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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9회 좋은 친구 예수님
2019년 2월 2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3절~15절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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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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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좋은 친구 예수님” よい友イエス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도로를 달리다 보면 빨리 달리는 차를 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그런 차를 보시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좀 멋있어 보이던가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거기다가 자동차가 비싼 외국 스포츠카다 하면 정말 더 멋져 보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꼭 멋있게만 보이는 것만은 아니지요.

일반도로든 고속도로든 간에 과속으로 운전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래서 좀 너무 빨리 달리는 차를 보면, 아휴, 저러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한국이나 일본이나 모두 나비게이션을 달고 다니면 종종 과속주의 안내가 나옵니다. 저기 지금 과속단속 카메라가 있으니까 조심하라는 거예요. 이런 카메라는 무슨 잠복근무를 하기 위해서 달아놓은 것이 아니라 안전을 위해 속도를 줄이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것이기 때문에 이런 안내 방송은 불법이 아닙니다.

특히 고속도로에는 굳이 이런 장치가 없더라도, 바로 앞에 단속 카메라가 있다는 표지판이 붙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보고 속도를 줄이면 단속에 걸리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자동차에 이런 나비 시스템도 없고, 분명히 바로 앞에 단속 카메라가 있다는 표지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도 무시한 채로 그냥 달렸다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 카메라에 찰칵 찍히게 되지요.


저는 아직 사진을 찍힌 적이 없어서 어떻게 나오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에서 한 번 여기에 걸린 적이 있는 친구한테 말을 들어보니까, 자기 얼굴과 자동차 번호판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찍혀 있어서 부인을 할래야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저기 앞에 과속 단속 카메라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속도만 빨리 내서 달린다고 하면, 이는 멋지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편 14편 1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愚か者は心の中で「神はいない」と言う。彼らは腐っていて忌まわしいことを行う。善を行う者はいない。

이 세상에 하나님이 어디 있어. 그런 건 없어.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믿을 바에야, 차라리 눈에 보이는 나를 믿어라. 돈을 믿어라. 권력을 믿어라. 또는 이 세상 지식을 믿어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렇게 말하면 꽤 멋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私たちは見えるものにではなく、見えないものに目を留めます。見えるものは一時的であり、見えないものは永遠に続くからです。


지금 너의 눈 앞에 보이는 것? 그게 영원할 줄 알아? 아니야. 그거 영원하지 않아. 잠깐이면 사라질 것들이야. 눈에 보이는 돈이나 권력이나 세상적인 힘이나 지식이 아니라, 육적인 눈에는 안 보이는 하나님을 믿어야 돼. 그게 영원한 거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잠언 9장 10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잠언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主を恐れることは知恵の初め、聖なる方を知ることは悟ることである。

저기 앞에 단속 카메라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지금은 보이지 않으니까 괜찮다고 하면서 쌩쌩 달리는 것이 지혜로운 게 아니야. 지금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저기 단속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카 나비게이션에서는 앞에 카메라가 있다고, 속도를 줄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계속 안내를 하는데도 속도를 줄이지 않는 것이 멋있어요? 아니에요. 그건 어리석은 것입니다.

시편 33편 13절~14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시편 33편 13절~14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살피시는도다”

主は天から目を注ぎ人の子らをすべてご覧になる。
御座が据えられた所から地に住むすべての者に目を留められる。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걱정 말라고, 그러면서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것이 멋진 것이 아닙니다. 이는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서 12장 14절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神は、善であれ悪であれ、あらゆる隠れたことについて、すべてのわざをさばかれるからである。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요한계시록 20장 12절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また私は、死んだ人々が大きい者も小さい者も御座 の前に立っているのを見た。数々の書物が開かれた。書物がもう一つ開かれたが、それはいのちの書であった。死んだ者たちは、これらの書物に書かれていることにしたがい、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고속으로 달리는 모습이 멋있어 보일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벌금을 내는 모습이 멋있어 보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자기식대로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모습이 멋있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심판대 앞에 서서 그렇게 살아왔던 자신의 삶이 낱낱이 드러날 때 모습이 멋이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요, 하나님은 아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는 것은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존재로 생각되십니까.

무서우신 하나님? 노하시는 하나님?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 꾸짖으시는 하나님처럼 생각되십니까.

아니면, 은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축복의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처럼 여겨지십니까.

출애굽기에 보면 다음 구절이 저는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출애굽기 33장 11절 전반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主は、人が自分の友と語るように、顔と顔を合わせてモーセと語られた。

아……정말 멋진 말씀 아니십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와 대화하실 때에 모세를 마치 친구 대하듯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친구와 같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정말 허물 없이 자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모두 다 말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모세는 어떤 대화까지 나누었던 것일까요.

출애굽기 33장 18절~23절

“18.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21.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22.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23.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モーセは言った。「どうか、あなたの栄光を私に見せてください。」
主は言われた。「わたし自身、わたしのあらゆる良きものをあなたの前に通らせ、主の名であなたの前に宣言する。わたしは恵 もうと思う者を恵み、あわれもうと思う者をあわれむ。」
また言われた。「あなたはわたしの顔を見ることはできない。人はわたしを見て、なお生きていることはできないからである。」
また主は言われた。「見よ、わたしの傍らに一つの場所がある。あなたは岩の上に立て。
わたしの栄光が通り過ぎるときには、わたしはあなたを岩の裂け目に入れる。わたしが通り過ぎるまで、この手であなたをおおっておく。
わたしが手をのけると、あなたはわたしのうしろを見るが、わたしの顔は決して見られない。」


생각해보십시오. 당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목숨을 건 일이었습니다. 감히 가까이도 가지 못할 정도로 무서운 일이었지요. 하지만 모세는 어떤 대화까지 나누었습니까. 감히 하나님의 얼굴까지도 보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어요?

얘야, 사람인 네가 하나님인 내 얼굴을 보면 죽어. 그러니까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네 앞을 지나갈 텐데, 내 앞모습이 보일 때에는 내가 손으로 네 눈을 가려줄게. 그리고 내가 지나간 다음에 내가 손을 거두면, 내 얼굴은 보지 못하겠지만 내 뒷모습은 볼 수 있을 거야. 그러면 되겠지?…….

뭐 이러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대화입니까.

모세는 정말 이 정도로 가깝고 다정하게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모습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또 내일부터, 그래, 그러면 어디 한 번 나도 하나님 얼굴 좀 보게 해달라고 기도해보자……라고 하실 분이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여러분더러 그렇게 기도 하시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 정도로 모세는 정말 친구처럼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친구처럼 대한다는 말씀은 무엇이냐 하면, 정말 서로 숨김없이 모든 것을 드러낼 수 있는 관계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한테만 친구처럼 대한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8장 17절~19절을 봅니다.
“17.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18.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19.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主はこう考えられた。「わたしは、自分がしようとしていることを、アブラハムに隠しておくべきだろうか。
アブラハムは必ず、強く大いなる国民となり、地のすべての国民は彼によって祝福される。
わたしがアブラハムを選び出したのは、彼がその子どもたちと後の家族に命じて、彼らが主の道を守り、正義と公正を行うようになるためであり、それによって、主がアブラハムについて約束したことを彼の上に成就するためだ。」

하나님께서는 죄악으로 물든 도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는 요즘 말로 하자면 극비 중 극비이었습니다. 절대로 발설할 수 없는 내용이었지요. 그런데도 이처럼 아브라함한테만은 하나님께서 숨기지 않고 모든 것을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친구인 것입니다.

이쯤 되면 좀 질투가 나십니까. 아니, 아브라함이나 모세와는 친구가 되어주셨으면서 왜 나와는 친구가 안되 주시는 거야……라고 하는 질투가 나십니까?

음? 안 나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나 모세와 친구가 되든지 말든지…….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그래요? ㅎㅎ 그러면 안됩니다. 그건 마치, 아브라함이 축복을 받거나 말거나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거나 말거나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가 되고 맙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은 우리가 모두 받아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우리 안에 넘쳐나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건 지금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이야기, 내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가 하나님과 친구를 맺은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친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제가 드리는 말씀이 아니에요. 그리고 우리가 먼저 하나님과 친구를 맺자고 한 것이 아닙니다.

감사하게도, 너무나도 감사하게도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야, 우리 친구가 되자. 말하자면 우리 친구 하자……이렇게 먼저 말씀해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 요한복음 15장 중에서 15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わたしはもう、あなたがたをしもべとは呼びません。しもべなら主人が何をするのか知らないからです。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友と呼びました。父から聞いたことをすべて、あなたがたには知らせたからです。”


누가복음 8장 10절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がたには神の国の奥義を知ることが許されていますが、ほかの人たちには、たとえで話します。『彼らが見ていても見ることがなく、聞いていても悟ることが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들에게 있어서는 숨겨진 것들을 제자들에게는 모두 말씀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친구인 것입니다.

이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모든 비밀을 다 알게 해주셨습니다. 다만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이것을 안 믿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2장 4절~5절
“4.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わたしの友である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からだを殺しても、その後はもう何もできない者たちを恐れてはいけません。
恐れなければならない方を、あなたがたに教えてあげましょう。殺した後で、ゲヘナに投げ込む権威を持っておられる方を恐れなさい。そうです。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この方を恐れなさい。

이것 또한 천국의 어마어마한 비밀입니다. 이 세상에서 권세 잡은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또 가끔 보면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렇다고 이 세상 권력에 불복종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 것을 바라보고, 세상 것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의지할 분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친구처럼 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께 진정으로 친구처럼 말씀 드리고 있습니까.

주님은 이처럼 우리를 친구 대하듯 하고 싶은데, 우리는 어쩌면 서먹서먹하게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주여!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

여러분, 친구한테 그렇게 말합니까. 야, 누구야. 내가 너를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이러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거 왜 그렇게 기도 하는 거예요? 간단해요. 안 믿어지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주여~ 믿습니다~ 믿음이 부족한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주여~ 믿습니다~

이거 뭘 어쩌라는 거예요. 이건 지금 믿어진다는 게 아니에요. 안 믿어진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물론 예배 때 기도 시간에 앞에 나오셔서 모든 성도님들을 대표해서 드리는 대표기도 같은 것은, 당연히 그 내용이나 기도 순서에 있어서 다듬기도 해야겠고 단어도 좀 선별해서 하셔야겠지만, 우리가 개인적으로 드리는 기도까지 그렇게 한다면, 이는 주님께서 바라는 기도가 아닐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교회에 다닐 때 보면 예배 시간 때 통성기도 같은 것을 하잖아요? 아, 그러면 저는 정말 그거 잘 못 하겠더라구요.
아니, 그렇잖아요. 예를 들어서, 주여~ 제 수입이 지금 너무나도 적은데, 월급이 올라가게 해 주시옵소서~ 주여~ 이번 달 집세를 내야 할 텐데, 꾸지 않도록 해주시옵소서~
아니면 내 어디어디가 아파서 고생인데 고쳐주시옵소서~
아니면 집이 비싸게 팔리게 해주시옵소서~
이번에 어디 시험을 봤는데 합격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사람들 많이 있는데 큰 소리로 할 수 있어요? 아이구, 그런 걸 어떻게 큰 소리로 해요. 프라이버시인데…… 그러면 통성기도 할 때에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들어도 무방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만 기도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 기도는 큰 소리로 기도했다가, 개인적인 기도는 조용한 소리로 기도해야 하는 거예요? 세상에 그렇게 기도해야 한다는 게 성경에 어디 나와 있습니까.

가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보면 하나님 앞에서도 체면을 세우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이건 옳지 않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만, 자, 우리한테 무슨 문제가 있어서 변호사를 찾아갔다고 생각해보겠습니다. 뭐, 쉽게 말해서 내가 누구한테 돈을 꿔졌는데. 안 갚아요. 그래서 상담하기 위해서 변호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예약을 하고 변호사와 함께 상담실에 들어갔어요. 그러면 변호사를 앞에 두고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변호사님. 우리 인생에 있어서 돈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인생의 전부가 돈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것은 저도 압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돈을 또한 완전히 도외시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겠지요…….”

이러실 건가요? 이러면 아마 변호사는 그냥 가만히 쳐다보고 있겠지요. 무슨 메모를 하려고 들고 있던 펜은 가만히 멈춘 상태일 것입니다. 이건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됩니다. 지금 변호사 앞에 두고 체면 차릴 이유가 뭐가 있어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솔직하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야죠.

“변호사님, 지금 제가 누구한테 돈을 꿔준 게 있는데, 글쎄 이 사람이 안 갚아요.”

이렇게 말하면 변호사는, 아, 대여금반환청구사건이구나……라고 금방 알아차립니다. 그러면 이제 필요한 질문을 하지요. 변제일은 언제입니까. 계약서는 있습니까. 담보는 있습니까. 등등 실질적인 질문에 바로 들어가서 문제해결을 위해서 빨리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슨 체면을 차린다고 인생이 어떻고 그러고 있으면 이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이지요.

주님은 지금 우리들로부터 친구처럼 솔직한 기도를 듣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기도하래요? 남들 다 듣는 데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라고 하시던가요?


마태복음 6장 6절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あなたが祈るときは、家の奥の自分の部屋 に入りなさい。そして戸を閉めて、隠れたところにおられるあなたの父に祈りなさい。そうすれば、隠れたところで見ておられるあなたの父が、あなたに報いてくださいます。

우리는 이 말씀을 오랫동안 오해해왔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지금까지는 너무 남들한테 티 내지 말고 기도하라……는 정도로밖에 이해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친구처럼 나한테 모든 말을 다 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움직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뻗고 역사하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 7절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それどころか、あなたがたの髪の毛さえも、すべて数えられています。恐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あなたがたは、多くの雀よりも価値があるのです。

주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아신다고 하시는데, 우리가 주님 앞에서 무엇을 부끄러워할 게 있습니까. 뭐가 창피할 게 있습니까. 무엇을 숨길 게 있습니까. 무슨 체면을 차릴 게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3절~15절
“1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ヨハネの福音書 15章 13節~15節
“人が自分の友のためにいのちを捨てること、これよりも大きな愛はだれも持っていません。
わたしが命じることを行うなら、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友です。
わたしはもう、あなたがたをしもべとは呼びません。しもべなら主人が何をするのか知らないからです。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友と呼びました。父から聞いたことをすべて、あなたがたには知らせたからです。”

예수님은 우리와 친구가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는 그냥 단순히 친하게 지내자. 아니면 말고……가 아닙니다.

과거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는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되셔서, 스스로 십자가에 못박히고 피를 흘리시면서까지 우리와 친구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와 친구가 되셔서 우리의 죄를 자신의 피로 모두 씻어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손을 내미십니다. 이제 내가 제물이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제물은 필요가 없어. 너의 기도를 드리기만 하면 돼.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나한테 모든 것을 털어놓으면 돼……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신뢰합시다. 예수님을 의지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친구, 우리의 좋은 친구되신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를 항상 지켜주십니다. 인도해주십시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진정한 친구되신 예수님께 진정한 기도를 드릴 때에, 그리고 예수님을 진정한 친구로 우리가 맞이할 수 있을 때에, 주님 안에서 진정한 평안과 진정한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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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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