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회 무화과나무를 통해 주시는 교훈
2016년 11월 2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1장 12절~14절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マルコの福音書 11章12節~14
“翌日、彼らがベタニアを出たとき、イエスは空腹を覚えられた。葉の茂ったいちじくの木が遠くに見えたので、その木に何かあるかどうか見に行かれたが、そこに 来てみると、葉 のほかには何も見つからなかった。いちじくのなる季節ではなかったからである。するとイエスは、その木に向かって言われた。「今後いつまでも、だれもおまえの実を食べることがないように。」弟子たちはこれを聞いて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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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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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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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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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무화과나무를 통해 주시는 교훈"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마가복음 11장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목적지인 예루살렘에 도착을 하십니다. 예루살렘의 군중들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라고 크게 환호하며 예수님을 맞아들입니다. 그리고 밤이 늦었기 때문에 베다니로 가셨다고 해요.

이 베다니라고 하는 곳은 예수님에 의해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가 있는 동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에서 나오셨는데 그때 예수님께서 시장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뭔가 잡수실 것이 없나 해서 둘러보았습니다. 둘러봤는데 멀리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래, 저기 한번 가 보자 했던 것이죠. 그래서 다가가서 무화과 열매를 찾으셨겠죠.

뭔가 좀 드실 수 있는 열매가 있나, 이렇게 찾아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성경에서는요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됐겠어요? 아, 그러고 보니 무화과 계절이 아니었네. 무화과가 없는 게 당연하구나. 어쩔수 없지 뭐, 편의점에나 가 볼까, 이렇게 예수님께서 포기 하셨어요? 아니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를 향해서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라고 저주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랬더니 그 나무가 어떻게 되었다고 하나요? 마가복음 11장 20절에 의하면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나무의 윗 부분만 썩었거나 죽은 것이 아니라 아주 나무 뿌리까지, 뿌리째 말라 버렸다, 완전히 말라버렸다는 것입니다. 참 무섭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그와 같은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성경 내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께서 예수님의 하신 행동에 대해 납득하십니까?

여러분께서는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오랫동안 이 구절이 이해가 안 갔습니다. 오죽하면 제가 이 구절에 대해 고민하다가 이런 생각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신 이유가 뭐겠습니까?

바로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서죠.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걸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알고 계셨죠.

내가 이제 십자가에 달리게 되는구나.

이렇게 십자가형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예수님은 좀 예민해져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 다음에는요, 성전 정화 사건이 있습니다

성전에서 환전하거나 장사하는 사람들을 채찍으로 몰아내시죠

그래서 아, 좀 예민하셨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좀 너무 심한 경우라고 할 수 있죠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없었던 이유가 뭐라고 되어 있어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마가복음 11장 13절 후반부를 보면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라고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 이건 너무하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무화과가 열릴 시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무화과 열매가 없다고 그 나무를 죽인다는 것은 이것은 좀 지나치신 거 아니에요? 그런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잘못된 행동을 하신 거에요?

너무 과한, 지나친 행동을 하신 거에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바로 이 점을 조심해야 됩니다

하나님도 실수할 때가 있어, 성경도 잘못 쓰인 부분이 있어 라는 생각을 완전히 없애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지 성경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로마서 9장 14절에서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로마서 9장 14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분명히 바울 사도는 기록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하물며 신학자들 중에서도 가끔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서 성경을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자기 멋대로 해석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실수할 수도 있다, 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도 잘못된 부분이 있다 라고 하는 견해 자체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선하시고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 라고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는 문제가 없다, 하나님께는 문제가 없다 라고 하면 문제가 있는 건 뭐예요?

나한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 되는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그런 관점에서 좀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많은 성경 주석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열매가 열리기 전에 작은 무화과 열매가 열린다고 해요. 그래서 예수님도 무화과가 열리기 전에 있어야 할 작은 무화과를 찾으셨다는 것입니다.

조금 납득이 가십니까?

솔직히 저는 이 주석을 읽고도 저의 물음표를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문맥상으로 도저히 납득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주목하는 부분은 재차 말씀드렸던 마가복음 11장 13절 후반,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에서 무화과 열매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게 무엇이냐

바로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맥상 이렇게밖에 해석이 안 되는 것이죠.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주석도 중요하지만은 원문을 보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은 히브리어, 신약은 헬라어 성경을 연구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죠.

그런데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전문가가 아니라면 자칫 오역을 할 위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같은 단어라 하더라도 문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경우도 적지 않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번역본을 다양하게 보는 방법을 택하고 있습니다.

한글 번역본도 많이 있죠. 우리가 주로 보는 개역개정, 그 전에는 개역한글, 새번역, 표준새번역 등등이 있었고 현대인의 성경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일본어, 영어 성경들을 보고요.

어쨌든 이 구절과 관련하여 많은 번역본을 찾아보니 한국어는 물론이고 영어나 일본어 모두 다 예수님께서 무화과 열매를 찾으실 수 없었던 이유로서 무화과 때가 아니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맥을 무시하면서까지 아니야, 아니야, 그때는 원래 작은 열매가 있을 시기였다고 해석을 하는 것이 오히려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막혀 버렸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을 했습니다. 일본의 형사들에게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현장 백번"

아무리 열심히 정보를 모아도 단서를 찾아낼 수가 없어서 수사가 꽉 막혀 버렸을 때 사건이 일어난 현장에 다시 가 보면 거기서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돌아갈 신앙의 현장은 어디일까요. 그렇죠, 다름 아닌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다시 한번 읽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지금까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재미있는 부분이 보였습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시장하셨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쪽으로 가신 거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달력을 보시고 요즘 무화과가 열릴 시기네, 하고 가셨어요? 그렇지 않죠. 그럼 대체 무엇을 보시고 무화과나무 쪽으로 가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까?

마가복음 11장 13절 전반부를 보시면,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달력을 보시고 무화과 열매를 기대한 게 아니라 그 무성한 잎사귀를 보고 "저렇게 잎사귀가 많으니 열매도 있겠지" 라고 생각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대부분의 나무에는 예외없이 이파리가 달려 있습니다. 그 이파리는 수분과 햇빛과 이산화탄소를 섞어서 영양분을 만들어 내고 이 영양분을 나무 전체 공급합니다.

그렇다면 이 이파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바로 꽃을 피우게 하거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죠. 꽃을 피워 꿀벌 같은 곤충들을 불러들이고 그 곤충에게 꿀을 주면서 화분을 묻혀 번식을 합니다. 나무에 따라서는 열매를 맺고 이 열매를 동물들이 먹으면 그 배설물로 씨를 퍼뜨리는 나무도 있습니다.

그런데 잎사귀만이 무성했고 거기는 꽃도 없고 열매도 없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은 "잎사귀"가 갖는 두가지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번째로 잎사귀는 힘을 의미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잎사귀는 영양소를 만드는 힘, 능력, 권한이 있습니다. 그 능력을 사용해 영양분을 만들어 내고 자기 자신에게 공급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능력을 사용하는 최종적인 목적이 뭐라고요? 그렇죠, 바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매를 맺을 수 없었다면 이것은 뭡니까? 잎사귀가 할 도리를 제대로 못 한 거죠.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주인이 세 명의 종에게 그 능력에 따라서 재산을 맡깁니다

한 사람에게는 5달란트, 또 한 사람에게는 2달란트, 마지막 한 사람에게는 1달란트를 맡깁니다. 그리고 주인이 돌아와서 그들에게 재산을 어떻게 썼는지 묻습니다. 정산을 하는 것이죠. 5달란트를 맡은 종은 장사를 해서 10달란트로 돈을 불렸습니다.

2달란트 맡은 종도 장사를 해서 4달란트로 불렸죠. 이 두 종들은 그 금액에 차이는 있긴 합니다만 주어진 능력과 재산, 즉 주어진 잎사귀를 사용해서 그에 따른 결과를 남겼습니다. 그렇기에 주인은 이 두 종을 향해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라고 아주 똑같은 칭찬의 말씀을 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종은 어떻게 했습니까? 주인이 맡긴 1달란트를 쓰지 않고 땅 속에 묻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것을 캐내어 주인 앞에 내놓았습니다. 이것을 본 주인은 "악하고 게으른 종아" 라고 아주 혹독하게 혼을 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5장 28절에 의하면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그리고 30절에는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그 나무에 이파리가 많이 달려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잎사귀를 주셨죠? 그것은 하나님이 바로 기대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회사 사장이 어떤 사람을 부장으로 임명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을 과장으로 임명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직책에 맞는 권한을 가지게 됩니다. 그 권한이 왜 생기는 것이에요?

그 권한을 써 사장이 기대하는 성과를 올리라는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사장이 기대하는 성과는 없고 부장이나 과장님은 자기 멋대로만 행동하고 부하직원에게 으시대기만 합니다. 만일 그런 직원을 내버려 둔다면 회사가 어떻게 되겠어요?

망하죠.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그런 직원들을 해고하거나 강등시키거나 해서 주어진 권한을 빼앗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성경에서 살펴본 뿌리째 말라버린 무화과나무 혹은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쫓긴 무익한 종의 최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주인처럼 반드시 정산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학교 다닐때는 시험을 치죠. 그럼 언제 시험을 칩니까?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상태에서 시험을 치지는 않습니다.

먼저 여러 과목을 배우고 그 배운 내용을 잘 알고 있는지 시험을 치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반드시 시험의 시기가 도래합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을 믿은지 얼마 안 되는 새신자에게는 오지 않습니다. 교회다니고 몇년 지나고 직분도 받고 권한이 늘어가기 시작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점점 존경의 눈빛을 받기 시작하고 조금 목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할때, 바로 그때 예수님은 여러분에게서 열매를 찾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주님께서 힘을 주셔서 제가 이렇게 성과를 남겼습니다, 라고 열매를 내밀 수 있으면 그야말로 훌륭하게 합격을 한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고 칭찬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아무런 열매도 내밀지 못하고 아무것도 보여 드릴 것이 없고 그냥 나한테 주신 것 그대로 땅에 묻었다가 내 보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말 큰일나는 것이죠. 무익한 종이라고 꾸중을 듣고 바깥 어두운데 쫓겨날지도 모릅니다. 또는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처럼 뿌리채 말라버릴 지도 모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 보면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힘과 능력 그리고 권한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써야 한다는 것을 믿으시고 그대로 행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의 축원합니다.

그리고 잎사귀가 갖는 두 번째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입니다.

교회에서도 가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오로지 하나님과 관련된 일만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이 계세요.

자기 일이 중요해? 하나님 일이 중요해? 자기 일은 중요치 않아, 하나님 일만이 중요해,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인데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20장 8절에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하나님의 날이죠 그래서 거룩하게 지키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너희들 7일 동안 모든 것을 다 나한테 바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했어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출애굽기 20장 9절 보면 "엿새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의 생업도 중요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이죠.

그리고 그 생업을 대충 대충 하나요? 아니에요 열심히 일을 해야만 합니다.

노력이라고 하는 건 당연히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럼 무조건 무작정 노력만 하면 되느냐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목적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예수님이 오신다면 우리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겠죠. 에녹이나 엘리야처럼 하늘로 올라가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누구나 다 똑같이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는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인간의 마지막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되풀이해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우리는 이 심판에서 반드시 합격해야 합니다.

만약 대학이나 취업, 자격증 시험이라면 한번 떨어져도 괜찮아요 다시 기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만은 절대로 떨어지면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의 심판은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시험인 것이죠.

그럼 이를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를 들어 축구경기를 생각해 봅시다. 축구는 어떻게 해야 이깁니까? 공을 상대편 골대에 많이 넣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이길 수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반드시 규칙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골을 많이 넣었다 하더라도 하나도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면 그 골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24절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라고 말씀합니다.

규칙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열심히 뛰기만 한다고 해서 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을 받는 사람은 딱 한 사람, 규칙을 지키면서 경기를 하는 사람이 상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3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무작정 빨리 달리기만 하면 금메달을 받을 수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푯대를 향해서 달려야지만 상을 받을 수 있다고 성경을 말씀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사람의 방법, 사람을 힘만을 의지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두 눈을 딱 감고 그냥 무작정 달리기만 하는 비운의 선수와도 같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잎사귀만 무성하고 꽃도 없고 열매도 없는 무화과나무와도 같은 것입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자기의 지식이나 능력만을 믿고 이 세상의 부, 명예, 권력을 위해 정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달리기만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한 목표점, 진정한 푯대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만 합니다

푯대라고 하는 것은 누가 정합니까?

예를 들은 올림픽에서 마라톤을 할 때 골인지점을 선수가 정합니까?

아니죠. 주최측이 정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푯대, 골인지점은 누가 정합니까?

우리가 정합니까? 내가 생각하기에 내 인생의 목표는 이거다 이렇게 정하면 그것이 우리 인생의 진정한 목표가 됩니까?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푯대는 우리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정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우리의 삶의 주인되신 하나님께서 푯대를 세우시고 우리는 그 골인지점을 통과해야만 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의지해야만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서 주님께서 주신 힘과 능력으로 주님께서 기대하시는 열매를 맺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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ハレルヤ!神様を愛する方はアーメン!と告白しましょう。アメーン。今日は皆さまと一緒に「いちじくの木を通して下さる教え」무화과나무를 통해 주시는 교훈というテーマで恵みを分かち合いたいと思います。

マルコの福音書11章によると、イエス様はとうとう、目的地であるエルサレムに到着し、
「ホサナ。祝福あれ。主の御名によって来られる方に。祝福あれ。いま来た、われらの父ダビデの国に。ホサナ。いと高き所に。」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と、群衆によって大歓声 で迎えられます。そして、夜も遅かったのでベタニヤに行かれました。このベタニヤというところは、イエス様により生き返ったラザロが住む町です。そして次の日、イエス様は弟子たちと共にベタニヤから出てこられますが、そのとき、イエス様は空腹を覚えました。それで何か召しあがれるものはないものかとお探しになったのでしょうね。そうしたら、遠くに 葉 の生い茂ったイチジクの木が目に入りました。よし、あそこに行ってみよう、と思ってその木に近づきました。そして、その木の中であちこちを探されましたが、どうでしたか?はい、いくら探しても 葉の他には何も見つける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
その理由を聖書は、「いちじくのなる季節ではなかったから」だと書き記されております。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その結果どうなりましたか?ああ、そういえばイチジクのなる季節じゃないから、イチジクの実が無いのは当然か、しょうがない、コンビニでも行くか、と諦められましたか?
いいえ、イエス様はその木に向かって「今後、いつまでも、だれもおまえの実を食べることのないように。」と言われたというのです。
そうしたら、どうなりました?

マルコの福音書11章20節によると、
「朝早く、通りがかりに見ると、いちじくの木が根まで枯れていた。」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と書かれています。ただ、枯れたのではなく、木の根っこまで完全に枯れていたというのです。怖いですね。イエス様の言葉にはこのような力があります。
みなさん、聖書のこの内容について皆さまはどう思われますか?皆さんはこのイエス様の行いに納得がいきますか?おなかがすいて、何か食べようと思ってイチジクの木の方に行ったら、何もなかった。それに腹を 立てて、その木を枯らしてしまったんです。
私は長い間、この部分がどうも理解できませんでした。そして、こんなことを思ったこともありました。
「イエス様がエルサレムに行かれた理由は十字架にかけられるためだ。その時が迫ってきてるのだから、あるいはイエス様も神経質になっていたのかもしれない」
しかし、それにしてもこれは厳しすぎますよね。いや、厳しいのはそれだけではありません。イチジクの実が無かったのはどうしてだと言っていますか?

マルコの福音書11章13節の後半、
「いちじくのなる季節ではなかったから」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だと言うんです。
いやいやいやいや、イエス様、これはあんまりでしょう。じゃあ、これはどういうことですか?イチジクがなる季節でもないのに、それが無かったからと言って木を枯らしてしまうというのは、これは、せっかちにもほどがある。あまりにもひどい。そうでしょう?
では、イエス様は間違ったことをされたのですか?私たちが聖書を読むときには一つ気をつけなけらばなりません。それは、「神様は間違 ったこともする」という可能性を全面的に否定することです。

ローマ人への手紙9章14節には、こう書かれています。
「それでは、どういうことになりますか。神に不正があるのですか。絶対に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とパウロは告白しています。神様を信じる人の中にも、ましてや神学者の中にも、ときおり、そのように考えている人がいて、聖書を、そして神様の働きを自分勝手 に解釈してしまう場合がありますが、「神様は間違ったこともする」あるいは、「神様の御言葉である聖書には間違いもある」という見解自体そのものが間違 っていると私たちは信じなければなりません。

私もそのような観点から、この部分を知ろうとしました。何かしら理由 があるだろうと思って、いろいろと調べてみましたが、大概の聖書の注釈書には次のように書かれています。
イチジクのなる季節になる前にも実は、一般的なイチジクの実がなる前の早い時期に、小さなイチジクの実を結ぶ時がある。だから、イエス様もその普通の実がなる前の、その、あってしかるべき、小さいイチジクの実を探されたのだが、見つけ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というのです。皆さんは納得ができますか?もちろん、なるほど、と、思うことはできますが。だとしたら、次の文脈が 理解できません。それは、先ほどにも触れた個所である、マルコの福音書11章13節の後半、「いちじくのなる季節ではなかったから」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だという部分です。
聖書を解釈するのにあたっては、もちろん、原文を見るのが一番いいでしょうが、ヘブル語やギリシャ語を専攻した専門家でなければ、いくら一生懸命勉強 したといえども2~3年です。このような場合 は、浅い知識で原文を解釈すると、誤解を招く恐れも少なくはありません。たとえば、単語や文法的に同じであったとしても、文脈などの関係で二つ以上の解釈が可能な 場合も多々あるからです。ですから、私は、そうした、その道の専門家 が翻訳をした訳文を参考にしますが、日本語はもちろん、英語、韓国語の訳文すべてが、「イエス様がイチジクの実を見つけ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理由 、「イチジクのなる季節ではなかったから」と説明しているのです。この文脈を無視してまでも「いや、その時期には実は小さなイチジクの実があったんだ」と解釈するには少なからず無理がある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した。神学をたくさん 勉強した方たちは納得できたかは知れませんが、私にはどうも納得がいきません。さて、行き詰ってしまいました。では、こうなったときはどうすればいいのか。
例えば、事件を調べる刑事たちにはこのような格言があるといいます。それは「現場百回」という言葉 です。いくら必死に走り回って情報を集めたり資料を調べても何の手掛かりを見つけることができず、行き詰 ったら、どうしたらいいか。それは、事件が起きた現場に戻ってみること、そして、そこから新たに捜査を調べると新しい展開につながることがあるということです。
では、イエス様を信じる私たちにとって信仰の現場とはとこですか?はい、それは、ほかでもない、聖書です。私はもう一度本文 を読んでみました。するとそれまでに気づかなかった面白い部分が見えてきたんです。
今日の本文によると、イエス様は空腹を覚えられました。そして、イチジクの木の方へ行かれたのでありますが、その時、イエス様はカレンダーをご覧 になって、ああ、今はイチジクの実がなっているころだろうから、どれどれ、ちょっと食べてみるか、と思われましたか?いいえ、違います。では、何をご覧 になったと書かれていますか?
はい、マルコの福音書 11章13節 前半によると、
「葉の茂ったいちじくの木が遠くに見えたので…」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ということです。つまり、イエス様はカレンダーをみてイチジクの実を期待されたのではなく、葉 が生い茂っているのを見て、ああ、イチジクの実があるだろうと、お思いになったということです。
皆さん、ほとんどすべての木には漏れなく葉っぱがついています。葉 っぱは木の根っこを通して吸い上げられて水分を使い、太陽の光と二酸化炭素によって光合成をおこない、そうして作られた栄養分を木全体に供給させます。
それでは、この葉っぱの究極的な、最終的な目的は何でしょう。はい、それは、花を咲かせたり、実を結ぶことにあります。花を咲かせてミツバチなどの昆虫 を集め、花粉をつけさせ子孫を増やします。木によっては実を結ばせ、動物たちに食べさせることによって、やはり繁殖をさせます。ですが、葉 っぱだけが生い茂っていて、そこには花もなければ実もないというのは、どういうことでしょうか。今日はここで葉 っぱの持つ二つの意味について考えてみましょう。

まず、第一に葉っぱは力を意味します。先ほど申し上げましたように、葉 っぱがあるというのは栄養素を作る力、能力があるということ、権限があるということです。その力や能力、権限を使うことで養分を作り出し、自分自身 に供給していきます。しかし、そのような能力が使われる最終的な目的は何ですか?はい、実を結ぶことです。ですが実を結ぶことができなかったらどうでしょう。それは何の意味もなさないものになってしまうのです。マタイの福音書25章では、主人が3人のしもべたちにその能力に応じて財産を預けます。一人には5タラント、もう一人には2タラント、そして最後の一人には1タラントを預けました。そして主人が帰ってきて彼らがその財産をどのように使ったのか、検査をします。5タラントをもらったしもべは、 商売をして10タラントに増やしました。2タラントをもらったしもべも商売をして4タラントに増やしました。この二人のしもべは、もちろん、その金額 に違いはあれど、与えられた財産、能力、つまり葉っぱを使い、それに応じた結果を残せたので、主人は二人に対して

『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あなたは、わずかな物に忠実だったから、私はあなたにたくさんの物を任せよう。主人の喜びをともに喜んでく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という、全く同じ誉め言葉を授けます。
しかし、最後のしもべはどうでしたか?主人が預けた1タラントを使わずに地の中に埋めてしまいました。そして、主人が帰ってきた後、それを掘り出して主人に返したのです。これを見た主人は何と言いましたでしょうか。主人は彼に対して、『悪いなまけ者のしもべだ。』 악하고 게으른 종아 とこっぴどく叱ります。それだけではありません。

マタイの福音書25章28節によると、
「だから、そのタラントを彼から取り上げて、それを十タラント持っている者にやりなさい。」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そして30節には
「役に立たぬしもべは、外の暗やみに追い出しなさい。そこで泣いて歯ぎしりするのです。」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と書かれています。
その木に葉 っぱがついているのはなぜですか。それは授けた方がいるからです。そう、神様が授けてくださったんです。どうしてですか?それはまさしく神様が期待するものがあるからです。会社の社長がいます。ある人を部長にしました。ある人を課長にしました。その人にはその 役職 に値する権限が生まれます。その権限とはどんなことでしょうか。それは、その権限を使って社長が期待する成果を上げることに他ありません。しかし、社長がいくら待ってもその部長や課長はその権限を使って威張ってばかりいたり、 自分勝手なことをしています。もしそんな社員を野放 しにしておくと、会社はどうなるでしょう。はい、当然すぐにつぶれてしまいます。ですからそのような事態にならないようにするためには?そうです、そんな社員はいち早く首にするか、または与えれられていた権限を奪うしかないでしょう。まさにこれが、根っこまで枯れてしまったイチジクの木であり、外の 暗闇に追い出された役に立たないしもべのなれの果てです。

私たちが忘れてはならないのは、このマタイの福音書25章に出てくる主人のように必ず検査する時が訪れるということです。
学校では中間試験もあれば期末試験もあります。では、その試験はいつ行われますか?まさか、何も習 っていないのに試験を受けろといは言いません。その試験に出てくる内容をすべて習 った後になって、今まで教わった内容がしっかり頭の中に入っているのかどうかをテストするんです。
信仰の中にあっても、必ずテストの時期が訪れます。でも、まだイエス様を信じて間もない人のところには来ません。教会に通って数年がたち、役職 ももらって権限が増え始める、人々からだんだん尊敬のまなざしを受け始める、ちょっと鼻が高くなり始める、まさにその時、イエス様は私たちから木の実を探し始めます。そして、イエス様の、み前に、「 貴方 が下さった力を用いて、このような成果を修めることができました」と、出すことができたら見事合格です。イエス様は「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と、この上ない誉め 言葉と同時に、素晴らしい褒美を授けられるでしょうが、万が一、何も出すものがないとすると、これは大変なことになります。役に立たないしもべだとして、外の 暗闇に追い出されるかもしれません。または、呪われた木のように枯れてしまうかもしれません。

第一コリント人への手紙10章12節をみると、
「ですから、立っていると思う者は、倒れないように気をつけなさい。」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と、書かれています。 神様が私たちに下さった力や能力、そして権限を神様の意向に沿うように使う必要があるということをわすれないようにしましょう。

そして、葉っぱの持つ二つ目の意味について考えてみましょう。 葉 っぱの持つ二つ目の意味、それは何かというと「人間の努力」です。教会の中でも時々誤解をされている方がおられますが、神様を信じる人は、何事にも神様の仕事だけを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か?もし、そうだったとしたら自分の仕事ができないでしょう。聖書にもこう書かれています。

神様は
出エジプト記20章8節で
「安息日を覚えて、これを聖なる日とせよ。」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と言われましたが、7日間すべてを私に捧げよ、とまでは言われませんでした。
その次の9節では、

「六日間、働いて、あなたのすべての仕事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とおっしゃいます。つまり、私たちの生業もとても大事だと聖書には書かれているんですね。そして、この生業をするためには、一生懸命働 かなくてはいけません。努力は当然大事です。では、とにかく努力さえすればそれでいいのでしょうかというと、必ずしもそうとは限りません。私たちには間違 いなく目的があります。
私たちの生きている間にイエス様が来られれば、私たちは死を経験せずに父なる神様の御国へ入ることはできるでしょうが、そうでない場合 は、誰しも一度は「死」という過程を経ることになります。

ヘブライ人への手紙9章27節によると、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第二コリント人への手紙5章10節には
「なぜなら、私たちはみな、キリストのさばきの座に現われて、善であれ悪であれ、各自その肉体にあってした行為に応じて報いを受けることになるからです。」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人間には最後に必ずさばきがあると聖書は繰り返し私たちに訴えています。私たちはこの裁きを見事パス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が、そのためにはどうすればよいかを考えなければなりません。みなさん、 例 えばスポーツ競技で勝つためにはどうすればいいでしょうか。たとえば、サッカーで勝つためには、もちろん、ゴールにボールをたくさん入れる必要がありますが、それだけで勝つ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ただ、ボールを入れさえすれば、勝てますか?
いいえ、もう一つ、条件があります。それは、ルールを守るということです。


第一コリント人への手紙9章24節には
「競技場で走る人たちは、みな走っても、賞を受けるのはただひとりだ、ということを知っているでしょう。ですから、あなたがたも、賞を受けられるように走りなさい。」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競技場で一生懸命努力をして必死に走っている人がたくさんいます。しかし、優勝して金メダルをもらえるのはただ一人です。どんな人ですか?速く走る人ですか?もちろん、それも大事ですが、もっと大切な要素があります。それは、ゴールに向かって走るということです。

ですからピリピ人への手紙3章14節には
「キリスト・イエスにおいて上に召してくださる神の栄冠を得るために、目標を目ざして一心に走っているのです。」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と記されています。

みなさん、神様のやり方、神様の力に頼らず、人間のやり方、人間の力 だけに頼ることは、それはまるで、ただ目をつぶってやみくもに走り続ける悲運のランナーに過ぎません。それはまさに、葉 っぱだけが生い茂っていて、花もつけず実もみのらないイチジクの木でしかありません。今も、この世の中には自分の知識や能力だけを信じ、世の中の富や名誉や権力だけのために、やがてどこへ向かうかも知らないまま走り続けています。
しかし、私たちは本当のゴールを見極める必要があります。ゴールは選手が決めるのではなく主催者側 が決めるのです。私たちの人生をのゴールは私たちが決めるのではなく、私たちの人生を司られる神様がお決めになることです。そのゴールを通過することによってのみ、神様からの賞をもらうことができるのです。
私たちは自分の力に頼るのではなく神様の力に頼ることで、初めて目が開き、自分がどこに向かうべきか、何をすべきかが見えてくるのです。
言葉を締めくくります。私たちはいつも高ぶることなく、神様の中で忠実なしもべとして、神様から与えられた力 や能力をもって、神様が期待される実を結べる私たちでありますことを切に望み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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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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