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회 주님이 꾸짖으신 이유
2016년 10월 1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4장 35절~41절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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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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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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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주님이 꾸짖으신 이유’ 主がお叱りになられた理由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아시는 분들은 많으실 겁니다. 아까 드렸던 찬양에도 있듯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는데, 파도가 몰아치니까 주무시고 계셨던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성난 포도를 잠잠하게 하셨다는 역사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당시 제자들한테만이 아니라 우리한테까지도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여러 기적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매우 은혜로운 말씀입니다만, 저는 언제부터인지 이 말씀을 보면 좀 어딘가가 찝찝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세요. 이 기적이 믿어지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이 어디 한 둘인가요. 아까 드렸던 찬양만 보더라도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고, 앞을 보지 못하는 바디메오의 눈을 뜨게 하셨고, 또한 죽은 나사로까지도 살리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혈루증을 앓던 여인도 그 옷자락을 만지만 했더니 나았습니다. 백부장의 하인도 예수님께서 정말 말씀만 하시니까 그 질병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변화산에서는 영광스러운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이기도 하셨지요.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는 3일만에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 성경은 기록합니다.

v요한복음 21장 25절 말씀에 보면,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イエスが行なわれたことは、ほかにもたくさんあるが、もしそれらをいちいち書きしるすなら、世界も、書かれた書物を入れることができまい、と私は思う。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놀라운 역사가 얼마나 많은지, 그 기록을 다 적으면 그 기록된 책을 이 세상에 둘 수도 없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참 많은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이시기에, 바람을 꾸짖어서 잠잠하게 하신 것도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을 만한 일이라고 여겨집니다만, 제가 느끼는 찝찝함의 이유…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오늘은 함께 말씀을 나누실 때에, 바람과 파도를 멈추게 한 부분과는 좀 다른 부분, 바람과 파도를 멈추게 하신 그 다음 장면에 대해서 초점을 맞춰보도록 하고자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면 어떻게 하라고 적혀 있어요?

v 시편 50편 15절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苦難の日にはわたしを呼び求めよ。わたしはあなたを助け出そう。あなたはわたしをあがめよう。」

어려움이 닥치면 우리는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환날 날에 하나님을 부르고 주님을 찾으면 분명히 우리를 건져내주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어떻게 했어요?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큰 일 났어요. 우리 좀 살려주세요. 이렇게 예수님을 깨웠지요. 이게 뭐예요? 기도 아니에요? 어려움이 닥쳤을 때 제자들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건지시고 제자들을 영화롭게 해주셔야 하는 것 아니에요? 제 말이 틀렸나요? 아니면 성경이 틀렸나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그 다급한 기도를 들으시고는 잠에서 깨어나서 바람을 꾸짖어서 파도를 멎게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셔야 해요?

“그래. 성경에 적힌 대로, 어려움이 닥칠 때 나를 의지했구나. 참 잘했다.”
이렇게 칭잔해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하세요? 왜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왜 이렇게 믿음이 없냐 하고, 오히려 화를 내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러셨을까요? 잘 주무시는데 제자들이 깨워서 신경질이 나셔서 그랬을까요?

자,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번 차근차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갑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풀어오더니 배가 출렁이기 시작합니다. 수면은 오르락 내리락 하고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그것뿐입니까. 바람이 점점 쎄게 불어오더니만, 이제는 출렁이는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배 안에까지 물이 들어와서 가득찼다고 합니다. 이 때 당시 제자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혹시 어러분께서는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의 직업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12 제자들을 살펴보면, 먼저 마가복음 1장 16절~20절에 의하면,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 이 네 사람은 확실히 어부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에 그들을 따라서, 나도 고기나 잡으러 가야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두 명 있는데, 그게 도마와 바돌로매입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이 두 사람도 어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또 빌립이 있는데, 요한복음 1장 44절에 의하면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안드레와 베드로와 같은 동네라는 점도 그렇고, 그리고 이 벳새다라고 하는 동네 이름도 “어부의 집”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 빌립의 직업에 대해서 정확하게 나와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이와 같은 정황으로 볼 때 이 빌립도 어부가 아니었을까 하고 추정을 합니다. 그렇다면 어부가 벌써 몇 명이에요? 다시 한 번 살펴보면, 베드로와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 그리고 나중에 고기를 잡겠다고 그들을 따라 나선 도마와 바돌로매, 거기에다 빌립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제자 12명 중에서 벌써 7명 정도, 그러니까 최대 절반 이상이 어부였습니다. 무슨 취미로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직업적으로 어부였다고 한다면 배에 있어서는 적어도 프로급이었을 것입니다.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그들한테 있어서는 벌써 구름만 보더라도 바람이 얼마나 불 것인지, 비가 얼마나 내릴 것인지, 그리고 언제 어디쯤에서 어떤 물고기들이 잡히는지 정도는 맞출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배가 지금 난리가 났습니다.

v이 장면을 그린 그림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작품이 바로 이 그림입니다.



배 안에까지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앞서 살펴본 것처럼 배 안에 물이 가득 찼다고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물이 그렇게 금방 차요?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고 최소한 어느 정도는 시간이 지났을 것입니다. 그 사이에 그들은 뭘 했을까요? 자기들은 자신들의 실력을 믿고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노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잘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몇 가지가 있었느냐 하면 오늘은 시간 관계상 두 가지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그들의 잘못은 바로 그들의 마음 안에 예수님이 빠져 있었습니다.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도 쉬운 일은 내가 내 힘으로 하고, 어려운 일은 예수님의 힘을 의지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게 맞나요? 예수님이 무슨 비싼 도구라서, 그 힘을 좀 아껴야 해요? 자꾸 예수님한테 부탁하면 예수님이 귀찮아할까봐 눈치가 보여요?


v 요한복음 14장 14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何かをわたしに求めるなら、わたしはそれをしましょう。

라고 기록합니다.
“야, 너 왜 그렇게 쉬운 걸 구하고 그래, 거 귀찮으니까 웬만한 건 니 힘으로 하고 좀 어려운 것만 구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주님을 의지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님께서 행하리라고 말씀해주십니다. 이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이니까. 그런데 제자들, 다른 건 몰라도 이 배에 있어서는 내가 좀 알지. 그러니까 예수님 필요 없어. 내가 할 수 있어. 우리가 우리 힘 만으로 해낼 수 있어. 이렇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점점 악화됩니다. 그러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뭘 하고 계셨어요? 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래?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아? 그럼 너희들 마음대로 해봐.”

이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 속에서 예수님을 지워버리고 내 힘대로 내 실력만을 믿고 하려고 하면, 예수님은 주무십니다. 아무 일도 안 하십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에 미국이나 유럽을 갈 때 어떻게 가요? 예, 보통 비행기를 타고 갑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내 힘만으로 가겠다는 것은, 내 발로 걸어가거나 헤엄쳐서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 얼마나 미련한 노릇입니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크고 작은 문제가 닥쳐올 때,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을 의지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그들의 잘못은 뭐냐 하면, 바로 믿음의 부족이었습니다.

오늘 말씀 중에서 38절을 봅니다.

v 마가복음 4장 38절입니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ところがイエスだけは、とものほうで、枕をして眠っておられた。弟子たちはイエスを起こして言った。「先生。私たちがおぼれて死にそうでも、何とも思われないのですか。」

여기서 이 ‘고물’이라고 하는 것은 배의 뒷부분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한 번 생각해보세요. 지금 폭풍이 불어옵니다. 파도가 몰아치고 배가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뭘 하고 계셨다고요? 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깨웁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바람을 그치게 하셨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외국 신학자가 쓴 주석을 보니까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주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보여 준다 그분이 배의 고물에서 주무신 것은 그분의 인성이며 그분의 말씀에 파도가 잔잔해진 것은 그분의 신성이다”

여러분은 이 해석을 보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주석서를 보고 웃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신성과 인성,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신성과, 종의 모습, 피조물이라고 하는 인성을 모두 갖추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50% 하나님이고 50%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100% 하나님과 100% 사람으로서 오신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완벽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실 수가 없고, 또한 만약 완벽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시라면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갖고 오신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무신 것이 인성이다? 예수님은 정말 피곤해서 깊이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이 깨우기까지 그런 사실을 모르셨나요?
만약에 정말로 그랬다면, 제자들이 깨울 때까지 폭풍이 불고 파도가 몰아친다는 사실을 모르셨다면, 예수님을 깨운 제자들을 칭찬했어야죠. 안 그래요?
“야, 너희들 나를 빨리 깨워서 다행이었어. 깜빡 잠이 들었네. 좀 늦게 깨웠다가는 하마터면 큰 일 날 뻔했잖아.”
이렇게 칭찬을 하셨어야 했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혼내십니다. 뭐라고 하시면서 혼을 내셨는지 기억하시나요?

v 마가복음 4장 40절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どうしてそんなにこわがるのです。信仰がないのは、どうしたことです。」

왜 그렇게 혼내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지금 바람이 불어오고 파도가 밀려오고 배 안까지 물이 가득 찼다는 사실도 알고 계셨습니다.

v 시편 121편 3절~4절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主はあなたの足をよろけさせず、あなたを守る方は、まどろむこともない。見よ。イスラエルを守る方は、まどろむこともなく、眠ることもない。

우리 주님은 밤이고 낮이고 주무시지 않습니다. 졸지도 않으십니다. 어쩌면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해보려고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어땠어요? 자신들의 힘으로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지만 안 됩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됐습니까. 완선히 무서움에 사로잡혀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살려주소서……가 아니에요. 지금 우리가 죽게 됐어요. 그런데 지금 잠이 옵니까? 좀 어떻게 해보세요. 라고 무슨 두려움 속에서 신경질을 부리는 식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이 물위를 걸었을 때 자기도 걷게 해달라고 했던 베드로를 기억합니다.

v 마태복음 14장 28절에 보면,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すると、ペテロが答えて言った。「主よ。もし、あなたでしたら、私に、水の上を歩いてここまで来い、とお命じになってください。」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저벅저벅 걸어갑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요?

v 마태복음 14장 30절 전반부에 보면,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ところが、風を見て、こわくなり、沈みかけたので

아무리 예수님이 거기 계시다고 해도, 우리가 지금 닥친 위기만을 보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우리는 문제해결은커녕 무서움,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지금 폭풍 속에서 배에 타고 있는 제자들, 그들은 예수님을 바라볼 수가 없었어요? 예수님이 거기 안 계셨어요? 아니요, 계셨습니다. 처음부터 함께 배에 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저 눈앞에 닥친 폭풍을 바라보고 높은 파도 속에서 안간 힘을 써봤지만 결국은 기진맥진해서 벌벌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이 아닌 두려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에 대해서 뭐라고 하십니까.

v 누가복음 17장 6절에 보면,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しかし主は言われた。「もしあなたがたに、からし種ほどの信仰があったなら、この桑の木に、『根こそぎ海の中に植われ。』と言えば、言いつけどおりになるのです。

겨자씨 몇 개도 아니에요. 더도 말고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한 번 생각해볼까요? 믿음의 반댓말은 뭐가 있을까요. 물론 믿지 않는다는 것이니까 불신……이라는 말도 있겠지만, 믿음 반댓말은 의심이요 두려움입니다. 의심을 하니까 두려움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전에 한국에 있을 때, 학교 선배 형이 제게 말해준 적이 있습니다. 잠실에 있는 롯데월드에 가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만, 거기 천장에 보면 풍선 모양을 한 놀이기구가 있습니다.


v 바로 이렇게 생긴 것입니다만,



이걸 그 형이 탔다고 해요. 보통 그렇게 그 높이 있는 것을 보면, 아래에서 보는 것보다 위에서 보는 게 훨씬 더 높게 느껴지잖아요? 그래서 윗부분을 보니까, 자기가 보기에 고정되어 있는 부분, 매달려 있는 부분이 너무 작아보이더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아예 그걸 그냥 믿어버리면 되는데, 이게 의심이 생기니까 너무나 무서웠다고 합니다.
저는 보기와는 달리 겁이 많아서 그런 놀이기구는 잘 안 타요. 그 번지점프 같은 것도 저는 해본적이 없고 할 마음도 없습니다. 그런 놀이기구에 대해서는 믿음이 부족하거든요. 놀이기구에 대한 믿음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만큼은 어때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 믿음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어야 하나요? 아니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부분에 대해서 혼을 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의심에 대해서 꾸짖으신 장면을, 역시 같은 마가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 귀신들린 아들을 데려오는데, 거품을 흘리고 경련을 일으키고 난리입니다. 그러면서 그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그 아들을 데려오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 21절~24절
v“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v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イエスはその子の父親に尋ねられた。「この子がこんなになってから、どのくらいになりますか。」父親は言った。「幼い時からです。この霊は、彼を滅 ぼそうとして、何度も火の中や水の中に投げ込みました。ただ、もし、おできになるものなら、私たちをあわれんで、お助けください。」するとイエスは言われた。「できるものなら、と言うのか。信じる者には、どんなことでも
できるのです。」するとすぐに、その子の父は叫んで言った。「信じます。不信仰な私をお助けください。」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어디냐 하면 22절에서 그 아이의 아버지가 한 말입니다.

v 마가복음 9장 22절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この霊は、彼を滅ぼそうとして、何度も火の中や水の中に投げ込みました。ただ、もし、おできになるものなら、私たちをあわれんで、お助けください。」

이게 무슨 뜻이에요? 귀신이 지금 아들을 무척 괴롭힙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이는 다시 말해서, 어차피 안 되겠지만, 그래도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또 혹시 모르니까, 밑져야 본전이니까 뭘 좀 해보든지 말든지……이것입니다. 이 말에 믿음이 있어요? 아니요, 없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을 “밑져야 본전”으로 믿는 마음이 있는지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은 매우 작은 믿음이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아이의 아버지를 꾸짖으십니다.


v마가복음 9장 2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するとイエスは言われた。「できるものなら、と言うのか。信じる者には、どんなことでもできるのです。」

할 수 있거든? 되면 다행이고 안 되면 말고? 그런 믿음에 대해서 예수님은 강력하게 경계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마지막에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왜 마지막에 깨웠습니까. 그들이 생각하기를 예수님은 어부가 아니죠. 인간적으로는 요셉이라고 하는 목수 집에 태어난, 다시 말해서 배에 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이라고 알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무런 도움이 안 되니까 자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제 죽게 됐어요. 두려움이 싹틉니다. 그래서 어차피 죽게된 마당에, 되면 다행이고 안 되면 말고 식의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깨웠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점 때문에 제자들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v 시편 94편 9절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耳を植えつけられた方が、お聞きにならないだろうか。目を造られた方が、ご覧にならないだろうか。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우리를 보시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말을 듣지 않으시겠습니까.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폭풍 속에서도 파도가 밀려오는 그 속에서도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면 살아요?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만 바라보면 삽니다. 다른 이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기도 합니다. 다른 신을 섬기기도 합니다.

v 사도행전 4장 11절~12절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あなたがた家を建てる者たちに捨てられた石が、礎の石となった。』というのはこの方のことです。この方以外には、だれによっても救いはありません。世界中 でこの御名のほかには、私たちが救われるべき名としては、どのような名も、人間に与えられていないからです。」

우리는 오직 예수, 오직 예수, 예수님만을 붙잡으면 됩니다. 예수님만을 의지하면 됩니다. 예수만이 구원이요, 예수만이 소망이요, 예수만이 우리의 인도자되심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v 에스겔 2장 6절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人の子よ。彼らや、彼らのことばを恐れるな。たとい、あざみといばらがあなたといっしょにあっても、またあなたがさそりの中に住んでも、恐れるな。彼らは反逆の家だから、そのことばを恐れるな。彼らの顔にひるむな。

우리는 물리쳐야 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무서움을 무리쳐야 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공포를 물리쳐야 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의심을 물리쳐야 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절망을 물리쳐야 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좌절을 물리쳐야 합니다.

v 사무엘하 22장 33절,
“하나님은 나의 견고한 요새시며 나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며”

この神こそ、私の力強いとりで。私の道を完全に探り出される。

v 시편 115편 9절~11절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イスラエルよ。主に信頼せよ。この方こそ、彼らの助け、また盾である。
アロンの家よ。主に信頼せよ。この方こそ、彼らの助け、また盾である。主を恐れる者たちよ。主に信頼せよ。この方こそ、彼らの助け、また盾である。

언제 어디서 어떤 때든지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방패가 되시고 우리의 도움이시요 우리의 방패가 되십니다. 우리 마음에서 두려움과 의심을 물리치고 온전히 믿음을 이루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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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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