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회 보아야 할 것만을 봅시다
2018년 1월 1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Last Update 2019. 5. 21

민수기 13 장1절~2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되 그들의 조상의 가문 각 지파 중에서 지휘관 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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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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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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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보아야 할 것만을 봅시다’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병원에 갑니다. 그럼 때로는 엑스레이를 찍지요. 그리고 탁탁 꽂아놓고 설명을 합니다. 우리 눈에는 그저 하얗고 까만 사진일 뿐이죠. 하지만 그 분들은 그 사진을 보고 어디가 정상인지 또는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정확하게 집어냅니다. 왜 그게 가능한거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분들은 전문가이기 때문인 것이죠. 다른 전문가들은 어떻습니까. 날씨를 예측하는 기상예보관은 똑같은 구름을 보고도 이것이 비구름인지 아닌지를 알아봅니다. 어디 보는 것만이 전문가인가요. 자동차 기술자는 엔진소리를 듣기만 해도 벌써 이 차가 몇 년쯤 된 차고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를 알아 맞춘다고 해요.
이와 같은 사람들을 바로 우리는 전문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은 남들과 똑같은 것을 보고 듣더라도 무엇이 핵심인지, 무엇이 군더더기인지를 분간하고 잘 대처하는 사람들, 바로 그와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전문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민수기 13장 1절~2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되 그들의 조상의 가문 각 지파 중에서 지휘관 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
애굽을 탈출하고 홍해를 건너 가나안 땅 바로 앞에까지 왔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 정복에 앞서, 각 지파의 지휘관들을 보내서 정탐을 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지휘관을 새로 뽑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단지 지휘관들을 보내라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당시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의 수를 보면 성인 남성만 60만명이 넘었습니다. 여기서 각 지파의 인원수들을 보면 적게는 3만에서 많게는 7만에 달했고, 그 지휘관들은 그 지파에서 한 명씩 선발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서는 단순히 그 인원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이스라엘 전체 민족 중에서 선발된 12명의 대표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들은 단지 정탐을 위해서 그냥 급하게 뽑힌 사람이 아니라, 본래부터 각 지파를 대표하는 지휘관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모세는 지휘관들을 모아놓고 명령을 내립니다
민수기 13장 17절~20절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그들을 보내며 이르되 너희는 네겝 길로 행하여 산지로 올라가서 그 땅이 어떠한지 정탐하라 곧 그 땅 거민이 강한지 약한지 많은지 적은지와 그들이 사는 땅이 좋은지 나쁜지와 사는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와 토지가 비옥한지 메마른지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를 탐지하라 담대하라 또 그 땅의 실과를 가져오라 하니 그 때는 포도가 처음 익을 즈음이었더라”
이제 40일동안 정탐하고 난 후에 그들이 돌아와서 정탐결과를 보고합니다. 그런데 12명의 정탐꾼 중 10명의 정탐꾼들의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민수기 14 장 1절~4절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이제 온 민족이 난리가 납니다. 이제 우리는 다 죽었구나. 절망 속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일이 도대체 왜 이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까. 어떤 분들은 열 명의 정탐꾼들의 믿음이 부족해서 그랬다고는 하는데, 물론 그게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더욱 심각한 문제는 다름아닌 바로 모세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민수기 13 장1절~2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되 그들의 조상의 가문 각 지파 중에서 지휘관 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
그런데 모세가 명령한 내용은 어땠습니까.
앞서 민수기 13장17절~20절에 있는 모세의 명령을 정리해본다면, 먼저 그 땅이 어떠한지 정탐하라고 하면서
“곧 그 땅 거민이 강한지 약한지 많은지 적은지와 그들이 사는 땅이 좋은지 나쁜지와 사는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와 토지가 비옥한지 메마른지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를 탐지하라”
라고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명령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 대해서 정탐하라고 하셨지, 언제 그 땅의 거민이 강한지 약한지 많은지 적은지를 정탐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하지만 모세는 이처럼 하나님께서 시키지도 않았던 지시를 내리고 말았습니다. 과연 그렇게 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모세가 그 당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지식에 얽매어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모세가 누구입니까. 비록 그는 히브리 인이었기는 하나, 어렸을 때부터 애굽의 왕궁에서 왕자로 성장했습니다. 몇 살까지요? 예, 그의 나이 마흔까지 애굽의 왕실에 살면서 당시 최고의 학문을 익혔습니다. 그 학문 중에는 당연히 전쟁에 관한 학문도 있었을 것입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애굽의 왕자로서 자라던 모세는 수많은 전쟁에도 참여하고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고 합니다. 즉, 그는 비록 그 후 40여년 간을 광야에서 지내고 지금은 팔십 먹은 노인에 불과했으나, 당시 전쟁에 있어서 전략과 전술에 관해서는 최고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와 같은 그에게 있어서 전쟁을 하기 전에, 공략대상인 지역에 정탐꾼을 보내서 살피는 일은, 굳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더라도 당연히 해야 하는, 그야말로 <상식>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상식은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공략대상 지역을 정탐할 때에는 무엇을 보아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우리 군이 진격했을 때 어디를 어떻게 공략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지역 병력이 강한지 약한지, 많은지 적은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이는 당연하겠죠. 아무리 우리 병력이 강하고 많다 하더라도, 우리보다 더 강하고 더 많다고 한다면 전쟁이 매우 어렵기 되기 때문입니다.
정탐해야 할 것은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 땅이 비옥한지 아닌지, 그 땅에 식량이 어느 정도 있는지도 반드시 파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무리 상대방 병력이 강하다 하더라도 식량이 넉넉지 않으면 오래 버틸 수가 없습니다. 즉, 우리 병력이 약하고 상대 병력이 강하다 할지라도 우리 쪽에 식량이 넉넉하게 있고 상대방에게는 식량이 부족할 경우, 속전속결을 하면 불리하지만 장기전으로 몰고 가면 승산이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의 식량사정을 알아오는 것도 정탐꾼이 해야 할 중요한 역할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당시 전쟁에 관한 훌륭한 학문을 했던 모세는 정탐꾼을 보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어땠을까요.
“아니, 하나님, 내가 전쟁에 있어서는 공부도 많이 했는데, 제가 그걸 모를까봐 그러세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 제가 이제 각 지파 지휘관들에게 이렇게 멋지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간단히 말씀하셨지만, 제가 내린 명령을 보세요. 아주 구체적으로 하지 않았어요? 저 잘했죠?”
어쩌면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자, 이제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를 합니다. 그들은 모세의 명령을 충실히 지켰습니다.
민수기 13 장27절~29절입니다.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주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주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주하더이다”
그리고 민수기 13 장31절~33절까지에는요,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그들의 보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세가 그 가나안 땅을 정탐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뭐래요? 예, 하나님의 말씀처럼 정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것도 모자라서 거기서 난 과일도 증거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요? 예, 올라가서 빨리 그 땅을 얻어야지요! 그런데 모세는 또 뭐라고 지시했었습니까. 예, 그 땅 거민이 강한지 약한지 많은지 적은지를 보고하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그들은 뭐라고 해요? 예, 거기 사는 사람들이요? 무지 크고 무지 강해요. 그리고 그 수도 어마어마하게 많아요. 이제 우리는 다 죽었어요!
이게 그들의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들어가서, 아! 여기가 하나님께서 주실 땅이구나!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너무나도 좋은 땅을 우리에게 주시려는구나! 하고, 이렇게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제 새로운 땅에 들어가서 살아갈 희망을 꿈꾸면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모세가 보낸 정탐꾼 12명 중에서 10명은 모세의 말을 너무나도 충실히 지켰습니다. 그 땅만 본 것이 아니라 그 거민들까지도 충실히 보았기 때문에, 덜컥 겁을 먹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라고 한 땅은 분명히 아름답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으나, 모세가 보라고 했던 거민들을 보니 우리들은 이제 다 죽은 목숨이라는 결론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온 백성이 밤새도록 대성통곡을 합니다. 울부짖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님께서 보라고 하신 것만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수아와 갈렙이었습니다.
민수기 14장 6절~10절까지를 보겠습니다.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는데 그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여러분,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정탐하라고 했습니다. 그 땅의 거민들이 강한지 약한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땅 거민들이 많은지 적은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기로 한 땅을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요. 모세도 거기 사는 사람들만 보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를 보라고도 했지요.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유혹이나 함정은 가장 약한 일부분에서 시작합니다. 작은 쥐구멍 때문에 댐이 무너진다는 말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 오래된 일본 토크쇼 동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사회자가 어떤 여성 출연자한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여성 출연자는 얼마 전에 이혼을 한 것 같은데,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그 전 남편이 좀 잘못을 저질렀나 봐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이 여성 출연자가 화가 나서 이혼을 한 모양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두고 사회자가 이 여성 출연자한테 말을 합니다. 아마도 여성 출연자가 사회자보다 후배인 것 같은데, 이 사회자가 뭐라고 하냐 하면, 물론 너의 전 남편이 잘못을 저지른 것은 맞다. 그러나, 그 나쁜 부분은 5%에 불과하다. 그 전 남편의 나머지 95%는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 사람의 좋은 부분인 95%를 바라보지 않고 나쁜 5%만 바라보게 되면, 결국 그 5%가 그 사람의 100%로 보이게 되고 만다. 너는 전 남편의 나쁜 5%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좋은 부분인 95%를 보았어야 했다. 그런데 너는 좋은 부분인 95%를 보지 않고 그 사람의 나쁜 부분인 5%만을 보았기 때문에 마치 그 나쁜 부분인 5%가 100%처럼 보인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여기에 하나 덧붙인다면 그 사람의 나쁜 5% 중에서 4.2%는 너한테 책임이 있다……뭐,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참 웃기면서도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슨 남자는 옳고 여자는 나쁘다는 것이 아니에요. 반대의 일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시겠다고 한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마음 속에 겁이 자리잡고 부정적인 생각이 꽉 들어찬 그들에게 있어서는 아무리 좋은 땅이고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귀에 안 들어옵니다.
이게 바로 믿음이 적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왜 그들의 믿음이 적어졌습니까. 그것은 바로 보아야 할 것과 보지 말아야 할 것을 혼동하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의사가 엑스레이 사진을 볼 때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이유는, 보아야 할 것과 보지 말아야 할 것을 제대로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동차 전문가가 엔진 소리를 듣고 그 자동차의 증세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이유는, 들어야 할 것과 듣지 말아야 할 것을 제대로 분간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땅만 보라고 말씀하시면 땅만 보면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은 것까지 굳이 보고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그런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라고 한 것만 보았다면 어땠을까요. 예, 그들은 즉시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라고 한 것 외의 것을 보면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친 그들은 결국 어떻게 됐습니까.
어떤 분들은 즉시 못 들어가고 40년 뒤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아닙니다. 그건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40년 뒤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40년 전 당시 미성년자들이었을 뿐이고, 당시 대성통곡을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던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광야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여호수아는 정탐꾼을 보낼 때 어떻게 말하는지 한 번 볼까요? 여러 말을 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 2장 1절 전반부를 한 번 봅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다른 말을 하지 않습니다. 거민이 강한지 약한지 어쩌구 저쩌구 하는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라고 말씀하신 것만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회는 단 한 번 뿐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만 믿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느냐, 아니면 이것저것 세상적인 것을 따져가며 계산기를 두드려가면서 결국 광야에서 죽고 마느냐. 이 둘 중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선에 집중해야 합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칠 시간이 없습니다. 망설일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라고 하신 것만 보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을 정복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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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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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회 순종하는 마음
2018년 1월 7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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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6장 8절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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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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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순종하는 마음” 従う心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새해 2018년 첫 주일예배입니다. 일본 같은 경우에는 보통 1월 3일~4일 정도까지 노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이제 연휴도 끝나고 대부분이 평상시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떠세요? 이제 좀 2018년이라고 하는 새해에 적응이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휴일에서 벗어나 머리 회전에 도움이 되도록 제가 문제 하나를 내드릴까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는 친구들끼리 여러 가지 수수깨끼를 내면서 놀았던 기억이 있습니다만, 이 수수깨끼의 답이 무엇인지를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분명 내 것은 내 것인데,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쓰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답을 아실 수 있겠어요? 예, 답은 간단합니다. 무엇이에요? 바로 이름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은 분명 내 것이지만 나 자신이 그 이름을 쓸 때보다도 다른 사람이 오히려 나를 부를 때 많이 사용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름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볼 기회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도 그렇겠죠. 내가 내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뭐, 때로는 자신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바꾸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이름을 아예 없애버리고자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당연한 말씀입니다만, 이름을 없애고자 하더라도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오늘은 이 이름에 대해서 한 번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했으면 합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떠나서 모두가 가지고 있는 이 이름, 돈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서 많이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요,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하나밖에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이 이름이야말로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한 사람당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이름, 그러나 이름의 가치라는 것을 보았을 때, 모두가 똑같다고는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이름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본다면 여러분께서는 그 기준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물론 쉽게 떠오르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름>이라는 것을 떠오르실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알리려고 노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장 알기 쉬운 경우가 바로 정치인들이겠지요. 선거 때 보면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포스터에 이름을 찍어서 여기저기 붙이기도 하고, 자신의 이름이 적힌 어깨띠를 걸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자기 이름을 소리높이 외칩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그 때까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병원이나 노인시설 같은 곳을 방문해서 서툰 솜씨로 일을 돕기도 합니다. 다 이것이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다 자기 이름을 남들한테 알리고 선거에서 당선되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이름을 알리려고 힘을 쓰는 사람들은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사업을 하시는 분들도 물론이지만 웬만한 직장인들은 모두 무엇을 가지고 있어요? 예, 명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회사원들에게 있어서는 이 명함을 주고 받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회사에 들어가면 맨 처음에 받는 매너교육 중 하나가 바로 이 명함을 주고 받는 방법입니다.

이처럼 내 이름을 누군가가 알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내 이름이 아무리 멋지고 훌륭한 이름이리고 한다 하더라도 아무도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어요. 그렇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이름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히 내가 그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내 이름을 불러줄 때에 비로소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름의 의미는 누군가가 나를 불러줄 때에만 그 의미가 있다는 점은 이해가 가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이름의 가치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가지는 이름의 가치는, 그렇다면 무조건 많은 사람들이 불러줄 때에만 가치가 올라가나요? 아니요. 꼭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솔 펄머터 ソール・パールマッター>
<브라이언 슈밋 ブライアン・P・シュミット>
<애덤 리스 アダム・リース>……
이런 분들의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단 세흐트만 ダニエル・シェヒトマン>이라는 이름은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모르세요?

그렇다면 <브루스 보이틀러 ブルース・ボイトラー>
<율레스 호프만 ジュール・ホフマン>
<랠프 스타인먼 ラルフ・スタインマン>이라는 이름은 어떠십니까. 이 분들도 잘 모르시겠습니까. 흠……그러시군요.

사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한테 있어서도 무척이나 낯선 이름들이긴 합니다만, 이분들은 대단히 유명한 분들입니다. 어느 정도 유명한 분들이냐 하면 이 분들은 모두 2011년에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이라고 할 수 있는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들입니다.

<솔 펄머터> <브라이언 슈밋> <애덤 리스>는 분들은 노벨 물리학상을, <단 세흐트만>이라는 분은 노벨 화학상을, 그리고 <보이틀러> <호프만> <스타인먼>이라는 분들은 노벨 의학 • 생리학상을 각각 2011년에 수상한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의 이름에 대한 가치는 어떻습니까. 사실 우리 같은 비전문가가 알지는 못하더라도 그 쪽 전문 분야에 있어서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인물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처럼 큰 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이와 같은 분들의 이름에 대한 가치는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반면에, 글쎄요. 또 어떤 이름은 이 또한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이름이지만, 일부 분야에 있어서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한테 알려져 있냐 하면, 경찰이나 검사들, 깡패들, 교도관들한테는 아주 잘 알려진 이름이 있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름이라고 해서 그 이름에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겠어요? 이런 이름에 대한 사회적인 가치는 좀 문제가 많겠지요.

이와 같이 그 이름의 가치란 단순히 무조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그 이름을 많이 알고 있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들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고, 정작 우리 이름은 어떻겠습니까.

예배가 끝나면 예배 때 전해드렸던 말씀을 가지고 동영상을 촬영해서 여러 곳에 메일을 보내드리고 있습니다만, 그 중 한 일본 목사님께서 제게 매주 섬기시는 교회의 주보를 보내주고 계십니다.


사실 교회 일을 하다 보면 다른 교회 주보를 볼 기회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만, 이렇게 매주 주보를 보내주시니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이 목사님께서 보내주시는 주보에 보면 헌금을 하신 분들의 성함이 적혀 있는데, 가끔 <신지명>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지명, 즉 하나님이 이름을 아신다는 한자겠지요. 처음에 봤을 때는 이게 무슨 뜻일까 했습니다만, 아마도 이름을 적지 않고 헌금을 하신 분을 이렇게 주보에 적어놓으신 것이 아닐까 했습니다. 이름이 헌금봉투에 적혀 있지 않으니 우리들은 그 이름을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을 알고 계시다는 뜻이겠지요.

저는 어려서부터 일본에 살면서 믿음생활을 했습니다만, 정작 일본 교회에 다녀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이런 표현이 일본교회에서는 일반적인 것인가 해서 인터넷에 찾아보니까 없더라구요. 그래서 아무래도 이 <신지명>이라는 표현은 이 교회에서 사용되는 독특한 표현 같았습니다.

저희 주보에도 헌금으로 섬겨주시는 분들을 제가 주보에 기록합니다만, 그 중에는 성함을 적지 않은 분들을 그저 <무명>이라고 해왔습니다만, 사실 무명……이름이 없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또 <신지명>이라고 똑같이 따라 하기에는 좀 죄송하다는 마음이 들어서, 얼마 전부터는 <무명>이 아니라 <무기명>, 그러니까 <이름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적지 않았다>는 식으로 주보에 싣고 있습니다.

이 교회에서 보내주신 주보에 적혀 있었던 <신지명>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우리에게 있어서 정말로 가치가 있는 이름이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 그리고 세계에는 이름만 대면 어느 교회 목사님이라고 널리 알려진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 여겨지는 이름에 대한 가치가 꼭 이 세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가치와 같을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렇다고 무슨 유명한 목사님이 하나님 나라에서 가치가 없다고 말씀 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기준과 가치가 다를 수도 있다고 하는 점입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두 성경구절을 한 번 비교해볼까 합니다.

하나는 오늘 본문인 이사야 6장 8절 말씀입니다.

이사야 6장 8절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私は、「だれを遣わそう。だれが、われわれのために行くだろう」と言っておられる主の声を聞いたので、言った。「ここに、私がおります。私を遣わしてください。」

또 한 구절은 누가복음 10장 2절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0장 2절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そして、彼らに言われた。「実りは多いが、働き手が少ない。だから、収穫の主(しゅ)に、収穫のために働き手を送ってくださるように祈りなさい。

이 두 말씀, 어떻게 보면 별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말씀입니다만, 교회에서는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교회에서,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쓰입니까.

예를 들어서 무슨 교회나 교단에서 무슨 회장 자리에 출마하려고 해요. 아니면 믿는 사람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에 출마하려고 할 때 어떻게 기도해요?

예, 그렇죠.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主よ、ここに、私がおります。私を遣わしてください。

이 말이 뭐예요? 하나님 앞에서 막 손 들면서, 저요, 저요, 저 여기 있으니까 저 시켜주세요. 하는 거잖아요. 나 당선시켜 달라는 것 아니겠어요?

하지만 반면에 뭐예요? 교회에서 봉사해야 할 일이 있어요. 전도해야 할 일이 있어요. 돈이나 시간으로 섬겨야 할 일이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요?

예, 그렇죠.


“주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主よ、実りは多いが、働き手が少ない。だから、働き手を送ってください。

이게 무슨 뜻이에요? 물론 본인도 열심히 일을 하면서, 그래도 나 혼자 이 일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하니까 함께 일을 할 사람들을 보내주세요……라고 기도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그 중에는 뭐예요? 나는 이래저래 바쁘고 하니까 좀 나 대신 일을 할 사람들을 보내달라는 식으로 기도하는 경우도 솔직히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정말로 훌륭한 교회, 훌륭한 사회는 이 두 말씀의 쓰임새가 지금과는 반대가 되어야 하겠지요. 무슨 회장이요? 무슨 의원이요? 아이, 그런 건 저보다도 더 훌륭한 인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내주세요……라고 기도하고,

힘든 일, 궂은 일, 봉사하는 일, 섬기는 일, 티 안 나는 일 같은 것을 할 때에는, 너도나도 손을 들면서 “내가 여기 있으니까 내가 그 일을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그와 같은 교회, 그와 같은 사회가 있다면이야 무슨 법률이 필요하고 무슨 율법이 필요하겠습니까.
우리는 마지막 때에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상을 받아야 합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안 알아준다 하더라도 우리가 묵묵히 인내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하나님의 일을 섬기고 하면 주님께서 나를 인정해주십니다.

생각해보세요. 나중에 내가 하늘나라에 가니까 우리 주님이 내 이름을 부르면서 반겨주십니다. 이건 무슨 제 상상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8장 56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あなたがたの父アブラハムは、わたしの日を見ることを思って大いに喜びました。彼はそれを見て、喜んだのです。」

아브라함도 예수님을 볼 것을 기대하고 즐거워하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기뻐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중에 하늘나라에 갔을 때 마주치는 천사들과 천국시민들이 모두가 나를 알아줍니다. 반겨줍니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셨습니다 하고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순간이겠습니까.

그런데 반면에 어떤 경우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복음 11장 46절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しかし、イエスは言われた。「おまえたちもわざわいだ。律法の専門家たち。人々には負いきれない荷物を負わせるが、自分は、その荷物 に指一本さわろうとはしない。

자기들은 몸에 힘을 주고 이래라 저래라 성도들한테 말만 하면서 자기들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나중에 천국에 가서, 예수님, 저 아시죠? 저 이렇게 유명한 사람이었어요. 내가 이렇게 많은 책도 썼어요. 이렇게 큰 교회도 지었어요. 이렇게 무슨 박사 학위도 많이 받았고요, 높은 직분도 받았고요, 이렇게 많은 상도 받았어요……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만약에 마태복음 7장 23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しかし、その時、わたしは彼らにこう宣告します。『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全然知らない。不法をなす者ども。わたしから離れて行け。』

라고 말씀하시면 어쩌겠습니까. 그 때는 이미 늦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중에서 70명을 뽑아서 전도사역을 맡기니까 그들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물리치니까 귀신들도 항복했었다고 기뻐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누가복음 10장 20절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だがしかし、悪霊どもがあなたがたに服従するからといって、喜んではなりません。ただあなたがたの名が天に書きしるされていることを喜びなさい。」


우리가 진정으로 기뻐해야 하는 일은 이 세상에서 믿음 좋다고, 높은 직분을 받았다고, 출세했다고,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하물며 귀신을 쫓아냈다고 기뻐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기뻐해야 하는 것은 우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것으로 기뻐해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지어준 이름, 아무리 훌륭한 뜻이 담긴 이름이라 하더라도, 그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평범하고 소박한 이름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자주 불러주시고 하나님께서 아껴주시고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는 이름이라면, 하늘나라에 있는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이라면 이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이름이 어디 있겠습니까.

올 한해 하나님께서 우리 이름을 자주 불러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무엘상 3장 1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불렀을 때 사무엘이 대답합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이 만약에 회사라고 생각해보세요. 어느 날 사장님이 한 직원을 불러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게 좀 귀찮은 일인데 말이야. 이걸 자네가 해줄 수 있나? 그러면 그 직원이 뭐라고 해요? 예, 알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는 사장님이나 회장님이 무슨 중요한 일만 있다 하면 꼭 그 직원을 찾아요. 그러면 어때요? 예, 그 사람의 출세는 이미 보장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무슨 일이 있을 때면 내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그리고 일을 맡겨 주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하이구, 왜 귀찮게 나한테만 그래요? 나 돈도 시간도 없는 사람이에요.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그러시겠습니까. 아니면,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그러시겠습니까.


그래도 아직 감이 안 잡히시는 분들을 위해 말씀 드립니다. 예를 들어서 생각해보십시오. 저 넓은 운동장에 만원자리 지폐가 막 쌓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저거 다 너 가져. 그러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아휴, 저걸 귀찮게 어떻게 다 가져가요? 사람들을 더 불러서 가져가라고 하세요…… 라고 하시겠어요? 아니면 밤을 새고라도 다 싸서 가져가겠어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맡기신다는 것은 저 넓은 운동장에 축복이 많은데 저거 다 너 가져…….라고 말씀하고 계신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이구, 감사합니다. 제가 다 하겠습니다. 라고 하지 않겠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혹시 이렇게 물어보실지도 모릅니다. “너 혼자 하기에 좀 벅차면 누구 좀 더 부를까?” 이걸 보고 눈치가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말하겠어요? 아닙니다. 괜찮아요. 이 축복, 다 내가 가지겠습니다!

이것이 욕심이라고 생각하세요? 욕심이라고 다 똑 같은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야말로 거룩한 욕심입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バプテスマのヨハネの日以来今日まで、天の御国は激しく攻められています。そして、激しく攻める者たちがそれを奪い取っています。

이렇게 되면 내 이름을 얼마나 많이 부르시는지 하늘나라에서 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예요. 천사들이 그럽니다. 도대체 우리 하나님은 뻑 하면 그 사람을 찾아서 일을 맡기신단 말이야……뭐 이러면서 하늘나라에 소문이 퍼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시는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힘이요? 능력이요? 지혜요? 돈이요? 시간이요?

예전에 007 영화를 보면 시작이 대략 비슷해요. 007 제임스 본드가 무슨 작전 수행 임무를 받습니다. 그리고는 그냥 가라고 해요? 아뇨. 놀랍고도 신기한 도구 같은 것을 다 받습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일을 맡기실 때 그냥 맨몸으로 시킬 정도로 무책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지혜를 주십니다. 돈이 필요하다면 돈도 주시고 시간이 필요하다면 시간도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순종하는 마음> 이것 뿐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드리게 되면, 하늘나라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올 한해 2018년. 하나님 나라의 유명인사가 됩시다. 하나님 나라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도록 합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고요? 예, <순종하는 마음>뿐입니다. 그 외에 필요한 모든 것은 다 알아서 채워주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믿고 신뢰하고 올 한해 주님께 우리의 <순종하는 마음>을 드림으로 말미암아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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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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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111회 우리가 받아야 할 축복
2018년 1월 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신명기 28장 6절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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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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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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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가 받아야 할 축복” 私たちが受けるべき祝福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한국에서 일본으로 올 때, 일본에서도 운전을 해야 할 텐데, 당연히 일본 면허증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요.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예, 한국에 있는 면허시험장에 가서 국제운전면허를 발급 받습니다. 이 한국 면허증과 국제면허증을 갖고 있으면, 한국과 체결을 맺은 나라에서는 그 나라 면허가 없더라도 운전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국제운전면허증의 특징이 있습니다. 좋은 점이 하나, 그리고 나쁜 점이 하나입니다. 먼저 좋은 점은 무엇인가 하면요, 설령 무슨 위반을 했다 하더라도 벌점이 붙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기사 그렇겠지요. 벌점이 붙으려면 그 나라에 면허가 등록되어 있어야 할 텐데 국제면허는 그런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위반을 해도 벌점을 붙일래야 붙일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점이 뭐 좋은 점이라면 좋은 점일 수도 있을 지도 모릅니다. 뭐, 두 말 하면 잔소리겠습니다만, 위반을 하면 안 되죠.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운전은 방어운전이요 안전운전입니다. 새해에는 안전운전을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그러면 안 좋은 점은 무엇인가 하면 바로 기간이 1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식 체류자격, 즉 유학이나 취업이나 하는 비자가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정규면허로 갱신을 받아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국제면허의 이런 부분을 악용을 해서 한국에 갈 때마다 국제면허를 발급 받아서 온다는 분들도 계신데,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들이 무슨 정치인이나 공무원들을 보고 청렴해야 한다고 말을 하면서, 그래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나 자신이 법도 안 지키고, 매너도 안 지키고 무슨 부정행위나 탈세 같은 것을 한다거나 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우리부터 지킬 것은 지키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은 1년이라고 하는 특별한 기간을 주는 것일까요.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그 중 하나는 바로 그 나라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적응할 수 있는 기간을 허용해주는 의미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또한 이 국제면허증이라고 하는 것이 완벽한 면허증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임시 면허인 셈이죠. 그래서 원칙적으로는 국제면허증을 가지고 운전할 때에는 반드시 본국에서 발급받은 정식 면허증도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국제면허증이 그 나라에서 신분증으로 사용할 수 없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식면허를 발급 받으면 어떻습니까. 이제 이는 그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운전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은 것이죠. 당연히 그 나라에서는 어디를 가더라도 완벽한 신분증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교통위반을 하거나 하면 벌점도 쌓이고 벌칙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서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고자 하실 때에 아브라함과 약속을 맺습니다.

창세기 12장 2절~3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なる国民とし、あなたを祝福し、あなたの名を大いなるものとしよう。あなたの名は祝福となる。
あなたを祝福する者をわたしは祝福し、あなたをのろう者をわたしはのろう。地上のすべての民族は、あなたによって祝福される。」

뿐만 아니라 창세기 15장, 17장 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줄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어디를 보아도, 벌을 주겠다는 말씀이 없어요. 그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고만 하십니다.

이제 세월이 흘러 요셉을 비롯하여 야곱과 그의 가족이 애굽으로 들어간 다음 400여 년이 지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내시게 되는 것이죠.

이제 애굽을 탈출하고 홍해를 건넌 이 시점에서 이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언약을 맺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는 언약과, 애굽을 탈출하고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민족과 맺은 언약, 즉시 시내산 언약을 보면 사뭇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 언약에는 없었던 것이 시내산 언약에는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아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바로 조건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시내산 언약 내용을 잠시 살펴봅니다. 이는 먼저 이렇게 시작하지요.

신명기 28장 1절~2절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もし、あなたが、あなたの神、主の御声 によく聞き従い、私が、きょう、あなたに命じる主のすべての命令を守り行うなら、あなたの神、主は、地のすべての国々の上にあなたを高くあげられよう。あなたがあなたの神、主の 御声に聞き従うので、次のすべての祝福があなたに臨み、あなたは祝福される。

그러면서 13절까지 온통 축복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부분만 읽으면 정말 참으로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리고 이 축복을 한 구절로 요약하자면 바로 오늘 본문,

신명기 28장 6절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あなたは、入るときも祝福され、出て行くときにも祝福される。

이 말씀은 단지 들어올 때 복을 받고 나갈 때 복을 받는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할 때라도 복을 받고, 아침이나 낮이나 밤에도 복을 받고, 자나 깨나 복을 받는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이렇게 놀라운 축복을 주시고 마지막으로 14절에 못을 박습니다.


신명기 28장 14절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あなたは、私が、きょう、あなたがたに命じるこのすべてのことばを離れて右や左にそれ、ほかの神々に従い、それに仕えてはならな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놀라운 축복을 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절~2절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킬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14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 중에서도 특별히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면 이처럼 엄청난 축복을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16절부터는 분위기가 완전히 바뀝니다. 지금까지는 복을 주신다는 말이 계속 이어졌습니다만, 이제 무서운 말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바로 <저주 받는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16절부터 68절까지 보면 온통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저주와 징벌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역시 그 내용을 한 마디로 정리한 구절이 바로 19절 말씀입니다.

신명기 28장 19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あなたは、入るときものろわれ、出て行くときにものろわれる。

이 말씀은 앞서 살펴본 말씀인 신명기 28장 6절과 완전히 반대되는 말씀입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할 때라도 저주를 받고, 아침이나 낮이나 밤에도 저주를 받고, 자나 깨나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얼마나 생각만 해도 끔찍한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시기 위한 조건을 다신 것처럼 저주에도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명기 28장 15절 말씀인 것입니다.

신명기 28장 15절을 보겠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もし、あなたが、あなたの神、主の御声に聞き従わず、私が、きょう、命じる主のすべての命令とおきてとを守り行わないなら、次のすべてののろいがあなたに臨 み、あなたはのろわれる。

지금까지는 어긴다 하더라도 적응기간, 그래, 조금 위반을 하더라도 벌칙을 주지는 않을게. 그런데 이제부터는 달라. 이제 너희는 말하자면 임시면허가 아니라 정식 면허야.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게 좋은 거예요? 안 좋은 거예요? 지금까지는 벌칙이 없었지만 이제부터는 벌칙이 있다……이 점만 본다면 안 좋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조금 말을 바꿔 볼까요?

지금까지 당신은 계약직이었습니다. 계약직일 때에는 회사에서 이루어지는 회의나 행사에 반드시 참여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자기한테 맡겨진 일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당신은 정규직이 됩니다. 정규직이 되면 회사에서 있는 모든 회의에 참석도 해야 하고 회사 행사에도 반드시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말씀 하시겠습니까. 아이구, 거 정규직이 되면 무척 귀찮네요. 저는 그냥 계약직이 좋아요. 그러겠어요?

여러분께서 잘 알고 계시겠지만, 그래도 확인 삼아 말씀을 드리자면, 계약직은 정규직 사원과 똑 같은 일을 하면서도 월급이 적습니다. 정규직은 신입사원부터 시작했다 하더라도 대리, 과장, 차장, 부장……이렇게 승진이 됩니다만 계약직은 승진도 없고 월급도 늘지 않습니다. 정규직은 회사에 있어서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 해고시킬 수 없습니다만, 계약직은 계약 기간이 만료되고 재계약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수고하셨습니다”로 끝나고 맙니다.

어느 쪽이 좋겠습니까.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정규직이 훨씬 좋은 것입니다.

시내산 언약을 맺을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어디를 거쳐 왔습니까. 그렇습니다. 홍해를 거쳐왔습니다. 신학자들 중에는 이를 영적인 세례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참으로 절묘한 비유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고 아직 세례도 받지 않은 새신자였을 때는 어떻습니까. 와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합니까. 새신자는 본래 의무도 없고 책임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세례를 받고 정식 교인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요? 의무도 발생합니다. 책임도 생깁니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받기만 했던 일들을 이제는 봉사를 해야 합니다. 그 때까지는 섬김을 받기만 했었는데 이제는 섬겨야 합니다. 교회에 가서도 이제 밥만 먹으면 됐었는데, 이제 돌아가면서 당번을 정해가면서 밥도 해 와야 하고 반찬도 해 와야 하고, 설거지도 해야 됩니다.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영원히 새신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아이가 태어나면 맨 처음에는 무엇을 해야 되요? 예, 해야 되는 게 어디 있습니까. 그냥 젖 먹고 응가 하고 그러는 게 일입니다. 그것만 잘해도 주위에서는 귀엽다고 좋아합니다. 잘한다고 칭찬해줍니다. 냄새 나는 기저기를 갈아 줄 때도 그저 예쁘다고 해줍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고 30년이 지났는데도, 어디 아픈 데도 없는데도, 맨날 기저기를 차고 다니면서, 계속해서 하는 일이라고는 젖 먹고 응가 하는 일 뿐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래도 주변에서는 이쁘다고 해줘야 하나요? 아니요. 이건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아니, 아브라함 때까지는 조건을 안 다시더니, 왜 모세 때부터는 조건을 달기 시작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갑자기 이렇게 까칠하게 구시는 거예요? 이스라엘 민족이 미워서요? 아닙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훨씬 더 큰 축복을 주기 위해서인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장성한 어른한테는 장성한 어른이 받을 축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만, 기저기를 찬 갓난아기한테는 기저기를 찬 갓난아기 수준의 축복 밖에는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축복을 부어주십니다. 하염없이 부어주십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은 큰 탱크를 들고 그 많은 축복을 모두 받아갑니다. 그런데 내 손에는 조그만 컵만 달랑 들고 있어요. 아무리 오랫동안 들고 있어도 그 축복이 다 새어나갑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을 성장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커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명기 28장 6절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あなたは、入るときも祝福され、出て行くときにも祝福される。

이 축복을 받는 것은 우리의 권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의무인 것입니다. 반드시 받아야 하는 축복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신명기 28장 1절~2절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もし、あなたが、あなたの神、主の御声 によく聞き従い、私が、きょう、あなたに命じる主のすべての命令を守り行うなら、あなたの神、主は、地のすべての国々の上にあなたを高くあげられよう。あなたがあなたの神、主の 御声に聞き従うので、次のすべての祝福があなたに臨み、あなたは祝福される。

신명기 28장 14절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あなたは、私が、きょう、あなたがたに命じるこのすべてのことばを離れて右や左にそれ、ほかの神々に従い、それに仕えてはならない。

우리는 이 말씀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새해 우리 교회 말씀은 바로 오늘 본문인 신명기 28장 6절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あなたは、入るときも祝福され、出て行くときにも祝福される。

로 할 것입니다.

우리 한 번 다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あなたは、入るときも祝福され、出て行くときにも祝福される。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あなたは、入るときも祝福され、出て行くときにも祝福される。

이는 예수를 믿으면 무조건 복을 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복을 받기 위해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겠다는 우리 선언, 우리의 다짐, 우리의 결심이 되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새해입니다. 이는 우연히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2018년을 허락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새해를 허락해주신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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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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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0회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삶
2017년 12월 3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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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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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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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삶” イエス様の心を抱く人生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가족끼리 살아도 그렇습니다만, 특히 혼자 살게 되면 이사를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사를 할 때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이 책들입니다. 책들이 참 무거워요. 이사를 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았을 때에는 요령도 모르고 하니까, 짐을 쌀 때 박스 안에 책을 가득 채워 넣습니다. 그러면 이걸 옮길 때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에요. 상당히 무겁습니다. 원래 책을 쌀 때에는 그렇게 하면 안 된대요. 박스 속에 책을 넣을 때에는 절반 정도만 채워 넣고, 나머지는 잡동사니 같은 것을 넣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거워서 도저히 들 수 없게 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짐을 싸게 되면 박스 한 개당의 무게는 줄어드는 대신 개수는 늘어나고 맙니다. 결국 이사를 할 때에 책들이 골칫거리라고 하는 사실에는 별함이 없게 되는 셈이지요.

제가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짐을 쌀 때 가장 골칫거리가 이 책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서울 시내 여기서 저기까지 이사를 한다고 하면, 요즘은 박스에 포장을 다 해놓고 난 다음에는 아예 이삿짐 센터에 맡깁니다. 그러면 그 분들이 와서 전문적으로 운반하는 짐차 같은 것에 싣게 되면 별 문제가 없이 해결됩니다. 그런데 이를 한국에서 일본으로 가져오게 된다면 말이 달라지죠. 그 무게에 따라 돈도 들고, 또 배편으로 일일이 부친다고 하더라도 보통 일이 아닙니다. 박스 하나 당 20킬로 밖에 넣을 수 없다고 하는데, 솔직히 책 몇 권이면 20킬로는 금방 넘어갑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하고 고민을 한 결과, 제가 그 동안 가지고 있든 책들을 처분하기로 했습니다. 그 동안 이사를 할 때마다 가지고 다녔던 책들인데 애착도 많았습니다만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 중에서 꼭 필요한 몇 권만 남기고는 헌책방에 팔고 그랬습니다. 그 동안 자주 보지도 않는 책들을 무슨 보물단지처럼 가지고 다녔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다 미련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걸 다 처분하고 오니까 얼마나 속이 시원한지 모릅니다.


아마 저희 집에 있었던 책들 중에서 90프로 이상은 처분한 것 같습니다. 나머지 10프로만 가지고 왔습니다만,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더 처분하고 와도 됐었겠다 싶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렇게 책들을 버리지 못하고 어딜 가나 고생고생 하면서 가지고 다녔던 제 모습이 참 미련하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책 욕심이라는 것이 사실 만만치 않습니다.

제가 예전에 만난 적이 있는 어떤 일본 교수 분이 계셨는데, 이 분 전공은 일본어예요, 일본어를 전공하는 교수님이시니까 아무래도 집이나 서재에는 이와 관련된 책이 많겠지요? 자기 집에는 책을 둘 곳이 없어서 방이고 창고고 할 것 없이 책이 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 분이 하시는 말씀이 좀 흥미롭습니다.

일본어 사전 중에서 가장 분량이 많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일본국어대사전>이라는 책인데 전체가 두꺼운 책들로 10권이 넘어갑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자기가 존경하는 어떤 교수님이 이사하시는데 갔었는데, 그 분이 자기한테 그 사전을 가져가겠냐고 묻더랍니다. 그래서 자기는 얼릉 달라고 해서 가져왔다고는 하는데, 여기까지 들으면 뭐 그런가 보다, 나는 잘 모르지만 귀한 책을 얻을 수 있었나 보다…할 텐데, 그런데 이 분이 하시는 말이 자기 집에 아마도 이미 이 사전이 2세트가 있을 거라는 거예요.

아니, 그럼 왜 그렇게 부피가 많은 것을 가져왔냐고 하니까, 자기는 책을 너무 좋아해서 그런다는 겁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조금 의아했습니다. 교수님이시고 책이 많다는 것은 알겠지만, 책을 둘 곳이 부족하다고 하면서 그렇게 부피가 있는 책을 좋다고 얻어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이미 자기 집에 한 두 세트 있다고 하는데,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을 보니까 그 책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은, 그다지 볼 일도 없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 이게 무엇입니까. 바로 욕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분 이야기를 들으면서, 분명 이 분은 저보다 많이 배운 분이시겠지만, 얼마나 지혜롭지 못하게 보였는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なぜなら私は、あなたがたの間で、イエス・キリスト、すなわち十字架につけられた方のほかは、何も知らないことに決心したからです。

바울이 어떠한 인물입니까. 그 당시 최고의 학교에서 공부했었고, 뿐만 아니라 지금으로 본다면 어려운 시험에 합격할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었습니다. 책도 많이 읽었겠지요. 지식도 웬만한 사람들보다 많았을 것입니다. 그는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출세와 안정된 생활이 보장되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그가 얼마나 지식이 많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당시 유대 총독이었던 베스도 앞에서 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합니다. 그런 바울에게 베스도 총독이 말합니다.

사도행전 26장 24절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パウロがこのように弁明していると、フェストが大声で、「気が狂っているぞ。パウロ。博学があなたの気を狂わせている」と言った。


생각해보십시오. 이 베스도라는 사람도 총독까지 오른 인물이니 남부럽지 않은 엘리트입니다. 얼마나 많은 지식과 경력이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총독 조차도 인정할 정도로 바울은 학식이 많은 인물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바울이 또 말합니다.

골로새서 2장 8절을 봅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あのむなしい、だましごとの哲学によってだれのとりこにもならぬよう、注意しなさい。それは人の言い伝えによるもの、この世の幼稚な教えによるものであって、キリストによ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

그 시대에 학문 중에서 가장 으뜸을 꼽으라고 하면 무엇보다도 철학을 꼽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철학에 있어서 당시 가장 선진국이었던 나라는 바로 그리스입니다.

그리스 철학자라고 하면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유명한 사람들이 즐비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은 당시 최고의 학문이었다고 하는 철학을 그저 초등학문이라고 깎아 내립니다. 이렇게 말하는 바울은 그렇다면 철학을 잘 몰라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아니면 당시 학문적으로 가장 선진국이었던 헬라 그리스를 잘 몰랐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었던 것일까요?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신약성경 중에서 복음서를 제외한다면 상당부분이 바울이 각 교회나 개인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로마서, 고린도 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 전후서, 디모데 전후서, 디도서, 빌래몬서 등은 바울이 쓴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글이 어느 나라 말로 적혀 있냐 하면 헬라어 즉 그리스어로 적혀 있습니다.


그 정도로 그리스어에 능통했던 바울이, 그리고 당시 고등학문을 했던 바울이 그리스 철학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아니, 몰랐을 정도가 아니라 대단히 열심히 공부했었을 것입니다. 그랬던 그가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 잠시 솔로몬 왕에 대해서 살펴볼까 합니다. 솔로몬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셔서 전무후무한 대호황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나라는 평안했었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운 시대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솔로몬의 고백을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다.

전도서 2장 3절~11절을 봅니다.
“내가 내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을 지혜로 다스리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내가 어떻게 하여야 천하의 인생들이 그들의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어떤 것이 선한 일인지를 알아볼 때까지 내 어리석음을 꼭 붙잡아 둘까 하여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
v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나를 위하여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을 주기 위하여 못들을 팠으며 남녀 노비들을 사기도 하였고 나를 위하여 집에서 종들을 낳기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도 내가 소와 양 떼
v의 소유를 더 많이 가졌으며 은 금과 왕들이 소유한 보배와 여러 지방의 보배를 나를 위하여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들과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 더 창성하니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도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
v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私は心の中で、私の心は知恵によって導かれているが、からだはぶどう酒で元気づけようと考えた。人の子が短い一生の間、天の下でする事について、何が良いかを見るまでは、愚かさを身につけていようと考えた。
私は事業を拡張し、邸宅を建て、ぶどう畑を設け、
庭と園を造り、そこにあらゆる種類の果樹を植えた。
木の茂った森を潤すために池も造った。
私は男女の奴隷を得た。私には家で生まれた奴隷があった。私には、私より先にエルサレムにいただれよりも多くの牛や羊もあった。
私はまた、銀や金、それに王たちや諸州の宝も集めた。私は男女の歌うたいをつくり、人の子らの快楽である多くのそばめを手に入れた。
私は、私より先にエルサレムにいただれよりも偉大な者となった。しかも、私の知恵は私から離れなかった。
私は、私の目の欲するものは何でも拒まず、心のおもむくままに、あらゆる楽しみをした。実に私の心はどんな労苦をも喜 んだ。これが、私のすべての労苦による私の受ける分であった。
しかし、私が手がけたあらゆる事業と、そのために私が骨折った労苦とを振り返ってみると、なんと、すべてがむなしいことよ。風を追うようなものだ。日の下には何一つ 益になるものはない。

이 말이 무엇입니까. 내가 좀 행복해지려고 많은 일들을 해봤어. 재산도 많이 늘려봤어. 부인이 많으면 좋을 줄 알고 여자들도 많이 거느려 봤어. 내가 보고 싶은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다 해봤어.

그리고 전도서 2장 25절을 보십시오.
“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

実に、神から離れて、だれが食べ、だれが楽しむことができようか。

그랬더니 어떻게 됐다고 합니까. 기쁨이 충만했대요? 너무나도 행복하게 됐답니까?

아니요, 오히려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것이 모두 다 헛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능력으로 내 육신을 위해서 다 해보았지만, 그게 모두가 다 헛되고 헛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이 무엇입니까. 전도서에 보면 흥미로운 말이 나옵니다.


전도서 9장 9절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日の下であなたに与えられたむなしい一生の間に、あなたの愛する妻と生活を楽しむがよい。それが、生きている間に、日の下であなたがする労苦によるあなたの受ける分である。

당시 결혼을 하여 아내와 남편이 같이 산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최소한의 것이었습니다. 즉, 아무리 서민이라 하더라도 대부분의 남녀가 결혼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나친 욕심을 부려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과욕을 부린다 하더라도 모두가 헛되다. 그러지 말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최소한의 조건으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충분히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솔로몬의 말에 설득력이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생각해보세요. 평생 동안 가난했던 사람이 “무슨 돈 같은 것 필요 없어”라고 해봐야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하이고, 지가 돈을 벌어보기나 했어?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어요? 아무도 귀담아 들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그의 인생에서 모든 부귀와 영화를 누려보았습니다. 그런 결과 솔로몬이 하는 말이, 뭐였습니까. 다 헛되다는 것이에요.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 말씀과 이어집니다.

누가복음 12장 29절~30절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何を食べたらよいか、何を飲んだらよいか、と捜し求めることをやめ、気をもむことをやめなさい。これらはみな、この世の異邦人たちが切に求めているものです。しかし、あなたがたの父は、それがあなたがたにも必要であることを知っておられます。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아들께서 스스로의 목숨을 우리를 위해서 주실 정도로, 우리 자신을 사랑해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그런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냥 굶어 죽으라고, 추위에 떨고 더위에 지치라고 내버려두겠습니까.

하지만 사람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옛날에는 재산을 어느 정도 모으면 모아둘 곳이 없었습니다. 곡식이 넘치고 돈이 넘치면 땅을 사서 창고를 짓고 거기에 보관하고 그랬습니다만, 그것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지요. 그러면 어떻게 했어요? 다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렇잖아요? 아무리 수확이 많다 하더라도 보관할 곳이 없다면, 썩도록 내버려둘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자신의 분수를 알았습니다. 이 정도 벌었으면 됐구나 하는 생각을 어렵지 않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돈을 벌면 은행으로 입금이 됩니다. 그럼 어느 날 은행에서 전화가 걸려 옵니다. 죄송합니다만, 당신 돈을 더 이상 쌓아둘 곳이 없습니다. 그런 전화 받아보신 적 있으세요?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들도 죽는 그 순간까지 그 돈을 계속해서 벌여드리려고 합니다.


그와 같은 모습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너무나도 안타까워 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너한테 준 세월을 살아가면서, 걱정하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채워줄 텐데, 좀 나를 믿고 기뻐하면서 살아갔으면 좋을 텐데, 나를 못 믿고 그저 맨날 부족하다고 하니 얼마나 주님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힘으로 아둥바둥거리며 살아보려고 했더니 결국 모든 것이 헛되더라는 것이 누구의 고백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솔로몬 왕의 고백입니다. 이처럼 모든 부와 명예를 누려본 솔로몬이 하는 말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에게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고백은 어떨까요. 예를 들어서 21세기 현대에 있어서 가장 우주에 가깝다고 일컬어지는 물리학자라고 하면 스티븐 호킹 교수를 꼽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교수가 만약에 “지금까지의 물리학은 모두 다 틀렸다.” 이런 말을 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전세계 언론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세계적인 석학의 말로서 연일 보도를 하고 난리가 나겠지요.

하지만 만약에 제가 “아~ 지금 물리학은 모두 다 틀려먹었어요! 휴지조각이에요!”라고 말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흥, 지가 뭘 안다고” 다들 그럴 것 아니겠어요?

오늘 바울은 말합니다. 이 세상의 학문은 모두 초등학문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당시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뭐? 이 세상 학문들이 다 초등학문이라고? 지가 뭘 안다고……”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아니요. 하나도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 세상 학문들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알게 되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버렸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아버린 것이었습니다. 이 십자가를 알고 나니, 그 동안 자신이 최고로 알았던, 이 세상의 부와 지식과 권력과 명예가 모두 다 어린애 속임수 같이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만큼 돈을 벌어야 해. 나는 이만큼 배워야 해. 나는 이만한 지위에 올라 가야만 해. 이렇게 자기 자신을 얽매었던 그 동안의 삶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이 바울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의 모든 학문이 값어치가 없고 모두 다 신학만을 해야 한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에서 일을 하고 세상에서 공부하는 것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 어떤 공부를 하든, 어디서 살아가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이처럼 예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품고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에 예수님을 품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품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주님,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해 내주신 그 사랑을 믿고, 포기하지 말고, 단념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인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결국에는 잘 된다는 믿음, 끝내는 잘 된다는 믿음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을 품는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품는 삶,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올 한 해도 오늘로 마지막입니다. 올 한 해를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올 한 해 동안 내가 내 마음 안에 가장 중요한 것, 예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품고 살아 왔는지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새해, 아니, 우리가 살아가는 날 동안에 가장 중요한 것, 예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품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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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회 예수님의 증명
2017년 12월 2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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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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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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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의 증명” イエス様の証明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에는 수학을 배웁니다. 산수나 수학이라고 할 때 생각나는 것은 덧셈이다 뺄셈이다 해서 무슨 계산문제가 있고 여기에 해당하는 답을 딱 내는 것을 생각합니다만, 어떤 수학 전문가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무슨 숫자가 있고 이를 계산해서 답을 내는 것은, 그 문제가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그건 수학이 아니라 산수이다. 그렇다면 진짜 수학은 무엇인가 하면 이는 바로 <증명>이다,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몇 학년 때 배우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희 때는 중학교 때부터 이 증명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예를 들어서 삼각형 A와 B의 크기가 같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은 문제였습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무슨 삼각형의 합동조건 같은 것을 외워야 합니다.

그래서 뭐, 첫째는 대응하는 세 변의 길이가 각각 같거나 3辺がそれぞれ等しい。, 둘째는 대응하는 두 변의 길이가 각각 같고 그 끼인각의 크기가 같거나 2辺とその間の角がそれぞれ等しい。, 셋째는 대응하는 한 변의 길이가 같고 그 양 끝각의 크기가 각각 같을 때 1辺とその両端の角がそれぞれ等しい, 두 삼각형은 합동이다…… 뭐 이런 걸 이용해서 증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수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이라고 하는 상을 받은 사람들을 보면 무슨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어서 답을 맞췄다거나, 무슨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무슨 어떤 어려운 이론에 대한 증명을 해서 받게 되는 것도 다 이 때문입니다.

증명 중에서도 대학생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보았을 수도 있는 문제인데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1+1=2라는 것을 증명하라.

여러분께서는 이 문제를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사실 이 문제는 보기보다 꽤나 수준이 높은 것입니다. 이 문제는 러셀과 화이트헤드라고 하는 사람이 쓴 <수학원리>라는 책에 나옵니다만, 이 증명을 모두 이 자리에서 말씀 드리자면 5분도 안 되어서 모든 사람들이 졸아버릴 것이요, 10분도 안 되어서, 말을 하고 있는 저 자신도 아마 졸아버릴 것입니다.

이 1+1=2라는 증명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다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시간, 그것도 오늘은 성탄예배인데, 왜 느닷없이 수학 증명이야기를 꺼내는가 하면,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매주 설교 동영상을 촬영한 다음 한국이나 일본뿐만이 아니라 전세계에 메일을 발송합니다만, 그렇게 되면 여러 군데에서 다양한 메일을 보내주시기도 합니다. 미국에 계신 목사님께서 격려메일을 보내주시는가 하면, 상해에 계신 분께서 감사 메일을 보내주십니다. 그리고 터키에 계신 분으로부터 신앙상담을 받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메일을 보면서 저 자신도 힘이 나기도 하고, 또한 상담을 해드리면서 저 스스로도 많은 공부가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지난 주에 보내드린 메일 내용은 선교후원에 대한 요청이 담겨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한국에 계신 분으로부터 대단히 흥미로운 메일을 받았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선교후원을 요청하시는데 당신의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인지 어떻게 압니까? 내 돈이 진짜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면 아깝지 않은데 당신의 관념이 만들어낸 하나님이라면 가짜 하나님일 것인바 매우 아까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이 인정하지도 않는데 당신이 착각 속에 빠져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전도하는 셈치고 당신의 하나님이 진짜임을 증명해보십시오.”

이 메일은 지금까지 제가 받은 메일 중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메일이었습니다. 이는 비꼬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흥미로운 내용이었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 성경 속에 적혀 있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증명해 보이라는 내용입니다. 아니, 단순한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증명 문제인 것입니다.

이는 비단 저만이 받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만이 아닌, 이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증명문제인 것입니다.

문제 출제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전도하는 셈치고 당신의 하나님이 진짜임을 증명해보십시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이라고 믿으십니까? 아멘. 예, 아멘이라고 말씀하시겠지요. 아니요, 놀리는 것이 아닙니다. 대단히 귀한 신앙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아멘이라고 고백하신 분께서는 어떻게 해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면 또 우리가 하는 말이 있죠? 예, 성경에 써 있습니다.

좋습니다. 이 또한 대단히 귀한 모범답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발 더 나아가서 묻겠습니다. 성경에 적힌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이를 어떻게 증명하시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힌트는 바로 앞서 말씀 드렸던 1+1=2의 증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만약에 1+1=2이다……라는 증명을 하라고 하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좀 어렵나요? 그렇다면 좀 쉽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유치원생 아이에게 1+1=2다 라고 하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렇죠. 예를 들어서 무슨 공이나 아니면 무슨 과일 같은 것을 이용해서, 자, 여기 한 개가 있지? 그리고 여기 또 한 개가 있지? 그렇다면 이거랑 이거 전부는 몇 개야?

한 개, 두 개, 세 개 정도를 아는 아이라면 이 정도 설명으로 분명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번 해서 못 알아듣는다면 몇 번 설명을 하면 알아듣겠죠. 조금 똑똑한 아이라면, 그걸 알려주면 한 개랑 두 개를 합하면 세 개라는 사실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잘못된 증명방법인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이렇게 설명하면 왜 알아 들을까요. 예, 눈으로 보니까 알아듣습니다. 속담에 백문이 불여일견,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훨씬 더 쉽게 빨리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 대한 증명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이에 앞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ことばは人となって、私たちの間に住まわれた。私たちはこの方の栄光を見た。父のみもとから来られたひとり子としての栄光である。この方は恵 みとまことに満ちておられた。


우리가 사람들끼리 어떤 계약을 한다고 하면 한국이나 일본이나 일반적으로 서명 날인을 합니다. 즉, 계약내용을 적고 거기에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는 것이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아닙니다. 모두 언약 즉 말씀으로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 언약, 시내산 언약 등 다양한 언약이 등장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말씀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말씀으로 모든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중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오랫동안 가지고 다녔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언약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진 돌 판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역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그 자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언약궤 만으로는 사람들이 도무지 믿지를 않아요.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요. 이스라엘 민족은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우상숭배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직접 하나님을 보이시기로 마음 먹으시고 사람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나타나셨다는 뜻이지요. 이게 누구십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야말로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그 이전에는 선택된 극히 일부 선지자들한테만 보이셨습니다만, 이제는 선지자가 아니라 하물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는 사람들 앞에 나타나시고는 직접 말씀해주시고, 우리를 만져주시고 우리를 치료해주신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니죠?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하여 우리를 이제 보통 사람들은 근처에도 못 갔던 가장 거룩한 하나님께서 계신 지성소에까지, 하나님 앞으로까지 직접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요한복음 1장 10절~11절을 봅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この方はもとから世におられ、世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のに、世はこの方を知らなかった。
この方はご自分のくにに来られたのに、ご自分の民は受け入れなかった。

예수님은 하나님 다음 가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 비서도 아닙니다. 하나님 보다 못한 분도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 그 자체이신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 없이 된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떻게 했대요? 예, 그를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요. 태어난 자식은 자기 부모를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뱃속에 있을 때 기억이 없잖아요? 자기가 뱃속에서 나올 때 기억이 있어요? 뱃속에서 나와서 엄마 얼굴을 봤던 기억이 있어요?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냥 내가 엄마다, 내가 아빠다 그러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그죠.

사람이 배가 고픈 것은 압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배가 고픈 것은 느낄 수가 있거든요. 하지만 누가 부모인지 누가 형제인지는 주변에서 알려주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부모는 어떻습니까. 부모는 자기 자식을 낳았으니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자기 부모도 알아볼 수 없는데, 그 부모의 부모의 부모의 부모까지 모든 인류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신 하나님을 우리 지혜로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는 모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알게 되겠습니까. 그렇죠. 우리가 알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알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성경은 바로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증명해놓은 해답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땠습니까.

창세기 22장 14절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そうしてアブラハムは、その場所を、アドナイ・イルエと名づけた。今日でも、「主の山の上には備えがある」と言い伝えられている。

아브라함은 알았습니다. 무엇을 알았어요. 그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제일 나중에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사야서에 나와 있습니다.

이사야 45장 18절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天を創造した方、すなわち神、地を形造り、これを仕上げた方、すなわちこれを堅く立 てた方、これを茫漠としたものに創造せず、人の住みかにこれを形造った方、まことに、この主がこう仰せられる。「わたしが主である。ほかにはいない。

천지를 창조하신 바로 핵심은 우리를 거주하게 하기 위해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제 오늘이 아니라 태초부터 우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이미 창조해놓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브라함은 그의 삶을 통해서 다시금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저 만들어놓으시고 끝이 아닙니다. 다윗은 그 삶을 통해서 어떻게 고백하고 있습니까.

시편 23편 1절~6절을 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
v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主は私の羊飼い。私は、乏しいことがありません。
主は私を緑の牧場に伏させ、いこいの水のほとりに伴われます。
主は私のたましいを生き返らせ、御名のために、私を義の道に導かれます。
たとい、死の陰の谷を歩くことがあっても、私はわざわいを恐れません。あなたが私とともにおられますから。あなたのむちとあなたの杖、それが私の慰めです。
私の敵の前で、あなたは私のために食事をととのえ、私の頭に油をそそいでくださいます。私の杯は、あふれています。
まことに、私のいのちの日の限り、いつくしみと恵みとが、私を追って来るでしょう。私は、いつまでも、主の家に住まいましょう。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 부족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부족한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내게 힘을 주시고 항상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원수들의 목전에서도 나를 후하게 대우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게 기쁨이 넘칩니다.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 이렇게 감사하신 하나님께 내가 영원토록 꼭 붙어 있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그냥 한 번 시를 읊어본 것인가요? 아닙니다. 다윗이라고 하는 그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하나님의 크나큰 사랑을 이렇게 증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증명하여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증명해 보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증명해 보이실 수 있으십니까. 예수님을 증명해 보이실 수가 있으시겠습니까. 아니, 그것보다도 먼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증명해 보이실 수가 있으시겠습니까.

사실 그렇잖아요? 우리 스스로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증명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에는 학생증이 있습니다. 학생증이 있으면 학생 할인도 받을 수 있고, 만약에 경찰이나 누군가가 나한테 신분을 묻는 경우라고 한다면, 중고등학생한테는 유일한 신분증이 바로 학생증입니다. 이건 중요하지요.

회사생활을 하게 된다면 사원증이 있습니다. 저도 한국에서 직장에 다닐 때에는 사원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제가 한국에서 섬기던 교회에서는, 무슨 생각을 해서인지 성도등록증……이라는 것을 전 교인한테 나누어주었습니다. 얼마 전에도 찾아보니까 지금도 제 서랍 안에 들어있더라고요. 뭐, 그게 있으면 교회 서점이나 교회에서 운영하는 카페 같은 곳에서 할인을 받을 수 있다고는 하는데, 사실 조금 찝찝했습니다. 이유는 좀 있다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또 얼마 전에 인터넷을 보니까 목사 신분증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큰 교회에서는 그 교회에서 발급하는 마치 사원증 같은 것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또 교단에서 제작하는 경우에는 나름 여러 가지로 필요해서 신분증을 만든다고 하는데, 글쎄요. 저는 이를 보고 마치 전교인한테 나누어주었다는 신분증을 받았을 때처럼 찝찝했습니다.

제가 왜 찝찝했을까요? 내가 꼭 교회 성도라는 증명서를 내보여야 내가 성도라고 알아요? 내가 목사 신분증을 내보여야 목사라고 인정을 해주나요? 바로 그런 생각 때문에 목사님들이 학위 논문도 표절하고, 설교도 베껴 쓰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모자라서 설교할 때 앞에서, 소매에 줄 세 개 있는 박사학위 가운 입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목사라고 하는 사실을 증명서를 만들어서 보여주어야지만 목사라고 인정해준다면, 그렇지 않으면 안 믿어줘요. 저 사람이 말하는 거나 행동하는 걸 보면 영 목사 같지가 않아…… 주변 사람들한테 이런 말을 듣는다면, 이건 무슨 신학박사, 목회학 박사가 아니라, 일개 목사로서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아니요, 평신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야? 교회에 다닌다고? 에이, 거짓말, 저 사람 말하는 것, 행동하는 걸 봐.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뭘 저래?

만약에 우리 주변 사람들한테 내가 이런 말을 들으면 이거 문제 심각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자기 술 안 마신다고, 담배 안 피운다고 믿음 좋은 줄 알고 있는 사람들 많습니다.
자기 모태신자라고, 헌금 많이 낸다고, 주일마다 교회 나간다고 거룩한 줄 알고 있는 사람들 많습니다.
자기 목사라고, 자기 장로, 권사라면서 금배지 은배지 달고 다니면서 인사 받기 좋아하는 사람들도 교회에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이 언제부터 있었어요? 예, 그렇습니다. 예수님 당시부터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4절~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말씀하십니다.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また、彼らは重い荷をくくって、人の肩に載せ、自分はそれに指一本さわろうとはしません。
彼らのしていることはみな、人に見せるためです。経札(きょうふだ)の幅を広くしたり、衣のふさを長くしたりするのもそうです。
また、宴会の上座や会堂の上席が大好きで、
広場であいさつされたり、人から先生と呼ばれたりすることが好きです。

벌써 예수님 당시부터 겉모습만 신경 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그 사람들처럼 살아간다면 하나님을 증명하고 예수님을 증명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진정한 삶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내 주위 사람이 나를 보면서 “야, 나는 예수님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지만, 저 사람을 보면 정말 예수님이 있긴 있는 것 같애. 하나님이 살아있긴 살아 있는 것 같애” 이렇게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고 오히려 “하이고……인간이 어떻게 된 게 믿는다는 인간들이 더 해” 이런 말이 나온다면 이는 하나님을 증명하고 예수님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 얼굴에 먹칠하는 것과 다름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35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あなたがたに新しい戒めを与えましょう。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
もし互いの間に愛があるなら、それによって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弟子であることを、すべての人が認めるのです。」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사람들이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가진 돈만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힘, 내가 가진 시간, 내가 가진 자존심까지도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내 이웃을 위해서 기뻐 내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럴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그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과 같이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탄예배입니다. 2천년 전 예루살렘에서 우리를 위해 오신 날입니다. 지금도 안 믿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십니까. 그렇다면 전도하는 셈치고 당신의 하나님이 진짜임을 증명해보십시오.”

우리는 그 분들에게 열 마디 백 마디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을 보이고 우리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이처럼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이웃을 사랑하면 이처럼 예수님이 전파되고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세상이 변화된다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기쁨에 찬 성탄절 이브를 맞이하여, 우리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 삶을 통해서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주님을 증명하고 이웃에게 우리 주님을 널리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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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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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회 포기함으로 얻는 사랑
2017년 12월 17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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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3장 16절~28절
“그 때에 창기 두 여자가 왕에게 와서 그 앞에 서며 한 여자는 말하되 내 주여 나와 이 여자가 한집에서 사는데 내가 그와 함께 집에 있으며 해산하였더니 내가 해산한 지 사흘 만에 이 여자도 해산하고 우리가 함께 있었고 우리 둘 외에는 집에 다른 사람이 없었나이다 그런데 밤에 저 여자가 그의 아들 위에 누우므로 그의 아들이 죽으니 그가 밤중에 일어나서 이 여종 내가 잠든 사이에 내 아들을 내 곁에서 가져다가 자기의 품에 누이고 자기의 죽은 아들을 내 품에 뉘었나이다 아침에 내가 내 아들을 젖 먹이려고 일어나 본즉 죽었기로 내가 아침에 자세히 보니 내가 낳은 아들이 아니더이다 하매 다른 여자는 이르되 아니라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이 여자는 이르되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 하며 왕 앞에서 그와 같이 쟁론하는지라 왕이 이르되 이 여자는 말하기를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저 여자는 말하기를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 하는도다 하고 또 이르되 칼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칼을 왕 앞으로 가져온지라 왕이 이르되 산 아이를 둘로 나누어 반은 이 여자에게 주고 반은 저 여자에게 주라 그 산 아들의 어머니 되는 여자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청하건대 내 주여 산 아이를 그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다른 여자는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 왕이 대답하여 이르되 산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의 어머니이니라 하매 온 이스라엘이 왕이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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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포기함으로 얻는 사랑” 捨てることで得られる愛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에 보면 아들 얻기를 간절히 바라는 부모가 종종 등장합니다. 무엇보다 아브라함이 그랬지요. 그는 간절히 아들 얻기를 기다렸으나 결국 나이는 나이대로 먹고 일흔이 넘어도 아들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의 아들 이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창세기 25장 21절에 보면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イサクは自分の妻のために主に祈願した。彼女が不妊の女であったからである。主は彼の祈りに答えられた。それで彼の妻リベカはみごもった。

간구했다는 것은 그만큼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다는 것이지요. 그랬더니 에서과 야곱을 얻게 됩니다.

야곱은 그의 외숙부인 라반의 딸인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레아는 아들을 많이 낳는데, 야곱이 제일 사랑한 라헬은 아들을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기도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녀의 소원을 들으시고 요셉과 베냐민을 주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죠.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도 사무엘상 1장 10절에 보면 마음이 괴로워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통곡했다고 합니다.
ハンナの心は痛んでいた。彼女は主に祈って、激しく泣いた。

요즘 세상에서야 아이가 없다는 것이 대단한 일 아니고, 오히려 일부러 안 낳는 사람들도 많아서 이른바 저출산 현상이라고 합니다만, 당시에는 특히 여성에게 있어서 이 아들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큰 부담으로 여겨졌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그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간절한 소원이었던 아들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성경을 잘 모르는 분들, 하물며 교회에 다니지 않는, 신앙이 아직 없는 분들도 아는 사람들이 많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왕위에 올랐을 때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많은 백성을 다스려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구하였습니다.

열왕기상 3장 9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善悪を判断してあなたの民をさばくために聞き分ける心をしもべに与えてください。さもなければ、だれに、このおびただしいあなたの民をさばく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

솔로몬은 하나님께 자신이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재판을 잘 할 수 있도록 하는 마음을 달라고 구한 것입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미국 같은 민주적인 국가에서는 이른바 삼권분립이라고 해서 사법부의 독립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예를 들어서 아무리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나 총리라 하더라도 재판 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그 누구도 처벌할 수 없고, 재판에 관여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왕이나 황제가 재판할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기원은 출애굽기까지 거슬러올라갑니다.

출애굽기 18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 모세를 따라 광야 길로 나와서 생활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질서를 만들어가고 있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무슨 다툼만 있으면 사건을 모두 모세한테 가져갑니다. 그러니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그러자 이를 본 모세의 장인이 모세에게 말합니다. 재판을 모두 다 자네가 하는 게 아니라 백성들 중에 리더를 세워서 작은 일들은 그들에게 맡기고 자네는 정말 어려운 재판만 하도록 하게. 이렇게 조언을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모세는 이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합니다.

출애굽기 18장 25절~26절을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무리 중에서 능력 있는 사람들을 택하여 그들을 백성의 우두머리 곧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으매 그들이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되 어려운 일은 모세에게 가져오고 모든 작은 일은 스스로 재판하더라”

モーセは、イスラエル全体の中から力 のある人々を選び、千人の長、百人の長、五十人の長、十人の長として、民のかしらに任じた。いつもは彼らが民をさばき、むずかしい事件はモーセのところに持って 来たが、小さい事件は、みな彼ら自身でさばいた。

이렇게 해서 작은 재판은 백성들의 리더로 세운 그들이 재판을 하고, 그들이 해결하기 어려운 재판은 모세에게 가져오게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은 신약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5장에 보면 바울이 자신은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하면서 가이사에게 상소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가이사는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던 로마의 황제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사건 같은 경우에는 당시에도 황제가 직접 재판을 맡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참고로 이와 갈은 시스템이 바로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남아 있지요? 바로 삼심제도……즉, 국민은 한 사건에 대해서 적어도 3번, 그러니까 지방법원, 고등법원, 그리고 대법원……이렇게 3번은 재판을 받을 수 있다는 제도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은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 그리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의 핵심인 재판을 잘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솔로몬의 기도를 듣고 하나님께서는 대단히 기뻐하십니다. 열왕기상 3장 11절~13절에 보면,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
v 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神は彼に仰せられた。「あなたがこのことを求め、自分のために長寿を求めず、自分のために富を求めず、あなたの敵のいのちをも求めず、むしろ、自分のために正しい訴えを聞き分ける判断力を求めたので、今、わたしはあなたの言ったとおりにする。見よ。わたしはあなたに知恵の心と判断する心とを与える。あなたの先に、あなたのような者はなかった。また、あなたのあとに、あなたのような者も起こらない。そのうえ、あなたの願わなかったもの、富と誉れとをあなたに与える。あなたの生きているかぎり、王たちの中であなたに並ぶ者はひとりもないであろう。

이 솔로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 받으셨는지, 네가 구한 지혜만이 아니라 네가 구하지 않은 부귀와 영화까지도 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놀라운 지혜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소개되어 있는 장면이 바로 오늘 본문의 재판내용입니다.

오늘 사건을 간략하게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그들의 주장을 들어보겠습니다.

두 여인이 솔로몬 앞에 섰습니다. 편의를 위해 이 여인을 A와 B라고 하겠습니다. A가 먼저 왕에게 말합니다. A와 B는 한 집에 사는데, A가 아이를 낳고 3일이 지난 후에 B도 똑같이 아들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뿐이었습니다. 여자 둘이서 살고 있었는데 두 아들이 태어났으니 가족이 넷이 된 셈입니다.

그러던 차에 사건이 발생합니다. A가 아침에 일어나서 젖을 먹이려고 아들을 보았더니, 그 아들이 글쎄 죽어있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런데 A가 자세히 보니까 자기 아들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A가 생각하기를, 간밤에 B의 아들이 죽었는데, 죽은 자기 아들을 내 옆에 갖다 놓고, 멀쩡한 내 아들을 자기가 데려갔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B의 주장은 다릅니다. 아니다. 살아 있는 아들이 내 아들이고, 죽은 아들이 A의 아들이다……이렇게 서로 주장하면서 한치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여기까지가 말하자면 그들의 주장입니다.

아무리 동갑내기 아이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 컸다면 남들이 봐서도 어느 쪽이 누구 아들인지 알아볼 수도 있었겠지만, 아직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습니다. 뭐, 갓난아기 얼굴이야 다 비슷비슷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누구는 알아봐요? 예, 자기 어머니는 알아봅니다.

사실관계로 미루어보아 당시 사건이 발생한 장소는 밀실이었습니다. 등장인물은 A와 B, 그리고 그들의 아들인……여기서는 편의상 C와 D라고 하겠습니다. C는 살았고 D는 죽었습니다. 제3자가 개입하지 않았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C와 D는 분명 그들의 아들들입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갓난아이였겠지요. 다른 사람들이 얼굴을 구분하기란 쉬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최소한 A와 B는 어느 쪽이 진정으로 자기 아들인지는 분명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즉 답은 둘 중 하나입니다. 살아있는 아들인 C가 A의 아들이거나 B의 아들, 둘 중 하나입니다. 지금 같았으면 유전자검사라도 하면 정확하게 알 수 있겠으나 당시에는 그런 것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더 이상의 물증도 없고 목격자도 없습니다. 있는 것이라고는 서로 엇갈리는 이 두 당사자들의 주장뿐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사건이기 때문에 십부장이나 백부장, 천부장도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솔로몬 왕한테까지 왔겠지요. 이제 왕이 판결을 내려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런데 생뚱 맡게도 솔로몬 왕이 신하들에게 칼을 가져오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살아있는 아들 C를 둘로 나누어서 하나는 A에게 주고 하나는 B한테 주라고 명령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살아있는 아들 C마저도 죽여서 그 몸을 둘로 나누라는, 충격적인 명령을 내립니다.

이 말을 들은 A의 심정은 오늘 본문에 보니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자면 너무나도 불쌍히 여겼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A가 솔로몬 왕에게 간청합니다. 그 살아있는 아이를 차라리 B한테 주시고 죽이지 말아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런데 한편 B는 솔로몬의 판결을 듣고 그거 참 좋은 판결이다. 내 것이 되지 않을 바에는 차라리 A의 것도 되지 말게 해달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솔로몬이 뭐라고 합니까. 살아있는 아이를 A에게 주고 절대로 죽이지 말라, A가 살아있는 아이의 어머니라고 판결합니다.

참으로 놀랍고도 훌륭한 판결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 본문 내용은 주로 솔로몬의 놀라운 지혜로 어려운 사건을 해결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조금 시각을 달리해서 본다면 우리가 알지 못했던 또 하나의 크나큰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사실관계로 미루어 볼 수 있는 내용을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구절은 오늘 본문 중에서 바로 열왕기상 3장 16절입니다.

열왕기상 3장 16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그 때에 창기 두 여자가 왕에게 와서 그 앞에 서며”

そのころ、ふたりの遊女が王のところに来て、その前に立った。

대단히 짧은 구절입니다만, 이 구절로 알 수 있는 내용을 우선 네 가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경건하지 못한 여인들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창기였다고 합니다. 즉, 불특정한 남성들을 대상으로 하여 율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지극히 올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집에는 A와 B만 살고 있었고, 각각 C와 D라는 아들들을 낳았다고 하는데, 그 어디에도 그들의 아버지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이를 보더라도 어쩌면 A와 B 그들 자신들조차 그들이 낳은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랐을지도 모르는, 그와 같은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둘째로, 그들은 주변에서 도움을 얻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을 겪는 상황이라고 한다면, 이웃사람들로부터 받는 위로나 격려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창기입니다. 같은 이스라엘 민족끼리라 하더라도 아무도 그녀들을 인간적으로 대우를 해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도 그렇겠지요. 사회적으로나 지위가 있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재력가이거나 한다면 너도나도 도와주려고 할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사회적으로도 가장 밑바닥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들에게는 남편도 없습니다. 가족도 없습니다. 친척들도 그들을 눈여겨보지 않습니다. 친구들조차 없습니다. 아니, 그 때까지 한 집에 살았던 A와 B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친구 사이였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서로에게 있어서 그나마 있었던 단 한 명뿐인 친구조차도, 철천지 원수지간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셋째로, 그들은 피로에 지쳐있었을 것입니다. 요즘은 그나마 법적인 제도가 많이 정비되었습니다만, 그래도 한 번 재판을 한다고 하면 비용이 상당히 많이 듭니다. 변호사 비용만 하더라도 일반 서민들이 감당하기에는 큰 돈을 들여야지만 가능한 액수입니다. 예전에 비해 변호사 수가 많이 늘어난 지금도 변호사비용이 만만찮은데 과거에 변호사 수가 적었을 때는 법원문턱이 얼마나 높았는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는 오랫동안 <송사하면 패가망신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어디 돈만 드나요? 웬만한 민사재판이라면 하루 이틀 만에 해결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짧아야 몇 주에서 몇 개월, 자칫하면 몇 년까지도 끌게 되는 것이 바로 재판입니다. 당시 재판 비용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백 보 양보를 해서 재판에 들어가는 비용이 모두 무료였다 하더라도 두 여인은 오랜 시간 동안 재판을 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 재판이라고 하는 것을 하게 되면요, 요즘도 그렇습니다. 작성해야 하는 서류들도 많고 신경써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판사나 변호사들 앞에서뿐만 아니라, 만나는 담당자들한테 그 때마다 했던 말을 또 하고 했던 말을 또 하고 하는 과정을 반복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당시에도 재판을 한 번 하려면 그 과정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들은 앞서 말씀 드렸던 대로 곧바로 솔로몬 앞에 선 것이 아니었겠지요. 십부장, 백부장, 천부장 앞에 서서 재판을 받았고, 이제 마지막으로 왕에게 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 자리에 서게 되기까지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상당히 지친 상태였음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아이를 찾는 일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그들에게 있어서 이 아이에 대한 집착, 아이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그들은 경제적으로도 매우 궁핍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 여인들은 가족도 없었고 친척도 없었습니다. 이제 유일한 친구였던 A와 B 사이마저도 갈라졌습니다. 당시 자료를 살펴보면 이른바 매춘행위를 하는 경우, 실제 자기가 생활하는 집에 있으면서 손님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같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고 하는 A와 B는 단순히 친구가 아니라, 서로 동업을 하는, 말하자면 비즈니스 파트너였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둘 사이가 이미 이렇게 갈라졌습니다. 그러니 비록 부도덕한 일이라고는 하나 어찌 되었든 일을 못하게 되니,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솔로몬 왕 앞에 섰을 때 그들의 심정은 보통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했습니다. 돈도 들였고 시간도 들였습니다. 육체적이나 정신적인 고통도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거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 자신의 아들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되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오직 그와 같은 희망을 안고 그 자리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진짜 어머니인 A의 심정은 어땠겠습니까. 자신이 비록 경건하지 못한 생활을 하고 있으나,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 될 수 있는 아들을 얻었는데, 그 아들조차도 빼앗길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많은 것을 잃은 그들에게, 이제 그 아들마저 잃게 된다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반면 B는 어떨까요. 물론 그녀는 살아있는 아들 C가 자신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자다가 일어나보니 자기 옆에 있던 아이가 죽어 있었고, 자기가 스스로 아이를 바꿔 치기 했으니 누구보다도 살아있는 아들 C가 자기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오랫동안 C가 자신의 친자식이라며 거짓 주장을 했던 이유는, 비록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으나, 심정적으로는 A와 그리 큰 차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B에게 있어서도 자신이 낳은 아들 D가 유일한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그 아들을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절망 가운데에 있었겠습니까.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옳지 않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그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할 수만 있다면 그 아들을 차지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참으로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솔로몬 왕이 판결을 합니다. 그런데 그 판결 내용을 들어보니 뭐래요? 느닷없이 칼을 가지고 와서 그 살아있는 아이를 죽여서 반 토막을 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었던 친어머니 A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고 가슴이 찢어지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서 이제껏 오랫동안 재판을 해왔는데, 이제 마지막으로 왕 앞에 믿음을 가지고 섰는데,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자신의 아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그 믿음 하나 가지고 거기까지 왔는데, 그 판결이라는 게 자기도 아니고 그 아들을 죽이라는 거라니, 얼마나 충격이었겠습니까. 얼마나 기가 막히는 노릇이었겠습니까.


어쩌면 이와 같은 충격을 받은 것은 B도 또한 마찬가지였을지도 모릅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B도 역시 그 아들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망 하나만을 가지고 살아왔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아들을 죽이라는 판결이 나왔으니, 그녀 자신도 그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다음의 모습이 A와 B에 있어서 다르게 나타납니다. 친어머니 A는 왕에게 간청을 합니다. 왕이여, 제발 그러지 마시고 차라리 산 아이를 B한테 주세요. 차라리 제가 포기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죽이지만 말아주세요. 그 여인은 이제 그 아들을 찾는다는 소망 하나를 가지고 살아왔는데, 이제 그것마저도 포기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B는 이제 모든 것이 다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내 것도 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그 아이를 죽여버려라. 내 것도 되지 못하는데 남 행복해하는 꼴을 어떻게 보겠냐는 것입니다.

이를 보고 솔로몬이 마지막으로 판결을 합니다. 그 아이를 A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의 어머니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명판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A가 자신의 아들을 되찾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런 질문을 하면 어떤 분은 “그야 A가 친어머니였으니까 그렇지” 이렇게 대답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에서의 재판이 모두 진실만을 밝힐 수 있다면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A가 B보다 훌륭한 변호사를 고용했어요? 아니요, 외형적인 조건은 둘 다 똑같았습니다. 물증도 목격자도 없고 단순히 정황증거 밖에 없는 상황에서 결론을 내려야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A가 아들을 차지하고 B가 차지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A와 B의 결정적인 차이에 있습니다. 그 차이를 두 가지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번째 큰 차이는,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는가 하는 점입니다.

A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친아들이었습니다. 어떠한 일이 일더라도 자신은 그 아들이 중요했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아들의 생명을 지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웬걸 솔로몬이 그 아이를 죽이라고 판결을 하고 맙니다. 그러자 이 친어머니 A는 생각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친아들을 되찾기 위해서 지금까지 싸워왔는데, 이제 친아들이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렇다면 내 아들을 살릴 방법이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바로 자기 아들을 B에게 넘겨주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그 시점에서 A에게 있어서 B가 어떤 존재입니까. 과거에는 친구였는지 모르지만, 과거에는 비즈니스 파트너였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인간이 바로 B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A는 그와 같은 자신의 감정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 자기 아들의 생명을 살리는 방법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B는 어땠습니까. B가 살아있는 아이를 원했던 것은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였습니다. 그 살아있는 아이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은, 아이를 바꿔치기 한 당사자인 B가 이 세상에서 제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재판에서 만에 하나 아들을 얻게 된다면 이는 그야말로 횡재를 하게 되는 일이지만, 아이를 못 얻는다 한다면 이는 말하자면 밑져야 본전인 셈입니다. B에게 있어서는 살아있는 그 아이가 친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B에게 있어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그 아이가 아니라 B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된다면, 그렇게 된 이상 아이가 살아있건 죽었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에요. 아니, 오히려 서로 원수 사이가 된 A가 행복해하는 모습이 꼴보기 싫을 테니 아예 그 아이를 죽여버리는 게 속 시원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바로 이와 같이 A와 B는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해서 서로간에 차이가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큰 차이는, A는 자기 자신을 포기할 줄 알았으나, B는 포기할 줄을 몰랐습니다. A는 자신의 아들의 생명을 살리는 길, 그 유일한 길은 그토록 애타게 원했던 나 자신을 포기하는 일이었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포기함으로 인해서 아들의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포기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A는 내 욕심을 부리고 내 자존심을 세우려다가 친아들을 잃을 바에야, 내 욕심, 내 주장, 내 자존심을 버리더라도 내 아들을 살리는 길을 택하겠다는 심정으로 차라리 B에게 주라고 한 것입니다. A는 철저하게 자신을 포기했습니다. 왜요? 그것은 바로 자신의 친아들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시겠습니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포기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포기하는 것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상대방을 위해서 자기의 욕심과 자기의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이 사랑이라는 것을 오해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예를 들어서 부모의 자식 사랑에 있어서인데 자녀 교육을 사랑이라고 착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얼마 전에 일본 뉴스를 보니까, 자기 아들이 공부를 못한다고 아버지가 패는 바람에 결국 중학생 아들이 죽었다는 것이에요. 어쩌면 그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에, 아들 잘 되라고 하는 의미에서 팼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무엇을 포기하는 게 사랑이라고요? 예, 자신의 욕심과 자존심을 상대방을 위해 포기할 때 이것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이는 부모 자식간 만이 아니라 친구사이에 있어서나, 부부사이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을 사랑한다면서 자신의 욕심, 자신의 자존심을 다 세우려고 하는 것은 이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이를 포기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여인 A는 자신의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이를 실천했습니다. 그러나 B는 어땠습니까. B가 자신의 죽은 아들을 A의 아들과 바꿔치기 한 이유는 A의 아들을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사랑해서인 것입니다. 그러니 애초부터 자기가 사랑하지 않은 A의 아들이 죽든 말든, 자기의 욕심이나 자존심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A는 아들을 얻을 수 있었고 B는 얻지 못했던 것입니다.

물론 다시 말씀 드립니다만, 세상 판결은 항상 올바르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판결은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절대적으로 올바른 판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무엇이 중요한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잠시 살펴봅니다.

누가복음 6장 27절~35절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
v 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v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しかし、いま聞いているあなたがたに、わたしはこう言います。あなたの敵を愛しなさい。あなたを憎む者に善を行いなさい。
あなたをのろう者を祝福しなさい。あなたを侮辱する者のために祈りなさい。
あなたの片方の頬を打つ者には、ほかの頬をも向けなさい。上着を奪い取る者には、下着も拒んではいけません。
すべて求める者には与えなさい。奪い取る者からは取り戻してはいけません。
自分にしてもらいたいと望むとおり、人にもそのようにしなさい。
自分を愛する者を愛したからといって、あなたがたに何の良いところがあるでしょう。罪人たちでさえ、自分を愛する者を愛しています。
自分に良いことをしてくれる者に良いことをしたからといって、あなたがたに何の良いところがあるでしょう。罪人たちでさえ、同じことをしています。
返してもらうつもりで人に貸してやったからといって、あなたがたに何の良いところがあるでしょう。貸した分を取 り返すつもりなら、罪人たちでさえ、罪人たちに貸しています。
ただ、自分の敵を愛しなさい。彼らによくしてやり、返してもらうことを考えずに貸し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の受ける報いはすばらしく、あなたがたは、いと高き方の子どもになれます。なぜなら、いと高き方は、恩知らずの悪人にも、あわれみ深いからです。

좀 길지만 이 말씀이 다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내 욕심과 내 자존심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포기하라는 말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사회생활을 하는데 어떻게 내 욕심과 내 자존심만을 세워가면서 할 수 있어요? 정말 치사한 일도 있지만 꾹 참고 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게 있습니다. 그게 다 무엇을 위해서예요? 다 내 회사를 위해서, 내 이익을 위해서겠지요.

하지만 성경에서 이처럼 포기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얻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상을 얻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내 욕심과 자존심을 포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바로 남들로부터 빼앗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인 B처럼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빼앗으려고 하는 모습이 바로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믿음을 위해서 나 스스로의 욕심과 자존심을 포기하는 사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모두 하나 같이 내 것을 나누어 줄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 누가복음 말씀을 한 번 보세요. 원수를 사랑해?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해? 내 뺨을 치는 자한테 다른 쪽 뺨도 치라고 돌려대? 내 겉옷을 뺏어가는 사람한테 속옷도 거절하지 말래? 이게 세상적으로 생각할 때 하나라도 정상처럼 들리는 게 있습니까? 나를 포기하지 못하고, 내 욕심과 자존심을 버리지 못한 사람한테 있어서는 그 무엇 하나 정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 욕심을 버리고 내 자존심을 버리게 되면, 사람은 빼앗는 게 아니라 주고 싶어집니다.

역시 누가복음을 봅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与えなさい。そうすれば、自分も与えられます。人々は量りをよくして、押 しつけ、揺すり入れ、あふれるまでにして、ふところに入れてくれるでしょう。あなたがたは、人を量る量りで、自分も量り返してもらうからです。」

이처럼 주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랑은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5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もし互いの間に愛があるなら、それによって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弟子であることを、すべての人が認めるのです。」

우리 모두 무엇이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고, 무엇을 우리가 포기해야 하는지를 올바로 깨닫고, 우리가 우리 욕심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남들로부터 빠앗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처럼 남들을 섬기고 남들에게 나누어 주는 사랑을 실천함으로 인하여 주님으로부터 큰 상을 받고, 누르고 흔들어 넘치는 축복에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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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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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107회 미루어 헤아리는 믿음
2017년 12월 1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 7절~14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모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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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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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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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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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미루어 헤아리는 믿음” 推し量る信仰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을 보니까 일본 올해의 유행어 대상으로 두 단어가 발표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인스타바에라는 것인데, 이는 인스타그램……이라고 해서 인터넷에 자신을 올리는데 보다 잘 나오게 찍힐 만한 풍경이나 패션, 요리 같은 것을 말합니다. 글쎄요. 우리말로 하자면 사진빨이 잘 받는다…는 말이 있는데, 사진빨…이 아닌 인스타빨…이라는 단어가 말하자면 인스타바에……라는 단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자신이 찍은 사진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인다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었는데, 요즘은 스마트폰만 있으면 누구나 사진을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좋은 사진을 많이 올리게 되면 전세계 사람들이 그 사진을 보게 되고, 반응도 뜨겁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뭐 돈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다는 마음 때문일까요? 그래서 레스토랑 같은 데에 가면 음식을 시켜놓고, 이를 먹기 전에 사진을 찍느라고 난리인 경우를 볼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두 번째로 선정된 단어가 무엇인가 하면 바로 “촌탁”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게 참 한국 사람만이 아니라 일본 사람들한테도 그리 익숙한 단어가 아닙니다.

사전에 의하면 촌탁이란 “남의 마음을 미루어서 헤아리다.  他人の心をおしはかること。また、おしはかって相手に配慮すること。”는 뜻입니다.

어려운 단어에 비해 뜻은 그리 대단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게 왜 올해의 유행어로 뽑혔냐 하면 그 내면이 흥미롭습니다. 예를 들어서 상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상사가 부하한테 어떤 지시를 했습니다. 그러면 부하직원은 그 지시에 따라야 하겠지요. 이건 회사만이 아니라 어떤 조직에 있어서나 당연한 논리입니다. 정치나 공직자들도 마찬가지겠지요. 대통령이나 총리가 밑에 있는 장관이나 관료들한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립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이상 그 지시에 따라야 하겠지요.

그런데 만약에 대통령이나 총리 밑에 있는 장관이나 관료들한테 한 지시가 부당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예를 들어서 입찰 갈은 경우를 본다면 그 입찰에 참가하는 회사들한테 있어서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기회를 주어야 하는데, 대통령이나 총리가 지시를 하기를 어느 한 기업한테 유리하도록 특혜를 주라고 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예, 그건 아무리 대통령이나 총리라 하더라도 위법성이 있는 지시입니다. 나중에 이런 사실이 탄로나게 되면 이를 지시한 대통령이나 총리는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하게 되겠지요.

그런데 말이에요. 여기서부터가 문제인데, 학교 설립에 관한 신청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학교 설립에 대한 심사를 맡고 있는 관료라고 칩시다. 그런데 이 학교 설립에 대해서 심사를 해보니까 여러 가지 부족한 부분이 좀 많았습니다. 그래서 설립허가를 내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학교 설립신청을 낸 이사장이 자기 상사인 현직 총리인 아베 총리와 대단히 친분이 있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이 총리도 그 사람이 학교 설립 신청을 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요. 학교 설립이라고 하면 이는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어마어마한 돈이 움직이는 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여러분의 상사인 총리는 자기와 대단히 친분이 있는 그 이사장이 학교 설립 신청을 냈다는 것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관료인 내가 그 심사를 맡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총리가 나한테 무슨 요구나 지시사항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런 말도 없었어요.

이 시점에서 분명한 점 4가지를 정리해서 말씀 드립니다. 첫째로, 총리와 대단히 친분이 있는 이사장이 학교 설립 신청을 냈습니다. 둘째로, 학교 설립 허가를 위해서는 여러 가지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셋째로, 총리는 여러분한테 특혜를 주라고 하거나 허가를 주라고 하거나 하는 위법성이 있는 압력을 넣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넷째로 총리는 관료인 여러분이 그 심사를 맡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심사를 맡고 있는 담당 관료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학교 이사장이 아무리 내 상사인 총리와 대단히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여러 가지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당연히 허가를 내줄 수는 없지. 기각.

만약에 여러분께서 이렇게 곧바로 대답을 하셨다면, 예, 맞습니다. 그게 정답입니다…라고 말씀 드릴 것입니다. 하지만, 다음에 이 말을 덧붙이겠지요. “그걸 누가 몰라요?”

예전에 어떤 텔레비전 광고를 보았습니다. 여기에 공사 현장감독이 등장하는데 거기 항의를 하러 찾아온 고객한테 죄송하다면서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옆에 서 있던 젊은 부하직원한테도 너도 어서 빨리 사과 드려……그러면서 억지로 고개를 숙이게 합니다.

사과를 받은 고객이 돌아갑니다. 그러자 그 젊은 부하직원이 현장감독한테 따집니다.

감독님, 우리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우리가 사과해야 합니까. 그러자 이 현장감독이 말합니다. “너도 지켜야 할 것이 생기면 알게 될 거야.” 「お前も守るものができればわかるよ」

참 인상 깊지 않습니까. 이 고참 현장감독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잘못한 것 없어. 그걸 누가 몰라? 하지만 나한테는 지켜야 할 회사가 있어요. 지켜야 할 가족이 있어. 처자식이 있다고. 여기서 내가 고집을 부린다고, 내 체면을 세운다고 무슨 득이 되겠냐. 차라리 그냥 내 자존심 버리고 사과하는 게 우리 회사를 지키고 우리 가족을 지키는 일이야……이것 아니겠습니까.

앞서 학교 설립에 대해서는 이처럼 문제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설립 인가가 나버린 것입니다. 관료가 인가를 해줘 버렸어요. 그래서 그 특혜를 주라고 지시를 한 게 아니냐, 또는 그런 지시를 하지 않았어도 총리 마음을 헤아리고, 눈치를 추고 지레 짐작으로 학교 설립 인가를 준 게 아니냐 하면서, 국회에서도 연일 총리한테 추궁을 하고 난리였습니다. 여기서 나온 말이 바로 이 <촌탁>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직장 상사의 눈치를 보는 일, 그래서 알아서 기는 일이 바로 앞서 살펴 본 “촌탁”이라는 말입니다만, 그렇다면 이 “촌탁”이라는 것은 나쁜 일,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인가요? 어떤 뉴스를 보니까 기자가 밖에 나가서 직장인들한테 물어봅니다. 당신은 이 <촌탁>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있냐고 말이에요. 그랬더니 뭐라고 했겠어요.

자기들은 맨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겠어요. 맨날 자기 상사 눈치 보고, 자기 거래처 눈치 보면서, 알아서 기는 일을 매일 같이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사장이나 직장 상사가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알아서 척척 입맛에 맞도록 일처리를 한다면 얼마나 칭찬을 받겠어요. 하지만 반대로, 도대체 말을 안 하면 못 알아먹어요. 분위기 파악을 못해요. 그러면 무슨 말을 듣겠습니까.

쯧쯧쯧… 이런 눈치 없는 것 같으니라구. 내가 꼭 말을 해야 되겠어? 그렇게도 내 마음을 모르나? 뭐 이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참 세상에서 직장에 다니면서 또는 사업을 하면서 보면요, 치사한 일이 한 둘이 아닙니다. 참 많습니다. 예전에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자기 자식이 밖에서 어떻게 돈을 벌어 오는지를 알면 부모가 그 돈을 못 쓴다는 거예요. 이처럼 참 정말 촌탁인지 뭔지까지 해가면서 분위기 파악하고, 눈치 보고, 치사한 일 다 겪어 가면서 돈을 번다는 뜻이겠지요. 저도 직장생활, 회사생활을 해봐서 조금은 압니다. 정말로 직장생활 하시는 분들 참 고생이 많으십니다.

이렇게 자기 자존심을 버리고 상사 눈치를 보고 그 입맛에 맞춰서 일처리를 하면 상사나 거래처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승진도 되고 출세도 잘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와 같은 잔머리가 오래 가지는 않습니다. 자기 위에 있는 그 사람이 항상 그 자리에 있으면서 나를 지켜주고, 나를 보살펴준다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문제가 커져서 잘못했다가는 내가 경찰에 잡혀가는 일이 발생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항상 높은 자리에 계시면서 나를 지켜주고 나를 보살펴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게 누구십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사람 눈치를 보고, 권력자들, 권세자들 눈치만을 보고 거기에 순종한다면 이는 불의한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미루어 헤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로 오늘 본문에서 모세의 모습을 봅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있는데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는 짓이 뭐였습니까. 지금 금송아지를 세워놓고 그게 하나님이라면서 거기에 대고 제물을 드리고 난리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모세는 몰랐으나 하나님은 알고 계셨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중에서 출애굽기 32장 10절을 봅니다.

출애굽기 32장 10절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今はただ、わたしのするままにせよ。わたしの怒りが彼らに向かって燃え上がって、わたしが彼らを絶ち滅 ぼすためだ。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なる国民としよう。」

이에 대해서 나중에 모세가 설명하는 장면이 있는데 신명기 9장입니다.

신명기 9장 14절
“나를 막지 말라 내가 그들을 멸하여 그들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애고 너를 그들보다 강대한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시기로”

わたしのするがままにさせよ。わたしは彼らを根絶やしにし、その名を天の下から消し去ろう。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を、彼らよりも強い、人数の多い国民としよう。」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지만 그 중에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가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그런데 속을 참 많이 썩힌 이스라엘 민족이 이제는 하나님께서 너무나도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우상숭배를 하고 지네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그게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해낸 하나님이라면서 사람들이 막 미처 날뛰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노릇입니까.

우리는 이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그리고 모세에게 어떻게 해왔습니까. 정말 그야말로 하루가 멀다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불평과 불만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래도 정말 인내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하다하다 우상숭배까지 해요? 참으로 한심한 일이지요.

이제 하나님이 노하셨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 나 말리지 마. 내가 저놈들을 자 진멸하고 모세야, 너는 내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말씀만 들으면 모세한테 있어서는 전혀 나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게 속을 썩였던 인간들을 다 멸해버리고 나로 하여금 다시 새로운 민족을 세워서 더 강대한 나라가 되게 해 주시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말씀을 들은 모세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여러분께서 모세였다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저라면 이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구 하나님, 참 잘 생각하셨습니다. 하나님도 아시죠? 저놈들이 얼마나 하나님이나 제 속을 썩였습니까. 그래요. 이 참에 저 나쁜 놈들을 싹 멸해버리시고 새 민족으로 깨끗하게 시작하십시다……라고 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을까요?

쯧쯧쯧… 이런 눈치 없는 것 같으니라구. 그렇게도 내 마음을 모르나?

그러지 않으셨겠습니까?


하지만 모세는 알았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탈출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야. 하나님께서 400여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하신 역사야. 그리고 그냥 이렇게 이끌어내신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의해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마침내는 홍해를 가르시기까지 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셨다면, 지금은 분명 이렇게 화를 내고 계시지만, 하나님은 이 백성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고 계신 거야. 그리고 만약에 여기서 이스라엘 민족이 진멸하게 된다면, 그렇게 난리를 치고 애굽을 나가더니만 결국은 광야에서 다 죽이는구나. 무슨 그런 하나님이 다 있어? 하고 애굽 사람들이 비웃을 거 아니야? 그렇다면 하나님 체면이 뭐가 돼?

이렇게 생각한 모세는 뭐라고 합니까.

출애굽기 32장 11절~13절
“모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v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しかしモーセは、彼の神、主に嘆願して言った。「主よ。あなたが偉大な力と力強い御手をもって、エジプトの地から連 れ出されたご自分の民に向かって、どうして、あなたは御怒りを燃やされるのですか。また、どうしてエジプト人が『神は彼らを山地で殺し、地の面から絶ち滅 ぼすために、悪意をもって彼らを連 れ出したのだ』と言うようにされるのですか。どうか、あなたの燃える怒りをおさめ、あなたの民へのわざわいを思い直してください。あなたのしもべアブラハム、イサク、イスラエルを覚えてください。

あなたはご自身にかけて彼らに誓い、そうして、彼らに、『わたしはあなたがたの子孫を空の星のようにふやし、わたしが約束したこの地をすべて、あなたがたの子孫に与え、彼らは永久にこれを 相続地とするようになる』と仰せられたのです。」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 한 번만 참아 주세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말씀이 있잖아요. 제발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라고 간곡히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훌륭한 중보자의 모습이요, 훌륭한 지도자의 모습입니까.

세상의 지도자들은 대부분이 사람들 앞에 군림하기 좋아하고 번쩍이는 옷에다가 큰 차를 타고 다니면서 자신의 힘을 자랑하길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자신의 이웃을 위해서 자신의 조국을 위해, 자신의 민족을 위해,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훌륭한 중보자요, 훌륭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마음을 헤아리고 하나님 마음에 딱 들어맞는 기도를 드리니까 어떻게 됩니까.

출애굽기 32장 14절,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すると、主はその民に下すと仰せられたわざわいを思い直された。

하나님께서는 그러셨을 것입니다. 그래, 네가 내 마음을 아는구나……역시 너는 훌륭한 지도자야.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그 간청을 받아들이시고 마음을 돌이키셔서 화를 내리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로부터 바로 이 기도를 듣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 백성의 중보자로서, 지도자로서의 기도를 듣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나쁜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그 인간은 정말 나쁜 사람 같아요. 그런데 왜 멸하지 않으실까. 왜 빨리 데려가지 않으실까.

조금 더 거슬러올라가 볼까요? 여러분께서는 혹시 그런 생각 해보지 않으셨습니까. 애초에 우리가 이 고생을 하고 있는 이유가 뭐예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善悪の知識の木の実)를 따먹었기 때문이잖아요. 그렇지 않았으면 우리도 에덴에서 즐겁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갔을 텐데, 괜히 아담과 하와가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아예 그냥 그 나쁜 아담과 하와를 싹 멸해버리고 깨끗하게 다시 시작하셨다면 참 좋으셨을 텐데 왜 괜히 아담과 하와를 살려두셔 가지고 우리를 이렇게 고생하게 하실까……이거 제가 좀 고약해서 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건가요?

하지만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즉시 멸해버리실 정도로 성질이 급하셨다면, 이스라엘 민족을 당장 멸해버리실 정도로 성질이 급하셨다면, 우리 모두는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율법적인 기준으로만 보셨다면 우리만이 아니라 전세계에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단 한 사람도 율법 앞에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그렇게 생각하실 지 아세요? 글쎄요. 이 때는 아무래도 자기 이름을 대는 게 제일 좋겠지요?

야, 저 홍성필이라는 녀석 말이야. 아무리 두고 봐도 안 되겠어. 내가 얼마나 지켜봤는데 도저히 좋아질 것 같지가 않아. 내가 저 녀석한테 얼마나 많은 것을 주고, 얼마나 많은 기회를 주고, 얼마나 많은 사랑을 주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도무지 좋아질 것 같지가 않아. 그냥 싹 쓸어버리고 깨끗하게 시작할까?


이럴 때 누군가가 말씀하십니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래도 저 녀석을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지금까지 기다려주셨잖아요. 그리고 제가 저 녀석의 죄를 다 해결하신 것 기억하시잖아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반드시 회개하고 돌아올 거예요.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해주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중보자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기록합니다.

디모데전서 2장 5절~6절을 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神は唯一です。また、神と人との間の仲介者も唯一であって、それは人としてのキリスト・イエスです。
キリストは、すべての人の贖いの代価として、ご自身をお与えになりました。これが時至ってなされたあかしなのです。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중보자가 되어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해주시는 것만큼 내 이웃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제 나한테 물으실 지도 모릅니다. 얘 너 누구누구 미워하지? 내가 생각해도 참 밉다. 아주 못 돼먹었어. 그래서 내가 벌을 주어야 할 것 같은데, 넌 어떻게 생각하니?

그럼 여러분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이구, 하나님, 거 생각 참 잘하셨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도 그렇죠? 그 인간이 얼마나 나쁜 놈인데요. 이제라도 그 사실을 아셨으니 참 다행이십니다. 자, 어서 더 늦기 전에 아주 그냥 정신이 바짝 들게 된통 혼을 내주세요…… 그러시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신다고요?


쯧쯧쯧… 이런 눈치 없는 것 같으니라구. 그렇게도 내 마음을 모르나?

그러시지 않겠어요? 우리는 사람한테 하는 촌탁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께 하는 촌탁, 하나님 마음을 헤아리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을 멸하시려고 작정하셨다면 우리 자신도 벌써 심판 받아서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 떨어져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처럼 이렇게 죄도 많고, 믿음도 때로는 흔들리고, 이렇게 부족한 우리도 이렇게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불러서 예배를 드리게 해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은혜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만큼 우리 이웃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셔야 하겠습니다.

이제 얼마 후면 성탄절입니다. 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人の子が来 たのが、仕えられるためではなく、かえって仕えるためであり、また、多くの人のための、贖(あがな)いの代価として、自分のいのちを与えるためであるのと同じです。」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모두 사해주시는 일 말고는, 그와 같이 가장 힘든 일만 빼고는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감당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이웃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고 계시겠습니까. 그래, 마음 같아서는 그냥 꼴도 보기 싫은 인간들이지만, 예수님께서 나를 이렇게 사랑해주셨는데, 내가 먼저 섬기겠습니다. 내가 먼저 용서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와 같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싶어 하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죄인이라도 잃는 것을 원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4절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このように、この小さい者たちのひとりが滅びることは、天にいますあなたがたの父のみこころではありません。

이것이 진정 하나님의 마음이십니다. 이 마음을, 이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는 헤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우리 이웃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해 오신 성탄절이 조금 있으면 다가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서, 이 성탄절을 앞두고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그럼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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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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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106회 먼저 해야 할 일
2017년 12월 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Last Update 2019. 5. 21

마태복음 6장 14절~15절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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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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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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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먼저 해야 할 일’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요즘 일본에서 뉴스를 보면, 물론 북한 미사일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어제 보니까 월드컵 추첨 이야기도 있고 그렇습니다만, 아무래도 스모 선수인 하루마후지(日馬富士)에 대한 내용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까지 사건 수사가 진행중이라서 모두가 밝혀진 것은 아닙니다만, 지금까지 알려진 내용을 간추려서 설명하면 대략 이렇습니다.
일본 스모에서 최고위에 해당되는 요코즈나(横綱)인 하루마후지는 지난 10월 25일 스모 선수들끼리 술자리 모임에 참석했었다고 합니다. 이 하루마후지는 몽골 출신 선수였는데, 그 자리는 몽골출신 선수 모임의 성격이 강했다고 하네요.
그런데 그 모임 자리에서 이 하루마후지 선수가 후배 몽골 선수한테 폭행을 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뭐 여기서 때릴 때 맨손으로 때렸다느니 맥주병으로 때렸다느니, 그래서 머리 뼈가 금이 갔다느니 하는 보도가 연일 이어졌습니다.
글쎄요. 사실 맥주병으로 때렸다면, 이는 보통 일이 아닙니다. 가끔 영화나 드라마 같은 데에서 싸움을 할 때 보면 맥주병으로 머리를 때리면, 맥주병이 박살이 나고 하는 장면을 보신 적이 있으시겠습니다만, 그건 진짜 맥주병이 아니라 설탕으로 만들어진 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짝 때려도 그렇게 박살이 나곤 하는데, 진짜 맥주병은 그렇게 쉽게 안 깨집니다. 만약에 사람을, 그것도 머리를 그렇게 때렸다고 한다면 그건 스모 선수가 아니라 그냥 보통 사람들이 휘둘렀다고 해도 큰 일 날 정도로 다치거나, 자칫하면 사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맨손으로 때렸다고 하는데, 그건 또 반대로 아무리 씨름 선수, 그것도 요코즈나 정도 되는 선수라고 하더라도 맨손으로 때려서 머리 뼈에 금이 간다고는 볼 수 없겠지요. 사진도 공개가 되었습니다만, 이는 맨손으로 어떻게 해서 될만한 상처는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맥주병은 맨 처음에 들긴 들었는데, 병 표면에 물기가 묻어 있어서 미끄러졌다고 하고, 결국 옆에 있던 노래방 리모컨으로 때렸다고 합니다. 뭐로 때렸건 간에 맞은 사람은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것도 보통 사람이 때린 것도 아니고 스모선수, 그것도 요코즈나가 때렸으니 말 다했지요. 그리고 그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한 두 대를 때린 게 아니라 수십 대를 때렸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폭행이었죠.
이에 대해서 보도된 것이 11월 중순인데, 그 때부터 신문이고 텔레비전이고 무슨 벌집 쑤셔놓은 것처럼 연일 이에 대해서 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폭행을 가한 요코즈나 하루마후지 말에 의하면 후배 선수가 너무나도 건방지게 굴었다는 것입니다. 이 선수 말에 의하면, 그 모임 자리에서 선배가 후배 선수들한테 훈계를 하고 있는데, 스마트폰에 문자가 왔었다고 해요. 그래서 이 후배 선수가 스마트폰을 보았더니, 선배 선수가 누구한테 왔냐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후배 선수가 자기 여자친구한테서 왔다고 했답니다. 그러자 선배 선수가 말하기를, 지금 선배가 훈계를 하고 있는데 뭐하는 짓이냐 하고, 한 대 머리를 툭 쳤대요. 그 자리에서 이 후배가 잘못했다고 하면 괜찮았을 텐데, 반대로 이 선배를 노려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쭈 이 자식이……이래서 때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가해자인 요코즈나 하루마후지 이야기이고, 피해 당사자는 아직 직접 방송에 나와서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사실관계는 알 수가 없습니다만, 여기까지 들은 여러분께서는 어떻습니까. 이 후배, 버르장머리 없는 이 후배는 맞아도 싸다……혹시 이렇게 생각하시나요?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서 요코즈나 하루마후지는 사건 발생 한 달여 만에 은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스모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렇지, 사실 이 일본에서의 스모 인기는 대단합니다. 요코즈나 정도 되면 기본 연봉이 얼마쯤 되냐 하면 4천5백만엔입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4억 5천만원 정도가 되는 샘이죠.
거기에 실적에 따라 수당이 붙고, 행사 때마다 또 특별수당이 붙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코즈나가 1년에 받는 수입은 대략 1억엔, 10억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
지금 현재 공식 씨름선수가 대략 700명 정도가 있고, 요코즈나는 4명이 있었는데, 단순계산으로 본다면 0.6프로에 불과합니다. 과거에는 모두가 일본인이었습니다만, 스모에 대한 인기가 세계에까지 알려지면서 지금은 몽골 만이 아니라 국적도 매우 다양해져서, 종종 백인 스모 선수도 보일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일본뿐만이 아니라 세계에서 몰려드는 선수들을 이기고 요코즈나까지 올라간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겠지요. 말 그대로 피와 땀과 눈물의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요코즈나 하루마후지가 일본에 처음 온 것이 17년 전인 2000년 9월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나이 16살이었습니다. 몽골에서는 일본 스모가 상당한 인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에서 스모 선수가 된다는 것은, 글쎄요. 야구로 본다면 미국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것처럼 영웅대우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당시 얼마나 큰 꿈이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17년 간, 그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견디면서 올라간 그는 단 하룻밤, 아니, 불과 한 시간도 안 되는 동안에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서 궁지에 몰리게 됩니다. 일이 이렇게 커지자,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17년간 열심히 해왔는데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었다.”
그가 잃은 것은 연봉 10억원이라고 하는 수입만이 아닙니다. 본래 요코즈나 정도 되는 스모 선수가 은퇴를 하게 되면 스모 감독이 되어서 후진 양성을 할 수도 있는데, 그러려면 일본 국적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그는 당시 일본 국적 취득을 위한 수속을 진행중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스모를 계속 할 수도 없고, 감독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스모 세계에서 완전히 떠날 수밖에 없게 되고 만 것입니다.
그렇다고 몽골에 돌아가면 따뜻하게 맞아주나 하면, 지금까지 몽골에서도 계속해서 신문 보도가 이루어졌는데, 이미 이 하루마후지에 대한 몽골 사람들의 반응도 냉담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스포츠 선수로서 이런 불명예스러운 은퇴를 하고, 그것도 더구나 같은 후배 몽골 선수를 팼으니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야말로 돈도 명예도 한 순간에 잃어버린 격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사건 전말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피해 당사자인 후배 선수가 경찰조사는 받았다고는 하지만, 아직 공개적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누가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백 보 양보를 해서, 이 요코즈나 하루마후지가 한 말이 100% 맞다, 정말로 후배 선수가 버르장머리 없는 짓을 했다고 칩시다. 정말 맞을만한 짓을 했다고 쳐요. 하지만 그렇다고 결과가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일이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하루마후지는 은퇴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폭행 원인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후배를 생각해서, 이후의 일을 생각해서 혼을 냈다. 후배한테 있어서 예의와 예절을 제대로 가르치려 했는데, 너무 지나치게 되고 말았다. 선배로서 후배한테 예의범절을 가르치려고 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좀 과하게 되어서 이렇게 되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선배가 후배를 혼내는 일, 상사가 부하를 혼내는 일, 나이 든 사람이 젊은 사람, 어린 사람을 혼내는 일……어찌 보면 흔히 있는 일이 수도 있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바탕에는 우리에게 어떤 생각이 있습니까. 그렇죠. 너한테는 분명 문제가 있다. 그러나 나는 문제가 없다는 생각인 것입니다.
만약에 이 요코즈나가 그 버릇없는 후배를 보았을 때, 그래, 저 놈이 건방지긴 하지만,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아니면, 나도 부족한 점이 많은데, 어린 애가 저럴 수도 있겠지……라는 생각을 단 한 번이라도 했다면 어땠을까요. 한 두 마디 쓴 소리를 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머리 뼈에 금이 가도록 두들겨 패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건으로 인해서 본인 스스로의 말처럼,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비판할 때에 보면 우리 속에는 어떤 마음이 있습니까. 바로, <나는 옳고 상대방은 나쁘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옳은 내가 옳지 않은 너를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우리가 남을 비판하기에 앞서, 비판하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해야 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용서입니다.
성경을 봅니다.
누가복음 6장 37절을 봅니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우리는 비판을 하기 전에, 정죄를 하기 전에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용서>입니다.
이 용서라고 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 또한 용서인 것입니다. 우리가 왜 용서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믿음이 좋아서요? 우리가 착해서요? 우리가 남들보다 잘나서 용서할 수 있나요?
성경을 보면 용서해야 하는 3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우리 자신이 용서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4절에서 35절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여기서 한 달란트라고 하는 것은 당시 근로자들의 20년치 임금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냥 한 달란트도 아니고 10000달란트 빚을 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게 도대체 몇 년치 임금이에요? 단순계산으로 20만년어치 임금이라는 것입니다. 20년치 임금이라면 그래요, 뭐, 갚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20만년어치 임금이라뇨. 이걸 어떻게 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절대로 갚을 수가 없습니다. 반면에 데나리온이라는 것은 당시 하루 치 임금이 1데나리온이었습니다. 그런데 100데나리온이라고 하면 100일치, 그러니까 3개월하고 10일치 임금 정도 되겠네요.
20만년어치, 100일치……라고 하니까 잘 감이 안 오시죠? 그렇다면 돈으로 한번 계산해보도록 하지요. 먼저 100일치 임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에서 보면 평균 월급이 대략 300만원 정도라고 해요. 그러면 100일치 임금이라고 하면 3개월에 열흘 정도 보태서, 그냥 계산하기 쉽게 1000만원이라고 하지요. 1,000만원.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닙니다. 하지만 먼저 1달란트부터 계산해볼까요? 1달란트는 20년치 임금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300만원 곱하기 12를 하면 3600만원이 나옵니다. 이게 1년이에요. 그럼 20년이면 3600만원 곱하기 20이죠? 그러면 7억2천만원이 됩니다. 이게 1달란트예요. 그런데 여기에 얼마를 곱해야 해요? 예, 10000달란트라고 하니 10000을 곱해야겠지요? 그럼 얼마가 나오냐 하면 7조 2천억원이 나옵니다.
1000만원과 7조 2천억원……이라고 하면 저 같은 사람은 잘 감이 안 와요. 그렇기 때문에 서로 좀 숫자를 낮추면 알기 쉬울 것입니다. 1000만원을 1000원이라고 합시다. 그러면 7조 2천원은 어떻게 되냐 하면 7억 2천만원입니다.
7억 2천만원을 탕감해주었는데 단돈 1000원을 안 갚는다고 그를 잡아서 옥에 가두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죄악 속으로 빠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일평생을 착하게 살려고 아등바등 노력을 해봐도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가 있습니까. 율법 보다는 차라리 세상 법을 지키기가 훨씬 쉽습니다.
예를 들어서 세상에서는 작은 죄를 지으면 작은 벌만 받으면 됩니다. 그러나 율법은 어떻습니까.
야고보서 2장 10절을 봅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이것을 어떻게 우리가 지킬 수 있단 말입니까. 강물에 돌멩이를 던집니다. 그러면 큰 돌만 물에 가라앉나요? 아니요? 작은 돌도 물속에 가라앉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아무리 착한 척을 한다 하더라도 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는 없다고 성경은 말씀해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의지하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만 의지하면 됩니다. 십자가만 의지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기만 하면 우리 힘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우리의 죄 모두가 탕감되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큰 은혜를 입었는데, 돈으로 환산하자면 상상도 못할 빚을 탕감 받았는데, 우리 이웃한테 아주 작은 것 하나 탕감해주지 못하겠습니까.
그 탕감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용서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한다는 것은 우리가 탕감 받았다는, 우리 죄가 용서 받았다는 믿음의 간증인 것입니다. 우리도 이 믿음의 간증인, 은혜의 간증인 용서를 할 수 있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갚아주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로마서 12장 19절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나쁜 일이지만, 하나님이 생각하실 때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 혼자 생각하고 원수를 갚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원수를 갚아야 할만한 일이라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이를 갚아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맡기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하면 됩니까. 그렇습니다. 용서를 하면 됩니다. 내가 나 스스로 수고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방을 해하면 죄가 되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면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 아니겠습니까. 저 놈은 정말 나쁜 놈이야. 그런데 하나님이 아무런 벌도 안 내리셔.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하나님을 대신해서 내가 해?
하나님은 그러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용서이지 원수를 갚는 일, 복수를 하는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하라는 일 하기도 바쁜데,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일까지 할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하늘을 대신해서 내가 복수를 해요? 복수는 나의 것? 복수는 나의 힘? 영화 제목으로는 그럴 듯할지 모르지만, 그러다가 그야말로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그런 일 당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화가 나면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잘 압니다. 저도 성격이 그리 고분고분한 편은 못 됩니다. 하지만 그 고비를 한 번 넘겨보자는 것입니다. 한 번 넘겨서 안 되면 두 번 넘겨보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쉽나요? 아니요. 어렵지요. 하지만 그 어려움을 누가 아십니까. 예, 하나님이 아십니다. 예수님이 그런 우리 모습을 보시고 위로해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을 믿잖아요? 예수님을 믿잖아요? 그렇다면 한 고비, 두 고비 넘어가면서 용서해보시길 바랍니다. 용서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더할 나위 없는 간증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용서야말로 우리가 받을 축복의 열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주기도문, 여기에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고백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 용서야 말로 축복을 받는 핵심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어쩌다가 말실수로 이 용서라는 말씀을 넣은 것이 아닙니다. 이 주기도문은 마태복음 6장 9절~13절까지 나옵니다만,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주기도문을 말씀해 주시고 난 다음에 곧바로 한 번 더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오늘 본문을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14절~15절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는 용서는 어떤 용서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면 어렵지요? 그렇다면 간단하게 질문하겠습니다.
용서가 먼저입니까, 사과가 먼저입니까.
여기에 많은 분들은 <사과가 먼저>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합니다. 아니, 사과를 하고 죄를 뉘우쳐야지 용서를 하든지 말든지 하지, 사과도 안 했는데 용서를 해? 그건 말도 안 돼……이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은 어땠습니까.
성경을 봅니다.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
자신의 죄를 알고 뉘우쳤다면 이는 죄인이 아니었겠지요.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먼저 사과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우리 스스로의 죄도 모르고 있을 때 먼저 십자가에 달려주셨던 것입니다. 만약에 사과하면 용서해준다고 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18장 21절~22절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이 말씀에 보면 어디에도 <사과하면>이라는 조건이 없습니다. 무조건적인 용서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먼저 사과하라, 그러면 사과하는 것 봐서 용서해주겠다……그것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사과를 안 하면 어쩌겠습니까? 맥주병으로 팰 건가요? 노래방 리모컨으로 때리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된다고요?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성경에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5장 26절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용서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 속 뒤집어지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 손해 보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용서야말로 축복을 받는 지름길인 것입니다. 용서야 말로 우리 믿음의 더할 나위 없는 간증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용서야말로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미운 사람이 있습니까? 나한테 잘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한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왜요? 그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내가 용서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 덕분에 내가 용서를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상을 받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것을 잃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가 크나큰 축복 받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에 용서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남들 보다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중요하겠지요. 남들보다 출세하는 것도 중요하겠지요.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남들보다 용서를 더 많이 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더 많이 사랑하며 섬기는 믿음의 자녀가 되어서,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에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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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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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회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
2017년 11월 2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43장 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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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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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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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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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 神様を宣べ伝える人生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먼저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천사한테는 날개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이른바 천사라고 하면 우리는 날개가 있는 천사를 연상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많은 예술가들도 천사를 그릴 때에 보면 반드시 날개를 그려왔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천사들을 보면 날개에 대한 묘사가 있는 것도 있지만 없는 것도 있습니다.

사사기 13장 16절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나를 머물게 하나 내가 네 음식을 먹지 아니하리라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하니 이는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마노아가 알지 못함이었더라”

すると、主の使いはマノアに言った。「たとい、あなたがわたしを引き止めても、わたしはあなたの食物は食べない。もし全焼のいけにえをささげたいなら、それは主にささげなさい。」マノアはその方が主の使いであることを知らなかったのである。

이는 여호와의 사자인 천사가 삼손의 탄생을 그의 아버지인 마노아에게 알리는 장면입니다만, 성경에는 천사를 보고도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이 보았을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큰 날개가 달린 천사를 보았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렇다면 누구나가 다 금새 알아보았겠습니다만, 이처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면 이는 얼핏 보기에 우리와도 같은 사람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천사 이름 중에는 가브리엘과 미가엘이 성경에 나옵니다. 가브리엘은 구약에서는 다니엘서에 등장하고 신약에서는 누가복음에 등장하지요. 미가엘은 천사장이라고 합니다. 미가엘은 구약에 보면 역시 다니엘서에 등장하고 신약에서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합니다. 여기서 보면 그 어디에도 그들에게 날개가 있었다고 묘사한 부분은 없습니다.

물론 다니엘 9장 21절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곧 내가 기도할 때에 이전에 환상 중에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내게 이르더니”

すなわち、私がまだ祈って語っているとき、私が初めに幻の中で見たあの人、ガブリエルが、夕方のささげ物をささげるころ、すばやく飛んで来て、私に近づき、

가브리엘이 다니엘의 기도 응답을 위해서 빠른 속도로 날아 왔다고 합니다. 여기에 특별히 <날아 왔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분명 날개가 있었을 것이다……라고 옛날 초대 교회 지도자들은 해석하였습니다만, 여기서 <날다>라고 하는 원어 뜻에 대한 해석도 여러 주장이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이 주장하기로는 <날다>라고 하는 뜻에는 <지치다>, <피곤하다>라는 뜻도 있다고 하면서, 이는 다니엘이 오랜 기도 때문에 지쳐 있을 때에 가브리엘이 왔다……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날라왔다고 하더라도, 아니, 그럼 가브리엘이 아닌 다른 천사들, 날개가 없는 천사들은 그럼 어떻게 내려왔겠습니까. 하늘에서 사다리라도 타고 내려왔겠어요? 이런 말씀을 드리면, 성경을 열심히 읽으신 분이라면 어떤 한 구절을 떠올리실 것입니다.

창세기 28장 12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そのうちに、彼は夢を見た。見よ。一つのはしごが地に向けて立てられている。その頂は天に届き、見よ、神の使いたちが、そのはしごを上り下りしている。

라고 기록되어 있지요? 이를 보고, 거봐. 날개가 있는 천사들은 하늘에서 날아서 이 땅에 오고, 그렇지 않은 천사들은 사닥다리를 타고 왔다 갔다 한 거야……

라고 말씀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생각해보세요. 천사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일인데, 하나님으로부터 지시를 받으면 저기 하늘나라에서 열심히 사닥다리를 타고 이 땅에 내려와서 일을 하고는, 임무를 마친 다음에는 다시 열심히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가요? 그건 좀 무리가 있겠지요. 여기 야곱에게 나타난 사닥다리는 어디까지나 환상입니다. 이는 천사들이 고생하면서 저 하늘까지 왔다 갔다 했다는 뜻이 아니라, 야곱이 자기가 살던 집에서 도망 나와서 외롭게 가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늘나라와 이 땅 사이가 별개의 것이 아니고, 이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려고 환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증거로 앞서 말씀 드렸던, 삼손의 출생을 알린 천사가 다시 하늘로 올라갈 때 사닥다리를 타고 갔을까요?

사사기 13장 20절에 보면,
“불꽃이 제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제단 불꽃에 휩싸여 올라간지라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그것을 보고 그들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라”

炎が祭壇から天に向かって上ったとき、マノアとその妻の見ているところで、主の使いは祭壇の炎の中を上って行った。彼らは地にひれ伏した。

삼손의 아버지인 마노아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준비했더니, 불꽃이 제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데, 이와 함께 여호와의 사자도 제단 불꽃에 휩싸여서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천사한테는 날개가 있었고, 날개가 있어야지만 하늘을 날 수 있고 하늘나라와 이 땅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땅에서의 얄팍한 기준을 두고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가복음 16장 5절~6절을 봅니다.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それで、墓の中に入ったところ、真っ白な長い衣をまとった青年が右側にすわっているのが見えた。彼女 たちは驚いた。青年は言った。「驚い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がたは、十字架につけられたナザレ人イエスを捜しているのでしょう。あの方はよみがえられました。ここにはおられません。ご 覧なさい。ここがあの方の納められた所です。

이는 예수님 시신 위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갔다가, 빈 무덤 안에서 천사를 만났을 때의 묘사입니다. 여기에는 단지 흰 옷을 입은 청년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는데, 만약에 날개가 있었다면 흰 옷을 입었다거나 청년이라거나 하는 게 문제겠어요? 적어도 날개가 달린 청년을 보고……이렇게 되어 있어야겠지요. 하지만 여기에도 역시 날개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천사한테는 날개가 없을까요? 아뇨. 확실하게 날개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룹(ケルビム)과 스랍(セラフィム)입니다. 실제 그룹(ケルビム)에 대한 묘사는 에스겔서(エゼキエル書) 에 많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반드시 날개에 대한 묘사도 등장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룹(ケルビム)이 많이 등장하는 곳은 출애굽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여기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성막(幕屋)을 제작하는 장면인데, 여기에 보면 성소 여기저기에 날개가 있는 그룹(ケルビム) 천사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하나님의 법궤나 성막에는 일반 천사가 아닌 그룹(ケルビム) 천사가 새겨지거나 그려졌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그룹(ケルビム)천사의 임무는 주로 지키는 일입니다. 사실 천사들 중에서 성경에 제일 처음 등장하는 천사가 바로 이 그룹(ケルビム)천사인데, 어디에 등장하냐 하면 창세기에, 그것도 창세기 3장에 벌써 등장합니다.

창세기 3장 24절을 봅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こうして、神は人を追放して、いのちの木への道を守るために、エデンの園の東に、ケルビムと輪を描いて回る炎の剣を置かれた。

아담과 하와는 본래 에덴에 있으면서, 우리를 영생하게 하는 생명나무도 마음대로 따먹을 수가 있었습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었는데, 에덴으로 이어지는 길, 생명나무로 이어지는 길을 막은 것이 누구였냐 하면 바로 그룹(ケルビム) 천사였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그룹(ケルビム) 천사가 지키고 있는 곳을 함부로 지나치려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 곧바로 죽음이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법궤의 모양을 보더라도 그룹(ケルビム) 천사의 날개로 덮여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25장 20절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ケルビムは翼を上のほうに伸べ広げ、その翼 で『贖(あがな)いのふた』をおおうようにする。互いに向かい合って、ケルビムの顔が『贖いのふた』に向かうよう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

여기서의 속죄소는 법궤神の契約の箱의 뚜껑을 말합니다. 이처럼 그룹(ケルビム) 천사로 하여금 법궤를 지키게 했던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를 열어보려고 했다가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무엘상 6장 19절을 보면 이를 열어보려고 했던 벧세메스(ベテ・シェメシュ)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죽이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법궤가 놓여져 있는 곳은 어디였냐 하면 바로 지성소였습니다. 과거에는 성전이라고 해도 그 안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성소만 하더라도 일반 사람은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고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으며, 법궤가 놓여져 있는 지성소에는 제사장들 중에서도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대속죄일에 단 한 번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는데, 아무리 대제사장이라 한다 하더라도 지성소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들어가는 곳이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옛날이라면 이 땅의 임금님을 만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임금님 앞에서 자칫 실수라도 하게 된다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대제사장들도 마찬가지였지요. 당시 제사장 복장에는 방울이 달려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섬기는 과정에서 죽을 수도 있었는데, 이 방울소리가 나면 죽지 않은 것이고, 방울소리가 안 나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성소와 지성소는 대단히 거룩하게 구별된 곳이었습니다. 이곳은 휘장으로 구분이 되어 있어서, 밖에서는 그 안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알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마가복음 15장 37절~38절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それから、イエスは大声をあげて息を引き取られた。神殿の幕が上から下まで真っ二つに裂けた。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짊어지시고, 모든 징계를 대신해서 받으시고, 모든 심판을 대신해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위에서 숨이 끊어지셨을 바로 그 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완전히 둘로 찢어졌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는 마가복음만이 아니라 공관복음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기록된 사건입니다. 아니 휘장이 찢어진 게 뭐가 그리 대단하기에 이처럼 공관복음 기자가 모두 적어 놓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소 휘장에 대한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26장 31절~33절을 봅니다.
“너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짜서 휘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ケルビム)들을 정교하게 수 놓아서 금 갈고리를 네 기둥 위에 늘어뜨리되 그 네 기둥을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싸서 네 은 받침 위에 둘지며 그 휘장을 갈고리 아래에 늘어뜨린 후에 증거궤를 그 휘장 안에 들여놓으라 그 휘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리라”
青色、紫色、緋色の撚り糸、撚(よ)り糸で織った亜麻布(あまぬの)で垂れ幕を作る。これに巧みな細工でケルビムを織り出さなければならない。これを、四つの銀の 台座 の上に据えられ、その鉤(かぎ)が金でできている、金をかぶせたアカシヤ材の四本の柱につける。その垂れ幕を留(と)め金の下に掛け、その垂れ幕の内側に、あかしの箱を運び入れる。その垂れ幕は、あなたがたのために聖所と至聖所との仕切りとなる。
이 기록에 의하면 법궤만이 아니라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해 놓은 휘장에는 바로 다름 아닌 그룹(ケルビム) 천사의 그림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단지 그림으로 그려놓으면 지워질까봐 정교하게 수를 놓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죠? 그룹(ケルビム) 천사의 최초 역할이 무엇이었습니까. 죄를 짓고 타락한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를 지키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타락한 상황에서는, 우리의 죄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인하여 영생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하나도 남김 없이 해결해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지키고 있던 그룹(ケルビム) 천사들이 물러나고 생명으로 가는 길, 생명나무로 가는 길, 아버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지성소가 어디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있는 교회가 성소이고 지성소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꼭 교회만이 아니더라도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주님을 부르는 곳, 우리가 주님 이름으로 모인 바로 그 곳이 성소이자 지성소입니다. 이제 우리는 누구를 통해서가 아닌 직접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날개 가진 천사에 대해서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스랍(セラフィム)>이라고 하는 이름의 천사입니다. 이 스랍(セラフィム)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 단 두 구절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이사야 6장 2절과 6절인데, 특히 2절~3절에 이 스랍(セラフィム)에 대한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セラフィムがその上に立っていた。彼らはそれぞれ六つの翼があり、おのおのその二つで顔をおおい、二つで両足 をおおい、二つで飛んでおり、互いに呼びかわして言っていた。「聖なる、聖なる、聖なる、万軍の主。その栄光は全地に満つ。」

이 스랍(セラフィム)은 낮이나 밤이나 하나님 곁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사입니다. 그런데 이 천사의 모습이 독특합니다. 날개가 여섯이 있는데 둘로는 자기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자기 발을 가리고, 그리고 나머지 둘로는 날아다니면서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류폴드라는 분은, 얼굴을 가린 것은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었기 때문이고, 발을 가린 것은 먼지로 자주 더럽혀지는 발의 상대적인 불경건성 때문이라고 하는데, 저는 이 해석에 상당히 의문이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볼 수는 없으나 하늘의 천사들이 하나님 얼굴을 볼 수가 없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고, 또한 날개로 날아다니는 스랍(セラフィム)에게 있어서 발이 불경건하다는 표현도 쉽게 이해가 안 됩니다.

여기에 있어서의 힌트가 바로 오늘 본문이 있는 이사야 43장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인 이사야 43장 2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지으신 이유는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문맥을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송을 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되어야 할 텐데, 어디 한 번 그 다음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 43장 22절~24절
“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롭게 여겼으며 네 번제의 양을 내게로 가져오지 아니하였고 네 제물로 나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는 제물로 말미암아 너를 수고롭게 하지 아니하였고 유향으로 말미암아 너를 괴롭게 하지 아니하였거늘 너는 나를 위하여 돈으로
v향품을 사지 아니하며 희생의 기름으로 나를 흡족하게 하지 아니하고 네 죄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
しかしヤコブよ。あなたはわたしを呼び求めなかった。イスラエルよ。あなたはわたしのために労苦しなかった。
あなたはわたしに、全焼のいけにえの羊を携 えて来ず、いけにえをささげて、わたしをあがめようともしなかった。わたしは穀物のささげ物のことで、あなたに苦労をさせず、乳香(にゅうこう)のことであなたを煩わせもしなかった。
あなたはわたしのために、金を払って菖蒲(しょうぶ)を買わず、いけにえの脂肪で、わたしを満足させなかった。かえって、あなたの罪で、わたしに苦労をさせ、あなたの不義で、わたしを煩わせただけだ。

여러분, 어떠세요?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찬송하라고 지어놨더니 제대로 찬송하지 않더라……라는 말씀을 하시려면, 무슨 노래를 많이 하지 않는다거나, 노래 실력이 부족하다거나 하는 말씀을 하실 만도 한데, 노래에 대한 말씀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았고, 하나님을 괴롭게 여겼고, 하나님께 제물로 공경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너한테 돈을 벌게 해주고 재물도 너한테 많이 주었는데, 너는 나를 위해서 그것을 쓰지 않고 오히려 네 죄악들로 인해서 나를 괴롭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디에도 노래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나는 너한테 많은 것을 주었는데, 너는 그것을 가지고 나를 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섬기기는커녕 죄악으로 하나님을 힘들게 할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랍(セラフィム) 천사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스랍(セラフィム)의 모습은 얼굴을 가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높이려고 합니다.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어떠한 모습입니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려고 합니다. 하나님 얼굴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하나님 이름을 널리 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발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디로든 가고자 하는 행위는 발로서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길로 갈 것인가, 아니면 악의 길로 갈 것인가 하는 기로에 우리는 항상 서 있기 마련입니다.

20세기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Life is C between B and D. 우리의 인생은 B와 D 사이에 있는 C이다. 이 말은 B는 birth, 탄생이고, D는 death…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알파벳으로 보더라도 B와 D 사이에 C가 있는데 우리 인생에도 B와 D 사이에 C가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C Choice 그렇습니다. 바로 선택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성공적인 인생을 보내고 싶어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돈 많은 부모를 만나야만 가능한가요? 행운이 있어야지만 하나요? 아닙니다. 순간 순간마다 선택만 잘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공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나를 영화롭게 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인지를 우리는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셨습니까. 돈이나 재산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건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시간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아니면 나 자신을 섬길 것인지를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선택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요,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과거에는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 지성소로 들어간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언제든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지성소로 들어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남은 삶의 기간 동안, 나를 위한 선택이 아닌 하나님을 위한 선택을 하면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주님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는 삶을 살아가는,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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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4회 준비된 감사
2017년 11월 19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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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4절~5절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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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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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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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준비된 감사” 備えられた感謝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예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특별히 <감사>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교회에 조금 다녀보신 분이라면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은 매우 익숙한 구절 중 하나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こういうわけで、いつまでも残るものは信仰と希望と愛です。その中で一番すぐれているのは愛です。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그 앞에는 마음은 반드시 <감사>라고 하는 마음이 전제조건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주님께 대한 감사가 없이 어떻게 믿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모두 해결해주셨고, 우리를 멸망 속에서 건져서 구원의 길로 인도해주셨다는 감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소망도 마찬가지지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주지 않으셨다면 우리에게는 절망 밖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순간 잘 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결국은 절망 속으로 가고 마는 미래인데 거기에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앞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거저가 아닙니다. 우리가 받을 징계를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시고, 우리가 맞을 채찍을 예수님께서 대신 맞으시고 우리가 받을 죽음과 멸망과 저주와 심판을 모두 예수님께서 대신 짊어져 주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그 귀하신 피를 흘려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절망이 아닌 소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떻습니까. 옛날에 제가 붓글씨를 배울 때 보면, 그냥 아무렇게나 쓰라고 하지 않습니다. 글씨를 어떻게 써야 잘 쓰는 글씨인지 알지도 못하는데 무조건 잘 쓰라고 하면 그게 되나요? 그래서 반드시 옆에 샘플을 놓고 그대로 따라서 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우리 모습이 어땠습니까.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여인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4장 22절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救いはユダヤ人から出るのですから、わたしたちは知って礼拝していますが、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で礼拝しています。

지금도 이 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예배해야 하는지, 무엇을 경배해야 하는지, 무엇을 섬겨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사람의 손으로 조각을 만들어놓고는 그것을 신이라고 하면서 거기에 대고 절을 하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를 심판하는 하나님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면 되는지, 우리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면 되는지, 과거에는 모세를 통해서 율법으로만 말씀해주셨으나, 이제 십자가를 통해서 직접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의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이 사랑에 대해서도 우리가 그냥 그런가보다……라고 지나쳐버린다면 이 사랑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감사함으로 ,주님의 사랑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였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사가 있어야 믿음이 있을 수 있고, 감사가 있어야 소망이 있을 수 있고, 또한 감사가 있어야 사랑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각 나라에는 그 나라 국민이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한국의 경우에는 국민의 4대 의무, 국방의 의무, 교육의 의무, 근로의 의무, 납세의 의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믿음 안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18절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いつも喜んでいなさい。絶えず祈りなさい。すべての事について、感謝しなさい。これが、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あなたがたに望んでおられることです。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좋은 일이 있으면 기뻐하지 말라고 해도 기뻐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자신의 복을 우상들을 향해 빌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무슨 선물을 준다든지 친절을 베풀어주면 감사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기뻐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만 기뻐하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전혀 기뻐할 일도 아닌데, 아니, 남들이 보기에는 시련일 수도 있고 문제일 수도 있고 또는 어려움일 수도 있는데, 하지만 믿음 안에서 우리는 기뻐하는 것이 의무이기 때문에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는 기뻐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아쉬울 때만 기도하고, 그렇지 않으면 안 해도 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는 쉬지 말고 하라고 하기에 누구는 기도를 믿음 안에서 호흡이라고 하는 분도 계십니다. 참 맞는 비유이죠. 숨 쉬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을 때 하고, 귀찮으면 며칠 건너뛰고 그럴 수 있나요? 그러면 죽어버리고 맙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죠. 그렇다고 반드시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기도하는 것만이 기도가 아닙니다. 길을 갈 때나 혼자 있을 때 주님께 말씀을 드리는 것도 훌륭한 기도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도 얼마나 귀한 기도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호흡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의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과의 대화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범사가 무엇입니까. 좋은 일이 있을 때에만? 누가 나한테 좋은 일을 해주었을 때만? 누가 나한테 선물을 줬을 때만? 아니요. 범사란 언제든지, 어떤 일에 있어서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서는 사랑이 제일이지만, 기뻐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과 감사하는 것 중에서는 저는 감사가 제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가 있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감사가 있기 때문에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가 있기 때문에 믿음을 지킬 수가 있고, 감사가 있기 때문에 소망을 품을 수가 있는 것이며, 감사가 있기 때문에, 감사로 넘치기 때문에 사랑을 할 수 있는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혀 좋은 일도 아닌데, 전혀 기뻐할 일도, 전혀 감사할 일도 아닌데 우리는 왜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4절~5절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神が造られた物はみな良い物で、感謝して受けるとき、捨てるべき物は何一つありません。神のことばと祈りとによって、聖められるからです。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모두가 선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감사함으로 받기만 하면 무엇 하나 버릴 것이 없기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께 드려야 할 감사는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해서, 오늘은 3가지, 과거의 감사, 현재의 감사, 그리고 미래의 감사……이렇게 3가지로 나누어서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과거의 감사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몇 십 년 동안 살아오면서 되돌아보면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한 번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그 중에는 물론 좋은 일도 있었을 것이고, 기쁜 일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어디 그 뿐인가요? 서운한 일도 있었고 슬픈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괴로운 일도 있었고 힘든 일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쁜 일이나 좋은 일에 대해서는 감사할 수 있겠습니다만, 한편으로는 어려웠던 일이나 괴로웠던 일은 어떠십니까. 어떤 분들은, 그래 뭐 옛날 일이니까 그 때는 좀 힘들고 고생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좋은 추억이야……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신가 하면, 또 어떤 분들은 아직도 분이 안 풀려서 지금도 그 때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고 하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 안에 있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주님께 돌려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병에 걸린 적이 있으십니까. 그 때는 그랬어도 하지만 지금은 회복되어서 이 자리에 계시잖아요. 돈을 많이 잃으셨나요? 얼마나 잃으셨습니까. 많이 잃으셨습니까. 하지만 더 많이 잃지 않는 것도 감사한 것입니다.

사람한테 상처를 받으셨습니까. 그 때 받은 상처를 주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라고 과거의 일들을 돌아보면 좋은 일만 있겠습니까. 정말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고도 남을 일들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죠. 하이고, 정말 내가 왜 그 때 그랬을까, 이랬을까 하고 생각을 하면 밤새도록 후회해도 끝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항상 후회해라? 쉬지 말로 후회해라? 범사에 후회해라? 아니요.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후회하시기를 원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사랑하는 자녀가 후회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좋아할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가진 상처, 우리가 가진 괴로움, 우리가 가진 고통들을 주님께서는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위로하시고 우리를 사랑으로 보듬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아픔, 지난 날의 상처를 보듬어주시는 주님을 믿고 주님께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현재의 감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무리 평탄하거나 아무리 순탄할 때라 하더라도 조금도 고민이 없거나 문제가 없었던 시기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항상 어느 정도의 문제는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셨기 때문에 이곳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이 가진 것은 똑같습니다. 똑 같은 자동차에 똑 같은 수준의 재산도 가지고 있습니다. 가족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똑 같은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행복했고 다른 한 사람은 불행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한 사람은 내가 가진 것, 내게 주어진 것에 감사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 내가 가지고 있는 가족, 내가 가지고 있는 건강, 내게 주어진 직장이나 환경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니 항상 기쁨이 넘칩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항상 부족해했습니다. 이웃이나 옆집을 보고는 부러워합니다. 가족도 맨날 웬수 덩어리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가진 것이 아니라 내게 없는 것만 바라봅니다. 교회에 가면 뭘 해. 나는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는데…… 그렇게 되니 당연하게도 불평 불만이 쌓여갑니다. 그러니 어떻게 거기에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6장 31절~33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そういうわけだから、何を食べるか、何を飲むか、何を着るか、などと言って心配 するのはやめなさい。こういうものはみな、異邦人が切に求めているものなのです。しかし、あなたがたの天の父は、それがみなあなたがたに必要であることを知っておられます。だから、神の国とその義とをまず第一に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それに加えて、これらのものはすべて与えられます。

여기서 구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단순히 부족한 것을 구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불평 불만 염려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에게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은 나도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을 구하라는 것이죠.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것이에요.

그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먼저 그 나라는 무엇이에요. 그렇습니다. 천국, 바로 우리가 가야 할 곳입니다. 우리의 목적지,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최종목표는 이 땅에서 어디까지 출세하느냐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 얼마나 재산을 많이 모아놓느냐가 아닙니다. 우리가 마침내 가야 할 곳은 천국인 것입니다. 바로 그 천국에 가기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를 구하라는 것은 천국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좀 어렵죠? 조금 더 쉽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군대에서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강단에서 직접적으로 말씀 드리기는 좀 그렇습니다만, 고참이 어떤 황당한 행동을 해도 그것은 작전이다……그러니까 졸병이 보기에는 이해가 안 가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뜻을 어떻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믿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 생각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이사야 55장 9절을 봅니다.

이사야 55장 9절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天が地よりも高いように、わたしの道は、あなたがたの道よりも高く、わたしの思いは、あなたがたの思いよりも高い。

아무리 지혜가 많고 생각이 깊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길은 우리 길보다 높고 하나님 생각은 우리 생각보다 높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두 번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하나님이 누구 편이에요? 그렇죠. 바로 우리 편이 되십니다. 우리도 역시 하나님 생각을 구체적으로 짐작할 수는 없을지라도, 한 가지 확실한 것,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 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온맘다해”라는 찬양을 들어보신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그 찬 양 중에 다음과 같은 부분 가사가 있습니다.

“나 염려하잖아도 내 쓸 것 아시니 나 오직 주의 얼굴 구하게 하소서 다 이해할 수 없을 때라도 감사하며 날마다 순종하며 주 따르오리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가 그 때 그 때 모두 다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적지 않습니다. 때로는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신 걸까,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걸까……이렇게 의문이 들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가 미처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깊고도 높다는 것, 그리고 그와 같은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눈앞에는 어떠한 문제가 놓여 있을지라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현재의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감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를 기억하시나요?

창세기 12장 1절~4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v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主はアブラムに仰せられた。「あなたは、あなたの生まれ故郷、あなたの父の家を出て、わたしが示す地へ行きなさい。
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なる国民とし、あなたを祝福し、あなたの名を大いなるものとしよう。あなたの名は祝福となる。あなたを祝福する者をわたしは祝福し、あなたをのろう者をわたしはのろう。地上のすべての民族は、あなたによって祝福される。」
アブラムは主がお告げになったとおりに出かけた。ロトも彼といっしょに出かけた。アブラムがハランを出たときは、七十五歳であった。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이 말씀만을 믿고 무작정 나섭니다.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였어요. 그런데 이삭을 가졌을 때가 몇 살이요? 백 세 때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몇 년이에요? 25년입니다. 아브라함은 무려 25년 동안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불평 불만을 하지 않아요. 그냥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만 하죠. 정말 이런 모습을 보면 과연 믿음의 조상다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에 반해 출애굽 당시 모세를 따라 나선 이스라엘 민족들은 어땠습니까. 하루가 멀다 하고 그 입에서 불평 불만이 떠나지를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축복 받는 사람과 축복 받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에 대한 감사와 현재에 대한 감사를 알게 된 우리는 이제 미래에 대한 감사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감사가 무엇이겠습니까. 아직 어떤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언제든지,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감사할 준비를 갖춘 사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기쁜 것이라면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준비가 안 되어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려고 하실 때, 아이구…얘를 또 괜히 썼다가 좌절하면 어쩌나…절망하면 어쩌나…믿음이 약해지면 어쩌나……얼마나 걱정이 많으시겠습니까.

하지만 이렇게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안심하고 쓰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이처럼 하나님의 손때, 예수님의 손때가 많이 묻은 삶이라면 얼마나 은혜가 넘치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충만한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기에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고 모든 것이 감사한 일입니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에 대한 넘치는 감사와, 그리고 항상 준비된 감사를 가지고, 미래에 있어서도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일을 감사함으로 받음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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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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