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5회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 이루리라선교회
2024년 5월 26일 설교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IRURIRA.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5절~7절
“5.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ヨハネの福音書 11章 5節~7節
“5.イエスはマルタとその姉妹とラザロを愛しておられた。
6.しかし、イエスはラザロが病んでいると聞いてからも、そのときいた場所に二日とどまられた。
7.それからイエスは、「もう一度ユダヤに行こう」と弟子たちに言わ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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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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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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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19번째 시간으로서 “찾으러 오시는 주님” 捜しに来られる主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 잃어버린 양이라는 비유로서, 대단히 유명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양을 치는 목자는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서 양 한 마리가 안 보여요.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요.


그런데 목자는 지금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돌보고 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흔아홉 마리 양을 내버려 둔 채, 길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지금 있는 곳은 산 한 가운데인데 만일 자기가 없으면 이 양떼들이 흩어질 지도 모르고, 뿐만 아니라 맹수들이 와서 공격을 받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목자는 망설이지 않습니다. 귀한 아흔아홉 마리 양을 산에 둔 채로 목자는 그 길을 잃은 양을 찾아 나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세상적으로 본다면 맞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고자 하신 것은, 누가 길을 잃은 양이라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내가, 우리가 길을 잃은 양이라는 것이지요. 길을 잃고 헤매는 양이 우리이기 때문에, 다른 희생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를 찾아오셨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참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런데 보기에 따라서는 좀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자, 여기서 길을 잃은 양에 대해서 우선 한 번 짚고 넘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양, 왜 길을 잃었을까요. 어떤 분은 양이 어렸기 때문이라고 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어디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요. 길을 잃은 어린 양……그래서 그림 같은 것도 보면 길을 잃은 양은 항상 새끼 양으로 그려지는 것을 많이 본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길을 잃은 것이 어린 양이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이 길을 잃은 양에 대한 말씀은 오늘 마태복음 18장 만이 아니라 누가복음 15장에도 나옵니다만,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 어디를 보더라도 그저 양이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지 어린 양이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질문을 해볼까요. 이 양, 도대체 왜 길을 잃었던 것일까요.

이는 제 생각을 말씀 드리겠는데, 이를 부정하실 분은 아마도 안 계시지 않을까 해요. 이 양은 왜 길을 잃었을까 하면 그것은 분명합니다. 좀 모자라서입니다. 다른 양들보다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남들은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잘 따라갑니다. 그러면 문제가 없어요. 하지만 뭐예요? 예, 좀 부족해서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가다가 결국 길을 잃고 마는 것이지요.

사람들도 그렇잖아요. 무슨 어린 애들만 고집이 세나요. 나이 많이 드신 분들도, 다른 사람들이 아니, 거기로 가면 안 된다고 하는데, 그러면 안 된다고 하는데,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하다가 큰 일이 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일본에 보더라도 고령자분들의 교통사고가 많이 늘어나서, 정말 한 달에 몇 번이나 가속페달과 브레이크를 잘 못 밟아서 사람들이 크게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물론 이 군마처럼 자동차가 없으면 정말 생활하기 어려운 곳에 살기 때문에 그러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대중교통이 많이 있는 곳인데도, 이제 운전을 하지 마시고 버스나 전철을 타고 다니시라고 하면, 그래도 괜찮다고 하면서, 내가 운전을 얼마나 잘 하는 줄 아냐고 하면서 끝까지 고집을 부리다가 그만 큰 사고가 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길을 잃은 양은 비단 어린 양만이 아니라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해당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문제는 더 심각하지 않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똘똘한 아흔아홉 마리 양과, 조오금 부족한 한 마리 양. 어느 쪽이 중요합니까.

아니, 그냥 아흔아홉과 하나를 비교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똘똘한 한 마리 양과 부족한 아흔아홉을 비교하는 것도 아닌, 똘똘한 아흔아홉과 여러가지로 조금 부족한 한 마리 양이라고 한다면, 이는 비교할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거 맨날 모자라서 말도 안 듣고 자기 고집대로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하는 양이라면 오히려 없어지는 편이 속히 편하지 않겠습니까. 맨날 그 양 한 놈 때문에 속을 썩였는데, 에이, 없어져서 속이 시원하다. 그거 한 놈 없어져도 여기 아흔아홉만 잘 키우면 또 매년 새끼는 태어나니 별 걱정이 있겠나.

사실 이게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전혀 반대로 똘똘한 아흔아홉 마리 양은 내버려둔 채로, 그 좀 모자라고, 그런 주제에 고집은 세서 맨날 일만 벌이고 사고만 치는, 그래서 이번에도 길을 잃고 어딘지 모를 곳을 헤매고 다니는 양, 똘똘한 양이라면 어쩌면 자기가 길을 찾아서 돌아올 수도 있겠지만, 이 좀 모자란 양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결국 이 목자는 여러 위험을 무릅쓰고서 양을 찾아 나섰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길을 잃을 양이 누구라고요? 예, 아, 그때 그 사람, 맞아, 아 그 때 저 사람……이 아니라, 그렇습니다.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솔직히 좀 모자랄 뿐이라면 길을 잃지도 않아요. 오히려 겁이 많아서 목자나 양한테 꼭 붙어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딱한 양은 모자랄 뿐만 아니라 고집도 세요. 그래서 그냥 자기 멋대로 가는 겁니다. 그래서 맨날 일을 저지르기도 하고, 사고도 내고, 여기저기 부딪쳐서 머리도 깨지고 무릎도 성할 날이 없는, 그런 양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해서 믿게 되었습니까.

요한복음 15장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を選んだのではなく、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選び、あなたがたを任命しました。それは、あなたがたが行って実を結び、その実が残るようになるため、また、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父に求めるものをすべて、父が与えてくださ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요한일서 4장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私たちは愛しています。神がまず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

우리는 우리가 똘똘해서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먼저 우리를 선택하고 사랑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까.

역시 주님은 사람 보는 눈이 있으셔. 다른 사람보다 그래도 내가 좀 잘한 것이 있으니까, 그나마 조금이라도 나은 게 있으니까 나를 선택해주신 것 아니겠어? 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에 대해 성경은 반복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제발 그런 황당한 소리 좀 그만 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디모데후서 1장 9절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神は私たちを救い、また、聖なる招きをもって召してくださいましたが、それは私たちの働きによるのではなく、ご自分の計画と恵みによるものでした。この恵みは、キリスト・イエスにおいて、私たちに永遠の昔に与えら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를 보고 판단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구약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이 힘이 셌기 때문입니까. 그 수가 많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고분고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었기 때문입니까.



신명기 7장 6절~8절
“6.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あなたは、あなたの神、主の聖なる民だからである。あなたの神、主は地の面のあらゆる民の中からあなたを選んで、ご自分の宝の民とされた。
主があなたがたを慕い、あなたがたを選ばれたのは、あなたがたがどの民よりも数が多かったからではない。事実あなたがたは、あらゆる民のうちで最も数が少なかった。
しかし、主があなたがたを愛されたから、またあなたがたの父祖たちに誓った誓いを守られたから、主は力強い御手をもってあなたがたを導き出し、奴隷の家から、エジプトの王ファラオの手からあなたを贖い出されたのである。


우리가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자손들이 어떠했는지를 잘 알잖아요. 맨날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합니다. 물이 없으면 물이 없다고 난리를 치고, 맨날 이걸 달라 저걸 달라며 성화입니다.

그리고 이제 조금 살만 하면 뭘 해요? 예, 기다렸다는 듯이 우상을 숭배하기 시작합니다. 애굽에 보면 황소 모양을 세워놓고 거기에다가 숭배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거기서 노예로 살면서 그게 뭐 좋은 거라고 똑같이 거기에 대고 숭배하다가,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간 다음에는 거기에 있는 온갖 잡신들, 그것도 모자라서 외국에서 건너온 우상들을 숭배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경고를 하신 바 있습니다.


신명기 4장 23절~26절
“23.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
24.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25.네가 그 땅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오래 살 때에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일으키면
26.내가 오늘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하고 전멸될 것이니라”

気をつけて、あなたがたの神、主があなたがたと結ばれた契約を忘れることのないように、またあなたの神、主の命令に背いて、いかなる形の彫像も造ることがないようにしなさい。
あなたの神、主は焼き尽くす火、ねたみの神である。
あなたが子や孫をもうけ、あなたがたがその地に長く住むうちに堕落して、何かの形に刻んだ像を造り、あなたの神、主の目に悪であることを行い、御怒りを引き起こすようなことがあれば、
私は今日、次のことで、あなたがたに対して天と地を証人に立てる。あなたがたは、ヨルダン川を渡って所有しようとしているその地から追われ、たちまち滅び失せる。そこで、あなたがたは長く生きるどころか、すっかり根絶やしにされる。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무려 40년 동안이나 이렇게 교육을 시켜놨는데도 허사였습니다. 맨날 말을 안 듣고 우상숭배를 밥 먹듯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이스라엘 민족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맨날 일을 저지르고 사고를 일으키며 말썽을 부리는, 그야말로 좀 모자란 길 잃은 양과도 같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때로는 경책하시고 그리고 자비를 베푸시면서도 끝까지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사랑하신 이유,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어떤 분은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끝까지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신 이유는 아브라함 때문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자손들을 버리지 않으신 것이다.

자, 이 주장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아주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앞서 하나님께서도 너희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시려고 인도해 내셨다고 하셨잖아요. 하지만,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4장 2절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もしアブラハムが行い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のであれば、彼は誇ることができます。しかし、神の御前ではそうではありません。

이 말씀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지 않았다고 해요. 이 말씀에 동의하십니까. 어떤 분은 좀 의아해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아브라함이면 믿음의 조상이요, 자기 아들 이삭도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아낌없이 하나님께 바치려고 했던 그와 같은 의인 아니냐. 그러니 하나님이 아브라함도 사랑하셨고, 그리고 그 후손인 이스라엘 자손도 사랑하시게 된 것이 아니냐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로마서 말씀은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이 착한 일을 아주 많이 함으로 해서 하나님이 그를 보시고 마음에 들어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때가 되어서야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반대로 아브라함의 등장은 사실 좀 이상한 말이지만 상당히 생뚱맞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3절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主はアブラムに言われた。「あなたは、あなたの土地、あなたの親族、あなたの父の家を離れて、わたしが示す地へ行きなさい。
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なる国民とし、あなたを祝福し、あなたの名を大いなるものとする。あなたは祝福となりなさい。
わたしは、あなたを祝福する者を祝福し、あなたを呪う者をのろう。地のすべての部族は、あなたによって祝福される。」

바로 앞장인 11장에서도 그 때까지는 이름이 아브람이었던 아브라함의 이름이 등장하기도 합니다만, 하나님께서 처음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무슨 착한 일을 했다거나 좋은 일을 했다거나 하는 기록이 없어요. 사실 좀 막무가내입니다. 아무런 전제조건도 없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명령을 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후에 아브라함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물론 그도 많은 실수를 합니다. 기껏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서 이 땅을 주겠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가뭄이 들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버려버리고 애굽으로 내려가잖아요. 거기서 그의 아내 사라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라를 통해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했는데, 그걸 못 기다려서 사라의 여종인 하갈 사이에 이스마엘을 낳게 되는데, 이 이스마엘 때문에 가정에 불화가 생기고 그렇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본래 계획하셨던 것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그의 아들 이삭, 이삭의 아들 야곱, 그리고 그의 열두 아들을 비롯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이제 그 이스라엘 땅에 하나님의 사랑, 그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이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와 같이 살펴 본다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길을 잃은 양에 대한 비유는, 언뜻 보면 우리가 신앙을 갖기 전, 우리가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를 때에 주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해주시고 불러 주셔서 이제 올바른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그와 같은 말씀으로 이해를 하시게 되지요.

아니,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 만으로도 충분히 은혜로운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믿음을 갖게 되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면, 이 말씀은 더 이상 우리에게 필요가 없는 것일까요.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길을 잃은 양이 될 염려가 없습니까.

사실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습니까. 아무리 우리가 주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좀 모자라서 때로는 일을 저지르기도 하고 사고를 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와 같은 우리에게 있어서 이 말씀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놀라운 것은 이 말씀은 초신자 딱지를 뗀 지 오래된 분들에게 있어서도 여전히 많은 가르침을 주시는 은혜로운 말씀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자, 우리가 뭐 동물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알 수 있는 것은 있지요?

우선 양에게 목자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물론 먹이가 있는 곳으로 인도해주어야 할 필요가 있겠지요. 자기가 알아서 풀을 찾아 먹을 수 있다면 걱정할 것 없겠지만, 사실 그렇게 양이 똘똘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걸음걸이도 느리고, 그리고 먹이를 찾기 위한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말도 못 들어봤어요.

그러니 일일이 목자가 그 양떼들을 풀이 있는 곳으로 인도해서 먹일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양을 친다는 일은 생각보다 상당히 위험이 따르는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다윗이 양을 칠 때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당시 사울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무엘상 17장 34절~35절
“34.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ダビデはサウルに言った。「しもべは、父のために羊の群れを飼ってきました。獅子や熊が来て、群れの羊を取って行くと、
しもべはその後を追って出て、それを打ち殺し、その口から羊を救い出します。それがしもべに襲いかかるようなときは、そのひげをつかみ、それを打って殺してしまいます。

그러니까 양 주위에는 항상 이와 같은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자, 내가 지금 길을 잃었어요. 언제 사자나 곰이 와서 나를 공격할지 몰라요.

그러면 여러분이 지금 길을 잃은 양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제부터라도 당장 근육을 키워서 그런 맹수들이 공격해와도 이길 수 있도록 훈련을 해요? 내가 양인데 그게 가능합니까.


아니면, 여기저기 닥치는대로 헤집고 다니겠습니까. 그러다가 점점 더 이상한 곳에 들어가게 되고, 해는 떨어지고 배도 고파지고, 체력은 더 떨어져서 그야말로 목숨이 위험하게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그것도 아니라면, 에라 모르겠다 하고 이제 내 인생은 끝났다, 그러면서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인생을 다 포기해 버리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길을 잃은 양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길을 잃은 양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선 오늘 말씀처럼 길을 잃은 양을 목자가 찾아와 줄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믿음을 갖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목자가 나를 포기하지 않고 틀림없이 나를 찾아와 줄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갖게 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주시는 도움의 손길을 기다릴 수가 있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이 기다림에 대해서 많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40편 1절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私は切に 主を待ち望んだ。 主は私に耳を傾け 助けを求める叫びを聞いてくださった。

잠언 8장 34절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예레미야애가 3장 25절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면서 가만히 있기만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올바른 기다림이 아니라, 마치 주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땅속에 묻어 놓고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을 감당해 나아가면서 기다리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우리가 이 기다림 속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까요.

그러면 무엇을 안 하는 것이 기다림이냐 하면, 바로 낙심을 안 하고, 포기를 안 하고, 좌절을 안 하고 절망을 안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기다림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본의 문화청 청장도 지낸 적이 있는 심리학자 카와이 하야오 라고 하는 분이 계신데, 그 분이 쓴 책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이 분이 이제 늦은 밤에 일본 전철 역에서 일본의 고속철도인 신칸센 표를 사려고 하고 있었는데, 이미 늦은 시간이라서 막차가 걱정이 되었다고 해요.

그래서 역무원에게 문의를 했는데, 그 때 역무원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노조미는 없지만 히카리는 있습니다”(のぞみはありませんが、ひかりはあります)

여기서 “노조미”라고 하는 말은, “희망” 또는 “소망”이라는 뜻이 있고, “히카리”는 빛이라고 하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를 직역을 하면, 소망은 없지만 빛은 있습니다……라는 뜻이 됩니다.


외국 사람이 들으면 이게 뭔 소리인가 싶겠습니다만, 이 대화가 역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면, 일본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해를 할 수 있는 내용이에요.

그건 뭐냐 하면, 여기에 나오는 ‘노조미’나 ‘히카리’는 사실 일본의 고속철도인 신칸센 이름입니다. 말하자면 KTX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일본은 신칸센 종류가 많아서 이름도 다양하거든요.

그러니까 역무원은 단순히 신칸센 노조미는 막차가 없지만 신칸센 히카리는 아직 있다는 뜻으로 “노조미는 없지만 히카리는 있습니다”(のぞみはありませんが、ひかりはあります) 라고 말한 것인데, 이게 듣기에 따라서는 “소망은 없으나 빛은 있습니다”로도 들릴 수가 있잖아요?

그래서 이 심리학자는, 물론 그 역무원이 말하고자 하는 본래 뜻도 알았지만, 그보다도, 그래, 이 세상 소망은 끊어지더라도(失っても) 하늘에서 비치는 빛은 있구나! 하고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대단히 성경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 보면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9절
“8.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兄弟たち。アジアで起こった私たちの苦難について、あなたがたに知らずにいてほしくありません。私たちは、非常に激しい、耐えられないほどの圧迫を受け、生きる望みさえ失うほどでした。
実際、私たちは死刑の宣告を受けた思いでした。それは、私たちが自分自身に頼らず、死者をよみがえらせてくださる神に頼る者となるためだったのです。


바울은 주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수많은 고통과 고난을 당했습니다. 오죽하면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이유를 바울로 하여금 오직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 그와 같은 과정을 겪게 하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わたしは光として世に来ました。わたしを信じる者が、だれも闇の中にとどまる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어둠에 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빛으로 친히 우리가 있는 이 낮은 땅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길을 잃고 헤매고 있습니까. 고통과 고난 가운데 있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주님께서 오십니다. 아흔아홉 마리가 아니라 수천 수만 마리 양이라 하더라도, 모든 것을 버려 두고 다 내팽겨 치고서라도, 나 하나를 살리기 위해 달려오시는 주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세상의 소망이 끊어져도 빛으로 오신 주님을 기다리고 의지하기만 하면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そうです。主は光として来られました。 私たちが闇の中にとどまる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に、自ら私たちのいる低いところまで下られたということを信じ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いたします。

皆さん、道に迷っておられますか。苦しみと苦難のただ中におられますか。大丈夫です。主が来られます。九十九匹の羊どころか、何千何万の羊であろうともすべてを山に残し、あなた一人を助けるために走って来られる主であるということを信じ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します。

この世においての望みを失っても、光として来られた主を待ち望み、頼りさえすれば私たちは生きられます。勝利す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이제 아무리 인간적인 그리고 세상적인 소망이 끊어졌다 하더라도, 오로지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님이 우리를 도와 주시기 위해,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를 찾으러 오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다림으로 말미암아, 불안과 낙심과 좌절과 절망을 훌훌 털어버리고, 빛으로 오신 주님과 함께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これからは、いくら人間的、世俗的な望みを失っても、ただ主のみを頼り、私たちを助けてくださるため、道に迷っている私たちの捜しに来られるということを信じ、そして待ち望むことによって、不安と落胆と挫折と絶望を振り払い、光として来られたイエス様とともに勝利す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します。

 

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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