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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4회 안식이라는 선물
2018년 9월 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신명기 5장 12절~14절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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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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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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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안식이라는 선물” 安息という贈物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에는 안식일에 대한 오해를 살펴보고 안식일과 예배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만, 오늘은 이제 드디어 안식일의 본연의 의미, 안식일의 핵심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안식일의 근거라고 할 수 있는 구절, 지난 주에 살펴본 창세기 2장 1절~3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2장 1절~3절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こうして天と地とその万象が完成した。
神は第七日に、なさっていたわざを完成し、第七日に、なさっていたすべてのわざをやめられた。
神は第七日を祝福し、この日を聖なるものとされた。その日に神が、なさっていたすべての創造のわざをやめられたからである。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모두 창조하신 다음에 안식을 하셨다, 즉 쉬셨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안식은 언제 하지요? 말하자면 언제 쉬나요? 예, 피곤할 때 쉽니다.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고 난 다음에 휴식을 취하지요.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좀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을 취하셨다는 것은, 그럼 하나님도 피곤하셨다는 것인가요? 온 천하 만물을 다 창조하시고 그러니까 너무 피곤해서 쉬셨다는 것인가요?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많은 분들은 이런 의문이 들었을 때,

“음,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그래서 쉬신 거겠지.”

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하기를 하나님도 피곤하시면 쉬실 때도 있구나, 하나님도 우리와 비슷한 데가 있네……이러고 넘어갑니다. 그러면서 좀 더 상상력이 풍부하신 분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요. 하나님께서는 그럼 안식하면서 무엇을 하셨을까. 역시 우리처럼 평일에 열심히 일하고 지쳤을 테니까 안식일에는 좀 뒹굴뒹굴 거리면서 그 동안 밀렸던 잠도 주무시고 그러셨겠지…….

이런 생각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실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이런 사소한 이해가 나중에는 또다른 크나큰 오해로 이어질 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성경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 40장 28절~29절입니다.

이사야 40장 28절~29절
“28.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あなたは知らないのか。聞いたことがないのか。主は永遠の神、地の果てまで創造した方。疲れることなく、弱ることなく、その英知は測り知れない。
疲れた者には力を与え、精力のない者には勢いを与えられる。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피곤하지도 않으시고 곤비하지도 않으신다고 합니다. 즉, 피곤을 느끼지도 않으신다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고 능력이 부족한 자에게는 힘까지 더해주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편도 볼까요? 시편 121편 4절입니다.

시편 121편 4절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見よイスラエルを守る方はまどろむこともなく眠ることもない。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주무시지도 않고 졸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게 어떻게 된 것일까요. 성경은 앞뒤가 안 맞는다는 말이 되나요?

성경을 공부할 때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바로 “성경무오” 성경은 오류가 없다는 전제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성경을 연구한다고 하면서, 성경 이 부분은 안 맞고, 이 부분은 틀렸고……하면서 마치 그게 대단한 연구성과인 것처럼 자랑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물론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신학자나 목회자라 하더라도 성경 모두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특히 선지서 같은 내용은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사람이 이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성경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학생들이 선생님 수업을 들으면서, 자신들이 공부나 지혜가 부족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교수님이 틀렸다, 잘못됐다고 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죠.

그리고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 원문 중에서 대부분이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되어 있는데, 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단어 해석을 잘못한다거나 해서 발생하는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이 또한 번역본이 잘못된 것을 두고 성경 자체를 부정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주장이라고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자료의 부족이나 원문 훼손으로 인해서 읽을 수 없는 부분이 있기도 합니다. 지금 현재 발견된 자료들을 보면 성경 원문은 하나도 없고 모두가 사본입니다. 그런데 극히 일부이기는 합니다만, 자료가 훼손이 되었기 때문에 판독이 어려운 부분도 있고, 또한 발견된 자료나 근거가 부족해서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그렇다고 해서 성경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 있다고 하면 반드시 돌아와야 할 구절이 바로 디모데후서 3장 16절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聖書はすべて神の霊感によるもので、教えと戒めと矯正と義の訓練のために有益です。

즉, 앞서 말씀드린 성경무오……성경에는 오류가 없다는 말씀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글 개역개정 성경이 완벽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있어서는 전혀 오류가 없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다시 안식일에 대한 내용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먼저 안식일에 대한 성경 말씀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성경 말씀에 적혀 있는 객관적인 사실부터 검토를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 2장 1절~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안식을 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이사야 40장 28절~2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피곤하지도 않으시고 곤비하지도 않으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시편 121편 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는다고 적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세 구절이 서로 앞뒤가 안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앞서 말씀 드렸던 것처럼 성경에는 오류도 모순도 없습니다.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하냐 하면 말씀으로 돌아오면 됩니다.

우리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께서는 피곤하셨고 곤비하셨기 때문에, 좀 눈 좀 붙이시기 위해서 안식하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순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요?

창세기 2장 1절~3절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2장 1절~3절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こうして天と地とその万象が完成した。
神は第七日に、なさっていたわざを完成し、第七日に、なさっていたすべてのわざをやめられた。
神は第七日を祝福し、この日を聖なるものとされた。その日に神が、なさっていたすべての創造のわざをやめられたからである。

이 구절,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는 내용입니다만, 이렇게 보면 흥미롭지 않으십니까? 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이 구절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피곤해서 안식을 하셨다거나 잠이 와서 좀 주무시기 위해서 안식하셨다는 말씀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께서는 피곤하지도 않고 졸리지도 않는데도 불구하고 안식을 하셨다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이 바로 오늘 말씀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신명기 5장 12절~14절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安息日を守って、これを聖なるものとせよ。あなたの神、主が命じたとおりに。
六日間働いて、あなたのすべての仕事をせよ。
七日目は、あなたの神、主の安息である。あなたはいかなる仕事も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も、あなたの息子や娘も、それにあなたの男奴隷や女奴隷、牛、ろば、いかなる家畜も、また、あなたの町囲みの中にいる寄留者も。そうすれば、あなたの男奴隷や女奴隷が、あなたと同じように休むことができる。

우리가 안식일을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말이 “노는 날, 또는 쉬는 날”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일요일도 마찬가지죠? 일요일은 노는 날, 쉬는 날입니다. 하지만 신명기 5장 12절~14절을 보면, <안식하라>는 말씀이 없고 그 대신 뭐라고 되어 있어요? 예, <안식하게 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일요일은 노는 날, 쉬는 날이 아니라, 놀게 하는 날, 쉬게 하는 날이라고 우리는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피곤하지도 않은데 안식을 하셨을까요.


예전에 보면 이런 우스개 소리가 있었습니다.

어느 회사에서 하루는 점심시간에 부장님이 부하직원들을 데리고, 자기가 한 턱 쏘겠다고 하면서 중국집으로 갔다고 합니다. 이 부장님이 자리에 앉고 하시는 말씀이, 자, 여러분, 내가 쏠 테니까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시켜요. 그러면서 이 부장님이 뭐라고 했냐 하면, ㅎㅎ뭐라고 했겠어요?

“난 짜장면.”

그러면 거기 같이 있는 부하직원들이 어떻게 해요? 그 자리에서 탕수육을 시키겠어요, 팔보채를 시키겠어요? 다들 그냥 고개를 숙이고, 저도 짜장면요, 저도 짜장면요……그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피곤하지도 않고 졸리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식을 취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안식일은 쉬는 날? 아닙니다. 쉬는 날이 아니라 쉬게 하는 날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족만이 아니라 가축이나 객이라 하더라도 쉬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31장에는 이를 어기면 죽이라고까지 하신 것입니다.

한국이나 일본을 보면, 일요일은 당연히 노는 날이라고 여겨지고 있습니다만, 사실 일요일이 도입된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요일이 도입된 것은 1895년부터, 일본은 1876년부터라고 하는데, 일요일이 휴일로 널리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훨씬 나중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 전은 어땠을까요? 당연하게도 달력에는 일요일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지요. 한국이나 일본 모두 농경사회입니다. 그렇다면 일요일에는 잡초가 안 생겨요? 일요일에는 거름을 안 주더라도 자라나요? 그렇기 때문에 일요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되냐 하면 평균수명이 대단히 짧아집니다. 일요일이 도입되기 전의 평균수명은 50세도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60세 환갑까지 산다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장수를 하는 편에 속했지요.

하지만 일요일이 도입된 다음부터 평균수명이 길어지기 시작합니다. 물론 평균수명이 연장된 데에는 의료기술의 발전도 있고 생활환경의 변화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일요일이 도입된 시기부터 평균수명이 급격하게 늘어가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있어서는 휴식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쉴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냐 하면, 바로 하나님께서 쉬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 1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それは主が六日間で、天と地と海、またそれらの中のすべてのものを造り、七日目に休んだからである。それゆえ、主は安息日を祝福し、これを聖なるものとした。

만약에 하나님께서 쉬지 않으셨다면, 경건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이구, 하나님도 쉬지 않으셨는데 내가 어떻게 쉴 수 있을까…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쉬셨습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 쉬시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안심하고 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놓쳐서는 안 됩니다. 앞서 말씀 드렸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31장에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죽이라고까지 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아니, 단지 쉬라고 하는 날인데, 쉬지 않는다고 죽이래?”라고 해석한다면 이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앞서 제가 안식일을 뭐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쉬는 날이요? 아니요. 쉬게 하는 날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는 말에서 비롯한 말 중에 “성수주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이 말은 어떻습니까.

마트 사장님이 계세요. 마트는 현재 연중무휴입니다. 주중에는 사장님이 나와서 직원들이랑 근무를 했어요. 그런데 일요일에는 사장님이 안 나오십니다. 왜냐하면 사장님은 교회에 가야 한대요. 그래서 그 날은 다른 직원들이 마트를 지킵니다. 직원들은 교회에 갈 수가 없어요.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사장님은 자기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면서 직원들에게는 일을 시키고 자기만 교회에 가면 그것으로 되는 것인가요?

누누이 말씀을 드리지만 안식일은 쉬는 날이 아니라 쉬게 하는 날입니다. 더구나 기독교에서의 일요일은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는 축제의 날입니다. 그러니 그냥 쉬게 하는 날이 아니라 기쁨으로 쉬게 하는 날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가족들만이 아니라 남종이나 여종들, 그리고 가축들까지도 쉬게 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를 어길 시에는 죽이라고까지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들을 사랑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도 쉬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과로사입니다.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서 돈을 많이 번다 하더라도 그로 말미암아 죽게 되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 세상의 사장님들은 휴일이 늘어나는 것을 싫어합니다. 한국의 전경련도 그렇고 일본에 経団連도 그렇습니다. 그럴 만도 하겠지요. 시급이나 일당이면 모를까 정규직 사원들은 월급이 나갑니다. 짧은 28일까지 있는 2월도 31일까지 있는 달도 똑같이 월급이 나가지요. 그런데 휴일이 늘어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다고 월급이 줄어드나요? 아니요. 정규직 같은 경우에는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다 유급휴가 취급이 되는 것이지요. 이게 아까운 것입니다.

그래서 기업 사장님들은 휴일이 늘어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경제학에 있어서 오류입니다만, 경제학은 생산자와 소비자를 나누어서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실제로 그런가요? 극단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잠을 자지 않고 공장에서 열심히 물건을 만들기만 한다면 회사가 발전하고 우리 나라가 돈을 많이 벌 것 같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요? 아니, 아무리 잠도 안 자면서 물건을 많이 만들었다고 해도 그걸 살 사람이 없다면 회사에 무슨 이득이 되겠습니까. 생산이 아무리 늘어나도 소비가 늘어나지 않는다면 그 기업은 돈을 벌 수 없고 나라도 성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는 영원한 생산자나 영원한 소비자가 없고 생산자가 곧 소비자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나라의 발전을 원한다면 주5일제가 아니라 주4일제 근무를 해야 한다고 어떤 경제학자는 말합니다.

마가복음 2장 27절~28절을 봅니다.

마가복음 2장 27절~28절
“27.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そして言われた。「安息日は人のために設けられたのです。人が安息日のために造られたのではありません。
ですから、人の子は安息日にも主です。」

안식일은 반드시 지켜야 하고, 안식일을 어기는 사람은 죽이라고까지 하셨으니, 안식일은 목숨 걸고 지켜야 한다……그러면서 주일에 어쩌다가 교회를 빠지는 사람들을 비판하기도 하고 벌을 받는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안식을 하신 이유가 우리에게 무슨 벌을 내리기 위한 빌미로 안식일을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안식일을 주셨다는 것과 딱 맞아떨어지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누가 하셨나요? 예, 그렇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여기서 안식일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일주일 중 하루 있는 안식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온 율법을 가리킨다고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죽어가고 있어요. 그런데 율법을 지킨다면서 죽어가는 사람을 안 살립니까. 아닙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요 완성하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식일은 우리를 속박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어마어마한 선물인 것입니다.

안식일은 감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본을 보여주셔서 우리를 쉬게 하신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들 드릴 수가 있습니다.
안식일은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쉬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를 굶기기 위한 것이 아닌,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면 30배 60배 100배로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심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던 것처럼, 우리는 다른 이들을 쉬게 함으로 인하여 우리가 은혜를 베풀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생명입니다. 세상 것만을 좇는 것이 아니라 안식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게 함으로써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해주셨습니다.

성수주일이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주일만 거룩하게 지키면 되는 것인가요? 우리에게 안식은 고개를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오늘 하루 동안에도 주님께서 주신 안식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말씀을 드리고 마칠까 합니다. 우리가 생각학기에 클래식 음악 중에서 이른바 명곡……이라고 하면 어떤 음악이 떠오를까요? 여러 곡이 있겠습니다만, 그 중 대표적인 명곡이라고 하면 베토벤의 운명……짜짜짜잔……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그 운명의 악보를 보면 처음에 무엇으로 시작할까요? 이는 4분 음표도 아니, 8분 음표도 아닌, 바로, 8분 쉼표로 시작합니다. 아무리 악보가 많이 들어간 곡이라 하더라도 쉼표 없이는 훌륭한 곡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쉼표는 단지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을 일주일에 한 번만 하실 건가요?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20장 6절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わたしを愛し、わたしの命令を守る者には、恵みを千代にまで施すからである。

우리는 성수주일이 아니라, 성수매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우리 삶을 통해서 하루하루 주님을 바라보고 안식하며 주님께서 약속하신 은혜와 축복을 모든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145회 곤고한 날에 →

← 제143회 안식일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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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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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3회 안식일과 예배
2018년 9월 2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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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장 1절~3절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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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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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안식일과 예배” 安息日と礼拝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번에는 안식일에 대해서 두 번으로 나누어서 말씀을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입니다.

교회에 어느 정도 다녀보시고 성경에 대한 지식도 갖게 되고 그러신 분들 중에는 간혹 의문을 갖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이 안식일 문제입니다. 정통 복음주의와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기독교 교회에서는 예배를 주일, 그러니까 일요일에 드립니다. 하지만 구약에서의 안식일은 언제냐 하면 토요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말씀을 지키는 우리도 예배를 토요일에 드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보다 더 하나님 말씀에 맞는 예배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져보신 분들이 어쩌면 계실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틈을 타서 일부 종교단체……자신들은 교회라고 하지만, 교회는 어디까지나 하나님 말씀, 성경 말씀을 올바로 따르는 곳이 교회이지, 그렇지 않은 곳은 자신들이 아무리 교회라고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종교단체라고 저는 생각해서 오늘도 이와 같은 이름을 쓰기로 합니다만, 일부 종교단체에서는 토요일에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복음주의 교회를 가리켜 이는 잘못되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을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자신들이야말로 성경을 지키는 곳이니 자기네들한테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교회에 다니면 구원을 못 받는데요. 여러분께서는 이런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본인이 아니더라도 만약에 누군가가 이 문제를 가지고 상담을 해왔어요.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확실한 답을 내놓으실 수 있으신가요? 아니면, 어? 그러고 보니 그러네……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이번에는 안식일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우선 안식일에 대한 오해를 풀고, 그리고 이 안식일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오늘은 오해를 푸는 시간입니다.

안식일의 시작은 창세기까지 거슬러올라가지요.

오늘 말씀 창세기 2장 1절~3절까지를 보시겠습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こうして天と地とその万象が完成した。
神は第七日に、なさっていたわざを完成し、第七日に、なさっていたすべてのわざをやめられた。
神は第七日を祝福し、この日を聖なるものとされた。その日に神が、なさっていたすべての創造のわざをやめられたからである。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천지만물을 모두 창조하시고 마지막 7일째에 안식을 취하십니다. 안식을 취하다……그러니까 쉬셨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이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 안식일에 대한 규정은, 쉽게 말하자면 쉬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해서 대단히 엄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말씀 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우선 안식일에 대한 성경 내용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31장 13절~17절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14.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15.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16.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17.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 하라

「あなたはイスラエルの子らに告げよ。あなたがたは、必ずわたしの安息を守らなければならない。これは、代々にわたり、わたしとあなたがたとの間のしるしである。わたしが主であり、あなたがたを聖別する者であることを、あなたがたが知るためである。
あなたがたは、この安息を守らなければならない。これは、あなたがたにとって聖なるものだからである。これを汚す者は必ず殺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この安息中 に仕事をする者はだれでも、自分の民の間から断ち切られる。
六日間は仕事をする。しかし、七日目は主の聖なる全き安息である。安息日に仕事をする者は、だれでも必ず殺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
イスラエルの子らはこの安息を守り、永遠の契約として、代々にわたり、この安息を守らなければならない。
これは永遠に、わたしとイスラエルの子らとの間のしるしである。それは主が六日間で天と地を造り、七日目にやめて、休息したからである。」


출애굽기 35장 2절~3절
2.엿새 동안은 일하고 일곱째 날은 너희를 위한 거룩한 날이니 여호와께 엄숙한 안식일이라 누구든지 이 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
3.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

六日間は仕事をする。しかし、七日目は、あなたがたにとって主の聖なる全き安息である。この日に仕事をする者は、だれでも殺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
安息日には、あなたがたの住まいのどこであっても、火をたいてはならない。」

이 말씀을 들으면 여러분께서는 어떠세요? 아니, 무슨 하라는 일을 안 하면 벌을 내린다, 시키는 일을 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뭐, 이렇다면 좀 그나마 이해가 갈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안식일? 아니, 그거 쉬는 거잖아요. 그런데 쉬라고 했는데 쉬지 않으면 어떻게 하래요? 예, 반드시 죽이라고 하십니다. 정말 엄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범하는 일을 엄히 금지하셨기 때문에, 아직도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종교단체에서는, 자신들이야말로 올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있고,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잘못되었다고 비판을 합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구약에서의 안식일은 분명 토요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안식일을 범하는 자는 죽이라고까지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다음 주부터는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우리더러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판을 한다면, 저는 이렇게 반박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여전히 속건제, 속죄제를 드리십니까. 소제나 요제를 드리십니까. 양이나 동물을 잡아서 불에 태워서 제사를 드리십니까. 그렇게 물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에서는 아직도 그와 같은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만, 예수님을 논하면서도 토요일에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곳에서 그런 제사를 드린다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구약시대, 예수님께서 아직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는 가장 큰 명절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유월절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애굽에서 살면서 오랫동안 종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보내서 애굽을 탈출시키셨을 때 행하셨던 마지막 이적, 그 땅에 있는 모든 가족 중에서 장자들은 하나도 남김 없이 죽였으나, 문 인방과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발라놓은 집은 죽음의 사자가 들어가지 않고 건너갔기에 무사했다고 하는 절기입니다. 이 유월절이 구약에서는 가장 큰 명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어떻습니까. 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에 규정된 공식절기를 보더라도 핵심은 모두 신약 절기입니다. 성탄절도 그렇고, 고난주간도 그렇습니다. 성령강림주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복음주의 교회에서 가장 큰 절기는 무엇입니까? 유월절이에요? 아닙니다. 바로 부활절입니다.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을 믿을 필요도 없고, 부활이 없다면 구원도 없고, 부활이 없다면 믿음도 없고, 부활이 없다면 죄사함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이 있나요? 예, 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부활을 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를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2절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ところで、キリストは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れたと宣べ伝えられているのに、どうして、あなたがたの中に、死者の復活はないと言う人たちがいるのですか。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채찍을 맞게 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시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인하여 우리의 죄는 모두 해결되었습니다. 말로 해서 안 되니까 처참하게 십자가에 달리시는 모습을 사람들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하셨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부활 또한 말로 해서 안 되니까 예수님께서 직접 부활을 해서 보여주셨습니다.

부활은 오로지 죄사함을 받은 자에게만 허락되는 것입니다. 죄인한테는 부활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철저한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활을 허락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게 된 이유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 안식일 다음 날인 일요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해서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을 갈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유일한 길은 구원이요, 구원은 오직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의지하는 길 밖에는 없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결박을 푸셨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1절~14절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さらに、祭司がみな、毎日立って礼拝の務めをなし、同じいけにえを繰り返し献げても、それらは決して罪を除き去ることができませんが、
キリストは、罪のために一つのいけにえを献げた後、永遠に神の右の座に着き、
あとは、敵がご自分の足台とされるのを待っておられます。
なぜなら、キリストは聖なるものとされる人々を、一つのささげ物によって永遠に完成されたからです。

이제 우리는 짐승들을 잡아서 하나님께 불완전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예수님께서 완벽한 제사들 드려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문제가 되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할례에 관한 논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하느냐 안 받아도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2장 28절~29절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外見上の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はなく、また、外見上のからだの割礼が割礼ではないからです。
かえって人目に隠れた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あり、文字ではなく、御霊による心の割礼こそ割礼だからです。その人への称賛は人からではなく、神から来ます。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할례도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위한 할례는 그 마음에 하면 족하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3장 6절~7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アブラハムは神を信じた。それで、それが彼の義と認められた」とあるとおりです。
ですから、信仰によって生きる人々こそアブラハムの子である、と知りなさい。

인간적으로 본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해요? 예, 아브라함의 자녀로 태어나야죠. 아무리 입양을 했다고 하더라도 유전자적으로 본다면 이는 완전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하시고 그의 자손에게도 복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축복은 아브라함의 자손들, 말하자면 이스라엘 민족이나 유대인들한테만 주어지는 축복인가요?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녀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모든 축복을 우리도 똑같이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하지만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존 교회에서도 이스라엘 유대인들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우리는 여전히 이방인이라고 말하고 계신 분들도 있으니, 참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무슨 요한계시록을 보면 몇 년에 이스라엘에서 무슨 전쟁이 터시고 여기에 또 어떻게 되고 어떻게 되어서 중동에서 3차대전이 터지고……이러면서 자기가 무슨 선지자라도 되어서 대단한 예언이라도 하듯이, 저기 멀리 떨어진 이스라엘 걱정을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 분들께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지금 저 멀리 떨어진 이스라엘 걱정하실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 이웃 걱정이나 하세요……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장 8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しかし、聖霊があなたがたの上に臨むとき、あなたがたは力 を受けます。そして、エルサレム、ユダヤとサマリアの全土、さらに地の果てまで、わたしの証人となります。」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여기서 말씀하신 땅끝이라고 하는 것은 지구를 한 바퀴 삥 돌아서 예루살렘이 바로 땅끝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전도가 시급하다는 것입니다. 혹시 그런 말씀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왜 성경을 그렇게 멋대로 해석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기존 교회에서 그렇게 마음대로 해석을 하니, 이른바 희한한 종교단체 같은 곳에서 그 틈을 타서 치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땅끝이 어디입니까. 여러분, 내 이웃, 우리 이웃을 돌아보십시오. 거기 안 믿는 이웃이 있나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이 있나요? 복음을 전해야 할 이웃이 있나요? 바로 그곳, 복음을 전해야 할 바로 그 곳이 땅끝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결박을 모두 풀어주셨습니다. 완벽한 제사를 드려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레위기 11장에는 먹으면 안 된다고 했던 돼지고기도 먹어도 됩니다. 비늘이 없는 물고기는 먹지 말라고 하지만, 이제 제가 좋아하는 오징어도 먹어도 됩니다.

누가복음 23장 45절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太陽は光を失っていた。すると神殿の幕が真ん中から裂けた。

그 때까지는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휘장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해주셨을 때, 그 두꺼웠던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이제 우리의 모든 죄가 해결되어서 하나님께로 나아갈 길이 열린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니야. 아직 우리는 안돼. 우리는 율법을 지켜야 돼……이렇게 생각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약성경 히브리서를 봅니다.

히브리서 6장 4절~6절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一度光に照らされ、天からの賜物を味わい、聖霊にあずかる者となって、
神のすばらしいみことばと、来たるべき世の力を味わったうえで、
堕落してしまうなら、そういう人たちをもう一度悔い改めに立ち返らせることはできません。彼らは、自分で神の子をもう一度十字架 にかけて、さらしものにする者たちだからです。

여기서 빛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타락한 자들>이라는 뜻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면, 그럼 단순히 믿었다가 안 믿게 된 사람을 가리키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본문이 기록된 히브리서 자체가 어떤 사람들을 대상으로 쓰였냐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신학자들의 의견에 의하면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적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 중에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래도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성장배경이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지켜왔던 율법도 따라야 하지 않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겠지요. 그래서 이와 같은 사람들을 훈계하는 내용이 많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6장 6절에서의 “타락한 자들”이라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안 믿게 되었다기 보다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과거 율법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그럼으로 인하여 우리의 죄는 모두 해결 되었어요. 그 동안 차고 있던 수갑을 풀고 교도소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교도관이 교도소 문을 활짝 열고, 자, 이제 너의 죄는 다 해결 되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너의 죄를 모두 해결해 주셨다. 너는 자유다……이렇게 말하는데, 아니야. 난 못 나가. 내 죄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어……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 선한 사람이에요? 겸손한 사람이에요? 양심적인 사람이에요? 세상적인 시각으로는 그럴 수도 있으나, 성경적으로 그런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아무리 십자가에 달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거예요. 내가 율법을 지키고 내가 내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거예요.

이런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용서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자,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예배를 드려야 할까요. 이제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되요. 그러면 반드시 일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하나요? 다른 요일에 예배를 드리면 큰 일 나나요? 그리고 또 일주일에 몇 번 예배를 드려야 하나요?

정답부터 알려드리겠습니다. 언제 드려도 상관 없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몇 번 드려도 상관 없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기를 힘쓰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율법을 따른다면, 그 외의 시간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자유롭습니다. 새벽기도, 수요예배, 철야예배, 찬양예배 등등 일주일에 몇 번이라도 예배를 드려도 괜찮습니다. 한국에서 제가 섬기던 교회는 일요일만이 아니라 토요일에도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렇다고 이상한 교회예요? 아닙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여건상 도저히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기 힘든 분들을 위해서 드리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씀 드린 일부 종교단체에서 토요일에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그 부분만 가지고는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자기들은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면서, 자기들만 옳고,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우리더러 성경을 따르지 않는다고 지적하는 것은, 이는 가당치도 않는, 잘못돼도 보통 잘못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욕되게 하는 행동인 것입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이유가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마가복음 3장과 누가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쳤다는 이유로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죽일 방도를 의논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단 이유는,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려는 것도 아니고, 율법을 지키려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위협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까지 백성들한테는 자기들의 말이 옳다. 내 말 대로 하면 구원을 받고, 내 말을 어기면 저주를 받는다, 뭐 이런 식으로 백성들에게 말하면서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해왔는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자신들더러 잘못했다고 지적을 하시니, 자기들의 체면이 말이 아니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백성들의 이목이 있는데, 자기들 자존심을 구겼다고 해서 사형을 시키라고는 할 수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명분으로 내건 것이 바로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했다는 것을 빌미 삼아서 백성들을 충동시켰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오해하고 잘못 적용하면 하물며 예수님까지도 죽이는 일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あなたがたは真理を知り、真理はあなたがたを自由にします。」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주신 자유 안에서 참된 안식일의 의미를 깨닫고, 주님을 마음껏 예배하고, 주님을 마음껏 찬양하고, 주님께 마음껏 감사하며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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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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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2회 하나님 나라의 회복
2018년 8월 2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30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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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회복” 神様の御国の回復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십니다. 그 단계는 이렇습니다.
먼저 첫째 날은 하나님께서 빛을 만드시고는 빛과 어둠을 나누십니다.
둘째 날은 하늘과 바다를 만드십니다.
셋째 날은 바다 속에서 육지를 드러나게 하시고는 각종 식물을 만드십니다.
넷째 날은 태양과 달과 수많은 별들을 만드십니다.
그리고 다섯째 날은 하늘에는 새를, 바다에는 바다 생물들을 만드셨습니다.
이제 천지창조의 마지막 날 여섯째 날이 옵니다. 이 날에는 드디어 육지에 온갖 짐승들을 만드십니다. 그리고 이 뿐만이 아니죠. 마지막으로 무엇을 창조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 부분이 바로 오늘 말씀이지요. 물론 뒤에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의 보다 자세한 내용이 나옵니다만, 오늘 말씀 부분에는 사람 창조의 핵심적인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단순히 어떻게 사람을 만드셨나 하는 설명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말씀 안에만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원대한 꿈을 가지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마음을 알고 크나큰 은혜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전에도 생물들을 창조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때와 사람을 창조하실 때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은 먼저 이 차이, 하나님께서 다른 생물들을 창조하실 때와 사람을 창조하실 때의 차이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의 첫 번째 특징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점입니다.


27절을 다시 봅니다.

창세기 1장 27절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神は人をご自身のかたちとして創造された。神のかたちとして人を創造し、男と女に彼らを創造された。

하나님께서는 다른 생물들을 만드실 때에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한해서는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이 세상에는 사람을 닮은 동물들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보기에 그렇게 보일 뿐이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다른 동물들을 만드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사람만을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냥 생김새만 하나님을 닮도록 만들었다는 뜻, 그것 뿐일까요? 아닙니다. 여기에는 대단히 큰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두 사람이 있는데, 얼굴 생김새가 비슷해요. 나이 또래도 비슷해요. 그럼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예, 서로 형제나 자매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좀 나이 차이가 있어 보여요. 적어도 나이 차이가 20~30 정도는 있어 보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예, 아마 부모와 자녀인가보다……라고 생각합니다.

왜들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는 핵심적인 이유가 뭐라고요? 예, 서로 생김새가 비슷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는 것은 단순히 생김새를 그냥 비슷하게 만드셨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자녀 삼으시려고 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13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しかし、この方を受け入れた人々、すなわち、その名を信じた人々には、神の子どもとなる特権をお与えになった。
この人々は、血によってではなく、肉の望むところでも人の意志によってでもなく、ただ、神によって生まれたのである。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아무리 사람을 닮은 원숭이나 다른 동물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동물한테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권세를 주신 적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사람한테만 주어진 특권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람의 두 번째 특징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오늘 말씀 28절을 봅니다.

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神は彼らを祝福された。神は彼らに仰せられた。「生めよ。増えよ。地に満ちよ。地を従えよ。海の魚、空の鳥、地の上を這うすべての生き物を支配せよ。」


앞서 다른 생물들을 창조하실 때에도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는 축복을 주신 적이 있습니다. 2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새들과 바다 생물들한테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장 22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神はそれらを祝福して、「生めよ。増えよ。海の水に満ちよ。鳥は地の上に増えよ」と仰せられた。

그러니까 이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는 말씀을 새롭지가 않아요. 그런데 사람한테만 들어 있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1장 28절 후반부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地を従えよ。海の魚、空の鳥、地の上を這うすべての生き物を支配せよ。」
우리는 이 말을 들으면 사람이 물고기도 잡을 수 있고, 새도 잡을 수 있고 움직이는 모든 생물들과 싸워서 이긴다, 아니면 자연 환경을 우리 마음대로 주무를 수가 있다……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이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 이 지구상에 있는 전체 생태계 차원의 문제입니다.

즉,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생물들은 이른바 먹이사슬이라고 하는 구조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약육강식이지요. A라는 생물이 있으면 이를 A보다 강한 B가 먹고, B는 B보다 강한 C가 먹고, C는 C보다 강한 D가 먹고……이렇게 해서 맨 위까지 올라갑니다. 그렇다면 먹이사슬의 맨 위에는 무엇이 있어요? 이럴 때 보면 누가 좋은 중학교를 나왔는지 알 수 있어요. 자, 맨 위에는 누가 있어요? 사람이 있어요? ㅎㅎ아닙니다.


먹이사슬은 새들이면 새들의 먹이사슬이 있고, 바다 생물에는 바다 생물들의 먹이사슬이 있고, 육지에는 육지 생물들의 먹이사슬이 따로 있습니다. 알기 쉽게 육지 생물들의 먹이사슬을 보면 가장 아래에는 작은 벌레 같은 것들이 오겠지요. 그리고 맨 꼭대기에는 무엇이 있어요? 예,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들이 있습니다. 바다 생물들의 꼭대기에는 고래나 상어가 있겠고, 새들의 먹이사슬 꼭대기에는 독수리 같은 맹금류가 있게 됩니다.

하지만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있다고 해서 이 구조가 거기서 멈추나요? 아닙니다. 사자나 호랑이도 죽으면 그 시체들을 또다시 작은 벌레들이 먹게 되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순환시스템이 바로 먹이사슬입니다. 이 먹이사슬의 순환구조가 균형 있게 갖추어져 있어야지만 생태계가 잘 유지되지, 이러한 균형이 조금이라도 무너지기 시작하면 생태계 전체에 위기가 발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만약에 먹이사슬 구조에 포함되어 있다고 하면, 예를 들어서 사람은 어떤 특정 먹이만을 먹는데, 그 위에는 사람을 먹이로 하는 생물이 있게 됩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하지만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하늘이나 바다나 육지에 있는 먹이사슬 어디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참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지요. 이 지구상에 있는 생태계에서 완전히 벗어난 존재로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처럼 어마어마한 축복을 주셨는데도 우리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감사 드리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무슨 동물 학대 하라는 것도 아니요,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모두 동물원 사육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이끌어 나아갈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 사명은 특별히 선발된 사람들한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우리 모두에게 주신 사명인 것입니다. 동물들은 그저 태어나서 생육하면 됩니다.

생육이 무엇입니까. 살아가기 위해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먹고 마시는 것이지요. 그리고 번성하고 충만한 것이 무엇입니까. 짝을 만나서 새끼 낳고 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른 동물들은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이 세상에서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사는 것 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두 번째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특징, 기억하시나요? 예, 첫째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둘째로 사람은 모두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명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특징이 알아보았으니, 이제 다음 구절로 넘어가보아야겠지요? 예, 창세기 1장 29절~30절입니다.

창세기 1장 29절~30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神は仰せられた。「見よ。わたしは、地の全面にある、種のできるすべての草と、種の入った実のあるすべての木を、今あなたがたに与える。あなたがたにとってそれは食物となる。
また、生きるいのちのある、地のすべての獣、空のすべての鳥、地の上を這うすべてのもののために、すべての緑 の草を食物として与える。」すると、そのようになった。

이 구절, 너무나도 흥미롭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사람과 짐승들한테 먹을 거리로 주신 것이 모두 풀들이에요. 너무하지 않아요? 고기를 먹지 말래요. ㅎㅎ 자, 그렇다면 우리도 이제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하니까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는 건가요?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하나요?


창세기 9장 2절~3절에 보면 노아의 홍수가 끝나고 방주에서 나온 노아에게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9장 2절~3절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あなたがたへの恐れとおののきが、地のすべての獣、空のすべての鳥、地面を動くすべてのもの、海のすべての魚に起こる。あなたがたの手に、これらは委ねられたのだ。
生きて動いているものはみな、あなたがたの食物となる。緑の草と同じように、そのすべてのものを、今、あなたがたに与える。

아휴, 다행이에요. 이제 고기를 먹어도 됩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에 사람은 이제 고기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만, 그렇다면 에덴에서는 왜 채소만을 먹을 거리로 주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에덴에는 죽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사용되는 죽음은 사람과 동물에 대해서만 쓰입니다. 특히 사람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희생이나 심판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에는 죄가 없었습니다. 죄가 없으니 희생이나 심판이 있을 수가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죽음 또한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에게 채소를 주셨다는 것은 이처럼 죄가 없는 상태, 그렇기 때문에 희생이나 심판으로 인한 죽음이 없는 세상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창세기 2장 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木から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하여 우리 안에 죄가 들어오게 됩니다. 그 결과 사람은 이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30절에 보면 에덴에서는 사람한테 만이 아닌 동물들한테까지도 풀을 먹을 거리로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동물들이 처음에는 초식동물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을 다스려야 하는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어쩌면 모든 생태계가 파괴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에는 언제부터인지 기록되지는 않습니다만, 이제 동물들도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게 되고 말았습니다.

어디 동물들만 그런가요? 인간의 세계에서도 약육강식이 생깁니다. 동물처럼 서로 직접 잡아먹지는 않더라도 서로를 비판하고 비난하고 증오하고 억누르고 짓밟고 올라서려고 합니다. 이것이 사실 알고 보면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죄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인가요? 아닙니다. 성경은 회복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복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가 회개하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복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 회복된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이사야서를 봅니다. 이사야 11장 6절~9절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狼は子羊とともに宿り、豹は子やぎとともに伏し、子牛、若獅子、肥えた家畜がともにいて、小さな子どもがこれを追って行く。
雌牛と熊は草をはみ、その子たちはともに伏し、獅子も牛のように藁を食う。
乳飲み子はコブラの穴の上で戯れ、乳離れした子は、まむしの巣に手を伸ばす。
わたしの聖なる山のどこにおいても、これらは害を加えず、滅ぼさない。主を知ることが、海をおおう水のように地に満ちるからである。

여러분, 상상이 가십니까.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고,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들이 함께 있는데 어린 아이들이 이 짐승들을 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사자가 소처럼 풀을 뜯고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을 쳐도 해 됨도 없고 상하는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역사입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회복하고자 하시는 나라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세상은 반드시 옵니다. 하나님께서는 회복을 하십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이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며 기다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죄송합니다만, 오늘 말씀은 아직도 다음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냥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분명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세상을 기다리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디에 이루어야 할까요. 그냥 당장 동물원에서 호랑이건 사자건 다 풀어놓으면 되나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가 어디 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누가복음 17장 21절을 봅니다.

누가복음 17장 20절~21절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パリサイ人たちが、神の国はいつ来るのかと尋ねたとき、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神の国は、目に見える形で来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
『見よ、ここだ』とか、『あそこだ』とか言えるよう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見なさい。神の国はあなたがたのただ中にあるのです。」

하나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 마음 안을 한 번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표범이 보이십니까. 염소가 보이십니까. 표범이 염소와 함께 누워서 놀고 있습니까. 아니면 표범이 염소의 살을 찢고 있습니까.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빨을 드러내며 어린 양을 물어 뜯고 있습니까. 젖 뗀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 손을 넣고 장난치고 있습니까? 아니면 독사에 물려 괴로워하며 죽어가고 있습니까.


우리 마음 속에 불평과 불만과 비판과 비난과 증오로 가득 차게 되다면, 이는 우리 마음 속에 저기 아프리카 벌판이나 정글 밀림처럼 짐승들이 서로 싸우고 물어 뜯고 비 비린내 나는 세상이 임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 속에 기쁨과 감사와 찬송과 소망과 사랑이 충만하게 된다면 미움이 사라집니다. 분노가 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감사와 은혜로 넘치게 됩니다. 아무리 미운 짓을 하는 사람들도 그저 사랑으로 보듬어 안아주고 싶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마음 안에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시켜야 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으면 믿음이 성장합니다. 말씀이 선포됩니다. 복음이 전파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으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은혜의 길이 열립니다. 하늘에서 축복의 문이 열려 누르고 흔들어 넘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주신 우리의 크나큰 사명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 안에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이루어, 마침내 넘치는 은혜와 넘치는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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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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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1회 억지로의 축복
2018년 8월 1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21절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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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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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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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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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억지로의 축복” 無理やりの祝福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당시 대제사장과 그 일당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기 위하여 총독 빌라도 앞에까지 끌고 갑니다. 이미 여러 차례 채찍질을 당한 예수님은 온몸이 피범벅입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침을 뱉으며 모욕을 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온몸이 피에 젖고 기진맥진한 상태였습니다. 그 골고다로 향하는 길은 좁은 오르막길인데 구전에 의하면 너무나 힘이 들어서 몇 번이고 넘어지셨다고 합니다.

당시 이를 지휘하고 있었던 로마군인들이 보니까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시간은 지금 지체하는데 예수님을 보니까 도저히 제대로 못 걸을 것 같아요. 그런데 마침 옆에 누가 서 있길래, 야, 너, 빨리 일루 와서 이 십자가를 대신 져. 그랬을 것입니다. 거기 서 있던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오늘의 주인공 구레네 사람 시몬. 이른바 구레네 시몬이라 불리는 사람입니다.

이 십자가라고 하는 것.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구주의 십자가, 이러면서 대단히 은혜로운 것처럼 여겨지실지는 모르지만, 사실 이 십자가 자체만을 본다면 이는 쉽게 말해서 사형틀입니다. 무슨 단두대 같은 거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생각만해도 얼마나 흉물스럽습니까. 그런 건 손으로 만지는 건 고사하고 근처에도 가기가 꺼려지는 물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건 무게가 무겁고 가볍고 한 문제만이 아닙니다. 만약에 누가 나더러, 이제 저기 있는 저 사람을 목매달아서 사형을 시키려고 하는데 그 끄나풀을 들고 가라고 해보세요. 그게 아무리 가볍다고 해도 기분이 좋겠습니까.

십자가도 똑같이 그런 사형기구입니다. 신명기 21장 23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신명기 21장 23절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その死体を次の日まで木に残しておいてはならない。その日のうちに必ず埋葬しなければならない。木にかけられた者は神にのろわれた者だからである。あなたの神、主が 相続地としてあなたに与えようとしておられる土地を汚してはならない。

즉, 나무에 달린 자, 사형을 당한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징표인 것이지요. 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더구나 지금 이 십자가는 나무로 되어 있고, 그리고 사람을 못 박아서 높은 곳에 매달아야 하기 때문에 그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무거웠을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만약 사람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도구라면 쓰기 편하고 만지기도 좋게 매끌매끌하게 만들어놓기도 했겠지만, 십자가라고 하는 사형도구, 이제 그 형틀에 매달리는 사람은 다시는 살아서 내려오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매끌매끌하게 만들어놓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통나무를 잘라서 만들었을 테니, 그 겉표면은 얼마나 까칠까칠했을까요.

그것도 모자라서 거기까지 온몸이 피에 젖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오셨기 때문에 십자가 여기저기에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을 것입니다.

누구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 십자가는 다른 식으로 운반되고 예수님은 그냥 걸어가기만 했다……이런 말씀을 혹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어떤 분들은 어? 정말 그런가? 신기하네? 왜 다른 사람들은 나한테 그런 말을 안 해줬지? 라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사실 언뜻 생각하면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면 어떠십니까. 자칫 잘못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말씀 드립니다.

마태복음 27장 31절을 봅니다.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こうしてイエスをからかってから、マントを脱がせて元の衣を着せ、十字架につけるために連れ出した。

다음은 마가복음 15장 20절입니다.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彼らはイエスをからかってから、紫の衣を脱がせて、元の衣を着せた。それから、イエスを十字架につけるために連れ出した。

그리고 누가복음 23장을 보면 예수님을 끌고 갔다는 기록은 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 그럼 어쩌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지 않았을 수도 있네? 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요한복음을 봅니다. 요한복음 19장 17절입니다.

요한복음 19장 17절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イエスは自分で十字架を負って、「どくろの場所」と呼ばれるところに出て行かれた。そこは、ヘブル語ではゴルゴタと呼ばれている。


분명히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그 거칠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셨던 것입니다. 금식도 좋고 기도도 좋고 봉사도 좋습니다만, 우선 성경말씀부터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이 우리 안에 있어야 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이는 보통 사람이라면 근처에도 가기 싫었을 정도였겠지요.

그런데 갑자기 길 옆에 서 있는 사람한테 그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에요. 그 십자가, 무거운 사형틀, 조금 지고 가기만 해도 까칠까칠한 나무 때문에 온몸의 여기저기가 긁힐 것만 같은 십자가, 여기저기에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십자가를 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정말 믿음이 좋은 여러분 같았더라면 물론 할렐루야! 하고 십자가를 지셨을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몇 년을 함께 했던 제자들은 자기 목숨 하나 살려보려고 모두 달아났습니다.

이른바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도, 너,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았냐고 누군가가 물었을 때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어디 그냥 모른다고 했나요?

마가복음 14장 71절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するとペテロは、噓ならのろわれてもよいと誓い始め、「私は、あなたがたが話しているその人を知らない」と言った。

베드로조차도 너무나 두려워서, 정말 저주하고 맹세까지 해가면서 예수님을 부인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까지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한테 그런 십자가를 매고 가라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마가복음 15장 21절 후반부를 보면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イエスの十字架を無理やり背負わせた。)”라고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억지로 지게 했다”는 표현이 마가복음에만 있다면, 이 장면을 묘사한 마가의 주관적이고 독단적인 기록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사실 이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간 게 아닌데, 그냥 마가가 보기에 억지로 가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을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27장 32절입니다.

마태복음 27장 32절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兵士たちが出て行くと、シモンという名のクレネ人に出会った。彼らはこの人に、イエスの十字架を無理やり背負わせた。

예수님의 열두 사도 중 한 사람인 마태는 그의 전직이 세리였습니다. 세리라고 해서 단순히 요즘 세무 공무원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공인된 고리대금업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던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서 자신들과 동족인 이스라엘 민족들의 피를 빨아먹고 있었던, 대단히 미움을 받는 사람들이 바로 세리였는데, 마태도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마태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사도가 된 것이지요. 이 마태복음을 보면 아무래도 돈을 다루던 직업에 오랫동안 종사해서 그런지 다른 복음서에 비해 묘사가 대단히 꼼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태도 분명히 <억지로 지워가게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레네 시몬에 대한 기록은 사복음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 중에서 요한복음을 제외한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등장하는데, 이미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억지로 지었다>는 표현이 명확하게 등장합니다.

자, 그렇다면 누가복음에는 어떨까요. 누가라는 사람은 열 두 사도에 들지는 못했지만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바울과 선교여행도 함께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의 전직은 의사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역시 그도 지금 식으로 하자면 이과적인 관찰력으로 세심하게 묘사했을 것입니다.

그런 전직 의사였던 누가가 이 장면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3장 26절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彼らはイエスを引いて行く途中、田舎から出て来たシモンというクレネ人を捕まえ、この人に十字架を負わせてイエスの後(うしろ)から運ばせた。

누가는 그들이 구레네 시몬을 “붙들어서 그에게 십자가를” 지웠다고 (捕まえ、この人に十字架を負わせて) 기록합니다. 붙들어서 하게 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싫다고 강하게 거부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벗어나려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상대는 로마 군인입니다. 군인이 구레네 시몬을 붙잡아서 강제로 십자가를 지우게 했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지게 된 일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모두 기록될 정도로 대단히 인상 깊은 사건이었다. 그리고 둘째는, 이는 틀림없이 구레네 시몬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강제로 억지로 십자가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된 구레네 시몬. 하지만 이로 인해서 그의 자손들이 축복을 받았다는 말씀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근거가 있는 것인지, 또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오늘 한 번 여러분과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마가복음 15장 21절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兵士たちは、通りかかったクレネ人シモンという人に、イエスの十字架を無理やり背負わせた。彼はアレクサンドロとルフォスの父で、田舎から来ていた。

여기에 등장하는 <루포>에 대해서 작은 글씨로 적혀 있는 성경 주석에 보면 로마서 16장 13절……이렇게 적혀있고, 그 다음에 괄호를 해서 이렇게 물음표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 구절 간에 연관성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겠지요.

자, 그럼 로마서 16장 13절을 찾아봐야겠지요? 이 부분은 바울이 로마에 보내는 편지를 맺으면서 안부인사를 적은 장면입니다만, 그 과정에서 로마서 16장 13절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13절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主にあって選ばれた人ルフォスによろしく。また彼と私の母によろしく。

(口語訳)主にあって選ばれたルポスと、彼の母とに、よろしく。彼の母は、 わたしの母でもある。
(新共同訳)主に結ばれている選ばれた者ルフォス,およびその母によろしく.彼女はわたしにとっても母なのです.


성경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만, <루포>라는 이름은 신구약을 통틀어서 마가복음 15장 21절과 로마서 16장 13절 단 두 군데만 등장합니다.

로마서를 보면 바울이 루포를 가리켜서, 그는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었다(主にあって選ばれた人ルフォス)는 말까지 하고,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곧 자신의 어머니나 마찬가지라고 할 정도라고 하면서 안부를 전해달라고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 글만을 보더라도 루포만이 아니라 그의 가정과 사도 바울은 대단히 돈독한 사이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 뿐만이 아니라 이렇게 로마서에 적어서 보낼 정도였다면, 이를 받은 쪽에서도 루포가 누구이고 그의 어머니는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모두가 이미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라고 하는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구절이 바로 오늘 말씀 마가복음 15장 21절입니다.

보통 성경에 보면 누군가를 소개할 때 어떻게 하는지 혹시 기억 하십니까?

예레미야 1장 1절을 봅니다.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ベニヤミンの地、アナトテにいた祭司の一人、ヒルキヤの子エレミヤのことば。

요엘1장 1절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ペトエルの子ヨエルにあった主のことば。

이사야 1: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アモツの子イザヤの幻。これは彼がユダとエルサレムについて、ユダの王ウジヤ、ヨタム、アハズ、ヒゼキヤの時代に見たものである。


이처럼 아버지 누구누구의 아들 누구누구……라고 소개를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구레네 사람 시몬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가 아니라, 아들이 먼저 와 있어요.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록이 되는 일은 단 한 가지 경우입니다. 그것은 바로, 아들이 아버지보다 유명한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에서 아들 이름을 먼저 언급했다는 것은, 마가에 의해 이 복음서가 기록될 무렵, 그들에게 알렉산더와 루포라는 이름은, 적어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의 아버지 <시몬>보다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이름이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이런 식이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이름은 시몬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 뭐 이런 식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흥미로운 점은, 신학자들에 의하면 마가복음의 수신인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 지역의 기독교인을 위해 적혔다고 하는데, 이 점에 있어서는 로마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즉, 마가복음과 로마서 모두가 이미 수신인들이 <루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기록되었다는 점, 그리고 마가복음과 로마서 모두가 이방 지역의 기독교인을 위해서 기록되었다는 공통점으로 미루어볼 때, 믿음의 형제들 중에 유명인사인 루포, 사도 바울이 그를 가리켜서 주의 택하심을 입었다고 말하고, 그의 어머니는 내 어머니나 마찬가지로까지 할 만큼 친근감을 표시한 가정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구레네 시몬의 가정이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기에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アレクサンドロとルフォスの父)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졌습니다. 이는 결코 그가 원해서 지었던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기록된 것처럼, 지기 싫은데도 억지로 지었습니다. 누가복음의 기록대로라면 도망치고 싶었을지도 모르나 붙잡히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지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에는 저주스럽고 무겁고 지저분한 나무통나무, 끔찍한 사형도구이지만, 그것은 영적으로 본다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지시는 십자가, 그 십자가에 묻은 피는 우리를 죄에서 씻기시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보혈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억지로 하는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누구는 생로병사. 태어나고, 늙고 병 들고 죽는 것을 모두 고통이라고 합니다.

이 네 가지를 본다면 사실 모두가 억지로입니다. 내가 좋아서, 기쁜 마음으로 늙는 사람, 기쁜 마음으로 병에 걸리는 사람, 기쁜 마음으로 죽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는 다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늙고,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병에 걸리고,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죽어가는 것입니다.

태어나는 것은 어떻습니까. 어디 한 번 이 세상에 태어나볼까? 해서 태어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는 모두가 다 강제로, 억지로 태어나서 억지로 늙고 억지로 병들고 억지로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고통인가요? 적어도 주님을 믿는 우리는 이를 고통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그럼 무엇으로 받아들여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감사입니다.

내가 태어난 것도 감사, 내가 늙는 것도 감사, 내가 병에 걸리는 것도 감사, 내가 죽는 것도 감사입니다.

이 세상에 생명을 주시고 주님께서 함께 해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리고 늙는 것이 고통이에요? 늙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살아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나이 마흔, 쉰이 아니라 열 살, 스무 살도 못 넘기고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죽으면 더 이상 나이를 먹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살아서 나이 50, 60, 70을 넘길 수 있다는 것은 이는 엄청난 축복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우리가 질병을 앓는 것도 믿음 안에서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왜 감사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치료해주실 것이기 때문에 감사한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음도 감사할 수 있을까요?

로마서 14장 8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私たちは、生きるとすれば主のために生き、死ぬとすれば主のために死にます。ですから、生きるにしても、死ぬにしても、私たちは主のものです。

빌립보서 1장 20절~21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私の願いは、どんな場合にも恥じることなく、今もいつものように大胆に語り、生きるにしても死ぬにしても、私の身によってキリストがあがめられることです。
私にとって生きることはキリスト、死ぬことは益です。

빌립보서 3장 13절~14절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兄弟たち。私は、自分がすでに捕らえたなどと考えてはいません。ただ一つのこと、すなわち、うしろのものを忘れ、前のものに向かって身を伸ばし、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우리가 믿음의 푯대를 향해서 달려가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다면 이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기쁨으로 충만한 삶이 되겠습니까. 태어나고 나이 들고, 병에 걸리고 죽는 것이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닌 억지로 되는 것이지만, 이는 믿음 안에서 이 모두가 감사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억지로 하신 것이 없으셨습니까. 아니요.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 기도 드리시기를

마태복음 26장 39절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それからイエスは少し進んで行って、ひれ伏して祈られた。「わが父よ、できることなら、この杯をわたしから過ぎ去らせてください。しかし、わたしが望むようにではなく、あなたが望まれるままに、なさってください。」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시게 됩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예수님의 십자가 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확실하게 증거해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십대들은 종종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싶어요”

그러나 이 말을 듣는 어른들은 어떻습니까. 어쩌면 누구는 철없는 소리 한다면서 웃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그렇죠.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 보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기 보다는,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처음에는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노력이나 희생이 안 따르나요? 아닙니다. 항상 즐겁기만 한 일은 없습니다. 부단한 노력과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어쩌면 우리 삶의 대부분이 억지로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인지도 모릅니다.

누구는 십자가에 대해서 무슨 고통이나 고난이라고 오해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누구는 그래요. 아~ 자기한테는 자기 자식들이 십자가래요. 너무나 속을 썩이는데 정말로 속이 상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고통이나 고난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속을 썩이는 게 십자가가 아닙니다. 고통과 고난의 십자가는 이미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우리를 위해 지셨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십자기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삶 속에서 내가 억지로 해야 할 일들이 있어요. 아무리 기도를 해도 믿음 안에서 생각을 해도 피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정말 하기 싫어요. 바로 그 때 구레네 시몬을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이를 감사함으로 감당함으로 인해서 주님께 영광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은 또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어요. 내가 축복 받지 않고 내 자식들만 축복 받으면 뭘 해. 혹시 그런 생각 안 해보셨나요? ㅎㅎ 저는 해봤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아버지가 축복 받지 못했는데 어떻게 자식들이 믿음을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짐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시몬은 넘치는 축복을 받았을 것이요, 이를 본 아들들 알렉산더와 루포가 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억지로 감당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까? 감사합시다.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주님께서 힘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그 일을 감사함으로 감당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주님께 큰 영광을 돌리고 주님으로부터 넘치는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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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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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0회 언제나 감사할 수 있는 이유
2018년 8월 1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9절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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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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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언제나 감사할 수 있는 이유” いつも感謝できる理由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다는 것을 믿으시나요? 예, 아멘. 믿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남들이 기도를 하면 응답을 받는다고 하기 때문이요?

항상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어디서 찾아야 하냐 하면 바로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기도 응답을 받은 사람들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이사야 38장 1절을 봅니다.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そのころ、ヒゼキヤは病気になって死にかかっていた。そこへ、アモツの子、預言者イザヤが来 て、彼に言った。「主はこう仰せられます。『あなたの家を整理せよ。あなたは死ぬ。直らない。』」

히스기야 왕이 이제 죽을 병에 걸렸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제 너는 죽고 살지 못한다고 하는 사형판결을 내리십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듣고 히스기야 왕은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히스기야 왕이 기도하는 유명한 장면이 이사야 38장 2절~3절에 나옵니다.

이사야 38장 2절~3절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니”

そこでヒゼキヤは顔を壁に向けて、主に祈って、言った。「ああ、主よ。どうか思い出してください。私が、まことを尽くし、全き心をもって、あなたの御前に歩み、あなたがよいと見られることを行ってきたことを。」こうして、ヒゼキヤは大声で泣いた。

히스기야 왕이 간절하게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요.

이사야 38장 5절~6절입니다.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行って、ヒゼキヤに告げよ。あなたの父ダビデの神、主は、こう仰せられます。『わたしはあなたの祈りを聞いた。あなたの涙 も見た。見よ。わたしはあなたの寿命にもう十五年を加えよう。
わたしはアッシリヤの王の手から、あなたとこの町を救い出し、この町を守る。』

히스기야 왕의 운명은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간구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수명을 15년이나 늘려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신약에도 예수님을 만난 후에 기도 응답을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병 고침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마가복음 5장과 누가복음 8장에서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마가복음 7장에는 귀가 안 들리고 말을 못하는 사람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는 38년 된 병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또한 마가복음 5장 41절에서는 숨을 거둔 회당장(会堂管理者)의 딸이 살아났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는 이미 죽은 지 4일이나 되어서 냄새가 나는 나사로(ラザロ)를 무덤에서 일으키셨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4장 14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何かをわたしに求めるなら、わたしはそれをしましょう。

요한복음 16장 24절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あなたがたは今まで、何もわたしの名によって求めたことはありません。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受けるのです。それはあなたがたの喜 びが満ち満ちたものとなるためです。

예수님께서는 이제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구해야 하는 것이지요. 혹시 이렇게 구하라고 하면 좀 죄송해서 못 구하시는 경우가 있으신가요?

아니요, 죄송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구하라고 말씀하고 계신데 안 구한다는 것은 이는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해야 합니다.

죠지 뮬러라는 사람은 자신의 기도 제목을 노트에 적고, 기도 응답을 받을 때마다 체크를 했다고 하는데, 그는 평생 동안 5만 번이나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기도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기도를 하면 응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십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입니다. 기도의 능력을 믿고 주님께 간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자, 이렇게 말씀을 끝낼 수도 있습니다만, 사실 오늘 본론은 여기서부터입니다.

특히 우리나라를 보면 기도를 강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과거 기독교에서는 성령님의 역사와 기도를 대단히 강조해왔습니다. 기도를 하면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응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를 하면 병도 낫고, 기도를 하면 부자도 되고, 기도를 하면 모든 것이 만사 형통이라는 식으로 암암리에 교육을 받아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기도는 중요하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을 도외시하고 그저 기도만 한다고 해서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만 열심히 하면 기도 응답 받고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다고 한다면, 이렇게 두꺼운 성경이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단이 기승을 부리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해서 열정은 많아요. 기도도 많이 해요. 헌금도 많이 해요. 전도도 많이 해요. 그런데 뭐가 없어요? 예, 하나님 말씀이 없어요. 성경을 모릅니다. 그저 주일 설교 말씀 듣고, 가끔 빨강색이나 노랑색 형광 펜으로 줄을 긋고, 그게 다예요.

이런 사람들을 이단들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성경에도 보면 사탄이 예수님을 무엇으로 유혹을 합니까.

마태복음 4장 5절~6절을 봅니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すると、悪魔はイエスを聖なる都に連れて行き、神殿の頂に立 たせて、言った。「あなたが神の子なら、下に身を投げてみなさい。『神は御使いたちに命じて、その手にあなたをささえさせ、あなたの足が石に打ち当たることのないようにされる』と書いてありますから。」

이 마귀가 인용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시편 91편 11절~12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시편 91편 11절~12절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まことに主は、あなたのために、御使いたちに命じて、すべての道で、あなたを守るようにされる。彼らは、その手で、あなたをささえ、あなたの足が石に打ち当たる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

이걸 누가 인용을 했어요? 예, 마귀가 인용을 했습니다. 지금 사탄은 예수님을 거룩한 성의 성전 꼭대기에 세우셨다고 하는데, 이는 아마도 예루살렘 성전이 아닐까 하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만, 그 곳이 예루살렘 성전이든 아니든 간에 분명 대단히 높은 곳이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마귀 사탄이 유혹한 대상이 성경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어? 그래? 성경에 그렇게 적혀 있어? 그럼 어디 한 번 뛰어내려볼까? 그렇게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이단입니다. 거기서 뛰어내려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죠. 잘해야 심한 부상이요, 대부분 사망입니다. 하나님 말씀이라도 왜곡해서 잘못 전달하게 되면 이처럼 엄청난 비극이 벌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이단에 사로잡혀서 자신의 생활도 파괴되고 가정도 파괴되어 심하게 다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마귀는 때로는 우리를 돈이나 욕망 같은 것으로도 유혹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성경 말씀으로 우리를 유혹할 때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죠. 뛰어내리지 않았습니다. 왜요? 겁이 많아서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4장 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試みてはならない』とも書いてある。」

성경 말씀을 잘못 적용하는 마귀 사탄을 대항하신 예수님의 방법은 바로 성경 말씀이었습니다. 신명기 6장 16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あなたがたがマサで試みたように、あなたがたの神、主を試みてはならない。

이처럼 성경을 알아야 마귀 사탄도 대항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도 중요하고 봉사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기도 응답을 받고 싶으십니까? 물론이죠. 하나님을 믿는 분들 중에서 기도 응답을 받고 싶지 않는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예전에 5만 번이나 기도 응답을 모두 받았다는 죠지 뮬러 이야기를 듣고, 그래, 그럼 나도 기도 노트를 한 번 적어놓고 해보면 모두 응답을 받을 수 있겠지……라고 생각해서 한 번 해볼까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려고 하니까 조금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요, 성경에 보니까 믿음이 좋다고 모든 사람들이 다 기도 응답을 받은 게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모세를 한 번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추산 200여 만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나온 모세. 홍해를 가르고 바위에서 물을 내는 모세, 뿐만 아니라 출애굽기 33장 11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출애굽기 33장 11절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主は、人が自分の友と語るように、顔と顔とを合わせてモーセに語られた。モーセが宿営に帰ると、彼の従者でヌンの子ヨシュアという若者が幕屋 を離れないでいた。

하나님께서 자기 친구한테 말씀하듯이 모세한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정말 참 이만 저만 부러운 게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가깝게 대하던 모세의 기도도 모두 들어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의 마지막 간절한 기도는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3장 25절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どうか、私に、渡って行って、ヨルダンの向こうにある良い地、あの良い山地、およびレバノンを見させてください。」

그런데 이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바로 다음 구절입니다.

신명기 3장 26절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しかし主は、あなたがたのために私を怒り、私の願いを聞き入れてくださらなかった。そして主は私に言われた。「もう十分だ。このことについては、もう二度とわたしに言ってはならない。

너 이제 그만 구해. 그만하면 됐어. 하지만 더 이상 나한테 구하지 마. 안 돼……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물론 여기에는 모세가 저지른 잘못이 있지요.

광야에서 물이 떨어져서 백성들이 모세한테 물을 달라면서 항의를 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기도를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20장 8절입니다.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杖を取 れ。あなたとあなたの兄弟アロンは、会衆を集めよ。あなたがたが彼らの目の前で岩に命じれば、岩は水を出す。あなたは、彼らのために岩から水を出し、会衆とその家畜に飲ませよ。」

하나님께서는 그저 반석한테 명령을 하라고 해셨는데, 모세는 어떻게 했냐 하면 10절과 11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민수기 20장 10절~11절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そしてモーセとアロンは岩の前に集会を召集して、彼らに言った。「逆らう者たちよ。さあ、聞け。この岩から私たちがあなたがたのために水を出さ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
モーセは手を上げ、彼の杖で岩を二度打った。すると、たくさんの水がわき出たので、会衆もその家畜も飲んだ。

이는 말하자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성질을 낸 것입니다. 사실, 뭐 모세라고 사람인데 뻑하면 하나님이나 자신들한테 항의하고 난리를 치고 하는 백성들이 곱게 보이기만 했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성질을 낸 것이겠지요. 하지만 이 일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이나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처럼 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기도를 끝까지 거절하셨습니다.

그럼 신약에서는 어떻습니까. 바울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9절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9절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また、その啓示があまりにもすばらしいからです。そのために私は、高ぶることのないようにと、肉体に一つのとげを与えられました。それは私が高ぶることのないように、私を打つための、サタンの使いです。
このことについては、これを私から去らせてくださるようにと、三度も主に願いました。
しかし、主は、「わたしの恵みは、あなたに十分である。というのは、わたしの力 は、弱さのうちに完全に現れるからである」と言われたのです。ですから、私は、キリストの力が私をおおうために、むしろ大いに喜んで私の弱さを誇りましょう。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만, 대체적인 의견으로는 아마도 당시 바울이 어떤 질병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신학자들은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질병이든 아니든 간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당시 바울의 육체를 몹시 힘들게 하고 있던 것을 물리쳐 달라고 주님께 기도를 드렸는데 이 기도를 거절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미 네가 받은 은혜가 족하다, 네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진다” 「貴方の受けたわたしの恵みは、十分である。神様の 力は、弱さのうちに完全に現れるからである」는 응답을 받았다는 것이지요.


만약에 모세나 바울이 죠지 뮬러와 같은 기도 노트가 있었다고 한다면 적어도 각자 최소한 한 가지는 기도 응답란에 체크를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이신가요? 아니요. 도리어 축복입니다. 바울은 이를 기뻐했다고 합니다.

또한 모세에 대해서는 신학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에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고 하면 그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우상숭배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물론 성경에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명시는 없습니다만, 이 의견에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신명기 34장 5절~6절에 보면 모세의 무덤조차 아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말하자면 모세가 우상 숭배 대상이 되었다면 그의 무덤도 무슨 성지처럼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모세의 무덤을 감추었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우상숭배의 대상이 되면 그것은 축복인가요? 아니요.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저주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회사원인데 다른 회사와 계약을 했습니다. 그런데 계약금이 10억원이었어요. 자기는 월급을 300만원 받고 있는데 자기 월급에 비하면 10억원은 어마어마한 액수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 계약금을 내 주머니 속에 집어넣어요? 그건 범죄입니다. 내 정당한 수입은 회사에서 주는 월급이지요.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주는 영광은 모두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그것을 가로채려고 하는 것이 누구입니까. 그렇죠. 바로 사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진정한 축복이요 은혜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기도 제목이 있으십니까. 그런데 기도를 해도 응답을 안 해주시는 것 같아서 답답하신가요? 예, 그 마음 제가 잘 압니다. 다름 아닌 제가 사실 요즘 그런 심정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을 원망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태복음 6장 7절~8절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また、祈るとき、異邦人のように同じことばを、ただくり返してはいけません。彼らはことば数が多ければ聞かれると思っているのです。
だから、彼らのまねをし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がたの父なる神は、あなたがたがお願いする先に、あなたがたに必要なものを知っておられるからです。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々、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従って召された人々のためには、神がすべてのことを働かせて益としてくださ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신명기 28장 6절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あなたは、入るときも祝福され、出て行くときにも祝福される。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세요? 아니요. 지금 이 순간도 우리를 지대한 관심을 가지시고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에 응답을 해주시면 감사합시다. 이는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기도 응답이 더디더라도 감사합시다. 그리고 하물며 모세와 바울처럼 기도를 거절하시더라도 감사합시다. 그 이유는 그것이 바로 축복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한, 우리는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고, 누워도 복을 받고, 앉아도 복을 받고, 일어서도 복을 받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룹니다. 모든 것이 합력해서 결국은 넘치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항상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과 동행하며 마침내 넘치는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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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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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회 사이 좋게 지냅시다
2018년 8월 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절~2절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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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사이 좋게 지냅시다” 仲良くしましょう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입학식은 3월에 한국에서 했습니다만, 그 해 5월에 일본으로 왔기 때문에 제가 입학식을 했던 학교에 대한 기억은 가물가물합니다. 오히려 제 모교라고 하면 5월에 전학했던 동경 신쥬쿠에 있는 동경한국학교 초등부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 당시 참 말도 안 듣고 뻑 하면 울기만 했던 저를 많이 보살펴주셨던 당시 1학년 때 선생님을 생각하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동경한국학교는 고등부까지 불어있는데 저는 초등부만 나왔습니다. 그래도 “현해탄 푸른 물결 건너서 울려온다 희망의 종소리……”라는 교가도 아직까지 기억합니다.

얼마 전에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역시 똑 같은 교가를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더라구요. 참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것이 더 있었습니다만, 이는 바로 학교 교훈이었습니다. 교훈이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라를 사랑하자, 힘써 배우자, 사이 좋게 지내자”입니다

참 고풍스러우면서도 기본적인 말이죠?

나라를 사랑하자, 힘써 배우자, 사이 좋게 지내자.

이 세상에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이 세 마디에 대해서 이견을 제시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를 사랑해야죠. 힘써 열심히 배워야죠. 그리고 사이 좋게 지내야죠.

그런데 저는 이 세 가지를 보고 조금 아쉬운 부분이 느껴졌습니다. 그렇다고 무언가를 더하자는 것은 아니에요. 어찌 보면 그야말로 황금비율. 완벽한 것처럼 느껴지는 이 교훈이지만 2% 아쉽다고 한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이 순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에 있거나 외국에 있거나 우리 나라를 사랑해야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첫 번째이고, 학교는 공부를 하는 곳이기 때문에 힘써 배우는 것이 두 번째이고, 학교는 또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는 것이 세 번째라고 하는 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만, 저는 어쩌면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사이 좋게 지내자>가 아닐까 합니다.

인터넷에서 <사이 좋게 지내자>를 찍어서 검색을 해보니까 대부분이 유치원, 초등학교…라는 식으로 주로 어린 아이들에 대한 사진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만 사이 좋게 지내면 되나요? 사실 정작 심각한 문제는 어른들입니다.

<사이 좋게 지내자>는 것을 가르치는 곳이 어디 동경한국학교 뿐이겠습니까? 수많은 학교에서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청년이 되어 어른이 되면서 이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는 생각은 어느새 우리 머리에서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어디를 보더라도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사이 좋게 지내지 못하는 어린이들이 아니라, 사이 좋게 지내지 못하는 어른들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정치나 경제나 사회나 분명 그 분들도 어렸을 때에는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는 것을 배웠을 텐데도 불구하고 사이 좋게 지내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고 마는 것이지요.

좋아요. 열심히 공부합니다 힘써 배웁니다. 그래서 고위공직자들이 되었습니다. 공직자들이 되면 공무원 윤리헌장, 공무원 윤리헌장 실천강령, 공무원의 신조 5개항 등을 배우겠지요. 여기에는 나라에 대한 충성, 국가에 대한 헌신도 있습니다. 역사의 주체가 된다, 민족의 선봉이 된다, 국가의 역군이 된다, 정의사회를 구현하는 국민의 귀감이 된다, 겨레의 기수가 된다……라고 하는 대단히 훌륭한 말들은 있습니다만, 무엇이 빠졌습니까. 예, <사이 좋게 지내자>가 빠졌습니다.


힘써 배웠죠. 열심히 공부했지요. 그래서 나라를 사랑하고 충성하자는 생각은 머리에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무자비하게 강자가 약자를 공격하고 서로 치고 박고 싸웁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끊임없이 서로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비판을 하는 사람들 중에 가장 많이 서로 비판하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정치인이 아닐까 합니다. 참 이 정치인이라는 사람들도 보면 참 딱하고 가엾은 직업입니다. 한국이나 일본을 보더라도 국회에서 상대방 칭찬하는 것 보신 적 있으세요? 서로 비판하고 비난하고 공격하고 그렇습니다. 이를 두고 그 분들은 논의를 한다고 하는데, 물론 여러 가지 특혜도 있고 대우도 받고 하겠습니다만, 참 하기 힘든 직업 중 하나가 이 정치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면 또 그 사람들은 서로 비판만 하나요? 비판을 많이 받기도 하지요. 누구한테서 비판을 받냐 하면, 동료 의원들한테서 만이 아니라 언론이나 국민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을 보면 참 정치를 좋아해요. 여러분들께서는 혹시 페이스북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페이스북을 하고, 이를 통해서 주일 설교 내용이나 선교후원을 해주신 분들을 적어 올리고 있습니다만, 누가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페이스북은 정치인이 정치 이야기를 하거나 아저씨들이 자기들 이야기를 하는 곳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제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 정치 이야기가 참 많이 올라오는데, 이건 그냥 제가 페이스북에서 친구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단순히 정치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 건가 했습니다만,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사람들이 참 정치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제가 페이스북으로 연결되어 있는 분들 중에는 정치를 하는 분들도 계시고 한데, 뭐 그 분들이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기 직업이니까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 외의 사람들도 무슨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정치 이야기 투성이입니다.


특히나 사회적으로 무슨 이슈가 되는 사건이 터지기라도 한다면 이건 뭐 난리가 아닙니다. 참 그 분들도 바쁘게 사는 분들일 텐데, 언제 그런 시간을 내서 긴 글을 써 올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자기가 몇 년 전에 썼던 글까지도 다시 끌고 와서 올리고 그럽니다. 그런 글들을 보면 99% 이상이 누군가를 아니면 무언가를 온통 비판하는 글들 투성이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댓글이 달리고, 거기서 논쟁이 시작되고 뭐 그러는 일들을 흔히 볼 수 있어요.

저는 그런 현상을 보면서 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글들을 페이스북에 올리고, 또 그 글로 인해서 상대방을 공격하고 비판하고 비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대통령이나 정부 고위 관료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어요. 그런데 그 글을 그 비판 당하는 당사자가 읽어 본다고 칩시다. 그러면 애기는 다르죠. 당신은 이런 부분이 잘못 됐으니까 이것을 고치시오……라고 했는데 그 사람이 그 글을 보고 나서, 아, 맞네. 고쳐야겠네……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분명히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그런 글들을, 그 글들의 상대방인 대통령이나 고위 공직자가 읽습니까? 정말 일간지 신문 기고란이나 텔레비전 시사 프로그램 같은 데에 출연해서 말하거나 한다면 모를까, 일개 개인이 페이스북에 올리는 글을 그 사람들이 읽어볼 리가 만무합니다.

옛날 중국의 어느 문인은 이런 글을 썼다고 합니다. “저는 오랫동안 중국 위정자와 중국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써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사람들이 제 글을 전혀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너무나도 부끄러웠습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모른 채 오늘도 보니까 얼마나 많은 비판 글이 올라왔는지 모릅니다.


저는 이런 글들을 보면서 잠시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사람들이 왜 이럴까.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세요. 대통령이나 정치인을 욕해서는 안 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서는 옛날에 대통령을 욕하면 잡아가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시대도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로 뽑은 대통령이나 정치인을 비판하는 것은 충분히 허용되고 보장되어야 하는 국민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다만 그렇다면 상대방이 알아 듣게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본인이 글을 읽을 확률은 0%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글을 이렇게 열심히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것이죠.

가만히 생각해보니 좀 알 것도 같더라구요. 아마도 이는 우리가 갖고 있는 큰 착각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무슨 착각이냐 하면 바로 상대방을 비판하면 내가 상대방보다 나은 존재로 평가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착각인 것입니다.

누구는 정치를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정치는 권력투쟁이다. 야당은 정권을 빼앗기 위해서 투쟁 하고 여당은 정권을 지키기 위해서 투쟁한다. 이 말을 들으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나치게 과장된 말 같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하냐 하면, 무조건 상대방을 비판해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방 보다 내가 더 나은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국민들의 지지를 뺏어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페이스북에서 당사자가 읽을 리 만무한 비판글들을 올리는 사람들도 이해가 갑니다.

이는 바로 내가 어떤 유명 인사를 비판하면서 자기 자신을 더 좋게 보이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지요. 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정치나 사회에 대한 비판 글을 올리는 이유는 어찌 보면 정치나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기보다는 다분히 자기 주변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고 싶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이 비판이나 비난을 하게 되다는 것은 그 근원에 무엇일 깔려 있냐 하면, 여기에는 정치나 사회를 보다 좋게 만들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바로 자기 자신을 좀 좋게 보이려고 하는 과시욕, 또는 교만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경계를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비판이 무엇이에요? 나는 옳고 너는 잘 못됐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구는 이런 말을 합니다. 시골 동네 술집에 가보라는 거예요. 거기서 얘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하룻밤에도 세상이 세 번 이상 바뀐대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아~ 요즘 정치 글러먹었어. 대통령은 누가 되어야 하고 장관은 누가 되어야 하고, 이걸 이렇게 해야 하고 저걸 저렇게 해야 하고……라고 하면, 다른 한 쪽에서는 아니야, 저건 저렇게 하고 그건 그렇게 하고……그런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어떠세요? 정치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참 모자란 것도 같고 그럴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하면 좀 더 잘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런 생각도 중요하죠. 하지만 알고 보면 그 사람들도 자기가 하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정치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사람들, 더구나 초선이 아닌 몇 선이나 하고 있는 사람들 보면, 공부도 많이 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무슨 행사다 무슨 모임이다 하면서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보통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 일도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또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무슨 정치인들을 두둔하거나 비판하거나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바로 우리입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나와 내 이웃입니다.

한 달쯤 전에 제가 처음으로 팟캐스트를 등록하기 위해서 그 동안 주일 설교 내용들을 다시 정리할 일이 있었습니다만, 그러면서 저 스스로가 참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뭐 발음이 나빠서라거나 내용이 잘못되어서가 아니에요.


이런 말씀 드리기가 적지 않게 창피합니다만, 참 말을 잘 하는 것 같더라구요. 이렇게 듣고 있으니까 참 맞는 말만 해요. 이왕 창피한 김에 좀 더 말씀을 드리자면, 제 주일 말씀을 들으면서 저 자신도 은혜를 참 많이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 말을 누가 하고 있어요? 예, 바로 저 자신이 하고 있습니다. 저는 저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아요.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말들을 들으면서 제가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야……이 친구야……너냐 잘해……

그것 아니겠습니까.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 그것은 바로 상대방한테 충고를 하는 일이라는 것이에요. 하지만 저는 더 쉬운 일은 바로 상대방을 비판하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게 상대방을 비판하면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가 오른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옆에 서 보는 사람들도 비판하는 사람이 훌륭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착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단순히 착각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는 바로 교만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찌 보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 중 하나가 바로 이 정치인이 아닐까 합니다. 선거운동을 하면서 상대 후보를 칭찬하면 이길 수 있을까요?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대단히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오늘 말씀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7장 1절~2절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さばかれないためです。
あなたがたがさばくとおりに、あなたがたもさばかれ、あなたがたが量るとおりに、あなたがたも量られるからです。

비판과 비난에는 교만이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는 비단 정치인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이 아닙니다. 바로 나와 내 이웃 간의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말씀을 전하신 기간을 대략 3년에서 3년 반 정도로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절대 긴 시간이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 이 말씀은 이른바 산상수훈이라는 말씀 안에 포함된 내용입니다만, 예수님께서는 하셔야 할 말씀, 전하셔야 할 말씀이 많으셨을 것입니다. 천국에 대해서 지옥에 대해서, 그리고 구원에 대해서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왜 갑자기 이처럼 <비판하지 말아라>라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시간이 남아서 좀 시간을 때우려고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지금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부분이 바로 천국과 구원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가끔 다른 사람들한테 쓴 소리를 하지요? 하지만 그러면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나도 너한테 이런 말 하기 싫어. 하지만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라는 말, 어떤 분은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 분도 계시겠고, 또 어쩌면 직접 해본 적이 있으신 분도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정말 그런 말 하기 싫었어요? 그래도 상대방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말이었어요?

그래요. 그 진의를 제가 의심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비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네가 비판을 하면 똑 같은 비판을 네가 받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2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それで、何事でも、自分にしてもらいたいことは、ほかの人にもそのようにしなさい。これが律法であり預言者です。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내가 다른 사람을 안 좋게 대우하면 다른 사람도 나를 안 좋게 대우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나를 잘 대접해주면 좋은 것처럼, 내가 다른 사람을 잘 대접해주면 좋아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에 깔린 주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나와 상대방은 똑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무슨 청문회 같을 것을 하는데 기억에 남는 인사청문회가 두 번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만, 적어도 이 두 사람은 정말 털어서 먼지가 안 나올 줄 알았습니다만, 국회의원들이 집요하게 밝혀내더라구요.

그래도 물론 본인이 인정을 하지 않으면 그게 사실이 아닐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세상에, 이런 저런 내용들을 집요하게 물으니까 본인들이 사과를 하는 모습을 보고 적지 않게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들었던 느낌이 무엇이겠습니까. 아……저 사람들도 역시 똑 같은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이었지요.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우리와 똑 같은 사람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에 보면 요한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천사를 보고 놀라서 경배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하지만 그 때 그 천사가 뭐라고 합니까,.


요한계시록 19장 10절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そこで、私は彼を拝もうとして、その足もとにひれ伏した。すると、彼は私に言った。「いけません。私は、あなたや、イエスのあかしを堅く保っているあなたの兄弟たちと同じしもべです。神を拝みなさい。イエスのあかしは預言の 霊です。」

이 모습을 보면 천사도 사람에게서 높임을 받으려 하지 않고, 오직 높임을 받으실 이, 경배를 받으실 이는 하나님이라고 말하는데, 일개 사람인 주제에 어차피 똑 같은데 다른 사람들로부터 애써 높임을 받으려고 한다면 이 얼마나 무서운 교만이 되겠습니까.

“교만하지 말라”고 하는 말은 그저 단순히 <착하게 살자>가 아닙니다. 성경은 이 교만을 반복해서 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시편 119편 21절
“교만하여 저주를 받으며 주의 계명들에서 떠나는 자들을 주께서 꾸짖으셨나이다”

あなたは、あなたの仰せから迷い出る高ぶる者、のろわるべき者をお叱りになります。

잠언 16장 18절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高ぶりは破滅に先立ち、心の高慢は倒れに先立つ。


예레미야 50장 32절
“교만한 자가 걸려 넘어지겠고 그를 일으킬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그의 성읍들에 불을 지르리니 그의 주위에 있는 것을 다 삼키리라”

そこで、高ぶる者はつまずき倒れ、これを起こす者もいない。わたしは、その町に火をつける。火はその回りのものをすべて焼き尽くす。」

이 외에도 교만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구절이 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비판은 교만입니다. 비판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가 영광을 독차지 하겠다는 교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다스려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을 하려고 하는 우리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누가 나에게 비판을 하면 그 비판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을 하려고 하는 나 자신의 교만을 대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35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あなたがたに新しい戒めを与えましょう。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
もし互いの間に愛があるなら、それによって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弟子であることを、すべての人が認めるのです。」


요한복음 15장 9절~10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父がわたしを愛されたように、わたしもあなたがたを愛しました。わたしの愛の中にとどまりなさい。
もし、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戒めを守るなら、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愛にとどまるのです。それは、わたしがわたしの父の戒めを守って、わたしの父の愛の中にとどまっているのと同じです。

내 안에 있는 교만을 물리칠 힘은 오로지 사랑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천국에 가도 되고, 안 가도 됩니까? 구원을 받아도 되지만, 안 받아도 됩니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반드시 천국에 가야만 합니다.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교만을 물리쳐도 되고, 안 물리쳐도 됩니까? 우리 이웃을 사랑해도 되고 사랑 안 해도 됩니까? 여기서도 선택의 여지는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교만은 반드시 물리쳐야 합니다. 그리고 이 교만을 물리칠 유일한 방법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에 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원을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 교만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에베소서를 봅니다.

에베소서 4장 21절~24절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ただし、ほんとうにあなたがたがキリストに聞き、キリストにあって教えられているのならばです。まさしく真理はイエスにあるのですから。
その教えとは、あなたがたの以前の生活について言うならば、人を欺く情欲によって滅びて行く古い人を脱ぎ捨てるべきこと、
またあなたがたが心の霊において新しくされ、
真理に基づく義と聖をもって神にかたどり造り出された、新しい人を身に着るべきことでした。

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제 비판이라는 옛 사람을 벗어버립시다. 미움이라는 옛 사람을 벗어버립시다. 이는 모두가 교만이라고 하는 유혹, 자기 자신이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든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사랑이라는 새 사람, 용서라는 새 사람을 입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단순히 권면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피를 흘리시기까지 하면서 우리에게 해주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라를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고 힘써 배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 이웃과 사이 좋게 지내게 되고 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비판하려 하지 맙시다. 비판 대신 서로를 사랑합시다. 주님 안에서 사이 좋게 지냅시다. 그리하여 옛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제자로서 거듭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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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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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회 아직 끝이 아닙니다
2018년 7월 2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4장 29절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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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아직 끝이 아닙니다.” まだ終わりではありません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전에 서울에서 살 때 지하철 역이나 시내 광고판을 보면 무슨 성형외과다 하면서 이른바 <비포 애프터> 사진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비포…… 그러니까 시술을 받기 전의 모습은 코나 턱이 이렇게 생겼었는데, 애프터……시술을 받고 나면 이렇게 변했다……는 사진을 크게 붙여놓곤 했었지요. 그 중에는 정말 이게 똑 같은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지금 현재 그런 광고는 이제 법적으로 금지가 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개인에 따라서 결과가 같다고 할 수 없기에 과장광고가 될 수 있는 소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이른바 비포 애프터 사진이라고 하면 이처럼 성형외과나 아니면 다이어트 광고를 떠올리게 됩니다만, 며칠 전에 인터넷에서 또다른 비포 애프터 사진, 아니, 그냥 비포만 있는 사진들을 보았습니다. 이는 바로 유명인들의 비포……그러니까 유명해지기 전의 사진을 모아놓은 것이었습니다.

제가 서양 유명인들에 대해서 많이 알지는 못했기 때문에 거기 나와 있는 사람들 모두를 알 수는 없었습니다만, 저 같은 사람도 아는 유명인들이 몇몇 있었습니다.

그 중 인상 깊게 남았던 사진이 두 장 있습니다만, 그 중 한 장은, 18세 소녀가 선 채로 천진난만하게 밝은 웃음을 짓고 있는 사진입니다.

또 한 장은 19세 소녀가 앉아서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진입니다.

궁금해하실 것 같아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천진난만하게 밝은 웃음을 짓고 있는 18세 소녀는 아직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찍은 마돈나 사진이었고,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19세 소녀는 장차 영국 왕세자와 결혼하게 될 다이애너비의 사진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의 사진이 있었지요. 하지만 그 중에는 미래에 마돈나처럼 큰 성공을 거둔 스타가 있었나 하면 다이애너비처럼 비극적인 인생을 살아간 사람도 있었습니다.

아무리 불우한 인생을 살아간 사람이라 하더라도 처음부터 그런 일들이 자신에게 일어날 줄은 몰랐겠지요. 본인은 물론이고 그 주변 사람들도 몰랐을 것입니다.

어쩌면 성공한 사람도 마찬가지일지 모르겠습니다.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은 소프트뱅크를 설립한 1981년, 전 직원들 앞에서 “5년 뒤 우리 회사는 컴퓨터 소프트웨어 유통에 있어서 1등을 할 것이고, 1000곳 이상의 딜러를 상대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큰 소리를 쳤다고 합니다.

말은 참 멋집니다. 하지만 그 말을 할 당시 그는 어디에 서 있었냐 하면 사과상자 두 개를 엎어놓은 단상 위에 있었고, 그 말을 듣고 있던 전 직원은 단 두 사람 뿐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손 회장은 현재 어떻습니까. 그는 현재 일본에서 제일가는 거부이고 소프트뱅크는 직원 6만 8천명, 총자산 246조원, 매출 89조원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아무리 성형외과에서 하는 비포 애프터 광고가 과장성이 있다 하더라도, 이처럼 인생에 있어서의 비포 애프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면 그들의 인생에 있어서도 이 비포 애프터의 차이가 대단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인물에 보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합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은 팔형제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서도 그리 큰 대접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귀한 손님인 사무엘이 방문했을 때, 아버지 이새가 다른 일곱 형들은 불러서 인사를 드리게 하면서도 막내인 다윗한테는 양들을 지키게 할 정도로 홀대를 당했습니다. 이것이 비포입니다. 그런데 애프터는 어떻습니까. 그는 골리앗을 물리치고 장차 왕이 되어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40년 동안이나 통치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사랑 받는 아들이었다가 종으로 끌려가고는 그것도 모자라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비포와 애프터는 참으로 안타깝지요. 비포는 사랑 받는 아들 요셉. 그런데 애프터는 이국 땅에서의 종살이와 감옥생활입니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닙니다. 그는 나이 서른에 애굽의 총리 자리에 오르는 놀라운 재반전을 이루게 됩니다.

신약에도 인생의 반전을 이룬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베드로를 한 번 볼까요? 그는 고기잡이였습니다. 단순히 고기잡이라고 해서 무시하면 안 되겠지요. 그는 분명히 고기잡이라고 하는 기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배도 있었겠지요. 즉,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배와 기술 만으로도 먹고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4장 19절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わたしについて来なさい。あなたがたを、人間をとる漁師にしてあげよう。」

이 한마디에 베드로는 순종하지요.

누가복음 5장 11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彼らは、舟を陸に着けると、何もかも捨てて、イエスに従った。


그들은 배도 있었고 기술도 있었습니다. 생활에 전혀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비포이지요. 그런데 좀 이상한 말이지만 예수님을 만나는 바람에 애프터에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다인가요?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넘치는 축복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또한 바울의 인생도 빼놓을 수 없겠지요. 그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젊은 나이에 고시를 패스한 유능한 엘리트 관료였습니다. 이미 출세가 보장된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유대교에 대한 믿음도 대단했지요.

사도행전 9장 1절~2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さてサウロは、なおも主の弟子たちに対する脅(おびや)かしと殺害の意に燃えて、大祭司のところに行き、
ダマスコの諸会堂あての手紙を書いてくれるよう頼んだ。それは、この道の者であれば男でも女でも、見つけ次第縛り上げてエルサレムに引いて来るためであった。

그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가려고 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단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탄압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신앙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9장 3절~5절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ところが、道を進んで行って、ダマスコの近くまで来たとき、突然、天からの光が彼を巡り照らした。
彼は地に倒れて、「サウロ、サウロ。なぜわたしを迫害するのか」という声を聞いた。
彼が、「主よ。あなたはどなたですか」と言うと、お答えがあった。「わたしは、あなたが迫害しているイエスである。

이렇게 예수님을 만난 바울, 그는 이제 예수님을 박해하던 청년 엘리트가 아니라 예수님을 전하는 사도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의 삶이 어땠을까요.

고린도후서 11장 24절~27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ユダヤ人から三十九のむちを受けたことが五度、
むちで打たれたことが三度、石で打たれたことが一度、難船したことが三度あり、一昼夜、海上を漂ったこともあります。
幾度も旅をし、川の難、盗賊の難、同国民から受ける難、異邦人から受ける難、都市の難、荒野の難、海上の難、にせ兄弟の難に会い、
労し苦しみ、たびたび眠られぬ夜を過ごし、飢え渇き、しばしば食べ物もなく、寒さに凍え、裸でいたこともありました。


이런 비포 애프터도 드물지요. 그는 출세가 이미 예정된 인물이었습니다. 남들한테 인정받고 안정된 생활이 보장된 인물이었습니다.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이 비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난 후의 인생은 참으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매도 맞고 강도 위험에다가 이제 같은 유대인한테까지 핍박을 받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고 난 다음의 애프터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그의 공로는 얼마나 대단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미 사도행전 9장 15절에서 바울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しかし、主はこう言われた。「行きなさい。あの人はわたしの名を、異邦人、王たち、イスラエルの子孫の前に運ぶ、わたしの選びの器です。

예수님의 이 말씀대로 신약 성경 중에서 상당 부분을 바울이 집필을 했고, 로마를 비롯해서 복음 전파와 교회 설립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이 바로 이 바울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모세를 보더라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범상치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핍박 받고 있던 당시 애굽에서 그는 출생합니다. 애굽 왕이 명령하기를 유대인 아기가 태어날 때 딸이면 살려두고 아들이면 죽이라고 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됩니다. 그 후 그는 애굽의 왕자로 성장하게 되지요. 몇 살까지냐 하면 무려 40세까지 그는 당시 최고 선진국에 살면서 왕족이라고 하는 최고의 환경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최고의 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놀랍고도 풍요로운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40세 때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는 뜻하지 않게 살인을 저지르게 되어 결국 그 때까지 쌓아둔 지위와 명예를 모두 버리고 광야로 도망치게 됩니다.

광야에서의 삶은 어땠을까요. 거기서 만난 여인과 결혼하여 그저 조용한 삶을 보내게 됩니다. 조용한 삶……말은 참 좋지요. 하지만 이제 그에게는 왕궁에서 살았을 때와 같은 화려한 옷도, 화려한 집도, 화려한 음식도 없습니다. 수많은 부하들도 없고 찬란했던 지위도 명예도 없습니다. 그의 나이 마흔. 이제 한창 활약을 하면서 인생 황금기를 맞이해야 할 그 시기에 그는 광야에서 허무하게 지내야 했던 것입니다.

이제 세월은 흐릅니다. 얼마나 흘렀냐 하면 또다시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그의 나이 여든입니다.

여기까지의 인생을 모세의 비포와 애프터로 본다면 참으로 기구하기 짝이 없지요. 얼마나 화려하고 찬란한 비포에 비해 얼마나 초라하고 볼품없는 애프터입니까.

하지만 여러분, 모세의 인생이 여기서 끝나나요? 아니요. 아직 끝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몇 살이요? 예, 그의 나이 여든……팔십부터 이제 하나님께서 쓰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그를 부르십니다. 애굽에서 핍박 받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몇 년이요? 예, 40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34장 7절에 보면 백이십 세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그의 인생을 단순히 숫자상으로 보면 어떨까요. 계산하기 대단히 쉽습니다. 애굽에서 왕자로 생활한 기간이 40년, 애굽에서 도망쳐 나와 광야에서 생활한 기간이 40년,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었던 기간이 40년……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어떨까요. 단순비교를 위해서, 성경에 어느 정도 비중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지를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세가 어렸을 때 태어났을 때의 기록은 자신의 판단이 아니니 제쳐둔다고 하면, 그의 인생은 출애굽기 2장 11절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애굽기 2장 11절은 “모세가 장성한 후에……” (こうして日がたち、モーセが おとなになったとき、)로 시작합니다. 이 때는 애굽의 왕자로 40년을 살아갈 때였는데, 이 때의 기록은 어디까지냐 하면 15절에 끝납니다.

15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しかし、モーセはパロのところからのがれ、ミデヤンの地に住んだ。彼は井戸のかたわらにすわっていた。

찬란했던 그의 40년 인생이 고작 다섯 장도 아니고 5절로 끝나고 말아요.

그리고 광야에서의 도피생활 40년은 어떤가 하면 그 다음 구절 출애굽기 2장 16절부터 시작하겠지요? 그런데 그 기록은 22절에서 게르솜(ゲルショム)이라는 아들을 낳았다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니까 몇 구절이에요? 16절부터 22절, 7절이에요. 그러니까 광야에서의 도피생활 40년도 고작 7절에서 끝나고 맙니다. 이것만을 본다면 그의 80년 인생은 고작 12절이 다입니다. 참 허무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음 장인 출애굽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드디어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그는 하나님과의 인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의 이후 인생이 앞서 말씀 드린 신명기 34장 7절까지라고 가정해 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함께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었던 40년을 출애굽기 3장 1절에서 신명기 34장 7절이라고 한다면 이 절 수는 얼마나 될까요?

애굽에서의 40년을 성경은 5절로 기록하고, 광야 도피생활 40년을 7절로 기록한 성경, 하지만 하나님과 함께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었던 40년을 성경은 출애굽기 3장 1절부터 신명이 34장 7절까지 무려 4,267절로 기록하고 계십니다.

물론 이 구절 모두가 모세의 인생에 대한 기록은 아니지요. 여기에는 율법도 많고 기타 내용도 많습니다만, 그러나 이 기간은 분명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었던 기간이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내용이 다 모세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으로 본다면 이와 같이 비교하는 것이 전혀 허황된 것은 아니리라 생각됩니다.

인간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똑 같이 40년, 40년, 40년이지만, 성경적인 시각,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5절과 7절, 그리고 무려 4,267절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34장 29절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それから、モーセはシナイ山から降りて来た。モーセが山を降りて来 たとき、その手に二枚のあかしの石の板を持っていた。彼は、主と話したので自分の顔のはだが光を放ったのを知らなかった。

성경에서는 모세가 하나님과 말하였음으로 인해서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얼굴에 광채가 날 수 있을까요. 뭐, 누구는 얼굴에 얼마짜리 성형을 했다는 둥 얼마짜리 고액미용을 한다는 둥 그런 얘기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해서 나는 광채나 같겠습니까.


사실 모세의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인간적인 의미로 광채가 가장 날 시기를 꼽으라면 아무래도 애굽에서 왕자로 살 때 아니겠습니까. 글쎄요. 그 시대에 어떤 피부관리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단지 피부관리 뿐이겠습니까. 화려한 옷에 화려한 장식에, 거기다가 최고로 높은 지위까지 갖추었다고 한다면, 아무리 못생긴 사람이라 한다 하더라도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처럼 보이기 마련이겠지요. 그것도 한창 젊을 나이 때 광채가 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에서는 젊은 시절 좋은 시절 다 가고, 이제 나이 80도 넘어서, 이제 인생의 내리막길에 접어든 노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여호와와 말하였기 때문에, 여호와와 동행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을 한 번 되돌아보시면 어떻습니까. 이런 저런 일들이 참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믿음 바깥에서의 일이라면, 그것은 기나긴 우리 인생 중에서 기껏해야 5절과 7절 정도에 들어가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세 전체의 인생을 통틀어서 5절과 7절을 빼면 몇 구절이었죠? 예, 4,267절입니다. 모세 인생에 있어서 5절과 7절은 그야말로 비포였습니다. 제아무리 왕자로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5절만큼의 분량에 지나지 않는 값어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인생에서 애프터는 바로 4,267절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모세의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인생, 하나님과 말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이야말로 진정한 인생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십니까? 오늘 아침에 세수를 할 때 광채가 나셨습니까. 안 났어요?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인생은 어쩌면 5절과 7절까지의 인생이었는지 모릅니다. 걱정 마십시오. 아직 끝이 아닙니다. 이제 어제까지 5절과 7절까지의 인생이었다면, 이제 오늘부터 4,267절의 인생,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생,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인생을 시작할 때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기도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도>라고 하면 왠지 부담스럽습니다. 기도가 중요해. 기도를 많이 해. 이런 말은 특히 믿음이 좋은 분들한테 있어서는 큰 부담으로 느껴집니다.

그 이유가 뭐예요? 여러분, 기도를 열심히 하려면 어떻게 해요? 예, 우리 한국 사람들 금방 떠올리는 것이 금식입니다. 그리고 기도원에 가야지요. 그러면 금식을 안 하면 기도가 아니에요? 기도원에 올라가지 않으면 기도가 아닌가요?

물론 기도원에서 기도 드리는 것도 귀한 기도 시간이고, 성전에서 기도를 드리는 기도도 귀한 기도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기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담을 느끼는 것이지요. 기도라고 하는 것이 항상 성전이나 기도원에서 두 손 들고 주여 주여, 하는 것만 기도인가요?

가끔 보면 누구는 하루에 몇 시간 기도한다, 누구는 일 년에 며칠을 금식 한다, 이런 말을 가끔 듣습니다만, 이건 자칫 잘못하면 교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어떻게 기도하라고 되어 있습니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
“쉬지 말고 기도하라”

絶えず祈りなさい。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루에 몇 시간 기도한다? 일년에 며칠을 금식기도 한다? 그것만이 기도라면 성경말씀에 비해 턱도 없이 부족하다는 것이 되고 맙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주님을 가까이 하는 것, 주님을 의지하는 것, 앉았을 때나 누웠을 때나 걸어갈 때나 주님을 묵상하고 주님께 말씀을 드리는 것, 그것이 얼마나 귀한 기도인지 모릅니다.

이제 5절까지의 인생, 7절까지의 인생은 접읍시다. 아무리 화려한 과거라고 해도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았던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실망하지 않아도 됩니다. 낙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직 끝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오늘부터 5절짜리, 7절짜리 인생을 접고 이제 4,267절짜리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십시다.

항상 주님을 가까이 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묵상하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광채가 나는 삶,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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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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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회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2018년 7월 2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4장 15절~16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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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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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前に進まなければなりません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힘 드십니까.

물론 요즘은 날도 덥고 해서 더 고되게 느껴지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렇지 않더라도 이렇게 살아가다 보면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 쳐요. 하지만 우리처럼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의 삶은 믿지 않은 사람들보다 조금은 더 나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렇게 가만히 살펴보면 꼭 그런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오늘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우리 삶 속에서 가장 많이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돈이나 재산이 부족해서 그럴까요? 그렇다면 단순히 돈이나 재산이 많으면 내 고민도 좀 줄어들까요? 물론 그럴 것도 같긴 하겠습니다만, 막상 세상을 보면 돈이 많아도 고민이 없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단적으로 요즘 한국 뉴스를 보면 대표적인 한국 항공사의 경영인들이 모두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렇다고 돈이 없겠어요? 그 사람들의 재산을 본다면, 보통 서민들의 몇 십 배, 몇 백 배는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돈이 많고 유능한 부하들이 많다고 해도 그렇게 고민이 많고 힘들어 한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서의 힘든 일들을 단순히 돈이나 재산에만 원인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이는 아마도 세상 일들이 내 생각대로, 내 계획대로 안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음 달에 저희 집 사람이 한국에 잠시 들어갈 일이 있어서 비행기표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래도 좀 한 푼이라도 저렴한 표를 구매하기 위해서 몇 날을 인터넷을 통해 검색도 해보고 하다가 결제를 했습니다.

아니,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결제를 하고 불과 몇 시간 뒤에 보니까 똑 같은 날짜에 똑 같은 시간, 똑 같은 비행기표가 무려 6만원이나 싸게 나와 있는 거예요.

처음부터 그냥 별 생각 없이 딱 보고 샀다면 그렇게 속이 상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이렇게 살펴보고 저렇게 알아본 다음에 결정을 했는데, 불과 몇 시간 뒤에 그렇게 되니까 정말 속이 얼마나 상했는지 몰랐습니다. 아니, 그렇게 빨리 가격이 떨어질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참 이런 것 하나 계획대로 안 되니까 마음이 좋지 않더라구요.

돈 문제만이 아니죠. 예를 들어 자식들을 키우는 분들 말씀을 들어보면 다들 하시는 이야기가 비슷해요. 자기 생각대로 안 돼서 답답하다는 거예요. 내가 얘한테 들이는 과외비 학원비가 얼만데, 그렇다면 아무리 못 나와도 대충 이 정도는 점수가 나와서 이 정도 학교를 가줘야 할 텐데, 성적표를 받아오는 것을 보면 그렇지 못해서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날씨도 그렇잖아요. 한동안 어느 정도 더웠다가도 좀 시원해져야 사람이 살만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한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고 얼마나 날이 더우면 사람들이 막 실려갑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 삶에 있어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좀 내 생각대로 내 예상대로 문제가 해결된다면 그나마 좀 견딜 만도 하겠는데, 내 예상도 예측도 계획도 모두 빗나가고 마니까 이는 더욱 힘들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나왔습니다. 이는 단순히 모세의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15장 13절~14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そこで、アブラムに仰せがあった。「あなたはこの事をよく知っていなさい。あなたの子孫は、自分たちのものでない国で寄留者となり、彼らは奴隷とされ、四百年の間、苦しめられよう。
しかし、彼らの仕えるその国民を、わたしがさばき、その後、彼らは多くの財産を持って、そこから出て来るようになる。

그리고 이 말씀은 모세의 때에 성취됩니다.

출애굽기 12장 35절~40절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그들이 애굽으로부터 가지고 나온 발교되지 못한 반죽으로 무교병을 구웠으니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쫓겨나므로 지체할 수 없었음이며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하였음이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イスラエル人はモーセのことばどおりに行い、エジプトから銀の飾り、金の飾り、それに着物を求めた。
主はエジプトがこの民に好意を持つようにされたので、エジプトは彼らの願いを聞き入れた。こうして、彼らはエジプトからはぎ取った。
イスラエル人はラメセスから、スコテに向かって旅立った。幼子を除いて、徒歩の壮年の男子は約六十万人。
さらに、多くの入り混じって来た外国人と、羊や牛などの非常に多くの家畜も、彼らとともに上った。
彼らはエジプトから携えて来た練り粉を焼いて、パン種の入れてないパン菓子を作った。それには、パン種が入っていなかった。というのは、彼らは、エジプトを追い出され、ぐずぐずしてはおられず、また食料の準備もできなかったからである。
イスラエル人がエジプトに滞在していた期間は四百三十年であった。

그냥 나온다는 것이 아닙니다. 큰 재물(多くの財産)을 이끌고 나오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정말로 심히 많은 재물과 가축들을 가지고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사백삼십 년만에 나왔다고 해서 성경의 앞뒤가 안 맞는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이는 성경을 오해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13절에서 말씀하신 400년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방 민족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는 기간이 400년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고, 출애굽기 12장 40절에 있는 430년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총 기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요셉이 살아서 애굽 총리로 있을 때에는 아무도 야곱이나 그들 가족들을 건드릴 수가 없었지요. 건드릴 수 없을 정도가 아니라 귀빈대우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부터 괴롭힘을 당하게 되냐 하면 요셉이 죽고 난 다음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왕이 된 다음부터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와 같은 성경 말씀을 바탕으로 해서 계산을 해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괴롭힘을 당한 시기를 아무리 길게 잡아보아도 400년은커녕 360년도 안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학대 당하는 기간을 감해주셨으면 감해주셨지 본래 예언보다 늘리신 것은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원대한 계획 하에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탈출했습니다. 그것도 몰래 살금살금 나온 것이 아니에요. 성경에는 60만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이는 성인 남성만을 세었을 때의 숫자이고, 남녀노소 다 합치면 대략 200만명, 한국으로 본다면 충청남도가 211만명 정도라고 하니까 충남 정도의 인구, 일본으로 본다면 바로 이 군마현 정도 되는 규모의 인구가 당당하게 많은 재물을 가지고 나왔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광경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예언과 계획으로 그 많은 무리들이 애굽을 탈출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그토록 지긋지긋했던 종살이에서 벗어나서 자유인으로서, 새로운 삶, 축복된 삶을 꿈꾸고 나왔을 것입니다. 그들은 꿈을 꾸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서는 희망이 넘쳐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넘쳐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얼마 가자 앞에는 홍해에 가로막히고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자기들을 죽이려고 좇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이제 꿈이고 희망이고, 기쁨이고 감사고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모세를 원망합니다.

출애굽기 14장 10절~12절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パロは近づいていた。それで、イスラエル人が目を上げて見ると、なんと、エジプト人が彼らのあとに迫っているではないか。イスラエル人は非常に恐れて、主に向かって叫んだ。
そしてモーセに言った。「エジプトには墓がないので、あなたは私たちを連れて来て、この荒野で、死なせるのですか。私たちをエジプトから連れ出したりして、いったい何ということを私たちにしてくれたのです。
私たちがエジプトであなたに言ったことは、こう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か。『私たちのことはかまわないで、私たちをエジプトに仕えさせてください。』事実、エジプトに仕えるほうがこの荒野で死ぬよりも私たちには良かったのです。」

도대체 왜 그들은 이렇게 되었을까요. 이는 바로 단순히 어려움이 닥쳐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대로, 자신들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대단히 흥미로운 점은 바로 10절~11절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イスラエル人は非常に恐れて、主に向かって叫んだ。そしてモーセに言った。

즉, 이 구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무엇을요? 예, 추격해오는 애굽 군대를 보고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애굽 군대를 보고 두려워한 그들이 한 행동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들의 영적 지도자인 모세를 원망한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애굽 군대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어른들이 아니라 주일학교 몇 번 다녀본 애들도 다 아는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들은 애굽 군대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했어야 합니다.
그들은 애굽 군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애굽 군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애굽 군대를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애굽 군대가 무엇입니까. 바로 현실입니다. 현실 속에서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위기입니다. 애굽을 탈출할 때 기쁨으로 충만했던 그들은 나중에 애굽 정예부대가 죽이려고 좇아오리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습니다. 만사형통, 아무런 문제 없이 편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벌어졌을 때, 그들은 눈앞에 벌어지는 위기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눈앞에 자기들을 좇아오는 애굽 군대를 바라보면 어떻게 됩니까. 내 눈에는 이제 시퍼런 칼과 창과 화살을 들고 좇아오는 애굽 군대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는 그 순간 게임은 끝난 것입니다.

반면에 모세는 어땠을까요.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도 마찬가지죠.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나왔을 때 애굽 군대가 추격할 것이다”라고 하나님이 말씀해주셨어요? 아니요. 그런 말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적지 않게 모세 자신도 당황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절체절명의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모세는 애굽 군대를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바라보았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현실을 바라보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생깁니다. 절망이 생깁니다. 그리고 원망과 절망 앞에서 우리의 미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희망이 생깁니다. 기쁨이 생깁니다. 힘이 생깁니다. 믿음이 생깁니다. 감사가 생기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출애굽기 14장 13절~14절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それでモーセは民に言った。「恐れてはいけない。しっかり立って、きょう、あなたがたのために行われる主の救いを見なさい。あなたがたは、きょう見るエジプト人をもはや永久に見ることはできない。
主があなたがたのために戦われる。あなたがたは黙っ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

여기서 가만히 있으라고 한 모세의 말은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싸우실 것이니 흥분하지 말고 진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지 말고 입 다물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5절~16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主はモーセに仰せられた。「なぜあなたはわたしに向かって叫ぶのか。イスラエル人に前進するように言え。
あなたは、あなたの杖を上げ、あなたの手を海の上に差し伸ばし、海を分けて、イスラエル人が海の真ん中のかわいた地を進み行くようにせよ。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세요? 빨리 앞으로 나아가게 해! 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바쁘게 움직이십니다.

출애굽기 14장 19절~21절에 보면
“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의 뒤로 옮겨 가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ついでイスラエルの陣営の前を進んでいた神の使いは、移って、彼らのあとを進んだ。それで、雲の柱は彼らの前から移って、彼らのうしろに立ち、
エジプトの陣営とイスラエルの陣営との間に入った。それは真っ暗な雲であったので、夜を迷い込ませ、一晩中、一方が他方に近づくことはなかった。
そのとき、モーセが手を海の上に差し伸ばすと、主は一晩中強い東風で海を退かせ、海を陸地とされた。それで水は分かれた。

본래 이스라엘 진영을 앞에서 인도하던 구름기둥이 뒤로 물러가서 이스라엘 진영과 애굽 군대 사이를 가로막습니다. 그렇게 해 놓으니까 애굽 군대가 이스라엘 진영에 접근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해놓고 하나님께서는 이제 밤새도록 큰 동풍을 불게 합니다. 영화 십계에 보면 순식간에 바다가 갈라진 것처럼 나오는데, 그건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밤새도록 바람이 불게 한 결과 바다가 갈라졌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좀 이상하지 않나요? 아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자까지 동원하셔서 애굽 군대와 이스라엘 진영을 갈라놓았다면, 아예 이 참에 애굽 군대를 물리치셨더라면 더 편하지 않았겠어요? 하나님께서는 애굽 군대를 멸하지 않으시고, 말하자면 밤새도록 대기시켜놓으셨다는 말씀인데, 왜 멸하지 않으시고 굳이 밤새도록 머물게 해놓으셨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 이유는 바로 다음에 있습니다.

자, 이제 밤새도록 동풍을 불게 하셔서 홍해 바다를 갈라놓으셨습니다. 22절에 보면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水は彼らのために右と左で壁となった。

라고 기록합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건 강이 아니에요. 바다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바람이 계속 불어오면서 바닷물을 막아서고 있습니다. 앞을 보니까 이 길이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끝이 보이지도 않아요. 물이 좌우의 벽처럼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벽이라고는 하나 바람이 막고 있는 바닷물이기 때문에 출렁거렸을 지도 모릅니다. 까딱 잘못하면 지금이라도 무너져서 다시 흐를 것 같아요.

자, 모세가 말합니다. 어서 빨리 여기를 건너라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같으면 어떠셨을 것 같습니까. 첫발이 내디뎌질까요. 용감하고 믿음 좋은 청년이라면 모를까, 거기에는 나이든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계셨을 것이고요, 여성들, 아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바람은 정신 없이 불어옵니다. 그 와중에 그 불안한 길,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길을 가기 위해 첫 발자국을 내딛는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무서워서 못 가겠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속출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겠지요.

바로 이 때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예비해두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애굽 군대, 그것도 정예부대를 예비해두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라!”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하지만 아무리 겁이 많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뒤에 보면 애굽 군대가 보입니다. 그대로 주저앉아 있으면 100% 죽습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하는 수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애굽군대를 예비해두신 이유가 이스라엘 민족을 미워해서였을까요?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애굽군대는 그러면 저주인가요? 아니요. 반대입니다. 애굽군대를 예비해두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너무나도 사랑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애굽군대가 없었다면 홍해를 건너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홍해를 건너지 못했다면 종살이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애굽군대가 있었기 때문에 홍해를 건너올 수가 있었던 것이에요. 말하자면 애굽군대야말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크나큰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하나님께서 홍해를 갈라 가시면서까지 열어주신 믿음의 길, 생명의 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길이 그 뿐인가요.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까지도 열어주셨던 것입니다.

현실 속에서 어려움이 답답하십니까. 괴로우십니까. 두려우십니까. 아니요. 오히려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일 수가 있습니다. 애굽 군대와도 같은 현실 속에서의 어려움 덕분에 우리는 믿음의 길, 축복의 길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더러 머물러 있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주저앉아 있으라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가나안 땅 정복을 눈앞에 두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 1장 5절~6절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あなたの一生の間、だれひとりとしてあなたの前に立ちはだかる者はいない。わたしは、モーセとともにいたように、あなたとともにいよう。わたしはあなたを見放さず、あなたを見捨てない。
強くあれ。雄々しくあれ。わたしが彼らに与えるとその先祖たちに誓った地を、あなたは、この民に継がせなければならないからだ。

그리고 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1장 10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恐れるな。わたしはあなたとともにいる。たじろぐな。わたしがあなたの神だから。わたしはあなたを強め、あなたを助け、わたしの義の右の手で、あなたを守る。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놀랄 필요도 없습니다. 내 예상대로, 내 계획대로 안 되다고 낙심하거나 힘들어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에게는 그 어떤 고통과 고난도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라면 고통도 고난도 역경도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는 모든 것이 축복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범사에 축복과 은혜로 채워주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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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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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회 믿음의 졸음운전
2018년 7월 1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11장 1절~4절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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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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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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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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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믿음의 졸음운전” 信仰の居眠り運転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운전을 하면서 무서운 것 중의 하나가 이 졸음운전입니다. 혹시 여러분께서는 졸음운전이라는 것을 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한 마디로 졸음운전이라고 해도 어디서부터가 졸음운전인지에 대해서는 견해에 따라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제가 말씀 드리는 졸음운전은 <아~졸립다~>라고 하면서 졸음을 억지로 참으면서 운전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깜빡>하고 순간적으로나마 수면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혹시 졸음운전을 해보신 적이 있으시거나, 아니면 까딱 잘못했다가 졸음운전을 할 뻔한 적이 있으셨다면, 정말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하실 수가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주님께 크나큰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졸음운전……저도 솔직히 말씀 드려서 해 본적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아니고 예전에 미국에서 살고 있을 때에 해본 적이 있습니다. 아, 그거 정말 아찔합니다. 미국에서 한 고속도로를 밤에 달리고 있었는데, 정말 깜빡 졸고 보니까 차선이 두 개나 이동해 있었습니다.

정말 이건 진지하게 말씀 드립니다만, 피곤할 때는 무조건 휴게소에서 쉬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큰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눈앞에 좋은 차가 있습니다. 왠지 모르게 요즘은 말씀을 전할 때마다 자동차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만, 아무튼, 좋은 차가 한 대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고 싶겠습니까. 가족들을 데리고 좋은 드라이브 코스를 쌩쌩 달리는 것, 그러면 얼마나 기분이 좋겠습니까. 설마 좋은 차가 생겼으니 도로 정체가 심한 곳에 한 번 가보고 싶다는 분은 안 계시겠지요?

뭐, 꼭 좋은 차가 아니더라도 막히는 곳보다는 시원하게 뚫린 곳을 달리고 싶어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앞서 말씀 드린 졸음운전, 어디서 하게 되나요? 꽉 막힌 곳에서 졸음운전을 해요? 아니요. 가속페달 밟았다가, 브레이크 밟았다가 하고 정신이 없는데 언제 졸음운전을 할 새가 있습니까.

아니면 문제가 많은 자동차를 몰면 졸음운전을 하나요? 얼마 전에 동경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만, 목적지까지 거의 다 가서 기어에 좀 문제가 생겼어요. 차가 잘 안 나가는 거예요. 그렇게 되니까 어땠겠어요. 그 때까지 피곤해서 올락말락 하던 잠이 순식간에 확 달아나버립니다.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졸음운전은 차에 문제가 많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자동차 상태가 대단히 좋을 때 하기 쉽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한국이나 일본 같은 경우를 보면 고속도로를 달리더라도 적절하게 커브가 있는데, 이는 의도적으로 졸음운전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 같은 경우, 특히 서부 쪽에 외곽에 나 있는 고속도로를 보면 정말 하염없이 일직선인 곳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주말이나 그렇지 않으면 차도 많지 않아요. 그러면 자동차들도 쌩쌩 달립니다.

그것도 그냥 달리는 것이 아니에요. 한국이나 일본에도 아마 그런 기능이 있는 차들이 있을 겁니다만, 가속페달을 계속 밟고 있으면 다리가 피곤하니까, 일정 정도 가속해서 락을 걸어놓습니다. 그러면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어도 브레이크를 밟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 속도로 달립니다. 멋지죠? 그렇게 해놓으면 참 다리가 편안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해놓고 깜빡 잠이 들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보통 졸음운전이면 잠이 든 순간 페달을 밟는 힘도 빠집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 감속도 되겠지요. 하지만 속도를 예를 들어서 100킬로면 100킬로로 딱 고정시켜놓은 상태에서 발을 떼고 있었는데, 깜빡 잠이 들어서 핸들이 다른 곳으로 꺾였어요. 하지만 속도가 고정이 되어 있으니까 그 속도 그대로 도로에서 벗어납니다. 그런 상태에서 달리다가 뭔가에 부딪히거나, 뒤집히거나 하면 이건 그대로 100프로 사망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경우에 졸음운전을 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서 초보운전 때 졸음운전을 할 수 있을까요? 저도 기억납니다만, 맨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아니 어떻게 운전을 하는데 졸음이 올 수가 있을까 했어요. 그렇잖아요? 가속페달도 밟아야죠, 브레이크도 신경 써야죠. 앞에도 봐야죠. 사이드 미러, 백 미러를 살펴야죠……. 고속도로를 탔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봐야 하는 표지판이 왜 그렇게 많은지요. 출구가 가까워지면 차선도 바꿔야죠, 속도도 봐야지요, 그리고 또 경찰차가 어디서 오지나 않을까 하는 것도 봐야지요……. 이건 뭐 졸 새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어느 정도 운전에 익숙해지고 나면, 어떻습니까. 예, 언제 그랬냐는 듯이 피곤하면 나도 모르게 스르르 눈이 감기곤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참 이상합니다. 우리가 졸음운전을 언제 하게 되냐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볼 때, 면, 운전하기에 가장 나쁜 조건? 아니요, 운전하기에 가장 좋은 조건에 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잖아요? 길이 막힌 것도 아닙니다. 아주 뻥뻥 뚫렸어요. 그리고 귀찮게 오른쪽 왼쪽 커브도 없어요. 일직선 도로입니다. 자동차 컨디션도 대단히 좋아요. 쌩쌩 잘 나갑니다. 가속페달도 고정시킬 수 있는 기능도 있어요. 그리고 운전경력도 이제 초보가 아니에요.

바로 이렇게 완벽한 상황일 때, 역설적으로 우리는 졸음운전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무엘하 11장 1절부터 봅니다.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年が改まり、王たちが出陣するころ、ダビデは、ヨアブと自分の家来たちとイスラエルの全軍とを戦いに出した。彼らはアモン人を滅 ぼし、ラバを包囲した。しかしダビデはエルサレムにとどまっていた。

당시 다윗의 나이를 대략 50 정도라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젊은 날에는 오랜 세월 동안 사울에게 쫓겨가며 도망 다녔던 고달픈 시기를 보냈던 다윗, 그러나 그는 나이 서른에 왕이 되어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다고 하니, 나이 50이라고 하면 이제 왕위에 오른 지도 20년이나 되었습니다.

그의 권력은 확고부동했으며 누구도 그의 자리를 넘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휘하에는 유능한 장군들이 있었지요. 다윗과 그들은 그 동안 주변국들을 공략해서 이제는 이스라엘에 대해 직접적인 위협이 될만한 나라들은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당시 다윗은 국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대단히 안정적인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암몬군과의 전쟁을 보더라도 굳이 다윗이 출전하지 않고도 유능한 부하만으로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었습니다. 완전히 이긴 싸움이었다는 것이지요. 아마도 그렇게 생각을 했기 때문에 다윗은 전쟁에 나가지 않고 그대로 예루살렘에 머물렀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다음에 2절을 봅니다.

사무엘하 11장 2절입니다.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ある夕暮れ時、ダビデは床から起き上がり、王宮の屋上を歩いていると、ひとりの女が、からだを洗っているのが屋上から見えた。その女は非常に美しかった。

이 기록에 의하면 다윗은 저녁 때에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을 거닐었다고 합니다. 지금 시기가 어떤 상황입니까. 상대가 아무리 약소국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지금 전쟁은 전쟁입니다. 그리고 왕이라고 한다면 군대의 최고통수권자입니다. 전쟁 상황을 보고 받고, 이를 분석하고, 명령을 내리고 지휘를 해야 할 왕이, 밤새도록 무엇을 했는지 모르지만, 낮에는 계속 자다가 저녁 때 일어나서 왕궁을 산책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모습을 그의 어머니가 보았더라면 어땠을까요.

야 이 놈아. 지금 니 부하들은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는데, 전쟁 작전을 세우지는 않고 실컷 퍼 자다가 이제 부시시 일어나서 어슬렁 어슬렁 걸어다녀?

뭐, 이렇게 혼을 내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혼이 날 일은 사실 그 뒤에 더 있죠?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이렇게 바깥쪽을 보니까 어떤 여인이 목욕을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당시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집 앞마당에서 목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위쪽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그 안이 보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더구나 왕궁이라고 하니 다른 일반 주택보다는 높았으리라 하는 점은 쉽게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바깥 쪽을 봤는데 어떤 여인이 목욕을 하는 모습을 보았어요. 그렇다면 그런 모습이 보이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아이쿠. 이런……뭐 이러면서 고개를 돌려야 하는 것이 정상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딱한 우리의 다윗은 어땠습니까. 그 목욕하는 여인을 가만히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참 아름답네……뭐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범죄 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다음 구절을 봅니다.

사무엘하 11장 3절입니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ダビデは人をやって、その女について調べたところ、「あれはヘテ人ウリヤの妻で、エリアムの娘バテ・シェバではありませんか」との報告を受けた。

이 말을 보면 참 흥미롭습니다. 다른 번역문을 보더라도 다 이런 식이에요. 그냥 “아, 저 여인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입니다”가 아니라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라는 것입니다.

먼저 이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는 어떤 사람인가를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그는 헷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는 본래 이방인이라고 하는 것을 뜻합니다만 아마도 개종을 해서 이스라엘 군대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우리아는 군대에서 일반 사병이 아니었습니다. 사무엘하 23장 39절에 의하면 헷 사람 우리아는 삼십 칠인 용사 중 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군대 수가 80만에서 110만 정도라고 하는데, 이게 어느 정도인지 잘 감이 안 오시죠? 참고로 2017년 한국 군인의 수는 61만 8천명 정도라고 합니다. 그 중에서 별을 단 장군들의 수는 400여명 정도가 된다고 하는데, 62만명 정도 되는 한국 군에서 400여명 정도 안에 들어가도 대단히 높은 지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당시 이스라엘 군은 이보다도 더 많은 80만에서 110만의 병력 중에서 서열 37위 안에 들었다고 하면, 이는 대단히 높은 지위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점은 무엇인가 하면, 그 정도의 고위급 장군인 우리아였다고 한다면 당연히 다윗도 우리아를 알고 있었을 것이고, 더 나아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도 알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단순히 제 추측이 아닙니다.

다윗이 사람을 보내서 저기 목욕을 하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보라고 했더니, 그 사람이 뭐라고 했다구요? 예, “우리아의 아내입니다”가 아니라 “우리아의 아내가 아니니이까”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아니, 지금 몰라서 물으세요? 저 여자가 우리아 장군의 아내 밧세바라고 하는 건 왕도 알고 계시잖아요” 마치 이런 식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는 또 다른 생각의 교차가 이루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리 지금 대통령이나 총리의 권력이 막강하다 하더라도 옛날 왕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물론 이 점은 그 기준에 따라서 달라지지 않을까 합니다만, 생각해보면 이 말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은 아무리 대통령이나 총리라고 하더라도 돈이나 여성에 대한 문제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만, 옛날의 권력자라고 하면 얻을 수 있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돈과 여자……라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무엘하 5장 13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옵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올라온 후에 예루살렘에서 처첩들을 더 두었으므로 아들과 딸들이 또 다윗에게서 나니”

ダビデはヘブロンから来て後、エルサレムで、さらにそばめたちと妻たちをめとった。ダビデにはさらに、息子、娘たちが生まれた。


그가 몇 명의 처첩을 두었는지 명확하게 나오지는 않습니다만, 왕이었던 그가 단순히 처첩을 많이 두었다는 것만을 가지고 죄라고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의 아들 솔로몬의 경우에는 더 구체적인 숫자가 나오는데 열왕기상 11장 3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됩니다.

열왕기상 11장 3절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

彼には七百人の王妃としての妻と、三百人のそばめがあった。その妻たちが彼の心を転じた。

그러니까 후궁과 첩을 합하면 천 명이라는 숫자가 나옵니다만, 여기서도 솔로몬의 죄악을 단순히 후궁이나 첩을 많이 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방 여인들이 가지고 있던 우상들을 솔로몬한테도 섬기게 했다는 것을 용납했다고 하는 점을 하나님께서는 문제시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밧세바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죠.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였기 때문입니다.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십계명 중에서 마지막 계명이 출애굽기 20장 17절입니다.

출애굽기 20장 17절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あなたの隣人の家を欲しがってはならない。すなわち隣人の妻、あるいは、その男奴隷、女奴隷、牛、ろば、すべてあなたの隣人 のものを、欲しがってはならない。」

제왕이 아무리 많은 처첩을 두든 후궁을 두든 문제게 되지는 않았으나, 다른 사람의 아내를 탐한다는 것, 이것은 아무리 제왕이라 한다 하더라도 큰 죄였던 것이지요.


다윗의 그 부하는, 왕이 그 여인의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알아보라는 말을 했을 때, 이미 왕이 그 여인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겠지요.

왕은 암암리에 그 부하에게 “저 여인을 나한테 데려와”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하지만 부하는 왕에게 말합니다.

“왕이시여. 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이러시면 안 됩니다. 왕도 알다시피 저 여인은 우리아 장군의 아내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한 번 유혹에 사로잡힌 다윗은 막무가내입니다. 결국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자신의 최측근인 우리아 장군의 아내를 빼앗고는, 그것도 모자라서 충신 우리아 장군을 전쟁터에서 일부러 죽도록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이 죄가 얼마나 큽니까.

결국 이 결과 다윗과 밧세바 사이의 첫 아이는 죽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의 불행은 이어집니다. 다윗의 아들 암논이 배 다른 누이동생 다말을 겁탈합니다. 이에 분을 품은 오라버니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지요. 그리고 나중에는 그 압살롬이 다윗을 향해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는 불행이 이어져서, 다윗은 도망을 치게 됩니다. 그리고 끝내는 압살롬마저도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이 얼마나 피비린내 나는 역사입니까.

잠언 7장 22절~23절에 보면 유혹에 끌려가는 사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젊은이가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도다 필경은 화살이 그 간을 뚫게 되리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의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같으니라”

彼はほふり場に引かれる牛のように、愚か者を懲らしめるための足かせのように、ただちに女につき従い、
ついには、矢が肝を射通し、鳥がわなに飛び込むように、自分のいのちがかかっているのを知らない。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에 맞는 자라고까지 하신 다윗도 이와 같은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믿음의 졸음운전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권력기반도 확고하고 돈과 명예도 넘쳐납니다. 누구도 자신을 위협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탄탄대로, 커브도 없는 일직선 도로에서 졸음운전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동차에 타고 있는데, 운전하는 사람이 존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흔들어 깨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길이 안 막히고 뻥뻥 뚫리기만 한다고 조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긴장된 상태라면 졸음이 안 오도록 할 수가 있습니다. 다윗도 보세요. 나라가 평화롭고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가 없으면 누구나 다 조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긴장이 풀린 상태에서 해이해진다면 이는 아무리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라 하더라도 언제든지 졸음운전에 빠질 수가 있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고를 일으키기를 원하고 계신가요? 아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운전하고 있는데 깜빡깜빡 졸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실까요? 예, 흔들어 깨우십니다. 얘야, 어서 일어나! 빨리 일어나서 앞을 봐!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나! 이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때로는 우리에게 시련으로 닥쳐올 때도 있고, 또한 때로는 징계로 느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6절~8절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主はその愛する者を懲らしめ、受け入れるすべての子に、むちを加えられるからである。」
訓練と思って耐え忍びなさい。神はあなたがたを子として扱っておられるのです。父が懲らしめることをしない子がいるでしょうか。
もしあなたがたが、だれでも受ける懲らしめを受けていないとすれば、私生子であって、ほんとうの子ではないのです。

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운전 하다가 졸고 있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나를 흔드십니다. 깨우세요. 그러면 주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아차! 믿음 안에서 긴장이 풀려서 잘못하면 주님을 잊고 큰 사고를 일으킬 뻔했어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여기겠지요.

하지만 무조건 주님께서 주시는 시련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아이 참, 하나님도. 아니, 왜 기분 좋게 자고 있는데 신경질 나게 깨우고 그래……. 이러면 어떻게 됩니까. 예. 큰 사고를 일으키게 될지도 모르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골로새서 4장 2절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目をさまして、感謝をもって、たゆみなく祈りなさい。

우리는 믿음 안에서 항상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시련이 다가오고 있습니까. 삶이 힘드십니까. 어쩌면 지금 운전하면서 잠이 들려고 하는 나를 우리 주님께서 깨우시려고 하는 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깨어 있어야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깨어 있어야 앞을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하며 따라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깨어 있어야 마귀 사탄들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졸음운전에서 깨어나, 항상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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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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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5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2018년 7월 8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5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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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天と地を創造された神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엊그제 뉴스를 통해서 알고 계시는 분도 많으시겠습니다만, 지난 7월 6일, 옴 진리교 대표와 간부들을 비롯한 7명의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적게는 4개에서 많게는 열 개가 넘는 죄목이 있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아무래도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1995년 3월 20일 아침 출근시간에 동경에서 발생한 사건인데, 그들에 의해 자행된 이 사건만으로도 지하철 승무원이나 승객 중 사망자는 13명이고, 부상자는 무려 6,300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무슨 중동이나 분쟁지역도 아닌 대도시 동경 한복판에서 이처럼 무차별테러가 자행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일본만이 아니라 전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저지른 사건은 이외에도, 1989년 11월 4일에는 자신들의 활동에 비판적이었던 변호사에 대해서 그 변호사 당사자만이 아니라, 당시 1살이었던 장남, 그리고 아이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고 하는 부인마저도 무참히 살해한 사건, 동경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을 일으키기 바로 전해인 1994년 6월 27일에는 나가노현 마츠모토 시 주택가에서 사린가스를 이용한 범죄를 일으켜서 8명이 사망하고 600명 이상이 부상을 입는 사건을 벌이는 등, 이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들을 저질러 왔습니다.

결국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으로 총 13명이 사형선고를 받게 됩니다만,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들의 학력입니다. 한국에 보더라도 이런 잔인무도한 사건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면 사회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왔다거나 하겠으나 이 사람들을 보면 참 대단합니다.

이들 대부분이 대하 졸업자이고, 그 중에는 의과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2명, 국립대 박사과정, 와세다대 물리학과 수석졸업, 동경대 물리학과 석사……뭐 이런 식으로 대단한 학력들을 자랑합니다.

이는 단지 공부를 잘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이 자라오는 과정이, 이른바 흉악범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무슨 사회적이나 가정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꽤 평탄한 삶, 아니,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는 좋은 환경에서 자라왔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자신들이 배울 만큼 배우고 가질 만큼 가진 사람들이 도대체 왜 이런 어처구니 없는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을까 하는 생각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는 이번 사건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범죄라고 하는 것이 무슨 이런 것만이 범죄인가요. 지금 한국에 보면 정권이 바뀌면서 그 전에 자행되었던 사건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 보면 어떻습니까. 그야말로 참 배울 만큼 배우고 가질 만큼 가진 사람들입니다.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배경은 모두 가진 분들이죠. 그런데 지금은 어떠냐 하면, 전직대통령들부터 해서 모두 수갑 차고 구치소 교도소에 있습니다.

신문이나 텔레비전 보도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아니, 그게 나쁜 짓인 줄 모르고 그랬을까. 안 들킬 줄 알았을까. 못 배운 사람이 그랬다면 생각이 부족할 수도 있겠다고 하겠는데,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그런 생각도 못했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를 생각하기 위해, 먼저 오늘 본문부터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1장 1절~5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참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제가 한국 소설은 많이 읽지 못했습니다만, 일본의 유명한 책들을 보면 벌써 첫 문구부터가 다릅니다.

196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카와바탸 야스나리의 설국은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国境の長いトンネルを抜けると雪国であつた……나츠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후쿠자와 유키지의 <학문의 권유>를 보면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아니하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아니하니……”라는 첫 구절은 대단히 유명합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첫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사실 이건 제 상상입니다만, 하나님께서도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성경이 완성되고, 이로 말미암아 복음이 전파될 것인데, 그렇다면 바로 첫 구절을 어떻게 하실까 몇 번이고 생각하지 않으셨을까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첫 구절을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입니다.

참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멋진 말씀입니다.
언제? 이 세상 가장 처음에
누가? 하나님께서
무엇을?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성경의 첫 구절임과 동시에 첫 관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이 믿어진다면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을 다 믿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을 믿지 못한다면, 이는 성경에 등장하는 어떤 말씀, 홍해가 갈라지고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것을 믿는다 하더라도 이는 소용없는 일인 것입니다.

일본에 신사에 가보면 <에마>라고 해서 자기의 소원을 적어놓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몇 백 원이나 몇 천원을 내서 나무 판대기를 사고는 그 뒤에 펜으로 자기 소원을 적어놓고 걸어놓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대요. 거기 보면 뭐 자기가 원하는 고등학교나 대학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세요. 시험에 합격하게 해주세요. 취직할 수 있게 해주세요, 결혼을 할 수 있게 해주세요, 돈 잘 벌게 해주세요……등등 자신들의 소원이 적혀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주님께 자신의 기도제목을 말씀드리는 것 중요합니다. 신사나 다른 우상들에게 절하는 것은 그야말로 헛것이요, 우리 주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기도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 한 번 잘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우리가 믿은 예수님이 기껏해봐야 시험에 합격시켜주는 하나님? 입학이나 취직 시켜주는 하나님? 결혼 시켜주는 하나님? 돈 좀 벌게 해주는 하나님? 그게 다인가요?

만약에 그렇다면 그냥 평소에는 교회에 안 나오고 기도도 안 하고 있다가, 기도제목이 있을 때만 교회에 나와서 헌금하고 기도하면 되는 것 아니에요? 그래서 정말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면 오~ 땡큐땡큐! 그리고 소원이 안 이루어지면 에이, 엉터리! 그걸로 끝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믿음도 아니에요. 좋은 일이 일어나면 히히 거리고 기뻐하고, 조금 안 좋은 일이 일어나면 뱉어버리는 것은 이는 주님 앞에서 올바른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첫째로 온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둘째로, 이것이 사실 더욱 중요합니다만, 그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사랑하세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권력자들이 있습니다. 대통령도 있고 총리도 있고 왕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천지를 주재하시는 것처럼 큰 능력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나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독생자를 내줄 정도로 사랑해주나요? ㅎㅎ아니요. 어림도 없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또는 자기 가족이나 친인척을 위해서 챙기는 나쁜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 자신을 위해서 그토록 사랑해주는 권력자들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떠십니까.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이랑은 비교가 안될 정도의 힘과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만군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늘과 땅과 모든 사람들을 창조하시고 이를 지금 이 순간도 다스리고 계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를 어떻게 세상 권력자들이랑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와 같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아침에나 낮에나 밤에나 항상 함께 해주시고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아니, 이렇게 죄가 많은 우리가 어떻게 해서 그런 영광을 누릴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해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그대로 있다면 이는 백 번 죽는다 하더라도 하나님 근처에 갈 수조차 없는 우리지만,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을 채찍을 모두 맞으시고, 우리가 받을 징계를 받아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할 수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항상 기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험에 합격시켜달라고 기도했는데 떨어졌어? 괜찮아. 그래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계셔.
취직 시켜달라고 기도했는데 안 됐어? 괜찮아. 그래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계셔.
돈 좀 벌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못 벌었어? 괜찮아. 그래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계셔.

마태복음 7장 11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시시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기적인 하나님도 아닙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만큼 능력이 있으시고,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이 믿음이 어디서 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는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을 보도록 합니다.

창세기 1장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우선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요? 이는 바로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동그라면 동그랗고 네모나면 네모나야 하는데, 이건 동그랗지도 않고 네모나지도 않고, 그러면 그 안에 가득 차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텅 비어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있는 것 같은데 있는 것도 아니에요. 없는 것 같은데 없는 것도 아니고, 형태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에요. 이건 어떤 사물의 “존재”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있거나 없거나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대요. 정말 참 문학적인 말씀입니다. 흑암이라는 것 자체가 벌써 어둡다는 것인데, 어느 정도 어둡냐 하면 아주 깊을 정도로 어둡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을 좀 풀어서 말씀 드리자면 보이는 것도 잡히는 것도 없는 그런 세계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창세기 1장 3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이제 하나님께서 빛을 만드셨습니다. 이 빛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 인간의 눈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합니다. 무엇을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엇이 필요하냐 하면 <빛>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눈은 두 가지 밖에 볼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 두 가지가 뭐냐 하면 첫째는 <빛 그 자체>이고, 둘째는 <빛이 반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양을 보면 너무 눈이 부시지만 이런 조명 같은 것을 보고 알아볼 수 있는 이유는 거기서 빛이 나오기 때문에, 그 나오는 빛을 보고, 아, 저기 불빛이 있구나……하고 알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빛이 반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를 들어서 어떤 물건을 보고 빨간색을 인식하는 것은, 어떤 빛이 그 물건에 닿은 후에 빨간색만이 반사되어서 우리 눈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빨간색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파란색으로 인식하는 것은 어떤 빛이 거기에 닿았을 때 파란색만 반사되면 역시 파란색으로 인식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에 아무런 빛도 반사하지 않아요. 그러면 검정색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빛, 특히 태양빛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모든 색깔이 다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이른바 <빛>의 색깔이라고 하면 어떤 색을 떠올리세요? 예, 흰색을 떠올립니다만, 예를 들어서 어떤 물건의 색깔을 형광등으로 보는 것과 태양빛으로 보는 것과는 그 선명도가 다릅니다. 어느 쪽이 선명하게 보이냐 하면 바로 태양빛으로 볼 때가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이는 단순히 태양빛이 더 밝아서가 아니라, 쉽게 말하자면 형광등에 포함된 색 종류보다 태양빛에 포함된 색깔 종류가 월등히 많기 때문에 이렇게 바깥에서 볼 때가 더욱 선명하고 자연스러운 색깔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먼저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즉, 안 보이는 세계에서 순식간에 보이는 세계가 된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무엇이 다릅니까. 그것은 바로 앞이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의 차이인 것입니다.

아무리 차가 좋아요. 좋은 차가 뭐죠? 뭐, 벤츠나 BMW, 정말 밟으면 잘 나갑니다. 속도도 빠르고 승차감도 뭐 잘 모르겠습니다만 뛰어나다고 합시다. 그러면 좋은 차죠?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문제가 뭐냐 하면 앞이 안 보입니다. 앞 유리가 시커매요. 그러면 여러분 타시겠습니까? 아니요. 절대로 그런 차는 타면 안 됩니다. 아무리 속도가 빠르면 뭘 합니까. 아무리 승차감이 좋으며 뭘 해요. 앞이 안 보이는데. 만약에 그런 차를 타고 신나게 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대형사고가 나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입니다.

지금 제가 대형사고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대형사고가 뭐예요? 아닌 말로 사고를 내서 자기만 죽으면 대형사고는 아니죠. 자기만 죽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죄 없는 사람들까지도 함께 죽게 만드는 것 이것이 대형사고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옴진리교의 간부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교도소나 구치소에 수감중인 전직 대통령이나 공직자들. 이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사회적으로 보면 엘리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벤츠나 BMW라고 할 수 있었겠지요. 말 그대로 잘 나가는 삶을 살아왔었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 신세가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까.

그것은 바로 빛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빛이 없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앞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를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힘보다는 내 힘, 하나님의 능력보다는 내 능력을 의지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힘들고 고달프십니까. 일이 잘 안 풀리십니까.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시련이 닥치고 어려운 일들이 자꾸 일어나십니까. 기도를 해도 응답이 안 오고 그러는 것 같습니까.

그럴 때면 성경을 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창세기 1장 1절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그 곳에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천지를 주재하시는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내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맞이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전인 우리는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는 존재,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빛을 비추십니다. 이제 우리가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만군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좌절하지 맙시다. 포기하지 맙시다. 낙심하지 맙시다. 우리 모두 만군의 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주님께서 인도해주시는 빛을 따라 승리의 길, 축복의 길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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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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