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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3회 [면류관 강해 제4회] 아름답고 광대한 축복 - 이루리라선교회 홍성필 목사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장 8절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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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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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면류관 강해 4번째 시간으로서 “아름답고 광대한 축복”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오늘도 면류관 강해의 핵심구절인 요한계시록 3장 11절을 함께 읽고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아멘.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에게 내리신 말씀이셨습니다.

당시 모세는 어떻게 지내고 있었습니까. 그는 태어나서 40년 동안 애굽에서 왕자로 자랐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사람을 해치게 되어 결국 광야로 돌아와 또 40년 동안 쓸쓸하게 보내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제 그의 나이 80세였습니다.

한편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400년 가까이 되는 동안 애굽에서 노예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 때까지를 한 번 간략하게 정리해보도록 할까요.

지난 주에 잠시 살펴보았던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아들 중 하나인 야곱이 있지요. 그의 아들인 요셉이 그의 형들에 의해 노예로서 애굽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그의 나이 열 일곱 살 때의 일이지요.

그리고는 노예로 살다가 그것도 모자라서 억울하게 옥살이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애굽으로 팔려간 지 13년 만에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시자, 그는 애굽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총리가 되어서 애굽을 다스리는 위치에 오르게 됩니다.

그로부터 7년 동안에는 풍년이 들더니 그 이후에는 극심한 흉년이 들어서 애굽 외에는 모두 아사 직전이 되지요. 그러나 애굽에는 요셉의 지혜 덕분에 식량이 넉넉했습니다.

이제 요셉은 그의 아버지 야곱과 일가족 모두를 애굽으로 불러들이게 되지요.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식량 걱정 없이, 뿐만 아니라 애굽의 총리 가족으로서 풍요로운 삶을 보내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그와 같이 좋은 환경 속에서 나날이 수가 늘어 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요셉을 비롯하여 그 세대 사람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새로운 지도자들이 등장하게 되자, 이제 그 사람들의 생각이 바뀝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네 나라에 수많은 이민족이 있게 된다면 전쟁이 일어났을 때 배신을 할 수 있다. 이대로 놔둘 수는 없다고 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강제노역에 동원하기 시작하고, 점차 노예로서 고된 삶을 강요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일은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내용이에요.


창세기 15장 13절~14절
“13.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하나님께서는 벌써 한참 전에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구체적으로 어느 나라라고까지는 언급하지 않으셨지만, 이 말씀에 의하면 이방 나라에서 400년 동안 이방 나라에 살면서 괴롭힘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출애굽기 12장 40절입니다.

출애굽기 12장 40절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이상하죠? 하나님께서는 400년 동안 이방 나라에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그것보다 30년이나 지났잖아요.

이 말씀을 보고 누구는 그렇게 말합니다. 아니, 400년이라고 하면 400년 만에 풀어 주시거나 하실 일이지, 왜 30년이나 더 괴롭힘을 당하게 내버려두신 거냐.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 그게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계산을 잘못하신 거냐. 뭐, 그러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이는 성경을 오해했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에요.

자, 지금 시리즈로 전해드리고 있는 말씀은 주제설교가 아니라 강해이기 때문에, 같이 공부하는 의미로 우리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방금 말씀드린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떻습니까.

창세기 15장 13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여기서는 400년 동안 이방 민족이 괴롭힐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출애굽기는 어떻습니까.

출애굽기 12장 40절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괴롭힘을 당한 기간이 아니라 단순히 거주한 기간을 가리키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 거주한 기간은 비록 430년이긴 하지만, 괴롭힘을 당하는 기간은 400년이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당시 총리였던 요셉의 부름을 받아 애굽에 들어갔을 때부터 노예로 살았던 것은 아니잖아요.

초반에는 안락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노예로서 살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성경에 의하면 구체적으로 노예로서 살았던 기간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우선, 성경기록에 의하면 요셉이 나이 서른에 총리가 되고 7년 동안 풍년이 있은 다음에 7년 동안 가뭄이 들었다고 하지요.

창세기 45장 6절에 의하면 요셉이 가족들을 불러들인 것이 7년 풍년이 끝나고 흉년으로 접어들고는 2년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풍년부터 계산하면 9년 뒤인 셈이지요.

이를 근거로 단순계산을 한다면, 나이 서른에 총리가 되고 난 다음, 그의 가족들이 애굽으로 들어간 것은 9년 뒤이니까 요셉의 나이 39세 때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마지막인 50장 26절에 의하면 요셉이 110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요셉이 39세 때 야곱과 그의 가족이 애굽으로 들어왔고, 그가 110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면, 야곱과 그의 가족이 애굽으로 들어가서 총리로 있던 요셉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최소한 70년은 평안하게 살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출애굽기 12장 40절에 의하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430년 만에 나왔다고 하니까,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살았던 전체 기간인 430년 중에서 요셉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70년을 뺀다면 360년이라는 기간이 나오죠?


그러니까 요셉이 세상을 떠난 다음 곧바로 그들의 노예생활이 시작했다고 해도 430년 빼기 70년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길어도 360년 동안 노예로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본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이 괴롭힘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400년 보다 무려 40년이나 그 기간을 줄여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360년이라고 하는 기간이 어디 짧습니까.

우리나라가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36년이라고 해도 대단히 긴 세월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에서 36년도 아닌 최대 360년 동안 노예살이를 하면서 괴롭힘을 당했다고 하니 얼마나 길었겠습니까.

혹시 여러분께서는 어렸을 때의 꿈을 이루셨습니까.

사실 꿈을 꾸는 데에 동서고금, 남녀노소, 그리고 빈부귀천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난 2024년 11월 15일자 신문에 보니까 올해 수능 응시자 중에서 83세 되는 할머니도 계셨다고 하고, 그리고 작년 2023년 2월에는 94세 되는 할아버지가 대학을 졸업하셨다고 합니다. 참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하지만 노예라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노예는 태어날 때 노예면 죽을 때까지 노예입니다. 노예는 꿈이 없습니다. 소망도 없습니다. 일거수일투족 자신이 무엇을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해야만 해요. 자신을 위한 삶도 없습니다. 자신의 주인을 위해 태어나서, 평생동안 주인을 위해 살다가 가는 인생이 노예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자, 여기서도 잠깐 공부 좀 하고 갈까요.


과연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으로 보내셨던 것일까요. 그들이 미워서 그러셨을까요?

이번 말씀을 준비하면서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인구의 증가율을 한번 살펴보았습니다. 그러자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을 알았어요.

한국이나 일본을 본다면 대략 100년 동안에 3배에서 4배 정도의 인구가 증가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100년에 4배라고 한다면 400년이면 16배잖아요? 이는 세계적으로 보아도 대략 추세가 비슷해요.

세계인구가 1600년에는 5억 정도였는데, 400년 뒤인 2024년대에는 80억이 되었으니 이것도 정확히 16배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인구는 대략 100년에 4배 정도, 400년이라면 16배 정도 증가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점엔 대해서는 이해가 되셨지요?

그렇다면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의 증가속도를 보겠습니다.

창세기 46장 26절~27절
“26.야곱과 함께 애굽에 들어간 자는 야곱의 며느리들 외에 육십육 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태어난 자이며
27.애굽에서 요셉이 낳은 아들은 두 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가 모두 칠십 명이었더라”


여기에 보시면 며느리들을 제외한다고 하면 아이들까지 합한 숫자가 70명이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며느리까지 남녀노소 모두 합친 숫자를 본다면, 좋습니다. 반올림까지 한다고 치고 넉넉잡아서 약 100명이라고 해보죠.

자, 요셉이 애굽의 총리일 때, 처음에는 약 100명이 애굽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430년 뒤에 나올 때에는 인구가 얼마였다고 말씀드렸는지 기억하시나요?

출애굽기 12장 37절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을 세어보니까 장정, 그러니까 성인 남성의 수가 60만명이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남녀노소를 다 합치면 대략 200만명 정도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산을 해요.

그렇다면 이게 어떻게 됩니까. 처음에 애굽에 들어갈 때를 약 100명이었다고 한다면 나올 때는 몇 명이요? 예, 200만명이라고 한다면 430년 동안에 몇 배가 늘어난 거예요?

100명에서 200만명, 400년 사이에 2만배가 증가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평균이 400년 동안에 16배인데 이스라엘 자손들은 20배도 아니고 2만배가 증가했어요. 세상에 이렇게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경우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애굽이라는 환경에 둠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자손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도록 역사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또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약속을 이루신 결과입니다.


창세기 22장 17절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당시 아브라함은 아들 하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아들 하나가 아니야. 너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해줄 거야.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요즘 사람들은 뭐 이런 말을 별로 기뻐하지 않겠지요?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시면 어떻습니까.


지금 밥 한끼 먹을 돈이 없어요. 아니면 한달 치 집세를 낼 돈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의 재산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해줄게……. 이러면 당시 아브라함의 마음이 좀 와 닿지 않을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정도로 놀라운 말씀을 해 주셨던 것입니다.

자, 이제 그 수가 이제는 한 가정이 아니라 한 나라의 민족을 이룰 정도로 늘었어요.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시점에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모세를 부르실 때의 말씀을 우리는 주목을 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3장 8절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꿈도 없고 희망도 없이, 남의 나라에서 노예로 살고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해방시켜 주실 뿐만 아니라,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는 마치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축복처럼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집도 없고 재산도 없고, 그리고 자유도 소망도 없이 종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한테, 최고로 좋은 집과 넉넉한 재산을 주시겠다는 것보다도 더욱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들을 위해 축복을 예비해 놓으셨어요.


그리고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그들을 이끌어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나일 강을 피로 만들고, 개구리와 이와 파리를 통해서 재앙을 내리시고, 질병과 자연재해와 마지막에는 장자를 치시는 이적을 통해서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십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출애굽기 14장에 의하면 그들 앞에 놓인 홍해를 갈라 여성들과 아이들을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추격해오던 애굽의 최정예부대를 모두 전멸시키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여러분, 지금까지 장황하게 말씀드린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놀라운 땅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시려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요?

예, 그렇습니다. 모세가 태어나기 전, 아니, 야곱이나, 이삭도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미 그와 같은 놀랍고도 기쁜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거예요. 그리고 단순히 마음속으로 생각만 하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준비를 차곡차곡 진행하고 계셨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을 통해서만이 아니에요. 400년 동안 애굽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폭발적으로 늘리셨을 뿐만 아니라 모세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아무리 옥토였던 곳이라 하더라도 땅이라고 하는 것은 놔두면 폐허가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그렇죠. 가나안 여섯 족속을 시켜서 그 땅을 부지런히 가꾸도록 만드셨던 것이지요.

가나안 사람들은 그 거기가 자기들을 위한 땅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시려고, 그들을 시켜서 열심히 가꾸게 하셨던 것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수 백 년에 걸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줄 어마어마한 축복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철저하게 준비하셨어요. 이 축복의 주인은 이미 정해진 것이잖아요. 이 세상에서 바로 이스라엘 자손에게만 주어진 영광된 축복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면 이를 차지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성경은 무엇에 대한 책이라고 말씀드렸지요? 예, 순종에 대한 책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 순종만 하면 이 모든 축복이 주어진다는 점은 이미 기정 사실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 바로 앞에까지 왔습니다.


민수기 13장 1절~2절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되 그들의 조상의 가문 각 지파 중에서 지휘관 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

하나님께서는 이제 가나안 땅으로 정탐을 보내도록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모세는 각 지파에서 한 사람 씩을 뽑아 총 열두명을 가나안 땅으로 정탐을 보냅니다.


이제 그들이 40일 동안 정탐을 마치고 돌아와서 보고를 하는데, 그 땅이 어떻다고 합니까. 아주 황폐하고 쓸모없는 땅이래요?

아닙니다.

민수기 13장 25절~27절
“25.사십 일 동안 땅을 정탐하기를 마치고 돌아와
26.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나아와 그들에게 보고하고 그 땅의 과일을 보이고
27.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그들은 말합니다. 정말 놀라운 땅, 정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아름답고 광대한 땅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하나님 말씀에 거짓이 없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에게 주실 축복이 정말로 놀랍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잖아요.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당장 올라가서 그 축복을 차지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있지요.

민수기 13장 28절~33절
“28.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29.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주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주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주하더이다
30.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31.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32.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이는 뭐예요? 예, 거기 있는 이방민족이 너무 강해서 우리는 그 땅을 차지하지 못할 것 같다는 것입니다.

자, 지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명료합니다. 너희들을 위해서 좋은 땅을 몇 백 년에 걸쳐 준비해 놨어. 너희도 가서 직접 봤지? 그러니까 이제 그 땅을 차지하면 돼.


하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은 말합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이 너무 강해 보여서 저희는 차지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러고 있는 것이잖아요.

이를 보고 정탐꾼 중 두 명인 여호수아와 갈렙은 말합니다.

민수기 14장 6절~9절
“6.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7.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말합니다.

이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거기 있는 백성들을 보고 두려워하지 마. 우리가 봐야 할 것은 거기 사는 백성들이 아니라, 그 땅이 얼마나 아름답고 광대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된 땅이냐 하는 거야. 그 땅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시기로 했어. 그러니까 당장 올라가서 차지하자.

그러나 좌절과 절망감에 사로잡힌 그들은 듣지를 않습니다.


민수기 14장 1절~3절
“1.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2.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이 모습을 보면 저는 물위를 걸었던 베드로가 생각납니다. 그는 예수님 말씀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물위를 걸었습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폭풍이 몰아치는 물위를 걸어갔어요.

하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죠.

마태복음 14장 30절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베드로가 담대한 믿음을 가졌으면 예수님만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는 예수님이 아니라 바람을 보게 되자 두려움에 사로잡혀, 결국 물속으로 빠져갔다고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손가락으로 실험을 해보면 금방 압니다. 멀리 보면 자세히 보이더라도 손가락을 눈앞에 두고 가까이만 본다면 멀리 있는 모습이 흐려져서 안 보이게 돼요.

마치 그런 식이지요. 우리가 주님만 바라보고 나아가면 이길 수 있는데, 주님이 아니라 코앞에 있는 바람을 바라보고 현실을 바라보게 되자 무서워서 실족하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찬송가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의 3절 가사가 어떻게 됩니까.

“주 안에 기쁨 누림으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우리가 주님께 초점을 맞추면 우리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찾아오고는, 세상과 내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만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이 아닌 코앞에 있는 현실에 초점을 맞추면 어떻게 되겠습니다.

그렇죠. 구속한 주님은 간곳없고 세상과 나만 보이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된다고요? 예, 그렇죠. 마치 바람을 보고 물속으로 빠져버린 베드로처럼 우리 또한 현실 앞에서 실족하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로 이런 격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눈앞에 있는 현실을 보니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이제 도망가고 싶어요.

그래서 뭐라고 해요? 예, 차라리 우리가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왜 우리가 그들한테 죽임을 당해야 하는가 하고 난리를 치지 않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민수기 14장 26절~33절
“26.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7.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31.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32.너희의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33.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들이 지금 들어가지 못하고 40년 뒤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씀하시나요?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 보세요.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정성 들여서 너희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했는데 이걸 못 받겠다고? 차라리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겠다고?

좋아. 너희들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해주마. 사리분별이 있는 성인들 중에서, 내 말을 믿은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는 광야에서 다 죽을 거야. 가나안 땅에는 절대로 못 들어가.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정성 들여 준비하신 놀라운 축복을 한순간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나 보죠? 저희가 지금이라도 올라가서 가나안 땅을 차지하겠습니다! 하고 자기들 멋대로 쳐들어갔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겠어요.


민수기 14장 39절~45절
“39.모세가 이 말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알리매 백성이 크게 슬퍼하여
40.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산 꼭대기로 올라가며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곳으로 올라가리니 우리가 범죄하였음이니이다
41.모세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제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느냐 이 일이 형통하지 못하리라
42.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의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43.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
44.그들이 그래도 산 꼭대기로 올라갔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영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45.아말렉인과 산간지대에 거주하는 가나안인이 내려와 그들을 무찌르고 호르마까지 이르렀더라”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들을 위해 준비하신 값진 선물을 내던지셨어요. 너희들에게는 안 주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나중에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하더라도 이미 버스는 떠나간 다음이에요.


하나님으로부터 크나큰 축복을 받기로 되어 있던 그들은 순종을 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40년 동안 광야에서 살면서 한 사람 두 사람 쓰러지게 되고 그들의 흔적은 광야의 모래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축복을 예비해 놓고 계십니다.

지금은 보이지 않을지라도, 놀라운 면류관, 아름답고 광대한 축복을,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해 놓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앞에 있는 어려움을 보고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축복을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24장 13절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우리가 순종을 버리면 이스라엘 자손들을 향한 축복의 약속을 버려 버리셨듯이 우리를 향한 축복도 버리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주님을 믿고 견디게 된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주신 축복을 모두 얻게 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주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과 순종을 가지고 끝까지 견딤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약속하신 면류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과도 같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아름답고 광대한 축복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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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2회 [면류관 강해 제3회] 팔아 넘긴 장자의 명분 - 이루리라선교회 홍성필 목사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25장 29절~34절
“29.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30.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32.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십일조, 감사헌금, 개척후원, 선교후원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이루리라선교회 후원
www.후원.com
미션펀드 일반후원 :     www.MISSIONFUND.kr
미션펀드 정기후원 :  www.MISSIONFUND.co.kr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면류관 강해 3번째 시간으로서 “팔아 넘긴 장자의 명분”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오늘도 면류관 강해의 핵심구절인 요한계시록 3장 11절을 함께 읽고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오늘 본문에 보시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아들인 에서와 야곱이 등장합니다.

에서와 야곱은 그 출생부터 독특했습니다.

가장 큰 특징은 이 두 형제는 쌍둥이였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용모가 매우 달랐어요.


창세기 25장 24절~26절
“24.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25.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26.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형 에서의 용모는 피부가 붉고 온몸에 털이 많았다고 하지요? 그리고 성격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창세기 25장 27절~28절
“27.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28.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이 구절에 의하면 형 에서는 들에서 사냥을 좋아하는 외향적인 성격이었던 반면에, 야곱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좀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에서는 사냥을 해오면 그것으로 음식을 만들어서 가족들에게 대접을 했는데 아버지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로 해 오는 음식을 아주 좋아했다고 하지요?

반면에 야곱은 맨날 집에 있으니까 어머니 리브가와 많은 시간을 보냈을 테니, 아버지 이삭은 형 에서를 좋아하고, 어머니 리브가는 동생 야곱을 좋아했을 것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지금도 흔히 있을 수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 두 형제들에게는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창세기 25장 22절~23절
“22.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3.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리브가가 아이를 임신했는데 뱃속에서 아주 많이 싸웠나봐요. 그러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더구나 그때까지 출산 경험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참으로 괴로웠었나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를 드리게 되었는데,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뱃속 아이들은 두 민족인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을 하세요.

큰 자가 작은 자를, 그러니까 형이 아우를 섬길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게 언제요? 예, 태어나기도 전에 그와 같은 말씀을 하셨던 것이지요.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그렇다면 리브가 외에 그의 남편 이삭이나 아니면 그의 두 아들인 에서와 야곱이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에 기록이 없어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뭐냐 하면 야곱은 형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아니, 단순히 에서의 형이 되고 싶어했던 것이 아니라, 장자가 되고 싶어 했어요.

당시에 장자라고 하면 그 집의 상속자였습니다. 대단한 권한이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야곱이 장자가 된다는 것은 이는 현실적으로 볼 때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장자라고 하는 것은 다름아닌 태어난 순서로 정해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야곱이 아니지요. 그는 장자권을 자신이 얻기 위한 방도를 생각합니다.

출애굽 이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셨고, 그 내용에 의하면 600개가 넘는 세부적인 규정이 있었습니다.

당시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수많은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였기 때문에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그만한 규율이 필요했겠습니다만, 야곱 당시에는 아직 율법이 없었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말하자면 거래와 같은 일을 원만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원칙이 필요했을까요.

이는 단순합니다. 상대방과의 합의만 있으면 그 내용에 있어서는 자기들 마음대로 정하기 나름 아니겠어요?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떤 물건을 팔려고 해요. 거기에 1만원이라는 가격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걸 1만원에 사려고 해요.

그럼 물건을 가진 사람은 그 사람에게 물건을 넘기고 그 대신 1만원을 그 사람으로부터 받으면 그만이잖아요.


당시에는 무슨 ‘장자권은 팔 수 없다’라는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서로가 합의만 한다면 그 내용은 무엇이든지 상관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여기에 주목한 야곱은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넘겨받을 방법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에서가 들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나 시간대를 계산했을지도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돌아올 때에는 항상 허기진 상태였다는 점도 놓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랜 시간 준비해온 야곱은 그날 한 길목에서 팥죽을 쑤고 있었습니다. 그 곁에는 떡을 준비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이제 여느 때처럼 에서가 걸어옵니다. 야곱은 태연하게 팥죽을 쑤고 있었겠지요. 이를 본 에서는 다짜고짜 야곱에게 그 팥죽을 달라고 말합니다.

그렇겠지요. 지금 배가 고파 정신이 혼미해서 쓰러질 지경인데, 네가 왜 여기 있냐, 왜 팥죽을 쑤고 있냐는 등을 물어볼 기력이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야곱은 신중했습니다. 오랫동안 준비해온 순간인데 대충 넘어가게 된다면 모든 것이 수포가 될 수도 있잖아요.

야곱은 에서에게 말합니다. 형님이 가지고 있는 장자의 명분을 내게 파세요.

이는 말하자면 떡과 팥죽을 줄 테니 그 대가로 나에게 장자의 명분을 넘기라는 요구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에서는 말합니다. 아니, 내가 지금 죽게 생겼는데, 장자의 명분이 밥 먹여주냐. 그래, 너나 가져라. 그리고 빨리 거기 있는 떡과 팥죽을 내놓으란 말이야.

에서는 배가 고파서 그런지 성질을 부리며 소리칩니다. 그래도 야곱은 신중합니다.


장자의 명분을 자기한테 판다고 하나님께 맹세하라고 하지요. 여기서 맹세란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닙니다.

신학자들에 의하면 성경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한다는 것은, 그것을 어겼을 때에는 저주가 임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제 에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장자의 명분을 동생 야곱에게 팔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하고는 떡과 팥죽을 먹고 일어나 떠났다고 하지요.

이러므로 인해서 이제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그의 동생 야곱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에서가 동생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빼앗겨버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에서가 어리석었기 때문에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에서는 사냥을 잘했다고 하는데 어리석은 사람이 어떻게 사냥을 잘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야곱이 나빴기 때문에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성경은 야곱이 악했기 때문에 에서로부터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에서는 왜 장자의 명분을 팔아 넘겼습니까. 아니, 정확하게는, 에서는 왜 장자의 명분을 팔아 넘겼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창세기 25장 34절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예, 그렇습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에 이를 떡과 팥죽에 팔아 넘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고 말았던 것일까요.


장자의 명분이라고 하는 말을 히브리어로 본다면 ‘베코라’라고 해서 ‘태를 열다’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영어번역본에는 뭐라고 되어 있냐 하면 birthright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서 ‘birth’라고 하는 것은 birthday 라고 할 때 쓰이는 것처럼 ‘태어나다’라는 뜻이고, ‘right’라고 하는 말은 ‘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장자의 명분’이라고 하는 것은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권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는 참 절묘한 표현 아닙니까. 장자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착한 일을 했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열심히 공부했다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태어나면서 주어진 엄청난 권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장자의 명분에는 그 외에도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바로 거저로 얻은 권리라는 점입니다.

에서는 자신이 노력해서 얻지 않았습니다. 돈을 많이 주고 사지도 않았어요. 단지 태어나면서 자신의 아무런 노력 없이 거저로 주어진 것, 그것이 바로 장자권, 장자의 명분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이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느졌다는 것이에요.

만약에 몇 년 동안 열심히 공부한 끝에 어려운 시험에 합격해서 가질 수 있었던 것이라면, 몇 년 동안 열심히 일하고 절약한 끝에 돈을 모아서 샀던 비싼 것이었더라면, 에서가 그 장자의 명분을 떡과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넘겼겠습니까. 아니요.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자신의 노력 없이, 자신이 돈을 지불하지 않고 거저로 얻은 것이었기 때문에, 장자의 명분이라고 하는 놀라운 축복을 단지 ‘그까짓 것 뭐가 대단하다고’ 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 결국은 헐값에 팔아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언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약속을 받았던 것입니까.

에베소서 1장 3절~5절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언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언제 우리를 택하셨다고 되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창세 전에,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 정도가 아니라, 온 천하 만물을 만드시기도 전에 이미 주님 안에서 우리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있도록 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했습니까. 어떤 대가를 지불했습니까.

그 다음 구절을 보시겠습니다.


에베소서 1장 6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이와 같이 놀랍고도 놀라운 축복과 은혜는 우리에게 거저로 주어진 축복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어느 분은 그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헌금을 많이 냈는데, 얼마나 십일조도 많이 내고, 얼마나 열심히 봉사도 하고 얼마나 열심히 교회를 섬겼는데…….

혹시 여러분들도 그런 생각이 드셨습니까.

자, 지난 주의 강해를 조금 복습할까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원하셨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에덴에 있는 온갖 과실들을 밤낮없이 분주하게 키우거나 하는 것이었습니까.

아니에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않는 것, 단지 그것 하나만 지킨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마어마한 축복을 영원히 누르고 흔들어 넘칠 정도로 부어 주신다는 것 아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지키라고 말씀하신 약속의 크기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어 주시겠다고 하는 축복의 크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둘이 비교가 됩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헌금이나 십일조를 많이 냈다고 해도, 아무리 우리가 봉사를 많이 하고 교회를 열심히 섬겼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우리가 받은 축복은 물론이거니와 장차 우리가 받을 축복과도 비교가 안 되는 작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작은 것으로 우리가 주님께 감사하고 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종을 받아 주시고 우리에게 약속한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을 영원토록 부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장자의 명분이라고 하는 축복, 사람의 노력으로는 절대로 얻지 못할 엄청난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축복을 너무나도 가볍게 여겼기에 헐값으로 넘겨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에서의 후손 에돔 족속은 오바댜서에 의해 멸망이 예언되고 결국 그 예언대로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후손은 어떻습니까. 그 후손에서 이새의 아들 다윗이 나고 마침내 예수님으로 이어지는 놀라운 족보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에게는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주어진 구원의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은 축복을 받을 만한 일을 한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모든 것이 예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떡 몇 개와 팥죽 몇 그릇에 그와 같은 축복을 팔아 넘기지 않을 자신이 있으십니까.

물론,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우리의 구원과 팥죽 몇 그릇을 어떻게 비교하겠습니까.

자, 그럼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돈이 좀 넉넉하십니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해서 당당하게 ‘네’라고 대답할 수 있는 분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글쎄요. 돈이 얼마 정도 있으면 넉넉하겠습니까. 100억원? 아니, 한 1000억원 정도 있으면 넉넉할까요?

사실 그 정도 되면 저 같은 경우는 잘 감이 안 옵니다만, 좋아요. 한 1,000억원 정도 있으면 남은 여생까지 좀 돈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럼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누군가가 여러분께 이렇게 제안을 했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 제가 지금 당장 여러분 은행 계좌에 현찰로 1,000억원을 입금시켜 드리겠습니다.

그 대신,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여러분의 신앙을 버리십시오.

이런 말을 들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생각해보세요. 1000억원이라면 이제 더 이상 집세 오를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생활비나 자녀들 교육비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자기가 원하는 집, 원하는 차를 살 수도 있고, 직장에서 치사한 상사 밑에서 눈치 보며 일할 필요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평생동안 병원비 걱정도 없어요.

이처럼 꿈과도 같은 생활이 보장되는 조건은 단 하나, 지금 가지고 있는 신앙을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이게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라면, 여러분께서는 이와 같은 유혹 앞에서 당당할 수 있겠습니까.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이런 유혹, 어디서 들어보지 않으셨습니까.

누가복음 4장 5절~7절
“5.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의 유혹인 것이지요.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마귀의 시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항상 크고 작은 갈림길이 놓여 있습니다. 그 갈림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신앙과 세상의 갈림길’인 것이지요.

아휴,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다고 해도 내 인생에 바뀌는 것 하나 없더라. 신앙이 밥 먹여주나. 성경이 밥 먹여주나. 차라리 그런 쓸데 없는 것을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겠나.

이것이 바로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에서가 빠져든 덫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받은 구원의 약속이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십니까. 예수님의 사랑이 별볼일 없는 것처럼 생각되십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거저로 주어진 이 구원의 약속은, 온 세상 모든 금은보화라 하더라도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를 가볍게 여긴다면 마치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빼앗긴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 우리에게 약속된 구원이라는 면류관도 역시 빼앗겨 버리게 되고 말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6절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이제 세상적인 탐욕을 위해 구원의 약속을 팔아버린 에서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시험이 닥쳐 오더라도 우리에게 약속된 구원의 면류관을 끝까지 굳게 잡아 지킴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날에 한 사람도 남김 없이 주님으로부터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구원의 면류관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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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1회 [면류관 강해 제2회] 최초의 축복과 저주 - 이루리라선교회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 23절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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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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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면류관 강해 2번째 시간으로서 “최초의 축복과 저주”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른바 구원의 취소, 그러나 저는 단순히 ‘구원의 취소’라기 보다는 더 구체적으로 ‘구원이라는 약속의 취소’라고 하는 편이 보다 적절하지 않을까 합니다.

구원이라는 약속의 취소. 이 점에 대해서 이를 긍정하는 의견,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약속은 취소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의 근거로 제시하는 구절이 히브리서입니다.

히브리서 6장 4절~6절
“4.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이 구절에 대해서도 면류관 강해 중에서 자세히 다루게 될 것입니다만, 사실 성경에 보면 이 외에도 대단히 많은 곳에서 ‘구원이라는 약속의 취소’에 대한 개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이 ‘구원이라는 약속의 취소’라는 내용을 담게 될 면류관 강해를 본격적으로 시작함에 있어서 이 강해의 핵심이 되는 구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본 구절에 의하면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즉 면류관을 빼앗기지 못하게 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지 않습니까.

지난 주에 알아본 바와 같이 면류관은 누가 주시는 것입니까.


디모데후서 4장 8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바울은 자신을 위해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하며, 그 면류관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주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주님께서 주시는 이 면류관을 빼앗기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어렵지 않습니다. 빼앗기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 그것은 바로 빼앗길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러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를 위해 예비된 면류관은 절대로 빼앗기는 일이 없다면 주님은 이와 갈이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시록에 의하면 주님께서는 친히 이를 빼앗기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요한계시록의 이 구절은 이 면류관 강해에 있어서 핵심이기 때문에 이 강해 동안에는 그 날의 본문구절과 함께 우선 이 핵심구절도 함께 읽고 본론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자, 요한계시록 3장 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예,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약속된 면류관을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창세기 1장 1절부터 보실까요.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 방송국에서 어떤 한 여성을 밀착취재를 했다고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아침에 그 여성이 일어나더니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서요. 그래서 어디를 가나 하고 카메라가 따라가 보았더니 시장에 갔습니다. 거기서 여러 가지 음식재료를 삽니다.

그 다음에는 마트에 가서 또 여러 가지 재료를 삽니다. 그것 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이제 백화점에 가서 실내외를 장식할 물건들도 사왔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집 안과 바깥을 아주 정성스럽게 꾸밉니다. 그리고는 구입해온 최고급 자료를 써서 그야말로 진수성찬을 차렸습니다.

몇 시간 동안 집도 꾸미고 음식도 열심히 했는데 이제 저녁 6시쯤이 되자 누군가가 집의 벨을 눌러요. 그래서 문을 열었더니 어떤 남성이 활짝 웃으면서 들어옵니다.

알고 보니 그 여성의 남편이 며칠 동안 먼 곳에 출장을 갔다가 그 날 돌아오는 날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 여성은 남편을 환영하기 위해 아침부터 정성스럽게 준비했던 것이지요.


도중까지 본다면 그 여성이 왜 그와 같은 준비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먹으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디 여행을 가려고 도시락 준비를 하는지 알 길이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제일 마지막까지 지켜보았더니 그제서야 모든 목적을 알 수 있게 되었던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그 여성이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서 여기저기 바쁘게 다니면서 쇼핑도 하고 그리고 집에 와서는 하루 종일 집도 꾸미고 요리도 하고 그랬던 것은 모두 다 누구를 위해서예요?


예, 그렇습니다. 모두 다 그의 남편을 위해서 준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앞에 있어왔던 모든 일들은 다 어디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그렇죠. 그의 남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여성의 모든 일은 다 그의 남편을 위한 일이었던 것이기 때문에 그의 남편을 제외해버린다면 모든 일들이 무의미해지고 만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창세기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기록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빛을 만드시고는 빛과 어둠을 나누세요. 물과 궁창을 나누시고는 육지를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채소와 나무들을 만드십니다. 해와 달을 만드세요.

뿐만 아니라 바다와 육지와 하늘 위에 많은 생물들도 만드셨습니다.

이런 표현이 적절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참 열심히 일을 하세요.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많은 것들을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까.

그것은 마지막 날에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창세기 1장 26절 이하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여섯째 날에 사람을 만드셨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천지창조는 모두가 다 ‘사람’이라고 하는 피조물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이는 무엇을 말해줍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은 바로 사람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에는 지금까지 다른 생물들을 만드셨을 때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다른 생물들을 만드셨을 때와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바로 사람의 창조 목적인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 모양대로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사람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이 세상에 수많은 생물들을 창조하셨다고는 하지만, 이와 같은 축복을 주신 피조물은 오로지 사람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말씀해 주고 계신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는 구체적인 축복도 주셨습니다.


창세기 1장 29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창세기 2장에 의하면 에덴 동산은 전체가 아름다운 귀금속이나 보석으로 넘쳐나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곳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의 · 식 · 주 문제, 뿐만 아니라 죽음도 질병도 없는 완전하고도 완벽한 세상에서 큰 기쁨과 함께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세상입니다.


누구는 그렇게 말합니다. 집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숲속에서 그냥 먹고 자고 하는 것인데 뭐가 좋겠냐는 거예요.

혹시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 질문을 드립니다. 제가 여러분께 종이를 나누어 드리고 시간을 충분히 드릴 테니까 여러분 집에 있는 것, 여러분 것이든지 여러분의 가족 것이든지, 아무튼 여러분 집에 있는 것을 모두 적어 보시기 바랍니다. 가능한 한 자세히 적는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몇 가지 정도를 적으실 수 있을까요. 실제로 적어보지는 않는다고 해도 한 번 구체적으로 자세히 하나하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 머리 속으로라도 여러분 집에 있는 것들을 자세하게 적으셨나요?

그럼 제가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지금 적으신 그 목록에 ‘지우게’를 적었나요? ‘양말’이라고 적으셨나요? ‘귀이게’라고 적으셨나요? ‘손톱깎이’라고 적으셨나요? ‘가위’라고 적으셨나요?

제가 지금 다섯가지를 말씀 드렸지요? 지우개, 양말, 귀이게, 손톱깎이, 가위……이 중에서 여러분 집에 하나도 없는 분 계십니까. 만약에 그런 분이 계시다면 저한테 말씀해 주세요. 언제 제가 여러분 댁에 심방 갈 일이 있다면 예쁜 것으로 하나 구입해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설령 이 다섯가지 전부가 다 집에 없다 하더라도 이 중에서 한 두가지 정도는 있지 않겠어요? 하지만 여러분 집에 있는 물건 목록을 적어 보시라고 했을 때, 이와 같은 것들까지 적은 분들이 얼마나 계시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것들을 안 적은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아니 뭐 그런 게 대단한 거라고 꼭 적어야 해. 그거 아니에요? 그야 맞는 말씀이지요. 지우개나 가위 같은 것이 무슨 대단한 재산이라고 재산목록에 적겠습니까.

자, 에덴이 어떤 곳이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그 곳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마련하신 가장 완전하고도 완벽한 세상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런 곳에 집도 없고 잘 곳도 없어요?

예를 들어서 성경에 집이 있었다거나 침대가 있었다거나 하는 언급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완벽한 세상에 그와 같은 것들보다 더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 있었으면 있었지, 그저 불편하게 맨날 흙위에서 먹고 자고 해서 온몸이 흙 범벅이었고 하는, 그와 같은 지저분한 생활을 아담과 하와가 보내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더 말이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내용, 구체적으로는 에덴에 어떤 시설이 있었고 얼마나 쾌적한 생활 공간이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전해주고자 하는 핵심 내용과 관련이 없기 때문에 굳이 그와 같은 점에 대해서 기록이 없는 것뿐이지, 실제로는 아무리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쾌적하다 하더라도, 그저 사람들이 만들어낸 불완전한 세상을, 당시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것을 창조하신 에덴 동산과 어떻게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간혹 보면 과거 에덴이 어디에 있었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여기다 저기다 하고 주장을 하는 분들이 계세요.


그러면서 창세기 2장 14절에 보면 “유브라데”라는 강 이름이 나오는데, 그 이름이 지금도 이라크나 시리아 쪽에 흐르고 있는 유프라테스 강과 이름이 같다고 해서 아마도 에덴은 그쪽에 있었을 것이라고 하는 분들도 계세요. 그래서 그 쪽을 잘 찾으면 과거 에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씀까지 하십니다.

하지만 성경 기록을 사실이라고 받아들이는 저희로서는 이는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노아 때에 일어난 홍수 때문인 것입니다. 당시 홍수는 그저 하늘에서 비가 많이 온 정도가 아닙니다.

창세기 7장 11절~12절
“11.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12.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지난 2011년 3월 11일에 일본에서 발생한 동일본대지진의 경우를 본다면 단 한 번의 지진과 쓰나미로 그 쪽 지형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노아 때 홍수를 보면 한 두 번도 아니고, 그리고 일부 지역에만 일어난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성경 기록에 의하면 깊음의 샘들이 터졌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는 단순히 하늘에서 비가 왔다는 정도가 아니라 지면에서도 지하수가 터져서 쏟아진 것이고, 그리고 어느 특정 지역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지구 전체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지각변동이 일어났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전세계적인 지진이나 홍수가 하루나 이틀만에 끝난 것이 아니라, 창세기 7장 24절에 의하면 물이 가득차 있었던 기간만 보더라도 150일이나 되었고,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에 들어갔다가 나온 날을 본다면 1년 이상이라고 하는 긴 기간입니다.


그러니 그런 상황에서 홍수 이전에 있었던 에덴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리고 그 모습이 어땠는지 찾아낸다는 것은 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이 좀 길어졌습니다만, 요컨대 에덴이라고 하는 곳은 첫째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시기 위해서 마련하신 곳이고, 둘째로 그 곳은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완벽하고 완전한 세상이었다는 점입니다.

사실 이와 같은 축복을 누려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최초의 사람이었던 아담과 하와 이후에는 노아의 홍수 이전이라 하더라도 에덴에 들어가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인 에덴에서 추방을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창세기 2장 16절~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에덴에는 수많은 각종 나무 열매들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은 먹어도 되지만, 단 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최초의 율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키기가 어려운가요? 수많은 열매를 먹지 말고 그것만 먹으라는 것도 아니에요. 다른 건 아무리 많이 먹어도 되지만, 유일하게 그것만 먹으면 안 된다고 하신 것이잖아요.

우리가 성경에 있어서 본다면 ‘사랑’만 강조하기 십상인데 사실 여기에는 사랑만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순종’인 것이지요.

사실 사랑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더할 나위 없는 순종이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순종의 책입니다. 사랑도 순종입니다. 순종과 구원은 뗄래야 뗄 수가 없는 불가분의 개념인 것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기록된 책이 바로 성경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경은 구약 창세기에서부터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래도 사람들이 못 알아들으니까 어떻게 하셨습니까.

빌립보서 2장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순종이 무엇인지 모르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순종인지 알아듣지 못하니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알고 계시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래서 에덴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많은 것을 원하지 않으셨던 것 아니겠습니까.


네가 무엇을 먹든 무엇을 마시든 어디서 무엇을 하든 괜찮아. 다만 단 하나, 내가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 열매만 먹지 않는다면, 그 작은 명령 하나만 지켜준다면, 네가 나에게 온전히 순종한 것으로 생각하고 너에게 누르고 흔들어 넘치는 축복을, 언제까지요? 예, 영원토록 부어 줄게.

하나님께서는 그러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사람은 그 작은 약속 하나를 지키지 못했지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에덴에서 마귀에게 유혹을 당했을 때의 모습을 보시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 5절~6절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사람이 유혹에 넘어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보다 어기는 것이 자기에게 더 유익하다고 판단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지금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악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세상에는 정말 좋은 사람들도 많지만 나쁜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그와 같은 나쁜 짓을 저지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말 자기는 악인이 되어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겠다고 작심했기 때문일까요.

물론 그런 사람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자기는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줄 알았어요. 그렇게 하는 것이 나에게 있어서 더욱 좋게 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그런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어기고 자신의 생각대로 판단하고 행동하게 된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7절~19절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세기 3장 23절~24절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이제 그들에게 주어졌던 놀라운 축복은 모두 빼앗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영원한 생명도 빼앗기고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를 두고서도 구원이라는 약속의 취소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한 번 주어진 면류관은 빼앗기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창세기 5장 5절에 의하면 아담은 930세까지 살고 죽었다고 합니다.

솔직히 아담과 하와가 천국에 갔는지 지옥에 갔는지는 알 수가 없지요. 여기에 대해서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큰 소리로 주장을 해봤자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장에 불과합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축복을 빼앗기고 결국은 에덴에서 쫓겨나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타락한 그들에게 또다시 축복이 회복되고 에덴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지 않습니까.


로마서 11장 21절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최초로 만드셨던 아담과 하와도 그들이 불순종을 하였을 때 가차없이 모든 축복을 빼앗아 버렸는데 하물며 우리가 불순종을 했을 때 우리에게서 빼앗지 않으신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히브리서 12장 28절~29절
“28.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9.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우리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약속, 구원의 약속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기서 안심하는 것이 아니라, 경건함과 두려움을 가지고 더더욱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을 섬기는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약속된 생명의 면류관, 구원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을 끝까지 지키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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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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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0회 [면류관 강해 제1회] 믿음의 시작 - 이루리라선교회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8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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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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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제 지난 주까지 이어온 복음서 강해는 44회로 일단 마무리를 하고, 오늘부터 저는 여러분과 함께 <면류관>을 주제로 해서 <지켜야 할 면류관>이라는 제목으로 새롭게 강해를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면류관 강해 그 첫 시간으로서 <믿음의 시작>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있어서 교회가 위기라고 합니다. 기독교 인구 수는 줄어가고 있으며, 반면에 이단이나 다른 종교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복음이 잘못되어서 그렇습니까. 성경이 잘못되어서 그렇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하고도 완전한,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의 기독교는 왜 이렇게 쇠퇴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요리책이 있다고 해요. 그 요리책은 아주 유명한 요리사가 쓴 것인데, 그 요리사가 운영하는 식당은 대단히 놀라운 성장을 하고 있다고 해보죠.

그래서 나도 어디 한 번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보자 하는 마음에 그 책을 샀습니다. 그리고 요리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요리가 정말 맛이 없어요.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요리책이 잘못 되어서요?


아니에요. 그 책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 검증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만든 요리가 맛이 없게 되고 말았다는 경험이 있으시다는 분 많이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요리책은 아니지만 어렸을 때 프라모델을 만들고 그럴 때 그와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분명히 설명서대로 한다고 했는데, 아무리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해도 이상하게 작동이 안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모든 원인이 다 요리책이나 아니면 프라모델 설명서에 있는 것입니까.

물론 간혹 가다가 그런 경우도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만, 대부분은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경우가 많겠습니까.

그렇죠.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것이죠.

분명히 넣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안 넣었다든지, 아니면 넣지 말아야 할 것을 넣어버렸다든지, 또는 넣기는 넣었는데 그 분량을 잘못 넣었다든지 하는 그 원인이 있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프라모델도 그렇지요. 설명서대로 하지 않고 엉뚱한 부품을 가져다가 붙이려고 했다거나 아니면 다른 곳에 연결을 해버렸기 때문에 작동하지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그 책이나 설명서를 보고 만들었다고 하는 그 요리나 프라모델이 이상한 이유는 그 책이나 설명서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한테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 교회가 쇠퇴하고 있는 이유도 그 원인이 복음이나 성경이나 하물며 예수님한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 나 자신에게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잘못하고 있기에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있어서 교회가 이처럼 문제 투성이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요리책이나 설명서 잘못이 아니라 요리책이나 설명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음식맛이 이상해 지는 것이요, 프라모델이 이상해지는 것인 것처럼, 성경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에 교회가 망가지고 복음이 오염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 것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15절~16절
“15.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여기에 등장하는 편지는 바울이 쓴 서한을 말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로마서나 고린도서, 데살로니가서나 갈라디아서 등의 성경은 모두가 다 바울이 쓴 편지입니다.


아직 신약성경이 없었던 당시에는 바울이 편지를 통해서 믿음을 심어주고 말씀을 풀어주고 그리고 행함을 인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간혹 그 내용을 본래 뜻이 아닌, 이상하게 풀어버리는 바람에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멸망에 이른다고 성경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오해한다고 하면 우리는 이단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대부분의 이단들은 어떻게 성경을 풀게 됩니까. 대표적인 예가 자신들의 교주는 재림 예수라고 하는 경우를 볼 수 있겠지요.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하는 말씀이 반복해서 기록되어 있지요.

그런데 성경을 자기들 멋대로 해석해서 주입시키고는, 장차 다시 오실 예수님이 바로 자기라고 하면서 자기를 떠받들면 구원 받고, 자기 말을 안 들으면 멸망한다면서 결국은 자기한테 돈 갖다 바치고 재산 갖다 바치고 그리고 시간이나 몸까지도 갖다 바치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다른 대표적인 주장이 바로 시한부 종말론입니다.

성경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말씀들을 억지로 왜곡해서 끼어 맞추어 놓고는 몇 년 몇 월 몇 일에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거나, 아니면 이 세상이 멸망할 테니까……그러면서 역시 교주 말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는 것, 각 이단 사이비들 마다 앞에 붙은 문구들은 좀 다를지 모르지만, 그 목적은 대부분이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와 같은 일은 한국만이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도 없이 있어 왔던 일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새롭다기보다는 식상하다는 말이 더 맞겠지요. 이러한 일들은 이후에도 또다시 반복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런데 말이에요. 이처럼 성경을 오해하거나 억지로 푸는 것이 과연 이단이나 사이비들만 그런가 하는 것이지요.

앞서 말씀 드렸듯이 성경을 올바로 받아들이고 이 말씀에 순종한다고 하면 교회는 나날이 부흥할 것이요,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교회는 나날이 쇠퇴하고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여기에 대한 결론은 하나, 이단이나 사이비가 아닌 우리 스스로에 있어서도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저는 몇 년 전부터 문제의식을 가져온 것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주장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지 그 동안 주저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목사 이전에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와 같은 부분에 대한 주장은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고, 그리고 이로 인해서 성경말씀이 올바로 우리 안에 심어지게 됨으로 말미암아 복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다고 한다면, 이는 더 이상 묵과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주장은 무엇인가 하면, 바로 구원의 취소입니다.


일반적으로 ‘구원의 취소’라고 하는 개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한 번 구원 받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구원이 취소되어 멸망하는 경우가 있는가.

더 쉽게 말하자면 한 번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는데 나중에 그 구원이 취소 되어져서 지옥에 떨어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이른바 ‘구원’이라고 한다면, 이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는 아직 천국 하나님 아버지 나라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입니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4장 3절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갈라디아서 3장 6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야고보서 2장 23절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 말씀은 구약성경의 한 구절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창세기 15장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의로 여기셨다는 것은 것 비록 아직은 이 땅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당장 천국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장차 천국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셨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장차 구원 받을 자격,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무엇을 하였기에 의로 여겨졌다고 되어 있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무슨 이유로 아브라함에게 구원 받을 자격을 주셨습니까.

성경에는 이점에 대해서 “여호와를 믿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무슨 선행을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더니 그것으로 인하여 의로 여기심을 받았다, 즉 구원 받을 자격이 주어졌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겠지요.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어떤 행위를 했을 때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을 때 바로 구원이 약속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원이 약속되었습니다. 누구는 세례를 받아야지만 비로소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이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세례라고 한다면 이는 신앙을 가졌다는 징표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세례를 받음으로써 정식교인이 된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이를 구약적으로 본다면 할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경우를 본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의로 여기신 그 시점이 할례를 받기 전이었을까요, 아니면 할례를 받은 다음이었을까요.

이는 성경을 보면 명확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셨다고 하는 시점이 15장 6절이라고 한다면, 한편 할례는 언제 등장하는가 하면 창세기 17장 10절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아직 할례를 받지 않은 시점에서 의로 여기심을 받았다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있어서도 구원을 받을 자격이 주어진 시점과 세례는 무관하다고 할 것이고, 오로지 주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한 그 시점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로 여기심을 받은 시점, 말하자면 구원을 약속 받은 시점이라고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약속을 받은 시점, 구체적으로 믿음의 시작을 어느 시점으로 보아야 하겠습니까.


요엘 2장 32절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로마서 10장 10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10장 13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와 같은 성경말씀에 비추어 보아 우리가 믿음을 시작한 시점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신앙을 고백한 시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신앙고백이 있다고는 하지만 대표적으로 사도신경을 꼽을 수 있겠지요.

세례를 받거나 특별한 형식을 갖추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마음으로 사도신경에 담긴 내용을 믿고 입으로 “전능하사 전치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라는 신앙고백을 했을 때 우리의 믿음은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였을 때 우리의 신앙은 시작되고,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마지막 날에 구원에 이르는 자격, 하나님 나라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약속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이 놀랍고도 기쁨에 찬 구원의 약속은 과연 절대적인가 하는 점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8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마지막으로 남긴 서신이라고 합니다.

이제 주님 앞으로 나아갈 날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았던 바울은 자신을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는 자신에게 만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도 이와 같다고 기록합니다.

우리가 신앙고백을 함으로써 주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고 이제 믿음을 갖게 되고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서게 되는 그 날까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보내게 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요.

우리는 기쁨으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요, 마지막 그 날에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비록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함으로 인하여 구원의 약속을 받았는데, 남은 생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버리고 믿음에서 벗어나 타락했을 때에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번 구원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 나중에 주님을 저버리고 신앙을 저버렸을 때에도 여전히 구원, 천국백성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구원의 약속은 취소가 되는 것인지 하는 문제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회개를 했다면 문제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3장 19절
“19.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에베소서 1장 7절
“7.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요한일서 1장 9절
“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예수님의 보혈에는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주님 앞에 고백하고 주님께로 돌아온다면 어떠한 죄라 하더라도 주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아 천국백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치만 문제는 회개를 하지 않았을 때에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이지요.


한 번 하나님을 믿어서 구원이 약속되었는데 그 다음에 타락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회개를 하지 않더라도 구원의 약속이 취소되지는 않는 것인지, 아니면 아무리 한 번 구원의 약속을 받았으나 죄를 짓고 타락을 하게 되면 한 번 받았던 구원의 약속은 취소가 되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일반 성도님들과 전문적 신학지식이 있는 분들과의 사이에서 견해가 갈리지 않을까 합니다.

짐작하건대 일반 성도님들이 생각하기에는, 아무리 처음에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나중에 믿음을 버리게 된다면 구원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처음에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생활을 했었다고는 하지만, 나중에는 신앙을 버리고 다른 우상을 계속 섬기다가 죽었어요. 그렇다면 그 사람도 역시 처음에 구원의 약속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천국에 간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기에 있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여기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런 의견을 가지고 있을까요. 만약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이번 주라도 교회에 가셨을 때 목사님께 한 번 여쭈어 보시기 바랍니다.


“한 번 받은 구원의 약속이 타락함으로 인하여 취소될 수 있습니까.”

그런 질문을 드리면 특히 장로교나 침례교의 대부분의 목사님들께서는 “한 번 받은 구원은 취소되지 않습니다”라는 놀라운 답변을 듣게 되실 것입니다.

아니, 그렇다고 이것이 이단이나 사이비라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정통 복음주의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회의 목사님이나 신학자 분들의 견해가 그렇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의견이 나오는 대표적인 견해는 장로회를 창시한 장 칼벵에서 볼 수 있습니다.


조금 어려운 말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장 칼벵의 5대교리라고 하는, 이를 영문 첫 글자를 따서 TULIP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 중에서 마지막 다섯 번째의 교리가 이른바 ‘성도의 견인’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성도는 구원의 취소가 없다고 보는 것이지요.

여러분께서는 이 의견에 동의를 하십니까. 한 번 주어진 구원은 죄를 짓는다고 해서,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았는데도 단지 한 번 구원이 주어졌다고 해서 취소가 되지 않는다는 의견에 동의가 되시나요?


어떤 분은 그럴 리가 있겠냐고 하실 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것이 장로교회 침례교에서 주장하는 엄연한 교리의 원칙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셨던 어떤 분은 제가 예전에 이런 말씀을 드렸더니 너무나도 생소한 의견이라고 하면서 제 말을 반신반의 하더라고요. 그렇지만 이와 같은 견해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자료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는 좀 지난 기사이긴 합니다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독교 일간지 국민일보 2017년 2월 23일자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목회자 500명에게 물었더니, 절반 가까이 "구원 잃어버릴 수도 있다"

이 내용에 의하면, 총신대학교 실천목회연구과정에서 약 1년에 걸쳐서 초교파로 목회자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다고 하는데, 이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할까. 아니면 중간에 잃어버릴 수도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52.5%가 “구원은 그래도 영원하다”라고 답한 반면, 절반에 가까운 47.5%가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조사는 오차범위가 ±5.75%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가’라고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오차범위 안에서 거의 절반이나 되는 목회자 분들이 “구원을 한 번 받았다 하더라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교리상으로 보면 구원은 취소가 없다고는 하기에 공식적으로 말을 할 수는 없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계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오늘부터 시작한 이 면류관 설교에 대해서 이제 이와 관련된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은 신학자나 목회자에 의해 적혀진 종교서적이 아니고 당연히 성경을 바탕해서 진행될 것입니다.

이제 이 성경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 올바로 심겨짐으로 말미암아 30배 60배 100배, 300배 600배 1000배의 복음의 열매, 축복의 열매를 맺게 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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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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