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회 던져진 나무 하나
2016년 10월 2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5장 22절~25절 전반부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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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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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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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던져진 나무 하나’ 投げられた一本の木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430여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던 이스라엘 민족, 430년이라고 하면 애굽에서 종이 된 신분으로 태어나서 종의 신분으로 죽어간 사람들도 무척이나 많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유인이었던 시절을 모릅니다. 보통 한 세대를 30년으로 치는데, 430년이라고 하면 14세대 이상이 됩니다. 이는 참으로 무척이나 긴 세월입니다. 그 동안에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주인인 애굽인들만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진정한 주인이 애굽인들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잊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400년까지는 참았을지 모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아브람이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5장 13절~14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そこで、アブラムに仰せがあった。「あなたはこの事をよく知っていなさい。あなたの子孫は、自分たちのものでない国で寄留者となり、彼らは奴隷とされ、四百年 の間、苦しめられよう。しかし、彼らの仕えるその国民を、わたしがさばき、その後、彼らは多くの財産を持って、そこから出て来るようになる。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400년이 지나면 이스라엘 민족들을 해방시켜주실 것리고 하신 말씀을 믿고 참았는데, 401년이 지나도 402년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믿음이 식어갑니다. 하나님에 대한 실망감이 커져만 갑니다.
에라 이제 모두 끝났다. 하나님은 무슨 하나님. 뭐 어째? 하나님이 아브라함하고 언약을 맺었어? 아휴 됐어. 그거 다 신화야, 옛날얘기야. 꾸며낸 얘기라구. 그러면서 410년, 420년…이렇게 흘러갑니다. 그리고 429년이 된 해에는 어땠겠습니까. 400년이 지나고 한 세대가 지나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세대는 절망과 낙담과 좌절의 세대일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하나님이 구원을 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430년. 하나님은 모세를 택하셔서 애굽으로 보내십니다. 그렇다면 왜 430년이었을까요. 하나님이 깜빡 졸았어요? 아니면 천국 시계가 잠깐 고장이 났었나요? 그것도 아니라면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을 미워해서 그랬었나요?

오늘은 먼저 이 문제부터 살펴볼까 합니다.
우선 창세기 15장 1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다른 나라에서 객이 되어서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400년 동안 아브라함의 자손을 괴롭힐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방에서 객이 된다는 말씀은 아브라함의 자손, 즉 야곱의 아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야곱과 그의 아들들과 자손들 모두가 애굽에 들어가서 살게 됨으로서 성취가 됩니다. 하지만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애굽으로 들어갔을 때 곧바로 종살이가 시작되었나요? 아닙니다. 바로가 요셉을 총리로 세우고 나서 했었던 말을 기억하시나요?

창세기 41장 40절에 보면,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あなたは私の家を治めてくれ。私の民はみな、あなたの命令に従おう。私があなたにまさっているのは王位だけだ。」


그리고 창세기 41장 42절~43절에 보면,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

そこで、パロは自分の指輪を手からはずして、それをヨセフの手にはめ、亜麻布の衣服を着せ、その首に金の首飾りを掛けた。
そして、自分の第二の車に彼を乗せた。そこで人々は彼の前で「ひざまずけ。」と叫んだ。こうして彼にエジプト全土を支配させた。

이 기록을 보면 바로왕이 요셉을 그냥 2인자로 삼은 것이 아닙니다. 거의 자신의 모든 권한을 요셉에게 주었습니다. 정말 1인지하 만인지상의, 그것도 그냥 보통 나라입니까. 당시 최대 강국인 애굽의 총리였습니다. 그리고 바로왕으로부터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습니다. 어느 누가 그에게 대항하겠습니까. 모두가 요셉 바라보기를 왕 바라보듯 했을 것입니다.

그러했던 요셉 총리의 가족이 애굽으로 들어와서는 좋은 땅에서 살았으며, 창세기 50장 3절에 보면,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애굽 사람들이 70일 동안이나 곡을 했다고 합니다. 정말이지 이런 귀빈 대우가 어디 있겠습니까.
야곱이 애굽에 들어가서 바로왕을 만났을 때의 나이가 130세이고, 세상을 떠난 시기는 147세, 즉 애굽에 들어가서 17년 동안 귀빈으로서 부귀영화를 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을 본다면 30세 때 총리가 되고 7년 풍년이 있었고 그 다음에 2년 흉년이 있은 다음에 야곱을 만났기 때문에 당시 요셉의 나이는 39세.
즉, 야곱이 130세 때 요셉은 39세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39세 때 아버지 다시 야곱을 만났고, 야곱이 17년 뒤에 세상을 떠났으니까 요셉 나이 56세 때였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마지막 구절인 50장 26절에 의하면 요셉이 세상을 떠난 시기는 110세라고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그들에게 고난이 닥쳐옵니다. 언제부터지요?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애굽으로 들어간 이후에 몇 년후부터 이와 같은 어려움이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만,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1장 8절~11절에 의하면,
v“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감독들을
v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さて、ヨセフのことを知らない新しい王がエジプトに起こった。
彼は民に言った。「見よ。イスラエルの民は、われわれよりも多く、また強い。さあ、彼らを賢く取 り扱おう。彼らが多くなり、いざ戦いというときに、敵側についてわれわれと戦い、この地から出て行くといけないから。」そこで、彼らを苦役で苦しめるために、
v彼らの上に労務の係長を置き、パロのために倉庫の町ピトムとラメセスを建てた。

즉, 요셉이 죽고 그를 알지 못하는 다른 왕이 즉위한 다음에 이스라엘 민족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애굽 왕 <바로>가 몇 번 등장합니다만, 당연히 모두 같은 왕은 아닙니다.

여기서 신학적으로 세부적인 분석은 하지 않겠습니다만, 단순하게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요셉이 총리가 된 나이는 30세이고,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애굽에 들어갔을 때가 요셉이 39세 때. 그리고 요셉이 110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적어도 야곱 자손들이 애굽에서 귀빈 대우를 받으며 평안하게 살았던 시기는 요셉이 죽은 나이 110, 여기서 야곱의 자손들이 애굽에 들어갔을 때의 요셉의 나이 39를 빼면 71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 이스라엘 자손이 종살이를 한 기간을 최대한도로 늘려보기 위해서, 요셉이 죽은 해에 요셉을 모르는 왕이 즉위해서 곧바로 이스라엘 민족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고 생각해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애굽에 살았던 햇수가 몇 년이죠? 예, 430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들이 애굽에 살았던 그 햇수를 모두 더해서 400년 후에 애굽을 빠져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아까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었죠? 창세기 15장 13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창세기 15장 13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そこで、アブラムに仰せがあった。「あなたはこの事をよく知っていなさい。あなたの子孫は、自分たちのものでない国で寄留者となり、彼らは奴隷とされ、四百年 の間、苦しめられよう。

여기서 그들이 평안하게 살았던 시기가 몇 년이었어요? 예, 71년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종살이를 했던 시기를 늘려본다 하더라도 그 기간은 몇 년이에요? 430 빼기 71년. 359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본래 몇 년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예, 400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400년은 그들이 애굽에 머무는 총 햇수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뭐라고 말씀하세요?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을 괴롭히는 시기가 400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실제로 괴롭힘을 당한 햇수가 몇 년이었어요? 예, 아무리 늘려본다 하더라도 400년에서 41년이 부족한 359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 400년을 다 채우지 않으시고 그 기한이 다 못 되어서 이스라엘 민족들을 해방시켜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말씀이 출애굽기 3장 9절~10절 부분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시기 위해서 애굽으로 보내십니다. 그때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3장 9절~10절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見よ。今こそ、イスラエル人の叫びはわたしに届いた。わたしはまた、エジプトが彼らをしいたげているそのしいたげを見た。
今、行け。わたしはあなたをパロのもとに遣わそう。わたしの民イスラエル人をエジプトから連れ出せ。」

하나님께서는 본래 400년을 채우려고 하셨으나 이스라엘 자손들의 부르짖음을 보시고 그 마음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기한이 넘도록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힌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시기를 하나님의 자비로움으로 감해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몰랐다면 이스라엘 민족들은 하나님을 원망했을 것이요 하나님을 잊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잊었어도 하나님은 그들을 잊이 않으셨습니다.


출애굽기 2장 23절~25절,
v“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v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それから何年もたって、エジプトの王は死んだ。イスラエル人は労役にうめき、わめいた。彼らの労役の叫びは神に届いた。
神は彼らの嘆きを聞かれ、アブラハム、イサク、ヤコブとの契約を思い起こされた。
神はイスラエル人をご覧になった。神はみこころを留められた。

하나님은 그들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리고 400년보다도 일찍 그들을 불러내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그 고마움을 알지 못했습니다. 고마움을 알키는커녕, 그들은 그 때까지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부리던 애굽 사람들을 보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애굽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럼 그 사실을 좋게 생각하셨을까요? 아니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십니까. 배워야죠. 우리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배워야 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배우기에 딱 좋은 곳이 어디입니까. 그것은 바로 광야입니다. 광야는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다윗도 광야를 두 번이나 다녀갔습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셨습니다.
광야에서는 농사도 지을 수 없습니다. 목축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냥감이 될 만한 짐승들도 없습니다. 주변을 아무리 돌아보아도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늘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곳,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곳,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곳,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주인은 그동안 그들이 섬겼던 애굽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자신들의 주인은 하나님 뿐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광야인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광야 초년생입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놀라운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15장은 이 기적을 보고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를 찬양하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모든 여인들도 춤을 추고 기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것이 바로 5장 21절까지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인 5장 22절, 홍해를 떠나 3일 동안 물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3일 동안 물을 마시지 못했는지, 아니면 3일 동안을 걷는 동안에 그 동안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물을 다 마셔버렸는지 성경에 안 나옵니다만, 아무튼 대단히 목이 말라 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언제는 물이 너무 많아 홍해라는 물이 자신들의 앞길을 막아서 탈이었는데, 이제 물이 없어서 탈입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도 어찌 보면 이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물이 없어 죽을 지경입니다. 그러던 차에 <마라>라고 하는 곳에 왔더니 물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너도 나도 달려들어 마시려고 했었습니다만 그 맛이 어땠대요? 오늘 15장 23절에 보면 물이 써서 마시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 삶 속에서도 처음에는 매우 큰 기대와 희망을 품고 일을 시작합니다. 누구는 상급학교에 진학을 하고, 누구는 유학을 가기도 하고, 누구는 사업장에 취직을 하고, 누구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도 하고, 누구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 모든 일을 할 때에 하나같이 큰 기대와 희망을 품고 시작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좋은 일뿐인가요? 자신이 원하는 학교에 들어가거나, 원하는 회사에 들어가거나, 원하는 사업을 시작하거나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그것만으로 모든 삶이 장미빛인가요? 안타깝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부부사이에도 쓰디쓴 경우가 적지 않게 있을 것입니다.
요즘 일본에 보면 가끔 뉴스에 나오는 것이, 회사에서 너무 일을 많이 시켜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건이 종종 등장합니다. 최근 소식으로는 작년에 4월에 입사했지만 12월달에 회사 기숙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그 이유가 과로로 인한 스트레스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 달 9월에 과로사로 인정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분은 여성이었는데, 그녀의 나이 고작 24살입니다. 동경대를 현역으로 합격해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부모님한테 효도를 하겠다며, 일본 광고회사 중에서 가장 큰 회사에 입사했습니다. 하지만 그 꿈은 1년도 채 되지 못한 12월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왜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쓴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거쳐왔던 길은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좋은 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회사에 들어간 그녀는 남부러울 것 없는 인생을 시작했다고 모두가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쓴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삶 속에서 쓴물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합니까. 오늘 말씀 중에서 15장 25절 전반분까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15장 25절 전반부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モーセは主に叫んだ。すると、主は彼に一本の木を示されたので、モーセはそれを水に投げ入れた。すると、水は甘くなった。……

저는 주일학교 때 배웠던 기억 때문인지, 아니면 예전에 어떤 목사님이 해주셨던 말씀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모세가 나뭇가지를 꺾어서 물속에 던지는 것이 제 기억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면 말씀에는 나뭇가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졌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새번역 성경을 보면 나무 한 그루를 보여주시고, 그 나뭇가지를 꺾어서 던졌다고 되어 있고, 현대인의 성경에는 나무토막을 보여주셔서, 그것을 던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외에는 모두 한 나무를 가리키시고 그 나무를 던졌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렇게 번역이 다양한 것은 그렇게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는 뜻이 되겠지요. 참고로 일본 성경에는 모두 나무 한 그루를 보여주셨는데 그것을 던져넣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나뭇가지를 꺾어서 던져넣었든, 아니면 나무 한 그루를 베어서 그 통나무를 텀벙하고 던져넣었든지 간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한 나무를 말씀하셨고 모세는 그 나무를 던져넣었다는 것입니다.
이 나무가 무엇일까요.
먼저 첫번째로는, 중세 시대의 주석가들의 해석입니다. 그들은 이 나무를 십자가와 연계시켰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대단히 큽니다. 우리는 지금 매우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물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물이 있었어요. 얼마나 기쁩니까. 그래서 허겁지겁 마시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써서 마시질 못해요. 그러면 그 심정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자신이 어떤 회사에 들어가고 싶었어요. 어떤 사업을 시작하고 싶었어요.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싶었습니다. 너무나 간절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만 된다면 행복해질 줄 알았어요. 하지만 쓴물이었습니다. 회사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사업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결혼생활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나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요? 바로 우리 삶 속에 십자가를 던져넣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수님의 보혈이 묻은 십자가를, 내 삶 속에, 쓴물로 가득찬 내 삶 속에 던져넣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물이 달아집니다. 이제야 그 물을 마음껏 마실 수가 있습니다. 회사에서도 기쁨이 넘칩니다. 사업도 원활하게 잘 돌아갑니다. 결혼생활도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해집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십자가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주신 예수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마음이 힘드십니까? 내가 정말 이걸 왜 했나. 괜히 했나. 아, 정말 힘들다. 죽고 싶다……예수 믿는 사람은 그런 생각이 안 든다고요? 누가 그래요? 아닙니다. 힘든 일이 있습니다. 어려움이 닥쳐옵니다. 그럴 때에는 어떻게 해요? 어리석은 철부지,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민족처럼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고 그럴 건가요?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그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했던 주님의 마음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주님의 사랑을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그 생명을 주시면서까지 구원하고자 하셨던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나입니다. 바로 우리 입니다. 우리의 영혼입니다. 우리의 쓴 마음을, 죄로 가득찬 우리의 쓰디쓴 우리 영혼 속에, 예수님의 생명이라는 그 값진 나무를 던져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쓴물이 단물로 바뀌면서 우리의 모든 죄악들을 해결해주신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역사입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주님의 사랑의 역사입니까.

그리고 두 번째. 이처럼 놀라운 사랑을 받은 우리는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바로 이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모세가 아무 나무를 골라서 던진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되어 있었나요? 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한 나무를 가리키셨습니다.


이사야 43장 1절을 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だが、今、ヤコブよ。あなたを造り出した方、主はこう仰せられる。イスラエルよ。あなたを形造った方、主はこう仰せられる。「恐れるな。わたしがあなたを贖ったのだ。わたしはあなたの名を呼んだ。あなたはわたしのもの。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제자를 부를 때, “아무나 나를 따라올 사람은 따라와”라고 했습니까? 아니에요. 하나 하나 친히 제자들을 가리켜 부르셨습니다. 여기 모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わたしを遣わした父が引き寄せられないかぎり、だれもわたしのところに来ることはできません。わたしは終わりの日にその人をよみがえらせます。

우리를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불러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서 귀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찬양을 드리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요?

여호수아 1장 16절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彼らはヨシュアに答えて言った。「あなたが私たちに命じたことは、何でも行ないます。また、あなたが遣わす所、どこへでもまいります。


구약에서 여호수아는 예수님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제 가나안 점령을 앞두고, 믿음이 충만한 이스라엘 민족들은 총사령관인 여호수아한테 말하기를, 여호수아가 명령한 것에 다 따르고, 여호수아가 보내는 곳에는 우리가 갈 것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예수님께서 그 귀한 보혈로 우리의 죄를 모두 사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겨진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순종입니다. 이제 나 자신이 주님이 가리키신 한 그루 나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있는 곳. 군마현 시부카와입니다. 저는 이 이름을 생각할 때마다 참 많은 생각이 듭니다.
v시부카와, 한글로 하면 삽천…라는 뜻이 무슨 한자예요? 한자로 풀이를 하면
v떫을 삽과 내천자입니다. 이 동네 이름의 유래는 1200년대 카마쿠라 막부 때 이 지역을 다스렸던 시부카와 요시아키라고 하는 사람 이름에서 따왔다고 합니다만, 한자로 보면 분명히 쓴 강, 떫은 강입니다. 우리 교회가 쓴 강물이라는 이름의 동네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그렇죠.

주님께서 우리 교회를 불러서 이 땅에 세워주셨다는 것은 그만큼 주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주님의 계획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렇다면 그 쓴 강물에 던져넣는 나무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만이 아니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이 쓰디쓴 세상에 던져넣어지는 한 그루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 때 우리에게는 쓴 물이 단물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언제 어디에 어떤 상황에 있던지 간에 그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지금 그 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계획하신 분은 바로 다름 아닌,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고 우리를 사용해주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어려움이 닥친다면 우리는 먼저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의 십자가를 던져넣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마음 속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가 주님이 지명하신 나무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희생입니다.
나무가 나 혼자 살아보겠다고, 물에 안들어가겠다고 발버둥치면 나무도 죽고 물도 쓴채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무가 물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나무도 살고 쓴 물도 단 물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 물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 주님께서, 우리가 쓴물 속에서 허우적대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하십니다. 내가 내 생명을 내주면서까지 해서 구원한 영혼인데, 쓴물 속에서 허우적대는 우리를 보시고 좋아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던져 넣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을 품고 세상에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주님의 복음을 전할 때, 나 자신이 쓴물에서 단물로 변하고, 내 주변이 쓴물에서 단물로 변하고, 그리고 이 세상이 쓴물에서 단물로 변하는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일에, 주님이 계획하신 놀라운 일에 크게 쓰임 받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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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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