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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1회 감사라고 하는 명령
2019년 3월 1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 전반부
“범사에 감사하라”


한국어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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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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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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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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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감사라고 하는 명령” 感謝という命令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먼저 여러분께 질문을 하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께서는 감사함을 알고 계신가요? 예, 우리는 감사함을 알고 있습니다. 감사함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감사를 해야 할까요. 그리고 또한 우리는 무엇에 대해서 감사해야 할까요.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 전반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すべてのことにおいて感謝しなさい。

그렇습니다. 우리는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범사에……라고 하는 뜻은 모든 일에……라는 뜻입니다. 모든 일,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가 느끼기에 좋은 것처럼 생각되는 일은 물론이지만, 반대로 우리가 느끼기에는 안 좋은 것처럼 생각되는 일도 역시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이 말씀은 분명히 명령형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명령형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명령이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명령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지시나 권장(推奨)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지시나 권장은 여기에 따르면 좋은 것이고 따르지 않을 경우에 불이익이 발생할 수는 있지만 처벌 당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명령은 어떻습니까. 이는 자신에게 이익이 있든 없든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이 명령입니다. 만약에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이에 해당하는 책임이 발생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처벌을 받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쉬운 예를 한 번 들어볼까요? 여러분께서 오늘 교회에 오실 때 보면 반드시 몇 개 이상의 신호등을 지나오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파랑신호와 빨강신호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파랑신호는 진입(進め), 빨강신호는 정지(止まれ) ……이라고 하는 차이는 누구나 다 알고 있겠지만, 이 두 신호의 차이는 그 내용만이 아니라 성격에 있어서도 대단히 큽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파랑신호는 허가인 반면 빨강신호는 명령입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기 위해서 보행자 신호를 한 번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보행자 신호가 파랑이에요. 그럼 반드시 건너야 하는 건가요? 아니, 난 이쪽 방향인데 보행자 신호가 저쪽이 파랑이 되었어요. 그러면 건너야 해요? 아니요. 건널 수도 있지만, 안 건너도 됩니다. 파랑신호는 <건널 수 있다>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빨강신호는 다릅니다. 빨강신호는 건너면 안 되지만 건너도 됩니다……가 아니에요. 빨강신호는 <절대로 건너서는 안 된다>라는 뜻입니다. 이를 간단하게 말하자면 파랑신호는 건널 수 있다고 하는 <허가>인 반면에 빨강신호는 건너지 말라고 하는 <명령>인 것이지요.

여기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는데, <허가>를 이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처벌 받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운전면허를 가지고 계신 분들도 많으시겠지요? 지난 달에 저희 아내도 드디어 일본면허로 전환을 했습니다만, 면허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운전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에요. 면허를 가지고 있는데 운전을 안 하면 처벌 받나요? ㅎㅎ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운전면허는 어디까지나 <운전을 할 수 있는 허가>이지 <운전을 해야만 한다>는 <명령>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명령>을 어기면 처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건너지 말라>라고 하는 빨강신호의 <명령>을 어기면 이는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말씀은 허가가 아닙니다. 감사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는 게 아닙니다. 감사 안 한다 해도 괜찮다는 것도 아닙니다. 감사를 하지 않으면 큰 일 난다, 앞서 살펴본 신호등 이야기로 본다면 <처벌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 바로 이 명령인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지금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없어요? 누가 거짓말을 하래요? 여러분, 저는 부족한 것이 있을 것 같습니까. 없을 것 같습니까. 없을 것 같으세요? 뭐, 이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기는 뭐하지만 부족한 것이 이만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시편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시편 23편 1절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主は私の羊飼い。私は乏しいことがありません。

자, 성경에 이렇게 적혀 있으니, 우리는 이처럼 지금 부족한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야 해요?

아아, 주님! 저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렇게 억지로 고백해야 하는 것인가요?

앞서 말씀 드렸던 것을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누가 거짓말을 하래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사실은 내가 무척 부족하지만 부족하지 말라고 하니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또는

“범사에 부족하더라도 부족하지 않다고 말하라”

성경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부족함이 있을 때에는 항상 돌아가는 성경구절이 어디여야 하겠습니까.

마태복음 6장 31절~32절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ですから、何を食べようか、何を飲もうか、何を着ようかと言って、心配しなくてよいのです。
これらのものはすべて、異邦人が切に求めているものです。あなたがたにこれらのものすべてが必要であることは、あなたがたの天の父が知っておられます。

바로 이 구절로 우리는 돌아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데도 “하이고, 하나님이 알긴 뭘 알아요” 라고 하시겠어요?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냥 하신 말씀이 아니에요. 모든 말씀은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면서까지 우리에게 하시고자 했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고 계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지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채워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남녀 어린아이 다 합해서 200만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민족,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200만명 구출작전을 명령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장 9절~10절
“9.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今、見よ、イスラエルの子らの叫びはわたしに届いた。わたしはまた、エジプト人が彼らを虐げている有様を見た。
今、行け。わたしは、あなたをファラオのもとに遣わす。わたしの民、イスラエルの子らをエジプトから導き出せ。」

자, 지금 모세 나이 80입니다. 지금 이 할아버지가 뚜벅뚜벅 가서 애굽의 황제 바로를 만나서, 저기 여보시오. 당신 나라에서 종살이 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풀어주시오……. 이렇게 말하면 바로가 아이구,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거행 하겠사옵니다……라고 할 것이라는 상상이 됩니까? 안 됩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이는 불가능합니다. 더구나 이를 위해 누구를 붙여주셨다구요? 예, 모세의 형인 83살 먹은 아론 할아버지를 붙여주셨어요. 그러면 가능합니까? 아니에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이는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켜주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죽으러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모세한테 무엇을 주셨습니까.


출애굽기 4장 2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主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が手に持っているものは何か。」彼は答えた。「杖です。」

출애굽기 4장 17절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また、あなたはこの杖を手に取り、これでしるしを行わなければならない。」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냐 하면, 모세야, 너 오른손에 쥔 게 뭐야? 그러니까, 모세가, 지팡이…인데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래. 그거 가지고 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팡이 하나 가지고 가래요.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었던 지팡이인데, 그거 하나 가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안 됩니다.

자, 그러면 모세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다음 2개 중에 골라보세요.

1번. “주여! 이것으로는 너무나도 부족하오니 애굽을 이길 수 있는 10만 군대, 100만 군대를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한다. 이 기도를 안 들어주면 들어줄 때까지 기도한다.

2번. 애굽으로 간다.

어느 쪽이 정답이겠습니까.


예, 2번이 정답입니다. 왜요? 너무 무모하지 않나요? 그런데 왜 2번이 정답인가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할 수 있다. 하면 된다고 하셨기 때문에 모세는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좀 더 들어가볼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그것은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실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를 믿고 간 모세는 마침내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내는 데에 성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떻습니까. 그가 블레셋 군대의 영웅 골리앗 앞에 섰을 때 다윗의 나이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만, 적어도 군대에 나가지 못할 정도로 어린 나이였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온다고 해서 형들은 전쟁터로 나갔습니다만, 다윗은 아직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형들의 도시락배달을 나갔던 것입니다. 거기서 만난 것이 바로 골리앗이었습니다.

블레셋 군대의 전쟁 영웅 골리앗, 그리고 군대에도 못 갈 정도로 나이가 어렸던 다윗의 한판 승부. 이는 누가 보더라도 뻔한 승부였습니다. 승부가 시작하자 마자 골리앗의 공격으로 다윗의 몸은 그 흔적 조차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갈기갈기 찢겨지는 비참한 광경을 상상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주여~ 저 골리앗을 물리칠 군대를 보내주시옵소서~!” 라고 기도를 해야 합니까.

물론 그런 기도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저기 눈앞에 골리앗이 쳐들어오고 있지 않습니까.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사무엘상 17장 45절~47절

“45.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6.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ダビデはペリシテ人に言った。「おまえは、剣と槍と投げ槍を持って私に向かって来 るが、私は、おまえがそしったイスラエルの戦陣の神、万軍の主の御名によって、おまえに立ち向かう。
今日、主はおまえを私の手に渡される。私はおまえを殺しておまえの頭を胴体から離し、今日、ペリシテ人の軍勢の屍を、空の鳥、地の獣に与えてやる。すべての国は、イスラエルに神がおられることを知るだろう。
ここに集まっているすべての者も、剣や槍がなくても、主が救いをもたらすことを知るだろう。この戦いは主の戦いだ。主は、おまえたちをわれわれの手に渡される。」

이렇게 말하고 어떻게 했대요?


그 다음 48절~49절입니다.
“48.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49.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そのとき、そのペリシテ人はダビデの方に近づき始めた。ダビデは、すばやく戦場を走って行き、ペリシテ人に立ち向かった。
ダビデは手を袋の中に入れて、石を一つ取り、石投げでそれを放って、ペリシテ人の額を撃った。石は額に食い込み、彼はうつぶせに地面に倒れた。

갑자기 음악소리가 짜잔~ 울려 퍼지더니, 하늘에서 빛이 나고 물매가 쫘악 내려왔대요? 아니에요. 물매는 이미 다윗이 가지고 있었어요. 그것을 가지고 골리앗을 물리친 것입니다.

모세나 다윗이 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것도 부족하고 저것도 모자라고 하는 불평이나 투정이 아닙니다.

주님, 지금 내게 있는 것이 족합니다. 부족하면 주님께서 채워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고 담대하게 애굽 바로를 향해서, 블레셋 골리앗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지정한 믿음의 용사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인 무엇인지를 가끔 모를 때가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는 있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하지만 이는 대단히 위험합니다. 이를 모르면 감사가 나오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이삭에는 쌍둥이 아들이 있었는데, 에서와 야곱입니다. 먼저 나온 에서가 형이 되고, 간발의 차이로 나중 나온 야곱이 동생이 되었습니다.

간발의 차이이긴 하나 형은 형입니다. 에서는 아브라함의 축복을 이어나갈 장손이었습니다. 장자였습니다. 이는 대단히 큰 축복이었습니다. 돈을 주고 살래야 살 수도 없는 축복이었지요.

하지만 그는 이것이 그렇게 큰 축복인줄 몰랐습니다. 이유는 간단하지요. 자기는 아무런 노력도 안 했어요. 태어나서부터 당연히 가지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어떻게 되냐 하면 결국에는 이 권리를 떡과 팥죽 한 그릇을 대가로 야곱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창세기 25장 33절~34절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ヤコブが「今すぐ、私に誓ってください」と言ったので、エサウはヤコブに誓った。こうして彼は、自分の長子の権利をヤコブに売った。
ヤコブがエサウにパンとレンズ豆の煮物を与えたので、エサウは食べたり飲んだりして、立ち去った。こうしてエサウは長子の権利を侮った。

이는 단순히 어떤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는 것이 아닙니다. 장자의 명분은 사람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주신 권리입니다. 그런데 이를 가볍게 여긴 에서는 결국 언약의 족보, 아브라함의 계보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리고 에서의 하나님이 될 수도 있었지만, 결국 그 장자의 명분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알았던 야곱으로 권리는 넘어가서 야곱의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6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また、だれも、一杯の食物と引き替えに自分の長子の権利を売ったエサウのように、淫らな者、俗悪な者にならないようにしなさい。

이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당연하다, 별것 아니다……라고 생각하면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에서는 자신을 장자로 선택해주신 하나님에 대해서 감사를 한 번도 안 해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특권을 가볍게 여겼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 자체를 가볍게 여겼다는 것과 똑같은 말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이를 당연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감사로 여겨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지금 무엇을 가지고 계십니까. 요즘은 대부분 스마트폰을 가지고 계시지요? 성능으로 보자면 모세가 가지고 있던 지팡이나 다윗이 가지고 있던 물매에 비하겠습니까. 그리고 대부분 자동차를 타고 오시거나, 대도시 같으면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시잖아요? 그것을 아무리 과거 이집트 황제가 타는 병거라 하더라도 속도나 안전성이 거기에 비하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많은 것을 잊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감사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성년자 다윗는 물매로 골리앗을 물리쳤습니다. 할아버지 모세는 지팡이 하나로 200만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더 큰 일을 해내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앞서 명령과 허가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그 중에서 명령은 이를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을 수도 있다고 말씀 드렸지요. 이 점에 대해서는 세상 법이나 믿음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명령을 지키면 상을 주나요? 여러분, 걸어가다가 빨강신호 지킨다고 경찰한테 칭찬 받아본 적 있으세요? 아니요. 이 세상 명령은 좀 이상한 말이지만 지켜봤자 본전입니다. 그러나 어기면 처벌을 받게 되지요.

반면에 믿음의 명령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 혼이 날 수도 있지만, 명령을 지키면 크나큰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넘치는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명령할 때에는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나라가 나한테 빨강신호를 지키라고 했는데 내가 안 지켰어요. 그러면 나라가 책임져 주나요? 아니에요. 책임은 우리가 져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이것을 안 지키면 누가 책임을 져요? 예, 하나님이 지십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책임을 지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령을 하셨어요. 그런데 인간이 명령을 안 지키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저주를 받아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을, 그 책임을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피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지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지켜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항상 감사하라는 명령, 이것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항상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하라는 명령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성경에 기록된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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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회 온전한 믿음 온전한 순종
2019년 3월 3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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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3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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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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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온전한 믿음 온전한 순종” 完全なる信仰・完全なる従順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보면 어떤 것은 예전에 경험해본 일, 또는 지식으로 알고 있던 일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별로 큰 문제가 없습니다. 지식이나 경험에 비추어 일을 처리하면 되는 것이니까요.

요즘도 그런 말을 쓰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른다고 할 때 보면 가끔 “FM대로 하면 된다”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FM대로>라는 말은 많은 사람들이 알지만, 그게 무슨 약자인지는 의외로 모르는 분들이 꽤 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사실 FM이라고 하는 것은 군사용어라고 하지요? 필드 매뉴얼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교본, 교과서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FM대로>라고 하는 것은 원칙대로 처리하면 되다는 뜻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항상 FM대로 처리하면 되는가 하면 꼭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냐 하면 FM, 즉 매뉴얼이 없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지요.

역사적으로 보면 세상에는 유명한 모험가들이 있습니다. 아무도 안 가본 곳에 간다거나, 또는 아무도 해보지 않은 것을 해보는 사람들이지요.

말 그대로 전인미답. 지금까지 한 사람도 밟아보지 않은 곳을 간다는 것은, 해보지 않은 것을 해본다는 것은, 좋은 말로 하자면 용기가 있는 것이요, 조금 부정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무모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세상적으로 생각할 때 성경에 보면 이처럼 용기가 있는 것인지 무모한 것인지 헷갈리는 사람이 꽤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사람 중 하나가 아브라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말씀, 그게 바로 오늘 말씀인데,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3절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主はアブラムに言われた。「あなたは、あなたの土地、あなたの親族、あなたの父の家を離れて、わたしが示す地へ行きなさい。
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なる国民とし、あなたを祝福し、あなたの名を大いなるものとする。あなたは祝福となりなさい。
わたしは、あなたを祝福する者を祝福し、あなたを呪う者をのろう。地のすべての部族は、あなたによって祝福される。」

부모님들이 아이들한테 보통 어떻게 교육을 합니까. 어떤 사람을 따라가면 안돼요? 예,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된다고 가르치지요. 그런데 이 아브라함이라는 어린이. 사실 어린이가 아니죠.

12장 4절을 보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의 나이는 75세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만, 그때는 아직 가톨릭이나 개신교는 고사하고 유대교도 생기기 전이었습니다.

당시 75세였던 아브라함 어린이는, 이 짧은 세 줄의 듣도 보지도 못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섰습니다.

이게 그리 쉬운 일이었을까요? 아니요. 정말 그야말로 무모하고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무엇보다 아브라함 그 이전에는 이와 같은 일이 없었습니다. 이런 일이 닥쳤을 때 말하자면 FM, 필드매뉴얼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 때문에 아브라함은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습니다.

우선 아브라함은 혼자 떠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중에서 아내 사라를 데리고 간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창세기 2장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それゆえ、男は父と母を離れ、その妻と結ばれ、ふたりは一体となるのである。

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지요. 부부는 한 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사라를 데리고 간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5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창세기 12장 5절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アブラムは、妻のサライと甥のロト、また自分たちが蓄えたすべての財産と、ハランで得た人たちを伴って、カナンの地に向かって出発した。こうして彼らはカナンの地に入った。

얻은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은 종입니다. 당시에 종은 말하자면 재산처럼 거래되고 있었기 때문에 역시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걸리는 게 있지요?


아니, 언제 하나님께서 조카 롯을 데려가라고 하셨어요. 하나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셨냐 하면 7절 전반부를 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主はアブラムに現れて言われた。「わたしは、あなたの子孫にこの地を与える。」

이 말씀을 어쩌면 당시 아브라함은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기껏 아브라함을 불러놓고 하신다는 말씀이, 아브라함한테 준다는 말씀을 하지 않고, 자손한테 주겠다고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시키지 않았던 일, 롯을 데리고 갔던 것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아브라함이 왜 롯을 데려갔을까요. 조카라고 하니 자기보다는 젊고 힘이 있었겠지요. 그래서 어쩌면 자기들만 가는 것보다 롯을 데려가면 조금 더 도움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졌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판단하셨냐 하면, 이를 온전한 순종이 아니라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르실 때에는 아브라함에 대해서 축복의 말씀을 하셨지만, 롯을 데리고 떠나는 모습을 보시고는, 정작 아브라함 본인에 대한 축복의 말씀은 사라집니다.

아브라함의 시행착오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2장 10절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その地に飢饉が起こったので、アブラムは、エジプトにしばらく滞在するために下って行った。その地の飢饉が激しかったからである。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시겠다고 하면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주셨으면 거기 머물러 있어야 할 텐데, 생활이 조금 어려워졌다고 해서 약속의 땅을 떠나 다른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됩니까. 창세기 12장 11절~20절에 보면, 까딱 잘못했다가 아내를 빼앗길지도 모르는 일까지 겪게 되고 맙니다. 참, 이런 일은 남자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최악의 사태는 모면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십니다. 아무런 말씀도 안 하세요. 왜요? 그렇죠. 아브라함은 아직 온전한 순종, 하나님께서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인간적인 생각으로 왠지 롯을 데리고 있으면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브라함과 롯 사이에 다툼이 생겨서 결별하게 됩니다.

창세기 13장 14절~17절
“14.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15.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17.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ロトがアブラムから別れて行った後、主はアブラムに言われた。「さあ、目を上げて、あなたがいるその場所から北、南、東、西を見渡しなさい。
わたしは、あなたが見渡しているこの地をすべて、あなたに、そしてあなたの子孫に永久に与えるからだ。
わたしは、あなたの子孫を地のちりのように増やす。もし人が、地のちりを数えることができるなら、あなたの子孫も数えることができる。
立って、この地を縦と横に歩き回り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に与えるのだから。」

결국 아브라함과 롯이 결별하게 되는데, 결별하자마자 하나님께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브라함에게 축복의 말씀을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자기 생각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방법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처럼 FM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모세는 또 어떻습니까.

출애굽기 7장 7절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에 모세는 팔십 세였고 아론은 팔십삼 세였더라”

彼らがファラオに語ったとき、モーセは八十歳、アロンは八十三歳であった。

하나님께서는 여든 살 먹은 모세와 그보다도 세 살이 더 많은 그의 형을 시켜서 이스라엘 민족 성인 남성만 60만명, 아이들과 여성들까지 하면 총 200만명이 넘는 이스라엘 민족의 구출을 위해 부르셨습니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까지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젊은 날 다 가고, 좋은 날 다 보낸 모세 할아버지가 그보다 나이가 더 많은 형님과 함께, 당시 강대국인 애굽의 왕을 만나서 담판을 짓고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하라? 이게 말이나 됩니까.

어디 그 뿐인가요. 모세는 이후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이 또한 아브라함 때와 마찬가지입니다. FM이 없어요. 매뉴얼이 없었던 것입니다. 뻑 하면 목이 마른다고 아우성입니다. 식량이라도 넉넉히 주시면 모를까, 하늘에서 만나를 주시는 것은 좋지만, 항상 간당간당 해요. 오늘은 만나가 있어서 먹을 수 있지만, 내일 또 만나를 얻을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좀 불안하기 때문에 모아두려고 했더니 어떻게 됐대요?

출애굽기 16장 19절~20절
“19.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20.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モーセは彼らに言った。「だれも、それを朝まで残しておいてはならない。」
しかし、彼らはモーセの言うことを聞かず、ある者は朝までその一部を残しておいた。すると、それに虫がわき、臭くなった。モーセは彼らに向かって怒った。

아니, 이게 그렇게 잘못한 거예요? 라고 묻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마치 아브라함이 롯을 데려간 것이 그렇게 잘못한 거예요? 라고 묻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만 믿으라는 것입니다. 나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모세 나이도 마찬가지죠. 좀 팔팔하고 혈기 왕성한 젊은이를 택한다 하더라도 모자랄 판에, 왜 하필이면 나이 든 여든 살 먹은 할아버지와, 여든 세 살 먹은 할아버지를 택하셨을까요.

이는 사사기에 보면 그 답이 있습니다.

일단 사사기 6장 1절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

イスラエルの子らは、主の目に悪であることを行った。そこで、主は七年の間、彼らをミディアン人の手に渡された。

하나님께 죄를 범한 이스라엘에 대하여 시련을 허락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미디안 사람들을 시켜서 이스라엘을 괴롭게 만드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이에 이스라엘 민족이 회개하였더니 한 지도자를 세웁니다. 그 이름이 바로 기드온이지요.

이제 기드온이 미디안을 물리치기 위해서 사람들을 모읍니다. 그랬더니 몇 명이 모였냐 하면 3만 2천명이 모였습니다. 미디안 군대가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3만 2천명 정도가 모였다면 한 번 해볼만 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몇 명까지 줄이냐 하면, 예, 300명까지 줄입니다. 아니, 지금부터 전쟁을 하려고 하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한 사람이라도 더 있으면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사사기 7장 2절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主はギデオンに言われた。「あなたと一緒 にいる兵は多すぎるので、わたしはミディアン人を彼らの手に渡さない。イスラエルが『自分の手で自分を救った』と言って、わたしに向かって誇るといけないから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많아서 이기면 그 영광을 하나님한테 돌리는 게 아니라 너희들이 잘 싸워서 이겼어. 이렇게 말할 게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브라함 때도 모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시 젊은 조카 롯이 있으니까 해냈어, 역시 젊은 모세와 팔팔한 아론이 있으니까 해낼 수 있었어……. 너희들 그렇다고 할 거 아니야? 나는 그 꼴 못 봐.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이사야 48장 11절에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わたしのため、わたしのために、わたしはこれを行う。どうしてわたしの名が汚されてよかろうか。わたしの栄光を、ほかの者に与えはしない。

참 이기적인 하나님이시죠? 너무나도 이기적인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이기적이면 다른 사람한테 피해를 입힐 수가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이기적이시라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모두한테 크나큰 축복이 허락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절~29절
“26.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兄弟たち、自分たちの召しのことを考えてみなさい。人間的に見れば知者は多くはなく、力ある者も多くはなく、身分の高い者も多くはありません。
しかし神は、知恵ある者を恥じ入らせるために、この世の愚かな者を選び、強い者を恥じ入らせるために、この世の弱い者を選ばれました。
有るものを無いものとするために、この世の取るに足りない者や見下されている者、すなわち無に等しい者を神は選ばれたのです。
肉なる者がだれも神の御前で誇ることが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본인에 대해서 만족하세요? 아, 내가 좀 더 돈이 많았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좀 더 능력이 많았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좀 더 젊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좀 더 힘이 세거나 지위가 높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혹시 그런 생각 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여러분, 참~ 다행입니다. 돈이 없는 덕분에, 능력이 부족한 덕분에, 젊지 않은 덕분에, 힘이 약하고 지위가 낮은 덕분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쓰시기를 원하고 계신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된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상상도 못할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크고도 놀라운 비밀인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금방 좌절합니다. 금방 절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알면 어떻게 됩니까. 이 비밀을 알면 부족한 가운데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왜 믿을 수가 있어요? 예, 우리에게는 FM이 있습니다. 매뉴얼이 있어요. 그 매뉴얼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입니다. 우리에게 는 성경이 있기 때문에 이제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나 자신한테는 힘과 능력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마침내는 잘 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끝내는 잘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작년 11월 말 쯤이라고 기억되는데, 저희 집 우체통에 보니까 무슨 안내장이 들어있더라구요? 그래서 보니까 집안에 있는 무슨 전기 설비 안전점검을 할 텐데 12월 몇 일 몇 시쯤에 방문예정입니다……라는 안내문이에요. 뭐, 점검하는 시간은 한 10분 정도라고 하던데, 좀 흥미로운 것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 점검은 4년마다 한 번씩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무슨 올림픽도 아니고 4년마다 한 번씩 하냐……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예정된 날짜, 예정된 시간에 정확히 점검하시는 분이 오셔서는, 정말로 한 10분 정도 집 안에 들어와서 여기저기 점검을 하셨습니다. 다 마치시고는 이상이 없다고 하시면서 나가시는데 그 때 이 분이 하신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럼 4년 뒤에 뵙겠습니다”

이러고 가시더라구요.

그렇죠. 전혀 이상할 건 없습니다. 4년마다 점검이 있고 오늘 마쳤으니 4년 뒤에 또 하겠다는 인사말이었습니다만, 좀 생각해보니까 지금까지 4년 뒤를 기약하면서 인사를 나눈 적이 없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상당히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이분이 오셨을 때가 작년 2018년 12월이니 그로부터 4년 뒤라고 하면 2022년 12월입니다.

2022년 12월.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는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에 계속 살고 있을까. 지금부터 4년 뒤라면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들은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하는, 참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기대와 불안함이 느껴졌습니다. 사실 기대보다는 불안감이 조금 더 많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온전한 순종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고 죽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러셨나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안 된다고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까. 누가 미련한 사람입니까. 예수님? 아이구, 필요 없어. 나는 내 힘이 있으니까, 내 능력이 있으니까, 예수님 없이도 나는 잘할 수 있어……이것이 지혜 있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나는 힘이 없기 때문에, 능력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 없이는 안돼. 반드시 예수님이 함께 해주셔야 해……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지혜 중에 지혜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十字架のことばは、滅びる者たちには愚かであっても、救われる私たちには神の力です。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1년 뒤, 5년 뒤, 그리고 10년 뒤에, 그는 자기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알지 못했습니다. 모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기 전인 79세가 되던 때까지도 모세는 어쩌면, 그래, 인생 별거야? 그냥 이렇게 살다 가는 거지 뭐……그랬는지도 모르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도 모세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크게 높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온전한 믿음, 온전한 순종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는 지금 현재 4년 뒤를 갔다 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4년 뒤는 고사하고 1시간 뒤, 1분 1초 뒤도 갔다 온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 미래는 모두에게 공평한 전인미답. 아무도 안 가본 땅이요, 아무도 안 해본 일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부르십니다. 누구누구야. “너는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네게 큰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あなたは、わたしが示す地へ行きなさい。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なる国民とし、あなたを祝福し、あなたの名を大いなるものとする。

이렇게 하나님께서 부르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온전한 믿음, 온전한 순종입니다.

그렇다고 꼭 이사를 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도전, 새로운 세계로 주님께서 이끌어가실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영원한 FM, 영원한 매뉴얼 성경 말씀을 따르면 됩니다. 성경 말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시행착오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직 성경 말씀, 하나님 말씀을 따라,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며, 예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온전한 믿음과 온전한 순종으로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 놀라운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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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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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9회 좋은 친구 예수님
2019년 2월 2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3절~15절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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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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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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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좋은 친구 예수님” よい友イエス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도로를 달리다 보면 빨리 달리는 차를 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그런 차를 보시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좀 멋있어 보이던가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거기다가 자동차가 비싼 외국 스포츠카다 하면 정말 더 멋져 보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꼭 멋있게만 보이는 것만은 아니지요.

일반도로든 고속도로든 간에 과속으로 운전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래서 좀 너무 빨리 달리는 차를 보면, 아휴, 저러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한국이나 일본이나 모두 나비게이션을 달고 다니면 종종 과속주의 안내가 나옵니다. 저기 지금 과속단속 카메라가 있으니까 조심하라는 거예요. 이런 카메라는 무슨 잠복근무를 하기 위해서 달아놓은 것이 아니라 안전을 위해 속도를 줄이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것이기 때문에 이런 안내 방송은 불법이 아닙니다.

특히 고속도로에는 굳이 이런 장치가 없더라도, 바로 앞에 단속 카메라가 있다는 표지판이 붙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보고 속도를 줄이면 단속에 걸리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자동차에 이런 나비 시스템도 없고, 분명히 바로 앞에 단속 카메라가 있다는 표지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도 무시한 채로 그냥 달렸다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 카메라에 찰칵 찍히게 되지요.


저는 아직 사진을 찍힌 적이 없어서 어떻게 나오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에서 한 번 여기에 걸린 적이 있는 친구한테 말을 들어보니까, 자기 얼굴과 자동차 번호판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찍혀 있어서 부인을 할래야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저기 앞에 과속 단속 카메라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속도만 빨리 내서 달린다고 하면, 이는 멋지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편 14편 1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愚か者は心の中で「神はいない」と言う。彼らは腐っていて忌まわしいことを行う。善を行う者はいない。

이 세상에 하나님이 어디 있어. 그런 건 없어.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믿을 바에야, 차라리 눈에 보이는 나를 믿어라. 돈을 믿어라. 권력을 믿어라. 또는 이 세상 지식을 믿어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렇게 말하면 꽤 멋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私たちは見えるものにではなく、見えないものに目を留めます。見えるものは一時的であり、見えないものは永遠に続くからです。


지금 너의 눈 앞에 보이는 것? 그게 영원할 줄 알아? 아니야. 그거 영원하지 않아. 잠깐이면 사라질 것들이야. 눈에 보이는 돈이나 권력이나 세상적인 힘이나 지식이 아니라, 육적인 눈에는 안 보이는 하나님을 믿어야 돼. 그게 영원한 거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잠언 9장 10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잠언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主を恐れることは知恵の初め、聖なる方を知ることは悟ることである。

저기 앞에 단속 카메라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지금은 보이지 않으니까 괜찮다고 하면서 쌩쌩 달리는 것이 지혜로운 게 아니야. 지금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저기 단속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카 나비게이션에서는 앞에 카메라가 있다고, 속도를 줄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계속 안내를 하는데도 속도를 줄이지 않는 것이 멋있어요? 아니에요. 그건 어리석은 것입니다.

시편 33편 13절~14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시편 33편 13절~14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살피시는도다”

主は天から目を注ぎ人の子らをすべてご覧になる。
御座が据えられた所から地に住むすべての者に目を留められる。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걱정 말라고, 그러면서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것이 멋진 것이 아닙니다. 이는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서 12장 14절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神は、善であれ悪であれ、あらゆる隠れたことについて、すべてのわざをさばかれるからである。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요한계시록 20장 12절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また私は、死んだ人々が大きい者も小さい者も御座 の前に立っているのを見た。数々の書物が開かれた。書物がもう一つ開かれたが、それはいのちの書であった。死んだ者たちは、これらの書物に書かれていることにしたがい、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고속으로 달리는 모습이 멋있어 보일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벌금을 내는 모습이 멋있어 보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자기식대로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모습이 멋있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심판대 앞에 서서 그렇게 살아왔던 자신의 삶이 낱낱이 드러날 때 모습이 멋이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요, 하나님은 아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는 것은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존재로 생각되십니까.

무서우신 하나님? 노하시는 하나님?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 꾸짖으시는 하나님처럼 생각되십니까.

아니면, 은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축복의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처럼 여겨지십니까.

출애굽기에 보면 다음 구절이 저는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출애굽기 33장 11절 전반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主は、人が自分の友と語るように、顔と顔を合わせてモーセと語られた。

아……정말 멋진 말씀 아니십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와 대화하실 때에 모세를 마치 친구 대하듯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친구와 같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정말 허물 없이 자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모두 다 말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모세는 어떤 대화까지 나누었던 것일까요.

출애굽기 33장 18절~23절

“18.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21.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22.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23.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モーセは言った。「どうか、あなたの栄光を私に見せてください。」
主は言われた。「わたし自身、わたしのあらゆる良きものをあなたの前に通らせ、主の名であなたの前に宣言する。わたしは恵 もうと思う者を恵み、あわれもうと思う者をあわれむ。」
また言われた。「あなたはわたしの顔を見ることはできない。人はわたしを見て、なお生きていることはできないからである。」
また主は言われた。「見よ、わたしの傍らに一つの場所がある。あなたは岩の上に立て。
わたしの栄光が通り過ぎるときには、わたしはあなたを岩の裂け目に入れる。わたしが通り過ぎるまで、この手であなたをおおっておく。
わたしが手をのけると、あなたはわたしのうしろを見るが、わたしの顔は決して見られない。」


생각해보십시오. 당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목숨을 건 일이었습니다. 감히 가까이도 가지 못할 정도로 무서운 일이었지요. 하지만 모세는 어떤 대화까지 나누었습니까. 감히 하나님의 얼굴까지도 보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어요?

얘야, 사람인 네가 하나님인 내 얼굴을 보면 죽어. 그러니까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네 앞을 지나갈 텐데, 내 앞모습이 보일 때에는 내가 손으로 네 눈을 가려줄게. 그리고 내가 지나간 다음에 내가 손을 거두면, 내 얼굴은 보지 못하겠지만 내 뒷모습은 볼 수 있을 거야. 그러면 되겠지?…….

뭐 이러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대화입니까.

모세는 정말 이 정도로 가깝고 다정하게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모습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또 내일부터, 그래, 그러면 어디 한 번 나도 하나님 얼굴 좀 보게 해달라고 기도해보자……라고 하실 분이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여러분더러 그렇게 기도 하시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 정도로 모세는 정말 친구처럼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친구처럼 대한다는 말씀은 무엇이냐 하면, 정말 서로 숨김없이 모든 것을 드러낼 수 있는 관계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한테만 친구처럼 대한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8장 17절~19절을 봅니다.
“17.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18.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19.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主はこう考えられた。「わたしは、自分がしようとしていることを、アブラハムに隠しておくべきだろうか。
アブラハムは必ず、強く大いなる国民となり、地のすべての国民は彼によって祝福される。
わたしがアブラハムを選び出したのは、彼がその子どもたちと後の家族に命じて、彼らが主の道を守り、正義と公正を行うようになるためであり、それによって、主がアブラハムについて約束したことを彼の上に成就するためだ。」

하나님께서는 죄악으로 물든 도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는 요즘 말로 하자면 극비 중 극비이었습니다. 절대로 발설할 수 없는 내용이었지요. 그런데도 이처럼 아브라함한테만은 하나님께서 숨기지 않고 모든 것을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친구인 것입니다.

이쯤 되면 좀 질투가 나십니까. 아니, 아브라함이나 모세와는 친구가 되어주셨으면서 왜 나와는 친구가 안되 주시는 거야……라고 하는 질투가 나십니까?

음? 안 나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나 모세와 친구가 되든지 말든지…….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그래요? ㅎㅎ 그러면 안됩니다. 그건 마치, 아브라함이 축복을 받거나 말거나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거나 말거나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가 되고 맙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은 우리가 모두 받아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우리 안에 넘쳐나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건 지금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이야기, 내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가 하나님과 친구를 맺은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친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제가 드리는 말씀이 아니에요. 그리고 우리가 먼저 하나님과 친구를 맺자고 한 것이 아닙니다.

감사하게도, 너무나도 감사하게도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야, 우리 친구가 되자. 말하자면 우리 친구 하자……이렇게 먼저 말씀해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 요한복음 15장 중에서 15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わたしはもう、あなたがたをしもべとは呼びません。しもべなら主人が何をするのか知らないからです。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友と呼びました。父から聞いたことをすべて、あなたがたには知らせたからです。”


누가복음 8장 10절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がたには神の国の奥義を知ることが許されていますが、ほかの人たちには、たとえで話します。『彼らが見ていても見ることがなく、聞いていても悟ることが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들에게 있어서는 숨겨진 것들을 제자들에게는 모두 말씀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친구인 것입니다.

이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모든 비밀을 다 알게 해주셨습니다. 다만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이것을 안 믿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2장 4절~5절
“4.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わたしの友である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からだを殺しても、その後はもう何もできない者たちを恐れてはいけません。
恐れなければならない方を、あなたがたに教えてあげましょう。殺した後で、ゲヘナに投げ込む権威を持っておられる方を恐れなさい。そうです。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この方を恐れなさい。

이것 또한 천국의 어마어마한 비밀입니다. 이 세상에서 권세 잡은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또 가끔 보면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렇다고 이 세상 권력에 불복종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 것을 바라보고, 세상 것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의지할 분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친구처럼 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께 진정으로 친구처럼 말씀 드리고 있습니까.

주님은 이처럼 우리를 친구 대하듯 하고 싶은데, 우리는 어쩌면 서먹서먹하게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주여!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

여러분, 친구한테 그렇게 말합니까. 야, 누구야. 내가 너를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이러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거 왜 그렇게 기도 하는 거예요? 간단해요. 안 믿어지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주여~ 믿습니다~ 믿음이 부족한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주여~ 믿습니다~

이거 뭘 어쩌라는 거예요. 이건 지금 믿어진다는 게 아니에요. 안 믿어진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물론 예배 때 기도 시간에 앞에 나오셔서 모든 성도님들을 대표해서 드리는 대표기도 같은 것은, 당연히 그 내용이나 기도 순서에 있어서 다듬기도 해야겠고 단어도 좀 선별해서 하셔야겠지만, 우리가 개인적으로 드리는 기도까지 그렇게 한다면, 이는 주님께서 바라는 기도가 아닐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교회에 다닐 때 보면 예배 시간 때 통성기도 같은 것을 하잖아요? 아, 그러면 저는 정말 그거 잘 못 하겠더라구요.
아니, 그렇잖아요. 예를 들어서, 주여~ 제 수입이 지금 너무나도 적은데, 월급이 올라가게 해 주시옵소서~ 주여~ 이번 달 집세를 내야 할 텐데, 꾸지 않도록 해주시옵소서~
아니면 내 어디어디가 아파서 고생인데 고쳐주시옵소서~
아니면 집이 비싸게 팔리게 해주시옵소서~
이번에 어디 시험을 봤는데 합격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사람들 많이 있는데 큰 소리로 할 수 있어요? 아이구, 그런 걸 어떻게 큰 소리로 해요. 프라이버시인데…… 그러면 통성기도 할 때에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들어도 무방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만 기도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 기도는 큰 소리로 기도했다가, 개인적인 기도는 조용한 소리로 기도해야 하는 거예요? 세상에 그렇게 기도해야 한다는 게 성경에 어디 나와 있습니까.

가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보면 하나님 앞에서도 체면을 세우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이건 옳지 않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만, 자, 우리한테 무슨 문제가 있어서 변호사를 찾아갔다고 생각해보겠습니다. 뭐, 쉽게 말해서 내가 누구한테 돈을 꿔졌는데. 안 갚아요. 그래서 상담하기 위해서 변호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예약을 하고 변호사와 함께 상담실에 들어갔어요. 그러면 변호사를 앞에 두고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변호사님. 우리 인생에 있어서 돈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인생의 전부가 돈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것은 저도 압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돈을 또한 완전히 도외시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겠지요…….”

이러실 건가요? 이러면 아마 변호사는 그냥 가만히 쳐다보고 있겠지요. 무슨 메모를 하려고 들고 있던 펜은 가만히 멈춘 상태일 것입니다. 이건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됩니다. 지금 변호사 앞에 두고 체면 차릴 이유가 뭐가 있어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솔직하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야죠.

“변호사님, 지금 제가 누구한테 돈을 꿔준 게 있는데, 글쎄 이 사람이 안 갚아요.”

이렇게 말하면 변호사는, 아, 대여금반환청구사건이구나……라고 금방 알아차립니다. 그러면 이제 필요한 질문을 하지요. 변제일은 언제입니까. 계약서는 있습니까. 담보는 있습니까. 등등 실질적인 질문에 바로 들어가서 문제해결을 위해서 빨리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슨 체면을 차린다고 인생이 어떻고 그러고 있으면 이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이지요.

주님은 지금 우리들로부터 친구처럼 솔직한 기도를 듣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기도하래요? 남들 다 듣는 데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라고 하시던가요?


마태복음 6장 6절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あなたが祈るときは、家の奥の自分の部屋 に入りなさい。そして戸を閉めて、隠れたところにおられるあなたの父に祈りなさい。そうすれば、隠れたところで見ておられるあなたの父が、あなたに報いてくださいます。

우리는 이 말씀을 오랫동안 오해해왔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지금까지는 너무 남들한테 티 내지 말고 기도하라……는 정도로밖에 이해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친구처럼 나한테 모든 말을 다 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움직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뻗고 역사하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 7절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それどころか、あなたがたの髪の毛さえも、すべて数えられています。恐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あなたがたは、多くの雀よりも価値があるのです。

주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아신다고 하시는데, 우리가 주님 앞에서 무엇을 부끄러워할 게 있습니까. 뭐가 창피할 게 있습니까. 무엇을 숨길 게 있습니까. 무슨 체면을 차릴 게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3절~15절
“1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ヨハネの福音書 15章 13節~15節
“人が自分の友のためにいのちを捨てること、これよりも大きな愛はだれも持っていません。
わたしが命じることを行うなら、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友です。
わたしはもう、あなたがたをしもべとは呼びません。しもべなら主人が何をするのか知らないからです。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友と呼びました。父から聞いたことをすべて、あなたがたには知らせたからです。”

예수님은 우리와 친구가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는 그냥 단순히 친하게 지내자. 아니면 말고……가 아닙니다.

과거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는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되셔서, 스스로 십자가에 못박히고 피를 흘리시면서까지 우리와 친구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와 친구가 되셔서 우리의 죄를 자신의 피로 모두 씻어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손을 내미십니다. 이제 내가 제물이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제물은 필요가 없어. 너의 기도를 드리기만 하면 돼.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나한테 모든 것을 털어놓으면 돼……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신뢰합시다. 예수님을 의지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친구, 우리의 좋은 친구되신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를 항상 지켜주십니다. 인도해주십시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진정한 친구되신 예수님께 진정한 기도를 드릴 때에, 그리고 예수님을 진정한 친구로 우리가 맞이할 수 있을 때에, 주님 안에서 진정한 평안과 진정한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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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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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8회 닮음과 흉내
2019년 2월 1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4장 29절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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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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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닮음과 흉내” 倣うこととマネること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제 개인적인 일이라도 참 송구스럽습니다만, 요즘에 제 주변을 보니 왜 이렇게 자꾸 고장 나는 것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맨 처음에는 프린터부터 시작했어요. 100엔샵에 보면 프린터 잉크를 이렇게 주입해서 쓰는 것을 파는데, 전도지도 뽑고 하니까 잉크 소모가 좀 빨리 되더라구요? 그래서 그걸 사서 좀 해볼까 했는데 영 좀 신통치가 않습니다. 프린터 움직임이 적지 않게 수상해요. 아무래도 뒤에서 잉크가 새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내일 하고 있어요.

그러던 차에 얼마 전 갑자기 모니터 두 대 중에 한 대가 고장이 났습니다. 제가 모니터가 원래 두 대가 있었어요. 그 이유는 한국에서 컴퓨터 두 대를 가져왔는데, 하나는 이미 몇 년 전에 고장이 나서 못 쓰고 있거든요. 그래서 거기서 쓰던 걸 나머지 한 컴퓨터에 연결해서 두 대를 두고 쓰고 있었는데, 요즘 제 아내한테 일을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남은 컴퓨터라고 하는 게 노트북 중에서도 작은 것, 이른바 넷북이라고 하는 컴퓨터인데, 속도도 느리지만 모니터가 작아요. 그래서 제가 있는 두 대의 모니터 중에서 하나를 떼어서 연결을 해주었습니다. 화면이 커지니까 아무래도 일을 하기가 수월하죠. 그런데 이게 하루 만에 갑자기 고장이 났습니다.

프린터도 속을 썩이고 그랬는데 왜 모니터까지 이렇게 고장이 났을까……그래, 뭐 좋은 일이 있으려고 그러는 거겠지……라고 했는데, 마침 지난 주 화요일에 제가 집에서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어요. 사실 지금까지도 몇 번 떨어뜨린 적도 있었거든요. 하물며 바깥에서 아스팔트 위에 떨어뜨린 적도 있었습니다만, 튼튼한 케이스 덕분에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별 문제 없겠지……라고 했는데, 좀 보니까 액정 한 구석이 보라색으로 물들기 시작했어요. 그래도 뭐 큰 문제가 있겠나……했는데, 점점점점 범위가 넓어 지더니, 저녁이 되니까 절반 정도가 퍼렇게 물들게 되었습니다. 그래, 뭐 그래도 이 정도면 보이니까 괜찮겠다 했는데, 다음날이 되니까 아예 화면이 보이지 않아요.

아……정말 그 때 심경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요. 카카오톡에 보면 낙심, 좌절, 슬픔 같은 걸 표현한 이모티콘이 여러 개 있잖아요? 이걸 모두 다 합쳐놓은 심정……에 곱하기 5 정도라고 할까요? 참 암담합니다. 이 핸드폰은, 뭐 스마트폰 가지신 분들은 대부분 그렇시겠지만, 메일이나 메신저 뿐만이 아니라, 어딜 가려면 네비게이터로도 써야 하고, 은행 업무도 이걸로 해야 하고, 또 동영상 촬영도 스마트폰으로 해야 합니다.

참 순간 아찔하더라구요.

아니, 내가 요즘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이런 일을 당할까……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하나님이 사탄한테 내 자랑을 하셨나보다……했습니다.

욥기 1장 8절~12절을 좀 바꾸어 보았습니다.

8.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홍 목사를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9.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홍 목사가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주께서 그에게 프린터와 모니터와 스마트폰을 주셨기 때문이 아니니이까
11.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프린터와 모니터와 스마트폰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12.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프린터와 모니터와 스마트폰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主はサタンに言われた。「おまえは、わたしのしもホン牧師に心を留めたか。彼のように、誠実で直ぐな心を持ち、神を恐れて悪から遠ざかっている者は、地上には一人もいない。」
サタンは主に答えた。「ホン牧師は理由もなく神を恐れているのでしょうか。
あなたが、彼のプリンター、モニター、そしてスマホをあげたからではありませんか。
しかし、手を伸ばして、彼のプリンター、モニター、そしてスマホを打ってみてください。彼はきっと、面と向かってあなたを呪うに違いありません。」
主はサタンに言われた。「では、ホン牧師のプリンター、モニター、スマホをすべておまえの手に任せる。ただし、彼自身には手を伸ばしてはならない。」そこで、サタンは主の前から出て行った。

아마도 이런 게 아닐까……하고 저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참고로 말씀을 드립니다만, 이런 저를 보고 제 아내는 욥의 처처럼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神を呪って死になさい。)” 라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오히려 “이왕 망가질 거면 좀 넉넉할 때 망가지거나 하지, 왜 하필이면 이럴 때 망가지는지 모르겠네”라고 미안해하는 저에게 “괜찮아요. 여자들도 꼭 돈이 없을 때 화장품이 떨어져요”라는 말로 위로해주었습니다. 참 은혜가 넘치는 말씀입니다.

욥이 처음에는 큰 고난을 당하지만 마지막에는 큰 축복을 받지요.


욥기 42장 12절~15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12.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13.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14.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니
15.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主はヨブの後の半生を前の半生に増して祝福された。それで彼は羊一万四千匹、らくだ六千頭、牛一千くびき、雌ろば一千頭を持つことになった。
また、息子七人、娘三人を持った。
彼はその第一の娘をエミマ、第二の娘をケツィア、第三の娘をケレン・ハ・プクと名づけた。
ヨブの娘たちほど美しい女は、この地のどこにも見つからなかった。彼女たちの父は彼女たちに、その兄弟たちの間で相続地を分け与えた。

참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욥이 이처럼 큰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욥이 고난을 받았기 때문일까요.

물론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시편 119편 71절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苦しみにあったことは私にとって幸せでした。それにより私はあなたのおきてを学びました。

고난에 있어서 성경에는 많은 기록이 있습니다. 고난은 바울도 많이 받았고 그 외 선지자들 사도들 제자들도 많은 고난을 받아온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이사야 53장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しかし、彼は私たちの背きのために刺され、私たちの咎のために砕かれたのだ。彼への懲らしめが私たちに平安をもたらし、その打ち傷のゆえに、私たちは癒やされた。

여기서 <그>라고 하는 분은 다름아닌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구약 중에서도 이 이사야서는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대단히 많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못에 찔린 이유는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예수님께서 채찍에 상하신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징계를 받음으로 인해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나음을 받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축복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채찍에 맞아야 하고 고통과 고난을 받아야 한다면,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과 고난의 80%나 90%를 받았고,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나머지 10%~20%의 고통과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과 고난은 모두 2천년 예수님이 십자가 위해서 100% 모두 받아 주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셨을 때, 우리에게 특별히 고난을 허락하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 스스로가 구원을 받기 위한 고난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께로 더욱 가까이 나아가기를 원하셔서, 특별히 허락하시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욥이 고난 끝에 이처럼 놀라운 축복을 받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욥기 42장 5절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私はあなたのことを耳で聞いていました。しかし今、私の目があなたを見ました。

욥은 고난이 끝난 후에 이처럼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이와 같은 고난을 당하기 전에도 그는 의인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고난을 당한 후에 눈으로 주를 뵙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욥이 받은 큰 축복은 나중에 나오는 후손이나 재물에 대한 축복보다도 이처럼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는 축복이 진정한 축복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게 되는 축복. 이는 너무나도 큰 축복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고 합니다. 왜 빛이 났을까요. 오늘 말씀에 보면 그 이유가 명확하게 적혀 있습니다.

오늘 말씀 출애굽기 34장 29절 중반부를 봅니다.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モーセは、主と話したために自分の顔の肌が輝きを放っている

하나님과 말을 하면 광채가 났다고 하는데, 하나님과 말을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죠. 기도입니다.

우리는 모두 기도를 하지요. 그렇다면 우리 얼굴에 광채가 나십니까.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셨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 때 거울에 보니 얼굴에서 광채가 나던가요? 세수를 안 해서 기름이 번들번들 그래요? 에이, 그건 광채가 아니지요.

그렇다면 광채가 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성경대로 해석을 하면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겠지요. 모세처럼 하면 됩니다. 모세가 어떻게 했어요? 예, 하나님과 말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어? 이상하네요. 나도 기도하고 그러는데 광채가 안 나요.

그렇다면 모세는 어느 정도 하나님과 함께 있었느냐 하면 바로 위 2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34장 28절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モーセはそこに、四十日四十夜、主とともにいた。彼はパンも食べず、水も飲まなかった。そして、彼は石の板に契約のことば、十のことばを書きしるした。


자, 이제 큰일 났습니다. 얼굴에서 광채가 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대요? 예,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四十日四十夜、主とともにいた。彼はパンも食べず、水も飲まなかった。

쉽게 말해서 사십 일 동안 금식했다는 것입니다. 보통 금식하시는 분들 보면, 식사는 안 하시더라도 물은 많이 드시잖아요? 그런데 물도 안 마셨대요. 며칠 동안요? 예, 40일 동안이랍니다.

그러면 믿음이 좋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해요? 예, 오늘부터 시작하는 건 좀 힘들 테니까 오늘 좀 넉넉히 먹어놓고 내일부터 40일 동안 물 한 방울 먹지 않고 금식을 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요? 예, 얼굴에서 광채가 날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유, 믿기는 뭘 믿어요.

성경에 보면 믿음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노아부터 시작해서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엘리사, 사무엘, 다윗, 베드로, 바울 요한 등등 뭐 끝도 없지요. 그 믿음의 사람들을 닮아가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흉내를 내면 이건 곤란하지요.

그래, 모세가 40일 금식해서 얼굴에 광채가 났다니까 나도 40일 금식 한 번 해보자……이는 모세를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세 흉내, 말하자면 모세 코스플레입니다. 모세를 닮겠다고 하면서 지팡이 들고 허허벌판을 돌아다니면서 바위를 지팡이로 치고는 물이 나오라고 소리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세는 하나님과 말을 했다고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누가복음 17장 2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神の国はあなたがたのただ中)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 눈에는 하나님이 안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찾지 않아서인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7장 7절~8절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与えられます。探しなさい。そうすれば見出します。たたきなさい。そうすれば開かれます。
だれでも、求める者は受け、探す者は見出し、たたく者には開かれます。

우리는 어쩌면 이 말씀을 지금까지 오해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래,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된다. 우리한테 필요한 게 있으면 구하면 주실 것이요, 찾을 것이요, 열릴 것이다. 그래서 돈도 구하고 물질도 구하고 건강도 구하자……. 하지만 정말 구하는 대로 모두 다 받으셨습니까? 아니에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거짓말을 하신 겁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마태복음 6장 33절과 연계시켜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まず神の国と神の義を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これらのものはすべて、それに加えて与えられます。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神の国と神の義を求めなさい)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나라와 그의 의, 이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더 쉽게 말씀 드리자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 힘 쓰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왕이 되고 난 후에 일천 번제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千匹の全焼のささげ物を献げた).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셨지요.

그 때 솔로몬이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열광기상 3장 7절~9절
“7.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8.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9.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わが神、主よ。今あなたは私の父ダビデに代わって、このしもべを王とされました。しかし私は小さな子どもで、出入(でい)りする術を知りません。
そのうえ、しもべは、あなたが選んだあなたの民の中にいます。あまりにも多くて、数えることも調べることもできないほど大勢の民です。
善悪を判断してあなたの民をさばくために、聞き分ける心をしもべに与えてください。さもなければ、だれに、この大勢のあなたの民をさばく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


이 뜻이 무엇입니까. 주님, 제가 너무나 부족해서 이 백성을 다스릴 능력이 없습니다. 이런 저에게 재판할 능력을 허락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드렸던 것이지요. 지금은 대통령이나 총리가 재판을 하지는 않습니다만, 당시에는 왕의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바로 재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재판을 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그 나라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것과 같은 뜻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자신은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택하신 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도록 능력을 달라고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열왕기상 3장 11절~13절
“11.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12.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13.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神は彼に仰せられた。「あなたがこのことを願い、自分のために長寿を願わず、自分のために富を願わず、あなたの敵のいのちさえ願わず、むしろ、自分のために正しい訴えを聞き分ける判断力を願ったので、
見よ、わたしはあなたが言ったとおりにする。見よ。わたしはあなたに、知恵と判断の心を与える。あなたより前に、あなたのような者はなく、あなたの後に、あなたのような者は起こらない。
そのうえ、あなたが願わなかったもの、富と誉れもあなたに与える。あなたが生きているかぎり、王たちの中であなたに並ぶ者は一人もいない。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자, 그러면 솔로몬이 백성을 다스릴 지혜를 구했더니 이렇게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이처럼 놀라운 축복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일단 솔로몬처럼 1천 번제를 해야겠지요? 번제……그러니까 짐승을 불에 태워서 드리는 제사를 드렸다는 것인데, 여기서 말하는 1,000이라고 하는 숫자가 회수인지 아니면 1000마리라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고 합니다.

양이든 염소든 간에 집에서 1,000마리를 우리가 태울 수는 없고, 만약에 1000일 연속해서 드렸다는 것으로 한다면, 그래요. 편의상 1000일 새벽기도를 드린다고 합시다. 1000일이라고 하면 대략 2년 8개월 하고도 보름 정도 됩니다. 그 다음에는 이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야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짠~ 하고 나타나십니까. 그러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오~주님! 저에게도 이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것도 역시 솔로몬 흉내, 솔로몬 코스플레입니다.

솔로몬이 이처럼 놀라운 축복을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열왕기상 3장 10절에 적혀 있습니다.

열왕기상 3장 10절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これは主のみこころにかなった。ソロモンがこのことを願ったからである。

솔로몬이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솔로몬이 구한 그 기도가 하나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의 고집을 세우는 것이요? 그래, 하나님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한 번 해보자……이게 기도 입니까. 아닙니다.

기도는 바로 하나님 마음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도의 목적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 구할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를 알게 됩니다. 바로 그 때 구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는 마치 열쇠 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열쇠를 넣지도 않고, 아니면 열쇠를 넣었지만 돌리지도 않고 문을 열라고 아무리 해봤자 안 열립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마음도 모르는 상황에서 아무리 구하고 찾고 두드려봤자 몸만 피곤합니다. 두드리는 손만 아프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하나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면, 모세처럼 어떻게 되요? 예, 얼굴에서 광채가 납니다. 이는 바로 우리 마음에서 광채가 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빛이 나기 시작하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 주변의 물건들이 막 고장 나는 것을 보고, 아……이제 하나님께서 욥한테 주신 고난을 나한테도 주시려는구나……하고 생각했다면 저는 이제 뭘 해야 해요?

욥기 2장 8절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ヨブは土器のかけらを取り、それでからだを引っかいた。彼は灰の中に座っていた。

예, 몸을 긁을 깨진 질그릇 조각을 준비하거나, 아니면 좀 괜찮은 피부병 의료보험에 가입하던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ㅎㅎ

하지만 이렇게 하면 뭐라구요? 예, 욥 흉내내기, 욥 코스플레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지금은 안 좋은 일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믿음의 사람들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닮아감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듯, 하나님을 본 욥의 삶에서 빛이 남으로 인하여 큰 축복을 받은 것 같이, 하나님 마음을 알게 됨으로 인하여 우리 마음에도 빛이 나고, 우리 삶 속에서도 빛이 나게 되어,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놀라운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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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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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7회 창대한 축복의 시작
2019년 2월 1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욥기 8장 7절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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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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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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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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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창대한 축복의 시작” 大いなる祝福の始まり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욥기 8장 7절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あなたの始まりは小さくても、あなたの終わりは、きわめて大きなものとなる。

참 좋은 말씀이죠? 이 말씀은 욥기에 적혀 있는 말씀입니다만, 욥기를 모두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도, 아니, 성경을 잘 모르시는 분들, 예수님을 믿지 않으시는 분들도 들어본 적이 있을 수 있을 만큼 상당히 익숙한 구절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용품점 곳에 가보면 이 구절을 크게 써서 걸어놓는 것이나 액자 같이 해서 팔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참 좋은 말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살입니다.

욥기는 그 내용 중 대부분이, 아무런 이유 없이 어려움을 겪는 욥에 대해, 그의 어려운 상황을 듣고 위로해준답시고 온 세 명의 친구들이 결국은 위로는커녕 그를 맹비난 하는 말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욥기 8장에 있는 내용인데 한 번 볼까요?


우선 욥기 8장 1절~6절까지를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1.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3.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4.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5.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6.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次に、シュアハ人ビルダデが答えた。
いつまで、あなたはこのようなことを語るのか。あなたが口にすることばは激しい風だ。
神がさばきを曲げられるだろうか。全能者が義を曲げられるだろうか。
もし、あなたの子らが神の前に罪ある者となり、神が彼らをその背きの手に渡されても、
もし、あなたが熱心に神に求め、全能者にあわれみを乞うなら、
もし、あなたが純粋で真っ直ぐなら、今すぐ神はあなたのために奮い立ち、あなたの義の住まいを回復されるだろう。


그리고 이 다음에 오늘 말씀인

7.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あなたの始まりは小さくても、あなたの終わりは、きわめて大きなものとなる。

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선 6절까지의 내용을 정리해보도록 하면 이런 것이지요.

조금 길지만 일단 욥기 1장 13절~19절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13.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14.사환이 욥에게 와서 아뢰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15.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6.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양과 종들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7.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갈대아 사람이 세 무리를 지어 갑자기 낙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8.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들의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는데
19.거친 들에서 큰 바람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청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한지라”


ある日、彼の息子、娘たちが、一番上の兄の家で食べたりぶどう酒を飲んだりしていたとき、
一人の使者がヨブのところにやって来て言った。「牛が耕し、そのそばでろばが草を食べていると、
シェバ人が襲いかかってこれを奪い取り、若い者たちを剣(つるぎ)の刃で打ち殺しました。私一人だけが逃れて、あなたに知らせに参りました。」
この者がまだ話している間に、もう一人が来て言った。「神の火が天から下って、羊と若い者たちを焼き滅ぼしました。私一人だけが逃れて、あなたに知らせに参りました。」
この者がまだ話している間に、もう一人が来て言った。「カルデア人が三組になって、らくだを襲い、これを奪い取り、若い者たちを剣の刃で打ち殺しました。私一人だけが逃れて、あなたに知らせに参りました。」
この者がまだ話している間に、もう一人が来て言った。「あなたのご子息やお嬢さんたちは、一番上のお兄さんの家で食べたりぶどう酒を飲んだりしておられました。
そこへ荒野の方から大風が吹いて来て、家の四隅を打ち、それがお若い方々の上に倒れたので、皆様亡くなられました。私一人だけが逃れて、あなたに知らせに参りました。」

이 말씀을 보면 내용은 길지만 사실 정신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크게 나누어 네 가지 재앙들이 있는데, 이를 보면 우리의 인생 중에서 하나만 일어나도 크나큰 비극이 아닐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엄청난 재앙들이 네 개나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재앙에서는 큰 바람이 와서 건물을 쳤는데 그게 무너지는 바람에 자녀들이 몰사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하지만 이렇게 된 원인에 대해서 이 수아 사람 빌닷이 말하기를, 당신의 자녀들이 죽은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다. 하나님은 언제나 공의롭지 않으시냐. 네 자녀들이 괜히 죽은 것이겠는가. 분명히 지은 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네가 회개하고 그러면 지금은 이렇게 모든 것을 잃어서 미약하지만 나중에는 크게 축복해주실 것이다……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맞는 지적인가요?

욥기 1장 1절에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ウツの地に、その名をヨブという人がいた。この人は誠実で直ぐな心を持ち、神を恐れて悪から遠ざかっていた。

욥기 1장 5절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宴会の日が一巡すると、ヨブは彼らを呼び寄せて聖別した。朝早く起きて、彼ら一人ひとりのために、それぞれの全焼のささげ物を献げたのである。ヨブは、「もしかすると、息子たちが罪に陥って、心の中で神を呪ったかもしれない」と思ったからである。ヨブはいつもこのようにしていた。

이와 같은 욥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욥기 1장 8절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主はサタンに言われた。「おまえは、わたしのしもべヨブに心を留めたか。彼のように、誠実で直ぐな心を持ち、神を恐れて悪から遠ざかっている者は、地上には一人もいない。」

보십시오. 그리고 그의 아들이 하나님 앞에서 죽을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를 데려가신 것이라고 욥의 친구 비닷은 말하지만, 그의 주장은 전혀 근거 없는 말입니다. 완전히 잘못된 지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이런 욥기 8장 7절 같은 구절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걸어놓는 것은 너무나도 무지한 일이다. 아무런 근거 없이 욥을 비난한 말이 아니냐.

이렇게 말을 했다는 글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사실 성경 말씀을 인용할 때에는 조심해야지요. 무작정 성경에 적힌 말이라고 해서 이를 하나님의 말씀이라면서 믿으라고 한다면 이는 안 됩니다. 최소한 전후맥락은 이해하고 인용을 해야겠지요.

하지만, 그렇다면 이 말씀을 걸어놓는 것은 잘못된 일인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잘 아는 요한 3서 2절 말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愛する者よ。あなたのたましいが幸いを得ているように、あなたがすべての点で幸いを得、また健康であるように祈ります。


이 문구는 요한이 편지를 쓸 때 맨 처음에 안부인사를 쓴 것일 뿐이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하자면, 글쎄요. 요즘 잘 지내십니까. 안녕하십니까……회사 공문으로 본다면, “귀사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라는, 그저 형식적인 문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구절의 전후맥락을 살펴본다면 이는 어디까지나 “안부인사”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셨냐 하면, 아, 그렇구나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아서 우리의 영혼은 잘 되지만, 우리가 죽고 난 다음에 잘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도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주님께서 원하시고 계시구나……하고 이해한 것입니다.

그렇게 받아들이신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님이셨던 것이지요. 그 결과 그 분은 현재 70만이 넘는 세계 최대의 교회를 세우게 되셨습니다.

만약에 이 말씀을 그저 안부인사 만으로만 받아들이셨다면 그와 같은 어마어마한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즉, 비록 오늘 말씀은 아무런 잘못 없는 욥한테, 그의 친구가 아무런 근거 없이 비난하는 말이긴 합니다만, 그 내용에 숨겨진 뜻, 지금 우리는 미약한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심히 창대하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이는 우리 안에서 엄청난 큰 축복으로 다가오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俵万智 1987년 サラダ記念日 3000부, 280만부


1992년 4월 11일, 한국 텔레비전의 어떤 음악 방송에 한 가수 그룹이 등장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때는 그들이 처음으로 방송에 등장한 날이었습니다.

이 곡을 들은 네 명의 심사위원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먼저 첫 번째 분, “리듬은 좋은데 멜로디 라인이 약하다. 다른 곳에 비해 멜로디 라인 쪽은 신경을 좀 안 쓴 것 같다.”

두 번째 심사위원, “자신은 노래를 들을 때 습관적으로 노랫말부터 듣게 되는데, 이 때 생각하는 것이, 첫째로, 올바른 문장으로 되어 있는가, 둘째로 새로운 이야기인가 하는 점인데, 이 노래는 새로운 형식이긴 한데, 내용까지 새로움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새로운 형식의 노래이긴 한데 내용은 좀 새로움이 없다는 평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심사위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욕적인데, 동작 속에 노래가 좀 묻힌 것 같은 아쉬움이 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심사위원은 그래도 그나마 좀 나았습니다. “새로운 형식인데, 평가는 우리가 아니라 시청자들이 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하면서 점수를 주는데, 네 명의 심사위원들이 준 점수가 8점이 3명, 7점이 1명, 평균점수 7.8점이었다고 하는데, 이게 역대 가장 낮은 점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혹평, 정말 낮은 평가를 받은 그룹이 누구였냐 하면,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불렀던 곡이 “난 알아요”였죠.

워낙 유명한 동영상이니 어쩌면 이미 보신 분들도 많으실 것입니다.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 가요계는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적어도 80년대 생 이전의 세대라고 한다면 이 서태지와 아이들이 한국 가요계 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받은 상이나 음반 판매수 같은 숫자를 논한다는 거의 무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이 역대 신기록을 수립했을 뿐만 아니라, 1994년 대한민국 학계와 언론계가 뽑은 〈광복 50년 한국을 바꾼 100인〉에 가수로서는 최초로 선정되기도 했을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어떻게 됐냐 하면 서태지는 역사적인 스타가 된 반면, 그 네 명의 심사위원 중 특별히 혹평을 했던 심사위원들은 온데 간데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있어서 가장 상처를 받을 때는,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라고 합니다. 나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나도 노력하고 있는데,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고 인정해주지 않아요. 다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요. 이럴 때 사람들은 참 힘들어하고 외롭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 그렇게 가치가 없는 존재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치를 어느 정도로 여기고 계실까요.


요한계시록 5장 9절~10절을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 9절~10절
“9.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彼らは新しい歌を歌った。「あなたは、巻物を受け取り、封印を解くのにふさわしい方です。あなたは屠られて、すべての部族、言語、民族、国民の中から、あなたの血によって人々を神のために贖い、
私たちの神のために、彼らを王国とし、祭司とされました。彼らは地を治めるのです。」

예수님은 우리를 피로 사셨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의 피로 그 대가를 지불하셨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어떤 물건을 예를 들어서 1000원에 샀다고 하면, 그 물건은 1000원의 가치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100만원을 주고 샀다면 그 물건은 100만원과 동일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가치는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그 비용으로 지불하신 것이 예수님의 피라고 하는데 이는 결국 우리의 가치가 다름 아닌 예수님의 피와 똑같은 가치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피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신명기 12장 23절에서 피는 생명(血はいのち)이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피는 예수님의 생명 그 자체인 것입니다.

즉 우리의 가치는 어느 정도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를 예수님의 생명처럼 여기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말씀입니까.

이는 그냥 상징적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0장 11절~15절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1절~15절
“11.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わたしは良い牧者(ぼくしゃ)です。良い牧者は羊たちのためにいのちを捨てます。
牧者でない雇い人(にん)は、羊たちが自分のものではないので、狼が来るのを見ると、置き去りにして逃げてしまいます。それで、狼は羊たちを奪ったり散らしたりします。
彼は雇い人で、羊たちのことを心にかけていないからです。
わたしは良い牧者です。わたしはわたしのものを知っており、わたしのものは、わたしを知っています。
ちょうど、父がわたしを知っておられ、わたしが父を知っているのと同じです。また、わたしは羊たちのために自分のいのちを捨てます。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삯꾼과 선한 목자를 비유하고 계십니다. 똑같이 양을 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리가 양들을 공격해 왔을 때 삯꾼은 도망가지만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삯꾼 雇い人(にん), 그러니까 요즘 말로 하자면 월급쟁이 사장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예를 들어서 공장에 불이 났어요. 그러면 월급쟁이 사장은 어떻게 합니까. 어차피 월급쟁이잖아요. 거기 공장에 있는 건 자기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어쩌면 내 목숨 하나 살기 위해서 도망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사장은 어떻습니까.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건지려고 끝까지 노력하겠지요. 만에 하나 그 안에 사람이라도 남아 있는다면 끝까지 살려내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예전에 2014년에 일어났던 세월호 침몰 사고에서 학생들은 그 안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자기만 먼저 살아보겠다고 나오는 선장을 보십시오. 이게 말하자면 삯꾼이지요. 하지만 그 아이들을 데리고 온 선생님들은 어땠습니까.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더 살려보겠다고 끝까지 사투를 벌이다가 결국 자신은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 선생님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많은 분들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한 목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스스로를 십자가 위에 매다셨습니다.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의 목숨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토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공격해온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실 것입니다. 왜요?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바치셨을 정도로 우리를 너무나도 아끼고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살다 보면 외로우신가요? 불안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불안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바로 앞이 안 보이기 때문에 불안한 거죠. 정말 내가 가고 있는 길,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맞는 것일까. 어쩌면 길을 잘못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불안한 것 아니겠습니까.

마태복음을 잠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입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天の御国は畑に隠された宝のようなものです。その宝を見つけた人は、それをそのまま隠しておきます。そして喜びのあまり、行って、持っている物すべてを売り払い、その畑を買います。

이 말씀을 잠시 묵상해보았더니 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사람이 밭에 감추어져 있는 보화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숨겨두고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샀다고 하는데, 이 사람이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샀다고 한다면, 그 보화는 그 사람이 그 때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를 다 합한 것 보다 더 값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여기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이 사람은 어떻게 해서 그 보화를 발견할 수 있었을까요. 뭐, 여러 이유를 상상해볼 수는 있겠습니다만, 가장 확실한 이유, 이 사람이 그 보화, 값진 보화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사람 이전에 다른 사람이 그 보화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그 사람 이전에 왜 다른 사람이 그 값진 보화를 발견할 수 없었을까요. 그것은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거기에 그와 같은 값진 보화가 감추어져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잖아요? 그 사람보다 다른 사람들이 먼저 발견했더라면 그 사람은 그 보화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무도 거기에 있는 보화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그 값진 보화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처음에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천국은 마치 감추인 보화와 같다”(天の御国は畑に隠された宝のようなもの)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주님을 믿으면서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이 정말 천국에 가는 길이라고, 이 땅에서도 창대한 축복을 받는 길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나만 이 길을 가요. 그래서 외롭게 느껴질 지도 모릅니다. 불안해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으로 가는 보화를 얻는 길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 군마도 마찬가지지요. 선교사들의 무덤이라고 하는 일본선교. 그래도 그나마 좀 하려면 동경이나 좀 큰 도시로 가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 군마현, 그것도 군마 중에서 오지에 가까운 시부카와에 우리를 데려다 놓으셨는데……이게 맞는 길인지 아닌지 참 저도 불안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신다고요? 예, 우리가 가는 이 길이 바로 값진 보화를 얻는 길, 창대한 축복을 받는 길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이건 저한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 속에서 외로울 때, 불안할 때, 주변 사람들이 아무도 나를 안 알아줄 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아, 지금 나는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것이다.
아, 지금 주님께서 인도해주신다.
아,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
지금은 미약하더라도 마침내 창대하게 해 주실 것이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앞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첫 텔레비전 출연을 했을 때의 동영상이 지금도 유튜브 동영상 사이트에 올라와 있습니다만, 거기 댓글 중에 인상적인 글이 있었습니다.

전설의 시작임을 왜 그대들은 몰랐는가

이는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을 보고 혹평을 했던 심사위원들한테 한 말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텔레비전에 처음 등장했을 바로 그 날은 전설의 시작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전설의 시작,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는 축복의 시작 시점에 서 이는지도 모릅니다.

불안하십니까.
불안해하지 맙시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두려우십니까.
두려워 하지 맙시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이 지켜주십니다.

초조하십니까.
초조해 하지 맙시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이 창대하게 해주십니다.


지금은 불안하고 두렵고 초초하고 미약한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의심을 물리치고 주님을 의지할 때에, 주님과 동행할 때에, 마침내 욥이 받은 축복의 축복을 받는, 끝내는 우리를 심히 창대하게 하시는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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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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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6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2019년 2월 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イエス様を信じるということ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아멘?
아멘이세요? 자,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이렇게 질문을 하면 좀 어려우시다면 조금 다르게 물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보고 “아, 저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구나” 라고 하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볼 수 이을까요?

매주 교회에 다니는 것을 보면 알아요?
술 담배 안 하는 것이요?
식사하기 전에 기도하는 것을 보면, 아, 저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나요?

자, 그렇다면 반대로 물어보겠습니다.

매주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닌가요?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에요?
식사하기 전에 기도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닌가요?

여기에 대한 기준은 어쩌면 사람마다 제 각각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우리의 믿음은 성경에서 시작해서 성경으로 끝나는데 왜 이렇게 사람마다 다를까요.

그것은 뭐 성경의 해석차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물론 성경에 있어서의 견해나 해석 차이는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신학자들 사이에도 있습니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는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자기 주장을 하는 사람들, 그것도 아주 강력하게 자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신앙적으로 보았을 때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당연히 중요하지요.

그래서 믿음에 열성이 있는 분들을 보면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기도를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기도원도 많아요. 저도 한국에 있을 때 기도원에 가보기도 했습니다만, 정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밤새도록 기도를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또다시 질문을 드립니다. 간단하게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기도를 왜 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그야 당연히 응답을 받기 위해서 하지……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럼 둘째로. 기도를 오래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한 번 기도할 때 몇 시간이나 오랫동안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기도제목을 갖고 며칠 동안이나 기도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렇다면 기도를 그처럼 오래 하실까요.

이에 대한 답변도 단순합니다. 응답을 빨리 안 해주니까 그러는 거죠……라고 하시죠.

그러면서 성경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다니엘 10장 13절에 보면 다니엘이 기도를 한지 21일 만에 응답을 받았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보면 다니엘 기도회라고 해서 21일 동안 기도를 하는 집회가 열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질문입니다. 가끔 보면 큰 소리로 기도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큰 소리로 기도를 하는지 물어보면 이 또한 성경을 인용하십니다.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 (エレミヤ書)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わたしを呼べ。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に答え、あなたが知らない理解を超えた大いなることを、あなたに告げよう。』

그래서 기도를 큰 소리로 외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질문. 가끔 보면 방언으로 기도를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섬기던 교회에서도 보면 여기저기서 방언 소리가 크게 들려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방언으로 기도를 하시냐고 물으면 역시 성경을 인용해서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同じように御霊も、弱い私たちを助けてくださいます。私たちは、何をどう祈ったらよいか分からないのですが、御霊 ご自身が、ことばにならないうめきをもって、とりなしてくださるのです。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무엇을 기도 드려야 할지 몰라도 성령님께서 기도를 드린다는 거예요. 그래서 방언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질문과 그 답변.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두 수긍이 가시나요? 납득이 가시나요? 수긍이 가거나 납득이 가지 않더라도 최소한 이런 말씀들은 교회에 어느 정도 다녀보신 분들이라면 익숙한 말씀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첫번째 질문. 기도를 왜 하는가……이 부분에 대해서는 마지막에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째 질문. 기도를 왜 오래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빨리 응답을 안 해주시기 때문에 오래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는 기도를 오래 한다고 하면서 오래 하는 방법을 책으로 출판하신 분들도 계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또 누구는 기도를 몇 시간 한다, 자기는 몇 시간 하는 말씀도 들어보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6장 7절~8절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また、祈るとき、異邦人のように、同じことばをただ繰り返してはいけません。彼らは、ことば数が多いことで聞かれると思っているのです。
ですから、彼らと同じようにし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がたの父は、あなたがたが求める前から、あなたがたに必要なものを知っておられるのです。

예수님께서는 오랫동안 기도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기 또 하는 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것은 이방인들이나 하는 기도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세요.


그리고 세 번째 질문. 큰 소리로 기도를 해야 할 필요가 있나요?

이사야 59장 1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見よ。主の手が短くて救えないのではない。その耳が遠くて聞こえないのではない。

우리가 무슨 그림에 보면 하나님 얼굴이 수염도 나고 머리도 하얗고 하니까 노인이라서 귀가 잘 안 들리실까봐 큰 소리로 기도해야 하는 건가요? 성경에서 하나님은 도움의 손이 짧지도 않고 귀가 둔하지도 않다고 기록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어느 작은 교회에 다닐 때의 일인데, 거기서 찬양을 인도하는 자매가 있는데 매주 보면 목이 쉬어 있어요. 그러니 찬양이 제대로 될 리가 있겠어요? 고음은 고사하고 보통 음도 소리가 잘 안 나옵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목이 쉬어있냐고 하니까, 아~ 매일 밤 주님께 부르짖어보래요.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나……그러면서 마치 자신은 무슨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처럼 말을 하는 모습을 보고 참 안타까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니, 그래도 찬양을 한다는 사람이 자기 목소리 하나 관리 못해서 되겠습니까? 그러면서 그게 믿음이 좋다는 것인가요? 참으로 딱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요.

다음은 네 번째 질문. 방언으로 기도를 하시는 분들을 보면, 물론 이는 성경에 나옵니다. 사도 바울도 방언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8절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라고 고백합니다.

私は、あなたがたのだれよりも多くの異言で語っていることを、神に感謝しています。

그 뿐만 아닙니다.

같은 고린도전서 14장 39절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라고 까지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ですから、私の兄弟たち、預言することを熱心に求めなさい。また、異言で語ることを禁じてはいけません。

방언은 엄연히 성경에 기록된 은사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 교회를 보면 여기저기서 큰 소리로 방언을 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앞서 말씀 드렸던 기도원에서도 얼마나 많은 분들이, 그것도 한밤중에도 큰 소리로 방언기도를 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특별히 방언에 대해서 많이 적힌 고린도전서 14장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있습니다.

14장 13절~14절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そういうわけで、異言で語る人は、それを解き明かすことができるように祈りなさい。
もし私が異言で祈るなら、私の霊は祈りますが、私の知性は実を結びません。


이 말씀을 보면 바울은 방언을 하는 것도 좋지만 그 방언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는 통역의 능력도 달라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방언으로만 기도 하고 그 뜻을 모른다면 마음에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 (知性は実を結びません), 즉 유익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14장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절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愛を追い求めなさい。また、御霊の賜物、特に預言することを熱心に求めなさい。

14장 5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私は、あなたがたがみな異言で語ることを願いますが、それ以上に願うのは、あなたがたが預言することです。異言 で語る人がその解き明かしをして教会の成長に役立つのでないかぎり、預言する人のほうがまさっています。

방언만을 구하지 말고 오히려 예언하기를 구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교회에 몇 십 년을 다니면서 방언을 한다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이 봐왔습니다만, 방언을 통역한다는 분은, 그런 분들이 계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만, 아직 제가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습니다.

참고로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인터넷에 방언이나 방언을 통역한다는 은사를 흔히들 “통변의 은사”라고 하는데, 이를 검색해 보니까, 쪼금 요상한 사이트들이 많이 떠서 금방 닫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언을 한다”고 하는 분들은 특히나 만나본 적도 없고, 자기는 방언 통역이나 예언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는 사람들 역시 본 적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3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ですから、教会全体が一緒に集まって、皆が異言で語るなら、初心の人か信じていない人が入って来 たとき、あなたがたは気が変になっていると言われることにならないでしょうか。(気が狂っていると言わないでしょうか。)

14장 28절~29절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解き明かす者がいなければ、教会では黙っていて、自分に対し、また神に対して語りなさい。
預言する者たちも、二人か三人が語り、ほかの者たちはそれを吟味しなさい。

성경에는 분명히 이렇게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즘도 한국 교회에 보면 여기저기서 큰 소리로 막 방언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9절을 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同じようにあなたがたも、舌で明瞭なことばを語らなければ、話していることをどうして分かってもらえるでしょうか。空気に向かって話していることになります。

그리고 14장 19절
“그러나 교회에서 내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しかし教会では、異言で一万のことばを語るよりむしろ、ほかの人たちにも教えるために、私の知性で五つのことばを語りたいと思います。

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끔 보면 교회나 사람에 따라서는 방언 은사를 중요시하는 나머지 방언 은사가 없는 사람은 믿음이 적은 사람으로 보는 경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글쎄요. 제가 방언을 해본적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방언기도를 한다면서 다들 보면 “까라바리야 사라바리야 까라바리야 사라바리야” 하고 반복하거나 “렐렐렐렐렐……”하고 하는 모습을 보면 글쎄, 저게 정말 방언인가 하는 생각도 들기도 합니다.

성경 말씀대로 저도 방언을 금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방언 기도를 하신다면 먼저 성경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를 보시고 성경에 적힌 그대로 하셔야지만 은혜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첫 번째 질문입니다. 기도를 하는 이유는 응답을 받기 위해서입니까. 마침 요즘은 일본의 수능시즌인데, 만약에 예수님을 믿는 100명의 수험생이 1지망에 합격하게 해달라고 모두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누구는 합격을 했는데 누구는 합격이 안됐습니다.

그렇다면 합격할 수 없었던 사람은 기도를 헛한 건가요? 기도에 있어서 패배자인가요?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니, 그렇잖아요. 기도는 응답을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면, 합격할 수 없었다는 것은 응답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니 결국 기도의 실패자라는 뜻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입니까.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나는 것입니까.

여러분. 목사님 설교 말씀 몇 마디 듣고, 성경 구절 몇 마디 외우고, 그것이 믿음이라 생각하고, 나중에는 그저 죽어라고 기도만 하는 것. 이것이 믿음인가요?

저는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무엇이 빠졌습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이 빠졌습니다. 말씀이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자기가 드리는 기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어떻게 올바른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는 우리의 고집을 세우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고집을 이기기 위해서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에 술 담 배 안 하면서 사람한테 상처 입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금식 철야 한다면서 자기만 생각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이 어떻게 올바른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すべて疲れた人、重荷を負っている人はわたしのもとに来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休ませてあげます。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쉬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 속에서 쉼을 얻지 못했다면 이는 우리의 믿음을 한 번 점검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 응답, 소원 성취가 문제가 아닙니다. 기도를 하는데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철야를 합니다. 그래도 안 되니까 금식을 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어떻게 해요? 예,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이 살았다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한탄을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께서 최근에 장난감 가게에 가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저도 얼마 전에 우연히 지나가다가 장난감 가게에 한 번 들어가봤습니다만, 그러면 꼭 들려오는 소리가 뭐예요? 예, 가끔 보면 애들 울음 소리가 들려옵니다. 장난감을 사달라고 막 울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가 사달라는 것을 다 사주나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예요? 아니에요. 아이를 사랑합니다. 오히려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때로는 그렇게 아이가 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들어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그 부모를 원망해야 하나요? 엄마 아빠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안 사준다고 믿어야 하나요? 아닙니다. 그건 오히려 잘못된 생각이죠.

이를 모르는 어른들이 있어요? 아니요. 없습니다. 알죠. 그러면서 왜 자기는 하나님한테는 그렇게 고집을 부리십니까. 그리고 안 들어주면 왜 억지를 부리고 하나님을 원망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 안에서 쉼을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 생각에는 이게 이렇게 되어야 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이건 이렇게 되어야 하고, 저건 저렇게 되어야 해……이건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이 되겠다는 말이나 다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 생각을 따르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 대로 하나님이 움직여야 한다고 믿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얼마 전에 뉴스를 보니까 결혼생활이 힘들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 보면요. 회사 일이 너무나도 힘들어서 또 역시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참 안타깝죠. 그리고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결혼생활이 힘들면 좀 별거를 해본다거나, 그것도 안 되면 차라리 헤어지지.

회사? 아무리 좋은 회사, 아무리 힘들게 들어간 회사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힘들면 좀 쉬던가, 아니면 차라리 그만 두면 되지, 왜 그렇게 슬픈 결말을 맞이해야만 했을까.

사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보면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생각이 모자라서도 아닙니다. 오히려 좀 생각이 모자라거나, 생활 자체에 있어서도 좀 대충대충 하고 그런 사람들은 이런 경우가 드물어요. 반대로 정말 착실하고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사람들이 이런 안타까운 일들을 당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제가 좀 심하게 말씀 드렸는지 모르지만요, 솔직히 이런 고민을 하는 분들을 보면요, 그냥 대충대충 믿는 사람들은 이런 고민들도 안 해요. 믿음이 참 좋은 분들, 주님을 어떻게든 잘 믿어보려고 애를 쓰는 분들이 철야도 하고 새벽기도도 하고, 기도원에 가보기도 하고 금식도 하기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안 되니까 답답해하고 절망도 하고,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一人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요한일서 4장 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私たちは自分たちに対する神の愛を知り、また信じています。神は愛です。愛のうちにとどまる人は神のうちにとどまり、神もその人のうちにとどまっておられます。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냥 말로만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무참하게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나도 명확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쉼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우리는 잘 됩니다. 지금 잘 안 되더라도 결국은 잘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해주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61장 3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シオンの嘆き悲しむ者たちに、灰の代わりに頭の飾りを、嘆きの代わりに喜 びの油を、憂いの心の代わりに賛美の外套を着けさせるために。彼らは、義の樫(かし)の木、栄光を現す、主の植木と呼ばれる。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초조해하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찬송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생이 힘 드십니까. 고달프십니까. 정말 죽고 싶으십니까.

그 마음, 그 힘든 마음. 설령 아무도 못 알아준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항상 기다리고 계십니다. 힘 드시면 성경을 펴 보십시오. 두 눈을 감고 주님께 기도를 드려보십시오. 주님께서 주님의 마음을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피멍 든 가슴을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바로 주님 안에서 쉼을 얻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항상 불안해하고 항상 초조해한다면 이는 우리 믿음에 분명히 문제가 있다는 신호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우리는 결국은 잘 됩니다. 지금은 힘들고 어렵더라도 결국은 잘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 안에서 진정한 쉼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사랑의 하나님, 사랑의 예수님, 그리고 사랑의 성령님을 믿고 의지하며, 사랑의 주님 품 안에서 진정한 쉼을 얻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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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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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5회 꾸짖으신 예수님
2019년 1월 2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4장 35절~41절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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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꾸짖으신 예수님” 叱りつけたイエス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은 배에 타서 건너고 있는데 갑자기 큰 광풍이 불어왔다고 합니다. 지금처럼 무슨 튼튼한 배도 아니고 그냥 나룻배나 고기잡이 배였을 텐데 물 위에서 광풍이 부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배는 위아래로 오르락 내리락 합니다. 오른쪽 왼쪽으로 심하게 흔들려요. 그리고 무슨 지붕이 있는 배도 아니었을 것이기에 물들이 배 안으로 넘쳐옵니다.

그들 중에는 베드로를 비롯해서 요한이나 야고보처럼 오랫동안 고기잡이를 해왔던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배 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에요. 그러니 자신들의 자존심도 있겠지요. 그래서 그 때까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지식이나 경험으로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거 난리 났다고 하면서 뒤를 봤더니만, 뭐가 보여요? 예, 저 뒤편에서 예수님이 누워서 주무시고 계세요. 그 때 그 사람들의 심경이 어땠겠습니까.

아니, 지금 제정신이야, 뭐야. 자기가 선생이면 다야?
배를 좀 어떻게라도 해보려면 사람 손이 아쉬운 마당에 뒤에서 자고 있으면 어떡해?
이런 상황에서 잠이 와?

입으로 말이야 안 했겠지만 이렇게 다급한 상황에서 그런 생각이 안 들었겠습니까.

그래서 제자들이 뭐라고 했대요?


오늘 말씀 중 38절 후반부를 봅니다.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弟子たちはイエスを起こして、「先生。私たちが死んでも、かまわないのですか」と言った。

차마 심한 말은 못하고, 선생님, 우리가 이렇게 죽게 됐는데 그냥 그렇게 주무시고 계실 겁니까. 좀 어떻게 해보세요……라고 한 것이지요.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음 구절을 봅니다. 39절입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イエスは起き上がって風を叱りつけ、湖に「黙れ、静まれ」と言われた。すると風はやみ、すっかり凪になった。

예수님께서는 그제서야 깨어나시더니 바람과 바다를 향해 <잠잠하라 고요하라 黙れ、静まれ>라고 하셨더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해졌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오는 표현이 흥미롭습니다. <바람과 바다에게 명하여>라고 해도 될 것도 같은데 굳이 <꾸짖었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래요. 뭐 이를 두고 글을 쓴 마가의 문학적 표현이라고 하면 그럴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같은 장면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등장합니다.


먼저 마태복음부터 보도록 하시겠습니다. 마태복음 8장 26절 후반부입니다.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それから起き上がり、風と湖を叱りつけられた。すると、すっかり凪になった。

누가복음도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8장 24절 후반부입니다.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イエスは起き上がり、風と荒波を叱りつけられた。すると静まり、凪になった。

이렇게 보면 오늘 말씀을 적은 마가만이 아니라 마태와 누가도 역시 <꾸짖었다>는 표현을 똑같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큰 소리로 명하셨다……도 아닌 세 사람이 하나같이 <꾸짖었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두고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절묘한 것 같습니다.

복음서의 기록을 두고 신학자들 사이에는 정말 그들이 직접 보고 쓴 것인지, 아니면 누가 쓴 것을 보고 편집을 한 것인지 아직 다툼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런 어려운 논쟁들을 제쳐두고 단순히 생각해 본다면, 적어도 이 세 사람이 보기에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는 것처럼 보였다고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가 보통 꾸짖었다고 한다면 상대방은 무슨 잘못이 있는 경우이겠지요. 물론 우리들은 모두 완벽하지 않은 사람인지라, 사람이 아무리 상대방을 꾸짖었다 하더라도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에 잘못이 있는지는 따져봐야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친히 꾸짖었다고 하셨으니 이는 100프로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우리는 봐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상대방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분명 바람과 바다입니다. 바람과 바다가 잘못을 했으니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신 것이라고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다만, 자, 그렇다면 바람과 바다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 꾸짖으셨을까요. 오늘은 이 예수님의 꾸짖음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첫 번째로 바람과 바다의 잘못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이 좀 이상하긴 합니다만 일단 이해하고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바람과 바다가 잘못을 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들이 잘못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큰 돌풍과 파도 때문에 예수님께서 타신 배가 앞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즉, 돌풍과 파도는 결국 예수님의 앞길을 막았던 것이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옛날에 임금님이 가마를 타고 행차를 하는데 그 앞길을 막는다고 하면 살아 남겠습니까?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임금님도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가시고자 하는 그 앞길을 막는다고 하니, 제아무리 바람이나 바다다 할지라도 혼이 안 날 수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혼이 나야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뭐,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만, 제가 지금 하는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린다 하더라도 이해해주시고 잠시만 더 들어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 앞길을 막아 섰던 바람과 바다를 향해 꾸짖으셨습니다. 그 결과 바람은 고요해지고 바다도 잔잔해졌습니다. 그럼 이제 모두 해결된 건가요? 아닙니다.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시간을 조금 앞으로 되돌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큰 돌풍이 불어봅니다. 심하게 파도가 휘몰아칩니다. 온 천지가 흔들립니다. 배도 겉잡을 수 없이 흔들립니다. 하지만 흔들린 것은 그 뿐이었나요? 아니에요. 그 외에도 흔들리고 있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같이 타고 있던 제자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증거는 바로 그들의 말이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25절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弟子たちは近寄ってイエスを起こして、「主よ、助けてください。私たちは死んでしまいます」と言った。

마가복음 4장 38절 후반부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弟子たちはイエスを起こして、「先生。私たちが死んでも、かまわないのですか」と言った。

누가복음 8장 24절 전반부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そこで弟子たちは近寄ってイエスを起こし、「先生、先生、私たちは死んでしまいます」と言った。

제자들은 오늘 일을 겪기 전에 그 때까지 예수님의 설교도 많이 들었습니다. 기적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과 한 배를 타고 있음에도 그들은 하나 같이 지금 자기들이 죽게 되었다고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보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던 것, 좌로 흔들 우로 흔들 하고 있던 것은 그들이 타고 있던 배만이 아니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바로 그들의 믿음 또한 폭풍 위에 떠 있는 배처럼, 아니 그보다도 더욱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앞서서 바람과 바다가 잘못했다고 했습니다만, 사실 바람이나 바다가 잘못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바람은 단지 불었을 뿐이고, 그렇기 때문에 바다는 출렁거렸을 뿐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배도 흔들렸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서 무엇이 드러나게 되었냐 하면, 예수님과 같은 배에 타고 있던 제자들이 아직도 얼마나 믿음이 부족했는가 하는 것이 여실히 탄로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보면 모두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8장 26절 전반부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イエスは言われた。「どうして怖がるのか、信仰の薄い者たち。」……

오늘 말씀 중 마가복음 4장 40절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どうして怖がるのですか。まだ信仰がないのですか。」

누가복음 8장 25절 전반부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イエスは彼らに対して、「あなたがたの信仰はどこにあるのですか」と言われた。

사실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대상은 바람과 바다가 아닌 아직도 여전히 작은 믿음만 가지고 있던 제자들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렇게 함께 있어주고 그렇게 많이 보여주고 그렇게 많이 들려주었는데도, 아직도 믿음이 그것 밖에 안 되느냐 하시면서 제자들을 꾸짖으셨던 것입니다.

병원에서 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때 보면, 물론 작은 건 그냥 한다 하더라도 좀 큰 치료를 하거나 아니면 수술을 할 때 환자를 보통 마취를 하지요? 그렇다면 마취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죠. 물론 환자가 통증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만, 더욱 큰 이유는 환자가 움직이지 못하게, 난리 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술을 해야 하는데 환자가 아프다고 난리를 치고 도망가고 하면 어떻게 치료를 하겠습니까. 그래서 움직이지 못하고 꼼짝 못하도록 특별히 전신마취를 하는 것이지요.

출애굽 당시의 유대인들을 보면 어떻습니까. 애굽을 빠져 나왔을 때에 그들은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이제 몇 백 년에 걸친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서는 애굽 정예부대가 추격해봅니다.

출애굽기 14장 11절~12절
“11.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そしてモーセに言った。「エジプトに墓がないからといって、荒野で死なせるために、あなたはわれわれを連れて来たのか。われわれをエジプトから連 れ出したりして、いったい何ということをしてくれたのだ。
エジプトであなたに『われわれのことにはかまわないで、エジプトに仕えさせてくれ』と言ったではないか。実際、この荒野で死ぬよりは、エジプトに仕えるほうがよかったのだ。」


그러자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시지요.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 민족을 모두 건너게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추격해오던 애굽 군대를 모두 홍해 바다에 잠겨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출애굽기 15장 1절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そのとき、モーセとイスラエルの子らは、主に向かってこの歌を歌った。彼らはこう言った。「主に向かって私は歌おう。主はご威光を極みまで現され、馬と乗り手を海の中に投げ込まれた。

이제 언제 그랬냐는 듯이 (手のひらを返したように)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감사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같은 15장 22절~24절을 봅니다.

“22.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モーセはイスラエルを葦の海から旅立たせた。彼らはシュルの荒野へ出て行き、三日間、荒野を歩いた。しかし、彼らには水が見つからなかった。
彼らはマラに来たが、マラの水は苦くて飲めなかった。それで、そこはマラという名で呼ばれた。
民はモーセに向かって「われわれは何を飲んだらよいのか」と不平を言った。


아니, 얼마나 지났다고 또 모세를 원망합니까. 그 놀라운 기적을 직접 보고도 벌써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원망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들의 원망은 계속됩니다.

출애굽기 16장 2절~3절
“2.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そのとき、イスラエルの全会衆は、この荒野でモーセとアロンに向かって不平を言った。
イスラエルの子らは彼らに言った。「エジプトの地で、肉鍋のそばに座り、パンを満ち足りるまで食べていたときに、われわれは主の手にかかって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のだ。事実、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をこの荒野に導き出し、この集団全体を飢え死にさせようとしている。」

출애굽기 17장 3절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民はそこで水に渇いた。それで民はモーセに不平を言った。「いったい、なぜ私たちをエジプトから連 れ上ったのか。私や子どもたちや家畜を、渇きで死なせるためか。」


민수기 14장 3절~4절
“3.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なぜ主は、われわれをこの地に導いて来 て、剣に倒れるようにされるのか。妻や子どもは、かすめ奪われてしまう。エジプトに帰るほうが、われわれにとって良くはないか。」
そして互いに言った。「さあ、われわれは、かしらを一人立ててエジプトに帰ろう。」

그들의 불평 불만은 끝이 없습니다. 이처럼 흔들리는 믿음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들을 전신마취 시켜버렸습니다. 40년 동안 꼼짝없이 광야 안에 가둬버리시고는 집중적으로 그들을 훈련시켰던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일이 있을 때 기뻐하는 거요? 믿음이 있어야 기뻐하나요? 아니에요. 믿음이 없어도 좋은 일이 있으면 기뻐합니다. 이는 마치 어린 애들한테 맛있는 사탕을 주면 좋아하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자기가 좋아하는 맛있는 사탕을 주는데, 그걸 보고 좋아하기 위해서는 교양이 필요해요, 지식이 필요해요. 아니면 믿음이 필요해요? 아니요. 그런 것 없어도 기뻐합니다. 그냥 기뻐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진정한 믿음이 있느냐 하는 것은 그렇지 않을 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 보면 사람들이 아브라함이나 야곱 이야기는 많이 하는데 막상 그 사이에 있는 이삭 이야기는 별로 안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왠지 모르게 과소평가 하기 쉬운 것 같습니다만 이 이삭을 보면 진정한 큰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26장 19절~22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19.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20.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21.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22.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イサクのしもべたちがその谷間を掘っているとき、そこに湧き水の井戸を見つけた。
ゲラルの羊飼いたちは「この水はわれわれのものだ」と言って、イサクの羊飼いたちと争った。それで、イサクはその井戸の名をエセクと呼んだ。彼らがイサクと争 ったからである。
しもべたちは、もう一つの井戸を掘った。それについても彼らが争ったので、その名をシテナと呼んだ。
イサクはそこから移って、もう一つの井戸を掘った。その井戸については争 いがなかったので、その名をレホボテと呼んだ。そして彼は言った。「今や、主は私たちに広い所を与えて、この地で私たちが増えるようにしてくださった。」

너무나 대단하지 않습니까. 자신이 애써 우물을 팠어요. 그런데 다툼이 생겼어요. 다른 사람이 그걸 자기들 거라고 그런 거예요. 그러자 이삭은 싸웠대요? 아니요. 그냥 다른 곳에 우물을 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누가 시비를 걸어와요. 그랬더니 또다시 옮겨서 새로운 우물을 파고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는 이삭이 모자라서 그랬을까요? 아니요. 이러한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다툼을 피하고 평안을 추구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큰 믿음 아니겠습니까. 이삭의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그는 흔들리지 않는 안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까 한국이나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인기직업 1순위가 똑같다는 것이에요. 요즘 한국도 일본도 학생들 사이에서 공무원이 그렇게 인기라고 합니다. 물론 옛날에도 공무원 인기는 높았습니다만, 옛날에는 판검사나 외교관 같은 아무래도 고위공무원 인기가 높았지요. 하지만 요즘은 지방공무원, 중하급 공무원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며칠 전에는 이에 대해서 저희 집사람이랑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집사람 말이 이래요. 요즘 한국에서 9급 공무원이라도 되려면 조상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니, 목사 마누라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하고 따지려고 했더니, 그게 아니라, 한국에는 자기 집안 중에 국가유공자로 지정된 사람이 있으면 그런 취직시험 같은 데에 가산점이 붙는 제도가 있는데, 그런 가산점이라도 받지 않으면 하위직이라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기 어려울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이 공무원이라는 직업과 일반 회사 직원을 비교해보면 어떨까요.

일반 회사원의 경우 회사가 돈을 많이 벌게 되면 보너스를 받거나 아니면 무슨 특별 휴가 같은 것을 받는 경우도 있겠지만, 안 좋아지면 어떻습니까. 텔레비전을 보면 아무리 큰 회사라 하더라도 상황이 어려워지면 명예퇴직이나 정리해고를 한다는 말을 듣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반면에 공무원은 어떻습니까. 세금이 많이 걷힌다고 보너스를 받나요? 아니면 특별 휴가? 그랬다가는 큰일 나죠. 그건 다 국민들이 내는 혈세입니다. 하지만 반면에 자금 사정이 어려진다 하더라도 명예퇴직이나 정리해고 같은 것은 없지요.

한국이나 일본에서 공무원의 인기가 나날이 오르는 이유 중 하나는, 아무리 큰 회사라 하더라도 일반 회사는 경기가 안 좋아지면 나와야 하는 반면, 공무원은 이와 같은 안정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로 하나님 나라의 공무원이라고 하는 마음 가짐을 갖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고 모두가 목사나 전도사가 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안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안정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잠시 에스더서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에스더 4장 14절입니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もし、あなたがこのようなときに沈黙を守るなら、別のところから助けと救いがユダヤ人のために起こるだろう。しかし、あなたも、あなたの父の家も滅 びるだろう。あなたがこの王国に来たのは、もしかすると、このような時のためかもしれない。」


역적 하만이 유다인들을 다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모르드개가 왕비 에스더에게 말하지요. 네가 지금 아무 일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다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너와 너의 집 가문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는 말인데, 우리는 이 구절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안정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어떤 사람을 믿어서가 아닙니다. 어떤 재산이나 세상적인 어떤 기득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어쩌면 그런 것들은 언제든지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들이지요.

하지만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믿음, 그와 같은 흔들리지 않는 안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쓰셔서 주님의 일을 하실 수 있고,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큰 축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작은 배는 물이 조금만 출렁여도 흔들리고 뒤집힙니다만, 큰 배는 바람이 불어와도 파도가 몰아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작은 믿음은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 오더라도 믿음이 흔들리고 하나님을 원망하지만 큰 믿음은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와도 주님을 믿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 힘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해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의 작은 믿음을 보시고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 것처럼 우리를 꾸짖으시면 어쩌시겠습니까.

아니,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신 것처럼 전신마취라도 하시면 어쩌겠습니까. 이는 정말 큰일 납니다. 그러기 전에 우리는 정신을 바싹 차려야 하겠습니다. 気を強く持たなければなりません

우리 모두 큰 믿음, 안정적인 믿음, 강한 믿음을 갖고 주님께 감사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릴 때에 주님의 놀라운 축복, 큰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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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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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회 용서와 사랑과 소망
2019년 1월 2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욥기 1장 8절~12절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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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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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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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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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용서와 사랑과 소망” 許しと愛と希望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이 포함된 욥기는 신구약 총 66권 성경 중에서도 대단히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 욥기를 몇 번이나 읽어보신 적이 있으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아직 한 번도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도 계시겠지요.

그렇다면 몇 번이나 이 욥기를 읽어보신 적이 있으신 분들께 여쭙겠습니다. 이 욥기, 어떠십니까. 성경 전체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책이라고 하는, 내가 다시 읽고 싶은 책이라고 하는 순서를 메긴다고 한다면 이 욥기, 총 66권 중에서 몇 번째 정도에 두시겠습니까.

저도 몇 번 읽어보았습니다만, 어쩌면 참 답답하고 암울하고 그런 내용일 수가 있습니다. 욥기 내용 중 대부분이, 글쎄요. 색깔로 표현하면 회색? 그것도 아주 짙은 회색빛으로 가득 차 있는 느낌마저 받습니다. 참 암울한 내용이에요. 물론 사람들에 따라서 다르겠습니다만, 일반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본다면, 성경 66권 중에서 다시 읽고 싶은 순위가 10위 권에는 들기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가이고 작가일 뿐만 아니라 종교혁명가였던 마틴 루터는 이 욥기를 두고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탁월한 책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욥기에 대해서 오늘은 잠시 알아보려고 합니다.

에스더서와 시편 사이에 있는 이 욥기는 총 42장으로 구성된 꽤 긴 책입니다. 이 욥기의 주인공은 <욥>이라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 욥기에 대해서는 다른 책에서 찾아보기 힘든 부분이 몇 가지 있습니다.

먼저 이 욥기의 특징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욥기는 배경이 되는 시대가 언제인지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다른 성경들은 물론 지금처럼 서기 몇 년이다 하는 기록은 없을지라도, 당시 어느 나라가 있었다거나 아니면 어느 왕이 있었던 시대라거나 하는 식의 기록이 있어서, 대략 언제쯤의 이야기인지 가늠할 수가 있습니다만, 욥기는 그런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단서는 있지요. 예를 들어서 욥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만, 반면에 구약이라면 당연히 등장하는 단어라고 할 수 있는 <유대인> 또는 <율법>이라는 단어를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유대인> 또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말은 적어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후에 나온 말이기 때문에, 욥기가 적힌 시대는 아브라함 이전 시대가 아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율법>은 모세 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욥기가 아브라함 이전에 적힌 글이라면 당연히 모세가 태어나기 적어도 몇 백 년 전에 적혔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 점도 수긍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이 욥기에 적힌 시대배경을 대략적으로 창세기 11장 후반 정도로 보는 경향이 많다고 합니다.

둘째로 욥이 실존 인물이었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이처럼 시대 배경이 모호하기 때문에 어쩌면 욥은 실존인물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 픽션으로 만들어낸 가상 인물이고, 이 내용도 사람들의 상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다 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에스겔 서를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에스겔 14장 12절~14절을 봅니다.

에스겔 14장 12절~14절
“12.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3.인자야 가령 어떤 나라가 불법을 행하여 내게 범죄하므로 내가 손을 그 위에 펴서 그 의지하는 양식을 끊어 기근을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나라에서 끊는다 하자
14.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次のような主のことばが私にあった。
「人の子よ。国が、わたしに対して罪あるものとなって信頼を裏切 り、そのためわたしがその国に手を伸ばし、そこのパンの蓄えをなくし、その国に飢饉を送り、人や家畜をそこから絶ち滅ぼすとき、
たとえ、そこにノアとダニエルとヨブの、これら三人の者がいても、彼らは自分たちの義によって自分たちのいのちを救い出すだけだ──神である主のことば──。

이 말씀은 어떤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노아와 다니엘과 욥……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노아와 다니엘은 성경의 여러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실존했던 인물이라는 근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다니엘과 함께 욥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실존했던 노아와 다니엘과 함께 실존인물이 아닌 욥을 말씀하셨다? 이는 대단히 부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이 세 사람, 즉 노아와 다니엘과 욥에 대한 말씀이 이 14절 만이 아니라 16절, 18절, 20절에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도 하나님께서는 이 세 사람을 대단히 비중 있는 인물로 보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욥은 노아와 다니엘처럼 실제로 존재했다고 성경은 인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이 욥기에서는 대단히 흥미로운 장면이 등장합니다. 세상에, 하나님께서 계신 자리에 사탄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탄이 대화까지 합니다. 이는 정말 놀라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신학자들의 논란이 아직 있습니다. 물론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과 사탄이 대화하는 장면은 나옵니다만, 이처럼 하나님과 사탄이 직접 대화하는 장면은 이 욥기 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특징, 이는 욥기의 가장 큰 특징이자 어쩌면 우리가 가장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특징일지도 모릅니다. 이는 욥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대단히 큰 불행을 겪는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욥기 1장 1절 후반부에 보면 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この人は誠実で直ぐな心を持ち、神を恐れて悪から遠ざかっていた。

이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한테 욥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자랑까지 하십니다.

욥기 1장 8절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主はサタンに言われた。「おまえは、わたしのしもべヨブに心を留めたか。彼のように、誠実で直ぐな心を持ち、神を恐れて悪から遠ざかっている者は、地上には一人もいない。」

그런데 나중에 보면 어떻게 되었냐 하면 욥은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잃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도 대단히 심각한 질병을 앓게 되고 맙니다. 이는 그야말로 큰 불행이라고 할 수 있지요. 오늘은 특별히 이 욥기의 네 번째 특징, 욥은 대단히 훌륭한 인물이었고 믿음도 큰 사람이었지만, 도대체 왜 이렇게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성경은 이와 같은 기록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는지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욥기 1장 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에 대한 자랑을 하십니다. 그러자 사탄은 하나님께 반박을 하지요.

욥기 1장 10절~11절
“9.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11.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サタンは主に答えた。「ヨブは理由もなく神を恐れているのでしょうか。
あなたが、彼の周り、彼の家の周り、そしてすべての財産の周りに、垣を巡らされたのではありませんか。あなたが彼の手のわざを祝福されたので、彼の家畜は地に増え広がっているのです。
しかし、手を伸ばして、彼のすべての財産を打ってみてください。彼はきっと、面と向かってあなたを呪うに違いありません。」


그랬더니 어떻게 됩니까. 12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主はサタンに言われた。「では、彼の財産をすべておまえの手に任せる。ただし、彼自身には手を伸ばしてはならない。」そこで、サタンは主の前から出て行った。

하지만 사탄이 욥의 모든 소유물을 모두 빼앗았는데도 욥이 믿음을 버리지 않자 사탄은 하나님께 다른 제안을 합니다.

욥기 2장 5절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しかし、手を伸ばして、彼の骨と肉を打ってみてください。彼はきっと、面と向かってあなたを呪うに違いありません。」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 제안도 받아들이십니다.

욥기 2장 6절~7절
“6.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7.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主はサタンに言われた。「では、彼をおまえの手に任せる。ただ、彼のいのちには触れるな。」
サタンは主の前から出て行き、ヨブを足の裏から頭の頂まで、悪性の腫物(しゅもつ)で打った。

지금까지 믿음이 좋은 분들 중에서 이 욥기를 처음 읽는 분들이 계시면, 이 시점이 되면 아마도 당황하지 않을까 합니다.

여기까지 이야기의 흐름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탄한테 괜히 욥에 대한 자랑을 하셨다가, 사탄이 말하는 잔꾀에 흥분한 하나님이 넘어가서 멀쩡한 욥이 어려움을 당하게 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정말 사탄이 한 이 말 한 마디에 흥분하셔서, 아무런 죄가 없는 욥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버리신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이 마귀 사탄의 말에 그렇게 쉽게 넘어가는 분이실까요?

아니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서는 왜 이처럼 쉽게 사탄의 꼬임에 넘어가신 것처럼 말씀하셨을까요.

이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비밀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마귀 사탄의 두 번의 말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욥기 1장 11절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しかし、手を伸ばして、彼のすべての財産を打ってみてください。彼はきっと、面と向かってあなたを呪うに違いありません。」

욥기 2장 5절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しかし、手を伸ばして、彼の骨と肉を打ってみてください。彼はきっと、面と向かってあなたを呪うに違いありません。」


이 두 구절에서 사탄은 똑같이 한 가지 목적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구절에 토시 하나 차이 없이 등장한 문구가 있는데 이는 바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彼はきっと、面と向かってあなたを呪うに違いありません。)라고 하는 사탄의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기에는 사탄의 본심이 드러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에는 사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こうして、その大きな竜、すなわち、古い蛇、悪魔とかサタンとか呼ばれる者、全世界を惑わす者が地に投げ落とされた。また、彼の使いたちも彼とともに投げ落 とされた。

사탄은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합니다. 사탄은 어떻게 꾑니까. 우리는 창세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善悪の知識の木)의 열매를 하와가 먹게 하기 위해서 사탄은 교묘한 말로 속입니다.

창세기 3장 5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それを食べるそのとき、目が開かれて、あなたがたが神のようになって善悪を知る者となることを、神は知っているのです。」


이 사탄의 말은 완전한 거짓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로 이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지,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꾀는 영, 속이는 영 全世界を惑わす者 인 사탄은 하와를 간교한 말로 속였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탄의 속임에 넘어간 하와와 아담은 결국 타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처럼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사탄은 절대로 자신의 의도를 노출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목적을 숨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욥기 1장과 2장에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마지막 목적을 실토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욕하게 만드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마귀 사탄의 충동에 넘어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탄의 철저한 비밀을 자기 입으로 실토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마귀의 꾀임에 넘어간 사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꾀임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 앞에 놓인 것은 철저한 징계였습니다. 그 때까지 머물렀던 에덴, 아무런 걱정 없이 영원히 지낼 수 있었던 하나님의 품인 에덴에서 추방 당하고 말았습니다. 거기에는 용서도 없었습니다. 사랑도 없었습니다. 소망도 없었습니다. 오직 징계와 절망 뿐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 입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을까요? 그와 같은 기록은 없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아들인 가인은 결국 자신의 동생을 죽이는 살인까지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아도 그 가정에 사랑이 넘치고 기쁨이 넘치는 가정이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탄의 계략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만든 이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증오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죄성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우리는 하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이것이야 말로 마귀 사탄의 마지막 목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간의 거리가 멀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 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죄가 존재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죄가 용서 받지 못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이에 죄가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가까워질래야 가까워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에 죄가 있다면 결국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지옥행입니다. 우리는 지옥 외에 다른 곳으로 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 마귀 사탄이 바라는 것은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죄로 인해서 멀어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 하늘에서 땅끝까지 멀어진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깝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피를 흘려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재물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마귀 사탄의 계획,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영원히 벌려놓으려고 했던 마귀 사탄의 계획은 철저하게 실패하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우리에게 알리려고 하셨습니다. 마귀 사탄의 계획을 다른 사람이 말해도 안 믿을 수 있으니까, 가장 정확하게 마귀 사탄 스스로 그 입으로 말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거리가 멀어졌던 것은 하나님과의 거리 뿐일까요? 아닙니다. 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도 너무나도 멀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 대해서도 욥기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욥기 2장 11절~13절을 봅니다.

“11.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12.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13.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さて、ヨブの三人の友が、ヨブに降りかかったこれらすべてのわざわいのことを聞き、それぞれ自分のところから訪ねて来 た。すなわち、テマン人エリファズ、シュアハ人ビルダデ、ナアマ人ツォファルである。彼らはヨブに同情し、慰めようと、互いに打ち合わせて来た。
彼らは遠くから目を上げて彼を見たが、それがヨブであることが見分けられなかった。彼らは声をあげて泣き、それぞれ自分の上着 を引き裂き、ちりを天に向かって投げ、自分の頭の上にまき散らした。
彼らは彼とともに七日七夜(なぬかななや)、地に座っていたが、だれも一言も彼に話しかけなかった。彼の痛みが非常に大きいのを見たからである。


욥이 질병 가운데에 있을 때 이 슬픈 소식을 듣고 위문하고 위로하려고 세 친구가 왔습니다만, 욥의 모습을 보고 그 상태가 얼마나 처참하고 가여웠던지 소리 질러 울고는 그와 함께 7일 동안 땅에 앉아 있었지만 너무나도 딱해서 아무도 말을 거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 세 친구들, 데만 사람 엘리바스(テマン人エリファズ), 수아 사람 빌닷(シュアハ人ビルダデ), 그리고 나아마 사람 소발(ナアマ人ツォファル)이라고 하는 친구들은 어떤 친구 같겠습니까. 사람이 좋을 때, 잘 나갈 때에는 모여들지만 조금 안 좋아지면 하나 둘 그 사람의 곁을 떠나가는 것이 세상 인정이겠지요. 하지만 이 세 친구들은 그래도 의리가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대단히 좋은 사람들이었지요.

7일 동안 잠잠히 있었더니 그 다음에 욥이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자신의 처지를 저주하는 말이었습니다. 참으로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말을 들은 친구들은 일제히 욥을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그냥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거론하면서 욥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욥기 4장 7절~9절
“7.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8.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9.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さあ、思い出せ。だれか、潔白なのに滅びた者があるか。どこに、真っ直ぐなのに絶たれた者があるか。
私の見てきたところでは、不法を耕して害悪を蒔く者が、自らそれらを刈り取るのだ。
彼らは神の息吹(いぶき)によって滅び、御怒りの息によって消え失せる。

이러면서 마치 너한테 죄가 있으니 이런 일을 당한다, 분명 너한테 죄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징벌을 내리신다……이렇게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여기 한 부분만이 아니라 이 세 친구의 말 중에서 반복적으로 이와 같은 내용이 등장합니다. 이것이 다 무엇입니까. 자신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들 멋대로 하나님을 들먹거리면서, 마치 자신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행세하면서 욥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왔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처음에는 위문하고 위로하기 위해서 먼 길을 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정작 근거 없는 비판과 비난을 늘어놓았을 뿐이었고, 결국 그들의 입에서 위문과 위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과 사람 간의 거리를 멀어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간의 거리마저도 멀어지게 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은 남에게 충고하는 일입니다. 이는 쉬울 뿐만 아니라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충고가 어떻습니까. 알고 보면 대부분 어설픈 근거를 대면서 주장합니다.

세상에도 어설픈 근거를 대는 일들은 꽤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디서 대지진이 일어났어요. 그런데 일어나기 전에는 그런 예측은 아무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어나고 난 다음에는 어떻습니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원인을 설명하는 주장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또 2016년에 있었던 미국 대통령 선거는 어떻습니까. 선거 전에는 대부분의 언론에서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우세하다고 보도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당선됐지요. 그랬더니 어떻게 됐어요? 여기저기 언론에서 트럼프가 당선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이 넘쳐납니다. 누구누구가 트럼프 후보 당선을 예측했었다 뭐 이런 일들을 대서특필합니다.

세상에서는 또 어떻습니까. 그 때까지는 아무렇지도 않고 있었다가, 특히 어떤 사람한테 안 좋은 일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이럽니다. “그래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 언젠가 그렇게 될 줄 알았어” 이런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합니다.

이런 일들이 교회 밖에서만 그런 가요?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사람 벌 받아서 저런다, 하나님이 징계를 해서 저런다 하고 함부로 말씀하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때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할 때도 있습니다. 뻑하면 하나님을 들먹이는 일들이 있습니다.

“아~ 이런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아”, “아~ 이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야”

교회 좀 다녀보신 분들은 이런 말을 한 두 번 정도는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말들이 모두 근거 없는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문제는 이런 지적이 성경에 근거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100프로 성경에 바탕을 둔 근거가 있거나 하지 않으면 차라리 그런 말씀을 하지 마시는 편이 좋습니다. 만약에 이게 누구한테 하는 충고라고 한다면 차라리 그런 충고는 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아무리 신학박사나 상담학 박사라 하더라도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줄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욥기를 보면 이처럼 하나님을 들먹이면서 비판했던 욥의 친구들에게 하나님께서 꾸짖으십니다.

욥기 42장 7절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主がこれらのことばをヨブに語った後、主はテマン人エリファズに言われた。「わたしの怒りはあなたとあなたの二人の友に向かって燃える。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しもべヨブのように、わたしについて確かなことを語らなかったからだ。

라고 하나님께서는 함부로 말한 욥의 친구들 세 명에 대하여 엄한 말로 혼을 내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충고나 비판으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힐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충고나 비판으로 거리를 좁힐 수가 있었다면,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오셔서 충고나 비판과 비난만 하시고 가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순종이자 희생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인하여 스스로를 희생제물로 내놓으셨던 것입니다.

이 희생의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희생으로 말미암아 용서, 죄사함이 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가 그대로 있을 때에는 소망이 없었으나, 죄사함이 임하면서 우리는 이제 천국을 꿈꿀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9절을 봅니다.

로마서 5장 19절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すなわち、ちょうど一人の人の不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罪人とされたのと同様に、一人の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義人とされるのです。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모든 이가 죄인이 되었으나, 예수님께서 순종하심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는 그의 이름을 믿고 구주로 영접함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의인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충고와 비판은 단 한 사람도 위문과 위로를 줄 수가 없습니다. 충고와 비판, 비난은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다 합니다.

하지만 충고와 비판보다도 순종과 희생을 먼저 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순종과 희생이라고 해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리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죽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자기 자존심을 죽여야 합니다. 자기 고집을 죽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순종과 희생을 위한 출발점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兄弟たち。私たちの主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私が抱いている、あなたがたについての誇りにかけて言いますが、私は日々死んでいるのです。


바울이 우리보다 못난 사람입니까. 우리보다 자존심이 없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매일 죽는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바로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귀 사탄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희생과 순종은 다른 게 아닙니다. 상대방의 마음, 바로 그 사람의 마음이 되는 것이 순종이고 희생인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사랑인 것입니다.

아무리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은 마귀가 아닙니다. 단지 마귀에 속아 넘어간 사람일 뿐인 것입니다.

그 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게 될 때 진정한 순종과 희생이 싹트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와 사랑과 소망이 나오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新しい戒めを与えます。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

욥기, 특히 욥의 친구들 말이 답답하고 우울하고 회색빛처럼 느껴졌던 이유는 그들의 말 속에 희생도 순종도 용서도 사랑도, 그리고 소망도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욥기는 이처럼 희생과 순종뿐만 아니라 용서와 사랑 그리고 소망까지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너무나도 소중한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줄여주신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줄여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스스로의 희생과 순종으로, 십자가의 용서와 십자가의 사랑, 그리고 천국을 꿈꿀 수 있는 소망을 널리 알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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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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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회 흔들리지 않는 믿음
2019년 1월 1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에스겔 1장 20절~21절
"영이 어떤 쪽으로 가면 생물들도 영이 가려 하는 곳으로 가고 바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에 있음이니라 그들이 가면 이들도 가고 그들이 서면 이들도 서고 그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는 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에 있음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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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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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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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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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흔들리지 않는 믿음” 揺るがされない信仰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구분할 때를 보면 예를 들어 구약은 모세오경, 역사서, 시가서, 대선지서, 소선지서……이렇게 일반적으로 구분을 합니다. 여기서 대선지서나 소선지서……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분량으로 구분이 될 뿐이지, 길이가 길다고 해서 가치가 더 있다거나, 길이가 짧다고 해서 가치가 덜하다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150편이나 되는 시편, 이는 성경에서 가장 긴 책입니다만, 반면에 신약성경 요한 이서는 1장 밖에 없고, 그것도 13절까지밖에 없는 짧은 책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편이 제일 가치가 있고 요한이서는 가장 가치가 덜한 책이라는 것이 아니라, 시편이나 요한이서나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 성경이라고 우리는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이 중에서 오늘 말씀인 에스겔서는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다니엘 등과 함께 대선지서에 포함되는 책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을 모두 이해해야 하겠습니다만, 그러나 현재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100% 완벽하게 해석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조금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성경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성경이 하나도 오류가 없는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것 또한 우리의 신앙인 것입니다. 다만 완벽하지 않다는 것은 똑같은 복음주의 신학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서 해석에 있어서 서로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와 같은 성경 중에서도 특별히 난해한 부분은 아무래도 예언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오늘 말씀이 있는 에스겔 서에는 여러 환상이 등장합니다만, 그와 같은 환상의 내용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고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에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살펴보았던 말씀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동일한 의견이 있는데 이는 바로 하나님의 충성된 사자의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에스겔 1장 20절~21절
“20.영이 어떤 쪽으로 가면 생물들도 영이 가려 하는 곳으로 가고 바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에 있음이니라
21.그들이 가면 이들도 가고 그들이 서면 이들도 서고 그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는 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에 있음이더라”

これらは霊が行かせる所に行き、霊が行かせる所には、輪もまたそれらとともに上がった。生きものの霊が輪の中にあったからである。
生きものが行くときには、輪も行き、生きものが立ち止まるときには、輪も立ち止まり、生きものが地の上から上がるときには、輪も共に上がった。生きものの霊 が輪の中にあったからである。

이 말씀에는 영과 생물들, 그리고 바퀴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생물들 곁에 있는 바퀴는 영이 가라고 하는 곳으로 따라 갔다는 것입니다. 영이 좌로 가려 하면 좌로 가고, 우로 가려고 하면 우로 가고, 영이 서면 바퀴도 서고, 영이 하늘로 들리고자 하면 바퀴도 똑같이 따라갔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성경 구절이 떠오릅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입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主はサムエルに言われた。「彼の容貌や背の高さを見てはならない。わたしは彼を退 けている。人が見るようには見ないからだ。人はうわべを見るが、主は心を見る。」

하나님은 외모를 보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중심에서 무엇을 보시겠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신지, 성령님이 계신지를 보신다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중심, 믿음의 중심이 명확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성경을 비과학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못 믿겠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들은 어떻게 하냐 하면 그 분이 돌아가신 날에는 제사를, 명절에는 차례를 지냅니다. 부적을 지니고 다녀요. 그러면 안심이 되대요. 그게 자기를 지켜준대요. 그리고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나오는 오늘의 운세를 봅니다. 뻑 하면 갑자을축병인정묘무진기사경오신미 사주팔자를 보고 굿판까지 벌여요.

아니, 성경을 비과학적이라서 못 믿는다면서 그런 건 왜 하냐고 하면 그건 우리 문화래요. 전통이래요. 미풍양속이래요.

이런 말들을 그래도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인데도 웃지도 않고 말해요. 이게 앞뒤가 맞는 말입니까. 그래도 이런 말을 하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이 한다면 그럴 수도 있다고 한다지만, 이미 교회에 다니고 나름 믿음이 있다고 하는 분들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계시니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는 노릇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 마음의 중심이, 우리 믿음의 중심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자동차에 달린 바퀴, 아무리 좋은 타이어로 된 바퀴이면 뭘 합니까. 그 중심이 흔들리면 넘어지고 빠지고 사고가 나고 마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때의 왕들에 대한 평가를 보십시오. 구약에서 왕들에 대한 평가는 얼굴이 잘생겼느냐, 오래 살았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다윗처럼 행하였느냐 아니냐입니다.

열왕기하 18장에 보면 성경에서는 히스기야 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열왕기하 18장 3절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彼は、すべて父祖ダビデが行ったとおりに、主の目にかなうことを行った。

성경은 히스기야(ヒゼキヤ) 왕을 가리켜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왕이었다고 평가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무엇을 했을까요.

열왕기하 18장 4절~6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열왕기하 18장 4절~6절
“4.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5.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6.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

高き所を取 り除き、石の柱を打ち砕き、アシェラ像を切り倒し、モーセが作った青銅の蛇を砕いた。そのころまで、イスラエル人がこれに犠牲を供えていたからである。これはネフシュタンと呼ばれていた。
彼はイスラエルの神、主に信頼していた。彼の後にも前にも、ユダの王たちの中で、彼ほどの者はだれもいなかった。
彼は主に堅くつき従って離れることなく、主がモーセに命じられた命令を守った。

그리고 열왕기하 23장에 보면 요시야 왕이 등장합니다. 그의 공적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열왕기하 23장 19절~20절
“19.전에 이스라엘 여러 왕이 사마리아 각 성읍에 지어서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산당을 요시야가 다 제거하되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대로 행하고
20.또 거기 있는 산당의 제사장들을 다 제단 위에서 죽이고 사람의 해골을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

ヨシヤはまた、イスラエルの王たちが造って主の怒りを引き起こした、サマリアの町々の高き所の宮もすべて取 り除き、彼がベテルでしたのと全く同じことを、それらに対しても行った。
彼は、そこにいた高き所の祭司たちをみな、祭壇の上で屠り、その祭壇の上で人の骨を焼いた。こうして、彼はエルサレムに帰った。


열왕기하 23장 24절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さらにヨシヤは、霊媒 、口寄せ、テラフィム、偶像、それに、ユダの地とエルサレムに見られるすべての忌むべき物も除き去った。こうして、彼は祭司ヒルキヤが主の宮で見つけた書物に記されている 律法のことばを実行した。

요시야 왕은 과거에 우상들의 온상이었던 산당들을 모두 헐어버리고 점쟁이들을 모두 제거해버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요시야 왕을 어떻게 평가하셨습니까.

성경은 요시야 왕은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열왕기하 23장 25절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ヨシヤのようにモーセのすべての律法にしたがって、心のすべて、たましいのすべて、力 のすべてをもって主に立ち返った王は、彼より前にはいなかった。彼の後にも彼のような者は、一人も起こらなかった。

그리고 어김없이 열왕기하 22장 2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열왕기하 22장 2절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彼は主の目にかなうことを行い、父祖ダビデのすべての道に歩み、右にも左にもそれなかった。


시간관계상 히스기야 왕과 요시야 왕에 대해서만 보았습니다만, 그들은 전통도 모르고 문화도 모르고 미풍양속도 모르는 왕이었다고 기록하나요?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순종하고 신앙 중심, 믿음의 중심을 지킨 훌륭한 왕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2장 4절~5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누가복음 12장 4절~5절
“4.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わたしの友である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からだを殺しても、その後はもう何もできない者たちを恐れてはいけません。
恐れなければならない方を、あなたがたに教えてあげましょう。殺した後で、ゲヘナに投げ込む権威を持っておられる方を恐れなさい。そうです。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この方を恐れなさい。

이 말씀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영의 세계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영혼도 육체처럼 썩어지고 없어지나요? 그렇다면 차라리 괜찮습니다. 예수님도 믿을 필요 없고, 성경 말씀도 볼 필요가 없겠지요.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기록합니까.

히브리서 9장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요한계시록 20장 12절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また私は、死んだ人々が大きい者も小さい者も御座 の前に立っているのを見た。数々の書物が開かれた。書物がもう一つ開かれたが、それはいのちの書であった。死んだ者たちは、これらの書物に書かれていることにしたがい、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죽음 다음에는 심판이 있다고 성경은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단지 또 하나의 시작일 뿐입니다. 그 시작에 앞서서 심판이 있다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합니다.

여러분, 저도 예전에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도 몇 번 옮겨보기도 했습니다만, 그 회사에 다닐 때에는 상사 눈치도 봐야지요. 신입사원 때에는 대리님, 과장님, 차장님, 부장님, 어디 그 뿐이에요? 이사님, 상무님, 거기에 사장님, 회장님. 뭐 눈치를 봐야 할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 분들 앞에서는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지요. 비위도 맞춰드려야 하겠습니다만, 그 회사를 그만두고 나오면 뭐예요? 예, 더 이상 그 사람들의 영향권 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상관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세상은 바로 일시적이고도 한시적인 회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떠한 분입니까. 우리의 창조주이시자 영원한 통치자이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거나 죽은 다음에 주님 앞에 설 때나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다니고 있는 회사 상사와, 우리의 영원한 통치자이신 하나님, 이 중에서 우리가 어느 쪽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뻔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있습니다. 서울이나 동경 같은 큰 도시에서는 밤하늘에도 별들이 잘 안 보입니다만, 우리 교회가 있는 군마에서는 밤이 되면 꽤 많은 별들이 보입니다.

하늘의 별들을 구분하는 대표적인 기준은 그 밝기를 등급으로 구분하는데, 어떤 한 별은 가장 밝은 1등급도 아닙니다. 얼핏 보기에는 다른 별들과 차이가 없어요. 하지만 그 별은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대단히 많은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아오고 도움을 주어왔습니다.

그 별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북극성입니다. 북극성의 밝기는 2등급이라고 합니다. 썩 밝은 편도 아니지요. 그 중심이 흔들렸다면 하늘의 수많은 다른 별들 속에 묻혀서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북극성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사막을 헤매는 사람들, 드넓은 바다를 여행하는 사람들로부터 귀하게 여김을 받았던 이유,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그 중심이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북극성이 과거에는 다른 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지구의 축이 이동하기 때문인데, 먼 옛날에는 다른 별이 북극성처럼 움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별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그 축이 다른 별로 넘어가게 되어서, 지금의 북극성이 중심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 말이 참 흥미롭지 않습니까.

성경에는 이와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4절~5절
“4.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けれども、あなたには責めるべきことがある。あなたは初めの愛から離れてしまった。
だから、どこから落ちたのか思い起こし、悔い改めて初めの行いをしなさい。そうせず、悔い改めないなら、わたしはあなたのところに行って、あなたの燭台 をその場所から取り除く。

여러분, 우리가 받고 있는 축복, 우리가 누리고 있는 축복, 만약에 우리 마음의 중심이 흔들리고 우리 믿음의 중심이 흔들릴 때, 축복의 촛대는 다른 곳으로 옮겨갈지도 모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떤 분은, 아이구 내가 무슨 축복을 받고 있어……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좋은 주일날 성전에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 그리고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있었습니다만, 에서가 야곱에게 어처구니없게도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 장자권(長子の権利)을 빼앗기게 됩니다. 여러분, 다른 건 몰라도 장자권은 살 수도 없고 강제로 빼앗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순서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는 너무나도 큰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에서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태어나서부터 당연히 있는 것, 그러니까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팥죽 한 그릇으로 야곱한테 장자권이 빼앗기고 맙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에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야곱의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을 이어갈 권리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난 다음에 에서는 땅을 치고 통곡을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촛대는 이미 옮겨진 후였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48절~50절을 봅니다.

요한복음 1장 48절~50절
48.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우리가 주님을 알기 전에 먼저 나를 알아보고 불러주신 주님.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께 감사하고, 예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일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보다 더 큰 일을, 이보다 더 큰 축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마음의 중심에 성령님을 모셔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흔들리지 않는 우리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축복을 넘치도록 받는, 지금까지 받은 모든 축복보다도 훨씬 더 큰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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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회 부족한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2019년 1월 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1절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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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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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부족한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劣る私を愛してくださる主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베드로와 제자들 앞에 나타났을 때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베드로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돌아가신 후에 제자들은 실의에 빠졌습니다. 그도 그럴 만 하지요. 인간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예수님은 영웅이나 혁명가처럼 보였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과거 구약에 보면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민족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합니다. 그렇게 되자 이제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일들을 사람들은 기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2천년 전 이 땅에 오셨을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라고 하는 강대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조국을 잃은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새로운 사사, 이 시대의 리더, 억압받는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구원해주실 통치자로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열광했습니다. 지금으로 본다면 차기 대통령 최유력후보 정도로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요즘 식으로 말하면 줄을 잘 서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마태복음 19장 27절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そのとき、ペテロはイエスに言った。「ご覧ください。私たちはすべてを捨てて、あなたに従って来ました。それで、私たちは何をいただけるでしょうか。」

뿐만 아니지요. 제자들만이 아니라 이른바 치맛바람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일도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0절~21절
“20.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そのとき、ゼベダイの息子たちの母が、息子たちと一緒にイエスのところに来てひれ伏し、何かを願おうとした。
イエスが彼女に「何を願うのですか」と言われると、彼女は言った。「私のこの二人の息子があなたの御国 で、一人はあなたの右に、一人は左に座れるように、おことばを下さい。」

세베대의 아들이란 사도 요한과 야고보를 뜻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어머니까지 나서서 예수님께 와서는 자신의 두 아들에 대해서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어떤 부탁입니까. 예수님 당신이 왕이 되면, 요즘 식으로 본다면 대통령이나 총리가 된다면 우리 두 아들들한테 비서실장 자리나 장관 자리 같은 높은 자리 하나 마련해주세요……라는 뜻 아니겠어요?


이런 제의를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바로 다음 구절인 마태복음 20장 22절 중반부에 보면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あなたがたは自分が何を求めているのか分かっていません

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보면 참 딱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이 사람들을 너무 나무라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당시는 아직 성령님이 역사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들은 오직 사람의 생각, 육의 생각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따라 나섰던 이유는, 물론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겠으나, 어쩌면 그 중에는 이 사람을 따라다니면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은, 그것은 영적인 것이 아닌 육적으로, 인간적으로 생각해서 세상이 바뀌고 난 다음에는 벼슬 자리 하나 정도는 주어질 것이라는 점을 기대했을 법도 하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도 있고, 그리 비난 받을 만한 일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어떻게 되었어요. 3년 정도는 지방을 순회하면서 예수님의 지지자들을 결집하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진격해서 민중들을 결집시키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로마를 물리치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조하자……뭐 이렇게 될 줄 알았는데, 예루살렘에 도착하시고 얼마 있었더니, 맥없이 체포되고 맙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2장 54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22장 54절
“54.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彼らはイエスを捕らえ、引いて行き、大祭司の家に連れて入った。ペテロは遠く離れてついて行った。

예수님께서 체포된 후에도 베드로는 끝까지 예수님을 멀찌감치에서나마 따라가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는 예수님이 걱정되었기 때문도 있었겠지만, 어쩌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탈출하시는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워낙 나서기 좋아하는 베드로였으니 예수님께서 묶인 쇠사슬을 풀고 놀라운 기적으로 탈출하셨을 때 자기가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는 것을 예수님께 보여드리면 얼마나 칭찬을 듣겠습니까.

어쩌면 베드로는 그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베드로가 했던 말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마태복음 26장 33절~35절을 봅니다.
“33.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5.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すると、ペテロがイエスに答えた。「たとえ皆があなたにつまずいても、私は決してつまずきません。」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あなたは今夜、鶏が鳴く前に三度わたしを知らないと言います。」
ペテロは言った。「たとえ、あなたと一緒に死ななければならないとしても、あなたを知らないなどとは決して申しません。」弟子たちはみな同じように言った。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끝까지 예수님을 지키겠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하지 않겠다고 강력하게 말합니다.

이렇게 호언장담을 했던 베드로, 예수님을 끝까지 버리지 않겠다고 했던 베드로, 예수님께서 탈출하셨을 때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모습을 보여드리면서 칭찬을 받으려고 했을지도 모르는 베드로, 하지만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의 굳건한 고백과는 달리,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예수님도 눈치 챘다는 것을 베드로 자신도 알게 됩니다.

누가복음 22장 55절~60절에 보면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의 상황이 너무나도 자세히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55.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56.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57.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58.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59.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0.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人々が中庭の真ん中に火をたいて、座り込んでいたので、ペテロも中に交じって腰を下ろした。
すると、ある召使いの女が、明かりの近くに座っているペテロを目にし、じっと見つめて言った。「この人も、イエスと一緒にいました。」
しかし、ペテロはそれを否定して、「いや、私はその人を知らない」と言った。
しばらくして、ほかの男が彼を見て言った。「あなたも彼らの仲間だ。」しかし、ペテロは「いや、違う」と言った。
それから一時間ほどたつと、また別の男が強く主張した。「確かにこの人も彼と一緒だった。ガリラヤ人だから。」
しかしペテロは、「あなたの言っていることは分からない」と言った。するとすぐ、彼がまだ話しているうちに、鶏が鳴いた。

이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부인할 때를 마가복음 14장 71절에서는 더욱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71절
“71.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するとペテロは、噓ならのろわれてもよいと誓い始め、「私は、あなたがたが話しているその人を知らない」と言った。

너도 저 예수라는 사람을 알지? 라고 물었던 그 상대방을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모른다고 했다는 말은, 이걸 요즘 식으로 말한다면, 그 말을 했던 사람한테 심한 욕설이라도 한 마디 하면서 모른다고 딱 잡아 떼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누가복음 22장 61절~62절
“61.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主は振り向いてペテロを見つめられた。ペテロは、「今日、鶏が鳴く前に、あなたは三度わたしを知らないと言います」と言われた主のことばを思い出した。
そして、外に出て行って、激しく泣いた。

아이고, 이렇게 민망할 때가 어디 있겠습니까(何とばつの悪いことでしょうか). 이 때에 예수님과 눈이 맞은 베드로의 심정은 어땠겠습니까. 자신은 예수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지키겠다고 했는데, 그 입에 침이 마르기도 전에, 예수님을 아느냐고 했던 사람을 저주하고 맹세까지 해가면서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噓ならのろわれてもよいと誓い始め

그런 베드로는 통곡을 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일말의 기대를 가졌을지도 모르는 제자들의 바램도 무색하게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실의에 빠졌습니다. 소망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지난 3년은 그저 한날의 추억으로 끝나버렸는지도 모릅니다.

마태복음 26장 32절에 보면,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しかしわたしは、よみがえった後、あなたがたより先にガリラヤへ行きます。」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던 것을 기억해서인지, 아니면 그대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다가는 자신들의 신변도 위험해질 수 있다고 판단해서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이제 갈릴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갈릴리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더니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요한복음 21장 3절~6절
“3.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シモン・ペテロが彼らに「私は漁に行く」と言った。すると、彼らは「私たちも一緒 に行く」と言った。彼らは出て行って、小舟に乗り込んだが、その夜は何も捕れなかった。
夜が明け始めていたころ、イエスは岸辺に立たれた。けれども弟子たちには、イエスであることが分からなかった。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子どもたちよ、食べる魚がありませんね。」彼らは答えた。「ありません。」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舟の右側に網を打ちなさい。そうすれば捕れます。」そこで、彼らは網を打った。すると、おびただしい数の魚のために、もはや彼らには網を引き上げ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어쩌면 베드로는 이 순간 몇 년 전의 일을 떠올렸을지도 모릅니다. 누가복음 5장 3절~7절을 봅니다.


누가복음 5장 3절~7절
“3.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イエスはそのうちの一つ、シモンの舟に乗り、陸から少し漕ぎ出すようにお頼みになった。そして腰を下ろし、舟から群衆を教え始められた。
話が終わるとシモンに言われた。「深みに漕ぎ出し、網を下ろして魚を捕りなさい。」
すると、シモンが答えた。「先生。私たちは夜通し働きましたが、何一つ捕れませんでした。でも、おことばですので、網を下ろしてみましょう。」
そして、そのとおりにすると、おびただしい数の魚が入り、網が破れそうになった。
そこで別の舟にいた仲間の者たちに、助けに来てくれるよう合図した。彼らがやって来て、魚を二艘の舟いっぱいに引き上げたところ、両方とも沈みそうになった。

이것이 언제인가 하면 바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일입니다.

어? 나 이거 알아. 몇 년 전에 똑 같은 일이 있어. 그럼 저기 서 있는 사람이 혹시?


마침 그 때에 누가 말합니다.

요한복음 21장 7절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それで、イエスが愛されたあの弟子が、ペテロに「主だ」と言った。シモン・ペテロは「主だ」と聞くと、裸に近かったので上着をまとい、湖に飛び込んだ。

이 구절을 보면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보통 바다로 뛰어 내릴 때에는 입고 있던 옷을 벗는 것이 자연스럽지요. 하지만 이 구절을 보면 베드로는 벗고 있던 곳을 입은 다음에 바다로 뛰어 내렸다고 합니다. 이는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준비를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데 아무리 남자라고는 하나 어찌 벗은 상태에서 뵐 수 있겠어요. 그래서 베드로는 겉옷을 입었습니다. 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도의 예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흥미로운 점은 이 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1절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シモン・ペテロは舟に乗って、網を陸地に引き上げた。網は百五十三匹の大きな魚でいっぱいであった。それほど多かったのに、網は破れていなかった。

이 구절을 우선 앞서 살펴보았던 구절,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록인 누가복음 5장 6절~7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 6절~7절
“6.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そして、そのとおりにすると、おびただしい数の魚が入り、網が破れそうになった。
そこで別の舟にいた仲間の者たちに、助けに来てくれるよう合図した。彼らがやって来て、魚を二艘の舟いっぱいに引き上げたところ、両方とも沈みそうになった。

이 두 구절의 차이, 두 경우 똑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고기를 잡았는데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베드로, 예수님을 아직 잘 알지 못했던 시기의 베드로가 고기를 잡았을 때에는 그물이 찢어지고 배가 잠기게 되었다고 합니다만, 나중 경우에는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물고기를 적게 잡아서인가요? 성경에는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それほど多かったのに、網は破れていなかった)>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물이 찢어질 만큼, 찢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많이 잡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찢어지지 않았다고 봐야겠습니다.

과연 이 두 구절의 차이, 이 두 구절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 있습니다.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을 때, 나중에 물고기를 많이 잡았을 때에는 물고기 수가 백쉰세 마리, 그러니까 153마리였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 숫자를 가지고 사람들은 다양하게 해석합니다. 누구는 구약에서 율법을 가리키는 숫자인 10, 신약에서는 성령을 상징하는 숫자인 7, 이를 더하면 17이 되는데, 1+2+3……해서 17까지 더하면 153이 된다고 하는 설, 100을 이방인의 수, 50을 유대인의 수, 3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보는 설, 고대 동물학자들은 생선을 153종으로 분류를 했는데, 이는 인류 전체의 인종을 상징한다고 하는 설, 나아가서 어떤 분은 153은 한 교회에 가장 적당한 성도 수이기 때문에 153명이 넘어가면 교회를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성경을 바탕으로 해서 묵상을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다양한 상상이나 다양한 해석을 하는 것을 모두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겠지요. 이런 해석을 들으면 어~그렇구나. 어~신기하네. 어~그런가보다 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해석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의 주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성경구절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에서 우리가 얻을 의미는 없는 것일까요? 굳이 153마리라고 기록하신 성경은 무의미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성경 기록으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베드로가 자신이 잡은 물고기 마리 수를 정확히 알았다는 것입니다.

어촌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팔 때에는 큰 고기 같은 경우에는 마리 수로 계산하지만 일반 물고기는 무게로 계산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더구나 당시 배들의 크기를 보아 무게가 아니라 마리 수로 셀만한 물고기를 150마리 이상이나 싣는다는 것은 어려웠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리고 설령 그 정도 물고기였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대략 100이나 200도 아닌 153마리라는 사실을 그렇게 빠르고도 정확하게 인식했다는 사실은 놀랍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똑같이 예수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내렸을 때 물고기를 많이 잡았는데 두 경우를 자세히 비교해보면, 앞에서는 첫째 그물이 찢어졌고, 둘째, 배가 가라앉을 것만 같았고, 셋째, 몇 마리를 잡았는지 기록이 없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잡았을 때에는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고, 배가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는 기록이 없는 반면, 잡은 물고기 수가 정확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축복을 담을 준비가 되어 있었느냐 하는 차이입니다. 물고기를 많이 잡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 주님이 주시는 축복입니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 그 축복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다면 이는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 내가 기도를 해서 너무 많이 주시면 재앙이 될 수도 있으니까 조금만 달라고 기도해야겠구나……이러시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내가 많은 축복을 바라는데 왜 안 주실까 하면 그 이유는 지금 내 상태에서 너무나도 많은 축복을 주시면 이를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마음껏 부어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크나큰 축복을 받을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그물이 찢어집니다. 배가 가라앉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많은 축복을 주고 싶으셔도 주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훌륭하고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하나요? 앞서 베드로의 삶을 잠시 돌아보았습니다만, 그가 우직하고 나서기 좋아하기는 했으나, 베드로한테는 좀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그렇다고 칭찬 받을 만한 대단한 일을 한 기록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큰 축복을 받더라도 그의 그물은 더 이상 찢어지지 않았으며 그의 배도 가라앉지 않았고, 그는 자신이 받은 축복을 정확히 인식할 정도로 믿음이 성장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의 마음 안에는 언제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14장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걷는 모습을 보고 자기도 걷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에 풍덩 하고 빠져버렸지요. 마태복음 16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하시자, 베드로는 절대로 그런 일을 당하지 않게 하겠다고 하자,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하고 심하게 꾸중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앞서 살펴본 것처럼 막판에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고백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예수님을 배신한 것이지요. 이것만 보면 예수님을 팔았던 가룟 유다나 베드로나 별반 차이가 없는지도 모릅니다.

나중에는 유다도 베드로도 후회했지요. 적지 않은 수치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은 스스로 부끄러워하면서 후회하고 목숨을 끊은 유다는 버리셨으나, 부끄러워하면서도 수치스러워하면서도 후회하면서도 예수님께로 돌아온 베드로는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하루하루가 예수님 앞에서 떳떳하십니까. 자랑스러우십니까. 아니요. 그렇지가 않으실 겁니다. 목사인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가면서 때로는 화도 내고, 그리고 남들한테 민폐도 끼치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가끔 저 자신이 제 모습을 생각하면 얼마나 부족한 점이 많은지, 그래서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すべて疲れた人、重荷を負っている人はわたしのもとに来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休ませてあげます。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로 가면 됩니다.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을 품으면 됩니다. 우리 스스로는 많이 부족해도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을 품읍시다.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께 감사합시다.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면 우리의 그물은 찢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탄 배는 가라앉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을 모두 받아 안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새해 첫 주입니다. 주님을 사랑합시다. 주님께 감사합시다. 언제나 주님과 동행하고, 우리의 모든 부끄러움을 받아주시는 주님, 부족함을 받아주시는 주님께 감사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모두 받아 안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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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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