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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7회 창대한 축복의 시작
2019년 2월 1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욥기 8장 7절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한국어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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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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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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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창대한 축복의 시작” 大いなる祝福の始まり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욥기 8장 7절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あなたの始まりは小さくても、あなたの終わりは、きわめて大きなものとなる。

참 좋은 말씀이죠? 이 말씀은 욥기에 적혀 있는 말씀입니다만, 욥기를 모두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도, 아니, 성경을 잘 모르시는 분들, 예수님을 믿지 않으시는 분들도 들어본 적이 있을 수 있을 만큼 상당히 익숙한 구절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용품점 곳에 가보면 이 구절을 크게 써서 걸어놓는 것이나 액자 같이 해서 팔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참 좋은 말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살입니다.

욥기는 그 내용 중 대부분이, 아무런 이유 없이 어려움을 겪는 욥에 대해, 그의 어려운 상황을 듣고 위로해준답시고 온 세 명의 친구들이 결국은 위로는커녕 그를 맹비난 하는 말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욥기 8장에 있는 내용인데 한 번 볼까요?


우선 욥기 8장 1절~6절까지를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1.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3.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4.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5.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6.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次に、シュアハ人ビルダデが答えた。
いつまで、あなたはこのようなことを語るのか。あなたが口にすることばは激しい風だ。
神がさばきを曲げられるだろうか。全能者が義を曲げられるだろうか。
もし、あなたの子らが神の前に罪ある者となり、神が彼らをその背きの手に渡されても、
もし、あなたが熱心に神に求め、全能者にあわれみを乞うなら、
もし、あなたが純粋で真っ直ぐなら、今すぐ神はあなたのために奮い立ち、あなたの義の住まいを回復されるだろう。


그리고 이 다음에 오늘 말씀인

7.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あなたの始まりは小さくても、あなたの終わりは、きわめて大きなものとなる。

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선 6절까지의 내용을 정리해보도록 하면 이런 것이지요.

조금 길지만 일단 욥기 1장 13절~19절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13.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14.사환이 욥에게 와서 아뢰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15.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6.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양과 종들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7.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갈대아 사람이 세 무리를 지어 갑자기 낙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8.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들의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는데
19.거친 들에서 큰 바람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청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한지라”


ある日、彼の息子、娘たちが、一番上の兄の家で食べたりぶどう酒を飲んだりしていたとき、
一人の使者がヨブのところにやって来て言った。「牛が耕し、そのそばでろばが草を食べていると、
シェバ人が襲いかかってこれを奪い取り、若い者たちを剣(つるぎ)の刃で打ち殺しました。私一人だけが逃れて、あなたに知らせに参りました。」
この者がまだ話している間に、もう一人が来て言った。「神の火が天から下って、羊と若い者たちを焼き滅ぼしました。私一人だけが逃れて、あなたに知らせに参りました。」
この者がまだ話している間に、もう一人が来て言った。「カルデア人が三組になって、らくだを襲い、これを奪い取り、若い者たちを剣の刃で打ち殺しました。私一人だけが逃れて、あなたに知らせに参りました。」
この者がまだ話している間に、もう一人が来て言った。「あなたのご子息やお嬢さんたちは、一番上のお兄さんの家で食べたりぶどう酒を飲んだりしておられました。
そこへ荒野の方から大風が吹いて来て、家の四隅を打ち、それがお若い方々の上に倒れたので、皆様亡くなられました。私一人だけが逃れて、あなたに知らせに参りました。」

이 말씀을 보면 내용은 길지만 사실 정신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크게 나누어 네 가지 재앙들이 있는데, 이를 보면 우리의 인생 중에서 하나만 일어나도 크나큰 비극이 아닐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엄청난 재앙들이 네 개나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재앙에서는 큰 바람이 와서 건물을 쳤는데 그게 무너지는 바람에 자녀들이 몰사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하지만 이렇게 된 원인에 대해서 이 수아 사람 빌닷이 말하기를, 당신의 자녀들이 죽은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다. 하나님은 언제나 공의롭지 않으시냐. 네 자녀들이 괜히 죽은 것이겠는가. 분명히 지은 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네가 회개하고 그러면 지금은 이렇게 모든 것을 잃어서 미약하지만 나중에는 크게 축복해주실 것이다……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맞는 지적인가요?

욥기 1장 1절에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ウツの地に、その名をヨブという人がいた。この人は誠実で直ぐな心を持ち、神を恐れて悪から遠ざかっていた。

욥기 1장 5절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宴会の日が一巡すると、ヨブは彼らを呼び寄せて聖別した。朝早く起きて、彼ら一人ひとりのために、それぞれの全焼のささげ物を献げたのである。ヨブは、「もしかすると、息子たちが罪に陥って、心の中で神を呪ったかもしれない」と思ったからである。ヨブはいつもこのようにしていた。

이와 같은 욥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욥기 1장 8절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主はサタンに言われた。「おまえは、わたしのしもべヨブに心を留めたか。彼のように、誠実で直ぐな心を持ち、神を恐れて悪から遠ざかっている者は、地上には一人もいない。」

보십시오. 그리고 그의 아들이 하나님 앞에서 죽을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를 데려가신 것이라고 욥의 친구 비닷은 말하지만, 그의 주장은 전혀 근거 없는 말입니다. 완전히 잘못된 지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이런 욥기 8장 7절 같은 구절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걸어놓는 것은 너무나도 무지한 일이다. 아무런 근거 없이 욥을 비난한 말이 아니냐.

이렇게 말을 했다는 글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사실 성경 말씀을 인용할 때에는 조심해야지요. 무작정 성경에 적힌 말이라고 해서 이를 하나님의 말씀이라면서 믿으라고 한다면 이는 안 됩니다. 최소한 전후맥락은 이해하고 인용을 해야겠지요.

하지만, 그렇다면 이 말씀을 걸어놓는 것은 잘못된 일인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잘 아는 요한 3서 2절 말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愛する者よ。あなたのたましいが幸いを得ているように、あなたがすべての点で幸いを得、また健康であるように祈ります。


이 문구는 요한이 편지를 쓸 때 맨 처음에 안부인사를 쓴 것일 뿐이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하자면, 글쎄요. 요즘 잘 지내십니까. 안녕하십니까……회사 공문으로 본다면, “귀사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라는, 그저 형식적인 문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구절의 전후맥락을 살펴본다면 이는 어디까지나 “안부인사”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셨냐 하면, 아, 그렇구나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아서 우리의 영혼은 잘 되지만, 우리가 죽고 난 다음에 잘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도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주님께서 원하시고 계시구나……하고 이해한 것입니다.

그렇게 받아들이신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님이셨던 것이지요. 그 결과 그 분은 현재 70만이 넘는 세계 최대의 교회를 세우게 되셨습니다.

만약에 이 말씀을 그저 안부인사 만으로만 받아들이셨다면 그와 같은 어마어마한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즉, 비록 오늘 말씀은 아무런 잘못 없는 욥한테, 그의 친구가 아무런 근거 없이 비난하는 말이긴 합니다만, 그 내용에 숨겨진 뜻, 지금 우리는 미약한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심히 창대하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이는 우리 안에서 엄청난 큰 축복으로 다가오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俵万智 1987년 サラダ記念日 3000부, 280만부


1992년 4월 11일, 한국 텔레비전의 어떤 음악 방송에 한 가수 그룹이 등장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때는 그들이 처음으로 방송에 등장한 날이었습니다.

이 곡을 들은 네 명의 심사위원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먼저 첫 번째 분, “리듬은 좋은데 멜로디 라인이 약하다. 다른 곳에 비해 멜로디 라인 쪽은 신경을 좀 안 쓴 것 같다.”

두 번째 심사위원, “자신은 노래를 들을 때 습관적으로 노랫말부터 듣게 되는데, 이 때 생각하는 것이, 첫째로, 올바른 문장으로 되어 있는가, 둘째로 새로운 이야기인가 하는 점인데, 이 노래는 새로운 형식이긴 한데, 내용까지 새로움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새로운 형식의 노래이긴 한데 내용은 좀 새로움이 없다는 평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심사위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욕적인데, 동작 속에 노래가 좀 묻힌 것 같은 아쉬움이 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심사위원은 그래도 그나마 좀 나았습니다. “새로운 형식인데, 평가는 우리가 아니라 시청자들이 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하면서 점수를 주는데, 네 명의 심사위원들이 준 점수가 8점이 3명, 7점이 1명, 평균점수 7.8점이었다고 하는데, 이게 역대 가장 낮은 점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혹평, 정말 낮은 평가를 받은 그룹이 누구였냐 하면,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불렀던 곡이 “난 알아요”였죠.

워낙 유명한 동영상이니 어쩌면 이미 보신 분들도 많으실 것입니다.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 가요계는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적어도 80년대 생 이전의 세대라고 한다면 이 서태지와 아이들이 한국 가요계 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받은 상이나 음반 판매수 같은 숫자를 논한다는 거의 무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이 역대 신기록을 수립했을 뿐만 아니라, 1994년 대한민국 학계와 언론계가 뽑은 〈광복 50년 한국을 바꾼 100인〉에 가수로서는 최초로 선정되기도 했을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어떻게 됐냐 하면 서태지는 역사적인 스타가 된 반면, 그 네 명의 심사위원 중 특별히 혹평을 했던 심사위원들은 온데 간데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있어서 가장 상처를 받을 때는,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라고 합니다. 나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나도 노력하고 있는데,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고 인정해주지 않아요. 다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요. 이럴 때 사람들은 참 힘들어하고 외롭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 그렇게 가치가 없는 존재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치를 어느 정도로 여기고 계실까요.


요한계시록 5장 9절~10절을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 9절~10절
“9.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彼らは新しい歌を歌った。「あなたは、巻物を受け取り、封印を解くのにふさわしい方です。あなたは屠られて、すべての部族、言語、民族、国民の中から、あなたの血によって人々を神のために贖い、
私たちの神のために、彼らを王国とし、祭司とされました。彼らは地を治めるのです。」

예수님은 우리를 피로 사셨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의 피로 그 대가를 지불하셨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어떤 물건을 예를 들어서 1000원에 샀다고 하면, 그 물건은 1000원의 가치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100만원을 주고 샀다면 그 물건은 100만원과 동일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가치는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그 비용으로 지불하신 것이 예수님의 피라고 하는데 이는 결국 우리의 가치가 다름 아닌 예수님의 피와 똑같은 가치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피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신명기 12장 23절에서 피는 생명(血はいのち)이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피는 예수님의 생명 그 자체인 것입니다.

즉 우리의 가치는 어느 정도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를 예수님의 생명처럼 여기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말씀입니까.

이는 그냥 상징적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0장 11절~15절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1절~15절
“11.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わたしは良い牧者(ぼくしゃ)です。良い牧者は羊たちのためにいのちを捨てます。
牧者でない雇い人(にん)は、羊たちが自分のものではないので、狼が来るのを見ると、置き去りにして逃げてしまいます。それで、狼は羊たちを奪ったり散らしたりします。
彼は雇い人で、羊たちのことを心にかけていないからです。
わたしは良い牧者です。わたしはわたしのものを知っており、わたしのものは、わたしを知っています。
ちょうど、父がわたしを知っておられ、わたしが父を知っているのと同じです。また、わたしは羊たちのために自分のいのちを捨てます。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삯꾼과 선한 목자를 비유하고 계십니다. 똑같이 양을 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리가 양들을 공격해 왔을 때 삯꾼은 도망가지만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삯꾼 雇い人(にん), 그러니까 요즘 말로 하자면 월급쟁이 사장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예를 들어서 공장에 불이 났어요. 그러면 월급쟁이 사장은 어떻게 합니까. 어차피 월급쟁이잖아요. 거기 공장에 있는 건 자기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어쩌면 내 목숨 하나 살기 위해서 도망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사장은 어떻습니까.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건지려고 끝까지 노력하겠지요. 만에 하나 그 안에 사람이라도 남아 있는다면 끝까지 살려내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예전에 2014년에 일어났던 세월호 침몰 사고에서 학생들은 그 안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자기만 먼저 살아보겠다고 나오는 선장을 보십시오. 이게 말하자면 삯꾼이지요. 하지만 그 아이들을 데리고 온 선생님들은 어땠습니까.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더 살려보겠다고 끝까지 사투를 벌이다가 결국 자신은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 선생님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많은 분들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한 목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스스로를 십자가 위에 매다셨습니다.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의 목숨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토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공격해온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실 것입니다. 왜요?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바치셨을 정도로 우리를 너무나도 아끼고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살다 보면 외로우신가요? 불안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불안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바로 앞이 안 보이기 때문에 불안한 거죠. 정말 내가 가고 있는 길,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맞는 것일까. 어쩌면 길을 잘못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불안한 것 아니겠습니까.

마태복음을 잠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입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天の御国は畑に隠された宝のようなものです。その宝を見つけた人は、それをそのまま隠しておきます。そして喜びのあまり、行って、持っている物すべてを売り払い、その畑を買います。

이 말씀을 잠시 묵상해보았더니 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사람이 밭에 감추어져 있는 보화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숨겨두고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샀다고 하는데, 이 사람이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샀다고 한다면, 그 보화는 그 사람이 그 때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를 다 합한 것 보다 더 값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여기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이 사람은 어떻게 해서 그 보화를 발견할 수 있었을까요. 뭐, 여러 이유를 상상해볼 수는 있겠습니다만, 가장 확실한 이유, 이 사람이 그 보화, 값진 보화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사람 이전에 다른 사람이 그 보화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그 사람 이전에 왜 다른 사람이 그 값진 보화를 발견할 수 없었을까요. 그것은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거기에 그와 같은 값진 보화가 감추어져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잖아요? 그 사람보다 다른 사람들이 먼저 발견했더라면 그 사람은 그 보화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무도 거기에 있는 보화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그 값진 보화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처음에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천국은 마치 감추인 보화와 같다”(天の御国は畑に隠された宝のようなもの)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주님을 믿으면서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이 정말 천국에 가는 길이라고, 이 땅에서도 창대한 축복을 받는 길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나만 이 길을 가요. 그래서 외롭게 느껴질 지도 모릅니다. 불안해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으로 가는 보화를 얻는 길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 군마도 마찬가지지요. 선교사들의 무덤이라고 하는 일본선교. 그래도 그나마 좀 하려면 동경이나 좀 큰 도시로 가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 군마현, 그것도 군마 중에서 오지에 가까운 시부카와에 우리를 데려다 놓으셨는데……이게 맞는 길인지 아닌지 참 저도 불안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신다고요? 예, 우리가 가는 이 길이 바로 값진 보화를 얻는 길, 창대한 축복을 받는 길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이건 저한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 속에서 외로울 때, 불안할 때, 주변 사람들이 아무도 나를 안 알아줄 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아, 지금 나는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것이다.
아, 지금 주님께서 인도해주신다.
아,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
지금은 미약하더라도 마침내 창대하게 해 주실 것이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앞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첫 텔레비전 출연을 했을 때의 동영상이 지금도 유튜브 동영상 사이트에 올라와 있습니다만, 거기 댓글 중에 인상적인 글이 있었습니다.

전설의 시작임을 왜 그대들은 몰랐는가

이는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을 보고 혹평을 했던 심사위원들한테 한 말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텔레비전에 처음 등장했을 바로 그 날은 전설의 시작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전설의 시작,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는 축복의 시작 시점에 서 이는지도 모릅니다.

불안하십니까.
불안해하지 맙시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두려우십니까.
두려워 하지 맙시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이 지켜주십니다.

초조하십니까.
초조해 하지 맙시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이 창대하게 해주십니다.


지금은 불안하고 두렵고 초초하고 미약한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의심을 물리치고 주님을 의지할 때에, 주님과 동행할 때에, 마침내 욥이 받은 축복의 축복을 받는, 끝내는 우리를 심히 창대하게 하시는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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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6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2019년 2월 3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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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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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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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イエス様を信じるということ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아멘?
아멘이세요? 자,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이렇게 질문을 하면 좀 어려우시다면 조금 다르게 물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보고 “아, 저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구나” 라고 하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볼 수 이을까요?

매주 교회에 다니는 것을 보면 알아요?
술 담배 안 하는 것이요?
식사하기 전에 기도하는 것을 보면, 아, 저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나요?

자, 그렇다면 반대로 물어보겠습니다.

매주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닌가요?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에요?
식사하기 전에 기도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닌가요?

여기에 대한 기준은 어쩌면 사람마다 제 각각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우리의 믿음은 성경에서 시작해서 성경으로 끝나는데 왜 이렇게 사람마다 다를까요.

그것은 뭐 성경의 해석차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물론 성경에 있어서의 견해나 해석 차이는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신학자들 사이에도 있습니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는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자기 주장을 하는 사람들, 그것도 아주 강력하게 자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신앙적으로 보았을 때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당연히 중요하지요.

그래서 믿음에 열성이 있는 분들을 보면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기도를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기도원도 많아요. 저도 한국에 있을 때 기도원에 가보기도 했습니다만, 정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밤새도록 기도를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또다시 질문을 드립니다. 간단하게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기도를 왜 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그야 당연히 응답을 받기 위해서 하지……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럼 둘째로. 기도를 오래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한 번 기도할 때 몇 시간이나 오랫동안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기도제목을 갖고 며칠 동안이나 기도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렇다면 기도를 그처럼 오래 하실까요.

이에 대한 답변도 단순합니다. 응답을 빨리 안 해주니까 그러는 거죠……라고 하시죠.

그러면서 성경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다니엘 10장 13절에 보면 다니엘이 기도를 한지 21일 만에 응답을 받았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보면 다니엘 기도회라고 해서 21일 동안 기도를 하는 집회가 열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질문입니다. 가끔 보면 큰 소리로 기도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큰 소리로 기도를 하는지 물어보면 이 또한 성경을 인용하십니다.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 (エレミヤ書)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わたしを呼べ。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に答え、あなたが知らない理解を超えた大いなることを、あなたに告げよう。』

그래서 기도를 큰 소리로 외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질문. 가끔 보면 방언으로 기도를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섬기던 교회에서도 보면 여기저기서 방언 소리가 크게 들려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방언으로 기도를 하시냐고 물으면 역시 성경을 인용해서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同じように御霊も、弱い私たちを助けてくださいます。私たちは、何をどう祈ったらよいか分からないのですが、御霊 ご自身が、ことばにならないうめきをもって、とりなしてくださるのです。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무엇을 기도 드려야 할지 몰라도 성령님께서 기도를 드린다는 거예요. 그래서 방언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질문과 그 답변.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두 수긍이 가시나요? 납득이 가시나요? 수긍이 가거나 납득이 가지 않더라도 최소한 이런 말씀들은 교회에 어느 정도 다녀보신 분들이라면 익숙한 말씀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첫번째 질문. 기도를 왜 하는가……이 부분에 대해서는 마지막에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째 질문. 기도를 왜 오래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빨리 응답을 안 해주시기 때문에 오래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는 기도를 오래 한다고 하면서 오래 하는 방법을 책으로 출판하신 분들도 계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또 누구는 기도를 몇 시간 한다, 자기는 몇 시간 하는 말씀도 들어보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6장 7절~8절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また、祈るとき、異邦人のように、同じことばをただ繰り返してはいけません。彼らは、ことば数が多いことで聞かれると思っているのです。
ですから、彼らと同じようにし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がたの父は、あなたがたが求める前から、あなたがたに必要なものを知っておられるのです。

예수님께서는 오랫동안 기도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기 또 하는 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것은 이방인들이나 하는 기도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세요.


그리고 세 번째 질문. 큰 소리로 기도를 해야 할 필요가 있나요?

이사야 59장 1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見よ。主の手が短くて救えないのではない。その耳が遠くて聞こえないのではない。

우리가 무슨 그림에 보면 하나님 얼굴이 수염도 나고 머리도 하얗고 하니까 노인이라서 귀가 잘 안 들리실까봐 큰 소리로 기도해야 하는 건가요? 성경에서 하나님은 도움의 손이 짧지도 않고 귀가 둔하지도 않다고 기록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어느 작은 교회에 다닐 때의 일인데, 거기서 찬양을 인도하는 자매가 있는데 매주 보면 목이 쉬어 있어요. 그러니 찬양이 제대로 될 리가 있겠어요? 고음은 고사하고 보통 음도 소리가 잘 안 나옵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목이 쉬어있냐고 하니까, 아~ 매일 밤 주님께 부르짖어보래요.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나……그러면서 마치 자신은 무슨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처럼 말을 하는 모습을 보고 참 안타까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니, 그래도 찬양을 한다는 사람이 자기 목소리 하나 관리 못해서 되겠습니까? 그러면서 그게 믿음이 좋다는 것인가요? 참으로 딱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요.

다음은 네 번째 질문. 방언으로 기도를 하시는 분들을 보면, 물론 이는 성경에 나옵니다. 사도 바울도 방언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8절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라고 고백합니다.

私は、あなたがたのだれよりも多くの異言で語っていることを、神に感謝しています。

그 뿐만 아닙니다.

같은 고린도전서 14장 39절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라고 까지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ですから、私の兄弟たち、預言することを熱心に求めなさい。また、異言で語ることを禁じてはいけません。

방언은 엄연히 성경에 기록된 은사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 교회를 보면 여기저기서 큰 소리로 방언을 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앞서 말씀 드렸던 기도원에서도 얼마나 많은 분들이, 그것도 한밤중에도 큰 소리로 방언기도를 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특별히 방언에 대해서 많이 적힌 고린도전서 14장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있습니다.

14장 13절~14절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そういうわけで、異言で語る人は、それを解き明かすことができるように祈りなさい。
もし私が異言で祈るなら、私の霊は祈りますが、私の知性は実を結びません。


이 말씀을 보면 바울은 방언을 하는 것도 좋지만 그 방언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는 통역의 능력도 달라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방언으로만 기도 하고 그 뜻을 모른다면 마음에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 (知性は実を結びません), 즉 유익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14장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절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愛を追い求めなさい。また、御霊の賜物、特に預言することを熱心に求めなさい。

14장 5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私は、あなたがたがみな異言で語ることを願いますが、それ以上に願うのは、あなたがたが預言することです。異言 で語る人がその解き明かしをして教会の成長に役立つのでないかぎり、預言する人のほうがまさっています。

방언만을 구하지 말고 오히려 예언하기를 구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교회에 몇 십 년을 다니면서 방언을 한다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이 봐왔습니다만, 방언을 통역한다는 분은, 그런 분들이 계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만, 아직 제가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습니다.

참고로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인터넷에 방언이나 방언을 통역한다는 은사를 흔히들 “통변의 은사”라고 하는데, 이를 검색해 보니까, 쪼금 요상한 사이트들이 많이 떠서 금방 닫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언을 한다”고 하는 분들은 특히나 만나본 적도 없고, 자기는 방언 통역이나 예언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는 사람들 역시 본 적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3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ですから、教会全体が一緒に集まって、皆が異言で語るなら、初心の人か信じていない人が入って来 たとき、あなたがたは気が変になっていると言われることにならないでしょうか。(気が狂っていると言わないでしょうか。)

14장 28절~29절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解き明かす者がいなければ、教会では黙っていて、自分に対し、また神に対して語りなさい。
預言する者たちも、二人か三人が語り、ほかの者たちはそれを吟味しなさい。

성경에는 분명히 이렇게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즘도 한국 교회에 보면 여기저기서 큰 소리로 막 방언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9절을 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同じようにあなたがたも、舌で明瞭なことばを語らなければ、話していることをどうして分かってもらえるでしょうか。空気に向かって話していることになります。

그리고 14장 19절
“그러나 교회에서 내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しかし教会では、異言で一万のことばを語るよりむしろ、ほかの人たちにも教えるために、私の知性で五つのことばを語りたいと思います。

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끔 보면 교회나 사람에 따라서는 방언 은사를 중요시하는 나머지 방언 은사가 없는 사람은 믿음이 적은 사람으로 보는 경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글쎄요. 제가 방언을 해본적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방언기도를 한다면서 다들 보면 “까라바리야 사라바리야 까라바리야 사라바리야” 하고 반복하거나 “렐렐렐렐렐……”하고 하는 모습을 보면 글쎄, 저게 정말 방언인가 하는 생각도 들기도 합니다.

성경 말씀대로 저도 방언을 금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방언 기도를 하신다면 먼저 성경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를 보시고 성경에 적힌 그대로 하셔야지만 은혜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첫 번째 질문입니다. 기도를 하는 이유는 응답을 받기 위해서입니까. 마침 요즘은 일본의 수능시즌인데, 만약에 예수님을 믿는 100명의 수험생이 1지망에 합격하게 해달라고 모두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누구는 합격을 했는데 누구는 합격이 안됐습니다.

그렇다면 합격할 수 없었던 사람은 기도를 헛한 건가요? 기도에 있어서 패배자인가요?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니, 그렇잖아요. 기도는 응답을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면, 합격할 수 없었다는 것은 응답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니 결국 기도의 실패자라는 뜻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입니까.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나는 것입니까.

여러분. 목사님 설교 말씀 몇 마디 듣고, 성경 구절 몇 마디 외우고, 그것이 믿음이라 생각하고, 나중에는 그저 죽어라고 기도만 하는 것. 이것이 믿음인가요?

저는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무엇이 빠졌습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이 빠졌습니다. 말씀이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자기가 드리는 기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어떻게 올바른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는 우리의 고집을 세우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고집을 이기기 위해서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에 술 담 배 안 하면서 사람한테 상처 입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금식 철야 한다면서 자기만 생각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이 어떻게 올바른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すべて疲れた人、重荷を負っている人はわたしのもとに来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休ませてあげます。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쉬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 속에서 쉼을 얻지 못했다면 이는 우리의 믿음을 한 번 점검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 응답, 소원 성취가 문제가 아닙니다. 기도를 하는데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철야를 합니다. 그래도 안 되니까 금식을 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어떻게 해요? 예,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이 살았다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한탄을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께서 최근에 장난감 가게에 가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저도 얼마 전에 우연히 지나가다가 장난감 가게에 한 번 들어가봤습니다만, 그러면 꼭 들려오는 소리가 뭐예요? 예, 가끔 보면 애들 울음 소리가 들려옵니다. 장난감을 사달라고 막 울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가 사달라는 것을 다 사주나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예요? 아니에요. 아이를 사랑합니다. 오히려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때로는 그렇게 아이가 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들어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그 부모를 원망해야 하나요? 엄마 아빠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안 사준다고 믿어야 하나요? 아닙니다. 그건 오히려 잘못된 생각이죠.

이를 모르는 어른들이 있어요? 아니요. 없습니다. 알죠. 그러면서 왜 자기는 하나님한테는 그렇게 고집을 부리십니까. 그리고 안 들어주면 왜 억지를 부리고 하나님을 원망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 안에서 쉼을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 생각에는 이게 이렇게 되어야 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이건 이렇게 되어야 하고, 저건 저렇게 되어야 해……이건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이 되겠다는 말이나 다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 생각을 따르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 대로 하나님이 움직여야 한다고 믿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얼마 전에 뉴스를 보니까 결혼생활이 힘들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 보면요. 회사 일이 너무나도 힘들어서 또 역시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참 안타깝죠. 그리고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결혼생활이 힘들면 좀 별거를 해본다거나, 그것도 안 되면 차라리 헤어지지.

회사? 아무리 좋은 회사, 아무리 힘들게 들어간 회사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힘들면 좀 쉬던가, 아니면 차라리 그만 두면 되지, 왜 그렇게 슬픈 결말을 맞이해야만 했을까.

사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보면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생각이 모자라서도 아닙니다. 오히려 좀 생각이 모자라거나, 생활 자체에 있어서도 좀 대충대충 하고 그런 사람들은 이런 경우가 드물어요. 반대로 정말 착실하고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사람들이 이런 안타까운 일들을 당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제가 좀 심하게 말씀 드렸는지 모르지만요, 솔직히 이런 고민을 하는 분들을 보면요, 그냥 대충대충 믿는 사람들은 이런 고민들도 안 해요. 믿음이 참 좋은 분들, 주님을 어떻게든 잘 믿어보려고 애를 쓰는 분들이 철야도 하고 새벽기도도 하고, 기도원에 가보기도 하고 금식도 하기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안 되니까 답답해하고 절망도 하고,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一人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요한일서 4장 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私たちは自分たちに対する神の愛を知り、また信じています。神は愛です。愛のうちにとどまる人は神のうちにとどまり、神もその人のうちにとどまっておられます。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냥 말로만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무참하게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나도 명확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쉼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우리는 잘 됩니다. 지금 잘 안 되더라도 결국은 잘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해주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61장 3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シオンの嘆き悲しむ者たちに、灰の代わりに頭の飾りを、嘆きの代わりに喜 びの油を、憂いの心の代わりに賛美の外套を着けさせるために。彼らは、義の樫(かし)の木、栄光を現す、主の植木と呼ばれる。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초조해하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찬송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생이 힘 드십니까. 고달프십니까. 정말 죽고 싶으십니까.

그 마음, 그 힘든 마음. 설령 아무도 못 알아준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항상 기다리고 계십니다. 힘 드시면 성경을 펴 보십시오. 두 눈을 감고 주님께 기도를 드려보십시오. 주님께서 주님의 마음을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피멍 든 가슴을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바로 주님 안에서 쉼을 얻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항상 불안해하고 항상 초조해한다면 이는 우리 믿음에 분명히 문제가 있다는 신호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우리는 결국은 잘 됩니다. 지금은 힘들고 어렵더라도 결국은 잘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 안에서 진정한 쉼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사랑의 하나님, 사랑의 예수님, 그리고 사랑의 성령님을 믿고 의지하며, 사랑의 주님 품 안에서 진정한 쉼을 얻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167회 창대한 축복의 시작 →

← 제165회 꾸짖으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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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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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5회 꾸짖으신 예수님
2019년 1월 2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4장 35절~41절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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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꾸짖으신 예수님” 叱りつけたイエス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은 배에 타서 건너고 있는데 갑자기 큰 광풍이 불어왔다고 합니다. 지금처럼 무슨 튼튼한 배도 아니고 그냥 나룻배나 고기잡이 배였을 텐데 물 위에서 광풍이 부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배는 위아래로 오르락 내리락 합니다. 오른쪽 왼쪽으로 심하게 흔들려요. 그리고 무슨 지붕이 있는 배도 아니었을 것이기에 물들이 배 안으로 넘쳐옵니다.

그들 중에는 베드로를 비롯해서 요한이나 야고보처럼 오랫동안 고기잡이를 해왔던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배 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에요. 그러니 자신들의 자존심도 있겠지요. 그래서 그 때까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지식이나 경험으로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거 난리 났다고 하면서 뒤를 봤더니만, 뭐가 보여요? 예, 저 뒤편에서 예수님이 누워서 주무시고 계세요. 그 때 그 사람들의 심경이 어땠겠습니까.

아니, 지금 제정신이야, 뭐야. 자기가 선생이면 다야?
배를 좀 어떻게라도 해보려면 사람 손이 아쉬운 마당에 뒤에서 자고 있으면 어떡해?
이런 상황에서 잠이 와?

입으로 말이야 안 했겠지만 이렇게 다급한 상황에서 그런 생각이 안 들었겠습니까.

그래서 제자들이 뭐라고 했대요?


오늘 말씀 중 38절 후반부를 봅니다.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弟子たちはイエスを起こして、「先生。私たちが死んでも、かまわないのですか」と言った。

차마 심한 말은 못하고, 선생님, 우리가 이렇게 죽게 됐는데 그냥 그렇게 주무시고 계실 겁니까. 좀 어떻게 해보세요……라고 한 것이지요.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음 구절을 봅니다. 39절입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イエスは起き上がって風を叱りつけ、湖に「黙れ、静まれ」と言われた。すると風はやみ、すっかり凪になった。

예수님께서는 그제서야 깨어나시더니 바람과 바다를 향해 <잠잠하라 고요하라 黙れ、静まれ>라고 하셨더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해졌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오는 표현이 흥미롭습니다. <바람과 바다에게 명하여>라고 해도 될 것도 같은데 굳이 <꾸짖었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래요. 뭐 이를 두고 글을 쓴 마가의 문학적 표현이라고 하면 그럴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같은 장면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등장합니다.


먼저 마태복음부터 보도록 하시겠습니다. 마태복음 8장 26절 후반부입니다.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それから起き上がり、風と湖を叱りつけられた。すると、すっかり凪になった。

누가복음도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8장 24절 후반부입니다.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イエスは起き上がり、風と荒波を叱りつけられた。すると静まり、凪になった。

이렇게 보면 오늘 말씀을 적은 마가만이 아니라 마태와 누가도 역시 <꾸짖었다>는 표현을 똑같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큰 소리로 명하셨다……도 아닌 세 사람이 하나같이 <꾸짖었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두고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절묘한 것 같습니다.

복음서의 기록을 두고 신학자들 사이에는 정말 그들이 직접 보고 쓴 것인지, 아니면 누가 쓴 것을 보고 편집을 한 것인지 아직 다툼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런 어려운 논쟁들을 제쳐두고 단순히 생각해 본다면, 적어도 이 세 사람이 보기에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는 것처럼 보였다고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가 보통 꾸짖었다고 한다면 상대방은 무슨 잘못이 있는 경우이겠지요. 물론 우리들은 모두 완벽하지 않은 사람인지라, 사람이 아무리 상대방을 꾸짖었다 하더라도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에 잘못이 있는지는 따져봐야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친히 꾸짖었다고 하셨으니 이는 100프로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우리는 봐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상대방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분명 바람과 바다입니다. 바람과 바다가 잘못을 했으니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신 것이라고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다만, 자, 그렇다면 바람과 바다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 꾸짖으셨을까요. 오늘은 이 예수님의 꾸짖음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첫 번째로 바람과 바다의 잘못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이 좀 이상하긴 합니다만 일단 이해하고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바람과 바다가 잘못을 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들이 잘못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큰 돌풍과 파도 때문에 예수님께서 타신 배가 앞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즉, 돌풍과 파도는 결국 예수님의 앞길을 막았던 것이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옛날에 임금님이 가마를 타고 행차를 하는데 그 앞길을 막는다고 하면 살아 남겠습니까?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임금님도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가시고자 하는 그 앞길을 막는다고 하니, 제아무리 바람이나 바다다 할지라도 혼이 안 날 수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혼이 나야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뭐,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만, 제가 지금 하는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린다 하더라도 이해해주시고 잠시만 더 들어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 앞길을 막아 섰던 바람과 바다를 향해 꾸짖으셨습니다. 그 결과 바람은 고요해지고 바다도 잔잔해졌습니다. 그럼 이제 모두 해결된 건가요? 아닙니다.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시간을 조금 앞으로 되돌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큰 돌풍이 불어봅니다. 심하게 파도가 휘몰아칩니다. 온 천지가 흔들립니다. 배도 겉잡을 수 없이 흔들립니다. 하지만 흔들린 것은 그 뿐이었나요? 아니에요. 그 외에도 흔들리고 있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같이 타고 있던 제자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증거는 바로 그들의 말이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25절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弟子たちは近寄ってイエスを起こして、「主よ、助けてください。私たちは死んでしまいます」と言った。

마가복음 4장 38절 후반부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弟子たちはイエスを起こして、「先生。私たちが死んでも、かまわないのですか」と言った。

누가복음 8장 24절 전반부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そこで弟子たちは近寄ってイエスを起こし、「先生、先生、私たちは死んでしまいます」と言った。

제자들은 오늘 일을 겪기 전에 그 때까지 예수님의 설교도 많이 들었습니다. 기적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과 한 배를 타고 있음에도 그들은 하나 같이 지금 자기들이 죽게 되었다고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보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던 것, 좌로 흔들 우로 흔들 하고 있던 것은 그들이 타고 있던 배만이 아니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바로 그들의 믿음 또한 폭풍 위에 떠 있는 배처럼, 아니 그보다도 더욱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앞서서 바람과 바다가 잘못했다고 했습니다만, 사실 바람이나 바다가 잘못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바람은 단지 불었을 뿐이고, 그렇기 때문에 바다는 출렁거렸을 뿐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배도 흔들렸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서 무엇이 드러나게 되었냐 하면, 예수님과 같은 배에 타고 있던 제자들이 아직도 얼마나 믿음이 부족했는가 하는 것이 여실히 탄로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보면 모두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8장 26절 전반부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イエスは言われた。「どうして怖がるのか、信仰の薄い者たち。」……

오늘 말씀 중 마가복음 4장 40절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どうして怖がるのですか。まだ信仰がないのですか。」

누가복음 8장 25절 전반부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イエスは彼らに対して、「あなたがたの信仰はどこにあるのですか」と言われた。

사실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대상은 바람과 바다가 아닌 아직도 여전히 작은 믿음만 가지고 있던 제자들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렇게 함께 있어주고 그렇게 많이 보여주고 그렇게 많이 들려주었는데도, 아직도 믿음이 그것 밖에 안 되느냐 하시면서 제자들을 꾸짖으셨던 것입니다.

병원에서 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때 보면, 물론 작은 건 그냥 한다 하더라도 좀 큰 치료를 하거나 아니면 수술을 할 때 환자를 보통 마취를 하지요? 그렇다면 마취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죠. 물론 환자가 통증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만, 더욱 큰 이유는 환자가 움직이지 못하게, 난리 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술을 해야 하는데 환자가 아프다고 난리를 치고 도망가고 하면 어떻게 치료를 하겠습니까. 그래서 움직이지 못하고 꼼짝 못하도록 특별히 전신마취를 하는 것이지요.

출애굽 당시의 유대인들을 보면 어떻습니까. 애굽을 빠져 나왔을 때에 그들은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이제 몇 백 년에 걸친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서는 애굽 정예부대가 추격해봅니다.

출애굽기 14장 11절~12절
“11.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そしてモーセに言った。「エジプトに墓がないからといって、荒野で死なせるために、あなたはわれわれを連れて来たのか。われわれをエジプトから連 れ出したりして、いったい何ということをしてくれたのだ。
エジプトであなたに『われわれのことにはかまわないで、エジプトに仕えさせてくれ』と言ったではないか。実際、この荒野で死ぬよりは、エジプトに仕えるほうがよかったのだ。」


그러자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시지요.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 민족을 모두 건너게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추격해오던 애굽 군대를 모두 홍해 바다에 잠겨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출애굽기 15장 1절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そのとき、モーセとイスラエルの子らは、主に向かってこの歌を歌った。彼らはこう言った。「主に向かって私は歌おう。主はご威光を極みまで現され、馬と乗り手を海の中に投げ込まれた。

이제 언제 그랬냐는 듯이 (手のひらを返したように)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감사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같은 15장 22절~24절을 봅니다.

“22.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モーセはイスラエルを葦の海から旅立たせた。彼らはシュルの荒野へ出て行き、三日間、荒野を歩いた。しかし、彼らには水が見つからなかった。
彼らはマラに来たが、マラの水は苦くて飲めなかった。それで、そこはマラという名で呼ばれた。
民はモーセに向かって「われわれは何を飲んだらよいのか」と不平を言った。


아니, 얼마나 지났다고 또 모세를 원망합니까. 그 놀라운 기적을 직접 보고도 벌써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원망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들의 원망은 계속됩니다.

출애굽기 16장 2절~3절
“2.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そのとき、イスラエルの全会衆は、この荒野でモーセとアロンに向かって不平を言った。
イスラエルの子らは彼らに言った。「エジプトの地で、肉鍋のそばに座り、パンを満ち足りるまで食べていたときに、われわれは主の手にかかって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のだ。事実、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をこの荒野に導き出し、この集団全体を飢え死にさせようとしている。」

출애굽기 17장 3절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民はそこで水に渇いた。それで民はモーセに不平を言った。「いったい、なぜ私たちをエジプトから連 れ上ったのか。私や子どもたちや家畜を、渇きで死なせるためか。」


민수기 14장 3절~4절
“3.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なぜ主は、われわれをこの地に導いて来 て、剣に倒れるようにされるのか。妻や子どもは、かすめ奪われてしまう。エジプトに帰るほうが、われわれにとって良くはないか。」
そして互いに言った。「さあ、われわれは、かしらを一人立ててエジプトに帰ろう。」

그들의 불평 불만은 끝이 없습니다. 이처럼 흔들리는 믿음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들을 전신마취 시켜버렸습니다. 40년 동안 꼼짝없이 광야 안에 가둬버리시고는 집중적으로 그들을 훈련시켰던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일이 있을 때 기뻐하는 거요? 믿음이 있어야 기뻐하나요? 아니에요. 믿음이 없어도 좋은 일이 있으면 기뻐합니다. 이는 마치 어린 애들한테 맛있는 사탕을 주면 좋아하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자기가 좋아하는 맛있는 사탕을 주는데, 그걸 보고 좋아하기 위해서는 교양이 필요해요, 지식이 필요해요. 아니면 믿음이 필요해요? 아니요. 그런 것 없어도 기뻐합니다. 그냥 기뻐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진정한 믿음이 있느냐 하는 것은 그렇지 않을 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 보면 사람들이 아브라함이나 야곱 이야기는 많이 하는데 막상 그 사이에 있는 이삭 이야기는 별로 안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왠지 모르게 과소평가 하기 쉬운 것 같습니다만 이 이삭을 보면 진정한 큰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26장 19절~22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19.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20.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21.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22.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イサクのしもべたちがその谷間を掘っているとき、そこに湧き水の井戸を見つけた。
ゲラルの羊飼いたちは「この水はわれわれのものだ」と言って、イサクの羊飼いたちと争った。それで、イサクはその井戸の名をエセクと呼んだ。彼らがイサクと争 ったからである。
しもべたちは、もう一つの井戸を掘った。それについても彼らが争ったので、その名をシテナと呼んだ。
イサクはそこから移って、もう一つの井戸を掘った。その井戸については争 いがなかったので、その名をレホボテと呼んだ。そして彼は言った。「今や、主は私たちに広い所を与えて、この地で私たちが増えるようにしてくださった。」

너무나 대단하지 않습니까. 자신이 애써 우물을 팠어요. 그런데 다툼이 생겼어요. 다른 사람이 그걸 자기들 거라고 그런 거예요. 그러자 이삭은 싸웠대요? 아니요. 그냥 다른 곳에 우물을 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누가 시비를 걸어와요. 그랬더니 또다시 옮겨서 새로운 우물을 파고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는 이삭이 모자라서 그랬을까요? 아니요. 이러한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다툼을 피하고 평안을 추구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큰 믿음 아니겠습니까. 이삭의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그는 흔들리지 않는 안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까 한국이나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인기직업 1순위가 똑같다는 것이에요. 요즘 한국도 일본도 학생들 사이에서 공무원이 그렇게 인기라고 합니다. 물론 옛날에도 공무원 인기는 높았습니다만, 옛날에는 판검사나 외교관 같은 아무래도 고위공무원 인기가 높았지요. 하지만 요즘은 지방공무원, 중하급 공무원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며칠 전에는 이에 대해서 저희 집사람이랑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집사람 말이 이래요. 요즘 한국에서 9급 공무원이라도 되려면 조상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니, 목사 마누라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하고 따지려고 했더니, 그게 아니라, 한국에는 자기 집안 중에 국가유공자로 지정된 사람이 있으면 그런 취직시험 같은 데에 가산점이 붙는 제도가 있는데, 그런 가산점이라도 받지 않으면 하위직이라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기 어려울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이 공무원이라는 직업과 일반 회사 직원을 비교해보면 어떨까요.

일반 회사원의 경우 회사가 돈을 많이 벌게 되면 보너스를 받거나 아니면 무슨 특별 휴가 같은 것을 받는 경우도 있겠지만, 안 좋아지면 어떻습니까. 텔레비전을 보면 아무리 큰 회사라 하더라도 상황이 어려워지면 명예퇴직이나 정리해고를 한다는 말을 듣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반면에 공무원은 어떻습니까. 세금이 많이 걷힌다고 보너스를 받나요? 아니면 특별 휴가? 그랬다가는 큰일 나죠. 그건 다 국민들이 내는 혈세입니다. 하지만 반면에 자금 사정이 어려진다 하더라도 명예퇴직이나 정리해고 같은 것은 없지요.

한국이나 일본에서 공무원의 인기가 나날이 오르는 이유 중 하나는, 아무리 큰 회사라 하더라도 일반 회사는 경기가 안 좋아지면 나와야 하는 반면, 공무원은 이와 같은 안정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로 하나님 나라의 공무원이라고 하는 마음 가짐을 갖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고 모두가 목사나 전도사가 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안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안정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잠시 에스더서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에스더 4장 14절입니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もし、あなたがこのようなときに沈黙を守るなら、別のところから助けと救いがユダヤ人のために起こるだろう。しかし、あなたも、あなたの父の家も滅 びるだろう。あなたがこの王国に来たのは、もしかすると、このような時のためかもしれない。」


역적 하만이 유다인들을 다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모르드개가 왕비 에스더에게 말하지요. 네가 지금 아무 일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다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너와 너의 집 가문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는 말인데, 우리는 이 구절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안정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어떤 사람을 믿어서가 아닙니다. 어떤 재산이나 세상적인 어떤 기득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어쩌면 그런 것들은 언제든지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들이지요.

하지만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믿음, 그와 같은 흔들리지 않는 안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쓰셔서 주님의 일을 하실 수 있고,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큰 축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작은 배는 물이 조금만 출렁여도 흔들리고 뒤집힙니다만, 큰 배는 바람이 불어와도 파도가 몰아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작은 믿음은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 오더라도 믿음이 흔들리고 하나님을 원망하지만 큰 믿음은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와도 주님을 믿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 힘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해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의 작은 믿음을 보시고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 것처럼 우리를 꾸짖으시면 어쩌시겠습니까.

아니,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신 것처럼 전신마취라도 하시면 어쩌겠습니까. 이는 정말 큰일 납니다. 그러기 전에 우리는 정신을 바싹 차려야 하겠습니다. 気を強く持たなければなりません

우리 모두 큰 믿음, 안정적인 믿음, 강한 믿음을 갖고 주님께 감사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릴 때에 주님의 놀라운 축복, 큰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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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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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회 용서와 사랑과 소망
2019년 1월 2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욥기 1장 8절~12절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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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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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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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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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용서와 사랑과 소망” 許しと愛と希望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이 포함된 욥기는 신구약 총 66권 성경 중에서도 대단히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 욥기를 몇 번이나 읽어보신 적이 있으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아직 한 번도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도 계시겠지요.

그렇다면 몇 번이나 이 욥기를 읽어보신 적이 있으신 분들께 여쭙겠습니다. 이 욥기, 어떠십니까. 성경 전체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책이라고 하는, 내가 다시 읽고 싶은 책이라고 하는 순서를 메긴다고 한다면 이 욥기, 총 66권 중에서 몇 번째 정도에 두시겠습니까.

저도 몇 번 읽어보았습니다만, 어쩌면 참 답답하고 암울하고 그런 내용일 수가 있습니다. 욥기 내용 중 대부분이, 글쎄요. 색깔로 표현하면 회색? 그것도 아주 짙은 회색빛으로 가득 차 있는 느낌마저 받습니다. 참 암울한 내용이에요. 물론 사람들에 따라서 다르겠습니다만, 일반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본다면, 성경 66권 중에서 다시 읽고 싶은 순위가 10위 권에는 들기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가이고 작가일 뿐만 아니라 종교혁명가였던 마틴 루터는 이 욥기를 두고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탁월한 책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욥기에 대해서 오늘은 잠시 알아보려고 합니다.

에스더서와 시편 사이에 있는 이 욥기는 총 42장으로 구성된 꽤 긴 책입니다. 이 욥기의 주인공은 <욥>이라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 욥기에 대해서는 다른 책에서 찾아보기 힘든 부분이 몇 가지 있습니다.

먼저 이 욥기의 특징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욥기는 배경이 되는 시대가 언제인지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다른 성경들은 물론 지금처럼 서기 몇 년이다 하는 기록은 없을지라도, 당시 어느 나라가 있었다거나 아니면 어느 왕이 있었던 시대라거나 하는 식의 기록이 있어서, 대략 언제쯤의 이야기인지 가늠할 수가 있습니다만, 욥기는 그런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단서는 있지요. 예를 들어서 욥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만, 반면에 구약이라면 당연히 등장하는 단어라고 할 수 있는 <유대인> 또는 <율법>이라는 단어를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유대인> 또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말은 적어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후에 나온 말이기 때문에, 욥기가 적힌 시대는 아브라함 이전 시대가 아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율법>은 모세 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욥기가 아브라함 이전에 적힌 글이라면 당연히 모세가 태어나기 적어도 몇 백 년 전에 적혔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 점도 수긍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이 욥기에 적힌 시대배경을 대략적으로 창세기 11장 후반 정도로 보는 경향이 많다고 합니다.

둘째로 욥이 실존 인물이었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이처럼 시대 배경이 모호하기 때문에 어쩌면 욥은 실존인물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 픽션으로 만들어낸 가상 인물이고, 이 내용도 사람들의 상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다 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에스겔 서를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에스겔 14장 12절~14절을 봅니다.

에스겔 14장 12절~14절
“12.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3.인자야 가령 어떤 나라가 불법을 행하여 내게 범죄하므로 내가 손을 그 위에 펴서 그 의지하는 양식을 끊어 기근을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나라에서 끊는다 하자
14.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次のような主のことばが私にあった。
「人の子よ。国が、わたしに対して罪あるものとなって信頼を裏切 り、そのためわたしがその国に手を伸ばし、そこのパンの蓄えをなくし、その国に飢饉を送り、人や家畜をそこから絶ち滅ぼすとき、
たとえ、そこにノアとダニエルとヨブの、これら三人の者がいても、彼らは自分たちの義によって自分たちのいのちを救い出すだけだ──神である主のことば──。

이 말씀은 어떤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노아와 다니엘과 욥……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노아와 다니엘은 성경의 여러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실존했던 인물이라는 근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다니엘과 함께 욥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실존했던 노아와 다니엘과 함께 실존인물이 아닌 욥을 말씀하셨다? 이는 대단히 부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이 세 사람, 즉 노아와 다니엘과 욥에 대한 말씀이 이 14절 만이 아니라 16절, 18절, 20절에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도 하나님께서는 이 세 사람을 대단히 비중 있는 인물로 보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욥은 노아와 다니엘처럼 실제로 존재했다고 성경은 인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이 욥기에서는 대단히 흥미로운 장면이 등장합니다. 세상에, 하나님께서 계신 자리에 사탄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탄이 대화까지 합니다. 이는 정말 놀라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신학자들의 논란이 아직 있습니다. 물론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과 사탄이 대화하는 장면은 나옵니다만, 이처럼 하나님과 사탄이 직접 대화하는 장면은 이 욥기 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특징, 이는 욥기의 가장 큰 특징이자 어쩌면 우리가 가장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특징일지도 모릅니다. 이는 욥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대단히 큰 불행을 겪는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욥기 1장 1절 후반부에 보면 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この人は誠実で直ぐな心を持ち、神を恐れて悪から遠ざかっていた。

이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한테 욥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자랑까지 하십니다.

욥기 1장 8절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主はサタンに言われた。「おまえは、わたしのしもべヨブに心を留めたか。彼のように、誠実で直ぐな心を持ち、神を恐れて悪から遠ざかっている者は、地上には一人もいない。」

그런데 나중에 보면 어떻게 되었냐 하면 욥은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잃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도 대단히 심각한 질병을 앓게 되고 맙니다. 이는 그야말로 큰 불행이라고 할 수 있지요. 오늘은 특별히 이 욥기의 네 번째 특징, 욥은 대단히 훌륭한 인물이었고 믿음도 큰 사람이었지만, 도대체 왜 이렇게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성경은 이와 같은 기록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는지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욥기 1장 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에 대한 자랑을 하십니다. 그러자 사탄은 하나님께 반박을 하지요.

욥기 1장 10절~11절
“9.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11.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サタンは主に答えた。「ヨブは理由もなく神を恐れているのでしょうか。
あなたが、彼の周り、彼の家の周り、そしてすべての財産の周りに、垣を巡らされたのではありませんか。あなたが彼の手のわざを祝福されたので、彼の家畜は地に増え広がっているのです。
しかし、手を伸ばして、彼のすべての財産を打ってみてください。彼はきっと、面と向かってあなたを呪うに違いありません。」


그랬더니 어떻게 됩니까. 12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主はサタンに言われた。「では、彼の財産をすべておまえの手に任せる。ただし、彼自身には手を伸ばしてはならない。」そこで、サタンは主の前から出て行った。

하지만 사탄이 욥의 모든 소유물을 모두 빼앗았는데도 욥이 믿음을 버리지 않자 사탄은 하나님께 다른 제안을 합니다.

욥기 2장 5절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しかし、手を伸ばして、彼の骨と肉を打ってみてください。彼はきっと、面と向かってあなたを呪うに違いありません。」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 제안도 받아들이십니다.

욥기 2장 6절~7절
“6.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7.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主はサタンに言われた。「では、彼をおまえの手に任せる。ただ、彼のいのちには触れるな。」
サタンは主の前から出て行き、ヨブを足の裏から頭の頂まで、悪性の腫物(しゅもつ)で打った。

지금까지 믿음이 좋은 분들 중에서 이 욥기를 처음 읽는 분들이 계시면, 이 시점이 되면 아마도 당황하지 않을까 합니다.

여기까지 이야기의 흐름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탄한테 괜히 욥에 대한 자랑을 하셨다가, 사탄이 말하는 잔꾀에 흥분한 하나님이 넘어가서 멀쩡한 욥이 어려움을 당하게 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정말 사탄이 한 이 말 한 마디에 흥분하셔서, 아무런 죄가 없는 욥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버리신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이 마귀 사탄의 말에 그렇게 쉽게 넘어가는 분이실까요?

아니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서는 왜 이처럼 쉽게 사탄의 꼬임에 넘어가신 것처럼 말씀하셨을까요.

이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비밀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마귀 사탄의 두 번의 말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욥기 1장 11절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しかし、手を伸ばして、彼のすべての財産を打ってみてください。彼はきっと、面と向かってあなたを呪うに違いありません。」

욥기 2장 5절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しかし、手を伸ばして、彼の骨と肉を打ってみてください。彼はきっと、面と向かってあなたを呪うに違いありません。」


이 두 구절에서 사탄은 똑같이 한 가지 목적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구절에 토시 하나 차이 없이 등장한 문구가 있는데 이는 바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彼はきっと、面と向かってあなたを呪うに違いありません。)라고 하는 사탄의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기에는 사탄의 본심이 드러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에는 사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こうして、その大きな竜、すなわち、古い蛇、悪魔とかサタンとか呼ばれる者、全世界を惑わす者が地に投げ落とされた。また、彼の使いたちも彼とともに投げ落 とされた。

사탄은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합니다. 사탄은 어떻게 꾑니까. 우리는 창세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善悪の知識の木)의 열매를 하와가 먹게 하기 위해서 사탄은 교묘한 말로 속입니다.

창세기 3장 5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それを食べるそのとき、目が開かれて、あなたがたが神のようになって善悪を知る者となることを、神は知っているのです。」


이 사탄의 말은 완전한 거짓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로 이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지,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꾀는 영, 속이는 영 全世界を惑わす者 인 사탄은 하와를 간교한 말로 속였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탄의 속임에 넘어간 하와와 아담은 결국 타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처럼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사탄은 절대로 자신의 의도를 노출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목적을 숨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욥기 1장과 2장에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마지막 목적을 실토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욕하게 만드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마귀 사탄의 충동에 넘어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탄의 철저한 비밀을 자기 입으로 실토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마귀의 꾀임에 넘어간 사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꾀임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 앞에 놓인 것은 철저한 징계였습니다. 그 때까지 머물렀던 에덴, 아무런 걱정 없이 영원히 지낼 수 있었던 하나님의 품인 에덴에서 추방 당하고 말았습니다. 거기에는 용서도 없었습니다. 사랑도 없었습니다. 소망도 없었습니다. 오직 징계와 절망 뿐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 입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을까요? 그와 같은 기록은 없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아들인 가인은 결국 자신의 동생을 죽이는 살인까지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아도 그 가정에 사랑이 넘치고 기쁨이 넘치는 가정이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탄의 계략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만든 이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증오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죄성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우리는 하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이것이야 말로 마귀 사탄의 마지막 목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간의 거리가 멀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 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죄가 존재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죄가 용서 받지 못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이에 죄가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가까워질래야 가까워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에 죄가 있다면 결국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지옥행입니다. 우리는 지옥 외에 다른 곳으로 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 마귀 사탄이 바라는 것은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죄로 인해서 멀어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 하늘에서 땅끝까지 멀어진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깝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피를 흘려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재물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마귀 사탄의 계획,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영원히 벌려놓으려고 했던 마귀 사탄의 계획은 철저하게 실패하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우리에게 알리려고 하셨습니다. 마귀 사탄의 계획을 다른 사람이 말해도 안 믿을 수 있으니까, 가장 정확하게 마귀 사탄 스스로 그 입으로 말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거리가 멀어졌던 것은 하나님과의 거리 뿐일까요? 아닙니다. 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도 너무나도 멀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 대해서도 욥기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욥기 2장 11절~13절을 봅니다.

“11.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12.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13.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さて、ヨブの三人の友が、ヨブに降りかかったこれらすべてのわざわいのことを聞き、それぞれ自分のところから訪ねて来 た。すなわち、テマン人エリファズ、シュアハ人ビルダデ、ナアマ人ツォファルである。彼らはヨブに同情し、慰めようと、互いに打ち合わせて来た。
彼らは遠くから目を上げて彼を見たが、それがヨブであることが見分けられなかった。彼らは声をあげて泣き、それぞれ自分の上着 を引き裂き、ちりを天に向かって投げ、自分の頭の上にまき散らした。
彼らは彼とともに七日七夜(なぬかななや)、地に座っていたが、だれも一言も彼に話しかけなかった。彼の痛みが非常に大きいのを見たからである。


욥이 질병 가운데에 있을 때 이 슬픈 소식을 듣고 위문하고 위로하려고 세 친구가 왔습니다만, 욥의 모습을 보고 그 상태가 얼마나 처참하고 가여웠던지 소리 질러 울고는 그와 함께 7일 동안 땅에 앉아 있었지만 너무나도 딱해서 아무도 말을 거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 세 친구들, 데만 사람 엘리바스(テマン人エリファズ), 수아 사람 빌닷(シュアハ人ビルダデ), 그리고 나아마 사람 소발(ナアマ人ツォファル)이라고 하는 친구들은 어떤 친구 같겠습니까. 사람이 좋을 때, 잘 나갈 때에는 모여들지만 조금 안 좋아지면 하나 둘 그 사람의 곁을 떠나가는 것이 세상 인정이겠지요. 하지만 이 세 친구들은 그래도 의리가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대단히 좋은 사람들이었지요.

7일 동안 잠잠히 있었더니 그 다음에 욥이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자신의 처지를 저주하는 말이었습니다. 참으로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말을 들은 친구들은 일제히 욥을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그냥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거론하면서 욥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욥기 4장 7절~9절
“7.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8.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9.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さあ、思い出せ。だれか、潔白なのに滅びた者があるか。どこに、真っ直ぐなのに絶たれた者があるか。
私の見てきたところでは、不法を耕して害悪を蒔く者が、自らそれらを刈り取るのだ。
彼らは神の息吹(いぶき)によって滅び、御怒りの息によって消え失せる。

이러면서 마치 너한테 죄가 있으니 이런 일을 당한다, 분명 너한테 죄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징벌을 내리신다……이렇게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여기 한 부분만이 아니라 이 세 친구의 말 중에서 반복적으로 이와 같은 내용이 등장합니다. 이것이 다 무엇입니까. 자신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들 멋대로 하나님을 들먹거리면서, 마치 자신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행세하면서 욥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왔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처음에는 위문하고 위로하기 위해서 먼 길을 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정작 근거 없는 비판과 비난을 늘어놓았을 뿐이었고, 결국 그들의 입에서 위문과 위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과 사람 간의 거리를 멀어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간의 거리마저도 멀어지게 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은 남에게 충고하는 일입니다. 이는 쉬울 뿐만 아니라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충고가 어떻습니까. 알고 보면 대부분 어설픈 근거를 대면서 주장합니다.

세상에도 어설픈 근거를 대는 일들은 꽤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디서 대지진이 일어났어요. 그런데 일어나기 전에는 그런 예측은 아무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어나고 난 다음에는 어떻습니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원인을 설명하는 주장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또 2016년에 있었던 미국 대통령 선거는 어떻습니까. 선거 전에는 대부분의 언론에서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우세하다고 보도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당선됐지요. 그랬더니 어떻게 됐어요? 여기저기 언론에서 트럼프가 당선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이 넘쳐납니다. 누구누구가 트럼프 후보 당선을 예측했었다 뭐 이런 일들을 대서특필합니다.

세상에서는 또 어떻습니까. 그 때까지는 아무렇지도 않고 있었다가, 특히 어떤 사람한테 안 좋은 일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이럽니다. “그래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 언젠가 그렇게 될 줄 알았어” 이런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합니다.

이런 일들이 교회 밖에서만 그런 가요?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사람 벌 받아서 저런다, 하나님이 징계를 해서 저런다 하고 함부로 말씀하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때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할 때도 있습니다. 뻑하면 하나님을 들먹이는 일들이 있습니다.

“아~ 이런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아”, “아~ 이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야”

교회 좀 다녀보신 분들은 이런 말을 한 두 번 정도는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말들이 모두 근거 없는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문제는 이런 지적이 성경에 근거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100프로 성경에 바탕을 둔 근거가 있거나 하지 않으면 차라리 그런 말씀을 하지 마시는 편이 좋습니다. 만약에 이게 누구한테 하는 충고라고 한다면 차라리 그런 충고는 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아무리 신학박사나 상담학 박사라 하더라도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줄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욥기를 보면 이처럼 하나님을 들먹이면서 비판했던 욥의 친구들에게 하나님께서 꾸짖으십니다.

욥기 42장 7절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主がこれらのことばをヨブに語った後、主はテマン人エリファズに言われた。「わたしの怒りはあなたとあなたの二人の友に向かって燃える。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しもべヨブのように、わたしについて確かなことを語らなかったからだ。

라고 하나님께서는 함부로 말한 욥의 친구들 세 명에 대하여 엄한 말로 혼을 내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충고나 비판으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힐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충고나 비판으로 거리를 좁힐 수가 있었다면,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오셔서 충고나 비판과 비난만 하시고 가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순종이자 희생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인하여 스스로를 희생제물로 내놓으셨던 것입니다.

이 희생의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희생으로 말미암아 용서, 죄사함이 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가 그대로 있을 때에는 소망이 없었으나, 죄사함이 임하면서 우리는 이제 천국을 꿈꿀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9절을 봅니다.

로마서 5장 19절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すなわち、ちょうど一人の人の不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罪人とされたのと同様に、一人の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義人とされるのです。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모든 이가 죄인이 되었으나, 예수님께서 순종하심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는 그의 이름을 믿고 구주로 영접함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의인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충고와 비판은 단 한 사람도 위문과 위로를 줄 수가 없습니다. 충고와 비판, 비난은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다 합니다.

하지만 충고와 비판보다도 순종과 희생을 먼저 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순종과 희생이라고 해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리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죽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자기 자존심을 죽여야 합니다. 자기 고집을 죽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순종과 희생을 위한 출발점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兄弟たち。私たちの主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私が抱いている、あなたがたについての誇りにかけて言いますが、私は日々死んでいるのです。


바울이 우리보다 못난 사람입니까. 우리보다 자존심이 없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매일 죽는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바로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귀 사탄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희생과 순종은 다른 게 아닙니다. 상대방의 마음, 바로 그 사람의 마음이 되는 것이 순종이고 희생인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사랑인 것입니다.

아무리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은 마귀가 아닙니다. 단지 마귀에 속아 넘어간 사람일 뿐인 것입니다.

그 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게 될 때 진정한 순종과 희생이 싹트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와 사랑과 소망이 나오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新しい戒めを与えます。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

욥기, 특히 욥의 친구들 말이 답답하고 우울하고 회색빛처럼 느껴졌던 이유는 그들의 말 속에 희생도 순종도 용서도 사랑도, 그리고 소망도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욥기는 이처럼 희생과 순종뿐만 아니라 용서와 사랑 그리고 소망까지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너무나도 소중한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줄여주신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줄여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스스로의 희생과 순종으로, 십자가의 용서와 십자가의 사랑, 그리고 천국을 꿈꿀 수 있는 소망을 널리 알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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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회 흔들리지 않는 믿음
2019년 1월 1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에스겔 1장 20절~21절
"영이 어떤 쪽으로 가면 생물들도 영이 가려 하는 곳으로 가고 바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에 있음이니라 그들이 가면 이들도 가고 그들이 서면 이들도 서고 그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는 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에 있음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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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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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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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흔들리지 않는 믿음” 揺るがされない信仰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구분할 때를 보면 예를 들어 구약은 모세오경, 역사서, 시가서, 대선지서, 소선지서……이렇게 일반적으로 구분을 합니다. 여기서 대선지서나 소선지서……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분량으로 구분이 될 뿐이지, 길이가 길다고 해서 가치가 더 있다거나, 길이가 짧다고 해서 가치가 덜하다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150편이나 되는 시편, 이는 성경에서 가장 긴 책입니다만, 반면에 신약성경 요한 이서는 1장 밖에 없고, 그것도 13절까지밖에 없는 짧은 책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편이 제일 가치가 있고 요한이서는 가장 가치가 덜한 책이라는 것이 아니라, 시편이나 요한이서나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 성경이라고 우리는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이 중에서 오늘 말씀인 에스겔서는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다니엘 등과 함께 대선지서에 포함되는 책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을 모두 이해해야 하겠습니다만, 그러나 현재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100% 완벽하게 해석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조금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성경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성경이 하나도 오류가 없는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것 또한 우리의 신앙인 것입니다. 다만 완벽하지 않다는 것은 똑같은 복음주의 신학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서 해석에 있어서 서로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와 같은 성경 중에서도 특별히 난해한 부분은 아무래도 예언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오늘 말씀이 있는 에스겔 서에는 여러 환상이 등장합니다만, 그와 같은 환상의 내용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고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에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살펴보았던 말씀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동일한 의견이 있는데 이는 바로 하나님의 충성된 사자의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에스겔 1장 20절~21절
“20.영이 어떤 쪽으로 가면 생물들도 영이 가려 하는 곳으로 가고 바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에 있음이니라
21.그들이 가면 이들도 가고 그들이 서면 이들도 서고 그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는 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에 있음이더라”

これらは霊が行かせる所に行き、霊が行かせる所には、輪もまたそれらとともに上がった。生きものの霊が輪の中にあったからである。
生きものが行くときには、輪も行き、生きものが立ち止まるときには、輪も立ち止まり、生きものが地の上から上がるときには、輪も共に上がった。生きものの霊 が輪の中にあったからである。

이 말씀에는 영과 생물들, 그리고 바퀴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생물들 곁에 있는 바퀴는 영이 가라고 하는 곳으로 따라 갔다는 것입니다. 영이 좌로 가려 하면 좌로 가고, 우로 가려고 하면 우로 가고, 영이 서면 바퀴도 서고, 영이 하늘로 들리고자 하면 바퀴도 똑같이 따라갔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성경 구절이 떠오릅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입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主はサムエルに言われた。「彼の容貌や背の高さを見てはならない。わたしは彼を退 けている。人が見るようには見ないからだ。人はうわべを見るが、主は心を見る。」

하나님은 외모를 보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중심에서 무엇을 보시겠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신지, 성령님이 계신지를 보신다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중심, 믿음의 중심이 명확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성경을 비과학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못 믿겠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들은 어떻게 하냐 하면 그 분이 돌아가신 날에는 제사를, 명절에는 차례를 지냅니다. 부적을 지니고 다녀요. 그러면 안심이 되대요. 그게 자기를 지켜준대요. 그리고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나오는 오늘의 운세를 봅니다. 뻑 하면 갑자을축병인정묘무진기사경오신미 사주팔자를 보고 굿판까지 벌여요.

아니, 성경을 비과학적이라서 못 믿는다면서 그런 건 왜 하냐고 하면 그건 우리 문화래요. 전통이래요. 미풍양속이래요.

이런 말들을 그래도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인데도 웃지도 않고 말해요. 이게 앞뒤가 맞는 말입니까. 그래도 이런 말을 하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이 한다면 그럴 수도 있다고 한다지만, 이미 교회에 다니고 나름 믿음이 있다고 하는 분들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계시니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는 노릇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 마음의 중심이, 우리 믿음의 중심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자동차에 달린 바퀴, 아무리 좋은 타이어로 된 바퀴이면 뭘 합니까. 그 중심이 흔들리면 넘어지고 빠지고 사고가 나고 마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때의 왕들에 대한 평가를 보십시오. 구약에서 왕들에 대한 평가는 얼굴이 잘생겼느냐, 오래 살았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다윗처럼 행하였느냐 아니냐입니다.

열왕기하 18장에 보면 성경에서는 히스기야 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열왕기하 18장 3절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彼は、すべて父祖ダビデが行ったとおりに、主の目にかなうことを行った。

성경은 히스기야(ヒゼキヤ) 왕을 가리켜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왕이었다고 평가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무엇을 했을까요.

열왕기하 18장 4절~6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열왕기하 18장 4절~6절
“4.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5.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6.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

高き所を取 り除き、石の柱を打ち砕き、アシェラ像を切り倒し、モーセが作った青銅の蛇を砕いた。そのころまで、イスラエル人がこれに犠牲を供えていたからである。これはネフシュタンと呼ばれていた。
彼はイスラエルの神、主に信頼していた。彼の後にも前にも、ユダの王たちの中で、彼ほどの者はだれもいなかった。
彼は主に堅くつき従って離れることなく、主がモーセに命じられた命令を守った。

그리고 열왕기하 23장에 보면 요시야 왕이 등장합니다. 그의 공적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열왕기하 23장 19절~20절
“19.전에 이스라엘 여러 왕이 사마리아 각 성읍에 지어서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산당을 요시야가 다 제거하되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대로 행하고
20.또 거기 있는 산당의 제사장들을 다 제단 위에서 죽이고 사람의 해골을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

ヨシヤはまた、イスラエルの王たちが造って主の怒りを引き起こした、サマリアの町々の高き所の宮もすべて取 り除き、彼がベテルでしたのと全く同じことを、それらに対しても行った。
彼は、そこにいた高き所の祭司たちをみな、祭壇の上で屠り、その祭壇の上で人の骨を焼いた。こうして、彼はエルサレムに帰った。


열왕기하 23장 24절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さらにヨシヤは、霊媒 、口寄せ、テラフィム、偶像、それに、ユダの地とエルサレムに見られるすべての忌むべき物も除き去った。こうして、彼は祭司ヒルキヤが主の宮で見つけた書物に記されている 律法のことばを実行した。

요시야 왕은 과거에 우상들의 온상이었던 산당들을 모두 헐어버리고 점쟁이들을 모두 제거해버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요시야 왕을 어떻게 평가하셨습니까.

성경은 요시야 왕은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열왕기하 23장 25절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ヨシヤのようにモーセのすべての律法にしたがって、心のすべて、たましいのすべて、力 のすべてをもって主に立ち返った王は、彼より前にはいなかった。彼の後にも彼のような者は、一人も起こらなかった。

그리고 어김없이 열왕기하 22장 2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열왕기하 22장 2절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彼は主の目にかなうことを行い、父祖ダビデのすべての道に歩み、右にも左にもそれなかった。


시간관계상 히스기야 왕과 요시야 왕에 대해서만 보았습니다만, 그들은 전통도 모르고 문화도 모르고 미풍양속도 모르는 왕이었다고 기록하나요?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순종하고 신앙 중심, 믿음의 중심을 지킨 훌륭한 왕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2장 4절~5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누가복음 12장 4절~5절
“4.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わたしの友である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からだを殺しても、その後はもう何もできない者たちを恐れてはいけません。
恐れなければならない方を、あなたがたに教えてあげましょう。殺した後で、ゲヘナに投げ込む権威を持っておられる方を恐れなさい。そうです。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この方を恐れなさい。

이 말씀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영의 세계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영혼도 육체처럼 썩어지고 없어지나요? 그렇다면 차라리 괜찮습니다. 예수님도 믿을 필요 없고, 성경 말씀도 볼 필요가 없겠지요.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기록합니까.

히브리서 9장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요한계시록 20장 12절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また私は、死んだ人々が大きい者も小さい者も御座 の前に立っているのを見た。数々の書物が開かれた。書物がもう一つ開かれたが、それはいのちの書であった。死んだ者たちは、これらの書物に書かれていることにしたがい、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죽음 다음에는 심판이 있다고 성경은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단지 또 하나의 시작일 뿐입니다. 그 시작에 앞서서 심판이 있다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합니다.

여러분, 저도 예전에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도 몇 번 옮겨보기도 했습니다만, 그 회사에 다닐 때에는 상사 눈치도 봐야지요. 신입사원 때에는 대리님, 과장님, 차장님, 부장님, 어디 그 뿐이에요? 이사님, 상무님, 거기에 사장님, 회장님. 뭐 눈치를 봐야 할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 분들 앞에서는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지요. 비위도 맞춰드려야 하겠습니다만, 그 회사를 그만두고 나오면 뭐예요? 예, 더 이상 그 사람들의 영향권 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상관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세상은 바로 일시적이고도 한시적인 회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떠한 분입니까. 우리의 창조주이시자 영원한 통치자이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거나 죽은 다음에 주님 앞에 설 때나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다니고 있는 회사 상사와, 우리의 영원한 통치자이신 하나님, 이 중에서 우리가 어느 쪽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뻔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있습니다. 서울이나 동경 같은 큰 도시에서는 밤하늘에도 별들이 잘 안 보입니다만, 우리 교회가 있는 군마에서는 밤이 되면 꽤 많은 별들이 보입니다.

하늘의 별들을 구분하는 대표적인 기준은 그 밝기를 등급으로 구분하는데, 어떤 한 별은 가장 밝은 1등급도 아닙니다. 얼핏 보기에는 다른 별들과 차이가 없어요. 하지만 그 별은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대단히 많은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아오고 도움을 주어왔습니다.

그 별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북극성입니다. 북극성의 밝기는 2등급이라고 합니다. 썩 밝은 편도 아니지요. 그 중심이 흔들렸다면 하늘의 수많은 다른 별들 속에 묻혀서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북극성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사막을 헤매는 사람들, 드넓은 바다를 여행하는 사람들로부터 귀하게 여김을 받았던 이유,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그 중심이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북극성이 과거에는 다른 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지구의 축이 이동하기 때문인데, 먼 옛날에는 다른 별이 북극성처럼 움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별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그 축이 다른 별로 넘어가게 되어서, 지금의 북극성이 중심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 말이 참 흥미롭지 않습니까.

성경에는 이와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4절~5절
“4.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けれども、あなたには責めるべきことがある。あなたは初めの愛から離れてしまった。
だから、どこから落ちたのか思い起こし、悔い改めて初めの行いをしなさい。そうせず、悔い改めないなら、わたしはあなたのところに行って、あなたの燭台 をその場所から取り除く。

여러분, 우리가 받고 있는 축복, 우리가 누리고 있는 축복, 만약에 우리 마음의 중심이 흔들리고 우리 믿음의 중심이 흔들릴 때, 축복의 촛대는 다른 곳으로 옮겨갈지도 모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떤 분은, 아이구 내가 무슨 축복을 받고 있어……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좋은 주일날 성전에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 그리고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있었습니다만, 에서가 야곱에게 어처구니없게도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 장자권(長子の権利)을 빼앗기게 됩니다. 여러분, 다른 건 몰라도 장자권은 살 수도 없고 강제로 빼앗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순서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는 너무나도 큰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에서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태어나서부터 당연히 있는 것, 그러니까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팥죽 한 그릇으로 야곱한테 장자권이 빼앗기고 맙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에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야곱의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을 이어갈 권리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난 다음에 에서는 땅을 치고 통곡을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촛대는 이미 옮겨진 후였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48절~50절을 봅니다.

요한복음 1장 48절~50절
48.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우리가 주님을 알기 전에 먼저 나를 알아보고 불러주신 주님.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께 감사하고, 예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일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보다 더 큰 일을, 이보다 더 큰 축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마음의 중심에 성령님을 모셔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흔들리지 않는 우리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축복을 넘치도록 받는, 지금까지 받은 모든 축복보다도 훨씬 더 큰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164회 용서와 사랑과 소망 →

← 제162회 부족한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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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회 부족한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2019년 1월 6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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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1절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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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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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부족한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劣る私を愛してくださる主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베드로와 제자들 앞에 나타났을 때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베드로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돌아가신 후에 제자들은 실의에 빠졌습니다. 그도 그럴 만 하지요. 인간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예수님은 영웅이나 혁명가처럼 보였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과거 구약에 보면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민족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합니다. 그렇게 되자 이제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일들을 사람들은 기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2천년 전 이 땅에 오셨을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라고 하는 강대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조국을 잃은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새로운 사사, 이 시대의 리더, 억압받는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구원해주실 통치자로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열광했습니다. 지금으로 본다면 차기 대통령 최유력후보 정도로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요즘 식으로 말하면 줄을 잘 서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마태복음 19장 27절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そのとき、ペテロはイエスに言った。「ご覧ください。私たちはすべてを捨てて、あなたに従って来ました。それで、私たちは何をいただけるでしょうか。」

뿐만 아니지요. 제자들만이 아니라 이른바 치맛바람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일도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0절~21절
“20.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そのとき、ゼベダイの息子たちの母が、息子たちと一緒にイエスのところに来てひれ伏し、何かを願おうとした。
イエスが彼女に「何を願うのですか」と言われると、彼女は言った。「私のこの二人の息子があなたの御国 で、一人はあなたの右に、一人は左に座れるように、おことばを下さい。」

세베대의 아들이란 사도 요한과 야고보를 뜻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어머니까지 나서서 예수님께 와서는 자신의 두 아들에 대해서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어떤 부탁입니까. 예수님 당신이 왕이 되면, 요즘 식으로 본다면 대통령이나 총리가 된다면 우리 두 아들들한테 비서실장 자리나 장관 자리 같은 높은 자리 하나 마련해주세요……라는 뜻 아니겠어요?


이런 제의를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바로 다음 구절인 마태복음 20장 22절 중반부에 보면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あなたがたは自分が何を求めているのか分かっていません

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보면 참 딱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이 사람들을 너무 나무라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당시는 아직 성령님이 역사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들은 오직 사람의 생각, 육의 생각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따라 나섰던 이유는, 물론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겠으나, 어쩌면 그 중에는 이 사람을 따라다니면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은, 그것은 영적인 것이 아닌 육적으로, 인간적으로 생각해서 세상이 바뀌고 난 다음에는 벼슬 자리 하나 정도는 주어질 것이라는 점을 기대했을 법도 하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도 있고, 그리 비난 받을 만한 일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어떻게 되었어요. 3년 정도는 지방을 순회하면서 예수님의 지지자들을 결집하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진격해서 민중들을 결집시키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로마를 물리치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조하자……뭐 이렇게 될 줄 알았는데, 예루살렘에 도착하시고 얼마 있었더니, 맥없이 체포되고 맙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2장 54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22장 54절
“54.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彼らはイエスを捕らえ、引いて行き、大祭司の家に連れて入った。ペテロは遠く離れてついて行った。

예수님께서 체포된 후에도 베드로는 끝까지 예수님을 멀찌감치에서나마 따라가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는 예수님이 걱정되었기 때문도 있었겠지만, 어쩌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탈출하시는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워낙 나서기 좋아하는 베드로였으니 예수님께서 묶인 쇠사슬을 풀고 놀라운 기적으로 탈출하셨을 때 자기가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는 것을 예수님께 보여드리면 얼마나 칭찬을 듣겠습니까.

어쩌면 베드로는 그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베드로가 했던 말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마태복음 26장 33절~35절을 봅니다.
“33.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5.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すると、ペテロがイエスに答えた。「たとえ皆があなたにつまずいても、私は決してつまずきません。」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あなたは今夜、鶏が鳴く前に三度わたしを知らないと言います。」
ペテロは言った。「たとえ、あなたと一緒に死ななければならないとしても、あなたを知らないなどとは決して申しません。」弟子たちはみな同じように言った。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끝까지 예수님을 지키겠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하지 않겠다고 강력하게 말합니다.

이렇게 호언장담을 했던 베드로, 예수님을 끝까지 버리지 않겠다고 했던 베드로, 예수님께서 탈출하셨을 때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모습을 보여드리면서 칭찬을 받으려고 했을지도 모르는 베드로, 하지만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의 굳건한 고백과는 달리,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예수님도 눈치 챘다는 것을 베드로 자신도 알게 됩니다.

누가복음 22장 55절~60절에 보면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의 상황이 너무나도 자세히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55.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56.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57.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58.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59.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0.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人々が中庭の真ん中に火をたいて、座り込んでいたので、ペテロも中に交じって腰を下ろした。
すると、ある召使いの女が、明かりの近くに座っているペテロを目にし、じっと見つめて言った。「この人も、イエスと一緒にいました。」
しかし、ペテロはそれを否定して、「いや、私はその人を知らない」と言った。
しばらくして、ほかの男が彼を見て言った。「あなたも彼らの仲間だ。」しかし、ペテロは「いや、違う」と言った。
それから一時間ほどたつと、また別の男が強く主張した。「確かにこの人も彼と一緒だった。ガリラヤ人だから。」
しかしペテロは、「あなたの言っていることは分からない」と言った。するとすぐ、彼がまだ話しているうちに、鶏が鳴いた。

이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부인할 때를 마가복음 14장 71절에서는 더욱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71절
“71.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するとペテロは、噓ならのろわれてもよいと誓い始め、「私は、あなたがたが話しているその人を知らない」と言った。

너도 저 예수라는 사람을 알지? 라고 물었던 그 상대방을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모른다고 했다는 말은, 이걸 요즘 식으로 말한다면, 그 말을 했던 사람한테 심한 욕설이라도 한 마디 하면서 모른다고 딱 잡아 떼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누가복음 22장 61절~62절
“61.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主は振り向いてペテロを見つめられた。ペテロは、「今日、鶏が鳴く前に、あなたは三度わたしを知らないと言います」と言われた主のことばを思い出した。
そして、外に出て行って、激しく泣いた。

아이고, 이렇게 민망할 때가 어디 있겠습니까(何とばつの悪いことでしょうか). 이 때에 예수님과 눈이 맞은 베드로의 심정은 어땠겠습니까. 자신은 예수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지키겠다고 했는데, 그 입에 침이 마르기도 전에, 예수님을 아느냐고 했던 사람을 저주하고 맹세까지 해가면서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噓ならのろわれてもよいと誓い始め

그런 베드로는 통곡을 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일말의 기대를 가졌을지도 모르는 제자들의 바램도 무색하게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실의에 빠졌습니다. 소망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지난 3년은 그저 한날의 추억으로 끝나버렸는지도 모릅니다.

마태복음 26장 32절에 보면,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しかしわたしは、よみがえった後、あなたがたより先にガリラヤへ行きます。」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던 것을 기억해서인지, 아니면 그대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다가는 자신들의 신변도 위험해질 수 있다고 판단해서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이제 갈릴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갈릴리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더니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요한복음 21장 3절~6절
“3.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シモン・ペテロが彼らに「私は漁に行く」と言った。すると、彼らは「私たちも一緒 に行く」と言った。彼らは出て行って、小舟に乗り込んだが、その夜は何も捕れなかった。
夜が明け始めていたころ、イエスは岸辺に立たれた。けれども弟子たちには、イエスであることが分からなかった。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子どもたちよ、食べる魚がありませんね。」彼らは答えた。「ありません。」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舟の右側に網を打ちなさい。そうすれば捕れます。」そこで、彼らは網を打った。すると、おびただしい数の魚のために、もはや彼らには網を引き上げ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어쩌면 베드로는 이 순간 몇 년 전의 일을 떠올렸을지도 모릅니다. 누가복음 5장 3절~7절을 봅니다.


누가복음 5장 3절~7절
“3.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イエスはそのうちの一つ、シモンの舟に乗り、陸から少し漕ぎ出すようにお頼みになった。そして腰を下ろし、舟から群衆を教え始められた。
話が終わるとシモンに言われた。「深みに漕ぎ出し、網を下ろして魚を捕りなさい。」
すると、シモンが答えた。「先生。私たちは夜通し働きましたが、何一つ捕れませんでした。でも、おことばですので、網を下ろしてみましょう。」
そして、そのとおりにすると、おびただしい数の魚が入り、網が破れそうになった。
そこで別の舟にいた仲間の者たちに、助けに来てくれるよう合図した。彼らがやって来て、魚を二艘の舟いっぱいに引き上げたところ、両方とも沈みそうになった。

이것이 언제인가 하면 바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일입니다.

어? 나 이거 알아. 몇 년 전에 똑 같은 일이 있어. 그럼 저기 서 있는 사람이 혹시?


마침 그 때에 누가 말합니다.

요한복음 21장 7절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それで、イエスが愛されたあの弟子が、ペテロに「主だ」と言った。シモン・ペテロは「主だ」と聞くと、裸に近かったので上着をまとい、湖に飛び込んだ。

이 구절을 보면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보통 바다로 뛰어 내릴 때에는 입고 있던 옷을 벗는 것이 자연스럽지요. 하지만 이 구절을 보면 베드로는 벗고 있던 곳을 입은 다음에 바다로 뛰어 내렸다고 합니다. 이는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준비를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데 아무리 남자라고는 하나 어찌 벗은 상태에서 뵐 수 있겠어요. 그래서 베드로는 겉옷을 입었습니다. 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도의 예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흥미로운 점은 이 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1절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シモン・ペテロは舟に乗って、網を陸地に引き上げた。網は百五十三匹の大きな魚でいっぱいであった。それほど多かったのに、網は破れていなかった。

이 구절을 우선 앞서 살펴보았던 구절,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록인 누가복음 5장 6절~7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 6절~7절
“6.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そして、そのとおりにすると、おびただしい数の魚が入り、網が破れそうになった。
そこで別の舟にいた仲間の者たちに、助けに来てくれるよう合図した。彼らがやって来て、魚を二艘の舟いっぱいに引き上げたところ、両方とも沈みそうになった。

이 두 구절의 차이, 두 경우 똑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고기를 잡았는데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베드로, 예수님을 아직 잘 알지 못했던 시기의 베드로가 고기를 잡았을 때에는 그물이 찢어지고 배가 잠기게 되었다고 합니다만, 나중 경우에는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물고기를 적게 잡아서인가요? 성경에는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それほど多かったのに、網は破れていなかった)>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물이 찢어질 만큼, 찢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많이 잡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찢어지지 않았다고 봐야겠습니다.

과연 이 두 구절의 차이, 이 두 구절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 있습니다.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을 때, 나중에 물고기를 많이 잡았을 때에는 물고기 수가 백쉰세 마리, 그러니까 153마리였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 숫자를 가지고 사람들은 다양하게 해석합니다. 누구는 구약에서 율법을 가리키는 숫자인 10, 신약에서는 성령을 상징하는 숫자인 7, 이를 더하면 17이 되는데, 1+2+3……해서 17까지 더하면 153이 된다고 하는 설, 100을 이방인의 수, 50을 유대인의 수, 3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보는 설, 고대 동물학자들은 생선을 153종으로 분류를 했는데, 이는 인류 전체의 인종을 상징한다고 하는 설, 나아가서 어떤 분은 153은 한 교회에 가장 적당한 성도 수이기 때문에 153명이 넘어가면 교회를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성경을 바탕으로 해서 묵상을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다양한 상상이나 다양한 해석을 하는 것을 모두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겠지요. 이런 해석을 들으면 어~그렇구나. 어~신기하네. 어~그런가보다 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해석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의 주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성경구절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에서 우리가 얻을 의미는 없는 것일까요? 굳이 153마리라고 기록하신 성경은 무의미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성경 기록으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베드로가 자신이 잡은 물고기 마리 수를 정확히 알았다는 것입니다.

어촌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팔 때에는 큰 고기 같은 경우에는 마리 수로 계산하지만 일반 물고기는 무게로 계산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더구나 당시 배들의 크기를 보아 무게가 아니라 마리 수로 셀만한 물고기를 150마리 이상이나 싣는다는 것은 어려웠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리고 설령 그 정도 물고기였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대략 100이나 200도 아닌 153마리라는 사실을 그렇게 빠르고도 정확하게 인식했다는 사실은 놀랍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똑같이 예수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내렸을 때 물고기를 많이 잡았는데 두 경우를 자세히 비교해보면, 앞에서는 첫째 그물이 찢어졌고, 둘째, 배가 가라앉을 것만 같았고, 셋째, 몇 마리를 잡았는지 기록이 없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잡았을 때에는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고, 배가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는 기록이 없는 반면, 잡은 물고기 수가 정확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축복을 담을 준비가 되어 있었느냐 하는 차이입니다. 물고기를 많이 잡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 주님이 주시는 축복입니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 그 축복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다면 이는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 내가 기도를 해서 너무 많이 주시면 재앙이 될 수도 있으니까 조금만 달라고 기도해야겠구나……이러시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내가 많은 축복을 바라는데 왜 안 주실까 하면 그 이유는 지금 내 상태에서 너무나도 많은 축복을 주시면 이를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마음껏 부어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크나큰 축복을 받을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그물이 찢어집니다. 배가 가라앉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많은 축복을 주고 싶으셔도 주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훌륭하고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하나요? 앞서 베드로의 삶을 잠시 돌아보았습니다만, 그가 우직하고 나서기 좋아하기는 했으나, 베드로한테는 좀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그렇다고 칭찬 받을 만한 대단한 일을 한 기록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큰 축복을 받더라도 그의 그물은 더 이상 찢어지지 않았으며 그의 배도 가라앉지 않았고, 그는 자신이 받은 축복을 정확히 인식할 정도로 믿음이 성장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의 마음 안에는 언제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14장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걷는 모습을 보고 자기도 걷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에 풍덩 하고 빠져버렸지요. 마태복음 16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하시자, 베드로는 절대로 그런 일을 당하지 않게 하겠다고 하자,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하고 심하게 꾸중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앞서 살펴본 것처럼 막판에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고백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예수님을 배신한 것이지요. 이것만 보면 예수님을 팔았던 가룟 유다나 베드로나 별반 차이가 없는지도 모릅니다.

나중에는 유다도 베드로도 후회했지요. 적지 않은 수치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은 스스로 부끄러워하면서 후회하고 목숨을 끊은 유다는 버리셨으나, 부끄러워하면서도 수치스러워하면서도 후회하면서도 예수님께로 돌아온 베드로는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하루하루가 예수님 앞에서 떳떳하십니까. 자랑스러우십니까. 아니요. 그렇지가 않으실 겁니다. 목사인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가면서 때로는 화도 내고, 그리고 남들한테 민폐도 끼치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가끔 저 자신이 제 모습을 생각하면 얼마나 부족한 점이 많은지, 그래서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すべて疲れた人、重荷を負っている人はわたしのもとに来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休ませてあげます。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로 가면 됩니다.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을 품으면 됩니다. 우리 스스로는 많이 부족해도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을 품읍시다.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께 감사합시다.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면 우리의 그물은 찢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탄 배는 가라앉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을 모두 받아 안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새해 첫 주입니다. 주님을 사랑합시다. 주님께 감사합시다. 언제나 주님과 동행하고, 우리의 모든 부끄러움을 받아주시는 주님, 부족함을 받아주시는 주님께 감사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모두 받아 안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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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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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1회 함께 하시는 하나님
2019년 1월 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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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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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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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함께 하시는 하나님” 共におられる神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의 기록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それゆえ、主は自ら、あなたがたに一つのしるしを与えられる。見よ、処女が身ごもっている。そして男の子を産み、その名をインマヌエルと呼ぶ。

라고 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요셉과 마리아는 약혼한 상태였습니다. 약혼이라고 하면 요즘은 결혼하기 전에 하는 단순한 약속 정도로만 여겨지고 있습니다만, 당시 이스라엘에서의 약혼은 단지 동거를 하지 않을 뿐이지 법적으로는 결혼이나 다름 없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약혼관계를 해지하는 것, 즉 파혼을 한다는 것은, 지금으로 본다면 이혼이나 마찬가지이며 간음으로 인하지 않고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큰일이 났습니다. 아직 동거를 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마리아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이는 보통 일이 아닙니다.

아직 함께 살고 있지 않은 마리아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본다면 결혼을 약속한 요셉이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라는 말이 됩니다.

성경에 보면 과거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대단히 무서운 율법을 주셨습니다.

신명기 22장 23절~24절
“23.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24.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안에 있으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ある男と婚約中の処女の娘がいて、ほかの男が町で彼女を見かけて一緒に寝た場合、
あなたがたはその二人をその町の門のところに連れ出し、石を投げて殺さなければならない。その女は町の中にいながら叫ばなかったからであり、その男は隣人 の妻を辱めたからである。こうして、あなたがたの中からその悪い者を除き去りなさい。

즉, 율법대로라고 한다면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조용히 관계를 끊으려고 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바로 이 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결혼을 하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1장 20절~23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20.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彼がこのことを思い巡らしていたところ、見よ、主の使いが夢に現れて言った。「ダビデの子ヨセフよ、恐れずにマリアをあなたの妻として迎えなさい。その胎に宿 っている子は聖霊によるのです。
マリアは男の子を産みます。その名をイエスとつけなさい。この方がご自分の民をその罪からお救いになるのです。」
このすべての出来事は、主が預言者を通して語られたことが成就するためであった。
「見よ、処女が身ごもっている。そして男の子を産む。その名はインマヌエルと呼ばれる。」それは、訳すと「神が私たちとともにおられる」という意味である。

이에 따라 요셉은 마리아와 예정대로 결혼을 하게 된 것이지요.

저는 예전에 성경을 읽을 때 이 부분이 좀 마음에 걸렸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유대인이라고 한다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예언은 모두가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메시아의 탄생을 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라고 하셨지만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았지요.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부분 때문이 아닐까 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제가 생각하기를 애초에 이사야 서에서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가 아니라 “예수라 하리라”라고 되어 있었다면 사람들이 좀 알기 쉽지 않았을까 했던 것이지요.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이름이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말한 것을 어떤 사람이 말했다고 하면, 잘못 해석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오늘 복음서에 보니 하나님의 사자가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의심할 수가 없겠지요. 이사야서에 기록된 임마누엘은 틀림없이 예수님을 뜻합니다.

하지만 메시야 탄생을 예언한 구약성경에는 메시야의 이름이 “예수”다 라고 하는 구절이 어디에도 없거든요. 예언서에 보면 메시야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라고 예언되었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예수”라는 이름이라고 하니 사람들이 헷갈린 것이 아닐까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생각에 동의하시나요? 그렇다면 성경이 좀 잘못 적혀 있는 건가요? 하나님의 문장 실력이 우리보다 좀 못해서 그러셨을까요? ㅎㅎ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임마누엘 메시야가 오신다는 예언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구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이 “예수라 하리라”라고까지 기록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이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이름이 “예수”라고 하면서, 자기가 메시야라고 하면서 백성들을 현혹했겠습니까.


얼마 전에 신문을 보니까 자기가 재림예수라고 하는 사람들이 5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무려 20여명이래요. 이 숫자가 전세계적인 것일까요? 아니요. 한국에서만 이렇다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내가 하나님 부인이다, 내가 보혜사 성령이다(助け主の精霊). 내가 엘리야나 다윗이다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 이건 뭐 난리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에도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어쩌면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주님의 이름을 마지막까지 숨겨놓으셨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라는 이름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임마누엘>은 그럼 또 무엇일까요. 사실 이 <임마누엘>에는 그 뜻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뜻이 바로 예수님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임마누엘>은 히브리어인데 <임>은 ~과 함께, 영어로 with이고, <마누>는 <우리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엘>은 하나님을 가리키죠. 그러니까 오늘 말씀에 나와 있는 것처럼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역사하셨습니까. 아담과 하와 때에는 사람이 하나님을 대단히 가깝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만, 사람이 죄악으로 타락한 후에, 하나님과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져만 갔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예언자나 선지자에 국한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신 후에 어떻게 변했습니까.


여기서 한 번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6장 7절
“7.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しかし、わたしは真実を言います。わたしが去って行くことは、あなたがたの益 になるのです。去って行かなければ、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助け主はおいでになりません。でも、行けば、わたしは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助け主を遣わします。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제자들은 아마도 이게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후에 하늘에 올라가신 다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도행전 2장 1절~4절
1.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五旬節の日になって、皆が同じ場所に集まっていた。
すると天から突然、激しい風が吹いて来たような響きが起こり、彼らが座っていた家全体に響き渡った。
また、炎のような舌が分かれて現れ、一人ひとりの上にとどまった。
すると皆が聖霊に満たされ、御霊が語らせるままに、他国のいろいろなことばで話し始めた。


많은 이들이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를 하고 있는 가운데 홀연히 하늘로부터 성령이 내려와서 각 사람에게 임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과거에는 하나님 근처에도 갈 수 없었던 우리였습니다만, 이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친히 하나님께서 와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해졌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입니다.

제 집 사람이 체류비자를 받기 전에는 무비자로 입국을 했습니다. 한국여권을 가지고 있으면 90일 동안은 비자를 받지 않아도 체류할 수가 있지요. 하지만 그 체류자격은 기본적으로 관광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일을 할 수도 없고, 학교에 다닐 수도 없습니다. 재류카드를 만들 수도 없고 면허증도 딸 수 없으며, 그 흔한 휴대폰도 계약할 수가 없지요.

첫 번째 90일이 다 하고 난 다음에 한 번 귀국을 했습니다만, 몇 주 후에 다시 들어오려고 하니까 일본 공항에서 어딘가로 끌려가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지금 비자를 신청중이라고 하니까 신청한 비자가 안 나오면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몇 번이나 못을 박았다고 합니다. 참 까다롭게 굴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얼마 전에 입국관리국에서 재류자격인정증명서……라고 하는 요만한 작은 종이 한 장이 도착했습니다. 말하자면 정식 비자가 나온 것이지요. 이 작은 종이 하나에 어떤 힘이 있었냐 하면, 이걸 일본 대사관에 가져갔더니 바로 다음 날 비자를 여권에 찍어줍니다. 일본 공항에 도착해서 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거기 왔다 갔다 하는 담당 직원이 그 종이를 보고는, 아, 재류카드를 만들어야 하는군요……라고 하면서 다른 방으로 데려가서 재류카드를 뚝딱 만들어주고는 남들보다도 일찍 심사를 마치고 입국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 시청에 갔더니 주민등록도 되고 의료보험도 됩니다. 이제 다음 달이면 운전면허도 얻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참 그 작은 종이 한 장의 위력이 대단해요. 저도 예전에 똑같이 했었기 때문에 새로울 것도 없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토록 오래 기다렸던 터라 참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이 얼마나 복잡합니까. 어떤 분의 말씀에 의하면 잠이 안 올 때 읽으면 정말로 효과적이라고 하는 레위기. 그 1장 1절부터 보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방법이 적혀 있는데 얼마나 어렵고 복잡한지 모릅니다. 짐승일 경우에는 어떻게 하고 새일 경우에는 어떻게 하고, 또 곡물일 경우에는 어떻게 하고……라는 규정이 대단히 까다롭게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는 제사장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다가 잘못하면 죽임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그 단계가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지 몰라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아주 짧은 길이의 이름을 주셨어요. 그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라는 짧은 이름입니다. 하지만 이 예수라는 이름의 힘이 어떻습니까.

사도행전 4장 11절~12절
11.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あなたがた家を建てる者たちに捨てられた石、それが要の石となった』というのは、この方のことです。
この方以外には、だれによっても救いはありません。天の下でこの御名のほかに、私たちが救われるべき名は人間に与えられていないからです。」


우리는 이 짧은 이름,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3절~14절
“13.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またわたしは、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求めることは、何でもそれをしてあげます。父が子によって栄光をお受けになるためです。
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何かをわたしに求めるなら、わたしがそれをしてあげます。

요한복음 16장 23절~24절
“23.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その日には、あなたがたはわたしに何も尋ねません。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わたしの名によって父に求めるものは何でも、父はあなたがたに与えてくださいます。
今まで、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名によって何も求めたことがありません。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受けます。あなたがたの喜 びが満ちあふれ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이제 양이나 소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복잡한 자격이나 절차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그 짧은 이름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면 모든 일들이 가능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모든 기도가 응답 받을 수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 예수님이 어떤 하나님이시라고요? 그렇습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와 함께 해주십니까. 그 이유는 간단하지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채찍에 맞아주시고, 우리를 위해 가시관을 써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주시고,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주시고, 우리를 위해 죽어주시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셔서 우리를 위해 하늘로 올라가주신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1서 4장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第一ヨハネの手紙
私たちは愛しています。神がまず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

이처럼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한국이나 일본을 보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알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토정비결을 보고 일본에서는 오미쿠지를 뽑습니다. 그것도 꽤 비싸지요.


여러분께서도 새해를 맞이해서 2019년이 궁금하십니까? 올 한 해가 여러분에게 있어서 어떻게 되실지 궁금하십니까? 좋습니다. 제가 봐드리겠습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올 한 해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축복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 안 하시면 멸망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시련처럼 보여도 그것은 축복으로 가는 길이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축복처럼 보이는 길도 시련이요 멸망으로 가는 길인 것입니다.

멀리까지 가서 우상들한테 절을 할 필요가 무엇이 있습니까. 비싼 돈 내고 토정비결이다 오미쿠지다 하는 것을 뽑을 필요가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안 하시면 멸망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진정하고도 영원한 진리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은 명령하시는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 무서운 하나님이셨다고 한다면, 신약에서의 하나님,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지금 이 시대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언제나 만날 수 있는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제 한 해가 밝았습니다. 올 한 해도 수많은 기쁨과 웃음과 즐거움과 반가움이 있겠지만, 때로는 슬픔과 눈물과 어려움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아무리 슬픔과 눈물과 어려운 일이 닥친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심을 받는 우리에게는 이 모든 일에 결국은 마침내 큰 축복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올 한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30배 60배 100배의 놀라운 축복, 누르고 흔들어 넘치는 축복을 모두 받은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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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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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회 평강을 위하여
2018년 12월 3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7장 3절~4절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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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평강을 위하여” 平安のために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올 한 해 마지막 주일예배입니다. 이렇게 귀한 시간에 이처럼 함께 하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참 감사한 일이지요. 여러분께서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드시나요? 예, 아직도 잘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분들이 계시다면 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올 한해 어떠셨습니까. 일본의 공익재단법인 <일본한자능력검정협회> 에서는 매년 12월에 “올해의 한자(今年の漢字)”라고 해서 일반인들로부터의 모집을 통해 그 해 1년을 나타내는 한자 한 글자를 선정해서 발표합니다. 여러분께서도 텔레비전에서 보신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쿄토 키요미즈데라에서 붓글씨로 크게 한 글자를 쓰는 장면이 꽤 유명합니다.

지난 12월 12일에 발표된 내용에 의하면 올해의 한자는 총 응모수 193,214표 중에서 2만표 정도를 차지한 “재앙 재”자가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4월 9일 밤에 시마네 현에서 발생한 시마네현 서부지진.

6월 18일 아침에 오오사카에서 발생하여 사망자 6명, 부상자 443명이 발생한 “오오사카북부지진”

9월 6일 새벽 일본 홋카이도에서 발생하여 사망자 41명, 부상자 749명이 발생한 “홋카이도 이부리 동부지진”

그리고 지진만이 아니지요. 지난 7월에는 일본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기록적인 폭우가 내려서 총 사망자 227명, 부상자 421명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태풍 21호, 24호가 정통으로 일본 상륙을 지나가기도 했고, 예년에 비해 일찍 끝난 장마 때문에 말도 못할 정도로 심한 폭염에 시달렸습니다.

우리 교회가 있는 군마현은 그래도 자연재해가 적은 지역이라서 감각이 좀 무뎌졌을지는 모르지만 이처럼 올 한 해 동안 수많은 재난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어디 일본만 그런가요.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해가 시작되자마자 1월 26일에는 밀양시에 있는 세종병원에서 발생한 화재로 51명이 사망하고 141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7월 22일 서울 기온은 38도, 24일 경북 영천은 40.2도를 기록했습니다.

7호 태풍 쁘라삐룬으로 인한 피해도 심각했습니다. 고급외제승용차가 여기저기서 터지기도 했지요. 11월 9일에 일어났던 종로 고시원 화재, 12월 18일에 강릉에서 일어난 고등학생 일산화탄소 중독 사건은 아직도 우리 기억에 생생합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지금 되돌아보면 이 외에도 수많은 재난이 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서 2018년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이제 좀 와 닿으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떠십니까. 한 해를 되돌아보면서 자신의 2018년을 한자 한 글자로 나타낸다면 어떤 글자를 쓰시겠습니까.

만약에 누가 제게 이런 질문을 묻는다면, 저는 망설임 없이 <기다릴 대(待)>자를 쓰겠습니다. 가끔 라디오나 텔레비전 등을 보면 “참 올해는 빨리 지나갔어요”라고 하는 분들이 계신데, 저는 그런 분들을 보면 몰래 가서 살짝 꼬집어주고 싶습니다. ㅎㅎ

올 해는 참 많이 기다리는 한 해였던 것 같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안 갔는지 몰라요. 무엇을 기다렸냐 하면 바로 입관, 입국관리국으로부터의 소식을 기다렸습니다.

올해만 보더라도 입국 관리국에 몇 번이나 갔는지 모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1년 동안에 대략 6번은 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3번은 동경까지 갔었던 것 같습니다. 동경에 한 번 가면 고속도로비를 좀 아껴본다고 밑으로 가니까 편도 3시간, 왕복 6시간이 걸립니다.

비자 문제 때문에 왔다갔다 해야 했기 때문에 올 한 해만 하더라도 저희 아내를 공항에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하기 위해서도 나리타에 4번 갔다 왔습니다. 나리타공항 까지도 일반도로로 편도 3~4시간 정도 걸리고 하니, 올해는 정말 장거리 운전도 꽤 많이 한 것 같습니다.

입관에 한 번 신청을 해놓으면 결과가 나오기까지 보통 2~3개월이 걸립니다. 거기다가 그 중에서 또 몇 개월은 저는 저대로 일본에서, 제 집사람은 한국에 있으면서 언제 올지도 모르는 소식을 하루하루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것 참 힘들더라구요. 집에서 일을 하다가 창 밖에서 우체부 아저씨 오토바이 소리만 나면 기가 쫑긋 세워집니다. 그렇게 헤어져서 기다린 기간만 해도 결국 4개월이었습니다. 그러니 같이 살면서 기다린 기간과 헤어져서 기다린 기간을 합치면 거의 1년 내내 기다린 꼴이 되어버렸지요.

8월에 헤어질 때에는 그래도 빨리 일이 해결되면 어쩌면 2~3주 만에 다시 만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여름이 가기 전에 오게 되면 여기저기서 열리는 불꽃놀이를 볼 수 있겠구나 했습니다. 그런데 8월이 다 가도록 연락이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9월에 오면 단풍구경을 같이 갈 수 있겠구나 했는데, 아무런 소식도 없습니다.

그래서 또 10월이 되면 코스모스를 같이 보러 갈 수 있겠구나……했는데 역시 안 옵니다.

그래서 10월 하순에는 군마현민의 날이 있는데, 그 때는 여기저기서 이벤트도 하고 그러니까 같이 갈 수 있겠구나 했는데, 아직도 감감 무소식이에요.

그래서 또 11월에는 대학축제가 한창인데, 오면 같이 구경갈 수 있겠구나 했는데, 역시 아무런 소식도 없습니다. 우체부 아저씨는 오늘도 저희 집 앞을 지나만 갑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이제 연말이라도 같이 보낼 수 있으면 좋겠는데……라는 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이런저런 문제들이 무사히 해결되었기에 망정이지 만약에 제 비자문제도 해결이 안 되었거나, 아니면 저희 집사람 비자가 안 나왔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니, 지금도 자다 생각해도 참 아찔합니다. 정말 막막한 상황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사실 일본이 물론 이와 같은 절차 같은 것이 까다로운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렇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은 아닙니다. 규정에 맞게 하나하나 하면 문제 없이 해결 됩니다. 저도 처음에 신청할 때에는 3년짜리 비자가 나왔거든요. 하지만 무엇이 문제였냐 하면 바로 여기에 사람의 생각이 개입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목회가 어렵고 교회 상황이 어려운데 어떻게 해야겠어요. 그래서 사람의 생각대로 이렇게 저렇게 해보았습니다만, 그러다 보니 아니나 다를까 일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그 때까지 잘 풀리던 일들이 잘 안되게 되요. 만약에 정말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 일만 해왔다면 올 한 해를 이렇게 <기다릴 대>, 우체부 아저씨 오토아비 소리에 예민해지거나 신혼 몇 개월 만에 떨어져서 살거나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의 생각이 개입하기 시작하면, 내 생각에는 훨씬 더 잘 될 줄 알았는데, 어쩌면 이게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럴 줄 알았는데, 점점 조금씩 하나하나 걸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어느 한 곳에서 딱 막히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생각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상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우상의 정의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14장 9절
“네 이전 사람들보다도 더 악을 행하고 가서 너를 위하여 다른 신을 만들며 우상을 부어 만들어 나를 노엽게 하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도다”

第一列王記
ところがあなたは、これまでのだれよりも悪いことをした。行って自分のためにほかの神々や鋳物(いもの)の像を造り、わたしの怒りを引き起こし、わたしをあなたのうしろに捨て去った。

시편 115편 4절~7절
4.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5.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6.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7.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彼らの偶像は銀や金。人の手のわざにすぎない。
口があっても語れず目があっても見えない。
耳があっても聞こえず鼻があっても嗅げない。
手があってもさわれず足があっても歩けない。喉があっても声をたてることができない。

이사야 2장 8절~9절
8.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경배하여
9.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イザヤ書
その地は偽りの神々で満ち、彼らは自分の手で造った物を、指で造った物を拝んでいます。
こうして人間はかがめられ、人は低くされます。彼らを赦さないでください。

자고로 우상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를 위하여 자기들의 손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출애굽기 20장 4절~6절
4.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あなたは自分のために偶像を造ってはならない。上の天にあるものでも、下の地にあるものでも、地の下の水の中にあるものでも、いかなる形をも造ってはならない。
それらを拝んではならない。それらに仕え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神、主であるわたしは、ねたみの神。わたしを憎む者には父の咎を子に報い、三代、四代にまで及ぼし、
わたしを愛し、わたしの命令を守る者には、恵みを千代にまで施すからである。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형상이든지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고 거기에 절하지 말고 그것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だれも二人の主人に仕えることはできません。一方を憎んで他方を愛することになるか、一方を重んじて他方を軽んじることになります。あなたがたは神と富とに仕えることはできません。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비교하셨습니다만,, 이는 단순히 하나님과 돈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좀 쉽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이 많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 이렇게 질문을 드리면 현명하신 여러분께서는 “하나님도 잘 섬기고 재물도 많으면 더욱 행복하다”라고 말씀을 하시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생각이요, 재물은 육신의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가진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섬긴다> 즉 <귀하게 여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재물, 영적인 생각과 육신의 생각을 동등하게 귀하게 여길 수는 없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로마서도 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 5절~6절
“5.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肉に従う者は肉に属することを考えますが、御霊に従う者は御霊に属することを考えます。
肉の思いは死ですが、御霊の思いはいのちと平安です。

로마서 8장 8절
“8.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肉のうちにある者は神を喜ばせることができません。

사람들은 우상을 섬긴다는 것에 대해서 무슨 사람이나 이상한 것을 세워 놓고 거기에 절을 하는 것만을 우상숭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우상숭배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왜 우상숭배가 죄가 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내가 내 생각대로 내 방식대로 행하려고 하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 우상숭배의 시작은 어디냐 하면 바로 에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善悪の知識の木)에 대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창세기 2장 16절~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神である主は人に命じられた。「あなたは園のどの木からでも思いのまま食べてよい。
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木から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그런데 하와는 어땠습니까.

창세기 3장 6절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そこで、女が見ると、その木は食べるのに良さそうで、目に慕わしく、またその木は賢くしてくれそうで好ましかった。それで、女はその実を取 って食べ、ともにいた夫にも与えたので、夫も食べた。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마! 먹으면 죽어!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생각, 영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하와는 어땠습니까. 먹음지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게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생각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아무리 내 생각에, 내 지식과 경험으로 판단하기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한 방법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하지마! 그 길로 가면 죽어! 라고 하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있을 것 같으신가요? 이는 영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을 겸하여 섬길 수 있다는 것이요, 더 쉬운 말로 한다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킨다고 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섬긴다고 하면서 한 쪽으로는 허고헌날 선악과를 우걱우걱 따먹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사람의 생각에 사로잡혀서 사람의 방법대로 하려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철저하게 훈련을 시키십니다.

오늘 말씀이 있는 사무엘상 7장에서도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의 명령이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무엘상 7장 3절~4절
“3.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4.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サムエルはイスラエルの全家に言った。「もしあなたがたが、心のすべてをもって主に立ち返るなら、あなたがたの間から異国の神々やアシュタロテを取 り除きなさい。そして心を主に向け、主にのみ仕えなさい。そうすれば、主はあなたがたをペリシテ人の手から救い出してくださいます。」
イスラエル人は、バアルやアシュタロテの神々を取り除き、主にのみ仕えた。

그랬더니 어떻게 됐다고 합니까.


사무엘상 7장 9절
“9.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サムエルは、乳離れしていない子羊一匹を取り、焼き尽くす全焼のささげ物として主に献げた。サムエルはイスラエルのために主に叫 んだ。すると主は彼に答えられた。

여기서의 어린 양이 무엇을 뜻합니까.

요한복음 1장 29절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その翌日、ヨハネは自分の方にイエスが来られるのを見て言った。「見よ、世の罪を取り除く神の子羊。

그렇습니다. 어린 양은 바로 우리의 구주 예수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우상을 헐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희생이 되어주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을 통해서만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우상은 다름 아닌 내 생각,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세우려고 하는 내 방법, 내 지식, 내 경험인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なぜなら私は、あなたがたの間で、イエス・キリスト、しかも十字架につけられたキリストのほかには、何も知るまいと決心していたからです。

이는 바울이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당시 바울은 누구보다도 많은 지식과 학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지식이나 학식이나 경험, 내 마음 속에 있는 우상들을 헐어버리고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세우겠다고 하는 바울의 강력한 고백인 것입니다.

요즘도 우체부 아저씨의 오토바이 소리를 들으면, 그런 참 많은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저 오토바이 소리. 그리고 기쁜 소식을 가져다 준 저 오토아비 소리를 들으면 참 반갑게 들립니다. 하지만 반면에, 내가 온전히 순종하지 못해서, 내 생각을 앞세웠기 때문에 1년 내내 우체부 아저씨 오토바이 소리만을 기다려야 했던 지난날을 떠올리면서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その日、すなわち週の初めの日の夕方、弟子たちがいたところでは、ユダヤ人を恐れて戸に鍵がかけられていた。すると、イエスが来 て彼らの真ん中に立ち、こう言われた。「平安があなたがたにあるように。」

올 한해 많은 재난이 있었고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미 적힌 올해의 한자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 내년의 한자는 바꿀 수가 있습니다.

올해의 한자 1위가 <재앙 재>였다고 하는데, 2위는 <평평할 평>자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평창 올림픽의 <평>, 그리고 일본 현재 연호인 헤이세이가 이제 올해로 마지막이 될 테니 그 헤이세이의 <평>, 마지막으로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이 성사되어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고 해서 평화의 <평>이었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의 새해 2019년의 한자는 평강과 평안(平隠と平安)을 누리는 <평>이 되어야 하지 않을 까 합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님만을 신뢰하여 평강과 평안을 누리고 주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은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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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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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9회 사랑의 시작
2018년 12월 2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1절~35절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한국어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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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사랑의 시작” 愛の始まり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일본에서의 성탄절, 크리스마스라고 하면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가져다 주는 날, 연인들과 데이트를 즐기는 날, 친한 사람들과 선물을 주고 받는 날, 화려하게 장식된 조명과 트리, 연말 세일이 한창인 백화점에서의 쇼핑……그와 갈은 풍경이 있습니다. 이는 한국에서도 비슷하지요.

하지만 일본 특유의 모습도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치킨을 먹는다는 것이지요. 혹시 오늘은 23일이지만 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에 보면 KFC 같은 일본 치킨 집 앞에는 줄을 서기도 한다고 합니다.

두 번째로는 베토벤 교향곡 제9번 콘서트가 여기저기서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山下達郎의 “크리스마스 이브”, 그리고 ユーミン 松任谷由実의 “恋人はサンタクロース”가 거리 여기저기에서 울려퍼집니다. 제가 얼마 전에 차를 타고 어디를 갔다 올 일이 있었는데, 라디오에서 가는 길에 이 恋人はサンタクロース가 나오더니, 오는 길에도 똑같이 이 노래가 나오더라구요.

이처럼 일본에는 일본 특유의 성탄절이 있습니다. 이와 갈은 모습은 일본만이 아니라 한국도 있을 것을 것입니다.

한국이나 일본 같은 북반구는 성탄절이 있는 12월이 겨울이지만 호주나 남미 같은 남반구에서는 지금이 여름입니다. 얼마 전 브라질 사람이 쓴 글을 보았는데, 이 분의 글에 의하면 브라질에서는 더운 날씨 때문에 대부분의 가족들은 크리스마스를 해변에서 일광욕을 하고 물놀이를 하면서 보낸다고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탄절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이처럼 각 나라마다 달라지고 있는 성탄절이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끼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날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을 꼭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두 번째의 공통점이 문제입니다. 이는 바로 크리스마스에서 예수님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있건 없건, 예수님에 대해서 알건 모르건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끼리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면 되지 않냐 할지 모르지만, 사실 이는 대단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크리스마스에 아무리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하더라도 거기에 예수님이 안 계시다면 이는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고 저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옳지 않다거나 잘못되었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굳이 위험하다고 말씀 드리는 그 이유에 대해서 오늘은 먼저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로 쉬운 질문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천 년 전에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그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요한복음 3장 14절~16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16절
“14.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モーセが荒野で蛇を上げたように、人の子も上げら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それは、信じる者がみな、人の子にあって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す。」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一人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광야로 나왔을 때, 그들이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보내셔서 백성들을 상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모두가 죽도록 내버려둔 것이 아니었지요.

민수기 21장 7절~9절을 보겠습니다.

민수기 21장 7절~9절
“7.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民はモーセのところに来て言った。「私たちは主とあなたを非難したりして、罪を犯しました。どうか、蛇を私たちから取 り去ってくださるよう主に祈ってください。」モーセは民のために祈った。
すると主はモーセに言われた。「あなたは燃える蛇を作り、それを旗ざおの上に付けよ。かまれた者はみな、それを仰ぎ見れば生きる。」
モーセは一つの青銅の蛇を作り、それを旗ざおの上に付けた。蛇が人をかんでも、その人が青銅の蛇を仰ぎ見ると生きた。

이렇게 해서 장대 위에 높이 올린 뱀을 쳐다보았더니 불뱀에 물린 자들이 모두 나음을 입고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대 위에 올려졌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신명기 21장 23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즉, 장대 위에 불뱀을 매달았다는 것은 질병의 근원인 불뱀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불뱀으로 인한 모든 질병이 나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떠실까요.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십자가가 바로 장대인 것이지요. 그러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나요? 만약에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실 이유가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第一ペテロの手紙
キリストは自ら十字架の上で、私たちの罪をその身に負われた。それは、私たちが罪を離れ、義のために生きるため。その打ち傷のゆえに、あなたがたは癒やされた。

빌립보서 2장 6절~11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ピリピ人への手紙 2章6節~11節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それゆえ神は、この方を高く上げて、すべての名にまさる名を与えられました。
それは、イエスの名によって、天にあるもの、地にあるもの、地の下にあるもののすべてが膝をかがめ、
すべての舌が「イエス・キリストは主です」と告白して、父なる神に栄光を帰するためです。

누구는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합니다. 누구는 예수님이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서 하나님의 아들로 뽑혔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분들께는 조용히 이렇게 말씀을 드려야겠지요. 성경을 좀 읽어보세요.

성경에는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나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본체라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하나님, 동일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약 700년 전에 이미 이사야 선지자에 의해 이 일은 예언 되었습니다.


이사야 53장 4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イザヤ書 53장 4절
まことに、彼は私たちの病を負い、私たちの痛みを担った。それなのに、私たちは思った。神に罰せられ、打たれ、苦しめられたのだと。

예수님은 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모두 짊어지셨기에 예수님은 철저한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한 두 사람의 죄도 아니고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는데 그 죄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우셨겠습니까.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던 불뱀이 장대에 높이 올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올려본 사람들은 그 질병의 원흉인 불뱀으로 말미암은 질병이 모두 나아서 살아난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장대 위에 높이 올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십자가를 올려다본 사람들은 우리를 괴롭히던 죄악의 근본이 해결되었다는 것을 믿기에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영광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야말로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로마서 5장 7절~8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5장 7절~8절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正しい人のためであっても、死ぬ人はほとんどいません。善良な人のためなら、進んで死ぬ人がいるかもしれません。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의인을 위하여 죽는다면 그 죽음은 그래도 어느 정도 가치가 있겠지요. 예를 들어서 나라를 위해 민족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면 그 사람은 위인으로 추앙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죄인을 위해서 대신 죽는 사람이 어디 있냐는 것이지요.

생각해보십시오.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은 흉악범, 정말로 용서 받을 수 없는 흉악범을 한 번 머리 속에 떠올려보십시오. 한국이나 일본에도 얼마나 나쁜 사람들이 많았습니까.

자, 떠올리셨나요?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떠올린 그 나쁜 사람이 사형판결을 받았습니다. 이는 지당한 판결이에요. 누가 보더라도 그 사람은 사형판결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 사형판결을 내린 판사가 이상한 말을 해요. 만약에 이 중에서 이 사람을 대신해서 사형을 당하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사형시키고 이 사람을 풀어주겠다……물론 현행법에서 이런 제도는 허용되지 않습니다만, 만약에 이런 일이 허용되었다고 한다면, 여러분께서는 여러분 머리 속에 떠올린 그 사람을 대신해서 형벌을 받으시겠습니까?

말이 되나요? 예, 말이 안 되죠. 만약에 누군가가 그랬다면 그건 뭐예요? 그야말로 한 낯 가치 없는 죽음. 좀 험한 말로 말하자면 개죽음일 수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분이 계셨습니다. 누구세요? 예,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로부터 죽어 마땅하다고 여겨진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나 자신인 것입니다. 떳떳하십니까? 죄가 없으십니까? 이는 정말로 운이 좋아서. 아니, 하나님의 은혜로 안 들켰을 뿐입니다. 아니면 너무나도 뻔뻔해서 모르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이지 이미 죄악이라는 이름의 불뱀에 여기저기를 물려 뜯겨서 이미 만신창이입니다. 이미 온몸에 불뱀들의 이빨자국이 가득해요. 어쩌면 좀 끔찍한 얘기이지만 아직도 불뱀이 내 온몸 여기저기에 매달려있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내 손이 죄악이라는 이름의 피에 범벅이 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뭐래요? 괜찮대요. 나는 죄가 없대요. 나는 안 죽는대요. 깨끗하대요. 만약에 그런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이요, 딱한 사람이겠습니까. 그렇게 흉악한 죄를 지어놓고도 태연하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면 얼마나 나쁜 사람입니까. 하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 스스로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우리를 위해서, 그와 같은 우리를 어떻게든 살려보시려고 어떻게 하셨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서 하나님의 모든 저주를 한 몸에 받고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성탄절에는 가까운 사람들끼리 선물을 교환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 또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선물과 뇌물. 무엇이 다릅니까.

그것은 바로 “대가성이 있느냐(見返り)”가 핵심입니다. 대가성이 없으면 선물이지만, 조금이라도 대가성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아무리 선물이라고 우긴다 하더라도 뇌물입니다.

선물은 사랑입니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그 마음은 사랑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내 이득을 위한 대가성 있는 뇌물은 범죄입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것이요, 경우에 따라서는 형사처벌을 받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누가복음 14장 12절~14절
“12.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3.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4.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イエスはまた、ご自分を招いてくれた人にも、こう話された。「昼食や晩餐をふるまうのなら、友人、兄弟、親族、近所 の金持ちなどを呼んではいけません。彼らがあなたを招いて、お返しをすることが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食事のふるまいをするときには、貧しい人たち、からだの不自由な人たち、足の不自由な人たち、目の見えない人たちを招きなさい。
その人たちはお返しができないので、あなたは幸いです。あなたは、義人の復活のときに、お返しを受けるのです。」

이와 같은 말씀을 드리면 간혹 오해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아,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힘들더라도 착하게 살아야 할 필요가 있겠구나.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좀 착하게 마음을 먹고 착하게 살아야 복을 주시는구나……

그래요.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됩니까? 내가 아무리 착하게 살려고 해도, 그렇게 마음을 먹자 말자 누군가가 속을 박박 긁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요?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뭐 어째고 어째?” 라고 화를 내지 않습니까?

우리 생각을 좀 바꿔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착하게 살자는 것이 아니에요. 다음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2장 19절~21절입니다.


로마서 12장 19절~21절
19.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愛する者たち、自分で復讐してはいけません。神の怒りにゆだねなさい。こう書かれているからです。「復讐はわたしのもの。わたしが報復する。」主はそう言われます。
次のようにも書かれています。「もしあなたの敵が飢えているなら食べさせ、渇いているなら飲ませよ。なぜなら、こうしてあなたは彼の頭上に燃える炭火を積むことになるからだ。」
悪に負け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善をもって悪に打ち勝ちなさい。

이 말씀을 보시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한국이나 일본의 옛날 예기를 보면 원수를 갚는다는 것이 무슨 미담으로 여겨지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성경은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원수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 도움을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도 역시 그저 착하게 살라는 그런 윤리적인 말씀인가요? 아닙니다.

내가 내 손으로 원수를 갚지 않더라도 나를 대신해서 원수를 갚을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위에서 누가복음 14장 12절~14절에서의 말씀도 그냥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착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니라, 대가성이 없는 사람, 내가 아무리 그 사람한테 도움을 주더라도 그 사람이 나한테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면, 누가 나한테 갚아주신대요?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갚아주신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더욱 큰 것으로 갚아주신다는 것을 믿은 믿음을 가지라고 성경은 말씀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 귀한 피를 흘려주심으로 인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완전히 해결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일을 해서 그 은혜를 갚을 수가 있을까요. 모세의 율법을 모두 지키면 갚을 수가 있을까요? 아무리 모세의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면서 산다고 해도 100년이 아니라 100만년을 살아도 티끌만큼도 갚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으로부터 보답을 받기 원하셨습니까? 오늘 말씀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오늘 말씀 중 요한복음 13장 32절
“32.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예수님은 우리한테 영광을 받지 않으셔도 하나님께서 영광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같은 말씀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
“12.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ヨハネの黙示録
「見よ、わたしはすぐに来る。それぞれの行いに応じて報いるために、わたしは報いを携えて来る。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억지로(無理やり) 착한 사람으로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갚아주신다고 하신 성경 말씀을 믿는 사람이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 이와 같은 말씀이 있는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어야 할 것은 뇌물이 아닙니다. 선물입니다. 우리가 행해야 할 것은 범죄가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이와 같은 사랑의 언제 시작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해주시기 위해 오신 성탄절에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시작된 오늘 성탄절 예배를 기념하여 이제 바로 오늘 성탄절부터 시작하여 뇌물이 아닌 선물을, 범죄가 아닌 사랑을 베풂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알리고 예수님의 제자 됨을 알리며 온 천하에 예수님을 들어내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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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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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8회 물리쳐야 할 속삭임
2018년 12월 1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19장 6절~7절
"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말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 바 나를 모욕하는 말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한 영을 그의 속에 두어 그로 소문을 듣고 그의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의 본국에서 그에게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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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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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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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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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물리쳐야 할 속삭임” 退けるべきささやき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금 강대국 앗수르가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이제 앗수르(アッシリア) 왕 산헤립(センナケリブ)의 신하 랍사게(ラブ・シャケ)가 말합니다.

열왕기하 18장 28절~35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열왕기하 18장 28절~35절
“28.랍사게가 드디어 일어서서 유다 말로 크게 소리 질러 불러 이르되 너희는 대왕 앗수르 왕의 말씀을 들으라
29.왕의 말씀이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 그가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내지 못하리라
30.또한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여호와를 의뢰하라 함을 듣지 말라 그가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건지실지라 이 성읍이 앗수르 왕의 손에 함락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할지라도
31.너희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수르 왕의 말씀이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고 너희는 각각 그의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또한 각각 자기의 우물의 물을 마시라
32.내가 장차 와서 너희를 한 지방으로 옮기리니 그 곳은 너희 본토와 같은 지방 곧 곡식과 포도주가 있는 지방이요 떡과 포도원이 있는 지방이요 기름 나는 감람과 꿀이 있는 지방이라 너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히스기야가 너희를 설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하여도 히스기야에게 듣지 말라
33.민족의 신들 중에 어느 한 신이 그의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34.하맛과 아르밧의 신들이 어디 있으며 스발와임과 헤나와 아와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사마리아를 내 손에서 건졌느냐
35.민족의 모든 신들 중에 누가 그의 땅을 내 손에서 건졌기에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하셨느니라”

ラブ・シャケは突っ立って、ユダのことばで大声で叫んで、こう告げた。「大王、アッシリアの王のことばを聞け。
王はこう言っておられる。『ヒゼキヤにごまかされるな。あれは、おまえたちを私の手から救い出すことができないからだ。
ヒゼキヤは、「主が必ずわれわれを救い出してくださる。この都は決してアッシリアの王の手に渡されることはない」と言って、おまえたちに主を信頼させようとするが、そうはさせない。』
ヒゼキヤの言うことを聞くな。アッシリアの王はこう言っておられるからだ。『私と和を結び、私に降伏せよ。そうすれば、おまえたちはみな、自分のぶどうと自分のいちじくを食べ、自分の井戸の水を飲めるようになる。
その後私は来て、おまえたちの国と同じような国におまえたちを連 れて行く。そこは穀物と新しいぶどう酒の地、パンとぶどう畑の地、オリーブの木と蜜の地である。おまえたちが生き延びて死ぬ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ある。たとえヒゼキヤが、「主はわれわれを救い出してくださる」と言って、おまえたちをそそのかしても、ヒゼキヤに聞き従ってはならない。
国々の神々は、それぞれ自分の国をアッシリアの王の手から救い出しただろうか。
ハマテやアルパデの神々は今、どこにいるのか。セファルワイムやヘナやイワの神々はどこにいるのか。彼らはサマリアを私の手から救い出したか。
国々のすべての神々のうち、だれが自分たちの国を私の手から救い出したか。主がエルサレムを私の手から救い出せるとでもいうのか。』」

당시 유다 왕은 히스기야(ヒゼキヤ)였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열왕기하 18장 1절~8절까지를 보겠습니다.

열왕기하 18장 1절~8절
“1.이스라엘의 왕 엘라의 아들 호세아 제삼년에 유다 왕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이 되니
2.그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비요 스가리야의 딸이더라
3.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4.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5.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6.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7.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저가 앗수르 왕을 배반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
8.그가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가사와 그 사방에 이르고 망대에서부터 견고한 성까지 이르렀더라”

イスラエルの王エラの子ホセアの第三年に、ユダの王アハズの子ヒゼキヤが王となった。
彼は二十五歳で王となり、エルサレムで二十九年間、王であった。彼の母の名はアビといい、ゼカリヤの娘であった。
彼は、すべて父祖ダビデが行ったとおりに、主の目にかなうことを行った。
高き所を取 り除き、石の柱を打ち砕き、アシェラ像を切り倒し、モーセが作った青銅の蛇を砕いた。そのころまで、イスラエル人がこれに犠牲を供えていたからである。これはネフシュタンと呼ばれていた。
彼はイスラエルの神、主に信頼していた。彼の後にも前にも、ユダの王たちの中で、彼ほどの者はだれもいなかった。

彼は主に堅くつき従って離れることなく、主がモーセに命じられた命令を守った。
主は彼とともにおられた。彼はどこへ出て行っても成功を収めた。彼はアッシリアの王に反逆し、彼に仕えなかった。
彼はペリシテ人を討ってガザにまで至り、見張りのやぐらから城壁のある町に至るその領土を打ち破った。

이처럼 히스기야(ヒゼキヤ) 왕은 믿음의 왕이요 순종의 왕이었습니다. 25세라고 하는 젊은 나이에 왕이 되긴 하였으나 그는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 정직하게 행하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우상들을 헐어버리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다고 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ヒゼキヤ) 왕과 함께 하셨으며,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다(成功を収めた)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아무리 강한 세력이 공격해오더라도 히스기야 왕은 백성들을 설득합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께서 적들을 물리쳐주신다고 백성들에게 외칩니다.

하지만 그러는 히스기야(ヒゼキヤ)를 비웃듯이 그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앞서 살펴본 말씀 중 열왕기하 18장 31절 전반부
“31.너희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수르 왕의 말씀이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ヒゼキヤの言うことを聞くな。アッシリアの王はこう言っておられるからだ。『私と和を結び、私に降伏せよ。

라고 하는 것입니다. 28절에 보면 크게 소리질러 말을 했다(大声で叫んで)고는 합니다만, 사실 이는 무서운 속삭임인 것입니다.

너희들, 히스기야가 아무리 하나님이 지켜주신다 하더라도 소용없다. 지금까지 너희들도 봤지 않았느냐. 우리 대 앗수르(アッシリア) 산헤립(センナケリブ) 왕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 있었던 신이 어디 있었느냐. 아무리 많은 신을 믿었던 나라들도 우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너희들도 괜한 고집 부리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지 말아라. 하나님의 사람 히스기야 왕을 믿지 말아라. 너희들 거기 그대로 있으면 죽는다. 차라리 너희 하나님을 버리고, 너희 왕을 버리고, 너희 나라를 버리고 항복한다면 살려주겠다.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달콤하면서도 무서운 유혹입니까.

이와 같은 유혹은 성경 여러 곳에 나옵니다.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이제 공격하려고 할 때,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온 무리들 12명 중 10명이 뭐라고 했습니까.

민수기 13장 31절~33절
“31.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32.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しかし、彼と一緒に上って行った者たちは言った。「あの民のところには攻め上れない。あの民は私たちより強い。」
彼らは偵察して来 た地について、イスラエルの子らに悪く言いふらして言った。「私たちが行き巡って偵察した地は、そこに住む者を食い尽くす地で、そこで見た民はみな、背の高い者たちだ。
私たちは、そこでネフィリムを、ネフィリムの末裔アナク人を見た。私たちの目には自分たちがバッタのように見えたし、彼らの目にもそう見えただろう。」

열 두 명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カレブ)은 지금 당장 가나안 땅에 올라가자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미 10명의 정탐꾼들이 말한 속삭임에 넘어간 그들은 무력했습니다.

제가 왜 굳이 그들의 말들을 속삭임이라고 할까요. 당시 애굽을 탈출한 사람들은 성인 남성만이 60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여성과 어린 아이들을 모두 합친다면 대략 200만 명 정도는 되었을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추정합니다.

지금 그 20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두 의견이 있습니다. 하나는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다. 또 하나는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없다. 이 두 가지입니다.

정복할 수 있다고 하는 쪽은 숫자로만 보면 열두 정탐꾼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이요, 정복할 수 없다고 한 사람들은 나머지 열 명이었습니다. 숫자로 보면 못한다. 정복할 수 없다고 하는 쪽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정탐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여호수아와 갈렙 뿐인가요? 아니요. 하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복적으로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10명, 200만 명 중에서 10명이면 몇 분의 일입니까.

20만분의 1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것입니다. 20만분의 1의 목소리……이는 완전히 속삭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저버리고 그와 같은 부정적인 속삭임에 사로잡혀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입성은 40년이나 늦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는 40년 늦게 들어갔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20만분의 1의 속삭임에 순종한 그들은 가나안 땅에 영원히 들어가지 못한 채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광야에서 죽어갔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속삭임의 원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에덴에서 있었습니다. 사탄은 하와에게 속삭입니다.

창세기 3장 1절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さて蛇は、神である主が造られた野の生き物のうちで、ほかのどれよりも賢かった。蛇は女に言った。「園の木のどれからも食べてはならないと、神は本当に言われたのですか。」

성경은 뱀을 가리켜 간교하다고 했습니다. 먼저 오늘의 문제를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쪽은 사탄일까요, 아니면 사람들일까요.

여기에 대해서 100%까지라고는 말씀 드리기 어렵습니다만, 대체적으로 보면 사탄이 우리 인간들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못 알아봤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은 어땠습니까. 예수님을 알아봤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시험하실 때, 사탄은 무엇을 근거로 삼았는가 하면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 예수님을 실족하려 하기도 했습니다.

그와 같은 사탄이 하나님의 명령, 그러니까 창세기 2장 17절에서 아담에게 하신 명령,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木から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와에게 이런 질문을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요? 아니요. 목적은 단 하나. 하와를 타락시키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너무나도 무서운 마귀 사탄의 속삭임이었던 것입니다.

이 속삭임에 넘어간 하와는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게 됩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남편인 아담까지도 하나님을 배신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하나입니다. 타락이요, 저주요, 불행이요, 실패자, 패배자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왜 이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속삭임을 뿌리치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된다고 하면 안 돼.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물러가라! 라고 하면 되는 것을 자꾸 말을 하게 내버려두니까 결국 거기에 넘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반면 욥은 어땠습니까. 그렇게 많은 재산, 그렇게 많은 자녀들을 가지고 있었으나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날라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욥기 2장 7절~8절을 봅니다.

“7.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8.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サタンは主の前から出て行き、ヨブを足の裏から頭の頂まで、悪性の腫物で打った。
ヨブは土器のかけらを取り、それでからだを引っかいた。彼は灰の中に座っていた。

이제 재산과 자녀들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건강까지도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났는데 그걸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긁고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야말로 남부럽지 않던 삶을 살았던 그가, 아무런 죄 없이 이 지경이 되니 얼마나 어의가 없었겠습니까.

이를 보다 못한 그의 아내가 말합니다.

욥기 2장 9절

“9.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すると、妻が彼に言った。「あなたは、これでもなお、自分の誠実さを堅く保とうとしているのですか。神を呪って死になさい。」

사실 그의 아내가 한 이 말을 가지고 그의 아내를 마치 악처와 같이 말하기도 합니다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정말 너무나도 가엾고 보기 딱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이 좋다고 소문났는데,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았다고 사람들은 부러워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되니 안쓰러운 마음에 그런 말을 했을지도 모르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을 욕해도 될 리야 있겠습니까.

이 속삭임, 어쩌면 정말 하나님을 욕할 수 있는 상황, 이와 같은 속삭임을 욥은 물리쳤습니다.

욥기 2장 10절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しかし、彼は妻に言った。「あなたは、どこかの愚かな女が言うようなことを言っている。私たちは幸いを神から受けるのだから、わざわいも受けるべきではないか。」ヨブはこのすべてのことにおいても、唇によって罪に陥ることはなかった。

그 결과 욥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보게 되는 축복, 진정한 하나님을 알게 되는 축복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빼앗겼던 모든 것들이 회복되는 축복, 그 이전보다도 훨씬 더 부요하게 되는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앗수르의 산헤립(センナケリブ) 왕은 대군을 이끌고 와서 유다 땅을 공격하려 합니다. 하나님을 모욕하고 하나님의 사람 히스기야 왕을 모욕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오늘 구절입니다.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열왕기하 19장 6절~7절
“6.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말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 바 나를 모욕하는 말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7.내가 한 영을 그의 속에 두어 그로 소문을 듣고 그의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의 본국에서 그에게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더라”

イザヤは彼らに言った。「あなたがたの主君にこう言いなさい。『主はこう言われる。あなたが聞いたあのことば、アッシリアの王の若い者たちがわたしをののしった、あのことばを恐れるな。
今、わたしは彼のうちに霊を置く。彼は、あるうわさを聞いて、自分の国に引き揚げる。わたしはその国で彼を剣で倒す。』」


사실 당시 상황으로 보았을 때 이건 말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모든 권력을 손에 넣고 천하를 호령하는 산헤립 왕이 유다 공격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돌아가요?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니라 칼에 맞고 죽어요? 그래. 좋아요. 그러면 그걸 믿을 근거가 어디 있냐 하는 것이지요. 지금 그 나라 앗수르에서 반역에 대한 소문이 있어요? 무슨 징조라도 있나요? 아니요.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근거이고, 무엇이 증거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 말씀입니다.

창세기 1장 7절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神は大空を造り、大空の下にある水と大空の上にある水を分けられた。すると、そのようになった。


창세기 1장 9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神は仰せられた。「天の下の水は一つの所に集まれ。乾いた所が現れよ。」すると、そのようになった。

창세기 1장 15절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また天の大空で光る物となり、地の上を照らすようになれ。」すると、そのようになった。

창세기 1장 24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神は仰せられた。「地は生き物を種類ごとに、家畜や、這うもの、地の獣を種類ごとに生じよ。」すると、そのようになった。

창세기 1장 30절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また、生きるいのちのある、地のすべての獣、空のすべての鳥、地の上を這うすべてのもののために、すべての緑 の草を食物として与える。」すると、そのようになった。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하나님 말씀이신 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국 앗수르 왕 산헤립(センナケリブ)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열왕기하 19장 35절~37절
“35.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36.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37.그가 그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쳐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그들이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その夜、主の使いが出て行き、アッシリアの陣営で十八万五千人を打ち殺した。人々が翌朝早く起きて見ると、なんと、彼らはみな死体となっていた。
アッシリアの王センナケリブは陣をたたんで去り、帰ってニネベに住んだ。
彼が自分の神ニスロクの神殿で拝んでいたとき、その息子たち、アデラメレクとサルエツェルは、剣で彼を打ち殺した。彼らはアララテの地へ逃れ、彼の子エサル・ハドンが代わって王となった。

전쟁터에서 전날에 여호와의 사자가 그 진영의 군사들 185,000명을 다 죽여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어쩔 수 없이 빈손으로 돌아갔더니 거기서 칼에 맞아 죽었다는 것이에요. 말이 안 되지요? 예, 말이 안 됩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실제로 일어나버렸는데 말이에요.

만약에 히스기야(ヒゼキヤ)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안 믿고 앗수르에 항복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는 그의 나라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포로로 끌려가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잘 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우리 하나 살려보려고, 우리 하나 잘 되게 해보시려고, 예수님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우리에게 주셨는데, 우리가 잘 안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전도를 하러 교회 주변을 돌아다니면요, 여기저기서 개가 짖습니다. 그렇다면 전도 하면서 그 개가 짖는 소리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여야 하나요? 아니요. 담대하게 주님께서 인도해주시는 길을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귀가 귀에 대고 속닥속닥 거리면 어떻겠습니까. 상당히 거슬리고 시끄럽게 느껴지겠지요? 일본말로 보면 시끄럽다는 것을 <우루사이>라고 하는데, 그 한자가 참 흥미롭습니다. 한자를 <5월달의 파리>라고 써요. 옛말로 5월이니까 아마도 음력이겠이죠. 그러니까 지금으로 본다면 6월쯤 될 것입니다. 오뉴월의 파리가 얼마나 시끄럽습니까. 하지만, 예를 들어서 올림픽 마라톤을 달리는 선수가 그 파리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는 것 보셨습니까? 그런 쓸데없는 속삭임에 신경 쓰다 보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당당하게 결승점을 향해 질주해야지만 훌륭한 성적을 남길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래야지만 진정한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뉴월의 파리 같은 마귀 사탄들의 속삭임을 모두 물리치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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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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