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1회 결산을 합니다 - 기린선교회
2024년 4월 21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14절~30절
“14.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0.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マタイの福音書 25章 14節~30節
“14.天の御国は、旅に出るにあたり、自分のしもべたちを呼んで財産を預ける人のようです。
15.彼はそれぞれその能力に応じて、一人には五タラント、一人には二タラント、もう一人には一タラントを渡して旅に出かけた。するとすぐに、
16.五タラント預かった者は出て行って、それで商売をし、ほかに五タラントをもうけた。
17.同じように、二タラント預かった者もほかに二タラントをもうけた。
18.一方、一タラント預かった者は出て行って地面に穴を掘り、主人の金を隠した。
19.さて、かなり時がたってから、しもべたちの主人が帰って来て彼らと清算をした。
20.すると、五タラント預かった者が進み出て、もう五タラントを差し出して言った。『ご主人様。私に五タラント預けてくださいましたが、ご覧ください、私はほかに五タラントをもうけました。』
21.主人は彼に言った。『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おまえはわずかな物に忠実だったから、多くの物を任せよう。主人の喜びをともに喜んでくれ。』
22.二タラントの者も進み出て言った。『ご主人様。私に二タラント預けてくださいましたが、ご覧ください、ほかに二タラントをもうけました。』
23.主人は彼に言った。『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おまえはわずかな物に忠実だったから、多くの物を任せよう。主人の喜びをともに喜んでくれ。』
24.一タラント預かっていた者も進み出て言った。『ご主人様。あなた様は蒔かなかったところから刈り取り、散らさなかったところからかき集める、厳しい方だと分かっていました。
25.それで私は怖くなり、出て行って、あなた様の一タラントを地の中に隠しておきました。ご覧ください、これがあなた様の物です。』
26.しかし、主人は彼に答えた。『悪い、怠け者のしもべだ。私が蒔かなかったところから刈り取り、散らさなかったところからかき集めると分かっていたというのか。
27.それなら、おまえは私の金を銀行に預けておくべきだった。そうすれば、私が帰って来たとき、私の物を利息とともに返してもらえたのに。
28.だから、そのタラントを彼から取り上げて、十タラント持っている者に与えよ。
29.だれでも持っている者は与えられてもっと豊かになり、持っていない者は持っている物までも取り上げられるのだ。
30.この役に立たないしもべは外の暗闇に追い出せ。そこで泣いて歯ぎしりするの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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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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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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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16번째 시간으로서 “결산을 합니다” 清算をします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에 이어서 오늘은 마태복음 25장 14절~30절까지를 살펴보려고 하는데, 오늘 본문은 좀 길지만 말씀 자체는 우리에게 친숙한 내용이기 때문에 이해하시기에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은 이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한 다음에 이 말씀에 담겨진 뜻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종들의 주인이 먼 길을 떠나는데 그 전에 자기 소유를 그 종들에게 맡겼다고 하지요. 한 사람한테는 금 다섯 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다고 합니다.

예전에 제가 한 달란트라고 하는 것의 무게가 어느 정도라고 말씀 드렸는지 혹시 기억하시나요?


당시의 무게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씀 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한 달란트가 지금의 무게로 환산했을 때 신학자들은 대략 27킬로에서 34킬로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이를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30킬로라고 하지요.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뭐가 한 달란트래요? 예, 금이 한 달란트라고 합니다.

요즘은 금값도 많이 올랐다고 하지요? 그래서 금 1그램이 1만엔, 10만원이 넘는다고 하는데, 이것도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금 1그램에 1만엔, 10만원이라고 한다면, 1킬로는 몇 그램이에요? 예, 1킬로는 1000그램입니다.

그러면 1그램에 1만엔, 10만원이라고 한다면, 1킬로, 1000그램은 얼마입니까. 예, 계산 쉽지요? 1그램에 1만엔, 10만원이라고 한다면 1킬로, 1000그램이라면 1000만엔, 1억원이 됩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는 무게가 어떻게 되었지요? 예, 30킬로입니다.

금이 1킬로에 1000만엔, 1억원이었으니까 30킬로면 어떻게 됩니까.

예, 30배를 하면 되니까 3억엔, 30억원이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이게 몇 달란트요? 예, 한 달란트가 그 정도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서 종에게 한 달란트를 맡겼다고 해서 조금 맡겼다고 생각하면 이는 오해입니다. 제일 적게 맡긴 종이라 하더라도 3억엔, 30억원이라는 거금을 맡겼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큰 재산을 맡기고 주인은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오랜 후에 돌아와서 결산을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다른 종들은 주인이 맡긴 재산을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해서 그 재산을 불렸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칭찬을 하지요.

하지만 마지막 종은 어떻습니까. 그 종은 일을 하지 않고 땅에 묻어 놨었어요.

이 사실을 알았던 주인은 크게 화를 냅니다.


마태복음 25장 26절~30절
“26.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マタイの福音書 25章 26節~30節
26.しかし、主人は彼に答えた。『悪い、怠け者のしもべだ。私が蒔かなかったところから刈り取り、散らさなかったところからかき集めると分かっていたというのか。
27.それなら、おまえは私の金を銀行に預けておくべきだった。そうすれば、私が帰って来たとき、私の物を利息とともに返してもらえたのに。
28.だから、そのタラントを彼から取り上げて、十タラント持っている者に与えよ。
29.だれでも持っている者は与えられてもっと豊かになり、持っていない者は持っている物までも取り上げられるのだ。
30.この役に立たないしもべは外の暗闇に追い出せ。そこで泣いて歯ぎしりするのだ。』”

주인은 그를 가리켜서 악하고 게으른 종(悪い、怠け者のしもべ)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가졌던 것을 빼앗길 뿐만 아니라 바깥 어두운 데(外の暗闇)로 내쫓기고는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말씀하세요.

여기서 우리는 일단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부분을 확인하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확인해야 할 점은,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신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이 땅에 처음 오시고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6장 6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が言ったとおりです。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は今から後(のち)に、人の子が力ある方の右の座に着き、そして天の雲とともに来るのを見ることになります。」


그리고 이 말씀은 계시록에도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7절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見よ、その方は雲とともに来られる。すべての目が彼を見る。彼を突き刺した者たちさえも。地のすべての部族は彼のゆえに胸をたたいて悲しむ。しかり、アーメン。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2천년 전에 하늘로 올라가시고는 다시 이 땅에 오시게 되는데 그 때의 상황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라고 우리는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십니다. 이 때는 저기 이스라엘 시골 마구간에서 조용히 태어나시는 것이 아니라, 영광 중에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며, 이 모습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하물며 예수님을 박해했던 사람이나 모두가 보는 가운데 오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오신 다음에 무엇을 하신다고 말씀하세요? 나를 믿은 사람은 구원 받고 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뜨린다고 하시나요?


오늘 말씀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결산(清算)”을 하시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확인해야 할 두 번째 점입니다. 주님은 분명 “결산”을 하시겠다고 해요.

많은 사람들은 사실 이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자, 우선 오늘 본문 말씀 중에 등장하는 주인을 예수님이라고 한다면, 그 주인 밑에 있는 세 종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에요? 아니면 안 믿는 사람이에요.

예, 믿는 사람이지요.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누구한테 돈을 잠시 가지고 있으라고 맡긴다고 한다면, 아무리 적은 돈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디 사는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한테 돈을 맡기겠습니까.

그런데 여기 보세요. 그냥 푼돈이 아니에요. 자기마치 금 30킬로, 대략 3억엔, 30억원이나 되는 돈을 아무한테나 맡길 리가 있겠습니까.


에이, 뭐 그래도 부자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한국이나 일본에서 아무리 대기업 재벌 회장이라 하더라도 누군지 모르는 사람한테 3억엔, 30억원을 맡기겠어요?

그리고 자기 회사 사람이라 하더라도 말단 사원이나 대리, 과장한테 그 큰 돈을 맡기겠습니까. 적어도 부장이나 아니면 임원급한테 맡기지 않겠어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교회 돈 3억엔, 30억원이나 되는 돈을 교회에 나온지 얼마 안 되는 초신자한테 맡기지는 않을 것 아니에요. 아무리 못해도 교회 임원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 이렇게 본다면 여기에 나오는 종이라고 하는 사람은 모두가 다 그 주인과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함께 있어왔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도 그 종들이 분명히 성실하게 일을 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겠지요.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어떻습니까. 다른 종들은 열심히 맡은 바 소임을 감당했는데 마지막 종은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기껏 그 큰 재산을 맡겨 놨더니, 아무 일도 안 했어요.


이는 마치 그런 것이지요. 주인이 그 종을 위해서 3억엔이나 들여서 회사를 차려줬는데, 주인이 떠나자 셔터문 내리고 놀기만 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는 단순히 게으른 것만이 아니라 주인의 기대를 의도적으로 저버렸기 때문에 악한 종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종은 어떻게 되었다고 합니까. 그래도 예수님을 믿었으니까 구원을 받았다고 하시나요? 아닙니다.

마태복음 25장 30절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30.この役に立たないしもべは外の暗闇に追い出せ。そこで泣いて歯ぎしりするのだ。』”

생각해보십시오.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김을 당하고 거기서 슬피 우는 사람을 두고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하시겠습니까.

어떤 분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단순히 슬퍼한다는 것이 아니라, “슬피 우며 이를 간다(泣いて歯ぎしりする)”는 것은 자신은 전혀 예상하지 않은 일을 당한 상황을 뜻한다는 것이에요.


저는 이 주장에 대해서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종은 내가 주인이 맡겨준 돈을 땅에 묻어 놨다가 주인이 다시 왔을 때 그걸 파내서 주면 칭찬 받을 줄 알았던 거예요.

그런데 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반대로 크게 혼이 났을 뿐 아니라 내쫓김을 당하고 말았다고 하니 얼마나 놀라고 억울했겠습니까.

그래서 단순히 슬피 우는 것만이 아니라 이를 갈았다고까지 한다는 것이지요. 참 맞는 말씀 같아요.

그런데 저는 요즘 교회에 보면 마지막 날에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슬피 울며 기를 갈게 되지나 않을까 대단히 우려가 됩니다.

이는 이단 사이비 단체에서만이 아니라 복음주의 개혁주의 기독교 교회에서도 말합니다. 한 번 믿으면 죄를 지어도 괜찮아. 한 번 믿으면 그 때에 구원이 약속되는 것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얼마나 좋아요. 하지만 주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고 계시잖아요. 아무리 큰 재산을 맡길 만한 종이라 하더라도 마지막 날에 결산을 할 것이고 그 결과에 따라서는 축복이나 구원 대신 저주를 받을 수 있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열왕기상 13장에 보시면 흥미로운 내용이 등장합니다.

솔로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남북이 나뉘게 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이 있는 남쪽 유다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レハブアム)이 왕이 되지만 북쪽 이스라엘은 여로보암(ヤロブアム)이 통치를 하게 되지요.

그런데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도 우상을 숭배해요. 바로 그 때 남쪽 유다에서 한 선지자가 북 이스라엘 벧엘(ベテル)까지 와서 보자 여로보암이 우상한테 절을 합니다. 이 때에 이 선지자는 여로보암(ヤロブアム) 왕을 저주하고 죽음을 예언합니다.

이를 들은 여로보암(ヤロブアム) 왕은 이 유다에서 온 선지자를 대접하려고 하는데, 이 선지자는 이를 거부합니다.

그 이유를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열왕기상 13장 8절~10절
“8.하나님의 사람이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 절반을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 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9.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10.이에 다른 길로 가고 자기가 벧엘에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아니하니라”


すると神の人は王に言った。「たとえ、あなたの宮殿の半分を私に下さっても、私はあなたと一緒に参りません。また、この場所ではパンも食べず、水も飲みません。
というのは、主のことばによって、『パンを食べてはならない。水も飲んではならない。また、もと来た道を通って帰ってはならない』と命じられているからです。」
こうして、彼はベテルに来たときの道は通らず、ほかの道を通って帰った。


유다에서 온 선지자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여기서는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말고 오라고 하셨기 때문에 아무리 왕이 먹거나 마시라고 해도 못 마시겠다고 거절을 해요.

그런데 마침 그 벧엘에 어떤 한 늙은 선지자가 살고 있었다고 해요. 그의 아들들이 여로보암 왕과 유다에서 온 선지자 사이에 있었던 일을 보거나 들었나보죠? 이 일을 집에 가서 자신의 아버지인 나이 든 선지자한테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버지 선지자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 유다에서 온 선지자를 따라가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마침내 이 늙은 선지자가 지금 막 유다로 돌아가고 있는 선지자를 길가에서 만나요. 그러면서 이 늙은 선지자가 말하기를 자기 집에 가서 식사를 하자고 청합니다.

하지만 거긴 자기 고향이 유다가 아니라 아직 이스라엘 땅이에요. 왕의 명령도 거절했는데 그 사람의 부탁을 들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말하지요.

그러자 이 늙은 선지자가 유다에서 온 선지자한테 말합니다.


열왕기상 13장 18절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彼はその人に言った。「私もあなたと同じく預言者です。御使いが主のことばを受けて、私に『その人をあなたの家に連れ帰り、パンを食べさせ、水を飲ませよ』と告げました。」こうして彼はその人をだました。

이게 무슨 말이에요? 이 나이든 선지자가 말하기를, 나도 당신과 같은 선지자인데, 천사가 나한테 나타나서 말하기를 하나님 말씀에 당신을 집으로 초청하고는 함께 식사를 하라고 하셨다더라……이랬다는 거잖아요.

하지만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거짓말이에요. 하지만 유다에서 온 선지자는 이 말을 믿고 이 나이든 선지자를 따라가서 식사를 하게 됩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열왕기상 13장 20절~22절
“20.그들이 상 앞에 앉아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하니
21.그가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외쳐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22.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하신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彼らが食卓に着いていたとき、その人を連れ戻した預言者に主のことばがあったので、
彼は、ユダから来た神の人に呼びかけて言った。「主はこう言われる。『あなたは主のことばに背き、あなたの神、主が命じた命令を守らず、
引き返して、主があなたに、パンを食べてはならない、水も飲んではならないと言った場所でパンを食べ、水を飲んだので、あなたの亡骸は、あなたの先祖の墓には入らない。』」


유다 선지자가 나이든 선지자 집에 와서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영이 갑자기 이 나이 든 선지자한테 임하더니만, 너 왜 내가 하지 말라고 한 짓을 하느냐고 크게 꾸짖는게 아닙니까.

그러면서 그의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데, 결국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자한테 물려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유다에서 온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다는 것은 우리가 쉽게 알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이 나이 든 선지자가 왜 이런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이 유다에서 온 선지자를 집에까지 초청해서 식사를 했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나이든 선지자는 왜 이 유다에서 온 선지자를 집으로 초청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어쩌면 먼 길을 온 선지자를 만나고 싶어 하는 반가운 마음, 아니면 대담하게 왕한테까지 찾아가서는 그 면전에서 그와 같은 무서운 저주까지도 할 수 있는 선지자라고 하기에 존경하는 마음에서 초청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그 선지자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처참한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이야기 흐름 상으로 보았을 때, 악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만들어서 이 유다에서 온 선지자를 죽여버리자고 하는, 그와 같은 의도는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인간성이 그런 악한 사람 같지는 않아요. 그가 한 거짓말도 남의 것을 빼앗으려 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러나 그는 분명 잘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잘 못한 것입니까. 이는 단순한 거짓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했다고 하는 크나큰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왜곡되고 변질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요즘 이스라엘과 팔레스틴, 그리고 이스라엘과 이란 간에 있어서 전운이 감돌자 어느 목사님은 그런 말씀을 했다고 하지요.

이제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도할 때다. 예루살렘을 위해 기도할 때다.

이게 사실입니까. 여전히 저기 중동 이스라엘에 사는 사람들, 또는 유전자적 유대인만이 유대인입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는 이방인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경에 그렇게 적혀 있나요?


로마서 2장 28절~29절
“28.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外見上の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はなく、また、外見上のからだの割礼が割礼ではないからです。
かえって人目に隠れた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あり、文字ではなく、御霊による心の割礼こそ割礼だからです。その人への称賛は人からではなく、神から来ます。

성경에 이렇게 적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동에 있는 이스라엘이 어쩧다는 둥 예루살렘이 어쩧다는 둥의 주장을 한다면, 그 주장대로라면 예수님도 필요없고 신약도 필요 없고 당장 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배를 가르고 속죄제나 속건제를 드려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얼마 전에 한국에서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잖아요. 그런데 어떤 목사님이 강단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하는군요.

어느 특정 정당을 지지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위해 투표하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그 분들을 제가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이와 같은 주장을 하시는 분들, 인간적으로 본다면 나쁜 분들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말씀을 하신다 하더라도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해서,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하신 말씀은 아니지 않을까 해요. 사실 알고 보면 다 좋으신 분들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있어서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말씀이 없습니다. 주님은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어요.

그러면 꿈속에서 천사가 말을 했다고 하시겠습니까. 기도 중에 예수님이 나타나서 알려주셨다고 하시겠습니까.

교회에서도 보면 가끔 꿈 좋아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이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23장 25절~26절
"25.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꿈을 꾸었다 꿈을 꾸었다고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26.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

わたしの名によって偽りを預言する預言者たちが、『私は夢を見た。夢を見た』と言うのを、わたしは聞いた。
いつまで、あの預言者たちの心に偽りの預言があるのか。心の偽りごとを語る預言者たちのうちに。

예레미야 29장 8절~9절
“8.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고 믿지 말라
9.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まことに、イスラエルの神、万軍の主はこう言われる。『あなたがたのうちにいる預言者たちや、占い師たちにごまかされるな。また、あなたがたが見ている夢に聞き従ってはならない。
なぜなら、彼らはわたしの名を使って、偽りをあなたがたに預言しているからだ。わたしは彼らを遣わしていない──主のことば。』

하나님이 보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둥 예수님의 얼굴을 보았다는 둥 한다면, 이는 그야말로 이단 사이비 교주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고린도후서 11장 14절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しかし、驚くには及びません。サタンでさえ光の御使いに変装します。

성경에 이렇게 적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꿈이다 환상이다 하면서 이를 믿으래요. 그리고 더 심한 경우는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풀면서 또 그것을 믿으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15절~16절
“15.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また、私たちの主の忍耐は救いであると考えなさい。愛する、私たちの兄弟パウロも、自分に与えられた知恵にしたがって、あなたがたに書き送ったとおりです。
その手紙でパウロは、ほかのすべての手紙でもしているように、このことについて語っています。その中には理解しにくいところがあります。無知な、心の定まらない人たちは、聖書の他の箇所と同様、それらを曲解して、自分自身に滅びを招きます。


기도도 좋고 방언도 좋고 금식도 좋아요. 하지만 무엇보다 성경말씀을 올바로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을 모르고 목사님 설교를 포함해서 맨날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말이나, 성경이 아닌 다른 책에만 귀를 기울이다가, 마지막 날에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겨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우리는 성경 말씀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다른 것이 아닌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祈りや異言、断食もいいでしょう。しかし、何よりも聖書のみ言葉を正しく知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

聖書も知らずに、ただ、牧師先生の説教も含めて、あの人この人の言っていることとか、聖書以外のほかの本にばかり耳を傾けていて、最後の日に外の暗闇に追い出されて歯ぎしりをすることになったらどうしますか。

私たちは聖書を正しく学ばなければなりません。何よりも主のみ言葉に耳を傾けなくてはならないのであります。



이제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아니면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주님은 우리에게 결산을 하자고 하실 것입니다.

바로 그 마지막 날 주님 앞에서 결산을 하게 되는 바로 그 날에, 주님으로부터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라고 하는 크나큰 칭찬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これから先、主が来られるとき、あるいは私たちが主の御前に立つとき、主は私たちに清算をしようと言われるはずです。

まさにその最後の日、主の御前で清算することになるまさにその日に、『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といって大きな称賛を受けられ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主の御名においてお祈り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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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40회 슬기 있는 자 - 기린선교회
2024년 4월 14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1절~13절
“1.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マタイの福音書 25章 1節~13節
“1.そこで、天の御国は、それぞれともしびを持って花婿を迎えに出る、十人の娘にたとえることができます。
2.そのうちの五人は愚かで、五人は賢かった。
3.愚かな娘たちは、ともしびは持っていたが、油を持って来ていなかった。
4.賢い娘たちは自分のともしびと一緒に、入れ物に油を入れて持っていた。
5.花婿が来るのが遅くなったので、娘たちはみな眠くなり寝入ってしまった。
6.ところが夜中になって、『さあ、花婿だ。迎えに出なさい』と叫ぶ声がした。
7.そこで娘たちはみな起きて、自分のともしびを整えた。
8.愚かな娘たちは賢い娘たちに言った。『私たちのともしびが消えそうなので、あなたがたの油を分けてください。』
9.しかし、賢い娘たちは答えた。『いいえ、分けてあげるにはとても足りません。それより、店に行って自分の分を買ってください。』
10.そこで娘たちが買いに行くと、その間に花婿が来た。用意ができていた娘たちは彼と一緒に婚礼の祝宴に入り、戸が閉じられた。
11.その後で残りの娘たちも来て、『ご主人様、ご主人様、開けてください』と言った。
12.しかし、主人は答えた。『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私はあなたがたを知りません。』
13.です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その日、その時を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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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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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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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15번째 시간으로서 “슬기 있는 자” 賢い者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복음서 중에서도 마태복음에만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에 대해서 말씀을 시작하시는데, 여기에 보시면, 두 부류의 여성들이 등장을 합니다.


마태복음 25장 1절~2절
“1.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1.そこで、天の御国は、それぞれともしびを持って花婿を迎えに出る、十人の娘にたとえることができます。
2.そのうちの五人は愚かで、五人は賢かった。


이 여성들은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슬기 있는 여성과 슬기 없는 여성의 차이가 있겠지요. 그 차이가 3절과 4절입니다.

마태복음 25장 3절~4절
“3.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3.愚かな娘たちは、ともしびは持っていたが、油を持って来ていなかった。
4.賢い娘たちは自分のともしびと一緒に、入れ物に油を入れて持っていた。


여기서 슬기 있는 자들은 등과 함께 기름을 담아서 가져갔습니다. 그런데 슬기가 없는 자들은 어떻게 했냐 하면 등만 가져가고 기름은 가져가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아니, 미련해도 유분수지 어떻게 등을 가져가면서 기름을 안 가져갔나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본문을 읽어가면 그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자, 일단 이 열 명의 여성이 이제 신랑이 온다고 해서 맞으러 갔어요. 여기서도 아니, 신랑은 하나인데 왜 신부가 열 명이냐고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점도 역시 좀 뒤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이 열 명의 여성이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땠다고 합니까.

마태복음 25장 5절
“5.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5.花婿が来るのが遅くなったので、娘たちはみな眠くなり寝入ってしまった。

예, 온다고 한 신랑이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를 않아요. 그래서 어떻게 했냐 하면 다 졸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일이 터졌습니다.

마태복음 25장 6절
“6.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6.ところが夜中になって、『さあ、花婿だ。迎えに出なさい』と叫ぶ声がした。

신랑이 이제 온다는 소리가 났는데 그게 하필이면 밤중이었다는 것이에요.

마태복음 25장 7절
“7.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7.そこで娘たちはみな起きて、自分のともしびを整えた。


다들 졸고 있었는데 갑자기 연락이 오니까 서둘러 준비를 시작했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마태복음 25장 8절
“8.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8.愚かな娘たちは賢い娘たちに言った。『私たちのともしびが消えそうなので、あなたがたの油を分けてください。』

여기서 보면 미련한 자들이라 하더라도 기름을 아주 안 가져간 것이 아니에요. 그들도 등불을 켜기 위해서는 기름이 필요하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문제는 뭐예요? 예, 기름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이에요. 반면에 슬기 있는 자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가지고 있었던 기름이 넉넉했었나보죠? 그러니까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기름을 나누어 달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슬기 있는 자들은 어떻게 말합니까.


마태복음 25장 9절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9.しかし、賢い娘たちは答えた。『いいえ、分けてあげるにはとても足りません。それより、店に行って自分の分を買ってくださ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름이 서로 나누어 써도 충분할지 어떨지 모른다. 우리가 나누어 주면 둘 다 부족할 지도 모르니까, 그것보다는 어서 가서 기름을 파는 곳에 가서 사오는 게 낫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말을 들은 미련한 자들은 서둘러 사러 가지요.

그러자 어떻게 됩니까.

마태복음 25장 10절
“10.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0.そこで娘たちが買いに行くと、その間に花婿が来た。用意ができていた娘たちは彼と一緒に婚礼の祝宴に入り、戸が閉じられた。


하필이면 그 미련한 자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어요. 그래서 신랑은 그를 기다리면서 준비하던 슬기로운 자들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고는 어떻게 됐다고 합니까. 예, 문이 닫혔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제 얼마 후에 아까 그 기름을 사러 갔던 자들이 돌아왔습니다.

마태복음 25장 11절
“11.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1.その後で残りの娘たちも来て、『ご主人様、ご主人様、開けてください』と言った。

사실 이 사람들도 무슨 나쁜 짓을 저지른 게 아니잖아요. 따지고 보면 신랑을 기다리기 위해서 기름을 사러 갔다 온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그들에게 신랑의 말은 단호합니다.

마태복음 25장 12절
“12.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2.しかし、主人は答えた。『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私はあなたがたを知りません。』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을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13절
“13.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13.です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その日、その時を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ら。” 

자, 이렇게 끝나게 되는데, 이 말씀에 대한 가르침을 우선 전체적으로 살펴본 다음에 몇몇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 확인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여기서는 혼인잔치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혼인잔치는 말하자면 결혼식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는 사람에게 있어서 최대의 기쁨이자 인생에 있어서도 중요한 행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시면 이 혼인잔치를 천국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9절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御使いは私に、「子羊の婚宴に招かれている者たちは幸いだ、と書き記しなさい」と言い、また「これらは神の真実なことばである」と言った。

즉 성경에 있어서 우리의 신랑은 예수님이 되는 것이고 신부는 우리 모두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성별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부부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사람보다, 사실 부모자식이나 형제 자매보다도 가까운 존재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한국에도 부부간에는 촌수가 없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은 1촌입니다만, 부부간에는 촌수가 없어요.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은 ‘親等’이라고 하는데, 역시 부부간에는 촌수가 없어요.

부부라고 하는 것이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창세기 2장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それゆえ、男は父と母を離れ、その妻と結ばれ、ふたりは一体となるのである。

부부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두 존재가 아니라 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이처럼 마지막 날에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 가서 주님과 한 몸을 이루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두 사람들 슬기 있는 자들과 미련한 자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신랑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분명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요. 이는 분명 “신랑이 온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신랑이 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당연히 “신랑이 올 것이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는데도 나가서 기다릴 리가 없겠지요.

더구나 미련한 자들 만이 아니라 슬기 있는 자들도 신랑을 맞이러 나갔다고 하니, 이는 분명 곧 신랑이 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상황을 제가 항상 드리는 “믿음과 말씀과 행함”에 대해서 보면 어떻습니까.

그들은 모두에게 “믿음”이 있었어요. 그들에게는 신랑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씀”을 알았어요. 신랑이 곧 온다는 말씀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본다면 그들은 모두 흠잡을 곳이 없는 믿음과 말씀을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문제는 “행함”이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슬기 있는 자들 뿐만 아니라 미련한 자들이라 하더라도 등불을 켜기 위해 기름이 필요하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기름을 넣어 갔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신랑이 오지 않아요. 그래서 그들은 모두 잠이 들었다고 하지요.

그런데 한밤중에 갑자기 소리가 나기를 지금 신랑이 왔으니 맞으러 나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깜짝 놀라 서둘러 준비를 시작하지요.

6절에 보시면 “밤중에(ところが夜中になって)”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전에는 밤중이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테니까 아마도 그들이 신랑을 맞으러 나갔을 때에는 밝았을 것이기 때문에 등불을 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랑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 깨어보니까 주위가 캄캄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제서야 등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이제 온다고 하면 빨리 와야 할 것 아니에요. 하지만 온다는 소리가 들린 다음에도 좀처럼 그 모습이 안 보였나죠?

열 명이 모두 다 등을 켜고 기다리고 있는데 한쪽 등이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이는 바로 미련한 자들의 등불이었죠.

자, 큰 일 났습니다. 신랑이 도착할 때까지 불이 켜져 있어야 할 터인데, 등불의 기름이 떨어져가요. 그래서 그들은 슬기 있는 자들에게 말하기를 기름을 나눠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어떻게 말합니까. 슬기 있는 자들이 말하기를 그렇게 되면 우리 서로가 다 모자라게 될 지도 모른다고 하잖아요.

이는 당연하지요. 신랑이 언제 도착할 지 모르는데, 막상 도착했더니 둘다 불이 꺼져 있어봐요.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 기다렸던 것이 모두 헛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차라리 어서 가서 사오는 게 낫지 않겠냐고 말합니다. 그제서야 미련한 자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서둘러 달려가서 기름을 사러 갔는데, 하필이면 마침 그 때 신랑이 도착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제서야 기름을 사서 돌아온 여성들은 신랑이 들어간 집의 문을 두드립니다.

제발 문을 열어 주세요. 저희도 지금까지 기다렸었다고요. 이 날을 기다렸는데 이렇게 들어가버리면 어떡해요. 어서 빨리 열어주세요.

하지만 안에서 들려온 소리는 무엇이었습니까.


마태복음 25장 12절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2.しかし、主人は答えた。『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私はあなたがたを知りません。』

문 안에서 들려온 소리는 엄합니다. 너희는 내가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니 들어올 수 없다. 그러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이들에게는 모두 믿음과 말씀이 있었습니다. 신랑이 온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이는 분명 말씀, 그러니까 신랑이 올 것이라는 말씀을 알았다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문제는 “행함”에 있었던 것입니다.

행함? 물론 그들은 행함이 있었습니다. 신랑이 온다고 하니까 등을 들고 맞으러 갔잖아요. 하지만 여기서의 문제가 뭐냐 하면 기름이었던 것이지요.

그들은 등불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어떤 주석서에 보면 유대인들의 결혼식 행사에 등불을 켜는 관례가 있었다고 하는데, 만약에 이를 위해 그들이 등불을 준비했다고 한다면 그들은 모두 같은 분량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하지만 한쪽은 기름을 넉넉히 준비하고 다른 한 쪽은 기름이 부족했다고 한다면, 이는 그들이 생각하기를 등불은 어디까지나 비상용이라고 여기지 않았을까 합니다. 말하자면 신랑을 맞이하는 데에 있어서 등불과 넉넉한 기름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필수품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어느 분 주장에 의하면 이 때의 등은 우리가 생각하는 작은 등잔불 같은 것이 아니라, 불이 활활 타는 횃불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하시는데, 저는 오히려 이 주장에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형식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라면 작은 등불이라도 괜찮을 수 있겠습니다만, 정말 캄캄한 길을 오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라면 오히려 횃불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횃불의 경우에는 아무리 오래 탄다 하더라도 10분에서 15분 정도라고 해요. 그러고는 꺼지기 때문에 기름을 더 보충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저는 여기서 길을 나서기 전의 두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슬기 있는 자 다섯 명과 미련한 자 다섯 명이 이제부터 신랑을 맞으러 나갈 때에, 미련한 자들은 예비 기름을 전혀 준비하지 않은 반면, 슬기 있는 자들은 예비 기름을 몇 통이고 준비했을 지 모릅니다.

만약 이 때에 등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등잔불이 아니라 횃불이었다고 한다면 얼마나 많은 기름이 필요했겠습니까. 그야말로 두 손에 무겁도록 낑낑 매고 기름을 들고 나갔을지도 모르잖아요.

이 모습을 보고 미련한 자들은 뭐라고 했을까요.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해봐. 신랑이 온다면 아무리 늦더라도 초저녁일텐데 무슨 그렇게 무거운 기름을 준비할 필요가 있냐. 괜히 옷이나 지저분해지고 땀을 흘리면 화장도 지워질 수도 있는데 우리처럼 이렇게 깔끔하게 하고 가야하지 않겠냐……뭐 이러면서 똑똑한 척을 하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슬기로운 자들은 여기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기름을 여유롭게 준비해서 혹시 모를 일에 대비했던 것이지요.

마태복음 25장 13절
“13.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13.です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その日、その時を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ら。” 

예수님의 이 말씀은 곧 언제 올지 모르니 항상 대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지난 2009년 1월 15일 오후 3시 26분. 한 여객기가 뉴욕의 공항을 이륙하자 1분만에 두 번이나 새 떼와 충돌함으로 인해서 엔진 두 개가 모두 고장이 났다고 합니다. 관제소에서는 공항으로 회항하라고 했으나 비행기 상황으로 보아서 이는 도저히 불가능 하다고 판단한 설렌버거 기장은 (サレンバーガー:Sullenberger) 뉴욕 시내를 흐르는 허드슨 강에 비상착륙을 감행합니다.

이 허드슨 강에 대한 착륙은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155명의 승객과 승무원 모두가 무사히 구조가 되었다고 하지요.

셀런버거 기장은 허드슨 강에 착륙한 뒤에도 승무원과 승객들이 모두 밖으로 무사히 탈출했는지 비행기 안을 두 번이나 살피고 난 다음에야 마지막에 자신도 탈출했다고 하니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이 사건은 ‘허드슨 강의 기적’이라고 불리고 있어서 2016년에는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얼마 후 이 허드슨 강의 주역인 설렌버거 기장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었느냐고 하는 질문에 대해 그는 말합니다.

“나는 평소 훈련대로 했을 뿐이다.”

그렇죠. 그는 평소에도 그런 훈련을 해왔던 것이었습니다. 아니, 그 기장만이 아니라 다른 비행기 조종사들은 분명 그와 같은 비상착륙 훈련을 몇 번이고 해왔을 것이고, 그리고 지금도 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아휴, 세상에 항공기가 강 위에 착륙할 일이 얼마나 있다고 그런 훈련을 해……그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렇겠지요. 수많은 비행기 조종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평생동안 강 위에 착륙할 일이 있는 조종사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참고로 미국 국가교통안전위원회 (国家運輸安全委員会) (NTSB)의 자료에 따르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할 확률은 0.0009%이고, 이는 438년 동안 매일 탑승해서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정도라고 하지요.

말하자면 그만큼 비행기 사고는 극히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대비해서 철저하게 훈련을 해왔기 때문에 허드슨 강 비상착륙이라고 하는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을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이 순간도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파하고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럴 필요까지 없는데 쓸데 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적당히 믿는 자신은 지혜롭고 그와 같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있는 힘껏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미련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0장 16절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このように、後の者が先になり、先の者が後になります。」

저는 이 말씀이 이와 같이 들립니다.

“이와 같이 미련 자가 슬기로운 자가 되고, 슬기로운 자가 미련한 자가 되리라”

このように、愚かな者が賢い者になり、賢い者が愚かな者になります。

바울은 참으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9장 16절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私が福音を宣べ伝えても、私の誇りにはなりません。そうせずにはいられないのです。福音を宣べ伝えないなら、私はわざわいです。

고린도전서 9장 27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むしろ、私は自分のからだを打ちたたいて服従させます。ほかの人に宣べ伝えておきながら、自分自身が失格者になら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빌립보서 3장 13절~14절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兄弟たち。私は、自分がすでに捕らえたなどと考えてはいません。ただ一つのこと、すなわち、うしろのものを忘れ、前のものに向かって身を伸ばし、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그는 자신이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 정도 행함이면 내가 구원 받을 수 있으니까 이제 안심하고 다리 뻗고 쉬어도 된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직도 부족하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다. 내가 아직 부족해서 버림을 받을지도 모른다, 더 할 수 있다, 더 해야 한다, 그와 같은 마음으로 불타오르고 있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은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언제 오실까요. 이에 대해서 오늘 말씀에 보시면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 오시느냐 하면, 바로 “하필이면 그 때(よりによってそんな時)” 오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돼요? 예, 그렇습니다. 항상 대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미련한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혜로운 자, 슬기로운 자, 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일에는 지나침이 없습니다. 믿음과 말씀을 통하여 넉넉한 행함으로 대비함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주님 앞에서 슬기 있는 자로서 인정함을 받아, 마지막 날에 기쁨으로 넘치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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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39회 오병이어의 두 가지 은혜 - 기린선교회
2024년 4월 7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5절~11절
“5.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10.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ヨハネの福音書 6章 5節~11節
“5.イエスは目を上げて、大勢の群衆がご自分の方に来るのを見て、ピリポに言われた。「どこからパンを買って来て、この人たちに食べさせようか。」
6.イエスがこう言われたのは、ピリポを試すためであり、ご自分が何をしようとしているのかを、知っておられた。
7.ピリポはイエスに答えた。「一人ひとりが少しずつ取るにしても、二百デナリのパンでは足りません。」
8.弟子の一人、シモン・ペテロの兄弟アンデレがイエスに言った。
9.「ここに、大麦のパン五つと、魚二匹を持っている少年がいます。でも、こんなに大勢の人々では、それが何になるでしょう。」
10.イエスは言われた。「人々を座らせなさい。」その場所には草がたくさんあったので、男たちは座った。その数はおよそ五千人であった。
11.そうして、イエスはパンを取り、感謝の祈りをささげてから、座っている人たちに分け与えられた。魚も同じようにして、彼らが望むだけ与えら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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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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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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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부활절을 맞이해서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13번째 시간으로서 “거듭난 사람” 新しく生まれた人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2천년 전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부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는 단순히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더니 다시 살아나셨더라. 신기하다……로 끝나는 하나의 흥미로운 사건, 요즘 식으로 하자면 무슨 해외 토픽, 세상에 이런 일이……같은 방송에 나올 만한 그런 놀라운 사건으로 끝나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부활하셨습니까.

사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십자가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정작 부활의 의미에 대해서 물으면 긴가민가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부활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 기억해야 합니다.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는 우리의 죄가 해결되지 않아요. 말하자면 우리가 아직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가 아직 용서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잘못을 저질렀어요. 그렇다면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배상이든 보상이든 간에 돈으로 물어주어야 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민사상이든 형사상이든 간에 가해자인 내가 피해자인 상대방과 합의를 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필요한 절차가 뭐냐 하면, 내가 이렇게 사과를 하고 물어주니까 재판이나 기타 방법으로 더 이상 요구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반드시 들어가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기껏 내가 물어주었는데 또다시 재판을 하게 되면 이 쪽이 이중 삼중으로 물어주어야 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잖아요.

이와 같은 합의에 동의한다는 것은 그 합의 내용에 대해서 만족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데 100만원을 물어 주기로 했어요. 그리고 정중히 사과도 했습니다. 여기에 만족을 하면 상대방이 좋다. 그 정도 금액을 받고 사과도 했으니까 내가 용서해주마……라고 하면서 도장을 찍거나 사인을 하게 되면 이제 제가 잘못한 일은 상호간에 있어서 해결되는 것이지요.

로마서 5장 11절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それだけではなく、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私たちは神を喜んでいます。キリストによって、今や、私たちは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のです。

재판에서 원고와 피고로 나누어서 다투게 되면 하루하루가 피를 말립니다. 재판장에서는 온갖 지저분한 것들이 증거로 제시되어서 날을 거듭할수록 부끄러운 일들만 드러나게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상대방과 화해를 하고 합의를 하게 되면 그 다툼은 끝나게 됩니다. 이제 상대방은 적이 아닌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부끄러움이 사라지고 기쁨의 화해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버리면 아무것도 해결인 안 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하나님과 합의가 안됐거든요. 하나님이 아직 합의문서에 사인을 안 하셨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기쁘게 받으시고, 그 십자가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신 증거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어서는 부활이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부활은 바로 우리의 죄를 모두 다 해결해주신 하나님과 우리와의 합의문서인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에는 또 하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부활 하나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에 있어서도 공통되는 부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부활하셨을까요.

자, 학생들이 아침에 학교에 갔습니다. 교실에 들어가니까 칠판에 어려운 수학 문제가 적혀 있었어요. 그 문제를 어떻게 푸는지 아는 학생들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들어오시더니 그 문제 풀이를 처음부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문제 푸는 방법을 몰랐는데 그 풀이를 보고 나니까 이제 학생들도 그 문제를 이해하고 풀 수 있게 되었어요.

자, 그렇다면 선생님이 그 문제를 푼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선생님이니까 너희들과는 차원이 달라. 이 문제는 내가 선생님이니까 풀 수 있는 거야. 그런 마음으로 선생님이 이 문제를 푸셨을까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자, 이 문제는 이런 식으로 풀면 누구든지 풀 수 있어 하고 그 문제 푸는 방식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주려는 것 아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がたの信仰が薄いからで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もし、からし種ほどの信仰があるなら、この山に『ここからあそこに移れ』と言えば移ります。あなたがたにできないことは何もありません。」

누가복음 17장 6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すると主は言われた。「もしあなたがたに、からし種ほどの信仰があれば、この桑の木に『根元から抜かれて、海の中に植われ』と言うなら、あなたがたに従います。

겨자씨 크기는 1~2미리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그 나무는 2~3미터 크기의 나무가 되어 숲을 이룬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우리가 아주 작은 믿음의 씨를 심기만 해도 나무가 움직이고 산이 움직이는 역사가 일어난다고 말씀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 있었지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의롭게 보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의 희생으로는 그 누구의 죄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義人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

이 세상에 의인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죄인이 아닌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어느 누가 스스로의 희생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의 죄를 해결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피조물인 인간이 아무리 수백 번 십자가에 달린다 하더라도 우리 이웃은커녕 자기 자신의 죄도 해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능하십니다. 예수님 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 중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 이것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만이 감당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우리에게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라는 말씀은 안 하셨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외의 것, 그러니까 십자가를 제외하고 공생애 기간 동안에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모두 할 수 있는 일이요, 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 한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부활은 어떻습니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는 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까. 아니면 우리 모두가 해야만 하는 일입니까.

고린도전서 15장 13절~15절
“13.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もし死者の復活がないとしたら、キリストもよみがえらなかったでしょう。
そして、キリストがよみがえらなかったとしたら、私たちの宣教は空しく、あなたがたの信仰も空しいものとなります。
私たちは神についての偽証人(ぎしょうにん)ということにさえなります。なぜなら、かりに死者がよみがえらないとしたら、神はキリストをよみがえらせなかったはずなのに、私たちは神がキリストをよみがえらせたと言って、神に逆らう証言をしたことになるからです。

성경은 우리 스스로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부활이 없으면 예수님의 부활도 없었을 것이며,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복음도 믿음도 모두 헛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뒤집어집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부활도 있는 것이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복음도 믿음도 모두 진리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성경 중에서 한 가지 부분에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빌립보서 3장 11절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何とかして死者の中からの復活に達したいのです。

빌립보서를 기록한 바울은 어떻게 해서든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고백합니다.

아니, 바울 정도가 되었으면 당연히 부활은 따 놓은 단상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안심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부활에 이르려고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뿐만이 아니지요.


빌립보서 3장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고린도전서 9장 27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むしろ、私は自分のからだを打ちたたいて服従させます。ほかの人に宣べ伝えておきながら、自分自身が失格者になら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바울은 가만히 멈추어 있지 않습니다. 안심하고 있지 않아요. 지금도 주님이 위에서 주실 상을 위해 달려간다고 합니다. 이렇게 복음을 많이 전하고 주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한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반면에 우리는 믿음 안에서 어떠한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신앙 안에서 너무나도 안주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그냥 가만히 하루하루 보내고 있는 것 아닙니까.

지금은 로스쿨도 생기고 그래서 제도가 좀 바뀌고 그랬습니다만, 예전에는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2년 동안 사법연수원 과정을 거쳐야지만 법조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법대 동기 변호사가 제게 털어놓은 내용입니다만, 자기는 시험에 합격한 다음 사법연수원 과정에서 방심을 해서 공부를 좀 소홀이 했다는 거예요.

사실 시험에 합격하기가 어렵지 연수원이야 웬만하면 수료는 되기 때문이거든요.

그러나 시험에 합격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겠습니다만, 알고 보면 이 사법연수원 과정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사법시험 성적과 이 연수원 과정에서의 성적을 바탕으로 판사나 검사로 임용이 되고 그리고 그 성적이 관직에 있으면서 계속 따라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연수원을 마치고 난 다음 사법시험 성적과 연수원에서의 성적에 있어서 상위권은 판사로 임용되고 그 다음이 검사로 임용이 됩니다. 그 외에는 임용되고 싶어도 될 수 없어요. 연수원을 마치고 변호사 자격이 주어질 뿐입니다.


하지만 이 차이를 본다면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일단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연수원에 들어가면 공무원입니다. 5급이에요. 이 5급이라고 하는 것은 외무고시나 행정고시에 합격을 해서 사무관으로 임명되었을 때와 같지요.

5급 사무관이라고 하면 과장급인데, 사실 밑에 9급부터 시작하면 거의 정년퇴임 할 때쯤 잘하면 달 수 있는 것이 5급입니다. 그런데 고시에 합격하면 빠르면 20대 후반, 그리고 보통 30대 초반에 벌써 그 자리에 오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벌써 스타트 라인이 다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판사나 검사로 임용이 되면 그 급수가 어떻게 되냐 하면 갑자기 2단계가 뜁니다. 초임 판사나 초임 검사는 벌써 3급이에요.

보통 고시에 합격하고 5급부터 시작을 했다 하더라도 5급에서 3급까지는 빨라도 17년 이상이 걸리는데,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2년만 열심히 공부하기만 하면 연수원을 마치고 2년 만에 3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야말로 고속 출세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판사나 검사로 임관되지 못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냐 하면, 그냥 변호사 자격만 가지고 나오게 됩니다. 이제는 공무원도 아니니까 급수가 없어요. 단순히 변호사 면허만 취득한 것이 됩니다.

변호사가 되는 것도 물론 대단한 것입니다만, 그 자격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돈이 나오나요. 말하자면 운전면허나 같습니다. 운전면허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나라에서 돈을 주지는 않잖아요. 그 면허를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해야지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동기는 이걸 좀 더 잘 알았더라면 연수원 때 좀더 열심히 했었어야 했다면서 아쉬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어요. 이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참 잘하셨습니다. 그야말로 고시 패스한 것 보다 더 잘한 일입니다. 이건 농담이 아니라 정말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안심하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지금부터가 더 중요합니다. 지금부터 이제 열심히 뛰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열심히 해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자기는 열심히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믿은 지 얼마나 됐고, 자기가 무슨 직분을 받았고, 무슨 장을 몇 년 무슨 장을 몇 년 했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이와 같은 과거에만 집착하게 된다면 이는 우리 신앙의 목적을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마가복음 11장 12절~14절
“12.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翌日、彼らがベタニアを出たとき、イエスは空腹を覚えられた。
葉の茂ったいちじくの木が遠くに見えたので、その木に何かあるかどうか見に行かれたが、そこに来てみると、葉のほかには何も見つからなかった。いちじくのなる季節ではなかったからである。
するとイエスは、その木に向かって言われた。「今後いつまでも、だれもおまえの実を食べることがないように。」弟子たちはこれを聞いていた。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발견하고는 거기서 무엇을 찾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열매를 찾으셨습니다. 그런데 찾지 못했지요.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었기 때문에 저주를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분명 잘못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열매는 없으면서 잎사귀만 무성했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잎사귀라도 없었다면 예수님은 그 나무에게서 열매를 구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열매는 없으면서 잎사귀만 달려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여기에 대해서 꾸짖으셨던 것이지요.

여러분, 나무에 있어서 잎사귀는 무슨 역할을 합니까. 그것은 바로 광합성에 있습니다. 나무 뿌리는 땅속에서 물과 영양분을 빨아올리고 이를 바탕으로 잎사귀는 광합성을 통해서 그 영양분을 에너지로 바꾸고는 나무 전체에 공급하게 됩니다.

이 광합성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햇빛입니다. 나무는 그 잎사귀를 통해서 햇빛을 받아요. 이를 통해서 광합성이 일어나게 되는 것인데, 잎사귀가 이와 같은 작용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열매를 맺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나무에게 있어서 잎사귀가 나쁜 것이 아니듯, 교회에서 직분을 받는 것은 안 좋은 일이 아닙니다. 좋은 일이지요. 그리고 이 직분이라고 하는 것은 집사나 장로 권사만이 아니라 목사나 전도사, 그리고 사모도 역시 귀한 직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갈은 직분은 목에 힘을 주라고 받는 것이 아니잖아요.


마치 나무에 있어서의 잎사귀와 같이, 주님께서 주신 직분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받아 이를 에너지로 만들고는 교회 전체, 나아가 이 세상에 공급을 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잎사귀가 있다면 거기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그와 같은 잎사귀로 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고 무슨 헌금만 많이 하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섬기고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일들이 어디 한 둘입니까.

그리고 복음을 전해야 할 곳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전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정작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잎사귀에만 관심이 있어요. 이를 주님은 기뻐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2장 48절 후반부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多く与えられた者はみな、多くを求められ、多く任された者は、さらに多くを要求されます。


하나님으로부터 잎사귀를 많이 받았다면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고 하신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부활이라고 하는 목적에 초점이 맞추어 져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거듭나는 것, 즉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듭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3장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イエスは答えら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人は、新しく生まれなければ、神の国を見ることはできません。」

우리는 거듭나야지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을 하세요. 그러면서 거듭난 사람에 대해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8절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風は思いのままに吹きます。その音を聞いても、それがどこから来てどこへ行くのか分かりません。御霊によって生まれた者もみな、それと同じです。」

이 말씀에 의하면 거듭난 사람이란 성령으로 난 사람과 같은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사람 움직이는 것, 자동차 움직이는 것을 보면 그것이 어느 쪽에서 와서 어느 쪽으로 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람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사람의 생각으로는 짐작할 수가 없어요.

자, 여기가 바로 포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20절
“19.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その日、すなわち週の初めの日の夕方、弟子たちがいたところでは、ユダヤ人を恐れて戸に鍵がかけられていた。すると、イエスが来て彼らの真ん中に立ち、こう言われた。「平安があなたがたにあるように。」
こう言って、イエスは手と脇腹を彼らに示された。弟子たちは主を見て喜んだ。



요한복음 20장 26절~27절
“26.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八日後、弟子たちは再び家の中におり、トマスも彼らと一緒にいた。戸には鍵がかけられていたが、イエスがやって来て、彼らの真ん中に立ち、「平安があなたがたにあるように」と言われた。
それから、トマスに言われた。「あなたの指をここに当てて、わたしの手を見なさい。手を伸ばして、わたしの脇腹に入れなさい。信じない者ではなく、信じる者になりなさい。」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묘사한 부분입니다만, 모두 문이 닫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나타나셨어요. 그렇다면 영혼만 오셨나 하면 그 육신도 함께 오셔서 만질 수도 있는 존재이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에 있어서는 수많은 제약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공간의 제약입니다. 사람들은 이 공간의 제약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 공간의 제약을 모두 넘는 존재가 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공간의 제약을 뛰어 넘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냐 하면, 아니요. 그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우리가 이 세상이라고 하는 제약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우선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이 잘 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일단 태어나는 것부터 잘 태어나야 해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면 답이 없다고들 합니다. 쉽게 말해서 부잣집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교를 나온 다음에 좋은 회사에 들어가고 난 다음에는 돈 많이 벌고 좋은 사람과 결혼을 하고 등등……. 물론 다른 방법도 많이 있긴 하지만 대충 이런 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잘 사는 인생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믿음에 있어서도 그렇다면 바울도 그렇게 했어야죠. 지금으로 본다면 고시를 패스할 정도로 엘리트였는데, 그와 같은 길을 박차고는, 그 험난한 고생길을 선택했다면 이는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 생각으로는 바울처럼 살아가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좋은 머리와 그 좋은 배경, 그 좋은 집안과 그 좋은 경력을 가지고 왜 저렇게 사서 고생을 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바울은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정한 열매를 맺는 삶이란, 이 세상에서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난 사람, 성령으로 난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세상적인 제약, 세상적인 상식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직도 세상적인 제약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까. 아직도 세상적으로만 살아가려 합니까.

여러분, 우리에게는 잎사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잎사귀입니까.

나한테는 아무것도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이 육신이라고 하는 잎사귀, 그리고 시간이라고 하는 잎사귀가 있지 않습니까.



みなさん、未だに世俗的な制約から抜け出せずにおられますか。未だに世俗的に生きていこうとされていますか。

みなさん、私たちには葉っぱがあります。それではそれは、どのような葉っぱでしょうか。

自分には何もないとおっしゃるかもしれませんが、いいえ、そうではありません。いくら持っているものがない人だとしても、私たちにはこの体という葉っぱ、そして時間という葉っぱがあるではありませんか。



그것은 주님께서 주신 소중한 잎사귀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잎사귀로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열매는 맺지 않고 잎사귀만 기를 쓰고 모은다면 주님으로부터 나중에 무슨 말씀을 들으시려고 합니까.

이제 우리는 거듭난 사람, 성령으로 난 사람이 되어서, 모든 제약에서 벗어나 믿음의 열매를 맺는 사람, 주님께서 우리에게 열매를 찾으실 때, 그동안 맺었던 믿음의 열매를 한아름 안겨 드릴 수 있는 삶을 통해서, 마지막 날에 기쁨의 부활을 맞이하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これは主がくださった貴重な葉っぱだと言えます。しかし主が私たちに下さった発破で実を結ばなければなりませんが、実は結ばずに、せっせと葉っぱだけを集めているとしたら、のちに主からどのようなお叱りを受けるおつもりですか。
これからは新しく生まれた人、御霊によって生まれた人として、すべての制約から抜け出し、信仰を身を結ぶ者、主が私たちに実を求められたとき、それまで結んでおいた信仰の実をたくさんささげられるような人生を通して、最後の日に喜びの復活を迎えられるみなさんであらんことを主の御名においてお祈り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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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38회 거듭난 사람 - 기린선교회
2024년 3월 31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6절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マタイの福音書 28章 6節
“ここにはおられません。前から言っておられたとおり、よみがえられたのです。さあ、納められていた場所を見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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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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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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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부활절을 맞이해서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13번째 시간으로서 “거듭난 사람” 新しく生まれた人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2천년 전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부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는 단순히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더니 다시 살아나셨더라. 신기하다……로 끝나는 하나의 흥미로운 사건, 요즘 식으로 하자면 무슨 해외 토픽, 세상에 이런 일이……같은 방송에 나올 만한 그런 놀라운 사건으로 끝나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부활하셨습니까.

사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십자가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정작 부활의 의미에 대해서 물으면 긴가민가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부활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 기억해야 합니다.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는 우리의 죄가 해결되지 않아요. 말하자면 우리가 아직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가 아직 용서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잘못을 저질렀어요. 그렇다면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배상이든 보상이든 간에 돈으로 물어주어야 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민사상이든 형사상이든 간에 가해자인 내가 피해자인 상대방과 합의를 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필요한 절차가 뭐냐 하면, 내가 이렇게 사과를 하고 물어주니까 재판이나 기타 방법으로 더 이상 요구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반드시 들어가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기껏 내가 물어주었는데 또다시 재판을 하게 되면 이 쪽이 이중 삼중으로 물어주어야 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잖아요.

이와 같은 합의에 동의한다는 것은 그 합의 내용에 대해서 만족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데 100만원을 물어 주기로 했어요. 그리고 정중히 사과도 했습니다. 여기에 만족을 하면 상대방이 좋다. 그 정도 금액을 받고 사과도 했으니까 내가 용서해주마……라고 하면서 도장을 찍거나 사인을 하게 되면 이제 제가 잘못한 일은 상호간에 있어서 해결되는 것이지요.

로마서 5장 11절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それだけではなく、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私たちは神を喜んでいます。キリストによって、今や、私たちは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のです。

재판에서 원고와 피고로 나누어서 다투게 되면 하루하루가 피를 말립니다. 재판장에서는 온갖 지저분한 것들이 증거로 제시되어서 날을 거듭할수록 부끄러운 일들만 드러나게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상대방과 화해를 하고 합의를 하게 되면 그 다툼은 끝나게 됩니다. 이제 상대방은 적이 아닌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부끄러움이 사라지고 기쁨의 화해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버리면 아무것도 해결인 안 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하나님과 합의가 안됐거든요. 하나님이 아직 합의문서에 사인을 안 하셨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기쁘게 받으시고, 그 십자가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신 증거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어서는 부활이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부활은 바로 우리의 죄를 모두 다 해결해주신 하나님과 우리와의 합의문서인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에는 또 하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부활 하나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에 있어서도 공통되는 부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부활하셨을까요.

자, 학생들이 아침에 학교에 갔습니다. 교실에 들어가니까 칠판에 어려운 수학 문제가 적혀 있었어요. 그 문제를 어떻게 푸는지 아는 학생들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들어오시더니 그 문제 풀이를 처음부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문제 푸는 방법을 몰랐는데 그 풀이를 보고 나니까 이제 학생들도 그 문제를 이해하고 풀 수 있게 되었어요.

자, 그렇다면 선생님이 그 문제를 푼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선생님이니까 너희들과는 차원이 달라. 이 문제는 내가 선생님이니까 풀 수 있는 거야. 그런 마음으로 선생님이 이 문제를 푸셨을까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자, 이 문제는 이런 식으로 풀면 누구든지 풀 수 있어 하고 그 문제 푸는 방식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주려는 것 아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がたの信仰が薄いからで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もし、からし種ほどの信仰があるなら、この山に『ここからあそこに移れ』と言えば移ります。あなたがたにできないことは何もありません。」

누가복음 17장 6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すると主は言われた。「もしあなたがたに、からし種ほどの信仰があれば、この桑の木に『根元から抜かれて、海の中に植われ』と言うなら、あなたがたに従います。

겨자씨 크기는 1~2미리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그 나무는 2~3미터 크기의 나무가 되어 숲을 이룬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우리가 아주 작은 믿음의 씨를 심기만 해도 나무가 움직이고 산이 움직이는 역사가 일어난다고 말씀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 있었지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의롭게 보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의 희생으로는 그 누구의 죄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義人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

이 세상에 의인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죄인이 아닌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어느 누가 스스로의 희생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의 죄를 해결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피조물인 인간이 아무리 수백 번 십자가에 달린다 하더라도 우리 이웃은커녕 자기 자신의 죄도 해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능하십니다. 예수님 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 중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 이것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만이 감당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우리에게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라는 말씀은 안 하셨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외의 것, 그러니까 십자가를 제외하고 공생애 기간 동안에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모두 할 수 있는 일이요, 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 한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부활은 어떻습니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는 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까. 아니면 우리 모두가 해야만 하는 일입니까.

고린도전서 15장 13절~15절
“13.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もし死者の復活がないとしたら、キリストもよみがえらなかったでしょう。
そして、キリストがよみがえらなかったとしたら、私たちの宣教は空しく、あなたがたの信仰も空しいものとなります。
私たちは神についての偽証人(ぎしょうにん)ということにさえなります。なぜなら、かりに死者がよみがえらないとしたら、神はキリストをよみがえらせなかったはずなのに、私たちは神がキリストをよみがえらせたと言って、神に逆らう証言をしたことになるからです。

성경은 우리 스스로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부활이 없으면 예수님의 부활도 없었을 것이며,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복음도 믿음도 모두 헛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뒤집어집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부활도 있는 것이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복음도 믿음도 모두 진리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성경 중에서 한 가지 부분에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빌립보서 3장 11절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何とかして死者の中からの復活に達したいのです。

빌립보서를 기록한 바울은 어떻게 해서든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고백합니다.

아니, 바울 정도가 되었으면 당연히 부활은 따 놓은 단상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안심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부활에 이르려고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뿐만이 아니지요.


빌립보서 3장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고린도전서 9장 27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むしろ、私は自分のからだを打ちたたいて服従させます。ほかの人に宣べ伝えておきながら、自分自身が失格者になら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바울은 가만히 멈추어 있지 않습니다. 안심하고 있지 않아요. 지금도 주님이 위에서 주실 상을 위해 달려간다고 합니다. 이렇게 복음을 많이 전하고 주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한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반면에 우리는 믿음 안에서 어떠한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신앙 안에서 너무나도 안주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그냥 가만히 하루하루 보내고 있는 것 아닙니까.

지금은 로스쿨도 생기고 그래서 제도가 좀 바뀌고 그랬습니다만, 예전에는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2년 동안 사법연수원 과정을 거쳐야지만 법조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법대 동기 변호사가 제게 털어놓은 내용입니다만, 자기는 시험에 합격한 다음 사법연수원 과정에서 방심을 해서 공부를 좀 소홀이 했다는 거예요.

사실 시험에 합격하기가 어렵지 연수원이야 웬만하면 수료는 되기 때문이거든요.

그러나 시험에 합격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겠습니다만, 알고 보면 이 사법연수원 과정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사법시험 성적과 이 연수원 과정에서의 성적을 바탕으로 판사나 검사로 임용이 되고 그리고 그 성적이 관직에 있으면서 계속 따라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연수원을 마치고 난 다음 사법시험 성적과 연수원에서의 성적에 있어서 상위권은 판사로 임용되고 그 다음이 검사로 임용이 됩니다. 그 외에는 임용되고 싶어도 될 수 없어요. 연수원을 마치고 변호사 자격이 주어질 뿐입니다.


하지만 이 차이를 본다면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일단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연수원에 들어가면 공무원입니다. 5급이에요. 이 5급이라고 하는 것은 외무고시나 행정고시에 합격을 해서 사무관으로 임명되었을 때와 같지요.

5급 사무관이라고 하면 과장급인데, 사실 밑에 9급부터 시작하면 거의 정년퇴임 할 때쯤 잘하면 달 수 있는 것이 5급입니다. 그런데 고시에 합격하면 빠르면 20대 후반, 그리고 보통 30대 초반에 벌써 그 자리에 오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벌써 스타트 라인이 다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판사나 검사로 임용이 되면 그 급수가 어떻게 되냐 하면 갑자기 2단계가 뜁니다. 초임 판사나 초임 검사는 벌써 3급이에요.

보통 고시에 합격하고 5급부터 시작을 했다 하더라도 5급에서 3급까지는 빨라도 17년 이상이 걸리는데,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2년만 열심히 공부하기만 하면 연수원을 마치고 2년 만에 3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야말로 고속 출세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판사나 검사로 임관되지 못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냐 하면, 그냥 변호사 자격만 가지고 나오게 됩니다. 이제는 공무원도 아니니까 급수가 없어요. 단순히 변호사 면허만 취득한 것이 됩니다.

변호사가 되는 것도 물론 대단한 것입니다만, 그 자격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돈이 나오나요. 말하자면 운전면허나 같습니다. 운전면허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나라에서 돈을 주지는 않잖아요. 그 면허를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해야지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동기는 이걸 좀 더 잘 알았더라면 연수원 때 좀더 열심히 했었어야 했다면서 아쉬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어요. 이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참 잘하셨습니다. 그야말로 고시 패스한 것 보다 더 잘한 일입니다. 이건 농담이 아니라 정말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안심하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지금부터가 더 중요합니다. 지금부터 이제 열심히 뛰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열심히 해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자기는 열심히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믿은 지 얼마나 됐고, 자기가 무슨 직분을 받았고, 무슨 장을 몇 년 무슨 장을 몇 년 했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이와 같은 과거에만 집착하게 된다면 이는 우리 신앙의 목적을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마가복음 11장 12절~14절
“12.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翌日、彼らがベタニアを出たとき、イエスは空腹を覚えられた。
葉の茂ったいちじくの木が遠くに見えたので、その木に何かあるかどうか見に行かれたが、そこに来てみると、葉のほかには何も見つからなかった。いちじくのなる季節ではなかったからである。
するとイエスは、その木に向かって言われた。「今後いつまでも、だれもおまえの実を食べることがないように。」弟子たちはこれを聞いていた。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발견하고는 거기서 무엇을 찾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열매를 찾으셨습니다. 그런데 찾지 못했지요.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었기 때문에 저주를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분명 잘못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열매는 없으면서 잎사귀만 무성했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잎사귀라도 없었다면 예수님은 그 나무에게서 열매를 구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열매는 없으면서 잎사귀만 달려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여기에 대해서 꾸짖으셨던 것이지요.

여러분, 나무에 있어서 잎사귀는 무슨 역할을 합니까. 그것은 바로 광합성에 있습니다. 나무 뿌리는 땅속에서 물과 영양분을 빨아올리고 이를 바탕으로 잎사귀는 광합성을 통해서 그 영양분을 에너지로 바꾸고는 나무 전체에 공급하게 됩니다.

이 광합성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햇빛입니다. 나무는 그 잎사귀를 통해서 햇빛을 받아요. 이를 통해서 광합성이 일어나게 되는 것인데, 잎사귀가 이와 같은 작용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열매를 맺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나무에게 있어서 잎사귀가 나쁜 것이 아니듯, 교회에서 직분을 받는 것은 안 좋은 일이 아닙니다. 좋은 일이지요. 그리고 이 직분이라고 하는 것은 집사나 장로 권사만이 아니라 목사나 전도사, 그리고 사모도 역시 귀한 직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갈은 직분은 목에 힘을 주라고 받는 것이 아니잖아요.


마치 나무에 있어서의 잎사귀와 같이, 주님께서 주신 직분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받아 이를 에너지로 만들고는 교회 전체, 나아가 이 세상에 공급을 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잎사귀가 있다면 거기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그와 같은 잎사귀로 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고 무슨 헌금만 많이 하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섬기고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일들이 어디 한 둘입니까.

그리고 복음을 전해야 할 곳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전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정작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잎사귀에만 관심이 있어요. 이를 주님은 기뻐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2장 48절 후반부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多く与えられた者はみな、多くを求められ、多く任された者は、さらに多くを要求されます。


하나님으로부터 잎사귀를 많이 받았다면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고 하신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부활이라고 하는 목적에 초점이 맞추어 져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거듭나는 것, 즉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듭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3장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イエスは答えら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人は、新しく生まれなければ、神の国を見ることはできません。」

우리는 거듭나야지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을 하세요. 그러면서 거듭난 사람에 대해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8절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風は思いのままに吹きます。その音を聞いても、それがどこから来てどこへ行くのか分かりません。御霊によって生まれた者もみな、それと同じです。」

이 말씀에 의하면 거듭난 사람이란 성령으로 난 사람과 같은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사람 움직이는 것, 자동차 움직이는 것을 보면 그것이 어느 쪽에서 와서 어느 쪽으로 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람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사람의 생각으로는 짐작할 수가 없어요.

자, 여기가 바로 포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20절
“19.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その日、すなわち週の初めの日の夕方、弟子たちがいたところでは、ユダヤ人を恐れて戸に鍵がかけられていた。すると、イエスが来て彼らの真ん中に立ち、こう言われた。「平安があなたがたにあるように。」
こう言って、イエスは手と脇腹を彼らに示された。弟子たちは主を見て喜んだ。



요한복음 20장 26절~27절
“26.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八日後、弟子たちは再び家の中におり、トマスも彼らと一緒にいた。戸には鍵がかけられていたが、イエスがやって来て、彼らの真ん中に立ち、「平安があなたがたにあるように」と言われた。
それから、トマスに言われた。「あなたの指をここに当てて、わたしの手を見なさい。手を伸ばして、わたしの脇腹に入れなさい。信じない者ではなく、信じる者になりなさい。」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묘사한 부분입니다만, 모두 문이 닫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나타나셨어요. 그렇다면 영혼만 오셨나 하면 그 육신도 함께 오셔서 만질 수도 있는 존재이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에 있어서는 수많은 제약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공간의 제약입니다. 사람들은 이 공간의 제약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 공간의 제약을 모두 넘는 존재가 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공간의 제약을 뛰어 넘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냐 하면, 아니요. 그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우리가 이 세상이라고 하는 제약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우선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이 잘 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일단 태어나는 것부터 잘 태어나야 해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면 답이 없다고들 합니다. 쉽게 말해서 부잣집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교를 나온 다음에 좋은 회사에 들어가고 난 다음에는 돈 많이 벌고 좋은 사람과 결혼을 하고 등등……. 물론 다른 방법도 많이 있긴 하지만 대충 이런 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잘 사는 인생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믿음에 있어서도 그렇다면 바울도 그렇게 했어야죠. 지금으로 본다면 고시를 패스할 정도로 엘리트였는데, 그와 같은 길을 박차고는, 그 험난한 고생길을 선택했다면 이는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 생각으로는 바울처럼 살아가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좋은 머리와 그 좋은 배경, 그 좋은 집안과 그 좋은 경력을 가지고 왜 저렇게 사서 고생을 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바울은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정한 열매를 맺는 삶이란, 이 세상에서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난 사람, 성령으로 난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세상적인 제약, 세상적인 상식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직도 세상적인 제약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까. 아직도 세상적으로만 살아가려 합니까.

여러분, 우리에게는 잎사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잎사귀입니까.

나한테는 아무것도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이 육신이라고 하는 잎사귀, 그리고 시간이라고 하는 잎사귀가 있지 않습니까.



みなさん、未だに世俗的な制約から抜け出せずにおられますか。未だに世俗的に生きていこうとされていますか。

みなさん、私たちには葉っぱがあります。それではそれは、どのような葉っぱでしょうか。

自分には何もないとおっしゃるかもしれませんが、いいえ、そうではありません。いくら持っているものがない人だとしても、私たちにはこの体という葉っぱ、そして時間という葉っぱがあるではありませんか。



그것은 주님께서 주신 소중한 잎사귀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잎사귀로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열매는 맺지 않고 잎사귀만 기를 쓰고 모은다면 주님으로부터 나중에 무슨 말씀을 들으시려고 합니까.

이제 우리는 거듭난 사람, 성령으로 난 사람이 되어서, 모든 제약에서 벗어나 믿음의 열매를 맺는 사람, 주님께서 우리에게 열매를 찾으실 때, 그동안 맺었던 믿음의 열매를 한아름 안겨 드릴 수 있는 삶을 통해서, 마지막 날에 기쁨의 부활을 맞이하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これは主がくださった貴重な葉っぱだと言えます。しかし主が私たちに下さった発破で実を結ばなければなりませんが、実は結ばずに、せっせと葉っぱだけを集めているとしたら、のちに主からどのようなお叱りを受けるおつもりですか。
これからは新しく生まれた人、御霊によって生まれた人として、すべての制約から抜け出し、信仰を身を結ぶ者、主が私たちに実を求められたとき、それまで結んでおいた信仰の実をたくさんささげられるような人生を通して、最後の日に喜びの復活を迎えられるみなさんであらんことを主の御名においてお祈り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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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37회 눈물을 닦아 주시는 하나님
2024년 3월 24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18절~22절
“18.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1.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マタイの福音書 4章 18節~22節
“18.イエスはガリラヤ湖のほとりを歩いておられたとき、二人の兄弟、ペテロと呼ばれるシモンとその兄弟アンデレが、湖で網を打っているのをご覧になった。彼らは漁師であった。
19.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わたしについて来なさい。人間をとる漁師にしてあげよう。」
20.彼らはすぐに網を捨ててイエスに従った。
21.イエスはそこから進んで行き、別の二人の兄弟、ゼベダイの子ヤコブとその兄弟ヨハネが、父ゼベダイと一緒に舟の中で網を繕っているのを見ると、二人をお呼びになった。
22.彼らはすぐに舟と父親を残してイエスに従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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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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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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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11번째 시간으로서 “시험의 의미” 試みの意味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후에 이제 광야로 가서 금식하신 후에 마귀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게 되십니다.

이에 대해서는 2020년 5월에서 6월에 총 4회에 걸쳐서 시험 내용 하나하나에 대해서 말씀을 전해 드렸기에 혹시 궁금하신 분은 인터넷을 통해서 그 때 말씀을 참조해 주셨으면 하고, 오늘은 이 시험 내용 전반에 걸쳐서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신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어떻게 됩니까.

첫째 시험은 3절에 의하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하고,

둘째 시험은 5절에서 6절에 의하면 높은 데서 뛰어내려 보라고 하고,

셋째 시험은 8절에서 9절에 의하면 자신에게 경배하라고 합니다.

우선 여러분께서는 이와 같은 시험 내용을 들으시면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아, 나도 이런 시험을 받게 되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이 되십니까. 불안해 하십니까.

그런 분들을 위해 제가 안심을 시켜드리고자 합니다.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런 시험, 아무나 당하는 게 아니에요.

자, 마귀 사탄이 한 시험 내용을 자세히 좀 보세요.

첫째 시험은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와 같은 시험은 어떤 사람들에게 했을 것 같습니까. 아니, 복잡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조금 쉬운 비유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너 내일 너네 회사에서 100억원을 횡령하라는 시험을 마귀가 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렇다면 그런 시험을 아무한테나 하겠습니까.

우선 그 사람이 최소한 100억 정도는 있는 회사에 다녀야 하지 않겠어요? 회사에 100억도 없는데 어떻게 100억을 횡령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한 그 사람이 100억 정도가 있는 회사에 다닌다고 해서 그 돈을 횡령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회사에 갓 들어간 신입사원한테 그 정도의 돈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예컨대 회사에서 100억 정도의 돈을 횡령하라는 시험을 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로 요건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에 나온 마귀 사탄의 시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아무한테나 돌을 떡덩어리로 만들라는 시험을 하겠어요? 아니요. 그렇지는 않겠지요. 적어도 돌을 떡덩이로 만들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한테 그런 시험을 하지 않겠습니까.

다음 시험은 뭐였어요. 높은 데서 뛰어내려 보라고 하잖아요. 이 정도의 시험을 받기 위해서는 높은 데에 올라가 있는 사람이라야 하는데, 아직 밑바닥에서 바둥바둥 거리고 있는 사람한테 무슨 이런 시험을 하겠습니까.

마지막으로는 마귀가 자신한테 경배하라고 하지요? 자, 여러분께서는 누구한테 인사를 받으면 좋겠습니까. 동네에 있는 어린 애들이나 별볼일 없는 사람들한테 인사를 받고 대우를 받으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얼마 전에 그런 제목을 보았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겸손하다는 것예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미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은 별볼일 없는 사람들로부터 대우를 받지 않더라도 이미 자신의 지위는 확고해요. 그렇기 때문에 대단하지도 않은 사람들한테서까지 굳이 대우를 받을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사실 그야말로 별볼일 없는 사람들이나 아무한테서 인사를 받고 싶고 대우를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요? 예, 성경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5절~7절
“5.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彼らがしている行いはすべて人に見せるためです。彼らは聖句を入れる小箱を大きくしたり、衣の房を長くしたりするのです。
宴会では上座を、会堂では上席を好み、
広場であいさつされること、人々から先生と呼ばれることが好きです。

이 얼마나 소인배 같은 인물들입니까. 아주 작은 것까지도 대우 받기 좋아하고, 아주 작은 것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는 그런 인물들이 작은 인물들이지, 큰 사람들은 그런 작고 사소한 일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대단한 사람들한테서 대우를 받고 싶어할 수는 있겠지요. 마귀 사탄을 보십시오. 하물며 예수님으로부터 경배를 받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한가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 하시다고 하지 않습니까. 무소부재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바로 안 계신 곳이 없는, 모든 곳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 23장 24절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人が隠れ場に身を隠したら、わたしはその人を見ることができないのか。──主のことば──天にも地にも、わたしは満ちているではないか。──主のことば。

하나님께서는 온 천지에 충만하시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를 풀어서 말씀을 드리자면,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 전혀 제약을 받지 않으십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리고 온 우주 천지 공간에 충만하신 하나님, 한 순간에 모든 곳에 존재하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으면 큰 일입니다. 내가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옆 사람이 동시에 기도를 드리고 있어요. 그러면 옆 사람한테 양해를 구해야겠죠. 여보세요. 내가 지금 정말 급한 기도가 있어서 그런데, 일단 내 기도가 끝난 다음에 당신 기도를 좀 해줄 수 있겠냐 하고 양해를 얻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전세계 모든 사람들이 한 번에 기도를 드린다 하더라도 그 기도를 모두 그 순간에 다 듣고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보죠. 마귀 사탄은 무소부재 할까요? 말하자면 여기저기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천사는 어떨까요. 천사는 여기저기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을까요?

성경에 의하면 천사들은 자신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9절~10절
“9.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10.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御使いは私に、「子羊の婚宴に招かれている者たちは幸いだ、と書き記しなさい」と言い、また「これらは神の真実なことばである」と言った。
私は御使いの足もとにひれ伏して、礼拝しようとした。すると、御使いは私に言った。「いけません。私はあなたや、イエスの証しを堅く保っている、あなたの兄弟たちと同じしもべです。神を礼拝しなさい。イエスの証しは預言の霊なのです。」


요한계시록 22장 8절~9절
“8.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9.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これらのことを聞き、また見たのは、私ヨハネである。私は、聞いたり見たりした後に、これらのことを示してくれた御使いの足もとにひれ伏して、礼拝しようとした。
すると、御使いは私に言った。「いけません。私はあなたや、預言者であるあなたの兄弟たち、この書のことばを守る人々と同じしもべです。神を礼拝しなさい。」


천사들은 자기들에 대해서 스스로 ‘종(しもべ)’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천사들도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천사들도 우리처럼 동시에 여기저기에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마귀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동시에 여기저기 존재할 수가 없어요. 말하자면 그 수에는 절대적인 한계가 있다고 하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모든 사람들을 시험의 대상으로 삼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스스로를 생각할 때, 내가 별로 능력도 없고, 높은 데에 있지도 않고, 대단하지도 않은 인물이라고 한다면 안심하십시오. 마귀들은 그런 사람들한테까지 시험할 여유가 없습니다. 마귀들이 얼마나 바쁜데 그런 별볼일 없는 사람들까지 시험하고 있겠습니까.

자, 이게 정말 사실이라고 한다면, 마귀는 그럼 누구한테 시험을 하겠습니까. 일단 기본적으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마귀는 누구를 시험할 것인가에 대해서 면밀하게 선별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선택과 집중, 이 또한 마귀들의 전략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그 선별 기준이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들을 시험할 사람들로 삼는 것일까요.

이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바로 마귀들 나라에 대해서 위협이 되는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탄의 나라에 대해서 전혀 위협이 되지 않은 사람들까지 일일이 시험을 할 시간도 없고 여력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시험을 해서 넘어뜨려야 할 사람들을 선택해서 집중적으로 공략할 작전을 세우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열심히 하려고 해요. 주님의 일을 감당하려고 해요. 그러면 마귀들한테는 비상이 걸립니다. 아무리 바빠도 저 놈을 막아야 해. 그러면서 온갖 수작들을 다 부립니다.

주변 사람들을 동원해서 욕을 하고 박해하고, 어디 그 뿐이에요? 너는 안돼. 할 수 없어. 어서 포기해……. 이러면서 우리에게 총공격을 가해옵니다. 그리고 아주 우리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좌절과 절망을 안겨주려고 난리를 쳐요.

이처럼 정신적인 박해, 그리고 때로는 육체적인 박해까지도 우리에게 안겨주려고 마귀 사탄들이 발버둥을 칠 때가 있습니다.


공사다망한 마귀 사탄들이 엄격한 선별기준에 따라서 그 시험대상을 선정한 다음에, 그 없는 시간과 인력을 할애해가면서 그 사람에 대하여 시험을 한다는 것, 이는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이 마귀 사탄에게 있어서 그만큼 위협이 될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마귀 사탄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마귀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 그 정도로 큰 일을 하고 있는 사람, 나중에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상을 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뜻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5장 11절~12절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わたしのために人々があなたがたをののしり、迫害し、ありもしないことで悪口を浴びせるとき、あなたがたは幸いです。
喜びなさい。大いに喜びなさい。天においてあなたがたの報いは大きいのですから。あなたがたより前にいた預言者たちを、人々は同じように迫害したのです。


생각해보세요. 누군가가 우리 보고 욕하고 박해하고 그래요. 그런데 기뻐하래요. 이걸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읽는다면 말이 안 됩니다. 그런 정신 나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마귀가 어떤 사람들을 시험하려고, 그리고 넘어뜨리려고 달려드느냐 하는 그 비밀을 알면 이 말씀이 얼마나 큰 은혜가 되냐 하는 것이지요.

지금 마귀가 지들도 바빠 죽겠는데도 우리한테 욕을 하고 박해하고 그래요. 그것은 뭐냐 하면 바로 우리가 그만큼 자기들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경에는 이 비밀을 이미 알아차렸던 믿음의 선배들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5장 40절~42절
“40.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2.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使徒たちを呼び入れて、むちで打ち、イエスの名によって語ってはならないと命じたうえで、釈放した。
使徒たちは、御名のために辱められるに値する者とされたことを喜びながら、最高法院から出て行った。
そして毎日、宮や家々でイエスがキリストであると教え、宣べ伝えることをやめなかった。

사도들이 관리들에게 붙들려서 채찍질을 당했는데도 기뻐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것만 보면 그야말로 정신병자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이 기뻐한 것에는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5장 41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使徒たちは、御名のために辱められるに値する者とされたことを喜びながら、最高法院から出て行った。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래,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일했더니, 마귀 사탄들에 의해 이 정도로 박해를 받을 만한 인물로 인정을 받았구나! 하는 사실을 알고 기뻐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축구 시합에 나갔어요. 그런데 나한테 공도 없는데 상대 팀 선수들이 몇 명이나 몰려와서는 내 주위를 둘러싸고 어떻게든 나한테 공이 안 오게 방해를 해요. 내가 움직이려고 하면 일거수일투족 막아 서고 그럽니다.

만약에 그런 상황이라면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바로 나는 상대팀에게 있어서 그만큼 위협이 되는 뛰어난 선수라는 사실을 인정받은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된 게, 나한테는 상대팀 선수들이 아무도 방해를 안 해요. 나한테 공이 왔는데도 아무도 빼앗을 생각도 하지 않고 멀리서 실실 웃으면서 처다 보고만 있어요.

그건 뭐예요? 야. 저 놈한테 공이 가도 괜찮아. 어차피 골을 못 넣어……. 그렇게 무시 당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 삶 속에서 시험이 다가왔습니까. 크고 작은 시험 때문에 지치고 힘들고 괴롭습니까.

축하합니다. 이제 당신은 비로소 마귀 사탄에게 위협되는 사람으로 선정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렇습니다. 이제 당신은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상을 받을 후보로 선정된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넘어뜨리기 위해 달려드는 마귀 사탄들을 쌍수 들고 환영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물리쳐야죠.

그렇다면 어떻게 물리쳐야 하느냐 하면, 그 방법을 오늘 본문에서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마귀 사탄을 어떻게 물리치셨습니까.

마태복음 4장 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イエスは答えられた。「『人はパンだけで生きるのではなく、神の口から出る一つ一つのことばで生きる』と書いてある。」

마태복음 4장 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試みてはならない』とも書いてある。」

마태복음 4장 10절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そこでイエスは言われた。「下がれ、サタン。『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礼拝しなさい。主にのみ仕えなさい』と書いてある。」


예수님께서는 마귀 사탄을 어떻게 물리치셨습니까. 마귀 사탄한테 십자가를 드리 대셨나요? 아니면 무슨 성수 같은 것을 뿌리셨나요?

아닙니다. 세 번의 시험 모두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말씀으로 물리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지난 주 토요일에 다카사키 쪽 방문전도를 마치고 오는 길에 동네 마트에 들렀습니다. 그 때는 제 아내도 서울에 가 있었고 하니 혼자서 뭐라도 먹을 거리라도 사야겠다 싶어서 좀 늦은 시간에 마트에 갔습니다.

이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문을 닫고는 문 옆에 있는 스위치를 누르면 문이 잠기거든요. 그런데 그 날 따라 그 단추를 눌러도 문이 안 잠겨요.

이상하다 하고 아무리 이것저것 시도를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쩌겠어요. 이미 해는 저물어서 주차장은 어두컴컴했기 때문에 자동차 매뉴얼을 들고 마트 안으로 들어가서 그 구석에서 열심히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무슨 스위치를 누르면 될 것 같아요. 그래서 다시 자동차 쪽으로 나와서 핸드폰 라이트를 켜고 열심히 그 스위치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안 보여요. 분명 거기에 있다고 그림까지 그려서 설명이 되어 있는데도 도무지 보이질 않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저랑 똑 같은 차를 가진 사람이 있으면 좀 물어볼까 하고 주차장을 둘러 봤더니만, 평소에는 자주 보이던 그 흔한 차가 그날 따라 또 안 보이는 것 있죠.

그래서 저는 또 제 차가 워낙 오래된 거라서 없거나 아니면 옵션에 따라서 다른가 했었습니다만, 아니, 그 매뉴얼은 분명 그 차에 대한 것이니까 다르지는 않을 거거든요. 그리고 옵션에 따라서 다르다는 설명도 없어요.

그래서 어쩌겠습니까. 매뉴얼을 몇 번이나 다시 본 다음에 확인을 하고서는 이제 아주 그 운전석의 다리 쪽에 머리를 집어넣어서 샅샅이 뒤져봤죠.

그랬더니만 어떻게 됐겠습니까. 야, 거기 스위치가 있더라고요.

그게 어디 있었냐 하면, 운전하시는 분들이라면 아실 거예요. 가속페달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그 발등 바로 위쪽에 있었습니다.

거기 있는 스위치를 누르니까 이제 되더라고요.


솔직히 제가 자동차에 있어서 그리 해박한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지금까지 여러 대를 몰아 보긴 했었거든요.

하지만 그런데도 제가 가지고 있던 지식이나 경험으로는 거기에 스위치가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습니다.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곳에 스위치가 있었더라니까요.

제가 장담을 합니다. 만약에 그 자동차 매뉴얼이 아니었다면 아마 10년이 지나도 그 스위치는 찾아내지 못했을 거예요. 그러나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제가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 매뉴얼을 봤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우리 삶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평소에는 잘 되던 것이 안 됩니까. 이상하게 일이 안 풀리고 여기저기서 꼬이기 시작합니까. 골치 아픈 문제들이 동시에 여기저기서 터지기 시작합니까.

그것은 어쩌면 마귀 사탄이 우리를 자기네들 요주의 인물로 선별한 결과 달려들기 시작해서 그런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럴 때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의 영원하고도 완전한 매뉴얼, 바로 성경을 찾아봐야 할 때인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7절~8절
“7.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与えられます。探しなさい。そうすれば見出します。たたきなさい。そうすれば開かれます。
だれでも、求める者は受け、探す者は見出し、たたく者には開かれます。


주님은 우리에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구하고 찾고 어디를 두드리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에서 구하고 성경에서 찾고 성경을 두드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지식이나 내 상식으로 그리고 내 경험으로도 찾거나 구하지 못한 스위치를 성경에 의해 전혀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바로 성경에서 찾아낸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달려드는 마귀 사탄들을 물리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가 시험을 당하게 되었을 때, 근심하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큰 상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았다고 하는 그 시험의 의미를 올바로 깨달아서,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하고 그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마귀 사탄을 물리침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면류관, 놀라운 승리의 면류관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まさに聖書から探し出したそのみ言葉を通して、私たちを転ばせるために躍起になっている悪魔サタンを退かせ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いたします。

これから私たちが試みにあう時、苦しみ落胆し挫折し絶望し諦めるのではなく、主から大きな褒美を受けるに値する者とされたという試みの意味を悟り、むしろ喜び感謝をささげ、そして主のみ言葉により悪魔サタンを退かせることによって、主からいのちの冠、驚くべき勝利の冠をすべて受けられる皆さまであらんことを主の御名においてお祈り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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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36회 시험의 의미
2024년 3월 17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1절~11절
“1.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8.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マタイの福音書 4章 1節~11節
“1.それからイエスは、悪魔の試みを受けるために、御霊に導かれて荒野に上って行かれた。
2.そして四十日四十夜、断食をし、その後で空腹を覚えられた。
3.すると、試みる者が近づいて来て言った。「あなたが神の子なら、これらの石がパンになるように命じなさい。」
4.イエスは答えられた。「『人はパンだけで生きるのではなく、神の口から出る一つ一つのことばで生きる』と書いてある。」
5.すると悪魔はイエスを聖なる都に連れて行き、神殿の屋根の端に立たせて、
6.こう言った。「あなたが神の子なら、下に身を投げなさい。『神はあなたのために御使いたちに命じられる。彼らはその両手にあなたをのせ、あなたの足が石に打ち当たらないようにする』と書いてあるから。」
7.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試みてはならない』とも書いてある。」
8.悪魔はまた、イエスを非常に高い山に連れて行き、この世のすべての王国とその栄華を見せて、
9.こう言った。「もしひれ伏して私を拝むなら、これをすべてあなたにあげよう。」
10.そこでイエスは言われた。「下がれ、サタン。『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礼拝しなさい。主にのみ仕えなさい』と書いてある。」
11.すると悪魔はイエスを離れた。そして、見よ、御使いたちが近づいて来てイエスに仕え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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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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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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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11번째 시간으로서 “시험의 의미” 試みの意味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후에 이제 광야로 가서 금식하신 후에 마귀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게 되십니다.

이에 대해서는 2020년 5월에서 6월에 총 4회에 걸쳐서 시험 내용 하나하나에 대해서 말씀을 전해 드렸기에 혹시 궁금하신 분은 인터넷을 통해서 그 때 말씀을 참조해 주셨으면 하고, 오늘은 이 시험 내용 전반에 걸쳐서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신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어떻게 됩니까.

첫째 시험은 3절에 의하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하고,

둘째 시험은 5절에서 6절에 의하면 높은 데서 뛰어내려 보라고 하고,

셋째 시험은 8절에서 9절에 의하면 자신에게 경배하라고 합니다.

우선 여러분께서는 이와 같은 시험 내용을 들으시면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아, 나도 이런 시험을 받게 되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이 되십니까. 불안해 하십니까.

그런 분들을 위해 제가 안심을 시켜드리고자 합니다.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런 시험, 아무나 당하는 게 아니에요.

자, 마귀 사탄이 한 시험 내용을 자세히 좀 보세요.

첫째 시험은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와 같은 시험은 어떤 사람들에게 했을 것 같습니까. 아니, 복잡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조금 쉬운 비유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너 내일 너네 회사에서 100억원을 횡령하라는 시험을 마귀가 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렇다면 그런 시험을 아무한테나 하겠습니까.

우선 그 사람이 최소한 100억 정도는 있는 회사에 다녀야 하지 않겠어요? 회사에 100억도 없는데 어떻게 100억을 횡령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한 그 사람이 100억 정도가 있는 회사에 다닌다고 해서 그 돈을 횡령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회사에 갓 들어간 신입사원한테 그 정도의 돈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예컨대 회사에서 100억 정도의 돈을 횡령하라는 시험을 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로 요건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에 나온 마귀 사탄의 시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아무한테나 돌을 떡덩어리로 만들라는 시험을 하겠어요? 아니요. 그렇지는 않겠지요. 적어도 돌을 떡덩이로 만들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한테 그런 시험을 하지 않겠습니까.

다음 시험은 뭐였어요. 높은 데서 뛰어내려 보라고 하잖아요. 이 정도의 시험을 받기 위해서는 높은 데에 올라가 있는 사람이라야 하는데, 아직 밑바닥에서 바둥바둥 거리고 있는 사람한테 무슨 이런 시험을 하겠습니까.

마지막으로는 마귀가 자신한테 경배하라고 하지요? 자, 여러분께서는 누구한테 인사를 받으면 좋겠습니까. 동네에 있는 어린 애들이나 별볼일 없는 사람들한테 인사를 받고 대우를 받으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얼마 전에 그런 제목을 보았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겸손하다는 것예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미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은 별볼일 없는 사람들로부터 대우를 받지 않더라도 이미 자신의 지위는 확고해요. 그렇기 때문에 대단하지도 않은 사람들한테서까지 굳이 대우를 받을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사실 그야말로 별볼일 없는 사람들이나 아무한테서 인사를 받고 싶고 대우를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요? 예, 성경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5절~7절
“5.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彼らがしている行いはすべて人に見せるためです。彼らは聖句を入れる小箱を大きくしたり、衣の房を長くしたりするのです。
宴会では上座を、会堂では上席を好み、
広場であいさつされること、人々から先生と呼ばれることが好きです。

이 얼마나 소인배 같은 인물들입니까. 아주 작은 것까지도 대우 받기 좋아하고, 아주 작은 것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는 그런 인물들이 작은 인물들이지, 큰 사람들은 그런 작고 사소한 일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대단한 사람들한테서 대우를 받고 싶어할 수는 있겠지요. 마귀 사탄을 보십시오. 하물며 예수님으로부터 경배를 받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한가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 하시다고 하지 않습니까. 무소부재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바로 안 계신 곳이 없는, 모든 곳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 23장 24절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人が隠れ場に身を隠したら、わたしはその人を見ることができないのか。──主のことば──天にも地にも、わたしは満ちているではないか。──主のことば。

하나님께서는 온 천지에 충만하시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를 풀어서 말씀을 드리자면,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 전혀 제약을 받지 않으십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리고 온 우주 천지 공간에 충만하신 하나님, 한 순간에 모든 곳에 존재하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으면 큰 일입니다. 내가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옆 사람이 동시에 기도를 드리고 있어요. 그러면 옆 사람한테 양해를 구해야겠죠. 여보세요. 내가 지금 정말 급한 기도가 있어서 그런데, 일단 내 기도가 끝난 다음에 당신 기도를 좀 해줄 수 있겠냐 하고 양해를 얻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전세계 모든 사람들이 한 번에 기도를 드린다 하더라도 그 기도를 모두 그 순간에 다 듣고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보죠. 마귀 사탄은 무소부재 할까요? 말하자면 여기저기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천사는 어떨까요. 천사는 여기저기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을까요?

성경에 의하면 천사들은 자신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9절~10절
“9.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10.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御使いは私に、「子羊の婚宴に招かれている者たちは幸いだ、と書き記しなさい」と言い、また「これらは神の真実なことばである」と言った。
私は御使いの足もとにひれ伏して、礼拝しようとした。すると、御使いは私に言った。「いけません。私はあなたや、イエスの証しを堅く保っている、あなたの兄弟たちと同じしもべです。神を礼拝しなさい。イエスの証しは預言の霊なのです。」


요한계시록 22장 8절~9절
“8.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9.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これらのことを聞き、また見たのは、私ヨハネである。私は、聞いたり見たりした後に、これらのことを示してくれた御使いの足もとにひれ伏して、礼拝しようとした。
すると、御使いは私に言った。「いけません。私はあなたや、預言者であるあなたの兄弟たち、この書のことばを守る人々と同じしもべです。神を礼拝しなさい。」


천사들은 자기들에 대해서 스스로 ‘종(しもべ)’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천사들도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천사들도 우리처럼 동시에 여기저기에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마귀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동시에 여기저기 존재할 수가 없어요. 말하자면 그 수에는 절대적인 한계가 있다고 하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모든 사람들을 시험의 대상으로 삼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스스로를 생각할 때, 내가 별로 능력도 없고, 높은 데에 있지도 않고, 대단하지도 않은 인물이라고 한다면 안심하십시오. 마귀들은 그런 사람들한테까지 시험할 여유가 없습니다. 마귀들이 얼마나 바쁜데 그런 별볼일 없는 사람들까지 시험하고 있겠습니까.

자, 이게 정말 사실이라고 한다면, 마귀는 그럼 누구한테 시험을 하겠습니까. 일단 기본적으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마귀는 누구를 시험할 것인가에 대해서 면밀하게 선별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선택과 집중, 이 또한 마귀들의 전략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그 선별 기준이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들을 시험할 사람들로 삼는 것일까요.

이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바로 마귀들 나라에 대해서 위협이 되는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탄의 나라에 대해서 전혀 위협이 되지 않은 사람들까지 일일이 시험을 할 시간도 없고 여력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시험을 해서 넘어뜨려야 할 사람들을 선택해서 집중적으로 공략할 작전을 세우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열심히 하려고 해요. 주님의 일을 감당하려고 해요. 그러면 마귀들한테는 비상이 걸립니다. 아무리 바빠도 저 놈을 막아야 해. 그러면서 온갖 수작들을 다 부립니다.

주변 사람들을 동원해서 욕을 하고 박해하고, 어디 그 뿐이에요? 너는 안돼. 할 수 없어. 어서 포기해……. 이러면서 우리에게 총공격을 가해옵니다. 그리고 아주 우리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좌절과 절망을 안겨주려고 난리를 쳐요.

이처럼 정신적인 박해, 그리고 때로는 육체적인 박해까지도 우리에게 안겨주려고 마귀 사탄들이 발버둥을 칠 때가 있습니다.


공사다망한 마귀 사탄들이 엄격한 선별기준에 따라서 그 시험대상을 선정한 다음에, 그 없는 시간과 인력을 할애해가면서 그 사람에 대하여 시험을 한다는 것, 이는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이 마귀 사탄에게 있어서 그만큼 위협이 될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마귀 사탄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마귀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 그 정도로 큰 일을 하고 있는 사람, 나중에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상을 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뜻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5장 11절~12절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わたしのために人々があなたがたをののしり、迫害し、ありもしないことで悪口を浴びせるとき、あなたがたは幸いです。
喜びなさい。大いに喜びなさい。天においてあなたがたの報いは大きいのですから。あなたがたより前にいた預言者たちを、人々は同じように迫害したのです。


생각해보세요. 누군가가 우리 보고 욕하고 박해하고 그래요. 그런데 기뻐하래요. 이걸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읽는다면 말이 안 됩니다. 그런 정신 나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마귀가 어떤 사람들을 시험하려고, 그리고 넘어뜨리려고 달려드느냐 하는 그 비밀을 알면 이 말씀이 얼마나 큰 은혜가 되냐 하는 것이지요.

지금 마귀가 지들도 바빠 죽겠는데도 우리한테 욕을 하고 박해하고 그래요. 그것은 뭐냐 하면 바로 우리가 그만큼 자기들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경에는 이 비밀을 이미 알아차렸던 믿음의 선배들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5장 40절~42절
“40.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2.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使徒たちを呼び入れて、むちで打ち、イエスの名によって語ってはならないと命じたうえで、釈放した。
使徒たちは、御名のために辱められるに値する者とされたことを喜びながら、最高法院から出て行った。
そして毎日、宮や家々でイエスがキリストであると教え、宣べ伝えることをやめなかった。

사도들이 관리들에게 붙들려서 채찍질을 당했는데도 기뻐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것만 보면 그야말로 정신병자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이 기뻐한 것에는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5장 41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使徒たちは、御名のために辱められるに値する者とされたことを喜びながら、最高法院から出て行った。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래,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일했더니, 마귀 사탄들에 의해 이 정도로 박해를 받을 만한 인물로 인정을 받았구나! 하는 사실을 알고 기뻐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축구 시합에 나갔어요. 그런데 나한테 공도 없는데 상대 팀 선수들이 몇 명이나 몰려와서는 내 주위를 둘러싸고 어떻게든 나한테 공이 안 오게 방해를 해요. 내가 움직이려고 하면 일거수일투족 막아 서고 그럽니다.

만약에 그런 상황이라면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바로 나는 상대팀에게 있어서 그만큼 위협이 되는 뛰어난 선수라는 사실을 인정받은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된 게, 나한테는 상대팀 선수들이 아무도 방해를 안 해요. 나한테 공이 왔는데도 아무도 빼앗을 생각도 하지 않고 멀리서 실실 웃으면서 처다 보고만 있어요.

그건 뭐예요? 야. 저 놈한테 공이 가도 괜찮아. 어차피 골을 못 넣어……. 그렇게 무시 당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 삶 속에서 시험이 다가왔습니까. 크고 작은 시험 때문에 지치고 힘들고 괴롭습니까.

축하합니다. 이제 당신은 비로소 마귀 사탄에게 위협되는 사람으로 선정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렇습니다. 이제 당신은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상을 받을 후보로 선정된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넘어뜨리기 위해 달려드는 마귀 사탄들을 쌍수 들고 환영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물리쳐야죠.

그렇다면 어떻게 물리쳐야 하느냐 하면, 그 방법을 오늘 본문에서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마귀 사탄을 어떻게 물리치셨습니까.

마태복음 4장 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イエスは答えられた。「『人はパンだけで生きるのではなく、神の口から出る一つ一つのことばで生きる』と書いてある。」

마태복음 4장 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試みてはならない』とも書いてある。」

마태복음 4장 10절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そこでイエスは言われた。「下がれ、サタン。『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礼拝しなさい。主にのみ仕えなさい』と書いてある。」


예수님께서는 마귀 사탄을 어떻게 물리치셨습니까. 마귀 사탄한테 십자가를 드리 대셨나요? 아니면 무슨 성수 같은 것을 뿌리셨나요?

아닙니다. 세 번의 시험 모두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말씀으로 물리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지난 주 토요일에 다카사키 쪽 방문전도를 마치고 오는 길에 동네 마트에 들렀습니다. 그 때는 제 아내도 서울에 가 있었고 하니 혼자서 뭐라도 먹을 거리라도 사야겠다 싶어서 좀 늦은 시간에 마트에 갔습니다.

이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문을 닫고는 문 옆에 있는 스위치를 누르면 문이 잠기거든요. 그런데 그 날 따라 그 단추를 눌러도 문이 안 잠겨요.

이상하다 하고 아무리 이것저것 시도를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쩌겠어요. 이미 해는 저물어서 주차장은 어두컴컴했기 때문에 자동차 매뉴얼을 들고 마트 안으로 들어가서 그 구석에서 열심히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무슨 스위치를 누르면 될 것 같아요. 그래서 다시 자동차 쪽으로 나와서 핸드폰 라이트를 켜고 열심히 그 스위치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안 보여요. 분명 거기에 있다고 그림까지 그려서 설명이 되어 있는데도 도무지 보이질 않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저랑 똑 같은 차를 가진 사람이 있으면 좀 물어볼까 하고 주차장을 둘러 봤더니만, 평소에는 자주 보이던 그 흔한 차가 그날 따라 또 안 보이는 것 있죠.

그래서 저는 또 제 차가 워낙 오래된 거라서 없거나 아니면 옵션에 따라서 다른가 했었습니다만, 아니, 그 매뉴얼은 분명 그 차에 대한 것이니까 다르지는 않을 거거든요. 그리고 옵션에 따라서 다르다는 설명도 없어요.

그래서 어쩌겠습니까. 매뉴얼을 몇 번이나 다시 본 다음에 확인을 하고서는 이제 아주 그 운전석의 다리 쪽에 머리를 집어넣어서 샅샅이 뒤져봤죠.

그랬더니만 어떻게 됐겠습니까. 야, 거기 스위치가 있더라고요.

그게 어디 있었냐 하면, 운전하시는 분들이라면 아실 거예요. 가속페달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그 발등 바로 위쪽에 있었습니다.

거기 있는 스위치를 누르니까 이제 되더라고요.


솔직히 제가 자동차에 있어서 그리 해박한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지금까지 여러 대를 몰아 보긴 했었거든요.

하지만 그런데도 제가 가지고 있던 지식이나 경험으로는 거기에 스위치가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습니다.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곳에 스위치가 있었더라니까요.

제가 장담을 합니다. 만약에 그 자동차 매뉴얼이 아니었다면 아마 10년이 지나도 그 스위치는 찾아내지 못했을 거예요. 그러나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제가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 매뉴얼을 봤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우리 삶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평소에는 잘 되던 것이 안 됩니까. 이상하게 일이 안 풀리고 여기저기서 꼬이기 시작합니까. 골치 아픈 문제들이 동시에 여기저기서 터지기 시작합니까.

그것은 어쩌면 마귀 사탄이 우리를 자기네들 요주의 인물로 선별한 결과 달려들기 시작해서 그런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럴 때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의 영원하고도 완전한 매뉴얼, 바로 성경을 찾아봐야 할 때인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7절~8절
“7.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与えられます。探しなさい。そうすれば見出します。たたきなさい。そうすれば開かれます。
だれでも、求める者は受け、探す者は見出し、たたく者には開かれます。


주님은 우리에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구하고 찾고 어디를 두드리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에서 구하고 성경에서 찾고 성경을 두드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지식이나 내 상식으로 그리고 내 경험으로도 찾거나 구하지 못한 스위치를 성경에 의해 전혀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바로 성경에서 찾아낸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달려드는 마귀 사탄들을 물리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가 시험을 당하게 되었을 때, 근심하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큰 상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았다고 하는 그 시험의 의미를 올바로 깨달아서,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하고 그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마귀 사탄을 물리침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면류관, 놀라운 승리의 면류관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まさに聖書から探し出したそのみ言葉を通して、私たちを転ばせるために躍起になっている悪魔サタンを退かせ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いたします。

これから私たちが試みにあう時、苦しみ落胆し挫折し絶望し諦めるのではなく、主から大きな褒美を受けるに値する者とされたという試みの意味を悟り、むしろ喜び感謝をささげ、そして主のみ言葉により悪魔サタンを退かせることによって、主からいのちの冠、驚くべき勝利の冠をすべて受けられる皆さまであらんことを主の御名においてお祈り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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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35회 세례 받으신 예수님
2024년 3월 10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11절~17절
“11.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2.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13.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14.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16.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マタイの福音書 3章 11節~17節
“11.私はあなたがたに、悔い改めのバプテスマを水で授けていますが、私の後に来られる方は私よりも力のある方です。私には、その方の履き物を脱がせて差し上げる資格もありません。その方は聖霊と火であなたがたにバプテスマを授けられます。
12.また手に箕(み)を持って、ご自分の脱穀場を隅々まで掃ききよめられます。麦を集めて倉に納め、殻を消えない火で焼き尽くされます。」
13.そのころ、イエスはガリラヤからヨルダン川のヨハネのもとに来られた。彼からバプテスマを受けるためであった。
14.しかし、ヨハネはそうさせまいとして言った。「私こそ、あなたからバプテスマを受ける必要があるのに、あなたが私のところにおいでになったのですか。」
15.しかし、イエスは答えられた。「今はそうさせてほしい。このようにして正しいことをすべて実現することが、わたしたちにはふさわしいのです。」そこでヨハネは言われたとおりにした。
16.イエスはバプテスマを受けて、すぐに水から上がられた。すると見よ、天が開け、神の御霊が鳩のようにご自分の上に降って来られるのをご覧になった。
17.そして、見よ、天から声があり、こう告げた。「これはわたしの愛する子。わたしはこれを喜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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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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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10번째 시간으로서 “세례 받으신 예수님” 洗礼を受けられたイエス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중에서 11절과 12절의 내용을 본다면 세례 요한은 분명 예수님에 대해서 백성들에게 증거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서 11절과 12절을 보시면 이는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11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3장 11절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1.私はあなたがたに、悔い改めのバプテスマを水で授けていますが、私の後に来られる方は私よりも力のある方です。私には、その方の履き物を脱がせて差し上げる資格もありません。その方は聖霊と火であなたがたにバプテスマを授けられます。


이는 장차 오실 구세주 메시야의 위상과 능력에 대해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이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인지 여부를 알고 싶어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세례 요한은 명쾌하게 부인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의 신발을 관리한다는 일은 당시 하인들이 했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그 분의 하인 보다도 못한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신의 뒤에 오실 분은 자신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놀라운 능력을 가진 분이시고, 뿐만 아니라 이 또한 자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히 위대하신 분이라는 것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12절입니다.

마태복음 3장 12절
“12.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12.また手に箕を持って、ご自分の脱穀場を隅々まで掃ききよめられます。麦を集めて倉に納め、殻を消えない火で焼き尽くされます。」

이는 메시야에 의한 심판을 뜻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우리에 대한 심판은 누가 합니까. 이 세상에서 심판은 말하자면 재판은 재판관이 할 수 있겠습니다만, 영적인 재판 즉 구원이냐 멸망이냐 하는 재판은 바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세례 요한이 말하기를, 자기 다음에 오실 분은 우리에 대한 심판을 하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진 분이라고 증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자기 뒤에 오실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시라고 증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요, 이 예언대로 오신 분이 바로 성자 하나님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은 13절에서 15절까지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3장 13절~15절
“13.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14.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13.そのころ、イエスはガリラヤからヨルダン川のヨハネのもとに来られた。彼からバプテスマを受けるためであった。
14.しかし、ヨハネはそうさせまいとして言った。「私こそ、あなたからバプテスマを受ける必要があるのに、あなたが私のところにおいでになったのですか。」
15.しかし、イエスは答えられた。「今はそうさせてほしい。このようにして正しいことをすべて実現することが、わたしたちにはふさわしいのです。」そこでヨハネは言われたとおりにした。


이처럼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를 선포하고 세례를 베풀면서 메시야가 오신다는 예언을 전하고 있을 때 바로 예수님께서 그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이 점에 대해서 세례 요한은 흥미로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31절
“29.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0.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31.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その翌日、ヨハネは自分の方にイエスが来られるのを見て言った。「見よ、世の罪を取り除く神の子羊。
『私の後に一人の人が来られます。その方は私にまさる方です。私より先におられたからです』と私が言ったのは、この方のことです。
私自身もこの方を知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私が来て水でバプテスマを授けているのは、この方がイスラエルに明らかにされるためです。」


문맥상으로 볼 때 이 말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주위에 있는 백성들이나 제자들에게 했던 말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내 뒤에 오실 분이 계시다고 했는데, 그 분이 바로 이 분이다, 라고 말하면서 자신도 그를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그 때까지 일면식도 없는 관계였을까요. 아니요. 오히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그 이유는 누가복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 36절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見なさい。あなたの親類のエリサベツ、あの人もあの年になって男の子を宿しています。不妊と言われていた人なのに、今はもう六か月です。

누가복음 1장 56절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マリアは、三か月ほどエリサベツのもとにとどまって、家に帰った。


누가복음 1장에 의하면 이 한 장에서 두 아이의 탄생이 예언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세례 요한과 예수님에 대한 탄생입니다.

세례 요한의 어머니는 엘리사벳이고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는 마리아인데,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말하기를 네 친족 엘리사벳도 잉태했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친족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어느 정도 가까운 사이였냐 하면, 마리아가 잉태사실을 듣고는 엘리사벳한테 가서 석 달이나 함께 지냈을 정도로 그 관계가 가까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3장 23절 전반부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イエスは、働きを始められたとき、およそ三十歳で、……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나이가 서른 살 정도 되셨다고 하는데, 자, 어머니끼리 그 정도로 가까웠다면 그 아들인 요한과 예수님이 30년 동안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면 이는 오히려 부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이 점에 대해서 요한복음 1장 33절~34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장 33절~34절
“33.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私自身もこの方を知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水でバプテスマを授けるようにと私を遣わした方が、私に言われました。『御霊が、ある人の上に降って、その上にとどまるのをあなたが見たら、その人こそ、聖霊によってバプテスマを授ける者である。』
私はそれを見ました。それで、この方が神の子であると証しをしているのです。」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그처럼 가까운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이 그를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바로 구세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여기만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1장 2절~3절
“2.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さて、牢獄でキリストのみわざについて聞いたヨハネは、自分の弟子たちを通じて
イエスにこう言い送った。「おいでになるはずの方はあなたですか。それとも、別の方を待つべきでしょうか。」

당시 세례 요한은 옥에 갇혀 있었습니다만, 그 때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묻기를 장차 오시리라고 예언되었던 메시야가 예수님이 맞는지 여부를 묻게 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아니, 육신적으로 본다면 예수님과 대단히 가까운 친척관계에 있어왔고 예수님을 만나자 그가 바로 메시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심을 가지고 있었던 세례 요한의 모습을 본다면, 그는 영적으로 대단히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나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에 대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11장 11절 전반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女から生まれた者の中で、バプテスマのヨハネより偉大な者は現れませんでした。……

이 말씀은 세례 요한만한 선지자는 그 전에도 후에도 없다고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정도로 대단한 선지자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는 나중까지도 그 의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요.

이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서 세례 요한 조차도 예상을 못했을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를 비롯해서 메시야가 오신다는 예언은 구약에 끊임없이 등장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채로 저주를 받아 죽음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하게 되어,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이와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을 당시에는 그 누구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도 이는 세례 요한조차도 믿기가 어려울 정도로 정말 뜻밖의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구약 39권째 말라기서를 읽고 그 다음에는 곧바로 마태복음이 나옵니다. 참고로 말라기는 창세기나 출애굽기, 레위기처럼 책 이름이 아니라 “말라기”가 선지자 이름입니다.

말라기 선지자까지는 계속해서 선지자도 있었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장차 엘리야를 보내시겠다고 하는 예언으로 말라기서가 끝나게 되는데, 그로부터 오랫동안 그야말로 감감무소식입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메시야나 엘리야는 고사하고 선지자들도 나타나지 않아요.

그와 같은 기간이 얼마나 계속됐냐 하면 무려 400년 이상이나 이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됐겠어요.

아, 구약 때 예언은 그야말로 전설, 아니면 신화구나. 이제 메시야가 온다고 하는 것도 모두 헛것이구나. 하는 그와 같은 절망이 만연하고 있던 상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때 세례 요한이 나타나서는 회개와 천국을 선포하고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제 세례 요한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예수님도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겠다고 하세요.

예수님이 장차 오시리라고 하신 그 분이라는 사실을 알아보고서 요한은 놀랍니다. 아니, 내가 당신한테서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어찌 내가 세례를 베풀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는 것이 의를 이루는 것, 즉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이라고 요한에게 말을 함으로 인해서 마침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러자 어떻게 됩니까.

마태복음 3장 16절~17절
“16.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16.イエスはバプテスマを受けて、すぐに水から上がられた。すると見よ、天が開け、神の御霊が鳩のようにご自分の上に降って来られるのをご覧になった。
17.そして、見よ、天から声があり、こう告げた。「これはわたしの愛する子。わたしはこれを喜ぶ。」”

이 장면을 보시면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이 모두 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성령님을 받으신 예수님은 비로소 공생애를 시작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참고로 저는 성령님이 비둘기 같이 내려왔다는 점에 대해서 단순히 그냥 비유라고 생각했었습니다만, 사실 그게 아닌 것 같더라고요.

이 장면에 대해서 누가복음 3장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누가복음 3장 22절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聖霊が鳩のような形をして、イエスの上に降って来られた。すると、天から声がした。「あなたはわたしの愛する子。わたしはあなたを喜ぶ。」

여기 보면 분명히 ‘비둘기 같은 형체(鳩のような形)’라고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볼 때 최소한 비둘기 같은 그 무엇인가가 보인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자, 이 시점에서 우리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에는 중요한 ‘실’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실’과 ‘진실’과 ‘현실’입니다.

이 ‘사실’과 ‘진실’과 ‘현실’이라고 하는 개념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도 매우 유용합니다.

우선 ‘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객관적으로 일어난 사건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고,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실’에 내포되어 있는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며,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그 ‘진실’이 끼친 영향으로 인한 현재 상황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 진실은 의미가 없는 것이요, 진실을 이룰 만한 내포된 의미가 없는 객관적인 사건 또한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세례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일단 ‘사실’은 어떻습니까. 마태복음 3장 16절, 마가복음 1장 9절, 누가복음 3장 21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분명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진실’을 알아보아야 하겠지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고 하신 사실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우리는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알아본 바와 같이 세례 요한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러 온 인물입니다.

이사야 40장 3절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荒野で叫ぶ者の声がする。「主の道を用意せよ。荒れ地で私たちの神のために、大路をまっすぐにせよ。

마태복음 3장 3절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この人は、預言者イザヤによって「荒野で叫ぶ者の声がする。『主の道を用意せよ。主の通られる道をまっすぐにせよ』」と言われた人である。


400년 이상이나 계속된 영적으로 암울한 공백기간을 지나고 이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날이 다가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례 요한은 백성들에게 그 사실을 선포합니다.

예언은 전설이나 신화가 아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우리를 기억하시며 놀라운 권세를 가지신 분이 이 땅에 오신다. 그러니 어서 깨어 회개하고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라고 외친 것이 바로 세례 요한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비행기가 뜨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작은 비행기, 무슨 헬기나 특수 전투기가 아닌 거대한 여객기 같은 비행기가 뜨기 위해서는 반드시 활주로가 필요합니다.

활주로가 있어야 비행기가 그 활주로 위를 달리고는 마침내 날아오르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은 바로 그 활주로의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겠다고 하신 그 이유는, 세례 요한이 감당했던 그 사역을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그리고 그가 닦아 놓은 활주로를 통해서 높이 날아오르시겠다고 하는 주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일출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처음 일출을 본 건 20대 중반 쯤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그때 제가 PC통신, 그 때는 아직 인터넷이 없었을 때였거든요. 그래서 그때 PC통신에 있는 여행동호회에 가입해서 잠시 활동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 보니까 여행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밤에 전화가 한 통 걸려왔어요. 받아봤더니 그 동호회에서 그래도 좀 친하게 지냈던 형이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와서 하는 말이, 저더러 “야, 정동진 가자” 그러는 거예요.

저는 그 때까지 ‘정동진’이라는 곳을 몰랐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게 사람 이름인 줄 알고, 제가 김동진은 알고 박동진도 아는데, 정동진은 모른다고 했더니만, 무슨 헛소리냐고 하면서 그냥 따라오래요. 그래서 멋도 모르고 그 형 차를 타고 갔지요.

지금은 뭐 정동진이 개발이 되어서 상당하다고 합니다만,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냥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어요. 그런데 정말 신기하더라고요. 저는 그 형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갔었는데, 철도길 옆이 바로 바닷가 모래사장이잖아요. 정말 참 신기하더라고요.


거기 도착하니까 아직 어두웠는데 날이 밝아 지기 전에 서둘러 바닷가 쪽으로 갔죠.

저는 일출을 처음 볼 때까지는, 일출이라고 하는 것은 캄캄할 때 갑자기 태양이 떠오르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고요.

하늘은 다 밝아졌는데 아직 해가 안 뜨는 거예요. 그 때가 겨울이었나 그랬는데, 거기에 동해바다 바닷바람까지 있으니까 얼마나 추웠겠어요. 그래서 빨리 차에 가고 싶었는데 하늘은 환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해가 안 떠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일출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이 거의 다 밝아지고는 그 다음에 태양이 이렇게 떠오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벌벌 떨면서 기다렸더니 정말 그렇더라고요. 하늘이 아주 환하게 밝아진 다음에 저 멀리서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역할이 바로 그와 같은, 그러니까 태양이 떠오르기 전에 하늘을 밝히는 역할을 했던 것이 세례 요한이 감당했던 사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그가 밝힌 하늘 속으로 마치 아침 해가 떠오르듯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요한복음 1장 31절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私自身もこの方を知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私が来て水でバプテスマを授けているのは、この方がイスラエルに明らかにされるためです。」

요한은 주님을 이스라엘에 나타내기 위해서 세례를 베풀었으며, 그가 평탄하게 한 그 길로 이제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의 진정한 의미, 즉 진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현실’은 어떨까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말씀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 중에서 마태복음 3장 16절을 다시 볼까요?

마태복음 3장 16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6.イエスはバプテスマを受けて、すぐに水から上がられた。すると見よ、天が開け、神の御霊が鳩のようにご自分の上に降って来られるのをご覧になった。

저는 이 세례를 받으시고는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정말 그 때 동해바다에서 올라온 태양이 연상됩니다. 요한이 이 세상을 환하게 밝혀 놓고는, 그 속에서 예수님이 떠올라 이 세상에 나타내심바 되었다는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나타나고 계십니까.

만약 이 현실 속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고 아직 물 속에 가라앉고 계시다면, 이는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의 진실이고 사실이고 간에 이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했어요. 그런데 현실 속에서 결과를 얻은 것이 없다면 그렇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삶 속에서 예수님을 올라오시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예수님을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드실 작정이십니까.

우리가 우리 힘으로 우리 스스로를 높이면 우리는 높아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낮추는 것입니다.
考えてみてください。いくら一生懸命努力をしたとしても現実の中で結果を得られなかったというのであれば、そこに何の意味があるでしょうか。

私たちは私たちの人生の中でイエス様を上がらせなければなりません。イエス様を私たちの人生の中に現せ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いつまでイエス様を水の中で、もがき苦しませるおつもりですか。

私たちが私たちの力で自らを高めても高められません。

しかし私たちを高められる方法があります。それは私たちがへりくだることです。

야고보서 4장 10절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主の御前でへりくだりなさい。そうすれば、主があなたがたを高く上げてくださいます。

이제 우리 삶 속에서 우리를 낮추고는 예수님을 올라오시게 하고 나타내시게 하고 높이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높임을 받고 존귀함을 얻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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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34회 회개에 합당한 열매
2024년 3월 3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5절~9절
“5.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7.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マタイの福音書 3章 5節~9節
“5.そのころ、エルサレム、ユダヤ全土、ヨルダン川周辺のすべての地域から、人々がヨハネのもとにやって来て、
6.自分の罪を告白し、ヨルダン川で彼からバプテスマを受けていた。
7.ヨハネは、大勢のパリサイ人やサドカイ人が、バプテスマを受けに来るのを見ると、彼らに言った。「まむしの子孫たち、だれが、迫り来る怒りを逃れるようにと教えたのか。
8.それなら、悔い改めにふさわしい実を結びなさい。
9.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の父はアブラハムだ』と心の中で思ってはいけません。言っておきますが、神はこれらの石ころからでも、アブラハムの子らを起こすことができ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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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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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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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9번째 시간으로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 悔い改めにふさわしい実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세례를 베풀었더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로 왔다고 하는데, 오늘 본문에 보시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 부류는 6절에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3장 6절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6.自分の罪を告白し、ヨルダン川で彼からバプテスマを受けていた。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세례라고 하는 개념은 그 때까지 없었던 관행이었는데, 나중에 이 세례에 대해서 의미가 부여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만, 당시 요한에게 모여들어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요한이 외쳤던 회개에 대하여 순종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세례를 베푼 것은 세례 요한이 자기 마음대로 시작한 것이냐 하면,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장 33절 중반부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私自身もこの方を知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水でバプテスマを授けるようにと私を遣わした方が、私に言われました。……

이는 세례 요한의 말입니다만, 여기서 그는 자신이 스스로 판단해서 세례를 베푼 것이 아닌 세례를 베풀도록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례는 예수님까지도 받으셨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 요한이 베푸는 세례는 예수님도 분명 인정하셨다는 점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은 장로회를 비롯한 많은 교단에서 약식으로 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만, 본래 세례라고 하는 것은 침례, 그러니까 물속에 완전히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성경에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16절 전반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イエスはバプテスマを受けて、すぐに水から上がられた。

마가복음 1장 10절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イエスは、水の中から上がるとすぐに、

옛날 그림들을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 머리 위에 물을 붓고 있는 것도 있고 그런데, 그와 같은 그림이나 영화 같은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바로 성경 말씀을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를 들어서 다빈치의 마지막 만찬이라고 하는 그림을 본다면 어떻습니까.

이는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기념해서 만찬을 가졌을 때의 장면을 그린 작품이라고 하지요.

이건 좀 여담입니다만, 한국에서는 이를 ‘최후의 만찬’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적절하지가 않습니다.


아마도 일본에서 이를 한자로 표기했을 때 ‘최후의 만찬’이라고 해서 이를 그대로 한글로 옮기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데, 이는 의미상으로 볼 때 ‘최후’라고 하기 보다는 ‘마지막’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그림을 보고 아, 정말 그 때는 이랬었나 보다 하고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이 그림에는 분명한 오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식사할 때의 자세입니다.

그 그림에 보시면 예수님을 비롯해서 모두가 의자에 앉아 있는데,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처럼 의자에 앉아서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조금 비스듬하게 누운 자세로 식사를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영화나 그림을 보고 그것이 성경인 줄 알고 그대로 믿는다는 것은 자칫하면 성경 이해에 있어서 오해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 성경말씀을 중심으로 우리가 이해를 해야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자,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본래 세례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머리에 물을 조금 붓는 것이 아닌 물속에 완전히 들어갔다 나오는 방식이었다고 한다면, 이 세례가 주는 의미를 1차적으로 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기에는 세례 요한이 외쳤던 ‘회개’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하겠는데, 이 회개의 의미를 살펴본다면 세례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물에 풍덩 들어갔다 오면 당연히 온몸이 젖게 되겠지요. 지금도 비가 오면 우산을 씁니다만,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일단 옷을 안 젖게 하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사실 요즘 옷 같은 경우에는 비에 젖는다 하더라도 그리 심하게 모양새가 흐트러지지는 않는다고 하겠는데, 옛날 옷 같은 경우에는 옷이 물에 젖으면 아주 보기에 안 좋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옷을 벗어야 해요.

저도 어렸을 때 세례를 받았을 때를 보면 그 때는 강에 가서 침례로 받았는데, 그 때는 속옷차림에다가 흰 가운을 입고 강에 들어가서 세례를 받고 그랬습니다만, 그 모습은 어떻습니까. 아무리 점잖은 사람이 흰 가운을 입었다 하더라도 그 젖은 모습이 그리 보기 좋지는 않잖아요.

회개라고 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좋은 모습, 멋진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쓰지요.


예를 들어서 요즘 사람들을 보더라도 페이스북이나 인스타 같은 곳에 보면 자기의 안 좋은 모습을 올려놓고 싶어합니까.

자기가 잘 차려 입은 사진이나 멋진 모습들을 사진에 찍어서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겠어요.

하물며 자기의 흔한 일상모습이라고 하고 올려놓는 사진들을 보면, 옆에 슬쩍 명품 시계나 악세서리 같은 것이 나오게 찍는다거나, 운전하는 모습에는 슬쩍 자기 운전대에 찍힌 외제차 마크가 보기에 한다거나, 사실 좀 그런 건 보는 사람이 쑥스러울 수도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자기 좋은 모습을 그렇게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회개를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안 좋은 것, 마치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회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세요. 회개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무슨 많은 사람들을 앞에 두고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께 지은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내가 이웃에게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이웃에게 잘못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 그것이 회개 아니겠습니까.


여기에는 자존심이 없습니다. 변명이 없습니다.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는 것이 바로 회개의 본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은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며 세례를 베푸는 요한에게 와서 자신을 낮추고 회개의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만, 이 중에는 또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7절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7.ヨハネは、大勢のパリサイ人やサドカイ人が、バプテスマを受けに来るのを見ると、彼らに言った。「まむしの子孫たち、だれが、迫り来る怒りを逃れるようにと教えたのか。

요한이 세례를 베푸는데 그 곳에 많은 사람들이 왔고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도 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라고 하면 무슨 이방인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이 아니라 모두 유대인들입니다.

당시 유대교에는 세 가지 그룹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것은 바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그리고 성경에는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 에세네파라고 하는 그룹이 있었습니다.

이 차이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 좀 이야기가 복잡해질 수 있겠는데, 간단히 설명하면 바리새파 사람들은 형식에 있어서 강조했던 경향이 있고, 사두개파 사람들은 합리주의적인 경향이 있었다고 할 수 있었는데, 이들은 내세도 부활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에세네파로 불리는 사람들은 경건주의 금욕주의 그리고 비밀주의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들은 광야에서 살면서 철저한 경건, 금욕을 지키면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에 대해서 외부에 알리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기록들이 없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이 에세네파에서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세례 요한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기도 합니다.

이 세 개 종파 중에서 당시 종교적인 권력을 행사했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들이 오는 것을 보고 세례 요한은 크게 비난을 합니다.

아니,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다가, 왜 유독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는 심한 말로 꾸짖었던 것일까요.

이는 분명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요한의 말대로 자신의 죄에 대해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세례를 받기 위해 왔지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구경을 하러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는 자신들의 말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복종하고 그랬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더니 사람들이 다 그리로 몰려가요. 그리고 자신들은 전혀 주장하지도 않았던 회개를 말하자 사람들이 다 물로 세례를 받고 그럽니다.

일이 그렇게 되니까 도대체 누가 무슨 말을 하기에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갈까 하고 궁금해하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제 자신들의 기득권이 흔들리게 되지 않을까 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말하자면 정탐을 갔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제 자신을, 말하자면 구경하러 온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말합니다.


마태복음 3장 8절~9절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8.それなら、悔い改めにふさわしい実を結びなさい。
9.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の父はアブラハムだ』と心の中で思ってはいけません。言っておきますが、神はこれらの石ころからでも、アブラハムの子らを起こすことができるのです。


자신들의 기득권에 연연하는 그들에게 세례 요한은 회개할 것을 강권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하지 말라고 하지요. 하나님께서는 이 돌멩이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고 합니다.

당시 그들의 생활이 어땠길래 요한은 이처럼 험한 말로 그들을 꾸짖었던 것일까요.


마태복음 23장 5절~7절
“5.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彼らがしている行いはすべて人に見せるためです。彼らは聖句を入れる小箱を大きくしたり、衣の房を長くしたりするのです。
宴会では上座を、会堂では上席を好み、
広場であいさつされること、人々から先生と呼ばれることが好きです。


그들은 남들 앞에서 자신을 높이기 좋아했습니다.

경문 띠라고 하는 것은, 지금도 유대인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만, 율법을 기록한 경문을 작은 상자에 담아서 이마나 손목에 묶어서 고정을 시키고 기도를 하는데, 그 띠를 넓게 했다는 것은 사람들 눈에 잘 띄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옷술을 길게 했다는 것은 자신들이 입는 예복을 권위있게 꾸몄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는 실속이 없고 바깥 모습을 꾸미는 데에만 신경을 썼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디 그 뿐인가요. 잔치 자리에 가면 항상 높은 자리에 앉으면서 대우를 받으려고 했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선생님 소리를 들으면서 높임을 받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5절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また、祈るとき偽善者たちのようであってはいけません。彼らは人々に見えるように、会堂や大通りの角に立って祈るのが好きだからで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彼らはすでに自分の報いを受けているのです。


이처럼 사람들로부터 높임을 받으려고 했던 그들을 향해 세례 요한은 엄한 말로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들을 차별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면 말하자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자신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이라고 해서 다른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사람 취급도 안 했어요. 말도 안 섞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당시 이스라엘이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그들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자신들의 국권도 상실한 상태인 주제에 무슨 다른 체면으로 이방인들을 차별하고 그러냐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주제 파악도 못하고 사리분별도 못하는 그들에게 세례 요한은 뭐라고 말합니까.


마태복음 3장 9절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の父はアブラハムだ』と心の中で思ってはいけません。言っておきますが、神はこれらの石ころからでも、アブラハムの子らを起こすことができるのです。


너희들이 지금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서 잘난 척하고 있는데,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하나님은 이 돌멩이처럼 아무런 가치 없는 것으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만들 수 있어……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어떤 한 메일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제가 보내 드리는 전도메일을 받아 보신 분 같아요.


그런데 이 분이 하는 말이, 어디서 감히 자기한테 이런 메일을 보내냐는 것이에요.

그래서 저는 이 메일을 받고, 어디서 감히? 라는 말을 하기에 좀 어이가 없었습니다.

메일 내용을 보자 하니 변호사 같은데 도대체 얼마나 지체가 높으신 분이신가, 대법관이나 국무총리라도 역임하신 분이신가 하고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봤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분이셨냐 하면, 아직 30대 초반인 로스쿨 출신 변호사더라고요.


참 듣기도 민망해서, 혹시 저와 같은 법대나 대학교 후배라면 한 마디라도 해줄까 했는데, 뭐, 같은 법대도 아니고 같은 학교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래, 수고하세요……라고 생각하고 그냥 접었습니다.

옛날에는 사법시험을 보려면 응시자격이 없었습니다. 학력에 대한 제한도 없었고 그리고 응시료도 얼마나 쌌는지 몰라요.

90년대 초반의 경우에는 사법시험 1차 응시료가 2000원이고, 2차, 3차는 3500원이었습니다. 당시 운전면허 필기와 실기시험 응시료하고 똑같았어요.


물론 그 후에는 조금 더 오르긴 했지만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되지요. 한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습니다만, 지금은 변호사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로스쿨을 반드시 졸업을 해야 하는데, 이 등록금이 상당히 비쌉니다. 졸업하기 위해서는 등록금만 보더라도 몇 천만원이 들어요. 여기에 책값이나 뭐다 하면 어마어마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열심히 공부하고 비싼 돈도 들여서 변호사님이 되셨으니 얼마나 자랑스러웠겠습니까.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어디서 감히? 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을 보면, 이런 젊은 변호사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의뢰인의 입장이 되어서 사건이나 제대로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를 갖게 됩니다.

뭐, 이런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도 때로는 여러 가지 자부심을 가질 때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말도 있잖아요. 누구는 집에 금송아지 하나 없는 사람 있냐……라고 하기도 하잖아요.


내가 이래봬도 젊었을 때는 말이야……. 그리고 외국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그런 말을 많이 한다고도 하지요? 내가 한국에 있었을 때는 말이야…….

여러분, 성경에는 뭐라고 기록합니까. 성경에 그러라고 적혀 있습니까.

모세는 당시 유대인에 대한 핍박 때문에 갓난아기일 때에 나일 강에 버려졌지만, 그 아이를 통해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도록 하셨습니다.

다윗은 형제 중 막내였고 그의 아버지도 그를 중히 여기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그는 많이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어부 집안에서 태어나 어부로 살아갈 사람을 택해서 주님의 크나큰 사도로 세우지 않았습니까.

우리 마음 안에 좁쌀만한 자만심이 있습니까. 내가 이래봬도……라고 하는 오만함이 있습니까.


누가복음 14장 11절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なぜなら、だれでも自分を高くする者は低くされ、自分を低くする者は高くされるからです。」

고린도전서 10장 12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ですから、立っていると思う者は、倒れないように気をつけなさい。


우리는 그 오만함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높이기 보다는 낮추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포르투갈 항공사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고 합니다. 50대 가량 백인 여성이 비행기 이코노미석에 앉으려고 했는데 그 옆자리에 흑인 남성이 앉아 있더래요.

이 백인 여성은 역성을 내며 승무원을 부른 다음에 하는 말이, 자기 옆에 흑인이 앉아 있어서 대단히 불쾌하다면서 당장 자리를 바꿔 달라고 난리를 칩니다.

이 말을 들은 승무원은, 이 승객을 진정시킨 다음에 잠시 알아보고 오겠다고 해요.

그러고는 얼마 후에 돌아와서 말을 합니다.

“지금 이코노미석에 빈 자리가 없지만 퍼스트클래스에는 빈 자리가 있습니다. 자리를 옮겨드리는 일은 저희 항공사에서는 전례가 없는 일이지만, 저희 손님을 불쾌한 사람 옆에 앉도록 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 말을 듣고 백인 여성은 통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짐을 챙기고 일어나려고 하는데, 승무원은 백인 여성이 아닌, 말없이 옆자리에 앉아 있던 흑인 남성에게 말을 합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짐을 챙겨서 퍼스트클래스로 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주변 승객들은 박수를 치고 환호를 보냈다고 합니다.

여러분, 만약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상이 없으시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각자도생 해야겠지요. 아무도 나를 높여주지 않는다면 나 스스로라도 내 힘으로 높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요한계시록 22장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見よ、わたしはすぐに来る。それぞれの行いに応じて報いるために、わたしは報いを携えて来る。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실 상이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거만, 교만, 오만, 자만(あざけり、おごり高ぶり、横柄、思い上がり)을 버려야만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주시는 상을 받을 수 있다고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야고보서 4장 10절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主の御前でへりくだりなさい。そうすれば、主があなたがたを高く上げてくださいます。


베드로전서 5장 6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神の力強い御手の下にへりくだりなさい。神は、ちょうど良い時に、あなたがたを高く上げてくださいます。


거만과 교만과 오만과 자만(あざけり、おごり高ぶり、横柄、思い上がり)을 버리고 겸손의 열매를 맺는 것, 이것이야말로 요한이 말을 한 회개에 합당한 열매 아니겠습니까.

이제 세례 요한의 말처럼 회개에 합당한 열매, 주님 앞에 겸손하고 이웃에게 겸손한 열매를 맺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크게 높임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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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33회 회개와 천국
2024년 2월 25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1절~3절
“1.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2.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3.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マタイの福音書 3章 1節~3節
“1.そのころバプテスマのヨハネが現れ、ユダヤの荒野で教えを宣べ伝えて、
2.「悔い改めなさい。天の御国が近づいたから」と言った。
3.この人は、預言者イザヤによって「荒野で叫ぶ者の声がする。『主の道を用意せよ。主の通られる道をまっすぐにせよ』」と言われた人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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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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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8번째 시간으로서 “회개와 천국” 悔い改めと天の御国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복음을 선포함에 있어서 그 첫마디가 회개와 천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하고 보면 이 두 단어의 조합은 적지 않게 특이합니다.

만약에 “회개하라 심판날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한다거나 “기뻐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한다면 좀 이해가 될 것도 같아요.

심판날이 다가왔으니 어서 빨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기뻐하라, 이렇게 본다면 좀 더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세례 요한은 굳이 <회개>아 <천국>이라는 두 단어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잘못된 단어선택을 한 것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성경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후 공생애를 시작하십니다. 그 때 예수님의 외침이 무엇이었습니까.


마태복음 4장 17절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この時からイエスは宣教を開始し、「悔い改めなさい。天の御国が近づいたから」と言われた。

이 말씀을 보세요. 이는 세례 요한이 외치던 것과 똑같은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를 보더라도 <회개>와 <천국>이라고 하는 조합은 잘못된 것이 아닌, 오히려 반드시 필요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외쳤던 <회개>와 <천국>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요. 이는 어렵지 않습니다. <회개>와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에 있어서 인과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과관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인 것이지요. A라고 하는 원인이 있었고 B라고 하는 결과가 있었어요.

만약에 A라고 하는 원인과 B라고 하는 결과가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A와 B는 인과관계가 없는 것이 되지만, A라고 하는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 B라고 하는 결과가 발생했고, 만약 A라고 하는 원인이 없었다면 B라고 하는 결과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을 때 A와 B는 인과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회개>와 <천국>이라고 하는 것이 서로 인과관계에 있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회개>가 있어야지만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고, <회개>가 없다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천국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 목적에서 흔들리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내일이라도 동네 대학 입시학원 앞에 가서 거기 오는 학생들한테 물어보세요. 너는 왜 이 입시학원에 오냐고 물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저희 집 근처에도 그 주변에서는 그래도 꽤 규모가 있는 편에 속하는 입시학원이 하나 있는데, 입시철인 경우 수업이 끝나는 시간대 쯤이면 그 주변 일대에 차들이 줄을 섭니다. 모두 아이들을 데리러 온 부모님의 차들이지요.

큰 도시 같은 경우는 대중교통수단이 많기 때문에 그런 일은 별로 없겠지만, 여기 군마는 자동차 사회이다 보니 멀리서도 부모님들이 다 데리러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학생 본인만이 아니라 부모님들까지도 고생하면서 대입학원에 다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공부가 좋아서 취미로 다니는 거라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집에 있으면 심심해서 친구들 만나기 위해서 다니는 거라고 하겠습니까.

대입학원에 다니는 학생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것 아니겠습니까. 입시학원에 다닌다면 그 목적이 흔들려서는 절대로 안 돼요. 자기가 들어가고자 하는 학교를 정했으면 거기를 향해서 매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믿음생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왜 나옵니까. 예배를 왜 드립니까. 성경을 왜 읽습니까. 믿음이 취미 생활이신가요? 일요일에 심심해서, 집에 혼자 있으면 뭔가 허전해서 나들이 삼아 교회에 나오고 예배도 드립니까.

생각해보십시오.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사도행전 20장 28절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あなたがたは自分自身と群れの全体に気を配りなさい。神がご自分の血をもって買い取られた神の教会を牧させるために、聖霊はあなたがたを群れの監督にお立てになったのです。

교회는 친목모임이 아닙니다. 동네 경로당이 아닙니다. 교회는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교회를 사신 것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말미암아 그 대가로 세워진 것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취미활동이나 친목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해결하고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목숨을 걸었어요. 아니, 실제로 목숨까지 내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뒤에서 심심풀이로 믿음을 생각하게 된다면 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입니까.

고린도전서 9장 24절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競技場で走る人たちはみな走っても、賞を受けるのは一人だけだということを、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ですから、あなたがたも賞を得られるように走りなさい。

우리도 주님께서 예비하신 상을 받을 수 있도록, 있는 힘을 다해서 믿음의 달음질을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받는 상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천국입니다. 대입학원에 다니는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노력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천국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달려가야 하는 것이지요.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 것처럼, 열심히 믿음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대학이야 다음 번에도 기회가 있을 수 있고, 그리고 요즘은 꼭 대학이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선택지가 많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믿음에 있어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천국에 가야만 해요.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야지만 되는 것이지, 그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인데, 천국이라고 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원인이 있어야 한다고 했었지요? 예,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인 것이지요.

<회개>와 <천국>이 서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 없이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사람들은 회개를 잘 안 하려고 하는 경향에 있습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에 회개는 어떤 사람이 해야 하는 것 같습니까. 그렇죠. 뭔가 잘못한 것이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 회개 아니겠습니까. 잘못한 것이 없다면 회개할 것이 없다고 하겠지요.

이와 같은 경향, 어디서 많이 보냐 하면 의외로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는 항상 옳아요. 다른 사람이 잘못했지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하는 특이한 믿음입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아직도 제가 기억이 남는 것이 있는데, 한국 어느 교회에서 담임목사님이 은퇴하면서 자기 아들에게 담임목사 자리를 물려주었어요. 사실 이와 같은 일은 그 이전에도 이미 다른 몇몇 교회에서 있어왔던 일이지요.


그런데 이를 가지고 주일날 그 교회 앞에서 마이크를 가지고 비판을 하고 그래요. 뭐, 그래요. 교회에는 다양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수는 있지요. 오히려 그런 사람들의 입을 막는다면 그것 또한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흥미로운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그 마이크를 들고 큰 소리로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 교회 교인이 아니라는 거예요. 다른 무슨 기독교 단체인지 하는 곳에서 나와서는, 자기가 다니는 교회도 아닌데도 남의 교회 앞에 와서 그렇게 마이크를 들고 큰 소리로 비판을 하고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주장을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만약에 그분들의 말이 100% 맞다고 가정을 해보죠. 사실관계부터 모든 주장이 다 합당하다고 가정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만약에 그 사람들이 비판하고 있는 그 교회에서 담임목사 위임이나 기타 여러 사항에 대해서 결정을 하는 데에 있어서 무슨 불법행위가 있었다고 한다면 어떨까요. 회의실에 흉기를 들고 들어가서 협박을 했다거나, 사람들 입을 틀어막고 손발을 묶어 놓거나 아니면 문을 잠거 놓고 부당하게 안건을 땅땅땅 하고 통과시켰다고 해봐요.

만약에 그럴 경우라면 이는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이와 같은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고 한다면 비난 정도가 아니라 형사고발까지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 교회에서 거기 규정대로 진행되어서 모든 것이 합법적으로 결정된 내용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비난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도 그 교회 성도도 아니고 외부인이 말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교회 앞에서 그렇게 비난하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 교회 사람들은 다 틀렸고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제가 설교를 동영상으로 촬영을 해서 인터넷에 올리고 하면 격려도 해주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간혹 메일이나 댓글을 통해서 지적을 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그와 같은 지적이나 비판이 좀 성경적이고 그러면 제게도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대부분 좀 다소 벗어난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20대 때 저라면 끝까지 논쟁을 벌일 수도 있겠지요.


그 때는 정말 특별히 시사적인 부분에 대해서 인터넷으로 논쟁을 많이 했었습니다.

하나하나 조목조목 근거를 제시해가면서 철저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반박하고 그랬었지요.

그와 같은 기억 때문에서 그런지 지금도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써 놓은 글을 보거나, 아니면 저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보면 그 글들의 허점이 보여요.

뿐만 아니라 이 사람에게 어떤 부분을 어떤 식으로 공격을 하면 가장 큰 상처를 입힐 수 있을까 하는 점까지도 대충 짐작이 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요즘도 그런 논쟁을 벌이느냐 하면, 아니요. 안 합니다.

얼마 전에도 인터넷에 어떤 분으로부터 그런 일이 있었는데, 누군가가 제게 어떠한 비판이나 부정적인 지적을 하면 제 답변은 하나입니다.

“귀하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이는 형식적인 말이 아니라 저의 본심입니다. 제가 항상 옳다고 감히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면 대부분 거기서 논의는 끝이 나요.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2절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あなたがたは、自分がさばく、そのさばきでさばかれ、自分が量るその秤で量り与えられるのです。

예수님께서는 비판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물며 교회에서까지 상대방에 대한 비판이 넘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기록합니까.

로마서 3장 10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義人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

그렇습니다. 의인은 없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의인의 반대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인이잖아요.


의인이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죄인이 아닌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죄인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피 없이 구원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남들은 틀렸고 자기 자신 만이 옳다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비난할 수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회개를 하지 않는 사람들의 두번째 이유는 좀 특별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것은 바로 회개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의 말을 한 번 들어볼까요? 여러분께서는 이 주장에 대해서 이상한 점이 있는지 없는지 자세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사해 주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7장 27절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イエスは、ほかの大祭司たちのように、まず自分の罪のために、次に民の罪のために、毎日いけにえを献げる必要はありません。イエスは自分自身を献げ、ただ一度でそのことを成し遂げられたからです。

과거에는 제사장들이 제물을 드리면서 속죄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구원 받은 의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단번에 완전한 제사를 드려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반복해서 회개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자, 이 주장에 대해서 이상한 곳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런 주장을 어떤 사람들이 하냐 하면 예전에 세월호 사건 때 많이 나왔던 이른바 구원파 사람들이 이런 주장을 해요.

자기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구원파에서는 자기들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하는데, 왜요. 저도 직접 그 사람들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와 같은 주장을 실제로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어떤 무슨 설교 영상 같은 것을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구원의 확신이 확 든다는 것이에요.

그건 뭐냐 하면 그게 바로 그 순간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증거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사람들은 자신이 몇 날 몇 일 언제 구원받았다는 것을 아주 외우고 다닌다고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정말 성경적이냐 하는 것이지요.

우리 오랜만에 그 질문을 한 번 해보도록 할까요. 지난 로마서 강해 때 몇 번이고 했던 질문입니다.

자,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라고 했지요?

예, 이는 바로 구원 받을 자격,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다는 뜻이지요.


로마서 5장 9절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ですから、今、キリストの血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私たちが、この方によって神の怒りから救われるのは、なおいっそう確かなことです。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지만,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즉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자격,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졌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그럼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천국인가요?

아니에요. 이는 말하자면 대학입시나 회사 입사시험에서 합격은 했지만 아직 들어가지는 않은 상황이에요.

합격을 해도 아직 안 들어갔다면 그 학교 학생이 아니고, 그 회사 직원도 아니에요. 마찬가지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은 있지만 아직 천국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아직은 천국백성이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안 지으려고 해도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이는 제 주장이 아니라 성경에도 기록합니다.

로마서 7장 22절~25절
“22.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私は、内なる人としては、神の律法を喜んでいますが、
私のからだには異なる律法があって、それが私の心の律法に対して戦いを挑み、私を、からだにある罪の律法のうちにとりこにしていることが分かるのです。
私は本当にみじめな人間です。だれがこの死のからだから、私を救い出してくれるのでしょうか。
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を通して、神に感謝します。こうして、この私は、心では神の律法に仕え、肉では罪の律法に仕えているのです。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고 해도 내 몸속에 있는 죄가 자신을 사로잡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믿음이 부족해요? 아니면 예수님이 아직도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셨나요?

아니요. 예수님은 벌써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시고는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어요. 그리고 바울은 지금 회심해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바울의 믿음을 따라갈 만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그와 같은 바울도 자기 안에 있는 죄로 말미암아 괴로워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땅에 사는 한 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옳은 일인지 무엇이 잘못된 일인지를 알고 있으면서도 죄를 짓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와 같은 경우에는 어서 빨리 회개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28장 13절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自分の背きを隠す者は成功しない。告白して捨てる者はあわれみを受ける。

시편 32편 5절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私は自分の罪をあなたに知らせ 自分の咎を隠しませんでした。 私は言いました。 「私の背きを主に告白しよう」と。 すると あなたは私の罪のとがめを 赦してくださいました。

세상 죄는 자복 그러니까 스스로 털어놓는다고 해서 어느 정도 가벼워질 수는 있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죄는 우리가 주님 앞에 죄를 내려놓게 되면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죄만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 보면 <강하도 담대하라 (強くあれ。雄々しくあれ。)>는 말을 아무데나 갖다 붙이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죄를 지어도, 이웃에 대해서 나쁜 짓을 했을 때에도, 성경에 봐라,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잖아.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라는 분이 계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걱정하지 말라고요? 이런 분들이야말로 오히려 정말로 걱정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죄를 지었어요. 나쁜 짓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강하고 담대하라고 성경에 기록하나요?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23절~26절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ですから、祭壇の上にささげ物を献げようとしているときに、兄弟が自分を恨んでいることを思い出したなら、
ささげ物はそこに、祭壇の前に置き、行って、まずあなたの兄弟と仲直りをしなさい。それから戻って、そのささげ物を献げなさい。
あなたを訴える人とは、一緒に行く途中で早く和解しなさい。そうでないと、訴える人はあなたを裁判官に引き渡し、裁判官は下役(したやく)に引き渡し、あなたは牢に投げ込まれることになります。
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最後の一コドラントを支払うまで、そこから決して出ることはできません。


내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려고 해요. 그런데 내가 내 이웃에게 죄를 지은 것이 생각났어요. 그럴 때에는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괜찮대요? 강하고 담대하래요?

아니에요. 예배를 드리다가 말고라도 좋으니까 빨리 가서 그 이웃과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세상적인 일로 나를 고발하는 사람과 재판을 하려고 해요. 그런데 걱정 마, 재판은 이길 거야. 그러면서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십니까.

아닙니다. 법원에 도착하기 전에 빨리 화해하라고 말씀을 하세요. 잘못하다가 지게 되면 다 빼앗길 수도 있을 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하라고 말씀하고 계시잖아요.

세상에는 죄를 지으면서도 강하고 담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불륜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면 어떻습니까. 정말 강하고 담대하지요. 괜찮아, 괜찮아. 그까짓 것 무서워해서 어떡해.

그러면서 아마도 자신들은 그와 같은 죄가 세상에 알려지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어떻게 적혀 있습니까.


누가복음 12장 3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が暗闇で言ったことが、みな明るみで聞かれ、奥の部屋で耳にささやいたことが、屋上で言い広められるのです。

이게 과장된 말씀인가요? 아니에요. 어두운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자기들끼리만 나누었던 은밀한 대화가 무슨 신문이나 주간지에 나와서 전국 아니, 인터넷으로 전세계 사람들이 알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작년 그러니까 2023년 10월에 일본 요코하마에서 일어났던 사건인데, 깊은 밤에 어떤 남성이 피곤에 지쳐서 길가 옆에 앉은 채로 잠이 들고 말았어요. 그런데 그 때 이 남성이 들고 있던 스마트폰이 도난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그 모습을 멀리서 촬영했던 CCTV가 있긴 한데 그것만 가지고는 얼굴도 파악할 수도 없고 무엇보다 그 범인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알 길이 없잖아요.


그런데 불과 얼마 뒤, 경찰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게 뭐냐 하면 도난 당한 스마트폰을 찾았다는 것이에요.

뿐만 아니라 절도그룹 세 명을 모두 체포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경찰이 이 도난당한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까지 하더래요.

아니, 자기는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 때 이 도난 당한 스마트폰이 인터넷에 생중계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도난 당한 사람은 말하자면 유튜버인데 그 때 인터넷 생중계를 하다가 지쳐서 그만 길가에서 잠이 들고 말았었는데, 스마트폰은 여전히 작동중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범인은 그것도 모르고 그 폰을 훔치고는 자신들의 아지트까지 계속 들고 다녔어요.

그러다 보니까 그 절도그룹 일당들 얼굴도 화면에 대문짝 만하게 다 나오고, 대화내용까지 들려요.

뿐만 아니라 그들이 차를 타고 이동을 하는데 그 대화내용을 들으니까 어디에 숨어 있는지도 추적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그런 상태로 무려 1시간 반 동안 그 폰이 켜진 채로 모든 것을 촬영했다고 하는데, 이게 인터넷으로 생중계가 되고 있었다고 하니까 그걸 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 아니에요.

그럼 몇 명이 그 장면을 보고 있었냐 하면 약 80명이나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절도범들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자신들의 얼굴이나 목소리를 수 십 명이 그것도 생중계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그저 강하고 담대하게 범죄를 저질렀던 것이지요.

여러분,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은 그렇게 나쁜 짓을 저지르거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때 쓰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의 일을 감당할 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서 제 경우를 본다면, 전도를 나갈 때나 인터넷으로 전도 메일을 보낼 때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솔직히 밖에 나가서 전도지를 돌리게 되면 기쁜 마음도 있지만, 때로는 누가 또 안 좋은 소리라도 할까 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메일을 보낼 때는 더 하지요. 또 무슨 싫은 소리, 험한 소리라도 듣게 될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고, 주님께서 주신 지혜대로 내가 감당하도록 하셨다고 한다면, 강하고 담대해야지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주님께서 지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감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있으면 그럴 때에는 더 늦기 전에 회개해야 하고 그리고 이웃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어서 사과하고 화목해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8절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自分に関することについては、できる限り、すべての人と平和を保ちなさい。

비판하고 비난하고 상처 주는 데에 담대해 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못을 발견하면 회개하고 사과하고 화목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천국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회개가 먼저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見よ、わたしはすぐに来る。それぞれの行いに応じて報いるために、わたしは報いを携えて来る。



주님은 곧 오신다고 말씀하세요. 속히 오신다고 하세요. 그리고 행한 대로 갚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제 더 늦기 전에 비판과 비난에 앞장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에게 회개와 화목의 본을 보이는 삶을 통해서, 장차 주님께서 예비하신 놀라운 상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主はすぐに来られるとおっしゃいます。そしてそれぞれの行いに応じて報いるとおっしゃっているのであります。

これからは手遅れになる前に、批判や非難に先走るのではなく、神様と隣人に対して悔い改めと和解の見本となる人生を通して、将来、主が備えられた驚くべき賞をすべて受けられる皆さまであらんことを主の御名においてお祈りいた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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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32회 세례 요한 입문
2024년 2월 18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9절~21절
“19.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20.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21.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ヨハネの福音書 1章 19節~21節
“19.さて、ヨハネの証しはこうである。ユダヤ人たちが、祭司たちとレビ人たちをエルサレムから遣わして、「あなたはどなたですか」と尋ねたとき、
20.ヨハネはためらうことなく告白し、「私はキリストではありません」と明言した。
21.彼らはヨハネに尋ねた。「それでは、何者なのですか。あなたはエリヤですか。」ヨハネは「違います」と言った。「では、あの預言者ですか。」ヨハネは「違います」と答え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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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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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7번째 시간으로서 “세례 요한 입문” 洗礼者ヨハネ入門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부터 몇 회에 걸쳐 세례 요한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려고 하는데, 오늘은 우선 세례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부터 알아볼까 합니다.

세례 요한의 잉태에 대한 내용은 누가복음 1장에 등장합니다.

당시 제사장 중에 사가랴(ザカリ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나이가 많았지만 아이가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1장 13절에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제사장 사가랴에게 나타나서 그의 아내 엘리사벳(エリサベツ)이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면서 이름까지 지어줍니다.

그의 아내 엘리사벳도 역시 나이가 많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브리엘이 알려준 것처럼 정말로 아이를 갖게 되었어요.


누가복음 1장 26절 이후에 의하면 엘리사벳이 잉태된 후 5개월이 지나고는 6개월 째가 되는 달에 역시 천사 가브리엘이 요셉이라는 목수와 약혼한 마리아를 찾아가서 하나님의 아들 즉 예수님을 잉태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와 같은 기록에 의하면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이 땅에 오신 순서로만 본다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보다 대략 5개월 정도 먼저 태어났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은 세례 요한에 대해서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우선 마태복음 3장 3절을 보실까요.

마태복음 3장 3절
“3.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この人は、預言者イザヤによって「荒野で叫ぶ者の声がする。『主の道を用意せよ。主の通られる道をまっすぐにせよ』」と言われた人である。

이는 이사야서 기록을 인용한 것인데, 이는 다음 말씀입니다.


이사야 40장 3절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荒野で叫ぶ者の声がする。「主の道を用意せよ。荒れ地で私たちの神のために、大路(おおじ)をまっすぐにせよ。

이 점에 대해서는 세례 요한 스스로도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23절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ヨハネは言った。「私は、預言者イザヤが言った、『主の道をまっすぐにせよ、と荒野で叫ぶ者の声』です。」

이와 같이 성경에 의하면 세례 요한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미리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 글을 보기만 하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겠습니다만, 알고 보면 이는 엄청난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어떤 인물이 태어나기 전에 이 세례 요한의 경우처럼 미리 이름을 정해준 경우가 있을까요. 예,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경우이겠지만, 이 외에도 창세기 16장 11절에서는 이스마엘의 이름을 지어 주셨고, 창세기 17장 19절에서는 이삭, 역대상 22장 9절에서는 솔로몬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시는 등 사실 출생하기 전에 이름을 붙여주는 경우는, 물론 그리 많지는 않지만 종종 있었던 일이긴 합니다.

그렇다면 출생에 있어서 다른 책에 예언되는 경우는 어떨까요. 태어나기 1년이나 그 정도 전에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식이 아니라, 아예 다른 책에 출생이 예언되는 경우는 누가 있었을 것 같습니까.

사실 알고 보면 그와 같은 인물은 예수님과 바로 이 세례 요한 밖에 없었다는 점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엘리야나 이사야 같은 선지자라 하더라도, 그리고 신약에 있어서는 베드로나 바울과 같은 위대한 사도라 하더라도 성경은 다른 책에서 그 출생을 예언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외에 이처럼 다른 책에서 그 출생이 미리 예언된 인물이 있었는데, 그 인물이 바로 세례 요한이었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성경 전체에서 차지하는 이 세례 요한의 비중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있어서 오해를 하시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 강에서 세례를 주면서 회개와 천국을 선포합니다. 그러자 많은 백성들이 그에게로 모여오는데 여기서 긴장했던 이들이 있겠지요. 그것은 바로 당시 종교적인 지도자들, 그러니까 기득권자들이었지요. 그래서 그들은 도대체 세례 요한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이 그것을 알고 싶어했겠습니까. 무슨 좋은 의도가 있었을까요? 아니요.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에서 였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9절~21절
“19.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20.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21.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ヨハネの福音書 1章 19節~21節
“19.さて、ヨハネの証しはこうである。ユダヤ人たちが、祭司たちとレビ人たちをエルサレムから遣わして、「あなたはどなたですか」と尋ねたとき、
20.ヨハネはためらうことなく告白し、「私はキリストではありません」と明言した。
21.彼らはヨハネに尋ねた。「それでは、何者なのですか。あなたはエリヤですか。」ヨハネは「違います」と言った。「では、あの預言者ですか。」ヨハネは「違います」と答えた。”


그들은 세례 요한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합니다. 너는 누구냐, 너는 엘리야냐, 마지막으로 너는 선지자냐 하는 질문을 하지요.

이 질문에 대해서 세례 요한은 모두 부인을 합니다. 그런데 조금 생각해보면 의문이 들 수도 있는 부분이 있어요.

우선 너는 누구냐에 대한 질문인데, 그 질문의 의도를 요한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네가 장차 오실 그리스도 메시야냐 하는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앞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왔기 때문에, 자신은 그리스도 메시야가 아니라고 이를 부인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지요.

문제는 두 번째 질문과 세 번째 질문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장 21절 초반부
“21.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21.彼らはヨハネに尋ねた。「それでは、何者なのですか。あなたはエリヤですか。」ヨハネは「違います」と言った。


그들은 왜 이와 같은 질문을 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구약 마지막 장인 말라기에 다음과 같은 예언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4장 5절~6절
“5.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見よ。わたしは、主の大いなる恐るべき日が来る前に、預言者エリヤをあなたがたに遣わす。
彼は、父の心を子に向けさせ、子の心をその父に向けさせる。それは、わたしが来て、この地を聖絶の物として打ち滅ぼす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ある。」

구약의 마지막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두려운 날, 즉 하나님의 날이 이르기 전에 엘리야를 우리에게 먼저 보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점에 대해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7장 10절~13절
“10.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すると、弟子たちはイエスに尋ねた。「そうすると、まずエリヤが来るはずだと律法学者たちが言っているのは、どういうことなのですか。」
イエスは答えられた。「エリヤが来て、すべてを立て直します。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エリヤはすでに来たのです。ところが人々はエリヤを認めず、彼に対して好き勝手なことをしました。同じように人の子も、人々から苦しみを受けることになります。」
そのとき弟子たちは、イエスが自分たちに言われたのは、バプテスマのヨハネのことだと気づいた。


구약에 있어서도 장차 메시야 구세주가 오신다는 말씀, 그리고 그 이전에 엘리야가 먼저 온다는 성경 말씀은, 서기관 정도 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가 다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여담입니다만, 성경 기록에 의하면 당시 세례 요한의 차림새는 엘리야와 비슷한 점이 있었습니다.

열왕기하 1장 8절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彼らが「毛衣を着て、腰に革の帯を締めた人でした」と答えると、アハズヤは「それはティシュベ人エリヤだ」と言った。

마가복음 1장 6절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ヨハネはらくだの毛の衣を着て、腰に革の帯を締め、いなごと野蜜を食べていた。

엘리야는 몸에 털이 많다고는 하는데,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성경 번역본에 따라서 몸에 털이 많았다는 것인지, 머리 숱이 많은 것인지, 아니면 털이 많이 달린 옷을 입었다는 것이지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한편 세례 요한에 대해서 보자면, 메뚜기와 석정을 먹었다고 하는데, 여기서의 석청은 말하자면 야생 꿀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은 허리에 가죽 띠를 띤 옷차림을 하고 있었고, 메뚜기와 야생 꿀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과연 어떤 외모였는지, 정확히 무엇을 먹었었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천국 가서 직접 물어봐야 알 수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허리에 가죽 띠를 띤 차림으로 기록된 인물은 신구약을 통 틀어서 구약에서는 엘리야 뿐이고 신약에서는 세례 요한 뿐입니다.


어찌 되었든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미리 보내 주시겠다고 하신 말라기의 예언 대로 이 땅에 오신 인물이 바로 세례 요한이라고 하는 점을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은 이 점에 대해서 부인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례 요한은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아직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종교에 의하면 죽은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하는, 이른바 환생이라고 하는 개념이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가 있지요.

사람이 죽고 얼마가 지나면 그 영혼이 다른 사람이나 동물한테 들어가서 다시 태어나게 된다고 하기도 한다는데 성경에는 그와 같은 말씀이 없어요.

그리고 또한 죽은 사람의 영혼이 꿈에 나온다거나 아니면 그 죽은 곳에 계속 붙어 있다거나 하기도 합니다만, 역시 그와 같은 주장들도 모두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아니, 생각해보세요. 사람이 죽으면 그 장소에 영혼이 계속 있게 된다? 그렇다면 동서를 불문하고 지금도 사람들이 제일 많이 죽어 나가는 장소는 어디입니까.

바로 병원이잖아요. 그럼 대형병원은 귀신들의 소굴입니까. 귀신들이 아주 우글우글 하겠네요? 그럼 그거 무서워서 어떻게 갑니까.

성경에 의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면 좀 이상한 말일지는 모르지만, 꿈에 나온다거나 환상으로 으흐흐흐 하면서 나올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그리고 그 심판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15절
“12.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また私は、死んだ人々が大きい者も小さい者も御座の前に立っているのを見た。数々の書物が開かれた。書物がもう一つ開かれたが、それはいのちの書であった。死んだ者たちは、これらの書物に書かれていることにしたがい、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海はその中にいる死者を出した。死とよみも、その中にいる死者を出した。彼らはそれぞれ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それから、死とよみは火の池に投げ込まれた。これが、すなわち火の池が、第二の死である。
いのちの書に記されていない者はみな、火の池に投げ込まれた。


생각해보세요. 이제부터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언제 구천을 떠돌고 언제 꿈에 나타날 새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돌아가신 분이 꿈에 나타나는 경우는 무엇이냐고 할 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는 어쩌면 자신의 기억이나 희망사항이 꿈으로 보일 수도 있거나, 아니면 다른 요인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최소한 그 돌아가신 사람의 진짜 영이 직접 내 꿈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의하면 죽은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경우를 본다면 이는 이른바 변화산 사건 때 예수님과 함께 했던 모세와 엘리야 뿐입니다.

마태복음 17장 3절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そして、見よ、モーセとエリヤが彼らの前に現れて、イエスと語り合っていた。

마가복음 9장 4절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また、エリヤがモーセとともに彼らの前に現れ、イエスと語り合っていた。


누가복음 9장 30절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そして、見よ、二人の人がイエスと語り合っていた。それはモーセとエリヤで、

이 장면을 목격한 것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인데, 그리고 이 말씀으로 보아 알듯이 모세와 엘리야는 그들에게 말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말을 나누고 있다고 기록하지 않습니까.

또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구약에 등장하는 사무엘을 떠올리시는 분이 계실까봐 잠시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사무엘상 28장 5절~6절
“5.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의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6.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サウルはペリシテ人の陣営を見て恐れ、その心は激しく震えた。
サウルは主に伺ったが、主は、夢によっても、ウリムによっても、預言者によってもお答えにならなかった。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왕으로 세움을 받았지만, 그는 하나님을 높이는 대신 자기 스스로를 높이기에 바빴습니다. 사울의 거듭되는 불순종으로 인해서 결국 하나님은 그를 버리시게 되지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한 그는 이제 두려움에 시달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시고 그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사무엘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어요.

그래서 그는 무당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그래서 죽은 사무엘을 불러내서는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어보겠다는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니까 죽은 사무엘을 불러내서 물어보려고 한다는데, 이게 얼마나 참 말이 안 되는 생각입니까.

하지만 이제 그에게는 이성적인 판단을 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는 신접한 무당(霊媒師)을 찾아가서 이미 세상을 떠난 사무엘의 영혼을 불러내라고 합니다.


사무엘상 28장 13절~19절
“13.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하니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하는지라
14.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의 모양이 어떠하냐 하니 그가 이르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하더라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의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15.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 하니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다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하지 아니하시기로 내가 행할 일을 알아보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하더라
16.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17.여호와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네게 행하사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18.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19.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라 하는지라”

王は彼女に言った。「恐れることはない。何を見たのか。」女はサウルに言った。「神々しい方が地から上って来るのを見ました。」
サウルは彼女に尋ねた。「どのような姿をしておられるか。」彼女は言った。「年老いた方が上って来られます。外套を着ておられます。」サウルは、その人がサムエルであることが分かって、地にひれ伏し、拝した。
サムエルはサウルに言った。「なぜ、私を呼び出して、私を煩わすのか。」サウルは言った。「私は困りきっています。ペリシテ人が私を攻めて来るのに、神は私から去っておられます。預言者によっても、夢によっても、もう私に答えてくださらないのです。それで、私がどうすればよいか教えていただくために、あなたをお呼びしました。」
サムエルは言った。「なぜ、私に尋ねるのか。主はあなたから去り、あなたの敵になられたのに。
主は、私を通して告げられたとおりのことをなさったのだ。主は、あなたの手から王位をはぎ取って、あなたの友ダビデに与えられた。
あなたが主の御声に聞き従わず、主の燃える御怒りをもってアマレクを罰しなかったからだ。それゆえ、主は今日(きょう)、このことをあなたにされたのだ。
主は、あなたと一緒にイスラエルをペリシテ人の手に渡される。明日、あなたもあなたの息子たちも、私と一緒になるだろう。主は、イスラエルの陣営をペリシテ人の手に渡されるのだ。」

이 기록을 보면 마치 사울 왕이 사무엘을 대면하고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가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사울 왕 앞에 있는 사람은 무당이고, 무당이 말하기를 한 노인의 영이 올라온다고 하잖아요. 그렇다면 그 노인이 어떻게 생겼냐 하면 얼굴 생김새에 대한 정보는 없어요. 그저 겉옷을 입은 한 노인이 보인다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무엇이 보이냐 하면 자기가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이고 자기가 듣고 싶어 하는 것만 들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사무엘을 만나고 싶어 하는데 무슨 겉옷을 입은 노인네가 보여요. 아니, 그것도 사울이 직접 본 게 아닙니다. 그저 무당이 보인다고 주장을 하고 있고, 사울은 눈앞에 있는 무당만 보고 있는 상황인 것이지요.

그리고 그 노인의 어디서 나타났대요? 예, 13절에 의하면 “땅에서 올라왔다(地から上って来る)”고 하잖아요.

백 보, 천 보를 양보해서 사무엘의 영이 나타났다고 하지요. 그러면 사무엘이 지옥에 있습니까. 아니요.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성전에 살면서 평생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충실하게 살아온 그의 영이 나타났다 하더라도, 그 영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면 또 모를까 어떻게 땅에서 올라올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무당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금하신 것인데, 하나님 나라에 있는 사무엘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무당이 부른다고 나타날 리가 있겠습니까.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사무엘상 28장 19절
“19.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라 하는지라”

主は、あなたと一緒にイスラエルをペリシテ人の手に渡される。明日、あなたもあなたの息子たちも、私と一緒になるだろう。主は、イスラエルの陣営をペリシテ人の手に渡されるのだ。」

이 말은 하나님께서 내일 너와 네 아들, 그러니까 사울 왕과 그의 아들들이 블레셋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사울 왕과 사무엘이 내일 함께 있게 된다고 하잖아요. 이것도 말이 안 됩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평생을 하나님께 순종한 사무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사울과 함께 있을 수는 있겠습니까. 만약 이 노인의 영이 말한 주장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사울은 죽은 후에 심판을 받아 지옥에 떨어질 것이 분명한데 그 곳에 함께 있겠다고 한다면 이 노인의 영은 틀림없이 마귀 사탄이라는 뜻이 된다는 것이지요.

귀신이 이 땅에 존재하나요? 예,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 악한 영으로서 등장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은 눈으로 보이는 생김새가 어떤 생김새로 나타나든지 간에 그것은 바로 악한 영이 나타나는 것이지, 죽은 사람의 영이 직접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사람이 죽은 다음에 그 영혼이 다른 사람에게 들어가서 다시 태어난다거나 하는 것도 성경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만약에 세례 요한이 그들의 질문에 대해서 내가 엘리야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지극히 성경적이지 않은 환생을 인정한 것이 되기 때문에 요한은 이에 대해 분명히 아니라고 부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또한 예수님 말씀 대로 틀림없이 엘리야로서 이 땅에 왔습니다.

사가랴에게 세례 요한에 대해서 말씀을 전할 때에 천사 가브리엘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누가복음 1장 17절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彼はエリヤの霊と力で、主に先立って歩みます。父たちの心を子どもたちに向けさせ、不従順な者たちを義人の思いに立ち返らせて、主のために、整えられた民を用意します。」

그러니까 그는 그 구약 때의 엘리야의 영혼이 다시 자기 몸에 들어와서 환생을 했거나 한 것이 아니라, 우상들이 판을 치고 있던 시기에 우상들과 싸워서 물리치고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던 엘리야와 같이, 세례 요한도 그와 같은 사명을 띠고 많은 백성들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며 주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은 세례 요한더러 세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요한복음 1장 21절 후반부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では、あの預言者ですか。」ヨハネは「違います」と答えた。”


그들은 세례 요한에게 당신이 선지자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이 질문에 대해서도 아니라고 답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11장 9절~11절
“9.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10.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そうでなければ、何を見に行ったのですか。預言者ですか。そうです。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預言者よりもすぐれた者を見に行ったのです。
この人こそ、『見よ、わたしはわたしの使いをあなたの前に遣わす。彼は、あなたの前にあなたの道を備える』と書かれているその人です。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女から生まれた者の中で、バプテスマのヨハネより偉大な者は現れませんでした。しかし、天の御国で一番小さい者でさえ、彼より偉大です。


이 말씀에서 주님은 세례 요한이 선지자, 아니, 다른 선지자들 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선지자이며, 예언의 말씀처럼 주님의 길을 준비하러 왔으며, 이 땅의 그 누구보다도 큰 인물이 바로 세례 요한이라고까지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은 의심할 여지 없는 선지자 중의 선지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은 왜 그들의 질문에 대해서 아니라고 부인을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들이 했던 질문을 자세히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21절 후반부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실까요.

요한복음 1장 21절 후반부
“21.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では、あの預言者ですか。」ヨハネは「違います」と答えた。”

만약에 그들이 묻기를 “네가 선지자냐”라고 했다면 요한은 어쩌면 그렇다 라고 대답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질문은 어떻습니까. 단순히 “네가 선지자냐”라고 한 것이 아니라 “네가 그 선지자냐”라고 했던 것이지요.


자, 구약에 보시면 장차 등장할 인물에 대한 예언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메시야, 그리스도이시요, 둘째가 엘리야가 다시 오겠다는 예언인데, 그 외에 나머지 하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이 어디 있냐 하면 신명기에 있는 말씀입니다.

신명기 18장 15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あなたの神、主はあなたのうちから、あなたの同胞の中から、私のような一人の預言者をあなたのために起こされる。あなたがたはその人に聞き従わなければならない。

이는 모세가 한 말입니다만, 그러니까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했던 질문은, 네가 장차 오실 메시야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야? 그럼 나머지 하나 남았네. 네가 그러면 신명기에 기록된, 하나님께서 장차 모세 다음으로 일으키시겠다는 바로 그 선지자야? 라고 물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 질문에도 세례 요한은 분명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이 신명기에 기록된 말씀 즉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일으키실 것이요 그 말을 들으라고 하신 그 인물은 다름 아닌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구약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따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그 때까지 억압받던 애굽에서 끌어내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 가나안으로 인도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그 때까지 죄악에 짓눌렸던 우리를 인도해 내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시고 장차 거룩한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로 인도해주실 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旧約においてモーセは神様の命に従って神様の民であるイスラエルを、それまで苦しめられていたエジプトから率いて、神様がお与えになったカナンの地へと導いたように、イエス様はそれまで罪によって苦しめられていた私たちを率いて神様の民としてくださり、来るべき時に聖なる天の御国へと導いてくださるということを信じ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します。




말하자면 네가 <그 선지자냐>라고 하는 질문은 마치 <네가 그리스도냐>라고 하는 질문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당시 그들은 이 둘이 별개인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세례 요한에게 이와 같은 질문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에 이어서 다음 주도 이 세례 요한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하는데, 우리는 분명 기억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도 역시 세례 요한과 똑 같은 시대라는 사실입니다.



세례 요한은 곧 이어 오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회개와 천국을 전파했다고 한다면, 우리도 역시 장차 다시 오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본다면 비록 세례 요한이 살고 있던 것은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이긴 합니다만, 당시 그 상황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와도 똑 같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세례 요한에 대해서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또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귀한 도구로 쓰임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これからこの洗礼者ヨハネをより深く理解していくことによって、主の道を備える尊い器として用いられる皆さまであらんことを主の御名においてお祈り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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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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