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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7회 [면류관 강해 제8회] 사울이 얻은 것 - 이루리라선교회 홍성필 목사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0장 20절~22절
“20.사무엘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베냐민 지파가 뽑혔고
21.베냐민 지파를 그들의 가족별로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마드리의 가족이 뽑혔고 그 중에서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으나 그를 찾아도 찾지 못한지라
22.그러므로 그들이 또 여호와께 묻되 그 사람이 여기 왔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그가 짐보따리들 사이에 숨었느니라 하셨더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십일조, 감사헌금, 개척후원, 선교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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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면류관 강해 8번째 시간으로서 “사울이 얻은 것”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오늘도 면류관 강해의 핵심구절인 요한계시록 3장 11절을 함께 읽고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아멘.

자, 이번 시간에는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사울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엘리 제사장은 그의 아들들과 같은 날에 사망하고, 이제 그의 밑에서 성장한 사무엘이 그 뒤를 잇게 됩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지혜롭게 다스렸고, 백성들 또한 사무엘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그에게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세월이 지나 사무엘도 나이가 들었어요.

사무엘상 8장 1절~3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사무엘상 8장 1절~3절
“1.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
2.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3.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그에게는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가 있어서 그들로 하여금 자산의 뒤를 잇는 사사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지난 번에 알아본 바와 같이 그의 스승인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문제가 많았는데, 그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사무엘 또한 그의 두 아들들에게는 문제가 많았다고 합니다.

사무엘이라고 한다면 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 중에서도 대표적인 선지자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처럼 아버지가 충실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아들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처럼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성경 기록에 의하면 아버지와 달리 뇌물을 먹고 올바르지 않은 행위를 했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식 만큼은 마음대로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사무엘은 늙어서 이제 실무적인 일은 아들들이 하는데 이처럼 문제가 많다 보니까 백성들의 불만이 폭발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에게도 남의 나라들처럼 왕을 달라고 요구를 하지요.

그 때까지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사람들은 제사장이나 사사였다고 말씀 드렸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왕과도 같은 통치자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지도자였을 뿐이었지요.

그렇다면 이른바 지도자와 통치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우리가 가장 알기 쉬운 것이 바로 권력입니다. 권력의 상징은 바로 인사권과 형벌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시시대에 있어서 제사장이나 사사에게는 이와 같은 권력이 없었습니다. 제사장의 인사권에 있어서는 극히 제한적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레위지파 사람들 뿐이었고, 그 중에서도 각 자손에 따라서 감당할 임무가 율법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또한 사사가 하나님의 명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전했을 때, 그들이 따라주면 다행이지만 만약에 따라주지 않았다고 해도 체포해서 형벌을 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사시대를 상징하는 구절로서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사사기 17장 6절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 21장 25절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당시 율법은 있었습니다만, 이를 어겼다고 해서 누가 체포하거나 감옥에 가두지는 않았던 것이지요.

반면에 통치자인 왕이 다스리기 시작하면 어떻게 됩니까.

왕은 제사장이나 사사와 달리 막강한 공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내가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총리나 장관 같은 높은 자리에 앉힐 수가 있어요. 그리고 자기 명령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 형벌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권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백성들에게 있어서 왕이 있는 것이 좋습니까, 없는 것이 좋습니까.

사실 백성 위에 군림하는 절대적 통치자가 있어서 좋은 것은 별로 없어요.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무엘의 두 아들들은 문제가 많았고, 그리고 자기들이 보니까 남의 나라 왕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백성들을 대신해서 왕이 싸우고 그러는 것처럼 보여요.

그래서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말하기를 자신들에게도 이제 사사가 아니라 왕을 달라고 성화를 했던 것이죠.


이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왕으로 세우시게 되는데 그 인물이 바로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왕의 자리에 앉게 되는 과정을 보면 상당히 독특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9장에 의하면 하루는 기스라는 사람이 그의 아들 사울에게 말하기를 암나귀를 잃어버렸으니 사환과 함께 찾아오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어요.

그러자 함께 있던 사환이 말합니다. 이 근처에 선지자가 살고 있다고 하니 그 사람한테 가서 물어보자고 해요. 그 인물이 누구냐 하면 바로 사무엘이었던 것이지요.

그들이 물어물어 사무엘을 찾아갔더니, 아직 사울이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먼저 말하기를, 네가 찾고 있는 암나귀는 이미 찾았으니 걱정할 것 없고, 너는 오늘 나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말을 나눌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삼십 명 가량이 모인 잔치 자리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그를 앉히고는 그에게 고기 중 제일 좋은 부위를 주며 대접을 하지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무엘은 이미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지요.

사무엘이 사울을 처음 볼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상 9장 17절
“사무엘이 사울을 볼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다스리리라 하시니라”

이처럼 사무엘은 이미 사울과 말을 나누기도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그가 왕이 될 인물이라는 사실을 듣고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제 식사를 마치고는 사무엘상 10장 1절에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이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왕으로 세움을 받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비록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아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당장 왕으로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까지는 아직 왕이 있었던 것도 아니기에 궁궐이 있는 것도 아니요, 왕관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왕이 되려면 다스리는 백성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기가 지금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해서 당장 밖으로 나가서, 이제부터 내가 왕이다, 라고 해봤자 아무도 인정을 안 해준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사무엘상 10장 17절 이하에 의하면 사무엘은 얼마 뒤, 백성들을 한 자리에 모읍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제비를 뽑아요.


구약에 의하면 당시에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제비를 뽑는 장면이 종종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열 두 지파 중에서 베냐민 지파가 뽑혔고, 그 중에서 가족별로 뽑으니까 사울 가족이 뽑혔고, 또 그 중에서 뽑으니까 정말로 사울이 뽑혔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자리에 사울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어디 있었냐 하면 사무엘상 10장 22절에 의하면 그가 짐보따리들 사이에 숨어 있었다고 해요.


이와 같은 기록으로 우리는 몇 가지를 짐작할 수가 있겠습니다.

첫째로 사울은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사울 가족 중 누군가가 사울을 대신해서 제비를 뽑았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둘째로 사울은 자신이 뽑힐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 마지막 셋째로 사울은 그의 성격이 대단히 소심하거나 겸손했다는 점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이제 사울을 데려오고 사무엘은 그를 백성들 앞에서 왕으로 임명합니다. 이에 백성들은 만세를 외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뭔가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어요.


사무엘상 11장 5절의 기록을 보면 여전히 사울은 밭에서 소를 몰며 일을 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암몬 사람들이 공격을 해와요. 반면에 이스라엘에는 마땅한 군대가 없습니다.

사실 그럴 만도 하지요. 왕이 있는 것도 아니니 군대도 없고, 군사 지도자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 사사라고 해도 사무엘은 늙었고, 문제가 많았다는 그의 못난 두 아들들이 제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어서 전쟁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암몬 사람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백성들이 통곡을 합니다.

마침 밭에서 소를 끌고 오던 사울이 사람들의 우는 소리를 듣고 그 이유를 물어요. 그랬더니 암몬 사람들이 쳐들어온다고 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사울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소를 잡아 각을 뜨고는 그 조각난 소를 이스라엘 각 지역에 보내서, 너희들이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않는다면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소들도 이렇게 만들어 버리겠다, 하고 전령을 보냅니다.


이 소식을 들은 각 지역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공포심을 심게 하시니까 수많은 백성들이 나왔어요.

사무엘상 11장 8절에 의하면 사울의 집합 명령을 듣고 모인 사람들이 총 33만명이었다고 합니다.

사무엘은 이제 그 군사들을 이끌고 가서 암몬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하는데 새벽부터 한낮까지 공격을 해서 풍비박산을 내버리고 맙니다.

이제 이렇게 되니 누가 보더라도 왕 다운 모습 아니겠습니까.


이로 인해서 사울은 비로소 백성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이제 진정한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소심하고 겸손했던 사울에게 무슨 용기가 있어서 그와 같이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일까요.

이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사무엘상 11장 6절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


암몬 사람들이 쳐들어온다는 사실을 알고 사람들이 울부짖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아무리 소심하고 아무리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면 능히 모든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여기까지가 사울이 이제 명실상부한 이스라엘 왕으로서 등극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확인을 하고 넘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과연 사울이 이스라엘 왕이 되기 위해서 노력한 것이 있었습니까.

방금 말씀 드린 암몬 사람들을 물리친 거요? 아니, 그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다음에 있었던 일이잖아요.

그것이 아니라 애초에 하나님으로부터 왕으로 세움을 받기 위해서 했던 일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지요.

예, 따지고 보면 왕이 되기 위해 그가 노력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실 이 왕이라는 자리가 보통 자리입니까. 우리나라 대통령 같은 경우는 현행 헌법상으로 볼 때 5년까지밖에 못 합니다.

세계를 쥐락펴락 한다는 미국 대통령도 1기에 4년, 연임을 해도 8년까지밖에 못 해요.

그러나 왕은 어떻습니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이라는 자리는 임기가 없어요. 한 번 즉위하면 이변이 없는 한 죽을 때까지 하게 됩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자기만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자기 후손에게 그 자리를 물려줄 수도 있는 것이지요.

거기다가 왕이 가진 권력은 대단했습니다. 물론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가 있긴 합니다만, 대부분 지금의 대통령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본다면 여러분 어떻습니까. 부러우신가요. 예, 물론 부러울 수도 있겠지요.

우리나라도 역사적으로 본다면 그 몇 년 밖에 못하는 대통령 자리 한 번 해보려고 얼마나 고생들을 많이 합니까.


그런데 사울은 어때요. 예, 그냥 잃어버린 암나귀 찾으러 나갔다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제비를 뽑았더니 당첨되어서 왕으로 임명된 것 아니겠습니까.

사울은 그의 노력 없이 어마어마한 절대권력, 상상할 수도 없는 축복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또한 어떻습니까.

사실 알고 보면 우리는 사울 못지않게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이라는 축복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이 구원이라는 축복은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졌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 아니겠습니까.

자,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한 일이 있습니까. 아니에요. 없습니다.

아니, 없을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 만이 우리의 구원이라는 사실을 이전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고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면, 구약에서 누군가가 한 마디, 당신의 아들을 어서 보내주셔서 나무에 달리게 해서 우리를 구원해주소서 하고 기도한 사람이 있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제아무리 위대한 선지자라 하더라도 그렇게 기도한 사람이 있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말은 뭐예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야 할 정도로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 있어서 다른 구원의 방법이 있었다면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을 나무에 달려서 죽게 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외에 달리 방법이 없어요. 우리가 구원 받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모든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는 채찍에 맞아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형벌을 받으시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그리고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게 해주시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 엄청난 축복을 위해서 우리가 지불한 대가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없었어요.


로마서 3장 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지불한 것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생명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 구원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 노력한 것이 없어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값 없이 거저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축복, 주님으로부터 받은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도록 지키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지요.

이 놀라운 축복, 엄청난 축복을 어찌 사울이 받은 축복에 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은 지금까지 ‘사울이 받은 것’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노력없이 사울이 받은 놀라운 축복에 대해서 알아보았고, 다음은 ‘사울이 버린 것’이라는 제목으로 계속해서 사울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제 우리가 받은 은혜, 우리가 받은 축복에 감사하면서, 주님의 나라에 가는 그 날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면류관을 끝까지 지키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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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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