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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회 흔들리지 않는 믿음
2019년 1월 1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에스겔 1장 20절~21절
"영이 어떤 쪽으로 가면 생물들도 영이 가려 하는 곳으로 가고 바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에 있음이니라 그들이 가면 이들도 가고 그들이 서면 이들도 서고 그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는 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에 있음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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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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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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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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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흔들리지 않는 믿음” 揺るがされない信仰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구분할 때를 보면 예를 들어 구약은 모세오경, 역사서, 시가서, 대선지서, 소선지서……이렇게 일반적으로 구분을 합니다. 여기서 대선지서나 소선지서……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분량으로 구분이 될 뿐이지, 길이가 길다고 해서 가치가 더 있다거나, 길이가 짧다고 해서 가치가 덜하다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150편이나 되는 시편, 이는 성경에서 가장 긴 책입니다만, 반면에 신약성경 요한 이서는 1장 밖에 없고, 그것도 13절까지밖에 없는 짧은 책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편이 제일 가치가 있고 요한이서는 가장 가치가 덜한 책이라는 것이 아니라, 시편이나 요한이서나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 성경이라고 우리는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이 중에서 오늘 말씀인 에스겔서는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다니엘 등과 함께 대선지서에 포함되는 책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을 모두 이해해야 하겠습니다만, 그러나 현재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100% 완벽하게 해석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조금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성경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성경이 하나도 오류가 없는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것 또한 우리의 신앙인 것입니다. 다만 완벽하지 않다는 것은 똑같은 복음주의 신학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서 해석에 있어서 서로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와 같은 성경 중에서도 특별히 난해한 부분은 아무래도 예언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오늘 말씀이 있는 에스겔 서에는 여러 환상이 등장합니다만, 그와 같은 환상의 내용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고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에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살펴보았던 말씀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동일한 의견이 있는데 이는 바로 하나님의 충성된 사자의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에스겔 1장 20절~21절
“20.영이 어떤 쪽으로 가면 생물들도 영이 가려 하는 곳으로 가고 바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에 있음이니라
21.그들이 가면 이들도 가고 그들이 서면 이들도 서고 그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는 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에 있음이더라”

これらは霊が行かせる所に行き、霊が行かせる所には、輪もまたそれらとともに上がった。生きものの霊が輪の中にあったからである。
生きものが行くときには、輪も行き、生きものが立ち止まるときには、輪も立ち止まり、生きものが地の上から上がるときには、輪も共に上がった。生きものの霊 が輪の中にあったからである。

이 말씀에는 영과 생물들, 그리고 바퀴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생물들 곁에 있는 바퀴는 영이 가라고 하는 곳으로 따라 갔다는 것입니다. 영이 좌로 가려 하면 좌로 가고, 우로 가려고 하면 우로 가고, 영이 서면 바퀴도 서고, 영이 하늘로 들리고자 하면 바퀴도 똑같이 따라갔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성경 구절이 떠오릅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입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主はサムエルに言われた。「彼の容貌や背の高さを見てはならない。わたしは彼を退 けている。人が見るようには見ないからだ。人はうわべを見るが、主は心を見る。」

하나님은 외모를 보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중심에서 무엇을 보시겠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신지, 성령님이 계신지를 보신다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중심, 믿음의 중심이 명확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성경을 비과학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못 믿겠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들은 어떻게 하냐 하면 그 분이 돌아가신 날에는 제사를, 명절에는 차례를 지냅니다. 부적을 지니고 다녀요. 그러면 안심이 되대요. 그게 자기를 지켜준대요. 그리고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나오는 오늘의 운세를 봅니다. 뻑 하면 갑자을축병인정묘무진기사경오신미 사주팔자를 보고 굿판까지 벌여요.

아니, 성경을 비과학적이라서 못 믿는다면서 그런 건 왜 하냐고 하면 그건 우리 문화래요. 전통이래요. 미풍양속이래요.

이런 말들을 그래도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인데도 웃지도 않고 말해요. 이게 앞뒤가 맞는 말입니까. 그래도 이런 말을 하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이 한다면 그럴 수도 있다고 한다지만, 이미 교회에 다니고 나름 믿음이 있다고 하는 분들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계시니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는 노릇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 마음의 중심이, 우리 믿음의 중심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자동차에 달린 바퀴, 아무리 좋은 타이어로 된 바퀴이면 뭘 합니까. 그 중심이 흔들리면 넘어지고 빠지고 사고가 나고 마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때의 왕들에 대한 평가를 보십시오. 구약에서 왕들에 대한 평가는 얼굴이 잘생겼느냐, 오래 살았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다윗처럼 행하였느냐 아니냐입니다.

열왕기하 18장에 보면 성경에서는 히스기야 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열왕기하 18장 3절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彼は、すべて父祖ダビデが行ったとおりに、主の目にかなうことを行った。

성경은 히스기야(ヒゼキヤ) 왕을 가리켜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왕이었다고 평가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무엇을 했을까요.

열왕기하 18장 4절~6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열왕기하 18장 4절~6절
“4.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5.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6.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

高き所を取 り除き、石の柱を打ち砕き、アシェラ像を切り倒し、モーセが作った青銅の蛇を砕いた。そのころまで、イスラエル人がこれに犠牲を供えていたからである。これはネフシュタンと呼ばれていた。
彼はイスラエルの神、主に信頼していた。彼の後にも前にも、ユダの王たちの中で、彼ほどの者はだれもいなかった。
彼は主に堅くつき従って離れることなく、主がモーセに命じられた命令を守った。

그리고 열왕기하 23장에 보면 요시야 왕이 등장합니다. 그의 공적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열왕기하 23장 19절~20절
“19.전에 이스라엘 여러 왕이 사마리아 각 성읍에 지어서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산당을 요시야가 다 제거하되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대로 행하고
20.또 거기 있는 산당의 제사장들을 다 제단 위에서 죽이고 사람의 해골을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

ヨシヤはまた、イスラエルの王たちが造って主の怒りを引き起こした、サマリアの町々の高き所の宮もすべて取 り除き、彼がベテルでしたのと全く同じことを、それらに対しても行った。
彼は、そこにいた高き所の祭司たちをみな、祭壇の上で屠り、その祭壇の上で人の骨を焼いた。こうして、彼はエルサレムに帰った。


열왕기하 23장 24절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さらにヨシヤは、霊媒 、口寄せ、テラフィム、偶像、それに、ユダの地とエルサレムに見られるすべての忌むべき物も除き去った。こうして、彼は祭司ヒルキヤが主の宮で見つけた書物に記されている 律法のことばを実行した。

요시야 왕은 과거에 우상들의 온상이었던 산당들을 모두 헐어버리고 점쟁이들을 모두 제거해버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요시야 왕을 어떻게 평가하셨습니까.

성경은 요시야 왕은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열왕기하 23장 25절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ヨシヤのようにモーセのすべての律法にしたがって、心のすべて、たましいのすべて、力 のすべてをもって主に立ち返った王は、彼より前にはいなかった。彼の後にも彼のような者は、一人も起こらなかった。

그리고 어김없이 열왕기하 22장 2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열왕기하 22장 2절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彼は主の目にかなうことを行い、父祖ダビデのすべての道に歩み、右にも左にもそれなかった。


시간관계상 히스기야 왕과 요시야 왕에 대해서만 보았습니다만, 그들은 전통도 모르고 문화도 모르고 미풍양속도 모르는 왕이었다고 기록하나요?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순종하고 신앙 중심, 믿음의 중심을 지킨 훌륭한 왕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2장 4절~5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누가복음 12장 4절~5절
“4.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わたしの友である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からだを殺しても、その後はもう何もできない者たちを恐れてはいけません。
恐れなければならない方を、あなたがたに教えてあげましょう。殺した後で、ゲヘナに投げ込む権威を持っておられる方を恐れなさい。そうです。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この方を恐れなさい。

이 말씀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영의 세계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영혼도 육체처럼 썩어지고 없어지나요? 그렇다면 차라리 괜찮습니다. 예수님도 믿을 필요 없고, 성경 말씀도 볼 필요가 없겠지요.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기록합니까.

히브리서 9장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요한계시록 20장 12절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また私は、死んだ人々が大きい者も小さい者も御座 の前に立っているのを見た。数々の書物が開かれた。書物がもう一つ開かれたが、それはいのちの書であった。死んだ者たちは、これらの書物に書かれていることにしたがい、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죽음 다음에는 심판이 있다고 성경은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단지 또 하나의 시작일 뿐입니다. 그 시작에 앞서서 심판이 있다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합니다.

여러분, 저도 예전에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도 몇 번 옮겨보기도 했습니다만, 그 회사에 다닐 때에는 상사 눈치도 봐야지요. 신입사원 때에는 대리님, 과장님, 차장님, 부장님, 어디 그 뿐이에요? 이사님, 상무님, 거기에 사장님, 회장님. 뭐 눈치를 봐야 할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 분들 앞에서는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지요. 비위도 맞춰드려야 하겠습니다만, 그 회사를 그만두고 나오면 뭐예요? 예, 더 이상 그 사람들의 영향권 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상관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세상은 바로 일시적이고도 한시적인 회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떠한 분입니까. 우리의 창조주이시자 영원한 통치자이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거나 죽은 다음에 주님 앞에 설 때나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다니고 있는 회사 상사와, 우리의 영원한 통치자이신 하나님, 이 중에서 우리가 어느 쪽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뻔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있습니다. 서울이나 동경 같은 큰 도시에서는 밤하늘에도 별들이 잘 안 보입니다만, 우리 교회가 있는 군마에서는 밤이 되면 꽤 많은 별들이 보입니다.

하늘의 별들을 구분하는 대표적인 기준은 그 밝기를 등급으로 구분하는데, 어떤 한 별은 가장 밝은 1등급도 아닙니다. 얼핏 보기에는 다른 별들과 차이가 없어요. 하지만 그 별은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대단히 많은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아오고 도움을 주어왔습니다.

그 별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북극성입니다. 북극성의 밝기는 2등급이라고 합니다. 썩 밝은 편도 아니지요. 그 중심이 흔들렸다면 하늘의 수많은 다른 별들 속에 묻혀서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북극성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사막을 헤매는 사람들, 드넓은 바다를 여행하는 사람들로부터 귀하게 여김을 받았던 이유,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그 중심이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북극성이 과거에는 다른 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지구의 축이 이동하기 때문인데, 먼 옛날에는 다른 별이 북극성처럼 움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별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그 축이 다른 별로 넘어가게 되어서, 지금의 북극성이 중심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 말이 참 흥미롭지 않습니까.

성경에는 이와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4절~5절
“4.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けれども、あなたには責めるべきことがある。あなたは初めの愛から離れてしまった。
だから、どこから落ちたのか思い起こし、悔い改めて初めの行いをしなさい。そうせず、悔い改めないなら、わたしはあなたのところに行って、あなたの燭台 をその場所から取り除く。

여러분, 우리가 받고 있는 축복, 우리가 누리고 있는 축복, 만약에 우리 마음의 중심이 흔들리고 우리 믿음의 중심이 흔들릴 때, 축복의 촛대는 다른 곳으로 옮겨갈지도 모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떤 분은, 아이구 내가 무슨 축복을 받고 있어……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좋은 주일날 성전에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 그리고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있었습니다만, 에서가 야곱에게 어처구니없게도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 장자권(長子の権利)을 빼앗기게 됩니다. 여러분, 다른 건 몰라도 장자권은 살 수도 없고 강제로 빼앗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순서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는 너무나도 큰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에서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태어나서부터 당연히 있는 것, 그러니까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팥죽 한 그릇으로 야곱한테 장자권이 빼앗기고 맙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에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야곱의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을 이어갈 권리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난 다음에 에서는 땅을 치고 통곡을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촛대는 이미 옮겨진 후였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48절~50절을 봅니다.

요한복음 1장 48절~50절
48.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우리가 주님을 알기 전에 먼저 나를 알아보고 불러주신 주님.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께 감사하고, 예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일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보다 더 큰 일을, 이보다 더 큰 축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마음의 중심에 성령님을 모셔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흔들리지 않는 우리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축복을 넘치도록 받는, 지금까지 받은 모든 축복보다도 훨씬 더 큰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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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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