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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1회 함께 하시는 하나님
2019년 1월 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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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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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함께 하시는 하나님” 共におられる神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의 기록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それゆえ、主は自ら、あなたがたに一つのしるしを与えられる。見よ、処女が身ごもっている。そして男の子を産み、その名をインマヌエルと呼ぶ。

라고 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요셉과 마리아는 약혼한 상태였습니다. 약혼이라고 하면 요즘은 결혼하기 전에 하는 단순한 약속 정도로만 여겨지고 있습니다만, 당시 이스라엘에서의 약혼은 단지 동거를 하지 않을 뿐이지 법적으로는 결혼이나 다름 없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약혼관계를 해지하는 것, 즉 파혼을 한다는 것은, 지금으로 본다면 이혼이나 마찬가지이며 간음으로 인하지 않고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큰일이 났습니다. 아직 동거를 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마리아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이는 보통 일이 아닙니다.

아직 함께 살고 있지 않은 마리아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본다면 결혼을 약속한 요셉이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라는 말이 됩니다.

성경에 보면 과거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대단히 무서운 율법을 주셨습니다.

신명기 22장 23절~24절
“23.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24.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안에 있으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ある男と婚約中の処女の娘がいて、ほかの男が町で彼女を見かけて一緒に寝た場合、
あなたがたはその二人をその町の門のところに連れ出し、石を投げて殺さなければならない。その女は町の中にいながら叫ばなかったからであり、その男は隣人 の妻を辱めたからである。こうして、あなたがたの中からその悪い者を除き去りなさい。

즉, 율법대로라고 한다면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조용히 관계를 끊으려고 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바로 이 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결혼을 하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1장 20절~23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20.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彼がこのことを思い巡らしていたところ、見よ、主の使いが夢に現れて言った。「ダビデの子ヨセフよ、恐れずにマリアをあなたの妻として迎えなさい。その胎に宿 っている子は聖霊によるのです。
マリアは男の子を産みます。その名をイエスとつけなさい。この方がご自分の民をその罪からお救いになるのです。」
このすべての出来事は、主が預言者を通して語られたことが成就するためであった。
「見よ、処女が身ごもっている。そして男の子を産む。その名はインマヌエルと呼ばれる。」それは、訳すと「神が私たちとともにおられる」という意味である。

이에 따라 요셉은 마리아와 예정대로 결혼을 하게 된 것이지요.

저는 예전에 성경을 읽을 때 이 부분이 좀 마음에 걸렸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유대인이라고 한다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예언은 모두가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메시아의 탄생을 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라고 하셨지만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았지요.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부분 때문이 아닐까 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제가 생각하기를 애초에 이사야 서에서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가 아니라 “예수라 하리라”라고 되어 있었다면 사람들이 좀 알기 쉽지 않았을까 했던 것이지요.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이름이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말한 것을 어떤 사람이 말했다고 하면, 잘못 해석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오늘 복음서에 보니 하나님의 사자가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의심할 수가 없겠지요. 이사야서에 기록된 임마누엘은 틀림없이 예수님을 뜻합니다.

하지만 메시야 탄생을 예언한 구약성경에는 메시야의 이름이 “예수”다 라고 하는 구절이 어디에도 없거든요. 예언서에 보면 메시야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라고 예언되었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예수”라는 이름이라고 하니 사람들이 헷갈린 것이 아닐까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생각에 동의하시나요? 그렇다면 성경이 좀 잘못 적혀 있는 건가요? 하나님의 문장 실력이 우리보다 좀 못해서 그러셨을까요? ㅎㅎ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임마누엘 메시야가 오신다는 예언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구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이 “예수라 하리라”라고까지 기록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이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이름이 “예수”라고 하면서, 자기가 메시야라고 하면서 백성들을 현혹했겠습니까.


얼마 전에 신문을 보니까 자기가 재림예수라고 하는 사람들이 5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무려 20여명이래요. 이 숫자가 전세계적인 것일까요? 아니요. 한국에서만 이렇다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내가 하나님 부인이다, 내가 보혜사 성령이다(助け主の精霊). 내가 엘리야나 다윗이다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 이건 뭐 난리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에도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어쩌면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주님의 이름을 마지막까지 숨겨놓으셨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라는 이름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임마누엘>은 그럼 또 무엇일까요. 사실 이 <임마누엘>에는 그 뜻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뜻이 바로 예수님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임마누엘>은 히브리어인데 <임>은 ~과 함께, 영어로 with이고, <마누>는 <우리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엘>은 하나님을 가리키죠. 그러니까 오늘 말씀에 나와 있는 것처럼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역사하셨습니까. 아담과 하와 때에는 사람이 하나님을 대단히 가깝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만, 사람이 죄악으로 타락한 후에, 하나님과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져만 갔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예언자나 선지자에 국한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신 후에 어떻게 변했습니까.


여기서 한 번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6장 7절
“7.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しかし、わたしは真実を言います。わたしが去って行くことは、あなたがたの益 になるのです。去って行かなければ、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助け主はおいでになりません。でも、行けば、わたしは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助け主を遣わします。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제자들은 아마도 이게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후에 하늘에 올라가신 다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도행전 2장 1절~4절
1.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五旬節の日になって、皆が同じ場所に集まっていた。
すると天から突然、激しい風が吹いて来たような響きが起こり、彼らが座っていた家全体に響き渡った。
また、炎のような舌が分かれて現れ、一人ひとりの上にとどまった。
すると皆が聖霊に満たされ、御霊が語らせるままに、他国のいろいろなことばで話し始めた。


많은 이들이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를 하고 있는 가운데 홀연히 하늘로부터 성령이 내려와서 각 사람에게 임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과거에는 하나님 근처에도 갈 수 없었던 우리였습니다만, 이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친히 하나님께서 와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해졌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입니다.

제 집 사람이 체류비자를 받기 전에는 무비자로 입국을 했습니다. 한국여권을 가지고 있으면 90일 동안은 비자를 받지 않아도 체류할 수가 있지요. 하지만 그 체류자격은 기본적으로 관광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일을 할 수도 없고, 학교에 다닐 수도 없습니다. 재류카드를 만들 수도 없고 면허증도 딸 수 없으며, 그 흔한 휴대폰도 계약할 수가 없지요.

첫 번째 90일이 다 하고 난 다음에 한 번 귀국을 했습니다만, 몇 주 후에 다시 들어오려고 하니까 일본 공항에서 어딘가로 끌려가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지금 비자를 신청중이라고 하니까 신청한 비자가 안 나오면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몇 번이나 못을 박았다고 합니다. 참 까다롭게 굴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얼마 전에 입국관리국에서 재류자격인정증명서……라고 하는 요만한 작은 종이 한 장이 도착했습니다. 말하자면 정식 비자가 나온 것이지요. 이 작은 종이 하나에 어떤 힘이 있었냐 하면, 이걸 일본 대사관에 가져갔더니 바로 다음 날 비자를 여권에 찍어줍니다. 일본 공항에 도착해서 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거기 왔다 갔다 하는 담당 직원이 그 종이를 보고는, 아, 재류카드를 만들어야 하는군요……라고 하면서 다른 방으로 데려가서 재류카드를 뚝딱 만들어주고는 남들보다도 일찍 심사를 마치고 입국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 시청에 갔더니 주민등록도 되고 의료보험도 됩니다. 이제 다음 달이면 운전면허도 얻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참 그 작은 종이 한 장의 위력이 대단해요. 저도 예전에 똑같이 했었기 때문에 새로울 것도 없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토록 오래 기다렸던 터라 참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이 얼마나 복잡합니까. 어떤 분의 말씀에 의하면 잠이 안 올 때 읽으면 정말로 효과적이라고 하는 레위기. 그 1장 1절부터 보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방법이 적혀 있는데 얼마나 어렵고 복잡한지 모릅니다. 짐승일 경우에는 어떻게 하고 새일 경우에는 어떻게 하고, 또 곡물일 경우에는 어떻게 하고……라는 규정이 대단히 까다롭게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는 제사장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다가 잘못하면 죽임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그 단계가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지 몰라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아주 짧은 길이의 이름을 주셨어요. 그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라는 짧은 이름입니다. 하지만 이 예수라는 이름의 힘이 어떻습니까.

사도행전 4장 11절~12절
11.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あなたがた家を建てる者たちに捨てられた石、それが要の石となった』というのは、この方のことです。
この方以外には、だれによっても救いはありません。天の下でこの御名のほかに、私たちが救われるべき名は人間に与えられていないからです。」


우리는 이 짧은 이름,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3절~14절
“13.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またわたしは、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求めることは、何でもそれをしてあげます。父が子によって栄光をお受けになるためです。
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何かをわたしに求めるなら、わたしがそれをしてあげます。

요한복음 16장 23절~24절
“23.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その日には、あなたがたはわたしに何も尋ねません。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わたしの名によって父に求めるものは何でも、父はあなたがたに与えてくださいます。
今まで、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名によって何も求めたことがありません。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受けます。あなたがたの喜 びが満ちあふれ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이제 양이나 소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복잡한 자격이나 절차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그 짧은 이름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면 모든 일들이 가능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모든 기도가 응답 받을 수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 예수님이 어떤 하나님이시라고요? 그렇습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와 함께 해주십니까. 그 이유는 간단하지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채찍에 맞아주시고, 우리를 위해 가시관을 써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주시고,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주시고, 우리를 위해 죽어주시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셔서 우리를 위해 하늘로 올라가주신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1서 4장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第一ヨハネの手紙
私たちは愛しています。神がまず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

이처럼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한국이나 일본을 보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알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토정비결을 보고 일본에서는 오미쿠지를 뽑습니다. 그것도 꽤 비싸지요.


여러분께서도 새해를 맞이해서 2019년이 궁금하십니까? 올 한 해가 여러분에게 있어서 어떻게 되실지 궁금하십니까? 좋습니다. 제가 봐드리겠습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올 한 해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축복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 안 하시면 멸망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시련처럼 보여도 그것은 축복으로 가는 길이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축복처럼 보이는 길도 시련이요 멸망으로 가는 길인 것입니다.

멀리까지 가서 우상들한테 절을 할 필요가 무엇이 있습니까. 비싼 돈 내고 토정비결이다 오미쿠지다 하는 것을 뽑을 필요가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안 하시면 멸망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진정하고도 영원한 진리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은 명령하시는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 무서운 하나님이셨다고 한다면, 신약에서의 하나님,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지금 이 시대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언제나 만날 수 있는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제 한 해가 밝았습니다. 올 한 해도 수많은 기쁨과 웃음과 즐거움과 반가움이 있겠지만, 때로는 슬픔과 눈물과 어려움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아무리 슬픔과 눈물과 어려운 일이 닥친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심을 받는 우리에게는 이 모든 일에 결국은 마침내 큰 축복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올 한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30배 60배 100배의 놀라운 축복, 누르고 흔들어 넘치는 축복을 모두 받은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162회 부족한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

← 제160회 평강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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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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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회 평강을 위하여
2018년 12월 30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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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7장 3절~4절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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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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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평강을 위하여” 平安のために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올 한 해 마지막 주일예배입니다. 이렇게 귀한 시간에 이처럼 함께 하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참 감사한 일이지요. 여러분께서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드시나요? 예, 아직도 잘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분들이 계시다면 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올 한해 어떠셨습니까. 일본의 공익재단법인 <일본한자능력검정협회> 에서는 매년 12월에 “올해의 한자(今年の漢字)”라고 해서 일반인들로부터의 모집을 통해 그 해 1년을 나타내는 한자 한 글자를 선정해서 발표합니다. 여러분께서도 텔레비전에서 보신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쿄토 키요미즈데라에서 붓글씨로 크게 한 글자를 쓰는 장면이 꽤 유명합니다.

지난 12월 12일에 발표된 내용에 의하면 올해의 한자는 총 응모수 193,214표 중에서 2만표 정도를 차지한 “재앙 재”자가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4월 9일 밤에 시마네 현에서 발생한 시마네현 서부지진.

6월 18일 아침에 오오사카에서 발생하여 사망자 6명, 부상자 443명이 발생한 “오오사카북부지진”

9월 6일 새벽 일본 홋카이도에서 발생하여 사망자 41명, 부상자 749명이 발생한 “홋카이도 이부리 동부지진”

그리고 지진만이 아니지요. 지난 7월에는 일본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기록적인 폭우가 내려서 총 사망자 227명, 부상자 421명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태풍 21호, 24호가 정통으로 일본 상륙을 지나가기도 했고, 예년에 비해 일찍 끝난 장마 때문에 말도 못할 정도로 심한 폭염에 시달렸습니다.

우리 교회가 있는 군마현은 그래도 자연재해가 적은 지역이라서 감각이 좀 무뎌졌을지는 모르지만 이처럼 올 한 해 동안 수많은 재난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어디 일본만 그런가요.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해가 시작되자마자 1월 26일에는 밀양시에 있는 세종병원에서 발생한 화재로 51명이 사망하고 141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7월 22일 서울 기온은 38도, 24일 경북 영천은 40.2도를 기록했습니다.

7호 태풍 쁘라삐룬으로 인한 피해도 심각했습니다. 고급외제승용차가 여기저기서 터지기도 했지요. 11월 9일에 일어났던 종로 고시원 화재, 12월 18일에 강릉에서 일어난 고등학생 일산화탄소 중독 사건은 아직도 우리 기억에 생생합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지금 되돌아보면 이 외에도 수많은 재난이 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서 2018년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이제 좀 와 닿으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떠십니까. 한 해를 되돌아보면서 자신의 2018년을 한자 한 글자로 나타낸다면 어떤 글자를 쓰시겠습니까.

만약에 누가 제게 이런 질문을 묻는다면, 저는 망설임 없이 <기다릴 대(待)>자를 쓰겠습니다. 가끔 라디오나 텔레비전 등을 보면 “참 올해는 빨리 지나갔어요”라고 하는 분들이 계신데, 저는 그런 분들을 보면 몰래 가서 살짝 꼬집어주고 싶습니다. ㅎㅎ

올 해는 참 많이 기다리는 한 해였던 것 같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안 갔는지 몰라요. 무엇을 기다렸냐 하면 바로 입관, 입국관리국으로부터의 소식을 기다렸습니다.

올해만 보더라도 입국 관리국에 몇 번이나 갔는지 모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1년 동안에 대략 6번은 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3번은 동경까지 갔었던 것 같습니다. 동경에 한 번 가면 고속도로비를 좀 아껴본다고 밑으로 가니까 편도 3시간, 왕복 6시간이 걸립니다.

비자 문제 때문에 왔다갔다 해야 했기 때문에 올 한 해만 하더라도 저희 아내를 공항에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하기 위해서도 나리타에 4번 갔다 왔습니다. 나리타공항 까지도 일반도로로 편도 3~4시간 정도 걸리고 하니, 올해는 정말 장거리 운전도 꽤 많이 한 것 같습니다.

입관에 한 번 신청을 해놓으면 결과가 나오기까지 보통 2~3개월이 걸립니다. 거기다가 그 중에서 또 몇 개월은 저는 저대로 일본에서, 제 집사람은 한국에 있으면서 언제 올지도 모르는 소식을 하루하루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것 참 힘들더라구요. 집에서 일을 하다가 창 밖에서 우체부 아저씨 오토바이 소리만 나면 기가 쫑긋 세워집니다. 그렇게 헤어져서 기다린 기간만 해도 결국 4개월이었습니다. 그러니 같이 살면서 기다린 기간과 헤어져서 기다린 기간을 합치면 거의 1년 내내 기다린 꼴이 되어버렸지요.

8월에 헤어질 때에는 그래도 빨리 일이 해결되면 어쩌면 2~3주 만에 다시 만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여름이 가기 전에 오게 되면 여기저기서 열리는 불꽃놀이를 볼 수 있겠구나 했습니다. 그런데 8월이 다 가도록 연락이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9월에 오면 단풍구경을 같이 갈 수 있겠구나 했는데, 아무런 소식도 없습니다.

그래서 또 10월이 되면 코스모스를 같이 보러 갈 수 있겠구나……했는데 역시 안 옵니다.

그래서 10월 하순에는 군마현민의 날이 있는데, 그 때는 여기저기서 이벤트도 하고 그러니까 같이 갈 수 있겠구나 했는데, 아직도 감감 무소식이에요.

그래서 또 11월에는 대학축제가 한창인데, 오면 같이 구경갈 수 있겠구나 했는데, 역시 아무런 소식도 없습니다. 우체부 아저씨는 오늘도 저희 집 앞을 지나만 갑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이제 연말이라도 같이 보낼 수 있으면 좋겠는데……라는 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이런저런 문제들이 무사히 해결되었기에 망정이지 만약에 제 비자문제도 해결이 안 되었거나, 아니면 저희 집사람 비자가 안 나왔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니, 지금도 자다 생각해도 참 아찔합니다. 정말 막막한 상황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사실 일본이 물론 이와 같은 절차 같은 것이 까다로운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렇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은 아닙니다. 규정에 맞게 하나하나 하면 문제 없이 해결 됩니다. 저도 처음에 신청할 때에는 3년짜리 비자가 나왔거든요. 하지만 무엇이 문제였냐 하면 바로 여기에 사람의 생각이 개입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목회가 어렵고 교회 상황이 어려운데 어떻게 해야겠어요. 그래서 사람의 생각대로 이렇게 저렇게 해보았습니다만, 그러다 보니 아니나 다를까 일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그 때까지 잘 풀리던 일들이 잘 안되게 되요. 만약에 정말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 일만 해왔다면 올 한 해를 이렇게 <기다릴 대>, 우체부 아저씨 오토아비 소리에 예민해지거나 신혼 몇 개월 만에 떨어져서 살거나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의 생각이 개입하기 시작하면, 내 생각에는 훨씬 더 잘 될 줄 알았는데, 어쩌면 이게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럴 줄 알았는데, 점점 조금씩 하나하나 걸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어느 한 곳에서 딱 막히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생각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상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우상의 정의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14장 9절
“네 이전 사람들보다도 더 악을 행하고 가서 너를 위하여 다른 신을 만들며 우상을 부어 만들어 나를 노엽게 하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도다”

第一列王記
ところがあなたは、これまでのだれよりも悪いことをした。行って自分のためにほかの神々や鋳物(いもの)の像を造り、わたしの怒りを引き起こし、わたしをあなたのうしろに捨て去った。

시편 115편 4절~7절
4.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5.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6.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7.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彼らの偶像は銀や金。人の手のわざにすぎない。
口があっても語れず目があっても見えない。
耳があっても聞こえず鼻があっても嗅げない。
手があってもさわれず足があっても歩けない。喉があっても声をたてることができない。

이사야 2장 8절~9절
8.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경배하여
9.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イザヤ書
その地は偽りの神々で満ち、彼らは自分の手で造った物を、指で造った物を拝んでいます。
こうして人間はかがめられ、人は低くされます。彼らを赦さないでください。

자고로 우상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를 위하여 자기들의 손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출애굽기 20장 4절~6절
4.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あなたは自分のために偶像を造ってはならない。上の天にあるものでも、下の地にあるものでも、地の下の水の中にあるものでも、いかなる形をも造ってはならない。
それらを拝んではならない。それらに仕え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神、主であるわたしは、ねたみの神。わたしを憎む者には父の咎を子に報い、三代、四代にまで及ぼし、
わたしを愛し、わたしの命令を守る者には、恵みを千代にまで施すからである。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형상이든지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고 거기에 절하지 말고 그것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だれも二人の主人に仕えることはできません。一方を憎んで他方を愛することになるか、一方を重んじて他方を軽んじることになります。あなたがたは神と富とに仕えることはできません。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비교하셨습니다만,, 이는 단순히 하나님과 돈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좀 쉽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이 많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 이렇게 질문을 드리면 현명하신 여러분께서는 “하나님도 잘 섬기고 재물도 많으면 더욱 행복하다”라고 말씀을 하시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생각이요, 재물은 육신의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가진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섬긴다> 즉 <귀하게 여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재물, 영적인 생각과 육신의 생각을 동등하게 귀하게 여길 수는 없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로마서도 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 5절~6절
“5.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肉に従う者は肉に属することを考えますが、御霊に従う者は御霊に属することを考えます。
肉の思いは死ですが、御霊の思いはいのちと平安です。

로마서 8장 8절
“8.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肉のうちにある者は神を喜ばせることができません。

사람들은 우상을 섬긴다는 것에 대해서 무슨 사람이나 이상한 것을 세워 놓고 거기에 절을 하는 것만을 우상숭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우상숭배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왜 우상숭배가 죄가 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내가 내 생각대로 내 방식대로 행하려고 하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 우상숭배의 시작은 어디냐 하면 바로 에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善悪の知識の木)에 대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창세기 2장 16절~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神である主は人に命じられた。「あなたは園のどの木からでも思いのまま食べてよい。
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木から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그런데 하와는 어땠습니까.

창세기 3장 6절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そこで、女が見ると、その木は食べるのに良さそうで、目に慕わしく、またその木は賢くしてくれそうで好ましかった。それで、女はその実を取 って食べ、ともにいた夫にも与えたので、夫も食べた。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마! 먹으면 죽어!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생각, 영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하와는 어땠습니까. 먹음지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게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생각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아무리 내 생각에, 내 지식과 경험으로 판단하기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한 방법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하지마! 그 길로 가면 죽어! 라고 하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있을 것 같으신가요? 이는 영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을 겸하여 섬길 수 있다는 것이요, 더 쉬운 말로 한다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킨다고 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섬긴다고 하면서 한 쪽으로는 허고헌날 선악과를 우걱우걱 따먹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사람의 생각에 사로잡혀서 사람의 방법대로 하려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철저하게 훈련을 시키십니다.

오늘 말씀이 있는 사무엘상 7장에서도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의 명령이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무엘상 7장 3절~4절
“3.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4.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サムエルはイスラエルの全家に言った。「もしあなたがたが、心のすべてをもって主に立ち返るなら、あなたがたの間から異国の神々やアシュタロテを取 り除きなさい。そして心を主に向け、主にのみ仕えなさい。そうすれば、主はあなたがたをペリシテ人の手から救い出してくださいます。」
イスラエル人は、バアルやアシュタロテの神々を取り除き、主にのみ仕えた。

그랬더니 어떻게 됐다고 합니까.


사무엘상 7장 9절
“9.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サムエルは、乳離れしていない子羊一匹を取り、焼き尽くす全焼のささげ物として主に献げた。サムエルはイスラエルのために主に叫 んだ。すると主は彼に答えられた。

여기서의 어린 양이 무엇을 뜻합니까.

요한복음 1장 29절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その翌日、ヨハネは自分の方にイエスが来られるのを見て言った。「見よ、世の罪を取り除く神の子羊。

그렇습니다. 어린 양은 바로 우리의 구주 예수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우상을 헐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희생이 되어주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을 통해서만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우상은 다름 아닌 내 생각,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세우려고 하는 내 방법, 내 지식, 내 경험인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なぜなら私は、あなたがたの間で、イエス・キリスト、しかも十字架につけられたキリストのほかには、何も知るまいと決心していたからです。

이는 바울이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당시 바울은 누구보다도 많은 지식과 학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지식이나 학식이나 경험, 내 마음 속에 있는 우상들을 헐어버리고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세우겠다고 하는 바울의 강력한 고백인 것입니다.

요즘도 우체부 아저씨의 오토바이 소리를 들으면, 그런 참 많은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저 오토바이 소리. 그리고 기쁜 소식을 가져다 준 저 오토아비 소리를 들으면 참 반갑게 들립니다. 하지만 반면에, 내가 온전히 순종하지 못해서, 내 생각을 앞세웠기 때문에 1년 내내 우체부 아저씨 오토바이 소리만을 기다려야 했던 지난날을 떠올리면서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その日、すなわち週の初めの日の夕方、弟子たちがいたところでは、ユダヤ人を恐れて戸に鍵がかけられていた。すると、イエスが来 て彼らの真ん中に立ち、こう言われた。「平安があなたがたにあるように。」

올 한해 많은 재난이 있었고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미 적힌 올해의 한자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 내년의 한자는 바꿀 수가 있습니다.

올해의 한자 1위가 <재앙 재>였다고 하는데, 2위는 <평평할 평>자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평창 올림픽의 <평>, 그리고 일본 현재 연호인 헤이세이가 이제 올해로 마지막이 될 테니 그 헤이세이의 <평>, 마지막으로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이 성사되어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고 해서 평화의 <평>이었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의 새해 2019년의 한자는 평강과 평안(平隠と平安)을 누리는 <평>이 되어야 하지 않을 까 합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님만을 신뢰하여 평강과 평안을 누리고 주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은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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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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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9회 사랑의 시작
2018년 12월 2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1절~35절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사랑의 시작” 愛の始まり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일본에서의 성탄절, 크리스마스라고 하면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가져다 주는 날, 연인들과 데이트를 즐기는 날, 친한 사람들과 선물을 주고 받는 날, 화려하게 장식된 조명과 트리, 연말 세일이 한창인 백화점에서의 쇼핑……그와 갈은 풍경이 있습니다. 이는 한국에서도 비슷하지요.

하지만 일본 특유의 모습도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치킨을 먹는다는 것이지요. 혹시 오늘은 23일이지만 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에 보면 KFC 같은 일본 치킨 집 앞에는 줄을 서기도 한다고 합니다.

두 번째로는 베토벤 교향곡 제9번 콘서트가 여기저기서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山下達郎의 “크리스마스 이브”, 그리고 ユーミン 松任谷由実의 “恋人はサンタクロース”가 거리 여기저기에서 울려퍼집니다. 제가 얼마 전에 차를 타고 어디를 갔다 올 일이 있었는데, 라디오에서 가는 길에 이 恋人はサンタクロース가 나오더니, 오는 길에도 똑같이 이 노래가 나오더라구요.

이처럼 일본에는 일본 특유의 성탄절이 있습니다. 이와 갈은 모습은 일본만이 아니라 한국도 있을 것을 것입니다.

한국이나 일본 같은 북반구는 성탄절이 있는 12월이 겨울이지만 호주나 남미 같은 남반구에서는 지금이 여름입니다. 얼마 전 브라질 사람이 쓴 글을 보았는데, 이 분의 글에 의하면 브라질에서는 더운 날씨 때문에 대부분의 가족들은 크리스마스를 해변에서 일광욕을 하고 물놀이를 하면서 보낸다고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탄절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이처럼 각 나라마다 달라지고 있는 성탄절이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끼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날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을 꼭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두 번째의 공통점이 문제입니다. 이는 바로 크리스마스에서 예수님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있건 없건, 예수님에 대해서 알건 모르건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끼리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면 되지 않냐 할지 모르지만, 사실 이는 대단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크리스마스에 아무리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하더라도 거기에 예수님이 안 계시다면 이는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고 저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옳지 않다거나 잘못되었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굳이 위험하다고 말씀 드리는 그 이유에 대해서 오늘은 먼저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로 쉬운 질문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천 년 전에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그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요한복음 3장 14절~16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16절
“14.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モーセが荒野で蛇を上げたように、人の子も上げら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それは、信じる者がみな、人の子にあって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す。」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一人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광야로 나왔을 때, 그들이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보내셔서 백성들을 상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모두가 죽도록 내버려둔 것이 아니었지요.

민수기 21장 7절~9절을 보겠습니다.

민수기 21장 7절~9절
“7.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民はモーセのところに来て言った。「私たちは主とあなたを非難したりして、罪を犯しました。どうか、蛇を私たちから取 り去ってくださるよう主に祈ってください。」モーセは民のために祈った。
すると主はモーセに言われた。「あなたは燃える蛇を作り、それを旗ざおの上に付けよ。かまれた者はみな、それを仰ぎ見れば生きる。」
モーセは一つの青銅の蛇を作り、それを旗ざおの上に付けた。蛇が人をかんでも、その人が青銅の蛇を仰ぎ見ると生きた。

이렇게 해서 장대 위에 높이 올린 뱀을 쳐다보았더니 불뱀에 물린 자들이 모두 나음을 입고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대 위에 올려졌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신명기 21장 23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즉, 장대 위에 불뱀을 매달았다는 것은 질병의 근원인 불뱀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불뱀으로 인한 모든 질병이 나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떠실까요.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십자가가 바로 장대인 것이지요. 그러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나요? 만약에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실 이유가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第一ペテロの手紙
キリストは自ら十字架の上で、私たちの罪をその身に負われた。それは、私たちが罪を離れ、義のために生きるため。その打ち傷のゆえに、あなたがたは癒やされた。

빌립보서 2장 6절~11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ピリピ人への手紙 2章6節~11節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それゆえ神は、この方を高く上げて、すべての名にまさる名を与えられました。
それは、イエスの名によって、天にあるもの、地にあるもの、地の下にあるもののすべてが膝をかがめ、
すべての舌が「イエス・キリストは主です」と告白して、父なる神に栄光を帰するためです。

누구는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합니다. 누구는 예수님이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서 하나님의 아들로 뽑혔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분들께는 조용히 이렇게 말씀을 드려야겠지요. 성경을 좀 읽어보세요.

성경에는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나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본체라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하나님, 동일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약 700년 전에 이미 이사야 선지자에 의해 이 일은 예언 되었습니다.


이사야 53장 4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イザヤ書 53장 4절
まことに、彼は私たちの病を負い、私たちの痛みを担った。それなのに、私たちは思った。神に罰せられ、打たれ、苦しめられたのだと。

예수님은 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모두 짊어지셨기에 예수님은 철저한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한 두 사람의 죄도 아니고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는데 그 죄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우셨겠습니까.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던 불뱀이 장대에 높이 올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올려본 사람들은 그 질병의 원흉인 불뱀으로 말미암은 질병이 모두 나아서 살아난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장대 위에 높이 올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십자가를 올려다본 사람들은 우리를 괴롭히던 죄악의 근본이 해결되었다는 것을 믿기에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영광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야말로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로마서 5장 7절~8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5장 7절~8절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正しい人のためであっても、死ぬ人はほとんどいません。善良な人のためなら、進んで死ぬ人がいるかもしれません。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의인을 위하여 죽는다면 그 죽음은 그래도 어느 정도 가치가 있겠지요. 예를 들어서 나라를 위해 민족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면 그 사람은 위인으로 추앙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죄인을 위해서 대신 죽는 사람이 어디 있냐는 것이지요.

생각해보십시오.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은 흉악범, 정말로 용서 받을 수 없는 흉악범을 한 번 머리 속에 떠올려보십시오. 한국이나 일본에도 얼마나 나쁜 사람들이 많았습니까.

자, 떠올리셨나요?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떠올린 그 나쁜 사람이 사형판결을 받았습니다. 이는 지당한 판결이에요. 누가 보더라도 그 사람은 사형판결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 사형판결을 내린 판사가 이상한 말을 해요. 만약에 이 중에서 이 사람을 대신해서 사형을 당하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사형시키고 이 사람을 풀어주겠다……물론 현행법에서 이런 제도는 허용되지 않습니다만, 만약에 이런 일이 허용되었다고 한다면, 여러분께서는 여러분 머리 속에 떠올린 그 사람을 대신해서 형벌을 받으시겠습니까?

말이 되나요? 예, 말이 안 되죠. 만약에 누군가가 그랬다면 그건 뭐예요? 그야말로 한 낯 가치 없는 죽음. 좀 험한 말로 말하자면 개죽음일 수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분이 계셨습니다. 누구세요? 예,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로부터 죽어 마땅하다고 여겨진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나 자신인 것입니다. 떳떳하십니까? 죄가 없으십니까? 이는 정말로 운이 좋아서. 아니, 하나님의 은혜로 안 들켰을 뿐입니다. 아니면 너무나도 뻔뻔해서 모르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이지 이미 죄악이라는 이름의 불뱀에 여기저기를 물려 뜯겨서 이미 만신창이입니다. 이미 온몸에 불뱀들의 이빨자국이 가득해요. 어쩌면 좀 끔찍한 얘기이지만 아직도 불뱀이 내 온몸 여기저기에 매달려있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내 손이 죄악이라는 이름의 피에 범벅이 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뭐래요? 괜찮대요. 나는 죄가 없대요. 나는 안 죽는대요. 깨끗하대요. 만약에 그런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이요, 딱한 사람이겠습니까. 그렇게 흉악한 죄를 지어놓고도 태연하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면 얼마나 나쁜 사람입니까. 하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 스스로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우리를 위해서, 그와 같은 우리를 어떻게든 살려보시려고 어떻게 하셨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서 하나님의 모든 저주를 한 몸에 받고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성탄절에는 가까운 사람들끼리 선물을 교환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 또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선물과 뇌물. 무엇이 다릅니까.

그것은 바로 “대가성이 있느냐(見返り)”가 핵심입니다. 대가성이 없으면 선물이지만, 조금이라도 대가성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아무리 선물이라고 우긴다 하더라도 뇌물입니다.

선물은 사랑입니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그 마음은 사랑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내 이득을 위한 대가성 있는 뇌물은 범죄입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것이요, 경우에 따라서는 형사처벌을 받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누가복음 14장 12절~14절
“12.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3.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4.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イエスはまた、ご自分を招いてくれた人にも、こう話された。「昼食や晩餐をふるまうのなら、友人、兄弟、親族、近所 の金持ちなどを呼んではいけません。彼らがあなたを招いて、お返しをすることが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食事のふるまいをするときには、貧しい人たち、からだの不自由な人たち、足の不自由な人たち、目の見えない人たちを招きなさい。
その人たちはお返しができないので、あなたは幸いです。あなたは、義人の復活のときに、お返しを受けるのです。」

이와 같은 말씀을 드리면 간혹 오해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아,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힘들더라도 착하게 살아야 할 필요가 있겠구나.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좀 착하게 마음을 먹고 착하게 살아야 복을 주시는구나……

그래요.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됩니까? 내가 아무리 착하게 살려고 해도, 그렇게 마음을 먹자 말자 누군가가 속을 박박 긁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요?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뭐 어째고 어째?” 라고 화를 내지 않습니까?

우리 생각을 좀 바꿔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착하게 살자는 것이 아니에요. 다음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2장 19절~21절입니다.


로마서 12장 19절~21절
19.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愛する者たち、自分で復讐してはいけません。神の怒りにゆだねなさい。こう書かれているからです。「復讐はわたしのもの。わたしが報復する。」主はそう言われます。
次のようにも書かれています。「もしあなたの敵が飢えているなら食べさせ、渇いているなら飲ませよ。なぜなら、こうしてあなたは彼の頭上に燃える炭火を積むことになるからだ。」
悪に負け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善をもって悪に打ち勝ちなさい。

이 말씀을 보시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한국이나 일본의 옛날 예기를 보면 원수를 갚는다는 것이 무슨 미담으로 여겨지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성경은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원수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 도움을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도 역시 그저 착하게 살라는 그런 윤리적인 말씀인가요? 아닙니다.

내가 내 손으로 원수를 갚지 않더라도 나를 대신해서 원수를 갚을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위에서 누가복음 14장 12절~14절에서의 말씀도 그냥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착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니라, 대가성이 없는 사람, 내가 아무리 그 사람한테 도움을 주더라도 그 사람이 나한테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면, 누가 나한테 갚아주신대요?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갚아주신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더욱 큰 것으로 갚아주신다는 것을 믿은 믿음을 가지라고 성경은 말씀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 귀한 피를 흘려주심으로 인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완전히 해결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일을 해서 그 은혜를 갚을 수가 있을까요. 모세의 율법을 모두 지키면 갚을 수가 있을까요? 아무리 모세의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면서 산다고 해도 100년이 아니라 100만년을 살아도 티끌만큼도 갚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으로부터 보답을 받기 원하셨습니까? 오늘 말씀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오늘 말씀 중 요한복음 13장 32절
“32.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예수님은 우리한테 영광을 받지 않으셔도 하나님께서 영광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같은 말씀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
“12.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ヨハネの黙示録
「見よ、わたしはすぐに来る。それぞれの行いに応じて報いるために、わたしは報いを携えて来る。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억지로(無理やり) 착한 사람으로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갚아주신다고 하신 성경 말씀을 믿는 사람이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 이와 같은 말씀이 있는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어야 할 것은 뇌물이 아닙니다. 선물입니다. 우리가 행해야 할 것은 범죄가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이와 같은 사랑의 언제 시작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해주시기 위해 오신 성탄절에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시작된 오늘 성탄절 예배를 기념하여 이제 바로 오늘 성탄절부터 시작하여 뇌물이 아닌 선물을, 범죄가 아닌 사랑을 베풂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알리고 예수님의 제자 됨을 알리며 온 천하에 예수님을 들어내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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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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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8회 물리쳐야 할 속삭임
2018년 12월 1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19장 6절~7절
"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말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 바 나를 모욕하는 말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한 영을 그의 속에 두어 그로 소문을 듣고 그의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의 본국에서 그에게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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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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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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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물리쳐야 할 속삭임” 退けるべきささやき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금 강대국 앗수르가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이제 앗수르(アッシリア) 왕 산헤립(センナケリブ)의 신하 랍사게(ラブ・シャケ)가 말합니다.

열왕기하 18장 28절~35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열왕기하 18장 28절~35절
“28.랍사게가 드디어 일어서서 유다 말로 크게 소리 질러 불러 이르되 너희는 대왕 앗수르 왕의 말씀을 들으라
29.왕의 말씀이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 그가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내지 못하리라
30.또한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여호와를 의뢰하라 함을 듣지 말라 그가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건지실지라 이 성읍이 앗수르 왕의 손에 함락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할지라도
31.너희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수르 왕의 말씀이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고 너희는 각각 그의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또한 각각 자기의 우물의 물을 마시라
32.내가 장차 와서 너희를 한 지방으로 옮기리니 그 곳은 너희 본토와 같은 지방 곧 곡식과 포도주가 있는 지방이요 떡과 포도원이 있는 지방이요 기름 나는 감람과 꿀이 있는 지방이라 너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히스기야가 너희를 설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하여도 히스기야에게 듣지 말라
33.민족의 신들 중에 어느 한 신이 그의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34.하맛과 아르밧의 신들이 어디 있으며 스발와임과 헤나와 아와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사마리아를 내 손에서 건졌느냐
35.민족의 모든 신들 중에 누가 그의 땅을 내 손에서 건졌기에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하셨느니라”

ラブ・シャケは突っ立って、ユダのことばで大声で叫んで、こう告げた。「大王、アッシリアの王のことばを聞け。
王はこう言っておられる。『ヒゼキヤにごまかされるな。あれは、おまえたちを私の手から救い出すことができないからだ。
ヒゼキヤは、「主が必ずわれわれを救い出してくださる。この都は決してアッシリアの王の手に渡されることはない」と言って、おまえたちに主を信頼させようとするが、そうはさせない。』
ヒゼキヤの言うことを聞くな。アッシリアの王はこう言っておられるからだ。『私と和を結び、私に降伏せよ。そうすれば、おまえたちはみな、自分のぶどうと自分のいちじくを食べ、自分の井戸の水を飲めるようになる。
その後私は来て、おまえたちの国と同じような国におまえたちを連 れて行く。そこは穀物と新しいぶどう酒の地、パンとぶどう畑の地、オリーブの木と蜜の地である。おまえたちが生き延びて死ぬ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ある。たとえヒゼキヤが、「主はわれわれを救い出してくださる」と言って、おまえたちをそそのかしても、ヒゼキヤに聞き従ってはならない。
国々の神々は、それぞれ自分の国をアッシリアの王の手から救い出しただろうか。
ハマテやアルパデの神々は今、どこにいるのか。セファルワイムやヘナやイワの神々はどこにいるのか。彼らはサマリアを私の手から救い出したか。
国々のすべての神々のうち、だれが自分たちの国を私の手から救い出したか。主がエルサレムを私の手から救い出せるとでもいうのか。』」

당시 유다 왕은 히스기야(ヒゼキヤ)였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열왕기하 18장 1절~8절까지를 보겠습니다.

열왕기하 18장 1절~8절
“1.이스라엘의 왕 엘라의 아들 호세아 제삼년에 유다 왕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이 되니
2.그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비요 스가리야의 딸이더라
3.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4.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5.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6.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7.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저가 앗수르 왕을 배반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
8.그가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가사와 그 사방에 이르고 망대에서부터 견고한 성까지 이르렀더라”

イスラエルの王エラの子ホセアの第三年に、ユダの王アハズの子ヒゼキヤが王となった。
彼は二十五歳で王となり、エルサレムで二十九年間、王であった。彼の母の名はアビといい、ゼカリヤの娘であった。
彼は、すべて父祖ダビデが行ったとおりに、主の目にかなうことを行った。
高き所を取 り除き、石の柱を打ち砕き、アシェラ像を切り倒し、モーセが作った青銅の蛇を砕いた。そのころまで、イスラエル人がこれに犠牲を供えていたからである。これはネフシュタンと呼ばれていた。
彼はイスラエルの神、主に信頼していた。彼の後にも前にも、ユダの王たちの中で、彼ほどの者はだれもいなかった。

彼は主に堅くつき従って離れることなく、主がモーセに命じられた命令を守った。
主は彼とともにおられた。彼はどこへ出て行っても成功を収めた。彼はアッシリアの王に反逆し、彼に仕えなかった。
彼はペリシテ人を討ってガザにまで至り、見張りのやぐらから城壁のある町に至るその領土を打ち破った。

이처럼 히스기야(ヒゼキヤ) 왕은 믿음의 왕이요 순종의 왕이었습니다. 25세라고 하는 젊은 나이에 왕이 되긴 하였으나 그는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 정직하게 행하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우상들을 헐어버리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다고 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ヒゼキヤ) 왕과 함께 하셨으며,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다(成功を収めた)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아무리 강한 세력이 공격해오더라도 히스기야 왕은 백성들을 설득합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께서 적들을 물리쳐주신다고 백성들에게 외칩니다.

하지만 그러는 히스기야(ヒゼキヤ)를 비웃듯이 그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앞서 살펴본 말씀 중 열왕기하 18장 31절 전반부
“31.너희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수르 왕의 말씀이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ヒゼキヤの言うことを聞くな。アッシリアの王はこう言っておられるからだ。『私と和を結び、私に降伏せよ。

라고 하는 것입니다. 28절에 보면 크게 소리질러 말을 했다(大声で叫んで)고는 합니다만, 사실 이는 무서운 속삭임인 것입니다.

너희들, 히스기야가 아무리 하나님이 지켜주신다 하더라도 소용없다. 지금까지 너희들도 봤지 않았느냐. 우리 대 앗수르(アッシリア) 산헤립(センナケリブ) 왕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 있었던 신이 어디 있었느냐. 아무리 많은 신을 믿었던 나라들도 우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너희들도 괜한 고집 부리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지 말아라. 하나님의 사람 히스기야 왕을 믿지 말아라. 너희들 거기 그대로 있으면 죽는다. 차라리 너희 하나님을 버리고, 너희 왕을 버리고, 너희 나라를 버리고 항복한다면 살려주겠다.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달콤하면서도 무서운 유혹입니까.

이와 같은 유혹은 성경 여러 곳에 나옵니다.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이제 공격하려고 할 때,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온 무리들 12명 중 10명이 뭐라고 했습니까.

민수기 13장 31절~33절
“31.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32.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しかし、彼と一緒に上って行った者たちは言った。「あの民のところには攻め上れない。あの民は私たちより強い。」
彼らは偵察して来 た地について、イスラエルの子らに悪く言いふらして言った。「私たちが行き巡って偵察した地は、そこに住む者を食い尽くす地で、そこで見た民はみな、背の高い者たちだ。
私たちは、そこでネフィリムを、ネフィリムの末裔アナク人を見た。私たちの目には自分たちがバッタのように見えたし、彼らの目にもそう見えただろう。」

열 두 명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カレブ)은 지금 당장 가나안 땅에 올라가자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미 10명의 정탐꾼들이 말한 속삭임에 넘어간 그들은 무력했습니다.

제가 왜 굳이 그들의 말들을 속삭임이라고 할까요. 당시 애굽을 탈출한 사람들은 성인 남성만이 60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여성과 어린 아이들을 모두 합친다면 대략 200만 명 정도는 되었을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추정합니다.

지금 그 20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두 의견이 있습니다. 하나는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다. 또 하나는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없다. 이 두 가지입니다.

정복할 수 있다고 하는 쪽은 숫자로만 보면 열두 정탐꾼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이요, 정복할 수 없다고 한 사람들은 나머지 열 명이었습니다. 숫자로 보면 못한다. 정복할 수 없다고 하는 쪽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정탐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여호수아와 갈렙 뿐인가요? 아니요. 하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복적으로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10명, 200만 명 중에서 10명이면 몇 분의 일입니까.

20만분의 1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것입니다. 20만분의 1의 목소리……이는 완전히 속삭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저버리고 그와 같은 부정적인 속삭임에 사로잡혀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입성은 40년이나 늦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는 40년 늦게 들어갔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20만분의 1의 속삭임에 순종한 그들은 가나안 땅에 영원히 들어가지 못한 채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광야에서 죽어갔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속삭임의 원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에덴에서 있었습니다. 사탄은 하와에게 속삭입니다.

창세기 3장 1절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さて蛇は、神である主が造られた野の生き物のうちで、ほかのどれよりも賢かった。蛇は女に言った。「園の木のどれからも食べてはならないと、神は本当に言われたのですか。」

성경은 뱀을 가리켜 간교하다고 했습니다. 먼저 오늘의 문제를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쪽은 사탄일까요, 아니면 사람들일까요.

여기에 대해서 100%까지라고는 말씀 드리기 어렵습니다만, 대체적으로 보면 사탄이 우리 인간들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못 알아봤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은 어땠습니까. 예수님을 알아봤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시험하실 때, 사탄은 무엇을 근거로 삼았는가 하면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 예수님을 실족하려 하기도 했습니다.

그와 같은 사탄이 하나님의 명령, 그러니까 창세기 2장 17절에서 아담에게 하신 명령,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木から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와에게 이런 질문을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요? 아니요. 목적은 단 하나. 하와를 타락시키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너무나도 무서운 마귀 사탄의 속삭임이었던 것입니다.

이 속삭임에 넘어간 하와는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게 됩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남편인 아담까지도 하나님을 배신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하나입니다. 타락이요, 저주요, 불행이요, 실패자, 패배자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왜 이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속삭임을 뿌리치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된다고 하면 안 돼.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물러가라! 라고 하면 되는 것을 자꾸 말을 하게 내버려두니까 결국 거기에 넘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반면 욥은 어땠습니까. 그렇게 많은 재산, 그렇게 많은 자녀들을 가지고 있었으나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날라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욥기 2장 7절~8절을 봅니다.

“7.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8.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サタンは主の前から出て行き、ヨブを足の裏から頭の頂まで、悪性の腫物で打った。
ヨブは土器のかけらを取り、それでからだを引っかいた。彼は灰の中に座っていた。

이제 재산과 자녀들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건강까지도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났는데 그걸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긁고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야말로 남부럽지 않던 삶을 살았던 그가, 아무런 죄 없이 이 지경이 되니 얼마나 어의가 없었겠습니까.

이를 보다 못한 그의 아내가 말합니다.

욥기 2장 9절

“9.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すると、妻が彼に言った。「あなたは、これでもなお、自分の誠実さを堅く保とうとしているのですか。神を呪って死になさい。」

사실 그의 아내가 한 이 말을 가지고 그의 아내를 마치 악처와 같이 말하기도 합니다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정말 너무나도 가엾고 보기 딱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이 좋다고 소문났는데,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았다고 사람들은 부러워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되니 안쓰러운 마음에 그런 말을 했을지도 모르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을 욕해도 될 리야 있겠습니까.

이 속삭임, 어쩌면 정말 하나님을 욕할 수 있는 상황, 이와 같은 속삭임을 욥은 물리쳤습니다.

욥기 2장 10절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しかし、彼は妻に言った。「あなたは、どこかの愚かな女が言うようなことを言っている。私たちは幸いを神から受けるのだから、わざわいも受けるべきではないか。」ヨブはこのすべてのことにおいても、唇によって罪に陥ることはなかった。

그 결과 욥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보게 되는 축복, 진정한 하나님을 알게 되는 축복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빼앗겼던 모든 것들이 회복되는 축복, 그 이전보다도 훨씬 더 부요하게 되는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앗수르의 산헤립(センナケリブ) 왕은 대군을 이끌고 와서 유다 땅을 공격하려 합니다. 하나님을 모욕하고 하나님의 사람 히스기야 왕을 모욕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오늘 구절입니다.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열왕기하 19장 6절~7절
“6.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말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 바 나를 모욕하는 말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7.내가 한 영을 그의 속에 두어 그로 소문을 듣고 그의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의 본국에서 그에게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더라”

イザヤは彼らに言った。「あなたがたの主君にこう言いなさい。『主はこう言われる。あなたが聞いたあのことば、アッシリアの王の若い者たちがわたしをののしった、あのことばを恐れるな。
今、わたしは彼のうちに霊を置く。彼は、あるうわさを聞いて、自分の国に引き揚げる。わたしはその国で彼を剣で倒す。』」


사실 당시 상황으로 보았을 때 이건 말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모든 권력을 손에 넣고 천하를 호령하는 산헤립 왕이 유다 공격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돌아가요?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니라 칼에 맞고 죽어요? 그래. 좋아요. 그러면 그걸 믿을 근거가 어디 있냐 하는 것이지요. 지금 그 나라 앗수르에서 반역에 대한 소문이 있어요? 무슨 징조라도 있나요? 아니요.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근거이고, 무엇이 증거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 말씀입니다.

창세기 1장 7절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神は大空を造り、大空の下にある水と大空の上にある水を分けられた。すると、そのようになった。


창세기 1장 9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神は仰せられた。「天の下の水は一つの所に集まれ。乾いた所が現れよ。」すると、そのようになった。

창세기 1장 15절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また天の大空で光る物となり、地の上を照らすようになれ。」すると、そのようになった。

창세기 1장 24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神は仰せられた。「地は生き物を種類ごとに、家畜や、這うもの、地の獣を種類ごとに生じよ。」すると、そのようになった。

창세기 1장 30절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また、生きるいのちのある、地のすべての獣、空のすべての鳥、地の上を這うすべてのもののために、すべての緑 の草を食物として与える。」すると、そのようになった。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하나님 말씀이신 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국 앗수르 왕 산헤립(センナケリブ)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열왕기하 19장 35절~37절
“35.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36.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37.그가 그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쳐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그들이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その夜、主の使いが出て行き、アッシリアの陣営で十八万五千人を打ち殺した。人々が翌朝早く起きて見ると、なんと、彼らはみな死体となっていた。
アッシリアの王センナケリブは陣をたたんで去り、帰ってニネベに住んだ。
彼が自分の神ニスロクの神殿で拝んでいたとき、その息子たち、アデラメレクとサルエツェルは、剣で彼を打ち殺した。彼らはアララテの地へ逃れ、彼の子エサル・ハドンが代わって王となった。

전쟁터에서 전날에 여호와의 사자가 그 진영의 군사들 185,000명을 다 죽여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어쩔 수 없이 빈손으로 돌아갔더니 거기서 칼에 맞아 죽었다는 것이에요. 말이 안 되지요? 예, 말이 안 됩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실제로 일어나버렸는데 말이에요.

만약에 히스기야(ヒゼキヤ)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안 믿고 앗수르에 항복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는 그의 나라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포로로 끌려가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잘 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우리 하나 살려보려고, 우리 하나 잘 되게 해보시려고, 예수님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우리에게 주셨는데, 우리가 잘 안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전도를 하러 교회 주변을 돌아다니면요, 여기저기서 개가 짖습니다. 그렇다면 전도 하면서 그 개가 짖는 소리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여야 하나요? 아니요. 담대하게 주님께서 인도해주시는 길을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귀가 귀에 대고 속닥속닥 거리면 어떻겠습니까. 상당히 거슬리고 시끄럽게 느껴지겠지요? 일본말로 보면 시끄럽다는 것을 <우루사이>라고 하는데, 그 한자가 참 흥미롭습니다. 한자를 <5월달의 파리>라고 써요. 옛말로 5월이니까 아마도 음력이겠이죠. 그러니까 지금으로 본다면 6월쯤 될 것입니다. 오뉴월의 파리가 얼마나 시끄럽습니까. 하지만, 예를 들어서 올림픽 마라톤을 달리는 선수가 그 파리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는 것 보셨습니까? 그런 쓸데없는 속삭임에 신경 쓰다 보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당당하게 결승점을 향해 질주해야지만 훌륭한 성적을 남길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래야지만 진정한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뉴월의 파리 같은 마귀 사탄들의 속삭임을 모두 물리치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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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7회 우리에게 주신 검
2018년 12월 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4절~38절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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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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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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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에게 주신 검” 私たちに下さった剣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선 오늘 말씀 중에서 우리에게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검>을 주러 오셨다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는 다음 구절로 말씀이 이어집니다.

마태복음 10장 35절~37절
35.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わたしは、人をその父に、娘をその母に、嫁をその姑に逆らわせるために来たのです。
そのようにして家の者たちがその人の敵となるのです。
わたしよりも父や母を愛する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わたしよりも息子や娘を愛する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는 가족 간에 불화를 일으키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 말씀을 두고 많은 사람드은 이렇게 이해해 왔습니다.

“그래. 우리 가족들 중에서 내가 교회 나가는 것을 ○○가 반대하는데, 이와 같은 일은 이미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일이야. 여기서 물러서면 안돼. 아무리 내 가족 중에서 ○○가 반대를 하더라도, 아무리 가족간에 불화가 생긴다 하더라도 난 교회에 나갈 거야. 주님 제게 ○○를 이길 힘과 능력을 줏시옵소서! 주여! 믿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 말씀 적용과 이 기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게 맞은 것일까요?

만약에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 우리 가족에는 불화가 없어요. 아주 화평해요.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뭐라고 되어 있어요? 예수님께서는 화평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오셨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서 가족 간에 불화가 생긴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 가정을 생각해보니까 대단히 화평하고 화목해요. 가족간의 불화가 없어요. 그럼 그런 가정은 뭐예요? 예수님이 임하지 않은 가정이 되고 맙니다. 그러잖아요? 예수님이 임하시면 가족 간의 불화가 생긴다는데, 우리 가족은 불화는커녕 서로 아끼고 존중하고 화목해해요.

아, 이건 내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구나. 주님이 제대로 임하시기 위해서는 가족 간의 불화가 있어야 한다는데, 그럼 오늘 집에 가서 당장이라도 뭔가 트집을 잡아서 불화를 일으켜야겠다…….

제 말이 이상한가요?

예전에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어떤 한 목사님의 설교말씀이 생각납니다. 이 분은 제가 직접 뵌 적은 없고 기독교 방송을 통해서 말씀을 접하고 했는데, 제가 참 존경하는 목사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께서 이제 막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셨을 때라고 해요. 그 때는 정말 믿음으로 충만했던 때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 부모님은 믿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이……당시는 초신자였겠지요? 그래서 이 분께서 가족이 함께 모여서 식사할 때 아버님한테 교회에 한 번 같이 가시자고, 예수님을 믿으시라고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아무리 예수님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전하더라도, 이 아버님께서는 도무지 받아들이지 않으시더래요. 받아들이시기는커녕 기독교를 비판하고 교회를 비판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그러시더랍니다.


그 때 이 분이 생각하셨대요. 아니, 예수님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전하는데, 받아들이지 않아? 이게 하나님이 하는 일이야? 아니면 사탄이 하는 일이야. 이는 틀림없이 사탄의 역사야. 그럼 어떻게 해야 되요? 그렇죠. 물리쳐야죠. 사탄을 당장 물리쳐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한 이 목사님. 어떻게 하셨을까요?

밥 먹는 자리에서 큰 소리로 아버님께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했답니다.

여러분,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좀 상상이 가지 않으세요? ㅎㅎ

이 목사님께서는 그 이후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 더 이상 자세한 말씀은 안 하셨습니다만, 아무튼 몇 개월 동안 대단히 힘들었다고 합니다.

익히 짐작은 되지요. 아무리 믿지 않는 분이라 하더라도 아버님께 자식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했다면 그 가정에 평안이 임하겠습니까.

그런데, 어? 그러면 오늘 말씀에 뭐라고 되어 있었어요?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그 사람이 아버지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아이고,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네요. 할렐루야…….

여러분, 이게 맞는 말씀인가요?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것이 이런 모습이셨을까요?

이런 말씀을 제가 드리면 어떤 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봐. 홍목사. 이건 그런 뜻이 아니라, 말세가 되고 예수님께서 오실 때가 되면 화목한 가정도 이렇게 불화가 일어날 수 있으니까 조심하라는 뜻이야.


아니면, 이 뜻은 가정에 따라서 교회에 나가는 것 때문에 다툼이 생길 수도 있다는 말씀이야.

하지만 이 두 의견 모두에 동의하기는 어렵습니다. 먼저 말세가 되면, 예수님께서 오실 날이 다가오면 화목했던 가정도 불화가 생기기 시작한다는 말씀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가정에 따라서는 이와 같은 문제가 일어날 수 있고, 또는 없을 수도 있다는 말씀도 없습니다. 이는 대단히 보편적인 표현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간관계에 있어서 불화를 원하고 계신 건가요?

성경말씀을 잠시 살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平安を残します。わたしの平安を与えます。わたしは、世が与えるのと同じようには与えません。あなたがたは心を騒がせてはなりません。ひるんではなりません。

마태복음 5장 9절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平和をつくる者は幸いです。その人たちは神の子どもと呼ばれるからです。


히브리서 12장 14절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すべての人との平和を追い求め、また、聖さを追い求めなさい。聖さがなければ、だれも主を見ることができません。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결코 불화를 바라고 계시지 않습니다. 화평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여전히 많은 분들이 신앙의 이름으로, 복음의 이름으로, 전도의 이름으로, 하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불화를 조장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마 지금도 그럴 것입니다. 저도 한국에 있을 때 대형교회에서 섬겼습니다만, 거기 보면 각 지역, 각 구역마다 담당자가 있고, 성도관리를 합니다. 이는 물론 중요한 일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빠지지 않는 것이 실적평가입니다. 그 지역, 그 구역의 성도들이 얼마나 늘었느냐, 얼마나 줄었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성도들이 늘어난 곳은 좋은 평가를 받고, 줄어든 곳은 나쁜 평가를 받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그런 구역이나 지역을 맡은 목사님들이나 전도사님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전도를 합니다. 이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가끔은 너무나도 지나칠 정도로 집요하게 하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면 잡음이 생깁니다.

저도 교회에 다닐 때 보면 전도왕……이라고 해서 상도 주고 그런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많은 사람들을 자기 교회로 출석하게 한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전도왕……거기에다가 <왕>자를 쓰는 게 저는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아무튼 그래서 그 분들이 간증을 하는 것을 들어보면 어떻습니까. 아~ 누구는 몇 번 씩이나 예수님을 전하고 말씀을 전해도 교회에 안 나왔었는데, 자기가 기도하고 열심히 전도를 하니까 마침내 교회에 나왔다……할렐루야!

이런 간증 많이 들어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좋다 이겁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집요하고 진저리 나게 하니까 오히려 지겨워서 안 나오게 된 사람은 어떡하냐는 거죠.

예수도 좋고 성경도 좋고 교회도 좋지만, 예수 믿는 인간들이 지겨워서 교회에 안 나간다…… 지금도 솔직히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면 그 분들이 하는 말씀이 뭡니까.

아~ 성경에 뭐라고 적혀 있냐

디모데후서 4장 2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みことばを宣べ伝えなさい。時が良くても悪くてもしっかりやりなさい。忍耐の限りを尽くし、絶えず教えながら、責め、戒め、また勧めなさい。

봐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고 되어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상대방이 듣기 싫어해도 끈질기게 말씀을 전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한테 강제로 억지로 말씀을 전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베드로도 그렇고 바울도 그렇습니다만, 박해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씀 듣기를 원하지 않은 사람들한테 억지로 말씀을 전하다가 그랬나요? 아닙니다. 말씀을 갈급한 사람들한테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한테 복음을 전했습니다만, 당시 권력자들이나 기득권자들에 의해 박해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또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신 어떤 분은 이 구절을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과부(やもめ)가 재판장한테 끈질기게 가서 말하지 않았느냐

여러분, 이게 맞는 말씀인가요?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이 비유는 무엇입니까. 아무리 옳지 않은 권력자들이라 하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끈질기게 부탁을 하면 들어주는데, 우리가 인내심을 갖고 하나님께 간구하면, 이를 들어주시지 않겠느냐 하는 비유입니다.

성경은 어디를 보더라도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한테 억지로 강제로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일까요? 이제 그 사람은 구원 받을 가능성이 없으니 우리가 무시해도 되는 것인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에스겔 18장 32절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わたしは、だれが死ぬのも喜ばない──神である主のことば──。だから立ち返って、生きよ。」

예수님을 믿지 않지만 악하지 않은 사람만이 아니라, 대단히 악한 자, 정말 인간의 눈으로 보아서 죽어 마땅한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가 죄 가운데에 죽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켜 살 것을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 주님께서 지금 내가 전하는 복음을 거부하고 있는 그 사람을 버리시겠습니까? 아니요. 절대로 안 버리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래도 밤이고 낮이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서 교회에 나오게 만들어요? 아닙니다. 그것은 전도를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사람의 방법으로 하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은 단 하나. 그래. 저 사람도 하나님께서 살기를 원하시는 사람이야. 지금 내가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거야……. 그렇게 믿고 우리는 기회가 될 때마다 마음으로 섬기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마음을 움직이실 것입니다.

예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가족 중에서 교회에 나가지 말래요. 예를 들어서 남편이나 부모님이 매주 내가 교회에 나가는 것을 반대합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가정의 화목이 깨져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요? 그와 같은 가족의 핍박을 무릅쓰고 교회에 나와야 하는 것인가요? 여러분, 가족은 무슨 타도의 대상이나 저항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제안을 합니다. 만약 그런 경우라면 교회에 당분간 나오지 마세요. 나는 교회에 나가고 싶지만, 부모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안 나가겠습니다. 당신이 원하지 않으면 안 나갈게요. 괜찮습니다. 그리고 집에서 기도하고 성경 보고, 인터넷을 통해서 말씀을 듣고 그러십시오.

그러면 우선 가정이 편안해집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억지로 내가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기도하고 우리의 모습,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예수님을 믿는 마음을 보여주십시오. 그리고 마음껏 그 사람을 섬겨보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그 마음의 닫힌 문을 열어주십니다. 그러면 그 때 함께 믿음 생활을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으로 돌아와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의 불화를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는 바로 다름 아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가치관의 파괴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질서 중 핵심은 가족 내에 있었습니다. 상하관계, 우선순위, 이는 가족에서 시작하고 가족이 그 근본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이것이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우리의 가치관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가치관은 비단 가족관계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가치관, 전통, 습관을 돌이켜보면 믿음 안에서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모릅니다.

얼마 전에 인터넷에 보니까 성경에 대해서 누가 말하면서, 21세기 첨단과학 시대에 아직도 성경을 믿고 있냐는 식의 글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21세기 첨단과학 시대 때 우리 인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한국에서는 여전히 돼지머리 앞에 놓고 절을 합니다. 예전에 보니까 제 첫 직장이 IT관련 회사였는데, 거기서 회사 차를 하나 구입했는데, 역시 고사를 지내더라구요. 그래서 왜 이런 걸 하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하면 사고가 안 난대요.

고인이 돌아가신 날 제사를 지냅니다. 명절 때 차례를 지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영이 와서 차려놓은 음식을 맛있게 먹고 간데요.

일본도 보면 오봉 때 그런다고 하지요. 그리고 또 뻑 하면 신사에 가서 참배를 합니다. 거기 가서 참배를 하면 거기 신이 나를 도와주어서 시험에 합격할 수 있대요. 취직할 수 있대요.

돈을 내고 부적을 사면 교통사고가 안 일어난대요.

이게 지금 21세기 첨단과학 시대 때의 한국과 일본 모습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그 동안 당연시했던 가치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1517년 종교혁명으로 태어난 기독교 정신이 무엇입니다. 프로테스탄트, 저항정신입니다. 이는 상당히 진보적인 정신, 그 당시까지 당연시되어 왔던 구태의연하고 비신앙적인 모든 것을 거부하고 오직 말씀에 순종하려는 정신이 바로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의 정신인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기독교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오히려 종교혁명 이전보다도 변화를 거부합니다. 사람의 머리로 만들어낸 전통으로 말씀을 능가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 중에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 わたしよりも父や母を愛する者、わたしよりも息子や娘を愛する者 인 것입니다. 믿음의 우선순위, 말씀의 우선순위보다도 우리 머리 안에 있는 인간적인 우선순위와 세상적인 우선순위를 앞세우는 것입니다.

정답은 우리 머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안에 있습니다. 말씀 안에 있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불화는 가족 간이나 이웃 간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리 속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반대되는 생각, 믿음과 반대되는 전통과 우선순위를 깨야 하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 38절을 봅니다

마태복음 10장 38절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自分の十字架を負ってわたしに従って来ない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의 문제 나갑니다. 믿음 안에서 누군가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힘든 일, 대단히 귀찮은 일, 대단히 하기 싫은 일……누가 먼저 해야겠습니까. 1번 내가. 2번 니가.

그렇습니다. “힘든 일은 니가 해야 한다”는 낡은 전통을 깨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야 말로 가족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첫 시작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미움을 받아 마땅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저주 받아 마땅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주신 검으로 말미암아 우리 머리 속에 있는 잘못된 생각들, 잘못된 우선순위들을 모두 깨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족을 섬기고 이웃과 화목하여 섬길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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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6회 그래도 돌을 던지시겠습니까
2018년 12월 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2절~11절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그래도 돌을 던지시겠습니까” それでも石を投げますか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아침에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백성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계실 때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한 여자를 끌고 와서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큰 소리로 예수님께 말합니다.

이보시오, 이 여인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소. 모세는 돌로 치라고 명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이와 같은 자세는 예수님께 지혜를 구하거나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 중에서 6절에 보면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彼らはイエスを告発する理由を得ようと、イエスを試みてこう言ったのであった。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뜻을 살펴보기 전에 우선 이 질문을 던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당시에 그들은 이른바 기득권 세력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그리고 종교적인 지위가 확고해서,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왔던, 이른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나이 서른 갓 넘은 젊은이가 나타나더니만 자신들과 조금 다른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소문에 의하면 앞을 못 보는 사람들을 보게 하고, 걷지 못하는 사람들을 걷게 할 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들까지도 살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젊은이를 따르기 시작합니다.


문제의 심각성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 젊은이가 이제 자신들까지 비판합니다. 이렇게 되니 기득권 세력이었던 바리새인들, 제사장들, 서기관들의 체면이 위태롭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자기들의 말에 아무도 귀를 기울여주지 않아요. 이는 상당한 위기 의식을 느끼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 하면 기회가 될 때마다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시험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트집을 잡아서 함정에 빠뜨릴 궁리를 했던 것입니다. 그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어떤 질문을 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 21장 23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それからイエスが宮に入って教えておられると、祭司長たちや民の長老たちがイエスのもとに来 て言った。「何の権威によって、これらのことをしているのですか。だれがあなたにその権威を授けたのですか。」

예수님께서는 지금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분명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시점에 이른바 기득권 세력인 사람들이 나타나서 예수님한테 말하기를,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이렇게 사람들한테 가르치느냐……하고 질문을 합니다. 이는 자신이 어떠한 지혜나 도움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공격하는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이 질문에 대해서,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받았다……이렇게 말씀을 하셨다면 이는 신성모독이라고, 하나님을 모욕한다고 외쳤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사람으로부터 받았다고 하셨다면 어떻게 말했을까요. 만약에 그러셨다면 그들은, 그러면 당신한테 그런 자격을 준 사람이 누구냐.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누구 밑에서 배웠느냐, 어느 학교 나왔느냐, 뭐 이런 식이었겠지요.

당연한 말입니다만, 이 땅에서 누가 예수님께 권위를 드렸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누구 밑에서 성경을 공부한 것도 아니요, 신학교를 나온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대답하면 그들이 뭐라고 했겠습니까. 아~ 제대로 학교도 나오지 못했으면서,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으면서, 성경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사기를 친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이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반문을 하십니다.

이후 24절~27절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1장 24절~27절
“2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25.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26.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27.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わたしも一言尋 ねましょう。それにあなたがたが答えるなら、わたしも、何の権威によってこれらのことをしているのか言いましょう。
ヨハネのバプテスマは、どこから来たものですか。天からですか、それとも人からですか。」すると彼らは論 じ合った。「もし天からと言えば、それならなぜヨハネを信じなかったのかと言うだろう。
だが、もし人から出たと言えば、群衆が怖い。彼らはみなヨハネを預言者と思っているのだから。」
そこで彼らはイエスに「分かりません」と答えた。イエスもまた、彼らにこう言われた。「わたしも、何の権威によってこれらのことをするのか、あなたがたに言いません。

예수님께서는 이러신 것이지요. 내가 그러면 당신들한테 질문을 하겠다. 세례 요한은 누구한테서 권위를 인정 받았다고 생각하느냐.

대다수의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들은 그를 따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백성들이 세례 요한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따랐습니다. 그렇다고 세례 요한이 무슨 신학교를 나왔거나 그런 것도 아니죠.

그런 상황에서 세례 요한은 하늘로부터 권위를 받았다고 대답하면, 너는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받은 세례요한을 왜 안 믿었느냐……하고 물으면 할 말이 없어질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런 권위를 받은 적이 없는 사기꾼이다……이렇게 말했다가는 거기 있던 많은 백성들이 세례 요한을 따랐던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로부터 온갖 비난을 받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결국 그래서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물러갔지요.

그들의 악의적인 질문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바로 다음 장인 마태복음 22장 17절에서는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ですから、どう思われるか、お聞かせください。カエサルに税金を納めることは律法にかなっているでしょうか、いないでしょうか。」

가이사는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의 황제입니다. 로마 황제한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느냐 하는 질문인데, 이도 역시 대단히 위험한 질문이지요.


쉽게 말하자면 일제 시대 때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조선 사람한테 “당신은 일본 천황한테 세금을 바치는 게 옳으냐 옳지 않냐”하고 공개적으로 묻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천황한테 세금을 바칠 필요가 없다”라고 말했다가는 당장 일본 경찰한테 붙잡혀갔겠지요. 그렇다고 “천황한테 세금을 바쳐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조국독립을 염원하는 사람들로부터 저놈은 친일파다, 매국노다 하는 낙인이 찍히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2장 21절 중반부 이후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そのときイエスは言われた。「それなら、カエサルのものはカエサルに、神のものは神に返しなさい。」

너희들이 생각하기에 그 돈이 가이사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가이사한테 바쳐라.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니 역시 그들은 아무런 대답을 못하고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으로 돌아옵니다.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데려왔습니다. 이는 증거도 증인도 필요 없습니다. 현장에서 현행범으로 잡혔는데 무슨 증거나 증인이 필요하겠습니까. 이 여인은 꼼짝없이 아무런 변명도 할 여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그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당신, 율법 좀 알지? 요즘 꽤 뜨는 사람 같은데 말이야. 우리 질문에 대답해보시오. 율법에는 이런 여자, 간음한 여자는 돌로 치라고 되어 있지 않소이까? 자, 그럼 이 여자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이 질문 또한 역시 대단히 위험한 질문,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철저하게 계산된 질문입니다. 그 이유는,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에서는 사형판결을 내릴 권한은 로마한테만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해달라는 판결을 얻어내기 위해 당시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한테 끌고 간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만약에 그 자리에서 <그 여인은 죽여야 한다>라고 했다면 이는 로마의 현행법을 어기는 일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고 그러면 <죽이지 말라>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것 봐라. 하나님을 전한다고 하면서 율법을 어기라고 하지 않느냐 하고 비난을 했겠지요.

즉, 이 질문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시더라도 현행법이나 율법 중 어느 한 쪽을 반드시 어길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이 또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대단히 악의적인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에 계실 때 예수님께서는 허리를 굽히시고 땅에 무언가를 적으셨습니다. 그 때 무엇을 적었는지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합니다만, 다 믿을 수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적으셨는지 성경에 안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괜히 성경에 안 적힌 것을 가지고 알려고 애 쓰지 마시고, 적혀 있는 것이나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천국에 갔을 때 예수님께 한 번 여쭤봐야 할 부분입니다. 여러분도 나중에 예수님을 뵈면, 도대체 그 때 무엇을 적으셨냐고 한 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저도 참 궁금합니다만 성경에 없으니 지금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지요.

아무튼 땅에 무엇인가를 적고 있으니까, 답답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 여자를 돌로 쳐야 되냐 어쩌냐 하고 자꾸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오늘 말씀 중 7절 중반부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イエスは身を起こして言われた。「あなたがたの中で罪のない者が、まずこの人に石を投げなさい。」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율법? 그래, 너희들 율법 좋아하지? 그러면 한 번 생각해봐. 너희들 중에서 율법적으로 돌에 맞아 죽을 죄를 하나도 짓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먼저 돌을 던져…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율법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라는 죄목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교도소에 있지 않다고, 우리가 사형판결을 받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는 선한 존재입니까. 의로운 사람인가요? 거룩한 사람입니까?

로마서 3장 10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義人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

야고보서 2장 10절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律法全体を守っても、一つの点で過ちを犯すなら、その人はすべてについて責任を問われるからです。

우리가 아무리 거룩한 척하고 의로운 척을 해 봤자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우리 스스로가 잘 알지 않습니까. 모든 율법 중에서 하나라도 범하면 율법을 모두 범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율법적으로 죽음을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돌을 던집니다.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면서, 율법을 어긴 사람이라면서, 죄를 지은 사람이라면서 돌을 마구마구 던집니다. 여러분, 사람이 부드러운 지우개를 누가 던져서 그걸 맞아도 아픕니다. 하지만 돌멩이를 던져서 맞았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수없이 많은 돌멩이를 맞으면 머리나 얼굴, 온몸이 피범벅이 되어서 쓰러집니다.

올 한해, 어떠셨습니까. 누군가가 던진 돌에 많이 맞으셨습니까. 그래, 내가 여기서도 돌을 맞고 저기서도 돌을 맞았어. 자기들도 잘난 것은 없으면서 정말 이 세상에는 어쩌면 그렇게 나쁜 사람들이 많을까……. 여러분 혹시 그런 생각이 드십니까.

여러분, 왜 맞은 것만을 생각하십니까. 요즘은 한국 군대도 많이 좋아져서 그런 일은 없어졌다고 합니다만, 예전에 보면 군대에서 폭행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당시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 말을 들으면, 아, 나는 누구한테 억울하게 맞았다. 나는 어마어마하게 많이 맞았다는 등, 맨날 맞았다는 이야기밖에 안 합니다. 누군가를 팼다는 말을 거의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럼 도대체 맞은 사람들은 누구한테 맞았다는 것입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만 당하고 사는 것 같으십니까. 나만 돌 맞고, 나만 억울한 일을 겪고 사는 것 같으십니까. 우리는 우리가 맞은 것보다 우리가 던진 돌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따르고 모셨던 이들이 누구입니까. 예, 바로 열 두 사도들입니다. 그런데 결국 그 중에서 누가 예수님을 버렸습니까. 이름 혹시 아십니까? 가룟 유다요?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가복음 14장 50절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皆は、イエスを見捨てて逃げてしまった。

이는 어쩌면 성경에서 가장 슬픈 구절일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皆は、イエスを見捨てて逃げてしまった。

그렇게 자기 생명을 다 바쳐서 예수님을 지키겠다고 했으면서, 그렇게 마지막 때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으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어떻게 했어요? 예,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당시 예수님을 따랐던 열 두 사도들보다도 더 좋다고 장담하실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럴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것도 모르고 돌을 던집니다. 자기가 거룩한 줄 알고 돌을 던집니다. 돌을 맞고 괴로워 몸부림을 치는 모습을 보고 자신은 마치 의로운 일을 하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가 피범벅이 된 얼굴을 듭니다. 그 모습이 누구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피범벅이 된 얼굴을 들며, 돌을 던지는 나를 바라보십니다. 그래도 나는 의롭습니까. 그래도 나는 거룩한가요?

이는 제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과 45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25장 40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すると、王は彼らに答えま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が、これらのわたしの兄弟たち、それも最も小さい者たちの一人にしたことは、わたしにしたのです。』


그리고 마태복음 25장 45절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すると、王は彼らに答えます。『まことに、おまえたちに言う。おまえたちがこの最も小さい者たちの一人にしなかったのは、わたしにしなかったのだ。』

여기서 작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극히 하찮은 사람, 지극히 별볼일 없는 사람, 지극히 거룩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한테 한 것이 누구한테 한 것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예수님한테 한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그만큼 돌을 던졌으면 됐습니다. 이제 그만큼 상처를 입혔으면 됐습니다.

이제 손에 든 돌을 놓고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2장 8절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この知恵を、この世の支配者たちは、だれ一人知りませんでした。もし知っていたら、栄光の主を十字架につけはしなかったでしょう。

우리는 그 누구한테도 돌을 던질 만큼 의로운 이도 없고 거룩한 이도 없습니다. 우리가 돌을 던지면 그 돌을 누가 맞는다고요?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맞으십니다. 이 지혜를 알았더라면 우리는 더 이상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을 것이요, 예수님을 향해 돌을 던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キリスト・イエスにつく者は、自分の肉を、情欲や欲望とともに十字架につけたのです。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もはや私が生きているのではなく、キリストが私のうちに生きておられるのです。今私が肉において生きているいのちは、私を愛し、私のためにご自分を与えてくださった、神の御子に対する信仰によるのです。

이제 우리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예수님께서 부어주시는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화평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157회 우리에게 주신 검 →

← 제155회 죄를 다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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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5회 죄를 다스리라
2018년 11월 2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4장 3절~7절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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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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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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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죄를 다스리라” 罪を治めよ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대단히 충격적인 사건, 대단히 비극적인 사건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름을 붙이자면 아벨 살인사건입니다. 일반적으로 무슨무슨 살인사건이다……라고 하면 범인을 찾는 내용입니다만, 이 사건에서 범인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그의 형, 가인이 범인인 것이지요.

성경에서 이 내용은 너무나도 유명해서 우리에게는 익숙한 부분일 수도 있겠으나, 찬찬히 살펴보면 그 동안 우리가 놓쳤던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오늘은 이 아벨살인사건을 통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큰 은혜를 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형이 아우를 죽인 충격적이거나 비극적인 사건일 뿐만 아니라 대단히 흥미로운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는, 특히 익숙한 내용, 내가 잘 알고 있을 것만 같은 내용일수록 편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성경에 적혀 있는 부분들, 즉 사실관계를 명확히 해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 내용을 보면 오늘 말씀에서 등장인물은 두 명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인과 아벨이지요. 형은 가인이고 동생은 아벨입니다.

자, 그 다음에 창세기 4장 3절~5절 중반까지를 보겠습니다.


창세기 4장 3절~5절 중반까지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しばらく時が過ぎて、カインは大地の実りを主へのささげ物として持って来た。
アベルもまた、自分の羊の初子の中から、肥えたものを持って来た。主はアベルとそのささげ物に目を留められた。
しかし、カインとそのささげ物には目を留められなかった。……

먼저, 사건의 발단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냐 하면, 하나님께서 아벨이 바친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이 바친 제물은 안 받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먼저 이 부분부터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내용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는데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을까……하는 부분에 대해 관심을 갖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다만 신약성경 히브리서 11장 4절에,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信仰によって、アベルはカインよりもすぐれたいけにえを神に献げ、そのいけにえによって、彼が正しい人であることが証しされました。神が、彼のささげ物を良いささげ物だと証しし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彼は死にましたが、その信仰によって今もなお語っています。

라고 적혀 있을 뿐입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이 부분을 들어 많은 주장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는 짐승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는데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바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셨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아벨은 자신이 바칠 제물을 잘 골라서 결정했는데 가인은 대충 그냥 아무거나 바쳤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도 합니다. 아마도 이와 같은 말씀을 들어보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어떻게 되어 있냐 하면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항상 동물로 드려야 한다? 아니요. 율법에 보면 밀가루나 곡물로 드리는 예물도 있습니다. 또한 아벨은 제물을 선별했는데 가인은 선별하지 않고 대충 드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게 어디 적혀있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적혀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자꾸 자기 생각을 억지로 집어넣게 되면 성경에 담긴 본연의 뜻에서 멀어질 수가 있습니다. 이는 대단히 큰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는 왜 그 부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적혀 있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이 엉터리라서요? 아니에요. 그것이 아니라, 이 사건에 있어서 그 부분은 핵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핵심적인 내용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다른 부분을 생략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사건에 있어서 핵심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는 바로 창세기 4장 5절 중반부터 7절까지입니다.


창세기 4장 5절 중반부터 7절까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5.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それでカインは激しく怒り、顔を伏せた。
主はカインに言われた。「なぜ、あなたは怒っているのか。なぜ顔を伏せているのか。
もしあなたが良いことをしているのなら、受け入れられる。しかし、もし良いことをしていないのであれば、戸口で罪が待ち伏せている。罪はあなたを恋 い慕うが、あなたはそれを治めなければならない。」

이 부분을 보면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고 합니다. 가인은 지금 대단히 화가 났습니다. 여기까지 봤을 때 가인이 화가 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예물을 받아들이지 않아서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자신의 아우인 아벨이 드린 예물은 하나님께서 받으셨는데 자신이 드린 예물을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록으로 짐작할 수 있는 점은 또 있습니다. 아벨의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사실을 가인이 알았다는 것은, 반대로 가인의 제물을 하나님께서 거부하셨다는 사실을 아벨도 알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으셨을 때 하늘에서 불이 떨어졌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눈으로 봐서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고 가인의 제물은 거부했다는 사실을 금새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 때 아벨이 보는 앞에서 가인은 대단히 큰 수치심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4장 7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한 구절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4장 7절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もしあなたが良いことをしているのなら、受け入れられる。しかし、もし良いことをしていないのであれば、戸口で罪が待ち伏せている。罪はあなたを恋 い慕うが、あなたはそれを治めなければならない。」

이 말씀으로 미루어볼 때, 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았는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 그것은 그 이유를 가인은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가인은 알았습니다. 자신의 행위에, 우리는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으나, 분명한 것은 선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제가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를 외면하신 것을 압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해주세요……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회개를 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가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안색이 변했습니다. 말하자면 빨간 불이 켜진 것입니다. 이를 누가 먼저 알아차리셨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어? 너 왜 그래? 일이 이렇게 된 게 누구 잘못인데? 그 원인이 다 너한테 있다는 걸 네가 제일 잘 알잖아?”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もし良いことをしていないのであれば、戸口で罪が待ち伏せている。罪はあなたを恋い慕うが、あなたはそれを治めなければならない。」

이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 지금 조심해. 지금 죄가 너를 노리고 있다. 죄가 너를 덮치려고 하는데, 넌 거기 넘어가면 안 돼. 죄를 다스려야 해……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결국 폭주를 하고 맙니다. 폭주가 무엇입니까. 나중 일이 어떻게 되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내 감정에 맡긴 채로 행동을 저지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죄를 다스리지 않고 죄의 유혹에 완전히 넘어가 버리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는 말하자면 자동차에서 핸들도 잡지 않고 눈을 감은 채, 있는 힘껏 가속페달을 밟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만약에 그랬다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동차는 여기 저기에 부딪힐 것이요, 웅덩이에 빠질 수도 있고 절벽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길 가는 사람을 칠 지도 모릅니다.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인 것입니다.

결국 가인은 무슨 짓을 저지르고 맙니까. 그렇습니다.

창세기 4장 8절.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カインは弟アベルを誘い出した。二人が野にいたとき、カインは弟アベルに襲いかかって殺した。

사람이 죄를 다스리지 못하면 이와 같은 무서운 일을 저지르고 마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서운 일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저지른 일로 인하여 자신이 어떻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훨씬 더 무서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일로 인해서 가인은 저주를 받게 됩니다.


창세기 4장 11절~12절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今や、あなたはのろわれている。そして、口を開けてあなたの手から弟の血を受けた大地から、あなたは追い出される。
あなたが耕しても、大地はもはや、あなたのために作物を生じさせない。あなたは地上をさまよい歩くさすらい人となる。」

당시는 아직 율법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죽이기까지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가인과 그의 자손들은 결국 노아의 홍수 때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게 됩니다.

가인의 행동을 보면 그는 한 가지를 알고 있었고 두 가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알았던 한 가지는 무엇이었냐 하면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왜 하나님께서 자신의 예물을 거부하셨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알지 못했던 두 가지는 무엇이었을까요.

첫째로 분노의 대상입니다.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으면 스스로 뉘우치고 스스로 회개하고 스스로 반성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의 대상을 다른 사람한테 돌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잘못이 본인에게 있다는 사실을 자신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자기 탓으로 하지 않고 남 탓으로 하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지금 제 말씀을 들으면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맞아. 저 사람은 맨날 남 탓을 하고 있어. 누구누구도 맨날 자기 탓은 하지 않고 남의 탓만 해……. 여러분, 성경은 우리더러 그런 생각을 가지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나부터 먼저 남의 탓을 하고 그랬다는 사실을 깨닫고 뉘우치라고 주신 말씀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맨날 그런 생각, 잘 된 건 내 탓, 잘못된 건 남의 탓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결국에는 가인처럼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둘째로 가인이 몰랐던 것은, 자신이 그와 같은 행동을 저지르고 어떠한 형벌을 받을지 몰랐습니다. 비록 그가 즉시에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으나 결국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그 뿐만이 아니라 그의 자손들도 모두 버림을 받게 되고 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버림을 받은 사울 왕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6장 14절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さて、主の霊はサウルを離れ去り、主からの、わざわいの霊が彼をおびえさせた。

사무엘상 28장 6절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サウルは主に伺ったが、主は、夢によっても、ウリムによっても、預言者によってもお答えにならなかった。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시자 이제 악령이 그를 지배합니다. 사울은 이제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기도를 하더라도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이제 그에게는 희망도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오로지 죽음만이, 오로지 파멸 만이 존재할 뿐인 것입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노릇입니까.

가인은 아벨만 죽이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적어도 속이 후련할 줄 알았습니다. 어쩌면 잘만 하면 하나님한테도 들키지 않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이 끝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에게는 이제 죽음과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최근에 일어난 두 가지 사건이 떠오릅니다. 하나는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이요, 또 하나는 일본에서 발생한 사건입니다.

한국에서 일어난 이른바 피씨방 살인사건이라는 것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인터넷에 의하면 지난달 2018년 10월 14일, 29살 범인이 피씨방에서 아르바이트생한테 자리를 치워달라고 했는데 화장실을 갔다온 사이에도 안 치워져 있어서 화가 났고, 1,000원 환불을 요구했으나 거부를 당하자, 자신이 무시 당했다는 생각에 스무살인 피씨방 아르바이트생을 무참하게 살해했다고 합니다.

또 하나의 사건은 지난 6월 5일 밤 9시 반쯤, 일본의 한 고속도로 상에서 앞에 가는 차를 추월해서 뒤차를 고속도로 한 가운데에 강제로 세운 다음에 시비를 걸어서, 결국 뒤차에 타고 있던 부부가 그 뒤에서 달려오던 트럭에 치어서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범인이 그렇게 그 부부한테 따진 이유는, 바로 직전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나오는 길에 범인이 출고 쪽을 막고 차를 세워놓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해자가, 방해가 되니까 차를 치우라고 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결국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범인의 말이 대단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느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열 받잖아요. 사람인데.”「文句言われて、カチンとくるけん、人間やけん」라고 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그래. 싫은 소리를 들으면 열 받지. 사람인데 안 그래? 여러분도 혹시 그런 생각을 하신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참고로 저는 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그런 끔찍한 사건을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만, 저도 많이 부족해서 예전에는 참 화도 많이 내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싫은 소리 듣고 열 받으면 화를 낸다는 것. 사림이면 당연한 것인가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戸口で罪が待ち伏せている。罪はあなたを恋い慕うが、あなたはそれを治めなければならない。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짐승한테 하시지 않았습니다. 사람한테 하셨습니다. 짐승은 인내를 모릅니다. 그저 화가 나면 전후 좌우 안 가리고 물어 뜯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바로 그 순간 죄가 나를 끌어들이려고 하지만, 너는 죄를 다스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상대방을 위해서요? 아니요. 나 자신을 위해서, 나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마음에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 죄에 넘어가면 큰일 나. 바로 지금, 너를 삼키려고 하는 죄를 네가 다스려야 해! 라고 하나님께서는 간절한 마음으로 외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가인은 무슨 문제로 이렇게 화를 냈냐 하는 것입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예배에 있어서 화가 났던 것입니다. 교회에 보면 문제가 없나요? 교회가 안전지대인가요? 아닙니다. 교회도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보니 다툼이 끊이지 않습니다.

저도 예전에 여러 교회를 다녀보곤 했습니다만, 맨날 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예배 끝나고 식사를 하려고 하면, 누가 먹기 전에 반찬을 꼭 싸가려는 사람이 있어요. 그럼 그것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이건 일본에서도 겪었고 한국에서도 봤고, 미국에 있을 때에도 역시 교회에서 똑 같은 문제가 일어났었습니다. 그러면 또 그걸 가지고 싸워요.

그게 꼭 싸워야 할 일입니까. 조금 양보하고 그냥 웃어넘기면 될 것을 꼭 거기서 싸우고 성질을 부리고 삐지고 안 나오고 그럽니다. 이게 다 죄를 다스리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요.

그리고 또 어떤 경우에는 야외예배 때 식사기도를 자기 남편한테 안 시켰다고 그렇게 성질을 냅니다. 그게 자기네를 무시했다는 거예요. 이게 그렇게 화를 낼만한 것입니까? 이 분, 믿음이 없는 분 같으세요? 그 분 남편은 장로님이고, 자기는 권사님에다가 방언기도는 또 얼마나 유창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나이가 문제가 아닙니다. 직분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적 지위 또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를 삼키려는 죄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연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저기서 모임을 가질 기회도 많아질 것입니다. 그 중에서 마음이 상할 때도 있고 자존심이 상할 때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그 때 그 순간이 죄를 다스릴 기회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죄가 문에 엎드려 있지 않아요? 죄가 나를 원하는 것 같지 않아요? 그게 좋은 것일까요? 아니요. 어쩌면 그건 안 좋은 일인지도 모릅니다. 생각해보세요. 마귀가 나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 아니겠어요? 마귀가 나를 유혹하고 실족하게 하려는 이유는 내가 대단해서입니다. 내 믿음이 성장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마귀들은 이를 어떻게 해서는 방해하려고 해요. 그런데 아무리 있어도 마귀가 나를 건드리지 않아요? 그건 오히려 기도제목일지도 모릅니다. 내 믿음이 성장하지 않고 있다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말입니다. 자존심은 이럴 때 상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를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바로 그 때,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아하, 내 믿음을 내가 주님을 향한 믿음을 마귀가 알고 방해하러 왔구나.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죄가 나를 원하나 나는 죄를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마귀가 나를 넘어뜨리려고 하나 나는 마귀를 다스려서 능히 이겨야 할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46편 1절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神はわれらの避け所また力。苦しむときそこにある強き助け。

신명기 28장 7절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主は、あなたに向かい立つ敵どもをあなたの前で敗走させる。彼らは一つの道からあなたを攻めて来るが、あなたの前で七つの道に逃げ去る。

로마서 8장 37절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しかし、これらすべてにおいても、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方によって、私たちは圧倒的な勝利者です。

마귀 사탄이 나를 넘어뜨리려고 다가오더라도 우리의 도움이신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를 삼키려는 죄를 다스림으로 말미암아 적들을 물리치고 넉넉히 이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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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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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4회 감사함으로 채우는 삶
2018년 11월 18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5절~8절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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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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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감사함으로 채우는 삶” 感謝で満たす人生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물건에 대한 욕심은 별로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욕심이 있다면 좀 넓은 책상을 갖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동경에서 살 때에는, 집이 워낙 좁다 보니 독립된 구조의 제 방이 없었습니다. 기껏 있는 방이라고 하면 미닫이문으로 연결된 방이었지요. 하지만 제 책상은 계속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 책상에 대해 그리 만족해본 일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방은 좀 좁더라도 좀 넓은 책상을 갖고 싶었어요.

그런 생각은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한 다음에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책상은 상당히 넓었습니다만, 별로 넓다는 생각을 못 해보았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텔레비전에서 어떤 영화배우가 새 집을 구입했는데, 그 이유가 그 집에 보니 큰 책상이 있었더라는 거예요. 바로 그게 마음에 들어서 그 집을 샀다고 했는데, 그 말이 저는 참 이해가 될 것 갈았습니다.

그런데 문득 제가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때 어떤 직원의 책상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좀 늦은 시간, 이 분이 퇴근한 다음이었는데, 그 때 그 책상을 보니까 참 넓어 보이는 것이에요. 그래서 왜 이렇게 넓어 보일까 했더니만, 아하, 알았습니다. 그 책상 위가 너무나도 깨끗하게 치워져 있던 것입니다. 정말 책상 위에 아무것도 없어요. 물론 모니터는 있지요. 키보드도 마우스도 있었지만 저기 한 쪽으로 딱 밀어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책상이 얼마나 깔끔해 보이는지 몰라요. 정말 저 같아도 다음날 아침에 출근해서 그 책상을 보면 정말 일하고 싶어질 마음이 생길 것 같아요. 그런데 뭐 그 때는 그러고 말았던 것 같습니다. 그걸 보고 제가 뭘 어떻게 해보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러던 차에 며칠 전, 문득 제 책상을 봤어요. 그랬더니 거기에는 무슨 프린트다, 영수증이다, 책이다 해서 빈 공간이 별로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기 위한 최소한의 공간만 비어있어요. 그 때 마침 예전에 봤던 그 분의 책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그러면 어디 한 번 치워보자……자고로 정리의 기본 원칙이 뭐겠어요? 예, 안 쓰는 것을 치우자……하면 역시 마찬가지거든요. 이것도 써야 하고, 저것도 써야 하고……그러면 책상은 여전히 똑같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 하면, 일단 모든 것을 없애버렸습니다. 정말 당장 필요한 것을 빼고 모든 것을 버리든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옮겨놓았습니다.

하……그러자 정말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책상이 어마어마하게 넓어진 거예요. 아마도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썼던 책상 중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사용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할 정도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어질러진 책상을 보면서도 나름 핑계를 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20세기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책상, 그리고 일본의 유명 작가인 사카구치 안고의 서재 사진 같을 것을 보면 책상이 정말 지저분합니다. 방도 엉망진창이에요. 거기에 비하면 제 책상은 양반이지요.

하지만 책상을 깨끗이 치우면서 든 생각이 무엇인가 하면, 두 가지입니다.
첫째, 나는 천재 물리학자나 유명 작가가 아니다.
그리고 둘째, 아인슈타인이나 사카구치 안고가 책상 정리를 좀 잘 하고 살았다면 더 뛰어난 성과를 남겼을지도 모른다.
이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책상을 좀 깨끗하게 치우고 연구를 했다면, 그가 평생 동안 연구해왔던 통일장이론을 완성시킬 수 있었을지도 모르고, 사카구치 안고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ㅎㅎ물론 이건 제 개인적인 상상입니다.

이렇게 깨끗하게 책상을 치우고 나니까, 제 마음에 무슨 마음이 드냐 하면,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이렇게 넓은 책상이 나한테 주어지다니 얼마나 감사한가……. 내 인생 중에서 가장 큰 책상을 얻은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제가 그토록 갖고 싶었던 큰 책상. 하지만 제게 필요했던 것, 큰 책상을 얻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은, 큰 책상을 살 수 있는 돈이나, 큰 책상을 놓을 수 있는 큰 집이 아니라, 책상을 치우려고 하는 제 마음가짐이었던 것입니다.

혹시 본인의 책상이 좁다고 생각하시는 분께서는 저처럼 한 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이건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너무나도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라고 하는 마음을 언제 느낄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무엇인가에 대해서 불만이 있거나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는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저는 참 정리를 잘 못하는 편인데, 그 이유를 제 스스로가 알고 있습니다.

뭐냐 하면 잘 버리질 못해요. 분명 당장은 쓸 일이 없을 것 같지만 왠지 나중에 필요해질 것 같아요. 그래서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욕심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도 갖고 싶고, 저것도 갚고 싶다는 것이 바로 욕심이지요. 물론 필요하다면 가지고 있어야지요. 슈퍼에 가서 식사거리도 사야죠. 하지만 사람의 욕심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나한테 있어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의 몇 배, 몇 십 배, 나아가서는 몇 백 배나 몇 천 배도 더 갖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욕심인 것입니다.

욕심은 마치 소금물과도 같습니다. 아무리 마셔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감사가 자리잡을 곳이 없습니다. 아직 내 욕심이 충족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감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6장 31절~33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ですから、何を食べようか、何を飲もうか、何を着ようかと言って、心配しなくてよいのです。
これらのものはすべて、異邦人が切に求めているものです。あなたがたにこれらのものすべてが必要であることは、あなたがたの天の父が知っておられます。
まず神の国と神の義を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これらのものはすべて、それに加えて与えられます。

이 말씀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들은 작은 것에 대해서 전전긍긍 하지 말라. 너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런 사소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라.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 일을 하면서 살아라, 그렇게만 한다면 그런 사소한 것들은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다 책임져 주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얼마나 감사한 말씀입니까.

예를 들어서 우리가 회사 사장인데, 지금 어떤 회사와 큰 계약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는 돈이 몇 십억 몇 백억이 들어가는 프로젝트입니다. 이를 위해서 이제 협상을 하고 전략을 짜고 해야 합니다. 까딱 잘못하면 회사의 운명이 하루 아침에 바뀔 수도 있는 거대한 프로젝트입니다.

사장님이신 여러분은 어떤 한 직원한테 이 일의 실무를 맡겼습니다.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지요. 그런데 이 직원이 맨날 걱정이 끊이질 않습니다. 그래서 물어봤어요. 이봐, 자네는 뭐가 그렇게 걱정이 많아? 그랬더니 이 직원이 말합니다.

아휴……이거 맨날 스테이플러 심이 부족해요. 포스트잇도 부족하고, 볼펜도 맨날 부족해요……일을 하다가 펜이나 종이가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게 제 걱정입니다……

만약에 이 직원이 그랬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야, 이 친구야. 지금 그거 걱정할 때야? 지금 몇 십억, 몇 백억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을 맡겼는데 기껏해야 지금 볼펜이나 종이가 떨어지는 것 걱정하고 있어? 그런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채워줄테니 내가 하라고 한 일이나 신경 써……

이러지 않겠습니까? 사장님이 그렇게 말을 했으면 들어야지, 그래도 계속해서 중요한 건 뒷전으로 미루고 볼펜 걱정 종이 걱정 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일을 계속 그 직원한테 맡기겠습니까? 아니요. 그 직원한테서 일을 빼앗고 다른 사람한테 맡길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누가복음 9장 3절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ルカの福音書
「旅には何も持って行かないようにしなさい。杖も袋もパンも金もです。また下着も、それぞれ二枚持ってはいけません。

이는 단순히 물건을 가지고 가지 말라는 것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도 역시 사소한 일들을 위해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다 알아서 채워줄 테니 너는 내가 맡긴 일에만 신경 쓰면 된다는 것입니다.

여행을 많이 해본 사람과 많이 안 해본 사람들을 보면 금방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어떻게 차이가 나냐 하면, 여행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짐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가져가야 하고 저것도 가져가야 하니까 당연히 짐이 무거워질 수밖에요. 그런데 어떤 분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여행에 갈 때, 특히 장기 여행을 갈 때에는 이렇게 짐을 싸면 된대요. 잘 생각해서 필요한 물건만을 모아보래요. 정말로 이건 없으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되는 물건들만을 모아서, 마지막에는 그 중에서 딱 절반만 가져가라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현지에서 조달하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다 하나하나 가져가려고 하니 짐이 무거우니까 움직일 때마다 고생인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연예인이 이런 말을 했어요. 이 분이 가수인지 텔런트인지는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자기가 지금까지 모아놓은 레코드나 CD, DVD가 참 많다는 것이에요. 얼마나 많은지 집에 둘 곳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한 결과, 유료 창고를 하나 빌렸대요. 그래서 돈을 내고 그 창고에 자신이 그 동안 모아놓은 CD나 DVD를 보관하기로 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아, 이게 바로 츠타야구나……말하자면 CD, DVD 대여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일본에는 CD, DVD 대여점들이 참 많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구하기 힘든 희귀한 것들도 있기야 하겠지만, 대부분은 그런 대여점에 가면 언제든지 빌릴 수 있는 것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자기가 다 지고 다니면서, 결국 둘 곳이 없으니까 돈을 내고 창고를 빌려야 할 정도까지 되었다는 것인데, 그럴 필요 없이, 필요하다면 대여점에 가서 빌리면 된다는 것이에요. 어차피 보관하기 위해 창고를 빌리나, 아니면 대여점에서 빌리나 돈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앞서 아인슈타인이나 소설가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그런 교수나 작가들의 집은 어떻겠어요? 아마도 책들이 여기저기 많이 싸여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는 물론 쉽게 구할 수 없는 책들도 많겠지요. 하지만 그걸 꼭 다 갖고 있어야 하나요? 솔직히 아무리 책을 좋아하는 분이라 하더라도 거기 있는 책 중에서 항상 곁에 두고 있어야 할 정도로 자주 보는 책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정말 중요한 책들만 집에 두고 그 외의 것들은 차라리 필요할 때 도서관에 가서 보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냐 하면 감사가 사라지게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감사는 언제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첫째로, 감사는 내가 낮아질 때 드릴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충실한 종인지 아닌지를 말씀하실 때 다윗을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윗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기에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겸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에 대한 축복을 말씀하셨을 때 그가 한 말을 보십시오.

역대상 17장 16절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ダビデ王は主の前に出て、座して言った。「神、主よ、私は何者でしょうか。私の家はいったい何なのでしょうか。あなたが私をここまで導いてくださったとは。

내가 정말 이와 같은 큰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는데 이렇게 채워주시니 감사합니다 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항상 겸손했습니다. 작은 것을 주셔도 감사, 큰 것을 주셔도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처럼 나 자신을 낮추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높이는 일이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계속 부어주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감사는 믿음입니다. 내가 지금 없어요. 하지만 내게 필요할 때 주님께서 채워주실 것을 믿고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 때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4절~47절
44.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信者となった人々はみな一つになって、一切の物を共有し、
財産や所有物を売っては、それぞれの必要に応じて、皆に分配していた。
そして、毎日心を一つにして宮に集まり、家々でパンを裂き、喜びと真心をもって食事をともにし、
神を賛美し、民全体から好意を持たれていた。主は毎日、救われる人々を加えて一つにしてくださった。

믿는 사람들이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서 교회에 바치면, 이를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그대로 베끼려고 한 것이 바로 공산주의 이론이라고 합니다. 개인재산을 모두 몰수하고, 국민은 국가가 부여하는 노동을 합니다. 그리고 돈이 필요하면 그 필요를 따라 나누어준다는 것이지요. 여러 가지 복잡한 이론은 있습니다만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더 쉽게 말하자면, 8시간 노동을 하고, 돈은 개인이 필요한 만큼 사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개인은 경제적인 걱정 없이 마음 편히 일을 하고 나라도 발전한다……는 것인데, 그게 실제로 가능하겠습니까.

여기 계신 분들은 안 그렇겠지만, 단순하게 말해서 10만원어치 일을 하고 100만원, 1000만원을 갖고 싶어하는 게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국가에서 만족시켜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누가 얼마만큼 필요한지를 사람이 판단한다고 하는데, 그건 불가능한 것이지요.

하지만 누구는 아세요? 예, 주님은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계시고, 필요에 따라 채워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믿음이 있으면 감사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넓은 책상이 필요하신가요? 우리한테는 넓은 책상을 살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넓은 책상을 놓을 만한 큰 집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이미 그 책상은 여러분이 가지셨습니다. 다만 안 보일 뿐입니다. 왜요? 그렇습니다. <욕심>이라고 하는 잡동사니들에 가려서 안 보이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욕심>이라고 하는 여러 가지 잡동사니를 깨끗하게 치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셨던 넓은 책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미 우리에게 주신 넘치는 축복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열심히 일만 하다가 어떤 사고를 당해서 며칠 동안 집에서 요양을 했던 사람의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가끔 목발을 짚고 동네를 산책해보았더니, 그곳에 그렇게 오랫동안 살았는데도 자기 동네에 그렇게 꽃이 많이 피었고 새가 많이 우는 것을 처음 알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그러면 가족이 보입니다. 이웃이 보입니다. 가끔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감사를 드린다면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에게 그렇게 큰 축복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나요? 아니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보겠다고 결심을 하면 뭘합니까. 금방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세상 속에서 세상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감사와 믿음은 사라지고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힙니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축복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감사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5절~8절 신약성경 266페이지
5.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アポロとは何なのでしょう。パウロとは何なのでしょう。あなたがたが信じるために用いられた奉仕者であって、主がそれぞれに与えられたとおりのことをしたのです。
私が植えて、アポロが水を注ぎました。しかし、成長させたのは神です。
ですから、大切なのは、植える者でも水を注ぐ者でもなく、成長させてくださる神です。
植える者と水を注ぐ者は一つとなって働き、それぞれ自分の労苦に応じて自分の報酬を受けるのです。

사람이 아무리 심고 물을 주더라도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지 않으시면 모든 일은 헛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어떻게 말씀하고 계십니까.

데살로니가전서 5장 24절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あなたがたを召された方は真実ですから、そのようにしてくださいます。

하나님은 이루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내게 없는 것을 보지 말고 내가 가진 것, 주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보고 감사 드려야 하고, 또한 장차 주님께서 채워주실 것을 믿고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낮아짐으로 하나님을 높이면서 감사를 드리고, 우리에게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감사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우리의 모든 삶을 감사함으로 채워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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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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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3회 주님을 의지해야 하는 이유
2018년 11월 1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잠언 9장 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주님을 의지해야 하는 이유” 主を頼らなければならない理由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혜롭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는 참 중요한 것이지요. 지혜롭다는 말의 반대는 미련하다는 말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 머리가 좋고 지혜로운 사람들은 많습니다만, 그 반면에 미련한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공부요? 가방끈이 길면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석사, 박사, 정도를 받으면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삶을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아니면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면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자기 스스로가 지혜롭다고 믿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진정으로 지혜롭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지혜로운 삶이요, 지혜로운 사람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지혜롭다는 사람, 아무리 석사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 아무리 어려운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면서 5분 뒤에 신호등에 걸려 있을지 아닐지를 100프로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가장 지혜로운 줄 알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경을 봅니다.

전도서 8장 7절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伝道者の書
何が起こるかを知っている者はいない。いつ起こるかを、だれも告げることはできない。


전도서 10장 14절
“우매한 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나중에 일어날 일을 누가 그에게 알리리요”

伝道者の書
愚か者はよくしゃべる。人はこれから起こることを知らない。これから後に起こることを、だれが彼に告げる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

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교통사고를 보십시오. 얼마 전에 한국에서인지 일본에서인지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습니다만,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중앙선 너머에서 자동차가 중앙분리대를 박고는 이 쪽으로 달려오는 게 아니라, 아주 날라오더라구요. 내가 아무리 제한속도를 지키고 안전운전을 해 봤자 뭐합니까.

제아무리 신중하게 운전을 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설마 중앙선 너머에서 자동차가 날라오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고속도로이니만큼 이쪽도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지만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저쪽에서 100킬로, 이쪽에서 100킬로 그렇게 해서 200킬로에 가까운 속도로 자동차가 부딪혔을지도 모르죠. 제아무리 운전솜씨가 좋다고 하더라도 그걸 어떻게 피하겠습니까.

이처럼 사람은 1년이나 10년은 고사하고 단 3분이나 5분, 아니, 1초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욥기 23장 10절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ヨブ記
しかし神は、私の行く道を知っておられる。私は試されると、金のようになって出て来る。

주님은 아십니다. 뉴스를 보면 공부 많이 하고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던 사람들이 뇌물을 받거나 부정을 저질러서 감옥에 가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많이 공부를 했으면서 그런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요. 하지만 사람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설마 자기가 감옥에 갈 줄 알고 그랬겠습니까. 나는 괜찮겠지….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괜찮아. 자신 있다니까……하지만 그러다가 어떻게 됩니까. 공든 탑이 안 무너진다구요? 아니요.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는 어떻습니까. 제 간증을 해볼까 합니다. 이는 바로 어제 밤에 있었던 일입니다. 지난 주는 정말 참 여러 가지로 힘들었던 한 주였습니다. 일단 감기가 심하게 걸렸어요. 지난 주일부터 좀 기침이 난다 싶었는데, 그러고 말겠지 했습니다만, 이게 점점 심해지더니 주중에는 정말 참 힘들어지더군요.

몸이 좀 안 좋고 그러면, 다른 일이라도 잘 풀려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또 여기저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교회소식을 메일로 전해드리는데 지금까지는 별로 문제가 안 되었던 것이 시스템 적으로 계속 막혀요. 그래서 막히면 또 메일을 써서 한국 인터넷 회사에 보내고, 그럼 또 한국에서는 아이구, 죄송합니다 하고 그 막힌 것을 풀어주면, 또 다른 곳에 막히고, 그럼 또 메일을 써서 보내요. 그러면 저쪽에서는 또 아이구 죄송합니다……하고 또 풀어주고……이런 일이 지난 주에는 이상하게 반복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사실 이런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한 게 지난 주가 처음은 아니에요. 지난 달 10월 중순 쯤에 어떤 새로운 데이터를 추가할 일이 있었는데, 사실 그 때 자세한 말씀을 드리려면 좀 길어져서 생략하겠습니다만, 좀 느낌이 안 좋았었거든요. 하지만 그래도 뭐, 일단 데이터를 추가를 시켜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막 그 때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지난 주에 완전히 절정에 다다른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 도저히 안 되겠어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생각했는데, 결국 뭐,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지난 달에 추가했던 새로운 데이터를 빼버리면 되겠지요. 근데 그게 쉽냐 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미 기존 데이터와 섞여버려서 어떤 게 그 때 추가한 것인지 분간을 할 수 없게 돼버렸습니다.

아, 참 난감하더라구요. 이게 다 하나님 일이라고 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일이 꼬일까요. 그래도 나름 또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에요. 예전에 새로운 데이터를 얻었을 때의 방법을 똑같이 반복해서, 그 다시 얻게 되면, 그 데이터와 똑 같은 데이터를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에서 빼내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머리를 굴려보니까, 이게 보통 작업이 아니에요. 대충 짐작을 해보니까 오로지 그 일에만 매달린다 하면 아무리 짧게 잡아도 3일~4일, 하지만 다른 일도 하면서 해야 하니까 빨라 봤자 1주일 정도는 걸리는 업무량이었습니다.

참 생각만 해도 참 난감했습니다. 그래서 이래저래 답답하기도 하고 해서 어제 밤중에 잠시 동네 주변을 걸었습니다만, 그 때 횡단보도를 건너서 편의점 앞을 지나오는 순간, 갑자기 머리 속에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것입니다. 정말 저 자신이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아, 그래, 이걸 이렇게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내가 왜 이걸 몰랐을까.

정말 그 순간은 전혀 과장 없이 말씀 드리건대, 이렇게 걸어가다가 저도 모르게 멈춰 서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때 생각난 방법대로 일을 하니까, 그 전에는 1주일은 걸릴 줄 알았던 일이, 넉넉잡아 2시간 만에 끝나버렸습니다. 그것도 제가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깔끔하게 일을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가끔 어떤 분들이 하시는 간증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물론 그 중에는 정말 은혜로운 간증도 있습니다만, 가끔 보면 이게 하나님 자랑인지 자기 자랑인지 모를 때가 있지요.

그런데 정말 어제 제가 겪었던 일은 제가 무슨 잘 나서, 또는 머리가 좋아서 떠오른 게 아니라는 걸 확신합니다. 만약에 제가 생각했던 방법으로 했다고 하면 당연히 아직 일은 끝나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도 수심에 가득 찬 모습이었겠지요. 하지만 주님이 주시는 지혜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 지혜에 비한다면 사람의 생각은 얼마나 미련한지 모릅니다.

어떤 문제가 닥쳐왔습니다. 물론 내가 과거에 해보거나 아니면 들어본 일이라면 상관 없겠지요.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 비추어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한 번도 닥쳐보지 못한 일,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 우리의 인생 속에서는 수없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내가 전혀 겪어보지도 못하고, 전혀 알지도 못하는 문제가 닥쳤는데 이걸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해결하려고 하십니까. 아니요. 그건 어쩌면 마치 자동차도 운전해보지 못한 사람이 비행기를 조종하려는 것처럼 무모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자, 문제 나갑니다.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비행기를 조종해보기는커녕 자동차를 운전해본 일도 없어요. 그런데 비행기를 이륙시켜야 할 일이 발생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요?

1번, 조종사를 부른다. 2번, 일단 내 힘으로 해본다.

여러분, 어떠십니까. 내가 운전면허도 없긴 하지만, 왠지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여러분, 이건 용감한 것이 아닙니다. 무모한 것입니다. 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미련한 것입니다.


빨리 전문 지식이 있는 조종사를 찾아서 부탁해야지, 경험도 없고 지식도 없는데,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무슨 세발 자전거도 아니고 비행기를 운전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했는데 2번 내가 일단 해본다……라고 진지하게 대답한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분한테 어떻게 해드려야 해요? 예, 잘 보살펴 드려야 합니다. 어딘가가 편찮은 분인지도 몰라요.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면 대부분 1번, 조종사를 부른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 정상이겠지요. 맞습니다. 그렇게 해야지요.

하지만 그러면 이 질문은 어떻습니까.

내가 겪어보지 못한 어떤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1번 주님을 의지한다. 2번 일단 내 힘으로 해본다.

이렇게 단순한 문제인데, 지금 이 순간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순간순간마다 2번 <일단 내 힘으로 해본다>를 선택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요? 예, 주님이 주시는 지혜를 가지면 넉넉잡아 한 두시간이면 끝날 일을 1주일, 한 달이 넘도록 자기 힘으로 낑낑 대면서 고생을 하는 미련한 삶을 살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제가 저희 교회 소식을 보내드리니까 어떤 분은 이런 답장을 보내오셨습니다. 나는 무신론자입니다. 종교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신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한테는 이런 메일을 보내지 말라고 하더군요.

보내지 말라고 하면 저는 안 보내드립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사람은 지금 나 같은 사람이 얼마나 미련한 삶을 산다고 생각할까 하고 말입니다. 인생은 자기 힘으로 살아나가야지. 그리고 무슨 문제가 있으면 자기 힘과 능력으로 해쳐 나아가야지, 무슨 나약하게 신을 의지하고 그러냐……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고린도전서 1장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第一コリント人への手紙
十字架のことばは、滅びる者たちには愚かであっても、救われる私たちには神の力です。

예수님은 못 배운 사람한테만 필요한 분이 아니십니다.
지식이나 경험이 부족한 사람한테만 필요한 분이 아니십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간구해야 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잠언 9장 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箴言
主を恐れることは知恵の初め、聖なる方を知ることは悟ることである。

사람들이 왜 공부를 하지요? 예, 물론 지식을 얻기 위해서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한편으로는 학위를 따기 위해서, 자격을 얻기 위해서, 또는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학교나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서 공부하는 경우도 있겠지요.

이 모두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다 훌륭한 목표이지요. 그런데 이와 같이 노력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는 보다 좋은 삶,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일본 사람들 보면 응원할 때 자주 쓰는 말이 뭐예요? 예, がんばれ! 한국에서는 힘내라! 파이팅! 뭐 이러지요? 이게 다 뭐예요? 예, 열심히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무조건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쩌면 짙은 안개 때문에 앞이 안 보이는데도 전속력으로 달리면 목적지에 빨리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대단히 위험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랬다가 갑자기 앞에 장애물이 나타나거나,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중앙선을 넘어서 자동차가 날라오기라도 하면, 내가 탄 차가 제아무리 비싸고 튼튼한 차라 하더라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일단 내 힘으로 해 보고, 안 되면 예수님을 의지하자……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시작부터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과 함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미련한 일이에요? 아닙니다. 주님의 지혜와 능력을 의지하면 한 두 시간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내 힘으로 하겠다고 1주일 한 달 씩 지나도 제대로 못 하는 것이 훨씬 더 미련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내가 내 힘으로 내 능력대로 출세하고 돈 많이 벌어보겠다고 하다가 돈 잃고 명예도 잃고 수갑 차고 교도소에 갇히는 편이 훨씬 더 미련한 삶인 것입니다.

지혜롭게 되기를 원하십니까. 훌륭한 인생, 성공적인 인생을 원하십니까. 주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훌륭한 인생, 성공적인 인생으로 가는 지름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주님을 의지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항상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주님과 함께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능력으로 훌륭한 인생,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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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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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2회 높이시는 하나님
2018년 11월 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4장 7절~11절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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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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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높이시는 하나님” 高くされる神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 여러분, 어떠십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높은 자리에 앉지 말고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면 좀 어떠세요? 아멘, 할렐루야가 절로 나오세요?

자, 그럼 다른 말씀을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장 39절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悪い者に手向かっ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の右の頬を打つ者には左の頬も向けなさい。

이 말씀을 들으시면 어떻습니까. 할렐루야가 절로 나옵니까. 감사가 넘칩니까.

믿음이 좋으신 분들은 분명 그러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더 묻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여러분 자녀나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누가 너의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도 돌려 대면서 패라고 해라……” 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솔직히 그렇게 말하기가 쉽습니까. 아니, 나 자신이 그렇게 살아가기도 힘든데, 다른 사람, 그것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한테 그렇게 살라고 해요. 솔직히 이건 참 어려운 문제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더러 그렇게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나요? 아니요.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얼마나 사랑하세요? 예, 우리를 위해서, 너무나도 죄가 많은 우리를 대신해서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려 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씻어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왜 우리더러 그렇게 어렵게 살라고 하셨을까요.

이 사실을 모르면 어떻게 됩니까. 아니, 도대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면서 왜 맨날 당하고 살라고 하실까.

그럼 이 말을 들은 어떤 믿음 좋으신 분은 말씀하시겠지요. 아니야. 그렇게 살아야 복 받아. 그렇게 살아야지 천국 간다니까……

정말 그런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까지 그렇게 맨날 당하고 살아야 합니까. 맨날 그렇게 살다가 홧병에 앓아 누우면 책임져 주신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맨날 그렇게 손해만 보면서 살아야 복 받는다는 건가요?

그리고 또 오늘 말씀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는데, 이왕 말씀을 하실 거면 천국이나 구원이나 죄 사하심 같은, 좀 멋있고 거창한 말씀을 해주셔야 하지 않나요? 기껏 하신다는 말씀이 앉는 자리에 대해서 말씀하십니까. 이거 너무 잔소리가 좀 심한 것 같지 않으세요? ㅎㅎ 여러분은 은혜롭게 모두 알아들으시는데, 저만 좀 삐딱하게 해석하는 건가요? 어쩌면 이렇게 이해하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아, 예수 믿기 정말 힘들다……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왜 이처럼 우리더러 당하고 살라고, 손해보고 살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리고, 왜 이렇게 앉는 자리 같은 사소한 말씀까지도 예수님께서는 하신 것일까요.


오늘은 이에 대한 말씀을 이해하고, 여기에 담긴 예수님의 마음을 올바로 받아들임으로 인하여 넘치는 은혜를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우리더러 무리한 일, 이유 없는 일을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또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을 믿는 일은 축복된 길이요, 생명의 길이요, 다른 선택지가 없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당하고만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논리는 앞뒤가 안 맞는 것처럼 들입니다만, 아닙니다. 대단히 논리정연한 말씀입니다.

쉬운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배울 만큼 배우고, 가질 만큼 가진 사람이에요. 나랑 별로 친하지도 않아요. 그런데 와서 굽실거립니다. 아주 친한 것처럼 반갑게 웃으면서 악수를 청해요. 이유가 뭐예요? 왜 그럴까요?

예, 그렇습니다. 바로, 선거철입니다. 이 사람 입후보한 사람이에요. 국회의원, 시의원, 시장 구청장, 그리고 대통령 등에 출마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얼릉 다가가서 인사하고 악수하고 그럽니다. 그 사람은 자존심이 없어요? 손해보고 살려고 하는 거예요?

아닙니다. 거기서 그렇게 자존심을 굽히고 사람들한테 친절하게 보이고 그러면 훨씬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그 머리 속에는 정확한 계산이 있기 때문인 것이에요. 그 증거로 선거철인데, 자신의 지역구를 벗어나서 인사하거나 악수하는 것을 보셨나요? 예를 들어서 서울시장으로 출마했는데 경기도나 충청도 가서 막 인사하고 악수하고 그래요? 아니요. 그건 이상한 사람이죠.

선거에 출마한 사람들이 굽실거리는 대상은 분명합니다. 누구한테 굽실거려요? 예, 바로 유권자, 자신한테 표를 찍어줄 사람들한테만 굽실거립니다.

어디 굽실거릴 뿐인가요? 만약에 그 사람이 길가에 서서 유세를 하고 있는데, 그 사람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 그 사람한테 다가가서 싫은 소리를 했어요. 당신은 말이야, 이게 이래서 나쁘고, 저게 저래서 잘못했어! 라고 길가에서 따졌다고 칩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뭐가 어째고 어째? 이게 지금 누구한테 큰 소리야? 나 몰라? 나 국회의원 될 사람이야. 아니면 나 시장 될 사람이야. 아니면, 나 대통령 될 사람인데 날 어떻게 보고 이런 무례한 소리를 해! 이렇게 따져야 되겠습니까? 안 되요? 왜요? 사람들한테는 친절하게 해야 하니까요?ㅎㅎ

물론 그렇기도 하겠습니다만, 그러면 안 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 만약에 그랬다가는 선거에 떨어지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 때까지 아무리 착하고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왔으면 뭘 합니까. 그 사람이 많이 배웠으면 뭘합니까. 모든 것이 그 순간에 날라가 버리는 것입니다.

실제 선거를 보면 어떻습니까. 싫은 소리만 해요? 경우에 따라서는 계란을 던지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는 주먹질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후보들은 어떻게 해요? 당장 다가가서 멱살을 잡고 혼내주나요? 아니요. 묵묵히 그것을 맞습니다. 때리면 맞고 계란을 던지면 그것도 맞습니다. 이유가 뭐라고요? 예, 당선되기 위해서, 그 순간을 견디면 자신이 더 큰 영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순간, 많은 유권자들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묵묵히 참고 견디면서 자신의 자존심을 죽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른뺨을 때리면 왼쪽뺨을 대래요. 이게 쉬운 일인가요? 아니요.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있는 지혜로운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내가 이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이 순간을 누가 보고 계세요? 예, 영적인 유권자. 나를 당선 시킬 수도 있고 낙선 시킬 수도 있는 분, 나를 높이실 수도 있고, 낮추실 수도 있는 분, 나에게 축복을 주실 수도 있고, 축복을 빼앗아가실 수도 있는 분, 바로 주님께서 보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면 이제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내가 뺨 두 대 맞고 엄청난 축복을 받을 수 있다면 그깟 뺨이 문제겠습니까. 차라리 맞고 말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축복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는 제 상상이 아닙니다.

그 축복이 어느 정도의 축복일까요. 마태복음 13장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입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天の御国は畑に隠された宝のようなものです。その宝を見つけた人は、それをそのまま隠しておきます。そして喜 びのあまり、行って、持っている物すべてを売り払い、その畑を買います。

이 말씀에 의하면 밭에 감추어진 보화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 이 보화를 발견하고 어떻게 했냐 하면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보화의 가치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팔아서 사도 기쁠 정도의 보화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은 비단 돈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능력이나 경험이나 명예나 자존심이나 그 모든 것을 다 쏟아 붓고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충분히 남는 장사이기 때문에 이 밭을 사고도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이요 그것이 바로 축복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좀 더 거창한 주제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왜 하필이면 무슨 앉는 자리 같은 사소한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 특히 복음서를 읽을 때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께서는 그저 지나가는 말로 아무런 의미 없이 하신 말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10년이고 20년이고 말씀하실 시간이 없었습니다. 1시간 1분 1초, 십자가로 향해야 하는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와 같이 없는 시간을 쪼개서 하시듯 한마디 한 마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앉는 자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낮은 자리에 앉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대우해 주기를 원합니다. 자기 자신을 소중히 생각해주기를 원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권력입니다.

저는 얻어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권력이라고 하는 것을 얻으면 그렇게 달콤하다고 합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설설 깁니다. 모두가 내 말에 복종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 눈치를 살피고, 내 안색을 살핍니다. 어떻게든 내 마음에 들려고 사람들이 애를 씁니다. 누구는 이런 말을 합니다. 아부를 하면, 그걸 당하는 사람도 바보가 아닌데, 눈치를 챈다는 것입니다. 아, 저 사람이 나한테 아부를 하고 있구나 하고 말이죠.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는 것이니 참 묘합니다.

우리도 앉는 자리는 중요하지요. 벌써 앉아 있는 것만 보더라도 누가 높은 사람인지 낮은 사람인지 압니다. 그래서 대우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것은 요즘도 마찬가지지요.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람한테서 받는 상은 작고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상이 진정으로 크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정말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데, 살짝 방심만 해도 이를 잊고 맙니다. 무엇보다 저부터도 그래요.

일주일에 한 두 번 정도 교회 주변에 전도지를 들고 돕니다만, 어느 순간 저 자신한테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 주변에 보면 크고 좋은 집도 많습니다만, 자세히 보면 좀 낡고 비좁은 집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집에 제가 전도지를 넣으려고 우체통을 찾는데, 저 자신이 주저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유가 뭐겠어요. 우리 교회 사정도 어려운데, 생활이 어려운 분이 교회에 오시면 우리가 감당할 수가 있을까……뭐 이런 생각을 제가 하면서 전도지를 넣고 올까 말까를 망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목사라고 하는 인간이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 노릇입니까.

내가 지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공손히 전도지를 우체통에 넣고 나왔습니다.

아무리 교회 사정이 어렵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럼 크고 좋은 집에만 전도지를 돌리고, 가난하고 어려운 집에는 전도지를 안 돌려요? 그건 무슨 짓입니까. 그건 마치 축복은 사람이 가져다 준다고 생각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 하는 것이지요. 아, 저 큰 집에 살고 좋은 차를 모는 사람이 우리 교회에 나와서 헌금도 많이 내고 그러면 참 좋겠다……아휴, 괜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와서 헌금도 못 내고 속이나 썩이고 그러면 어떡하지……

만약에 목사가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하면, 그렇다면 목사는 그만해야겠죠. 사실 이것은 목사만이 아닙니다. 여러분, 회사원을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어떤 상품을 거래처에 판매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회사에서 주는 월급이 적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고객한테 판 돈을 내 주머니에 넣어요? 안 됩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횡령이죠. 범죄입니다. 내 경제상황이 어렵다고 해도 고객이 나한테 주는 돈은 내 돈이 아니에요. 그것은 회사 돈입니다. 회사에서 주는 돈, 사장님이 주는 월급이 내 정당한 수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라면서 돈 많은 사람만 쫓아다니고 돈 좀 줬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그야말로 횡령하려고 작정한 것이지요. 그렇다고 이건 목사만 해당된 말씀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지요. 사실 이른바 “주의 종”이라고 하면 목사만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목사가 아닌 성도님들은 무엇입니까. 목사 만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주의 종이라고 하는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주의 종이라고 하는 사명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나한테 축복을 갚을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가릴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오늘 말씀 다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4장 12절~14절

“12.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3.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4.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イエスはまた、ご自分を招いてくれた人にも、こう話された。「昼食や晩餐をふるまうのなら、友人、兄弟、親族、近所 の金持ちなどを呼んではいけません。彼らがあなたを招いて、お返しをすることが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食事のふるまいをするときには、貧しい人たち、からだの不自由な人たち、足の不自由な人たち、目の見えない人たちを招きなさい。
その人たちはお返しができないので、あなたは幸いです。あなたは、義人の復活のときに、お返しを受けるのです。」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 사람이 나한테 은혜를 갚을까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운 이유가 뭐예요? 내가 그 사람한테 은혜를 받으면 그건 지극히 작은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고, 이를 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안 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잘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더러 안 좋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우리더러 큰 축복을 받으라고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 중에 11절을 보십시오. 누가복음 14장 11절입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なぜなら、だれでも自分を高くする者は低くされ、自分を低くする者は高くされるからです。」

이 말씀 안에 주님의 사랑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낮아지기를 원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높아지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높아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힘과 능력으로 힘껏 높이 뛰어 올라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이 높여주십니다.

사무엘상 2장 7절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第一サムエル記 2章7節
主は貧しくし、また富ませ、低くし、また高くします。

이사야 52장 13절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見よ、わたしのしもべは栄える。彼は高められて上げられ、きわめて高くなる。

하나님은 우리가 낮은 곳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높아지기를 원하십니다. 높이 들리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앞서 말씀 드렸던 선거철의 후보들로부터 배우십시다. 그들의 지혜를 믿음 안에서 활용해봅시다. 선거 때를 보면 그 후보가 아무리 잘났다 하더라도 유권자가 표를 넣어주지 않으면 절대로 당선될 수 없습니다.


믿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나 스스로 나를 높이려 해도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꼼짝 못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작정하시고 높이시면 낮출 자가 없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ピリピ人への手紙 4章13節
私を強くしてくださる方によって、私はどんなことでもできるのです。

사무엘하 22장 49절
“나를 원수들에게서 이끌어 내시며 나를 대적하는 자 위에 나를 높이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는도다”

第二サムエル記 22章49節
神は、敵から私を携え出される方。あなたは、向かい立つ者から私を引き上げ、不法を行う者から私を救い出してくださいます。

시편 103편 5절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あなたの一生を良いもので満ち足らせる。あなたの若さは鷲のように新しくなる。

우리가 높아지려고 스스로 아등바등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높이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주님이 주시는 능력 안에서 주님께 순종하고 살아갈 때 주님으로부터 높임을 받고 독수리 같이 새롭게 날아오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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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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