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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1회 지금
2019년 10월 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21절~22절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マタイの福音書 8章 21節~22節
“また、別の一人の弟子がイエスに言った。「主よ。まず行って父を葬ることをお許しください。」
ところが、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に従って来なさい。死人たちに、彼ら自身の死人たちを葬らせ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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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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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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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지금” 今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역사적으로 볼 때 많은 사람들에게 의아함을 느끼게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8장 21절~22절입니다.

마태복음 8장 21절~22절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また、別の一人の弟子がイエスに言った。「主よ。まず行って父を葬ることをお許しください。」
ところが、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に従って来なさい。死人たちに、彼ら自身の死人たちを葬らせなさい。」”

이 말씀에 의하면 어떤 제자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하는 말이, 내가 주님을 따라야 하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먼저 가서 내 아버지 장사를 지내고 난 다음에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자 이 말씀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흥미롭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오늘 본문 중에서 22절 말씀.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ところが、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に従って来なさい。死人たちに、彼ら自身の死人たちを葬らせなさ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장사 치르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아버지 장사가 중요한 게 아니야. 너는 나를 따라야 해……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 우리가 이를 생각해볼 때 예수님은 너무나도 가혹한 말씀을 하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물론 주님을 따르는 것은 중요하지요. 하지만 아버지 장사를 치르는 것은 중요하지가 않나요?

나사로가 죽었을 때나 기타 성경에 묘사된 당시 장례 풍습을 보더라도, 누군가가 돌아가시면 지금처럼 많은 조문객이 모여와서 함께 슬퍼하고 일을 처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 장사를 치르겠다는데, 그러지 말고 나를 따르라……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처럼 들린다는 것이지요.

이 구절에 대해서 많은 신학자들이 지금까지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해왔습니다. 그 중에는 정말 아무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하더라도, 장사를 지내는 것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하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말로 예수님은 지금 아버지가 돌아가셨음에도 불구하고 장례를 치르는 것을 다 내버려두고 나를 따르라 라고 하셨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요?

이를 위해서 우선 당시 상황을 조금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그 때는 예수님께서 무리들과 함께 길을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을 따르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과 길을 걸어가면서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가혹하게 들리는 이유는 뭘까요. 그것은 바로 이 제자라고 하는 사람의 아버님이 지금 막 돌아가셔서 장례를 올려야 하는데, 이를 예수님께서 하지 말아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성경 기록상으로 볼 때 그렇다고 하기에는 몇 가지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이 점에 대해서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 지금 이 제자의 아버지가 막 돌아가셨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는 그에게 있어서 상당히 다급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음도 추슬러야 할 뿐만 아니라 장례식 준비도 하여야 할 것입니다. 돌아가신 분이 자신의 친척도 아닌 아버지라고 하면 더더욱 정신이 없겠지요. 그와 같은 상황을 묘사한다면 이런 식의 기록은 어떻겠습니까.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한 제자가 황급히 달려와 이르되, 주여 지금 제 아버지가 죽었나이다 이에 저로 하여금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하지만 오늘 말씀은 어떻습니까. 이와 같은 긴박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만약에 지금 방금 이 제자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장사 재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한다면, 이는 단순히 윤리나 도덕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율법에 대한 문제까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십계명 중에서 제5계명은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20장 12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2절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あなたの父と母を敬え。あなたの神、主が与えようとしているその土地で、あなたの日々が長く続くようにするためである。

십계명이 모두 그렇듯이 이 제5계명도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아버지 장사를 지내지 말라는 말씀은 자칫하면 이 계명을 어기는 말씀처럼 들릴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또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 제자보다도 먼저 예수님께 말씀을 드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8장 19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8장 19절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そこに一人の律法学者が来て言った。「先生。あなたがどこに行かれても、私はついて行きます。」

여기서 서기관이라고 하는 사람은 다른 말로 율법학자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율법에 있어서 많이 연구를 하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지금 막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장사를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한다면, 거이 있던 이 서기관이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항의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니, 예수님, 그건 율법 특히 십계명에 어긋나는 말씀 아니신가요? 하고 질문이라도 한 번 했을 법도 한데, 성경 어디에도 그와 같은 기록이 없습니다.

이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본다면, 이 성경말씀에 대해서 어떤 한 흥미로운 해석이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1차 장사와 2차 장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차 장사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사람이 돌아가셨을 때 하는 것입니다만, 당시는 2차 장사라고 하는 풍습도 있었다고 합니다. 2차 장사는 무엇인가 하면, 사람이 돌아가시면 요즘 일본을 보면 99% 이상이 화장을 하고 한국도 점차 화장이 주류가 되고 있습니다만, 한국이나 일본이나 옛날에는 시신을 그대로 땅속에 매장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동굴을 파서 무덤으로 사용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산의 절벽 같은 곳을 파서 넓은 방처럼 만들어 놓고는 거기에 시신을 안치하고 나서 큰 돌로 그 입구를 막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놓은 상태로 1년 정도가 지나면 살은 완전히 썩고 뼈만 남는다고 합니다. 이제 그와 같은 상태가 되면 무덤 돌문을 열어서 유골을 유골함에 넣어서 다시 그 곳에 안치를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2차 장사라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 제자는 지금 예수님께 2차 장사를 허락해 달라,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그리 급하지 않는 일을 먼저 처리하게 해달라고 말씀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신학자의 주장에 의하면 여기에서 더 나아가, 2차 장사도 지금 당장이 아니라 몇 개월 뒤에 치러야 하는데, 그 몇 개월 뒤에 2차 장사를 치르고 난 다음에야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말일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이죠.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이는 전혀 다급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를 핑계로 해서 예수님을 좀 나중에 따르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혹시 기억하실 것입니다. 학교에 다니다 보면 시험기간이 있잖아요?

자, 오랜만에 오늘 문제 나갑니다. 잘 생각해보시고 마음 속으로 크게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학생이라면 평소에도 그래야겠습니다만, 특히 시험기간 때에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의 편의를 위해서 객관식으로 드리겠습니다. 자, 시험기간에 해야 할 것은 다음 중 무엇입니까. 1번 시험공부, 2번 평소에는 하기 싫었던 방 청소.

이 문제가 어렵다고 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다른 문제도 내 드리겠습니다. 자, 문제는 똑같습니다. 시험기간에 해야 할 것은 다음 중 무엇입니까. 1번 시험공부, 2번 기타.

성공적인 인생을 보내기 위해서는 그 때마다 해야 하는 <선택>만 잘하면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동서고금,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 문제를 물어보세요. 어떤 게 정답이냐고. 그러면 정상적인 분이라면 모두 1번 시험공부를 택하겠지요. 하지만 그게 그리 쉬운가요? 아니요. 쉽지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왜겠습니까. 왜 평소에는 하기 싫던 방 청소가 시험기간만 되면 하고 싶어지는 거예요. 그것은 다름아닌 시험공부를 하기가 싫으니까, 그 핑계를 찾다 보니 그나마 방 청소가 차라리 낫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거라도 하고 싶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쪽에서는 계속해서 핑계거리, 구실거리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또 그렇다고 자녀분들께, 아~ 핑계거리 구실거리 만들지 말고 공부하라고 닥달하지 마세요. 공부해라 공부해라 하고 자녀들에게 말을 많이 하시는 분들은, 공부가 얼마나 힘든지 몰라서 하는 말씀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면 또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르지요. “내가 공부를 안 해 본 줄 알아? 나도 옛날에 다 해봤어”

여러분, 우리가 교회 하루 이틀 다닙니까. 나도 옛날에 금식도 다 해보고, 기도도 다 해봤어……라고 하는 분들이 여러분 교회에 계시면, 그 모습이 은혜롭겠습니까.

신앙은 추억이 되면 안 됩니다. 신앙은 현재 진행형이어야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공부 안 하는 아이들에게 부모로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학원 보내주는 거요? 좋은 선생님 붙여주는 거요? 아니요. 부모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걸 잘 하려고 하지 않아요. 왜요? 자기도 힘들거든요. 그래서 부모님들도 자녀들의 교육에 대해서 또 다른 핑계거리, 구실거리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모님을 공경하려고 하는 것을 꾸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좀 뒤로 미루기 위해서 대고 있는 핑계거리, 구실거리를 꾸짖고 있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우리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요,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먼저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이 우선순위를 잘못 잡으면 나중에 크게 후회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를 보면 어땠습니까. 그가 어디에 방주를 짓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 정확한 언급은 없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물 위에 짓지는 않았습니다. 땅 위에 지었지요. 그 기간도 누구는 120년이라고 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나이로 계산해보면 대략 80년에 조금 못 미치는 기간이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짧은 기간은 아니지요. 노아는 그 오랜 세월 동안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렇다면 노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창세기 6창 9절에서는 노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창세기 6장 9절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これはノアの歴史である。ノアは正しい人で、彼の世代の中にあって全き人であった。ノアは神とともに歩んだ。

노아는 의인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완전한 자라고까지 합니다. 당시 방주 크기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창세기 6장 15절에 정확하게 나와있습니다.

창세기 6장 15절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それを次のようにして造りなさい。箱舟の長さは三百キュビト。幅は五十キュビト。高さは三十キュビト。

라고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방주의 크기를 본다면 1큐빗이 사람 발꿈치에서 손 끝까지 길이었다고 하는데 이를 대략 45센티 정도였을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계산을 해보면 방주의 앞뒤 길이가 135미터, 폭은 22.5미터, 높이는 13.5미터라고 하는 숫자가 나오는데, 이 크기는 축구장 넓이의 1.5배, 높이는 대략 7층 건물 정도가 되는 어마어마한 건축물이었지요.

그렇게 큰 배를, 그것도 바다 위도 아닌 땅 위에 짓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을 크게 벗어나는 일입니다. 노아가 70~80년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은 그를 보고 비웃었을 것입니다.

이봐. 하나님을 믿는 것도 좀 적당히 해. 자, 그런 황당한 배는 나중에 만들고 우리와 함께 놀자. 우리와 함께 사업을 하자. 우리와 함께 다른 것을 하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의인이었던 노아는 어떻게 말했을까요. 이봐. 이제 세상은 금방 망할 거야.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진다구. 자, 더 늦기 전에 자네도 나와 함께 배를 지읍시다. 그리고 마지막 날 우리 같이 방주에 들어가서 구원을 받읍시다. 그는 분명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노아가 평생 동안 전도를 몇 명 했습니까. 예, 그 오랜 기간 동안 자기 가족들, 자기 빼고 7명 외에는 한 사람도 전도를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께서도 지금까지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전도를 못했다 라고 해서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세상을 다음과 갈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4장 38절~39절
“38.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洪水前の日々にはノアが箱舟に入るその日まで、人々は食べたり飲んだり、めとったり嫁いだりしていました。
洪水が来て、すべての人をさらってしまうまで、彼らには分かりませんでした。人の子の到来もそのように実現するのです。

이것도 또 오해하시면 곤란한 것이,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세상 일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노아 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당시 세상 사람들은 세상 일들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 일들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지식과 재물과 지위와 권력과 명예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열심히 돈을 벌었습니다.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홍수 때는 어땠습니까. 세상 지식이 그들을 구원했습니까. 재물이 그들을 구원했습니까. 아니면 세상 지위나 권력이나 명예가 그들을 구원했습니까.

마지막 날에 그들을 구원한 것은 오로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를 몰랐습니다. 노아가 아무리 말을 해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언제 깨달았습니까. 그렇습니다. 방주의 문이 닫히고 지금까지 보지도 못했던 물들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나서야. 그리고 이제 물이 점점 차 올라서 이 세상에는 어디 하나 피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나서야 하나님에 대한 순종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방주에 못 들어가고 바깥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들이 저기 떠다니는 방주를 보고 뭐라고 했겠습니까. 이봐 노아! 내가 잘못했어! 너를 비웃었던 내가 어리석었어. 다시 한 번만 기회를 주게. 딱 한 번만 열어주게!

창세기 6장 14절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あなたは自分のために、ゴフェルの木で箱舟を造りなさい。箱舟に部屋を作り、内と外にタールを塗りなさい。

방주를 만들 때 하나님께서는 역청을 칠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말하자면 방수 처리지요. 이로 인해서 물은 배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렇다고 방음처리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배 안에서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수 많은 사람들의 비명소리, 외침소리도 들리지 않았을까 합니다.

만약에 그런 소리가 들렸더라면, 어떻게 해야 했겠습니까. 그래도 노아가 의인이었다고 하는데, 좀 열어줄 수도 있는 것 아니에요? 아무리 여러 짐승들을 태웠다 하더라도 그렇게 크고 넓은 방주였다고 하니, 최소한 수 십 명은 더 태우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노아가 문을 조금 열어서 몇몇 사람들을 건져 올렸더라”……라는 내용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거 막판에 노아가 너무 야박하게 군 건가요? 왜 문을 안 열어주었을까요. 잠깐 열어주면 됐을 거 아니에요? 그러나 노아는 아무리 의인이었다 하더라도 이제 방주의 문을 열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노아가 야박해서가 아닙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창세기 7장 16절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入ったものは、すべての肉なるものの雄と雌であった。それらは、神がノアに命じられたとおりに入った。それから、主は彼のうしろの戸を閉ざされた。

문을 누가 닫았다고요? 방주의 문을 노아가 닫았다면, 노아가 다시 열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방주의 문을 닫으신 분은 노아가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방주의 열쇠, 구원의 열쇠는 노아나 다른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을 믿으시라고, 교회에 나오시라고 하면, 바쁘다고 하십니다. 시간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번 주일에는 약속이 있다고 하십니다. 인터넷으로 전도를 하다 보면요, 더 심한 말씀을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래요. 바쁘시겠지요. 시간이 없으시겠지요. 약속도 있으시겠지요. 그리고 자기는 관심도 없는데 누군지도 모르는 목사라는 사람이 갑자기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노아의 홍수 때, 물론 신앙적으로는 죄로 가득 차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세상적으로는 머리도 좋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 나중에 갈게, 내 일 좀 다 하고 갈게. 사람들은 그러면서 함께 주님께 순종하자고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마지막 때가 이처럼 빨리 다가올지는 몰랐던 것입니다.

과거에 일제시대 때를 보면 조선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둘로 갈라졌습니다. 그것은 친일을 하거나 아니면 항일을 하거나 둘 중 하나였습니다.

해방이 되고 난 다음에 친일을 한 사람들을 체포해서 질문을 합니다. 당신처럼 그렇게 많이 배우고 지식도 많은 사람이, 왜 친일을 했습니까.

그러면 하나같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빨리 일제가 망할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하루는 24시간, 분으로는 1,440분. 초로는 86,400초입니다. 이를 1년 365일로 바꾼다면 1년은 8,760시간, 분으로는 525,600분, 초로는 31,536,000초입니다.

꽤 길죠? 하지만 정말 긴가요? 2019년. 어째요. 벌써 10월하고도 6일입니다. 이제 올해 2019년은 3개월도 안 남았습니다.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마지막 날이 임했을 때,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가 이와 같이 말할 것입니다.

“그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노아의 삶, 노아가 방주를 짓는 삶, 그와 같은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순종을 보여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입니다.

로마서 5장 19절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すなわち、ちょうど一人の人の不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罪人とされたのと同様に、一人の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義人とされるのです。

빌립보서 2장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が道であり、真理であり、いのちなのです。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だれも父のみもとに行くことはできません。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一人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으로 이르는 길, 방주의 문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열쇠, 그것은 바로 예수님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구원을 얻습니다. 그 이름을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순종하신 예수님께서 흘려주신 그 피를 믿으면 우리는 구원을 얻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2절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わたしの父の家には住む所がたくさんあります。そうでなかったら、あなたがたのために場所を用意しに行く、と言ったでしょうか。

천국은 넓습니다. 노아의 방주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넓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여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넓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곳입니다.

그리고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神は彼らの目から涙をことごとくぬぐい取ってくださる。もはや死はなく、悲しみも、叫び声も、苦しみもない。以前のものが過ぎ去ったからである。」

요한계시록 21장 23절~27절
“23.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24.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25.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26.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27.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都は、これを照らす太陽も月も必要としない。神の栄光が都を照らし、子羊が都の明かりだからである。
諸国の民は都の光によって歩み、地の王たちは自分たちの栄光を都に携えて来る。
都の門は一日中、決して閉じられない。そこには夜がないからである。
こうして人々は、諸国の民の栄光と誉れを都に携えて来ることになる。
しかし、すべての汚れたもの、また忌まわしいことや偽りを行う者は、決して都に入れない。入ることができるのは、子羊のいのちの書に記されている者たちだけである。

우리 모두 예수님이 십자가로 보여주신 순종을 우리 마음에 새기고, 더 늦기 전에 지금 바로 당장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예수님만을 따라감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때에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주님께서 주시는 영광스러운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202회 나를 위한 고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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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0회 합당한 자
2019년 9월 3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5절~38절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マタイの福音書 10章 35節~38節
“わたしは、人をその父に、娘をその母に、嫁をその姑に逆らわせるために来たのです。
そのようにして家の者たちがその人の敵となるのです。
わたしよりも父や母を愛する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わたしよりも息子や娘を愛する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
自分の十字架を負ってわたしに従って来ない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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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합당한 자” ふさわしき者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5절~38절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マタイの福音書 10章 35節~38節
"わたしは、人をその父に、娘をその母に、嫁をその姑に逆らわせるために来たのです。
そのようにして家の者たちがその人の敵となるのです。
わたしよりも父や母を愛する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わたしよりも息子や娘を愛する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
自分の十字架を負ってわたしに従って来ない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온 가족이 불화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다”라고 까지 하시지요.

그렇다면 이 말씀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아하, 그래. 우리가 부모님을 공경해야 하지만 그보다는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구나. 이렇게 이해하면 될까요?

물론 그럴듯해 보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부모님을 공경하고 가족을 사랑한다 하더라도, 그러나 그 우선순위로 본다면 하나님을 더욱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 이렇게 이해하면 될까요? 하지만 이렇게 이해하고자 하면 또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합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이 말씀에 보면 두 계명을 말씀하시는데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라……입니다만, 여기서 잊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 바로 마태복음 22장 39절 전반부입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즉 이 말씀은, 첫째 계명이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으로 둘째 계명은 첫 번째 계명 다음으로 중요하다는 말씀이 아니라, 두 번째 계명도 첫 번째 계명과 똑 같이 중요하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즉,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둘째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첫째 계명과 똑같이 중요하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성경에 적힌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대원칙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에 물음표를 한 번 붙이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자칫 성경 내용에 있어서 혼란이 생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게 된다면 믿음 좋은 사람들 가정은 다 서로가 불화해해요. 그렇잖아요.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가 가족끼리 사이가 안 좋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시는데, 우리 가족을 보면 서로 너무나 사이가 좋아요. 이건 그러면 우리 가정이 예수님 말씀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리고 또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라는 말씀을 가지고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고~ 성경 말씀은 정말 맞아. 우리 애들이 얼마나 내 말을 안 듣는지 알아? 걔네 들이야 말로 정말 원수라니까. 아니면, 내 남편이 또는 내 부인이 내 속을 얼마나 썩이는지 몰라. 그야말로 내 원수가 따로 없어.

여러분, 이게 맞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오늘 저는 여러분께 새로운 도전을 드리고자 합니다. 자신의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시는 분들께서는 한 번 도전해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4장 42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です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あなたがたの主が来られるのがいつの日なのか、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ら。


마가복음 13장 33절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気をつけて、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その時がいつなのか、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からです。

누가복음 21장 36절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しかし、あなたがたは、必ず起こるこれらすべてのことから逃れて、人の子の前に立つことができるように、いつも目を覚まして祈っていなさい。」

골로새서 4장 2절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たゆみなく祈りなさい。感謝をもって祈りつつ、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

자, 이처럼 성경에서는 반복해서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좋으신 분들께서는 이제부터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밤이나 낮이나 깨어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이게 말이 되나요?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성경 좀 안다는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아, 홍 목사, 그것은 그대로 해석하면 안 되는 거야. 이것은 영적으로 이해해야지…… 이런 말씀 들어보셨지요?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과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다소 의아한 부분이 생기게 됩니다. 어떤 건 성경에 적힌 그대로 이해해야 하고, 또 어떤 건 적혀있는 대로가 아닌 영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궁금증이 생기지요. 아니, 어떤 건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또 어떤 건 영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그 경우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면 그 분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하면 성령님께서 알려주신다”

아, 참 멋진 말 아닙니까.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하면 성령님께서 알려주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예요? 내가 하는 말은 성령님께서 하신 말씀이니까 더 이상 따지지 말아라. 나한테 그런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너는 성경도 제대로 안 읽고 기도도 많이 안 했기 때문이다……. 이런 말 아니겠습니까.

가끔 목사님들 중에도 이런 분들이 계십니다. 그 분의 설교나 그 분이 쓰신 책을 보고 질문을 한다거나 하면, 아, 자기는 성령님께서 인도해주시는 대로 말을 하고 글을 쓰기 때문에 이런 건 따지면 안 된대요.

참 과감하신 말씀이십니다. 물론 저도 성령님께도 인도해주시는 대로 쓰임 받기를 간절히 원합니다만, 그렇다고 감히 제 입으로 그런 말을 할 용기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 너무나도 부족하거든요.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저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서울의 수돗물이 그게 문제라고 하지요? 물이 처음 공급되는 곳에서는 아주 깨끗하대요. 다만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도중의 수도관이 오래되거나 녹슬거나 해서 수질이 떨어진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완벽하시지요. 예수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성경은 완전한 하나님 말씀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전해 드리는 저는 그렇다면 정말 완벽한가. 나 자신이 정말 깨끗한 수도관이기에 주님의 말씀을 한 점 오류도 없이 전해드리고 있는가 하는지를 저 자신에게 묻는다면, 물론 그러려고 노력은 합니다만, 그렇다고 100% 언제나 그렇다고는 차마 자신 있게 말씀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제가 겸손해서가 아니라, 이를 판단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인 것이지요.

하지만 자신의 해석, 자신의 말이 성령님의 말씀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이는 교만이나 오만을 넘어서 그야말로 선지자 놀이, 선지자 코스프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말을 할래야 하 수가 없어요. 이것이 조금 더 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사이비 교주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계시를 받았다. 내가 선지자다. 내가 예수다. 내가 하나님이다. 내 말을 따르라. 이것입니다.

그래서 이른바 신흥종교집단을 보시면 거기 신도들의 가정이나 사회적인 환경에 문제가 많이 있다고 합니다. 내가 내 가족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로 인해서 문제가 생긴다면 이것도 주님의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가족이 반대하든 친구가 만류하든 그들의 집단을 위해서, 교주를 위해서 헌신해야 한다……. 이것 아니겠습니까.

성경 해석에 있어서 기본 원칙은 문어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만, 그렇다고 이를 오직 한글성경대로 해석한다거나 자기 상식대로, 막연한 느낌대로 이해하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 드린 “깨어 있으라”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문어적으로 본다면 수면을 취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방심하지 주의를 계속 기울이고 있으라는 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한글성경 그대로 이해하고 잠을 안 잔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그리고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5절~38절
“35.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マタイの福音書 10章 35節~38節

わたしは、人をその父に、娘をその母に、嫁をその姑に逆らわせるために来たのです。
そのようにして家の者たちがその人の敵となるのです。
わたしよりも父や母を愛する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わたしよりも息子や娘を愛する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
自分の十字架を負ってわたしに従って来ない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상황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요즘 시대는 어떻습니까. 옛날과 비교를 해본다면 부모님을 공경하는 자녀들은 늘어난 것 같습니까. 아니면 줄어든 것 같습니까.

아마도 한국이나 일본, 아니, 그 외 다른 나라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아마도 대부분 답이 비슷하지 않을까 합니다. 옛날에는 부모를 공경하고 그랬지만, 요즘은 그런 경향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렇지 않겠어요?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요즘 젊은 것들은 너무나도 교만하고 건방지고 버르장머리가 없어서요? 물론 그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를 사회적으로 보면 어떻습니까.

옛날 농경사회를 보면 특히 서민으로 태어난 사람의 일생은 뻔했습니다. 그 집 아버지가 농사꾼이에요. 그러면 자식도 농사를 하게 되겠지요. 그렇다면 그 일을 누구한테 배웁니까. 그렇죠. 아버지한테 배웁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아버지로부터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농민은 땅이 있었지요. 그 땅은 누구의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버지 것입니다. 형제들이 많이 있다면 나중에 이를 누구한테 물려줄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아버지 판단에 걸려 있었던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가족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농경이나 낙농업 같은 경우는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할 수가 없어요. 반드시 가족의 도움이 있어야지만 일을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당시 아버지의 존재는 자신의 부모이자 스승이자, 회사의 선배님이자 사장님과도 같은 존재, 그 뿐만이 아니라, 조금 더 극단적으로 말씀을 드린다면 자신의 운명을 좌우할 만한 큰 권한을 가진 존재였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만약에, 야, 너한테는 물려줄 땅이 없다……이렇게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면 이는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는 누구나 자신의 부모님을 공경했고 가족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시대 상황은 어떻습니까.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녀들이 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단지 정말 요즘 젊은이들이 못나서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발전을 하다 보니, 예전처럼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역할이 많지 않게 되었다는 점을 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차이를 무시한 채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려 한다면 뜻하지 않는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에베소서 4장 21절~24절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4장 21절~24절
"21.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ただし、本当にあなたがたがキリストについて聞き、キリストにあって教えられているとすれば、です。真理はイエスにあるのですから。
その教えとは、あなたがたの以前の生活について言えば、人を欺く情欲によって腐敗していく古い人を、あなたがたが脱ぎ捨てること、
また、あなたがたが霊と心において新しくされ続け、
真理に基づく義と聖をもって、神にかたどり造られた新しい人を着ることでした。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새 사람을 입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셨다면 새 사람을 입어야지요. 그렇다면 새 사람을 입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렇죠.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을 벗어 버리지 않고서는 새 사람을 입을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옛 사람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것이 바로 옛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 상황을 본다면 가족끼리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는 것은, 윤리나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하루하루 살아가기 위해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던 생각, 마치 목이 마를 때에는 물을 마셔야 한다……는 정도로 상식 중의 상식,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철칙 중의 철칙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그 철칙 중의 철칙. 상식 중의 상식을 깨버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옛 사람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내게 이득이 되면 좋은 것이요, 내게 손해가 되면 나쁜 것입니다. 내 입에 달면 먹고, 내 입에 쓰면 뱉어버리는 식으로, 기준은 항상 나 자신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철칙 중의 철칙, 상식 중의 상식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런 것 바로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새 사람을 입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내 기춘이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말씀 중심이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새 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작은 변화가 아닙니다. 내 철칙과 상식, 지금까지 쌓아왔던 내 가치관을 완전히 송두리째 바꾸는 변화인 것입니다.

제가 운전을 처음 배울 때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 운전을 하고 있으니까 자꾸 핸들을 움직이려고 해요. 조금 오른쪽으로 가면 왼쪽으로 돌리려고 하고, 조금 왼쪽으로 가면 오른쪽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옆에 있는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바로 코앞을 보는 것이 아니라 멀리 앞을 바라 보면서 운전하라고 했던 말씀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그리고 또 그런 운전하시다 보면 그런 경험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운전을 하고 있는데 유리창에 뭐가 좀 묻었어요. 그런데 그게 참 신경이 쓰입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그 먼지만 보고 운전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고가 나겠지요.

우리는 지금 눈앞에 있는 먼지 하나하나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 앞을 보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원하시는 본래 목적지로 도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 코앞이나 내 바로 앞 유리창에 묻은 먼지를 보느냐, 아니면 내가 나아갈 저 멀리 앞을 바라보느냐 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을 기준으로 생각하느냐, 아니면 내가 나아가야 길을 인도해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느냐 하는 차이인 것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기준이 아닌 우리의 앞길을 인도해주시는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모든 가치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나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 먼저, 예수님 먼저가 되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끔 집에서 제 아내와 이야기를 하다가 보면 제 학교 동창이나 선후배에 대한 말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이 그래도 신앙 안에서는 제일 출세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세상적으로 본다면 정말 참 출세를 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 학교 동기나 선후배가 아무리 판검사다, 변호사다, 국회의원이다, 청와대 무슨 고급 공무원이다, 하물며 무슨 장관이다 하더라도, 제 아내의 기준은 명확합니다.

제 아내는 제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 사람한테 우리 결혼식 청첩장을 보냈느냐. 그럼 보냈다고 그러죠. 그러면 다음 질문. 우리 결혼식에 왔느냐. 그런데 안 왔어요. 그럼 마지막 질문. 그럼 조금이라도 축하를 해줬느냐. 그러면 아니, 뭐, 그런 것 없었다고 하잖아요? 여기까지 들은 제 아내의 답은 간단합니다.

“그럼 됐어요.”

제아무리 대단한 사람이고, 예전에 아무리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결혼식에 안 왔을 정도라고 한다면 뭐 됐다는 말이지요. 참 명확하죠? 며칠 전에도 텔레비전을 보면서 제 아내가 하는 말이 “아이고, 저 사람이 우리 결혼식 때 와서 밥이라도 한 끼 먹고 가기만 했었더라도……쯧쯧쯧” 라고 하더라구요.

글쎄요. 저는 뭐 그 뜻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뭐, 워낙 바쁜 분들이기에, 사실 오려고 했었어도, 못 왔던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그런데 이렇게 지금 생각해 보면 분명 왔을 것도 같은데 안 온 사람이 있나 하면, 반면에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와준 사람도 있고 그랬습니다. 그럴 땐 참 반갑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지요.

그래요. 뭐, 제 결혼식에 왔다고 복 받고 그러는 게 아니지요. 제가 뭐 예수님이에요? 하지만, 어린 양의 혼인잔치, 천국은 다릅니다. 거기는 가도 되고 안 가도 되는 곳이 아니에요. 반드시 가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우리가 주님께 이렇게 말했다고 칩시다. 아, 주님, 저는 세상에 살 때에 이렇게 공부를 많이 했고, 이렇게 돈을 많이 벌었고, 이렇게 출세를 많이 했습니다. 그 뿐만 이나리 이렇게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이렇게 착한 일도 많이 했어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옆에 있는 천사한테 물으십니다. 이 사람한테 복음은 전해졌느냐. 그럼 천사가 예 누구누구를 통해서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음. 그래. 그러면 내 이름으로 교회나 이웃을 섬겼느냐, 그런데 천사가 대답하기를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내 이름을 믿고 새 사람을 입었느냐 하니까 그것도 “아니요” 하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럼 됐어.”

더 이상 무엇을 따지시겠습니까. 마태복음 25장 30절이 떠오릅니다.

마태복음 25장 30절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この役に立たないしもべは外の暗闇に追い出せ。そこで泣いて歯ぎしりするのだ。』

여러분,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5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イエスは答えら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人は、水と御霊によって生まれなければ、神の国に入ることはできません。

우리는 이제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가치관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요, 이것이 바로 새 사람을 입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까지는 나를 위해 살았습니다. 나 중심으로 살아왔습니다. 나의 만족을 위해 살았습니다. 나의 기쁨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주님 중심으로 살겠습니다. 주님의 만족을 위해 살겠습니다. 주님의 기쁨을 위해 살겠습니다.

이와 같이 고백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계시록 19장 9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계시록 19장 9절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御使いは私に、「子羊の婚宴に招かれている者たちは幸いだ、と書き記しなさい」と言い、また「これらは神の真実なことばである」と言った。

우리 모두 이제 썩어져 가는 옛 사람, 옛 가치관을 벗어 버리고 주님 중심의 새로운 가치관 새 사람을 입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자로 거듭나서, 마지막 날에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201회 지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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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9회 믿음 성장의 출발점
2019년 9월 2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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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5장 12절~14절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ヘブル人への手紙 5章 12節~14節
“あなたがたは、年数 からすれば教師になっ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にもかかわらず、神が告げたことばの初歩を、もう一度だれかに教えてもらう必要があります。あなたがたは固い食物ではなく、乳が必要になっています。
乳を飲んでいる者はみな、義の教えに通じてはいません。幼子なのです。
固い食物は、善と悪を見分ける感覚を経験によって訓練された大人のも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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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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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믿음 성장의 출발점” 信仰成長の出発点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인생은 어떻게 됩니까. 만사형통? 혹시 우리 이웃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인생에 전혀 어려움이 없게 되고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100% 다 이루어진다. 이렇게 전하신 적은 없으십니까.

실제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정말로 모든 것이 만사형통, 우리가 원하는 대로 100% 다 이루어졌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어려운 일도 있고, 때로는 괴로울 때도 있지요.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대부분 믿음이 있으신 분들은 기도를 할 것입니다. 사업에 문제가 있을 때, 진로에 문제가 있을 때, 인간관계나 건강상의 문제가 있을 때 우리는 주님께 기도를 드리지요.

기도를 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냥 기도를 드리는 일이 착한 일이기 때문에요? 잘 모르겠지만 왠지 마음이 편해져서요?

어떠한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도를 드리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이지요. 제가 지금 이러이러한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이러이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해결해주세요. 이 어려움을, 이 고통을 제게서 물리쳐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기도를 드리는 이유는 단순히 그와 같은 문제가 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께 기도를 드리면, 주님께서는 응답을 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와 같은 믿음을 갖고 기도를 드리면 어떻습니까.

내가 드린 기도에 대해서 응답을 해주셨어요. 어려움이 있었는데 기도를 드렸더니 어려움이 해소되었어요. 건강이 회복되었어요. 문제가 해결 되었어요. 이렇게 된다면 정말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감사와 찬송이 넘쳐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도를 해도 자신이 원하는 응답을 받지 못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한국에서 옛날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쑤시개로 코끼리를 죽이는 세 가지 방법이라는 말씀을 혹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작은 이쑤시개로 큰 코끼리를 죽이는 방법, 생각만 해도 어려울 것 같지만, 그 방법이 한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나 있다고 하니 놀랍지 않습니까.

오늘은 이 방법만 알고 돌아가도 남는 장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이쑤시개로 코끼리를 죽이는 첫 번째 방법, 그것은 이쑤시개로 코끼리를 콕 하고 한 번 찌르고 죽을 때까지 기다린다.

두 번째 방법은, 코끼리가 죽기 바로 직전에 딱 한 번 찌른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죽을 때까지 찌른다.

예, 정말 뭐 추억의 우스개 소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해서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뭐 응답을 언제 해주실지 모르는 상황에서, 응답해주시기 직전에 딱 한 번 기도를 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그러면 기도를 딱 한 번 하고 이제 응답해주실 때까지 기다려요?

제가 생각하기에 대체적으로 믿음이 좋은 분들을 보면 주로 세 번째 방법을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게 뭐겠습니까. 그렇죠. 응답을 해주실 때까지 기도를 하는 것이죠. 우리 한국 사람들을 보면 기도를 얼마나 열심히 하십니까. 매주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 외에도 철야기도 수요예배, 새벽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무슨 다니엘 기도라는 것도 있지요? 그리고 또 그것도 모자라서 기도원에 올라가서 금식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금식도 3일 금식, 5일 금식, 뭐 경우에 따라서는 40일 금식을 하시는 분들도 계시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저도 예전에 금식도 해보고 그랬지요. 괜히 또 며칠까지 금식을 해 보았다고 하고 말씀을 드리면 교만도 될 것 같아서 자세한 말씀을 드리지는 않겠습니다만, 40일까지는 한참 못 미치더라도 그래도 금식기도는 몇 번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 참 배가 많이 고프더라구요.

자. 좋아요. 그렇게 기도를 열심히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100%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응답을 받을 수 있다고는 말하기 어렵겠지요.

그러면 그렇게 열심히 기도를 드렸는데, 금식기도도 해가면서 새벽기도 철야기도까지 드렸는데, 그래도 응답을 안 해주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상당히 쿨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좋았습니다만, 그의 행동이 모두 바람직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결점이 바로 밧세바와의 일이었지요.

밧세바는 다윗의 충신 우리아의 아내였습니다. 말하자면 자기 부하의 아내였던 것이지요. 우리아는 지금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었습니다.


사무엘하 11장에 의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 왕은 그 자기 부하의 아내인 밧세바와 잠자리를 함께 합니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하여 밧세바는 아이를 갖게 되었지요. 이를 숨기기 위해 다윗 왕은 한 계책을 생각해냅니다. 전쟁터에 나가 있는 우리아를 잠시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인 것이지요. 다윗 생각에는 그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가면 아내와 잠자리를 함께 할 것이요, 그렇게 되면 밧세바가 가진 아기는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 우리아의 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당시는 지금처럼 무슨 DNA 검사가 있는 것도 아니니, 어쩌면 성공할 수도 있는 작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기껏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였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우리아가 집으로 가지 않고, 바깥에서 자기 부하들과 함께 잠을 잡니다. 그래서 답답해진 다윗이 우리아를 불러서, 아니, 넌 왜 집에 안 들어가고 바깥에서 네 부하들과 잠을 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다윗의 부하 우리아 장군의 말이 기가 막힙니다.

사무엘하 11장 11절
“우리아가 다윗에게 아뢰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 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기로 왕의 살아 계심과 왕의 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나이다 하니라”

ウリヤはダビデに言った。「神の箱も、イスラエルも、ユダも仮庵 に住み、私の主人ヨアブも、私の主人の家来たちも戦場で野営しています。それなのに、私が家に帰り、食べたり飲んだりして、妻と寝るという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あなたの前に、あなたのたましいの前に誓います。私は決してそのようなことをいたしません。」


지금 우리 군대가 전쟁 중에 있고, 내 상관과 부하가 거기서 목숨을 건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어찌 내가 혼자 집에 가서 먹고 마시고, 편안한 잠자리를 잘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이처럼 놀라운 충신을 보았습니까.

자, 이 말을 들은 다윗. 자신의 작전이 실패한 줄 알게 된 다윗은, 이제 자신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 전쟁터에서 우리아를 일부러 죽이라고 명령을 합니다. 참 나쁜 사람이에요.

이 작전은 안타깝게도 성공을 합니다. 우리아는 아군이 일부러 쳐놓은 덫에 걸리게 되어 마침내 전쟁터에서 전사를 하게 됩니다. 그 이후 다윗 왕은 밧세바를 정식으로 아내로 맞이하지요.

하지만 이 일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이 일에 대하여 다윗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이번에 태어날 아이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여기서 조금 길지만 잠시 사무엘하 12장 15절~23절까지를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사무엘하 12장 15절~23절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그 곁에 서서 다윗을 땅에서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이레 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그러나 다윗의 신하들이 아이가 죽은 것을 왕에게 아뢰기를 두려워하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아이가 살았을 때에 우리가 그에게 말하여도 왕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셨나니 어떻게 그 아이가 죽은 것을 그에게 아뢸 수 있으랴 왕이 상심하시리로다 함이라

다윗이 그의 신하들이 서로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죽은 줄을 다윗이 깨닫고 그의 신하들에게 묻되 아이가 죽었느냐 하니 대답하되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그를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이 일이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第二サムエル記 12章 15節~23節
ナタンは自分の家へ帰って行った。主は、ウリヤの妻がダビデに産んだ子を打たれたので、その子は病気になった。
ダビデはその子のために神に願い求めた。ダビデは断食をして引きこもり、一晩中、地に伏(ふ)していた。
彼の家の長老たちは彼のそばに立って、彼を地から起こそうとしたが、ダビデは起きようともせず、彼らと一緒に食事をとろうともしなかった。
七日目 にその子は死んだ。ダビデの家来たちは、その子が死んだことをダビデに告げるのを恐れた。彼らは、「聞きなさい。王はあの子が生きているとき、われわれが話しても、言うことを聞いてくださらなかった。どうして、あの子どもが死んだことを王に言えるだろうか。王は何か悪いことをされるかもしれない」と言ったのである。
ダビデは、家来たちが小声で話し合っているのを見て、子が死んだことを悟った。ダビデは家来たちに言った。「あの子は死んだのか。」彼らは言った。「亡くなられました。」
ダビデは地から起き上がり、からだを洗って身に油を塗り、衣を替えて主の家に入り、礼拝をした。そして自分の家に帰り、食事の用意をさせて食事をとった。
家来たちは彼に言った。「あなたのなさったこのことは、いったいどういうことですか。お子様が生きておられるときは断食をして泣かれたのに、お子様が亡くなられると、起き上がり食事をされるとは。」
ダビデは言った。「あの子がまだ生きているときに私が断食をして泣いたのは、もしかすると主が私をあわれんでくださり、あの子が生きるかもしれない、と思ったからだ。
しかし今、あの子は死んでしまった。私はなぜ、断食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あの子をもう一度、呼び戻せるだろうか。私があの子のところに行くことはあっても、あの子は私のところに戻っては 来ない。」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 아이를 살려달라고 기도를 드립니다. 기도 내용은 우리도 짐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에게는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그 아이를 살려주시옵소서……하고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7일 동안 금식하면서 밤새도록 기도를 드렸는데, 결국 아이가 죽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이럴 때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제가 이렇게 간절히 금식까지 해가면서 철야까지 해가면서 기도를 드렸는데, 왜 하나님은 내 기도를 안 들어주십니까.

하나님이 계시긴 한 걸까? 하나님은 안 계실지도 몰라. 성경? 아이구, 이거 다 거짓말이야……이렇게 낙담을 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은 어땠다고 합니까. 그래. 내가 이렇게 기도를 드렸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들어주지 않으셨어. 그러면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여야지…… 그러고는 툭툭 털고 일어나서 밥을 먹었다는 것이지요.

다윗은 참 강했습니다. 무엇이 강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이 강했습니다.

그 아이가 태어났다면 어땠겠습니까. 그 아이는 아직 다윗이 정식으로 아내로 맞이하기 전, 우리아의 아내일 때 갖게 된 아이입니다. 아무리 비밀로 한다 하더라도 궁에서는 왕이 충신 우리아의 아내와 부정한 관계를 맺었고, 그 결과 갖게 된 아이라는 사실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태어나서 자랐다고 한다면, 다윗이나 밧세바에게는 물론이거니와 그 아이에게 있어서도 대단히 불행한 삶이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물론 이 부분은 제 추측입니다만, 결국 다윗의 그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죽고 말았는데, 다윗은 이를 너무나도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던 다윗은 밧세바를 통하여, 마침내 솔로몬이라는 자신의 진정한 후계자를 얻게 되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에 바울은 어떻습니까.

고린도후서 12장 7절~10절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第二コリント人への手紙 12章 7節~10節
“その啓示のすばらしさのため高慢にならないように、私は肉体に一つのとげを与えられました。それは私が高慢にならないように、私を打つためのサタンの使いです。
この使いについて、私から去らせてくださるようにと、私は三度、主に願いました。
しかし主は、「わたしの恵みはあなたに十分である。わたしの力は弱さのうちに完全に現れるからである」と言われました。ですから私は、キリストの力 が私をおおうために、むしろ大いに喜んで自分の弱さを誇りましょう。
ですから私は、キリストのゆえに、弱さ、侮辱、苦悩、迫害、困難を喜んでいます。というのは、私が弱いときにこそ、私は強いからです。”

이 기록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정확히 어떠한 질병인지는 모르지만 당시 바울은 어떤 건강상의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래서 이를 치료해달라고 기도를 세 번이나 드렸더니, 주님이 이를 거절하셨는데, 오히려 이로 인하여 크게 기뻐했다고 합니다.

이 또한 참으로 놀라운 믿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습은 어떻습니까.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는데, 정말 다른 건 몰라도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주셔야 했는데, 아이구 기도를 들여주지 않으셨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때로는 낙담을 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무슨, 내 기도 하나도 들어주지 않으면서 뭐가 전능하다는 거야. 내 기도가 혹시 안 들리신 것 아닌가? 좀 더 큰 소리로 기도를 드렸어야 하나? 뭐 그러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다 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어떻게 기록합니까.


이사야 59장 1절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イザヤ書 59章 1節
見よ。主の手が短くて救えないのではない。その耳が遠くて聞こえないのではない。

하나님은 모든 기도를 다 듣고 계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기도를 응답해주지 않으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한탄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고린도전서 3장 1절~2절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兄弟たち。私はあなたがたに、御霊に属する人に対するようには語ることができずに、肉に属する人、キリストにある幼子に対するように語りました。
私はあなたがたには乳を飲ませ、固い食物を与えませんでした。あなたがたには、まだ無理だったからです。実は、今でもまだ無理なのです。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합니까. 내가 너희들을 믿음 안에서 어른으로 대할 수가 없어. 너는 아직 어린애야. 너는 아직 밥을 먹을 수가 없고 젖먹이 밖에는 안 돼……. 이러는 것이지요.


여러분, 아이들이 누워서, 이거 줘. 저거 줘…….라고 하면 어떻습니까. 물론 갓난아이들은 충분히 그럴만하지요. 아기들의 발바닥을 보신 적 있으신가요? 어른 들의 발바닥은 평평하지만 갓난아기의 발바닥은 볼록합니다. 그리고 근육도 제대로 발달하지 못해서 걸어 다닐래야 걸어 다닐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것도 갖다 주고 저것도 갖다 줍니다. 혼자서 걸어 다닐 수도 없으니, 업어주기도 하고 안아 주기도 하지요.

그리고 어른들의 배를 엑스레이로 찍어보면 위장이 있지요. 이렇게 볼록한 위장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형태로 되어 있으니까 음식을 먹으면 그 공간에서 잠시 음식물을 머물게 해서 소화액으로 부드럽게 한 후에 내려 보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갓난아기의 배를 엑스레이로 찍어보면 위장이 없어요. 그냥 소장이나 대장처럼 한 줄기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단단한 것을 먹이면, 아직 이빨도 제대로 없으니까 꼭꼭 씹을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위장도 그렇게 생겼기 때문에 시간을 들여서 부드럽게 할 수가 없으니까 배탈이 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냐 하면, 처음에는 젖을 먹이거나 하고, 조금 지난다 하더라도 부드러운 이유식을 먹여야 하는 것입니다.

부드러운 음식을 먹으면 속은 편하지요. 굳이 힘들여서 소화를 시킬 필요도 없으니 얼마나 편합니까. 하지만 언제까지나 젖만 먹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내장이 약해집니다. 이제 젖이나 이유식이 아니라 제대로 된 단단한 음식을 먹고, 영양분도 충분히 섭취해야 하고 하는데도, 언제까지나 젖이나 죽만 먹고 있다거나, 아니면 이제 근육도 생기고 얼마든지 걸을 수 있을 만큼 성장했는데, 일어설 생각도 안 하고, 여전히 엄마, 이것 줘, 저것 줘……그리고 업혀 다니려고 한다는 생각을 해보십시오.

이렇게 되면 아무리 건강한 몸으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올바로 성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이거 주세요, 하면 이걸 주시고, 주님, 저걸 주세요, 하면 저걸 주신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순간적으로는 편하고 감사하게 느껴질 지는 몰라도 그런 상태로라면 믿음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걸음마 단계의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 분들에게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다시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5장 12절~14절
“12.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ヘブル人への手紙 5章 12節~14節
あなたがたは、年数 からすれば教師になっ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にもかかわらず、神が告げたことばの初歩を、もう一度だれかに教えてもらう必要があります。あなたがたは固い食物ではなく、乳が必要になっています。
乳を飲んでいる者はみな、義の教えに通じてはいません。幼子なのです。
固い食物は、善と悪を見分ける感覚を経験によって訓練された大人のものです。

이봐. 니가 지금 교회 다닌 지가 얼마나 됐어. 이제 단단한 음식도 먹고 그러면서 교회도 섬기고 이웃도 섬기고 그래야 할 거 아니야. 그런데 아직까지 젖먹이 아이처럼 나약한 믿음을 갖고 있으면 어떡하니……하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믿음의 성장은 언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기도의 응답을 받았을 때요? 아니요. 오히려 기도 응답을 받지 못했을 때부터 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때가 바로 믿음 성장에 있어서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여러분, 우리가 주님 안에서 얼마나 귀한 존재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를 흘리시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해주셨던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귀하게 여겨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치욕을 당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해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기도, 그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원하시는 우리의 마음을 주님은 분명히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물리치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랑해주시는 우리를 위해 더욱 더 큰 축복이 예비되어 있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第一ヨハネの手紙 4章 19節
私たちは愛しています。神がまず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

우리 모두 우리가 사랑하기보다도 먼저 우리를 사랑해주신 예수님을 믿고, 우리가 사랑하는 크기보다도 훨씬 더 큰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예수님을 믿고, 그 믿음이 성장하는 출발점, 믿음 성장의 갈림길에 섰을 때, 좌절하거나 낙담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큰 신뢰와 감사를 주님께 돌림으로 말미암아, 위대한 믿음의 용사로 성장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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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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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8회 말씀과 기도
2019년 9월 1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
“쉬지 말고 기도하라”

第一テサロニケ人への手紙 5章 17節
“絶えず祈り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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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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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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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말씀과 기도” みことばと祈り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세 가지가 중요하다는 말씀을 항상 드려왔습니다. 그것은 믿음과 말씀과 행함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이라고 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이신 성경, 마지막으로 말씀에 입각한 행함이 있어야지만 올바른 신앙으로서 굳게 설 수 있으며, 여기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게 된다면 그 신앙은 올바로 설 수가 없게 됩니다.

이는 마치 비행기에 달린 세 개의 날개와도 같습니다. 비행기가 날다가 엔진 몇 개가 고장이 나더라도 갑자기 떨어지는 일은 없다고 합니다. 제트기 같은 경우에는 엔진이 4개 달렸는데, 그 중에서 3개가 고장이 나더라도, 나머지 하나 만으로 무사히 착륙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른쪽, 왼쪽, 그리고 뒤에 달린 날개 중에서 하나라도 잘려나갔다고 생각해보세요.

만에 하나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 비행기가 아무리 크고 안전하게 설계되었다 하더라도 금새 균형을 잃고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지요.

이처럼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믿음과 말씀과 행함은 무엇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절대적인 3가지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기도’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지요. 흔히들 기도는 호흡이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믿음’과 ‘말씀’과 ‘행함’ 중 어디에 들어갈까요.


많은 분들이 ‘기도’라고 하는 것을 ‘믿음’ 안에 들어간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이 논리는 꽤 그럴 듯합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기도를 하는 것이요, 주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기도를 하는 것이요, 주님께서 기도에 응답을 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곧 믿음이다……라고 하는 공식에 문제가 없을까요?

요한복음 14장 14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何かをわたしに求めるなら、わたしがそれをしてあげます。

실제로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셨을 때 기도를 많이 하셨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이처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하라는 것 아니겠어요?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리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기도가 믿음이다>라고 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하루에 열 번 기도하는 사람이 하루에 한 번 기도하는 사람보다 믿음이 많은 것이요, 하루에 1시간 2시간 기도 하는 사람이 하루에 1분 기도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일까요? 성경에 보면 ‘기도를 많이 하는 자나 기도를 오래 하는 자는 믿음이 많으니라’ 이런 기록이 있나요? 아니에요. 없습니다. 즉 기도라고 하는 것을 하루에 몇 번이나 하느냐, 얼마 동안을 하느냐가 곧 믿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기도가 말씀이라고 한다면 기도를 많이 하게 되면 말씀을 알게 된다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가요? 만약에 기도를 많이 하기만 하면 말씀을 알게 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 없다는 말이 됩니까. 그렇습니다. 이 두꺼운 성경책은 필요가 없다는 말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굳이 필요하다고 하면, 기도를 안 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모를 테니까, 이 성경은 그렇다면 기도를 안 하는 사람들만을 위한 책이라는 말이 됩니다. 이게 사실인가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성경을 조금 아는 분께서 이러실지도 모르지요. 아니, 예수님도 성령님이 오시면 성경을 알게 해주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냐, 하고 말이에요.

물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하셨지요.

요한복음 14장 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しかし、助け主、すなわち、父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お遣わしになる聖霊は、あなたがたにすべてのことを教え、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話したすべてのことを思い起こさせてくださいます。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하게 되면 성경을 알게 된다고 하는 이 주장에는 두 가지 오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당시는 성경이 완성되기 전이었다는 점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하루 이틀도 아닌 3년이나 같이 다니긴 했지만 그 때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들을 모두 다 적어놓지는 못했지요. 무슨 스마트폰이 있어서 녹음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한 지금처럼 종이나 펜이 쉽게 누구나 쓸 수 있었던 시대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기록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능력이 필요했었다는 것이지요. 바로 그렇게 해서 이 성경은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이 성경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에게는 완성된 성경이 있습니다. 이제 꼭 기도를 해야지만 예수님 말씀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누구든지 성경책을 펴기만 하면 주님의 말씀을 들으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음으로, 기도를 하면 성경을 알게 된다는 주장의 두 번째 오류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실 때 “너희가 모르던 것을 알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라고 하셨던 것이지요.

즉, 이 말씀은, 내가 예전에 했던 말을 너희가 들었지만 지금을 잊어버렸겠지. 그러나 성령님의 능력으로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해줄 것이다……라는 말씀이지, “전혀 듣도 보지도 못한 말씀들이 떠오르게 하리라”라고 하신 말씀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그냥 기도만 하는 분들은 가끔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기도를 하니까 이러이러한 응답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하라는 것이에요. 이 말을 믿으라는 거예요.

일부 신흥종교집단을 보면 대체적으로 이 방법을 많이 씁니다. 내가 어디서 기도를 하니까 천사를 만났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천사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는 것이지요. 그게 이러이러한 것인데, 이걸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믿으시겠어요? 안 믿으시겠어요..


조금 더 극단적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앞에 갑자기 환하게 빛나는 천사가 나타났어요. 그러면서 자기는 하나님이 보낸 천사래요. 그리고 이제부터 자기가 하는 말이 하나님 말씀이라면서 무슨 말을 전해줘요. 그런데 그 내용은 지금까지 내가 알던 성경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에요. 그러면 여러분께서는 믿겠습니까 안 믿겠습니까.

망설여지나요? 하지만 망설일 필요가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4절~15절
“14.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しかし、驚くには及びません。サタンでさえ光の御使いに変装します。
ですから、サタンのしもべどもが義のしもべに変装したとしても、大したことではありません。彼らの最後は、その行いにふさわしいものとなるでしょう。

갈라디아서 1장 7절~8절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ほかの福音といっても、もう一つ別に福音があ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あなたがたを動揺させて、キリストの福音を変えてしまおうとする者たちがいるだけです。
しかし、私たちであれ天の御使いであれ、もし私たちがあなたがたに宣べ伝えた福音に反することを、福音として宣べ伝えるなら、そのような者はのろわれるべきです。


이와 같은 성경 말씀을 알았더라면, 아무리 빛의 천사처럼 보이는 것이 성경이 아닌 다른 것을 전한다면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이렇게 적혀있는데도 불구하고, 성경 외의 것들을 믿으라고 합니다. 천사한테서 받았대요. 그러니까 자기 말을 믿으라고 합니다. 성경이 아닌 자기가 쓴 책을 믿으라고 합니다.

이러한 단순한 말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넘어가는지 모릅니다. 왜 그와 같은 말에 넘어갑니까. 그것은 성경을 우리가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어디 그 뿐인가요. 자기가 선지자래요. 자기가 재림예수래요. 그러면서 자기를 믿으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2천년 전에 왔을 때 아무도 안 알아주었던 것처럼, 자기도 사실은 재림 예수인데 이 세상에서 아무도 안 알아준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그 말을 듣고, 어떻게 해야 해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못 알아봤습니다. 하고 그 사람을 믿어야 합니까.

마태복음 11장 13절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すべての預言者たちと律法が預言したのは、ヨハネの時まででした。


마태복음 24장 23절~27절
“23.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4.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25.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26.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7.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そのとき、だれかが『見よ、ここにキリストがいる』とか『そこにいる』とか言っても、信じてはいけません。
偽キリストたち、偽預言者たちが現れて、できれば選ばれた者たちをさえ惑わそうと、大きなしるしや不思議を行います。
いいですか。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前もって話しました。
ですから、たとえだれかが『見よ、キリストは荒野にいる』と言っても、出て行ってはいけません。『見よ、奥の部屋にいる』と言っても、信じてはいけません。
人の子の到来は、稲妻が東から出て西にひらめくのと同じようにして実現するのです。

마태복음 24장 30절
“30.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そのとき、人の子のしるしが天に現れます。そのとき、地のすべての部族は胸をたたいて悲しみ、人の子が天の雲のうちに、偉大な力 と栄光とともに来 るのを見るのです。


요한계시록 1장 7절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見よ、その方は雲とともに来 られる。すべての目が彼を見る。彼を突き刺した者たちさえも。地のすべての部族は彼のゆえに胸をたたいて悲しむ。しかり、アーメン。

성경에서 장차 올 선지자에 대해서는 세례 요한이 끝입니다. 그 후에는 성경에서 예언한 대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 이후에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성령님께서 임해주셨습니다. 그 다음에 무슨 선지자를 보내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성경 예언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예수님의 재림 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천년 전에는 정말 아무도 모르게 누추한 모습으로 오셨지만, 재림하실 때에는 심판의 왕으로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각 사람도 볼 것이요 그를 찌른 자들도 보겠다는 말씀은, 장차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한테 만이 아니라 안 믿는 사람들, 예수님을 학대한 사람들조차도 그 오시는 모습을 볼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만약에 “내가 재림 예수다”라고 한다면, 그 분한테는 이러시면 됩니다. 딱 한마디 “저는 당신이 구름을 타고 오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라고만 말씀 드리면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그게 무슨 소리냐”라고 물으면, 그야말로 그 사람은 성경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라는 게 들통나는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가 말씀을 알아야 하나님께서도 떠올리게 해주실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말씀을 읽지도 않고 말씀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크게 잘못될 수도 있는, 그와 같은 위험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들은 어떤 사람을 제일 잘 가지고 놀겠습니까. 바로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을 가지고 놉니다.

지금은 조금 잠잠합니다만, 이제 얼마 지나면 그게 고개를 들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시한부 종말론이지요. 1980년대 후반에 서서히 시작되더니 1992년 10월 28일에 세상이 종말하고 휴거가 일어난다고 하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에는 300개 이상의 교회가 있었고 성도 수도 2만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주장했던 1992년 10월 28일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교회에 모여서,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밤 12시가 되기까지 열광하면서 찬양도 하고 기도도 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에 여기에 심취한 신도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다 팔아서 교회에 바쳤습니다. 그렇잖아요. 이제 세상이 멸망하고 하늘로 올림을 받는다는데, 조금이라도 더 빨리 올림을 받으려면 헌금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나보죠. 그 뿐만이 아니라 직장도 그만두었습니다. 아니, 세상이 망하는데 지금 직장이 문제예요? 그리고 가정도 버렸습니다. 형제들도 버렸습니다. 그리고 또 인터넷에 찾아 보니까 3년 동안 아이를 갖기를 원했던 여성이, 간신히 임신을 했는데, 휴거를 할 때에는 임신하면 안 된다고 믿고는 그렇게 소망했던 아이를 임신 7개월 만에 중절했다고 합니다. 기가 막힌 노릇이지요.

여러분, 마귀들이 이런 모습을 보았을 때 얼마나 깔깔대고 좋아했겠습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이와 같은 유치한 주장에 그 많은 사람들이 넘어갔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경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24장 36절
“36.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ただし、その日、その時がいつなのかは、だれも知りません。天の御使いたちも子も知りません。ただ父だけが知っておられます。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 하늘의 천사들은 물론이고 예수님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무엇입니까. 예수님도 알지 못하는 것을 자기들은 안다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이 말은 성경보다도 예수님의 말씀보다도 자기들의 말이 맞다고 하는 소리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는 눈을 감고 하는 것이지만, 기도만 한다고 성경을 알게 되지는 않습니다. 눈을 뜨고 성경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우리 마음 안에 새겨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기도는 행함인 것입니다. 실천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기도라고 하는 것은 금식하면서 어두컴컴한 성전에서 무릎 꿇고 발이 저린 것을 참아가며 분위기 잡으면서 하는 것만이 기도가 아닙니다.

잠시 화제를 바꾸어보도록 하겠습니다.


2010년대에 보면 일본에 대조되는 두 사람의 학자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2012년에 iPS 세포에 대한 연구 성과로 노벨 의학생리학상을 수상한 야마나카 신야 교수였고, 또 한 사람은 2014년에 STAP 세포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던 한 여성 과학자였습니다.

보통 노벨상이라고 하면 젊었을 때 어떤 연구를 발표하고 난 다음에는, 오랜 세월 동안 그것이 맞는지 여부의 확인 과정을 거치고 난 다음, 다 늙어서 받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만, 이 야마나카 신야 교수가 발표한 iPS 세포 같은 경우는 어땠냐 하면, 이 교수님의 논문대로 하나하나 해보니까 누구나 다 iPS 세포를 만들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건 뭐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가 없어요. 그랬기 때문에 세계 여기저기에서 노벨상 심사위원들한테 이 교수에 대한 추천서가 날아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분이 노벨상을 받은 나이가 2012년 당시 불과 50세였다는 것이지요. 참 놀라운 일입니다.

하지만 2014년에 그와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더욱 획기적인 STAP 세포를 개발했다고 하는 어떤 일본 여성 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논문은 세계 유력 학술지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세계의 많은 학자들이 거기에 실린 논문대로 아무리 시도를 해보아도 그 STAP 세포를 만들 수가 없는 거예요.

조사결과 그 사람의 논문에는 조작의혹이 발견됐고 그 논문만이 아니라 박사학위 논문도 조작이 의심된다는 주장이 나와서, 결국 그 논문은 물론이고 박사학위까지도 취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 때까지 몸담고 있었던 대학에서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때까지 평생을 걸쳐 쌓아왔던 명예도 학위도 직장도 한 순간에 모두를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기도는 행함입니다. 실천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을 위한 행함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과학자들에게 있어서는 논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성경을 입증하기 위한 실천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을 입증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입증하는 것이요, 예수님을 입증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입증한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말씀을 이해하고 난 다음에 여기에 입각한 기도를 드려야 주님을 온전히 드러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기도를 통해 성경을 입증해왔습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예수님을 검증해왔습니다. 만약에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나타내지 못했다면 이 두꺼운 성경은 먼 옛날에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몇 천 년이라는 세월 동안 사라지지 않고 지금도 전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읽혀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성경 말씀대로 기도를 하면 누구에게나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주님의 역사가 나타남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검증되고 예수님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わたしはすぐに来る。あなたは、自分の冠をだれにも奪われないように、持っているものをしっかり保ちなさい。


요한계시록 22장 18절~19절
“18.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私は、この書の預言のことばを聞くすべての者に証しする。もし、だれかがこれにつけ加えるなら、神がその者に、この書に書かれている災害を加えられる。
また、もし、だれかがこの預言の書のことばから何かを取り除くなら、神は、この書に書かれているいのちの木と聖なる都から、その者の受ける分を取り除かれる。

우리가 말씀을 올바로 알아야 주님을 올바로 나타낼 수가 있고, 주님을 올바로 나타냈을 때에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것이지, 말씀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이를 왜곡하거나 자기 멋대로 조작하거나 하면, 앞서 말씀 드린 그 불행한 과학자처럼 그야말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생명의 면류관을 빼앗기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
“쉬지 말고 기도하라”

第一テサロニケ人への手紙 5章17節
絶えず祈りなさい。


우리는 어느 한 순간만 기도를 드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는 무슨 뜻이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주님께 기도를 드리라는 것,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쉬지 말고 주님을 나타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성경의 명령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세상에 나타내고 예수님을 세상에 나타내는 놀라운 실천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일생을 통해서 주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갖고, 주님의 온전한 말씀이신 이 성경을 마음에 새기고, 기도라고 하는 행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주님을 온 세상에 나타내고 주님을 온 세상, 땅끝까지 전파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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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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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7회 열매를 맺는 삶
2019년 9월 8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ヨハネの福音書 15章 5節
"わたしはぶどうの木、あなたがたは枝です。人がわたしにとどまり、わたしもその人にとどまっているなら、その人は多くの実を結びます。わたしを離れては、あなたがたは何もす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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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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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열매를 맺는 삶” 実を結ぶ人生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그 나뭇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고로 나무들이 자라면서 잎사귀가 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수분과 영양분을 섭취하고 태양열을 받으면서 광합성을 하며 성장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때가 되면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 같이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무리 입사귀가 많고, 아무리 크기가 크고 높다 하더라도 그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결국 그 나무는 번성하지 못하고 그 한 그루 만으로 멸종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삶의 가치라고 한다는 것은 내가 내 삶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이 큰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죽고 난 다음에는 그 회사도 사라지고 그 사람이 했던 사업도 완전히 문을 닫았다고 한다면, 아무리 그 사람이 생전에 돈을 많이 벌고 큰 회사를 세웠었다 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고 맙니다.

이는 돈도 그렇고 명예도 그렇죠. 어떤 학자가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를 해서, 평생을 걸쳐 논문도 쓰고 그랬는데, 그 사람이 죽고 난 다음에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또는 어떤 작가가 살아 있을 때에는 그가 쓴 책도 많이 팔리고 사람들로부터 선생님 소리도 듣기도 하고 상도 많이 받았는데, 조금 지나니까 아무도 그 사람의 책을 읽지도 않고, 그 사람 자체도 잊혀지고 말았다면, 그 사람이 살아간 인생의 의미는 그리 크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진정한 가치를 갖기 위해서는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 인생에 있어서의 열매란 과연 무엇일까요. 세상에서는 이른바 대를 잇는다고 합니다. 이는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였지요. 아브라함도 자신의 대를 이을 자식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어렵게 얻은 아이가 바로 이삭이지요.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가 되어서야 얻게 되었습니다.

이는 요즘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왕 같은 경우를 보면 후사 문제가 생기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꼭 자식이 있어야지만 대를 잇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큰 회사 같았으면 친자식이 아니라 하더라도 후계자를 세워서 그 사업을 계속해 나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기서부터는 조금 더 구체적인 내용으로 한 번 살펴볼까 합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열매란 정말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에게 아들이나 딸이 있다면, 내 육신적인 유전자를 남길 수가 있었다면, 그것으로 열매를 맺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 인생의 목표는 오직 좋은 자식을 낳는 것에 집중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좋은 열매 맺는 것이 진정한 가치 있는 삶이고, 좋은 열매라는 것이 훌륭한 자식이라고 한다면, 진정한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훌륭한 자식을 갖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 되지 않겠습니까.

성경에서는 어떨까요. 성경에 보면 베드로는 결혼을 해서 아내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어땠습니까. 성경에는 그에게 아내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그렇다고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 명확한 기록 또한 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들에게는 아들이나 딸이 있었는지는 기록이 없지요.

그렇다면 훌륭한 자식을 갖는 것이 진정한 가치 있는 삶이라고 한다면, 베드로와 바울은 열매 없는 삶, 가치 없는 삶을 살았다는 말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가요? 아니요. 어느 누구도 그들이 열매 없는 삶, 가치 없는 삶을 살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훨씬 더 많은 열매를 맺은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한 번 창세기를 살펴볼까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생물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창세기 1장 21절~22절
“21.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神は、海の巨獣と、水に群がりうごめくすべての生き物を種類ごとに、また翼のあるすべての鳥を種類ごとに創造された。神はそれを良しと見られた。
神はそれらを祝福して、「生めよ。増えよ。海の水に満ちよ。鳥は地の上に増えよ」と仰せられた。

그리고 사람을 창조하시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말씀하셨냐 하면 창세기 1장 27절~28절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28절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神は人をご自身のかたちとして創造された。神のかたちとして人を創造し、男と女に彼らを創造された。
神は彼らを祝福された。神は彼らに仰せられた。「生めよ。増えよ。地に満ちよ。地を従えよ。海の魚、空の鳥、地の上を這うすべての生き物を支配せよ。」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것만이 아니라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만약에 전쟁 같은 상황에서 상관이 부하들에게, 저 땅을 공격해서 점령하라! 이렇게 명령을 했다면, 이는 너희들이 열심히 노력을 해서, 저 땅을 빼앗으라는 말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에게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생물들을 다스리라……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우리더러 땅을 정복할 수 있도록, 생물들을 다스릴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라……라는 말씀아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이는 바로 우리에게 땅을 정복할 수 있는 권세, 그리고 천하의 모든 생물들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다는 뜻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휩쓸려 가는 삶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주님의 명령에 따라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참 감사한 일이지요.

신약이라고 하는 것, 이는 단순히 막연한 기준이 아니라 또 하나의 천지창조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

그리고 요한복음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初めにことばがあった。ことばは神とともにあった。ことばは神であった。

참 너무나도 멋진 천지창조 아닙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창세기 때의 타락을 바로잡기 위해 오셨다는 내용도 성경에 기록합니다.

로마서 5장 19절
“19.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すなわち、ちょうど一人の人の不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罪人とされたのと同様に、一人の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義人とされるのです。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타락하게 되었으나, 예수님 한 분이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처럼 신약은 또 하나의 시작, 새로운 천지창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생물들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와 똑같은 말씀이 신약에도 나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어디인가 하면 마태복음 28장 18절~20절과 마가복음 16장 15절~16절 말씀입니다.

먼저 마태복음부터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20절
“18.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イエスは近づいて来て、彼らにこう言われた。「わたしには天においても地においても、すべての権威が与えられています。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行って、あらゆる国の人々を弟子としなさい。父、子、聖霊の名において彼らにバプテスマを授け、
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命じておいた、すべてのことを守るように教えなさい。見よ。わたしは世の終わりまで、いつもあなたがたとともにいます。」

그리고 마가복음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16절
“15.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それから、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福音を宣べ伝えなさい。
信じてバプテスマを受ける者は救われます。しかし、信じない者は罪に定められます。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이른바 예수님의 지상명령 또는 선교 지상명령이라고도 하는 말씀이지요.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그럼 창세기 말씀에 대입을 시켜보면 어떻게 됩니까.

첫째, 온 천하에 다니면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의 제자를 삼는 것이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는 것이다.

둘째, 이는 우리더러 노력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를 능히 할 수 있는 권세를 주셨다.

이렇게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실천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그렇습니다. 베드로나 바울이, 그리고 그 외의 수많은 믿음의 용사들이 이와 같은 삶을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인생은 귀중한 것이요 진정한 가치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삶이야말로 진정한 열매를 맺는 삶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지금 당장 모든 직업을 포기하고 모두가 신학을 공부하고 안수를 받아야만 하는 건가요?

우리는 열매 맺는 삶, 열매 맺는 삶……이라고 하는데, 이 ‘열매’라고 하는 것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과 같이 많은 나무들은 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 잎사귀도 내고 광합성도 하고 성장도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 열매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 열매의 특징이 뭐죠?


물론 먹을 수 있다는 것도 되겠습니다만, 가장 큰 특징은 무엇보다 그 안에 들어있는 씨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열매가 크고 맛이 좋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든 씨가 없다면 번식을 할 수가 없겠지요. 사실 열매를 맛이 좋게 하는 이유는, 새들이나 짐승들이 열매를 먹고는, 그 씨를 널리 퍼뜨리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믿음 안에서 이 땅에 번성하고 이 땅을 정복하는 진정한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떠한 씨를 퍼뜨려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이라고 하는 씨를 퍼뜨려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씨 없는 믿음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교회에서 정치 이야기나 돈 이야기를 합니다. 권력이나 세상 윤리 도덕 이야기를 합니다. 무엇이 사라지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라고 하는 귀한 씨가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집 근처 자전거를 타고 나가면 작은 강이긴 하지만, 그 강가에 자전거 도로가 잘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초여름이 되니까 그 도로 옆에 보면 일대에 풀들이 무성하게 자랐습니다. 정말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 다에 그 풀들이 닿을 정도인데, 가만히 놔두면 길을 아주 덮어버릴 기세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제초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저기서 기계로 그 무성한 풀들을 깎아버립니다. 그러면 그 깎인 풀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 순간은 그래도 푸른 빛이 남아 있습니다. 잘린 풀들은 그대로 거기 놓여있고, 색깔도 그대로니까, 물론 잘려서 이렇게 누워있긴 합니다만, 여전히 흙이나 본래 줄기와는 붙어있긴 하지요. 아니, 붙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며칠 뒤에 가보니까 어떻게 되어 있었겠습니까. 여전히 땅바닥에 놓여 있고 그 풀들의 본래 줄기와 붙어 있긴 했습니다만, 잘려나간 풀들은 완전히 갈색으로 변해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わたしはぶどうの木、あなたがたは枝です。人がわたしにとどまり、わたしもその人にとどまっているなら、その人は多くの実を結びます。わたしを離れては、あなたがたは何もす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す。

교회에는 두 가지 부류의 성도님들이 계신 것 같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라고 하는 포도나무에 꼭 붙어 있는 성도님들. 또 하나는 예수님이라고 하는 포도나무에 꼭 붙어 있는……것처럼 보이는 성도님들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찰 티가 안 나요. 교회에 매주 나오고, 믿음 생활도 뭐 나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한쪽은 정말 꼭 붙어 있는 성도님이요, 다른 한쪽은 정말 꼭 붙어 있는……것처럼 보이는 성도님이라는 것이지요.

겉으로 보면 차이가 별로 안나 보이지만 조금 지나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자전거 도로에 나 있던 풀들처럼, 정말로 줄기에 붙어 있는 풀들은 여전히 푸르지만,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풀들은 얼마 지나자 갈색으로 시들어버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라고 하는 포도나무에 꼭 붙어 있는 사람은 열매를 맺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성장합니다. 내 주변에 예수님의 향기가 넘쳐납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라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점점점점 그 믿음이 식어갑니다. 시들어져 갑니다. 메말라 갑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나와 예수님 사이의 접착제가 말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접착제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이 성경 말씀인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교양을 쌓았다 하더라도, 아무리 세상 책을 많이 읽었다 하더라도 성경말씀이 우리 안에 없다면 이는 예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삶, 그야말로 전도서 기자처럼 헛되어 바람을 잡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진정한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예수님은 주님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앞서 읽어드린 요한복음 1장 1절을 기억하십니까.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初めにことばがあった。ことばは神とともにあった。ことばは神であった。

성경은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기록하십니다.


출애굽기 13장 9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9.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이 네 입에 있게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강하신 손으로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
10.해마다 절기가 되면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これをあなたの手の上のしるしとし、あなたの額の上の記念として、主のおしえがあなたの口にあるようにしなさい。力強 い御手で、主があなたをエジプトから導き出されたからである。

신명기 6장 8절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これをしるしとして自分の手に結び付け、記章として額の上に置きなさい。

신명기 11장 18절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을 너희의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このことばを心とたましいに刻み、それをしるしとして手に結び付け、記章として額の上に置きなさい。

이 말씀 때문에 유대인 남성들이 기도할 때 보면 성경이 적힌 작은 상자를 여기 이마에 묶거나 팔뚝에 칭칭 감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우리도 이렇게 성경을 작게 만들어서 이마에 매고 팔뚝에 칭칭 감아야 제대로 말씀을 지키는 것이 되나요?

머리와 손에 말씀을 달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머리로 하는 생각과 팔로 하는 행동에 있어서, 말씀을 기준으로 하라는 주님의 명령이리고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에서는 사람이 먼저다……라고 하는 말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무엇이 먼저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먼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먼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 말씀이 먼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와 같은 삶이야말로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믿음 안에서의 삶, 진정한 가치 있는 삶이란 바로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 예수님을 전하는 삶, 예수님을 나타내는 삶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이라고 하는 포도나무에 성경말씀으로 꼭 붙어 있는 나뭇가지가 되어서, 예수님이라고 하는 씨를 전파하고 주님의 말씀을 전파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을 통해서, 주님께서 주시는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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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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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6회 우리를 부르신 이유
2019년 9월 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43장 7절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イザヤ書 43章 7節
"わたしの名で呼ばれるすべての者は、わたしの栄光のために、わたしがこれを創造した。これを形造り、また、これを造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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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를 부르신 이유” 私たちを呼ばれた理由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보시도록 찬찬히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 43장 7절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わたしの名で呼ばれるすべての者は、わたしの栄光のために、わたしがこれを創造した。これを形造り、また、これを造った。

오늘 이 본문을 읽으시면, 여러분께서는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신이 받으실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이 뿐만이 아니지요. 오늘 본문과 같은 이사야 43장에서 21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이사야 43장 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わたしのためにわたしが形造ったこの民は、わたしの栄誉を宣べ伝える。

이 백성을 하나님께서 찬송 받기 위해 지으셨다고 하나님 스스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나타내시려는 곳이 여러 군데 나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십니다.

출애굽기 6장 5절~8절
“5.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6.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7.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8.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하셨다 하라”

今わたしは、エジプトが奴隷として仕えさせているイスラエルの子らの嘆きを聞き、わたしの契約を思い起こした。
それゆえ、イスラエルの子らに言え。『わたしは主である。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エジプトの苦役から導き出す。あなたがたを重い労働から救い出し、伸ばされた腕 と大いなるさばきによって贖う。
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取 ってわたしの民と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の神となる。あなたがたは、わたしがあなたがたの神、主であり、あなたがたをエジプトでの苦役から導き出す者であることを知る。
わたしは、アブラハム、イサク、ヤコブに与えると誓ったその地にあなたがたを連れて行き、そこをあなたがたの所有地として与える。わたしは主である。』」

자,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모세에게 하셨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생각해볼 때,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부터 이끌어 내시려고 하신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 일을 이루려고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셨고, 그의 형 아론과 함께 애굽으로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 길은 어떤 길입니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길,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길, 하나님께서 명하여 가라고 하신 길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99%가 아니라 100% 확실한 사실이지요.

그런데 말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좀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출애굽기 7장 3절~6절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7장 3절~6절
“3.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4.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5.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
6.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더라”

わたしはファラオの心を頑なにし、わたしのしるしと不思議をエジプトの地で数多く行う。
しかし、ファラオはあなたがたの言うことを聞き入れない。そこで、わたしはエジプトに手を下し、大いなるさばきによって、わたしの軍団、わたしの民イスラエルの子らをエジプトの地から導き出す。
わたしが手をエジプトの上に伸ばし、イスラエルの子らを彼らのただ中から導き出すとき、エジプトは、わたしが主であることを知る。」
そこでモーセとアロンはそのように行った。主が彼らに命じられたとおりに行った。


이 부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명하여 가라고 하신 길이라면, 그 길이 형통해야 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무슨 애굽에 놀러 간 사람들을 데리고 나오려고 하는 거에요? 아닙니다.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데려 나오려는 것입니다. 당시 노예나 종이라고 한다면 그 주인의 재산이나 마찬가지였지요. 그런데 이를 데리고 나오려고 한다는 것은, 그 재산을 주인한테서 빼앗으려고 하는 것, 마치 무슨 인질로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구출하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시죠.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왕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것, 좀 편하고 신속하게 되야 하는 아니겠습니까.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집트 왕 바로의 마음을 좀 부드럽게 만드셔서, 그래, 모세야. 너희들이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내달라고 한다면 그렇게 하자……뭐 이렇게 일이 술술 풀려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제 말이 이상하세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냐 하면, 출애굽기 7장 3절~4절을 다시 한 번 보세요.


7장 3절~4절
“3.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4.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わたしはファラオの心を頑なにし、わたしのしるしと不思議をエジプトの地で数多く行う。
しかし、ファラオはあなたがたの言うことを聞き入れない。そこで、わたしはエジプトに手を下し、大いなるさばきによって、わたしの軍団、わたしの民イスラエルの子らをエジプトの地から導き出す。

바로의 마음을 순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완악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사이비 점쟁이처럼, 처음에는 잘될 거야 하셨다가, 나중에 잘 안 되니까, 아, 사실 그건 내가 잘 안되게 한 거야…… 이런 식으로 나중에 말씀을 바꾸신 게 아닙니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바로 왕이 이스라엘 민족들을 쉽게 내보내지 않을 거야. 처음부터 너희들 말을 안 들을 거야. 내가 애굽에서 여러 가지 심판을 행한 다음에, 그제서야 내보낼 거야…… 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될 거라고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려고 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스스로 일을 꼬이게 만들겠다고 하시는 거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뭐래요?

다음 구절입니다.


출애굽기 7장 5절
“5.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

わたしが手をエジプトの上に伸ばし、イスラエルの子らを彼らのただ中から導き出すとき、エジプトは、わたしが主であることを知る。」

이 말씀은, 내가 이렇게 일을 일부러 어렵게 만드는 것은 애굽 사람들한테 나를 하나님이라고 알게 하기 위해서다……이와 같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들으면 “할렐루야”가 나옵니까. 아니요. 반대로 하나님께 따지고 싶어지지 않을까 합니다.

제가 모세였다면 이렇게 따졌을 거예요. 아니, 하나님. 지금 장난하십니까. 제가 언제 하나님더러 하나님 아니라고 그랬어요? 거, 괜히 일을 어렵게 만들지 마시고, 그냥 좀 쉽게 쉽게 합시다. 아니, 뭐,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든 말든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괜히 이상하게 일을 꼬이게 하지 마시고, 바로의 마음을 좀 부드럽게 만드셔서 일 좀 잘 풀리게 해주세요.

제 기도가 이상해요? 아니에요. 이상할 것 없습니다. 오히려 너무나도 당연한 기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사사건건이 자신을 드러내려 하시는 것일까. 그래, 좋아요. 애굽 사람들한테 하나님이심을 드러낸다면 그건 그렇다고 칩시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구절이 또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6장 7절
“7.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取 ってわたしの民と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の神となる。あなたがたは、わたしがあなたがたの神、主であり、あなたがたをエジプトでの苦役から導き出す者であることを知る。


지금 전능하신 하나님을 나타낸다는 것이 애굽 사람들한테 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들한테까지도 여호와 하나님을 드러낼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거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그렇지, 너무 자기 자신 만을 내세우려고 하시는 거 아니야? 그런 마음이 충분히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백 보 양보를 해서 적국인 애굽 사람들한테 전지전능하신 만군의 하나님을 나타낸다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왜 이스라엘 민족들한테까지, 그렇게 일을 어렵게 해가면서까지 그와 갈이 하나님 자신을 드러낼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사업을 하시는 사장님 같은 분들을 우리가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반 회사를 비롯해서 비즈니스를 하시는 분들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물론 사회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고 할 수도 있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최종적인 목표는 다를지 몰라도, 일차적으로는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돈을 벌기 위해서지요. 내가 돈을 벌기 위해서 내가 사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뭐 작은 사업체라면 자기 혼자 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직원들을 뽑아서 사업체를 운영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여러분이 사장입니다. 그리고 A와 B, 두 사람의 직원이 있어요. 이 두 사람, 모두 유능합니다. 그런데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A는 자기 만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장님이신 여러분이나 회사 생각을 하지 않아요. 오직 자기 방법대로 자기 생각대로, 자기 이득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B는 회사 생각을 하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사 사장님이신 여러분을 생각하면서 일을 해요. 무슨 일이 있으면 사장님이신 여러분과 의논을 하고 결정을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A와 B, 어느 쪽을 귀하게 쓸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이는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당연히 B지요. 아니, 사장님이신 여러분이 월급을 줘가면서 데리고 있는 직원이, 사장님이신 여러분 생각이나 회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일만 한다면, 그 사람이 아무리 유능해도 회사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운동경기 같은 것도 보세요. 저도 스포츠 같은 것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예를 들어서 야구를 보다면, 개인의 홈런이나 안타 같은 타율이 있지요. 그런데 자신이 속한 팀에 대해서는 자신의 팀이 이기든지 지든지 관심은 없고, 감독의 지시도 무시한 채, 오로지 자신의 기록에만 신경을 쓰는 선수라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선수가 아무리 능력이 탁월하다 하더라도, 정말 그야말로 류현진이나 일본의 이치로, 오오타니 선수 정도 되는 뛰어난 인재라 하더라도, 감독 지시에 따르지 않고, 팀의 승리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결국 팀에 남아 있을 수가 없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장님이에요, 그리고 여러분은 팀 감독이에요. 밤이나 낮이나 자신의 회사를 위해서 노력하고 자신의 팀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연구하고 있는데, 자기 회사의 사장이 누군지도 모르고, 팀 감독이 누군지도 모른다면, 그 사람은 쓸모가 없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신경 쓰지 않더라도, 우리가 인정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스스로 드러내려 하시는 것, 내가 너희들의 하나님이야, 내가 너희들을 만들었고 너희들을 인도하는 하나님이야, 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잘 되게 하기 위해서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글쎄요. 한국이나 일본에서 큰 회사다 라고 하면 어디가 있을까요. 뭐, 한국에는 삼성이 있겠지요. 일본에서는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님 정도 되는 분이라고 생각해보겠습니다.

삼성이나 소프트뱅크 같은 큰 회사의 회장님이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이봐. 내가 회장이야. 회장인 나를 위해서 일을 해주었으면 좋겠어.”

그런 분들이 이런 말씀을 하신다면, 누구한테 할까요? 그렇습니다. 그 회사 직원들한테 이런 말을 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님을 평소부터 존경하는 어떤 분이 있었다고 칩시다. 그 분을 위해서 내가 좀 일을 해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소프트뱅크 본사에 찾아갔습니다. 그런 큰 회사 같은 곳이라면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겠지요. 1층 안내데스크에 말합니다. 손정의 회장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럼 무슨 일이냐고 묻겠지요. 그러면 “아, 제가 평소부터 손 회장님을 존경하고 있었는데, 제가 꼭 손 회장님을 위해서 일을 하고 싶습니다” 라고 하면, 그 쪽에서 뭐라고 할까요? 아, 그러세요? 어서오세요! 그러겠습니까?

아닙니다. 어디서 별 이상한 사람이 왔다고 해서 쫓겨날지도 모르는 노릇이지요. 잘못하면 경비들한테 끌려나갈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화가 왔어요. 받아보니까 손정의 회장님이세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기를 위해서 일을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큰 회사 회장님이 그것도 직접 나한테 전화를 해서, 나를 위해 일을 해달라고 했다면, 그게 보통 일입니까? 그리고 일하게 될 직책이 무슨 대리나 과장 정도 되는 자리를 가지고 사장님이나 회장님이 직접 전화를 하겠습니까. 적어도 이사나 상무, 전무 정도는 되는 자리일 것이라고 하는 짐작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나를 위해서 일을 해달라.” 그런데 그 분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이 세상 누구와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분이 지금 나한테 말씀하시기를, “나를 위해 일을 해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이기적이라서 그런 건가요?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시겠다, 우리를 귀하게 써주시겠다는 말씀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어떤 말씀을 놓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시면서 하나님임을 나타내려고 하신다는 말씀을 모세에게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나 종처럼 하찮은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고 하셨나요?

출애굽기 6장 8절
“8.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하셨다 하라”

わたしは、アブラハム、イサク、ヤコブに与えると誓ったその地にあなたがたを連れて行き、そこをあなたがたの所有地として与える。わたしは主である。』」

출애굽기 7장 4절
“4.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しかし、ファラオはあなたがたの言うことを聞き入れない。そこで、わたしはエジプトに手を下し、大いなるさばきによって、わたしの軍団、わたしの民イスラエルの子らをエジプトの地から導き出す。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내시는 이유를, 축복의 땅을 주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야말로 <내 군대,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큰 회사 회장님이 “이제부터 내가 당신의 사장이다. 나를 위해서 일을 해달라”라고 부탁을 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그렇죠. 그 사장님은 상대방을 자신 회사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도 보통 직원이 아니라 임원급, 고위직책이라고 인정하고 있는 경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제부터 내가 너희 하나님이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가 너희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하겠다”는 말씀은 이기적인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내 나라, 천국의 군대, 천국 백성이다. 내가 하려는 일이 좀 어렵고 시간이 걸린다 하더라도 너희는 내 천국 군대, 천국 백성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된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축복을 받는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구원을 받는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13절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しかし、この方を受け入れた人々、すなわち、その名を信じた人々には、神の子どもとなる特権をお与えになった。
この人々は、血によってではなく、肉の望むところでも人の意志によってでもなく、ただ、神によって生まれたのである。

마태복음 10장 32절~33절
“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ですから、だれでも人々の前でわたしを認めるなら、わたしも、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の前でその人を認めます。
しかし、人々の前でわたしを知らないと言う者は、わたしも、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の前で、その人を知らないと言います。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독생자,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시고, 우리를 위해 하늘로 오르시고,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예수님을 찬양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기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되시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요,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 되시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요, 우리가 천국 백성이 된 것을 시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즘 많이 힘드십니까. 일이 잘 안 풀리고 꼬입니까. 어쩌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려고 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을 높이라고,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라고 우리를 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는 삶,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신 땅을 차지하고,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면서, 하나님의 군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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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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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5회 예수님의 부탁
2019년 8월 2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4절~5절
"4.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ルカの福音書 12章 4節~5節
"4.わたしの友である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からだを殺しても、その後はもう何もできない者たちを恐れてはいけません。
5.恐れなければならない方を、あなたがたに教えてあげましょう。殺した後で、ゲヘナに投げ込む権威を持っておられる方を恐れなさい。そうです。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この方を恐れ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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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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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의 부탁” イエス様の頼み事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참 인상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러셨고, 특히 구약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는 큰 위엄과 함께 무엇을 하라, 또는 무엇을 하지 말라 라는 식으로 강하게 명령하듯이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어떻습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의 상황에 대해서 누가복음 12장 1절 전반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누가복음 12장 1절 전반부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そうしているうちに、数えきれないほどの群衆が集まって来て、足を踏み合うほどになった。

지금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서로 밟힐 만큼 모여왔다고 기록합니다.

다음으로 검토해야 할 부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는 반드시 그 말씀을 누구한테 하셨는가 하는 점이죠.

다시 한번 누가복음 12장 1절 초반부에서 중반부까지를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そうしているうちに、数えきれないほどの群衆が集まって来て、足を踏み合うほどになった。イエスはまず弟子たちに話し始められた。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이처럼 말씀을 하실 때에는 참으로 사랑이 넘칩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1절부터 3절까지 한 번 살펴볼까요?

누가복음 12장 1절~3절입니다.
“1.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2.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そうしているうちに、数えきれないほどの群衆が集まって来 て、足を踏み合うほどになった。イエスはまず弟子たちに話し始められた。「パリサイ人のパン種、すなわち偽善には気をつけなさい。
おおわれているもので現されないものはなく、隠されているもので知られずにすむものはありません。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が暗闇で言ったことが、みな明るみで聞かれ、奥の部屋で耳にささやいたことが、屋上で言い広められるのです。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비밀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두고 한 사람은 그랬다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아니라고 합니다. 한 사람은 이게 사실이라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건 거짓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도대체 어느 쪽 말이 사실인지 알 수가 없어요.

잘잘못을 가린다면서, 사실을 밝힌다면서, 진실을 파헤친다면서 조사를 하고 수사를 하고 재판을 합니다. 그러나 1심, 2심이 아니라 대법원에서 확정이 되면 사실이 밝혀졌다고 100% 장담할 수 있나요? 경우에 따라서는 몇 년 또는 몇 십 년 뒤에 재판 결과가 뒤집어지는 경우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완전하게 밝혀지지 않은 사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뭐 유명한 사건 중 하나를 본다면 케네디 대통령 암살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 가지 설은 있지만, 정작 그 사건의 진실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고 하지요.

하지만 심판의 날이 온다면, 그리고 우리가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면 그 때에는 모든 것이 밝혀진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도 모르게 했었다고 믿었던 일들이 순식간에 모든 사람들 앞에서 들통이 나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런 말씀을 들으면 어떠세요? 우와, 정말 큰일 나겠다……라고 생각하는 건, 저만 그런가요?

그렇다고 미리미리 자가 비밀들을 주변 사람들한테 말하고 다니라는 것이 아니에요.

잠언 28장 13절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自分の背きを隠す者は成功しない。告白して捨てる者はあわれみを受ける。


마태복음 5장 23절~25절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ですから、祭壇の上にささげ物を献げようとしているときに、兄弟が自分を恨んでいることを思い出したなら、
ささげ物はそこに、祭壇の前に置き、行って、まずあなたの兄弟と仲直りをしなさい。それから戻って、そのささげ物を献げなさい。
あなたを訴える人とは、一緒に行く途中で早く和解しなさい。そうでないと、訴える人はあなたを裁判官に引き渡し、裁判官は下役に引き渡し、あなたは牢 に投げ込まれることになります。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면, 미리미리 하나님 앞에 죄를 자복하고 용서를 구해야 하지요. 그리고 사람한테 죄를 지었다면, 누구는 이럴 경우에도 하나님께 회개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그 형제한테 가서 직접 화해를 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8절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自分に関することについては、できる限り、すべての人と平和を保ちなさい。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여기서 특히 마태복음 22장 39절에서 “둘째도 그와 같으니”라고 하신 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 다음으로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도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과 똑같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듯 우리 이웃도 마음을 다해서 섬기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제 여기서부터가 드디어 본론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할까요?


누가복음 12장 4절~5절
“4.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わたしの友である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からだを殺しても、その後はもう何もできない者たちを恐れてはいけません。
恐れなければならない方を、あなたがたに教えてあげましょう。殺した後で、ゲヘナに投げ込む権威を持っておられる方を恐れなさい。そうです。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この方を恐れなさい。

오늘 말씀, 정말 처음부터 사랑이 넘치지 않습니까.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친구인 너희들에게 말한다고 하십니다.(わたしの友である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 이는 명령이나 지시, 가르침을 넘어서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간곡히 부탁하시는 말씀, 내가 너희들이 미워서 하는 말이 아니야. 너희들 힘들고 괴로워하라고 하는 말이 아니야. 너희들이 장차 반드시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 천국에 들어와야 하는데, 만에 하나 그러지 못할 까봐, 그러면 너무나도 내 마음이 아프니까, 혹시라도 그런 일이 있을 까봐 내가 미리 말하는 거야……이렇게 정말 사랑이 넘치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은 아마도 그랬겠지요. 아니, 도대체 무슨 어마어마한 말씀을 하려고 하실까, 얼마나 놀라운 비밀을 말씀해주시려고 이렇게까지 하실까. 어쩌면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있을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4.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わたしの友である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からだを殺しても、その後はもう何もできない者たちを恐れてはいけません。
恐れなければならない方を、あなたがたに教えてあげましょう。殺した後で、ゲヘナに投げ込む権威を持っておられる方を恐れなさい。そうです。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この方を恐れなさ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오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전에 회사 생활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저는 참 그 때까지 세상 물정도 모르고 그랬지요. 그런 상황에서 제 직속 상사 대리님이 계셨는데, 참 그 분은 아는 것도 많고 그러시더라구요. 그리고 저도 참 잘 챙겨주세요. 그래서 저는 멋도 모르고, 아, 이 분만 믿고 따라가면 괜찮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하루는 회사 업무에 있어서 사장님 결제를 받아야 할 일이 있었는데, 그 제 직속 상사 대리님이, 아~ 자기 말만 들으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지금 기억에 보면 애초에 사장님 지시와는 조금 다르게 일을 처리해요. 그러면서 사장님도 이렇게 하면 당연히 OK 하실 거라고 장담을 합니다. 만약에 자기 방법대로 해서 안 되면, 아주 그냥 뒤집어버린대나 뭐래나 하면서 아주 호언장담을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그 때는 참 그 대리님이 얼마나 멋있어 보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같이 결제를 받으러 사장실에 들어가니까, 사장님이 일언지하에 안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내심 아, 이제 드디어 이 대리님이 뭔가 멋지게 일을 벌이겠구나……라고 했는데, 제가 가만히 지켜보니까 이 대리님이 “예, 알겠습니다” 그러고 나오더라구요.

아니, 그래서 제가 좀 어이가 없어서 사장실에서 나와서는 대리님한테,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라고 물었더니, 그 대리님 하시는 말씀이, 뭐 어쩌겠냐, 사장님이 안 된다는데……시키는 대로 해야지…… ㅎㅎ그러더라구요.

하기사 말이야 바른 말이지, 자기가 무슨 부장이나 상무, 전무도 아닌 고작 대리가 사장님한테 어떻게 대항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순진하게 그것도 모르고, 사장님보다도 이 대리님 말만 들으면 되는 줄 알았었던 것이니, 참 제가 세상 물정을 몰라도 보통 모른 게 아니지요.

성경에도 보면 홍해에 가로막혔던 이스라엘 민족이 떠오릅니다. 지금 저 뒤에서는 애굽의 최정예부대가 추격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14장 16절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あなたは、あなたの杖を上げ、あなたの手を海の上に伸ばし、海を分けなさい。そうすれば、イスラエルの子らは海の真ん中の乾いた地面を行くことができる。


자, 선택의 길은 두 가지입니다. 단순합니다. 애굽을 의지할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을 의지할 것이냐 입니다. 애굽을 의지한다는 말은 지금 이 순간 왔던 길을 돌아서 애굽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당시 세상에 온 천하에서 애굽을 당해낼 나라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추격해오는 애굽 군대한테 두 손 들고 항복! 저희들이 잘못했습니다. 이번 한 번만 살려주신다면 또다시 애굽으로 들어가서 열과 성을 다해서 종으로, 노예로서 섬기겠습니다……. 이것이 애굽을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그 지긋지긋한 노예생활에서 해방을 시켜주셨는데, 그리고 이제 자유인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고 하는 위대한 계획이 있으신데, 이를 마다하고 다시 종살이로 돌아간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들을 이끌었던 모세는 다행히도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애굽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갈라진 홍해 가운데를 통과해서, 이스라엘 민족 모두가 구원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941년 12월에 시작한 미국과 일본 간의 태평양 전쟁은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라는 결과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전쟁 전과 전쟁 후를 살펴본다고 한다면 일본은 외적으로만이 아니라 내적으로도 대단히 큰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 때까지는 적대국이라고 여겨왔던 미국 군인들이 이제는 일본 안에까지 들어와서 통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일본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사람이, 바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맥아더 장군이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일본 사람들한테 있어서는 천황이야말로 가장 높은 왕이요, 신이라고 여겨왔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이상한 파이프를 물고 선글라스를 낀 사람 하나가 왔는데, 이게 보통이 아니에요. 어느 날 일본 신문에 사진 한 장이 실렸는데 이 사진을 본 일본 사람들은 경악을 했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왼쪽에는 맥아더 장군이 살짝 뒷짐을 지고 편안한 자세로 서 있었는데, 옆에 서 있는 몸집이 작은 일본 천황은 무슨 초등학생처럼 차렷 자세를 하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일본 사람들은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천황이 가장 높은 사람, 아니, 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신보다도 더 높은 신, 맥아더라고 하는 신이 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당시 맥아더 장군은 동경에 GHQ라고 하는 최고사령부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일본의 재벌을 해체시키고 헌법까지도 다시 만들게 했을 정도이니 말 다 했지요. 당시 자료에 의하면 맥아더 장군이 마음만 먹었다면 일본의 천황제도 자체도 없앨 수 있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일본 정치권에서는 이를 막기 위해서, 어떻게든 천황제를 존속시키기 위해서 맥아더를 설득하고 그랬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제 맥아더를 보면서, 아, 저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능력자, 진정한 권력자, 진정한 신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책에 의하면 당시 출세를 하기 위해서는 맥아더의 귀가 되어라……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라고 하니, 그 때 일본에서 맥아더 장군의 권력은 정말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또 웬일일까요. 당시 일본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왕 중의 왕이요 신 중의 신이라고 생각했던 맥아더 장군이 해임을 당했어요. 말하자면 해고가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놀랐지요. 자기들은 맥아더 장군이 천황보다도 높고,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사람인줄 알았는데, 그 위에 또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인가……하면서 말입니다. 맥아더를 해임시킨 게 누구입니까. 예, 바로 트루먼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을 지배하고 다스리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어떤 회사에 다닐 때에 보면, 사장님이나 회장님이 아니라, 내가 말단사원이라면 과장님이나 차장님 정도 되더라도 어렵지요. 무슨 업무 지시가 있으면 반드시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야 여러 가지 있습니다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내 인사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부장 회의에서, 아니면 사장 회의에서 말단사원인 나 하나를, 아무런 큰 잘못 없이 해고시키지는 못하더라도 이상한 부서로 발령을 내는 정도는 전혀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서 내 생활이나 내 미래에 대해서 어쩌면 큰 영향을 줄 수도 있는 일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인사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한테는, 꼼짝없이 업무지시에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만약에 그 회사를 나온 다음은 어떻습니까. 예, 이제는 상대방이 저한테 그런 인사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회사에 있을 때에는 하물며 밤중에 전화가 걸려와서 회사에 지금 중대한 문제가 생겼으니까 당장 나오라고 하면 허겁지겁 나갔겠지만, 그 회사에서 나온 후라면 예전 상사나, 하물며 사장님이나 회장님이 아무리 오라고 한다 해도 내가 가기 싫으면 안 가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는 있지만, 우리는 믿음이라는 것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회사에서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저를 다른 곳으로 발령 내거나, 징계를 내리게 할 수는 있겠지요. 하물며 경우에 따라서는 해고를 시킬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이상은 못합니다. 회사에서 이미 나왔는데 그런 나더러 서울에 가라, 일본에 가라……이렇게 지시할 수 있어요? 아니에요 없습니다.

이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힘이나 권력을 가진 자라 하더라도, 최악의 경우에도 나 자신을 죽이는 것밖에는 못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상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자기는 그럼 안 죽어요? 아닙니다. 자기도 역시 죽습니다. 그리고 생전에 아무리 큰 권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자신이 죽은 다음에 천국에 들어갈지 지옥에 떨어질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은 없습니다.


그 권한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있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의지해야 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도움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을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계시기에 예수님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신 것과 부활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처럼 아무리 큰 힘을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우리를 지옥에 던져 넣을 수 있는 권세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를 뒤집어 보면 아무리 큰 힘을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훌륭한 목회자나 신학자라 하더라도 사람의 힘으로는, 누군가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진 사람 또한 없습니다.

그 권세는 오로지 하나님께 있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 구원을 받아야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야만 됩니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が道であり、真理であり、いのちなのです。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だれも父のみもとに行くことはできません。

예수님께서 부탁하십니다.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からだを殺しても、その後はもう何もできない者たちを恐れてはいけません。
恐れなければならない方を、あなたがたに教えてあげましょう。殺した後で、ゲヘナに投げ込む権威を持っておられる方を恐れなさい。

그리고 또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부탁을 하십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そうです。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この方を恐れなさい。

우리 모두 구원에 이르는 참된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님, 왕 중의 왕이요 신 중의 신이신 예수님,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 죄를 모두 씻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 땅에서 기쁨으로 살아가며, 마침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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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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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4회 채워야 할 기름
2019년 8월 18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1절~13절
"1.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マタイの福音書 25章 1節~13節
"1.そこで、天の御国は、それぞれともしびを持って花婿を迎えに出る、十人の娘にたとえることができます。
2.そのうちの五人は愚かで、五人は賢かった。
3.愚かな娘たちは、ともしびは持っていたが、油を持って来ていなかった。
4.賢い娘たちは自分のともしびと一緒に、入れ物に油を入れて持っていた。
5.花婿が来るのが遅くなったので、娘たちはみな眠くなり寝入ってしまった。
6.ところが夜中になって、『さあ、花婿だ。迎えに出なさい』と叫ぶ声がした。
7.そこで娘たちはみな起きて、自分のともしびを整えた。
8.愚かな娘たちは賢い娘たちに言った。『私たちのともしびが消えそうなので、あなたがたの油を分けてください。』
9.しかし、賢い娘たちは答えた。『いいえ、分けてあげるにはとても足りません。それより、店に行って自分の分を買ってください。』
10.そこで娘たちが買いに行くと、その間に花婿が来た。用意ができていた娘たちは彼と一緒に婚礼の祝宴に入り、戸が閉じられた。
11.その後で残りの娘たちも来て、『ご主人様、ご主人様、開けてください』と言った。
12.しかし、主人は答えた。『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私はあなたがたを知りません。』
13.です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その日、その時を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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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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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채워야 할 기름” 満たすべき油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제 예수님 공생애도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무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마태복음 24장부터 25장 끝까지에 걸쳐서 마지막 때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24장 1절부터 44절까지는 장차 일어날 일들을,
24장 45절~51절까지는 악한 종에 대한 비유를,
그리고 오늘 살펴볼 말씀인 25장 1절~13절에서는 열 처녀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항상 말씀 드리듯이 복음서의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말씀하셨는지, 그리고 비유인 경우에는 그 등장인물이 누구인지가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를 보면 말씀이 24장부터 이어지고 있습니다만, 24장 3절~4절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절~4절
“3.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イエスがオリーブ山で座っておられると、弟子たちがひそかにみもとに来て言った。「お話しください。いつ、そのようなことが起こるのですか。あなたが来 られ、世が終わる時のしるしは、どのようなものですか。」
そこで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人に惑わされないように気をつけなさい。


이렇게 해서 말씀이 시작됩니다. 오늘 말씀도 이 맥락에서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역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생애 기간 중에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신 대상을 크게 나누어 보면, 바리새인이나 제사장 같은 기득권층, 예수님께 나온 일반 백성들, 그리고 제자들, 이렇게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만, 대상이 백성들이거나 또는 바리새인, 제사장들의 경우에는 난해한 비유로 설명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제자들만을 상대로 말씀하실 때를 보면 대단히 이해하기가 쉽게,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하나하나 꼼꼼하게 설명해주듯이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참 얼마나 사랑이 넘치는지 모릅니다. 오늘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음으로 등장인물이죠. 오늘 말씀은 비유이기 때문에 이 속에 등장인물들이 있습니다만, 이는 우선 신랑, 열 처녀, 그리고 또 하나가 등장하는데 이는 나중에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보면 일반적으로 혼인잔치라고 한다면 마지막 때를 상징하지요. 그리고 혼인잔치라고 한다면 주로 신랑과 신부를 이야기하게 되는데 오늘은 신부가 아닌 열 처녀라고 하십니다. 이는 말씀의 초점, 그러니까 오늘 말씀의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의 주제는 즐거운 잔치가 아니라, 여기에 참여할 수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만약에 신부라고 한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당연히 참여하겠지만, 신부라고 하시지 않고 굳이 ‘처녀들’이라고 하신 것에는 이와 같은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차차 아시게 되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과거의 이스라엘 지역 결혼문화와도 관련이 있습니다만, 시간관계상 어려운 것은 생략하도록 하고, 가능한 한 심플하게 말씀 드리도록 해 보겠습니다.


자, 그럼 일단 등장인물들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신랑입니다. 신랑은 ‘혼인잔치’라고 하는 큰 잔치를 위해 오는 귀빈.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손님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지요.

그리고 열 처녀들은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이제 머지 않아 찾아올 신랑을 맞으러 나가야 하는 중요한 임무가 있었습니다. 요즘 말로 한다면 결혼식 때의 신부 들러리(ブライズメイド) 정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열 처녀 중에서 다섯 명은 미련한 자요, 나머지 다섯 명은 슬기 있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미련한 자와 슬기 있는 자들이 취한 행동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보아야 하겠지요. 여기에 대해서는 3절~4절에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절~4절
“3.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愚かな娘たちは、ともしびは持っていたが、油を持って来ていなかった。
賢い娘たちは自分のともしびと一緒に、入れ物に油を入れて持っていた。

미련한 자는 등을 가졌지만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슬기 있는 자는 그릇에 기름을 담아서 등과 함께 가져 갔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미련한 자가 든 등에 기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뒤에 보면 나옵니다만, 미련한 자는 그 등에 들어갈 만큼의 적은 양의 기름만 가지고 갔고, 슬기 있는 자들은 등에 기름을 넣었을 뿐만 아니라, 기름을 다른 그릇에 담아서 넉넉하게 가지고 갔다는 것입니다.

당시는 가로등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만, 준비를 하러 나갈 때 처녀들이 등을 켰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만약에 이 때가 밤이었다면 등을 켰겠지요. 하지만 그들이 등을 킨 것 같지는 않고 그냥 들고만 갔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아직 어두워지기 전이었기 때문이었겠지요.

자, 열 처녀 모두 준비는 다 마쳤습니다. 이제 신랑이 오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니, 도대체 이 신랑이라고 하는 양반이 오다가 길을 잃었는지 아니면 자기 집에서 무슨 행사가 길어지는지, 도무지 나타나지 않습니다. 요즘 같았더라면 당장 전화를 걸어서 지금 어디 쯤이냐, 언제쯤 도착할 예정이냐 등등 물어볼 수나 있지만 당시는 가로등도 없는 마당에 그럴 수야 있나요. 그저 꼼짝없이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정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오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그래도 긴장도 했겠지요. 조금 늦을 수도 있겠지. 이제 금방 올 거야……그런데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나고……이제 몇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위는 어두컴컴해지고 계속 긴장하고 있었기에 몸도 마음도 피곤하지요. 그래서 이 열 처녀가 어떻게 되었대요?

마태복음 25장 5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花婿が来るのが遅くなったので、娘たちはみな眠くなり寝入ってしまった。

기다리다 못해 이제 안 오니까 그냥 잠이 들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준비하느라고 아침 일찍부터 난리를 쳤겠지요. 다른 분들도 그러셨겠지만 저도 기록을 보니까 결혼식 당일에는 다 준비하고 새벽 5시 반에 숙소를 출발했더라구요. 그렇다면 대략 한 새벽 4시 정도에는 일어났다는 말이 되잖아요? 뭐, 그렇다고 꼭 결혼 당사자만 그런가요? 가족 친지분들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온몸이 피곤한데 미련한 자나 슬기 있는 자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제 자기들도 모르게 깊이 잠이 들고 말았던 것이지요.

아이구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마태복음 25장 6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ところが夜中になって、『さあ、花婿だ。迎えに出なさい』と叫ぶ声がした。

밤중에 갑자기 어디선가 소리가 납니다. 이 소리가 바로 세 번째 등장인물입니다.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려오더니 신랑이 왔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맞으러 나오라는 것입니다.

이는 미련한 자가 아니라 슬기 있는 자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만약에 예상을 했었더라면 졸지 않았겠지요. 그렇잖아요? 아니, 지금 중요한 날인데, 신랑이 올 줄 알았으면 아무리 피곤해도 자다 깬 얼굴을 하고 나가겠어요? 어떻게 해서든 그 시간까지 안 졸았겠지요. 그런데 슬기 있는 자들도 잠을 잤다는 것은 그들도 역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신랑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이제 난리가 났습니다. 서둘러 잠을 깨고는 날이 어두우니까 준비한 등불을 켜고 나갑니다. 자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마태복음 25장 8절~10절
“8.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愚かな娘たちは賢い娘たちに言った。『私たちのともしびが消えそうなので、あなたがたの油を分けてください。』
しかし、賢い娘たちは答えた。『いいえ、分けてあげるにはとても足りません。それより、店に行って自分の分を買ってください。』
そこで娘たちが買いに行くと、その間に花婿が来た。用意ができていた娘たちは彼と一緒に婚礼の祝宴に入り、戸が閉じられた。

이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부탁을 하지요. 지금 자기들이 등 안에 기름을 넣어왔기에 불을 붙이긴 했지만 그래도 기름이 부족해서 꺼져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좀 나누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랬더니 슬기 있는 자들이 말하기를, 지금 자기들 쓰기에도 모자랄 것 같으니, 그러지 말고 어서 가서 사오라고 합니다.

아니, 지금 가로등도 없고 전화도 없는데, 그 밤중에 영업하고 있는 편의점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아마도 정신 없이 왔다 갔다 하면서 간신히 기름을 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부랴부랴 다시 돌아왔지만, 그러면 뭘 합니까. 이미 신랑은 도착해서 슬기 있는 다섯 처녀가 맞이하고, 모두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는 문이 닫히고 말았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11절~12절
“11.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その後で残りの娘たちも来て、『ご主人様、ご主人様、開けてください』と言った。
しかし、主人は答えた。『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私はあなたがたを知りません。』

당연히 알지 못하겠지요. 신랑이 도착했을 때에 그들은 기름 사러 갔었잖아요. 얼굴을 봤어야 들여보내든지 하겠지만, 당신들은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차가운 말을 듣고, 결국은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참 허무하지 않습니까. 아침부터 이게 무슨 고생이에요.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아침부터, 아니, 경우에 따라서는 피부관리다 뭐다 해서 오랫동안 그 날을 위해 준비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러면 뭘 합니까. 이미 잔치는 시작되었고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그 즐거운 잔치에 들어갈 수 없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마태복음 25장 1절~12절까지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미련한 자와 슬기 있는 자의 구분이 이와 같이 되어 있습니다만, 세상적으로 보면 좀 다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자, 행사 준비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행사 진행 매뉴얼이 신부 들러리 역할을 맡은 열 처녀들에게 내려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예정된 시간까지 지정된 장소에서 기다렸다가 신랑이 도착하면 지체 없이 곧바로 나가서 맞이할 것. 해가 저물고 주변이 어두울 때에는 각자 불이 켜진 등을 손에 들고 나갈 것. 그리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기름을 넉넉하게 준비할 것. 이게 반드시 지켜야 할 사항이었습니다.

여기서는 편의상 처녀 열 명 중 다섯 명씩 A그룹과 B그룹으로 나누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A그룹 처녀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매뉴얼에 이렇게 적혀 있으니까 등불을 준비해야지. 그리고 언제 올지 모르니 밤늦게 올 것도 대비해서 기름도 넉넉하게 준비해야겠다. 참 단순하죠?

한편 B그룹 처녀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매뉴얼에 이렇게 적혀 있으니 들고 나갈 등은 준비해야겠지. 기름? 에이, 그거야 등 안에 넣어두면 되잖아. 여분의 기름 같은 건 필요 없어. 우리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여기서 신랑 집까지의 거리는 얼마고, 신랑이 당일에 시댁에서 이런저런 행사를 마치고 이리로 출발한다고 하면, 여기에 도착하는 시간은 대략 오후 정도. 아무리 늦더라도 초저녁이면 충분해. 지금이 겨울이라면 또 모를까 요즘은 아직 초저녁이라도 환하니까, 굳이 등을 켤 필요가 없잖아. 밝을 때 켜봤자 티도 안 난다니까. 그러니까 괜히 무겁게 기름을 많이 넣지 않아도 돼. 그리고 최악의 경우 기름이 필요하다면 A그룹 애들한테 빌리면 되지 뭐. 쟤네들 좀 봐. 미련하게 하란다고 기름을 저렇게 많이 준비했잖아. 머리가 나쁘면 평생 고생이라니까. 기름이 적어서 불안해? 괜찮아. 걱정하지마. 나만 믿으라구.

만약에 이랬다면 어떨까요. 물론 우리는 이미 답을 아니까 쉽습니다만, 세상적으로 보면 A그룹과 B그룹은 어떻습니까. 어쩌면 세상적으로 보면 여분의 기름을 준비한 A그룹보다도, 이것저것 정보를 수잡하고 요령 있게 준비한 B그룹 처녀들이 더 지혜롭다는 평을 받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잖아요? 세상을 좀 요령 있게 살아야지요. 하란다고 시키는 대로 다 하면 그게 미련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어떻습니까. 세상적으로 보면 미련하게 보였던 A그룹이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반면에 세상적으로 보면 지혜롭고 요령 있는 것처럼 보였던 B그룹은 아예 문 안에도 들어가지 못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죠.

마태복음 25장 13절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です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その日、その時を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ら。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열 처녀에게 내려졌을 명령, 매뉴얼이란 무엇일까.
둘째로, 열 처녀의 희비를 엇갈리게 만든 기름이란 무엇일까.
마지막으로 셋째로, 깨어있으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 세 가지를 오늘은 반드시 이해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깨닫게 되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열 처녀에게 내려졌을 명령, 매뉴얼이란 무엇일까요. 이는 우리에게 있어서 당연히 성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의 질문입니다. 이렇게 두꺼운 성경, 이 안에는 너무나도 많은 내용들이 있습니다만, 이를 간단하게 줄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여기서 특히 40절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2장 40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변화산 사건을 떠올리게 됩니다.


마태복음 17장 1절~3절
“1.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それから六日目に、イエスはペテロとヤコブとその兄弟ヨハネだけを連れて、高い山に登られた。
すると、弟子たちの目の前でその御姿が変わった。顔は太陽のように輝き、衣は光のように白くなった。
そして、見よ、モーセとエリヤが彼らの前に現れて、イエスと語り合っていた。

모세는 율법의 상징이요 엘리야는 선지자의 상징입니다. 즉 이 두 사람은 그야말로 성경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가운데에 예수님께서 계셨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라는 계명과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라는 이 두 계명이 곧 성경 전체와도 같다, 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매뉴얼인 이 성경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가득 차 있고, 이를 실제로 보여주신 분이 바로 다름아닌 예수님이시고,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둘째로, 기름은 무엇이냐 하는 부분입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슬기 있는 자들은 기름을 넉넉하게 가지고 갔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겸손과 순종이요, 또 하나는 주님 앞에 드리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 날 그 열 처녀들에게 내려진 사명은 장차 도착할 신랑을 기다리다가 맞이하는 일이었습니다. 낮에 와야만 맞이하고 밤에 오면 맞이하지 안아도 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문제가 아닙니다. 낮에 도착하든 밤에 도착하든 새벽에 도착하든, 언제든지 도착하기만 하면 신랑을 나가서 맞이하는 것, 이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낮에 오시든 밤에 오시든, 언제든지 오십시오. 주님께서 원하실 때에 오십시오. 저의 생각이나 저의 방법이 아니라, 주님의 생각대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섬기겠습니다. 이것이 기름을 넉넉하게 채우는 겸손과 순종의 자세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기름이라고 하는 것이 주님 앞에 드리는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는 말씀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얼마나 우리 삶 속에서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범사에 예배하고 찬송하고 감사하는 삶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이웃 사랑은 어떻게 하는 것이 이웃 사랑일까요. 여러분께서는 요즘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계십니까. 이렇게 물으면 어떤 분은 이렇게 대답하실지도 모르겠지요. 아이구, 요즘은 저 먹고 사느라고 바빠서 이웃 사랑을 실천할 시간이 없어요. ㅎㅎ

이웃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것일까요?

이도 역시 우리의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매뉴얼인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39절~45절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悪い者に手向かっ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の右の頬を打つ者には左の頬も向けなさい。
あなたを告訴して下着を取ろうとする者には、上着も取らせなさい。
あなたに一ミリオン行くように強いる者がいれば、一緒に二ミリオン行きなさい。
求める者には与えなさい。借りようとする者に背を向けてはいけません。
『あなたの隣人を愛し、あなたの敵を憎め』と言われていたのを、あなたがたは聞いています。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自分の敵を愛し、自分を迫害する者のために祈りなさい。
天におられるあなたがたの父の子どもになるためです。父はご自分の太陽を悪人にも善人にも昇らせ、正しい者にも正しくない者にも雨を降らせてくださるからです。


여러분, 이 구절 좋아하십니까? 어쩌면 이 구절을 읽으시면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어요. 하이구. 그래. 성경은 맨날 손해 보면서 살라고 하고 그런 얘기 밖에 없어. 어떻게 사람이 맨날 인내심 테스트 하면 살라는 거야? 그런 생각 들지 않으세요?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성경을 오해한 것입니다. 사실 이 글 내용을 보면 우리에게 그렇게 어려운 것을 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큰 돈을 쓰라는 것도 아니고 큰 희생을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조금 손해보고, 조금 내주고 조금 자존심 세우지 말아라……그 정도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하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해주시는 건가요? 그렇게 좀 손해 보면서 살면 다투지 않아도 되니까? 속이 편하니까? 여러분, 성경은 윤리책이나 실용서가 아닙니다. 이렇게 조금 손해보고 이웃을 사랑하면, 주님께서 30배 60배 100배 되는 축복으로 갚아주신다는 사실을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믿음이야말로 우리가 주님 앞에 드리는 등불에 기름을 채워 넣는 일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깨어있으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미련한 자도 슬기 있는 자도 신랑을 기다리다가 지쳐서 잠을 잤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잠이 든 슬기 있는 자들도 잘못했다고 말씀하고 계신 건가요?

여러분, 세상적으로 보았을 때 잠을 자야지요. 어떻게 항상 깨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 잠을 잔다는 것은 단순히 수면을 취한다는 뜻만이 아니라, 신앙적으로는 세상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신앙이 있다고 해서 1년 365일 교회 안에서만 있어야 하나요?

그것은 하나님도 그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안식일에 대한 계명을 주시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출애굽기 20장 8절~10절
8.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安息日を覚えて、これを聖なるものとせよ。
六日間働いて、あなたのすべての仕事をせよ。
七日目は、あなたの神、主の安息である。あなたはいかなる仕事も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も、あなたの息子や娘も、それにあなたの男奴隷 や女奴隷、家畜、またあなたの町囲みの中にいる寄留者も。

엿새 동안은 믿음을 갖고 세상에서 열심히 우리의 일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여기서 깨어 있으라고 하는 것은, 슬기 있는 자들이 했던 것처럼, 신랑이 낮에 오든 밤에 오든, 그 때 넉넉한 기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믿음과 말씀과 행함으로 말미암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기름을 들고 나갈 준비가 되었는가 하는 점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미련한 자들은 슬기 있는 자들에게 기름을 빌리려 했으나 거절 당했다고 하지요. 여러분, 우리가 쌓아온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다른 사람한테 빌려줄 수 있나요? 좀 다른 예로 말씀 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 운전 면허증을 조금 잘라서 면허가 없는 사람한테 주면, 그 사람은 조금 잘라준 면허만큼 운전할 수 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이처럼 마지막 날에는 하물며 자신의 부모나 자식이라 하더라도 믿음으로 채운 기름은 나누어 줄 수도 없고 빌려줄 수도 없습니다. 모두 자기가 자기 힘으로 채워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4장 44절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も用心していなさい。人の子は思いがけない時に来るのです。

누가복음 12장 40절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あなたがたも用心していなさい。人の子は、思いがけない時に来るのです。」

요한계시록 22장 7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見よ、わたしはすぐに来る。この書の預言のことばを守る者は幸いである。」

요한계시록 22장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見よ、わたしはすぐに来る。それぞれの行いに応じて報いるために、わたしは報いを携えて来る。

요한계시록 22장 20절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これらのことを証しする方が言われる。「しかり、わたしはすぐに来る。」アーメン。主イエスよ、来てください。


주님이 언제 오실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하루 뒤, 한 달 뒤, 1년 뒤, 5년 뒤, 10년 뒤에 오실 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오늘 지금 이 예배가 끝나기 전에 오실 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언제인지는 모릅니다만, 그러나 반드시 오십니다. 속히 오신다고 주님께서는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밤중에 갑자기 신랑이 도착했다는 소리로 인하여 순식간에 상황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날도 그렇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1절~52절

“51.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聞きなさい。私はあなたがたに奥義を告げましょう。私たちはみな眠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が、みな変えられます。
終わりのラッパとともに、たちまち、一瞬のうちに変えられます。ラッパが鳴ると、死者は朽ちないものによみがえり、私たちは変えられるのです。

그렇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때 나팔소리가 나며 모든 것이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될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오십니다. 반드시 오십니다. 그리고 곧 오십니다. 우리 모두, 믿음과 말씀과 행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우리 몸 같이 사랑함으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 속에 기름을 가득 채워서, 주님께서 언제 오시더라도 오늘 말씀에 나오는 슬기 있는 처녀들처럼 기쁨과 감사와 찬송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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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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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3회 ’그러나’의 하나님
2019년 8월 1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절~29절
“26.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第一コリント人への手紙 1章 26節~29節
"26.兄弟たち、自分たちの召しのことを考えてみなさい。人間的に見れば知者は多くはなく、力 ある者も多くはなく、身分の高い者も多くはありません。
27.しかし神は、知恵ある者を恥じ入らせるために、この世の愚かな者を選び、強い者を恥じ入らせるために、この世の弱い者を選ばれました。
28.有るものを無いものとするために、この世の取 るに足りない者や見下されている者、すなわち無に等しい者を神は選ばれたのです。
29.肉なる者がだれも神の御前で誇ることが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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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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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그러나’의 하나님” 『しかし』の神様라고 하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예전에 일본어 시험반을 맡고 가르칠 때에 보면, 학생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과목이 아무래도 독해입니다. 독해는 단어도 많이 나올 뿐만 아니라, 단순한 암기력만이 아닌, 짧고 긴 문장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도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독해 문제 중에서 제일 어려운 지문 중 하나가 뭐냐 하면 “필자의 생각”을 묻는 문제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묻는 것이라면 본문 중에서 찾아내면 되지만, 이 “필자의 생각”을 묻는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문장 내용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필자의 생각을 가장 빨리 찾아내는 방법이 바로 본문 흐름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당시 저는 수업에서 독해 문장을 읽을 때에 접속사를 주목하라고 강조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본문에 나오는 단어 하나하나를 모두 완벽하게 알지 못하더라도 글의 흐름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바로 “필자의 생각”이라고 하는 것을 집어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흐름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접속사’이기 때문입니다.

접속사는 말 그대로 문장과 문장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데, 접속사의 기등들을 보면 여기에는 뭐 첨가도 있고, 조건도 있고, 병렬도 있고, 화제전환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가장 대표적인 접속사는 아무래도 순접과 역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말은 어려울지 모르겠습니다만, 알고 보면 쉽습니다. 먼저 ‘순접’이라고 하는 것은 앞에 나오는 문장을 이어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러므로, 그러니까 따라서, 때문에’ だから それで같이 앞에 오는 문장의 흐름을 그대로 이어 받을 때 쓰는 접속사가 이 ‘순접’입니다.


반면에 ‘역접’이라고 하는 것은 앞에 오는 문장의 흐름에 반대되는 내용을 쓸 때 사용됩니다. ‘그러나, 하지만, ~에도 불구하고’ 같은 것이 바로 ‘역접’에 해당됩니다.

이 접속사 중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접속사를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이 ‘역접’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지요. 이 역접 다음에 ‘필자의 생각’, ‘필자의 의도’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독해 문제에서 사용되는 문장들을 보면, 평범한 것이 없고, 대부분 필자만의 독특한 시각이 담긴 글들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식이지요.

많은 사람들은 돈을 좋아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합니다…….이런 문장인데 마지막에 가서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라는 식의 본문은 잘 안 나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필자만의 생각이나 견해가 없기 때문이지요.

이런 글 보다는 오히려, 글쎄요……, “세상 사람들은 돈을 좋아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합니다……이렇게 이어진다 하더라도 마지막에는 뭐예요? “그러나! 돈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돈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뭐 이런 글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 “그러나!”라고 하는 역접 뒤에 “필자의 독특한 생각, 필자만의 견해”가 당겨진 문장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눈을 돌려보면 어떻습니까. 세상에는 온통 순접이 넘쳐납니다. 무슨 사건이라도 일어나보세요. 아니면 얼마 전에 일본에서도 선거가 있었습니다만, 무슨 사건이나 어떤 현상이 발생하면, 이른바 많이 배웠다는 분들은 이를 두고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 비추어보며 분석을 하고 이유를 달아서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A라서 B라는 현상이 일어났다. A이기 때문에 B라는 사건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 A였기 때문에 B라는 선거결과가 나오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뭐 이런 식이지요. 이것이 무엇입니까. 모두 다 순접입니다. 이런 어려운 내용이 아니더라도, 예를 들어서, 돈이 없다. 그래서 고생한다. 건강하지 못하다. 그래서 불행하다. 나이가 많다, 아니면 나이가 너무 어리다 그래서 어쩌구 저쩌구……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순접 투성이입니다. 이렇게 이유를 달고 저렇게 이유를 달아놓고는 그래, 그래서 어쩔 수 없다……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 생각입니다.

과거 당나라 시절에는 관리로서 출세를 하기 위해서는 4개의 조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신언서판……이라고 합니다. 몸 신, 말씀 언, 글 서, 판단할 판 자를 써서 신언서판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먼저,

신…… 이란 건강도 건강이지만 풍채와 용모도 중요시했다고 합니다.
언…… 이란 언변입니다. 즉 말을 잘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 는 글씨를 잘 써야 한다는 것이고,
판…… 은 판단력도 판단력이지만 문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아무리 아는 것이 많고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신언서판……이라고 하는 요소를 갖추고 있어야지만 당나라 때에는 관리로 등용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오늘 말씀 중에서 고린도전서 1장 26절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절

“26.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兄弟たち、自分たちの召しのことを考えてみなさい。人間的に見れば知者は多くはなく、力ある者も多くはなく、身分の高い者も多くはありません。

이 글을 좀 이해하기 쉽도록 현대인의 성경판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셨을 때 여러분이 어떠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적으로 볼 때 여러분 가운데는 지혜로운 사람도 많지 않았고 유능한 사람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현대인의 성경을 참 좋아합니다만, 이 고린도전서, 바울은 당시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들을 가리켜, 당신들은 인간적으로 볼 때 지혜로운 사람도 많지 않고, 유능한 사람도 없고, 가문이 좋은 사람도 별로 없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 드리면 당신들은 배운 것도 없고, 능력도 없고, 그렇다고 배경이 좋은 사람들도 없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배운 것은 초등학교 나온 게 다고, 머리도 나쁘고 빽도 없어요. 이런 사람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뭐 꼭 당나라 때 관리 임용이 아니라 요즘 세상에 있어서도 제대로 이력서 한 장 내밀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옛날에는 못 배웠어도 그냥 부모한테 물려받은 농사나 지으면서 살아가면 되지……라고 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요즘은 뭐 아무나 농사를 짓나요? 농사를 지으려면 얼마나 많이 공부를 해야 하는데요.


세상적으로 본다면 이 말 뒤에 나오는 가장 자연스러운 접속사는 순접입니다. 당신들은 지혜로운 사람도 많지 않다. 그래서 당신들은 성공할 수가 없다. 유능한 사람도 별로 없다. 그래서 잘살 수 없다. 가문이 좋은 사람도 별로 없다. 그래서 출세하기는 틀렸다…… 그래서, 그래서……이게 세상 이치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은 어떻습니까. 바로 다음 구절인 고린도전서 1장 27절은 무슨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장 27절 첫 단어.
“27.그러나!” 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역접이라고 하는 접속사는 정말 대단합니다. 이 역접이 가지고 있는 힘은 막강합니다. 왜냐하면 앞에 있는 모든 조건들을 완전히 뒤집어버리기 때문인 것입니다.

앞에 이런 저런 그런 나쁜 조건들이 있어요. 안 좋은 상황들이 있습니다. 불리한 환경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자, 여기에 역접을 한번 집어넣어 보십시오. “그러나!”입니다. 아무리 나쁜 조건들, 안 좋은 상황들, 불리한 환경들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모두 “그러나!”로 물리칠 수 있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처럼 성경을 자세히 보면 여기에는 반대로 ‘역접’으로 넘쳐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라고 하면 사울이었습니다. 그가 왕이 되기 위해 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지요. 처음에 그는 겸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점점 교만해지더니 마침내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을 저버리고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데에만 급급해집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고, 그 왕위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십니다. 그 사람이 바로 다윗이지요.


다윗은 영문도 모르는 채 사울에게 쫓깁니다. 그 때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함께 있었습니다만 그게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보면 성경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사무엘상 22장 2절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そして、困窮している者、負債のある者、不満のある者たちもみな、彼のところに集まって来 たので、ダビデは彼らの長となった。約四百人の者が彼とともにいるようになった。

상대는 지금 누구입니까. 어느 개인 한 두 명이 아니라 한 나라의 왕이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변에 좀 더 나은 사람들이 함께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기 성경에 보면 환난 당한 모든 자, 빚진 모든 자,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윗한테 모였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다윗도 참 얼마나 답답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어째 내 주위에는 좀 쓸만한 사람들은 없고 다들 무슨 사정이 있는 사람들, 돈도 없는 사람들, 이런저런 문제가 있는 사람들만 모였을까, 괜찮은 사람들은 어디 가고 다 못난 사람들만 모여왔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무엘상 18장 12절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サウルはダビデを恐れた。それは、主がダビデとともにおられ、サウルを離れ去られたからである。


내가 아무리 배운 것도 없고 능력도 없고 배경도 없고,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내 주위에 나쁜 조건들이 있어요 내가 놓인 상황은 안 좋습니다. 환경들도 너무나 불리해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무슨 하나님이시라구요? 예, 그렇습니다. “’그러나’의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에 ‘그러나’를 넣으면 어떻게 되요? 예, 27절 이후가 됩니다.

오늘 말씀 중 고린도전서 1장 27절~29절을 보시겠습니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27. しかし神は、知恵ある者を恥じ入らせるために、この世の愚かな者を選び、強い者を恥じ入らせるために、この世の弱い者を選ばれました。
28. 有るものを無いものとするために、この世の取るに足りない者や見下されている者、すなわち無に等しい者を神は選ばれたのです。
29. 肉なる者がだれも神の御前で誇ることが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하나님께서는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28절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신다 (有るものを無いものとするために、この世の取るに足りない者や見下されている者、すなわち無に等しい者を神は選ばれた) 고 하십니다.

이것이 이상하신가요? 그렇죠. 이상하죠. 이해가 안 되시나요? 그렇죠. 이해가 안 되지요.

아니, 하나님도 참 이상하시지. 이왕 쓰시려면 좀 똘똘하고 잘난 사람을 쓰시면 얼마나 좋아요. 그렇잖아요? 내가 회사 사장이에요. 그런데 직원을 뽑으려고 해요. 그렇다면 똘똘한 사람과 미련한 사람, 누구를 뽑겠습니까. 그야 당연히 똘똘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뽑지요. 그래야 나나 우리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해주지 않겠습니까. 미련한 사람을 뽑아보세요. 회사가 잘 돌아가겠습니까. 그런 사람을 내 돈 들여가면서 데리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참 하나님도 이상한 양반이야. 말도 안돼. 그러니까 성경은 엉터리라니까……. 그렇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렇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누가 먼저 버림을 받아 마땅합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나 자신부터 버림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대단해서, 우리 스스로가 좀 남들보다 착하고 똘똘해서 하나님이 사랑해주시는 것 같습니까.

잠언 26장 12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잠언 26장 12절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自分を知恵のある者と思っている人を見たか。彼よりも、愚かな者のほうが、まだ望みがある。


우리가 만약에 지혜롭고 능력 있고 나 혼자라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내가 잘났었다면,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일찌감치 버리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아직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사랑해주시는 이유는 어쩌면 참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미련해서, 어쩌면 참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능력이 없어서, 어쩌면 참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지혜롭지 못해서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자학인가요? 아닙니다. 동물 양을 보십시오. 양은 늑대나 사자가 달려든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좇아오는 늑대나 사자를 뿌리칠 정도로 빨리 달리지 못합니다. 맹수들과 싸워서 이길 만한 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인가요? 아닙니다. 이는 오히려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미련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지혜로움이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아이구, 나는 맹수가 달려들면 내 힘으로는 살아남을 수가 없어요. 꼼짝없이 죽고 말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예, 그렇습니다. 양치기 목자한테 꼭 붙어 있을 게요…… 이게 진정한 지혜이자 진정한 능력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10장 14절~15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갈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0장 14절~15절
“14.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わたしは良い牧者です。わたしはわたしのものを知っており、わたしのものは、わたしを知っています。
ちょうど、父がわたしを知っておられ、わたしが父を知っているのと同じです。また、わたしは羊たちのために自分のいのちを捨てます。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께서는 그냥 말로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죄악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준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3장 5절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心を尽くして主に拠り頼め。自分の悟りに頼るな。

잠언 16장 20절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みことばによく通じた者は幸いを見出す。主に拠り頼む者は幸いである。

잠언 29장 25절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人を恐れると罠にかかる。しかし、主に信頼する者は高い所にかくまわれる。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시편 23편 6절에 보면 다윗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편 23편 6절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まことに 私のいのちの日の限り いつくしみと恵みが 私を追って来るでしょう。 私はいつまでも 主の家に住まいます。


다윗은 평생토록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 결과 그렇게 문제도 많은 사람들, 정말 인간적으로 보면 전혀 쓸모 없는 것처럼 보인 사람들을 거느리고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자, 하나님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오히려 사울이 다윗을 두려워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이스라엘 왕으로 오르게 되어 40년이나 통치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요, 뭐, 그러나의 믿음, 좋습니다. 하지만 제가 모르나요. 예, 알지요. 뭘 아냐 하면, 이런 믿음, 그러나의 믿음이 생기더라도 어떻습니까. 주변을 돌아보면 믿음도 없는 사람들이 잘 되고 그런 모습을 봅니다. 그러면 이게 어느 쪽이 맞는 것일까.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데 이렇게 어려움이 닥쳐옵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성경대로 살아가지도 않고 자신들의 욕심만 채우려고 하는데 잘 되는 것처럼 보여요. 그러면 이거 나만 바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잠언 24장 1절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悪い者たちを羨んではならない。彼らとともにいることを望んではならない。

잠언 24장 19절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悪を行う者に対して腹を立てるな。悪しき者を羨むな。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는 지금이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수천년 전에도 이와 같은 일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악인인데도 잘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있어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일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잠언 19장 3절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人の愚かさは自らの道を滅ぼす。その心は主に向かって激しく怒る。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미련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지혜롭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5절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神の愚かさは人よりも賢く、神の弱さは人よりも強いからです。

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제아무리 머리가 좋고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능가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승리를 주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된 인도자가 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 우리가 부족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힘들더라도, 우리를 높이시고 우리를 쓰시고 우리를 인도해주시고,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분,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질문을 안 드린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한 번 질문을 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오늘 드린 말씀을 잘 들으셨는지 아닌지 알 수 있는 질문입니다. 앞서 제가 이 역접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그 이유가 뭐라고 말씀 드렸는지 혹시 기억하십니까? 왜 접속사 중에서 ‘그러나’ 같은 역접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씀 드렸는지 기억하시나요?

예, 그 이유는 이 역접 다음에 ‘필자의 생각’, ‘필자의 의도’가 등장하기 때문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성경의 필자는 누구입니까. 물론 직접적으로 성경을 기록한 것은 사람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세나 다윗, 솔로몬 바울 등 수 십 명에 달하는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만, 이는 그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지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第二テモテへの手紙 3章16節

聖書はすべて神の霊感によるもので、教えと戒めと矯正と義の訓練のために有益です。

그러니까 성경의 필자는 하나님 자신이라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말씀 중에서 필자의 생각, 하나님의 생각이 어디에 나오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 ‘그러나’ 다음입니다. 마지막으로 필자의 생각, 성경의 필자이신 하나님께서 가장 말씀하고 싶은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29절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しかし神は、知恵ある者を恥じ入らせるために、この世の愚かな者を選び、強い者を恥じ入らせるために、この世の弱い者を選ばれました。
有るものを無いものとするために、この世の取るに足りない者や見下されている者、すなわち無に等しい者を神は選ばれたのです。
肉なる者がだれも神の御前で誇ることが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할렐루야! 그리고 또 로마서 8장 28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나쁜 조건들, 안 좋은 상황들, 불리한 환경들을 단번에 좋은 조건들, 좋은 상황들, 놀라운 환경으로 바꾸어주시는 ‘그러나’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 진정으로 주님으로부터 충성된 일꾼으로 쓰임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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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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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2회 날아오르는 삶
2019년 8월 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전도서 1장 2절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伝道者の書 1章 2節
"空の空。伝道者は言う。空の空。すべては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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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날아오르는 삶” はばたく人生라고 하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보면 어떻습니까. 어떤 말씀은 참 우리에게 위로가 되기도 하고, 힘이 되기도 하고,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28장을 볼까요?

마태복음 28장 20절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命じておいた、すべてのことを守るように教えなさい。見よ。わたしは世の終わりまで、いつもあなたがたとともにいます。」

우리가 외로울 때라도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해주신다는 주님의 마음을 생각을 하면 외롭거나 불안하거나 할 때라도 마음이 든든해집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전도서 1장 2절 말씀이지요?

전도서 1장 2절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空の空。伝道者は言う。空の空。すべては空。

오늘 말씀, 참 유명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물론이지만, 성경을 잘 알지 못하는 분들도,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본 일이 있을 법한 말씀이지요. 그렇다면, 이 말씀. 읽고 힘이 나시나요? ㅎㅎ


잠언과 아가 그리고 오늘 살펴볼 전도서는 대부분을 솔로몬이 썼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 전도서는 솔로몬 왕이 노년 때 쓰여진 책이라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전도서를 보면, 힘이 팍팍 난다기 보다는 힘이 좀 빠지게 되는 구절들이 눈에 띄는 것 같습니다.

힘이 빠지는 구절은 여기만이 아니지요. 인생은 바람을 잡는 것 같다는 말씀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전도서 1장 14절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私は、日の下で行われるすべてのわざを見たが、見よ、すべては空しく、風を追うようなものだ。


전도서 2장 11절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しかし、私は自分が手がけたあらゆる事業と、そのために骨折った労苦を振り返った。見よ。すべては空しく、風を追うようなものだ。日の下には何一つ益 になるものはない。

전도서 2장 17절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미워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에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로다”

私は生きていることを憎んだ。日の下で行われるわざは、私にとってはわざわいだからだ。確かに、すべては空しく、風を追うようなものだ。


이 외에도 2장 26절, 4장 4절, 4장 16절, 6장 9절 등등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 같다는 말씀입니다. 참 힘이 팍팍 나는 게 아니라, 추욱 하고 빠집니다.

그래도 끈기 있게 꾹 참고 계속 읽어나가면 전도서 마지막 장인 12장에 다음 구절이 나옵니다.

전도서 12장 8절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空の空。伝道者は言う。すべては空。

아, 정말 참 이처럼 기운이 나지 않는 책도 드물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도서만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90편에 보면 모세의 시가 나옵니다.


시편 90편 10절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私たちの齢は七十年。 健やかであっても八十年。 そのほとんどは 労苦とわざわいです。 瞬く間に時は過ぎ 私たちは飛び去ります。

신약성경 야고보서를 볼까요?

야고보서 4장 14절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あなたがたには、明日のことは分かりません。あなたがたのいのちとは、どのようなものでしょうか。あなたがたは、しばらくの間現 れて、それで消えてしまう霧です。


자, 이런 말씀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그래. 고통도 많고 탈도 많은 이 짧은 인생, 빨리 끝내고 어서어서 천국에 갔으며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드시나요?

그렇다면 우리 잠깐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지금 이 주어진 삶, 이 삶은 정말로 그렇게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그저 잠깐 왔다가 가는 덧없는 인생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인생. 누가 주신 것입니까. 우리가 지금 호흡을 하고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을 누가 허락하신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그리고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살아가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이는 다른 말로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작품에 대해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전도서는 우리의 삶을 부정하는 책, 빨리 죽고 천국이나 가자고 하는, 그런 책이 아닙니다.

전도서 9장 4절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しかし、人には拠り所がある。生ける者すべてのうちに数えられている者には。生きている犬は死んだ獅子にまさるのだ。

라고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또한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순간 이 땅에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괴로워해야 하거나 힘들어해야 할 일이 아니라 기쁘고 감사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별로 기쁘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그렇다면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이 땅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또한 죽어갔습니다. 그 중에는 돈이 많은 사람들도 있었고,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죽기 싫어했겠지요. 얼마나 하루하루를 더 살고 싶었겠습니까. 자신이 가진 많은 돈과 권력을 쓸 수 있다면 써서라도 하루 1분 1초를 더 살아보려고 애 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오늘 2019년 8월 4일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아이고, 뭐 돈이 많고 권력이 많고 팔자 좋은 사람이야 오래 살고 싶겠지만, 가진 것도 없고 힘도 없는 우리한테는 그냥 하루하루가 괴롭고 고생이야……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떤 분은 또 그러실 지도 모르겠지요. 그렇다면 이 질문은 어떠십니까. 우리 삶이 정말로 힘들고 괴롭고 고통일 뿐이라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 땅에 오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냥 이 땅에 오셨나요? 이 땅에 오셔서 온갖 수치와 모욕을 다 받으시고, 그것도 모자라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물론 이는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가 생을 마친 후에 하나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우리 죄가 해결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죽고 난 다음만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여에 걸친 공생애 기간을 통해서, 우리가 죽은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한다……가 아닌,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잠시 화제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오늘의 질문을 한 번 드려볼까요? 어떤 시합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가지 경우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느 쪽이 좋습니까.

첫째, 우리가 2대 1로 진 시합.
둘째, 우리가 10대 0으로 지고 있는 시합.

이 두 경우, 물론 둘 다 좋다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 중에서 여러분께서는 어느 쪽이 좋다고 생각되십니까.

첫째의 경우, 비록 2대 1, 점수는 1점 차이밖에 나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이미 시합은 끝났습니다. 우리가 진 것으로 시합이 끝나고 말았어요.

하지만 둘째 경우는 어떻습니까. 점수가 10대 0이에요. 아주 점수 차이가 많이 나버렸습니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큰 점수 차로 지고 있긴 하지만, 아직 시합이 진행 중이에요. 아직 시합이 끝나지 않았다고 한다면, 무엇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길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포기하기에는 아직 일렀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모세의 경우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400여년의 애굽생활을 마치고 성인 남성만 60만 명, 남녀노소를 모두 합치면 아마도 200만명 정도는 되었다고 여겨지는 수많은 사람들, 우리 군마현 전체 인구가 200만명 정도인데, 그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애굽을 탈출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홍해 앞에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큰일 났어요. 길이 막혔습니다. 더 이상 갈 길이 없어요.

그래요. 시간이 있다면 힘을 합쳐서 배를 만들어서 건너든, 아니면 다른 길로 돌아가든 방법은 여러 가지 있었겠지요. 그러나 당시는 이제 시간이 없었습니다.

출애굽기 14장 6절~7절
6.바로가 곧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갈새
7.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そこでファラオは戦車を整え、自分でその軍勢を率い、
選り抜きの戦車六百、そしてエジプトの全戦車を、それぞれに補佐官をつけて率いて行った。

애굽 왕 바로가 애굽 군대, 그것도 특별히 선발한 마차부대와 모든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 민족을 죽이기 위해 추격해오고 있습니다. 당시 최강 선진국이었던 애굽의 군대와, 몇 백 년 동안 종살이를 해온 이들을 비교한다면, 그 숫자는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이스라엘 민족이 200만이 아니라 2000만이라 하더라도 한쪽은 첨단무기로 무장한 군대이고, 다른 한쪽은 완전히 무장해제된 사람들, 전쟁도 모르고 훈련도 안 된 사람들입니다.

이는 앞서 본 시합으로 생각해본다면 이는 점수차이가 10대 0이 아니라 100대 0, 아니, 1000대 0으로 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애굽 군대가 추격해올 때까지의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도 않았습니다.

이길 확률이요? 1%나 되겠습니까? 이는 누가 보더라도 0%입니다. 생각해볼 필요도 없습니다. 상대 자체가 안 되는 것이지요.

이 때 모세의 심정을 생각해보면 참 아찔합니다.


우리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내가 미국이나 유럽에 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기도를 할까 고민을 했습니다. 마침 성경을 찾아보니까, 아주 좋은 구절이 있었어요.

시편 55편 6절~7절
6.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7.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私は言いました。 「ああ 私に鳩のように翼があったなら。 飛び去って 休むことができたなら。
ああ どこか遠くへ逃れ去り 荒野の中に宿りたい。

아~ 정말 멋진 기도문이 아니에요? 그래서 기도를 했습니다. 내가 미국이나 유럽에 가고 싶습니다.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제가 원하는 곳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 저에게 날개를 주십시오.

그런데 주님이 응답해주셨습니다. 날개를 주신 것이 아니라 쇳덩어리를 주셨어요.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크고 무거운 쇳덩어리를 주셨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렇다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쇳덩어리로 미국에 갈 수 있겠습니까. 유럽에 갈 수 있겠습니까. 하늘을 날 수 있게 날개를 달라고 했더니 그런 크고 무거운 쇳덩어리를 주셨다면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쇳덩어리로 하늘을 날 수 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쇳덩어리는 무슨, 지갑에 들어있는 요만한 동전 하나도 하늘로 던지는 순간 떨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어떻게 쇳덩어리로 하늘을 날 수 있겠습니까.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쇳덩어리가 하늘을 날 수 없는 이유. 많이 배운 사람과 적게 배운 사람, 누가 더 많이 이유를 들 수 있겠습니까. 예, 많이 배운 사람이 훨씬 더 많은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한 대학 공대 교수님을 남편으로 둔 부인이 남편을 전도하려고 하는데, 공대 교수님 정도 되니까 아는 게 얼마나 많으셨겠어요.

성경에서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었다는 예수님의 기적을 전해주니까 남편이 이러시더래요.

“여보. 물이 포도주로 바뀐다구요? 아니, 어떻게 H2O가 C6H12O6가 됩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로 5000명을 먹이셨다는 말씀을 했더니, 그 남편 분이 하시는 말씀이, 그것은 물질의 질적인 변화가 아니라 양적 팽창이 일어났다는 것이니, 이는 질량보존의 법칙에 어긋나기 때문에 이것도 역시 불가능하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랬던 이 남편 분이 누구냐 하면 훗날에 한국 포항에 있는 미션스쿨인 한동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낸 김영길 총장님에 대한 이야기라고 합니다.

앞서 모세 이야기로 돌아가보겠습니다. 모세는 그럼 얼마나 배운 사람이었습니까. 출애굽기에 의하면 그는 유대인 레위 지파 부부에서 태어났지만 당시 애굽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학대를 받고 있었는데, 특히 그 때는 유대인이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졌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2장에 보면 모세의 부모는 낳은 아들을 하는 수 없이 작은 상자에 실어서 나일 강에 담아 띄워 보내게 되는데, 그 아이가 애굽 공주에게 발견됩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갓난아기 때부터 나이 마흔 때까지 당시 최고의 선진국인 애굽 왕궁에서 자라면서 최고의 학문을 배웠을 것입니다.

모세에게 있어서 홍해가 갈라지지 않을 이유를 대라고 한다면, 수십 가지, 수백 가지는 더 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 그는 손에 뭘 잡고 있었어요? 예, 지팡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합니다. 홍해 바다 모래사장 위에 글씨를 쓰기 시작합니다. 당시 성인 남성 60만명, 여자와 어린 아이까지 다 합치면 200만 명 정도 되고, 지금 추격해오는 애굽 군대를 향해서 총공격을 한다고 했을 때, 예상 희생자 수와 이길 확률을 막 계산을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모세야…… 모세야……”

그랬더니 “아잇, 지금 바쁘니까 잠깐 좀 계세요.”

그러면서 이제 또 계산을 합니다. 아니면 지금 약 200만명이 빠께쓰……아니, 지금 한일관계를 생각하면 빠께쓰라고 하면 안 되죠. 양동이를 들고 홍해 바닷물을 퍼냈을 때 걸리는 시간을 막 정신 없이 계산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또 부르십니다. “모세야…… 모세야……”

그러니까 또 모세는 신경질을 냅니다.

“아잇, 지금 정신 없는데 왜 자꾸 말을 걸어요. 가만히 좀 계시라니까요.”

만약에 모세가 이랬다면, 여러분, 이게 뭐라구요? 예, 이것이야말로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すべては空しく、風を追うようなものだ)”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헛된 인생, 바람을 잡으려는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헛된 인생을 살지 않았습니다. 바람을 잡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명령합니다.

출애굽기 14장 14절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主があなたがたのために戦われるのだ。あなたがたは、ただ黙っていなさい。」

이것이야말로 믿음의 사람 모세의 놀라운 신앙고백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출애굽기 14장 15절~16절
“1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16.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主はモーセに言われた。「なぜ、あなたはわたしに向かって叫ぶのか。イスラエルの子らに、前進するように言え。
あなたは、あなたの杖を上げ、あなたの手を海の上に伸ばし、海を分けなさい。そうすれば、イスラエルの子らは海の真ん中の乾いた地面を行くことができる。

이렇게 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100대 0, 1000대 0으로 지고 있었던, 아니, 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그들의 상황은 완전히 역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자손들은 어린 아이 하나 다치지 않았고, 애굽 군대들은 모두가 홍해 바다 속으로 잠겨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승리하는 삶,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사는 사람의 모습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어떤 스포츠 경기가 있다고 칩시다. 저는 그 스포츠에 대해서 전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께서는 야구는 잘 아시죠? 그런데 비슷한 것으로 크리켓이라고 하는 스포츠가 있어요. 사실 저도 잘 모릅니다만, 갑자기 우리가 그 스포츠를 해서 이겨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어요.

그러면 여러분께서는 처음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으십니까. 아, 야구랑 비슷하다고 하니까, 공을 잘 던지는 훈련을 해야겠구나. 아니면 공을 방망이로 잘 맞추는 연습을 해야 되겠구나……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그게 틀렸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우선순위가 바뀌었습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운동경기의 규칙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무조건 공만 잘 던져요? 무조건 방망이만 잘 휘둘러요? 이기려고 하면 점수를 따야 하는데 점수를 따는 방법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그 운동경기의 규칙을 알아야 합니다. 규칙을 알지 못하면 아무리 공을 멀리 던져도, 아무리 방망이를 잘 휘둘러도 절대로 점수를 딸 수 없고, 점수를 딸 수 없다면 절대로 이길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건 그야말로 헛되어 바람을 잡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すべては空しく、風を追うようなものだ

우리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이기려면 점수를 따야 하고, 점수를 따려면 규칙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규칙은 어디에 나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에 나와 있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는 뭐라고 나와 있습니까.


레위기 19장 18절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あなたは復讐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民の人々に恨みを抱い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わたしは主である。

여호수아 1장 9절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わたしはあなたに命じたではないか。強くあれ。雄 々しくあれ。恐れてはならない。おののいてはならない。あなたが行くところどこででも、あなたの神、主があなたとともにおられるのだから。」


시편 115편 9절~11절
“9.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10.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11.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イスラエルよ 主に信頼せよ。 主こそ助け また盾。
アロンの家よ 主に信頼せよ。 主こそ助け また盾。
主を恐れる者たちよ 主に信頼せよ。 主こそ助け また盾。

잠언 9장 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主を恐れることは知恵の初め、聖なる方を知ることは悟ることである。

신약성경도 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18절
“16.항상 기뻐하라
17.쉬지 말고 기도하라
18.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いつも喜んでいなさい。
絶えず祈りなさい。
すべてのことにおいて感謝しなさい。これが、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あなたがたに望んでおられることです。


요한복음 13장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新しい戒めを与えます。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

성경에는 온통 규칙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위한 규칙입니까. 우리의 자유를 속박하는 규칙입니까?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기 위한 규칙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승리하기 위한 규칙,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지금 이기고 있는 것 같지가 않습니까. 믿음 안에서 지고 있는 것 같습니까. 실패한 인생을 살아온 것 같습니까. 헛되고 공허하고 바람을 잡는 것만 같은 인생을 보내고 있는 것 같으십니까.

괜찮습니다. 게임은 아직 안 끝났습니다.

날개를 달라고 했는데 쇳덩이를 주셨다고 원망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할 때 그 쇳덩이는 거대한 비행기로 변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을 찬양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규칙,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비결인 성경 말씀대로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을 찬양하며 살아갈 때에, 우리는 그 비행기 일등석에 앉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조종석에 누가 앉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께서 앉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엔진을 거십니다. 그리고 힘차게 활주로를 달리고는 저 하늘 높이 날아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을 믿고 의지할 때 물이 포도주가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을 믿고 의지할 때 홍해가 갈라지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을 믿고 의지할 때 힘차게 활주로를 달려서 저 하늘 높이 날아 오르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103편 3절~5절
3.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4.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5.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主は あなたのすべての咎を赦し あなたのすべての病を癒やし
あなたのいのちを穴から贖われる。 主は あなたに恵みとあわれみの冠をかぶらせ
あなたの一生を 良いもので満ち足らせる。 あなたの若さは 鷲(わし)のように新しくなる。

베드로전서 5장 6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神の力強い御手の下にへりくだりなさい。神は、ちょうど良い時に、あなたがたを高く上げてくださいます。

이제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남은 귀한 우리의 인생 속에서, 주님을 믿고 의지할 때에, 주님께서 주신 이 성경 말씀대로 살아갈 때에, 더 이상 헛되고 바람을 잡는 삶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놀라운 기쁨과 축복으로 가득 찬 삶,
넘치는 은혜로 가득 찬 삶,
이기고 또 이기는 승리하는 삶,
독수리처럼 저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삶,
하나님께서 높이 들어올리시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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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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