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면류관 강해 3번째 시간으로서 “팔아 넘긴 장자의 명분”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오늘도 면류관 강해의 핵심구절인 요한계시록 3장 11절을 함께 읽고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오늘 본문에 보시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아들인 에서와 야곱이 등장합니다.
에서와 야곱은 그 출생부터 독특했습니다.
가장 큰 특징은 이 두 형제는 쌍둥이였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용모가 매우 달랐어요.
창세기 25장 24절~26절
“24.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25.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26.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형 에서의 용모는 피부가 붉고 온몸에 털이 많았다고 하지요? 그리고 성격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창세기 25장 27절~28절
“27.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28.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이 구절에 의하면 형 에서는 들에서 사냥을 좋아하는 외향적인 성격이었던 반면에, 야곱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좀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에서는 사냥을 해오면 그것으로 음식을 만들어서 가족들에게 대접을 했는데 아버지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로 해 오는 음식을
아주 좋아했다고 하지요?
반면에 야곱은 맨날 집에 있으니까 어머니 리브가와 많은 시간을 보냈을 테니, 아버지 이삭은 형 에서를 좋아하고, 어머니 리브가는
동생 야곱을 좋아했을 것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지금도 흔히 있을 수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 두 형제들에게는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창세기 25장 22절~23절
“22.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3.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리브가가 아이를 임신했는데 뱃속에서 아주 많이 싸웠나봐요. 그러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더구나 그때까지 출산 경험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참으로 괴로웠었나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를 드리게 되었는데,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뱃속 아이들은 두 민족인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을 하세요.
큰 자가 작은 자를, 그러니까 형이 아우를 섬길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게 언제요? 예, 태어나기도 전에 그와 같은 말씀을 하셨던 것이지요.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그렇다면 리브가 외에 그의 남편 이삭이나 아니면 그의 두 아들인
에서와 야곱이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에 기록이 없어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뭐냐 하면 야곱은 형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아니, 단순히 에서의 형이 되고 싶어했던 것이 아니라, 장자가
되고 싶어 했어요.
당시에 장자라고 하면 그 집의 상속자였습니다. 대단한 권한이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야곱이 장자가 된다는 것은 이는 현실적으로 볼 때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장자라고 하는 것은 다름아닌 태어난 순서로 정해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야곱이 아니지요. 그는 장자권을 자신이 얻기 위한 방도를 생각합니다.
출애굽 이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셨고, 그 내용에 의하면 600개가 넘는 세부적인 규정이 있었습니다.
당시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수많은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였기 때문에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그만한 규율이
필요했겠습니다만, 야곱 당시에는 아직 율법이 없었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말하자면 거래와 같은 일을 원만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원칙이 필요했을까요.
이는 단순합니다. 상대방과의 합의만 있으면 그 내용에 있어서는 자기들 마음대로 정하기 나름 아니겠어요?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떤 물건을 팔려고 해요. 거기에 1만원이라는 가격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걸 1만원에 사려고 해요.
그럼 물건을 가진 사람은 그 사람에게 물건을 넘기고 그 대신 1만원을 그 사람으로부터 받으면 그만이잖아요.
당시에는 무슨 ‘장자권은 팔 수 없다’라는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서로가 합의만 한다면 그 내용은 무엇이든지 상관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여기에 주목한 야곱은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넘겨받을 방법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에서가 들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나 시간대를 계산했을지도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돌아올 때에는 항상 허기진 상태였다는 점도 놓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랜 시간 준비해온 야곱은 그날 한 길목에서 팥죽을 쑤고 있었습니다. 그 곁에는 떡을 준비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이제 여느 때처럼 에서가 걸어옵니다. 야곱은 태연하게 팥죽을 쑤고 있었겠지요. 이를 본 에서는 다짜고짜 야곱에게 그 팥죽을 달라고
말합니다.
그렇겠지요. 지금 배가 고파 정신이 혼미해서 쓰러질 지경인데, 네가 왜 여기 있냐, 왜 팥죽을 쑤고 있냐는 등을 물어볼 기력이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야곱은 신중했습니다. 오랫동안 준비해온 순간인데 대충 넘어가게 된다면 모든 것이 수포가 될 수도 있잖아요.
야곱은 에서에게 말합니다. 형님이 가지고 있는 장자의 명분을 내게 파세요.
이는 말하자면 떡과 팥죽을 줄 테니 그 대가로 나에게 장자의 명분을 넘기라는 요구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에서는 말합니다. 아니, 내가 지금 죽게 생겼는데, 장자의 명분이 밥 먹여주냐. 그래, 너나 가져라. 그리고 빨리
거기 있는 떡과 팥죽을 내놓으란 말이야.
에서는 배가 고파서 그런지 성질을 부리며 소리칩니다. 그래도 야곱은 신중합니다.
장자의 명분을 자기한테 판다고 하나님께 맹세하라고 하지요. 여기서 맹세란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닙니다.
신학자들에 의하면 성경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한다는 것은, 그것을 어겼을 때에는 저주가 임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제 에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장자의 명분을 동생 야곱에게 팔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하고는 떡과 팥죽을 먹고 일어나
떠났다고 하지요.
이러므로 인해서 이제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그의 동생 야곱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에서가 동생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빼앗겨버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에서가 어리석었기 때문에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에서는 사냥을 잘했다고 하는데 어리석은 사람이 어떻게 사냥을 잘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야곱이 나빴기 때문에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성경은 야곱이 악했기 때문에 에서로부터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에서는 왜 장자의 명분을 팔아 넘겼습니까. 아니, 정확하게는, 에서는 왜
장자의 명분을 팔아 넘겼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창세기 25장 34절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예, 그렇습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에 이를 떡과 팥죽에 팔아 넘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고 말았던 것일까요.
장자의 명분이라고 하는 말을 히브리어로 본다면 ‘베코라’라고 해서 ‘태를 열다’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영어번역본에는 뭐라고 되어
있냐 하면 birthright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서 ‘birth’라고 하는 것은 birthday 라고 할 때 쓰이는 것처럼
‘태어나다’라는 뜻이고, ‘right’라고 하는 말은 ‘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장자의 명분’이라고 하는 것은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권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는 참 절묘한 표현 아닙니까. 장자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착한 일을 했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열심히
공부했다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태어나면서 주어진 엄청난 권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장자의 명분에는 그 외에도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바로 거저로 얻은 권리라는 점입니다.
에서는 자신이 노력해서 얻지 않았습니다. 돈을 많이 주고 사지도 않았어요. 단지 태어나면서 자신의 아무런 노력 없이 거저로 주어진
것, 그것이 바로 장자권, 장자의 명분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이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느졌다는 것이에요.
만약에 몇 년 동안 열심히 공부한 끝에 어려운 시험에 합격해서 가질 수 있었던 것이라면, 몇 년 동안 열심히 일하고 절약한 끝에
돈을 모아서 샀던 비싼 것이었더라면, 에서가 그 장자의 명분을 떡과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넘겼겠습니까. 아니요.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자신의 노력 없이, 자신이 돈을 지불하지 않고 거저로 얻은 것이었기 때문에, 장자의 명분이라고 하는 놀라운 축복을
단지 ‘그까짓 것 뭐가 대단하다고’ 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 결국은 헐값에 팔아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언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약속을 받았던 것입니까.
에베소서 1장 3절~5절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언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언제 우리를 택하셨다고 되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창세 전에,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 정도가 아니라, 온 천하 만물을 만드시기도 전에 이미 주님 안에서 우리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있도록 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했습니까. 어떤 대가를 지불했습니까.
그 다음 구절을 보시겠습니다.
에베소서 1장 6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이와 같이 놀랍고도 놀라운 축복과 은혜는 우리에게 거저로 주어진 축복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어느 분은 그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헌금을 많이 냈는데, 얼마나 십일조도 많이
내고, 얼마나 열심히 봉사도 하고 얼마나 열심히 교회를 섬겼는데…….
혹시 여러분들도 그런 생각이 드셨습니까.
자, 지난 주의 강해를 조금 복습할까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원하셨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에덴에 있는 온갖 과실들을
밤낮없이 분주하게 키우거나 하는 것이었습니까.
아니에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않는 것, 단지 그것 하나만 지킨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마어마한 축복을 영원히 누르고 흔들어 넘칠 정도로 부어 주신다는 것 아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지키라고 말씀하신 약속의 크기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어 주시겠다고 하는 축복의 크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둘이 비교가 됩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헌금이나 십일조를 많이 냈다고 해도, 아무리 우리가 봉사를 많이 하고 교회를 열심히 섬겼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우리가 받은 축복은 물론이거니와 장차 우리가 받을 축복과도 비교가 안 되는 작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작은 것으로 우리가 주님께 감사하고 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종을 받아 주시고 우리에게 약속한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을 영원토록 부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장자의 명분이라고 하는 축복, 사람의 노력으로는 절대로 얻지 못할 엄청난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축복을 너무나도 가볍게 여겼기에 헐값으로 넘겨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에서의 후손 에돔 족속은 오바댜서에 의해 멸망이 예언되고 결국 그 예언대로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후손은 어떻습니까. 그 후손에서 이새의 아들 다윗이 나고 마침내 예수님으로 이어지는 놀라운 족보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에게는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주어진 구원의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은 축복을 받을 만한 일을 한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모든 것이 예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떡 몇 개와 팥죽 몇 그릇에 그와 같은 축복을 팔아 넘기지 않을 자신이 있으십니까.
물론,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우리의 구원과 팥죽 몇 그릇을 어떻게 비교하겠습니까.
자, 그럼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돈이 좀 넉넉하십니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해서 당당하게 ‘네’라고 대답할 수 있는 분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글쎄요. 돈이 얼마 정도 있으면 넉넉하겠습니까. 100억원? 아니, 한 1000억원 정도 있으면 넉넉할까요?
사실 그 정도 되면 저 같은 경우는 잘 감이 안 옵니다만, 좋아요. 한 1,000억원 정도 있으면 남은 여생까지 좀 돈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럼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누군가가 여러분께 이렇게 제안을 했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 제가 지금 당장 여러분 은행 계좌에 현찰로 1,000억원을 입금시켜 드리겠습니다.
그 대신,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여러분의 신앙을 버리십시오.
이런 말을 들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생각해보세요. 1000억원이라면 이제 더 이상 집세 오를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생활비나 자녀들 교육비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자기가 원하는 집, 원하는 차를 살 수도 있고, 직장에서 치사한 상사 밑에서 눈치
보며 일할 필요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평생동안 병원비 걱정도 없어요.
이처럼 꿈과도 같은 생활이 보장되는 조건은 단 하나, 지금 가지고 있는 신앙을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이게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라면, 여러분께서는 이와 같은 유혹 앞에서 당당할 수 있겠습니까.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이런 유혹, 어디서 들어보지 않으셨습니까.
누가복음 4장 5절~7절
“5.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의 유혹인 것이지요.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마귀의 시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항상 크고 작은 갈림길이 놓여 있습니다. 그 갈림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신앙과 세상의 갈림길’인 것이지요.
아휴,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다고 해도 내 인생에 바뀌는 것 하나 없더라. 신앙이 밥 먹여주나. 성경이 밥 먹여주나. 차라리 그런
쓸데 없는 것을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겠나.
이것이 바로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에서가 빠져든 덫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받은 구원의 약속이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십니까. 예수님의 사랑이 별볼일 없는 것처럼 생각되십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거저로 주어진 이 구원의 약속은, 온 세상 모든 금은보화라 하더라도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를 가볍게 여긴다면 마치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빼앗긴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 우리에게
약속된 구원이라는 면류관도 역시 빼앗겨 버리게 되고 말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6절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이제 세상적인 탐욕을 위해 구원의 약속을 팔아버린 에서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시험이 닥쳐 오더라도 우리에게 약속된 구원의
면류관을 끝까지 굳게 잡아 지킴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날에 한 사람도 남김 없이 주님으로부터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구원의
면류관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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