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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4회 채워야 할 기름
2019년 8월 18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1절~13절
"1.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マタイの福音書 25章 1節~13節
"1.そこで、天の御国は、それぞれともしびを持って花婿を迎えに出る、十人の娘にたとえることができます。
2.そのうちの五人は愚かで、五人は賢かった。
3.愚かな娘たちは、ともしびは持っていたが、油を持って来ていなかった。
4.賢い娘たちは自分のともしびと一緒に、入れ物に油を入れて持っていた。
5.花婿が来るのが遅くなったので、娘たちはみな眠くなり寝入ってしまった。
6.ところが夜中になって、『さあ、花婿だ。迎えに出なさい』と叫ぶ声がした。
7.そこで娘たちはみな起きて、自分のともしびを整えた。
8.愚かな娘たちは賢い娘たちに言った。『私たちのともしびが消えそうなので、あなたがたの油を分けてください。』
9.しかし、賢い娘たちは答えた。『いいえ、分けてあげるにはとても足りません。それより、店に行って自分の分を買ってください。』
10.そこで娘たちが買いに行くと、その間に花婿が来た。用意ができていた娘たちは彼と一緒に婚礼の祝宴に入り、戸が閉じられた。
11.その後で残りの娘たちも来て、『ご主人様、ご主人様、開けてください』と言った。
12.しかし、主人は答えた。『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私はあなたがたを知りません。』
13.です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その日、その時を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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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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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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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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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채워야 할 기름” 満たすべき油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제 예수님 공생애도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무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마태복음 24장부터 25장 끝까지에 걸쳐서 마지막 때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24장 1절부터 44절까지는 장차 일어날 일들을,
24장 45절~51절까지는 악한 종에 대한 비유를,
그리고 오늘 살펴볼 말씀인 25장 1절~13절에서는 열 처녀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항상 말씀 드리듯이 복음서의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말씀하셨는지, 그리고 비유인 경우에는 그 등장인물이 누구인지가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를 보면 말씀이 24장부터 이어지고 있습니다만, 24장 3절~4절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절~4절
“3.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イエスがオリーブ山で座っておられると、弟子たちがひそかにみもとに来て言った。「お話しください。いつ、そのようなことが起こるのですか。あなたが来 られ、世が終わる時のしるしは、どのようなものですか。」
そこで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人に惑わされないように気をつけなさい。


이렇게 해서 말씀이 시작됩니다. 오늘 말씀도 이 맥락에서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역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생애 기간 중에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신 대상을 크게 나누어 보면, 바리새인이나 제사장 같은 기득권층, 예수님께 나온 일반 백성들, 그리고 제자들, 이렇게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만, 대상이 백성들이거나 또는 바리새인, 제사장들의 경우에는 난해한 비유로 설명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제자들만을 상대로 말씀하실 때를 보면 대단히 이해하기가 쉽게,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하나하나 꼼꼼하게 설명해주듯이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참 얼마나 사랑이 넘치는지 모릅니다. 오늘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음으로 등장인물이죠. 오늘 말씀은 비유이기 때문에 이 속에 등장인물들이 있습니다만, 이는 우선 신랑, 열 처녀, 그리고 또 하나가 등장하는데 이는 나중에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보면 일반적으로 혼인잔치라고 한다면 마지막 때를 상징하지요. 그리고 혼인잔치라고 한다면 주로 신랑과 신부를 이야기하게 되는데 오늘은 신부가 아닌 열 처녀라고 하십니다. 이는 말씀의 초점, 그러니까 오늘 말씀의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의 주제는 즐거운 잔치가 아니라, 여기에 참여할 수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만약에 신부라고 한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당연히 참여하겠지만, 신부라고 하시지 않고 굳이 ‘처녀들’이라고 하신 것에는 이와 같은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차차 아시게 되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과거의 이스라엘 지역 결혼문화와도 관련이 있습니다만, 시간관계상 어려운 것은 생략하도록 하고, 가능한 한 심플하게 말씀 드리도록 해 보겠습니다.


자, 그럼 일단 등장인물들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신랑입니다. 신랑은 ‘혼인잔치’라고 하는 큰 잔치를 위해 오는 귀빈.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손님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지요.

그리고 열 처녀들은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이제 머지 않아 찾아올 신랑을 맞으러 나가야 하는 중요한 임무가 있었습니다. 요즘 말로 한다면 결혼식 때의 신부 들러리(ブライズメイド) 정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열 처녀 중에서 다섯 명은 미련한 자요, 나머지 다섯 명은 슬기 있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미련한 자와 슬기 있는 자들이 취한 행동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보아야 하겠지요. 여기에 대해서는 3절~4절에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절~4절
“3.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愚かな娘たちは、ともしびは持っていたが、油を持って来ていなかった。
賢い娘たちは自分のともしびと一緒に、入れ物に油を入れて持っていた。

미련한 자는 등을 가졌지만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슬기 있는 자는 그릇에 기름을 담아서 등과 함께 가져 갔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미련한 자가 든 등에 기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뒤에 보면 나옵니다만, 미련한 자는 그 등에 들어갈 만큼의 적은 양의 기름만 가지고 갔고, 슬기 있는 자들은 등에 기름을 넣었을 뿐만 아니라, 기름을 다른 그릇에 담아서 넉넉하게 가지고 갔다는 것입니다.

당시는 가로등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만, 준비를 하러 나갈 때 처녀들이 등을 켰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만약에 이 때가 밤이었다면 등을 켰겠지요. 하지만 그들이 등을 킨 것 같지는 않고 그냥 들고만 갔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아직 어두워지기 전이었기 때문이었겠지요.

자, 열 처녀 모두 준비는 다 마쳤습니다. 이제 신랑이 오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니, 도대체 이 신랑이라고 하는 양반이 오다가 길을 잃었는지 아니면 자기 집에서 무슨 행사가 길어지는지, 도무지 나타나지 않습니다. 요즘 같았더라면 당장 전화를 걸어서 지금 어디 쯤이냐, 언제쯤 도착할 예정이냐 등등 물어볼 수나 있지만 당시는 가로등도 없는 마당에 그럴 수야 있나요. 그저 꼼짝없이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정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오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그래도 긴장도 했겠지요. 조금 늦을 수도 있겠지. 이제 금방 올 거야……그런데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나고……이제 몇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위는 어두컴컴해지고 계속 긴장하고 있었기에 몸도 마음도 피곤하지요. 그래서 이 열 처녀가 어떻게 되었대요?

마태복음 25장 5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花婿が来るのが遅くなったので、娘たちはみな眠くなり寝入ってしまった。

기다리다 못해 이제 안 오니까 그냥 잠이 들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준비하느라고 아침 일찍부터 난리를 쳤겠지요. 다른 분들도 그러셨겠지만 저도 기록을 보니까 결혼식 당일에는 다 준비하고 새벽 5시 반에 숙소를 출발했더라구요. 그렇다면 대략 한 새벽 4시 정도에는 일어났다는 말이 되잖아요? 뭐, 그렇다고 꼭 결혼 당사자만 그런가요? 가족 친지분들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온몸이 피곤한데 미련한 자나 슬기 있는 자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제 자기들도 모르게 깊이 잠이 들고 말았던 것이지요.

아이구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마태복음 25장 6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ところが夜中になって、『さあ、花婿だ。迎えに出なさい』と叫ぶ声がした。

밤중에 갑자기 어디선가 소리가 납니다. 이 소리가 바로 세 번째 등장인물입니다.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려오더니 신랑이 왔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맞으러 나오라는 것입니다.

이는 미련한 자가 아니라 슬기 있는 자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만약에 예상을 했었더라면 졸지 않았겠지요. 그렇잖아요? 아니, 지금 중요한 날인데, 신랑이 올 줄 알았으면 아무리 피곤해도 자다 깬 얼굴을 하고 나가겠어요? 어떻게 해서든 그 시간까지 안 졸았겠지요. 그런데 슬기 있는 자들도 잠을 잤다는 것은 그들도 역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신랑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이제 난리가 났습니다. 서둘러 잠을 깨고는 날이 어두우니까 준비한 등불을 켜고 나갑니다. 자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마태복음 25장 8절~10절
“8.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愚かな娘たちは賢い娘たちに言った。『私たちのともしびが消えそうなので、あなたがたの油を分けてください。』
しかし、賢い娘たちは答えた。『いいえ、分けてあげるにはとても足りません。それより、店に行って自分の分を買ってください。』
そこで娘たちが買いに行くと、その間に花婿が来た。用意ができていた娘たちは彼と一緒に婚礼の祝宴に入り、戸が閉じられた。

이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부탁을 하지요. 지금 자기들이 등 안에 기름을 넣어왔기에 불을 붙이긴 했지만 그래도 기름이 부족해서 꺼져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좀 나누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랬더니 슬기 있는 자들이 말하기를, 지금 자기들 쓰기에도 모자랄 것 같으니, 그러지 말고 어서 가서 사오라고 합니다.

아니, 지금 가로등도 없고 전화도 없는데, 그 밤중에 영업하고 있는 편의점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아마도 정신 없이 왔다 갔다 하면서 간신히 기름을 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부랴부랴 다시 돌아왔지만, 그러면 뭘 합니까. 이미 신랑은 도착해서 슬기 있는 다섯 처녀가 맞이하고, 모두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는 문이 닫히고 말았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11절~12절
“11.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その後で残りの娘たちも来て、『ご主人様、ご主人様、開けてください』と言った。
しかし、主人は答えた。『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私はあなたがたを知りません。』

당연히 알지 못하겠지요. 신랑이 도착했을 때에 그들은 기름 사러 갔었잖아요. 얼굴을 봤어야 들여보내든지 하겠지만, 당신들은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차가운 말을 듣고, 결국은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참 허무하지 않습니까. 아침부터 이게 무슨 고생이에요.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아침부터, 아니, 경우에 따라서는 피부관리다 뭐다 해서 오랫동안 그 날을 위해 준비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러면 뭘 합니까. 이미 잔치는 시작되었고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그 즐거운 잔치에 들어갈 수 없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마태복음 25장 1절~12절까지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미련한 자와 슬기 있는 자의 구분이 이와 같이 되어 있습니다만, 세상적으로 보면 좀 다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자, 행사 준비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행사 진행 매뉴얼이 신부 들러리 역할을 맡은 열 처녀들에게 내려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예정된 시간까지 지정된 장소에서 기다렸다가 신랑이 도착하면 지체 없이 곧바로 나가서 맞이할 것. 해가 저물고 주변이 어두울 때에는 각자 불이 켜진 등을 손에 들고 나갈 것. 그리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기름을 넉넉하게 준비할 것. 이게 반드시 지켜야 할 사항이었습니다.

여기서는 편의상 처녀 열 명 중 다섯 명씩 A그룹과 B그룹으로 나누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A그룹 처녀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매뉴얼에 이렇게 적혀 있으니까 등불을 준비해야지. 그리고 언제 올지 모르니 밤늦게 올 것도 대비해서 기름도 넉넉하게 준비해야겠다. 참 단순하죠?

한편 B그룹 처녀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매뉴얼에 이렇게 적혀 있으니 들고 나갈 등은 준비해야겠지. 기름? 에이, 그거야 등 안에 넣어두면 되잖아. 여분의 기름 같은 건 필요 없어. 우리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여기서 신랑 집까지의 거리는 얼마고, 신랑이 당일에 시댁에서 이런저런 행사를 마치고 이리로 출발한다고 하면, 여기에 도착하는 시간은 대략 오후 정도. 아무리 늦더라도 초저녁이면 충분해. 지금이 겨울이라면 또 모를까 요즘은 아직 초저녁이라도 환하니까, 굳이 등을 켤 필요가 없잖아. 밝을 때 켜봤자 티도 안 난다니까. 그러니까 괜히 무겁게 기름을 많이 넣지 않아도 돼. 그리고 최악의 경우 기름이 필요하다면 A그룹 애들한테 빌리면 되지 뭐. 쟤네들 좀 봐. 미련하게 하란다고 기름을 저렇게 많이 준비했잖아. 머리가 나쁘면 평생 고생이라니까. 기름이 적어서 불안해? 괜찮아. 걱정하지마. 나만 믿으라구.

만약에 이랬다면 어떨까요. 물론 우리는 이미 답을 아니까 쉽습니다만, 세상적으로 보면 A그룹과 B그룹은 어떻습니까. 어쩌면 세상적으로 보면 여분의 기름을 준비한 A그룹보다도, 이것저것 정보를 수잡하고 요령 있게 준비한 B그룹 처녀들이 더 지혜롭다는 평을 받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잖아요? 세상을 좀 요령 있게 살아야지요. 하란다고 시키는 대로 다 하면 그게 미련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어떻습니까. 세상적으로 보면 미련하게 보였던 A그룹이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반면에 세상적으로 보면 지혜롭고 요령 있는 것처럼 보였던 B그룹은 아예 문 안에도 들어가지 못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죠.

마태복음 25장 13절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です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その日、その時を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ら。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열 처녀에게 내려졌을 명령, 매뉴얼이란 무엇일까.
둘째로, 열 처녀의 희비를 엇갈리게 만든 기름이란 무엇일까.
마지막으로 셋째로, 깨어있으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 세 가지를 오늘은 반드시 이해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깨닫게 되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열 처녀에게 내려졌을 명령, 매뉴얼이란 무엇일까요. 이는 우리에게 있어서 당연히 성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의 질문입니다. 이렇게 두꺼운 성경, 이 안에는 너무나도 많은 내용들이 있습니다만, 이를 간단하게 줄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여기서 특히 40절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2장 40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변화산 사건을 떠올리게 됩니다.


마태복음 17장 1절~3절
“1.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それから六日目に、イエスはペテロとヤコブとその兄弟ヨハネだけを連れて、高い山に登られた。
すると、弟子たちの目の前でその御姿が変わった。顔は太陽のように輝き、衣は光のように白くなった。
そして、見よ、モーセとエリヤが彼らの前に現れて、イエスと語り合っていた。

모세는 율법의 상징이요 엘리야는 선지자의 상징입니다. 즉 이 두 사람은 그야말로 성경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가운데에 예수님께서 계셨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라는 계명과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라는 이 두 계명이 곧 성경 전체와도 같다, 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매뉴얼인 이 성경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가득 차 있고, 이를 실제로 보여주신 분이 바로 다름아닌 예수님이시고,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둘째로, 기름은 무엇이냐 하는 부분입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슬기 있는 자들은 기름을 넉넉하게 가지고 갔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겸손과 순종이요, 또 하나는 주님 앞에 드리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 날 그 열 처녀들에게 내려진 사명은 장차 도착할 신랑을 기다리다가 맞이하는 일이었습니다. 낮에 와야만 맞이하고 밤에 오면 맞이하지 안아도 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문제가 아닙니다. 낮에 도착하든 밤에 도착하든 새벽에 도착하든, 언제든지 도착하기만 하면 신랑을 나가서 맞이하는 것, 이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낮에 오시든 밤에 오시든, 언제든지 오십시오. 주님께서 원하실 때에 오십시오. 저의 생각이나 저의 방법이 아니라, 주님의 생각대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섬기겠습니다. 이것이 기름을 넉넉하게 채우는 겸손과 순종의 자세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기름이라고 하는 것이 주님 앞에 드리는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는 말씀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얼마나 우리 삶 속에서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범사에 예배하고 찬송하고 감사하는 삶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이웃 사랑은 어떻게 하는 것이 이웃 사랑일까요. 여러분께서는 요즘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계십니까. 이렇게 물으면 어떤 분은 이렇게 대답하실지도 모르겠지요. 아이구, 요즘은 저 먹고 사느라고 바빠서 이웃 사랑을 실천할 시간이 없어요. ㅎㅎ

이웃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것일까요?

이도 역시 우리의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매뉴얼인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39절~45절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悪い者に手向かっ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の右の頬を打つ者には左の頬も向けなさい。
あなたを告訴して下着を取ろうとする者には、上着も取らせなさい。
あなたに一ミリオン行くように強いる者がいれば、一緒に二ミリオン行きなさい。
求める者には与えなさい。借りようとする者に背を向けてはいけません。
『あなたの隣人を愛し、あなたの敵を憎め』と言われていたのを、あなたがたは聞いています。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自分の敵を愛し、自分を迫害する者のために祈りなさい。
天におられるあなたがたの父の子どもになるためです。父はご自分の太陽を悪人にも善人にも昇らせ、正しい者にも正しくない者にも雨を降らせてくださるからです。


여러분, 이 구절 좋아하십니까? 어쩌면 이 구절을 읽으시면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어요. 하이구. 그래. 성경은 맨날 손해 보면서 살라고 하고 그런 얘기 밖에 없어. 어떻게 사람이 맨날 인내심 테스트 하면 살라는 거야? 그런 생각 들지 않으세요?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성경을 오해한 것입니다. 사실 이 글 내용을 보면 우리에게 그렇게 어려운 것을 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큰 돈을 쓰라는 것도 아니고 큰 희생을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조금 손해보고, 조금 내주고 조금 자존심 세우지 말아라……그 정도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하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해주시는 건가요? 그렇게 좀 손해 보면서 살면 다투지 않아도 되니까? 속이 편하니까? 여러분, 성경은 윤리책이나 실용서가 아닙니다. 이렇게 조금 손해보고 이웃을 사랑하면, 주님께서 30배 60배 100배 되는 축복으로 갚아주신다는 사실을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믿음이야말로 우리가 주님 앞에 드리는 등불에 기름을 채워 넣는 일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깨어있으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미련한 자도 슬기 있는 자도 신랑을 기다리다가 지쳐서 잠을 잤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잠이 든 슬기 있는 자들도 잘못했다고 말씀하고 계신 건가요?

여러분, 세상적으로 보았을 때 잠을 자야지요. 어떻게 항상 깨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 잠을 잔다는 것은 단순히 수면을 취한다는 뜻만이 아니라, 신앙적으로는 세상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신앙이 있다고 해서 1년 365일 교회 안에서만 있어야 하나요?

그것은 하나님도 그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안식일에 대한 계명을 주시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출애굽기 20장 8절~10절
8.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安息日を覚えて、これを聖なるものとせよ。
六日間働いて、あなたのすべての仕事をせよ。
七日目は、あなたの神、主の安息である。あなたはいかなる仕事も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も、あなたの息子や娘も、それにあなたの男奴隷 や女奴隷、家畜、またあなたの町囲みの中にいる寄留者も。

엿새 동안은 믿음을 갖고 세상에서 열심히 우리의 일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여기서 깨어 있으라고 하는 것은, 슬기 있는 자들이 했던 것처럼, 신랑이 낮에 오든 밤에 오든, 그 때 넉넉한 기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믿음과 말씀과 행함으로 말미암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기름을 들고 나갈 준비가 되었는가 하는 점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미련한 자들은 슬기 있는 자들에게 기름을 빌리려 했으나 거절 당했다고 하지요. 여러분, 우리가 쌓아온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다른 사람한테 빌려줄 수 있나요? 좀 다른 예로 말씀 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 운전 면허증을 조금 잘라서 면허가 없는 사람한테 주면, 그 사람은 조금 잘라준 면허만큼 운전할 수 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이처럼 마지막 날에는 하물며 자신의 부모나 자식이라 하더라도 믿음으로 채운 기름은 나누어 줄 수도 없고 빌려줄 수도 없습니다. 모두 자기가 자기 힘으로 채워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4장 44절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も用心していなさい。人の子は思いがけない時に来るのです。

누가복음 12장 40절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あなたがたも用心していなさい。人の子は、思いがけない時に来るのです。」

요한계시록 22장 7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見よ、わたしはすぐに来る。この書の預言のことばを守る者は幸いである。」

요한계시록 22장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見よ、わたしはすぐに来る。それぞれの行いに応じて報いるために、わたしは報いを携えて来る。

요한계시록 22장 20절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これらのことを証しする方が言われる。「しかり、わたしはすぐに来る。」アーメン。主イエスよ、来てください。


주님이 언제 오실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하루 뒤, 한 달 뒤, 1년 뒤, 5년 뒤, 10년 뒤에 오실 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오늘 지금 이 예배가 끝나기 전에 오실 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언제인지는 모릅니다만, 그러나 반드시 오십니다. 속히 오신다고 주님께서는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밤중에 갑자기 신랑이 도착했다는 소리로 인하여 순식간에 상황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날도 그렇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1절~52절

“51.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聞きなさい。私はあなたがたに奥義を告げましょう。私たちはみな眠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が、みな変えられます。
終わりのラッパとともに、たちまち、一瞬のうちに変えられます。ラッパが鳴ると、死者は朽ちないものによみがえり、私たちは変えられるのです。

그렇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때 나팔소리가 나며 모든 것이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될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오십니다. 반드시 오십니다. 그리고 곧 오십니다. 우리 모두, 믿음과 말씀과 행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우리 몸 같이 사랑함으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 속에 기름을 가득 채워서, 주님께서 언제 오시더라도 오늘 말씀에 나오는 슬기 있는 처녀들처럼 기쁨과 감사와 찬송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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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3회 ’그러나’의 하나님
2019년 8월 1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절~29절
“26.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第一コリント人への手紙 1章 26節~29節
"26.兄弟たち、自分たちの召しのことを考えてみなさい。人間的に見れば知者は多くはなく、力 ある者も多くはなく、身分の高い者も多くはありません。
27.しかし神は、知恵ある者を恥じ入らせるために、この世の愚かな者を選び、強い者を恥じ入らせるために、この世の弱い者を選ばれました。
28.有るものを無いものとするために、この世の取 るに足りない者や見下されている者、すなわち無に等しい者を神は選ばれたのです。
29.肉なる者がだれも神の御前で誇ることが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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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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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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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그러나’의 하나님” 『しかし』の神様라고 하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예전에 일본어 시험반을 맡고 가르칠 때에 보면, 학생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과목이 아무래도 독해입니다. 독해는 단어도 많이 나올 뿐만 아니라, 단순한 암기력만이 아닌, 짧고 긴 문장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도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독해 문제 중에서 제일 어려운 지문 중 하나가 뭐냐 하면 “필자의 생각”을 묻는 문제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묻는 것이라면 본문 중에서 찾아내면 되지만, 이 “필자의 생각”을 묻는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문장 내용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필자의 생각을 가장 빨리 찾아내는 방법이 바로 본문 흐름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당시 저는 수업에서 독해 문장을 읽을 때에 접속사를 주목하라고 강조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본문에 나오는 단어 하나하나를 모두 완벽하게 알지 못하더라도 글의 흐름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바로 “필자의 생각”이라고 하는 것을 집어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흐름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접속사’이기 때문입니다.

접속사는 말 그대로 문장과 문장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데, 접속사의 기등들을 보면 여기에는 뭐 첨가도 있고, 조건도 있고, 병렬도 있고, 화제전환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가장 대표적인 접속사는 아무래도 순접과 역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말은 어려울지 모르겠습니다만, 알고 보면 쉽습니다. 먼저 ‘순접’이라고 하는 것은 앞에 나오는 문장을 이어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러므로, 그러니까 따라서, 때문에’ だから それで같이 앞에 오는 문장의 흐름을 그대로 이어 받을 때 쓰는 접속사가 이 ‘순접’입니다.


반면에 ‘역접’이라고 하는 것은 앞에 오는 문장의 흐름에 반대되는 내용을 쓸 때 사용됩니다. ‘그러나, 하지만, ~에도 불구하고’ 같은 것이 바로 ‘역접’에 해당됩니다.

이 접속사 중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접속사를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이 ‘역접’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지요. 이 역접 다음에 ‘필자의 생각’, ‘필자의 의도’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독해 문제에서 사용되는 문장들을 보면, 평범한 것이 없고, 대부분 필자만의 독특한 시각이 담긴 글들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식이지요.

많은 사람들은 돈을 좋아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합니다…….이런 문장인데 마지막에 가서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라는 식의 본문은 잘 안 나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필자만의 생각이나 견해가 없기 때문이지요.

이런 글 보다는 오히려, 글쎄요……, “세상 사람들은 돈을 좋아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합니다……이렇게 이어진다 하더라도 마지막에는 뭐예요? “그러나! 돈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돈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뭐 이런 글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 “그러나!”라고 하는 역접 뒤에 “필자의 독특한 생각, 필자만의 견해”가 당겨진 문장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눈을 돌려보면 어떻습니까. 세상에는 온통 순접이 넘쳐납니다. 무슨 사건이라도 일어나보세요. 아니면 얼마 전에 일본에서도 선거가 있었습니다만, 무슨 사건이나 어떤 현상이 발생하면, 이른바 많이 배웠다는 분들은 이를 두고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 비추어보며 분석을 하고 이유를 달아서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A라서 B라는 현상이 일어났다. A이기 때문에 B라는 사건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 A였기 때문에 B라는 선거결과가 나오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뭐 이런 식이지요. 이것이 무엇입니까. 모두 다 순접입니다. 이런 어려운 내용이 아니더라도, 예를 들어서, 돈이 없다. 그래서 고생한다. 건강하지 못하다. 그래서 불행하다. 나이가 많다, 아니면 나이가 너무 어리다 그래서 어쩌구 저쩌구……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순접 투성이입니다. 이렇게 이유를 달고 저렇게 이유를 달아놓고는 그래, 그래서 어쩔 수 없다……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 생각입니다.

과거 당나라 시절에는 관리로서 출세를 하기 위해서는 4개의 조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신언서판……이라고 합니다. 몸 신, 말씀 언, 글 서, 판단할 판 자를 써서 신언서판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먼저,

신…… 이란 건강도 건강이지만 풍채와 용모도 중요시했다고 합니다.
언…… 이란 언변입니다. 즉 말을 잘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 는 글씨를 잘 써야 한다는 것이고,
판…… 은 판단력도 판단력이지만 문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아무리 아는 것이 많고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신언서판……이라고 하는 요소를 갖추고 있어야지만 당나라 때에는 관리로 등용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오늘 말씀 중에서 고린도전서 1장 26절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절

“26.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兄弟たち、自分たちの召しのことを考えてみなさい。人間的に見れば知者は多くはなく、力ある者も多くはなく、身分の高い者も多くはありません。

이 글을 좀 이해하기 쉽도록 현대인의 성경판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셨을 때 여러분이 어떠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적으로 볼 때 여러분 가운데는 지혜로운 사람도 많지 않았고 유능한 사람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현대인의 성경을 참 좋아합니다만, 이 고린도전서, 바울은 당시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들을 가리켜, 당신들은 인간적으로 볼 때 지혜로운 사람도 많지 않고, 유능한 사람도 없고, 가문이 좋은 사람도 별로 없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 드리면 당신들은 배운 것도 없고, 능력도 없고, 그렇다고 배경이 좋은 사람들도 없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배운 것은 초등학교 나온 게 다고, 머리도 나쁘고 빽도 없어요. 이런 사람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뭐 꼭 당나라 때 관리 임용이 아니라 요즘 세상에 있어서도 제대로 이력서 한 장 내밀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옛날에는 못 배웠어도 그냥 부모한테 물려받은 농사나 지으면서 살아가면 되지……라고 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요즘은 뭐 아무나 농사를 짓나요? 농사를 지으려면 얼마나 많이 공부를 해야 하는데요.


세상적으로 본다면 이 말 뒤에 나오는 가장 자연스러운 접속사는 순접입니다. 당신들은 지혜로운 사람도 많지 않다. 그래서 당신들은 성공할 수가 없다. 유능한 사람도 별로 없다. 그래서 잘살 수 없다. 가문이 좋은 사람도 별로 없다. 그래서 출세하기는 틀렸다…… 그래서, 그래서……이게 세상 이치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은 어떻습니까. 바로 다음 구절인 고린도전서 1장 27절은 무슨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장 27절 첫 단어.
“27.그러나!” 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역접이라고 하는 접속사는 정말 대단합니다. 이 역접이 가지고 있는 힘은 막강합니다. 왜냐하면 앞에 있는 모든 조건들을 완전히 뒤집어버리기 때문인 것입니다.

앞에 이런 저런 그런 나쁜 조건들이 있어요. 안 좋은 상황들이 있습니다. 불리한 환경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자, 여기에 역접을 한번 집어넣어 보십시오. “그러나!”입니다. 아무리 나쁜 조건들, 안 좋은 상황들, 불리한 환경들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모두 “그러나!”로 물리칠 수 있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처럼 성경을 자세히 보면 여기에는 반대로 ‘역접’으로 넘쳐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라고 하면 사울이었습니다. 그가 왕이 되기 위해 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지요. 처음에 그는 겸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점점 교만해지더니 마침내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을 저버리고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데에만 급급해집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고, 그 왕위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십니다. 그 사람이 바로 다윗이지요.


다윗은 영문도 모르는 채 사울에게 쫓깁니다. 그 때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함께 있었습니다만 그게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보면 성경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사무엘상 22장 2절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そして、困窮している者、負債のある者、不満のある者たちもみな、彼のところに集まって来 たので、ダビデは彼らの長となった。約四百人の者が彼とともにいるようになった。

상대는 지금 누구입니까. 어느 개인 한 두 명이 아니라 한 나라의 왕이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변에 좀 더 나은 사람들이 함께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기 성경에 보면 환난 당한 모든 자, 빚진 모든 자,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윗한테 모였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다윗도 참 얼마나 답답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어째 내 주위에는 좀 쓸만한 사람들은 없고 다들 무슨 사정이 있는 사람들, 돈도 없는 사람들, 이런저런 문제가 있는 사람들만 모였을까, 괜찮은 사람들은 어디 가고 다 못난 사람들만 모여왔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무엘상 18장 12절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サウルはダビデを恐れた。それは、主がダビデとともにおられ、サウルを離れ去られたからである。


내가 아무리 배운 것도 없고 능력도 없고 배경도 없고,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내 주위에 나쁜 조건들이 있어요 내가 놓인 상황은 안 좋습니다. 환경들도 너무나 불리해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무슨 하나님이시라구요? 예, 그렇습니다. “’그러나’의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에 ‘그러나’를 넣으면 어떻게 되요? 예, 27절 이후가 됩니다.

오늘 말씀 중 고린도전서 1장 27절~29절을 보시겠습니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27. しかし神は、知恵ある者を恥じ入らせるために、この世の愚かな者を選び、強い者を恥じ入らせるために、この世の弱い者を選ばれました。
28. 有るものを無いものとするために、この世の取るに足りない者や見下されている者、すなわち無に等しい者を神は選ばれたのです。
29. 肉なる者がだれも神の御前で誇ることが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하나님께서는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28절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신다 (有るものを無いものとするために、この世の取るに足りない者や見下されている者、すなわち無に等しい者を神は選ばれた) 고 하십니다.

이것이 이상하신가요? 그렇죠. 이상하죠. 이해가 안 되시나요? 그렇죠. 이해가 안 되지요.

아니, 하나님도 참 이상하시지. 이왕 쓰시려면 좀 똘똘하고 잘난 사람을 쓰시면 얼마나 좋아요. 그렇잖아요? 내가 회사 사장이에요. 그런데 직원을 뽑으려고 해요. 그렇다면 똘똘한 사람과 미련한 사람, 누구를 뽑겠습니까. 그야 당연히 똘똘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뽑지요. 그래야 나나 우리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해주지 않겠습니까. 미련한 사람을 뽑아보세요. 회사가 잘 돌아가겠습니까. 그런 사람을 내 돈 들여가면서 데리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참 하나님도 이상한 양반이야. 말도 안돼. 그러니까 성경은 엉터리라니까……. 그렇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렇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누가 먼저 버림을 받아 마땅합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나 자신부터 버림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대단해서, 우리 스스로가 좀 남들보다 착하고 똘똘해서 하나님이 사랑해주시는 것 같습니까.

잠언 26장 12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잠언 26장 12절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自分を知恵のある者と思っている人を見たか。彼よりも、愚かな者のほうが、まだ望みがある。


우리가 만약에 지혜롭고 능력 있고 나 혼자라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내가 잘났었다면,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일찌감치 버리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아직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사랑해주시는 이유는 어쩌면 참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미련해서, 어쩌면 참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능력이 없어서, 어쩌면 참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지혜롭지 못해서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자학인가요? 아닙니다. 동물 양을 보십시오. 양은 늑대나 사자가 달려든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좇아오는 늑대나 사자를 뿌리칠 정도로 빨리 달리지 못합니다. 맹수들과 싸워서 이길 만한 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인가요? 아닙니다. 이는 오히려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미련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지혜로움이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아이구, 나는 맹수가 달려들면 내 힘으로는 살아남을 수가 없어요. 꼼짝없이 죽고 말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예, 그렇습니다. 양치기 목자한테 꼭 붙어 있을 게요…… 이게 진정한 지혜이자 진정한 능력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10장 14절~15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갈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0장 14절~15절
“14.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わたしは良い牧者です。わたしはわたしのものを知っており、わたしのものは、わたしを知っています。
ちょうど、父がわたしを知っておられ、わたしが父を知っているのと同じです。また、わたしは羊たちのために自分のいのちを捨てます。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께서는 그냥 말로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죄악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준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3장 5절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心を尽くして主に拠り頼め。自分の悟りに頼るな。

잠언 16장 20절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みことばによく通じた者は幸いを見出す。主に拠り頼む者は幸いである。

잠언 29장 25절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人を恐れると罠にかかる。しかし、主に信頼する者は高い所にかくまわれる。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시편 23편 6절에 보면 다윗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편 23편 6절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まことに 私のいのちの日の限り いつくしみと恵みが 私を追って来るでしょう。 私はいつまでも 主の家に住まいます。


다윗은 평생토록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 결과 그렇게 문제도 많은 사람들, 정말 인간적으로 보면 전혀 쓸모 없는 것처럼 보인 사람들을 거느리고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자, 하나님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오히려 사울이 다윗을 두려워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이스라엘 왕으로 오르게 되어 40년이나 통치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요, 뭐, 그러나의 믿음, 좋습니다. 하지만 제가 모르나요. 예, 알지요. 뭘 아냐 하면, 이런 믿음, 그러나의 믿음이 생기더라도 어떻습니까. 주변을 돌아보면 믿음도 없는 사람들이 잘 되고 그런 모습을 봅니다. 그러면 이게 어느 쪽이 맞는 것일까.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데 이렇게 어려움이 닥쳐옵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성경대로 살아가지도 않고 자신들의 욕심만 채우려고 하는데 잘 되는 것처럼 보여요. 그러면 이거 나만 바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잠언 24장 1절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悪い者たちを羨んではならない。彼らとともにいることを望んではならない。

잠언 24장 19절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悪を行う者に対して腹を立てるな。悪しき者を羨むな。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는 지금이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수천년 전에도 이와 같은 일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악인인데도 잘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있어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일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잠언 19장 3절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人の愚かさは自らの道を滅ぼす。その心は主に向かって激しく怒る。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미련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지혜롭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5절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神の愚かさは人よりも賢く、神の弱さは人よりも強いからです。

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제아무리 머리가 좋고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능가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승리를 주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된 인도자가 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 우리가 부족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힘들더라도, 우리를 높이시고 우리를 쓰시고 우리를 인도해주시고,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분,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질문을 안 드린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한 번 질문을 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오늘 드린 말씀을 잘 들으셨는지 아닌지 알 수 있는 질문입니다. 앞서 제가 이 역접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그 이유가 뭐라고 말씀 드렸는지 혹시 기억하십니까? 왜 접속사 중에서 ‘그러나’ 같은 역접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씀 드렸는지 기억하시나요?

예, 그 이유는 이 역접 다음에 ‘필자의 생각’, ‘필자의 의도’가 등장하기 때문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성경의 필자는 누구입니까. 물론 직접적으로 성경을 기록한 것은 사람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세나 다윗, 솔로몬 바울 등 수 십 명에 달하는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만, 이는 그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지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第二テモテへの手紙 3章16節

聖書はすべて神の霊感によるもので、教えと戒めと矯正と義の訓練のために有益です。

그러니까 성경의 필자는 하나님 자신이라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말씀 중에서 필자의 생각, 하나님의 생각이 어디에 나오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 ‘그러나’ 다음입니다. 마지막으로 필자의 생각, 성경의 필자이신 하나님께서 가장 말씀하고 싶은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29절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しかし神は、知恵ある者を恥じ入らせるために、この世の愚かな者を選び、強い者を恥じ入らせるために、この世の弱い者を選ばれました。
有るものを無いものとするために、この世の取るに足りない者や見下されている者、すなわち無に等しい者を神は選ばれたのです。
肉なる者がだれも神の御前で誇ることが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할렐루야! 그리고 또 로마서 8장 28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나쁜 조건들, 안 좋은 상황들, 불리한 환경들을 단번에 좋은 조건들, 좋은 상황들, 놀라운 환경으로 바꾸어주시는 ‘그러나’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 진정으로 주님으로부터 충성된 일꾼으로 쓰임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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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2회 날아오르는 삶
2019년 8월 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전도서 1장 2절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伝道者の書 1章 2節
"空の空。伝道者は言う。空の空。すべては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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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날아오르는 삶” はばたく人生라고 하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보면 어떻습니까. 어떤 말씀은 참 우리에게 위로가 되기도 하고, 힘이 되기도 하고,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28장을 볼까요?

마태복음 28장 20절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命じておいた、すべてのことを守るように教えなさい。見よ。わたしは世の終わりまで、いつもあなたがたとともにいます。」

우리가 외로울 때라도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해주신다는 주님의 마음을 생각을 하면 외롭거나 불안하거나 할 때라도 마음이 든든해집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전도서 1장 2절 말씀이지요?

전도서 1장 2절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空の空。伝道者は言う。空の空。すべては空。

오늘 말씀, 참 유명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물론이지만, 성경을 잘 알지 못하는 분들도,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본 일이 있을 법한 말씀이지요. 그렇다면, 이 말씀. 읽고 힘이 나시나요? ㅎㅎ


잠언과 아가 그리고 오늘 살펴볼 전도서는 대부분을 솔로몬이 썼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 전도서는 솔로몬 왕이 노년 때 쓰여진 책이라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전도서를 보면, 힘이 팍팍 난다기 보다는 힘이 좀 빠지게 되는 구절들이 눈에 띄는 것 같습니다.

힘이 빠지는 구절은 여기만이 아니지요. 인생은 바람을 잡는 것 같다는 말씀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전도서 1장 14절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私は、日の下で行われるすべてのわざを見たが、見よ、すべては空しく、風を追うようなものだ。


전도서 2장 11절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しかし、私は自分が手がけたあらゆる事業と、そのために骨折った労苦を振り返った。見よ。すべては空しく、風を追うようなものだ。日の下には何一つ益 になるものはない。

전도서 2장 17절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미워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에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로다”

私は生きていることを憎んだ。日の下で行われるわざは、私にとってはわざわいだからだ。確かに、すべては空しく、風を追うようなものだ。


이 외에도 2장 26절, 4장 4절, 4장 16절, 6장 9절 등등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 같다는 말씀입니다. 참 힘이 팍팍 나는 게 아니라, 추욱 하고 빠집니다.

그래도 끈기 있게 꾹 참고 계속 읽어나가면 전도서 마지막 장인 12장에 다음 구절이 나옵니다.

전도서 12장 8절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空の空。伝道者は言う。すべては空。

아, 정말 참 이처럼 기운이 나지 않는 책도 드물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도서만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90편에 보면 모세의 시가 나옵니다.


시편 90편 10절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私たちの齢は七十年。 健やかであっても八十年。 そのほとんどは 労苦とわざわいです。 瞬く間に時は過ぎ 私たちは飛び去ります。

신약성경 야고보서를 볼까요?

야고보서 4장 14절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あなたがたには、明日のことは分かりません。あなたがたのいのちとは、どのようなものでしょうか。あなたがたは、しばらくの間現 れて、それで消えてしまう霧です。


자, 이런 말씀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그래. 고통도 많고 탈도 많은 이 짧은 인생, 빨리 끝내고 어서어서 천국에 갔으며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드시나요?

그렇다면 우리 잠깐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지금 이 주어진 삶, 이 삶은 정말로 그렇게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그저 잠깐 왔다가 가는 덧없는 인생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인생. 누가 주신 것입니까. 우리가 지금 호흡을 하고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을 누가 허락하신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그리고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살아가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이는 다른 말로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작품에 대해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전도서는 우리의 삶을 부정하는 책, 빨리 죽고 천국이나 가자고 하는, 그런 책이 아닙니다.

전도서 9장 4절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しかし、人には拠り所がある。生ける者すべてのうちに数えられている者には。生きている犬は死んだ獅子にまさるのだ。

라고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또한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순간 이 땅에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괴로워해야 하거나 힘들어해야 할 일이 아니라 기쁘고 감사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별로 기쁘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그렇다면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이 땅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또한 죽어갔습니다. 그 중에는 돈이 많은 사람들도 있었고,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죽기 싫어했겠지요. 얼마나 하루하루를 더 살고 싶었겠습니까. 자신이 가진 많은 돈과 권력을 쓸 수 있다면 써서라도 하루 1분 1초를 더 살아보려고 애 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오늘 2019년 8월 4일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아이고, 뭐 돈이 많고 권력이 많고 팔자 좋은 사람이야 오래 살고 싶겠지만, 가진 것도 없고 힘도 없는 우리한테는 그냥 하루하루가 괴롭고 고생이야……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떤 분은 또 그러실 지도 모르겠지요. 그렇다면 이 질문은 어떠십니까. 우리 삶이 정말로 힘들고 괴롭고 고통일 뿐이라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 땅에 오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냥 이 땅에 오셨나요? 이 땅에 오셔서 온갖 수치와 모욕을 다 받으시고, 그것도 모자라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물론 이는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가 생을 마친 후에 하나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우리 죄가 해결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죽고 난 다음만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여에 걸친 공생애 기간을 통해서, 우리가 죽은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한다……가 아닌,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잠시 화제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오늘의 질문을 한 번 드려볼까요? 어떤 시합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가지 경우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느 쪽이 좋습니까.

첫째, 우리가 2대 1로 진 시합.
둘째, 우리가 10대 0으로 지고 있는 시합.

이 두 경우, 물론 둘 다 좋다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 중에서 여러분께서는 어느 쪽이 좋다고 생각되십니까.

첫째의 경우, 비록 2대 1, 점수는 1점 차이밖에 나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이미 시합은 끝났습니다. 우리가 진 것으로 시합이 끝나고 말았어요.

하지만 둘째 경우는 어떻습니까. 점수가 10대 0이에요. 아주 점수 차이가 많이 나버렸습니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큰 점수 차로 지고 있긴 하지만, 아직 시합이 진행 중이에요. 아직 시합이 끝나지 않았다고 한다면, 무엇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길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포기하기에는 아직 일렀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모세의 경우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400여년의 애굽생활을 마치고 성인 남성만 60만 명, 남녀노소를 모두 합치면 아마도 200만명 정도는 되었다고 여겨지는 수많은 사람들, 우리 군마현 전체 인구가 200만명 정도인데, 그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애굽을 탈출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홍해 앞에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큰일 났어요. 길이 막혔습니다. 더 이상 갈 길이 없어요.

그래요. 시간이 있다면 힘을 합쳐서 배를 만들어서 건너든, 아니면 다른 길로 돌아가든 방법은 여러 가지 있었겠지요. 그러나 당시는 이제 시간이 없었습니다.

출애굽기 14장 6절~7절
6.바로가 곧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갈새
7.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そこでファラオは戦車を整え、自分でその軍勢を率い、
選り抜きの戦車六百、そしてエジプトの全戦車を、それぞれに補佐官をつけて率いて行った。

애굽 왕 바로가 애굽 군대, 그것도 특별히 선발한 마차부대와 모든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 민족을 죽이기 위해 추격해오고 있습니다. 당시 최강 선진국이었던 애굽의 군대와, 몇 백 년 동안 종살이를 해온 이들을 비교한다면, 그 숫자는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이스라엘 민족이 200만이 아니라 2000만이라 하더라도 한쪽은 첨단무기로 무장한 군대이고, 다른 한쪽은 완전히 무장해제된 사람들, 전쟁도 모르고 훈련도 안 된 사람들입니다.

이는 앞서 본 시합으로 생각해본다면 이는 점수차이가 10대 0이 아니라 100대 0, 아니, 1000대 0으로 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애굽 군대가 추격해올 때까지의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도 않았습니다.

이길 확률이요? 1%나 되겠습니까? 이는 누가 보더라도 0%입니다. 생각해볼 필요도 없습니다. 상대 자체가 안 되는 것이지요.

이 때 모세의 심정을 생각해보면 참 아찔합니다.


우리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내가 미국이나 유럽에 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기도를 할까 고민을 했습니다. 마침 성경을 찾아보니까, 아주 좋은 구절이 있었어요.

시편 55편 6절~7절
6.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7.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私は言いました。 「ああ 私に鳩のように翼があったなら。 飛び去って 休むことができたなら。
ああ どこか遠くへ逃れ去り 荒野の中に宿りたい。

아~ 정말 멋진 기도문이 아니에요? 그래서 기도를 했습니다. 내가 미국이나 유럽에 가고 싶습니다.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제가 원하는 곳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 저에게 날개를 주십시오.

그런데 주님이 응답해주셨습니다. 날개를 주신 것이 아니라 쇳덩어리를 주셨어요.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크고 무거운 쇳덩어리를 주셨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렇다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쇳덩어리로 미국에 갈 수 있겠습니까. 유럽에 갈 수 있겠습니까. 하늘을 날 수 있게 날개를 달라고 했더니 그런 크고 무거운 쇳덩어리를 주셨다면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쇳덩어리로 하늘을 날 수 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쇳덩어리는 무슨, 지갑에 들어있는 요만한 동전 하나도 하늘로 던지는 순간 떨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어떻게 쇳덩어리로 하늘을 날 수 있겠습니까.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쇳덩어리가 하늘을 날 수 없는 이유. 많이 배운 사람과 적게 배운 사람, 누가 더 많이 이유를 들 수 있겠습니까. 예, 많이 배운 사람이 훨씬 더 많은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한 대학 공대 교수님을 남편으로 둔 부인이 남편을 전도하려고 하는데, 공대 교수님 정도 되니까 아는 게 얼마나 많으셨겠어요.

성경에서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었다는 예수님의 기적을 전해주니까 남편이 이러시더래요.

“여보. 물이 포도주로 바뀐다구요? 아니, 어떻게 H2O가 C6H12O6가 됩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로 5000명을 먹이셨다는 말씀을 했더니, 그 남편 분이 하시는 말씀이, 그것은 물질의 질적인 변화가 아니라 양적 팽창이 일어났다는 것이니, 이는 질량보존의 법칙에 어긋나기 때문에 이것도 역시 불가능하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랬던 이 남편 분이 누구냐 하면 훗날에 한국 포항에 있는 미션스쿨인 한동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낸 김영길 총장님에 대한 이야기라고 합니다.

앞서 모세 이야기로 돌아가보겠습니다. 모세는 그럼 얼마나 배운 사람이었습니까. 출애굽기에 의하면 그는 유대인 레위 지파 부부에서 태어났지만 당시 애굽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학대를 받고 있었는데, 특히 그 때는 유대인이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졌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2장에 보면 모세의 부모는 낳은 아들을 하는 수 없이 작은 상자에 실어서 나일 강에 담아 띄워 보내게 되는데, 그 아이가 애굽 공주에게 발견됩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갓난아기 때부터 나이 마흔 때까지 당시 최고의 선진국인 애굽 왕궁에서 자라면서 최고의 학문을 배웠을 것입니다.

모세에게 있어서 홍해가 갈라지지 않을 이유를 대라고 한다면, 수십 가지, 수백 가지는 더 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 그는 손에 뭘 잡고 있었어요? 예, 지팡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합니다. 홍해 바다 모래사장 위에 글씨를 쓰기 시작합니다. 당시 성인 남성 60만명, 여자와 어린 아이까지 다 합치면 200만 명 정도 되고, 지금 추격해오는 애굽 군대를 향해서 총공격을 한다고 했을 때, 예상 희생자 수와 이길 확률을 막 계산을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모세야…… 모세야……”

그랬더니 “아잇, 지금 바쁘니까 잠깐 좀 계세요.”

그러면서 이제 또 계산을 합니다. 아니면 지금 약 200만명이 빠께쓰……아니, 지금 한일관계를 생각하면 빠께쓰라고 하면 안 되죠. 양동이를 들고 홍해 바닷물을 퍼냈을 때 걸리는 시간을 막 정신 없이 계산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또 부르십니다. “모세야…… 모세야……”

그러니까 또 모세는 신경질을 냅니다.

“아잇, 지금 정신 없는데 왜 자꾸 말을 걸어요. 가만히 좀 계시라니까요.”

만약에 모세가 이랬다면, 여러분, 이게 뭐라구요? 예, 이것이야말로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すべては空しく、風を追うようなものだ)”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헛된 인생, 바람을 잡으려는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헛된 인생을 살지 않았습니다. 바람을 잡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명령합니다.

출애굽기 14장 14절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主があなたがたのために戦われるのだ。あなたがたは、ただ黙っていなさい。」

이것이야말로 믿음의 사람 모세의 놀라운 신앙고백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출애굽기 14장 15절~16절
“1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16.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主はモーセに言われた。「なぜ、あなたはわたしに向かって叫ぶのか。イスラエルの子らに、前進するように言え。
あなたは、あなたの杖を上げ、あなたの手を海の上に伸ばし、海を分けなさい。そうすれば、イスラエルの子らは海の真ん中の乾いた地面を行くことができる。

이렇게 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100대 0, 1000대 0으로 지고 있었던, 아니, 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그들의 상황은 완전히 역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자손들은 어린 아이 하나 다치지 않았고, 애굽 군대들은 모두가 홍해 바다 속으로 잠겨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승리하는 삶,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사는 사람의 모습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어떤 스포츠 경기가 있다고 칩시다. 저는 그 스포츠에 대해서 전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께서는 야구는 잘 아시죠? 그런데 비슷한 것으로 크리켓이라고 하는 스포츠가 있어요. 사실 저도 잘 모릅니다만, 갑자기 우리가 그 스포츠를 해서 이겨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어요.

그러면 여러분께서는 처음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으십니까. 아, 야구랑 비슷하다고 하니까, 공을 잘 던지는 훈련을 해야겠구나. 아니면 공을 방망이로 잘 맞추는 연습을 해야 되겠구나……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그게 틀렸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우선순위가 바뀌었습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운동경기의 규칙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무조건 공만 잘 던져요? 무조건 방망이만 잘 휘둘러요? 이기려고 하면 점수를 따야 하는데 점수를 따는 방법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그 운동경기의 규칙을 알아야 합니다. 규칙을 알지 못하면 아무리 공을 멀리 던져도, 아무리 방망이를 잘 휘둘러도 절대로 점수를 딸 수 없고, 점수를 딸 수 없다면 절대로 이길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건 그야말로 헛되어 바람을 잡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すべては空しく、風を追うようなものだ

우리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이기려면 점수를 따야 하고, 점수를 따려면 규칙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규칙은 어디에 나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에 나와 있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는 뭐라고 나와 있습니까.


레위기 19장 18절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あなたは復讐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民の人々に恨みを抱い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わたしは主である。

여호수아 1장 9절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わたしはあなたに命じたではないか。強くあれ。雄 々しくあれ。恐れてはならない。おののいてはならない。あなたが行くところどこででも、あなたの神、主があなたとともにおられるのだから。」


시편 115편 9절~11절
“9.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10.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11.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イスラエルよ 主に信頼せよ。 主こそ助け また盾。
アロンの家よ 主に信頼せよ。 主こそ助け また盾。
主を恐れる者たちよ 主に信頼せよ。 主こそ助け また盾。

잠언 9장 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主を恐れることは知恵の初め、聖なる方を知ることは悟ることである。

신약성경도 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18절
“16.항상 기뻐하라
17.쉬지 말고 기도하라
18.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いつも喜んでいなさい。
絶えず祈りなさい。
すべてのことにおいて感謝しなさい。これが、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あなたがたに望んでおられることです。


요한복음 13장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新しい戒めを与えます。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

성경에는 온통 규칙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위한 규칙입니까. 우리의 자유를 속박하는 규칙입니까?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기 위한 규칙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승리하기 위한 규칙,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지금 이기고 있는 것 같지가 않습니까. 믿음 안에서 지고 있는 것 같습니까. 실패한 인생을 살아온 것 같습니까. 헛되고 공허하고 바람을 잡는 것만 같은 인생을 보내고 있는 것 같으십니까.

괜찮습니다. 게임은 아직 안 끝났습니다.

날개를 달라고 했는데 쇳덩이를 주셨다고 원망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할 때 그 쇳덩이는 거대한 비행기로 변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을 찬양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규칙,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비결인 성경 말씀대로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을 찬양하며 살아갈 때에, 우리는 그 비행기 일등석에 앉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조종석에 누가 앉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께서 앉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엔진을 거십니다. 그리고 힘차게 활주로를 달리고는 저 하늘 높이 날아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을 믿고 의지할 때 물이 포도주가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을 믿고 의지할 때 홍해가 갈라지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을 믿고 의지할 때 힘차게 활주로를 달려서 저 하늘 높이 날아 오르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103편 3절~5절
3.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4.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5.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主は あなたのすべての咎を赦し あなたのすべての病を癒やし
あなたのいのちを穴から贖われる。 主は あなたに恵みとあわれみの冠をかぶらせ
あなたの一生を 良いもので満ち足らせる。 あなたの若さは 鷲(わし)のように新しくなる。

베드로전서 5장 6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神の力強い御手の下にへりくだりなさい。神は、ちょうど良い時に、あなたがたを高く上げてくださいます。

이제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남은 귀한 우리의 인생 속에서, 주님을 믿고 의지할 때에, 주님께서 주신 이 성경 말씀대로 살아갈 때에, 더 이상 헛되고 바람을 잡는 삶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놀라운 기쁨과 축복으로 가득 찬 삶,
넘치는 은혜로 가득 찬 삶,
이기고 또 이기는 승리하는 삶,
독수리처럼 저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삶,
하나님께서 높이 들어올리시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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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1회 우리들의 예복
2019년 7월 28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1절~14절
"1.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7.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10.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11.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4.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マタイの福音書 22章 1節~14節
"イエスは彼らに対し、再びたとえをもって話された。
「天の御国は、自分の息子のために、結婚の披露宴を催した王にたとえることができます。
王は披露宴に招待した客を呼びにしもべたちを遣わしたが、彼らは来ようとしなかった。
それで再び、次のように言って別のしもべたちを遣わした。『招待した客にこう言いなさい。「私は食事を用意しました。私の雄牛 や肥えた家畜を屠り、何もかも整いました。どうぞ披露宴においでください」と。』
ところが彼らは気にもかけず、ある者は自分の畑に、別の者は自分の商売に出て行き、
残りの者たちは、王のしもべたちを捕まえて侮辱し、殺してしまった。
王は怒って軍隊を送り、その人殺しどもを滅ぼして、彼らの町を焼き払った。
それから王はしもべたちに言った。『披露宴の用意はできているが、招待した人たちはふさわしくなかった。
だから大通りに行って、出会った人をみな披露宴に招きなさい。』
しもべたちは通りに出て行って、良い人でも悪い人でも出会った人をみな集めたので、披露宴は客でいっぱいになった。
王が客たちを見ようとして入って来ると、そこに婚礼の礼服を着ていない人が一人いた。
王はその人に言った。『友よ。どうして婚礼の礼服を着ないで、ここに入って来たのか。』しかし、彼は黙っていた。
そこで、王は召使いたちに言った。『この男の手足を縛って、外の暗闇に放り出せ。この男はそこで泣いて歯ぎしりすることになる。』
招かれる人は多いが、選ばれる人は少ない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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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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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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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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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들의 예복” 私たちの礼服 라고 하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마태복음에 있는 내용입니다만, 이와 비슷한 말씀은 누가복음에도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있는 내용을 잠시 살펴볼까 합니다. 누가복음 14장 16절~24절입니다.

누가복음 14장 16절~24절

16.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1.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するとイエスは彼にこう言われた。「ある人が盛大な宴会を催し、大勢の人を招いた。
宴会の時刻になったのでしもべを遣わし、招いていた人たちに、『さあ、おいでください。もう用意ができましたから』と言った。
ところが、みな同じように断り始めた。最初の人はこう言った。『畑を買ったので、見に行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どうか、ご容赦ください。』
別の人はこう言った。『五くびきの牛を買ったので、それを試しに行くところです。どうか、ご容赦ください。』
また、別の人はこう言った。『結婚したので、行くことができません。』
しもべは帰って来て、このことを主人に報告した。すると、家の主人は怒って、そのしもべに言った。『急いで町の大通りや路地 に出て行って、貧しい人たち、からだの不自由な人たち、目の見えない人たち、足の不自由な人たちをここに連れて来なさい。』
しもべは言った。『ご主人様、お命じになったとおりにいたしました。でも、まだ席があります。』
すると主人はしもべに言った。『街道や垣根のところに出て行き、無理にでも人々を連れて来て、私の家をいっぱいにしなさい。
言っておくが、あの招待されていた人たちの中で、私の食事を味わう者は一人もいません。』」

여기서 보면 이 누가복음은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1차 초청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잔치할 시간이 되자 이 분은 그냥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초청한 사람들에게 직접 종을 보내고는, 자, 이제 잔치 준비가 되었으니까 오십시오……라고 말을 전하지요.

그랬더니 어땠냐 하면 모두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자기는 밭을 샀기 때문에, 자기는 소를 샀기 때문에, 또는 자기가 장가 들었기 때문에 가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기껏 잔치 준비를 하고 미리 초청도 하고 그랬는데, 자기들 사정 때문에 못 오겠다고 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 이유가 보면 모두 자기 개인적인 일, 세상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마지막 사람을 보면 자기 결혼식이 있기 때문에……가 아니에요. 뭐, 자기 결혼식이 있기 때문에 남의 집 잔칫집에 못 간다고 하면 그나마 이해가 되겠습니다만, 자세히 보면 자기가 이미 장가를 들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자기가 신혼이기 때문에, 자기 마누라와 같이 있고 싶기 때문에, 당신 잔치에 못 가겠다……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때 보면 우선순위를 정하지요. 그 우선순위를 보면 그 사람이 어느 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큰 잔치보다도 자기의 개인적인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주인은 당연히 화가 났지요. 자기가 정성을 다해서 잔치를 준비했는데, 초청한 사람들이 잔치보다도 각자의 일을 더 중요시 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주인, 어떻게 했냐 하면, 다음 단계로 접어듭니다. 누가복음 16장 21절을 봅니다.

누가복음 16장 21절
“21.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しもべは帰って来て、このことを主人に報告した。すると、家の主人は怒って、そのしもべに言った。『急いで町の大通りや路地 に出て行って、貧しい人たち、からだの不自由な人たち、目の見えない人たち、足の不自由な人たちをここに連れて来なさい。』


이제 두 번째, 2차 초청으로 넘어갑니다. 처음에 초청했던 사람들은 모두 안 온다고 하니까, 집 주인이 노했다고 하지요? 어쭈, 그래? 그럼 됐다고 그래. 그러면서 하는 말이,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에 나가서 사람들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처음에는 초청을 받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뿐만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특징이 뭐예요?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
貧しい人たち、からだの不自由な人たち、目の見えない人たち、足の不自由な人たち

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를 두고 성경이 빈부차별, 장애인 차별……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래서 이 사람들을 다 불러왔는데, 그래도 아직 자리가 남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이제 제3차 초청입니다.

누가복음 16장 23절
“23.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すると主人はしもべに言った。『街道や垣根のところに出て行き、無理にでも人々を連れて来て、私の家をいっぱいにしなさい。

그러면서 이 주인의 마지막 말이 24절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16장 24절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言っておくが、あの招待されていた人たちの中で、私の食事を味わう者は一人もいません。』」

여기서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招待されていた人たち)>이라고 하는 것은 1차 초청 때 불렀던 사람들, 처음에 초청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사람들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니까 원래 부르기로 했던 사람들, 좋은 음식이 차려진 큰 잔치에 초청된 사람들은 하나도 들어오지 못하고, 오히려 예정에 없었던 사람들이 그 잔치에 참여하여 기쁨을 누렸다는 뜻입니다.

성경 특히 신약에서 <잔치>라고 하면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9장 9절
“9.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御使いは私に、「子羊の婚宴に招かれている者たちは幸いだ、と書き記しなさい」と言い、また「これらは神の真実なことばである」と言った。

마지막 날에 예수님과 함께 드리는 잔치가 바로 이 어린 양의 혼인잔치이지요.

여기서 1차 때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유대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잔치에 들어오지 못하고 2차 초청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2차 초청에서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 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이는 빈부차별이나 장애인 차별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기존 유대인 사회에서 소외 받은 사람들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다 같은 유대인이 아니지요. 예를 들어 제사장이나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이나 율법교사들 같은 사람들은 상류층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어려움, 또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같은 유대인이라 하더라도 소외 당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잔치에 초청을 받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그래도 빈 자리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3차 초청으로 넘어갑니다.

2차 초청에서는 ‘시내 거리와 골목’으로 가서 사람을 불러오라고 했었는데, 3차 초청에서는 ‘길과 산울타리’까지 가서 데려오라고 합니다.

‘시내 거리와 골목’이라고 한다면 이는 그 지역 울타리 내부를 이야기 하지요. 시내 거리와 골목은 그 지역에 있는 길가와 좁은 골목에 있는 사람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유대인은 유대인이지만 길가나 좁은 골목 같은 곳에 있는 소외계층인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런데 3차에서는 ‘길과 산울타리’라고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길’은 시내 거리가 아닙니다. 시외 즉 바깥으로 연결되는 길입니다. 그리고 산울타리는 외부와의 경계를 말하는 것이지요. 이는 다른 말로 이방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까지도 이 잔치에 초청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인의 마지막 말로 알 수 있듯이, 그 동안 소외 계층이나 이방인이라 하더라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은 마지막 때에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청을 받게 되지만, 예수님을 거절한 사람들은 아무리 유대인, 선택 받은 민족이라 하더라도 성대한 예수님의 잔치에는 들어올 수가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누가복음 말씀은 상당히 깔끔합니다. 이해하기가 쉬어요.

자, 그러면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마태복음을 보기에 앞서 누가복음 말씀을 살펴본 이유는, 누가복음은 비교적 내용이 간결하기 때문에 이를 먼저 살펴보고 난 다음에 마태복음을 보시면 더욱 잘 이해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 중 먼저 마태복음 22장 2절을 보시겠습니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天の御国は、自分の息子のために、結婚の披露宴を催した王にたとえることができます。

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이는 어떤 주석서에 의하면 원문 문법상으로 봤을 때, 천국이 어떤 왕과 같은 것이 아니라, '천국은 어떤 왕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베푼 혼인잔치와 같다(天の御国は、ある王が自分の息子のために催した結婚の披露宴にたとえることができる)'고 이해해야 한다……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참 타당한 지적 같습니다. 그러니까 천국이 곧 왕이라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혼인잔치로 말씀하셨다는 것이지요. 그것도 왕이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풀었다고 하니, 얼마나 성대하고 얼마나 정성스럽게 차려진 잔치였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앞서 살펴본 누가복음과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3절에 보면 1차 초청이 나오는데, 청한 사람들이 오기를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금방 포기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2장 4절
“4.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それで再び、次のように言って別のしもべたちを遣わした。『招待した客にこう言いなさい。「私は食事を用意しました。私の雄牛 や肥えた家畜を屠り、何もかも整いました。どうぞ披露宴においでください」と。』

아하, 1차 초청에서 그냥 오라고 했더니 이 사람들이 잔치 내용을 잘 몰라서 그랬나 보구나. 그래, 그러면 이 잔치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내가 얼마나 정성껏 준비한 성대한 잔치인지를 알려주면 오겠지……하고 다시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들이 어떻게 했답니까.

마태복음 22장 5절~6절
“5.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ところが彼らは気にもかけず、ある者は自分の畑に、別の者は自分の商売に出て行き、
残りの者たちは、王のしもべたちを捕まえて侮辱し、殺してしまった。

이런 나쁜 사람들이 있습니까. 기껏 종들을 보내면서까지 오라고 했더니만, 누가복음에서 살펴본 것처럼, 종들을 무시하고 각자 자기 일을 하러 간 것만으로 모자라, 이제 어떤 사람들은 잔치에 초청한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니 당연히 임금님은 화를 냅니다.


마태복음 22장 7절
“7.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王は怒って軍隊を送り、その人殺しどもを滅ぼして、彼らの町を焼き払った。

임금은 이제 자신이 보낸 종들을 무시하고 죽이기까지 한 그들을 진멸하고는 그것만으로도 부족하여 그 동네들을 완전히 멸망시켜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2장 8절~10절을 봅니다.

8.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10.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それから王はしもべたちに言った。『披露宴の用意はできているが、招待した人たちはふさわしくなかった。
だから大通りに行って、出会った人をみな披露宴に招きなさい。』
しもべたちは通りに出て行って、良い人でも悪い人でも出会った人をみな集めたので、披露宴は客でいっぱいになった。

이 부분은 누가복음을 이미 살펴보았으니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본래 초청했던 사람들이 안 온다고 하기에, 네거리 길에 가서 만나는 사람들을 다 모아왔다더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 찼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 특별히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바로 그 다음부터입니다.


마태복음 22장 11절~13절
11.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王が客たちを見ようとして入って来ると、そこに婚礼の礼服を着ていない人が一人いた。
王はその人に言った。『友よ。どうして婚礼の礼服を着ないで、ここに入って来たのか。』しかし、彼は黙っていた。
そこで、王は召使いたちに言った。『この男の手足を縛って、外の暗闇に放り出せ。この男はそこで泣いて歯ぎしりすることになる。』

자, 1차로 초청을 했던 사람들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다 불러다가 자리를 채웠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 거기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당신은 왜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왔냐고 하자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임금이 화를 내서 그 사람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졌다고 하지요.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사람은 꾸짖음을 당한 것일까 한 번 생각해보았습니다.

제가 이 글을 맨 처음 읽을 때 느꼈던 것은, 아니, 네거리 길가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는 대로 데려오라고 했다면서요. 그래서 종들이 길거리에 나가서 선한 자나 악한 자나 그냥 만나는 대로 다 데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복을 안 입었다고 혼이 나요? 아니, 무슨 예복을 항상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있나요?


얼마 전에 보니까 요즘 영국 귀족들은 어딜 가든지 누군가가 돌아가셨을 때 입을 수 있는 상복을 항상 가지고 다닌다고 그러더라구요. 하지만 예수님 당시 사람들, 그것도 귀족도 아닌 일반 서민들이 항상 예복을 가지고 다닐 일이야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걸 입지 않았다고 내쫓겨야 한다는 것은 좀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열왕기하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열왕기하 10장 22절
“예후가 예복 맡은 자에게 이르되 예복을 내다가 바알을 섬기는 모든 자에게 주라 하매 그들에게로 예복을 가져온지라”

エフーが衣装係に、「バアルの信者すべてに祭服を出してやれ」と命じたので、彼らのために祭服を取り出した。

이 기록은 북 이스라엘 왕 예후가 바알 선지자들을 죽이기 위해서 함정에 빠뜨리게 하려는 장면입니다만, 여기에 보면, ‘예복 맡은 자’ 라고 되어 있으며, 그가 사람들에게 예복을 나누어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는 기원전 800년대의 일이고, 이와 같은 문화가 예수님 당시까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우리는 이 기록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다른 사람들은 예복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지목했다고 하는데, 만약에 예복을 입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이 한 사람만 내쫓겼다고 보기에는 부자연스럽습니다. 오히려 예복을 안 입은 사람은 이 사람뿐이었다고 하는 것이 문맥 흐름상 타당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다음은 둘째로, 이 사람이 예복을 입을래야 입을 수 없었다면 내쫓김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여기서 임금은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하는데, 애써 사람을 불러놓았는데 그 사람이 아무리 예복을 입고 싶어도 어떤 사정이 있어 입을 수 없었는데 이를 두고 내쫓았다고 하면 공의로운 하나님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이렇게 본다면 한다면 결론은 하나입니다. 왕이 초청한 손님들을 위해 예복을 주는 고대 문화가 당시까지 남아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분명히 자신이 원했다면 얼마든지 예복을 입을 수 있었다고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내쫓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 예복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예복, 천국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 다른 곳에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을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는가 하는 것을 살펴봅니다.

요한복음 3장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イエスは答えら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人は、新しく生まれなければ、神の国を見ることはできません。」

우리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또 하나 중요한 구절을 기억해야 해겠습니다.

자, 오늘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가장 처음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을까요. 마태복음 4장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この時からイエスは宣教を開始し、「悔い改めなさい。天の御国が近づいたから」と言われた。

천국이 멀리 있을 때, 심판이 멀리 있을 때에는 네 멋대로 살아도 괜찮아. 하지만 이제 천국이 가까이 왔다. 심판의 날이 바로 눈앞에 닥쳤다. 이제 그렇다면 빨리 회개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다급하셨으면 공생애를 시작하자마자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회개였겠습니까.

여기까지의 말씀들을 세 가지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듭나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라는 예복을 입고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2장 10절에 보니 뭐라고 되어 있었어요?
“10.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しもべたちは通りに出て行って、良い人でも悪い人でも出会った人をみな集めたので、披露宴は客でいっぱいになった。

참 이상합니다. 아니, 천국 하나님 나라 잔치인데 선한 자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악한 자도 데려올 수 있다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 이상하지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왜 괜찮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무리 악한 자라 하더라도 회개라는 예복을 입고 거듭나면 괜찮다는 것입니다. 이 회개라는 예복은 우리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져야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인간의 힘으로 반성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별로 힘이 없습니다. 흙탕물을 물컵에 담아서 가만히 놓아보세요.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 맑아집니다. 하지만 그게 정말 맑은 건가요? 젓가락으로 휘 저으면 또다시 시커멓게 되고 맙니다. 그것이 인간의 힘으로 반성한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반성해봤자, 아무리 죄를 짓고 교도소에 들어갔다 와봤자 또다시 죄를 짓게 되고 맙니다. 인간은 그토록 참 연약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계시록 7장 14절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そこで私が「私の主よ、あなたこそご存じです」と言うと、長老は私に言った。「この人たちは大きな患難を経てきた者たちで、その衣を洗い、子羊の血で白くしたのです。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피에 우리 죄를 씻고 회개하여야 진정으로 흰 예복을 입고, 거듭난 모습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가 내쫓긴 곳이 어디입니까. 바깥 어두운 데라고 하지요. 이는 지옥입니다. 지옥이 어떤 곳입니까.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지옥에 떨어진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누가복음 16장 24절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金持ちは叫んで言った。『父アブラハムよ、私をあわれんでラザロをお送りください。ラザロが指先を水に浸して私の舌を冷 やすようにしてください。私はこの炎の中で苦しくてたまりません。』

그에 대해서 바로 앞 16장 19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누가복음 16장 19절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ある金持ちがいた。紫の衣や柔らかい亜麻布(あまぬの)を着て、毎日ぜいたくに遊び暮らしていた。

오해하지 마십시오. 부자라고 해서 다 지옥에 떨어진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호화롭게 즐기기만 하던 부자, 자비를 베풀지 않았던 그는 지옥에 떨어진 후, 물 한 방울을 달라며 아브라함에게 호소를 합니다. 그렇게 처참한 곳이 바로 지옥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곳은 뭐 경험 삼아 가본다 하더라도 지옥에만은 절대로 가서는 안 됩니다. 근처에도 가서는 안 되지요.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내쫓긴 사람이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를 간다는 표현은 성경에 종종 나오는 표현입니다만, 특별히 신약에서는 그 감정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억울함입니다. 억울함이라고 하는 것은 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후회하는 억울함입니다.

지옥에 떨어진 그들이 하는 가장 큰 후회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회개하지 않은 후회일 것입니다. 내가 회개할 걸. 여기에 떨어지기 전에 회개할 걸. 회개만 했다면, 회개의 흰 옷, 회개의 예복만 입었다면, 주님께서 주시는, 십자가의 피로 깨끗하게 씻긴 회개의 예복을 입기만 했었다면 나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하지만 이미 심판이 내려진 후에는 아무리 후회를 해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이지요.

이제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늦기 전에, 회개해야 합니다. 거듭나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보혈에 우리의 죄를 씻고 거듭난 모습으로 회개라는 이름의 흰 예복을 입음으로 말미암아 천국으로 들어가서 어린양의 혼인잔치, 큰 기쁨으로 충만한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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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0회 세 가지 찬양
2019년 7월 2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37절~40절
"37.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ルカの福音書 19章37節~40節
“イエスがいよいよオリーブ山の下りにさしかかると、大勢の弟子たちはみな、自分たちが見たすべての力あるわざについて、喜 びのあまりに大声で神を賛美し始めて、
こう言った。「祝福あれ、主の御名によって来られる方、王に。天には平和があるように。栄光がいと高き所にあるように。」
するとパリサイ人のうちの何人かが、群衆の中からイエスに向かって、「先生、あなたの弟子たちを叱ってください」と言った。
イエスは答えられた。「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もしこの人たちが黙れば、石が叫び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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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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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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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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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세 가지 찬양” 三つの賛美 라고 하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제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십니다. 이 때는 오늘 말씀에도 보이는 것처럼 예루살렘 전체가 떠들썩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37절~38절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시겠습니다.

37.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イエスがいよいよオリーブ山の下りにさしかかると、大勢の弟子たちはみな、自分たちが見たすべての力あるわざについて、喜 びのあまりに大声で神を賛美し始めて、
こう言った。「祝福あれ、主の御名によって来られる方、王に。天には平和があるように。栄光がいと高き所にあるように。」

마태복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21장 7절~9절

“7.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ろばと子ろばを連れて来て、自分たちの上着をその上に掛けた。そこでイエスはその上に座られた。
すると非常に多くの群衆が、自分たちの上着を道に敷いた。また、木の枝を切って道に敷く者たちもいた。
群衆は、イエスの前を行く者たちも後に続く者たちも、こう言って叫んだ。「ホサナ、ダビデの子に。祝福あれ、主の御名によって来 られる方に。ホサナ、いと高き所に。」

여기서 <호산나>라고 하는 말씀은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사야서를 봅니다.

이사야 11장 10절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その日になると、エッサイの根はもろもろの民の旗として立ち、国々は彼を求め、彼のとどまるところは栄光に輝く。

이사야서는 특히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많은 것이 특징 중 하나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도 돌아오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이새>(エッサイ)는 다윗의 아버지 이름입니다. 그 뿌리에서 왕 중의 왕 메시야가 오신다는 예언 그대로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족보로 볼 때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자 온 동네에 찬양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찬양이라고 하면 노래만을 떠올리기 십상인데, 그건 너무나도 좁은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찬양예배라고 하면 어떤 예배가 떠오르십니까. 말씀에 대한 내용은 적고 주로 음악과 노래로서 진행하는 예배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 한 번 <찬양>이라는 뜻부터 정리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찬양>이라고 하는 것은, “아름답고 훌륭함을 크게 기리고 드러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문으로는 왕의 덕을 찬양하다, 업적을 찬양하다, 효행을 찬양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왕의 덕을 찬양하고 업적을 찬양하고 효행을 찬양하는데 꼭 노래를 불러야 하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말로도 얼마든지 이와 같은 찬양을 표현할 수가 있겠지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할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꼭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불러야지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을 세 가지, 믿음으로 드리는 찬양, 말씀으로 드리는 찬양, 그리고 행함으로 드리는 찬양으로 정리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먼저 믿음으로 드리는 찬양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アブラムは主を信じた。それで、それが彼の義と認められた。

로마서 1장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

福音には神の義が啓示されていて、信仰に始まり信仰に進ませるからです。「義人は信仰によって生きる」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냥 아, 그래, 성경에 있는 것을 나는 믿어…… 그것으로 끝인가요? 만약에 그것이 믿음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성경이 아닌, 예를 들어서 역사책을 읽을 경우는 어떻습니까. 1700몇 년에 어디서 누가 어떤 일을 했고, 1800몇 년에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났고……이것을 믿는 것도 그렇다면 역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둘이, 성경을 읽고 그 내용을 믿는다는 것과, 역사책을 읽고 그 내용을 믿는다는 것이 서로 차이가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차이가 없을까요? 아니요. 분명히 있습니다. 적어도 몇 백 년 전에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도 살아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건들은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가치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 개인과는 그리 큰 관계가 없는 경우도 많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성경은 어떻습니까. 성경을 단순히 역사책을 읽는 정도로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이는 그야말로 껍데기만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과거의 기록만을 적어놓은 책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살아서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록, 예수님에 대한 기록, 성령님에 대한 기록이라는 사실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드리는 찬양은 어떤 찬양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이 선택이라고 하는 것만 잘 하면 그야말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학생이나 수험생이 치르는 시험문제 같은 데에 나오는 선택지는 4개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만 경우에 따라서는 5개나 그 이상인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선택지는 대체적으로 2개 정도일 때가 많지 않을까 합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뭐냐 하면, 세상적인 방법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믿음의 방법을 따를 것인가 하는 경우입니다.

“이봐, 예수를 믿는 것도 좋지만, 좀 적당히 믿어.”

이 말, 별것 아닌 것 같으시죠? 하지만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서 또 오해를 하실까봐 말씀을 드리자면, 여기서 <세상적인 방법>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좀 극단적인 의미로 말씀을 드리자면, 집에 들어가려고 해요. 그러면 손으로 문을 열어야죠. 그런데 아니야. 이런 세상적인 방법을 의지하면 안돼. 기도하고 문이 열리기를 간구해야지…… 이러시라는 게 아닙니다.

세상적인 방법이라고 하는 것은, 정확하게 말씀 드리자면 <믿음의 방법>에 반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 중에서도 잠언을 많이 읽으시는 분들이 계신데, 거기에 보면 세상적인 방법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말이 바로 ‘뇌물’입니다.

잠언 15장 27절
“이익을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해롭게 하나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살게 되느니라”

利得を貪る者は自分の家族を困らせ、賄賂を憎む者は生きながらえる。

잠언 17장 23절
“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

悪しき者は人の懐から賄賂を受け取り、さばきの道を曲げる。

이와 같은 뇌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라,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믿음 안에서 취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방법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에 어떤 문제에 봉착하는 경우, 믿음의 방법에 반하기는 하지만, 세상적인 방법으로, 편법을 쓰면 왠지 잘 풀릴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믿음의 방법,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면 왠지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고, 잘 안 될 것만 같은데, 그냥 눈 딱 감고 세상적인 방법, 나쁜 일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이번 한 번 만 하면 잘 될 것처럼 생각될 때…… 바로 그 때가 중요한 갈림길인 것입니다. 그 때가 무슨 갈림길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찬양을 드리는 삶을 살 수 있는지 없는지, 하나님께 우리 믿음의 찬양을 드릴 수가 있는지 없는지의 갈림길인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그 때 우리는 세상적인 방법이 아닌 믿음의 방법 쪽을 택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43장 18절~20절

18.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先のことに心を留めるな。昔のことに目を留めるな。
見よ、わたしは新しいことを行う。今、それが芽生えている。あなたがたは、それを知らないのか。必ず、わたしは荒野に道を、荒れ地に川を設ける。
野の獣、ジャッカルや、だちょうも、わたしをあがめる。わたしが荒野に水を、荒れ地に川を流れさせ、わたしの民、わたしの選んだ者に飲ませるからだ。

믿음에 반하는 이전 일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사막에 길을 내고 강을 내시는 하나님, 광야에 물을 내시는 하나님, 홍해를 가르시는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 속에서 믿음의 찬양을 드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둘째로 말씀으로 드리는 찬양입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에게 있어서 성경 말씀은 우리의 무기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를 보면 말씀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 중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마지막 구절. 요한계시록 22장 21절, 기억하십니까?


요한계시록 22장 21절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主イエスの恵みが、すべての者とともにありますように。

성경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작은 어떻습니까.

창세기 1장 1절에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

그리고 요한복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장 2절~3절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この方は、初めに神とともにおられた。
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によらずにできたものは一つもなかった。

여기서 <그>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즉, 만물 중에서 예수님 없이 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창세기 1장 1절부터 이는 예수님의 기록이라고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에서 예수님이 사라집니다. 성경 말씀이 사라집니다. 십자가가 사라집니다. 서로 이야기 하는 것이 돈 이야기, 재산 이야기, 직분 이야기, 나아가 이제 정치 이야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을 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고 하고, 나아가 목사라고 하는 분들까지도 이제 세상 정치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인터넷 유튜브까지 개설해가면서 세상 이야기, 정치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그러라고 십자가에서 못 박고 죽으셨습니까. 저도 정치 이야기 상당히 좋아합니다. 페이스북 같은 곳에 올라오는 정치 이야기들을 보면 저도 막 쓰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제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정치 이야기나 세상 이야기 같은 거나 하게 하기 위해서 이제까지 나를 인도해 오셨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고린도전서 2장 2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なぜなら私は、あなたがたの間で、イエス・キリスト、しかも十字架につけられたキリストのほかには、何も知るまいと決心していたからです。

당시 최고 엘리트였던 바울도 정치나 경제, 사회와 같은 내용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었기에 세상적인 말을 하기 원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삶 속에서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을 증언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경이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말씀이요, 예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타내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말씀으로 드리는 찬양이라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마지막으로 행함으로 드리는 찬양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아니, 근본적으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있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건가요?
헌금을 내면 예수님을 믿는 건가요?
세례를 받으면 예수님을 믿는 건가요?
직분을 받으면 예수님을 믿는 건가요?

이는 모두 다 교회 안에서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생활만 잘 하면 우리는 그것으로 충분한 건가요? 마태복음 11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バプテスマのヨハネの日から今に至るまで、天の御国は激しく攻められています。そして、激しく攻める者たちがそれを奪い取っています。

여기서 <침노>는 공격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천국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물론 당연히 천국은 우리의 노력 만으로는 갈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우리 죄가 해결되어야 하지만,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우리의 죄를 조금도 해결할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해야지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씻은 후에야 비로소 천국에 들어갈 기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천국은 가만히 앉아, 아무 것도 하지 않더라도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을 빼앗기 위해서, 천국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끊임없이 공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노력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행함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행함에 있어서 너무나도 부족한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로마서 16장 19절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あなたがたの従順は皆の耳に届いています。ですから、私はあなたがたのことを喜 んでいますが、なお私が願うのは、あなたがたが善にはさとく、悪にはうとくあることです。


누가복음 6장 37절~38절
37.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38.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もさばかれません。人を不義に定めてはいけません。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も不義に定められません。赦し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も赦されます。
与え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も与えられます。詰め込んだり、揺すって入れたり、盛り上げたりして、気前良 く量って懐に入れてもらえます。あなたがたが量るその秤で、あなたがたも量り返してもらえるからです。」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사람들은 참으로 남들을 비판합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합니다. 이는 교회 안에서도 벌어지고 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남들보다 잘나면 얼마나 잘났기에 큰 소리로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정치인들을 보십시오. 상대방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럼 본인들은 참으로 흠이 없나요?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정치인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다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비판하는 데에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 지혜로워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웃 사랑의 으뜸은 우리가 가진 것을 주는 것입니다. 이는 돈이나 재산 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웃을 위해 시간을 줄 수가 있습니다. 수고를 줄 수도 있습니다. 마음을 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행함으로 드리는 찬양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에서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돌들이 찬양하리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돌멩이가 무엇입니까. 지금 여기까지 오시는 길에 돌멩이가 몇 개나 있었는지 세면서 오신 분 계십니까. 돌멩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들, 하나도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찬양을 멈출 때, 우리 입에서, 우리 삶 속에서 찬양이 멈출 때,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우리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곳에서, 정말 하찮다고 생각해왔던 곳에서부터 예수님의 찬양이 울려 퍼지고 우리에게 있던 축복의 촛대는 생각지도 않은 곳으로 옮겨질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わたしはすぐに来る。あなたは、自分の冠をだれにも奪われないように、持っているものをしっかり保ちなさい。

우리 모두 믿음으로 드리는 찬양, 말씀으로 드리는 찬양, 그리고 행함으로 드리는 찬양을 통해서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주님의 사랑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면류관을 굳게 지키고, 마지막 날에 주님으로부터 잘했다고 칭찬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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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9회 주님의 뜻대로
2019년 7월 1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28절~31절
“28.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マタイの福音書 21章28節~31節
“ところで、あなたがたは、どう思いますか。ある人にふたりの息子がいた。その人は兄のところに来て、『きょう、ぶどう園に行って働いてくれ』と言った。
兄は答えて『行きます。お父さん』と言ったが、行かなかった。
それから、弟のところに来て、同じように言った。ところが、弟は答えて『行きたくありません』と言ったが、あとから悪かったと思って出かけて行った。
ふたりのうちどちらが、父の願ったとおりにしたのでしょう。」彼らは言った。「あとの者です。」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告げます。 取税人や遊女たちのほうが、あなたがたより先に神の国に入ってい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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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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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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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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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주님의 뜻대로” 主の願ったとおりに 라고 하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서 역시 마태복음 21장 28절~31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지난 주 말씀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뉘우침>이란 후회와 회개가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우리 과거에 부끄러운 일, 후회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멈춰서는 게 아니라 회개하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언제나 받아주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또 다른 각도로 이 말씀을 우리가 받음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주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 중에서도 특히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은 예수님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행적의 중심은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에 대한 기록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해줍니다.

하지만 우리가 복음서에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하는 점만이 아니라, 그 말씀이 누구를 향해서 하신 말씀인가 하는 것도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에 보다 대단히 큰 근거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말씀은 누구를 향해서 하신 말씀인가요.

마태복음 21장 23절 중반까지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それからイエスが宮に入って教えておられると、祭司長たちや民の長老たちがイエスのもとに来て言った。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당시 성전에 있었던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 하신 말씀의 결론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는 오늘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31절 후반 부분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取税人たちや遊女たちが、あなたがたより先に神の国に入ります。

이게 참 놀라운 결론입니다.

당시에는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받고 율법을 어기면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대제사장이나 장로들,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학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스스로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믿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율법을 지도하는 위치, 이른바 기득권 세력들,(既得権益層) 사회지도층 인사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세리나 창녀들은 어땠을까요. 그들은 율법에서 제일 먼 존재, 구원에서 제일 먼 곳에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 나라에는 가장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잘 지킨다고 하는 그들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에서 가장 먼 존재, 구원에서 제일 먼 존재인 세리나 창녀들이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놀라운 말씀을 하셨을까요.

먼저 오늘 본문 말씀들, 지난 주에도 살펴보았으니까 여러분께서는 모두 잘 기억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만, 그래도 또 혹시 모르니까 다시 한 번 간략하게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는 두 아들이 나오지요. 맏아들과 둘째 아들입니다.

맏아들의 경우를 살펴보면,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했더니, 대답은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가지 않았지요.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대답은 순종, 행동은 불순종. 이것이 맏아들이었습니다.

반면 둘째 아들의 경우를 살펴보면,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했더니, 대답은 싫소이다. 안 가겠다 하고 거절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갔지요. 왜 갔느냐 하면, 예, 뉘우쳤기 때문에, 자기 잘못을 후회하고 회개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말을 따라서 포도원에 간 것입니다. 역시 이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둘째 아들의 경우를 보면 대답은 불순종, 그러나 회개한 후 그의 행동은 순종……. 이것이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맏아들은 말로만 순종, 행동은 불순종

둘째 아들은 말로는 불순종, 그러나 행동은 뉘우치고 순종이었습니다.

여기까지 말씀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질문을 던지셨지요. 31절 전반부입니다.

마태복음 21장 31절 전반부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二人のうちのどちらが父の願ったとおりにしたでしょうか。」

우리는 이제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했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는 맏아들과 둘째 아들이 등장합니다. 이 말씀을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 말하자면 종교적 지도자들, 기득권자들에게 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에서는 세리들과 창녀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맏아들을 종교적 지도자들, 그리고 둘째 아들을 세리와 창녀들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당시에 종교적 지도자들, 기득권자들은 어땠습니까. 정말로 믿음이 좋았나요? 당시 그들에게는 문제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이는 제 추측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가장 많이 꾸짖은 사람들이 바로 이 당시 종교지도자들, 기득권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목에 힘을 주고 다녔습니다. 거리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 모인 곳에서 대우 받기를 좋아했습니다. 남들이 들으라고 큰 소리로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마태복음 23장 3절~7절
“3.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ですから、彼らがあなたがたに言うことはすべて実行し、守りなさい。しかし、彼らの行いをまねてはいけません。彼らは言うだけで実行しないからです。
また彼らは、重くて負いきれない荷を束ねて人々の肩に載せるが、それを動かすのに自分は指一本貸そうともしません。
彼らがしている行いはすべて人に見せるためです。彼らは聖句を入れる小箱を大きくしたり、衣の房を長くしたりするのです。
宴会では上座を、会堂では上席を好み、
広場であいさつされること、人々から先生と呼ばれることが好きです。

마태복음 6장 5절
“5.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また、祈るとき偽善者たちのようであってはいけません。彼らは人々に見えるように、会堂や大通りの角に立 って祈るのが好きだからで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彼らはすでに自分の報いを受けているのです。

겉으로는 믿음이 좋은 척, 겉으로는 깨끗한 척, 거룩한 척을 하는 그들을 예수님께서 모르시겠습니까.

그래서 마태복음 23장 27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3장 27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わざわいだ、偽善の律法学者、パリサイ人。おまえたちは白く塗った墓のようなものだ。外側は美しく見えても、内側は死人の骨やあらゆる汚れでいっぱいだ。

아무리 시신을 묻어놓고 그 바깥을 하얗게 칠해서 깨끗하게 보이도록 해놓아도 그 속은 시체가 썩어가고 온갖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다고 하는데, 당시 종교지도자들,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이와 같은 모습이었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지만 세리들, 창녀들은 어떻습니까. 그렇다고 또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당시 세리나 창녀가 모두 거룩하고 천국에 간다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너희들은 회개하지 않지만, 차라리 과거에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사회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하물며 율법적으로나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모든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온다면, 즉, 처음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반항했었다 하더라도 나중에 뉘우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둘째 아들과 같은 그들이, 말로만 믿는 척, 겉으로만 순종하는 척만 하고 결국은 회개하지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는 너희들 보다 천국에 먼저 들어가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좀 화제를 바꾸어볼까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구원의 확신에 대한 질문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무엇입니까. 나는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았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다. 이 확신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확신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럼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구원의 확신이 있으십니까? 지금 이 순간 죽더라도 나는 틀림없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예, 아멘.

이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일본에서 살다가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당시 대학부 예배에 처음 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이제 처음 왔으니까 새신자 등록카드 같은 것을 쓰라고 했던 것 같아요.

거기에는 뭐 이름이나 주소 같은 것들을 적는 곳도 있었습니다만, 제 기억에 이런 것도 적혀 있더라구요?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예, 아니오.

그래요. 뭐 예전부터 교회에 다니고 있는 성도님들이라면 어느 정도 답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전 좀 그 때 당황했습니다. 아니, 그게 새신자 등록카드잖아요? 저는 뭐 일본에서 신앙생활을 계속 했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좀 당황스러운데 오늘 처음으로 교회에 나온 사람들한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맞는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그 때 처음 나온 분이 저만이 아니었는데, 역시 어떤 다른 분이 그 종이를 들고 질문을 하더라구요.

“이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는 지금 반드시 대답해야 하느냐”

그러니까 그 서류를 받으시는 분이 하시는 말씀이 “이 부분은 아주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반드시 대답을 해주셔야 합니다”라고 하더군요.

이 말을 들은 그 분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럼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ㅎㅎ
성경에 보면 구원의 확신이 강한 분들, 꽤 많이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이 구원의 확신이 강한 분일까요? 장담할 수 있습니다.

바로 당시 종교지도자들, 앞서 말씀 드린 대제사장이나 장로들,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학자들, 예수님께서 꾸짖으셨던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을 잠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0절~14절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二人の人が祈るために宮に上って行った。一人はパリサイ人で、もう一人は取税人であった。
パリサイ人は立って、心の中でこんな祈りをした。『神よ。私がほかの人たちのように、奪い取る者、不正な者、姦淫する者でないこと、あるいは、この取税人 のようでないことを感謝します。
私は週に二度断食し、自分が得ているすべてのものから、十分の一を献げております。』
一方、取税人は遠く離れて立ち、目を天に向けようともせず、自分の胸をたたいて言った。『神様、罪人の私をあわれんでください。』
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が、義と認められて家に帰ったのは、あのパリサイ人ではなく、この人です。だれでも自分を高くする者は低くされ、自分を低くする者は高くされるのです。」

이 두 사람 중에서 구원의 확신이 누가 있겠습니까. 예, 바리새인입니다. 그는 분명히 구원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의 입에서 감사가 넘쳐납니다. 그러면서 세리를 보고는 경멸을 합니다. 아마도 그는 생각했겠지요. 나는 구원을 받았지만 저 세리는 구원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쯧쯧쯧……

반면에 이 세리는 어떻습니까. 구원의 확신이 있었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당당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리, 어떻습니까. 성전 안으로도 제대로 못 들어왔습니다. 저기 멀리 서 있어요. 감히 하늘도 쳐다보지 못합니다.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교회 저기 바깥에 서서 십자가도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주여…주여…제가 죄인입니다…불쌍히 여기소서……하고 눈물만 흘렸을 것입니다. 그에게 구원의 확신이요? 아니요. 없었어요.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이 죄 많은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간절한 회개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를 물리치시고 이 세리의 기도를 기쁘게 받으셨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강한 구원의 확신을 가졌던 사람들, 대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 율법학자들, 그들이 했던 일들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의 교만이 하늘을 찌르더니 마침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던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구원의 확신, 누가 가장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을까요. 분명합니다.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 구원의 확신이요? 당연히 있겠지요. 내가 그렇게 문제를 일으키고 나쁜 일을 저질러도 나는 천국에 간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토록 당당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구원의 확신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진정한 구원의 확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주심으로 우리를 대속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확신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 어쩌면 잘못하면, 믿음의 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런 막무가내 식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 이는 마치 안전띠 하나 매고는, 이제 나는 괜찮다면서 속도 무시, 신호 무시, 다른 차량들 무시해가면서 운전하는 것, 그러면서 자기가 안전할 것이라고 바라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실제로 이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고 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다치는 것도 시간 문제지요. 자기만 다치나요? 자칫하면 애꿎은 다른 사람한테까지도 피해를 입히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확신이 아닙니다. 무모한 확신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구원의 확신이 진정한 확신인지, 아니면 무모한 확신인지,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호세아 6장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ホセア書 6章 3節
私たちは知ろう。主を知ることを切に追い求めよう。主は暁のように確かに現れ、大雨のように私たちのところに来られる。地を潤す、後の雨のように。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을 알자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알아야 하겠습니까.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예, 맞습니다. 그게 틀렸다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에는 다음과 갈이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からだを殺しても、たましいを殺せない者たちを恐れ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たましいもからだもゲヘナで滅ぼすことができる方を恐れなさ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처럼 하나님은 두려운 하나님이기도 하시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과 두려운 하나님이라는 이 두 사실이 모두 알아야지만 진정한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한 번 마음 속으로 한 사람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정말 이 사람은 절대로 천국에 못 갈 것이다……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더도 말고 딱 한 사람만 떠올려 보십시오. 어떠세요? 생각 나셨나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사랑의 하나님과 두려운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절대로 천국에 못 갈 것 같은 바로 그 사람이 우리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가게 되고, 그 영광스러운 뒷모습을 우리는 멀리서 지켜보게 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천국에 막 들어가려고 하는 그 사람을 뿌리치고 내가 먼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함께 천국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기를 소망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16장 2절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人には自分の行いがみな純粋に見える。しかし、主は人の霊の値打ちを量られる。

여러분, 우리 자신을 한 번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남들보다 의롭습니까? 우리가 우리 이웃보다 대단한가요? 설령 그렇게 생각된다 하더라도 오십보 백보, 아니요, 오십보 오십보입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나 자신이나 내가 제일 미워하는 사람이나 다 거기서 거기인 것입니다. 마지막 날 심판대 앞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내 과거에 대해서 하나하나 적힌 책이 읽혀진다면 그 앞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新しい戒めを与えます。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

서로 용서해주고 서로 사랑해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 예수님의 뜻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사랑의 하나님, 그리고 두려운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주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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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8회 새로운 삶
2019년 7월 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28절~31절
“28.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マタイの福音書 21章28節~31節
“ところで、あなたがたは、どう思いますか。ある人にふたりの息子がいた。その人は兄のところに来て、『きょう、ぶどう園に行って働いてくれ』と言った。
兄は答えて『行きます。お父さん』と言ったが、行かなかった。
それから、弟のところに来て、同じように言った。ところが、弟は答えて『行きたくありません』と言ったが、あとから悪かったと思って出かけて行った。
ふたりのうちどちらが、父の願ったとおりにしたのでしょう。」彼らは言った。「あとの者です。」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告げます。 取税人や遊女たちのほうが、あなたがたより先に神の国に入ってい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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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새로운 삶” 新しい人生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두 아들이 등장합니다. 개역개정 성경에는 맏아들과 둘째 아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사실 이 부분은 번역본에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번역본에는 한쪽이 맏아들이고 다른 한쪽이 동생이라고 되어 있는데 또 어떤 번역본에는 형과 동생이 뒤바뀐 경우도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어 성경을 보면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예전 신개역판은 현재 한글성경과 같은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만, 얼마 전에 새로 나온 신개역2017판에는 한글성경과는 뒤바뀐 순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보면 어느 쪽이 형이고 동생이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구분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오늘은 편의상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 성경을 기준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 말씀, 길이로 보면 4절 밖에 안 되는 말씀입니다만, 여기에 담긴 내용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그 중 한 가지 부분에 주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부분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이를 바탕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깨닫는 이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선 두 아들의 대답과 행동의 차이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하지요.

어느 날 아버지가 맏아들한테,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자 맏아들은 가겠다고 말은 했지만 결국 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둘째 아들, 아주 당돌합니다. 좀 있다 가겠습니다, 도 아닙니다. 가긴 가야 할 텐데 제가 좀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요…….라고 변명도 안 합니다. “싫습니다(行きたくありません)”라고 아주 단호하게 거절을 하지요.

친구가 부탁을 하는데 이를 거절할 때에도 좀 핑계를 대거나 아니면 좀 우회적으로 부드럽게 거절할 법도 한데,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부탁하는데도, “싫소이다” 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는 아무리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가 들어도 좀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딱 잘라서 거절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 말씀에 따르겠다고 대답은 했어요. 하지만 결국 가지는 않았다는 것이죠. 반면에 둘째 아들은 어땠냐 하면 아주 버르장머리 없게 거절을 하긴 했지만, 나중에 뉘우치고는 포도원에 가서 일을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우선 맏아들입니다.

아버지가 말씀을 하셨을 때, 이를 따르겠다고 대답을 해놓고는 결국 안 따랐습니다.

다음은 둘째 아들이지요.

역시 아버지가 말씀을 하셨을 때, 이를 거절한다고 대답해 놓고서는 결국 따랐습니다.

물론, 아버지가 가라고 했을 때, 예, 가겠습니다, 하고 갔다거나, 아니면 싫습니다, 하고 안 갔다거나 하면 이는 구분하기 쉽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이 두 아들의 대답과 행동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맏아들의 경우 포도원에 가라고 하신 아버지의 말씀에 대해서, 가겠다고 대답한 다음 결국 안 갔습니다. 자세히 보면 <가겠다>라는 ‘대답’과 <안 갔다>는 ‘행동’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말만 하고 안 간 것이지요.

반면에 둘째 아들의 경우를 보면, 처음에는 <안 가겠다>는 ‘대답’과 <갔다>는 ‘행동’ 사이에는 어떤 말이 하나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예, 잊어버리셨을 수도 있으니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1장 30절 말씀입니다.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それから、弟のところに来 て、同じように言った。ところが、弟は答えて『行きたくありません』と言ったが、あとから悪かったと思って(思い直し)出かけて行った。

그렇습니다. 맏아들의 경우에는 간다고 말만 해놓고는 대답과 안 갔다고 하는 행동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의 경우에는 안 가겠다는 대답과 갔다고 하는 행동 사이에 바로 이 ‘뉘우침’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주목해야 할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이 마음이 바뀌어서, 변덕을 부려서……가 아닙니다. 이 <뉘우침>에는 중요한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담겨 있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는 후회이고, 다음은 회개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면 어떻습니까. 자랑스러우십니까. 내 인생 돌아보면 조금도 후회가 없습니까. 부끄러운 점이 없습니까. 글쎄요. 여러분은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후회되는 거요?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부끄러웠던 경험이요? 정말 많지요. 아마 뭐 그래도 지금 기억하는 것들은 전체 후회되는 일이나 부끄러운 일들 중 극히 일부일 것입니다. 까먹은 것도 많겠지요.

정말 기억이 안 나는 것 같다가도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나면 정말 참, 너무도 후회가 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아예 지워버리고 싶어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 저만 그래요? 모르겠어요. 여러분은 어떠신지 제가 한 분 한 분 여쭤볼 수는 없겠지만, 성경에 보면 역시 저처럼 그렇게 생각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창세기 12장 10절~2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기껏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주셨는데도, 잠깐 기근이 들었다고 해서 자기 멋대로 이집트로 갔다가는 하마터면 자기 아내를 빼앗길 뻔한 위기를 겪고 맙니다. 이는 남자로서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 왕은 어떻습니까. 사무엘하 11장을 보면 자신의 충신 우리아(ウリヤ)의 아내를 빼앗아서 자기의 아내로 삼고, 우리아는 전쟁터에서 고의로 죽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이 씻을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 성경에 너무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어떤 책입니까. 몇 천년 동안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대 베스트셀러 아닙니까. 전세계 사람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읽혀지는 책 속에 자신의 무용담이 아니라 부끄러운 것이 적혀 있다면 그 기분이 어떻겠어요. 제가 만약에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이나 예수님한테 부탁을 해서, 아무도 모르게 그 부분 좀 어떻게 빼주실 수 없느냐고 부탁했을 지도 모르지요.

어디 그뿐인가요. 신약에도 있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주님을 3년이나 따라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떠나자 곧바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0절 이후에 보면 형제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다른 제자들이 다 보는 앞에서 예수님한테 데려와서는, 나중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거든 우리 아들 좀 높은 자리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이것도 참 요한이나 야고보가 나중에 생각하면 부끄러울 수도 있는 노릇이지요. 아휴, 그 때 우리 엄마 좀 말릴 걸. 괜히 따라가가지고는 몇 백 년, 몇 천년 동안 창피를 당하고 있지요.

도마(トマス)는 어떻습니까. 그는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자, 그는 끝까지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하지요.

요한복음 20장 25절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そこで、ほかの弟子たちは彼に「私たちは主を見た」と言った。しかし、トマスは彼らに「私は、その手に釘の跡を見て、釘の跡に指を入れ、その脇腹 に手を入れてみなければ、決して信じません」と言った。

하지만 8일 뒤에 예수님께서 도마 앞에 나타나십니다. 그렇다고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본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니 안 믿을래야 안 믿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과거에 자기가 그런 고집을 부렸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마태는 어떻습니까. 그는 예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기 전은 세리였습니다. 세리라고 하는 것은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을 때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해가면서 동족의 피를 빨아먹던 매국노였습니다.

어쩌면 마태는 그와 같은 부끄러운 과거를 지우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도들은 괜찮았습니까? 부끄러운 점이 없었을까요? 오늘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지켰던 사도가 누구였을까요.

성경은 충격적인 한 구절을 남겨놓았습니다. 마가복음 14장 50절입니다.

마가복음 14장 50절,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皆は、イエスを見捨てて逃げてしまった。

참으로 기가 찰 노릇입니다. 예수님과 그렇게 오랫동안 지내왔으면서, 그렇게 은혜로운 말씀들을 수도 없이 들어왔으면서, 놀라운 기적들을 수도 없이 봐왔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쳐버렸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당연한 말입니다만 그 때는 아직 신약성경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이 장차 오시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를 다음과 같이 말씀해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しかし、助け主、すなわち、父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お遣わしになる聖霊は、あなたがたにすべてのことを教え、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話したすべてのことを思い起こさせてくださいます。


성령님이 오시면 그 때까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모든 것들이 생각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갈은 능력으로 인하여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서가 완성된 것입니다.

이러면 또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미리 말씀 드리겠습니다만, 지금도 그럼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시면 성경을 읽지 않아도 달달달달 외우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성경이 아직 없었기 때문에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씀을 우리 안에 머물게 해주셨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성경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펴서 말씀을 공부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말씀을 담아둘 수가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없으면 아무리 훌륭한 목사님이나 신학교 교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을 직접 따라다녔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위기가 닥치면 모든 것을 다 팽개치고, 예수님도 버려두고 도망쳐버리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더라도 정말 우리들처럼 부끄러운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보면 역시 당시 본인들의 행동을 후회하면서, 아 그때는 정말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한탄도 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거절을 하였으나, 후에 뉘우치고 아버님 말씀대로 포도원에 갔다고 기록합니다. 앞서 이 <뉘우침>에는 <후회>와 <회개>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지요.

그렇다면 후회와 회개는 무엇이 다를까요.

우리 이해하기 쉽게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두 사도를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다름아닌 베드로와 가룟 유다입니다.


제가 지금부터 드리는 말을 나중에 베드로 선생이 알게 된다면, 제게 좀 서운하다고 말씀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뭐 나중이고, 제 기준으로 본다면, 사도 베드로도 가룟 유다도 역시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배반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말했지요. 그리고 마태복음 26장 74절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26장 74절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するとペテロは、噓ならのろわれてもよいと誓い始め、「そんな人は知らない」と言った。すると、すぐに鶏が鳴いた。

그냥 모른다고 하는 게 아니라 저주하고 맹세까지 해가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잡아뗐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음 구절 마태복음 26장 75절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ペテロは、「鶏が鳴く前に、あなたは三度わたしを知らないと言います」と言われたイエスのことばを思い出した。そして、外に出て行って激しく泣いた。

그렇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미 베드로가 부인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3절~35절

“33.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5.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すると、ペテロがイエスに答えた。「たとえ皆があなたにつまずいても、私は決してつまずきません。」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あなたは今夜、鶏が鳴く前に三度わたしを知らないと言います。」
ペテロは言った。「たとえ、あなたと一緒に死ななければならないとしても、あなたを知らないなどとは決して申しません。」弟子たちはみな同じように言った。

이렇게 호언장담을 했던 베드로의 부인은, 장도 바뀌지 않은 똑 같은 마태복음 26장 70절부터 시작합니다. 이는 베드로가 부족해서 라기보다도, 사람이란 참 이처럼 연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뜻도 되겠지요.

흥미로운 점은 베드로가 부인할 것도 미리 말씀하셨던 것처럼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할 것이라는 점도 이 마태복음 26장 21절~25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베드로와 가룟 유다는 비슷한 점이 많이 있지요.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한 베드로가 그렇게 심히 통곡했다고 하니, 대단히 후회를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배반한 다음에 후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어떻게 됐을까요.

마태복음 27장 3절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そのころ、イエスを売ったユダはイエスが死刑に定められたのを知って後悔し、銀貨三十枚を祭司長たちと長老たちに返して、言った。

여기서 유다도 뉘우쳤다고 나옵니다만, 이는 회개가 아닌 후회일 뿐입니다. 그는 결국 어떻게 됩니까.

마태복음 27장 5절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そこで、彼は銀貨を神殿に投げ込んで立ち去った。そして出て行って首をつった。

사람이 후회를 하게 되면 나 자신이 참으로 싫어집니다. 후회함으로 인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이 싫어지고, 그리고 세상이 싫어집니다. 내가 그 때 왜 그랬을까, 하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도 그렇고, 예수님을 팔아버린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둘 다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후회를 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부터가 달랐습니다. 가룟 유다는 거기서 멈춰버렸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움 속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어땠습니까. 심히 통곡할 정도로 자신이 부끄러웠을 것이지만, 거기서 멈춰서지 않았습니다. 회개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주님 앞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후회에서 멈추면 주님 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회개를 하고 돌아온다면 주님은 언제든지 우리를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에 대한 말씀을 마치시고 질문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 질문내용이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마태복음 21장 31절 초반부입니다.

“31.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二人のうちのどちらが父の願ったとおりにしたでしょうか。

참으로 오묘한 질문이십니다. 보통 우리 같으면 맏아들과 둘째 아들 중 누가 더 착한 아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을 법도 한데, 그게 아니라,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라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착한 사람이요? 정말 착한 사람은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정말로 간 사람이겠지요. 그러나 굳이 예수님께서 그런 모범적인 사람을 예로 들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義人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

예, 그렇게 착한 사람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예 그런 무리한 말씀은 하지 않으신 것이지요.

그리고 두 번째 이유,

누가복음 5장 32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わたしが来たのは、正しい人を招くためではなく、罪人を招いて悔い改めさせるためです。」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람을 찾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한테 회개시키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뿐만이 아니지요.

누가복음 15장 7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それと同じように、一人の罪人が悔い改めるなら、悔い改める必要のない九十九人の正しい人のためよりも、大きな喜びが天にあるのです。

누가복음 15장 10절
“1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それと同じように、一人の罪人が悔い改めるなら、神の御使いたちの前には喜びがあるのです。」

죄인 한 사람의 회개가 하나님께 진정한 기쁨이 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시는 거입니다.

후회되는 것이 있습니까. 후회 하십시오. 하지만 거기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회개를 하고 주님 품으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너무 늦은 것 같으십니까. 아직은 괜찮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뜨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면 아직은 기회가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후회하고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시면 됩니다. 과거의 내 모습을 뉘우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오늘 지금 이 시간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뜻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 그것은 바로 그 기회는 영원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마태복음 24장 42절~44절
“42.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43.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です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あなたがたの主が来られるのがいつの日なのか、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ら。
次のことは知っておきなさい。泥棒が夜の何時に来るかを知っていたら、家の主人は目を覚ましているでしょうし、自分の家に穴を開けられることはないでしょう。
ですから、あなたがたも用心していなさい。人の子は思いがけない時に来るのです。

마가복음 13장 33절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気をつけて、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その時がいつなのか、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からです。


요한계시록 3장 3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だから、どのように受け、聞いたのか思い起こし、それを守り、悔い改めなさい。目を覚まさないなら、わたしは盗人のように来る。わたしがいつあなたのところに 来るか、あなたには決して分からない。

그 날은 반드시 옵니다. 심판의 날은 반드시 옵니다. 그 전에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과거를 더 이상 부끄러워할 것 없습니다. 주님이 모두 받아주십니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뉘우침, 진정한 회개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순종으로 나아가는 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28장 13절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自分の背きを隠す者は成功しない。告白して捨てる者はあわれみを受ける。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우리 모두 내가 지금까지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짐들을 주님 앞에 모두 내려놓고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함으로 말미암아 진정으로 순종하는 삶,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을 통하여 주님께 기쁨과 영광과 찬송을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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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7회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섬김
2019년 6월 3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1절~8절
“1.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ヨハネの福音書 12章1節~8節
“さて、イエスは過越の祭りの六日前にベタニアに来られた。そこには、イエスが死人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ラザロがいた。
人々はイエスのために、そこに夕食を用意した。マルタは給仕し、ラザロは、イエスとともに食卓に着いていた人たちの中にいた。
一方マリアは、純粋で非常に高価なナルドの香油を一リトラ取って、イエスの足に塗り、自分の髪でその足をぬぐった。家は香油の香りでいっぱいになった。
弟子の一人で、イエスを裏切ろうとしていたイスカリオテのユダが言った。
「どうして、この香油を三百デナリで売って、貧しい人々に施さなかったのか。」
彼がこう言ったのは、貧しい人々のことを心にかけていたからではなく、彼が盗人で、金入れを預かりながら、そこに入っているものを盗んでいたからであった。
イエスは言われた。「そのままさせておきなさい。マリアは、わたしの葬りの日のために、それを取っておいたのです。
貧しい人々は、いつもあなたがたと一緒にいますが、わたしはいつも一緒に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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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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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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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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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섬김” 主が喜ばれる奉仕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이 말씀, 어떤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 위에 기름을 붓는 내용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 중에서 누가복음에 대해서만은 배경이나 등장인물, 그리고 주제에 있어서 다른 기록과 다소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누가복음에는 7장 36절~50절까지에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도 역시 한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는,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는 장면이 나옵니다만, 누가복음에서는 다른 마태, 마가, 요한복음과 달리 그 장소가 바리새인 집이고 여인은 눈물을 흘리고 있으며, 여기서의 주제는 죄사함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어떤 신학자는 이와 같은 사건, 즉 여인이 예수님께 기름을 붓는 사건이 두 번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오늘은 사복음서 중에서도 특별히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의 기록을 비교해가면서 이 말씀에 담긴 주님의 참뜻을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마태복음부터 살펴볼까 합니다. 마태복음 26장입니다.

마태복음 26장 6절~13절
“6.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10.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さて、イエスがベタニアで、ツァラアトに冒された人シモンの家におられると、
ある女の人が、非常に高価な香油の入った小さな壺を持って、みもとにやって来た。そして、食卓に着いておられたイエスの頭に香油を注いだ。
弟子たちはこれを見て、憤慨して言った。「何のために、こんな無駄なことをするのか。
この香油なら高く売れて、貧しい人たちに施しができたのに。」
イエスはこれを知って彼らに言われた。「なぜこの人を困らせるのですか。わたしに良いことをしてくれました。
貧しい人々はいつもあなたがたと一緒にいます。しかし、わたしはいつも一緒に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
この人はこの香油をわたしのからだに注いで、わたしを埋葬する備えをしてくれたのです。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世界中どこでも、この福音が宣べ伝えられるところでは、この人がしたことも、この人の記念として語られます。」
그리고 마가복음도 보실까요? 마가복음은 14장입니다.

마가복음 14장 3절~9절
3.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さて、イエスがベタニアで、ツァラアトに冒された人シモンの家におられたときのことである。食事をしておられると、ある女の人が、純粋で非常に高価なナルド油の入った小さな壺を持って 来て、その壺を割り、イエスの頭に注いだ。
すると、何人かの者が憤慨して互いに言った。「何のために、香油をこんなに無駄にしたのか。
この香油なら、三百デナリ以上に売れて、貧しい人たちに施しができたのに。」そして、彼女を厳しく責めた。
すると、イエスは言われた。「彼女を、するままにさせておきなさい。なぜ困らせるのですか。わたしのために、良いことをしてくれたのです。
貧しい人々は、いつもあなたがたと一緒にいます。あなたがたは望むとき、いつでも彼らに良いことをしてあげられます。しかし、わたしは、いつもあなたがたと 一緒に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
彼女は、自分にできることをしたのです。埋葬に備えて、わたしのからだに、前もって香油を塗ってくれました。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世界中どこでも、福音が宣べ伝えられるところでは、この人がしたことも、この人の記念として語られます。」
그리고 오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2장이죠?

요한복음 12장 1절~8절
“1.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さて、イエスは過越の祭りの六日前にベタニアに来られた。そこには、イエスが死人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ラザロがいた。
人々はイエスのために、そこに夕食を用意した。マルタは給仕し、ラザロは、イエスとともに食卓に着いていた人たちの中にいた。
一方マリアは、純粋で非常に高価なナルドの香油を一リトラ取って、イエスの足に塗り、自分の髪でその足をぬぐった。家は香油の香りでいっぱいになった。
弟子の一人で、イエスを裏切ろうとしていたイスカリオテのユダが言った。
「どうして、この香油を三百デナリで売って、貧しい人々に施さなかったのか。」
彼がこう言ったのは、貧しい人々のことを心にかけていたからではなく、彼が盗人で、金入れを預かりながら、そこに入っているものを盗んでいたからであった。
イエスは言われた。「そのままさせておきなさい。マリアは、わたしの葬りの日のために、それを取っておいたのです。
貧しい人々は、いつもあなたがたと一緒にいますが、わたしはいつも一緒に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

아멘.

먼저 장소에 대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똑같이 대단히 흥미로운 말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가 어디냐 하면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나병환자라고 하면, 개역한글에서는 문둥병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이를 요즘 식으로 말씀 드리자면 한센병……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는 지금의 기준보다도 좀 더 넓은 의미의 질병, 예를 들어서 심각한 피부병도 당시에는 나병이라고 하는 범주에 포함되어 있었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당시 나병이라고 하면 역시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과 함께 살지는 못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머무르고 계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만약에 여전히 시몬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병에 걸려있는 상태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같은 곳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여기에는 그와 같은 내용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이 시몬이라는 사람은 과거에 나병에 걸렸다가 완치가 된 사람, 또는 더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에 의해 나음을 받은 사람일 수도 있다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참고로 누가복음 7장 40절에 보면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 이름이 <시몬>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역시 누가복음도 다른 복음서 내용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당시 시몬이라는 이름은 드물지 않았습니다. 유명한 사람으로서는 베드로도 시몬이라 이름이었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강제로 짊어진 사람 이름도 구레네 시몬이라고 했지요.

그리고 당시 바리새인이라고 하면 권위도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예전에 나병에 걸려있었다 하더라도, 바리새인인 사람을 가리켜서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라고 했다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이 바리새인 시몬과 나병환자 시몬은 동명이인일 아무래도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한편 오늘 말씀인 요한복음에서는 12장 1절에서 예전에 죽은 지 나흘이 지난 후에 무덤에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시몬의 집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도 안 맞지 않느냐 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자세히 보시면, <나사로의 집>이 아니라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고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나사로의 집이 아닌데도 왜 요한은 주인이 아닌 <나사로를 강조했을까요. 그 이유는 어렵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 바로 다음인 요한복음 12장 9절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9절
9.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すると、大勢のユダヤ人の群衆が、そこにイエスがおられると知って、やって来 た。イエスに会うためだけではなく、イエスが死人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ラザロを見るためでもあった。

그러니까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나사로를 죽은 지 4일만에 무덤에서 살려내셨다는 것은 말하자면 빅뉴스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를 살려내신 예수님은 물론이지만,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도 유명인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려고 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이 생각하기에는, 집주인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더욱 지명도가 있던 나사로의 이름을 빌려서, 당시 그 자리에 <나사로가 있었던 곳>이라고 하는 점을 강조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한 여인이 예수님께 기름을 부었다고 합니다. 그 기름에 대한 기록도 비교해볼까 합니다.


마태복음 26장 7절
7.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ある女の人が、非常に高価な香油の入った小さな壺を持って、みもとにやって来た。そして、食卓に着いておられたイエスの頭に香油を注いだ。

마가복음 14장 3절
3.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さて、イエスがベタニアで、ツァラアトに冒された人シモンの家におられたときのことである。食事をしておられると、ある女の人が、純粋で非常に高価なナルド油の入った小さな壺を持って 来て、その壺を割り、イエスの頭に注いだ。

요한복음 12장 3절
3.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一方マリアは、純粋で非常に高価なナルドの香油を一リトラ取って、イエスの足に塗り、自分の髪でその足をぬぐった。家は香油の香りでいっぱいになった。

흥미로운 것은 요한복음에서만은 이 여인,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마리아라고 하는데, 이는 다름아닌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의 누이였던 것이지요.

참고로 좀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 미리 한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향유……라고 하면 글쎄요, 뭐 요즘 말로 쉽게 하자면 향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만약에 여러분께서 어떤 분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갔는데, 거기서 이제 식사를 하려고 해요.

그런데 누군가가 갑자기 머리에 고급 향수를 부으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기분이 좋으세요? ㅎㅎ 오히려 깜짝 놀라겠지요. 그리고 밥 먹기 전에 온 몸에서 막 향수 냄새가 나요. 그러면 아무리 비싼 향수였다 하더라도, 그거 별로 좋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성경을 읽을 때 그대로 똑같이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편 23편 5절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23편 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私の敵をよそにあなたは私の前に食卓を整え頭に香油を注いでくださいます。私の杯はあふれています。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원수들 앞에서도 우리를 넉넉하게 대접해주신다는 말씀인데,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식사를 대접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머리에 기름을 부으셨다고 기록합니다. 당시에는 왕이나 귀족들이 식사 때 머리나 수염에 값진 향유를 발랐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식사 때 기름을 바르게 했다는 것은 그 손님을 왕이나 귀족처럼 귀하게 대접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매우 귀한 향유, 매우 값진 향유, 지극히 비싼 향유……라고 성경은 기록하는데, 이게 그러면 도대체 얼마나 값진 것이었을까 궁금해집니다.

이 값어치에 대해서 성경은 구체적으로 기록합니다. 마가복음 14장 5절과 오늘 말씀 요한복음 12장 5절에 보면 이 향유를 300 데나리온에 팔 수 있다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데나리온이라고 하는 화폐단위가 나옵니다만, 이는 당시 하급 군인이나 품꾼, 말하자면 노동자들의 하루 일당이었다고 합니다.

아직 최저시급이 한국이나 일본이 10,000원은 안 됩니다만, 계산하기 쉽게 일단 10,000원으로 계산한다면 하루 8시간이니 8만원, 여기에 300을 곱하면 2400만원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적게 잡아도 대략 2000만원 이상이 되는데, 오늘날 아무리 값진 향수라 하더라도 작은 한 병에 2000만원 이상 하는 향수는 많지 않겠지요.

물론 돈이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2000만원이 그리 놀라운 가격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여기에도 마리아의 집안 형편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각 성경에서 매우 귀하고 매우 값지고 지극히 값비싸다고 기록한 것은 적어도 이를 바친 마리아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8절에서는 이를 단순히 <제자들>이라고 하고, 마가복음 14장 4절에서는 <어떤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이 또한 요한복음 12장 4절에서는 분명히 꼭 집어서 ‘가룟 유다’라고 기록합니다.

다시 한번 이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2장 4절~6절입니다.

“4.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弟子の一人で、イエスを裏切ろうとしていたイスカリオテのユダが言った。
「どうして、この香油を三百デナリで売って、貧しい人々に施さなかったのか。」
彼がこう言ったのは、貧しい人々のことを心にかけていたからではなく、彼が盗人で、金入れを預かりながら、そこに入っているものを盗んでいたからであった。

유다는 말합니다. 그 향유를 300 데나리온으로 팔아서 가난한 사람한테 주지 그러느냐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보면 한술 더 떠서 마리아에게 화를 내가면서, 그걸 아깝게 왜 그렇게 허비하느냐 無駄なことをするのか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허비하다>? 마리아가 어떻게 했길래 허비하다, 즉 낭비한다고 화를 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섬긴 것을 두고 그것을 낭비라면서 화를 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유다가 의로워서요? 성경은 분명히 아니라고 합니다. 가룟 유다는 말하자면 자금관리를 하고 있었는데, 향유를 판 돈으로 헌금을 하면 그것을 자기가 훔치려 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나쁜 사람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4절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人の子は、自分について書かれているとおりに去って行きます。しかし、人の子を裏切るその人はわざわいです。そういう人は、生まれて来 なければよかったのです。」


요한복음 6장 70절~71절
“70.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わたしがあなたがた十二人を選んだのではありませんか。しかし、あなたがたのうちの一人は悪魔です。」
イエスはイスカリオテのシモンの子ユダのことを言われたのであった。このユダは十二人の一人であったが、イエスを裏切ろうとしていた。

이 가룟 유다의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십니다. 마태와 마가복음을 봅니다.

마태복음 26장 10절~13절
10.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イエスはこれを知って彼らに言われた。「なぜこの人を困らせるのですか。わたしに良いことをしてくれました。
貧しい人々はいつもあなたがたと一緒にいます。しかし、わたしはいつも一緒に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
この人はこの香油をわたしのからだに注いで、わたしを埋葬する備えをしてくれたのです。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世界中どこでも、この福音が宣べ伝えられるところでは、この人がしたことも、この人の記念として語られます。」

마가복음 14장 6절~9절
6.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すると、イエスは言われた。「彼女を、するままにさせておきなさい。なぜ困らせるのですか。わたしのために、良いことをしてくれたのです。
貧しい人々は、いつもあなたがたと一緒にいます。あなたがたは望むとき、いつでも彼らに良いことをしてあげられます。しかし、わたしは、いつもあなたがたと 一緒に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
彼女は、自分にできることをしたのです。埋葬に備えて、わたしのからだに、前もって香油を塗ってくれました。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世界中どこでも、福音が宣べ伝えられるところでは、この人がしたことも、この人の記念として語られます。」

불만을 품었던 것은 가룟 유다와 달리 예수님께서는 이 마리아의 섬김을 대단히 기쁘게 받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좀 본문을 비교하느라고 시간이 좀 오래 걸렸습니다만, 이것이 오늘 말씀에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이제 지금까지 말씀 드렸던 내용을 잘 기억하시고 생각해보시기 바라겠습니다.

이 사건의 특징은 어떤 부분이 있을까요.


오늘 내용의 등장인물은 예수님과 마리아, 그리고 가룟 유다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 가장 귀한 것을 자진해서 예수님께 바쳤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선 주목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지폐가 없으니까 모두 다 동전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자들은 성전에 가서 헌금을 할 때에는 동전이 든 항아리를 헌금함에 쏟아 넣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 동전이니까 소리가 나겠지요? 돈을 많이 넣으면 아마도 와르르르르 하는 큰 소리가 주변에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쳐다보고 와~ 대단하다~ 라고 했겠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나마 그 동전을 작은 돈으로 환전을 해서, 요즘 식으로 한다면 500원짜리나 100원짜리를 10원짜리 5원짜리로 바꾸어서 개수를 늘린 다음에 와르르르르 하고 넣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 때 이 사람 표정은 어땠겠습니까. 목에 힘을 주고 자랑스럽다는 듯이 주위를 살펴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참 유치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마리아는 어떻습니까. 그렇게 귀한 예물을 드린 다음에도 겸손하게 가장 낮은 곳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쩌면 그 값비싼 향유가 아닌, 그렇게 귀한 예물을 드리고도 겸손하게 섬기는 그 모습을 더욱 기쁘게 받으셨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더 주목해주셨으면 좋을 부분이 있습니다. 자, 드디어 오늘 문제가 나갑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오늘 본문 말씀 중에서 빨간 줄을 긋는다고 한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디에 그으시겠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시간이 좀 됐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오늘 본문 말씀 읽어볼까요? 자, 읽어보시면서 어디에 빨간 줄을 그을까 하고 생각을 하시면서 읽어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요한복음 12장 1절~8절
“1.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さて、イエスは過越の祭りの六日前にベタニアに来られた。そこには、イエスが死人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ラザロがいた。
人々はイエスのために、そこに夕食を用意した。マルタは給仕し、ラザロは、イエスとともに食卓に着いていた人たちの中にいた。
一方マリアは、純粋で非常に高価なナルドの香油を一リトラ取って、イエスの足に塗り、自分の髪でその足をぬぐった。家は香油の香りでいっぱいになった。
弟子の一人で、イエスを裏切ろうとしていたイスカリオテのユダが言った。
「どうして、この香油を三百デナリで売って、貧しい人々に施さなかったのか。」
彼がこう言ったのは、貧しい人々のことを心にかけていたからではなく、彼が盗人で、金入れを預かりながら、そこに入っているものを盗んでいたからであった。
イエスは言われた。「そのままさせておきなさい。マリアは、わたしの葬りの日のために、それを取っておいたのです。
貧しい人々は、いつもあなたがたと一緒にいますが、わたしはいつも一緒に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

예, 빨간 줄을 그으셨나요? 물론 여기에는 정답이 하나라고 할 수 없겠지요. 사실 성경은 전체를 모두 빨간 줄로 그을만한 책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특별히 주목해주셨으면 하는 곳은, 요한복음 12장 3절 마지막 부분입니다.

요한복음 12장 3절 마지막 부분.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家は香油の香りでいっぱいになった。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싶다면, 어떻게 섬겨야 하겠습니까. 조금 극단적인 말씀을 드려볼까요? 방음이 완벽하지 않은 아파트에서 한밤중에 큰 소리로 찬양을 부르고 통성기도를 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까.

우리 한 번 분명히 알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의 두 번째 문제 나가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 말들은 누가 한 말일까요.

먼저 누군가가 예수님께 다음과 갈이 소리칩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私はあなたがどなたなのか知っています。神の聖者です。

그리고 다음에는 누군가가 사도 바울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この人たちは、いと高き神のしもべたちで、救いの道をあなたがたに宣べ伝えています」


이 말을 한 사람들은 누굴까요. 정답은? 예, 마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라는 사실을 못 알아보는 것은 영적인 눈이 어두웠던 인간들 뿐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제사장 아들들이 보니까 사도 바울이 마귀 사탄을 쫓아내고 그럽니다. 그렇다면 어디 우리도 한 번 해보자 해서 흉내를 냈더니, 마귀가 뭐라고 했겠습니까.

사도행전 19장 15절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すると、悪霊が彼らに答えた。「イエスのことは知っているし、パウロのこともよく知っている。しかし、おまえたちは何者だ。」

마귀들은 예수님도 알고, 하물며 주님의 일을 하는 바울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마귀들이라 하더라도 예수님과 예수님의 능력으로 마귀들을 물리치는 사도 바울을 대항할래야 대항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큰 소리로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을 주님께서 기쁘게 받으십니까? 아닙니다. 예수님도 그렇고 바울도 그렇고 엄히 꾸짖어서 물리쳤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한다면서 시도 때도 없이 큰 소리로 할렐루야를 외쳐대고, 예를 들어 예배 때 주위에 대해서는 신경을 안 쓰고 갑자기 큰 소리로 찬양을 하고 그러면 그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는 분명 문제가 있는 일이지요.

마리아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주님을 섬길 때, 그 집에는 향유 냄새가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을 섬기는 데에 꼭 비싼 향유만 있어야 하나요?


우리는 종종 “시간은 돈이다”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진정으로 귀한 것이 어느 쪽이라는 것인가요? 시간이 더 중요하다는 것인가요? 아니면 돈이 더 중요하다는 것인가요.

이 말은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돈>만큼 중요하다. 즉, <시간>의 중요성을 <돈>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고 있는 말이기 때문에, 이 말대로라고 한다면 <돈>이 <시간>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인가요?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시간으로 돈을 살 수 있습니다. 1시간이라고 하는 <시간> 속에서 <돈>을 얻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100만원이든 1000만원이든 간에 아무리 돈을 쌓는다 하더라도, 돈으로는, 이미 지나간 1분 1초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꼭 돈이 있어야만 해요?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리 돈이 없더라도, 이처럼 돈보다 더 귀한 시간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시간으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주님을 섬길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돈보다도 더 귀한 우리의 육신이 있습니다. 이 육신으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주님을 섬길 수가 있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돈보다도 귀한 우리의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주님께 드림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얼마든지 주님을 섬길 수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섬김>을 실천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 내가 가진 가장 값진 것으로 가장 낮은 곳에서 주님을 묵묵히 섬길 때, 우리 믿음의 향유, 향기로운 믿음의 향기는 온 집에 가득해지고, 온 직장에 가득해지고, 온 학교에 가득해지고, 온 지역에 가득해지고, 온 나라에 가득해질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우리 삶 속에서 주님께 향기로운 섬김을 드림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 가득 채우시는 촉북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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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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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6회 땅 끝으로 향하는 믿음
2019년 6월 2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使徒の働き 1章8節
“しかし、聖霊があなたがたの上に臨むとき、あなたがたは力 を受けます。そして、エルサレム、ユダヤとサマリアの全土、さらに地の果てまで、わたしの証人とな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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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땅 끝으로 향하는 믿음” 地の果てへと向かう信仰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이 있는 사도행전은 신약성경 중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제외한 대부분의 신약성경은 서신, 즉 편지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에는 창세기나 출애굽기, 사사기, 열왕기 등을 비롯하여 좀 스토리가 있는 책들이 많기 때문에 그나마 덜 지루한 면이 있습니다만, 신약은 대부분이 그와 같은 편지 형식이기 때문에 좀 읽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복음서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스토리가 있는, 신학적으로는 신약에서 유일한 역사서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사도행전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지요. 만약에 사도행전이 없었더라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복음이 어떻게 전파되기 시작하였는지를 우리는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이 있는 덕분에 말씀 전파, 복음 전파의 시작을, 그리고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쓴 저자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합니다만, 대체적으로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가 사도행전 저자라고 하는 견해가 많은 것 같습니다.

사복음서 중에서 사실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고 하는 기록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있습니다만, 그런데 사실 좀 찝찝한 게 성경을 자세히 보시면 그 부분,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고 하는 그 부분이 괄호 안에 적혀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현재 성경은 원본이 발견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은 모두 다 사본을 바탕으로 번역이 된 책들입니다. 그런데 이 괄호 안에 적혀 있다는 것은 어떤 사본에는 이 부분이 있는데, 또 어떤 사본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는 “하늘에 오르사” 天に昇り 라는 부분이 있습니다만, 사도신경은 성경 본문에 나오는 기록이 아닙니다. 오랜 교회 역사 속에서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완성된 귀한 신앙고백이긴 합니다만 성경에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영화를 보면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이 아니라 점점점점 눈앞에서 사라지는 식으로 묘사한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모습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번 볼까요?

사도행전 1장 8절~11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しかし、聖霊があなたがたの上に臨むとき、あなたがたは力 を受けます。そして、エルサレム、ユダヤとサマリアの全土、さらに地の果てまで、わたしの証人となります。」
こう言ってから、イエスは使徒たちが見ている間に上げられた。そして雲がイエスを包み、彼らの目には見えなくなった。
イエスが上って行かれるとき、使徒たちは天を見つめていた。すると見よ、白い衣を着た二人の人が、彼らのそばに立っていた。
そしてこう言った。「ガリラヤの人たち、どうして天を見上 げて立っているのですか。あなたがたを離れて天に上げられたこのイエスは、天に上って行くのをあなたがたが見たのと同じ有様で、またおいでになります。」

정말 참으로 생생 活き活き 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괄호도 없지요. 이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려지셨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인생에 있어서 마지막 말을 남기는 것을 “유언”이라고 합니다. 이는 일반적인 그런 말들과는 다르지요. 법적으로도 적법한 절차에 맞게 작성된 유언장은 대단히 큰 효력을 가집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말씀하신 것은 또 다른 유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말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말씀을 하셨을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두 구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마가복음부터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それから、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福音を宣べ伝えなさい。

그리고 오늘 본문말씀,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しかし、聖霊があなたがたの上に臨むとき、あなたがたは力 を受けます。そして、エルサレム、ユダヤとサマリアの全土、さらに地の果てまで、わたしの証人となります。」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남겨놓으신 마지막 말씀이셨습니다. 그만큼 이 말씀에 담긴 내용이 무겁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오늘은 이 말씀에 담긴 진정한 뜻을 깨닫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믿음과 말씀과 행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기쁨과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살펴본 마가복음 16장 15절에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인 사도행전 1장 8절에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エルサレム、ユダヤとサマリアの全土、さらに地の果てまで”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우리는 이와 갈은 말씀을 접할 때 보면, 그래, 여기저기 다니면서 전도하라는 말씀이겠지……라고 쉽게 넘어가버릴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사실이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이스라엘 민족은 말하자면 유대교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유대교는 이방인한테 전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선택 받은 이스라엘 민족만의 특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과 이방인들을 철저하게 구분하였고, 이방인들과는 교류를 일체 하지 않았으며, 하물며 말도 하지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 ,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エルサレム、ユダヤとサマリアの全土、さらに地の果てまで”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는 제 추측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위해 전도자를 세우셨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사도 바울입니다.

주님은 바울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しかし、主はアナニアに言われた。「行きなさい。あの人はわたしの名を、異邦人、王たち、イスラエルの子らの前に運ぶ、わたしの選びの器です。

이 사명은 바울 자신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사도행전 13장 47절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主が私たちに、こう命じておられるからです。『わたしはあなたを異邦人の光とし、地の果てにまで救いをもたらす者とする。』」

이렇게 해서 이제 복음이 이스라엘 뿐만이 아니라 전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동안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지 않았던 복음이 왜 갑자기 이 시점에 전파되기 시작했던 것일까요. 왜 주님께서는 바로 지금 이 시기에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고 계셨던 것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이제 신앙이 완성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구약시대 때의 신앙은, 사람의 아기로 본다면 태어나기 전인 뱃속에 있는 아기입니다. 아기가 뱃속에 있다면 예정된 기일까지는 반드시 배 안에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너무 일찍 태어난다고 하면 이는 큰 일이 날 수가 있습니다. 아직 미완성인 상태이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때가 차면 어떻습니까. 이제는 반대로 아이가 태어나야 할 날짜가 많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안 태어나요. 이것도 큰 문제이지요. 아이는 예정된 시기에 반드시 출산해야지만 산모도 아이도 건강을 유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에 있어서는 언제가 완성일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모든 죄를 해결하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끝인가요? 아닙니다.

성령님이 오셔야 합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제 성령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신앙은 비로소 완성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인 성경도 완성 되었습니다. 어떤 악한 세력들, 또는 무지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들먹이며 예수님을 들먹이며, 선지자를 들먹이며 성경 외에 다른 복음을 말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거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7절~8절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ほかの福音といっても、もう一つ別に福音があ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あなたがたを動揺させて、キリストの福音を変えてしまおうとする者たちがいるだけです。
しかし、私たちであれ天の御使いであれ、もし私たちがあなたがたに宣べ伝えた福音に反することを、福音として宣べ伝えるなら、そのような者はのろわれるべきです。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자기를 무슨 하나님이 보낸 사도다 예수님이 보낸 사도다 라고 하면서 성경을 부정하고 자신의 생각을 주입시키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3절~15절
“13.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14.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こういう者たちは偽使徒、人を欺く働き人であり、キリストの使徒に変装しているのです。
しかし、驚くには及びません。サタンでさえ光の御使いに変装します。
ですから、サタンのしもべどもが義のしもべに変装したとしても、大したことではありません。彼らの最後は、その行いにふさわしいものとなるでしょう。


이미 우리가 받은 이 성경 외에 더 이상의 복음은 없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 말씀이 완전하고도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복음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께서 오심으로 인하여 이제 신앙은 완성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제 복음이 이스라엘을 넘어 이방인들에게로 전파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놀라운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21세기를 살아가는, 육신적으로는 이방인인 우리까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일본의 어떤 텔레비전을 보면 한 연예인의 조상들을 하나하나 찾아나가면서 그 동안 본인도 몰랐던 자기 가문의 역사를 알게 되는 그런 방송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수 있게 된 그 믿음의 족보를 하나하나 거슬러 올라가면, 어쩌면 2천년 전 예수님의 제자 중 누군가, 또는 바울한테까지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여 이방인들에게 말씀이 전해지고 몇 천 년 뒤에 바로 우리한테까지 그 복음의 계보가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50년 전인 1969년 7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명언이 탄생됩니다. 그 말을 했던 주인공은 1969년 7월 20일, 세계에서 최초로 달 위에 발을 내딛는 닐 암스트롱이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달 위에 발자국을 남긴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한 인간에게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거대한 도약이다”

これは一人の人間にとっては小さな一歩だが、人類にとっては偉大な飛躍である。

우리에게 복음이 전달되기까지는 예수님 당시 누군가로부터 시작이 있었을 것입니다. 수 천년 동안 그 줄기는 위기를 만났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절망과 좌절을 느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족보는 몇 천년 동안 끊임없이 이어지고, 마침내 나한테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지금까지 수 천 년에 걸친 위대한 신앙의 발걸음이 이어져 왔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 이 신앙의 줄기를 우리 대에서 끊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는 계속 이어져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상상 속의 족보가 아니라 믿음의 핏줄, 신앙의 핏줄인 것입니다. 이것이 끊기는 순간, 우리는 우리 만이 아닌 우리를 통해서 복음을 전해 받았어야 할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모르는 채 살아가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믿음의 발걸음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의 발걸음은 계속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긴장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 다음 주부터 특별전도주간입니다. 다음 주일에는 반드시 한 사람당 두 사람 이상을 데리고 오시기 바랍니다……뭐 그런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아니에요. ㅎㅎ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여러 발걸음 중 하나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내딛는 발걸음은 어디로 향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エルサレム、ユダヤとサマリアの全土、さらに地の果てまで” 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온 천하는 어디고 땅 끝은 어디입니까. 지금 당장 전도지를 들고 나가서 무작정 복음을 전하고 그래야만 하는 것인가요?

온 천하에 다니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물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늘어나고 교회가 늘어나고 하는 것도 되겠지요. 하지만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땅을 확장한다고 하면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단순히 마구잡이로 땅을 많이 산다면 그것만으로 확장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 일단 땅은 땅이라 하더라도 쓸모가 있는 땅이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리 넓은 땅이라고는 하나 쓸모가 없다면 이는 있으나 마나 일 것입니다.

쓸모 없는 땅, 예를 들어서 잡초로 우거져 있거나 돌밭 가시나무들로 가득 찬 땅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잡초를 뽑아내고 돌이나 가시나무들을 걷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흙을 갈아서 생산성 있는 땅으로 만드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어디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누가복음 17장 20절~21절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パリサイ人たちが、神の国はいつ来るのかと尋ねたとき、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神の国は、目に見える形で来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
『見よ、ここだ』とか、『あそこだ』とか言えるよう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見なさい。神の国はあなたがたのただ中にあるのです。」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잡초들, 큰 바위, 작은 돌멩이, 가시나무들을 모두 제거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황무지 땅, 아무도 돌보지 않았던 땅들을 주님을 위한 옥토로 가꾸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아까 말씀 드렸던 전도를 열심히 하면 되는 건가요?

한국 교회를 보면 전도를 열심히 해야 한다, 한 번 전도 해서 오지 않으면 몇 번씩 가서라도 꼭 교회에 데려와야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많이 데려오면 전도왕이 되어서 상도 준다……뭐 그런 말들을 합니다만, 솔직히 성경 어디를 보더라도 복음을 안 받아들이는 사람한테 몇 번씩이나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라는 기록이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기도 하고, 또는 개인한테 전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특히 개인한테 반복해서 억지로 전도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까운 사람이라면 한 두 번 말씀을 전하고, 그리고 우리 삶 속에서, 참된 신앙을 보여주는 것, 참된 믿음을 보여주는 것, 참된 행함을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전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참된 믿음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이를 위해서는 먼저 내 마음 속에 있는 땅 끝에 발을 내디뎌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별로 안 해보셨습니까. 기도생활을 시작해보십시오.
성경을 아직 제대로 읽어보지 않으셨습니까.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지금까지 한 번도 전도지를 돌리거나 예수님을 전한 적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한 번 해보십시오.
물질이나 봉사로 교회를 위해 주님을 위해 섬겨본 적이 없으십니까. 이제 시작해 보십시오.
우리의 이웃을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해본 적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실천해 보십시오.

이것이야말로 믿음의 땅 끝으로 가는 첫 발걸음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넓히는 위대한 첫 발자국이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전도를 해도 교회에 안 나와요.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 사람이 아무리 나를 봐도 예수님을 믿고 싶어지지 않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정말로 그렇다면 이는 나 스스로가 먼저 주님 앞에 반성하고 먼저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 발걸음이 믿음의 땅끝으로 향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기 시작할 때, 내가 달라집니다. 그리고 내 주위가 달라집니다. 그러면 누가 먼저 알아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내 주위 사람들이 먼저 알아봅니다. 내 주위 사람들이 먼저 내 변화를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전도의 열매를 거둘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우리더러 땅 끝까지 가라고 말씀하실까요. 그 이유는 바로 그 곳에 주님이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축복이 바로 그 곳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믿음의 한 발자국, 신앙의 위대한 발자국을, 땅 끝을 향해서 내디딤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신 모든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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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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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5회 응답을 받으려면
2019년 6월 1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24절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ヨハネの福音書 16章24節
“今まで、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名によって何も求めたことがありません。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受けます。あなたがたの喜 びが満ちあふれ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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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응답을 받으려면” 答えを得るためには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기도하고 응답 받으신 적 있으십니까. 이러이러한 어려움을 겪었는데 기도를 드리니까 문제도 해결되고 건강도 회복되고 그러셨습니까.

예, 아멘.

사실 이 질문은 그냥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나가는 말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절실하지요. 오히려 교회에 오래 다녔는데, 기도를 해도 응답을 한 번도 안 받았다? 이건 정말 심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어려움이 닥칠 때 기도를 안 드린다고 하는 것은, 이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실까요?

요한복음 16장 24절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今まで、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名によって何も求めたことがありません。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受けます。あなたがたの喜 びが満ちあふれ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면 받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은혜로운 말씀이십니까.


그런데 말이에요. 자, 그렇다면 다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 기도하신 것, 100프로 모두 응답을 받으셨나요? 이것이 필요합니다. 저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해주세요. 저것을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를 드리면 모두 들어주셨나요?

이게 참 어렵습니다. 어떤 것은 들어주시기도 하는데, 어떤 것은 안 들어주시기도 하는 것 같아요.

어찌 보면 참 이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무엇이든 들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안 들어주시는 기도가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성경말씀에 대해서 궁금증이 생기면 사람 생각에 치우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성경에 있어서의 모든 정답은 우리 사람의 생각, 무슨 유명한 신학자나 목회자의 주장이나 해석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에 있다고 우리는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마태복음을 한 번 보실까요? 마태복음 6장 31절~33절입니다.

마태복음 6장 31절~33절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ですから、何を食べようか、何を飲もうか、何を着ようかと言って、心配しなくてよいのです。
これらのものはすべて、異邦人が切に求めているものです。あなたがたにこれらのものすべてが必要であることは、あなたがたの天の父が知っておられます。
まず神の国と神の義を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これらのものはすべて、それに加えて与えられます。

이 두 말씀을 모두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앞서 요한복음에 보니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우리가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보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덜어주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신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 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구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것만 알면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이것을 잘 모르겠어요.

오늘은 이 말씀의 참 뜻을 깨닫고 우리 기도의 응답을 모두 받을 수 있게 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느 회사에 한 직원이 있었습니다. 뭐, 편의상 제가 홍 가니까 홍 대리라고 하지요. 이 홍 대리는 본래부터 좀 사장님한테 불만이 많았습니다. 자기가 기안서를 올리면 결제를 잘 안 해줘요. 그런데 같은 회사 동료 직원인 김 대리는 결제만 올렸다 하면 곧바로 사인을 받아옵니다. 예산도 얼마나 많이 쓰는지 몰라요. 그래도 펑펑 회사에서 지원을 해줍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아하, 이 사장님이 차별을 하고 있구나. 사장님은 김대리만 편애를 하고 나는 미워하나 보다……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그냥 참고 있었더니, 안되겠어요. 한 번 제대로 사장님과 말을 해봐야겠어요. 그래서 이 홍 대리는 그 날도 평소처럼 결제서류를 딱 손에 들고서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사장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똑똑.”

“예, 들어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저 사장님, 오늘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음? 그래? 어서 말을 해보게나.”

그러자 이 홍 대리는 말을 합니다.
“사장님은 아무래도 직원들을 차별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장님은 놀라시죠.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우리 직원들을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데 그래?”

홍 대리는 말을 계속합니다.
“그렇다면 제 동료 김 대리는 맨날 결제를 올리면 사인을 해주시면서 제가 올리는 결제에는 언제나 사인을 안 해주십니다. 그 이유는 사장님이 김 대리만 편애하고 저는 미워하기 때문 아닌가요?”

그러자 사장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봐. 그건 자네가 모르고 하는 소리야. 우리 회사가 아무리 넉넉하다고는 하지만, 내가 미워하는 직원한테까지 매달 꼬박꼬박 월급을 주면서 데리고 있겠나? 내가 자네를 미워 한다구? 자네가 우리 회사에 지원하고 면접보고 그랬잖아? 그 때 누가 면접을 봤어? 나야. 그리고 누가 자네를 뽑았는지 알아? 내가 뽑았어. 물론 더욱 훌륭한 지원자들도 많았지, 하지만 나는 자네가 마음에 들었어. 그래서 내가 뽑은 거야. 그리고 지금 자네가 있는 부서가 얼마나 중요한 부서인지 알아? 내가 자네를 미워했다면 어떻게 그런 중요한 일을 자네한테 맡길 수가 있겠는가.”

이 말을 듣자, 우리의 홍 대리. 표정이 밝아집니다. 아, 그래. 사장님이 나를 차별한다는 것은 오해였구나. 사장님은 나도 아껴주시는구나. 김 대리만 사랑하시는 게 아니라 나도 사랑해주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니 얼마나 마음이 가벼워졌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제 환한 표정을 지으면서 손에 든 결제판을 내보입니다.

“사장님, 그렇다면 오늘은 제가 올리는 결제에 사인을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래? 그럼 어디 봅시다”

그런데 우리의 홍 대리가 내민 결제판을 본 사장님.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잠시 후 사장님이 고개를 들면서 한 말씀 합니다.

“자네, 이게 뭔가?”

그랬더니 자신감을 얻은 홍 대리. 당당하게 말을 합니다.

“지난 번에 김 대리가 사장님한테 결제를 받은 안건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사장님은 김 대리가 미국과 유럽 각지를 방문하도록 한 달 동안 출장을 허락하셨다는 말씀 들었습니다. 당연히 출장비에는 비행기표와 숙박비, 식비, 그리고 출장수당까지 나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사장님,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이봐, 홍 대리. 그러니까 이게 뭐냐니까.”

“예, 제주도 3박 4일 출장 계획서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이 내용이 무슨 뜻이냐 하는 걸세.”

우리의 홍대리는 당당하게 말합니다.

“모든 직원들을 차별하지 않고 공평하게 대하신다는 사장님은, 김 대리한테 한 달 동안 미국과 유럽 출장을 보내주실 정도로 통이 크신 분이시니, 저한테는 해외는 아니더라도 제주도 3박 4일 정도는 출장을 보내주실 것 같아서 계획을 짜보았습니다.”

“흠……. 그래? 그럼 제주도는 왜 가려고?”

그러자 우리의 홍 대리.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바다가 좀 보고 싶어서요.”

여러분께서 이 사장님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비로운 사장님이 가만히 있다가 말을 시작합니다.

“이보게 홍 대리. 잠깐 앉아보게. 자, 그리고 내 말을 좀 들어봐. 지난 번에 김 대리가 출장 기획서를 냈고 내가 사인을 했네. 그 내용은 자네가 말한 대로 미국과 유럽 각국을 한 달 동안 방문하고 오는 일일세. 물론 거기에는 항공비와 숙식비, 그리고 출장 수당까지도 지불되지. 하지만 그 기획서를 자네는 봤나? 우리 회사는 우리 회사 제품을 해외로 수출하려고 하고 있네. 그런데 김 대리는 미국과 유럽 각지에 있는 회사들을 검색해서 우리 회사와 제휴를 할 만한 곳을 물색하고, 계속 연락을 해오다가 이제 마지막으로 직접 방문을 해서 계약을 맺으러 간 걸세. 이 일은 사장인 내가 추진하라고 지시를 했고, 이 일이 성사된다면 우리 회사에 있어서 큰 이익이 되는 일이네. 요즘은 다들 경기가 어렵다고는 하지만, 다행히 우리 회사는 그 정도 지원해줄 여력은 있어. 내가 지시한 일이고 우리 회사를 위한 일이라면 미국과 유럽 한 달이 문제인가? 세계 일주 1년치라도 비용을 지출할 수 있단 말이네.

그런데 이봐. 홍 대리. 3박 4일로 제주도에 보내달라고? 물론 비용으로 본다면 미국과 유럽 한 달 간 출장비에 비해 몇 분의 일도 안 되는 돈이지. 그런데 말이야. 자네가 제주도에 가고 싶다는 이유가 바다를 보고 싶다고? 만약에, 자네가 바다를 보는 일이 사장인 나나 회사한테 도움이 된다면 3박 4일이 아니라 제주도에 아예 별장을 지어가지고는 돈 다 대주면서 원하는 만큼 살게 해줄 수도 있어. 그런데 그게 나나 회사에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건가?”


사장님 말씀은 계속됩니다.

“이봐. 자네 지난번에는 책상을 바꿔달라고 했지? 그래. 그러면 회사 돈을 들여서 자네 책상을 바꿔주어야 할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나? 또 그 전에는 차를 하나 뽑아달라고 했지? 이봐. 자네 집에서 전철 역까지 걸어서 5분 걸리지? 그리고 전철로 회사까지 20분이면 올 수 있지? 그런데 왜 내가 회사 돈을 써가면서 자네한테 차를 뽑아 주어야 하지? 이래도 내가 결제를 안 해 주는 게 자네를 차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이런 결제를 올릴 시간이 있으면, 나나 우리 회사의 경영방침을 좀 공부하도록 하게.”

이 이야기,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는 물론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는 아니고 제가 잠시 생각해본 짤막한 것입니다만, 우리는 분명 신앙적으로 볼 때 이런 면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라는 것이 있어요. 그래서 기도를 합니다. 새벽기도도 하고 철야기도도 하고, 또 때로는 금식기도를 하고 그렇습니다. 큰 소리로 기도도 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지요. 그렇게 해서 그러면 응답을 받았어요. 그러면 기쁘겠지요. 할렐루야. 감사하지요. 그런데, 그걸로 끝인가요?

여러분도 많은 간증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저는 이러이러한 어려움이 있었어요. 이러이러한 병에 걸렸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기도를 하고 응답을 받았어요. 할렐루야! 아멘! 감사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간증이었습니다.

예전에 제가 어느 기독교 방송에서 라디오에 나오신 분인데 이런 간증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예전에 양쪽 귀가 잘 안 들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 분이 어떻게 했냐 하면, 병원 침대에 앉아서 성경을 들고서는, 주기도문을 한 번 외울 때마다 성경 한 장씩 넘겼대요. 이 성경이 얼마나 두껍습니까. 한국 성경은 구약이 대략 1330페이지, 신약은 423페이지 정도가 되어요.

이걸 더하면 1753페이지. 종이 한 장씩으로 계산 한다면 단순히 2로 나누어서 876장 정도 되겠지요. 주기도문을 한 번 외우는데 얼마나 걸릴까. 제가 한 번 해보니까 빨리 하면 15초 정도면 하겠더라구요. 그런데 한 두 번도 아니고 800번 이상 외워야 하니까 나중에는 지치겠지요. 그래서 대략 평균을 잡아서 30초에 한 번, 1분에 두 번이라고 계산했습니다. 종이가 876장이었으니까 이를 1분에 2장 넘기게 되면 438분. 시간으로 바꾸면 7.3시간, 대략 7시간 12분입니다. 그 동안 잠시 쉬거나 화장실도 다녀오고 식사도 하고 그러면 더 길어졌겠지요. 그렇게 주기도문 한 번 외우고 넘기고 한 번 외우고 넘기고, 그렇게 요한계시록 끝까지 넘기고 나니까 갑자기 저기서 빛이 날라오더니 두 갈래로 나뉘어져서 귓속으로 휙 하고 들어 오더래요. 그러자 귀가 뚫리고 들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런 식의 간증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예. 감사하지요. 예, 신앙이 있으시고 더구나 방송에까지 나와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 정도이니 뭐, 거짓은 아니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신앙의 전부가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또 이런 분도 계십니다. 자기는 반드시 응답을 받아야 할 기도제목이 있대요. 자기는 하나님이 이 기도를 들어줄 때까지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분들 기도원에 가면 많이 계세요.

하지만 우리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과연 신앙적으로 맞는 일인가요? 지금 무슨 하나님과 기 싸움을 해서 이기자는 것인가요?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고집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를 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이지요. 믿음이 없으면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면 응답해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는 응답을 받고 누구는 응답을 못 받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에 맞느냐 안 맞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아무리 유창한 말투로 아무리 오랜 시간을 아무리 큰 소리로 기도를 드려보아도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 뜻에 맞지도 않는 기도라면 이는 헛수고입니다.

한편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 마음에 맞는다면, 하나님 뜻에 맞는다면 아는 무엇이든지 주님께서 곧바로 이루어주실 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욥기 41장 1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욥기 41장 11절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だれが、まずわたしに与えたというのか。わたしがそれに報いなければならないほどに。天の下にあるものはみな、わたしのものだ。

이사야 59장 1절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見よ。主の手が短くて救えないのではない。その耳が遠くて聞こえないのではない。

시편 94편 9절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耳を植えつけた方が聞かないだろうか。目を造った方が見ないだろうか。


시편 33편 13절~15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살피시는도다
그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살피시는 이로다”

主は天から目を注ぎ人の子らをすべてご覧になる。
御座が据えられた所から地に住むすべての者に目を留められる。
主は一人ひとりの心を形造りわざのすべてを読み取る方。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관심하시기 때문에 기도를 안 들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살펴보고 계실 정도로 우리들에게 대단히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능력이 부족해서 너무 멀리 계셔서, 돈이 부족해서 안 들어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온 천하가 주님의 것입니다. 무엇이 부족하시겠습니까. 다만, 우리가 하나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그저 기도만 드리고 있기 때문에 응답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 마음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에 하나님 마음이 적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믿음만 있고 말씀이 없다면 이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자동차로 예를 들어봅니다. 믿음은 자동차를 뜻하지요. 말씀은 기름입니다. 아무리 자동차가 좋아도 기름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지요. 우리 믿음을 말씀으로 가득 채워야 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반대로, 말씀만 있고 믿음이 없으면 곤란합니다. 가끔 보면 신앙이 없는 상태에서 성경을 연구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런 분들을 보면 자꾸만 성경을 인간적으로 해석하려고 해요.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이를 자기 생각대로만 자기 지식과 경험대로만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아요.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고 애기하거나, 사도 바울이 다메섹을 향할 때 예수님을 만난 것도 당시 그 지역에는 천둥이 많이 일어났는데, 이 때도 천둥 때문에 바울이 헛것을 본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동차는 없고 기름만 있으면 이것도 안 되는 것처럼 믿음은 없고 말씀만 있어도 안 되는 것입니다. 믿음과 말씀은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제 믿음이라고 하는 좋은 차에 말씀이라고 하는 기름을 꽉 채웠어요. 하지만 아무리 좋은 차에 비싼 기름을 가득 채웠다고 해도 움직이지 않는 차는 쓸모가 없습니다. 움직이는 것, 이것이 바로 행함인 것이지요.

야고보서 2장 17절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同じように、信仰も行いが伴わないなら、それだけでは死んだものです。

움직이지 않는 차가 고장 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도 역시 죽은 것입니다.

자, 이제 좋은 차에 기름을 가득 채웠습니다. 본격적으로 운전을 하려고 해요. 아이구, 그런데 이걸 어쩌면 좋겠습니까. 중요한 것이 빠졌습니다. 무엇이 빠졌습니까. 그렇습니다. 열쇠가 없어요. 차도 있고 기름도 채웠는데 열쇠가 없으니 움직이려고 해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열쇠가 무엇입니까. 성경을 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절~3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たとえ私が人の異言や御使いの異言で話しても、愛がなければ、騒がしいどらや、うるさいシンバルと同じです。
たとえ私が預言の賜物を持ち、あらゆる奥義とあらゆる知識に通じていても、たとえ山を動かすほどの完全な信仰を持っていても、愛がないなら、私は無に等しいのです。
たとえ私が持っている物のすべてを分け与えても、たとえ私のからだを引き渡して誇ることになっても、愛がなければ、何の役にも立ちません。

고린도전서 13장 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こういうわけで、いつまでも残るのは信仰と希望と愛、これら三つです。その中で一番すぐれているのは愛です。

그렇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성경에 보면 응답 받는 기도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는 바로 그 기도에 <사랑>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말씀과 행함은 반드시 중요하지만 그 안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이는 휴지조각이요 그야말로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이 운전을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요즘도 뉴스에 보면 끔찍한 교통사고 소식들이 많이 들려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합니까.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많다고 하는 분들, 성경을 많이 공부했다고 하는 분들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습니까.

그런 분들을 보면 공부도 많이 합니다. 기도도 많이 합니다. 봉사도 많이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그 기도에 없기 때문에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면 이런 분들을 보면 남들한테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너, 요즘 기도 안 하지? 기도 많이 해. 어. 누구누구, 금식 좀 해야 되겠어. 너 믿음이 좀 부족한 것 같애……”

아니, 자기가 무슨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이런 말을 남들한테 합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피해의식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어떤 생각이 들게 되겠습니까. 아무런 응답도 못 받는데 왜 나만 이렇게 힘들게 기도하고 봉사해야만 하나……라는 피해의식이 자리잡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주지 못할망정 상처를 주어서 되겠습니까. 이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나님 사람과 이웃 사랑이 너무나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살펴본 말씀 중 세 가지를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6장 24절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今まで、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名によって何も求めたことがありません。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受けます。あなたがたの喜 びが満ちあふれ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마태복음 6장 33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まず神の国と神の義を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これらのものはすべて、それに加えて与えられます。

고린도전서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こういうわけで、いつまでも残るのは信仰と希望と愛、これら三つです。その中で一番すぐれているのは愛です。

우리는 이제 믿음이라는 자동차에 말씀이라는 기름을 가득 채우고, 사랑이라는 열쇠로 엔진을 걸어서 힘차게 주님의 일을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사랑을 갖고 주님의 마음과 주님의 나라를 생각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구할 때 믿음과 말씀과 행함 속에서 모든 기도에 응답을 받고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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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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