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회 축복에 이르는 문
2017년 11월 1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축복에 이르는 문” 祝福に至る門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14절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マタイの福音書 7章 13節~14節
「狭い門から入りなさい。滅びに至る門は大きく、その道は広いからです。そして、そこから入って行く者が多いのです。いのちに至る門は小さく、その道は狭 く、それを見いだす者はまれです。」

아멘.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넓은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하는데, 이 문은 크고 넓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고 하십니다. 좁은 문이야말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들어가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면 큰 일 납니다. 우리는 반드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좁은 문, 협착한 문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이 아니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좁은 문으로 한 사람도 빠짐없이 들어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제가 한 가지 여쭤보겠습니다. 지금 이 말씀을 들은 기분이 어떠십니까. 기쁨으로 충만하세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의지, 의욕, 아! 정말 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겠다! 라고 하는 마음으로 충만하신가요?

이게 참 묘합니다. 이른바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영어로는 good news,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이라는 뜻인데, 무슨 선지자나 사도들이 한 말이 아닌,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만, 이와 같은 말씀을 들으면 어딘지 모르게 찝찝해지고 인상이 살짝 굳어지기 마련입니다.

저도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목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했습니다. 물론 맨 처음에 떠오른 제목은 뭐였겠어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였습니다.

그런데 제목을 이렇게 정하고 주보에 적어 넣으면, 교회에 오셔서 이것을 보셨을 때의 여러분 표정이 떠오릅니다.

일단 한 숨부터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표정이 좀 굳어지겠지요. 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구? 하이구, 대충 뭐 내용 알겠구만. 거, 헌금 많이 내고, 귀찮은 봉사도 많이 하고, 희생이다 뭐다 하면서 고생을 죽도로 하고 그래야 복 받고 천국 간다는 거 아냐? 라고 생각하실 것 같았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제가 여러분을 나쁘게 평가해서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저 같으면 바로 그랬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생각한다고 알고 계십니까.

요한복음 15장 9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父がわたしを愛されたように、わたしもあなたがたを愛しました。わたしの愛の中にとどまりなさい。

예,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사랑하신다고 하십니까.

요한1서 4장 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私たちが神を愛したのではなく、神が私たちを愛し、私たちの罪のために、なだめの供え物としての御子を遣わされました。ここに愛があるのです。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んでくださったことにより、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身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어떤 시인이 쓴 시를 조금 바꾸어본다면, 그 누가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묻거든, 눈 들어 십자가를 보게 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우리를 미워하셨다면, 또는 우리가 고생을 하기를 원하시고, 힘든 일을 감당하길 원하셨다면, 그래야지만 구원을 허락하신다고 하셨다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구원? 네 죄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 그런데 구원해달라고? 그래. 좋아. 구원해줄게. 너 내가 십자가에 달리는 것 봤지? 너도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 그러면 내가 구원해줄게. 그러지 않으셨겠어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토록 힘든 일을 감당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을 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神は、罪を知らない方を、私たちの代わりに罪とされました。それは、私たちが、この方にあって、神の義となるためです。

베드로전서 3장 18절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キリストも一度罪のために死なれました。正しい方が悪い人々の身代わりとなったのです。それは、肉においては死に渡され、霊 においては生かされて、私たちを神のみもとに導くためでした。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죽임을 당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힘든 일, 가장 어려운 일을, 우리를 대신해서 감당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좀 오해하고 있지나 않은지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잘 보십시오.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狭い門から入りなさい。滅びに至る門は大きく、その道は広いからです。そして、そこから入って行く者が多いのです。いのちに至る門は小さく、その道は狭 く、それを見いだす者はまれです。

여기 어디에 좁은 문은 힘들다고 적혀 있나요? 좁은 문은 험난하다고 말씀하시나요? 아닙니다. 단지 그 넓이가 좁다고 말씀하십니다. 좁을 뿐입니다. 좁기 때문에 눈에 잘 안 띄는 것입니다. 그래서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에 이르는 길, 생명에 이르는 길인,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좁은 문이란 어떤 것을 가리키는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이에 대해서 오늘은 시간 관계상 두 가지로만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첫째로 좁은 문은 우리가 목표로 삼아야 할 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이른바 좁은 문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예를 들어서 남들이 알아주는 학교나 월급을 많이 주는 직장, 아니면 어려운 시험 같은 것이 바로 좁은 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기가 왜 좁은 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많은 사람들이 몰리기 때문입니다. 그 학교에 들어가면, 그 직장에 들어가면, 그리고 그 시험에 합격만 하면 좋은 미래, 내 꿈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것이지요. 그와 같은 시험장에 가 보면 반드시 합격하겠다고 하는 열정이 느껴집니다. 거기에는 시험 보기 싫은데 억지로 와서 앉아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 들아 가기 싫다는 사람 있나요? 적어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들 천국에 가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어서 좋은 소식과 별로 좋지 않은 소식이 있지요. 먼저, 좋은 소식부터 말씀 드립니다. 천국에는 정원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학교나 회사 같은 경우를 보면 아무리 좋은 곳이라 하더라도 무제한으로 합격자를 뽑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정원이리라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요. 하지만 천국은 어떻습니까.

요한복음 14장 2절~3절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わたしの父の家には、住まいがたくさんあります。もしなかったら、あなたがたに言っておいたでしょう。あなたがたのために、わたしは場所を備えに行くのです。
わたしが行って、あなたがたに場所を備えたら、また来て、あなたがたをわたしのもとに迎えます。わたしのいる所に、あなたがたをもおらせるためです。

천국에는 우리가 있을 곳이 많다는 것입니다. 전세값 월세값을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인가요? 아쉽게도 그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세례만 받았다고 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わたしに向かって、『主よ、主よ』と言う者がみな天の御国に入るのではなく、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のみこころを行う者が入るのです。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냥 취미 삼아 공부해서 합격하는 사람들이 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모두들 그 시험에 합격한다고 하는 분명한 목표를 갖고 그 곳을 향해서 열심히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천국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빌립보서 3장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キリスト・イエスにおいて上に召してくださる神の栄冠を得るために、目標を目ざして一心に走っているのです。

이 푯대가 바로 천국입니다. 우리는 이곳을 향해서 열심히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전도도 있을 것이요, 섬김도 있을 것이요, 봉사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고 계신지, 나에게 어떤 일 하기를 원하고 계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마음은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인 것입니다.

호세아 6장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私たちは、知ろう。主を知ることを切に追い求めよう。主は暁の光のように、確かに現れ、大雨のように、私たちのところに来 、後(のち)の雨のように、地を潤される。」

그냥 알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성경도 모르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주소도 모르면서 처음 가는 곳을 찾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성경을 읽고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내년도 우리 교회 목표는 모두가 최소한 성경을 1독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알아야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고, 성령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는 하지만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고서 영화나 소설을 믿고, 성경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사람들 말을 믿습니다. 그러니 온갖 사이비종교에 어이없이 빠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신앙이 취미생활일 수는 없습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고, 힘써 예수님을 알아가면서, 천국에 대한 분명한 목표의식을 갖고 천국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두 번째로 좁은 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들어가야 할 문입니다. 가끔 어떤 분을 보면 성경을 논할 때에 꼭 이스라엘에 집착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는 한국만이 아니라 일본도 마찬가지예요. 성경을 풀어가는 데에 있어서 지금 중동에 있는 이스라엘을 자꾸 끌어들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분들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땅끝은 이스라엘이요, 이스라엘에 복음이 전파될 때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 이러면서 이스라엘 선교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가 되면 중동 이스라엘 쪽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어떻게 되고 저렇게 되고……하면서 마치 무슨 선지자가 되신 것처럼 말씀을 하시는 것을, 여러분께서는 들으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글쎄요. 저는 그 점에 있어서 적지 않은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성경을 봅니다.

로마서 4장 16장~18절입니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そのようなわけで、世界の相続人となることは、信仰によるのです。それは、恵みによるためであり、こうして約束がすべての子孫に、すなわち、律法 を持っている人々にだけでなく、アブラハムの信仰にならう人々にも保証されるためなのです。「わたしは、あなたをあらゆる国の人々の父とした」と書いてあるとおりに、アブラハムは私たちすべての者の父なのです。
このことは、彼が信じた神、すなわち死者を生かし、無いものを有るもののようにお呼びになる方の御前で、そうなのです。
彼は望みえないときに望みを抱いて信じました。それは、「あなたの子孫はこのようになる」と言われていたとおりに、彼があらゆる国の人々の父となるためでした。

여기서 16절 후반부에 보면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여기서 <율법에 속한 자>라고 하는 것이 육적인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키고,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라고 하는 것이 영적인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킨다고 신학자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육적으로 보면 이스라엘 사람이에요? 아브라함의 자손인가요? 족보에 보면 저는 유다 지파도 아니요 레위 지파라고 나와 있지도 않고, 베냐민 지파라고도 적혀 있지 않습니다. 본관은 남양 홍가이고, 시조는 홍은열이라는 사람이며, 제가 35대손이라고 되어 있어요. 육적으로는 이스라엘 피가 아마 조금도 섞여있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육적으로는 한국사람, 일본사람, 어느 나라 사람이라 하는 구분이 있다 하더라도 영적으로는, 믿음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육적인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이고, 우리들은 그 다음 가는 민족일 수밖에 없는 건가요? 이제 그런 생각을 좀 버리셨으면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1등 국민 다음 가는 2등 국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에요. 믿음의 시초인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삼은 우리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말의 반대되는 개념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바로 <이방인>인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산상수훈에 보면 <이방인>이라고 하는 단어가 3번 나옵니다.


마태복음 5장 46절~47절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自分を愛してくれる者を愛したからといって、何の報いが受けられるでしょう。取税人でも、同じことをしているではありませんか。
また、自分の兄弟にだけあいさつしたからといって、どれだけまさったことをしたのでしょう。異邦人でも同じことをするではありませんか。

당시 세리들은 육적으로는 분명히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만, 여기서는 세리와 이방인을 동등하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7절,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また、祈るとき、異邦人のように同じことばを、ただくり返してはいけません。彼らはことば数が多ければ聞かれると思っているのです。
だから、彼らのまねをし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がたの父なる神は、あなたがたがお願いする先に、あなたがたに必要なものを知っておられるからです。

그리고 마지막으로 6장 31절~32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そういうわけだから、何を食べるか、何を飲むか、何を着るか、などと言って心配 するのはやめなさい。こういうものはみな、異邦人が切に求めているものなのです。しかし、あなたがたの天の父は、それがみなあなたがたに必要であることを知っておられます。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이방인>이라고 하는 개념을 단지 국적이 어디이냐라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을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그렇지 않은 사람들, 믿음이 없는 사람들 또는 믿음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도 <이방인>이라고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 이방인이 아니요, 아브라함의 자손, 믿음의 자녀가 되었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방인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믿음의 자녀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또한 기도를 드릴 때 이방인처럼 중언부언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께 어떠한 기도를 드려야 하는 것일까요.

가끔 목사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기복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문제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가 복을 비는 것이 문제라는 것인가요? 주님한테 이것을 해주세요, 저것을 해주세요……라고 말씀 드리는 것이 죄인가요? 우리는 그럼 기도를 드릴 때 항상 세계 평화나 인류의 구원과도 같은 고상하고 거창한 기도만을 드려야 하는 것인가요?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예전에 미국에 있을 때 만났던 목사님이셨는데, 이 분은 저보다 나이가 몇 살 좀 많으셨습니다. 이 분도 아직 결혼을 안 하셨던 분이신데, 이 분은 당시 저와는 달리 결혼을 무척이나 하고 싶어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결혼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해보셨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자기는 결혼에 대해서는 기도해본 적이 없으시대요. 음? 아니, 결혼에 대해서 기도하는 것이 무슨 수준 낮은 기도입니까? 그래서 제가 물었죠. 아니, 왜요? 그러니까 그 목사님은 다시 말씀하시기를, 결혼에 대한 기도는 드린 적이 없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유를 말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목사님, 상당히 결혼하고 싶어하셨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태복음 7장 7절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与えられます。捜しなさい。そうすれば見つかります。たたきなさい。そうすれば開かれます。


요한복음 14장 14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何かをわたしに求めるなら、わたしはそれをしましょう。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께 구하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복신앙은 문제라고 하는데, 이는 어떤 것을 말하는가 하면, 예를 들어서 우리가 무슨 병에 걸렸어요. 아니면 어디를 다쳤습니다. 그렇다면 병원에 가지요. 그런데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덕분에 다 나았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요? 그래도 병원에 계속 가나요? 아니요. 병이 낫고 다친 곳이 회복 되었으면 더 이상 병원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교회도 생각하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그런 간증 들어보셨지 모르겠습니다. 취직도 안 되고 사업도 안 되고 해서 맨날 교회에 나와서 기도도 하고 믿음 생활도 성실히 했는데,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셔서 취직도 되고 사업도 번창하게 되니까, 이제 바쁘고 시간이 없어서 교회에도 안 나오게 되고 믿음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됐대요? 생활 속에 또다시 시련이 닥쳐오고 어려움이 닥쳐와서 모든 것을 잃은 채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 주 나를 외면 하시면 나 어디가리까> 하면서 다시 교회에 나왔다는 간증, 여러분께서도 들어보신 적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는 비단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만의 일이 아닙니다. 구약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처음에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러면 나라가 부흥합니다. 평안합니다. 그런데 차차 사람들이 타락합니다. 바알을 숭배하기 시작해요. 이방 신들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너희들 그러지 말아라. 하나님께로 돌아와라. 그렇게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경고를 합니다. 그래도 그들이 돌이키지 않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십니까.

다른 민족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치게 합니다. 괴롭히게 하시지요. 그러면 그제서야 회개하고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다시 구원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를 다니거나 하나님 섬기는 것을 무슨 병원에 다니는 것처럼 무슨 문제가 있을 때만 다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문제가 해결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나님을 외면하는 삶이야말로 기복신앙인 것입니다.

믿음의 자녀 된 우리는 그렇다면 주님께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까.

성경에는 이에 대한 말씀이 많습니다만, 우리는 우선 이것부터 해보도록 합시다.

마태복음 5장 44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自分の敵を愛し、迫害する者のために祈りなさい。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사랑합니다. 그러나 이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넓은 문은 무엇입니까. 원수를 미워하고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에게 복수하라. 이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넓은 문은 멸망으로 가는 문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복을 빌라는 것입ㅂ니다. 그것이 바로 좁은 문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축복으로 가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축복을 받는 비결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해가 안 가시나요? 한 가지 제안을 드립니다. 우리 마음 속에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번 주,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모르게 오직 주님을 향해서, 내가 제일 미워하는 사람,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의 복을 빌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어떤 축복을 부어주시는지 시험해보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주님께서는 응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주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닙니다. 믿음의 자녀이자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좁은 문입니다. 이 문은 생명으로 이어지는 길이요, 축복으로 이어지는 길인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문이 좁아서 잘 눈에 안 띄는 것입니다. 이 길로 가는 길을 못 찾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압니다. 우리는 천국이라고 하는 분명한 목표,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힘써 여호와를 알고 주님을 알아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방인처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자녀처럼 구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무슨 성인군자라서가 아닙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축복의 지름길, 생명으로 가는 길이라고 우리 주님께서 알려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믿음의 자녀,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생명의 길, 축복의 길인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는 기쁨,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축복과 생명으로 가는 놀라운 기쁨을 모두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104회 준비된 감사 →

← 제102회 상속자와 손님

 
이카호중앙교회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102회 상속자와 손님
2017년 11월 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민수기 11장 31절~34절
“바람이 여호와에게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영 곁 이쪽 저쪽 곧 진영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 백성이 일어나 그 날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열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진영 사면에 펴 두었더라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불렀으니 욕심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상속자와 손님” 相続人と客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을 좀 읽어보신 분이시라면 읽어가시면서 감동도 받고 은혜도 받고 그렇습니다. 그렇게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해가 되고 머리 쏙쏙 들어오면 얼마나 좋겠습니다까마는, 이렇게 읽다 보면 좀 이상하게 여겨지는 경우도 더러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 그들은 매일매일 하나님께서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먹었던 만나가 어떤 것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그림도 없고, 당연히 사진도 없습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만나를 보고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 <만나>라고 하는 이름도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하는 <만후>라고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정도입니다.

여호수아 5장 12절입니다.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彼らがその地の産物を食べた翌日から、マナの降ることはやみ、イスラエル人には、もうマナはなかった。それで、彼らはその年のうちにカナンの地で収穫した物を食べた。

여기서 <그 땅>이라고 하는 것은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마치고 요단강을 건너서 이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살펴본 성경구절에 의하면 <만나>라고 하는 것은 본래부터 있어왔던 음식이 아니요, 하물며 광야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생활을 하기 전에는 없었고, 광야생활을 마치 후에도 없었으며, 오직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에만 한시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참으로 이 <만나>라고 하는 음식은 놀랍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영양소가 필요합니다. 이를 두고 필수영양소라고 하는데 그 종류가 18가지의 비타민과 20가지의 미네랄, 그리고 8가지의 아미노산, 이렇게 총 46가지 필수 영양소가 있는데, 이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영양소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이 몸 속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낼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음식물로 섭취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살면서 거의 이 만나만 먹고 살았는데, 누구 하나 영양실조에 걸렸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이 만나를 먹기만 하면 우리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모든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었다고 하는, 역사상 가장 완벽한 음식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와 같은 깊은 사랑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모르는 이스라엘 광야 1세대들은 불평 불만이 끊이질 않습니다.

민수기 11장 4절 후반부터 6절까지 봅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イスラエル人もまた大声で泣いて、言った。「ああ、肉が食べたい。エジプトで、ただで魚を食べていたことを思い出す。きゅうりも、すいか、にら、たまねぎ、にんにくも。だが今や、私たちののどは干からびてしまった。何もなくて、このマナを見るだけだ。」

지금 뭐라고요? 애굽에 있을 때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을 것이 생각난다고요? 아니, 아무리 애굽이 부자 나라였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값없이 먹을 수가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그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값없이 먹었다고 하는 것은, 나라에서 공짜로 나눠줘서 먹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종살이를 하던 그 집에 있던 것을 몰래 먹었던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허락하신 완벽한 음식인 만나는 이제 지겹고, 종살이를 하면서 몰래 먹었던 것들이 그리워진다면서 지금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못살게 굽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고기를 잡수시고 싶대요.

이와 같은 이스라엘 민족을 보고 모세가 하나님께 하소연을 합니다.


민수기 11장 13절~15절입니다.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이르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どこから私は肉を得て、この民全体に与え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しょうか。彼らは私に泣き叫び、『私たちに肉を与えて食べさせてくれ。』と言うのです。
私だけでは、この民全体を負うことはできません。私には重すぎます。
私にこんなしうちをなさるのなら、お願いです、どうか私を殺してください。これ以上、私を苦しみに会わせないでください。」


출애굽을 할 당시 모세의 나이는 팔십이었다고 출애굽기 7장 7절에 기록합니다. 백성들이 얼마나 원망하고 불평 불만을 하고 못살게 굴었으면 팔십 먹은 노인네가 지금 이렇게 하나님께 차라리 자기를 죽여달라고 하소연을 하고 있겠습니까. 이 광경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가슴이 찢어지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어? 그래? 고기가 잡수시고 싶으시다고? 그러면서 내가 사랑으로 너희한테 베풀어준 완벽한 음식인 만나를 무시하고, 내 종으로 세운 모세를 그렇게 못살게 구나? 그래. 좋아. 고기? 줄게.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같은 민수기 11장 17절~20절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또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몸을 거룩히 하여 내일 고기 먹기를 기다리라 너희가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애굽에 있을
v 때가 우리에게 좋았다 하는 말이 여호와께 들렸으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실 것이라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스무 날만 먹을 뿐 아니라 냄새도 싫어하기까지 한 달 동안 먹게 하시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중에 계시는 여호와를 멸시하고 그 앞에서 울며 이르기를 우리가 어찌하여 애굽에서 나왔던가 함이라 하라”


わたしは降りて行って、その所であなたと語り、あなたの上にある霊 のいくらかを取って彼らの上に置こう。それで彼らも民の重荷をあなたとともに負い、あなたはただひとりで負うことがないようになろう。
あなたは民に言わなければならない。あすのために身をきよめなさい。あなたがたは肉が食べられるのだ。あなたがたが泣いて、『ああ肉が食べたい。エジプトでは良かった。』と、主につぶやいて言ったからだ。主が肉を下さる。あなたがたは肉が食べられるのだ。
あなたがたが食べるのは、一日や二日や五日や十日や二十日だけではなく、
一か月もであって、ついにはあなたがたの鼻から出て来 て、吐きけを催すほどになる。それは、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主をないがしろにして、御前に泣き、『なぜ、こうして私たちはエジプトから出て来 たのだろう。』と言ったからだ。」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모세야. 걱정하지마. 너 혼자한테 힘든 짐을 지게 하지 않을 거야. 내가 내 능력으로 종살이에서 해방시켜주고 애굽에서 탈출시켜 자유민으로 만들어줬더니, 이제 와서 기껏 하는 말이 종살이 때가 그리우시다고? 그 때 종살이 하면서 주인 몰래 잡수시던 고기가 그리우시다고? 좋아. 먹게 해 주마. 하루나 이틀? 아니야. 아주 지긋지긋할 정도로 먹어주마.

그러면서 어떻게 하십니까.

민수기 11장 31절~32절
“바람이 여호와에게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영 곁 이쪽 저쪽 곧 진영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 백성이 일어나 그 날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열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진영 사면에 펴 두었더라”

さて、主のほうから風が吹き、海の向こうからうずらを運んで来て、宿営の上に落とした。それは宿営の回りに、こちら側に約一日の道のり、あちら側にも約一日 の道のり、地上に約二キュビトの高さになった。
民はその日は、終日終夜、その翌日も一日中出 て行って、うずらを集め、――最も少なく集めた者でも、十ホメルほど集めた。――彼らはそれらを、宿営の回りに広く広げた。


본래 광야는 아무 것도 없는 삭막한 곳입니다. 그러니 메추라기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람을 불게 해서 메추라기를 모아 이스라엘 민족이 있는 광야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20절에 의하면 성인 남성 60만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성과 어린 아이들을 다 포함하면 대략 200만명은 되었을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예상을 합니다. 성인 남성이 60만이고 부인에 아이들이 한 둘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전혀 과장된 숫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수많은 메추라기를 보내주셨을 뿐만 아니라, 너무 높이 날아다니면 잡을 수가 없으니까 두 규빗쯤 높이만 날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한 규빗은 대략 45센티 정도라고 하니 두 규빗은 90센티 정도 되겠죠? 그러니까 메추라기가 그 정도 높이만 날아다녔다고 하니까, 성인 남성이라고 한다면 충분히 손이 닿을 만한 높이였을 것입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참 얼마나 세심하신 하나님이십니까.

그래서 신나게 사람들이 메추라기를 잡는데, 그날 종일과 종야, 그리고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잡았다고 하는데, 그러니까 그날 아침부터 잠도 안 자고 꼬박 새면서 메추라기를 잡았고요, 그 다음 날도 하루 종일 잡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잡은 메추라기가 얼마 정도인가 하면요, 적게 모은 자도 열 호멜이라고 합니다. <호멜>이라고 하는 단위가 잘 감이 안 오시죠? 말씀 드리겠습니다. 한 호멜이 어느 정도냐 하면 지금 단위로 220리터라고 합니다. 1리터가 몇 킬로그램이에요? 예, 1리터는 1킬로그램입니다. 그러니까 한 호멜이 220킬로였는데, 이틀 동안 꼬박 잡은 메추라기 무게가 적게 잡은 사람도 열 호멜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무게가 얼마예요? 220킬로 곱하기 10이면…예, 2200킬로입니다. 2톤이 넘어가는데, 적게 잡은 사람이 그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메추라기 한 마리 무게가 대충 얼마나 나갈까요? 인터넷에 찾아보니까, 90그램에서 100그램 정도래요. 조그마한 새입니다. 그러니까 편의상 100그램이라고 하죠. 그러면 1킬로는 1000그램이죠? 그러니까 1킬로가 메추라기 10마리입니다. 그런데 적게 모은 사람이 열 호멜, 2200킬로였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메추라기를 몇 마리 잡았다는 거예요? 예, 22,000마리를 잡았다는 것입니다. 그게 적게 잡은 사람이 그렇다는 거예요. 상상이 되십니까? 2200킬로 고기를 한 달에 먹는다고 하면요, 하루에 73킬로 이상을 먹어야 합니다. 4인 가족이라고 치고 한 사람당 하루에 400그램씩 먹는다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하루에 1.6킬로입니다. 2200킬로를 하루도 빠짐 없이 그렇게 먹는다고 하더라도 3년 이상, 거의 4년 가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인 것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숫자 얘기를 좀 더 해볼까요? 그럼 도대체 메추라기가 몇 마리나 날아온 계산이 될까요?

편의상 성인 남성만이 메추라기를 잡았고, 모두 최소한 22,000마리를 잡았다는 것인데, 이를 단순계산하면 되겠죠? 성인 남성이 60만명이었고, 여기에 22,000마리를 곱하면 어떤 숫자가 나오냐 하면요. 132억마리입니다. 역시 잘 감이 안 오죠? 참고로 공원 같은 곳에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비둘기가 전세계에 얼마나 있는지 인터넷을 좀 봤더니 대략 2억에서 3억마리라고 하네요. 그러니까 전세계에 있는 비둘기의 50배나 되는 수의 메추라기가 한 번에 광야에 몰려왔다는 것입니다. 이건 뭐 정말 아무리 날아다니는 새라 하더라도 이 정도면 그야말로 눈감고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을 정도였겠죠.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많은 메추라기가 한 번에 몰려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상식 적으로 이해가 안 간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께 말해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지금 이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3500년이나 전에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지금과는 생태계가 상당히 많이 달랐겠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정도의 일을 못 믿는다면 어떻게 홍해가 갈라졌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 것이요, 어떻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홍해의 기적도, 예수님의 부활도 믿을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렇죠. 바로 성경에 적혀 있기 때문에, 성경은 전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메추라가기 132억마리가 몰려왔다는 것을 못 믿을 이유가 없는 것이겠죠.

이것은 여담입니다만, 지금 현재 메추라기는 멸종위기종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이 때 너무 많이 잡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만, 아 이건 어디까지나 여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어마어마한 수의 메추라기를 보내주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해서요? 아니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불평 불만을 늘어놓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의 종 모세를 원망하는 그들에 대해서 진노하셨다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만나만 주었을까요. 그것만이 아니죠. 광야고 보통 험한 곳입니까? 거기에는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워해서요? 아니요. 미워했다면 단번에 쓸어버리셨겠지요. 이렇게 사사건건이 불순종하고 그러는 사람들을 미워하셨다면 이렇게 살려두셨겠어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너무나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신다고 하면서 왜 그런 험난한 광야생활을 허락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신명기 8장 14절 후반부부터 16절까지 봅니다.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v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主は、あなたをエジプトの地、奴隷の家から連れ出し、
燃える蛇やさそりのいるあの大きな恐ろしい荒野、水のない、かわききった地を通らせ、堅い岩から、あなたのために水を流れ出させ、
あなたの先祖たちの知らなかったマナを、荒野であなたに食べさせられた。それは、あなたを苦しめ、あなたを試み、ついには、あなたをしあわせにするためであった。――

이렇게 어려움을 겪게 하신 이유를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마침내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그러셨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자,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넘치는 메추라기를 보내주십니다. 하지만 그것이 축복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 33절~34절에 뭐라고 적혀 있나요?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불렀으니 욕심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기브롯 핫다아와(탐욕의 무덤)
肉が彼らの歯の間にあってまだかみ終わらないうちに、主の怒りが民に向かって燃え上がり、主は非常に激しい疫病で民を打った。
こうして、欲望にかられた民を、彼らがそこに埋めたので、その場所の名をキブロテ・ハタアワと呼んだ。

그 많은 고기를 아직 씹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큰 재앙으로 내리심으로 말미암아 욕심을 낸 백성들을 크게 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 보면 이 부분이 이상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먼저 첫째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죄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껏 주신 고기를 씹기도 전에 재앙을 내리셨을까요.
그리고 둘째로, 사실 백성들이 고기를 달라고 했던 일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두 번째입니다.

출애굽기 16장에 보면요, 이 때는 만나도 주셨고 고기도 주셨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이렇게 주셨는데, 왜 이제 와서 민수기에서는 이처럼 무서운 재앙을 내리셨습니까. 하나님한테는 한 번만 구할 수 있고, 두 번 구하면 안 되나요? 아뇨. 하나님께 구하는데 무슨 회수제한 같은 것은 없습니다.

사실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을 받아주고 요구를 들어주셨던 출애굽기 16장, 그리고 원망에 대해서 진노하시고 무서운 재앙으로 치셨던 민수기 11장 사이에는 중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바로 출애굽기 24장이 있었던 것입니다.

출애굽기 24장은 시내산 언약이라고 불리는 언약 체결식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에 관한 신학적인 어려운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만, 여기서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게 되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간에 공식적인 언약을 맺게 됩니다. 예전에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는 언약은 무조건 계약입니다. 아브라함이 무엇을 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은 아닙니다.

출애굽기 24장 3절과 7절을 봅니다.

먼저 3절은요,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의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전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そこでモーセは来て、主のことばと、定めをことごとく民に告げた。すると、民はみな声を一つにして答えて言った。「主の仰せられたことは、みな行ないます。」

그리고 7절을 봅니다.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そして、契約の書を取り、民に読んで聞かせた。すると、彼らは言った。「主の仰せられたことはみな行ない、聞き従います。」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모든 율례를 모두 따를 것이라고 서원을 합니다. 그리고 6절과 8절에 보면 하나님께 바친 소의 피를 제단에 뿌립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피는 생명을 상징하지만 또한 희생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를 어길 시에는 준엄한 심판이 따른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피로 맺어진 시내산 언약인 것입니다.

이 언약으로 인하여 이제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은 진정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시내산 언약을 체결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그들의 관계는, 말하자면 고급 호텔 레스토랑 사장님과 손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어느 식당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사장님이나 직원이 우리를 친절하게 대해줍니다. 식당에 들어가면 웃는 얼굴로 우리를 반겨주고 자리로 안내해줍니다. 그 자리는 깨끗한 식탁포로 덮여있고요, 냅킨도 예쁘게 접혀 있습니다. 메뉴에 대해서 물어보면 하나하나 설명도 해주고요. 음식이 다 되면 공손히 가져다 줍니다. 물을 더 달라면 더 주고요, 포크가 지저분하다고 하면 죄송하다고 하면서 곧바로 새것으로 바꾸어줍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 반면, 직원들은 어때요? 손님들이 많으면 바쁘게 움직입니다. 손님들이 무슨 불평 불만을 하면 그저 죄송하다고 사과합니다. 직원들이 그런 아름다운 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해요? 아뇨. 그렇지 않죠. 손님들이 안 보이는 저쪽 안쪽이나, 아니면 허름한 직원 식당에서 때우기도 할 것입니다. 레스토랑 사장이 그럼 직원들을 공손하게 대해주나요? 아니요.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지시를 합니다. 그리고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혼이 나기도 하겠지요. 그리고 또 어디 그 뿐인가요. 직원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가게가 오픈하기 훨씬 전에 와서 준비를 해야 하고, 가게 문을 닫은 다음에도 뒷정리가 보통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고급 호텔에 한 젊은 직원이 있었습니다. 그 사장님은 아주 엄하기로 소문이 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직원이 오래 버티지 못하고 맨날 바뀌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젊은이는 꿋꿋이 근무하고 있어요.

그렇다고 이 사장님이 그 젊은이한테는 상냥하게 대해주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엄하게 대해면 대했지 봐주거나 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그 호텔 단골손님이 그 젊은이한테 물었답니다.

“이봐. 자네는 정말 참 대단한 것 같네. 내가 자네를 지켜 봐왔는데 저렇게 엄한 사장님 밑에서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꿋꿋이 버틸 수 있는지 얘기해줄 수 있겠나?”

그러자 이 젊은이가 웃으면서 조용히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저 사장님은 제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몇 년 뒤면 이 호텔을 제가 물려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들으니까 모든 것이 납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손님이라고 한다면 상냥하게 대우하겠지요. 요리도 갖다 주어야겠지요. 다 먹으면 그것도 치워야겠지요. 무슨 불평이나 불만을 이야기하면 사과도 하고 요구도 들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면 뭐합니까. 그 손님은 어차피 남남입니다. 가족도 아니고 식구도 아니에요. 밥 다 먹으면 갈 사람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단골손님이고 아무리 매상을 많이 올려주었다 하더라도 가게 문 닫을 시간이 되면 내보내야 합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아무리 좋은 손님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은 남남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족은 어떻습니까. 영업시간이 끝나면 바닥도 쓸고 테이블도 정리하고 그릇도 치우고 정신 없이 바쁩니다. 그 젊은이도 잘못한 것이 있으면 사장인 자기 아버지한테 혼이 나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젊은이가 호텔 사장의 가족이고 장차 그 호텔을 이어받을 상속자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8장 16절~18절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私たちが神の子どもであることは、御霊ご自身が、私たちの霊とともに、あかししてくださいます。
もし子どもであるなら、相続人でもあります。私たちがキリストと、栄光をともに受けるために苦難をともにしているなら、私たちは神の相続人であり、キリストとの共同相続人であります。
今の時のいろいろの苦しみは、将来私たちに啓示されようとしている栄光に比べれば、取るに足りないものと私は考えます。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남남이면 다시 안 보면 그만입니다.

잠언 24장 19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悪を行なう者に対して腹を立てるな。悪者に対してねたみを起こすな。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직 영업중인 상황에서 그 사람이 손님이라면 대우를 받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영업시간이 끝났을 때, 아직도 계속 거기 있고 싶대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내쫓게 되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요? 그러면 곧바로 경찰에 신고를 당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을 성경에는 뭐라고 적혀 있나요.
마태복음 7장 23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しかし、その時、わたしは彼らにこう宣告します。『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全然知らない。不法をなす者ども。わたしから離れて行け。』

여러분, 손님이 좋으시겠습니까. 상속자가 좋으시겠습니까. 제가 평신도 때 여러 교회에 다니다 보면요, 교회에서 이걸 해달라 저걸 해달라 그러면 싫어합니다. 그냥 자기는 예배를 드리기만 하겠다는 것이에요.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아무한테나 이걸 해달라 저걸 해달라 그러겠어요? 아닙니다. 그것은 이제 교회의 손님이 아니라 교회 주인이, 교회 가족이 되어달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교회에 새로 오신 분한테 전도를 하라고 하겠어요, 아니면 청소를 하라고 하겠어요. 이것도 갖다 주고 저것도 챙겨주고 그렇습니다. 그건 아직 손님인 단계라는 것이지요.

주님도 마찬가지십니다.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주고 그럴 때는 아직 손님입니다. 예, 홍해도 갈라주셨습니다. 단단한 바위에서 물도 주셨습니다.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왜요? 그 때까지는 아직 그들은 손님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손님이 좋은가요? 손님은 어디까지나 가족의 반대말, 상속자의 반대말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피의 언약을 맺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호텔 사장님과 손님 관계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남남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자격을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손님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전에는 손님이라서 사장한테 이것도 해달라 저것도 해달라 말할 수 있었지만, 이제 손님이 아니라 직원이요, 가족이요,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장한테 이걸 해달라 저걸 해달라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혼이 안 날래야 안 날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시내산 언약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 언약은 고대 시대에 행해진 것이기에 우리와 상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과 피의 언약을 맺음으로 인하여, 생명을 걸고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를 지키면 축복을 받지만 이를 어기면 죽음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이를 지켰나요? 아닙니다. 어기고 어기고, 또 어기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고 했는데 어겼으면 죽어야지요.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닙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당장이라도 죽어서 지옥불에 떨어져도 마땅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죽는 대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죽은 것으로 치자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모든 저주를 받으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저주를 받은 것으로 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나요? 예, 이미 우리가 받을 형벌을 예수님께서 모두 받아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맞을 채찍을 모두 받아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축복 받게는 받을 것이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모두 사라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을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된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지금 상속자의 믿음입니까. 아니면 손님의 믿음입니까. 나는 지금 교회 가족의 믿음입니까, 아니면 여전히 새신자의 믿음입니까.

지금 힘드십니까. 어려우십니까.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광야생활을 허락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허락하신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8장 18절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今の時のいろいろの苦しみは、将来私たちに啓示されようとしている栄光に比べれば、取るに足りないものと私は考えます。

우리 모두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잘 섬겨서 마침내 하나님 나라를 물려받는 영광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103회 축복에 이르는 문 →

← 제101회 달아 보시는 하나님

 
이카호중앙교회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101회 달아 보시는 하나님
2017년 10월 2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다니엘 5장 25절~31절
“기록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그 글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하니 이에 벨사살이 명하여 그들이 다니엘에게 자주색 옷을 입히게 하며 금 사슬을 그의 목에 걸어 주고 그를 위하여 조서를 내려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으니라 그 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그 때에 다리오는 육십이 세였더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달아보시는 하나님” 量られる神様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에 보면 위대한 왕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위대하다>는 뜻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크게 쓰임을 받은 왕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세상적으로 많은 권세를 자랑했던 왕이라는 뜻입니다.

그와 같은 왕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느부갓네살/ネブカデネザル 왕입니다. 그는 바벨론의 왕이었으며 예루살렘을 몇 번이나 침공하고 점령하였습니다. 그리고 온갖 금과 은 과,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포로로 잡아갔다고 해서 모두 노예로 삼아가지고 힘든 노동을 시킨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 지혜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밑에서 정치나 행정업무를 맡기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 중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다니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도 역시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만, 그는 다니엘 2장에서 느부갓네살/ネブカデネザル 왕이 꾼 꿈을 해석해줌으로 말미암아 단번에 바벨론 총리를 맡게 됩니다. 그가 관직에 있었던 기간을 보면, 다니엘 1장 1절에 보면 유다왕 여호야김이 다스린지 3년 만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ネブカデネザル이 공격을 하면서 포로로 끌려갔다고 하는데, 이 시기가 기원전 605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1장 21절에 보면 다니엘이 있었던 시기가 고레스왕 원년까지라고 하는데, 고레스왕/クロス王 은 페르시아 왕입니다만, 그 시기를 기원전 536년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단순계산으로 70년간이나 당대 왕을 섬겼다는 것이니, 왕이 바뀌고 나라가 바뀐다 하더라도 누구나가 다니엘을 중용했다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지혜롭고 뛰어난 인물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이 있는 다니엘 5장에 보면 벨사살/ベルシャツァル 이라고 하는 왕이 등장합니다. 그는 천하를 호령하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ネブカデネザル 왕의 후손이었습니다. 2절에 보면 느부갓네살/ネブカデネザル 왕이 그의 부친이라고 나옵니다만, 신학자들에 의하면 그가 바벨론의 마지막 왕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직접적인 아버지와 아들이라기 보다는, 조상과 후손……이라는 관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고 합니다.

그런데 그 대단했던 왕의 후손인 이 벨사살/ベルシャツァル이라고 하는 왕은 어땠냐 하면 그 행함이 대단히 문제가 많았다고 합니다.

다니엘 5장 1절~3절을 봅니다.
“벨사살 왕이 그의 귀족 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고 그 천 명 앞에서 술을 마시니라 벨사살이 술을 마실 때에 명하여 그의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하여 온 금, 은 그릇을 가져오라고 명하였으니 이는 왕과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이 다 그것으로 마시려 함이었더라 이에 예루살렘
v하나님의 전 성소 중에서 탈취하여 온 금 그릇을 가져오매 왕이 그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과 더불어 그것으로 마시더라”

ベルシャツァル王は、千人の貴人たちのために大宴会 を催し、その千人の前でぶどう酒を飲んでいた。ベルシャツァルは、ぶどう酒を飲みながら、父ネブカデネザルがエルサレムの宮から取って来た金、銀の器を持って 来るように命じた。王とその貴人たち、および王の妻とそばめたちがその器で飲むためであった。そこで、エルサレムの神の宮の本堂から取 って来た金の器が運ばれて来たので、王とその貴人たち、および王の妻とそばめたちはその器で飲んだ。

이 벨사살/ベルシャツァル 왕은 귀족 천 명들과 함께 잔치를 베풀던 중에 자신의 아버지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해온 금그릇과 은그릇을 가져오게 해서 그것들로 술을 마시고 거하게 놉니다. 이게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냥 술을 먹고 노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성전 안에 있었던 금 그릇과 은 그릇들을 가져다가 그것으로도 술을 마시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바쳤던 헌물을 다시 가져다가 자기들을 위해서 쓰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짓을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다니엘 5장 4절에 적혀 있습니다.
“그들이 술을 마시고는 그 금, 은, 구리, 쇠, 나무,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니라”

彼らはぶどう酒を飲み、金、銀、青銅、鉄、木、石の神々を賛美した。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에 있었던 물건들을,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자신들의 희락을 위해 더럽혔을 뿐만 아니라 금이나 은, 구리, 쇠, 나무,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됐어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바로 다음 구절, 다니엘 5장 5절을 봅니다.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すると突然、人間の手の指が現われ、王の宮殿の塗り壁の、燭台の向こう側の所に物を書いた。王が物を書くその手の先を見たとき、

갑자기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그 손가락이 석회벽에 글자를 썼다는 것이지요.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쾌락에 가득 찼던 그 잔치자리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와중에 왕이 얼마나 놀랐는지에 대한 묘사가 참으로 리얼합니다. 다음 5장 6절입니다.

“이에 왕의 즐기던 얼굴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의 무릎이 서로 부딪친지라”

王の顔色は変わり、それにおびえて、腰の関節がゆるみ、ひざはがたがた震えた。

참 묘사가 흥미롭죠?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의 무릎이 서로 부딪칠 정도로 벌벌 떨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 때 나타난 손가락이 쓴 글자가 도대체 뭐라고 썼는지 해석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걸 해석할 수 없었던 것은 왕뿐만이 아니었습니다.

5장 8절을 봅니다.
“그 때에 왕의 지혜자가 다 들어왔으나 능히 그 글자를 읽지 못하며 그 해석을 왕께 알려 주지 못하는지라”

その時、王の知者たちがみなはいって来たが、彼らは、その文字を読むことも、王にその解き明かしを告げることもできなかった。

지금도 왕이나 대통령, 총리 주변에는 공부도 많이 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만, 당시도 역시 마찬가지였겠지요. 갑자기 손가락이 나타나서 벽에 글을 썼다고 한다면 이게 보통 일이 아닐 텐데, 거기 있던 공부도 많이 하고 똑똑한 사람들 중에서 아무도 그 글씨를 읽을 수도 없었고 해석도 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앞의 7절에 보니까
“왕이 크게 소리 질러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를 불러오게 하고 바벨론의 지혜자들에게 말하되 누구를 막론하고 이 글자를 읽고 그 해석을 내게 보이면 자주색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그의 목에 걸어 주리니 그를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으리라 하니라”

王は、大声で叫び、呪文師、カルデヤ人、星占 いたちを連れて来させた。王はバビロンの知者たちに言った。「この文字を読み、その解き明かしを示す者にはだれでも、紫の衣を着せ、首に金の鎖をかけ、この国の 第三の権力を持たせよう。」

이를 해석하는 사람한테는 내가 이렇게 큰 상도 주고 벼슬도 주겠다고 하는데, 그런데도 아무도 손을 드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 얼마나 두렵고 답답했겠습니까.

그런데 마침 왕비가 들어옵니다. 그리고는 당신 신하 중에 다니엘이라고 하는 인물이 있지 않느냐, 다니엘을 불러서 한 번 물어보라고 조언을 합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왕 앞에 서고는 그 글씨를 해석하는 장면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오늘은 이해를 돕기 위해서 5장의 순서를 조금 바꾸어서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손가락이 나타나서 썼다고 하는 그 문제의 글씨가 무엇이었느냐 하면 25절에 나와 있습니다.

“기록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その書かれた文字はこうです。『メネ、メネ、テケル、ウ・パルシン。』

이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하는 말은 아람어라고 합니다. 아람어라고 하는 말은 당시에도 통용되던 언어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자리에 있던 지혜자들도 읽을 수 있었을 텐데 그것을 읽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두고 누구는 글씨체가 고대 문자로 쓰여졌기 때문에, 또 누구는 그 쓰여진 글씨는 사람의 힘으로는 읽지 못하는 글씨로 적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합니다만, 또 어떤 분들은, 그 글자를 읽을 수는 있었으나 해석을 할 수 없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글자 뜻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우선 <메네>라고 하는 말은 <수를 세어 본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 둘, 셋……이렇게 물건을 세다……라고 하는 말이 <메네>입니다.

그 다음에 <데겔>이라는 말은 <저울에 달아보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시장에서 고기나 야채를 살 때 보면, 간혹 아직도 무게를 저울에 달아서 거래를 하기도 합니다만, 바로 그런 식으로 무게를 저울에 달아본다는 뜻이 <데겔>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바르신>이라고 하는 말은, 정확하게는 <우> <바르신>입니다. 여기서 <우>라고 하는 말은 <그리고>라고 하는 접속사이고, <바르신>이라는 말은 <베레스>라고 하는 단어의 복수형 수동태라고 하는데, 그럼 <베레스>는 무슨 뜻이냐고 하면, 나누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나누다>는 말을 복수형 수동태가 <바르신>이라고 하니, 이것은 <두 개 이상으로 나누어지다>는 말이 됩니다.

여기서 다시 석화벽에 쓰여진 글씨가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하는 말을 직역을 해보면,

<세어보다, 세어보다, 저울에 달아보다, 그리고 둘로 나누어지다>

…가 됩니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그러니까 그 자리에 있던 지혜자들이 석화벽에 적힌 이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하더라도 이것만으로는 도무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이제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이 드디어 해석을 하게 됩니다. 이 해석은 크게 3가지로 구분이 됩니다. 첫째는 느부갓네살/ネブカデネザル 왕에 대한 배경설명이고, 둘째는 벨사살/ベルシャツァル 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지적, 그리고 셋째는 석화벽 글씨의 해석입니다.


먼저 느부갓네살/ネブカデネザル 왕에 대한 배경설명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18절에서 21절까지의 기록입니다.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v완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의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의 영광을 빼앗기고 사람 중에서 쫓겨나서 그의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나귀와 함께 살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의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사람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자리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에 이르렀나이다”

王さま。いと高き神は、あなたの父上ネブカデネザルに、国と偉大さと光栄と権威とをお与えになりました。
神が彼に賜わった偉大さによって、諸民、諸国、諸国語 の者たちはことごとく、彼の前に震え、おののきました。彼は思いのままに人を殺し、思いのままに人を生かし、思いのままに人を高め、思いのままに人を低くしました。
こうして、彼の心が高ぶり、彼の霊が強くなり、高慢にふるまったので、彼はその王座から退けられ、栄光を奪われました。
そして、人の中から追い出され、心は獣と等しくなり、野ろばとともに住み、牛のように草を食べ、からだは天の露 にぬれて、ついに、いと高き神が人間の国を支配し、みこころにかなう者をその上にお立てになることを知るようになりました。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ネブカデネザル 왕에게 엄청난 권력과 권세를 주어서 세상이 모두 그에게 굴복하게끔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교만하게 되어서 쫓겨났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짐승들과 같이 살면서 풀을 뜯어먹었다고 했는데, 그러면서 진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느부갓네살/ネブカデネザル 왕도 본인이 스스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니엘 4장 30절~34절
“나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이 말이 아직도 나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이르되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
v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 바로 그 때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v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이 자랐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이 되었더라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王はこう言っていた。「この大バビロンは、私の権力によって、王の家とするために、また、私の威光を輝かすために、私が建てたものではないか。」
このことばがまだ王の口にあるうちに、天から声があった。「ネブカデネザル王。あなたに告げる。国はあなたから取り去られた。
あなたは人間の中から追い出され、野の獣とともに住み、牛のように草を食べ、こうして七つの時があなたの上を過ぎ、ついに、あなたは、いと高き方が人間の国を支配し、その国をみこころにかなう者にお与えになることを知るようになる。」
このことばは、ただちにネブカデネザルの上に成就した。彼は人間の中から追い出され、牛のように草を食べ、そのからだは天の露にぬれて、ついに、彼の髪の毛は 鷲の羽のようになり、爪は鳥の爪のようになった。
その期間が終わったとき、私、ネブカデネザルは目を上げて天を見た。すると私に理性 が戻って来た。それで、私はいと高き方をほめたたえ、永遠に生きる方を賛美し、ほめたたえた。その主権は永遠の主権。その国は代々限りなく続く。


이것을 두고 느부갓네살/ネブカデネザル 왕이 정신적으로 이상하게 되어서 광야에서 유랑했다고 신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래서 7년 동안을 들짐승들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뜯었다고 하는데 그러면서 진정으로 이 나라를 다스리는 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니, 총명함이 돌아와서 다시 왕이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과연 정말로 정신병이 들어서 유랑생활을 했었는지, 아니면 모든 사람들로부터 쫓김을 당해서 동안 정처 없이 방황하고, 먹는 것조차 제대로 먹지도 못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자신의 교만함이 하늘을 찌를 때 사람들한테 쫓겨나고, 7년이라고 하는 오랜 세월 동안, 그야말로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면서 고생을 한 후에야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랬더니 모든 영광과 권세를 다시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 느부갓네살/ネブカデネザル 왕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둘째로, 지금 당사자인 벨사살/ベルシャツァル 에 대해서 말합니다. 23절~24절입니다.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아직도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도리어 자신을 하늘의 주재보다 높이며 그의 성전 그릇을 왕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구리, 쇠와 나무, 돌로 만든 신상들
v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その子であるベルシャツァル。あなたはこれらの事をすべて知っていながら、心を低くしませんでした。
それどころか、天の主に向かって高ぶり、主の宮の器をあなたの前に持って来 させて、あなたも貴人たちもあなたの妻もそばめたちも、それを使ってぶどう酒を飲みました。あなたは、見ることも、聞くことも、知ることもできない銀、金、青銅、鉄、木、石の神々を賛美しましたが、あなたの息と、あなたのすべての道をその手に握っておられる神をほめたたえませんでした。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여기서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후손>이라고 이해한다고 하면, 벨사살/ベルシャツァル 왕이여, 당신은 느부갓네살/ネブカデネザル 왕의 후손이고, 그러니 당연히 느부갓네살/ネブカデネザル 왕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교만하게 굴고, 하나님께 바쳐진 헌물을 가지고 욕보이고, 그것들도 모자라서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구리, 쇠와 나무, 돌로 만든 신상들> 요즘 말로 하면, 그야말로 듣보잡, 듣도 보도 못한 잡신들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고 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글씨를 써서 하나님께서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셋째로 이 글자의 의미를 다니엘이 해석하는데 그 해석이 26절~28절에 있습니다.

“그 글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하니”

そのことばの解き明かしはこうです。『メネ』とは、神があなたの治世を数えて終わらせられたということです。
『テケル』とは、あなたがはかりで量られて、目方の足りないことがわかったということです。
『パルシン』とは、あなたの国が分割され、メディヤとペルシヤとに与えられるということです。」

이 벨사살/ベルシャツァル이 왕이 된 것은 기원전 550년이라고 하고, 이 사건이 일어난 시기는 기원전 538년입니다. 그러니까 왕이 된지 13년째가 되는 해였던 것이지요. 이 말씀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를 한 번만 세어본 게 아니야. 몇 번이고 세어봤어. 그리고 어디 그 뿐이야? 저울에 달아보기까지 했어. 그러니까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너를 지금까지 하나만 본 게 아니야. 이렇게 보기도 하고, 저렇게 보기도 해봤어……라고 하는 뜻이지요. 몇 년 동안이요? 예, 적어도 13년 동안 네가 왕으로 있으면서 하는 짓을 여러 가지로 평가해봤어. 그런데 어땠다는 거예요? 예, 도저히 안 되겠다는 겁니다. 회복 불능. 너는 이제 끝이야. 라고 한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다는 거예요? 우-바르신……즉 그 나라를 갈라서 메대와 바사한테 줘버리겠다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석화벽에 쓰인 글자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세다, 세다, 저울에 달다, 그리고 나누어진다>라는 말만을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만, 이렇게 다니엘이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대로 해석을 하니까 모든 수수깨끼가 풀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 해석을 들으니까 벨사살/ベルシャツァル 왕이 어떻겠어요? 다니엘이 왕한테 말을 한 지적이 조목조목 모두 맞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도 반박할 수가 없어요. 일이 이렇게 되니 벨사살/ベルシャツァル 왕이 7절에서 약속했던 상을 다니엘에게 내립니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됩니까. 30절에 의하면 바로 그날 밤 죽임을 당하고 결국 그 찬란했던 바벨론이 멸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신다. 이것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예, 맞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主は、ある人たちがおそいと思っているように、その約束のことを遅らせておられるのではありません。かえって、あなたがたに対して忍耐深くあられるのであって、ひとりでも 滅びることを望まず、すべての人が悔い改めに進むことを望んでおられるのです。

여기서 주의 약속은 심판의 왕으로 다시 오실 날을 말합니다. 주님은 오래 참으십니다. 우리가 잘못이 있고 죄를 짓고 해도 오랫동안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나 우리는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오래 참으시기는 하지만, 영원히 참지는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심판의 그 날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 벨사살/ベルシャツァル 왕이 당했던 심판을 피할 수 있을까요.


예전에 한국에 있을 때 보면 이른바 <몰래 카메라>라고 하는 방송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개그맨 이경규씨가 진행하고 계셨습니다만, 지금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어떤 내용이에요? 말하자면 연예인들을 몰래 촬영하면서, 무슨 속이는 프로그램이잖아요? 그러면 그 연예인들이 실수도 하고 창피도 당하고 그러는 것 같습니다. 저는 좀 그런 방송을 잘 못 보는 성격이라서 자주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우리 한 번 생각해봅시다.

물론 그 방송은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서 마치 아무도 안 보는 것처럼 해놓고, 그리고 그 사람이 실수를 하거나 좀 황당한 행동을 하게끔 유도를 하는 것입니다만, 그 연예인들이 걸려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몰래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연출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게 해야 합니다. 만약에 이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리게 되면 연예인이 모든 비밀을 알아버리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떤 실수도, 당혹스러운 행동도 하지 않게 되고, 그러니까 당연히 돌발상황도 벌어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거나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발생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의지하는 우리를, 설마 주님께서 미워하시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럴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세어보고 계시구나, 지금 달아보고 계시구나……만약에 이 사실을 모르면 그냥 하나님을 원망하고 나 스스로 절망하고 그럽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보고 계시는구나, 지금 나를 저울에 달아보고 계시는구나, 라고 하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18절, 第一テサロニケ人への手紙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いつも喜んでいなさい。
絶えず祈りなさい。
すべての事について、感謝しなさい。これが、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あなたがたに望んでおられることです。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앞서 말씀 드린 <몰래 카메라>라는 방송을 생각해보십시오. 예를 들어서 무슨 사고가 날 것 같아요. 일이 터질 것 같아요. 하지만 정말로 사고가 나나요? 일이 터지나요? 그러면 정말 큰일 납니다. 방송을 할 수가 없어요. 몰래 카메라로 보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그 결정적인 순간에, 사고가 나고 일이 터질 바로 그 직전에,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몰래 카메라는 어디까지나 그 사람을 짓궂게 하고 골탕먹이게 해서 그걸 보고 웃으려고 하는 방송입니다만, 하나님도 우리를 그런 의도로 엿보고 계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121편 3절에서 8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
v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主はあなたの足をよろけさせず、あなたを守る方は、まどろむこともない。
見よ。イスラエルを守る方は、まどろむこともなく、眠ることもない。
主は、あなたを守る方。主は、あなたの右の手をおおう陰。
昼も、日が、あなたを打つことがなく、夜も、月が、あなたを打つことはない。
主は、すべてのわざわいから、あなたを守り、あなたのいのちを守られる。
主は、あなたを、行くにも帰るにも、今よりとこしえまでも守られる。

아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으면서 지켜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실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인생에서 어려움이 닥칠 때, 고난이 닥칠 때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아,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 나를 달아보고 계신다. 그리고 이 어려움을 주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이기면 넘치는 축복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또한 이는 어려움이 있을 때만이 아닙니다. 잘될 때, 좋은 일이 있을 때에도, 일이 잘 풀릴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럴 때일수록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 드리고 영광을 돌려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겪을 때, 우리 앞이 가로막혀 있을 때, 그것은 절망의 신호가 아니라 축복의 신호입니다. 주님께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찬양하시겠습니까.
스스로 절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주님을 의지하시겠습니까.
거기서 주저앉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일어서서 주님과 함께 나아가겠습니까.

우리에게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스스로 교만해지시겠습니까. 아니면 주님께 감사하겠습니까.
모든 공로를 나한테 돌리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우리 모두, 어떠한 일이 있을 때든지 사랑의 주님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다는 믿음을 갖고, 아무리 힘들고 어려울 때라도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과 함께 나아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일이 잘 풀릴 때라도 교만하지 않고 주님께 영광을 돌려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드리는, 그리고 마침내 주님께서 채워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102회 상속자와 손님 →
← 제100회 편지로서의 사명
 
이카호중앙교회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100회 편지로서의 사명
2017년 10월 2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3절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편지로서의 사명” 手紙としての使命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후서에 적힌 글입니다. 고린도후서라고 하는 것은 1장 1절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아가야지방과 아가야지방의 수도인 고린도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서신입니다.

이와 같이 이해하는 것은, 신학적인 지식으로서는 가치가 있습니다만, 단지 성경을 그렇게만 받아들이는 것은 신앙적으로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특히 교회에 오래 다니고 성경에 대해서 많이 아는 분들 중에 이렇게 이해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예를 들어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고대 이스라엘의 전설과 규범들이다,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 하, 열왕기상 하, 역대상 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는 이스라엘의 역사서다.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는 다윗과 솔로몬 등이 지은 노래다,
이사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는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 선지자들이 본 환상이다,

신약에서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신 행적을 적어놓은 기록물이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일어난 일들을 기록해 놓은 역사서다.
로마서, 고린도전 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 후서, 디모데전 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등은 바울이 각 교회에 보낸 서신들이다.
야고보서, 베드로전 후서, 요한 1.2.3서, 유다서. 히브리서 등은 그 외의 제자들이 각 교회에 보낸 편지들이다.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 되었다가 본 환상이다.

이와 같은 성경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이를 두고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단지 이렇게만 이해한다는 것은, 성경은 그야말로 세상인 지식, 세상적인 학문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聖書はすべて、神の霊感によるもので、教えと戒めと矯正と義の訓練とのために有益です。

성경은 모두 직접적으로는 사람에 의해 기록된 것이지만, 이는 단지 사람의 생각이나 판단으로 적힌 세상에 있는 책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생각이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는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라, 성경은 바로 누구를 위해서요? 예, 바로 나를 위해 쓰여진 책이라고 믿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전에 보면 많이 배웠다는 사람이 이렇게 적어놓은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호수아서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점령합니다. 그런데 성경 대로라면 가나안 사람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일 텐데, 그렇게 무참하게 사람들을 죽인다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을 하는 사람들의 저의가 무엇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앞뒤가 맞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닙니까?

그게 사실인가요? 아니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에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만 했습니까. 어디 그 뿐입니까? 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채찍에 맞으시고, 사람들에게 모욕을 받으면서,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죽으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나 하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죄 속에서 허덕이는 나 하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러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사람이 많아서, 그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을 것이다. 나는 그 많은 사람들 중 한 사람밖에 안 되니까 예수님의 은혜도 그 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10장 30절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また、あなたがたの頭の毛さえも、みな数えられています。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위대하다는 표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만 먹으면 너희들의 머리카락까지 세실 수도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는 너희 머리카락 수까지도 이미 새셨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미 우리를 자세히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를 세심하게 살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사랑입니까.

성경은 위인전이 아닙니다. 어떤 한 두 사람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적힌 책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 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실수를 하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어떻게 해서든 나 한 사람 좀 구원해보시려고, 나 한 사람 좀 살려보려고 그와 같은 기록이 있는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 땅에 나 혼자 살았다 하더라도,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기쁜 마음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요, 그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나를 위해서 오신 것이요,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신 것도 나를 위해 맞으신 것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도 나를 위해 달리신 것이요,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도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도 나를 위해 부활하신 것이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것도 나를 위해 승천하신 것이요, 성령을 부어주신 것도 나를 위해 부어주신 것이요, 장차 오실 예수님도 나를 위해 오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본문 말씀도, 단지 2000년 전에 바울이라고 하는 사람이 아가야와 고린도 지방에 있는 성도들한테 보낸 편지일 뿐이고, 이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말이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2000년 전에, 나는 물론이거니와 내 부모님의 부모님도 태어나시기 훨씬 전에, 주님께서 나에게 쓰신, 나 보라도 쓰신 말씀, 오늘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3절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第二コリント人への手紙 3章 3節
「あなたがたが私たちの奉仕によるキリストの手紙であり、墨によってではなく、生ける神の御霊 によって書かれ、石の板にではなく、人の心の板に書かれたものであることが明らかだからです。」

이 말씀에 의하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갖고 있는 편지……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쓰신 편지라는 뜻입니다. 그것도 그냥 쓰신 편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 마음판에 쓰신 편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편지라고 하신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편지로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하겠습니다만,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그렇다면 과연 <편지>란 무엇인가 하는 점부터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편지는 발신인과 수신인이 있습니다. 자기가 어떤 글을 써서 그것을 서랍에 보관한다거나, 아니면 노트에 쓴 다음에 책장에 꽂아둔다면, 이는 편지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편지를 쓰는 목적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닌, 보내기 위해서 쓰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편지에는 반드시 보내는 사람과 받아보는 사람, 즉 발신인과 수신인이 있습니다.

둘째로, 편지를 보낼 때에는 공짜로 보내주지는 않습니다. 내가 종이에 글을 쓰고 나 혼자서 보관한다 하면 비용은 전혀 들지 않습니다만, 우편으로 보내기 위해서는, 아무리 얇은 엽서 한 장이라 한다 하더라도 돈을 내야지만 운반해줍니다. 편지는 편지를 보내는 사람, 즉 발신인이 반드시 비용을 지불해야지만 한다는 점입니다.

셋째로, 편지에는 반드시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편지의 가치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 내용에 있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사진과 두꺼운 내용이라 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담긴 내용이 없다면, 이를 눈여겨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 편지의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바로 그 편지 속에 담긴 내용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세 가지 편지의 특징으로 미루어볼 때 우리가 편지라고 한다면, 우선 발신인과 수신인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그것은 누구입니까.

예, 오늘 본문에서 우리를 가리켜서 그리스도가 쓰신 편지라고 말씀하셨으니, 우리를 보내시는 분은 다름아닌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마가복음 16장 15절을 봅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それから、イエスは彼らにこう言われた。「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福音を宣べ伝えなさい。

주님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바로 온 천하에 있는 만민들, 바로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아직 예수님을 모르거나, 아니면 알긴 알지만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 또는 예전에 믿음이 있었지만 지금은 믿음을 잃어버리거나 잃어버릴 위기에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우리가 있는 곳이 바로 천하이고 우리 곁에 있는 그와 같은 사람들이 바로 만민인 것입니다. 편지의 발신인 되신 주님께서는 그 만민이라고 하는, 이웃이라고 하는 수신인에게 <나>라고 하는 편지를 보내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두 번째의 특징인 비용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나>라고 하는 편지를 보내시기 위해서 비용을 지불하셨나요? 예, 지불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서 우리가 회사원인 경우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회사에서 근무하는 직원이라고 한다면 매월 정해진 날짜에 월급이 지급됩니다. 그 이유, 즉 정해진 월급날에 월급이 나오는 이유는 그냥 어쩌다가 우연히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그 회사에 고용되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회사가 그 사람을 고용하고, 그 사람에게 월급을 주기 때문에 그 사람이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말입니다. 그런데 그 월급 받는 사람들 중에서는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도 있지만, 열심히 안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월급이 나와요. 왜 나옵니까?

그것은 지금은 비록 뚜렷한 성과가 안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회사에 도움이 될만한 일을 할 것이다, 언젠가는 회사에 기여를 할 만한 인재가 되어줄 것이다……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열심히 일하지도 않아요, 그리고 회사에서 기대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사람을 왜 비싼 돈을 줘가면서 고용을 하겠습니까.

제가 예전에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할 때를 보면, 제 상사가 항상 했던 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회사원은 반드시 자신의 인건비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건비라고 하는 것은 월급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그 회사에서 근무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필요합니까. 일단 기본적으로 책상과 의자, 그리고 컴퓨터는 기본이겠죠? 그리고 볼펜이나 각종 문구류, 프린터, 종이값, 잉크값, 교통비……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그 사람이 회사에서 근무하려면, 회사 임대료에서 그 사람이 차지하는 면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기세, 냉난방비도 듭니다. 이것도 역시 인건비에 포함되어야 하죠. 이렇게 따진다면 직원 한 사람을 고용하기 위해서 드는 비용은 대략 월급의 3배가 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월급 30만엔을 지급하는 직원 하나를 고용하기 위해서는 월급을 포함해서 총 90만엔이 든다는 것이지요. 이를 뒤집어서 말하자면 그 직원이 회사에서 한 달에 90만엔어치 일을 해야지만 본전이라는 것이니까, 자신의 월급의 3배 이상의 일을 하는 직원이야말로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인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능한 직원은 항상 내가 하는 일이 어느 정도 회사에 기여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는 반면에, 유능하지 못한 직원은 어떻습니까. 내가 회사에 어느 정도 기여하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저 맨날 월급만 적다고 불평 불만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이유는 어쩌다 우연히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당장이라도 죄악 때문에 지옥으로 떨어진다 하더라도 아무 소리 못할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26절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空の鳥を見なさい。種蒔きもせず、刈り入れもせず、倉に納めることもしません。けれども、あなたがたの天の父がこれを養っていてくださるのです。あなたがたは、鳥よりも、もっとすぐれたものではありませんか。

저는 이 말씀을 보고 이렇게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무슨 동물 관련 방송을 보면요, 공중의 새들이 하루 먹이를 얻기 위해서 엄청나게 노력을 합니다. 그래서, 아이구, 무슨, 하나님이 먹이시는 것만이 아니라 새들도 무척이나 힘들게 노력해야 하네……라고 생각했었습니다만, 여러분께서는 어떻습니까.

만약에 이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거짓말이고 새들이 자기들의 노력으로 하루하루 먹고 산다고 생각한다면, 예를 들어서 어항 안에 있는 물고기들이, 자기들도 엄청 노력해서 먹이를 좇아 다닌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어항 안에 있는 물고기가 그 기르는 사람의 수고로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저 하늘을 나는 새든, 그리고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든,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거저가 아니라 모두 주님의 사랑과 은혜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편지의 내용입니다. 발신인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표값도 냈습니다. 그런데 내용이 시원찮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누가 보겠습니까. 예전에 제가 학교 다닐 때에 보니까, 그 때가 정월이었는데, 어디서 연하장이 와 있었습니다. 발신인이 누군가 해서 봤더니 <청와대>라고 적혀 있더라구요? 그래서 열어보니까 마침 그 때쯤에 새로 취임한 대통령이 연하장을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뭐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런 게 아니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마도 저희 학교 중에서 4학년 학생들한테 다 보낸 것 같더라구요. 연하장 표지도 아주 멋있었습니다. 흰 바탕에 금색으로 봉황문양이 찍혀 있었고요. 대통령 서명까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뭐합니까. 설마 거기에 직접 사인을 했겠어요? 새해 인사도 틀에 박힌 글이고, 서명도 다 인쇄죠.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맨 처음에는 신기한 마음도 있었습니다만, 언제 어떻게 버렸는지도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편지에 좋은 내용이 담겼다면 어떻겠습니까. 그와 같은 편지는 오랫동안 마음 속에 담아두고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내용을 담아서, 어떤 내용을 전해야 할까요. 오늘은 일본 중의원 선거 날입니다. 어제까지는 후보들이 자신의 선거구를 돌아다니면서 자신을 찍어달라고 호소하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당직자들은 자신의 선거구 만이 아니 아니라 일본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주장을 말합니다.

저도 그런 모습을 보면요, 나도 정치를 좀 했다면 잘했을 것 같은데……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아, 물론 절대로 안 해요. 그리고 생각이 그렇다는 것뿐이지, 막상 해보면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겠어요?

그 분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여러 가지 내용도 그렇습니다만, 결국은 뭐예요? 내가 하면 잘할 수 있다. 나를 지지해달라. 우리 당이 하면 잘할 수 있다. 우리 당을 지지해달라……아니겠습니까? 이는 민주적인 선거를 치르는 나라라고 한다면 어느 나라든지 후보들은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사실 저도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없습니다만 지지해주세요”라고 하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들 “자기는 할 수 있다”고 외칩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에요? 물론 본인들은 그렇게 믿고 있을지 모르지만, 정말로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쉽게도 극히 한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못난 사람들인가요? 아니에요. 일본이나 한국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해서, 적어도 몇 번 당선된 적이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래도 상당히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선거 때 공약으로 내세운 것들을 다 잘할 수는 없습니다. 이건 여당이나 야당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국회의원도 그렇고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못 나서 그렇다기 보다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편지라고 하는 우리는 어떤 내용을 사람들에게, 만민들에게 전해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교회 좀 다녀본 분이라면 <주님의 복음을 전한다>라고 대답하실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더 나아가서 주님의 복음을 전한다는 게 뭐예요? 지나가는 사람 만나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두 읊어드려야 복음을 전하는 것인가요?


지난 수요예배 때도 말씀 드린 것입니다만, 교회도 그렇고 세상도 그렇고 너무나도 추상적인 말씀들을 하세요.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순종하라고 합니다. 주님이 주신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설명해주지 않아요.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할지 결국 모르고 끝나게 됩니다.

정치인들은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나는 할 수 있다>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우리가 외칠 내용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은 할 수 있다>입니다. 내 힘으로는 못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할 수 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할 수 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분들이 전도지를 들고 다니시면서 전하는 것도 좋겠습니다만, 그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평소에는 전혀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선거 때만 나타나서 찍어달라고 하면 누가 찍어주나요? 그것이 아니라 평소부터 열심히 그 지역을 위해서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을 지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는 세상적으로만 살면서, 주일에만 교회에서 거룩한 척한다면, 전도할 때만 예수 믿는 척을 한다면, 누가 나를 보고 예수님을 믿고 싶어지겠습니까.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쓰신 편지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편지로서 어떤 사명을 감당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은 할 수 있다>는 복음을 전하는 것, 바로 그것이 사명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예수님께서 쓰신 편지가 되고, 예수님을 전하는 전도지가 되어서, 우리 생활 속에서 우리 삶을 통해서 <예수님은 할 수 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할 수 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다> 라고 하는 믿음의 복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101회 달아 보시는 하나님 →

← 제99회 우리들의 희로애락

 
이카호중앙교회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99회 우리들의 희로애락
2017년 10월 1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Last Update 2019. 5. 21

요나 4장 6절~8절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들의 희로애락’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나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고자 합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밋대의 아들 요나한테 말씀하시기를 니느웨에 가서, “너희들의 죄악이 하나님께 상달되었다”라고 말하라고 하십니다. 그랬더니 이 요나가 한 행동이 참 흥미롭죠? 니느웨로 가라고 했더니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니느웨라고 하는 곳은 당시 앗수르라는 나라의 수도입니다. 그리고 니느웨와 다시스의 방향은 거의 반대방향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또 흥미로운 것은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순종하기 싫어서 다시스로 갔다고 하는데, 그 거리가 보통이 아닙니다. 무슨 엄마 심부름 하기 싫어서 친구네로 도망간 정도가 아니에요. 요나가 정확히 어디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습니다만, 당시 이스라엘이었다는 것은 요나가 다시스로 가려고 욥바까지 내려갔다는 글로 알 수 있습니다. <욥바>라고 하는 곳은 예루살렘에서 6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항구도시인데, 여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단 요나가 있었던 곳이 일단 예루살렘이었다고 한다면 니느웨는 지금의 이라크 정도 되는 곳으로서, 대략 800km 정도 되는 거리였다고 하는데, 요나가 도망가고자 했던 목적지인 다시스는 지금의 스페인 쪽이라고 해요. 그래서 거리가 무려 3200km 정도 떨어진 곳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그저 잠깐 피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작심하고 도망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를 두고 어떤 분들은 요나더러 불순종한 못된 사람으로 낙인을 찍기도 합니다만 과연 그럴까요? 요나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일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니느웨가 수도인 앗수르 제국은 이스라엘을 무척이나 괴롭혔던 강대국이었습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괴롭혔던 나라였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맨날 자기 나라를 공격하고 못살게 굴고 하는 나라가 좋았을 리가 없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이스라엘이 쉽게 물리칠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대단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자랑합니다.
그런 최강국이자 적대국인 나라에 가서 무슨 좋은 소리를 하라는 것도 아니고, 너희들이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다 아신다……이런 말을 하러 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예를 들어서 당시 일제시대 때, 조선은 일본이 빨리 망하는 것을 원했을 텐데, 하나님이 조선에 있는 한 기독교 신자한테 말씀하시기를, 일본에 가서 너희들의 죄악을 하나님이 모두 아신다! 그러니까 회개하라! 라고 말하기를 명하시면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요나더러 무슨 불순종한 선지자다, 나약한 선지자다 하고 손가락질 하기는 쉽습니다만, 그런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사명을 하나님이 주셨을 때,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것은 지극히 의문입니다.
요나라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 구체적인 사전설명은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아무나 선지자로 택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에 아무나 택했다고 하면 그야말로 하나님이 사람을 잘못 골랐다, 하나님이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 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 없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가 불순종했다는 것은, 요나가 나약해서였다기보다는, 당시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사명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선지자한테 조차도 그만큼 감당하기 힘들었던 것이었다고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이 요나서는 비록 짧은 책이긴 합니다만, 여기에는 너무나도 드릴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후반부에 있는 구절을 말씀 드려야 하기 때문에 전반부는 조금 빨리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요나가 욥바에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는데 풍랑을 만납니다. 배에 탄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배를 가볍게 하려고 짐들을 바다에 던집니다. 그래도 잠잠해지지 않자, 이 풍랑이 누구 때문에 일어났는지를 알아보자고 하면서 제비를 뽑자고 합니다. 그랬더니 요나가 뽑혔어요. 요나는 이것을 보고 그래,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서 달아나려고 하니 이렇게 난리가 나는구나, 하고 깨닫고는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그러자 바다는 잔잔해지고, 바다로 던져진 요나를 큰 물고기가 삼켜버리고 맙니다. 요나는 이제 물고기 뱃속에서 무려 3일 동안을 보낸 다음 육지로 나오게 되지요. 요나가 도망치려 했던 곳은 니느웨와 정반대 방향이었지만, 뱃속에서 나온 곳은 니느웨 근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 넣으시고 니느웨 쪽으로 강제송환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자, 이제 뱃속에서 나온 요나한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나 3장 1절~2절을 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지금 3일 동안 물고기 뱃속에 갇혀 있다가 이제 간신히 물고기가 토하는 바람에 밖으로 나왔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3일간 있으면서 죽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 기적이지요.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물고기 뱃속에 불이 있겠어요? 3일 동안 캄캄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간신히 나왔습니다. 이 때가 낮인지 밤인지는 적혀 있지는 않습니다만, 낮이었다면 얼마나 눈이 부셨을 것이고, 밤이면 거기가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 마음이 급하십니다. 어서 일어나라는 거예요. 그리고 빨리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너한테 말한 것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뭐라고 하셨어요. 예, 너희들이 지금 짓고 있는 죄를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라는 말씀이었죠. 그런데 이 부분을 기록한 말씀을 보면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요나 3장 3절~4절입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이 구절에 보면 요나가 더 한 말이 있었지요?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이 말씀도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었겠지요. 당시 니느웨라고 하는 도시 크기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아직까지도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만, 성경에는 분명히 <큰 성읍>이라고 하고, 그 기준을 <사흘 동안 걸을 만큼>이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굳이 <사흘 동안 걸을 만큼>이라고 한 이유는, 물론 당시 어떤 도시 규모를 표현하는 방법일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그보다는 오히려 그 다음 구절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요나는 어떻게 했대요? 예, 하루 동안 다니면서 외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니느웨 전체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3일을 다녀야 하는데, 하루만 다니면서 말씀을 선포했다는 것은 그 성읍의 1/3 정도밖에 안 돌아다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보면 이 요나가 니느웨를 얼마나 미워했는지, 얼마나 하나님이 이 성읍을 멸망시켜주시기를 바랬는지, 얼마나 니느웨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정말 참으로 불성실하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요나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되었대요?
요나 3장 5절~9절을 보면요,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정말로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지독한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하면서 회개했다는 것이에요. 이 앗수르는 본래 하나님을 믿는 나라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 무성의하고 불성실한 요나의 말 한마디를 듣고 온 국민은 물론이거니와, 니느웨 왕까지 금식과 회개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니느웨 대부흥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결정적인 계기를 만든 것이 누구였습니까. 그렇죠. 바로 요나였습니다. 요나가 비록 강제적이긴 했습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니느웨에서 선포함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까.
하지만 요나는 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는 요나의 심보가 고약해서가 아니에요.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을 그렇게 괴롭히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잡아가고 노략질을 하던 나라가 바로 앗수르였습니다. 요나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앗수르의 멸망을 원하고 있었고, 앗수르의 멸망이야말로 이스라엘의 구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지극히 무성의한 전도를 했을 뿐인데, 이 말을 듣고 하나님을 믿지를 않나, 금식을 하지 않나, 회개를 하지 않나……그러자 결국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여기서부터가 오늘 말씀의 본론입니다. 여기까지 말씀을 드린 이유는 지금 이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여기서부터 나오는 요나의 감정표현이 얼마나 풍부한지 한 번 보세요.
이를 보고 요나는 기뻐했겠어요? 아니죠. 반대로 무척 화를 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요나 4장 1절~4절까지를 봅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요나를 보니 화가 단단히 났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 가지 말이 있습니다만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거 봐요. 이럴 거면 진작 이렇게 될 거라고 말을 하지 그랬어요.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러니까 내가 다시스로 도망친 거 아니에요. 아~~열 받아. 나 정말 죽겠으니까 어서 빨리 내 생명이나 거둬가쇼.”
뭐 이러면서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가 모자란 사람이에요? 요나가 성실하지 못한 사람이에요? 사실 내용이 좀 그렇습니다만, 이 정도로 하나님과 가깝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보통 인물입니까. 우리가 만약에 요나였더라면 더 속상해하고 불평을 했지, 요나보다 낫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나가 그래도 또 혹시 몰라서, 어쩌면 그 중에서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한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을까 해서, 그것을 지켜보려고 성읍 동쪽에 초막을 짓고 앉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다음부터가 오늘 본문입니다.
요나 4장 6절~8절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여기 이 세 구절에 보면 요나의 극단적인 감정표현이 두 군데 나옵니다.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크게 기뻐했다는 것과, 둘째는 죽기를 구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뜨거운 동풍>이 불었다고 기록합니다. 당시 북아프리카 쪽에서 지중해 연안으로 불어오는 바람 중에 <시로코(Sirocco)>라고 하는 열풍이 있다고 합니다만. 이 바람은 보통 초여름에 불어온다고 합니다. 이 바람은 똑같은 열풍인데 어떤 때는 대단히 건조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대단히 습하기도 해서, 이 바람이 불면 대체적으로 불쾌지수가 높아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나도 그 때 이렇게 예민했는지 모르지만, 그 때가 이 시로코라고 하는 바람이 불어오는 초여름이었다고 하면 햇빛도 대단히 강했을 것입니다.
요나가 머물렀던 초막은 집으로서 완벽하지가 않았겠지요. 요나도 많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나를 위해 박넝쿨을 예비해주셨다는 것이에요. 그랬더니 요나가 어떻게 했대요? 예, 크게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대로 놔두시면 좋으실 것을, 하나님이 이번에는 벌레를 예비하셔서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셨다는 거예요. 그리고 뜨거운 바람, 열풍을 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뜨거운 바람은 불어오죠, 거기에 강한 햇빛을 가려줄 박넝쿨도 없어졌죠, 그러니까 정신이 혼미해져서는 이제 자기를 죽여달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하든, 저는 지금까지 이 요나라는 선지자에 대해서 꿋꿋이 변호하고 왔습니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지금이 어떤 상황입니까. 이스라엘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까지 하나님께 이끌려 와서, 큰 도시 니느웨에서 회개를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니느웨에 대한 운명을 생각하고 계실 때에, 거기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구원사역을 생각하고 계실 때에, 선지자이자 선교사로 온 장본인인 요나는 지금 뭘 하고 있나 하면, 박 넝쿨 하나가 생겼다고 크게 기뻐하다가, 그 넝쿨 하나가 사라지니까 나를 죽여달라고 하나님한테 떼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로애락도 어쩌면 이런 수준인지 모르겠습니다. 희로애락……기뻐하고 화를 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이와 같은 감정을 모두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도 근시안적으로, 조금 좋은 일이 있으면 히히 거리다가, 조금 섭섭한 일이 있으면 화를 내고, 좋은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슬퍼하다가, 또 조금 좋은 일이 있으면 즐거워하고……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통 사람들인가요? 인간적으로 본다면 우리는 별볼일 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나도 큰 사랑을 허락하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해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해주신 것입니다. 죄 안에서 허덕이다가 결국은 지옥으로 떨어져서 영원토록 꺼지지 않는 불구덩이 속에서 고통을 당할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목숨까지도 내주실 만큼 우리에게 한없는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구약에는 우리와 같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말미암아 성전을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괜히 사랑하셨나요? 아닙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20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6장 15절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감당해야 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이는 목사나 선교사만이 감당해야 하는 사역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 하는 사명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천하가 어디입니까. 만민이 누구입니까. 내가 있는 곳이 바로 천하요, 예수님을 믿지 않거나, 믿다가 안 믿게 된 이웃이 바로 만민인 것입니다. 지금 그와 같은 막중한 상황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모른 채, 그저 초막에 앉아서 박넝쿨 하나에 크게 기뻐하고, 벌레 한 마리 때문에 못 살겠다, 죽고 싶다 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할 때가 없었는지, 우리 스스로를 한 번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희로애락만으로도 모자라서,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근심, 불안, 불평, 불만을 일삼고 있지나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 좋습니다. 기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기도를 하면 할수록 불안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생각해보세요. 예를 들어서 버스를 탈 때 <이 버스가 서울역에 갑니까>라고 물었더니 <예, 갑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예, 그 버스는 서울역에 간다고 믿어야죠.
그런데 그 버스에 탔으면서도 서울역까지 갈 수 있도록 금식하고, “이 버스가 서울역까지 인도해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그러면서 버스 안에서 통성기도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버스 기사 아저씨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니, 서울역까지 간다니까요. 왜 안 믿어요?” 그럴 거 아니겠어요?
여러분,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그렇다면 이제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어차피 우리는 잘 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룹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우리가 받을 고통과 고난은 예수님께서 이미 2천년 전에 십자가 위에서 모두 해결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징계를 받으므로 말미암아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와 같은 믿음이 있는데, 눈앞에 왔다 갔다 하는 박넝쿨 한 두 개 때문에 슬퍼했다가 걱정했다가, 근심했다가, 낙심했다가, 좌절했다가 하면, 마귀들이 보고 얼마나 깔깔대고 좋아하겠습니까.
우리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과 동행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슬픔과 걱정과 근심과 낙심과 좌절을 모두 버려버리고,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신다는 믿음을 갖고,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축복과 승리를 모두 얻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100회 편지로서의 사명 →

← 제98회 간증을 예비하는 삶

 
이카호중앙교회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98회 간증을 예비하는 삶
2017년 10월 8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신명기 5장 32절~33절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간증을 예비하는 삶” 証しに備える生き方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 세상에는 참 훌륭한 책들도 많고 훌륭한 교육자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공부 많이 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신앙적으로 보더라도 세계적인 교회나 목회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치나 사회적으로 보더라도, 그리고 신앙적으로 보더라도 문제가 끊이질 않습니다.

똑똑한 사람들도 많고 훌륭한 사람들도 많고, 그리고 믿음 좋은 사람들도 많은데 왜 이렇게 문제가 끊이질 않을까……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중 하나가 바로 내가 말하는 것처럼 내가 행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제가 무슨 똑똑하다거나 훌륭하다는 것도 아니요, 믿음이 좋다는 것을 자랑하거나 내세우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다만, 문제점은 어쩌면 가까운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물론 잘못한 것도 많고 실수도 많이 하고 그랬습니다만, 사실 주님 앞에 그렇게 막 내 잘못을 회개하고 뉘우치고 그랬던 적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것은 물론 그렇다고 제가 무슨 대단한 의인이라서가 아니라, 아직 제가 많이 부족해서 제 잘못을 깨닫지 못해서이기 때문이겠습니다만, 그런데 적어도 지난 며칠 동안은 참으로 많은 회개를 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오늘은 제 회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제가 재작년 2015년에 다시 일본에 오고 난 후 바로 직면한 것은 교회 재정문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목회를 하면서 또 다른 직업을 갖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일본에 오기 전에 한국에서 약 7년 정도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건 자화자찬 같습니다만, 그래도 그 7년 정도는 정말 여러 열심히 일했던 것 같았습니다. 일본어 독해에 대한 책도 쓰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마침 제가 일본 군마에서 알아보니까 일본어를 가르치는 곳이 있었기에 금방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년 반 정도 근무를 했습니다. 저로서는 이것도 하나님이 열어주신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일이 잘 풀리지 않아요. 잘 풀릴 것만 같다가도 일이 꼬이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됐냐 하면 결국 1년 반 만에 아무런 잘못도 없이 나오게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길이라면 어려움을 겪다가도 길이 열리고 해야 할 텐데, 나오게 되었다는 것은 이건 완전히 막혀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3개월 정도는 그저 말씀을 전하면서 전도도 하러 다니고 그랬습니다. 그러자 또 하나의 찬스가 돌아왔어요. 그건 바로 일본어교사 자격증 과정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자격증이 없이 경험이 있으면 가르칠 수 있었는데, 이제 제도가 엄격해져서 일본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려면 그 자격증을 따야 한다는 것이에요. 한국에서는 회화반은 자격증이 필요한데 제가 한국에 있을 때 맡았던 과목은 줄곧 시험반이라서 자격증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7월과 8월은 매일 학교에 가서 자격증 수업을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들었습니다. 참 얼마나 피곤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재정적으로 어려운데 제가 나설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이것도 또한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참고 견뎠습니다. 그리고 무사히 이 과정을 마치고 다시 일본어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왠걸요. 여기에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만, 거두절미하고 가르치기 시작한지 2주 만에 또 길이 막힌 것입니다. 거기다가 이제 그 2주 동안 가르쳤던 비용도 못 받게 되기까지 했지요.

이렇게 길이 열릴 것 같으면서도 꼬이고, 또 길이 열릴 것 같으면서도 막히고 하니까 참 난감해졌습니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순간 머리 속이 하얘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 되십니까. 제가 뭘 잘못했나요?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도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다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뭔가를 주님 앞에 잘못한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가는 온천에 가서, 탕에 들어가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더니만, 그때까지는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이 참으로 많이 떠올랐습니다.

사실 새로운 사실이라고는 했지만, 그것은 이미 제가 알고 있는 일들이었습니다. 무엇이 떠올랐냐 하면 그것은 바로 저 스스로가 전했던 말씀들이었습니다.

먼저 베드로부터 살펴볼까요? 풍랑 속에서 바다 위를 걸어오는 예수님을 발견하고 베드로가 외칩니다.


마태복음 14장 28절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すると、ペテロが答えて言った。「主よ。もし、あなたでしたら、私に、水の上を歩いてここまで来い、とお命じになってください。」

파도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물 위로 뛰어들자 베드로가 물 위에 올라섰습니다. 가라앉지 않아요. 예수님을 향해서 저벅저벅 걸어갑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로 뒤 30절을 봅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ところが、風を見て、こわくなり、沈みかけたので叫び出し、「主よ。助けてください。」と言った。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았더니 믿음이 생겼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면 물위를 걸을 수도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갔더니,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바람을 바라본 순간 어떻게 되었습니까. 두려움이 몰려왔던 것입니다. 믿음과 두려움은 상극입니다. 믿음과 두려움이 함께 있을 수는 없어요. 두려움이 몰려오자 그 때까지 가졌던 믿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에 빠져버리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으로 돌아가서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옵니다. 그런데 거기서의 생활이 어땠습니까.

창세기 12장 10절,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さて、この地にはききんがあったので、アブラムはエジプトのほうにしばらく滞在するために、下って行った。この地のききんは激しかったからである。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면 그 땅에 풍년이 들고 소출이 풍성해야 하지 않아요? 그런데 풍년은커녕 기근이 들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주신다고 했는데 기근이 들었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말씀을 믿고 그 땅을 지킨다. 아니면 그 땅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간다. 어떻습니까. 예. 그 땅을 지켜야지요.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그 땅에 임한 기근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애굽을 의지했던 것입니다. 이 또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바람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애굽에 가서는 자신의 부인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는 수치를 당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약속만을 붙잡았을 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되고,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했으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삭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어땠습니까.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이 성인 남성만 60만명이었다고 하니 여성과 아이들을 포함하면 200만명이 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광야로 나왔습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간신히 탈출하여 이제 숨 좀 돌리려고 하는데, 그들이 가는 앞길을 홍해가 가로막습니다. 그리고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추격해옵니다.

어쩌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애굽 군대가 온다 하더라도 성인 남성 60만명이라면서. 그렇다면 한 번 싸워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 60만명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전문적인 훈련을 받아본 적이 있는 사람들도 아닌, 태어나서부터 그 때까지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왔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이들이 당시 최고 선진국이자 최강국인 애굽 군대를, 그것도 성경에 보면 최정예부대가 추격해오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들을 상대로 어떻게 싸울 수가 있겠습니까. 이는 아무리 수가 많아 봤자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그 때 모세는 얼마나 불안했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합니다. 출애굽기 14장 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主があなたがたのために戦われる。あなたがたは黙っ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가만히 있어. 내가 싸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모세가 싸우는 게 낫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싸우시는 게 낫겠습니까. 이건 물어보나마나죠.

출애굽기 14장 27절~28절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モーセが手を海の上に差し伸べたとき、夜明け前に、海がもとの状態に戻った。エジプト人は水が迫って来 るので逃げたが、主はエジプト人を海の真中に投げ込まれた。水はもとに戻り、あとを追って海にはいったパロの全軍勢 の戦車と騎兵をおおった。残された者はひとりもいなかった。

만약에 모세가 그 때 홍해를 바라보았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자, 우리 양동이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물을 퍼내자고 했을까요? 아니면, 죽을 각오를 해서 애굽 군대와 한 번 싸워보자고 했을까요?

하지만 그는 홍해를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애굽 군대를 바라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민족의 희생자는 한 사람도 없었던 반면, 최정예 애굽 군대는 홍해에서 전멸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온 믿음을 볼 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믿음을 말합니다. 느부갓네살(ネブカデネザル王) 왕이 세운 금신상, 우상한테 전을 하라고 하고, 절을 하지 않으면 풀무불 속으로 던져 넣겠다고 하는데도 그들은 어떻게 말합니까.

다니엘 3장 17절~18절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もし、そうなれば、私たちの仕える神は、火の燃える炉 から私たちを救い出すことができます。王よ。神は私たちをあなたの手から救い出します。しかし、もしそうでなくても、王よ、ご承知ください。私たちはあなたの神々に仕えず、あなたが 立てた金の像を拝むこともしません。」


이것이야말로 진짜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이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개역한글에서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이 믿음. 이것이 믿음의 힘이요, 믿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 믿음의 고백과 함께 맹렬히 타는 풀무불 속에 들어갔더니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27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총독과 지사와 행정관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太守、長官、総督、王の顧問たちが集まり、この人たちを見たが、火は彼らのからだにはききめがなく、その頭の毛も焦げず、上着 も以前と変わらず、火のにおいもしなかった。

그들은 느부갓네살 왕을 바라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너머에 있는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은 채로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까.

성경에 보면 이런 일들은 여기저기에 널려 있습니다.

우리 모두 바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홍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애굽 군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느부갓네살 왕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기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세처럼 승리하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처럼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이라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그렇게 말씀을 전하는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하면,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고 어떻게 해서든지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려고 하는 나 자신, 하나님을 믿으면 홍해가 갈라진다고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씀을 전하면서도, 눈앞에 있는 홍해를 바라보고는 양동이로 열심히 물을 퍼내고 있는 나 자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잘못하고 있는 것인 줄 몰랐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어떤 사람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일본에 보낸 이유가 무엇이냐, 일본에서 일본어 가르치라고 보냈느냐. 너 다시 생각해봐라.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옳지 않다……라고 하시면서 제가 생각했던 세상적인 길들을 모두 막으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널리 알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복음을 증거하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었다면 어떻게 간증할까요. 사람의 생각으로 하다가 수치를 당했으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이삭을 얻을 수 있었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모세는 홍해를 바라보지 않고 애굽 군대를 바라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았더니,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고 애굽 군대를 무찔러주셨다고 간증할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하나님을 이렇게 의지했더니 풀무불 속에서도 구원해주셨다고 간증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요?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바람을 바라보았다가 물에 가라앉은 베드로. 그러나 그는 온전히 예수님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초대교회를 굳건히 세우는 사도로서의 사명을 능히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일본에 와서 이렇게 세상 일을 하면서 주님 일을 했다고 한다면, 나중에 어떻게 간증할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이렇게 해서 교회가 부흥하고 교회 재정이 늘었다면 저는 어떻게 말했을까요.

예, 물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본선교는 부업을 해가면서 해야지 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려워요. 그러니까 교회 일도 하면서 세상 일도 하면서, 그렇게 해야지만 성공할 수 있습니다……이렇게 말하지 않겠어요?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좋을까……

주님은 아실 것입니다. 제가 회사 근무를 하면서 전도지를 전혀 돌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주님은 아실 것입니다.

주님은 아실 것입니다. 토요일 밤에 지쳐서 들어와서 졸다가, 간신히 새벽에 일어나서 부랴부랴 말씀을 정리해서 강단에 오르곤 했었다는 사실을 주님은 아실 것입니다.

제가 그저 직장생활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평범한 회사원도 아니고, 그래도 주님께서 목사로 부르셨다면 감당해야 할 일들이 있는데, 이처럼 하나님의 일보다도 세상일에 비중을 둔 모습을 보면 어떻게 그 길을 열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생각들이 겉잡을 수 없을 만큼 마음 속에 떠오릅니다. 그러면서 얼마나 많은 회개를 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제 새롭게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주님만 바라보고 전적으로 주님 일에만 매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어떤 간증 같은 말씀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이런 어려움이 있었다, 저런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주님이 도와주셔서 이렇게 해결 되었다 저렇게 역사해주셨다……라고 하면 물론 많은 은혜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지만, 저처럼 좀 삐딱한 사람이 들으면 가끔은, <그래, 뭐 잘 됐으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심할 때에는 <저게 무슨 하나님 자랑인지 자기 자랑인지 모르겠다>라고 좀 들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지금 제 모습, 아직 아무것도 해결된 것은 없습니다. 여러 문제들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된 하나님은, 매우 자존심이 강한 분이십니다.

그러니 어떻겠습니까. <하이구, 거기 이카호중앙교회 홍목사 봐, 하나님만 의지했는데 결국 쫄딱 망했더라> 이런 말은 절대로 듣기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거기 홍목사, 세상 일 다 정리하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고 주님 일에만 매진했더니 정말 잘 되었더라.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신가봐> 이런 말들을 듣기 원하시지 않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참된 전도요, 참된 부흥이요,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역사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는 저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지금 문제가 있습니까. 내가 내 힘으로, 내 지혜대로, 내 능력으로, 해결하겠다고 하면 주님은 일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일을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맡기겠습니까.

내가 일을 하는 것은 홍해 물을 양동이로 퍼내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은 단번에 홍해를 가르시는 것입니다.

지금 어려움이 있을 때, 지금 문제가 있을 때, 이 어려움이 해결되고 난 다음 하나님은 내가 어떻게 간증하기를 원하고 계실까, 지금 이 문제가 사라진 다음에 어떻게 주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기를 원하고 계실까.

이처럼 간증을 준비하는 삶이야말로 진정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삶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명기 5장 32절~33절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

あなたがたは、あなたがたの神、主が命じられたとおりに守り行ないなさい。右にも左にもそれてはならない。あなたがたの神、主が命じられたすべての道を歩まなければならない。あなたがたが生き、しあわせになり、あなたがたが所有する地で、長く生きるためである。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면서 세상적인 방법을 의지하려고 좌로나 우로 치우친다면, 하나님은 일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의지하여 간증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맡긴다면, 우리에게 축복이 넘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처럼 간증을 준비하는 삶을 통해서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주님의 지혜를 의지하고, 주님의 방법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99회 우리들의 희로애락 →

← 제97회 보화와 진주

 
이카호중앙교회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97회 보화와 진주
2017년 10월 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44절~46절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보화와 진주” 宝と真珠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에 대해서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천국에는 아직 우리가 가보질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해주신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는 마치, 인터넷은커녕 컴퓨터도 없고 텔레비전도 없고 전화기도 없었던 조선시대 사람들한테 스마트폰에 대해서 설명하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한테는 상식인 컴퓨터나 인터넷이 상식이지만, 그와 같은 단어를 아무리 그 당시 사람들한테 말을 해 봤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당연히 그 사람들이 알고 있는 단어를 빌어서 설명해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로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천국에 대한 비유를 여러 가지 각도에서 설명해주고 계신데, 오늘 본문을 보면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두 사람을 예로 드십니다. 한 사람은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한 진주 장사를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 두 사람을 예로 드셨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두 사람을 예로 말씀하시는 것이 천국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첫 번째 사람을 보시겠습니다. 그가 발견한 것은 밭에 감추어져 있던 보화였습니다. 그는 이를 발견하고 너무나도 기뻐했습니다. 그러고는 어떻게 했대요? 이를 숨겨두고 돌아가서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진주 장사꾼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은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침 지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했다고 해요. 그래서 어떻게 했냐 하면 자기의 소유를 다 팔고서 그 진주를 샀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러면 이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합니다만,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공통점과 두 가지 의문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 두 사람의 공통점부터 보겠습니다.

첫째 공통점은, 이 두 사람은 모두 한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밭에서 값진 보화를 발견했고요, 두 번째 사람은 지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둘째 공통점은 이 두 사람들은 자신이 발견한 보물을 얻기 위해 자기 소유를 다 팔았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두 가지 공통점,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발견한 두 가지, 즉 밭에서 발견한 보화와 값진 진주는 모두 천국을 상징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이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야 했다는 것이지요.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시나요? 하지만 이를 좀 더 확실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의문점에 대해서 해결해야지만 합니다.

두 가지 의문점이란 무엇인가 하면, 첫째 의문점은, 그 사람들이 그 보화나 진주를 발견하기 전에 다른 사람들은 그것들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그리고 둘째 의문점은, 도대체 그 보화나 진주는 얼마나 비싸길래 자기가 가진 소유를 다 팔아야지만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먼저, 첫 번째 의문점입니다. 첫 번째 사람이 발견한 보화는 밭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사람이 발견한 것은 진주였습니다. 앞에서는 보화가 발견된 장소는 명확하게 밭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밭>이라고 한다면 보통 바닷가에 있을 리가 없을 테니, 아마도 내륙이나 산이겠지요. 하지만 구체적으로 보화가 무엇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반면에 두 번째는 어떤가요? 반대로 두 번째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발견한 물건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지극히 값진 진주라고는 설명이 있는 반면에, 그 발견된 장소가 바다인지 아니면 귀금속방인지 어디인지는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왕 말씀해주시려면 좀 더 알기 쉽게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을, 왜 이렇게 헷갈리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사실 이것은 일부러 우리가 알아듣기 힘들라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실 리가 있겠어요? 이는 오히려 우리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옛날 조선시대 때 같았으면, 이른바 <성공적인 삶>을 사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무엇이에요. 남자는 열심히 공부해서 과거급제 하고 벼슬길에 오르는 것이 목표였을 것이요, 여성은 곱게 키워서 좋은 집안으로 시집 가서 아들 딸 낳고 잘 사는 것이 인생 목표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어떻습니까. 이른바 명문대학 나와서 고시패스 하지 않더라도 훌륭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고 여성도 시집 가서 가정 일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진출도 상당이 늘어서, 이제는 여성 없이는 사회가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천국이라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은 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닷가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천국에 가려면 신학교를 나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에서 높은 직분을 받아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천국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한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은 어떻게 해야지만 얻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 두 사람이 어떻게 해서 밭에 있는 보화와 지극히 값진 진주를 찾을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답은 예수님께서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7장 7절~8절을 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与えられます。捜しなさい。そうすれば見つかります。たたきなさい。そうすれば開かれます。

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사람들이 보화와 값진 진주를 발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닙니다. 바로 이를 얻기 위해 열심히 찾아 다녔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진을 찍으려면 핀트를 잘 맞춰야 하지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기계가 좋아졌다고는 하나, 그래도 그냥 갖다 대고 누르기만 하면 사진이 잘 나오고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건 가까이 있고, 어떤 건 멀리 있고 할 때, 가까이 있는 것을 찍고 싶다면 어떻게 해요? 그냥 가까이 갖다 대고 찍는다고 잘 나오지는 않습니다. 손가락으로 터치를 해서 핀트를 맞춰야지만 합니다. 그렇다면 핀트를 맞추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냐 하면, 당연히 무엇을 찍어야 할지를 확실하게 정해야 할 필요가 있겠지요. 무엇을 찍을지 결정하지도 못했다면 핀트를 맞출래야 맞출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야기에 등장하는 이 사람들은 바로 그 보화, 그리고 그 진주한테 핀트를 맞춰서, 이를 얻기 위해 열심히 찾아 다녔겠지요. 아마도 눈에 불을 켜고 찾아 다녔을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어요? 예, 마침내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우리 삶 속에서 천국이라고 하는 보화, 천국이라고 하는 값진 진주에 핀트를 맞추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땠을까요? 예, 다른 사람들은 그게 보화인지 몰랐습니다. 자신들이 직접 보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렇게 정말로 값어치가 있는 진주인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누구는 이렇게 말해요. "아니, 남의 밭에서 보화를 발견했다면 그 주인한테 알려줘야지, 그걸 몰래 숨겨두고 그 밭을 샀다는 것은 나쁜 사람이 아니냐" 라고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ㅎㅎ

그것은 역시 성경을 오해한 것입니다. 이건 마치 무슨 그 밭에 금덩어리가 있었는데, 그걸 비밀로 하고 주인 몰래 숨겨두었다가, 모르는 척하고 그 밭을 샀다고 생각해서인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생각해보세요. 어떤 밭이 있는데, 그 밭은 다른 농작물은 잘 안 되는데, 자기가 알고 있는 농작물은 그 밭에 심으면 정말 잘 될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밭을 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도 역시 그 밭에서 자신만이 알 수 있는 보화를 발견한 것이겠지요. 여기서 숨겨두었다는 것은, 무슨 나쁜 의도가 아니라 그만큼 중요하게, 그만큼 소중하게 여겼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보화도 그렇고 진주도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진정한 가치를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 보화와 진주를 열심히 찾았던 그들은 단번에 이를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고등학교나 대학교 야구나 축구 그리고 육상경기 감독 같은 경우에는, 물론 선수 육성이나 지도도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유망한 선수를 발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우리가 얼핏 보면 다 그 선수가 그 선수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유능한 감독이나 스카우트를 하는 사람들은 벌써 사람을 보는 눈이 남다릅니다. 그 안목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바로 그 팀의 몇 년, 어쩌면 몇 십 년을 좌우하는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 보화와 진주는 어떨까요. 앞서 말씀 드렸던 것처럼 이 보화와 진주는 천국을 뜻합니다. 하지만 이 천국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적습니까. 예, 많지 않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狭い門からはいりなさい。滅びに至る門は大きく、その道は広いからです。そして、そこからはいって行く者が多いのです。いのちに至る門は小さく、その道は狭 く、それを見いだす者はまれです。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보화야말로 진정 가치가 있고, 이 진주야말로 참으로 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가져가려 하지 않아요. 아무도 그 진정한 가치를 알려 하지 않습니다.

천국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일요일에 교회를 가? 그렇잖아도 노는 날이 적은데 일요일에 교회까지 가면 그걸로 하루가 다 가버려. 그 시간에 돈을 벌든가, 아니면 잠이라도 더 자야지, 무슨 소리야.

이 천국의 가치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는, 사실 별 것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렇잖아요? 더구나 직장인이라고 생각해보세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계속 시달리고, 잘못하면 야근이다 회식이다 하면서 몸 상하고 마음 상하면서 다녔다면, 주말쯤은 집에서 잠이라도 푹 자고 싶어 하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일요일마저도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라고 해요. 그리고 무슨 직분이라도 맡는 날에는 무슨 회의다, 무슨 봉사다, 무슨 전도다 해서, 그 금족 같은 일요일에 제대로 쉬기는커녕, 잘못하면 출근하는 것보다 더 일을 많이 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좁은 문이라는 것이지요. 그 좁은 문으로 가려는 사람들이 별로 없대요. 오히려 넓은 문으로 가는 사람들은 많다는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이겠어요. 좁은 문으로 가려는 사람들을 넓은 문으로 가는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저런 예수쟁이들을 봐라. 일요일에 쉬지 않고 저렇게 교회에 가서 하루 종일 일하다가 온다. 회사라면 월급이나 받지, 교회는 돈을 받기는커녕 헌금이다 십일조다 바쳐가면서까지 저런다. 저게 제정신이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천연수정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반짝이고 아름다운 보석 중 하나이죠. 하지만 그 수정이 들어 있는 돌 표면을 보면요, 그냥 길가 어디에나 있는 그런 돌멩이입니다. 저 같은 비전문가가 보면 전혀 알아볼 수가 없어요. 하지만 전문가가 보면 어떻습니까. 우리 눈으로는 전혀 알아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는 무엇이 천연수정이 있는 돌이고, 무엇이 그냥 가치 없는 돌멩이인지를 구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천연수정이 있는 돌을 갈라보면 그 안에는 아름다운 수정이 빼곡히 차 있는 것이지요.

일요일에 교회를 가요? 거기서 예배다 봉사다 하면서 하루를 보내요?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안 하려고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정말 그 안에는 귀한 천연수정이 가득 들어 있는데,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한테 이것을 가져가라고 하면, 에이, 집도 좁아 죽겠는데 이런 볼품없는 돌멩이를 가져다가 뭐합니까……이렇게 하는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가치를 아는 사람, 진정으로 그 천국의 귀하다는 것을 알고, 말씀과 복음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모합니다. 예수님 알기를 갈망합니다.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영과 진리로 주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기도원에 갑니다. 금식을 하면서 주님 만나기를 힘쓰고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립니다.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은혜가 넘칩니다.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주님을 알면 알수록 찬송이 넘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나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주님,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나를 위해서 죽으신 주님, 나를 위해서 부활하신 주님, 나를 위해서 하늘로 올라가신 주님, 나를 위해서 성령님을 보내주신 주님이 너무나도 감사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시는 보화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값진 진주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께서도 이와 같은 천국이라는 이름의 보화, 천국이라는 값진 진주를 발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이렇게 보기만 좋고 듣기만 좋은 보화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주님을 믿는다는 것으로, 주님의 일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수모를 당하기도 합니다. 멸시를 당하기도 합니다. 전도지를 한 번 돌려보세요. 그러면요, 어디를 들어가면 정말 반갑게 맞이해주는 곳이 있나 하면, 어디를 들어가면요 금방 그 분위기가 싸하게 느껴지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래도 뭐,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제가 매주 한국이나 일본을 비롯해서 전세계에 우리 교회 소식을 담아서 메일을 보냅니다. 그러면 그 중에는 격려메일을 보내주시는 분들, 선교후원금으로 섬겨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지금 우리 교회의 재정이 열악한 상황인데, 그와 같은 손길이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하지만 꼭 그런 분들만 계신 것은 아니지요. 이런 메일 보내지 말아달라……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래도 강제로 또 보내요? 아니요. 전도나 선교는 사람이 억지로 강제로, 아주 귀찮게 하거나 못살게 굴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도나 선교는 인간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지요.

그래서 제가 보내드린 메일을 받고 싶지 않다 하더라도 저는 괜찮습니다. 성령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 인도하실 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미리 메일을 보낼 때에는 <이 메일 수신을 원하지 않는 분들은 ‘수신거부’라고 적어서 답장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해드려요. 그리고 답장이 오면 그 분의 메일 주소는 목록에서 삭제를 합니다.

그런데 더 이상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냥 <수신거부>라고 적어서 보내면 될 것을, 참 여러 가지 다양한 글과 표현으로 답장을 주십니다. 왜 받기 싫은데 자꾸 메일을 보내느냐, 이런 메일을 보낼 거면 미리 양해를 구하고 보내야 하지 않느냐……아니, 어떤 걸 보낼 것인지도 모르는 분한테 어떻게 미리 양해를 구하고 보내요. 그러면서 이런 메일 더 이상 보내지 말아라, 한 번만 더 보내면 고발할 거다, 하면서 참 다양하게 답장을 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또 보면 이런 메일을 보내주시는 분들 중에는 안 믿는 분들만 그러냐 하면, 이미 신앙이 있는 분들, 더 나아가서 교역자나 선교사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면 이런 분들이 또 답장을 보내면서요, 이런 게 선교냐, 왜 이렇게 귀찮게 하냐, 이런 메일 보낼 시간이 있으면 기도나 해라, 하고 역시 또 참 다양한 글과 다양한 표현으로 답장을 주십니다.
이런 메일을 받고 그러면요, 정말 반박답장을 보내고 싶어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저라고 하고 싶은 말이 왜 없겠어요. 입이 근질근질 거립니다. 머리 속으로 문장을 몇 번이나 적어갑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마태복음 5장 11절~12절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わたしのために人々があなたがたをののしり、迫害し、ありもしないことで悪口を浴びせるとき、あなたがたは幸いです。喜びなさい。喜 びおどりなさい。天ではあなたがたの報いは大きいから。あなたがたより前にいた預言者たちを、人々はそのように迫害したのです。

사도행전 5장 40절~41절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使徒たちを呼んで、彼らをむちで打ち、イエスの名によって語ってはならないと言い渡したうえで釈放した。そこで、使徒たちは、御名のためにはずかしめられるに値する者とされたことを 喜びながら、議会から出て行った。

그리고 또 성경은 또 다른 보화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11장 24절~26절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信仰によって、モーセは成人したとき、パロの娘の子と呼ばれることを拒み、はかない罪の楽しみを受けるよりは、むしろ神の民とともに苦しむことを選び取 りました。彼は、キリストのゆえに受けるそしりを、エジプトの宝にまさる大きな富と思いました。彼は報いとして与えられるものから目を離さなかったのです。

이와 같은 말씀들을 떠올리면요, 그래,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은 잘못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인도해주시는 길을 가고 있다……하고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주님께서 주시는 일을 감당하실 때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주님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두 번째 의문을 살펴보아야겠지요. 이 두 사람들은 보화와 값진 진주를 얻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천국이라는 보화는 얼마나 비싸길래 내가 가진 소유를 다 팔아야 하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또 잘못 이해하면, 무슨 천국에 들어가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교회에 갖다 바쳐야 한다 뭐 이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게 뭐겠어요. 그야말로 사이비 종교가 되는 것이죠.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은, 과거에 청년 엘리트였습니다. 좋은 학교를 나와서 어려운 시험에 합격한 인물이었지요. 그의 출세는 이미 보장된 거나 다름 없었습니다. 그는 출세가도를 달리기 위해서 나라에 충성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진 신념에 충실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을 탄압하고 짓밟고 잡아들이고 죽음에 몰아넣었습니다. 이것이 그러면 바울이 나쁜 사람이라서 그랬나요? 아니요. 세상적으로 보면 바울은 나쁜 사람이거나, 하물며 범죄자가 아니었습니다. 유능한 인물이었고 충실한 관료였습니다. 바울이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겠습니까. 하지만 믿음이 없는 그가,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그가 나라와 국가를 위해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결국 예수님을 박해하고 탄압하고 복음을 방해한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복음을 받아들인 그가 이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なぜなら私は、あなたがたの間で、イエス。キリスト、すなわち十字架につけられた方のほかは、何も知らないことに決心したからです。

갈라디아서 6장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しかし私には、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以外 に誇りとするものが決してあってはなりません。この十字架によって、世界は私に対して十字架につけられ、私も世界に対して十字架につけられたのです。

빌립보서 3장 8절~9절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それどころか、私の主であるキリスト。イエスを知っていることのすばらしさのゆえに、いっさいのことを損と思っています。私はキリストのためにすべてのものを捨てて、それらをちりあくたと思っています。それは、私には、キリストを得、また、キリストの中にある者と認められ、 律法 による自分の義ではなくて、キリストを信じる信仰による義、すなわち、信仰に基づいて、神から与えられる義を持つことができる、という望みがあるからです。

이게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노력, 내가 이루어온 성과, 내가 가지고 있던 업적, 실적들을 다 모아보아도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많은 지식을 얻었지만, 주님의 십자가에 대한 지식과 지혜에 비하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에 대해서 자랑할 것이 많았지만, 이 모든 자랑은 주님의 십자가에 비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세상 모든 지식보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야말로 가장 으뜸되는 지식이요, 구원과 생명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자기가 그 동안 가지고 있던 소유를 다 팔아서 보화와 지극히 값진 진주를 얻은 바울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까지 말씀 드렸다면 이제 우리에게 있어서 진정한 보화가 무엇인지 아시게 되셨나요? 하지만 아직까지도 진정한 보화가 무엇인지 모르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를 어쩌면 좋을까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이와 같은 분들을 위해, 이 보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2장 2절~3절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それは、この人たちが心に励ましを受け、愛によって結び合わされ、理解 をもって豊かな全き確信に達し、神の奥義であるキリストを真に知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このキリストのうちに、知恵と知識との宝がすべて隠されているのです。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 최대의 보화이자 유일한 보화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다른 것은 잃어버려도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은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보화, 유일한 보화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슬퍼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좌절이 없습니다. 낙심이 없습니다. 슬픔이 없습니다. 왜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좌절과 낙심과 슬픔은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찬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이라고 하는 보화를 굳게 잡고,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굳게 잡고, 성령님과 함께,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기쁨과 감사와 즐거움으로 힘차게 나아가며, 하루하루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98회 간증을 예비하는 삶 →

← 제96회 다윗의 신앙고백

 
이카호중앙교회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96회 다윗의 신앙고백
2017년 9월 2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Last Update 2019. 5. 21

사무엘상 24장 1절~7절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다윗의 신앙고백’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에서 다윗이라고 하면 어떤 인물입니까. 그는 나이 서른에 왕이 되어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도 바로 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게 되었던 것이죠. 다윗이야말로 이스라엘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 놓은 위대한 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이 다윗이 어렸을 때부터 먼저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직 전쟁에 나갈 나이가 되지 않은 청년 다윗, 아니, 어쩌면 소년 다윗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에 구체적인 나이가 기록되지는 않았습니다만 아무리 많이 잡아도 스무 살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장성한 첫째 형, 둘째 형 그리고 셋째 형들은 전쟁터에 나갑니다. 하지만 아직 나이가 어렸던 막내 다윗은 전쟁터에 나가지 못하고 집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17절~18절을 보면 다윗의 아버지 이새가 심부름을 명합니다.
“이새가 그의 아들 다윗에게 이르되 지금 네 형들을 위하여 이 볶은 곡식 한 에바와 이 떡 열 덩이를 가지고 진영으로 속히 가서 네 형들에게 주고 이 치즈 열 덩이를 가져다가 그들의 천부장에게 주고 네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증표를 가져오라”
말하자면 형들한테 도시락 심부름을 가라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도시락들을 들고 전쟁터 쪽에 갔더니, 거기서 다윗은 마침 블레셋 군에서 골리앗을 목격합니다.
이 골리앗을 보니 벌써 외모부터 덩치가 보통이 아닙니다. 사무엘상 17장 4절에 의하면 그의 키가 여섯 규빗 한 뼘이라고 기록합니다. 이는 지금 길이로 2미터 93센티, 그러니까 거의 3미터나 되는 거인이었습니다. 이 괴물과도 같은 골리앗을 다윗이 물리칩니다. 이것이 무슨 삼국지 대결장면이나, 아니면 무협지 소설 같았으면 전투묘사가 화려하게 기록될 수도 있었겠지만, 철저하게 사실에 입각한 성경 기록은 어떻습니까.
사무엘상 17장 48절~49절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어떻게 기록되어 있어요? 예, 단 두 구절입니다. 돌멩이를 물매로 던졌더니 블레셋 사람 이마에 박혔다는 것이에요. 참 놀랍죠?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처럼 다윗은 멋진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까요.
이 이야기를 모두 아는 우리는 그저 <하나님이 함께 하셨으니까>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맞나요? 예, 맞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조금 더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윗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도 지금 이 순간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예, 좋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 한 가지 묻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 갑자기 우리가 있는 이 곳이 전쟁터로 바뀌었습니다. 판타지 영화 같은 것을 보면 그런 것 있잖아요? 예를 들어서 내가 정신을 차려보니까 지금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저기 보니까 키가 3미터나 되는 골리앗이 나를 노려보고 있어요. 제 손을 보니까 돌과 물매가 쥐어져 있습니다.
자, 여러분께서는 지금 다윗과 함께 했던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에 우리와도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했던 것처럼 지금 저 골리앗을 향해 달려가면서 물매로 돌을 던질 수 있겠어요? 못해요? 왜 못해요? 믿음이 부족해서요?
그렇다면 저는 어떨까요? 지금 이 순간 갑자기 제가 골리앗 앞에 서게 됐어요. 저는 할 수 있나요? 아뇨. 못합니다. 왜요? 믿음이 부족해서요? 아뇨. 믿음이 부족하고 뭐고를 떠나서 물매를 써본 일도 없어요. 그런 제가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이래봬도 얼마나 겁이 많은데요.
그러면 다윗은 어땠을까요.
사무엘상 17장 34절~35절에 보면,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다윗은 비록 나이는 어렸으나 힘은 대단했습니다. 여느 책에 청년 다윗을 그려놓은 그림들을 보면 그냥 평범하거나 다소 왜소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만, 이 기록을 보십시오. 사자나 곰이 새끼 양을 물어가면, 그 입에서 새끼를 구해냈고, 그 뿐만 아니라 공격해오면, 그 수염을 잡아서 쳐죽였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청년 다윗은, 비록 나이가 어려서 전쟁터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그야말로 삼손 뺨치는 장사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어떻게 해서 골리앗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길렀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 순간을 위해 철저히 준비시켰던 것입니다.
다윗은 형제들 중에서 가장 막내였습니다.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명하시기를 이새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 중 하나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새 집을 찾아가서는, 네 아들을 데려오라고 했는데, 그가 데려온 아들들을 보니까 모두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어떻게 합니까.
사무엘상 16장 11절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그래서 마지막으로 불려온 것이 누군가 하면, 그가 바로 다윗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자기 집에서도 찬밥신세였습니다. 맨날 형들은 장손이다 뭐다 하면서 대우를 받았지만 막내 다윗은 허드렛일만 했습니다. 힘든 일, 볼품없는 일만 골라서 시킵니다. 양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것도 다윗 말처럼 맹수들이 공격해보면 물리치기도 해야 하는 궂을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궂은 일,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힘들고 고단한 그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골리앗을 물리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훈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의 훈련으로 인하여 다윗은 당당하게 골리앗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리고 이미 수 십 번, 수 백 번도 더 던져봤던 물매를 익숙한 솜씨로 골리앗을 향해 있는 힘껏 던졌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은, 바로 하루 아침에 이스라엘의 영웅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매를 던져본 일이 있습니까? 저요? 당연히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갑자기 골리앗 앞에 저를 세우시고는, 평생 해보지도 않은 물매를 갑자기 던지게 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세요. 고린도전서 10장 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만약에 우리가 정말로 물매를 던져야 할 일이 있다면, 그 전에 미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철저하게 준비를 시키실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힘들고 고단하고, 내가 지금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다윗을 떠올리기 바랍니다. 다윗은 불평 불만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을 잘 감당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쓰임 받았던 것이지요. 우리도 힘들고 고단할 때는, 이것도 분명 하나님께서 나를 크게 쓰시기 위한, 특별훈련이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감사함으로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자,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은 이처럼 화려하게 성경 속, 이스라엘 역사 속에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이제 젊은 나이에 골리앗을 물리친 영웅 다윗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 그는 왕으로부터 군대장이라는 벼슬까지 하사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입니까?
다윗 덕분에 대승을 거둔 이스라엘 군대가 이제 돌아옵니다. 거기에는 당연히 사울 왕도 있고 다윗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환호하는 소리를 보십시오.
사무엘상 18장 7절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이제 오히려 사울보다도 다윗이 전쟁에서 공이 더 크다고 사람들이 외치는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과 온 유다의 민심은 이제 다윗으로 돌아섰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사울마저도 이제 다윗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어디까지 가게 되냐 하면 사무엘상 18장 29절,
“사울이 다윗을 더욱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
생각해보십시오. 이미 하나님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택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백성들도 다윗을 모두 따랐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면 이제 화려한 다윗의 시대가 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윗이 잘못한 게 뭐가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시대가 열리기는커녕, 다윗을 시기한 사울에 의해 목숨을 빼앗길 위기에 처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견디다 못해 사울로부터 도망치게 됩니다. 사울은 틈만 나면 계속 다윗을 찾아내어 잡아서 죽이려고 합니다. 그 기간이 몇 년이요? 예, 적게 잡아 10년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다윗과 그의 일행이 사울을 피해 엔게디 광야에 머물러 있을 때의 일을 기록합니다. 본문 1절을 봅니다.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사울과 다윗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사울은 이스라엘 초대 왕이요, 다윗은 둘째 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는 합니다만, 이 때 당시 이 둘은 어떤 입장입니까. 사울은 이스라엘 최고 통치자이고, 이에 반해 다윗은, 신망은 있었으나 도망자 신세였습니다.
한국이나 다른 나라들을 보아도 권력을 쥐고 있으면 그에게 모든 정보가 집중됩니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죠. 이스라엘도 똑같습니다. 왕이 다윗을 찾았더니, 다윗의 위치에 대한 정보가 속속들이 들어옵니다.
사울은 주저하지 않고 다윗 추격에 나서게 됩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보니 3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을 추격했다고 합니다.
당시 다윗을 따랐던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되었을까요? 사무엘상 23장 13절에 의하면 대략 600명 가량이 다윗을 따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를 추격한 사울의 군대 수는 3천명이었습니다. 단순계산으로 다섯 배에 해당 되는 숫자입니다만, 이는 그야말로 숫자만 봤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냐 하면 오늘 본문 2절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이는 그냥 군인 3천 명이 아니에요. 온 이스라엘에서 특별히 선발한 3천 명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말하자면 정예부대. 요즘 말로 한다면 특수부대였던 것입니다. 반면에 당시 다윗과 함께 했던 사람들은 어떤 이들이었을까요? 이는 사무엘상 22장 2절에 보면 초창기 다윗과 함께 한 400명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나와 있습니다.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이게 무엇을 말합니까. 말하자면 사울 왕 당시, 그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어렵게 살아가는 이들이 모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400명이나 600명이 아닌, 사울이 거느리고 온 병력과 같은 숫자인 3000명이었다 한다 하더라도 그 힘이 똑같겠습니까?
하물며 다윗 쪽은 숫자마저 1/5 수준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는 제대로 전쟁이 시작된다면 붙어보나마나 뻔한 상태입니다. 이미 승부는 났습니다. 싸워볼 것도 없어요. 사울의 압승, 다윗의 참패입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오늘 3절~4절을 봅니다.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지금도 이 엔게디라고 하는 곳에는 크고 작은 동굴들이 무수히 많이 있다고 합니다. 사울과 그의 군대가 추격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니까, 다윗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아마도 여러 동굴에 흩어져서 숨었겠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2절에 보면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갔다”고 하는데, 이는 아마도 용변을 보기 위해서 동굴 속으로 들어간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해석합니다.
그래서 볼 일을 보려고 혼자서 그 많은 동굴 중 하나에 들어갔는데, 웬걸, 마침 그 동굴에는 다윗과 그 일행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일반 평민도 아닌 왕이라는 신분이니 밖에서 안 보이는 곳에서 볼일을 보려고 했을 것이기 때문에, 동굴 안쪽까지 들어왔겠지요. 대낮이라 하더라도 동굴 안쪽에는 빛이 안 들어옵니다. 환한 밖에서 방금 들어왔으니 사울은 동굴 속이 어둡고 해서 잘 안 보였을 것입니다. 반면에 미리 동굴 안에 숨어 있던 다윗과 그의 일행들은 어땠겠습니까. 이미 오랫동안 어두운 동굴 안에 있었던 그들에게 있어서는 사울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보였을 것입니다.
이를 보고 다윗의 부하들은 다윗한테 말합니다. 이제 때가 왔습니다. 사울을 죽일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당신 손에 붙이셨습니다. 이제 단숨에 사울을 죽이십시오. 그리고 이스라엘 왕이 되십시오. 이렇게 다윗 부하들은 다윗에게 바로 지금 사울을 죽이라고 말합니다.
당시 상황은 어땠습니까. 이미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민심도 사울을 떠났습니다. 오히려 민심은 새로운 영웅 다윗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사울만 제거해버린다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 다윗이 내린 결론은 무엇이었습니까. 다윗이 사울 곁을 보니 사울이 입고 있었던 겉옷이 보였습니다. 이는 아마도 사울이 볼일을 보기 위해서 옆에 벗어두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다윗은 가만히 일어나 사울의 겉옷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사울의 몸이 아닌 겉옷의 한 자락을 잘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부하들에게 말합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봅니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우리는 앞서 다윗이 얼마나 힘이 강한 사람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절대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자와 곰을 상대로 싸울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왜소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골리앗을 이긴 것이 아니라, 충분히 골리앗에 맞서 싸울 만한 훈련을 거쳐왔던 용사였던 것입니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그가 단순히 겁이 많아서 사울을 미처 죽이지 못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충분히 사울을 공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동굴에서 그 순간 혼자였으나 다윗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부하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자신이 직접 죽이지 않더라도 부하한테 공격명령만 내린다면 단숨에 사울의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저 겉옷자락만 베었는데, 그것마저도 마음이 찔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다윗이 말하기를 “사울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다윗이 나중에 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우리가 이 순간 다윗과 함께 있었다면, 그의 말에 대해 <아멘> 하고 따를 수 있겠지요. 하지만 만약에 우리도 당시 다른 부하들과 마찬가지로 이후 다윗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하이구, 이렇게 절호의 기회를 놓쳐?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 이제 언제 올지도 모르는 기회인데 이걸 놓치나. 아니, 줘도 못해? 이거 골리앗을 죽였을 때에는 뭔가 좀 대단한 인물인줄 알았는데, 이거 완전히 잘못 봤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 사람도 있지 않았을까요?
“아니, 이보시오. 다윗 선생. 우리가 지금 처자식 다 버리고, 당신만 바라보고 이렇게 도망 다니고 있지 않소. 그런데 이렇게 결정적인 기회를 하나님이 주셨는데, 그걸 걷어차버린다는 게 말이 되오?”
어쩌면 이런 식으로 실망을 한 사람들은 없을까, 그리고 실망을 한 나머지 다윗 곁을 떠난 사람도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왜 그랬을까요. 예, 다윗은 기다렸습니다. 무엇을 기다려요? 예,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일 때에는 전혀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하나님이 싸인을 해서 그 자리에 앉힌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대로 해? 그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는 제가 다니던 회사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그 회사는 모든 신입사원을 사장이 뽑습니다. 그런데 어떤 한 사원이 지각도 자주 하고 무단결근도 하고 해서 아주 문제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원의 상사인 부장이 그 신입사원을 해고시켰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나요? 아니요. 회사에서는 규정이 있습니다. 직원한테 문제가 있고 몇 번이고 반복되고,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해고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부장이 취한 행위는, 회사 규정 자체만 본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화를 낸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겠어요? 예, 바로 사장입니다. 사장한테 있어서는 부장도 부하직원이고 신입사원도 부하직원입니다. 그 신입사원은 다른 직원과 마찬가지로 사장인 내가 뽑았는데, 내 허락도 없이 왜 부장 네 마음대로 잘랐냐는 것이에요. 이것도 사장 말을 들어보면 틀린 말이 아닙니다.
다윗도 아마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하나님이 기름을 부으셨다면 하나님께서 처리하실 일이지, 내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지 않는가.
정말 힘도 없고 나약한 사람이 이렇게 생각했다면 자기 변명이요, 핑계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다윗은 그 순간 사울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자신이 직접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까지 기다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맡겼던 것이지요. 이것이야말로 바로 다윗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결국 사울은 블레셋 사람들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도망하는 과정에서 길보아 산 위에서 비참하게 죽고 맙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의 손에 사울의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왕이 되는데, 그의 나이 서른이었습니다.
만약에 다윗이 그 때 엔게디 동굴 속에서 사울을 공격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훨씬 더 빨리 왕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는 치지 말아라>라고 하는 철칙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다름 아닌 다윗 자신을 지켜주는 중요한 방패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라고 위기가 없었겠습니까. 다윗이 왕으로 있는 동안에도 수많은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사울이 아직 왕으로 있는 상황에서 사울을 죽이고 왕 자리에 앉았다면, 이는 국민들에게 <아, 왕을 죽일 수도 있구나,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왕을 죽이고 그 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구나>라고 하는 대단히 안 좋은 선례를 만들어버리는 결과가 되어, 다윗이 왕이 되고 난 다음에는, 결국 다윗 스스로를 위기에 빠뜨리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현명한 다윗의 행동 덕분에, 스스로가 왕이 된 후에 아무리 위기가 닥치더라도 다윗을 죽이려는 이들이 없었다는 것은 우리가 분명히 주목해야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기다리는 것은 이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기다리지 않고, 사람의 생각 만으로 판단하고 행한다면, 그야말로 더 큰 기회를 놓치게 될 뿐만 아니라, 이는 자기 스스로를 위기에 빠뜨리게 될 수도 있는,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다윗의 신앙고백인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맡기는 믿음,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믿음을 갖고, 마침내 다윗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97회 보화와 진주 →

← 제95회 인애와 자비

 
이카호중앙교회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95회 인애와 자비
2017년 9월 1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7절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지난 9월 7일부터 14일까지 1주일 동안의 한국방문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정했던 일들도 모두 잘 된 것 같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모두가 우리 앞길을 인도해주신 주님 덕분이고, 그리고 기도해주신 여러분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정말 큰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마무리된 것은 아니고, 이제부터 또 내년까지 여러 일들이 예정되어 있습니다만, 계속해서 기도를 좀 당부 드립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인애와 자비” 慈しみと憐れみ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한국에 가기 전부터 한국 뉴스를 보니 참 여러 소식이 들어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안타까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 여중생 폭행사건이었습니다. 부산에서 여고생 4명이 여중생 한 명을 피투성이가 되도록 집단폭행을 했다는 것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사진들은 모자이크처리를 한 것이었습니다만, 그 모습만 보더라도 얼마나 처참한 폭행이었는지를 충분히 가늠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우리 한 번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지금 우리가 이웃과의 거리가 가까워졌나요? 아니면 멀어졌나요? 사실 거리는 대단히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한국이나 일본 등 웬만한 나라에서는 핸드폰, 스마트폰이 당연시 되고 있는 사회입니다. 그러고 보면 옛날에는 참 불편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친구네 집에 전화를 건다고 하면, 너무 늦게 걸어도 실례가 되겠지요. 적당한 시간을 봐서 전화를 겁니다. 전화를 걸었는데 본인이 받는 경우는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보통 부모님이 받으세요. 그러면 “저 누구누구네 집이죠? 저 누구누구 친구 누구누구라고 하는데 누구누구 있어요?” 그 때 마침 있어서 통화를 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없다거나 하면 참 골치입니다. 간단한 용건이라면 그냥 전해달라고 하면 되겠습니다만, 내용이 좀 길어지거나 하면, 전해달라고 하기도 좀 어려워요. 그럼 다시 걸겠다고 하거나, 아니면 들어오면 전화를 걸어달라고 부탁을 해야 합니다.


그건 그래도 괜찮아요. 예를 들어서 누구랑 밖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되도 안 나타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 집에 전화를 걸어요. 그러면 당연히 본인은 이미 나갔으니까 없죠. 그런데 마침 가족이 있거나 하면 그나마 다행이에요. “저 오늘 누구누구랑 만나기로 한 누구누군데요. 몇 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아직 안 나와서 연락을 드렸는데요……” 라고 해서 아직 기다리고 있는데, 무슨 연락이 온 게 있느냐, 혹시 연락이 오면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달라는 둥 뭐 이러면서 끊습니다. 그리고 마냥 기다릴 수 밖에 없어요. 그리고 서울이 또 차가 보통 밀리나요. 그래서 뭐 사람을 30분, 1시간 기다리는 것도 매우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대학가 앞 사회과학서점에 보면 그날 모임이 있다고 하면 그 약속 메모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어요. 신림동에는 당시 대표적인 서점이 <전야> <열린글방> <그날이오면> 세 군데 있었는데, 지금은 그 중 ‘그날이오면’이라는 서점만 남아있습니다. 연세대 앞에는 ‘오늘의책’이라는 책방이 있었지요. 그래서 좀 늦게 오는 사람들은 다들 모여서 그 메모를 보고 찾아가곤 했었습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이런저런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들은 이야기로는 <롯데백화점 지하 분수대>에서 분명 만나기로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그날 그 두 사람은 못 만났다고 하는데, 문제는 두 사람이 모두 약속 시간에 분명히 <롯데백화점 지하 분수대> 앞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 두 사람은 못 만났을까요? 사람이 많아서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답은 서울에 롯데백화점이 두 곳이 있었다는 거예요. 한 곳은 명동이고 또 하나는 잠실입니다. 지금도 그대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당시에는 명동과 잠실에 있는 롯데백화점에는 똑같이 지하에 분수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이라면 이런 문제는 안 생기지요. 5분만 늦더라도 곧바로 전화를 걸거나, 아니면 카톡으로 확인하면 될 일입니다.

이렇게 되니 누가 받을지 긴장하면서 친구 집에 전화를 걸 필요도 없습니다. 모임 장소를 알기 위해서 일일이 메모를 확인할 필요도 없습니다. 시간을 넘어, 그리고 지역과 국경을 넘어서 인터넷을 통해 24시간 동안 연결이 되어 있고, 원한다면 언제든지 말을 주고 받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울 것도 아닌, 이제는 완전히 상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른바 메신저와 SNS라고 하지요? 메신저는 카카오톡이나 라인, SNS,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라고 하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통해서 우리들은 365일 24시간 동안 원하는 지인과 연락을 취할 수가 있습니다.

아마도 역사상 이처럼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가 긴밀하게 가까웠던 시기는 없었지 않았나 합니다. 참으로 과학이란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로 가까워졌나요? 사실 가깝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잘 위하고 서로 도와주기도 하고 힘이 되어 주기도 하고……그것이 가까운 것 아니겠습니까. 상대방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기뻐해주고, 안 좋은 일이 있으면 같이 슬퍼해주고 위로해주기도 하는 것이 가까운 것 아니겠습니까. 이는 서로가 멀리 있다고 해도 이처럼 365일 24시간 언제든지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면 예전에 비해서 더욱 강한 유대감이 생겨나야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페이스북에 보면 수백 명, 수천 명이 이른바 <친구>라는 이름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만, 서로에 있어서 정말로 기쁨과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어제 저도 이렇게 페이스북으로 연결되어 있는 <친구 목록>을 좀 봤습니다. 저는 그렇게 많은 편에 속하지 않습니다만, 진정으로 내 친구, 내 이웃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가 않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이와 같은 거리는 개념적인 거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리적으로는 아무리 떨어져 있더라도 인터넷을 통해서 언제든지 연결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과거에 비해서는 상상도 못할 만큼 개념적인 거리가 가까워졌습니다만, 서로간의 관계는 오히려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념적인 거리가 그렇다고 한다면, 반면이 그러면 물리적 거리는 어떨까요? 예, 물론 그렇습니다. 물리적 거리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옛말에 먼 사촌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고 했습니다. 이는 물리적 거리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웃들과의 물리적 거리는 가까워졌나요?


예, 가까워졌습니다. 특히 큰 도시일수록 과거에 비해 물리적으로는 너무나도 가까워졌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무엇입니까. 바로 아파트입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이 아파트를 선호하는 경향이 대단히 큽니다. 제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뉴스를 보니까 서울 강남의 신축 아파트 분양 경쟁률이 최고 510대 1이었다고 합니다.

510대 1……이건 정말이지 경쟁률이라기보다는 로또에 가깝습니다. 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몰리겠습니까. 물론 그만큼 그 아파트에서 살고 싶기 때문도 있겠습니다만, 그 외에도 그것은 그야말로 로또. 분양 받기만 하면 가격이 몇 배나 뛸 것이다……라고 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너도나도 몰린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에 갈 때를 보면 비행기에서 이렇게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아파트 단지들이 보이기 시작하면, 아……이제 한국이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일본에도 아파트 단지가 있기는 합니다만, 그렇게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곳곳에 몰려있는 모습은 본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도 한국에서 살고 있을 시기에 한 때 아파트 단지에서 살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사실 아파트만큼 이웃과의 거리가 적어도 물리적으로 가까운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웃과 벽 하나차이입니다. 그것도 좌우뿐인가요? 위층과 아래층도 역시 바닥 하나 차이입니다. 이렇게 물리적으로 가까운 이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실상은 어떤가요? 가깝나요? 아니요. 가깝기는요. 그 이웃간의 거리는 대단히 멉니다. 이름은 고사하고 어떤 사람이 사는지 모릅니다. 아니, 알 필요도 없어요. 물론 알게 될 때도 있습니다. 어떨 때냐 하면, 좋은 일이 있을 때요? 아니요,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알게 됩니다. 옆집에서 복도 통로에 무슨 어떤 물건을 갖다 놔서 통행에 불편을 겪는다거나, 밤새 무슨 음악을 틀어놓고 잠 못 자게 군다거나 하면, 서로의 얼굴을 알 수 있게 되겠지요.

하지만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없다면 서로 누가 누군지, 누가 언제 이사 오고, 누가 언제 이사 갔는지, 심한 경우에는 옆집에 사는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관심을 끊고도 살아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아파트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만나 뵌 분이 하시는 말씀이, 이 분은 부동상 관련 사업을 하시는 분이신데, 이 분은 어떤 사람과 대화를 하다 보면 아파트에 사는지 단독주택에 사는지를 알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이 아파트라는 것이야말로 사람들의 정신을 이상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아파트가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느낀 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이웃과의 단절, 교제의 단절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악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옛날에도 이웃간의 다툼이야 있었지요. 싸우고 코피도 터지고 그랬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처참하게 집단으로 폭력을 휘두르고, 그것도 동년배들끼리 1대1로 싸우거나 한 것이 아닌, 여고생 여럿이 여중생 하나를 그렇게 피범벅이 되도록 두드려 패고 했던 것은 익히 들어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무슨 이웃이겠습니까.

이는 안타깝게도 비단 교회 밖에서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은 얼마든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성도 수가 늘어나면 교회 안에서도 이웃이 늘어갑니다. 구역 식구들이 늘어갑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성도 안의 교제가 늘어가고, 그야말로 먼 사촌보다 가까운 이웃이 나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내 이웃이 늘어가면 늘어갈수록, 물리적으로나 개념적인 거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하물며 주님을 믿는다는 우리조차도 이웃간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교회에 보면 믿음 좋다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간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어요.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저는 이 원인은 어쩌면 성경말씀의 오해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어떤 성경말씀을 오해하였느냐 하면, 바로 마태복음 22장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5절~4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そして、彼らのうちのひとりの律法の専門家が、イエスをためそうとして、尋ねた。「先生。律法 の中で、たいせつな戒めはどれですか。」そこで、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心を尽くし、思いを尽くし、知力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愛せよ。』これがたいせつな第一の戒めです。『あなたの 隣人をあなた自身のように愛せよ。』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たいせつです。律法全体と預言者とが、この二つの戒めにかかっているのです。」


이 구절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이를 쉽게 말하자면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다>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그렇게 이해를 한다면, 그렇다면 이 구절은 어떻게 해석하시겠습니까.

마태복음 5장을 봅니다. 마태복음 5장 23절~24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여기서 예물을 제단에 드린다는 것은 예배를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주님께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한다는 우리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면, 이 말씀은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려다가 형제와의 관계에 있어서 문제가 있을 것 같다면, 일단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형제와의 관계를 해결하라고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잖아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려다가, 형제 이웃 간의 문제가 생각났다면,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세요? 예물을 드리다가 말고, 어서 먼저 형제와 화목하고 난 다음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뭐예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순서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언제는 이랬다가 언제는 저랬다가 하고 말을 바꾸셨다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렇게 알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바로 마태복음 22장 39절 전반부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9절 전반부를 다시 한 번 보도록 하시겠습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たいせつです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 앞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고, 이 말씀 다음에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둘째도 그와 같으니”라는 말씀은 이 두 가지 계명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는데, 과연 뭐가 같다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 공동번역성경이 참 친절하게 번역되었습니다. 공동번역판에서는 마태복음 22장 39절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즉,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둘째 계명도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첫째 계명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사랑은 필수이고 이웃 사랑은 무슨 선택인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계명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두 가지 계명을 두고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강령이라는 말씀은 즉,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이 바로 이 두 가지 계명,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말씀, 주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경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너무나도 두꺼워요. 잘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십계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계명도 많아요. 그러면 어떡해 해요?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두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을 또 봅니다. 야고보서 2장 10절에는 다음과 같기 기록합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律法全体を守っても、一つの点でつまずくなら、その人はすべてを犯した者となったのです。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는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찬송을 드리고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리는 것,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주일예배도 드립니다. 새벽기도 수요예배도 드립니다. 철야예배도 드립니다.

하지만 그런데 뭐가 빠졌냐 하면 이웃 사랑이 빠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는 율법의 절반만 지킨 것이 되나요? 아니요.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라고 하면 믿음이 좋기로 소문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믿음을 지키려고 힘썼습니다. 예, 그렇죠.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사랑은 있었는지 모르나 이웃 사랑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안식일에 질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안식일에 허기를 달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고 손가락질을 해댑니다.

지금 그들이 하고 있는 행동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무슨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쓰는 것도 유분수지, 감히 하나님의 독생자, 성자 하나님한테 지금 믿음이 부족하다고 가르치려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를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2장 7절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わたしはあわれみは好むが、いけにえは好まない。』ということがどういう意味かを知っていたら、あなたがたは、罪のない者たちを罪に定めはしなかったでしょう。

이 말씀은 호세아서의 구절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호세아 6장 6절을 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わたしは誠実を喜ぶが、いけにえは喜ばない。全焼のいけにえより、むしろ神を知ることを喜ぶ。

이 인애와 자비의 마음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병자와 죄인들을 보시고 미워하신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겨주셨습니다. 바로 우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겨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믿기만 하면, 우리가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을 믿기만 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기만 하면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죄에서 해방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나를 사랑하라. 그러면 내 제자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말씀하시던가요?

요한복음 13장 34절~35절을 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あなたがたに新しい戒めを与えましょう。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もし互いの間に愛があるなら、それによって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弟子であることを、すべての人が認めるのです。」


예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비난합니까. 우리가 이웃을 비판합니까. 그것은 오늘 바리새인들이 했던 것처럼 어쩌면 예수님을 비난하고 예수님한테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서로 치고 박고 싸우는 목회자나 교인들을 보고, 사람들이 뭐라고 하나요? 저 사람들은 참 믿음이 좋다고 칭찬하던가요? 아니요, 오히려 기독교가 아니라 <개독교>라고 욕합니다.

하나님 사랑도 중요하지만,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 하나님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렇잖아요?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말씀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인애와 자비를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이웃을 바라본다면 미워하는 마음, 증오의 마음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품는 것은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을 모셔드린다는 것이요,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을 모셔드린다는 것은, 우리 마음 안에 천국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인애와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96회 다윗의 신앙고백 →

← 제94회 주님이 주시는 짐

 
이카호중앙교회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94회 주님이 주시는 짐
2017년 9월 1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30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원고 없음

제95회 인애와 자비 →

← 제93회 역산법의 비밀

 
이카호중앙교회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