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0회 낡은 부대를 새 부대로 (3)
2024년 2월 4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9장 17절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マタイの福音書 9章 17節
“また、人は新しいぶどう酒を古い皮袋に入れたりはしません。そんなことをすれば皮袋は裂け、ぶどう酒が流れ出て、皮袋もだめになります。新しいぶどう酒は新しい皮袋に入れます。そうすれば両方とも保て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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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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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5번째 시간으로서 “낡은 부대를 새 부대로(3)” 古い革袋を新しい革袋に(3)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시간에는 경건이라고 하는 낡은 부대에 알아보았고, 지난 주에는 십자가나 성경, 더 나아가 예수님 마저도 경우에 따라서는 우상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교회 내의 우상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세 번째 시간인 오늘은 바로 <열심(熱心さ)>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믿음생활에 있어서 <열심>이라고 한다면 어떤 생각을 갖게 되십니까. 이를 두고 나쁘다고 말씀하실 분들은 없으시겠지요.

열심히 기도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하는 것, 이는 나쁘기는 커녕 많은 분들이 본받아야 하는 자세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우리가 경계해야 할 낡은 부대 중에는 이 <열심>이라고 하는 덫이 얼마나 많이 깔려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은 이 <열심(熱心さ)>이라고 하는 낡은 부대를 버려버리고 새 부대에 주님의 말씀을 가득 담아갈 수 있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전에 제가 잠시 알던 분이 계셨는데, 이 분의 어머님은 권사님이셨는데, 이 권사님은 강하게 주장하시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새벽기도는 반드시 드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벽 5시에 일어나면 자기 아들을 깨워요. 그리고 잠이 아직 덜 깬 아들과 함께 새벽기도를 드리고 옵니다.

그렇게 새벽에 예배를 다녀오면 졸릴 것 아니에요. 하지만 이 권사님의 주장은 또 뭐냐 하면 새벽기도에 다녀왔다고 해서 아무리 졸립다고 하더라도 낮에 자면 안 되고, 밤에는 항상 성경을 읽고는 12시에 잠을 자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떠냐 하면 이 아드님은 밖에서 생활할 때 항상 시간만 나면 꾸벅꾸벅 졸아요.

그리고 이 권사님의 주장은 그것 만이 아닙니다. 기도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거예요. 기도를 하면 얼굴에서 환하게 빛이 나지만, 기도를 하지 않으면 얼굴이 아주 시커멓게 된다고 해요. 그래서 하루에 몇 시간이고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뭐, 다른 부분도 있습니다만, 이것 만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여러분께서는 공감이 가십니까. 그리고 이대로 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이렇게 믿고 있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금식을 얼마나 해야 하고 주일은 어떻게 해야 하고, 먹는 것 마시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고, 그리고 반대로 이것은 하면 안 되고 저것도 하면 안 되고…….

이런 사람들 주변에 있으면 어떨 것 같습니까. 믿음이 대단히 좋아질 것 같으신가요. 아니요. 제 솔직한 심정은 뭐냐 하면 대단히 피곤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잠시 이 아드님과 가까이 지낼 일이 있었습니다만, 얼마나 좀 측은하게 느껴졌는지 몰라요. 아니, 어머님은 연세도 있으시고 해서 수면시간이 짧아서 몇 시간 안 자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한테 이건 이렇게 해야 한다, 저건 저렇게 해야 한다고 강요를 하면 그 주변 사람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 분들 밑에 있었다고 한다면, 교회고 신앙이고 뭐고 솔직히 지겨워서라도 다 때려 치고 싶어 지지 않겠습니까.

이 분만이 아니라 세상에 보면 이와 같은 분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병에 걸렸거나 문제가 있을 때 금식을 하기도 하고 기도원에 가기도 하잖아요. 그렇다면 금식은 며칠이나 하면 될 것 같습니까. 하루에 기도는 얼마나 하면 될 것 같습니까.

누구는 또 그런 말도 합니다. 마귀를 물리칠 때에는 그냥 “예수의 이름으로 물러가라” 라고 하면 안 된대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 하면, 좀 혀를 굴려서 “예슈의 이름으로 물러가라” 라고 해야 물러간다고 하는 말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마귀는 복음성가를 부르면 물러가지 않는데 찬송가를 부르면 물러간다나? 그런 말을 웃지도 않고 진지한 얼굴로 하시니, 듣는 사람 입장으로서는 참으로 난처하지요.

예전에 그런 말씀을 제가 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교역자를 모집한다고 하기에 한 전도사님이 면접을 보았다고 하는데, 이 전도사님은 어머님께서 질병으로 일찍 돌아가셨다고 해요.

그런데 이를 두고 그 면접을 보는 담임목사라고 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 어머님께서 일찍 돌아가신 것은 전도사님의 기도가 부족해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잔인하고 사람 마음에 비수를 꽂는 말입니까.

그리고 이는 또 제가 30대 초반 때의 일입니다만, 무슨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일요일에 교회를 마치고 나가야 하는 시간에 일을 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 사실을 교회에서 말을 하니까 그 구역 리더라고 하는 형제가 하는 말이, 자기도 주일에 일을 하게 될 뻔한 적도 있었는데, 믿음을 가지고 그 일을 그만 두니까 이런 저런 좋은 일들이 일어났다고 하면서 간증을 합니다.

그건 뭐예요? 제가 그 일 때문에 교회에 안 나오겠다는 것도 아니고, 교회를 마치고 일을 하러 간다고 하는데도 그것이 잘못됐다고 하면서, 당장 그만 두라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주장들, 물론 그 사람들이 정말 나쁜 사람들이라서 그랬겠습니까. 그 진의는 제가 알지는 못하지만 저는 사실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좋은 의도를 가지고 말을 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 일이 발생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오늘은 잠시 사사기 말씀부터 살펴볼까 합니다.


사사기 17장 1절~5절
“1.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2.그의 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천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가졌나이다 하니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3.미가가 은 천백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매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기 위해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주리라
4.미가가 그 은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머니가 그 은 이백을 가져다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고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5.그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그가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그의 제사장으로 삼았더라”


エフライムの山地の出で、その名をミカという人がいた。
彼は母に言った。「銀千百枚が盗まれたとき、あなたはのろいの誓いをされ、私の耳にもそのことを言われました。実は、その銀は私が持っています。私がそれを盗んだのです。」すると母は言った。「主が私の息子を祝福されますように。」
彼が母にその銀千百枚を返したとき、母は言った。「私は自分の手でその銀を聖別して、主に献げていました。自分の子のために、それで彫像(ちょうぞう)と鋳像(ちゅうぞう)を造ろうとしていたのです。今は、それをあなたに返します。」
彼が母にその銀を戻したので、母は銀二百枚を取って銀細工人(ぎんざいくにん)に与えた。銀細工人はそれで彫像と鋳像を造った。こうして、それはミカの家にあった。
このミカという人には神の宮があった。彼はエポデとテラフィムを作り、その息子の一人を任命して、自分の祭司としていた。


여기서 단어를 몇 가지 설명 드리겠습니다.

1절에서 <에브라임 산지(エフライムの山地)>라고 나오는데 이로 보아 이 미가와 그 가정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중에서 에브라임 족속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5절에서 <에봇과 드라빔(エポデとテラフィム)>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에봇(エポデ)>은 당시 제사장이 입었던 옷을 말하는 것이고 <드라빔(テラフィム)>은 당시 이방인들이 섬겼던 우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사기 17장에서 18장에 있는 내용의 시작 부분입니다만,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에브라임 지파 가정에 미가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은 천백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난리를 쳤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이 돈을 훔친 것이 그 아들이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어머니가 하도 속상해 하니까, 그 돈이 여기 있다고 하면서 이 아들이 자수를 했어요.

그러자 어머니의 화가 금방 풀려서 아들더러 여호와의 복 받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들이 어머니에게 자기가 훔친 은을 돌려주었더니, 어머니가 그걸로 우상을 만들어서는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겠다고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자기 아들 중에서 하나를 뽑아서 제사장을 삼았다는 것이 이 본문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이 본문에서 이상한 점이 어디 있을까요. 사실 자세히 이 내용을 자세히 본다면, 문제가 있는 점이 한 둘이 아닙니다.

일단 이 어머니 입에서 <여호와>라고 하는 하나님의 성호가 나왔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는 분명 신앙이 있는 집안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일단 2절에 의하면 어떻습니까. 아들이 어머니의 돈을 훔쳤어요.

이 시점에서 본다면 아들은 이미 십계명 중에서 두 가지를 어겼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일단 자기 어머니의 돈을 훔쳤기 때문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あなたの父と母を敬え)> 라고 하는 제5계명을 어긴 것이 되겠지요.

뿐만 아니라 <도둑질하지 말라(盗んではならない。)> 라고 하는 제8계명도 어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어머니는 그 점에 대해서 전혀 지적을 하지 않고, 그저 아이구 이쁜 내 새끼……라고 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돈을 가지고 무엇을 하겠다고 하냐 하면 우상을 만들겠다는 것이에요. 그 우상을 왜 만드냐 하면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기 위해서, 말하자면 하나님을 위해서 우상을 만들겠다고 합니다.

이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あなたは自分のために偶像を造ってはならない。上の天にあるものでも、下の地にあるものでも、地の下の水の中にあるものでも、いかなる形をも造ってはならない。それらを拝んではならない。それらに仕えてはならない。)> 라고 하는 십계명 중에서 제2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다음으로 5절에 의하면 에봇과 드라빔(エポデとテラフィム)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 입는 옷을 입고서는 드라빔이라고 하는 우상을 섬기도록 하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5절 끝부분에 보시면 자기 아들 중에서 하나를 세워 제사장을 삼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사장은 모세의 형인 아론의 후손 즉 레위 지파만 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 가정은 에브라임 지파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이 짧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로 문제가 많이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영적으로 보자면 그야말로 지저분하고 문제 투성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이 어머니에게 악의가 있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요. 이 어머니는 하나님을 위해서 이렇게 했다고 하잖아요.

자기는 잘 믿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예, <열심히> 했습니다. 열심히 돈을 들여서 우상도 만들고, 열심히 제사장 옷도 만들고 열심히 자기 아들도 제사장으로 세워서 열심히 섬겨보려고 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그렇게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이는 오히려 하나님을 욕보이게 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결국 이들은 바로 다음 장인 18장에서 모든 것을 다 빼앗겨버리고 말지요.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항상 승리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저 내 생각만 가지고 막무가내로 열심히 하기만 하면 승리할 수가 있습니까.

달리기 경주에서 우승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냅다 뛰기만 하면 됩니까. 아닙니다. 정해진 규칙에 따라서 출발해야 하고 정해진 코스를 달린 다음에, 역시 정해진 결승점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잖아요.

이 어머니는 좀 잘 믿어보려고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문제가 많은 행동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는 하나님께 순종했던 유다 제13대 왕이었던 히스기야 왕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만, 오늘은 역시 하나님께 순종했던 유다 제16대 왕인 요시야 왕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열왕기하 22장에 의하면 요시야 왕은 하나님의 성전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 성전을 수리할 것을 명합니다. 그런데 그 때 성전에서 제사장 힐기야가 오래된 율법책이 하나 발견됩니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한 내용이 요시야 왕에게까지 보고가 되는데, 그 때 장면이 다음과 같습니다.


열왕기하 22장 8절~11절
“8.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힐기야가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
9.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돌아가서 보고하여 이르되 왕의 신복들이 성전에서 찾아낸 돈을 쏟아 여호와의 성전을 맡은 감독자의 손에 맡겼나이다 하고
10.또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사반이 왕의 앞에서 읽으매
11.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의 옷을 찢으니라”


そのとき、大祭司ヒルキヤは書記シャファンに、「主の宮で律法の書を見つけました」と言った。そしてヒルキヤがその書物をシャファンに渡したので、彼はそれを読んだ。
書記シャファンは王のもとに行って、王に報告した。「しもべたちは、神殿にあった金を取り出して、これを主の宮で工事している監督者たちの手に渡しました。」
さらに書記シャファンは王に告げた。「祭司ヒルキヤが私に一つの書物を渡してくれました。」シャファンは王の前でそれを読み上げた。
王は律法の書のことばを聞いたとき、自分の衣を引き裂いた。


하나님께 순종했던 요시야 왕은 이 율법책 내용을 듣더니 자기 옷을 찢었다고 합니다. 이는 대단히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진정한 율법,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까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 말하자면 지금까지 열심히 한다고 했었는데 그게 다 헛것이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요시야 왕은 이제 어떻게 했냐 하면 다음 장에 기록합니다.



열왕기하 23장 1절~3절
“1.왕이 보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를 자기에게로 모으고
2.이에 왕이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노소를 막론하고 다 왕과 함께 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성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
3.왕이 단 위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께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하매 백성이 다 그 언약을 따르기로 하니라”


王は使者を遣わして、ユダとエルサレムのすべての長老たちを彼のところに集めた。
王は、ユダのすべての人々、エルサレムのすべての住民、祭司と預言者、および下の者から上の者まで、すべての民とともに主の宮に上り、主の宮で見つかった契約の書のことばをすべて彼らに読み聞かせた。
それから王は柱のわきに立ち、主の前に契約を結び、主に従って歩み、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て主の命令と証しと掟を守り、この書物に記されているこの契約のことばを実行することを誓った。民もみなこの契約に加わった。


여기서 요시야 왕이 하고자 했던 말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지금까지 자기들 생각대로 지켜왔던 것은 다 헛것이다. 이제 여기에 적힌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는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말씀에 입각하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해왔던 그런 낡은 부대들은 다 버려버리고, 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새 부대에 믿음을 담아야 한다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업무상 때로는 여러 변호사들 홈페이지에 들어가보곤 합니다만, 거기에 보면 자기들 소개가 있잖아요.

그럼 그 내용이 어떤 것으로 채워져 있겠습니까.

뭐, 기본적으로 몇 년에 어디 학교를 졸업하고, 언제 사법시험이나 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는 내용이 있고, 그리고 그 외에는 대부분 자기 경력들이 나와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변호사님들의 소개 중에 “나는 법전을 몇 번 통독했습니다”라는 소개가 있을까요.

아니면 “나는 법정에서 재판장에게 몇 시간 동안 변론을 한 적이 있습니다”라는 소개가 있을까요?

지금 한국의 변호사 수가 대략 3만 4천명 정도라고 하는데, 제가 장담을 합니다만, 한국만이 아니라 전세계 어느 변호사라 하더라도 그와 같은 것을 자랑삼아 적어 놓은 변호사는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법전을 몇 번 읽었냐 하는 것이나, 재판장에게 변론을 몇 시간 했느냐 하는 것이 변호사의 실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교회에 보시면 다양한 자랑거리가 있는데 그 중에는 자기가 성경을 몇 번 읽었다거나 기도를 몇 시간 한다거나, 내가 금식을 얼마나 했다는 것을 자주 말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또 있는 것은 내가 교회에 몇 년 다녔다거나 내가 직분이 뭐라고 말하는 분들도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그 사람의 믿음을 간음할 수 있는 척도가 될 수 있을까요.

아니요. 오히려 그와 같은 말 중에 낡은 부대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은 아닌지 점검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변호사에게 있어서 법전을 몇 번 읽었는지, 변론을 몇시간 했는지가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순하게 말해서 재판에서 이길 수 있느냐 여부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기는 것, 우리 삶에 있어서 승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교회에 오래 다니기만 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까.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단순히 성경책만 많이 읽으면 승리할 수 있습니까. 기도나 금식을 오래 하기만 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까.

그와 같은 막무가내식 열심은 오히려 승리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10장 2절~3절
“2.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私は、彼らが神に対して熱心であることを証ししますが、その熱心は知識に基づくものではありません。
彼らは神の義を知らずに、自らの義を立てようとして、神の義に従わなかったのです。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니고 아무리 열심히 믿는다고 하더라도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내세우려고 하는 것이므로, 하나님께 순종하기는커녕 오히려 불순종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를 오래 하고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아무리 금식을 오래 했다고 하더라도, 무슨 어려움이 닥치면 기다렸다는 듯이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포기하면서, 아이구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이럴 수 없어……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인생을 원망하게 된다면 그것이 어떻게 해서 승리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법전만 많이 읽고 재판에서 말도 많이 하는데 재판만 하면 지는 변호사와 다를 바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 변호사한테 누가 사건을 맡기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올바로 알고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오더라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좌절하지 않습니다.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지금 눈앞에 크고 작은 문제들이 나를 가로막고 있다 하더라도, 아브라함을 부르셨던 하나님, 모세를 이끄셨던 하나님, 그리고 다윗과 함께 싸우셨던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125편 1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主に信頼する人々はシオンの山のようだ。 揺るぐことなく とこしえにながらえる。


이제 내 생각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나를 세우려는 낡은 부대를 버려버리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새로운 부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흔들리지 않고, 영적인 싸움에서 이기고 또 이기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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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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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9회 낡은 부대를 새 부대로 (2)
2024년 1월 28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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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9장 17절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マタイの福音書 9章 17節
“また、人は新しいぶどう酒を古い皮袋に入れたりはしません。そんなことをすれば皮袋は裂け、ぶどう酒が流れ出て、皮袋もだめになります。新しいぶどう酒は新しい皮袋に入れます。そうすれば両方とも保て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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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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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4번째 시간으로서 “낡은 부대를 새 부대로(2)” 古い革袋を新しい革袋に(2)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에는 경건이라고 하는 낡은 부대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경건이라고 하는 것은 경건 그 자체로 있는다면 아름다울 수 있겠으나 거기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빠지게 된다면 그것은 경건이 아니라 오히려 교만이라고 하는 죄가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이 외에도 우리가 그 동안 당연시해왔던 낡은 부대들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부터 해볼까요. 오늘은 성경책이나 십자가이라고 하는 낡은 부대부터 시작해볼까 합니다.

자, 교회에 걸려있는 십자가,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책에 능력이 있습니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 드려볼까요. 자동차에 성경책을 싣고 다니면 사고가 나지 않는다. 맞습니까. 틀립니까.


이에 대해서 틀리다고 하신 분들께 질문을 드립니다. 아니, 성경책에 능력이 없어요? 성경책에 능력이 있다면 성경책을 차에 싣고 다닐 경우 사고가 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십자가를 목걸이로 걸고 다니면 십자가 목걸이를 안 한 사람보다 좋은 일이 더 많이 일어난다. 맞습니까, 틀립니까.

이에 대해서도 틀리다고 하신 분들께 질문을 드립니다. 십자가에 능력이 없어요? 십자가에 능력이 있다고 한다면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니면 좋은 일들이 생기고, 십자가를 차에 매달고 다니면 사고도 안 일어나야 하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무엘상 4장에 보시면 흥미로운 장면이 등장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군은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어요.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치지는 못하고 오히려 사망자만 늘어 가서, 사무엘상 4장 2절에 의하면 이미 4천 명이나 죽임을 당한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이를 보다 못한 이스라엘 장로들은 그들이 신성시하고 있던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오자고 합니다.


언약궤는 무엇입니까.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직접 쓰신 돌판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주신 것인데, 광야에서 40년 동안 어디를 가든 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 언약궤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재 했었습니다.

지금 전쟁터에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지고 있어요. 그렇다면 거룩한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오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부랴부랴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져왔습니다.

사무엘상 4장 5절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主の契約の箱が陣営に来たとき、全イスラエルは大歓声をあげた。それで地はどよめいた。

자, 이제 우리는 전쟁에서 이긴다. 승리할 수 있다. 이제 하나님의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숙적 블레셋 군대를 물리쳐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군대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올랐습니다.


그런데 전쟁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예상했던 대로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였어요.

사무엘상 4장 10절~11절
“10.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11.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こうしてペリシテ人は戦った。イスラエルは打ち負かされ、それぞれ自分たちの天幕に逃げ、非常に大きな打撃となった。イスラエルの歩兵三万人が倒れた。
神の箱は奪われ、エリの二人の息子、ホフニとピネハスは死んだ。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오기 전에는 죽임을 당한 자가 4천 명이었는데, 오히려 언약궤를 가져오고 싸웠더니 그 희생자가 3만 명이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모자라서 언약궤 마저도 이방인인 적군한테 빼앗겨 버렸다고 합니다.

아니, 그들이 가져온 언약궤가 가짜였어요? 아닙니다. 진짜 하나님의 언약궤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군은 크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어디에 잘못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군이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그 언약궤를 믿었다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하나님의 그 언약궤를 우상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에 크나큰 문제가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앞서 말씀 드렸던 성경책이나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책이나 십자가 모두 소중한 것이지요. 하지만 이는 그 물건이 거룩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 물건 자체를 거룩하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우상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책이나 십자가는 경우에 따라서 우상이 되어 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상은 아무런 능력도 없습니다. 오히려 해악이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또 우리에게 우상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예수님 마저도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아니, 무슨 해괴한 소리냐. 어떻게 예수님이 우상이 될 수 있느냐고 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닙니다. 성경에도 이와 같은 장면이 등장합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든 사람을 치료하고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물리치고 하는 모습들을, 대단히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냥 민간인도 아니고 제사장 아들이에요. 그들은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모습이 부러웠나 보죠?

가만히 보니까 예수 이름으로 명하기만 하면 병이 낫고 귀신들이 물러가요. 그러면 사람들이 놀라고 기뻐하고 막 그래요. 그런 모습을 보고 옳지, 그래, 나도 한 번 해보자. 하는 마음이 생길 만도 하지 않겠어요?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다고 나와 있습니까.

사도행전 19장 13절~16절
“13.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14.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ところが、ユダヤ人の巡回祈祷師のうちの何人かが、悪霊につかれている人たちに向かって、試しに主イエスの名を唱え、「パウロの宣べ伝えているイエスによって、おまえたちに命じる」と言ってみた。
このようなことをしていたのは、ユダヤ人の祭司長スケワという人の七人の息子たちであった。
すると、悪霊が彼らに答えた。「イエスのことは知っているし、パウロのこともよく知っている。しかし、おまえたちは何者だ。」
そして、悪霊につかれている人が彼らに飛びかかり、皆を押さえつけ、打ち負かしたので、彼らは裸にされ、傷を負ってその家から逃げ出した。

이 글의 문맥으로 본다면, 제사장 아들들도 귀신 들린 사람한테 가서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일단 그들은 예수라는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바울이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치길래 그들도 바울이 하는 것처럼 따라하려고 했을 뿐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예수>라고 하는 우상의 능력을 의지하려고 했을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주님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귀가 뭐라고 했어요.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라고 하면서 오히려 귀신 들린 사람이 덤벼 들어서 이기더니만 그 사람들은 벗은 몸으로 도망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망신입니까.

이처럼 성경책이나 십자가와 같은 물건이 우리 눈에는 아무리 거룩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자칫하면 우상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와 같은 사실을 이미 알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놀랍게도 신약이 아니라 더 옛날 구약에 나오는 인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갈라져 있을 당시를 보면, 문제가 많은 왕들이 태반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우상을 섬겼던 왕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요.

하지만 그 중에도 마치 다윗처럼 하나님께 순종했던 왕이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몇 안 되는 왕 중에 하나님께 순종했던 왕 중 하나가 바로 제13대 유다 왕 히스기야라고 할 수 있겠지요.

히스기야 왕의 아버지는 아하스였습니다. 그도 역시 유다 왕이었는데 그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열왕기하 16장 2절~4절
“2.아하스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간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아니하고
3.이스라엘의 여러 왕의 길로 행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4.또 산당들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アハズは二十歳で王となり、エルサレムで十六年間、王であった。彼はその父祖ダビデとは違って、彼の神、主の目にかなうことを行わず、
イスラエルの王たちの道に歩み、主がイスラエルの子らの前から追い払われた異邦の民の、忌み嫌うべき慣わしをまねて、自分の子どもに火の中を通らせることまでした。
彼は高き所、丘の上、青々と茂るあらゆる木の下でいけにえを献げ、犠牲を供えた。


이처럼 히스기야 왕의 아버지인 아하스는 다른 불순종한 왕들처럼 우상을 섬기고 우상한테 제사를 드리고 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히스기야 왕은 어땠을까요.

자, 여기서 우리는 잠시 조금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볼까 합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모세가 만든 놋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를 행할 때 이스라엘 자손들은 뻑 하면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면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를 해서 그들의 소원을 들어 주기도 했었던 것이지요.

이와 같은 일들이 반복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자손들은 어쩌면 안 좋은 것을 학습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자신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면,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를 해서,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진다는 식의 대단히 비뚤어진 법칙을 터득했는지도 모르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래서인지 그 날도 그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합니다.


민수기 21장 5절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神とモーセに逆らって言った。「なぜ、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をエジプトから連れ上って、この荒野で死なせようとするのか。パンもなく、水もない。われわれはこのみじめな食べ物に飽き飽きしている。」

하지만 그들이 생각했던 법칙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망이나 불평 불만으로 역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민수기 21장 6절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そこで主は民の中に燃える蛇を送られた。蛇は民にかみついたので、イスラエルのうちの多くの者が死んだ。

하나님께서는 불뱀들을 보내셔서 불평불만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구 물어버리게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어떻게 했어요?

민수기 21장 7절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民はモーセのところに来て言った。「私たちは主とあなたを非難したりして、罪を犯しました。どうか、蛇を私たちから取り去ってくださるよう主に祈ってください。」モーセは民のために祈った。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혼이 나더니 그제서야 아이구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라고 애원을 합니다. 그러자 이제 모세가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민수기 21장 8절~9절
“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すると主はモーセに言われた。「あなたは燃える蛇を作り、それを旗ざおの上に付けよ。かまれた者はみな、それを仰ぎ見れば生きる。」
モーセは一つの青銅の蛇を作り、それを旗ざおの上に付けた。蛇が人をかんでも、その人が青銅の蛇を仰ぎ見ると生きた。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명하시기를 불뱀 같은 것을 만들어서 장대 위에 높이 매달고는 그것을 보게 하라고 하세요. 그래서 모세가 놋으로 불뱀처럼 만들어서 장대 위에 높이 매달아 놓고는, 뱀에 물린 사람들이 그것을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 놋뱀을 봤더니 불뱀에 물려서 괴로워했던 사람들이 회복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놋뱀이 달린 장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신명기 21장 23절 후반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木にかけられた者は神にのろわれた者だからである。……

즉 나무에 달렸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상하게 한 불뱀들이 나무에 달림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불뱀으로 인한 상처가 모두 나음을 입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채로 십자가라고 하는 나무에 매달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 되신 예수님이 저주를 받으셨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지고 구원으로 이르는 길이 열렸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다 제12대 왕이었던 아하스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우상을 섬기는 짓을 했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히스기야 왕은 오히려 하나님께 순종하는 왕이었습니다.


열왕기하 18장 3절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彼は、すべて父祖ダビデが行ったとおりに、主の目にかなうことを行った。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했길래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느냐 하면 다음 구절입니다.

열왕기하 18장 4절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高き所を取り除き、石の柱を打ち砕き、アシェラ像を切り倒し、モーセが作った青銅の蛇を砕いた。そのころまで、イスラエル人がこれに犠牲を供えていたからである。これはネフシュタンと呼ばれていた。

신학자들은 모세에 의해 놋뱀이 만들어진 시기를 대략 기원전 1410년 경으로 보고 있는데, 히스기야 왕이 즉위한 시기는 대략 기원전 720년 경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히스기야 왕이 즉위한 시기는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만든 시기로부터 대략 700년이 흐른 뒤라고 할 수 있겠지요? 
여기서 놀라운 것은 그 히스기야 왕이 즉위할 때까지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이 현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700년이라고 하는 세월도 세월이지만, 모세가 만든 놋뱀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뜻깊은 물건이었기 때문에,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그야말로 국보급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 놋뱀을 소중히 여겼을 뿐만 아니라 그 놋뱀한테 분향까지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백성들로부터 소중하게 여김을 받고,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대단히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왕으로서는 더욱 더 이를 잘 보존하기 위해 애를 써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히스기야는 어떻게 했냐 하면, 반대로 그 놋뱀을 완전히 부숴버리고 그것을 <느후스단(ネフシュタン)>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느후스단>이라는 것은 <놋조각> 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여러분께서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니까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부숴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 흔적을 아무런 가치가 없는 한낱 놋조각, 고철덩이에 불과한 것이라고 선언했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일은 어쩌면 백성들의 반감을 불러왔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와 같은 히스기야를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열왕기하 18장 5절~6절
“5.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6.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彼はイスラエルの神、主に信頼していた。彼の後にも前にも、ユダの王たちの中で、彼ほどの者はだれもいなかった。
彼は主に堅くつき従って離れることなく、主がモーセに命じられた命令を守った。

참으로 이런 찬사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히스기야는 모세가 만든 놋뱀을 부숴버렸는데 오히려 그것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킨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히스기야는 왜 굳이 모세가 만든 놋뱀을 부숴버리고 말았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그 놋뱀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으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들은 말입니다만, 한약재 중에서 어떤 약재는 그 효능이 탁월한데, 문제는 복용할 때 반드시 차갑게 먹어야 한다고 해요. 만약에 이를 따뜻하게 해서 먹게 된다면 오히려 독이 되어 경우에 따라서는 사망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님이라는 이름은 물론, 성경책이나 십자가가 중요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를 우리의 새로운 가죽부대에 담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무럭무럭 성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마치 우상이라고 하는 낡은 가죽부대에 담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머지않아 여기저기서 포도주가 새어 나오게 되어, 마침내는 그나마 있던 우리의 믿음 자체가 모두 사라지게 되거나 오히려 우리에게 해악을 끼치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 말씀에 성경책 자체에 능력이 있다고 되어 있나요?

신명기 8장 3절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それで主はあなたを苦しめ、飢えさせて、あなたも知らず、あなたの父祖たちも知らなかったマナを食べさせてくださった。それは、人はパンだけで生きるのではなく、人は主の御口から出るすべてのことばで生きるということを、あなたに分からせるためであった。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까지 40년 동안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게 해서 먹도록 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사람이 거두어서 먹는 떡이 아니라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시기 위해서라고 하는 것이지요.

아무리 맛이 있는 떡이나 빵이라 하더라도 이를 포장지에 넣어둔 채로 가지고만 있는다고 해서 배가 불러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가지고만 있으면 결국 배가 고파지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죠. 그 포장지를 뜯어서 먹어야지만 배가 부르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는 배우지 못한 어린 아이들도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다 큰 어른들, 배울만큼 배운 어른들이 그것도 모르고 그저 성경책만 들고 다닙니까. 그것 만으로는 아무런 능력이 없어요. 성경책을 펴서 그 안에 적힌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먹었을 때 진정한 능력이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 십자가를 보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흘려 주신 피를 기억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독생자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해야만 해결될 수 있었던 내 죄악을 기억하고, 뿐만 아니라 그렇게까지 하시면서 우리에게 사랑을 확실하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단순히 패션으로 걸고 다닌다거나 형식적으로 벽에 걸어 놓게 된다면, 이는 마치 모세가 만든 놋뱀이 <느후스단(ネフシュタン)> 그저 놋조각이 되어 버린 것처럼, 십자가도 역시 나무조각, 쇳조각, 고철덩어리가 되어 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4절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真理に基づく義と聖をもって、神にかたどり造られた新しい人を着ることでした。

성경은 우리에게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새 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어떻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골로새서 3장 9절~10절
“9.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互いに偽りを言っ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がたは古い人をその行いとともに脱ぎ捨てて、
新しい人を着たのです。新しい人は、それを造られた方のかたちにしたがって新しくされ続け、真の知識に至ります。


그냥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고 새로워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새 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그 지식에까지 새롭게 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케케묵은 오래된 관습이나 관행에서 벗어나, 주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새 사람을 입어 진정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어서, 새로운 가죽 부대에 새로운 믿음 진정한 믿음을 갖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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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28회 낡은 부대를 새 부대로 (1)
2024년 1월 21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9장 17절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マタイの福音書 9章 17節
“また、人は新しいぶどう酒を古い皮袋に入れたりはしません。そんなことをすれば皮袋は裂け、ぶどう酒が流れ出て、皮袋もだめになります。新しいぶどう酒は新しい皮袋に入れます。そうすれば両方とも保て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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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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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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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3번째 시간으로서 “낡은 부대를 새 부대로 (1)” 古い革袋を新しい革袋に (1)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이 기독교는 지금까지 적지 않은 변화를 겪어 왔습니다.

그 변화 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꼽는다면 무엇보다 구약에서 신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진정한 하나님을 믿는 종교란 유대교 밖에 없었지요. 그 외에는 다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유대교는 대단히 폐쇄적이었습니다. 이방인에게 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금지 되어 있었습니다. 유대교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유일한 민족이라고 믿었던 유대인들 만을 위한 종교로 여겨졌던 것이지요.

그러다가 이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이야 말로 진정으로 하나님 말씀을 잘 알고 있고, 자신들의 말대로 하면 틀림없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2천년 전에 오셨을 때, 그들에게 칭찬을 했을까요.

아니요. 오히려 대단히 심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3장 13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わざわいだ、偽善の律法学者、パリサイ人。おまえたちは人々の前で天の御国を閉ざしている。おまえたち自身も入らず、入ろうとしている人々も入らせない。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천국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아버리고서 자기들도 못 들어가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못 들어가게 만들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이와 같이 심한 꾸짖음을 들은 것일까요.

이어서 마태복음 23장을 계속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6절~22절
“16.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7.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9.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21.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2.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わざわいだ、目の見えない案内人たち。おまえたちは言っている。『だれでも神殿にかけて誓うのであれば、何の義務もない。しかし、神殿の黄金にかけて誓うのであれば、果たす義務がある。』
愚かで目の見えない者たち。黄金と、その黄金を聖なるものにする神殿と、どちらが重要なのか。
また、おまえたちは言っている。『だれでも祭壇にかけて誓うのであれば、何の義務もない。しかし、祭壇の上のささげ物にかけて誓うのであれば、果たす義務がある。』
目の見えない者たち。ささげ物と、そのささげ物を聖なるものにする祭壇と、どちらが重要なのか。
祭壇にかけて誓う者は、祭壇とその上にあるすべてのものにかけて誓っているのだ。
また、神殿にかけて誓う者は、神殿とそこに住まわれる方にかけて誓っているのだ。
天にかけて誓う者は、神の御座とそこに座しておられる方にかけて誓っているのだ。


이 말씀을 간단하게 정리를 해볼까요.

자, 맹세를 하면 지켜야 하는데, 그들은 사람들한테 어떻게 가르쳤냐 하면, 성전이나 제단을 두고 맹세를 하면 안 지켜도 되지만, 성전의 금이나 제단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를 하면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게 완전히 반대라는 것이지요.

사실 본래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는 성전이나 제단을 두고 맹세를 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는 그 사람들이 율법을 잘못 인용 했다고 하기 보다는 율법의 해석에 있어서 엉터리로 가르쳤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에도 만약에 이런 식으로 학교나 학원에서 가르쳤다고 생각해보세요. 한 선생님이 어떤 문제에 있어서 정답은 A인데 B라고 가르쳤다고 한다면 그 학생들이 그 문제를 맞출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그 선생님한테 안 배웠더라면 그 문제를 맞출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괜히 그 선생님한테 배우는 바람에 어이없게 정답을 못 맞추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게 무슨 학교에서 보는 간단한 시험이라면 대수롭지 않겠지만, 입학시험이라고 생각해보세요. 그 문제 하나 때문에 합격과 불합격이 갈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또한 당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사실 613가지였는데, 이를 2134가지까지 늘려서 사람들한테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어했겠습니까.

이처럼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와 같은 잘못을 버젓이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마치 자신들이 제대로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목에 힘을 주고 다녔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심한 말씀으로 꾸짖으셨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마치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시고는 이미 예고하셨던 바와 같이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실 때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가복음 16장 15절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それから、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福音を宣べ伝えなさい。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유대인들만 믿는 것이 아니라 만민, 그러니까 세계 모든 민족에게 전파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유대교에서 새롭게 탄생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회가 점점 성경에서 멀어집니다. 또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자꾸 사람들의 해석이 들어가더니 이제는 사람들의 생각이 하나님 말씀보다 더욱 권위를 갖게 되기에 이릅니다.

당시 성경은 라틴어 성경이었는데 문제는 사람들이 라틴어를 읽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라틴어 성경만이 있었던 것이고,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설교를 할 때에도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로 하고 있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은 성경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사제들만 성경을 알고 다른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성경을 가지고 있는 사제들이 하는 말이 곧 성경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처럼 여겨지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사제들만 성경을 알고 다른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게 함으로써, 사제들이 하는 말이 곧 성경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처럼 여겨지게 만들고는, 그런 식으로 해서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려고 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이는 그야말로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저질렀던 일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무엇이 일어납니까. 그렇죠. 1517년 독일의 마르틴 루터에 의해 종교혁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가 외쳤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오직 말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교회가 마치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했던 것처럼 말씀 즉 성경에서 멀어지고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해서 사람들한테 지키도록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종교혁명을 일으키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이냐 하면, 무엇보다 일반 성도들부터 성경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해서 성경을 자신들의 모국어였던 독일어로 번역한 것이죠.

이렇게 되니까 그제서야 무엇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무엇이 사람들 멋대로 갖다 붙인 엉터리 가르침인가 하는 것이 모두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종교혁명을 거치면서 그리스도교는 구교에서 나와 신교로 자리잡게 되어서 오늘날의 기독교가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되풀이하기 때문일까요. 이제 이 기독교가 문제입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생각이 아닌 사람들의 생각이 적지 않게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되면 무슨 문제가 생기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말씀이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정답이 아닌 것을 정답이라고 말하게 되기도 하는, 그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과거에는 일반 성도들이 성경을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 당시에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그리고 16세기에는 라틴어를 이해할 수 있었던 사제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이를 지키도록 강요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성경책이 웬만한 나라에서도 모국어로 읽을 수가 있습니다.

인쇄기술도 얼마나 좋아졌고 책 자체도 얼마나 튼튼한 지 모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옛날에는 가격도 꽤 비쌌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그래도 많이 내려간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 몇 년 다니신 분들이라면 그 집에 성경책이 한 두 권 이상은 보통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성경책을 구할 수가 없어요? 그럼 조금 큰 교회에 가서 부탁을 하면 거기 비치되어 있는 성경책 한 권 정도는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잖아요.

보통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교회라면 수 십 권, 수 백 권의 성경책이 있기 마련인데, 성경책을 읽고 믿어보려고 하는데 돈이 없어서 구하지 못한다고 하는 사람한테, 거기서 중고 성경책 한 권 못 주겠어요?

그리고 성경에 적힌 글이 너무 어렵다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과거에는 이른바 <가라사대> 라고 하는 비교적 좀 난해하다고 할 수 있는 한글 개역 성경밖에 없었고 더구나 세로쓰기였기 때문에 많은 분들에게 좀 읽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실 50년대,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전체 국민의 교육수준이 그리 높지 않았었잖아요.

그러니까 그 두꺼운 성경을 읽는 것보다는 그저 목사님이 해주시는 말씀이 성경 말씀이려니 했던 것이고, 그리고 성경말씀을 공부하는 것보다는 그저 금식하고 기도하고 그러면 방언이 나오고 병이 낫고 그리고 부자가 되고……그것이 할렐루야……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한국이나 일본을 보더라도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을 비롯한 고등교육기관에 대한 진학률이 70프로가 넘는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공부 잘 하는 일부 수제들만 들어갔던 대학인데, 지금은 학교 수도 늘어나고 반면에 인구는 줄어들어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학교 이름에 욕심을 내지 않는다고 한다면 솔직히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곳도 많다고 하지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책 종류도 다양해 져서, 현대인의 성경, 쉬운 성경, 새번역 성경 등 보통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 된 성경들도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몰라요.


하지만 이와 같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기독교에는 어쩌면 과거와 똑 같은 문제들이 생겨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 그리고 개신교로 발전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똑 같은 문제들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성경으로부터 멀어지고 말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누구나 성경을 손쉽게 읽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이 성경으로부터 멀어졌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인 것이지요.

아무리 책값이 떨어지고 아무리 말투가 쉬워지고, 아무리 책을 튼튼하게 만들고 아무리 사람들의 교육수준이 높아졌다 하더라도, 결국 사람들이 읽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일이 이렇게 되면 역시 문제는 다시 도지게 됩니다.

과거에는 바리새인들이나 사제가 <성경을 읽지 못하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해서, 하나님 말씀대로가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 가르치다가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면, 이제는 목사나 교역자가 <성경을 읽지 않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해서 자기 멋대로 가르치게 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무슨 일들이 일어나게 되느냐 하면 바로 낡은 가죽부대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말씀은 그렇지 않은데도 사람들의 낡은 생각에 사로잡혀서 마치 그게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사람들한테 인식이 되어서 결국 낡은 가죽부대들이 여기저기에서 펑펑 하고 터지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와 같은 낡은 가죽부대를 없애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경을 읽고 올바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정말로 성경을 읽기 싫어하는 것인가 하면,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싶어해요. 성경을 알고 싶어해요. 그런데 문제가 뭐냐 하면 기존 교회에서 제대로 성경공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지냐 하면 이상한 종교집단들이 사람들을 유인하게 되는데 그 미끼가 뭐냐 하면 바로 <성경공부>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너희들 교회에서는 성경을 안 가르치지? 하지만 우리 교회는 성경공부를 열심히 해……이렇게 해서 사람들을 유인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막상 그런 데에 가보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이상하게 해석해서 결국 자신들의 교주를 신격화 하게 만드는 세뇌교육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다 누구 책임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기존 교회 책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기존 교회에서 제대로 성경 말씀을 전하지 않고 무슨 자기 생각이나 자기 경험만을 전하고 그러니 사람들이 성경말씀에 대해서 갈망하게 되어서 결국 이상한 곳으로 빠지고 마는 것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이번에 저는 이와 같은 낡은 부대를 버리고 새 부대로 만들기 위해서 과연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낡은 부대가 무엇인지,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 지를 좀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오늘은 간략하게 한 가지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른바 낡은 부대 중에서 대표적인 낡은 부대가 무엇인가 하면 바로 <경건>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경건, 사실 이 경건이라고 하는 것을 안 좋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여기에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복음 18장 9절~14절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自分は正しいと確信していて、ほかの人々を見下している人たちに、イエスはこのようなたとえを話された。
「二人の人が祈るために宮に上って行った。一人はパリサイ人で、もう一人は取税人であった。
パリサイ人は立って、心の中でこんな祈りをした。『神よ。私がほかの人たちのように、奪い取る者、不正な者、姦淫する者でないこと、あるいは、この取税人のようでないことを感謝します。
私は週に二度断食し、自分が得ているすべてのものから、十分の一を献げております。』
一方、取税人は遠く離れて立ち、目を天に向けようともせず、自分の胸をたたいて言った。『神様、罪人の私をあわれんでください。』
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が、義と認められて家に帰ったのは、あのパリサイ人ではなく、この人です。だれでも自分を高くする者は低くされ、自分を低くする者は高くされるのです。」


여기에 나오는 “토색, 불의, 간음”이라고 하는 말씀은 남들 것을 빼앗거나 남들을 속이거나 윤리적으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奪い取る者、不正な者、姦淫する者) 바리새인은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도 드린다면서 감사 드린다고 해요.

사실 따지고 본다면 이정도의 경건함이 그리 쉽습니까. 하루에 한 끼만 걸러도 배가 고파서 정신이 혼미해질 수도 있는데, 일주일에 두 번이나 금식을 한대요. 그리고 십일조도 꼬박꼬박 드리고, 절대 나쁜 짓은 안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사람에 대한 본심을 정확하게 표현하십니다. 그는 뭐라고 기도합니까.

그렇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この取税人のようでないことを感謝します)>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가 경건이라고 생각한 그 모습은 경건 그 자체로 있었다면 아름다운 것이었겠으나, 자기 바로 옆에 있는 이웃을 멸시하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경건이라고 하는 이름의 낡은 부대가 터지는 순간 아니겠습니까.

경건이라는 이름의 낡은 부대가 터지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교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는 주님께서 주신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을 드릴 때 항상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이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이 이웃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똑같이 중요하다는 말씀인 것이지요.

세상에는 법률이나 조례, 규칙 등이 수 만 가지도 넘습니다만, 그 모든 법률이나 조례나 규칙 등은 어디에 위배되어서는 안 되는가 하면, 바로 헌법에서 벗어나면 안 됩니다.

만약에 헌법에서 벗어난다고 법원에서 판결이 나오면 그 즉시로 그 규정은 무효가 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주신 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말씀은 우리 믿음에 있어서 헌법과도 같습니다.

아무리 유명한 목사님이나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라 하더라도 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그 순간 그 가르침은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이웃은 누구입니까. 그것은 말 그대로 내 옆에 있는 사람, 내 근처에 있는 사람,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이 바로 내 이웃인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인 거리만이 아닙니다.

요즘은 인터넷이 일상화가 되면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손쉽게 연락이 되는 경우가 많지요. 이와 같은 사람들도 분명 우리의 이웃입니다.

이러한 이웃을 사랑하고 아껴주고 위로하고 그래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헐뜯고 멸시하고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도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점은, 이와 같은 일이 교회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에요.

나는 이렇게 좋은 일을 했다. 나는 저렇게 좋은 일을 했다. 참 감사하다……라고 하면서 그 마음 안에 교만이 깔려 있다면, 이는 그 순간 경건이 아니라 교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전에 한국의 어떤 기업 총수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하지요.

“모든 것을 다 바꿔야 한다.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라.”

어쩌면 이와 같은 말이 바로 지금 우리 기독교 모든 교회에 필요한 말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도 모든 것을 다 바꾸어야 합니다.

그럼 무엇을 빼고 다 바꾸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 성경 빼고 다 바꾸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야 낡은 부대를 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새 부대에 주님께서 주시는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부터 되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를 다시 점검해보면서, 우리 안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온전히 자리잡게 함으로 말미암아, 낡은 부대가 아닌 새 부대에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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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27회 물에서 포도주로
2024년 1월 14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 6절~11절
“6.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ヨハネの福音書 2章 6節~11節
“6. そこには、ユダヤ人のきよめのしきたりによって、石の水がめが六つ置いてあった。それぞれ、二あるいは三メトレテス入りのものであった。
7. イエスは給仕の者たちに言われた。「水がめを水でいっぱいにしなさい。」彼らは水がめを縁までいっぱいにした。
8.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さあ、それを汲んで、宴会の世話役のところに持って行きなさい。」彼らは持って行った。
9. 宴会の世話役は、すでにぶどう酒になっていたその水を味見した。汲んだ給仕の者たちはそれがどこから来たのかを知っていたが、世話役は知らなかった。それで、花婿を呼んで、
10. こう言った。「みな、初めに良いぶどう酒を出して、酔いが回ったころに悪いのを出すものだが、あなたは良いぶどう酒を今まで取っておきました。」
11. イエスはこれを最初のしるしとしてガリラヤのカナで行い、ご自分の栄光を現された。それで、弟子たちはイエスを信じ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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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2번째 시간으로서 “물에서 포도주로” 水からぶどう酒へ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대부분의 복음서 내용이 그렇듯이 오늘 본문 내용도 우리에게 익숙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간과하기 쉬운, 말하자면, 다 아는 얘기니까 하고 그냥 넘겨버리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6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2장 6절
“6.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6. そこには、ユダヤ人のきよめのしきたりによって、石の水がめが六つ置いてあった。それぞれ、二あるいは三メトレテス入りのものであった。

먼저 여기 있는 <유대인의 정결 예식>이라는 점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마가복음에 자세히 나와 있어요.

마가복음 7장 3절~4절
“3.(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4.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パリサイ人をはじめユダヤ人はみな、昔の人たちの言い伝えを堅く守って、手をよく洗わずに食事をすることはなく、
市場から戻ったときは、からだをきよめてからでないと食べることをしなかった。ほかにも、杯、水差し、銅器や寝台を洗いきよめることなど、受け継いで堅く守っていることが、たくさんあったのである。

지금 우리가 이 글을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밥 먹기 전에 손을 씻는다는 것, 특히나 혹독한 코로나 사태를 경험한 우리에게 있어서는, 틈만 나면 손소독도 하고 그리고 식사는 물론이고 밖에 갔다가 들어오면 우선 손부터 씻는 것은 생활습관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는다는 것에 있어서는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없다고 여겨지겠습니다만,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자, 이 위생에 있어서 가장 신경 써야 하는 장소는 어디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식당 같은 음식을 다루는 곳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는 중요하지요. 하지만 더욱 신경을 써야 하는 곳, 그곳은 바로 병원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수술실 같은 곳이라고 한다면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야말로 먼지 하나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는 특수한 세제로 손을 세 번 씻고는 손에 딱 붙은 전용장갑을 끼게 됩니다. 아무리 작은 세균이라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환자의 생명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지요.

하지만 이와 같은 생각이 자리잡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의사가 손을 씻어야 한다는 사실을 처음 주장한 사람은 헝가리 출신인 의사 이그나츠 제멜바이스(センメルヴェイス)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언제 사람이냐 하면 19세기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1800년대에 활동했던 산부인과 의사였습니다.

산부인과 의사였으니까 출산을 도우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런데 이 때 의사는 손을 씻어야 한다는 사실을 처음 주장한 것이 이 제멜바이스(センメルヴェイス)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전에는 어땠냐 하면 의사들이 손을 씻지 않았었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의사도 손을 씻어야 한다고 주장한 이 제멜바이스라는 의사 선생님은 당시에 어떤 대우를 받았을까요.

이 분은 놀라운 발견을 했다면서 높이 평가를 받았는가 하면, 그건 나중이고, 당시에는 정신병자 취급을 받아서 실제로 정신병원에 입원 당하기도 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19세기가 되어서도 여전히 그런 상황이었는데 예수님 당시에 무슨 위생이다 세균이다 하는 생각이 있었겠어요.

그렇다면 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이와 같은 정결의식을 했을까요. 혹시 율법에 그와 같은 규정이 있었기 때문일까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이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의식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손을 씻는다고 하더라도 지금처럼 물로 손을 비벼서 손에 묻은 세균을 씻어 낸다기 보다는 무슨 하나의 격식처럼 해왔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돌항아리가 여섯 개 정도 놓였다고 하는데, 이는 거기에 쓰이는 물을 담아두기 위한 통이었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이 돌항아리에 직접 손을 넣고 씻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물을 길러서 그릇에 담아가지고는 각자 손을 씻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냥 맹물을 넣어서 보관하는 것이었으니까 지저분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겠지요.

그리고 돌항아리가 두세 통이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에 있는 <통>이라고 하는 것은 단위로 사용된 것인데 원어에 의하면 <메트레테스>라고 되어 있어요.

1 메트레테스에 대해서는 신학자들에 따라서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한데, 지금 기준으로 보았을 때, 대체적으로 40리터가 조금 안 되는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38~39리터 정도입니다.

쉽게 계산하기 위해서 1메트레테스를 40리터라고 한다면, 두세 통, 그러니까 2~3메트레테스라고 하면 대충 80리터에서 120리터 정도라고 할 수 있겠지요?

여러분 혹시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만, 바퀴가 달리고 사람 허리 정도까지 오는 쓰레기 통 있잖아요. 그게 대략 120리터 정도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런 돌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7절~8절까지를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2장 7절~8절
“7.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7. イエスは給仕の者たちに言われた。「水がめを水でいっぱいにしなさい。」彼らは水がめを縁までいっぱいにした。
8.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さあ、それを汲んで、宴会の世話役のところに持って行きなさい。」彼らは持って行った。

여기서 <그들>이라고 하는 것은 밑에 9절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거기서 일하는 <하인들(給仕の者たち)>이었습니다.

하인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돌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하세요.

벌써 잔치는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음식을 먹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미 손님들은 손을 씻었겠지요. 그래서 아마도 돌항아리 안에는 물이 많이 줄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물을 채우라고 하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여기까지는 이상한 점이 없겠지요. 본래 거기는 물을 넣어두는 곳이고, 물이 줄었으니까 채우라는 것인데 무엇이 이상하겠어요.

그래서 하인들은 물을 채웠습니다. 그랬더니 이제 그 물을 떠서 연회장한테 갖다 주라고 하세요.

이 시점에서 하인들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이미 사람들은 다 손을 씻고 음식을 먹고 있는데 다시 물을 가져다 주라고 하니 의아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상대방은 손님이요 자신들은 하인이니 어쩔 수 없지요. 그들은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가져다 줍니다. 여기서 연회장이라고 하는 사람은 그 잔치에 있어서 책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상황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2장 1절~3절
“1.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それから三日目に、ガリラヤのカナで婚礼があり、そこにイエスの母がいた。
イエスも弟子たちも、その婚礼に招かれていた。
ぶどう酒がなくなると、母はイエスに向かって「ぶどう酒がありません」と言った。

이 자리는 결혼식인데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해요. 이는 대단히 심각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잔치에서 꼭 있어야 할 포도주가 부족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이 책임은 당연히 연회장(宴会の世話役)에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에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습니다만, 지금 이 잔치 책임자는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적지 않게 당혹스러워 하고 있지 않았나 해요.

그런데 하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떻겠습니까. 지금 아주 곤혹스러워 하고 있는 잔치 책임자에게 다시 손 씻는 물을 떠서 가져가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상상이긴 합니다만, 평상시 같았더라면 이 잔치 책임자는 하인더러 화를 냈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잖아요. 아니, 사람들은 이미 다 손을 씻고는 음식을 먹고 있는데, 왜 다시 손 씻을 물을 가져 오냐면서 꾸짖었을 수도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연회장은 포도주가 떨어져서 정신이 없어요.

어디 남은 포도주가 없냐면서 잘 찾아보라고 성화였는지도 모릅니다.

바로 그 때 하인이 무슨 물 같은 것을 떠왔어요. 그래서 연회장은 이게 바로 찾아낸 포도주인지도 모른다면서 덥석 맛을 보았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게 웬 일이에요. 그 맛이 참 기가 막혀요.

그래서 연회장은 신랑한테 말합니다.

요한복음 2장 10절
“10.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0. こう言った。「みな、初めに良いぶどう酒を出して、酔いが回ったころに悪いのを出すものだが、あなたは良いぶどう酒を今まで取っておきました。」


그리고 11절에 의하면 이와 같은 표적이 바로 예수님이 나타내신 첫 표적(最初のしるし)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 짧은 내용이지만 여기서 다룰 수 있는 내용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한 부분에 주목을 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에서 본다면 이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말씀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어디일까요.

예, 바로 9절에 있는 본문 중에 등장하는 <물이 된 포도주(ぶどう酒になっていたその水)>라는 말씀입니다.

자, 이제 드디어 본론에 들어가보고자 합니다.

이를 단순화시켜서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주님은 A를 B로 만드셨어요. 그렇다면 A가 좋은 것인가요? 아니면 B가 좋은 것인가요.

예, B가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굳이 좋은 것을 안 좋은 것으로 만드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지금 당장 필요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맹물을 이렇게 담아두면, 어느 정도 지나면 포도주가 되지요?

예, 맹물은 아무리 지나도 포도주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 또 한 가지 질문.

포도주를 만들 때 물을 몇 프로나 첨가할까요?

예, 답은 0프로입니다. 와인을 만들 때에는 물을 전혀 첨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물과 포도주>라고 하는 것은, 물론 둘 다 액체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이 둘은 전혀 별개의 것, 그러니까 맹물은 그 자체로 만으로는 포도주가 될 수 없고, 그리고 포도주에는 물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물과 포도주는 그 본질에 있어서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표적이 바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이었다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왜 이를 굳이 첫 표적으로 택하셨을까요.

이는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본질적인 변화>라는 점을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포도주에 대한 비유는 많이 등장합니다. 신학자들은 신학적으로 보았을 때 포도주라고 하는 것은 신약에 있어서의 기독교를 상징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보다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점은, 바로 주님을 믿기 전과 믿은 다음의 변화가 아닐까 합니다.

믿음이 있기 전인 우리는 맹물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게 된 다음부터 우리는 변화됩니다.

그것도 어떤 변화입니까. 그렇죠. 마치 물에서 포도주로 변하는 것처럼 질적인 변화, 완전한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믿음을 가지게 된 사람에게 있어서 볼 수 있는 질적인 변화라고 하는 것은 어떤 모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믿음을 갖기 전과 비교했을 때 어떤 부분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면 꽤 많은 분들이 하시는 말씀이, 술 담배를 끊는 것을 꼽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요. 뭐 술담배가 몸에 안 좋은 건 맞지요. 하지만 그것이 신앙에 있어서 핵심인가요?

제가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만, 술 담배 안 하면서 주님을 믿지 않는 것보다는, 술 담배 하면서라도 주님을 믿는 것이 백 번 천 번 낫습니다.

술담배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성경 해석상에 있어서인 것이지 술담배라고 하는 것이 곧 믿음을 저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담배 같은 것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 15세기 말에 미 대륙을 발견한 컬럼부스 때부터였다고 하는데 그보다도 1400년 전에 쓰여진 성경에 담배 이야기가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와 같은 것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매주 교회에 다니는 것? 아니면 주일에 일을 안 하는 것? 그것이 과연 믿음에 있어서 본질이자 핵심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 살다가 보면 주일에 급한 일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

몸이 안 좋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요즘은 업무상 일요일에 반드시 근무해야 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일요일에 일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면, 일요일에는 버스나 전철을 타서도 안 되고, 식당이나 편의점에 가서도 안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역시 그것도 본질적인 부분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과연 믿음에 있어서 본질이자 핵심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평소에 성경 말씀을 많이 묵상하시는 분들께서는 금방 아실 수가 있습니다.

우리 한 번 십계명을 보시겠습니다.

제1계명이 뭐였죠?

출애굽기 20장 3절
“3.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あなたには、わたし以外に、ほかの神があってはならない。

그리고 제2계명은 그 다음,


출애굽기 20장 4절~5절 전반부
“4.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あなたは自分のために偶像を造ってはならない。上の天にあるものでも、下の地にあるものでも、地の下の水の中にあるものでも、いかなる形をも造ってはならない。
それらを拝んではならない。それらに仕えてはならない。……

자, 이를 우리가 다 아는 말로 하자면 무엇을 하지 말라는 것이에요?

그렇습니다.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것이에요.

한국이나 일본이나 솔직히 법으로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면 술이나 담배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일요일에 어쩌다가 교회에 빠지는 것이 무슨 죄입니까.

그리고 업무상으로 일요일에 근무를 해야 하는 경우가 있어요.

하지만 그것을 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일요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구약 때 안식일이 신약에 와서 일요일이 된 것이 아닙니다.

일요일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해서 지키기 시작한 것이요, 주님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따라서 그 날은 반드시 일요일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나 우상숭배만은 절대로 안 됩니다. 그것은 명백한 죄악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주님과 우리는 신랑과 신부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사람 사이에 있어서도 혼인관계에 있어서 치명적인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서도 재판상 이혼을 청구할 수 있는 요건에 있어서 한국과 일본의 경우를 본다면 공통점이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민법 제840조
1. 배우자에 부정한 행위가 있었을 때
2. 배우자가 악의로 다른 일방을 유기한 때
5. 배우자의 생사가 3년 이상 분명하지 아니한 때

民法第770条
1.配偶者に不貞な行為があったとき。
2.配偶者から悪意で遺棄されたとき。
3.配偶者の生死が3年以上明らかでないとき。
이럴 때에는 재판상 이혼을 청구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를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로 바꾸어 보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주님의 사랑에 대해 배반하고, 우리가 악의로 주님을 섬기지도 않고 의지하지도 않은 채 내버려두고, 그리고 우리가 오랜 동안 주님 앞에 나타나지 않아, 우리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지 못하게 되어 버렸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혼을 청구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여기서 사랑을 배반하는 행위라고 하면 이는 무엇보다 바람을 피우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정당한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배우자가 아닌데도 배우자와 같은 관심을 갖고 만나게 된다면, 이는 진짜 배우자를 배반하는 행위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주님에 대한 부정행위, 즉 사랑의 배반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더도 말고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우상숭배야말로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주님의 그 사랑을 배반하는 행위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시게 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이 아닌 다른 이방 신들을 섬긴다고 생각해보세요.

이렇게 악의에 찬 배반 행위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호수아 24장 20절~21절
“20.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하니
21.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하는지라”

あなたがたが主を捨てて異国の神々に仕えるなら、あなたがたを幸せにした後でも、主は翻って、あなたがたにわざわいを下し、あなたがたを滅ぼし尽くす。」
民はヨシュアに言った。「いいえ。私たちは主に仕えます。」


우상숭배라는 것은 무슨 우상한테 절하는 것만이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애굽에서 이끌어낸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있는 주민들을 쫓아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신명기 9장 5절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あなたが彼らの地を所有することができるのは、あなたが正しいからではなく、またあなたの心が真っ直ぐだからでもない。これらの国々の邪悪さのゆえに、あなたの神、主があなたの前から彼らを追い出そうとしておられるのだ。また主があなたの父祖、アブラハム、イサク、ヤコブになさった誓いを果たすためである。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너희들한테 가나안 땅을 주는 것은 너희들이 잘 해서가 아니야. 너희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이 있었고, 그리고 지금 가나안 땅에 있는 민족들이 악하기 때문에 그들을 내쫓으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세요.


그렇다면 지금 가나안 땅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했길래 악하다고 말씀하십니까.

신명기 18장 9절~12절
“9.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10.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11.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12.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あなたの神、主があなたに与えようとしておられる地に入ったとき、あなたは、その異邦の民の忌み嫌うべき慣わしをまねてはならない。
あなたのうちに、自分の息子、娘に火の中を通らせる者、占いをする者、卜者、まじない師、呪術者、
呪文を唱える者、霊媒をする者、口寄せ、死者に伺いを立てる者があってはならない。
これらのことを行う者はみな、主が忌み嫌われるからである。これらの忌み嫌うべきことのゆえに、あなたの神、主はあなたの前から彼らを追い払われるのである。


그들은 이와 같은 점을 치거나 무슨 귀신을 불러 들인다거나 하는 짓들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내쫓는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즘같이 새해가 되면 여기저기서 점집이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이건 한국이나 일본 마찬가지이요.

그런 데를 왜 가냐고 하면 사람들 하는 말이 뭔지 아십니까. “아이, 뭐 정말 믿는다고 하는 건가. 그냥 재미로 보는 거지.”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우상을 숭배한다는 것이 성경에서 엄격하게 금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미삼아 죄를 저지르시겠습니까.

여러분께서는 내가 사랑하는 배우자가 재미삼아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우고, 재미삼아 다른 사람과 살림을 차렸다고 한다면 그냥 허허 하고 웃어 넘기시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겠습니까.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ですから、だれでもキリストのうちにあるなら、その人は新しく造られた者です。古いものは過ぎ去って、見よ、すべてが新しくなりました。


에베소서 4장 22절~24절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その教えとは、あなたがたの以前の生活について言えば、人を欺く情欲によって腐敗していく古い人を、あなたがたが脱ぎ捨てること、
また、あなたがたが霊と心において新しくされ続け、
真理に基づく義と聖をもって、神にかたどり造られた新しい人を着ることでした。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면 이제 온전히 주님을 믿고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진정으로 주님을 영접하여, 맹물이 아닌 최고의 포도주, 이전 것을 버린 새로운 피조물,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린 새 사람으로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함께 기쁨의 새해 2024년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右にも左にもそれてはならないのです。

これからは心から主を私たちの救い主として受け入れ、真水ではない最高の葡萄酒、古いものは過ぎ去り新しく造られた者、腐敗していく古い人を脱ぎ捨て、新しい人として生まれ変わることによって、主とともに喜びに満ちた新年2024年を生き抜く皆様であらんことを主の御名においてお祈りいた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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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26회 왜 예수님인가
2024년 1월 7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ヨハネの福音書 14章 1節
“「あなたがたは心を騒がせてはなりません。神を信じ、またわたしを信じ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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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제 오늘부터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를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복음서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이렇게 네 복음서가 있지요. 이는 모두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처음 오셨을 때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는 대단히 귀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네 복음서 중에서 앞에 있는 세 복음서, 그러니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을 보면 그 내용에나 순서에 있어서 유사한 부분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 복음서를 공통된 관점으로 기록된 복음서라고 해서 공관복음이라고 합니다.

저는 앞서 복음서 강해를 시작함에 있어서 우선 공관복음 강해를 먼저 하고 그 다음에 요한복음을 하려고 했습니다만, 막상 그러려고 했더니 요한복음에서도 다루어야 할 부분이 많이 있을 것 같더라고요.

첫 시간에 다루어야 할 부분이 요한복음이잖아요.

그래서 이번 강해는 공관복음에 한정 짓는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을 포함한 사복음서를 전체적으로 알아보는 식으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순서에 있어서는 너무 성경에 기록된 순서에 얽매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공관복음이라 하더라도 그 순서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따라서 이번 강해는 성경에 기록된 순서를 원칙으로 합니다만, 우선순위에 있어서는 그 내용에 더 중점을 두고 진행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첫번째 시간으로서 “왜 예수님인가” なぜイエス様なのか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록된 것입니다만, 왜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야 하는지를 한 번 짚고 넘어가고 난 다음에 예수님에 대해서 더욱 깊게 공부해보려고 합니다.

자,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왜 알아야 하는 것일까요.

이 부분에 있어서 여러분께서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아, 물론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기본이고 상식일 수 있겠지요.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성경에 다 써 있는데 그걸 무슨 새삼스럽게 묻나, 하고 생각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보통 이렇게 말씀하신 분들은 어떤 분들이냐 하면, 간단합니다. 전도를 안 해본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을 전혀 모르고 믿지 않는 사람들한테 전도를 하는데, 예수님은 당신이 태어나기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는, 당신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셨으니 예수님을 믿으시오……라고 하면, 그 복음을 쉽게 받아들입니까.

물론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면 그 말씀 한 마디로 주님을 영접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는 정말 그야말로 기적이지요. 하지만 이를 논리적으로만 설득하려고 한다면 이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여기서 좀 복습을 해볼까 합니다. <기독교>에서 <기독>은 무슨 뜻이었죠? 예,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사랑 즉 기독 사랑과 이웃사랑, 이렇게 해서 기린선교회인 거잖아요.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메시아, 구세주 즉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 기독교는 예수님을 그 믿음의 중심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요.

자신이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직접 말로 해보거나, 아니면 더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은 글로 한 번 써보는 것입니다.

저도 대학 때 경험이 있는데, 왠지 나 자신은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시험 때 보면 그 내용에 대해서 몇 페이지나 적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답안지에 써 내려 가려고 했더니 몇 줄 안 되어서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나 자신은 많이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그리 많이 알고 있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드리면 너무 막연해서 당황하실 수도 있겠으니까, 우리 질문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세상에는 <사이비>라는 말이 있지요? 이 뜻이 정확하게 무엇입니까. 이는 단순히 <다르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유사하지만 다르다> 그러니까 <비슷하게 보이기는 하는데 그 본질에 있어서는 완전히 다른 것>이 바로 <사이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독교에 보시면 <사이비>, 그러니까 비슷하게 보이기는 하는데 그 내용이 완전히 다른 것이 많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대부분은 <사이비>는커녕 <비이비> 뭐 그런 말은 없습니다만, 대부분 본질이 다를 뿐만 아니라 겉보기도 전혀 비슷하지 않은 이단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이요, 자기가 재림 예수요, 자기가 보혜사요, 자기가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성경을 조금 읽어보면 그와 같은 주장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게 어떻게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사이비, 본질은 완전히 다르긴 한데 겉보기는 비슷하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 드리면 좋을까 하고 생각을 해봤는데, 얼마 전에 아주 좋은 샘플을 발견했습니다.

자, 제가 지금부터 말씀드릴 내용은 어느 종교집단 사이트에 있는 글입니다.

이 주장에 대해서 여러분께서는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반박할 수 있는지 한번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글은 <거기서는 예수님을 믿습니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이에 대한 답변은 이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다. 그분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14:6)

우리는 예수께서 하늘에서 땅으로 오셔서 자신의 완전한 인간 생명을 대속 희생으로 바치셨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마태 20:28)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분에게 믿음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요한 3:16)

또한 우리는 예수께서 현재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왕국의 왕으로 통치하고 계시다는 점도 믿고 있는데, 그 왕국은 머지않아 온 땅에 평화를 이룩할 것입니다. (계시 11:15)


하지만 우리는 “아버지께서 나보다 더 크시다”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요한 14:28) 따라서 우리는 예수가 전능하신 하느님이라고는 믿지 않으며, 그분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はい,信じています。イエスは,「わたしは道であり,真理であり,命です。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だれひとり父のもとに来ることはありません」と述べました。(ヨハネ 14:6)

わたしたちは,イエスが天から地上に来て,完全な人間としての命を贖い(あがない)の犠牲として差し出してくださった,という信仰を抱いています。(マタイ 20:28)

イエスの死と復活により,イエスに信仰を働かせる人は永遠の命を得ら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ヨハネ 3:16)

わたしたちは,現在イエスが天で神の王国の王として統治しておられ,まもなく地球全体に平和をもたらすことも信じています。(啓示 11:15)

とはいえ,イエスが述べた「父はわたしより偉大な方」という言葉もそのとおりに受け止めています。(ヨハネ 14:28)イエスが全能の神であるとは信じていないため,イエスを崇拝することはしません。


자, 여러분께서는 이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반박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어? 그러고보니 그러네? 라고 이 주장을 받아 들이시겠습니까.

저는 이 글을 보았을 때, 조금 다른 의미로 대단히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역시 조금 다른 의미로 대단히 귀한 보화를 찾아낸 기쁨이었습니다. 좀 더 쉽게 표현하자면 <그래! 바로 이거다!>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진정한 사이비, 조금 이상한 말이지만 <누가 봐도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라 <겉모습은 비슷한데 그 본질은 다른 것>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세상에 있는 사이비들은 90프로가 비슷해요. 그러나 본질 부분에서 마지막 10프로가 다른 경우, 이는 분명 결정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 주장도 보세요. 앞부분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내용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머지않아 다시 오셔서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실 것입니다.

이게 이상한가요? 아니요. 이건 제가 항상 드리는 말씀이잖아요. 이상할 것 없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한 끗이 중요한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나보다 크시다고 하신 말씀 그 부분을 들어서, 예수님은 믿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주장은 그 홈페이지에서 세계 수 십 개국어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그만큼 자기들은 자신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이 문장은 글 구도에서부터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이 글은 처음에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다>라고 시작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마지막에 보면, <우리는 예수가 전능하신 하느님이라고는 믿지 않으며, 그분을 숭배하지 않습니다.>로 끝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으면서 이 짧은 글 마지막에는 믿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 문장이 얼마나 허술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일본에서 지금 문제시가 되고 있는 어떤 종교집단에서 기자회견을 했는데, 작년 2023년 11월 7일에 한 내용을 보니까 여기서 어떤 말이 나왔냐 하면, 먼저 자기들이 사과 말씀을 하겠다고 해요. 그래서 기자가 그 사과는 사죄냐 하니까, 사과는 하지만 사죄는 아니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궤변입니까.

앞서 말씀드린 그 내용도 그렇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믿지 않는다는 말로 끝나지 않습니까.

자,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서 반박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을 알아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성경 말씀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각 4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금식하고 계실 때 마귀가 나타나서 예수님을 유혹하지 않습니까. 그 때 예수님께서는 무엇으로 물리치십니까.


마태복음 4장 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イエスは答えられた。「『人はパンだけで生きるのではなく、神の口から出る一つ一つのことばで生きる』と書いてある。」

이는 신명기 8장 3절 말씀이고,

마태복음 4장 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試みてはならない』とも書いてある。」

라고 하신 말씀은 신명기 6장 16절 말씀이고,

마태복음 4장 10절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そこでイエスは言われた。「下がれ、サタン。『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礼拝しなさい。主にのみ仕えなさい』と書いてある。」

라고 하신 말씀은 신명기 4장 13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물리치실 때 무슨 영화처럼 십자가를 내보였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마귀를 물리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이지요.

그런데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니고 직분을 받았다거나, 하물며 교역자라 하더라도 이 성경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말을 들으면 이 말이 맞는 것 같고, 저 말을 들으면 저 말이 맞는 것처럼 들리게 되어서 결국 마귀들의 밥이 되고 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와 같은 주장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떤 말씀을 알아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あなたがたは心を騒がせてはなりません。神を信じ、またわたしを信じなさい。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라고 하세요.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말씀과 <나를 믿는다>라는 말씀에 있어서 한국어는 같은 말을 쓰고 있지만, 원어에서는 다른 말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헬라어 원어를 보더라도 <믿는다>라고 하는 뜻인 <피스튜에테>라는 단어가 <하나님>과 <나>에서 똑같이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원어상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면 역시 똑같이 나도 믿으라 하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그런데 앞서 홈페이지에 있는 주장은 어땠다고요? 하나님은 믿지만 예수님은 안 믿는다 아니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성경공부를 아주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이미 그 믿음이라고 하는 본질에서 예수님이 빠지게 된다고 한다면 아무리 성경공부를 많이 한들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일단 성경에 있어서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서 한 번 복습을 해볼까요. 예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성경에서 예수님은 언제 처음으로 등장하십니까.


요한복음 1장 3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によらずにできたものは一つもなかった。

여기서 <그>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씀이지요. 만물이 예수님에 의해 지어졌으며, 예수님 없이 된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어디에 처음 등장하게 되시냐 하면, 그렇습니다.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바로 여기에 이미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성경은 어떻게 끝이 납니까.

요한계시록 22장 21절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主イエスの恵みが、すべての者とともにありますように。

성경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 그리고 그 마지막 구절인 22장 21절에도 예수님이 등장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은 창세기 1장 1절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 22장 21절까지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은 모두 예수님에 대한 기록으로 시작해서 예수님에 대한 기록으로 끝나는,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 채워진 책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성경공부를 한다면서 예수님을 안 믿는다면 그건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건 말하자면 한국어를 배우겠다면서 가나다라는 안 배우겠다는 말, 일본어를 배우겠다면서 히라가나 카타카나, 한자는 안 배우겠다는 말, 영어공부를 하겠다면서 알파벳은 절대로 안 배우겠다는 말이나 무엇이 다르냐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아버지께서 나보다 더 크시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그와 같은 말씀을 하셨어요.


요한복음 14장 28절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わたしは去って行くが、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戻って来る』とわたしが言ったのを、あなたがたは聞きました。わたしを愛しているなら、わたしが父のもとに行くことを、あなたがたは喜ぶはずです。父はわたしよりも偉大な方だからです。

어디 그 뿐인가요.

요한복음 6장 38절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わたしが天から下って来たのは、自分の思いを行うためではなく、わたしを遣わされた方のみこころを行うためです。

요한복음 7장 16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そこで、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わたしの教えは、わたしのものではなく、わたしを遣わされた方のものです。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오셨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몇 번이나 하셨느냐 하면 요한복음에서만 보더라도 무려 서른 세번이나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가 나보다 높으신 분이니까 나는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이신가요?

일본 사람들에게 널리 존경받는 사람 중에 <야마모토 이소로쿠>라는 과거 일본 해군 사령관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일본 단카처럼 57577로 된 말인데 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해 보여주고 말로 설명해주고 시켜봐 주고, 칭찬해 주어야만 사람은 움직인다”

やってみせ 言って聞かせて させてみて ほめてやらねば 人は動かじ

이 말은 사람을 어떻게 가르치고 성장시킬 것인가에 대한 말이라고 하겠지요.

“해 보여주고 말로 설명해주고 시켜봐 주고, 칭찬해 주어야만 사람은 움직인다”

내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냐 하면, 무엇보다 내가 먼저 해 보여 주어야만 합니다. 그게 가장 효과적이라는 거예요.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말은 21세기 요즘 나온 말이 아니라 서슬 퍼런 군국주의가 팽배하던 시절, 그 정상에 있었던 사람이 한 말이라는 점이라는 사실이지요.

무조건 정신승리, 엄하게 맞아가면서 배워야 한다……뭐 이런 말들이 넘쳐났던 시대였음에도 이와 같은 말이 나왔다는 것이 참 놀랍습니다.

이는 제가 한국에서 일본어를 가르칠 때에도 도움이 된 말이기도 해요. 제가 먼저 이건 이렇게 발음을 한다고 해 보여 줍니다. 또는 이 한자는 이렇게 쓰는 것이라고 써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건 뜻이 뭐고 문법이 어떻고, 한자의 경우에는 훈독이 뭐다 음독이 뭐다 하고 설명을 한 다음에 마지막으로 자, 이제 네가 해봐. 하고 시켜보는 것이지요.

하지만 여기서 끝나면 안 됩니다. 반드시 뭐가 필요해요? 예, 칭찬해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내가 가르친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이지,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가르칠 수도 없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수영을 가르치려고 한다면 수영을 먼저 해 보여야 하는데, 자기는 수영을 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수영을 가르칠 수 있겠냐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은 무엇이었습니까.

이는 명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을 가르쳐 주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순종>인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최초로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불순종 아니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순종을 했더라면 우리는 아무런 걱정 근심 없이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 가운데 살아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인해서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게 되고 말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를 회복시켜야 해요. 불순종으로 인하여 죄에 물들었다면 이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온전한 순종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로마서 5장 19절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すなわち、ちょうど一人の人の不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罪人とされたのと同様に、一人の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義人とされるのです。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되었다면, 완전한 순종을 하나님께 바침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도록 하신 것이지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순종이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16장 25절 후반부~26절 전반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世々にわたって隠されていた奥義の啓示によって──
……今や明らかにされ、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다고 합니다. 누가요? 그렇죠. 예수님께서 나타내신 바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 눈 앞에 나타나신 그 1차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기를 원하셨던 것 그것이 뭐냐 하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순종>이었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예수님은 어떻게 순종하셨습니까.

마태복음 26장 39절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それからイエスは少し進んで行って、ひれ伏して祈られた。「わが父よ、できることなら、この杯をわたしから過ぎ去らせてください。しかし、わたしが望むようにではなく、あなたが望まれるままに、なさってください。」

마태복음 26장 42절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イエスは再び二度目に離れて行って、「わが父よ。わたしが飲まなければこの杯が過ぎ去らないのであれば、あなたのみこころがなりますように」と祈られた。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우리에게 순종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순종은 마지막 십자가까지 이어졌던 것입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은 궁금해 했습니다. 아니, 순종을 하라 순종을 하라고 그러는데 어떻게 하는게 순종하는 거야?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명확한 답을 주는 사람들이 없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이게 바로 순종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순종이다> 라고 우리에게 보여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보다 못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셨어요?

빌립보서 2장 6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고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 직접 나타내신 바 되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해서 그 순종을 보여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이걸 가지고 예수님은 하나님보다 못한 분이시니까 믿을 필요가 없다? 도대체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그런 논리가 나오냐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해서 알지 못했던 것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들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분명히 알게 해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순종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순종을 주님께 드렸을 때 주님께서는 칭찬해 주십니다.

마태복음 25장 21절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主人は彼に言った。『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おまえはわずかな物に忠実だったから、多くの物を任せよう。主人の喜びをともに喜んでくれ。』


이제 예수님을 끝까지 믿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순종을 본받아서, 마지막까지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칭찬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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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25회 문 되신 예수님
2023년 12월 31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25절~27절
“25.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26.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27.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25節~27節
“25.私の福音、すなわち、イエス・キリストを伝える宣教によって、また、世々にわたって隠されていた奥義の啓示によって──
26.永遠の神の命令にしたがい、預言者たちの書を通して今や明らかにされ、すべての異邦人に信仰の従順をもたらすために知らされた奥義の啓示によって、あなたがたを強くすることができる方、
27.知恵に富む唯一の神に、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栄光がとこしえまでありますように。アーメ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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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64번째 시간으로서 “문 되신 예수님” 門であるイエス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드디어 로마서 마지막 시간입니다. 로마서 강해를 처음 시작한 것이 2020년 9월 첫째 주였으니까, 3년하고도 4개월이 되었네요.

처음에는 과연 언제쯤 끝낼 수 있을까 했는데 마침내 오늘 이 시간이 오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자, 지난 주에 알아본 바와 같이 구약에 보시면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구세주 메시아가 오신다는 기록은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의 이름이 예수라고 한다거나, 그가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고는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로 올라가실 것이라는 등의 구체적인 내용은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단히 추상적이고 막연하게 예언되어 있을 뿐이었지요.


이 때문에 아무리 성경, 당시는 물론 구약 뿐이었습니다만, 이 성경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주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드물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가복음 7장 28절 전반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女から生まれた者の中で、ヨハネよりも偉大な者はだれもいません。……

이 말씀은 다른 말로 하자면 지금까지 역사상 세례 요한 보다도 뛰어난 선지자,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은 없었다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옥에 갇혀 있던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시켜서 예수님께 뭐라고 묻습니까.

마태복음 11장 3절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イエスにこう言い送った。「おいでになるはずの方はあなたですか。それとも、別の方を待つべきでしょうか。」


이 말씀은 뭐냐 하면 그 위대한 선지자인 세례 요한 마저도 정작 예수님을 직접 보고서도 100% 확신이 서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제사장이나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못 알아보았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겠지요.

지난 주에 예수님의 외모, 더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2천년 전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의 외모만을 본다면, 우리의 육안으로 보았을 때 도저히 선지자나 하물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처럼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도 자신의 외모를 보고 믿으라는 말씀은 안 하셨어요.

그 대신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앞서 세례 요한의 질문, 오실 그 분이 맞습니까 하는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절 5절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目の見えない者たちが見、足の不自由な者たちが歩き、ツァラアトに冒された者たちがきよめられ、耳の聞こえない者たちが聞き、死人たちが生き返り、貧しい者たちに福音が伝えられています。

이와 비슷한 말씀은 다른 곳에서도 말씀하셨어요.

요한복음 10장 38절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しかし、行っているのなら、たとえわたしが信じられなくても、わたしのわざを信じなさい。それは、父がわたしにおられ、わたしも父にいることを、あなたがたが知り、また深く理解す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나의 외모를 보고 믿음이 생기지 않더라도 내가 행한 그 행함을 보고 믿으라고 말씀하고 계시잖아요.

이토록 위대한 선지자나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오랫동안 가리워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3장 16절~17절
“16.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しかし、あなたがたの目は見ているから幸いです。また、あなたがたの耳は聞いているから幸いです。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多くの預言者や義人たちが、あなたがたが見ているものを見たいと切に願ったのに、見られず、あなたがたが聞いていることを聞きたいと切に願ったのに、聞けませんでした。

구약시대에는 수많은 선지자나 예언자들이 등장합니다만, 그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아직 이 땅에 있을 때 예수님을 볼 수도 없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었습니다.

구약에 보시면 막연히 누군가가 있는 것 같긴 해요. 그런데 정확하게 그 모습을 볼 수도 없었고, 그리고 그 말씀을 들을 수도 없었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8장 56절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あなたがたの父アブラハムは、わたしの日を見るようになることを、大いに喜んでいました。そして、それを見て、喜んだのです。」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대단히 가까웠던 사람 중 하나입니다.

창세기 18장 17절~19절
“17.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18.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19.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主はこう考えられた。「わたしは、自分がしようとしていることを、アブラハムに隠しておくべきだろうか。
アブラハムは必ず、強く大いなる国民となり、地のすべての国民は彼によって祝福される。
わたしがアブラハムを選び出したのは、彼がその子どもたちと後(のち)の家族に命じて、彼らが主の道を守り、正義と公正を行うようになるためであり、それによって、主がアブラハムについて約束したことを彼の上に成就するためだ。」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이와 같은 축복을 받은 사람도 많지 않겠지요.

이처럼 아브라함 정도 되는 사람이었다면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 막연하게나마 어느 정도는 알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예수님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자세히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하나님 나라에 갔을 때, 예수님을 직접 만나보고는 정말로 기뻐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반면에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놀라운 선지자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예수님이 그들을 부르셨을 때 순종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볼 수도 있고, 그 말씀을 직접 그 자리에서 귀로 들을 수도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그 축복이 크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받은 축복이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못한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만이 아니라 당시 그들이 알지 못했던 십자가도 알고 부활도 알고 성령님도 알고 그리고 장차 이루어질 심판에 대해서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렇죠. 바로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 구약 39권 신약 27권은 저자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부분도 있기는 합니다만, 직접적으로는 100% 사람의 손에 의해 쓰여진 것입니다. 갑자기 무슨 펜이 자기 혼자 움직여서 쓰여지거나 한 것은 없어요.

그러나 모든 성경은 사람의 생각이 쓰여진 책이 아니지요.


디모데후서 3장 16절 전반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聖書はすべて神の霊感によるもので、……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100% 사람의 손에 의해 쓰여지긴 했으나 반면에 100%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책, 하나님의 생각이 쓰여진 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로마서 16장 22절에 깜짝 등장한 한 <더디오(テルティオ)>라는 인물에 대해서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신학자들이 생각하기를 이 로마서는 <더디오>라는 사람의 손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이 로마서의 저자가 <더디오>는 아니잖아요?

분명한 것은 로마서의 저자는 사도 바울이고, 더디오는 어디까지나 바울의 명을 따라 바울의 말을 받아 적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모두 사람의 손으로 기록된 것이지만, 이는 모두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유일하고도 완전한 책이 바로 성경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중에서 우선 25절~26절까지를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6장 25절~26절 중반부
“25.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26.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25.私の福音、すなわち、イエス・キリストを伝える宣教によって、また、世々にわたって隠されていた奥義の啓示によって──
26.永遠の神の命令にしたがい、預言者たちの書を通して今や明らかにされ、すべての異邦人に信仰の従順をもたらすために知らされた奥義の啓示によって、あなたがたを強くすることができる方、


여기서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世々にわたって隠されていた奥義の啓示…… 今や明らかにされ

라는 부분, 즉 구약에서는 감추어 졌었다가 이제 비로소 나타내신 바 되셨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요,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

永遠の神の命令にしたがい、預言者たちの書……すべての異邦人に信仰の従順をもたらすために知らされた奥義の啓示

라는 부분은 성경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겠지요.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이 복음과 예수님을 전파하는 그 목적은 예수님이 기록된 성경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다 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26절 후반부에서 27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6장 26절 후반부~27절
“26.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27.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26. ……知らされた奥義の啓示によって、あなたがたを強くすることができる方、
27.知恵に富む唯一の神に、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栄光がとこしえまでありますように。

자, 여기서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복음, 예수님의 복음은 그냥 문자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실질적으로 견고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이는 단순히 그 글자나 문장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견고하게 해 주실 분이 계시다는 것이에요.

그게 누구시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라고 성경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시면 하나님에 대한 수식어가 붙어 있지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시라고 합니까.

그렇습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知恵に富む神)”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로 무엇을 하셨습니까.

시편 136편 5절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英知をもって天を造られた方に感謝せよ。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잠언 3장 19절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에 터를 놓으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견고히 세우셨고”

主は知恵をもって地の基(もとい)を定め、英知をもって天を堅く立てられた。

예레미야 10장 12절
“여호와께서 그의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의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의 명철로 하늘을 펴셨으며”

エレミヤ書10章12節
主は、御力をもって地を造り、知恵をもって世界を堅く据え、英知をもって天を張られた。

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을 암기하거나 무슨 문제를 풀거나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5절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神の愚かさは人よりも賢く、神の弱さは人よりも強いからです。

가끔 하나님을 지나치게 과소평가 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하나님께서 자기 기도를 안 들어 주시는 것은 이것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몰라서 그러신데요.


그게 사실입니까. 제아무리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이사야 59장 1절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見よ。主の手が短くて救えないのではない。その耳が遠くて聞こえないのではな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 응답을 들어 주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지혜로 천지만물 창조하시는 분이신데 우리를 도와 주실 힘이 안 되실 리가 있겠습니까.

어디 그 뿐인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까지도 보내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포기합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믿을 수가 없겠지요.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와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우리는 눈앞에 어떠한 시련과 환난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와 넘치는 사랑은 무엇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까. 그렇죠. 바로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 말씀을 알아야 우리가 견고해질 수 있는 것인데, 성경은 읽지 않고 맨날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만 연발하고 있으니, 믿음이 어떻게 견고해질 수가 있겠냐는 것이지요.

성경 말씀을 올바로 깨달아서 하나님으로부터 견고하게 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그 지혜로우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는 분이십니다.

이사야 42장 8절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わたしは主、これがわたしの名。わたしは、わたしの栄光をほかの者に、わたしの栄誉を、刻んだ像どもに与えはしない。

그렇다면 그 영광을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통해서 받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까.

로마서 16장 27절
“27.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27.知恵に富む唯一の神に、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栄光がとこしえまでありますように。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영광 받기를 원하고 계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が道であり、真理であり、いのちなのです。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だれも父のみもとに行くことはできません。

이 말씀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 길에는 예외가 없어요. 오로지 누구를 통해서 가야 해요?

예,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가는 길 그 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아무리 좋은 비행기, 좋은 배, 좋은 자동차를 타고 다른 나라에 갔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받아주나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러면 어디를 통해야 합니까.

그렇죠. 공항이든 항구든 반드시 지정된 곳을 통해서 입국을 해야지만 되는 것이지, 아무리 돈이 많고 유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른 곳을 통해서 들어가게 되면 이는 그야말로 밀입국이 되기 때문에, 그 나라에 들어가기는커녕 오히려 범죄자로서 붙잡이고는 추방을 당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요한복음 10장 7절~10절
“7.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そこで、再びイエスは言わ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わたしは羊たちの門です。
わたしの前に来た者たちはみな、盗人であり強盗です。羊たちは彼らの言うことを聞きませんでした。
わたしは門です。だれでも、わたしを通って入るなら救われます。また出たり入ったりして、牧草を見つけます。
盗人が来るのは、盗んだり、殺したり、滅ぼしたりするためにほかなりません。わたしが来たのは、羊たちがいのちを得るため、それも豊かに得るためです。


성경에는 분명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고 기록합니다. 그것도 언제 오신다고요? 예, 속히 오신다고 성경은 반복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2023년 12월 현재 예수님은 아직 오시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비롯해서 전세계에는 자기가 재림 예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누구는 자신이 보혜사요 선지자라고 합니다. 도대체 보혜사와 선지자의 구분도 하지 못하면서 무슨 성경을 가르친다는 것인지 참 답답하기만 해요.

그런데 그 말을 또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주님은 주님이 오시기 전에 자기가 먼저 왔다고 하는, 이른바 자칭 재림 예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들은 절도요 강도라고 말씀하십니다.

생각해보세요. 그들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도둑질하고 멸망시키는 것 뿐이라고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 이 세상에는 이 말도 안 되는 사이비 이단에 빠져서 가족과 재산과 그리고 자신의 인생 모두를 다 빼앗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바로 올바른 문으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우리가 들어가야 할 문,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그리고 우리를 구원 받기에 합당한 의인으로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서 살아나신 예수님 뿐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행전 4장 11절~12절
“11.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あなたがた家を建てる者たちに捨てられた石、それが要の石となった』というのは、この方のことです。
この方以外には、だれによっても救いはありません。天の下でこの御名のほかに、私たちが救われるべき名は人間に与えられていないからです。」


구원 받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예수님 외의 다른 이름이 주어진 적이 없어요. 다른 길이 주어진 적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목적, 예수님을 전하는 목적은 바로, 하나님 나라로 통하는 진정한 문, 유일한 문인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 그것 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 완전한 생명의 길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까지 3년 여에 걸쳐서 로마서를 살펴보았습니다만,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때로는 인생에서 길을 잃거나 어쩌면 마음이 힘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든지 이 로마서로 돌아와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든지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힘을 주시고 소망을 주시고 그리고 사랑과 은혜와 위로를 넘치도록 부어 주실 것입니다.


이제 이 로마서에서 배운 그 말씀을 우리 삶에 있어서 양식으로 삼아서, 더욱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 감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우리가 들어가야 할 문 되신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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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24회 예수님이 짊어지신 것
2023년 12월 24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25절~27절
“25.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26.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27.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25節~27節
“25.私の福音、すなわち、イエス・キリストを伝える宣教によって、また、世々にわたって隠されていた奥義の啓示によって──
26.永遠の神の命令にしたがい、預言者たちの書を通して今や明らかにされ、すべての異邦人に信仰の従順をもたらすために知らされた奥義の啓示によって、あなたがたを強くすることができる方、
27.知恵に富む唯一の神に、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栄光がとこしえまでありますように。アーメ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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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63번째 시간으로서 “예수님이 짊어지신 것” イエス様が背負われたもの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제 로마서 마지막 부분입니다. 사실 성탄절을 맞이해서 오늘로 로마서를 끝내려고 했었습니다만, 여기서 다루어야 할 내용이 좀 많아서 부득이하게 오늘과 다음주로 나누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자, 오늘 살펴볼 본문 내용은 로마서 마지막 송영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사실 성경만이 아니라 일반 책들도 마지막 부분까지 가면 이제 서둘러 건성건성 넘길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성경은 그 어디 하나 버릴 곳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 구석구석까지 모두 주님께서 주시는 영양분으로 가득 찬 귀한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실 성경을 많이 읽으신 분이라 하더라도 오늘 이 부분을 유심히 살펴본 적이 있으신 분은 그리 많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얼핏 보면 그냥 성경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마지막 인사말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하지만 이 말씀 속에서도 우리는 대단히 귀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말고 집중을 해서 함께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은 좀 금방 머리에 들어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25절에서 27절에 걸친 구절이 모두 한 문장이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오늘 본문을 보다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이는 무엇보다 짧게 끊어서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선 25절 전반부부터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6장 25절 전반부
“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私の福音、すなわち、イエス・キリストを伝える宣教によって、

여기서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이 둘이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일단 <나의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전하는 복음>이라는 뜻으로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다. 이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바울이 전하는 신앙이라고 해야 하겠지요.

우리가 이미 공부해온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많은 사람들은 신앙에 있어서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 혼란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부터 어떻게 믿어야 하는 것인가, 이제부터 우리의 신앙은 어떻게 가져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본다면 예수님을 믿는 데에 있어서 율법도 역시 지켜야 하는지, 예를 들어 구약 때처럼 여전히 할례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부터 시작해서 많은 점에 대한 혼란이 있어왔던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율법과 복음에 대해서 이미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6절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律法と預言者はヨハネまでです。それ以来、神の国の福音が宣べ伝えられ、だれもが力ずくで、そこに入ろうとしています。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에 대해서는 세례 요한 때까지이며, 그 이후 즉 예수님 이후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볼 것 같으면, 구약 식으로 생각하게 되는 경우, 선민 즉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은 어디에요? 예, 이스라엘 자손입니다. 유대인 뿐이지요. 그렇다면 그 외의 민족은 무엇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방인입니다.

구약 대로라면 구원을 받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 유대인 뿐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본다면 한국사람이나 일본사람을 비롯한 다른 나라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이에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이냐 하면, 예,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 외의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그렇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성령님이 역사하시기 시작하셨어요.

이와 같은 상황이 되니까 이제부터 어떻게 믿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지 사람들마다 혼란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정리하고 올바른 신앙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복음의 핵심이 뭐라고 말씀 드렸지요?

예,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그렇습니다. 그 복음의 핵심은 바로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달려서 죽임을 당하셨는지, 그리고 왜 살아나셨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 밖에 없으셨습니까.

그것은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 때문에,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셨고, 이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즉 우리를 구원 받기에 합당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와 같은 부분이 바로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해당되는 것이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해당되는 부분이 다음부터 공부하게 될 <복음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우선 복음서부터 공부를 하고 난 다음에 바울이 전하는 가르침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어떨지 모릅니다만, 제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본다면, 법대는 법대인데 1학년 때에는 법을 거의 공부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법대에 들어갔으니까 법전을 좀 사야되나 했는데, 선배들이 말리더라고요. 법전 사봐야 그거 1학년 때 쓰지도 않는다는 거예요.

법전은 2학년 때부터 쓰게 되는데, 법이라는 게 매년 바뀌다보니 내년이 되면 어차피 새로 사야 된다고 하면서, 1학년 때는 살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1학년 때에는 기껏 법학과목을 듣는 게 법학개론 밖에 없어요. 이는 완전히 개론서, 그러니까 개념에 대해서 정리한 과목, 말하자면 입문서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 외에는 교양필수가 경제학개론이 있었고, 그리고는 모두 다 교양과목이었습니다.

그래도 나름 법대생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뭘해요. 법대 건물이 15동인데, 1년 동안 15동에서 들은 과목이라고 해봐야 기초과목인 그 법학개론 하나 뿐이었고, 그것도 한 학기만 들어요. 그리고 그 외에는 다 여기저기 다른 학과 건물을 돌아다니면서 교양과목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우선 개념을 잡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대학에서의 공부를 어느 정도 적응도 하고, 그리고 법학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개념을 정리해 놓은 다음에 이제 본격적으로 전공공부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강해 순서에 있어서, 우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서부터 하고, 그 다음에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 복음서를 공부하기로 한 것입니다.

자, 이와 같이 바울이 복음과 예수님에 대해서 전파한다고 하는데, <전파함은>이라고 되어 있지요? 그것은 바로 <전파하는 이유는>이라는 뜻, 그러니까 전파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25절 후반부와 26절 전반부까지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6장 25절 후반부에서 26절 전반부
“25.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26.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25. ……また、世々にわたって隠されていた奥義の啓示によって──
26.永遠の神の命令にしたがい、預言者たちの書を通して今や明らかにされ、……

여러분께서는 혹시 그런 생각 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구약 시대에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물론 구약에 있어서의 율법학자들이나 제사장들이 <예수>라는 이름은 알 수 없었지요. 이는 성경에 등장하지 않으니 당연합니다.

하지만 메시아가 오신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わたしは敵意を、おまえと女の間に、おまえの子孫と女の子孫の間に置く。彼はおまえの頭を打ち、おまえは彼のかかとを打つ。」

창세기부터 이미 메시아가 오신다는 기록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그 메시아에 대한 지식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은 구약에서도 많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책이 바로 이사야서지요.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それゆえ、主は自ら、あなたがたに一つのしるしを与えられる。見よ、処女が身ごもっている。そして男の子を産み、その名をインマヌエルと呼ぶ。

이사야 11장 10절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その日になると、エッサイの根はもろもろの民の旗として立ち、国々は彼を求め、彼のとどまるところは栄光に輝く。

이사야서가 기록된 것은 기원전 700년 경이라고 하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700년도 전에 예언된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어떻습니까. 이미 창세기에서 예언된 바와 같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 즉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고, 그뿐 만이 아니라 그 분은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다는 것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새가 누구입니까. 그는 다윗의 아버지요,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는 유다 지파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장차 오실 메시아는 유다 지파이자 이새의 뿌리, 즉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장차 오실 메시아가 어디서 태어나실 것도 기록합니다.

미가 5장 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ベツレヘム・エフラテよ、あなたはユダの氏族の中で、あまりにも小さい。だが、あなたからわたしのためにイスラエルを治める者が出る。その出現は昔から、永遠の昔から定まっている。」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는 당시 하나님의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도 아니요 분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다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구약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생생하게 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 7장 13절~14절
“13.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私がまた、夜の幻を見ていると、見よ、人の子のような方が天の雲とともに来られた。その方は『年を経た方』のもとに進み、その前に導かれた。
この方に、主権と栄誉と国が与えられ、諸民族、諸国民、諸言語の者たちはみな、この方に仕えることになった。その主権は永遠の主権で、過ぎ去ることがなく、その国は滅びることがない。

이처럼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전에도 이미 많은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은 이와 같은 예언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달달달달 외울 정도로 아주 자세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럼 결과적으로 볼 때 주님께서는 이 예언과 다르게 오셨나요? 아니요. 정확하게 이 예언처럼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그리고 아직 결혼하기 전인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태어나신 곳도 베들레헴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참 이상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성경내용을 다 잘 알고 있었던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왜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성경을 하나님 식이 아닌 자기 식으로 이해하고 해석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구세주, 메시아를 보내십니다. 그렇다면 그 분이 어떤 모습으로 오실 것 같으세요.

정말 멋진 모습으로, 영광된 모습으로 오실 것 같잖아요. 그냥 무슨 왕도 아니하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구세주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서 만약에 당시 이스라엘에 계셨다면 예수님을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아, 물론 우리는 이미 예수님도 알고 십자가도 알고 부활도 성령님도 알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사랑도 알고 있기 때문에, 비록 우리가 육안으로 예수님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하더라도, 장차 우리가 예수님을 보게 된다면 첫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그리고 예수님도 아직 공생애를 시작하지 않으신 상황, 그저 요셉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일을 돕고 있는 예수님을 우리가 당시 보게 된다면, 금방 오! 하나님의 독생자!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가실 어린양! 이라면서 마치 세례 요한이 알아본 것처럼 우리도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죄송합니다만, 아마 그건 좀 어렵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는 제 생각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서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이사야 53장 2절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彼は主の前に、ひこばえのように生え出た。砂漠の地から出た根のように。彼には見るべき姿も輝きもなく、私たちが慕うような見栄えもない。


이를 좀 이해하기 쉽도록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오는 현대인의 성경판을 보시면 다음과 같습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이사야 53장 2절
“그는 연한 순처럼,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처럼 주 앞에서 자랐으니 그에게는 풍채나 위엄이 없고 우리의 시선을 끌 만한 매력이나 아름다움도 없다.”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모습은 튼튼한 줄기가 아니라 연한 순 같다고 해요. 바람이 불면 이리 흔들, 저리 흔들, 그리고 누군가가 꺾으려고 하면 쉽게 꺾일 것만 같은 아주 연약한 새싹 같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다고 하잖아요. 물이 넉넉하고 비옥한 땅에서 자란 줄기라면 아주 굵고 튼튼한 나무 줄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보시면 장차 오실 메시아를 어떻게 예언하고 있습니까. 비옥하지도 않고 오히려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다는 거예요. 그리고 풍채도 없고 우리의 시선을 끌 만한 매력이나 아름다움도 없었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아마도 몸집은 위풍당당, 어깨도 쫙 벌어지고 얼굴에는 귀티가 나고, 그 누가 봐도 거룩함이 넘치는……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좀 호리호리 하다못해 빼빼 마른 몸집에, 누가 살짝 밀기만 해도 넘어질 것 같고, 얼굴도 그리 위엄이 느껴지지도 않는, 이런 말을 하면 좀 혼날지는 모르지만, 좀 빈상? 정도가 아니었을까 해요. 아니, 이는 제 불경스러운 상상이 아니라 성경 말씀대로 하자면 정말 그렇잖아요.

어디를 보더라도 좀 귀한 집 아들 같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 그리고 또 오해하시는 분이 계실까봐 미리 말씀을 드립니다만, 이는 예수님의 본모습이 그렇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셨을 때의 모습,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을 때의 모습이 그러셨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오셨을 때 예수님께서 자란 곳이 어디에요?

예, 마태복음 2장 23절에 의하면 나사렛에서 자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나사렛이라고 하는 곳은 이스라엘 북쪽 지역입니다만, 그러니까 요셉과 마리아는 이스라엘 북쪽지역인 나사렛에 살고 있었는데, 누가복음 2장에 의하면 호적을 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고향인 이스라엘 남쪽 베들레헴까지 갔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나사렛이라고 하는 곳은 어떤 지역이었을까요.

보통 신약에 등장하는 지명을 보면 구약부터 존재하는 곳이 많습니다. 그만큼 역사가 깊은 곳이지요. 베들레헴 같은 경우는 창세기에 이미 등장합니다.

그런데 나사렛이라고 하는 지명은 구약에 아예 등장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전혀 주목받지도 못한 지역이었거나, 아니면 아예 지명 자체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요한복음 1장 45절~46절
“45.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ピリポはナタナエルを見つけて言った。「私たちは、モーセが律法の中に書き、預言者たちも書いている方に会いました。ナザレの人で、ヨセフの子イエスです。」
ナタナエルは彼に言った。「ナザレから何か良いものが出るだろうか。」ピリポは言った。「来て、見なさい。」


여기에 등장하는 나다나엘은 다른 곳에 등장하는 바돌로매와 동일인물이라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는데, 그의 친구 빌립이 그에게 말하기를 자기가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를 만났는데, 그분이 바로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하니까, 그가 대뜸 말하기를 나사렛에서 무슨 대단한 인물이 나올 수 있겠느냐 하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사렛이라고 하는 동네는 구약에서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그 때까지도 여전히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한 지역, 다른 곳은 몰라도 그 곳에서는 절대로 대단한 인물이 나오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모두 다윗의 자손입니다. 그러니 유다 지파에 속하게 되는 것이지요. 여호수아 당시 가나안 정복 때 유다 지파가 받은 지역은 이스라엘 남쪽 지역이었는데, 여기에 베들레헴이 포함됩니다. 베들레헴은 또한 다윗 왕의 고향이기도 하지요.

지금으로 본다면 요셉과 마리아의 주소지는 북쪽 나사렛이었지만 본적지는 남쪽 베들레헴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나라에서 지시가 있으면 본적에 가서 신고를 해야 했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북쪽 나사렛에서 남쪽 베들레헴까지 가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본적지 베들레헴이 아닌, 멀리 북쪽 나사렛 땅에서 살았을까요. 여기에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포로로 끌려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하는 역사적 과정에 그 원인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어쨌거나 그들은 자신들의 본래 지역이 아닌, 거기서 멀리 떨어진 나사렛이라고 하는 외딴 동네에서 살았다는 것이잖아요.

이를 본다면, 그들은 말하자면 그 나사렛이라고 하는 지역에서 영향력이 있는 유지……라기 보다는 오히려 나사렛에서는 그 지역에 뿌리가 없는, 어찌 보면 같은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도 외지인에 가까운 존재로 살아가지 않았을까 합니다.

다음으로 그들이 살았던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거리가 얼마일까 하고 알아보았습니다만, 그 거리가 150킬로 정도가 된다고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하루에 40킬로 정도를 걷는다고 한다면 나흘 정도가 걸리는 거리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건강한 성인남성의 경우입니다. 나사렛에 살고 있던 요셉은 마리아와 함께 베들레헴까지 갔다고 되어 있는데, 마리아는 여성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 만삭인 상태였습니다.

그러니 거기까지 가는 시간도 시간이지만. 베들레헴까지 가는 과정도 보통 힘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간신이 본적지인 베들레헴에 도착했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대요?

누가복음 2장 6절~7절
“6.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ところが、彼らがそこにいる間に、マリアは月が満ちて、
男子の初子を産んだ。そして、その子を布にくるんで飼葉桶に寝かせた。宿屋には彼らのいる場所がなかったからである。


호적을 하러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왔는데, 그 때 왔던 사람들이 이 둘 뿐이겠어요? 아마도 각처에서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로 베들레헴이 북적거렸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빈 방을 찾을 수가 없었나보죠? 그런데 하필이면 그 때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았는데, 마땅히 누일 곳이 없어서 가축들의 먹이를 넣어두는 구유에 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자, 아마도 지금까지 제가 말씀 드린 내용은, 교회에 어느 정도 다니신 분이시라면 대부분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실 지는 모르지만, 조금 생각해보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아니, 생각해보세요. 지금 누가 태어났어요? 그렇죠. 예수님이 태어나셨습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예수님이 태어나셨어요. 우주 천하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이 땅에 오신 역사적인 순간이에요.

그런데 실상은 어땠대요? 예, 묵을 곳이 없었대요. 여관에 빈방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이신데도, 그 날 베들레헴 여관 방은 못 잡으셨대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이는 지난 번에 잠시 알아본 점이지만 다시 한 번 확인해볼까요?

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요셉과 마리아 집안의 경제사정은 어땠다고 말씀 드렸었지요?

자녀를 낳았을 때의 율법규정을 보시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12장 6절~8절
“6.아들이나 딸이나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면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 년 된 어린 양을 가져가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회막 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7.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서 그 여인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이는 아들이나 딸을 생산한 여인에게 대한 규례니라
8.그 여인이 어린 양을 바치기에 힘이 미치지 못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가 정결하리라”


彼女のきよめの期間が満ちたら、息子の場合であっても娘の場合であっても、全焼のささげ物として一歳の子羊一匹と、罪のきよめのささげ物として家鳩のひなか山鳩を一羽、会見の天幕の入り口にいる祭司のところに持って行く。
祭司はこれを主の前に献げ、彼女のために宥めを行い、彼女はその出血の汚れからきよくなる。これが、男の子であれ女の子であれ、子を産む女についてのおしえである。
しかし、もし彼女に羊を買う余裕がなければ、二羽の山鳩か、二羽の家鳩のひなを取り、一羽は全焼のささげ物、もう一羽は罪のきよめのささげ物とする。祭司は彼女のために宥めを行い、彼女はきよくなる。」

자녀를 낳았을 때 여인은 어린 양을 바쳐야 하는데 경제적 사정으로 양을 바치기가 어렵다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를 바치라고 되어 있잖아요.

그렇다면 요셉과 마리아는 어떻게 했을까요. 아주 살이 포동포동 찐 최고급 어린양을 바쳤을까요?



누가복음 2장 21절~24절
“21.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22.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八日が満ちて幼子に割礼を施す日となり、幼子の名はイエスとつけられた。胎内に宿る前に御使いがつけた名である。
そして、モーセの律法による彼らのきよめの期間が満ちたとき、両親は幼子をエルサレムに連れて行った。
それは、主の律法に「最初に胎を開く男子はみな、主のために聖別された者と呼ばれる」と書いてあるとおり、幼子を主に献げるためであった。
また、主の律法に「山鳩一つがい、あるいは家鳩のひな二羽」と言われていることにしたがって、いけにえを献げるためであった。


요셉과 마리아는 어린 양 대신 비둘기를 바쳤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 이유? 당연히 경제적인 이유에서였겠지요. 이는 다시 말해서 요셉과 마리아 집안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고 하는 결정적인 근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이 고향을 방문하셨을 때의 모습을 보시겠습니다.



마가복음 6장 1절~3절
“1.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2.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3.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イエスはそこを去って郷里に行かれた。弟子たちもついて行った。
安息日になって、イエスは会堂で教え始められた。それを聞いた多くの人々は驚いて言った。「この人は、こういうことをどこから得たのだろう。この人に与えられた知恵や、その手で行われるこのような力あるわざは、いったい何なのだろう。
この人は大工ではないか。マリアの子で、ヤコブ、ヨセ、ユダ、シモンの兄ではないか。その妹たちも、ここで私たちと一緒にいるではないか。」こうして彼らはイエスにつまずいた。


예수님께서 고향을 방문하셨다고 하는데, 이 고향은 분명 나사렛일 것입니다. 그런데 나사렛에 있는 회당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시는데, 사람들이 놀랐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 문맥을 자세히 보면 아무래도 그 놀란 이유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아서가 아닌 것 같아요.

그게 아니라, 아니, 우리가 이 사람 집안에 대해서 좀 아는데, 어떻게 저런 지혜와 지식이 있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 놀라고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당시 높은 교육을 받았었다고 한다면 놀라지 않았겠지요.

사도 바울은 자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사도행전 22장 3절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私は、キリキアのタルソで生まれたユダヤ人ですが、この町で育てられ、ガマリエルのもとで先祖の律法について厳しく教育を受け、今日の皆さんと同じように、神に対して熱心な者でした。


여기서 <가말리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다 (ガマリエルのもとで先祖の律法について厳しく教育を受け) >라고 하는 것은 당시 기준으로 보았을 때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최고의 명문대에서 고등교육을 배웠다, 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정도 교육을 받은 사람이 회당에서 율법을 전했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놀라지는 않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니까 다들 놀랍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그러면서 놀래요? 예, 어? 쟤 목수 아들 아냐?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집도 넉넉하지 않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도 못했으면서, 언제 저런 걸 배웠어? 라고 하면서 놀라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말씀 중에서 또 한 곳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6장 3절 전반부
“3.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この人は大工ではないか。マリアの子で、ヤコブ、ヨセ、ユダ、シモンの兄ではないか。


여기서는 <요셉의 아들 목수>라고 하지 않고 <마리아의 아들 목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복음서를 보시면 예수님께서 성인이 되신 후에 요셉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예수님이 아직 어리셨을 때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닐까 하고 신학자들은 추정을 하고 있거든요.

자, 이렇게 보시면 어떻습니까.

여기까지 한 번 정리해본다면 예수님에 대해서는 어떻다고 할 수 있을까요.

첫째로 예수님의 외모에 대해서 본다면 예, 쉽게 말해서 잘생기지도 않았고, 몸집이 크지도 않았고, 아무튼 딱 봐서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메시아라고 느낄 만한 부분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출신지역은 어떻습니까. 유다 지파의 전통적인 지역 베들레헴이나 유다 지역이 아닌 저 멀리 북쪽,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저 변방 나사렛이라고 하는 곳에서 자랐습니다.


셋째로 출생환경으로 본다면 예수님은 외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나마 제대로 된 방도 아닌 곳에서 태어났어요. 성경에 본다면 구유에 뉘었다는 구절 때문에 예수님은 마구간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정확히 그 곳이 마구간이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 흔한 여관방 보다도 못한 곳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분명하겠지요. 참으로 열악한 상황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넷째로 경제사정은 어떻습니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에는 이미 경제적 사적이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태어나셨으니 사정은 조금 더 나아졌을까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 6장 3절
“3.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この人は大工ではないか。マリアの子で、ヤコブ、ヨセ、ユダ、シモンの兄ではないか。その妹たちも、ここで私たちと一緒にいるではないか。」こうして彼らはイエスにつまずいた。


일부 종교단체에서는 여기에 나와 있는 사람들을 마리아의 자녀가 아니라 사촌이라고 하면서 마리아는 영원한 처녀였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기록에 의하면 비록 예수님께서 잉태하실 때에는 아직 결혼하기 전이었다고는 하나, 예수님의 출생 이후에는 요셉과 사이에 아들 딸 낳고 살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아들이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있고 여기에 예수님을 더한다면 아들만 다섯 명이에요. 그리고 자매들은 어땠냐 하면 <누이>라고 되어 있지 않고 <누이들>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두 명 이상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적게 잡아서 그 가정에는 자녀가 아들 다섯 명과 딸이 둘 이상, 도합 7남매 이상은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 가정이 어땠어요? 예, 넉넉하지 못했지요. 그런 상황에서 적게 잡아 7남매라고 한다면 어땠겠습니까. 참 여러가지로 어려움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뿐만이 아니지요.

다섯 번째로 가족사정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이야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여성들이 사회에서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하물며 예수님 당시는 어땠겠습니까. 그야말로 집안에 남자가 없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사회적 약자였던 것이지요.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기 때문에 경제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차별을 받거나 불이익을 받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고, 그리고 지역이나 친인척 간에 있어서도 생각 없는 사람들로부터 결손가정이다 뭐다 하면서 어쩌면 마리아나 예수님을 비롯한 그 형제들까지 때로는 수치를 당하는 일도 있었지 않았을까 합니다.

여섯 번째로 예수님은 당시 기준으로 보아 대단한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회당에서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셨을 때에 그렇게 놀라지 않았겠습니까.

앞서 성경구절을 보더라도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난 다음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했다고 하잖아요.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 4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누가복음 4장 28절~30절
“28.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28.これを聞くと、会堂にいた人たちはみな憤りに満たされ、
29.立ち上がってイエスを町の外に追い出した。そして町が建っていた丘の崖の縁まで連れて行き、そこから突き落とそうとした。
30.しかし、イエスは彼らのただ中を通り抜けて、去って行かれた。

아니,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는 어쩌면 그만큼 예수님과 그 집안 사람들을 좀 무시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까 좀 쉽게 말하자면 대단한 집안도 아니고,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주제에, 젊은 놈이 건방지게 누구를 가르치려고 들어? 뭐,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이처럼 모질게 대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오래된 연고도 없고 남편도 없고 돈도 없고 배우지도 못한 집안이라면서, 어쩌면 그 지역 사람들한테 있어서 무시를 당하면서 살아왔는지도 모르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자, 이와 같은 상황을 보면 어떻습니까.

외모문제, 출신지역, 출생환경, 경제사정, 가족환경, 그리고 교육문제에 이르기까지 그 무엇 하나 평탄한 것이 없지 않습니까.

지금 현대 사회에도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인 고통을 앓고 있다고 하는데 그 중 대부분이 이 열등감, 콤플렉스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경우를 보세요. 열등감을 가질 만한 부분이 어디 한 둘입니까. 외모, 출신, 출생, 경제, 가족, 학력문제 ……이렇게만 보더라도 여섯 개나 됩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 중 한 두개만 되더라도 괴로워할 텐데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으로 볼 때 이처럼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왜 이와 같이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을까요.

여기서 다시 로마서 4장 25절을 보실까요.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가 해결된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요리를 할 때 쓰이는 믹서가 있지요? 예, 믹서에 과일이나 야채를 넣고 돌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죠. 예외 없이 완전히 갈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말하자면 믹서의 법칙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십자가의 법칙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법칙,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짊어지고 십자가에 오르신 것은 무엇이든지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법칙 아니겠습니까.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오르셨더니 우리의 죄가 모두 해결되었어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또 무엇을 짊어지셨습니까.

이는 성경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4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まことに、彼は私たちの病を負い、私たちの痛みを担った。それなのに、私たちは思った。神に罰せられ、打たれ、苦しめられたのだと。

이 말씀을 신약에서는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17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これは、預言者イザヤを通して語られたことが成就するためであった。「彼は私たちのわずらいを担い、私たちの病を負った。」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나 질병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한 것도 짊어지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오르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질병 그리고 연약한 것까지 모두를 십자가 위에서 완전하게 해결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외모, 출신, 출생, 경제, 가족, 학력문제 그 외에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때로는 부끄러워할 수도 있고, 때로는 우리를 괴롭힐 수도 있는 모든 문제들, 그리고 우리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통 받는 모든 연약한 것을 다 짊어지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0장 28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人の子が、仕えられるためではなく仕えるために、また多くの人のための贖いの代価として、自分のいのちを与えるために来たのと、同じようにしなさ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 그대로 우리를 섬겨 주시기 위해, 우리의 죄와 질병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연약한 것들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오르셨고, 그리고 바로 그 모든 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성탄절을 맞이하여,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님, 우리의 연약한 것을 모두 해결해주시기 위해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셔 들이고, 이제부터 영원까지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께 순종하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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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23회 사도 바울을 본받아
2023년 12월 17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21절~24절
“21.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2.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23.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4.(없음)”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21節~24節
“21.私の同労者テモテ、また私の同胞、ルキオとヤソンとソシパテロが、あなたがたによろしくと言っています。
22.この手紙を筆記した私テルティオも、主にあってあなたがたにごあいさつ申し上げます。
23.私と教会全体の家主であるガイオも、あなたがたによろしくと言っています。市の会計係エラストと兄弟クアルトもよろしくと言っています。
24.(な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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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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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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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62번째 시간으로서 “사도 바울을 본받아” 使徒パウロを見倣って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본문 중에서 일단 24절에 대한 부분부터 말씀을 드릴까요.

(없음)이라고 되어 있는 이 로마서 16장 24절에 대해서, 성경에 따라서는 주가 달려 있는 경우도 있을 텐데, 여기에 보시면 “24.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든 이에게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하는 문구가 적혀 있기도 합니다.

24.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恵みがあなたがたすべてとともにありますように。アーメン。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현재 성경은 구약 신약을 불문하고 원본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사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 복사기도 많고 하기 때문에 어떤 책에 대한 사본을 만들기는 쉬운 일입니다만, 과거에는 당연히 그런 것이 없었고, 무슨 복사기 이전에 인쇄술 자체도 없었기 때문에, 사본이라고 한다면 무조건 사람이 눈으로 보고 그것을 하나하나 손으로 베껴 쓰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본 중에는 원본을 보고 베껴 쓴 사본도 있겠습니다만, 오히려 그것보다는 사본을 보고 또 그것을 베껴 쓴 사본, 그리고 또 그 사본을 보고 베껴 쓴 사본,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사본들이 훨씬 많지 않겠습니까.

물론 당시 성경 사본을 만드는 작업은 아무나 하지 못했을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기 위해 철저하게 관리되고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오랜 역사 속에서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치고, 그리고 단순한 사본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 언어로도 번역되고 하는 과정을 거치다 보니, 아무래도 세부적으로 차이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겠지요.

사실 지금 한국어 성경 하나만 보더라도 개역개정, 개역한글, 표준새번역, 현대인의성경, 쉬운 성경 등등, 그 종류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기에 영어성경은 대표적인 것만으로도 NIV, NASB, KJV, 일본어 성경은 구어역, 신개역, 신개역2017, 신공동역 등등 참으로 다양하지요.

물론 성경 원본은 하나이지만, 지금 한 시대에도 이렇게 종류가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몇 백 년, 몇 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면서 글자 수 하나 틀리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렇기 때문에 성경 번역본에 따라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 번역본에 있어서 어떤 성경은 가치가 있고 어떤 성경은 가치가 떨어지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공인된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 성경은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유일하고도 완전한 하나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이 로마서 16장 24절을 안 넣는 것이 일반적이긴 합니다만, 일부 성경 사본에는 이 부분이 들어가 있는 것도 있기 때문에 참고로 난외주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이 난외주에 기록된 24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든 이에게 있을지어다 아멘”이라는 내용을 넣게 되면, 사실 여기서 본문 내용이 끝나게 됩니다.

24.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恵みがあなたがたすべてとともにありますように。アーメン。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 있는 내용, 25절~27절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일부 신학자들은, 사실 원래는 24절에서 끝났는데, 25절~27절은 나중에 추가된 부분이다 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원본에는 과연 25절~27절까지가 적혀 있었는지에 대한 부분이 중요하게 되는데,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확인할 길이 없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상황에서 24절을 넣어야 한다거나, 25절~27절 부분을 빼야 한다거나 하는 주장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그런 논쟁은 공부를 많이 한 신학자들한테 맡겨 놓기로 하고, 우리는 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내용 대로 살펴보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번 강해에서는 24절은 제외하고 공부를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 21절~23절까지를 다시 보시도록 할까요.

로마서 16장 21절~23절
“21.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2.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23.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21節~27節
21.私の同労者テモテ、また私の同胞、ルキオとヤソンとソシパテロが、あなたがたによろしくと言っています。
22.この手紙を筆記した私テルティオも、主にあってあなたがたにごあいさつ申し上げます。
23.私と教会全体の家主であるガイオも、あなたがたによろしくと言っています。市の会計係エラストと兄弟クアルトもよろしくと言っています。

여기서 우리 잠시 복습을 해볼까 합니다.


바울이 그리스 아테네를 지나 동쪽에서 고린도로 오게 되었는데, 여기서 누구를 만났느냐 하면 로마서 16장 3절에 등장하는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만났지요?

사도행전 18장 2절에 의하면 이 부부는 로마, 그러니까 고린도를 기준으로 본다면 서쪽에 있는 로마에서 고린도로 오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처럼 서쪽 로마에서 온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동쪽에서 온 바울을 이 고린도에서 처음 만나게 됩니다.

이 부부와 바울은 잠시 고린도에서 지내다가 에베소로 함께 건너가게 되지요.

그리고 바울은 다시 고린도로 돌아오게 되는데, 우리가 이미 공부해서 아는 바와 같이, 로마서 16장 3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그 때 다시 로마에 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홀로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나 하면, 이미 그에게는 또다른 사역자들이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 바울과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는 이 사람들을 본다면 그 명단이 오늘 본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성경에서 본다면 그 정보양이 적어서 그 사람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대부분 자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나마 알 수 있는 사람은 처음으로 등장하는 디모데 정도입니다.

디모데는 정말 오랫동안 바울과 사역을 함께 하면서 큰 도움이 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 외의 사람들은 솔직히 잘 몰라요.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잊어서는 안 되는 점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모르지만 누구는 알아요? 예, 그렇습니다. 주님은 아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생각해보세요. 이 로마서가 기록된 시기를 신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서기 56~57년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만,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2천년 가까이 전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당시 그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자기 이름이 2천년 뒤에까지 남아서, 사람들이 자기들 이름을 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까요?

이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솔직히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실 지는 우리가 알 수가 없겠습니다만, 지금 21세기 초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이름이 언제까지 남아 있을 것 같습니까.

과연 우리의 이름이 2000년 뒤에까지 남아 있을까요?

2000년 뒤, 그러니까 서기 4000년 경에 누군가가 내 이름을 듣는다면, 아, 그 사람, 하고 알아볼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드시나요?

많은 사람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 애를 쓴다고 합니다. 그러나 2000년전 한국에 있었던 왕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2천년 전 일본에 있었던 왕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기를 쓰고 세상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 싸우기도 하고, 상대방을 죽이기도 하고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비석도 세우고 하면서 자기 이름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을 했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 비석들은 부서지고 낡아지고 대부분이 남아 있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이름이라고 해봐야 몇몇 전문가들이나 보는 고전 역사서에나 기록되어 있겠지요. 그리고 쓸쓸히 잊혀져 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경에 기록된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이 사람들은 왕이 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권력싸움을 한 사람들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을 죽이지도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나라를 빼앗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천년 동안이나 그들의 이름들이 수많은 성경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만에 하나 이 세상에 있는 성경책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어디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영광스러운 주님의 나라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10장 20절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しかし、霊どもがあなたがたに服従することを喜ぶのではなく、あなたがたの名が天に書き記されていることを喜びなさい。」


요한계시록 3장 5절
“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勝利を得る者は、このように白い衣を着せられる。またわたしは、その者の名をいのちの書から決して消しはしない。わたしはその名を、わたしの父の御前と御使いたちの前で言い表す。


이 땅에 이름이 남아봐야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 땅에 아무리 자기의 큰 동상을 세워봐야 주님께서 인정해주시지 않는다면 거기에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이 세상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더라도 주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귀하게 여겨 주시고,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다음으로 주목할 부분은 22절입니다.

로마서 16장 22절
“22.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22.この手紙を筆記した私テルティオも、主にあってあなたがたにごあいさつ申し上げます。

이 말씀에 보면 갑자기 어느 한 이름이 등장하는데 그 이름이 <더디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앞에 등장했던 다른 사람처럼 단순한 동역자로 나오는 것이 아닌,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라고 하지 않아요?

느닷없이 깜짝 등장한 이 더디오라고 하는 사람인데, 사실 이 사람의 이름은 역시 신구약을 통틀어 여기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알 수가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기가 이 편지를 기록하고 있다고 해요.

그런데 이 로마서는 바울이 기록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기록한다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는 분명합니다. 바로 대필을 했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바울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 적은 사람이 바로 더디오라는 인물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이른바 바울의 이름으로 기록된 서신 중에서 대필을 한 것은 로마서만이 아닙니다.

현재 신학자들이 바울서신으로 꼽는 것은 총 13권이 있습니다만, 이 중에서 고린도전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 그리고 이 로마서, 이렇게 네 권은 바울이 대부분의 내용을 대필하도록 했다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여기에 빌레몬서를 넣을 것이냐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습니다만, 아무튼 최소한 이 네 권, 고린도전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 그리고 이 로마서는 아마도 대부분을 바울이 말을 하고 이를 다른 사람이 받아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가 뭐냐 하면 다음 성경 구절입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1절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私パウロが、自分の手であいさつを記します。

골로새서 4장 18절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私パウロが自分の手であいさつを記します。……


데살로니가후서 3장 17절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私パウロが自分の手であいさつを記します。……

여기서 보면 각각 “친필로 기록한다”가 아니라 바울이 “친필로 문안한다”고 되어 있는 점이 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좀 직역을 해본다면, “나 바울은 직접 내 손으로 이 인사말을 씁니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로마서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바울 서신을 보면 마지막 부분에 문안인사 부분이 나오는데, 이 문안 인사 부분은 나 바울이 직접 썼다고 하는 것이지요.

이 말을 뒤집어보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죠. 이 문안인사 부분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자기가 하는 말을 다른 사람이 받아 썼다는 것을 뜻한다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순히 바울이 글을 쓰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일까요?

아니, 그럴 리는 없습니다. 만약에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기 전에 하던 일이 무슨 어부였다거나 아니면 목자였다거나 하면 글을 읽고 쓰는 데에 있어서 익숙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바울이 누구입니까. 그는 청년 관료 출신입니다. 지금으로 본다면 고시를 패스한 수준의 엘리트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당대에 있어서는 그래도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학문에 있어서는 상당한 수준이 있는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필을 하도록 했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무슨 육체적인 어려움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기는 신학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혹시 기억하시나요?

고린도후서 12장 7절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その啓示のすばらしさのため高慢にならないように、私は肉体に一つのとげを与えられました。それは私が高慢にならないように、私を打つためのサタンの使いです。

이 부분을 들어서 아마도 바울은 당시 어떤 질병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렇다면 무슨 병을 앓고 있었을까.

사실 그 구체적인 병명을 알지는 못하더라도, 과연 어떤 증상을 앓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요.

그래서 바울이 서한들을 대필하도록 한 이유는 아마도 본인 스스로가 긴 글을 쓰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그리고 그 원인이 바로 바울 본인이 밝히고 있는 이와 같은 육체의 가시 즉 질병에서 오는 증상 때문이 아닐까 하고 신학자들은 추정을 하는 것이지요.

여기에 있어서 일부 신학자들은 아마도 안질, 그러니까 눈의 질병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바울이 주님을 만났을 때의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회심하기 전인 바울, 그 때는 아직 사울이라는 이름이었는데, 그는 당시 청년관료로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다메섹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만, 그 때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사도행전 9장 3절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ところが、サウロが道を進んでダマスコの近くまで来たとき、突然、天からの光が彼の周りを照らした。

그는 이 빛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데, 그 이후 3일 동안 그는 앞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3일 후에 아나니아의 기도를 받고 또다시 앞을 볼 수 있게 되는데, 당시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의 상황을 그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6장 13절
“13.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その途中のこと、王様、真昼に私は天からの光を見ました。それは太陽よりも明るく輝いて、私と私に同行していた者たちの周りを照らしました。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의 그 빛이 해보다도 더 밝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강렬한 빛 때문에 바울의 눈에 질병이 생겨서 시력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대부분의 서한을 대필하도록 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바울의 구체적인 증세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냥 단순히 신학자들이 추정할 뿐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에 기록된 사실만으로 본다면 어떨까요.

일단 바울은 글을 읽거나 쓰는 데에 있어서 그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학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다만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적어도 고린도전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 그리고 이 로마서는 대필을 한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 이유는 글을 쓰는 데에 있어서 육체적인 불편함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에 그렇다면 어디가 불편했을까.

글을 쓰기 어려울 정도의 육체적인 질병이라면 단순히 눈이나 손이 아닐까.

그렇다면 성경에 위와 같은 기록들이 있었으니까 아마도 눈에 질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런 식으로 추정을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또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로마서를 제외한 고린도전서와 골로새서, 그리고 데살로니가후서의 경우에는, 다른 부분은 대필을 하도록 하긴 했지만, 마지막 문안 인사 부분만은 바울이 직접 기록했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는 바울 자신의 서한이라고 인정을 했다는, 말하자면 글 마지막 부분에 하는 서명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긴 글을 쓰는 데에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화룡점정, 마지막 문안인사 부분은 바울이 직접 씀으로 인해서 그 서한을 완성시켰다고 본다는 것이지요.


이에 반해 이 로마서는 어떻습니까.

다른 고린도전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 이 세 권과는 달리 이 로마서는 마지막에 있는 문안인사까지도 바울이 아닌 더디오라는 인물이 기록했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와 같은 기록은 13권의 바울서신 중에서도 이 로마서가 유일합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유독 로마서만 끝까지 그 기록을 다른 사람에게 맡겼을까요.

그 정확한 이유는 나중에 천국에 가서 바울 선생님을 만났을 때 여쭤봐야지만 알 수 있는 부분이겠으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추정을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첫째로 바울은 여러 어려움이 있는 가운데에도 마지막 문안인사는 반드시 자신이 직접 기록할 정도로 이 문안인사 부분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

둘째로 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마지막 부분을 직접 쓰지 못할 어떠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

이와 같은 점은 우리가 짐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중요한 마지막 부분을 쓰지 못할 정도의 사정이라면 무엇이 있을까요.

이는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 그야말로 바울 자신이 쇠약한 상황에 처해 있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 짧은 글조차 쓰지 못할 정도로 증상이 심각했을 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울이 주님의 일을 포기하려고 했나요?

아니요. 우리가 이미 공부했잖아요? 바울은 이제부터 무엇을 하겠다고 해요.

마게도니야와 아가야 사람들이 모아준 연보를 예루살렘에 전달해주고 난 다음에 다시 정 반대방향인 로마에까지 가겠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

예전에 제가 회사에 처음 들어갔을 때 배운 것 중 하나가, 회사에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바로 “바쁘다”는 말이라는 거예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예를 들어서 누가 나한테 언제까지 해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걸 약속한 그 날까지 하지 못했어요.


그럼 상대방은 왜 못했냐고 물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그 때, “아, 제가 좀 바빠서요……”라고 말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상대방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니, 자기만 바쁘고 다른 사람은 다 한가한 줄 알아?

당연히 그런 말이 안 나오겠어요?

아, 물론 정말로 바쁠 때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럴 때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서 내일 임원회의가 있는데 여기에 쓸 회의자료를 준비하기 위해서 며칠째 밤을 새고 있어요……아니면 내일 제출해야 할 제안서가 있어서 다른 일들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에요……라고 상대방한테 설명을 하면, 상대방도 그래, 나도 뭐 그럴 때도 있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라고 이해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도 아니고, 그냥 바빠서 못했습니다……라고 말하면 누가 좋아하겠냐는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가 왜 성경을 읽지 않습니까. 우리가 왜 우리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까. 몸이 안 좋아서요? 먹고 살기가 바빠서요?

여러분, 바울 앞에서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몸이 좀 피곤해서, 이래저래 바빠서 못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육체적인 어려움, 외적인 난관이 닥쳐와도 바울의 열정은 식을 줄을 모릅니다.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 주셨으니까,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구원 받아 천국에 간다.

이 말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만약에 이 말이 맞다면 바울은 물론이고 지금 이 순간도 주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 열심히 수고하는 사람들은 쓸데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わたしはすぐに来る。あなたは、自分の冠をだれにも奪われないように、持っているものをしっかり保ちなさい。

이 말씀.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은 다른 말로 하면 무엇입니까. 빼앗길 수도 있다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신 것이지, 절대로 빼앗기는 일이 없다면 굳이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실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빌립보서 3장 13절~14절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兄弟たち。私は、自分がすでに捕らえたなどと考えてはいません。ただ一つのこと、すなわち、うしろのものを忘れ、前のものに向かって身を伸ばし、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사실 성경을 본다면 천국에 바울이 못 간다면 누가 가겠습니까. 회심한 후 바울은 평생동안 주님의 일을 열정적으로 감당했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바울도 자신은 내가 이만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 이제 안심할 수 있다, 라는 생각을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주님께서 주실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앞에서 우리는 편안하게 아멘 할렐루야 하면서 누워 있겠습니까. 쉬고만 있겠습니까.

아니면, 바울 앞에서 내가 좀 바빠서요, 그러면서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겠습니까.

그만큼 쉬었으면 이제 됐습니다.

그리고 이제 일어설 때입니다. 주님을 위해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발을 내디딜 때인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16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に勧めます。私に倣う者となってください。


고린도전서 11장 1절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私がキリストに倣う者であるように、あなたがたも私に倣う者でありなさい。

이제 우리를 기억해주시는 주님께 감사하면서, 이제부터는 사도 바울을 본받아, 주님께서 허락하신 마지막 날까지 주님께 순종하며 주님의 일을 힘차게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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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22회 지혜로운 삶
2023년 12월 10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19절~20절
“19.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20.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19節~20節
“19.あなたがたの従順は皆の耳に届いています。ですから、私はあなたがたのことを喜んでいますが、なお私が願うのは、あなたがたが善にはさとく、悪にはうとくあることです。
20.平和の神は、速やかに、あなたがたの足の下でサタンを踏み砕いてくださいます。どうか、私たちの主イエスの恵みが、あなたがたとともにありますよう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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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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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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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61번째 시간으로서 “지혜로운 삶” 賢い人生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두 구절로 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사실 이는 별개가 아니라 연결된 한 내용으로 이해를 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19절


“19.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19.あなたがたの従順は皆の耳に届いています。ですから、私はあなたがたのことを喜んでいますが、なお私が願うのは、あなたがたが善にはさとく、悪にはうとくあることです。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되냐 하면, 20절


“20.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0.平和の神は、速やかに、あなたがたの足の下でサタンを踏み砕いてくださいます。どうか、私たちの主イエスの恵みが、あなたがたとともにありますように。”

이와 같은 식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솔직히 사탄은 우리 힘으로 물리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 사탄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그럼 이를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 하면, 바로 19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미련하다고 하는 단어에 대해서 잠시 부연 설명을 드리자면, 우선 마태복음을 잠시 보실까요?


마태복음 10장 16절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いいですか。わたしは狼の中に羊を送り出すようにして、あなたがたを遣わします。ですから、蛇のように賢く、鳩のように素直でありなさい。

오늘 19절에 나오는 <미련하다>라고 하는 뜻은 이 구절에 나오는 <순결>이라는 단어와 같은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용된 <미련하다>라는 말은 단순히 무식하다거나 어리석다고 하는 부정적인 뜻이라기 보다는 <순결하다, 순진하다>라는 뜻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글쎄요. 예를 들어서 무슨 불법 마약을 사는 방법이라거나 아니면 불법 도박을 하는 장소 같은 것을 모른다고 무식한 것은 아니잖아요?

오히려 그런 것에 대해서 잘 아는 편이 좀 이상한 것이지, 그런 것과 관련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쩌면 모르는 것이 나쁘다기 보다는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와 비슷한 성경구절은 고린도전서에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0절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兄弟たち、考え方において子どもになってはいけません。悪事においては幼子でありなさい。けれども、考え方においては大人になりなさい。

이 말씀과 오늘 본문 중 19절 말씀을 같이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선한 데에 있어서는 장성한 어른처럼 지혜롭고, 악한 데는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라, 순진하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반대 아니겠습니까. 선한 데는 미련하고 오히려 악한 데에 지혜롭습니다.


창세기 8장 21절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죠.

창세기 8장 21절 중반부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人の心が思い図ることは、幼いときから悪であるからだ。……

요즘 신문이나 뉴스를 보시면 어떻습니까. 어쩌면 그렇게 나쁜 일을 저지르는 데에는 아주 교묘한지 몰라요.


사기를 치는 사람들을 보세요. 얼마나 기가 막힌 방법으로 사기를 칩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무슨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사기 치는 방법을 배웠겠어요? 아니에요. 그런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사기를 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돈을 빼앗습니다.

정말 악한 데에는 얼마나 지혜로운지 몰라요.

저는 오늘 이 본문 말씀을 읽고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성경은 선한 데에 지혜롭고 악한 데에는 좀 미련하라, 순진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왜 사람들은 반대로 그렇게도 나쁜 데에는 지혜롭고 선한 데에는 미련한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어요.

그런데 문득 그런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성경에 있는 마지막 날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실까요.

성경은 마지막 날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지막 날은 언제라고 성경에는 적혀 있습니까.


일본에 어디 보니까 중요한 것은 다섯 번 말한다는 말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다섯 구절만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 13절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です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その日、その時を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ら。


마태복음 24장 36절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ただし、その日、その時がいつなのかは、だれも知りません。天の御使いたちも子も知りません。ただ父だけが知っておられます。

사도행전 1장 7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いつとか、どんな時とかいうことは、あなたがたの知るところではありません。それは、父がご自分の権威をもって定めておられることです。

베드로후서 3장 10절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しかし、主の日は盗人のようにやって来ます。その日、天は大きな響きを立てて消え去り、天の万象は焼けて崩れ去り、地と地にある働きはなくなってしまいます。


요한계시록 16장 15절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見よ、わたしは盗人のように来る。裸で歩き回って、恥ずかしい姿を人々に見られることのないように、目を覚まして衣を着ている者は幸いである──

어느 정도 연배가 있으신 분들께서는 1992년에 일어난 이른바 시한부 종말론 사건을 기억하시는 분도 많으실 것입니다.


1992년 10월 28일날 휴거가 일어난다고 해서, 그 말에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바치고 인생을 바치고 뭐 난리가 나지 않았습니까.

아니, 성경에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주님은 말씀 하셨잖아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들은 안다고 하니 이게 무엇입니까.

그건 성경이 틀렸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하늘의 천사들도 그리고 아들도 모른다고 하셨는데, 자기들은 안다고 하니 이처럼 알기 쉬운 이단이 어디 있냐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사기에 많은 사람들이 속아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정신적인 피해, 재산적인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그러나 또 조만간 이 시한부 종말론은 분명 다시 고개를 듭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매력이 있거든요.


언제인지 모른다고 하면 그저 막연한데, 정확히 언제라고 말하면 정말 믿기 쉬워질 것 같잖아요.

그래서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본다면 주기적으로 이 시한부종말론이 등장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말을 잘하고 그리고 외모가 뛰어난 사람이 하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성경과 다르면 그건 99%도 아닙니다. 100% 이단입니다.


이는 멸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절대로 믿으면 안 되는 것이요, 만약 이를 따르게 되면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되고 만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자, 그렇다고 한다면, 주님께서는 왜 마지막 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신다는 말씀을 분명히, 그것도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10장 37절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もうしばらくすれば、来たるべき方が来られる。遅れることはない。

언제 오신다고요? 예, 잠시 잠깐 후면 오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말씀은 성경 후반에 가면 갈수록 더욱 절박하게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 1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イエス・キリストの黙示。神はすぐに起こるべきことをしもべたちに示すため、これをキリストに与えられた。そしてキリストは、御使いを遣わして、これをしもべヨハネに告げられた。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대한 기록이라고 알려져 있는 요한계시록은 벌써 1장 1절부터 속히 일어난다고 시작합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わたしはすぐに来る。あなたは、自分の冠をだれにも奪われないように、持っているものをしっかり保ちなさい。

1장에 이어 3장에 또다시 주님께서 속히 오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마지막 부분에 가면 갈수록 이 긴박함은 더해갑니다.

요한계시록이 몇 장까지 있지요? 예, 22장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22장에 보시면 마지막 날이 언제 임할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6절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御使いは私に言った。「これらのことばは真実であり、信頼できます。」預言者たちに霊を授ける神である主は、御使いを遣わして、すぐに起こるべきことをしもべたちに示された。


요한계시록 22장 7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見よ、わたしはすぐに来る。この書の預言のことばを守る者は幸いである。」

요한계시록 22장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見よ、わたしはすぐに来る。それぞれの行いに応じて報いるために、わたしは報いを携えて来る。

요한계시록 22장 20절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これらのことを証しする方が言われる。「しかり、わたしはすぐに来る。」アーメン。主イエスよ、来てください。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간절한 마음을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창세기에 보시면 처음으로 애굽 왕 바로 앞에 선 요셉의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로 왕의 꿈에 대한 해설을 이 요셉이 하게 되는데 그는 이제부터 7년 동안 풍년이 있고 난 다음에 7년 동안 흉년이 있을 것을 예언하게 되지요.

이 상황에서 요셉은 흥미로운 말을 합니다.

창세기 41장 32절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

夢が二度ファラオに繰り返されたのは、このことが神によって定められ、神が速やかにこれをなさるからです。


사실 바로는 같은 날 밤에 꿈을 두 번 꾸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말하기를 그 꿈이 갖는 의미는 하나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두 번이나 보여주셨다는 것은 이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행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날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두 번이요? 아니요. 주님이 속히 오신다는 말씀은 요한계시록에만 보더라도 여섯 번,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인 22장에만 보더라도 네 번이나 등장합니다.


아니, 두 번 말씀하신 것만으로도 이미 하나님께서 일을 정하셨다고 성경에 나와 있는데 이처럼 반복해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죠. 이는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날에 대해서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그 일이 속히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 중요한 사실, 주님께서는 이제 속히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제대로 알게 되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성경말씀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살까요.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되겠지요.

그 중에는 여럿이 있겠습니다만 대표적인 것으로는 돈과 명예와 권력이 아닐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과 명예와 권력을 얻기 위해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삶이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재산을 얻기를 원하고, 사람들로부터 인정 받기를 원하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기를 원하면서, 이를 성취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성경 말씀을 완전하게 지키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37.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38.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39.『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40.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를 알면서도 잘 지킬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린다면,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보다 나를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아닌 바로 내 욕심 때문 아니겠습니까.

일단 내 배가 부른 다음에 하나님을 섬기든 이웃을 섬기든 할 것 아니야……하면서 어떻게 해요?

예,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고 이웃을 섬기지도 않은 채, 그저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돈과 명예와 권력을 얻기 위해서만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알고 보면 남은 시간이 없어요. 주님께서는 속히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열심히 일을 하면 돈을 받아요. 그런데 그 돈의 화폐가치가 얼마 지나지 않아 휴지조각이 되어버리고 말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돈에 대해서 욕심을 갖겠습니까.

이 세상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진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얻을 명예에 대한 욕심을 갖겠습니까.

다니엘 서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 왕의 꿈에서 이 세상 마지막 장면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다니엘 2장 34절~35절
“34.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35.그 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

あなたが見ておられると、一つの石が人手によらずに切り出され、その像の鉄と粘土の足を打ち、これを粉々に砕きました。
そのとき、鉄も粘土も青銅も銀も金も、みなともに砕け、夏の脱穀場の籾殻のようになり、風がそれを運んで跡形もなくなりました。そして、その像を打った石は大きな山となって全土をおおいました。

이 세상이 얼마 지나지 않아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세상을 다스리고 싶은 권력에 대한 욕심을 갖겠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겠지요.

오히려 그와 같은 것들은 모두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오로지 영원한 주님의 나라에 소망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시편 43편 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わがたましいよ なぜ おまえはうなだれているのか。 なぜ 私のうちで思い乱れているのか。 神を待ち望め。 私はなおも神をほめたたえる。 私の救い 私の神を。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를 떠나 우리에게 허락된 날이 언제까지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수명이 아무리 오래 남았다 하더라도, 지금부터 100년 뒤까지 이 자리에 남아 있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허락된 날이 어쩌면 수십년일 수도 있겠지만, 또 어쩌면 의외로 얼마 안 남았을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날에 대해서 가리셨을 뿐만 아니라, 그 마지막 날이 속히 온다는 말씀을 우리에게, 그것도 반복적으로 하신 이유는, 우리가 불안에 떨면서 살기를 바라셨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세상적인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게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어떤 삶입니까. 그렇습니다. 그와 같은 삶이야말로 선한 데에 지혜롭게 살아가는 삶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 날까지 이 땅에서 남아 있는 시간 동안, 선한 데에 지혜롭고 악한 데에 미련한 삶을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 날, 크나큰 기쁨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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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21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
2023년 12월 3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17절~18절
“17.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18.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17節~18節
“17.兄弟たち、私はあなたがたに勧めます。あなたがたの学んだ教えに背いて、分裂とつまずきをもたらす者たちを警戒しなさい。彼らから遠ざかりなさい。
18.そのような者たちは、私たちの主キリストにではなく、自分の欲望に仕えているのです。彼らは、滑らかなことば、へつらいのことばをもって純朴な人たちの心をだまし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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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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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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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60번째 시간으로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 神様が愛される人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한 영혼과 온 천하, 어느 쪽이 귀합니까.

교회에서는 흔히들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을 많이 하지요. 저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구절이 성경 어디 있는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알지를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본 기억이 안 났거든요.

그런데 예전에 우연히 어느 교회에 방문을 했었는데, 그 교회 어느 벽면을 보니까 한 포스터가 붙여져 있었는데, 거기에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글과 함께 성경 절수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 구절이 어디인가 하고 보았더니 마태복음 16장 26절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全世界よりも一つのたましいのほうが重い


이를 보고, 그래, 드디어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의문이 풀리는구나 하고 반가운 마음에 성경을 찾아보았습니다.

일단 마태복음 16장 26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6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人は、たとえ全世界を手に入れても、自分のいのちを失ったら何の益があるでしょうか。そのいのちを買い戻すのに、人は何を差し出せばよいのでしょうか。

다시 한 번 읽어드릴까요?

마태복음 16장 26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人は、たとえ全世界を手に入れても、自分のいのちを失ったら何の益があるでしょうか。そのいのちを買い戻すのに、人は何を差し出せばよいのでしょうか。

어떻습니까. 이는 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인데, 이 말씀 내용이 과연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이라고 생각이 되십니까.

제가 일본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몇 년 동안 시험대비반도 가르치고 그랬습니다만, 독해문제를 이런 식으로 풀면 큰일납니다.

이 말씀은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라기 보다는 굳이 말하자면 <자신의 목숨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에 더 가깝다고 하겠지요.

그리고 이 말씀은 바로 앞에 있는 말씀과 함께 보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5절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自分のいのちを救おうと思う者はそれを失い、わたしのためにいのちを失う者はそれを見出すのです。

그리고 그 다음에 26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人は、たとえ全世界を手に入れても、自分のいのちを失ったら何の益があるでしょうか。そのいのちを買い戻すのに、人は何を差し出せばよいのでしょうか。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말씀은 아무리 귀한 것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목숨을 잃게 되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는데, 그 목숨을 얻는 방법은 세상적인 것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살아갈 때에 진정한 목숨 영생을 얻게 된다는 말씀이라고 우리는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성경구절이 어떻게 해서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로 사용되었을까요.

저는 이런 해석이 한국에서부터 시작된 줄 알았습니다만, 인터넷에 보니까 어떤 미국 목사님도 이런 식으로 인용을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여전히 어디서부터 그리고 언제부터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하기 시작했는지는 불분명합니다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그렇게 되면 전도를 함에 있어서 아무리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아, 그래,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지 않는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도를 해서 교회에 데리고 와야 한다……이런 식으로, 말하자면 전도 세미나 같은 데에서 교육을 하게 되면, 더욱 열심히 전도를 하게 하고, 마침내 성도는 늘어나고 교회는 부흥하고, 그리고 수익도 많아지고……

제가 좀 성격이 삐딱해서 그런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번 생각해볼까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확한 성경 출처는 불분명합니다만 왠지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은 좀 성경적인 것 같지 않으세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성경 어딘가를 찾아보면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도 들지 않아요?

그렇다면 이 말씀이 정말 성경적인지를 한 번 따져봐야 하겠지요.

예를 들어서 교회에서 맨날 문제나 다툼을 일으키고 그러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면서요. 그러면 어떻게든 그 영혼을 올바른 길로 돌아서게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시면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로마서 16장 17절~18절
“17.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18.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17節~18節
“17.兄弟たち、私はあなたがたに勧めます。あなたがたの学んだ教えに背いて、分裂とつまずきをもたらす者たちを警戒しなさい。彼らから遠ざかりなさい。
18.そのような者たちは、私たちの主キリストにではなく、自分の欲望に仕えているのです。彼らは、滑らかなことば、へつらいのことばをもって純朴な人たちの心をだましています。”

이를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현대인의 성경 로마서 16장 17절~18절
“17.형제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이 배운 교훈과는 달리 분열을 일삼고 여러분의 신앙 생활에 장애물을 놓는 사람들을 조심하고 그들을 멀리하십시오.
18.그런 사람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고 자기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간사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사람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고 간사하고 아첨하는 말로 사람들을 속이고, 분열을 일삼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래요?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끈질기게 매달려서 좀 바꾸도록 해보래요?

성경은 그들을 멀리하라, 그들에게서 떠나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런 구절은 여기만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6절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兄弟たち、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名によって命じます。怠惰(たいだ)な歩みをして、私たちから受け継いだ教えに従わない兄弟は、みな避けなさい。

이는 역시 성경의 가르침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내용인데 그와 같은 사람한테서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점에 대해서 주님도 직접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8장 15절~17절
“15.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また、もしあなたの兄弟があなたに対して罪を犯したなら、行って二人だけのところで指摘しなさい。その人があなたの言うことを聞き入れるなら、あなたは自分の兄弟を得たことになります。
もし聞き入れないなら、ほかに一人か二人、一緒に連れて行きなさい。二人または三人の証人の証言によって、すべてのことが立証されるようにするためです。
それでもなお、言うことを聞き入れないなら、教会に伝えなさい。教会の言うことさえも聞き入れないなら、彼を異邦人か取税人のように扱いなさい。

어떤 사람에게 잘못이 있다면 우선 공개적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한 번 말을 해 보라고 하세요.

그래도 안 들으면 그 사실을 아는 몇 사람을 데리고 가서 권면을 해보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공개적으로 하는데, 끝까지 말을 듣지 않으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이나 세리를 당시 유대인들이 어떻게 대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말도 안 섞고 아예 교제 자체를 끊어버렸던 것입니다.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면 아무리 죄를 범했다고 해도 돌이키지 않는다고 해서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대하면 되겠어요? 어떻게 해서든 회개를 시켜야죠? 하지만 주님은 그런 사람들과는 더 이상 상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떠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조금 더 살펴볼까요?



디모데후서 4장 10절 전반부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デマスは今の世を愛し、私を見捨ててテサロニケに行ってしまいました。……

디모데후서 4장 14절~15절
“14.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15.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銅細工人のアレクサンドロが私をひどく苦しめました。その行いに応じて、主が彼に報いられます。
あなたも彼を警戒しなさい。彼は私たちのことばに激しく逆らったからです。

우선 10절에 나오는 데마는 본래 바울과 사역을 함께 했었던 형제입니다.

하지만 그는 무슨 이유인지는 자세히 알 길이 없으나 결국 도중에 바울을 버리고 떠났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누구는 한 번 믿으면 이제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다고 그러면서, 이제 무슨 죄를 저질러도 십자가에서 내 모든 죄를 다 해결해 주셨으니 안심해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인기를 얻을지도 모르겠지요.

그러나 사람들이 좋아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성경에는 그런 말씀이 어디에도 안 나와 있습니다.

우선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떠난 데마라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이 사람은 바울이 대단히 아꼈던 인물로 여겨집니다.

골로새서 4장 14절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愛する医者のルカ、それにデマスが、あなたがたによろしくと言っています。

빌레몬서 1장 24절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私の同労者たち、マルコ、アリスタルコ、デマス、ルカがよろしくと言っています。

이처럼 바울서신에도 몇 번이나 그의 이름이 등장해요. 그 정도로 바울과 대단히 가까웠고 사역도 함께 열심히 했었던 사람으로 여겨지지만, 그는 믿음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세상 속으로 떠나버리고 맙니다.

또한 14절에 등장하는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라고 하는 사람은 더 심합니다.

바울에게 해를 아주 많이 입혔다고 하면서 디모데에게 너도 조심하라고까지 말을 합니다.

아니,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면 만사를 제쳐 두고라도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구원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어떻습니까. 그 사람들을 멀리하라. 떠나라. 조심하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는 어떤 개인만을 살펴보았습니다만, 성경 전체적으로만 본다면 그 정도가 아니지요.

구약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죄악으로 물든 소돔과 고모라를 한순간에 멸망시켜버리지 않으셨습니까.

노아 때에 기록을 보시면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제외하고 전인류를 홍수로 멸망시켜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니,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처럼 사람들을 멸망시키셨겠습니까.


이처럼 성경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그저 막무가내로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버릴 때에는 철저하게 버리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나요?

아니요. 사랑하십니다.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그러면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게 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사랑하시고 누구를 버리시는 것일까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6절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わたしはぶどうの木、あなたがたは枝です。人がわたしにとどまり、わたしもその人にとどまっているなら、その人は多くの実を結びます。わたしを離れては、あなたがたは何もす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す。
わたしにとどまっていなければ、その人は枝のように投げ捨てられて枯れます。人々がそれを集めて火に投げ込むので、燃えてしまいます。

주님께서는 주님이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포도나무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게 되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으나 주님을 떠나게 된다면 밖에 버려져서 불에 던져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는 정말로 많은 깨달음을 주십니다.

나뭇가지는 그 나무에 붙어 있을 때에 영양을 공급 받아 성장하고 잎사귀가 달리며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지, 아무리 처음에는 나무에 붙어 있었다 하더라로, 그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나뭇가지는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완전히 가치가 상실되는 것이지요.

머리카락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어떻습니까. 남자분들도 그렇습니다만, 특히 여성 분들은 자신의 머리카락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쓰지요.

미용실에 가게 된다면 때로는 몇시간이나 들이면서 머리를 가꾸기도 하고, 그 비용도 정말 놀랄 정도로 드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이는 말하자면 그만큼 자신의 머리카락을 아끼고 그리고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머리카락이 한 번 빠지면 어떻습니까.


아무리 비싼 돈을 주고 한 머리카락이라 하더라도, 목욕탕에서 샤워를 하고 난 다음에 머리에서 빠져서 배수구 쪽에 있는 머리카락을 아까워 하면서 주워 가지고서는 다시 머리에 심으려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그건 그야말로 지저분한 쓰레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비싸고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고 해도, 나중에 화장실 갔다가 물 내리기를 아까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주님을 버린 사람들에 대한 성경말씀은 단호합니다.

그렇게 되면 철저하게 버림을 받게 된다고 성경은 분명히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게 된다면,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누가복음 15장 4절~7절
“4.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あなたがたのうちのだれかが羊を百匹持っていて、そのうちの一匹をなくしたら、その人は九十九匹を野に残して、いなくなった一匹を見つけるまで捜し歩かないでしょうか。
見つけたら、喜んで羊を肩に担ぎ、
家に戻って、友だちや近所の人たちを呼び集め、『一緒に喜んでください。いなくなった羊を見つけましたから』と言うでしょう。
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それと同じように、一人の罪人が悔い改めるなら、悔い改める必要のない九十九人の正しい人のためよりも、大きな喜びが天にあるのです。


이 세상, 우주 천하 만물을 다 합친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그 귀한 피 한방울과 어찌 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아무리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끝까지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아흔 아홉마리 양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서 모든 피를 흘려 죽으시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15장 9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父がわたしを愛されたように、わたしもあなたがたを愛しました。わたしの愛にとどまりなさい。

우리가 거해야 하는 곳은 단 한 곳,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고 그래야 축복을 받습니다.

마태복음 24장 13절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しかし、最後まで耐え忍ぶ人は救われます。


아무리 튼튼한 포도나무라 하더라도 겨울이 되면 잎사귀가 떨어지고 추위에 떨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싫다고 해서 나무에서 떨어져 나와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쓰레기나 땔감이 되고 말겠지요.

그러나 그 추운 겨울을 주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견디게 된다면, 마침내 따뜻한 봄날이 되어 또다시 힘차게 살아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하박국 3장 17절~18절
“17.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いちじくの木は花を咲かせず、ぶどうの木には実りがなく、オリーブの木も実がなく、畑は食物を生み出さない。羊は囲いから絶え、牛は牛舎にいなくなる。
しかし、私は主にあって喜び躍り、わが救いの神にあって楽しもう。 




이제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친다 하더라도 끝까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포도나무 가지가 되어서, 마침내 진정한 포도나무이신 주님께서 부어 주시는 놀라운 사랑,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을 모두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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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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