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응답의 비결
2015년 12월 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7절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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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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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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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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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응답의 비결”答えを得る秘訣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일본에는 연말에 복권이 年末ジャンボ宝くじ 연말점보복권이라고 해서 판매가 됩니다. 작년에는 당첨금이 1등이 5억엔, 그리고 1등 당첨번호와 끝자리가 앞뒤인 경우, 예를 들어서 1등 끝자리가 5번이었다고 하면 끝자리가 4번과 6번은 각각 1억엔, 그런데 보통 연속된 번호로 사니까 1등 당첨자는 앞뒤번호까지 모두 갖고 있다면 최고 7억엔이라고 합니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지나 11월 25일부터 年末ジャンボ宝くじ가 판매되었다고 합니다. 매년 그렇지만 1등이 많이 나오는 곳에는 판매되는 날에는 장사진을 이룹니다. 그 곳이 바로 동경 긴자에 있는 한 판매창구라고 하는데, 판매되는 첫 날에는 1000명 가까이의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고 하고, 또 거기는 워낙 소문이 많이 나서인지 그 매장에서 복권을 사기 위해서 동경뿐만이 아니라 일본 전국에서 몰려올 정도라고 합니다. 특히나 올해는 사람들이 더 많이 몰린 이유가, 이 당첨금이 올해는 앞뒤번호를 합쳐서 사상최대금액인 10억엔이라고 합니다.
10억엔. 한국 돈으로는 100억원입니다. 아, 10억엔. 세금을 내고 이것저것 다 빼면 절반 정도로 줄어든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5억엔. 50억원입니다. 자, 이제 머리가 팍팍 돌아갑니다. 이 10억엔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아, 이 돈이 있으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그것도 하고……자세하게 말씀을 드리기는 좀 그렇습니다만, ……이 많은 문제들이 한번에 해결되고, 정말 목회 한 번 멋지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매우 구체적인 생각이 들 때까지 불과 10초도 안 걸렸습니다. 어디 그 뿐이에요? 성경구절까지 생각합니다.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로마서 8장 37절,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37節
「しかし、私たちは、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方によって、これらすべてのことの中にあっても、圧倒的な勝利者となるのです。」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10억엔! 절반이라 해도 5억엔! 이 얼마나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까. 자, 머릿속에 계획도 세워졌습니다. 성경말씀도 떠올랐습니다. 이제 1 장에 300엔. 앞뒤번호까지 다 사려면 최소한 3장을 사야 하니까 900엔. 1000엔짜리 1장 내면 100엔이 남습니다. 사야 되요? 말아야 되요?
여기서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 6절에는,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第一 コリント人への手紙 8章6節
「私たちには、父なる唯一の神がおられるだけで、すべてのものはこの神から出ており、私たちもこの神のために存在しているのです。また、唯一の主なるイエス・キリストがおられるだけで、すべてのものはこの主によって存在し、私たちもこの主によって存在するのです。」

욥기 41장 11절에 보면,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ヨブ記41章11節
「だれがわたしにささげたのか、わたしが報いなければならないほどに。天の下にあるものはみな、わたしのものだ。」

성경에는 온 천하 만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온 천하가 하나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0억엔을 얻기 위해서 뭐요? 300엔짜리 3장 900엔을 낸다? 아니요.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10억엔이 아니라 온 천하까지도 돈 한푼 한 들이고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 분이 바로 우리가 믿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인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한테는 이것저것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문제가 바로 돈 문제입니다. 다급할 때는, 정말 돈만 많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아요. 너무나 행복해질 것만 같습니다. 그 심정을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아는데 하나님은 왜 모르시겠습니까. 당연히 아시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를 미워해서요? 아니요. 제가 아까 말씀 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第一ヨハネの手紙4章16節
「私たちは、私たちに対する神の愛を知り、また信じています。神は愛です。愛のうちにいる者は神のうちにおり、神もその人のうちにおられます。」

말라기 1장 2절 전반부에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マラキ書
「「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愛している。」と主は仰せられる。あなたがたは言う。「どのように、あなたが私たちを愛されたのですか。」と。・・・・・・」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성경에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왜 우리에게는 시련이 닥쳐오고 문제가 쌓입니까?

예전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지옥에서 마귀들이 모여서, 어떻게 하면 기독교인들을 실족시킬까 회의를 했다고 합니다. 한 젊은 마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간단해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 잡아서 가둬버려요.” 라고 하니까 늙은 마귀가 하는 말이, “소용없다. 그 놈들을 가둬놓으니까 감옥에서 전도를 하는 바람에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많이 늘어버리고 말았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젊은 마귀가, “그럼 가둬놓고 먹을 것도 주지 말고 쫄쫄 굶게 해버리면 기운도 없어서 전도도 안 할 거잖아요?” 그러니까 늙은 마귀가 “그러면 금식한다고 해서 믿음만 좋아지고 효과도 없더라.” 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젊은 마귀가, “그럼 잡아서 매로 때리고 혼을 내주면 안 그럴 거잖아요?” 그랬더니 늙은 마귀가 혀를 차면서 “쯧쯧쯧. 옛날에 나도 그 방법을 써서 기독교인들을 많이 괴롭혀봤지만, 오히려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을 당한다고 기뻐하더라.”라고 하더랍니다.
이 말을 들은 또 다른 젊은 마귀가 “그러면 독방에 가둬버려요. 그러면 사람도 못 만나니까 전도도 못할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 늙은 마귀가, “소용 없다. 독방에 가두니까 밤이고 낮이고 기도를 얼마나 하는지 얼굴에 희색이 돌더라”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옆에 있던 다른 젊은 마귀가 “아, 그렇다면 다 잡아다가 죽여버려요. 그게 제일 완벽하잖아요?” 그랬더니 이 늙은 마귀가 인상을 찌푸리고 덜컥 화를 내면서 “무슨 허튼 소리! 그랬다가는 순교한다고 얼마나 기뻐하는 줄 알아? 응? 누가 순교 한 번 해봐. 그랬다가는 신자들이 백 배 천 배 늘어난단 말이야!” 라고 아주 불쾌해합니다.
이렇게 아무리 생각을 해도 기독교인들을 실족시킬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 대화를 듣고 있던 또 하나의 마귀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돈도 아주 넉넉하게 줘버려요. 그렇다면 분명히 그들은 믿음을 버릴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늙은 마귀가, 그거 좋다. 라고 해서 실제로 해보니까 아니나 다를까 모든 기독교인들이 믿음을 버리고 타락해버렸다는 내용입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에 있는 내용도 아닙니다만, 이 일화는 우리에게 많은 부분을 시사해줍니다. 과거 기독교가 탄압 받을 때, 사람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300년 동안이나 지하동굴에서 몰래 숨어 살았습니다. 3년도 30년도 아닌 300년입니다. 그들은 믿음이 곧 생명이자 인생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공인되고 안락해지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과거에는 어떤 시련과 고난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감사와 찬양으로 살았던 삶이 어느새 그저 한낱 종교, 취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살펴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서 왜 이렇게 우리한테 여러 문제들을 주시는지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재물이 있는 것이 나쁜 것인가요? 그렇다면 가난한 것이 축복입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잠언 10장 15절에는,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멸망이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箴言10章15節
「富(と)む者(もの)の財産(ざいさん)はその堅固(けんご)な城(しろ)。貧民(ひんみん)の滅(ほろ)びは彼(かれ)らの貧困(ひんこん)。」

가난과 궁핍은 결코 축복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시련이 닥치는지에 대한 힌트가 잠언서 다른 구절에 나와 있습니다.

잠언 14장 24절에는,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요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미련한 것이니라”
箴言14章24節
「知恵(ちえ)のある者(もの)の冠(かん)はその知恵(ちえ)。愚(おろ)かな者(もの)のかぶり物(もの)はその愚(おろ)かさ。」

지혜로운 자에게는 재물이 그의 면류관이고 미련한 자의 소유는 그저 미련할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한테 있어서 재물이 있으면 매우 유용하고 큰 도움이 되겠지만, 미련한 사람한테 있어서는 그 재물이 오히려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재물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지혜로워져야겠습니까, 미련해져야겠습니까. 그렇죠. 지혜로워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꼭 재물에 대한 축복만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갖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지혜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지혜로워질 수 있겠습니까.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하나요? 그러면 지혜로워지나요?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잠언 1장 7절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箴言1章7節
「主(しゅ)を恐(おそ)れることは知識(ちしき)の初(はじ)めである。愚(おろ)か者(もの)は知恵(ちえ)と訓戒(くんかい)をさげすむ。」

잠언 9장 10절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箴言9章10節
「 主(しゅ)を恐(おそ)れることは知恵(ちえ)の初(はじ)め、聖(せい)なる方(かた)を知(し)ることは悟(さと)りである。」

시편 111편 10절에는,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詩篇111篇10節
「主(しゅ)を恐(おそ)れることは、知恵(ちえ)の初(はじ)め。これを行(おこ)なう人(ひと)はみな、良(よ)い明察(めいさつ)を得(え)る。主(しゅ)の誉(ほま)れは永遠(えいえん)に堅(かた)く 立(た)つ。」

그리고 호세아 6장 3절에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ホセア書6章3節
「私(わたし)たちは、知(し)ろう。主(しゅ)を知(し)ることを切(きり)に追(お)い求(もと)めよう。主(しゅ)は暁(あかつき)の光(ひかり)のように、確(たし)かに現(あら)われ、大雨(おおあめ)のように、私(わたし)たちのところに 来(き)、後(のち)の雨(あめ)のように、地(ち)を潤(うるお)される。」」

우리가 지혜로워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자고 합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면 지혜로워지는 것이요, 지혜로워지면 드디어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 이제부터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에 거꾸로 접근하면 쉽게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을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열심히 일을 하고 돈을 벌어서, 그 돈을 가지고 차를 살까 집을 살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집을 사려고 마음을 먹습니다. 그것도 구체적으로 어디에 얼마나 하는 집을 사기로 계획을 합니다. 그리고 그 집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얼마를 벌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1년에 얼마를 저금해야 하고……이렇게 계산을 하면 그 집을 언제쯤 살 수 있을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무작정 열심히 공부하고 장례 꿈은 나중에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서 의사가 되고 싶다, 라고 하면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의과대학에 진학을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학교를 목표로 하고, 그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느 정도 공부해야 하고…이런 식으로 거꾸로 계산을 하면 의외로 명확하게 답을 얻을 수 있을 때가 많습니다. 기도 응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무조건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문제가 닥쳐왔습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이런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누가 아시겠습니까. 그렇죠.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12장 2절에는,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イザヤ書12章2節
「見よ。神は私の救い。私は信頼して恐れることはない。ヤハ、主は、私の力、私のほめ歌。私のために救いとなられた。」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왜 나한테 이런 문제가 생기냔 말이야.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게 맞아?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이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문제를 나에게 주신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이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최대의 힌트는 예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マルコの福音書16章15節
「それから、イエスは彼らにこう言われた。「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福音(ふくいん)を宣(の)べ伝(つた)えなさい。」

사도행전 1장 8절에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使徒行伝1章8節
「しかし、聖霊があなたがたの上(うえ)に臨(のぞ)まれるとき、あなたがたは力 を受けます。そして、エルサレム、ユダヤとサマリヤの全土、および地の果てにまで、わたしの証人となります。」」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파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 복음이라는 것은 정말 성경책을 읽어주면서 전도하는 것만이 아니라, 나한테 이런 문제가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역사를 하시고 이렇게 응답을 해주셨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증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으면 복음의 증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이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 받음으로 인해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드러내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처음 이야기로 돌아간다면, 제가 복권을 샀습니다. 그런데 10억엔이 당첨되었어요. 그렇다면 이 이야기로 인해서 하나님이 드러나겠어요, 복권이 드러나겠어요? 복권이 드러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기는커녕 죽어라고 복권만 사댈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아까 떠올린 성경구절은 어떻게 된 거죠? 성경이 거짓말을 한 건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 37절,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8章37節
「しかし、私たちは、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方によって、これらすべてのことの中にあっても、圧倒的な勝利者となるのです。」

이 성경구절을 몇 번 읽어봐도 <복권으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다>고 적혀 있지 않습니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다>고도 적혀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로 말미암아 이겨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가 누구십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자기 아들까지도 우리에게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피 한 방울 남김 없이 십자가에서 흘려주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가 잘 안 되기를 바랄 리가 없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당장 와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싶으시겠으나, 이 일로 인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시기 때문에 이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가 응답 받았을 때에 그 일로 말미암아 많은 이들이 하나님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계신 것입니다.
너무 어려우신가요? 그렇다면 쉬운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하나 문제를 내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제가 실제로 뼈저리게 겪은 일입니다. 제가 어딘가를 운전하면서 갈 때, 하루는 출발하기 전에 기도를 하고 갔고, 하루는 기도를 안 하고 갔습니다. 어느 쪽이 편안하고 안전하게 갔을까요? 두 번째 문제를 내겠습니다. 어느 날은 아침에 일어났을 때 기도로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은 기도 없이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어느 쪽이 보람되고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낼 수 있었을까요? 이 두 문제에 대한 답을 여러분들은 다 아실 수 있으십니다. 운전하기 전에 기도를 하고 갔더니, 항상 다니는 길이지만 그날 따라 뒤를 바짝 따라붙는 차도 없고, 길도 막히지 않고 얼마나 편했는지 모릅니다.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니 그 날에는 아침부터 밤까지 유익하고 보람된 하루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누구의 은혜입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기도를 하고 싶겠어요? 안 하고 싶겠어요? 하나님을 의지하고 싶겠어요? 안 하고 싶겠어요? 예, 맞습니다. 기도를 하고 싶어지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싶어지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전해지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문제가 생기고 시련이 닥쳐올 때 첫째로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이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드러내시기 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로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인지를 기도로써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시련을 겪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키고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나타내시는 것이 목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이처럼 하나님을 나타내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온 천하에 전해지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고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구할 때에 모든 기도의 응답을 받고 하나님 안에서 넉넉히 이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4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

← 제2회 세상의 빛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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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세상의 빛이라
2015년 11월 29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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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14절~16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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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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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탄절을 한 달 앞둔 날로서 이를 대강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것을 기다리는 절기로 지켜지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대강절을 맞이하여 “세상의 빛이라”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어떤 음악을 감상할 때, 물론 그것 자체를 즐겨도 무방하지만, 더욱 재미를 느끼려면 미리 어느 정도 공부하고 접하면 한층 감회가 새롭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베토벤이나 슈베르트의 교향곡이나 모짜르트의 오페라 같은 작품을 감상할 때에는, 그냥 보는 것보다 먼저 어느 정도 그 내용을 알아보고 감상하면 더 큰 재미를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비단 음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림 같은 것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 작품이 누구에 의해 어떤 시대적 배경에서 그려졌으며, 이 그림에 등장하는 어떤 것은 무엇을 상징하고 이 색깔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내용을 알면, 그냥 그림을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여행도 마찬가지라고 하죠. 우리가 국내나 해외에 갔을 때 어떤 건축물을 보면,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저 건물이 무엇이고 무슨 의미를 지닌 것인지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다면 그 때까지 보이지 않았던 것들까지도 볼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서 동경에 있는 도쿄타워. 그냥 보면 조명도 아름답고 색깔도 화려한 그 모습이지만, 이 도쿄타워가 완성된 1958년. 이 시기는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의해 잿더미가 된 상황에서 다시 일어서서 고도경제성장을 시작하려는 일본의 희망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동경 긴자에 있는 니혼바시는, 오랜 역사 속에서 동경의 상징입니다. 예를 들어서 동경에서 어디까지의 거리를 측정할 때 기준점이 되는 곳이 바로 이 니혼바시입니다. 그 구조는 니혼바시의 위상을 나타내듯 매우 화려한 모습인데, 그 위에 수도고속이 달리고 있어서 매우 답답하게 보입니다. 이것도 그냥 보면, 아 그런가보다…하고 지나갈 수도 있겠지만, 사실 1968년 동경올림픽을 앞두고 수도고속을 건설해야 하는데, 땅 위에 고가도로를 건설하면 그 땅을 매입해야 하기 때문에 돈도 필요하고 시간과 절차도 오래 걸립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강 줄기를 따라 고속도로를 건설하다 보니 동경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니혼바시 바로 위에까지 고속도로가 지나가게 된 것입니다. 서울에는 과거에 중앙청 건물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 건물만 보면 참 잘 지은 건물이지만, 그것이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 하고 통치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그것도 당시 왕이 살고 있었던 경복궁 안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똑 같이 눈에 보이는 것도 다르게 느껴집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성탄절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개신교와 가톨릭을 합쳐도 전 인구의 1프로가 안 된다는 일본도 이맘때쯤이 되면 일루미네이션이라고 해서 멋진 조명을 하고 연말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계절이 되었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여기저기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이 들려오고 성탄절과 연말을 즐거워하는 소리들이 넘쳐날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중에는 의외로 성탄절 크리스마스가 무슨 날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그런 분들한테는 크리스마스에 누가 태어났다거나 어떤 의미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아이들한테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선물을 가져다 주고, 젊은이들은 데이트를 합니다.
혹시 그거 아세요? 일본에만 있는 특이한 성탄절 문화가 있습니다. 첫째로, 성탄절에서 연말에 걸쳐서는 여기저기서 클래식 콘서트가 열리는데 주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듣습니다. 그러면서 그 곡이 찬송가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또 공교로운 것은 그 가사가 성탄과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전세계에서 성탄절에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듣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특이한 문화는, 일본 사람들이 성탄절에 무엇을 먹느냐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요? 물론 크리스마스 케익도 먹습니다만…사실 생각하고 보면 성탄절에 크리스마스 케익을 먹는다는 것도 독특한 문화입니다만, 이건 뭐 세계적으로 다 하고 있는 문화인데, 특별히 성탄절에 일본사람들이 유독 많이 먹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치킨입니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면 KFC 앞에는 줄을 서서 치킨을 사 간다고 합니다. 서양에도 추수감사절 때 칠면조 요리를 먹는 풍습이 있습니다만, 크리스마스 이브 때 치킨을 먹는다는 문화도 일본 특유의 관행이 아닐까 합니다.
케익이라고 하면 마치 생일케익이나 웨딩케익처럼 축하할만한 일이 있을 때에 먹는 것이니만큼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치킨을 먹는다는 것도 정말 흥미롭습니다. 그렇다고 무슨 축하할 일이 있을 때 치킨을 먹는 일이 일본에 있다면 이해가 가지만, 그것도 아닙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성탄’이라고 하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크리스마스는 즐거운 날, 신나는 날”이라는 의미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시내에 나가서 백화점이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마련해 놓은 크리스마스 장식들을 보면 산타클로스나 사슴들, 선물들을 그려놓은 곳은 많지만 정작 예수님을 나타내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는 마세요. 크리스마스 때 치킨을 먹거나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 벌 받는다…이런 뜻이 아니에요. 하지만 이와 같은 모습을 주님이 보신다면 어떤 생각이 드시겠어요?
이건 제가 대학교 1학년 때의 일입니다. 제 생일은 3월 하순입니다만, 아시다시피 한국은 3월 달에 입학식이 있습니다. 그러니 생일 때가 되었지만 아직 입학한지 한 달도 안 되었고, 저는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문회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제가 있던 서클 형이, 아~ 생일파티 하자면서, 수업이 끝난 후 저를 포함해서 서클 회원 5~6명이 학교에서 출발을 했는데, 이 선배가 또 아는 신입생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학교 건물에서 교문까지 걸어 나오는 도중에서 만나는 신입생들한테 모두 말을 걸어서 같이 가자고 꼬시는 거예요. 그랬더니 신림동 식당에 도착하고 봤더니 한 서른 명 가까이가 모였습니다. 하지만 거기 모였던 사람들 중 대부분은 그 날이 무슨 날인지, 왜 모였는지, 그리고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었습니다. 뭐, 이 경우는 그저 즐거운 추억일 수 있겠지만, 만약에 그 사람들이 제 생일 때마다 모여서 즐겁게 지내는데, 한 두 번도 아니고 몇 년이 지나도 나 자신에 대해서 관심도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지금 일본의 경우가 바로 이런 식입니다. 크리스마스가 무슨 날인지도 어떤 의미를 갖는 날인지도 모르니까 그냥 즐거워하고 맛있는 것 먹고… 그것이 바로 일본의 현주소입니다.
그렇다면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끼시는 외아들을 왜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까.
그 답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ひとり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저는 옛날에 여기 있는 ‘이처럼’이라는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번역들을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너무나도 사랑해서 독생자를 주셨다, 또는 하나님이 세상을 독생자까지 보내주실 만큼 이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주셨는데, 이 사실은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도 전에 이미 선지자 이사야에 의해 예언된 바 있습니다.

이사야 7장 14절을 보면요,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それゆえ、主みずから、あなたがたに一つのしるしを与えられる。見よ。処女がみごもっている。そして男の子を産み、その名を『インマヌエル』と名づける。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라”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그리 대단하지 않게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그 때까지는 극히 한정된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는데, 이제 예수님이 오신 후부터는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라겠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저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서만 오셨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의 말씀을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しかし、彼は、私たちのそむきの罪のために刺(さ)し通(とお)され、私(わたし)たちの咎(とが)のために砕(くだ)かれた。彼(かれ)への懲(こ)らしめが私(わたし)たちに平安(へいあん)をもたらし、彼(かれ)の打(う)ち傷(きず)によって、私たちはいやされた。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채찍에 찢기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이유는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예수님께서 모진 고초를 겪으신 이유도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체찍에 찢기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고 모친 고초를 겪으시기 위해 이 땅 위에 오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을 예수님께서는 모두 이루셨나요? 아니면 이루다가 마셨나요?

요한복음 19장 30절에는,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イエスは、酸(す)いぶどう酒(しゅ)を受(う)けられると、「完了した。」と言われた。そして、頭(あたま)を垂(た)れて、霊(れい)をお渡(わた)しになった。

라고 기록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목적을 하나도 빠짐 없이 모두 완벽하게 이루셨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 53장 5절의 말씀 후반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彼(かれ)への懲(こ)らしめが私(わたし)たちに平安(へいあん)をもたらし、彼(かれ)の打(う)ち傷(きず)によって、私たちはいやされた。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 고되고 힘든 사명을 모두 감당해주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평화를 누릴 수도 없고 나음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못난 우리를 위해서 징계를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셨으며,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피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흘려주셨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평화를 누릴 수도 있고 나음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서 24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すべての人は、罪を犯したので、神からの栄誉を受けることができず、ただ、神の恵みにより、キリスト・イエスによる贖(あがな)いのゆえに、価(あたい)なしに義(ぎ)と認(みと)められるのです。

내가 지은 죄를 하늘의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오셔서 모든 죄값을 대신 치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죄값을 치르기 위해 뭔가를 했나요? 아니요.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값 없이 얻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기쁨의 소식입니까. 얼마나 큰 복음이에요? 이 사실을 알면 정말 몇날 며칠을 깡총깡총 뛰면서 기뻐해도 모자랄 판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성탄절이 왜 즐겁냐고 하면 아이들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기쁘다고 해요. 어른들은 그냥 이유 없이 남들이 기뻐하니까 기뻐하고 있습니다.
뭐, 그렇습니다. 기뻐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에요.
크리스마스에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도 기뻐한다고 무슨 벌을 받는 것도 아니니 좋다고 칩시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무엇을 기억해야 합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살다가 죽으면 그게 다인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의하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ヘブル人への手紙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분명히 우리 인생의 마지막에는 심판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 심판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행전 16장 31절에는,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ふたりは、「主イエスを信じ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もあなたの家族も救われます。」と言った。

로마서 10장 9절에는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라고 합니다.
なぜなら、もしあなたの口でイエスを主と告白し、あなたの心で神は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てくださったと信じるなら、あなたは救われるからです。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모든 죄를 대신 사해주셨다는 것을 믿고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쁜 소식을 우리만 알고 있어야겠습니까? 크리스마스가 그저 친구들과 흥청망청 놀기만 하고 데이트나 하고 선물자랑만 하는 그런 날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넘쳐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를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14절에서 16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あなたがたは、世界の光です。山の上にある町は隠れる事ができません。
また、あかりをつけて、それを枡(ます)の下に置く者はありません。燭台(しょくだい)の上(うえ)に置(お)きます。そうすれば、家にいる人々全部を照らします。
このように、あなたがたの光を人々の前で輝かせ、人々があなたがたの良い行ないを見て、天におられるあなたがたの父をあがめるようにしなさい。

이사야 60장 1절에는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起きよ。光を放て。あなたの光が来て、主の栄光があなたの上に輝いているから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깡총깡총 뛸만한 기쁜 소식을, 아직 왜 기쁜 날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죠? 왜 전해야 하는 거죠? 그것은 바로 우리가 빛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제가 하는 말이 아니라 친히 하나님께서 우리더러 빛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진정한 빛은 반짝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빛을 발하지 않는 빛이 있을 수가 없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를 전하는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다가 협박을 하면서 더 이상 예수를 전하지 말라고 했더니 베드로와 요한이 뭐라고 하죠?

사도행전 4장 18절~21절에 보면,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そこで彼らを呼んで、いっさいイエスの名によって語ったり教えたりしてはならない、と命じた。ペテロとヨハネは彼らに答えて言った。「神に聞き従うより、あなたがたに聞き従うほうが、神の前に正しいかどうか、判断してください。私たちは、自分の見たこと、また聞いたことを、話さないわけにはいきません。」
そこで、彼らはふたりをさらにおどしたうえで、釈放した。それはみなの者が、この出来事のゆえに神をあがめていたので、人々の手前、ふたりを罰するすべがなかったからである。

이처럼 누가 전하지 말라고 해도 전하지 않고는 못 백이는, 바로 이것이 빛의 참된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이제 한달 남짓 지나면 성탄절입니다. 이번 성탄절 예배는 오는 12월 23일 수요 예배 시간대인 오후 1시를 예정하고 있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아직 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 한 달 동안 진정한 성탄의 의미를 전하고, 많은 영혼들을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 빛되신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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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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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1회 수확의 비결
2015년 11월 2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5장 9절~14절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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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한국은 지난 주가 추수감사절입니다만, 일본은 오늘에 주로 추수감사예배를 드립니다. 은혜로운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수확의 비결’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교회 생활을 좀 오래 하신 분들을 보면 가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하이고, 예수 믿기 참 어려워요.” 이런 말씀을 본인이 하지는 않더라도 누군가가 하시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세요? 예수 믿기 참 힘드신가요? 아니면 쉬우신가요?
병원에서 근무하시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치료하기 쉬운 환자와 치료하기 매우 어려운 환자가 있다고 합니다. 치료하기 쉬운 환자는 어떤 환자인가 하면, 지금 증상이 이러이러하니까 이런 검사를 하고, 그 다음에는 이 약을 며칠간 먹고 그 다음에 경과를 봐서 이러저러한 처방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하면 그 말에 순종하는 환자들은 대하기가 수월하고 치료효과도 뛰어나다고 합니다.
반면에 치료하기 매우 어려운 환자는 어떤 분들인가 하면, 이 분들은 이미 자기 증상도 다 알고 있고, 여기저기 병원도 많이 다녀본 사람들입니다. 의사가 지금 증상이 이러이러하니까 이런 검사를 하고 그 다음에는…뭐, 이렇게 말하기가 무섭게, “나는 내가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불필요한 검사는 할 필요 없이 이러저러한 약을 처방해주시면 됩니다.” 라고 하면서, 그냥 의사 말도 듣지 않는답니다. “아니, 그러지 마시고, 일단 검사부터 받아보셔야 합니다”라고 말하면, “글쎄 나에 대한 건 내가 더 잘 안다니까, 괜히 귀찮게 하지 말고, 그냥 내가 달라는 약이나 처방해주쇼” 라면서 막무가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그야말로 치료도 제대로 되지 않고, 당연히 치료효과도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한테 들은 얘기가 아니라, 이번에는 제가 직접 느꼈던 일을 말씀 드릴까 합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에 학원에 근무하면서 대학 진학반을 맡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있었던 일입니다만, 한창 진학지도 막마지일 때 함께 근무하던 어떤 선생님이 저한테 이런 말을 해주더라구요. 같이 공부하는 아이들끼리 서로 진학상담을 해준다는 거예요. 뭐, 이것만 들으면 그런가보다 할 수도 있겠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좀 심상치 않았습니다. 이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얼마 전에 어떤 학생과 상담을 해서 지원대학을 결정했는데, 얼마 후 자기는 더 낮춰야겠다는 말을 하더랩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정확한 대답은 안 하고 자꾸 말을 돌리면서 어쨌든 자기는 대학을 좀 더 낮춰야겠다는 말만 반복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집요하게 물었더니만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거예요.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아이들의 진학지도, 구체적으로는 지원할 대학을 결정할 때에는, 담당 선생님들이 학생 본인과 상담하고 성적을 분석하고 각 대학들의 정보에 입각해서 A대학 B학과를 지원하라고 말해주는데, 이것을 무시하고, 서로 자기들끼리 말하면서, 야 너는 거기 안돼. 더 낮춰야 돼, 그리고 또 다른 애한테는 너는 좀 더 높여서 써도 되겠다…뭐 이러면서 서로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담당 선생님들과 게네들, 어느 쪽 정보가 더 정확하겠어요? 백 보 양보를 해서 그 상담을 해준 아이가 이미 대학에 들어간 대학생이라면 또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건 그것도 아닙니다. 자기도 지금 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학생이면서 뭘 안다고 누구를 상담해주고 그런단 말이에요?
이렇게 조금 생각해보면 금방 알만한 일이지만, 상황이 너무 예민할 때에는 별 대수롭지 않은 말도 아주 민감하게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선생님 지도를 따르고 순종한 아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고, 그렇지 않고 엉뚱한 정보를 듣고 믿었던 아이들은 진학에 실패하거나, 진학을 했다 하더라도 원하는 대학보다 낮은 곳에 진학하게 되는 어이없는 일을 당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람 군대의 나아만 장군이 등장합니다. 이 아람이라는 나라는 지금의 시리아 쪽에 위치했었으며 수도는 현재까지 시리아의 수도인 다메섹이었습니다. 이 아람 군의 군대장관이 나아만이었습니다. 그냥 장군도 아닌 군대장관이었으니 그의 능력이나 영향력은 실로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그는 나병환자였습니다. 나병이라는 것이 예전 개역한글에서는 문둥병이라고 나와 있습니다만, 정확히 한센병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고는 합니다. 하지만 여하튼 매우 심각한 질병이었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열왕기하 5장 1절에는,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큰 부귀와 권세를 가졌다고는 하나, 자신의 몸이 썩어 들어가는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다면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마가복음 8장 36절 말씀에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아마도 그는 하루하루가 걱정과 근심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마침 그러던 차에, 열왕기하 5장 2절에서 3절을 보니,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공교롭게도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혀온 어린 소녀가 나아만의 아내한테,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한테 가서 나병을 고쳤으면 좋겠다고 조언을 합니다. 본래 이 소녀가 비록 포로이긴 하지만 성실하여 사람들이 이 소녀의 말을 믿었는지, 아니면 너무나도 절박해서 그 어린 소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는지는 안 나와 있습니다만, 이 말을 듣고 나아만 장군은 예물들을 싸 들고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오늘 읽은 본문 중에서 열왕기하 5장 9절에서 10절에 보면,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나아만 장군은 화를 냅니다.
이 부분을 자세히 읽어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매우 화가 났다고 성경은 기록하는데,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나아만 장군이 선지자 엘리사 집에 갈 때 말들과 병거를 거느리고 엘리사 집 문앞에 섰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엘리사가 무슨 군대를 가지고 있어서 자기들을 공격할까봐 그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나아만 장군이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그랬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냥 장군도 아닌 군대장관인데 얼마나 그 위세가 대단했겠습니까. 더구나 자신은 나병환자라는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세상에서도 유독 자기 자신을 과시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분들을 보면 대체적으로 무슨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그 부분을 보이지 않으려고 일부러 더 잘난 척도 하고 대단해 보이려고 노력하고 그러는 것이죠. 나아만 장군도 <내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야> 라는 식으로 말과 병거들 이끌며 가면, 글쎄요, 한국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엘리사가 저 멀리서 버선발로 뛰어나와 “아이구 어서 오십쇼. 이렇게 누추한 곳에 와 주셔서 황공하옵니다” 뭐 이러면서 맞아줄 줄 알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땠어요?
정작 엘리사는 나와보지도 않고 그의 종을 시켜서 말을 전합니다. 어떻게 하라고요?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면 낫는다” 라고 했다는 것이죠. 여기서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나아만은 지금 거기 왜 왔어요? 국경을 넘어 엘리사한테 간 이유가 뭐죠? 자기 위세를 자랑하러 간 거예요? 자존심 세우러 간 거예요? 아닙니다. 그럼 왜 갔어요? 예, 그렇습니다. 나병 고치러 간 거예요. 그런데, 중요한 핵심은 망각하고 그저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투덜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아만 장군이 화를 낸 첫 번째 이유입니다.
그럼 이제 나아만 장군의 심기가 불편해진 두 번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이어서 11절과 12절을 보면,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이 말을 들은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인지 뭔지 모르는 선지자가 직접 영접하러 나오지 않은 것도 열 받는데, 먼 길을 애써 와서 병을 고치는 방법이 기껏해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그게 다야?”
아마 이랬을지도 모릅니다.

“내 생각에 기도로 병을 고친다고 한다면 보통 나한테 나와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손을 그 환부 위에서 흔들어서 주여~~ 하고 기도를 해서 병을 고칠 줄 알았는데, 자기는 코빼기도 안 보여?” 뭐, 이러면서 화를 내지 않았나 합니다.

아니, 자기가 선지자입니까? 자기가 하나님이에요? 앞서 의사 선생님들이 말하는, 매우 다루기 힘든 환자처럼, 자기가 의사도 아닌데 나를 이렇게 고쳐주세요, 저런 약을 주세요…이렇게 말하는 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자기가 의사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닌데도 자기 생각대로 고쳐주지 않는다고 투덜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분들을 보면 이와 비슷한 분들이 계십니다. 다 자기가 정해요. 어디에 가든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판단하고, 자기가 행동하고, 자기 멋대로 다 해 놓고 그리고 마지막에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자, 이제 내가 다 해놨으니까 하나님, 축복해주세요.”라고 합니다.
아니, 하나님이 무슨 내가 하라는 대로 해주는 종이에요? 아니면, 요리는 자기가 다 해놓고 마지막 먹기 전에 살짝 뿌리는, 하나님이 무슨 소스나 케첩이에요?
성경에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시편 115편 9절~11절는,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예레미야 17장 7절~8절에는,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시편 57편 2절에는,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그런데 나아만은 내가 생각했던 방식대로 안 해준다고 지금 투덜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아만 장군의 심기가 불편해진 두 번째 이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을, 내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을 의지하는,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우리 모두가 되여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나아만 장군이 화를 낸 이유는, 요단 강에서 몸을 씻으라고 했던 말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강에서 몸을 씻으려면 어떡해 해야 합니까. 네 그렇습니다. 옷을 다 벗어야 해요. 더구나 나병환자였기 때문에 옷을 벗으면 피부가 허옇게 타 들어간 흉한 모습이 여과 없이 사람들 눈에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구예요? 군대장관입니다. 지금으로 본다면 참모총장이나 국방부장관 정도 되는 사람일 것입니다. 만약에 이 사람이 자기 나라에 있으면서 거기 강물에 몸을 씻는다고 한다면, 매우 거창하게 했을 것입니다. 글쎄요. 그 당시 상황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겠지만, 아무래도 수십 명, 수백 명의 경호원들이 그 강물 일대의 출입을 통제시키고, 멀리서도 안 보이게 가림막을 설치하고 그 부끄러운 모습을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해서 들어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 나아만 장군이 있는 곳은 남의 나라입니다. 거기서 옷을 벗고 자기의 그 흉한 살을 드러내고서 강물에 몸을 씻으라고? 이건 어림도 없는 소리였습니다. 적어도 나아만 장군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대장군인 나를 제대로 대우해주지도 않고, 기도도 제대로 해주지 않는 것도 부족해서, 이제 내 수치를 온 천하에 다 드러내라고? 에잇, 치사해서 내가 안 하고 만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에게 말한 내용 중에서 객관적으로 어려운 것이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무슨 큰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물리적으로 어려운 일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를 보다 못한 나아만 장군이 데리고 온 종들이 직언을 합니다. 13절에 보면요,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주인님, 그게 어려울 게 뭐가 있어요? 멀리 있는 것도 아닌, 저기 있는 요단 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잖아요? 그러면 되는데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요? 저기서 몸을 씻으면 다른 것도 아닌 나병이 낫는다잖아요?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어려울 게 없습니다. 엘리사한테 갔더니 저기 있는 요단강물에 몸을 씻으래요. 예, 알겠습니다 하고 얼릉 가서 몸을 씻었다면 금방 낫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아만 장군이 화를 내고, 그리고 하마터면 그 중병을 고치지도 못하고 그냥 돌아갈 뻔했던 이유가 뭐였죠?
첫째는 엘리사가 자기를 대우해주지 않았다는 것. 둘째는 자기 생각대로 해주지 않았다는 것, 셋째는 자기 치부를 드러내라고 한 것. 이 세 가지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응답을 받으려면 이 세 가지를 모두 극복해야만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모두 단 한 마디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뭘까요? 바로 내 자존심입니다. 이 자존심만 없었더라면 응답도 바로 받고, 피곤하게 화를 낼 일도 없었을 텐데, 하나님을 보기 전에 자기 자신을 보고, 자존심을 세우는 데에만 급급한 나머지, 하마터면 애써 먼 곳까지 와서 화만 내고 응답도 못 받은 채로 돌아갈 뻔 했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우리가 이 날 감사를 드리려면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바로 추수를 할 것이 있어야 감사를 드릴 수 있겠죠. 추수감사절에 추수할 것이 없다면 어떻게 감사를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 23절에 보면 우리가 거두어야 할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와 같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바로 나를 높이고 나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6장 5절에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라고 하십니다.

내 자존심을 세우고 내 생각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앞세우며,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우리 하나님을 사랑할 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고, 30배 60배 100배의 풍성한 수확을 얻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2회 세상의 빛이라 →

 
 
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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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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