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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회 더욱 사랑
2017년 2월 1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 7절~8절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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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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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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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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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더욱 사랑”より大きな愛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교회만으로는 생활이 좀 어렵기 때문에 평일에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해서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만, 어제 학교 사무실 앞을 지나가다가 보았더니 사무실 입구에 낯선 외국인 3명이 그 학교 출입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창문을 보니 사무실 안에는 물이 꺼져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왔냐고 하니까, 학교 입학 문제 때문에 문의할 게 있어서 온 학생들이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담당자와 약속은 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약속은 안 했대요. 그럼, 오늘 여기 올 때에 전화를 하고 왔냐고 물었더니 전화를 안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니, 오늘이 무슨 요일인 줄 아느냐 했더니, 토요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래, 맞다. 토요일이다. 그런데도 왔냐고 했더니, 그 학생들이 하는 말이, 토요일이라도 12시 정도까지는 근무를 할 줄 알았다는 거예요.
저는 좀 이해가 안 됐습니다. 그래서, 아니, 우리 직원이 그런 말을 했느냐, 라고 했더니, 아니, 그냥 자기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저는 참 여러 가지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일본은 기본적으로 토요일은 노는 날이다. 그리고 지금 시간이 몇 시냐”
다행히 그 친구들은 시계를 차고 있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이미 12시는커녕 1시도 아니고 2시가 다 되어갑니다. 그리고 이건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2월 11일은 일본 공휴일이더라구요.
그래서 지금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했더니, 足利 시에서 왔다고 해요. 아시카가 시라고 하면 군마현도 아니고 이웃 토치기 현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걸렸냐고 하니까 1시간 반이나 걸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제가 검색을 해보니까 자동차로 오면 1시간이 좀 안 걸리는데, 전철을 타고 오면 대략 1시간 30~40분이 나오더군요.
자, 지금까지 이 3명의 외국학생들이 한 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꼭 알아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군마현에 있는 학교에 왔는데, 토요일이라도 1~2시 정도까지 가면 사람이 있겠지, 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생각하고 1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를, 전철을 탔는지 아니면 운전하고 왔는지는 모르지만 시간과 돈을 들여서 왔다는 거예요. 한 명이라면 착각할 수도 있다고 한다지만, 멀쩡한 3명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전화 한 통 걸어보면 될 일을 3명 모두가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솔직히 안타깝다기 보다는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어느 나라에서 온 학생이냐고 물었더니, 어디어디에서 왔다고 하더군요. 그 나라는 일본이나 한국과 비교하면 경제적으로도 대단히 낙후된 곳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그 나라에도 훌륭한 사람들은 많이 있겠지요. 하지만 이 학생들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면, 그 나라의 미래는 그리 밝지만은 않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이 학생들이 그 날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어쩌다가 한 번 그랬을까요? 오히려 그렇다기 보다는 그들이 갖고 있는 시간에 대한 개념은 항상 그 정도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마침 저기 담당자가 탄 차가 오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 분이 타고 있는 차에 가서 이러이러한 학생들이 찾아왔습니다. 라고 했더니만, 아니, 그 분도 당혹스럽죠. 갑자기 찾아왔으니 말이에요. 그러면서, 지금은 좀 볼일이 있으니까 그렇다면 좀 기다리라고 해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안으로 들여보내놓았습니다만 30분이 지나도 40분이 지나도 안 옵니다. 그게 그 담당자 책임이에요? 아니에요,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찾아온 그 학생들 잘못입니다. 결국 기다린 지 50분 만에 자리에서 일어나서, 월요일에 다시 연락하고 오겠다고 하면서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떠난 지 20분 정도가 지나서 그 담당자는 왔습니다.

사실 한국도 옛날에는 그랬다고 합니다. 우스갯소리로 이른바 코리안 타임이라고 하죠? 이 코리안타임에 대해서 인터넷에서 찾아보니까 다음과 같이 나와 있었습니다.

“코리안 타임(Korean time)은 약속시간에 일부러 늦게 도착하는 행동이나 그 버릇을 이르는 말이다. 이 말은 한국 전쟁 때 주한 미군이 한국인과 약속을 한 뒤 약속시간보다 늦게 나오는 한국인을 좋지 않게 생각하여 '한국인은 약속 시간에 늦게 도착한다. 이것이 한국인의 시간관이다.' 라고 하여 코리안 타임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한국전쟁 때라고 하면 1950년대입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시계도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도 통할지는 모르지만, 사실 이 코리안 타임이라고 하는 말이 꽤나 오랫동안 남아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한국도 참 경제적으로 낙후된 시기였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대체적으로 본다면 이 시간관념과 경제적 수준은 비례하는 부분이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시간을 안 지키니까 가난한 것인지, 아니면 가난하니까 시간을 못 지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는 있겠습니다만, 어찌되었든 이 시간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 학생들은 시간관념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시간관념만의 문제였다면 약속 시간에 늦은 것일 뿐이겠지요. 하지만 이 학생들은 시간이고 뭐고를 떠나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오직 자기들이 멋대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자기들 생각에 오늘은 토요일이지만 담당자들이 있을 줄 알았고, 자기들 생각에 1~2시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토요일에 적어도 몇 천엔의 돈과, 왕복하고 기다리고 하는 시간을 들이게 됐고, 결국 기다리는 것도 도중에 포기해서 그 날에 자신들이 하고자 했던 일은 하나도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을 한 번 볼까요?

마태복음 15장 1절~3절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そのころ、パリサイ人や律法学者たちが、エルサレムからイエスのところに来 て、言った。「あなたの弟子たちは、なぜ昔の先祖たちの言い伝えを犯すのですか。パンを食べるときに手を洗っていないではありませんか。」そこで、イエスは彼らに答えて言われた。「なぜ、あなたがたも、自分たちの言い伝えのために神の戒めを犯すのですか。

이 구절만을 읽으면 좀 이상한 생각이 들게 됩니다. 아니, 식사 하시기 전에 손 씻으라고 한 건데 그걸 가지고 왜 화를 내셨을까.

그런데 이 의문은 마가복음 7장 3절~4절을 보면 풀립니다.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パリサイ人をはじめユダヤ人はみな、昔の人たちの言い伝えを堅く守って、手をよく洗わないでは食事をせず、また、市場から帰ったときには、からだをきよめてからでないと食事をしない。まだこのほかにも、杯、水差し、銅器を洗うことなど、堅く守るように伝えられた、しきたりがたくさんある。―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이 구절을 밥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하느냐 아니면 씻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생각하면 이는 큰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서 자신들이 만들어낸 방식대로 행하라고 예수님이나 그 제자한테 강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태복음 15장 4절~6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神は『あなたの父と母を敬え。』また『父や母をののしる者は、死刑に処せられる。』と言われたのです。それなのに、あなたがたは、『だれでも、父や母に向かって、私からあなたのために差し上げられる物は、供え物になりましたと言う者は、その物をもって父や母を尊んではならない。』と言っています。こうしてあなたがたは、自分たちの言い伝えのために、神のことばを無にしてしまいました。

십계명 중에서 제5계명에는 분명히 부모를 공경하라고 되어 있는데, 그 부모한테 가서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 私からあなたのために差し上げられる物は、供え物になりました ”라고 말하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히 부모를 공경한 것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논리입니까. 하나님께서 언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아니에요. 하지만 이는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의 머리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걸 지키라는 거예요.
그것뿐인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만든 논리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이 안식일을 어긴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안식일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1장 15절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六日間は仕事をしてもよい。しかし、七日目は、主の聖なる全き休みの安息日である。安息の日に仕事をする者は、だれでも必ず殺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

그런데 이 안식일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하시는 것을 두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다고 해서 비난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안식일에 행하면 안 되는 일들을 바리새인들은 수도 없이 많이 만들었습니다. 아주 세부적으로 이것을 하면 안 된다, 저것을 하면 안 된다고 해서 대단히 까다롭게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잘 믿도록 하기 위해서요?

예를 들어서 독재자가 등장하면 대체적으로 그들은 반드시 법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매우 까다로운 법을 만들었지요. 그 이유를 그들은 나라를 위해서, 국민을 위해서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한국만 보더라도 어떻습니까. 유신헌법이나 무슨 헌법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긴급조치다 뭐다 해서 수많은 법을 만듭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괴롭히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들은 나라를 위해서 국민을 위해서 그와 같은 법을 만들었나요? 아니요, 그들은 다름 아닌 자신들의 권위를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자신들의 권력 강화를 위해서 만들었던 것입니다.
외국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히틀러가 저지른 범죄행위를 보십시오. 그는 수많은 유대인들을 살해했습니다. 그 살해한 수가 600백만에서 많게는 2000만명까지 추산된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그가 저지른 행위는 모두가 불법이었나요? 아니요. 모두가 합법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항해서 싸운다는 것은 모두가 불법행위였던 것입니다. 왜죠? 그것은 그와 같은 법을 만든 장본인이 바로 그 독재자였기 때문입니다. 일제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제에 대항한 독립투사들은 모두가 불법행위를 저지른, 말하자면 범법자들입니다. 그렇다면 나치에 대항해서 싸운 사람들이나 일제에 대항해서 싸운 독립투사들이 범법자라고 해서 비난을 받아야 하나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와 같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을 잡은 독재자나 잡은 세력은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있지도 않은 논리와 주장으로 그럴 듯한 말들을 총동원해서 법을 만들고 규칙을 만들고, 그리고 이를 따르라고, 이에 복종하라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그와 같은 전통을 만든 것은 하나님을 잘 믿기 위해서가 아닌, 자신들의 권력 강화를 위해서 이것저것 붙여서 만들어 놓았던 것이고, 하물며 예수님한테까지도 이를 따르도록 강요한 것이니, 이게 얼마나 어이없는 노릇입니까.
오늘날 교회에도 보면 여러 가지 규칙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해라, 저것을 해라, 이것을 하지 말라, 저것을 하면 안 된다. 물론 그와 같은 규칙이 모두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모두가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성경에 부합된 것인지를 분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 바리새인들이나 독재자들은 자신의 권위와 권력을 위해서 만들어 놓았다면, 그렇다면 진정한 하나님의 법은 어떨까요. 역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법도 하나님의 권력과 권위를 위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은 여느 독재자들처럼 우리를 짓밟고 우리를 억누르고 우리를 괴롭히면서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우리의 영혼을 위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말씀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법을 지켜라…라고 하면 무슨 골치 아프고 힘든 것처럼 들릴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예를 들어서 신호를 지키라는 것은 권위나 권력을 위한 것인가요? 빨간 신호에는 건너지 말아라, 파란 신호라도 깜빡 거릴 때에는 건너지 말아라, 전철을 기다릴 때에는 좀 더 뒤로 와서 서 있어라. 운전을 할 때에는 차간 거리를 넓혀라. 이것이 권위나 권력입니까? 바로 이런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법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말씀에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내 생각으로 노력을 해서 열심히 믿음 생활도 하고 그랬는데, 나중에 내 성적표를 받아보니 완전히 점수가 바닥이에요. 그러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이는 바로 내 생각만 중요시하고 하나님 생각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우리에게 바라는 삶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른바 십자가 계명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말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そこで、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心を尽くし、思いを尽くし、知力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愛せよ。』これがたいせつな第一の戒めです。『あなたの 隣人をあなた自身のように愛せよ。』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たいせつです。律法全体と預言者とが、この二つの戒めにかかっているのです。」

이는 우리에게 친숙한 말씀이기도 합니다만, 반면에 대단히 어려운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그래요, 이건 좀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이건 정말 어떻게 해야 할 수 있을까요? 정말 목숨을 걸고, 지금 당장이라도 순교할 작정을 하고, 이를 악 물고 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인가요?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고 계신 걸까요?
물론 과거에 보면 우리 주님을 믿는 것이 목숨을 걸만한 일이었던 적도 있습니다. 지금 북한 같은 곳에서도 한 번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도, 성경책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마음껏 예배를 드리고 성경책은 여기저기에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할 수 없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가장 알기 쉬운 것이 남녀간의 <사랑>이 아닐까 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신랑으로, 그리고 우리를 신부로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 33절~35절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彼らはイエスに言った。「ヨハネの弟子たちは、よく断食をしており、祈りもしています。また、パリサイ人の弟子たちも同じなのに、あなたの弟子たちは食べたり飲んだりしています。」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 花婿がいっしょにいるのに、花婿につき添う友だちに断食させることが、あなたがたにできますか。しかし、やがてその時が来て、花婿 が取り去られたら、その日には彼らは断食します。」

고린도후서 11장 2절 초중반부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というのも、私は神の熱心をもって、熱心にあなたがたのことを思っているからです。私はあなたがたを、清純な処女として、ひとりの人の花嫁に定め、キリストにささげることにしたからです。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마지막 날, 구원의 날에 예수님 품에 안기는 것이 그야말로 혼인잔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우리 예수님을 섬겨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 답이 나오게 됩니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 어느 정도로 사랑하냐 하면 내가 결혼 상대자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럴 때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이는 분명 틀림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다면 그 사람을 일주일에 한 번만 생각해요? 일주일에 한 번만 생각하고 나머지 6일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삽니까? 과연 그래도 되는, 그 정도 밖에 생각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해서 평생을 같이 살아요? 그건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이와 같은 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내가 이 정도로 하나님을 믿으면 되지. 교회 한 번 나가고 헌금 내고, 또 십일조 내고 뭐 그러면 되는 거 아냐? 뭘 더 해?
하지만 그런 생각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의 생각이 바로 그런 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이제 천국 문 앞에서 서성입니다.

이상하네.
내 생각에는 이 정도 했으면 천국 문이 열릴 줄만 알았는데.
내 생각에는 이 정도 했으면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실 줄 알았는데,
내 생각에는 이 정도로 헌금도 내고 십일조도 내고 했으면 예수님이 나를 칭찬해줄 줄 알았는데,
내 생각에는 이 정도로 교회도 오래 다니고, 직분도 받았으면 천국 천사들이 나를 환영해 줄 알았는데…….
이상하네…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문은 잠겨있고 아무도 안 열어주네…
바로 그때 문이 열립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12절,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しかし、彼は答えて、『確かなところ、私はあなたがたを知りません。』と言った。

만약에 그러신다면 이게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습니까.


더 무서운 구절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2절~23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その日には、大ぜいの者がわたしに言うでしょう。『主よ、主よ。私たちはあなたの名によって預言をし、あなたの名によって悪霊を追い出し、あなたの名によって奇蹟をたくさん行なったではありませんか。』しかし、その時、わたしは彼らにこう宣告します。『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全然知らない。 不法をなす者ども。わたしから離れて行け。』

정말이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칩니다. “다음에 다시 와라”라고 하셨더라면 그래도 기회는 있습니다만, “나는 도무지 알지 못해. 떠나 가”라고 하신다면, 이는 말 그대로 사형선고나 다름없겠지요.

이 모두가 다 내 생각만 하고 내 생각대로 신앙생활을 한 결과입니다. 하지만 우리 생각해봅시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그 사람보다 나를 사랑하나요?
내가 그 사람보다 나를 먼저 생각하나요?
내가 그 사람보다 나를 더 소중하게 여기나요?
만약에 그렇다면 결혼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겠죠.

내가 진정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나 자신보다도 그 사람을 더욱 사랑할 것이요,
나는 나 자신보다도 그 사람을 먼저 생각할 것이요,
나는 나 자신보다도 그 사람을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 아니겠어요?

에이,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냐구요? 여기 성경에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5장 7절~8절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正しい人のためにでも死ぬ人はほとんどありません。情け深い人のためには、進んで死ぬ人があるいはいるでしょう。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んでくださったことにより、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身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우리가 의인이나 선인일 때가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서 희생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 정도로 우리를 사랑해주셨다는 것이 성경에 이미 나와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바라지는 않으십니다.
제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팔 굽혀 펴기나 윗몸 일으키기를 할 때에, 한 두 번 정도는 괜찮습니다만 안 하나가 하면 서른 번도 힘듭니다.

자, 스물 여덟, 스물 아홉…그리고 이를 악 물고 서른 번을 했습니다. 간신히 했어요. 많은 사람들은 거기서 멈춥니다. 그런데 정말로 근육이 생기는 순간은 그 때가 아니랍니다. 그럼 언제냐. 바로 그 다음, 이를 악 물고 발발 떨면서 서른 번째를 한 바로 그 다음에 한 번 더 할 때! 그 때 진정으로 근육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오랜만에 운동을 하면 어떻습니까. 근육통이 옵니다. 안 하던 운동을 했기 때문에 여기저기가 쑤셔요.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오랜만에 운동을 했는데 다음 날에 몸이 멀쩡해요. 근육통이 안 느껴져요. 그럼 어떻게 된 거예요?
답은 간단합니다. 운동 헛 한 거예요. 근육통이 있어야 근육이 생긴다는 증거이지, 근육통이 없다면 이건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 안에서는 어떨까요. 여러분께서도 지금까지 믿음 생활을 잘 해 오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조금 더, 지금까지 해왔던 믿음 생활보다 조금만 더 우리 주님을 사랑해봅시다. 그게 어려운 것 아닙니다.
내가 만약 일주일에 한 번만 예수님을 생각했다면, 이제부터는 두 번, 그리고 세 번, 네 번, 그리고 매일 매 순간 예수님을 생각하게 되는 것,
내가 만약 일주일에 한 번만 성경 말씀을 묵상했다고 하면, 이제부터는 두 번, 세 번, 그리고 항상 성경말씀을 묵상하게 되는 것,
별 것 아닌 것 같으신가요? 아닙니다. 이것이야말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지름길인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안 하던 일을 하면요, 몸이 피곤해집니다. 안 읽던 성경 읽으려니 눈이 침침합니다. 주일 예배만 가다가 수요예배 가고 새벽예배 가려니 몸도 피곤합니다. 바로 그것이 믿음 안에서의 근육통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면 믿음이 놀라울 만큼 성장하게 되는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내가 지금보다
항상 내가 나 자신보다도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고,
항상 내가 나 자신보다도 예수님을 먼저 생각하고,
항상 내가 나 자신보다도 예수님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을 보냄으로 인하여,


마지막 날에 내가 다가가자 문이 활짝 열리고 마태복음 25장 21절과 23절의 말씀처럼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その主人は彼に言った。『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あなたは、わずかな物に忠実だったから、私はあなたにたくさんの物を任せよう。主人の喜 びをともに喜んでくれ。』

하고 예수님께서 기뻐 맞이해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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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회 전능하사
2017년 2월 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47장 4절
"우리의 구원자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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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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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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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전능하사”全能なりし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날 특히 개신교 교회에서는 예배 중에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예배 순서에 사도신경이 있지요. 이른바 주기도문은 이름 그대로 주님이 주신 기도문, 즉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주신 기도문입니다. 이 기도문은 마태복음 6장 9절~13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름이 <사도신경>이라고 해서 예수님의 열두 사도들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설화도 있습니다만, 이는 불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사도신경이 과거에 한 번 만들어지고 그만이었던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 속에서 수없이 변천을 거듭해왔습니다. 이 사도신경은 기도문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성격이 강합니다.
얼마 전에는 흥미로운 말씀을 들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 보면 <복음방송>이라고 하는 한국말로 나오는 기독교 라디오 방송이 있습니다. 이 방송국에서는 물론 자체적으로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합니다만, 주로 각 교회에서 협찬을 해서 설교 방송을 틀어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집에 있을 때에는 하루 종일 틀어놓으면 주로 로스앤젤레스나 그 인근지역에 있는 남부캘리포니아, 이를 미국 한인들 사이에서는 남가주라고 하는데, 주로 남가주 쪽에 있는 한인 교회의 설교들을 한 번에 꽤 많이 들을 수가 있습니다. 물론 시간이 정해져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그 정도 여러 교회 설교들을 한 번에 들을 수 있는 건 참 귀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얼마 전에 그 지역 목사님의 설교를 인터넷에서 들었는데, 그 목사님 말씀에 의하면, 당시 조금 작은 소동이 있었나봅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그 복음방송에서 방송된 설교 내용에 어떤 교회 목사님이, 사도신경을 외우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는 말씀을 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그대로 방송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송국에서는 사과도 하고 그 교회 설교를 이제 더 이상 방송하지 않기로 결정을 했다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사도신경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분들한테도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한 번은 어떤 분이 교회 목사님한테 전화를 걸어서, 당신 교회에 다니려고 하는데 거긴 사도신경을 외우냐고 물어보더랍니다. 그래서 왜 그걸 물으시냐고 했더니, 사도신경을 외우는 교회는 이단이라고 자기가 들어서 그걸 확인하려고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목사님이 전화로 말씀하기를, 저희 교회는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사도신경을 외운다고 해서 이단이 아닙니다. 저희 교회는 복음주의 교회이고……라고 하니까 그냥 끊어버리더랍니다.
여러분께서도 혹시 사도신경을 외우는 교회는 이단이다…뭐, 이런 엉뚱한 말씀을 들어보신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이 사도신경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교회를 어느 정도 다녀보신 분이라면 사도신경 정도는 안 보고도 외우실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저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을 분명히 새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까지도 이 사도신경을 외우는 의미는 무엇인가 하면, 초대교회에서부터 중세에 걸쳐 성경이 형성되고 많은 신학과 교리가 나오게 되었습니다만, 그 중에는 성경에서 벗어나거나 해서 믿음이 바로 서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게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로 인한 크고 작은 마찰도 적지 않게 일어났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다보니 이를 어느 정도 정비할 필요가 있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복음주의 교회에서 교파를 초월하여 신앙고백으로 삼고 있는 것이 바로 사도신경입니다. 이 사도신경은 오랜 역사 속에서 수많은 논쟁과 토론과 고민 끝에 완성된, 그야말로 우리의 신앙고백 중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사도신경을 보면 지금까지 오랜 역사 속에서 어떤 부분 때문에 다투어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도신경은 어떻게 시작하죠?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여기에도 우리의 얼마나 많은 신앙고백들이 들어 있습니까.
하나님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이 없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와 같은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 예수님을 믿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야말로 그리스도 메시야, 구세주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 짧은 문장 안에 얼마나 많은 우리의 신앙고백이 들어 있습니까. 우리는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만, 사실은 역사 속에서 이와 같은 부분 하나하나가 쟁점이 되기도 했던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도 물론이지만, 이 사도신경에서도 은혜를 참 많이 받습니다.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세상에 보면 많은 문학작품들이 있습니다만, 어느분 말에 의하면 명작은 벌써 그 시작부터 다르다고 합니다. 일본을 보면 벌써 노벨문학상을 두 개나 땄지요. 그 중에서 첫 번째 작품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입니다. 눈의 나라…설국입니다만, 그 도입부가 어떻게 되냐 하면 이렇습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벗어나자 설국이었다……. 사실 원문이 아니라 번역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그 느낌이 좀 떨어집니다만, 그래도 어둡고 캄캄한 긴 터널, 검은빛 터널을 벗어났더니 완전히 다른 세상, 하얀 눈덮인 세상에 펼쳐졌다는 것입니다. 이 벌써 시작부터 사람을 확 끌어당기는 힘이 좀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건 노벨상 수상작은 아닙니다만, 나츠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吾輩は猫である。名前はまだない 나는 고양이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이렇게 시작함으로써 이 소설은 고양이의 시각으로 적혀졌다는 것을 독자한테 직접적으로 알려줍니다. 지금은 워낙 유명한 작품이기 때문에 좀 신선도는 떨어지겠습니다만, 당시 이 책을 처음 접한 독자들한테 있어서는 상당히 충격적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첫 구절이 훌륭한 작품이라 하더라도 이 성경을 따라올만한 작품은 없는 것 같습니다. 특히 창세기 첫 구절을 보십시오. 어떻게 시작하죠?

예, 창세기 1장 1절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初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した。

제가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책을 읽은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좀 어느 정도 읽어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짧으면서도 황홀할만한 도입부로 장식된 책은 아직까지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태초, 모든 것, 세계 만물이 시작하는 그 시점에 하나님께서 계셨으며, 그 분께서 천지, 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창조하셨다는 것은 단순히 만들어놓기만 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누구에 대해서 적힌 책입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의 주인공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일단 신약에 있어서는 인정하시겠죠? 신약성경은 마태복음에서 시작해서 요한계시록으로 끝납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한 번 볼까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アブラハムの子孫、ダビデの子孫、イエス・キリストの系図。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은 어떻게 끝나죠?

요한계시록 22장 21절,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主イエスの恵みがすべての者とともにあるように。アーメン。

분명히 신약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으로 끝납니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은 어떨까요. 예수님은 신약에만 등장하시니까 신약에서만 주인공이신가요? 어떤 분은 구약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인공이시고 신약에서만 예수님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신약에서 예수님에 대한 기록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2절~3절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この方は、初めに神とともにおられた。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によらずにできたものは一つもない。

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초에, 즉 모든 것의 시작 바로 그 시점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예수님이 없이 창조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골로새서 1장 15절~17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御子は、見えない神のかたちであり、造られたすべてのものより先に生まれた方です。なぜなら、万物は御子にあって造られたからです。天にあるもの、地にあるもの、見えるもの、また見えないもの、王座も主権も支配も権威も、すべて御子によって造られたのです。万物は、御子によって造られ、御子のために造られたのです。御子は、万物よりも先に存在し、万物は御子にあって成り 立っています。


여기서도 예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보다도 먼저 나셨으며, 단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 뿐만이 아니라, 그리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곳만이 아니라, 하늘과 땅에서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까지도 예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신약에서만이 아니라 구약에서의 창세기 1장 1절부터 예수님께서는 이미 성경에 기록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2천년 전에, 죄악 속에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늘에서의 모든 영광을 버리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6절~8절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方なのに、神のあり方を捨てることができないとは考えないで、ご自分を無にして、仕える者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たのです。キリストは人としての性質をもって現われ、自分を卑(いや)しくし、死にまで従い、実に十字架の死にまでも従われたのです。

그리고 이제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내 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과 함께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20장 22절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そして、こう言われると、彼らに息を吹きかけて言われた。「聖霊を受けなさい。

지금 이 시간 이 순간에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를 가장한 다른 종교에서는 우리를 천사가 지켜준다고 하거나, 아니면 성령님을 그저 무슨 신비로운 바람이나 기운처럼 주장하는 곳도 있습니다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천사가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나타난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빈 무덤 앞에서였습니다. 그 다음에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 있은 후에는 천사가 나타났다는 기록이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과거에 우리 인간의 죄악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을 때에는 감히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수도 없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어주셔서 우리의 죄악을 모두 해결해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님과 천사가 같습니까? 이는 전혀 다릅니다. 천사는 아무리 미가엘 천사장이라고 해봤자 똑 같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어떻습니까.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요, 하나님 그 자체입니다. 이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 만드신 또다른 피조물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그 자체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가끔, 아니, 종종 잊고 있습니다.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가난한 청년이 꼭 타고 싶었던 여객선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여객선은 표값이 너무나 비싸요. 그래서 이 청년은 돈을 열심히 모아서 그 여객선 표를 샀습니다. 많은 돈을 모으지 못했기 때문에 표 중에서도 제일 싼 3등급짜리 표를 간신히 샀습니다.
이제 배가 출발합니다. 주변에는 멋지게 차려입은 신사들과 숙녀들이 넘쳐납니다. 그들의 화려함에 기가 죽어서 이 청년은 감히 어디를 나가지도 못합니다. 그들은 미소를 지으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마십니다. 하지만 이 청년은, 이제 자기가 가진 돈을 모두 탈탈 털어서 간신히 그 3등급짜리 표를 샀기 때문에 더 이상 돈이 없어요. 그래서 이제 배도 고프고 기운도 빠져서, 혼자 저 구석에서 웅크리고 앉아서 허기를 꾹 참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객선 승무원이 지나가다가 이 청년을 봤어요. 그래서 이 청년한테 왜 거기서 그러고 있느냐고, 어디 아픈데라도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이 청년은 말을 하죠. 자기가 이 배에 너무나도 타고 싶어서 열심히 돈을 모아서 표를 끊었는데, 이제 가진 돈이 없어서 밥도 못 사먹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승무원이 뭐라고 했겠습니까. 손님, 이 배의 운임에는 모든 식사값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어서 가서 자유롭게 드시라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이 청년은 어떻게 했겠어요.
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 청년은 이제 더 이상 허기에 시달릴 필요도 없습니다. 목마름을 참을 필요도 없습니다. 곧바로 식당으로 달려가서 차려놓은 음식들을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 분은 나보다 조금 더 사람이에요?
나보다 조금 더 힘이 있는, 능력이 있는 천사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이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영, 예수님의 영이 곧 성령 하나님이신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7절~11절,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v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与えられます。捜しなさい。そうすれば見つかります。たたきなさい。そうすれば開かれます。だれであれ、求める者は受け、捜す者は見つけ出し、たたく者には開(ひら)かれます。あなたがたも、自分の子がパンを下さいと言うときに、だれが石を与える
でしょう。また、子が魚(うお)を下さいと言うのに、だれが蛇を与えるでしょう。してみると、あなたがたは、悪い者ではあっても、自分の子どもには良い物を与えることを知っているのです。とすれば、なおのこと、天におられるあなたがたの父が、どうして、求める者たちに良いものを下さらないことがありましょう。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구하는 방법도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4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何かをわたしに求めるなら、わたしはそれをしましょう。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구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어 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끔 기도하시는 분들 중에 겸손하게 기도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아니, 겸손하다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에요. 좋습니다. 그런데 기도함에 있어서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을 안 드리는 것이 겸손이에요? 그건 겸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것은 이는 불순종이지요. 하지만 하라고 하는데도 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도 역시 불순종입니다. 우리가 사람한테는 해도 되는 말, 해서는 안 될 말이 있지요. 내가 또 이런 말을 저 사람한테 해서 저 사람이 상처 입으면 어쩌나…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건 당연히 생각해야지요. 입에서 나오는 대로 그냥 막 하면 안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기도는 어떻습니까. 특히 다윗의 기도를 보십시오. 다윗의 기도를 보려면 시편을 보면 됩니다. 저 너무나 속상합니다, 답답합니다. 저들을 아주 혼 내주세요…. 이런 기도가 넘쳐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주십니까. 물론 원수를 그의 손에 붙여서 물리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한없은 은혜로 우리를 위로해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구해야 할 기도가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것까지 기도하면 들어주실까? 하나님한테 그런 능력이 있을까?
물론 너무나도 지나치거나 이기적인 탐욕으로 가득찬 기도를 드리면 안되겠습니다만, 기도를 하다 보면 하나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를 드리게 되고, 주님으로부터 응답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괜히 이뻐했습니까.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쏟아놓았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무슨 멋있고 거창하고 어려운 말을 써야만 합니까.

물론 주일날 많은 분들 앞에서 드리는 대표기도 같은 경우에는 그래야겠지요. 하지만 은밀한 가운데에 드리는 기도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로마서 8장 15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あなたがたは、人を再び恐怖に魏れるような、奴隷の霊を受けたのではなく、子としてくださる御霊を受けたのです。私たちは御霊 によって、「アバ、父。」と呼びます。

갈라디아서 4장 6절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そして、あなたがたは子であるゆえに、神は「アバ、父。」と呼ぶ、御子の御霊を、私たちの心に遣わしてくださいました。

자기 혼자 기도하는데 아~ 거룩하고 존귀하고 영화롭고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고 전지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지혜와 능력이 충만하시고 왕 중의 왕이시요 신 중의 신이신 아버지 하나님……이렇게 하면요, 내가 무슨 기도를 하려고 했는지 까먹습니다.

우리는 구해야 합니다. 어떻게 구한다구요? 예,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합니다. 누구한테 구합니까. 무슨 신비한 바람이나 기운한테요? 나를 지켜주는 천사한테요?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도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인도해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마치 아들이 아빠한테 하듯이 구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께서 이루어 주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들 때에는 사도신경을 외워봅시다. 사도신경이 너무 길어요? 그렇다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만 외워봅시다. 외운다고 해서 무슨 주문처럼 외우시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뜻을 깊이 곱씹어 보아야 합니다. 그것도 길어요? 그렇다면 “전능하사”, “전능하사”, 그래,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뭐가 무섭겠냐…하고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봅니다.

이사야 47장 4절
“우리의 구원자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니라”

私たちを贖(あがな)う方、その名は万軍の主、イスラエルの聖なる方。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분은 시시한 분이 아닙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존재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시요, 그 외아들 우리 주 독생자 예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 사실을 알고 우리가 주님께 감사하고,
이 사실을 알고 우리가 주님께 구하고,
이 사실을 알고 우리가 주님을 찬양하고,
이 사실을 알고 우리가 주님을 예배하고,
그리고 이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고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하는, 그래서 기도의 응답과 차고 넘치는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64회 더욱 사랑 →

← 제62회 발을 씻으시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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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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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회 발을 씻으시는 예수님
2017년 1월 2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4절~8절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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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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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발을 씻으시는 예수님”足を洗われるイエス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한테서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기간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동안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기도 하셨고, 폭풍으로 휘몰아치는 파도를 잠잠하게 하기도 하셨으며, 물위를 걷기도 하셨습니다. 가시는 곳마다 천국 복음도 전파하셨을 뿐만 아니라,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고, 병든 자를 일으키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면 가룟유다가 배신을 하여 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입니다. 그 사실을 다른 제자들은 몰랐으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시간은 1분 1초 흐르고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한 마디라도 더 말씀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식사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제자들의 발을 차례대로 씻으시기 시작하십니다. 그냥 씻으신 것만이 아니라, 씻으시고는 그 묻은 물기를 깨끗하게 수건으로 닦아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본 우직한 사도 베드로가 놀랍니다. 아니, 주님, 지금 뭘하고 계신 거예요? 왜 우리 발을 닦으세요? 그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7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イエスは答えて言われた。「わたしがしていることは、今はあなたにはわからないが、あとでわかるようになります。」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랬더니 이 우직한 베드로, 다른 제자들은 가만히 있습니다만, 이 베드로는 목소리를 높입니다.아~ 주님, 이러지 마세요. 이러실 수 없습니다, 하고 강하게 거절합니다.그랬더니 예수님께서는 매우 흥미로운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8절 후반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もしわたしが洗わなければ、あなたはわたしと何の関係もありません。」

이 말씀이 과연 무슨 뜻인지, 오늘은 이 말씀에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는데, 그 상황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 당시,이는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 때 사람들이 신은 신발, 더구나 서민들이 신은 신발은, 요즘으로 말한다면 슬리퍼를 좀 단단하게 고정시킨 것 정도였습니다. 더구나 아스팔트 길이 어디 있나요. 당시 유럽지역을 지배했던 로마는 도로망 정비에 투자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돌들을 이용해서 도로를 정비하기도 했습니다만, 모든 길이 그랬던 것은 아니죠. 대부분의 도로는 그저 쉽게 말하자면 비포장 도로였습니다. 그런 길을 이 신발을 신고 나가서 몇 발자국 걷기만 해도 금새 발은 먼지 투성이가 되죠. 그러니까 이 신발은 발바닥은 보호하지만 그 외의 부분에 대해서는 발가락부터 해서 발등까지 다 드러난 상태였습니다. 그러니 발이 얼마나 지저분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은 발을 씻어준 것입니다.

요즘도 여러 교회에서 제자훈련 과정에서 이른바 세족식을 하는 곳이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 만이 아니라 미션스쿨이나 여러 단체에서도 이와 같은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경우가 있는데, 말하자면 교역자나 직분자가 평신도를 섬긴다는 뜻으로 발을 씻어준다는 것이죠.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당시 잠시 다녔던 교회 청년부에서도 그런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세족식이라는 것을 해보았습니다만, 당시 저는 평신도였기 때문에 제 발을 그 교회 청년부 리더들이 씻어주었습니다만, 그 때 미리 안내 프린트를 나누어주었는데, 거기에 보니까 주의사항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게 참 재미있었습니다만, 일단 세족식을 하는 분들은 미리 발톱을 깎고, 반드시 발을 깨끗이 씻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죠. 뭐, 충분히 이해는 갑니다. 무슨 목욕을 시켜주는 것도 아니고, 단순한 이벤트인데 지저분한 발을 만지고 싶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리고 세족식이 시작되고, 그 사람이 제 발을 씻어주었을 때, 맨 처음에는 분위기상 좀 감동도 받았습니다만, 조금 지나니까 무슨 감흥도 없고 그저 한 번 그런 걸 해봤다, 뭐 그 정도이지, 그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좀 심보가 고약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다른 단체에서 이런 행사를 하는 것을 보면, 발을 씻겨주는 분들이, 겸손한 마음에서 이런 행사를 하는 곳도 물론 많겠지만, 어쩌면, 그냥 보여주기식, 우리는 이런 것도 한다, 뭐 이런 과시용 이벤트처럼 여겨지고 있는 곳도 있겠다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때에는 어땠습니까.
“너희들 잘 들어. 내가 지금부터 너희들 발을 씻어줄 테니까, 어여 가서 발 좀 씻고 와. 알았지?”
뭐, 이러셨어요? 아니에요. 제자들한테 아무 말씀도 없이 갑자기 일어나서 발을 씻어주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발이었을까요. 어차피 우리 몸을 씻어주시기를 원하셨다면 손을 씻어주셔도 되잖아요. 그런데 왜 발을 씻어주셨는지 먼저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발은 우리 몸 중에서 그 당시 가장 불결한 부분이었습니다. 몸의 다른 부분은 물로 씻고 목욕을 하면 어느 정도는 그 청결함이 유지가 됩니다. 하지만 발은 어떻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방금 목욕을 했다고 하더라도 한 발자국 바깥에 나가면 금새 지저분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의 몸 중에서 가장 지저분한 부분, 가장 불결한 부분을 씻어주셨던 것입니다.

둘째로, 발이 지저분해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발이 이 세상과 가장 맞닿아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얼굴이나 손처럼 바깥으로 노출된 부분이라 하더라도 직접적으로 세상과 접촉하는 시간은 길지 않습니다. 하지만 발은 어떻습니까. 우리 신체 중에서 이 세상, 세상적인 것과 가장 오래 밀착된 부분입니다. 이는 단지 물리적으로 붙어있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지치고 힘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모두가 세상적인 문제, 여기에는 경제적인 문제, 신체적인 문제, 사회적인 문제 등 여러 문제들이 있겠습니다만, 이 모두가 다 세상적인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혹시 여기에 지난 한 주 동안 영적인 문제로 인해서 깊게 고민해보신 분 계신가요?
아……이대로는 나는 구원받지 못할 지도 몰라.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없을지도 몰라……어떻게 하면 내가 예수님을 잘 믿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의지하고 따를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해보신 분 계신가요? 물론 그러실 수도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보면 아무래도 우리에게 있어서 세상적인 고민에 대한 비중이 많은 것은 부정할 수 없겠지요. 이처럼 이 세상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부분이 바로 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적인 때가 가장 많이 묻은 발을 씻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발을 씻어주실 때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자세를 떠올려보세요. 어떻습니까. 좋은 의자에 앉아서 등받이에 등을 기댄 상태에서 상대방의 발을 씻어줄 수가 있나요? 아니요. 그 사람의 발을 씻기 위해서는 그 사람 앞에 낮은 자세로 몸을 숙여야 합니다. 그리고 마치 무릎을 꿇는 정도로 몸을 낮추어야지만 상대방의 발을 씻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발을 씻어주는 것은 당시 하인들이 했던 일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치욕적인 자세입니까.
만약에 내가 발을 씻겨주는 사람이 나보다 훌륭하고 나는 그보다 한참 못한 사람이다……이런 상황이라면 뭐 그나마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니, 예수님이 제자보다 못해요? 그럴 리가 있나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서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섬기는 사람의 자세를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많은 교역자들이나 교회 지도자들, 나아가 이걸 따라했는지는 모르지만, 정치인들까지도 국민을 섬기고 나라를 섬기갰다고 합니다만, 어디 그렇습니까. 입으로는 섬긴다고 하지만 실제 행동은 몸을 숙이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권세에 취해서, 성도들 위에 군림하고 교회 위에 군림하고, 국민들 위에 군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진정으로 섬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우리 모두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던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는 이 이유를 모르고 왜 제 발을 씻으시냐고 예수님께 물었더니, 지금은 너희가 몰라도 나중에는 내가 왜 이랬는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만, 그래도 베드로가, 아~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 그러실 수 없습니다. 하고 완고하게 거절을 합니다. 아마도 이렇게 말했더라면 예수님한테 무슨 칭찬이라도 들을 줄 생각했는지 모릅니다만, 예수님의 반응은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서로 상관이 없다”
라고 하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발을 씻어주시는 장면은 요한복음에만 나옵니다만, 이 장면을 연상케 하는 부분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23절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v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その時から、イエス・キリストは、ご自分がエルサレムに行って、長老、祭司長、律法学者たちから多くの苦しみを受け、殺され、そして三日目 によみがえら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弟子たちに示し始められた。するとペテロは、イエスを引き寄せて、いさめ始めた。「主よ。神の御恵 みがありますように。そんなことが、あなたに起こるはずはありません。」しかし、
vイエスは振り向いて、ペテロに言われた。「下がれ。サタン。あなたはわたしの邪魔をするものだ。あなたは神のことを思わないで、人のことを思っている。」


예수님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는 사흘 만에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시니까 베드로가 나서서 아~절대로 그러실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칭찬하십니까? 아니요.오히려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까지 심한 말로 꾸짖으십니다.

이 베드로는 예수님이 싫어서 그랬어요? 아니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존경하는 마음에 그랬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예수님의 뜻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두 번이나 혼이 난 것이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이유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첫째로는 우리 중에서 가장 불결한 부분을 깨끗하게 해주시기 위해서, 둘째로는 세상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주시기 위해서, 셋째로는 섬김과 겸손함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단순히 제자들의 발만 씻어주고 마셨나요? 이제 내가 할 건 다 했다고 하셨나요?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을 단번에 보여주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죠.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우리의 가장 불결하고 지저분한 우리의 죄악을 깨끗하게 해주시기 위해서 지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25절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そして自分から十字架の上で、私たちの罪をその身に負われました。それは、私たちが罪を離れ、義のために生きるためです。キリストの打ち傷のゆえに、あなたがたは、いやされたのです。あなたがたは、羊のようにさまよっていましたが、今は、自分のたましいの牧者であり監督者である方のもとに帰ったのです。

우리의 죄악은 그저 양이나 염소나 데려다가 제단에서 불태우면 해결되는,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였습니까. 그렇죠.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으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셔야지만 해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예수님께서는 더 쉬운 방법을 택해셨겠지요. 하지만, 그것만이, 오직 그 방법만이, 십자가만이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우리의 세상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주시기 위해서 지신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5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神は、キリスト・イエスを、その血による、また信仰による、なだめの供え物として、公にお示しになりました。それは、ご自身の義を現わすためです。というのは、今までに犯されて 来た罪を神の忍耐をもって見のがして来られたからです。

우리의 모든 문제들이 왜 생겨납니까. 경제적인 문제, 신체적인 문제, 사회적인 문제가 왜 일어납니까. 바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을 한 번 생각해봅니다.

우리 몸의 건강을 유지함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혈액순환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우리 몸안에 있는 장기가 건강하다 하더라도 혈관 중 어디 한 군데가 막히거나, 아니면 좁아지거나 하면 곧바로 몸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얼마전까지 별로 큰 문제가 없었는데, 갑자기 이런 저런 문제들이 발생해요. 경제적인 문제, 건강상의 문제,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문제가 하나 둘 생겨납니다. 그 이유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딘가가 막혀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들을 제거해버려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 사람의 힘으로 됩니까? 아니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의지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십자가를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화목제물로 삼아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바로 이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과 나와의 막혔던 길이 뚫려서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셋째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우리에게 겸손함과 복종하심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지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人としての性質をもって現われ、自分を卑しくし、死にまで従い、実に十字架の死にまでも従われたのです。

예수님께서 2천년 전에 처음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는 우리를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위에 군림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죄악 속에서 허덕이는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시고, 도리어 섬기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人の子が来 たのが、仕えられるためではなく、かえって仕えるためであり、また、多くの人のための、贖(あがな)いの代価として、自分のいのちを与えるためであるのと同じです。」

이 섬긴다는 것이 어쩌면 작고 쉬운 문제라고 생각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섬기는 것이야말로 앞서 살펴본 우리의 죄악의 해결, 세상적인 문제의 해결을 열기 위한 열쇠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 13절~17절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v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あなたがたはわたしを先生とも主とも呼んでいます。あなたがたがそう言うのはよい。わたしはそのような者だからです。それで、主であり師であるこのわたしが、あなたがたの足を洗ったのですから、あなたがたもまた互いに足を洗い合うべきです。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したとおりに、あなたがたもするように、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模範を示したのです。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告げます。しもべはその主人にまさらず、
v遣わされた者は遣わした者にまさ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あなたがたがこれらのことを知っているのなら、それを行なうときに、あなたがたは祝福されるのです。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래. 나는 분명 너희들의 선생이다. 그렇지만 내가 너희들 위에 군림한 것이 아니라 너희를 섬겼으니까 너희들도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말고 서로 섬겨라. 그리고 마지막에 뭐라고 말씀하세요?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입니다. 그 반대는 뭐겠습니까. 너희가 이것을 모르고, 또는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복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온갖 고난이 닥쳐온다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교회들이 고난을 겪고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섬김의 부족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 섬김이야말로 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지름길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와 같이 살펴본 세 가지, 죄악의 해결과 세상 문제의 해결, 그리고 섬김의 자세, 이것이야말로 십자가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목숨을 다 바쳐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뜻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으려 했지만 베드로는 맨 처음에 거절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죠? 내가 만약 너를 씻지 않는다면 너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아무리 천국 복음을 전하셨다 하더라도, 기적을 많이 일으키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들을 일으키셨다 하더라도,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하더라도, 그 사실을 내가 인정하고 믿고, 그에 대해 내가 감사하고 찬양할 때에 내가 예수님과 상관이 있는 것이지, 이를 믿지 않는다면 예수님과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나는 여전히 십자가와 무관한 사람, 나는 여전히 죄악 속에서 허덕이고 세상 문제 속에서 허덕이는, 교만하고 딱하기 그지없는 한 인간에 불과한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위해서 오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나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위해서 채찍에 맞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나를 위해서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바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까.
바로 나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위해서 부활하셨습니까.
바로 나를 위해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위해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까.
바로 나를 위해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위해서 이 시간에도 일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나를 위해서 이 시간에도 이 순간에도 일하고 계신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 우리의 죄악과 우리의 문제와 우리의 교만함을 해결하시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해주셨던 것처럼 우리가 서로에게 낮아짐으로 섬김으로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본을 따라서 행함으로 말미암아, 넘치도록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으로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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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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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회 응답하시는 하나님
2017년 1월 2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Last Update 2019. 5. 21

열왕기상 18장 36절~40절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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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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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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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부분은 이른바 갈멜산의 대결, 또는 갈멜산 전투라는 제목으로 일컬어지는 대목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아합 왕은 우상인 바알을 섬기는 왕이었습니다만, 그가 시돈 땅에서 왕비로 데려온 이세벨 또한 바알과 아세라라고 하는 우상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데려왔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이기까지 했었습니다. 참으로 믿음을 지키기 힘든 시대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아니면 이 세상 권력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아니면 왕이나 대통령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교회에서 물으면 대부분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하겠지요. 그렇죠. 그게 정답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우리가 두려워할 이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 이 세상 권세를 잡은 권력자들이 아니라,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만군의 여호와, 온 세상의 통치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섬깁니다.
안타깝게도 그 중에는 기존 교회 지도자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권력자들의 입맛에 맞는 말만 하고, 돈 많이 주는 사람들 편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거룩한 교회 강단에서 그들의 말만 대변하고, 약한 사람들을 학대하고 비판하기도 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그게 편합니다. 권력자들의 편에 서기만 하면 많은 특혜를 누릴 수도 있고 이 세상 부귀영화도 누릴 수 있을지 모릅니다. 돈 많은 사람들 뒤를 따라다니면 거기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불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길이라면 이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상을 섬기는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가 득세를 합니다. 지저분한 우상을 섬기는 이들은 어깨에 힘을 주고 거리를 활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믿음을 지키는 이들은 처참하게 죽음을 당하거나, 아니면 숨어서 지냅니다. 이와 갈은 암흑과도 같은 시대였던 것입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엘리야를 예비하셨습니다. 과감하게도 엘리야가 아합 왕 앞에 서서 담대하게 말합니다.
열왕기상 18장 19절,
“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
이제 400명과 450명, 총 850명과 엘리야 1명과의 대결이 시작됩니다. 이 모습을 구경하러 모인 많은 백성들에게 엘리야는 외칩니다.
열왕기상 18장 21절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이 얼마나 딱하기 그지없는 백성들의 모습입니까. 하나님을 믿을 것이냐, 바알을 믿을 것이냐 하는 물음에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고 이 세상 권세 잡은 자들의 눈치를 보면서 머뭇머뭇 거리면서 한 마디도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제 엘리야가 바알 선자자와 백성들에게 제안을 합니다. 말하자면 대결 방법을 제안하는 것이죠.
열왕기상 18장 23절~24절,
“그런즉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며 나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고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
이제 송아지 두 마리를 가져 와라. 그리고 각을 떠서 나무 위에다 올려 놓고 기도해라. 너희들은 바알 이름을 부르고 기도하고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고 기도할 것이다. 둘 중에서 응답하시는 쪽이 진정한 하나님이다. 이렇게 제안을 하니, 당연히 이를 들은 백성들은 그래, OK, 좋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에게 말합니다.
열왕기상 18장 25절,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붙이지 말라”
너희들이 많으니까 너희들 먼저 해봐라. 그랬더니 이제 바알 선지자들이 송아지를 각을 뜨고 난 다음에 신이 나서 기도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 모습이 다음 구절입니다.
열왕기상 18장 26절,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이제 우상들을 향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말하자면 통성기도를 합니다. 얼마나 했대요? 아침부터 낮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허무하게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도 없었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도 답답했나보죠?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우상이 응답을 하겠어요? 이 모습을 보면서 엘리야가 그들에게 말을 합니다.

열왕기상 18장 27절,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이보쇼, 거 응답이 없은 걸 보니 더 큰 소리로 하셔야겠네. 혹시 지금 묵상하고 있는지, 아니면 잠깐 외출했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졸고 있는지 알어? 좀 더 큰 소리로 해봐.
이렇게 말을 하니까, 정말 그런 줄 알았는지, 아니면 자존심이 상했는지 모르지만, 더 기를 쓰고 난리를 치기 시작합니다.
본문 28절~29절,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났고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
이제 자기 몸까지 상하게 하면서 저녁 때까지 미친 듯이 떠들어댑니다. 그런데 뭐래요?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도 돌아보는 자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죠. 응답이 있으면 바알이 신이게요? 하지만 우상은 응답을 하지 않습니다. 우상한테 하루 종일 미친 듯이 소리치며 외쳐보십시오. 응답은 없고 몸만 피곤할 뿐입니다.
이제 엘리야가 일어섭니다.
30절~35절까지 봅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엘리야가 돌 열두 개를 취하니 이 야곱은 옛적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제단을 쌓고 제단을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둘 만한 도랑을 만들고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째로 그리하라 하여 세 번째로 그리하니 물이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 찼더라”
여호와의 제단을 쌓습니다. 이스라엘의 지파의 이름으로 돌들을 쌓아서 여호와의 제단을 만들고, 나무를 벌여놓고서 송아지를 각을 떠서 올려놓고는, 거기에 물을 부으라고 합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번제물과 나무에 불을 부으라고 해요.
여러분 중에서도 캠핑 같은 데에 가서, 장작불 같은 데에 불을 붙여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냥 나무에 불을 붙이려고 해도 잘 붙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이에 불을 붙이고는 그걸 넣어보기도 하고 해도, 기술이 없으면 잘 안 되요.
그렇게 그냥 붙여도 불이 제대로 붙을까 말까인데, 이제 통 넷에 물을 채워서 세 번을 부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겠어요. 물이 펑펑 흘러서 나무고 번제물이고 간에 모두 물에 흠뻑 젖은 상태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의 힘으로는 불을 붙일래야 붙일 수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본문 36절~37절입니다.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우상들을 향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소리 지르고 난리 쳤던 그들한테는 아무런 응답도 없었습니다만, 엘리야는 이제 단 한번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응답하소서, 저들이 하나님은 여호와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라고 단 한 마디 기도를 드렸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늘 본문 38절,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하늘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불길이 내려오더니 번제물과 나무만이 아니라, 거기 있던 돌과 흙을 태우고는, 그것도 모자라서 도랑의 물까지 모조리 불살라버렸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역사입니까.
하나님은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응답하지 않으신다……하면서 탄식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시편 94장 9절,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여호와 하나님만이 진정한 하나님이시요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진정한 하나님이십니다. 그 외의 다른 신은 없는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 정초에 보면 일본에서는 올해에도 많은 사람들이 절이나 신사를 찾아서 이른바 하츠모데에 가서 돈을 던지고 두 손을 모아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우상한테 아무리 돈을 던지고 기도해봐야 소용 없는데. 절대로 응답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이는 마치 배가 고픈 사람이 음식 사진이 찍힌 요리책을 보거나 텔레비전으로 요리방송을 보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 걸 아무리 본다고 배가 불러오나요. 우상을 섬기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죽을 힘을 다해서, 온 재산 다 털어서 우상을 섬겨봤자 헛것입니다.
우상을 만들어놓고는 거기에 대고 절을 하면서 비는 것에 대한 허망함을 이사야서에서는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4장 13절~17절에 보면,
“목공은 줄을 늘여 재고 붓으로 긋고 대패로 밀고 곡선자로 그어 사람의 아름다움을 따라 사람의 모양을 만들어 집에 두게 하며 그는 자기를 위하여 백향목을 베며 디르사 나무와 상수리나무를 취하며 숲의 나무들 가운데에서 자기를 위하여 한 나무를 정하며 나무를 심고 비를 맞고 자라게도 하느니라 이 나무는 사람이 땔감을 삼는 것이거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덥게도 하고 불을 피워 떡을 굽기도 하고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기도 하는구나 그 중의 절반은 불에 사르고 그 절반으로는 고기를 구워 먹고 배불리며 또 몸을 덥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
이 얼마나 허망합니까. 나무를 베어서 어떤 것은 땔감으로 쓰고, 어떤 것으로는 고기를 굽고, 또 남은 것으로는 보기 좋게 조각을 하고는 그 앞에 엎드려서 내 소원을 들어 달라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을 보니, 흥미로운 방송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유명 연예인들이 나와서 좋은 것과 안 좋은 것을 구분하는 방송이었습니다. 제가 보았던 방송에서는, 첫번째 문제는 100만엔짜리 포도주, 또 한 쪽은 5천엔짜리 포도주를 구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문제는 한쪽은 일본산 최고급 소고기를 요리한 것이고, 다른 한쪽은 수입산 냉동 소고기를 요리한 것입니다. 이런 것을 먹어보거나 마셔보고 비싼 쪽을 A와 B 중에서 고르라는 것이지요. 거기에 등장하는 연예인들은 워낙 유명 연예인들이기 때문에 평소에 좋은 것도 많이 먹고 마시고 하는 사람들이니까 모두 알아맞힐 것도 같은데, 어이없게도 틀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또 이런 문제도 있었습니다. 바이올린 두 대와 첼로 한 대로 3중주를 하는데, 그 악기를 합한 가격이 한쪽은 25억엔이고, 다른 한쪽은 80만엔입니다만, 그 소리를 구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인데, 이는 이른바 소리로 먹고 사는 현역 유명 가수들도 틀리고 했습니다.
어떠세요? 우리는 맞힐 수 있을까요? 알고 보면 이게 참 힘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맞힐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런 문제를 당할 일이 없으니까 생각할 필요가 없다? 혹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수시로 이런 문제 앞에 놓이게 됩니다.
여러분께서는 하나님을 알아 보십니까. 하나님을 알아보실 자신이 있으십니까. 하나님 마음을 알아보실 자신이 있으십니까. 하나님 음성을 알아보실 자신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살다 보면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어느 쪽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지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이를 알아보는 몇가지 방법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첫 번째는 성경입니다. 성경 말씀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성령님이 사도들을 통해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답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기도입니다. 내가 어떤 것을 두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응답이 안 옵니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답답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엘리야가 기도를 많이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나요?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많이 한다고 무조건 응답하십니까? 아니면 기도를 크게 한다고 무조건 응답하십니까? 아닙니다. 그 기도가 하나님 마음에 맞아야 응답됩니다. 하나님 마음에 맞는다면 중언부언 기도를 할 필요도 없고, 목이 쉬도록 힘들게 기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는, 기도하는 내 자신이 피곤하지도 않습니다. 기쁨이 넘칩니다. 마음에 평안이 다가옵니다.
기도는 내 생각을 주구장창 늘어놓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내 고집을 굽히지 않고 예수님 앞에 떼를 쓰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이 때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지금 내 옆에 예수님이 계셔서, 지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주님께 물으면 어떻게 말씀하실까. 이것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따라 나아갈 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신 놀라운 응답과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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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제61회 응답하시는 하나님
2017년 1월 2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Last Update 2019. 5. 21

열왕기상 18장 36절~40절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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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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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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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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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부분은 이른바 갈멜산의 대결, 또는 갈멜산 전투라는 제목으로 일컬어지는 대목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아합 왕은 우상인 바알을 섬기는 왕이었습니다만, 그가 시돈 땅에서 왕비로 데려온 이세벨 또한 바알과 아세라라고 하는 우상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데려왔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이기까지 했었습니다. 참으로 믿음을 지키기 힘든 시대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아니면 이 세상 권력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아니면 왕이나 대통령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교회에서 물으면 대부분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하겠지요. 그렇죠. 그게 정답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우리가 두려워할 이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 이 세상 권세를 잡은 권력자들이 아니라,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만군의 여호와, 온 세상의 통치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섬깁니다.
안타깝게도 그 중에는 기존 교회 지도자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권력자들의 입맛에 맞는 말만 하고, 돈 많이 주는 사람들 편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거룩한 교회 강단에서 그들의 말만 대변하고, 약한 사람들을 학대하고 비판하기도 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그게 편합니다. 권력자들의 편에 서기만 하면 많은 특혜를 누릴 수도 있고 이 세상 부귀영화도 누릴 수 있을지 모릅니다. 돈 많은 사람들 뒤를 따라다니면 거기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불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길이라면 이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상을 섬기는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가 득세를 합니다. 지저분한 우상을 섬기는 이들은 어깨에 힘을 주고 거리를 활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믿음을 지키는 이들은 처참하게 죽음을 당하거나, 아니면 숨어서 지냅니다. 이와 갈은 암흑과도 같은 시대였던 것입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엘리야를 예비하셨습니다. 과감하게도 엘리야가 아합 왕 앞에 서서 담대하게 말합니다.
열왕기상 18장 19절,
“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
이제 400명과 450명, 총 850명과 엘리야 1명과의 대결이 시작됩니다. 이 모습을 구경하러 모인 많은 백성들에게 엘리야는 외칩니다.
열왕기상 18장 21절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이 얼마나 딱하기 그지없는 백성들의 모습입니까. 하나님을 믿을 것이냐, 바알을 믿을 것이냐 하는 물음에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고 이 세상 권세 잡은 자들의 눈치를 보면서 머뭇머뭇 거리면서 한 마디도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제 엘리야가 바알 선자자와 백성들에게 제안을 합니다. 말하자면 대결 방법을 제안하는 것이죠.
열왕기상 18장 23절~24절,
“그런즉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며 나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고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
이제 송아지 두 마리를 가져 와라. 그리고 각을 떠서 나무 위에다 올려 놓고 기도해라. 너희들은 바알 이름을 부르고 기도하고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고 기도할 것이다. 둘 중에서 응답하시는 쪽이 진정한 하나님이다. 이렇게 제안을 하니, 당연히 이를 들은 백성들은 그래, OK, 좋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에게 말합니다.
열왕기상 18장 25절,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붙이지 말라”
너희들이 많으니까 너희들 먼저 해봐라. 그랬더니 이제 바알 선지자들이 송아지를 각을 뜨고 난 다음에 신이 나서 기도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 모습이 다음 구절입니다.
열왕기상 18장 26절,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이제 우상들을 향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말하자면 통성기도를 합니다. 얼마나 했대요? 아침부터 낮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허무하게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도 없었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도 답답했나보죠?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우상이 응답을 하겠어요? 이 모습을 보면서 엘리야가 그들에게 말을 합니다.

열왕기상 18장 27절,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이보쇼, 거 응답이 없은 걸 보니 더 큰 소리로 하셔야겠네. 혹시 지금 묵상하고 있는지, 아니면 잠깐 외출했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졸고 있는지 알어? 좀 더 큰 소리로 해봐.
이렇게 말을 하니까, 정말 그런 줄 알았는지, 아니면 자존심이 상했는지 모르지만, 더 기를 쓰고 난리를 치기 시작합니다.
본문 28절~29절,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났고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
이제 자기 몸까지 상하게 하면서 저녁 때까지 미친 듯이 떠들어댑니다. 그런데 뭐래요?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도 돌아보는 자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죠. 응답이 있으면 바알이 신이게요? 하지만 우상은 응답을 하지 않습니다. 우상한테 하루 종일 미친 듯이 소리치며 외쳐보십시오. 응답은 없고 몸만 피곤할 뿐입니다.
이제 엘리야가 일어섭니다.
30절~35절까지 봅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엘리야가 돌 열두 개를 취하니 이 야곱은 옛적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제단을 쌓고 제단을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둘 만한 도랑을 만들고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째로 그리하라 하여 세 번째로 그리하니 물이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 찼더라”
여호와의 제단을 쌓습니다. 이스라엘의 지파의 이름으로 돌들을 쌓아서 여호와의 제단을 만들고, 나무를 벌여놓고서 송아지를 각을 떠서 올려놓고는, 거기에 물을 부으라고 합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번제물과 나무에 불을 부으라고 해요.
여러분 중에서도 캠핑 같은 데에 가서, 장작불 같은 데에 불을 붙여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냥 나무에 불을 붙이려고 해도 잘 붙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이에 불을 붙이고는 그걸 넣어보기도 하고 해도, 기술이 없으면 잘 안 되요.
그렇게 그냥 붙여도 불이 제대로 붙을까 말까인데, 이제 통 넷에 물을 채워서 세 번을 부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겠어요. 물이 펑펑 흘러서 나무고 번제물이고 간에 모두 물에 흠뻑 젖은 상태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의 힘으로는 불을 붙일래야 붙일 수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본문 36절~37절입니다.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우상들을 향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소리 지르고 난리 쳤던 그들한테는 아무런 응답도 없었습니다만, 엘리야는 이제 단 한번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응답하소서, 저들이 하나님은 여호와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라고 단 한 마디 기도를 드렸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늘 본문 38절,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하늘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불길이 내려오더니 번제물과 나무만이 아니라, 거기 있던 돌과 흙을 태우고는, 그것도 모자라서 도랑의 물까지 모조리 불살라버렸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역사입니까.
하나님은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응답하지 않으신다……하면서 탄식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시편 94장 9절,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여호와 하나님만이 진정한 하나님이시요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진정한 하나님이십니다. 그 외의 다른 신은 없는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 정초에 보면 일본에서는 올해에도 많은 사람들이 절이나 신사를 찾아서 이른바 하츠모데에 가서 돈을 던지고 두 손을 모아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우상한테 아무리 돈을 던지고 기도해봐야 소용 없는데. 절대로 응답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이는 마치 배가 고픈 사람이 음식 사진이 찍힌 요리책을 보거나 텔레비전으로 요리방송을 보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 걸 아무리 본다고 배가 불러오나요. 우상을 섬기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죽을 힘을 다해서, 온 재산 다 털어서 우상을 섬겨봤자 헛것입니다.
우상을 만들어놓고는 거기에 대고 절을 하면서 비는 것에 대한 허망함을 이사야서에서는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4장 13절~17절에 보면,
“목공은 줄을 늘여 재고 붓으로 긋고 대패로 밀고 곡선자로 그어 사람의 아름다움을 따라 사람의 모양을 만들어 집에 두게 하며 그는 자기를 위하여 백향목을 베며 디르사 나무와 상수리나무를 취하며 숲의 나무들 가운데에서 자기를 위하여 한 나무를 정하며 나무를 심고 비를 맞고 자라게도 하느니라 이 나무는 사람이 땔감을 삼는 것이거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덥게도 하고 불을 피워 떡을 굽기도 하고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기도 하는구나 그 중의 절반은 불에 사르고 그 절반으로는 고기를 구워 먹고 배불리며 또 몸을 덥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
이 얼마나 허망합니까. 나무를 베어서 어떤 것은 땔감으로 쓰고, 어떤 것으로는 고기를 굽고, 또 남은 것으로는 보기 좋게 조각을 하고는 그 앞에 엎드려서 내 소원을 들어 달라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을 보니, 흥미로운 방송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유명 연예인들이 나와서 좋은 것과 안 좋은 것을 구분하는 방송이었습니다. 제가 보았던 방송에서는, 첫번째 문제는 100만엔짜리 포도주, 또 한 쪽은 5천엔짜리 포도주를 구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문제는 한쪽은 일본산 최고급 소고기를 요리한 것이고, 다른 한쪽은 수입산 냉동 소고기를 요리한 것입니다. 이런 것을 먹어보거나 마셔보고 비싼 쪽을 A와 B 중에서 고르라는 것이지요. 거기에 등장하는 연예인들은 워낙 유명 연예인들이기 때문에 평소에 좋은 것도 많이 먹고 마시고 하는 사람들이니까 모두 알아맞힐 것도 같은데, 어이없게도 틀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또 이런 문제도 있었습니다. 바이올린 두 대와 첼로 한 대로 3중주를 하는데, 그 악기를 합한 가격이 한쪽은 25억엔이고, 다른 한쪽은 80만엔입니다만, 그 소리를 구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인데, 이는 이른바 소리로 먹고 사는 현역 유명 가수들도 틀리고 했습니다.
어떠세요? 우리는 맞힐 수 있을까요? 알고 보면 이게 참 힘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맞힐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런 문제를 당할 일이 없으니까 생각할 필요가 없다? 혹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수시로 이런 문제 앞에 놓이게 됩니다.
여러분께서는 하나님을 알아 보십니까. 하나님을 알아보실 자신이 있으십니까. 하나님 마음을 알아보실 자신이 있으십니까. 하나님 음성을 알아보실 자신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살다 보면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어느 쪽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지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이를 알아보는 몇가지 방법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첫 번째는 성경입니다. 성경 말씀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성령님이 사도들을 통해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답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기도입니다. 내가 어떤 것을 두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응답이 안 옵니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답답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엘리야가 기도를 많이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나요?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많이 한다고 무조건 응답하십니까? 아니면 기도를 크게 한다고 무조건 응답하십니까? 아닙니다. 그 기도가 하나님 마음에 맞아야 응답됩니다. 하나님 마음에 맞는다면 중언부언 기도를 할 필요도 없고, 목이 쉬도록 힘들게 기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는, 기도하는 내 자신이 피곤하지도 않습니다. 기쁨이 넘칩니다. 마음에 평안이 다가옵니다.
기도는 내 생각을 주구장창 늘어놓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내 고집을 굽히지 않고 예수님 앞에 떼를 쓰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이 때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지금 내 옆에 예수님이 계셔서, 지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주님께 물으면 어떻게 말씀하실까. 이것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따라 나아갈 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신 놀라운 응답과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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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회 예수님을 만나면 변합니다
2017년 1월 1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5장 25절~34절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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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을 만나면 변합니다”イエス様に逢うと変わります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12년 동안을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이 예수님에게 손을 대었더니 곧바로 병이 나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만나고 병을 치료 받은 사람이 많습니다만, 오늘은 이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어 치료 받은 여인을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성경에는 이 여인이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 나이가 젊은지 많은지, 이름이 무엇인지조차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름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 사람이 어디 사랑인지, 그 사람이 몇 살이나 먹었는지 정도는 금방 보면 어느 정도 짐작이 갈 텐데, 그에 대한 기록은 없고, 오히려 금방 봐서는 잘 알 수 없는 정보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25절에 보면, 이 여인에 대해서 12년 동안을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 그러나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인이라고 소개됩니다. 성도 없고 이름도 없고 단지 이 짧막한 설명이 이 여인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이 여인을 설명하는 데에 부족한가요? 아니요, 이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여인은 12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이 혈루증이라고 하는 질병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혈루증은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부인병이고, 월경이 아닌데도 계속해서 출혈이 있는 질병입니다. 그런데 이 질병은 여느 질병과 달리 특별합니다. 그 이유는, 이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이른바 부정하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는, 쉽게 말하자면 차별대상이었습니다. 일반적인 질병, 즉 팔이 아프거나 다리가 아프거나, 앞을 보지 못하거나 일어서지 못 하거나 하는 질병이나 장애는, 물론 일상생활에는 매우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부정하다>는 말을 듣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혈루증, 구약에서는 유출병이라고 하는데 레위기 15장에 보면 율법적으로 이 질병은 부정하다고 되어 있어, 이는 마치 나병처럼 이에 대한 세부적인 규례가 적혀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를 쉽게 말하자면 이 질병을 앓는 환자는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설 수도 없고 가까이 가서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33절에 보면,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女は恐れおののき、自分の身に起こった事を知り、イエスの前に出てひれ伏し、イエスに真実を余すところなく打ち明けた。

라고 되어 있는데, 여인이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두려워했다는 이유는, 사람들 앞에 나와서는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실이 탄로났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성경에 치료 받은 사람들은 많지만, 이 여인처럼, 인간적으로 보자면, 예수님한테 허락도 받지 않고 치료 받은 사람은 아마 이 여인이 처음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 성경에는 이 여인이 예수님께 손을 댄 이유가, 28절에 보면,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お着物にさわることでもできれば、きっと直る。」と考えていたからである。


즉, 다른 건 모릅니다. 지금까지 그런 사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지금 부정한 몸인데, 그래도 되는지 안 되는지도 모릅니다. 다른 것은 하나도 알지 못했지만, 단 하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저 예수님한테 가서, 예수님 옷자락에 손이라도 댈 수 있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나음을 입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어떻게 나아오라고 말씀하십니까.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에 처해 있을 때, 죄악에 빠져 허덕이고 있을 때, 네가 네 어려움을 다 해결하고 오라? 아니면 네가 네 힘으로 네 죄를 다 해결하고, 그리고 나서 깨끗하게 된 다음 내게로 오라? 그것도 아니면 너 혼자서는 능력이 안 되니까, 내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한테 부탁해서 같이 오라?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すべて、疲れた人、重荷を負っている人は、わたしのところに来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休ませてあげます。

예수님한테 오는 사람은 조건이 없습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 낮은 사람, 돈이 많은 사람, 없는 사람, 남녀노소, 누구든지 오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리 거룩한 척, 아무리 깨끗한 척을 해봐야 우리 모두는 다 같은 죄인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죄 가운데 빠져서 허우적 거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지금 물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세상 법적으로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을 그냥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이구, 쯧쯧. 그러길래 미리 수영을 배워놓지 그랬어. 그리고 아무 일도 안 하고 보고만 있었어요. 살려주고 싶어도 내가 수영을 못해요? 그렇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건 아니죠. 옆에 튜브든지 끄나풀이든지 있으면 던져줄 수도 있고, 그것도 없다면 119로 전화를 한다거나, 주변에 도움을 줄만한 사람을 찾아나선나거나, 할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만일 아무것도 안 하다가 그 사람이 죽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래요. 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어요. 그 사람을 죽으라고 무엇을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형법상 부작위에 의한 고의라고 해서 살인죄로 처벌 받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죄 가운데에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사람한테, 넌 예수 믿을 준비가 아직 덜 됐으니까 나중에 믿으라고 해요? 너 같이 맨날 나쁜 짓만 하는 사람은 예수 믿을 자격이 없다고 해요? 아니면, 교회에 바칠 헌금이 없다고 해서 교회에 나오지 말라고 해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더러 뭐라고 하겠습니까. 역시 똑같이 벌을 받게 되겠지요.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데에는 준비가 필요 없습니다. 지금 그냥 있는 그대로 예수님 앞에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 여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체면이고 율법이고 간에 이것저것 안 가리고 무조건 예수님한테 갔습니다. 그녀한테 있었던 것은 단 한 가지. 예수님한테만 가면, 예수님의 그 옷자락만 잡더라도 내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만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어떻게 해서 이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오늘 본문에 기록된 여인의 과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25절과 26절을 봅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ところで、十二年 の間長血(ながち)をわずらっている女がいた。この女は多くの医者からひどいめに会わされて、自分の持ち物をみな使い果たしてしまったが、何のかいもなく、かえって悪くなる一方であった。

12년을 혈루증을 앓으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더구나 그 당시는 지금처럼 위생용품도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에 불편한 점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거기에 출혈이 심하니까 몸도 마음도 쇠약해지고,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용하다는 의사가 있으면 거기 가서 비싼 돈을 들이고 치료를 받습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죠? 그 치료 받는 것은 그럼 쉽습니까. 무슨 조직검사다 무슨 검사다, 이런 치료다, 저런 치료다, 이런 약이다 저런 약이다……병원에 다니면서 치료를 해보신 분이라면, 돈도 돈이지만 그 치료과정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얼마나 힘들고 고된 일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정말 그런 일을 12주나 12개월도 아닌 12년이나 해왔다니, 벌써 그 여인의 상태가 어땠겠습니까.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재산까지도 탕진했는데, 병이 낫기는커녕 도리어 더 중해졌다고 합니다.
그 여인한테는 이제 꿈도 희망도 없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봤어. 그런데 이제 기력도 없고 돈도 없고, 소망까지 없으니 어떻게 살아갈까 하고 모든 것을 포기한 바로 그때,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했어. 그래도 안 되더라…이겁니다. 그런데 마침. 예수님한테 가면 병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었던 그녀에게 비로소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로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힘 센 남자들도 있었겠지요. 젊은 사람들도 많았겠지요. 그런데 그 사이를 이제 몸도 마음도 쇠약해진 한 여인이 뚫고 들어간다는 것이 어디 쉬웠겠습니까. 하지만 그녀에게는 이제 희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이제 체면이나 율법이나 이 세상 의사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예수, 오직 예수, 그녀에게는 예수님만이 필요했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무리들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눈에는 오직 예수님만이 보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 많은 인파들 사이를 뚫고 손을 뻗습니다. 죽을 힘을 다 해서 뻗습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5미터, 4미터, 조금만, 조금만 더, 하지만 많은 무리들 때문에 이리 떠밀리고 저리 떠밀립니다. 하혈이 심했던 그녀한테서는 불결한 냄새가 났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누군가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그녀를 무리 바깥으로 내칠지도 모른다는 위험도 있었습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옷도 찢어지고 신발도 벗겨졌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안간 힘을 다 해서 손을 뻗습니다.
3미터, 2미터, 1미터.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이 닿았습니다. 그 순간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늘 본문 29절,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すると、すぐに、血の源がかれて、ひどい痛みが直ったことを、からだに感じた。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이 닿는 순간 <곧> 질병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손을 뻗고 3미터일 때까지, 2미터일 때까지, 1미터일 때까지 아무 일도 안 일어났습니다. 조금씩 나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마침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이 닿았을 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난 이 여인은 이제 변화가 일어납니다. 어떤 변화일까요.

이 변화를 다음 3가지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첫째는, 당연히 건강상의 변화입니다. 12년 동안 그녀를 괴롭혀 왔던 질병으로부터 나음을 받았습니다. 해방되었습니다. 그녀는 건강,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건강이라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혈루증이 나은 그녀는 기력이 회복됩니다. 힘이 나기 시작합니다. 이제 세상을 살아가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직전과 만나고 난 직후는 완전히 다른 삶입니다. 죽을 날만 기다리던 그녀가 아니라 이제 새로운 꿈,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펼치는 인생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둘째는, 경제적인 변화입니다. 하루 이틀도 아닌 12년을 질병의 치료에 매달렸습니다. 그녀가 전에는 어느 정도의 경제적 능력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제 더 이상 남은 돈도 없습니다. 모두를 탕진했습니다. 그 동안 어떤 수입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그야말로 <밑빠진 독에 물 붓기>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질병이 나았습니다. 치료 받았습니다. 더 이상 병원비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이제 경제적으로 안정되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사회적인 변화입니다. 우리 속담에 <긴 병에 효자 없다>고 합니다만, 12년 동안 앓아오는 과정에서 그녀 주변에서는 가족도 떠나도 친구도 떠나고, 그리고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혈루증을 앓고 있는 것은 율법적으로 부정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소외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그 지긋지긋한 질병이 치료되고, 지긋지긋한 문제에서 해방되어, 이제는 당당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유인으로서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다니면 사람들이 하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 예수를 만나야 한다, 예수를 만나야지만 된다……이런 말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예수님을 만나요? 그건 뭐,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얼굴도 마주보고, 대화도 하고, 그래야지만 예수님을 만나는 건가요? 그렇다면 전 예수님을 만난 적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저는 아직까지 직접 본 적이 없어요.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우리가 이 눈으로 얼굴을 보고 말을 하고……그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서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는 내가 꿈에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과 말을 했다, 그런 분들도 계십니다만, 그런데 막상 그 사람의 삶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예수님을 만나면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 삶이 변화됩니다. 우리 삶이 변화되었다면 그것은 누가 먼저 알아요? 나 자신이요? 아니요, 내 주변 사람들이 제일 먼저 알아봅니다.

제가 한국에서 일본 대학 시험 보는 아이들을 가르쳤을 때의 일입니다만, 그 중 한 학생이 있었는데. 얘가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맨날 까불고 그러는 애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친구들이랑도 야, 누구누구야 하면서 맨날 장난도 치고 그랬던 애였습니다. 그리고 선생님들한테는 얼마나 귀찮게 하는지, 맨날 얼굴만 보면 선생님~ 이러고 와서 이런저런 질문을 해요.

하도 그러다보니까 어떤 선생님은 이 아이만 보면 도망가거나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이, 그렇다고 정말로 도망간게 아니라 그냥 장난으로 도망가는 척도 하고 그랬던 것입니다.
유학시험의 경우에는 각 대학마다 시험날짜도 다르고 해서 발표날짜도 다 제각각이에요. 얘는 실력도 되는 아이였기 때문에 케이오대학을 쳤어요. 그것도 경제학부입니다. 케이오대학에서 대표적인 과가 문과에서는 법학부랑 경제학부거든요.
그런데 발표날 얘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뭐, 예상은 했었습니다만, 딱 붙은 거예요. 그러니까 저도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본인도 기뻐하고 부모님도 기뻐했겠지요. 그리고 다음 날 학원에 왔습니다. 제 교실에 들어왔어요. 옷차림도 원래 입던 그대로, 얼굴 인상도 당연히 그대로, 눈으로 보기에는 바뀐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얘가 들어오면 교실에 있던 친구들이 서로 누구누구야, 뭐,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장난도 치고 농담도 하고 그랬을 텐데, 합격자 발표가 난 다음 날에는 이미 학원에 소문이 다 났겠죠? 그러니까, 얘가 교실 문을 딱 열고 들어와요. 그러니까 다른 아이들이 얘를 보고, 딱 한 마디 “와……”하더라구요.

그렇죠. 이제 걔는 수험생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자면 얘가 삼수를 했는데, 이제 얘는 더 이상 삼수생이 아니라, 뭐예요? 케이오대 합격생이었던 것입니다.
본인은 잘 모르지만, 이미 주변에서 그 아이를, 칙칙한 별볼 일 없는 삼수생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당당한 케이오대 합격생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다니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5년 10년 교회에 다닌다고 하는 사람이 믿기 전과 믿은 후의 차이가 없어요? 건강상의 변화도 경제적인 변화도, 사회적인 변화도 없어요? 기도 응답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내 주변에서 아무도 나를 보고 바뀌지 않았대요? 아무도 나를 예수 믿은 사람으로 알아보지 않아요?
기도해야 합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기도할 때 주님 나를 만나주소서, 가 아닙니다. 내가 가만히 앉아서 주님더러 이리 오시라고 해요? 그게 아니라, 내가 가야죠. 오늘 이 혈루증을 앓던 여인처럼 주님께로 가야지요. 어떻게 가요? 점잔 빼고 가나요? 아니요, 영적으로 물불 안 가리고, 그야말로 기를 쓰고 가야합니다. 그러면 변화 받습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면 치료 받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에게 소망이 생깁니다. 희망이 생깁니다. 힘이 생깁니다. 꿈이 생깁니다. 우리 삶이 변화됩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안 시켜도 기도합니다. 누가 안 시켜도 전도합니다. 누가 안 시켜도 간증합니다. 누가 안 시켜도 기뻐합니다. 누가 안 시켜도 찬양합니다. 누가 안 시켜도 봉사합니다.
이렇게 되면 어디 감히 사탄이 틈을 타겠습니까. 어디 감이 죄가 들어오겠습니까. 어디 마귀가 기웃거리겠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지고 예수님께 나아가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변화 받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축복 받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은혜가 충만해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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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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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회 하나님의 축복을 앞당기는 방법
2017년 1월 8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45절~49절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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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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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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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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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축복을 앞당기는 방법”神様の祝福を早める方法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은 참으로 두꺼워서, 우리에게는 생소하고 어려운 이야기도 많은 반면에, 잘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도 적지 않습니다. 이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믿음이 없는 분들도 많이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사사시대를 거쳐 사울이 초대 왕으로 앉아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호시탐탐 노리면서, 수도 없이 괴롭히곤 했었습니다.
이번에도 쳐들어와서는 시비를 거는데, 이번에는 평소와 조금 더 달랐습니다. 적군에는 골리앗이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이 사람의 용모가 남달랐습니다.

사무엘상 17장 4절~7절에 보면 이 골리앗에 대한 묘사가 나와 있는데,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의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의 키는 여섯 규빗 한 뼘이요 머리에는 놋 투구를 썼고 몸에는 비늘 갑옷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무게가 놋 오천 세겔이며 그의 다리에는 놋 각반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 단창을 메었으니 그 창 자루는 베틀
V채 같고 창 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방패 든 자가 앞서 행하더라”

ときに、ペリシテ人の陣営から、ひとりの代表戦士が出て来た。その名はゴリヤテ、ガテの生まれで、その背の高さは六 キュビト半。頭には青銅のかぶとをかぶり、身にはうろことじのよろいを着けていた。よろいの重さは青銅で五千シェケル。足には青銅のすね当てを着け、肩には青銅の投げ槍を背負っていた。槍の柄は 機織の
V巻き棒のようであり、槍の穂先は、鉄で六百シェケル。盾持ちが彼の先を歩いていた。

라고 기록합니다. 골리앗의 키가 여섯 규빗과 한 뼘이라고 하는데, 이를 요즘 척도로 바꾸면 대략적으로 2미터 90센티 이상이 된다고 합니다. 이게 어느 정도의 키인지 잘 상상이 안 가시죠?

참고로 2015년 현재 세상에서 가장 키가 큰 사람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는 사람은 2미터 36센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2미터 90센티라고 하는 키는 21세기에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제일 키가 큰 사람보다도 50센티 이상이나 더 컸다고 하니 말 다했죠.
그런 골리앗이 입고 있던 갑옷의 무게가 5천세겔이라고 하는데, 이은 대략 60킬로그램에 해당합니다. 여기에 다윗은 그럼 어땠을까 하면, 당시 다윗의 나이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습니다만 소년 또는 청년이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리 많아봤자 20세 이하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청년 다윗이 골리앗과 대결할 때 그는 갑옷을 전혀 입지 않았습니다.
자…이 둘이 대결을 합니다. 한 쪽은 이방인 블레셋의 거대한 장군, 용사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쪽은 다윗은 전쟁터에 나간 형들한테 도시락 심부름을 나왔는데 그 때 골리앗을 보고 덤벼든 철없는 청년으로 비추었을 것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승부는 뻔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뭐라고 합니까.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볼까요?


사무엘상 17장 45절~47절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V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ダビデはペリシテ人に言った。「おまえは、剣と、槍と、投げ槍を持って、私に向かって来 るが、私は、おまえがなぶったイスラエルの戦陣の神、万軍の主の御名によって、おまえに立 ち向かうのだ。きょう、主はおまえを私の手に渡される。私はおまえを打って、おまえの頭を胴体から離し、きょう、ペリシテ人の陣営のしかばねを、空の鳥、地の
V獣に与える。すべての国は、イスラエルに神がおられることを知るであろう。この全集団 も、主が剣や槍を使わずに救うことを知るであろう。この戦いは主の戦いだ。主はお前たちをわれわれの手に渡される。」」

그리고 물매를 던졌더니 그 돌맹이가 이마에 박혀서 거구 골리앗 장군이 쓰러졌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드라마틱한 장면입니까. 이로서 다윗은 하루만에 이스라엘의 영웅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자, 이 구절을 교회에서 들어보신 분들 많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은 어떻게 되나요? 할렐루야, 어린 다윗이 골리앗 장군을 쓰러뜨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이와 같은 기적을 일으키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이것이 일반적인 설교 스토리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이러한 말씀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이런 말씀을 들어보았고 은혜도 많이 받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 내용을 읽고, 아 그랬구나, 그런 일이 있었구나, 신기하네……. 이걸로 끝난다면 얼마나 허무합니까. 다윗은 다윗이고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것은 성경이 아닙니다. 그저 여느 신화나 세상에 널린 이야기책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성경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쓰여진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설교하라고 목사를 위해 쓰인 것도 아니고, 내 옆에 시간 많고 돈 많은 사람이 심심풀이로 읽으라고 쓰인 책도 아닙니다. 누구를 위해서 쓰인 책입니까.

그렇죠. 바로 나 보라고, 나 읽으라고, 그리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으라고,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라고 쓰인 책이 바로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성경, 오늘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그저 와~ 신기하네. 이걸로 끝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은 이 다윗과 골리앗에 대한 내용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깨닫고, 바로 내가, 우리가, 다윗과 같은 놀라운 능력을 받고, 축복을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당시 골리앗 앞에 섰던 다윗, 그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성경을 자세히 읽지 않았거나, 또는 읽긴 읽었지만 왠지 내 머리 속에, 여러분 머리 속에 있는 다윗의 이미지는 어떠십니까. 흥미롭게도 꽤 많은 분들이 좀 몸집이 작고 나약하고 볼품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성경을 한 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무엘상 16장 12절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エッサイは人をやって、彼を連 れて来させた。その子は血色の良い顔で、目が美しく、姿もりっぱだった。主は仰せられた。「さあ、この者に油を注げ。この者がそれだ。」

사무엘상 17장 42절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ペリシテ人はあたりを見おろして、ダビデに目を留(と)めたとき、彼をさげすんだ。ダビデが若くて、紅顔の美少年だったからである。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사무엘상 17장 34절~35절을 보면,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ダビデはサウルに言った。「しもべは、父のために羊の群れを飼っています。獅子や、熊が来て、群れの羊を取 って行くと、私はそのあとを追って出て、それを殺し、その口から羊を救い出します。それが私に襲いかかるときは、そのひげをつかんで打ち殺しています。

이미 다윗은 아버지의 양을 치는 일을 했었는데, 그 때 사자나 곰들이 공격을 해오면 수염을 잡고 물리쳤다고 하는데, 이게 아무나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이 다윗의 말이 과장이나 거짓말이 아닌 이상, 다윗도 상당히 싸움에 능숙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38절~39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사울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 투구를 그의 머리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히매 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하지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 보다가 사울에게 말하되 익숙하지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곧 벗고”


サウルはダビデに自分のよろいかぶとを着させた。頭には青銅のかぶとをかぶらせ、身にはよろいを着けさせた。ダビデは、そのよろいの上に、サウルの剣を帯び、思い切って歩いてみた。慣れていなかったからである。それから、ダビデはサウルに言った。「こんなものを着けては、歩くこともできません。慣れていないからです。」ダビデはそれを脱ぎ、

다윗이 블레셋의 용사 골리앗을 상대하러 나가겠다고 사울 왕한테 말을 하니, 사울 왕은 자신의 갑옷을 벗어서 다윗에게 입혀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의 몸집은 어땠을까요?

사무엘상 9장 2절에 보면,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

キシュにはひとりの息子がいて、その名をサウルと言った。彼は美しい若い男で、イスラエル人の中で彼より美しい者はいなかった。彼は民のだれよりも、肩から上だけ高かった。

사울 왕은 키가 모든 백성보다 컸다고 하는데, 그 컸던 사울이 다윗에게 자신의 갑옷을 입혀주려고 했습니다. 갑옷도 물론 사이즈가 있었겠지만, 자신의 갑옷이 다윗에게 전혀 맞지 않을 것 같았으면 애초에 입혀주려고 하지도 않았겠지요. 그리고 다윗이 그 갑옷을 입었습니다만, 너무 커서 벗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익숙하지 않아서 벗었다고 합니다.
이상과 같은 기록을 종합해본다면 다윗의 나이는 20세 또는 그 이하의 젊은 나이에 몸집은 다른 사람들보다 키가 컸고 용모는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양들을 공격하는 사자나 곰 같은 사나운 동물들도 물리칠 힘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나이 어리고 외소하고 볼품없는 소년이 싸웠던 것이 아닌, 몸집도 능력도 어느 정도 되는 청년 다윗이 블레셋의 용사 골리앗 앞에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골리앗을 물리친 것이 다윗 혼자의 실력이었다고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전쟁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닌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아무리 힘이 강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지만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과 함께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어떻게 해서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쳤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다윗을 여기까지 만들어오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초대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셨던 사울을 버리십니다.

사무엘상 15장 11절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わたしはサウルを王に任じたことを悔いる。彼はわたしに背を向け、わたしのことばを守らなかったからだ。」それでサムエルは怒り、夜通 し主に向かって叫んだ。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기름을 부으시고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사울은 처음에 왕으로 세움을 받을 때에는 너무나도 겸손해서 짐보따리 뒤에 숨었을 정도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셔서 왕으로 통치하게 되고 전쟁에서 성과도 올립니다. 이렇게 되니 그는 이제 처음에 가졌던 겸손한 마음을 버리고, 그 빈 자리를 교만함이 자리잡게 됩니다. 하나님께는 불순종을 거듭하고,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행하게 됩니다.

사무엘상 15장 12절에는,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翌朝早く、サムエルがサウルに会いに行こうとしていたとき、サムエルに告げて言う者があった。「サウルはカルメルに行って、もう、自分のために記念碑を立 てました。それから、引き返して、進んで、ギルガルに下りました。」

이제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드러내려 합니다. 자신이 왕이 된 것이 자신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우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이제 자기를 위해서 기념비를 세우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즉, 하나님 이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높이기에 급급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왕의 자리에서 사울을 내치고 다른 인물을 세울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사무엘에게 명령하십니다.

사무엘상 16장 1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主はサムエルに仰せられた。「いつまであなたはサウルのことで悲しんでいるのか。わたしは彼をイスラエルの王位から退 けている。角に油を満たして行け。あなたをベツレヘム人エッサイのところへ遣わす。わたしは彼の息子たちの中に、わたしのために、王を見つけたから。」

이 말씀을 듣고 이제 베들레헴으로 이새라는 사람을 만나러 갑니다. 그리고 다른 말은 안 하고, 너희 아들들을 데려오라고 해요. 그래서 일곱명을 불러모아놓고 하나하나 검토를 하는데, 하나님께서 놀랍게도 거기 있는 이들이 모두 다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사무엘상 16장 11절,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サムエルはエッサイに言った。「子どもたちはこれで全部ですか。」エッサイは答えた。「まだ末の子が残っています。あれは今、羊の番をしています。」サムエルはエッサイに言った。「人をやって、その子を 連れて来なさい。その子がここに来るまで、私たちは座に着かないから。」

사무엘은 이새더러 그의 아들들을 불러 모으라고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인 아들 중에 기름을 부을만한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세요. 그런데 막내가 하나 남았는데 지금 양을 치고 있다는 대답입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겠습니까.

선지자 사무엘이 오니까 이새라고 하는 사람이 긴장했겠지요. 더구나 아들들을 소집시키라고 하니, 서둘러 모읍니다. 그런데 다 모으면 양을 칠 사람이 없을 거잖아요. 그래서, 야 니가 해, 아니야 니가 해……이렇게 되다 보니 결국은 막내 혼자서 양을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어디 한 두번이었겠어요? 양을 돌보고 먹이를 먹이고 이동시키고…이는 매우 고된 일일 것입니다. 세상에 고된 일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있어요? 회사에서나 모임에서의 일들을 보면, 할 때는 힘 들어도 그래도 일을 좀 한 티가 나면 한 보람도 있어요. 와, 이런 일을 했구나, 힘들었지? 정말 수고했어…뭐 이런 말 한 마디라도 들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정말 하기 싫은 일은 어떤 일인가 하면요, 하기는 매우 힘든데 아무리 해도 티가 안 나는 일, 그런데 안 하면 티가 확 나는 일……이런 일이 제일 힘듭니다. 대표적인 것이 집안일이겠지요. 청소도 해야 하고 빨래도 해야 하고 밥도 해야 하고……물론 처음에는 알아주기도 하고 칭찬도 해주겠지만, 조금 지나면 무슨 그게 당연한 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야 할 일이 줄어드나요? 아니요, 늘어나면 늘어나지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힘은 더 들어요. 그런데 티는 안 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 하면 어떻게 되요? 금방 티가 나죠.
이 양을 치는 일도 어쩌면 그런 일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래서 항상 제일 귀찮은 일, 제일 하기 싫은 일은 어쩌면 가장 힘이 없었던 막내 차지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날도 귀한 손님이 오신다고 하니 첫째부터 둘째, 셋째 형님들이 차례로 나가게 되었고, 여느 때와 같이 제일 막내는 양이나 지키는, 어쩌면 허드렛일이나 하는 처지가 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 막내는 어디에도 이에 대해 불평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저 묵묵히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때가 이르렀을 때, 하나님이 바로 그 막내를 찾으십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그렇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청년 다윗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와 갈이 블레셋 족속들과 전쟁이 일어났을 때, 다른 형들은 전쟁에 나아갔지만, 나이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사정 때문인지 다윗은 집을 지켜야 했고, 기껏 한다는 일이 형들을 위한 도시락 심부름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다윗은 묵묵히 자기에게 맡기진 일을 하지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다윗이 말하기를, 자신이 양을 지킬 때 사자나 곰이 와서 공격하면 이에 맞서 싸우고 물리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원해서 그 힘든 일을 했어요? 아니요. 그냥 아무도 안 하니까, 너도나도 떠맡기니까 할 수 없이 다윗이 그 힘은 힘대로 들고 티는 하나도 안 나는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지 않고 묵묵히 감당했기에 사자나 곰을 상대할 힘을 길를 수도 있었고, 마침내 골리앗 앞에 서서도 당당하게 맞설 수가 있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갔을 때의 일입니다. 솔직히 전문대도 아니고 4년제, 그것도 이공계도 아니고 문과를 졸업했다면, 회사에서 실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정말이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전문대는 바로 현업에 투입되어도 일을 해낼 수 있는 실무적인 일을 배우고, 이공계도 그 전문지식을 살려서 결과를 낼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만, 이 문과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3개월 동안 한 일이 뭐냐 하면 회의자료 복사하는 일이랑 커피 심부름이었습니다.
회의자료 복사는 뭐 알 것도 같습니다. 부장회의다 사장단 회의다, 회장님이나 부회장님이 오시면 보고할 자료작성이다, 주간업무보고 월간업무보고……아무튼 회의가 많습니다. 그러면 그 자료들을 복사하는 일도 보통이 아니에요. 그것도 복사만 하나요? 복사를 하면 다 분류를 해서 호치키스로 찍습니다. 요즘은 좋은 복사기들이 많아서 작업도 쉽게 끝나지만, 저 때까지만 하더라도 참 번거롭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커피 심부름… 참 이거 귀찮습니다. 그런데 이게 이상해요. 제가 처음 배치된 부서가 전략기획실이었는데, 거기가 사장실 바로 옆이거든요. 그리고 사장님 비서도 거기 있어요. 사장님이 혼자 있을 때에는 커피를 비서가 가져갑니다. 그런데 꼭 손님이 오거나 하면 당시 기획실 막내인 저한테 시키는 겁니다. 홍성필씨, 여기 커피 3잔, 홍성필씨, 여기 커피 4잔…이렇게요.

아니, 비서가 있으면 비서한테 시키면 되지, 왜 나한테 시킬까. 아니, 그런 생각이 안 들겠어요?
그런데 저처럼 생각하는 신입사원들이 저만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 동안 나름 열심히 노력해서 대학도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가고 그랬는데, 아니, 기껏 시키는 게 이거야? 맨날 종이 복사나 하고, 커피 심부름이나 하고……내가 이런 거 하려고 여기 왔나?
이런 자괴감도 들고 환멸도 느끼곤 한답니다. 그렇다면 상사나 직장 선배들이 이런 일을 시키는 이유가, 그저 귀찮은 일이니까 시키는 것뿐일까요? 아닙니다. 사실은 이 아무 일도 할 줄 모르는 신입사원을 생각해서 시키는 일입니다.
먼저, 복사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솔직히 그 회사의 부장회의나 사장단 회의 같은 데에 다루어지는 내용들은 모두가 대외비입니다. 매우 중요한 내용들이 다루어지고 결정됩니다. 그런 자료들은 갓 들어간 신입사원이 감히 볼 수도 없는 자료입니다. 그러니까 공식적으로는 이 자료를 너한테 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복사하면서 힐끔힐끔이라도 보면서 분위기를 익히라는 그런 깊은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죠.

그리고 꼭 손님이 오면 커피심부름을 시키는 사장님는 왜 그랬을까요? 생각해보세요. 당시 다니던 곳이 그래도 꽤 지명도가 있는 회사였습니다만, 그 회사 사장님을 만나러 오는 손님들이 무슨 말단 직원이었겠어요? 그것도 사장님이 커피까지 대접하려는 손님은 적어도 대기업 부장급 이상은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이 또한 갓 들어간 신입사원이 언제 만나보겠어요? 그러니까 커피를 타서 들어갈 때에 얼굴이라도 익히고 인사라도 나누라고 하는, 이 또한 매우 깊은 뜻이 담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도대체 날 뭘로 보기에 이런 잡일이나 시키는 거야, 나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내가 이런 일이나 하려고 여기 들어온 줄 알아? 내가 이래뵈도 말이야……. 이렇게 불만이나 하고 있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형들이 시키는 일들을 이런 불만 저런 핑계를 대면서 요리 빼고 조리 빼고 했으면, 그는 사자나 곰을 상대할 힘이나 능력도 기르지 못했을 것이요, 골리앗도 물리치지 못했을 것이요, 장차 이스라엘 왕이 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걸 거꾸로 생각하면 어떻게 되요? 형들이 귀찮아 했던 그 일들은 바로 이스라엘 왕이 되기 위한 훈련이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형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고 하면, 내가 그 일을 함으로써 이스라엘 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설마 막내한테 일을 떠맡겨겠어요? 아니요, 서로 자기가 하겠다고 했을지도 모를 노릇이지요. 하지만 그들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아무런 불만 없이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구약의 요셉은 어떻습니까. 노예로 팔려서 애굽으로 가는 길이 장차 나이 서른에 애굽의 총리가 되는 길이었다고 생각했다면 형들이 요셉을 팔았겠습니까? 아니요, 어쩌면 내가 먼저 노예로 팔려가겠다, 아니, 내가 가겠다, 이러면서 싸움이 일어났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팔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형들을 원망했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은 어땠습니까.

창세기 12장 10절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さて、この地にはききんがあったので、アブラムはエジプトのほうにしばらく滞在するために、下って行った。この地のききんは激しかったからである。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는 가나안 땅에 도달했으면 이를 믿고 거기 있어야죠. 기근이 들었다고, 조금 생활이 어려워졌다고 해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갑니까. 성경에서 애굽은 단지 그 나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말합니다.

이사야 31장 3절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エジプト人は人間であって神ではなく、彼らの馬も、肉であって霊ではない。主が御手を伸ばすと、助ける者はつまずき、助けられる者は倒れて、みな共に滅 び果てる。

그러니까, 가나안 땅을 버리고 애굽을 의지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의 약속을 버리고 세상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잘 살게 되었나요? 아니요. 하마터면 자기 부인을 빼앗길 위기에 처해지고, 세상적으로도 수치를 단단히 겪고 또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얼마나 사랑하세요. 예,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님의 목숨까지도 우리를 위해서 내주셨을 정도로 사랑하십니다. 이는 과거가 아닙니다. 사랑하셨습니다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가 고생하시는 것을 보고 기뻐하시겠습니까. 아무런 이유 없이 심심풀이로 우리에게 고난과 고통을 주시겠습니까. 아니요. 절대로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에게 고통과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과 고난과 역경은 바로 믿음 안에서 우리를 이스라엘 왕 다윗으로 만드시기 위한 과정, 믿음 안에서 우리를 애굽의 총리 요셉으로 만드시기 위한 과정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あなたがたのあった試練はみな人の知らないよう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神は真実な方ですから、あなたがたを耐えることのできないような試練に会わせるようなことはなさいません。むしろ、耐えることのできるように、試練とともに、脱出の道も備えてくださいます。

우리가 고민하고 힘들어 할 때, 우리 주위에 아무도 내 어려움을 알아주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내 가족도 내 친구도 내 이웃도 내 고난에 대해서 알아주지 않으면 어때요. 하나님이 알아주시면 되잖아요. 그리고 피할 길을 내어 감당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욥기 23장 10절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しかし、神は、私の行く道を知っておられる。神は私を調べられる。私は金のように、出て来る。

광야에서 모세 뒤를 따라 애굽을 빠져 나온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이었습니까. 무슨 일이 닥치기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뭐예요?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民はモーセにつぶやいて、
民はモーセにつぶやいて、

결국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 기껏 노예로 살던 애굽에서는 해방되었으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구경도 못해보고 광야에서 다 죽어갔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을 막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안에 있는 원망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 세상에 대한 원망, 이것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하나님의 축복을 앞당기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아침에도 감사, 밤에도 감사, 잘 될 때도 감사, 잘 안 될 때도, 그 때는 결국은 잘 될 거니까 감사……. 내 마음과 내 입에서 감사와 순종과 찬송이 넘쳐나면 축복이 폭포수처럼 쏟아집니다. 옆집에 갈 축복도 나한테 쏟아집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믿으시나요? 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순종함으로 감사함으로 따를 때 놀라운 축복이 쏟아집니다. 요셉한테 임했던 축복, 다윗한테 임했던 축복이 쏟아질 줄 믿습니다.

잊지 맙시다. 우리는 결국은 잘 됩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을 의지하듯 세상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넘치는 감사와 넘치는 순종과 넘치는 찬양을 드릴 때, 넘치는 축복과 넘치는 은혜를 폭포수처럼 받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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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회 하나님께 복 받을 자
2017년 1월 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46절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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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께 복 받을 자” 神様に祝福された人たち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제 2017년입니다. 새해를 맞이한다는 것은 한 살 덕 먹는다, 아 슬프다, 이런 게 아닙니다. 한 살을 더 먹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감사한 일입니다. 지난 한 해에도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2016년을 넘어 2017년을 웃는 얼굴로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송구영신, 옛 것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는 뜻입니다만, 지난 한 해는 여러분께 어떠셨습니까. 축복된 한 해요? 아니면 힘들었던 한 해요?
아무리 기쁘고 보람된 한 해였다고 생각하는 분도, 잘 생각해시면 힘들었던 일도, 슬펐던 일도 그리고 아쉬웠던 일도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힘들었던 한 해였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마찬가지시겠지요. 아무리 힘들었다고 해도 설마 한 번도 웃는 일이 없었겠습니까. 잘 생각해보면 그 힘든 와중에도 조금은 기쁘기도 하고, 조금은 즐겁기도 하고, 그래도 몇 번은 웃기도 했을 것입니다.
일본 한자 능력 검정 협회에서는 매년 “올해의 한자”를 일반 사람들로부터 공모해서, 가장 수가 많은 한자를 12월에 쿄토 키요미즈데라에서 붓글씨로 써서 발표하는데, 올해 2016년의 한자로 꼽힌 글자는, 전체 15만 3562표 중에서 6655표를 차지한 <쇠 금> 자가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응모자들이 이 글자를 선택한 이유도 여러가지인데, 그 이유를 보면, 지난 여름에 열린 리우 올림픽에서의 금메달 러쉬가 기억에 남았다고도 하고, 전임 동경 도지사의 정치자금문제, 그리고 일본 최대 수산시장이죠? 츠키지 시장을 토요스로 이전하는 데에 따른 돈 문제, 마지막으로 2020년 동경올림픽 개최에 있어서 들어가는 천문학적인 비용문제 등을 그 이유로 꼽았다고 합니다. 그 이외에도 재미있는 것으로는, 미국 대통령으로 새로 당선된 미국 도널드 트럼프 당선자의 금발이 인상적이라서 골랐다는 사람도 있고요, 또 무슨, 애플펜~ 이라는 단조로운 노래와 춤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피코타로의 금빛 의상도 이 ‘금’이라는 한자가 선정되는 데에 한몫 했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듣고, 저도 역시 나 자신에게 있어서 올해의 한자를 뽑으라고 하면 어떤 글자를 고를지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만, 저 자신의 올해의 한자를 뽑는다고 한다면, 지난 한 해에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지, 내가 올 한해에 무슨 일들을 겪었는지를 하나하나 떠올리면서 검토를 해보아야 하는데, 문제는 이런 것들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1년이라고 하면 365일, 아니, 2016년은 윤년이었으니까 366일이었습니다. 다른 해보다도 하루가 많아요. 시간으로 해보면 366일 곱하기 하루 24시간…자는 시간을 넉넉잡아 8시간으로 잡고 24에서 8시간을 빼면 깨어있는 시간은 16시간. 그렇게 해서 366일 곱하기 16시간을 해보면 무려 5,856시간이 됩니다.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죠. 당연히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겠지요. 기쁜 일도 많았고 아쉬운 일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생각해내려 하니, 몇몇 기억밖에 떠오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작년에 일어났던 일들을 여기 A4 용지에 나열해 보시라고 하면 몇 개나 적으실 수 있겠어요? 자기 생각이나 감상을 빼고 일어났던 일들만 적는다고 하면 이 종이에 빼곡히 적어넣으실 수 있으세요?

오늘 본문을 살펴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33절입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人の子が、その栄光を帯びて、すべての御使いたちを伴って来 るとき、人の子はその栄光の位に着きます。そして、すべての国々の民が、その御前に集められます。彼は、羊飼いが羊と山羊(やぎ)とを分けるように、彼らをより分け、羊を自分の右に、山羊を左に置きます。

이것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이 땅에 다시 오셨을 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처음 오셨을 때에는 매우 초라한 모습이셨습니다만, 심판을 위해서 오실 때에는 영광된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자, 이제 심판을 시작하십니다. 사람이 사람을 재판하는 경우에는 절차도 복잡하고 시간도 오래 걸립니다만, 하나님이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시는 속도는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처럼 하신다고 기록합니다. 우리 일반인들도 양과 염소를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는데, 가축들을 기르는 것이 직업인 목자들한테는 얼마나 쉬운 일이겠습니까.


먼저 그렇게 구분을 해 놓으시고, 이제 오른쪽에 있는 의로운 무리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35절~36절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あなたがたは、わたしが空腹であったとき、わたしに食べる物を与え、わたしが渇いていたとき、わたしに飲ませ、わたしが旅人であったとき、わたしに宿 を貸し、わたしが裸のとき、わたしに着る物を与え、わたしが病気をしたとき、わたしを見舞い、わたしが牢にいたとき、わたしをたずねてくれたからです。』


이렇게 말씀을 하시니까 이 사람들이 뭐라고 해요? 아, 제가 착한 일 좀 했죠 뭐. 제가 상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랬어요? 이 사람들의 말을 좀 들어볼까요?

37절~39절입니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すると、その正しい人たちは、答えて言います。『主よ。いつ、私たちは、あなたが空腹なのを見て、食べる物を差し上げ、渇いておられるのを見て、飲ませてあげましたか。いつ、あなたが 旅をしておられるときに、泊まらせてあげ、裸なのを見て、着る物を差し上げましたか。また、いつ、私たちは、あなたのご病気やあなたが牢 におられるのを見て、おたずねしましたか。』

이 사람들이 지금 뭐래요? 예, 기억도 못합니다. 아니, 제가 언제 주님을 돌봐드렸어요? 저 그렇게 착한 일 한 적 없어요.


이 말을 들은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40절입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すると、王は彼らに答えて言いま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告げます。あなたがたが、これらのわたしの兄弟たち、しかも最も小さい者たちのひとりにしたのは、わたしにしたのです。』

나한테 직접 하지 않았더라도 너희들이 지극히 작은 사람들한테 해줬잖아? 뭘 해줬어요? 배고픈 사람한테 음식을 대접해줬고, 목 마른 사람한테 물을 마시게 하고, 오갈 데 없어서 난처한 사람을 영접했고, 입을 게 없는 사람한테 옷을 입게 했고, 병 들었을 때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봐줬잖아. 그게 바로 나한테 한 거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하는 게 누구를 뜻하는 것일까요? 누가복음을 함께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4장 12절~14절입니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また、イエスは、自分を招いてくれた人にも、こう話された。「昼食や夕食のふるまいをするなら、友人、兄弟、親族、近所 の金持ちなどを呼んではいけません。でないと、今度は彼らがあなたを招いて、お返しすることになるからです。祝宴を催すばあいには、むしろ、貧しい人、不具 の人、足なえ、盲人たちを招きなさい。その人たちはお返しができないので、あなたは幸いです。義人の復活のときお返しを受けるからです。」


요즘도 텔레비전을 보면 정부인사나 정치인들이 재벌들한테서 많게는 수십억, 수 백억 돈을 받아 챙깁니다.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하나같이 하는 말이 “대가성이 없다”고 주장을 하지요. 아니, 그 사람들이 대가성이 없이 그 많은 돈을 정치인들한테 갖다주겠어요? 그 사람들이 실성했습니까? 당연히 그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챙기기 위해서 그렇게 앞 다투면서 상납하는 것입니다. 일반인들도 뭐 그렇잖아요. 꼭 뭐 뇌물이 아니더라도, 예를 들어서 내가 이번에 밥을 샀으면, 다음에는 저 사람이 밥을 사겠지. 내가 이번에 저 사람한테 이런 선물을 했으니까 다음에는 저 사람이 나한테 이렇게 해주겠지.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세요? 괜한 흑심을 품거나 뭘 기대하지 말고, 오히려 전혀 대가를 못받을 사람들한테 베풀라는 것입니다. 왜요?

누가복음 14장 12절 후반부 말씀이 참 흥미롭죠?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でないと、今度は彼らがあなたを招いて、お返しすることになるからです。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될까요? 부자들 불러다가 밥을 먹이고, 부자들한테 잘해주고 그러지 말아. 괜히 그랬다가 그 사람들이 갚으면 어떡하려고 해?

참 말씀이 흥미롭죠? 사람들은 오히려 갚아줄 것을 기대하고 부자들한테 돈도 갖다바치고 하는데, 주님은 오히려, 부자들이 갚아줄까봐 하지 말고, 오히려 절대로 너희들한테 갚을 확률이 거의 없어보이는 사람들,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해서 베풀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래도 사회가 그나마 좀 발전해서 몸이 불편하신 분들도 제한적이긴 하지만 사회활동도 할 수 있고 그렇습니다만, 과거에는 완전히 불가능하다시피 했거든요. 그런 분들한테는 아무리 내가 대접을 해도 절대로 되돌려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그런 분들한테 대접하라는 거예요. 왜요? 우리가 잘 되는게 싫어서요? 지금 무슨 사람 인내심 테스트 하시는 거예요? 아니요. 그러실 리가 있겠습니까.

누가복음 14장 14절을 보십시오.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その人たちはお返しができないので、あなたは幸いです。義人の復活のときお返しを受けるからです。」


주님 말씀은 이것입니다. 부자들한테 잘해줘서 그 사람이 갚아줘봐야 별 것 있겠냐. 차라리 절대로 못 갚을 사람한테 잘해줘. 그럼 내가 나중에 더 큰 걸로 갚아줄게……이것이 바로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갚아주시는 장면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들, 절대로 대가를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한테 이 사람들은 베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이 사람들이 한 게 뭐예요.

마태복음 25장 35절~36절을 다시 한 번 볼까요?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あなたがたは、わたしが空腹であったとき、わたしに食べる物を与え、わたしが渇いていたとき、わたしに飲ませ、わたしが旅人であったとき、わたしに宿 を貸し、わたしが裸のとき、わたしに着る物を与え、わたしが病気をしたとき、わたしを見舞い、わたしが牢にいたとき、わたしをたずねてくれたからです。』

즉, 지극히 작은 자한테 먹을 것을 주었답니다. 지극히 작은 자가 목마를 때 마시게 했다고 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가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영접했다>는 것은, 그렇다고 무슨 평생 먹여 살렸다는 것이 아니라, 잠시 유숙할 곳을 마련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헐벗은 사람한테 옷을 줬고, 병 들었거나 옥에 갇혔을 때, 그 뒷일을 다 돌바준 게 아니라, 그저 찾아가봐준 것 뿐입니다.
이웃을 돌 보거나, 이웃한테 좀 도움을 주라고 하면, 대뜸 하는 말이 뭐예요? “아이, 제가 좀 형편이 안 되어서요. 제코가 석지인데요…”
오늘 이 본문 말씀을 자세히 한 번 살펴보세요. 굶주린 사람한테 부페 대접하래요? 고급호텔이나 레스토랑에서 풀코스 사주라십니까? 아니에요. 한국 같으면 설렁탕 한 그릇, 일본이면 라면 한 그릇이라도 충분합니다. 목 마른 사람한테 물 한 잔 줘도 괜찮아요. 해는 저물고 바깥은 춥고 그런데, 당장 갈 곳이 없다고 나한테 왔어요. 잠깐만 눈붙일 곳만 있게 해달라고 해요. 그런데 그 사람을 내쳐요? 그냥 들어오라고 해서 아무 방이나 따뜻하게 해서 묵도록 했습니다. 그걸로 되는 것입니다. 헐벗은 사람한테 새옷을 사입혀야 해요? 아니에요. 지금 헐벗은 사람이 새옷 헌옷 가리게 생겼어요? 지금 나한테 있는 옷을 급한 대로 입게 하면 되는 거예요. 병들었거나 옥에 갇힌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처럼 찾아가서 돌봐줘야 해요? 아니요. 그냥 몇 번 찾아가서, 용기를 주고 기도해주고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무슨 큰 돈 들어가는 것이 있어요? 넉넉잡아 일본돈 몇 천엔, 한국 돈 몇 만원만 있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돈도 없어요? 그렇다면 다른 구절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42절을 보겠습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わたしの弟子だというので、この小さい者たちのひとりに、水一杯でも飲ませるなら、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告げます。その人は決して報いに漏 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

어떠십니까. 내가 돈이 없더라도, 가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더라도 냉수 한 그릇은 대접해줄 수 있지 않겠어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해준 것? 글쎄요. 그런 일이 있었나? 저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요? 하지만 기억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게 바로 누구세요? 예, 우리 주님은 그 모든 것을 기억하시는 분이십니다.

반대로 이제 왼편에 있는 사람들한테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2절에서 45절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おまえたちは、わたしが空腹であったとき、食べる物をくれず、渇いていたときにも飲ませず、わたしが旅人 であったときにも泊まらせず、裸であったときにも着る物をくれず、病気のときや牢にいたときにもたずねてくれなかった。』
そのとき、彼らも答えて言います。『主よ。いつ、私たちは、あなたが空腹であり、渇き、旅をし、裸であり、病気をし、牢 におられるのを見て、お世話をしなかったのでしょうか。』
すると、王は彼らに答えて言います。『まことに、おまえたちに告げます。おまえたちが、この最も小さい者たちのひとりにしなかったのは、わたしにしなかったのです。』

이번에는 지극히 작은 자들을 베풀지 않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도 역시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베풀지 않은 것? 글쎄요. 그런 일이 있었나? 저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요? 하지만 역시 기억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게 바로 누구세요? 예,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은 그 모든 것을 기억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 모두, 자신들이 한 일을 잘 기억하지는 못했습니다. 서로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그 결과는 참으로 극명하게 갈립니다.

베풀었던 사람들이 받은 상은 34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そうして、王は、その右にいる者たちに言います。『さあ、わたしの父に祝福された人たち。世の初めから、あなたがたのために備えられた御国を継ぎなさい。

그리고 베풀지 않았던 사람이 받은 벌은 끔찍했습니다. 41절을 봅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それから、王はまた、その左にいる者たちに言います。『のろわれた者ども。わたしから離れて、悪魔とその使いたちのために用意された永遠の火に入れ。


이 얼마나 큰 차이입니까. 한 쪽은 하나님께 복 받을 자들이라 칭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창세로부터 예비된 천국까지도 상속받게 되었고, 다른 한 쪽은 예수님을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된 불구덩이 속으로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 판결을 들으시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너무 하다고 생각하세요? 이렇게까지 하는 건 너무나도 심하다는 생각이 드시나요?
그런데 알고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이 작아보여도 그 행동은 사람에게 희망을 줄 수도 있고, 또한 절망을 가져다 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매주 주일 오후가 되면 전도지를 나누어주는 성도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날은 몸도 피곤하고 날씨도 비가 너무나도 많이 내리는 날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날은 안 나가려고 했는데, 11살된 아들이, 오늘은 주일인데 엄마가 집에 있길래, 오늘은 왜 안 나가냐고 물어보니까, 몸도 너무 피곤하고 비도 많이 내리니까 안 나간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들래미가 그럼 자기가 나가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아들한테 전도지를 맡깁니다.
억수같이 내리는 빗속을 우산을 쓰고 열심히 집집마다 전도지를 돌리는데, 마지막 한 장이 남았어요. 그래서 어떻게 할까 하다가 어느 집 문을 두드립니다. 그러니까 어떤 아주머니가 나오십니다. 그래서 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전도지를 내밀며 말을 합니다.
“아줌마한테 이 전도지를 드리려 왔어요.”라고 말하고는 그리고 건내드리고 왔습니다. 그 아이가 한 건 그게 다예요. 아마도 그 아이는 이 아주머니의 얼굴도, 그리고 그 아주머니의 집도 자세히 기억을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다음 주 이 아주머니가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간증을 합니다.

“저는 남편과 아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저는 그 날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자살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비가 많이 오던 지난 주일 밤 목을 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기에 열어 보니 작은 천사가 서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저를 버리시지 않으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 아이의 전도지를 받고 읽으면서 자살을 포기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교회에 나왔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였습니다.”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베푸는 작은 손길, 어쩌면 우리는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막 접어든 2017년, 하지만 올해 이맘때도 아…지난 한해가 어떻게 지나갔을까…하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누구는 알고 계세요? 예,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을 살펴봅니다.

마태복음 23장 11절~12절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あなたがたのうちの一番偉大な者は、あなたがたに仕える人でなければなりません。だれでも、自分を高くする者は低くされ、自分を低くする者は高くされます。

로마서 12장 18절,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あなたがたは、自分に関する限り、すべての人と平和を保ちなさい。

우리가 작은 정성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길 때, 하나님은 큰 것으로 우리에게 갚아주십니다. 올 한 해, 하나님과 이웃을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다 하여 섬김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큰 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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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회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
2016년 12월 2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8절~14절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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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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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ハレルヤ!神様を愛する方はアーメン!と告白しましょう。アメーン。今日は皆さまと一緒に「イエス様が下さる喜び」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 いうタイトルで恵みを分かち合いたいと思います。

クリスマスです。皆さん、メリークリスマス!はい、この「メリークリスマス」という挨拶 を言う時の皆さんの顔がとても素敵です。外は榛名湖や、群馬の色々な場所、いいえ、日本中、世界中 は、いま、クリスマスツリーのイルミネーションで輝いています。でも、正確には全世界ではありません。クリスマスツリーがあるということは、それだけで平和だという証です。クリスマスケーキを食べられるということは、それは、当り前ではありません。メリークリスマスと 挨拶を交わせるということは、それだけでとても平和だということです。
でも、考えてみると妙です。クリスマスが何の日なのか、メリークリスマスがどんな意味なのかも知らないのに、お互いに明るい顔であいさつを交わします。
家族や友人たちと、または恋人同士 が楽しい時間を過ごす、それはそれで結構なことですが、それだけで終わりでしょうか。では、この世の中が平和だからと言って、みんながみんな楽しいひと時を過ごせますか?

例 えば、周りに友人がいない、友人がいても忙しくて会う時間がない、友人もいて、会う時間もあるけれど、経済的な余裕がない、まあ、つまり、お金がない。こういう 場合はどうですか?この前お会いしたある人は、友達もいる、時間もある、お金もある程度は持ち合わせている、クリスマスでも恋人 がいないので寂しい、というんです。こう考えてみると、今の世の中でクリスマスを本当に楽しむためには様々な条件を必要とするようです。ですが、それで本当にいいのでしょうか。

マタイの福音書を見てみましょう。
マタイの福音書5章44節~45節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自分の敵を愛し、迫害する者のために祈りなさい。それでこそ、天におられるあなたがたの父の子どもになれるのです。天の父は、悪い人にも良い人にも太陽を上らせ、正しい人にも正しくない人にも雨を降らせてくださるからです。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神様は良い人たちのためだけでなく、悪い人のためにも太陽を上らせ、正しい人たちだけのためではなく、正しくない人たちのためにも雨を降らせてくださると書かれています。これはどうしててしょうか。それは、今は悪い人、正しくない人であっても、イエス様は、待っておられるんです。まだチャンスはある、今ならまだ間に合う、早く戻ってきなさい。私の元へ戻ってきなさい、と待っておられるんです。ですから、たとえ、今は悪い人、正しくない人、ましてや自分を迫害する者であっても、その人のために祈りなさいとイエス様はおっしゃっているんです。
悪い人、正しくない人であっても、神様は彼らのために恵みを与えてくださっているのに、え?彼氏がいない、彼女がいない、時間がない、金がない、そんな理由 でクリスマスを楽しく送れないといったら、それこそ、神様が望むことではないはずです。
では、まず、この、メリークリスマスというあいさつをしますが、せっかくですから、このメリークリスマスの意味から見てみましょうか。

まず、メリーという言葉 は英語で楽しい、陽気な、という意味です。そして、クリスマス、これはキリストとマスという単語の合成語です。キリストとはヘブライ語で「油を注がれた者」「救世主」という 言葉をギリシャ語に訳した言葉です。そして、最後にマス…というのは、カトリックでミサという意味、つまり礼拝という意味です。この三つの言葉 をつなげると、楽しい、キリスト、礼拝という意味になります。つまり、メリークリスマスとは、楽しくキリスト・イエス様に礼拝 をささげましょう、これがメリークリスマスという意味だったんです。
クリスマスは礼拝 を捧げる日、キリストの誕生を祝う日なんです。ですが、イエス様を信じない多くの人々は、そんなことはお構いなしです。多くに人たちはこれを認めようとしません。いや、認めることは認めるけれど、それを深く考えようとはしません。クリスマスのルーツはキリスト教から始まったが、今はそうではない、ただチキンを食べ、 彼氏や彼女とデートをし、プレゼントを交換する、それができない人たち?ああ、そりゃ残念でした、というのです。


以前、このような話を聞いたことがあります。皆さんは恩赦・または赦免という言葉 をご存知ですか。これはその国の政府やトップが持つ権限の一つであって、罪が確定している人に対して、その刑を免除してあげられるというものです。
これはアメリカであった話だそうですが、アメリカでは大統領だけでなく、その州法での犯罪に関しては州知事にもこの権限が与えられています。ある日、凶悪な犯罪が発生しました。数人が殺害されるという痛ましい事件です。幸い犯人は逮捕されたのですが、捕まえてみたら、彼はまだ未成年者でした。彼は当然起訴され裁判を受けることになったのですが、未成年者ではあるが、犯行が極めて残虐であるため、 結局死刑判決が下されてしまいました。
勿論、犯罪は犯罪です。しかし、彼が未成年者だ、何とかもう一度チャンスを与えられないものかというので、一部の人たちによって救命運動が始まりました。そしてその趣旨に賛同する人たちが増え始めて、その声はその州の州知事の耳にも入りました。
ある日、州知事は一つの決断を下します。その犯罪を犯した青年と会ってみよう。そして、それから彼にチャンスを与えるかどうかを見定 めようと思い立ちます。それで、彼には自分が州知事であることを伏せ、牧師の格好をして刑務所にいる彼を尋ねました。
しかし、その青年は、自分の目の前に牧師の格好をして座っている州知事をみるなり、怒鳴り散らします。出ていけ!お前らなんかの顔などみたくもない!
州知事は、まあ、若気の至りなのだろうと思い、彼をなだめます。「まあ、まあ、落ち着きなさい。」
そして青年がある程度落ち着きを取り戻してから、州知事は質問をしました。
「もし、君がここから出ることができたら何がしたいかね。」
すると青年は言いました。
「出ることができるだと?もしここを出ることができたら、俺をこんな目に合わせたやつらに復讐してやる。まず、俺を警察に通報した奴、逃げる俺を捕まえた警官、そいつらはただじゃ置かない。絶対ひどい目に合わせてやる。」
これを聞いた州知事は驚きましたが、それでも辛抱強く聞き返しました。
「いや、君、落ち着きなさい。復讐とか仕返しとかではなく、もっと他にやるべきことがあるんじゃないか?」
しかし、青年は自分の言い分を変えようとはしません。彼らだけではなく、自分の周りにいた人たちも懲らしめると言ってききませんでした。

州知事は何度もなだめたり、言い聞かせたりもしましたが、一向に聞く耳を持たないその青年には、もう、何を言っても無駄 だと悟りました。州知事は結局あきらめて、静かに席から立ち上がり、そして刑務所を後にしました。
州知事が立ち去った後、その刑務所の職員が青年に言います。
「馬鹿者。お前は何と愚かなことをしたんだ。今、お前の前にいた人は州知事だったんだ。その人の上着 のポケットの中には、お前の罪を免除できる恩赦状が入っていたんだ。それがあれば、お前は明日にでもここから出られたんだ。」
これを聞いた青年は驚きます。そして、泣き叫びました。許してくれ、俺が悪かった、もう一度会 ってくれ、もう一度だけチャンスをくれ。しかし、州知事がその刑務所を訪れることは、もう、二度とありませんでした。

そもそも、イエス様が来られた理由は何ですか。それは、マタイの福音書20章28節に書かれています。


マタイの福音書20章28節
「人の子が来 たのが、仕えられるためではなく、かえって仕えるためであり、また、多くの人のための、贖(あがな)いの代価として、自分のいのちを与えるためであるのと同じです。」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ヨハネの福音書1章9節~11節
「すべての人を照らすそのまことの光が世に来 ようとしていた。この方はもとから世におられ、世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のに、世はこの方を知らなかった。この方はご自分のくにに来 られたのに、ご自分の民は受け入れなかった。」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イエス様はご自分のために来られたのではありません。この世の多くの人のために、多くに人たちの罪を解決するために、そのためにご自分の命を犠牲にするために 来られたんです。なのに、それにもかかわらず、人々はイエス様を拒んでいます、イエス様を認めません、イエス様を救世主、自分の、私のために来 られて犠牲になり、私たちの罪を私たちの代わりにすべて解決してくださった方だという事実を認めようとしないんです。
これは、例えばですね。私に借金があります。ですが、期日を過ぎても返すことができません。このままでは借金取りから逃れることができません。
まさにその時、イエス様が現れました。そして私におっしゃいます。私があなたの借金を肩代わりしてあげました。 借金 を肩代わりして「あげましょう」、ではないんです。「あげました」。もうすでに私がみんな払いました。
え?じゃあ、私は何をすればいいんですか?と尋ねます。イエス様は言います。いや、あなたが何かをする必要はありません。なぜならみんな私が解決したからです。ただ、そのことを認めて、そして信じてください。
イエス様がもし、あなたにそう言われたら、あなたはどうしますか?

いいえ、私は信じません、認めません。何があっても私が払います。大きなお世話です。といいますか?
当然、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と、いうでしょう?違いますか?
他の例で見ましょうか?比較しやすいように、重要なポイント以外は同じセリフで行きますね。
私が犯罪を犯しました。そして、死刑判決を受けました。一審、二審でも死刑です。最高裁で上告も棄却されました。残された道はもう死ぬだけです。
まさにその時、イエス様が現れました。そして私におっしゃいます。私があなたの代わりに死んであげました。あなたの代わりに死んで「あげましょう」、ではないんです。「あげました」。もうすでに私が罰を受けたのですから、あなたは自由の身です。
え?じゃあ、私は何をすればいいんですか?と尋ねます。イエス様は言います。いや、あなたが何かをする必要はありません。なぜならみんな私が解決したからです。ただ、そのことを認めて、そして信じてください。
イエス様がもし、あなたにそう言われたら、あなたはどうしますか?
いいえ、私は信じません、認めません。何があっても私が死にます。大きなお世話です。といいますか?

当然、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と、いうでしょう?違いますか?しかし、人間は長い歴史 の中でずっとこの、愚かな選択をしているんです。どれくらいですか?はい、2千年もの間、人間は拒み続けているんです。


マルコの福音書12章1節~9節
「それからイエスは、たとえを用いて彼らに話し始められた。「ある人がぶどう園を造って、垣(かき)を巡らし、酒(さか)ぶねを掘り、やぐらを建て、それを農夫たちに貸して、 旅に出かけた。季節になると、ぶどう園の収穫の分けまえを受け取りに、しもべを農夫たちのところへ遣わした。ところが、
v彼らは、そのしもべをつかまえて袋だたきにし、何も持たせないで送り帰した。そこで、もう一度別 のしもべを遣わしたが、彼らは、頭をなぐり、はずかしめた。また別のしもべを遣わしたところが、彼らは、これも殺してしまった。続いて、多くのしもべをやったけれども、彼らは袋だたきにしたり、
v殺したりした。その人には、なおもうひとりの者がいた。それは愛する息子であった。彼は、『私の息子なら、敬ってくれるだろう。』と言って、最後にその息子を遣わした。すると、その農夫たちはこう話し合った。『あれはあと 取りだ。さあ、あれを殺そうではないか。そうすれば、財産はこちら
vのものだ。』そして、彼をつかまえて殺してしまい、ぶどう園の外に投げ捨てた。ところで、ぶどう園の主人は、どうするでしょう。彼は戻って来 て、農夫どもを打ち滅ぼし、ぶどう園をほかの人たちに与えてしまいます。」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v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v죽인지라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v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マタイの福音書23章37節
「ああ、エルサレム、エルサレム。預言者たちを殺し、自分に遣わされた人たちを石で打つ者。わたしは、めんどりがひなを翼 の下に集めるように、あなたの子らを幾たび集めようとしたことか。それなのに、あなたがたはそれを好まなかった。」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これはもう、歴史的にずっと続いている悪しき流れなのです。認めればいいものを認めないんです。

だからといって、これは、教会の外に限った話ではありません。教会の中でも同じです。子供 たちに聞きます。クリスマスプレゼントは、もうもらいましたか。クリスマスプレゼントは、誰がくれるものですか?サンタさんがくれるものですか?では、何が欲しいですか?ゲームですか?

人間の学問は今まで、この世の仕組みから何としても神様やキリストを消そうとしてきました。それが科学です。そしてその結果生 まれたものが「自然」や「偶然」という言葉です。
聖書は言います。天と地は神様がお創りになった。すると科学者は言います。いいえ、それは神の御業ではなく自然の力によってできたものだ。
聖書は言います。この世界と、この世界に生きる生き物、そして人間が、神様が明確な意図を思ってお創りになられた。すると科学者は言います。いいえ、それは神の御業ではなく 偶然起こった出来事だ。
このように人間の行いは神を消そう消そうとします。これは学問に限ったことではありません。
教会でも、クリスマスにイエス様は消え、サンタクロースがその中心人物となり、いつしか、礼拝 は消え、ただ、お金を使い、世俗的な時間を楽しむ。これでは、クリスマスの真の喜びを味わえるわけがないではありませんか。
クリスマスに神様から送られた贈り物、これはほかでもないイエス・キリストそのものなのです。これが本当のプレゼントなんです。お金でも買えません。この世の中のすべてのものをもってしても、とても買え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そんな素晴らしいプレゼントを神様からいただいたんです。
じゃあ、私は何をすればいいんですか?と神様に尋ねます。皆さん、プレゼントに見返りがありますか?もし、見返 りがあるとすれば、それはプレゼントではないでしょう。
皆さんがプレゼントを選びます。そういう時に、ただ単に選びますか?いいえ、心を込めて、何が喜 ばれるか、何を欲しがっているかを考えに考えた末に買って、そして、その人にあげました。そしたら、その相手が、ああ、これを私のために買ってくれたんですか。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とても 喜んでくれました。しかし、ある人は、あ、そ、と言っただけで気にも留めません。これほど残念なことはありませんよね。残念 を通り越して怒ってしまうかもしれません。

メッセージを締めくくりましょう。
私たちは神様に対して何かをする必要がありません。ただ、わたしたちのために死なれ、私たちの罪をすべて解決し、私たちを救ってくださったということをしんじて、認めて、感謝を捧げるだけでいいんです。その始まり、スタート地点がまさに今日、クリスマスなんです。
これを知っていれば、もう、お金がなくても、恋人がいなくても、クリスマスは寂しくありません。寂しいどころか真の喜 びであふれることになるでしょう。これこそが神様が喜ばれるクリスマスだと言えると思います。
本当のクリスマス、本当のメリークリスマスを迎え、そしてイエス様への本当の喜 びと感謝であふれる私たちであらんことをイエス様の御名において祝福いた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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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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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회 죄의 기원
2016년 12월 18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절~6절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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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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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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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죄의 기원’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구약은 이야기들의 보물창고입니다. 노아의 방주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에서 시작해서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도 있습니다. 모세에 의해 애굽에서 탈출한 기록도 있습니다. 여호수아에 의한 가나안 땅 정복은 우리에게 많은 힘을 주기도 합니다.
성경은 물론 훌륭한 일, 선인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의지했는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위인전도 아니며 윤리서도 아닙니다.
만약 위인전이나 윤리서였다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 하더라도 나쁜 점이나 부끄러운 부분은 완전히 없애고 멋진 부분, 자랑스러운 부분만 열거되어 있었겠지요. 하지만 성경에는 실패담도 있나 하면 안타까운 장면도 적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에덴 동산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동산은 그야말로 완벽한 공간이었습니다. 노아 시대에 일어난 홍수에 의해 모든 것이 흘러내려간 지금에 와서는 당시 에덴 동산의 규모나 형태는, 이 성경에 적힌 글로밖에 접할 수 없습니다만, 그곳에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창조되고, 이 지구뿐만 아니라 전우주도 그 에덴동산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생물들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만드신 것들을 축복하십니다. 창세기 1장 22절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2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그러나 같은 피조물,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 중에도 매우 특별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름아닌 우리 인간입니다. 창세기 1장 26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라고 적혀 있는데, 이 한 구절은 매우 중요한 3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우선 첫째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나’라고 하는 단수가 아니라 ‘우리’라고 하는 복수형으로 말씀하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를 보여주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3절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빌립보서 2장 6절~8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즉, 예수님도 하나님의 본체이시고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드셨습니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자기 아이를 귀여워하는 것은 그 아이가 뛰어나거나 하는 이유가 아니라, 자기와 닮았다, 자기 모양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적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여러 가지 것들을 모두 창조하셨습니다만, 우리 인간만은 특별한 의도를 갖고 만드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창세기 2장 7절을 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이 창조 과정에서 이처럼 본인의 형상을 닮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친히 생기를 코에 불어넣어 주셨다고 하는 피조물은 우리 인간밖에 없습니다. 다른 생물체들은 말씀만으로 만드셨지만,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에는 이처럼 수고를 하시고, 정성을 담아서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비단 아담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에서 부모가 자신의 아이를 귀여워하는 이유를 자신과 닮았기 때문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모습으로 아이를 낳을 수가 있습니까?
저는 의학이나 생물학적 지식 같은 것은 없습니다만, 어머니와 아이의 혈액형이 항상 같기만 한 건 아니라는 점은 참 신기합니다. 물론 같은 경우도 있습니다만, 예를 들어서 어머니 혈액형이 O형인데, 그 어머니 뱃속에 있는 아이는 A형이다, 라고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니까 참으로 신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라고 해서 아이를 자신의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착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누구의 것입니까? 그렇죠. 바로 하나님 것입니다. 자신의 아이도 자기 자신처럼 하나님께서 만드신 작품이라 생각하고 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얘기가 좀 빗나갔습니다만, 그토록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정성을 담아서 만들어주신 걸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여타 피조물과는 분명 다른 사명을 주셨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창세기 1장 22절에 보면, 다른 피조물에 대해서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라고 축복하셨을 뿐입니다만, 인간에 대한 축복은 어땠을까요.

창세기 1장 28절을 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예, 뭐가 추가되었어요? 예, 첫 부분은 비슷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그리고 그 다음입니다.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이것은 정말 어마어마한 축복입니다. 바다 물고기, 하늘의 새,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다른 생물들보다도 몸집이 큰가요? 힘이 센가요? 아니요, 인간보다 몸집이 큰 동물들은 많습니다. 힘이 센 것도 많지요.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그와 같은 동물들에 의해 지배를 당하나요? 몸집이 크고 힘이 센 동물들이 이래라 저래라 하면 인간들이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고 그러나요? 아니잖아요? 반대로 우리 인간이 자기보다 몸집이 큰 동물들도 지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을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에덴동산도 이처럼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고, 사람한테는 특별한 축복을 해주셨기에 영원하고도 평화로운 삶이 약속되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물거품으로 만든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고 맙니다. 오늘 말씀,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 이른바 선악과를 따먹고, 그뿐만이 아니라 함께 있던 남편에게도 주어서 먹게 했다고 기록합니다만, 이는 정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오늘은 이 사건을 좀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사건이 발생한 시점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아담과 하와과 기원전 몇 년에 창조되고, 그리고 몇 년에 선악과를 먹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만, 그 외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사실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당시까지 아이가 없었다는 것. 이는 성경에 기록이 없기 때문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그 당시 그들의 생활에는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지금 우리 인간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물론 여러 많은 것들이 개발되어 옛날에 비하면 스마트폰이다 인터넷이다 하여 무척 편리해진 것 같습니다만, 그 반면 안 좋은 점은 없나요?
얼마 전에도 운전 중에 스마트폰을 썼다고 해서 사망사고가 일어났지요? 인터넷은 물론 편리하긴 합니다만, 사람한테 상처를 입히거나, 있지도 않은 유언비어를 유포시켜서 민폐를 끼치게 하거나 하는 악영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공장이나 자동차도 그렇습니다. 공해나 사고에 대한 부작용이 끊이질 않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것들을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만든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은 어땠습니까. 그것은 완전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신 완전한 곳이었습니다. 완전한 환경이었습니다. 흠집 하나 없는, 완전무결한 곳이 바로 에덴동산이었던 것입니다. 거기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축복된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신비함을 말해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 8절을 봅니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이거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에덴 동산을 거니셨다는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아무런 장벽도 없었기에, 마음껏 하나님을 볼 수 있었고, 마음껏 하나님과 말씀을 나눌 수가 있었고, 마음껏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었던 장소입니다.
여러분, 이런 곳에 살고 싶지 않으세요? 상상만 해도 마음이 설레지 않으십니까?
그와 같은 정말 멋진,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 그런 생활에 있을 때에, 무엇이 다가왔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뱀이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뱀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뱀’이라고 하는 동물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탄이 뱀의 몸을 빌려서 다가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리고 하와한테 속삭입니다.


창세기 3장 5절~6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말이죠, “아니, 그걸 도대체 왜 먹었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했잖아, 그 외에도 먹을 건 얼마든지 있지 않았냐. 하고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와는 그 열매를 따 먹고, 그뿐만이 아니라 아담에게도 주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절대로 먹지 말라고 하는 말씀을 직접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와가 그 열매를 먹는 것을 나무라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와로부터 그 열매를 받아 들고는 먹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일부 신학자들은, 이는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다,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하는 사탄의 유혹에 진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적힌 글을 보면, “그래, 어디 나도 한번 하나님처럼 돼보자”라고 하는,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라고 하는 강한 의지가 아무래도 느껴지질 않습니다.

성경에는 그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다. 그래서 따먹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와는 정말로 내가 하나님처럼 되어보자, 하나님을 이겨보자, 라고 하는 거창한 마음이 아니라, 그저 단순히 좀 먹어보고 싶다, 먹지 말라고 하니 더 먹어보고 싶다, 좀 혼날지는 모르지만 아마 괜찮겠지. 기껏해 봐야 그 정도 대수럽지 않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땠습니까. 너무나도 참혹했습니다. 우선 그 나무열매를 먹은 그들에게 처음 일어난 일은 무엇입니까.

창세기 3장 7절에 보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자신들이 벗은 줄을 알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그 때까지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눈이 밝아져서 보였다고 하니까, 그럼 더 좋아진 건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벗었다고 하는 것은 자신을 지켜주는 것이 이제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는 하나님 영광 안에 있었으며, 하나님의 축복 속에 머물고 있었기에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주셨지만, 이제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약속을 져버렸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주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옷을 만들어 자기 몸을 지키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인간의 힘의 한계입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실 때에는 자기가 아무런 옷을 입고 있지 않더라도, 그러니까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괜찮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핵폭발이 일어나더라도 문제없습니다.

다니엘 3장 27절에 보면,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버리지 않았기에, 극렬히 타는 풀무 속에 던져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그 속에서 나왔을 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다니엘 3장 27절,
“총독과 지사와 행정관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보호입니다. 극렬히 타는 풀무불 속에 던져져도 머리털 하나 그을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철저한 하나님으로부터의 보호가 아담과 하와를 떠났습니다. 그래서 앞서 살펴본 것처럼,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엮어서 자신들을 지키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한 보호에 비한다면, 인간의 힘으로 자기 스스로를 지키려고 한다는 것은, 지가 아무리 노력해봐야 그깟 무화과나무 이파리를 엮어서 자기 몸을 지키려 하는 정도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받게 될 벌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창세기 3장 16절~19절,
“v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v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제 죄인이 되어버린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에덴 동산에 있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에 결국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하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아마도 “예? 설마…… 말도 안돼……이렇게 될 줄 정말 몰랐어.” 그러고 그녀는 또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아……괜히 먹었다. 쓸데없이 그딴 걸 왜 먹었을까.”
하지만 이제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이미 심판은 내려졌습니다. 그렇다면 하와는 왜 그랬을까요. 왜 그들은 이런 지경에 빠지고 말았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감사의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라고 하면 잘 실감이 안 나실지 모릅니다만, 예를 들어서 도박이나 마약 등은 어떻습니까. 불과 얼마 전에도 일본 유명 스포츠 선수나 연예인이 불법도박이나 마약을 사용해서 경찰한테 체포되거나, 아니면 그 때까지 일구어놓은 사회적 지위를 한 순간에 잃거나 하는 뉴스를 듣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도박을 해야 할만큼 절박할 정도로 가난했다거나, 아니면 마약을 써서 쾌감을 맞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밑바닥 인생을 살았던 것도 아닙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 반대 케이스가 많다고 할 수 있겠지요.
불법도박으로 붙잡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돈이 많고, 마약을 쓴 연예인들도 유명인에다가 경제적으로도 풍족한 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그들이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가 하면, 역시 감사의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돈은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돈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나요?

재력만 있으면 인생은 성공하나요?
아니요. 아무리 돈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인간이 갖는 경제력 같은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에 비하면, 그야말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만든” 볼품없는 치마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소금물입니다. 돈을 더 벌어보려고 도박을 하거나, 자신의 마음에 기쁨을 느끼려고 약에 의존하는 인간들의 모습은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소금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인간의 모습 바로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4장 13절~1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우리가 아무리 몸부림을 쳐봐도 사람의 힘 만으로는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는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의지해도 되고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만이 우리의 길이라고 믿으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우리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57회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 →

← 제55회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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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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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회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
2016년 12월 1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Last Update 2019. 5. 21

누가복음 16장 1절~9절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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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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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 이 말씀은 이른바 성경에서 난해한 구절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합니다. 저도 이 구절이 오랫동안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성경 말씀에 담긴 주님의 뜻을 이해하게 된다면 참으로 큰 은혜가 임하게 될 줄을 믿습니다.
이 말씀의 줄거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등장인물은 주인과 청지기와 채무자들입니다. 주인은 이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청지기를 불러놓고, 너를 이제 해고할 테니 어서 장부정리를 해. 그러니까 요즘 식으로 하자면 인수인계를 하라고 명령합니다.
이처럼 횡령사건이 들통나서 덜미가 잡히게 된 피의자 청지기는 이제 해고가 되어 직장을 잃게 되고, 이제 어쩌면 자신이 낭비한 돈을 물어내야 하며, 자신이 저지른 죄값을 치러야 할 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이제 그는 고민을 하기 시작합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상황이 이렇게 되었을 때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세상적으로 본다면 우선 낭비를 했다고 하는 증거를 없애거나 아니면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 청지기는 조금 독특한 행동을 시작합니다.
주인으로부터 해고통지를 받은 청지기는 이제 주인한테 빚진 자들을 불러다가 그 빚을 자기 마음대로 줄여줍니다. 기름 백 말을 꾸어간 사람한테는 오십이라고 쓰라고 하고, 밀을 백 석 꾼 사람한테는 팔십만 꾸었다고 거짓으로 쓰라고 합니다. 이렇게 선심을 써주면 자기가 해고된 다음에도 그 사람들이 자신을 고용해주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랬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 청지기는 참 머리가 좋습니다. 주인이 조사를 해보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이미 해고통보를 했다는 것은, 주인이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아무리 아니라고 주장해봐야 소용없고, 어설프게 증거를 없애봐야 자기 허물만 늘어난다고 생각했던 그는, 이후에 닥칠 사태에 대해서 대비하는 방법을 택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고서 채무자들의 채무를 감면시켜주기로 결심을 합니다만. 그 때의 이 청지기의 행동을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감면을 시키려면 자기가 그냥 장부를 고쳐쓰면 될 것인데도 그 채무자를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직접 거기에 고쳐쓰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가 아닐까 합니다.
하나는 자신이 이렇게 선심을 써줬다는 것을 직접 알게 하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만약에 장부를 조작했다는 사실이 탄로 난다면 그 장부를 고친 것은 자기가 아니라 바로 그들이 그렇게 멋대로 고친 것으로 하려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대단히 머리가 잘 돌아가는 청지기입니다. 여기까지가 이 청지기의 행동을 정리한 것입니다만, 이 이야기가 난해한 이유는 특별히 다음 세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첫째로, 주인은 이 청지기를 칭찬했습니다. 이 청지기가 잘한 일이 무엇입니까. 이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고, 이 보고를 들은 주인은 해고하겠다고 했는데, 청지기는 주인의 채무자들을 불러서 자기 멋대로 채무금액을 줄여줍니다.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다고 하는데, 주인한테 빚을 진 그 금액을 줄이는 건 그럼 낭비가 아닌가요? 아닙니다. 역시 이것도 낭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행동에 대해서 칭찬을 받았을까요. 세상적으로 보면 이 청지기가 한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난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그를 칭찬했다는 것은 대단히 이해하기가 힘든 부분입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성경의 다른 부분들을 보면 주로 재물을 탐하거나 권력을 남용하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을 비난하기도 하셨으며, 이 비유도 어쩌면 그런 내용일 수도 있을텐데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대상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 아니라 분명히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구절입니다. 문자 그대로를 보면 의롭지 않은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인데, 불의의 재물? 의롭지 않은 재물은 거들떠보지도 말아라……라고 해야 맞을 것도 같은데, 오히려 친구를 사귀라고 하십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 하는 것이죠.
바로 이 세 부분 때문에 이 구절이 난해하다고 합니다만, 오늘은 이 부분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를 하고, 이 비유로 말씀하시려는 주님의 넘치는 은혜를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먼저, 청지기가 한 <낭비>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낭비>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주인에게 들키기 전에 청지기가 했던 <낭비>이고, 또 하나는 주인에게 들키고 해고통보를 받은 다음에 청지기가 했던 <낭비>입니다.
앞에 했던 <낭비>에 대해서 성경에는 기록이 없고, 주인에게 들킨 다음에 채무자들의 채무를 줄여준 <낭비>만을 성경은 기록합니다만, 처음 <낭비>는 주인이 못 마땅하게 여겼으나, 나중에 했던 <낭비>를 통해서 주인의 칭찬을 받습니다. 이로써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똑같이 주인한테는 손해가 되는 <낭비>임에도 불구하고 분명 두 <낭비>는 서로 달랐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나중에 한 <낭비>를 살펴보면, 자연히 먼저 한 <낭비>도 우리가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선 <두번째 낭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이득과 손해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 <두번째 낭비>에서는 채무자들의 채무금액을 줄여주었습니다. 그럼 주인은 이득과 손해, 어느 쪽이에요? 예, 주인은 손해입니다. 그럼 채무자들은요? 예, 채무가 줄어들었으니까 채무자들에게는 이득이겠지요. 청지기는요? 예, 변동이 없습니다. 이유는 청지기가 자신의 돈을 꿔준게 아니라 자기 주인의 돈을 꿔주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주인은 분명히 손해를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청지기를 칭찬했습니다. 그렇다면 주인이 화를 냈던 <첫번째 낭비>도 이로써 짐작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먼저 주인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주인의 소유를 낭비했다고 하니 <첫번째 낭비>에서도 당연히 주인은 손해를 입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 채무자들에게 있어서는 어땠을까요. 오늘 예수님 말씀으로 미루어볼 때, 주인의 소유를 낭비하면서까지 채무자들에게 이익을 보게 해 준 것은 해고통보를 받은 후에 한 행동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첫번째 낭비>로 채무자들이 이득을 본 것은 없겠지요. 그렇다면 이득을 본 것은 누구였겠습니까? 예, 바로 청지기 자신입니다.
첫번째 낭비에도 두번째 낭비에도 주인은 똑같이 손해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화를 낸 첫번째 낭비와, 주인이 칭찬을 한 두번째 낭비의 차이는, 첫번째 낭비에서는 청지기가 이득을 본 것이었으며, 두번째 낭비에서는 채무자들이 이득을 본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주인의 돈을 써서 채무자들이 이득을 보게 했다고 주인이 칭찬했을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청지기가 왜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청지기는 자신한테 맡겨진 돈을 가지고 돈을 꾸어주고 그러면서 이득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돈을 가지고 자신을 위해 허랑방탕하게 낭비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좋은 옷도 사 입고, 요즘 식으로 한다면 좋은 차도 뽑고 그랬을 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인줄 알고, 모든 재산이 자기 마음대로 써도 되는 줄 알고 허비하고 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첫번째 낭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주인이 부릅니다. “너 해고야! 짐 싸!”
이 말을 듣는 순간, 청지기는 그제서야 알아차립니다. 아! 이게 다 내 것이 아니었구나! 내 것이 아니라 내 주인 것이었구나!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이제 나는 해고를 당하게 되는데, 지금 내가 예전처럼 똑같이 차를 사봐야 빼앗길 것이고, 옷을 사봐야 소용이 없겠다고 판단한 청지기는, 에라, 어차피 내 돈도 아닌데, 차라리 인심이나 쓰자. 그러면 내가 해고를 당한 다음에도 나를 맞아주는 사람들이 생길지도 몰라. 이렇게 생각해서 채무자들을 불러서 빚을 줄여준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청지기가 썼던 돈을 가리켜서 <불의의 재물>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재물이 누구의 것입니까. 여기서 이 재물은 주인의 것이었습니다. 주인이 나쁜 짓을 해서 돈을 벌었어요? 그래서 불의의 재물인가요? 아니요.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불의의 재물입니까. 그 이유는 청지기가 사용한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닌데도, 자신에게는 권한이 없는데도 마치 자신의 소유인 것처럼 사용한 재물이었기 때문에 <불의의 재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불의의 재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세상에 있는 재물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재물들이 모두가 알고 보면 내 소유가 아닌, 내게는 아무런 권한이 없는 재물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내가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재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많은 돈을 갖고,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갖고 있었다고 할 지라도,
“너 해고야! 짐 싸!”
라는 통보를 받으면 하나도 남김 없이, 그냥 두 손 털고 일어나야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사람이 알게 될 때가 언제입니까.
사람마다 상황이야 다르겠으나, 예를 들어 병원에서 의사가 멀쩡한 나를 앉혀놓고는,
“암입니다. 이미 퍼져서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길어봐야 1년입니다.”
라는 말을 들었다면 어떻겠습니까. 이게 바로 인생에 있어서 해고 통보나 다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 때 그럼 좋은 차를 사시겠습니까. 예쁜 옷을 사시겠습니까. 주식이나 부동산에 투자하시겠습니까.
이 말을 듣는 순간, 사람들은 알아차립니다. 아아, 알고보니 이게 다 내 것이 아니었구나. 바로 오늘 살펴본 청지기와 똑 같은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주인이 청지기를 칭찬한 것은 바로 이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모두가 다 자기 것이 아니라 진정한 소유주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열심히 일을 합니다. 돈을 법니다. 그리고 많은 것을 소유합니다. 소유한 것이 없나요? 그렇다면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무엇이고,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무엇입니까.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소유하고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게 잘못되었다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그것들의 진정한 소유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는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누구한테 말씀하셨다고요? 예, 제자들한테 말씀하셨습니다. 즉, 이 비유는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있는 바로 우리들한테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 중에서 8절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6장 8절,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를 주인이 칭찬한 이유는 그 소유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유가 아닌 그 재물을 이용해서 머지않아 자신에게 닥치게 될 사태를 대비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이 세상 사람들도 그처럼 미래를 대비할 줄 아는데, 믿는 사람들이 다가올 일들에 대해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고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기록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어떤 말씀이 반복적으로 사용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7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22장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 22장 20절,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강한 의지를 나타내실 때에는 3번 반복하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 장에서 주님께서는 속히 오리니, 속히 오리니, 그리고 마지막에는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고 계십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같은 계시록 16장 15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계시록 16장 15절,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그것도 속히 오십니다. 그것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때에 도둑 같이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언제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유물을 영원히 자신이 가질 것이라고 착각하고 사시겠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재물, 모든 소유물은 불의의 재물, 내가 진정한 소유자가 아닌 재물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성경의 앞뒤가 모두 다 맞아떨어지게 됩니다.
누가복음 12장 16절~21절을 봅니다.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 세상 재물들을 열심히 쌓아두고 이제 천년 만년 즐겁게 살아보자고 기대에 부풀어봤자, 진정한 소유주인 하나님께서, 너 오늘 해고야, 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지 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6장 20절에는,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도 재물들을 이 세상에 쌓아두려고 애를 쓰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내가 가진 것을 모두 빼앗아가시는 그런 야박하신 분이세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 핵심은 바로 오늘 본문 다음 구절에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1절~12절,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이 구도를 보면 “불의한 재물과 참된 것”이 한 쌍이요, “남의 것과 너희의 것”이 한 쌍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불의한 재물이 남의 것”, 그러니까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이고 “참된 것이 곧 너희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진 재물, 권한이 없는 재물들은 모두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의 것은 나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참된 것으로 채워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좀 쉬운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진 재물과 나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참된 것, 어느 쪽이 더 클 것 같습니까. 이 답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겠으나, 분명한 근거가 성경에 있습니다. 바로 달란트의 비유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보면 자신의 소유를 종들에게 맡깁니다. 각각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와 한 달란트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와서 결산을 하는데, 금 다섯 달란트를 열 달란트로 만든 종한테 주인은 말합니다.
마태복음 25장 21절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이는 두 달란트를 네 달란트로 만든 종한테도 똑 같은 말로 칭찬을 합니다만, 여기 보면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라고 주인이 말을 합니다. 적은 일이요? 과연 그럴까요? 여러분, 금 한 달란트가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자그마치 무게가 30킬로그램입니다. 얼마전에 찾아보니까 한국에서 금 한 돈에 17만8천원이었습니다. 한 돈이 3.75그램이니까 17만 8천원을 3.75그램으로 나누면 대략 1그램 당 47,500원이라는 금액이 나옵니다. 1그램당 47,500원이라면 이를 30킬로로 바꾸면 얼마나 될까요? 자그마치 14억 4천만원입니다. 이게 한 달란트입니다. 이렇게 계산을 해보면 열 달란트는 144억입니다. 여러분께서 지금까지 평생동안 벌었던 돈을 모두 합하면 144억 정도는 되시나요? 저요?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를 보고 뭐라고 하셨나요? 이를 두고 적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하나님은 통도 크세요. 그리고 뭐라고 하세요?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진 모든 것들을 너무나도 귀하고 소중하다고 하면서 그것을 마치 영원히 가지고 있을 것처럼 여기고, 나만을 위해서, 내 자식들만을 위해서 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쓰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이 해고될 날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이를 위해 대비하지 않고, 잠시 맡겨진 재물을 마치 영원히 자신의 것인 것처럼 착각하고 그저 흥청망청 쓰면서 살아가고 있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유하고 있는 재물이 누구의 것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지금 잠시 우리에게 맡겨진 재물의 참 주인이 누구이신 줄 알고, 그분이 기뻐하는 방법으로 사용을 하게 되면,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이번에는 정말로 영원히 내 소유인 큰 것으로 주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재물이나 재산이라고 하는 것은 꼭 돈만을 가리키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신이나 건강, 나아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 또한 모두 불의의 재물, 즉 내 소유가 아닌 하나님의 소유물이요, 마지막 때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되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것을, 이번에는 불의의 재물이 아닌 진정한 내 것, 참된 것을 받게 될 줄을 믿으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려 놓고, 진정한 소유주이신 주님께 우리의 삶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때, 주님께서는 기쁘게 받으시리라 믿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의 진정한 소유주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주님께 드렸을 때, 마침내 큰 것으로, 참된 것으로 상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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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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