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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1회 세 가지 기쁨
2019년 5월 1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2절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ヨハネの福音書 15章 3節
「わ
たしの枝で実を結ばないものはすべて、父がそれを取り除き、実を結ぶものはすべて、もっと多く実を結ぶように、刈り込みをなさ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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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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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세 가지 기쁨” 三つの喜び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어떤 친구와 얘기를 하고 있는데, 무슨 얘기를 하다가 문득 이 친구가 하는 말이, “야, 입이 열 개라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저도 그렇고 이 친구도 그렇고 잠시 멍하니 서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게 맞는 말이에요? 틀린 말이에요?

예, 그렇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라는 말과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하라”는 두 말이 합쳐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합쳐놓으니까 이게 알 것도 같지만 어딘가 좀 이상하게 느껴진 것이지요. 그래서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럼 성경은 어떨까요. 여러분, 잠깐 질문 하나 해보겠습니다. 먼저 이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진주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여러분 어떠세요? 괜찮으세요? 이 말씀을 듣고, “음? 왜? 뭐가 이상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허허어, 홍 목사. 왜 그러시나.”라고 의문을 갖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잘 못 들으셨을 수도 있으니까 다시 한 번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진주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사실 이건 좀 부끄러운 말씀입니다만, 얼마 전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문득 이 말씀이 떠올랐어요. 그러면서 든 생각이 뭐냐 하면, 아니, 진주는 바다에 있어야 하지 않아요? 바다에 사는, 무슨 조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조개 안에서 발견되는 게 진주잖아요? 그런데 왜 성경에는 진주가 밭에 감추어져 있다고 했을까. 오타인가?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예수님이 잠깐 착각하셨나?

그래서 한 번 찾아봐야겠다 생각하고 집에 와서 찾아봤더니, 아이구 웬 걸이요.

마태복음 13장 44절에 보면,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진주요? 아니에요. 보화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天の御国は畑に隠された宝のようなものです。その宝を見つけた人は、それをそのまま隠しておきます。そして喜 びのあまり、行って、持っている物すべてを売り払い、その畑を買います。

그러면 진주는 안 나오나요? 아니요. 나옵니다. 바로 다음 구절이에요.

마태복음 13장 45절~46절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天の御国はまた、良い真珠を探している商人のようなものです。高価な真珠を一つ見つけた商人は、行って、持っていた物すべてを売り払い、それを買います。

참 얼마나 정확합니까. 그렇죠. 진주가 밭에 있을 리가 없지요. 그런데 정말 창피하게도 제가 이걸 섞어가지고 정말 “입이 열 개라도 말은 똑바로 해야 한다”는 식으로 헷갈려버린 것입니다. 참 제 부족함을 반성하는 한편으로 이 구절을 읽으면서 또 다른 의미로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오류가 적을까요? 아니요.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아요. 그냥 대충대충 넘어가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떤 분 말씀에 의하면 자기가 섬기고 있는 교회에서는 “할렐루야”라는 말이 여러 가지 경우에 쓰인대요. 누구를 부를 때에도, 할렐루야! 김 집사님! 할렐루야!
지나가니까 길을 좀 열어달라고 할 때에도 할렐루야! 자, 지나갑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급히 주의를 줄 때에도 “할렐루야! 할렐루야! 뛰면 안 됩니다!”

뭐 이런 식이지요. 하지만 할렐루야가 무슨 뜻입니까. 이는 “찬양하다”, “영광스럽게 하다”는 말의 명령형과, 하나님을 나타내는 말 “야”가 결합된 말. 즉 ,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지극히 거룩한 말씀입니다만, 이 말을 그냥 아무런 의미 없이 여러 경우에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성경은 그냥 막연하게 추상화처럼 적힌 책이 아닙니다. 자세한 의미를 몰라도 그냥 느낌만으로 알기만 하면 되는 그런 책이 아니에요. 오히려 대단히 치밀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반도체 정밀기기와도 같은 것입니다.

텔레비전 같은 데에서 보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첨단기기를 만드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신경을 씁니다. 작은 먼지라도 들어가면 큰 일입니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지요.

이를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20절~21절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ただし、聖書のどんな預言も勝手に解釈するものではないことを、まず心得ておきなさい。預言は、決して人間の意志によってもたらされたものではなく、聖霊に動かされた人たちが神から受けて語ったものです。

베드로후서 3장 15절~16절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また、私たちの主の忍耐は救いであると考えなさい。愛する、私たちの兄弟パウロも、自分に与えられた知恵にしたがって、あなたがたに書き送ったとおりです。その手紙でパウロは、ほかのすべての手紙でもしているように、このことについて語っています。その中には理解 しにくいところがあります。無知な、心の定まらない人たちは、聖書の他の箇所と同様、それらを曲解して、自分自身に滅びを招きます。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아무데나 대충대충 갖다 붙인다고 모두 하나님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멸망할 수도 있다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만, 이와는 별개로 네이버 카페도 운영하고 있는데, 며칠 전에 어떤 신흥종교집단에서 어떤 글 하나를 올렸습니다. 그 글은 그 단체 교주 명의로 되어 있었습니다만, 이런 글로 시작합니다.

“나는 계시록 22장 8절과 16절에 약속한, 예수님께서 교회들에게 계시록이 성취된 것을 증거하라고 보내신 사자입니다”

이 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그냥 비웃고 넘어갈 수도 있겠습니다만, 일단 성경 구절이 있으니 살펴보아야지요. 계시록 22장 8절? 이건 오타인 것 같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8절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これらのことを聞き、また見たのは、私ヨハネである。私は、聞いたり見たりした後に、これらのことを示してくれた御使いの足もとにひれ伏して、礼拝 しようとした。

여기엔 별다른 내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2장 16절, 여기에는 <사자>라는 말이 나오기는 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6절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わたしイエスは御使いを遣わし、諸教会について、これらのことをあなたがたに証しした。わたしはダビデの根、また子孫、輝く明けの明星である。」

하지만 이 말씀은 당시 예수님께서 사자를 통해서 요한에게 환상을 보게 하여 교회에 이 요한계시록, 성경 말씀을 적게 하였다는 말씀이지, 먼 훗날에 사자를 보내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리고 중간에는 이런 글도 있었습니다.

“약 2,000년이 지난 재림 때인 오늘날 또 예수님이 보내신 사자를 받아 주지 않고 핍박하면, 초림 때의 예루살렘의 목자들과 장로들 같은 죄를 범하게 됩니다”

여기서 이 글을 쓴 사람은 자기를 예수님이 보내신 사자라고 하려는지, 아니면 재림 예수라고 하려는지를 혼돈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2천 년 전에 오신 분은 예수님이지 예수님의 사자가 아니지요. 그리고 자신이 재림예수다?

요한계시록을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7절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見よ、その方は雲とともに来 られる。すべての目が彼を見る。彼を突き刺した者たちさえも。地のすべての部族は彼のゆえに胸をたたいて悲しむ。しかり、アーメン。

이는 성경 다른 곳에도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0절
“22.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そのとき、人の子のしるしが天に現れます。そのとき、地のすべての部族は胸をたたいて悲しみ、人の子が天の雲のうちに、偉大な力 と栄光とともに来るのを見るのです。

누가복음 17장 23절~24절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人々は『見よ、あそこだ』とか、『見よ、ここだ』とか言いますが、行ってはいけません。追いかけてもいけません。人の子の日、人の子は、稲妻がひらめいて天の端から天の端まで光るのと、ちょうど同じようになります。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는 구원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으로 오셨습니다. 용서의 하나님으로 오셨습니다. 죄인 된 우리를 어떻게 해서든지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고,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0절~13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この方はもとから世におられ、世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のに、世はこの方を知らなかった。この方はご自分のところに来られたのに、ご自分の民はこの方を受け入れなかった。しかし、この方を受け入れた人々、すなわち、その名を信じた人々には、神の子どもとなる特権をお与えになった。この人々は、血によってではなく、肉の望むところでも人の意志によってでもなく、ただ、神によって生まれたのである。

2천년 전, 그 때는 아무도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 특히 권세 잡은 자들, 기득권자들이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아니, 거부하는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을 박혀버렸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그와 같은 소박한 모습으로 오지 않으십니다.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람들까지도 그 모습을 본다고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 사실을 무슨, 뉴스 같은 데에서 들어서 안대요? 아니요.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그 소식은 순식간에 이 땅에 사는 사람들 모두에게 알려질 것입니다.

저……제가 예수님이에요. 라고 말할 때까지 몰랐어요? 그건 뭐냐 하면 그 사람은 예수님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빛의 속도가 어느 정도요? 예, 초속 30만 킬로, 1초에 지구를 일곱바퀴 반이나 돌 수 있는 속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그 날에는 이 땅에 있는 누구나가 다 알 수 있는 모습으로 오십니다. 그리고 그 때는 이제 구원의 주님이 아닙니다. 자비로운 주님이 아닙니다. 심판의 주님으로 오십니다. 만왕의 왕의 모습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빼놓아서는 안 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3절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すべての預言者たちと律法が預言したのは、ヨハネの時まででした。

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모든 선지자나 예언자는 세례 요한으로 끝입니다. 과거에는 몇몇 제한적인 사람들만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셨지만,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성령가림사건 이후에는 성령님께서 직접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아까 그 글을 보면 어떻습니까. 예, 그 글을 쓴 사람은 성경을 제대로 모르고 썼다는 말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지금도 세상에 보면 자기가 예수다, 선지자다, 사자다, 예언자다 하면서 이상한 교리로 사람들을 현혹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안식일은 원래 토요일이니 토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구약에서 안식일은 토요일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매주 토요일마다 양 잡고 염소 잡고 태워서 제사를 드리나요? 그건 또 아니에요.

이건 무슨 구약도 아니고 신약도 아닙니다. 글쎄요. 마치 라면을 포크와 나이프로 먹으려는 것 같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온전히 신약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이요, 신약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오해가 이런 이단이나 신흥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마가복음 8장 34절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それから、群衆を弟子たちと一緒に呼び寄せて、彼らに言われた。「だれでもわたしに従って来たければ、自分を捨て、自分の十字架を負って、わたしに従って来なさい。

이 말씀은 어떻습니까. 여러분께서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어흠, 잠시 한 3분 정도 좀 부흥회 모드로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준비 되셨나요?

자, 그럼 시작해보겠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목소리가 작아요, 다시 한 번, 자, 더 큰 소리로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신 채로 피범벅이 되어서 골고다로 향하는 길을 십자가를 짊어지고 올라가셨습니다. 너무나도 괴롭고 너무나도 힘들어서 몇 번이고 이리 쓰러지고 저리 쓰러지고 그러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서, 우리 죄악을 해결하기 위해서 넘어지면서도 쓰러지면서도 올라가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그 길, 예수님께서 올라가셨던 그 고난의 길, 그 고통의 길을 우리도 함께 하자고 말씀하십니다. 그 길은 주님께서 가셨던 길입니다. 그 길을 우리도 함께 올라가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十字架のことばは、滅びる者たちには愚かであっても、救われる私たちには神の力です。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남들은 비웃더라도 남들은 미련하다면서 손가락질 하더라도 우리는 그 고난의 길을 십자가를 짊어지고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고통이 있더라도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떠한 고난이 닥쳐 오더라도, 어떠한 고통이 우리를 막아 선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 예수님께서 오르는 그 길을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올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떠십니까. 괜찮았어요? 이런 내용과 비슷한 말씀, 교회에 어느 정도 다닌 분이시라면, 적어도 한 두 번 정도 들어보신 적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제가 지금 드린 말씀. 괜찮습니까? 이대로 그냥 설교를 마쳐도 괜찮겠어요?

만약에 괜찮다고 생각하시는 분들께 여쭙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하려고 해요. 그러면 지금 제가 드린 말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고통과 고난의 길, 예수님께서 올라가셨던 그 힘든 길을 올라가야 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안 하시겠습니까.

하실 건가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건, 가시관을 쓰고 채찍에 맞으면서 피범벅이 된 채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길로 올라가는 것 같은 거야……그렇게 전도하실 건가요? 그러면 아하! 예수님을 믿는다는 건 정말 멋진 거구나! 하고 생각해줄까요?

잘 안 될 것 같아요? 그러면 원래 예수 믿는 일은 힘들고 어렵고 고통과 고난이 동반되지만, 이 사실을 숨기실 건가요? 그냥 좋은 것만 얘기하고 어떻게 해서든 교회에 나오게 만드실 건가요? 여러분, 만약에 그렇게 하신다면 이는 사기입니다. 그렇잖아요? 이는 거짓말하는 것, 속이는 것이지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고통과 고난을 우리도 함께 겪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왜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그와 같은 고통과 고난을 겪으셨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신 채로 십자가를 짊어지며 겪으셨던 고통,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셨던 그 고통을 당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런 고통과 고난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대신 당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도 똑 같은 고통과 고난을 당해야 한다? 이는 그야말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고통을 당하셨는지 간에 나도 똑 같은 고통을 당해야지만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모두 없었던 것으로 하자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십자가를 매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다름아닌 복종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8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도 모두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려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복종하셔야 할 부분이 있었다면 우리도 복종하여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예를 들어 지구보다도 큰 바위, 태양보다도 큰 바위를 옮겨놓으실 정도의 너무나도 힘든 복종이셨다면, 우리는 그저 작은 돌멩이 하나, 모래알 하나 정도를 옮기는 정도, 그야말로 흉내만 내는 정도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4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いつも主にあって喜びなさい。もう一度言います。喜びなさい。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과 고난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고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에서 기쁨을 누려야 하겠습니까. 이는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 복종 • 순종이라는 십자가를 통해서 기쁨을 누려야 하는 것이고, 또한 그래야만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려야 하는 기쁨은 첫째로 믿음을 통한 기쁨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스스로 멸망할 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해결해주셨다는 믿음.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이 믿음을 통해서 기쁨을 얻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말씀을 통한 기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무엇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영화요? 드라마요? 아니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 어디에 예수님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요한복음 5장 39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あなたがたは、聖書の中に永遠のいのちがあると思って、聖書を調べています。その聖書は、わたしについて証ししているものです。

신약만이 아니라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계시록까지 66권 모두가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믿음이 곧 성경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면 이는 맞는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그럴 듯한 말이라 한다 하더라도 이는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기쁨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행함을 통한 기쁨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보면 <행함>이라고 하면 무슨 특별한 봉사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만, 그것만이 행함이 아닙니다. 교회 내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우리 일상 생활에서까지도 모든 행함을 가리켜야 한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행함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24절~27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ですから、わたしのこれらのことばを聞いて、それを行う者はみな、岩の上に自分の家を建てた賢い人にたとえることができます。雨が降って洪水が押し寄せ、風が吹いてその家を襲っても、家は倒れませんでした。岩の上に土台が据えられていたからです。また、わたしのこれらのことばを聞いて、それを行わない者はみな、砂の上に自分の家を建てた愚かな人にたとえることができます。雨が降って洪水が押し寄せ、風が吹いてその家に打ちつけると、倒れてしまいました。しかもその倒れ方はひどいものでした。」

주님의 말씀, 성경 말씀을 듣기는 들었지만 그것으로 끝, 아무런 행함이 없다면 이는 금방 무너져 내리는 집이나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행함 속에서 우리는 기쁨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과 말씀과 행함, 이는 씨와 밭과 가꾸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이라는 씨를 사왔습니다. 그러면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냐 하면, 이 씨를 심을 밭을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입니다. 우리의 믿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그 믿음을 심을 밭이 말씀인 것이지요.

자, 이제 씨도 샀고, 밭도 구했어요. 그러면 이제 끝이에요? 아니에요. 이것을 심어야 합니다. 씨를 밭에 심고 물을 주고 비료도 주고 해서 가꾸어야지요.

고린도전서 3장 6절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私が植えて、アポロが水を注ぎました。しかし、成長させたのは神です。

믿음이라고 하는 씨를 말씀이라고 하는 밭을 구하여 행함으로 심고 가꾸었을 때, 마침내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셔서 마침내 큰 수확을 얻도록 역사해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왜 씨를 가지고 있으면 기쁩니까. 예, 그 씨로 인해서 수확을 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왜 밭을 구하면 기쁩니까. 예, 그 밭을 통해서 수확을 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왜 물을 주고 가꾸면 기쁩니까. 그렇습니다. 밭에 씨를 심고 가꾸면 자라난 후에 큰 수확을 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라도 빠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씨가 없어요. 그럼 아무 것도 없는 밭만 열심히 가꾼다고 수확할 수가 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씨가 있는데 심을 밭이 없어요. 그러면 물을 줄 수도 없고 가꿀 수도 없습니다. 씨가 있고 밭이 있어서 씨를 밭에 심었지만 물도 주지 않고 가꾸지도 않았어요. 그러면 조금 자라다가 시들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복종은,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우리의 복종, 믿음과 말씀과 행함이 기쁜 이유는 바로 이 세 가지를 통해서 큰 수확을 얻을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 2절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わたしの枝で実を結ばないものはすべて、父がそれを取り除き、実を結ぶものはすべて、もっと多く実を結ぶように、刈り込みをなさいます。

누가복음 6장 43절~45절도 보겠습니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良い木が悪い実を結ぶことはなく、悪い木が良い実を結ぶこともありません。木はそれぞれ、その実によって分かります。茨からいちじくを採ることはなく、野ばらからぶどうを摘むこともありません。良い人は、その心の良い倉から良い物を出し、悪い人は、悪い倉から悪い物を出します。人の口は、心に満ちていることを話すからです。

열매는 정직합니다. 나쁜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께서 버리시지만 좋은 열매를 맺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크나큰 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믿음과 말씀과 행함이 주는 소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크나큰 수확의 기쁨, 30배, 60배, 100배 되는 기쁨을 누리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약에, 다행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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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0회 일어나세요
2019년 5월 1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4장 2절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한국어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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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일어나세요” 起きましょう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요즘 어벤져스나 뭐 이런 영화가 유행이라고 하는데, 문득 이런 이야기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어떤 소원을 이루어주는 돌을 모았어요. 아니면 옛날 동화 속 이야기처럼 한다면 무슨 요정이 나타났어요. 그리고 무슨 일이든지 소원을 한 가지만 들어준대요.

만약에 이와 같은 행운의 기회가 찾아왔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떤 소원을 빌겠습니까. 어떤 한 착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대단히 착하고 나쁜 생각은 전혀 없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어느 날 이 사람한테 이런 놀라운 행운이 찾아왔어요.

그래서 이 착한 사람은 가만히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이 세상 사람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래. 일단 무엇보다 돈이 어느 정도 있어야 행복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느 정도 돈이라면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여러분께서는 지금 은행에 돈이 얼마나 있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하시겠습니까.

1억 원? 요즘 한국 뉴스를 보면 1억 원 가지고는 서울 아파트 한 채도 못 사나보더라구요? 음. 그래요. 그러면 한 10억 원 정도면 어떻겠습니까. 그래. 그러면 나는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졌으면 좋겠으니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은행계좌에 지금 이 순간 10억 원이 들어가게 해주세요……라고 소원을 빌었습니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착한 사람 아니에요? 자기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10억 원을 갖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다니 대단히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이제 10초 후면 전세계 사람들 모두에게 10억 원이 입금 됩니다. 이제 5초 남았습니다. 4, 3, 2, 1 땡~


축하합니다! 이제 여기 계신 모든 분들, 그리고 전세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 은행에 각자 10억 원이 입금 되었습니다.

아, 뭐, 당연한 말씀입니다만,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혹시나 하는 심정에 지금 이 순간 예금 잔고를 확인하거나 하시는 분이 계실지는 모르지만,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 들어있다면, ㅎㅎ 각자 섬기시는 교회에 십일조나 감사헌금을 꼭 하시기 바라겠습니다. )

물론 이건 성경에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냥 제가 마음대로 만들어낸 이야기예요.

자, 그렇다면 정말로 지금 이 순간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어떤 사람한테는 스마트폰이 갑자기 삐빅 울려서 보니, 고객님 계좌에 10억 원이 입금되었습니다……. 뭐, 이런 문자가 와서 금방 알아차리는 사람이 있나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남들이 하는 소문을 늦게 들어서 이 사실을 깨닫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오래 잡는다 하더라도 2~3일은 안 걸리겠지요. 여러분은 기분이 어떠실 것 같으세요? 와, 갑자기 내 통장에 10억 원이 들어왔어. 나는 이제 부자다! 신난다! 하면서 난리가 나겠지요.

여러분께서는 10억 원이 갑자기 생겼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느 주부가 있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메시지가 와서 10억 원이 입금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대단히 기뻤습니다. 하지만 이 현명한 주부는 침착했습니다. 일단 오늘 저녁에 맛있는 음식을 차려야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동네 조금 고급 마트에 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들이 발생했을까요. 마트에 직원들이 없어요. 거리를 보니까 사람들이 난리가 아니에요. 버스도 전철도 택시도 안 다녀요. 왜요? 아니, 은행에 10억 원이 있는데, 한달 동안 뼈빠지게 일해서 월 몇 십 만원, 몇 백 만원 버는 일을 하겠어요? 아무도 일을 안 하려고 합니다.

서둘러서 편의점에 가보아도 역시 사람들이 없어요. 아르바이트생도 없습니다. 은행에 10억이 있는데 시급 10,000원도 안 되는 일을 하겠어요? 10억 원이라고 한다면, 시급 10,000원을 받는다고 한다면, 하루 24시간 잠을 자지 않고 일을 한다 해도 11년 이상을 꼬박 일을 해야 벌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런데 지금 누가 그 월급을 받고 일하겠어요. 10억 원이 있는데.

분명 이처럼 어마어마하게 좋은 일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일이 이렇게 되면 나중에는 겉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릴 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일을 하지도 않습니다. 공장도 멈춰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최악의 경우 이 세상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질 지도 모르는 노릇입니다.

이처럼 자본주의사회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불평등해야지만 되는 사회,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모든 사람들이 부자가 되면 오히려 사회 전체가 위태로워지는 사회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경제학이나 사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생각한다면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공교롭게도 한국이나 일본 모두에서 유명인의 마약 사건이 보도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마약, 과연 어떤 사람들이 손을 댈까요? 예전에 어느 방송을 보니까 이런 말을 하더군요. 처음으로 마약 같은 것을 하게 되는 사람들은 우리와 전혀 차이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돈을 어느 정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 마약을 하기 쉽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한 달 벌어서 빚 갚고, 집세 내고, 전기, 가스, 수도세다, 식대다, 교통비다, 생활비다, 자녀 교육비다 하고 나면 남는 것이 별로 없는 일반 가정 같은 경우가 아닌, 정말 당장 일이 없더라도 몇 년 또는 그 이상도 생활에 어려움이 없는 정도 되는, 그와 같은 사람들이 그런 데에 손을 댄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처럼 마약이라고 하는 것은 극단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와 같은 경우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계속되는 현실 속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은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21장 34절~36절

“34.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6.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あなたがたの心が、放蕩や深酒や生活の思い煩いで押しつぶされていて、その日が罠のように、突然あなたがたに臨むことにならないように、よく気をつけなさい。
その日は、全地の表に住むすべての人に突然臨むのです。
しかし、あなたがたは、必ず起こるこれらすべてのことから逃れて、人の子の前に立つことができるように、いつも目を覚まして祈っていなさい。」


가끔 보면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려는 분이 계십니다. 물론 예외가 없는 상황이라면 원칙적으로 문자적인 해석이 맞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예전에 한 번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한 때 머리카락을 좀 길게 하고 다닌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당시 잠시 알고 지냈던 권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남자는 머리카락을 길게 하고 다니면 안 된대요. 그 분이 권사님이시고 그래서인지 자주 성경 말씀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말씀을 듣고, 그런 말씀이 성경에 있어요? 라고 농담 삼아서 물었지요. 그랬더니 이 분 하시는 말씀이 정색을 하면서, 아,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자가 머리카락이 길면 안 된대요.

당시는 제가 성경 지식이 별로 없었을 때였으니까, 아, 그런 내용이 성경에도 있나 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그런 내용이 성경에 있게요? 없게요?

정답은…… 있습니다! 이 분이 역시 성경은 잘 아시는 분이에요. 한 번 볼까요?

고린도전서 11장 14절

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自然そのものが、あなたがたにこう教えていないでしょうか。男が長い髪をしていたら、それは彼にとって恥ずかしいことであり、

놀랍지 않으십니까. 남자한테 긴 머리가 있으면 부끄러운 일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믿음이 있는 모든 남자분들은 머리카락을 기르는 것은 부끄러움이 된다는 성경 말씀에 순종하고 항상 머리를 짧게 깎으셔야 하겠습니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럼 다음 구절은 어떻습니까.

고린도전서 11장 15절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가리는 것을 대신하여 주셨기 때문이니라

女が長い髪をしていたら、それは彼女にとっては栄誉なのです。なぜなら、髪はかぶり物として女に与えられているからです。

남자 머리를 짧게 깎아야 한다는 성경 구절에 따라야 한다면, 그러면 이 말씀에 따른다면, 여자는 짧은 머리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인가요? 제 기억에 그 권사님 머리카락은 그리 길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만, 그 때 그 권사님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말씀을 안 하시더라구요?

그러면 고린도전서 11장 5절은 어떻습니까.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しかし、女はだれでも祈りや預言をするとき、頭にかぶり物を着けていなかったら、自分の頭を辱めることになります。それは頭を剃っているのと全く同じことなのです。

이 구절이 있기 때문에 카톨릭 성당에서 보면 여성 분들이 미사포……라고 하죠? 그걸 쓰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실 수가 있습니다만, 그럼 우리도 이제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으니까 여자분들은 손수건 같은 것을 뒤집어쓰고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인가요?

저도 당시 그 권사님과 예배를 드려본 적이 있습니다만, 그 분은 머리에 그런 것을 쓰지 않으셨더라구요.

만약에 제가 당시 성경에 대해서 좀 알고, 이 구절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면 그 분께 이 구절에 대해서 질문을 했겠지요. 그런데 당시 저는 이 구절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알았다고 해도 그 분께 질문을 드렸다면, 그 분의 답변은 뻔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당시 다른 질문을 드렸던 적도 있었는데 그러면 이 분은 항상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건 영적으로 해석을 해야 한대요. 그래서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하면 영적인 변별력이 생겨서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적어도 위 구절은 이는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2천년 전 관습을 기준으로 생각해야 하는 부분인 것입니다.

아전인수……라고 하지요? 무엇이든 자기 생각이나 자기 주장에 맞도록 해석하는 것을 말할 때 쓰이기도 합니다만, 이런 일들이 성경 해석에 있어서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미국 할리웃의 유명한 배우 중에 브래드 피트라는 배우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본래 대단히 엄격하고 경건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신을 믿지 않는대요. 무신론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는 어려서부터 이걸 하려고 하면 이건 하면 안 돼. 저걸 하려고 하면 저걸 하면 안 돼……. 그런 환경에서 자라오다 보니 기독교는 나를 속박하는 것, 나를 억압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앞서 잠시 살펴본 누가복음 21장 말씀 중에서 34절을 다시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21장 34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あなたがたの心が、放蕩や深酒や生活の思い煩いで押しつぶされていて、その日が罠のように、突然あなたがたに臨むことにならないように、よく気をつけなさい。

많은 교회에서는 이 구절을 들으면서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해요. 그러면 담배는 왜 피우지 말라고 하냐고 질문을 하니까 어떤 목사님께서 해주시는 말씀이, 여기 <방탕함>이라는 곳에 담배도 들어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해석하기를 원하신다면 그러면

누가복음 21장 36절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しかし、あなたがたは、必ず起こるこれらすべてのことから逃れて、人の子の前に立つことができるように、いつも目を覚まして祈っていなさい。」

자,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으라고 하는데, 그러면 잠도 자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렇잖아요? 하지만 이게 옳은 해석인가요? 아니면 이것도 앞부분은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하고, 뒷부분은 무슨 영적으로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것인가요?

여러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자, 지금 이제부터 우리도 술 많이 마시고 담배도 많이 피워보자……라고 말씀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자기 멋대로 해석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 전파는 고사하고 오히려 믿음에 대해서 반감을 갖는 사람들, 어처구니 없는 무신론자들만 만들어내고 말게 될 지도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세상에 보면 이른바 믿음이 좋다고 하는 분들이나, 아니면 심한 경우에는 목회자라 하는 분들이라 하더라도, 세상이라는 술에 취하고 돈이라는 술에 취하고, 권력과 명예라는 술에 취하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정치라고 하는 술에 취해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는 분들을 가끔 보면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지 하나님을 높이려고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도 있어요. 예를 들어서 제 이름. 홍성필. 이니셜로 하면 HSP입니다. 저도 이런 생각을 한 번 해봤어요. HSP 무슨, Holy Spirit Prayers. 크~ 멋있지 않아요? 성령 기도자의 모임. 그래서 이런 조직을 만들어서 막 활동을 하고 그래요. 이거 홍성필 이름 따서 한 거 아니냐? 라고 누가 물으면, 아니다. 성령님을 향한 기도자 모임을 만들다 보니 우연히 이름이 그렇게 된 것이다……. 여러분, 사람들이 바보입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머리가 나쁘신 것 같으십니까. 지금 하나님을 높이자는 거예요, 아니면 자기를 높이자는 거예요. 이는 하나님을 빌미로 해서 자기 이름을 높이자는 것입니다. 만약에 제가 나중에 이런 정신 나간 짓을 한다고 하면, 누구라도 좋으니까, “홍 목사. 정신 차려” 라고 한마디 꼭 해주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ガラテヤ人への手紙
キリスト・イエスにつく者は、自分の肉を、情欲や欲望とともに十字架につけたのです。

고린도전서 2장 2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なぜなら私は、あなたがたの間で、イエス・キリスト、しかも十字架につけられたキリストのほかには、何も知るまいと決心していたからです。

여러분,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지금으로 본다면 행정고시나 외무고시를 합격한 정도의 당시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그가 세상에 대해서 몰랐겠습니까. 돈과 권력과 명예에 대해서 몰랐겠습니까. 아니면 정치에 대해서 몰랐겠습니까. 그는 이 모든 일에 대해서 대단히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술에 취해서 자기가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정치라는 술에 취해서, 앞뒤를 못 가리고 신앙의 이름으로, 교회의 이름으로, 어쩔 때는 예수님의 이름까지 들먹여가면서 이런 말들을 거침없이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잠은 중요합니다.

시편 127편 2절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あなたがたが早く起き遅く休み労苦の糧を食べたとしてもそれはむなしい。実に主は愛する者に眠りを与えてくださる。


잠언 6장 9절~11절
“9.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10.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면
11.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怠け者よ、いつまで寝ているのか。いつ目を覚まして起き上がるのか。
少し眠り、少しまどろみ、少し腕を組んで、横になる。
すると、付きまとう者のように貧しさが、武装した者のように乏しさがやって来る。

여러분, 우리가 건강까지 헤치면서 지나치게 일하려고 하는 것은 이는 탐욕입니다. 그야말로 돈은 벌었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그야말로 헛된 일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성경은 또한 말씀하십니다. 지나친 게으름은 빈궁과 곤핍이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열심히 돈을 벌라는 말씀만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언제 잠이 옵니까. 물론 열심히 일하고 잠을 잘 못 자고 했을 때도 그렇겠지만, 별로 피곤하지 않아요. 요즘 잠도 많이 잤습니다. 그런데 막 잠이 와요. 그게 언제 그래요? 예배 드릴 때요? ㅎㅎ 물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질문을 더 단순하게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배가 부를 때 잠이 오나요, 아니면 배가 고플 때 잠이 오나요.

예, 대부분 배가 부르고 등 따습고 하면 잠이 솔솔 오게 되는 것이지요.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사회가 어렵고 배가 고프고 할 때에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다가도, 생활이 편해지고 배가 부르게 되면, 그렇게 타오르던 부흥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믿음의 깊은 잠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한 사회나 한 나라에 국한된 것만이 아닙니다. 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내 통장에 10억 원이 아니라 100억 원, 천억 원이 들어왔다 하더라도 믿음의 깊은 잠에 빠져 들어서, 세상의 술에 취하고 권력과 명예의 술에 취하고 정치 같은 술에 취해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좀더 자자, 좀더 졸자 하면 영적인 빈궁과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게 되고, 나중에는 대단히 위태로운 상황에 빠지게 될 수도 있는 노릇입니다.

배가 불러서 잠에 빠져드는 것보다는 부족하기 때문에 깨어있을 수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욱 큰 축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족한 것을 깨닫지 못하면 그 자리에 머물러 서게 됩니다. 그러나 부족한 것을 알게 되면 앞으로 전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스마트폰이 있기 전에 우리는 그게 우리에게 그토록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그저 삐삐나 핸드폰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삐삐나 전화만 되는 핸드폰 가지고는 너무나도 부족하다. 큰 컴퓨터로만 인터넷을 하는 것만으로는 너무나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마침내 스마트폰을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바로 아이폰이지요. 이처럼 부족한 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크나큰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1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イエスは答えられた。「もしあなたが神の賜物を知り、また、水を飲ませてくださいとあなたに言っているのがだれなのかを知っていたら、あなたのほうからその人に求めていたでしょう。そして、その人はあなたに生ける水を与えたことでしょう。」

우리가 부족한 것을 깨달으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 힘으로는, 우리 능력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생수로 채워주시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30절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すべて疲れた人、重荷を負っている人はわたしのもとに来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休ませてあげます。
わたしは心が柔和でへりくだっているから、あなたがたもわたしのくびきを負って、わたしから学びなさい。そうすれば、たましいに安らぎを得ます。
わたしのくびきは負いやすく、わたしの荷は軽いからです。」


여러분, 시험 공부를 하기 위해서 학원에 갑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렇다면 훌륭한 선생님은 어떤 선생님이에요? 공부를 안 해도 합격할 수 있게 해주는 선생님? 그런 선생님이 어디 있어요. 만약에 자기가 그렇다고 주장하는 선생님이 있다면 이는 99프로도 아닙니다. 100프로 사기꾼입니다. 거짓말쟁이거나 아니면 부당한 방법으로 합격을 시켜주는 범죄자겠지요.

그러면 훌륭한 선생님은 어떤 선생님이냐 하면 그 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공부만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것 중의 하나는 그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얼마만큼 공부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필요 없는 공부까지 하느라고 시간과 돈과 힘을 낭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면 합격을 위해서 필요한 공부만을 알려주기 때문에 너무나도 효율적으로 시험 준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면 구원을 얻기 위해서, 내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알지 모릅니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많은 노력을 허비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면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다 해결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내가 다 책임져야 하는 줄 알았는데, 내 모든 죄를 이미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해결해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할게 없어요. 다만 무엇만 하면 됩니까. 그렇습니다.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 31절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二人は言った。「主イエスを信じ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もあなたの家族も救われます。」

마가복음 5장 36절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イエスはその話をそばで聞き、会堂司に言われた。「恐れないで、ただ信じていなさ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그만큼 주무셨으면 됐습니다. 세상이라는 술에 취하고, 돈과 권력과 명예 같은 것에 그만큼 취했으면 이제 됐습니다. 이제 깨어나셔야 합니다. 어서 일어나서 해장하셔야지요.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골로새서 4장 2절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たゆみなく祈りなさい。感謝をもって祈りつつ、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

기도는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신명기 26장 17절
“네가 오늘 여호와를 네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또 그 도를 행하고 그의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키며 그의 소리를 들으라”

あなたは今日、この主をあなたの神とし、主の道に歩み、主の掟と命令と定めを守り、御声に聞き従うと誓約した。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서 하나님을 인정하면 내게 부족한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다가오게 되어 감사함으로 충만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깨어나야 합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일어나 깨어나서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을 살아갈 때에, 예수님으로부터 크나큰 기쁨과 놀라운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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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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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9회 칠천 명이 보입니다
2019년 5월 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9장 18절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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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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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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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칠천 명이 보입니다” 七千人が見えます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먼저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열왕기상 19장 18절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しかし、わたしはイスラエルの中に七千人を残している。これらの者はみな、バアルに膝をかがめず、バアルに口づけしなかった者たちである。」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겨 두셨다고 하십니다만, 그 사람들은 모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입맞추지도 아니한 자라고 합니다. 이는 무슨 말씀인가 하면 우상에게 굴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이처럼 많다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엘리야가 하나님께 드린 말씀이 있습니다.

조금 앞에 있는 구절을 잠시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열왕기상 19장 10절 말씀입니다.


열왕기상 19장 10절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エリヤは答えた。「私は万軍の神、主に熱心に仕えました。しかし、イスラエルの子らはあなたとの契約を捨て、あなたの祭壇を壊 し、あなたの預言者たちを剣で殺しました。ただ私だけが残りましたが、彼らは私のいのちを取ろうと狙っています。」

뒤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칠천 명이 남아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앞에서 엘리야는 칠천 명이 아니라 오직 자기만이 남았다고 했습니다. 이를 풀어보면 엘리야한테는 하나님께서 남겨놓으신 칠천 명이 보이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여러분, 엘리야가 누구입니까.

열왕기상 17장 1절~7절을 보면, 수년 간의 걸친 가뭄을 예언하고, 8절 이후에 보면 사르밧 과부(ツァレファテのやもめ)한테 가서, 굶주림과 가난 때문에 죽으려고 하던 그녀를 위해 기름병을 가득 채우는 기적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22절에서는 질병으로 죽은 그 집 아들을 살리기도 하였으며, 당시 왕이 이세벨(イゼベル)의 사주로 온 나라로 하여금 바알을 숭배하도록 만든 이스라엘 아합(アハブ) 왕 앞에서도 담대하게 하나님 말씀을 전했습니다.

또한 18장에서는 갈멜산(カルメル山)에서 바알과 아세라(アシェラ) 선지자들 850명과 싸워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몇 년에 걸친 가뭄을 종식 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엘리야의 기적은 한 둘이 아니지요. 나아가 열왕기하 2장에 의하면 엘리야는 이 땅에서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처럼 하늘로 올라간 사람은 예수님을 제외하면 창세기 5장 24절에 등장하는 에녹(エノク)과 엘리야 뿐입니다.

엘리야는 또한 신약에도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17장 1절~3절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それから六日目に、イエスはペテロとヤコブとその兄弟ヨハネだけを連れて、高い山に登られた。
すると、弟子たちの目の前でその御姿が変わった。顔は太陽のように輝き、衣は光のように白くなった。
そして、見よ、モーセとエリヤが彼らの前に現れて、イエスと語り合っていた。

이처럼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하셨을 때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구약에 있어서 모세와 엘리야의 위치는 대단히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명사이자 엘리야는 선지자의 상징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선지자, 수많은 기적을 행했던 구약의 대표적인 예언자인 엘리야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남겨놓으셨다고 하신 7천 명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 하나만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열왕기상 19장 4절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自分は荒野に、一日の道のりを入って行った。彼は、エニシダの木の陰に座り、自分の死を願って言った。「主よ、もう十分です。私のいのちを取 ってください。私は父祖たちにまさっていませんから。」

이제 아합 왕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데 자기는 이제 죽었으면 좋겠대요. 왜냐하면 갈멜산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사실을 왕비 이세벨(イゼベル)이 알아차리고는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와 같은 위대한 선지자, 하나님의 능력자인 엘리야가 이처럼 순식간에 나약해졌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이를 두고 많은 분들은 엘리야의 우울증이라고 합니다. 우울증……. 저는 개인적으로 우울증이라기보다는 무기력증이라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지고, 갑자기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아지고, 그저 이대로 쓰러지고 넘어지고 좌절할 것만 같은 상황입니다.

사실 엘리야한테는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우리한테는 한편으로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우리도 그런 일 있잖아요.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도 저도 다 포기하고 싶어질 때가 왜 없겠습니까. 그러면서 드는 생각……. 아…… 내가 너무 믿음이 없어서 그런가, 너무 믿음이 약해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어떻습니까. 그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도 이처럼 우울증 무기력증을 앓았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그러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방안에서 걸어 다니다가, 어딘가에 새끼발가락을 세게 부딪혀보신 적 있으신가요? 그러면 그 순간 어때요? 이상하게 정말 순간적으로는 아프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요. 무엇을 알아요? 예, 이게 불과 몇 초 후면 어마어마하게 아파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상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고 있으면 정말 몇 초 후……어떻습니까. 아, 정말 상상만 해도 아파오지 않나요? 정말 어마어마하게 아프죠.

그렇다면요. 여러분. 질문 하나 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처럼 걸어가다가 새끼발가락을 부딪힐까요? 좀 못 배운 분이요? 믿음이 약한 사람이요? 그러면 반대로 박사학위 받은 사람은 이런 경험이 없을까요? 믿음이 좋은 분은 새끼 발가락을 부딪친 적이 없어요? 아닙니다. 다 있어요. 그러면 이렇게 부딪혔을 때, 믿음이 약한 사람은 아파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믿음이 좋은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해서 새끼 발가락을 부딪쳤을 때에도 거룩하게 “주여……” 그럴 수 있나요? 아니에요. 똑같이 아픕니다. 많이 배운 사람이나 조금 배운 사람이나 믿음이 약한 사람이나 믿음이 좋은 사람이나 발가락을 부딪히면 똑같이 아파요. 정말 아야 아야 하면서 깡총깡총 뛸 정도로 아픕니다. 사실 또한 그렇게 아야 아야 하면서 아파해야 그나마 조금 덜 아픈 것 같이 느껴집니다.

다른 예를 한 번 들어볼까요? 여러분 소면 드실 때 츠유 안에 와사비를 넣어서 드시잖아요? 그런데 그걸 이렇게 젓가락으로 잘 저어서 완전히 녹인 다음에 드셔야 하는데, 사실 츠유 자체가 차갑기 때문에 잘 녹지 않아요. 그럴 때 어떤 경험이 있으세요? 예, 어? 좀 싱거운데? 라고 하면서 좀 와사비를 더 넣었는데, 아이구, 제대로 녹지 않은 와사비 덩어리가 입에 들어오면 어떻게 됩니까. 난리 나죠.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럼 이럴 때 많이 배운 사람이나 믿음이 좋은 사람은 아…… 주여…… 라고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요? ㅎㅎ당해본 사람은 알아요. 아이구, 어떻게 그걸 그냥 참아요. 정말 가만히 앉아 있기 힘들기까지 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 두 경우를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내가 방에 있을 때, 있는 힘을 다 해서 발가락을 부딪혔어요. 아니면 소면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와사비 덩어리가 입에 들어왔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많이 배웠으니까, 교양이 있으니까, 믿음이 있으니까 괜찮아요? 아니요. 똑같아요. 역시 아프고 괴롭습니다.

좀 안타까운 말씀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이 경우에는 답이 없습니다. 아, 물론 너무 세게 부딪혀서 새끼발가락이 부러졌다거나 하면 그야 당연히 빨리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겠습니다만, 대부분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리고 만약에 김치 같은 매운 것을 먹었을 때에는 물을 마시거나 하면, 조금은 그 매운 것을 누그러뜨리는 효과도 있습니다만, 이 와사비를 먹었을 때 매운 것은 정말 답이 없어요.

그러면 이 두 경우, 가장 현명한 대처방법은 무엇입니까. 예. 꾸욱 참는 것입니다. 그냥 발가락의 아픔이 지나갈 때까지 꾸욱 참아야지요. 와사비의 그 매운 맛이 지나갈 때까지 꾸욱 참는 것뿐입니다. 아이구 아파 아이구 아파…… 해도 괜찮습니다. 아휴 매워 아휴 매워 하면서 눈물을 좀 흘려도 괜찮습니다. 만약에 똑 같은 경우를 당했다고 한다면 분명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도 아파했을 것이요, 와사비를 먹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매워했을 것입니다.

그럼 주위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끔 사람은 위로를 한답시고 사람한테 상처를 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 너 그렇게 맨날 왔다 갔다 하니까 언제 한 번 발가락을 부딪칠 줄 알았어…… 그래, 어쩐지 너 아까 보니까 와사비를 많이 넣더라…… 그걸 봤을 때 그렇게 매워할 줄 알았어……

이게 위로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말은 위로가 아니지요. 사실 이건 조금 다른 말이지만,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 사모님이 목사님한테 가끔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경우가 있대요.

오늘 설교가 이게 이렇게 안 좋았고 저게 저렇게 안 좋았고 하면서, 마지막에 꼭 붙이는 말이 있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니까 당신한테 이런 말을 해주지 누가 이런 말을 해주겠어요.” 라는 말씀, 아마 목사님이시라면 사모님이나 가족 분들이 이렇게 하시는 말씀을 몇 번 정도는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게 위로가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사실 이것은 말씀하시는 분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많은 상처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 참고로 저희 집사람은 저한테 이런 말은 안 합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ㅎㅎ

그럼 이웃이 새끼 발가락을 부딪혔을 때, 와사비 덩어리를 먹었을 때, 이럴 때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아이구, 이걸 어쩌면 좋아. 괜찮아. 그래 조금만 참아. 나도 당해봐서 아는데 지금은 무척 아프고 무척 맵지만, 조금만 기다려봐. 그럼 금방 나아질 거야…… 이렇게 위로해주는 것, 이것이 최선이고 이것이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

하나님도 어떻게 하셨습니까. 야, 엘리야. 니가 지금 뭐하는 거야? 그래 너 내가 준 능력으로 이런 저런 기적을 일으키고 그럴 때 보면, 아하, 너 언젠가 우울증이나 무기력증에 걸려서 날 좀 죽여주쇼 할 줄 알았어. 거봐. 내 생각대로잖아? 하나님이 이러셨나요? 아니요. 그러지 않았습니다.


열왕기상 19장 5절~7절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彼がエニシダの木の下で横になって眠っていると、見よ、一人の御使いが彼に触れ、「起きて食べなさい」と言った。
彼が見ると、見よ、彼の頭のところに、焼け石で焼いたパン菓子一つと、水の入った壺があった。彼はそれを食べて飲み、再び横になった。
主の使いがもう一度戻って来て彼に触れ、「起きて食べなさい。旅の道のりはまだ長いのだから」と言った。

참 얼마나 자비로운 하나님이신지 모릅니다. 천하의 대선지자 엘리야가 나무 아래 쪼그리고 자고 있으니까 천사가 그에게 와서 발길로 걷어차는 게 아니에요. 어루만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얘야, 일어나. 어서 이거 먹어. 그리고 숯불에 구운 떡과 물을 주시더래요. 그러니까 그걸 받아먹고 또 잤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또 시계를 보고, 얘가 또 배가 고플 시간이 됐구나 하고, 또 오셔서는, 어루만지면서 먹을 것을 주면서, 자, 이걸 먹고 어서 기운을 차려…… 네가 해야 할 길이 남았잖니…… 괜찮으니까 자, 어서 먹고 힘을 내보자…… 이렇게 다정하게 말씀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달리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러니까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이지요.


세상에서도 보면 상담자가 상담할 때, 부족한 상담자는 상대방 이야기를 듣고 난 다음에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라고 한답니다. 반면에 능숙한 상담자는 상대방의 말을 듣고 실의에 빠진 사람한테, “괜찮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을 해준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말을 한 사람은 이 말 한마디에 얼마나 큰 위로를 받는지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기력증에 빠지고 우울증에 빠질 때? 믿음이 좋은 사람은, 많이 배운 사람은 그런 일이 없어요? 아니에요. 내가 모자라서가 아니에요.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에요. 그런 사람들도 다 똑같이 그런 일을 겪습니다. 엘리야도 나 하나인줄 알았습니다. 다 죽고 나 혼자만 남아 있는 줄 알았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했어요? 예, 잠시 쉬었습니다. 잘 먹고 잘 지는 것이 최고입니다. 이게 바로 성경적인 치료 방법이에요. 그렇잖아요? 엘리야도 겪었던 일입니다. 괜찮습니다. 조금 있으면 지나갑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저 누워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체력이 떨어져가지요. 이 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을 간단히 세 가지로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가 식물을 예로 들어보면 알기 쉽습니다.

식물이 자라기 위해서는 첫째로 태양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를 회복시켜주시고,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를 치유해주시고,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를 일으켜주신다는 믿음, 이것이 우리의 믿음의 시작이요 믿음의 끝인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信仰の創始者であり完成者であるイエスから、目を離さないでいなさい。この方は、ご自分の前に置かれた喜びのために、辱めをものともせずに十字架を忍び、神の 御座の右に着座されたのです。

우리를 온전하게 해주시는 주님, 우리를 회복시켜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기쁠 때라도 슬플 때라도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최선이자 유일한 해답이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식물이 자라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영양분을 흡수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흡수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말씀을 흡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 없이 하나님만 바라본다는 것은 학생이 수업에 들어가서 귀를 막고 선생님 얼굴만 쳐다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한테 주목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집중력을 키우게 해줍니다. 그런데 중요한 선생님 말씀을 못 들어요. 그렇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성경 말씀, 하나님 말씀을 꾸준히 흡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이제 식물은 광합성을 합니다. 태양으로부터 얻은 힘과 뿌리로부터 빨아올린 영양분을 바탕으로 하여 광합성을 일으킵니다. 그래야지만 자신의 에너지가 되어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강렬한 태양과 풍부한 영양분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에너지로 만들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고급요리, 아무리 좋은 약을 먹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몸 안에서 소화되고 실질적으로 에너지로 변환하지 못한다면 이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냥 돌덩이나 삼키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바로 행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4절~17절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私の兄弟たち。だれかが自分には信仰があると言っても、その人に行いがないなら、何の役に立 つでしょうか。そのような信仰がその人を救う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
兄弟か姉妹に着る物がなく、毎日の食べ物にも事欠いているようなときに、
あなたがたのうちのだれかが、その人たちに、「安心して行きなさい。温まりなさい。満腹になるまで食べなさい」と言っても、からだに必要な物を与えなければ、何の役に 立つでしょう。
同じように、信仰も行いが伴わないなら、それだけでは死んだものです。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흡수해서 이를 우리의 에너지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행함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말씀을 흡수합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은혜를 나눕니다. 성경을 읽음으로써 은혜를 받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행함이 없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성경 말씀을 본다면서 꼬박꼬박 교회에 나간다면서, 십일조 감사헌금 바친다면서, 바깥에서 그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안 믿는 사람보다 더 야박하고 더 배려심도 관용도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이야말로 곧 죽은 믿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 됩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말씀을 흡수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행함 만으로도 부족합니다. 이 세 가지가 하나로 뭉쳐졌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 전까지는 나 혼자인 줄 알았는데,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주님의 말씀으로 행함을 하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7천 명이 보이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울증과 무기력증을 물리칠 수 있는 강한 믿음의 군대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힘드십니까. 외로우십니까. 괜찮습니다. 여러분이 부족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도 그랬다는데 어찌 여러분을 탓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우울증, 무기력증은 물리칠 수 있습니다. 믿음과 말씀과 행함으로 인하여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조금만 인내하면 모든 것이 지나갑니다.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스타나 연예인들을 보면 어떻습니까. 방탄소년단? 트와이스? 한국이나 일본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대단한 선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사람들 보면 방탄소년단은 2013년에 데뷔했고 트와이스가 데뷔한 것이 2015년이더라구요. 그러니까 지금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긴 하지만, 적어도 5~6년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52장 13절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見よ、わたしのしもべは栄える。彼は高められて上げられ、きわめて高くなる。

2~3년 뒤, 5~6년 뒤, 또는 7~8년 뒤, 세상 사람들은 새롭게 떠오르는 믿음의 용사, 하나님의 능력으로 떠오르는 믿음의 사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우리, 여기 앉아 계신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말씀을 흡수하여 이를 행함으로써 주님께서 예비하신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을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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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8회 새로운 시대의 시작
2019년 4월 28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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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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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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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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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새로운 시대의 시작” 新しい時代の始まり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간혹 어려움을 겪는 이유 중 하나가 갑작스러운 질문을 당할 때라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어떻게 생겼는지, 아담과 하와의 자녀는 아들 밖에 기록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이들이 늘어났는지, 하나님은 여러 가지 그림처럼 수염이 있는지 어떤지…… 이런 질문들을 진지하게 물어오면 가끔 당황스럽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은 어떻습니까.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민족 땅을 점령하라고 하시는 경우가 있는데, 그 때 보면 좀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명령을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점령하라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죽이라고 명령하실 때가 있습니다.

신명기 20장 16절~17절
“16.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17.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 하라”

あなたの神、主が相続地として与えようとしておられる次の民の町々では、息のある者を一人も生かしておいてはならない。
すなわち、ヒッタイト人、アモリ人、カナン人、ペリジ人、ヒビ人、エブス人は、あなたの神、主が命じられたとおり必ず聖絶しなければならない。


이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점령할 것인데, 그 때에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호흡 있는 자가 무엇입니까. 살아 있는 사람들, 즉 전쟁을 할 수 있는 성인 남성만이 아니라 그야말로 남녀노소, 여자와 어린 아이들까지도 모두 죽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구절은 여기만이 아닙니다.

민수기 21장에 보면 광야에서 바산 왕 옥을 멸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민수기 21장 33절~35절
33.그들이 돌이켜 바산 길로 올라가매 바산 왕 옥이 그의 백성을 다 거느리고 나와서 그들을 맞아 에드레이에서 싸우려 하는지라
3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와 그의 백성과 그의 땅을 네 손에 넘겼나니 너는 헤스본에 거주하던 아모리인의 왕 시혼에게 행한 것 같이 그에게도 행할지니라
35.이에 그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백성을 다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그의 땅을 점령하였더라

さらに彼らが向きを変えてバシャンへの道を上って行くと、バシャンの王オグが、エデレイで戦うために、そのすべての兵とともに彼らの方に出て来た。
主はモーセに言われた。「彼を恐れてはならない。わたしは彼とそのすべての兵とその地をあなたの手に与えた。あなたがヘシュボンに住んでいたアモリ人の王シホンに行ったように、彼にも行え。」
そこで彼らは、彼とその子たちとそのすべての兵を討ち、一人の生存者も残さなかった。こうして彼らはその地を占領した。


그리고 여리고를 점령할 때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여호수아 6장 21절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 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町のものをすべて、男も女も若者も年寄りも、また牛、羊、ろばも剣(つるぎ)の刃(は)で聖絶した。

가나안 점령 때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아말렉 족속 토벌을 명하시는데 그 명령이 다음과 같습니다.

사무엘상 15장 3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今、行ってアマレクを討ち、そのすべてのものを聖絶しなさい。容赦してはならない。男も女も、幼子も乳飲み子も、牛も羊も、らくだもろばも殺しなさい。』」

아니, 어른들은 그렇다고 쳐요. 그런데 젖 먹는 아이까지 죽이라는 것은 너무하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사랑하지 않으셨느냐. 젖 먹는 아이까지 죽이라고 하는 게 무슨 사랑의 하나님이냐. 그 사람들도 역시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 아니지 않느냐.

이렇게 하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여러분께 이렇게 묻는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어? 정말 그러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닌가 보네? 하고 마실 건가요?


여러분, 하나님이 피조물을 죽이라고 하신 명령이 너무하다고 느껴지시나요? 사실 성경에는 그보다도 더욱 잔인한 살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기록입니다. 그것도 가장 잔인한 처형방법으로 살해한 기록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목숨에 대한 가치를 생각해볼 때, 과연 인간의 목숨 몇 명 정도면 비슷할 수가 있을까요?

사실 이게 비교가 되나요? 가나안이나 이방민족 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살아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인류의 목숨들을 다 합친다 하더라도 어떻게 예수님 목숨에 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잠시 화제를 돌려보겠습니다.

예전에 어떤 신학교 교수님이 적은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자신의 수업 첫 시간에는 반드시 하는 일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일단 가지고 있는 성경을 꺼내라고 시킨대요. 그러면 신학생들이니까 대부분 성경을 가지고 있겠지요. 성경책에서 구약과 신약 사이를 보면 그 사이를 가르고 있는 종이가 있는데, 성경에서 구약과 신약은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똑 같은 것이다. 그러면서 이 종이를 찢으라고 시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당시 이 말씀을 듣고 음…그냥 뭐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만,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절을 봅니다.

히브리서 10장 1절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律法には来たるべき良きものの影はあっても、その実物はありません。ですから律法 は、年ごとに絶えず献げられる同じいけにえによって神に近づく人々を、完全に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

이 구절을 들어 흔히 하는 말이 신약이 실체라고 하면 구약은 그림자라고 합니다. 그림자와 실체는 사실 불가분의 관계라고 할 수가 있지요. 그래서 실체와 그림자, 즉 구약과 신약은 차이가 없다, 똑 같은 것이다……이와 같은 주장도 나름 일리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약과 신약이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기독교와 천주교는 물론이지만, 유대교, 이슬람교 같은 것을 보면 그 뿌리는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특히 유대교나 이슬람교 같은 경우는 신약을 믿지 않지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며, 성부 하나님의 독생자 되신 성자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구주시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죄 사함을 얻게 하셨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잘못이 시작한 것입니다.

지난 4월 21일 부활절에 스리랑카에서 동시다발 테러가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일본인 여성을 포함한 253명이 사망하고 약 500명이 부상을 입었다는 슬픈 소식이 전해져 왔습니다. 이후 조사에 의하면 그 배후에는 이슬람 과격단체가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여전히 구약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이방인에 대한 잔혹한 학살을 정당화시키는 사람들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비극을 낳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누구에 의해 죽으셨습니까. 다시 말해서 직접적으로 누가 예수님을 죽이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질문을 보면 <내가 죽였다>라고 고백하도록 교육을 시키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방금 말씀 드린 것처럼 우리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직접적으로 우리가 2천년 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게 한 것은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다시 묻겠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죽인 것은 누구입니까. 다시 말해서 2천년 전에 예수님을 죽인 진범은 누구냐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인가요? 바리새인인가요? 제사장인가요? 본디오 빌라도인가요? 로마 군인인가요?

성경은 이 점에 대해서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누가복음 22장 42절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父よ、みこころなら、この杯をわたしから取り去ってください。しかし、わたしの願いではなく、みこころがなりますように。」

예수님께서는 아셨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는 분은 바리새인도 아니요, 유다도 아니요, 로마 군인도 아닌, 바로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처참하게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마음이 괴로우셨겠습니까.

누가복음 22장 44절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イエスは苦しみもだえて、いよいよ切に祈られた。汗が血のしずくのように地に落ちた。〕

얼마나 괴로우셨으면 기도를 하는데 땀이 핏방울처럼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의 목숨은 역사상 전 인류의 목숨이라 하더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존귀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하나님에 의한 예수님의 십자가 살해사건이야말로 지금까지 그 어떤 학살보다도 더욱 처참한 대학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예수님은 왜 죽으셔야 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예수님을 죽이셔야 했습니까.

이유는 오직 하나 뿐입니다. 나 하나 살려보려고 그러신 것입니다. 이런 죄 많고 부족한 나 하나 살려보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그렇게 무참하게 죽도록 하신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15장 4절~6절
“4.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あなたがたのうちのだれかが羊を百匹持っていて、そのうちの一匹をなくしたら、その人は九十九匹を野に残して、いなくなった一匹 を見つけるまで捜し歩かないでしょうか。
見つけたら、喜んで羊を肩に担ぎ、
家に戻って、友だちや近所の人たちを呼び集め、『一緒に喜んでください。いなくなった羊を見つけましたから』と言うでしょう。

이 말씀은 상식을 벗어난 말씀입니다. 양 백마리 중에서 한 마리를 잃어버렸어요. 그러면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 만이라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왜 아흔아홉 마리는 멀쩡한데 한 마리는 길을 잃었을까요. 이건 어렵지 않습니다. 아흔아홉 마리는 영리했습니다. 길을 잃지 않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목자들의 말에 순종했습니다.

하지만 길을 잃은 양은 어땠을까요. 어쩌면 좀 모자랐을 지도 모릅니다. 걸음이 늘였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순종하기를 싫어하고 반항하려고 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영리하고 순종하는 아흔아홉 마리 양과, 좀 모자라고 반항하는 한 마리 양, 어느 쪽이 귀합니까. 예, 당연히 못난 한 마리보다 잘난 아흔아홉 마리가 더 귀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까. 잃어버린 한 마리를 포기했대요? 아니면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기는 찾아야 하는데, 아흔아홉 마리를 일단 집에 데려다 놓고 난 다음에 나머지 한 마리를 찾아 나섰대요?


아닙니다.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그냥 둔 채로 나머지 한 마리를 찾아 나섰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너무나도 다급했습니다. 시간이 없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절벽 아래로 떨어지거나 짐승들한테 먹힐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목자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나머지 한 마리를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제 더 이상 길을 잃지 않도록 아예 어깨에 짊어지고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한테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지금 빨리 가야 합니다. 그런데 차가 없어요. 택시를 잡아 타야 합니다. 그러면 그 때 택시 기본요금이 얼마고 교통비가 얼마고…… 그거 계산하고 계시겠습니까? 그냥 빨리 있는 돈 모아서 잡아 타야지요.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한테 갑자기 큰 돈이 필요하게 되었어요. 시간이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집이라도 팔고 땅이라도 팔아야지요. 그 때 시세를 따지고 그럴 새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었다면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 시간이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다급합니다. 때문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시게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이렇게 못나고 죄 많은 나 하나 살려보려고 그러신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차이가 없어요? 아니요.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 사이에 있는 종이는 떼어내지 마십시오. 그 종이는 예수님의 피 값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인류 최대의 대학살이요, 이는 다름 아닌 나 하나를 살리시기 위한 대학살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부활 이후로 학살은 사라졌습니다. 미움은 사랑으로, 정죄는 용서로, 멸망은 구원으로 이어지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나야말로 미움 받아 마땅하고, 나야 말로 용서 받을 수 없는, 나야 말로 죄로 말미암아 멸망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그런 나를 위해, 이런 못난 나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私たちすべてのために、ご自分の御子さえも惜しむことなく死に渡された神が、どうして、御子とともにすべてのものを、私たちに恵 んでくださらない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평생 동안 감사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빚을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의 목숨으로 인하여 모두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믿으시면 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죠. 이 얼마나 감사한 말씀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아. 이제 나는 구원 받았어. 나는 죄 사함 받았어. 그렇게 기뻐하고 끝인가요?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구약에서 피 비린 내 나는 학살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막을 내리고 이제 새로운 시대, 미움과 정죄와 멸망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우리 스스로 학살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우리 자신 이야기입니다. 아닌 것 같으신가요?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すると、王は彼らに答えま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が、これらのわたしの兄弟たち、それも最も小さい者たちの一人にしたことは、わたしにしたのです。』

그리고 마태복음 18장 6절도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18장 6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わたしを信じるこの小さい者たちの一人をつまずかせる者は、大きな石臼を首にかけられて、海の深みに沈められるほうがよいのです。

우리보다 잘난 사람, 우리보다 강한 사람한테 우리가 상처를 입힐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상처를 주고 우리가 괴롭힘을 주는 사람들은 모두가 우리보다 약한 사람들, 우리보다 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런 사람들을 실족하게 만드는 일, 그런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는 일은, 그 사람들을 무참하게 살해하는 일이나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뭐라고요? 예, 네 주위에 그렇게 힘이 없고 그렇게 약한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이십니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뒤돌아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참으로 끔찍할 때가 있습니다.

잠시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라고 하십니다.

시편 33:20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私たちのたましいは主を待ち望む。主は私たちの助け私たちの盾。

시편 115:9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イスラエルよ主に信頼せよ。主こそ助けまた盾。

시편 119:114
“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あなたは私の隠れ場私の盾。私はあなたのみことばを待ち望みます。

여러분, 방패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맞을 칼을 대신 맞아 주시고, 내가 맞을 총을 대신 맞아 주심으로 인하여 나를 보호하는 것, 그것이 방패 아니겠습니까.


이사야 53장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しかし、彼は私たちの背きのために刺され、私たちの咎のために砕かれたのだ。彼への懲らしめが私たちに平安をもたらし、その打ち傷のゆえに、私たちは癒やされた。

맞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으셨고, 우리를 대신해서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진정으로 우리의 방패 되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기뻐하기만 하며 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채찍으로 때린 적은 없나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한 적은 없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지금까지도 우리 이웃을 향해 셀 수 없이 많은 공격을 해왔는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한 방패이기도 하지만 우리 이웃을 위한 방패이기도 하십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 얼굴이 여기 저기 피 멍이 들고 상처가 나 있어요. 아니, 주님 왜 이렇게 상처가 많이 나셨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맞을 돌멩이나 칼이나 총알로부터 너를 지키기 위해서 내가 대신 맞았기 때문이다. 내가 너의 방패가 되어서 네가 맞을 돌멩이를 내가 먼저 맞고, 네가 맞을 칼이나 총알을 내가 먼저 맞았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서자 예수님 등뒤에도 수없이 많은 상처가 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왜 예수님은 등 뒤에까지 이렇게 상처가 많이 나 있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던진 돌멩이나 칼이나 총알로부터 네 이웃을 지키기 위해서 내가 대신 맞았기 때문이다. 내가 네 이웃의 방패가 되어서 네가 던진 돌멩이를 내가 먼저 맞고, 네가 공격한 칼이나 총알을 내가 먼저 맞았기 때문이란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쩌시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학살을 종식 시켜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모든 미움과 정죄라는 공격의 무기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일본은 이제 연호가 바뀐다고 합니다. 2019년 4월로 헤이세이가 끝나고 다음 달부터는 레이와가 시작 된다고 해서 새시대가 열린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지만 연호가 바뀐다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게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중요합니까.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가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열려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당장 지금부터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미움이 아닌 사랑으로, 정죄가 아닌 용서로 말미암아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25절
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キリストは自ら十字架の上で、私たちの罪をその身に負われた。それは、私たちが罪を離れ、義のために生きるため。その打ち傷のゆえに、あなたがたは癒やされた。
あなたがたは羊のようにさまよっていた。しかし今や、自分のたましいの牧者であり監督者である方のもとに帰った。

우리 모두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깨닫고, 길 잃은 우리를 찾아와 주신 예수님께 감사 드림으로 말미암아, 바로 이 순간부터 새로운 시대를 열고. 우리 이웃에게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보여주신 사랑을 널리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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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7회 부활하셨기 때문에
2019년 4월 21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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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 30절~31절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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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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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부할하셨기 때문에” 復活されたから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지난 주에는 블랙홀 뉴스가 계속 나오더니 지난 주 뉴스에서는 어떤 내용이 많이 나오던가요? 뭐,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세계적으로 공통된 내용은 대부분 프랑스 파리에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화재소식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현지시간 4월 15일 오후 6시 넘어서 발생한 이 화재로 그 성당의 상징인 청탑과 지붕이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이 건물은 1163년부터 세워지기 시작해서 완성된 것이 1345년이라고 하니까 182년 만에 세워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345년이라고 하면 지금으로부터 670년 이상 전의 건물이라고 하니 역사가 깊은 건물입니다. 우리 나라로 치면 국보급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건물이 불에 타고 청탑이 불길 때문에 넘어가는 모습을 많은 분들이 보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저도 참 많이 안타까웠습니다. 특히나 고난주간에 교회 건물이 불에 탄다는 것 자체가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세상에는 워낙 남 말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아마 이번 일에 대해서도 이런 저런 말을 하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20년 정도는 전의 일일 것 같습니다. 그 때 어떤 목사님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만, 그 분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이 세운 교회에 대해서 말이 나왔습니다.

그 분이 하시는 말에 의하면, 보통 한국에 보면 이렇게 교회가 있으면 건물 꼭대기에 십자가 탑을 세워놓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다른 사람들은 피뢰침을 세워놓는데 자기는 세워놓지 않는대요.

왜냐하면 만약에 교회가 번개를 맞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벌하셨다는 뜻인데, 자기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교회 십자가 탑에 피뢰침을 설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에 그 이웃에 사시는, 역시 개척교회 목사님이 계셨는데, 이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감명을 받으셨나 봐요. 그래서 그 이웃 목사님도 건물 옥상에 십자가 탑을 세워놓으시고는 피뢰침을 안 달아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왜요? 예, 믿음이 있으니까요.

피뢰침이라는 것은,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피뢰……사실 글자는 번개를 피한다고는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번개를 피한다기 보다는 번개로 인한 피해를 피한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피뢰침을 이렇게 세워두었는데, 번개가 거기에 맞으면, 말하자면 그 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흘러 보내기 때문에 그 밑에 있는 시설은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이웃 목사님이 세우신 십자가 탑에 번개가 떨어졌어요. 그게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그 십자가 탑이 쇠로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제게 말을 해 주신 목사님이 그 번개를 맞은 십자가 탑을 보니까는 완전히 무슨 엿가락처럼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웃 목사님이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자기 집에 왔었는데, 결국 아무런 위로의 말도 못해주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렇겠지요. 기껏 벼락은 하나님의 저주라고 얘기했었는데 그 분의 교회에 벼락이 떨어졌다는 것은 그 교회가 저주를 받았다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제가 그 목사님한테 물어봤지요. 그 이웃 목사님은 어떤 분이셨는지, 정말 무슨 나쁜 짓을 하신 분이셨는지 말이에요. 그랬더니 아니래요. 전혀 그렇지 않고 대단히 성실한 분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교회에 벼락이 떨어지니 자기도 해줄 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당시 성경에 대한 지식이 지금보다도 훨씬 많이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그렇구나 했습니다.

여러분께 하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교회 건물을 지을 때 높은 곳에 피뢰침을 달아야 합니까, 아니면 안 달아야 합니까.

조금 질문을 바꿔볼까요? 교회 건물을 지을 때에 피뢰침을 달면 믿음이 적은 것입니까, 아닙니까.

성경에 흥미로운 구절이 있습니다.

신명기 22장 8절을 봅니다.

신명기 22장 8절
“네가 새 집을 지을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

新しい家を建てるときは屋上に手すりを付けなさい。だれかがそこから落ちても、あなたの家が血の責任を負う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ある。

흥미롭지 않습니까? 아니, 믿음이 있으면 난간을 달 필요가 뭐가 있어요. 기도하면 사고가 안 일어나는데. 그렇잖아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굳이 이처럼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면 교회를 지을 때에 성경에는 난간을 만들라고 되어 있으니까 난간은 만들지만,

“새 교회를 세울 때에 피뢰침을 만들어 벼락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

新しい教会を建てるときは屋上に避雷針を付けなさい。

라는 말씀은 없으니까 피뢰침은 안 만드나요? 그럼 스프링클러는요? 소화전은요?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볼까요? 교회 가는 길입니다. 얼마나 거룩한 길이에요. 자동차 안전띠를 매야 합니까, 안 매도 됩니까. 안 매도 되지만 법이 매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매야 해요? 아니, 믿음이 있으면 법이 그렇게 정해져 있다 하더라도, 안전벨트를 안 해도 사고가 안 나도록 지켜주시는 하나님이 경찰 단속에도 안 걸리도록 지켜주실 것 아니에요?

사실 이런 건 정말 우스갯소리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와 같이 생각하는 분들, 그러니까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이는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하겠지요. 하나님께서 기껏 주신 지혜를 활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또한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불이 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가지고 곧 하나님의 저주다, 벌 받은 것이다, 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 예를 들어서 현대에 있어서 위대한 목사님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미국의 무디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1871년에 발생한 시카고 화재로 인해서 교회가 모두 불타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이 교회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인가요? 아닙니다. 오히려 이 일로 인해서 무디 목사님은 더 큰 교회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요.

다시 말해서 교회에 불이 났다고 해서 그 교회가 저주를 받았다는 둥 벌을 받았다는 둥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그러나 말입니다. 텔레비전 화면을 보니 안타까워 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 불 타는 건물을 향해 촛불을 들고 기도를 하거나 성가를 부르는 모습들도 보았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와 같은 모습을 보면서 저는 좀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습니다. 물론 그 건물은 카톨릭 성당이었기 때문에 그 분들의 생각은 우리와 다를 수가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 교회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규정되어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또한 대단히 흥미로운 곳이 있는데 어디냐 하면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했을 때의 장면입니다. 애초에 다윗이 성전을 세우려고 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말리셨죠.

그 이유가 역대상 22장 7절~10절에 나와 있습니다.

역대상 22장 7절~10절

7.다윗이 솔로몬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으나
8.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9.보라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그는 온순한 사람이라 내가 그로 주변 모든 대적에게서 평온을 얻게 하리라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그의 생전에 평안과 안일함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10.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지라 그는 내 아들이 되고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어 그 나라 왕위를 이스라엘 위에 굳게 세워 영원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니

ダビデはソロモンに言った。「わが子よ。私は、わが神、主の御名のために宮を建てる志を持ち続けてきた。
しかし、私に次のような主のことばがあった。『あなたは多くの血を流し、大きな戦いをしてきた。あなたがわたしの名のために家を建ててはならない。わたしの前に多くの血を地に流してきたからである。
見よ、あなたに一人の男の子が生まれる。彼は穏やかな人となり、わたしは周りのすべての敵から守って彼に安息を与える。彼の名がソロモンと呼ばれるのはそのためである。彼の世に、わたしはイスラエルに平和と平穏を与える。
彼がわたしの名のために家を建てる。彼はわたしの子となり、わたしは彼の父となる。わたしは彼の王座をイスラエルの上にとこしえに堅く立てる。』

그래서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왕이 된 다음에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건축을 시작한지 7년 뒤에 하나님의 성전이 완성되는데, 이 성전의 모습이 열왕기상 6장에 나옵니다만, 이는 대단히 크고 화려한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자, 이 성전이 완성한 다음에 솔로몬이 온 회중들을 모아 놓고 그 앞에서 기도를 드리는데, 이 때 솔로몬의 기도가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그 기도 중의 일부를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일단 열왕기상 8장 29절~30절까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29.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주의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30.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そして、この宮、すなわち『わたしの名をそこに置く』とあなたが言われたこの場所に、夜も昼も御目(おんめ)を開き、あなたのしもべがこの場所に向かってささげる祈りを聞いてください。
あなたのしもべとあなたの民イスラエルが、この場所に向かってささげる願いを聞いてください。あなたご自身が、あなたの御住まいの場所、天においてこれを聞いてください。聞いて、お赦しください。


여기서 보면 이 곳을 향하여(この場所に向かって)……라고 나오는데 <이 곳>(この場所)은 바로 자기가 세운 하나님의 성전이 되겠지요. 그런데 여기를 보면 29절부터 50절까지 <이 곳> 같은 말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31절에는 <이 성전에 있는 주의 제단 앞에서 맹세하거든>
この宮の中にある、あなたの祭壇の前に来て誓うなら、

33절에는 <이 성전에서 주께 기도하며 간구하거든>
この宮であなたに祈り願うなら、

35절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그들의 죄에서 떠나거든>
彼らがこの場所に向かって祈り、御名をほめたたえ、あなたが苦しませたことによって彼らがその罪から立ち返るなら、

38절 <이 성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
この宮に向かって両手を伸べ広げて祈るなら、どのような祈り、どのような願いであっても、

42절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この宮に向かって祈るなら、

여기까지 보면 뭐 그런가보다 하겠지만, 43절부터는 이제 솔로몬의 본색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43절에는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
私が建てたこの宮で御名が呼び求められ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知るでしょう。

44절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이 있는 쪽을 향하여 여호와께 기도하거든>
私が御名のために建てた宮に向かって主に祈るなら、


48절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 있는 쪽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私が御名のために建てたこの宮に向かって、あなたに祈るなら、

여러분, 이 기도를 들으시면 어떠십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도 같으신가요? 이 기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 있는 그 앞에서 드린 기도인데, 아무리 봐도 무슨 새로운 교회를 지어놓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는 어설픈 담임목사님 기도로 밖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공적, 자신의 공로를 사람들한테 큰 소리로 알리는 기도, 자화자찬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자기를 높이는 기도지 어디가 하나님을 높이는 기도입니까.
그 증거로 이 기도에 대한 응답이 열광기상 9장에 나와 있습니다.

특히 열왕기상 9장 6절~9절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6.만일 너희나 너희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경배하면
7.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며
8.이 성전이 높을지라도 지나가는 자마다 놀라며 비웃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성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대답하기를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따라가서 그를 경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もし、あなたがたとあなたがたの子孫が、わたしに背を向けて離れ、あなたがたの前に置いたわたしの命令とわたしの掟を守らずに、行ってほかの神々に仕え、それを拝むなら、
わたしは彼らに与えた地の面(おもて)からイスラエルを断ち切り、わたしがわたしの名のために聖別した宮をわたしの前から投げ捨てる。イスラエルは、すべての民の間で物笑いの種となり、嘲(あざけ)りの的となる。
この宮は廃墟となり、そのそばを通り過ぎる者はみな驚き恐れてささやき、『何のために、主はこの地とこの宮に、このような仕打ちをされたのだろう』と言う。
人々は、『彼らは、エジプトの地から自分たちの先祖を導き出した彼らの神、主を捨ててほかの神々に頼 り、それを拝み、それに仕えた。そのため主はこのすべてのわざわいを彼らに下されたのだ』と言う。」

제가 솔로몬이었으면 좀 민망했을 것 같습니다. 그래 솔로몬아 잘 했다. 사람들이 네가 지은 성전을 향해서 기도를 하면 내가 들어줄게……라고는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성전이 헐릴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참 좀 재수없는 (縁起でもない)이야기가 아닐 수 없지요.

하지만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솔로몬이 사망한 다음 솔로몬의 불순종한 죄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리고 결국은 바벨론에 의해 솔로몬이 세운 성전은 흔적도 없이 파괴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진정한 성전이란 무엇입니까. 정말 그야말로 솔로몬 성전이나 노트르담 대성당처럼 화려한 건물에 우아한 예술품이나 장식들이 있는 곳인가요? 그런 것은 사실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이사야 56장 7절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わたしの聖なる山に来 させて、わたしの祈りの家で彼らを楽しませる。彼らの全焼のささげ物やいけにえは、わたしの祭壇の上で受け入れられる。なぜならわたしの家は、あらゆる民の祈りの家と呼ばれるからだ。

골로새서 1장 18절~20절
“18.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また、御子はそのからだである教会のかしらです。御子は初めであり、死者の中から最初に生まれた方です。こうして、すべてのことにおいて第一の者となられました。
なぜなら神は、ご自分の満ち満ちたものをすべて御子のうちに宿らせ、
その十字架の血によって平和をもたらし、御子によって、御子のために万物を和解させること、すなわち、地にあるものも天にあるものも、御子によって和解させることを良しとし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

교회에 있어서 화려한 건물이나 우아한 예술품, 장식 같은 것은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 교회에 있는 이 벽화 같은 것은 이곳이 아직 미술관일 때에 바티칸에 있는 카톨릭 시스티나 성당을 본 따서 만들었기 때문에 있는 것이지, 이런 그림이나 벽화 같은 것과 그 교회의 가치는 전혀 별개의 문제인 것입니다.


진정한 교회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이요, 예수님께서 머리 되신 곳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마태복음 18장 19절~20절도 봅니다.

마태복음 18장 19절~20절
19.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まことに、もう一度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のうちの二人が、どんなことでも地上で心を一つにして祈るなら、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はそれをかなえてくださいます。
二人か三人がわたしの名において集まっているところには、わたしもその中にいるのです。」

이 곳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라고 할 수 있겠지요. 모여서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께 기도를 드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는 곳, 그 곳이 진정한 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이 머리 되신 곳이 교회일까요.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길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으시길래 예수님을 구주라고 우리가 여기는 것입니까.

이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입니다. 이 질문을 던지면 교회에 다니시는 많은 성도님들이 <십자가>를 말씀하실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저도 항상 이 자리에서 말씀을 드리고 있듯이,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증명되었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으셨고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걸로 된 건가요? 이걸로 이제 다 완성인가요? 아닙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여기서 끝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단순히 우리를 대신해서 벌을 받아주신 것 뿐입니다. 그러면 된 거 아냐? 라고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더 중요한 것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이것으로 인해서 죄 사함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용서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들어가려고 입장료를 냈어요. 그러면 들어갈 수 있나요? 예를 들어서 동경 디즈니랜드 하루 이용권이 7,400엔인가 하는 것 같은데, 그 돈만 내면 들어갈 수가 있어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뭐가 필요하냐 하면, 그렇습니다. 반드시 입장권을 받아야 합니다. 입장권을 받지 못한다면 7,400엔이 아니라 몇십만엔을 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5장 30절~31절
“30.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私たちの父祖の神は、あなたがたが木にかけて殺したイエスを、よみがえらせました。
神は、イスラエルを悔い改めさせ、罪の赦しを与えるために、このイエスを導き手、また救い主として、ご自分の右に上げられました。

부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아주셨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다 하더라도 우리의 죄가 용서받지 못했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로는 헛수고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용서를 받았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형벌을 받으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용서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부활인 것입니다. 부활이야말로 우리가 천국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こういうわけで、いつまでも残るのは信仰と希望と愛、これら三つです。その中で一番すぐれているのは愛です。

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부활 없이 믿음 없고, 믿음 없이 소망 없고, 소망이 없으면 사랑도 소용이 없습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이요, 주님 믿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요, 소망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이해서 우리를 위해 채찍에 맞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감사하고,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다 해결해주신 주님을 찬양하며,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머리 되신 교회를 섬기면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림으로 말미암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갖고, 주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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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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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6회 모든 것이 주님의 사랑
2019년 4월 1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23장 11절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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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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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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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모든 것이 주님의 사랑” 全てが主の愛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 뉴스에 보니, 혹시 여러분도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우주에서 최초로 블랙홀을 사진 찍는 데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이야기가 한 번 우주로 나가버리면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 상식이 아니게 됩니다.

하루라고 하는 것은 지구가 이렇게 혼자서 한 번 도는 것이고, 1년은 지구가 태양 주변을 한 바퀴 도는 것인데, 지구는 24시간 걸려서 혼자서 한 바퀴 돌고, 1년 걸려서 태양 주변을 한 바퀴 돕니다. 당연히 1년에 비해 하루는 짧죠. 365분의 1이니까요.

하지만 이는 당연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태양계 거의 끝 쪽에 있는 천왕성을 보면, 1년과 하루가 똑같다고 합니다. 태양을 한 바퀴 도는데 84년이 걸리지만 그 중 절반인 42년은 낮만 계속 되고 나머지 42년은 계속 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17시간마다 남극과 북극이 서로 바뀌고 있다고 해요.

좀 황당하지요? 이런 걸 지구와 비교를 한다고 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입니다.

이번에 최초로 사진 촬영에 성공했다고 하는 블랙홀이라고 하는 것은, 아시는 분들도 많으시겠지만, 보통 별 같은 것은 고체라고 할 수 있지요? 그게 돌이거나 아니면 얼음덩어리인 경우도 있고요, 또는 표면이 대부분 가스 형태로 되어 있는 별들도 있습니다. 태양계에서 목성 같은 경우를 보면 크기는 대단히 크지만 그 표면은 대부분 두꺼운 가스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돌이든 얼음이든, 하물며 가스이든 간에 이는 모두 우리 육안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블랙홀……번역하면 검은 구멍…이라는 뜻인데 이는 별은 존재하지 않고 무지무지 강한 중력만 있다고 해요. 그래서 그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빨아들인다고 합니다. 얼마나 그 빨아들이는 힘이 강하냐 하면 주변에 있는 빛까지도 흡수한다고 해요. 그러니까 그 주변에는 빛이 없기 때문에 그 부분은 시커멓게 보이는 것이지요.

우주를 보면 여러 기준도 우리가 사는 지구와 많이 다릅니다. 쉬운 예로 본다면 예를 들어서 우주에는 위 아래가 없지요? 그건 지구에서 살 때에나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동서남북도 없고 그저 방향만 존재할 뿐입니다.

우주에서 일반적으로 거리를 말할 때에는 광년……이라는 말이 있지요? 1광년이라고 하는 것은 빛으로 가는 데에 1년이나 걸리는 거리입니다. 빛이 초속, 그러니까 1초에 어느 정도를 가냐 하면 30만 킬로를 가요. 30만 킬로……라고 하면 무슨 서울 부산 간이 아닙니다. 동경에서 오키나와까지도 아니에요. 지구 전체 둘레가 4만 킬로미터이니까 1초에 30만 킬로를 간다는 것은 7바퀴는 28만 킬로, 거기에 절반 정도를 더 도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게 1초인데 이 속도로 1년을 가야 한다는 거리입니다.

그러면 1광년을 킬로로 바꾸면 그 거리가 얼마나 되냐 하면 약 9조 4600억 킬로라고 합니다. 이게 1광년이에요. 근데 1광년 2광년…… 이 정도는 우주 차원으로 본다면 대단히 짧은 거리에 속합니다. 간단하게 말씀 드리자면, 우리 지구가 속해 있는 은하게 지름은 10만광년이고, 두께는 15000광년이라고 합니다. 대충 상상이 가시나요? 아니요. 안 갑니다. 어려워요.

이번에 촬영에 성공했다고 하는 블랙홀. 어디에 있는 것이냐 하면 지구에서 약 5500만 광년이라고 합니다. 1광년이 9조 4600억 킬로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러면 5500만 광년은 몇 킬로가 되는지, 머리가 좋으신 분들께서는 한 번 계산해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ㅎㅎ


숫자로 보면 정말 상상도 안 가는 일이지만, 그나마 좀 더……아주 쪼끔 더 이해가 갈 수 있게 말씀 드린다면, 빛의 속도로 5500만 광년 거리에 떨어져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그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거기서 빛이 우리가 사는 지구까지 도달했기 때문이지요. 이걸 거꾸로 계산해 본다면, 우리가 보고 있는 그 블랙홀 사진은 지금으로부터 5500만년 전의 빛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뭐,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하더라도 잘 감이 안 잡히는 건 어쩔 수가 없겠지요. 어찌 되었거나 놀라운 발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 발견에 있어서 저는 조금 더 놀라운 발견을 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꽤 많은 사람들이 이 발견을 놀라워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뭐, 제가 지금 말씀 드린 것처럼, 놀라운 발견이고 그리고 사진까지 찍었다고 하니 놀라운 성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예를 들어서 페이스북에 보니까, 꽤 많은 사람들, 그러니까 무슨 이과 쪽 사람들이 아닌 분들까지도 와 너무 신기하다 대단하다 놀랍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사람들이 그렇게 놀라워 하는 모습이 더 신기했습니다. 단순히 말하자면 이거죠.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인데? 하는 뭐 그 정도라고 할까요? 솔직히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한테는 그걸 사진으로 찍었거나 아니거나 우리 인생에 있어서는 별로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이고 홍 목사 무식한 소리 하네……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니, 저도 고등학교 때까지만 하더라도 물리학 쪽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아이작 뉴튼에 의해 정립된 상대성원리와 광속불변의 법칙이 중심개념으로 완성된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 이번 블랙홀 개념이 등장하는 일반상대성이론, 광행차현상이다, 우라시마 효과다, 또는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스티븐 호킹 박사가 주장했던 시간순서보호가설 같은 것에도, 물론 깊이 공부를 할 기회는 없었지만 그래도 관심을 가졌던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렇게 놀라워하는 것을 보니 저로서는 좀 적지 않게 의아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요? 아까 말씀 드렸던 것처럼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인데 그렇게 신기해해?”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신기하다면서 감탄했지만 거기서 끝이에요.

이건 글쎄요……로케트 발사를 보고 와~ 멋지다~ 놀랍다~ 하고 끝나는 정도? 아니, 신기해하고 놀랍다고 생각했으면 좀 더 깊이 알아보려고 한다든지, 뭔가 조 더 한 발자국 나아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렇게 신기해했으면서 신문 기사 하나 링크 해놓고 끝인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좀 가끔 잘못 생각하고 계신 것이 있는데, 오늘은 이 시점에서 두 가지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볼까 합니다.

먼저 첫 번째. 과학의 반대가 신학? 가끔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 것 같습니다만,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과학과 신학 또는 과학과 성경……이라는 개념은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똑 같은 개념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과학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성경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준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둘째로, 가끔 보면 “나는 성경을 믿지 않아. 나는 과학을 믿어” 라고 하는 분들이 계신데, “과학을 믿는다”는 것은 절대적인 것을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라는 것은 변한다”는 것을 믿는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지구의 기원이라고 하는 것도 20년 전 기술로 측정하는 것과 20년 후에 측정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러면 과학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 이 둘 모두를 믿는다는 것이지요. 과학을 믿는다는 것은 과학이 발전한다는 것도 믿는다는 것이고, 이에 따라 결과가 바뀔 수 있다는 것도 믿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또 믿음이 있다는 분들을 보면 아~ 이런 무슨 과학에 대한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분들도 계세요. 아닙니다. 서로 얼마나 깊은 연관성이 있는지 모릅니다. 저도 뭐, 글쎄요. 우주에 가보고 싶은 생각까지는 없더라도, 이런 뉴스는 대단히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버리면 이는 그야말로 가십거리. 무슨 연예인이 결혼한다거나 하는 그 정도의 가치밖에 없다고 할 수 있겠지요.

예전에 학생시절 제가 아는 형이 있었는데, 이 분이 중학생 과외 아르바이트를 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학생이 좀 공부에 흥미가 없는 학생이었나봐요. 그래서 특히 영어를 못했다고 하는데……그 학생이 중학생이었다고 하는데, 수준이 정말 대단했다고 합니다. 이건 정말 실화인데 영어로 쥐가 뭐냐……라고 물으면, 쥐가 영어로 뭐예요? 예, <마우스>죠? 그런데 이 학생. 야, 영어로 쥐가 뭐야……라고 하면 <미키>라고 한대요. 그리고 오리가 영어로는 <덕>인데, 이 아이한테 야, 오리가 영어로 뭐야……라고 하면……뭐라고 대답해요? 예, <도날드>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형이 하는 말이 더 재미있습니다. 조금만 더 말하면 될 텐데. 쥐를 물어볼 때 <미키>가 아니라 <마우스>까지 말하지. 오리도 <도날드>가 아니라 <덕>까지 좀 말하지 거기서 멈춰버린다고 했던 이야기가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정말 이 형 말마따나 조금만 더 가면 될 것인데, 이런 우주 관련 뉴스를 보고 그냥 거기서 와 신기해 ……라고 하고 멈춰버리는 것을 보면 대단히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야겠지요. 한 발 더 나아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것을 누가 만들었느냐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걸 어떻게 알아요? 성경에 적혀 있지요. 우리는 성경을 믿습니다.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니고 학위를 몇 개 씩이나 받았다 하더라도 우리의 신앙이 한 순간이라도 성경을 떠나게 된다면 이는 믿음이 아니지요.

천지를 창조하시는 과정은 창세기에 등장합니다만 오늘은 욥기를 함께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욥기 3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38장을 전부 읽기는 내용이 길기 때문에 몇몇 구절을 발췌해서 읽어 드리겠습니다.

욥기 38장입니다.

4.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6.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8.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9.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옷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10.한계를 정하여 문빗장을 지르고
11.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


16.네가 바다의 샘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 밑으로 걸어 다녀 보았느냐

18.땅의 너비를 네가 측량할 수 있느냐 네가 그 모든 것들을 다 알거든 말할지니라

24.광명이 어느 길로 뻗치며 동풍이 어느 길로 땅에 흩어지느냐

26.누가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며
27.황무하고 황폐한 토지를 흡족하게 하여 연한 풀이 돋아나게 하였느냐
28.비에게 아비가 있느냐 이슬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29.얼음은 누구의 태에서 났느냐 공중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32.너는 별자리들을 각각 제 때에 이끌어 낼 수 있으며 북두성을 다른 별들에게로 이끌어 갈 수 있겠느냐
33.네가 하늘의 궤도를 아느냐 하늘로 하여금 그 법칙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

35.네가 번개를 보내어 가게 하되 번개가 네게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하게 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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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욥기 38장과 39장을 읽어보면 창세기를 읽을 때와는 다른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이렇게 말씀으로 짠~ 하고 간단하게 만드신 것 같지만, 이 욥기를 읽으면 정말 하나님께서는 하나하나 세밀하게 계획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정말 우리는 아는 것이 많지가 않습니다. 이 욥기는 적어도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이니까 기원전에 적힌 글입니다만, 이와 같은 똑 같은 질문을 21세기에 사는 우리들에게 하셨다면, 지금 우리는 시원하게 대답할 수가 있을까요?

예를 들어서 38장 18절
“땅의 너비를 네가 측량할 수 있느냐 네가 그 모든 것들을 다 알거든 말할지니라”

038:18

그래. 이 때는 알지 못했지만 우리는 이제 알 수 있다. 예를 들어서 군마 현 면적도 낼 수 있고, 한국이나 일본 면적도 과학적으로 정밀하게 잴 수 있지 않는가….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이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좀 어려운 말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카오스이론……혼돈이론에는 이런 말이 나와요. 어떤 지형의 둘레 길이는 무한대다. 즉 끝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서 제주도 크기, 오키나와 섬 둘레 길이를 측정할 때, 쉽게 말해서 1미터 짜리 자로 재는 경우와 10센티짜리 자로 재는 것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경우를 보면 1미터짜리 자로 재는 것보다 10센티 짜리 자로 재는 것이 더 세부적으로 잴 수 있겠죠? 그러면 길이가 어느 쪽이 더 길에 나올까요? 예, 짧은 자가 구석구석 더 잘 잴 수 있으니까 10센티짜리 자로 쟀을 때가 더 길어지겠죠?


그러면 1센티 짜리로 재면 섬 둘레 길이는 어떻게 됩니까. 예 둘레 길이는 더 길어질 것이고, 이런 식으로 과학이 발전하고 정밀도가 늘어나면 그 길이는 점점 더 길어지기 때문에 결국 섬 둘레 길이는 무한대다……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우리는 유리 컵 안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그것이 어떻게 퍼질 지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5500만 광년 멀리 떨어진 블랙홀 사진을 찍으면 뭘 합니까. 제주도나 오키나와 섬 둘레 길이를 재는 것은 고사하고, 물컵 안에 떨어지는 잉크 한 방울 예측도 못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까지 알면 우리는 이제 많이 알 수 있는 것인가요? 아니요. 아직 더 남았습니다. 여기까지 알고 멈춰버린다면 그야말로 <쥐가 영어로 뭐야>라는 질문에 <믹키~>라고 대답하고 마는 꼴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법칙과 삼라만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게 중요한 것이죠.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는 이를 모두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관리하도록 맡기신 것이지요.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예, 그렇습니다. 이 모두를 우리를 위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만들어 놓으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니지요. 우리를 그냥 만들어놓고 일만 맡긴 다음에 나중에는 될 대로 되라……라고 내버려두신 것이 아닙니다.

옛날에는 연좌제……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본인이 잘못하면 그 죄를 본인만이 아니라 가족 친지들한테도 묻는 제도였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무슨 무거운 죄를 지으면 삼대를 멸한다거나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서 이 연좌제를 금하고 계십니다.

신명기 24장 16절
“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父が子のために殺されてはならない。子が父のために殺されてはならない。人が殺されるのは自分の罪過のゆえでなければならない。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 자신은 벌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시게 하심으로 인해서 우리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가 있습니까.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잔인하다. 자기가 만들어놓은 사람들이 죄를 지으니까 자기 아들을 죽으라고 내놓았다는 것입니다.

잔인하다? 예, 잔인하지요. 너무나도 잔인합니다. 어떻게 이 얼마나 부족한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래. 내 아들이 너희의 죄를 다 해결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이제 죄가 없다. 내 아들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올 수가 있게 되었다고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が道であり、真理であり、いのちなのです。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だれも父のみもとに行くことはできません。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하는 방법은 다른 길이 없습니다. 다른 우상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노력으로도 우리의 선행으로도 할 수 없습니다. 제아무리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라 하더라도 무엇 하나 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도 하나님의 말 못할 놀라운 사랑을 말씀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수아 23장 11절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だからあなたがたは自分自身に十分に気をつけて、あなたが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이번 주는 이제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떠올리며 아이구 쯧쯧쯧 하고 동정하는 날이 아닙니다. 5500만광년 떨어진 블랙홀을 볼 때에도, 그리고 바로 길가에 펴 있는 꽃 한송이를 볼 때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주신 은혜와 사랑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믹키>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우리를 위해 맞아주신 채찍과 우리를 위해 짊어지신 십자가를 떠올리며,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더욱 찬양하고 더욱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을 통해서, 모든 것이 주님의 사랑임을 깨닫고, 다음 주 부활절을 놀라운 기쁨으로 맞이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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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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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5회 옳은 길
2019년 4월 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3장 2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한국어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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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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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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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옳은 길” 正しい道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에 광고 말씀을 드린 것처럼 저희 집사람이 잠시 한국을 방문을 하게 되어서, 지난 목요일에 생전 처음으로 이바라키 공항이라는 곳에 다녀왔습니다.

이바라키 공항이라고 하니 당연히 이바라키 현에 있는 공항입니다만, 지금까지는 그냥 하네다나 나리타를 이용했었는데, 조금이라도 저렴한 항공편을 알아보려 하니까 이바라키 공항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이번에는 처음으로 그곳을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뭐, 주지하시는 바와 갈이 일본은 고속도로 요금이 좀 비싸잖아요. 그래서 뭐, 이른 시간도 아니고 해서 이번에도 여느 때와 같이 일반도로로 갔다 왔습니다. 편도 3시간 반 정도 걸리더라구요.

도중까지는 꽤 괜찮았습니다. 여기 군마에서 보자면 계속 동쪽으로 가는 것이죠. 군마에서 토치기로 해서 이바라키로 들어서기까지는 제법 넓은 길로 갈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이바라키에서 좀 가다보니까 길이 심상치가 않아요. 꽤 좁더라구요. 그래도 뭐 이렇게 가다가 보면 넓어지겠지 했는데, 왠걸……좀 가다보니까 시골 주택가 꼬불꼬불한 길을 지나고 있어요. 가끔 보면 저쪽에서 오는 차와 서로 닿을 수도 있을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조심조심 마주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뭐 그냥 가고 있는데, 옆에서 집사람이 좀 불안해하는 것 갈더라구요. 제가 지금 어디를 가고 있었다구요? 예, 전철 역도 아니요, 고속버스 터미널도 아니요, 공항입니다. 그런데 지금 차는 어디를 지나고 있냐 하면 정말 그야말로 시골 농촌 주택가 골목길들을 계속 지나고 있었어요.

집사람은 제게 물어봅니다. 이 길이 맞냬요. 그래서 저는 맞다고 괜찮다고 하지요. 그렇다고 제가 그 길을 가본 적이 있어요? 아니요. 처음 갑니다. 정말 제가 보더라도 불안해 할만 해요.

그 길이 공항은 고사하고 무슨 산속 온천 휴양지에 가는 길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합니까. 저는 그래도 자신 있게 갔습니다. ……솔직히 저도 좀 불안하기는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멈춰 서서 우물쭈물할 수가 없었지요. 왜 제가 앞으로 갈 수 있었을까요. 이유야 간단하죠. 나비가 가라고 하니까 그대로 간 것입니다.

정말 어느 정도냐 하면요. 나비에 보면 목적지 도착 시간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10분 뒤면 도착한다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전혀 공항이 나올 것 같지가 않아요.

하지만 어땠을까요. 예, 참 놀랍게도 공항이 나오더라구요. 그런 곳에 공항이 있을 줄이야 정말 몰랐습니다. ㅎㅎ

우리 성경을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8장 6절입니다.

로마서 8장 6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肉の思いは死ですが、御霊の思いはいのちと平安です。

아멘. 그렇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제가 지난 번에 이바라키 공항에 가는 길을 예로 본다고 한다면 육신의 생각은 제가 운전하면서 앞을 바라보았을 때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앞을 바라보았을 때 간판이나 표지판이 큼지막하게 있으면 참 감사하겠습니다만, 이 공항에 갈 때를 보니까는요, 거의 도착할 때까지 공항 간판이 안 나오더라구요. 그런 상황에서 아, 이쪽 길이 왠지 좀 넓으니까, 저쪽 길이 왠지 좀 예쁜 꽃도 피었으니까, 이쪽 길이 왠지 공항으로 이어지는 길처럼 생겼으니까…….

만약에 이런 식으로 길을 선택했다면 저는 아마도 아직까지 공항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리고 또 집으로도 못 돌아오고, 아마 이 시간까지 저기 이바라키나 토치기현 산속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무사히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 나비를 보았습니다. 거기서 길을 알려주어요. 실제로 육안으로 앞을 보면 아무 것도 안 보이지만, 나비를 보면 올바른 길 쪽으로 줄이 쭈욱 쳐져 있습니다. 그 줄 따라서 가면 되는 거예요.

어디 그 뿐인가요. 왼쪽으로 꺾을 일이 있으면 한 번만 말하지 않습니다. 약 300미터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집니다. 조금 더 가면 이제 곧 왼쪽으로 꺾어집니다. 사거리에 가면 왼쪽입니다……. 이처럼 몇 번씩 말해줍니다. 잘못 갈래야 갈 수가 없어요. 그리고 또 만에 하나 골목을 놓치잖아요? 그럼 또 새로운 길을 찾아서 알려줍니다. 정말 다른 길이 없으면 유턴 하라고 난리에요.

그런데 만약에 그런 나비가 시끄럽다고 꺼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어디 운전 한 두 번 하냐……하고 스위치를 꺼버리면, 예, 그렇습니다. 영영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나비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이 성경,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창세기 13장 9절~11절을 봅니다.
“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0.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1.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全地はあなたの前にあるではないか。私から別れて行ってくれないか。あなたが左なら、私は右に行こう。あなたが右なら、私は左に行こう。」
ロトが目を上げてヨルダンの低地全体を見渡すと、主がソドムとゴモラを滅 ぼされる前であったので、その地はツォアルに至るまで、主の園のように、またエジプトの地のように、どこもよく潤っていた。
ロトは、自分のためにヨルダンの低地全体を選んだ。そしてロトは東へ移動した。こうして彼らは互いに別れた。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이 서로 헤어질 때가 왔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양보를 하지요.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가라.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내가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내가 왼쪽으로 가겠다…….이렇게 아브라함은 말합니다.

그런데 롯이 이렇게 앞을 보니까 정말 거기가 온 땅에 물이 넉넉한데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아더라…. 이는 정말 딱 보기에 땅이 윤택하고 풍요로워 보였다……제가 앞서 말씀 드린 식으로 말하자면 정말 딱 보이게 공항으로 연결된 길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가 어디래요? 예, 바로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보면 가끔 실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정말 믿음이 좋고 충성된 사람들이 많이 나오죠. 그런 분들을 존경하고 본받는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가끔 보면 잘못을 저지르거나, 오늘 이 롯처럼 잘못 판단하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그리 옳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잘못 판단한 경우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는 경우가 적지 않게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 인간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절대로 반복하지 않는다……라고 하면 우리는 옛 사람들이 저지른 실수를 참고할 필요가 없지요. 그렇잖아요. 하지만 만약에 그랬다고 한다면 어쩌면 성경 중 대부분은 없어졌을 지도 모릅니다. 없어도 알아서 잘 하는데 굳이 두꺼운 책을 들고 다닐 필요가 뭐가 있어요.

하지만 우리 인간이 어떻습니까. 진화요? 진화는 무슨. 옛날에 했던 일들, 특히나 미련한 일들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오히려 옛 사람들의 실수는 우리에게 대단히 많은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이끌려서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 이제 가나안 땅 바로 직전까지 왔던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은 이제 열두 명의 정탐꾼을 골라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합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었어요. 무려 40일 동안, 그것도 열두 명을 시켜서 정탐을 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자세히 보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중 열 명은 뭐라고 하냐 하면 대단히 절망적인 말을 합니다. 우리는 안 된대요.


민수기 13장 28절
“28.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ただ、その地に住む民は力が強く、その町々は城壁があって非常に大きく、そのうえ、そこでアナクの子孫を見ました。

민수기 13장 31절~33절
“31.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32.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しかし、彼と一緒に上って行った者たちは言った。「あの民のところには攻め上れない。あの民は私たちより強い。」
彼らは偵察して来 た地について、イスラエルの子らに悪く言いふらして言った。「私たちが行き巡って偵察した地は、そこに住む者を食い尽くす地で、そこで見た民はみな、背の高い者たちだ。
私たちは、そこでネフィリムを、ネフィリムの末裔アナク人を見た。私たちの目には自分たちがバッタのように見えたし、彼らの目にもそう見えただろう。」

쉽게 말하면 뭐라는 거예요? 우리는 가나안 땅을 점령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이것이 정탐꾼 12명 중에서 10명의 보고였습니다. 딱 2명, 갈렙과 여호수아는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자, 10대 2에요. 7대 5도 아닙니다. 8대 4도 아니에요. 10대 2예요. 어느 쪽을 따르겠습니까.


10명은 점령할 수 없다고 합니다. 왜요? 육의 눈으로 보았을 때 우리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말을 듣고 이스라엘 민족들은 어쩌자고 합니까.

민수기 14장 4절
"4.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そして互いに言った。「さあ、われわれは、かしらを一人立ててエジプトに帰ろう。」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그게 제일 현명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우리가 뻔히 질 전쟁을 한다는 것은 죽으러 간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말하자면 여기서 개죽음 당할 바에야 차라리 모세가 아닌 새로운 리더를 뽑아서 애굽으로 돌아가서, 뭐 노예로 사는 게 여기서 이대로 죽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죠. 이해가 안 가요? 아니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땠습니까.

민수기 14장 6절~8절
“6.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7.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すると、その地を偵察して来た者のうち、ヌンの子ヨシュアとエフンネの子カレブが、自分たちの衣を引き裂き、
イスラエルの全会衆に向かって次のように言った。「私たちが巡り歩いて偵察した地は、すばらしく、良い地だった。
もし主が私たちを喜んでおられるなら、私たちをあの地に導き入れ、それを私たちに下さる。あの地は乳と蜜が流れる地だ。

앞서 열 명은 자신들의 판단을 믿었습니다. 말하자면 나비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것입니다.

출애굽기 3장 8절
8.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わたしが下って来 たのは、エジプトの手から彼らを救い出し、その地から、広く良い地、乳と蜜の流れる地に、カナン人、ヒッタイト人、アモリ人、ペリジ人、ヒビ人、エブス人のいる場所に、彼らを導き上るためである。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아름다운 땅 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 말씀을 그들은 믿었던 것입니다.

지금 눈앞에 표지판이 있건 없건, 지금 길이 포장되어 있건 비포장도로건, 지금 길이 넓건 좁건 간에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그 길이 옳은 길이냐 아니냐, 그것 하나입니다.

옳은 길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에요. 딱 하나.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이냐 아니냐. 주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3장 24절
24.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狭い門から入るように努めなさい。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が、多くの人が、入ろうとしても入れなくなるからです。

그 옳은 길, 주님께서 인도해주시는 길을 오늘 말씀에서는 <좁은 문>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이 말씀을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가난해야 한다. 맞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가난해야지 믿음이 좋은 것이요, 돈이 많으면 믿음이 안 좋은 건가요?

이를 바꾸어 말하자면, <이바라키 공항에 가기 위해서는 좁은 길로만 가야 한다> 이게 맞습니까? 아니에요. 하지만 예수님을 잘 믿으려고 한다면 가난해야 한다는 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가난해야 하고 고생해야 하고, 그러면 나중에 죽어서 축복 받는다? 그럼 이 세상에서는요?

이름을 말씀 드리면 알 만한 일본 신학자가 있습니다만, 저는 이 분의 책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 무료로 공개된 책이 있길래 좀 앞을 읽어보았더니 이렇게 되어 있더라구요?

마태복음 5장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心の貧しい者は幸いです。天の御国はその人たちのものだからです。

이 말씀을 해석하기를, 성경은 내세에 대한 생각을 분명히 갖고 읽어야 한다면서, 이는 지금 현세에는 우리가 가난하다 하더라도 내세에는 천국을 얻을 수 있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저는 여기까지 읽고 그만 닫아버렸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면 이 세상에서는 고생만 하고 죽은 다음에 축복을 받는다는 건가요?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병든 자가 고쳐달라고 하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어요.

응. 조금 참아. 나를 믿으면 지금은 좀 고생스럽더라도 나중에 죽고 난 다음에 천국 갈 거야……그러셨나요? 아닙니다. 모든 문제가 즉시 해결 되었습니다. 모든 질병이 즉시 나았습니다. 죽은 사람마저도 즉시 일어났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ただちに たちどころに

요한3서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愛する者よ。あなたのたましいが幸いを得ているように、あなたがすべての点で幸いを得、また健康であるように祈ります。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의 영혼이 잘 됩니다. 그러나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도 범사에 잘 되기를 주님께서는 원하고 계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을 믿으면서 맨날 질병을 앓고 있고, 가난에 찌들고, 인생에는 여전히 문제 투성인데 그런 사람이, 여보쇼……예수 믿으세요. 음? 예수 믿으면 어떻게 되는데? 그러면 응, 예수 믿으면 나 같이 돼……라고 하면 누가 믿겠냐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좁은 문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좁은 문이라 하더라도” “좁은 길이라 하더라도”입니다. 주님이 인도해주시는 길이 항상 비좁고 험난한 길이에요? 아닙니다. 때로는 넓은 길일 수도 있습니다. 평탄한 길일 수도 있습니다. 향기로운 길일 수도 있습니다. 화창한 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길로 인도해주시면 어쩌겠습니까. 안 갈 거예요? 아이구, 저는 믿음이 좋아서 그렇게 넓고 좋은 길은 안 갈래요. 그냥 좁은 길만 갈래요……그러시겠습니까.

그것은 넓은 길만 가겠다는 것과 같은, 아니, 자칫하면 신앙적인 교만에 빠질 수도 있는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리로 가라고 하면 이리로 가고, 저리로 가라고 하면 저리로 가는, 그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저도 이곳 일본에서 사역을 하면서 그런 생각이 왜 안 들겠습니까. 아…… 정말 이 길이 맞는 걸까…… 이거 되돌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 이거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틀린 것 같지가 않아요. 왜요? 제가 잘 났기 때문에요?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예, 성경에서 벗어난 것 같지가 않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자다가 생각해도 이 길이 틀린 것 같지가 않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 가야죠. 성경이라는 이름의 나비를 보면서 앞으로 나아가면 그 길이 바로 옳은 길이요, 그 길이 바로 축복된 길이라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고난 당하는 일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큰 고난은 예수님께서 2천년 전에 이미 십자가 위에서 모두 당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인생에 있어서 고난을 당하는 것 같으신가요? 물론 우리 인생에서 고난도 있지요. 하지만 그 고난은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에 비하면 그냥 흉내 정도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인가요? 아니요. 그 흉내만 내더라도 주님께서는 큰 축복으로 갚아주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고난을 당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순종의 결과, 주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한 결과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넓은 길이냐 좁은 길이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옳은 길이냐 아니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옳은 길은 주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길입니다. 주님께서 인도해주시는 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는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걸어가면서, 마침내 주님께서 예비하해주신 땅, 예비해주신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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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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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4회 마음 속 알러지
2019년 3월 3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9절~16절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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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마음 속 알러지” 心の中のアレルギー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지난 2015년 3월 6일 일본에 왔을 때를 아직 기억합니다. 그 날은 좀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이었습니다만, 저녁 때 하네다에 도착하고, 저희 아버지가 차를 몰고 동경 하마마츠쵸까지 나와주셨지요. 그래서 어머니와 함께 차를 타고 그 때 아마 신쥬쿠에 한 번 내려서 한국마켓을 들렀던 것 같아요.

아, 그런데 갑자기 코가 이상합니다. 코가 막 막혀요. 제가 좀 원래 어려서부터 코가 안 좋긴 했어요. 그래서 2011년엔가는 코 수술……. 아, 뭐 그렇다고 이뻐지라고 한 수술은 아니구요. 안쪽 수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랬더니 뭐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그래도 예전에 비해서 꽤 괜찮아졌었습니다.

그런데 동경에 도착하니까 갑자기 코가 막히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이상했죠. 무슨 한겨울도 아니고, 그리고 서울보다 동경이 더 따뜻하면 따뜻할 텐데, 서울에서도 멀쩡했던 코가 왜 갑자기 막힐까. 좀 피곤해서 그런가? 서울보다 습도가 높아서 그런가? 피곤하거나 습도가 높으면 코가 막히나? 뭐 이런 별의별 생각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집에 도착하고 며칠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안 좋아집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 난 다음에, 아하, 드디어 알았어요. 이게 바로 그 꽃가루 알러지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에는 그저 말로만 들었던 花粉症, 제가 옛날에 어렸을 때 일본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걸리지 않았던 꽃가루 알러지에 드디어 걸리고 만 것입니다.

아, 힘들다는 말만 들었습니다만, 제가 직접 이렇게 앓게 되니까 정말 힘들더라구요. 눈은 정말 따갑죠. 그렇잖아도 제가 비염이 있는데 여기에 꽃가루 알러지가 겹치니까 정말 환상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를 보면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天の水門が開かれ 大雨は四十日四十夜、地に降り続いた”。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이건 무슨 수문이 터졌는지 콧물이 정말 참 난리가 아닙니다. 밤에 자다가도 코가 막혀서 몇 번이나 잠에서 깹니다. 눈은 또 왜 그렇게 따가운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그래서 그런지 머리도 아프고. 한동안은 정말 정신을 차리지 못하겠더라구요. 요즘은 좀 그나마 나아졌습니다만, 특히 이번 3월 달은 정말 참 힘들었습니다

이 알러지가 왜 일어나는가 하면, 예를 들어서 우리가 무슨 질병에 걸리잖아요. 예를 들어서 감기에 걸리게 되는 이유는, 외부로부터 바이러스가 우리 몸 안으로 들왔기 때문에 걸리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몸이 그 바이러스를 내보내기 위해서 저항을 한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침도 하고 재채기도 하는 것도 다 우리 몸이 저항을 하기 때문에, 나쁜 바이러스들과 싸우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누구는 감기에 걸렸을 때 감기약을 먹는 건 안 좋다고 하는 사람들도 봤어요. 감기약을 먹으면 기침이나 재채기를 억제 시키는데 그러면 오히려 감기가 빨리 안 낫는다는 거예요. 글쎄요. 저는 그 쪽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해서, 감기약을 먹는 게 좋은지, 아니면 그분 말씀대로 안 먹는 게 좋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 참고로 저는 감기 걸렸을 때에는 감기약을 꼭 먹습니다. ㅎㅎ

이처럼 몸에 병균이 들어왔을 때 몸이 저항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이는 어쩌면 몸이 건강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저항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른바 알러지, 또는 알레르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뭐가 문제냐 하면 우리 몸에 뭔가가 들어왔어요. 그런데 알고 보면 그건 우리 몸에 해로운 게 아니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막 내보내려고 몸이 여기저기서 안간 힘을 쓰는 것, 이것이 바로 알러지라고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꽃가루를 봐도 그렇습니다. 사실 이게 사람 몸 안에 들어온다고 해서 해로운 게 아니래요. 그런데 이걸 해로운 것, 나쁜 것이라고 판단을 해서 막 몸 바깥으로 내보내려고 기침도 하게 하고 재채기도 하게 하고 콧물도 나게 하고, 눈물도 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로 몸에 해로운 바이러스가 들어왔을 때에 이렇게 된다면 이는 좋은 것이지만, 해롭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면 몸이 대단히 힘이 들게 되지요. 예를 들어서 자동차가 비탈길을 오를 때 자동으로 힘을 받쳐주면 좋지만, 비탈길을 오르지도 않는데, 그냥 평지를 달리고 있는데 자꾸 비탈길 모드가 되어서 마악 차 엔진에 무리가 가고 그런다고 생각해보세요. 이러면 안 좋겠지요.

지난 3월 10일에 탑승자 157명이 전원 사망한 에티오피아 항공기 사고에 대한 안타까운 뉴스는 모두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고의 원인인데, 어제 뉴스에 보니까 안전장치 시스템이 오작동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안전장치가 무엇입니까. 제가 비행기에 대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적어도 안전장치라고 한다면, 이는 사고가 날 것 같은, 어떤 위험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이를 자동으로 방지하기 위한, 말하자면 대단히 중요한, 대단히 도움이 되는 장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안전장치가 잘못 작동을 하는 바람에, 결국 비행기가 추락하고 157명이라는 소중한 생명이 사망하는 비참한 사고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10장 9절~16절

9.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10.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1.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3.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14.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15.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翌日、この人たちが旅を続けて、町の近くまで来たころ、ペテロは祈るために屋上に上った。昼の十二時ごろであった。
彼は空腹を覚え、何か食べたいと思った。ところが、人々が食事の用意をしているうちに、彼は夢心地になった。
すると天が開け、大きな敷布のような入れ物が、四隅をつるされて地上に降りて来るのが見えた。
その中には、あらゆる四つ足の動物、地を這うもの、空の鳥がいた。
そして彼に、「ペテロよ、立ち上がり、屠って食べなさい」という声が聞こえた。
しかし、ペテロは言った。「主よ、そんなことはできません。私はまだ一度も、きよくない物や汚れた物を食べたことがありません。」
すると、もう一度、声が聞こえた。「神がきよめた物を、あなたがきよくないと言ってはならない。」
このようなことが三回あってから、すぐにその入れ物は天に引き上げられた。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본 환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 특히 베드로가 본 환상 내용만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 세 가지 단계, 세 가지 스텝으로 분류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 하늘에서 큰 보자기가 내려오는데 그 안을 보니까 거기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라고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둘째, 베드로는 이를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않았다>
私はまだ一度も、きよくない物や汚れた物を食べたことがありません。」
고 하면서 거절합니다.

셋째, 이를 듣고 다시 목소리가 들려 오기를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神がきよめた物を、あなたがきよくないと言ってはならない。」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부터 세 번째까지가 세 번 반복이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를 좀 더 간결하게 정리해볼까요?

첫째,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을
あらゆる四つ足の動物、地を這うもの、空の鳥 베드로한테 이걸 먹어! 라고 환상 속에서 들려왔습니다.
둘째, 베드로가 말하기론, 나 지금까지 신앙적으로 정결하지 않은 것은 먹은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안 먹을래요.
셋째, 하나님께서 정결하다고 하는데 니가 왜 정결하지 않다고 그래?

이것이지요.

이 대화의 흐름,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 먼저 오늘도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성경에서는 믿음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순종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에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순종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믿음이라는 게 무슨 신학교 교수님 말씀을 믿는 건가요? 순종한다는 것이 교회 목사님한테 순종한다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믿음이라 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순종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따른다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과 순종이라고 하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뭐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까. 지금 목소리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만, 적어도 마귀 사탄의 속삭임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입각한 환상이요, 이 사실은 베드로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하나님이 잡아 먹으라고 하신 말씀에 순종할 수 없대요. 그 이유는 둘째에서 보면, 이는 신앙적으로 정결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에서는 어떤 것들은 먹으면 안 된다고 하는 엄격한 율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누가 만든 거예요. 예,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인데, 지금 베드로한테는 하나님께서 이를 먹으라고 말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 자기는 말하자면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 저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이런 앞뒤가 맞지 않는, 지극히 모순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상한 말을 하고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너 하나님 믿는다면서 왜 하나님 말씀을 안 들어? 라고 세 번째에서 질책을 하고 계신 것이지요.

이 환상에서 앞에 나온, 베드로가 부정하다고 한 것은 이방인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이른바 선민사상,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았다는 사상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것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만, 이 때문에 유대인이 아닌 다른 이방인들에 대해서 차별대우를 했었던 것이지요. 이 환상은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방인에 대해서 그와 같은 시각이 있었기 때문에, 하물며 복음 조차도 이방인에게 전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환상을 보고 베드로는 아, 내가 부정하다고 여겨왔던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는 정결하다, 깨끗하다고 말씀하시는구나. 그렇다면 복음이 전해지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해서, 최초로 이방인 전도가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은 어떻습니까.

제가 오늘 이 말씀을 쓰면서 한 가지 고백을 하려고 합니다만, 제가 한 주의 말씀을 준비할 때 보면 대충 A4용지, 14포인트 정도로 해서 8페이지 정도를 합니다만, 여기까지가 대략 5페이지 정도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머지는 한 3페이지 정도 쓰면 되는데, 솔직히, 처음에 적은 대략 총 3페이지 정도의 글을 썼다가 모두 지웠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요.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요즘 사람들, 특히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너무 비판을 많이 한다. 그것도 하나님을 들먹이면서 마치 자신이 정당하다는 듯이 주장하면서 상대방을 비판한다…… 이는 마치 정치인이 국민을 들먹이면서 서로 상대방을 비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런 비판을 자제해야 한다……. 뭐 이런 내용을 자세하게 적어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제가 쓴 글, 이런 사람들은 이렇게 비판하고 있고, 저런 사람들은 저렇게 비판하고 있고……하고 적어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는, 그렇게 상대방을 비판하지 말고 <당신이나 잘해라> 뭐 이렇게 글을 적었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좀 이상해요. 제가 다 써놓고 다시 읽어보니, 뭐예요? 예, 제일 비판을 많이 하고 있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에 이게 사실이라면 제 글의 결론은 무엇이겠습니까. 저 자신을 보면서 <너나 잘해라>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 경우를 보신 적 있으시죠? 주위가 시끄러워요. 그래서 조용히 시키려고 야. 조용히 해! 조용히 하라니까! 라고 그랬더니 누가 그럽니다. 야, 니가 제일 시끄러워…….

마치 그런 말을 들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사실 우리는 어쩌면 이런 실수를 너무나도 많이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보면 나쁜 사람들을 잡아야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경우를 봅니다. 이걸 보고 저런 한심한 사람들…… 이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사실 우리도 역시 그렇지 않나 하는 것이지요.

뭐, 목사는 말할 것도 없지요. 죄를 지으면 안 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라고 하지만, 사실 목사라고 그게 다 쉬운 것은 아닙니다. 역시 힘든 것은 마찬가지인 것이죠.

예전에 어디서 그런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식은 절대로 부모 말을 듣지 않는대요. 절대로 부모가 말하는 대로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부모가 행동해온 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아무리 말로는 믿는다 순종한다 하면서, 사실 알고 보면 제일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믿음이 부족하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이, 믿음이 있다고 하는 우리 자신은 아닌지 한 번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보면 교회에 직분자 보다도 새신자 분들이 더욱 믿음이 좋을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은 불안해서 죽겠다고 하는데, 오히려 새산자들, 아니, 어린 아이들은 그렇게 걱정하는 사람들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된다는데 왜 안 믿어요…… 하는 것이지요.

성경을 봅니다. 고린도후서 3장 3절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3절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あなたがたが、私たちの奉仕の結果としてのキリストの手紙であることは、明らかです。それは、墨によってではなく生ける神の御霊によって、石の板にではなく人の心の板に書き記されたものです。

더 이상 오지 말라고 하는데도 귀찮게 찾아 다니고 성가 싫게 전화하고는 교회에 나오라고 하고 …… 사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 스스로가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입학시험이나 입사시험 같은 것은 교실에 앉아서 교재를 펴고 가르치면 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시험은 거기서 배운 것을 가지고 문제지에 나온 문제를 푼 다음 답안지에 적어 넣으면 됩니다.

하지만 믿음과 순종은 아닙니다. 이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하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잘 섬기면 됩니다. 믿음과 순종을 입으로 가르치려 해봤자 소용없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믿음과 순종을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분들이 봅니다. 그리고 그 분들이 아, 저게 예수님을 믿는 것이구나. 저게 믿음이고 저게 순종이구나 하는 것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다 보면 참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마음에 안 드는 사람도 많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 일들도 너무나도 많습니다. 불평 불만을 늘어놓으면 한 두 시간이 부족하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일들, 정말 참 쓸데 없고 힘들고 어려운 일들, 그리고 나를 힘들게 하는 저 누구 누구 누구……. 하지만 성경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는 요리를 잘 하지 못해서 여러 말씀은 못 드립니다만, 많은 요리를 함에 있어서 소금은 필요하지요. 요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 바로 소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요리에 반드시 들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금을 숟가락으로 퍽퍽 퍼 먹는 사람 보셨나요? 아니요. 그런 사람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것 하나하나를 보면 짜고 맵고 시고 쓰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나중에 모두 하나가 된다면 기가 막힌 주님의 멋진 요리로 완성이 될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걸 모르고, 아이구 이건 짜서, 이건 매워서, 저건 셔서, 이건 써서 넣으면 안 돼……라고 해서 자꾸 뱉어버리려고 하면, 하나님은 꼭 필요해서 주시려고 하는데 저는 자꾸 거부하고 내버리려고 하면……그게 뭐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알러지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 알러지는 우리를 영육간에 너무나도 힘들게 합니다. 맛이 있다고 해서, 달다고 해서 내가 좋아하는 맛의 조미료만 넣는다면 무슨 요리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한 가지 색을 좋아한다고 맨날 그 한 가지 색만 가지고 그림을 그리나요? 아니에요. 때로는 어두운 색도 필요하고 때로는 밝은 색도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 가지 색깔이 있어야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2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私は、貧しくあることも知っており、富むことも知っています。満ち足りることにも飢えることにも、富むことにも乏しいことにも、ありとあらゆる境遇に対処する秘訣を心得ています。

이런 것을 모두 감사하게 받아야 기가 막힌 요리가 되고, 기가 막힌 작품이 되고, 기가 막힌 축복을 얻을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진정한 믿음과 진정한 순종을 가지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먹여주시는 대로 먹고, 주시는 대로 받고, 그리하여 우리 마음 속 알러지를 물리치고 기가 막힌 주님의 요리, 기가 막힌 주님의 작품으로 완성되어 주님의 기가 막힌 축복을 모두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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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3회 지나가는 길
2019년 3월 2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지나가는 길” 通る道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학교를 다니거나 하면 이래저래 많은 시험을 봅니다. 의무교육 이상이 되면 이제 학교에 들어가기만을 위해서도 시험을 치죠. 시험은 입학시험이나 중간고사 기말고사만이 아닙니다. 무슨 자격 시험도 있고 입사시험도 있고 또 학교나 전공에 따라서는 졸업시험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는 아니지만 자격시험이나 입학, 입사 시험 같은 경우를 보면 일반적으로 합격 불합격이 있기 마련이지요. 그와 같은 시험의 경우에는 합격을 해야만 의미가 있지 합격을 하지 않으면 1점 차이든 10점 차이든 똑같습니다. 결국 불합격이 되고 맙니다.

한국이나 일본을 보면 합격, 또는 불합격……이라고 하지요. 대학입시 같은 경우 예나 지금이나 지방에서 도시로 와서 시험을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을 보니까 요즘은 합격자 발표를 스마트폰으로 확인을 하더군요. 예전에는 그냥 오로지 학교 앞 운동장 같은 곳에 붙여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랬는데 참 편리해진 것 같습니다. 옛날에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은 고사하고 일반 전화도 없었던 시절, 단순히 합격자 발표 만을 위해서 돈 들이고 시간을 들여 올라오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어떻게 했냐 하면, 전보……라고 하죠? 사실 요즘 젊은 분들……이라기 보다는 저도 사실 전보는 보내본 적도 없고 받아본 적도 없습니다만, 전화가 없었던 시절에는 제일 빨랐던 통신수단이 전보였다고 합니다. 옛날에 편지를 보내고 하면 며칠씩이나 걸리고 그랬는데 전보를 이용하면 당일에 전달할 수 있었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대신 좀 비쌌다고 합니다. 비용이 글자 수에 따라서 한 글자당 얼마……이런 식으로 계산을 했다고 하니까 무슨 안부 인사 같은 것을 적을 수는 없겠지요. 그야말로 용건만 간단히……였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대학 근처에 사는 지인들한테 부탁을 해서 수험번호를 미리 알려주고, 대신 발표를 본 다음 그 결과를 본인에게 전보를 통해서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보가 와서 딱 열어봤을 때, “합격”……이렇게 적혀 있으면 뭐 물론 좋겠지만 “불합격” 이렇게 되어 있으면 너무 충격적이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했냐 하면 좀 운치 있게 합격인 경우에는 “사쿠라사쿠” 즉 벚꽃이 핀다. 그리고 불합격일 때에는? “사쿠라치루” 벚꽃이 진다……. 뭐 사실 이것도 충격은 좀 충격이지만 아무튼 그런 문자로 해서 전보를 쳤다고 합니다.

그랬던 옛날 전통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지금도 일본에서는 벚꽃이 핀다 “사쿠라사쿠” 이렇게 다섯 글자로 표현을 하면, 대학교 합격……이라는 뜻으로 통합니다.

자, 그럼 시험 얘기도 나왔으니 우리 한 번 영어시험 한 번 볼까요?

그런데 한국이나 일본을 보면 이 <합격> 또는 <불합격>이라고 하는, 말하자면 어떤 시험의 최종결과……라는 인상이 있습니다. 그러면 영어로는 합격이라고 하는 말을 어떻게 말할까요.

혹시 아시는 분 계신가요? 예, 별로 어려운 말 아닙니다. pass. 패스……라는 단어이지요. 우리도 가끔 쓰지요? 어떤 시험에 패스했다……, 무슨 고시 패스 라는 식으로 쓰기도 합니다.

무조건 우리 것은 안 좋다. 영어가 좋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좀 바람직하지는 않지요. 우리 것도 좋은 것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지만 이 pass라는 말은 참 의미심장한 말 같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pass 라는 단어의 뜻은 합격 말고도 지나가다, 통과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통과……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지나가다>라는 말과 <합격>이라고 하는 말이 똑 같은 단어라는 사실을 보면 참 많은 생각이 듭니다.

한국은 3월에 새 학기가 시작합니다만, 일본은 4월에 시작합니다. 그런데 일본에 보면 5월병……이라는 말이 있다고 하더군요. 이것이 뭐냐 하면 이제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입학했어! 원하는 회사에 입사했어! 라고 하는 기쁨도 어느 정도 지나고 새로운 생활이 시작했을 무렵에 이 병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특히 유명 대학 입학생 같은 경우에는 이런 5월병을 앓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뭐 쉽게 말을 해서 자기는 어렸을 때부터 동경대에 들어가는 게 꿈이었는데. 그래서 동경대 합격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을 했어요. 잠 자는 시간도 아껴가면서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토록 동경대에 합격했어요! 와! 만세! ……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ㅅ 무기력증을 앓게 되다고 하는, 말하자면 심리적인 질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합격>이라고 하는 단어에는 그 동안에 쌓아왔던 노력이나 과정에 대한 <결과물>이라는 느낌이 강합니다. 좋은 학교에 들어갔다면 그것은 기쁜 일이지만 그것이 끝인가요? 이제는 아무것도 안해도 되는 건가요? 아니죠.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다면 이제 거기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졸업을 해서 자신의 꿈을 하나하나 이루어 나아가야지, 거기서 멈춰버리면 곤란합니다.

이건 회사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지요. 학교 다닐 때 열심히 취직준비를 했습니다. 그래서 졸업하고 원하는 회사에 합격할 수 있었어요. 와! 합격이다! 만세! ……. 뭐,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러면 거기서 끝인가요? 아니지요. 회사에서 왜 합격을 시켜주었겠어요. 회사에 합격시켜준 것은 무슨 상을 주려는 것이 아니에요. 회사에 들어와서 열심히 일을 하라고 합격시켜준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 합격했다고 막 그러면서 일은 안하고 친구들 만나고 좋아하기만 하고 일은 안 해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죠. 맨날 그러고 있으면 짤립니다. 그러면 안 되죠.

그런 면에서 보면 합격이라고 하는 pass라는 단어, 지나가다 라고 하는 단어는 참 좋습니다. 그 자리에 멈춰 서는 것이 아니라, 그 곳을 지나갈 수 있다는 것이 바로 합격이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도 시험이 없어요? 아휴, 시험이 왜 없어요. 많이 있습니다. 동경대 들어간다고 해서 시험이 없나요? 제가 동경대는 못 다녀봐서 모르겠습니다만 분명 시험이 많을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도 시험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예, 잘 봐야죠. 더 쉽게 묻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시험이 닥치면 합격해야 하겠습니까. 불합격해야 하겠습니까.

구약 같은 데에 보면 다니엘 서에 나오는 시험 있지요? 다니엘의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シャデラク、メシャク、アベデ・ネゴ)……가 시험을 당합니다. 느부갓네살(ネブカドネツァル) 왕이 금신상(金の像)을 세워놓고 거기에 절을 하라고 하지요. 그런데 이 세 다니엘의 친구는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 3장 15절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炉)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

「今、もしおまえたちが、角笛、二管の笛、竪琴、三角琴、ハープ、風笛 、および、もろもろの楽器の音を聞いたとき、ひれ伏して、私が造った像を拝むなら、それでよい。しかし、もし拝まないなら、おまえたちは、即刻、火の燃える炉 の中に投げ込まれる。どの神が、私の手からおまえたちを救い出せるだろうか。」」


왕이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금신상(金の像)한테 전을 하면 살려주겠지만, 절을 하지 않으면 너를 저 불타는 풀무불(炉) 속으로 집어넣겠다……그랬더니 그들이 뭐래요?

다니엘 3장 16절~18절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シャデラク、メシャク、アベデ・ネゴは王に答えた。「ネブカドネツァル王よ、このことについて、私たちはお答えする必要はありません。
もし、そうなれば、私たちが仕える神は、火の燃える炉から私たちを救い出すことができます。王よ、あなたの手からでも救い出します。
しかし、たとえそうでなくても、王よ、ご承知ください。私たちはあなたの神々には仕えず、あなたが建てた金の像を拝むこともしません。」

왕이여, 그런 말은 우리한테 그런 말을 백 번 해 봤자 소용없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저 불 속으로 집어넣는다면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다른 신들을 섬기지도 않을 것이고, 당신이 세워놓은 신상에 절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왜 이렇게 목숨을 걸고 절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직접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에도 있지요?


출애굽기 34장 14절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あなたは、ほかの神を拝んではならない。主は、その名がねたみであり、ねたみの神であるから。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왕의 명령을 끝까지 거부한 것이지요. 결국 그들은 왕명에 의해 풀무불(炉) 속으로 던져넣게 됩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다니엘 3장 27절
“총독과 지사와 행정관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太守、長官、総督、王の顧問たちが集まり、三人を見たが、火は彼らのからだに及んでおらず、髪の毛も焦げず、上着も以前と変わらず、火の臭 いも彼らに移っていなかった。

그렇게 맹렬히 타는 불 속으로 던져 넣었는데, 타기는커녕 그을리지도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떠십니까. 왕 앞에 끌려 나가서, 너 저 신상에 절해. 딱 한 번만 절하면 살려줄게. 아니면 너 저기 활활 타는 불 속으로 던져 넣는다……. 이런 시험을 당하면 어쩌겠습니까. 글쎄요.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냥 눈 딱 감고 넙죽 절하고 말겠다……라고 하는 사람들 많지 않을까 합니다.

저요? 저는 어떨 것 같습니까. ㅎㅎ 글쎄요. 저도 뭐 결혼하고 아직 1년밖에 안됐고요……할 일도 아직 많이 남은 것 같기도 하고요……ㅎㅎ

하지만 우리 이 서점에서 오늘 말씀을 한 번 다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あなたがたが経験した試練はみな、人の知らないものではありません。神は真実な方です。あなたがたを耐えられない試練にあわせることはなさいません。むしろ、耐えられるように、試練とともに脱出の道も備えていてくださいます。

이 말씀을 차근차근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시험을 당한대요? 안 당한대요? 예, 당합니다. 그런데 그 시험은 어떤 시험인가 하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당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사실 보면 이 세상 시험과 비슷합니다. 예를 들어서 초등학생한테 고등학생 문제를 내지는 않지요. 학교에서도 그 학년 그 수준이 풀만한 문제를 내줍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다음 부분입니다.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耐えられるように、試練とともに脱出の道も備えていてくださいます。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시험을 보는데 시험을 당할 때쯤에는 피할 길을 내주셔서 감당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피할 길을 내주세요? 앞서 제가 말씀 드렸던 것 기억하시나요? 영어로 합격은 pass입니다. 지나가는 길이지요. 합격을 하면 지나갈 수 있지만, 합격을 못하면 지나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보면 피할 길을 내주셔서 감당하게 하신다. 이는 지나가게 해준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이 내용을 풀어서 말씀 드리면 이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시험을 당하기도 하는데, 이는 우리가 감당할만한 시험, 그러니까 우리가 합격할 수 있는 시험만 당하게 해주신다. 만약에 합격하지 못할 것 같으면…… 어쩐다구요? 다른 합격하는 길을 내주신다……”

지금 성경에서는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뭐겠습니까. 니가 합격할만한 문제만 내줄게. 니가 합격하지 못할 것 같으면 다른 합격하는 방법을 내가 알려줄게……이러고 계신 것입니다.

이게 공정한 시험이에요? 아닙니다. 공정은 무슨 공정. 철저한 부정행위입니다. 세상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철저한 배후 수사와 책임자 처벌을 해야 마땅하겠지요.

하지만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부정행위? 예, 부정행위입니다. 누구를 위한 부정행위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나를 위한 부정행위, 우리를 위한 하나님 나라의 부정행위입니다.

더 심한 부정행위를 말씀 드릴까요? 죄인은 벌을 받아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예, 당연히 벌을 받아야지요. 그게 공정행위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벌을 받게 됩니다. 징계를 받아야 합니다. 채찍에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게 하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징계를 받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이 뭐라고 그러세요? 그래. 내 아들이 너희를 대신해서 모든 벌을 다 받았으니, 너희는 이제 죄가 없다. 구원을 받았다. 정결케 되었다. 그러니 천국으로 들어올 수 있다……. 이것이 바로 Amazing grace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놀라운 십자가의 은혜인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에는 이미 보장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보장되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합격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합격할만한 문제만 내겠다. 합격하지 못할 것 같으면 합격할 방법을 알려주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뭐, 그런 말 있지요?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a question…… 햄릿에 나오는 대사인데, 뭐 사실 이게 정확한 번역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아무튼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합격이냐 불합격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할지 모릅니다만, 예수님을 믿고 구주로 영접한 우리에게는 오로지 합격만이 있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을 알았던 것이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앞서 말씀 드린 다니엘의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シャデラク、メシャク、アベデ・ネゴ)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알고 있었습니까. 그들이 알고 있던 것, 그것은 자신들 앞에 놓인 시험에서는 오로지 합격만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겁 없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점에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마음 속으로 큰 소리로 대답해보시기 바랍니다.

자, 우리 앞에 두 가지 시험문제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반드시 봐야 하는데, 자기가 고를 수가 없어요.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면 100억원을 받고, 쉬운 시험에 합격하면 1만원을 받아요. 그런데 만약에 불합격을 하게 되면 자신의 전재산을 잃게 되요.

참 긴장이 되겠지요. 그런데 짠하고 문제지를 열었어요. 여러분께서는 어느 쪽이면 기뻐하시겠습니까. 내가 봐야 하는 시험이 어려운 시험이었으면 기뻐하겠어요? 아니면 쉬운 문제라면 기뻐하시겠어요.

그런데 시험지를 열어보기 직전에 안내방송이 들려와요. 여러분께서는 그 시험을 보시면 반드시 100% 합격합니다. 문제를 모를 경우에는 특별히 답을 알려주도록 규칙이 바뀌었습니다…이런 안내방송이에요.

자, 다시 묻겠습니다. 문제지를 열어봤을 때, 내가 봐야 하는 시험이 어려운 시험이었으면 기뻐하겠어요? 아니면 쉬운 문제라면 기뻐하시겠어요.

이런 규칙을 몰랐을 때에는, 만에 하나 내가 틀린다면 내 전재산을 몰수 당해. 그렇다면 쉬운 시험이 훨씬 좋죠. 하지만 100% 합격? 절대로 불합격이 안 돼? 그렇다면 어떻게 해요? 공짜로 돈을 주는데 100억이 좋냐, 1만원이 좋냐……. 이렇게 묻고 있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당연히 100억이 좋다고 하지요.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고 우리가 어려운 시험을 겪게 되면, 아이고, 큰일 났네. 이걸 어쩌면 좋아. 그러면서 하나님이 있네 없네, 죽었네 살았네 하고 난리를 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야. 넌 지금 위기가 아니야. 큰 축복을 얻을 기회를 잡은 거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우리는 그러죠. 하이고~ 저는 못해요~ 제가 어떻게 이런 시험을 이길 수가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실 것 같습니까.

누가 너더러 하래? 착각하지 마. 이건 내가 할 거야. 나한테 맡겨……. 이러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시편 37편 5절~6절
“5.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6.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あなたの道を主にゆだねよ。主に信頼せよ。主が成し遂げてくださる。
主はあなたの義を光のようにあなたの正しさを真昼のように輝かされる。

시편 55장 22절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あなたの重荷を主にゆだねよ。主があなたを支えてくださる。主は決して正しい者が揺るがされるようにはなさらない。

잠언 16장 3절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あなたのわざを主にゆだねよ。そうすれば、あなたの計画は堅く立つ。

베드로전서 5장 7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あなたがたの思い煩いを、いっさい神にゆだねなさい。神があなたがたのことを心配してくださるからです。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이야말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국이나 일본에 보면 장기나 바둑이 있지요? 직접 두시지는 않더라도 두는 것을 본 적은 있으실 것입니다. 두 사람이 승부를 겨루는 것인데, 예를 들어서 나무로 된 장기알이 있어요. 그것도 싸구려 나무로 된 장기알이 하나님한테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고, 하나님. 나는 싸구려 나무 장기알인데 상대방 장기알은 고급 나무에요. 아이고, 저는 졌어요. 이길 수 없어요…….

이게 말이 되는 건가요? 말이 안 됩니다. 아니, 장기에서 싸구려 나무로 된 장기알은 지고 비싼 나무로 된 장기알은 이기나요?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아무리 상대방이 비싼 나무가 아니라 무슨 대리석이나 금덩어리로 된 장기알이라 하더라도 이는 승부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겠어요. 걱정하지마. 싸구려 나무인지 비싼 나무인지는 전혀 상관 없어.

여러분, 그러면 무엇이 상관 있는 것입니까. 그렇죠. 그 장기를 누가 두느냐입니다. 사람이 두면 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두시면 반드시 이기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쉬운 시험이 오나 어려운 시험이 오나 우리는 반드시 합격합니다. 승리합니다. 승리하지 않을 것 같으면 다른 길, 지나가는 길을 예비해주셔서 합격할 수 있도록, 승리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서 이미 약속해 놓으신 말씀입니다.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 하나님 말씀이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장기알처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 됩니다. 우리가 싸구려 나무면 어떻고 저 길가에 있는 흔한 돌맹이면 어떻습니까. 이리로 가라면 이리로 가고, 저리로 가라면 저리로 가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께 맡기면 승리하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얼마 전에 뉴스에 보니까 동경에는 이제 벚꽃이 폈다고 하더군요. 한국이나 일본은 이제 여기저기서 벚꽃이 활짝 피게 되겠지요. 우리 삶도 이처럼 우리 앞에 놓인 모든 시험에 합격해서 사쿠라사쿠. 벚꽃이 핀다는 합격자 전보를 받아 안는 것처럼, 우리 삶 속에서 모든 시험에 승리해서 마침내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을 모두 받아 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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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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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2회 우리들의 마음
2019년 3월 1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잠언 4장 23절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들의 마음” 私たちの心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생각하실 때, 교회는 몇 년 정도 다녀야 좀 제대로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에는 나 정도 믿음을 가졌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좀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좀 어려우세요?

그러면 좀 다른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대략 몇 년 정도 살면 좀 사람으로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드시나요?

짐승들은 태어나자 마자 뛰어다니기도 하지요. 초식동물들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자기가 알아서 풀을 뜯어먹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하지요. 단순히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최소한 몇 개월이나 걸리고, 자기가 스스로 먹을 것을 자기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루 이틀 가지고는 안됩니다. 적어도 몇 십 년은 걸려야겠지요.

인간으로서 제대로 자립할 수 있는 나이다……라고 하면 단순한 기준으로서는 성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 한국이나 일본을 보면 과거에는 성년 나이를 20세로 정했었습니다만, 요즘은 어느 정도로 낮추는 경향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선 투표할 수 있는 나이를 20세에서 18세~19세로 조정을 하고, 그 외에 대한 부분도 모두 낮추는 추세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에 18세나 19세, 적어도 20세 정도 되면 사람으로서 성숙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아직 멀었어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요즘은 많은 분들이 면허를 땁니다. 그리고 운전을 하지요. 우리 교회가 있는 군마현을 본다면 일본 국내에서 운전면허 보유율이 가장 높다고 합니다. 뭐, 면허를 따놓고도 실제로 운전을 하지 않는 분들도 많이 계시지만, 이 군마현은 면허 보유율 만이 아니라 자동차 보유율도 일본에서 가장 높다고 합니다. 사실 뭐, 이걸 뒤집어보면 그만큼 대중교통수단이 부족하다는 뜻이 되지만요. ㅎㅎ

그렇다면 운전, 한 어느 정도 하면 능숙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5년? 10년? 아니면 한 20년은 해야 그래도 운전 좀 한다고 명함을 내밀 수 있는 건가요?

참고로 한국은 그런 규정이 없다고 합니다만, 일본은 새로 운전면허를 땄다면 1년간은 초보자 마크를 부착해야 한다고 법적으로 아예 정해져 있습니다. 노랑색과 파란색으로 된 새싹을 나타내는 마크이죠. 그래서 면허시험에 합격하면 운전학원에서 초보자마크를 선물로 준다고 해요.

저도 운전면허를 처음 땄을 때의 일을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솔직히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면허를 땄으면 그토록 꿈꿔왔던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습니다. 차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차이가 많지요. 서울이나 대도시 같으면 일단 버스나 지하철을 타러 가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몇 번이나 갈아타고 그래야 하지만, 자동차가 있으면 곧바로 차를 타고 출발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편리하게 차를 운전할 수 있다면 안전운전을 해야 할 텐데, 안타깝게도 사고가 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사고가 가장 많이 나냐 하면, 우리가 얼핏 생각하기에는 면허를 따고 바로 직후가 아무래도 운전이 서툴기 때문에 사고가 많이 날 것도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물론 주차를 하거나 커브를 돌 때 긁히기야 하겠지만, 그건 사고가 아니죠. 그냥 뭐, 애교?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정말 피해가 심각한 교통사고는 언제 나냐 하면 운전을 시작하고 3년 정도에 가장 많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한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이렇답니다. 맨 처음에 면허를 따고 운전을 시작할 때에는 상당히 조심한다고 해요. 과속을 하지도 않죠. 법정 속도도 잘 지키고, 일시 정지 하라고 하는 곳에서는 정확하게 멈춥니다. 오른쪽 왼쪽도 자세히 보지요. 그렇게 하면, 그야말로 실수로 긁히거나 하는 일은 있을 수 있지만 큰 사고는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3년 정도 지나고 나면, 아, 이제 조금 차를 알 것 같아요. 커브 같은 건 문제 없고요, 차선도 능숙하게 바꿀 수 있습니다. 고속도로를 타서 쌩쌩 달릴 때에는 기분도 좋아요. 이제 그야말로 나와 차가 하나가 된 듯한, 내가 원하는 대로 차를 운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나 바로 그 때, 정말 능숙하게 차를 운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 바로 그 때 대형사고가 날 확률이 제일 높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음주 같은 건 어떨까요. 얼마 전에 한국 뉴스를 보니까, 어떤 사람이 술을 먹고 주차요금을 징수하는 사람을 갑자기 폭행을 했다는 거예요. 그것도 참 안타까운 것은, 그 주차요금을 징수하는 분이 장애가 있으신 분이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뭐냐 하면 제대로 대항할 수 없는, 절대적인 약자를 그렇게 심하게 폭행을 해서, 병원에 실려갔다고 합니다.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지만, 육체적인 부상도 부상인데, 그 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너무나도 큰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다가 보면 자기를 그렇게 폭행할 때의 그 사람 얼굴이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그럼 가해자는 어떠냐 하면, 맨 처음에는 부인을 했는데, CCTV를 보여주니까, 그 때서야 인정을 하더래요. 하지만 인정을 하면 뭘 해요? 나는 술 마셨기 때문에 기억이 안 난다고 한답니다. 그리고 자기가 때린 사람한테 사과도 하러 가지 않았다고 해요.

술 드시고 그렇게 일을 저지르는 분들 보면, 평소에 자신이 술이 약하다고 해요? 아니요. 본래 술이 약하다고 하는 분들은 그렇게 많이 마시지도 않습니다. 나 괜찮아. 나 술 쎄. 걱정하지 마……. 이런 분들이 그렇게 과음을 하고 사고를 저지르는 일들이 많다고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너무나도 비굴해지고 기죽어서 살아가는 것이 좋을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너무 자신감이 넘치게 되면, 이는 자신감이 아니라 교만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보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진리를 논하고 정의를 논하고 철학을 논하고 윤리와 도덕을 논하는 사람들은 참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자기가 말을 한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냐 하면 이 또한 대단히 의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저도 이렇게 앞에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만, 목회자라 하더라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이 목회자야말로 어쩌면 교만이라고 하는 덫에 걸려들기 쉬운 직업인지도 모릅니다.

생각해보세요. 예를 들어서 한국의 대형교회라고 하면 한 번 예배에 몇 백 명, 몇 천 명씩 앉습니다. 그러면 그 앞에서 말씀을 전하지요. 그러면 다들 아멘 하고 경청을 합니다. 그리고 어딜 가나 목사님, 목사님 하지요. 세상에 어느 직업이 매주 그렇게 많은 청중들 앞에 서서 이야기하고, 그 많은 청중들이 경철을 하면서 감사를 합니까. 제아무리 큰 나라의 대통령이라 한다 하더라도 그러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작년 2018년 9월에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유엔본부에서 연설을 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 연설 중에서 그는 자신의 성과를 나열하고 자화자찬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2년이 채 안돼 나의 행정부는 미국 역사에서 다른 행정부보다 많은 것을 이루었습니다.”

이렇게 유엔본부에서 연설을 했더니, 그 앞에 앉아 있던 각국의 대표들이 어떻게 했냐 하면 갑자기 수군수군 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웃음 소리도 들려와요.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트럼프 대통령은 대단히 당황을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해요.

“아……이건 제가 전혀 예상하지 않은 반응이었다.”

이러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법한 것이, 그가 연설하는 곳은 언제나 그들의 지지자들로 넘쳤습니다. 왜냐 하면 그 사람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연설을 들으러 가지 않거든요. 그래서 그는 항상 어디서든지 연설만 하면 박수갈채를 받아왔던 것이지요. 하지만 유엔본부가 자기 지지자들이 모여 있나요. 어찌 보면 요즘 세계는 미국 대통령이나 정부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리 곱지만은 않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 비웃음을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나라의 대통령이나 지도자라 하더라도 매주 그 많은 청중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경청하는 자리에 서지는 못할 것입니다. 항상 지지하는 사람이 있나 하면 비판하는 사람이 있지요. 그것이 바로 정치라는 세계의 특성입니다.

그럼 뭐, 판사들은 어떻습니까. 어떤 판결을 내렸을 때 원고와 피고로부터 똑같이 박수를 받는다? 아뇨. 그럴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긴 쪽한테 있어서는 명판결이라고 할지는 모르지만 진 쪽에 있어서는 유감이다 뭐다 하겠지요.

그런데 반면에 앞서 목회자 이야기로 돌아오면, 매번 무슨 말씀을 전하면 아멘, 하고 경청을 해주십니다. 그러니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문제가 발생하냐 하면, 성도님을 경청을 해주시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듣는 분들이 왜 그렇게 경청을 해주십니까. 목회자가 앞에서 자기 자랑을 하는데 경청을 해줘요? 자기 생각을 말하는데 아멘 아멘 하고 경청을 해줍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그 교회는 문제가 심각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제대로 된 교회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역사가 선포되는 곳, 예수님의 십자가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 성경 말씀이 전파되는 곳이야말로 진정한 교회, 주님께서 머리 되신 교회라고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를 착각해서 주님한테 돌려야 할 영광을 자기가 차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오래된 목회자라 하더라도 소용 없습니다. 금새 교만이라고 하는 쓴 뿌리가 그 마음 안에 심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잠언 4장 23절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何を見張るよりも、あなたの心を見守れ。いのちの泉はこれから湧く。

참 이 말씀, 이 짧은 말씀이 알고 보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이 잠언서는 여러분께서 잘 하시는 바와 같이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쓴 것입니다. 솔로몬이 쓴 것이 시편에도 몇 편 있습니다만, 주로 잠언 외에 아가와 전도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잠언과 전도서를 읽으면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또한 잠언은 지혜서 중의 지혜서라고 하지요.

열왕기상 4장 29절~34절에는 솔로몬의 지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
솔로몬의 지혜가 동쪽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
그는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워서 예스라 사람 에단과 마홀의 아들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보다 나으므로 그의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
그가 잠언 삼천 가지를 말하였고 그의 노래는 천다섯 편이며
그가 또 초목에 대하여 말하되 레바논의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그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대하여 말한지라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왔으니 이는 그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들이 보낸 자들이더라”

神は、ソロモンに非常に豊かな知恵と英知と、海辺の砂浜のように広い心を与えられた。
ソロモンの知恵は、東のすべての人々の知恵と、エジプト人のすべての知恵にまさっていた。
彼は、どの人よりも、すなわち、エズラフ人エタンや、マホルの息子たちのヘマン、カルコル、ダルダよりも知恵があった。そのため、彼の名声は周辺のすべての国々に広まった。
ソロモンは三千の箴言を語り、彼の歌は千五首もあった。
彼は、レバノンにある杉の木から、石垣に生えるヒソプに至るまでの草木について語り、獣、鳥、這うもの、そして魚についても語った。
彼の知恵のうわさを聞いた世界のすべての王たちのもとから、あらゆる国の人々が、ソロモンの知恵を聞くためにやって来た。

하나님께서 넘치는 지혜를 허락해주셨기 때문에 이처럼 많은 성과를 남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솔로몬 자신의 인생을 어땠습니까. 정말로 자신이 했던 말처럼 지혜롭고 은혜로운 삶을 살았을까요.

잠언 9장 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主を恐れることは知恵の初め、聖なる方を知ることは悟ることである。

이렇게 은혜로운 말씀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상숭배를 하는 것을 용납했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애굽을 의지하기도 하였습니다. 성경에서 <애굽>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그 나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여호와를 의지하라고 말해놓고서, 정작 자신은 세상을 의지한다고 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때문에 어떻게 되냐 하면, 하나님께서 노하셨기에 솔로몬이 죽은 다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로 분단을 하시게 됩니다.

솔로몬도 이랬는데 솔로몬보다도 한참 부족한 우리가 솔로몬보다 더 잘할 수 있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0장 12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ですから、立っていると思う者は、倒れないように気をつけなさい。

성경은 이처럼 항상 안심하지 말아라. 방심하지 말아라. 언제나 경계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던 것처럼 정말로 큰 교통 사고는 우리 운전이 서툴 때가 아니라, 우리가 방심했을 때 일어나기 쉽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사람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우리는 몇 살쯤 되어야 제대로 철이 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미리 말씀 드리지만 저를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적어도 40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 하면 아직까지도 보면 아…… 내가 그 때 왜 그랬을까. 내가 며칠 전에 왜 그랬을까……하는 후회도 하고 그러기 때문에 아직 완벽한 인간이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실 후회가 나쁜 것은 아니지요. 누구는 후회가 나쁘다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후회를 해야 반성을 하고, 반성을 해야 개선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몇 살 정도 되어야 좀 능숙하고 성숙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삶은 평생 초보운전이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는 단순히 좀 멋있게 말한 것이 아니에요. 실질적으로 그렇습니다.

아까 일본은 면허를 따고 1년간 초보운전 마크를 붙인다고 했는데, 우리 삶은 어떻습니까. 자동차는 똑 같은 차를 2년째 3년째 운전하면 익숙해집니다. 왜냐하면 자동차는 그대로 있으니까 그렇겠지요.

하지만 사람은 어떻습니까. 내가 예를 들어서 올해 서른이에요. 만약에 내년에도 서른이고 그 다음 해도 서른이라면, 서른이라는 나이를 살아가면서 좀 능숙해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서른>이라고 하는 나이의 초보자딱지를 떼려고 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예. <서른 하나>라고 하는 새로운 초보자 딱지를 붙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른, 마흔이 아니라 좀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칠십, 팔십, 구십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 나이를 살아가는 것은 항상 처음입니다. 그리고 그 나이의 초보 딱지를 뗄 때 쯤이면 다음 나이의 초보 딱지를 붙여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나이가 많으면 젊은 사람들한테 좀 자랑을 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서 지금 나이 40 먹은 사람이 나이 30 먹은 사람한테 자랑할 수 있을까요? 아니에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이 40 먹은 사람이 30살 인생을 살았던 것은 10년이나 전 일이에요. 그 사람이 2009년에 30세 인생을 살았을지는 모르지만, 2019년에 30세 인생에 대해서는 역시 그 사람 자신도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믿음도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장해 나아가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1년째 믿음은 1년째 믿음의 초보자이고, 10년째 믿음은 나에게 있어서 역시 10년째 믿음의 초보자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스스로가 매사에 초보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낮아질 수가 있습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우리 마음을 교만이라는 위험으로부터, 유혹이라는 위험으로부터, 지킬 수 있다고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즘은 저희 집 주변에 전도지를 돌리고 있습니다만, 전도지를 넣으려고 우체통을 보면요, 우체통은 그 안이 비어 있어서 전도지를 넣을 때 쓰윽 쓰윽 하고 잘 들어갑니다.

그런데 또 어떤 우체통을 보면요, 그 안이 꽉 차 있어서, 아무리 전도지를 넣으려고 해도 안 들어가요. 어떻게 좀 요렇게 조렇게 넣어보려고 해도 안 들어가서, 때로는 포기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을 비워야 우리 마음 안에 복음이 들어갑니다. 우리 마음 안에 겸손이 있어야 우리 마음 안에 복음이 들어갑니다. 믿음이 심어집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見よ、わたしは戸の外に立 ってたたいている。だれでも、わたしの声を聞いて戸を開けるなら、わたしはその人のところに入って彼とともに食事をし、彼もわたしとともに食事をする。

내 마음을 비우고 우리 마음을 주님 앞에 열어놓을 때, 주님께서 두드리는 노크 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30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わたしは心が柔和(にゅうわ)でへりくだっているから、あなたがたもわたしのくびきを負って、わたしから学びなさい。そうすれば、たましいに安らぎを得ます。

우리는 아직 우리 자신이 초보운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 모두 우리 마음을 비우고,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면서 하루하루 살아갈 때에,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을 모셔 들이고, 주님과 함께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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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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