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회 이 세상의 중심
2016년 9월 1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스바냐 3장 17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하늘에 있는 태양도 달도 별도 구름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모든 것들을 누가 만드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첫째 날에는 빛을 만드시고는 5일에 걸쳐 천지와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에 우리 사람을 만드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시는 과정을 보면, 매우 특별하십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そして神は、「われわれに似るように、われわれのかたちに、人を造ろう。そして彼らに、海の魚、空の鳥、家畜、地のすべてのもの、地をはうすべてのものを支配させよう。」と仰せられた。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의 특징을 3가지로 본다면, 첫째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피조물을 만드실 때에도 그 형상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셨지만, 특별히 사람을 만드실 때에는 하나님 본인의 형상에 따라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점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그 자녀들을, 동물이 자신의 새끼들을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과 형상이 닮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하나님 자신과 같은 모습으로 만드셨으니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겠습니까. 그리고 둘째를 보면, 단순히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시는 권세와 지혜를 주셨습니다.
세상에 있는 생태계의 먹이사슬을 보면 간혹 예외는 있습니다만, 대체적으로 그 몸집과 힘은 비례를 합니다. 그리고 몸집이 작은 늑대가 몸집이 큰 황소 같은 짐승을 공략할 때를 보면 한 마리로 덤비는 것이 아니라 여러 마리가 힘을 합쳐야 사냥을 할 수가 있지요. 하지만 인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르실 권세와 지혜를 허락해주셨기 때문에 도구를 만들고 작전을 짜서 혼자서라도 능히 사냥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뿐입니까. 산을 깎아 길을 내기도 하고, 하늘을 나는 새들도 바다 속에 있는 물고기들도 잡을 수가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참으로 놀라운 지혜와 권세를 우리 인간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특징은

창세기 2장 7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その後、神である主は、土地のちりで人を形造り、その鼻にいのちの息を吹き込まれた。そこで、人は、生きものとなった。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만드실 때에 친히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영혼을 불어넣어주신 것 또한 우리 사람을 만드실 때만 해주신 일입니다. 즉, 우리 인간은 여타 다른 생물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이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분해서 창조해주시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사랑해주신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견해는 제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볼 때 오래 전부터 있어온 생각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특별히 사랑하시고, 우리 사람이 사는 이 땅을 지으셨기 때문에 오랫동안 이 세상은 우주의 중심이라고 여겨져 왔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천동설입니다.

천동설은 쉽게 말하자면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특별히 사랑하셨고, 또한 우리 사람들도 특별한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우주의 중심일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 우주의 중심에는 지구가 있고, 지구를 중심으로 이 우주는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사랑하십니까? 예, 사랑하십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특별하게 만드셨고, 특별한 권세를 주셨으며, 특별히 보살펴주십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시기 위해서,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주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징계를 받으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으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주셨습니다. 여기까지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왕이든 대통령이든 그 누가 이를 아니라 한다 하더라도 이는 진실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 문제는 그 다음부터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바로 우주의 중심에 위치해 있어야 한다……이런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성경 어디를 찾아보아도 지구는 가만히 있고 지구 주변을 태양이 돈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을 믿었던 과거의 사람들은 이 지구가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교만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먼저입니까. 사람의 생각이 먼저입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생각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생각에 맞추어서 사람의 생각을 바꾸어 가야 하는데, 이 교만이 심겨지게 되면 사람의 생각에 맞도록 하나님의 생각을 억지로 꿰어 맞추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과거에 이런 발상으로 인하여 카톨릭에서 행해진 종교재판을 통해 얼마나 많은 지식이 말살되고 진실이 왜곡되었는지 모릅니다. 단순이 이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어떤 일개 종교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당시에 주름잡고 있던 세상적 권력의 영향으로 인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지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모욕을 주고, 진실을 왜곡하게 만들고, 그래도 끝까지 진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화형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비극들이 일어났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생각을 모르고 사람의 생각을 고집하려 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기준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말씀에 비추어서,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발견하면……어느 쪽을 고쳐야겠어요?
내 생각은 가만히 놔두고 하나님 말씀을 고쳐요? 이건 마치 거울 속을 들여다보고 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그럴 때 거울 탓을 하는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 이마에 뭐가 묻었으면 어떻게 해요? 거울을 갈아야 해요? 아니요, 내 얼굴에 묻은 그걸 얼른 떼어내야죠.
문제는 하나님 생각이 아니라 바로 내 생각입니다. 내 생각을 고쳐야 합니다. 내 생각을 고치기 위해서 바로 성경을 읽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절대적인 기준은 내 생각이 아니요, 하나님 생각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얼마 전에 저희 부모님을 모시고 군마현에 있는 군마천문대를 방문했습니다. 제가 처음에 혼자서 방문했을 때에는 평일이라서 특별한 이벤트가 없었습니다만, 지난번에는 주말이라서 입체 영상도 보여주고 그랬습니다. 그걸 보니 예전에 학교 다닐 때의 기억이 나고 그랬는데, 그 입체영상은 지구에서 시작해서 여러 별들을 스크린으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은 대략 1시간 정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만, 정말 그런 영상을 보면 생각의 스케일이 커집니다. 태양에서 시작해서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그 별들의 크기나 거리 같은 것을 설명해줍니다. 별들의 거리를 보면 일반적으로 우주에서는 광년이라는 단위를 씁니다만 이는 빛이 1년 동안 갈 수 있는 거리를 말합니다. 빛이 얼마나 빠릅니까. 초속 30만 킬로미터라고 해서, 둘레가 4만 킬로미터인 지구를 1초에 7바퀴 반 돌 수 있는 게 빛입니다. 그런데 이 빛이 1년 동안 날아가는 거리가 1광년입니다. 이걸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거리로 바꾸면 1광년은 무려9조 4,605억 3000km. 감이 오세요? 이 길이는 시속 300킬로인 고속철도로 무려 360만년이나 가야 하는 거리입니다. 그게 1광년입니다. 그런데 우주에서 보면 이 1광년이라고 하는 숫자는 매우 작은 단위입니다. 우주에 대한 책을 보다 보면 몇 백 광년, 몇 천 광년이라는 단위가 흔히 등장합니다. 지난 2011년 뉴스에 의하면 지구의 140조배에 해당하는 물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별이 발견되었는데 그 별은 지구에서 120억광년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합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생각하는 고민이나 안 좋은 일들 같은 것은 정말 너무나도 작은 문제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자, 지금은 이제 천동설이 아닌 지동설, 그러니까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구만이 아니라 여러 별이 태양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태양계만을 보더라도 지구는 그 주인공이 아닙니다.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별들 중에서는 3번째에 있고, 크기도 매우 작은 편에 속합니다. 그리고 그 태양계는 은하계에 속해 있습니다.

이 은하계에는 별들이 대략 2000억 개 정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렇다면 이 은하계 중에서 태양계는 중심 쪽에 있을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은하계 중에서도 저기 저 끄트머리 쪽에 우리 이 태양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은하계가 곧 우주인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은하계가 모여서 또 무엇이 되냐 하면 ‘은하군’입니다. 그리고 이 은하군들이 모인 것이 ‘은하단’이고, 그리고 이 ‘은하단’들이 모인 것이 ‘초은하단’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초은하단’이 모여서 비로소 우주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쉽게 말씀을 드리긴 했습니다만, 사실 이 상황까지 가면 거리나 숫자나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요. 글쎄요. 숫자로는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해를 할 수 있는 범위는 이미 벗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수 백억이나 수 천억이나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런 정말 말만 들어도 까마득한 광대한 우주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의 몇 배, 태양의 몇 십배나 되는 별들이 사라져가고 또 새로 태어나고 있습니다. 그런 우주에서 본다면 이 지구는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는, 그리고 언제 사라진다 하더라도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 작은 일처럼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자 그렇다면 나라고 하는 존재는 어떨까요? 이 작은 지구에서만도 인구는 자그마치 74억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존재가치는 74억분의 1인가요?

이는 마치, 돈이 74억원 있는 사람이 1원짜리 생각하는 것처럼, 나에 대한 존재는 그 정도밖에 안 되나요?
어쩌면 이 말씀을 듣는 분들 중에는, “아아, 그랬구나. 그래서 내 기도를 하나님이 안 들어주시는구나. 내가 그래도 좀 가치가 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보니 나는 그냥 있으나마나한 존재였구나.”
혹시 이렇게 생각하신 분이 있다면 그것은 지극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 인간과 이 세상을 하나님은 귀하게 여기셨기에, 그렇기 때문에 이 땅은 우주의 중심일 것이다……라고 하는 잘못된 생각처럼, 그 반대의 생각, 그러니까, 우리 세상은 저 드넓은 우주 중에서도 한 구석에 있고, 이 지구에서도 나는 이 구석에 존재하니까 나는 정말로 값어치가 없는 인간이다……라고 하는 생각도 철저하게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것 또한 바로 사람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5장 8절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わたしの思いは、あなたがたの思いと異なり、わたしの道は、あなたがたの道と異なるからだ。―主の御告げ。―


이 모든 천하만물을 만드신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작은 지구에 있는 우리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내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어느 다른 별 다른 생물체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보내셨나요? 아닙니다. 이 광대한 우주 속에서 이 작은 별 지구에 사는 우리들을 위해 오셨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 27절~30절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너희
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ゆりの花のことを考えてみなさい。どうして育つのか。紡(つむ)ぎもせず、織(お)りもしないのです。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栄華を窮めたソロモンでさえ、このような花の一つほどにも 着飾ってはいませんでした。しかし、きょうは野にあって、あすは炉 に投げ込まれる草をさえ、神はこのように装ってくださるのです。ましてあなたがたには、どんなによくしてくださることでしょう。ああ、信仰の薄い人たち。
何を食べたらよいか、何を飲んだらよいか、と捜し求めることをやめ、気をもむことをやめなさい。これらはみな、この世の異邦人たちが切に求めているものです。しかし、あなたがたの父は、それがあなたがたにも必要であることを知っておられます。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너무나도 훌륭한 존재입니다.

단순히 숫자상으로만 본다면 74억이 살고 있는 이 지구상에서 우리의 존재는 74억분의 1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거기에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예를 들어서 대통령이나 유명인사들은 나 같은 이름없는 사람들보다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다. 어떤 영화를 만드는데, 등장인물이 10,000명이에요. 그렇다면 대단한 스케일이라고 할 수 있겠죠? 거기에는 주인공도 있고 조연배우도 있을 것이지만 대다수가 엑스트라일 것입니다. 설마 10,000명 중에서 1,000명이 주인공일 리가 있겠어요? 그래봤자 주목 받는 배우는 기껏해야 10명도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사람의 생각으로는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처럼 여기질지는 몰라도 우리 인생에서의 주연배우는 바로 우리, 나 자신입니다. 그렇다면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요? 만약에 그렇다면 그건 나만의 의미없는 착각이겠지요. 하지만,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에베소서 1장 4절~5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すなわち、神は私たちを世界の基の置かれる前からキリストのうちに選び、御前で聖く、傷のない者にしようとされました。
神は、ただみこころのままに、私たちを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ご自分の子にしようと、愛をもってあらかじめ定めておられたのです。


이 세상을 만드시기 전부터 나를 만드시고, 그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스바냐 3장 17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あなたの神、主は、あなたのただ中におられる。救いの勇士だ。主は喜 びをもってあなたのことを楽しみ、その愛によって安らぎを与える。主は高らかに歌ってあなたのことを喜ばれる。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74억분의 1의 가치밖에 안 된다고 한다면 그 기쁨이 얼마나 되겠고 사랑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리고 전우주 차원으로 본다면 우리의 가치는 더욱 작아질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생각으로 보는 세상의 중심은 다른 그 어디도 아닌 바로 내가 이 세상의 중심인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육신의 생각으로는 우리가 티끌만큼 작은 존재처럼 보일지는 모르나, 하나님의 생각, 영적인 생각으로는 우리는 너무나도 귀한 존재입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사람 생각이 중요합니까, 하나님 생각이 중요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 생각입니다.
육신으로의 생각으로 본다면 우리가 사는 지구는 우주 한 구석 끄트머리에 있는, 지극히 작은 존재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의 생각, 영적인 생각으로는 그 광활하고 드넓은 우주의 한 가운데 중심에 서 있는 것이 바로 지구입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으로 생각한다면 이 지구상에서도 작은 나라 일본에 살면서, 그것도 변두리 한켠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하나님의 생각, 영적인 생각으로는 우리는 주님 안에서 이 세상 중심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누가 우리더러 작은 존재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그리고 때로는 나 자신이 내가 너무나도 하찮은 존재처럼 여기질 지라도 그것은 지극히 못난 사람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계십니다.

누가복음 12장 7절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それどころか、あなたがたの頭の毛さえも、みな数えられています。恐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あなたがたは、たくさんの雀よりもすぐれた者です。

하나님이 왜 우리의 머리카락을 세시겠습니까. 심심해서요? 아니면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고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어때요? 그 상대방의 그 사람이 입은 옷,머리스타일, 취향 등에 관심이 가지 않겠어요? 그건 당연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상대방 머리카락 수를 세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아무리 그 사람을 좋아한다 하더라도 아마 그 정도로 상대방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본 분은 안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떻다고 하세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머리카락까지 세실 정도로 막대한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17장 20절~21절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さて、神の国はいつ来るのか、とパリサイ人たちに尋ねられたとき、イエスは答えて言われた。「神の国は、人の目で認められるようにして来 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
『そら、ここにある。』とか、『あそこにある。』とか言えるよう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いいですか。神の国は、あなたがたのただ中にあるのです。」

우리 안에 무엇이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온 천하 만물 중에서 하나님 나라보다 더욱 값진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값진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있을 때에 우리가 이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마음 안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이 세상의 중심이 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기쁨을 드리고, 그리고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주님께, 우리의 삶을 통해서 사랑으로 갚아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43회 두려움과 믿음 →

← 제41회 우리의 의무, 우리의 책임

 
이카호중앙교회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1회 우리의 의무, 우리의 책임
2016년 9월 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원고 없음

제42회 이 세상의 중심 →

← 제40회 살아있는 믿음

 
이카호중앙교회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0회 살아있는 믿음
2016년 8월 28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6절~24절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살아있는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나무늘보라는 동물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일본어로는 ナマケモノ라고 하지요.

이 사진이 바로 나무늘보입니다만, 이 나무늘보는 주로 중남미 지역에 서식하는, 크기는 40센티에서 70센티 정도 되는 포유류입니다만, 일생 동안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나무에 매달려서 지내고, 동작도 때도 매우 느릿느릿 움직인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그 이름이 나무늘보겠습니까. 그러다보니까 그렇게 많이 먹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기껏해야 하루에 나무 잎파리 3장 정도? 그리고는 또 나무에 매달려서 잠을 자고, 먹는 것도 많지 않으니 배설은 1주일에 한 번 정도 나무에서 내려와서 배설을 한다고 합니다.
조금 오래된 신문이긴 합니다만 흥미로운 내용이 있어서 좀 알려드릴까 합니다.
다음은 2007년 1월 29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내용입니다. 제목부터가 색다릅니다.

<최강의 ‘귀차니스트’ 나무늘보.. 3년 요지부동, 과학자들 연구 포기>

이 기사를 읽어드리겠습니다.
“하루 18시간 이상 잠을 자는 등 게으름뱅이로 유명한 나무늘보의 행동 연구에 착수한 독일 과학자들이 연구 시작 3년만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고 24일 독일 언론들이 보도했다. 과학자들이 연구를 포기한 이유는 연구 대상 나무늘보가 연구 기간 3년 내내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
언론에 따르면, 독일 제나 대학교 연구진은 3년 전 ‘마츠’라는 이름의 나무늘보를 대상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연구진은 스파게티, 삶은 계란 등 맛있는 음식을 이용, 마츠를 움직이기 위해 노력했지만 나무늘보가 음식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언론의 설명.
3년 동안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한 연구진은 지난 주 ‘연구 포기’를 공식 선언했는데, 과학자들은 “마츠가 과학 실험은 물론 음식 등 그 어떤 대상에도 흥미가 전혀 없었다”면서 안타까움을 표출했다. 일반적인 나무늘보는 나무 위에서 생활하다가, 음식을 보면 머리를 아래로 향한 채 서서히 내려온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설명.
과학 실험에 전혀 협조하지 않은 마츠는 뒤스부르크 동물원으로 보내져 편안한 삶을 살 예정이라고 언론은 전했다.”

이 사진은 이 소식을 전한 독일 신문입니다.



이른바 무슨 동물에 대한 연구를 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좀 움직여야지만 여러 성과를 얻을 수 있을텐데, 이건 무슨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 나무늘보를 대상으로 연구를 하려 했던 과학자들은 프로입니다. 저 같은 아마추어라면 “에이, 이게 뭐야, 재미없게.”라면서 금방 포기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 분들은 인내심을 갖고 끈질기게 매달렸을 것입니다. 어쩌면 정말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여러 방법으로 시도해보았겠지요. 그 기간이 얼마요? 예, 3년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땠대요? 그 과학자들로 하여금 아무런 성과도 못 내고 연구포기를 공식 선언하게 만들었습니다. 3년 동안 매달렸던 과학자들도 대단하지만, 이 나무늘보도 정말 대단하지요?

여러분께서는 이 기사를 들으시고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제가 이 기사를 처음 읽었을 때 저는 왠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이 편치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혹시 하나님께서 나 자신을 보고 어떤 반응을 바라고 계시는데도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나무에 매달려 하루 18시간씩 잠이나 자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생각하시지나 않을까 해서였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인내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103장 8절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主は、あわれみ深く、情け深い。怒るのにおそく、恵み豊かである。

이사야 48장 9절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わたしは、わたしの名のために、怒りを遅らせ、わたしの栄誉のために、これを押えて、あなたを断ち滅ぼさなかった。


베드로후서 3장 9절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主は、ある人たちがおそいと思っているように、その約束のことを遅らせておられるのではありません。かえって、あなたがたに対して忍耐深くあられるのであって、ひとりでも 滅びることを望まず、すべての人が悔い改めに進むことを望んでおられるのです。


그래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에 오래 참으십니다. 쉽게 화를 내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이렇게도 저렇게도 손길을 뻗으시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있다고 한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하십니까. 역시 앞서 살펴본 나무늘보를 연구하던 사람들처럼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가끔 포기를 하십니다. 예를 들어서 노아 때의 홍수를 봅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세상이 죄악과 부패함과 포악함이 가득함을 보시고,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도록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노아만 사랑하시고 노아와 그 가족들만을 구하고자 하셨다면 그렇게 번거로운 절차를 밟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냥 노아와 그 가족들만을 붕 뜨게 만들고 싹 쓸어버리면 됐을 것입니다. 하지만 굳이 하나님께서는 노아로 하여금 방주를 짓도록 하십니다. 그 방주를 짓는 기간은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신학자들에 따라서 기간이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만, 대략적으로 보면 최소한 60~70년은 되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20절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昔、ノアの時代に、箱舟が造られていた間、神が忍耐して待っておられたときに、従わなかった霊 たちのことです。わずか八人の人々が、この箱舟の中で、水を通って救われたのです。

생각해보십시오. 수 십 년 동안 노아는 묵묵히 방주만 지었겠어요? 적어도 자기가 살던 동네 사람들이 그랬겠지요. 이봐, 노아야, 너 뭘 그렇게 열심히 짓고 있어? 그럴 때마다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것입니다. 전도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제 이 세상을 심판하실 거야. 물로 쓸어버리실 거야. 그러니까 어서 회개하고 같이 배에 타서 구원을 얻자. 그리고 그 배 크기가 좀 컸어요? 배 길이가 135미터, 폭이 22.5미터, 높이가 13.5미터의 어마어마한 크기입니다.

이 135미터라는 길이는 지금 축구장 보다도 더 긴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소문도 났겠지요.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노아는 그들에게 말합니다. 어서 회개하고, 죄악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을 믿읍시다. 함께 하나님이 명령하신 배를 만듭시다. 하지만 몰려온 사람들은 어떤 이들은 신기하다는 눈으로 지켜봤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비웃었을 지도 모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심한 욕설을 퍼붓고 모욕을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구원을 얻은 사람은 노아와 그 가족 여덟 명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도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4장 37절~39절
“37.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人の子が来るのは、ちょうど、ノアの日のようだからです。洪水前 の日々は、ノアが箱舟にはいるその日まで、人々は、飲んだり、食べたり、めとったり、とついだりしていました。そして、洪水が来 てすべての物をさらってしまうまで、彼らはわからなかったのです。人の子が来るのも、そのとおりです。

이 땅에서의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은혜로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되 영원히 참지는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11장 16절~17절,
“16.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この時代は何にたとえたらよいでしょう。市場にすわっている子どもたちのようです。彼らは、ほかの子どもたちに呼びかけて、
こう言うのです。『笛を吹いてやっても、君たちは踊らなかった。弔いの歌を歌ってやっても、悲しまなかった。』

이와 비슷한 말씀이 바로 마태복음 23장 37절입니다.

마태복음 23장 37절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ああ、エルサレム、エルサレム。預言者たちを殺し、自分に遣わされた人たちを石で打つ者。わたしは、めんどりがひなを翼 の下に集めるように、あなたの子らを幾たび集めようとしたことか。それなのに、あなたがたはそれを好まなかった。


그들에게 피리를 불어도 꿈쩍도 하지 않고 슬피 울어도 무관심해 했던 사람들, 하나님께서 친히 보내신 선지자들을 돌로 치고, 그래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마치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몇 번이고 모으려고 해도 이를 거부했던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한탄하십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돌아보지 않고, 아무리 엄중한 경고를 전해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마태복음 11장 18절~19절까지 봅니다.
“18.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ヨハネが来て、食べも飲みもしないと、人々は『あれは悪霊につかれているのだ。』と言い、
人の子が来て食べたり飲んだりしていると、『あれ見よ。食いしんぼうの大酒飲み、取税人 や罪人の仲間だ。』と言います。でも、知恵の正しいことは、その行ないが証明します。」


이른바 온라인 쇼핑몰이라고 한다면 한국에서는 지마켓, 오크숀, 일본에는 라쿠텐 같은 곳이 있습니다만,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세계에서 제일 큰 곳은 미국의 아마존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중국의 알리바바가 급속도로 성장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워낙 인구가 많다 보니까 세계를 상대하고 있는 아마존보다도 13억 중국 내국인을 상대하고 있는 알리바바가 더 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큰 온라인 쇼핑몰을 꼽는다면 바로 이 알리바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알리바바의 회장이 바로 마윈이라는 분인데, 이 마윈 회장이 어떤 강연회에서 한 말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어떤 말인가 하면, 이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같이 일하기 힘든 사람에 대해서 한 말인데, 이 세계적인 기업을 이끌고 있는 마윈 회장이, 세상에서 가장 같이 일하기 힘든 사람이라고 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들일까요? 마윈 회장은 바로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마윈 회장이 말하기를 세상에서 가장 같이 일하기 힘든 사람은 바로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무슨 돈 없는 사람을 마구잡이로 차별하는 발언이 아닙니다. 이 분의 말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유를 주면 함정이라 얘기하고, 작은 비지니스라 얘기하면 돈을 별로 못번다고 얘기하고, 큰 비즈니스라고 얘기하면 돈이 없다고 하고, 새로운 걸 시도하자고 하면 경험이 없다 하고, 전통적인 비지니스라고 하면 어렵다고 하고,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라고 하면 사기라고 하고, 상점을 같이 운영하자고 하면 자유가 없다고 하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자고 하면 전문가가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지요? <가난은 나랏님도 못 구한다>는 말입니다. 가난이 무엇이에요? 그렇죠. 쉽게 말해서 돈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난을 구하려면 돈을 주면 되지 않나? 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물론 가난한 사람도 가난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그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앞서 마윈 회장이 말한 그와 같은 나쁜 습관이나 기질이 뼛속까지 스며있는 사람은 절대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잠시 봅니다.

마태복음 3장 4절에 보면 세례요한에 대해서 묘사한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4절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このヨハネは、らくだの毛の着物を着、腰には皮の帯を締め、その食べ物はいなごと野蜜であった。

이것만 보더라도 대단히 특이합니다만, 거기에다가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자주 금식도 하고 그랬나봅니다. 성경에 의하면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나오기는 합니다만 그 외에도 에세네파라는 파가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일반인들로부터 떨어져서 매우 엄격한 규율에 따라 믿음생활을 했다고 전해집니다만, 아마도 이 세례요한도 이 에세세파에 속해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치 구약에 나오는 나실인처럼 포도주도 안 마시고, 매우 금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처럼 일반인들과는 사뭇 다른 엄격한 믿음방식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세례요한을 신뢰하지 않았던 바리새인들은 그를 두고 귀신들렸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하시는 모습을 보니까, 무슨 어부출신이다 세리다 하는 젊은이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음식도 먹고 포도주도 마시고 하니까, 이제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물질이 없어 가난한 사람은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결국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것과 같이, 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도 또한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0절~24절,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それから、イエスは、数々の力 あるわざの行なわれた町々が悔い改めなかったので、責め始められた。「ああコラジン。ああベツサイダ。おまえたちのうちで行なわれた力 あるわざが、もしもツロとシドンで行なわれたのだったら、彼らはとうの昔に荒布をまとい、灰をかぶって悔い改めていたことだろう。しかし、そのツロとシドンのほうが、
おまえたちに言うが、さばきの日には、まだおまえたちよりは罰が軽いのだ。カペナウム。どうしておまえが天に上げられることがありえよう。ハデスに落 とされるのだ。おまえの中でなされた力 あるわざが、もしもソドムでなされたのだったら、ソドムはきょうまで残っていたことだろう。しかし、そのソドムの地のほうが、おまえたちに言うが、さばきの日には、まだおまえよりは罰が軽いのだ。」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3개의 도시를 책망하십니다. 거기는 바로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입니다. 예수님 당시 북쪽 갈릴리에는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디베랴 등 대표적인 네 성읍들이 있었습니다.
이 중에 벳새다는 사도 베드로와 안드레, 빌립의 고향이고, 마가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벳새다에서 맹인을 고치시는 장면이 나오고, 누가복음 9장 10절에서 17절에 보면 예수께서 5천명을 먹이신 곳이 바로 이 벳새다입니다.
그리고 고대 가버나움은 예수님 당시에는 매우 번화해서 세관도 있었고 큰 회당도 있었으며 주민들이 많았던 마을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곳 가버나움 회당에서 설교하셨고 나병환자도 고치셨고, 천장을 뚫고 지붕에서 내려보낸 환자를 치료하신 곳도 바로 이 가버나움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시기도 했으며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리셨고,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낫게 하셨으며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하셨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손을 펴게 하신 곳도 바로 다름 아닌 이곳 가버나움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토록 하나님의 큰 권능을 행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가버나움은 복음 받아들이기를 거절하여 결국 예수님으로부터 무서운 저주를 받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갈릴리 지역에 있던 4개의 대표적 도시,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디베랴 중에서 나머지 3 도시는 모두 저주를 받았고 디베랴만 이 저주를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참고로 이 디베랴라는 도시는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나타나신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저주하신 3 도시인 고라신과 벳새다, 가버나움, 그리고 저주를 피한 디베랴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요.
V이것이 바로 고라신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완전히 황폐해지고 고대 유적만 앙상하게 남아 있습니다.
V다음, 여기가 벳새다입니다.


정말 여기에 도시가 있었을까 하는 느낌마저 들게 합니다. 고대 돌뭉치들 외에는 남아 있는 것들이 없습니다.
V그리고 여기가 가버나움입니다.


이미 오래전에 파괴되고 잊혀진 도시이고, 지금의 가버나움은 호숫가 종려나무들 속에 폐허 더미로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2의 고향이라 일컬어지고, 예수님께서 친히 그 놀라운 기적을 수없이 행하신 가버나움이라 할지라도, 결국 회개와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니 철저하게 파괴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4개 도시 중 유일하게 저주를 피할 수 있었던 디베랴는 어떨까요. 예수님께서 계셨을 때 존재했다면 그것만으로도 2천년 전일텐데, 아무리 예수님의 저주를 피했다고는 하지만 그곳이 지금까지 남아 있을까요?
정답은 <존재 한다>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남아 있는 디베랴를 한 번 보실까요?



V현대식 발음으로는 티베리아스이고 예수님 시대 이후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갈릴리 지역에 존재하고, 2012년 현재 인구는 41,741명이라고 합니다.
V이 사진은 디베랴의 야경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는 인생 가운데에서 아름다운 추억이 재산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에서는, 천국의 복음에서는 하나님 안에서의 추억은 그저 추억일 뿐입니다. 과거에 아무리 내가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다, 금식도 많이 했었다, 응답도 많이 받았었다 할지라도 지금 믿음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무엇입니까.

야고보서 2장 17절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それと同じように、信仰も、もし行ないがなかったなら、それだけでは、死んだものです。

그리고 조금 뒤에 있는 26절에는 더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야고보서 2장 26절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たましいを離れたからだが、死んだものであるのと同様に、行ないのない信仰は、死んでいるのです。


이 행위가 무엇입니까. 기도이고, 전도이고, 봉사이고, 찬양입니다. 그리고 이 모두가 하나가 되어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도 예배이고 우리가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도 예배이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도 예배이고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도 예배인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아무리 움직이라고 해도 움직이지 않았던 나무늘보는 결국 과학자들이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쓰시려고 해도 우리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꿈쩍도 안하면 결국 주님은 우리를 포기하고 마실 것입니다. 앞서 본 나무늘보는 동물원으로 보내져서 편안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했지만, 예수님이 포기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한계시록 3장 15절~16절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わたしは、あなたの行ないを知っている。あなたは、冷たくもなく、熱くもない。わたしはむしろ、あなたが冷たいか、熱いかであってほしい。
このように、あなたはなまぬるく、熱くも冷たくもないので、わたしの口からあなたを吐き出そう。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벗어나고 예수님이 우리를 버리신다면 우리가 갈 곳은 한 곳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 13장 50절,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火の燃える炉に投げ込みます。彼らはそこで泣いて歯ぎしりするのです。

성경에는 종종 울며 이를 간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표현이 무엇입니까. 미리 사전에 풀무 불에 던져질 줄 알았다면, 울지는 모르겠지만 이를 갈지 않겠지요. 즉, 이 말은 자신이 풀무 불에 던져질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도 “믿더라도 너무 지나치게 믿으면 안 돼. 정도껏 믿어야지. 적당히 믿어도 된다니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신다고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서 토해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나무늘보와 같은 믿음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움직이지 않는 믿음,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처럼 아무리 큰 도시이고 부유한 도시이면 무엇합니까. 하나님께서 버리시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우리의 믿음은 영혼이 없는 죽은 몸이 아니라 영혼이 있는 살아 있는 몸처럼 행위가 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살아있는 기도, 살아있는 전도, 살아있는 봉사, 살아있는 찬양으로 살아있는 예배를 주님께 드리며, 마지막 날까지 살아있는 믿음을 지키고 그 날에 주님으로부터 큰 칭잔을 받은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제41회 우리의 의무, 우리의 책임 →

← 제39회 치료하시는 하나님

 
이카호중앙교회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39회 치료하시는 하나님
2016년 8월 2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치료하시는 하나님’ 癒してくださる神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간절한 기도를 드려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간절한 기도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성경에도 간절한 기도가 나옵니다. 사무엘상 1절에 보면 자신에게 아들을 달라고 하면서 간절히 기도를 드리는 한나의 모습이 있습니다. 사무엘하 12장에서는 다윗이 병상에 누운 자식을 위해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를 드립니다. 열왕기하 20장에서 히스기야는 자신이 죽게 되어 벽을 향해 가절히 기도를 드립니다.
제가 한국에서 성가대 활동을 할 때에, 어느 큰 대학병원 안에 있는 교회에서 몇 번 찬양을 드릴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대학병원 안에 있는 교회이다보니 참석하는 교인분들 중에는 그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나 간호사 그리고 병원 직원분들도 계십니다. 그리고 그 교회 주보에는 교인분들의 기도가 빼곡히 적혀 있었습니다.
먼저, 거기서 일하시는 직원분들의 기도를 읽어드리겠습니다.

#NAME?

- 주님, 점심 먹는 대신 기도하러 왔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한 이후 주신 가장 큰 특권은 기도인데 어려움이 있어야 비로소 기도를 합니다. 기도 하옵는 것은 일 계속 다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낮아질 수 있는 기회 주신 것 감사하며 깊이깊이 낮아지게 해 주십시오. 낮아짐의 은혜를 누리게 해주옵소서. 무엇이 진정한 낮아짐인지 배우고 깨달아 가는 5개월의 직장생활이 되게 해 주시고 지켜 주세요.

이 두 번째 분은 직장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는 이 기도만을 보고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 알고 계시겠지요. 하나님께서 이 기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응답해주셨을 줄 믿습니다.
하지만 이 교회의 교인 중에는 무엇보다도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본인이나 가족분들이 대다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기도가 너무나도 간절합니다. 역시 몇몇 기도를 읽어드리겠습니다.


1. 간암 환자입니다. 색전술과 항암치료를 두 번했습니다. 결과가 좋다고 했는데 갑자기 뼈로 전이가 되었습니다. 머리뼈, 갈비뼈, 척추, 골반뼈 등 무섭습니다. 다른 장기로 전이된 것 보다는 다행이라고 하지만 척추 신경을 암이 건드렸는지 다리가 저리고 아픕니다. 다들 힘드시겠지만 기도해 주세요. 10살과 7살 아들을 둔 아빠예요. 희망과 용기를 주시고 암과 함께 살아도 좋습니다. 완치가 안 되어도 좋습니다. 고통스럽지만 않게 생명을 연장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해 주세요. 도와주세요.

2. 아직도 젊은 나이입니다. 하셔야 할 일도 많은데 루게릭병이라는 진단을 1차 받았습니다. 확인검사 차 정밀검사를 받으러 왔습니다. 아직 나오지 않은 결과가 자꾸 두렵습니다. 부디 좋은 결과 나오게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지금과 같은 결과라 해도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 않게 해 주세요, 기도해 주세요

3. 근심하지 말라 하신 주님 주님의 은총 속에서 이 시간 수술 받고 있습니다. 주님의 그 뜨거운 손길로 역사하시어 완치되리라 저희가 믿사오며, 아직도 주님의 일꾼으로 할일 많은 주님의 제자, 주님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고 주님 곁으로 이끄시리라 굳건히 믿사오니, 주님, 수술 잘 되어 완치 되게 하옵소서 주님이 역사하심을 믿습니다. 주여, 모든 것을 주님께 맡깁니다. 주를 믿고 근심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채워 주소서.

4. 엄마가 복막염으로 응급실에 오게 되었습니다. 엄마가 하루속히 회복 하길 기도 드려요. 점점 약해지는 엄마를 보니 마음이 너무 아파요 주님……. 나태해지고 약해진 믿음이 예전처럼 주님께 열심히 기도 드리는 주님의 딸이 되길 기원합니다. 주님이 제 안에 계심을 믿습니다,

5. 폐, 가슴, 난소, 등뼈가 안 좋다고 합니다. 조직 검사합니다 너무나 지은 죄가 많아서 자격도 없는데 이렇게 왔습니다.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저를 받아주세요. 하나님, 저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6. 오늘도 주님 전에 나왔습니다. 병든 몸을 이끌고 주님께 이제야 나왔습니다. 위암수술을 받습니다. 다른 장기로 전이 되지 않았길 빕니다. 제발 살려 주세요. 불쌍히 여겨 주세요.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이 있습니다. 좋은 남편으로 좋은 아빠로 생활하지 못했는데 기회를 한번만 더 주세요. 주님 지켜주세요. 살려주세요.

7. 중환자실에서 생명과 싸우고 있는 아이의 엄마입니다. 어렵고 큰 수술을 했습니다, 이식 밖에 길이 없다는 진단을 받고 생명을 연장하러 입원했었는데, 다행히 수술할 수 있음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죄 많은 엄마이기에 자식이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길 간절히 부탁 드립니다.

이 기도를 들으면, 정말로 그 마음이 손에 잡힐 듯이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문법상으로 좀 안 맞는 글도 그대로 읽어드렸습니다만, 오히려 그런 부분이 더 애절하게 들립니다. 얼마나 힘들고 고달플까.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하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도 가슴이 메어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일들이 만사형통이요, 어려움이 하나도 없나요? 아니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 안에서 성장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쳐올 때마다 이를 믿음의 힘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하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을 봅니다.

민수기 21장 5절~9절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民は神とモーセに逆らって言った。「なぜ、あなたがたは私たちをエジプトから連 れ上(のぼ)って、この荒野で死なせようとするのか。パンもなく、水もない。私たちはこのみじめな食物に飽き飽きした。」
そこで主は民の中に燃える蛇を送られたので、蛇は民にかみつき、イスラエルの多くの人々が死んだ。
民はモーセのところに来て言った。「私たちは主とあなたを非難して罪を犯しました。どうか、蛇を私たちから取 り去ってくださるよう、主に祈ってください。」モーセは民のために祈った。
すると、主はモーセに仰せられた。「あなたは燃える蛇を作り、それを旗ざおの上につけよ。すべてかまれた者は、それを仰ぎ見れば、生きる。」
モーセは一つの青銅の蛇を作り、それを旗ざおの上につけた。もし蛇が人をかんでも、その者が青銅の蛇を仰ぎ見ると、生きた。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모세를 원망합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하셨나요? 불뱀을 백성한테 보내서 물게 하셨기에 이스라에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았다고 기록합니다. 그렇다고 없었던 불뱀이 어디서 솟아나온 것이 아닙니다. 본래 광야에는 불뱀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동안은 지켜주셨기 때문에 백성들이 안 물리고 있었던 것입니다만, 하나님께서 그 불뱀을 사람들한테 보내셨기 때문에 이와 같은 피해가 발생한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대부분의 질병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래 병균은 여기저기에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병균이 몸안에 들어왔다고 100% 발병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아버리는 경우도 꽤 있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경우에는 우리에게 발병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구절을 보면 그래도 출애굽기 때보다는 조금 철이 든 것 같습니다. 자기들이 왜 벌을 받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7절 전반부에 보니까,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民はモーセのところに来て言った。「私たちは主とあなたを非難して罪を犯しました。どうか、蛇を私たちから取り去ってくださるよう、主に祈ってください。」

우리가 잘못했으니까 하나님께 기도를 해서 이 뱀들이 좀 물러가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을 듣고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그랬더니 그 응답이 묘합니다.

민수기 21장 8절~9절을 다시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すると、主はモーセに仰せられた。「あなたは燃える蛇を作り、それを旗ざおの上につけよ。すべてかまれた者は、それを仰ぎ見れば、生きる。」
モーセは一つの青銅の蛇を作り、それを旗ざおの上につけた。もし蛇が人をかんでも、その者が青銅の蛇を仰ぎ見ると、生きた。

모세한테 불뱀을 만들게 해서 장대에 매달아 놓고, 물린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대로 했더니 정말로 모두 상처가 아물고 치료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장대 위에 매달았다고 하는데, 그 의미는 민수기 바로 뒤에 있는 신명기에 답이 나옵니다.

신명기 21장 23절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その死体を次の日まで木に残しておいてはならない。その日のうちに必ず埋葬しなければならない。木につるされた者は、神にのろわれた者だからである。あなたの神、主が 相続地としてあなたに与えようとしておられる地を汚してはならない。
즉 나무에 달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았다는 증거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나무에 매달게 되는데 에스더 서에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을 진멸하려고 했던 하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심판을 받게 되는데,

에스더 7장 9절~10절을 보면,
“왕을 모신 내시 중에 하르보나가 왕에게 아뢰되 왕을 위하여 충성된 말로 고발한 모르드개를 달고자 하여 하만이 높이가 오십 규빗 되는 나무를 준비하였는데 이제 그 나무가 하만의 집에 섰나이다 왕이 이르되 하만을 그 나무에 달라 하매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한 나무에 하만을 다니 왕의 노가 그치니라”
そのとき、王の前にいた宦官(かんがん)のひとりハルボナが言った。「ちょうど、王に良い知らせを告げたモルデカイのために、ハマンが用意した高さ五十キュビトの柱がハマンの家に 立っています。」すると王は命じた。「彼をそれにかけよ。」
こうしてハマンは、モルデカイのために準備しておいた柱にかけられた。それで王の憤りはおさまった。

이와 같이 나무에 달린다는 것은 심판을 받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무에 달린 불뱀을 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질병의 근원인 불뱀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질병, 우리 안에 있는 죄악, 우리 안에 있는 불의, 우리 안에 있는 부정한 모든 것의 원인이 나무에 달려 심판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야, 저 나무에 달린 불뱀을 봐. 그러면 낫는다니까…이렇게 말했는데도, 하이구, 무슨 소리. 그걸 보면 낫는다고? 말도 안 돼는 소리 하지도 마! 라고 했다면 낫겠어요? 아니요. 그는 믿음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고통 중에 죽어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 나무에 달린 불뱀을 보면 낫는다! 내 안에 있는 질병과 죄악과 불의와 부정한 모든 것이 저 나무에서 심판을 받았다! 고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온갖 모든 죄악 가운데에서 나무에 달린 분이 누구십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15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モーセが荒野で蛇を上げたように、人の子もまた上げら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それは、信じる者がみな、人の子にあって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す。」

그렇다면 예수님이 예수님 자신의 죄악 때문에 들려야 하나요? 아니요, 우리 모두 때문에, 우리 모두의 죄악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저주를 받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14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キリストは、私たちのためにのろわれたものとなって、私たちを律法 ののろいから贖(あがな)い出(だ)してくださいました。なぜなら、「木にかけられる者はすべてのろわれたものである。」と書いてあるからです。
このことは、アブラハムへの祝福が、キリスト・イエスによって異邦人に及ぶためであり、その結果、私たちが信仰によって約束の御霊(みたま)を受けるためなのです。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광야에서 불뱀에 물린 사람들이 나무에 달린 불뱀을 바라본 것 같이, 우리는 질병에 시달리고, 고통에 신음할 때에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독사가 사람을 물었을 때 그 독이 몸 안에 계속 있으면 그 사람은 사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欲がはらむと罪を生み、罪が熟すると死を生みます。

우리 안에 부당한 욕심과 죄악이 가득차 있다면 우리 또한 사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사망을 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이를 해결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결합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그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악이 해결되었고, 우리의 질병이 해결되었고 우리의 절망이 해결되었고 우리의 고통이 해결되었고,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간혹 오해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특히 교회 다니시는 분들 중에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이냐 하면, 누가 어떤 사고를 당했다거나 어떤 질병에 걸렸다고나 어떤 문제가 생겼다거나 하면, 아, 그거 그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이야, 회개해야 돼, 무슨 그런 말을 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겠지요.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질병을 치료하실 때에 “네 죄가 사해졌다”라고 말씀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꼭 그것 만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질병의 원인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하심이 없이 고쳐주시는 경우도 있었고,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요한복음 9장 3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イエスは答えられた。「この人が罪を犯したのでもなく、両親でもありません。神のわざがこの人に現われるためです。

라고 하시면서, 그 원인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1장 4절에서도 보면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イエスはこれを聞いて、言われた。「この病気は死で終わるだけのものではなく、神の栄光のためのものです。神の子がそれによって栄光を受けるためです。」
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질병의 원인이 어디 있든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질병이 낫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시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교회에 다니시 시작한 것이 어렸을 때 일본에 살 때부터라고는 합니다만, 그 때 다니던 교회도 한국 교회였기 때문에 일본 교회를 제대로 다녀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도 시간이 날 때마다, 공부하는 의미로 인터넷으로 일본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듣기도 합니다만, 가끔 좀 걸리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서 얼마 전에 들은 말씀은 사도행전에 있는 성령강림사건에 대한 설교인데, 이에 대해서 설명하실 때에, 이런 성령강림 또는 성령세례라는 것은 과거에 역사상에 있었던 일이고, 요즘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은 성령세례가 어떻게 일어나느냐 하고 누가 묻는다면, 그 때는 내가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서 받았다고 대답하면 된다고 말씀을 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분은 일본에서도 꽤 유명한 목사님이신데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런 논리는 얼마 전에 한국을 시끄럽게 했던 이른바 ‘구원파’에서 주장하는 논리인데, 이를 당당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좀 의아했습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보니까 또 어떤 사람은, 성경에는 예수님이 병도 고치고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분도 봤습니다. 성경이 정말 그런가요? 21세기 지금은 성령세례도 없고 치료함도 없나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마태복음 5장 18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告げます。天地が滅びうせない限り、律法の中の一点一画でも決してすた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全部が成就されます。


히브리서 13장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イエス・キリストは、きのうもきょうも、いつまでも、同じです。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도 살아서 역사하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그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 후반부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わたしは主、あなたをいやす者である。

어떻게 해서 우리가 치료 받을 수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과 질병이 예수님 십자가에서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단 한 가지.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질병이 저주를 받았고 우리의 모든 죄악이 저주를 받았고, 우리의 모든 불의함과 부정함이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이사야 53장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しかし、彼は、私たちのそむきの罪のために刺し通され、私たちの咎(とが)のために砕(くだ)かれた。彼への懲らしめが私たちに平安をもたらし、彼の打ち傷によって、私たちはいやされた。

우리가 고통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가 징계를 받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가 질병에 억눌릴 이유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가 받을 모든 징계를 받으시고, 우리가 받을 고통을 모두 겪으시고, 우리가 받을 수모를 모두 당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고 십자가를 바라보면 됩니다. 예수님이 달리신 갈보리 십자가만 붙잡으면 되는 것입니다.

말라기 4장 1절~2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見よ。その日が来る。かまどのように燃えながら。その日、すべて高ぶる者、すべて悪を行なう者は、わらとなる。来 ようとしているその日は、彼らを焼き尽くし、根も枝も残さない。―万軍(ばんぐん)の主は仰せられる。―
しかし、わたしの名を恐れるあなたがたには、義の太陽が上り、その翼には、癒しがある。あなたがたは外に出て、牛舎(ぎゅうしゃ)の子牛のようにはね回る。

시편 103편 3절~5절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主は、あなたのすべての咎(とが)を赦(ゆる)し、あなたのすべての病(やまい)をいやし、
あなたのいのちを穴から贖(あがな)い、あなたに、恵みとあわれみとの冠をかぶらせ、
あなたの一生を良いもので満たされる。あなたの若さは、わしのように、新しくなる。

질병 가운데 있으십니까. 고통 가운데 있으십니까. 좌절 가운데 있으십니까. 떨군 고개를 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을 짊어지고 해결해주신 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질병 속에서 고통 속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해방되어서, 마침내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어놀고 독수리 같이 날아오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40회 살아있는 믿음 →

← 제38회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이카호중앙교회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38회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2016년 8월 1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益としてくださる神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기 나라가 아닌 외국에서 살면서 아쉬운 점을 든다면 어디 하나 둘 뿐이겠습니까마는, 그 중 요즘 올림픽처럼 큰 경기가 열릴 때면 더욱 그런 것을 느낍니다. 여기 일본에 살면 당연히 일본 선수들을 중심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저 같은 외국인인 경우에는, 물론 예를 들어서 일본 체조에서 우치무라 코헤이 선수가 올림픽 개인전 2연패, 2회 연속 금메달을 했고, 이는 일본 체조 역사에서 44년만에 있는 놀라운 기록이다……라는 뉴스를 들어도……음…대단하네…라는 감흥밖에는 들지 않습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인 2013년에 축구 한일전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한국에 계시던 일본인 선생님과, 일본 유학중인 한국 학생의 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한국에서 가르치시던 일본인 선생님은 이렇게 썼습니다. 어제는 한국과 일본 축구시합이 있었습니다만, 가끔 한국 학생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先生はどちらを応援されるのですか?” 이 질문에 대한 이 일본인 선생님의 답은 무엇이었겠습니까. “日本に決まってるじゃないですか”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반면에, 일본 유학중인 한국 학생 글은 이랬습니다. “한국과 일본 축구가 있어서 보고 싶었다고 일본 친구들한테 말하니까, 친구들이 자기한테 “어? 너는 어느 쪽 응원하는데?” 라고 묻더랍니다. 여기에 대한 답. 너는 그럼 미국 가면 미국 응원하니? 당연히 한국이지.
둘 다 대단히 지당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기면 기쁘지만 지면 매우 안타깝고 속상하기까지 합니다. 누구 말에 의하면 축구 한일전에서 한국이 진 다음 날은 한국에서 운전할 때 조심하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화가 나서 운전을 난폭하게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ㅎㅎ이건 물론 농담이겠지만요. 이처럼 자기 나라를, 자기가 좋아하는 팀이나 선수를 열심히 응원하고 긴장하면서 시합을 보는 이유는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기 때문이겠죠.
예전에 어떤 목사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삶은 이미 이겨놓은 축구경기를 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대단히 인상적인 말씀입니다. 지금 축구를 생방송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반전에서 내가 응원하는 팀이 0-1로 지고 있습니다. 어서 빨리 하나라도 넣어야 하는데 전반전은 끝나고 맙니다. 이제 후반전이 시작했습니다. 자, 동점으로 가자 하나만 넣자……그런데 웬걸. 시작하자마자 한 골을 더 먹습니다. 하나를 넣어도 시원찮은 마당에 또 한 골을 먹고 맙니다. 이렇게 되면 정말 속상해하고 어떤 사람은 아예 텔레비전을 꺼버릴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게 생방송이 아니라 녹화방송이에요. 그리고 그 시합에서 내가 응원하는 팀이 비록 후반전 초까지는 0-2로 지고 있었지만 나중에는 3-2로 역전승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가슴 졸이지도 않고 속상해하지도 않을 것이고 매우 여유로운 마음으로 경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 지금은 지고 있지만 마지막에는 이긴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만약에 이미 이 경기의 결과를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녹화경기를 보면서 열을 내고 소리를 지르고 속상해하고……하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그 사람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시겠어요? 좀……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 안 하겠어요?
구약에서 보면 요셉이 얼마나 고생을 했습니까. 이복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결국은 아무 잘못 없이 노예로 팔려가고 맙니다. 그리고 이국 땅 애굽에서 보디발 장군 집에 있다가, 이제는 거기서 그것도 모자라서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쓰고는 옥에 갇히고 맙니다. 우리가 아무리 지금까지 여러 경우를 다 당해봤다고 하지만 이 요셉처럼 심한 꼴을 당해본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 시점까지만 본다면 세상에 이 요셉만큼 불행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요셉 보다도 더 밑바닥에 내려갈 래야 내려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창세기 41장 38절~43절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
そこでパロは家臣たちに言った。「神の霊 の宿っているこのような人を、ほかに見つけることができようか。」パロはヨセフに言った。「神がこれらすべてのことをあなたに知らされたのであれば、あなたのように、さとくて知恵のある者はほかにいない。あなたは私の家を治めてくれ。私の民はみな、あなたの命令に従おう。私があなたにまさっているのは王位だけだ。」パロはなおヨセフに言った。「さあ、私はあなたにエジプト全土を支配させよう。」そこで、パロは自分の指輪を手からはずして、それをヨセフの手にはめ、亜麻布の衣服を着せ、その首に金の首飾りを掛けた。そして、自分の第二の車に彼を乗せた。そこで人々は彼の前で「ひざまずけ。」と 叫んだ。こうして彼にエジプト全土を支配させた。


그리고 그의 나이가 창세기 41장 46절에 의하면,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ヨセフがエジプトの王パロに仕えるようになったときは三十歳であった。
그의 나이 고작 서른 살 때에 당시 최고의 선진국인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이는 그의 힘으로 어떤 노력을 해서도 절대로 얻을 수 없는 결과이고, 나이 서른에 총리가 되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지만, 또한 그가 세상을 떠나는 110세 때까지 영화를 누렸다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모르고 성경을 읽었다면, 아이고……쯧쯧쯧…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아니, 요셉이 무슨 큰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 벌을 받아? 그것도 축복을 약속하신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야곱의 아들 아냐? 하나님이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어? 말도 안 돼. 뭐 이러면서 성경을 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이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이 젊었을 때 형들한테 미움을 받았다는 것도, 노예로 팔려갔다는 것도,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혔다는 것도 대수롭지 않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왜요? 어차피 잘 될 건데. 어차피 나이 서른에 총리가 되어서 110세에 세상을 떠날 80년 동안 하나님 안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다는 걸 알고 있는데, 뭘 그게 대수야……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어요?
그렇다면 다윗은 또 어땠습니까.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사무엘이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다윗의 아버지 이새를 찾아갑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테니 너의 아들을 다 부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의 아들 중 한 아이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말씀하셨는데, 일곱명 모두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인 이새한테 여기 있는 자들이 너의 아들 전부냐고 물으니까 막내가 하나 있는데 지금 양을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그 막내가 바로 다윗이었던 것입니다만, 이 다윗은 자기 아버지한테도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블레셋 간의 전투에서 아버지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갔다가 골라앗을 보고는 물맷돌로 쓰러뜨리고 난 다음 이스라엘의 영웅이 됩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이제 그를 죽이려는 사울 왕한테 쫓기면서 도피생활이 시작됩니다. 이 기간을 신학자들은 대략 10년에서 13년 정도로 잡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혹시 술래잡기 해보셨나요? 자기를 잡으려고 달려오는 술래를 뿌리치고 기를쓰도 도망칩니다. 잡히면 내가 술래가 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런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누가 내 생명을 노리고 좇아온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게 얼마나 고달픈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누가 좇아와요? 어떤 개인도 아니고 왕입니다. 최고 권력자가 나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것도 나를 죽이려고 찾아다닙니다. 이렇게 되면요, 정말 하루라도 마음 편히 잠을 잘 수도 없습니다. 언제 갑자기 그들이 닥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기간이 1주일이요? 한 달이요? 아니요, 1년도 아니고 10년 이상입니다. 그리고 그 도피 과정에서도 온갖 고초를 다 겪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떻게 되나요?

사무엘하 5장 3절~5절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매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 그들과 언약을 맺으매 그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니라 다윗이 나이가 삼십 세에 왕위에 올라 사십 년 동안 다스렸으되 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
イスラエルの全長老がヘブロンの王のもとに来たとき、ダビデ王は、ヘブロンで主の前に、彼らと契約を結び、彼らはダビデに油をそそいでイスラエルの王とした。
ダビデは三十歳で王となり、四十年間、王であった。
ヘブロンで七年六か月、ユダを治め、エルサレムで三十三年、全イスラエルとユダを治めた。

이제 다윗은 나이 서른에 총리도 아니고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나는 70세까지 무려 40년을 왕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어때요? 예전에 그렇게 고생을 한다 하더라도 어차피 잘 될 건데. 어차피 나이 서른에 왕이 되어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텐데, 그것 뿐이에요? 그리스도 메시아 예수님도 다윗의 뿌리에서 나실 건데. 그와 같은 놀라운 은혜를 받을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데.
이와 같은 마음이 바로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의 믿음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살고 있을 때 직장에서도 무슨 이런 작은 일 하나 가지고 서로 언쟁도 하고 속이 상하고 그랬던 적이 있습니다만, 그때 만약에, 에이, 어차피 얼마 있으면 일본에 가서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면서 살게 될걸, 괜히 거기서 사소한 걸 가지고 고집을 부리고 자존심을 세우고 그랬다……그런 마음이 듭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불평이나 불만이 있습니다. 물론 어떤 부당하거나 잘못된 것이 있다면 지적도 해야 하고 바로잡기도 해야겠지요. 하지만 너무 자기만 생각하고 자존심만 생각하고, 너무 자기 이득만 챙기려고 하고 고집만 부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우리 구주로 삼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우리를 세상 사람들이 봤을 때, 아 과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다르구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정말 마음이 넓고 기쁨으로 충만하구나……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한국에서 보면, 그런 말씀 들어본 적 있으시죠? 믿는 사람이 더해. 교회 다니는 사람이 더 난리라니까. 그런 말을 들으면 이건 전도는커녕 하나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々、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従って召された人々のためには、神がすべてのことを働かせて益としてくださ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왜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쉽게 말하자면 “어차피 잘 될 거니까.” 입니다. 이미 우리는 다 이긴 축구시합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올림픽으로 본다면, 우리가 경기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지고 있어요. 지금 내가 힘이 들어요. 그리고 지금 내가 어딜 다쳤어요. 지금 나한테 이런 저런 문제가 있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왜요? 어차피 잘 될 거니까. 어차피 마지막에는 내가 금메달을 따게 되어 있으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도 더욱 놀라운 것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내가 지고 있다는 것, 힘이 든다는 것, 어딜 다쳤다는 것, 내게 이런저런 문제가 있다는 것, 이것은 모두 나한테는 마이너스, 안 좋은 것들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성경은 보여주고 계십니다.
생각해보세요. 요셉이 형들한테 미움을 받고, 노예로 팔리고,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고, 누명을 써서 옥에 갇히고…… 이 모든 것은 마이너스, 하나같이 안 좋은 요소들입니다. 그러나 이 중 하나라도 빠졌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요셉이 이복 형들한테 미움을 안 받았다면, 노예로 안 팔려갔다면,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안 했다면, 누명을 서서 옥에 갇히지 않았다면, 결국 요셉은 가나단 땅 광야에서 양이나 치면서 일생을 마쳤던 사람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이 모든 안 좋은 것들을 ‘때문에’가 아니라 ‘덕분에’로 바꾸어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이 이복 형들한테 미움을 받은 덕분에, 노예로 팔려간 덕분에, 보디발 집에서 종살이를 한 덕분에, 누명을 써서 옥에 갇힌 덕분에……그 결과가 어떻게 된다고요? 그렇죠. 나이 서른에 총리가 됩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은 그래도 아버지 야곱으로부터는 대단히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만, 다윗은 아버지한테서조차도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한 그저 막내아들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울에게 쫓기는 10여년의 세월 동안 그는 시편을 기록했고 하나님과 함께 했으며 마침내 이스라엘 왕이 됩니다. 이 모든 안 좋은 일들이,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나쁜 요소들이 모두 다 좋은 일들로 바뀌어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누가 내 것을 빼앗아 가려고 해요. 누가 나를 괴롭혀요.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죠? 그렇죠. 뭐가 어째고 어째? 누가 감이 나를 건드려? 라고 하면서 기를 쓰고 내 것을 챙기려고 해야겠죠. 하지만 그러려고 하니까 하루하루가 힘이 듭니다. 하지만 그것이 세상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하라고 해요?

마태복음 5장 38절~45절
“38.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目には目で、歯には歯で。』と言われたのを、あなたがたは聞いています。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悪い者に手向かっ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の右の 頬を打つような者には、左の頬も向けなさい。あなたを告訴して下着を取ろうとする者には、上着 もやりなさい。あなたに一ミリオン行けと強いるような者とは、いっしょに二ミリオン行きなさい。求める者には与え、借りようとする者は断わらないようにしなさい。『自分の 隣人 を愛し、自分の敵を憎め。』と言われたのを、あなたがたは聞いています。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自分の敵を愛し、迫害する者のために祈りなさい。それでこそ、天におられるあなたがたの父の子どもになれるのです。天の父は、悪い人にも良い人にも太陽を上らせ、正しい人にも正しくない人にも雨を降らせてくださるからです。


예수님이 왜 우리한테 이러라고 말씀하시죠? 우리를 미워하시기 때문에요? 무슨 우리가 괴로워하는 걸 보고 즐거워하시려고요? 아니요. 예수님은 그런 이상한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렇죠. 바로 “어차피 잘 될 거니까”입니다.
どうせうまくいくに決まっているから。
성경 개역개정에 보면 “노력”이라는 말은 딱 한 구절밖에 등장하지 않습니다만 “감사”라는 말은 무려 174번이나 등장합니다. 왜 감사해요?
“어차피 잘 될 거니까” 그렇습니다. 어차피 나는 잘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々、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従って召された人々のためには、神がすべてのことを働かせて益としてくださ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누구든지 아무런 조건 없이 모두가 잘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조건이 무엇이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한테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한테만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로마서 10장 9절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なぜなら、もしあなたの口でイエスを主と告白し、あなたの心で神は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てくださったと信じるなら、あなたは救われるからです。

요한복음 6장 44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わたしを遣わした父が引き寄せられないかぎり、だれもわたしのところに来ることはできません。わたしは終わりの日にその人をよみがえらせます。

야고보서 1장 12절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試練に耐える人は幸いです。耐え抜いて良しと認められた人は、神を愛する者に約束された、いのちの冠を受けるからです。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고 오늘 이 자리에 주님 앞으로 나아온 우리 모두는 이미 주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임을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모든 승부는 다 이겨놓은 상태입니다. 마지막에는 주님께서 주시는 금메달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마태복음 13장 4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天の御国は、畑に隠された宝のようなものです。人はその宝を見つけると、それを隠しておいて、大喜びで帰り、持ち物を全部売り払ってその畑を買います。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만 하면, 우리가 주님 안에 있기만 하면,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기만 하면, 우리가 온전히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인간적으로 보면 안 좋아보이는 그 모든 것들도 합력해서 오히려 선을 이룬다는 이 놀라운 말씀이야말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화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밭에 감추인 이 놀라운 보화를 얻기 위해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팝니다. 이는 꼭 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존심도 팝니다. 내 불이익도 팝니다. 내 고집도 팔아서 없애버립니다. 그리고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 밭에 감추인 놀라운 보화, 내게 있는 모든 안 좋은 일들도 주님 안에만 있으면 모두가 선을 이루게 된다는 이 놀라운 기적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 우리 한 번 가슴에 손을 얹고 큰 소리로 말해봅시다. “주님 안에만 있으면, 어차피, 난, 잘 될거야.” 다시 한 번요. “주님 안에만 있으면, 어차피, 난, 잘 될거야.” 아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30배 60배 100배, 300배, 600배, 1000배 축복의 열매를 거두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9회 치료하시는 하나님 →

← 제37회 형통함의 차이

 
이카호중앙교회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37회 형통함의 차이
2016년 8월 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Last Update 2019. 5. 21

잠언 24장 1절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형통함의 차이’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4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이 올해 지난 2016년 8월 5일, 우리나라나 일본 시간으로는 8월 6일 오전에 멀리 지구 반대편에 있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개막되었습니다.
올림픽이 아무리 축제라고는 하지만 100프로 모든 사람이 즐거움을 만끽할 수는 없는 세계입니다. 그 이유는 우선 올림픽에 선발되지 못한 선수들도 있을 것이고, 선발되어 자국 국기를 가슴에 달고 올림픽에서 경기를 치른다 하더라도, 거기도 역시 승부의 세계이기 때문에 승자와 패자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전세계에서 뽑힌 국가대표 중에서도 마지막으로 시상대에 올라가서 메달을 차지할 수 있는 선수는 극히 손에 꼽을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올림픽 시상대에 오른다는 것은 개인의 명예만이 아니라 그 나라의 위상을 높이는 데에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각 나라들은 어떻게 해서든 자국 선수가 이 올림픽 시상대에 올라 가서 메달을 받기를 원하고, 메달 중에서도 특히 금메달을 따도록 하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이고, 나아가 금메달에도 포상금을 설정해서 선수들로 하여금 의욕을 높이기도 합니다. 이 금액이나 기준은 각 나라마다 그리고 각 대회마다 매번 바뀌지만, 예를 들어서 일본은 이번 리우 올림픽에서는 금메달 500만엔, 은메달 200만엔, 동메달 100만엔이라고 합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정부에서 금메달은 6000만원, 은메달 3000만원, 동메달 1800만원을 내걸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니라 무슨 연금이다 여기저기에서 주는 격려금이다 하면 이보다도 훨씬 올라가겠지요. 어디 그 뿐이겠어요? 그 영광은 선수들한테만이 아니라 그 선수들을 키운 감독, 코치들한테도 돌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되다보니 선수들, 감독 코치, 그리고 국가 차원에서 어떻게든 금메달을 하나라도 더 따려고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노력을 하는 것은 당연하고 오히려 장려되어야 하는 것이겠죠. 공부도 노력이고 사업도 노력이고 회사생활도 노력이고 이처럼 스포츠도 노력입니다. 노력은 아름다운 것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말들 바로 앞에 어떤 말이 붙으면 좀 이상해집니다. 그 말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라는 말입니다. 노력은 분명 좋은 말입니다만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노력한다고 하면 이게 무슨 말이에요? 이것은 해도 되는 일 안 되는 일들을 안 가리고 한다는 뜻입니다. 무슨 일이든 과정이 아니라 결과가 중요하다는 말을 저는 간혹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해서 얻어진 결과라면 이는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올림픽은 많은 선수들이 자신과 자신의 나라의 명예를 걸고 경쟁을 합니다. 메달을 받고 시상대 위에 오르게 되면 그 경기장에 있는 관람객 수 천명, 수 만명 뿐만이 아니라 전세계에서 이를 지켜보는 이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습니다. 하지만,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해서는 안 되는 행위, 부정행위를 하게 되면 문제가 심각해 집니다. 이에 대표적인 부정행위가 바로 금지약물복용입니다. 육상이나 수영처럼 속도를 다투는 경쟁인 경우에는 심한 경우에는 1초 2초가 아니라 0.01초, 0.001초를 다투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금지약물을 복용하여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부당한 방법으로 끌어올려서 승리하게 되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가 받은 메달도 박수도 영광도 칭송도 모두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잠언 24장 1절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여러분 한 번 테스트를 해보시겠습니다.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이 있고, 예수를 믿어야만 축복이 있고, 예수를 믿어야만 소망이 있고, 예수를 믿어야만 죄사함이 있고, 예수를 믿어야만 우리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믿어지시나요? 지금 우리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이 뭔가 마음 구석 한켠에 남는 이 찝찝함.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요?
그래, 뭐 다 맞는 말씀이지. 성경말씀이 다 그렇잖아? 다 좋은 말씀이지만, 어디 세상이 다 그런가……라는 생각이 혹시 내 마음속 어딘가에 있지 않으십니까.
학교 다닐 때, 예를 들어서 몇 그램 되는 것을 몇 미터 위에서 떨어뜨리면 땅에 닿을 때까지는 몇 초인가. 그런데 여기서 답을 내놔도 실제로는 그렇게 딱 들어맞나요? 아니요. 그럼 왜 정확하게 맞지 않냐고 선생님한테 질문을 하면 그건 공기의 저항이 어떻고 바람의 방향이 어떻고 해서 실제로 해보면 오차가 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도 역시 그 말씀에는 예수님을 믿어야지만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게 된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꼭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다……혹시 이런 생각이 우리의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지는 않은가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100% 아멘으로 믿지 못하고 한 50대 50……아니, 그래, 좋아. 70대 30 정도로 해두자. 70은 성경이 맞지만 그래도 지금이 21세기인데 30프로는 이 현실에 맞게 적용도 하고 그래야지, 그렇게 곧이곧대로 믿어서야 되겠어? 혹시 이런 생각을 가져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그러면 제가 묻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라고 하면,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마치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을 지으면서, 아니, 누구는 예수를 믿지도 않고 교회도 안 나가고 하는데도 돈도 잘 벌고 사업도 잘 되고 그러는데, 나는 그래도 예수를 믿고 교회도 나가고 봉사도 하고 그러지만 항상 일은 꼬이고, 되는 일도 없고, 몸도 안 좋고, 문제는 많고…….
이런 생각이 있기 때문에 우리 믿음이 제대로 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적혀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강한 믿음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강한 믿음을 갖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대상이 연인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친척일 수도 있고, 선생님일 수도 있고, 제자일 수도 있고, 직장 상사일 수도 있고, 부하직원일 수도 있고, 그리고, 부모님일 수도 있고, 자식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 상대방을 매우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 상대가 나한테 말을 합니다. 나는 “당신을 99% 믿는다.” 그 말을 들으시면 기분이 좋으신가요? 아, 내가 사랑하는 상대방이 나를 99%나 믿어주고 있네, 기쁘다……이렇게 생각하시나요? 아니요. 오히려 별로입니다. 왜죠? 그것은 바로 “1%는 안 믿는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나님은 99%는 믿어요, 라고 말을 한다면 그 뜻은 뭐겠습니까. 주님, 난 주님을 1%는 안 믿어요. 라고 고백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야고보서 2장 10절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99% 율법을 지키다 1%를 안 지키면 나머지 99%까지도 모두 안 지키는 것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누가복음 6장 48절~49절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즉, 100%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 믿음의 집을 잘 지었기 때문에 어떤 시험이 닥쳐와도 요동하지 않지만, 믿음이 부족한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번드레해보이지만 그 마음 안에 믿음이 서지 않았기 때문에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다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우리 이웃을 보면 믿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장사도 잘 되고 돈도 잘 벌고 출세도 잘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작 자기는 믿음이 있는데도 잘 안 되고 고생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들이 언제부터였을까요? 5년 전? 10년 전? 그러면 그 전에는요? 오늘 말씀이 적힌 잠언은 주로 이스라엘 다윗 왕의 아들인 솔로몬 왕의 말이 적힌 글입니다만, 솔로몬 왕은 기원년 900년대의 인물이기 때문에 적어도 예수님이 오시기 900년 전에 벌써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잠언 24장 1절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그렇기 때문에 혹시라도 형통하는 악인을 부러워할까봐, 잠언에 이렇게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잠언 24장 19절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행악자가 나한테 무슨 나쁜 일을 저질러도 화를 내지도 말고, 그로 인해서 악인이 형통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부러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시편 73편 12절~15절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이 시편 기자도 말하기를, 악인들은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불어나는데 자신은 종일 재난을 당하고 아침마다 징벌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구절은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일까요. 악인은 항상 잘 되고 의인은 고생만 죽도록 하지만 너는 그냥 참아라? 예수님께서 그렇게 끔찍한 말씀을 하시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뒤가 있습니다.
시편 73편 16절~20절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 아이고 내 팔자야, 아아, 주님 나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까요, 하고 생각하고 생각해봤더니 이것이 심한 고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기준으로 생각하지 않고 사람 기준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는 마치 곱셈과 나눗셈으로 풀어야 할 문제를 덧셈과 뺄셈 만으로 풀려고 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 우리 주님의 마음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아하! 하나님께서 이렇게 악인을 파멸하게 하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실 계획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그들을 파멸에 던지시는데, 어떻게 그렇게 황폐되었는지 놀랄 정도로 전멸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일제시대 때 많은 지식인들이 이른바 친일을 했습니다. 자신의 조국을 팔고 자신의 양심을 팔아서 자기 배를 불렸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바보였습니까? 아니요. 남부럽지 않을만큼 배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짓을 했을까요. 해방되고 친일파를 소탕한다고 하면서 잡아들이고는 형사들이 물었습니다. 그렇게 배운 것도 많고 아는 것도 많은 사람이 왜 친일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같이 하는 말이, 이렇게 빨리 일본이 망할 줄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의 일본 정식 국호는 ‘일본국’이지만, 태평양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대일본제국>이었습니다. 대일본제국? 이거 너무 건방진 이름 아냐? 라고 생각하실지는 모르지만, 당시 일본의 규모를 본다면 이건 전혀 과장되지도 않은 이름입니다. 그 때 일본은 대만이나 필리핀,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 그리고 조선은 물론이고 중국 만주까지 모두 일본 것이었습니다. 그런 일본이 한순간에 패망할 것이라는 사실은 그렇게 많은 지식이 있었던 그 사람들도 전혀 몰랐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가는 시점에서도, 어느 정도에서 미국과 일본이 휴전을 하고 적정한 상황에서 전쟁이 끝나고는 강대국 일본은 계속 이어질 줄만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토록 대단했던 강대국이었던 대일본제국은 3년 반 남짓의 전쟁으로 순식간에 모두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악인들이 형통하게 보이는 일은 있습니다. 그러나 형통하게 보인다고 해서 악인이 의인으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주일을 지키는 사람이 돈을 많이 벌겠습니까. 교회에도 가지 않고 주일도 쉬지 않고 365일 일하는 사람이 돈을 잘 벌겠습니까. 세상적으로 본다면 하루라도 더 일하는 사람이 돈을 많이 벌겠지요. 자신의 수입 중에서 십일조를 바치는 사람이 돈을 많이 벌겠습니까. 십일조를 안 내는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겠습니까. 십일조는 무슨 십일조! 한 푼이라도 더 쌓아놓아야지! 이것이 세상적인 생각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시편 37편 7절~10절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악인이 형통하는 것, 악한 꾀, 잔머리를 굴리는 이들이 잘 되는 것을 보고 화를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질투하고 시기하고 배아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도저히 찾을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잠언 10:28
“의인의 소망은 즐거움을 이루어도 악인의 소망은 끊어지느니라”
욥기 27장 13절~19절
“악인이 하나님께 얻을 분깃, 포악자가 전능자에게서 받을 산업은 이것이라 그의 자손은 번성하여도 칼을 위함이요 그의 후손은 음식물로 배부르지 못할 것이며 그 남은 자들은 죽음의 병이 돌 때에 묻히리니 그들의 과부들이 울지 못할 것이며 그가 비록 은을 티끌 같이 쌓고 의복을 진흙 같이 준비할지라도 그가 준비한 것을 의인이 입을 것이요 그의 은은 죄 없는 자가 차지할 것이며 그가 지은 집은 좀의 집 같고 파수꾼의 초막 같을 것이며 부자로 누우려니와 다시는 그렇지 못할 것이요 눈을 뜬즉 아무것도 없으리라”
의인의 소망은 즐거움이 되지만 악인의 소망은 끊어집니다. 악인이 갖은 노력을 해서 재물을 모으고 한다 하더라도 그 재물은 죄 없는 의인이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시편 1편 1절~2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의인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도 않고 부러워하지도 않고 함께 하지도 않고 오직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전서 1장 13절~15절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올림픽에서는 경기가 끝나고 상위권 선수들한테는 도핑테스트라고 하는 약물검사를 하게 됩니다. 그가 정당한 방법으로 메달을 땄다면 그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당당히 검사를 통과해서 그가 받은 영광을 누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그 검사에서 만약에 금지약물이 검출이 된다면 그는 메달을 박탈 당하고 그와 함께 그의 모든 노력과 영광과 환호와 칭송과 미래도 모두 빼앗기고 말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하나님은 속히 오신다고 합니다. 속히 오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 순간까지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99% 아멘이 아니라 100% 아멘으로 믿고, 우리가 가진 믿음을 굳게 잡고 우리가 받을 상을, 면류관을 아무한테도 빼앗기지 않도록 항상 근신하고 온전히 주님만 바라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8회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

← 제36회 빈 집

 
이카호중앙교회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36회 빈 집
2016년 7월 3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Last Update 2019. 5. 21

마태복음 12장 43절~45절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빈 집’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살 때, 주로 미국 서부 쪽 캘리포니아나 네바다 쪽에 있었습니다만, 그 곳은 정말 비가 오지 않습니다. 안 가보신 분께서는 캘리포니아라고 하면 어떤 모습을 상상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1년 중에서 봄, 여름, 가을은 정말 화창합니다. 서울에서 살 때는 1년 중에 하루 종일 구름 한 점 없는 날씨가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캘리포니아에 가보니까 정말 그렇게 화창한 날씨가 계속됩니다. 맨 처음에는 신기하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날씨가 그렇다보니까 비가 안 옵니다. 특히 캘리포니아 남부 쪽에는 1년 중에서 겨울에만 잠깐 비가 내리고 그 외에는 비가 안 와요.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에 보면 잔디들이 넘쳐나고 나무들이 푸르릅니다. 어떻게 해서 그럴 수 있는가 하면 나무들이 있고 풀들이 있는 곳에는 100% 스프링쿨러가 설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우리나라나 일본에서 스프링쿨러라고 하면 불이 났을 때 그 불을 끄기 위해서 천장에서 물이 쏟아지는 장치를 말합니다만, 캘리포니아나 네바다에서는 비가 거의 안 오다시피 하니까 잔디나 나무가 있는 곳에 이 장치가 설치가 되어 있어서 1년 365일 하루에 정해진 시간에 물이 무슨 분수처럼 나옵니다. 그러니까 잔디 위에 벌러덩 누워 있다가 잠이라도 들면 큰일납니다. 잘못하면 물에 흠뻑 젖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만약에 가정집 뒷마당에 잔디를 심고 싶은데 스프링쿨러를 달지 않은 경우에는 매일같이 호스로 물을 뿌려야 합니다. 저도 미국에서 현지 학생들과 함께 그런 단독주택에서 1~2개월 정도 지낼 기회가 있었습니다만, 물 뿌리기를 하루라도 걸르면 벌써 잔디가 시들시들해집니다. 그리고 그 물을 뿌리는 것도 아주 흠뻑 젖도록 뿌려야 하기 때문에 그게 참 번거로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처럼 미국, 특히 서부지역에 사는 사람들한테에는 이 잔디에 물을 뿌리는 일이 거의 일과처럼 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 제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한 미국인 남성 이야기인데, 이 분도 역시 매일같이 잔디에 물을 뿌리고 있었는데, 하루는 자기 마당을 유심히 보니까 어디에는 잔디가 아주 빼곡하게 나 있었는데, 어디는 잔디가 듬성듬성 나 있는 곳도 있고, 또 어디에는 잔디가 하나도 안 나 있는 곳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보니까, 아주 예쁘게 잔디가 난 곳에는 잡초가 하나도 없는데, 잔디가 듬성듬성 난 곳에는 잡초도 듬성듬성 나 있고, 그리고 잔디가 하나도 없는 곳에는 여기저기가 잡초 투성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분이 생각하기를, 아하, 이 잔디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이 이 잡초로구나.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어요? 그렇죠. 잡초를 뽑아버려야죠. 그래서 그 때부터 열심히 잡초를 뽑았습니다. 매일 같이 잡초를 꼼꼼하게 뽑고는 물도 열심히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을까요? 잡초는 완전히 사라지고 잔디가 풍성하게 자라게 되었습니다……라는 것을 기대했는데, 이게 웬걸요. 상황이 전혀 안 바뀌더랍니다. 잡초는 분명히 그렇게 많이 뽑아버렸는데도 어디서 어떻게 된 영문인지 뽑아버린 곳에 또 나고, 아무리 뿌리채 뽑아버려도 며칠 뒤면 또 그자리에 나고 그랬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잔디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상황이 그렇다보니까 잔디도 전혀 늘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분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잡초를 죽이는 약을 뿌려볼까 생각도 했습니다만, 그랬다가 괜히 잔디까지 죽게 되면 큰 일입니다.
얼마 동안 고민을 하다가 이 분이 마침내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이 사람이 원했던 것은 뭐예요? 잡초가 없어지는 거예요? 아닙니다. 이 사람이 원했던 것은 잡초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잔디를 풍성하게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 이 사람이 했던 것은 잔디를 풍성하게 하는 노력이 아니라 잡초를 뽑아버리는 노력이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 결과는 어땠나요? 결국 잡초는 사라지지도 않았고 잔디도 늘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노력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이제 무엇을 위해서 노력했을까요. 그렇죠. 자신의 본래의 목표인 잔디를 늘리는 일에 매진했습니다. 그래서 잔디 씨를 사 와서 뿌리고는 열심히 물을 주었습니다. 잡초가 있는 곳에도 잡초를 뽑기도 하면서도 거기에 아랑곳 하지 않고 씨를 뿌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잔디는 무럭무럭 자라나고, 반면에 잡초는 조금씩 줄어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봅니다.
마태복음 12장 43절~45절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세상에는 마귀가 없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귀신이 없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분명히 있습니다. 왜요? 봤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물론 그것도 답이 될 수는 있겠지만 완벽한 답은 아닙니다. 정답은 바로 성경에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본다면, 귀신이 원해서 나왔는지 아니면 쫓아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왔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문맥상으로 본다면 분명 이 귀신이 어떤 사람 안에 있다가 거기서 나온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입니다. 여기서 물없는 곳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다만, 핵심은 귀신이 쉴만한 곳을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귀신이 어떻게 했다고 합니까. 그렇습니다.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오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리고 반성을 합니다. 회개를 합니다.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맹세를 합니다. 하지만 또다시 그 길로 되돌아가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듣습니다.
예를 들어서 마약을 보십시오. 이 세계에 한 번 빠져들면 정말로 헤어나오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얼마전 방송에 의하면, 마약을 모르는 일반 사람들은, 아 그거 끊지 못한다는 것은 의지가 부족해서 그렇다. 의지만 있으면 끊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자신의 의지만으로 끊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들기 때문에, 가장 좋은 방법은 의학적인 치료를 받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토록 어렵게 마약을 끊은 다음에도 또다시 여기에 손을 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니 이는 정말로 무서운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도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도 방송에서 보니까 이 도박에 빠져 있던 사람의 말에 의하면, 이 도박을 하다가 안 하면 심장이 벌렁벌렁 거리고, 식은 땀이 나고, 온통 자기 머리 속에는 도박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마약이나 도박이나 여기에 한 번 사로잡히게 되면 몸은 몸대로 망가지고 사회생활도 가정생활도 인간관계도 모두 파탄지경에 이르고 맙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어디까지나 극단적인 것입니다만,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악한 죄악이라는 것 모두가 무엇 때문에 일어납니까. 바로 이 악한 마귀 사탄에 의한 것입니다. 나는 거기서 벗어나왔어. 이제 나는 그것과 상관 없어……하고 다짐을 합니다. 맹세를 합니다. 내 마음 속을 깨끗하게 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열심히 인간적으로 노력을 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귀신들이 내 앞을 얼쩡거립니다. 오늘 이 말씀에 보면 그 마음 속에 있던 귀신들이 나가서 청소도 되고 수리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것 아니에요? 그런데 왜 귀신이 다시 거기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 중 44절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2장 44절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귀신이 다시 와서 보니, 청소되고 수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서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바로 그 집이 비어있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봅시다. 여러분께서는 깨끗한 집을 좋아하십니까. 아니면 지저분한 집을 좋아하십니까. 당연히 깨끗한 집이겠지요. 하지만 어떤 나쁜 사람들이 자기가 몰래 살 집을 구하러 다니는데, 둘 다 빈 집인데, 하나는 깨끗한 집이고, 또 하나는 지저분한 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디로 들어가겠습니까. 당연히 깨끗한 집이겠지요. 하지만 깨끗한 집임에도 불구하고 못 들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언제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집에 다른 주인이 있을 때에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주인 삼아야 되겠습니까.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복음 1장 12절~13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예수님이 문밖에서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실 때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문을 여는 것입니다. 문밖에서 예수님이 두드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예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 어서오십시오. 어서 들어오십시오. 내 모든 것을 주관해주십시오. 내 주인은 내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고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서 예수님을 영접해드렸을 때, 예수님께서는 내 마음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를 하나님 자녀로 삼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분들한테 교회에 나가시라고 말씀을 드리면, 자신은 너무나 죄가 많아서 회개하고 난 다음에 가겠다고 합니다. 또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술을 끊고 가겠다고 합니다. 담배를 도저히 끊을 수가 없어서 담배를 끊고 가겠다고 합니다. 그것이 맞다고 생각하세요? 한국의 이른바 개혁파 정통교회에 보면 술담배를 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누구는 또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고기를 안 먹는다는 사람도 있고, 또 교파에 따라서는 주일에 돈을 쓰거나 요리를 하거나 하지 않는다는 곳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술을 안 마시면 구원 받나요? 담배를 끊고 고기를 안 먹고 주일에 돈도 안 쓰고 요리를 하지 않으면 구원 받나요?
이와 같은 것을 강요하는 이른바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스스로 어떤 일들을 저지르고 다닙니까.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한 모범을 보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교회나 교회 지도자가 나라의 법을 어기고 세상 사람들보다 못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될 때마다 정말 저 자신 또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를 보면, 누구를 가장 꾸짖으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바리새인들, 율법교사들, 서기관들, 제사장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1장 42절~46절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이 말씀을 보았을 때 과연 지금의 목회자나 교역자 또는 교회의 직분자들이 과연 과거의 바리새인이나 율법교사들보다 믿음이 더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을 때, 아니요, 과거의 바리새인이나 율법교사가 지금의 그 분들보다 차라리 훨씬 낫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이렇게 혼이 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조건 잡초만 뽑으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대우를 잘 하라는 것입니다. 교만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의 이른바 교회 지도자는 이 과거에 바리새인이나 종교지도자들보다도 훨씬 더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픕니다. 예수님이 언제 먼저 네 힘으로 청소 다 하고 수리 다 한 다음에 그 다음에 나한테 오라고 말씀하셨나요?
마태복음 11장 28절~30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그냥 오라고 하십니다. 왜요? 어차피 네가 네 힘으로 깨끗하게 되려고 해도 안 되잖아. 그러니까 괜히 쓸데없이 힘 낭비하지 말고 그냥 어서 나한테로 와. 그럼 내가 알아서 다 해줄게. 나한테로 와서 내가 두드릴 때 문을 열어줘. 그러면 내가 네 안으로 들어가서 잔디가 풍성해지면 잡초도 없어진다니까. 왜 니가 혼자 노력하려고 해. 예수님께서는 바로 지금 그러고 계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24절~30절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우리 마음 속에 뿌려진 잡초, 가라지. 이걸 누가 뿌렸어요? 하나님이요? 아니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원수 마귀 사탄이 뿌렸습니다. 그래서 종들이 말하기를 이걸 다 뽑아버릴까요? 하니까 29절~30절을 다시 보면,
마태복음 13장 29절~30절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이 말씀을 보시면, “가라지가 있는 것” “곡식이 뽑히는 것” 이 둘 중에서 하나님은 무엇에 더 무게를 두고 있으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가라지가 있어? 그건 그 나쁜 원수가 한 짓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요? 뽑아버려야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다가 자칫 잘못해서 그나마 있는 곡식까지 뽑힐 것을 우려하고 계신 것입니다. 가라지는 없애버려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다가 믿음의 알곡까지 뽑혀버리면 오히려 더 큰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사람이 모두 지킬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600가지 이상이라고 합니다만 그것을 모두 지킬 수가 있습니까?
야고보서 2장 10절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그 율법 중에서 하나라도 어기면 율법 전체를 어겼다는 것이 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율법 하나라도 어긴 적이 없나요?
로마서 3장 10절 말씀처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그야말로 이와 같은 율법을 지킬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율법을 모두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예수님말로 누가 있겠습니까. 또한 술담배를 하지 않는 사람은 술담배를 하는 사람보다 의롭습니까. 주일에 돈을 안 쓰고 요리를 안 하면 주일에 돈을 쓰거나 요리를 하는 사람들보다 더 의롭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면 이와 같은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너희들이 아무리 행위로 거룩해지려고 해봤자 안돼. 어림 없어. 그 사실을 알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인간이 아무리 거룩한 척 하고 목에 힘을 줘봤자, 너나 나나 다 똑같다, 이것을 인정하게 되면 억지로 안 그럴려고 해도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6장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우리의 이 무거운 죄를, 죽음에서 헤어날 수 없는 끔찍한 죄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해결해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 또한 우리의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잔디를 풍성하게 만들겠다고 해서 아무리 잡초를 뽑아봤자 그 자리에서는 또다시 잡초가 납니다. 오히려 뽑기 전보다 더 많이 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예, 그 곳에 잔디를 심어야 합니다. 가라지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뽑아보겠다고 했다가 자칫 그나마 있는 알곡까지도 해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알곡이라는 이름의 믿음을 심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성장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잡초를 뽑는 것보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믿음이 성장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급선무입니다.
마태복음 13장 31절~32절에 보면,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풀이 풀로 있을 때에는 잡초도 걸리적거리고 가라지가 훼방할지도 모르지만, 이를 견디고 풍성해지면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고 공중의 새들이 와서 깃들게 된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나무가 성장하면 그까짓 잡초가 문제입니까? 가라지가 문제입니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목표는 빈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집, 주님을 모시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도 주님이 우리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럴 때 주저없이 우리의 마음을 여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을 내 안에 모셔 들일 때에 우리의 믿음이 성장해서 큰 나무를 이루고 마침내 30배 60배 100배 풍성하게 믿음의 열매를 맫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7회 형통함의 차이 →

← 제35회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카호중앙교회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35회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2016년 7월 2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60장 1절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일어나 빛을 발하라’ 起きよ。光を放て。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요즘 일본뉴스를 보면 오는 7월 31일에 있을 동경 도지사 선거 이야기, 그리고 8월 5일에 남미 브라질에서 개최되는 리우 올림픽 이야기가 한창입니다만, 그 틈새를 타서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이 있지요. 바로 지난 7월 6일 출시된 게임 포케몬go 입니다. 혹시 들어보신 분들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포케몬이라고 하는 것은 만화이자 애니메이션인데 이것이 게임으로 나왔다는 것입니다만, 사실 포케몬이라고 하는 만화가 워낙 인기가 있었던 것이라서 게임으로 만들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특별히 이번에 나온 게임은 전세계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개발한 곳은 일본 게임 회사인데도 불구하고 신기하게 7월 6일에는 호주와 뉴질랜드, 그리고 미국에서 출시되었고, 정작 일본이나 한국에서는 아직 서비스가 시작되지 않았는데, 특이하게 한국 속초지역에서만 할 수 있다고 해서 한국에서는 이 게임을 하기 위해서 속초로 몰려가고 그랬다고 합니다. 이 게임이 출시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미국에서는 벌써 6천 500만명이 이 게임을 즐기고 있고, 이 포켓몬 go를 개발한 닌텐도는 게임 출시 5일만에 주가가 120%나 상승했다고 합니다.
도대체 이 포켓몬go가 뭐길래 이렇게 난리인가 하니, 이는 모바일 게임의 일종입니다만, 기존 게임과는 많이 다르다고 합니다. 보통 게임을 한다고 하면 집이나 어디 앉아서 게임 캐릭터를 손가락으로 비벼가면서 앉아서 하는 게 보통인데, 이 게임은 손가락으로 하는 게 아니라 직접 자기가 밖에 나가서 돌아다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마트폰에는 실제 자기가 있는 지역의 지도가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서 저쪽에 무슨 목표가 되는 곳이 있어요. 그렇다면 거기까지 캐릭터를 손으로 움직여서 가는 게 아니라, 자기가 직접 걸어서 거기까지 가야지만 된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물론 기존에도 이와 같은 게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 출시된 게임은 포켓몬이라고 하는 만화의 지명도와 완성도에 있어서 인기가 가히 폭발적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니 기존에 생각으로 본다면,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방안에 틀어박혀서 가만히 게임만 하게 되니 운동부족이고 비만이 된다고 하는데, 이제 이 게임을 하게 되니까 직접 밖으로 나와서 걸어다니게 된 것입니다. 참 획기적인 전환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되니까 어떤 효과가 있냐 하면, 이제 사람들이 돌아도니면서 게임을 즐기고, 또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는 곳에서는 다른 캐릭터와 전투도 할 수 있다고 하니까, 점점 더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늘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그냥 돌아다니기만 하나요? 돌아다니면 배도 고프니까 이것저것 사 먹게 되고, 포켓몬이 여기저기 숨어 있으니까 사람도 여기저기 구석구석 다니게 되니까 가게들도 매출이 오르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이런 경제적인 효과를 가리켜서 벌써부터 이 포켓몬이 주는 경제적인 효과라고 해서 포켓몬과 경제를 가리키는 영어 에코노미를 합해서, 아베노믹스가 아닌 포케모노믹스라는 말까지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렇잖아도 경제가 안 좋았는데 이 게임이 경제회복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사야 60장 1절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起きよ。光を放て。あなたの光が来て、主の栄光があなたの上に輝いているからだ。

우리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성령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사람의 능력인가요?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죄를 지었을 때, 그 죄를 용서해준다고 하면 이해가 갑니다만,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 뿐이에요? 우리의 부모님, 그리고 그 분들의 부모님이 태어나시기도 한참 전인 2천년 전에 이미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모두 해결해주셨다는 사실을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말이 어디 적혀 있어요? 예, 바로 성경입니다. 이것이 믿어지시나요? 아멘. 그 믿음은 매우 귀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의 노력이 아닙니다.

성경을 봅니다.

마태복음 16장 13절~14절,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さて、ピリポ__カイザリヤの地方に行かれたとき、イエスは弟子たちに尋ねて言われた。「人々は人の子をだれだと言っていますか。」
彼らは言った。「バプテスマのヨハネだと言う人もあり、エリヤだと言う人もあります。またほかの人たちはエレミヤだとか、また預言者のひとりだとも言っています。」

고난 받으실 날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말하느냐고 물으시니까 제자들이 말하기를 누구는 죽은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 또 누구는 구약을 대표하는 선지자 엘리야다, 또 누구는 예레미야나 다른 선자자 같은 사람이다…라고 한다는 것이죠. 여러분이 익히 알고 계시는 바와 같이 구약에도 믿음 좋고 하나님의 능력을 행했던 선자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도 바로 그 중 하나다…라고 사람들이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15절~17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5절~17절
“15.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あなたがたは、わたしをだれだと言いますか。」
シモン・ペテロが答えて言った。「あなたは、生ける神の御子キリストです。」
するとイエスは、彼に答えて言われた。「バルヨナ・シモン。あなたは幸いです。このことをあなたに明らかに示したのは人間ではなく、天にいますわたしの父です。

그래?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말한다고 한다면, 그럼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러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는 그리스도 구세주, 메시아, 기름 부음 받은 자, 곧 이스라엘의 왕이요 우리의 죄를 대속해주시는 분, 즉 지금 이 순간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네가 복이 있다. 이를 네게 알게 하신 이는 네 지식이나 노력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 사실을 네게 알게 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ですから、私は、あなたがたに次のことを教えておきます。神の御霊 によって語る者はだれも、「イエスはのろわれよ。」と言わず、また、聖霊によるのでなければ、だれも、「イエスは主です。」と言うことはできません。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성령님의 능력으로 예수를 구주,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요한1서 4장 15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だれでも、イエスを神の御子と告白するなら、神はその人のうちにおられ、その人も神のうちにいます。

그러므로 우리가 이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다면 이는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인 것이요, 이를 입으로 시인하면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거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자, 우리는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무려 2천년 전에 모두 해결하셨음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 예수의 이름을 믿는 우리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영,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 오늘 읽은 말씀처럼 여호와의 영광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겠습니까. 성령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알게 된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오늘 말씀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죠?
그렇습니다. 일어나! 빛을 발하라!입니다. 이는 권고사항이 아닙니다. 빛을 발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가 아닙니다. 빛을 발하라고 명령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빛’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わたしは光として世に来ました。わたしを信じる者が、だれもやみの中にとどまることのないためです。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가복음 16장 15절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それから、イエスは彼らにこう言われた。「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福音を宣べ伝えなさい。

이것이 바로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빛이 있는데 빛을 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빛으로 오신 이유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둠 속에 있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만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고, 온 천하는커녕 집앞에도 안 나가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은 고사하고 내 이웃한테도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빛을 발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한테 후레시가 있습니다. 그런데 빛을 발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어둠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매우 역동적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은 사람들,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축복을 받고 그냥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노아도 그렇고, 아브라함도 그렇고, 요셉도 그렇고, 엘리야도 그렇고, 사무엘도 그렇고, 다윗도 그렇고, 모두 다 가만히 앉아 있기는커녕 쉴새없이 역동적으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 이것이 바로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한테나 일을 맡기시지 않습니다. 아무한테나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한테 믿음이 좋은 내가, 그래요 아무도 안 하면 제가 하죠 뭐. 손을 들어서 뽑혔나요? 아닙니다.

이사야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だが、今、ヤコブよ。あなたを造り出した方、主はこう仰せられる。イスラエルよ。あなたを形造った方、主はこう仰せられる。「恐れるな。わたしがあなたを贖(あがな)ったのだ。わたしはあなたの名を呼んだ。あなたはわたしのもの。

내가 먼저 나선 것이 아니라, 나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고, 나를 지명해서, 내 이름을 꼭 찍어서 부르시면서 하는 말씀이, 너는 내 것이다! 라고 말씀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わたしを遣わした父が引き寄せられないかぎり、だれもわたしのところに来ることはできません。わたしは終わりの日にその人をよみがえらせます。

요한복음 15장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を選んだのではありません。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選び、あなたがたを任命したのです。それは、あなたがたが行って実を結び、そのあなたがたの実が残るためであり、また、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父に求めるものは何でも、父があなたがたにお与えになるためです。

하나님께서 친히 나를 택해주시고 내 이름을 부르셔서 나로 하여금 예수님께로 인도해주시지 않았다면 아무도 예수님께로 올 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나도 감사해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찬양할 정도의 일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구속하시고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빛을 발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복음을 나만이 가지고, 이 축복을 나만이 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이웃에게 세상에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명자라고 해서도 무슨 목사나 전도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가 사명자이십니다. 하나님이 부르지 않으신 사람은 한 사람도 이 곳에 올 수가 없다는 말씀은, 다시 말해서 여기 지금 계신 분들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친히 부르셔서 오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빛을 발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축복을 전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당장 집밖으로 나가서 옆에 사는 사람을 교회로 끌고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벌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성령님께서 그와 같은 마음을 주셔서 복음을 전한다면 대단히 귀한 일이겠습니다만, 복음을 전하는 방법은 꼭 그것만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5장 16절,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このように、あなたがたの光を人々の前で輝かせ、人々があなたがたの良い行ないを見て、天におられるあなたがたの父をあがめるようにしなさい。

아무리 우리가 성경말씀을 전하고 예수님을 전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행실이 악하고 법을 지키지도 않고, 민폐를 끼치고 행동이 바르지 못하면 누가 예수님을 믿고 주님을 영접하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내 이웃이, 내 주변 사람이 나를 보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일본에 있는 속담 중에서 “犬も歩けば棒に当たる” 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직역을 하면, 개도 걸으면 막대기에 맞는다…는 뜻입니다만, 흥미로운 것은 이 속담의 해석이 두 가지가 있다는 점입니다. 먼저 첫번째 해석은, 그냥 집에 가만히 있어야지, 괜히 쓸데없이 돌아다니다가는 막대기에 얻어맞는 안 좋은 일이 생긴다는 해석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해석은, 집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밖에 나가야지만 무슨 기회라도 잡을 수 있다…라고 하는 해석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느 쪽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둘 다 일리 있는 해석입니다만, 믿음 안에서는 두 번째 해석이 옳다고 해야겠습니다. 아, 하나님이 나한테 축복을 주셨어. 아멘. 참 좋네. 감사하네. 라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축복을, 내게 주신 은혜를, 내게 주신 평안을, 내게 주신 감사를, 내게 주신 구원의 기쁨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빛은 비춰야 합니다. 사명은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한계시록 2장 4절~5절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しかし、あなたには非難すべきことがある。あなたは初めの愛から離れてしまった。それで、あなたは、どこから落 ちたかを思い出し、悔い改めて、初めの行ないをしなさい。もしそうでなく、悔い改めることをしないならば、わたしは、あなたのところに行って、あなたの燭台 をその置かれた所から取りはずしてしまおう。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을 보면,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증인이 무엇입니까. 증인은 증언을 하는 사람을 증인이라고 합니다. 내가 본 것, 내가 들은 것, 내가 받은 것을 증언하는 사람이 증인이지, 아무리 그 사람이 보고 들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증언하지 않는 사람은 증인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2절~33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ですから、わたしを人の前で認める者はみな、わたしも、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の前でその人を認めます。しかし、人の前でわたしを知らないと言うような者なら、わたしも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の前で、そんな者は知らないと言います。

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축복을 받았으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요,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축복을, 내게 주신 은혜를, 내게 주신 평안을, 내게 주신 감사를, 내게 주신 구원의 기쁨을 전하고, 주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 주님의 빛을 이 땅 온 세상에 발하여 전하는, 그리고 마침내 주님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6회 빈 집 →

← 제34회 핏값으로 사신 것

 
이카호중앙교회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34회 핏값으로 사신 것
2016년 7월 1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 9절~10절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피값으로 사신 것’ 血をもって買い取られたもの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얼마 전 한국 뉴스을 보니, 어떤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려 있었다고 합니다. “민중들은 99%가 개돼지다. 1%가 그 99%를 개돼지로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 우리나라도 신분제를 정했으면 좋겠다” 누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말을 들은 사람이, “나라가 사회적 간극을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느냐” 하니까,
“아이고… 출발선상이 다른데 그게 어떻게 같아지나. 현실이라는 게 있는데….”
그리고 또 지난 5월에 서울 지하철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가 사고로 사망한 19살짜리 청년이 있었는데, 그가 남긴 유품 중에 컵라면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무리하게 일을 시키고 감독책임도 소홀히 한 회사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같은 자리에 있던 사람이 이 사람한테 “구의역에서 컵라면도 못 먹고 죽은 아이가 가슴 아프지도 않은가. 사회가 안 변하면 내 자식도 그렇게 될 수 있는 거다. 그게 내 자식이라고 생각해 봐라.”라고 했더니
이 사람이 말을 하기를 “그게 어떻게 내 자식처럼 생각되나. 그렇게 말하는 건 위선이다.”
이런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또 어떤 싸구려 정치인이 이런 헛소리를 했나 했습니다만, 알고 보니 이 사람은, 서울 명문 사립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행정고시에 합격해서 교육부에 들어가게 됩니다. 국비로 미국에 가서 박사과정을 밟았습니다. 그 후 2010년에는 교육부 장관 비서관, 2011년에는 청와대 행정관으로 근무했으며, 올해 3월에 교육부 정책기획관으로 승진했습니다. 정책기획관이라고 하면 공무원 2급에 해당되고, 이는 그야말로 교육의 핵심을 담당하는 고위공무원이라고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사실은, 우연히 어쩌다가 이런 말들이 나왔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이 사람 또한 조직에 속해 있는 사람이고, 그 조직 속에서 생겨난 생각들이 머리속에 젖여 있다보니 불시에 이런 말들이 튀어나왔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결국 이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정부에서 국민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하는 것이 들통난 셈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 국민들은 개돼지인가요? 그 사람은 공직자인데 공무원은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먹고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은 뭐가 되나요? 참으로 한심한 노릇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의 가치는 어느 정도 될까요? 세상적으로 보면 우리가 재벌처럼 돈이 많지도 않습니다. 대통령이나 정부의 고위공직자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개돼지인가요? 그럴 리가요.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우리 자신은 어떤 존재인가요. 과연 얼마나 되는 값어치가 있을까요? 나 자신이 자랑스러우신가요? 물론 그럴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항상 그런가요? 아니요, 오히려 본인 스스로가 부끄러울 때도 있습니다. 살다 보면 어떤 때는 나 자신이 부끄럽고 못나게 느껴져서, 정말이지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자,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이 그림은 얼마일까요. 이 그림은 <Green White>라는 제목이고, 그린 사람은 엘스워스 랠리라는 미국 화가입니다. 여러분께서 이 작품에 가격을 붙인다면 얼마를 붙이시겠습니까. 이 작품은 경매에서 160만불, 약 1억 5천만엔, 16억 원 정도로 팔다고 합니다.
다음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얼마일까요. 이 그림은 사이 트웜블리라고 하는 미국 화가의 작품입니다. 이 작품에는 얼마나 가격을 붙이시겠어요? 이 작품은 경매에서 230만불. 23억원 정도에 팔렸습니다. 원하신다면 제가 이런 그림 한 장 정도는 그려드리겠습니다. 이 정도는 저도 좀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구입을 원하신다면 예배 후에 제게 문의해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 그림은 한스 아르퉁이라는 독일 태생의 프랑스 화가 작품입니다. 여러분 보시기에 어떠세요? 얼마쯤이면 사시겠어요? 이 작품은 지난 1월에 있었던 경매에서 225만 유로, 우리나라 돈으로 29억원 정도로 경매에서 팔렸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작품들을 보시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렇다면 이 그림에 붙은 가격은 사기인가요? 만약에 이 그림을 다른 사람이 그렸다거나, 아니면 이 그림이 원본이 아니라 복사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사기겠죠. 하지만 틀림없이 이 그림은 웰스워스 랠리라는 사람이 실제로 그렸고, 이 그림도 한스 아르퉁이라는 사람이 분명히 그린 작품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사기가 아닙니다. 그 그림을 사겠다는 사람이 있었고 그 가격에 팔렸다는 것이니까 누가 뭐라고 할 수 없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는요? 우리 스스로에 얼마의 값어치를 불이겠습니까. 말씀을 안 하셔도 좋습니다만, 내 가슴 위에 손을 얹어놓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얼마나 되는 가치가 있을까. 얼마쯤 가격을 맥이셨습니까.
그리고 가슴에 손을 얹어놓은 김에, 우리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나쁘게 판단한 적이 있나요? 아, 저 인간, 아무짝에도 쓰지 못할 인간 같으니라고……. 혹시 그런 일이 있다면 이 시간에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6장 37절,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そうすれば、自分もさばかれません。人を罪に定めてはいけません。そうすれば、自分も罪に定められません。赦しなさい。そうすれば、自分も赦されます。

고린도전서 4장 5절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主が来 られるまでは、何についても、先走ったさばきをしてはいけません。主は、やみの中に隠れた事も明るみに出し、心の中のはかりごとも明らかにされます。そのとき、神から各人に対する称賛が届くのです。


야고보서 4장 11절에는,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兄弟たち。互いに悪口を言い合ってはいけません。自分の兄弟の悪口を言い、自分の兄弟をさばく者は、律法の悪口を言い、律法 をさばいているのです。あなたが、もし律法をさばくなら、律法を守る者ではなくて、さばく者です。

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를 칭찬하지 않을지언정 비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 그렇다면 이야기를 돌아가서 나 자신은 어떨까요. 얼마나 값어치가 있겠습니까.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 9절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彼らは、新しい歌を歌って言った。「あなたは、巻き物を受け取 って、その封印を解くのにふさわしい方です。あなたは、ほふられて、その血により、あらゆる部族、国語、民族、国民の中から、神のために人々を贖い(あがない)、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신 분, 즉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자격이 있으신 분이 누구시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어린양 예수님이십니다.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시고 그 피값을 무엇을 사셨다는 것입니까.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즉 우리들을 사셨다는 것입니다. 검사 석에 앉아 있는 모세가, 율법의 이름으로 우리가 지은 죄, 내가 평생동안 지은 죄를 하나하나 읽어내면, 판사석에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 이를 들으시고 사형판결을 내리려고 하는 순간, 변호인석에 앉으신 예수님이 소리치십니다! 하나님 잠깐만요! 내가 이미 저 사람이 받을 벌을 대신 받았습니다. 저 사람이 흘릴 피를 내가 대신 흘렸고 저 사람이 받을 고통을 내가 대신 받았고, 저 사람이 당할 죽음을 내가 대신 당했습니다. 그러니까 저 사람한테는 더 이상 치를 죄값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2절~33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ですから、わたしを人の前で認める者はみな、わたしも、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の前でその人を認めます。しかし、人の前でわたしを知らないと言うような者なら、わたしも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の前で、そんな者は知らないと言います。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가 죄가 없나요? 아니요. 죄 투성이입니다. 일거수 일투족 죄로 시작해서 죄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죄를 누가 대신 갚아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를 내고 갚아주셨나요. 10억이요? 100억이요? 아닙니다. 그냥 사람도 아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갚아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존재입니까.

에베소서 1장 4절~6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すなわち、神は私たちを世界の基の置かれる前からキリストのうちに選び、御前で聖く、傷のない者にしようとされました。神は、ただみこころのままに、私たちを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ご自分の子にしようと、愛をもってあらかじめ定めておられたのです。それは、神がその愛する方によって私たちに与えてくださった 恵みの栄光が、ほめたたえられるためです。

우리를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다음에 하는 꼴을 보고 택하시거나, 아니면 우리 부모가 착하게 사는 것을 보시고 그 다음에 우리를 택하신 것이 아니라, 창세 전에, 즉 세상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이미 우리를 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거울을 보십시오. 우리가 아무리 초라해보이더라도, 우리 스스로가 보잘것 없이 보이더라도, 우리는 너무나도 대단한 존재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죠? 내가 대단해서요? 아닙니다. 나더러 대단하다고 말씀해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구주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대단하지도 않는데, 우리를 사랑하지도 않은데 예수님께서 스스로의 목숨을 버리십니까?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면, 자식을 위해서 부모는 집을 팔기도 하고 땅을 팔기도 합니다. 그 자식이 위대해서요? 훌륭해서요? 아닙니다. 아무리 못난 자식이라도 부모가 대단하게 여기고 사랑을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집이나 땅이 아니라 본인의 생명까지도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를 위해 모진 고통과 고난을 당해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보다 못하신 분이신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4장 8절~9절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ピリポはイエスに言った。「主よ。私たちに父を見せてください。そうすれば満足します。」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ピリポ。こんなに長い間あなたがたといっしょにいるのに、あなたはわたしを知らなかったのですか。わたしを見た者は、父を見たのです。どうしてあなたは、『私たちに父を見せてください。』と言うのですか。

사도 빌립이 예수님이 맨날 자기를 보내신 이, 하나님 아버지, 뭐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그렇게 말로만 하지 마시고, 우리한테 하나님을 좀 보여주세요. 그럼 우리가 좀 더 잘 믿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나는 너랑 그렇게 오랫동안 있지 않았냐,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인데, 나를 보고도 아직까지 하나님을 보여달라는 게 무슨 소리냐,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1장 3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御子は神の栄光の輝き、また神の本質の完全な現われであり、その力 あるみことばによって万物を保っておられます。また、罪のきよめを成し遂げて、すぐれて高い所の大能者の右の座に着かれました。

빌립보서 2장 5절~8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あなたがたの間では、そのような心構えでいなさい。それはキリスト・イエスのうちにも見られるものです。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方なのに、神のあり方を捨てることができないとは考えないで、ご自分を無にして、仕える者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たのです。キリストは人としての性質をもって現われ、自分を卑しくし、死にまで従い、実に十字架の死にまでも従われたのです。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 모두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고, 이 모든 하나님이 1/3씩 하나님이라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즉,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보다 못한 분이 아니라 똑같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기본 근간입니다. 그런데 이 부족한 우리 인간들이, 눈으로 보지 않으면 도무지 믿지 않으니까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사람의 모양으로 우리에게 보이시고, 그 뿐만이 아니라 십자게어 죽으셔서 그 핏값으로 우리를 죄 가운데에서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하지만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죠? 예수님께서 나 만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셨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이웃을 위해서도 피를 흘려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서로도 비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값없이 하찮게 여기는 것은 나를 위해 생명을 내주신 예수님을 하찮게 여기는 것이요, 나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려주신 십자가의 피를 하찮게 여기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내 이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내 이웃을 무시하거나 비방하는 일은 이 또한 예수님과 예수님의 희생을 무시하거나 비방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일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そこで、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心を尽くし、思いを尽くし、知力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愛せよ。』これがたいせつな第一の戒めです。『あなたの 隣人をあなた自身のように愛せよ。』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たいせつです。律法全体と預言者とが、この二つの戒めにかかっているのです。」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핏값으로 사신 것이 두 가지가 기록됩니다. 그 중 첫번째가 바로 나와 내 이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우리 이웃을 위해서도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주셨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이웃을 사랑하고, 아직 복음을 모르는 이웃이 있다면 복음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예수님이 핏값으로 사신 것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입니다.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あなたがたは自分自身と群れの全体とに気を配りなさい。聖霊は、神がご自身の血をもって買い取られた神の教会を牧させるために、あなたがたを群れの監督にお立 てになったのです。

이 교회는 사람이 돈 주고 산 것이 아니라, 교회 또한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사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교회는 침목회가 아닙니다. 세상적인 재미나 시간 떼우기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교회는 장사하는 곳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교회를 자신이 비즈니스를 하면서 무슨 고객관리 차원에서 다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교회는 세상적인 출세를 위해 다니는 곳도 아닙니다. 자신의 회사의 상사가 그 교회에 다니고 있어서, 자신의 거래처 사람이 교회에 다니고 있어서 맞이 못해 다니는 곳이 아닙니다. 물론 처음으로 교회에 다니게 되는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하물며 자기가 좋아하는 예쁜 여학생이 다니거다 잘생긴 남학생 따라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는 경우도 있겠지요. 그것을 제가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교회에 다니고 몇 년이 지났는데도, 교회에 다니는 목적이 여전히 그냥 주말에 시간 떼우기 위해서, 자기가 하는 비즈니스의 고객관리를 위해서, 자기 상사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 예쁘고 잘생긴 여학생 남학생을 따라다니기 위해서만이라면 이것은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라로 스스로 십자가에서 피흘리고 목숨을 버리셨나요?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골로새서 1장 18절에는,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また、御子はそのからだである教会のかしらです。御子は初めであり、死者の中から最初に生まれた方です。こうして、ご自身がすべてのことにおいて、第一のものとなられたのです。

에베소서 1: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また、神は、いっさいのものをキリストの足の下に従わせ、いっさいのものの上に立つかしらであるキリストを、教会にお与えになりました。

내가 학교에 다니면 학교 선생님들께 순종해야겠지요. 내가 회사에 다닌다면 회사의 머리인 사장님을 모시고 따라야겠지요.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의 머리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교회에 목사님을 믿으러 다니나요? 장로님을 믿으러 다니나요?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는 바로 누구십니까. 그렇죠.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핏값으로 사신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ふたりでも三人でも、わたしの名において集まる所には、わたしもその中にいるからです。」

두 세 사람이 무엇으로요? 그렇습니다. 세상적인 재미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명예나 출세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예수님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귀하게 여기고 감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나 자신의 삶 만이 아니라 내 이웃의 삶도 역시 귀하고 감사하게 여기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죄 많은 우리 영혼을 예수님께서 핏값으로 구원으로 이루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닙니다. 교회는 주말의 한가함을 달래주는 여가생활이 아닙니다. 시간이 남아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남아서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 생명을 내주고 그 핏값으로 받은 것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체이신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섬기면서 예배를 드릴 때도 주님을 묵상하고 섬기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죄많고 보잘것 없는 우리를 위해 그 귀한 보혈을 흘려주셨습니다. 우리가 언제 예수님한테 그런 부탁을 했나요? 안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죄가 그렇게 심각한 줄 몰랐던 것입니다. 그렇게 착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살면 천국에 갈 수 있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어땠습니까.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대가를 치루어야 했습니다. 그 대가가 무엇입니까. 벌금을 내면 됐나요? 양이나 염소를 잡아서 불로 태우면 됐나요? 아니면 어떤 착하거나 선한 사람의 희생이면 됐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피가 아니면 우리의 죄가 해결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흔쾌히 모든 것을 내주셨습니다. 누구를 위해서요? 예. 그렇습니다. 바로 이 못난 나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바로 우리 이웃을 위해서 그 귀한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제 눈에는 도저히 낙서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림을 위해서 10억을 냅니다. 그러면 그 그림은 얼마짜리 그림이에요? 예, 10억짜리 그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짜리 값어치인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 보혈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10억짜리 그림은 이제 누구의 것입니까. 그렇죠. 10억을 낸 사람의 것입니다. 왜 교회의 머리가 예수님이십니까. 그것은 바로 그 대가를 지불한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나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대가를 지불해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십니다. 믿으십니까?
자, 그렇다는 나는, 우리는 이제 누구의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는 예수님의 것입니다.

로마서 1장 6절,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あなたがたも、それらの人々の中にあって、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召された人々です。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삶을 귀하게 감사하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만이 아니라 우리 이웃을 귀하게 감사하게 여기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사신 교회도 귀하고 감사하게 여기셔야 합니다. 내 삶이 내 것이면 나 혼자 판단하면 그만이겠지요. 하지만 내 삶은 이제 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이라고 한다면 항상 기도하고 주님의 뜻으로 살기를 원하셔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값으로 산 우리 이웃도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되신 교회를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5회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

← 제33회 오만과 구원

 
이카호중앙교회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33회 오만과 구원
2016년 7월 1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6장 1절~7절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오만과 구원’ 傲慢と救い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지역을 강타한 지진은 사망자와 행방불명자 도합 2만명이라는 끔찍한 재앙이 되고, 이는 후에 동일본대지진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어서, 가옥이 무너지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일본 전국에 흩어져서, 여전히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낯설고 물설은 타지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지난달 말 현재 일본 정부 발표에 의하면 아직도 15만 5천명에 다다른다고 합니다. 그와 같은 끔찍한 재난에도 불구하고 전세계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바로 일본인들의 질서의식입니다. 지진 발생 직후, 생필품은 고사하고 식량과 식수조차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그 상황에서 다른 나라였다면 폭력사태가 일어나거나 하면서 혼란스러워졌을 텐데도 일본인들은 강한 인내심을 갖고 줄을 서고 질서를 지키는 모습이 세계언론을 통해 전해지면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달 6월 26일자 일본 아사히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렀습니다. 일본 후쿠히 현 후쿠이 시에 있는 한 여고에서 10년 전부터 “사랑의 우산”이라는 활동을 해오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게 뭔가 하면,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7년 여름에 갑자기 내린 비 때문에 우산을 미처 준비하지 못해서 흠뻑 비를 맞은 어떤 나이 드신 분의 모습을 본 이 여고에 다니는 학생이 아이디어를 내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이 학교 학생회가 주도해서, 그 인근 역이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우산을 놓자. 그렇게 해서 갑작스럽게 비가 내리면 그 우산을 이용하도록 하고, 그리고 다음 날에 그 우산을 제자 리에 돌려놓게 하자. 이런 취지로 초기에 200개의 우산을 가져다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1개월이 지났습니다. 우산을 가져다놓은 그 자리, 200개의 우산 중에 몇 프로나 돌아왔을까요?
앞서 본 일본사람들의 질서의식으로 미루어본다면 200자루 중에서 한 달 동안에 글쎄요. 안 돌아온 우산이 기껏해봐야 5개? 10개? 정도라고 생각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보니 남아있는 우산이 20자루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90프로인 180자루는 누군가가 가져간 채 안 돌려놓았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본 학생들의 심정은 어땠겠습니까.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외부 자선단체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부족한 우산을 보충해놓았습니다. 그리고 우산 색깔도 눈에 띄는 색, 빨강, 노랑, 초록 등으로 하고, 그리고 각 우산에는 돌려놓을 장소가 적힌 메모도 달아놓고, 그뿐만이 아니라 우산을 돌려놓아 달라고 하는 포스터도 붙여놓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반환율은 전혀 오르지 않았고 결국 10년이 되는 올해를 끝으로 이 “사랑의 우산” 운동을 종료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 동안 보충한 우산은 총 1100자루. 마지막 60자루를 보충하는 이 학교 학생 말에 의하면 “이미 포기했습니다. 우산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사람은 성선설보다 성악설이 맞는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학생이 말한 성선설, 성악설. 본래의 의미는 좀 다르지만, 요즘 쉽게 쓰이는 의미를 본다면, 사람은 태어나면서 선한 것인가, 아니면 태어나면서 악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만, 이 학생은 아마도 “사람이란 그 본성이 본래 나쁜 것 같다”는 뜻으로 쓰인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오늘 성경을 봅니다. 창세기 6장의 첫 부분을 보면 두 번의 반전이 나옵니다.
먼저 처음에는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한 후에 딸들이 낳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아들들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여자들을 아내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 말씀만을 보면 이상하지 않을 것도 같은데, 그 다음 구절에는, 하나님의 영이 사람과 함께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더라도 하나님의 심기가 매우 불편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반전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4절부터 시작해서 네피림이 있었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해서 자식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네피림이라고 하는 말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에서 거인족이다, 용사다 하는 등의 여러 가지 해설이 있습니다만, 아무튼 강한 사람, 힘이 센 사람을 뜻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들들이 딸들과 결혼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그 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낳은 자식들은 용사였고,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이 기록 역시 대단히 좋은 것처럼 보입니다만 5절에는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主は、地上に人の悪が増大し、その心に計ることがみな、いつも悪いことだけに傾くのをご覧になった。

이것이 바로 두 번째의 반전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당연한 것 같고 잘 된것 같이 보이는데도 왜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안좋게 생각하셨을까요.

먼저 첫번째 반전의 근거가 된 구절인 2절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神の子らは、人の娘たちが、いかにも美しいのを見て、その中から好きな者を選んで、自分たちの妻とした。

이 기록에는 <하나님의 아들들> 그리고 <사람의 딸들>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신학자들은 이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이고 사람의 딸들이 무엇이고 하면서 이 또한 여러가지로 자신의 주장을 피력합니다만, 이 구절, 그리고 이후에 나오는 문맥으로 보았을 때 이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 그리고 <사람에 속한 사람>이라고 이해해야지만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그렇다면 처음부터 하나님한테 속한 사람이 따로 있고, 사람에 속한 사람이 따로 있다…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만 상대하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한테만 복음을 전하면 되고, 사람에 속한 사람은 완전히 무시해도 된다…는 황당한 결론에 이르고 맙니다. 여기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을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하나님 생각대로 살아가는 사람>과 <사람의 생각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이해하셔야 합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들고 인종차별이다 남녀차별이다 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이것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즉, 그러니까 이 2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생각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람의 생각들 중에서 아름답게 보이는 생각, 좋아보이는 생각들을 취해서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인종차별도 아니고 남녀차별도 아닌, 영적인 믿음의 순수성이 훼손되고 인간적이고 물질적인 사고방직이 침입해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4절에 보면, 이처럼 하나님의 생각대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생각대로 <살아갔던> 사람들이, 사람의 생각대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타협하고 혼합되면서, 그 결과 나온 인물들이 용사이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돈을 많이 벌어보려고 밤이나 낮이나 죽도록 일을 한 결과 돈을 많이 벌었다… 이것이 기적이에요? 아니면 당연해요?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밤이나 낮이나 죽도록 공부한 결과 어려운 시험에 합격했다….이것이 기적이에요? 아니면 당연해요? 이 두 가지 모두 기적이 아니라 당연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생각대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인간적인 눈으로 보기에 아름답고 좋아보이는 방법대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 인간적인 눈으로 보기에 아름답고 좋아보이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것이 기적이에요? 아니면 당연해요? 예, 이것 또한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뻐하실까요? 하나님의 방법을 버리고 인간적인 방법을 택한 결과 인간이 보기에는 용사이자 인간 세상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삶을 택한 사람들을 보시고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셨겠습니까. 당연히 선하게 생각하실 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5절 말씀,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主は、地上に人の悪が増大し、その心に計ることがみな、いつも悪いことだけに傾くのをご覧になった。

입니다.

이사야 55장 8절을 봅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わたしの思いは、あなたがたの思いと異なり、わたしの道は、あなたがたの道と異なるからだ。

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만 몇 년 전에 북한의 김정일이 죽었을 때 그 누운 모습이 공개되었습니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에 자신의 부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도 죽어서 그 유리관 속에 누워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든 저의 생각은 “쯧쯧. 저렇게 갈 것을…”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자신들의 국민들이 굶주림에 허덕여도 이를 묵살하고 군사력에 돈을 들였고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죽인 결과 인간적으로 본다면 세계 최대 강국인 미국조차도 북한을 건드리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죽음에 대해서 진정으로 그의 삶을 축복되고 값진 인생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무리 북한 고위직 인사라 하더라도 진심으로 그를 존경하고 따랐던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저질렀던 그 일을 그대로 지금 김정은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알고, 시키지도 않은 롯을 데리고 집을 나옵니다. 이 롯은 사람의 생각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아브라함은 사람의 생각으로 롯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어떻게 하나요?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말합니다. 아무래도 네가 나를 떠나야겠다. 네가 먼저 길을 택하라, 나는 네가 택한 길과 다른 길을 택할 것이다. 믿음의 길, 하나님의 길은 언제나 항상 사람의 생각과 결별하고 난 다음부터 시작합니다.
그 말을 듣고 롯이 길을 택할 때의 모습이 창세기 13장에 나옵니다. 10절~11절을 보면요,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ロトが目を上げてヨルダンの低地全体を見渡すと、主がソドムとゴモラを滅 ぼされる以前であったので、その地はツォアルのほうに至るまで、主の園のように、またエジプトの地のように、どこもよく潤っていた。それで、ロトはそのヨルダンの低地全体を選び 取り、その後、東のほうに移動した。こうして彼らは互いに別れた。


롯이 눈을 들어 보니까 소돔 쪽이 아주 풍요로워보였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보니까요? 그렇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니까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눈이 아니라 자신의 눈이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보이는 대로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 그가 간 곳이 어디였습니까. 바로 죄악의 도시, 타락의 도시 소돔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눈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우리가 이제 길을 택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할 지를 모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눈을 들어야 합니까. 아니면 눈을 감아야 합니까. 조금 더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롯처럼 눈을 들어야 합니까, 아니면 감아야 합니까.
내 눈으로 보고 내가 판단하겠다는 것은 이것은 오만입니다. 하나님 됐어요. 내가 생각하고 내가 판단하겠습니다. 이것이 오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시나요? 아니요,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언제 역사하시나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역사하시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야 하겠습니까. 눈을 들어야 합니까 감아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눈을 감아야 합니다. 눈을 감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항복선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항복선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겠다고 하는 내 철저한 믿음의 선언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아니, 자신의 앞날을 판단한다면 두 눈을 똑바로 뜨고 판단해야지, 눈을 감는다는 것이 무슨 소리냐 하겠지요.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十字架のことばは、滅びに至る人々には愚かであっても、救いを受ける私たちには、神の力です。

네 눈을 의지하지 말고, 네 생각을 의지하지 말고, 나를 의지하라, 내 생각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눈을 감는 순간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눈을 감았을 때 시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나 눈을 감으면 기도가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의지하는 것, 십자가를 의지하는 것,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우리가 우리 생각으로 눈을 뜨면 오만이요, 눈을 감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구원입니다. 오만과 구원, 어느 쪽이 좋습니까. 인간적인 귀로 들어보면 오만! 구원! 당연히 오만!이 낫죠. 에게…9원? 10원도 아닌 9원을 어따 쓰게?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지금 드린 말씀은 말장난이지만 진정한 오만과 구원은 말장난이 아니라 우리 인생을 좌우하는 큰 갈림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만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요, 구원이 생명으로 가는 길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돌이켜보면 사람이 왜 타락하게 되었습니까. 창세기 3장 6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창세기 3장 6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そこで女が見ると、その木は、まことに食べるのに良く、目に慕わしく、賢くするというその木はいかにも好ましかった。それで女はその実を取 って食べ、いっしょにいた夫にも与えたので、夫も食べた。

하나님이 분명히 금했던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임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그 나무를 인간의 눈으로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생각은 분명히 절대로 먹지 말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생각은 그게 좋아보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셨다고 기록합니까.

오늘 본문 6절에,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それで主は、地上に人を造ったことを悔やみ、心を痛められた。

하나님이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지 못할 망정 하나님을 한탄하시게 만들고 근심하시게 만들어서야 되겠습니까.

로마서 8장 5절~6절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肉に従う者は肉的なことをもっぱら考えますが、御霊に従う者は御霊に属することをひたすら考えます。肉の思いは死であり、御霊 による思いは、いのちと平安です。

성경에는 벌써 답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불안할 때가 있습니다. 왜 없겠습니까. 그럴 때 인간은 판단합니다. 인간적인 눈을 뜨고 인간적인 머리로 판단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땠습니까. 하와로 말미암아 전인류는 타락하고 롯은 소돔으로 갔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정말 그런 나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요? 앞서 말씀드린 우산 이야기를 보고 인터넷에서 찾아보았습니다만, 다른 곳에서도 그와 같은 활동을 하는 곳이 많았습니다. 다만 그 지역에서는 그렇게 아쉬운 결과가 나왔다는 것일 뿐이죠. 다른 지역에는 지금도 잘 되고 있는 곳도 있다고 하는 걸을 보면, 이 일본의 공공질서에 대한 의식이 높은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인간이란, 그 여고생의 말처럼 인간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악할 수밖에 없는 존재일까요?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A라고 하는 길은 안락의 길, 풍요의 길입니다. 집도 크고 돈도 많고 삶이 넉넉한 길입니다. 한편 또 하나의 길 B라는 길은 불안하고 막막합니다. 그런데 A의 길은 인간의 길이요, 사망의 길이고, B는 하나님의 길이요, 믿음의 길이요, 복음의 길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길, 믿음의 길, 복음의 길을 택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앞길을 선택해야 합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눈을 떠야 합니까, 감아야 합니까. 잊지 마십시오. 눈을 뜨면 오만이요, 눈을 감으면 구원입니다. 눈을 뜨면 인간의 생각이요 눈을 감으면 하나님 생각입니다. 우리는 눈을 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길을 가는데, 운전하는데 눈을 감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가는 큰 일납니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결정을 내릴 때에 그 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 눈을 뜨고 내 생각 사람의 생각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눈을 감고 철저하게 하나님께 항복선언을 하고 전적으로 하나님 생각에 온전히 맡겼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삶을 책임지고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내 힘대로 하다가 내 능력대로 하다가 다 망하고 다 털리고 그 다음에서야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생각으로 나아가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그럼으로 인하여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신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4회 핏값으로 사신 것 →

← 제32회 베푸는 위로

 
이카호중앙교회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