らの労役の叫びは神に届いた。
神は彼らの嘆きを聞かれ、アブラハム、イサク、ヤコブとの契約を思い起こされた。
神はイスラエル人をご覧になった。神はみこころを留められた。

하나님은 그들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리고 400년보다도 일찍 그들을 불러내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그 고마움을 알지 못했습니다. 고마움을 알키는커녕, 그들은 그 때까지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부리던 애굽 사람들을 보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애굽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럼 그 사실을 좋게 생각하셨을까요? 아니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십니까. 배워야죠. 우리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배워야 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배우기에 딱 좋은 곳이 어디입니까. 그것은 바로 광야입니다. 광야는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다윗도 광야를 두 번이나 다녀갔습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셨습니다.
광야에서는 농사도 지을 수 없습니다. 목축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냥감이 될 만한 짐승들도 없습니다. 주변을 아무리 돌아보아도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늘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곳,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곳,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곳,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주인은 그동안 그들이 섬겼던 애굽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자신들의 주인은 하나님 뿐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광야인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광야 초년생입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놀라운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15장은 이 기적을 보고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를 찬양하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모든 여인들도 춤을 추고 기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것이 바로 5장 21절까지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인 5장 22절, 홍해를 떠나 3일 동안 물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3일 동안 물을 마시지 못했는지, 아니면 3일 동안을 걷는 동안에 그 동안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물을 다 마셔버렸는지 성경에 안 나옵니다만, 아무튼 대단히 목이 말라 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언제는 물이 너무 많아 홍해라는 물이 자신들의 앞길을 막아서 탈이었는데, 이제 물이 없어서 탈입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도 어찌 보면 이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물이 없어 죽을 지경입니다. 그러던 차에 <마라>라고 하는 곳에 왔더니 물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너도 나도 달려들어 마시려고 했었습니다만 그 맛이 어땠대요? 오늘 15장 23절에 보면 물이 써서 마시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 삶 속에서도 처음에는 매우 큰 기대와 희망을 품고 일을 시작합니다. 누구는 상급학교에 진학을 하고, 누구는 유학을 가기도 하고, 누구는 사업장에 취직을 하고, 누구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도 하고, 누구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 모든 일을 할 때에 하나같이 큰 기대와 희망을 품고 시작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좋은 일뿐인가요? 자신이 원하는 학교에 들어가거나, 원하는 회사에 들어가거나, 원하는 사업을 시작하거나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그것만으로 모든 삶이 장미빛인가요? 안타깝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부부사이에도 쓰디쓴 경우가 적지 않게 있을 것입니다.
요즘 일본에 보면 가끔 뉴스에 나오는 것이, 회사에서 너무 일을 많이 시켜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건이 종종 등장합니다. 최근 소식으로는 작년에 4월에 입사했지만 12월달에 회사 기숙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그 이유가 과로로 인한 스트레스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 달 9월에 과로사로 인정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분은 여성이었는데, 그녀의 나이 고작 24살입니다. 동경대를 현역으로 합격해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부모님한테 효도를 하겠다며, 일본 광고회사 중에서 가장 큰 회사에 입사했습니다. 하지만 그 꿈은 1년도 채 되지 못한 12월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왜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쓴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거쳐왔던 길은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좋은 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회사에 들어간 그녀는 남부러울 것 없는 인생을 시작했다고 모두가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쓴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삶 속에서 쓴물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합니까. 오늘 말씀 중에서 15장 25절 전반분까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15장 25절 전반부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モーセは主に叫んだ。すると、主は彼に一本の木を示されたので、モーセはそれを水に投げ入れた。すると、水は甘くなった。……

저는 주일학교 때 배웠던 기억 때문인지, 아니면 예전에 어떤 목사님이 해주셨던 말씀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모세가 나뭇가지를 꺾어서 물속에 던지는 것이 제 기억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면 말씀에는 나뭇가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졌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새번역 성경을 보면 나무 한 그루를 보여주시고, 그 나뭇가지를 꺾어서 던졌다고 되어 있고, 현대인의 성경에는 나무토막을 보여주셔서, 그것을 던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외에는 모두 한 나무를 가리키시고 그 나무를 던졌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렇게 번역이 다양한 것은 그렇게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는 뜻이 되겠지요. 참고로 일본 성경에는 모두 나무 한 그루를 보여주셨는데 그것을 던져넣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나뭇가지를 꺾어서 던져넣었든, 아니면 나무 한 그루를 베어서 그 통나무를 텀벙하고 던져넣었든지 간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한 나무를 말씀하셨고 모세는 그 나무를 던져넣었다는 것입니다.
이 나무가 무엇일까요.
먼저 첫번째로는, 중세 시대의 주석가들의 해석입니다. 그들은 이 나무를 십자가와 연계시켰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대단히 큽니다. 우리는 지금 매우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물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물이 있었어요. 얼마나 기쁩니까. 그래서 허겁지겁 마시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써서 마시질 못해요. 그러면 그 심정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자신이 어떤 회사에 들어가고 싶었어요. 어떤 사업을 시작하고 싶었어요.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싶었습니다. 너무나 간절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만 된다면 행복해질 줄 알았어요. 하지만 쓴물이었습니다. 회사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사업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결혼생활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나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요? 바로 우리 삶 속에 십자가를 던져넣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수님의 보혈이 묻은 십자가를, 내 삶 속에, 쓴물로 가득찬 내 삶 속에 던져넣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물이 달아집니다. 이제야 그 물을 마음껏 마실 수가 있습니다. 회사에서도 기쁨이 넘칩니다. 사업도 원활하게 잘 돌아갑니다. 결혼생활도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해집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십자가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주신 예수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마음이 힘드십니까? 내가 정말 이걸 왜 했나. 괜히 했나. 아, 정말 힘들다. 죽고 싶다……예수 믿는 사람은 그런 생각이 안 든다고요? 누가 그래요? 아닙니다. 힘든 일이 있습니다. 어려움이 닥쳐옵니다. 그럴 때에는 어떻게 해요? 어리석은 철부지,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민족처럼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고 그럴 건가요?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그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했던 주님의 마음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주님의 사랑을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그 생명을 주시면서까지 구원하고자 하셨던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나입니다. 바로 우리 입니다. 우리의 영혼입니다. 우리의 쓴 마음을, 죄로 가득찬 우리의 쓰디쓴 우리 영혼 속에, 예수님의 생명이라는 그 값진 나무를 던져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쓴물이 단물로 바뀌면서 우리의 모든 죄악들을 해결해주신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역사입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주님의 사랑의 역사입니까.

그리고 두 번째. 이처럼 놀라운 사랑을 받은 우리는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바로 이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모세가 아무 나무를 골라서 던진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되어 있었나요? 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한 나무를 가리키셨습니다.


이사야 43장 1절을 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だが、今、ヤコブよ。あなたを造り出した方、主はこう仰せられる。イスラエルよ。あなたを形造った方、主はこう仰せられる。「恐れるな。わたしがあなたを贖ったのだ。わたしはあなたの名を呼んだ。あなたはわたしのもの。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제자를 부를 때, “아무나 나를 따라올 사람은 따라와”라고 했습니까? 아니에요. 하나 하나 친히 제자들을 가리켜 부르셨습니다. 여기 모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わたしを遣わした父が引き寄せられないかぎり、だれもわたしのところに来ることはできません。わたしは終わりの日にその人をよみがえらせます。

우리를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불러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서 귀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찬양을 드리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요?

여호수아 1장 16절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彼らはヨシュアに答えて言った。「あなたが私たちに命じたことは、何でも行ないます。また、あなたが遣わす所、どこへでもまいります。


구약에서 여호수아는 예수님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제 가나안 점령을 앞두고, 믿음이 충만한 이스라엘 민족들은 총사령관인 여호수아한테 말하기를, 여호수아가 명령한 것에 다 따르고, 여호수아가 보내는 곳에는 우리가 갈 것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예수님께서 그 귀한 보혈로 우리의 죄를 모두 사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겨진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순종입니다. 이제 나 자신이 주님이 가리키신 한 그루 나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있는 곳. 군마현 시부카와입니다. 저는 이 이름을 생각할 때마다 참 많은 생각이 듭니다.
v시부카와, 한글로 하면 삽천…라는 뜻이 무슨 한자예요? 한자로 풀이를 하면
v떫을 삽과 내천자입니다. 이 동네 이름의 유래는 1200년대 카마쿠라 막부 때 이 지역을 다스렸던 시부카와 요시아키라고 하는 사람 이름에서 따왔다고 합니다만, 한자로 보면 분명히 쓴 강, 떫은 강입니다. 우리 교회가 쓴 강물이라는 이름의 동네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그렇죠.

주님께서 우리 교회를 불러서 이 땅에 세워주셨다는 것은 그만큼 주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주님의 계획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렇다면 그 쓴 강물에 던져넣는 나무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만이 아니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이 쓰디쓴 세상에 던져넣어지는 한 그루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 때 우리에게는 쓴 물이 단물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언제 어디에 어떤 상황에 있던지 간에 그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지금 그 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계획하신 분은 바로 다름 아닌,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고 우리를 사용해주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어려움이 닥친다면 우리는 먼저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의 십자가를 던져넣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마음 속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가 주님이 지명하신 나무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희생입니다.
나무가 나 혼자 살아보겠다고, 물에 안들어가겠다고 발버둥치면 나무도 죽고 물도 쓴채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무가 물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나무도 살고 쓴 물도 단 물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 물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 주님께서, 우리가 쓴물 속에서 허우적대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하십니다. 내가 내 생명을 내주면서까지 해서 구원한 영혼인데, 쓴물 속에서 허우적대는 우리를 보시고 좋아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던져 넣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을 품고 세상에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주님의 복음을 전할 때, 나 자신이 쓴물에서 단물로 변하고, 내 주변이 쓴물에서 단물로 변하고, 그리고 이 세상이 쓴물에서 단물로 변하는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일에, 주님이 계획하신 놀라운 일에 크게 쓰임 받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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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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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회 주님이 꾸짖으신 이유
2016년 10월 1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4장 35절~41절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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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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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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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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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주님이 꾸짖으신 이유’ 主がお叱りになられた理由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아시는 분들은 많으실 겁니다. 아까 드렸던 찬양에도 있듯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는데, 파도가 몰아치니까 주무시고 계셨던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성난 포도를 잠잠하게 하셨다는 역사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당시 제자들한테만이 아니라 우리한테까지도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여러 기적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매우 은혜로운 말씀입니다만, 저는 언제부터인지 이 말씀을 보면 좀 어딘가가 찝찝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세요. 이 기적이 믿어지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이 어디 한 둘인가요. 아까 드렸던 찬양만 보더라도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고, 앞을 보지 못하는 바디메오의 눈을 뜨게 하셨고, 또한 죽은 나사로까지도 살리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혈루증을 앓던 여인도 그 옷자락을 만지만 했더니 나았습니다. 백부장의 하인도 예수님께서 정말 말씀만 하시니까 그 질병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변화산에서는 영광스러운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이기도 하셨지요.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는 3일만에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 성경은 기록합니다.

v요한복음 21장 25절 말씀에 보면,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イエスが行なわれたことは、ほかにもたくさんあるが、もしそれらをいちいち書きしるすなら、世界も、書かれた書物を入れることができまい、と私は思う。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놀라운 역사가 얼마나 많은지, 그 기록을 다 적으면 그 기록된 책을 이 세상에 둘 수도 없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참 많은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이시기에, 바람을 꾸짖어서 잠잠하게 하신 것도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을 만한 일이라고 여겨집니다만, 제가 느끼는 찝찝함의 이유…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오늘은 함께 말씀을 나누실 때에, 바람과 파도를 멈추게 한 부분과는 좀 다른 부분, 바람과 파도를 멈추게 하신 그 다음 장면에 대해서 초점을 맞춰보도록 하고자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면 어떻게 하라고 적혀 있어요?

v 시편 50편 15절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苦難の日にはわたしを呼び求めよ。わたしはあなたを助け出そう。あなたはわたしをあがめよう。」

어려움이 닥치면 우리는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환날 날에 하나님을 부르고 주님을 찾으면 분명히 우리를 건져내주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어떻게 했어요?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큰 일 났어요. 우리 좀 살려주세요. 이렇게 예수님을 깨웠지요. 이게 뭐예요? 기도 아니에요? 어려움이 닥쳤을 때 제자들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건지시고 제자들을 영화롭게 해주셔야 하는 것 아니에요? 제 말이 틀렸나요? 아니면 성경이 틀렸나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그 다급한 기도를 들으시고는 잠에서 깨어나서 바람을 꾸짖어서 파도를 멎게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셔야 해요?

“그래. 성경에 적힌 대로, 어려움이 닥칠 때 나를 의지했구나. 참 잘했다.”
이렇게 칭잔해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하세요? 왜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왜 이렇게 믿음이 없냐 하고, 오히려 화를 내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러셨을까요? 잘 주무시는데 제자들이 깨워서 신경질이 나셔서 그랬을까요?

자,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번 차근차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갑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풀어오더니 배가 출렁이기 시작합니다. 수면은 오르락 내리락 하고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그것뿐입니까. 바람이 점점 쎄게 불어오더니만, 이제는 출렁이는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배 안에까지 물이 들어와서 가득찼다고 합니다. 이 때 당시 제자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혹시 어러분께서는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의 직업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12 제자들을 살펴보면, 먼저 마가복음 1장 16절~20절에 의하면,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 이 네 사람은 확실히 어부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에 그들을 따라서, 나도 고기나 잡으러 가야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두 명 있는데, 그게 도마와 바돌로매입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이 두 사람도 어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또 빌립이 있는데, 요한복음 1장 44절에 의하면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안드레와 베드로와 같은 동네라는 점도 그렇고, 그리고 이 벳새다라고 하는 동네 이름도 “어부의 집”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 빌립의 직업에 대해서 정확하게 나와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이와 같은 정황으로 볼 때 이 빌립도 어부가 아니었을까 하고 추정을 합니다. 그렇다면 어부가 벌써 몇 명이에요? 다시 한 번 살펴보면, 베드로와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 그리고 나중에 고기를 잡겠다고 그들을 따라 나선 도마와 바돌로매, 거기에다 빌립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제자 12명 중에서 벌써 7명 정도, 그러니까 최대 절반 이상이 어부였습니다. 무슨 취미로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직업적으로 어부였다고 한다면 배에 있어서는 적어도 프로급이었을 것입니다.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그들한테 있어서는 벌써 구름만 보더라도 바람이 얼마나 불 것인지, 비가 얼마나 내릴 것인지, 그리고 언제 어디쯤에서 어떤 물고기들이 잡히는지 정도는 맞출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배가 지금 난리가 났습니다.

v이 장면을 그린 그림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작품이 바로 이 그림입니다.



배 안에까지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앞서 살펴본 것처럼 배 안에 물이 가득 찼다고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물이 그렇게 금방 차요?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고 최소한 어느 정도는 시간이 지났을 것입니다. 그 사이에 그들은 뭘 했을까요? 자기들은 자신들의 실력을 믿고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노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잘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몇 가지가 있었느냐 하면 오늘은 시간 관계상 두 가지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그들의 잘못은 바로 그들의 마음 안에 예수님이 빠져 있었습니다.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도 쉬운 일은 내가 내 힘으로 하고, 어려운 일은 예수님의 힘을 의지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게 맞나요? 예수님이 무슨 비싼 도구라서, 그 힘을 좀 아껴야 해요? 자꾸 예수님한테 부탁하면 예수님이 귀찮아할까봐 눈치가 보여요?


v 요한복음 14장 14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何かをわたしに求めるなら、わたしはそれをしましょう。

라고 기록합니다.
“야, 너 왜 그렇게 쉬운 걸 구하고 그래, 거 귀찮으니까 웬만한 건 니 힘으로 하고 좀 어려운 것만 구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주님을 의지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님께서 행하리라고 말씀해주십니다. 이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이니까. 그런데 제자들, 다른 건 몰라도 이 배에 있어서는 내가 좀 알지. 그러니까 예수님 필요 없어. 내가 할 수 있어. 우리가 우리 힘 만으로 해낼 수 있어. 이렇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점점 악화됩니다. 그러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뭘 하고 계셨어요? 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래?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아? 그럼 너희들 마음대로 해봐.”

이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 속에서 예수님을 지워버리고 내 힘대로 내 실력만을 믿고 하려고 하면, 예수님은 주무십니다. 아무 일도 안 하십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에 미국이나 유럽을 갈 때 어떻게 가요? 예, 보통 비행기를 타고 갑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내 힘만으로 가겠다는 것은, 내 발로 걸어가거나 헤엄쳐서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 얼마나 미련한 노릇입니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크고 작은 문제가 닥쳐올 때,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을 의지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그들의 잘못은 뭐냐 하면, 바로 믿음의 부족이었습니다.

오늘 말씀 중에서 38절을 봅니다.

v 마가복음 4장 38절입니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ところがイエスだけは、とものほうで、枕をして眠っておられた。弟子たちはイエスを起こして言った。「先生。私たちがおぼれて死にそうでも、何とも思われないのですか。」

여기서 이 ‘고물’이라고 하는 것은 배의 뒷부분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한 번 생각해보세요. 지금 폭풍이 불어옵니다. 파도가 몰아치고 배가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뭘 하고 계셨다고요? 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깨웁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바람을 그치게 하셨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외국 신학자가 쓴 주석을 보니까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주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보여 준다 그분이 배의 고물에서 주무신 것은 그분의 인성이며 그분의 말씀에 파도가 잔잔해진 것은 그분의 신성이다”

여러분은 이 해석을 보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주석서를 보고 웃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신성과 인성,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신성과, 종의 모습, 피조물이라고 하는 인성을 모두 갖추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50% 하나님이고 50%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100% 하나님과 100% 사람으로서 오신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완벽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실 수가 없고, 또한 만약 완벽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시라면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갖고 오신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무신 것이 인성이다? 예수님은 정말 피곤해서 깊이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이 깨우기까지 그런 사실을 모르셨나요?
만약에 정말로 그랬다면, 제자들이 깨울 때까지 폭풍이 불고 파도가 몰아친다는 사실을 모르셨다면, 예수님을 깨운 제자들을 칭찬했어야죠. 안 그래요?
“야, 너희들 나를 빨리 깨워서 다행이었어. 깜빡 잠이 들었네. 좀 늦게 깨웠다가는 하마터면 큰 일 날 뻔했잖아.”
이렇게 칭찬을 하셨어야 했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혼내십니다. 뭐라고 하시면서 혼을 내셨는지 기억하시나요?

v 마가복음 4장 40절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どうしてそんなにこわがるのです。信仰がないのは、どうしたことです。」

왜 그렇게 혼내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지금 바람이 불어오고 파도가 밀려오고 배 안까지 물이 가득 찼다는 사실도 알고 계셨습니다.

v 시편 121편 3절~4절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主はあなたの足をよろけさせず、あなたを守る方は、まどろむこともない。見よ。イスラエルを守る方は、まどろむこともなく、眠ることもない。

우리 주님은 밤이고 낮이고 주무시지 않습니다. 졸지도 않으십니다. 어쩌면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해보려고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어땠어요? 자신들의 힘으로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지만 안 됩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됐습니까. 완선히 무서움에 사로잡혀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살려주소서……가 아니에요. 지금 우리가 죽게 됐어요. 그런데 지금 잠이 옵니까? 좀 어떻게 해보세요. 라고 무슨 두려움 속에서 신경질을 부리는 식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이 물위를 걸었을 때 자기도 걷게 해달라고 했던 베드로를 기억합니다.

v 마태복음 14장 28절에 보면,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すると、ペテロが答えて言った。「主よ。もし、あなたでしたら、私に、水の上を歩いてここまで来い、とお命じになってください。」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저벅저벅 걸어갑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요?

v 마태복음 14장 30절 전반부에 보면,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ところが、風を見て、こわくなり、沈みかけたので

아무리 예수님이 거기 계시다고 해도, 우리가 지금 닥친 위기만을 보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우리는 문제해결은커녕 무서움,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지금 폭풍 속에서 배에 타고 있는 제자들, 그들은 예수님을 바라볼 수가 없었어요? 예수님이 거기 안 계셨어요? 아니요, 계셨습니다. 처음부터 함께 배에 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저 눈앞에 닥친 폭풍을 바라보고 높은 파도 속에서 안간 힘을 써봤지만 결국은 기진맥진해서 벌벌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이 아닌 두려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에 대해서 뭐라고 하십니까.

v 누가복음 17장 6절에 보면,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しかし主は言われた。「もしあなたがたに、からし種ほどの信仰があったなら、この桑の木に、『根こそぎ海の中に植われ。』と言えば、言いつけどおりになるのです。

겨자씨 몇 개도 아니에요. 더도 말고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한 번 생각해볼까요? 믿음의 반댓말은 뭐가 있을까요. 물론 믿지 않는다는 것이니까 불신……이라는 말도 있겠지만, 믿음 반댓말은 의심이요 두려움입니다. 의심을 하니까 두려움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전에 한국에 있을 때, 학교 선배 형이 제게 말해준 적이 있습니다. 잠실에 있는 롯데월드에 가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만, 거기 천장에 보면 풍선 모양을 한 놀이기구가 있습니다.


v 바로 이렇게 생긴 것입니다만,



이걸 그 형이 탔다고 해요. 보통 그렇게 그 높이 있는 것을 보면, 아래에서 보는 것보다 위에서 보는 게 훨씬 더 높게 느껴지잖아요? 그래서 윗부분을 보니까, 자기가 보기에 고정되어 있는 부분, 매달려 있는 부분이 너무 작아보이더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아예 그걸 그냥 믿어버리면 되는데, 이게 의심이 생기니까 너무나 무서웠다고 합니다.
저는 보기와는 달리 겁이 많아서 그런 놀이기구는 잘 안 타요. 그 번지점프 같은 것도 저는 해본적이 없고 할 마음도 없습니다. 그런 놀이기구에 대해서는 믿음이 부족하거든요. 놀이기구에 대한 믿음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만큼은 어때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 믿음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어야 하나요? 아니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부분에 대해서 혼을 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의심에 대해서 꾸짖으신 장면을, 역시 같은 마가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 귀신들린 아들을 데려오는데, 거품을 흘리고 경련을 일으키고 난리입니다. 그러면서 그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그 아들을 데려오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 21절~24절
v“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v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イエスはその子の父親に尋ねられた。「この子がこんなになってから、どのくらいになりますか。」父親は言った。「幼い時からです。この霊は、彼を滅 ぼそうとして、何度も火の中や水の中に投げ込みました。ただ、もし、おできになるものなら、私たちをあわれんで、お助けください。」するとイエスは言われた。「できるものなら、と言うのか。信じる者には、どんなことでも
できるのです。」するとすぐに、その子の父は叫んで言った。「信じます。不信仰な私をお助けください。」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어디냐 하면 22절에서 그 아이의 아버지가 한 말입니다.

v 마가복음 9장 22절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この霊は、彼を滅ぼそうとして、何度も火の中や水の中に投げ込みました。ただ、もし、おできになるものなら、私たちをあわれんで、お助けください。」

이게 무슨 뜻이에요? 귀신이 지금 아들을 무척 괴롭힙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이는 다시 말해서, 어차피 안 되겠지만, 그래도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또 혹시 모르니까, 밑져야 본전이니까 뭘 좀 해보든지 말든지……이것입니다. 이 말에 믿음이 있어요? 아니요, 없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을 “밑져야 본전”으로 믿는 마음이 있는지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은 매우 작은 믿음이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아이의 아버지를 꾸짖으십니다.


v마가복음 9장 2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するとイエスは言われた。「できるものなら、と言うのか。信じる者には、どんなことでもできるのです。」

할 수 있거든? 되면 다행이고 안 되면 말고? 그런 믿음에 대해서 예수님은 강력하게 경계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마지막에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왜 마지막에 깨웠습니까. 그들이 생각하기를 예수님은 어부가 아니죠. 인간적으로는 요셉이라고 하는 목수 집에 태어난, 다시 말해서 배에 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이라고 알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무런 도움이 안 되니까 자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제 죽게 됐어요. 두려움이 싹틉니다. 그래서 어차피 죽게된 마당에, 되면 다행이고 안 되면 말고 식의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깨웠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점 때문에 제자들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v 시편 94편 9절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耳を植えつけられた方が、お聞きにならないだろうか。目を造られた方が、ご覧にならないだろうか。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우리를 보시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말을 듣지 않으시겠습니까.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폭풍 속에서도 파도가 밀려오는 그 속에서도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면 살아요?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만 바라보면 삽니다. 다른 이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기도 합니다. 다른 신을 섬기기도 합니다.

v 사도행전 4장 11절~12절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あなたがた家を建てる者たちに捨てられた石が、礎の石となった。』というのはこの方のことです。この方以外には、だれによっても救いはありません。世界中 でこの御名のほかには、私たちが救われるべき名としては、どのような名も、人間に与えられていないからです。」

우리는 오직 예수, 오직 예수, 예수님만을 붙잡으면 됩니다. 예수님만을 의지하면 됩니다. 예수만이 구원이요, 예수만이 소망이요, 예수만이 우리의 인도자되심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v 에스겔 2장 6절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人の子よ。彼らや、彼らのことばを恐れるな。たとい、あざみといばらがあなたといっしょにあっても、またあなたがさそりの中に住んでも、恐れるな。彼らは反逆の家だから、そのことばを恐れるな。彼らの顔にひるむな。

우리는 물리쳐야 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무서움을 무리쳐야 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공포를 물리쳐야 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의심을 물리쳐야 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절망을 물리쳐야 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좌절을 물리쳐야 합니다.

v 사무엘하 22장 33절,
“하나님은 나의 견고한 요새시며 나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며”

この神こそ、私の力強いとりで。私の道を完全に探り出される。

v 시편 115편 9절~11절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イスラエルよ。主に信頼せよ。この方こそ、彼らの助け、また盾である。
アロンの家よ。主に信頼せよ。この方こそ、彼らの助け、また盾である。主を恐れる者たちよ。主に信頼せよ。この方こそ、彼らの助け、また盾である。

언제 어디서 어떤 때든지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방패가 되시고 우리의 도움이시요 우리의 방패가 되십니다. 우리 마음에서 두려움과 의심을 물리치고 온전히 믿음을 이루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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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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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회 놀라운 은혜
2016년 10월 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Last Update 2019. 5. 21

사사기 16장 22절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한국어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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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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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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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놀라운 은혜’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찬송가 305장 우리나라 제목으로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지만, 영어 원어 찬양 제목은 <Amezing Grace> 놀라운 은혜입니다.
한국말 번역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입니다. 정말로 말 그대로 놀랍고도 은혜로운 가사입니다. 물론 영어를 잘 하시는 분께서 그 멜로디에 맞춰서 번역을 하신 것이겠습니다만, 이 가사를 원어로 본다면 또다른 은혜를 맛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어로는,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I'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이 가사를 해석해보면, 먼저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놀라운 은혜, 얼마나 감미로운 소리인가……입니다. 놀라운 은혜가 무엇입니까.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시고 십자가에 달리게 하셔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그 이름을 믿기만 하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이보다 놀라운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 그 감미로운 소리, 감미로운 음성이 참으로 놀랍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That saved a wretch like me.” 이 문장을 직역하면, “그것이 나 같은 wretch를 구했다”는 것입니다. 이 wretch가 뭐냐 하면 사전을 찾아보면 두 가지 의미가 나오는데, 매우 흥미롭습니다. 하나는 가엾고 불쌍한 사람, 또 하나는 악하고 비열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나 같은 사악하고도 비열하고도 가엾고도 불쌍한 인간을 “그것”이 구원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예요? 그렇죠. 바로 앞에 나온 그 놀라운 은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입니다. 그 놀라운 예수님의 은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나 같은 가엾고 불쌍하고 사악하고 비열한 인간을 구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은혜가 나한테 얼마나 감미롭게 여겨지겠습니까.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I once was lost, but now I'm found.” 내가 한 번은 버려졌지만, 그러나 지금 나는 발견되어졌다. 도로 찾아졌다는 것입니다. 이건 수동태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에 의해 발견되어졌다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버린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도 보십시오. 출애굽한 민족들에게 하나님께서 반복해서 말씀하시기를, 예컨대 레위기 26장에 보면, 너희가 내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축복을 주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징벌을 내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I once was lost, but now I'm found.”그 결과 내가 한 번은 버려짐을 당했었으나, 하나님께서 다시 나를 찾아주시고, 나를 건져주셨습니다.
마지막 가사. “Was blind, but now I see.” 나는 앞을 보지 못하고 눈이 멀었으나, “but now I see.” 그러나 지금 나는 봅니다. 지금 나는 볼 수가 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다시 한 번 이 가사를 처음부터 본다면요,

놀라운 은혜, 이 얼마나 감미로운 소리, 감미로운 음성인가.
그 놀라운 십자가의 은혜가 나 같이 사악하고도 가엾은 영혼을 구했습니다.
내가 한 번은 버려졌으나,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주시고 구원해주셨습니다.
내가 과거에는 눈이 멀었었으나, 지금은 내가 볼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놀라운 고백이 이 찬양 안에는 숨어 있습니다.
저는 이 찬양을 생각할 때마다, 특별히 성경에 등장하는 두 사람이 떠오릅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이스라엘 민족의 사사 중 한 사람이었던 삼손이요, 또 한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 사람처럼 악에서 떠난 자가 없다고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신 욥입니다.
먼저 삼손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애굽을 탈출해서 40여년을 방황하다가 마침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여리고를 함락시키고 각 지파에 따라 땅을 분배 받고 난 다음에는 사울이 왕이 되기 전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직접 택하신 사사가 다스렸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여러 사사들이 등장합니다. 사사를 세는 방법에 따라서는 12명이 되기도 하고, 또 사사기 4장에 등장하는 바락이나, 또는 사사기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사사시대와 왕국시대의 분기점이 되는 격동기의 시대에 대해서 적힌 사무엘서에 등장하는 사무엘과 그 두 아들까지 포함하면 16명이 되기도 합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사사들 중에는 우리가 잘 아는 기드온이나 입다, 그리고 여성 사사도 있었죠? 드보라 사사도 유명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인 삼손은, 사사기 15장 20절에 의하면 20년간 이스라엘을 사사로서 다스렸다고 합니다. 삼손에 대해서는 영화가 되기도 하고 해서 꽤 많이 알려진 존재입니다만, 오늘은 특별히 이 삼손에 대해서 잘 몰랐던 부분을 다시 살펴보면서 은혜를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먼저, 사사기에서는 삼손에 대해서 매우 자세하게 기록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만, 사사기 13장에서는 삼손의 출생을 기록하는데, 매우 특별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사기 13장 3절~5절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러므로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
삼손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여인에게 아들을 낳을 것을 알려줍니다. 네가 이제 아들을 낳을 것이니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고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아라, 그리고 태어나면 머리에 삭도를 대지도 말아라. 이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실인이라고 하는 말은 “헌신”이나 “봉사”를 뜻하는 ‘나자르’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나실인이라고 하면 자신이 서원해서 일정기간을 정하고 그 기간 동안을 하나님께 거룩하게 바쳐지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무엘 같은 경우에도 평생동안 나실인으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만, 그것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서원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장 11절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결과 사무엘이 태어나고, 어머니 한나는 자신의 서원대로 아들을 하나님께 바쳐서 대제사장 엘리에게로 데려갑니다. 그런데 삼손의 경우에는 아예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것도 사람이 정한 것도 아니요, 여호와의 사자가 직접 나타나서 지시를 합니다. 이는 매우 특별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사사기 13장 24절~25절에 보면,
“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
이제 삼손이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의 영이 그를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삼손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기를 이른바 힘이 강했다는 인상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삼손을 그려놓은 그림이나 영화를 보면 대단히 근육질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아도 사사기 14장 6절을 보면 맨손으로 사자를 물리치는데 무슨 염소새끼를 찢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힘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 뿐만이 아니죠. 4장 19절에는 사람 삼 십 명을 쳐죽였다고 하며, 15장 14절에 보면, 새 밧줄로 삼손을 결박했지만 그 밧줄이 무슨 불에 타는 것처럼 풀려버리고는 나귀의 턱뼈 하나 가지고 블레셋 사람들을 천 명이나 죽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도 한 사람이 전쟁터에서 총 한 자루 갖고 적군 천 명을 물리친다면 그야말로 전설과도 같은 일이겠지요. 그런데 무슨 대단한 무기도 아닌 나귀 턱뼈 하나 가지고 이렇게 큰 성과를 이루어냈다는 것은 정말 놀랍다고밖에는 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렸던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사사기 14장 6절,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 그가 손에 아무것도 없이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는 것 같이 찢었으나……”
사사기 14장 19절,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 곳 사람 삼십 명을 쳐죽이고……”
사사기 15장 14절,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이렇게 삼손이 힘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삼손이 평소에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자기몸 관리를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의 영이 임해서 이와 같은 놀라운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지요? 삼손은 자신이 나실인이라고 하는 것을 너무나도 가벼히 여겼습니다.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삭의 아들이요 야곱의 형인 에서에 대해서 어떻게 기록합니까. 야곱이 팥죽을 쒀서 에서한테 말하기를, 자기한테 장자권을 팔면 내가 팥죽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에서는 어떻게 해요?
창세기 25장 32절~33절에 보면,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아이구, 내가 지금 배고파서 죽겠는데 그깟 장자권이 뭐가 중요해? 야, 너나 가져라, 그리고 빨리 그 팥죽이나 줘. 라고 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부모와 자식간도 그렇지만 형제지간에 있어서도 그 순서를 사람 마음대로 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순서이고, 하물며 <장자>라고 하는 지위는 그 집안을 대표하는 권위있는 지위이고, 그것을 정해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이를 그깟 팥죽 한 그릇에 팔아넘긴 것입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분명히 기록합니다.
창세기 25장 34절에 보면,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야곱에게 판 이유는,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삼손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나실인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남들보다도 더욱 신실하게 지켜야 하는 입장에 있었지요. 더구나 삼손이 그냥 나실인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의 사사였습니다. 지도자였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남들의 모범이 되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는데, 삼손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사사기 14장에 보면 삼손이 블레셋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려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명기 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방 여인과 혼인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사사이자 나실인이라고 하는 신분도 망각한 채, 부모가 말리는 데도 끝까지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려고 합니다. 더구나 블레셋은 이스라엘 민족과 대립하고 있는, 말하자면 물리칠 대상의 민족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나님이 허락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결국은 거기서 다툼이 생기고, 그 블레셋의 아내는 삼손의 친구한테 넘어가버리고 맙니다. 그랬더니 여기에 화를 낸 삼손이 여우 3백마리를 붙들어서 두 마리씩 꼬리를 묶고 그 사이에 횃불을 달아서 블레셋 사람들 밭에 풀어놓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꼬리에 불이 붙은 여우는 뜨겁워서 날뜁니다. 하지만 두 마리가 하나로 묶여 있으니까 멀리 도망도 못 가고 해서 발버둥을 치니까 온 천지 과수원 밭이 불바다가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게 도대체 사람이 할 짓입니까. 그런데 아직도 자기가 무엇을 잘못한지 모르는 삼손은 사사기 16장에 보면 이제 블레셋의 그냥 여인도 아니고 기생인 들릴라를 사랑했다고 합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여기서 문제는 단순히 기생이라고 하는 점에 있지 않습니다. 기생이라면 무조건 나쁜 거예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성경에서 <기생>이라고 하면 누가 떠오르죠?
예, <라합>이 있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 민족이 여리고성을 공략하는 데에 협조하고, 마침내는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는 큰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삼손의 경우는 다릅니다. 삼손은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이고 나실인이었습니다. 물론 여인을 사랑해서 혼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이방 여인을, 그것도 성경에 보면 정상적인 결혼관계도 맺지 않은, 그야말로 비정상적인 남녀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이제 블레셋 사람은 자신들의 원수인 삼손을 어떻게든 꾀어내어서 잡으려고 들릴라한테 지시를 해서 그 힘의 비밀을 캐려고 합니다.
사사기 16장 5절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 여인에게로 올라와서 그에게 이르되 삼손을 꾀어서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 큰 힘이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를 이기어서 결박하여 곤고케 할 수 있을는지 알아보라 그리하면 우리가 각각 은 일천 일백을 네게 주리라”
만약에 진정한 사랑이었다면 들릴라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겠지요.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들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들릴라는 삼손보다도 돈에 눈이 멀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밤이고 낮이고 못살게 굽니다. 자꾸만 캐묻습니다. 맨 처음에는 엉터리 답을 가르쳐줬지만 그것도 한 두 번이죠.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들릴라가 포기하겠어요? 그녀한테 사랑이란 없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주겠다고 한 돈밖에는 안중에 없어요. 그래서 삼손을 보기만 하면 그 비밀을 자기한테 알려달라고 피를 말립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사기 16장 16절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결국 그 비밀을 말하고 맙니다.
사사기 16장 17절,
“삼손이 진정을 토하여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이제 비밀을 알아낸 들릴라는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 하고는 그 머리털을 밀어버립니다. 이제 신호를 보내자 블레셋 사람들이 들이닥칩니다. 들릴라는 삼손을 깨웁니다. 벌떡 일어난 삼손은 그 모습을 보고 힘을 쓰려고 합니다만, 이제 힘이 나지 않아요. 왜 힘이 나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머리를 깎이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삼손이 힘이 셌던 이유가 단순히 머리를 안 깎아서 그랬어요?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머리를 기르면 모두 삼손처럼 될 수가 있나요? 아니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삼손이 머리를 안 깎았다는 것은 나실인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믿음을 지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방탕한 생활에 믿음도 약해지고, 마침내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망각한채 타락하고 말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사사기 16장 20절입니다. 먼저 중반부까지만 보시겠습니다.
사사기 16장 20절, 중반부까지
“들릴라가 가로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만약에 머리털이 정말로 힘의 근원인데 머리를 깎았기 때문에 힘이 없어졌다면, 이 구절 마지막에는 이렇게 되어 있어야겠지요.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머리카락이 이미 깎인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라고 되어 있겠지요. 그러나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냐 하면, 사사기 16장 20절 전체를 보시겠습니다.
사사기 16장 20절,
“들릴라가 가로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라고 적혀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삼손을 떠나셨기에 힘을 쓸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만, 그러나 그 이유는 하나님이 변덕을 부려서요? 아니요, 삼손이 하나님을 저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떠나버리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곁을 떠나신 후의 삶은 어땠습니까.
다음 구절 사사기 16장 21절
“블레셋 사람이 그를 잡아 그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로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하나님이 버리신 삶, 하나님이 포기하신 삶은 너무나도 비참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그는 태어나기도 전에 천사가 와서 그의 탄생을 예고했습니다. 이런 일은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의 탄생 때나 있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가 태어날 때에도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얼마나 영광된 삶이 예비되고 얼마나 축복된 인생이 약속되었습니까. 그런데 지금 신세가 어떻습니까. 그 찬란했던 과거는 완전히 사라지고, 삼손은 두 눈이 뽑힌 채로 감옥에 갇혀서 노역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기록합니다.
민수기 14장 43절에 보면,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삼손을 배반하신 것이 아닙니다. 삼손이 하나님을 배반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생하고 비참한 지경에 이르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끝나지는 않습니다. 오늘 말씀인 사사기 16장 22절을 봅니다.
사사기 16장 22절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이는 단순히 머리털이 자라기 시작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믿음이 다시금 회복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자, 이제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우상을 모셔놓은 신전에서 큰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자리가 없어서 지붕에도 사람들이 올라가 있었는데, 그 지붕에 있던 사람들만 하더라도 3천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블레셋 사람들 자신들의 원수인 삼손을 불러와서 모욕을 주려고 했습니다. 이 때 삼손의 모습을 성경은 기록합니다.
사사기 16장 28절~30절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삼손이 집을 버틴 두 기둥 가운데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두 눈이 있고 축복 속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안 보이더니 두 눈이 뽑히고 고통 속에 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앞서 찬양에서도 있었지요?
내가 한 번은 버려졌으나,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주시고 구원해주셨습니다.
내가 과거에는 눈이 멀었었으나, 지금은 내가 볼 수가 있습니다.
이 곡을 들으면 삼손과 욥이 생각난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욥기 42장 5절을 봅니다.
욥기 42장 5절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렇게 풍요롭고 축복 속에 있을 때에는 주님께 대해서 그냥 귀로 들었을 뿐이었지만, 온갖 모진 고통을 겪고 났더니 이제 눈으로 주님을 본다는 것입니다.
삼손이 이방 여인, 블레셋 여인에 빠졌다는 것은 단순히 여자를 탐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 대한 무거운 죄를 꼽는다면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간음’입니다. 그러나 이 ‘간음’이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정상적인 혼인관계가 아닌, 쉽게 말하자면 바람을 피우거나 불륜을 하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상숭배를 ‘간음’이라고 합니다. 우상숭배라고 하는 것은 꼭 무슨 동상을 세워놓고 거기에 절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섬기고 하나님이 아닌 재물을 섬기는 것 또한 바로 우상인 것입니다.
신명기 4장 24절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왜 하나님이 질투하시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저버리고 재물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고 세상을 섬긴다면 그것이야말로 간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죄 가운데 있었습니다. 우리가 눈 먼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구해야 합니다. 놀라우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이사야 41장 17절
“가련하고 가난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이사야 58장 9절 전반부,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예레미야 33장 3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사사기 16장 22절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머리털이 자라난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내가 지금, 우리가 지금 아무리 죄 가운데 있었다 할 지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나 자신이 누구입니까. 삼손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값없는 존재예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존재인가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흘려서 얻어진 존재입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값없다고, 별볼일 없다고 여기십니까? 아니요. 절대로 그러면 안 됩니다. 만약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나 자신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모독하는 일이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모독하는 일이 되고 맙니다. 내 값어치, 내 영혼의 값어치는 다름아닌 예수님의 피값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그 놀라운 은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하고,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주님을 두 눈으로 바라보는, 주님을 바라보고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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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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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회 예수께서 기뻐 웃으시더라
2016년 10월 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35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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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께서 기뻐 웃으시더라’ イエスが喜び笑いになられた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신구약 합쳐서 66권, 1189장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절 수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만 대략 3만 천 구절이 조금 넘습니다. 그 중에는 긴 구절도 있고 짧은 구절도 있지요. 그렇다면 긴 구절은 중요하고 짧은 구절은 중요하지 않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장 수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장 수가 긴 책은 바로 시편, 그리고 가장 짧은 책은 요한2서인데, 그렇다면 성경에서 시편이 제일 중요하고 요한2서는 가장 안 중요한가요? 아니요. 성경은 그런 책이 아닙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17절에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聖書はすべて、神の霊感 によるもので、教えと戒めと矯正と義の訓練とのために有益です。それは、神の人が、すべての良い働きのためにふさわしい十分に整えられた者となるためです。

성경은 신구약 모두 약 40명에 의해 쓰여졌습니다만, 이는 그들의 저작물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감동,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내용은 어느 한 개인의 말이 아니라 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의미를 우리가 이해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편에서 150편 전체든 요한2서든 모두 같은 중요성을 가진다고 우리는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중에서 가장 짧은 구절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이는 물론 번역본에 따라서 많이 다릅니다만, 개역개정 성경 중에서 짧은 구절은 두 구절이 있는데,
하나는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구절이죠.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 말씀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
“항상 기뻐하라”

テサロニケ人への第一の手紙 5章 16節
いつも喜んでいなさい。

참고로 이 말씀은 항 ・ 상 ・ 기 ・ 뻐 ・ 하 ・ 라……이렇게 여섯글자입니다만, 신약성경 원문인 헬라어 성경에서도 바로 이 구절, 헬라어로는 <판토테 카이레테>라고 하는데 이 구절이 가장 짧은 구절입니다. 이 짧은 말씀 한 마디에도 얼마나 큰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까. 이왕 말이 나왔으니 이 구절을 조금 더 살펴볼까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18절 말씀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いつも喜んでいなさい。
絶えず祈りなさい。
すべての事について、感謝しなさい。これが、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あなたがたに望んでおられることです。

이 데살로니가전서는, 비록 저자는 바울이지만,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예를 들어서 내가 어떤 심각한 문제를 안고 시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 나한테 와서 하는 말이 “항상 기뻐하세요”라는 말 한 마디 툭 던지고 지나간다면, 여러분 심정은 어떻겠어요?
“이게 누구 속 뒤집어지는 꼴을 보려고 그러나…….”
안 그러겠어요? 아니, 내가 지금 머리가 아파서 미칠 지경인데, 지가 뭘 안다고 나더러 항상 기뻐하래? 누구 지금 팔짝 뛰는 꼴을 보려고 그래? 라는 말이 안 나오겠어요? 그러면 주님이 우리한테 <항상 기뻐하라> 라고 말씀하신 건 우리 속 뒤집어지는 꼴 보고 싶어서 그러시는 거예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뭐죠? 어차피? 나는? 잘 됩니다. 그렇죠. 어차피 나는, 어차피 우리는 잘 됩니다. 왜요?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인도해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친히 역사해주실 것이기 때문이기를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중에 그럴 것 아니에요. 아이 참, 이렇게 잘될 줄 알았으면 그렇게 인상 찌푸려가면서 고민할 필요가 없었네. 괜히 그렇게 잠도 못 자고 가슴 졸여가면서 고민했잖아…그럴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미리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공수표를 난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 끝날까지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리고 짤은 구절은, <항상 기뻐하라>가 몇 글자죠? 예, 여섯 글자입니다만, 똑같이 여섯 글자인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마가복음 6장 41절입니다.

마가복음 6장 42절,
“다 배불리 먹고”
人々はみな、食べて満腹した。

자~ 이 또한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이 말씀도 앞뒤를 살펴보기 위해 마가복음 6장 41절~44절까지 살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6장 41절~44절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

するとイエスは、五つのパンと二匹の魚を取り、天を見上げて祝福を求め、パンを裂き、人々に配るように弟子たちに与えられた。また、二匹 の魚もみなに分けられた。
人々はみな、食べて満腹した。
そして、パン切れを十二のかごにいっぱい取り集め、魚の残りも取り集めた。
パンを食べたのは、男が五千人であった。

이 구절은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만, 왜 이 짧은 말씀이 은혜가 되는가 하면,
다시, 마가복음 6장 42절만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6장 42절,
“다 배불리 먹고”

人々はみな、食べて満腹した。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예수님을 따라 나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제 배가 고픕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역사하셔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사람들로 하여금 먹도록 하셨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어요? 어떤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대요?
예, 바로 “다” 입니다. 여기서 이 ‘다’라는 말씀, 이 말씀이 얼마나 은혜롭습니까. 거기에 예수님을 따라 나온 사람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나온 사람들 모두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전부 다 배불리 먹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감사한 말씀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여기 오늘 모인 우리도, 사랑하는 우리 주님이 주시는 축복의 양식으로 다 배불리 먹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면에, 그러면 영어 성경에서 짧은 구절은 뭐냐 하면, 바로 오늘 말씀, 요한복음 11장 35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입니다.

イエスは淚を流された。

이 구절을 영어로 한다면

“Jesus wept”




자, 이 정도라면 우리 금방 외울 수 있겠죠? 오늘은 영어성경 한 구절을 외우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Jesus wept” 요한복음 11장 35절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눈물에 대해서 모두 세 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 바로 이 첫 번째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흘리신 눈물이고, 두 번째는 누가복음 19장 41절에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그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예감하시면서 우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히브리서에 5장 7절에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기록합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는 예수님의 눈물과 울음을 기록한 구절이 세 곳이나 있는 반면,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예수께서 기뻐 웃으시더라>라는 구절은 어디를 찾아보아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다니실 때 정말로 한 번도 웃지 않으셨을까요? 아니면, 웃으셨지만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 뿐이었을까요?
그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천국에 가서 예수님께 여쭤보지 않는 안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입니다만. 단 한 가지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예수님께서 즐기시러 오신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8장 18절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目がありながら見えないのですか。耳がありながら聞こえないのですか。あなたがたは、覚えていないのですか。

마태복음 9장 36절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また、群衆を見て、羊飼いのない羊のように弱り果てて倒れている彼らをかわいそうに思われた。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사실은 이미 구약에 계속해서 예언되어왔고, 그리고 그 예언대로 오셨습니다. 오신 이유는 물론 이 우매한 백성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천국을 전파하고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며, 죄인을 위로하고 병자들을 치료하시며, 목자 없는 양처럼 고생하는 무리들에게 아버지 하나님으로 이르는 길을 보여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마가복음 16: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それから、イエスは彼らにこう言われた。「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福音を宣べ伝えなさい。

누가복음 17장 6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しかし主は言われた。「もしあなたがたに、からし種ほどの信仰があったなら、この桑の木に、『根こそぎ海の中に植われ。』と言えば、言いつけどおりになるのです。

예수님께서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으며,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다면 우리도 예수님이 행하신 능력을 주님의 이름으로 능히 이룰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예수님께서 하신 일 중에서 가장 힘드신 일. 바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어주시는 일,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악을 해결해주시는 일, 이것만은 예수님밖에 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 외의 모든 일은 우리도 할 수 있지만, 바로 이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서 우리의 죄악을 하나님 앞에서 청산하시는 일은 예수님밖에 하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위해 오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 하물며 예수님을 몇 년 동안 따라다녔던 제자들조차도 예수님께서 몇 번이나 말씀을 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진의, 진정한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땠습니까.

마태복음 26장 35절,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ペテロは言った。「たとい、ごいっしょに死ななければならないとしても、私は、あなたを知らないなどとは決して申しません。」弟子たちはみなそう言った。

라며 끝까지 예수님을 지키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던 베드로와 그의 제자들, 그것이 36절입니다. 그런데 바로 밑, 57절 끝부분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마태복음 26장 56절 후반부,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そのとき、弟子たちはみな、イエスを見捨てて、逃げてしまった。

내가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지키겠습니다……이렇게 말한 그의 제자들은, 그야말로 침도 마르기 전에, 걸음아 나 살려랴 하고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쳐버렸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 뿐인가요?

마태복음 27장 46절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三時ごろ、イエスは大声で、「エリ、エリ、レマ、サバクタニ。」と叫 ばれた。これは、「わが神、わが神。どうしてわたしをお見捨てになったのですか。」という意味である。

이는 시편 22편을 인용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순간 예수님은 제자들로부터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까지도 철저하게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의인으로서 못 박히셨습니까, 아니면 죄인으로서 못 박히셨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한 죄인으로서 못 박히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죄를 지으셨나요?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은 티끌만한 죄도 없습니다. 이 모두가 다 우리의 죄, 나의 죄를 모두 짊어지시고 철저하게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 죄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죄인을 하나님이 사랑하십니까? 아닙니다. 죄인은 철저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맙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은 아무런 죄도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악을 짊어지시고 철저한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버림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이렇게 될 줄 모르셨을까요? 아니야,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베드로나 요한이나 야고보가 나를 구해줄 지도 몰라……그러셨을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시고 제 3일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베드로가, 아닙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16장 23절,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しかし、イエスは振り向いて、ペテロに言われた。「下がれ。サタン。あなたはわたしの邪魔をするものだ。あなたは神のことを思わないで、人のことを思っている。」

예수님께서는 화를 내십니다. 예수님을 지키겠다고 하는 베드로를 칭찬하시기는커녕 오히려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심한 말씀으로 꾸짖으십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십자가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치르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사실, 그들에게 잡힐 때에는 모든 제자들이 자신을 버릴 것이고, 십자가에서는 하나님마저도 예수를 버리신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아셨을까요, 모르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알고 계셨습니다. 스스로 감당하셔야 할 그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과 고난을 이미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어떤 기쁨인들 예수님을 기쁘게 웃으시도록 만들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웃지 않으셨던 것은 어쩌면 우리의 죄악을 짊어지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슬픔과 고뇌와 절망까지도 모두 짊어지셨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비록 이 땅에 계실 동안 예수님께서는 웃지 않으셨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는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순간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온 인생살이를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어떠십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님께 기쁨을 드린 적이 많으십니까. 아니면 눈물을 드린 적이 많으십니까. 혹시 기쁨이 아닌 눈물을 드린 적이, 슬픔을 드린 적이 많지 않으십니까.
저부터도 솔직히 고백하자면, 예수님께 눈물을 드린 적, 슬픔을 드린 적이 훨씬 많지 않나 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내 삶을, 내 행동을, 내 마음을 바라보시고 예수님이 슬퍼하신다면, 눈물을 흘리신다면 이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는 일입니까.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슬퍼하시면, 누가 기뻐합니까. 아무도 기뻐하지 않아요? 아니요, 분명히 누군가가 기뻐합니다. 그것이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마귀 사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슬퍼하실 만한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100% 마귀 사탄은 기뻐서 날뜁니다.
여러분, 예수님과 마귀 사탄이 동시에 기뻐하는 일이 존재합니까? 아니요, 절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슬퍼하시는 일은 마귀 사탄이 대단히 기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원수 마귀 사탄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예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슬퍼하시는 모습이 잘 안 떠오르십니까? 그렇다면 마귀 사탄이 기뻐하는 모습은 상상이 되십니까? 생각해보세요. 내가 어떤 말을 합니다. 어떤 행동을 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마귀 사탄이 기뻐 웃으면서 박수치고 좋아합니다. 이게 얼마나 섬찟하겠습니까.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로마서 12장 1절을 봅니다.

로마서 12장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そういうわけですから、兄弟たち。私は、神のあわれみのゆえに、あなたがたにお願いします。あなたがたのからだを、神に受け入れられる、聖い、生きた供え物としてささげなさい。それこそ、あなたがたの 霊的な礼拝です。

우리의 모습을 보고 누군가는 웃으며 기뻐합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반드시 예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올 한 해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2016년 1월에 세우신 여러분의 목표는 어느 정도 달성 되었습니까? 이제 얼마 남지 않은 2016년,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여기 모인 우리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아직 이 땅에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남은 2016년뿐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남겨진 생애 동안, 정말 예수님께서도 놀라실 정도로,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를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기쁨의 예배, 주님께 크나큰 기쁨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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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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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회 하나님의 시선
2016년 9월 2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시편 31장 24절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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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시선’ 神様の視線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동경에 살 때에 보면, 그 때는 당연히 운전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버스를 타잖아요? 그럼 앞에 신호등이 있습니다. 파란 신호예요. 옆에 보면 보행자 신호는 이미 빨강입니다. 아저씨 조금만 밟으면 저 신호 통과할 수 있어요! 라고 마음 속으로 아주 있는 힘껏 파워를 보내봐도 소용없습니다. 정확히 40킬로로 달리다가 노란 신호로 바뀌면 딱 서요. 그러는 반면, 이 우리 서울 버스는 아닙니다. 정말 내 마음과 버스 기사님의 마음이 일심동체. 하나가 된 것 같아요. 저~기 파란 신호가 보입니다. 기사님~ 갈 수 있어요~ 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벌써 부웅~하고 가속하기 시작합니다. 뭐, 사고는 좀 더 날지 모르겠지만 일단 속은 시원해요. ㅎㅎ 오해하지 마세요. 물론 안전제일입니다.
그런데, 운전하시는 분이라면 이런 경험을 해보신 적이 있으실 지 모르겠어요. 아니, 뭐, 꼭 굳이 운전을 하지 않는 분이라 해도 이런 일을 겪으셨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 바빠서 빨리 가려고 하는데 앞차가 느릿느릿 가고 있어요. 그런 경험 있지 않으세요? 얼마 전에도 시간이 급해서 좀 빨리 가려고 했는데, 그 날이 토요일 아침입니다.

보통 토요일 아침에는 차들이 많지 않거든요. 그런데 제 앞에 차들이 주루룩 가고 있어요. 아무래도 차들이 많으니까 속도가 느려지겠죠. 그리고 맨 앞에는? 예, 딱 보기에도 느려보이는 고물 트럭 한 대가 가고 있습니다. 달리다보니까 저 앞에 신호가 있는데, 파란 불이 들어와 있어요. 조금 빨리 가면 지나갈 수 있을 텐데, 그 차가 느릿느릿 가는 바람에 멈춰서버리고 맙니다. 정말 마음 같아서는 당장 내려서, 신호등에 서 있는 차까지 가가지고는, 여보쇼, 내가 지금 시간이 없어서 그런데 좀 빨리 갈 수 없어요? 아니, 여기가 제한속도가 50킬로인데 40킬로로 가면 어쩌자는 거예요……뭐, 이렇게 따지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습니다만, 그래도 어디 그럴 수야 있나요. 아이구 주여……하고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꼭 급할 때, 정말 1분이 아쉬울 때에는 보면 제가 가는 길 앞에 큰 트럭이 나타나거나, 아니면 여유로움으로 충만하신 어르신이 운전하시거나 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 그럼 이 마음이 어떻겠어요? 부글부글 끓죠, 짜증나죠, 속 터지죠…….
그런데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그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요,


마태복음 28장 20절을 봅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また、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命じておいたすべてのことを守るように、彼らを教えなさい。見よ。わたしは、世の終わりまで、いつも、あなたがたとともにいます。」

참 은혜로운 말씀이죠? 예수님께서 우리와 언제까지 함께 계셔주신대요? 예, 세상 끝날까지 함께 계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시간이 촉박해서 조바심이 나는 그 순간에도 우리 주님께서 함께 해주신다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면 내가 지금 급한지 안 급한지 예수님께서 아실 것이고, 정말 지금 급한데 빨리 가야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요? 그렇죠. 빨리 갈 수 있도록 길을 내주시겠죠. 생각해보세요. 길이 없다면 홍해 바다까지도 갈라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어떻게 알아요? 성경에 써 있죠?


요한1서 4장 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私たちは、私たちに対する神の愛を知り、また信じています。神は愛です。愛のうちにいる者は神のうちにおり、神もその人のうちにおられます。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지금 이 순간에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내 생각대로 지금 되지 않는다고 답답해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실 필요가 있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이 저부터도 쓸데없이 급한 성격 때문에 답답해하고 초조해하고 불안해하고 짜증을 내기도 합니다.
아, 물론 내가 게을러서 내 실수로,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반성을 해야 하겠지요. 그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내가 내 할 도리를 다 하고, 그랬는데도 일이 안 풀리고 꼬이고 하면, 오히려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예, 감사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19절~21절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詩と賛美と霊の歌とをもって、互いに語り、主に向かって、心から歌い、また賛美しなさい。
いつでも、すべてのことについて、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名によって父なる神に感謝しなさい。キリストを恐れ尊んで、互いに従いなさい。

지금으로부터 66년 전에 미국 중부 네브래스카에 있는 웨스트사이트 침례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1950년 3월 1일 수요일 저녁 7시 25분. 교회에서 갑자기 큰 폭발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폭발이었냐 하면 이 충격으로 근처에 있었던 라디오 방송국의 방송이 중단되었고, 주변 집들의 창문까지 깨졌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사고 원인은 당시 교회에 깔려 있던 천연가스가 파이프 사이로 새어와서는 그게 형광등하고 반응을 일으켜서 대폭발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사진이 바로 그 때의 교회 모습입니다.


평소 매주 수요일, 그 시간에는 담임목사님과 성가대원을 포함해서 모두 15명이 7시 30분부터 시작하는 성가대연습을 15분전부터 준비하고 있었고,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만큼 완전히 무너져내린 그 건물 잔해 밑에서는, 믿음 좋고 신실한 15명의 성가대원의 시신들이 발견되었습니다……아니, 발견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15명은 어디에 있었는가 하면 시신을 운반하기 위해 구조대원이 가지고 들어갔던 들것 위에 누워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무너진 교회 모습을 바깥에 서서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이건 무슨 공포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사연인가에 대해서 당시 1950년 3월호 미국 잡지 <라이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1950년 3월 1일, 미국 네브래스카 주에 있는 웨스트사이드 침례교회에서 저녁 7시 25분. 교회가 폭발하여 건물이 모두 무너졌다. 그러나 성가대 대원들은 전원이 지각하는 바람에 기적적으로 화를 면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성가대는 매주 저녁 7시 30분부터 연습이 있는 수요일에는, 평소 연습 시작 15분 전에는 모두 도착해서 연습을 준비할 정도로 시간에는 정확했다고 합니다. 더구나 성가대가 생기고 난 이래 그 날까지 단 한번도 지각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날은 어떻게 된 것이냐 하면,
이게 당시 그 내용을 전하는 기사입니다.


당시 여고생이었던 라도나 반더그리프트는, 수학 숙제를 마치고 성가대연습에 가려고 했었는데, 이상하게 수학 문제 하나가 그날따라 안 풀리더랍니다. 그래서 그 문제 하나를 풀고 가야지……하다가 그만 성가대연습에 지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역시 여고생이었던 루실 존스와 도로시 우드는 서로 이웃에 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날 따라 루실 양이 7시부터 7시30분까지 하고 있던 라디오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듣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루실은 지각했고, 그리고 성가대 연습에 같이 가려고 이 루실을 기다리고 있던 도로시 우드도 덩달아 지각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성가대 반주자였던 마릴린은 본래 연습시작 30분 전인 7시까지 가려고 했었는데,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그만 깜빡 잠이 들어버렸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깨운 시간이 7시 15분이라서 모녀가 지각을 했고요,
선반기술자인 하버트 키프 씨는 중요한 편지를 쓰느라고 늦었다고 합니다.
기술자 하비 알 씨는 마침 그 때 부인이 외출한 상태여서, 두 아들을 성가대 연습에 데려갔어야 했는데, 아이들이 말을 안 들었기 때문에 지각.

속기사였던 조이스 블랙 씨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가려는데 갑자기 몸에 기운이 풀려서 잠시 앉아있다 나오느라고 지각.
담임목사님이신 월터 클램플 목사님은,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3월달이었기 때문에 일찍 교회에 가서 난로를 켜 놓고 다시 집으로 돌아 가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7시 10분까지 도착하려고 사모님과 딸과 함께 집을 나서려고 했는데, 마침 딸아이의 옷에 뭐가 묻은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걸 닦아 내고 다림질을 하는 걸 기다리는 바람에 늦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17세였던 로이나 에스테스 양과 14세인 여동생 사디에 양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자동차에 탔지만, 이상하게 엔진이 안 걸립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친구 라도나 반더그리프트한테 전화를 걸어서, 교회에 갈 때 자기들을 태워가달라고 부탁했습니다만, 분명히 부탁을 했는데, 라도나가 오질 않아요. 기억하세요? 라도나가 아까 뭘 하고 있었어요? 예, 수학 숙제를 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목사님을 포함해서 성가대원 15명 모두 지각하는 바람에 사고를 면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15명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모두 다른 이유로 지각을 할 확률을 누구는 10억분의 1, 또 누구는 100조분의 1이라고 합니다만, 이와 같은 일을 두고 확률을 따진다는 것부터가 벌써 넌센스죠.

이 기사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은 글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This is an act of God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역사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요한복음 14장 13절~14절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またわたしは、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求めることは何でも、それをしましょう。父が子によって栄光をお受けになるためです。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何かをわたしに求めるなら、わたしはそれをしましょう。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랑하는 자기 자식인 안 되는 것을 보고 기뻐할 부모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계시고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ひとり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로마서 8장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私たちすべてのために、ご自分の御子をさえ惜しまずに死に渡された方が、どうして、御子といっしょにすべてのものを、私たちに恵 んでくださらないことがありましょう。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んでくださったことにより、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身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알지도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돈이요? 그렇죠. 그럼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되나요?

누가복음 12장 16절~21절에 보면,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ルカの福音書 12章 16節~21 節
それから人々にたとえを話された。「ある金持ちの畑が豊作であった。
そこで彼は、心の中でこう言いながら考えた。『どうしよう。作物をたくわえておく場所がない。』
そして言った。『こうしよう。あの倉を取 りこわして、もっと大きいのを建て、穀物や財産はみなそこにしまっておこう。そして、自分のたましいにこう言おう。「たましいよ。これから先何年分 もいっぱい物がためられた。さあ、安心して、食べて、飲んで、楽しめ。」』しかし神は彼に言われた。『愚か者。おまえのたましいは、今夜おまえから取 り去られる。そうしたら、おまえが用意した物は、いったいだれのものになるのか。』自分のためにたくわえても、神の前に富まない者はこのとおりです。」

결국 무슨 말씀이에요? 나한테 가장 필요한 것을 나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아세요? 그렇죠.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6장 31절~32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そういうわけだから、何を食べるか、何を飲むか、何を着るか、などと言って心配 するのはやめなさい。こういうものはみな、異邦人が切に求めているものなのです。しかし、あなたがたの天の父は、それがみなあなたがたに必要であることを知っておられます。

이 사실을 모르고 많은 사람들이 하늘을 보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예수님을 원망하고 부모를 원망하고 이웃을 원망하고 나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좋습니다. 하늘을 보세요. 하나님을 원망하려고 하늘을 보든 자기 팔자를 원망하려고 하늘을 보든, 어디 한 번 하늘을 봅시다. 그럼 거기에 뭐가 보이나요? 낮이라면 태양도 보이고 푸른 하늘도 보이지만 구름도 보입니다.

구름을 두 종류로 나눈다고 한다면 흰 구름과 먹구름으로 나눌 수 있겠지요. 하얀 구름은 참 아름답습니다. 하얗다는 것은 깨끗함을 상징하죠. 모양도 여러가지입니다. 계속 움직이고 모양도 바뀌지만 흰 구름은 참 예쁩니다. 그런데 먹구름은 어떻습니까. 물론 가뭄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먹구름은 비구름이니까 반가운 소식이겠으나, 일반적으로 본다면 조금 있으면 날씨가 궂어지는, 안 좋아지는 징조가 바로 이 먹구름입니다.
그런데 예전부터 그야말로 소박한 궁금증이었습니다만, 먹구름은 왜 저렇게 까말까. 아무래도 흰 구름과는 종류가 달라서 그럴까. 뭔가 대단히 큰 차이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얼마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인근의 군마천문대에 갔을 때, 거기서 안내해주시는 분한테 좀 다소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물어봤습니다.
“비구름은 왜 색이 검은 거죠? 뭔가 이유가 있나요?”
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좀 난해한 해설이라도 해줄 줄 알고 겁을 먹었는데, 그 분의 답은 간단했습니다.
“태양빛이 통과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더라구요. 그 말을 들으니까, 약간 허탈하기도 했습니다만, 아, 그렇구나. 빛을 통과하지 않기 때문에 어둡게 보이는구나…하고 이해가 됐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으니까 다시 또 궁금해지더라구요? 왜겠어요?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저…비구름은 왜 빛이 통과하지 않는데요?”
라고 질문을 했어요. 저는 좀 기대를 했어요. 예를 들어서, 비구름은 그 안에 수분이 가득 차서 그렇다는 둥, 아니면 이런 성분과 저런 성분이 이렇게 저렇게 결합돼서 어쩌구 저쩌구…뭐 이런 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비구름은 왜 빛이 통과하지 않느냐에 대한 답변 또한 매우 단순했습니다.
“구름이 두꺼워서 그래요.”
이게 제가 지식이 짧아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단순한 답변을 저는 두고두고 생각해봤습니다.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보니 꽤 많은 부분들이 납득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래에서 위를 보면 흰 구름도 있고 먹구름도 보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비행기 타보셨잖아요? 비행기 창문으로 보는 구름은 이렇게 내려다보게 됩니다만, 구름을 이렇게 내려다볼 때, 혹시 먹구름을 보신 적 있으세요? 만약에 있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아까 그 천문대에 계신 분이 말씀해주신 것처럼, 비구름이 검게 보이는 이유는 태양빛이 통과하지 않기 때문인데, 위에서 보면 태양빛이 내리쬐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구름이 하얗고 아름답게 보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가 비행기를 타기 전에는 천국이 어떤 건지 전혀 몰랐는데, 비행기를 타고 구름을 보니까 정말 천국이 이렇게 아름답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비행기를 타고 보는 구름은 우리가 있는 이 땅에서도 보이는 구름입니다. 그러나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어떤 구름은 아름다운 흰 구름이지만, 또 어떤 구름은 시커먼 먹구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만, 오늘은 한 가지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것은 사람의 시선에서 보는 것입니다. 사람의 시선으로 이 세상을 보면, 누구는 예쁘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누구는 시커멓고 흉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면 어떻습니까.

시편 8편 6절~9절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9.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詩篇 8篇 6節~9節
あなたの御手の多くのわざを人に治めさせ、万物を彼の足の下に置かれました。
すべて、羊も牛も、また、野の獣も、空の鳥、海の魚、海路(うみじ)を通うものも。
私たちの主、主よ。あなたの御名は全地にわたり、なんと力強いことでしょう。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시선입니다.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내 앞에 힘들고 어려운 문제들이 있더라도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이 세상 온 천하의 주관자이신 주님께서 언제까지 함께 하신다고요? 그렇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십니다. 저기 저 꺼멓게 보이는 구름은 그냥 무늬가 검을 뿐입니다. 우리를 넘어지게 할 수도 우리를 절망에 몰아넣을 수도 없습니다. 왜요. 주님께서 함께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람의 눈으로,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이 세상을 바라본다면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있고, 용납될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 내 생각으로는 지금 시간이 없어서 빨리 가야 하는데, 이게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왜 저렇게 저 차들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고, 또 어디 그것 뿐이에요? 왜 내인생의 앞길을 가로막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있습니까.

주님, 도대체 왜 나를 이렇게 괴롭힙니까. 하고 이렇게 원망이 될 때도 있겠습니다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국회의원도 아니고 대통령도 아니고 온 천하만물을 지으시고,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인데, 그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이번 주에도 이 구절을 말씀드립니다. 이번 주만이 아니라 매주라도 이 말씀은 우리가 단단히 기억하고 가슴에 담아두어야 합니다.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々、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従って召された人々のためには、神がすべてのことを働かせて益としてくださ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그리고 오늘 말씀,

시편 31장 24절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雄々(おお)しくあれ。心(こころ)を強(つよ)くせよ。すべて主(しゅ)を待(ま)ち望(のぞ)む者(もの)よ。

우리 주님을 바라는 우리 모두가, 이 세상의 육적인 시선이 아니라 영적인 하나님의 시선, 먹구름이 아닌 흰구름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시선을 가지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고 강하고, 담대하게 세상에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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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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