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면류관 강해 10번째 시간으로서 “아말렉의 죄악”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오늘도 면류관 강해의 핵심구절인 요한계시록 3장 11절을 함께 읽고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아멘.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서 사울이 저지른 두 번째의 결정적인 실수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했습니다만, 사울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계속해서 공부하기로 하고, 오늘은 그 이전에 아말렉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사무엘은 사울에게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사무엘상 15장 1절~3절
“1.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2.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3.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오늘 이 명령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을 쳐서 어른부터 젖 먹는 아이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진멸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기르고 있던 가축들까지도 완전히 죽여 없애 버리라는 엄중한 말씀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그 지역을 초토화시키고 씨를 말려버리고 흔적조차 남기지 말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아말렉에게 대해서 상당히 화가 나셨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 아말렉에 대해서 이처럼 화를
내셨던 것일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에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대적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이 부분을 좀 집중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이스라엘과 아말렉 사이에 있었던 전투에 대해서 먼저 알아볼까요.
출애굽기 17장 8절~16절 사이에 보시면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아말렉 사람들과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출애굽기 17장 8절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그리고 9절에 의하면 모세는 한 사람을 택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아말렉과 싸우라고 명하게 되는데 그 인물이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여호수아가 성경에 등장하게 되는데, 모세가 여호수아를 임명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중임을 맡기게 되어 마침내 모세의 후계자로서 가나안 땅 정복을 하게 되는데, 벌써부터 모세는
여호수아에 대해서 신임을 두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들의 나이를 한 번 짚고 넘어갈까요?
출애굽기 7장 7절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에 모세는 팔십 세였고 아론은 팔십삼 세였더라”
여호수아 14장 7절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출애굽을 했을 당시의 나이가 모세는 여든 살이었고,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했을 때가 출애굽으로부터 1년 정도 뒤라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기 때문에 그 때 여호수아의 나이가 마흔이었다고 한다면, 아말렉 사람들과 싸움을 벌이게 되는 이 시점은 아직
홍해를 건너고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모세는 여든 살이고, 여호수아는 마흔에서 1년 전인 서른 아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든 살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젊었을 때 날고 뛰던 모세라 하더라도 선봉에서 싸우기에는 어렵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반면에 여호수아는 서른 아홉입니다. 그야말로 한창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싸울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생각해보세요.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에서 400년 동안 노예로 살았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모세는 비록 애굽에서도 왕실에서 자라기는 했습니다만, 여호수아나 다른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두가 다 노예 집안 출신입니다.
그런데 노예한테 군사교육을 시켰겠습니까.
노예한테 괜히 군사교육을 시켰다가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어쩌겠습니까.
그러니까 군사교육을 제대로 받았을 리가 없잖아요.
그런 여호수아에게 모세가 명령을 합니다. 네가 알아서 사람들을 선발해서 군대를 조직하고는 목숨을 걸고 나가서 아말렉과 싸워라.
만약에 여러분이 모세한테 이런 명령을 들었다면, 여러분은 모세에게 뭐라고 말씀 하시겠습니까.
저라면 그럴 것 같아요.
“저, 있잖아요. 저를 높이 평가해주시는 것은 감사합니다만, 제가 태어나서 평생 노예로만 살았는데, 아니, 제가 뭘 안다고
사람들을 선발해서 군대를 조직하고 어떻게 전투를 할 수 있겠어요. 그런 걸 제가 배워 봤어야죠. 이러다가 저 뿐만이 아니라 다
죽어요. 죄송합니다만, 저는 못합니다.”
아니, 제 말이 이상해요? 충분히 그럴 수 있잖아요?
하지만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합니까.
출애굽기 17장 10절 전반부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이야, 참 멋있지 않습니까. 모세가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았어요. 그는 단 한마디 핑계나 변명도 하지 않고 모세의 말에 순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어떻게 해서 이렇게 과감할 수가 있었던 것일까요.
훗날 다윗은 고백합니다.
사무엘상 17장 47절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그렇습니다.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눈에 보이는 칼이나 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다윗은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보다도 훨씬 전에, 여호수아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도 이 여호수아처럼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여호수아에게 이 말을 남겨놓고 모세는 아론과 훌과 함께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싸움을 지켜보는데, 출애굽기 17장 11절
이하에 의하면, 모세가 지팡이를 쥔 손을 올리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이스라엘이 졌다는 거예요.
당시 모세 나이 여든이셨다고 하니 오랫동안 팔을 올리고 있었다면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그러자 모세가 손을 올리면 그 손을 아론과 훌이 각각 붙잡아서 내려오지 않게 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어떻게 되었대요?
출애굽기 17장 13절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전쟁의 ‘전’자도 모르는 여호수아가, 노예로 태어나서 노예로 밖에 살지 못했던 여호수아가, 모세의 명령에 순종하고
나아가자,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아말렉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여기까지 보시면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전투장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사실 이 전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특별하게 여기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7장 14절~16절
“1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15.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6.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이 글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에 대해서 아주 단단히 화가 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말렉과 대대로 싸우리라,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세요.
하나님께서는 그러면 왜 이토록 화를 내셨을까 하고 의문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신명기 25장을 보실까요.
신명기 25장 17절~19절
“17.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18.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9.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여기에 보시면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싸운 바로 그 전투에 대해서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말렉 사람들은 이 전투에서 당당하게 싸운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피로에 지쳐 있을 때, 뒤로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다고 되어 있는 것이지요.
자, 그러면 이 시점에서 과연 아말렉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누구인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말렉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완전히 이방 사람들이냐 하면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 자손들과 대단히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창세기 36장 12절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아말렉을 엘리바스에게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내 아다의 자손이며”
여기에는 우선 ‘에서’가 등장하는데 그의 아버지는 이삭이었습니다. 이삭에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이름이 에서와 야곱이잖아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은 야곱의 자손이 되는 것이고, 아말렉은 에서의 자손이 되는 것이니,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이 둘은
형제지간이라고 하는 것이 됩니다.
자, 지금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에서 400년간 노예생활을 하다가 탈출을 했습니다. 이제 모세의 인도 하에 애굽에서 빠져
나왔지만, 거기까지 오는 것도 대단히 힘든 과정이었지요.
열심히 도망쳐 왔더니 홍해가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어요. 뒤에서는 애굽의 정예부대가 추격해 옵니다.
이제는 여기서 다 죽는구나 하고 절망을 했더니만 하나님께서 홍해를 갈라 주셔서 가까스로 광야로 건너올 수가 있었어요.
하지만 그곳은 풀한포기 나지 않는 곳이에요. 애굽은 나일 강이 있어서 비옥한 지역이 있었지만 광야에서는 어디를 가나 물 걱정 끼니
걱정을 해야 합니다.
광야에는 일부 물이 있어서 오아시스 같은 곳이 있었는데, 그런 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만, 광야의 대부분은 본래 사람이 살
만한 땅이 아니에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내려 주셔서 먹도록 하게 하시고, 그리고 때를 따라 물을 공급해 주셔서 하루하루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이 척박한 광야에서의 생활. 홍해를 나와 아직 시내산에도 다다르지 못한 그들은 매우 지쳐 있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도 문제이지만, 나무들도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그늘도 없어요. 비도 안 내립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햇빛이 내리쬐고
모래바람 부는 땅을 적게 잡아 수십만 명, 많게는 수백만 명이 그저 걷는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한 생활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어서는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겠습니까.
반면에 아말렉 자손들은 어땠을까요. 그들도 광야에서 아주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을까요.
자, 여러분의 기억력 테스트를 한 번 해볼까요? 여호수아가 싸우고 모세가 손을 들어서 승리를 하게 된 전투가 어디서 있었다고
했는지 혹시 기억하시나요?
출애굽기 17장 8절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예, 그곳은 바로 르비딤이었다고 합니다.
자, 일단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홍해를 건너게 됩니다. 이는 쉽게 말하자면 애굽의 국경을 넘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요.
홍해를 건너기 전에는 애굽 군대들이 추격을 해왔습니다만, 홍해를 건너게 되자 애굽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제 완전히
애굽에서 탈출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제 그들은 시내산을 향해 진군을 합니다. 시내산에 도착하게 되자 지난 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셔서
율법과 함께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주시게 되지요.
그렇다면 르비딤은 어디에 있냐 하면 홍해와 시내산 그 중간 부분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직 애굽에서 탈출해서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르비딤이라고 하는 곳은 그 지명이 “평원, 쉬는 곳” 이라고 해요. 따라서 그 곳은 광야 중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물이 많고 나무들도 우거져서, 그야말로 사막의 오아시스,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대단히 적합한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을 합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저기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가오고 있어요. 무기를 든 것도 아니요, 공격을
해올 것 같지도 않아요.
공격은 무슨, 아직 광야라는 환경에 적응도 제대로 못해서 그 발걸음은 무겁고 지금 피로에 지쳐서 손으로 슬쩍 밀기만 해도
쓰러져버릴 것만 같아요.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 아말렉에 있어서 남도 아닌 자신들의 형제 벌인 이스라엘 자손들 아니겠습니까.
자신들에게는 물도 있어요. 식량도 있습니다. 충분히 도울 수가 있어요.
아니, 꼭 물질로 돕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르비딤’이라고 하는 이름의 뜻처럼 최소한 좀 쉬게라도 해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아말렉 사람들은 어떻게 했대요?
예, 도움을 주기는커녕 이스라엘 자손들의 가장 약한 사람들부터 뒤에서 공격을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얼마나 비열한 짓입니까.
하지만 그것 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이토록 화를 내셨을까요.
이 일에 대해서 신명기 25장 18절을 다시 한 번 보실까요.
신명기 25장 18절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비열하거나 비겁한 짓이라고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짓은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행위’라고까지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사실 아말렉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보았을 때, 아무리 그들이 지쳐서 보잘것 없이 보였다 하더라도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자손들의 발걸음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비록 그들이 400년 동안이나 남의 나라에서 노예로 살았고, 이제 간신히 탈출해서 누추한 모습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들이 자기 힘으로 자기 멋대로 걷는 발걸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의 겉모습이 아무리 볼품 없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천지를 창조하신 만군의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 주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힘겨워 하는 이웃이 있습니까.
겉보기에는 그 사람이 가진 것 없고 보잘 것 없이 보일지는 모르지만, 사실은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만에 하나 그 사실을 잊고 그 사람을 하찮게 생각하거나 모욕을 준다거나 괴롭힌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신다고 성경은 기록하십니까.
출애굽기 17장 16절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여러분, 이 세상에 권력자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경우는 더러 있겠으나, 하나님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시편 128편 1절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여기서 ‘경외하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현대인의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시편 128편 1절
“여호와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며 그의 명령대로 사는 자는 복이 있다.”
그렇습니다. 경외한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가리켜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 만으로 알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것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는 그와 함께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두려운 하나님’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에게 주어진 면류관을 끝까지 빼앗기지 않고 지켜낼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우리 이웃도 섬김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면류관을 끝까지
지켜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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