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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6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2019년 2월 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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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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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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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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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イエス様を信じるということ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아멘?
아멘이세요? 자,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이렇게 질문을 하면 좀 어려우시다면 조금 다르게 물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보고 “아, 저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구나” 라고 하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볼 수 이을까요?

매주 교회에 다니는 것을 보면 알아요?
술 담배 안 하는 것이요?
식사하기 전에 기도하는 것을 보면, 아, 저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나요?

자, 그렇다면 반대로 물어보겠습니다.

매주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닌가요?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에요?
식사하기 전에 기도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닌가요?

여기에 대한 기준은 어쩌면 사람마다 제 각각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우리의 믿음은 성경에서 시작해서 성경으로 끝나는데 왜 이렇게 사람마다 다를까요.

그것은 뭐 성경의 해석차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물론 성경에 있어서의 견해나 해석 차이는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신학자들 사이에도 있습니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는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자기 주장을 하는 사람들, 그것도 아주 강력하게 자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신앙적으로 보았을 때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당연히 중요하지요.

그래서 믿음에 열성이 있는 분들을 보면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기도를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기도원도 많아요. 저도 한국에 있을 때 기도원에 가보기도 했습니다만, 정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밤새도록 기도를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또다시 질문을 드립니다. 간단하게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기도를 왜 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그야 당연히 응답을 받기 위해서 하지……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럼 둘째로. 기도를 오래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한 번 기도할 때 몇 시간이나 오랫동안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기도제목을 갖고 며칠 동안이나 기도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렇다면 기도를 그처럼 오래 하실까요.

이에 대한 답변도 단순합니다. 응답을 빨리 안 해주니까 그러는 거죠……라고 하시죠.

그러면서 성경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다니엘 10장 13절에 보면 다니엘이 기도를 한지 21일 만에 응답을 받았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보면 다니엘 기도회라고 해서 21일 동안 기도를 하는 집회가 열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질문입니다. 가끔 보면 큰 소리로 기도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큰 소리로 기도를 하는지 물어보면 이 또한 성경을 인용하십니다.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 (エレミヤ書)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わたしを呼べ。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に答え、あなたが知らない理解を超えた大いなることを、あなたに告げよう。』

그래서 기도를 큰 소리로 외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질문. 가끔 보면 방언으로 기도를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섬기던 교회에서도 보면 여기저기서 방언 소리가 크게 들려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방언으로 기도를 하시냐고 물으면 역시 성경을 인용해서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同じように御霊も、弱い私たちを助けてくださいます。私たちは、何をどう祈ったらよいか分からないのですが、御霊 ご自身が、ことばにならないうめきをもって、とりなしてくださるのです。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무엇을 기도 드려야 할지 몰라도 성령님께서 기도를 드린다는 거예요. 그래서 방언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질문과 그 답변.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두 수긍이 가시나요? 납득이 가시나요? 수긍이 가거나 납득이 가지 않더라도 최소한 이런 말씀들은 교회에 어느 정도 다녀보신 분들이라면 익숙한 말씀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첫번째 질문. 기도를 왜 하는가……이 부분에 대해서는 마지막에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째 질문. 기도를 왜 오래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빨리 응답을 안 해주시기 때문에 오래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는 기도를 오래 한다고 하면서 오래 하는 방법을 책으로 출판하신 분들도 계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또 누구는 기도를 몇 시간 한다, 자기는 몇 시간 하는 말씀도 들어보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6장 7절~8절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また、祈るとき、異邦人のように、同じことばをただ繰り返してはいけません。彼らは、ことば数が多いことで聞かれると思っているのです。
ですから、彼らと同じようにし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がたの父は、あなたがたが求める前から、あなたがたに必要なものを知っておられるのです。

예수님께서는 오랫동안 기도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기 또 하는 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것은 이방인들이나 하는 기도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세요.


그리고 세 번째 질문. 큰 소리로 기도를 해야 할 필요가 있나요?

이사야 59장 1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見よ。主の手が短くて救えないのではない。その耳が遠くて聞こえないのではない。

우리가 무슨 그림에 보면 하나님 얼굴이 수염도 나고 머리도 하얗고 하니까 노인이라서 귀가 잘 안 들리실까봐 큰 소리로 기도해야 하는 건가요? 성경에서 하나님은 도움의 손이 짧지도 않고 귀가 둔하지도 않다고 기록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어느 작은 교회에 다닐 때의 일인데, 거기서 찬양을 인도하는 자매가 있는데 매주 보면 목이 쉬어 있어요. 그러니 찬양이 제대로 될 리가 있겠어요? 고음은 고사하고 보통 음도 소리가 잘 안 나옵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목이 쉬어있냐고 하니까, 아~ 매일 밤 주님께 부르짖어보래요.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나……그러면서 마치 자신은 무슨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처럼 말을 하는 모습을 보고 참 안타까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니, 그래도 찬양을 한다는 사람이 자기 목소리 하나 관리 못해서 되겠습니까? 그러면서 그게 믿음이 좋다는 것인가요? 참으로 딱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요.

다음은 네 번째 질문. 방언으로 기도를 하시는 분들을 보면, 물론 이는 성경에 나옵니다. 사도 바울도 방언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8절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라고 고백합니다.

私は、あなたがたのだれよりも多くの異言で語っていることを、神に感謝しています。

그 뿐만 아닙니다.

같은 고린도전서 14장 39절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라고 까지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ですから、私の兄弟たち、預言することを熱心に求めなさい。また、異言で語ることを禁じてはいけません。

방언은 엄연히 성경에 기록된 은사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 교회를 보면 여기저기서 큰 소리로 방언을 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앞서 말씀 드렸던 기도원에서도 얼마나 많은 분들이, 그것도 한밤중에도 큰 소리로 방언기도를 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특별히 방언에 대해서 많이 적힌 고린도전서 14장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있습니다.

14장 13절~14절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そういうわけで、異言で語る人は、それを解き明かすことができるように祈りなさい。
もし私が異言で祈るなら、私の霊は祈りますが、私の知性は実を結びません。


이 말씀을 보면 바울은 방언을 하는 것도 좋지만 그 방언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는 통역의 능력도 달라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방언으로만 기도 하고 그 뜻을 모른다면 마음에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 (知性は実を結びません), 즉 유익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14장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절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愛を追い求めなさい。また、御霊の賜物、特に預言することを熱心に求めなさい。

14장 5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私は、あなたがたがみな異言で語ることを願いますが、それ以上に願うのは、あなたがたが預言することです。異言 で語る人がその解き明かしをして教会の成長に役立つのでないかぎり、預言する人のほうがまさっています。

방언만을 구하지 말고 오히려 예언하기를 구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교회에 몇 십 년을 다니면서 방언을 한다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이 봐왔습니다만, 방언을 통역한다는 분은, 그런 분들이 계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만, 아직 제가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습니다.

참고로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인터넷에 방언이나 방언을 통역한다는 은사를 흔히들 “통변의 은사”라고 하는데, 이를 검색해 보니까, 쪼금 요상한 사이트들이 많이 떠서 금방 닫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언을 한다”고 하는 분들은 특히나 만나본 적도 없고, 자기는 방언 통역이나 예언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는 사람들 역시 본 적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3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ですから、教会全体が一緒に集まって、皆が異言で語るなら、初心の人か信じていない人が入って来 たとき、あなたがたは気が変になっていると言われることにならないでしょうか。(気が狂っていると言わないでしょうか。)

14장 28절~29절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解き明かす者がいなければ、教会では黙っていて、自分に対し、また神に対して語りなさい。
預言する者たちも、二人か三人が語り、ほかの者たちはそれを吟味しなさい。

성경에는 분명히 이렇게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즘도 한국 교회에 보면 여기저기서 큰 소리로 막 방언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9절을 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同じようにあなたがたも、舌で明瞭なことばを語らなければ、話していることをどうして分かってもらえるでしょうか。空気に向かって話していることになります。

그리고 14장 19절
“그러나 교회에서 내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しかし教会では、異言で一万のことばを語るよりむしろ、ほかの人たちにも教えるために、私の知性で五つのことばを語りたいと思います。

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끔 보면 교회나 사람에 따라서는 방언 은사를 중요시하는 나머지 방언 은사가 없는 사람은 믿음이 적은 사람으로 보는 경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글쎄요. 제가 방언을 해본적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방언기도를 한다면서 다들 보면 “까라바리야 사라바리야 까라바리야 사라바리야” 하고 반복하거나 “렐렐렐렐렐……”하고 하는 모습을 보면 글쎄, 저게 정말 방언인가 하는 생각도 들기도 합니다.

성경 말씀대로 저도 방언을 금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방언 기도를 하신다면 먼저 성경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를 보시고 성경에 적힌 그대로 하셔야지만 은혜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첫 번째 질문입니다. 기도를 하는 이유는 응답을 받기 위해서입니까. 마침 요즘은 일본의 수능시즌인데, 만약에 예수님을 믿는 100명의 수험생이 1지망에 합격하게 해달라고 모두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누구는 합격을 했는데 누구는 합격이 안됐습니다.

그렇다면 합격할 수 없었던 사람은 기도를 헛한 건가요? 기도에 있어서 패배자인가요?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니, 그렇잖아요. 기도는 응답을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면, 합격할 수 없었다는 것은 응답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니 결국 기도의 실패자라는 뜻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입니까.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나는 것입니까.

여러분. 목사님 설교 말씀 몇 마디 듣고, 성경 구절 몇 마디 외우고, 그것이 믿음이라 생각하고, 나중에는 그저 죽어라고 기도만 하는 것. 이것이 믿음인가요?

저는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무엇이 빠졌습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이 빠졌습니다. 말씀이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자기가 드리는 기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어떻게 올바른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는 우리의 고집을 세우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고집을 이기기 위해서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에 술 담 배 안 하면서 사람한테 상처 입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금식 철야 한다면서 자기만 생각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이 어떻게 올바른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すべて疲れた人、重荷を負っている人はわたしのもとに来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休ませてあげます。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쉬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 속에서 쉼을 얻지 못했다면 이는 우리의 믿음을 한 번 점검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 응답, 소원 성취가 문제가 아닙니다. 기도를 하는데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철야를 합니다. 그래도 안 되니까 금식을 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어떻게 해요? 예,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이 살았다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한탄을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께서 최근에 장난감 가게에 가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저도 얼마 전에 우연히 지나가다가 장난감 가게에 한 번 들어가봤습니다만, 그러면 꼭 들려오는 소리가 뭐예요? 예, 가끔 보면 애들 울음 소리가 들려옵니다. 장난감을 사달라고 막 울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가 사달라는 것을 다 사주나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예요? 아니에요. 아이를 사랑합니다. 오히려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때로는 그렇게 아이가 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들어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그 부모를 원망해야 하나요? 엄마 아빠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안 사준다고 믿어야 하나요? 아닙니다. 그건 오히려 잘못된 생각이죠.

이를 모르는 어른들이 있어요? 아니요. 없습니다. 알죠. 그러면서 왜 자기는 하나님한테는 그렇게 고집을 부리십니까. 그리고 안 들어주면 왜 억지를 부리고 하나님을 원망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 안에서 쉼을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 생각에는 이게 이렇게 되어야 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이건 이렇게 되어야 하고, 저건 저렇게 되어야 해……이건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이 되겠다는 말이나 다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 생각을 따르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 대로 하나님이 움직여야 한다고 믿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얼마 전에 뉴스를 보니까 결혼생활이 힘들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 보면요. 회사 일이 너무나도 힘들어서 또 역시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참 안타깝죠. 그리고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결혼생활이 힘들면 좀 별거를 해본다거나, 그것도 안 되면 차라리 헤어지지.

회사? 아무리 좋은 회사, 아무리 힘들게 들어간 회사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힘들면 좀 쉬던가, 아니면 차라리 그만 두면 되지, 왜 그렇게 슬픈 결말을 맞이해야만 했을까.

사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보면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생각이 모자라서도 아닙니다. 오히려 좀 생각이 모자라거나, 생활 자체에 있어서도 좀 대충대충 하고 그런 사람들은 이런 경우가 드물어요. 반대로 정말 착실하고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사람들이 이런 안타까운 일들을 당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제가 좀 심하게 말씀 드렸는지 모르지만요, 솔직히 이런 고민을 하는 분들을 보면요, 그냥 대충대충 믿는 사람들은 이런 고민들도 안 해요. 믿음이 참 좋은 분들, 주님을 어떻게든 잘 믿어보려고 애를 쓰는 분들이 철야도 하고 새벽기도도 하고, 기도원에 가보기도 하고 금식도 하기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안 되니까 답답해하고 절망도 하고,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一人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요한일서 4장 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私たちは自分たちに対する神の愛を知り、また信じています。神は愛です。愛のうちにとどまる人は神のうちにとどまり、神もその人のうちにとどまっておられます。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냥 말로만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무참하게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나도 명확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쉼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우리는 잘 됩니다. 지금 잘 안 되더라도 결국은 잘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해주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61장 3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シオンの嘆き悲しむ者たちに、灰の代わりに頭の飾りを、嘆きの代わりに喜 びの油を、憂いの心の代わりに賛美の外套を着けさせるために。彼らは、義の樫(かし)の木、栄光を現す、主の植木と呼ばれる。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초조해하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찬송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생이 힘 드십니까. 고달프십니까. 정말 죽고 싶으십니까.

그 마음, 그 힘든 마음. 설령 아무도 못 알아준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항상 기다리고 계십니다. 힘 드시면 성경을 펴 보십시오. 두 눈을 감고 주님께 기도를 드려보십시오. 주님께서 주님의 마음을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피멍 든 가슴을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바로 주님 안에서 쉼을 얻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항상 불안해하고 항상 초조해한다면 이는 우리 믿음에 분명히 문제가 있다는 신호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우리는 결국은 잘 됩니다. 지금은 힘들고 어렵더라도 결국은 잘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 안에서 진정한 쉼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사랑의 하나님, 사랑의 예수님, 그리고 사랑의 성령님을 믿고 의지하며, 사랑의 주님 품 안에서 진정한 쉼을 얻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167회 창대한 축복의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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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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