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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4회 감사함으로 채우는 삶
2018년 11월 18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5절~8절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한국어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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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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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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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감사함으로 채우는 삶” 感謝で満たす人生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물건에 대한 욕심은 별로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욕심이 있다면 좀 넓은 책상을 갖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동경에서 살 때에는, 집이 워낙 좁다 보니 독립된 구조의 제 방이 없었습니다. 기껏 있는 방이라고 하면 미닫이문으로 연결된 방이었지요. 하지만 제 책상은 계속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 책상에 대해 그리 만족해본 일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방은 좀 좁더라도 좀 넓은 책상을 갖고 싶었어요.

그런 생각은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한 다음에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책상은 상당히 넓었습니다만, 별로 넓다는 생각을 못 해보았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텔레비전에서 어떤 영화배우가 새 집을 구입했는데, 그 이유가 그 집에 보니 큰 책상이 있었더라는 거예요. 바로 그게 마음에 들어서 그 집을 샀다고 했는데, 그 말이 저는 참 이해가 될 것 갈았습니다.

그런데 문득 제가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때 어떤 직원의 책상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좀 늦은 시간, 이 분이 퇴근한 다음이었는데, 그 때 그 책상을 보니까 참 넓어 보이는 것이에요. 그래서 왜 이렇게 넓어 보일까 했더니만, 아하, 알았습니다. 그 책상 위가 너무나도 깨끗하게 치워져 있던 것입니다. 정말 책상 위에 아무것도 없어요. 물론 모니터는 있지요. 키보드도 마우스도 있었지만 저기 한 쪽으로 딱 밀어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책상이 얼마나 깔끔해 보이는지 몰라요. 정말 저 같아도 다음날 아침에 출근해서 그 책상을 보면 정말 일하고 싶어질 마음이 생길 것 같아요. 그런데 뭐 그 때는 그러고 말았던 것 같습니다. 그걸 보고 제가 뭘 어떻게 해보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러던 차에 며칠 전, 문득 제 책상을 봤어요. 그랬더니 거기에는 무슨 프린트다, 영수증이다, 책이다 해서 빈 공간이 별로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기 위한 최소한의 공간만 비어있어요. 그 때 마침 예전에 봤던 그 분의 책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그러면 어디 한 번 치워보자……자고로 정리의 기본 원칙이 뭐겠어요? 예, 안 쓰는 것을 치우자……하면 역시 마찬가지거든요. 이것도 써야 하고, 저것도 써야 하고……그러면 책상은 여전히 똑같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 하면, 일단 모든 것을 없애버렸습니다. 정말 당장 필요한 것을 빼고 모든 것을 버리든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옮겨놓았습니다.

하……그러자 정말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책상이 어마어마하게 넓어진 거예요. 아마도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썼던 책상 중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사용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할 정도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어질러진 책상을 보면서도 나름 핑계를 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20세기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책상, 그리고 일본의 유명 작가인 사카구치 안고의 서재 사진 같을 것을 보면 책상이 정말 지저분합니다. 방도 엉망진창이에요. 거기에 비하면 제 책상은 양반이지요.

하지만 책상을 깨끗이 치우면서 든 생각이 무엇인가 하면, 두 가지입니다.
첫째, 나는 천재 물리학자나 유명 작가가 아니다.
그리고 둘째, 아인슈타인이나 사카구치 안고가 책상 정리를 좀 잘 하고 살았다면 더 뛰어난 성과를 남겼을지도 모른다.
이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책상을 좀 깨끗하게 치우고 연구를 했다면, 그가 평생 동안 연구해왔던 통일장이론을 완성시킬 수 있었을지도 모르고, 사카구치 안고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ㅎㅎ물론 이건 제 개인적인 상상입니다.

이렇게 깨끗하게 책상을 치우고 나니까, 제 마음에 무슨 마음이 드냐 하면,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이렇게 넓은 책상이 나한테 주어지다니 얼마나 감사한가……. 내 인생 중에서 가장 큰 책상을 얻은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제가 그토록 갖고 싶었던 큰 책상. 하지만 제게 필요했던 것, 큰 책상을 얻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은, 큰 책상을 살 수 있는 돈이나, 큰 책상을 놓을 수 있는 큰 집이 아니라, 책상을 치우려고 하는 제 마음가짐이었던 것입니다.

혹시 본인의 책상이 좁다고 생각하시는 분께서는 저처럼 한 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이건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너무나도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라고 하는 마음을 언제 느낄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무엇인가에 대해서 불만이 있거나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는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저는 참 정리를 잘 못하는 편인데, 그 이유를 제 스스로가 알고 있습니다.

뭐냐 하면 잘 버리질 못해요. 분명 당장은 쓸 일이 없을 것 같지만 왠지 나중에 필요해질 것 같아요. 그래서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욕심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도 갖고 싶고, 저것도 갚고 싶다는 것이 바로 욕심이지요. 물론 필요하다면 가지고 있어야지요. 슈퍼에 가서 식사거리도 사야죠. 하지만 사람의 욕심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나한테 있어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의 몇 배, 몇 십 배, 나아가서는 몇 백 배나 몇 천 배도 더 갖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욕심인 것입니다.

욕심은 마치 소금물과도 같습니다. 아무리 마셔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감사가 자리잡을 곳이 없습니다. 아직 내 욕심이 충족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감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6장 31절~33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ですから、何を食べようか、何を飲もうか、何を着ようかと言って、心配しなくてよいのです。
これらのものはすべて、異邦人が切に求めているものです。あなたがたにこれらのものすべてが必要であることは、あなたがたの天の父が知っておられます。
まず神の国と神の義を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これらのものはすべて、それに加えて与えられます。

이 말씀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들은 작은 것에 대해서 전전긍긍 하지 말라. 너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런 사소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라.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 일을 하면서 살아라, 그렇게만 한다면 그런 사소한 것들은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다 책임져 주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얼마나 감사한 말씀입니까.

예를 들어서 우리가 회사 사장인데, 지금 어떤 회사와 큰 계약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는 돈이 몇 십억 몇 백억이 들어가는 프로젝트입니다. 이를 위해서 이제 협상을 하고 전략을 짜고 해야 합니다. 까딱 잘못하면 회사의 운명이 하루 아침에 바뀔 수도 있는 거대한 프로젝트입니다.

사장님이신 여러분은 어떤 한 직원한테 이 일의 실무를 맡겼습니다.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지요. 그런데 이 직원이 맨날 걱정이 끊이질 않습니다. 그래서 물어봤어요. 이봐, 자네는 뭐가 그렇게 걱정이 많아? 그랬더니 이 직원이 말합니다.

아휴……이거 맨날 스테이플러 심이 부족해요. 포스트잇도 부족하고, 볼펜도 맨날 부족해요……일을 하다가 펜이나 종이가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게 제 걱정입니다……

만약에 이 직원이 그랬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야, 이 친구야. 지금 그거 걱정할 때야? 지금 몇 십억, 몇 백억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을 맡겼는데 기껏해야 지금 볼펜이나 종이가 떨어지는 것 걱정하고 있어? 그런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채워줄테니 내가 하라고 한 일이나 신경 써……

이러지 않겠습니까? 사장님이 그렇게 말을 했으면 들어야지, 그래도 계속해서 중요한 건 뒷전으로 미루고 볼펜 걱정 종이 걱정 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일을 계속 그 직원한테 맡기겠습니까? 아니요. 그 직원한테서 일을 빼앗고 다른 사람한테 맡길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누가복음 9장 3절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ルカの福音書
「旅には何も持って行かないようにしなさい。杖も袋もパンも金もです。また下着も、それぞれ二枚持ってはいけません。

이는 단순히 물건을 가지고 가지 말라는 것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도 역시 사소한 일들을 위해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다 알아서 채워줄 테니 너는 내가 맡긴 일에만 신경 쓰면 된다는 것입니다.

여행을 많이 해본 사람과 많이 안 해본 사람들을 보면 금방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어떻게 차이가 나냐 하면, 여행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짐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가져가야 하고 저것도 가져가야 하니까 당연히 짐이 무거워질 수밖에요. 그런데 어떤 분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여행에 갈 때, 특히 장기 여행을 갈 때에는 이렇게 짐을 싸면 된대요. 잘 생각해서 필요한 물건만을 모아보래요. 정말로 이건 없으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되는 물건들만을 모아서, 마지막에는 그 중에서 딱 절반만 가져가라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현지에서 조달하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다 하나하나 가져가려고 하니 짐이 무거우니까 움직일 때마다 고생인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연예인이 이런 말을 했어요. 이 분이 가수인지 텔런트인지는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자기가 지금까지 모아놓은 레코드나 CD, DVD가 참 많다는 것이에요. 얼마나 많은지 집에 둘 곳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한 결과, 유료 창고를 하나 빌렸대요. 그래서 돈을 내고 그 창고에 자신이 그 동안 모아놓은 CD나 DVD를 보관하기로 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아, 이게 바로 츠타야구나……말하자면 CD, DVD 대여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일본에는 CD, DVD 대여점들이 참 많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구하기 힘든 희귀한 것들도 있기야 하겠지만, 대부분은 그런 대여점에 가면 언제든지 빌릴 수 있는 것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자기가 다 지고 다니면서, 결국 둘 곳이 없으니까 돈을 내고 창고를 빌려야 할 정도까지 되었다는 것인데, 그럴 필요 없이, 필요하다면 대여점에 가서 빌리면 된다는 것이에요. 어차피 보관하기 위해 창고를 빌리나, 아니면 대여점에서 빌리나 돈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앞서 아인슈타인이나 소설가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그런 교수나 작가들의 집은 어떻겠어요? 아마도 책들이 여기저기 많이 싸여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는 물론 쉽게 구할 수 없는 책들도 많겠지요. 하지만 그걸 꼭 다 갖고 있어야 하나요? 솔직히 아무리 책을 좋아하는 분이라 하더라도 거기 있는 책 중에서 항상 곁에 두고 있어야 할 정도로 자주 보는 책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정말 중요한 책들만 집에 두고 그 외의 것들은 차라리 필요할 때 도서관에 가서 보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냐 하면 감사가 사라지게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감사는 언제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첫째로, 감사는 내가 낮아질 때 드릴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충실한 종인지 아닌지를 말씀하실 때 다윗을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윗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기에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겸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에 대한 축복을 말씀하셨을 때 그가 한 말을 보십시오.

역대상 17장 16절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ダビデ王は主の前に出て、座して言った。「神、主よ、私は何者でしょうか。私の家はいったい何なのでしょうか。あなたが私をここまで導いてくださったとは。

내가 정말 이와 같은 큰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는데 이렇게 채워주시니 감사합니다 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항상 겸손했습니다. 작은 것을 주셔도 감사, 큰 것을 주셔도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처럼 나 자신을 낮추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높이는 일이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계속 부어주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감사는 믿음입니다. 내가 지금 없어요. 하지만 내게 필요할 때 주님께서 채워주실 것을 믿고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 때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4절~47절
44.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信者となった人々はみな一つになって、一切の物を共有し、
財産や所有物を売っては、それぞれの必要に応じて、皆に分配していた。
そして、毎日心を一つにして宮に集まり、家々でパンを裂き、喜びと真心をもって食事をともにし、
神を賛美し、民全体から好意を持たれていた。主は毎日、救われる人々を加えて一つにしてくださった。

믿는 사람들이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서 교회에 바치면, 이를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그대로 베끼려고 한 것이 바로 공산주의 이론이라고 합니다. 개인재산을 모두 몰수하고, 국민은 국가가 부여하는 노동을 합니다. 그리고 돈이 필요하면 그 필요를 따라 나누어준다는 것이지요. 여러 가지 복잡한 이론은 있습니다만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더 쉽게 말하자면, 8시간 노동을 하고, 돈은 개인이 필요한 만큼 사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개인은 경제적인 걱정 없이 마음 편히 일을 하고 나라도 발전한다……는 것인데, 그게 실제로 가능하겠습니까.

여기 계신 분들은 안 그렇겠지만, 단순하게 말해서 10만원어치 일을 하고 100만원, 1000만원을 갖고 싶어하는 게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국가에서 만족시켜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누가 얼마만큼 필요한지를 사람이 판단한다고 하는데, 그건 불가능한 것이지요.

하지만 누구는 아세요? 예, 주님은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계시고, 필요에 따라 채워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믿음이 있으면 감사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넓은 책상이 필요하신가요? 우리한테는 넓은 책상을 살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넓은 책상을 놓을 만한 큰 집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이미 그 책상은 여러분이 가지셨습니다. 다만 안 보일 뿐입니다. 왜요? 그렇습니다. <욕심>이라고 하는 잡동사니들에 가려서 안 보이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욕심>이라고 하는 여러 가지 잡동사니를 깨끗하게 치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셨던 넓은 책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미 우리에게 주신 넘치는 축복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열심히 일만 하다가 어떤 사고를 당해서 며칠 동안 집에서 요양을 했던 사람의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가끔 목발을 짚고 동네를 산책해보았더니, 그곳에 그렇게 오랫동안 살았는데도 자기 동네에 그렇게 꽃이 많이 피었고 새가 많이 우는 것을 처음 알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그러면 가족이 보입니다. 이웃이 보입니다. 가끔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감사를 드린다면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에게 그렇게 큰 축복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나요? 아니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보겠다고 결심을 하면 뭘합니까. 금방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세상 속에서 세상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감사와 믿음은 사라지고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힙니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축복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감사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5절~8절 신약성경 266페이지
5.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アポロとは何なのでしょう。パウロとは何なのでしょう。あなたがたが信じるために用いられた奉仕者であって、主がそれぞれに与えられたとおりのことをしたのです。
私が植えて、アポロが水を注ぎました。しかし、成長させたのは神です。
ですから、大切なのは、植える者でも水を注ぐ者でもなく、成長させてくださる神です。
植える者と水を注ぐ者は一つとなって働き、それぞれ自分の労苦に応じて自分の報酬を受けるのです。

사람이 아무리 심고 물을 주더라도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지 않으시면 모든 일은 헛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어떻게 말씀하고 계십니까.

데살로니가전서 5장 24절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あなたがたを召された方は真実ですから、そのようにしてくださいます。

하나님은 이루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내게 없는 것을 보지 말고 내가 가진 것, 주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보고 감사 드려야 하고, 또한 장차 주님께서 채워주실 것을 믿고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낮아짐으로 하나님을 높이면서 감사를 드리고, 우리에게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감사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우리의 모든 삶을 감사함으로 채워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155회 죄를 다스리라 →

← 제153회 주님을 의지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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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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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3회 주님을 의지해야 하는 이유
2018년 11월 1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잠언 9장 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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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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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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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주님을 의지해야 하는 이유” 主を頼らなければならない理由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혜롭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는 참 중요한 것이지요. 지혜롭다는 말의 반대는 미련하다는 말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 머리가 좋고 지혜로운 사람들은 많습니다만, 그 반면에 미련한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공부요? 가방끈이 길면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석사, 박사, 정도를 받으면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삶을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아니면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면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자기 스스로가 지혜롭다고 믿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진정으로 지혜롭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지혜로운 삶이요, 지혜로운 사람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지혜롭다는 사람, 아무리 석사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 아무리 어려운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면서 5분 뒤에 신호등에 걸려 있을지 아닐지를 100프로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가장 지혜로운 줄 알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경을 봅니다.

전도서 8장 7절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伝道者の書
何が起こるかを知っている者はいない。いつ起こるかを、だれも告げることはできない。


전도서 10장 14절
“우매한 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나중에 일어날 일을 누가 그에게 알리리요”

伝道者の書
愚か者はよくしゃべる。人はこれから起こることを知らない。これから後に起こることを、だれが彼に告げる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

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교통사고를 보십시오. 얼마 전에 한국에서인지 일본에서인지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습니다만,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중앙선 너머에서 자동차가 중앙분리대를 박고는 이 쪽으로 달려오는 게 아니라, 아주 날라오더라구요. 내가 아무리 제한속도를 지키고 안전운전을 해 봤자 뭐합니까.

제아무리 신중하게 운전을 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설마 중앙선 너머에서 자동차가 날라오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고속도로이니만큼 이쪽도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지만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저쪽에서 100킬로, 이쪽에서 100킬로 그렇게 해서 200킬로에 가까운 속도로 자동차가 부딪혔을지도 모르죠. 제아무리 운전솜씨가 좋다고 하더라도 그걸 어떻게 피하겠습니까.

이처럼 사람은 1년이나 10년은 고사하고 단 3분이나 5분, 아니, 1초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욥기 23장 10절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ヨブ記
しかし神は、私の行く道を知っておられる。私は試されると、金のようになって出て来る。

주님은 아십니다. 뉴스를 보면 공부 많이 하고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던 사람들이 뇌물을 받거나 부정을 저질러서 감옥에 가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많이 공부를 했으면서 그런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요. 하지만 사람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설마 자기가 감옥에 갈 줄 알고 그랬겠습니까. 나는 괜찮겠지….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괜찮아. 자신 있다니까……하지만 그러다가 어떻게 됩니까. 공든 탑이 안 무너진다구요? 아니요.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는 어떻습니까. 제 간증을 해볼까 합니다. 이는 바로 어제 밤에 있었던 일입니다. 지난 주는 정말 참 여러 가지로 힘들었던 한 주였습니다. 일단 감기가 심하게 걸렸어요. 지난 주일부터 좀 기침이 난다 싶었는데, 그러고 말겠지 했습니다만, 이게 점점 심해지더니 주중에는 정말 참 힘들어지더군요.

몸이 좀 안 좋고 그러면, 다른 일이라도 잘 풀려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또 여기저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교회소식을 메일로 전해드리는데 지금까지는 별로 문제가 안 되었던 것이 시스템 적으로 계속 막혀요. 그래서 막히면 또 메일을 써서 한국 인터넷 회사에 보내고, 그럼 또 한국에서는 아이구, 죄송합니다 하고 그 막힌 것을 풀어주면, 또 다른 곳에 막히고, 그럼 또 메일을 써서 보내요. 그러면 저쪽에서는 또 아이구 죄송합니다……하고 또 풀어주고……이런 일이 지난 주에는 이상하게 반복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사실 이런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한 게 지난 주가 처음은 아니에요. 지난 달 10월 중순 쯤에 어떤 새로운 데이터를 추가할 일이 있었는데, 사실 그 때 자세한 말씀을 드리려면 좀 길어져서 생략하겠습니다만, 좀 느낌이 안 좋았었거든요. 하지만 그래도 뭐, 일단 데이터를 추가를 시켜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막 그 때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지난 주에 완전히 절정에 다다른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 도저히 안 되겠어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생각했는데, 결국 뭐,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지난 달에 추가했던 새로운 데이터를 빼버리면 되겠지요. 근데 그게 쉽냐 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미 기존 데이터와 섞여버려서 어떤 게 그 때 추가한 것인지 분간을 할 수 없게 돼버렸습니다.

아, 참 난감하더라구요. 이게 다 하나님 일이라고 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일이 꼬일까요. 그래도 나름 또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에요. 예전에 새로운 데이터를 얻었을 때의 방법을 똑같이 반복해서, 그 다시 얻게 되면, 그 데이터와 똑 같은 데이터를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에서 빼내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머리를 굴려보니까, 이게 보통 작업이 아니에요. 대충 짐작을 해보니까 오로지 그 일에만 매달린다 하면 아무리 짧게 잡아도 3일~4일, 하지만 다른 일도 하면서 해야 하니까 빨라 봤자 1주일 정도는 걸리는 업무량이었습니다.

참 생각만 해도 참 난감했습니다. 그래서 이래저래 답답하기도 하고 해서 어제 밤중에 잠시 동네 주변을 걸었습니다만, 그 때 횡단보도를 건너서 편의점 앞을 지나오는 순간, 갑자기 머리 속에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것입니다. 정말 저 자신이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아, 그래, 이걸 이렇게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내가 왜 이걸 몰랐을까.

정말 그 순간은 전혀 과장 없이 말씀 드리건대, 이렇게 걸어가다가 저도 모르게 멈춰 서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때 생각난 방법대로 일을 하니까, 그 전에는 1주일은 걸릴 줄 알았던 일이, 넉넉잡아 2시간 만에 끝나버렸습니다. 그것도 제가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깔끔하게 일을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가끔 어떤 분들이 하시는 간증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물론 그 중에는 정말 은혜로운 간증도 있습니다만, 가끔 보면 이게 하나님 자랑인지 자기 자랑인지 모를 때가 있지요.

그런데 정말 어제 제가 겪었던 일은 제가 무슨 잘 나서, 또는 머리가 좋아서 떠오른 게 아니라는 걸 확신합니다. 만약에 제가 생각했던 방법으로 했다고 하면 당연히 아직 일은 끝나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도 수심에 가득 찬 모습이었겠지요. 하지만 주님이 주시는 지혜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 지혜에 비한다면 사람의 생각은 얼마나 미련한지 모릅니다.

어떤 문제가 닥쳐왔습니다. 물론 내가 과거에 해보거나 아니면 들어본 일이라면 상관 없겠지요.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 비추어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한 번도 닥쳐보지 못한 일,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 우리의 인생 속에서는 수없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내가 전혀 겪어보지도 못하고, 전혀 알지도 못하는 문제가 닥쳤는데 이걸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해결하려고 하십니까. 아니요. 그건 어쩌면 마치 자동차도 운전해보지 못한 사람이 비행기를 조종하려는 것처럼 무모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자, 문제 나갑니다.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비행기를 조종해보기는커녕 자동차를 운전해본 일도 없어요. 그런데 비행기를 이륙시켜야 할 일이 발생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요?

1번, 조종사를 부른다. 2번, 일단 내 힘으로 해본다.

여러분, 어떠십니까. 내가 운전면허도 없긴 하지만, 왠지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여러분, 이건 용감한 것이 아닙니다. 무모한 것입니다. 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미련한 것입니다.


빨리 전문 지식이 있는 조종사를 찾아서 부탁해야지, 경험도 없고 지식도 없는데,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무슨 세발 자전거도 아니고 비행기를 운전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했는데 2번 내가 일단 해본다……라고 진지하게 대답한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분한테 어떻게 해드려야 해요? 예, 잘 보살펴 드려야 합니다. 어딘가가 편찮은 분인지도 몰라요.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면 대부분 1번, 조종사를 부른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 정상이겠지요. 맞습니다. 그렇게 해야지요.

하지만 그러면 이 질문은 어떻습니까.

내가 겪어보지 못한 어떤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1번 주님을 의지한다. 2번 일단 내 힘으로 해본다.

이렇게 단순한 문제인데, 지금 이 순간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순간순간마다 2번 <일단 내 힘으로 해본다>를 선택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요? 예, 주님이 주시는 지혜를 가지면 넉넉잡아 한 두시간이면 끝날 일을 1주일, 한 달이 넘도록 자기 힘으로 낑낑 대면서 고생을 하는 미련한 삶을 살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제가 저희 교회 소식을 보내드리니까 어떤 분은 이런 답장을 보내오셨습니다. 나는 무신론자입니다. 종교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신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한테는 이런 메일을 보내지 말라고 하더군요.

보내지 말라고 하면 저는 안 보내드립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사람은 지금 나 같은 사람이 얼마나 미련한 삶을 산다고 생각할까 하고 말입니다. 인생은 자기 힘으로 살아나가야지. 그리고 무슨 문제가 있으면 자기 힘과 능력으로 해쳐 나아가야지, 무슨 나약하게 신을 의지하고 그러냐……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고린도전서 1장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第一コリント人への手紙
十字架のことばは、滅びる者たちには愚かであっても、救われる私たちには神の力です。

예수님은 못 배운 사람한테만 필요한 분이 아니십니다.
지식이나 경험이 부족한 사람한테만 필요한 분이 아니십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간구해야 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잠언 9장 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箴言
主を恐れることは知恵の初め、聖なる方を知ることは悟ることである。

사람들이 왜 공부를 하지요? 예, 물론 지식을 얻기 위해서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한편으로는 학위를 따기 위해서, 자격을 얻기 위해서, 또는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학교나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서 공부하는 경우도 있겠지요.

이 모두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다 훌륭한 목표이지요. 그런데 이와 같이 노력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는 보다 좋은 삶,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일본 사람들 보면 응원할 때 자주 쓰는 말이 뭐예요? 예, がんばれ! 한국에서는 힘내라! 파이팅! 뭐 이러지요? 이게 다 뭐예요? 예, 열심히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무조건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쩌면 짙은 안개 때문에 앞이 안 보이는데도 전속력으로 달리면 목적지에 빨리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대단히 위험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랬다가 갑자기 앞에 장애물이 나타나거나,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중앙선을 넘어서 자동차가 날라오기라도 하면, 내가 탄 차가 제아무리 비싸고 튼튼한 차라 하더라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일단 내 힘으로 해 보고, 안 되면 예수님을 의지하자……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시작부터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과 함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미련한 일이에요? 아닙니다. 주님의 지혜와 능력을 의지하면 한 두 시간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내 힘으로 하겠다고 1주일 한 달 씩 지나도 제대로 못 하는 것이 훨씬 더 미련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내가 내 힘으로 내 능력대로 출세하고 돈 많이 벌어보겠다고 하다가 돈 잃고 명예도 잃고 수갑 차고 교도소에 갇히는 편이 훨씬 더 미련한 삶인 것입니다.

지혜롭게 되기를 원하십니까. 훌륭한 인생, 성공적인 인생을 원하십니까. 주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훌륭한 인생, 성공적인 인생으로 가는 지름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주님을 의지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항상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주님과 함께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능력으로 훌륭한 인생,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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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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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2회 높이시는 하나님
2018년 11월 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4장 7절~11절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높이시는 하나님” 高くされる神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 여러분, 어떠십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높은 자리에 앉지 말고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면 좀 어떠세요? 아멘, 할렐루야가 절로 나오세요?

자, 그럼 다른 말씀을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장 39절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悪い者に手向かっ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の右の頬を打つ者には左の頬も向けなさい。

이 말씀을 들으시면 어떻습니까. 할렐루야가 절로 나옵니까. 감사가 넘칩니까.

믿음이 좋으신 분들은 분명 그러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더 묻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여러분 자녀나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누가 너의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도 돌려 대면서 패라고 해라……” 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솔직히 그렇게 말하기가 쉽습니까. 아니, 나 자신이 그렇게 살아가기도 힘든데, 다른 사람, 그것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한테 그렇게 살라고 해요. 솔직히 이건 참 어려운 문제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더러 그렇게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나요? 아니요.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얼마나 사랑하세요? 예, 우리를 위해서, 너무나도 죄가 많은 우리를 대신해서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려 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씻어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왜 우리더러 그렇게 어렵게 살라고 하셨을까요.

이 사실을 모르면 어떻게 됩니까. 아니, 도대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면서 왜 맨날 당하고 살라고 하실까.

그럼 이 말을 들은 어떤 믿음 좋으신 분은 말씀하시겠지요. 아니야. 그렇게 살아야 복 받아. 그렇게 살아야지 천국 간다니까……

정말 그런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까지 그렇게 맨날 당하고 살아야 합니까. 맨날 그렇게 살다가 홧병에 앓아 누우면 책임져 주신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맨날 그렇게 손해만 보면서 살아야 복 받는다는 건가요?

그리고 또 오늘 말씀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는데, 이왕 말씀을 하실 거면 천국이나 구원이나 죄 사하심 같은, 좀 멋있고 거창한 말씀을 해주셔야 하지 않나요? 기껏 하신다는 말씀이 앉는 자리에 대해서 말씀하십니까. 이거 너무 잔소리가 좀 심한 것 같지 않으세요? ㅎㅎ 여러분은 은혜롭게 모두 알아들으시는데, 저만 좀 삐딱하게 해석하는 건가요? 어쩌면 이렇게 이해하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아, 예수 믿기 정말 힘들다……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왜 이처럼 우리더러 당하고 살라고, 손해보고 살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리고, 왜 이렇게 앉는 자리 같은 사소한 말씀까지도 예수님께서는 하신 것일까요.


오늘은 이에 대한 말씀을 이해하고, 여기에 담긴 예수님의 마음을 올바로 받아들임으로 인하여 넘치는 은혜를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우리더러 무리한 일, 이유 없는 일을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또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을 믿는 일은 축복된 길이요, 생명의 길이요, 다른 선택지가 없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당하고만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논리는 앞뒤가 안 맞는 것처럼 들입니다만, 아닙니다. 대단히 논리정연한 말씀입니다.

쉬운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배울 만큼 배우고, 가질 만큼 가진 사람이에요. 나랑 별로 친하지도 않아요. 그런데 와서 굽실거립니다. 아주 친한 것처럼 반갑게 웃으면서 악수를 청해요. 이유가 뭐예요? 왜 그럴까요?

예, 그렇습니다. 바로, 선거철입니다. 이 사람 입후보한 사람이에요. 국회의원, 시의원, 시장 구청장, 그리고 대통령 등에 출마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얼릉 다가가서 인사하고 악수하고 그럽니다. 그 사람은 자존심이 없어요? 손해보고 살려고 하는 거예요?

아닙니다. 거기서 그렇게 자존심을 굽히고 사람들한테 친절하게 보이고 그러면 훨씬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그 머리 속에는 정확한 계산이 있기 때문인 것이에요. 그 증거로 선거철인데, 자신의 지역구를 벗어나서 인사하거나 악수하는 것을 보셨나요? 예를 들어서 서울시장으로 출마했는데 경기도나 충청도 가서 막 인사하고 악수하고 그래요? 아니요. 그건 이상한 사람이죠.

선거에 출마한 사람들이 굽실거리는 대상은 분명합니다. 누구한테 굽실거려요? 예, 바로 유권자, 자신한테 표를 찍어줄 사람들한테만 굽실거립니다.

어디 굽실거릴 뿐인가요? 만약에 그 사람이 길가에 서서 유세를 하고 있는데, 그 사람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 그 사람한테 다가가서 싫은 소리를 했어요. 당신은 말이야, 이게 이래서 나쁘고, 저게 저래서 잘못했어! 라고 길가에서 따졌다고 칩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뭐가 어째고 어째? 이게 지금 누구한테 큰 소리야? 나 몰라? 나 국회의원 될 사람이야. 아니면 나 시장 될 사람이야. 아니면, 나 대통령 될 사람인데 날 어떻게 보고 이런 무례한 소리를 해! 이렇게 따져야 되겠습니까? 안 되요? 왜요? 사람들한테는 친절하게 해야 하니까요?ㅎㅎ

물론 그렇기도 하겠습니다만, 그러면 안 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 만약에 그랬다가는 선거에 떨어지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 때까지 아무리 착하고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왔으면 뭘 합니까. 그 사람이 많이 배웠으면 뭘합니까. 모든 것이 그 순간에 날라가 버리는 것입니다.

실제 선거를 보면 어떻습니까. 싫은 소리만 해요? 경우에 따라서는 계란을 던지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는 주먹질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후보들은 어떻게 해요? 당장 다가가서 멱살을 잡고 혼내주나요? 아니요. 묵묵히 그것을 맞습니다. 때리면 맞고 계란을 던지면 그것도 맞습니다. 이유가 뭐라고요? 예, 당선되기 위해서, 그 순간을 견디면 자신이 더 큰 영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순간, 많은 유권자들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묵묵히 참고 견디면서 자신의 자존심을 죽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른뺨을 때리면 왼쪽뺨을 대래요. 이게 쉬운 일인가요? 아니요.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있는 지혜로운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내가 이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이 순간을 누가 보고 계세요? 예, 영적인 유권자. 나를 당선 시킬 수도 있고 낙선 시킬 수도 있는 분, 나를 높이실 수도 있고, 낮추실 수도 있는 분, 나에게 축복을 주실 수도 있고, 축복을 빼앗아가실 수도 있는 분, 바로 주님께서 보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면 이제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내가 뺨 두 대 맞고 엄청난 축복을 받을 수 있다면 그깟 뺨이 문제겠습니까. 차라리 맞고 말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축복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는 제 상상이 아닙니다.

그 축복이 어느 정도의 축복일까요. 마태복음 13장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입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天の御国は畑に隠された宝のようなものです。その宝を見つけた人は、それをそのまま隠しておきます。そして喜 びのあまり、行って、持っている物すべてを売り払い、その畑を買います。

이 말씀에 의하면 밭에 감추어진 보화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 이 보화를 발견하고 어떻게 했냐 하면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보화의 가치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팔아서 사도 기쁠 정도의 보화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은 비단 돈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능력이나 경험이나 명예나 자존심이나 그 모든 것을 다 쏟아 붓고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충분히 남는 장사이기 때문에 이 밭을 사고도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이요 그것이 바로 축복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좀 더 거창한 주제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왜 하필이면 무슨 앉는 자리 같은 사소한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 특히 복음서를 읽을 때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께서는 그저 지나가는 말로 아무런 의미 없이 하신 말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10년이고 20년이고 말씀하실 시간이 없었습니다. 1시간 1분 1초, 십자가로 향해야 하는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와 같이 없는 시간을 쪼개서 하시듯 한마디 한 마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앉는 자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낮은 자리에 앉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대우해 주기를 원합니다. 자기 자신을 소중히 생각해주기를 원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권력입니다.

저는 얻어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권력이라고 하는 것을 얻으면 그렇게 달콤하다고 합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설설 깁니다. 모두가 내 말에 복종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 눈치를 살피고, 내 안색을 살핍니다. 어떻게든 내 마음에 들려고 사람들이 애를 씁니다. 누구는 이런 말을 합니다. 아부를 하면, 그걸 당하는 사람도 바보가 아닌데, 눈치를 챈다는 것입니다. 아, 저 사람이 나한테 아부를 하고 있구나 하고 말이죠.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는 것이니 참 묘합니다.

우리도 앉는 자리는 중요하지요. 벌써 앉아 있는 것만 보더라도 누가 높은 사람인지 낮은 사람인지 압니다. 그래서 대우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것은 요즘도 마찬가지지요.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람한테서 받는 상은 작고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상이 진정으로 크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정말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데, 살짝 방심만 해도 이를 잊고 맙니다. 무엇보다 저부터도 그래요.

일주일에 한 두 번 정도 교회 주변에 전도지를 들고 돕니다만, 어느 순간 저 자신한테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 주변에 보면 크고 좋은 집도 많습니다만, 자세히 보면 좀 낡고 비좁은 집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집에 제가 전도지를 넣으려고 우체통을 찾는데, 저 자신이 주저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유가 뭐겠어요. 우리 교회 사정도 어려운데, 생활이 어려운 분이 교회에 오시면 우리가 감당할 수가 있을까……뭐 이런 생각을 제가 하면서 전도지를 넣고 올까 말까를 망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목사라고 하는 인간이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 노릇입니까.

내가 지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공손히 전도지를 우체통에 넣고 나왔습니다.

아무리 교회 사정이 어렵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럼 크고 좋은 집에만 전도지를 돌리고, 가난하고 어려운 집에는 전도지를 안 돌려요? 그건 무슨 짓입니까. 그건 마치 축복은 사람이 가져다 준다고 생각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 하는 것이지요. 아, 저 큰 집에 살고 좋은 차를 모는 사람이 우리 교회에 나와서 헌금도 많이 내고 그러면 참 좋겠다……아휴, 괜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와서 헌금도 못 내고 속이나 썩이고 그러면 어떡하지……

만약에 목사가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하면, 그렇다면 목사는 그만해야겠죠. 사실 이것은 목사만이 아닙니다. 여러분, 회사원을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어떤 상품을 거래처에 판매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회사에서 주는 월급이 적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고객한테 판 돈을 내 주머니에 넣어요? 안 됩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횡령이죠. 범죄입니다. 내 경제상황이 어렵다고 해도 고객이 나한테 주는 돈은 내 돈이 아니에요. 그것은 회사 돈입니다. 회사에서 주는 돈, 사장님이 주는 월급이 내 정당한 수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라면서 돈 많은 사람만 쫓아다니고 돈 좀 줬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그야말로 횡령하려고 작정한 것이지요. 그렇다고 이건 목사만 해당된 말씀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지요. 사실 이른바 “주의 종”이라고 하면 목사만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목사가 아닌 성도님들은 무엇입니까. 목사 만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주의 종이라고 하는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주의 종이라고 하는 사명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나한테 축복을 갚을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가릴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오늘 말씀 다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4장 12절~14절

“12.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3.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4.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イエスはまた、ご自分を招いてくれた人にも、こう話された。「昼食や晩餐をふるまうのなら、友人、兄弟、親族、近所 の金持ちなどを呼んではいけません。彼らがあなたを招いて、お返しをすることが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食事のふるまいをするときには、貧しい人たち、からだの不自由な人たち、足の不自由な人たち、目の見えない人たちを招きなさい。
その人たちはお返しができないので、あなたは幸いです。あなたは、義人の復活のときに、お返しを受けるのです。」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 사람이 나한테 은혜를 갚을까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운 이유가 뭐예요? 내가 그 사람한테 은혜를 받으면 그건 지극히 작은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고, 이를 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안 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잘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더러 안 좋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우리더러 큰 축복을 받으라고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 중에 11절을 보십시오. 누가복음 14장 11절입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なぜなら、だれでも自分を高くする者は低くされ、自分を低くする者は高くされるからです。」

이 말씀 안에 주님의 사랑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낮아지기를 원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높아지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높아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힘과 능력으로 힘껏 높이 뛰어 올라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이 높여주십니다.

사무엘상 2장 7절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第一サムエル記 2章7節
主は貧しくし、また富ませ、低くし、また高くします。

이사야 52장 13절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見よ、わたしのしもべは栄える。彼は高められて上げられ、きわめて高くなる。

하나님은 우리가 낮은 곳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높아지기를 원하십니다. 높이 들리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앞서 말씀 드렸던 선거철의 후보들로부터 배우십시다. 그들의 지혜를 믿음 안에서 활용해봅시다. 선거 때를 보면 그 후보가 아무리 잘났다 하더라도 유권자가 표를 넣어주지 않으면 절대로 당선될 수 없습니다.


믿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나 스스로 나를 높이려 해도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꼼짝 못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작정하시고 높이시면 낮출 자가 없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ピリピ人への手紙 4章13節
私を強くしてくださる方によって、私はどんなことでもできるのです。

사무엘하 22장 49절
“나를 원수들에게서 이끌어 내시며 나를 대적하는 자 위에 나를 높이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는도다”

第二サムエル記 22章49節
神は、敵から私を携え出される方。あなたは、向かい立つ者から私を引き上げ、不法を行う者から私を救い出してくださいます。

시편 103편 5절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あなたの一生を良いもので満ち足らせる。あなたの若さは鷲のように新しくなる。

우리가 높아지려고 스스로 아등바등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높이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주님이 주시는 능력 안에서 주님께 순종하고 살아갈 때 주님으로부터 높임을 받고 독수리 같이 새롭게 날아오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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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1회 주를 바라보라
2018년 10월 28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 1절~10절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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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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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주를 바라보라” 主に目を注ぎなさい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이름 없는 한 사람입니다. 편의상 이 사람을 A씨라고 하지요. 이름도 없는 이 A씨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먼저, A씨에 대해서 성경에는 어떻게 설명되어 있는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2절을 한 번 볼까요? 사도행전 3장 2절입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すると、生まれつき足の不自由な人が運ばれて来 た。この人は、宮に入る人たちから施しを求めるために、毎日「美しの門」と呼ばれる宮の門に置いてもらっていた。

이 A씨에 대한 설명은 어떻게 보면 대단히 부실해 보입니다. 무엇보다 이름도 없습니다. 그저 나면서부터 다리에 장애가 있었다고 합니다. 상황이 그랬으니 일을 할 수도 없었겠지요. 장애가 가볍다면 지팡이라도 짚고 걸을 수도 있었겠으나, 이 A씨는 장애가 너무나도 심해서 아예 일어서지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무슨 사회복지제도 같은 것도 없었을 테니, 이 사람을 불쌍하게 여겼던 주변 사람들이, 구걸이라도 할 수 있도록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으로 데려다 주었던 것입니다.

이 A씨의 이름은 안 나오지만, 나이는 나옵니다. 사도행전 4장 22절에 보면 40세가 넘었다고 합니다. (四十歳を過ぎていた。)

그러니까 태어나서부터 마흔이 넘도록 이 A씨는 한 번도 걸어보지도 못하고, 어느 정도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저 성전 문 앞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루 이들이 아니라 무려 40년 넘도록 말입니다.


그날도 다른 날과 차이가 없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루에 3번 예배를 드렸었는데, 그 날도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성전 문가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항상 앉았던 곳은 미문이라고 합니다. 미문, 아름다운 문입니다. 이는 정식명칭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서울의 동대문이나 남대문이 정식명칭이 아니지요? 동대문은 흥인지문, 남대문은 숭례문이라고 합니다만, 그저 편의상 동대문이나 남대문이라고 하는 것처럼, 예루살렘 성전의 어떤 문, 아마도 대단히 아름다운 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나 아름다우면 “미문”이라고 했겠습니까.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 밑에 앉아서 성전에 들어가고 나오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구걸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비록 매일같이 그처럼 아름다운 문가에 앉았으나, 그는 꿈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남들처럼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으고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려서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하는 꿈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저 하루하루 굶지 않고 살아갈 수만 있다 하더라도 감지덕지였을 것입니다.

그가 바랬던 것은 단 하나입니다. 아침에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성전에 나갈 때, 무엇을 바랬겠습니까. 그저 오늘은 좀 돈을 넉넉하게 얻을 수만 있었으면 좋겠다.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습니다. 그 외에는 꿈도 없고 희망도 없고 계획도 없습니다. 그저 오늘도 한 푼 두 푼 얻는 것만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가 앉아 있는 자리는 아마도 정해져 있었겠지요. 벌써 수 십 년을 그 곳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그 날도 항상 있어왔던 자리에 앉았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는 돈을 달라고 부탁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1절에 보면 제 구 시라고 합니다. 이는 유대식 시간인데 요즘 우리 식으로는 오후 3시입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하루도 끝나가려는 그 때, 이 A씨는 사람은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한테도 구걸을 합니다. 한 푼 줍쇼……한 푼 줍쇼……라고 했을 지도 모르겠지요.

右や左の旦那様…哀れな私にお恵みを…

자, 이제 여기서부터 실제로는 대단히 짧은 시간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좀 슬로모션, 느린 그림으로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볼까 합니다.

이 A씨가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한 푼 줍쇼……라고 구걸을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을 합니다. 4절을 봅니다.

사도행전 3장 4절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ペテロは、ヨハネとともにその人を見つめて、「私たちを見なさい」と言った。

이 말을 들었을 때 A씨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음? 아니 뭘 주는 사람들은 그냥 아무 말 없이 돈을 던져 주거나, 아니면 그냥 지나가는데, 이 사람은 자기들을 보라고 하네? 뭔가 대단할 걸 주려나? 하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A씨는 잔뜩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이는 제 상상이 아닙니다.

3장 5절을 볼까요?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彼は何かもらえると期待して、二人に目を注いだ。

여기서 <바라보았다>라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만, 베드로와 요한을 본 것은 이게 처음이 아닙니다. 3절에서도 한 번 봤어요.


3절을 다시 한 번 볼까요?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彼は、ペテロとヨハネが宮に入ろうとするのを見て、施しを求めた。

이처럼 베드로와 요한을 본 것은 처음이 아닙니다. 하지만 원문에 의하면 3절의 <보다>라는 것과 5절의 <보다>라는 단어는 분명히 다릅니다. 어떻게 다르냐 하면, 5절 나오는 동사 <보다>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집중해서 보았다는 뜻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3절에서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이 사람 저 사람 쳐다보는 김에 베드로와 요한도 보았습니다만, 베드로가 <우리를 보라>라고 하자, 정말 무슨 큰 돈이라도 줄줄 알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집중해서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자, 슬로모션이에요.

6절을 기, 승, 전, 결……이렇게 4개로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6철 처음, <기>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すると、ペテロは言った。「金銀は私にはない。……

아니, 이게 지금 무슨 말이에요? 심각한 표정으로 자기를 보라고 하기에, 글쎄요. 요즘 식으로는 신사임당 몇 장 줄까? 하는 생각으로 잔뜩 기대하고 봤더니만, 베드로가 기껏 하는 말이 뭐예요? 이것도 요즘 식으로 한다면

“내가 가진 돈은 없지만……”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이 A씨는 어땠을까요? 온갖 폼은 다 잡았으면서 기껏 한다는 말이 돈이 없대? 이 양반아 무슨 장난 하나…… 안 그랬겠습니까.

자, 그 다음에 6절 두 번째, <승>의 부분입니다. 승……이니까, 앞부분에 이어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しかし、私にあるものをあげよう。……

이건 또 무슨 말이에요? A씨는 지금 잔뜩 돈을 받을 걸 생각하고 있었는데, 앞에서는 돈이 없다고 했으면서, 이번에는 자기가 가진 것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제 기, 승, 전, 결 중에서 <전>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ナザレのイエス・キリストの名によって……

베드로의 말을 듣는 A씨의 혼란은 최고조에 달합니다. 돈은 가진 게 없지만 자기가 가진 것을 준대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예수님의 이름을 말합니다. 불과 얼마 전 예루살렘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십자가 사건을 A씨도 듣고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A씨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두고, 그저 하나의 사건, 하나의 해프닝 정도로 인식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갑자기 베드로의 입에서 <예수>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A씨는 이 말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마지막에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일어나 걸으라”라고 합니다.

立ち上がり、歩きなさい。

그리고는 7절에 보니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고 해요. 그렇겠죠. 지금 A씨는 뭐가 뭔지도 모릅니다. “일어나 걸으라”라는 말을 들어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힘껏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彼の足とくるぶしが強くなり、躍り上がって立ち、歩き出した。

이제야 이 A씨는 깨달았습니다. 자신은 하루하루 구걸해서 얻을 푼돈만을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몇 푼이나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을 하면서 40년 넘게 살아왔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을 보라고 했을 때에도 A씨는 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닙니다. 멀쩡한 몸으로 생활하다가 다쳐서 장애를 갖게 된 것도 아닙니다. 태어나서 40년 이상 동안 걷는다는 것을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몸이었습니다. 그런 자신이 불과 몇 초 뒤에 일어나서 걷게 될 줄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자기에게 돈 대신 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이 이름을 받게 되자 그는 기대도 하지 않았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단순히 걷지 못했다가 걷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이제 그는 꿈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고 나서 그가 처음 했던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8절을 봅니다.

사도행전 3장 8절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躍り上がって立ち、歩き出した。そして、歩いたり飛び跳ねたりしながら、神を賛美しつつ二人と一緒に宮に入って行った。

그는 성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어쩌면 그 동안 성전 바깥 문턱에만 앉았다가 4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성전 안으로 들어갔는지도 모릅니다.

성전 바깥에 앉아 있을 때에는 오직 한 푼 두 푼, 세상적인 소망에만 젖어 살았습니다. A씨도 유대인이니까 하나님은 알았겠지요. 때로는 성전 문턱에 앉아 어쩌면 한 두 번, 기도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기도제목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오늘은 좀 돈을 많이 받게 해주세요……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거기서 돈을 많이 받아봐야 얼마나 받았겠습니까. 하지만 이 사람은 그 외에 어떤 희망이 있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걷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가 돈 몇 푼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두 발로 걷게 되었습니다. 태어나서부터 자신을 억누르고 모든 굴레로부터 해방되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그가 처음 한 일이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송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눈물이 났겠습니까. 얼마나 기쁨으로 충만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를 위해서 이 A씨가 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라보았을 뿐이었습니다. 그것도 집중을 해서 바라보았을 뿐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3절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

どんなしもべも二人の主人に仕えることはできません。一方を憎んで他方を愛することになるか、一方を重んじて他方を軽んじることになります。あなたがたは、神と富とに仕えることはできません。」

이는 재물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는 재물을 바로 <세상>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도 믿으면서, 믿음과 상반되는 세상적인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과 상반되는 세상적인 생각을 가진 생태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을 수 없다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A씨를 생각해볼 때, 오늘날에도 이 A씨와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A씨도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었습니다. 그저 교회 문턱에 앉아서 바라는 것은 이 세상 속에서 얻어지는 <한 푼, 두 푼>이었습니다. 기도를 해도 돈을 더 많이 벌게 해 주시옵소서, 새 차를 주시옵소서, 새 집을 주시옵소서……그 이상의 희망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기도가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기도를 안 해요? 그건 이상한 자존심이지요. 주님께 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돈이 없거나 건강이 안 좋다면 돈도 구해야 하고 건강도 구해야죠.

하지만 그것이 최종목표인가요? 그렇다면 가난할 때 기도했다가도 돈을 어느 정도 벌게 되면 이제 기도도 그만 하고, 예수님도 그만 믿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건강? 몸이 아플 때에는 열심히 믿다가, 건강이 회복되면 이제 안 믿어도 되는 건가요?

이와 같은 믿음은 성전 안에 들어가지 않고 그 문턱에 앉아 한 푼 두 푼 달라고만 하고 있는 믿음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언제까지 그러고 살겠습니까. 1~2년이 아니라 40년 넘게 교회를 다녔으면 뭘 합니까. 하나님께서 주실 크나큰 축복을 꿈꾸지도 않고, 그저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하는, 그와 같은 믿음은 성전에도 들어가지 않고, 여전히 성전 문턱에 앉아서, 한 푼 두 푼 달라고 하는 믿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전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믿음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믿음의 성전 안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신 놀라운 축복을 받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적인 생각을 끝까지 버리지 못하고, 성전 문턱에 앉아 한 푼 두 푼 구걸하면서 인생을 마치시겠습니까.

예레미야 33장 3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エレミヤ書 33章3節
『わたしを呼べ。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に答え、あなたが知らない理解を超えた大いなることを、あなたに告げよう。』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우리 모두 살아있는 믿음을 갖고, 흔들림 없이 오로지 예수님만을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신 놀라운 축복,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크고 놀라운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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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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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0회 주님이 기뻐하시는 도전
2018년 10월 2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35절~39절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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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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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주님이 기뻐하시는 도전” 主が喜ばれる挑戦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얼마 전 라디오에서 “도전”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도전”이라고 하는 뜻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전에 찾아보니까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거는 것.” “비유적으로, 어려운 사업이나 기록 경신 따위에 맞서는 것.”

1 戦いや試合をいどむこと。「挑戦に応じる」「世界チャンピオンに挑戦する」「挑戦状」
2 困難な物事や新しい記録などに立ち向かうこと。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도전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좀 너무 흔하게 쓰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무슨 새로운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을 두고 모두 “도전”이라고 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 번 해보는 일”과 “도전”은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무턱대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모두가 다 도전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도전”은 무엇일까요.

사전에서는 “기록 경신”이라는 말이 나옵니다만, 저는 “도전”을 0.01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0.01의 후회를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00미터 세계 기록들을 보면 그 기록 차이가 0.1초를 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0.0 몇 초로 세계 신기록이 나오기도 하지요. 이는 세계 신기록만 봤을 때의 일입니다만, 세계 여러 나라에서 한 해에 치러지는 수많은 100미터 경주를 생각하면 0.1초가 아니라 0.01초로 승패가 갈리는 경우는 너무나도 많을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는 0.01초는 고사하고 1초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1초나 2초나 그냥 잠깐, 눈 깜짝할 새……가 되겠지요.

하지만 이와 같은 경기에서는 0.1초가 아니라 0.01초로 희비가 엇갈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대회에 출전하는 100미터 경주 선수라면 그래도 100미터를 10초 이내에는 달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경주에서 0.01초라고 하면 길이는 얼마나 될까요?

단순계산 해 보면 금방 나오지요. 100미터가 10초, 10미터가 1초, 1미터가 0.1초, 그러면 0.01초는 10센티……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10센티, 요만한 길이에요.

여러분, 올림픽에는 참가하는 데에 의의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솔직히 그런가요? 단순히 참가하는 데에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참가해서 열심히 경기를 해야지요. 더 멀리 날아가야 하고, 더 높이 뛰어 올라야 하고, 더 빠르게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위부터 3위까지는 메달이 주어집니다. 시상대에 올라가는 영광을 얻게 되지요. 0.1초건, 0.01초건, 10센티건 1밀리건 간에 3위 안에 들지 못하면 시상대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멀리서 구경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시상대에 올라가기만 하면 다 똑같나요? 솔직히 은메달과 금메달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금메달,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면, 그 나라가 아무리 작은 나라라 해도, 그 나라가 아무리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라 해도 그 큰 경기장에 그 나라 국가가 울려 퍼지고, 선수들과 수많은 관객들이 모두 기립해서 그 나라를 칭송합니다.

하지만 은메달과 동메달을 딴 나라들은, 그 나라가 아무리 큰 나라이고 돈이 많은 나라라 하더라도 국기는 올라가지만 국가는 나오지 않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은메달과 동메달을 딴 선수들은 “2위”와 “3위”이지만, 금메달을 딴 선수는 “우승”입니다. 영어로는 winner 승자라고 하지요. 결국 1등을 한 사람만이 “이긴 자” “승자”라는 영광을 차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엄청난 차이라고 할 수 있지요.

자, 스타트 신호가 울려 퍼집니다. 땅! 하고 총소리가 났어요. 10초, 결코 긴 시간은 아니지요. 이제 힘껏 달렸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달렸습니다. 그런데 내가 졌어요. 그 차이가 10센티, 0.01초 차이로 졌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생각이 들겠어요. 그래도 괜찮다? 나는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다? 물론 인터뷰 같은 것을 할 때라면 그렇게 대답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10초도 아니고 1초, 아니, 0.01초 차이로 졌거나, 0.01미리 차이로 졌는데도 진심으로 그런 생각이 들까요?

글쎄요. 저 같으면 참 많은 후회가 될 것 같습니다. 아……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그 순간 힘을 냈다면, 조금만 더 힘을 낼 수만 있었다면 내가 저 시상대 위에 설 수 있었을 텐데, 그 때 그 순간 조금만 더 노력했다면 가장 높은 곳에서 큰 영광을 차지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이 안 들겠어요?

운동선수도 그렇고 수험생들도 그렇겠지요. 예를 들어서 가끔 무슨 “수석합격”이라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만,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공부를 할까요. 수석합격……옛날 말로는 장원급제……가 되겠지요. 저는 평생 “수석합격”을 놓쳐본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ㅎㅎ 평생 “수석합격”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ㅎㅎ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한 번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어려운 시험 같은 경우에는 그냥 합격하기도 어려운데, 수석합격을 할 정도라면 실력이 보통 뛰어난 것은 아니었겠지요. 하지만 그렇다면 그 수석합격을 할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은, 본래 실력이 있었으니까 다른 수험생들보다 좀 여유롭게 공부를 했을까요?

올림픽 같은 데를 보면 웬만해서는 큰 이변이 없습니다. 몇몇 후보들 중에서 한 병이 우승을 하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들은 원래 실력이 있으니까, 다른 선수들보다도 연습이나 훈련을 덜 할까요?

선수들을 보더라도 수험생들을 보더라도 아무리 실력이 있고 아무리 메달이나 합격이 보장된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합니다. 왜요? 예, 0.01의 후회를 알기 때문입니다. 0.01점 차이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0.01초, 0.01미리, 0.01점 차이로 내가 큰 영광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반면에 0.01초, 0.01미리, 0.01점 차이로 그 동안 내가 해왔던 것이 모두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 방심하지 않고 피나는 노력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도전인 것입니다.

요즘 저는 우리 교회가 있는 시부카와시 주변에 전도지를 돌리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한 집 한 집 초인종을 눌러서 말씀을 전하고 전도지를 드리고 했습니다만, 요즘은 좀 방법을 바꾸어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초인종을 눌러서 그 사람이 나왔을 때, 이카호중앙교회에서 나왔다고 하면 전도지를 아예 안 받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은 됐대요. 괜찮대요. 그러면 우체통에 넣을 수도 없고 그냥 빈손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초인종도 누르지 않고 우체통에 넣어두기만 합니다. 물론 슬쩍 보고 버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믿음이 있습니다.


1866년에 조선으로 온 선교사 한 분이 계셨습니다. 이름은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 런던선교회로부터 파송된 선교사입니다. 그가 탄 배가 평양에 상륙하려고 하자 조선은 그 배를 공격했습니다. 가까스로 탈출한 그는 체포되어 결국 조선에서 제대로 말씀을 전해보지도 못한 채 순교를 하게 됩니다. 그의 나이 불과 27살이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그는 실패한 인생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가 순교하기 직전에 자신을 처형시킬 박춘권에게 책 몇 권을 건네 주었다고 합니다.

당시 그는 그 책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요. 그래서 당시에는 종이가 귀했기 때문에 박영식이라는 사람한테 그 책을 나누어주었다고 하는데, 그는 책을 뜯어서 벽지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들이 그 방에 들어갔다 나오기만 하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유가 뭐겠어요. 그 방에 머무는 사람은 그냥 무심코 벽지에 적힌 글을 읽었는데, 이 말씀이 그 마음 안에 박혀서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박춘권은 조선에서 첫 장로가 되었고, 토마스 선교사로부터 받은 한문성경을 벽지로 도배했던 박영식은 조선 최초 교회인 널다리교회를 세우게 되었는데, 그 뿐만 아니라, 이 교회는 훗날에 장대현교회가 되어, 1900년도 초에 있었던 평양대부흥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이처럼 놀랍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제가 나누어드린 종이에 제 말과 제 글이 적혀 있었다면, 그걸 버리면 아까운 마음도 들겠으나, 거기에는 주님의 말씀이 적혀 있고, 성령님께서 역사하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설령 그걸 그 사람이 지금 읽지 않는다고 해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나중에 읽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 읽고 은혜를 받을 수도 있는 노릇이고, 하다못해 그 종이를 버렸다 하더라도 그것을 치우는 사람이 보고 주님을 알게 될 수도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끔 집 앞에 나와 있는 분이 계세요. 그럼 말을 건넵니다. 저기 이카호중앙교회에서 나왔습니다……그러면서 전도지를 드리지요. 그러면 일본 사람들은 참 친절합니다. 아, 그러시군요, 수고가 많으시네요……라고 하면서, 자기는 괜찮다는 거예요. 필요 없으니 가져가라는 것입니다.

참 알고 보면 이 “괜찮다”는 말은 대단히 무서운 말입니다.

텔레비전에서 무슨 사고 소식이 나요. 예를 들어서 음주운전사고를 보면 어떻습니까.

음주운전이나 과속운전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보통 초보운전자가 하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운전경력 몇 년, 몇 십 년은 된 사람들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사람들이 사고가 날 줄 알고 음주운전을 했나요? 아니요. 대부분 자기는 괜찮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운전을 하루 이틀 한 줄 알아? 괜찮아. 괜찮아……

하지만 결국 어떻게 됩니까. 사고가 납니다. 그러면 본인 인생만이 아니라 본인의 가족, 그리고 피해자와 그 가족의 인생까지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알아야 해요? 예, 괜찮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괜찮다는 생각은 교회 바깥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 있는 이 괜찮다는 생각이 더욱 무섭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第二コリント人への手紙
「私たちはみな、善であれ悪であれ、それぞれ肉体においてした行いに応じて報いを受けるために、キリストのさばきの座の前に現れ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히브리서 9장 27절~28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キリストも、多くの人の罪を負うために一度ご自分を献げ、二度目には、罪を負うためではなく、ご自分を待ち望んでいる人々の救いのために現れてくださいます。

여기에는 안 믿는 사람만 심판을 받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죽음 다음에는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세상에는, 특히 교회에는 “괜찮다”는 생각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한 번 믿으면 우리는 괜찮대요. 지옥에 가지 않는대요. 구원은 사라지지 않는대요.

그렇다면 한 번 믿는다는 게 언제입니까. 주기도문을 외우면 된 건가요? 세례를 받으면 된 건가요? 아니면 직분을 받으면 이제 안심해도 되는 것인가요?

시간관계상 몇 구절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 28절~30절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だから、そのタラントを彼から取り上げて、十タラント持っている者に与えよ。
だれでも持っている者は与えられてもっと豊かになり、持っていない者は持っている物までも取り上げられるのだ。
この役に立たないしもべは外の暗闇に追い出せ。そこで泣いて歯ぎしりするのだ。』

이는 주인한테서 받은 달란트를 사용하지 않고 땅에 묻어놓은 종한테 주인이 한 말입니다. 이 당사자는 주인의 종이었습니다.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종은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이 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빼앗긴다”고 말씀하십니다. 빼앗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 번은 주어졌다가 잃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요한계시록에도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ヨハネの黙示録 3章11節
わたしはすぐに来る。あなたは、自分の冠(かんむり)をだれにも奪われないように、持っているものをしっかり保ちなさい。

여기서도 예수님께서는 네가 받은 면류관을 빼앗기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무엇입니까. 이미 주어진 면류관을 빼앗길 수도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도 봅니다.

요한계시록 2장 4절~5절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ヨハネの黙示録 2章4節~5節
けれども、あなたには責めるべきことがある。あなたは初めの愛から離れてしまった。だから、どこから落 ちたのか思い起こし、悔い改めて初めの行いをしなさい。そうせず、悔い改めないなら、わたしはあなたのところに行って、あなたの燭台(しょくだい)をその場所から 取り除く。

이는 일부에 불과합니다만, 성경에 이처럼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하다? 한 번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간다고 주장하시나요?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달란트를 빼앗기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겨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더라도 구원은 받았다는 것인가요? 면류관을 빼앗겨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인가요? 내 촛대를 다른 곳으로 옮기신다 하더라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인가요?

사실 제가 이 말을 처음 들었던 것이 작년 이맘때쯤입니다. 미국에 있는 어떤 기독교 라디오 방송사로부터 한 메일을 받았습니다. 그 내용에 의하면 제 설교를 자신들의 한국어 방송에서 사용하고 싶다고 하면서, 제게 방송사용허가와 8개 교리질의에 답하라는 것입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구원을 잃을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저는 이러이러해서 구원은 잃을 수가 있다고 답변했더니만, 그 부분이 자신들의 교리에 맞지 않아서 사용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제가 먼저 사용해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닌데, 자기들이 먼저 얘기를 해놓고는 안 하겠다고 하니 기분이 참 묘했습니다만, 그 교단이라고 하는 것이 군소교단도 아니고 미국에서 제일 큰 복음주의 교단 중 하나였습니다. 복음주의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성경에 입각한 믿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도 늦게나마 이 구원의 취소에 대해서 새삼 공부를 해보았습니다. 믿음으로 얻은 구원은 절대로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는 주장의 글도 읽어보았습니다.

그리고 현재 대부분의 기독교 교리를 보더라도 한 번 얻어진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참 여러 가지로 놀랐습니다. 일단 제 공부부족이죠. 이와 같은 사실, 현재 복음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대부분의 교단에서 구원의 취소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달란트를 빼앗기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겨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더라도 구원은 받았다는 것인가요? 면류관을 빼앗겨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인가요? 내 촛대를 다른 곳으로 옮기신다 하더라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인가요?

그렇다면 신앙인이 다른 사람을 속이고, 교회 재산으로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의 배를 불리게 하는 일을 저질러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가요? 목회자가 돈 문제, 여성 문제를 일으키고 해도, 다른 사람의 학위 논문을 베끼거나 해도 면류관을 받는다는 말입니까?

정말 괜찮다는 건가요?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의 문제, 세상보다도 훨씬 깨끗해야 한다는 교회 안에서, 교단 안에서도 오히려 세상보다도 더욱 부끄러운 일들이 끊이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아직 성경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지금 현재까지는 아무리 성경을 살펴보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도전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0.01초, 0.01점, 0.01미리 차이로 영광을 얻을 수도, 승리를 얻을 수도 있으나, 0.01초, 0.01점, 0.01미리 차이로 영광을 잃을 수도, 패배를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빌립보서 3장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ピリピ人への手紙 3章14節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이 글을 읽고 이런 생각 들지 않으십니까? 아니, 그냥 걸어가면 되지, 왜 달려가야 해요? 똑 같은 질문을 100미터 선수한테 물어보세요. 그냥 골라인까지 걸어가면되지 왜 힘들게 달려가냐고 말이에요.

마태복음 11장 12절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マタイの福音書 11章12節
バプテスマのヨハネの日から今に至るまで、天の御国は激しく攻められています。そして、激しく攻める者たちがそれを奪い取っています。


침노한다는 것은 대단히 심하게 공격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천국을 망하게 하려고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를 얻기 위해서, 천국을 차지하지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빼앗는다고, 침노해야 빼앗는다고, 혼신의 힘을 다해야 천국을 차지할 수 있다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걸어가지 않고 왜 힘들게 달려가냐구요? 예, 빼앗길지도 모르니까, 빼앗길 수도 있으니까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천국을 빼앗기 위해서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4년 만에 한번 열리는 올림픽, 흔히들 여기에 참가하는 선수들은 4년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말이지요. 4년만 준비해서 올림픽에 나갈 수가 있습니까. 저도 한 번 해볼까요? ㅎㅎ 그건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그 선수들은 평생을 준비했습니다. 그야말로 혼신의 노력을 다해서 준비했습니다.

힘이 안 들어요? 쉬고 싶지 않아요? 놀고 싶지 않겠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 하루하루가 즐겁겠어요? 아무리 자기가 좋아한다고 해도 한 두 번이죠.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왜 쉬고 싶거나 놀로 싶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모든 것을 견딥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순간을 인내함으로 받을 상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0장 35절~39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ヘブル人への手紙 10章 35節~39節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の確信を投げ捨ててはいけません。その確信には大きな報いがあります。
あなたがたが神のみこころを行って、約束のものを手に入れるために必要なのは、忍耐です。
「もうしばらくすれば、来たるべき方が来られる。遅れることはない。
わたしの義人は信仰によって生きる。もし恐れ退くなら、わたしの心は彼を喜ばない。」
しかし私たちは、恐れ退いて滅びる者ではなく、信じていのちを保つ者です。」

우리는 인내함으로 받을 상이 반드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신 후에 약속하신 큰 상을 반드시 주십니다.

우리가 뒤로 물러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순간 힘들다고 물러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바로 종살이에서 벗어나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금 힘들다고 다시 종살이를 하겠다면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잠언 26장 11절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우리가 지금 이 순간 힘들다고 해서 믿음을 버린다는 일은 이처럼 미련한 일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로마서 6장 6절~7절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6章6節~7節
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私たちの古い人がキリストとともに十字架につけられたのは、罪のからだが滅ぼされて、私たちがもはや罪の奴隷でなくなるためです。
死んだ者は、罪から解放されているのです。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신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서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힘들다고 해서 뒤로 돌아가려 한다는 것은,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없었던 것으로 치자는 말이나 다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욕하는 일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욕하는 일이요, 예수님의 보혈을 모욕하는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아니요, 괜찮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충분하십니까? 아니요,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욱 힘써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0.01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는 문턱 앞에서 후회하게 될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 안에서의 주님이 기뻐하시는 도전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힘써 천국이라는 푯대를 향해 달려가서 마침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큰 상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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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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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9회 우리들의 시선
2018년 10월 1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9절~14절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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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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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들의 시선” 私たちの視線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시면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하나는 세리입니다. 우리가 바리새인이라고 하면 좀 안 좋은 이미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사실 바리새인, 바리새파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어떻게든지 조금이라도 더 하나님을 잘 믿어보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세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은 세금을 로마한테 갖다 바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 로마에 바칠 세금을 징수하는 일을 로마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시켰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지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금을 내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방법이었습니다.

지금은 세금을 국가나 지자체에서 결정하고 그렇습니다만, 당시는 세리한테 그 권한이 있었다고 합니다. 복잡한 당시 상황을 생략하고 단순하게 본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관할 지역에서 임의로 세율을 상정하고, 그들에게는 이를 징수할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징수한 세금 중에서 일부를 로마에 바치고 나면 그 나머지는 모두 자기 차지로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들은 규정보다도 훨씬 많은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그런데 그 세금을 누구한테 징수한다고요? 예,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거두어들였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세리들은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많은 세금을 징수하고는, 이 중 일부는 로마에 갖다 바치고 나머지는 자신의 배를 불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같은 이스라엘 민족들의 피를 빨아서 로마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악랄한 일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당시 세리라는 말은 죄인의 대명사로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세리를 보면, 그들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고 합니다. 이를 보더라도 그들은 신앙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바리새인은 기도합니다. 그 기도 내용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1절 말씀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パリサイ人は立って、心の中でこんな祈りをした。『神よ。私がほかの人たちのように、奪い取る者、不正な者、姦淫する者でないこと、あるいは、この取税人のようでないことを感謝します。

이 바리새인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우선 좋은 점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바리새인의 기도 중에서 좋은 점을 기준으로 보면, 일단 이 바리새인은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토색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물건을 억지로 강제로 빼앗는 것을 말합니다. 불의는 부정한 일을 하는 것, 다른 사람들을 속이거나 하는 것을 말합니다. 간음도 안 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고백이 아닙니다. 먼저 토색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7절을 봅니다.

출애굽기 20장 17절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あなたの隣人の家を欲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隣人の妻、男奴隷、女奴隷、牛、ろば、すべてあなたの隣人のものを欲してはならない。」

다음은 불의입니다. 바리새인은 불의함을 저지르지 않았다. 즉, 내 이익을 위해서 상대방을 속이거나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레위기 19장 36절을 보겠습니다.

레위기 19장 36절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正しい天秤、正しい重り石、正しい升、正しい容器を使わなければならない。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エジプトの地から導き出した、あなたがたの神、主である。

마지막으로 간음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출애굽기 20장 14절에 간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즉, 바리새인의 이 감사 기도는 단순한 나열이 아닙니다. 이는 바로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모두 지키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다음 구절, 누가복음 18장 12절을 봅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私は週に二度断食し、自分が得ているすべてのものから、十分の一を献げております。』

나는 금식도 자주 합니다. 십일조도 드립니다……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일조에 대한 명령은 있었으나, 금식에 대한 명령은 없습니다. 다만 금식은 자진해서 하나님께 바치는 기도인 것이지요.

그러니까 바리새인은 “나 말이죠. 하나님께서 하라고 한 모든 것을 다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의 것도 모두 다 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감사를 드리고 있는 것이지요. 이 기도에 문제가 있나요? 솔직히 지금 이 바리새인치럼 자신 있게 기도를 드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반면에 세리는 어땠습니까. 세리는 자신의 죄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릴 어떤 말씀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누가복음 18장 13절을 봅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一方、取税人は遠く離れて立ち、目を天に向けようともせず、自分の胸をたたいて言った。『神様、罪人の私をあわれんでください。』

그렇죠. 세리도 자신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글쎄요. 요즘 식으로 본다면 성전 앞에 있는 십자가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저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만 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감사기도를 드렸던 바리새인보다도 이 세리가 더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충만하게 받으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실 오늘 이 말씀에 등장하는 두 인물, 즉 바리새인과 세리 중에서 주인공은 누구일까 하면,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 드린다면 바리새인이 드린 기도가 바로 오늘의 핵심 내용이 되겠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9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9절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自分は正しいと確信していて、ほかの人々を見下している人たちに、イエスはこのようなたとえを話された。

즉, 오늘 이 말씀의 제목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것이 누구냐 하면 바로 이 바리새인입니다.

이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면 참으로 독특하고 흥미롭습니다. 아마도 성경에 이처럼 독특한 기도에 대한 기록은 또 없지 않을까 할 정도로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먼저 질문을 드리려고 합니다만, 질문을 드리기 전에, 질문을 위한 질문을 잠깐 먼저 드리겠습니다.

11절을 다시 한 번 보실까요?

누가복음 18장 11절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パリサイ人は立って、心の中でこんな祈りをした。『神よ。私がほかの人たちのように、奪い取る者、不正な者、姦淫する者でないこと、あるいは、この取税人のようでないことを感謝します。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조금 바꾸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않게 해주시니 감사하나이다”

パリサイ人は立って、心の中でこんな祈りをした。『神よ。私が奪い取ったり、不正をしたり、姦淫しないようにして下さり感謝します。


이 두 기도는 어떻게 다를까요.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8장 11절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パリサイ人は立って、心の中でこんな祈りをした。『神よ。私がほかの人たちのように、奪い取る者、不正な者、姦淫する者でないこと、あるいは、この取税人のようでないことを感謝します。


그리고 바꾼 기도는 이렇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않게 해주시니 감사하나이다”

パリサイ人は立って、心の中でこんな祈りをした。『神よ。私が奪い取ったり、不正をしたり、姦淫しないようにして下さり感謝します。



차이가 있지요? 예, 제가 바꾼 구절에는 <나는 다른 사람들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는 부분을 뺐습니다.

이로 인해서 어떠한 차이가 일어나는가 하면, 여러분, 상상력을 한번 발휘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부터 진짜 질문에 들어갑니다.

자, 우리 한 번 눈을 한 번 감아보시기 바랍니다. 저기 앞에서 바리새인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귀를 기울여보니까 그 바리새인이 하는 기도 소리가 들려옵니다.

바리새인이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パリサイ人は立って、心の中でこんな祈りをした。『神よ。私がほかの人たちのように、奪い取る者、不正な者、姦淫する者でないこと、あるいは、この取税人のようでないことを感謝します。

자, 상상이 되시나요? 그럼 이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 바리새인, 지금 어디를 보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핵심입니다. 이 기도를 할 때 바리새인은 과연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세리를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앞서 제가 살짝 바꾼 것처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않게 해주시니 감사하나이다 『神よ。私が奪い取ったり、不正をしたり、姦淫しないようにして下さり感謝します。”라고 했더라면 이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라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바리새인의 시선은 하나님이 아닌 세리한테 있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짐작이나 추측이 아닙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에 보면 분명히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この取税人のようでないことを感謝します。”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세리> 즉, 바리새인의 시선은 분명히 하나님이 아니라 세리를 향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한 말은, 얼핏 보기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기도처럼 보입니다만, 이는 기도가 아니라 실제로는 세리를 향한 멸시, 세상 사람들을 향한 멸시였던 것입니다. 비난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가장한 비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를 가장한 멸시를 하나님께서 어찌 기뻐하시겠습니까.

로마서 13장 9절을 봅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姦淫してはならない。殺してはならない。盗んではならない。隣人のものを欲してはならない」という戒め、またほかのどんな戒めであっても、それらは、「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ことばに要約されるからです。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를 바꾸어 말한다면,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계명을 모두 지킨다 하더라도, 거기에 이웃에 대 한 사랑이 빠진다면 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만약에 우리가 이 바리새인이 드리는 잘못된 기도. 그렇죠. 이건 분명히 잘못된 기도입니다만, 이 기도를 보고, “그래, 저 바리새인은 참 잘못됐어. 나쁜 사람이야.”라고 끝나버린다면, 우리는 이 바리새인이 세리를 멸시한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늘 이 바리새인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만약에 오늘 말씀 중에 등장한 바리새인이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 대한 비유>로서 자기를 예로 들어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그 사실을 알고 이 바리새인이 반성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아니, 뭐가 문제인데? 나 하나님 말씀 잘 지켰잖아? 저 세리처럼 죄를 짓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는데 그게 뭐가 잘못됐다는 거야. 나 일요일에 교회 빼 먹은 적도 없고, 십일조나 감사헌금도 꼬박꼬박 드렸어. 봉사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알아? 그 정도면 된 거 아냐?”

혹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로마서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

なぜなら、人はだれも、律法を行うことによっては神の前に義と認められないからです。律法を通して生じるのは罪の意識です。

우리는 우리가 아무리 율법을 잘 지켰다고 생각해도 이로 인해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은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백 년이 아니라 백 만년 동안 율법을 지키려고 해봤자 이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한테 돈을 바치지 않으면 하나님이 굶으신 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가난하시답니까.

역대상 29장 11절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歴代誌第一 29章11節
主よ、偉大さ、力、輝き、栄光、威厳は、あなたのものです。天にあるものも地にあるものもすべて。主よ、王国もあなたのものです。あなたは、すべてのものの上に、かしらとしてあがめられるべき方です。

라고 다윗은 고백합니다.

온 천하 만물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헌금을 많이 냈다고 주님 앞에서, 또는 사람들 앞에서 자랑을 해요?

이사야 1장 11절~12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イザヤ書 1章11節~12節
「あなたがたの多くのいけにえは、わたしにとって何になろう。──主は言われる──わたしは、雄羊の全焼のささげ物や、肥えた家畜の脂肪に飽きた。雄牛、子羊、雄やぎの血も喜ばない。
あなたがたは、わたしに会いに出て来るが、だれが、わたしの庭を踏みつけよとあなたがたに求めたのか。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아무리 많은 돈과 재산을 하나님께 바쳤다 하더라도, 아무리 봉사를 많이 했다 하더라도, 아무리 의로운 행위를 많이 했다 하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훌륭한 기도를 드렸다 하더라도, 그 시선이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는다면, 그 마음 안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없다면, 이는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봅시다.

하나님은 그 시선과 그 마음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이웃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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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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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8회 소금을 두라
2018년 10월 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 50절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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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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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소금을 두라” 塩気を保て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요즘에 소금이 필요하다고 하면 슈퍼에 가서 언제든지 저렴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옛날에 소금은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가치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고대 로마 군인들은 봉급을 소금으로 받았을 만큼 그 값어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온 말이 요즘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른바 회사원들을 다른 말로 샐러리맨이라고 하는데, 이 샐러리라는 말은 월급, 봉급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이 샐러리라는 말이 소금을 뜻하는 영어 솔트……라는 단어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요즘 회사원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받는 월급이 바로 과거에는 소금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과거에는 이 소금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겠습니까.

복음서에 보면 소금에 대한 흥미로운 비유가 나옵니다.

먼저 마태복음을 봅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あなたがたは地の塩です。もし塩が塩気をなくしたら、何によって塩気をつけるのでしょうか。もう何の役にも立 たず、外に投げ捨てられ、人々に踏みつけられるだけです。

다음은 누가복음 14장 34절~35절 말씀입니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塩は良いものです。しかし、もし塩が塩気をなくしたら、何によってそれに味をつけるのでしょうか。
土地にも肥やしにも役立たず、外に投げ捨てられます。聞く耳のある者は聞きなさい。」

이 두 말씀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금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소금이 음식에 들어가면 맛이 변합니다. 그 이유는 소금에 짠 맛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소금에 짠 맛이 없다면 아무리 소금을 넣더라도 음식 맛은 변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맛이 싱거워요. 그렇다면 뭣 하러 소금을 넣겠습니까. 그런 소금은 필요가 없지요 그저 버림을 받아서 사람들한테 밟힐 뿐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인 마가복음을 보면 조금 다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9장 50절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塩は良いものです。しかし、塩に塩気がなくなったら、あなたがたは何によってそれに味をつけるでしょうか。あなたがたは自分自身 のうちに塩気を保ち、互いに平和に過ごしなさい。」

오늘 말씀에는 다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없는 부분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속에 소금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이 소금을 우리 안에 두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충만하게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앞서 살펴본 마태복음 5장 13절과 누가복음 14장 34절, 그리고 오늘 말씀, 마가복음 9장 50절에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는 말씀은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もし塩が塩気をなくしたら、何によって味をつけるのでしょうか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의 말씀에 보면 짠 맛을 잃은 소금은 버림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시는데, 오늘 말씀 마가복음에 보면 버림을 받게 된다는 말씀 대신 우리 안에 소금을 두라고 하십니다.

즉, 이렇게 본다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소금은 우리가 있는 곳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음식에 소금을 넣었을 때 소금으로 말미암아 음식 맛이 좋게 변하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복음을 전파함으로 인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짠 맛을 잃어버리면 버림을 당한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 속에 소금을 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는 앞서 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말씀에서는 대외적인 부분을 의미하는 것이고, 마가복음은 우리 안의 모습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소금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습니까. 예, 대부분의 소금은 바다에서 얻습니다. 우리 교회가 있는 군마현은, 다른 것은 다 좋은데 바다가 없다는 것이 좀 아쉽습니다. 일본에는 47개 지자체가 있는데 그 중에서 8개 현, 야마나시현, 나라현, 기후현, 토치기현, 시가현, 나가노현, 사이타마현, 그리고 군마현에는 바다가 없습니다. 이 여덟 개 현을 바다가 없는 현이라고 해서 이른바 우미나시현이라고 합니다만, 이건 좀 여담입니다만, 군마현은 비록 바다는 없지만 그래도 강은 참 많습니다. 물이 얼마나 깨끗한지 몰라요.

아무튼 그건 그렇다고 치고, 대부분의 소금은 바다에서 얻어집니다만, 바닷물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우선 대단히 넓죠. 지구 표면 비율로만 본다면 무려 70% 이상을 바다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연못이나 저수지를 보면 이끼가 끼기도 하고 안 좋은 냄새가 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다는 그렇지 않지요.

연못과 바다를 비교한다면 그 차이는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연못은 왜 이끼가 끼기도 하고 악취가 나기도 하는데 바다는 그렇지 않을까요.

여기에 있어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소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연못은 민물이기 때문에 소금이 없습니다. 그런데 소금에는 부패를 방지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바닷물은 썩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닷물을 연상하면 곧바로 이 짠 맛을 들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닷물에서 소금이 얼마나 함유되어 있을까요. 10%? 20%? 아니요. 불과 3.5% 정도라고 합니다. 다른 물들과 바닷물의 차이가 고작 3.5%의 차이 밖에 없는데, 이 작은 차이로 인해서 민물은 썩어가지만 바닷물은 썩는 일이 없다고 하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지요. 바란다 하더라도 어차피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예, 작은 것, 아주 작은 것만 바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쩌면 일주일 내내 하나님만 생각하고 살아가기를 원하셨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출애굽기 20장 8절~10절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安息日を覚えて、これを聖なるものとせよ。
六日間働いて、あなたのすべての仕事をせよ。
七日目は、あなたの神、主の安息である。あなたはいかなる仕事も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も、あなたの息子や娘も、それにあなたの男奴隷 や女奴隷、家畜、またあなたの町囲みの中にいる寄留者も。

예, 일주일, 7일 중에서 더도 말고 하루만 나를 기념하고 나를 기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7분의 1도 많으십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십일조를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14:22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あなたは毎年、種を蒔いて畑から得るすべての収穫の十分の一を、必ず献げなければならない。


말라기 3장 8절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マラキ書 3章8節
人は、神のものを盗む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だが、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ものを盗んでいる。しかも、あなたがたは言う。『どのようにして、私たちはあなたのものを盗んだでしょうか』と。十分の一と 奉納物においてだ。

이 십일조가 참 야박하게 느껴지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네 수입 중에서 다 바치지 않고, 7분의 1도 아닌, 10분의 1만 나한테 바쳐라. 그것으로 내가 만족하겠다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10분의 1 만으로 만족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10분의 1만 나한테 바치면 모든 것을 바친 것으로 쳐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여기서 머물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지켜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짐승도 바쳐야 했고 속죄제(罪のきよめのささげ物)다 속건제(代償のささげ物)다 요제다 소제다 해서 여간 복잡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율법으로 인해서 우리가 구원 받을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부족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9장 12절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ヘブル人への手紙 9章12節
また、雄やぎと子牛の血によってではなく、ご自分の血によって、ただ一度だけ聖所に入り、永遠の贖(あがな)いを成し遂げられました。

히브리서 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ヘブル人への手紙 9章26節
もし同じだとしたら、世界の基(もとい)が据えられたときから、何度も苦難を受け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でしょう。しかし今、キリストはただ一度だけ、世々の終わりに、ご自分をいけにえとして罪を 取り除くために現れてくださいました。

히브리서 10장 10절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ヘブル人への手紙 10章10節
このみこころにしたがって、イエス・キリストのからだが、ただ一度だけ献げられたことにより、私たちは聖なるものとされています。

과거에 양이나 소들을 제물로 드린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죽어 마땅한 우리의 죄를 우리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대신해서 짐승들을 죽이고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너무나 부족해요. 완벽한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단 한 번의ただ一度 완벽한 제사를 드려주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더 이상 짐승으로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게 해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모두 완벽하게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하면 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됩니다. 그 이름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13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しかし、この方を受け入れた人々、すなわち、その名を信じた人々には、神の子どもとなる特権をお与えになった。
この人々は、血によってではなく、肉の望むところでも人の意志によってでもなく、ただ、神によって生まれたのである。

더도 말고 그 이름을 믿기만 하면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믿음의 분량을 말씀하십니까.

누가복음 17장 6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すると主は言われた。「もしあなたがたに、からし種ほどの信仰があれば、この桑の木に『根元から抜かれて、海の中に植われ』と言うなら、あなたがたに従います。

여러분, 겨자씨를 혹시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도 실제로는 본 적이 없어서 인터넷으로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더도 말고 딱 좁쌀이더군요. 지름이 1미리 정도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기도 했고 물위를 걷기도 하셨습니다. 병자들을 치료하기도 하셨고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셨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 천 명을 먹이시기도 하셨지요. 하지만 그런 기적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나만이 할 수 있다……라고는 단 한 번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도 그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 조건이 무엇입니까. 7분의 1일이요? 10분의 1이요? 아닙니다. 좁쌀만한 겨자씨만큼만 믿음만 있으면 능히 이룰 수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만큼만 믿으면 다 믿는 것으로 쳐주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말씀입니까.

하지만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기도원이나 부흥회에 가서 은혜를 받거나, 아니면 놀라운 기도 응답을 맛보았을 때에는 할렐루야! 주여! 감사합니다! 라고 하지요. 그런데 조금 지나면 어떻습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나님 탓하고 세상 탓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 어디서 많이 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주었던 모습입니다.

출애굽기 14장 30절~31절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더라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こうして主は、その日、イスラエルをエジプト人の手から救われた。イスラエルは、エジプト人が海辺で死んでいるのを見た。
イスラエルは、主がエジプトに行われた、この大いなる御力を見た。それで民は主を恐れ、主とそのしもべモーセを信じた。

홍해가 갈라지고 바다 한 가운데를 걸어오고, 뿐만 아니라 애굽의 정예부대가 홍해에서 모두 죽은 것을 보았을 때에는 그들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모세를 믿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믿음 충만, 성령 충만이었겠지요.

다음 장 출애굽기 15장 20절~21절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

そのとき、アロンの姉、女預言者ミリアムがタンバリンを手に取ると、女たちもみなタンバリンを持ち、踊りながら彼女について出て来た。
ミリアムは人々に応えて歌った。「主に向かって歌え。主はご威光を極みまで現され、馬と乗り手を海の中に投げ込まれた。」

보십시오. 완전히 축제 분위기입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이 울려 퍼집니다. 하지만 이게 오래 갑니까. 바로 다음 구절을 봅니다.


출애굽기 15장 22절~24절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モーセはイスラエルを葦の海から旅立たせた。彼らはシュルの荒野へ出て行き、三日間、荒野を歩いた。しかし、彼らには水が見つからなかった。
彼らはマラに来たが、マラの水は苦くて飲めなかった。それで、そこはマラという名で呼ばれた。
民はモーセに向かって「われわれは何を飲んだらよいのか」と不平を言った。

좋은 일, 놀라운 일이 있을 때 아무리 기뻐해도 무슨 소용입니까. 1장도 아니고 1절도 못 가서 조금 어려운 일이 닥치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새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모세를 원망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 모습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보잉 747 같은 여객기 조종사들을 보면 비행기가 이륙하고, 정상궤도에 들어서고 난 다음에는 별로 할 일이 없대요. 왜냐하면 컴퓨터들이 알아서 자동적으로 조종을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좀 극단적인 말로, 그 상황에서 옷만 잘 입혀놓고 자리에 앉혀놓는다면 그 사람이 진짜 조종사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아무것도 안 하는데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하지만 진짜 차이가 나는 것은 돌발상황 때입니다. 갑자기 난기류가 발생했어요. 아니면 비행기의 어디에 문제가 생겼어요. 그럴 때에 조종사들은 자동운전에서 수동으로 전환을 해서 대처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 상황이 되면 그 사람이 진짜 조종사와 가짜 조종사가 차이가 바로 나는 것이지요. 믿음이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에는 3.5프로의 믿음이 있는지,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는지 구분이 안 됩니다. 그러나 언제 차이가 나요?

예, 시련이 닥칠 때 차이가 압니다. 어려움이 닥칠 때 진정한 믿음의 사람인지 아닌지가 곧바로 드러납니다.

믿음의 사람은 3.5프로에 불과한 작은 믿음에도 불구하고 썩어가는 물들을 물리칩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큰 역사를 행합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과거에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방 하나님을 원망하고 예수님을 원망합니다. 세상을 원망합니다. 신세를 한탄합니다. 3.5프로의 믿음을 갖기 전에, 겨자씨만한 믿음이 채워지기 전에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포기하고 맙니다. 절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의 삶 속에 이끼가 낍니다. 냄새가 납니다. 썩어져 갑니다. 그러면서 그 때부터는 완전히 마귀들의 밥이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노릇입니까.

바다와 비율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 드릴까 합니다. 흔히 우리는 빙산의 일각이라고 합니다. 빙산의 일각……즉, 이는 물위에 드러나 있어서 보이는 빙산은 전체 빙산에 비하면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것보다 안 보이는 부분이 훨씬 더 많다는 뜻으로 쓰입니다만, 그렇다면 한 가지 문제를 내겠습니다.

실제 우리 눈으로 보이는 빙산은 전체 빙산에 비해서 몇 프로나 될까요. 빙산이라고 해서 무슨 작은 빙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남극에도 무척이나 많은 빙산들이 있고, 북극에는 이는 땅덩어리가 아닙니다. 북극에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100% 모두 빙산입니다.

자, 그렇다면 다시 묻겠습니다. 바다 위에 드러나 있는 빙산은 전체 빙산 중에서 몇 프로나 될까요. 20%? 30%? 사실 바다 위로 보이는 빙산은 8.3%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나머지 91.7%는 모두 바다 속에 있다는 것이지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부르실 때의 모습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장 48절~50절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ナタナエルはイエスに言った。「どうして私をご存じなのですか。」イエスは答えられた。「ピリポがあなたを呼ぶ前に、あなたがいちじくの木の下にいるのを見ました。」
ナタナエルは答えた。「先生、あなたは神の子です。あなたはイスラエルの王です。」
イエスは答えられた。「あなたがいちじくの木の下にいるのを見た、とわたしが言ったから信じるのですか。それよりも大きなことを、あなたは見ることになります。」

나다나엘은 그가 저 멀리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너를 알아보았다고 말씀하시자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하지만 이를 보고 예수님께서는 이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계기는 각자 다를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의 놀라운 역사를 맛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아직 시작에 불과합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전체 축복 중에서 고작 8.3%밖에 맛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받을 축복은 아직 91.7%가 남았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삶 속에서 3.5프로만 바뀐다면 우리는 썩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마음 속에 믿음의 소금을 두어, 썩지 않는 믿음,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갖고 주님께서 주시는 8.3프로의 축복이 아니라, 나머지 91.7프로의 축복, 크고 놀라운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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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7회 우리들의 회복
2018년 9월 3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에스겔 37장 5절~10절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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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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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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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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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들의 회복” 私たちの回復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래 전에 제가 회사생활을 할 때의 일이었는데, 직원들끼리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사투리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강원도 사투리는 다 남 얘기라는 것입니다.

저희 가족이나 친척 분들은 대부분 서울이나 경기도 쪽이었기 때문에 사투리에 대한 부분은 좀 약합니다. 물론 학교를 다닐 때도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들이 있긴 했습니다만, 사투리를 쓰는 친구들은 호남이나 영남 출신이 대부분이라서 “강원도 사투리”는 좀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니, 강원도 사투리가 모두 남 얘기라는 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그 분이 이럽니다.

너 몇 학년이니? 라고 물으면 강원도 애들은 “4학년이래요” 라고 한다는 거예요. 너 고향은 어디니, 라고 물으면 “강원도래요” 라고 하면서, 이 사투리를 모르면 다 자기 말이 아니라 남 얘기를 하는 것처럼 들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참 작은 나라기인 합니다만 역사가 깊기 때문에 이처럼 지역마다 다양한 사투리가 있어서 참 흥미롭습니다.

가끔 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일본 목사님들의 설교 말씀을 듣습니다. 이게 참 도움이 많이 됩니다. 무엇보다 일본식 성경 명사나 말투에 도움이 됩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일본에 살면서 교회에 다니긴 했습니다만, 모두 한국인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일본어 예배는 드려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어도 한국어 성경만 읽고 그러다 보니 일본어 성경에는 좀 약한 편이지요.

물론 고유명사 같은 경우에는 대부분 발음이 비슷하지만 간혹 틀린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나라에서는 가룟 유다라고 하는데 일본에서는 イスカリオテのユダ라고 하지요.

얼마 전에도 그 일본 목사님의 말씀을 듣는데, 이 분의 말씀 중에서 “제카리야”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을 들으면서 이게 도대체 누굴까. 사가랴인가? 그런데 그러면 이 분의 말이 안 맞아요. 그래서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을 해봤는데, 아하, 알았어요. 우리나라 발음으로는 “스가랴”입니다. 이처럼 <스가랴>는 “제카리아”고, 참고로 사가랴는 “자카리야”입니다. 이처럼 참 많은 도움도 됩니다만, 간혹 듣다가 좀 고개를 갸우뚱 하게 만드는 부분도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의외로 많습니다.

얼마 전에 듣던 내용은 에스겔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만, 오늘 말씀, 사실 에스겔 서가 선지서이다보니 난해한 부분이 많습니다만, 오늘 말씀은 그래도 유명한 편입니다. 에스겔의 환상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른바 마른뼈에 관한 환상이지요.

에스겔 37장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어느 골짜기로 데려가셨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데려가셨는지, 아니면 꿈속에서 데려가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골짜기(平地(谷間)の真ん中)로 데려가셨다고 하는데, 거기에 보니 사람의 뼈들로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냥 뼈들이 아니라 2절에 보면 아주 말라 비틀어진(すっかり干からびていた) 뼈들이었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에스겔 37장 4절~6절을 봅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主は私に言われた。「これらの骨に預言せよ。『干からびた骨よ、主のことばを聞け。
神である主はこれらの骨にこう言う。見よ。わたしがおまえたちに息を吹き入れるので、おまえたちは生き返る。
わたしはおまえたちに筋をつけ、肉を生じさせ、皮膚でおおい、おまえたちのうちに息を与え、おまえたちは生き返る。そのときおまえたちは、わたしが主であることを知る。』」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저 말라 비틀어진 뼈들한테 전하라. 너희들이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이렇게 말을 했더니 어떻게 되었더랍니까.

에스겔 37장 7절~8절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私は命じられたように預言した。私が預言していると、なんと、ガラガラと音がして、骨と骨とが互いにつながった。
私が見ていると、なんと、その上に筋がつき、肉が生じ、皮膚がその上をすっかりおおった。しかし、その中に息はなかった。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 마른 뼈들한테 전하자 바싹 마른 뼈들이 딸가닥 딸가닥 거리면서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서로 맞아 연결되어갑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여서 사람 모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 어떻습니까. 무슨 할리우드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 짧은 구절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그와 같은 풍경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글이 지금으로부터 2600년이나 전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표현력이 참 놀랍습니다.

그런데 제가 듣고 있던 그 일본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려고 하는 것을 기록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아직까지 성취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이 1948년에 건국되었지만 아직 이 예언은 성취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언제 성취되느냐.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그 날, 이스라엘이 회복됨으로 인해서 성취된다. 이제 이스라엘에도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그렇다, 바로 주님의 오실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하다……

여러분께서는 이 말씀을 듣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말씀을 전하는 목사님은 이스라엘을 참 좋아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분의 말씀을 잘 들어보면 <이방인>이라는 말씀을 쓰시는데, 종종 보면 이를 어떤 때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스라엘인이 아닌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이방인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거기에 포함되지 않습니다만, <이스라엘인이 아닌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이방인>이라는 말을 쓴다면 한국 사람이나 일본사람들 모두가 포함되고 맙니다.

여러분께 한 가지 묻겠습니다. 우리는 이방인입니까. 아닙니까.

어려우신가요? 그러면 다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입니까, 아닙니까.

이런 질문이 나오면 다른 이론이나 주장은 필요 없습니다. 성경을 펴보면 되는 것이지요.


갈라디아서 3장 6절~7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アブラハムは神を信じた。それで、それが彼の義と認められた」とあるとおりです。
ですから、信仰によって生きる人々こそアブラハムの子である、と知りなさい。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우리는 이방인입니까, 아닙니까.

예, 우리는 믿음 안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건 제 말이 아니라 성경에 적힌 그대로의 말씀인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육적인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려주셨던 것입니다.

이 오늘 말씀은 당시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バビロンの王ネブカドネツァル) 왕에게 멸망을 당하고 포로로 끌려갔던 시기에 적힌 것입니다. 따라서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이 모두 망했다고 낙담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 적힌 글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신다. 이처럼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그러니 낙담하지 말라, 절망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나님께서는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입니까? 이것은 이스라엘 유대인의 역사이고,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생활을 하고 있을 때 적힌 이 글은, 장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될 그 시기에 대한 예언이라는 것인가요? 다시 말에서, 이 글은 여전히 이스라엘 만을 위해서 쓰인 글이라는 것인가요?


만약에 그렇다면 이는 그야말로 남 애기,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이야기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이해를 하게 되면 일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말 그대로 이스라엘 만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 이방인은 옆에서 구경이나 하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허무하고 황당한 이야기입니까.

어쩌다가 어떤 목사님 한 사람이 한 말을 가지고 주일 예배 시간 때에 꼭 장황하게 말을 해야 할까…….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떤 분은 또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일본에서 오신 어떤 독실한 기독교인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일본에서 미국까지 신학을 공부하러 오신 분이신데 얼마나 믿음이 좋으신 분이셨겠습니까.

그런데 이 분이 당시 제게 했던 말 중에, 자기가 아는 어떤 사람이 있는데 세계 각처에서 학대 받고 있는 유대인들을 구출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 언약을 저한테 말을 하더라구요.

아브라함의 언약 중에서 창세기 12장 3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12장 3절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わたしは、あなたを祝福する者を祝福し、あなたを呪う者をのろう。地のすべての部族は、あなたによって祝福される。」

이 축복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한테 잘해주면 축복을 받는다는 말을 하더군요. 그것도 아주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축복 받는 방법을 알았어요. 우선 우리 주변에 유대인이 어디 사는지를 알아봐야죠. 그리고 그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어떤 도움을 졸 수 있는지를 연구하고는 열과 성을 다해서 유대인들을 모시고 삽시다. 이 사람 말 대로라면 그것이야말로 축복받는 방법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구약이라 하더라도 성경말씀이 이스라엘 사람들 만을 위한 역사가 적혀있는 책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 나라와 그다지 관련이 없는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할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그 시간에 우리나라 역사, 태정태세문단세나 공부하는 편이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이스라엘만을 위한 하나님이라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남의 나라 신을 믿어서 뭐하겠습니까.

지금 이 일본, 그렇게 미션스쿨도 많고 선교사들이 많이 와서 순교하신 분들도 많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봅니다. 1549년에 기독교가 처음 전파되고 뛰어난 신학자들도 많이 배출한 일본에는 왜 아직도 신교구교 모두 합해도 전 인구의 1%도 안 되는 것인가.

그리고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잿더미가 된 상태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대부흥을 일구어낸 한국, 세계적인 교회가 많이 세워졌고 세계적인 목회자도 많이 배출한 한국이지만, 지금 한국에서 교회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믿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건 뭐 목사를 믿는 건지 하나님을 믿는 건지 모릅니다. 성적인 추문, 돈 문제, 권력 문제가 끊이질 않습니다. 참, 남 보기 민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아무리 전도를 해 봤자 사람들이 뭐라 그렇겠어요. “니들이나 잘해”라고 하고 말지 누가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도대체 왜 이 지경이 된 것일까요. 예수님이 가짜인가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모두 전설에 불과한, 그냥 꾸며낸 이야기인가요?

하나님도 가짜고 예수님도 가짜라면 성경 말씀도 가짜입니다. 이는 믿을 수도 없고, 믿어서는 안 되겠지요. 하루 빨리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만이 진정한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이 우리들의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요.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셨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지금 이 순간도 나와 함께 해주시고 인도해주신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이 성경 말씀이야말로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이고, 바로 나를 위해서 주신 이는 라고 믿은 것이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병에 걸려서 병원에 갔습니다. 거기 의사는 정말 훌륭한 의사라서 못 고치는 병이 없습니다. 자, 그 의사가 진찰을 하고 약을 처방해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병이 나아야겠습니까. 안 나아야겠습니까. 당연히 나아야겠지요. 정말 훌륭한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이잖아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다 나았는데 한 사람만 안 나았어요.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제대로 의사가 말한 대로 약을 먹지 않은 것입니다.

하루에 세 번 먹으라고 한 약을 한 번 먹었다거나, 아니면 반대로 한 번 먹으라고 한 약을 세 번이나 먹었다거나, 더 심하게 말하면 몸에 바르라고 한 약을 먹었다거나 하면 병이 낫겠습니까.


아무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를 잘못 이해하고 복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무슨 어디에서 목사가 귀신을 쫓다가 사람이 죽었다……그런 기사를 여러분께서도 보셨을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되는 일입니까. 아니면 무슨 어느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더니만 가정이 파탄 나고 인생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이것이 올바른 믿음입니까?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입니다. 성경도 진짜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지나도 복음이 전파되지 않고 믿음이 이상해져요.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서 올바로 서지 않아서인 것입니다.

성경은 저 멀리 있는,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 사람들 역사가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 주신 하나님 말씀인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서 환자가 병원을 찾습니다. 그러면 병원에서 진찰을 해주고 약을 처방해주지요. 그런데 사람이 거의 다 죽어가요. 그러면 아무리 훌륭한 의사라 하더라도 손을 쓸 수가 없겠지요.

하지만 오늘 말씀은 어떻습니까. 사람이 완전히 죽었어요. 아니, 그냥 죽은 게 아니라, 시신이 완전히 썩어서 뼈가 되었어요. 그것도 그냥 뼈래요? 2절에 보니까 아주 말라 비틀어진 뼈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요. 백 보 양보를 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경우가 세상에도 가끔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백골이 살아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는 무슨 공포영화 수준이겠지요. 하지만 오늘 말씀은 그런 좀비 같은 영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제 나라가 망하고 모든 사람들이 포로로 남의 나라에 끌려갔습니다. 이제 내 인생도 끝났다, 내 나라도 완전히 망했다. 모든 가망성이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졌다…… 그야말로 한 가닥 희망도 사라지고 실의에 빠진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냥 뼈도 아닌 마른 뼈라 하더라도 하나님은 일으킬 수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회복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 당시 나사로의 상태가 어땠습니까. 침대에 누워서 시름시름 앓고 있었나요? 지금 막 숨을 거뒀나요? 아니요. 나사로는 이미 죽고 그의 시신은 무덤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로 막힌 그 나사로의 무덤 앞에 다가가셔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1장 39절입니다.

요한복음 11장 3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イエスは言われた。「その石を取りのけなさい。」死んだラザロの姉妹マルタは言った。「主よ、もう臭くなっています。四日になりますから。」

죽은 지 4일이나 지나서 이미 그 몸은 썩어가고 있습니다. 냄새가 나요. 하면서 누이 마르다는 어쩌면 울면서 예수님을 말렸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단호하십니다. 요한복음 11장 43절~44절을 봅니다.

요한복음 11장 43절~44절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そう言ってから、イエスは大声で叫ばれた。「ラザロよ、出て来なさい。」
すると、死んでいた人が、手と足を長い布で巻かれたまま出て来た。彼の顔は布で包まれていた。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ほどいてやって、帰らせなさい。」


주님은 나사로를 부르셨습니다. 그것도 큰 소리로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썩어가던 뼈와 살들이 회복됩니다. 영혼이 그 몸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우리나라 식으로 하면 염을 한 상태였을 텐데 그 모습 그대로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성경은 남 얘기가 아닙니다. 남의 나라 회복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의 회복 이야기인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소망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기대도 해봅니다. 소원도 빌어봅니다. 하지만 소망이 끊어지고 속수무책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좌절합니다. 절망합니다. 단념합니다. 포기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모든 소망이 끊어졌을 때, 소망은커녕 뼈도 아주 마른 뼈가 되고 말았을 때, 세상적인 희망이 사라지고 썩은 냄새가 풍길 것만 같을 때,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 때는 땅바닥을 바라보며 낙담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볼 때인 것입니다. 포기할 때가 아니라 회복할 때인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단순히 한 두 사람이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 37장 10절을 봅니다.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私が命じられたとおりに預言すると、息が彼らの中に入った。そして彼らは生き返り、自分の足で立った。非常に大きな集団であった。

살아난 그 모습을 보니 군대, 그것도 지극히 큰 군대였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인간적인 소망이 끊기고 좌절과 절망이 밀려올 때, 그 때는 포기할 때가 아니라 지극히 큰 군대로 일어설 때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 구주 되신 예수님만 붙잡으면 됩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만의 하나님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의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만 붙잡으면 됩니다.
예수님만 붙잡으면 회복됩니다.
예수님만 붙잡으면 마른 뼈가 살아납니다.
예수님만 붙잡으면 죽은 자도 살아납니다.
지극히 큰 군대, 믿음의 용사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모두 오직 예수님만 붙잡고 예수님과 동행하며, 예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서, 지극히 큰 군대, 믿음의 큰 용사로서 회복되어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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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6회 믿음의 현역선수
2018년 9월 2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9절~10절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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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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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믿음의 현역선수” 信仰の現役選手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특히 신약 중에서 바울 서신을 보면 마지막 부분에 안부인사가 적혀 있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얼핏 보면 중요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 안부인사 속에도 얼마나 많은 은혜가 숨겨져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바울은 젊은 동역자 디모데에게 두 번째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신학자들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제국의 폭군 네로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는데, 그 시기를 대략 서기 67년~68년 정도로 추정합니다.

디모데후서 1장 8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第二テモテへの手紙 1章 8節
「ですからあなたは、私たちの主を証しすることや、私が主の囚人であることを恥じ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神の力によって、福音のために私と苦しみをともにしてください。」

이 구절에 의하면 바울은 현재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디모데후서는 바울서신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기록되었다고 하여 바울의 유언과도 같은 성격을 띤다고 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6절~8절을 봅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第二テモテへの手紙 4章 6節~8節
「私はすでに注ぎのささげ物となっています。私が世を去る時が来ました。
私は勇敢に戦い抜き、走るべき道のりを走り終え、信仰を守り通しました。
あとは、義の栄冠が私のために用意されているだけです。その日には、正しいさばき主である主が、それを私に授けてくださいます。私だけでなく、主の現れを慕い求めている人には、だれにでも授けてくださるのです。」

6절에 보면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내가 이제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질 때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이 디모데후서는 나이 들어 몸이 쇠약해진 바울이 어두운 감옥에 갇혀서 사형에 처해질 날을 기다리며 쓴 서한이라고 할 것입니다.

먼저 오늘 말씀 중 4장 10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デマスは今の世を愛し、私を見捨ててテサロニケに行ってしまいました。また、クレスケンスはガラテヤに、テトスはダルマティアに行きました。

이 짧은 구절에는 무려 3명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디도(テトス)는 바울과 함께 한 동역자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를 대단히 사랑하여 바울서신 중에는 디도에게 보내는 디도서(テトスへの手紙)가 있을 정도입니다. 그는 달마디아(ダルマティア)로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그레스게(クレスケンス)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그는 신약성경 중에서 단 한 곳, 이 디모데후서 4장 10절에만 등장합니다. 따라서 그가 어떤 인물인지, 왜 갈라디아(ガラテヤ)로 갔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단서가 없는 것은 아니에요. 그레스게(クレスケンス)가 갈라디아(ガラテヤ)로 가고 디도(テトス)가 달마디아(ダルマティア)로 갔다는 점에 대해서 바울은 질책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레스게(クレスケンス)라는 인물과 디도(テトス)는 각각 바울의 뜻에 따라 갔을 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이 점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는 부분이 바로 제일 앞에 나오는 데마(デマス)입니다. 오늘은 이 데마에 대해서 주목해보려고 합니다.

바울의 말에 의하면 데마는 데살로니가로 갔는데, 그냥 간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리고, 나이 들어 쇠약해지고 감옥에 갇힌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버렸다는 심하게 질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강조된 점은 그 뿐만이 아닙니다. 데마가 늙어서 감옥에 갇힌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간 이유는 바로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데마에 대해서는 성경에 여기 말고 다른 곳에 두 번 등장하는데, 하나는 골로새서와 또 하나는 빌레몬서입니다.

먼저 골로새서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골로새서 4장 14절입니다.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コロサイ人への手紙
「愛する医者のルカ、それにデマスが、あなたがたによろしくと言っています。」


그리고 빌레몬서 1장 24절을 봅니다.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ピレモンへの手紙
「私の同労者たち、マルコ、アリスタルコ、デマス、ルカがよろしくと言っています。」

이처럼 데마는 그냥 일반 성도가 아니라 그도 역시 바울을 도와 함께 주님의 일을 감당했었으며, 바울이 쓴 편지 마지막 문안인사에 데마도 함께 문안한다고 적었던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바울이 그를 인정해서 적었을 정도가 아닙니다. 아무리 바울이 데마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편지를 받는 사람이 데마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아마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즉, 이 데마라고 하는 사람은 바울이 아끼는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바울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도, <데마>라는 이름을 들으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었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의 총애를 받으면서 함께 주님의 일을 감당했던 데마가 왜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을까요. 어떤 일이 그에게 있었기에 바울은 그가 세상을 사랑했다고 했을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데마는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도 버리고 떠났다고 분명히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는 오늘 먼저 세상을 사랑한다(今の世を愛し)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보고자 합니다. 먼저 <세상을 사랑한다>는 말에 대한 오해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세상을 사랑한다> 말씀을 들으면 어떤 구절이 떠오르십니까.. 예,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1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モーセが荒野で蛇を上げたように、人の子も上げら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それは、信じる者がみな、人の子にあって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す。」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一人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하나님께서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게 함으로 인해서 우리 인간들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도록 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도 세상을 사랑하셨다는데,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럼 좋은 것이잖아요. 그런데 데마는 세상을 사랑해서 바울을 버리고 떠났다? 이게 무슨 차이냐 하는 것이죠.

먼저 앞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으신 이 세상을 피조물, 그리고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우리 인간을 사랑하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의 독생자 예수님까지 아끼지 않고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이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이 세상을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적인 쾌락, 세상적인 편법, 세상적인 구습에 젖은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4절을 봅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ヤコブの手紙 4章4節
節操のない者たち。世を愛することは神に敵対することだと分からないのですか。世の友となりたいと思う者はだれでも、自分を神の敵としているのです。

여기서 <간음한 여인들>이라고 나오는데, 이 말씀은 단순히 성적으로 문제가 있는 여성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신구약을 통틀어 <간음>이라고 함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숭배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상숭배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적인 방법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적인 구습을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우상이 무엇입니까.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돈이지요. 돈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부유함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잠언 10장 22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

人を富ませるのは主の祝福。人の苦労は何も増し加えない。

모든 재물이 축복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마귀 사탄도 때로는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마귀 사탄이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가 잘 되기를 바래서 그러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마귀들이 주는 재물은 사람을 타락하게 만듭니다. 사람을 괴롭게 만듭니다.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만듭니다. 마귀 사탄은 천만분의 일이라도 우리의 기쁨이나 행복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우리의 타락만을 원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속아 넘어가서 마귀 사탄이 주는 재물을 덥석 쥐게 되면, 이제 평온이 사라집니다. 인간관계가 틀어집니다. 다툼이 생겨납니다. 자나 깨나 불안합니다. 인생이 꼬입니다. 근심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부유함은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다도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한 푼이라도 돈을 모으려고 애를 씁니다. 하나님이 없더라도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바로 세상을 사랑하는 우상숭배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재물을 숭배하는 자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だれも二人の主人に仕えることはできません。一方を憎んで他方を愛することになるか、一方を重んじて他方を軽んじることになります。あなたがたは神と富とに仕えることはできません。

여러분, 하나님과 재물이 동등합니까? 아니, 비교할 걸 비교해야죠. 어떻게 하나님과 재물이 동등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 굳이 하나님과 재물을 비교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하나님과 재물을 동등하게 생각하는 착각을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던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평소에는 아멘 할렐루야 하면서 거룩한 척 좀 했다가, 이 돈 문제만 엮이기 시작하면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눈에 불을 켜고 열을 냅니다. 요즘 세상을 보면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참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지금 전세계를 돌아 보면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는 21세기가 된 지금도 식량문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천지가 창조된 이래 이 세상에는 식량이 부족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예, 전체적으로 보면 이 세상에는 식량이 충분히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뭐가 문제였냐 하면 분배를 하지 않아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지 않아서 이러한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지요.

그도 그럴 것이 미국에서 하루에 버려지는 음식만으로 아프리카에서는 1년을 먹을 수 있는 식량이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식량문제로 어려움을 곀고 있는 사람들은 굳이 아프리카나 개발도상국까지 안 가더라도, 한국이나 일본에도 대단히 많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자기가 게을러서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고 하겠지만,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부유한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잠시 인터넷을 찾아보았더니 부자들이 가진 재산들을 보니까 무슨 1조원 2조원이 아니더라구요. 글쎄요. 참 진부한 생각이긴 합니다만, 그분들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좀 지갑을 열어서 도움을 줄 수만 있다면 상당히 많은 빈곤문제가 해결될 텐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세상에는 돈이 없는 것이 아니에요. 분배가 안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정치를 보더라도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한국의 대통령이라고 하면, 한국이 비록 작은 나라이긴 합니다만,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는 제왕적 대통령이라고도 하지요. 그런데 임기가 끝나고 나면 대부분의 경우 본인이나 가족들이 불행하게 됩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재임 중에 그 큰 권력을 잘못 사용했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한국의 대통령은 그렇게 큰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항상 임기가 끝나면 감옥에 가야 하는 것인가요? 아니요. 자신이 가진 힘을 잘못 썼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그렇게 큰 힘이 있다면, 얼마나 많은 어려운 사람을 도와줄 수가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을 하지 않고 그 몇 년 안 되는 임기 동안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고, 이웃이나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임기가 끝나고 난 다음에 그와 같은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사랑만이 아니라 반드시 이웃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마음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방법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다시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야기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경우든지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고 제가 말씀 드리면 어떤 분은 또 이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하면, 그럼 아플 때 병원에도 가지 말고 기도만 하라는 거야? 혹시 그런 생각 안 해보셨나요?

이건 그냥 농담이 아니라 가끔 정말 진지하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만약에 그렇다면 하나님 믿는 사람은 의사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약사나 간호사도 마찬가지죠.

어디 그 뿐인가요? 기술자들이 집을 왜 져요? 집이 세워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밥을 왜 먹어요?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르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그렇게 따지면 배부르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밥을 먹는 사람들은 믿음이 적은 사람들이에요?

또한 그렇게 본다면 바울은 참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냥 복음이 전파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되지 왜 그렇게 고생을 해가면서 전도를 다녔어요. 안 그래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더러 그냥 산에 올라가서 기도만 하고 있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땅에 묻어버리는 일이나 다름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 일을 위해서 바울은 오늘 말씀 디모데후서 4장 9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あなたは、何とかして早く私のところに来てください。

라고 디모데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내 후사를 디모데에게 부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한국에서 교회에 있을 때 보니까 어떤 분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런 말씀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예수님 믿기 참 힘들대요. ㅎㅎ 여러분께서는 어떠세요? 예수님 믿기 쉬우세요? 아니면 힘드세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참 힘들지요. 저라고 그런 생각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얼마 전에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야구를 좋아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뭐, 꼭 야구가 아니라도 좋아요. 운동 선수들이 훈련하는 곳에 가봤다고 생각해보세요. 거기 보니까 선수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공을 던지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무거운 것을 들었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고된 훈련을 해요. 지난 여름은 얼마나 더웠습니까. 그런데 그런 더위 속에서 쉬지 않고 열심히 훈련을 합니다. 그런데 저쪽에 보니까 훈련을 안 하는 선수가 있어요. 그냥 그늘에서 왔다 갔다 어슬렁거릴 뿐이에요.

여러분께서는 어느 쪽이 부러우십니까. 얼핏 보기에는 저렇게 땡볕에서 땀을 흘려가면서 몇 시간이나 훈련을 하는 선수들이 불쌍하고, 그늘에서 훈련도 안 하는 선수가 부러워 보일 수는 있습니다만, 알고 보니 그늘에서 훈련을 안 하는 선수는 이번에 전력외 통보를 받았던 것입니다. 전력외 통보가 무엇이냐 하면, 한국에서는 지명할당……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한다고 하는데, 쉽게 말하자면 이것입니다. 너는 이제 우리 팀의 전력, 힘이 못돼. 그러니까 뭐예요? 예, 쉽게 말하자면 모가지입니다. 너는 이제 1군에서 뛸 수 없으니까 2군으로 내려가든지 아니면 나가든지 알아서 해……이것이죠. 야구 같은 데에 보면 한국이나 일본은 1군과 2군, 미국은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가 있는데, 텔레비전에서 중계도 하고 그러는 것은 모두 1군입니다. 그러니까 잘하는 사람들이죠. 똑 같은 팀이라 하더라도 1군과 2군 대우를 보면 그야말로 천지차이라고 합니다. 1군은 자기 유니폼, 헬멧 이런 것들이 잘 갖춰져 있지만 2군은 대부분 그런 것도 없대요. 당연히 받는 보수도 큰 차이가 납니다.

야구선수들, 특히 프로야구 선수들을 보면 어떤 인생을 살아왔겠습니까. 어렸을 때부터 평생동안 야구를 해보면서, 몇 십 년 동안 수 백 번, 수 천 번 되는 시합도 해왔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정말 그 나라에서 제일 야구 잘하기로 소문난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바로 프로야구입니다. 그렇잖아요?

사실 그 정도 되면, 이제 훈련 안 해도 되는 것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닙니다. 아무리 훌륭한 선수라 하더라도 훈련을 게을리하면 금새 뒤쳐집니다.

현역으로 활약을 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노련한 선수라 하더라도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프로의 세계인 것이지요. 감독도 마찬가지입니다. 가혹한 훈련을 시키는 것은 그만큼 그 선수한테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에, 다음 시합에서 활약 하기를 바라기 때문인 것이지요. 기대를 하지도 않은 선수한테는 훈련도 안 시킵니다. 그냥 전력외 통보. 너는 우리 팀에 전혀 도움이 안 되니까 나가……라고 은퇴시켜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예수 믿은 게 몇 년인데, 이 정도 믿었으면 이제 시련 좀 그만 겪어도 되는 것 아니야? 그런데 이렇게 문제가 끊이질 않아……이렇게 생각되신다면 우리 한 번 마음을 바꾸어보도록 합시다. 예수님께서 나를 은퇴시키지 않으시려고, 다음 시합에서도 나를 버리지 않고 현역으로 뛰게 하시려고, 내 활약을 기대하시기 때문에 지금 나를 이렇게 훈련시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말장난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주님의 진심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떠난 데마는 믿음 안에서 은퇴를 하고 말았습니다. 운동선수들에게 있어서는 뛰어난 성적을 내고 은퇴를 하는 것이 명예로울 수 있겠으나, 믿음 안에서의 은퇴는 영적인 죽음을 뜻합니다. 믿음 안에서 명예로운 것은 오직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 날까지 주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현역의 믿음을 가지고 달려가는 삶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은퇴선수의 믿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현역선수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에 있더라도 녹슬지 않는 현역선수의 믿음을 갖고, 세상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주님과 함께 달려가서, 마침내 바울처럼 의의 면류관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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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5회 곤고한 날에
2018년 9월 1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전도서 7장 14절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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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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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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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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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곤고한 날에” 逆境の日に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구약 여호수아 6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을 함락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함락하는 장면을 보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독특합니다.

여호수아 6장 2절~5절을 봅니다.

여호수아 6장 2절~5절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ヨシュア記

主はヨシュアに告げられた。「見よ、わたしはエリコとその王、勇士たちをあなたの手に渡した。
あなたがた戦士はみな町の周りを回れ。町の周囲を一周せよ。六日間そのようにせよ。
七人の祭司たちは七つの雄羊の角笛を手にして、箱の前を進め。七日目には、あなたがたは七回、町の周りを回り、祭司たちは角笛を吹き鳴らせ。
祭司たちが雄羊の角笛を長く吹き鳴らし、あなたがたがその角笛の音を聞いたら、民はみな大声でときの声をあげよ。そうすれば町の城壁は崩れ落ちる。民はそれぞれ、まっすぐに攻め上れ。」


이 말씀은 무엇인가 하니, 모든 군사가, 양각 나팔, 그러니까 양 뿔로 만든 나팔을 들게 한 일곱 제사장을 앞세워서 6일 동안 여리고 성 주위를 하루에 한 번씩 걸어서 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한 번이 아니라 일곱 번을 돈 다음 그 나팔을 불래요. 그리고는 군사들더러 외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된대요? 예, 여리고 성 성벽이 무너진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생각하기에 성벽이라고 한다면 고급 주택 담벼락, 기껏해야 지금 서울 덕수궁 돌담길 정도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신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여리고 성 성벽 구조는 이중으로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깥 쪽 성벽 두께는 약 1.8미터, 그리고 안쪽 성벽 두께는 약 4~5미터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높이는 어느 정도인가 하면 약 9미터 정도, 그러니까 대략 4층 건물 정도의 높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 두 벽 사이의 간격은 5미터 정도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정확한 수치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소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이 성벽이 얼마나 두꺼웠냐하면, 성벽 위에서 사람들이 집을 짓고 생활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성벽 위에 살고 있었던 사람 중 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여호수가 2장 15절
“라합이 그들을 창문에서 줄로 달아 내리니 그의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주하였음이라”

そこで、ラハブは綱で窓から彼らをつり降ろした。彼女の家は城壁に建て込まれていて、彼女はその城壁の中に住んでいた。

그렇습니다. 당시 여리고 성을 정탐하기 위해서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들을 숨겨주었던 라합이 살던 집이 바로 이 성벽 위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성벽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은 있지만, 확실한 것 한 가지는 무엇이냐 하면, 이 성벽을 사람의 능력으로 파괴하기 위해서는 보통 장비 가지고는 어려울 정도로 이 여리고 성은 난공불락의 아성이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를 공략하기 위해서 당시 이스라엘 군사들이 사용한 최첨단 무기와 최첨단 전술이 무엇이었다고요? 그것은 다름 아닌, 순종이었습니다.

제가 아직도 기억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제가 어렸을 때, 아마도 초등학교 때라고 기억합니다만, 그래도 좀 성경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해서 무엇을 읽을까 하고 뒤적거렸는데, 창세기는 너무 좀 진부해요……ㅎㅎ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에요. 그리고 레위기, 민수기는 뭔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여호수아를 좀 읽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앞에 좀 읽다가 여기에 오니까 이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 성벽을 어떻게 무너뜨렸냐 하면 이스라엘 제사장들과 군사들이 6일 동안은 하루에 한 번 씩 돌고,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일곱 번 돌고 나팔을 불고 외치니까 성벽이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되요? 그래서 야, 이게 도대체 뭔 소리야……하고 성경을 닫아버렸던 기억이 아직도 납니다. 그 때 좀 누가 성경을 알려주고 그랬더라면 참 좋았을 것을……이라는 아쉬움이 좀 있지요.

믿음이 없고 순종이 없었다면 이런 황당한 지시를 어떻게 따랐겠습니까.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 민족들은 달랐습니다. 애굽을 탈출할 때의 이스라엘 민족들, 이른바 광야 1세대들은 어땠습니까. 그들은 태어나서부터 노예였습니다. 그의 조상들도 몇 백 년 동안 노예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들은 자유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저 자기 주인집 창고에서 몰래 훔쳐먹는 음식들이 최고인줄 알고, 그게 무슨 자신들의 특권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애굽인이고 뭐고 간에, 하나님보다도 자기 주인들한테 굽신 굽신 거리고 비위를 맞춰가면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최고의 인생이라고 생각했던 그들입니다.


그러니 모세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아,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가 훨씬 편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광야까지 끌고 나와서 죽게 하냐……이러면서 사사건건이 반대를 하고 불평 불만을 늘어놓습니다.

그리고 막판에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시겠다고 하신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려 했더니만 뭐라고 합니까. 자기들은 안 된대요. 절대로 못 한대요. 아니, 하나님께서는 할 수 있다고 하시는데, 자기들이 못 한다는 거예요. 이 말은 무엇입니까. 할 수 있다고 하신 하나님은 틀렸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기들이 옳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교만을 가만히 두실 리가 있겠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마침내 40년 뒤에 그들이 여리고 성 앞에 선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40년 뒤에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인가요? 아닙니다. 40년 동안 하나님은 틀렸고 자신들이 옳다고 한 사람들은 모두가 광야에서 죽어갔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한 그들이 결국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를 떠돌며 죽어가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그들의 아들 딸들, 광야 1세대가 불순종할 때 미성년자였던 광야 2세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모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인해서 스스로만이 아니라 자신들 광야 2세대들까지도, 그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광야에서 오랫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여리고 공격 명령이 떨어졌을 때, 그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냐, 아니면 자신들의 부모들처럼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광야에서 죽어갈 것이냐……이 둘 중에서 무엇을 택하겠습니까. 그들은 이제 망설일 이유가 없었습니다. 불순종으로 인한 처참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수아의 명령을 받고는 일체의 불평 불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입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지막 일곱째 날에 여리고 성 주위를 일곱 번 돌고 난 다음 나팔을 불고 소리를 힘껏 질러 외쳤더니 그 견고한 여리고 성 성벽이 무너져 내렸던 것입니다.

혹시 기억력이 좋으신 분들께서는 이 시점에서 좀 의문이 들였을 것입니다. 아니, 성벽이 무너졌다고 하면, 라합이 살던 집도 그 위에 있었다고 하는데, 그러면 라합이 살던 집도 무너져 내린 것일까. 성경에 보면 라합의 집은 살아남았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걸까……하고 걱정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에 대해서 또 신학자들이나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여리고 성 성벽이 무너졌다고 해서 여리고성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성벽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린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여리고 성벽 중 일부가 무너져 내림으로 인해서 그 곳을 통해서 안으로 쳐들어갈 수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확고한 믿음과 순종으로 인해서 그들은 여리고 성을 단숨에 함락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승리였겠습니까.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이 울려 퍼집니다. 이스라엘 군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이제 여리고 성을 함락시켰으나 이스라엘 백성의 목표는 그깟 여리고 성 하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자손들에게 영원히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점령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제 그 여세를 몰아서 또 하나의 성을 공략하고자 합니다. 그 성 이름이 바로 <아이 성>이었습니다. 한국말로 하면 참 이해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뭐냐 하면 <아이 성> 대단히 작은 성이었습니다. 참고로 <아이>라는 말의 본 뜻은 <폐허>, <돌무더기>라고 합니다.


아무튼 그래서 여호수아가 이 아이 성을 정탐하라고 했더니 그들이 말합니다.

여호수아 7장 3절입니다.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

彼らはヨシュアのもとに帰って来て言った。「民をみな上って行かせるには及びません。二、三千人ぐらいを上らせて、アイを討たせるとよいでしょう。彼らはわずかですから、民をみな送って骨折らせるには及びません。」

여호수가아 보낸 정탐꾼들은 아이 성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2,000~3,000명이면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전쟁을 해보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로 다음 구절입니다. 여호수아 7장 4절~5절

“백성 중 삼천 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아이 사람이 그들을 삼십육 명쯤 쳐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가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

そこで民のうち、およそ三千人がそこに上って行ったが、彼らはアイの人々の前から逃げた。
アイの人々は彼らの中の三十六人を打ち殺し、彼らを門の前からシェバリムまで追って、下り坂で彼らを討った。民の心は萎え、水のようになった。

아이 성을 점령할 수 있었대요? 아니요. 오히려 36명의 희생자가 발생하고 완전히 패배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어쩌다가 한 번 전쟁에 졌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난공불락의 요새 여리고 성을 점령했습니다. 이 과정에서는 이스라엘 쪽에 단 한 사람도 죽었다는 기록이 없어요. 그런데 여리고 성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작은, 말 그대로 아이 성을 공략했는데, 희생자가 발생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여리고 성은 가나안 땅이고 아이 성은 가나안 땅이 아닌가요? 아니요, 아이 성도 가나안 땅입니다. 아이 성이 여리고 성보다 컸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아이 성은 여리고 성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작은 성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패배가 아닙니다. 희생자 몇 명이 발생했다는 것으로 끝낼 만한 것이 아니라, 하늘을 찌를 듯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기는 마음이 녹아서 물같이 되어버렸다고 합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의 반대는 <의심>입니다.

아니, 여리고에서 그렇게 큰 승리를 얻었을 때에는 정말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신다고 믿었는데, 저렇게 작은 성 하나를 공격했더니 36명이나 죽었어. 그럼 이거 정말 하나님이 함께 해주신다고 하는 게 맞는 거야? 뭐야? 여리고 성에서의 승리는 우연히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 아냐? 이렇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삼국지 같은 경우를 보면 지휘를 맡은 장수를 처벌하거나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만, 여호수아는 어떻게 했습니까.

옷을 찢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도대체 왜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십니다.

여호수가 7장 11절~15절입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희 가운데에 온전히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너희가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가운데에서 제하기까지는 네 원수들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리라
너희는 아침에 너희의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 뽑히는 그 지파는 그 족속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족속은 그 가족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그 가족은 그 남자들이 가까이 나아올 것이며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진 자로 뽑힌 자를 불사르되 그와 그의 모든 소유를 그리하라 이는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고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이라 하셨다 하라”


ヨシュア記 7章11節~15節

イスラエルは罪ある者となった。彼らはわたしが命じたわたしの契約を破った。聖絶の物の一部を取り、盗み、欺いて、それを自分のものの中に入れることまでした。
だから、イスラエルの子らは敵の前に立つことができず、敵の前に背を見せたのだ。彼らが聖絶の者となったからである。あなたがたの中から、その聖絶の物を滅ぼし尽くしてしまわないなら、わたしはもはやあなたがたとともにはいない。
立て。民を聖別せよ。そしてこう言え。あなたがたは、明日のために自らを聖別しなさい。イスラエルの神、主がこう告げられるからだ。『イスラエルよ、あなたの中に聖絶の物がある。あなたがたがその聖絶の物を、あなたがたの中から取り除くまでは、敵の前に立つことができない。
明日の朝、部族ごとに進み出よ。主がくじで取り分ける部族は氏族ごとに進み出、主がくじで取り分ける氏族は家族ごとに進み出、主がくじで取り分ける家族は男一人ひとり進み出よ。
聖絶の物のことでくじで取り分けられた者は、彼も彼に属するすべてのものも、火で焼かれなければならない。彼が主の契約を破ったからであり、彼がイスラエルの中で恥辱となることをしたからである。』」


공교롭게도 이 일에 대해서는 여호수아 7장 1절에 이미 기록되어 있습니다.

7장 1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しかし、イスラエルの子らは聖絶の物のことで主の信頼を裏切った。ユダ部族のゼラフの子ザブディの子であるカルミの子アカンが、聖絶の物の一部を取った。それで、主の怒りがイスラエルの子らに向かって燃え上がった。


유다 자피의 아간이라는 자가 하나님께 온전히 바친 물건에 손을 댔다는 것이지요.

여호수아 6장 17절~19절을 봅니다.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이는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가 숨겨 주었음이니라
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하니라”

この町とその中にあるすべてのものは主のために聖絶せよ。遊女ラハブと、その家にともにいる者たちだけは、みな生かしておけ。彼女は私たちが送った使いたちをかくまってくれたからだ。
あなたがたは聖絶の物には手を出すな。あなたがた自身が聖絶されないようにするため、すなわち、聖絶の物の一部を取ってイスラエルの宿営を聖絶の物とし、これにわざわいをもたらさ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ある。
ただし、銀や金、および青銅や鉄の器はすべて主のために聖別されたものである。それらは主の宝物倉に入れよ。」

이 성에서 얻은 전리품은 모두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간은 이를 몰래 자신의 집에 감추었던 것입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노하셔서 결국 전쟁에 패배하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여호수아는 아이 성을 공격할 때에 모든 주민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그 결과 여호수아 8장 25절에 의하면 그 때 사망한 아이 주민들이 12,000명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어떤 신학자들은 아이 성 주민이 12,000명이라고 한다면 싸울 수 있는 장정들은 대략 3,500명~4,000명 정도는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만일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더구나 그 쪽은 수비하는 쪽이니까 공격하는 쪽의 병력은 더 많으면 많았지 적으면 안 되었겠지요. 그런데 아이 성을 정탐한 이들의 보고는 어땠습니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호수아 7장 3절에 의하면 이삼천 명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패배한 것은 전쟁 방법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간의 죄로 인해서 정탐꾼들의 판단부터 흐려졌다고 하는 결론이 되고 맙니다.

이제 여호수아는 아간과 그 집안을 처벌합니다.

여호수아 7장 24절~26절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과 더불어 세라의 아들 아간을 잡고 그 은과 그 외투와 그 금덩이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딸들과 그의 소들과 그의 나귀들과 그의 양들과 그의 장막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여호수아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냐 여호와께서 오늘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물건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의 맹렬한 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

ヨシュアは全イスラエルとともに、ゼラフの子アカンと銀、外套、金の延べ棒、および彼の息子、娘、牛、ろば、羊、天幕、それに彼のすべての所有物を取って、アコルの谷へ運んだ。
ヨシュアは言った。「なぜ、おまえは私たちにわざわいをもたらしたのか。主は今日、おまえにわざわいをもたらされる。」全イスラエルは彼を石で打ち殺し、彼の所有物を火で焼き、それらに石を投げつけた。
人々はアカンの上に石くれの大きな山を積み上げた。今日もそのままである。主は燃える怒りを収められた。それで、その場所の名はアコルの谷と呼ばれた。今日もそうである。

자, 이렇게 모든 죄들을 해결하고 다시금 아이 성을 공격할 때 몇 명을 보냈냐 하면 여호수아 8장 3절에 의하면 3만 명을 보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제야 올바로 판단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께서는 전투방법까지도 자세하게 알려주십니다. 이로 인해서 이스라엘 민족은 또다시 대승을 거두게 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전도서 7장 14절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順境の日には幸いを味わい、逆境の日にはよく考えよ。これもあれも、神のなさること。後のことを人に分からせないためである。

형통한 날, 일이 잘 풀리고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시면 기뻐해야겠지요. 하지만 곤고한 날은 되돌아 보라고 합니다. 이 부분을 현대인의 성경은 “어려움을 당할 때는 생각하라”, 일본 신개역판에는 “역경의 날에는 잘 생각하라”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에 처해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되돌아보고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첫째는, 원인은 항상 나한테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9장 14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それでは、どのように言うべきでしょうか。神に不正があるのでしょうか。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


내가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하나님 잘못이에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본에 유명한 말이 있는데 이 말을 일본 야구 선수이자 감독이었던 사람 중에 노무라 카츠야라는 사람이 했다는 말도 있고, 그 이전 에도시대 때 마츠라 세이잔 이라는 사람이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그 말은 이것입니다.

“勝ちに不思議の勝ちあり 負けに不思議の負けなし”
“승리에 우연한 승리 있고, 패배에 우연한 패배 없다”

즉, 시합이나 경기에서 내 실력이 부족해도 상대방이 예상치 못한 실수를 하거나 해서 어쩌다가 이길 수는 있지만, 어쩌다가 우연히 지는 일은 없다. 내가 질 때에는 반드시 그 이유가, 그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한테 무슨 안 좋은 일이 일어난다거나, 일이 안 풀릴 때, 사람들은 쉽게 남의 탓을 합니다. 하물며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럴 수는 없어……이런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내가 생각한 대로 일이 풀려야 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내 방법대로 일을 행하시나요? 아니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방법대로 일을 행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일이 안 풀린다고 하나님이 있네, 없네 한다면 이는 얼마나 교만한 생각이 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내 앞에 무슨 문제가 있다 하면, 우선 나 자신부터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나한테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그 부분을 해결하기 전에는 절대로 앞으로 안 나갑니다. 반드시 그 부분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나 자신을 돌아보아도 하나님 앞에서 잘못이 없어요? 그렇다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더욱더 놀라운 방법으로 인도해주실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신다는 점입니다.

요한1서 4장 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第一ヨハネの手紙

私たちは自分たちに対する神の愛を知り、また信じています。神は愛です。愛のうちにとどまる人は神のうちにとどまり、神もその人のうちにとどまっておられます。

하나님은 단순히 사랑이 많다, 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단순한 말씀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고 피를 흘리게 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기를 기뻐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움을 허락하시고 곤고함을 허락하실 때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습니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하나님 탓을 했던 사람들, 남의 탓을 했던 사람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에베소서 4장 22절~24절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エペソ人への手紙

その教えとは、あなたがたの以前の生活について言えば、人を欺く情欲によって腐敗していく古い人を、あなたがたが脱ぎ捨てること、
また、あなたがたが霊と心において新しくされ続け、
真理に基づく義と聖をもって、神にかたどり造られた新しい人を着ることでした。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에 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이웃을 원망하고 환경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던 옛 사람은 이제 저기 광야에 벗어버립시다. 아간을 묻어버린 아골 골짜기에 묻어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어려움 속에서 내 안에 있는 문제를 되돌아보고 사랑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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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 모두 형통한 날에도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도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아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기쁨과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고, 사랑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놀라운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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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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