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준비하시는 하나님
2016년 2월 1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22장 13절~14절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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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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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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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준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이라고 하면 무엇을 떠올리십니까. 그렇죠.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불러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말씀하시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 인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를 만드시고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의 조상이자 또한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인물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훌륭한 인물이었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많이 있는 위인전은 그 사람의 뛰어난 부분, 자랑할 만한 부분만을 골라서 실려있다고 한다면,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위인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수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고통을 당하지만 그 속에서 회개하고 힘을 얻고 구원 받는 역사가 기록된 책이 바로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처음부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의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보다도 사람의 힘으로, 자기 자신의 지혜와 힘으로 어려움을 헤쳐나가려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렀을 때의 장면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서 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렇게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자, 그 다음에 아브라함이 했던 행동이 바로 다음 구절에 나옵니다.

창세기 12장 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여기서 문제를 내겠습니다. 아브라함의 행동이 옳았나요?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했나요? 아니라면 어디가 잘못되었나요?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어요. 고향과 친척 아비 집인 하란 땅을 떠났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언제 조카 롯을 데려가라고 했나요? 하나님은 순수하게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서 한 민족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시키지도 않은 롯을 데려갔을까요.
그 이유는 어쩌면 매우 인간적인 이유에서였는지도 모릅니다. 함께 데려갔던 종들이 있었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남자 하나가 더 있었으면 좋겠지 하는 생각에 같이 가자고 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고, 또한 어쩌면 본래부터 롯이 큰아버지인 아브라함을 잘 따랐기 때문에, 큰아버지가 집을 나가서 독립한다고 하니 자기도 가겠다고 졸랐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길이 어떤 길입니까. 그냥 어디 놀러 가는 길인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쓰시기 위해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부터 열까지 철저하게 순종을 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유명한 요리사가 저한테 요리 지도를 해줍니다. 지난 번에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저는 요리 초보자입니다. 자, 그런데 그 요리사가 저한테, “거기에는 설탕 몇 그램과 소금 몇 그램을 넣으세요” 라고 해요. 그런데 거기에, 제 생각에는 왠지 고춧가루를 좀 몇 숟갈 넣으면 맛이 있을 것 같아요. 넣어야 해요? 말아야 해요. 물론 맛이 있을지도 모르겠죠. 하지만 저는 요리 초보자입니다. 넣으라는 말이 없으면 넣지 말아야 하고, 정 넣고 싶으면 적어도 그 요리사한테 물어보고 넣든지 말든지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롯을 데려갈지 말지를 물어보았다는 구절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나요? 하나님께서 입을 다물어버리십니다.
하나님은 아직 아브라함한테 구체적으로 어디로 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그저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만 하셨는데, 아브라함이 불순종을 하니까 더 이상 말씀을 안 하게 되신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여전히 하나님이 말씀이 없으니까 그 땅을 지나서 세겜 땅까지 갔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딱 한 마디 하십니다. 창세기 12장 7절 초반에서 중반부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줄게. 이 한 마디만 하시고 또다시 침묵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만,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아무 말씀도 안 하십니다. 그리고 9절에 보면 또 희한한 부분이 나옵니다.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아니, 그 땅을 자손에게 주겠다고 했으면 거기 있을 것이지, 미심쩍어서 슬그머니 옮겨간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키는 일을 안 해도 문제가 생기지만, 하나님이 시키지 않은 일을 해도 문제가 생깁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시키는 일을 안 하는 것이나 시키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이나 둘 다 불순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이제 서서히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12장 10절에 보면,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땅을 떠나 여기저기 방황하고 있었더니 어느덧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기근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전도서 7장 14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이 ‘되돌아보아라’라는 부분이 개역한글에는 ‘생각하라’, 일본어 신개역판에는 ‘반성하라’는 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그렇죠. 기도를 해야죠. 하나님, 하나님이 가라는 곳으로 왔는데 기근이 들었습니다. 가뭄이 들었어요. 내가 뭔가 잘 못했나요? 이제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려주세요. 이처럼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다고 하죠? 기도했다고 했나요? 아니요, 애굽에 거류하려고 내려갔대요. 하나님이 거기로 가라고 하셨나요?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 ‘애굽’이라는 것은 세상을 상징합니다. 이후에도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에 무슨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느냐 아니면 애굽을 의지하느냐 하는 식으로 두 가지가 비교되어서 나옵니다. 여기서도 아브라함은, 자기 생각에, 아브라함의 생각에 거기 가면 좋을 것 같아서, 거기 가면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간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나요? 자기 부인을 빼앗길 위기에 처해지는 수치를 당하고 맙니다. 자기 판단을 의지하는 것은 비단 아브라함만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분은 앞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을 불렀지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를 부르지는 않지 않았느냐, 라고 하실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창세기 2장 24절에 의하면,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라고 되어 있어, 부부는 한 몸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불렀을 때 부인인 사라가 따라가는 것은 이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면 아브라함과 사라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렇죠. 기다려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는 믿고 기다리는 것이 곧 순종입니다. 그런데 사라는 어떻게 했습니까. 아무리 기다려도 아이를 주지 않으니까 자기의 여종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주어서 아이를 갖게 합니다. 이게 누구 생각인가요. 하나님 생각이요? 아니요 사라 자기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라의 여종인 하갈의 정체가 누구인지 성경은 매우 자세하게 놀라운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6장 1절에는 하갈의 정체가 나오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하갈이 어디 사람이요? 그렇습니다. 바로 애굽 사람입니다. 즉, 여기서도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 자신들의 판단으로 애굽 즉 세상을 의지한 것입니다. 결국 하갈은 아브라함의 아이를 잉태하게 되는데

창세기 16장 4절에 보면,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그리고 이후에 사라가 드디어 이삭을 출생하게 되는데,

창세기 21장 9절에 의하면,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이처럼 세상적인 생각에 의한 결과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결과는 서로 물과 기름입니다. 왜냐하면 순종과 불순종이 한 번에 존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낼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일설에 의하면 이 이슬람교의 조상이 이스마엘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기독교와 이슬람교와의 마찰과 갈등, 그리고 지금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른바 IS사태를 생각해본다면 그 당시 경솔했던 아브라함과 사라의 판단이 후세에 얼마나 막대한 악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다시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 롯에 대해서 본다면, 롯을 데리고 있을 때에는 아까 살펴본 바와 갈이 창세기 12장 7절 초반에서부터 중반부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라고 되어 있었는데, 이제 아브라함 집안과 롯 집안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그래서 결국 결별을 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게 되면서, 그제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축복을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3장 14절에서 17절에 보면,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롯과 결별하기 전, 그러니까 순종하기 전에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는 첫 부분부터 다릅니다. 결별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어요?
그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라고만 하셨어요. 이 말씀은 어떻게 보면,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는 주겠지만, 내 말에 순종하지 않은 아브라함 너한테는 안줘” 이렇게 도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제 비로소 순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창세기 13장 15절에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이제 네 자손에게 만이 아니라 너한테도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롯에 대해서도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롯은 아브라함과 결별한 후 선택한 지역이 소돔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소돔입니다. 그런데 롯이 전쟁에 휘말려서 납치를 당합니다. 이 때문에 아브라함은 300여명을 이끌고 가서 롯을 구출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19장에 보면, 여러분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되자 롯의 가족들이 탈출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롯과 그 가족 중에 롯의 두 딸과 약혼한 두 남자는 롯의 말을 곧이 듣지 않고 소돔에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롯의 아내는 탈출하면서 뒤돌아봄으로 인하여 소금기둥이 되고 맙니다. 이제 남은 사람은 롯과 두 딸 뿐입니다. 당시에는 약혼을 했다는 것은 함께 살지 않을 뿐이지, 법적으로는 결혼을 한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 딸은 자기들의 남편 될 사람들이 죽었으니 이제 자손을 남길 수 없게 되었다고 해서, 이 또한 사람의 생각으로 자신의 아버지 롯를 술 취하게 해서 아이를 갖고 출산하게 되는데 그 아이가 큰 딸이 낳은 아이는 모압이고 작은 딸이 낳은 아이는 암몬입니다. 성경을 어느 정도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얼마나 괴롭히게 되는지 모릅니다. 이것도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의 생각, 세상적인 생각을 의지했던 아브라함의 실수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머리로 살아가고자 했던 아브라함, 그러나 절체절명의 순간이 다가옵니다.

창세기 22장 1절에서 2절에 보니,
“1.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서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신 적은 이 때가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번제로 드리기를 원하셨나요? 아니요, 이것은 그야말로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상황을 만드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이제 아브라함의 머리로는, 자기의 생각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드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선택은 이제 두 가지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아니면 불순종 하느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무엇을 선택합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순종입니다.

22장 7절에서 12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와 같이 해서 하나님 앞에 아브라함은 백기항복을 합니다. 그 때까지의 아브라함이었다면 아마도 이삭과 함께 번제할 양도 같이 짊어지고 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아브라함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왜요? 8절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해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나요?

13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그리고 그 다음 구절에 아브라함의 고백이 나옵니다.

14절에,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 이레, 이는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으셔서 사람의 도움을 받기 원하시겠어요? 아니요. 하나님이 바쁘셔서 미처 하실 일을 혼자서는 다 못하시기 때문에 사람이 도와주기를 바라시겠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에게 주실 축복을 이미 준비해놓고 계십니다. 모든 것을 다 마련해놓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이 만약에, 아니요 하나님, 괜찮습니다. 내 생각대로 할게요. 내버려두세요, 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시편 103편 3절에서 5절에는,
“3.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4.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5.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이미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생각을 믿고 의지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창세기 15장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이 어떤 행위를 잘 해서 의로 여기셨다고 하셨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 그것을 의로 여기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우리 생각과 판단으로 어떤 행동을 한다는 것은 본인들만이 아니라 우리 자손들에게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의지할 때에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축복을 받게 되실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모든 일에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판단을 믿고 의지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주신 모든 축복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15회 내 눈 속의 들보 →

← 제13회 실상과 증거

 
이카호중앙교회
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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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실상과 증거
2016년 2월 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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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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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실상과 증거’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시골에 부랑자 소년이 있었습니다. 부랑자 홈리스가 대부분 그렇듯이 그 소년도 역시 학교에도 다니지 않고, 배가 고프면 간혹 길가에서 구걸을 하거나 거리를 의미 없이 어슬렁거리는 것만이 그의 일과였습니다. 그에게는 인생의 꿈도 목표도 없었습니다. 꿈이나 목표라는 말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조차도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시간이란 하루하루 그저 무의미하게 흘러가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살고 있는 동네의 강가에 가봤더니, 어느 한 청년이 강 풍경을 캔버스에 담고 있었습니다. 이 부랑자 소년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뭘 하는 건지 궁금해하면서 다가가봤더니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것 참 신기하네…… 하고 저 멀리서 멍하니 보고 있었더니, 낌새를 알아쳐렸는지 그림을 그리던 청년이 그 부랑자 소년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으면서, “보고 싶으면 여기 가끼이 와서 봐.” 라고 말을 해주었습니다. 이 말에 부랑자 소년은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붓끌이 캔버스 위에 그려내는 광경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그림을 그리던 청년이 부랑자 소년한테 “내가 너를 한 번 그려줄까?”라고 말을 하더랩니다. 그랬더니 얼마나 기뻐했겠어요. 저기 저 풍경을 아무 것도 없는 흰 캠퍼스에 이토록 아름답게 그리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신기한데, 그 사람이 자기를 그려준다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어쩔 줄을 몰라 하니까, 이 청년이, “괜찮으니까 그냥 거기 편안하게 서 있어봐.” 라고 말하고는 가방에서 연필과 스케치북을 꺼내들었습니다. 그리고 부랑자 소년을 보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요. 묵묵히 그림을 그리던 청년의 손이 멈추고는 환하게 웃으면서 말합니다. “다 됐다. 자 봐봐.” 청년은 도화지를 뜯어서 소년한테 보여줍니다. 그랬더니 이 부랑자 소년이 그 그림을 보고 놀랐어요. 거기에는 누추한 부랑자 소년의 모습이 아니라, 멋지게 양복을 차려입은 늘씬한 신사 한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랑자 소년이 그림을 그려준 청년한테 말합니다. “이게 뭐예요? 이게 나라구요? 이건 내가 아니에요.” 그러자 이 청년이 소년한테 말합니다. “아냐. 너 맞아. 이건 너의 미래 모습이야.”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부랑자 소년은 기뻐합니다. 어? 이게 내 미래 모습이야? 아주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한테 “이거 나 가져도 돼요?” 라고 하니까 “물론이지. 너 줄게.” 라고 아주 흔쾌히 대답해 주었습니다.
이 소년은 기분이 너무 좋아서 자기 잠자리가 있는 동네 다리 밑에 가서, 그 벽에 이 그림을 붙여놨습니다. 그리고는 이 소년은 하루 종일 아침에 일어나면 밤에 잠이 들 때까지 시간만 나면 이 그림만 보고 있는 거예요. 하루는 주변 부랑자 친구들이 지나가면서 이 소년을 보고 물었습니다. “야, 너 뭐하냐? 벽에 붙여 놓은 게 뭔데? 그걸 하루 종일 보고 있어?” 라고 하니까, 이 소년은 “이거? 이게 나야.” “뭐? 야 그게 어떻게 너야?” “이게 바로 미래의 내 모습이래.” 라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합니다. 그랬더니 이 친구 부랑자들이 뭐랬겠어요? “야, 정신차려. 넌 거지야 임마”라면서 곧이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당연하겠죠. 그 소년은 정말 그야말로 자타가 공인하는 부랑자, 쉬운 말로는 말 그대로 거지였으니까요. 하지만 이 소년은 누가 뭐라든 상관하지 않아요. 히죽히죽 웃으면서 이 그림을 바라봅니다. 이 그림만 바라보면 너무나 기분이 좋아져요. “하하 이게 나야. 이게 바로 미래의 내 모습이야…….”
그러던 중에 소년은 문득 “이런 신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자기가 지금 이대로 있다가는 절대로 미래에 그런 신사가 될 것 같지는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소년은 고심 끝에 부랑자 생활을 청산하고,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학교에 다니기 시작해서, 결국 그로부터 20년 후에는 옛날에 그 청년이 그려주었던 그림 속에 있던 인물 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신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다시 한번 살펴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먼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라는 것은 무슨 뜻인지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이 ‘실상’이라는 단어가 이해하기 어려우실 수도 있습니다만, 다른 번역에 의하면, 새번역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현대인의 성경에는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에 대한 실물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믿는다는 것을 말할 때에는 눈앞에 실제로 보이는 상황을 두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 내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뒤를 돌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당신이 내 뒤에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럼 믿는 게 아니면 뭐예요? 그렇죠. 아는 거죠. 나는 당신이 내 뒤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지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믿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믿는다는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 불확실한 것을 두고 믿는다고 말을 합니다. 나는 당신이 약속을 지킬 것을 믿는다, 라고 할 때에는, 아직 그 일이 일어나기 전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약속을 지킬 수도 있겠지만 어길 수도 있다는 그런 불확실한 상황에 있기 때문에 ‘믿는다’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이른바 증거라고 하는 것은 물증입니다. 즉, 눈에 보이는 또는 귀로 들을 수 있는 또는 만질 수 있는 물건이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탁월한 말솜씨를 자랑한다고 해도, 아무리 감명 깊은 웅변을 뽐낸다 하더라도 증거나 증인이 없다면 재판에서 내 주장을 입증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증거가 뭐라고 하시죠? 그런데 오늘 성경은 무엇이 증거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믿음이 증거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기를 바라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우리의 믿음이 생기겠습니까.

요한복음 20장 29절에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어떤 분은 이 말씀을 좀 독특하게 해석하는 분이 계십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을 믿으면서 뭘 봐서 믿으면 그건 믿음이 작은 것이고, 아무것도 보지 않고 믿어야 좋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해서 무슨 응답을 받고 믿으면 작은 믿음이고, 기도를 하고 응답을 받지 못하고 성령도 받지 못하고 예수님도 만나지 못해도 믿는 믿음이 큰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오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성경을 그 문맥에 따라 이해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다른 제자들 앞에는 나타나셨는데 도마는 마침 그 때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마가 말합니다.

요한복음 20장 25절에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라고, 보기에 따라서는 망언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실제로 보지 못했다면 이 정도로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어, 내가 분명히 봤어. 그런데 너희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말하자면 그런 식이겠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나요? 예수님이 혼내시면서 저주하셨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는 도마 앞에 나타나 주셨어요.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20장 27절에서,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러자 도마가 대답합니다.
20장 28절에서,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가 이 말을 했을 때 예수님께서 아까 살펴보았던 말씀,

요한복음 20장 29절에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고 성령님이 강림하신 후에 믿기 시작한 자들, 이것이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들은 2000년 전,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셨던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고 믿음을 얻었습니다. 바로 이 믿음이 복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지, 응답도 받지 못하고 성령님을 받지 못하고 믿는 믿음이 크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크기는커녕, 나는 교회에 오래 다녔는데도 아무리 기도를 해도 지금까지 응답을 받아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래도 나는 하나님을 믿어요……. 라고 하는 분이 계시다면 저한테 오시거나, 주변에 그런 분이 계시다면 저한테 모셔오시기 바랍니다. 그건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뭔가가 잘못된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안 보여주고 믿으라고 한 적이 있으신가요?
성경을 살펴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서,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라고 하시면서 “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3장 14절에서 15절,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라고 하시면서 역시 “바라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기를 바라고 계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여년을 헤맬 때에 믿음을 끝까지 붙잡고 가나안 땅에 입성할 수 있었던 것은 매일매일 하늘에서 주시는 만나를 먹으면서,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군해갔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0장 1절에서 3절에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라고 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낙심 가운데에 있을 때라도, 우리가 고난의 과정을 통과하고 있을 때라도, 마치 부랑자 소년이 그림 한 장을 바라보면서 소망의 끈을 놓지 않은 것처럼 우리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구주되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무엇을 들어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랬을 때에 비로소 오늘 말씀처럼 우리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되어서 보이지 않는 것에도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 믿음 없는 자가 아닌 믿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14회 준비하시는 하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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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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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엠마오로 가는 길
2016년 1월 3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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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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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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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실상과 증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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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약한 나를 택하신 하나님
2016년 1월 24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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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7장 1절~8절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하롯 샘 곁에 진을 쳤고 미디안의 진영은 그들의 북쪽이요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있었더라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외쳐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만 명이었더라 여호와께서 또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물 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이 너와 함께 가리라 하면 그는 너와 함께 갈 것이요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너와 함께 가지 말 것이니라 하면 그는 가지 말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 가에 내려가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개가 핥는 것 같이 혀로 물을 핥는 자들을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누구든지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들도 그와 같이 하라 하시더니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 명이요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지라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 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을 네 손에 넘겨 주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자기의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 이에 백성이 양식과 나팔을 손에 든지라 기드온이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각각 그의 장막으로 돌려보내고 그 삼백 명은 머물게 하니라 미디안 진영은 그 아래 골짜기 가운데에 있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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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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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약한 나를 택하신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한국의 어떤 유력대선후보로 꼽히는 분이 정계에 입문할 때에 했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 분은 사업가로서도 성공적인 성과를 이루어냈고, 학문으로도 좋은 대학교 종신교수까지 되었습니다. 종신교수라고 하는 것은, 각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분들은 정기적으로 심사를 받아야 하고, 그 기준에 미달된 경우에는 교수직을 잃게 됩니다만, 이 종신교수는 별도의 심사 없이, 본인이 원한다면 정년퇴임하는 날까지 교수직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니 대단히 큰 명예이자 혜택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그것을 박차고 정계에 입문하면서 했던 말은, 자신은 지금까지 해왔던 직업 중에서 실패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분이 걸어온 과정을 대략적으로 훑어본다면 이 말도 헛된 과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한 것은 정계에 입문하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분은 학문으로도 종신교수가 될 정도로 성공했고, 사업가로서도 매출 1000억원을 돌파하는, 해당 업계에서는 1위를 기록하는 회사로 성장시켰으니 성공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이제 정계에 입문해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고 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치인으로서의 성공은, 견해에 따라 여러 의견은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이 분 생각에 의하면, 대통령이 되는 것이야말로 정치인으로서 성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 분만이 아니라, 지금 다른 정치인들, 이른바 차기 대선후보라는 분들의 정책이나 경향 같은 것에는 별로 큰 관심이 없습니다. 예전에 한국에 있을 때에는 그래도 꽤 정치에 관심도 많고 했었습니다만, 요즘 한국 정치를 보면, 어떤 신문의 표제에 있었던 것처럼 ‘그 나물에 그 밥’ 같은 느낌이 들어서, 정치적인 생각이나 쟁점이나……그런 것을 떠나, 일단 무엇보다 재미가 없어요.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분이 없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제가 여기서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무슨 정치 이야기가 아닙니다. 몇 년 전 있었던 그 분의 기자회견을 들으면서 저는 저 스스로에게 물어봤습니다. 나는 내가 해 왔던 직업 중에 성공한 것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원 생활을 하면서 성공을 한 적이 있을까……. 한국에서 일본어 학원에 있을 때 성공해본 적이 있을까……. 그렇다고 완전히 못한 것은 아니에요. 회사원 생활을 하면서 상도 받아본 적도 있고, 일본어 학원에서는, 제가 근무하던 캠퍼스에서 몇 번이나 1등을 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공’이라는 것은 어느 한 순간 반짝했다고 해서 그것을 성공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성공을 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성공을 해보셨나요?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성공을 원합니다. 성공을 갈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을 하기 위해 노력도 많이 합니다. 어떻게 해야 성공할 수 있는지 연구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성공에 대한 책도 많이 나와 있습니다. ‘성공하는 시간관리와 인생관리를 위한 10가지 자연법칙’,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왜 성공하는 사람만 성공할까’, ‘운명을 만드는 절제의 성공학’, ‘성공하는 기업들의 8가지 습관’, ‘성공하는 사람들의 시간관리 습관’, ‘성공적인 한국 노인의 삶’, ‘성공하는 이름 흥하는 상호’, ‘성공의 비밀’, ‘성공하는 사람들의 보고습관’, ‘성공하는 리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참 책 제목도 다양합니다. 그리고 어떤 책은 정말 제목만 들어도 “어? 정말 사 볼까?” 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시중에 나와 있는 주식투자에 관한 책은 사지 말라는 거예요. 이상하죠? 주식투자에 대해서 알고 싶고, 그 비결을 연구하고 싶으면 주식투자 전문가가 쓴 책을 읽으면 도움이 많이 되지 않나? 그런데 그걸 읽지 말라는 게 무슨 얘기일까 했습니다만, 그 분의 말에 의하면, 주식투자로 성공한 사람은 절대 자신의 성공비결을 말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아, 이 말을 들으니까 그럴 것 같아요. 이건 매우 기초적인 말씀입니다만, 주식을 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해요? 남들이 주식을 많이 팔면 그 주식 가격이 떨어지고, 그럼 그 때 사서, 또 남들이 주식을 많이 사면 그 주식 가격이 올라가니까 그 때 그걸 팔면 이익이 많겠죠? 그러니까 남들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다른 방법으로 투자를 해야 하는데, 그 비결을 다른 사람들한테 알려주면 오히려 자기한테 손해가 될 것 같더군요. 그렇다면 주식투자 책을 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그 분의 말에 의하면 주식투자로 손해를 많이 본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손해를 메우려고 책을 쓴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책은 주식투자로 성공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니고, 성공했다가 크게 손해를 많이 본 사람이 쓴 것이니까 도움이 안 된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세요. 모든 책이 다 그렇다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잘 모르지만 분명 훌륭한 분이 쓰신 책도 많을 겁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건 저한테 말을 해준 분의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이 성공에 대한 책들……. 이건 제가 검색을 해본 것입니다만, ‘성공’이라는 검색어로 찾아보니 10,000권이 넘는 책이 나왔는데, 죄송합니다만, 제가 그 저자들을 살펴보니 제가 아는 분들이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알아야 성공한 사람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좀 김이 빠진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잖아요? 이왕 성공하고 싶어서 책을 읽는다면 정말로 성공한 사람이 쓴 책을 읽으야 할텐데, 책들은 분명 많지만, 정작 그럴 만한 사람이 쓴 책을 찾아보기 힘드니 참 아이러닉합니다.
아이러닉하다고 하면 이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만큼 아이러닉한 경우도 더물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한 번 보겠습니다.

사사기 6장 1절에 의하면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
6절에는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사자를 기드온에게 보내어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시도록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 방법이 참으로 묘합니다.
사사기 8장 10절에 의하면 미디안 군대는 135,000명이었습니다. 자, 이제 기드온은 이 군대를 대항하기 위해 병력들을 모아야 합니다. 그래서 모인 사람이 몇 명이 32,000명입니다. 이 32,000명이라는 병력이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닙니다만, 상대방은 135,000명입니다. 4분의 1도 안 됩니다. 숫자로는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한 10만명이었다면 한 번 해볼만 할까요? 아니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설령 미디안 군대보다도 더 많았다고 해도 이기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미디안은 지배하고 있는 입장이었고 이스라엘은 식민지였던 것이죠. 그러니까 만약 숫자가 거의 같다고 해도, 그들이 갖고 있는 장비도 그렇고 또한 군사작전도 그렇고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 아주 급박한 상황인데, 하나님은 뭐라고 하세요? 너무 적으니까 어서 빨리 가서 더 모아와라? 아니면 무기가 부족하니 더 나은 무기를 만들어라? 아닙니다.

사사기 7장 2절 전반부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지금 하나라도 더 불러와도 모자랄 판에,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나요? 부족하다고 하세요? 아니요, 너무 많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시각과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지금 앞으로 못 나가고 있는 것이, 가진 것이 너무 없어서 못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세요? 아니야, 네가 가진 것이 너무 없어서 못 나가고 있는 게 아니야. 너무 많아서 못 나가고 있는 거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면 하나님께서 돌아가라고 하시는 이유가 뭐라고 되어 있나요? 7장 2절 후반부에 보면,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이해하기 쉽게 본다면, 예를 들어서 상대방이 135,000명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10만명이었는데 이 10만명 가지고 135,000명을 이겼어요. 그럼 어떻게 얘기하겠어요? 야! 정말 잘 싸웠다. 숫적인 열세를 극복하고 우리가 해냈다! 하고 기뻐하겠죠? 그럼, 5만명이면 어땠을까요?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럼, 3만명이라면? 하나님은 3만명으로 이긴다 하더라도 역시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이 잘 싸워서, 훌륭하게 싸워서 이긴 걸로 생각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3만 명을 몇 명까지 줄이죠?

7장 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 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을 네 손에 넘겨 주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자기의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

3만명을 10분의 1도 아닌 100분의 1인 고작 300명으로 줄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집으로 돌려보내래요. 적군은 135,000명인데 이걸 비교해보면 450분의 1 밖에 안 되는, 이걸 반대로 말하자면 상대방은 우리보다 450배나 많은 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걸 이겨요? 이건 그야말로 사람의 힘으로 이겼다는 말은 절대로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잘 감이 안 오나요? 요즘 일본에 텔레비전을 보니 축구를 많이 하더라구요? 축구에서 우리가 4대 1로 지고 있어요. 좀 힘겹긴 하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죠? 우리는 희망을 걸고 응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450대 1로 지고 있어 봐요. 응원할 마음이 생기겠어요? 이건 절망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해요. 그런데 이것을 이기게 만드는 것이 누구요?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여기도 또 하나 놓치면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2절에서 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외쳐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만 명이었더라”

7절에서 8절,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 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을 네 손에 넘겨 주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자기의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 이에 백성이 양식과 나팔을 손에 든지라 기드온이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각각 그의 장막으로 돌려보내고 그 삼백 명은
머물게 하니라 미디안 진영은 그 아래 골짜기 가운데에 있었더라”

이 말씀들을 보면 여러분은 매우 자연스럽게 보이시나요? 아, 그냥 그렇구나…라고 생각되시나요?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매우 믿음이 좋으신 거겠죠.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상대방은 135,000명이고 우리는 32,000명인데, 그게 많다는 거예요. 그래서 줄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서 10,000명 남았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300명으로 가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기드온이면 어떻게 했겠어요? 저 같으면 이랬을 것입니다. “아이구, 하나님, 왜 그러세요. 그러지 마시고, 그냥 32,000명으로 이겨도 그냥 하나님이 이긴 걸로 할게요. 괜히 억지 부리지 좀 마세요.” 라는 말이 안 나왔겠어요? 어쩌면 애원하고 매달렸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어떻게 해요? 묵묵히 침묵합니다. 그렇다면 기드온은 안 불안했겠어요? 아니요, 엄청 불안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부분은 바로 이 믿음의 침묵, 그리고 순종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어요? 32,000명도 아닌 300명이 무려 135,000명을 대파하고 대승을 거두는 역사가 일어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구약을 대표하는 선지자인 모세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태어나고 40년 동안 당시 최대 강국인 애굽의 왕자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살인을 저지르게 되어 모든 것을 버리고 허허벌판 광야로 도망집니다. 거기서 40년 동안 허망하게 보내고 난 다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또다시 애굽으로 들어갑니다.
모세가 정말로 억압받는 이스라엘 민족들을 구원하려고 했다면 언제가 가장 좋은 시기였겠어요? 그렇습니다. 가장 젊고 가장 권력도 많았던 애굽의 왕자 시절이었습니다. 그 때는 어쩌면 바로왕을 설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고, 그것이 아니라면 당시 그가 가지고 있던 권력과 조직력을 총동원해서 무력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켰을 수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을 때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사야 42장 8절에는,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인간적인 권력을 갖고 있을 때 모세가 했다면 그 영광은 하나님이 아니라 모세가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내려놓은 모세를 사용하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영광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서 받으시게 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드온의 삶은, 그리고 모세의 삶은 성공적이었나요, 아닌가요. 답은 명확합니다. 그들의 삶이야말로 진정으로 성공적인 삶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일생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영광들 돌리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바라볼 때 볼품이 없나요? 성공한 적이 없다고 낙담하시나요? 만약에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별것 없다고,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나를 스스로 모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 9절에서 10절는,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우리는 우리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위해 대가를 치르신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누구예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셨대요? 하나님의 독생자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그 피값으로 우리를 사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를 하찮다고 생각하시나요? 별볼일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니님이 강한 자를 써서 강한 일을 행하신다면 그 영광은 하나님께로 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약한 자를 써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고, 약한 우리를 택하사 큰 일을 행하실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택하시고 기드온은 흔들림 없는 믿음과 침묵 그리고 순종으로 보답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로 135,000명을 300명으로 이길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약한가요? 우리가 볼품 없나요? 우리를 사용하셔서 강하게 하시고 우리를 사용하셔서 큰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흔들림 없는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드온처럼, 모세처럼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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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10회 하나님이 받으시는 감사
2016년 1월 1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7장 11절~19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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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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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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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감사’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도 정말 이렇게 좋은 주일을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꼭 날씨만을 가지고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고민이나 걱정거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쟁이나 굶주림이나 추위 걱정 없이 이렇게 주일 아침에 모여서 하나님께 기도와 찬양을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각 나라마다 감사하다는 말은 꼭 있습니다. 영어로운 thank you, 독어로는 당케쉔, 프랑스로는 멜시, 아랍어로는 슈클란…얼마 전에 텔레비전 방송에서 외국인이 좋아하는 일본어 랭킹을 보니까 그 순위권에 かわいい、귀엽다, おいしい맛있다 라는 단어도 있었는데, 압도적으로 1위였던 것은 ありがとう였다고 합니다. 고맙다고 하는, 감사하다고 하는 말에는 그 말을 하는 이도 그렇고, 듣는 이도 그렇고 마음을 아주 따뜻하게 해주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도 감사의 마음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7장 11절에서 19절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출발하셔서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한 마을을 지나십니다. 그랬더니 저 멀리서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보고 멀리서 소리칩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이 열 명이 젖먹던 힘을 다해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당시 이 나병이라는 질병은 이른바 저주 받은 질병으로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한테 가까이 가기는커녕 마을에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만약 그들이 온전한 사람들이었다면, 치료를 받은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님 앞에 와서 간구했을 것이지만, 이들은 나병환자들이었기 때문에 그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저 멀리서 예수님을 향해서 크게 소리 지르는 것뿐이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질병을 고치실 때,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마태복음 8장 14절에서 15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라고 하시며, 손으로 만지셔서 고치시기도 하시고,

마태복음 17장 18절에서는,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라고 하여, 귀신을 꾸짖으시고는 나가게 해서 질병을 낫게 하시기도 합니다.

또한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치료를 해주시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9장 6절~7절에 보면,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맞는, 그 사람에게 필요한 방법으로 치료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에 소리쳤던 나병환자는 어떻게 치료하셨어요? 그 몸에 손을 얹은 것도 아니요, 가까이 다가간 것도 아닙니다.

누가복음 17장 14절에는,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저 말씀만 하신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이 말씀 한 마디로 나병환자 열 명은 완전히 치료받았습니다. 나음을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17장 15절 이후에 보니 예수님께 와서 감사를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다는 사실을 보시고,

17절에서 18절에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라고 하십니다. 11절에도 기록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고 계셨습니다. 갈릴리는 유대 지역이었습니다만 사마리아는 이방인 취급하던 곳이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교제는 없었습니다만 이 지역에는 지리적으로 유대인들도 있었고 사마리아인들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리고 예수님 말씀에 의한다면 이 나병환자들 사이에는 유대인들도 있었을 것이고 사마리아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오셨고 유대인을 중심으로 한 사역을 하고 계셨는데, 정작 나음을 받은 유대인들은 온데 간데 없고 사마리아인만 예수님께 와서 감사했다고 기록합니다. 그것도 어떻게 감사했다고 했나요?

15절에서 16절에 보니까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그냥 감사한 것이 아니라,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면, 우리도 또한 감사에 매우 인색한 것 같습니다. 일본 사람들을 보면 아이들한테 예절을 가르칠 때에, 항상 밥 먹기 전에 두 손을 모으고, いただきます잘 먹겠습니다, 하고나서 먹고, 먹고 나서도 또 두 손을 모으고 ごちそうさまでした잘 먹었습니다. 라고 말을 합니다.

일본 사람들이 식사 전이나 식사 후에 잘 먹겠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하고 누구한테 기도를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 식사를 위해 농사를 짓느라고 수고하신 분들한테 하는 경우도 있겠고, 또 어쩌면 그들이 믿고 있는 우상들한테 하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두 가지, 하나는 그들이 기도하고 있는 대상은 우리가 믿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나 예수님한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보다 훨씬 감사를 잘 한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에서 17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서 18절에 보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라고 기록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때나 하나님을 위해서 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권고사항이 아닙니다. 웬만하면 기뻐하고, 웬만하면 기도하고, 또 웬만하면 감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그러니까 이는 명령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감사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여기서 말씀을 맺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잠시 누가복음 18장 10절에서 14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당시 바리새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믿음이 좋은 사람의 대명사 같은, 그리고 반대로 세리는 죄인의 대명사 같은 존재였습니다. 물론 바리새인도 세리도 모두 유대인이죠. 이 두 사람이 우연히 함께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바리새인은 뭐라고 기도했어요? 감사를 안 했어요? 아니요. 했습니다. 나는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않고, 저기, 저~기 서 있는 저 세리 같지도 않아서 죄를 짓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 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일조도 꼬박꼬박 드립니다…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반면에 세리는 뭐라고 했어요? 차마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회개하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믿음이 좋다고 하는 바리새인보다도 세리가 더 의롭다고 하나님으로부터 여기심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그냥 하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유대인 남자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세 가지 감사 기도를 드린다고 합니다. 첫째는, 저를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으로 태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것, 둘째는,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것, 그리고 셋째는 종이 아닌 자유인으로 태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것이겠죠. 이 기도를 하나님께서 받으실까요, 안 받으실까요. 안 받으세요?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여기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본체가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요한일서 4장 8절에는,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이어서,
요한일서 4장 19절에서 21절에는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하나님은 그 자체가 사랑이신데, 사랑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아요?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알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을 알면 또한 우리의 형제 자매를 사랑해야 합니다. 어떻게 사랑해야 해요?

요한복음 15장 12절에는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를 사랑하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권고요? 아니요, 명령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계속해서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절에서 3절에는,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믿음 좋고 능력 많은 사람이 아무리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줄줄이 읊고, 감사와 찬송과 훌륭한 설교를 한다 하더라도 그 안에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리새인의 감사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왜 안 받으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 세리에 대한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죄인이고 형편없는 세리가 사랑 받을 가치가 있어요? 성경은 뭐라고 하십니까.

마태복음 5장 46절에서 47절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46.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 바로 앞에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43절~44절
“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 또한 권고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신 줄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14절에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오늘 함께 나눈 말씀 중에서 외울 것이 너무 많다,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하느냐 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 구절 하나만이라도 확실하게 외워가시기 바랍니다. 다 함께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감사의 기도를 받으시길 원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사랑이 없는 감사는, 그것은 다만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처럼 그저 시끄럽고 거슬리는 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범사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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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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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2016년 1월 10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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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사기 12장 11절~15절
“그 뒤를 이어 스불론 사람 엘론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더라 스불론 사람 엘론이 죽으매 스불론 땅 아얄론에 장사되었더라 그 뒤를 이어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더라 그에게 아들 사십 명과 손자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칠십 마리를 탔더라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팔 년이라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죽으매 에브라임 땅 아말렉 사람의 산지 비라돈에 장사되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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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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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주제를 정하고 말씀을 고르면서 어떤 구절을 해야 할지 매우 망설였습니다. 조금은 여러분께 익숙하고 이해하기 쉬운 부분을 고르면 좋을텐데, 성경이 매우 두껍고 귀한 말씀으로 가득 차 있지만, 제 머리가 짧아서이겠지만, 때로운 마음에 딱 와닿는 말씀을 찾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 주제에 맞는 말씀을 골랐는데, 어떤 분은 좀 의아해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사기 12장 11절~15절
“그 뒤를 이어 스불론 사람 엘론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더라 스불론 사람 엘론이 죽으매 스불론 땅 아얄론에 장사되었더라 그 뒤를 이어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더라 그에게 아들 사십 명과 손자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칠십 마리를 탔더라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팔 년이라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죽으매 에브라임 땅 아말렉 사람의 산지 비라돈에 장사되었더라”

여러분은 이 글을 읽고 어떤 생각이 드세요?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70인을 세우시고 전도여행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누가복음 10장 17절에 보면,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잘 나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그들에게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죠. 그랬더니 그들을 보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20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내가 내 힘으로 그와 같은 능력을 행했다면 내가 자랑할 수도 있고 나를 내세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9절에 보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그와 같은 능력과 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이지, 내가 내 행위나 능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아까 보니까 왜 기뻐하라고요? 그렇습니다. 그런 능력을 행한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이렇습니다. 한 유명한 요리사가 나한테 최고급 요리를 하라고 시켰어요. 그런데 요리를 하려면 뭐가 필요해요? 일단 장소가 필요하겠죠? 장소도 마련해주었습니다. 장소만 있으면 다 되나요? 아니요, 냄비도 있어야 하고 칼도 있어야 하고 여러가지 도구가 필요합니다. 그것도 다 마련해주었어요. 그걸로 되나요? 아니요. 요리를 만들려면 재료가 있어야죠. 그런데 맛있는 요리를 만들려면 재료도 그냥 아무거나 사면 안 되겠죠? 그래서 아주 최고급 재료를 선별해서 다 갖다주었습니다. 그런데 요리를 할 양이 많으면 혼자 하기는 힘들 수도 있잖아요? 그랬더니 혼자 하면 힘들까봐 일을 함께 할 사람도 붙여 주었습니다. 이제 그럼 준비가 끝났나요? 멋진 주방과 멋진 도구, 훌륭한 요리재료와 협력자가 있으면 뭘해요? 제가 최고급 요리는 고사하고 김치찌개 하나도 제대로 못 끓이는 실력인데요. 그랬더니 그 유명한 요리사가 그 사실을 알고, 어떤 재료를 언제 얼마만큼 어디에 넣고,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고…라는 식으로 요리 만드는 방법을 모두 꼼꼼하게 적어주었어요. 그리고 나는 그대로 지켜서 했습니다.
자, 한 가지 문제를 내갰습니다. 요리가 맛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당연히 맛이 있겠죠. 멋진 주방에서 멋진 도구로, 유명한 요리사가 직접 골라준 재료로, 그것도 모자라서 요리사가 하나하나 적어준 방법을 그대로 따라했으니까요. 내가 한 것이라고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갖추어진 상태에서 내 생각이 아니라 그 유명한 요리사가 알려준 방법대로 한 것일 뿐입니다. 물론 그래도 맛이 있으면 기쁘긴 하겠죠. 하지만 자랑할 수 있어요? 아니요,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내 실력으로 한 것이 있다면 자랑할 게 있겠지만, 무엇 하나 내가 내 실력대로 한 것이 없는데 무슨 자랑할 거리가 있겠어요?
하지만 자랑할 건 딱 하나 있어요. 다른 사람들이 다 부러워할, 정말 유명한 요리사가 나한테 멋진 부엌도 마련해주고요, 요리도구도 갖춰 주고요, 재료까지 자기가 직접 골라서 사다주고요, 요리하는 방법까지 하나하나 꼼꼼하게 나한테 알려주었어요. 이것은 자랑할 수 있겠죠? 예수님은 바로 이 점을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20절 말씀에서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우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나요? 예, 기록됩니다. 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값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는 이 세상의 모든 환난이 끌나고 새예루살렘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만, 거기에는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세상이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21장 마지막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6절에서 27절에 보면,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요한계시록 20장 15절에는,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어린양의 생명책에는 어떤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나요? 그것은 바로 구원 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구원을 받나요? 그에 대한 말씀이 성경에는 가득 차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2절에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도행전 16장 31절,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로마서 10장 9절에서 10절에는,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을 하면 구원을 얻게 되고, 바로 이 구원을 받으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름도 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자, 이제 이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것으로 다 끝인가 하니, 계시록 20장 12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사람은, 이건 볼 것도 없이 불못으로 던져진다고 하지만, 이름이 있는 사람들도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여기 계신 우리 모두는 분명 구원을 받았습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다음 문제는 그 책에 어떻게 기록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에는 참 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누구는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을 받으면서, 멋진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일을 감당하지 못한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있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사사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다스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구별하신 성민이라고 하는 이 이스라엘 백성이라고는 하지만 하는 일은 지금 우리와 매우 흡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축복을 합니다. 그리고 그 축복을 누리면서 번영을 하는데, 그러다 보면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고 타락하게 됩니다. 그러면 선지자를 보내서 경고를 합니다. 그래도 안 들어요. 그러면 이웃에서 강대국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심판하게 합니다. 그러면 그제서야 이스라엘은 회개하죠. 그 다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사사를 세워서 핍박 받고 있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역사는 축복과 타락과 경고와 심판과 회개와 구원의 연속이었습니다.
특히 이 사사기에는 하나님께서 크게 쓰인 인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는 기드온도 있고, 입다도 있고, 삼손도 있고, 여성 사사인 드보라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면서 얼마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행하셨는지를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면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사사기 12장 11절에서 12절에는 엘론이라고 하는 사사에 대한 기록이 단 두 줄 뿐입니다.
“그 뒤를 이어 스불론 사람 엘론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더라 스불론 사람 엘론이 죽으매 스불론 땅 아얄론에 장사되었더라”

이게 하나님이 지도자로 세우신 엘론 이라고 하는 사사의 모든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줄이면 뭐예요? ‘엘론이라는 사사가 10년 동안 다스리고 죽었다’는 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 다음에 사사가 된 인물이 ‘압돈’이라는 사람입니다만, 이 사람에 대한 기록은
사사기 12장 13절~15절,

“그 뒤를 이어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더라 그에게 아들 사십 명과 손자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칠십 마리를 탔더라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팔 년이라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죽으매 에브라임 땅 아말렉 사람의 산지 비라돈에 장사되었더라”

이 압돈이라는 사람에 대한 기록도, 좀 줄이면 “압돈이라는 사람이 아들 딸 낳고 살다가 재산도 좀 모아두고 사사가 된지 8년만에 죽었더라”

이것이 다 입니다.

물론 성경에 기록이 길게 되어야지만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고 간 사람이 두 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에녹과 엘리야입니다. 엘리야에 대한 기록은 열왕기상에서 상당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에녹에 대한 기록은,

창세기 5장 24절,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이게 다 입니다. 그런데 이 한 구절이 얼마나 많은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까. 하나님이 에독과 동행하시더니, 그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죽음을 맛보지 않고 먼저 그를 데려가셨겠어요. 우리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 반면에 앞서 말씀드린 두 사사, 엘론과 압돈, 이 두 사사의 삶을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엘론이라는 사사가 10년 동안 다스리고 죽었더라’, ‘압돈이라는 사람이 아들 딸 낳고 살다가 재산도 좀 모아두고 사사가 된지 8년만에 죽었더라’
이 말씀을 읽고 “그래, 뭐, 그렇게 편안하게 살다가 갔다면 그걸로 됐지 뭐.” 만약에 이렇게 생각하신 분이 계시다면 조금 더 기도를 해보셔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에베소서 1장 3절에서 6절 말씀을 보면,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 전부터 택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을 십자가에서 못 박히게 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우리를 그냥 아무런 의미 없이 그냥 그렇게 살다가 그냥 그렇게 죽기를 바라시겠습니까?


이사야 5장 2절에는,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타락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하나님이 가슴을 치며 탄식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 창세 전부터 우리를 택하시고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도 그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가요?
그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의미 없이 살다가 의미 없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생의 삶을 마치고 예수님 앞에 섰을 때, 그 앞에 놓인 책 속에 적혀 있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아서, 하나님께 큰 기쁨을 드리는 우리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10회 하나님이 받으시는 감사 →

← 제8회 절제의 믿음

 
이카호중앙교회
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8회 절제의 믿음
2016년 1월 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24절~25절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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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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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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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절제의 믿음’이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세상에서도 보면 고위직에 앉거나 출세하는 분들을 보면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합니다. 물론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를 하기도 하지만,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에 당선되기 위해서 무척이나 많은 노력을 하는 것 같습니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같은 걸 해서 뭘하나……”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누구는 그렇게 말을 하더군요. 실제로 국회의원으로 당선이 되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10배가 좋아진대요. 그리고 대통령이 되면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100배가 좋아진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얼마 전 제가 텔레비전에서 스기무라 타이조라고 하는 전직 일본 국회의원이 나와서 강연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은 당시까지만 해도 자기는 그냥 증권회사에 다니던 평범한 회사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2005년 8월 중순 쯤에 문득 인터넷에 보니까 자민당에서 중의원 선거 출마자를 공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요. 그래서 거기에 보면 1600자로 소논문을 써서 신청하라고 되어 있어서, 그 자리에서 써서 팩스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며칠 뒤에 전화가 한 통 걸려오더니만 당장 자민당 당본부로 와달라는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그 후 5번의 면접과 3번의 소논문 시험을 거쳐서 자민당으로부터 공천을 받고, 다음 달인 9월 11일에 국회의원으로 당선이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국회의원이 되려고 마음을 먹고 실제로 국회의원으로 당선이 되기까지 한 달도 채 안 걸린 셈인데, 이것은 본인 말로는 일본 헌정사상 유래없는 일이라고 주장을 하더군요. ㅎㅎ
이렇게 정말 국회의원이 되려고 마음을 먹고 1달도 채 지나지 않아 정말로 국회의원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 분이 1979년생에다가 2005년에 당선되었으니까 26살에 국회의원 뱃지를 달았던 것입니다. 이 26세에 당선이 되었다는 것만을 보더라도 참 대단한 일이죠. 참고로 한국에서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이 바로 만 26세인데, 그 기록 보유자가 바로 김영삼 전 대통령인데, 이 기록은 1954년에 세워졌는데, 아직까지도 안 깨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 스기무라라는 분도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짐작이 갑니다.
아, 참고로 제가 말씀을 전할 때 ‘이 분’ 저 분’이라고 할 때 보면 전혀 대단하지 않은 사람한테도 붙이는 게 좀 부자연스럽다…는 말을 예전에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제가 이 분 저 분…이라고 이 강단에서 말씀드리는 건 꼭 그 사람을 존경해서가 아니라, 그냥 무난하게, 특별한 생각 없이 ‘이 분’ ‘저 분’ 이라고 하는 것이니까 이 점 양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이 스기무라라고 하는 분…여기까지 보면 대단한 것 같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기자들 앞에서 어이없는 실언이 마구 이어집니다. “빨리 요정에 가보고 싶다.” “당선되고 처음으로 곧바로 국회의원 월급을 알아보니 그렇게 갖고 싶어했던 BMW를 살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말을 하니까 매스컴들은 얼마나 신이 나게 보도를 했겠습니까. 그리고 또한 이 분이 무소속이었으면 또 모르겠는데, 하물며 여당 국회의원이에요. 그러니까 자민당 쪽에서는 난리가 났죠. 당장 호출이 되고는 아주 혼꾸녕이 났다고 합니다. 이 분 말에 의하면 얼마나 심하게 혼이 났는지, 자기는 정말 죽는줄 알았대요. 그리고 어떻게 됐느냐…하면 당선 되고 2주 만에 사죄기자회견을 열었다고 합니다.
국회의원이 되려고 결심하고 한 달 만에 실제로 당선된 것도 기록이지만, 초선 국회의원이 당선 2주만에 단독 기자회견을 연 것도 기록이고, 하물며 그 기자회견 내용이 사죄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도 기록이라고 합니다.
그럼 왜 그런 황당한 말을 하고 다녔냐…하는 것이 궁금한데, 이 분이 나중에 하는 말이 그래요.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나니까 너무나 신기하다는 거예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회사에서는 제일 밑바닥 평사원이었고, 회사에서는 과장 부장이 “야 스기무라…이거 해 저거 해…”뭐 그런 말만 듣고 살았는데, 딱 당선이 되니까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 그 때부터 자기한테 고개를 깍뜻히 숙면서, 자기를 갑자기 “선생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더라는 거예요. 그리고 당선이 되고 자기 사무실에서 의원회관으로 가려고 차에 타려고 하니까, 누가 허겁지겁 달려오더래요. 그러면서 자기한테 하는 말이, “선생님, 이제 운전은 하지 마시고, 이 쪽으로 오십쇼.” 그러더래요. 그래서 무슨 소리인가 하고 따라가보니까, 까만 색 신형 토요타 크라운이 있고, 거기에 운전기사가 있더래요. 그 뿐이에요? 자기 개인 비서가 2명이나 거기 서 있더라는 그예요. 생각해보세요. 이 사람 나이가 당시 고작 26살이었습니다. 그리고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일반 회사 말단 평사원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그런 상황이 되다 보니까 자기 말로 무슨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 같았다는 거예요. 그러다보니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정말 모든 것이 내세상이 된 것처럼 처신하다보니까 온갖 욕이라는 욕은 다 먹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 절제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24절~25절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 중에서 상을 받는 사람, 금메달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은 그냥 받는 것이 아니라, 이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 오늘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비단 무슨 선수권 대회나 올림픽 같은 큰 대회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1977년부터 매년 8월에서 9월에 시가현에서 열리고 있는 새인간 대회「鳥人間コンテスト」가 있습니다. 우리말로 새머리라고 하면 무슨 잘 까먹는 사람을 말하지만, 이 대회는 뭐냐하면 사람들이 손으로 만든 비행기를 타고 얼마나 멀리 날아가느냐, 얼마나 오랫동안 비행하느냐 하는 등을 겨루는 대회입니다. 여기에서 몇 번이나 우승을 한 오오키 쇼지라는 분이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자신은 대회 6개월 전부터 기름기 있는 것을 먹지도 않고 체력관리에 신경을 쓴다고 합니다.
이 대회의 우승상금은 1위가 백 만엔이라고 하는데, 사실 비행기 제작비용만 하더라도 보통 수 십만엔에서 수 백만엔이 든다고 하니까, 이게 결코 많은 액수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활을 절제해가면서 이렇게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절제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덕목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는 것이 자유인가요?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임이고 무질서입니다.

요한복음 8장 31절에서 32절에는,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라고 하셨지만, 반면에,

고린도전서 10장 23절에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라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국회의원처럼, 조금 출세했다고 기고만장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것은 옳다고 할 수 없듯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다고 해서,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내 욕구를 위해서,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행하게 되면 이는 절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어떤 곳에서 망년회가 있다고 해서 저보고도 오라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참가비가 4천엔이라고 합니다. 아니, 무슨 참가비가 그렇게 비싸냐고 물으니까, 요즘 노미호다이……술 무제한은 그 정도 한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아마도 술은 마음껏 마시고 안주를 시키는 대로 먹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디 한 번 가볼까……했더니, 생각해보니까 제가 목사더라구요? 그리고 제가 한 번 마시게 되면 그 동안 못 마신 것까지 다 마시게 될텐데, 그렇게 되면 군마현에 있는 술을 모두 다 마셔버리게 될 것 같고…그렇게 되면 이 군마현이 두 세 번은 뒤집힐 텐데, 그러면 이 군마현의 평화와 안녕이 심히 훼손되지나 않을까 해서 결국 안간다고 말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것 또한 구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고 술을 마시면 지옥에 가고, 술을 안 마시기만 하면 천국에 가고…그런 건 아닙니다. 하지만 목사가 술을 먹는 건 여러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예를 들어서 갑자기 누구 집에 심방을 하러 가야할 일이 생겼어요. 그런데 지금 술 먹었다고 안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음주운전으로 갈 수도 없잖아요?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구별 방법, 절제 방법이 여러가지 있을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7절에서 9절 말씀에 보면,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이 말씀을 오해하게 되면, “내게 유익한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다 해가 된다”라고 이해하게 됩니다.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무엇을 절제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의 기준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위해서 해가 되느냐 안 되느냐”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운동을 너무나 좋아해요. 운동 안 좋다고 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런데 세상에는 별 희한한 중독도 다 있습니다. 운동중독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운동을 하는 사람도 있답니다. 운동이 몸에는 좋지만, 교회도 안 가고 운동을 한다면 그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에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공부는요? 세상에 공부하는 것을 나쁘다고 할 사람은 없잖아요? 하지만 교회도 안 가고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으면서 공부만 한다는 것은 역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제가 실제로 들은 간증입니다만, 이 분은 고등학교 때 공부를 매우 잘 했다고 해요. 그런데 이제 고3이 되니까 교회가 중요한 게 아니라 주일에도 공부를 계속 하게 되는 것이었답니다.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대요. 아니, 다른 시기도 아니고 고3인데 오죽했겠습니까.
그런데 이 분이 어떻게 했냐 하면, 주일은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고 싶어서 마음을 독하게 먹고 주일에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교회에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집에 가면 또 책상 앞에 앉을 것 같아서, 일부러 하루 종일 교회에서 살았대요. 물론 주중에는 그만큼 더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됐겠어요? 자기가 꼭 서울의대에 가고 싶었는데, 결과는 서울의대 합격, 그것도 수석합격이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뭐라고 되어 있던가요?

신명기 6장 5절에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는,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우리가 주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만, 우리가 무엇을 누리고 무엇을 절제해야 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유익한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인가, 하나님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인가…하는 것에 달렸습니다.
너무 어려운가요? 그렇다면 조금 더 쉬운 기준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무언가를 절제하면 여러분이 바뀌시겠죠? 그렇다면 주변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고,
“저 사람 왜 저렇게 변했대? 원래 안 그랬잖아? 뭐? 예수를 믿는다고? 교회 다닌대? 아…그래서 저렇게 바뀌었구나…대단하네…그럼 나도 한 번 믿어볼까…?”
이런 말이 나오면 그것은 진정으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새해가 밝았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올 한 해의 목표를 무엇으로 잡으셨나요? 저는 이번에 한 가지 작은 목표를 잡아보았습니다. 이른바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죠? 주로 사람이 같은 무리들끼리 어울린다고 해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그 사람을 알려면 그 주변 친구를 보라는 말도 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비슷한 사람들끼리 뭉치니까 그 주변 친구가 어떤 사람들인가를 보면 그 사람에 대해서도 안다고 아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반면 이런 생각도 해봤습니다. 예전에는 ‘성인병’이라는 말을 꽤 많이 썼습니다. 물론 한국에서는 여전히 쓰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일본에서는 이미 ‘성인병’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성인병이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고혈압, 당뇨, 동맥경화, 뇌경색 등등 이런 병입니다만, 왜 요즘에는 성인병이라는 말을 안 쓰느냐 하면,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인이 아닌데도 성인병에 걸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모두 절제를 하지 않아서 생기는 일이겠지요. 그래서 일본에서는 성인병이라는 대신 생긴 이름이 生活習慣病 생활습관병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안 좋은 생활습관 때문에 생긴 병이라는 뜻이겠지요.
제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려면 그 사람의 친구를 보면 되고, 한편으로 그 사람의 생활습관을 알려면 그 사람의 몸매를 보면 알게 되겠구나. 제가 이 강단에서 아무리 절제를 강조해봤자 이 몸매로 여러분께 말씀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몸매는 절제와는 먼 곳에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데, 그러면서 절제를 강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은혜가 안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올해의 작은 목표는 뭐냐 하면,

짜잔~

매년 11월에 있는 군마현 마라톤대회 참가입니다. 그냥 참가가 아니라 완주가 목표입니다. 이 대회에는 10킬로짜리와 42.195킬로 풀코스 두 종류가 있는데, 물론 어느 날 갑자기 달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접수는 6월에 있다고 하니까 그 때까지 계속 연습과 훈련을 해보면서, 선택을 하려고 합니다. 물론 목표는 풀코스죠.
그래서 이걸 제가 솔선수범해서 한 번 해 보고, 장기적으로는 우리 교회의 전통으로 세워가려고 합니다. 설명을 읽어보니까 번호표에 교회이름도 붙일 수 있을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성도분들이 많아지면 매년 함께 뛰고, 다른 분들은 응원도 하고…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마라톤만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것을 위해서 준비도 하고 하면 여러 가지 절제를 자동적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물론 그렇다고 운동중독이 되면 곤란하겠죠. 여러분들도 많은 응원과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제가 마라톤 연습도 하고 그런다고, “그래? 홍 목사가 얼만큼 하는지 어디 한 번 두고 보자…”뭐 그러지 마시고, 여러분께서도,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절제는 무엇이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한번 고민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올해 연말에는, “아, 2016년 올해는 정말 주님 앞에서 믿음이 많이 성장했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한 해였다”라고 회고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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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7회 머리가 되는 믿음
2016년 1월 1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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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신명기 28장 13절~14절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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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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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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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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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기쁜 2016년 첫 예배인 송구영신예배에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머리가 되는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일본이 지금은 자민당 정권이지만, 과거에 민주당이 집권했을 때, 예산을 절감한다면서 일본 슈퍼컴퓨터에 대한 예산 논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세계 1위 수준을 유지하려면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민주당 국회의원이 문부과학성 청문회에서 “꼭 그렇게 막대한 돈을 들여서 1위를 해야 할 필요가 있나요? 2위는 안 되나요? 2位じゃだめなんでしょうか” 라는 말을 해서 한 때 유행어가 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꼭 1위를, 1등을 해야 해요? 2등도 꽤 괜찮잖아요? 라는 주장입니다.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해보고자 합니다.
일본에서 가장 높은 산은 뭔지 아시죠? 그렇습니다. 후지산입니다. 3776미터죠. 그렇다면 2번째로 높은 산은 혹시 아시나요? 2위는 야마나시 현에 있는 3193미터인 키타다케…라는 산입니다. 혹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다음에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은? 예, 에베레스트입니다. 8848미터입니다. 네팔과 티벳에 걸쳐 있는 산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높은 산은요? 바로 파키스탄과 중국 사이에 있는 K2라는 산입니다. 높이는 8611미터입니다.
조금만 더 살펴보겠습니다. 동물 중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동물은? 네 치타입니다. 최소한 중학생 정도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죠. 시속 120킬로까지 나온다고 합니다. 그럼 두 번째로 빠른 동물은요? 예, 가지뿔영양…이라는 양 종류 중 하나입니다. 속도는 96킬로라고 해요.
스포츠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경기인구가 많은 건 축구입니다. 그럼 두 번째로 많은 경기는요? 야구? 농구? 아닙니다. 바로 크리켓이라고 하는 경기입니다. 여러분 들어보셨나요?
자, 여기까지 들으셨다면 제가 하고자 하는 말씀을 아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1등을 해야 해요? 아니면 2등에 만족해야 해요?
아직도 감이 안 잡히시는 분을 위해서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올림픽 종목에 있는 스포츠를 하는 선수들한테 있어서는 언제나 최종목표는 바로 올림픽 출전입니다. 뿐만 아니라 메달을 따는 것이죠. 그것도 은메달이나 동메달이 아닌 금메달입니다. 이 올림픽에서만큼 2위와 1위, 은메달과 금메달의 차이가 큰 것은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2010년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에서 김연아는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 후 2014년 소치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후 명예롭게 은퇴를 한 그녀는 지금 각종 홍보대사와 모델 등을 하면서 제2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편 역시 밴쿠버에서 2위를 한 아사다 마오 선수는 그 다음 기회였던 2014년에 소치에서 6위를 하고 말았으나, 여전히 현역생활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만,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다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1등을 해야 해요? 아니면 2등에 만족해야 해요? 예, 그렇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일본 국회의원의 말을 좀 빌리자면, 그 분은 이렇게 말했다고 했죠? “꼭 1위를 해야 할 필요가 있나요? 2위는 안 되나요? 2位じゃだめなんでしょうか”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해요?
“예! 꼭 1위를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2위는 안 됩니다. 2位じゃだめなんです!”
라고 고백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여기까지 이해가 되셨다면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합니다. 1등을 하긴 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무엇으로 1등을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1등이 공부도 좋고 회사 실적도 좋습니다만,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살펴볼까 합니다.

신명기 28장 13절~14절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이,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소서”라는 말씀은 우리나라에 교회에서 많이 듣는 제목입니다. “항상 우리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고……” 분명 참 좋은 말씀입니다. 그것 뿐이 아니죠?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실 뿐만 아니라,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해주신다고 하니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이 말씀을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우리로 하여금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고,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머리가 되려고 아둥바둥 한다고 된다고 말씀하시나요? 우리가 위에 있기 위해서 기를 쓰고 물고 늘어지면 위에 있을 수 있다고 성경이 말씀하시나요? 아니요. 오히려 반대입니다.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마태복음 20장 26절에서 27절에는,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로마서 14장 18절,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마태복음 23장 12절에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누가복음 14장 11절에는,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그러니까 우리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으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게 하는 것은 우리의 힘이나 노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참으로 오묘한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1등이 되고자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요. 지금 1등인 사람을 이겨야 합니다. 그 사람을 끌어내리고 그 위에 올라가야지만 내가 1등을 해요. 그것이 세상 법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법칙은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면서 자기를 낮추는 자를 하나님께서 높여주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머리가 되는 믿음의 첫 번째 비결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뭐라고 기록되어 있죠?
신명기 28장 13절 후반부에 보면,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지금 여기 신명기 이 장면은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두고 이스라엘 모든 민족을 모아놓고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애굽을 탈출했던 40년 전에 한 언약을 이제 새로운 세대를 향해서 갱신하는 장면입니다.
이 명령이 신명기 27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압축하면 십계명이요, 이를 더 압축하면,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 40절 말씀처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신명기 28장 14절에,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여기서 또 강조하십니다.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이제 오늘부터 3일 일요일까지는 일본 전국에 있는 신사들이 미어터질 것입니다. 그와 같은 우상숭배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누누히 엄격하게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이와 같으리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이와 같으리라’는 것이 뭐죠? 그렇습니다. 우리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머리가 된다고 하는데 무엇보다 머리가 된다는 것일까요? 내 옆에 있는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해주겠다는 뜻인가요? 이것이 바로 오해입니다. 예를 들어서 대학이나 취업, 그리고 자격증 시험 같은 것은 옆사람 보다 내가 더 열심히 해서, 다른 사람들을 이겨야 되는 관문입니다. 그래서 경쟁률이 있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100명 뽑는데 1,000명이 몰렸다고 하면 경쟁률은 10:1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기려면 적어도 900명을 떨궈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천국은 어떻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경쟁률을 뚫고 들어가야만 하나요?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교회 잘 다니고 믿음 좋은 사람을 방해해서 교회 안 다니게 만들면, 내가 천국 가기가 쉬워지겠네요? 천국이 그렇게 좁다고 하시던가요?


요한복음 14장 2절에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천국의 모집정원은 무한대입니다. 경쟁률이 없어요. 그렇다면 여기서 머리가 되는 믿음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나 자신의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드신 분들, 가끔은 젊은 사람인데도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내가 왕년에 말이야……” 혹시 여러분도 이런 표현을 써보셨는지, 아니면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른바 ‘금송아지’라고 하죠? 집에 금송아지 한 두마리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그런 말들을 합니다.
“내가 왕년에 말이야……” 보통 이런 말을 쓰는 사람 중에서 지금 잘 나가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 무슨 뜻이에요? “내가 지금은 이렇게 볼품없지만 예전에는 잘 나갔었어. 나 무시하지마……” 그런 뜻이죠? 교회 오래 다니신 분들도 그런 말씀을 하는 분들이 간혹 계십니다. “옛날에는 내가 금식도 얼마나 하고 새벽기도도 철야도 열심히 나가고, 그래서 이러이러한 응답도 받고 그랬던 사람이야……”
음…그래요? 그렇다면 지금은요? 그러면 하는 말이, 아…요즘은 좀 바쁘고 몸도 피곤해서 말이야……
여러분, 이게 머리가 되는 믿음인가요? 아까 시험 얘기가 나와서인데, 예를 들어서 내가 무슨 시험을 보게 되었어요. 그런데, 내가 과거에 옛날에는 공부를 아주 잘 했었다…그게 중요해요? 지금 시험을 보는데 말이에요.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한 체험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만났던 그 기억은 우리의 믿음이 약해졌을 때 다시 힘을 돋구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머물고 만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 지나간 추억 속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1장 8절,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하나님은 과거에 계셨고, 미래에도 계시지만, 지금 이 순간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리 과거에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체험했다고 하더라도 ‘지금’이라는 것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결국 머리가 되는 믿음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옆에 있는 사람과 비교해서 내 믿음이 더 좋으면 머리가 되는 믿음이에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머리가 되는 믿음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자신의 믿음과 비교해서 지금 나 자신의 믿음이 더 나아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아무리 믿음이 좋았던 사람도 지금 형편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믿음이 약했더라도 오늘 믿음이 어제보다 좋아졌다면 그것은 분명 머리가 되는 믿음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새해에 받을 축복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을 축복입니다. 다 함께 신명기 28장 1절부터 14절까지 하나하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명기 28장 1절부터 14절 말씀,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할 것임이니라 땅의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이름이 너를 위하여 불리는 것을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가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을 많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오늘 2016년 새해 첫 예배에 모이신 우리 모두 머리가 되는 믿음을 갖고,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8회 절제의 믿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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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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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우리에게 주신 이름
2015년 12월 23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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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Last Update 2019. 5. 21

사도행전 4장 11절~12절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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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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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성탄예배인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에게 주신 이름’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특별예배이고 하니, 전하는 말씀도 좀 특별하게 문학 이야기를 한 번 해볼까 합니다. 여러분 혹시 SF소설 또는 SF영화라는 말씀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SF라는 것은 science fiction의 약자로서, 한국에서는 ‘공상과학’이라고 번역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SF 또는 공상과학…이라고 하면 여러분은 어떤 것을 떠올리세요? 얼마 전에 스타워즈의 신작이 개봉되어서 세계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아무래도 SF라고 하면 우주, 로켓, 로봇 같은 것들을 떠올리지 않을까 합니다.
저도 예전에는 그랬습니다만, 학교 다닐 때 제가 아르바이트를 했던 적이 있었는데, 당시 흥미로운 경험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아르바이트를 시작해야 했는데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온라인 상에 번역으로 등록을 해놓았는데, 마침 어떤 분과 연락이 닿아서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참 독특한 분이라서, 일본 문고판 책을 쇼핑백에 두 봉지를 가득 들고 나오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보고, 야…저걸 다 번역하면 수입도 괜찮겠다 싶었는데, 그 분이 하시는 말은, 여기 있는 책들을 다 읽고, 거기서 재미있는 것들을 몇 개 골라달라는 거예요. 이것 참 난감하더라구요. 덕분에 그 분과 일을 하면서 소설들은 참 많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이 대부분 일본 SF와 관련된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SF는 좀 독특하더라구요.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우주나 로켓 같은 것이 등장할 때도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꽤 되었습니다.
오늘은 일본 SF소설 중에서 츠츠이 야스타카의 ‘4차원 양파’라는 작품을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먼저, 매우 짧은 내용이기 때문에 간략하게 줄거리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어느 날 동물원에서 한 원숭이가 뭔가 조그마한 공 같은 것을 가지고 놀아요. 그런데 이걸 그냥 가지고 놀면 괜찮은데, 가만히 관찰을 해보니까 이 원숭이 상태가 점점 이상해지는 거예요. 그리고는 좀 더 있다가 어떻게 되나 했더니, 이제 완전히 노이로제에 걸리고 맙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다른 원숭이가 이걸 빼앗아서 가지고 놀더니 얼마 지나자 역시 발작을 일으키고 난리가 납니다. 그래서 사육사가 이것을 빼앗아서 보니까 하얀 작은 양파처럼 생겼더래요. 그래서 도대체 원숭이들이 왜 이걸 가지고 놀면 상태가 이상해지나 하고 유심히 살펴봤더니, 이게 참 신기한 양파입니다. 뭐가 어떻게 신기하냐 하면, 껍질을 아무리 까도 크기가 줄어들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 이게 얼마나 신기합니까. 그랬더니 이 소문이 퍼져나가서 결국 세계적인 과학자들이 연구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연구를 해도 밝혀내지 못해요. 그러자 한 과학자가 그 양파에 바늘을 꽂아봤더니 바늘 끝이 90도 꺾여진 곳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 이 양파 속에는 4차원 공간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속에 숨어있을지도 모른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내부가 어떻게 되어있는지를 밝혀내야 하는데, 그 방법이 없습니다. 껍질을 아무리 까도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없으니 말이에요. 그랬더니 어떤 과학자가 이걸 수소폭탄으로 터뜨려보자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다른 과학자들이 반대를 해도 전혀 귀담아듣지 않고 결국은 수소폭탄과 함께 이 양파를 폭발시키게 됩니다. 그러자 결국은 어떻게 됐냐, 하면 그 양파 속에 갇혀있던 몇 백억에 달하는 에너지가 한 번에 분출하는 바람에 지구 전체가 한줌의 재로 변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모습을 본 우주인들이 자기들끼리 대화를 하기 시작합니다. 쯧쯧쯧……지구인들도 별 수 없구만. 저걸 그냥 폭파시키고 자기들도 멸망해버리다니…왜 저 껍질을 먹을 수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했을까. 만약 그랬더라면 식량문제는 영원히 해결되는건데……
라고 하면서 이 ‘4차원 양파’는 막을 내립니다.
얼마 전에 모처럼 이 소설의 내용을 떠올리고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은 참 많습니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에 대한 책들도 많습니다. 시험 삼아 한국에서 가장 큰 서점인 교보문고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예수는’이라는 검색어를 입력해보았더니, 무려 6000권이 넘는 책이 검색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책 제목들을 보니 제 심정이 좀 복잡해졌습니다. 제목이 대충 이렇습니다.
예수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 도마복음 해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는 괴물이다,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예수는 신화다, 히말라야에서 만난 예수의 흔적, 예수는 정말 부활했을까, 예수는 과연 하나님의 독생자인가,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제가 인터넷에서 검색된 수많은 책들 중에서 이상한 제목들만 몇 개를 골라낸 것이 아니라, 검색어를 입력하고 클릭한 다음에 첫 페이지에 뜬 20개 중에서 차례대로 10개를 읽어드린 것입니다.
자, 이 책 제목들을 듣고 여러분께서는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그 중에서 마지막에 읽어드렸던 책 제목,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 이건 다른 식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더라구요? 그래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내용인가 하고 책 내용을 잠시 살펴보았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한 남자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아마로 만들어진 한 조각의 천, 토리노 성의(聖衣)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예수 부활론의 음모를 파헤친 책. 저자들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단지 실신한 상태으며 동물 무덤으로 옮겨져 비밀리에 치료를 받고 소생해 제자들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고 주장했다. 이어 부활 신앙이 붕괴되는 것을 두려워한 바티칸이 성의의 연대를 조작했다며 바티칸의 음모론을 제기했다.”
참, 마음이 심란해집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고학자들, 신학자들이 여러 곳을 파헤치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기 위해서 자료들을 찾아다니고 유적들을 발굴하고 있습니다. 누구는 예수님이 동정녀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당시 어수선한 이스라엘에서 임신하게 되어 사생아로 태어났다고 주장합니다. 누구는 예수님이 태어난 곳이 마굿간이 아니라 친척집이라고 주장합니다. 누구는 예수님은 사람이었고 고대 인도에 가서 가르침을 배워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에서 가르쳤다고 주장합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뭔지 아십니까? 일본 아오모리현에는 예수님의 무덤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푯말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예수는 21세에 일본으로 건너와 12년간 신학에 대한 수행을 쌓고 33세에 유대로 건너가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파했으나,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십자가에 매달려고 했다. 그러나 동생 ‘이스키리’가 형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었다. 한편 도망쳤던 예수는 힘겨운 여행 끝에 또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그 동네에 정착해서 106세의 장수를 누리고 사망했다.”
여기까지 되면 정말 웃음도 안 나옵니다. 여러분께 진지하게 묻겠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알려면 무엇을 읽어야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책들 중에서 예수님에 대해서는 성경에 모두 명확하게 나와 있는데, 만약에 성경과 다른 내용이 적혀 있는 내용과 조금이라도 다르다면, 이는 그야말로 사이비, 비슷하지만 그 본질은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어리석은 호기심은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집니다. 성경에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마태복음 1장 23절에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그런데 사람들은 “처녀가 잉태하지 않았다”고 해서 사람들의 흥미를 끕니다.
마태복음 3장 16절에서 17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해서 사람들을 현혹시킵니다.
마태복음 28장 5절과 6절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또는 십자가에 달린 것은 예수가 아니다” 라고 말해서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을 믿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다 뭐예요? 결국 그들은 성경을 믿지 말고, 성경에 적힌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말고, 자기들이 쓴 책, 자기들이 하는 말을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어떤 책입니까.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 17절에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적힌 책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쓰인 책보다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말을 믿으라고 하는 것이니 참으로 답답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그와 같은 주장에 혹하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출판사에서 책을 낼 때에는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훌륭한 책이라 하더라도 안 팔릴 것 같은 책은 절대로 내지 않습니다. 그렇잖아요? 한두푼도 아닌 목돈을 들여서 책을 냈는데 하나도 안 팔린다면 출판사는 망하고 맙니다.
하지만 반대로, 정말 쓰레기같은 책이지만 팔린다고 생각하면 어떻겠습니까. 믿음이 있고 신앙이 있는 출판사가 아니라면 돈에 눈이 멀어서 책을 냅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책들이 많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만큼 이런 책들이 팔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대가 이처럼 영적으로 혼탁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17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1장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사도행전 10장 43절,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그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오늘 읽은 본문,
사도행전 4장 11절~12절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우리를 구원해주실 이름은 예수, 오직 예수라는 사실을 믿으시길 축원드립니다. 그 예수님께서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요한복음 14장 5절에서 6절에 보면,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나요? 예수님께서 오늘 뭐라고 하시죠? 예수님이 가시는 곳으로만 가면 됩니다.
오늘은 성탄예배입니다. 성경을 벗어나서 예수님을 논하려고 하면, 마치 양파를 가지고 놀던 원숭이들처럼 노이로제를 일으키고 정신착란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예수는 신이 아니다, 예수는 괴물이다,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예수는 신화다, 예수는 부활하지 않았다, 예수는 하나님의 독생자가 아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이런 주장들 모두가 바로 성경에서 벗어난 예수님에 대한 주장인 것입니다. 성경을 벗어났다는 것은 본질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믿으면 되는데, 성경에 적힌 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으면 구원을 얻는데, 어떻게 해서든지 성경에서 벗어나서, 본질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주장을 억지로 꿰어맞추려 하니, 힘은 힘대로 들고, 고단함은 극에 달하고, 마치 4차원 양파가 귀한 식량이 될 수 있다는 어마어마한 비밀을 알아내지 못하고 자신의 지식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려 하다가 정신착란을 일으키고 노이로제에 걸리고 결국에는 지구를 폭발시켜버리는 어리석은 인간들처럼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하신 말씀대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시고, 우리에게 구원이 되신 이름인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생각하고 감사할 때, 우리 마음 안에 기쁨과 평안과 축복이 30배 60배 100배로 넘쳐나는 귀한 성탄절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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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5회 친히 듣고 친히 보는 믿음
2015년 12월 2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39절~42절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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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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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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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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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친히 듣고 친히 보는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 보면 한 지역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사마리아 지역의 수가 라는 성읍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유대인이 아닌 다른 지역 사람들을 이방인이라고 배척했었는데, 여러 역사적인 배경으로 인해서 이 사마리아인들도 이방인으로 취급해서 아주 멸시해서 서로 말도 섞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4장 3절에서 8절까지 보면,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ヨハネの福音書 4章3節~8節
主はユダヤを去って、またガリラヤへ行かれた。しかし、サマリヤを通って行か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それで主は、ヤコブがその子ヨセフに与えた地所に近いスカルというサマリヤの町に 来られた。そこにはヤコブの井戸があった。イエスは旅の疲れで、井戸のかたわらに腰をおろしておられた。時は六時 ごろであった。ひとりのサマリヤの女が水をくみに来た。イエスは「わたしに水を飲ませてください。」と言われた。弟子たちは食物を買いに、町へ出かけていた。


당시 유대 땅은 남쪽에 있고 갈릴리는 북쪽에 있었는데, 그 사이에 있는 지역이 바로 사마리아였습니다. 하지만 아까 말씀 드린 바와 갈이 당시 유대인들은 이 사마리아인들을 기피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에서 갈릴리 지역으로 갈 때에는 동쪽 요단강 쪽으로 빙 돌아서 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지 않고 곧바로 사마리아를 지나서 갈릴리로 가는 코스를 택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조금 더 살펴보면 예수님이 그러셨던 이유는 단순히 귀찮아서, 아니면 무슨 시간에 쫓겨서 그러신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도 분명히 구원 받을 영혼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 의하면 이 사마리아 지역에 들어서셔서 수가라고 하는 성읍에 이르셨을 때 예수님께서 피곤하시니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셨더니 시간이 오후 여섯 시쯤이었다고 하고, 그 때 마침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왔을 때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말을 걸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어떻게 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구절인데 여기서도 은혜를 받을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세상에 예수님이 피곤하셨대요. 예수님이 누구신가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보다 못한 존재인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원리가 뭐죠?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라는 세 인격이 존재하지만 이 모두가 하나의 본질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도 하나님이요, 예수 그리스도도 하나님이요, 성령님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예수님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1장 2절과 3절에서,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ヨハネの福音書 1章2節~3節
この方は、初めに神とともにおられた。
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によらずにできたものは一つもない。

라고 기록합니다. 그와 같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피곤함을 느끼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부분을 시사해줍니다.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8절에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ピリピ人への手紙2章6節から8節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方なのに、神のあり方を捨てることができないとは考えないで、ご自分を無にして、仕える者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たのです。キリストは人としての性質をもって現われ、自分を卑しくし、死にまで従い、実に十字架の死にまでも従われたのです。

그리스도는 분명 하나님이시지만, 이 땅에 인간이라고 하는 종의 형체로 오셔서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과 고난을 모두 겪으셨습니다. 진정으로 고난을 당하지 못한 사람은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어떤 심정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프랑스 루이 16세 당시에 그의 부인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빵이 없어 굶주림에 허덕이는 민중들을 가리켜,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 본인이 사악했다기 보다는, 직접 어려움을 겪지 못했기 때문에 그 어려움을 겪는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떠세요?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가 겪는 모든 어려움을 직접 겪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아실 수 있는 것이죠.

히브리서 2장 18절에는,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ヘブル人への手紙 2章18節
主は、ご自身が試みを受けて苦しまれたので、試みられている者たちを助けることがおできになるのです。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마치 무슨 관광하듯이 정말 편안하게 이 세상에 오셔서 즐겁게 놀다만 가셨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얼마나 많은 고통과 고난과 시험을 당하셨는지 모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똑같이 시험을 받아가며 어려움을 겪는 우리들의 마음을 헤아리실 수가 있는 것이요,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것이라고 오늘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4장 6절 후반부에서 8절까지 보면,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ヨハネの福音書4章6節の後半から8節
そこにはヤコブの井戸があった。イエスは旅の疲れで、井戸のかたわらに腰をおろしておられた。時は六時ごろであった。ひとりのサマリヤの女が水をくみに来 た。イエスは「わたしに水を飲ませてください。」と言われた。弟子たちは食物を買いに、町へ出かけていた。

이것은 좀 여담입니다만, 이 구절을 두고 어떤 주석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여인이 예수가 있는 우물에 나온 시간이 유대시간으로 제 육시인데 우리의 시간으로 하면 낮 열두시이다. 이때는 햇볕이 가장 뜨거운 때여서 다니는 사람이 없다. 이 여인은 도덕적인 면에서 떳떳하지 못한 생활을 하는 신분이기 때문에 남의 눈을 피해서 정오경에 우물에 왔다.

저도 예전에 이런 내용의 설교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한국 주석에만 이렇게 적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어로 된 홈페이지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을 보면, 이미 널리 퍼진 논리인 것 같습니다. 그것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유대시간대로 적혀 있어서 삼 시는 9시, 육 시는 12시, 구 시는 3시가 됩니다만, 요한복음은 로마식 시간대를 사용했기 때문에 요한복음에서 여섯 시라고 하는 것은 지금 우리 시간 대와 동일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러 온 시간은 대낮이 아니라 저녁 시간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이 퍼진 이유는, 무슨 나쁜 의도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성경을 좀 더 드라마틱하게 해석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합니다만, 그런 건 불필요한 의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 자체로도 너무나 드라마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무슨 여인이 온 시간이 낮 12시가 아니라 오후 6시로 믿어야지만 구원이 있다든지 그런 것은 아니니까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어찌되었든 예수님은 주님께서 주시는 생수에 대한 말씀, 이 여인의 개인사에 대한 말씀, 예배에 대한 말씀, 그리고 4장 26절까지 많은 대화를 나누십니다. 그랬더니 이 예수님에 대한 말씀에 은혜를 받은 여인이 어떻게 했습니까?


4장 28절에서 30절을 보니,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4章28節~30節
女は、自分の水がめを置いて町へ行き、人々に言った。「来 て、見てください。私のしたこと全部を私に言った人がいるのです。この方がキリストなのでしょうか。」そこで、彼らは町を出て、イエスのほうへやって来た。

자신이 받은 은혜가 넘치면 이것을 전하지 않고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대낮에 나왔든 저녁 때 나왔든 우물가로 나온 이유는 자신의 생활을 위해서, 자신의 육신을 위해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그 말씀을 들은 후에 어떻게 변했나요? 이제 여자는 물동이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복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니까, 내가 하나님을 만났다. 그리스도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이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놀랍게도 그 이방 땅, 당시 유대인들은 상종하지도 않았던 사마리아 땅에서 무려 이틀을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시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두 구절이 인상적입니다.

먼저, 4장 39절입니다.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さて、その町のサマリヤ人のうち多くの者が、「あの方は、私がしたこと全部を私に言った。」と証言したその女のことばによってイエスを信じた。

그리고 4장 42절입니다.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そして彼らはその女に言った。「もう私たちは、あなたが話したことによって信じ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自分で聞いて、この方がほんとうに世の救い主だと知っているのです。」
이 여인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예수를 믿었다고 했지만, 이틀 동안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사람들은 이제 그냥 믿는 게 아니라,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우리가 간접적으로 듣는 것과 직접적으로 듣는 것에는 차이가 많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것은 아담이었습니다.

창세기 2장 16절에서 17절에 의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神である主は、人に命じて仰せられた。「あなたは、園のどの木からでも思いのまま食べてよい。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取って食べてはならない。それを取 って食べるその時、あなたは必ず死ぬ。」

여기서의 ‘그 사람’은 아담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다리 건너서 들은 것이 누군가 하면 바로 하와입니다. 그렇다면 사탄은 누구를 노리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와입니다. 사탄은 반드시 가장 약한 곳에서부터 공격해오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에게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약점 중에서 가장 약한 부분을 치고 들어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방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기도로 무장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혹하는 사탄에 대해 하와가 뭐라고 대답하죠?

창세기 3장 3절에 의하면,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しかし、園の中央にある木の実について、神は、『あなたがたは、それを食べてはならない。それに触れてもいけない。あなたがたが死ぬといけないからだ。』と仰せになりました。」

여기서 “죽을까 하노라” 라는 것은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더라도 “죽을 수도 있고, 안 죽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던가요? 아까 17절에서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아담이 듣고 이를 하와에게 전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변질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명령을 어기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하와는 이를 ‘어쩌면 안 죽을 수도 있어’라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담과 하와는 타락하고 에덴에서 쫓겨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지난 주에 잠시 살펴보았습니다만, 욥은 어땠을까요. 고난을 겪고 수모를 당하고 이를 모두 인내한 후에 욥이 하나님께 뭐라고 고백합니까.

욥기 42장 5절에는,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이 모든 것을 빼앗겼지만,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런 계기가 된 것이 바로 이 고백이 아닐까 합니다. 이 욥의 말을 들으면 어떤 분은 “어? 귀로 듣기만 하면 부족해?” 좀 이상하게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되어 있잖아? 그러면 되는 것 아냐?” 성경을 열심히 읽으신 분이시라면 또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욥기 42장 5절의 다른 번역을 보면 조금 납득이 가실 것입니다.

한글 공동번역에 의하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일본어 신개역판에서는 “私はあなたのうわさを耳で聞いていました。しかし、今、この目であなたを見ました。”
욥기 1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던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그 당시까지 욥은 그저 소문으로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분이다, 누가 하는 말을 듣고 하나님은 이런 분이겠구나 라고 짐작하는 데에 머물렀었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여인도 믿음이 있었습니다. 메시야가 언젠가는 와서 자신을 구원해줄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눈 앞에 있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자 그 사람의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 사마리아 여인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땠습니까. 유대교에 있을 때에 청년 사울은 믿음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22장 3절에 의하면 그는 당시 명문이라고 여겨진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엘리트였습니다. 청년 사울은 말하자면 책으로 들은 하나님은 알고 있었으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 결과 어땠습니까. 자신이 알고 있던 하나님과 다른,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를 전하는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의 삶은 완전히 180도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듣기만 했던 믿음에서 벗어나, 이제 예수님을 보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믿음으로 성장해간 것입니다.
믿음의 시작은 듣는 것입니다. 목사님으로부터 들을 수도 있고 성경을 통해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조금씩 배워가는 것입니다만, 그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그저 지식에 불과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어디어디 사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 너를 정말 사랑한대…남자분이라면 어디어디 사는 아름다운 여성이, 여자분이라면 어디어디 사는 멋진 남자가 너를 정말정말 사랑한대…라는 말을 들었다고 해보세요.
이 소식을 듣고 “아…그래?”로 끝난다면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역사가 일어나겠어요? 그렇습니다. 직접 만나야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대…아…그래? 이렇게 되면 거기서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만,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렇죠. 직접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옛날에 있었던 일들을 그저 단순하게 기록해 놓은 역사책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홍해가 갈라졌다는데 우리의 삶 속에서 갈라지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성경에서 질병이 낫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데 우리의 삶 속에서 질병이 낫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야지, 그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끌나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어제도 살아계시고 지금도 살아계시고, 영원토록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어제와 오늘도,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성경에서 일어난 일들은 지금 우리에게도 일어나야 마땅한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しかし、彼は、私たちのそむきの罪のために刺し通され、私たちの咎のために砕かれた。彼への懲らしめが私たちに平安をもたらし、彼の打ち傷によって、私たちはいやされた。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읽고, 아 그렇구나…예수님 참 아프셨겠네…이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찔리고 징계를 받은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고,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평화를 누리는 것이요,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채찍을 맞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사실이에요, 아니에요? 예,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나음을 입지도 못하고 평화를 누리지도 못한다면, 그건 왜인가요? 성경이 거짓말이에요? 아니요.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보약, 만병통치의 명약이 내 눈앞에 놓여 있으면 뭐하겠어요? 그것을 먹고 내 몸 안에 넣어야지만 약효과 발휘되는 것처럼, 성경을 단지 하나의 책, 하나의 지식으로만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 삶 속에 들어와서 나와 함께 동행하는 삶이 되어야지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라는 말씀입니다.
見よ。わたしは、戸の外に立 ってたたく。だれでも、わたしの声を聞いて戸をあけるなら、わたしは、彼のところにはいって、彼とともに食事をし、彼もわたしとともに食事をする。

지금 이 순간도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누구한테 들은, 어디서 읽은 하나님의 지식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고 동행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만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누가복음 11장 13절에서,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してみると、あなたがたも、悪い者ではあっても、自分の子どもには良い物を与えることを知っているのです。とすれば、なおのこと、天の父が、求める人たちに、どうして聖霊を下さらないことがありましょう。」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이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다는 믿음을 갖고,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성령 충만해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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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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