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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1회 억지로의 축복
2018년 8월 1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21절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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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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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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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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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억지로의 축복” 無理やりの祝福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당시 대제사장과 그 일당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기 위하여 총독 빌라도 앞에까지 끌고 갑니다. 이미 여러 차례 채찍질을 당한 예수님은 온몸이 피범벅입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침을 뱉으며 모욕을 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온몸이 피에 젖고 기진맥진한 상태였습니다. 그 골고다로 향하는 길은 좁은 오르막길인데 구전에 의하면 너무나 힘이 들어서 몇 번이고 넘어지셨다고 합니다.

당시 이를 지휘하고 있었던 로마군인들이 보니까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시간은 지금 지체하는데 예수님을 보니까 도저히 제대로 못 걸을 것 같아요. 그런데 마침 옆에 누가 서 있길래, 야, 너, 빨리 일루 와서 이 십자가를 대신 져. 그랬을 것입니다. 거기 서 있던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오늘의 주인공 구레네 사람 시몬. 이른바 구레네 시몬이라 불리는 사람입니다.

이 십자가라고 하는 것.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구주의 십자가, 이러면서 대단히 은혜로운 것처럼 여겨지실지는 모르지만, 사실 이 십자가 자체만을 본다면 이는 쉽게 말해서 사형틀입니다. 무슨 단두대 같은 거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생각만해도 얼마나 흉물스럽습니까. 그런 건 손으로 만지는 건 고사하고 근처에도 가기가 꺼려지는 물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건 무게가 무겁고 가볍고 한 문제만이 아닙니다. 만약에 누가 나더러, 이제 저기 있는 저 사람을 목매달아서 사형을 시키려고 하는데 그 끄나풀을 들고 가라고 해보세요. 그게 아무리 가볍다고 해도 기분이 좋겠습니까.

십자가도 똑같이 그런 사형기구입니다. 신명기 21장 23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신명기 21장 23절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その死体を次の日まで木に残しておいてはならない。その日のうちに必ず埋葬しなければならない。木にかけられた者は神にのろわれた者だからである。あなたの神、主が 相続地としてあなたに与えようとしておられる土地を汚してはならない。

즉, 나무에 달린 자, 사형을 당한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징표인 것이지요. 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더구나 지금 이 십자가는 나무로 되어 있고, 그리고 사람을 못 박아서 높은 곳에 매달아야 하기 때문에 그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무거웠을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만약 사람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도구라면 쓰기 편하고 만지기도 좋게 매끌매끌하게 만들어놓기도 했겠지만, 십자가라고 하는 사형도구, 이제 그 형틀에 매달리는 사람은 다시는 살아서 내려오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매끌매끌하게 만들어놓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통나무를 잘라서 만들었을 테니, 그 겉표면은 얼마나 까칠까칠했을까요.

그것도 모자라서 거기까지 온몸이 피에 젖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오셨기 때문에 십자가 여기저기에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을 것입니다.

누구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 십자가는 다른 식으로 운반되고 예수님은 그냥 걸어가기만 했다……이런 말씀을 혹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어떤 분들은 어? 정말 그런가? 신기하네? 왜 다른 사람들은 나한테 그런 말을 안 해줬지? 라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사실 언뜻 생각하면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면 어떠십니까. 자칫 잘못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말씀 드립니다.

마태복음 27장 31절을 봅니다.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こうしてイエスをからかってから、マントを脱がせて元の衣を着せ、十字架につけるために連れ出した。

다음은 마가복음 15장 20절입니다.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彼らはイエスをからかってから、紫の衣を脱がせて、元の衣を着せた。それから、イエスを十字架につけるために連れ出した。

그리고 누가복음 23장을 보면 예수님을 끌고 갔다는 기록은 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 그럼 어쩌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지 않았을 수도 있네? 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요한복음을 봅니다. 요한복음 19장 17절입니다.

요한복음 19장 17절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イエスは自分で十字架を負って、「どくろの場所」と呼ばれるところに出て行かれた。そこは、ヘブル語ではゴルゴタと呼ばれている。


분명히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그 거칠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셨던 것입니다. 금식도 좋고 기도도 좋고 봉사도 좋습니다만, 우선 성경말씀부터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이 우리 안에 있어야 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이는 보통 사람이라면 근처에도 가기 싫었을 정도였겠지요.

그런데 갑자기 길 옆에 서 있는 사람한테 그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에요. 그 십자가, 무거운 사형틀, 조금 지고 가기만 해도 까칠까칠한 나무 때문에 온몸의 여기저기가 긁힐 것만 같은 십자가, 여기저기에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십자가를 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정말 믿음이 좋은 여러분 같았더라면 물론 할렐루야! 하고 십자가를 지셨을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몇 년을 함께 했던 제자들은 자기 목숨 하나 살려보려고 모두 달아났습니다.

이른바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도, 너,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았냐고 누군가가 물었을 때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어디 그냥 모른다고 했나요?

마가복음 14장 71절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するとペテロは、噓ならのろわれてもよいと誓い始め、「私は、あなたがたが話しているその人を知らない」と言った。

베드로조차도 너무나 두려워서, 정말 저주하고 맹세까지 해가면서 예수님을 부인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까지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한테 그런 십자가를 매고 가라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마가복음 15장 21절 후반부를 보면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イエスの十字架を無理やり背負わせた。)”라고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억지로 지게 했다”는 표현이 마가복음에만 있다면, 이 장면을 묘사한 마가의 주관적이고 독단적인 기록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사실 이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간 게 아닌데, 그냥 마가가 보기에 억지로 가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을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27장 32절입니다.

마태복음 27장 32절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兵士たちが出て行くと、シモンという名のクレネ人に出会った。彼らはこの人に、イエスの十字架を無理やり背負わせた。

예수님의 열두 사도 중 한 사람인 마태는 그의 전직이 세리였습니다. 세리라고 해서 단순히 요즘 세무 공무원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공인된 고리대금업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던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서 자신들과 동족인 이스라엘 민족들의 피를 빨아먹고 있었던, 대단히 미움을 받는 사람들이 바로 세리였는데, 마태도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마태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사도가 된 것이지요. 이 마태복음을 보면 아무래도 돈을 다루던 직업에 오랫동안 종사해서 그런지 다른 복음서에 비해 묘사가 대단히 꼼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태도 분명히 <억지로 지워가게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레네 시몬에 대한 기록은 사복음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 중에서 요한복음을 제외한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등장하는데, 이미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억지로 지었다>는 표현이 명확하게 등장합니다.

자, 그렇다면 누가복음에는 어떨까요. 누가라는 사람은 열 두 사도에 들지는 못했지만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바울과 선교여행도 함께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의 전직은 의사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역시 그도 지금 식으로 하자면 이과적인 관찰력으로 세심하게 묘사했을 것입니다.

그런 전직 의사였던 누가가 이 장면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3장 26절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彼らはイエスを引いて行く途中、田舎から出て来たシモンというクレネ人を捕まえ、この人に十字架を負わせてイエスの後(うしろ)から運ばせた。

누가는 그들이 구레네 시몬을 “붙들어서 그에게 십자가를” 지웠다고 (捕まえ、この人に十字架を負わせて) 기록합니다. 붙들어서 하게 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싫다고 강하게 거부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벗어나려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상대는 로마 군인입니다. 군인이 구레네 시몬을 붙잡아서 강제로 십자가를 지우게 했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지게 된 일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모두 기록될 정도로 대단히 인상 깊은 사건이었다. 그리고 둘째는, 이는 틀림없이 구레네 시몬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강제로 억지로 십자가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된 구레네 시몬. 하지만 이로 인해서 그의 자손들이 축복을 받았다는 말씀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근거가 있는 것인지, 또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오늘 한 번 여러분과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마가복음 15장 21절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兵士たちは、通りかかったクレネ人シモンという人に、イエスの十字架を無理やり背負わせた。彼はアレクサンドロとルフォスの父で、田舎から来ていた。

여기에 등장하는 <루포>에 대해서 작은 글씨로 적혀 있는 성경 주석에 보면 로마서 16장 13절……이렇게 적혀있고, 그 다음에 괄호를 해서 이렇게 물음표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 구절 간에 연관성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겠지요.

자, 그럼 로마서 16장 13절을 찾아봐야겠지요? 이 부분은 바울이 로마에 보내는 편지를 맺으면서 안부인사를 적은 장면입니다만, 그 과정에서 로마서 16장 13절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13절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主にあって選ばれた人ルフォスによろしく。また彼と私の母によろしく。

(口語訳)主にあって選ばれたルポスと、彼の母とに、よろしく。彼の母は、 わたしの母でもある。
(新共同訳)主に結ばれている選ばれた者ルフォス,およびその母によろしく.彼女はわたしにとっても母なのです.


성경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만, <루포>라는 이름은 신구약을 통틀어서 마가복음 15장 21절과 로마서 16장 13절 단 두 군데만 등장합니다.

로마서를 보면 바울이 루포를 가리켜서, 그는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었다(主にあって選ばれた人ルフォス)는 말까지 하고,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곧 자신의 어머니나 마찬가지라고 할 정도라고 하면서 안부를 전해달라고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 글만을 보더라도 루포만이 아니라 그의 가정과 사도 바울은 대단히 돈독한 사이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 뿐만이 아니라 이렇게 로마서에 적어서 보낼 정도였다면, 이를 받은 쪽에서도 루포가 누구이고 그의 어머니는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모두가 이미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라고 하는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구절이 바로 오늘 말씀 마가복음 15장 21절입니다.

보통 성경에 보면 누군가를 소개할 때 어떻게 하는지 혹시 기억 하십니까?

예레미야 1장 1절을 봅니다.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ベニヤミンの地、アナトテにいた祭司の一人、ヒルキヤの子エレミヤのことば。

요엘1장 1절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ペトエルの子ヨエルにあった主のことば。

이사야 1: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アモツの子イザヤの幻。これは彼がユダとエルサレムについて、ユダの王ウジヤ、ヨタム、アハズ、ヒゼキヤの時代に見たものである。


이처럼 아버지 누구누구의 아들 누구누구……라고 소개를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구레네 사람 시몬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가 아니라, 아들이 먼저 와 있어요.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록이 되는 일은 단 한 가지 경우입니다. 그것은 바로, 아들이 아버지보다 유명한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에서 아들 이름을 먼저 언급했다는 것은, 마가에 의해 이 복음서가 기록될 무렵, 그들에게 알렉산더와 루포라는 이름은, 적어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의 아버지 <시몬>보다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이름이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이런 식이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이름은 시몬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 뭐 이런 식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흥미로운 점은, 신학자들에 의하면 마가복음의 수신인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 지역의 기독교인을 위해 적혔다고 하는데, 이 점에 있어서는 로마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즉, 마가복음과 로마서 모두가 이미 수신인들이 <루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기록되었다는 점, 그리고 마가복음과 로마서 모두가 이방 지역의 기독교인을 위해서 기록되었다는 공통점으로 미루어볼 때, 믿음의 형제들 중에 유명인사인 루포, 사도 바울이 그를 가리켜서 주의 택하심을 입었다고 말하고, 그의 어머니는 내 어머니나 마찬가지로까지 할 만큼 친근감을 표시한 가정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구레네 시몬의 가정이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기에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アレクサンドロとルフォスの父)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졌습니다. 이는 결코 그가 원해서 지었던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기록된 것처럼, 지기 싫은데도 억지로 지었습니다. 누가복음의 기록대로라면 도망치고 싶었을지도 모르나 붙잡히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지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에는 저주스럽고 무겁고 지저분한 나무통나무, 끔찍한 사형도구이지만, 그것은 영적으로 본다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지시는 십자가, 그 십자가에 묻은 피는 우리를 죄에서 씻기시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보혈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억지로 하는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누구는 생로병사. 태어나고, 늙고 병 들고 죽는 것을 모두 고통이라고 합니다.

이 네 가지를 본다면 사실 모두가 억지로입니다. 내가 좋아서, 기쁜 마음으로 늙는 사람, 기쁜 마음으로 병에 걸리는 사람, 기쁜 마음으로 죽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는 다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늙고,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병에 걸리고,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죽어가는 것입니다.

태어나는 것은 어떻습니까. 어디 한 번 이 세상에 태어나볼까? 해서 태어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는 모두가 다 강제로, 억지로 태어나서 억지로 늙고 억지로 병들고 억지로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고통인가요? 적어도 주님을 믿는 우리는 이를 고통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그럼 무엇으로 받아들여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감사입니다.

내가 태어난 것도 감사, 내가 늙는 것도 감사, 내가 병에 걸리는 것도 감사, 내가 죽는 것도 감사입니다.

이 세상에 생명을 주시고 주님께서 함께 해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리고 늙는 것이 고통이에요? 늙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살아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나이 마흔, 쉰이 아니라 열 살, 스무 살도 못 넘기고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죽으면 더 이상 나이를 먹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살아서 나이 50, 60, 70을 넘길 수 있다는 것은 이는 엄청난 축복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우리가 질병을 앓는 것도 믿음 안에서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왜 감사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치료해주실 것이기 때문에 감사한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음도 감사할 수 있을까요?

로마서 14장 8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私たちは、生きるとすれば主のために生き、死ぬとすれば主のために死にます。ですから、生きるにしても、死ぬにしても、私たちは主のものです。

빌립보서 1장 20절~21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私の願いは、どんな場合にも恥じることなく、今もいつものように大胆に語り、生きるにしても死ぬにしても、私の身によってキリストがあがめられることです。
私にとって生きることはキリスト、死ぬことは益です。

빌립보서 3장 13절~14절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兄弟たち。私は、自分がすでに捕らえたなどと考えてはいません。ただ一つのこと、すなわち、うしろのものを忘れ、前のものに向かって身を伸ばし、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우리가 믿음의 푯대를 향해서 달려가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다면 이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기쁨으로 충만한 삶이 되겠습니까. 태어나고 나이 들고, 병에 걸리고 죽는 것이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닌 억지로 되는 것이지만, 이는 믿음 안에서 이 모두가 감사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억지로 하신 것이 없으셨습니까. 아니요.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 기도 드리시기를

마태복음 26장 39절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それからイエスは少し進んで行って、ひれ伏して祈られた。「わが父よ、できることなら、この杯をわたしから過ぎ去らせてください。しかし、わたしが望むようにではなく、あなたが望まれるままに、なさってください。」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시게 됩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예수님의 십자가 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확실하게 증거해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십대들은 종종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싶어요”

그러나 이 말을 듣는 어른들은 어떻습니까. 어쩌면 누구는 철없는 소리 한다면서 웃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그렇죠.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 보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기 보다는,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처음에는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노력이나 희생이 안 따르나요? 아닙니다. 항상 즐겁기만 한 일은 없습니다. 부단한 노력과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어쩌면 우리 삶의 대부분이 억지로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인지도 모릅니다.

누구는 십자가에 대해서 무슨 고통이나 고난이라고 오해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누구는 그래요. 아~ 자기한테는 자기 자식들이 십자가래요. 너무나 속을 썩이는데 정말로 속이 상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고통이나 고난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속을 썩이는 게 십자가가 아닙니다. 고통과 고난의 십자가는 이미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우리를 위해 지셨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십자기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삶 속에서 내가 억지로 해야 할 일들이 있어요. 아무리 기도를 해도 믿음 안에서 생각을 해도 피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정말 하기 싫어요. 바로 그 때 구레네 시몬을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이를 감사함으로 감당함으로 인해서 주님께 영광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은 또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어요. 내가 축복 받지 않고 내 자식들만 축복 받으면 뭘 해. 혹시 그런 생각 안 해보셨나요? ㅎㅎ 저는 해봤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아버지가 축복 받지 못했는데 어떻게 자식들이 믿음을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짐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시몬은 넘치는 축복을 받았을 것이요, 이를 본 아들들 알렉산더와 루포가 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억지로 감당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까? 감사합시다.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주님께서 힘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그 일을 감사함으로 감당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주님께 큰 영광을 돌리고 주님으로부터 넘치는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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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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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0회 언제나 감사할 수 있는 이유
2018년 8월 1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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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9절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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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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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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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언제나 감사할 수 있는 이유” いつも感謝できる理由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다는 것을 믿으시나요? 예, 아멘. 믿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남들이 기도를 하면 응답을 받는다고 하기 때문이요?

항상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어디서 찾아야 하냐 하면 바로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기도 응답을 받은 사람들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이사야 38장 1절을 봅니다.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そのころ、ヒゼキヤは病気になって死にかかっていた。そこへ、アモツの子、預言者イザヤが来 て、彼に言った。「主はこう仰せられます。『あなたの家を整理せよ。あなたは死ぬ。直らない。』」

히스기야 왕이 이제 죽을 병에 걸렸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제 너는 죽고 살지 못한다고 하는 사형판결을 내리십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듣고 히스기야 왕은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히스기야 왕이 기도하는 유명한 장면이 이사야 38장 2절~3절에 나옵니다.

이사야 38장 2절~3절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니”

そこでヒゼキヤは顔を壁に向けて、主に祈って、言った。「ああ、主よ。どうか思い出してください。私が、まことを尽くし、全き心をもって、あなたの御前に歩み、あなたがよいと見られることを行ってきたことを。」こうして、ヒゼキヤは大声で泣いた。

히스기야 왕이 간절하게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요.

이사야 38장 5절~6절입니다.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行って、ヒゼキヤに告げよ。あなたの父ダビデの神、主は、こう仰せられます。『わたしはあなたの祈りを聞いた。あなたの涙 も見た。見よ。わたしはあなたの寿命にもう十五年を加えよう。
わたしはアッシリヤの王の手から、あなたとこの町を救い出し、この町を守る。』

히스기야 왕의 운명은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간구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수명을 15년이나 늘려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신약에도 예수님을 만난 후에 기도 응답을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병 고침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마가복음 5장과 누가복음 8장에서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마가복음 7장에는 귀가 안 들리고 말을 못하는 사람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는 38년 된 병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또한 마가복음 5장 41절에서는 숨을 거둔 회당장(会堂管理者)의 딸이 살아났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는 이미 죽은 지 4일이나 되어서 냄새가 나는 나사로(ラザロ)를 무덤에서 일으키셨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4장 14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何かをわたしに求めるなら、わたしはそれをしましょう。

요한복음 16장 24절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あなたがたは今まで、何もわたしの名によって求めたことはありません。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受けるのです。それはあなたがたの喜 びが満ち満ちたものとなるためです。

예수님께서는 이제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구해야 하는 것이지요. 혹시 이렇게 구하라고 하면 좀 죄송해서 못 구하시는 경우가 있으신가요?

아니요, 죄송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구하라고 말씀하고 계신데 안 구한다는 것은 이는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해야 합니다.

죠지 뮬러라는 사람은 자신의 기도 제목을 노트에 적고, 기도 응답을 받을 때마다 체크를 했다고 하는데, 그는 평생 동안 5만 번이나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기도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기도를 하면 응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십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입니다. 기도의 능력을 믿고 주님께 간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자, 이렇게 말씀을 끝낼 수도 있습니다만, 사실 오늘 본론은 여기서부터입니다.

특히 우리나라를 보면 기도를 강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과거 기독교에서는 성령님의 역사와 기도를 대단히 강조해왔습니다. 기도를 하면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응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를 하면 병도 낫고, 기도를 하면 부자도 되고, 기도를 하면 모든 것이 만사 형통이라는 식으로 암암리에 교육을 받아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기도는 중요하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을 도외시하고 그저 기도만 한다고 해서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만 열심히 하면 기도 응답 받고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다고 한다면, 이렇게 두꺼운 성경이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단이 기승을 부리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해서 열정은 많아요. 기도도 많이 해요. 헌금도 많이 해요. 전도도 많이 해요. 그런데 뭐가 없어요? 예, 하나님 말씀이 없어요. 성경을 모릅니다. 그저 주일 설교 말씀 듣고, 가끔 빨강색이나 노랑색 형광 펜으로 줄을 긋고, 그게 다예요.

이런 사람들을 이단들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성경에도 보면 사탄이 예수님을 무엇으로 유혹을 합니까.

마태복음 4장 5절~6절을 봅니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すると、悪魔はイエスを聖なる都に連れて行き、神殿の頂に立 たせて、言った。「あなたが神の子なら、下に身を投げてみなさい。『神は御使いたちに命じて、その手にあなたをささえさせ、あなたの足が石に打ち当たることのないようにされる』と書いてありますから。」

이 마귀가 인용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시편 91편 11절~12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시편 91편 11절~12절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まことに主は、あなたのために、御使いたちに命じて、すべての道で、あなたを守るようにされる。彼らは、その手で、あなたをささえ、あなたの足が石に打ち当たる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

이걸 누가 인용을 했어요? 예, 마귀가 인용을 했습니다. 지금 사탄은 예수님을 거룩한 성의 성전 꼭대기에 세우셨다고 하는데, 이는 아마도 예루살렘 성전이 아닐까 하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만, 그 곳이 예루살렘 성전이든 아니든 간에 분명 대단히 높은 곳이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마귀 사탄이 유혹한 대상이 성경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어? 그래? 성경에 그렇게 적혀 있어? 그럼 어디 한 번 뛰어내려볼까? 그렇게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이단입니다. 거기서 뛰어내려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죠. 잘해야 심한 부상이요, 대부분 사망입니다. 하나님 말씀이라도 왜곡해서 잘못 전달하게 되면 이처럼 엄청난 비극이 벌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이단에 사로잡혀서 자신의 생활도 파괴되고 가정도 파괴되어 심하게 다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마귀는 때로는 우리를 돈이나 욕망 같은 것으로도 유혹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성경 말씀으로 우리를 유혹할 때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죠. 뛰어내리지 않았습니다. 왜요? 겁이 많아서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4장 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試みてはならない』とも書いてある。」

성경 말씀을 잘못 적용하는 마귀 사탄을 대항하신 예수님의 방법은 바로 성경 말씀이었습니다. 신명기 6장 16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あなたがたがマサで試みたように、あなたがたの神、主を試みてはならない。

이처럼 성경을 알아야 마귀 사탄도 대항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도 중요하고 봉사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기도 응답을 받고 싶으십니까? 물론이죠. 하나님을 믿는 분들 중에서 기도 응답을 받고 싶지 않는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예전에 5만 번이나 기도 응답을 모두 받았다는 죠지 뮬러 이야기를 듣고, 그래, 그럼 나도 기도 노트를 한 번 적어놓고 해보면 모두 응답을 받을 수 있겠지……라고 생각해서 한 번 해볼까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려고 하니까 조금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요, 성경에 보니까 믿음이 좋다고 모든 사람들이 다 기도 응답을 받은 게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모세를 한 번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추산 200여 만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나온 모세. 홍해를 가르고 바위에서 물을 내는 모세, 뿐만 아니라 출애굽기 33장 11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출애굽기 33장 11절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主は、人が自分の友と語るように、顔と顔とを合わせてモーセに語られた。モーセが宿営に帰ると、彼の従者でヌンの子ヨシュアという若者が幕屋 を離れないでいた。

하나님께서 자기 친구한테 말씀하듯이 모세한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정말 참 이만 저만 부러운 게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가깝게 대하던 모세의 기도도 모두 들어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의 마지막 간절한 기도는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3장 25절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どうか、私に、渡って行って、ヨルダンの向こうにある良い地、あの良い山地、およびレバノンを見させてください。」

그런데 이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바로 다음 구절입니다.

신명기 3장 26절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しかし主は、あなたがたのために私を怒り、私の願いを聞き入れてくださらなかった。そして主は私に言われた。「もう十分だ。このことについては、もう二度とわたしに言ってはならない。

너 이제 그만 구해. 그만하면 됐어. 하지만 더 이상 나한테 구하지 마. 안 돼……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물론 여기에는 모세가 저지른 잘못이 있지요.

광야에서 물이 떨어져서 백성들이 모세한테 물을 달라면서 항의를 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기도를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20장 8절입니다.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杖を取 れ。あなたとあなたの兄弟アロンは、会衆を集めよ。あなたがたが彼らの目の前で岩に命じれば、岩は水を出す。あなたは、彼らのために岩から水を出し、会衆とその家畜に飲ませよ。」

하나님께서는 그저 반석한테 명령을 하라고 해셨는데, 모세는 어떻게 했냐 하면 10절과 11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민수기 20장 10절~11절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そしてモーセとアロンは岩の前に集会を召集して、彼らに言った。「逆らう者たちよ。さあ、聞け。この岩から私たちがあなたがたのために水を出さ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
モーセは手を上げ、彼の杖で岩を二度打った。すると、たくさんの水がわき出たので、会衆もその家畜も飲んだ。

이는 말하자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성질을 낸 것입니다. 사실, 뭐 모세라고 사람인데 뻑하면 하나님이나 자신들한테 항의하고 난리를 치고 하는 백성들이 곱게 보이기만 했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성질을 낸 것이겠지요. 하지만 이 일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이나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처럼 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기도를 끝까지 거절하셨습니다.

그럼 신약에서는 어떻습니까. 바울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9절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9절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また、その啓示があまりにもすばらしいからです。そのために私は、高ぶることのないようにと、肉体に一つのとげを与えられました。それは私が高ぶることのないように、私を打つための、サタンの使いです。
このことについては、これを私から去らせてくださるようにと、三度も主に願いました。
しかし、主は、「わたしの恵みは、あなたに十分である。というのは、わたしの力 は、弱さのうちに完全に現れるからである」と言われたのです。ですから、私は、キリストの力が私をおおうために、むしろ大いに喜んで私の弱さを誇りましょう。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만, 대체적인 의견으로는 아마도 당시 바울이 어떤 질병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신학자들은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질병이든 아니든 간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당시 바울의 육체를 몹시 힘들게 하고 있던 것을 물리쳐 달라고 주님께 기도를 드렸는데 이 기도를 거절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미 네가 받은 은혜가 족하다, 네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진다” 「貴方の受けたわたしの恵みは、十分である。神様の 力は、弱さのうちに完全に現れるからである」는 응답을 받았다는 것이지요.


만약에 모세나 바울이 죠지 뮬러와 같은 기도 노트가 있었다고 한다면 적어도 각자 최소한 한 가지는 기도 응답란에 체크를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이신가요? 아니요. 도리어 축복입니다. 바울은 이를 기뻐했다고 합니다.

또한 모세에 대해서는 신학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에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고 하면 그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우상숭배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물론 성경에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명시는 없습니다만, 이 의견에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신명기 34장 5절~6절에 보면 모세의 무덤조차 아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말하자면 모세가 우상 숭배 대상이 되었다면 그의 무덤도 무슨 성지처럼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모세의 무덤을 감추었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우상숭배의 대상이 되면 그것은 축복인가요? 아니요.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저주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회사원인데 다른 회사와 계약을 했습니다. 그런데 계약금이 10억원이었어요. 자기는 월급을 300만원 받고 있는데 자기 월급에 비하면 10억원은 어마어마한 액수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 계약금을 내 주머니 속에 집어넣어요? 그건 범죄입니다. 내 정당한 수입은 회사에서 주는 월급이지요.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주는 영광은 모두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그것을 가로채려고 하는 것이 누구입니까. 그렇죠. 바로 사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진정한 축복이요 은혜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기도 제목이 있으십니까. 그런데 기도를 해도 응답을 안 해주시는 것 같아서 답답하신가요? 예, 그 마음 제가 잘 압니다. 다름 아닌 제가 사실 요즘 그런 심정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을 원망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태복음 6장 7절~8절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また、祈るとき、異邦人のように同じことばを、ただくり返してはいけません。彼らはことば数が多ければ聞かれると思っているのです。
だから、彼らのまねをし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がたの父なる神は、あなたがたがお願いする先に、あなたがたに必要なものを知っておられるからです。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々、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従って召された人々のためには、神がすべてのことを働かせて益としてくださ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신명기 28장 6절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あなたは、入るときも祝福され、出て行くときにも祝福される。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세요? 아니요. 지금 이 순간도 우리를 지대한 관심을 가지시고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에 응답을 해주시면 감사합시다. 이는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기도 응답이 더디더라도 감사합시다. 그리고 하물며 모세와 바울처럼 기도를 거절하시더라도 감사합시다. 그 이유는 그것이 바로 축복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한, 우리는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고, 누워도 복을 받고, 앉아도 복을 받고, 일어서도 복을 받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룹니다. 모든 것이 합력해서 결국은 넘치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항상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과 동행하며 마침내 넘치는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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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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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회 사이 좋게 지냅시다
2018년 8월 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절~2절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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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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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사이 좋게 지냅시다” 仲良くしましょう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입학식은 3월에 한국에서 했습니다만, 그 해 5월에 일본으로 왔기 때문에 제가 입학식을 했던 학교에 대한 기억은 가물가물합니다. 오히려 제 모교라고 하면 5월에 전학했던 동경 신쥬쿠에 있는 동경한국학교 초등부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 당시 참 말도 안 듣고 뻑 하면 울기만 했던 저를 많이 보살펴주셨던 당시 1학년 때 선생님을 생각하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동경한국학교는 고등부까지 불어있는데 저는 초등부만 나왔습니다. 그래도 “현해탄 푸른 물결 건너서 울려온다 희망의 종소리……”라는 교가도 아직까지 기억합니다.

얼마 전에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역시 똑 같은 교가를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더라구요. 참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것이 더 있었습니다만, 이는 바로 학교 교훈이었습니다. 교훈이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라를 사랑하자, 힘써 배우자, 사이 좋게 지내자”입니다

참 고풍스러우면서도 기본적인 말이죠?

나라를 사랑하자, 힘써 배우자, 사이 좋게 지내자.

이 세상에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이 세 마디에 대해서 이견을 제시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를 사랑해야죠. 힘써 열심히 배워야죠. 그리고 사이 좋게 지내야죠.

그런데 저는 이 세 가지를 보고 조금 아쉬운 부분이 느껴졌습니다. 그렇다고 무언가를 더하자는 것은 아니에요. 어찌 보면 그야말로 황금비율. 완벽한 것처럼 느껴지는 이 교훈이지만 2% 아쉽다고 한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이 순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에 있거나 외국에 있거나 우리 나라를 사랑해야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첫 번째이고, 학교는 공부를 하는 곳이기 때문에 힘써 배우는 것이 두 번째이고, 학교는 또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는 것이 세 번째라고 하는 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만, 저는 어쩌면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사이 좋게 지내자>가 아닐까 합니다.

인터넷에서 <사이 좋게 지내자>를 찍어서 검색을 해보니까 대부분이 유치원, 초등학교…라는 식으로 주로 어린 아이들에 대한 사진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만 사이 좋게 지내면 되나요? 사실 정작 심각한 문제는 어른들입니다.

<사이 좋게 지내자>는 것을 가르치는 곳이 어디 동경한국학교 뿐이겠습니까? 수많은 학교에서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청년이 되어 어른이 되면서 이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는 생각은 어느새 우리 머리에서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어디를 보더라도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사이 좋게 지내지 못하는 어린이들이 아니라, 사이 좋게 지내지 못하는 어른들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정치나 경제나 사회나 분명 그 분들도 어렸을 때에는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는 것을 배웠을 텐데도 불구하고 사이 좋게 지내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고 마는 것이지요.

좋아요. 열심히 공부합니다 힘써 배웁니다. 그래서 고위공직자들이 되었습니다. 공직자들이 되면 공무원 윤리헌장, 공무원 윤리헌장 실천강령, 공무원의 신조 5개항 등을 배우겠지요. 여기에는 나라에 대한 충성, 국가에 대한 헌신도 있습니다. 역사의 주체가 된다, 민족의 선봉이 된다, 국가의 역군이 된다, 정의사회를 구현하는 국민의 귀감이 된다, 겨레의 기수가 된다……라고 하는 대단히 훌륭한 말들은 있습니다만, 무엇이 빠졌습니까. 예, <사이 좋게 지내자>가 빠졌습니다.


힘써 배웠죠. 열심히 공부했지요. 그래서 나라를 사랑하고 충성하자는 생각은 머리에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무자비하게 강자가 약자를 공격하고 서로 치고 박고 싸웁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끊임없이 서로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비판을 하는 사람들 중에 가장 많이 서로 비판하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정치인이 아닐까 합니다. 참 이 정치인이라는 사람들도 보면 참 딱하고 가엾은 직업입니다. 한국이나 일본을 보더라도 국회에서 상대방 칭찬하는 것 보신 적 있으세요? 서로 비판하고 비난하고 공격하고 그렇습니다. 이를 두고 그 분들은 논의를 한다고 하는데, 물론 여러 가지 특혜도 있고 대우도 받고 하겠습니다만, 참 하기 힘든 직업 중 하나가 이 정치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면 또 그 사람들은 서로 비판만 하나요? 비판을 많이 받기도 하지요. 누구한테서 비판을 받냐 하면, 동료 의원들한테서 만이 아니라 언론이나 국민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을 보면 참 정치를 좋아해요. 여러분들께서는 혹시 페이스북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페이스북을 하고, 이를 통해서 주일 설교 내용이나 선교후원을 해주신 분들을 적어 올리고 있습니다만, 누가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페이스북은 정치인이 정치 이야기를 하거나 아저씨들이 자기들 이야기를 하는 곳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제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 정치 이야기가 참 많이 올라오는데, 이건 그냥 제가 페이스북에서 친구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단순히 정치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 건가 했습니다만,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사람들이 참 정치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제가 페이스북으로 연결되어 있는 분들 중에는 정치를 하는 분들도 계시고 한데, 뭐 그 분들이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기 직업이니까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 외의 사람들도 무슨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정치 이야기 투성이입니다.


특히나 사회적으로 무슨 이슈가 되는 사건이 터지기라도 한다면 이건 뭐 난리가 아닙니다. 참 그 분들도 바쁘게 사는 분들일 텐데, 언제 그런 시간을 내서 긴 글을 써 올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자기가 몇 년 전에 썼던 글까지도 다시 끌고 와서 올리고 그럽니다. 그런 글들을 보면 99% 이상이 누군가를 아니면 무언가를 온통 비판하는 글들 투성이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댓글이 달리고, 거기서 논쟁이 시작되고 뭐 그러는 일들을 흔히 볼 수 있어요.

저는 그런 현상을 보면서 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글들을 페이스북에 올리고, 또 그 글로 인해서 상대방을 공격하고 비판하고 비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대통령이나 정부 고위 관료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어요. 그런데 그 글을 그 비판 당하는 당사자가 읽어 본다고 칩시다. 그러면 애기는 다르죠. 당신은 이런 부분이 잘못 됐으니까 이것을 고치시오……라고 했는데 그 사람이 그 글을 보고 나서, 아, 맞네. 고쳐야겠네……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분명히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그런 글들을, 그 글들의 상대방인 대통령이나 고위 공직자가 읽습니까? 정말 일간지 신문 기고란이나 텔레비전 시사 프로그램 같은 데에 출연해서 말하거나 한다면 모를까, 일개 개인이 페이스북에 올리는 글을 그 사람들이 읽어볼 리가 만무합니다.

옛날 중국의 어느 문인은 이런 글을 썼다고 합니다. “저는 오랫동안 중국 위정자와 중국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써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사람들이 제 글을 전혀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너무나도 부끄러웠습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모른 채 오늘도 보니까 얼마나 많은 비판 글이 올라왔는지 모릅니다.


저는 이런 글들을 보면서 잠시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사람들이 왜 이럴까.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세요. 대통령이나 정치인을 욕해서는 안 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서는 옛날에 대통령을 욕하면 잡아가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시대도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로 뽑은 대통령이나 정치인을 비판하는 것은 충분히 허용되고 보장되어야 하는 국민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다만 그렇다면 상대방이 알아 듣게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본인이 글을 읽을 확률은 0%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글을 이렇게 열심히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것이죠.

가만히 생각해보니 좀 알 것도 같더라구요. 아마도 이는 우리가 갖고 있는 큰 착각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무슨 착각이냐 하면 바로 상대방을 비판하면 내가 상대방보다 나은 존재로 평가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착각인 것입니다.

누구는 정치를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정치는 권력투쟁이다. 야당은 정권을 빼앗기 위해서 투쟁 하고 여당은 정권을 지키기 위해서 투쟁한다. 이 말을 들으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나치게 과장된 말 같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하냐 하면, 무조건 상대방을 비판해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방 보다 내가 더 나은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국민들의 지지를 뺏어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페이스북에서 당사자가 읽을 리 만무한 비판글들을 올리는 사람들도 이해가 갑니다.

이는 바로 내가 어떤 유명 인사를 비판하면서 자기 자신을 더 좋게 보이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지요. 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정치나 사회에 대한 비판 글을 올리는 이유는 어찌 보면 정치나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기보다는 다분히 자기 주변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고 싶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이 비판이나 비난을 하게 되다는 것은 그 근원에 무엇일 깔려 있냐 하면, 여기에는 정치나 사회를 보다 좋게 만들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바로 자기 자신을 좀 좋게 보이려고 하는 과시욕, 또는 교만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경계를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비판이 무엇이에요? 나는 옳고 너는 잘 못됐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구는 이런 말을 합니다. 시골 동네 술집에 가보라는 거예요. 거기서 얘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하룻밤에도 세상이 세 번 이상 바뀐대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아~ 요즘 정치 글러먹었어. 대통령은 누가 되어야 하고 장관은 누가 되어야 하고, 이걸 이렇게 해야 하고 저걸 저렇게 해야 하고……라고 하면, 다른 한 쪽에서는 아니야, 저건 저렇게 하고 그건 그렇게 하고……그런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어떠세요? 정치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참 모자란 것도 같고 그럴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하면 좀 더 잘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런 생각도 중요하죠. 하지만 알고 보면 그 사람들도 자기가 하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정치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사람들, 더구나 초선이 아닌 몇 선이나 하고 있는 사람들 보면, 공부도 많이 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무슨 행사다 무슨 모임이다 하면서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보통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 일도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또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무슨 정치인들을 두둔하거나 비판하거나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바로 우리입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나와 내 이웃입니다.

한 달쯤 전에 제가 처음으로 팟캐스트를 등록하기 위해서 그 동안 주일 설교 내용들을 다시 정리할 일이 있었습니다만, 그러면서 저 스스로가 참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뭐 발음이 나빠서라거나 내용이 잘못되어서가 아니에요.


이런 말씀 드리기가 적지 않게 창피합니다만, 참 말을 잘 하는 것 같더라구요. 이렇게 듣고 있으니까 참 맞는 말만 해요. 이왕 창피한 김에 좀 더 말씀을 드리자면, 제 주일 말씀을 들으면서 저 자신도 은혜를 참 많이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 말을 누가 하고 있어요? 예, 바로 저 자신이 하고 있습니다. 저는 저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아요.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말들을 들으면서 제가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야……이 친구야……너냐 잘해……

그것 아니겠습니까.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 그것은 바로 상대방한테 충고를 하는 일이라는 것이에요. 하지만 저는 더 쉬운 일은 바로 상대방을 비판하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게 상대방을 비판하면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가 오른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옆에 서 보는 사람들도 비판하는 사람이 훌륭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착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단순히 착각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는 바로 교만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찌 보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 중 하나가 바로 이 정치인이 아닐까 합니다. 선거운동을 하면서 상대 후보를 칭찬하면 이길 수 있을까요?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대단히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오늘 말씀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7장 1절~2절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さばかれないためです。
あなたがたがさばくとおりに、あなたがたもさばかれ、あなたがたが量るとおりに、あなたがたも量られるからです。

비판과 비난에는 교만이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는 비단 정치인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이 아닙니다. 바로 나와 내 이웃 간의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말씀을 전하신 기간을 대략 3년에서 3년 반 정도로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절대 긴 시간이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 이 말씀은 이른바 산상수훈이라는 말씀 안에 포함된 내용입니다만, 예수님께서는 하셔야 할 말씀, 전하셔야 할 말씀이 많으셨을 것입니다. 천국에 대해서 지옥에 대해서, 그리고 구원에 대해서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왜 갑자기 이처럼 <비판하지 말아라>라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시간이 남아서 좀 시간을 때우려고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지금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부분이 바로 천국과 구원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가끔 다른 사람들한테 쓴 소리를 하지요? 하지만 그러면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나도 너한테 이런 말 하기 싫어. 하지만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라는 말, 어떤 분은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 분도 계시겠고, 또 어쩌면 직접 해본 적이 있으신 분도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정말 그런 말 하기 싫었어요? 그래도 상대방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말이었어요?

그래요. 그 진의를 제가 의심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비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네가 비판을 하면 똑 같은 비판을 네가 받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2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それで、何事でも、自分にしてもらいたいことは、ほかの人にもそのようにしなさい。これが律法であり預言者です。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내가 다른 사람을 안 좋게 대우하면 다른 사람도 나를 안 좋게 대우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나를 잘 대접해주면 좋은 것처럼, 내가 다른 사람을 잘 대접해주면 좋아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에 깔린 주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나와 상대방은 똑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무슨 청문회 같을 것을 하는데 기억에 남는 인사청문회가 두 번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만, 적어도 이 두 사람은 정말 털어서 먼지가 안 나올 줄 알았습니다만, 국회의원들이 집요하게 밝혀내더라구요.

그래도 물론 본인이 인정을 하지 않으면 그게 사실이 아닐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세상에, 이런 저런 내용들을 집요하게 물으니까 본인들이 사과를 하는 모습을 보고 적지 않게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들었던 느낌이 무엇이겠습니까. 아……저 사람들도 역시 똑 같은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이었지요.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우리와 똑 같은 사람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에 보면 요한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천사를 보고 놀라서 경배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하지만 그 때 그 천사가 뭐라고 합니까,.


요한계시록 19장 10절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そこで、私は彼を拝もうとして、その足もとにひれ伏した。すると、彼は私に言った。「いけません。私は、あなたや、イエスのあかしを堅く保っているあなたの兄弟たちと同じしもべです。神を拝みなさい。イエスのあかしは預言の 霊です。」

이 모습을 보면 천사도 사람에게서 높임을 받으려 하지 않고, 오직 높임을 받으실 이, 경배를 받으실 이는 하나님이라고 말하는데, 일개 사람인 주제에 어차피 똑 같은데 다른 사람들로부터 애써 높임을 받으려고 한다면 이 얼마나 무서운 교만이 되겠습니까.

“교만하지 말라”고 하는 말은 그저 단순히 <착하게 살자>가 아닙니다. 성경은 이 교만을 반복해서 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시편 119편 21절
“교만하여 저주를 받으며 주의 계명들에서 떠나는 자들을 주께서 꾸짖으셨나이다”

あなたは、あなたの仰せから迷い出る高ぶる者、のろわるべき者をお叱りになります。

잠언 16장 18절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高ぶりは破滅に先立ち、心の高慢は倒れに先立つ。


예레미야 50장 32절
“교만한 자가 걸려 넘어지겠고 그를 일으킬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그의 성읍들에 불을 지르리니 그의 주위에 있는 것을 다 삼키리라”

そこで、高ぶる者はつまずき倒れ、これを起こす者もいない。わたしは、その町に火をつける。火はその回りのものをすべて焼き尽くす。」

이 외에도 교만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구절이 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비판은 교만입니다. 비판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가 영광을 독차지 하겠다는 교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다스려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을 하려고 하는 우리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누가 나에게 비판을 하면 그 비판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을 하려고 하는 나 자신의 교만을 대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35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あなたがたに新しい戒めを与えましょう。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
もし互いの間に愛があるなら、それによって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弟子であることを、すべての人が認めるのです。」


요한복음 15장 9절~10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父がわたしを愛されたように、わたしもあなたがたを愛しました。わたしの愛の中にとどまりなさい。
もし、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戒めを守るなら、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愛にとどまるのです。それは、わたしがわたしの父の戒めを守って、わたしの父の愛の中にとどまっているのと同じです。

내 안에 있는 교만을 물리칠 힘은 오로지 사랑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천국에 가도 되고, 안 가도 됩니까? 구원을 받아도 되지만, 안 받아도 됩니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반드시 천국에 가야만 합니다.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교만을 물리쳐도 되고, 안 물리쳐도 됩니까? 우리 이웃을 사랑해도 되고 사랑 안 해도 됩니까? 여기서도 선택의 여지는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교만은 반드시 물리쳐야 합니다. 그리고 이 교만을 물리칠 유일한 방법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에 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원을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 교만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에베소서를 봅니다.

에베소서 4장 21절~24절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ただし、ほんとうにあなたがたがキリストに聞き、キリストにあって教えられているのならばです。まさしく真理はイエスにあるのですから。
その教えとは、あなたがたの以前の生活について言うならば、人を欺く情欲によって滅びて行く古い人を脱ぎ捨てるべきこと、
またあなたがたが心の霊において新しくされ、
真理に基づく義と聖をもって神にかたどり造り出された、新しい人を身に着るべきことでした。

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제 비판이라는 옛 사람을 벗어버립시다. 미움이라는 옛 사람을 벗어버립시다. 이는 모두가 교만이라고 하는 유혹, 자기 자신이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든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사랑이라는 새 사람, 용서라는 새 사람을 입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단순히 권면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피를 흘리시기까지 하면서 우리에게 해주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라를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고 힘써 배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 이웃과 사이 좋게 지내게 되고 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비판하려 하지 맙시다. 비판 대신 서로를 사랑합시다. 주님 안에서 사이 좋게 지냅시다. 그리하여 옛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제자로서 거듭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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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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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회 아직 끝이 아닙니다
2018년 7월 2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4장 29절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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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아직 끝이 아닙니다.” まだ終わりではありません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전에 서울에서 살 때 지하철 역이나 시내 광고판을 보면 무슨 성형외과다 하면서 이른바 <비포 애프터> 사진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비포…… 그러니까 시술을 받기 전의 모습은 코나 턱이 이렇게 생겼었는데, 애프터……시술을 받고 나면 이렇게 변했다……는 사진을 크게 붙여놓곤 했었지요. 그 중에는 정말 이게 똑 같은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지금 현재 그런 광고는 이제 법적으로 금지가 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개인에 따라서 결과가 같다고 할 수 없기에 과장광고가 될 수 있는 소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이른바 비포 애프터 사진이라고 하면 이처럼 성형외과나 아니면 다이어트 광고를 떠올리게 됩니다만, 며칠 전에 인터넷에서 또다른 비포 애프터 사진, 아니, 그냥 비포만 있는 사진들을 보았습니다. 이는 바로 유명인들의 비포……그러니까 유명해지기 전의 사진을 모아놓은 것이었습니다.

제가 서양 유명인들에 대해서 많이 알지는 못했기 때문에 거기 나와 있는 사람들 모두를 알 수는 없었습니다만, 저 같은 사람도 아는 유명인들이 몇몇 있었습니다.

그 중 인상 깊게 남았던 사진이 두 장 있습니다만, 그 중 한 장은, 18세 소녀가 선 채로 천진난만하게 밝은 웃음을 짓고 있는 사진입니다.

또 한 장은 19세 소녀가 앉아서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진입니다.

궁금해하실 것 같아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천진난만하게 밝은 웃음을 짓고 있는 18세 소녀는 아직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찍은 마돈나 사진이었고,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19세 소녀는 장차 영국 왕세자와 결혼하게 될 다이애너비의 사진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의 사진이 있었지요. 하지만 그 중에는 미래에 마돈나처럼 큰 성공을 거둔 스타가 있었나 하면 다이애너비처럼 비극적인 인생을 살아간 사람도 있었습니다.

아무리 불우한 인생을 살아간 사람이라 하더라도 처음부터 그런 일들이 자신에게 일어날 줄은 몰랐겠지요. 본인은 물론이고 그 주변 사람들도 몰랐을 것입니다.

어쩌면 성공한 사람도 마찬가지일지 모르겠습니다.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은 소프트뱅크를 설립한 1981년, 전 직원들 앞에서 “5년 뒤 우리 회사는 컴퓨터 소프트웨어 유통에 있어서 1등을 할 것이고, 1000곳 이상의 딜러를 상대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큰 소리를 쳤다고 합니다.

말은 참 멋집니다. 하지만 그 말을 할 당시 그는 어디에 서 있었냐 하면 사과상자 두 개를 엎어놓은 단상 위에 있었고, 그 말을 듣고 있던 전 직원은 단 두 사람 뿐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손 회장은 현재 어떻습니까. 그는 현재 일본에서 제일가는 거부이고 소프트뱅크는 직원 6만 8천명, 총자산 246조원, 매출 89조원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아무리 성형외과에서 하는 비포 애프터 광고가 과장성이 있다 하더라도, 이처럼 인생에 있어서의 비포 애프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면 그들의 인생에 있어서도 이 비포 애프터의 차이가 대단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인물에 보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합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은 팔형제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서도 그리 큰 대접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귀한 손님인 사무엘이 방문했을 때, 아버지 이새가 다른 일곱 형들은 불러서 인사를 드리게 하면서도 막내인 다윗한테는 양들을 지키게 할 정도로 홀대를 당했습니다. 이것이 비포입니다. 그런데 애프터는 어떻습니까. 그는 골리앗을 물리치고 장차 왕이 되어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40년 동안이나 통치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사랑 받는 아들이었다가 종으로 끌려가고는 그것도 모자라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비포와 애프터는 참으로 안타깝지요. 비포는 사랑 받는 아들 요셉. 그런데 애프터는 이국 땅에서의 종살이와 감옥생활입니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닙니다. 그는 나이 서른에 애굽의 총리 자리에 오르는 놀라운 재반전을 이루게 됩니다.

신약에도 인생의 반전을 이룬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베드로를 한 번 볼까요? 그는 고기잡이였습니다. 단순히 고기잡이라고 해서 무시하면 안 되겠지요. 그는 분명히 고기잡이라고 하는 기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배도 있었겠지요. 즉,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배와 기술 만으로도 먹고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4장 19절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わたしについて来なさい。あなたがたを、人間をとる漁師にしてあげよう。」

이 한마디에 베드로는 순종하지요.

누가복음 5장 11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彼らは、舟を陸に着けると、何もかも捨てて、イエスに従った。


그들은 배도 있었고 기술도 있었습니다. 생활에 전혀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비포이지요. 그런데 좀 이상한 말이지만 예수님을 만나는 바람에 애프터에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다인가요?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넘치는 축복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또한 바울의 인생도 빼놓을 수 없겠지요. 그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젊은 나이에 고시를 패스한 유능한 엘리트 관료였습니다. 이미 출세가 보장된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유대교에 대한 믿음도 대단했지요.

사도행전 9장 1절~2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さてサウロは、なおも主の弟子たちに対する脅(おびや)かしと殺害の意に燃えて、大祭司のところに行き、
ダマスコの諸会堂あての手紙を書いてくれるよう頼んだ。それは、この道の者であれば男でも女でも、見つけ次第縛り上げてエルサレムに引いて来るためであった。

그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가려고 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단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탄압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신앙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9장 3절~5절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ところが、道を進んで行って、ダマスコの近くまで来たとき、突然、天からの光が彼を巡り照らした。
彼は地に倒れて、「サウロ、サウロ。なぜわたしを迫害するのか」という声を聞いた。
彼が、「主よ。あなたはどなたですか」と言うと、お答えがあった。「わたしは、あなたが迫害しているイエスである。

이렇게 예수님을 만난 바울, 그는 이제 예수님을 박해하던 청년 엘리트가 아니라 예수님을 전하는 사도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의 삶이 어땠을까요.

고린도후서 11장 24절~27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ユダヤ人から三十九のむちを受けたことが五度、
むちで打たれたことが三度、石で打たれたことが一度、難船したことが三度あり、一昼夜、海上を漂ったこともあります。
幾度も旅をし、川の難、盗賊の難、同国民から受ける難、異邦人から受ける難、都市の難、荒野の難、海上の難、にせ兄弟の難に会い、
労し苦しみ、たびたび眠られぬ夜を過ごし、飢え渇き、しばしば食べ物もなく、寒さに凍え、裸でいたこともありました。


이런 비포 애프터도 드물지요. 그는 출세가 이미 예정된 인물이었습니다. 남들한테 인정받고 안정된 생활이 보장된 인물이었습니다.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이 비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난 후의 인생은 참으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매도 맞고 강도 위험에다가 이제 같은 유대인한테까지 핍박을 받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고 난 다음의 애프터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그의 공로는 얼마나 대단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미 사도행전 9장 15절에서 바울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しかし、主はこう言われた。「行きなさい。あの人はわたしの名を、異邦人、王たち、イスラエルの子孫の前に運ぶ、わたしの選びの器です。

예수님의 이 말씀대로 신약 성경 중에서 상당 부분을 바울이 집필을 했고, 로마를 비롯해서 복음 전파와 교회 설립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이 바로 이 바울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모세를 보더라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범상치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핍박 받고 있던 당시 애굽에서 그는 출생합니다. 애굽 왕이 명령하기를 유대인 아기가 태어날 때 딸이면 살려두고 아들이면 죽이라고 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됩니다. 그 후 그는 애굽의 왕자로 성장하게 되지요. 몇 살까지냐 하면 무려 40세까지 그는 당시 최고 선진국에 살면서 왕족이라고 하는 최고의 환경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최고의 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놀랍고도 풍요로운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40세 때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는 뜻하지 않게 살인을 저지르게 되어 결국 그 때까지 쌓아둔 지위와 명예를 모두 버리고 광야로 도망치게 됩니다.

광야에서의 삶은 어땠을까요. 거기서 만난 여인과 결혼하여 그저 조용한 삶을 보내게 됩니다. 조용한 삶……말은 참 좋지요. 하지만 이제 그에게는 왕궁에서 살았을 때와 같은 화려한 옷도, 화려한 집도, 화려한 음식도 없습니다. 수많은 부하들도 없고 찬란했던 지위도 명예도 없습니다. 그의 나이 마흔. 이제 한창 활약을 하면서 인생 황금기를 맞이해야 할 그 시기에 그는 광야에서 허무하게 지내야 했던 것입니다.

이제 세월은 흐릅니다. 얼마나 흘렀냐 하면 또다시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그의 나이 여든입니다.

여기까지의 인생을 모세의 비포와 애프터로 본다면 참으로 기구하기 짝이 없지요. 얼마나 화려하고 찬란한 비포에 비해 얼마나 초라하고 볼품없는 애프터입니까.

하지만 여러분, 모세의 인생이 여기서 끝나나요? 아니요. 아직 끝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몇 살이요? 예, 그의 나이 여든……팔십부터 이제 하나님께서 쓰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그를 부르십니다. 애굽에서 핍박 받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몇 년이요? 예, 40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34장 7절에 보면 백이십 세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그의 인생을 단순히 숫자상으로 보면 어떨까요. 계산하기 대단히 쉽습니다. 애굽에서 왕자로 생활한 기간이 40년, 애굽에서 도망쳐 나와 광야에서 생활한 기간이 40년,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었던 기간이 40년……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어떨까요. 단순비교를 위해서, 성경에 어느 정도 비중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지를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세가 어렸을 때 태어났을 때의 기록은 자신의 판단이 아니니 제쳐둔다고 하면, 그의 인생은 출애굽기 2장 11절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애굽기 2장 11절은 “모세가 장성한 후에……” (こうして日がたち、モーセが おとなになったとき、)로 시작합니다. 이 때는 애굽의 왕자로 40년을 살아갈 때였는데, 이 때의 기록은 어디까지냐 하면 15절에 끝납니다.

15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しかし、モーセはパロのところからのがれ、ミデヤンの地に住んだ。彼は井戸のかたわらにすわっていた。

찬란했던 그의 40년 인생이 고작 다섯 장도 아니고 5절로 끝나고 말아요.

그리고 광야에서의 도피생활 40년은 어떤가 하면 그 다음 구절 출애굽기 2장 16절부터 시작하겠지요? 그런데 그 기록은 22절에서 게르솜(ゲルショム)이라는 아들을 낳았다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니까 몇 구절이에요? 16절부터 22절, 7절이에요. 그러니까 광야에서의 도피생활 40년도 고작 7절에서 끝나고 맙니다. 이것만을 본다면 그의 80년 인생은 고작 12절이 다입니다. 참 허무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음 장인 출애굽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드디어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그는 하나님과의 인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의 이후 인생이 앞서 말씀 드린 신명기 34장 7절까지라고 가정해 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함께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었던 40년을 출애굽기 3장 1절에서 신명기 34장 7절이라고 한다면 이 절 수는 얼마나 될까요?

애굽에서의 40년을 성경은 5절로 기록하고, 광야 도피생활 40년을 7절로 기록한 성경, 하지만 하나님과 함께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었던 40년을 성경은 출애굽기 3장 1절부터 신명이 34장 7절까지 무려 4,267절로 기록하고 계십니다.

물론 이 구절 모두가 모세의 인생에 대한 기록은 아니지요. 여기에는 율법도 많고 기타 내용도 많습니다만, 그러나 이 기간은 분명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었던 기간이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내용이 다 모세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으로 본다면 이와 같이 비교하는 것이 전혀 허황된 것은 아니리라 생각됩니다.

인간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똑 같이 40년, 40년, 40년이지만, 성경적인 시각,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5절과 7절, 그리고 무려 4,267절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34장 29절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それから、モーセはシナイ山から降りて来た。モーセが山を降りて来 たとき、その手に二枚のあかしの石の板を持っていた。彼は、主と話したので自分の顔のはだが光を放ったのを知らなかった。

성경에서는 모세가 하나님과 말하였음으로 인해서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얼굴에 광채가 날 수 있을까요. 뭐, 누구는 얼굴에 얼마짜리 성형을 했다는 둥 얼마짜리 고액미용을 한다는 둥 그런 얘기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해서 나는 광채나 같겠습니까.


사실 모세의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인간적인 의미로 광채가 가장 날 시기를 꼽으라면 아무래도 애굽에서 왕자로 살 때 아니겠습니까. 글쎄요. 그 시대에 어떤 피부관리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단지 피부관리 뿐이겠습니까. 화려한 옷에 화려한 장식에, 거기다가 최고로 높은 지위까지 갖추었다고 한다면, 아무리 못생긴 사람이라 한다 하더라도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처럼 보이기 마련이겠지요. 그것도 한창 젊을 나이 때 광채가 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에서는 젊은 시절 좋은 시절 다 가고, 이제 나이 80도 넘어서, 이제 인생의 내리막길에 접어든 노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여호와와 말하였기 때문에, 여호와와 동행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을 한 번 되돌아보시면 어떻습니까. 이런 저런 일들이 참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믿음 바깥에서의 일이라면, 그것은 기나긴 우리 인생 중에서 기껏해야 5절과 7절 정도에 들어가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세 전체의 인생을 통틀어서 5절과 7절을 빼면 몇 구절이었죠? 예, 4,267절입니다. 모세 인생에 있어서 5절과 7절은 그야말로 비포였습니다. 제아무리 왕자로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5절만큼의 분량에 지나지 않는 값어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인생에서 애프터는 바로 4,267절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모세의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인생, 하나님과 말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이야말로 진정한 인생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십니까? 오늘 아침에 세수를 할 때 광채가 나셨습니까. 안 났어요?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인생은 어쩌면 5절과 7절까지의 인생이었는지 모릅니다. 걱정 마십시오. 아직 끝이 아닙니다. 이제 어제까지 5절과 7절까지의 인생이었다면, 이제 오늘부터 4,267절의 인생,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생,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인생을 시작할 때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기도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도>라고 하면 왠지 부담스럽습니다. 기도가 중요해. 기도를 많이 해. 이런 말은 특히 믿음이 좋은 분들한테 있어서는 큰 부담으로 느껴집니다.

그 이유가 뭐예요? 여러분, 기도를 열심히 하려면 어떻게 해요? 예, 우리 한국 사람들 금방 떠올리는 것이 금식입니다. 그리고 기도원에 가야지요. 그러면 금식을 안 하면 기도가 아니에요? 기도원에 올라가지 않으면 기도가 아닌가요?

물론 기도원에서 기도 드리는 것도 귀한 기도 시간이고, 성전에서 기도를 드리는 기도도 귀한 기도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기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담을 느끼는 것이지요. 기도라고 하는 것이 항상 성전이나 기도원에서 두 손 들고 주여 주여, 하는 것만 기도인가요?

가끔 보면 누구는 하루에 몇 시간 기도한다, 누구는 일 년에 며칠을 금식 한다, 이런 말을 가끔 듣습니다만, 이건 자칫 잘못하면 교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어떻게 기도하라고 되어 있습니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
“쉬지 말고 기도하라”

絶えず祈りなさい。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루에 몇 시간 기도한다? 일년에 며칠을 금식기도 한다? 그것만이 기도라면 성경말씀에 비해 턱도 없이 부족하다는 것이 되고 맙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주님을 가까이 하는 것, 주님을 의지하는 것, 앉았을 때나 누웠을 때나 걸어갈 때나 주님을 묵상하고 주님께 말씀을 드리는 것, 그것이 얼마나 귀한 기도인지 모릅니다.

이제 5절까지의 인생, 7절까지의 인생은 접읍시다. 아무리 화려한 과거라고 해도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았던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실망하지 않아도 됩니다. 낙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직 끝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오늘부터 5절짜리, 7절짜리 인생을 접고 이제 4,267절짜리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십시다.

항상 주님을 가까이 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묵상하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광채가 나는 삶,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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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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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회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2018년 7월 2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4장 15절~16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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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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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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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前に進まなければなりません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힘 드십니까.

물론 요즘은 날도 덥고 해서 더 고되게 느껴지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렇지 않더라도 이렇게 살아가다 보면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 쳐요. 하지만 우리처럼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의 삶은 믿지 않은 사람들보다 조금은 더 나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렇게 가만히 살펴보면 꼭 그런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오늘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우리 삶 속에서 가장 많이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돈이나 재산이 부족해서 그럴까요? 그렇다면 단순히 돈이나 재산이 많으면 내 고민도 좀 줄어들까요? 물론 그럴 것도 같긴 하겠습니다만, 막상 세상을 보면 돈이 많아도 고민이 없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단적으로 요즘 한국 뉴스를 보면 대표적인 한국 항공사의 경영인들이 모두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렇다고 돈이 없겠어요? 그 사람들의 재산을 본다면, 보통 서민들의 몇 십 배, 몇 백 배는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돈이 많고 유능한 부하들이 많다고 해도 그렇게 고민이 많고 힘들어 한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서의 힘든 일들을 단순히 돈이나 재산에만 원인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이는 아마도 세상 일들이 내 생각대로, 내 계획대로 안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음 달에 저희 집 사람이 한국에 잠시 들어갈 일이 있어서 비행기표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래도 좀 한 푼이라도 저렴한 표를 구매하기 위해서 몇 날을 인터넷을 통해 검색도 해보고 하다가 결제를 했습니다.

아니,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결제를 하고 불과 몇 시간 뒤에 보니까 똑 같은 날짜에 똑 같은 시간, 똑 같은 비행기표가 무려 6만원이나 싸게 나와 있는 거예요.

처음부터 그냥 별 생각 없이 딱 보고 샀다면 그렇게 속이 상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이렇게 살펴보고 저렇게 알아본 다음에 결정을 했는데, 불과 몇 시간 뒤에 그렇게 되니까 정말 속이 얼마나 상했는지 몰랐습니다. 아니, 그렇게 빨리 가격이 떨어질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참 이런 것 하나 계획대로 안 되니까 마음이 좋지 않더라구요.

돈 문제만이 아니죠. 예를 들어 자식들을 키우는 분들 말씀을 들어보면 다들 하시는 이야기가 비슷해요. 자기 생각대로 안 돼서 답답하다는 거예요. 내가 얘한테 들이는 과외비 학원비가 얼만데, 그렇다면 아무리 못 나와도 대충 이 정도는 점수가 나와서 이 정도 학교를 가줘야 할 텐데, 성적표를 받아오는 것을 보면 그렇지 못해서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날씨도 그렇잖아요. 한동안 어느 정도 더웠다가도 좀 시원해져야 사람이 살만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한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고 얼마나 날이 더우면 사람들이 막 실려갑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 삶에 있어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좀 내 생각대로 내 예상대로 문제가 해결된다면 그나마 좀 견딜 만도 하겠는데, 내 예상도 예측도 계획도 모두 빗나가고 마니까 이는 더욱 힘들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나왔습니다. 이는 단순히 모세의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15장 13절~14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そこで、アブラムに仰せがあった。「あなたはこの事をよく知っていなさい。あなたの子孫は、自分たちのものでない国で寄留者となり、彼らは奴隷とされ、四百年の間、苦しめられよう。
しかし、彼らの仕えるその国民を、わたしがさばき、その後、彼らは多くの財産を持って、そこから出て来るようになる。

그리고 이 말씀은 모세의 때에 성취됩니다.

출애굽기 12장 35절~40절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그들이 애굽으로부터 가지고 나온 발교되지 못한 반죽으로 무교병을 구웠으니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쫓겨나므로 지체할 수 없었음이며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하였음이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イスラエル人はモーセのことばどおりに行い、エジプトから銀の飾り、金の飾り、それに着物を求めた。
主はエジプトがこの民に好意を持つようにされたので、エジプトは彼らの願いを聞き入れた。こうして、彼らはエジプトからはぎ取った。
イスラエル人はラメセスから、スコテに向かって旅立った。幼子を除いて、徒歩の壮年の男子は約六十万人。
さらに、多くの入り混じって来た外国人と、羊や牛などの非常に多くの家畜も、彼らとともに上った。
彼らはエジプトから携えて来た練り粉を焼いて、パン種の入れてないパン菓子を作った。それには、パン種が入っていなかった。というのは、彼らは、エジプトを追い出され、ぐずぐずしてはおられず、また食料の準備もできなかったからである。
イスラエル人がエジプトに滞在していた期間は四百三十年であった。

그냥 나온다는 것이 아닙니다. 큰 재물(多くの財産)을 이끌고 나오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정말로 심히 많은 재물과 가축들을 가지고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사백삼십 년만에 나왔다고 해서 성경의 앞뒤가 안 맞는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이는 성경을 오해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13절에서 말씀하신 400년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방 민족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는 기간이 400년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고, 출애굽기 12장 40절에 있는 430년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총 기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요셉이 살아서 애굽 총리로 있을 때에는 아무도 야곱이나 그들 가족들을 건드릴 수가 없었지요. 건드릴 수 없을 정도가 아니라 귀빈대우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부터 괴롭힘을 당하게 되냐 하면 요셉이 죽고 난 다음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왕이 된 다음부터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와 같은 성경 말씀을 바탕으로 해서 계산을 해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괴롭힘을 당한 시기를 아무리 길게 잡아보아도 400년은커녕 360년도 안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학대 당하는 기간을 감해주셨으면 감해주셨지 본래 예언보다 늘리신 것은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원대한 계획 하에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탈출했습니다. 그것도 몰래 살금살금 나온 것이 아니에요. 성경에는 60만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이는 성인 남성만을 세었을 때의 숫자이고, 남녀노소 다 합치면 대략 200만명, 한국으로 본다면 충청남도가 211만명 정도라고 하니까 충남 정도의 인구, 일본으로 본다면 바로 이 군마현 정도 되는 규모의 인구가 당당하게 많은 재물을 가지고 나왔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광경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예언과 계획으로 그 많은 무리들이 애굽을 탈출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그토록 지긋지긋했던 종살이에서 벗어나서 자유인으로서, 새로운 삶, 축복된 삶을 꿈꾸고 나왔을 것입니다. 그들은 꿈을 꾸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서는 희망이 넘쳐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넘쳐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얼마 가자 앞에는 홍해에 가로막히고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자기들을 죽이려고 좇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이제 꿈이고 희망이고, 기쁨이고 감사고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모세를 원망합니다.

출애굽기 14장 10절~12절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パロは近づいていた。それで、イスラエル人が目を上げて見ると、なんと、エジプト人が彼らのあとに迫っているではないか。イスラエル人は非常に恐れて、主に向かって叫んだ。
そしてモーセに言った。「エジプトには墓がないので、あなたは私たちを連れて来て、この荒野で、死なせるのですか。私たちをエジプトから連れ出したりして、いったい何ということを私たちにしてくれたのです。
私たちがエジプトであなたに言ったことは、こう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か。『私たちのことはかまわないで、私たちをエジプトに仕えさせてください。』事実、エジプトに仕えるほうがこの荒野で死ぬよりも私たちには良かったのです。」

도대체 왜 그들은 이렇게 되었을까요. 이는 바로 단순히 어려움이 닥쳐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대로, 자신들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대단히 흥미로운 점은 바로 10절~11절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イスラエル人は非常に恐れて、主に向かって叫んだ。そしてモーセに言った。

즉, 이 구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무엇을요? 예, 추격해오는 애굽 군대를 보고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애굽 군대를 보고 두려워한 그들이 한 행동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들의 영적 지도자인 모세를 원망한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애굽 군대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어른들이 아니라 주일학교 몇 번 다녀본 애들도 다 아는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들은 애굽 군대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했어야 합니다.
그들은 애굽 군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애굽 군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애굽 군대를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애굽 군대가 무엇입니까. 바로 현실입니다. 현실 속에서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위기입니다. 애굽을 탈출할 때 기쁨으로 충만했던 그들은 나중에 애굽 정예부대가 죽이려고 좇아오리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습니다. 만사형통, 아무런 문제 없이 편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벌어졌을 때, 그들은 눈앞에 벌어지는 위기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눈앞에 자기들을 좇아오는 애굽 군대를 바라보면 어떻게 됩니까. 내 눈에는 이제 시퍼런 칼과 창과 화살을 들고 좇아오는 애굽 군대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는 그 순간 게임은 끝난 것입니다.

반면에 모세는 어땠을까요.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도 마찬가지죠.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나왔을 때 애굽 군대가 추격할 것이다”라고 하나님이 말씀해주셨어요? 아니요. 그런 말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적지 않게 모세 자신도 당황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절체절명의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모세는 애굽 군대를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바라보았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현실을 바라보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생깁니다. 절망이 생깁니다. 그리고 원망과 절망 앞에서 우리의 미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희망이 생깁니다. 기쁨이 생깁니다. 힘이 생깁니다. 믿음이 생깁니다. 감사가 생기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출애굽기 14장 13절~14절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それでモーセは民に言った。「恐れてはいけない。しっかり立って、きょう、あなたがたのために行われる主の救いを見なさい。あなたがたは、きょう見るエジプト人をもはや永久に見ることはできない。
主があなたがたのために戦われる。あなたがたは黙っ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

여기서 가만히 있으라고 한 모세의 말은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싸우실 것이니 흥분하지 말고 진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지 말고 입 다물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5절~16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主はモーセに仰せられた。「なぜあなたはわたしに向かって叫ぶのか。イスラエル人に前進するように言え。
あなたは、あなたの杖を上げ、あなたの手を海の上に差し伸ばし、海を分けて、イスラエル人が海の真ん中のかわいた地を進み行くようにせよ。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세요? 빨리 앞으로 나아가게 해! 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바쁘게 움직이십니다.

출애굽기 14장 19절~21절에 보면
“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의 뒤로 옮겨 가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ついでイスラエルの陣営の前を進んでいた神の使いは、移って、彼らのあとを進んだ。それで、雲の柱は彼らの前から移って、彼らのうしろに立ち、
エジプトの陣営とイスラエルの陣営との間に入った。それは真っ暗な雲であったので、夜を迷い込ませ、一晩中、一方が他方に近づくことはなかった。
そのとき、モーセが手を海の上に差し伸ばすと、主は一晩中強い東風で海を退かせ、海を陸地とされた。それで水は分かれた。

본래 이스라엘 진영을 앞에서 인도하던 구름기둥이 뒤로 물러가서 이스라엘 진영과 애굽 군대 사이를 가로막습니다. 그렇게 해 놓으니까 애굽 군대가 이스라엘 진영에 접근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해놓고 하나님께서는 이제 밤새도록 큰 동풍을 불게 합니다. 영화 십계에 보면 순식간에 바다가 갈라진 것처럼 나오는데, 그건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밤새도록 바람이 불게 한 결과 바다가 갈라졌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좀 이상하지 않나요? 아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자까지 동원하셔서 애굽 군대와 이스라엘 진영을 갈라놓았다면, 아예 이 참에 애굽 군대를 물리치셨더라면 더 편하지 않았겠어요? 하나님께서는 애굽 군대를 멸하지 않으시고, 말하자면 밤새도록 대기시켜놓으셨다는 말씀인데, 왜 멸하지 않으시고 굳이 밤새도록 머물게 해놓으셨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 이유는 바로 다음에 있습니다.

자, 이제 밤새도록 동풍을 불게 하셔서 홍해 바다를 갈라놓으셨습니다. 22절에 보면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水は彼らのために右と左で壁となった。

라고 기록합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건 강이 아니에요. 바다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바람이 계속 불어오면서 바닷물을 막아서고 있습니다. 앞을 보니까 이 길이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끝이 보이지도 않아요. 물이 좌우의 벽처럼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벽이라고는 하나 바람이 막고 있는 바닷물이기 때문에 출렁거렸을 지도 모릅니다. 까딱 잘못하면 지금이라도 무너져서 다시 흐를 것 같아요.

자, 모세가 말합니다. 어서 빨리 여기를 건너라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같으면 어떠셨을 것 같습니까. 첫발이 내디뎌질까요. 용감하고 믿음 좋은 청년이라면 모를까, 거기에는 나이든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계셨을 것이고요, 여성들, 아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바람은 정신 없이 불어옵니다. 그 와중에 그 불안한 길,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길을 가기 위해 첫 발자국을 내딛는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무서워서 못 가겠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속출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겠지요.

바로 이 때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예비해두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애굽 군대, 그것도 정예부대를 예비해두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라!”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하지만 아무리 겁이 많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뒤에 보면 애굽 군대가 보입니다. 그대로 주저앉아 있으면 100% 죽습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하는 수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애굽군대를 예비해두신 이유가 이스라엘 민족을 미워해서였을까요?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애굽군대는 그러면 저주인가요? 아니요. 반대입니다. 애굽군대를 예비해두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너무나도 사랑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애굽군대가 없었다면 홍해를 건너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홍해를 건너지 못했다면 종살이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애굽군대가 있었기 때문에 홍해를 건너올 수가 있었던 것이에요. 말하자면 애굽군대야말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크나큰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하나님께서 홍해를 갈라 가시면서까지 열어주신 믿음의 길, 생명의 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길이 그 뿐인가요.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까지도 열어주셨던 것입니다.

현실 속에서 어려움이 답답하십니까. 괴로우십니까. 두려우십니까. 아니요. 오히려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일 수가 있습니다. 애굽 군대와도 같은 현실 속에서의 어려움 덕분에 우리는 믿음의 길, 축복의 길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더러 머물러 있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주저앉아 있으라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가나안 땅 정복을 눈앞에 두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 1장 5절~6절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あなたの一生の間、だれひとりとしてあなたの前に立ちはだかる者はいない。わたしは、モーセとともにいたように、あなたとともにいよう。わたしはあなたを見放さず、あなたを見捨てない。
強くあれ。雄々しくあれ。わたしが彼らに与えるとその先祖たちに誓った地を、あなたは、この民に継がせなければならないからだ。

그리고 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1장 10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恐れるな。わたしはあなたとともにいる。たじろぐな。わたしがあなたの神だから。わたしはあなたを強め、あなたを助け、わたしの義の右の手で、あなたを守る。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놀랄 필요도 없습니다. 내 예상대로, 내 계획대로 안 되다고 낙심하거나 힘들어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에게는 그 어떤 고통과 고난도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라면 고통도 고난도 역경도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는 모든 것이 축복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범사에 축복과 은혜로 채워주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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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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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회 믿음의 졸음운전
2018년 7월 1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11장 1절~4절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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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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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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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믿음의 졸음운전” 信仰の居眠り運転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운전을 하면서 무서운 것 중의 하나가 이 졸음운전입니다. 혹시 여러분께서는 졸음운전이라는 것을 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한 마디로 졸음운전이라고 해도 어디서부터가 졸음운전인지에 대해서는 견해에 따라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제가 말씀 드리는 졸음운전은 <아~졸립다~>라고 하면서 졸음을 억지로 참으면서 운전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깜빡>하고 순간적으로나마 수면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혹시 졸음운전을 해보신 적이 있으시거나, 아니면 까딱 잘못했다가 졸음운전을 할 뻔한 적이 있으셨다면, 정말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하실 수가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주님께 크나큰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졸음운전……저도 솔직히 말씀 드려서 해 본적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아니고 예전에 미국에서 살고 있을 때에 해본 적이 있습니다. 아, 그거 정말 아찔합니다. 미국에서 한 고속도로를 밤에 달리고 있었는데, 정말 깜빡 졸고 보니까 차선이 두 개나 이동해 있었습니다.

정말 이건 진지하게 말씀 드립니다만, 피곤할 때는 무조건 휴게소에서 쉬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큰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눈앞에 좋은 차가 있습니다. 왠지 모르게 요즘은 말씀을 전할 때마다 자동차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만, 아무튼, 좋은 차가 한 대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고 싶겠습니까. 가족들을 데리고 좋은 드라이브 코스를 쌩쌩 달리는 것, 그러면 얼마나 기분이 좋겠습니까. 설마 좋은 차가 생겼으니 도로 정체가 심한 곳에 한 번 가보고 싶다는 분은 안 계시겠지요?

뭐, 꼭 좋은 차가 아니더라도 막히는 곳보다는 시원하게 뚫린 곳을 달리고 싶어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앞서 말씀 드린 졸음운전, 어디서 하게 되나요? 꽉 막힌 곳에서 졸음운전을 해요? 아니요. 가속페달 밟았다가, 브레이크 밟았다가 하고 정신이 없는데 언제 졸음운전을 할 새가 있습니까.

아니면 문제가 많은 자동차를 몰면 졸음운전을 하나요? 얼마 전에 동경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만, 목적지까지 거의 다 가서 기어에 좀 문제가 생겼어요. 차가 잘 안 나가는 거예요. 그렇게 되니까 어땠겠어요. 그 때까지 피곤해서 올락말락 하던 잠이 순식간에 확 달아나버립니다.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졸음운전은 차에 문제가 많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자동차 상태가 대단히 좋을 때 하기 쉽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한국이나 일본 같은 경우를 보면 고속도로를 달리더라도 적절하게 커브가 있는데, 이는 의도적으로 졸음운전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 같은 경우, 특히 서부 쪽에 외곽에 나 있는 고속도로를 보면 정말 하염없이 일직선인 곳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주말이나 그렇지 않으면 차도 많지 않아요. 그러면 자동차들도 쌩쌩 달립니다.

그것도 그냥 달리는 것이 아니에요. 한국이나 일본에도 아마 그런 기능이 있는 차들이 있을 겁니다만, 가속페달을 계속 밟고 있으면 다리가 피곤하니까, 일정 정도 가속해서 락을 걸어놓습니다. 그러면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어도 브레이크를 밟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 속도로 달립니다. 멋지죠? 그렇게 해놓으면 참 다리가 편안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해놓고 깜빡 잠이 들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보통 졸음운전이면 잠이 든 순간 페달을 밟는 힘도 빠집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 감속도 되겠지요. 하지만 속도를 예를 들어서 100킬로면 100킬로로 딱 고정시켜놓은 상태에서 발을 떼고 있었는데, 깜빡 잠이 들어서 핸들이 다른 곳으로 꺾였어요. 하지만 속도가 고정이 되어 있으니까 그 속도 그대로 도로에서 벗어납니다. 그런 상태에서 달리다가 뭔가에 부딪히거나, 뒤집히거나 하면 이건 그대로 100프로 사망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경우에 졸음운전을 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서 초보운전 때 졸음운전을 할 수 있을까요? 저도 기억납니다만, 맨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아니 어떻게 운전을 하는데 졸음이 올 수가 있을까 했어요. 그렇잖아요? 가속페달도 밟아야죠, 브레이크도 신경 써야죠. 앞에도 봐야죠. 사이드 미러, 백 미러를 살펴야죠……. 고속도로를 탔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봐야 하는 표지판이 왜 그렇게 많은지요. 출구가 가까워지면 차선도 바꿔야죠, 속도도 봐야지요, 그리고 또 경찰차가 어디서 오지나 않을까 하는 것도 봐야지요……. 이건 뭐 졸 새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어느 정도 운전에 익숙해지고 나면, 어떻습니까. 예, 언제 그랬냐는 듯이 피곤하면 나도 모르게 스르르 눈이 감기곤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참 이상합니다. 우리가 졸음운전을 언제 하게 되냐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볼 때, 면, 운전하기에 가장 나쁜 조건? 아니요, 운전하기에 가장 좋은 조건에 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잖아요? 길이 막힌 것도 아닙니다. 아주 뻥뻥 뚫렸어요. 그리고 귀찮게 오른쪽 왼쪽 커브도 없어요. 일직선 도로입니다. 자동차 컨디션도 대단히 좋아요. 쌩쌩 잘 나갑니다. 가속페달도 고정시킬 수 있는 기능도 있어요. 그리고 운전경력도 이제 초보가 아니에요.

바로 이렇게 완벽한 상황일 때, 역설적으로 우리는 졸음운전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무엘하 11장 1절부터 봅니다.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年が改まり、王たちが出陣するころ、ダビデは、ヨアブと自分の家来たちとイスラエルの全軍とを戦いに出した。彼らはアモン人を滅 ぼし、ラバを包囲した。しかしダビデはエルサレムにとどまっていた。

당시 다윗의 나이를 대략 50 정도라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젊은 날에는 오랜 세월 동안 사울에게 쫓겨가며 도망 다녔던 고달픈 시기를 보냈던 다윗, 그러나 그는 나이 서른에 왕이 되어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다고 하니, 나이 50이라고 하면 이제 왕위에 오른 지도 20년이나 되었습니다.

그의 권력은 확고부동했으며 누구도 그의 자리를 넘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휘하에는 유능한 장군들이 있었지요. 다윗과 그들은 그 동안 주변국들을 공략해서 이제는 이스라엘에 대해 직접적인 위협이 될만한 나라들은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당시 다윗은 국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대단히 안정적인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암몬군과의 전쟁을 보더라도 굳이 다윗이 출전하지 않고도 유능한 부하만으로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었습니다. 완전히 이긴 싸움이었다는 것이지요. 아마도 그렇게 생각을 했기 때문에 다윗은 전쟁에 나가지 않고 그대로 예루살렘에 머물렀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다음에 2절을 봅니다.

사무엘하 11장 2절입니다.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ある夕暮れ時、ダビデは床から起き上がり、王宮の屋上を歩いていると、ひとりの女が、からだを洗っているのが屋上から見えた。その女は非常に美しかった。

이 기록에 의하면 다윗은 저녁 때에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을 거닐었다고 합니다. 지금 시기가 어떤 상황입니까. 상대가 아무리 약소국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지금 전쟁은 전쟁입니다. 그리고 왕이라고 한다면 군대의 최고통수권자입니다. 전쟁 상황을 보고 받고, 이를 분석하고, 명령을 내리고 지휘를 해야 할 왕이, 밤새도록 무엇을 했는지 모르지만, 낮에는 계속 자다가 저녁 때 일어나서 왕궁을 산책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모습을 그의 어머니가 보았더라면 어땠을까요.

야 이 놈아. 지금 니 부하들은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는데, 전쟁 작전을 세우지는 않고 실컷 퍼 자다가 이제 부시시 일어나서 어슬렁 어슬렁 걸어다녀?

뭐, 이렇게 혼을 내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혼이 날 일은 사실 그 뒤에 더 있죠?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이렇게 바깥쪽을 보니까 어떤 여인이 목욕을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당시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집 앞마당에서 목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위쪽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그 안이 보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더구나 왕궁이라고 하니 다른 일반 주택보다는 높았으리라 하는 점은 쉽게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바깥 쪽을 봤는데 어떤 여인이 목욕을 하는 모습을 보았어요. 그렇다면 그런 모습이 보이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아이쿠. 이런……뭐 이러면서 고개를 돌려야 하는 것이 정상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딱한 우리의 다윗은 어땠습니까. 그 목욕하는 여인을 가만히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참 아름답네……뭐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범죄 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다음 구절을 봅니다.

사무엘하 11장 3절입니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ダビデは人をやって、その女について調べたところ、「あれはヘテ人ウリヤの妻で、エリアムの娘バテ・シェバではありませんか」との報告を受けた。

이 말을 보면 참 흥미롭습니다. 다른 번역문을 보더라도 다 이런 식이에요. 그냥 “아, 저 여인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입니다”가 아니라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라는 것입니다.

먼저 이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는 어떤 사람인가를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그는 헷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는 본래 이방인이라고 하는 것을 뜻합니다만 아마도 개종을 해서 이스라엘 군대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우리아는 군대에서 일반 사병이 아니었습니다. 사무엘하 23장 39절에 의하면 헷 사람 우리아는 삼십 칠인 용사 중 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군대 수가 80만에서 110만 정도라고 하는데, 이게 어느 정도인지 잘 감이 안 오시죠? 참고로 2017년 한국 군인의 수는 61만 8천명 정도라고 합니다. 그 중에서 별을 단 장군들의 수는 400여명 정도가 된다고 하는데, 62만명 정도 되는 한국 군에서 400여명 정도 안에 들어가도 대단히 높은 지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당시 이스라엘 군은 이보다도 더 많은 80만에서 110만의 병력 중에서 서열 37위 안에 들었다고 하면, 이는 대단히 높은 지위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점은 무엇인가 하면, 그 정도의 고위급 장군인 우리아였다고 한다면 당연히 다윗도 우리아를 알고 있었을 것이고, 더 나아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도 알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단순히 제 추측이 아닙니다.

다윗이 사람을 보내서 저기 목욕을 하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보라고 했더니, 그 사람이 뭐라고 했다구요? 예, “우리아의 아내입니다”가 아니라 “우리아의 아내가 아니니이까”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아니, 지금 몰라서 물으세요? 저 여자가 우리아 장군의 아내 밧세바라고 하는 건 왕도 알고 계시잖아요” 마치 이런 식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는 또 다른 생각의 교차가 이루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리 지금 대통령이나 총리의 권력이 막강하다 하더라도 옛날 왕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물론 이 점은 그 기준에 따라서 달라지지 않을까 합니다만, 생각해보면 이 말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은 아무리 대통령이나 총리라고 하더라도 돈이나 여성에 대한 문제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만, 옛날의 권력자라고 하면 얻을 수 있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돈과 여자……라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무엘하 5장 13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옵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올라온 후에 예루살렘에서 처첩들을 더 두었으므로 아들과 딸들이 또 다윗에게서 나니”

ダビデはヘブロンから来て後、エルサレムで、さらにそばめたちと妻たちをめとった。ダビデにはさらに、息子、娘たちが生まれた。


그가 몇 명의 처첩을 두었는지 명확하게 나오지는 않습니다만, 왕이었던 그가 단순히 처첩을 많이 두었다는 것만을 가지고 죄라고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의 아들 솔로몬의 경우에는 더 구체적인 숫자가 나오는데 열왕기상 11장 3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됩니다.

열왕기상 11장 3절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

彼には七百人の王妃としての妻と、三百人のそばめがあった。その妻たちが彼の心を転じた。

그러니까 후궁과 첩을 합하면 천 명이라는 숫자가 나옵니다만, 여기서도 솔로몬의 죄악을 단순히 후궁이나 첩을 많이 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방 여인들이 가지고 있던 우상들을 솔로몬한테도 섬기게 했다는 것을 용납했다고 하는 점을 하나님께서는 문제시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밧세바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죠.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였기 때문입니다.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십계명 중에서 마지막 계명이 출애굽기 20장 17절입니다.

출애굽기 20장 17절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あなたの隣人の家を欲しがってはならない。すなわち隣人の妻、あるいは、その男奴隷、女奴隷、牛、ろば、すべてあなたの隣人 のものを、欲しがってはならない。」

제왕이 아무리 많은 처첩을 두든 후궁을 두든 문제게 되지는 않았으나, 다른 사람의 아내를 탐한다는 것, 이것은 아무리 제왕이라 한다 하더라도 큰 죄였던 것이지요.


다윗의 그 부하는, 왕이 그 여인의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알아보라는 말을 했을 때, 이미 왕이 그 여인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겠지요.

왕은 암암리에 그 부하에게 “저 여인을 나한테 데려와”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하지만 부하는 왕에게 말합니다.

“왕이시여. 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이러시면 안 됩니다. 왕도 알다시피 저 여인은 우리아 장군의 아내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한 번 유혹에 사로잡힌 다윗은 막무가내입니다. 결국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자신의 최측근인 우리아 장군의 아내를 빼앗고는, 그것도 모자라서 충신 우리아 장군을 전쟁터에서 일부러 죽도록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이 죄가 얼마나 큽니까.

결국 이 결과 다윗과 밧세바 사이의 첫 아이는 죽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의 불행은 이어집니다. 다윗의 아들 암논이 배 다른 누이동생 다말을 겁탈합니다. 이에 분을 품은 오라버니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지요. 그리고 나중에는 그 압살롬이 다윗을 향해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는 불행이 이어져서, 다윗은 도망을 치게 됩니다. 그리고 끝내는 압살롬마저도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이 얼마나 피비린내 나는 역사입니까.

잠언 7장 22절~23절에 보면 유혹에 끌려가는 사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젊은이가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도다 필경은 화살이 그 간을 뚫게 되리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의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같으니라”

彼はほふり場に引かれる牛のように、愚か者を懲らしめるための足かせのように、ただちに女につき従い、
ついには、矢が肝を射通し、鳥がわなに飛び込むように、自分のいのちがかかっているのを知らない。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에 맞는 자라고까지 하신 다윗도 이와 같은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믿음의 졸음운전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권력기반도 확고하고 돈과 명예도 넘쳐납니다. 누구도 자신을 위협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탄탄대로, 커브도 없는 일직선 도로에서 졸음운전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동차에 타고 있는데, 운전하는 사람이 존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흔들어 깨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길이 안 막히고 뻥뻥 뚫리기만 한다고 조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긴장된 상태라면 졸음이 안 오도록 할 수가 있습니다. 다윗도 보세요. 나라가 평화롭고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가 없으면 누구나 다 조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긴장이 풀린 상태에서 해이해진다면 이는 아무리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라 하더라도 언제든지 졸음운전에 빠질 수가 있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고를 일으키기를 원하고 계신가요? 아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운전하고 있는데 깜빡깜빡 졸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실까요? 예, 흔들어 깨우십니다. 얘야, 어서 일어나! 빨리 일어나서 앞을 봐!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나! 이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때로는 우리에게 시련으로 닥쳐올 때도 있고, 또한 때로는 징계로 느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6절~8절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主はその愛する者を懲らしめ、受け入れるすべての子に、むちを加えられるからである。」
訓練と思って耐え忍びなさい。神はあなたがたを子として扱っておられるのです。父が懲らしめることをしない子がいるでしょうか。
もしあなたがたが、だれでも受ける懲らしめを受けていないとすれば、私生子であって、ほんとうの子ではないのです。

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운전 하다가 졸고 있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나를 흔드십니다. 깨우세요. 그러면 주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아차! 믿음 안에서 긴장이 풀려서 잘못하면 주님을 잊고 큰 사고를 일으킬 뻔했어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여기겠지요.

하지만 무조건 주님께서 주시는 시련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아이 참, 하나님도. 아니, 왜 기분 좋게 자고 있는데 신경질 나게 깨우고 그래……. 이러면 어떻게 됩니까. 예. 큰 사고를 일으키게 될지도 모르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골로새서 4장 2절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目をさまして、感謝をもって、たゆみなく祈りなさい。

우리는 믿음 안에서 항상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시련이 다가오고 있습니까. 삶이 힘드십니까. 어쩌면 지금 운전하면서 잠이 들려고 하는 나를 우리 주님께서 깨우시려고 하는 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깨어 있어야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깨어 있어야 앞을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하며 따라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깨어 있어야 마귀 사탄들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졸음운전에서 깨어나, 항상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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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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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5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2018년 7월 8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5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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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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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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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天と地を創造された神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엊그제 뉴스를 통해서 알고 계시는 분도 많으시겠습니다만, 지난 7월 6일, 옴 진리교 대표와 간부들을 비롯한 7명의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적게는 4개에서 많게는 열 개가 넘는 죄목이 있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아무래도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1995년 3월 20일 아침 출근시간에 동경에서 발생한 사건인데, 그들에 의해 자행된 이 사건만으로도 지하철 승무원이나 승객 중 사망자는 13명이고, 부상자는 무려 6,300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무슨 중동이나 분쟁지역도 아닌 대도시 동경 한복판에서 이처럼 무차별테러가 자행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일본만이 아니라 전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저지른 사건은 이외에도, 1989년 11월 4일에는 자신들의 활동에 비판적이었던 변호사에 대해서 그 변호사 당사자만이 아니라, 당시 1살이었던 장남, 그리고 아이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고 하는 부인마저도 무참히 살해한 사건, 동경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을 일으키기 바로 전해인 1994년 6월 27일에는 나가노현 마츠모토 시 주택가에서 사린가스를 이용한 범죄를 일으켜서 8명이 사망하고 600명 이상이 부상을 입는 사건을 벌이는 등, 이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들을 저질러 왔습니다.

결국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으로 총 13명이 사형선고를 받게 됩니다만,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들의 학력입니다. 한국에 보더라도 이런 잔인무도한 사건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면 사회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왔다거나 하겠으나 이 사람들을 보면 참 대단합니다.

이들 대부분이 대하 졸업자이고, 그 중에는 의과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2명, 국립대 박사과정, 와세다대 물리학과 수석졸업, 동경대 물리학과 석사……뭐 이런 식으로 대단한 학력들을 자랑합니다.

이는 단지 공부를 잘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이 자라오는 과정이, 이른바 흉악범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무슨 사회적이나 가정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꽤 평탄한 삶, 아니,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는 좋은 환경에서 자라왔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자신들이 배울 만큼 배우고 가질 만큼 가진 사람들이 도대체 왜 이런 어처구니 없는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을까 하는 생각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는 이번 사건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범죄라고 하는 것이 무슨 이런 것만이 범죄인가요. 지금 한국에 보면 정권이 바뀌면서 그 전에 자행되었던 사건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 보면 어떻습니까. 그야말로 참 배울 만큼 배우고 가질 만큼 가진 사람들입니다.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배경은 모두 가진 분들이죠. 그런데 지금은 어떠냐 하면, 전직대통령들부터 해서 모두 수갑 차고 구치소 교도소에 있습니다.

신문이나 텔레비전 보도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아니, 그게 나쁜 짓인 줄 모르고 그랬을까. 안 들킬 줄 알았을까. 못 배운 사람이 그랬다면 생각이 부족할 수도 있겠다고 하겠는데,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그런 생각도 못했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를 생각하기 위해, 먼저 오늘 본문부터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1장 1절~5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참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제가 한국 소설은 많이 읽지 못했습니다만, 일본의 유명한 책들을 보면 벌써 첫 문구부터가 다릅니다.

196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카와바탸 야스나리의 설국은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国境の長いトンネルを抜けると雪国であつた……나츠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후쿠자와 유키지의 <학문의 권유>를 보면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아니하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아니하니……”라는 첫 구절은 대단히 유명합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첫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사실 이건 제 상상입니다만, 하나님께서도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성경이 완성되고, 이로 말미암아 복음이 전파될 것인데, 그렇다면 바로 첫 구절을 어떻게 하실까 몇 번이고 생각하지 않으셨을까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첫 구절을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입니다.

참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멋진 말씀입니다.
언제? 이 세상 가장 처음에
누가? 하나님께서
무엇을?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성경의 첫 구절임과 동시에 첫 관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이 믿어진다면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을 다 믿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을 믿지 못한다면, 이는 성경에 등장하는 어떤 말씀, 홍해가 갈라지고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것을 믿는다 하더라도 이는 소용없는 일인 것입니다.

일본에 신사에 가보면 <에마>라고 해서 자기의 소원을 적어놓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몇 백 원이나 몇 천원을 내서 나무 판대기를 사고는 그 뒤에 펜으로 자기 소원을 적어놓고 걸어놓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대요. 거기 보면 뭐 자기가 원하는 고등학교나 대학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세요. 시험에 합격하게 해주세요. 취직할 수 있게 해주세요, 결혼을 할 수 있게 해주세요, 돈 잘 벌게 해주세요……등등 자신들의 소원이 적혀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주님께 자신의 기도제목을 말씀드리는 것 중요합니다. 신사나 다른 우상들에게 절하는 것은 그야말로 헛것이요, 우리 주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기도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 한 번 잘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우리가 믿은 예수님이 기껏해봐야 시험에 합격시켜주는 하나님? 입학이나 취직 시켜주는 하나님? 결혼 시켜주는 하나님? 돈 좀 벌게 해주는 하나님? 그게 다인가요?

만약에 그렇다면 그냥 평소에는 교회에 안 나오고 기도도 안 하고 있다가, 기도제목이 있을 때만 교회에 나와서 헌금하고 기도하면 되는 것 아니에요? 그래서 정말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면 오~ 땡큐땡큐! 그리고 소원이 안 이루어지면 에이, 엉터리! 그걸로 끝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믿음도 아니에요. 좋은 일이 일어나면 히히 거리고 기뻐하고, 조금 안 좋은 일이 일어나면 뱉어버리는 것은 이는 주님 앞에서 올바른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첫째로 온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둘째로, 이것이 사실 더욱 중요합니다만, 그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사랑하세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권력자들이 있습니다. 대통령도 있고 총리도 있고 왕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천지를 주재하시는 것처럼 큰 능력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나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독생자를 내줄 정도로 사랑해주나요? ㅎㅎ아니요. 어림도 없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또는 자기 가족이나 친인척을 위해서 챙기는 나쁜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 자신을 위해서 그토록 사랑해주는 권력자들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떠십니까.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이랑은 비교가 안될 정도의 힘과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만군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늘과 땅과 모든 사람들을 창조하시고 이를 지금 이 순간도 다스리고 계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를 어떻게 세상 권력자들이랑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와 같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아침에나 낮에나 밤에나 항상 함께 해주시고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아니, 이렇게 죄가 많은 우리가 어떻게 해서 그런 영광을 누릴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해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그대로 있다면 이는 백 번 죽는다 하더라도 하나님 근처에 갈 수조차 없는 우리지만,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을 채찍을 모두 맞으시고, 우리가 받을 징계를 받아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할 수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항상 기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험에 합격시켜달라고 기도했는데 떨어졌어? 괜찮아. 그래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계셔.
취직 시켜달라고 기도했는데 안 됐어? 괜찮아. 그래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계셔.
돈 좀 벌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못 벌었어? 괜찮아. 그래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계셔.

마태복음 7장 11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시시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기적인 하나님도 아닙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만큼 능력이 있으시고,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이 믿음이 어디서 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는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을 보도록 합니다.

창세기 1장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우선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요? 이는 바로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동그라면 동그랗고 네모나면 네모나야 하는데, 이건 동그랗지도 않고 네모나지도 않고, 그러면 그 안에 가득 차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텅 비어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있는 것 같은데 있는 것도 아니에요. 없는 것 같은데 없는 것도 아니고, 형태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에요. 이건 어떤 사물의 “존재”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있거나 없거나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대요. 정말 참 문학적인 말씀입니다. 흑암이라는 것 자체가 벌써 어둡다는 것인데, 어느 정도 어둡냐 하면 아주 깊을 정도로 어둡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을 좀 풀어서 말씀 드리자면 보이는 것도 잡히는 것도 없는 그런 세계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창세기 1장 3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이제 하나님께서 빛을 만드셨습니다. 이 빛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 인간의 눈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합니다. 무엇을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엇이 필요하냐 하면 <빛>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눈은 두 가지 밖에 볼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 두 가지가 뭐냐 하면 첫째는 <빛 그 자체>이고, 둘째는 <빛이 반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양을 보면 너무 눈이 부시지만 이런 조명 같은 것을 보고 알아볼 수 있는 이유는 거기서 빛이 나오기 때문에, 그 나오는 빛을 보고, 아, 저기 불빛이 있구나……하고 알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빛이 반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를 들어서 어떤 물건을 보고 빨간색을 인식하는 것은, 어떤 빛이 그 물건에 닿은 후에 빨간색만이 반사되어서 우리 눈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빨간색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파란색으로 인식하는 것은 어떤 빛이 거기에 닿았을 때 파란색만 반사되면 역시 파란색으로 인식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에 아무런 빛도 반사하지 않아요. 그러면 검정색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빛, 특히 태양빛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모든 색깔이 다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이른바 <빛>의 색깔이라고 하면 어떤 색을 떠올리세요? 예, 흰색을 떠올립니다만, 예를 들어서 어떤 물건의 색깔을 형광등으로 보는 것과 태양빛으로 보는 것과는 그 선명도가 다릅니다. 어느 쪽이 선명하게 보이냐 하면 바로 태양빛으로 볼 때가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이는 단순히 태양빛이 더 밝아서가 아니라, 쉽게 말하자면 형광등에 포함된 색 종류보다 태양빛에 포함된 색깔 종류가 월등히 많기 때문에 이렇게 바깥에서 볼 때가 더욱 선명하고 자연스러운 색깔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먼저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즉, 안 보이는 세계에서 순식간에 보이는 세계가 된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무엇이 다릅니까. 그것은 바로 앞이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의 차이인 것입니다.

아무리 차가 좋아요. 좋은 차가 뭐죠? 뭐, 벤츠나 BMW, 정말 밟으면 잘 나갑니다. 속도도 빠르고 승차감도 뭐 잘 모르겠습니다만 뛰어나다고 합시다. 그러면 좋은 차죠?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문제가 뭐냐 하면 앞이 안 보입니다. 앞 유리가 시커매요. 그러면 여러분 타시겠습니까? 아니요. 절대로 그런 차는 타면 안 됩니다. 아무리 속도가 빠르면 뭘 합니까. 아무리 승차감이 좋으며 뭘 해요. 앞이 안 보이는데. 만약에 그런 차를 타고 신나게 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대형사고가 나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입니다.

지금 제가 대형사고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대형사고가 뭐예요? 아닌 말로 사고를 내서 자기만 죽으면 대형사고는 아니죠. 자기만 죽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죄 없는 사람들까지도 함께 죽게 만드는 것 이것이 대형사고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옴진리교의 간부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교도소나 구치소에 수감중인 전직 대통령이나 공직자들. 이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사회적으로 보면 엘리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벤츠나 BMW라고 할 수 있었겠지요. 말 그대로 잘 나가는 삶을 살아왔었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 신세가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까.

그것은 바로 빛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빛이 없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앞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를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힘보다는 내 힘, 하나님의 능력보다는 내 능력을 의지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힘들고 고달프십니까. 일이 잘 안 풀리십니까.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시련이 닥치고 어려운 일들이 자꾸 일어나십니까. 기도를 해도 응답이 안 오고 그러는 것 같습니까.

그럴 때면 성경을 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창세기 1장 1절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그 곳에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천지를 주재하시는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내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맞이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전인 우리는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는 존재,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빛을 비추십니다. 이제 우리가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만군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좌절하지 맙시다. 포기하지 맙시다. 낙심하지 맙시다. 우리 모두 만군의 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주님께서 인도해주시는 빛을 따라 승리의 길, 축복의 길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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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회 지피지기
2018년 7월 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28장 13절~14절
"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하니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하는지라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의 모양이 어떠하냐 하니 그가 이르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하더라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의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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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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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지피지기” 相手を知り己を知る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제 여름이 되고 그러면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납량특집이다 뭐다 해서 무서운 귀신 이야기 같은 것을 하거나 호러영화 같은 것이 나오거나 합니다.

글쎄요. 다른 분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런 무서운 영화를 본다고 해서 더위가 줄어드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항상 여름철만 되면 귀신 영화다 공포 영화다 하는 것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귀신 무섭습니까. 그렇죠. 무서운 것이 보통입니다. 무섭지 않다고 하시는 분들도 사실 실제로 보면 무서울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 중에는 말씀을 전할 때 무슨 마귀 이야기밖에 안 하는 분이 계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그건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사실 우리가 주님에 대해서 잘 알아야겠습니까, 아니면 마귀에 대해서 잘 알아야겠습니까.

호세아 6장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ホセア書 6章 3節
「私たちは、知ろう。主を知ることを切に追い求めよう。主は暁の光のように、確かに現れ、大雨のように、私たちのところに来 、後の雨のように、地を潤される。」」

성경에는 우리가 힘써 여호와를 알자, 힘써 하나님을 알자는 기록은 있습니다만, 힘써 마귀를 알자, 힘써 귀신을 알자……하는 기록은 없습니다.


귀신과 마귀와 사탄의 차이를 본다면 기본적으로 같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만, 그렇다면 귀신은 있는 것인가요, 없는 것인가요. 예, 있습니다. 왜죠? 어떻게 알아요? 예, 다름 아닌 성경에 적혀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귀신에 대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마귀 사탄에 대한 이해를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먼저, 귀신을 무섭다고 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가장 대표적인 이유는 우리가 잘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예능프로 같은 데에서 그런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어요.

어떤 상자가 있어요. 거기에는 관객들이나 시청자들한테는 그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게 뭔지 알아요. 그런데 그 상자 저쪽에 서 있는 사람한테 있어서는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모릅니다. 양쪽에 구멍이 나 있는데 거기로 손을 넣어서 만져보고, 그게 무엇인지를 알아 맞추라는 게임입니다. 혹시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러면 그 사람들의 모습이 어때요? 조심스럽게 손을 넣어보았다가 뭐라도 살짝 손끝에 닿았다가는 기겁을 하고 손을 뺍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본다면 TV방송에 나가는 건데 위험한 거나 무서운 게 들어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기껏 해봐야 무슨 묵이나 오징어 같은 것이 있을 정도입니다마는, 당사자는 뭔가 물컹거리는 것을 슬쩍 만지는 순간 너무나도 무서워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무서워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거기에 위험한 것이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알기만 하더라도 무섭지가 않을 텐데 전혀 모르기 때문에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도 무서워하고 그러는 것이지요.

우리가 귀신이나 마귀를 무서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처럼 우리가 잘 몰라서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때문에 이것이 오히려 영적으로 덫이 되어서 마귀 사탄의 꼬임에 넘어가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영적으로 제대로 알고, 마귀 사탄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 그 믿음의 핵심은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그 이상도 아니요, 그 이하도 아닙니다. 성경에 적힌 것을 전하지 않는다면 이는 복음이 아니거니와 성경에 적혀 있지 않은 것을 전한다고 한다면 이 또한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마귀나 사탄은 무슨 머리에 뿔이 나고, 엉덩이에는 꼬리가 달리고, 시커멓게 생기고는 삼지창 같은 것을 들고 다닌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마귀들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기록합니까.

요한계시록 12:9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こうして、この巨大な竜、すなわち、悪魔とか、サタンとか呼ばれて、全世界を惑わす、あの古い蛇は投げ落とされた。彼は地上に投げ落 とされ、彼の使いどもも彼とともに投げ落とされた。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합니다. 여러분도 가끔 신문에 보면 여러 가지 사기 수법으로 사람들을 속이는 사람들,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딱 보면 벌써 사기꾼처럼 생겼어요? 글쎄요. 사기꾼처럼 생겼다는 게 어떻게 생긴 것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대부분 정말 성실하고 멀쩡하게 생겼을 것입니다. 정말이지 그 사람이 사기를 친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바로 상상도 하지 못하는 엄청난 사기를 치곤 하는 것이지요.

아무리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렇지, 머리에 뿔 달리고 그렇게 무섭게 생긴 마귀가 와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라고 하면 그 말을 듣겠어요? 안 듣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고린도후서 11장 13절~14절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こういう者たちは、にせ使徒であり、人を欺く働き人であって、キリストの使徒に変装しているのです。
しかし、驚くには及びません。サタンさえ光の御使いに変装するのです。

세상에,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충격적인 말씀입니까.

사실 제가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지난 주에 잠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며칠 동안 인터넷 작업을 하느라고 밤잠을 설칠 때의 일이었습니다. 밤을 꼬박 새고, 아침 5시인가 6시쯤에 잠시 잠이 들었을 때였는데, 아침 일찍 누가 초인종을 누르는 것입니다. 아마 8시나 9시쯤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만, 그래서 도대체 무슨 일일까 하고, 문을 닫은 채로 누구시냐고 물어보니까, 어떤 여자분이 무슨 행사가 있다고 해서 안내하러 왔다고 해요. 그러면서 안내책자를 문에 있는 신문받이에 넣어둘 테니까 읽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참 부지런하기도 해요. 그런데 예전에도 그런 분이 한 번 찾아온 적이 있었거든요. 그 때는 무슨 육아에 관한 행사가 있다나 해서 아이가 있는 가정을 대상으로 행사 안내를 한다고 해요. 그래서 이번에도 무슨 그런 행사인가보다 하고, 그 사람이 넣어둔 종이는 꺼내보지도 안고, 그대로 다시 가서 눈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 속에서 똑 같은 광경이 일어난 것이에요. 똑같이 어떤 여자가 초인종을 누릅니다. 그런데 문을 열어주니까 이런저런 사람들이 와글와글 들어와요. 그리고 저희 집에 있는 살림살이를 다 뜯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니, 왜 이러시냐고 그러니까, 자기들이 그것들을 다 새 것으로 바꾸어주겠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아니, 이거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고, 우리가 이사 오기 전에 완전히 다 주인이 새것으로 바꾸어준 것이라고 했더니만, 아니, 그래도 괜찮다는 거예요. 자기들이 다 떼어내서 공짜로 다 바꾸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뭐 그런가 보다 하고 있었습니다만, 나중에 보니까 청구서가 날라온 거예요. 그리고 그 청구서에는 완전히 말도 안 되는 금액이 적혀 있었던 것입니다. 꼼짝없이 그 돈을 내야 하게 된 거죠. 그러니까 뭐예요? 완전히 속은 것 아니겠습니까.

완전히 속았다는 생각에 어이없어 하다가 보니 잠에서 깨어났어요. 그래서 도대체 아까 찾아온 그 사람이 누구였을까 하다가 그 사람이 넣고 간 종이를 보니까 참 기가 막혔습니다. 어디라고 구체적으로는 밝히기는 그렇고, 단적으로 말씀 드린다면 기독교를 가장하고, 성경을 올바로 전한다고는 도무지 여겨지지 않는 곳에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마귀나 사탄이 무슨 나쁜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에만 있는 것 같으십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사령부에서 명령이 떨어졌는데, 그 명령을 전방 부대한테 올바로 전달하는 것이 아닌 잘못 전달을 하게 되다면, 그 사람이 아무리 우리 군 군복을 입고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우리 군, 우리 나라를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적군을 이롭게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자기들도 성경을 가르치고 있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성경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과 아무리 갖은 것이라도 하더라도, 이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면, 이는 우리를 이롭게 하는 거이 아니라 적군을 이롭게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야말로 사탄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습니까.


사탄은 처음에는 모든 것을 다 주는 것처럼 접근합니다.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준대요. 그렇다면 그것은 사탄이 우리를 사랑해서, 사탄이 우리 잘 되는 것을 바라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일은 99.9%가 아닌 100% 없습니다. 사탄이 바라는 것은 결국은 처음에는 우리에게 잘 해주는 것 같다가도 나중에는 모든 것을 빼앗아가고 우리를 타락시키는 것, 그것만을 목적으로 삼고 있고, 그것만을 자신들의 기쁨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는 뭐라고 기록합니까.

잠언 24장 1절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悪い者たちをねたんではならない。彼らとともにいることを望んではならない。

마귀 꼬임에 넘어가서 주님을 떠나 세상과 벗이 되어 잘 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요? 결국 끝내는 타락하고 말기 때문인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수포로 돌아가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또 귀신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명절이나 제삿날이면 음식을 차려놓고 절을 하지요. 그러면 죽은 영이 와서는 그 음식을 잘 먹고 간다는 것입니다. 이는 한국만이 아니라 일본도 그런 풍습이 있지요. 바로 오봉이 그렇습니다. 일본에서는 8월 중순 쯤에 있는 오봉에는, 자기 조상님들이 저승에서 오면 며칠 동안 머물다가 간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대접을 잘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누가복음에 보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서 지옥에 떨어진 부자가 아브라함한테 간청을 합니다.


누가복음 16장 27절~31절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彼は言った。『父よ。ではお願いです。ラザロを私の父の家に送ってください。
私には兄弟が五人ありますが、彼らまでこんな苦しみの場所に来ることのないように、よく言い聞かせてください。』
しかしアブラハムは言った。『彼らには、モーセと預言者があります。その言うことを聞くべきです。』
彼は言った。『いいえ、父アブラハム。もし、だれかが死んだ者の中から彼らのところに行ってやったら、彼らは悔い改めるに違いありません。』
アブラハムは彼に言った。『もしモーセと預言者との教えに耳を傾けないのなら、たといだれかが死人の中から生き返っても、彼らは聞き入れはしない。』」

부자는 아브라함한테 불구덩이 속에서 말합니다. 내 형제들한테 나사로를 보내서, 너희들은 이런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는 말을 전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이 목적 자체는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지만 아브라함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 그러니까 지금으로 본다면 성경이 있기 때문에 이를 읽어보면 다 안다. 만약에 성경을 믿지 않는다고 한다면 아무리 죽은 사람이 가서 말을 한다 하더라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라고 하신 말씀은, 이 나사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귀신이라고 하는 것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죽은 사람의 그 원혼이 구천을 떠돌며 다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성경은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ヘブル人への手紙 9章 27節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사람이 한 번 죽으면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분명히 성경을 말씀하십니다. 심판은 무엇이겠습니까. 천국으로 갈 것이냐 아니면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성경에는 다른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심판을 받은 영혼이 다시 이 땅에 와서 사람들 앞에 나타나거나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른바 귀신을 봤다거나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귀신들이 어디 많이 있대요? 예, 누가 죽은 곳에 가면 거기 귀신이 나온다지요? 한국에는 그런 제도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본에는 이른바 사고물건이라고 해서 무슨 사람이 죽은 집 같은 곳은 집값이 싸진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곳은 거기서 죽은 사람이 나온다는 것인가요?

여러분, 어떤 집에서 옛날에 어떤 사람이 죽었대요. 그러면 그 집 들어가려고 하면 무섭지요? 하지만 우리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 중에서 사람들이 제일 많이 죽어나가는 곳이 어디에요? 예, 병원입니다. 만약에 사람이 많이 죽은 곳이 무서운 곳이라면 우리는 병원에 갈 때마다 소름이 오싹오싹 돋아야 해요. 머리카락이 쭈삣쭈삣 서야 합니다. 큰 병원이면 큰 병원일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셨겠지요.

생각해보세요. 사람 하나 죽었다고 귀신이 나온다면 예를 들어서 대학병원 같은 곳은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득실거리겠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무서워하나요? 아니요. 안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옛날에 어디서 누구 한 사람이 죽었다고 하면 무섭대요. 그리고 꼭 그런 곳은 밤에 가요. 아니, 여보세요. 그런 음침한 곳은 아무런 일이 없더라도 밤에 가면 무서워요. 왜 무섭겠어요? 잘못하면 어디 걸리거나 뭘 헛 딛어서 넘어질 수도 있고 미끄러져서 사고라도 날 수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지, 죽은 귀신이 다시 나타날까봐 무서워한다는 것은 이는 성경적이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떤 분은, 반박을 합니다. 죽은 영혼이 나타난다는 구절이 있다……라고 하면서 말씀하시는 부분이 바로 오늘 구절입니다.

오늘 구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택하여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세우셨습니다만, 사울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높이고, 그리고 하나님 명에 순종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생각을 우선하는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참다참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이제 어떤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지 않으십니다. 응답은커녕 오히려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을 괴롭힙니다.

때는 블레셋과 전쟁이 시작되었을 무렵입니다. 사울은 길보아 산에 이스라엘 군의 진을 쳤으나, 블레셋 군을 보고 너무나도 떨렸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하지만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십니다. 결국 그는 참다가 못해 예전에 자신이 금했던 무당을 찾아가서는 이미 죽은 사무엘의 영을 불러달라고 해서, 사무엘의 영으로부터 말을 들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무당이 사무엘의 영을 불어오는데, 그에게 사울은 말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하나님은 자기를 떠나서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말했으면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렇게 이렇게 하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거나 하는 말을 들을 줄 알았는데, 기가 막힌 말을 합니다.


사무엘상 28장 16절~20절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여호와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네게 행하사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라 하는지라 사울이 갑자기 땅에 완전히 엎드러지니 이는 사무엘의 말로 말미암아 심히 두려워함이요 또 그의 기력이 다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루 밤낮을 음식을 먹지 못하였음이니라”

第一サムエル記 28장 16절~20절
サムエルは言った。「なぜ、私に尋ねるのか。主はあなたから去り、あなたの敵になられたのに。
主は、私を通して告げられたとおりのことをなさったのだ。主は、あなたの手から王位をはぎ取って、あなたの友ダビデに与えられた。
あなたは主の御声に聞き従わず、燃える御怒りをもってアマレクを罰しなかったからだ。それゆえ、主はきょう、このことをあなたにされたのだ。
主は、あなたといっしょにイスラエルをペリシテ人の手に渡される。あす、あなたも、あなたの息子たちも私といっしょになろう。そして主は、イスラエルの陣営をペリシテ人の手に渡される。」
すると、サウルは突然、倒れて地上に棒のようになった。サムエルのことばを非常に恐れたからである。それに、その日、一昼夜、何の食事もしていなかったので、彼の 力がうせていたからである。

여기서의 가장 큰 핵심 중 하나가 이 영이 사무엘이 맞냐 하는 것입니다.

이 사무엘상 28장을 읽다 보면 마치 사무엘이 사울 앞에 나타나서 말을 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만, 자세히 보면 그게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무엘상 28장 13절~14절
“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하니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하는지라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의 모양이 어떠하냐 하니 그가 이르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하더라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의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第一サムエル記 28장 13절~14절
王は彼女に言った。「恐れることはない。何が見えるのか。」この女はサウルに言った。「こうごうしい方が地から上って来られるのが見えます。」
サウルは彼女に尋ねた。「どんな様子をしておられるか。」彼女は言った。「年老 いた方が上って来られます。外套を着ておられます。」サウルは、その人がサムエルであることがわかって、地にひれ伏して、おじぎをした。

이 말씀을 본다면 사울은 아무 것도 보지 못했고, 신접한 여인은 무언가를 봤습니다. 그렇다면 그 신접한 여인이 무엇을 봤는지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로, 땅에서 올라오는 영을 보았습니다.
둘째로, 그 영은 겉옷을 입은 노인이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사울은 아, 사무엘이구나! 하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사무엘이었다고 한다면 이는 앞서 말씀드린 성경구절 어디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었던 사무엘의 영이 땅에서 올라와요?

그리고 19절 말씀을 보면 결정적입니다.

사무엘상 28장 19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라 하는지라”
第一サムエル記 28장 19절
主は、あなたといっしょにイスラエルをペリシテ人の手に渡される。あす、あなたも、あなたの息子たちも私といっしょになろう。そして主は、イスラエルの陣営をペリシテ人の手に渡される。」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었던 사무엘은 죽은 후에 당연히 천국에 갔을 것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사울은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 분명한데, 사울의 죽음을 예언하면서, 내일 나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했다는 것을 본다면 이는 백 보 양보를 한다 하더라도 천국에 있는 사무엘의 말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영은 누구겠습니까. 이는 분명합니다. 이는 바로 사무엘을 가장한 악한 영, 마귀 사탄인 것입니다. 마귀 사탄도 미래에 대한 예측을 합니다. 대단히 놀라운 장면이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8장 29절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すると、見よ、彼らはわめいて言った。「神の子よ。いったい私たちに何をしようというのです。まだその時ではないのに、もう私たちを苦しめに来 られたのですか。」

마귀들은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았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즉, 자신들이 멸망할 때가 아직 멀었는데 벌써 오셨냐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마귀 사탄들은 장차 자기들이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까지도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루어본다면 마귀가 사울의 미래에 대해서 예측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결국 신접한 여인이 본 영은 사무엘의 영 아니라, 사무엘을 가장한, 사무엘인 척한 마귀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른바 생각하는 귀신들은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영이 나타나서 떠도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이처럼 그 사람의 영을 가장해서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짓을 할까요. 이는 마귀들에 대한 공포를 느낀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해왔는지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악령들에 대해서 공포를 느끼면 어떻게 합니까. 무슨 산당을 짓거나 신사나 성황당 같은 것을 지어서 귀신을 모십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절을 하고 예물을 바치고 경배를 합니다. 바로 그들이 받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우상들도 예외 없이 마찬가지였습니다.

마귀 사탄은 자신을 경배하라고 합니다. 자신을 대접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을 가로채서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려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4장 9절을 봅니다.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言った。「もしひれ伏して私を拝むなら、これを全部あなたに差し上げましょう。」

사탄이 이 말을 누구한테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한테 했던 말입니다. 이 무서울 줄 모르는 사탄은 오죽하면 예수님한테까지도 자기한테 엎드려 경배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마귀한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4장 10절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イエスは言われた。「引き下がれ、サタン。『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拝み、主にだけ仕えよ』と書いてある。」

예수님의 대답은 명확했습니다. “사탄아, 더러운 귀신아 물러가라” 였습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타협의 여지도 없습니다.

마귀가 무서우십니까. 귀신이 무서우십니까. 우리가 두려워 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마귀 사탄은 우리를 두렵게 만들어서 자기들을 경배하도록 만드는 것이 그 목적인 것입니다.

쉽게 말씀 드리면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여기서 누가 목매달아서 죽었다더라……라고 믿으면 사탄은 목매달아 죽은 귀신으로 둔갑해서 나옵니다. 칼에 찔려 죽었다더라……라고 믿으면 칼에 찔려 죽은 귀신으로 둔갑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요? 예, 사람들이 무서워해서 자기들을 대접하라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경배하라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섬기라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두려워하라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한테 순종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탄을 무서워해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전쟁을 하는데 마치 사울처럼 적군을 무서워하면 이미 그 전쟁은 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버리신 사울은 수많은 블레셋 군대를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점쟁이를 의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다윗은 어떻습니까.

사무엘상 17장 47절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この全集団も、主が剣や槍を使わずに救うことを知るであろう。この戦いは主の戦いだ。主はおまえたちをわれわれの手に渡される。」

전 이스라엘 군대가 공포 속으로 몰아넣은 골리앗을 앞에 두고 청년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담대하게 외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용사, 하나님의 용사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귀 사탄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닙니다. 물리쳐야 할 대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능력으로요? 아니요. 마귀 사탄은 우리의 힘으로 물리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미 마귀의 정체를 모두 다 드러냈습니다. 다 들통났습니다. 몰랐을 때에는 무서웠지만 이제 알게 되었기 때문에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알고 보면 이건 완전히 눈속임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담대함으로 말미암아 마귀를 물리치고 주님의 이름으로 승리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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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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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3회 능력 주시는 하나님
2018년 6월 2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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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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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능력 주시는 하나님” 強くしてくださる方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한 주 동안을 되돌아보면 참 골치가 아팠던 한 주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혹시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팟캐스트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스마트폰으로 오디오나 동영상을 이용하는 서비스입니다.

현재 저는 주일날 전해드리는 말씀을 동영상으로 다시 촬영을 해서 유튜브에 올리고는 한국이나 일본을 비롯해서 여러 곳에 이메일을 발송을 해드리고 있습니다만, 이 유튜브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독립된 서비스라는 개념이 있는데, 팟캐스트 같은 경우에는 동일한 하나의 서비스로서 제공하기 때문에 많은 분들에게 있어서 접근성이 좋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팟캐스트의 지명도가 높이 때문에 한 번 등록이 되면 여기저기에 연결이 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점에 대해서 본다면 대단히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오래 전부터 이미 많은 목사님이나 교회에서 이용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라고 하니까 잘 모르겠다, 내가 너무 뒤쳐졌나보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니요, 괜찮습니다. 사실 저도 한국에서 학원에 근무하고 있을 때, 학원측으로부터 팟캐스트를 하자고 제안을 받았을 때까지 그게 뭔지 잘 몰랐습니다.

당시는 잘 차려진 스튜디오에서 수업 자료만 들고 가서 녹음만 하면, 나머지는 회사 쪽에서 전문가들이 다 알아서 해주었기 때문에 저는 그게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등록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걸 해야 할 것 같아요. 유튜브만 가지고는 안 될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 제가 가졌던 또 하나의 생각은, 내가 돈이 있어서 무슨 서버를 임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전문지식이 있는 것도 아닌데 가능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긴 해야 하는데, 잘 될까……하는 막연한 불안감만 가지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습니다만, 결국 지난 주일에 작심을 하고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그랬더니 이게 아니나다를까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단 포토샵으로 이미지부터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인터넷에 올라온 글을 찾아서 설명서를 읽으면서 하나하나 해 가는데, 이건 뭐 그림을 등록하는 사이트가 다르고, 자료를 올리는 사이트가 다르고, 자료를 등록하는 사이트가 다르고……그리고 이걸 또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이것도 참 까다로웠습니다. 관련된 사이트만 보니까 총 4개의 전혀 다른 사이트에 자료를 올리고 승인을 받고 그리고 프로그램도 새로 깔고 그래야 했었지요. 제가 그래도 지금까지 컴퓨터도 좀 만지고 그랬습니다만, 적지 않게 생소한 것들 투성이였습니다.

그래서 이 며칠간 참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아, 난 왜 이런 것도 제대로 못할까 하고 자괴감도 들기도 했고요, 정말 도중에 포기하고 싶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결국 어찌어찌 해서 승인이 됐어요.

자, 이제 승인이 되었다고 하면 일이 모두 끝난 게 아니라 이제부터 일이 시작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이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자료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 동영상을 음성파일로 하나하나 바꾸어야 했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설교 동영상이 지난 주 것까지 합하면 총132회분 정도 되었습니다. 이를 하나하나 음성파일로 바꾸어주고, 그걸 또 사이트에 올리고, 그러면서 한 쪽에서는 이 자료 내용을 하나하나 엑셀로 작성을 해서 다른 곳에 등록시켜야 합니다.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그렇습니다만, 이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많이 하고 그랬지요. 아마도 이걸 해본 사람이나 전문가들이 들으면, 그것 별것도 아닌데 뭘 그러느냐 하고 생각하겠습니다만, 옆에서 누가 가르쳐주거나, 누구한테 물어볼 사람도 없고 그런 상황이다 보니 참 갑갑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결국 2~3일 정도는 밤을 꼬박 샜던 것 같아요. 그 결과 참 은혜롭게도 지난 주 것까지 무사히 등록을 완료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참 놀라웠는지 모르겠어요. 이걸 한다고 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해냈다는 것에 대해서 참 감사했습니다.

무사히 132회분 설교를 등록 시키고는 저희 집사람한테 자랑을 했지요. 이걸 보라고 그랬더니만 조금 보고 난 다음에, 대단히 충격적인 말을 한 마디 했습니다.

이거 일본어판도 있어야 되는 것 아니에요? 그러더라구요.

아니, 지금 내가 이걸 등록하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래? 당신이 옆에 있으면서 계속 봤잖아? 내가 며칠 밤을 샜는지 알아? 막 이런 말을……하려고 했습니다만 하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왜일까요? 예, 그게 맞는 말이었거든요. 이 팟캐스트라고 하는 것은 나라별로 다르기 때문에 한국 쪽에 일본어를 등록해봤자 일본사람들한테는 검색이 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뭐예요? 예, 처음에 승인을 받는 것부터 다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걸 또 언제 하냐……하고 하나하나 시작을 해보았더니만, 이미 한 번 해보았기 때문에 이제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어요. 자료를 만들고 승인을 얻고 파일을 올리고 이를 등록하고 하는 절차가, 물론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은 걸렸지만 처음 할 때처럼 그런 시행착오나 실수 없이 몇 시간 만에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제가 이 과정, 무슨 대단한 과업을 이룬 것은 아니지만, 이 일을 하면서 느낀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컴퓨터 그림 프로그램이나 엑셀, 사운드 프로그램에 대해서 제대로 배운 적이 없습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항상 기초가 딸리고 여전히 모르는 것도 많지요.

하지만 요즘 제가 드는 마음이 어떤 거냐 하면, 이 순간을 위해서 주님께서 인도해주지 않으셨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엑셀 같은 것을 처음 배웠지요.


엑셀에 대해서는 당시 그 부서에서 무슨 귀찮은 회계 정산 업무가 있었는데, 대리나 과장이 그런 일을 하기 좋아하겠어요? 그러니까 결국 어쩔 수 없이 제일 말단이었던 제가 하게 되었습니다. 참 그게 얼마나 귀찮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는 얼마 뒤에 그 회사를 그만 뒀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그 중 하나는 분명히 그 엑셀 작업을 하기가 싫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얼마 후에 다른 회사에 들어갔는데, 조금 있으니까 사장이 저를 불러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홍성필씨, 지금 우리 회사에서 당신만큼 엑셀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회계처리를 자네가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참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모릅니다. 무슨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인 격도 아니고 참 난감했습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또 회사를 나올 수는 없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몇 년 동안 그 일을 하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워드 쓰는 방법이나 포토샵 또는 사운드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비슷한 식으로 익히게 되었지요. 정말 자의반 타의반……아니, 거의 타의로 어쩔 수 없이 배웠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다른 사람들은 학원에 다니면서 돈을 내고 배웠는데 저는 꼬박꼬박 월급을 받으면서 배운 결과가 되었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저는 한국에서 운전면허도 없었습니다. 서울에 교통이 좀 잘 되어 있나요. 교통비도 일본에 비하면 월등히 쌉니다. 지하철에 버스도 잘 되어있고, 조금 급하다 하면 택시를 잡으면 되요. 비싼 돈 내가 차를 몰거나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 2000년에 미국생활을 시작했는데, 거긴 정말 대중교통이 없어요.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결국 면허를 딸 수 밖에 없었지요. 제가 이래봬도 운전면허에 있어서 만큼은 미국 유학파입니다. 아, 물론 거기서 배우기는 한국 사람한테 배웠지만요.

만약 그 때 운전면허를 따지 않았다면 제가 이 나이에 이 대중교통이 너무나도 부족한 군마현에 와서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일본어도 마찬가지겠지요. 제가 처음으로 일본에 올 때에는 아직 한국이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나 외국에 나갈 수가 없을 때였지요. 그 때 제가 무슨 제 노력이나 실력으로 일본에 온 것이 아니에요. 그냥 어린 나이에 멋도 모르고 부모님 따라서 온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일본에 살면서 학교에 다니다 보니 일본어를 그래도 이 정도로 하게 되었어요.

지금까지 제 이야기를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무슨 자랑이라도 되는 것처럼 들렸을지도 모르겠어요. 조금 생각하시면 아실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열심히 배워서 무엇을 해야겠다, 또는 내가 무엇이 되어야겠다 하고 해온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이렇게 걸어오다 보니까, 이것도 할 수 있게 되고, 저것도 하게 된 것일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그래도 몇 년 선교활동을 하다 보니 아, 사람들이 왜 일본선교가 어렵다고 하는지 조금은, 아주 조금은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디 어려운 게 일본 선교 뿐이겠습니까. 전세계에서 지금도 고군분투하고 계신 선교사님들은 물론이거니와 국내에서 목회하시는 분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고 보면 힘든 게 선교 뿐인가요? 외국에서 생활하는 분들도 힘들고 국내에서도 여러 가지 힘든 일들은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번 일, 뭐 몇 번이나 말씀 드리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만, 이번 작은 일을 겪으면서 느낀 것은,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아, 주님께서 어쩌면 이 때를 위해서 지금까지 나를 인도해주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치밀한 계획을 세워서 어렸을 때 일본에 왔던 것도 아니요, 피나는 노력을 해서 일본어를 익힌 것도 아니요, 비싼 돈을 들여가면서 컴퓨터를 배운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계획하셔서 지금까지 온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 엑셀이나 포토샵이나 컴퓨터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전문가가 제 실력을 알면, 비웃을 것입니다만 그래도 이 부족한 실력도 주님께서 쓰시기 위해 예비해주셨다고 하면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바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을 보면 정말 대단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마태복음 21장 8절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すると、群衆のうち大ぜいの者が、自分たちの上着を道に敷き、また、ほかの人々は、木の枝を切って来て、道に敷いた。

정말 온 예루살렘이 떠내려갈 정도로 찬양이 울려 퍼집니다. 그런데 그 찬양을 예수님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타신 나귀새끼도 듣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겉옷을 길에 펴고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는 예를 갖추었을 때 그 위를 직접 밟고 가는 것은 나귀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나귀가 했던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냥 예수님이 이쪽으로 가자고 하면 이쪽으로, 저쪽으로 가자고 하면 저쪽으로 갔을 뿐이었습니다. 이처럼 온순하게 따랐던 나귀는, 자기 스스로는 아무런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놀랍게 쓰임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구약에서 보면 애굽에 팔려간 요셉이 총리가 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까, 아니면 다윗이 왕이 되기 위해서 선거운동을 했습니까.

사무엘하와 역대하에 보면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장차 있을 영광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다윗에게 전할 때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역대상 17장 16절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라고 고백을 합니다.

ダビデ王は行って、主の前に座し、そして言った。「神、主よ。私がいったい何者であり、私の家が何であるからというので、あなたはここまで私を導いてくださったのですか。

이는 전혀 과장된 겸손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까지 왕이 되려고 한 것도 아니요, 왕을 넘볼 정도로 훌륭한 집안에 태어난 것도 아니요, 그저 보잘것없는 집안, 그것도 장남도 아닌 제일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기 위해 야곱처럼 기를 쓰고 노력한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놀라운 축복을 주신다는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다윗을 보면 죄도 많이 짓고 그랬습니다만, 항상 주님과 가깝게 지냅니다. 자기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자기가 잘못을 저지르면 곧바로 무릎 꿇고 회개를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귀여우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가난할 때나 부할 때나 어려울 때나 즐거울 때나 항상 주님을 가까이 합니다. 그러니 축복을 안 받을래야 안 받을 수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장 26절~29절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兄弟たち、あなたがたの召しのことを考えてごらんなさい。この世の知者は多くはなく、権力者も多くはなく、身分の高い者も多くはありません。
しかし神は、知恵ある者をはずかしめるために、この世の愚かな者を選び、強い者をはずかしめるために、この世の弱い者を選ばれたのです。
また、この世の取るに足りない者や見下されている者を、神は選ばれました。すなわち、有るものをない者のようにするため、無に等しいものを選ばれたのです。
これは、神の御前でだれをも誇らせないためです。

그렇기 때문에 주님 안에서는 아무리 힘 있고 아무리 돈 많다 하더라도 교만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ですから、立っていると思う者は、倒れないように気をつけなさい。

마태복음 3장 9절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われわれの父はアブラハムだ』と心の中で言うような考えではいけない。あなたがたに言っておくが、神は、この石ころからでも、アブラハムの子孫を起こすことがおできになるのです。

나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다, 내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을 주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기뻐하시기는커녕 거들떠보지도 않으십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겸손한 가운데에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을 도구로 사용하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당장 신학을 해서 목사안수를 받아야 하나요? 그리고 선교사로 나가야 하나요? 아니면 전재산을 팔아서 주님께 기부해야 합니까.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시겠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私は、私を強くしてくださる方によって、どんなことでもできるのです。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게 능력을 주십니다. 자, 내가 너를 도구로 쓰려고 하니까 네가 열심히 노력해서 멋진 도구가 되어서 와……이게 아닙니다. 내가 너를 도구로 쓰려고 해. 그래서 뭐예요? 나더러 노력하라? 아니요. 내가 너한테 능력을 줄거야. 너를 내가 원하는 도구로 만들어 줄 거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쓰려고 해. 내 도구로 쓰임을 받으면 너는 축복을 받아. 이를 위해서 너를 내 손에 딱 맞는 도구로 만들 거야.

그러면 우리는 뭘 하면 되요? 예,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등에 태운 나귀처럼 이리로 가라고 하면 이리로 가고, 저리로 가라고 하면 저리로 가면 됩니다. 자, 일본에 가서 일본어도 배우고 월급 받으면서 엑셀도 배우고 포토샵도 배우고 그래.

이유? 내가 너 나중에 써먹으려고 그러는 거야.

바로 이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팟캐스트가 사실은 아이폰을 개발한 미국 애플사에서 운영하는 회사입니다만, 제 팟캐스트도 승인을 해주고 그랬으니 그 애플사의 창업주인 스티브 잡스 얘기를 한 번 해볼까 합니다.

이는 그가 2005년 미국 스탠포드대학교 졸업식 때 했던 연설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그가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 집안 사정이 안 좋았는데, 가만히 계산을 해보니까 자기가 졸업할 때까지 대학에 다녔다가는 자기 부모님의 재산을 모두 탕진할 것 같더라는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대학을 졸업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학을 그만두었습니다. 학교를 그만둔 그는 정규수업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돈도 없었지요. 그래서 그는 글자 서체에 대한 수업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수업은 자신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큰 감명을 주었지만, 반면에 컴퓨터도 없던 그 시절 글자 서체에 대한 수업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어떻게 도움이 될 것인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 뒤에 그가 컴퓨터를 개발할 때, 바로 그 옛날에 그 학교에서 들었던 글자 서체에 대한 내용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그는 그 컴퓨터를 개발할 때에 컴퓨터에 다양한 서체에 대한 지식을 컴퓨터에 응용할 수 있었고, 이 컴퓨터는 어마어마한 판매를 기록하게 되는데, 이 컴퓨터가 바로 그 유명한 매킨토시 컴퓨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보면 여전히 윈도우가 아니라 매킨토시를 사용하는 출판사에서는 아직도 많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앞을 내다보면서 점으로 연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나, 10년 뒤에 과거를 돌아보면 너무나도 명확했다는 것입니다.

비록 이 스티브 잡스는 기독교인은 아니었습니다만, 믿지 않는 사람도 이런 생각을 하는데, 주님을 믿는 우리가 이와 같은 믿음을 버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와 같은 주님의 인도하심은 어디에 있을까요. 신학교에 있나요? 아니면 기도원에 있나요? 아니요. 이는 바로 우리 일상 속에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모두 일상 속에 있을 때 주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일상 속에서 주님은 우리를 인도해주시고 우리를 도구로 만들어 주시고, 또한 우리를 사용해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다윗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자면 애초에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칠 수 있었던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래부터 전쟁에 능했나요? 아니요. 형들이 귀찮아 하는 일들, 가축들을 돌보는 일을 하면서 곰이나 사자와 싸우고 하는 일상 속에서의 일들을 묵묵히 감당하다 보니 물매를 던지는 기술이 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능력, 어찌 보면 보잘것없는 그 능력을 사용하셔서, 전 이스라엘 군대가 벌벌 떨었던 골리앗을 물매 하나로 물리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너무나도 힘듭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주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인도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특별한 장소가 아닌 우리 일상 속에 임하십니다.

지금 이 순간 아무리 값진 일이라 하더라도 주님께서 인도해주시지 않는 일이라면 아무런 가치도 없어집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주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일이라면 이는 나중에 반드시 주님께서 크게 써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순종하면 됩니다. 사람한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께서 인도해주십니다. 주님께서 인정해주십니다. 주님께서 능력을 주십니다.

지금 힘들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크게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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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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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회 참된 친구
2018년 6월 1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참된 친구” まことの友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전에 하버드대학 교수인 마이클 샌델(マイケル・サンデル)이라는 사람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쓰고 이에 대한 강의를 통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책을 구입하지는 않고, 그저 텔레비전에서 해주는 강연 모습을 몇 번 보았을 뿐이었습니다만, 솔직히 저는 그다지 감명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좀 헷갈릴지는 모르지만 정의라는 말의 정의. 정의라는 말에 대한 참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인터넷에서 <정의>라고 하는 말의 뜻을 찾아보니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 <진리>는 무엇이고 <도리>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또 찾아보니까, <진리>는 참된 이치, 참된 도리……라고 나와 있고, <도리>는 사람이 어떤 입장에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른 길>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正義:正しい道義。人が従うべき正しい道理。 人の道にかなっていて正しいこと。
道理:物事の正しいすじみち。また、人として行うべき正しい道。

글쎄요. 머리가 좋고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은 이해가 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게는 무슨 제자리를 뱅글뱅글 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의>라고 하는 단어가 너무나도 막연해서 그 의미를 찾아보니, 그 뜻에 대한 설명도 역시 막연한 단어로만 되어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예전에 제가 한국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 어떤 사회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계 국가 분포를 분석하는 데에 있어서 그 나라의 인구를 기준으로 하면, 그 지역에 따라 여러 현상을 분석할 수 있고 예측할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은 <정의>라는 애매모호한 말에 대해서 조금 더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해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말이 필요할까 하는 고민을 해보았을 때, 저는 바로 <이익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이익>이라고 하는 말을 기준으로 설명하면 의외로 많은 막연한 부분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범죄가 발생을 합니다. 조금 무서운 이야기를 하자면 살인사건이 일어났어요. 어떤 사람이 살해 당했습니다. 그런데 범인을 알 수 없어요. 그럴 때 단서가 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그 주변인물입니다. 그 사람의 주변인물들 중에서 그 피해자가 살해 당함으로 인해서 가장 이익이 되는 사람, 이 사람이 범인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지요.

이는 테러 같은 사건에서도 통합니다. 어디서 어떤 테러 사건이 발생했어요. 그런데 누가 저질렀는지 밝혀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를 알아낼 단서가 바로 이 테러사건이 일어남으로 인해서 가장 이익이 되는 사람이나 집단이 어디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금 더 나아가서 <정의>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세상에 절대적인 정의가 있을까요? 얼마 전에 신문을 보니까 북한에서는 한국 드라마를 보았다는 것으로 처형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합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요. 얼마 전에 북미회담이 열린 싱가포르에는 형벌 중에 태형이 있다고 합니다. 태형, 그러니까 채찍으로 사람을 때리는 형벌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과연 정의에 부합하느냐 하는 것은 논의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면 자유의 나라라고 하는 미국은 어떻습니까.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총기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까다로운 규제를 받아야 합니다만, 미국 헌법에서는 국민이 무기를 휴대하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국민들이 무기를 소유한다는 것을 부당하다고 하면 미국은 정의가 보장되지 않은 사회라는 말이 되고 맙니다. 물론 총기규제에 대한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에는 정의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럼 국민이 무기를 소유한다는 것을 당연한 권리라 규정하고, 이것이 정의라고 하기 때문에 우리나라나 일본도 똑같이 무기를 갖는 것이 정의라고 할 수가 있을까요?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 하면 미국은 국민이 무기를 소유하는 것을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국민들의 무기 소지가 <정의>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국민들이 무기를 소유하는 것을 공동체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의>가 아닌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무슨 절대적인 정의라고 하는 척도를 갖다 대는 것은 오히려 올바른 <정의>가 무엇인가 하는 내용의 초점을 흐리게 만들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한국에서는 지방선거가 있었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어느 쪽이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는 말씀을 드리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만, 저는 정치에 있어서는 정답이란 없으며 오로지 이익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A당과 B당이 있으면 어느 한 쪽이 정답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에 맞는 쪽을 선택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정치인이 이런 말을 했다지요? 정치인이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대중들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정치인이다. 물론 소신 있는 정치인이 있긴 하겠습니다만, 선거전에 입후보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 당선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지지해줄 것 같은 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사람이 하는 말이나, 아니면 그 사람이 소속된 정당을 보고 판단하게 되는 것인데, 여기에는 어디에도 절대적인 정답이 있을 수는 없고, 다만 유권자들도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익>이라고 말로만 하면 이는 무슨 이기적인 것처럼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익>이라는 관점을 본다면 대단히 심플하면서도 서로간의 관계를 명확하게 나타낼 수 있는 척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정의>를 규정한다면, <정의>라고 하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개인이나 해당 공동체에 있어서 <이익>이 되는 개념 또는 행위가 바로 <정의>다 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이익>에 대한 인식이 같아야지만 한다는 말이 됩니다. 어떤 한 행위가 누구한테는 이익이 되는데 누구한테는 손해가 되요. 이렇게 되면 하나의 공동체가 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생각해보세요. 한 회사에서 A부서에서 어떤 일을 했는데, 이 일이 A부서에는 이익이 되지만 B부서에는 손해가 되는 일이에요. 그러면 이 두 부서는 한 회사에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이는 공동체라고 해서 무슨 거창한 단체나 회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께서는 주변에 진정한 친구가 있으신가요? 어떤 사람이 진정한 친구가 되겠습니까. 얼굴이 잘생기거나 예쁜 사람? 머리가 좋은 사람? 아니면 돈 많은 사람?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면 자신과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자신의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자신과 이익에 대한 조건이 같아야 합니다. 아무리 잘 생기고 예쁘고 머리가 좋고 돈 많고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진정한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이익을 누릴 때에 상대방도 함께 이익을 누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아무리 좋은 친구가 되기를 원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이익을 보는데 상대방이 손해를 봐요. 아니면 상대방이 이익을 보는데 내가 손해를 봐요. 이렇게 된다면 이는 진정한 친구가 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 안에서 누구와 친구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과 친구가 되셔야 합니다. 진정한 친구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바로 이익에 대한 조건이 같아야지만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과 진정한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죠. 예수님께 이익이 되는 조건과 나에게 이익이 되는 조건이 같아야지만 예수님과 나는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을 해도, 아무리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피를 흘려 주셨을 정도로 사랑해주신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 나에게는 이익이 안 된다거나, 또는 나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 예수님께 있어서는 이익이 안 된다거나 하면 예수님과 진정한 친구 관계를 맺을 수가 없다는 말씀이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고백합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ガラテヤ人への手紙 1章 10節
《 いま私は人に取 り入ろうと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いや。神に、でしょう。あるいはまた、人の歓心を買おうと努めているのでしょうか。もし私がいまなお人の歓心を買おうとするようなら、私はキリストのしもべとは言えません。》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은 <사람들>이 항상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곧 우리의 이웃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간혹 성경에서는 <사람들>을 <하나님>과 반대 되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비와 비슷한 개념이 바로 <세상>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과 <세상>이라고 하면 이는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오늘 이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6절부터 10절까지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6절~10절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私は、キリストの恵みをもってあなたがたを召してくださったその方を、あなたがたがそんなにも急に見捨てて、ほかの福音に移って行くのに驚いています。
ほかの福音といっても、もう一つ別に福音があるのではありません。あなたがたをかき乱す者たちがいて、キリストの福音を変えてしまおうとしているだけです。
しかし、私たちであろうと、天の御使いであろうと、もし私たちが宣べ伝えた福音に反することをあなたがたに宣べ伝えるなら、その者はのろわれるべきです。
私たちが前に言ったように、今もう一度私 は言います。もしだれかが、あなたがたの受けた福音に反することを、あなたがたに宣べ伝えているなら、その者はのろわれるべきです。
いま私は人に取 り入ろうと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いや。神に、でしょう。あるいはまた、人の歓心を買おうと努めているのでしょうか。もし私がいまなお人の歓心を買おうとするようなら、私はキリストのしもべとは言えません。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복음은 무엇입니까. 아~ 여러분, 예수만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갑니다~ 교회에만 나오세요~ 그러면 천국 갑니다~

이런 말을 하면 좋아하겠지요. 하지만 이런 말씀은 어떻습니까.


마태복음 7장 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わたしに向かって、『主よ、主よ』と言う者がみな天の御国に入るのではなく、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のみこころを行う者が入るのです。

히브리서 9장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마가복음 9장 47절~48절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もし、あなたの目があなたのつまずきを引き起こすのなら、それをえぐり出しなさい。片目で神の国に入るほうが、両目 そろっていてゲヘナに投げ入れられるよりは、あなたにとってよいことです。そこでは、彼らを食ううじは、尽きることがなく、火は消えることがありません。

이런 말씀은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그러면 이런 말씀을 전하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바울도 아마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을 지금 한 사람이라도 전도를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듣기 좋은 소리만 골라서 해도 모자랄 판에 듣기 거북한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입니다.

いま私は人に取り入ろうと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いや。神に、でしょう。

口語訳:今わたしは、人に喜ばれようとしているのか、それとも、神に喜ばれようとしているのか。

이 부분을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적고 있어요.

“내가 지금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려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현대인의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씀 드리자면 이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 마음에 들게 해야겠습니까. 아니면 사람들 마음, 세상 사람들 마음에 들게 해야겠습니까……하는 것이지요. 내가 하나님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세상 사람들 눈치를 보게 되다면 나는 이미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5절을 봅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わたしはもはや、あなたがたをしもべとは呼びません。しもべは主人のすることを知らないからです。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友と呼びました。なぜなら父から聞いたことをみな、あなたがたに知らせたからです。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제 종이 아니라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친구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익에 대한 조건이 같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이익이 되는 일이 곧 우리에게 이익이 되고,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 곧 예수님께 이익이 될 때 예수님과 우리는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우리는 영원한 친구로만 있게 되나요?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19장 7절~8절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私たちは喜び楽しみ、神をほめたたえよう。小羊の婚姻の時が来 て、花嫁はその用意ができたのだから。花嫁は、光り輝く、きよい麻布の衣を着ることを許された。その麻布とは、聖徒たちの正しい行いである。」

이제 마지막 날에 우리는 예수님의 신부로서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혼인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2장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それゆえ男はその父母を離れ、妻と結び合い、ふたりは一体となるのである。

남자와 여자가 그 때까지 부모라고 하는 영향력 밑에 있다가, 거기서부터 떠나서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이 바로 혼인입니다. 혼인에 이르기까지는 그 기간은 <친구>로 있는 기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친구 관계로 있으면서 과연 서로에 있어서 이익의 조건이 맞는지를 살피는 기간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결혼을 했는데, 알고 보니 남편과 부인이 각각 서로에게 있어서 이익의 조건이 다르다면 이 얼마나 큰 문제이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이는 한 몸을 이룬다고는 할 수 없게 되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까지 서로를 살피고 이익의 조건이 맞는지 안 맞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를 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말씀 드립니다만, 이익이다 아니다라고 해서 무슨 돈이나 재산에 관한 것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어떤 일에 대해서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상대방은 기쁨이 아닌 슬픔이나 고통을 느껴요. 뭐 좀 유치한 예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한쪽은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다른 한쪽은 영화를 보는 것을 아주 힘들어 합니다. 한쪽은 유원지에 놀러 가는 것을 좋아하는데, 다른 한쪽은 그게 너무나도 고달프다고 해보세요. 이렇게 되면 서로 맞기가 힘들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시간. 이는 어쩌면 예수님과 연애하는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이익이 되는 것을 기뻐하는지 아니면 안 기뻐하는지를 살피시고 계십니다.

뭐, 그래요. 세상에 살아가면서 연애를 하다 보면, 잘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헤어질 수도 있는 것이겠지요. 그러면 어때요? 속된 말로 남자나 여자가 어디 한 둘입니까. 더 좋은 사람을 만나면 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우리와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그렇죠. 절대로 헤어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부로서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익의 조건과 나에 대한 이익의 조건을 똑같이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주일에 함께 예수님이 머리 되신 교회에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 이익이 되는 일과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일인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일, 사람의 방식, 세상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을 따르는 일,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8절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あなたがたは、自分に関する限り、すべての人と平和を保ちなさい。

그래, 내 성격 같아서는 너 같은 놈은 꼴도 보기 싫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내가 너와 화해하고 화목하게 지내겠다……이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하나님 이익의 조건에 맞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좋게 하시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좋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삶을 보내시겠습니까. 사람들 마음에 드는 삶을 보내시겠습니까.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삶,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 이것이야말로 둘도 없는 정의이자 둘도 없는 진리인 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남은 삶 동안, 우리 주님과 진정한 친구가 되어, 함께 걸으며 함께 살아가면서, 마지막 날에 마침내 우리 주님과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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