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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4회 하나님 나라의 욕구 법칙 - 이루리라선교회
2024년 10월 6일 설교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31절~33절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39번째 시간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욕구 법칙”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염려를 합니다. 돈 문제, 건강 문제, 학교 문제, 직장 문제, 이성 문제, 부모 또는 자녀 문제 등등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사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우리의 삶 속에는 온통 문제 투성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자, 그렇다면 우리 앞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냥 문제를 끌어 안고 살아요?

물론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은 간에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은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이 해결하려고 하는 문제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이론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미국 심리학자인 매슬로가 주장한 욕구단계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람의 욕구를 피라미드 모양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라고 하는데, 삼각형 제일 밑에는 생리적 욕구가 있고, 그 위에 안전의 욕구, 그 위에 애정과 소속의 욕구, 그 위에 명예의 욕구, 그리고 제일 위에 자아실현의 욕구가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은 시간관계상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만, 이를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 되어야지만 그 위에 있는 욕구를 충족하고자 한다는 것이에요.


말하자면 생리적 욕구,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의식주 같은 기본적인 요구가 충족 되어야지만 그 위에 있는 안전의 욕구를 충족하려고 하고, 이것이 충족되면 또 한 단계 위에 있는 애정과 소속의 욕구로 올라간다는 주장입니다.

그것이 충족되면 그 위에 있는 명예의 욕구, 그리고 가장 상위에 있는 자아실현의 욕구로 올라간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자아실현의 욕구란 무엇입니까.

이는 자신의 인생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인가,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라고 하는 것을 모색하고 실현해 나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저도 예전에 대학진학을 준비하는 아이들을 가르칠 때 여기에 대해서도 다룬 적이 있습니다만, 이 자아실현이라고 하는 욕구는 다른 욕구들과 비교해서 조금 특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욕구는 비교적 단시간에 충족시킬 수 있어요.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르다면 뭔가를 먹거나 마시면 그 욕구는 충족되는 것이잖아요.

돈이 부족해요? 물론 조금씩 벌 수도 있겠지만, 까짓거 로또 한 번 당첨 되거나 누군가가 도와 주면 되는 것이잖아요.

하지만 이 자아실현의 욕구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일생을 통해서 성취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뭐 이렇게 가르치기도 했었습니다.


이와 같은 욕구단계설이라고 하는 것이, 참 그럴 듯하게 들리기도 합니다만, 그런데 잠깐만요.

이 주장대로라고 한다면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안전의 욕구도 없고 애정에 대한 욕구도 없다는 것이 되잖아요.

쉽게 말해서 사람이 일단 배가 부르고 등이 따스워야 안전에 대한 욕구도 챙기고, 그리고 안전이 확보 되어야지만 애정도 하고 명예를 얻고자 하기도 하고, 이게 다 충족 되어야지만 마지막에 가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시면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일단 배를 채울 걱정부터 하라고 말씀하시나요?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31절~33절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앞서 살펴본 욕구단계절에 의하면 일단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말하자면 생리적인 욕구에 대한 염려를 먼저 해야 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채워져야지만 더 윗단계로 올라갈 수 있으니까 일단 의식주 걱정, 돈 걱정, 먹고 살 걱정부터 먼저 하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아니다. 순서가 잘못되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걱정, 먹고 살 걱정은 나중에 해? 아니야, 그런 걱정은 아예 할 필요가 없어.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란 말이야.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말씀,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신실하시고 경건하신 여러분께서는 차마 입밖으로 말씀은 안 하시겠지만,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이고, 참으로 세상 물정을 모르셔도 한참 모르시네.

아니, 내가 가만히 있으면 누가 밥 먹여줘?

믿음도 좋고 신앙도 좋고 하나님도 좋고, 예수님도 좋고 성경도 좋고 복음도 좋고 다 좋지만, 아니 일단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야.

지금 무슨 배고프고 춥고 굶어 죽게 생겼는데 무슨 하나님 나라고 하나님의 의 타령이냐.

뭐, 솔직히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주님께 이런 식으로, 말하자면 투정을 부리면,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세요?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실까요.

마태복음 6장 31절~33절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걱정은 이방인,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이나 하는 걱정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은 왜 그런 걱정을 하는 것일까요.

이유는 다음에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런 걱정을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는 이미 다 알고 계시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세요.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은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단순히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실제로 우리에게 주어져야지만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이를 우리가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6장 33절 전반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자, 여기서 일단 우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잘 아는 주기도문에 보시면 참고가 됩니다.

마태복음 6장 10절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시기를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이기에 그 나라가 임하시기를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성경에 보시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이사야 11장 6절~8절
“6.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참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입니까.

육식동물이 초식동물과 어우러져 놀아요,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서로를 위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 구멍에서 장난을 친다고 하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는 단순히 무슨 동물의 왕국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도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 아니,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가 서로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이 아니라 서로 함께 어우러져 사는 세상,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 아니겠습니까.

자, 그렇다면 여기에는 무엇이 없습니까. 그것은 바로 탐욕이 없는 세상인 것입니다.

앞서 매슬로의 욕구단계설로 본다면, 아니, 무슨 의식주 욕구가 해결되면 그 윗단계로 넘어가요?

지금 인간세상을 보십시오. 넘어가긴 뭐가 넘어갑니까.

돈이 곧 안전이요, 돈이 곧 애정이요 돈이 곧 명예이자 돈이 곧 자아실현 아닙니까.

그런데 무슨 돈이 최하위 욕구예요. 오히려 최상위 욕구, 아니 욕구의 처음과 나중이 온통 이 돈에 대한 욕구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 돈을 많이 축적하려는 사람들을 싸잡아서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꼭 돈 많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나쁜 사람들이라고는 할 수 없잖아요.


돈이 많건 적건 간에 많은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도 자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 그저 돈과 재산을 축적합니다.

요즘에는 서울에 집 한 채 마련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하는데 얼마전에 인터넷 자료에 의하면 이 좁은 땅덩어리에 집이 10채 이상을 가진 사람이 3만 7천명이라고 합니다.

저 같은 사람한테서 보면 그 정도면 평생 먹고 살 만큼 넉넉한 돈과 재산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돈을 모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왜 그런 것일까요.

이유야 여러 가지 있겠습니다만, 그 근본에는 바로 <불안함>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아무리 돈과 재산을 모아도 불안한 거예요. 왜냐하면 세상에는 <이 정도 돈이 있으면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기준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예, 마치 소금물을 마시듯이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욕구, 탐욕이라는 이름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끊임없이 부를 축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탐욕이라고 하는 시커먼 웅덩이 속만 바라보던 눈을 들어 고개를 돌려 보면 어떻습니까.

주위에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애정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우리가 존중해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어떻습니까.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애정을 위해, 명예를 위해, 그리고 자아실현을 위해 우선 무엇을 하라? 예, 의식주 문제부터 해결하라는 것이 세상 생각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늘은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생각, 즉 하나님의 의로 통치되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어려운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판단할 때에 하나님 기준에서 판단할 것인가, 아니면 사람 기준에서 판단할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A인 것 같은데, 내가 배부르기 위해서 내가 이익을 보기 위해서는 B를 선택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다 B를 선택합니다. 바로 그 때 우리는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여기서의 ‘사람들’이라고 하는 말씀에는 ‘나’라는 존재도 역시 포함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사람들’이라는 단어를 ‘나’로 바꾸어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제 내가 나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나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나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여러분, 하나님의 의와 내 의 사이에서 망설이게 되었을 때에는, 어느 쪽은 선택해요?

예,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기쁨을 선택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하나님의 의를 선택해야 합니까. 우리가 무슨 욕심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에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욕구를 가지면 안 됩니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욕심을 가지십시오. 욕구를 가지십시오. 그러나 작은 욕심이나 욕구가 아닌 큰 욕심과 욕구를 가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따라 선택을 하게 된다면, 우리가 가난하게 산대요? 우리가 손해를 보게 된다고 말씀하십니까.

아닙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간구하고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살아가게 된다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해 주신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앞서 그 매슬로의 욕구단계설에 나오는 모든 욕구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욕구의 법칙은 무엇보다 돈과 재산을 모아야 하고, 그래야 다른 욕구들이 하나씩 채워지고, 마지막에 가서야 자아실현, 자신의 삶에 있어서 진정한 의미를 찾게 된다고 하는데,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 욕구의 법칙은 그게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시기를 기도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의에 따라 살아가게 된다면 이 모든 욕구를 우리에게 채워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본에 있을 때 보면 밀크보이라고 하는 개그 만담 콤비가 있습니다만, 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 중에 ‘시리얼’을 주제로 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 중에 보면 한 사람이 그래요.

자기 엄마가 좋아하는 아침식사가 있는데 그 이름이 생각 안 난다고 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달고 빠삭빠삭 하고 우유를 부어서 먹는 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상대방이 아, 그건 시리얼이네. 틀림없어 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다른 한쪽이 말하기를, 자기도 시리얼인 줄 알았는데 자기 엄마가 말하기를, 나중에 자기가 죽기 직전에 먹을 마지막 식사로도 그걸 먹고 싶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뭐라 그러냐 하면, 그럼 시리얼이 아니겠네. 인생 마지막 식사로 시리얼이 좋을 리 있겠어? 그러면서 하는 말이, 시리얼은 아직 수명에 여유가 있기 때문에 먹을 수 있는 거야.

라고 하는 것이에요.

제가 이렇게 말하면 별로 재미가 없습니다만, 실제로는 상당히 재미있는 내용입니다.


생각해보면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더구나 믿음이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도 어느 쪽이 올바른 선택인지, 어느 쪽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택인지 알지요. 왜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람에게, 더 구체적으로는 나에게 기쁨이 되는 쪽을 선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수명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있는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그 날까지 아직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말씀 있잖아요.

누가복음 12장 15절~21절
“15.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자신의 수명에 아직 여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든, 그리고 때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으고 부를 축적하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너의 수명이 끝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주님은 언제 다시 오신대요?

누가복음 12장 40절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요한계시록 22장 7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22장 20절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예, 주님은 언제 오시는가 하면, 그것은 바로, 생각하지 않은 때에 오신다고 하십니다. 속히 오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무엇을 하고 있으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하시는 것이지요.


이제부터 우리는 언제 어느 때에 내 수명이 다 하게 되더라도, 그리고 언제 어느 때에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 하더라도, 내 욕구와 내 이익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께 드리는 기쁨을 구하는, 하나님 나라의 법칙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누르고 흔들어 넘치는 축복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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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3회 한 알의 밀과 열매 - 이루리라선교회
2024년 9월 29일 설교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38번째 시간으로서 “한 알의 밀과 열매”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우선 오늘 본문 말씀부터 다시 볼까요?

요한복음 12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여러분께서는 이 말씀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십니까.

여기서 우선 첫째로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서 우리를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죄값에 대한 형벌을 모두 받아 주시고는,

하나님께서 그 죄를 모두 사해주신 증거로서 예수님을 다시 살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는 예수님의 죽음,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무사하시겠지만 그 대신 대속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 예수님 한 분의 죽음을 통한 많은 사람들의 구원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게 되신다면 그 죽음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구원을 얻는 열매를 맺게 된다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여기서의 죽음이라고 하는 말씀을 단순히 예수님의 십자가에 한정시키게 되면 좀 문제가 생깁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이 고백하기를 자신은 날마다 죽는다고 합니다.

날마다 죽는다. 날마다 죽는다. 여러분께서는 이 바울의 고백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바울의 말을 바탕으로 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한 알의 밀알과 열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자, 우선 다음 말씀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호세아 6장 2절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고린도전서 6장 14절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일으키신다, 다시 살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다시 살리신다는 것은 단지 우리가 이전의 모습으로 살아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는 그래요. 아휴, 이렇게 사는 것도 지겨운데 다시 살아나서 뭐해. 그러니까 다시 살아난다는 게 별로 안 반갑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활할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요한계시록 7장 16절~17절
“16.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요한계시록 22장 3절~5절
“3.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5.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을 때의 고통과 고민을 모두 끌어안고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날은 어떤 날이라고 합니까.

부활한 그들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에 대해서 현대인의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요한계시록 22장 5절
“거기에는 더 이상 밤이 없을 것이며 등불이나 햇빛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빛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그들은 영원히 왕처럼 살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보시는 것처럼 부활한 우리는 왕처럼 살게 될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왕이라고 해서 또한 이 땅에 있는 왕을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해도 이 땅에서의 삶은 대부분 고작 100년도 못 되지 않습니까.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지배했다고 하는 몽골의 징기스칸도 64세까지 살았고, 최초로 중국 대륙을 통일한 진시황은 50세, 유럽의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은 고작 32세까지밖에 못 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부활한 다음에 왕으로서의 삶은 언제까지 이어진다고요? 100년이요? 200년이요? 아닙니다.

세세토록 즉 영원히 왕으로서 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우리는 왕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괴로움을 훌훌 털어버리고 이제 주님의 능력으로 영광된 왕으로 태어나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문제를 드리겠습니다. 부활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물론 예수님도 믿어야 하겠지요. 신앙생활도 열심히 해야 하겠지요. 말씀도 잘 알아야 하겠지요. 기도로 항상 주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하겠지요. 다 좋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부활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죽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잖아요.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가 있겠습니까.

자, 그렇다면 우리도 부활하기 위해서는 당장 지금 육체적으로 죽어야 하느냐 하면, 아이,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육체적인 생명은 주님의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사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생각해보세요. 지금 직장에 다니고 있는 분들은 그게 저주입니까. 물론 때로는 힘들 수도 있겠지만, 사실 거기 들어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들을 하셨습니까.

한편 회사 입장에서 본다면 어떻습니까.

회사에서는 아무런 이유 없이 여러분들을 뽑았겠습니까. 그렇지는 않겠지요.

최소한 여러분을 뽑았다는 것은 여러분께 그만큼 회사를 위해서 일해주기를 바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런 의미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주님의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에 그 사명을 가지고 우리는 태어났다고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도중에 자기 멋대로 죽고 만다면 이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지고 계셨던 기대를 저버리는, 큰 불순종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한 바울은 한 번도 아닌 날마다 죽는다면서요. 사람이 어떻게 육체적으로 날마다 죽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말이 안 되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 간단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존심을 죽이라는 말씀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실 이 죽음이라는 것이 자존심을 죽이는 일이라고 이해를 하게 된다면, 성경에서는 이에 대한 말씀이 반복적으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2절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태복음 6장 5절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태복음 6장 16절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우리가 어떤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도와주려고 할 때, 그 목적이 그 사람에게 도움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서 한다거나, 기도나 금식을 할 때에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에게 자신의 믿음이 좋다는 것을 과시하려고 한다거나 하게 된다면, 주님은 이에 대해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 네 자존심을 네 힘으로 스스로 높이려고 했지? 그래, 그러면 대신 내가 높여줄 자존심은 없다. 다시 말하자면 너는 이미 네가 원하는 상을 받았으니까 내가 줄 상은 없다.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4장 7절~11절
“7.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8.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10.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사실 어딜 갔을 때 대우 받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럿이 모인 자리에 있어서는 제일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 하고, 그리고 여럿이 모여서 사진을 찍는다거나 하면 센터에 서고 싶어하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세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우 받는 자리에 가서 앉아라? 제일 눈에 띄는 곳에 서라? 그러십니까. 아니에요.


괜히 네가 네 힘으로 높은 자리에 가서 앉았다가, 거기 주인이 와서 말하기를, 이봐, 거기는 자네 자리가 아니야. 저기 낮은 쪽에 가서 앉아.

그렇게 되면 남들 앞에서 무슨 망신이냐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오히려 낮은 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된다면 역시 주인이 와서 말하기를, 아이구, 당신 같은 분이 왜 여기 낮은 자리에 와서 앉아 계십니까. 제가 저쪽 높은 자리로 모시겠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영광을 받겠느냐 하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네가 네 힘으로 스스로 너를 높이려고 애쓰지 말고, 오히려 자존심을 죽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본다면 누가 자존심을 철저하게 죽였습니까.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예수님 자신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5절~8절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좀 이상한 말일지는 몰라도 원래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가진 것 없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나마 나을지는 몰라요. 뭐 그래도 기분은 나쁘겠지만요.


하지만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천하를 호령하던 왕이나 황제였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다 잃고는 남들 앞에서 멸시를 당하고 수모을 겪게 되었다면 이 얼마나 참기 힘든 치욕이겠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 다음 가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체시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영광된 자리를 버리시고 종의 형체로서 이 땅에 오시고는, 어떻게 십자가에서 죽으셨대요? 영웅처럼 멋있게 죽으셨다고 하십니까.

아닙니다.

자기를 낮추셔서 죽으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체포되자 그 주위에는 누가 있었습니까.

마가복음 14장 50절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을 대략 3년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만, 기껏 제자들을 3년 동안이나 가르쳐 놨더니 결정적인 순간이 되자 한 사람도 남김 없이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쳐 버렸대요.

결국 예수님은 철저하게 낮아져서 홀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됩니다.

그러자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환호성을 지르던 사람들은 다 없어지고 온통 예수님을 모욕하는 사람들만 가득 찼습니다.


마태복음 27장 39절~44절
“3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참 어쩌면 그 마지막 순간까지 이토록 험한 꼴을 당하실 수가 있습니까.


성경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시간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25절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누가복음 23장 44절~46절
“44.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45.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46.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이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제심시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제육시 쯤에 어둠이 임하더니 제구시에 숨지셨다고 되어 있어요.

이를 지금 시간으로 고치면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시고는 정오 쯤에 하늘이 어두워지고 오후 3시 경에 운명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몇 시간이에요? 예,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무려 6시간 동안이나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고난을 받으시면서, 그것도 모자라서 온갖 모욕을 당하고 계셨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누가요? 죄인이요. 아닙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그와 같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수모를 겪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나요? 아니에요. 그것은 바로 우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그와 같은 고통과 고난을 겪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게 된다면,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못 참겠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는 것 같습니다. 예, 충분히 이해하지요.

자기도 날마다 죽는다고 말한 바울의 심정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사실 바울은 인간적으로 본다면 얼마나 많이 배운 사람입니까. 지금으로 본다면 고시를 패스한 청년 관료로서 얼마든지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율법도 모르고 복음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들 잘났다고 하면서 바울을 무시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그런 모습을 보았다면 얼마나 속에서 부글부글 끓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바울이 그것을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저 바울은 자기를 낮추고 오로지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높이면서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가 자존심이 상했을 때, 그 자존심 어떻게 살리시겠습니까.

누구는 자기 힘으로 자기 자존심을 살리려고 합니다.

누구는 하나님의 힘으로 자기 자존심을 살리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무리 자기 힘으로 자존심을 살리려고 해 봤자 그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들 앞에서 겸손해져서 자신을 낮추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존심을 살려 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시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6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우리 스스로 낮추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마냥 지켜보고 계시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우리를 높이신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또 이렇게 반문하지요. 아니, 도대체 어느 세월에 우리를 높여 주실 건데?

이에 대해서 일본 신개역 성경에는 이 ‘때가 되면’이라는 말씀을 ‘가장 좋을 때에’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참 대단히 인상적이지 않습니까.

어느 세월에 우리를 높여 주시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좋을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크게 높여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을 다시 볼까요?

요한복음 12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여러분, 우리가 우리 힘으로 자존심을 살리려고 해봤자 아무런 소용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한 알의 밀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지요.

그깟 한 알의 밀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그 한 알의 밀보다도 못한 알량한 자존심을 죽이고 인내라고 하는 제물을 주님께 바쳤을 때, 주님께서는 수많은 열매로 우리에게 갚아 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가 스스로 자존심을 죽이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순종하게 된다면, 때가 되었을 때,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좋을 때에, 마침내 주님께서 우리를 친히 일으켜 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크게 높임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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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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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2회 예수님이라는 이름의 길 - 이루리라선교회
2024년 9월 22일 설교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37번째 시간으로서 “예수님이라는 이름의 길”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오늘은 요한복음부터 보실까요?

요한복음 18장에 보시면 지금 유대인들에 의해 끌려 온 예수님과 총독 빌라도와의 대화가 나옵니다.

그 중의 일부를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8장 37절~38절 전반부
“37.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38.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진리에 대하여 증언을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이 진리에 속한 자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십니다.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예수님께 말합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여러분께서는 진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철학자가 답을 찾으려고 노력해왔습니다.

제 아련한 기억에 의하면 대학교 1학년 때 철학개론 중간시험인지 기말시험인지에서도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것이 문제였어요.


우선 세상적으로 본다면 <진리>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절대적인 정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경우라 하더라도 그 진리만 적용을 시킨다면 답을 얻을 수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뭐 어려울 것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아, 정말 힘들고 기운이 없을 때에는 고기가 진리다. 뭐 이런 말을 한다면, 적어도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자기가 힘들고 기운이 없을 때라면 무조건 고기만 먹으면 힘이 난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리고 또 이런 경우는 어떻겠습니까. 영화배우 A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한국영화라면 영화배우 A가 진리다. 라고 한다면 한국영화에서는 어떤 내용이든지 무슨 배역이든지 그 사람만 등장하면 흥행은 틀림없다……그런 뜻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진리라고 하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 이럴 때에는 이렇고 저럴 때에는 저러는 식으로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에요.

진리라고 하는 것은 때와 장소에 따라 그리고 경우에 따라 바뀌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어떤 때라 하더라도 바뀌지 않는 절대적인 정답이 바로 진리인 것이지요.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이지요?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길이십니다. 그 길이라는 것은 구원에 이르는 길,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이이라고 하는 뜻이지요.


예수님은 진리이십니다. 때에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 시대에 따라서 나라에 따라서 성별에 따라서 나이에 따라서, 어떤 때는 예수님이 정답이 되었다, 어떤 때는 정답이 아니게 되었다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나 불변의 정답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죽음, 곧 멸망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멸망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 그런 말이 있지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이런 생각은 우리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일본에 보면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을 흔히 사용하기도 하는데, 사실 이건 세익스피어의 희곡 제목에서 왔다고 하는 설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일본에서는 또 다른 말로 흔히 우리 식으로 하자면 “결과 오라이” 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뭐, 결과만 좋으면 만사 OK다. 라는 뜻입니다.

표현에는 조금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이와 같은 말들의 뜻은 다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과정이야 상관없어. 이쪽 길로 해서 가든 저쪽 길로 해서 가든, 그리고 수단과 방법이 중요한 게 아니야. 문제는 결과만 좋으면 돼.


그것이 바로 세상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어떻습니까. 과정이 상관 없어요? 아닙니다. 바로 그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어 외국에서 한국으로 온다고 한다면 비행기로 왔든 배로 왔든 간에 반드시 여권을 가지고 정해진 곳을 통해서 입국을 해야만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죠. 밀입국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범죄자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믿음에 있어서 들어가야 할 그 문이 어디라고 말씀하십니까.

요한복음 10장 7절~9절
“7.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구원 받을 양은 반드시 정해진 문을 통해서 들어가야만 하는데, 그 문이 어디냐 하면 바로 내가 문이다. 내가 구원 받을 양이 들어갈 바로 그 문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예수님의 문은 때와 장소나 경우에 따라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시대에 따라서 나라에 따라서 성별에 따라서 나이에 따라서 어떤 때는 예수님이 문이 되었다가 안 되었다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에 이르는 다른 길이나 문을 예비해 주시지 않았어요. 오로지 예수님이라는 길, 예수님이라는 문만 우리에게 예비해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우리에게 예외는 없습니다. 선택의 여지도 없습니다. 우리가 멸망이 아닌 구원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오로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하나님 나라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렇게 하면 왠지 그럴 듯하게 들리죠? 아니, 제가 드린 말씀이 틀리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여기서 멈춰버리면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저 막연하게 넘어가버리고 만다는 것이지요. 이제부터가 사실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에 이르는 길,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은 오로지 예수님 밖에 없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이라고 하는 길을 통해서, 그리고 예수님이라고 하는 문을 통해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구체적으로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 이제부터 우리는 예수님이라고 하는 길을 가기로 했어요. 예수님이라고 하는 문을 통해서 들어가기로 마음 먹었어요. 이는 말하자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되겠지요?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까.

이런 질문을 여러분께 드리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대답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 이 모든 설명들이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대단히 모범적인 대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 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여러분께 질문을 드립니다. 예수님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누구십니까’가 아니라 ‘무엇입니까’ 하는 질문이에요.

아, 물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이것이기 때문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면, 다시 질문을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입니까.

여기에 대한 질문은 요한복음 1장에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3절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이는 사실이지요.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시고 그리고 지금도 온 천하만물을 이 말씀으로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다음 구절 2절에서는 ‘그’라고 하는 단어가 나오지요.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등장하는 ‘그’가 누구시냐 하면 14절에 기록되어 있어요.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하시는데, 그 분이 그렇죠.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누구신가 하면 그 분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예수님이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그것은 단지 신약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만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하신 하나님 말씀,

더 나아가 성경 전체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한다면,

이 구약 39권 신약27권 총 66권에 담겨진 하나님의 완전하고도 유일한 성경 말씀을 믿고 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 길,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기쁘고 즐거운 길이라고 생각되십니까.

저는 이 예수님을 믿는 길, 믿음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제게 있어서는 상당히 외로운 길, 고독한 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는 그렇다고 무슨 감상적이거나 문학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름 아닌 성경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자, 예를 들어서 모세를 한 번 보겠습니다. 이제 그가 400여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자손 60만명, 이것은 성인 남자만의 숫자이고, 남녀노소 전체를 본다면 대략 200만명 정도였을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열 가지 재앙을 애굽에 내리셔서, 마침내 20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애굽에서 탈출 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이제 그 많은 무리들을 이끌고 나왔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앞에 홍해가 가로막고 있어요.


조그만 연못이나 호수라면 빙 돌아갈 수도 있겠지요. 시간이 허락된다면 배를 만들어서 건너갈 수도 있었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새가 없어요. 뒤에서는 애굽 정예부대가 추격해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다른 길로 가면 되지, 왜 그 길로 왔습니까. 모세가 길을 잘못 인도한 결과인가요?

아닙니다.


출애굽기 13장 18절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그 길은 모세가 자기 마음대로 간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따라서 간 길이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모세는 분명히 올바른 길을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믿음의 길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갔습니다.

그렇다면 앞길이 평탄했냐 하면 평탄은 고사하고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상황에서 그러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모세를 신뢰하며 담대하게 앞으로 나갔습니까.

그랬다면 좋겠습니다만, 실제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출애굽기 14장 11절~12절
“11.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이를 다른 말로 바꾸어 보면 어떻게 될까요.


야, 모세야. 너는 우리가 남의 나라에서 평생 종살이 하다가 죽게 내버려 두지, 왜 우리를 해방시켜서 우리가 큰 축복을 받게 만들었느냐. 말하자면 그런 뜻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지요.

여기에는 지금 성인 남자만 말을 했다고 되어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여자들도 포함해서 수십만 명이 한꺼번에 불평 불만을 토해냅니다. 왜 우리를 이끌어 내가지고는 여기서 죽게 만드느냐 하는 것이에요.


이때 모세는 말합니다.

출애굽기 14장 13절~14절
“13.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지금 모세는 뭐라고 합니까.

“자, 너희들 두려워 하지 마. 걱정하지 마.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거야!”


하지만 당시 무슨 마이크나 스피커도 없는 상황에서 이 모세의 외침이 과연 몇 명에게나 전파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 모세의 말이 들렸다고 해도 과연 몇 명이나 이 모세의 말을 믿었을까 하는 것이지요.


지금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200만명이라고 한다면 그 중의 글쎄요, 10%인 20만명은 믿었을까요? 아니에요. 저는 20만명은 고사하고 거의 모든 사람은 안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물며 홍해가 갈라져서 그 사이를 지나가요? 그런 일을 어떻게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나중에 보세요. 민수기 13장~14장에 의하면, 이제 가나안 땅 점령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도, 하나님 말씀대로 나가서 싸우자고 한 사람이 그 수많은 무리들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 단 두 사람 뿐이었지 않습니까.


홍해와 애굽 군대 사이에서 최대 위기를 맞은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을 본다면 이는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 1대 200만명입니다. 이 얼마나 고독한 상황이었겠습니까.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요셉은 어떻습니까.

그는 아무런 잘못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열 일곱살부터 서른 살까지 노예로서,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죄수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당시 요셉 주위에서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이는 99%도 아니에요, 100% 그가 나중에 애굽의 제2인자는 고사하고 감옥에서 나가게 되어 사람 답게 살게 될 것이라는 것조차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요셉이 불순종했습니까. 모세가 불순종했나요.

아니에요. 세상에 요셉이나 모세만큼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도 드물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들이 갔던 길은 대단히 외롭고 고독한 길이었습니다.

세상에 누가 고독한 길을 가길 원하겠습니까. 좀 내 주위에서 나를 격려해주고 칭찬도 해주고 그러면 참 좋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의외로 그런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분명 믿음의 길, 올바른 길을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구약을 불문하고 대부분 그 고독한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과연 왜 그런 것일까 하다가 문득 한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누가복음 6장 26절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참 묘하죠. 모든 사람이 나를 칭찬해주면 참 좋겠는데, 정말 참 살 맛이 나겠는데 말이에요.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예. 모든 사람들이 너희를 칭찬하면 그건 좋은 게 아니래요. 오히려 문제가 심각한 것이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내 주위 사람들이 다 나를 칭찬해요. 그것은 언제냐 하면 내가 올바른 일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세상적인 권세를 잡고 있을 때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내 일거수일투족을 칭찬해줍니다. 골프를 치면, 뭐 저는 골프를 치지는 않습니다만, 스윙을 한 번 할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뒤에서 사장님 나이스! 하고 외쳐 줍니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사람들이 굽신굽신 하고 설설 깁니다. 참 권력이라는 게 좋긴 좋은가봐요.

하지만 그것 만으로 그 사람이 정말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솔직히 얼마나 그 사람이 잘못하고 있으면 주위에서 그 사람에게 쓴 소리 하는 사람 하나 없겠어요.


그렇다고 또 오해하지 마세요. 무조건 주위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으면 그게 좋다는 게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문제는 기준을 어디에 두냐 하는 것이지요.

바울은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물론 내가 하는 일이 동시에 하나님께도 좋게 하고 사람들에게도 좋게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만, 그럴 수 없는 경우에는 비록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거나 비난을 받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성경말씀에 비추어서 내가 가는 길이 진정한 믿음의 길이라고 한다면, 담대하게 그 길을 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가는 믿음의 길은 때로는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 길은 아브라함이 걸어가고 요셉도 걸어가고 모세도 걸어가고, 그리고 다윗도 걸어가고 바울도 걸어갔던 길, 믿음의 선배들이 걸어갔던 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길이 다름아닌 하나님께로 이어지는 길, 예수님이라는 이름의 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아무리 힘들고 외로운 길이라 하더라도 성경말씀에 순종하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예수님이라는 이름의 길 위에, 담대하게 믿음의 한걸음을 내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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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1회 또 하나의 신앙고백 - 이루리라선교회
2024년 9월 15일 설교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 27절~29절
“27.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9.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36번째 시간으로서 “또 하나의 신앙고백”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 중에서 우선 27절~28절까지를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6장 27절~28절
“27.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 말씀, 어떻습니까. 여기에 보시면 예수님은 몇 가지 명령을 하십니다. 하나씩 볼까요?

첫째로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둘째로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
셋째로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라.
넷째로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선 원수란 어떤 사람을 가리킵니까. 그는 내가 잘 되기를 싫어하고 나를 방해하는 사람, 그리고 기회만 된다면 나를 해하려고까지 하는 사람이 바로 원수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미워하는 자나 저주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역시 하나를 가리키는 말, 즉 원수를 사랑하라, 선대하라, 축복하라,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 여기까지가 총론입니다. 전체적인 내용을 정리한 거예요. 이 말씀, 금방 머리에 안 들어올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다음에 오는 것이 각론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좀 기니까 오늘은 시간관계상 29절만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6장 29절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자, 우리에게도 익숙한 구절 아니겠습니까. 이 말씀은 마태복음에도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39절~40절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그렇다면 이 말씀에서 핵심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찌 보면 좀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간과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서 오늘은 확인하는 의미에서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물론 총론을 알고 난 다음에 각론으로 넘어오면 좋겠습니다만, 간혹 보면 세부적이고 구체적으로 기록된 각론을 알면 그 결과로 총론이 이해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 주님의 말씀을 자세하게 분석해보면 어떻습니까. 우선 너희는 나를 믿으면 뺨을 맞을 일은 없다? 그렇게 주님은 말씀하시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너희가 나를 믿는다 하더라도 뺨을 맞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말씀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다음 단계. 왜 뺨을 맞는 것일까요. 물론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하신 경우는 어떤 때라고 생각되십니까.

쉽게 말해서 뺨을 맞을 짓을 했을 때 맞았을 경우를 말씀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자신은 전혀 뺨을 맞을 짓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뺨을 맞았을 때를 말씀하고 계십니까.


이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자신은 전혀 뺨을 맞을 만한 짓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억울하게 뺨을 맞았을 때, 겉옷은 고사하고 값이 싼 속옷조차도 빼앗길 만한 짓을 한 적이 없는데도 빼앗기게 생겼을 때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총론에서 나오는 원수, 미워하는 자, 저주하는 자, 모욕하는 자에 대한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바로 정당하거나 합당한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모욕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죄를 지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나를 체포하는 경찰이나 나에게 형벌을 내리는 판사가 원수는 아니잖아요.

내가 누구한테 손해를 끼쳤어요. 예를 들어서 내가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100만원짜리 물건을 망가뜨렸어요.

그럴 경우 100만원을 물어내라고 하는 상대방이 또한 원수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내가 하나님 앞에서나 그 사람 앞에서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모욕하고 그런다면 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상대방에게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나는 전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나를 모욕하고 비난하고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니, 뭐 어쩌구 어째? 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해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재판이 있는 것이잖아요.

재판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결코 아니에요. 필요할 때는 해야죠.


하지만 그런데 말이에요.

이게 잘 안 통할 때가 있기도 한 것 같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나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결백함에도 불구하고 내 주장이 통하지 않는, 그와 같은 억울한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성경에도 그와 같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우선 야곱의 아들 요셉은 어떻습니까.

야곱은 아내 중에서 자기가 가장 사랑했던 라헬이 낳은 아들 요셉과 베냐민을 다른 아들들보다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두고 다른 형제들이 질투를 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아무런 잘못 없이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가는 노예상인에게 팔려버리고 말았어요.

창세기 37장 2절에 의하면 그의 나이 17살 때였습니다.


참 얼마나 기가 막힐 노릇입니까.

창세기 37장 36절에 의하면 애굽 왕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이 노예상인으로부터 요셉을 샀다고 합니다.

이제 그는 아무도 의지할 곳 없는 곳에서 그것도 그냥 객도 아니 노예로 살아가게 되었어요.

그 힘든 과정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신 덕분에 그래도 견딜 수 있었는데, 하지만 그의 고생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의 주인 보디발의 아내가 자꾸 그를 유혹해요. 당연히 요셉은 이를 거절하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유혹하는데 그래도 안 넘어가니까 끝내는 자기를 겁탈하려고 했다는 누명을 씌워서 감옥에 갇히게 만들고 맙니다.

아니, 인생이 꼬여도 어떻게 이처럼 꼬일 수가 있습니까. 요셉이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거친 후에 그는 나이 서른에 당시 최강국 애굽의 2인자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뭐냐 하면 요셉의 자세입니다.

형제들은 그를 미워했습니다. 저주했습니다. 모욕했습니다. 그러다 못해 자신과 피를 나눈 형제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렸던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세상에 이런 원수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은 어땠습니까.


17세 때 애굽으로 끌려와서 몇 년 동안 노예로 지내다가 몇 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연도는 나오지 않습니다만, 그가 애굽에서 노예로, 그리고 죄수로 지낸 13년~14년 동안 그가 그의 형제를 원망하고 보디발이나 그의 아내를 원망했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물론 한낱 노예가 무슨 말을 해 봤자 그런다고 풀어주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하늘을 원망하고 자기 신세를 원망하고 그럴 만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요셉이 그랬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다는 점은 대단히 흥미롭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 억울한 사람이 있지요. 그것은 바로 다윗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사울을 세우셨지만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리고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직 사울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이를 기뻐할 리가 있겠습니까. 사울은 아무런 잘못 없는 다윗을 죽이려고 오랫동안을 집요하게 쫓아다닙니다.

이러는 바람에 다윗은 어쩔 수 없이 동굴에 갇혀서 살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만, 그러나 다윗은 어떻게 합니까. 사울을 죽였나요.

아니요. 그에게는 사울을 죽일 결정적인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스스로 복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던 것이지요.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심판하시고 다윗은 아무런 흠이 없는 상태에서 이스라엘의 왕 자리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억울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무엘하 15장에 의하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다윗이 예루살렘을 버리고 도망치게 됩니다.

이 때에 많은 신하들이 다윗과 함께 했었습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 아들 때문에 도망쳐 나와서 피난을 가는 그 길이 얼마나 처량하고 비참했겠습니까.


그런데 사무엘하 16장 5절~12절에 보시면, 사울과 같은 집안인 베냐민 지파 시므이라는 사람이 저 쪽에서 피난 가는 다윗 일행을 따라가면서 돌을 던지고 먼지를 날리면서 큰 소리로 다윗 왕에게 저주했다고 합니다.

이를 보고 주위에 있던 신하들이 당장에 저 놈의 목을 베어 오겠다고 하자, 다윗 왕은 말합니다.


사무엘하 16장 10절~13절
“10.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11.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12.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13.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더라” 

다윗이 말합니다. 야, 그냥 내버려둬. 하나님이 시켜서 저주하게 하신 것인지도 모르잖아. 생각해봐. 지금 내 새끼도 나를 배반하고 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마당에, 사울과 같은 집안 사람이니 오죽하겠냐. 내가 억울한 것을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갚아 주실 것이니 그냥 내버려둬라.

지금 이러고 있지 않습니까. 참으로 다윗의 인내심은 놀라울 따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정리하면 어떻습니까.

요셉도 그렇고 다윗도 그렇습니다.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해하려고 하고 자신을 미워하고 저주하고 모욕하는 원수에 대하여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겼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요셉과 다윗은 그랬을까요.

그저 인생을 포기하고 자포자기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요셉과 다윗은 분명한 믿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자신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무슨 재판이나 그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살다 보면 우리 주변에서 크고 작은 다툼들이 일어날 수도 있잖아요.

주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모욕하고 비난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 그것은 바로, ‘인내’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이렇게 동영상 또는 음성이라고 해서 제가 모를 줄 알죠? 이 말에 대해서 ‘아멘’이 그리 쉽게 안 나오지 않습니까?

다시 한 번 해볼까요?


주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모욕하고 비난할 때에는 묵묵히 ‘인내’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아까보다는 조금 커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별로 큰 소리로 ‘아멘’이 안 나오는 것은, 뭐, 사실 솔직한 우리의 심정일지도 모릅니다.

자, 여기서 우리의 인내란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보지 않겠습니까.


모든 경우에 있어서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면, 이는 우리의 힘을 의지하는 교만함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 불신앙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솔직한 심정으로 보면요, 우리 주변에 정말 못난 사람들 많지 않습니까. 참 텔레비전을 보더라도요, 정치인들 보십시오. 여당이든 야당이든 누구든 간에 어쩜 저렇게 한심하고 못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많이 들지 않습니까.


하지만요,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는 어떨까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 사람들보다 잘났습니까. 우리는 우리 주변 사람들보다 뛰어납니까.

침착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전혀 그럴 것이 없어요. 오히려 우리보다도 뛰어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요즘 저는 스포츠 경기를 챙겨볼 여유가 없어서 잘 모릅니다만, 얼마 전에 보니까 한국이 어디랑 축구를 했는데 그 결과가 안 좋았나 보더라고요. 그래서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비난을 하고 비판도 하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만, 아니, 그래도 생각해보세요.


거기서 뛰고 있는 한국 선수들이요, 대한민국에서 축구 제일 잘하는 사람들 모아 놓은 거예요. 그 선수들한테 비난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아무리 축구에 자신이 있다 하더라도 거기서 뛰고 있는 국가대표 선수만 하겠어요?

그럼 또 어떤 분은 그러실지도 모르지요. 저 선수들은 밥 먹고 하는 게 축구잖아.

아니, 그러면 여러분이 회사원이라면 밥먹고 하는 게 회사일일 텐데, 그 일을 그럼 국가대표급으로 하고 계십니까. 뭐 그런 거잖아요.


그러니까 상대방이 누구라 하더라도 너무 그렇게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 이웃을 비판하고 비난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이웃을 다스리라고 지배하라고 굴복시키라고 말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로마서 12장 18절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예,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화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돈이나 선물을 주면 화목해질 수 있습니까. 밥을 많이 사주면 화목해질 수 있을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런 건 모두 일시적일 뿐이에요.

그렇다면 이 화목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바로 ‘인내’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욥기 16장 10절
“무리들은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나를 모욕하여 뺨을 치며 함께 모여 나를 대적하는구나”

정말 살다 보면 자기가 잘못한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환경이나 상황 때문에 수세에 몰리는 상황, 더 나아가 치욕과 모욕을 당하는 경우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뭐, 어째고 어째?” 하고 자기 힘으로 한바탕 발칵 뒤집어 놓겠습니까.


생각해보세요. 성경은 여러분의 정당성을 여러분의 힘으로 주장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라고 하셨다고요? 예, 화목하라고 하셨잖아요.

그 때 아무리 여러분이 옳다고 해도, 두들겨 패고 뒤집어 놓고 난리를 치고 그렇게 해버리면 어떻게 이웃과 화목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힘을 의지하지 않고 내 힘으로 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된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또 하나의 신앙고백, 인내라는 무기, 아니, 인내라고 하는 제물을 주님 앞에 올려 드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12장 16절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요즘은 한자어를 어려워하시는 분들도 계시기 때문에 현대인의 성경판도 보시겠습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잠언 12장 16절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터뜨리지만 슬기로운 자는 모욕을 당해도 참는다.”

미련한 자는 당장 그 자리에서 분노를 폭발 시키지만 슬기로운 자, 지혜가 있는 자는 수욕, 즉 모욕을 당한다 하더라도 참는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요? 예, 그 억울하고 원통한 내 심정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신다고 하는 믿음을 갖는다는 것, 그것이 바로 놀라운 신앙고백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억울하십니까. 주님이 알고 계십니다.

원통하십니까. 주님이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주님께서 모두 갚아 주실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믿으니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렇죠. 바로 인내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아무리 억울하고 아무리 원통하고 아무리 모욕적인 일을 겪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힘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우리 주님께는 ‘인내’라고 하는 이름의 놀라운 신앙고백을 올려 드리고, 우리 이웃과는 ‘인내’로 말미암아 기쁨으로 화목을 이루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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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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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0회 예수님을 믿고 - 이루리라선교회
2024년 9월 8일 설교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5절~17절
“15.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6.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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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35번째 시간으로서 “예수님을 믿고”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실까요?

누가복음 18장 15절~17절
“15.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6.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마태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13절~15절
“13.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15.그들에게 안수하시고 거기를 떠나시니라”

이 두 기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생각할 수가 있겠지요.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전하고 계셨을 때에 사람들이 아이를 좀 만져 달라고 하면서 예수님께로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왔나 보죠?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아이들에게 안수기도를 해 주셨나 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보고 제자들이 화를 냈대요. 아니, 왜 애들을 데리고 오냐 하는 것이죠. 그러자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십니까.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라고 하셨다고 하잖아요.


자, 우선 이 부분만 먼저 살펴볼까요.

당시에는 여자와 미성년자에 대해서는 분명한 차별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병이어의 기적 있잖아요.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인데, 이에 대한 기록을 보면 흥미롭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1절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모든 성경이 그렇습니다만, 특별히 마태복음을 비롯해서 마가, 누가, 요한과 같은 사복음서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무게를 두고 기록된 책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과 그 행적을 찬양하기 위해서 기록된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도 뭐 그렇잖아요. 무슨 행사를 하면 그 행사에 참가한 사람 수는 그 주최측에서는 조금이라도 좀 더 많이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복음서 기자도 이왕 예수님의 놀라운 행적을 기록하려고 했다면, 뻥튀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여자와 아이들까지 수에 넣어서 조금이라도 더 많이 보이게 하려는 것이 자연스러울 거잖아요.

신학자들에 의하면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하면 당시에 모였던 사람들은 모두 15,000명에서 20,000명이었을 것이라고 추산합니다.

이게 무슨 거짓말을 하자는 것이 아니잖아요. 분명 여자와 어린이들도 보리떡과 물고기를 먹었을 것이고, 어린이들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여자들은 미성년자들 만이 아니라 어른들도 대다수 포함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도 웬만한 남자들 못지않게 먹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그런데도 이 마태복음 기록에 보면 여자와 어린이를 제외한 숫자가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는 단순한 남존여비에서 비롯되었다기 보다는 당시 상황으로 보자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당시에는 국력, 즉 나라의 힘이라고 하는 점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당장 전쟁에 투입할 수 있는 인구를 가리켰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고 있었을 때에 사람들이 아이를 데려오고 그러니까 제자들이 이를 제지했다는 일은, 특히 당시로 본다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하지만 이를 보시던 예수님은 오히려 아이들이 예수님께로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지요.

자, 여기서 한 가지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실제로 들었던 이야기인데, 이 목사님이 다른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계실 때였다고 합니다.

이제 이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어떤 어린아이 하나가 강단에 올라왔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꾸 자기 주변에서 왔다 갔다 거리다 못해, 자기 바지도 잡아당기기도 하고 그랬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부모나 그 교회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앉아 있더래요. 어떤 사람은 웃으면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이 목사님께서는 그 때 상황을 말씀하시면서, 속으로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른다고 하셨어요.

저는 처음에 이 목사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아니, 성경에도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께 아이들이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으니까, 설교할 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강단에 올라왔다 하더라도 그냥 내버려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자, 이와 같은 상황에서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일 같습니까.

예수님도 아이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으니까, 설교할 때 아이들이 강단에 올라가서 목사님한테 가는 것도 금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내버려두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당장에 가서 아이를 데리고 와야 하겠습니까.

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건성으로 읽어서는 안 되고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자세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누가복음 18장 15절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그리고 마태복음도 볼까요.

마태복음 19장 13절
“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여기에 보시면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첫째로 그냥 애들이 자기들끼리 막무가내로 와~ 하고 몰려왔대요?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어른들이 자기 아이를 데려왔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아이들이 왔다고 해도 예수님한테 무슨 장난을 친다거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이 둘째입니다만, 그것은 바로 목사님은 예수님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던 가장 큰 핵심은 바로 예배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시나그고라고 하는 유대인 회당의 경우를 본다면 여기에는 만 13세 이상이 되어야지만 출입을 할 수 있었는데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예수님 앞에 나와서 예배 드리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지요.

그래서 지금도 교회에 보면 무엇이 있습니까.

그렇죠. 바로 주일학교입니다.


어린 아이들이라고 해서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어려서부터 말씀을 가르치고 예수님을 알도록 하라는 주님의 말씀으로 이해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니까 혹시 여러분 교회에서 목사님이 말씀을 하시는데 애들이 올라가서 왔다갔다 거리거나 하면, 뭐, 그렇다고 혼낼 필요까지야 없겠지만 재빨리 데리고 나오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어서 1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7절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시잖아요.

이를 뒤집어 보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 들여야만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성경에 있는 말씀이 모두 다 믿어 지십니까.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고, 성난 파도를 잠잠하게 하셨고, 앞을 볼 수 없는 바디메오의 눈을 여셨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것이 믿어 지십니까.

그 뿐만이 아니지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전세계를 홍수로 심판하셨고, 홍해를 가르시고, 풀한포기 나지 않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수많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먹이셨다는 것이 믿어 지십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대신해서 벌을 받게 하시고는 다시 살아나시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 주셨다는 것이 믿어 지십니까.

예, 아멘. 여러분의 ‘아멘’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성경무오에서 시작합니다. 성경무오, 즉 성경에는 오류가 없으며,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부터 요한계시록 22장 21절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까지 모두가 유일하고도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그 믿음이 우리 신앙의 핵심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아직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어떨까요.

자, 여기 지금 눈앞에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서 있다고 해보죠.

그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셔서 수십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거기를 건넜대요.”

그럼 50대 사람은 뭐라고 하실까요.

“에이, 말도 안돼.” 그러지 않겠어요?


그럼 40대는요? 예, 역시 “에이, 말도 안돼.”

30대, 20대, 그리고 10대 청년도 이 말에 역시 “에이, 말도 안돼.” 그러겠지요.

하지만 아직 초등학교에도 들어가지 않은 유치원생 정도의 아이에게 이 말을 하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있잖아, 하나님이 홍해라고 하는 큰 바다를 가르셔서 수십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거기를 건넜대.”

그럼 아이들은 뭐라고 할까요.

“우와, 정말이요?” 그러지 않겠습니까.

물론 요즘 아이들은 옛날과 달라서 어떨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서 어른들보다는 그 말을 믿는 아이들이 더 많지 않겠어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벌을 받아서, 우리의 죄가 용서받게 되었어요.”

이 말을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했다고 해도 역시 반응은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50대, 40대, 30대, 20대, 그리고 10대까지 그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에이, 말도 안돼”일 것입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이었다면 뭐라고 그런다고요?

예, “우와, 정말이에요?” 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굳이 아이다 어른이다 하는 것이 없이,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에이, 말도 안돼”와 “우와, 정말이야?”라고 한다면 어느 쪽이 구원을 받겠냐는 것이지요.


성경 말씀을 들었을 때 “에이 말도 안돼”가 아니라 “우와, 정말이야? 멋지다!”로 받아들이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저에 대해서는 어떨 것 같습니까. 여러분이 보시기에 저를 보신다면 믿음이 아주 좋아서 무엇이든지 처음부터 아무런 의심없이 믿었을 것 같습니까.

예, 그렇게 봐주신다면 좋게 봐주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감사를 드립니다만, 하지만 저는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적으로 본다면 저는 마치 도마와 같은 믿음이라고나 할까요. 안 보고는 안 믿는, 그와 같은 사람이 바로 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아니, 그렇잖아요. 세상적으로 본다면 성경에 나와 있는, 그런 황당한 말들을 어떻게 그냥 받아들이라는 것입니까.

어찌 보면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저를 여기까지 인도하시기까지 얼마나 많이 힘드셨을까 하는 마음도 가져봅니다.

그리 오랜 세월은 아닙니다만, 지금 여기까지의 제 삶을 뒤돌아본다면, 제 솔직한 심정, 그것은 바로, 그래, 홍해가 갈라지고도 남았겠구나,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바디메오가 눈을 뜨고 죽은 자도 살아났겠구나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요? 예, 제 삶을 이렇게 좀 뒤돌아보니까 홍해가 갈라질 정도로 놀랍고 감사한 일들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제가 일본에 있다가 한국에 온지 이제 한 달 정도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만, 제가 이렇게 한국에 와서 TV를 보니까 방송채널이 얼마나 많은 지 몰라요.

그 중에서 여러분도 보신 분이 계신지 모르겠어요. 얼마 전에 어떤 토크쇼를 보니까 역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장미란 선수가 나오더라고요. 지금은 차관님으로 계신가? 그런 것 같은데, 방송을 촬영할 때에는 교수님이셨을 때인가봐요.

이 장미란씨가 역도를 시작한 것이 중학교 3학년 때부터라고 합니다. 그 때 사실 중3 여름방학 때 한 번 역도장에 갔었는데, 창피해서 울고 나와서 결국 겨울방학 때 다시 가서 시작하게 되었다고 해요.

그래서 사회자가 하는 말이, 만약에 과거로 다시 돌아가서 그 때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뭐냐고 물었더니 이 장미란씨가 하는 말이 참 흥미로웠습니다.

그 때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 그것은 바로 “겨울방학이 아니라 여름방학 때 시작하지 그랬어” 라는 말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왕 시작할 거 조금 더 일찍 시작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는 지금에 와서 무슨 가식이나 꾸며낸 말이 아니라, 정말 성경이 그야말로 하나님의 말씀,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는 하나님 말씀으로 믿어집니다만, 이 사실을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내 인생도 조금은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의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지 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기록합니까.

갈라디아서 4장 3절~5절
“3.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4.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성경말씀, 복음이 초등학문이 아니라 바로 세상적인 학문이 초등학문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얼마 전 뉴스에 보니까 어느 창고에 화재가 나서 우선 경찰이 출동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활활 타고 있는 그 창고를 경찰이 보니까 2층인지 3층인지 하는 그 높은 창문에 초등학생 아이가 하나 있는데 창문을 열고 살려 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경찰이 보니까 소방차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불길이 세서 사람이 그 안으로는 도저히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대요.

그래서 밑에서 이 경찰이 그 위에 있는 아이를 보고 “아저씨를 믿고 뛰어!” 그랬다는 것이에요.


당시 아이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었겠습니까. 가만히 있으면 100프로 죽어요. 그래서 조금 머뭇머뭇 거리더니만 용기를 내어서 뛰어내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밑에 있던 경찰 두 명이 성공적으로 받아서 무사히 구해냈다는 것이지요.

글쎄요. 만약에 어른 같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자기 몸무게를 생각하고 높이를 생각하고 중력가속도를 생각하고 밑에 있는 경찰 몸집을 생각하고 그러면 내가 만약 뛰어내린다고 하면 무사할 것인지 의심을 가져요.


그렇게 마냥 시간만 보내고 결국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죠. 큰일 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도행전 4장 11절~12절
"11.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 뿐입니다. 말씀 뿐입니다.

여러분, 이왕 믿을 것, 조금 더 일찍 믿읍시다.

이제 주님 앞에서 어린 아이와 같이 의심 없는 마음을 가지고는, 겨울방학까지 기다리지 말고, 여름방학 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바로 오늘 지금 이 순간부터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른 세상 사람이 아닌 예수님을 믿고, 그 믿음 속으로, 그 말씀 속으로, 그리고 그 복음 속으로 뛰어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축복, 누르고 흔들어 넘치는 축복을 모두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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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9회 배와 아버지 - 이루리라선교회
2024년 9월 1일 설교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21절~22절
“21.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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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34번째 시간으로서 “배와 아버지”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실까요?

마태복음 8장 21절~22절
"21.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보시면 여러분께서는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말씀드리기를, 지금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을 치르고 난 다음에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아버지 장례식에 가기보다는 나를 따르라……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는 너무 심한 말씀처럼 들리지 않으세요? 물론 주님을 따르는 것은 중요하지요.


지금 주님께 말씀을 드리고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그도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자가 된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장례식을 치르고 오겠다고 하는데 그걸 막으셨다?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는 너무나도 매정한 말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혹시 나와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이를 슬퍼하는 것이 성경적이지 않은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23장 2절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여기에 보시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자신의 아내인 사라가 세상을 떠났을 때 슬퍼하며 애통해 했다고 적혀 있지 않습니까.

성경에 구체적인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평생을 아브라함과 함께 살아온 사라도 나중에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천국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나와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에 대해서 슬퍼하고 애통해 하는 것은, 이는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겠다고 하잖아요. 아버지 장례 때문에 예수님을 안 따르겠다는 것도 아니고, 장례를 치른 다음에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는데도 이를 막으셨다고 한다면 납득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해서 오해가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구약에서도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장례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점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막 장례를 치러야 할 상황이 아니었다고 해야 하는 것이지요.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까. 믿음을 가지고 싶고 교회에 나가려고 해도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바로 집안사정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자기가 종손이고 매년 명절 때나 제삿날에는, 조상님 영정이나 위패를 모셔 놓고 차례나 제사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돌아가신 조상님의 뜻을 기린다? 그것 만이라면 그나마 나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게 차례상이나 제사상을 차려 놓으면 조상님의 영이 와서 그 음식을 먹고는, 그렇게 잘 모셔 놓으면 그 조상님들의 영이 자기들을 지켜주고 복을 가져다 준다고 믿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사상은 일본에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오봉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는 간단히 말해서 조상님들의 영이 기간에 불러 들려서는 극진히 대접을 해서 돌려보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력 8월 중순 때가 되면 오이와 가지에 각각 이쑤시개 같은 것 네 개를 꽂아서 동물인형을 만듭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오이로 만든 인형은 말을 나타내고, 가지로 만든 인형은 소를 나타내요. 그래서 조상님이 올 때는 말을 타고 빨리 오시고, 그리고 대접을 받고 가실 때에는 소를 타고 천천히 가시라는 뜻을 담아서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세상적으로 본다면 죽은 사람이 다시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그러면 성경은 어떻습니까.

성경을 보면 한 번 세상을 떠난 사람이 다시 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낸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아들 이삭의 꿈이나 생시에 다시 나타나서 뭐라고 말을 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성경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부자는 살아있을 때에는 아주 호화스러운 생활을 했습니다. 반면에 나사로의 생은 아주 비참했어요. 그런데 이제 둘 다 죽은 다음에 보니까 부자는 불구덩이에 떨어져서 괴로워하고 있는 반면에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서 위로를 받고 있었어요.

이 때 이 부자가 하는 말을 잠시 들어볼까요?


누가복음 16장 27절~31절
“27.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자기는 살아있을 때에 이렇게 될 줄은 모르고 자기만 생각하며 호의호식 하고 살았는데, 죽은 나사로가 아직 살아 있는 자기 형제들한테 가서 증언하게 해서, 적어도 그들이 죽은 다음에는 자기처럼 고통을 받지 않게 해달라고 아브라함에게 간청을 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그들에게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의 모세는 ‘율법’을, 그리고 선지자는 ‘예언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율법과 예언서는 무엇을 뜻합니까.

그렇죠. 그것은 바로 성경을 뜻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굳이 천국에 있는 나사로가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한테 가서 말을 하지 않더라도 이미 이와 같은 내용에 대해서는 성경에 다 적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이 부자는 끝까지 우깁니다.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죽은 사람이 나타나서 말을 하면 믿고 회개할 거라니까요.

여기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단호합니다. 그들이 성경을 믿지 않는다고 한다면, 죽은 사람이 백날 가서 말을 해 봤자 어차피 안 믿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예요? 예, 목적이 어떻든 간에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 다시 가서 말해줘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어떤 분은 죽은 사무엘이 나타난 적이 있지 않냐고 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지난 제432회 2024년 2월 18일자 ‘세례요한 입문’이라는 설교에서 자세히 설명 드렸습니다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사무엘이 죽고 난 다음에 무당을 통해서 나타난 사무엘은 사무엘이 아니라 지옥에서 올라온 마귀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무엘상 28장에 등장하는 사무엘은 진짜 사무엘이 아니라 마귀가 사무엘인 척하고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이 말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냐 하면 성경적으로 본다면 한 번 세상을 떠난 사람이 아직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 앞에 나타나는 일은 없고, 만약에 아무리 그런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그것은 정말로 그 돌아가신 사람이 아니라, 마귀가 그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가 있다고 성경은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철저하게 살아있는 사람 위주로 기록되어 있어요. 다시 말해서 이미 죽은 사람,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에 대해서 성경은 전혀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시편 88편 10절~11절
“10.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셀라)
11.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죽은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까. 죽은 사람이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오로지 살아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이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도구로서 쓰임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한국에 와서 이렇게 전도지를 돌리고 있습니다만, 일본에 있을 때에도 전도지를 들고 집집마다 돌리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면 주위에서 묘지를 볼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만, 일본의 경우를 보면 동네 여기저기에서 공동묘지를 볼 수 있어요. 그럼 전도지를 들고 다니면서 제가 그 묘지에 묻힌 사람들한테 전도지를 나누어 주겠습니까.

아니요. 안 나누어 줍니다. 살아생전에 그 사람이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 부자였는지 가난했는지, 많이 배웠는지 아닌지, 그리고 그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이었는지 간에 저는 전도지를 나누어 주지 않지요.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이미 죽은 사람은 백날 복음을 전하더라도 읽을 수도 없고 받아 드릴 수도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살펴볼까요.

마태복음 8장 21절~22절
“21.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한 제자는 지금 예수님께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믿고 따라야 하는 줄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 아버지 때문에 제가 지금 당장 따를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제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 믿어도 되겠습니까.

사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구원이나 복음에 관심을 두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죽은 자가 아니겠느냐. 죽은 자들은 내버려두고 너는 살아 있는 하나님을 따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20장 38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하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10장 14절~15절
“14.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한복음 10장 25절~27절
“2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26.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예수님은 선한 목자라고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을 위해서 목숨까지 버린다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하지면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양을 위해서 목숨까지 버린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리 선한 목자라 하더라도 자기 양이 아닌 다른 양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까. 만약에 남의 양을 지키려고 하다가 정작 자기 양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기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아무리 선한 목자라고 해도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은 무엇보다 자기 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선한 목자가 자기 양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버린 것 같이, 예수님도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는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또 오해가 없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 아버지를 중요하게 여기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과 반대되는 구절을 한 번 살펴볼까요.

마태복음 4장 21절~22절
“21.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형제인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배를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비록 여기에는 ‘아버지를 버려 두고’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정말 갑자기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나왔겠습니까. 만약에 그랬다면 하루아침에 두 아들이 행방불명이 된 것이니 그 집에서는 난리가 났겠지요.

이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렸을 것입니다.

아버지, 이제 제 모든 일생을 걸고서라도 따라야 할 분은 만났습니다. 저는 이제 고기잡이를 그만두고 그 분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면 이 말을 들은 그의 아버지는 말했겠지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너네가 평생동안 고기잡이 밖에 안 해봤는데, 이걸 안 하면 어떻게 먹고 살려고 그래? 그 사람 따라 다니면 월급이라도 준다디?

그래, 좋아, 백 보 양보를 해서 그 예수인지 뭔지를 따라간다고 하자. 아니, 그래도 너희 형제 중 적어도 한 녀석은 남아서 집안을 돌봐야 할 것 아니냐.

뭐, 이런 말을 하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버지를 설득해서 결국 예수님을 따라 나서게 되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개역개정이나 개역한글에는 <버려 두고>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에는 <남겨 두고>라고 되어 있어요. 저는 이쪽이 더 본래 뜻에 가깝지 않을까 합니다.

사실 이 구절을 보면 참 의미심장합니다. 그들이 버려 둔 것, 아니, 그들이 남겨 두고 떠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죠. 바로 배와 아버지였습니다.


배라고 하는 것은 세상적인 생계수단, 말하자면 재물을 뜻하고, 아버지는 세상적인 구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이 두 가지를 미련없이 남겨두고 길을 나섰던 것 아니겠습니까.

이 배와 아버지. 사도 바울은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에베소서 4장 21절~24절
“21.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님의 가르침이 우리 안에 있다고 한다면 이제 남겨둘 것은 남겨두고 믿음의 길을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 욕심과 구습을 대단한 금과옥조라도 되는 것처럼 끌어안고 그 자리에 머물러 계실 작정이십니까.

요한계시록 3장에 보시면 주님은 사데교회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 1절~3절
“1.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우리가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니고 직분을 많이 받았다 하더라도 욕심과 구습에 사로잡혀 있으면 이는 결코 살아있는 믿음이 되지 못합니다. 이미 죽은 믿음인 것이지요.

주님의 말씀을 받아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열매를 맺을 수 있으나, 죽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것도 못합니다. 말 그대로 죽은 나무인데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더 늦기 전에 어서 회개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버려야 할 것은 빨리 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배가 침몰하고 있는데 욕심과 구습들을 버리지 못하고 붙잡고 있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얼마전 인터넷에서 흥미로운 말을 들었어요. 그것은 바로, 교회 안 갈 핑계는 죽을 때까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참 맞는 말 같아요.

하지만 교회에만 다닌다고 구원을 받습니까. 욕심과 구습을 안 버릴 핑계 또한 죽을 때까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것들을 버리지도 못한 채 교회에만 다닌다고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이사야 1장 12절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무작정 교회에만 다닌다고 능사가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른다면, 우리가 주님의 양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온전한 믿음을 갖는 것, 욕심과 구습을 버리고 새사람을 입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는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고 주님을 따름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죽은 자가 아닌 진정으로 살아있는 자, 주님의 진정한 양으로 거듭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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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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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8회 믿음을 보겠느냐 - 이루리라선교회
2024년 8월 25일 설교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8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33번째 시간으로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른바 불의한 재판관이라는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이라 하더라도 자주 그에게 가서 부탁을 하면 들어주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 말씀이죠.


누가복음 18장 8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이 말씀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어떻게 됩니까. 그 원한을 풀어줄 것이다. 그것도 언제요? 예, 속히! 지체없이 즉시 풀어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자, 한 번 생각해보죠.

우리가 기도를 해요. 그것도 간절하게 기도를 합니다. 그랬더니 그 때마다 속히, 지체없이, 즉시 응답을 받게 된다면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겠습니까. 줄어가겠습니까.

당연히 늘어나겠지요. 그렇잖아요. 아무리 기도를 해도 응답을 못 받는다면 믿는 사람들은 사라지겠지만, 기도를 하기만 하면 즉각즉각 응답을 받게 된다면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지 않겠어요?

그런데 이상하지요? 오늘 본문 후반부는 어떻습니까.


누가복음 18장 8절 후반부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기도 응답을 빨리 받게 되면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어서, 장차 인자가 올 때, 즉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에는 세상에서 수많은 믿음을 보시게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앞뒤가 맞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속히 응답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믿음에서 멀어져서 결국에는 믿음을 찾아보기 힘들게 될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 그리고 기도의 능력을 믿는 사람들은 특별히 자신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간절하게 기도를 하지요.

제발 이 어려움이 사라지고 고난이 끝나고 모든 문제들이 속히 해결되기를 간절하게 바라면서 기도를 드리지 않겠습니까.

분명 성경에서는 속히 응답을 해 주신다고 했는데, 그런데 가끔 보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속히 응답을 안 해주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한 번 고난을 받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각자의 인생 속에서 크고 작은 고난을 겪게 됩니다. 성경에 보시더라도 여러 고난을 겪은 사람들은 많이 등장합니다만, 그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욥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욥기 1장에 보시면 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욥기 1장 1절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성경에 수많은 사람이 등장을 한다고 하지만, 이 정도로 칭찬을 받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해요. 그는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는 하루아침에 사람들이 달려들고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고 그러면서 가축과 종들이 죽어 버리더니, 끝내는 큰 바람이 불어오더니만 집이 무너져서 그의 자녀들이 모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이런 날벼락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욥기 2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욥기 2장 7절~8절
“7.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8.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참 얼마나 끔찍한 상황입니까.


이른바 ‘만신창이’라는 말이 있지요? 이를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됨>이라고 나와 있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발바닥에서 정수리 머리 끝까지 종기가 나서 그것이 가려우니까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벅벅 긁고 있었다고 하니, 문자 그대로 온몸이 상처 투성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도 하루아침에 전재산과 자식들을 잃고, 뿐만 아니라 건강까지도 잃게 되어 말 그대로 죽음보다도 더한 괴로움을 겪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욥에게 재앙이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친구들이 모였는데, 그 때의 상황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욥기 2장 12절~13절
“12.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13.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친구라고 한다면 서로 가까운 사이이고 얼굴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텐데도 욥의 모습이 그 지경이 되니까 욥인지 아닌지도 알아보기 어렵게 되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결국 그 친구들은 그 참상을 눈앞에 두고 7일 동안이나 차마 말을 걸지도 못했다고 성경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욥도 이처럼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고난을 당했는데, 그렇다면 그 믿음도 좋은 욥이었으니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를 했겠어요.

자, 여기서 저는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그런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어요.

그것은 바로 욥이 이처럼 끔찍한 고난, 성경에 보더라도 전무후무한 고난을 당하는 기간이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얼마 동안이나 이처럼 극심한 고난을 당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요즘 전해드리고 있는 말씀이 주제 설교였다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게 아니라 강해 설교이기 때문에 비록 구약이긴 합니다만, 우리 함께 공부하는 의미로 이 점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욥이 고난 당한 기간이 과연 어느 정도 될까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그러자 흥미로운 글을 찾을 수 있었는데, 거기에 보니 그 기간이라고 하는 숫자가 적혀 있더라고요.

우선 이를 근거로 드는 구절이 욥기 42장 16절입니다.

욥기 42장 16절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자, 현재 복음주의 개혁주의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한글 개역개정 성경을 중심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욥기에는 과연 욥이 몇 살때부터 고난을 겪기 시작해서 몇 살에 그 고난이 끝났는지, 그리고 몇 살까지 살았는지에 대한 내용이 없어요.

그렇다면 이 42장 16절 구절을 가지고 어떻게 그 기간을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 그 글에서는 70인역 성경을 제시합니다.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현재 성경은 구약이나 신약 모두 원본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오래 전에 발견된 성경이라 하더라도 모두 사본이요 번역본에요.

그런데 그 번역본 중에는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이른바 70인역이라는 성경이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이 70인역 성경이 이단이다 뭐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위경이다 외경이다 하는 말들도 있습니다만, 오늘 이 시간에는 거기까지 들어가지는 않겠고, 다만 쉽게 말씀을 드린다면 70인역은 성경의 수많은 번역본 중 하나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70인역에 의하면 똑같은 욥기 42장 16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는 거예요.

70인역 욥기 42장 16절
“그리고 욥은 고난 시작할 때부터 170년을 더 살았고 따라서 그는 모두 240년을 향수하고 죽었다”

앞서 살펴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역개정 성경과 비교해보면 어떻습니까.

개역개정 욥기 42장 16절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70인역 욥기 42장 16절
“그리고 욥은 고난 시작할 때부터 170년을 더 살았고 따라서 그는 모두 240년을 향수하고 죽었다”

이 똑같은 욥기 42장 16절을 두고 어떻게 해석을 하냐 하면, 개역개정에 나와 있는 140년은 ‘그 후에’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이는 ‘고난이 끝난 후에’라는 뜻이니 욥은 고난이 끝나고 나서 140년을 더 살았다는 뜻이고, 70인역 욥기 42장 16절에 의하면 고난 시작할 때부터 170년을 더 살다가 240년을 향수하고, 그러니까 240세에 사망했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 두 구절을 종합해보면 욥은 사망하기 170년 전에 고난이 시작해서 사망하기 140년 전에 고난이 끝났다는 것이에요.

이를 쉽게 말하자면 240세에 사망한 욥이 죽기 170년 전이라고 한다면 70세가 되잖아요. 그러니까 70세 때 고난이 시작해서, 240세에 사망한 욥이 죽기 140년 전, 그러니까 100세 때 고난이 끝났다는 것이 되니까 욥이 고난을 겪은 기간은 70세 때부터 100세 때까지 30년간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주장을 들으시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 그런 새로운 해석이 었었구나! 하고 감동이 되십니까.

저는 이와 같은 주장을 보고 대단히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해요.

무엇보다 성경 욥기 본문과 대조해 본다면 적지 않게 부자연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터넷에 찾아보니까 이렇게 적혀 있는 사이트가 의외로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어로도 검색을 해 보았는데, 놀랍게도 한글에 있었던 내용과 거의 토시 하나 틀리지 않은 문구가 나왔습니다.

도대체 어느 쪽이 어느 쪽을 보고 베낀 것인지, 시작은 한국이 먼저인지 일본이 먼저인지, 아니면 영미권에 있는 주장을 단순히 번역해서 서로 베낀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만, 그것을 마치 자기가 발견한 진리인 것처럼 적어 놓은 글들을 보니까 사실 조금 씁쓸했습니다.


자, 일단 본문에 대한 검토를 해보도록 하지요.

42장까지 있는 욥기 본문에 의하면 우선 욥기 1장에서 욥에게 재앙이 닥칩니다. 그리고 친구들이 와서 7일 동안 머무르고 있다가 3장부터 대화가 시작합니다.

이 대화는 무려 37장까지 문답 형식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37장에서 이 대화가 끝나고는 38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시작되고 42장에서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넘치는 축복을 받는 것으로 끝이 나지요.

자, 그런데 말이에요. 이 기간을 두고 30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디에 30년이라는 공백이 생기느냐 하는 것이지요.

욥기 2장에 보시면 그의 친구들이 와서는 대화가 이어지게 되는데, 여기에는 몇 년에 한 번씩 와서 대화를 했다는 장면이 안 나옵니다. 물론 긴 대화이긴 합니다만, 거의 끊이지 않고 한 번에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욥기 마지막 장인 42장 7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직접 욥의 친구들에게 말씀하시는 장면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에는 그 자리에 욥과 함께 방금까지 그와 대화를 하던 친구들도 그대로 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와서는 7일 후에 대화가 시작되고,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말씀이 시작되시는 42장 중반까지는 끊이지 않고 한 번에 이루어진 일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언제 왔냐 하는 것이 문제인데, 과연 욥에게 재앙이 시작하고 30년 뒤에 친구들이 나타났다?

물론 지금처럼 인터넷은 고사하고 전화도 없었던 시대에, 욥이 지금 괴로워하고 있다는 소식이 신속하게 전해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친구라잖아요. 그러면 어느 정도 왕래도 있던 가까운 사이 아니었겠어요?


욥기 2장에 의하면 친구들이 가엾은 욥을 위로하기 위해 왔다고 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욥에게 재앙이 닥치고는 30년이 지나고서 나서야 위로하려고 왔겠냐 하는 것이지요.

애초에 이 주장을 의심하게 된 계기는, 아니 생각해보세요. 아무리 번역본이라도 그렇지, 똑같은 욥기 42장 16절을 두고 하나는 고난의 시작이고 하나는 고난의 끝이 기록된 구절이다?

여기서부터가 좀 미심쩍지 않겠습니까.

사실 성경에서 연대나 나이에 대한 기록은 세심하게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다음 구절은 어떻습니까.

사무엘상 13장 1절
“사울이 왕이 될 때에 사십 세라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이 년에”

여기에는 사울이 왕이 될 때 나이가 사십 세라고 되어 있는데 대부분의 다른 사본에는 삼십 세에 왕이 되었다고 되어 있어요. 외국 번역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이를 근거로 해서 사울은 삼십 세에 사십 세까지 왕으로 있었다?


물론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만, 앞서 욥기에 대한 해석은 마치 그런 식, 한 구절을 가지고 두 가지 식으로 해석을 해서 끼워 맞추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 그렇다면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욥이 고난을 당한 기간은 어느 정도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정확한 숫자는 아니지만 대략적인 단서는 찾을 수 있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어디서 찾을 수 있었을까요. 70인역 성경에서요? 아니면 다른 어떤 고대 자료에서요?

아니에요. 어디서 찾을 수 있었냐 하면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본문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뭐예요? 예, 우리는 더욱 성경 본문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어떤 죄에 대해서 처벌하지 말아야 한다, 라고 하는 책들이 세상에 아무리 많이 있다 하더라도, 현행법 법전에 <처벌해야 한다>라고 규정되어 있으면 처벌을 받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현행법 법전이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경,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 성경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도 좋고, 금식도 좋고, 방언도 좋고 은사도 좋습니다만, 무엇보다 우리 믿음의 핵심인 성경말씀을 더욱 가까이 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어디를 보면 욥이 고난 당한 기간을 대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는가 하면, 바로 욥기 7장 3절입니다.


여기에 보시면 욥은 그의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욥기 7장 3절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욥은 고난 한 가운데 있는 와중에 그의 친구들에게 자신이 고통을 받고 있는 기간에 대해서 분명 ‘여러 달째’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욥이 고난 당한 기간이 몇 년 이상이었다면 그는 ‘여러 해째’라고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히브리어 원문도 그렇고 대표적인 외국 성경 대부분이 ‘여러 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욥의 이 발언은 그를 위로하기 위해 온 친구들에게 했던 말이고, 이 대화가 끝나자마자 하나님이 나타나시게 됨으로써 그의 고난도 끝이 나게 됩니다.

여기까지 정리해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선 처음에 욥의 고난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몇 개월 뒤에 친구들이 그 소문을 듣고 그를 위로하기 위해 욥에게 와서 대화를 하게 되고 마지막에 하나님에 의해 회복된다는 식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욥이 고난 받았던 기간은 그에게 재앙이 시작되고 몇 개월 뒤, 아무리 길어도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습니다.

욥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길어졌습니다만, 여기서 우리 한 번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비록 몇 개월이라고는 하지만, 왜 욥은 이와 같은 고난을 받았을까요.

물론 욥기 1장과 2장에 의하면 사탄이 하나님을 충동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설마 하나님께서 그깟 마귀의 꾀임에 넘어가시겠습니까.


이는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연출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셨습니다. 이때 그 수단으로 단지 사탄을 이용하셨을 뿐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셨을까요.

오늘은 구약을 좀 많이 살펴보게 됩니다만, 다니엘서 5장을 잠시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의 뒤를 이어 벨사살이라는 사람이 왕이 되었는데, 그는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는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날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우상들을 찬양하며 흥청망청 연회를 벌이고 있었더니, 갑자기 손가락이 나타나더니만 벽면에 글자를 쓰기 시작해요.

그런데 그 글자 뜻을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다니엘이 불려와서 그 글자를 해석하게 됩니다.


다니엘 5장 25절~28절
“25.기록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26.그 글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27.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28.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하니”

이 글자를 다니엘의 해석에 따라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어보고 세어보고 저울에 달아보니 벨사상 왕은 부족하여 왕의 자리를 빼앗기게 된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다니엘 5장 30절~31절에 의하면 결국 벨사살은 그날 밤에 죽임을 당하게 되고 왕위는 다리오한테 넘어가게 되고 맙니다.

자, 우리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 볼까요?

누가복음 18장 8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속히 들어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또한 우리에게 고난도 허락하시는 분이시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꼭 죄를 지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고만은 할 수가 없어요.

욥기도 보세요. 위로한답시고 모인 그의 친구들은 욥을 나무랍니다. 너나 네 자녀들한테 잘못이 있으니까 이렇게 벌을 받는 게 아니냐.


그러면 욥이 말하기를, 아니라니까, 정말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니까. 그러면 친구들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잘못이 없는데 이렇게 고난을 내리시겠느냐……이런 대화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는 욥에게 그의 아내는 말합니다.

욥기 2장 9절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러자 욥은 말하지요.

욥기 2장 10절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비록 몇 개월이라 한다 하더라도 이처럼 극심한 고난이, 그것도 무슨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고 하나님을 잘 믿으면서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고난을 당하니 욥의 아내도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러니까 욥의 아내는 말합니다. 아무리 잘 믿어 봤자 이렇게 고난을 내리는 하나님 따위를 믿어서 뭐 하냐. 차라리 신앙이고 뭐고 다 버려버려라.

그런데 그와 같은 아내에게 욥이 하는 말이 사실 좀 흥미롭습니다.

욥은 그의 아내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어리석은 여자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그는 뭐라고 말합니까.

예, “그대는 어리석은 여자 같은 말을 한다”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말을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욥은 아내에게 말합니다. “그대는 어리석은 여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어리석은 여자갈이 말한다”라고 하고 있는 것이지요.

욥기 1장에 의하면 욥은 고난을 당하기 전부터 이미 상당한 거부였습니다.

그렇다고 그는 돈만 많은 졸부가 아니었어요. 그의 믿음도 상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재산만 많았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풍부했던 인물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집안인데 욥이 아무나 하고 결혼을 했겠습니까.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공부를 많이 한 재벌집에서 혼인을 한다고 하면, 그래도 어느 정도 서로 수준이 맞는 집안끼리 결혼을 하게 되지 않겠어요.


그렇게 생각해본다면, 욥의 아내도 결코 어리석은 여인이 아닌, 역시 욥과 마찬가지로 상당한 지식과 교양을 갖춘 그런 인물이었지 않았을까 해요.

하지만 죄 없는 자신의 남편과 가정이 그토록 고난을 당하게 되니, 아무리 지식이나 교양이 있고 믿음이 있는 아내라고 해도 오죽했으면 그 정도로 심한 말이 나왔을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고 말로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죄 많은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고,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으로 십자가에 달려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와 같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를 세어보고 달아보고 계시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난을 당하면 기뻐하래요. 더 큰 축복이 주어질 테니까 기뻐하라고 하는데, 그래요, 사실 그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난 중에서 진정으로 기뻐하며 껄껄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건 저도 못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죄를 지어서 징계를 받는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어서 회개해야 하겠지요.

잠언 3장 11절~12절
“11.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12.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잠언 1장 23절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우리의 잘못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멸망하지 않도록 타락하지 않도록 우리를 바로 새우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어서 회개하고 돌이켜야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징벌을 받을 만한 잘못이 없는데도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우리는 한 가지, 소망은 잃지 말았으면 합니다.

사무엘상 2장 3절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0장 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세어보고 우리를 달아보고 계시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시편 33편 13절~15절
“13.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14.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살피시는도다
15.그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살피시는 이로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도 저 높은 보좌에서 우리를 굽어살펴보고 계십니다.

우리를 세어보고 달아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채워 주실 놀라운 축복을 예비하고 계세요.


그러나 이를 믿지 못하니까 뭐예요? 예, 마지막 날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아무리 힘든 고난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좌절하거나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주님께 놀라운 믿음을 보여 드림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부어 주실 놀라운 축복, 누르고 흔들어 넘치는 축복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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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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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7회 더 큰 일을 보리라 - 이루리라선교회
2024년 8월 18일 설교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45절~50절
“45.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7.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32번째 시간으로서 “더 큰 일을 보리라”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시면 예수님 외에 빌립과 나다나엘이 등장하지요. 여기서 빌립은 우리도 잘 아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만 나다나엘에 대해서는 공관복음 즉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등장하지 않고 요한복음에만 등장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어느 한 인물을 주목하게 됩니다. 성경에 보시면 한 인물이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베드로는 시몬이나 게바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바울은 그 이전에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리고 이 나다나엘은 누구냐 하는 점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공관복음에 등장하는 바돌로매라는 사도와 동일인물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빌립과 나다나엘은 친구인 것으로 보입니다. 빌립이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말합니다.

성경이라는 책은 감정적인 면을 상당히 자제해가며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 문장도 그저 평이하게 느껴질 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내용으로 본다면 아마도 빌립은 적지 않게 격양된 상태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는 친구 나다나엘에게 말합니다.

“이봐, 이봐, 내가 어떤 분을 만났는데 말이야, 그 분은 모세가 기록한 율법에도 나와 있는 분이고, 여러 선지자들의 글에 예언된 분인데, 그게 누구냐 하면 요셉이라는 사람의 아들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는 분이야.”

자, 이 말을 들으면 여러분께서는 이 빌립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말에 대해서 살펴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만약에 그가 율법도 모르고 선지자들의 글도 몰랐다면, 다시 말해서 당시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면 그는 이와 같은 말을 하지는 않았겠지요.

다시 말해서 당시 빌립은 성경에 대해서 깊이 알고 있던, 말하자면 상당한 지식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성경에 있어서 분명한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율법과 선지자의 기록 즉 성경에 기록된 바로 그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점입니다.

이는 대단히 놀라운 사실입니다. 당시에 있어서는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 율법학자들처럼 성경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조차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핍박하고 끝내는 십자가에 못 박아버린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 빌립을 보십시오. 사실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모습을 보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만, 빌립은 예수님을 만나고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예수님은 성경에서 예언되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빌립의 생각은 사실일까요?

누가복음 24장 44절~45절
“44.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이 말씀에 의하면 성경에서 예언된 분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시라고 밝히고 계십니다만, 이는 한참 뒤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말했던 말과 똑같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에서 예언된 분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렇죠. 그것은 바로 메시야, 구세주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빌립은 아직 예수님을 만난지 얼마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예수님이 성경에서 예언된 메시야, 하나님게서 보내주신 구세주라는 사실을 간파했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을 보더라도 이 빌립의 성경에 대한 깨달음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나다나엘은 어떨까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빌립의 말을 듣고 난 다음의 반응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말합니다.

내가 말이야 성경에서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분,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분을 만났어, 라고 말하자 그는 어떻게 합니까.

사실 그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분?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분? 그게 어떤 건데? 라고 물어볼 법도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그는 이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뭘까요? 예, 어렵지 않지요. 그것은 바로 나다나엘 또한 빌립 못지 않게 성경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빌립과 나다나엘은 둘 모두 당시에 있어서 남부럽지 않은 상당한 지식인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단,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만났느냐 아직 못 만나느냐 하는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빌립은 말합니다.

“그 분이 누구냐 하면 나사렛 출신 사람인데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야.”

자, 이 부분이 문제입니다. 뭐가 문제냐 하면 구약에는 이 부분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지 않아요.

미가 5장 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기록들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구약에는 구세주 메시야에 대한 기록이 분명 나오기는 합니다만, 그 분이 베들레헴에서 나신다는 기록은 있어도, 나사렛 출신이라는 언급은 없어요.

그리고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기록은 있으나 요셉의 아들이라는 언급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율법도 알고 선지자들의 예언도 아는 나다나엘이라고 해도, 음? 나사렛 출신? 요셉의 아들? 그런 기록은 없는데 어떻게 믿지? 라고 되어버린 것이지요.

더구나 메시아가 탄생한다는 베들레헴은 구약 그것도 창세기에서 이미 등장할 정도로 역사와 전통이 있는 곳입니다만, 나사렛이라고 하는 지역은, 구약에서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는 당시 시각으로 본다면 족보가 없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사실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애굽으로 피신을 가신 다음에 다시 돌아와서는 나사렛에서 성장을 하게 되셨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가만히 보면 아무리 지식이 많다고 해도 자칫하면 그 지식에 갇혀서 진리를 놓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바울도 역시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그는 공부도 많이 하고 그만큼 지식도 풍부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의 지식에 갇혀서 결국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박해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예수님을 믿지 않고 의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믿도록 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47절에 보시면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와서 보라”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빌립은 왜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말을 했을까요. 이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도 직접 가서 봤더니 믿게 되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말을 해도 안 믿어요. 그러자 빌립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 나도 그 마음 알아. 나도 안 믿어졌어.

하지만 직접 가서 보니까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니까. 그러니까 뭐예요? 그렇죠. 너도 와서 직접 만나봐. 그러면 믿게 될 거야.


이렇게 해서 빌립에게 이끌려 나다나엘이 예수님께로 옵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이 아직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예수님이 그를 보시고는 칭찬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1장 47절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은 칭찬을 받았다는 것이 기뻤다기보다는 좀 놀라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요한복음 1장 48절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아니, 어떻게 저를 아시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는 좀 알기 쉬운 말로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아니, 저를 언제 봤다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뭐 그런 뜻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언제 봤냐니,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내가 봤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잖아요.

여기서 일부 신학자들은, 과연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하는 점에 주목을 해가면서, 아마도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이러이러한 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면서, 성경에도 나와 있지 않는 것을 두고 다양한 주장을 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만, 저는 이와 같은 의견에 대해서는 조금 회의적입니다.

그보다 저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에 주목을 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요한복음 1장 48절 후반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예수님께서는 이미 나다나엘을 보시고 인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언제였냐 하면 빌립이 아직 나다나엘을 부르기 전에 보셨다고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를 풀어서 말씀을 드리자면, 우선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알게 된 경위를 보면 어떻게 됩니까. 빌립이 예수님을 만나고는 그 사실을 나다나엘에게 말합니다. 그 이전까지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말하기도 전에 이미 그를 보았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내가 예전부터 너를 알고 있었다……뭐, 그런 말은 마음만 먹으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믿기 위해서는 증거가 있어야 하잖아요.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부터 너를 보았다.

이 말을 들은 나다나엘은 놀랍니다. 그렇다면 왜 놀랐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 자리에 안 계셨을 뿐만 아니라 멀리서라도 보실 수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 아니겠어요.

아니, 어쩌면 그 때는 주위에 분명 아무도 없었을 때였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으로 자신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고, 그 때부터 이미 자신을 주목하고 계셨다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던 것이지요.

이렇게 되자 그는 예수님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요한복음 1장 49절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이 나다나엘의 고백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사실 우리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잘 알고 있지요?

마태복음 16장 16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하는 신앙고백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이 나다나엘의 고백도 놀랍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그래도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 했었습니다만,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나고는 몇 마디 말씀만 나누어 보았더니 곧바로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하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만, 오늘 주목하고자 하는 말씀은 다음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1장 5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보았다는 말을 듣고 나를 믿니? 하지만 놀라기는 아직 일러. 이제부터 너는 더욱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이는 어떻게 보면 성경 전체에 있어서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자, 조금 범위를 좁혀서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서만 알아보도록 할까요.

얼마 전에 말씀에서 언급했던 “예수님이 말씀하시니”라는 찬양 순서대로 한 번 볼까요?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습니다. 성난 파도를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앞을 볼 수 없었던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성경에 보시면 어디 그 뿐입니까.

마태복음 8장에 보시면 베드로의 장모님을 고치셨고, 마태복음 9장에서는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고치셨고, 마태복음 14장에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이 외에도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셨고 그리고 귀신을 쫓아내기도 하셨어요.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은 사역을 하셨을까요. 단순히 주위 사람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고 싶어서요? 아니면 예수님은 원래 그런 일을 하는 분이시니까요?

여기서 잠시 제가 한국으로 오는 날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볼까 합니다.

지난 8월 16일 금요일은 저희가 이제 약 10년에 걸친 일본선교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 상당히 불안한 상황이었습니다. 날씨가 조금 안 좋을 것 같다는 거예요.

그런데 날짜가 다가오자 점점 심상치 않습니다. 하나 둘 일본 주변에 태풍이 보이기 시작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걱정은 안 했습니다. 왜냐하면 5호 태풍이나 6호 태풍의 경우에는 예상 진로가 일본의 북부 쪽을 지나가는 것으로 나왔거든요.

저희가 비행기를 탈 나리타 공항이 있는 치바현이나 비행기 항로에 있어서는 영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7호 태풍 암필이었습니다.

남쪽에서 슬금슬금 올라오는 이 태풍의 진로를 며칠 전에 보니까 저희가 비행기를 타는 8월 16일 오전에 정확히 나리타 공항 상공 부근을 지나간다고 나온 거예요.

자, 큰일입니다. 뉴스에서는 이 기간에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재고하도록 독려합니다.


뭐, 그래요. 단순히 여행을 하는 일정이었다면 연기를 하든 취소를 하든 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미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이사를 하기 위해 여러 개의 스케줄이 모두 잡혀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비행기를 취소하면 되는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제 메일을 받아 보시는 몇몇 분들께 임시로 기도를 당부하는 메일을 보내 드렸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안전하게 예정대로 한국에 갈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 드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스마트폰 일기예보 앱을 보면 그날그날 날씨 모양이 그림으로 나오잖아요?

그런데 8월 16일의 예보를 봤더니 우산에 비가 오는 그림인데 폭풍이 부니까 대각선으로 비가 오는 그림에요. 그것도 폭우입니다.

여기에 또 번개 그림까지 있어요. 그것도 모자라서 <경보>라고 하는 시뻘건 글씨와 <폭풍우 100프로>라고 하는 문구도 곁들여져 있습니다.

제가 일본에서 사는 동안 10년째 그 앱을 쓰고 있는데, 그런 험악한 날씨 그림을 본 건 처음입니다.

뉴스 방송에서는 16일 하루 종일 도쿄와 나고야 간의 신칸센이 운행을 안 하기로 했다고 보도를 합니다.

자, 신칸센도 안 움직이는 그런 날씨에 저희는 뭘 하려고 해요? 예, 비행기, 그것도 국제선을 타려고 하는 것이지요.

제 아내는 제게 말합니다.

“우리 못 가면 어떡하지.”

하지만, 사실 우리끼리 솔직한 말로 하자면, 저한테 무슨 답이 있겠어요.


“괜찮아. 주님께서 길을 열어 주실 거야.”

이렇게 말을 하기는 했습니다만, 정말 제가 믿음이 부족해서 참 많이 불안했습니다.

저 혼자라면 결항이 된다 하더라도 공항에서 밤을 새든 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만, 제 아내까지 있으니까 참 불안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보도록 했습니다. 우선 결항이 되고 혼잡해 지면 공항에 있는 편의점은 동이 날 것이기 때문에, 집을 나서기 전에 빵이나 음료수를 넉넉하게 사가기로 했습니다.


이제 출발 전날인 15일입니다. 사실 비행기는 다음날이긴 했습니다만, 일본 집을 나서는 것은 해가 뜨지 않은 16일 새벽이니 실질적으로는 15일 밤이 되는 샘이지요.

손에 땀을 쥐면서 시시각각 발표되는 태풍 진로를 보았더니, 수직으로 올라오던 태풍의 예상 진로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동쪽 태평양 쪽으로 밀려 가기 시작해요.

그래서 저는, 그래, 조금만, 조금만 더 동쪽으로…… 주님, 조금만 더 밀어주세요……하고 간절히 바랬습니다.

그러나 아직 안심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주님, 제발 한국에만 가게 해주세요. 그러면서 참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결항이 되면 비행기 값은 환불이 될지 모르지만, 다른 여러 가지가 얽혀 있어서, 이미 더 이상 이 집에 머무르고 싶어도 머무를 수 없는 상황입니다.

예정대로 가지 못하면 이래저래 일이 복잡해 집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든 저 태풍을 동쪽으로 좀 더 밀어 주시든지 아니면 아예 없애 주시든지 해주셔서 비행기만 뜨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도해도 태풍이 사라지기는커녕 예상 진로가 더 이상 동쪽으로 밀려가는 것 같지가 않아요. 매정하게도 그냥 나리타 공항이 있는 북쪽으로만 계속해서 올라옵니다.

저희가 탈 비행기 스케줄을 보니까 그 항공사가 그날 세 편이 한국으로 출발하는데, 오후에 두 편은 이미 결항이 결정되었고, 저희가 탈 오전 비행기만 아직 정상표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야말로 풍전등화예요. 언제 오전 비행기도 결항이 될지 모르는 노릇 아닙니까.


이제 참 난감하게 됐구나 어쩌면 좋을까 했습니다. 결국 태풍이 없어지거나 아니면 동쪽으로 더 틀어지게 해달라는 제 기도는 응답 받지 못했어요.

그런데 변화는 다른 식으로 일어났어요.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하면, 태풍 속도가 떨어지는 거예요.

아까는 시속 40킬로로 올라온다고 했던 태풍이 어느새 시속 20킬로로 표시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정확히 비행기 이륙시간 경에 태풍이 상륙한다고 했던 것이 조금씩 늦어져요. 잘하면 저희 비행기가 출발할 오전 중에는 태풍의 영향을 아직 안 받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자, 이제 어쩌겠어요. 그래도 태풍이 온다고 하니, 가는 길에 비를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특히 컴퓨터 모니터 같은 것은 철저하게 포장을 하고는 이제 집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참 놀랍죠. 태풍이 오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저희가 차에 타면 비가 쏟아 부어요. 그런데 차에서 내리기만 하면 비가 개입니다. 나리타 공항까지 버스로 가는 내내 비가 쏟아 부었는데 도착하고 리무진에서 내리니까, 비가 그칠 정도가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 해가 나더라니까요.


그러더니 이제 짐을 부치고 출국수속을 마친 다음에 공항 바깥을 보니까 또다시 비가 내리쳐요.

정말 참 이륙하는 순간까지 정말 이륙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륙하고 나서도 잠시 동안은 정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하고 참 불안했어요.

그러고서 인천공항에 도착니까 얼마나 감사한 마음이 밀려오는지 모릅니다.

아, 정말 주님은 계시는구나. 우리를 위해 이렇게 섬세한 손길로 인도해 주시는구나. 주님! 믿습니다!


그러자 저에게 그런 마음이 듭니다.

“네가 태풍 속을 뚫고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는 것으로 나를 믿느냐.”

그러면서 무슨 마음이겠습니까.

그렇죠. “더 큰 일을 보리라”라는 주님의 말씀이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기쁘고 감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무슨 특별한 선지자라서, 아니면 주님께서 저희만 특별하게 사랑하셔서 이와 같은 마음을 주셨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점에서 앞에 했던 질문으로 한 번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와 같은 사역,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고 성난 파도를 잠잠하게 하시고, 앞을 볼 수 없었던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까. 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던 것입니까.

이유는 명백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지금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을 보고 나를 믿어?

파도가 잔잔해 진 것을 보고 나를 믿어?

병자가 낫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귀신들이 쫓겨난 것을 보고 나를 믿어?

아직 놀라기는 일러. 이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입니다. 태풍을 뚫고 한국에 올 수 있었다는 것으로 나를 믿어? 이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주님을 왜 믿습니까. 병이 나았습니까. 취직이 되었습니까. 돈을 벌었습니까. 그와 같은 기도를 들어 주셨기 때문에 주님을 믿습니까.

물론 그와 같은 응답을 받았다면 기뻐하며 감사를 드려야 하겠지요. 하지만 우리의 믿음이 거기서 멈추어 버리면 안 됩니다.


요한복음 1장 2절~3절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여러분, 우리 주님의 능력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온 천하를 만드실 때 함께 계셨고, 주님 없이 된 것은 하나도 없다고 기록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출에굽기에서 홍해를 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그 정도밖에 안 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고급 레스토랑에서 코스 요리를 시키면 처음부터 고기가 나오지는 않잖아요. 일단 야채나 간단한 것부터 나오고 난 다음에 마지막에 메인 요리가 나옵니다.

우리가 기도응답을 받았다고 한다면, 물론 그것 만으로도 너무나도 감사할 일이지만, 거기서 아, 이제 기도응답을 받았으니 됐다고 하면서 휙 돌아 나오게 된다면 그것은 마치 코스요리를 시켰으면서 처음에 나오는 샐러드만 먹고 나오는 것 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이보다 더 큰 일, 지금까지 보아왔던 주님의 어떤 일보다도 더 크고 놀라운 일을 보게 되실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 오더라도, 끝까지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이루시는 더욱 큰 일, 이제까지 경험해보지도 못한 더욱 크고 기쁘고 놀라운 주님의 일을 보게 되는,

더욱 크고 기쁘고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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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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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6회 열매 맺는 믿음 - 이루리라선교회
2024년 8월 11일 설교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3절~9절
“3.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31번째 시간으로서 “열매 맺는 믿음” (実りある信仰)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이지요.

오늘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깊이 이해함으로 인해서 더욱 주님의 말씀을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를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씨를 뿌립니다. 이 씨는 모두 같은 종류예요. 그런데 문제는 떨어진 곳이 다릅니다. 그 유형이 네 가지로 나와요.

첫째 씨는 길 가에 떨어졌습니다.
둘째 씨는 돌밭에 떨어졌어요.
셋째 씨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넷째 씨는 좋은 땅에 떨어졌다고 하십니다.


첫째로 길 가에 떨어진 씨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길 가의 특성은 어떤 점을 들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딱딱한 땅바닥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

길은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입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기 때문에 그 바닥이 아주 딱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래 뿌려진 씨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뿌리가 나와서 땅속으로 들어가야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는데 단단한 길가에 뿌려진 씨는 뿌리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바람이 불면 이리로 굴러갔다가 저리로 굴러갔다가 하니, 어떻게 뿌리를 내려서 영양분을 섭취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된다고 말씀하세요.

그냥 썩어버렸대요? 아니요.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고 하십니다.


이에 대해서 누가복음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8장 12절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道端に落ちたものとは、みことばを聞いても信じて救われないように、後で悪魔が来て、その心からみことばを取り去ってしまう、そのような人たちのことです。

예, 길가에 뿌려진 씨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가서 빼앗아버린다고 하세요.

다음은 돌밭에 떨어진 씨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돌밭은 <밭>이라고 하는 말이 들어가기는 해요. 그러니까 길 가 정도는 아니더라도 흙이 조금은 있다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그 깊이가 얕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뿌리가 나오기는 해요. 거기서 약간의 영양분을 섭취해서 싹이 나오기는 합니다.

하지만 더 이상 뿌리를 내릴 수가 없기 때문에 영양분이 충분하지 않아요.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게 되고 만다는 것이지요.


마태복음 13장 20절~21절
“20.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また岩地に蒔かれたものとは、みことばを聞くと、すぐに喜んで受け入れる人のことです。
しかし自分の中に根がなく、しばらく続くだけで、みことばのために困難や迫害が起こると、すぐにつまずいてしまいます。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요. 아, 할렐루야! 주님! 감사합니다! 하고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금방 식어버려요. 그리고는 무슨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다면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세상으로 돌아가고 우상으로 돌아가버리는 모습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어떻습니까. 이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졌다고 해요.

이에 대해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3장 22절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茨の中に蒔かれたものとは、みことばを聞くが、この世の思い煩いと富の誘惑がみことばをふさぐため、実を結ばない人のことです。

이렇게 보면 돌밭에 떨어진 씨와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가 비슷하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여기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돌밭에 떨어진 경우에는 흙 자체가 별로 없어요. 그래서 뿌리가 내리지 못합니다. 말씀을 들어도 금방 잊어버리고 믿음도 불면 날라가 버리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는 조금 다릅니다. 그것은 땅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땅은 좋아요. 흙도 많고 영양가도 풍부합니다. 그래서 싹도 나고 막 자라나요. 그런데 문제는 온갖 가시떨기 때문에 더 이상 싹들이 자라다가 멎어버려요.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라고 말씀하시잖아요.

무엇이 옳은 지 무엇이 옳지 않은 지 정도는 알아요. 믿음도 있어요. 하지만 뭐예요? 예, 아니, 어떻게 사람이 성경대로만 살아.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니야? 뭐 이러면서 결국 믿음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경우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경우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3장 23절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良い地に蒔かれたものとは、みことばを聞いて悟る人のことです。本当に実を結び、あるものは百倍、あるものは六十倍、あるものは三十倍の実を結びます。」

좋은 땅은 길 가나 돌밭처럼 바닥이 단단하지 않아요. 아주 포근포근합니다. 그리고 가시떨기들도 모두 걷어버렸습니다.

이제 말씀의 씨가 떨어지자 그 씨를 받아 안아 뿌리를 내리고 싹을 뻗어가며 마침내 풍요로운 열매를 맺게 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말씀을 들을 때 그런 생각을 해보신 적이 없으신 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그게 뭐냐 하면, 아니, 애초에 씨를 좀 좋은 땅에 뿌리지, 왜 이상한 데 뿌려서 문제를 일으킬까……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냐 하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가리켜서 이른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고 말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하지만 사실 내용을 보면, 이 말씀에서는 지금 씨를 뿌리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 사람에 의해 뿌려진 씨가 떨어진 땅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비유>라기 보다는 <뿌려진 씨가 떨어진 땅에 대한 비유>라고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의 핵심은 씨를 뿌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 씨가 떨어진 땅이 어떤 모습이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갈 가나 돌밭, 그리고 가시떨기가 있는 땅이나 좋은 땅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인 모습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 하는, 그러니까 우리 마음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상태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폭풍이 몰아치는 배 위에서 예수님께로 향해서 걸어가던 베드로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만, 오늘은 복습하는 의미에서 이 네 가지의 단계와 함께 살펴보면 더욱 잘 이해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우선 길 가에 떨어진 믿음을 가졌다면 어땠을까요.

싹은 고사하고 뿌리도 나지 않을 정도의 단단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아무리 귀한 씨가 떨어졌다고 해도 무용지물입니다. 놀라운 기도 응답이나 넘치는 축복을 기대조차 하지 않아요.


만약에 베드로가 길 가와도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는 물 위로 가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말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 단계는 아니었어요. 그는 기적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분명 나로 하여금 물위로 걸을 수 있게 하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는 돌밭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여러분께서는 혹시 그런 곳을 가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어요. 그, 어떤 높은 곳에 있는 다리나 통로인데 유리처럼 투명한 바닥으로 된, 그런 곳에 가 보시거나 한 적이 있으신지 있으십니까.

예전에 저도 한국에 있을 때 그런 곳을 본 적이 있어요. 꽤 높은 곳에 있는 전망대인데 거기에 보면 투명다리가 있었어요. 저는 생긴 것 답지 않게 겁이 좀 많은 편입니다. 그리고 세상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믿음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저는 기본적으로 번지점프의 밧줄에 대한 안전성을 믿지 않아요. 그리고 그런 투명바닥의 안전성은 믿지 않습니다.

제 앞에 투명바닥이 있고 아무리 튼튼한 강화유리로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저는 발을 앞으로 내딛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돌밭과도 같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베드로의 경우에도 만약에 돌밭 같은 믿음 밖에 없었더라면, 아무리 물위에 설 수 있었다고는 해도 그 다음에는 다리가 후들거려서 더 이상 앞으로 걸어갈 수가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베드로는 어땠습니까. 예,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참 대단하다고 할 수 있을지 않을까 해요. 그는 그 마음 안에 강한 믿음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됩니까.

마태복음 14장 30절 전반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ところが強風を見て怖くなり、沈みかけたので……

예, 그렇죠. 바람을 보고 무서워 했더니 그만 빠져갔다고 합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베드로는 내부적으로는 좋은 땅이었어요. 뿌리도 내리고 싹이 날 만큼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갔더라면 풍성한 믿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외부적으로 가시떨기를 만났을 때 그는 외부적인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게 되어 결국 넘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앞서 말씀드린 네 가지 땅의 모습은 우리 믿음 상태를 나타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자,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있어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믿음은, 어느 상태라고 생각되십니까.

첫째, 길 가의 믿음 상태
둘째, 돌밭의 믿음 상태
셋째, 가시떨기의 믿음 상태
넷째, 좋은 땅의 믿음 상태

이 중에서 우리가 이 시대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경계해야 할 믿음 상태라고 생각하십니까.


우선 넷째는 아니겠지요.

좋은 땅에 떨어진 믿음 상태가 경계 대상이 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땅과도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럼 세 개가 남았네요.

첫째, 길 가의 믿음 상태
둘째, 돌밭의 믿음 상태
셋째, 가시떨기의 믿음 상태

이 시대에 있어서 가장 경계 대상이 될 수 있는 믿음 상태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되십니까.

많은 분들은 가시떨기의 믿음 상태라고 말씀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믿음은 있으나 외부적인 요인에 막혀서 결국 믿음이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막혀버리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할 수도 있겠지요.

물론 맞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는 요즘이라기 보다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후로 지금까지 몇 백 년, 몇 천 년에 걸쳐 계속해서 경계가 되어온 상태가 아닌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는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상태는 바로 첫째 상태, 즉 길 가의 믿음 상태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던 그 이후로,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만큼 수많은 말씀이 뿌려진 시대는 없었지 않을까 합니다.

오늘 이 순간도 목회자나 선교사에 의해 얼마나 많은 말씀이 뿌려지고 있습니까.

하지만 그 말씀들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이런 말씀을 드리면 우리 자신은 상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예수님을 잘 믿고 있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하십니까.

자, 이 시점에서 우리 자신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성경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한국에서 제가 다니던 교회에 보면 적어도 몇 달만 다니면 외우게 되는 성경구절이 있지요. 바로 요한3서 2절입니다.

요한3서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愛する者よ。あなたのたましいが幸いを得ているように、あなたがすべての点で幸いを得、また健康であるように祈ります。


하지만 수십만명이 있다고 하는 그 교회 성도님들 중에서 이 성경구절을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분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성경말씀 중에서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구절을 올바로 이해하고 계신 분들은 또 얼마나 계실까요.

우리에게는 수많은 말씀의 씨들이 뿌려지고 있습니다. 어려울 것 없어요. 우리 주변에 있는 성경책만도 보세요. 교회 몇 년 다니신 분이시라면 집에 성경책이 어디 한 권 뿐이겠어요?

하지만 그 성경책을 몇 번이나 읽으셨으며 어느 정도 이해하고 계십니까.


그냥 교회 다니기만 하면 성경을 알게 되나요? 성경책을 들고 기도하거나 성경책만 들고 왔다 갔다 하기만 하면 성경이 머리 속에 들어옵니까.

주일설교 말씀만 들으면 성경을 이해하게 되나요? 직분을 받으면? 성경학교 과정을 몇 개월 하면 성경을 알게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일본에 있으면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일본어를 가르치기도 했었습니다만, 그분들 중에는 일본생활 10년이나 20년, 하물며 저보다도 일본생활이 오래된 분들도 계세요.

그런데 그 중에는 일본어 실력이 상당히 부족한 분들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 이유가 뭐예요? 예, 그렇죠. 더 이상 배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전에 강사 회의 때 보니까 어떤 고참 일본인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일본어능력시험은 평소에 쓰지 않는 단어들도 많이 나오기 때문에 일본어실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물론 저는 그 자리에서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만, 사실 그 말씀을 듣고 참 답답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 생각해보세요. 일상생활에서 쓰는 말만 쓰면 일본어실력이 느나요? 그냥 일본에 살기만 한다고 해서 늘어요? 아니에요. 안 늘어요.


한국어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외국인이 한국에만 산다고 해서 한국어가 느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외국인이 한국에서 생활을 하는데,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비싸요. 맛있어요. 그런 식으로 맨날 쓰던 말만 쓰고 다른 것은 모른다고 한다면, 수 십년간 한국에 산다고 해서 말이 늘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교회에 오래 다닌다고 믿음이 좋아지지 않습니다. 성경 여기저기를 부분적으로만 반복적으로 듣는다고 말씀을 이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13장 23절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良い地に蒔かれたものとは、みことばを聞いて悟る人のことです。本当に実を結び、あるものは百倍、あるものは六十倍、あるものは三十倍の実を結びます。」

그렇습니다. 말씀을 단순히 듣는 것만이 아니라 깨달을 때에 비로소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성경은 안 보고 그저 기도만 하려는 분들이 종종 계십니다. 간혹 보면 그 중에는 대단히 독특하게 기도하시는 분들 계세요.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불로 불로 불로 불로, 오~ 주여~ 렐렐렐렐렐…… 어떤 분은 또 보니까 계속해서 무슨 예수의 피, 예수의 피, 예수의 피……라고 하면서 기도만 해요. 그러면서 그렇게 기도하니까 응답 받았다는 거예요.

자, 그게 과연 믿음입니까. 기독교인가요? 아닙니다. 그건 또다른 우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건 무슨 주문이지 어떻게 그게 기도입니까.

사실 말씀이 길바닥에 떨어져서 그냥 거기서 굴러다니기만 한다면 문제가 작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된다고요?

누가복음 8장 12절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道端に落ちたものとは、みことばを聞いても信じて救われないように、後で悪魔が来て、その心からみことばを取り去ってしまう、そのような人たちのことです。


예, 그렇습니다. 길 바닥에 떨어진 말씀들을 마귀들이 가져간다고 하시잖아요.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보시면 얼마나 사이비 집단들이 많이 있습니까.

성경을 자기 멋대로 끼워 맞춰서 자기들이 재림예수라고 하고 자기들이 보혜사라고 하고 자기들이 메시야라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문제는 그런 집단들의 꾀임에 어떤 사람들이 넘어갑니까. 놀기 좋아하는 사람, 불성실한 사람들이 넘어가나요? 아니에요. 그런 집단에서 어떻게 사람들을 유인합니까. 예, 자기들과 성경공부를 같이 하자고 하면서 유인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기존 교회에서 성경을 올바로 가르치고 있다면, 지금 자기가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 공부하면 되니까 굳이 그런 곳에 넘어갈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자기 교회에서는 성경을 가르치지 않아요. 그러니까 성경말씀을 열심히 배우려고 하다가 그만 이단 사이비에 빠지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고 하지 않습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게 다 누구 책임이에요? 마귀들 책임인가요? 그것보다는 우리 스스로가 성경을 올바로 알지 못해서 아니겠습니까. 성경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성경을 올바로 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더 이상 말씀을 마귀들에게 빼앗길 수 없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귀한 영혼들을 마귀에게 빼앗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성경 말씀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인 것입니다. 그래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신앙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보다 성경 말씀을 올바로 알아 감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좋은 땅으로 가꾸어 감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30배 60배 그리고 100배 1000배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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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5회 초대와 초청 - 이루리라선교회
2024년 8월 4일 설교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5절~32절
“25.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30번째 시간으로서 “초대와 초청” (招待と招へい)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세상에는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 차이를 잘 모를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좀 비교적 쉬운 예를 들어볼까요? 혁명과 쿠데타는 무엇이 다를까요.

좋은 것은 혁명이고 나쁜 것은 쿠데타다? 사실 그렇지는 않고 여기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지요. 그것은 바로 권력 외부에서 일어난 것은 혁명이고 권력 내부에서 일어난 것은 쿠데타라고 하는 것입니다.

쉬운 예로 한국에는 4.19 혁명이나 외국에 본다면 프랑스 혁명 같은 경우를 들 수 있겠지요. 이와 같은 혁명의 경우에는 권력 내부가 아니라 권력 외부에 있는 시민이 그 주체가 된 것이기 때문에 분명 혁명이 맞습니다.


반면에 쿠데타는 어떤 것을 들 수가 있겠습니까. 이는 쉬운 말로 군사 쿠데타를 들 수 있겠지요.

그 나라의 군은 권력 내부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군의 최고통수권자가 누구인가 하면 그 나라에 있어서의 최고권력자에게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무슨 군사혁명이다 라고 하는 말은 사실 앞뒤가 안 맞는 모순이 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하자면 이른바 군사반란이라고 하는 것은, 권력 내부에 있는 군부에 의해 군 최고통수권자에 대한 하극상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혁명이 아닌 쿠데타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다음은 조금씩 어려워집니다. 어떠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범인이 자수하는 경우와 출두하는 경우는 무엇이 다를까요.

범인이 경찰에 자수했다. 범인이 경찰에 출두했다. 분명 뭔가 다를 것 같은데 정작 무엇이 다르냐고 하면 설명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졌느냐 하는 점입니다.


어떠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범인이 누구인지 몰라요. 그런데 어느 날 경찰서에 누군가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사실 제가 그 사건의 범인입니다……라고 하게 된다면 범인이 ‘자수’를 했다는 것이 됩니다.

반면에 역시 어떠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범인이 이미 밝혀졌어요. 누구의 소행인지 증거도 있고 증인도 있어요. 다만 범인이 안 잡혔을 뿐이에요.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얼굴을 공개하고 전국에 지명수배를 하기도 하잖아요?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 비로소 그 범인이 스스로 경찰서에 나타나는 경우는, 이는 자수가 아니라 출두라고 한다는 것이지요.

자, 그럼 난이도가 점점 올라갑니다. 여러분께서는 사임과 사퇴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무슨 장관이 사임했다. 무슨 장관이 사퇴를 했다. 여기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사실 이 점에 대해서는 요즘은 거의 비슷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본래는 그 뜻이 다르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본래 사임과 사퇴에는 무슨 차이가 있냐 하면, 우선 어떤 직책에서 물러나는 것, 말하자면 지금 장관이나 어떤 직책에 있는 사람이 그 자리를 그만 두는 것을 사임이라고 한다면, 사퇴는 아직 그 직책에 있지 않았어요.

다시 말해서 아직 후보자인 상태인데 그 상황에서 물러나는 것을 사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좀 알 것 같지 않으십니까.

자, 그렇다면 오늘의 본론입니다. 초대와 초청의 경우는 무엇이 다를까요.

사실 이 단어의 경우에도 사전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습니다.

국어사전에서 초대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어요.
1. 어떤 모임에 참가해 줄 것을 청함.
2. 사람을 불러 대접함.

그리고 초청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사람을 청하여 부름.

이렇게 본다면 서로 차이가 없는 것 같지 않으세요?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이 초대와 초청은 큰 차이를 보입니다. 어떤 경우냐 하면 이 단어 뒤에 ‘장’이라는 글자를 하나 덧붙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 ‘초대장’과 ‘초청장’이 됩니다. 이제 좀 차이를 아실 것 같으신가요?


우선 ‘초대장’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 사용합니까. 예, 무슨 행사나 잔치 같은 경우에 사용하잖아요. 대표적인 것이 누구 결혼식이라든지 어떤 행사 같은 것이 있다면, 언제 어디서 이와 같은 행사를 하게 되었으니 와주십시오 라고 하는 것이 초대장 아니겠습니까.

반면에 ‘초청장’이 되면 어떨까요. 이를 극명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외국에 사는 사람이 한국에서 그 사람을 외국으로 불러 들이는 경우, 아니면 한국에 사는 사람이 외국에 사는 사람을 한국으로 불러 들이는 경우에 이 초청장이라는 서류가 꼭 필요하게 됩니다.

일단 한국에 사는 사람이 외국에 사는 외국인을 불러 들이는 경우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나라가 아닌 외국에 갈 때, 관광을 갈 경우에는 비자가 없이도 갈 수 있는 나라가 많다고 하지요?

한국 여권의 경우에는 비자가 없이 방문할 수 있는 나라가 190여개국이라고 합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잖아요. 한국여권을 가지고 있으면 90일 동안은 무비자로 체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 관광 같은 단기 방문일 경우이고, 관광이 아니라 중장기적으로 머물기 위해서는 어느 나라든지 반드시 그 목적에 따르는 비자를 취득해야 합니다.

비자에는 유학도 있고 취업비자도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종교비자로 체류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비자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자격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유학이나 취업이나 종교비자 같은 경우에는 각각 그 비자 성격에 맞는 자격을 갖추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유학의 경우에는 입학할 학교가 있어야 하고, 취업비자도 직장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어요? 다닐 학교도 없고 일할 직장도 없는 상황이라면 누가 유학비자나 취업비자를 내주겠습니까.

이 밖에도 모든 비자는 다 그 비자에 맞는 자격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니까 그 자격이 갖추어 져 있지 않으면 비자를 받을 수도 없고, 그러면 당연히 그 나라에 체류할 수도 없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예외가 있습니다. 자격이 없더라도 그 나라에 입국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오랫동안 체류할 수 있는 길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초청장이 있는 경우입니다.

그 나라 국민 또는 그 나라에서 합법적으로 체류하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초청을 받아서 인정을 받게 되면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게 되는 것이지요.


초대장과 초청장의 차이를 간단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기에 적힌 문구를 보면 알 수 있어요.

초대장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조금 쑥스럽긴 합니다만 저희 결혼식 때 청첩장에 제가 쓴 문구는 이렇습니다.

“시절은 단풍을 지나 눈 내리는 겨울입니다.
하얗게 덮인 세상은 새롭게 채색할 준비를 합니다.
이제 저희들도 함께 하얗게 펼쳐진 도화지 위에 새로운 삶을 그려가려 합니다.
1월 27일
첫 물감을 드는 날입니다.
함께 자리해주신다면 기쁨으로 간직하겠습니다.”

예, 나름대로 꽤 머리를 쓰면서 짜낸 글귀이긴 한데, 지금 이렇게 읽으니까 참 낯간지럽기도 합니다만, 아무튼 이것이 저희 결혼식 때의 초대 문구였습니다.

반면에 초청장 문구는 어떨까요. 이는 한국에 머무는 사람이 외국에 있는 사람을 한국으로 초청할 때 사용하는 초청장 문구인데, 한국 외교부 홈페이지에 있는 공식 초청장 양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본인은 상기 피초청인을 초청함에 있어 피초청인이 대한민국에 체류하는 기간 중 제반법규를 준수하도록 함은 물론이며 소요되는 경비지불과 위법행위로 인하여 발생되는 모든 사항에 대하여 민·형사상의 책임을 지며, 정해진 기일 내에 출국시키겠사오니 귀 공관의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어떻습니까. 무슨 계절이 어떻고 기쁨이 어떻다는 내용이 전혀 없지요? 그 대신 어떤 내용입니까.

예, 이 사람이 한국에 들어오면 체류하는 동안에 한국 법규를 잘 지키도록 할 것이고, 체류할 때 필요한 모든 비용을 다 부담할 것이며, 만약 무슨 문제가 생기면 여기서 발생하는 민형사상의 모든 책임을 다 자기가 지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을 한국에 입국시켜주세요……말하자면 그런 내용 아닙니까.

이는 당연한 것이지요. 왜냐하면 본래 비자를 받으려면 경제적인 증명이다 자격이다 하고 까다로운 요건을 필요로 하는데, 여기에 대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책임은 대신해서 다 내가 지겠으니까 입국을 허가해달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비교해보면 어떻습니까. 초대장과 초청장, 이 중에서 초대장은 무슨 책임을 진다는 것은 없습니다.

제가 결혼식날 하객분들을 초청한다는 것은 그저 오셔서 맛있게 음식을 드시고 그리고 저희들을 축하해주세요……라고 하는 것이지, 제가 무슨 그 분들에 대해서 법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초청장은 다릅니다. 본래 입국할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입국을 허가하는 것이니만큼, 자신이 누군가를 초청한다는 것은, 만에 하나 그 사람이 무슨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면 모든 책임은 내가 대신 지겠다는 각서나 다름 없는 것이 바로 이 초청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여러분께서는 혹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초청장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십니까.

마태복음 14장 28절~29절
“28.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28.するとペテロが答えて、「主よ。あなたでしたら、私に命じて、水の上を歩いてあなたのところに行かせてください」と言った。
29.イエスは「来なさい」と言われた。そこでペテロは舟から出て、水の上を歩いてイエスの方に行った。

오늘 본문에 의하면 베드로는 좀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필요한 절차를 모두 밟았어요.

베드로는 자기 마음대로 물위에 뛰어는 게 아닙니다. 베드로가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께 말씀 드리기를 나로 하여금 물위로 가게 해달라고 했잖아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오라”라고 하셨어요.


여기서 “오라”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내용대로라고 한다면 단순한 “초대”가 아닙니다.

“초대”라고 한다면 여기에는 책임이 발생하지 않아요.

“올라면 와라. 하지만 무슨 문제가 생겨도 나는 모른다.” 이게 초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 “초청”을 하셨습니다.

“와라. 내가 허락한다. 만약에 내 말대로 오다가 무슨 문제가 일어나기라도 한다면 내가 다 책임진다. 그러니까 안심하고 와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태복음 14장 30절~32절
“30.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0.ところが強風を見て怖くなり、沈みかけたので、「主よ、助けてください」と叫んだ。
31.イエスはすぐに手を伸ばし、彼をつかんで言われた。「信仰の薄い者よ、なぜ疑ったのか。」
32.そして二人が舟に乗り込むと、風はやんだ。”

예, 아니나 다를까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나서기 시작했다면 끝까지 주님을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평소에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 했더니만 글쎄 몸이 가라앉기 시작했다는 것이에요.

이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가만히 계셨어요? 아닙니다. 모든 책임을 다 지시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베드로의 손을 붙잡아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즘 한국이나 일본을 보면 정말 참 책임을 지지 않는 사회가 된 것 같습니다.

사실 본인에게 직접 잘못이 없다 하더라도, 자기 밑에 있는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자기 자신도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건 어떻게 된 게 본인이 분명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기는 책임을 지지 않고 자기 밑에 있는 사람한테 죄를 뒤집어쓰게 하는 경우를 참 많이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성경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리가 죄를 짓고 타락하게 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택하신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무참하게 대신 죽게 하셔서, 그 대가로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 힘이나 지혜로 예수님을 믿었습니까.

이사야 43장 1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だが今、主はこう言われる。ヤコブよ、あなたを創造した方、イスラエルよ、あなたを形造った方が。「恐れるな。わたしがあなたを贖ったからだ。わたしはあなたの名を呼んだ。あなたは、わたしのもの。

요한복음 6장 44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わたしを遣わされた父が引き寄せてくださらなければ、だれもわたしのもとに来ることはできません。わたしはその人を終わりの日によみがえらせます。


요한복음 15장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を選んだのではなく、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選び、あなたがたを任命しました。それは、あなたがたが行って実を結び、その実が残るようになるため、また、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父に求めるものをすべて、父が与えてくださ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에베소서 1장 4절~6절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すなわち神は、世界の基が据えられる前から、この方にあって私たちを選び、御前に聖なる、傷のない者にしようとされたのです。
神は、みこころの良しとするところにしたがって、私たちを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ご自分の子にしようと、愛をもってあらかじめ定めておられました。
それは、神がその愛する方にあって私たちに与えてくださった恵みの栄光が、ほめたたえられるためです。

요한1서 4장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私たちは愛しています。神がまず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계신 예수님을 찾아가서, 저……제가 오늘부터 당신을 믿을 테니까 잘 좀 부탁합니다……라고 해서 믿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아직 우리가 예수님을 알지 못할 때에, 아니,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먼저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택하시고, 그리고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단순한 초대가 아닙니다. 분명히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습니까.

로마서 3장 23절~24절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すべての人は罪を犯して、神の栄光を受けることができず、
神の恵みにより、キリスト・イエスによる贖いを通して、価なしに義と認められるからです。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도저히 구원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민 · 형사상의 모든 책임을 지심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구원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8장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私たちすべてのために、ご自分の御子さえも惜しむことなく死に渡された神が、どうして、御子とともにすべてのものを、私たちに恵んでくださらない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


여러분,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까지 당하실 정도로 책임을 다 져 주셨는데, 더 이상 무슨 책임을 안 져 주시겠습니까.

불안하십니까. 걱정되십니까. 괜찮습니다. 우리가 바람을 보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고 앞으로 가기만 하면 됩니다.

시편 136편 12절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力強い御手と伸ばされた御腕をもって。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이제 우리의 모든 책임을 져 주시고,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해주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눈앞을 가리는 크고 작은 바람들을 모두 물리치고, 주님만을 바라보며 힘 차게 나아갈 때, 마침내 크나큰 승리를 거두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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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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