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2회 신앙의 자가진단 - 이루리라선교회
2024년 7월 14일 설교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IRURIRA.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2장 3절~4절
“3.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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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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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27번째 시간으로서 “신앙의 자가진단” 信仰の自己診断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마가복음 외에 누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는 내용인데, 대부분 줄거리는 비슷합니다만 약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상호보완을 하면서 사실관계를 우선 정리를 해보고, 그리고 이 말씀에 담긴 뜻, 특별히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해보지 않은 뜻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선 사실관계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많은 사람들을 치료도 하시고 그리고 천국 복음을 전하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실 때에는, 물론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도 있었습니다만, 그 외에도 때로는 길가에서 때로는 강가에서, 그리고 때로는 산이나 들에서도 말씀을 전하기도 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장면을 보면 어떤 집에서 말씀을 전하고 계셨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이미 예수님께서 많은 역사를 하고 계셨기 때문에 그 지역 주위에는 이미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이 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와서 말씀을 듣고 있었는데 마침 그 때 어떤 사람들이 중풍을 앓고 있는 사람을 데리고 왔어요. 중풍이라고 한다면 알기 쉽게 말해서 뇌졸중 그러니까 뇌에 있는 혈관이 막혔거나 아니면 터졌거나 해서 거동을 할 수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하겠는데, 이 사람을 한글 개역개정이나 개역 성경에 보시면 메워 가지고 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네 사람이 한 사람을 동시에 등에 업을 수는 없고, 그리고 또 네 사람이라고 하니 아마도 들것 같은 것에 이 거동을 할 수 없는 사람을 누위고는 넷이 들고 오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들의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예수님께로 가기만 하면 무슨 병이든지 고쳐 주신다고 하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어요. 지금 예수님은 집 안에 계신 것 같은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도무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좀 민폐기인 해도 사람들 틈새를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갈 수도 있겠습니다만, 지금 일어날 수도 없어서 들것에 누워 있는 사람도 있잖아요. 이런 상태로는 도저히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민한 끝에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계신 곳 바로 위 지붕에 구멍을 내서 들것을 예수님 앞에 내려놓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들것을 가지고 지붕 위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여러분께서도 그림이나 영화 같은 것에서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이스라엘 집들을 보면 우리나라나 일본처럼 비스듬하게 경사진 것이 아니라 평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옥상도 하나의 생활 공간이었어요. 사도행전에 보시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9절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翌日、この人たちが旅を続けて、町の近くまで来たころ、ペテロは祈るために屋上に上った。昼の十二時ごろであった。

그러니까 당시에는 지붕 위 옥상에 올라가서 기도도 하고 그랬던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옥상에서 휴식을 하기도 하고 곡물을 말리거나 하기도 했다고 해요.

그러면 그 때마다 사다리로 올라갔냐 하면, 그것이 아니라 아예 바깥 쪽에 계단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옥상에 올라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지요. 첫째는 단순히 걸어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몸이 불편한 사람이 누워 있는 들것을 가지고 네 사람이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냉장고나 큰 짐을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으로 옮겨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둘이서 운반하기에도 상당히 어렵습니다. 무게도 무게지만 균형을 맞추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지금 들것에는 물건이 아닌 사람이 누워 있어요. 그리고 네 사람이 운반 했다고 하면 둘 중 하나이죠. 그것은 뭐냐 하면 네 사람이 들것을 가지고 균형을 맞추어 가면서 좁은 계단을 올랐거나, 아니면 네 사람이 어렵다면 두 사람이 낑낑 대면서 무거운 들것을 올렸거나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올린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지요. 두번째 문제로는 지붕을 뜯어 내야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집은 대부분 벽면이 돌로 되어 있었지요. 하지만 지붕은 돌이 아니었습니다. 눈이나 비가 많이 내리는 곳이라면 단단하게 만들어야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스라엘 기후는 눈 비가 많이 내리지는 않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어느 정도 굵은 나무를 여러 개 놓은 다음에 그 위에 종려나무나 돌멩이 또는 기와를 덮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지붕에 구멍을 낼 수는 없어요. 앞서 말씀 드렸듯이 지붕 위 옥상에는 사람들이 자주 올라 다녔고, 지금도 들것에 누워 있는 사람 한 명과 이를 들고 온 네 명, 최소한 총 다섯 명이 올라가 있잖아요.

그리고 구멍의 크기도 문제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하나 쏙 들어가기 위한 구멍이라고 한다면 작아도 되겠지만, 지금은 이 들것을 그대로 아래로 내려야 하기 때문에 상당히 큰 구멍을 내야 합니다.

당시 들것의 크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겠습니다만, 구멍을 내고 거기로 들것을 내린다고 한다면 최소한 길이는 2미터 가까이, 그리고 폭은 1미터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큰 구멍을 내는 것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세번째는 법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당연한 말씀이겠습니다만, 지금 그들이 지붕을 뚫으려고 하는 집은 그 사람들 집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멀쩡한 집의 지붕을 그것도 지붕의 상당 부분을 모두 뜯어내야 할 정도의 구멍을 뚫어야 하는 것인데,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여러분 집의 멀쩡한 지붕에 커다란 구멍을 냈다고 한다면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민사상으로는 손해를 배상해야 할 것이고 잘못하면 잡혀갈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형사상 책임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잖아요.

마지막으로 네 번째 문제는 이제 그 뚫은 구멍을 통해서 이 사람이 누워 있는 들것을 예수님 앞으로 내려놔야 해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지금 이 사람들의 체력이 남아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이 모든 위험요소들을 감수하고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구멍을 뚫고 그 중풍 환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예수님 앞으로 내렸더니, 어떻게 되었어요.

누가복음 5장 25절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すると彼はすぐに人々の前で立ち上がり、寝ていた床を担ぎ、神をあがめながら自分の家に帰って行った。

예수님께서 그 환자를 고쳐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여기까지가 말하자면 사실관계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는 우리에게 대단히 친숙한 이야기라서 설교 말씀으로도 많이 들어 보셨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왜 이 말씀이 성경에, 그것도 마가복음 뿐만이 아니라 누가복음에까지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요.

여러분께서는 이 일련의 기록으로 인해서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예, 누군가가 도움이 필요할 때에는 우리가 그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아니,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앞으로 들것을 내릴 때에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마가복음 2장 5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イエスは彼らの信仰を見て、中風の人に「子よ、あなたの罪は赦された」と言われた。

예수님께서는 분명 “그”가 아닌 “그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 이상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여기에 들것에 누워 있는 사람이 포함되느냐 여부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나누어지는 부분이긴 합니다만, 최소한 들것을 들고 온 네 명의 믿음을 보시고 그 환자를 치료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누군가의 믿음이 없거나 아니면 적은 경우에도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간구하면 우리의 믿음을 보고서라도 기도 응답을 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런데 오늘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다른 시각으로 이 사건을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어쩌면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부분을 놓쳐버리게 된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반쪽만,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을 버려버리게 될 지도 모르는 노릇입니다.

그렇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절대 이해하기 어렵거나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단지 시각을 조금 바꾸어 보면 어떻게 보일까 하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드린 말씀은 어디까지나 들것을 메고 온 사람들의 시각 아니었습니까. 우리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우리는 헌신적으로 그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말씀이었지요.

그러면 그 시각을 잠시 돌려서, 우리가 들것을 메고 온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그 들것에 누워 있는 사람의 입장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지금 온몸이 마비가 되어서, 걷기는커녕 일어나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저기 어딘가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그 분은 많은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 주셨다고 해요. 나도 그 분을 만나면 병이 나을 것 같아요.

여러분이 만약에 그와 같은 상황이라면, 여러분을 들것에 실어서 예수님께로 데려가줄 네 명의 사람이 있습니까.

그래요. 지금은 뭐 차에 태워드리거나 아니면 119를 부르면 알아서 잘 해주겠지요.

그러나 꼭 몸이 아플 때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그 정도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면,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그 정도의 도움이 필요하게 된다면, 여러분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여러분을 도와 줄 네 명 정도의 사람이 여러분 주변에는 있으십니까.

이 들것을 들고 온 사람들의 헌신이 어느 정도입니까. 지금이라면 무슨 전화나 아니면 카톡을 해서 언제 모여서 같이 들것에 실어서 가자는 식으로 쉽게 약속을 잡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때는 그런 게 어디 있겠어요.

그러니까 아마도 한 사람이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면서 그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을 모았겠지요.


그리고 네 사람이 낑낑거리고 들것을 메고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왔을 것입니다. 그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리 몇 킬로 안 되는 거리라고 하더라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에요.

무슨 들기 쉬운 가방을 매는 것도 아니고 들것을 들게 되면 한쪽으로 힘이 쏠리게 됩니다. 그리고 아무리 마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막상 업거나 들거나 하려면 상당히 힘이 들기 마련이에요.

거기다가 어디 그 뿐인가요. 네 사람이 한 들것을 들었으니까 한 사람만 빨리 간다고 될 문제가 아니잖아요. 잘못해서 떨어뜨리기라도 한다면 큰 일입니다. 그러니까 조심조심 걸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제 도착한 다음에는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옥상으로 올려야 하고, 거기다가 구멍을 뚫어서 이제 밧줄로 아래까지 내려야 했습니다. 이것도 균형을 잡으면서 조심조심 밑으로 내려야 했을 것인데,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조금 더 생각해본다면 힘든 것은 어디 그 뿐이었을까요? 아무리 빨리 작업을 했다 하더라도 지붕을 뚫는 작업이 그저 1~2분 사이에 끝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렸겠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면서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주일에 교회에서 거룩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져요. 그것도 조금 떨어졌겠습니까? 지붕을 아예 들어낼 정도로 뚫고 있는데?

이런 저런 부스러기들이 아주 그냥 폭포수처럼 쏟아졌을 것입니다. 갑자기 막 기침이 나고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먼지가 날립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했겠어요. 할렐루야 그랬겠습니까. 아니, 이 사람들아, 지금 뭐하는 짓이냐, 뭐 그러면서 난리를 치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육체적인 수고만이 아니라 이 모든 정신적인 수모까지도 감수하면서 그 네 사람은 끝까지 지붕을 뚫고 난 다음에, 온갖 야유와 질타 속에서도 네 사람이 조심조심 하면서 마침내 들것을 아래로 내리지 않았겠습니까.

이는 분명합니다. 99%도 아니에요. 그 네 사람들은 들것을 아래로 내린 다음에 100% 지쳐서 뻗어버렸을 것이에요.

자, 다시 한 번 질문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이와 같은 헌신적인 수고를 아낌없이 해줄 수 있는 네 사람 정도가 지금 현재 여러분 주변에 있으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내 주변에는 나를 위해 그 정도로 헌신해줄 사람이 없다는 분들께 질문을 드립니다. 이상하네요. 왜 없을까요. 성경에는 분명히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많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 말씀대로 살았다고 한다면, 무슨 평생동안 나를 위해 일을 하라는 것도 아니고, 하루 정도 시간과 수고를 낼 정도라면 얼마든지 도움을 줄 만한 사람들이 수십명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서, 그래, 내 주위에는 내가 어려움을 겪을 때, 나에게 그 정도의 도움을 줄 만한 네 사람 정도는 있어,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께 말씀 드리겠습니다.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아무런 사심없이 그 정도로 헌신적인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이 막상 현실로 닥쳤을 때 실제로 그리 많을까요?

물론 여러분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요. 내가 그 사람한테 해 준 게 얼마인데. 내가 언제도 도와줬고 언제도 어떻게 해주고 그랬는데 설마 나를 안 도와 주겠어? 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과연 그 마음이 상대방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까요? 혹시 여러분만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런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이 정말 네 사람이나 있습니까.

한국 속담에 그런 말 있잖아요.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상을 가도 정승이 죽으면 안 간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정승 집 개가 죽으면 정승 집 문지방이 닳아 없어지도록 문상객들이 몰려들지만, 정작 정승이 죽으면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승 집 개가 죽으면 생색 내기 위해서 얼굴 도장 찍으러 간다지만, 정작 정승 본인이 죽었다면 얼굴도장 찍을 사람도 없는데 뭐 하러 가냐 하는 것이지요.

세상 인심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내가 무슨 도움을 주거나 한다면 나한테도 무슨 이익이 되는 것이 있어야 움직이지, 아무리 수고를 해도 나한테 득이 되지 않는다면 손 하나 까딱이라도 하고 싶겠어요?

반면에 그런 경우도 있겠지요. 내가 다른 건 모르겠지만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가만 있을 수 없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나에게 다소 손해가 나는 일이라 하더라도 흔쾌히 도움을 주어야지…….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떤 때가 그런 경우일까요. 대표적인 예가 본인이 과거에 여러가지 도움을 받았을 경우 아니겠습니까.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그 때 그 사람이 나를 도와주었는데, 지금 그 사람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같은 경우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나를 위해서 그럴 사람이 네 사람도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예, 그렇죠. 내가 그만큼 내 이웃을 사랑하고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욥기 41장 11절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だれが、まずわたしに与えたというのか。わたしがそれに報いなければならないほどに。天の下にあるものはみな、わたしのものだ。

누가복음 16장 9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不正の富で、自分のために友をつくりなさい。そうすれば、富がなくなったとき、彼らがあなたがたを永遠の住まいに迎えてくれます。

이 세상이 누구의 것입니까. 그렇죠.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지금 내가 쓰고 있어요. 그렇다면 이는 내 것이면서도 진정한 내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만 주님이 나에게 잠시 동안만 맡겨 놓으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마치 내 것인 줄 알고, 이를 악 물고 놓지 않으려고 해요. 나한테는 지금 차고 넘치는데 지금 이 순간 부족한 이웃에게 나누어 줄 생각은 꿈에도 안 해요.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내 것이 아니잖아요. 안 되겠다. 내놔. 라고 진정한 소유주이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우리는 꼼짝 없이 모든 것을 다 내놔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 어떻게 하라고요? 예, 친구를 사귀라고 하잖아요. 친구가 별것입니까. 그렇다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다 퍼주라고 말씀하시나요?


마태복음 5장 40절~42절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あなたを告訴して下着を取ろうとする者には、上着も取らせなさい。
あなたに一ミリオン行くように強いる者がいれば、一緒に二ミリオン行きなさい。
求める者には与えなさい。借りようとする者に背を向けてはいけません。

내가 가지고 있는 하찮은 것을 뜯어가려고 기를 쓰고 달려들면 어떻게 하래요? 예, 내가 가지고 있는 별 것 아닌, 마치 헌옷 같은 것도 같이 줘버리라고 하시잖아요.

물 한 잔 달라면 물 두 잔 주고, 밥 한 그릇 달라고 죽일 듯이 달려들면 그냥 두 세 그릇 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믿음생활을 잘 했는지 알고 싶으십니까. 쉽습니다. 나를 위해서 하루 정도 정말 헌신적으로 도와줄 만한 이웃이 네 명 정도가 있는지 확인해보세요. 만약에 단순히 내 생각이 아니라, 그와 같은 일이 현실로 닥쳤을 때 정말로 그 정도 헌신적으로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다면 꽤 믿음생활을 잘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없습니까. 내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라도 나를 헌신적으로 다와줄 사람이 네 사람은 고사하고 한 사람도 없을 것 같으신가요? 괜찮습니다. 제가 드리는 이 말씀을 듣고 계시다면 아직 기회가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 중에서도 혹시 그런 경험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만, 몇 년 전에 제 아이디가 도난을 당해서 몇몇 사람한테 돈을 빌려 달라고 하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장 비밀번호도 바꾸고 이상한 메시지가 전달된 분들께는 사과도 하고 그랬던 기억이 있어요.

그러고는 이에 대한 내용의 글을 썼는데, 한 친구가 제게 그러더라고요. 만약에 돈을 빌려 달라고 여러 사람들한테 말을 했었는데 아무도 안 빌려줬다면 좀 서운했겠네? 라고 하는 거였어요.

자, 그렇다면 비록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나쁜 의도로 제 아이디를 써서 돈을 빌려 달라고 했었다고 하는데, 이 일로 인해서 정말 돈을 빌려준 사람이 있었을까요?

예, 다행히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실 좀 서운했었습니다만, 알고 보면 그게 서운해 할 일입니까.


제가 지금까지 10년 동안 일본 그것도 군마현에 살면서, 사례비도 제대로 못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저희가 지금까지 그래도 빚 없이 사역을 해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일면식도 없는 분들이 후원을 해 주셨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제가 일본에서 사역을 하면서 이런저런 곱지 않은 소리도 많이 듣고 그랬습니다만, 얼마 전에는 누가 저에게 그런 글을 남겼더라고요.

매주 동영상이나 음성으로 말씀을 전할 때 보면 서두에 후원해주시는 분들의 성함을 말씀 드리는데,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나봐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런 모습이 후원에 목을 매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분께는 그저 여느 비판에 대한 답글처럼 “귀하의 의견을 존중합니다”라고 말을 남기긴 했습니다만, 참 모르시는 말씀이지요.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 다른 사이비 교주처럼 무슨 몇 억 씩 내라는 것도 아니고, 지금 목이 말라서 물 한 잔 달라는 심정으로 말씀을 드리고 있는데 그게 마음에 안들 것이 뭐가 있습니까.

성함을 말씀 드리는 정도가 아니라 솔직히 제 심정 같아서는 매주마다 한 분 한 분 찾아 뵈면서 직접 인사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렇게 저희 사역을 위해서 관심을 가져 주시고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신데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렇다면 제가 그 분들을 위해 해 드린 것이 있나요. 사실 앞서 저도 여러분께 자신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도움을 줄 만한 사람 넷이 있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저 자신도 그런 분들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씀 드릴 수가 없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부터도 그런 도움을 많은 분들께 드리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이제부터는 보다 더 분발해서 많은 이웃분들을 섬겨야겠다는 다짐을,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우선 저 자신한테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더욱 분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 스스로 지금까지의 신앙적인 자세를 진단해 봄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나라에 갈 때까지 남겨진 시간 동안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해 헌신하면서 주님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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