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회 감사함으로 채우는 삶 |
2018년 11월 18일 설교 |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고린도전서 3장 5절~8절 |
한국어 동영상 |
마가복음 9장 41절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감사함으로 채우는 삶” 感謝で満たす人生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
이카호중앙교회 |
'설교본문'에 해당되는 글 474건
- 2021.05.30 [설교본문] 제154회 감사함으로 채우는 삶
- 2021.05.30 [설교본문] 제153회 주님을 의지해야 하는 이유
- 2021.05.30 [설교본문] 제152회 높이시는 하나님
- 2021.05.30 [설교본문] 제151회 주를 바라보라
- 2021.05.29 [설교본문] 제150회 주님이 기뻐하시는 도전
- 2021.05.29 [설교본문] 제149회 우리들의 시선
- 2021.05.29 [설교본문] 제148회 소금을 두라
- 2021.05.29 [설교본문] 제147회 우리들의 회복
- 2021.05.29 [설교본문] 제146회 믿음의 현역선수
- 2021.05.29 [설교본문] 제145회 곤고한 날에
제153회 주님을 의지해야 하는 이유 |
2018년 11월 11일 설교 |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잠언 9장 10절 |
한국어 동영상 |
마가복음 9장 41절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주님을 의지해야 하는 이유” 主を頼らなければならない理由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
이카호중앙교회 |
제152회 높이시는 하나님 |
2018년 11월 4일 설교 |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누가복음 14장 7절~11절 |
한국어 동영상 |
마가복음 9장 41절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높이시는 하나님” 高くされる神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
이카호중앙교회 |
제151회 주를 바라보라 |
2018년 10월 28일 설교 |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사도행전 3장 1절~10절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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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주를 바라보라” 主に目を注ぎなさい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이름 없는 한 사람입니다. 편의상 이 사람을 A씨라고 하지요. 이름도 없는 이 A씨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먼저, A씨에 대해서 성경에는 어떻게 설명되어 있는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2절을 한 번 볼까요? 사도행전 3장 2절입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すると、生まれつき足の不自由な人が運ばれて来 た。この人は、宮に入る人たちから施しを求めるために、毎日「美しの門」と呼ばれる宮の門に置いてもらっていた。 이 A씨에 대한 설명은 어떻게 보면 대단히 부실해 보입니다. 무엇보다 이름도 없습니다. 그저 나면서부터 다리에 장애가 있었다고 합니다. 상황이 그랬으니 일을 할 수도 없었겠지요. 장애가 가볍다면 지팡이라도 짚고 걸을 수도 있었겠으나, 이 A씨는 장애가 너무나도 심해서 아예 일어서지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무슨 사회복지제도 같은 것도 없었을 테니, 이 사람을 불쌍하게 여겼던 주변 사람들이, 구걸이라도 할 수 있도록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으로 데려다 주었던 것입니다. 이 A씨의 이름은 안 나오지만, 나이는 나옵니다. 사도행전 4장 22절에 보면 40세가 넘었다고 합니다. (四十歳を過ぎていた。) 그러니까 태어나서부터 마흔이 넘도록 이 A씨는 한 번도 걸어보지도 못하고, 어느 정도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저 성전 문 앞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루 이들이 아니라 무려 40년 넘도록 말입니다. 그날도 다른 날과 차이가 없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루에 3번 예배를 드렸었는데, 그 날도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성전 문가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항상 앉았던 곳은 미문이라고 합니다. 미문, 아름다운 문입니다. 이는 정식명칭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서울의 동대문이나 남대문이 정식명칭이 아니지요? 동대문은 흥인지문, 남대문은 숭례문이라고 합니다만, 그저 편의상 동대문이나 남대문이라고 하는 것처럼, 예루살렘 성전의 어떤 문, 아마도 대단히 아름다운 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나 아름다우면 “미문”이라고 했겠습니까.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 밑에 앉아서 성전에 들어가고 나오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구걸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비록 매일같이 그처럼 아름다운 문가에 앉았으나, 그는 꿈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남들처럼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으고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려서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하는 꿈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저 하루하루 굶지 않고 살아갈 수만 있다 하더라도 감지덕지였을 것입니다. 그가 바랬던 것은 단 하나입니다. 아침에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성전에 나갈 때, 무엇을 바랬겠습니까. 그저 오늘은 좀 돈을 넉넉하게 얻을 수만 있었으면 좋겠다.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습니다. 그 외에는 꿈도 없고 희망도 없고 계획도 없습니다. 그저 오늘도 한 푼 두 푼 얻는 것만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가 앉아 있는 자리는 아마도 정해져 있었겠지요. 벌써 수 십 년을 그 곳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그 날도 항상 있어왔던 자리에 앉았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는 돈을 달라고 부탁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1절에 보면 제 구 시라고 합니다. 이는 유대식 시간인데 요즘 우리 식으로는 오후 3시입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하루도 끝나가려는 그 때, 이 A씨는 사람은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한테도 구걸을 합니다. 한 푼 줍쇼……한 푼 줍쇼……라고 했을 지도 모르겠지요. 右や左の旦那様…哀れな私にお恵みを… 자, 이제 여기서부터 실제로는 대단히 짧은 시간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좀 슬로모션, 느린 그림으로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볼까 합니다. 이 A씨가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한 푼 줍쇼……라고 구걸을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을 합니다. 4절을 봅니다. 사도행전 3장 4절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ペテロは、ヨハネとともにその人を見つめて、「私たちを見なさい」と言った。 이 말을 들었을 때 A씨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음? 아니 뭘 주는 사람들은 그냥 아무 말 없이 돈을 던져 주거나, 아니면 그냥 지나가는데, 이 사람은 자기들을 보라고 하네? 뭔가 대단할 걸 주려나? 하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A씨는 잔뜩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이는 제 상상이 아닙니다. 3장 5절을 볼까요?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彼は何かもらえると期待して、二人に目を注いだ。 여기서 <바라보았다>라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만, 베드로와 요한을 본 것은 이게 처음이 아닙니다. 3절에서도 한 번 봤어요. 3절을 다시 한 번 볼까요?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彼は、ペテロとヨハネが宮に入ろうとするのを見て、施しを求めた。 이처럼 베드로와 요한을 본 것은 처음이 아닙니다. 하지만 원문에 의하면 3절의 <보다>라는 것과 5절의 <보다>라는 단어는 분명히 다릅니다. 어떻게 다르냐 하면, 5절 나오는 동사 <보다>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집중해서 보았다는 뜻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3절에서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이 사람 저 사람 쳐다보는 김에 베드로와 요한도 보았습니다만, 베드로가 <우리를 보라>라고 하자, 정말 무슨 큰 돈이라도 줄줄 알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집중해서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자, 슬로모션이에요. 6절을 기, 승, 전, 결……이렇게 4개로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6철 처음, <기>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すると、ペテロは言った。「金銀は私にはない。…… 아니, 이게 지금 무슨 말이에요? 심각한 표정으로 자기를 보라고 하기에, 글쎄요. 요즘 식으로는 신사임당 몇 장 줄까? 하는 생각으로 잔뜩 기대하고 봤더니만, 베드로가 기껏 하는 말이 뭐예요? 이것도 요즘 식으로 한다면 “내가 가진 돈은 없지만……”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이 A씨는 어땠을까요? 온갖 폼은 다 잡았으면서 기껏 한다는 말이 돈이 없대? 이 양반아 무슨 장난 하나…… 안 그랬겠습니까. 자, 그 다음에 6절 두 번째, <승>의 부분입니다. 승……이니까, 앞부분에 이어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しかし、私にあるものをあげよう。…… 이건 또 무슨 말이에요? A씨는 지금 잔뜩 돈을 받을 걸 생각하고 있었는데, 앞에서는 돈이 없다고 했으면서, 이번에는 자기가 가진 것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제 기, 승, 전, 결 중에서 <전>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ナザレのイエス・キリストの名によって…… 베드로의 말을 듣는 A씨의 혼란은 최고조에 달합니다. 돈은 가진 게 없지만 자기가 가진 것을 준대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예수님의 이름을 말합니다. 불과 얼마 전 예루살렘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십자가 사건을 A씨도 듣고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A씨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두고, 그저 하나의 사건, 하나의 해프닝 정도로 인식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갑자기 베드로의 입에서 <예수>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A씨는 이 말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마지막에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일어나 걸으라”라고 합니다. 立ち上がり、歩きなさい。 그리고는 7절에 보니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고 해요. 그렇겠죠. 지금 A씨는 뭐가 뭔지도 모릅니다. “일어나 걸으라”라는 말을 들어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힘껏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彼の足とくるぶしが強くなり、躍り上がって立ち、歩き出した。 이제야 이 A씨는 깨달았습니다. 자신은 하루하루 구걸해서 얻을 푼돈만을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몇 푼이나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을 하면서 40년 넘게 살아왔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을 보라고 했을 때에도 A씨는 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닙니다. 멀쩡한 몸으로 생활하다가 다쳐서 장애를 갖게 된 것도 아닙니다. 태어나서 40년 이상 동안 걷는다는 것을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몸이었습니다. 그런 자신이 불과 몇 초 뒤에 일어나서 걷게 될 줄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자기에게 돈 대신 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이 이름을 받게 되자 그는 기대도 하지 않았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단순히 걷지 못했다가 걷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이제 그는 꿈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고 나서 그가 처음 했던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8절을 봅니다. 사도행전 3장 8절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躍り上がって立ち、歩き出した。そして、歩いたり飛び跳ねたりしながら、神を賛美しつつ二人と一緒に宮に入って行った。 그는 성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어쩌면 그 동안 성전 바깥 문턱에만 앉았다가 4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성전 안으로 들어갔는지도 모릅니다. 성전 바깥에 앉아 있을 때에는 오직 한 푼 두 푼, 세상적인 소망에만 젖어 살았습니다. A씨도 유대인이니까 하나님은 알았겠지요. 때로는 성전 문턱에 앉아 어쩌면 한 두 번, 기도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기도제목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오늘은 좀 돈을 많이 받게 해주세요……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거기서 돈을 많이 받아봐야 얼마나 받았겠습니까. 하지만 이 사람은 그 외에 어떤 희망이 있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걷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가 돈 몇 푼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두 발로 걷게 되었습니다. 태어나서부터 자신을 억누르고 모든 굴레로부터 해방되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그가 처음 한 일이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송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눈물이 났겠습니까. 얼마나 기쁨으로 충만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를 위해서 이 A씨가 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라보았을 뿐이었습니다. 그것도 집중을 해서 바라보았을 뿐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3절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 どんなしもべも二人の主人に仕えることはできません。一方を憎んで他方を愛することになるか、一方を重んじて他方を軽んじることになります。あなたがたは、神と富とに仕えることはできません。」 이는 재물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는 재물을 바로 <세상>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도 믿으면서, 믿음과 상반되는 세상적인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과 상반되는 세상적인 생각을 가진 생태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을 수 없다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A씨를 생각해볼 때, 오늘날에도 이 A씨와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A씨도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었습니다. 그저 교회 문턱에 앉아서 바라는 것은 이 세상 속에서 얻어지는 <한 푼, 두 푼>이었습니다. 기도를 해도 돈을 더 많이 벌게 해 주시옵소서, 새 차를 주시옵소서, 새 집을 주시옵소서……그 이상의 희망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기도가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기도를 안 해요? 그건 이상한 자존심이지요. 주님께 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돈이 없거나 건강이 안 좋다면 돈도 구해야 하고 건강도 구해야죠. 하지만 그것이 최종목표인가요? 그렇다면 가난할 때 기도했다가도 돈을 어느 정도 벌게 되면 이제 기도도 그만 하고, 예수님도 그만 믿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건강? 몸이 아플 때에는 열심히 믿다가, 건강이 회복되면 이제 안 믿어도 되는 건가요? 이와 같은 믿음은 성전 안에 들어가지 않고 그 문턱에 앉아 한 푼 두 푼 달라고만 하고 있는 믿음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언제까지 그러고 살겠습니까. 1~2년이 아니라 40년 넘게 교회를 다녔으면 뭘 합니까. 하나님께서 주실 크나큰 축복을 꿈꾸지도 않고, 그저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하는, 그와 같은 믿음은 성전에도 들어가지 않고, 여전히 성전 문턱에 앉아서, 한 푼 두 푼 달라고 하는 믿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전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믿음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믿음의 성전 안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신 놀라운 축복을 받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적인 생각을 끝까지 버리지 못하고, 성전 문턱에 앉아 한 푼 두 푼 구걸하면서 인생을 마치시겠습니까. 예레미야 33장 3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エレミヤ書 33章3節 『わたしを呼べ。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に答え、あなたが知らない理解を超えた大いなることを、あなたに告げよう。』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우리 모두 살아있는 믿음을 갖고, 흔들림 없이 오로지 예수님만을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신 놀라운 축복,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크고 놀라운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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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0회 주님이 기뻐하시는 도전 |
2018년 10월 21일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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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0장 35절~39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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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주님이 기뻐하시는 도전” 主が喜ばれる挑戦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
이카호중앙교회 |
제149회 우리들의 시선 |
2018년 10월 14일 설교 |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누가복음 18장 9절~14절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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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들의 시선” 私たちの視線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시면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하나는 세리입니다. 우리가 바리새인이라고 하면 좀 안 좋은 이미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사실 바리새인, 바리새파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어떻게든지 조금이라도 더 하나님을 잘 믿어보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세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은 세금을 로마한테 갖다 바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 로마에 바칠 세금을 징수하는 일을 로마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시켰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지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금을 내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방법이었습니다. 지금은 세금을 국가나 지자체에서 결정하고 그렇습니다만, 당시는 세리한테 그 권한이 있었다고 합니다. 복잡한 당시 상황을 생략하고 단순하게 본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관할 지역에서 임의로 세율을 상정하고, 그들에게는 이를 징수할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징수한 세금 중에서 일부를 로마에 바치고 나면 그 나머지는 모두 자기 차지로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들은 규정보다도 훨씬 많은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그런데 그 세금을 누구한테 징수한다고요? 예,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거두어들였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세리들은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많은 세금을 징수하고는, 이 중 일부는 로마에 갖다 바치고 나머지는 자신의 배를 불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같은 이스라엘 민족들의 피를 빨아서 로마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악랄한 일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당시 세리라는 말은 죄인의 대명사로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세리를 보면, 그들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고 합니다. 이를 보더라도 그들은 신앙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바리새인은 기도합니다. 그 기도 내용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1절 말씀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パリサイ人は立って、心の中でこんな祈りをした。『神よ。私がほかの人たちのように、奪い取る者、不正な者、姦淫する者でないこと、あるいは、この取税人のようでないことを感謝します。 이 바리새인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우선 좋은 점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바리새인의 기도 중에서 좋은 점을 기준으로 보면, 일단 이 바리새인은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토색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물건을 억지로 강제로 빼앗는 것을 말합니다. 불의는 부정한 일을 하는 것, 다른 사람들을 속이거나 하는 것을 말합니다. 간음도 안 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고백이 아닙니다. 먼저 토색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7절을 봅니다. 출애굽기 20장 17절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あなたの隣人の家を欲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隣人の妻、男奴隷、女奴隷、牛、ろば、すべてあなたの隣人のものを欲してはならない。」 다음은 불의입니다. 바리새인은 불의함을 저지르지 않았다. 즉, 내 이익을 위해서 상대방을 속이거나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레위기 19장 36절을 보겠습니다. 레위기 19장 36절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正しい天秤、正しい重り石、正しい升、正しい容器を使わなければならない。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エジプトの地から導き出した、あなたがたの神、主である。 마지막으로 간음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출애굽기 20장 14절에 간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즉, 바리새인의 이 감사 기도는 단순한 나열이 아닙니다. 이는 바로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모두 지키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다음 구절, 누가복음 18장 12절을 봅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私は週に二度断食し、自分が得ているすべてのものから、十分の一を献げております。』 나는 금식도 자주 합니다. 십일조도 드립니다……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일조에 대한 명령은 있었으나, 금식에 대한 명령은 없습니다. 다만 금식은 자진해서 하나님께 바치는 기도인 것이지요. 그러니까 바리새인은 “나 말이죠. 하나님께서 하라고 한 모든 것을 다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의 것도 모두 다 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감사를 드리고 있는 것이지요. 이 기도에 문제가 있나요? 솔직히 지금 이 바리새인치럼 자신 있게 기도를 드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반면에 세리는 어땠습니까. 세리는 자신의 죄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릴 어떤 말씀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누가복음 18장 13절을 봅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一方、取税人は遠く離れて立ち、目を天に向けようともせず、自分の胸をたたいて言った。『神様、罪人の私をあわれんでください。』 그렇죠. 세리도 자신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글쎄요. 요즘 식으로 본다면 성전 앞에 있는 십자가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저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만 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감사기도를 드렸던 바리새인보다도 이 세리가 더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충만하게 받으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실 오늘 이 말씀에 등장하는 두 인물, 즉 바리새인과 세리 중에서 주인공은 누구일까 하면,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 드린다면 바리새인이 드린 기도가 바로 오늘의 핵심 내용이 되겠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9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9절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自分は正しいと確信していて、ほかの人々を見下している人たちに、イエスはこのようなたとえを話された。 즉, 오늘 이 말씀의 제목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것이 누구냐 하면 바로 이 바리새인입니다. 이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면 참으로 독특하고 흥미롭습니다. 아마도 성경에 이처럼 독특한 기도에 대한 기록은 또 없지 않을까 할 정도로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먼저 질문을 드리려고 합니다만, 질문을 드리기 전에, 질문을 위한 질문을 잠깐 먼저 드리겠습니다. 11절을 다시 한 번 보실까요? 누가복음 18장 11절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パリサイ人は立って、心の中でこんな祈りをした。『神よ。私がほかの人たちのように、奪い取る者、不正な者、姦淫する者でないこと、あるいは、この取税人のようでないことを感謝します。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조금 바꾸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않게 해주시니 감사하나이다” パリサイ人は立って、心の中でこんな祈りをした。『神よ。私が奪い取ったり、不正をしたり、姦淫しないようにして下さり感謝します。 이 두 기도는 어떻게 다를까요.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8장 11절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パリサイ人は立って、心の中でこんな祈りをした。『神よ。私がほかの人たちのように、奪い取る者、不正な者、姦淫する者でないこと、あるいは、この取税人のようでないことを感謝します。 그리고 바꾼 기도는 이렇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않게 해주시니 감사하나이다” パリサイ人は立って、心の中でこんな祈りをした。『神よ。私が奪い取ったり、不正をしたり、姦淫しないようにして下さり感謝します。 차이가 있지요? 예, 제가 바꾼 구절에는 <나는 다른 사람들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는 부분을 뺐습니다. 이로 인해서 어떠한 차이가 일어나는가 하면, 여러분, 상상력을 한번 발휘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부터 진짜 질문에 들어갑니다. 자, 우리 한 번 눈을 한 번 감아보시기 바랍니다. 저기 앞에서 바리새인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귀를 기울여보니까 그 바리새인이 하는 기도 소리가 들려옵니다. 바리새인이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パリサイ人は立って、心の中でこんな祈りをした。『神よ。私がほかの人たちのように、奪い取る者、不正な者、姦淫する者でないこと、あるいは、この取税人のようでないことを感謝します。 자, 상상이 되시나요? 그럼 이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 바리새인, 지금 어디를 보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핵심입니다. 이 기도를 할 때 바리새인은 과연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세리를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앞서 제가 살짝 바꾼 것처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않게 해주시니 감사하나이다 『神よ。私が奪い取ったり、不正をしたり、姦淫しないようにして下さり感謝します。”라고 했더라면 이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라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바리새인의 시선은 하나님이 아닌 세리한테 있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짐작이나 추측이 아닙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에 보면 분명히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この取税人のようでないことを感謝します。”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세리> 즉, 바리새인의 시선은 분명히 하나님이 아니라 세리를 향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한 말은, 얼핏 보기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기도처럼 보입니다만, 이는 기도가 아니라 실제로는 세리를 향한 멸시, 세상 사람들을 향한 멸시였던 것입니다. 비난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가장한 비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를 가장한 멸시를 하나님께서 어찌 기뻐하시겠습니까. 로마서 13장 9절을 봅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姦淫してはならない。殺してはならない。盗んではならない。隣人のものを欲してはならない」という戒め、またほかのどんな戒めであっても、それらは、「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ことばに要約されるからです。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를 바꾸어 말한다면,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계명을 모두 지킨다 하더라도, 거기에 이웃에 대 한 사랑이 빠진다면 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만약에 우리가 이 바리새인이 드리는 잘못된 기도. 그렇죠. 이건 분명히 잘못된 기도입니다만, 이 기도를 보고, “그래, 저 바리새인은 참 잘못됐어. 나쁜 사람이야.”라고 끝나버린다면, 우리는 이 바리새인이 세리를 멸시한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늘 이 바리새인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만약에 오늘 말씀 중에 등장한 바리새인이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 대한 비유>로서 자기를 예로 들어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그 사실을 알고 이 바리새인이 반성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아니, 뭐가 문제인데? 나 하나님 말씀 잘 지켰잖아? 저 세리처럼 죄를 짓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는데 그게 뭐가 잘못됐다는 거야. 나 일요일에 교회 빼 먹은 적도 없고, 십일조나 감사헌금도 꼬박꼬박 드렸어. 봉사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알아? 그 정도면 된 거 아냐?” 혹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로마서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 なぜなら、人はだれも、律法を行うことによっては神の前に義と認められないからです。律法を通して生じるのは罪の意識です。 우리는 우리가 아무리 율법을 잘 지켰다고 생각해도 이로 인해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은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백 년이 아니라 백 만년 동안 율법을 지키려고 해봤자 이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한테 돈을 바치지 않으면 하나님이 굶으신 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가난하시답니까. 역대상 29장 11절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歴代誌第一 29章11節 主よ、偉大さ、力、輝き、栄光、威厳は、あなたのものです。天にあるものも地にあるものもすべて。主よ、王国もあなたのものです。あなたは、すべてのものの上に、かしらとしてあがめられるべき方です。 라고 다윗은 고백합니다. 온 천하 만물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헌금을 많이 냈다고 주님 앞에서, 또는 사람들 앞에서 자랑을 해요? 이사야 1장 11절~12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イザヤ書 1章11節~12節 「あなたがたの多くのいけにえは、わたしにとって何になろう。──主は言われる──わたしは、雄羊の全焼のささげ物や、肥えた家畜の脂肪に飽きた。雄牛、子羊、雄やぎの血も喜ばない。 あなたがたは、わたしに会いに出て来るが、だれが、わたしの庭を踏みつけよとあなたがたに求めたのか。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아무리 많은 돈과 재산을 하나님께 바쳤다 하더라도, 아무리 봉사를 많이 했다 하더라도, 아무리 의로운 행위를 많이 했다 하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훌륭한 기도를 드렸다 하더라도, 그 시선이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는다면, 그 마음 안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없다면, 이는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봅시다. 하나님은 그 시선과 그 마음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이웃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제150회 주님이 기뻐하시는 도전 → |
← 제148회 소금을 두라 |
이카호중앙교회 |
제148회 소금을 두라 |
2018년 10월 7일 설교 |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마가복음 9장 50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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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소금을 두라” 塩気を保て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
이카호중앙교회 |
제147회 우리들의 회복 |
2018년 9월 30일 설교 |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에스겔 37장 5절~10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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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들의 회복” 私たちの回復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
이카호중앙교회 |
제146회 믿음의 현역선수 |
2018년 9월 23일 설교 |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디모데후서 4장 9절~10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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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믿음의 현역선수” 信仰の現役選手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
이카호중앙교회 |
제145회 곤고한 날에 |
2018년 9월 16일 설교 |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전도서 7장 14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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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곤고한 날에” 逆境の日に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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