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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1회 우리들의 예복
2019년 7월 28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1절~14절
"1.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7.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10.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11.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4.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マタイの福音書 22章 1節~14節
"イエスは彼らに対し、再びたとえをもって話された。
「天の御国は、自分の息子のために、結婚の披露宴を催した王にたとえることができます。
王は披露宴に招待した客を呼びにしもべたちを遣わしたが、彼らは来ようとしなかった。
それで再び、次のように言って別のしもべたちを遣わした。『招待した客にこう言いなさい。「私は食事を用意しました。私の雄牛 や肥えた家畜を屠り、何もかも整いました。どうぞ披露宴においでください」と。』
ところが彼らは気にもかけず、ある者は自分の畑に、別の者は自分の商売に出て行き、
残りの者たちは、王のしもべたちを捕まえて侮辱し、殺してしまった。
王は怒って軍隊を送り、その人殺しどもを滅ぼして、彼らの町を焼き払った。
それから王はしもべたちに言った。『披露宴の用意はできているが、招待した人たちはふさわしくなかった。
だから大通りに行って、出会った人をみな披露宴に招きなさい。』
しもべたちは通りに出て行って、良い人でも悪い人でも出会った人をみな集めたので、披露宴は客でいっぱいになった。
王が客たちを見ようとして入って来ると、そこに婚礼の礼服を着ていない人が一人いた。
王はその人に言った。『友よ。どうして婚礼の礼服を着ないで、ここに入って来たのか。』しかし、彼は黙っていた。
そこで、王は召使いたちに言った。『この男の手足を縛って、外の暗闇に放り出せ。この男はそこで泣いて歯ぎしりすることになる。』
招かれる人は多いが、選ばれる人は少ない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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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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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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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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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들의 예복” 私たちの礼服 라고 하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마태복음에 있는 내용입니다만, 이와 비슷한 말씀은 누가복음에도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있는 내용을 잠시 살펴볼까 합니다. 누가복음 14장 16절~24절입니다.

누가복음 14장 16절~24절

16.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1.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するとイエスは彼にこう言われた。「ある人が盛大な宴会を催し、大勢の人を招いた。
宴会の時刻になったのでしもべを遣わし、招いていた人たちに、『さあ、おいでください。もう用意ができましたから』と言った。
ところが、みな同じように断り始めた。最初の人はこう言った。『畑を買ったので、見に行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どうか、ご容赦ください。』
別の人はこう言った。『五くびきの牛を買ったので、それを試しに行くところです。どうか、ご容赦ください。』
また、別の人はこう言った。『結婚したので、行くことができません。』
しもべは帰って来て、このことを主人に報告した。すると、家の主人は怒って、そのしもべに言った。『急いで町の大通りや路地 に出て行って、貧しい人たち、からだの不自由な人たち、目の見えない人たち、足の不自由な人たちをここに連れて来なさい。』
しもべは言った。『ご主人様、お命じになったとおりにいたしました。でも、まだ席があります。』
すると主人はしもべに言った。『街道や垣根のところに出て行き、無理にでも人々を連れて来て、私の家をいっぱいにしなさい。
言っておくが、あの招待されていた人たちの中で、私の食事を味わう者は一人もいません。』」

여기서 보면 이 누가복음은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1차 초청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잔치할 시간이 되자 이 분은 그냥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초청한 사람들에게 직접 종을 보내고는, 자, 이제 잔치 준비가 되었으니까 오십시오……라고 말을 전하지요.

그랬더니 어땠냐 하면 모두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자기는 밭을 샀기 때문에, 자기는 소를 샀기 때문에, 또는 자기가 장가 들었기 때문에 가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기껏 잔치 준비를 하고 미리 초청도 하고 그랬는데, 자기들 사정 때문에 못 오겠다고 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 이유가 보면 모두 자기 개인적인 일, 세상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마지막 사람을 보면 자기 결혼식이 있기 때문에……가 아니에요. 뭐, 자기 결혼식이 있기 때문에 남의 집 잔칫집에 못 간다고 하면 그나마 이해가 되겠습니다만, 자세히 보면 자기가 이미 장가를 들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자기가 신혼이기 때문에, 자기 마누라와 같이 있고 싶기 때문에, 당신 잔치에 못 가겠다……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때 보면 우선순위를 정하지요. 그 우선순위를 보면 그 사람이 어느 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큰 잔치보다도 자기의 개인적인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주인은 당연히 화가 났지요. 자기가 정성을 다해서 잔치를 준비했는데, 초청한 사람들이 잔치보다도 각자의 일을 더 중요시 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주인, 어떻게 했냐 하면, 다음 단계로 접어듭니다. 누가복음 16장 21절을 봅니다.

누가복음 16장 21절
“21.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しもべは帰って来て、このことを主人に報告した。すると、家の主人は怒って、そのしもべに言った。『急いで町の大通りや路地 に出て行って、貧しい人たち、からだの不自由な人たち、目の見えない人たち、足の不自由な人たちをここに連れて来なさい。』


이제 두 번째, 2차 초청으로 넘어갑니다. 처음에 초청했던 사람들은 모두 안 온다고 하니까, 집 주인이 노했다고 하지요? 어쭈, 그래? 그럼 됐다고 그래. 그러면서 하는 말이,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에 나가서 사람들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처음에는 초청을 받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뿐만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특징이 뭐예요?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
貧しい人たち、からだの不自由な人たち、目の見えない人たち、足の不自由な人たち

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를 두고 성경이 빈부차별, 장애인 차별……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래서 이 사람들을 다 불러왔는데, 그래도 아직 자리가 남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이제 제3차 초청입니다.

누가복음 16장 23절
“23.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すると主人はしもべに言った。『街道や垣根のところに出て行き、無理にでも人々を連れて来て、私の家をいっぱいにしなさい。

그러면서 이 주인의 마지막 말이 24절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16장 24절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言っておくが、あの招待されていた人たちの中で、私の食事を味わう者は一人もいません。』」

여기서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招待されていた人たち)>이라고 하는 것은 1차 초청 때 불렀던 사람들, 처음에 초청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사람들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니까 원래 부르기로 했던 사람들, 좋은 음식이 차려진 큰 잔치에 초청된 사람들은 하나도 들어오지 못하고, 오히려 예정에 없었던 사람들이 그 잔치에 참여하여 기쁨을 누렸다는 뜻입니다.

성경 특히 신약에서 <잔치>라고 하면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9장 9절
“9.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御使いは私に、「子羊の婚宴に招かれている者たちは幸いだ、と書き記しなさい」と言い、また「これらは神の真実なことばである」と言った。

마지막 날에 예수님과 함께 드리는 잔치가 바로 이 어린 양의 혼인잔치이지요.

여기서 1차 때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유대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잔치에 들어오지 못하고 2차 초청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2차 초청에서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 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이는 빈부차별이나 장애인 차별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기존 유대인 사회에서 소외 받은 사람들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다 같은 유대인이 아니지요. 예를 들어 제사장이나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이나 율법교사들 같은 사람들은 상류층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어려움, 또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같은 유대인이라 하더라도 소외 당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잔치에 초청을 받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그래도 빈 자리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3차 초청으로 넘어갑니다.

2차 초청에서는 ‘시내 거리와 골목’으로 가서 사람을 불러오라고 했었는데, 3차 초청에서는 ‘길과 산울타리’까지 가서 데려오라고 합니다.

‘시내 거리와 골목’이라고 한다면 이는 그 지역 울타리 내부를 이야기 하지요. 시내 거리와 골목은 그 지역에 있는 길가와 좁은 골목에 있는 사람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유대인은 유대인이지만 길가나 좁은 골목 같은 곳에 있는 소외계층인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런데 3차에서는 ‘길과 산울타리’라고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길’은 시내 거리가 아닙니다. 시외 즉 바깥으로 연결되는 길입니다. 그리고 산울타리는 외부와의 경계를 말하는 것이지요. 이는 다른 말로 이방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까지도 이 잔치에 초청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인의 마지막 말로 알 수 있듯이, 그 동안 소외 계층이나 이방인이라 하더라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은 마지막 때에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청을 받게 되지만, 예수님을 거절한 사람들은 아무리 유대인, 선택 받은 민족이라 하더라도 성대한 예수님의 잔치에는 들어올 수가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누가복음 말씀은 상당히 깔끔합니다. 이해하기가 쉬어요.

자, 그러면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마태복음을 보기에 앞서 누가복음 말씀을 살펴본 이유는, 누가복음은 비교적 내용이 간결하기 때문에 이를 먼저 살펴보고 난 다음에 마태복음을 보시면 더욱 잘 이해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 중 먼저 마태복음 22장 2절을 보시겠습니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天の御国は、自分の息子のために、結婚の披露宴を催した王にたとえることができます。

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이는 어떤 주석서에 의하면 원문 문법상으로 봤을 때, 천국이 어떤 왕과 같은 것이 아니라, '천국은 어떤 왕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베푼 혼인잔치와 같다(天の御国は、ある王が自分の息子のために催した結婚の披露宴にたとえることができる)'고 이해해야 한다……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참 타당한 지적 같습니다. 그러니까 천국이 곧 왕이라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혼인잔치로 말씀하셨다는 것이지요. 그것도 왕이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풀었다고 하니, 얼마나 성대하고 얼마나 정성스럽게 차려진 잔치였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앞서 살펴본 누가복음과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3절에 보면 1차 초청이 나오는데, 청한 사람들이 오기를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금방 포기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2장 4절
“4.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それで再び、次のように言って別のしもべたちを遣わした。『招待した客にこう言いなさい。「私は食事を用意しました。私の雄牛 や肥えた家畜を屠り、何もかも整いました。どうぞ披露宴においでください」と。』

아하, 1차 초청에서 그냥 오라고 했더니 이 사람들이 잔치 내용을 잘 몰라서 그랬나 보구나. 그래, 그러면 이 잔치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내가 얼마나 정성껏 준비한 성대한 잔치인지를 알려주면 오겠지……하고 다시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들이 어떻게 했답니까.

마태복음 22장 5절~6절
“5.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ところが彼らは気にもかけず、ある者は自分の畑に、別の者は自分の商売に出て行き、
残りの者たちは、王のしもべたちを捕まえて侮辱し、殺してしまった。

이런 나쁜 사람들이 있습니까. 기껏 종들을 보내면서까지 오라고 했더니만, 누가복음에서 살펴본 것처럼, 종들을 무시하고 각자 자기 일을 하러 간 것만으로 모자라, 이제 어떤 사람들은 잔치에 초청한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니 당연히 임금님은 화를 냅니다.


마태복음 22장 7절
“7.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王は怒って軍隊を送り、その人殺しどもを滅ぼして、彼らの町を焼き払った。

임금은 이제 자신이 보낸 종들을 무시하고 죽이기까지 한 그들을 진멸하고는 그것만으로도 부족하여 그 동네들을 완전히 멸망시켜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2장 8절~10절을 봅니다.

8.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10.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それから王はしもべたちに言った。『披露宴の用意はできているが、招待した人たちはふさわしくなかった。
だから大通りに行って、出会った人をみな披露宴に招きなさい。』
しもべたちは通りに出て行って、良い人でも悪い人でも出会った人をみな集めたので、披露宴は客でいっぱいになった。

이 부분은 누가복음을 이미 살펴보았으니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본래 초청했던 사람들이 안 온다고 하기에, 네거리 길에 가서 만나는 사람들을 다 모아왔다더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 찼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 특별히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바로 그 다음부터입니다.


마태복음 22장 11절~13절
11.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王が客たちを見ようとして入って来ると、そこに婚礼の礼服を着ていない人が一人いた。
王はその人に言った。『友よ。どうして婚礼の礼服を着ないで、ここに入って来たのか。』しかし、彼は黙っていた。
そこで、王は召使いたちに言った。『この男の手足を縛って、外の暗闇に放り出せ。この男はそこで泣いて歯ぎしりすることになる。』

자, 1차로 초청을 했던 사람들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다 불러다가 자리를 채웠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 거기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당신은 왜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왔냐고 하자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임금이 화를 내서 그 사람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졌다고 하지요.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사람은 꾸짖음을 당한 것일까 한 번 생각해보았습니다.

제가 이 글을 맨 처음 읽을 때 느꼈던 것은, 아니, 네거리 길가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는 대로 데려오라고 했다면서요. 그래서 종들이 길거리에 나가서 선한 자나 악한 자나 그냥 만나는 대로 다 데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복을 안 입었다고 혼이 나요? 아니, 무슨 예복을 항상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있나요?


얼마 전에 보니까 요즘 영국 귀족들은 어딜 가든지 누군가가 돌아가셨을 때 입을 수 있는 상복을 항상 가지고 다닌다고 그러더라구요. 하지만 예수님 당시 사람들, 그것도 귀족도 아닌 일반 서민들이 항상 예복을 가지고 다닐 일이야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걸 입지 않았다고 내쫓겨야 한다는 것은 좀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열왕기하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열왕기하 10장 22절
“예후가 예복 맡은 자에게 이르되 예복을 내다가 바알을 섬기는 모든 자에게 주라 하매 그들에게로 예복을 가져온지라”

エフーが衣装係に、「バアルの信者すべてに祭服を出してやれ」と命じたので、彼らのために祭服を取り出した。

이 기록은 북 이스라엘 왕 예후가 바알 선지자들을 죽이기 위해서 함정에 빠뜨리게 하려는 장면입니다만, 여기에 보면, ‘예복 맡은 자’ 라고 되어 있으며, 그가 사람들에게 예복을 나누어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는 기원전 800년대의 일이고, 이와 같은 문화가 예수님 당시까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우리는 이 기록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다른 사람들은 예복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지목했다고 하는데, 만약에 예복을 입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이 한 사람만 내쫓겼다고 보기에는 부자연스럽습니다. 오히려 예복을 안 입은 사람은 이 사람뿐이었다고 하는 것이 문맥 흐름상 타당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다음은 둘째로, 이 사람이 예복을 입을래야 입을 수 없었다면 내쫓김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여기서 임금은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하는데, 애써 사람을 불러놓았는데 그 사람이 아무리 예복을 입고 싶어도 어떤 사정이 있어 입을 수 없었는데 이를 두고 내쫓았다고 하면 공의로운 하나님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이렇게 본다면 한다면 결론은 하나입니다. 왕이 초청한 손님들을 위해 예복을 주는 고대 문화가 당시까지 남아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분명히 자신이 원했다면 얼마든지 예복을 입을 수 있었다고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내쫓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 예복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예복, 천국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 다른 곳에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을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는가 하는 것을 살펴봅니다.

요한복음 3장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イエスは答えら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人は、新しく生まれなければ、神の国を見ることはできません。」

우리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또 하나 중요한 구절을 기억해야 해겠습니다.

자, 오늘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가장 처음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을까요. 마태복음 4장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この時からイエスは宣教を開始し、「悔い改めなさい。天の御国が近づいたから」と言われた。

천국이 멀리 있을 때, 심판이 멀리 있을 때에는 네 멋대로 살아도 괜찮아. 하지만 이제 천국이 가까이 왔다. 심판의 날이 바로 눈앞에 닥쳤다. 이제 그렇다면 빨리 회개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다급하셨으면 공생애를 시작하자마자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회개였겠습니까.

여기까지의 말씀들을 세 가지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듭나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라는 예복을 입고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2장 10절에 보니 뭐라고 되어 있었어요?
“10.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しもべたちは通りに出て行って、良い人でも悪い人でも出会った人をみな集めたので、披露宴は客でいっぱいになった。

참 이상합니다. 아니, 천국 하나님 나라 잔치인데 선한 자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악한 자도 데려올 수 있다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 이상하지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왜 괜찮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무리 악한 자라 하더라도 회개라는 예복을 입고 거듭나면 괜찮다는 것입니다. 이 회개라는 예복은 우리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져야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인간의 힘으로 반성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별로 힘이 없습니다. 흙탕물을 물컵에 담아서 가만히 놓아보세요.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 맑아집니다. 하지만 그게 정말 맑은 건가요? 젓가락으로 휘 저으면 또다시 시커멓게 되고 맙니다. 그것이 인간의 힘으로 반성한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반성해봤자, 아무리 죄를 짓고 교도소에 들어갔다 와봤자 또다시 죄를 짓게 되고 맙니다. 인간은 그토록 참 연약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계시록 7장 14절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そこで私が「私の主よ、あなたこそご存じです」と言うと、長老は私に言った。「この人たちは大きな患難を経てきた者たちで、その衣を洗い、子羊の血で白くしたのです。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피에 우리 죄를 씻고 회개하여야 진정으로 흰 예복을 입고, 거듭난 모습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가 내쫓긴 곳이 어디입니까. 바깥 어두운 데라고 하지요. 이는 지옥입니다. 지옥이 어떤 곳입니까.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지옥에 떨어진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누가복음 16장 24절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金持ちは叫んで言った。『父アブラハムよ、私をあわれんでラザロをお送りください。ラザロが指先を水に浸して私の舌を冷 やすようにしてください。私はこの炎の中で苦しくてたまりません。』

그에 대해서 바로 앞 16장 19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누가복음 16장 19절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ある金持ちがいた。紫の衣や柔らかい亜麻布(あまぬの)を着て、毎日ぜいたくに遊び暮らしていた。

오해하지 마십시오. 부자라고 해서 다 지옥에 떨어진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호화롭게 즐기기만 하던 부자, 자비를 베풀지 않았던 그는 지옥에 떨어진 후, 물 한 방울을 달라며 아브라함에게 호소를 합니다. 그렇게 처참한 곳이 바로 지옥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곳은 뭐 경험 삼아 가본다 하더라도 지옥에만은 절대로 가서는 안 됩니다. 근처에도 가서는 안 되지요.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내쫓긴 사람이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를 간다는 표현은 성경에 종종 나오는 표현입니다만, 특별히 신약에서는 그 감정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억울함입니다. 억울함이라고 하는 것은 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후회하는 억울함입니다.

지옥에 떨어진 그들이 하는 가장 큰 후회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회개하지 않은 후회일 것입니다. 내가 회개할 걸. 여기에 떨어지기 전에 회개할 걸. 회개만 했다면, 회개의 흰 옷, 회개의 예복만 입었다면, 주님께서 주시는, 십자가의 피로 깨끗하게 씻긴 회개의 예복을 입기만 했었다면 나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하지만 이미 심판이 내려진 후에는 아무리 후회를 해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이지요.

이제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늦기 전에, 회개해야 합니다. 거듭나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보혈에 우리의 죄를 씻고 거듭난 모습으로 회개라는 이름의 흰 예복을 입음으로 말미암아 천국으로 들어가서 어린양의 혼인잔치, 큰 기쁨으로 충만한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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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0회 세 가지 찬양
2019년 7월 2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37절~40절
"37.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ルカの福音書 19章37節~40節
“イエスがいよいよオリーブ山の下りにさしかかると、大勢の弟子たちはみな、自分たちが見たすべての力あるわざについて、喜 びのあまりに大声で神を賛美し始めて、
こう言った。「祝福あれ、主の御名によって来られる方、王に。天には平和があるように。栄光がいと高き所にあるように。」
するとパリサイ人のうちの何人かが、群衆の中からイエスに向かって、「先生、あなたの弟子たちを叱ってください」と言った。
イエスは答えられた。「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もしこの人たちが黙れば、石が叫び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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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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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세 가지 찬양” 三つの賛美 라고 하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제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십니다. 이 때는 오늘 말씀에도 보이는 것처럼 예루살렘 전체가 떠들썩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37절~38절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시겠습니다.

37.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イエスがいよいよオリーブ山の下りにさしかかると、大勢の弟子たちはみな、自分たちが見たすべての力あるわざについて、喜 びのあまりに大声で神を賛美し始めて、
こう言った。「祝福あれ、主の御名によって来られる方、王に。天には平和があるように。栄光がいと高き所にあるように。」

마태복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21장 7절~9절

“7.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ろばと子ろばを連れて来て、自分たちの上着をその上に掛けた。そこでイエスはその上に座られた。
すると非常に多くの群衆が、自分たちの上着を道に敷いた。また、木の枝を切って道に敷く者たちもいた。
群衆は、イエスの前を行く者たちも後に続く者たちも、こう言って叫んだ。「ホサナ、ダビデの子に。祝福あれ、主の御名によって来 られる方に。ホサナ、いと高き所に。」

여기서 <호산나>라고 하는 말씀은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사야서를 봅니다.

이사야 11장 10절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その日になると、エッサイの根はもろもろの民の旗として立ち、国々は彼を求め、彼のとどまるところは栄光に輝く。

이사야서는 특히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많은 것이 특징 중 하나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도 돌아오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이새>(エッサイ)는 다윗의 아버지 이름입니다. 그 뿌리에서 왕 중의 왕 메시야가 오신다는 예언 그대로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족보로 볼 때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자 온 동네에 찬양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찬양이라고 하면 노래만을 떠올리기 십상인데, 그건 너무나도 좁은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찬양예배라고 하면 어떤 예배가 떠오르십니까. 말씀에 대한 내용은 적고 주로 음악과 노래로서 진행하는 예배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 한 번 <찬양>이라는 뜻부터 정리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찬양>이라고 하는 것은, “아름답고 훌륭함을 크게 기리고 드러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문으로는 왕의 덕을 찬양하다, 업적을 찬양하다, 효행을 찬양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왕의 덕을 찬양하고 업적을 찬양하고 효행을 찬양하는데 꼭 노래를 불러야 하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말로도 얼마든지 이와 같은 찬양을 표현할 수가 있겠지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할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꼭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불러야지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을 세 가지, 믿음으로 드리는 찬양, 말씀으로 드리는 찬양, 그리고 행함으로 드리는 찬양으로 정리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먼저 믿음으로 드리는 찬양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アブラムは主を信じた。それで、それが彼の義と認められた。

로마서 1장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

福音には神の義が啓示されていて、信仰に始まり信仰に進ませるからです。「義人は信仰によって生きる」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냥 아, 그래, 성경에 있는 것을 나는 믿어…… 그것으로 끝인가요? 만약에 그것이 믿음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성경이 아닌, 예를 들어서 역사책을 읽을 경우는 어떻습니까. 1700몇 년에 어디서 누가 어떤 일을 했고, 1800몇 년에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났고……이것을 믿는 것도 그렇다면 역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둘이, 성경을 읽고 그 내용을 믿는다는 것과, 역사책을 읽고 그 내용을 믿는다는 것이 서로 차이가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차이가 없을까요? 아니요. 분명히 있습니다. 적어도 몇 백 년 전에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도 살아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건들은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가치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 개인과는 그리 큰 관계가 없는 경우도 많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성경은 어떻습니까. 성경을 단순히 역사책을 읽는 정도로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이는 그야말로 껍데기만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과거의 기록만을 적어놓은 책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살아서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록, 예수님에 대한 기록, 성령님에 대한 기록이라는 사실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드리는 찬양은 어떤 찬양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이 선택이라고 하는 것만 잘 하면 그야말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학생이나 수험생이 치르는 시험문제 같은 데에 나오는 선택지는 4개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만 경우에 따라서는 5개나 그 이상인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선택지는 대체적으로 2개 정도일 때가 많지 않을까 합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뭐냐 하면, 세상적인 방법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믿음의 방법을 따를 것인가 하는 경우입니다.

“이봐, 예수를 믿는 것도 좋지만, 좀 적당히 믿어.”

이 말, 별것 아닌 것 같으시죠? 하지만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서 또 오해를 하실까봐 말씀을 드리자면, 여기서 <세상적인 방법>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좀 극단적인 의미로 말씀을 드리자면, 집에 들어가려고 해요. 그러면 손으로 문을 열어야죠. 그런데 아니야. 이런 세상적인 방법을 의지하면 안돼. 기도하고 문이 열리기를 간구해야지…… 이러시라는 게 아닙니다.

세상적인 방법이라고 하는 것은, 정확하게 말씀 드리자면 <믿음의 방법>에 반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 중에서도 잠언을 많이 읽으시는 분들이 계신데, 거기에 보면 세상적인 방법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말이 바로 ‘뇌물’입니다.

잠언 15장 27절
“이익을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해롭게 하나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살게 되느니라”

利得を貪る者は自分の家族を困らせ、賄賂を憎む者は生きながらえる。

잠언 17장 23절
“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

悪しき者は人の懐から賄賂を受け取り、さばきの道を曲げる。

이와 같은 뇌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라,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믿음 안에서 취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방법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에 어떤 문제에 봉착하는 경우, 믿음의 방법에 반하기는 하지만, 세상적인 방법으로, 편법을 쓰면 왠지 잘 풀릴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믿음의 방법,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면 왠지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고, 잘 안 될 것만 같은데, 그냥 눈 딱 감고 세상적인 방법, 나쁜 일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이번 한 번 만 하면 잘 될 것처럼 생각될 때…… 바로 그 때가 중요한 갈림길인 것입니다. 그 때가 무슨 갈림길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찬양을 드리는 삶을 살 수 있는지 없는지, 하나님께 우리 믿음의 찬양을 드릴 수가 있는지 없는지의 갈림길인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그 때 우리는 세상적인 방법이 아닌 믿음의 방법 쪽을 택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43장 18절~20절

18.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先のことに心を留めるな。昔のことに目を留めるな。
見よ、わたしは新しいことを行う。今、それが芽生えている。あなたがたは、それを知らないのか。必ず、わたしは荒野に道を、荒れ地に川を設ける。
野の獣、ジャッカルや、だちょうも、わたしをあがめる。わたしが荒野に水を、荒れ地に川を流れさせ、わたしの民、わたしの選んだ者に飲ませるからだ。

믿음에 반하는 이전 일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사막에 길을 내고 강을 내시는 하나님, 광야에 물을 내시는 하나님, 홍해를 가르시는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 속에서 믿음의 찬양을 드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둘째로 말씀으로 드리는 찬양입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에게 있어서 성경 말씀은 우리의 무기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를 보면 말씀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 중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마지막 구절. 요한계시록 22장 21절, 기억하십니까?


요한계시록 22장 21절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主イエスの恵みが、すべての者とともにありますように。

성경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작은 어떻습니까.

창세기 1장 1절에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

그리고 요한복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장 2절~3절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この方は、初めに神とともにおられた。
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によらずにできたものは一つもなかった。

여기서 <그>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즉, 만물 중에서 예수님 없이 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창세기 1장 1절부터 이는 예수님의 기록이라고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에서 예수님이 사라집니다. 성경 말씀이 사라집니다. 십자가가 사라집니다. 서로 이야기 하는 것이 돈 이야기, 재산 이야기, 직분 이야기, 나아가 이제 정치 이야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을 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고 하고, 나아가 목사라고 하는 분들까지도 이제 세상 정치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인터넷 유튜브까지 개설해가면서 세상 이야기, 정치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그러라고 십자가에서 못 박고 죽으셨습니까. 저도 정치 이야기 상당히 좋아합니다. 페이스북 같은 곳에 올라오는 정치 이야기들을 보면 저도 막 쓰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제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정치 이야기나 세상 이야기 같은 거나 하게 하기 위해서 이제까지 나를 인도해 오셨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고린도전서 2장 2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なぜなら私は、あなたがたの間で、イエス・キリスト、しかも十字架につけられたキリストのほかには、何も知るまいと決心していたからです。

당시 최고 엘리트였던 바울도 정치나 경제, 사회와 같은 내용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었기에 세상적인 말을 하기 원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삶 속에서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을 증언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경이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말씀이요, 예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타내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말씀으로 드리는 찬양이라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마지막으로 행함으로 드리는 찬양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아니, 근본적으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있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건가요?
헌금을 내면 예수님을 믿는 건가요?
세례를 받으면 예수님을 믿는 건가요?
직분을 받으면 예수님을 믿는 건가요?

이는 모두 다 교회 안에서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생활만 잘 하면 우리는 그것으로 충분한 건가요? 마태복음 11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バプテスマのヨハネの日から今に至るまで、天の御国は激しく攻められています。そして、激しく攻める者たちがそれを奪い取っています。

여기서 <침노>는 공격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천국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물론 당연히 천국은 우리의 노력 만으로는 갈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우리 죄가 해결되어야 하지만,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우리의 죄를 조금도 해결할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해야지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씻은 후에야 비로소 천국에 들어갈 기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천국은 가만히 앉아, 아무 것도 하지 않더라도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을 빼앗기 위해서, 천국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끊임없이 공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노력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행함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행함에 있어서 너무나도 부족한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로마서 16장 19절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あなたがたの従順は皆の耳に届いています。ですから、私はあなたがたのことを喜 んでいますが、なお私が願うのは、あなたがたが善にはさとく、悪にはうとくあることです。


누가복음 6장 37절~38절
37.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38.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もさばかれません。人を不義に定めてはいけません。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も不義に定められません。赦し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も赦されます。
与え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も与えられます。詰め込んだり、揺すって入れたり、盛り上げたりして、気前良 く量って懐に入れてもらえます。あなたがたが量るその秤で、あなたがたも量り返してもらえるからです。」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사람들은 참으로 남들을 비판합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합니다. 이는 교회 안에서도 벌어지고 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남들보다 잘나면 얼마나 잘났기에 큰 소리로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정치인들을 보십시오. 상대방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럼 본인들은 참으로 흠이 없나요?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정치인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다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비판하는 데에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 지혜로워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웃 사랑의 으뜸은 우리가 가진 것을 주는 것입니다. 이는 돈이나 재산 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웃을 위해 시간을 줄 수가 있습니다. 수고를 줄 수도 있습니다. 마음을 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행함으로 드리는 찬양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에서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돌들이 찬양하리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돌멩이가 무엇입니까. 지금 여기까지 오시는 길에 돌멩이가 몇 개나 있었는지 세면서 오신 분 계십니까. 돌멩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들, 하나도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찬양을 멈출 때, 우리 입에서, 우리 삶 속에서 찬양이 멈출 때,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우리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곳에서, 정말 하찮다고 생각해왔던 곳에서부터 예수님의 찬양이 울려 퍼지고 우리에게 있던 축복의 촛대는 생각지도 않은 곳으로 옮겨질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わたしはすぐに来る。あなたは、自分の冠をだれにも奪われないように、持っているものをしっかり保ちなさい。

우리 모두 믿음으로 드리는 찬양, 말씀으로 드리는 찬양, 그리고 행함으로 드리는 찬양을 통해서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주님의 사랑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면류관을 굳게 지키고, 마지막 날에 주님으로부터 잘했다고 칭찬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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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9회 주님의 뜻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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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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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28절~31절
“28.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マタイの福音書 21章28節~31節
“ところで、あなたがたは、どう思いますか。ある人にふたりの息子がいた。その人は兄のところに来て、『きょう、ぶどう園に行って働いてくれ』と言った。
兄は答えて『行きます。お父さん』と言ったが、行かなかった。
それから、弟のところに来て、同じように言った。ところが、弟は答えて『行きたくありません』と言ったが、あとから悪かったと思って出かけて行った。
ふたりのうちどちらが、父の願ったとおりにしたのでしょう。」彼らは言った。「あとの者です。」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告げます。 取税人や遊女たちのほうが、あなたがたより先に神の国に入ってい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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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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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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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주님의 뜻대로” 主の願ったとおりに 라고 하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서 역시 마태복음 21장 28절~31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지난 주 말씀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뉘우침>이란 후회와 회개가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우리 과거에 부끄러운 일, 후회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멈춰서는 게 아니라 회개하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언제나 받아주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또 다른 각도로 이 말씀을 우리가 받음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주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 중에서도 특히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은 예수님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행적의 중심은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에 대한 기록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해줍니다.

하지만 우리가 복음서에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하는 점만이 아니라, 그 말씀이 누구를 향해서 하신 말씀인가 하는 것도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에 보다 대단히 큰 근거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말씀은 누구를 향해서 하신 말씀인가요.

마태복음 21장 23절 중반까지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それからイエスが宮に入って教えておられると、祭司長たちや民の長老たちがイエスのもとに来て言った。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당시 성전에 있었던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 하신 말씀의 결론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는 오늘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31절 후반 부분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取税人たちや遊女たちが、あなたがたより先に神の国に入ります。

이게 참 놀라운 결론입니다.

당시에는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받고 율법을 어기면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대제사장이나 장로들,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학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스스로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믿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율법을 지도하는 위치, 이른바 기득권 세력들,(既得権益層) 사회지도층 인사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세리나 창녀들은 어땠을까요. 그들은 율법에서 제일 먼 존재, 구원에서 제일 먼 곳에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 나라에는 가장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잘 지킨다고 하는 그들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에서 가장 먼 존재, 구원에서 제일 먼 존재인 세리나 창녀들이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놀라운 말씀을 하셨을까요.

먼저 오늘 본문 말씀들, 지난 주에도 살펴보았으니까 여러분께서는 모두 잘 기억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만, 그래도 또 혹시 모르니까 다시 한 번 간략하게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는 두 아들이 나오지요. 맏아들과 둘째 아들입니다.

맏아들의 경우를 살펴보면,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했더니, 대답은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가지 않았지요.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대답은 순종, 행동은 불순종. 이것이 맏아들이었습니다.

반면 둘째 아들의 경우를 살펴보면,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했더니, 대답은 싫소이다. 안 가겠다 하고 거절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갔지요. 왜 갔느냐 하면, 예, 뉘우쳤기 때문에, 자기 잘못을 후회하고 회개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말을 따라서 포도원에 간 것입니다. 역시 이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둘째 아들의 경우를 보면 대답은 불순종, 그러나 회개한 후 그의 행동은 순종……. 이것이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맏아들은 말로만 순종, 행동은 불순종

둘째 아들은 말로는 불순종, 그러나 행동은 뉘우치고 순종이었습니다.

여기까지 말씀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질문을 던지셨지요. 31절 전반부입니다.

마태복음 21장 31절 전반부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二人のうちのどちらが父の願ったとおりにしたでしょうか。」

우리는 이제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했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는 맏아들과 둘째 아들이 등장합니다. 이 말씀을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 말하자면 종교적 지도자들, 기득권자들에게 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에서는 세리들과 창녀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맏아들을 종교적 지도자들, 그리고 둘째 아들을 세리와 창녀들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당시에 종교적 지도자들, 기득권자들은 어땠습니까. 정말로 믿음이 좋았나요? 당시 그들에게는 문제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이는 제 추측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가장 많이 꾸짖은 사람들이 바로 이 당시 종교지도자들, 기득권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목에 힘을 주고 다녔습니다. 거리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 모인 곳에서 대우 받기를 좋아했습니다. 남들이 들으라고 큰 소리로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마태복음 23장 3절~7절
“3.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ですから、彼らがあなたがたに言うことはすべて実行し、守りなさい。しかし、彼らの行いをまねてはいけません。彼らは言うだけで実行しないからです。
また彼らは、重くて負いきれない荷を束ねて人々の肩に載せるが、それを動かすのに自分は指一本貸そうともしません。
彼らがしている行いはすべて人に見せるためです。彼らは聖句を入れる小箱を大きくしたり、衣の房を長くしたりするのです。
宴会では上座を、会堂では上席を好み、
広場であいさつされること、人々から先生と呼ばれることが好きです。

마태복음 6장 5절
“5.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また、祈るとき偽善者たちのようであってはいけません。彼らは人々に見えるように、会堂や大通りの角に立 って祈るのが好きだからで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彼らはすでに自分の報いを受けているのです。

겉으로는 믿음이 좋은 척, 겉으로는 깨끗한 척, 거룩한 척을 하는 그들을 예수님께서 모르시겠습니까.

그래서 마태복음 23장 27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3장 27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わざわいだ、偽善の律法学者、パリサイ人。おまえたちは白く塗った墓のようなものだ。外側は美しく見えても、内側は死人の骨やあらゆる汚れでいっぱいだ。

아무리 시신을 묻어놓고 그 바깥을 하얗게 칠해서 깨끗하게 보이도록 해놓아도 그 속은 시체가 썩어가고 온갖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다고 하는데, 당시 종교지도자들,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이와 같은 모습이었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지만 세리들, 창녀들은 어떻습니까. 그렇다고 또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당시 세리나 창녀가 모두 거룩하고 천국에 간다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너희들은 회개하지 않지만, 차라리 과거에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사회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하물며 율법적으로나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모든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온다면, 즉, 처음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반항했었다 하더라도 나중에 뉘우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둘째 아들과 같은 그들이, 말로만 믿는 척, 겉으로만 순종하는 척만 하고 결국은 회개하지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는 너희들 보다 천국에 먼저 들어가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좀 화제를 바꾸어볼까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구원의 확신에 대한 질문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무엇입니까. 나는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았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다. 이 확신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확신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럼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구원의 확신이 있으십니까? 지금 이 순간 죽더라도 나는 틀림없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예, 아멘.

이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일본에서 살다가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당시 대학부 예배에 처음 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이제 처음 왔으니까 새신자 등록카드 같은 것을 쓰라고 했던 것 같아요.

거기에는 뭐 이름이나 주소 같은 것들을 적는 곳도 있었습니다만, 제 기억에 이런 것도 적혀 있더라구요?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예, 아니오.

그래요. 뭐 예전부터 교회에 다니고 있는 성도님들이라면 어느 정도 답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전 좀 그 때 당황했습니다. 아니, 그게 새신자 등록카드잖아요? 저는 뭐 일본에서 신앙생활을 계속 했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좀 당황스러운데 오늘 처음으로 교회에 나온 사람들한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맞는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그 때 처음 나온 분이 저만이 아니었는데, 역시 어떤 다른 분이 그 종이를 들고 질문을 하더라구요.

“이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는 지금 반드시 대답해야 하느냐”

그러니까 그 서류를 받으시는 분이 하시는 말씀이 “이 부분은 아주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반드시 대답을 해주셔야 합니다”라고 하더군요.

이 말을 들은 그 분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럼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ㅎㅎ
성경에 보면 구원의 확신이 강한 분들, 꽤 많이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이 구원의 확신이 강한 분일까요? 장담할 수 있습니다.

바로 당시 종교지도자들, 앞서 말씀 드린 대제사장이나 장로들,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학자들, 예수님께서 꾸짖으셨던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을 잠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0절~14절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二人の人が祈るために宮に上って行った。一人はパリサイ人で、もう一人は取税人であった。
パリサイ人は立って、心の中でこんな祈りをした。『神よ。私がほかの人たちのように、奪い取る者、不正な者、姦淫する者でないこと、あるいは、この取税人 のようでないことを感謝します。
私は週に二度断食し、自分が得ているすべてのものから、十分の一を献げております。』
一方、取税人は遠く離れて立ち、目を天に向けようともせず、自分の胸をたたいて言った。『神様、罪人の私をあわれんでください。』
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が、義と認められて家に帰ったのは、あのパリサイ人ではなく、この人です。だれでも自分を高くする者は低くされ、自分を低くする者は高くされるのです。」

이 두 사람 중에서 구원의 확신이 누가 있겠습니까. 예, 바리새인입니다. 그는 분명히 구원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의 입에서 감사가 넘쳐납니다. 그러면서 세리를 보고는 경멸을 합니다. 아마도 그는 생각했겠지요. 나는 구원을 받았지만 저 세리는 구원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쯧쯧쯧……

반면에 이 세리는 어떻습니까. 구원의 확신이 있었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당당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리, 어떻습니까. 성전 안으로도 제대로 못 들어왔습니다. 저기 멀리 서 있어요. 감히 하늘도 쳐다보지 못합니다.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교회 저기 바깥에 서서 십자가도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주여…주여…제가 죄인입니다…불쌍히 여기소서……하고 눈물만 흘렸을 것입니다. 그에게 구원의 확신이요? 아니요. 없었어요.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이 죄 많은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간절한 회개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를 물리치시고 이 세리의 기도를 기쁘게 받으셨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강한 구원의 확신을 가졌던 사람들, 대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 율법학자들, 그들이 했던 일들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의 교만이 하늘을 찌르더니 마침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던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구원의 확신, 누가 가장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을까요. 분명합니다.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 구원의 확신이요? 당연히 있겠지요. 내가 그렇게 문제를 일으키고 나쁜 일을 저질러도 나는 천국에 간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토록 당당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구원의 확신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진정한 구원의 확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주심으로 우리를 대속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확신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 어쩌면 잘못하면, 믿음의 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런 막무가내 식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 이는 마치 안전띠 하나 매고는, 이제 나는 괜찮다면서 속도 무시, 신호 무시, 다른 차량들 무시해가면서 운전하는 것, 그러면서 자기가 안전할 것이라고 바라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실제로 이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고 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다치는 것도 시간 문제지요. 자기만 다치나요? 자칫하면 애꿎은 다른 사람한테까지도 피해를 입히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확신이 아닙니다. 무모한 확신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구원의 확신이 진정한 확신인지, 아니면 무모한 확신인지,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호세아 6장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ホセア書 6章 3節
私たちは知ろう。主を知ることを切に追い求めよう。主は暁のように確かに現れ、大雨のように私たちのところに来られる。地を潤す、後の雨のように。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을 알자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알아야 하겠습니까.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예, 맞습니다. 그게 틀렸다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에는 다음과 갈이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からだを殺しても、たましいを殺せない者たちを恐れ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たましいもからだもゲヘナで滅ぼすことができる方を恐れなさ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처럼 하나님은 두려운 하나님이기도 하시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과 두려운 하나님이라는 이 두 사실이 모두 알아야지만 진정한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한 번 마음 속으로 한 사람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정말 이 사람은 절대로 천국에 못 갈 것이다……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더도 말고 딱 한 사람만 떠올려 보십시오. 어떠세요? 생각 나셨나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사랑의 하나님과 두려운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절대로 천국에 못 갈 것 같은 바로 그 사람이 우리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가게 되고, 그 영광스러운 뒷모습을 우리는 멀리서 지켜보게 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천국에 막 들어가려고 하는 그 사람을 뿌리치고 내가 먼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함께 천국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기를 소망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16장 2절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人には自分の行いがみな純粋に見える。しかし、主は人の霊の値打ちを量られる。

여러분, 우리 자신을 한 번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남들보다 의롭습니까? 우리가 우리 이웃보다 대단한가요? 설령 그렇게 생각된다 하더라도 오십보 백보, 아니요, 오십보 오십보입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나 자신이나 내가 제일 미워하는 사람이나 다 거기서 거기인 것입니다. 마지막 날 심판대 앞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내 과거에 대해서 하나하나 적힌 책이 읽혀진다면 그 앞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新しい戒めを与えます。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

서로 용서해주고 서로 사랑해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 예수님의 뜻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사랑의 하나님, 그리고 두려운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주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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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8회 새로운 삶
2019년 7월 7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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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장 28절~31절
“28.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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マタイの福音書 21章28節~31節
“ところで、あなたがたは、どう思いますか。ある人にふたりの息子がいた。その人は兄のところに来て、『きょう、ぶどう園に行って働いてくれ』と言った。
兄は答えて『行きます。お父さん』と言ったが、行かなかった。
それから、弟のところに来て、同じように言った。ところが、弟は答えて『行きたくありません』と言ったが、あとから悪かったと思って出かけて行った。
ふたりのうちどちらが、父の願ったとおりにしたのでしょう。」彼らは言った。「あとの者です。」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告げます。 取税人や遊女たちのほうが、あなたがたより先に神の国に入ってい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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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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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새로운 삶” 新しい人生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두 아들이 등장합니다. 개역개정 성경에는 맏아들과 둘째 아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사실 이 부분은 번역본에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번역본에는 한쪽이 맏아들이고 다른 한쪽이 동생이라고 되어 있는데 또 어떤 번역본에는 형과 동생이 뒤바뀐 경우도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어 성경을 보면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예전 신개역판은 현재 한글성경과 같은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만, 얼마 전에 새로 나온 신개역2017판에는 한글성경과는 뒤바뀐 순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보면 어느 쪽이 형이고 동생이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구분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오늘은 편의상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 성경을 기준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 말씀, 길이로 보면 4절 밖에 안 되는 말씀입니다만, 여기에 담긴 내용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그 중 한 가지 부분에 주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부분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이를 바탕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깨닫는 이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선 두 아들의 대답과 행동의 차이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하지요.

어느 날 아버지가 맏아들한테,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자 맏아들은 가겠다고 말은 했지만 결국 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둘째 아들, 아주 당돌합니다. 좀 있다 가겠습니다, 도 아닙니다. 가긴 가야 할 텐데 제가 좀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요…….라고 변명도 안 합니다. “싫습니다(行きたくありません)”라고 아주 단호하게 거절을 하지요.

친구가 부탁을 하는데 이를 거절할 때에도 좀 핑계를 대거나 아니면 좀 우회적으로 부드럽게 거절할 법도 한데,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부탁하는데도, “싫소이다” 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는 아무리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가 들어도 좀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딱 잘라서 거절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 말씀에 따르겠다고 대답은 했어요. 하지만 결국 가지는 않았다는 것이죠. 반면에 둘째 아들은 어땠냐 하면 아주 버르장머리 없게 거절을 하긴 했지만, 나중에 뉘우치고는 포도원에 가서 일을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우선 맏아들입니다.

아버지가 말씀을 하셨을 때, 이를 따르겠다고 대답을 해놓고는 결국 안 따랐습니다.

다음은 둘째 아들이지요.

역시 아버지가 말씀을 하셨을 때, 이를 거절한다고 대답해 놓고서는 결국 따랐습니다.

물론, 아버지가 가라고 했을 때, 예, 가겠습니다, 하고 갔다거나, 아니면 싫습니다, 하고 안 갔다거나 하면 이는 구분하기 쉽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이 두 아들의 대답과 행동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맏아들의 경우 포도원에 가라고 하신 아버지의 말씀에 대해서, 가겠다고 대답한 다음 결국 안 갔습니다. 자세히 보면 <가겠다>라는 ‘대답’과 <안 갔다>는 ‘행동’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말만 하고 안 간 것이지요.

반면에 둘째 아들의 경우를 보면, 처음에는 <안 가겠다>는 ‘대답’과 <갔다>는 ‘행동’ 사이에는 어떤 말이 하나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예, 잊어버리셨을 수도 있으니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1장 30절 말씀입니다.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それから、弟のところに来 て、同じように言った。ところが、弟は答えて『行きたくありません』と言ったが、あとから悪かったと思って(思い直し)出かけて行った。

그렇습니다. 맏아들의 경우에는 간다고 말만 해놓고는 대답과 안 갔다고 하는 행동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의 경우에는 안 가겠다는 대답과 갔다고 하는 행동 사이에 바로 이 ‘뉘우침’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주목해야 할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뉘우침>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이 마음이 바뀌어서, 변덕을 부려서……가 아닙니다. 이 <뉘우침>에는 중요한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담겨 있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는 후회이고, 다음은 회개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면 어떻습니까. 자랑스러우십니까. 내 인생 돌아보면 조금도 후회가 없습니까. 부끄러운 점이 없습니까. 글쎄요. 여러분은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후회되는 거요?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부끄러웠던 경험이요? 정말 많지요. 아마 뭐 그래도 지금 기억하는 것들은 전체 후회되는 일이나 부끄러운 일들 중 극히 일부일 것입니다. 까먹은 것도 많겠지요.

정말 기억이 안 나는 것 같다가도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나면 정말 참, 너무도 후회가 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아예 지워버리고 싶어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 저만 그래요? 모르겠어요. 여러분은 어떠신지 제가 한 분 한 분 여쭤볼 수는 없겠지만, 성경에 보면 역시 저처럼 그렇게 생각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창세기 12장 10절~2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기껏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주셨는데도, 잠깐 기근이 들었다고 해서 자기 멋대로 이집트로 갔다가는 하마터면 자기 아내를 빼앗길 뻔한 위기를 겪고 맙니다. 이는 남자로서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 왕은 어떻습니까. 사무엘하 11장을 보면 자신의 충신 우리아(ウリヤ)의 아내를 빼앗아서 자기의 아내로 삼고, 우리아는 전쟁터에서 고의로 죽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이 씻을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 성경에 너무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어떤 책입니까. 몇 천년 동안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대 베스트셀러 아닙니까. 전세계 사람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읽혀지는 책 속에 자신의 무용담이 아니라 부끄러운 것이 적혀 있다면 그 기분이 어떻겠어요. 제가 만약에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이나 예수님한테 부탁을 해서, 아무도 모르게 그 부분 좀 어떻게 빼주실 수 없느냐고 부탁했을 지도 모르지요.

어디 그뿐인가요. 신약에도 있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주님을 3년이나 따라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떠나자 곧바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0절 이후에 보면 형제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다른 제자들이 다 보는 앞에서 예수님한테 데려와서는, 나중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거든 우리 아들 좀 높은 자리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이것도 참 요한이나 야고보가 나중에 생각하면 부끄러울 수도 있는 노릇이지요. 아휴, 그 때 우리 엄마 좀 말릴 걸. 괜히 따라가가지고는 몇 백 년, 몇 천년 동안 창피를 당하고 있지요.

도마(トマス)는 어떻습니까. 그는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자, 그는 끝까지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하지요.

요한복음 20장 25절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そこで、ほかの弟子たちは彼に「私たちは主を見た」と言った。しかし、トマスは彼らに「私は、その手に釘の跡を見て、釘の跡に指を入れ、その脇腹 に手を入れてみなければ、決して信じません」と言った。

하지만 8일 뒤에 예수님께서 도마 앞에 나타나십니다. 그렇다고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본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니 안 믿을래야 안 믿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과거에 자기가 그런 고집을 부렸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마태는 어떻습니까. 그는 예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기 전은 세리였습니다. 세리라고 하는 것은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을 때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해가면서 동족의 피를 빨아먹던 매국노였습니다.

어쩌면 마태는 그와 같은 부끄러운 과거를 지우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도들은 괜찮았습니까? 부끄러운 점이 없었을까요? 오늘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지켰던 사도가 누구였을까요.

성경은 충격적인 한 구절을 남겨놓았습니다. 마가복음 14장 50절입니다.

마가복음 14장 50절,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皆は、イエスを見捨てて逃げてしまった。

참으로 기가 찰 노릇입니다. 예수님과 그렇게 오랫동안 지내왔으면서, 그렇게 은혜로운 말씀들을 수도 없이 들어왔으면서, 놀라운 기적들을 수도 없이 봐왔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쳐버렸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당연한 말입니다만 그 때는 아직 신약성경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이 장차 오시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를 다음과 같이 말씀해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しかし、助け主、すなわち、父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お遣わしになる聖霊は、あなたがたにすべてのことを教え、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話したすべてのことを思い起こさせてくださいます。


성령님이 오시면 그 때까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모든 것들이 생각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갈은 능력으로 인하여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서가 완성된 것입니다.

이러면 또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미리 말씀 드리겠습니다만, 지금도 그럼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시면 성경을 읽지 않아도 달달달달 외우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성경이 아직 없었기 때문에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씀을 우리 안에 머물게 해주셨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성경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펴서 말씀을 공부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말씀을 담아둘 수가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없으면 아무리 훌륭한 목사님이나 신학교 교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을 직접 따라다녔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위기가 닥치면 모든 것을 다 팽개치고, 예수님도 버려두고 도망쳐버리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더라도 정말 우리들처럼 부끄러운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보면 역시 당시 본인들의 행동을 후회하면서, 아 그때는 정말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한탄도 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거절을 하였으나, 후에 뉘우치고 아버님 말씀대로 포도원에 갔다고 기록합니다. 앞서 이 <뉘우침>에는 <후회>와 <회개>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지요.

그렇다면 후회와 회개는 무엇이 다를까요.

우리 이해하기 쉽게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두 사도를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다름아닌 베드로와 가룟 유다입니다.


제가 지금부터 드리는 말을 나중에 베드로 선생이 알게 된다면, 제게 좀 서운하다고 말씀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뭐 나중이고, 제 기준으로 본다면, 사도 베드로도 가룟 유다도 역시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배반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말했지요. 그리고 마태복음 26장 74절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26장 74절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するとペテロは、噓ならのろわれてもよいと誓い始め、「そんな人は知らない」と言った。すると、すぐに鶏が鳴いた。

그냥 모른다고 하는 게 아니라 저주하고 맹세까지 해가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잡아뗐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음 구절 마태복음 26장 75절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ペテロは、「鶏が鳴く前に、あなたは三度わたしを知らないと言います」と言われたイエスのことばを思い出した。そして、外に出て行って激しく泣いた。

그렇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미 베드로가 부인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3절~35절

“33.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5.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すると、ペテロがイエスに答えた。「たとえ皆があなたにつまずいても、私は決してつまずきません。」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あなたは今夜、鶏が鳴く前に三度わたしを知らないと言います。」
ペテロは言った。「たとえ、あなたと一緒に死ななければならないとしても、あなたを知らないなどとは決して申しません。」弟子たちはみな同じように言った。

이렇게 호언장담을 했던 베드로의 부인은, 장도 바뀌지 않은 똑 같은 마태복음 26장 70절부터 시작합니다. 이는 베드로가 부족해서 라기보다도, 사람이란 참 이처럼 연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뜻도 되겠지요.

흥미로운 점은 베드로가 부인할 것도 미리 말씀하셨던 것처럼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할 것이라는 점도 이 마태복음 26장 21절~25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베드로와 가룟 유다는 비슷한 점이 많이 있지요.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한 베드로가 그렇게 심히 통곡했다고 하니, 대단히 후회를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배반한 다음에 후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어떻게 됐을까요.

마태복음 27장 3절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そのころ、イエスを売ったユダはイエスが死刑に定められたのを知って後悔し、銀貨三十枚を祭司長たちと長老たちに返して、言った。

여기서 유다도 뉘우쳤다고 나옵니다만, 이는 회개가 아닌 후회일 뿐입니다. 그는 결국 어떻게 됩니까.

마태복음 27장 5절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そこで、彼は銀貨を神殿に投げ込んで立ち去った。そして出て行って首をつった。

사람이 후회를 하게 되면 나 자신이 참으로 싫어집니다. 후회함으로 인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이 싫어지고, 그리고 세상이 싫어집니다. 내가 그 때 왜 그랬을까, 하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도 그렇고, 예수님을 팔아버린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둘 다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후회를 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부터가 달랐습니다. 가룟 유다는 거기서 멈춰버렸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움 속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어땠습니까. 심히 통곡할 정도로 자신이 부끄러웠을 것이지만, 거기서 멈춰서지 않았습니다. 회개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주님 앞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후회에서 멈추면 주님 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회개를 하고 돌아온다면 주님은 언제든지 우리를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에 대한 말씀을 마치시고 질문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 질문내용이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마태복음 21장 31절 초반부입니다.

“31.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二人のうちのどちらが父の願ったとおりにしたでしょうか。

참으로 오묘한 질문이십니다. 보통 우리 같으면 맏아들과 둘째 아들 중 누가 더 착한 아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을 법도 한데, 그게 아니라,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라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착한 사람이요? 정말 착한 사람은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정말로 간 사람이겠지요. 그러나 굳이 예수님께서 그런 모범적인 사람을 예로 들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義人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

예, 그렇게 착한 사람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예 그런 무리한 말씀은 하지 않으신 것이지요.

그리고 두 번째 이유,

누가복음 5장 32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わたしが来たのは、正しい人を招くためではなく、罪人を招いて悔い改めさせるためです。」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람을 찾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한테 회개시키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뿐만이 아니지요.

누가복음 15장 7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それと同じように、一人の罪人が悔い改めるなら、悔い改める必要のない九十九人の正しい人のためよりも、大きな喜びが天にあるのです。

누가복음 15장 10절
“1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それと同じように、一人の罪人が悔い改めるなら、神の御使いたちの前には喜びがあるのです。」

죄인 한 사람의 회개가 하나님께 진정한 기쁨이 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시는 거입니다.

후회되는 것이 있습니까. 후회 하십시오. 하지만 거기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회개를 하고 주님 품으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너무 늦은 것 같으십니까. 아직은 괜찮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뜨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면 아직은 기회가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후회하고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시면 됩니다. 과거의 내 모습을 뉘우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오늘 지금 이 시간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뜻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 그것은 바로 그 기회는 영원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마태복음 24장 42절~44절
“42.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43.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です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あなたがたの主が来られるのがいつの日なのか、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ら。
次のことは知っておきなさい。泥棒が夜の何時に来るかを知っていたら、家の主人は目を覚ましているでしょうし、自分の家に穴を開けられることはないでしょう。
ですから、あなたがたも用心していなさい。人の子は思いがけない時に来るのです。

마가복음 13장 33절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気をつけて、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その時がいつなのか、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からです。


요한계시록 3장 3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だから、どのように受け、聞いたのか思い起こし、それを守り、悔い改めなさい。目を覚まさないなら、わたしは盗人のように来る。わたしがいつあなたのところに 来るか、あなたには決して分からない。

그 날은 반드시 옵니다. 심판의 날은 반드시 옵니다. 그 전에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과거를 더 이상 부끄러워할 것 없습니다. 주님이 모두 받아주십니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뉘우침, 진정한 회개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순종으로 나아가는 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28장 13절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自分の背きを隠す者は成功しない。告白して捨てる者はあわれみを受ける。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우리 모두 내가 지금까지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짐들을 주님 앞에 모두 내려놓고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함으로 말미암아 진정으로 순종하는 삶,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을 통하여 주님께 기쁨과 영광과 찬송을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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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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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7회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섬김
2019년 6월 3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1절~8절
“1.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ヨハネの福音書 12章1節~8節
“さて、イエスは過越の祭りの六日前にベタニアに来られた。そこには、イエスが死人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ラザロがいた。
人々はイエスのために、そこに夕食を用意した。マルタは給仕し、ラザロは、イエスとともに食卓に着いていた人たちの中にいた。
一方マリアは、純粋で非常に高価なナルドの香油を一リトラ取って、イエスの足に塗り、自分の髪でその足をぬぐった。家は香油の香りでいっぱいになった。
弟子の一人で、イエスを裏切ろうとしていたイスカリオテのユダが言った。
「どうして、この香油を三百デナリで売って、貧しい人々に施さなかったのか。」
彼がこう言ったのは、貧しい人々のことを心にかけていたからではなく、彼が盗人で、金入れを預かりながら、そこに入っているものを盗んでいたからであった。
イエスは言われた。「そのままさせておきなさい。マリアは、わたしの葬りの日のために、それを取っておいたのです。
貧しい人々は、いつもあなたがたと一緒にいますが、わたしはいつも一緒に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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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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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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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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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섬김” 主が喜ばれる奉仕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이 말씀, 어떤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 위에 기름을 붓는 내용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 중에서 누가복음에 대해서만은 배경이나 등장인물, 그리고 주제에 있어서 다른 기록과 다소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누가복음에는 7장 36절~50절까지에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도 역시 한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는,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는 장면이 나옵니다만, 누가복음에서는 다른 마태, 마가, 요한복음과 달리 그 장소가 바리새인 집이고 여인은 눈물을 흘리고 있으며, 여기서의 주제는 죄사함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어떤 신학자는 이와 같은 사건, 즉 여인이 예수님께 기름을 붓는 사건이 두 번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오늘은 사복음서 중에서도 특별히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의 기록을 비교해가면서 이 말씀에 담긴 주님의 참뜻을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마태복음부터 살펴볼까 합니다. 마태복음 26장입니다.

마태복음 26장 6절~13절
“6.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10.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さて、イエスがベタニアで、ツァラアトに冒された人シモンの家におられると、
ある女の人が、非常に高価な香油の入った小さな壺を持って、みもとにやって来た。そして、食卓に着いておられたイエスの頭に香油を注いだ。
弟子たちはこれを見て、憤慨して言った。「何のために、こんな無駄なことをするのか。
この香油なら高く売れて、貧しい人たちに施しができたのに。」
イエスはこれを知って彼らに言われた。「なぜこの人を困らせるのですか。わたしに良いことをしてくれました。
貧しい人々はいつもあなたがたと一緒にいます。しかし、わたしはいつも一緒に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
この人はこの香油をわたしのからだに注いで、わたしを埋葬する備えをしてくれたのです。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世界中どこでも、この福音が宣べ伝えられるところでは、この人がしたことも、この人の記念として語られます。」
그리고 마가복음도 보실까요? 마가복음은 14장입니다.

마가복음 14장 3절~9절
3.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さて、イエスがベタニアで、ツァラアトに冒された人シモンの家におられたときのことである。食事をしておられると、ある女の人が、純粋で非常に高価なナルド油の入った小さな壺を持って 来て、その壺を割り、イエスの頭に注いだ。
すると、何人かの者が憤慨して互いに言った。「何のために、香油をこんなに無駄にしたのか。
この香油なら、三百デナリ以上に売れて、貧しい人たちに施しができたのに。」そして、彼女を厳しく責めた。
すると、イエスは言われた。「彼女を、するままにさせておきなさい。なぜ困らせるのですか。わたしのために、良いことをしてくれたのです。
貧しい人々は、いつもあなたがたと一緒にいます。あなたがたは望むとき、いつでも彼らに良いことをしてあげられます。しかし、わたしは、いつもあなたがたと 一緒に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
彼女は、自分にできることをしたのです。埋葬に備えて、わたしのからだに、前もって香油を塗ってくれました。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世界中どこでも、福音が宣べ伝えられるところでは、この人がしたことも、この人の記念として語られます。」
그리고 오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2장이죠?

요한복음 12장 1절~8절
“1.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さて、イエスは過越の祭りの六日前にベタニアに来られた。そこには、イエスが死人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ラザロがいた。
人々はイエスのために、そこに夕食を用意した。マルタは給仕し、ラザロは、イエスとともに食卓に着いていた人たちの中にいた。
一方マリアは、純粋で非常に高価なナルドの香油を一リトラ取って、イエスの足に塗り、自分の髪でその足をぬぐった。家は香油の香りでいっぱいになった。
弟子の一人で、イエスを裏切ろうとしていたイスカリオテのユダが言った。
「どうして、この香油を三百デナリで売って、貧しい人々に施さなかったのか。」
彼がこう言ったのは、貧しい人々のことを心にかけていたからではなく、彼が盗人で、金入れを預かりながら、そこに入っているものを盗んでいたからであった。
イエスは言われた。「そのままさせておきなさい。マリアは、わたしの葬りの日のために、それを取っておいたのです。
貧しい人々は、いつもあなたがたと一緒にいますが、わたしはいつも一緒に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

아멘.

먼저 장소에 대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똑같이 대단히 흥미로운 말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가 어디냐 하면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나병환자라고 하면, 개역한글에서는 문둥병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이를 요즘 식으로 말씀 드리자면 한센병……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는 지금의 기준보다도 좀 더 넓은 의미의 질병, 예를 들어서 심각한 피부병도 당시에는 나병이라고 하는 범주에 포함되어 있었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당시 나병이라고 하면 역시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과 함께 살지는 못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머무르고 계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만약에 여전히 시몬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병에 걸려있는 상태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같은 곳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여기에는 그와 같은 내용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이 시몬이라는 사람은 과거에 나병에 걸렸다가 완치가 된 사람, 또는 더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에 의해 나음을 받은 사람일 수도 있다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참고로 누가복음 7장 40절에 보면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 이름이 <시몬>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역시 누가복음도 다른 복음서 내용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당시 시몬이라는 이름은 드물지 않았습니다. 유명한 사람으로서는 베드로도 시몬이라 이름이었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강제로 짊어진 사람 이름도 구레네 시몬이라고 했지요.

그리고 당시 바리새인이라고 하면 권위도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예전에 나병에 걸려있었다 하더라도, 바리새인인 사람을 가리켜서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라고 했다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이 바리새인 시몬과 나병환자 시몬은 동명이인일 아무래도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한편 오늘 말씀인 요한복음에서는 12장 1절에서 예전에 죽은 지 나흘이 지난 후에 무덤에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시몬의 집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도 안 맞지 않느냐 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자세히 보시면, <나사로의 집>이 아니라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고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나사로의 집이 아닌데도 왜 요한은 주인이 아닌 <나사로를 강조했을까요. 그 이유는 어렵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 바로 다음인 요한복음 12장 9절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9절
9.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すると、大勢のユダヤ人の群衆が、そこにイエスがおられると知って、やって来 た。イエスに会うためだけではなく、イエスが死人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ラザロを見るためでもあった。

그러니까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나사로를 죽은 지 4일만에 무덤에서 살려내셨다는 것은 말하자면 빅뉴스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를 살려내신 예수님은 물론이지만,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도 유명인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려고 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이 생각하기에는, 집주인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더욱 지명도가 있던 나사로의 이름을 빌려서, 당시 그 자리에 <나사로가 있었던 곳>이라고 하는 점을 강조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한 여인이 예수님께 기름을 부었다고 합니다. 그 기름에 대한 기록도 비교해볼까 합니다.


마태복음 26장 7절
7.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ある女の人が、非常に高価な香油の入った小さな壺を持って、みもとにやって来た。そして、食卓に着いておられたイエスの頭に香油を注いだ。

마가복음 14장 3절
3.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さて、イエスがベタニアで、ツァラアトに冒された人シモンの家におられたときのことである。食事をしておられると、ある女の人が、純粋で非常に高価なナルド油の入った小さな壺を持って 来て、その壺を割り、イエスの頭に注いだ。

요한복음 12장 3절
3.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一方マリアは、純粋で非常に高価なナルドの香油を一リトラ取って、イエスの足に塗り、自分の髪でその足をぬぐった。家は香油の香りでいっぱいになった。

흥미로운 것은 요한복음에서만은 이 여인,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마리아라고 하는데, 이는 다름아닌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의 누이였던 것이지요.

참고로 좀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 미리 한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향유……라고 하면 글쎄요, 뭐 요즘 말로 쉽게 하자면 향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만약에 여러분께서 어떤 분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갔는데, 거기서 이제 식사를 하려고 해요.

그런데 누군가가 갑자기 머리에 고급 향수를 부으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기분이 좋으세요? ㅎㅎ 오히려 깜짝 놀라겠지요. 그리고 밥 먹기 전에 온 몸에서 막 향수 냄새가 나요. 그러면 아무리 비싼 향수였다 하더라도, 그거 별로 좋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성경을 읽을 때 그대로 똑같이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편 23편 5절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23편 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私の敵をよそにあなたは私の前に食卓を整え頭に香油を注いでくださいます。私の杯はあふれています。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원수들 앞에서도 우리를 넉넉하게 대접해주신다는 말씀인데,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식사를 대접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머리에 기름을 부으셨다고 기록합니다. 당시에는 왕이나 귀족들이 식사 때 머리나 수염에 값진 향유를 발랐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식사 때 기름을 바르게 했다는 것은 그 손님을 왕이나 귀족처럼 귀하게 대접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매우 귀한 향유, 매우 값진 향유, 지극히 비싼 향유……라고 성경은 기록하는데, 이게 그러면 도대체 얼마나 값진 것이었을까 궁금해집니다.

이 값어치에 대해서 성경은 구체적으로 기록합니다. 마가복음 14장 5절과 오늘 말씀 요한복음 12장 5절에 보면 이 향유를 300 데나리온에 팔 수 있다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데나리온이라고 하는 화폐단위가 나옵니다만, 이는 당시 하급 군인이나 품꾼, 말하자면 노동자들의 하루 일당이었다고 합니다.

아직 최저시급이 한국이나 일본이 10,000원은 안 됩니다만, 계산하기 쉽게 일단 10,000원으로 계산한다면 하루 8시간이니 8만원, 여기에 300을 곱하면 2400만원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적게 잡아도 대략 2000만원 이상이 되는데, 오늘날 아무리 값진 향수라 하더라도 작은 한 병에 2000만원 이상 하는 향수는 많지 않겠지요.

물론 돈이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2000만원이 그리 놀라운 가격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여기에도 마리아의 집안 형편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각 성경에서 매우 귀하고 매우 값지고 지극히 값비싸다고 기록한 것은 적어도 이를 바친 마리아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8절에서는 이를 단순히 <제자들>이라고 하고, 마가복음 14장 4절에서는 <어떤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이 또한 요한복음 12장 4절에서는 분명히 꼭 집어서 ‘가룟 유다’라고 기록합니다.

다시 한번 이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2장 4절~6절입니다.

“4.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弟子の一人で、イエスを裏切ろうとしていたイスカリオテのユダが言った。
「どうして、この香油を三百デナリで売って、貧しい人々に施さなかったのか。」
彼がこう言ったのは、貧しい人々のことを心にかけていたからではなく、彼が盗人で、金入れを預かりながら、そこに入っているものを盗んでいたからであった。

유다는 말합니다. 그 향유를 300 데나리온으로 팔아서 가난한 사람한테 주지 그러느냐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보면 한술 더 떠서 마리아에게 화를 내가면서, 그걸 아깝게 왜 그렇게 허비하느냐 無駄なことをするのか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허비하다>? 마리아가 어떻게 했길래 허비하다, 즉 낭비한다고 화를 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섬긴 것을 두고 그것을 낭비라면서 화를 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유다가 의로워서요? 성경은 분명히 아니라고 합니다. 가룟 유다는 말하자면 자금관리를 하고 있었는데, 향유를 판 돈으로 헌금을 하면 그것을 자기가 훔치려 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나쁜 사람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4절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人の子は、自分について書かれているとおりに去って行きます。しかし、人の子を裏切るその人はわざわいです。そういう人は、生まれて来 なければよかったのです。」


요한복음 6장 70절~71절
“70.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わたしがあなたがた十二人を選んだのではありませんか。しかし、あなたがたのうちの一人は悪魔です。」
イエスはイスカリオテのシモンの子ユダのことを言われたのであった。このユダは十二人の一人であったが、イエスを裏切ろうとしていた。

이 가룟 유다의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십니다. 마태와 마가복음을 봅니다.

마태복음 26장 10절~13절
10.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イエスはこれを知って彼らに言われた。「なぜこの人を困らせるのですか。わたしに良いことをしてくれました。
貧しい人々はいつもあなたがたと一緒にいます。しかし、わたしはいつも一緒に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
この人はこの香油をわたしのからだに注いで、わたしを埋葬する備えをしてくれたのです。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世界中どこでも、この福音が宣べ伝えられるところでは、この人がしたことも、この人の記念として語られます。」

마가복음 14장 6절~9절
6.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すると、イエスは言われた。「彼女を、するままにさせておきなさい。なぜ困らせるのですか。わたしのために、良いことをしてくれたのです。
貧しい人々は、いつもあなたがたと一緒にいます。あなたがたは望むとき、いつでも彼らに良いことをしてあげられます。しかし、わたしは、いつもあなたがたと 一緒に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
彼女は、自分にできることをしたのです。埋葬に備えて、わたしのからだに、前もって香油を塗ってくれました。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世界中どこでも、福音が宣べ伝えられるところでは、この人がしたことも、この人の記念として語られます。」

불만을 품었던 것은 가룟 유다와 달리 예수님께서는 이 마리아의 섬김을 대단히 기쁘게 받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좀 본문을 비교하느라고 시간이 좀 오래 걸렸습니다만, 이것이 오늘 말씀에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이제 지금까지 말씀 드렸던 내용을 잘 기억하시고 생각해보시기 바라겠습니다.

이 사건의 특징은 어떤 부분이 있을까요.


오늘 내용의 등장인물은 예수님과 마리아, 그리고 가룟 유다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 가장 귀한 것을 자진해서 예수님께 바쳤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선 주목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지폐가 없으니까 모두 다 동전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자들은 성전에 가서 헌금을 할 때에는 동전이 든 항아리를 헌금함에 쏟아 넣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 동전이니까 소리가 나겠지요? 돈을 많이 넣으면 아마도 와르르르르 하는 큰 소리가 주변에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쳐다보고 와~ 대단하다~ 라고 했겠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나마 그 동전을 작은 돈으로 환전을 해서, 요즘 식으로 한다면 500원짜리나 100원짜리를 10원짜리 5원짜리로 바꾸어서 개수를 늘린 다음에 와르르르르 하고 넣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 때 이 사람 표정은 어땠겠습니까. 목에 힘을 주고 자랑스럽다는 듯이 주위를 살펴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참 유치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마리아는 어떻습니까. 그렇게 귀한 예물을 드린 다음에도 겸손하게 가장 낮은 곳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쩌면 그 값비싼 향유가 아닌, 그렇게 귀한 예물을 드리고도 겸손하게 섬기는 그 모습을 더욱 기쁘게 받으셨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더 주목해주셨으면 좋을 부분이 있습니다. 자, 드디어 오늘 문제가 나갑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오늘 본문 말씀 중에서 빨간 줄을 긋는다고 한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디에 그으시겠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시간이 좀 됐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오늘 본문 말씀 읽어볼까요? 자, 읽어보시면서 어디에 빨간 줄을 그을까 하고 생각을 하시면서 읽어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요한복음 12장 1절~8절
“1.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さて、イエスは過越の祭りの六日前にベタニアに来られた。そこには、イエスが死人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ラザロがいた。
人々はイエスのために、そこに夕食を用意した。マルタは給仕し、ラザロは、イエスとともに食卓に着いていた人たちの中にいた。
一方マリアは、純粋で非常に高価なナルドの香油を一リトラ取って、イエスの足に塗り、自分の髪でその足をぬぐった。家は香油の香りでいっぱいになった。
弟子の一人で、イエスを裏切ろうとしていたイスカリオテのユダが言った。
「どうして、この香油を三百デナリで売って、貧しい人々に施さなかったのか。」
彼がこう言ったのは、貧しい人々のことを心にかけていたからではなく、彼が盗人で、金入れを預かりながら、そこに入っているものを盗んでいたからであった。
イエスは言われた。「そのままさせておきなさい。マリアは、わたしの葬りの日のために、それを取っておいたのです。
貧しい人々は、いつもあなたがたと一緒にいますが、わたしはいつも一緒に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

예, 빨간 줄을 그으셨나요? 물론 여기에는 정답이 하나라고 할 수 없겠지요. 사실 성경은 전체를 모두 빨간 줄로 그을만한 책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특별히 주목해주셨으면 하는 곳은, 요한복음 12장 3절 마지막 부분입니다.

요한복음 12장 3절 마지막 부분.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家は香油の香りでいっぱいになった。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싶다면, 어떻게 섬겨야 하겠습니까. 조금 극단적인 말씀을 드려볼까요? 방음이 완벽하지 않은 아파트에서 한밤중에 큰 소리로 찬양을 부르고 통성기도를 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까.

우리 한 번 분명히 알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의 두 번째 문제 나가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 말들은 누가 한 말일까요.

먼저 누군가가 예수님께 다음과 갈이 소리칩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私はあなたがどなたなのか知っています。神の聖者です。

그리고 다음에는 누군가가 사도 바울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この人たちは、いと高き神のしもべたちで、救いの道をあなたがたに宣べ伝えています」


이 말을 한 사람들은 누굴까요. 정답은? 예, 마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라는 사실을 못 알아보는 것은 영적인 눈이 어두웠던 인간들 뿐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제사장 아들들이 보니까 사도 바울이 마귀 사탄을 쫓아내고 그럽니다. 그렇다면 어디 우리도 한 번 해보자 해서 흉내를 냈더니, 마귀가 뭐라고 했겠습니까.

사도행전 19장 15절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すると、悪霊が彼らに答えた。「イエスのことは知っているし、パウロのこともよく知っている。しかし、おまえたちは何者だ。」

마귀들은 예수님도 알고, 하물며 주님의 일을 하는 바울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마귀들이라 하더라도 예수님과 예수님의 능력으로 마귀들을 물리치는 사도 바울을 대항할래야 대항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큰 소리로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을 주님께서 기쁘게 받으십니까? 아닙니다. 예수님도 그렇고 바울도 그렇고 엄히 꾸짖어서 물리쳤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한다면서 시도 때도 없이 큰 소리로 할렐루야를 외쳐대고, 예를 들어 예배 때 주위에 대해서는 신경을 안 쓰고 갑자기 큰 소리로 찬양을 하고 그러면 그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는 분명 문제가 있는 일이지요.

마리아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주님을 섬길 때, 그 집에는 향유 냄새가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을 섬기는 데에 꼭 비싼 향유만 있어야 하나요?


우리는 종종 “시간은 돈이다”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진정으로 귀한 것이 어느 쪽이라는 것인가요? 시간이 더 중요하다는 것인가요? 아니면 돈이 더 중요하다는 것인가요.

이 말은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돈>만큼 중요하다. 즉, <시간>의 중요성을 <돈>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고 있는 말이기 때문에, 이 말대로라고 한다면 <돈>이 <시간>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인가요?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시간으로 돈을 살 수 있습니다. 1시간이라고 하는 <시간> 속에서 <돈>을 얻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100만원이든 1000만원이든 간에 아무리 돈을 쌓는다 하더라도, 돈으로는, 이미 지나간 1분 1초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꼭 돈이 있어야만 해요?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리 돈이 없더라도, 이처럼 돈보다 더 귀한 시간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시간으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주님을 섬길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돈보다도 더 귀한 우리의 육신이 있습니다. 이 육신으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주님을 섬길 수가 있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돈보다도 귀한 우리의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주님께 드림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얼마든지 주님을 섬길 수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섬김>을 실천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 내가 가진 가장 값진 것으로 가장 낮은 곳에서 주님을 묵묵히 섬길 때, 우리 믿음의 향유, 향기로운 믿음의 향기는 온 집에 가득해지고, 온 직장에 가득해지고, 온 학교에 가득해지고, 온 지역에 가득해지고, 온 나라에 가득해질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우리 삶 속에서 주님께 향기로운 섬김을 드림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 가득 채우시는 촉북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188회 새로운 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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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6회 땅 끝으로 향하는 믿음
2019년 6월 2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使徒の働き 1章8節
“しかし、聖霊があなたがたの上に臨むとき、あなたがたは力 を受けます。そして、エルサレム、ユダヤとサマリアの全土、さらに地の果てまで、わたしの証人とな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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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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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땅 끝으로 향하는 믿음” 地の果てへと向かう信仰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이 있는 사도행전은 신약성경 중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제외한 대부분의 신약성경은 서신, 즉 편지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에는 창세기나 출애굽기, 사사기, 열왕기 등을 비롯하여 좀 스토리가 있는 책들이 많기 때문에 그나마 덜 지루한 면이 있습니다만, 신약은 대부분이 그와 같은 편지 형식이기 때문에 좀 읽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복음서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스토리가 있는, 신학적으로는 신약에서 유일한 역사서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사도행전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지요. 만약에 사도행전이 없었더라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복음이 어떻게 전파되기 시작하였는지를 우리는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이 있는 덕분에 말씀 전파, 복음 전파의 시작을, 그리고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쓴 저자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합니다만, 대체적으로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가 사도행전 저자라고 하는 견해가 많은 것 같습니다.

사복음서 중에서 사실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고 하는 기록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있습니다만, 그런데 사실 좀 찝찝한 게 성경을 자세히 보시면 그 부분,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고 하는 그 부분이 괄호 안에 적혀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현재 성경은 원본이 발견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은 모두 다 사본을 바탕으로 번역이 된 책들입니다. 그런데 이 괄호 안에 적혀 있다는 것은 어떤 사본에는 이 부분이 있는데, 또 어떤 사본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는 “하늘에 오르사” 天に昇り 라는 부분이 있습니다만, 사도신경은 성경 본문에 나오는 기록이 아닙니다. 오랜 교회 역사 속에서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완성된 귀한 신앙고백이긴 합니다만 성경에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영화를 보면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이 아니라 점점점점 눈앞에서 사라지는 식으로 묘사한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모습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번 볼까요?

사도행전 1장 8절~11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しかし、聖霊があなたがたの上に臨むとき、あなたがたは力 を受けます。そして、エルサレム、ユダヤとサマリアの全土、さらに地の果てまで、わたしの証人となります。」
こう言ってから、イエスは使徒たちが見ている間に上げられた。そして雲がイエスを包み、彼らの目には見えなくなった。
イエスが上って行かれるとき、使徒たちは天を見つめていた。すると見よ、白い衣を着た二人の人が、彼らのそばに立っていた。
そしてこう言った。「ガリラヤの人たち、どうして天を見上 げて立っているのですか。あなたがたを離れて天に上げられたこのイエスは、天に上って行くのをあなたがたが見たのと同じ有様で、またおいでになります。」

정말 참으로 생생 活き活き 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괄호도 없지요. 이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려지셨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인생에 있어서 마지막 말을 남기는 것을 “유언”이라고 합니다. 이는 일반적인 그런 말들과는 다르지요. 법적으로도 적법한 절차에 맞게 작성된 유언장은 대단히 큰 효력을 가집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말씀하신 것은 또 다른 유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말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말씀을 하셨을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두 구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마가복음부터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それから、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福音を宣べ伝えなさい。

그리고 오늘 본문말씀,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しかし、聖霊があなたがたの上に臨むとき、あなたがたは力 を受けます。そして、エルサレム、ユダヤとサマリアの全土、さらに地の果てまで、わたしの証人となります。」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남겨놓으신 마지막 말씀이셨습니다. 그만큼 이 말씀에 담긴 내용이 무겁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오늘은 이 말씀에 담긴 진정한 뜻을 깨닫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믿음과 말씀과 행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기쁨과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살펴본 마가복음 16장 15절에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인 사도행전 1장 8절에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エルサレム、ユダヤとサマリアの全土、さらに地の果てまで”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우리는 이와 갈은 말씀을 접할 때 보면, 그래, 여기저기 다니면서 전도하라는 말씀이겠지……라고 쉽게 넘어가버릴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사실이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이스라엘 민족은 말하자면 유대교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유대교는 이방인한테 전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선택 받은 이스라엘 민족만의 특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과 이방인들을 철저하게 구분하였고, 이방인들과는 교류를 일체 하지 않았으며, 하물며 말도 하지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 ,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エルサレム、ユダヤとサマリアの全土、さらに地の果てまで”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는 제 추측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위해 전도자를 세우셨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사도 바울입니다.

주님은 바울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しかし、主はアナニアに言われた。「行きなさい。あの人はわたしの名を、異邦人、王たち、イスラエルの子らの前に運ぶ、わたしの選びの器です。

이 사명은 바울 자신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사도행전 13장 47절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主が私たちに、こう命じておられるからです。『わたしはあなたを異邦人の光とし、地の果てにまで救いをもたらす者とする。』」

이렇게 해서 이제 복음이 이스라엘 뿐만이 아니라 전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동안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지 않았던 복음이 왜 갑자기 이 시점에 전파되기 시작했던 것일까요. 왜 주님께서는 바로 지금 이 시기에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고 계셨던 것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이제 신앙이 완성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구약시대 때의 신앙은, 사람의 아기로 본다면 태어나기 전인 뱃속에 있는 아기입니다. 아기가 뱃속에 있다면 예정된 기일까지는 반드시 배 안에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너무 일찍 태어난다고 하면 이는 큰 일이 날 수가 있습니다. 아직 미완성인 상태이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때가 차면 어떻습니까. 이제는 반대로 아이가 태어나야 할 날짜가 많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안 태어나요. 이것도 큰 문제이지요. 아이는 예정된 시기에 반드시 출산해야지만 산모도 아이도 건강을 유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에 있어서는 언제가 완성일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모든 죄를 해결하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끝인가요? 아닙니다.

성령님이 오셔야 합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제 성령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신앙은 비로소 완성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인 성경도 완성 되었습니다. 어떤 악한 세력들, 또는 무지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들먹이며 예수님을 들먹이며, 선지자를 들먹이며 성경 외에 다른 복음을 말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거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7절~8절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ほかの福音といっても、もう一つ別に福音があ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あなたがたを動揺させて、キリストの福音を変えてしまおうとする者たちがいるだけです。
しかし、私たちであれ天の御使いであれ、もし私たちがあなたがたに宣べ伝えた福音に反することを、福音として宣べ伝えるなら、そのような者はのろわれるべきです。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자기를 무슨 하나님이 보낸 사도다 예수님이 보낸 사도다 라고 하면서 성경을 부정하고 자신의 생각을 주입시키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3절~15절
“13.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14.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こういう者たちは偽使徒、人を欺く働き人であり、キリストの使徒に変装しているのです。
しかし、驚くには及びません。サタンでさえ光の御使いに変装します。
ですから、サタンのしもべどもが義のしもべに変装したとしても、大したことではありません。彼らの最後は、その行いにふさわしいものとなるでしょう。


이미 우리가 받은 이 성경 외에 더 이상의 복음은 없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 말씀이 완전하고도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복음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께서 오심으로 인하여 이제 신앙은 완성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제 복음이 이스라엘을 넘어 이방인들에게로 전파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놀라운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21세기를 살아가는, 육신적으로는 이방인인 우리까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일본의 어떤 텔레비전을 보면 한 연예인의 조상들을 하나하나 찾아나가면서 그 동안 본인도 몰랐던 자기 가문의 역사를 알게 되는 그런 방송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수 있게 된 그 믿음의 족보를 하나하나 거슬러 올라가면, 어쩌면 2천년 전 예수님의 제자 중 누군가, 또는 바울한테까지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여 이방인들에게 말씀이 전해지고 몇 천 년 뒤에 바로 우리한테까지 그 복음의 계보가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50년 전인 1969년 7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명언이 탄생됩니다. 그 말을 했던 주인공은 1969년 7월 20일, 세계에서 최초로 달 위에 발을 내딛는 닐 암스트롱이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달 위에 발자국을 남긴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한 인간에게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거대한 도약이다”

これは一人の人間にとっては小さな一歩だが、人類にとっては偉大な飛躍である。

우리에게 복음이 전달되기까지는 예수님 당시 누군가로부터 시작이 있었을 것입니다. 수 천년 동안 그 줄기는 위기를 만났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절망과 좌절을 느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족보는 몇 천년 동안 끊임없이 이어지고, 마침내 나한테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지금까지 수 천 년에 걸친 위대한 신앙의 발걸음이 이어져 왔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 이 신앙의 줄기를 우리 대에서 끊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는 계속 이어져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상상 속의 족보가 아니라 믿음의 핏줄, 신앙의 핏줄인 것입니다. 이것이 끊기는 순간, 우리는 우리 만이 아닌 우리를 통해서 복음을 전해 받았어야 할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모르는 채 살아가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믿음의 발걸음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의 발걸음은 계속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긴장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 다음 주부터 특별전도주간입니다. 다음 주일에는 반드시 한 사람당 두 사람 이상을 데리고 오시기 바랍니다……뭐 그런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아니에요. ㅎㅎ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여러 발걸음 중 하나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내딛는 발걸음은 어디로 향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エルサレム、ユダヤとサマリアの全土、さらに地の果てまで” 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온 천하는 어디고 땅 끝은 어디입니까. 지금 당장 전도지를 들고 나가서 무작정 복음을 전하고 그래야만 하는 것인가요?

온 천하에 다니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물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늘어나고 교회가 늘어나고 하는 것도 되겠지요. 하지만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땅을 확장한다고 하면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단순히 마구잡이로 땅을 많이 산다면 그것만으로 확장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 일단 땅은 땅이라 하더라도 쓸모가 있는 땅이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리 넓은 땅이라고는 하나 쓸모가 없다면 이는 있으나 마나 일 것입니다.

쓸모 없는 땅, 예를 들어서 잡초로 우거져 있거나 돌밭 가시나무들로 가득 찬 땅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잡초를 뽑아내고 돌이나 가시나무들을 걷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흙을 갈아서 생산성 있는 땅으로 만드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어디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누가복음 17장 20절~21절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パリサイ人たちが、神の国はいつ来るのかと尋ねたとき、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神の国は、目に見える形で来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
『見よ、ここだ』とか、『あそこだ』とか言えるよう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見なさい。神の国はあなたがたのただ中にあるのです。」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잡초들, 큰 바위, 작은 돌멩이, 가시나무들을 모두 제거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황무지 땅, 아무도 돌보지 않았던 땅들을 주님을 위한 옥토로 가꾸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아까 말씀 드렸던 전도를 열심히 하면 되는 건가요?

한국 교회를 보면 전도를 열심히 해야 한다, 한 번 전도 해서 오지 않으면 몇 번씩 가서라도 꼭 교회에 데려와야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많이 데려오면 전도왕이 되어서 상도 준다……뭐 그런 말들을 합니다만, 솔직히 성경 어디를 보더라도 복음을 안 받아들이는 사람한테 몇 번씩이나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라는 기록이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기도 하고, 또는 개인한테 전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특히 개인한테 반복해서 억지로 전도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까운 사람이라면 한 두 번 말씀을 전하고, 그리고 우리 삶 속에서, 참된 신앙을 보여주는 것, 참된 믿음을 보여주는 것, 참된 행함을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전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참된 믿음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이를 위해서는 먼저 내 마음 속에 있는 땅 끝에 발을 내디뎌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별로 안 해보셨습니까. 기도생활을 시작해보십시오.
성경을 아직 제대로 읽어보지 않으셨습니까.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지금까지 한 번도 전도지를 돌리거나 예수님을 전한 적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한 번 해보십시오.
물질이나 봉사로 교회를 위해 주님을 위해 섬겨본 적이 없으십니까. 이제 시작해 보십시오.
우리의 이웃을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해본 적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실천해 보십시오.

이것이야말로 믿음의 땅 끝으로 가는 첫 발걸음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넓히는 위대한 첫 발자국이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전도를 해도 교회에 안 나와요.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 사람이 아무리 나를 봐도 예수님을 믿고 싶어지지 않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정말로 그렇다면 이는 나 스스로가 먼저 주님 앞에 반성하고 먼저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 발걸음이 믿음의 땅끝으로 향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기 시작할 때, 내가 달라집니다. 그리고 내 주위가 달라집니다. 그러면 누가 먼저 알아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내 주위 사람들이 먼저 알아봅니다. 내 주위 사람들이 먼저 내 변화를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전도의 열매를 거둘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우리더러 땅 끝까지 가라고 말씀하실까요. 그 이유는 바로 그 곳에 주님이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축복이 바로 그 곳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믿음의 한 발자국, 신앙의 위대한 발자국을, 땅 끝을 향해서 내디딤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신 모든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187회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섬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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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6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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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6장 24절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ヨハネの福音書 16章24節
“今まで、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名によって何も求めたことがありません。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受けます。あなたがたの喜 びが満ちあふれ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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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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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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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응답을 받으려면” 答えを得るためには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기도하고 응답 받으신 적 있으십니까. 이러이러한 어려움을 겪었는데 기도를 드리니까 문제도 해결되고 건강도 회복되고 그러셨습니까.

예, 아멘.

사실 이 질문은 그냥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나가는 말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절실하지요. 오히려 교회에 오래 다녔는데, 기도를 해도 응답을 한 번도 안 받았다? 이건 정말 심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어려움이 닥칠 때 기도를 안 드린다고 하는 것은, 이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실까요?

요한복음 16장 24절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今まで、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名によって何も求めたことがありません。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受けます。あなたがたの喜 びが満ちあふれ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면 받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은혜로운 말씀이십니까.


그런데 말이에요. 자, 그렇다면 다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 기도하신 것, 100프로 모두 응답을 받으셨나요? 이것이 필요합니다. 저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해주세요. 저것을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를 드리면 모두 들어주셨나요?

이게 참 어렵습니다. 어떤 것은 들어주시기도 하는데, 어떤 것은 안 들어주시기도 하는 것 같아요.

어찌 보면 참 이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무엇이든 들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안 들어주시는 기도가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성경말씀에 대해서 궁금증이 생기면 사람 생각에 치우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성경에 있어서의 모든 정답은 우리 사람의 생각, 무슨 유명한 신학자나 목회자의 주장이나 해석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에 있다고 우리는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마태복음을 한 번 보실까요? 마태복음 6장 31절~33절입니다.

마태복음 6장 31절~33절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ですから、何を食べようか、何を飲もうか、何を着ようかと言って、心配しなくてよいのです。
これらのものはすべて、異邦人が切に求めているものです。あなたがたにこれらのものすべてが必要であることは、あなたがたの天の父が知っておられます。
まず神の国と神の義を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これらのものはすべて、それに加えて与えられます。

이 두 말씀을 모두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앞서 요한복음에 보니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우리가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보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덜어주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신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 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구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것만 알면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이것을 잘 모르겠어요.

오늘은 이 말씀의 참 뜻을 깨닫고 우리 기도의 응답을 모두 받을 수 있게 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느 회사에 한 직원이 있었습니다. 뭐, 편의상 제가 홍 가니까 홍 대리라고 하지요. 이 홍 대리는 본래부터 좀 사장님한테 불만이 많았습니다. 자기가 기안서를 올리면 결제를 잘 안 해줘요. 그런데 같은 회사 동료 직원인 김 대리는 결제만 올렸다 하면 곧바로 사인을 받아옵니다. 예산도 얼마나 많이 쓰는지 몰라요. 그래도 펑펑 회사에서 지원을 해줍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아하, 이 사장님이 차별을 하고 있구나. 사장님은 김대리만 편애를 하고 나는 미워하나 보다……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그냥 참고 있었더니, 안되겠어요. 한 번 제대로 사장님과 말을 해봐야겠어요. 그래서 이 홍 대리는 그 날도 평소처럼 결제서류를 딱 손에 들고서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사장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똑똑.”

“예, 들어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저 사장님, 오늘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음? 그래? 어서 말을 해보게나.”

그러자 이 홍 대리는 말을 합니다.
“사장님은 아무래도 직원들을 차별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장님은 놀라시죠.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우리 직원들을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데 그래?”

홍 대리는 말을 계속합니다.
“그렇다면 제 동료 김 대리는 맨날 결제를 올리면 사인을 해주시면서 제가 올리는 결제에는 언제나 사인을 안 해주십니다. 그 이유는 사장님이 김 대리만 편애하고 저는 미워하기 때문 아닌가요?”

그러자 사장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봐. 그건 자네가 모르고 하는 소리야. 우리 회사가 아무리 넉넉하다고는 하지만, 내가 미워하는 직원한테까지 매달 꼬박꼬박 월급을 주면서 데리고 있겠나? 내가 자네를 미워 한다구? 자네가 우리 회사에 지원하고 면접보고 그랬잖아? 그 때 누가 면접을 봤어? 나야. 그리고 누가 자네를 뽑았는지 알아? 내가 뽑았어. 물론 더욱 훌륭한 지원자들도 많았지, 하지만 나는 자네가 마음에 들었어. 그래서 내가 뽑은 거야. 그리고 지금 자네가 있는 부서가 얼마나 중요한 부서인지 알아? 내가 자네를 미워했다면 어떻게 그런 중요한 일을 자네한테 맡길 수가 있겠는가.”

이 말을 듣자, 우리의 홍 대리. 표정이 밝아집니다. 아, 그래. 사장님이 나를 차별한다는 것은 오해였구나. 사장님은 나도 아껴주시는구나. 김 대리만 사랑하시는 게 아니라 나도 사랑해주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니 얼마나 마음이 가벼워졌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제 환한 표정을 지으면서 손에 든 결제판을 내보입니다.

“사장님, 그렇다면 오늘은 제가 올리는 결제에 사인을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래? 그럼 어디 봅시다”

그런데 우리의 홍 대리가 내민 결제판을 본 사장님.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잠시 후 사장님이 고개를 들면서 한 말씀 합니다.

“자네, 이게 뭔가?”

그랬더니 자신감을 얻은 홍 대리. 당당하게 말을 합니다.

“지난 번에 김 대리가 사장님한테 결제를 받은 안건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사장님은 김 대리가 미국과 유럽 각지를 방문하도록 한 달 동안 출장을 허락하셨다는 말씀 들었습니다. 당연히 출장비에는 비행기표와 숙박비, 식비, 그리고 출장수당까지 나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사장님,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이봐, 홍 대리. 그러니까 이게 뭐냐니까.”

“예, 제주도 3박 4일 출장 계획서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이 내용이 무슨 뜻이냐 하는 걸세.”

우리의 홍대리는 당당하게 말합니다.

“모든 직원들을 차별하지 않고 공평하게 대하신다는 사장님은, 김 대리한테 한 달 동안 미국과 유럽 출장을 보내주실 정도로 통이 크신 분이시니, 저한테는 해외는 아니더라도 제주도 3박 4일 정도는 출장을 보내주실 것 같아서 계획을 짜보았습니다.”

“흠……. 그래? 그럼 제주도는 왜 가려고?”

그러자 우리의 홍 대리.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바다가 좀 보고 싶어서요.”

여러분께서 이 사장님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비로운 사장님이 가만히 있다가 말을 시작합니다.

“이보게 홍 대리. 잠깐 앉아보게. 자, 그리고 내 말을 좀 들어봐. 지난 번에 김 대리가 출장 기획서를 냈고 내가 사인을 했네. 그 내용은 자네가 말한 대로 미국과 유럽 각국을 한 달 동안 방문하고 오는 일일세. 물론 거기에는 항공비와 숙식비, 그리고 출장 수당까지도 지불되지. 하지만 그 기획서를 자네는 봤나? 우리 회사는 우리 회사 제품을 해외로 수출하려고 하고 있네. 그런데 김 대리는 미국과 유럽 각지에 있는 회사들을 검색해서 우리 회사와 제휴를 할 만한 곳을 물색하고, 계속 연락을 해오다가 이제 마지막으로 직접 방문을 해서 계약을 맺으러 간 걸세. 이 일은 사장인 내가 추진하라고 지시를 했고, 이 일이 성사된다면 우리 회사에 있어서 큰 이익이 되는 일이네. 요즘은 다들 경기가 어렵다고는 하지만, 다행히 우리 회사는 그 정도 지원해줄 여력은 있어. 내가 지시한 일이고 우리 회사를 위한 일이라면 미국과 유럽 한 달이 문제인가? 세계 일주 1년치라도 비용을 지출할 수 있단 말이네.

그런데 이봐. 홍 대리. 3박 4일로 제주도에 보내달라고? 물론 비용으로 본다면 미국과 유럽 한 달 간 출장비에 비해 몇 분의 일도 안 되는 돈이지. 그런데 말이야. 자네가 제주도에 가고 싶다는 이유가 바다를 보고 싶다고? 만약에, 자네가 바다를 보는 일이 사장인 나나 회사한테 도움이 된다면 3박 4일이 아니라 제주도에 아예 별장을 지어가지고는 돈 다 대주면서 원하는 만큼 살게 해줄 수도 있어. 그런데 그게 나나 회사에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건가?”


사장님 말씀은 계속됩니다.

“이봐. 자네 지난번에는 책상을 바꿔달라고 했지? 그래. 그러면 회사 돈을 들여서 자네 책상을 바꿔주어야 할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나? 또 그 전에는 차를 하나 뽑아달라고 했지? 이봐. 자네 집에서 전철 역까지 걸어서 5분 걸리지? 그리고 전철로 회사까지 20분이면 올 수 있지? 그런데 왜 내가 회사 돈을 써가면서 자네한테 차를 뽑아 주어야 하지? 이래도 내가 결제를 안 해 주는 게 자네를 차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이런 결제를 올릴 시간이 있으면, 나나 우리 회사의 경영방침을 좀 공부하도록 하게.”

이 이야기,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는 물론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는 아니고 제가 잠시 생각해본 짤막한 것입니다만, 우리는 분명 신앙적으로 볼 때 이런 면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라는 것이 있어요. 그래서 기도를 합니다. 새벽기도도 하고 철야기도도 하고, 또 때로는 금식기도를 하고 그렇습니다. 큰 소리로 기도도 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지요. 그렇게 해서 그러면 응답을 받았어요. 그러면 기쁘겠지요. 할렐루야. 감사하지요. 그런데, 그걸로 끝인가요?

여러분도 많은 간증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저는 이러이러한 어려움이 있었어요. 이러이러한 병에 걸렸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기도를 하고 응답을 받았어요. 할렐루야! 아멘! 감사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간증이었습니다.

예전에 제가 어느 기독교 방송에서 라디오에 나오신 분인데 이런 간증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예전에 양쪽 귀가 잘 안 들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 분이 어떻게 했냐 하면, 병원 침대에 앉아서 성경을 들고서는, 주기도문을 한 번 외울 때마다 성경 한 장씩 넘겼대요. 이 성경이 얼마나 두껍습니까. 한국 성경은 구약이 대략 1330페이지, 신약은 423페이지 정도가 되어요.

이걸 더하면 1753페이지. 종이 한 장씩으로 계산 한다면 단순히 2로 나누어서 876장 정도 되겠지요. 주기도문을 한 번 외우는데 얼마나 걸릴까. 제가 한 번 해보니까 빨리 하면 15초 정도면 하겠더라구요. 그런데 한 두 번도 아니고 800번 이상 외워야 하니까 나중에는 지치겠지요. 그래서 대략 평균을 잡아서 30초에 한 번, 1분에 두 번이라고 계산했습니다. 종이가 876장이었으니까 이를 1분에 2장 넘기게 되면 438분. 시간으로 바꾸면 7.3시간, 대략 7시간 12분입니다. 그 동안 잠시 쉬거나 화장실도 다녀오고 식사도 하고 그러면 더 길어졌겠지요. 그렇게 주기도문 한 번 외우고 넘기고 한 번 외우고 넘기고, 그렇게 요한계시록 끝까지 넘기고 나니까 갑자기 저기서 빛이 날라오더니 두 갈래로 나뉘어져서 귓속으로 휙 하고 들어 오더래요. 그러자 귀가 뚫리고 들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런 식의 간증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예. 감사하지요. 예, 신앙이 있으시고 더구나 방송에까지 나와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 정도이니 뭐, 거짓은 아니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신앙의 전부가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또 이런 분도 계십니다. 자기는 반드시 응답을 받아야 할 기도제목이 있대요. 자기는 하나님이 이 기도를 들어줄 때까지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분들 기도원에 가면 많이 계세요.

하지만 우리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과연 신앙적으로 맞는 일인가요? 지금 무슨 하나님과 기 싸움을 해서 이기자는 것인가요?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고집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를 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이지요. 믿음이 없으면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면 응답해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는 응답을 받고 누구는 응답을 못 받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에 맞느냐 안 맞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아무리 유창한 말투로 아무리 오랜 시간을 아무리 큰 소리로 기도를 드려보아도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 뜻에 맞지도 않는 기도라면 이는 헛수고입니다.

한편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 마음에 맞는다면, 하나님 뜻에 맞는다면 아는 무엇이든지 주님께서 곧바로 이루어주실 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욥기 41장 1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욥기 41장 11절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だれが、まずわたしに与えたというのか。わたしがそれに報いなければならないほどに。天の下にあるものはみな、わたしのものだ。

이사야 59장 1절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見よ。主の手が短くて救えないのではない。その耳が遠くて聞こえないのではない。

시편 94편 9절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耳を植えつけた方が聞かないだろうか。目を造った方が見ないだろうか。


시편 33편 13절~15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살피시는도다
그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살피시는 이로다”

主は天から目を注ぎ人の子らをすべてご覧になる。
御座が据えられた所から地に住むすべての者に目を留められる。
主は一人ひとりの心を形造りわざのすべてを読み取る方。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관심하시기 때문에 기도를 안 들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살펴보고 계실 정도로 우리들에게 대단히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능력이 부족해서 너무 멀리 계셔서, 돈이 부족해서 안 들어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온 천하가 주님의 것입니다. 무엇이 부족하시겠습니까. 다만, 우리가 하나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그저 기도만 드리고 있기 때문에 응답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 마음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에 하나님 마음이 적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믿음만 있고 말씀이 없다면 이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자동차로 예를 들어봅니다. 믿음은 자동차를 뜻하지요. 말씀은 기름입니다. 아무리 자동차가 좋아도 기름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지요. 우리 믿음을 말씀으로 가득 채워야 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반대로, 말씀만 있고 믿음이 없으면 곤란합니다. 가끔 보면 신앙이 없는 상태에서 성경을 연구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런 분들을 보면 자꾸만 성경을 인간적으로 해석하려고 해요.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이를 자기 생각대로만 자기 지식과 경험대로만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아요.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고 애기하거나, 사도 바울이 다메섹을 향할 때 예수님을 만난 것도 당시 그 지역에는 천둥이 많이 일어났는데, 이 때도 천둥 때문에 바울이 헛것을 본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동차는 없고 기름만 있으면 이것도 안 되는 것처럼 믿음은 없고 말씀만 있어도 안 되는 것입니다. 믿음과 말씀은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제 믿음이라고 하는 좋은 차에 말씀이라고 하는 기름을 꽉 채웠어요. 하지만 아무리 좋은 차에 비싼 기름을 가득 채웠다고 해도 움직이지 않는 차는 쓸모가 없습니다. 움직이는 것, 이것이 바로 행함인 것이지요.

야고보서 2장 17절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同じように、信仰も行いが伴わないなら、それだけでは死んだものです。

움직이지 않는 차가 고장 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도 역시 죽은 것입니다.

자, 이제 좋은 차에 기름을 가득 채웠습니다. 본격적으로 운전을 하려고 해요. 아이구, 그런데 이걸 어쩌면 좋겠습니까. 중요한 것이 빠졌습니다. 무엇이 빠졌습니까. 그렇습니다. 열쇠가 없어요. 차도 있고 기름도 채웠는데 열쇠가 없으니 움직이려고 해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열쇠가 무엇입니까. 성경을 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절~3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たとえ私が人の異言や御使いの異言で話しても、愛がなければ、騒がしいどらや、うるさいシンバルと同じです。
たとえ私が預言の賜物を持ち、あらゆる奥義とあらゆる知識に通じていても、たとえ山を動かすほどの完全な信仰を持っていても、愛がないなら、私は無に等しいのです。
たとえ私が持っている物のすべてを分け与えても、たとえ私のからだを引き渡して誇ることになっても、愛がなければ、何の役にも立ちません。

고린도전서 13장 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こういうわけで、いつまでも残るのは信仰と希望と愛、これら三つです。その中で一番すぐれているのは愛です。

그렇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성경에 보면 응답 받는 기도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는 바로 그 기도에 <사랑>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말씀과 행함은 반드시 중요하지만 그 안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이는 휴지조각이요 그야말로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이 운전을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요즘도 뉴스에 보면 끔찍한 교통사고 소식들이 많이 들려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합니까.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많다고 하는 분들, 성경을 많이 공부했다고 하는 분들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습니까.

그런 분들을 보면 공부도 많이 합니다. 기도도 많이 합니다. 봉사도 많이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그 기도에 없기 때문에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면 이런 분들을 보면 남들한테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너, 요즘 기도 안 하지? 기도 많이 해. 어. 누구누구, 금식 좀 해야 되겠어. 너 믿음이 좀 부족한 것 같애……”

아니, 자기가 무슨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이런 말을 남들한테 합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피해의식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어떤 생각이 들게 되겠습니까. 아무런 응답도 못 받는데 왜 나만 이렇게 힘들게 기도하고 봉사해야만 하나……라는 피해의식이 자리잡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주지 못할망정 상처를 주어서 되겠습니까. 이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나님 사람과 이웃 사랑이 너무나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살펴본 말씀 중 세 가지를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6장 24절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今まで、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名によって何も求めたことがありません。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受けます。あなたがたの喜 びが満ちあふれ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마태복음 6장 33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まず神の国と神の義を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これらのものはすべて、それに加えて与えられます。

고린도전서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こういうわけで、いつまでも残るのは信仰と希望と愛、これら三つです。その中で一番すぐれているのは愛です。

우리는 이제 믿음이라는 자동차에 말씀이라는 기름을 가득 채우고, 사랑이라는 열쇠로 엔진을 걸어서 힘차게 주님의 일을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사랑을 갖고 주님의 마음과 주님의 나라를 생각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구할 때 믿음과 말씀과 행함 속에서 모든 기도에 응답을 받고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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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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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4회 생명을 차지하는 믿음
2019년 6월 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2장 9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創世記 2章9節
“神である主は、その土地に、見るからに好ましく、食べるのに良いすべての木を、そして、園の中央にいのちの木を、また善悪の知識の木を生えさせ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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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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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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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생명을 차지하는 믿음” いのちを勝ち取る信仰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자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만드시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창조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2장 9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創世記2章9節
"
神である主は、その土地に、見るからに好ましく、食べるのに良いすべての木を、そして、園の中央にいのちの木を、また善悪の知識の木を生えさせた。"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장 16절~17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創世記2章16節~17節
"
神である主は人に命じられた。「あなたは園のどの木からでも思いのまま食べてよい。
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木から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이 말씀은 참으로 우리에게 큰 의문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껏 사람을 위해 그 아름다운 동산을 창조하셨다는데, 그렇다면 아름답고 먹기 좋은 열매만 나게 하는 나무만 만들어 놓으셨으면 좋았을 것을, 왜 굳이 먹으면 안 되는, 아니, 그냥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까지 만드셨을까, 하는 의문을 안 가질래야 안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이 엄중한 명령을 어김으로 인하여, 그들은 타락하게 되고 결국 우리까지도 이렇게 죄 속에서 허덕이게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무런 근심 걱정 없는 낙원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근심걱정에 직면할 때마다, 아이, 참 왜 그 때 아담과 하와는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저질러가지고는 우리까지도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래, 그것보다도 하나님이 괜히 쓸데없는 것을 만들어놓으셔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게 된 건 아닌가.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런 나무를 만들어놓지 않으셨다면 아담과 하와가 그런 죄를 지을 일도 없었을 것이요, 우리도 이처럼 고생을 하면서 살아갈 일도 없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 아마도 저만 해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 의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절대 먹어서는 안 되는 나무를 만들어놓으셨을까요. 천지를 창조하고 난 다음에 시간이 좀 남아서요? 아니면 에덴을 다 만들고 난 다음, 아직 재료가 좀 남아서, 그냥 버리기에는 아까워서 그런 끔찍한 나무를 만들어 놓으신 것일까요?


저는 예전에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이건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덫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덫을 설치해 놓으시고, 만에 하나라도 아담과 하와가 명을 어기고 이 열매를 따먹는 날에는 저주를 내리기 위해서 마련해 놓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주장,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처음에는 이 주장에 문제가 전혀 없을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렇잖아요? 이 나무는 마귀가 심어놓은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친히 심어놓으신 것입니다. 우연히 생긴 것도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 나무에 대해서 아담에게 경고를 하실 정도로 이 나무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두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나무는 아담과 하와를 위한 덫,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을 어길 수 있도록 만들어 놓으신 덫이라고 이해하는 데에 전혀 부자연스러운 점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요? 예,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하나님이, 그와 같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위해 덫을 놓으셨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덫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덫을 놓는 목적이라고 한다면 예를 들어서 사냥꾼이 덫을 놓을 경우, 이는 사냥감이 덫에 걸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요. 그렇다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사망에 이르는 나무를 심어 놓으신 이유가, 아담과 하와를 잡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었다면 이는 보통 일이 아닙니다.


사냥꾼은 덫을 설치해놓고 사냥감이 걸리기를 기대하면서 기다리는 법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사망에 이르는 나무를 심어 놓으시고, 아담이나 하와가 그것을 먹기만을 호시탐탐 기다리고 계셨다? 요놈, 언제 먹는지 한 번 보자. 먹기만 해봐라. 내가 아주 끔찍한 저주를 퍼부어줄 테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셨다는 건가요?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이는 공포의 하나님이지 무슨 사랑의 하나님이십니까.

이렇게 되면 성경의 앞뒤가 맞지 않게 되고 맙니다. 우리는 이 점을 오해해서는 곤란하게 됩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저주 받기를 원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주? 아니요, 오히려 칭찬 받기를 바라고 계셨던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해주시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인내로 인한 순종”이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인내”에 대해서 많은 기록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4절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ヤコブの手紙 1章4節
その忍耐を完全に働かせ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は何一つ欠けたところのない、成熟した、完全な者となります。

누가복음 21장 19절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あなたがたは、忍耐することによって自分のいのちを勝ち取りなさい。


베드로후서 1장 5절~7절
“5.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第二ペテロの手紙 1章5節~7節
だからこそ、あなたがたはあらゆる熱意を傾けて、信仰には徳を、徳には知識を、
知識には自制を、自制には忍耐を、忍耐には敬虔を、
敬虔には兄弟愛を、兄弟愛には愛を加えなさい。

이처럼 인내에 대한 기록이 많은 이유는 믿음에 있어서 인내가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인내로 인한 순종으로 칭찬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단순히 나쁜 일을 안 하면 아, 저 사람은 인내심이 강하고 절제를 잘 한다고 칭찬을 받을까요?

예를 들어서 “낭비”를 안 한다고 칭찬을 듣는 사람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 사람은 참 낭비를 안 해. 대단한 사람이야……이런 말을 듣는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일까요.

일단 돈이 많아야겠지요. 돈이 많은데도 도박도 안 해요. 흥청망청 쓰지도 않아요. 부동산 투기 같은 것도 안 해요. 그러면 뭐 칭찬 받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돈이 없어요. 낭비를 하고 싶어도 할 돈이 있어야 하든지 말든지 하죠. 그러니까 할래야 할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그 사람이 낭비를 안 한다고 칭찬을 받을 수 가 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자기가 원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어서 못하는 것이니 칭찬 받을 만한 일이 아니지요.


또는 생활이 대단히 건전한 사람을 봅시다. 예를 들어서 뭐, 어떤 인기 연예인이 있었다고 칩시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 저 사람은 참 인기가 많고, 용모도 단정하고 성격도 기가 막히게 좋고, 매너도 좋은 사람인데 스캔들이 없어요. 사생활이 정말 깨끗해요. 아, 그러면 정말 칭찬 받을 만 하겠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인기도 없고 실력도 없고, 그리고 맨날 입고 다니는 건 구질구질하고 잘 씻지도 않아요. 거기다가 성격은 아주 안 좋기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스캔들이 없어요. ㅎㅎ 그러면 칭찬 받을 일이 없겠지요.

이처럼 나쁜 일을 안 한다 하더라도, 할래야 할 수 없을 때 나쁜 일을 안 한다고 칭찬을 받지는 못 합니다.

오히려 나쁜 일을 충분히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은 경우에 칭찬을 받을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 나쁜 일……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바로 유혹입니다.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한 간략한 특징을 살펴보면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이 열매를 따 먹는 것을 하나님은 분명히 금하셨다는 점이요, 둘째는 아담과 하와는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따먹을 수 있는 곳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첫 번째에 대해서는 명확하지요. 분명히 하나님은 따 먹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에 대해서는 창세기 3장 6절을 봅니다.

창세기 3장 6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そこで、女が見ると、その木は食べるのに良さそうで、目に慕わしく、またその木は賢くしてくれそうで好ましかった。それで、女はその実を取 って食べ、ともにいた夫にも与えたので、夫も食べた。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먼저 따 먹은 것은 하와였습니다. 그런데 이를 따먹기 위해 절벽을 올라갔다거나 어디를 위험을 무릅쓰고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거나 하는 구절이 없어요. 여자인 하와에게 있어서도 그냥 손을 뻗어서 따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것을 성경은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만 먹은 것이 아니라 사이 좋게 남편한테도 주었더니 좋다고 낼름 받아 먹었다는 것이지요.

아예 따 먹을래야 따 먹을 수 없었더라면 이를 먹지 않는다고 칭찬 받을 수 없었을 거입니다. 오히려 언제든지 따먹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내하기 때문에 칭찬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했습니까. 어떻게 해야 칭찬을 받고 축복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간단합니다. 먹지 말라고 한 열매를 안 따먹으면 됩니다. 쉽죠? ㅎㅎ 그런데 사실 이게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2장 9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神である主は、その土地に、見るからに好ましく、食べるのに良いすべての木を、そして、園の中央にいのちの木を、また善悪の知識の木を生えさせた。

이 말씀은 참 읽으면 읽을수록 심오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답고 먹기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신 에덴 동산의 어디에 두셨다고요? 예, 동산 정 중앙, 가운데에 심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생명나무도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정중앙에 있었다고 한다면 에덴 어디에 있어도 항상 눈으로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에덴 동산에는 나무가 몇 그루나 있었을까요? 한 대여섯 그루 정도 있었을까요?

창세기 1장에 적힌 천지창조 과정을 보면 하늘을 나는 새들, 땅에 움직이는 짐승들, 바다 물고기들이 모두 서식할 정도로 천지를 이미 만드시고, 그 중에도 특별히 아름다운 땅에 에덴을 창설하셨던 것입니다.

아마도 수천, 수만의 아름다운 나무들로 가득 찬 곳이었을 것입니다. 거기에 나는 모든 나무 열매들은 다 먹어도 좋아. 하지만 에덴 가운데에 있는 딱 한 그루. 거기에 난 열매만 먹지 마. 그야말로 몇 천 분의 일, 몇 만 분의 일입니다. 이것만 안 먹는다면, 인내함으로 순종한다면 내 명령을 온전히 지킨 것으로 쳐줄게.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명령에는 반드시 상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얻는 것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세상 모두였습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입니까.

사망이 없고 애통도 없고 아픔도 없고 영원히 이어지는 기쁨으로 충만한 삶,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으로 넘치는 삶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死はなく、悲しみも、叫び声も、苦しみもなく

하지만 사람이 그와 같은 엄청난 축복을 받는 꼴을 누가 못 봅니까. 그렇습니다. 마귀 사탄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마귀 사탄은 우리가 받을 축복이 있다면 이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로채려고 안간 힘을 씁니다. 온 힘을 다해서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 공격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 공격방법은 하나도 안 바뀌었습니다. 그대로입니다. 그 이름은 바로 “유혹”입니다. 머리도 좋다는 마귀 사탄이 왜 공격방법을 안 바꾸겠습니까. 이유는 간단하지요. 이것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유혹”이라는 무기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유혹이라는 이름의 무기를 이용하여 마귀 사탄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넘어뜨려 왔는지 모릅니다.

최초의 공격도 역시 유혹이었습니다. 마귀가 하와를 유혹합니다.

창세기 3장 5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それを食べるそのとき、目が開かれて、あなたがたが神のようになって善悪を知る者となることを、神は知っているのです。」

정말 우리가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이 한 마디에 하와는 그냥 넘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유혹을 느껴본 일이 있습니까. 저는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10년은 더 된 것 같습니다만, 옛날에 제가 어떤 사람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돈도 많은 부자였지요. 그런데 그 사람 집에 갔더니 거실에 어떤 물건이 이렇게 놓여 있었습니다.

글쎄요. 저는 평소에 일반적으로 물건이나 옷이나 자동차 같은 것에 대한 욕심이나 애착 같은 것은 없는 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거기에 딱 그 물건이…… 아니, 뭐 구체적으로 그게 뭐였는지는 자세히 말씀 드리지는 않겠습니다만, 아무튼 그 중에서도 딱 제가 갖고 싶어하는 그 모델이 거기 놓여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뭐 장식해놓은 것도 아니고, 그냥 거실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는데, 또 마침 거실 조명이 오묘하게 비쳐서 참 예쁘게 보였습니다. 손으로 뻗으면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내 주머니에 집어넣을 수도 있는 크기였지요.

바로 그 때, 기다렸다는 듯이 마귀는 속삭입니다.

“야, 지금 아무도 안 보고 있어. 저거 빨리 주머니에 넣어버려. 그럼 니 게 될 수 있어.”

여러분, 그것을 내 주머니에 넣으면 내 것이 될 수 있다. 사실인가요? 아닙니다.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내 것이 되기는커녕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도 송두리째 빼앗기게 될 지도 모르는 노릇입니다.

이런 유혹, 유치하다고 생각되십니까. 아니요. 얼마든지 있습니다.

요즘 뉴스에 보면 어떻습니까. 정말 끔찍한 사건들이 어쩌면 그렇게도 연일 이어지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주위에 혹시 미운 사람이 있습니까? 마귀가 속삭입니다.

“저 인간만 없으면 너는 행복해질 수 있어. 너는 평안해질 수 있어. 없애버려…….”

하지만 그 끔찍한 공포의 속삭임에 넘어간 사람들의 결말이 어떻습니까. 평안은 고사하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 자신이 누리고 있던 자유와 인생 전부를 순식간에 잃어버리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극단적인 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정말 미운 사람이 있나요? 여러분께서는 저를 보시기에 어떻게 보이실지는 모르겠습니다.ㅎㅎ

저도 이렇게 무슨 대단한 것처럼 여러분 앞에서 이렇게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만, 사실 저도 성격이 상당히 좀 그렇습니다. ㅎㅎ 지금까지 되돌아보면 사람들에게 상처도 많이 받기도 했지만 또한 알게 모르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많이 주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제 머리 속으로 대충 상상이 가요. 내가 이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하면 이 사람이 가장 큰 상처를 입을까 하는 것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히면 내가 통쾌할 것 같아요. 아주 속이 시원해질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상처를 입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해코지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 또한 유혹인 것입니다. 상처를 입혀보십시오. 해코지를 해보십시오. 통쾌하고 속이 시원해지기는커녕 상대방에게 증오가 싹틉니다. 복수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오히려 더욱 끔찍한 일이 일어나게 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 사탄의 수법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가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기준이 되는 것, 그 때 힘이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말씀입니다. 성경말씀인 것입니다.

답답하십니까. 화가 나십니까. 또는 욕심이 나십니까. 유혹이 느껴지십니까. 어딘가에서 마귀의 속삭임이 들려오십니까. 우리는 이 때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로마서 8장 6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肉の思いは死ですが、御霊の思いはいのちと平安です。

여러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는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단 두 가지입니다. 육신적인 방법, 세상적인 방법을 택하면 금방 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것보다 육신의 방법, 세상적인 방법을 택하는 것이 훨씬 빠르고 확실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유혹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까지도 빼앗길지도 모르는 무서운 유혹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 눈 앞에 두 나무가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의 나무요 또 하나는 사망의 나무입니다.

생명의 나무는 영의 생각이요 사망의 나무는 육신의 생각입니다. 우리 모두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사망의 나무로 향하는 유혹을 뿌리치고, 영의 생각, 생명의 나무를 택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허락하신 생명을 차지하고,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기쁨과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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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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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3회 의무입니까, 감사입니까
2019년 6월 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ピリピ人への手紙 4章13節
“私を強くしてくださる方によって、私はどんなことでもでき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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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의무입니까, 감사입니까” 義務ですか、感謝ですか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오신 여러분들, 참 잘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오늘은 여러분께 질문부터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오늘 교회에 오신 것, 의무라고 생각하고 오셨습니까. 아니면 권리라고 생각하고 오셨습니까.

의무와 권리. 이 개념을 보면 어려울 수도 있고 복잡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우리 한 번 쉽게 생각해보겠습니다.

의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것, 또는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의무는 지켜야 본전입니다. 그 대신 안 지키면 문제가 발생하지요. 어쩌면 처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나라에서 국민의 의무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납세의 의무……즉 세금을 내야 하는 의무입니다.

일본은 올해 10월부터 소비세가 현재 8%에서 10%로 인상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 세금이 오르게 되면 나라 예산이 늘어나게 되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국민들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니까 좋은 일이다……그렇게 생각되시나요? 아니에요? 왜요? 일본은 우리나라가 아니라서요? 그렇다면 우리가 한국에 살고 있다면, 세금이 오른다면 좋아요?

물론 일부 관료들이나 정치인들은 좋아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솔직히 세금을 올린다고 좋아하는 국민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쉬운 예를 본다면, 선거철에 정치인들이 공약을 내세우면서 세금을 내리겠다고 하는 경우는 많지만, 내가 당선되면 세금을 올리겠다! 이렇게 공약을 내거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유야 간단하죠. 세금을 올린다고 하면 국민들이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세금을 올리는 경우에는, 아직 임기가 많이 남아 있을 때, 선거까지 아직 충분히 기간이 있을 때 슬그머니 올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원론적으로 생각해볼 때, 왜 세금 내기를 싫어합니까. 이유야 간단하지요. 내게 세금을 내서 좋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안 내면 처벌을 받고 강제로 세금을 징수 당하지만, 내가 낸다고 해서 나한테 직접적으로 돌아오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세금을 안 내보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세금을 많이 내려고 할까요? 그게 가능할까요? 예, 가능합니다. 그것은 바로 세금을 의무가 아닌 권리로 규정하면 됩니다.

즉, 이는 세금을 많이 내면 많이 낼수록 자기에게 돌아오는 혜택이 많아지게 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세금을 많이 내려고 할 것입니다. 세무서에 달려가서 어떻게든 세금을 더 내려고 해요. 더 낼 필요 없다고 해도 어떻게든 더 내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겠지요.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안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나라 예산이 바닥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요즘은 연금 같은 것을 보면, 고령자들이 늘어서 연금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막상 돈을 내야 할 젊은 사람들 수는 점점 더 줄어가서, 결국 어떻게 해야 하냐 하면, “많이 내고 적게 받는다”는 것이 현재 연금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기쁜 마음으로 낼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라에서는 어떻게든 세금을 거두려고 하고, 국민들은 어떻게든 세금을 줄여보거나, 심한 경우에는 안 낼 수 있다면 안 내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무라고 하는 것이 꼭 안 좋은 것만은 아니지요. 예컨대 군대는 어떻습니까. 한국남성이라고 하면 병역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체검사를 받고 문제가 없으면 일정기간 동안 군 복무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한창 젊은 시기에 몇 년 동안 군생활을 한다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은 아니지요.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어떻게든 안 가려고 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2002년, 당시 한국 가요계 정상을 차지하고 있던 어떤 남성 연예인이 신체검사를 받고 군입대 판정을 받자 한국 국적을 버리고 외국 국적을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군대를 안 가게 되었습니다만, 그 결과 한국에서는 이 사람에 대해서 입국금지처분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이 분은 해외에서는 여전히 활동을 하고 있고 한국에 들어가고 싶어하지만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이 연예인은 여전히 한국에서 입국을 금지 당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사실 군대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특히 연예인들한테 참 위험이 크다고 합니다. 몇 년의 공백기간을 거치면서 사람들한테 잊혀지게 되면 또다시 예전 그 자리로 복귀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죠.

하지만 그 때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냐 하면, 아, 군대를 어떻게 해서든지 피하는 것보다 갔다 오는 것이 더 낫구나 하고 여겨지게 되어서, 이제는 오히려 외국 국적을 갖고 있던 사람도 그것을 버리고 한국 국적을 취득해서 군대를 가는 일도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냐 하면 오히려 이로 인해서 인기가 더욱 올라가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이는 어쩌면 그 전에는 큰 부담만으로 느껴졌던 병역의무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대한민국 남성만이 할 수 있다고 하는 권리로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무엇이 의무이고 무엇이 권리인지 우리는 간혹 헷갈릴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 어렸을 때, 여러분께서는 혹시 그런 경험이 있으신지 모르겠어요. 어렸을 때 이렇게 집에 있으면 어머니가 밥을 먹으래요. 뭐 배가 고프면 반가운 소식이겠습니다만, 어쩔 때는 밥맛이 별로 없을 때 있잖아요. 그럴 때에도 시간이 되었으니까 밥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아니, 저 먹기 싫어요. 배 안 고파요……라고 해도 한 숟가락이라도 먹으라고 하십니다. 그럼 때로는 참 많이 성가 싫어요. 아니, 맨날 밥만 먹나? 안 먹을 수도 있지 않나? 왜 먹기 싫은데 자꾸 먹으라고 해? 뭐 이래가지고 어렸을 때는 짜증을 낸 적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제가 혼자서 살고 그러니까 말이죠. 밥 한 끼를 먹는다는 것이 참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혼자 살 때에는 뭐 맨날 대충 바깥에서 사먹는 거죠. 쉬는 날에 집을 있을 때에는 근처 식당에 배달을 시켜서 먹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맨날 뭘 먹을지 고민을 하고 그러는 게 얼마나 귀찮고 그런지 모릅니다.

하지만 결혼하기 전에 가끔 일본 집에 왔을 때 보면 정말 놀랍습니다. 식사 때만 되면 그냥 자동적으로 밥이 나와요.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뭘 먹고 싶냐고 해서 대충 말하면 고기든 면이든 그 음식을 먹을 수가 있어요. 정말 광야에서 내렸다고 하는 만나가 따로 없지요.

이 감사함을 이제는 안 다음에는 어머니가 밥을 차려주셨을 때거나, 지금은 제 아내가 밥 먹으라고 했을 때 단 한번도 싫다고 하거나 짜증을 내거나 한 일이 없습니다. 정말 식사 때마다 얼마나 기쁨과 감사한 마음으로 충만해지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아니, 무슨 여자가 밥해줄 때만 감사하게 느껴지냐……뭐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니, 그런 말씀이 아니라요ㅎㅎ 이처럼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면 아무런 감사도 나오지 않지만, 모든 것이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감사와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것, 의무로 살아가십니까? 감사로 살아가십니까. 우리가 의무라고 생각하면, 정말 마지못해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아무런 기쁨도 못 느낍니다. 그냥 억지로 살아가는 건데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금방 힘들어 합니다. 금방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을 감사라고 생각했을 때 기쁨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은혜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당연한가요? 아무런 감사도 못 느끼시나요? 아니요. 이는 너무나도 감사한 일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 날은 다카사키 쪽 전도지를 돌리는 날이라서 식사를 마치고 저녁 8시쯤에 차를 타고 골목을 지나서 이제 큰 길로 나가려고 했습니다. 요즘은 해가 길어졌다 하더라도 8시쯤이면 아주 캄캄합니다. 그래서 오른쪽을 보고 큰 길로 나가려는 순간, 제 눈 앞에 뭔가가 휙 하고 지나가요. 저는 솔직히 무슨 귀신인가 했습니다. 정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눈앞에 휙 하고 지나갔었거든요.

그래서 뭐지? 하고 서둘러 브레이크를 밟고 나서 자세히 봤더니 어떤 남학생이 자전거를 타고 제 자동차 앞을 휙 지나간 것입니다. 아~주 신나게 달려가요.

제가 저 스스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 드리는 것은 좀 우스울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그래도 운전은 꼼꼼하게 하는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속도 잘 하지 않고, 상당히 안전운전에 신경을 쓰는 편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글쎄요. 그 학생 자전거의 전조등이 꺼져서 못 봤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정말 그 자전거가 오고 있는지 몰랐어요.

그 순간은, 아~주 저기를 신나게 달려가는 뒷모습이 얼마나 얄밉던지요. 허허어, 짜식 큰일나면 어쩔라구……라고 생각하고 말았는데, 운전하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아이구, 큰일날 뻔 한 건 그 학생만이 아니라, 저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순간, 차가 그 자전거에 슬쩍 닿기라도 했다면, 그래서 그 친구가 넘어지기라도 했다면, 그 결과 차도로 밀려 나가서, 저 쪽에서 오는 자동차와 그 학생이 부딪치기라도 했다면……

만약에 그랬다고 한다면 어쩌면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민사상 손해배상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형사상 책임이 발생할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바로 지금 이 시간에도 경찰에 연행되어서 조사를 받고 있을 지도 모르는 노릇이지요.

어디 그 뿐인가요. 이제 이번 주부터는 제 비자 갱신 수속도 시작해야 하는데 교통사고를 일으켰다면 비자를 내주겠어요? 비자가 안 나오면 이제 아무런 대책 없이 저와 제 아내는 한국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런저런 일들을 생각하니까 정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찔하더라구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정말 감사하게도 접촉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아~주 얄밉게 달려간다고 생각했던 그 친구 뒷모습이, 넘어지지도 않고 다치지도 않고 그냥 휙 지나가준 그 남학생이 얼마나 감사하고 은혜롭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지난 주에도 참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왔지요. 일본에서는 5월 28일 아침 카와사키 시에 갑자기 흉기를 들고 나타난 범인에 의해 19명이 피해를 입고, 그 중 초등학교 6학년 여학생과 39세 외무성 직원이 숨졌다고 합니다. 정말 아직 꿈을 펼치지도 못한 어린 학생과, 이제 그의 인생에 있어서 전성기를 맞이하려고 했던 일본 최고 엘리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을 가슴 아프게 했습니다.

그리고 현지시간 그 다음날인 5월 29일, 헝가리에서 발생한 유람선 침몰사고 소식은 어떻습니까. 현지인도 있었지만 대부분 한국 여행객이었다고 하지요. 오늘 아침에 뉴스를 보았더니 여전히 사망 7명, 실종 19명이라고 합니다.

텔레비전에서는 구명조끼를 입으라는 말도 없었다, 안전교육도 없었다고는 하지만, 무슨 계곡을 고무보트 타고 내려가는 것도 아닌 그냥 보통 유람선이었잖아요? 저는 아직 헝가리를 가본 일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유람선은 지금까지 한국에서나 일본에서 몇 번이나 타봤습니다. 그런데 그 때 무슨 구명조끼요? 그런 건 한 번도 입어본 일도 없고, 안전교육? 그런 교육을 받아본 일도 없어요. 그리고 뉴스에 나온 목격자 인터뷰를 보니까 유람선이 대형선박과 충돌해서 침몰했다고 하는데 시간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고 합니다. 정말 쿵 하고 곧바로 가라앉아버린 것이었겠지요. 아무리 조끼가 있었다고 한들, 교육을 받았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가와사키에서 발생한 묻지마 흉기사건도 범행시간은 10 몇 초 정도라고 합니다. 그 피해를 입은 분들이 아이들만이 아니라 어른이라 하더라도 그 순식간에 닥친 일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할 수 있었겠습니까. 참으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도 지금 우리가 이렇게 오늘 한 자리에 모여서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 당연한가요? 아니에요. 절대로 당연하지 않습니다. 한 순간 한 순간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에 조심하면서 살아간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우리는 그야말로 눈을 감은 채로 어둠 속을 헤매는 존재일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냥 그렇게 살아요? 그냥 그렇게 살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지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여기 부딪히고 멍이 들고, 저기 걸려서 넘어지고 그렇게 되고 맙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イエスは再び人々に語られた。「わたしは世の光です。わたしに従う者は、決して闇の中を歩むことがなく、いのちの光を持ちます。」

요한복음 12장 46절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わたしは光として世に来ました。わたしを信じる者が、だれも闇の中にとどまる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우리는 우리 삶의 빛이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따라 가야 하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것,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의무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감사가 없습니다. 기쁨도 없고 은혜도 없습니다. 그저 있는 것이라고는 짜증이요 불평이요 불만입니다.

왜 그렇게 의무로 생각될까요? 그것은 우리가 어둠 속에 있어서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보지 못합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보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힘들 때라도 우리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라도 우리 마음 안에 예수님이라고 하는 빛을 밝히고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내가 지금 있는 것, 내가 겪고 있는 것, 이 모두가 은혜요, 이 모두가 감사요, 이 모두가 축복으로 보이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그냥 빛이다, 그냥 감사다 은혜다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만 붙잡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요? 예수님이 높으신 분이시기 때문에요? 그래서 세상에서도 높은 사람을 의지하면 출세하니까 신앙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높은 분한테 잘 보이면 축복 받을 것 같아서 맨날 예수님만 찾는 건가요?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6장 5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人の子の肉を食べ、その血を飲まなければ、あなたがたのうちに、いのちはありません。

우리가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 문자적으로 보면 참으로 무섭게 느껴지는 이 말씀입니다만,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첫째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살을 찢고 피를 흘리신 것이 내 죄를 위해 희생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이요, 둘째는 우리가 음식을 먹고 거기서 힘을 얻는 것과 같이 예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힘과 능력을 얻는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私を強くしてくださる方によって、私はどんなことでもできるのです。


우리가 예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마치 나는 음식을 먹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인가요? 용감한 사람인가요? 아닙니다. 대단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왜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없이 축복된 인생을 보낼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 이도 역시 지혜롭거나 용감한 것이 아니라 대단히 어리석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캄캄한 어둠 속을, 불도 켜지 않은 상태로 자동차로 전속력으로 달리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무모한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が道であり、真理であり、いのちなのです。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だれも父のみもとに行くことはできません。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서만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구원이 있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행전 4장 11절~12절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あなたがた家を建てる者たちに捨てられた石、それが要の石となった』というのは、この方のことです。
この方以外には、だれによっても救いはありません。天の下でこの御名のほかに、私たちが救われるべき名は人間に与えられていないからです。」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른 이름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뿐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이시요 우리의 능력이시요, 우리의 참된 빛이시요, 우리의 인도자이심을 믿으며, 예수님을 의지하고 기쁨과 감사로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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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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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2회 만약에, 다행히
2019년 5월 2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시편 115편 9절~10절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詩篇115篇 9節~10節
“イスラエルよ主に信頼せよ。主こそ助けまた盾。アロンの家よ主に信頼せよ。主こそ助けまた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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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만약에, 다행히” もしも、幸いにも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일기를 써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일기라고 하면 정말 어찌 보면 작심삼일의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지나 않을까 해요. 다른 것도 그렇지만 일기라고 하는 것은 정말 꾸준히 하기가, 글쎄요. 윗몸 일으키기보다도 힘든 것 같습니다. 이 윗몸 일으키기도 매일 꾸준히 해보려고 해도 이게 참 오래 하기가 힘든데 이보다도 더 힘든 게 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뭐, 윗몸 일으키기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요즘 제가 꽤 꾸준히 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전거를 타는 일입니다. 하루에 1시간 정도 거의 매일 타고 있어요. 저희 집 근처에는 자전거도로가 비교적 잘 정비되어 있어서, 30분쯤 쭈욱 갔다가 그 길을 다시 되돌아옵니다. 아침에 이렇게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저도 뭐, 일기를 꾸준히 쓰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가끔 문득 생각이 날 때에는 몇 자 적어보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오늘은 한번 제 짧은 일기, 자전거를 탔을 때를 적은 짧은 일기 이틀 치를 한 번 들려드릴까 합니다. 이건 실제로 제가 쓴 일기는 아닙니다만, 그래도 직접 제가 느꼈던 일입니다.

지금부터 제 짧은 일기 이틀 치를 읽어드리겠습니다만, 그냥 가만히 듣고 계시면 재미가 없겠지요? 여기서 한 가지를 찾으셔야 합니다. 무엇을 찾으시냐 하면, 분명히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말하지 않은 것, 이 일기에 나오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실제로는 분명히 있었던 것인데 이 일기에는 나오지 않는 것, 그것을 한 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자, 읽겠습니다.

첫 번째 일기.

오늘은 아침에 바람이 많이 불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은 맞바람 때문에 고생했지만, 돌아오는 길은 바람이 안 불어서 힘들지는 않았다.

짧죠?

자 그럼 두 번째 일기입니다.

오늘은 가는 길에는 바람이 불지 않았다. 자전거 속도도 제법 빨랐다. 그 동안 운동을 꾸준히 한 성과가 있었나 보다. 하지만 자전거를 돌려서 오는 길에는 갑자기 바람이 강하게 불어서 몹시 힘이 들었다. 시간도 평소보다 많이 걸렸다.

자, 이게 다입니다. 지금 읽어드린 이틀 치 일기 속에는, 양쪽 모두 분명히 있었던 것이지만 제가 적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짧으니까 다시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일기.

오늘은 아침에 바람이 많이 불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은 맞바람 때문에 고생했지만, 돌아오는 길은 바람이 안 불어서 힘들지는 않았다.

두 번째 일기

오늘은 가는 길에는 바람이 불지 않았다. 자전거 속도도 제법 빨랐다. 그 동안 운동을 꾸준히 한 성과가 있었나 보다. 하지만 자전거를 돌려서 오는 길에는 갑자기 바람이 강하게 불어서 몹시 힘이 들었다. 시간도 평소보다 많이 걸렸다.

아시겠어요? 이 일기 속에는 분명히 있었지만 적혀 있지 않은 것.

예, 정답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순풍입니다. 등 뒤에서 나를 밀어주는 바람이죠.

첫 번째 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아침에 바람이 많이 불었다. 가는 길은 맞바람 때문에 고생했지만, 돌아오는 길은 바람이 안 불어서 힘들지는 않았다.”

가는 길에는 맞바람, 즉, 앞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힘들었지만 돌아오는 길은 바람이 안 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바람이 안 분 게 아닙니다. 바람은 같은 방향으로 계속 불고 있었어요. 다만 제가 가는 방향이 반대가 되니까, 아까는 맞바람이었던 것이 지금은 나를 내 등뒤에서 밀어주는 바람, 순풍으로 바뀐 것입니다. 하지만 바람과 제가 가는 방향이 같으니까, 저는 그 바람이 불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지요.

두 번째 일기는 어떻습니까.

오늘은 가는 길에는 바람이 불지 않았다. 자전거 속도도 제법 빨랐다. 그 동안 운동을 꾸준히 한 성과가 있었나 보다. 하지만 자전거를 돌려서 오는 길에는 갑자기 바람이 강하게 불어서 몹시 힘이 들었다. 시간도 평소보다 많이 걸렸다.

이번에는 반대로 갈 때는 바람이 불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전거를 돌려서 오려고 하자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고 하는데, 이도 역시 마찬가지로 바람은 계속 불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이번에는 갈 때는 바람과 같은 방향이었고 올 때는 바람과 반대방향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일기는 어때요? 가는 길, 내 등뒤에서 나를 밀어주는 순풍이 불고 있을 때에는 그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자전거 속도가 제법 빨랐던 것은 나를 밀어주는 순풍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운동 성과였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돌아올 때에는, 이번에는 자기의 운동 부족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맞바람 때문에 몹시 힘들었다고 털어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좋은 것, 잘 된 것은 다 내 탓, 안 좋은 것, 잘 안 되 것은 모두 남의 탓, 환경 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런 발전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 삶을 돌아보면 어떻습니까. 일이 잘 풀릴 때는 내가 그 동안 열심히 노력을 해서, 내가 머리를 잘 써서 해온 덕분이고, 일이 잘 안 풀릴 때, 삶이 조금 어려울 때, 우리는 경기가 안 좋아서, 물가가 올라서……이러면서 너무나도 쉽게 우리 환경 탓을 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간혹하나님 탓을 해버리는 경우도 봉 수 있습니다.

애굽을 탈출하고 광야를 통과해서 이제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바로 앞에 두고 열두 정탐꾼들을 보냈는데, 그 중 열 명은 절망적인 보고를 합니다. 그들은 너무나도 강해서 절대로 우리가 이길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라고 했습니까.


민수기 14장 1절~3절

1.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2.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すると、全会衆は大声をあげて叫び、民はその夜、泣き明かした。
イスラエルの子らはみな、モーセとアロンに不平を言った。全会衆 は彼らに言った。「われわれはエジプトの地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あるいは、この荒野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のだ。
なぜ主は、われわれをこの地に導いて来 て、剣に倒れるようにされるのか。妻や子どもは、かすめ奪われてしまう。エジプトに帰るほうが、われわれにとって良くはないか。」


이제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의 명을 따라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해낸 하나님의 사람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차라리 애굽에서 죽었으면 좋았겠다. 차라리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겠다면서 대성통곡을 합니다.

여러분, 지금 상황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벌을 내렸습니까? 아닙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축복을 받기 직전,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몇 백 년간 해왔던 지긋지긋한 노예생활에서부터 해방시켜주시고, 이제 풍요로운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놀라운 땅, 놀라운 축복을 주시려고 하는 상황입니다.

이 사실을 알았다면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해도 모자랄 판입니다만,, 하나님의 뜻을 몰랐던 그들은 지금 감사와 찬송은커녕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를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차라리 애굽에서 죽었으면 좋았겠다. 차라리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겠다……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민수기 14장 27절~33절
27.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31.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32.너희의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33.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いつまで、この悪い会衆は、わたしに不平を言い続けるのか。わたしは、イスラエルの子らがわたしにつぶやく不平を聞いた。
彼らに言え。わたしは生きている──主のことば──。わたしは必ず、おまえたちがわたしの耳に語ったとおりに、おまえたちに行う。
この荒野におまえたちは、屍をさらす。わたしに不平を言った者で、二十歳以上の、登録され数えられた者たち全員である。
エフンネの子カレブと、ヌンの子ヨシュアのほかは、おまえたちを住まわせるとわたしが誓った地に、だれ一人入ることはできない。
おまえたちが『かすめ奪われてしまう』と言った、おまえたちの子どもについては、わたしは彼らを導き入れる。彼らはおまえたちが拒んだ地を知るようになる。
しかし、おまえたちはこの荒野に屍をさらす。
おまえたちの子どもは、この荒野で四十年の間羊を飼う者となり、おまえたちがみな、屍となるまで、おまえたちの背信の責めを負わなければならない。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는데, 너희들 지금 뭐라고 했어? 차라리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했니? 좋아. 내가 니네들 소원대로 해줄게.

그러면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40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은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광야를 헤매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40년 뒤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어요? 아닙니다. 당시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던 어른들은 그들이 말한 대로, 그들이 원했던 대로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결국 광야에서 모조리 죽고 말게 된 것입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 歴史にもしもはタブー 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만, 저는 이 주장에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이미 일어나버린 일에 대해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겠지요. 역사도 그렇고 우리 인생도 그렇고 단 한 번 뿐입니다.

하지만 이 "만약에"라는 것은 사실 모든 학문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학문은 과거와 현재를 바탕으로 해서 <미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외우기만 하는 것은 학문이 아닙니다. 학문을 위한 기초작업이지요.

예를 들어서 음악이나 미술 또는 예술은 <지금>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음악학, 미술학, 예술학......이 되는 순간 <만약>이라고 하는 <미래>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천지 만물을 모두 창조하시고, 이를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습니다. 이는 너무나도 큰 은혜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천지 창조를 위해서 무엇 하나 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를 창조하시고 이 모든 것을 아담과 하와에게 그냥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이와 같은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금하셨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 (善悪の知識の木の実) 를 따 먹었습니다. 너희는 이것을 먹는 날에는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하는 말도 안 되는 마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던 것입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정말로 하나님처럼 되었나요? 아니요.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타락이었습니다.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알고 감사를 드렸다면, 그리고 마귀 사탄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품에서 영원한 축복된 삶을 누릴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가나안 땅 정복을 바로 눈앞에 두었던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순종했었다면 그들은 곧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축복의 땅 가나안을 정복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도,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와 순종 대신 불순종으로 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어떻게 되었다구요? 그렇습니다. 타락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는 비단 아담과 하와,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죄가 너무나도 무겁게 우리를 짓누릅니다. 이를 우리 힘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우리도 역시 타락과 죽음 속으로 빠져들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해 희생해주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로 십자가에 의해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우리 삶 속에서 힘들어 하기도 합니다. “예수 믿기 힘들다”, “예수 믿어봤자 별거 없네”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쩌면 이런 생각, “내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더라면, 예수님께 순종하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더 나아졌을 수 있을지도 몰라. 일요일에 교회 갈 시간에 일을 더 하던가 했다면 지금보다 더 나아졌을 수 있을지도 몰라.”

이런 생각을 해보신 일이 없으신가요? 바로 이 생각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명을 따라 애굽을 탈출한 것을 후회하고 다시 애굽으로, 다시 노예 생활로 돌아가자고 주장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도 비참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3차원 세계에 사는 우리는 <시간>이라는 틀 속에 갇혀 있습니다. 이는 무슨 수를 써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3장 8절을 봅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イエス・キリストは、昨日も今日も、とこしえに変わることがありません。

이는 실로 놀라운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3차원 세계에 존재하는 시간이라고 하는 한계를 초월한 분이라는 사실을 지금으로부터 2천년 가까이 전에 적힌 히브리서에서 이미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이라고 하는 한계를 초월한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알고 계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르는 <만약에>를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죄에 대해서 무지했습니다. 그저 가축 몇 마리 바치면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그저 헌금 얼마 내면 우리의 죄는 모두 해결되고 천국에 갈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마태복음 24장을 봅니다.

마태복음 24장 38절~39절
38.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洪水前の日々にはノアが箱舟に入るその日まで、人々は食べたり飲んだり、めとったり嫁いだりしていました。
洪水が来て、すべての人をさらってしまうまで、彼らには分かりませんでした。人の子の到来もそのように実現するのです。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면 자신들은 멸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세상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즐겁게 지냈습니다. 이 정도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나도 무지했습니다. 이는 마치 얼마 있으면 낭떠러지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자동차로 힘껏 달리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이 이와 같은 위급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아셨습니까. 이대로 있다가는 우리 인간 모두가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누가 아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아셨습니다.

지옥이 어떤 곳입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9장 48절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ゲヘナでは、彼らを食らううじ虫が尽きることがなく、火も消えることがありません。

이 얼마나 끔찍합니까. 하지만 이 죽음을 향한 질주, 무지한 질주는 단순히 가축 몇 마리, 헌금 몇 푼 가지고는 해결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를 막기 위한 유일한 방법. 단 한 가지 방법.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방법 밖에는 없었던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불타는 지옥, 끔찍한 지옥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었던 운명입니다. 우리는 몰랐지만 예수님은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져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죽음을 감당해 주셨던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안 믿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지금과 그리 큰 차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믿음이 약해지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은 아셨습니다. 얼마나 끔찍한 결과가 되는지를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짊어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115편 9절~10절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イスラエルよ主に信頼せよ。主こそ助けまた盾。
アロンの家よ主に信頼せよ。主こそ助けまた盾。

우리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맞바람은 예민하게 느껴도, 우리를 순탄케 하는 순풍에는 둔감합니다. 이렇게 되면 불평과 불만만 쌓이게 되고 감사도 없고 기쁨도 없어집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의 은혜를 알아야 감사와 기쁨과 찬송이 나오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아무리 어려울 때라도, 아 그래. 예수님의 은혜를 지금도 누리고 있다.

만약에 예수님이 안 계셨더라면 나는 더욱 비참하게 되었겠지만, 다행히 예수님 덕분에, 예수님의 십자가 덕분에 지금의 축복을 누리고 있다고 깨닫는 것, 오히려 우리가 어려울 때에는 가나안 정복을 눈앞에 두고 있는 순간이다, 넘치는 축복을 받기 직전이다 라는 사실을 깨닫고 순종하는 것, 이것이 감사와 순종의 근본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가 형통할 때 주님께 감사 드리고, 우리가 어려울 때 주님께 순종함으로 인하여,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축복, 믿음의 축복, 구원의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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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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