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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4회 마음 속 알러지
2019년 3월 3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9절~16절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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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마음 속 알러지” 心の中のアレルギー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지난 2015년 3월 6일 일본에 왔을 때를 아직 기억합니다. 그 날은 좀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이었습니다만, 저녁 때 하네다에 도착하고, 저희 아버지가 차를 몰고 동경 하마마츠쵸까지 나와주셨지요. 그래서 어머니와 함께 차를 타고 그 때 아마 신쥬쿠에 한 번 내려서 한국마켓을 들렀던 것 같아요.

아, 그런데 갑자기 코가 이상합니다. 코가 막 막혀요. 제가 좀 원래 어려서부터 코가 안 좋긴 했어요. 그래서 2011년엔가는 코 수술……. 아, 뭐 그렇다고 이뻐지라고 한 수술은 아니구요. 안쪽 수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랬더니 뭐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그래도 예전에 비해서 꽤 괜찮아졌었습니다.

그런데 동경에 도착하니까 갑자기 코가 막히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이상했죠. 무슨 한겨울도 아니고, 그리고 서울보다 동경이 더 따뜻하면 따뜻할 텐데, 서울에서도 멀쩡했던 코가 왜 갑자기 막힐까. 좀 피곤해서 그런가? 서울보다 습도가 높아서 그런가? 피곤하거나 습도가 높으면 코가 막히나? 뭐 이런 별의별 생각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집에 도착하고 며칠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안 좋아집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 난 다음에, 아하, 드디어 알았어요. 이게 바로 그 꽃가루 알러지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에는 그저 말로만 들었던 花粉症, 제가 옛날에 어렸을 때 일본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걸리지 않았던 꽃가루 알러지에 드디어 걸리고 만 것입니다.

아, 힘들다는 말만 들었습니다만, 제가 직접 이렇게 앓게 되니까 정말 힘들더라구요. 눈은 정말 따갑죠. 그렇잖아도 제가 비염이 있는데 여기에 꽃가루 알러지가 겹치니까 정말 환상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를 보면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天の水門が開かれ 大雨は四十日四十夜、地に降り続いた”。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이건 무슨 수문이 터졌는지 콧물이 정말 참 난리가 아닙니다. 밤에 자다가도 코가 막혀서 몇 번이나 잠에서 깹니다. 눈은 또 왜 그렇게 따가운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그래서 그런지 머리도 아프고. 한동안은 정말 정신을 차리지 못하겠더라구요. 요즘은 좀 그나마 나아졌습니다만, 특히 이번 3월 달은 정말 참 힘들었습니다

이 알러지가 왜 일어나는가 하면, 예를 들어서 우리가 무슨 질병에 걸리잖아요. 예를 들어서 감기에 걸리게 되는 이유는, 외부로부터 바이러스가 우리 몸 안으로 들왔기 때문에 걸리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몸이 그 바이러스를 내보내기 위해서 저항을 한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침도 하고 재채기도 하는 것도 다 우리 몸이 저항을 하기 때문에, 나쁜 바이러스들과 싸우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누구는 감기에 걸렸을 때 감기약을 먹는 건 안 좋다고 하는 사람들도 봤어요. 감기약을 먹으면 기침이나 재채기를 억제 시키는데 그러면 오히려 감기가 빨리 안 낫는다는 거예요. 글쎄요. 저는 그 쪽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해서, 감기약을 먹는 게 좋은지, 아니면 그분 말씀대로 안 먹는 게 좋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 참고로 저는 감기 걸렸을 때에는 감기약을 꼭 먹습니다. ㅎㅎ

이처럼 몸에 병균이 들어왔을 때 몸이 저항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이는 어쩌면 몸이 건강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저항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른바 알러지, 또는 알레르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뭐가 문제냐 하면 우리 몸에 뭔가가 들어왔어요. 그런데 알고 보면 그건 우리 몸에 해로운 게 아니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막 내보내려고 몸이 여기저기서 안간 힘을 쓰는 것, 이것이 바로 알러지라고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꽃가루를 봐도 그렇습니다. 사실 이게 사람 몸 안에 들어온다고 해서 해로운 게 아니래요. 그런데 이걸 해로운 것, 나쁜 것이라고 판단을 해서 막 몸 바깥으로 내보내려고 기침도 하게 하고 재채기도 하게 하고 콧물도 나게 하고, 눈물도 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로 몸에 해로운 바이러스가 들어왔을 때에 이렇게 된다면 이는 좋은 것이지만, 해롭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면 몸이 대단히 힘이 들게 되지요. 예를 들어서 자동차가 비탈길을 오를 때 자동으로 힘을 받쳐주면 좋지만, 비탈길을 오르지도 않는데, 그냥 평지를 달리고 있는데 자꾸 비탈길 모드가 되어서 마악 차 엔진에 무리가 가고 그런다고 생각해보세요. 이러면 안 좋겠지요.

지난 3월 10일에 탑승자 157명이 전원 사망한 에티오피아 항공기 사고에 대한 안타까운 뉴스는 모두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고의 원인인데, 어제 뉴스에 보니까 안전장치 시스템이 오작동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안전장치가 무엇입니까. 제가 비행기에 대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적어도 안전장치라고 한다면, 이는 사고가 날 것 같은, 어떤 위험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이를 자동으로 방지하기 위한, 말하자면 대단히 중요한, 대단히 도움이 되는 장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안전장치가 잘못 작동을 하는 바람에, 결국 비행기가 추락하고 157명이라는 소중한 생명이 사망하는 비참한 사고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10장 9절~16절

9.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10.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1.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3.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14.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15.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翌日、この人たちが旅を続けて、町の近くまで来たころ、ペテロは祈るために屋上に上った。昼の十二時ごろであった。
彼は空腹を覚え、何か食べたいと思った。ところが、人々が食事の用意をしているうちに、彼は夢心地になった。
すると天が開け、大きな敷布のような入れ物が、四隅をつるされて地上に降りて来るのが見えた。
その中には、あらゆる四つ足の動物、地を這うもの、空の鳥がいた。
そして彼に、「ペテロよ、立ち上がり、屠って食べなさい」という声が聞こえた。
しかし、ペテロは言った。「主よ、そんなことはできません。私はまだ一度も、きよくない物や汚れた物を食べたことがありません。」
すると、もう一度、声が聞こえた。「神がきよめた物を、あなたがきよくないと言ってはならない。」
このようなことが三回あってから、すぐにその入れ物は天に引き上げられた。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본 환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 특히 베드로가 본 환상 내용만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 세 가지 단계, 세 가지 스텝으로 분류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 하늘에서 큰 보자기가 내려오는데 그 안을 보니까 거기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라고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둘째, 베드로는 이를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않았다>
私はまだ一度も、きよくない物や汚れた物を食べたことがありません。」
고 하면서 거절합니다.

셋째, 이를 듣고 다시 목소리가 들려 오기를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神がきよめた物を、あなたがきよくないと言ってはならない。」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부터 세 번째까지가 세 번 반복이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를 좀 더 간결하게 정리해볼까요?

첫째,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을
あらゆる四つ足の動物、地を這うもの、空の鳥 베드로한테 이걸 먹어! 라고 환상 속에서 들려왔습니다.
둘째, 베드로가 말하기론, 나 지금까지 신앙적으로 정결하지 않은 것은 먹은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안 먹을래요.
셋째, 하나님께서 정결하다고 하는데 니가 왜 정결하지 않다고 그래?

이것이지요.

이 대화의 흐름,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 먼저 오늘도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성경에서는 믿음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순종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에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순종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믿음이라는 게 무슨 신학교 교수님 말씀을 믿는 건가요? 순종한다는 것이 교회 목사님한테 순종한다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믿음이라 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순종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따른다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과 순종이라고 하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뭐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까. 지금 목소리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만, 적어도 마귀 사탄의 속삭임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입각한 환상이요, 이 사실은 베드로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하나님이 잡아 먹으라고 하신 말씀에 순종할 수 없대요. 그 이유는 둘째에서 보면, 이는 신앙적으로 정결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에서는 어떤 것들은 먹으면 안 된다고 하는 엄격한 율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누가 만든 거예요. 예,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인데, 지금 베드로한테는 하나님께서 이를 먹으라고 말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 자기는 말하자면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 저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이런 앞뒤가 맞지 않는, 지극히 모순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상한 말을 하고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너 하나님 믿는다면서 왜 하나님 말씀을 안 들어? 라고 세 번째에서 질책을 하고 계신 것이지요.

이 환상에서 앞에 나온, 베드로가 부정하다고 한 것은 이방인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이른바 선민사상,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았다는 사상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것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만, 이 때문에 유대인이 아닌 다른 이방인들에 대해서 차별대우를 했었던 것이지요. 이 환상은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방인에 대해서 그와 같은 시각이 있었기 때문에, 하물며 복음 조차도 이방인에게 전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환상을 보고 베드로는 아, 내가 부정하다고 여겨왔던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는 정결하다, 깨끗하다고 말씀하시는구나. 그렇다면 복음이 전해지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해서, 최초로 이방인 전도가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은 어떻습니까.

제가 오늘 이 말씀을 쓰면서 한 가지 고백을 하려고 합니다만, 제가 한 주의 말씀을 준비할 때 보면 대충 A4용지, 14포인트 정도로 해서 8페이지 정도를 합니다만, 여기까지가 대략 5페이지 정도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머지는 한 3페이지 정도 쓰면 되는데, 솔직히, 처음에 적은 대략 총 3페이지 정도의 글을 썼다가 모두 지웠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요.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요즘 사람들, 특히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너무 비판을 많이 한다. 그것도 하나님을 들먹이면서 마치 자신이 정당하다는 듯이 주장하면서 상대방을 비판한다…… 이는 마치 정치인이 국민을 들먹이면서 서로 상대방을 비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런 비판을 자제해야 한다……. 뭐 이런 내용을 자세하게 적어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제가 쓴 글, 이런 사람들은 이렇게 비판하고 있고, 저런 사람들은 저렇게 비판하고 있고……하고 적어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는, 그렇게 상대방을 비판하지 말고 <당신이나 잘해라> 뭐 이렇게 글을 적었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좀 이상해요. 제가 다 써놓고 다시 읽어보니, 뭐예요? 예, 제일 비판을 많이 하고 있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에 이게 사실이라면 제 글의 결론은 무엇이겠습니까. 저 자신을 보면서 <너나 잘해라>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 경우를 보신 적 있으시죠? 주위가 시끄러워요. 그래서 조용히 시키려고 야. 조용히 해! 조용히 하라니까! 라고 그랬더니 누가 그럽니다. 야, 니가 제일 시끄러워…….

마치 그런 말을 들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사실 우리는 어쩌면 이런 실수를 너무나도 많이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보면 나쁜 사람들을 잡아야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경우를 봅니다. 이걸 보고 저런 한심한 사람들…… 이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사실 우리도 역시 그렇지 않나 하는 것이지요.

뭐, 목사는 말할 것도 없지요. 죄를 지으면 안 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라고 하지만, 사실 목사라고 그게 다 쉬운 것은 아닙니다. 역시 힘든 것은 마찬가지인 것이죠.

예전에 어디서 그런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식은 절대로 부모 말을 듣지 않는대요. 절대로 부모가 말하는 대로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부모가 행동해온 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아무리 말로는 믿는다 순종한다 하면서, 사실 알고 보면 제일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믿음이 부족하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이, 믿음이 있다고 하는 우리 자신은 아닌지 한 번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보면 교회에 직분자 보다도 새신자 분들이 더욱 믿음이 좋을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은 불안해서 죽겠다고 하는데, 오히려 새산자들, 아니, 어린 아이들은 그렇게 걱정하는 사람들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된다는데 왜 안 믿어요…… 하는 것이지요.

성경을 봅니다. 고린도후서 3장 3절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3절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あなたがたが、私たちの奉仕の結果としてのキリストの手紙であることは、明らかです。それは、墨によってではなく生ける神の御霊によって、石の板にではなく人の心の板に書き記されたものです。

더 이상 오지 말라고 하는데도 귀찮게 찾아 다니고 성가 싫게 전화하고는 교회에 나오라고 하고 …… 사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 스스로가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입학시험이나 입사시험 같은 것은 교실에 앉아서 교재를 펴고 가르치면 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시험은 거기서 배운 것을 가지고 문제지에 나온 문제를 푼 다음 답안지에 적어 넣으면 됩니다.

하지만 믿음과 순종은 아닙니다. 이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하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잘 섬기면 됩니다. 믿음과 순종을 입으로 가르치려 해봤자 소용없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믿음과 순종을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분들이 봅니다. 그리고 그 분들이 아, 저게 예수님을 믿는 것이구나. 저게 믿음이고 저게 순종이구나 하는 것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다 보면 참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마음에 안 드는 사람도 많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 일들도 너무나도 많습니다. 불평 불만을 늘어놓으면 한 두 시간이 부족하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일들, 정말 참 쓸데 없고 힘들고 어려운 일들, 그리고 나를 힘들게 하는 저 누구 누구 누구……. 하지만 성경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는 요리를 잘 하지 못해서 여러 말씀은 못 드립니다만, 많은 요리를 함에 있어서 소금은 필요하지요. 요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 바로 소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요리에 반드시 들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금을 숟가락으로 퍽퍽 퍼 먹는 사람 보셨나요? 아니요. 그런 사람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것 하나하나를 보면 짜고 맵고 시고 쓰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나중에 모두 하나가 된다면 기가 막힌 주님의 멋진 요리로 완성이 될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걸 모르고, 아이구 이건 짜서, 이건 매워서, 저건 셔서, 이건 써서 넣으면 안 돼……라고 해서 자꾸 뱉어버리려고 하면, 하나님은 꼭 필요해서 주시려고 하는데 저는 자꾸 거부하고 내버리려고 하면……그게 뭐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알러지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 알러지는 우리를 영육간에 너무나도 힘들게 합니다. 맛이 있다고 해서, 달다고 해서 내가 좋아하는 맛의 조미료만 넣는다면 무슨 요리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한 가지 색을 좋아한다고 맨날 그 한 가지 색만 가지고 그림을 그리나요? 아니에요. 때로는 어두운 색도 필요하고 때로는 밝은 색도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 가지 색깔이 있어야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2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私は、貧しくあることも知っており、富むことも知っています。満ち足りることにも飢えることにも、富むことにも乏しいことにも、ありとあらゆる境遇に対処する秘訣を心得ています。

이런 것을 모두 감사하게 받아야 기가 막힌 요리가 되고, 기가 막힌 작품이 되고, 기가 막힌 축복을 얻을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진정한 믿음과 진정한 순종을 가지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먹여주시는 대로 먹고, 주시는 대로 받고, 그리하여 우리 마음 속 알러지를 물리치고 기가 막힌 주님의 요리, 기가 막힌 주님의 작품으로 완성되어 주님의 기가 막힌 축복을 모두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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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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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3회 지나가는 길
2019년 3월 24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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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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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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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지나가는 길” 通る道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학교를 다니거나 하면 이래저래 많은 시험을 봅니다. 의무교육 이상이 되면 이제 학교에 들어가기만을 위해서도 시험을 치죠. 시험은 입학시험이나 중간고사 기말고사만이 아닙니다. 무슨 자격 시험도 있고 입사시험도 있고 또 학교나 전공에 따라서는 졸업시험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는 아니지만 자격시험이나 입학, 입사 시험 같은 경우를 보면 일반적으로 합격 불합격이 있기 마련이지요. 그와 같은 시험의 경우에는 합격을 해야만 의미가 있지 합격을 하지 않으면 1점 차이든 10점 차이든 똑같습니다. 결국 불합격이 되고 맙니다.

한국이나 일본을 보면 합격, 또는 불합격……이라고 하지요. 대학입시 같은 경우 예나 지금이나 지방에서 도시로 와서 시험을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을 보니까 요즘은 합격자 발표를 스마트폰으로 확인을 하더군요. 예전에는 그냥 오로지 학교 앞 운동장 같은 곳에 붙여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랬는데 참 편리해진 것 같습니다. 옛날에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은 고사하고 일반 전화도 없었던 시절, 단순히 합격자 발표 만을 위해서 돈 들이고 시간을 들여 올라오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어떻게 했냐 하면, 전보……라고 하죠? 사실 요즘 젊은 분들……이라기 보다는 저도 사실 전보는 보내본 적도 없고 받아본 적도 없습니다만, 전화가 없었던 시절에는 제일 빨랐던 통신수단이 전보였다고 합니다. 옛날에 편지를 보내고 하면 며칠씩이나 걸리고 그랬는데 전보를 이용하면 당일에 전달할 수 있었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대신 좀 비쌌다고 합니다. 비용이 글자 수에 따라서 한 글자당 얼마……이런 식으로 계산을 했다고 하니까 무슨 안부 인사 같은 것을 적을 수는 없겠지요. 그야말로 용건만 간단히……였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대학 근처에 사는 지인들한테 부탁을 해서 수험번호를 미리 알려주고, 대신 발표를 본 다음 그 결과를 본인에게 전보를 통해서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보가 와서 딱 열어봤을 때, “합격”……이렇게 적혀 있으면 뭐 물론 좋겠지만 “불합격” 이렇게 되어 있으면 너무 충격적이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했냐 하면 좀 운치 있게 합격인 경우에는 “사쿠라사쿠” 즉 벚꽃이 핀다. 그리고 불합격일 때에는? “사쿠라치루” 벚꽃이 진다……. 뭐 사실 이것도 충격은 좀 충격이지만 아무튼 그런 문자로 해서 전보를 쳤다고 합니다.

그랬던 옛날 전통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지금도 일본에서는 벚꽃이 핀다 “사쿠라사쿠” 이렇게 다섯 글자로 표현을 하면, 대학교 합격……이라는 뜻으로 통합니다.

자, 그럼 시험 얘기도 나왔으니 우리 한 번 영어시험 한 번 볼까요?

그런데 한국이나 일본을 보면 이 <합격> 또는 <불합격>이라고 하는, 말하자면 어떤 시험의 최종결과……라는 인상이 있습니다. 그러면 영어로는 합격이라고 하는 말을 어떻게 말할까요.

혹시 아시는 분 계신가요? 예, 별로 어려운 말 아닙니다. pass. 패스……라는 단어이지요. 우리도 가끔 쓰지요? 어떤 시험에 패스했다……, 무슨 고시 패스 라는 식으로 쓰기도 합니다.

무조건 우리 것은 안 좋다. 영어가 좋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좀 바람직하지는 않지요. 우리 것도 좋은 것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지만 이 pass라는 말은 참 의미심장한 말 같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pass 라는 단어의 뜻은 합격 말고도 지나가다, 통과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통과……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지나가다>라는 말과 <합격>이라고 하는 말이 똑 같은 단어라는 사실을 보면 참 많은 생각이 듭니다.

한국은 3월에 새 학기가 시작합니다만, 일본은 4월에 시작합니다. 그런데 일본에 보면 5월병……이라는 말이 있다고 하더군요. 이것이 뭐냐 하면 이제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입학했어! 원하는 회사에 입사했어! 라고 하는 기쁨도 어느 정도 지나고 새로운 생활이 시작했을 무렵에 이 병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특히 유명 대학 입학생 같은 경우에는 이런 5월병을 앓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뭐 쉽게 말을 해서 자기는 어렸을 때부터 동경대에 들어가는 게 꿈이었는데. 그래서 동경대 합격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을 했어요. 잠 자는 시간도 아껴가면서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토록 동경대에 합격했어요! 와! 만세! ……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ㅅ 무기력증을 앓게 되다고 하는, 말하자면 심리적인 질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합격>이라고 하는 단어에는 그 동안에 쌓아왔던 노력이나 과정에 대한 <결과물>이라는 느낌이 강합니다. 좋은 학교에 들어갔다면 그것은 기쁜 일이지만 그것이 끝인가요? 이제는 아무것도 안해도 되는 건가요? 아니죠.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다면 이제 거기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졸업을 해서 자신의 꿈을 하나하나 이루어 나아가야지, 거기서 멈춰버리면 곤란합니다.

이건 회사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지요. 학교 다닐 때 열심히 취직준비를 했습니다. 그래서 졸업하고 원하는 회사에 합격할 수 있었어요. 와! 합격이다! 만세! ……. 뭐,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러면 거기서 끝인가요? 아니지요. 회사에서 왜 합격을 시켜주었겠어요. 회사에 합격시켜준 것은 무슨 상을 주려는 것이 아니에요. 회사에 들어와서 열심히 일을 하라고 합격시켜준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 합격했다고 막 그러면서 일은 안하고 친구들 만나고 좋아하기만 하고 일은 안 해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죠. 맨날 그러고 있으면 짤립니다. 그러면 안 되죠.

그런 면에서 보면 합격이라고 하는 pass라는 단어, 지나가다 라고 하는 단어는 참 좋습니다. 그 자리에 멈춰 서는 것이 아니라, 그 곳을 지나갈 수 있다는 것이 바로 합격이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도 시험이 없어요? 아휴, 시험이 왜 없어요. 많이 있습니다. 동경대 들어간다고 해서 시험이 없나요? 제가 동경대는 못 다녀봐서 모르겠습니다만 분명 시험이 많을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도 시험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예, 잘 봐야죠. 더 쉽게 묻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시험이 닥치면 합격해야 하겠습니까. 불합격해야 하겠습니까.

구약 같은 데에 보면 다니엘 서에 나오는 시험 있지요? 다니엘의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シャデラク、メシャク、アベデ・ネゴ)……가 시험을 당합니다. 느부갓네살(ネブカドネツァル) 왕이 금신상(金の像)을 세워놓고 거기에 절을 하라고 하지요. 그런데 이 세 다니엘의 친구는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 3장 15절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炉)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

「今、もしおまえたちが、角笛、二管の笛、竪琴、三角琴、ハープ、風笛 、および、もろもろの楽器の音を聞いたとき、ひれ伏して、私が造った像を拝むなら、それでよい。しかし、もし拝まないなら、おまえたちは、即刻、火の燃える炉 の中に投げ込まれる。どの神が、私の手からおまえたちを救い出せるだろうか。」」


왕이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금신상(金の像)한테 전을 하면 살려주겠지만, 절을 하지 않으면 너를 저 불타는 풀무불(炉) 속으로 집어넣겠다……그랬더니 그들이 뭐래요?

다니엘 3장 16절~18절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シャデラク、メシャク、アベデ・ネゴは王に答えた。「ネブカドネツァル王よ、このことについて、私たちはお答えする必要はありません。
もし、そうなれば、私たちが仕える神は、火の燃える炉から私たちを救い出すことができます。王よ、あなたの手からでも救い出します。
しかし、たとえそうでなくても、王よ、ご承知ください。私たちはあなたの神々には仕えず、あなたが建てた金の像を拝むこともしません。」

왕이여, 그런 말은 우리한테 그런 말을 백 번 해 봤자 소용없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저 불 속으로 집어넣는다면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다른 신들을 섬기지도 않을 것이고, 당신이 세워놓은 신상에 절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왜 이렇게 목숨을 걸고 절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직접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에도 있지요?


출애굽기 34장 14절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あなたは、ほかの神を拝んではならない。主は、その名がねたみであり、ねたみの神であるから。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왕의 명령을 끝까지 거부한 것이지요. 결국 그들은 왕명에 의해 풀무불(炉) 속으로 던져넣게 됩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다니엘 3장 27절
“총독과 지사와 행정관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太守、長官、総督、王の顧問たちが集まり、三人を見たが、火は彼らのからだに及んでおらず、髪の毛も焦げず、上着も以前と変わらず、火の臭 いも彼らに移っていなかった。

그렇게 맹렬히 타는 불 속으로 던져 넣었는데, 타기는커녕 그을리지도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떠십니까. 왕 앞에 끌려 나가서, 너 저 신상에 절해. 딱 한 번만 절하면 살려줄게. 아니면 너 저기 활활 타는 불 속으로 던져 넣는다……. 이런 시험을 당하면 어쩌겠습니까. 글쎄요.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냥 눈 딱 감고 넙죽 절하고 말겠다……라고 하는 사람들 많지 않을까 합니다.

저요? 저는 어떨 것 같습니까. ㅎㅎ 글쎄요. 저도 뭐 결혼하고 아직 1년밖에 안됐고요……할 일도 아직 많이 남은 것 같기도 하고요……ㅎㅎ

하지만 우리 이 서점에서 오늘 말씀을 한 번 다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あなたがたが経験した試練はみな、人の知らないものではありません。神は真実な方です。あなたがたを耐えられない試練にあわせることはなさいません。むしろ、耐えられるように、試練とともに脱出の道も備えていてくださいます。

이 말씀을 차근차근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시험을 당한대요? 안 당한대요? 예, 당합니다. 그런데 그 시험은 어떤 시험인가 하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당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사실 보면 이 세상 시험과 비슷합니다. 예를 들어서 초등학생한테 고등학생 문제를 내지는 않지요. 학교에서도 그 학년 그 수준이 풀만한 문제를 내줍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다음 부분입니다.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耐えられるように、試練とともに脱出の道も備えていてくださいます。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시험을 보는데 시험을 당할 때쯤에는 피할 길을 내주셔서 감당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피할 길을 내주세요? 앞서 제가 말씀 드렸던 것 기억하시나요? 영어로 합격은 pass입니다. 지나가는 길이지요. 합격을 하면 지나갈 수 있지만, 합격을 못하면 지나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보면 피할 길을 내주셔서 감당하게 하신다. 이는 지나가게 해준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이 내용을 풀어서 말씀 드리면 이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시험을 당하기도 하는데, 이는 우리가 감당할만한 시험, 그러니까 우리가 합격할 수 있는 시험만 당하게 해주신다. 만약에 합격하지 못할 것 같으면…… 어쩐다구요? 다른 합격하는 길을 내주신다……”

지금 성경에서는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뭐겠습니까. 니가 합격할만한 문제만 내줄게. 니가 합격하지 못할 것 같으면 다른 합격하는 방법을 내가 알려줄게……이러고 계신 것입니다.

이게 공정한 시험이에요? 아닙니다. 공정은 무슨 공정. 철저한 부정행위입니다. 세상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철저한 배후 수사와 책임자 처벌을 해야 마땅하겠지요.

하지만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부정행위? 예, 부정행위입니다. 누구를 위한 부정행위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나를 위한 부정행위, 우리를 위한 하나님 나라의 부정행위입니다.

더 심한 부정행위를 말씀 드릴까요? 죄인은 벌을 받아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예, 당연히 벌을 받아야지요. 그게 공정행위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벌을 받게 됩니다. 징계를 받아야 합니다. 채찍에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게 하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징계를 받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이 뭐라고 그러세요? 그래. 내 아들이 너희를 대신해서 모든 벌을 다 받았으니, 너희는 이제 죄가 없다. 구원을 받았다. 정결케 되었다. 그러니 천국으로 들어올 수 있다……. 이것이 바로 Amazing grace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놀라운 십자가의 은혜인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에는 이미 보장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보장되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합격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합격할만한 문제만 내겠다. 합격하지 못할 것 같으면 합격할 방법을 알려주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뭐, 그런 말 있지요?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a question…… 햄릿에 나오는 대사인데, 뭐 사실 이게 정확한 번역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아무튼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합격이냐 불합격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할지 모릅니다만, 예수님을 믿고 구주로 영접한 우리에게는 오로지 합격만이 있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을 알았던 것이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앞서 말씀 드린 다니엘의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シャデラク、メシャク、アベデ・ネゴ)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알고 있었습니까. 그들이 알고 있던 것, 그것은 자신들 앞에 놓인 시험에서는 오로지 합격만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겁 없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점에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마음 속으로 큰 소리로 대답해보시기 바랍니다.

자, 우리 앞에 두 가지 시험문제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반드시 봐야 하는데, 자기가 고를 수가 없어요.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면 100억원을 받고, 쉬운 시험에 합격하면 1만원을 받아요. 그런데 만약에 불합격을 하게 되면 자신의 전재산을 잃게 되요.

참 긴장이 되겠지요. 그런데 짠하고 문제지를 열었어요. 여러분께서는 어느 쪽이면 기뻐하시겠습니까. 내가 봐야 하는 시험이 어려운 시험이었으면 기뻐하겠어요? 아니면 쉬운 문제라면 기뻐하시겠어요.

그런데 시험지를 열어보기 직전에 안내방송이 들려와요. 여러분께서는 그 시험을 보시면 반드시 100% 합격합니다. 문제를 모를 경우에는 특별히 답을 알려주도록 규칙이 바뀌었습니다…이런 안내방송이에요.

자, 다시 묻겠습니다. 문제지를 열어봤을 때, 내가 봐야 하는 시험이 어려운 시험이었으면 기뻐하겠어요? 아니면 쉬운 문제라면 기뻐하시겠어요.

이런 규칙을 몰랐을 때에는, 만에 하나 내가 틀린다면 내 전재산을 몰수 당해. 그렇다면 쉬운 시험이 훨씬 좋죠. 하지만 100% 합격? 절대로 불합격이 안 돼? 그렇다면 어떻게 해요? 공짜로 돈을 주는데 100억이 좋냐, 1만원이 좋냐……. 이렇게 묻고 있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당연히 100억이 좋다고 하지요.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고 우리가 어려운 시험을 겪게 되면, 아이고, 큰일 났네. 이걸 어쩌면 좋아. 그러면서 하나님이 있네 없네, 죽었네 살았네 하고 난리를 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야. 넌 지금 위기가 아니야. 큰 축복을 얻을 기회를 잡은 거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우리는 그러죠. 하이고~ 저는 못해요~ 제가 어떻게 이런 시험을 이길 수가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실 것 같습니까.

누가 너더러 하래? 착각하지 마. 이건 내가 할 거야. 나한테 맡겨……. 이러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시편 37편 5절~6절
“5.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6.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あなたの道を主にゆだねよ。主に信頼せよ。主が成し遂げてくださる。
主はあなたの義を光のようにあなたの正しさを真昼のように輝かされる。

시편 55장 22절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あなたの重荷を主にゆだねよ。主があなたを支えてくださる。主は決して正しい者が揺るがされるようにはなさらない。

잠언 16장 3절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あなたのわざを主にゆだねよ。そうすれば、あなたの計画は堅く立つ。

베드로전서 5장 7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あなたがたの思い煩いを、いっさい神にゆだねなさい。神があなたがたのことを心配してくださるからです。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이야말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국이나 일본에 보면 장기나 바둑이 있지요? 직접 두시지는 않더라도 두는 것을 본 적은 있으실 것입니다. 두 사람이 승부를 겨루는 것인데, 예를 들어서 나무로 된 장기알이 있어요. 그것도 싸구려 나무로 된 장기알이 하나님한테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고, 하나님. 나는 싸구려 나무 장기알인데 상대방 장기알은 고급 나무에요. 아이고, 저는 졌어요. 이길 수 없어요…….

이게 말이 되는 건가요? 말이 안 됩니다. 아니, 장기에서 싸구려 나무로 된 장기알은 지고 비싼 나무로 된 장기알은 이기나요?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아무리 상대방이 비싼 나무가 아니라 무슨 대리석이나 금덩어리로 된 장기알이라 하더라도 이는 승부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겠어요. 걱정하지마. 싸구려 나무인지 비싼 나무인지는 전혀 상관 없어.

여러분, 그러면 무엇이 상관 있는 것입니까. 그렇죠. 그 장기를 누가 두느냐입니다. 사람이 두면 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두시면 반드시 이기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쉬운 시험이 오나 어려운 시험이 오나 우리는 반드시 합격합니다. 승리합니다. 승리하지 않을 것 같으면 다른 길, 지나가는 길을 예비해주셔서 합격할 수 있도록, 승리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서 이미 약속해 놓으신 말씀입니다.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 하나님 말씀이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장기알처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 됩니다. 우리가 싸구려 나무면 어떻고 저 길가에 있는 흔한 돌맹이면 어떻습니까. 이리로 가라면 이리로 가고, 저리로 가라면 저리로 가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께 맡기면 승리하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얼마 전에 뉴스에 보니까 동경에는 이제 벚꽃이 폈다고 하더군요. 한국이나 일본은 이제 여기저기서 벚꽃이 활짝 피게 되겠지요. 우리 삶도 이처럼 우리 앞에 놓인 모든 시험에 합격해서 사쿠라사쿠. 벚꽃이 핀다는 합격자 전보를 받아 안는 것처럼, 우리 삶 속에서 모든 시험에 승리해서 마침내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을 모두 받아 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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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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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2회 우리들의 마음
2019년 3월 1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잠언 4장 23절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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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들의 마음” 私たちの心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생각하실 때, 교회는 몇 년 정도 다녀야 좀 제대로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에는 나 정도 믿음을 가졌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좀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좀 어려우세요?

그러면 좀 다른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대략 몇 년 정도 살면 좀 사람으로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드시나요?

짐승들은 태어나자 마자 뛰어다니기도 하지요. 초식동물들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자기가 알아서 풀을 뜯어먹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하지요. 단순히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최소한 몇 개월이나 걸리고, 자기가 스스로 먹을 것을 자기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루 이틀 가지고는 안됩니다. 적어도 몇 십 년은 걸려야겠지요.

인간으로서 제대로 자립할 수 있는 나이다……라고 하면 단순한 기준으로서는 성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 한국이나 일본을 보면 과거에는 성년 나이를 20세로 정했었습니다만, 요즘은 어느 정도로 낮추는 경향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선 투표할 수 있는 나이를 20세에서 18세~19세로 조정을 하고, 그 외에 대한 부분도 모두 낮추는 추세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에 18세나 19세, 적어도 20세 정도 되면 사람으로서 성숙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아직 멀었어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요즘은 많은 분들이 면허를 땁니다. 그리고 운전을 하지요. 우리 교회가 있는 군마현을 본다면 일본 국내에서 운전면허 보유율이 가장 높다고 합니다. 뭐, 면허를 따놓고도 실제로 운전을 하지 않는 분들도 많이 계시지만, 이 군마현은 면허 보유율 만이 아니라 자동차 보유율도 일본에서 가장 높다고 합니다. 사실 뭐, 이걸 뒤집어보면 그만큼 대중교통수단이 부족하다는 뜻이 되지만요. ㅎㅎ

그렇다면 운전, 한 어느 정도 하면 능숙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5년? 10년? 아니면 한 20년은 해야 그래도 운전 좀 한다고 명함을 내밀 수 있는 건가요?

참고로 한국은 그런 규정이 없다고 합니다만, 일본은 새로 운전면허를 땄다면 1년간은 초보자 마크를 부착해야 한다고 법적으로 아예 정해져 있습니다. 노랑색과 파란색으로 된 새싹을 나타내는 마크이죠. 그래서 면허시험에 합격하면 운전학원에서 초보자마크를 선물로 준다고 해요.

저도 운전면허를 처음 땄을 때의 일을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솔직히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면허를 땄으면 그토록 꿈꿔왔던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습니다. 차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차이가 많지요. 서울이나 대도시 같으면 일단 버스나 지하철을 타러 가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몇 번이나 갈아타고 그래야 하지만, 자동차가 있으면 곧바로 차를 타고 출발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편리하게 차를 운전할 수 있다면 안전운전을 해야 할 텐데, 안타깝게도 사고가 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사고가 가장 많이 나냐 하면, 우리가 얼핏 생각하기에는 면허를 따고 바로 직후가 아무래도 운전이 서툴기 때문에 사고가 많이 날 것도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물론 주차를 하거나 커브를 돌 때 긁히기야 하겠지만, 그건 사고가 아니죠. 그냥 뭐, 애교?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정말 피해가 심각한 교통사고는 언제 나냐 하면 운전을 시작하고 3년 정도에 가장 많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한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이렇답니다. 맨 처음에 면허를 따고 운전을 시작할 때에는 상당히 조심한다고 해요. 과속을 하지도 않죠. 법정 속도도 잘 지키고, 일시 정지 하라고 하는 곳에서는 정확하게 멈춥니다. 오른쪽 왼쪽도 자세히 보지요. 그렇게 하면, 그야말로 실수로 긁히거나 하는 일은 있을 수 있지만 큰 사고는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3년 정도 지나고 나면, 아, 이제 조금 차를 알 것 같아요. 커브 같은 건 문제 없고요, 차선도 능숙하게 바꿀 수 있습니다. 고속도로를 타서 쌩쌩 달릴 때에는 기분도 좋아요. 이제 그야말로 나와 차가 하나가 된 듯한, 내가 원하는 대로 차를 운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나 바로 그 때, 정말 능숙하게 차를 운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 바로 그 때 대형사고가 날 확률이 제일 높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음주 같은 건 어떨까요. 얼마 전에 한국 뉴스를 보니까, 어떤 사람이 술을 먹고 주차요금을 징수하는 사람을 갑자기 폭행을 했다는 거예요. 그것도 참 안타까운 것은, 그 주차요금을 징수하는 분이 장애가 있으신 분이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뭐냐 하면 제대로 대항할 수 없는, 절대적인 약자를 그렇게 심하게 폭행을 해서, 병원에 실려갔다고 합니다.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지만, 육체적인 부상도 부상인데, 그 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너무나도 큰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다가 보면 자기를 그렇게 폭행할 때의 그 사람 얼굴이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그럼 가해자는 어떠냐 하면, 맨 처음에는 부인을 했는데, CCTV를 보여주니까, 그 때서야 인정을 하더래요. 하지만 인정을 하면 뭘 해요? 나는 술 마셨기 때문에 기억이 안 난다고 한답니다. 그리고 자기가 때린 사람한테 사과도 하러 가지 않았다고 해요.

술 드시고 그렇게 일을 저지르는 분들 보면, 평소에 자신이 술이 약하다고 해요? 아니요. 본래 술이 약하다고 하는 분들은 그렇게 많이 마시지도 않습니다. 나 괜찮아. 나 술 쎄. 걱정하지 마……. 이런 분들이 그렇게 과음을 하고 사고를 저지르는 일들이 많다고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너무나도 비굴해지고 기죽어서 살아가는 것이 좋을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너무 자신감이 넘치게 되면, 이는 자신감이 아니라 교만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보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진리를 논하고 정의를 논하고 철학을 논하고 윤리와 도덕을 논하는 사람들은 참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자기가 말을 한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냐 하면 이 또한 대단히 의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저도 이렇게 앞에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만, 목회자라 하더라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이 목회자야말로 어쩌면 교만이라고 하는 덫에 걸려들기 쉬운 직업인지도 모릅니다.

생각해보세요. 예를 들어서 한국의 대형교회라고 하면 한 번 예배에 몇 백 명, 몇 천 명씩 앉습니다. 그러면 그 앞에서 말씀을 전하지요. 그러면 다들 아멘 하고 경청을 합니다. 그리고 어딜 가나 목사님, 목사님 하지요. 세상에 어느 직업이 매주 그렇게 많은 청중들 앞에 서서 이야기하고, 그 많은 청중들이 경철을 하면서 감사를 합니까. 제아무리 큰 나라의 대통령이라 한다 하더라도 그러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작년 2018년 9월에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유엔본부에서 연설을 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 연설 중에서 그는 자신의 성과를 나열하고 자화자찬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2년이 채 안돼 나의 행정부는 미국 역사에서 다른 행정부보다 많은 것을 이루었습니다.”

이렇게 유엔본부에서 연설을 했더니, 그 앞에 앉아 있던 각국의 대표들이 어떻게 했냐 하면 갑자기 수군수군 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웃음 소리도 들려와요.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트럼프 대통령은 대단히 당황을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해요.

“아……이건 제가 전혀 예상하지 않은 반응이었다.”

이러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법한 것이, 그가 연설하는 곳은 언제나 그들의 지지자들로 넘쳤습니다. 왜냐 하면 그 사람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연설을 들으러 가지 않거든요. 그래서 그는 항상 어디서든지 연설만 하면 박수갈채를 받아왔던 것이지요. 하지만 유엔본부가 자기 지지자들이 모여 있나요. 어찌 보면 요즘 세계는 미국 대통령이나 정부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리 곱지만은 않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 비웃음을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나라의 대통령이나 지도자라 하더라도 매주 그 많은 청중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경청하는 자리에 서지는 못할 것입니다. 항상 지지하는 사람이 있나 하면 비판하는 사람이 있지요. 그것이 바로 정치라는 세계의 특성입니다.

그럼 뭐, 판사들은 어떻습니까. 어떤 판결을 내렸을 때 원고와 피고로부터 똑같이 박수를 받는다? 아뇨. 그럴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긴 쪽한테 있어서는 명판결이라고 할지는 모르지만 진 쪽에 있어서는 유감이다 뭐다 하겠지요.

그런데 반면에 앞서 목회자 이야기로 돌아오면, 매번 무슨 말씀을 전하면 아멘, 하고 경청을 해주십니다. 그러니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문제가 발생하냐 하면, 성도님을 경청을 해주시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듣는 분들이 왜 그렇게 경청을 해주십니까. 목회자가 앞에서 자기 자랑을 하는데 경청을 해줘요? 자기 생각을 말하는데 아멘 아멘 하고 경청을 해줍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그 교회는 문제가 심각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제대로 된 교회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역사가 선포되는 곳, 예수님의 십자가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 성경 말씀이 전파되는 곳이야말로 진정한 교회, 주님께서 머리 되신 교회라고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를 착각해서 주님한테 돌려야 할 영광을 자기가 차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오래된 목회자라 하더라도 소용 없습니다. 금새 교만이라고 하는 쓴 뿌리가 그 마음 안에 심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잠언 4장 23절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何を見張るよりも、あなたの心を見守れ。いのちの泉はこれから湧く。

참 이 말씀, 이 짧은 말씀이 알고 보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이 잠언서는 여러분께서 잘 하시는 바와 같이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쓴 것입니다. 솔로몬이 쓴 것이 시편에도 몇 편 있습니다만, 주로 잠언 외에 아가와 전도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잠언과 전도서를 읽으면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또한 잠언은 지혜서 중의 지혜서라고 하지요.

열왕기상 4장 29절~34절에는 솔로몬의 지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
솔로몬의 지혜가 동쪽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
그는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워서 예스라 사람 에단과 마홀의 아들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보다 나으므로 그의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
그가 잠언 삼천 가지를 말하였고 그의 노래는 천다섯 편이며
그가 또 초목에 대하여 말하되 레바논의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그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대하여 말한지라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왔으니 이는 그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들이 보낸 자들이더라”

神は、ソロモンに非常に豊かな知恵と英知と、海辺の砂浜のように広い心を与えられた。
ソロモンの知恵は、東のすべての人々の知恵と、エジプト人のすべての知恵にまさっていた。
彼は、どの人よりも、すなわち、エズラフ人エタンや、マホルの息子たちのヘマン、カルコル、ダルダよりも知恵があった。そのため、彼の名声は周辺のすべての国々に広まった。
ソロモンは三千の箴言を語り、彼の歌は千五首もあった。
彼は、レバノンにある杉の木から、石垣に生えるヒソプに至るまでの草木について語り、獣、鳥、這うもの、そして魚についても語った。
彼の知恵のうわさを聞いた世界のすべての王たちのもとから、あらゆる国の人々が、ソロモンの知恵を聞くためにやって来た。

하나님께서 넘치는 지혜를 허락해주셨기 때문에 이처럼 많은 성과를 남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솔로몬 자신의 인생을 어땠습니까. 정말로 자신이 했던 말처럼 지혜롭고 은혜로운 삶을 살았을까요.

잠언 9장 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主を恐れることは知恵の初め、聖なる方を知ることは悟ることである。

이렇게 은혜로운 말씀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상숭배를 하는 것을 용납했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애굽을 의지하기도 하였습니다. 성경에서 <애굽>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그 나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여호와를 의지하라고 말해놓고서, 정작 자신은 세상을 의지한다고 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때문에 어떻게 되냐 하면, 하나님께서 노하셨기에 솔로몬이 죽은 다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로 분단을 하시게 됩니다.

솔로몬도 이랬는데 솔로몬보다도 한참 부족한 우리가 솔로몬보다 더 잘할 수 있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0장 12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ですから、立っていると思う者は、倒れないように気をつけなさい。

성경은 이처럼 항상 안심하지 말아라. 방심하지 말아라. 언제나 경계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던 것처럼 정말로 큰 교통 사고는 우리 운전이 서툴 때가 아니라, 우리가 방심했을 때 일어나기 쉽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사람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우리는 몇 살쯤 되어야 제대로 철이 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미리 말씀 드리지만 저를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적어도 40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 하면 아직까지도 보면 아…… 내가 그 때 왜 그랬을까. 내가 며칠 전에 왜 그랬을까……하는 후회도 하고 그러기 때문에 아직 완벽한 인간이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실 후회가 나쁜 것은 아니지요. 누구는 후회가 나쁘다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후회를 해야 반성을 하고, 반성을 해야 개선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몇 살 정도 되어야 좀 능숙하고 성숙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삶은 평생 초보운전이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는 단순히 좀 멋있게 말한 것이 아니에요. 실질적으로 그렇습니다.

아까 일본은 면허를 따고 1년간 초보운전 마크를 붙인다고 했는데, 우리 삶은 어떻습니까. 자동차는 똑 같은 차를 2년째 3년째 운전하면 익숙해집니다. 왜냐하면 자동차는 그대로 있으니까 그렇겠지요.

하지만 사람은 어떻습니까. 내가 예를 들어서 올해 서른이에요. 만약에 내년에도 서른이고 그 다음 해도 서른이라면, 서른이라는 나이를 살아가면서 좀 능숙해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서른>이라고 하는 나이의 초보자딱지를 떼려고 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예. <서른 하나>라고 하는 새로운 초보자 딱지를 붙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른, 마흔이 아니라 좀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칠십, 팔십, 구십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 나이를 살아가는 것은 항상 처음입니다. 그리고 그 나이의 초보 딱지를 뗄 때 쯤이면 다음 나이의 초보 딱지를 붙여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나이가 많으면 젊은 사람들한테 좀 자랑을 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서 지금 나이 40 먹은 사람이 나이 30 먹은 사람한테 자랑할 수 있을까요? 아니에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이 40 먹은 사람이 30살 인생을 살았던 것은 10년이나 전 일이에요. 그 사람이 2009년에 30세 인생을 살았을지는 모르지만, 2019년에 30세 인생에 대해서는 역시 그 사람 자신도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믿음도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장해 나아가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1년째 믿음은 1년째 믿음의 초보자이고, 10년째 믿음은 나에게 있어서 역시 10년째 믿음의 초보자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스스로가 매사에 초보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낮아질 수가 있습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우리 마음을 교만이라는 위험으로부터, 유혹이라는 위험으로부터, 지킬 수 있다고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즘은 저희 집 주변에 전도지를 돌리고 있습니다만, 전도지를 넣으려고 우체통을 보면요, 우체통은 그 안이 비어 있어서 전도지를 넣을 때 쓰윽 쓰윽 하고 잘 들어갑니다.

그런데 또 어떤 우체통을 보면요, 그 안이 꽉 차 있어서, 아무리 전도지를 넣으려고 해도 안 들어가요. 어떻게 좀 요렇게 조렇게 넣어보려고 해도 안 들어가서, 때로는 포기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을 비워야 우리 마음 안에 복음이 들어갑니다. 우리 마음 안에 겸손이 있어야 우리 마음 안에 복음이 들어갑니다. 믿음이 심어집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見よ、わたしは戸の外に立 ってたたいている。だれでも、わたしの声を聞いて戸を開けるなら、わたしはその人のところに入って彼とともに食事をし、彼もわたしとともに食事をする。

내 마음을 비우고 우리 마음을 주님 앞에 열어놓을 때, 주님께서 두드리는 노크 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30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わたしは心が柔和(にゅうわ)でへりくだっているから、あなたがたもわたしのくびきを負って、わたしから学びなさい。そうすれば、たましいに安らぎを得ます。

우리는 아직 우리 자신이 초보운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 모두 우리 마음을 비우고,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면서 하루하루 살아갈 때에,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을 모셔 들이고, 주님과 함께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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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1회 감사라고 하는 명령
2019년 3월 1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 전반부
“범사에 감사하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감사라고 하는 명령” 感謝という命令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먼저 여러분께 질문을 하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께서는 감사함을 알고 계신가요? 예, 우리는 감사함을 알고 있습니다. 감사함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감사를 해야 할까요. 그리고 또한 우리는 무엇에 대해서 감사해야 할까요.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 전반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すべてのことにおいて感謝しなさい。

그렇습니다. 우리는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범사에……라고 하는 뜻은 모든 일에……라는 뜻입니다. 모든 일,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가 느끼기에 좋은 것처럼 생각되는 일은 물론이지만, 반대로 우리가 느끼기에는 안 좋은 것처럼 생각되는 일도 역시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이 말씀은 분명히 명령형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명령형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명령이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명령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지시나 권장(推奨)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지시나 권장은 여기에 따르면 좋은 것이고 따르지 않을 경우에 불이익이 발생할 수는 있지만 처벌 당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명령은 어떻습니까. 이는 자신에게 이익이 있든 없든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이 명령입니다. 만약에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이에 해당하는 책임이 발생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처벌을 받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쉬운 예를 한 번 들어볼까요? 여러분께서 오늘 교회에 오실 때 보면 반드시 몇 개 이상의 신호등을 지나오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파랑신호와 빨강신호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파랑신호는 진입(進め), 빨강신호는 정지(止まれ) ……이라고 하는 차이는 누구나 다 알고 있겠지만, 이 두 신호의 차이는 그 내용만이 아니라 성격에 있어서도 대단히 큽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파랑신호는 허가인 반면 빨강신호는 명령입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기 위해서 보행자 신호를 한 번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보행자 신호가 파랑이에요. 그럼 반드시 건너야 하는 건가요? 아니, 난 이쪽 방향인데 보행자 신호가 저쪽이 파랑이 되었어요. 그러면 건너야 해요? 아니요. 건널 수도 있지만, 안 건너도 됩니다. 파랑신호는 <건널 수 있다>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빨강신호는 다릅니다. 빨강신호는 건너면 안 되지만 건너도 됩니다……가 아니에요. 빨강신호는 <절대로 건너서는 안 된다>라는 뜻입니다. 이를 간단하게 말하자면 파랑신호는 건널 수 있다고 하는 <허가>인 반면에 빨강신호는 건너지 말라고 하는 <명령>인 것이지요.

여기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는데, <허가>를 이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처벌 받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운전면허를 가지고 계신 분들도 많으시겠지요? 지난 달에 저희 아내도 드디어 일본면허로 전환을 했습니다만, 면허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운전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에요. 면허를 가지고 있는데 운전을 안 하면 처벌 받나요? ㅎㅎ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운전면허는 어디까지나 <운전을 할 수 있는 허가>이지 <운전을 해야만 한다>는 <명령>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명령>을 어기면 처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건너지 말라>라고 하는 빨강신호의 <명령>을 어기면 이는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말씀은 허가가 아닙니다. 감사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는 게 아닙니다. 감사 안 한다 해도 괜찮다는 것도 아닙니다. 감사를 하지 않으면 큰 일 난다, 앞서 살펴본 신호등 이야기로 본다면 <처벌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 바로 이 명령인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지금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없어요? 누가 거짓말을 하래요? 여러분, 저는 부족한 것이 있을 것 같습니까. 없을 것 같습니까. 없을 것 같으세요? 뭐, 이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기는 뭐하지만 부족한 것이 이만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시편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시편 23편 1절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主は私の羊飼い。私は乏しいことがありません。

자, 성경에 이렇게 적혀 있으니, 우리는 이처럼 지금 부족한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야 해요?

아아, 주님! 저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렇게 억지로 고백해야 하는 것인가요?

앞서 말씀 드렸던 것을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누가 거짓말을 하래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사실은 내가 무척 부족하지만 부족하지 말라고 하니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또는

“범사에 부족하더라도 부족하지 않다고 말하라”

성경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부족함이 있을 때에는 항상 돌아가는 성경구절이 어디여야 하겠습니까.

마태복음 6장 31절~32절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ですから、何を食べようか、何を飲もうか、何を着ようかと言って、心配しなくてよいのです。
これらのものはすべて、異邦人が切に求めているものです。あなたがたにこれらのものすべてが必要であることは、あなたがたの天の父が知っておられます。

바로 이 구절로 우리는 돌아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데도 “하이고, 하나님이 알긴 뭘 알아요” 라고 하시겠어요?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냥 하신 말씀이 아니에요. 모든 말씀은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면서까지 우리에게 하시고자 했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고 계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지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채워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남녀 어린아이 다 합해서 200만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민족,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200만명 구출작전을 명령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장 9절~10절
“9.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今、見よ、イスラエルの子らの叫びはわたしに届いた。わたしはまた、エジプト人が彼らを虐げている有様を見た。
今、行け。わたしは、あなたをファラオのもとに遣わす。わたしの民、イスラエルの子らをエジプトから導き出せ。」

자, 지금 모세 나이 80입니다. 지금 이 할아버지가 뚜벅뚜벅 가서 애굽의 황제 바로를 만나서, 저기 여보시오. 당신 나라에서 종살이 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풀어주시오……. 이렇게 말하면 바로가 아이구,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거행 하겠사옵니다……라고 할 것이라는 상상이 됩니까? 안 됩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이는 불가능합니다. 더구나 이를 위해 누구를 붙여주셨다구요? 예, 모세의 형인 83살 먹은 아론 할아버지를 붙여주셨어요. 그러면 가능합니까? 아니에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이는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켜주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죽으러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모세한테 무엇을 주셨습니까.


출애굽기 4장 2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主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が手に持っているものは何か。」彼は答えた。「杖です。」

출애굽기 4장 17절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また、あなたはこの杖を手に取り、これでしるしを行わなければならない。」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냐 하면, 모세야, 너 오른손에 쥔 게 뭐야? 그러니까, 모세가, 지팡이…인데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래. 그거 가지고 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팡이 하나 가지고 가래요.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었던 지팡이인데, 그거 하나 가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안 됩니다.

자, 그러면 모세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다음 2개 중에 골라보세요.

1번. “주여! 이것으로는 너무나도 부족하오니 애굽을 이길 수 있는 10만 군대, 100만 군대를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한다. 이 기도를 안 들어주면 들어줄 때까지 기도한다.

2번. 애굽으로 간다.

어느 쪽이 정답이겠습니까.


예, 2번이 정답입니다. 왜요? 너무 무모하지 않나요? 그런데 왜 2번이 정답인가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할 수 있다. 하면 된다고 하셨기 때문에 모세는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좀 더 들어가볼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그것은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실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를 믿고 간 모세는 마침내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내는 데에 성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떻습니까. 그가 블레셋 군대의 영웅 골리앗 앞에 섰을 때 다윗의 나이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만, 적어도 군대에 나가지 못할 정도로 어린 나이였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온다고 해서 형들은 전쟁터로 나갔습니다만, 다윗은 아직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형들의 도시락배달을 나갔던 것입니다. 거기서 만난 것이 바로 골리앗이었습니다.

블레셋 군대의 전쟁 영웅 골리앗, 그리고 군대에도 못 갈 정도로 나이가 어렸던 다윗의 한판 승부. 이는 누가 보더라도 뻔한 승부였습니다. 승부가 시작하자 마자 골리앗의 공격으로 다윗의 몸은 그 흔적 조차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갈기갈기 찢겨지는 비참한 광경을 상상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주여~ 저 골리앗을 물리칠 군대를 보내주시옵소서~!” 라고 기도를 해야 합니까.

물론 그런 기도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저기 눈앞에 골리앗이 쳐들어오고 있지 않습니까.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사무엘상 17장 45절~47절

“45.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6.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ダビデはペリシテ人に言った。「おまえは、剣と槍と投げ槍を持って私に向かって来 るが、私は、おまえがそしったイスラエルの戦陣の神、万軍の主の御名によって、おまえに立ち向かう。
今日、主はおまえを私の手に渡される。私はおまえを殺しておまえの頭を胴体から離し、今日、ペリシテ人の軍勢の屍を、空の鳥、地の獣に与えてやる。すべての国は、イスラエルに神がおられることを知るだろう。
ここに集まっているすべての者も、剣や槍がなくても、主が救いをもたらすことを知るだろう。この戦いは主の戦いだ。主は、おまえたちをわれわれの手に渡される。」

이렇게 말하고 어떻게 했대요?


그 다음 48절~49절입니다.
“48.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49.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そのとき、そのペリシテ人はダビデの方に近づき始めた。ダビデは、すばやく戦場を走って行き、ペリシテ人に立ち向かった。
ダビデは手を袋の中に入れて、石を一つ取り、石投げでそれを放って、ペリシテ人の額を撃った。石は額に食い込み、彼はうつぶせに地面に倒れた。

갑자기 음악소리가 짜잔~ 울려 퍼지더니, 하늘에서 빛이 나고 물매가 쫘악 내려왔대요? 아니에요. 물매는 이미 다윗이 가지고 있었어요. 그것을 가지고 골리앗을 물리친 것입니다.

모세나 다윗이 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것도 부족하고 저것도 모자라고 하는 불평이나 투정이 아닙니다.

주님, 지금 내게 있는 것이 족합니다. 부족하면 주님께서 채워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고 담대하게 애굽 바로를 향해서, 블레셋 골리앗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지정한 믿음의 용사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인 무엇인지를 가끔 모를 때가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는 있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하지만 이는 대단히 위험합니다. 이를 모르면 감사가 나오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이삭에는 쌍둥이 아들이 있었는데, 에서와 야곱입니다. 먼저 나온 에서가 형이 되고, 간발의 차이로 나중 나온 야곱이 동생이 되었습니다.

간발의 차이이긴 하나 형은 형입니다. 에서는 아브라함의 축복을 이어나갈 장손이었습니다. 장자였습니다. 이는 대단히 큰 축복이었습니다. 돈을 주고 살래야 살 수도 없는 축복이었지요.

하지만 그는 이것이 그렇게 큰 축복인줄 몰랐습니다. 이유는 간단하지요. 자기는 아무런 노력도 안 했어요. 태어나서부터 당연히 가지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어떻게 되냐 하면 결국에는 이 권리를 떡과 팥죽 한 그릇을 대가로 야곱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창세기 25장 33절~34절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ヤコブが「今すぐ、私に誓ってください」と言ったので、エサウはヤコブに誓った。こうして彼は、自分の長子の権利をヤコブに売った。
ヤコブがエサウにパンとレンズ豆の煮物を与えたので、エサウは食べたり飲んだりして、立ち去った。こうしてエサウは長子の権利を侮った。

이는 단순히 어떤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는 것이 아닙니다. 장자의 명분은 사람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주신 권리입니다. 그런데 이를 가볍게 여긴 에서는 결국 언약의 족보, 아브라함의 계보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리고 에서의 하나님이 될 수도 있었지만, 결국 그 장자의 명분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알았던 야곱으로 권리는 넘어가서 야곱의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6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また、だれも、一杯の食物と引き替えに自分の長子の権利を売ったエサウのように、淫らな者、俗悪な者にならないようにしなさい。

이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당연하다, 별것 아니다……라고 생각하면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에서는 자신을 장자로 선택해주신 하나님에 대해서 감사를 한 번도 안 해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특권을 가볍게 여겼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 자체를 가볍게 여겼다는 것과 똑같은 말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이를 당연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감사로 여겨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지금 무엇을 가지고 계십니까. 요즘은 대부분 스마트폰을 가지고 계시지요? 성능으로 보자면 모세가 가지고 있던 지팡이나 다윗이 가지고 있던 물매에 비하겠습니까. 그리고 대부분 자동차를 타고 오시거나, 대도시 같으면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시잖아요? 그것을 아무리 과거 이집트 황제가 타는 병거라 하더라도 속도나 안전성이 거기에 비하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많은 것을 잊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감사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성년자 다윗는 물매로 골리앗을 물리쳤습니다. 할아버지 모세는 지팡이 하나로 200만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더 큰 일을 해내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앞서 명령과 허가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그 중에서 명령은 이를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을 수도 있다고 말씀 드렸지요. 이 점에 대해서는 세상 법이나 믿음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명령을 지키면 상을 주나요? 여러분, 걸어가다가 빨강신호 지킨다고 경찰한테 칭찬 받아본 적 있으세요? 아니요. 이 세상 명령은 좀 이상한 말이지만 지켜봤자 본전입니다. 그러나 어기면 처벌을 받게 되지요.

반면에 믿음의 명령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 혼이 날 수도 있지만, 명령을 지키면 크나큰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넘치는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명령할 때에는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나라가 나한테 빨강신호를 지키라고 했는데 내가 안 지켰어요. 그러면 나라가 책임져 주나요? 아니에요. 책임은 우리가 져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이것을 안 지키면 누가 책임을 져요? 예, 하나님이 지십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책임을 지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령을 하셨어요. 그런데 인간이 명령을 안 지키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저주를 받아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을, 그 책임을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피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지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지켜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항상 감사하라는 명령, 이것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항상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하라는 명령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성경에 기록된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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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회 온전한 믿음 온전한 순종
2019년 3월 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3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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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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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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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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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온전한 믿음 온전한 순종” 完全なる信仰・完全なる従順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보면 어떤 것은 예전에 경험해본 일, 또는 지식으로 알고 있던 일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별로 큰 문제가 없습니다. 지식이나 경험에 비추어 일을 처리하면 되는 것이니까요.

요즘도 그런 말을 쓰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른다고 할 때 보면 가끔 “FM대로 하면 된다”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FM대로>라는 말은 많은 사람들이 알지만, 그게 무슨 약자인지는 의외로 모르는 분들이 꽤 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사실 FM이라고 하는 것은 군사용어라고 하지요? 필드 매뉴얼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교본, 교과서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FM대로>라고 하는 것은 원칙대로 처리하면 되다는 뜻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항상 FM대로 처리하면 되는가 하면 꼭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냐 하면 FM, 즉 매뉴얼이 없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지요.

역사적으로 보면 세상에는 유명한 모험가들이 있습니다. 아무도 안 가본 곳에 간다거나, 또는 아무도 해보지 않은 것을 해보는 사람들이지요.

말 그대로 전인미답. 지금까지 한 사람도 밟아보지 않은 곳을 간다는 것은, 해보지 않은 것을 해본다는 것은, 좋은 말로 하자면 용기가 있는 것이요, 조금 부정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무모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세상적으로 생각할 때 성경에 보면 이처럼 용기가 있는 것인지 무모한 것인지 헷갈리는 사람이 꽤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사람 중 하나가 아브라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말씀, 그게 바로 오늘 말씀인데,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3절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主はアブラムに言われた。「あなたは、あなたの土地、あなたの親族、あなたの父の家を離れて、わたしが示す地へ行きなさい。
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なる国民とし、あなたを祝福し、あなたの名を大いなるものとする。あなたは祝福となりなさい。
わたしは、あなたを祝福する者を祝福し、あなたを呪う者をのろう。地のすべての部族は、あなたによって祝福される。」

부모님들이 아이들한테 보통 어떻게 교육을 합니까. 어떤 사람을 따라가면 안돼요? 예,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된다고 가르치지요. 그런데 이 아브라함이라는 어린이. 사실 어린이가 아니죠.

12장 4절을 보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의 나이는 75세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만, 그때는 아직 가톨릭이나 개신교는 고사하고 유대교도 생기기 전이었습니다.

당시 75세였던 아브라함 어린이는, 이 짧은 세 줄의 듣도 보지도 못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섰습니다.

이게 그리 쉬운 일이었을까요? 아니요. 정말 그야말로 무모하고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무엇보다 아브라함 그 이전에는 이와 같은 일이 없었습니다. 이런 일이 닥쳤을 때 말하자면 FM, 필드매뉴얼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 때문에 아브라함은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습니다.

우선 아브라함은 혼자 떠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중에서 아내 사라를 데리고 간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창세기 2장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それゆえ、男は父と母を離れ、その妻と結ばれ、ふたりは一体となるのである。

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지요. 부부는 한 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사라를 데리고 간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5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창세기 12장 5절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アブラムは、妻のサライと甥のロト、また自分たちが蓄えたすべての財産と、ハランで得た人たちを伴って、カナンの地に向かって出発した。こうして彼らはカナンの地に入った。

얻은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은 종입니다. 당시에 종은 말하자면 재산처럼 거래되고 있었기 때문에 역시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걸리는 게 있지요?


아니, 언제 하나님께서 조카 롯을 데려가라고 하셨어요. 하나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셨냐 하면 7절 전반부를 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主はアブラムに現れて言われた。「わたしは、あなたの子孫にこの地を与える。」

이 말씀을 어쩌면 당시 아브라함은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기껏 아브라함을 불러놓고 하신다는 말씀이, 아브라함한테 준다는 말씀을 하지 않고, 자손한테 주겠다고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시키지 않았던 일, 롯을 데리고 갔던 것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아브라함이 왜 롯을 데려갔을까요. 조카라고 하니 자기보다는 젊고 힘이 있었겠지요. 그래서 어쩌면 자기들만 가는 것보다 롯을 데려가면 조금 더 도움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졌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판단하셨냐 하면, 이를 온전한 순종이 아니라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르실 때에는 아브라함에 대해서 축복의 말씀을 하셨지만, 롯을 데리고 떠나는 모습을 보시고는, 정작 아브라함 본인에 대한 축복의 말씀은 사라집니다.

아브라함의 시행착오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2장 10절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その地に飢饉が起こったので、アブラムは、エジプトにしばらく滞在するために下って行った。その地の飢饉が激しかったからである。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시겠다고 하면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주셨으면 거기 머물러 있어야 할 텐데, 생활이 조금 어려워졌다고 해서 약속의 땅을 떠나 다른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됩니까. 창세기 12장 11절~20절에 보면, 까딱 잘못했다가 아내를 빼앗길지도 모르는 일까지 겪게 되고 맙니다. 참, 이런 일은 남자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최악의 사태는 모면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십니다. 아무런 말씀도 안 하세요. 왜요? 그렇죠. 아브라함은 아직 온전한 순종, 하나님께서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인간적인 생각으로 왠지 롯을 데리고 있으면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브라함과 롯 사이에 다툼이 생겨서 결별하게 됩니다.

창세기 13장 14절~17절
“14.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15.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17.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ロトがアブラムから別れて行った後、主はアブラムに言われた。「さあ、目を上げて、あなたがいるその場所から北、南、東、西を見渡しなさい。
わたしは、あなたが見渡しているこの地をすべて、あなたに、そしてあなたの子孫に永久に与えるからだ。
わたしは、あなたの子孫を地のちりのように増やす。もし人が、地のちりを数えることができるなら、あなたの子孫も数えることができる。
立って、この地を縦と横に歩き回り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に与えるのだから。」

결국 아브라함과 롯이 결별하게 되는데, 결별하자마자 하나님께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브라함에게 축복의 말씀을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자기 생각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방법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처럼 FM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모세는 또 어떻습니까.

출애굽기 7장 7절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에 모세는 팔십 세였고 아론은 팔십삼 세였더라”

彼らがファラオに語ったとき、モーセは八十歳、アロンは八十三歳であった。

하나님께서는 여든 살 먹은 모세와 그보다도 세 살이 더 많은 그의 형을 시켜서 이스라엘 민족 성인 남성만 60만명, 아이들과 여성들까지 하면 총 200만명이 넘는 이스라엘 민족의 구출을 위해 부르셨습니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까지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젊은 날 다 가고, 좋은 날 다 보낸 모세 할아버지가 그보다 나이가 더 많은 형님과 함께, 당시 강대국인 애굽의 왕을 만나서 담판을 짓고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하라? 이게 말이나 됩니까.

어디 그 뿐인가요. 모세는 이후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이 또한 아브라함 때와 마찬가지입니다. FM이 없어요. 매뉴얼이 없었던 것입니다. 뻑 하면 목이 마른다고 아우성입니다. 식량이라도 넉넉히 주시면 모를까, 하늘에서 만나를 주시는 것은 좋지만, 항상 간당간당 해요. 오늘은 만나가 있어서 먹을 수 있지만, 내일 또 만나를 얻을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좀 불안하기 때문에 모아두려고 했더니 어떻게 됐대요?

출애굽기 16장 19절~20절
“19.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20.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モーセは彼らに言った。「だれも、それを朝まで残しておいてはならない。」
しかし、彼らはモーセの言うことを聞かず、ある者は朝までその一部を残しておいた。すると、それに虫がわき、臭くなった。モーセは彼らに向かって怒った。

아니, 이게 그렇게 잘못한 거예요? 라고 묻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마치 아브라함이 롯을 데려간 것이 그렇게 잘못한 거예요? 라고 묻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만 믿으라는 것입니다. 나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모세 나이도 마찬가지죠. 좀 팔팔하고 혈기 왕성한 젊은이를 택한다 하더라도 모자랄 판에, 왜 하필이면 나이 든 여든 살 먹은 할아버지와, 여든 세 살 먹은 할아버지를 택하셨을까요.

이는 사사기에 보면 그 답이 있습니다.

일단 사사기 6장 1절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

イスラエルの子らは、主の目に悪であることを行った。そこで、主は七年の間、彼らをミディアン人の手に渡された。

하나님께 죄를 범한 이스라엘에 대하여 시련을 허락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미디안 사람들을 시켜서 이스라엘을 괴롭게 만드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이에 이스라엘 민족이 회개하였더니 한 지도자를 세웁니다. 그 이름이 바로 기드온이지요.

이제 기드온이 미디안을 물리치기 위해서 사람들을 모읍니다. 그랬더니 몇 명이 모였냐 하면 3만 2천명이 모였습니다. 미디안 군대가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3만 2천명 정도가 모였다면 한 번 해볼만 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몇 명까지 줄이냐 하면, 예, 300명까지 줄입니다. 아니, 지금부터 전쟁을 하려고 하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한 사람이라도 더 있으면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사사기 7장 2절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主はギデオンに言われた。「あなたと一緒 にいる兵は多すぎるので、わたしはミディアン人を彼らの手に渡さない。イスラエルが『自分の手で自分を救った』と言って、わたしに向かって誇るといけないから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많아서 이기면 그 영광을 하나님한테 돌리는 게 아니라 너희들이 잘 싸워서 이겼어. 이렇게 말할 게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브라함 때도 모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시 젊은 조카 롯이 있으니까 해냈어, 역시 젊은 모세와 팔팔한 아론이 있으니까 해낼 수 있었어……. 너희들 그렇다고 할 거 아니야? 나는 그 꼴 못 봐.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이사야 48장 11절에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わたしのため、わたしのために、わたしはこれを行う。どうしてわたしの名が汚されてよかろうか。わたしの栄光を、ほかの者に与えはしない。

참 이기적인 하나님이시죠? 너무나도 이기적인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이기적이면 다른 사람한테 피해를 입힐 수가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이기적이시라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모두한테 크나큰 축복이 허락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절~29절
“26.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兄弟たち、自分たちの召しのことを考えてみなさい。人間的に見れば知者は多くはなく、力ある者も多くはなく、身分の高い者も多くはありません。
しかし神は、知恵ある者を恥じ入らせるために、この世の愚かな者を選び、強い者を恥じ入らせるために、この世の弱い者を選ばれました。
有るものを無いものとするために、この世の取るに足りない者や見下されている者、すなわち無に等しい者を神は選ばれたのです。
肉なる者がだれも神の御前で誇ることが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본인에 대해서 만족하세요? 아, 내가 좀 더 돈이 많았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좀 더 능력이 많았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좀 더 젊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좀 더 힘이 세거나 지위가 높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혹시 그런 생각 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여러분, 참~ 다행입니다. 돈이 없는 덕분에, 능력이 부족한 덕분에, 젊지 않은 덕분에, 힘이 약하고 지위가 낮은 덕분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쓰시기를 원하고 계신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된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상상도 못할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크고도 놀라운 비밀인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금방 좌절합니다. 금방 절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알면 어떻게 됩니까. 이 비밀을 알면 부족한 가운데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왜 믿을 수가 있어요? 예, 우리에게는 FM이 있습니다. 매뉴얼이 있어요. 그 매뉴얼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입니다. 우리에게 는 성경이 있기 때문에 이제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나 자신한테는 힘과 능력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마침내는 잘 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끝내는 잘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작년 11월 말 쯤이라고 기억되는데, 저희 집 우체통에 보니까 무슨 안내장이 들어있더라구요? 그래서 보니까 집안에 있는 무슨 전기 설비 안전점검을 할 텐데 12월 몇 일 몇 시쯤에 방문예정입니다……라는 안내문이에요. 뭐, 점검하는 시간은 한 10분 정도라고 하던데, 좀 흥미로운 것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 점검은 4년마다 한 번씩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무슨 올림픽도 아니고 4년마다 한 번씩 하냐……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예정된 날짜, 예정된 시간에 정확히 점검하시는 분이 오셔서는, 정말로 한 10분 정도 집 안에 들어와서 여기저기 점검을 하셨습니다. 다 마치시고는 이상이 없다고 하시면서 나가시는데 그 때 이 분이 하신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럼 4년 뒤에 뵙겠습니다”

이러고 가시더라구요.

그렇죠. 전혀 이상할 건 없습니다. 4년마다 점검이 있고 오늘 마쳤으니 4년 뒤에 또 하겠다는 인사말이었습니다만, 좀 생각해보니까 지금까지 4년 뒤를 기약하면서 인사를 나눈 적이 없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상당히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이분이 오셨을 때가 작년 2018년 12월이니 그로부터 4년 뒤라고 하면 2022년 12월입니다.

2022년 12월.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는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에 계속 살고 있을까. 지금부터 4년 뒤라면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들은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하는, 참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기대와 불안함이 느껴졌습니다. 사실 기대보다는 불안감이 조금 더 많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온전한 순종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고 죽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러셨나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안 된다고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까. 누가 미련한 사람입니까. 예수님? 아이구, 필요 없어. 나는 내 힘이 있으니까, 내 능력이 있으니까, 예수님 없이도 나는 잘할 수 있어……이것이 지혜 있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나는 힘이 없기 때문에, 능력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 없이는 안돼. 반드시 예수님이 함께 해주셔야 해……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지혜 중에 지혜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十字架のことばは、滅びる者たちには愚かであっても、救われる私たちには神の力です。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1년 뒤, 5년 뒤, 그리고 10년 뒤에, 그는 자기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알지 못했습니다. 모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기 전인 79세가 되던 때까지도 모세는 어쩌면, 그래, 인생 별거야? 그냥 이렇게 살다 가는 거지 뭐……그랬는지도 모르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도 모세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크게 높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온전한 믿음, 온전한 순종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는 지금 현재 4년 뒤를 갔다 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4년 뒤는 고사하고 1시간 뒤, 1분 1초 뒤도 갔다 온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 미래는 모두에게 공평한 전인미답. 아무도 안 가본 땅이요, 아무도 안 해본 일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부르십니다. 누구누구야. “너는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네게 큰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あなたは、わたしが示す地へ行きなさい。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なる国民とし、あなたを祝福し、あなたの名を大いなるものとする。

이렇게 하나님께서 부르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온전한 믿음, 온전한 순종입니다.

그렇다고 꼭 이사를 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도전, 새로운 세계로 주님께서 이끌어가실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영원한 FM, 영원한 매뉴얼 성경 말씀을 따르면 됩니다. 성경 말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시행착오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직 성경 말씀, 하나님 말씀을 따라,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며, 예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온전한 믿음과 온전한 순종으로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 놀라운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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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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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9회 좋은 친구 예수님
2019년 2월 2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3절~15절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좋은 친구 예수님” よい友イエス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도로를 달리다 보면 빨리 달리는 차를 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그런 차를 보시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좀 멋있어 보이던가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거기다가 자동차가 비싼 외국 스포츠카다 하면 정말 더 멋져 보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꼭 멋있게만 보이는 것만은 아니지요.

일반도로든 고속도로든 간에 과속으로 운전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래서 좀 너무 빨리 달리는 차를 보면, 아휴, 저러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한국이나 일본이나 모두 나비게이션을 달고 다니면 종종 과속주의 안내가 나옵니다. 저기 지금 과속단속 카메라가 있으니까 조심하라는 거예요. 이런 카메라는 무슨 잠복근무를 하기 위해서 달아놓은 것이 아니라 안전을 위해 속도를 줄이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것이기 때문에 이런 안내 방송은 불법이 아닙니다.

특히 고속도로에는 굳이 이런 장치가 없더라도, 바로 앞에 단속 카메라가 있다는 표지판이 붙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보고 속도를 줄이면 단속에 걸리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자동차에 이런 나비 시스템도 없고, 분명히 바로 앞에 단속 카메라가 있다는 표지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도 무시한 채로 그냥 달렸다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 카메라에 찰칵 찍히게 되지요.


저는 아직 사진을 찍힌 적이 없어서 어떻게 나오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에서 한 번 여기에 걸린 적이 있는 친구한테 말을 들어보니까, 자기 얼굴과 자동차 번호판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찍혀 있어서 부인을 할래야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저기 앞에 과속 단속 카메라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속도만 빨리 내서 달린다고 하면, 이는 멋지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편 14편 1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愚か者は心の中で「神はいない」と言う。彼らは腐っていて忌まわしいことを行う。善を行う者はいない。

이 세상에 하나님이 어디 있어. 그런 건 없어.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믿을 바에야, 차라리 눈에 보이는 나를 믿어라. 돈을 믿어라. 권력을 믿어라. 또는 이 세상 지식을 믿어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렇게 말하면 꽤 멋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私たちは見えるものにではなく、見えないものに目を留めます。見えるものは一時的であり、見えないものは永遠に続くからです。


지금 너의 눈 앞에 보이는 것? 그게 영원할 줄 알아? 아니야. 그거 영원하지 않아. 잠깐이면 사라질 것들이야. 눈에 보이는 돈이나 권력이나 세상적인 힘이나 지식이 아니라, 육적인 눈에는 안 보이는 하나님을 믿어야 돼. 그게 영원한 거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잠언 9장 10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잠언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主を恐れることは知恵の初め、聖なる方を知ることは悟ることである。

저기 앞에 단속 카메라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지금은 보이지 않으니까 괜찮다고 하면서 쌩쌩 달리는 것이 지혜로운 게 아니야. 지금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저기 단속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카 나비게이션에서는 앞에 카메라가 있다고, 속도를 줄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계속 안내를 하는데도 속도를 줄이지 않는 것이 멋있어요? 아니에요. 그건 어리석은 것입니다.

시편 33편 13절~14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시편 33편 13절~14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살피시는도다”

主は天から目を注ぎ人の子らをすべてご覧になる。
御座が据えられた所から地に住むすべての者に目を留められる。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걱정 말라고, 그러면서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것이 멋진 것이 아닙니다. 이는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서 12장 14절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神は、善であれ悪であれ、あらゆる隠れたことについて、すべてのわざをさばかれるからである。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요한계시록 20장 12절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また私は、死んだ人々が大きい者も小さい者も御座 の前に立っているのを見た。数々の書物が開かれた。書物がもう一つ開かれたが、それはいのちの書であった。死んだ者たちは、これらの書物に書かれていることにしたがい、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고속으로 달리는 모습이 멋있어 보일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벌금을 내는 모습이 멋있어 보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자기식대로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모습이 멋있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심판대 앞에 서서 그렇게 살아왔던 자신의 삶이 낱낱이 드러날 때 모습이 멋이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요, 하나님은 아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는 것은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존재로 생각되십니까.

무서우신 하나님? 노하시는 하나님?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 꾸짖으시는 하나님처럼 생각되십니까.

아니면, 은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축복의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처럼 여겨지십니까.

출애굽기에 보면 다음 구절이 저는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출애굽기 33장 11절 전반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主は、人が自分の友と語るように、顔と顔を合わせてモーセと語られた。

아……정말 멋진 말씀 아니십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와 대화하실 때에 모세를 마치 친구 대하듯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친구와 같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정말 허물 없이 자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모두 다 말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모세는 어떤 대화까지 나누었던 것일까요.

출애굽기 33장 18절~23절

“18.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21.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22.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23.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モーセは言った。「どうか、あなたの栄光を私に見せてください。」
主は言われた。「わたし自身、わたしのあらゆる良きものをあなたの前に通らせ、主の名であなたの前に宣言する。わたしは恵 もうと思う者を恵み、あわれもうと思う者をあわれむ。」
また言われた。「あなたはわたしの顔を見ることはできない。人はわたしを見て、なお生きていることはできないからである。」
また主は言われた。「見よ、わたしの傍らに一つの場所がある。あなたは岩の上に立て。
わたしの栄光が通り過ぎるときには、わたしはあなたを岩の裂け目に入れる。わたしが通り過ぎるまで、この手であなたをおおっておく。
わたしが手をのけると、あなたはわたしのうしろを見るが、わたしの顔は決して見られない。」


생각해보십시오. 당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목숨을 건 일이었습니다. 감히 가까이도 가지 못할 정도로 무서운 일이었지요. 하지만 모세는 어떤 대화까지 나누었습니까. 감히 하나님의 얼굴까지도 보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어요?

얘야, 사람인 네가 하나님인 내 얼굴을 보면 죽어. 그러니까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네 앞을 지나갈 텐데, 내 앞모습이 보일 때에는 내가 손으로 네 눈을 가려줄게. 그리고 내가 지나간 다음에 내가 손을 거두면, 내 얼굴은 보지 못하겠지만 내 뒷모습은 볼 수 있을 거야. 그러면 되겠지?…….

뭐 이러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대화입니까.

모세는 정말 이 정도로 가깝고 다정하게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모습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또 내일부터, 그래, 그러면 어디 한 번 나도 하나님 얼굴 좀 보게 해달라고 기도해보자……라고 하실 분이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여러분더러 그렇게 기도 하시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 정도로 모세는 정말 친구처럼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친구처럼 대한다는 말씀은 무엇이냐 하면, 정말 서로 숨김없이 모든 것을 드러낼 수 있는 관계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한테만 친구처럼 대한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8장 17절~19절을 봅니다.
“17.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18.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19.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主はこう考えられた。「わたしは、自分がしようとしていることを、アブラハムに隠しておくべきだろうか。
アブラハムは必ず、強く大いなる国民となり、地のすべての国民は彼によって祝福される。
わたしがアブラハムを選び出したのは、彼がその子どもたちと後の家族に命じて、彼らが主の道を守り、正義と公正を行うようになるためであり、それによって、主がアブラハムについて約束したことを彼の上に成就するためだ。」

하나님께서는 죄악으로 물든 도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는 요즘 말로 하자면 극비 중 극비이었습니다. 절대로 발설할 수 없는 내용이었지요. 그런데도 이처럼 아브라함한테만은 하나님께서 숨기지 않고 모든 것을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친구인 것입니다.

이쯤 되면 좀 질투가 나십니까. 아니, 아브라함이나 모세와는 친구가 되어주셨으면서 왜 나와는 친구가 안되 주시는 거야……라고 하는 질투가 나십니까?

음? 안 나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나 모세와 친구가 되든지 말든지…….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그래요? ㅎㅎ 그러면 안됩니다. 그건 마치, 아브라함이 축복을 받거나 말거나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거나 말거나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가 되고 맙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은 우리가 모두 받아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우리 안에 넘쳐나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건 지금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이야기, 내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가 하나님과 친구를 맺은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친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제가 드리는 말씀이 아니에요. 그리고 우리가 먼저 하나님과 친구를 맺자고 한 것이 아닙니다.

감사하게도, 너무나도 감사하게도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야, 우리 친구가 되자. 말하자면 우리 친구 하자……이렇게 먼저 말씀해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 요한복음 15장 중에서 15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わたしはもう、あなたがたをしもべとは呼びません。しもべなら主人が何をするのか知らないからです。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友と呼びました。父から聞いたことをすべて、あなたがたには知らせたからです。”


누가복음 8장 10절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がたには神の国の奥義を知ることが許されていますが、ほかの人たちには、たとえで話します。『彼らが見ていても見ることがなく、聞いていても悟ることが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들에게 있어서는 숨겨진 것들을 제자들에게는 모두 말씀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친구인 것입니다.

이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모든 비밀을 다 알게 해주셨습니다. 다만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이것을 안 믿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2장 4절~5절
“4.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わたしの友である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からだを殺しても、その後はもう何もできない者たちを恐れてはいけません。
恐れなければならない方を、あなたがたに教えてあげましょう。殺した後で、ゲヘナに投げ込む権威を持っておられる方を恐れなさい。そうです。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この方を恐れなさい。

이것 또한 천국의 어마어마한 비밀입니다. 이 세상에서 권세 잡은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또 가끔 보면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렇다고 이 세상 권력에 불복종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 것을 바라보고, 세상 것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의지할 분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친구처럼 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께 진정으로 친구처럼 말씀 드리고 있습니까.

주님은 이처럼 우리를 친구 대하듯 하고 싶은데, 우리는 어쩌면 서먹서먹하게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주여!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

여러분, 친구한테 그렇게 말합니까. 야, 누구야. 내가 너를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이러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거 왜 그렇게 기도 하는 거예요? 간단해요. 안 믿어지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주여~ 믿습니다~ 믿음이 부족한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주여~ 믿습니다~

이거 뭘 어쩌라는 거예요. 이건 지금 믿어진다는 게 아니에요. 안 믿어진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물론 예배 때 기도 시간에 앞에 나오셔서 모든 성도님들을 대표해서 드리는 대표기도 같은 것은, 당연히 그 내용이나 기도 순서에 있어서 다듬기도 해야겠고 단어도 좀 선별해서 하셔야겠지만, 우리가 개인적으로 드리는 기도까지 그렇게 한다면, 이는 주님께서 바라는 기도가 아닐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교회에 다닐 때 보면 예배 시간 때 통성기도 같은 것을 하잖아요? 아, 그러면 저는 정말 그거 잘 못 하겠더라구요.
아니, 그렇잖아요. 예를 들어서, 주여~ 제 수입이 지금 너무나도 적은데, 월급이 올라가게 해 주시옵소서~ 주여~ 이번 달 집세를 내야 할 텐데, 꾸지 않도록 해주시옵소서~
아니면 내 어디어디가 아파서 고생인데 고쳐주시옵소서~
아니면 집이 비싸게 팔리게 해주시옵소서~
이번에 어디 시험을 봤는데 합격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사람들 많이 있는데 큰 소리로 할 수 있어요? 아이구, 그런 걸 어떻게 큰 소리로 해요. 프라이버시인데…… 그러면 통성기도 할 때에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들어도 무방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만 기도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 기도는 큰 소리로 기도했다가, 개인적인 기도는 조용한 소리로 기도해야 하는 거예요? 세상에 그렇게 기도해야 한다는 게 성경에 어디 나와 있습니까.

가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보면 하나님 앞에서도 체면을 세우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이건 옳지 않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만, 자, 우리한테 무슨 문제가 있어서 변호사를 찾아갔다고 생각해보겠습니다. 뭐, 쉽게 말해서 내가 누구한테 돈을 꿔졌는데. 안 갚아요. 그래서 상담하기 위해서 변호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예약을 하고 변호사와 함께 상담실에 들어갔어요. 그러면 변호사를 앞에 두고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변호사님. 우리 인생에 있어서 돈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인생의 전부가 돈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것은 저도 압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돈을 또한 완전히 도외시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겠지요…….”

이러실 건가요? 이러면 아마 변호사는 그냥 가만히 쳐다보고 있겠지요. 무슨 메모를 하려고 들고 있던 펜은 가만히 멈춘 상태일 것입니다. 이건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됩니다. 지금 변호사 앞에 두고 체면 차릴 이유가 뭐가 있어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솔직하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야죠.

“변호사님, 지금 제가 누구한테 돈을 꿔준 게 있는데, 글쎄 이 사람이 안 갚아요.”

이렇게 말하면 변호사는, 아, 대여금반환청구사건이구나……라고 금방 알아차립니다. 그러면 이제 필요한 질문을 하지요. 변제일은 언제입니까. 계약서는 있습니까. 담보는 있습니까. 등등 실질적인 질문에 바로 들어가서 문제해결을 위해서 빨리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슨 체면을 차린다고 인생이 어떻고 그러고 있으면 이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이지요.

주님은 지금 우리들로부터 친구처럼 솔직한 기도를 듣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기도하래요? 남들 다 듣는 데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라고 하시던가요?


마태복음 6장 6절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あなたが祈るときは、家の奥の自分の部屋 に入りなさい。そして戸を閉めて、隠れたところにおられるあなたの父に祈りなさい。そうすれば、隠れたところで見ておられるあなたの父が、あなたに報いてくださいます。

우리는 이 말씀을 오랫동안 오해해왔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지금까지는 너무 남들한테 티 내지 말고 기도하라……는 정도로밖에 이해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친구처럼 나한테 모든 말을 다 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움직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뻗고 역사하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 7절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それどころか、あなたがたの髪の毛さえも、すべて数えられています。恐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あなたがたは、多くの雀よりも価値があるのです。

주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아신다고 하시는데, 우리가 주님 앞에서 무엇을 부끄러워할 게 있습니까. 뭐가 창피할 게 있습니까. 무엇을 숨길 게 있습니까. 무슨 체면을 차릴 게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3절~15절
“1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ヨハネの福音書 15章 13節~15節
“人が自分の友のためにいのちを捨てること、これよりも大きな愛はだれも持っていません。
わたしが命じることを行うなら、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友です。
わたしはもう、あなたがたをしもべとは呼びません。しもべなら主人が何をするのか知らないからです。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友と呼びました。父から聞いたことをすべて、あなたがたには知らせたからです。”

예수님은 우리와 친구가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는 그냥 단순히 친하게 지내자. 아니면 말고……가 아닙니다.

과거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는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되셔서, 스스로 십자가에 못박히고 피를 흘리시면서까지 우리와 친구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와 친구가 되셔서 우리의 죄를 자신의 피로 모두 씻어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손을 내미십니다. 이제 내가 제물이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제물은 필요가 없어. 너의 기도를 드리기만 하면 돼.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나한테 모든 것을 털어놓으면 돼……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신뢰합시다. 예수님을 의지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친구, 우리의 좋은 친구되신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를 항상 지켜주십니다. 인도해주십시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진정한 친구되신 예수님께 진정한 기도를 드릴 때에, 그리고 예수님을 진정한 친구로 우리가 맞이할 수 있을 때에, 주님 안에서 진정한 평안과 진정한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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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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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8회 닮음과 흉내
2019년 2월 1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4장 29절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닮음과 흉내” 倣うこととマネること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제 개인적인 일이라도 참 송구스럽습니다만, 요즘에 제 주변을 보니 왜 이렇게 자꾸 고장 나는 것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맨 처음에는 프린터부터 시작했어요. 100엔샵에 보면 프린터 잉크를 이렇게 주입해서 쓰는 것을 파는데, 전도지도 뽑고 하니까 잉크 소모가 좀 빨리 되더라구요? 그래서 그걸 사서 좀 해볼까 했는데 영 좀 신통치가 않습니다. 프린터 움직임이 적지 않게 수상해요. 아무래도 뒤에서 잉크가 새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내일 하고 있어요.

그러던 차에 얼마 전 갑자기 모니터 두 대 중에 한 대가 고장이 났습니다. 제가 모니터가 원래 두 대가 있었어요. 그 이유는 한국에서 컴퓨터 두 대를 가져왔는데, 하나는 이미 몇 년 전에 고장이 나서 못 쓰고 있거든요. 그래서 거기서 쓰던 걸 나머지 한 컴퓨터에 연결해서 두 대를 두고 쓰고 있었는데, 요즘 제 아내한테 일을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남은 컴퓨터라고 하는 게 노트북 중에서도 작은 것, 이른바 넷북이라고 하는 컴퓨터인데, 속도도 느리지만 모니터가 작아요. 그래서 제가 있는 두 대의 모니터 중에서 하나를 떼어서 연결을 해주었습니다. 화면이 커지니까 아무래도 일을 하기가 수월하죠. 그런데 이게 하루 만에 갑자기 고장이 났습니다.

프린터도 속을 썩이고 그랬는데 왜 모니터까지 이렇게 고장이 났을까……그래, 뭐 좋은 일이 있으려고 그러는 거겠지……라고 했는데, 마침 지난 주 화요일에 제가 집에서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어요. 사실 지금까지도 몇 번 떨어뜨린 적도 있었거든요. 하물며 바깥에서 아스팔트 위에 떨어뜨린 적도 있었습니다만, 튼튼한 케이스 덕분에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별 문제 없겠지……라고 했는데, 좀 보니까 액정 한 구석이 보라색으로 물들기 시작했어요. 그래도 뭐 큰 문제가 있겠나……했는데, 점점점점 범위가 넓어 지더니, 저녁이 되니까 절반 정도가 퍼렇게 물들게 되었습니다. 그래, 뭐 그래도 이 정도면 보이니까 괜찮겠다 했는데, 다음날이 되니까 아예 화면이 보이지 않아요.

아……정말 그 때 심경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요. 카카오톡에 보면 낙심, 좌절, 슬픔 같은 걸 표현한 이모티콘이 여러 개 있잖아요? 이걸 모두 다 합쳐놓은 심정……에 곱하기 5 정도라고 할까요? 참 암담합니다. 이 핸드폰은, 뭐 스마트폰 가지신 분들은 대부분 그렇시겠지만, 메일이나 메신저 뿐만이 아니라, 어딜 가려면 네비게이터로도 써야 하고, 은행 업무도 이걸로 해야 하고, 또 동영상 촬영도 스마트폰으로 해야 합니다.

참 순간 아찔하더라구요.

아니, 내가 요즘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이런 일을 당할까……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하나님이 사탄한테 내 자랑을 하셨나보다……했습니다.

욥기 1장 8절~12절을 좀 바꾸어 보았습니다.

8.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홍 목사를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9.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홍 목사가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주께서 그에게 프린터와 모니터와 스마트폰을 주셨기 때문이 아니니이까
11.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프린터와 모니터와 스마트폰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12.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프린터와 모니터와 스마트폰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主はサタンに言われた。「おまえは、わたしのしもホン牧師に心を留めたか。彼のように、誠実で直ぐな心を持ち、神を恐れて悪から遠ざかっている者は、地上には一人もいない。」
サタンは主に答えた。「ホン牧師は理由もなく神を恐れているのでしょうか。
あなたが、彼のプリンター、モニター、そしてスマホをあげたからではありませんか。
しかし、手を伸ばして、彼のプリンター、モニター、そしてスマホを打ってみてください。彼はきっと、面と向かってあなたを呪うに違いありません。」
主はサタンに言われた。「では、ホン牧師のプリンター、モニター、スマホをすべておまえの手に任せる。ただし、彼自身には手を伸ばしてはならない。」そこで、サタンは主の前から出て行った。

아마도 이런 게 아닐까……하고 저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참고로 말씀을 드립니다만, 이런 저를 보고 제 아내는 욥의 처처럼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神を呪って死になさい。)” 라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오히려 “이왕 망가질 거면 좀 넉넉할 때 망가지거나 하지, 왜 하필이면 이럴 때 망가지는지 모르겠네”라고 미안해하는 저에게 “괜찮아요. 여자들도 꼭 돈이 없을 때 화장품이 떨어져요”라는 말로 위로해주었습니다. 참 은혜가 넘치는 말씀입니다.

욥이 처음에는 큰 고난을 당하지만 마지막에는 큰 축복을 받지요.


욥기 42장 12절~15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12.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13.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14.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니
15.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主はヨブの後の半生を前の半生に増して祝福された。それで彼は羊一万四千匹、らくだ六千頭、牛一千くびき、雌ろば一千頭を持つことになった。
また、息子七人、娘三人を持った。
彼はその第一の娘をエミマ、第二の娘をケツィア、第三の娘をケレン・ハ・プクと名づけた。
ヨブの娘たちほど美しい女は、この地のどこにも見つからなかった。彼女たちの父は彼女たちに、その兄弟たちの間で相続地を分け与えた。

참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욥이 이처럼 큰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욥이 고난을 받았기 때문일까요.

물론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시편 119편 71절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苦しみにあったことは私にとって幸せでした。それにより私はあなたのおきてを学びました。

고난에 있어서 성경에는 많은 기록이 있습니다. 고난은 바울도 많이 받았고 그 외 선지자들 사도들 제자들도 많은 고난을 받아온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이사야 53장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しかし、彼は私たちの背きのために刺され、私たちの咎のために砕かれたのだ。彼への懲らしめが私たちに平安をもたらし、その打ち傷のゆえに、私たちは癒やされた。

여기서 <그>라고 하는 분은 다름아닌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구약 중에서도 이 이사야서는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대단히 많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못에 찔린 이유는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예수님께서 채찍에 상하신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징계를 받음으로 인해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나음을 받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축복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채찍에 맞아야 하고 고통과 고난을 받아야 한다면,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과 고난의 80%나 90%를 받았고,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나머지 10%~20%의 고통과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과 고난은 모두 2천년 예수님이 십자가 위해서 100% 모두 받아 주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셨을 때, 우리에게 특별히 고난을 허락하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 스스로가 구원을 받기 위한 고난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께로 더욱 가까이 나아가기를 원하셔서, 특별히 허락하시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욥이 고난 끝에 이처럼 놀라운 축복을 받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욥기 42장 5절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私はあなたのことを耳で聞いていました。しかし今、私の目があなたを見ました。

욥은 고난이 끝난 후에 이처럼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이와 같은 고난을 당하기 전에도 그는 의인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고난을 당한 후에 눈으로 주를 뵙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욥이 받은 큰 축복은 나중에 나오는 후손이나 재물에 대한 축복보다도 이처럼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는 축복이 진정한 축복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게 되는 축복. 이는 너무나도 큰 축복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고 합니다. 왜 빛이 났을까요. 오늘 말씀에 보면 그 이유가 명확하게 적혀 있습니다.

오늘 말씀 출애굽기 34장 29절 중반부를 봅니다.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モーセは、主と話したために自分の顔の肌が輝きを放っている

하나님과 말을 하면 광채가 났다고 하는데, 하나님과 말을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죠. 기도입니다.

우리는 모두 기도를 하지요. 그렇다면 우리 얼굴에 광채가 나십니까.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셨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 때 거울에 보니 얼굴에서 광채가 나던가요? 세수를 안 해서 기름이 번들번들 그래요? 에이, 그건 광채가 아니지요.

그렇다면 광채가 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성경대로 해석을 하면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겠지요. 모세처럼 하면 됩니다. 모세가 어떻게 했어요? 예, 하나님과 말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어? 이상하네요. 나도 기도하고 그러는데 광채가 안 나요.

그렇다면 모세는 어느 정도 하나님과 함께 있었느냐 하면 바로 위 2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34장 28절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モーセはそこに、四十日四十夜、主とともにいた。彼はパンも食べず、水も飲まなかった。そして、彼は石の板に契約のことば、十のことばを書きしるした。


자, 이제 큰일 났습니다. 얼굴에서 광채가 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대요? 예,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四十日四十夜、主とともにいた。彼はパンも食べず、水も飲まなかった。

쉽게 말해서 사십 일 동안 금식했다는 것입니다. 보통 금식하시는 분들 보면, 식사는 안 하시더라도 물은 많이 드시잖아요? 그런데 물도 안 마셨대요. 며칠 동안요? 예, 40일 동안이랍니다.

그러면 믿음이 좋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해요? 예, 오늘부터 시작하는 건 좀 힘들 테니까 오늘 좀 넉넉히 먹어놓고 내일부터 40일 동안 물 한 방울 먹지 않고 금식을 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요? 예, 얼굴에서 광채가 날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유, 믿기는 뭘 믿어요.

성경에 보면 믿음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노아부터 시작해서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엘리사, 사무엘, 다윗, 베드로, 바울 요한 등등 뭐 끝도 없지요. 그 믿음의 사람들을 닮아가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흉내를 내면 이건 곤란하지요.

그래, 모세가 40일 금식해서 얼굴에 광채가 났다니까 나도 40일 금식 한 번 해보자……이는 모세를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세 흉내, 말하자면 모세 코스플레입니다. 모세를 닮겠다고 하면서 지팡이 들고 허허벌판을 돌아다니면서 바위를 지팡이로 치고는 물이 나오라고 소리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세는 하나님과 말을 했다고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누가복음 17장 2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神の国はあなたがたのただ中)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 눈에는 하나님이 안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찾지 않아서인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7장 7절~8절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与えられます。探しなさい。そうすれば見出します。たたきなさい。そうすれば開かれます。
だれでも、求める者は受け、探す者は見出し、たたく者には開かれます。

우리는 어쩌면 이 말씀을 지금까지 오해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래,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된다. 우리한테 필요한 게 있으면 구하면 주실 것이요, 찾을 것이요, 열릴 것이다. 그래서 돈도 구하고 물질도 구하고 건강도 구하자……. 하지만 정말 구하는 대로 모두 다 받으셨습니까? 아니에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거짓말을 하신 겁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마태복음 6장 33절과 연계시켜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まず神の国と神の義を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これらのものはすべて、それに加えて与えられます。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神の国と神の義を求めなさい)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나라와 그의 의, 이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더 쉽게 말씀 드리자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 힘 쓰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왕이 되고 난 후에 일천 번제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千匹の全焼のささげ物を献げた).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셨지요.

그 때 솔로몬이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열광기상 3장 7절~9절
“7.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8.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9.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わが神、主よ。今あなたは私の父ダビデに代わって、このしもべを王とされました。しかし私は小さな子どもで、出入(でい)りする術を知りません。
そのうえ、しもべは、あなたが選んだあなたの民の中にいます。あまりにも多くて、数えることも調べることもできないほど大勢の民です。
善悪を判断してあなたの民をさばくために、聞き分ける心をしもべに与えてください。さもなければ、だれに、この大勢のあなたの民をさばく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


이 뜻이 무엇입니까. 주님, 제가 너무나 부족해서 이 백성을 다스릴 능력이 없습니다. 이런 저에게 재판할 능력을 허락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드렸던 것이지요. 지금은 대통령이나 총리가 재판을 하지는 않습니다만, 당시에는 왕의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바로 재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재판을 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그 나라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것과 같은 뜻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자신은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택하신 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도록 능력을 달라고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열왕기상 3장 11절~13절
“11.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12.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13.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神は彼に仰せられた。「あなたがこのことを願い、自分のために長寿を願わず、自分のために富を願わず、あなたの敵のいのちさえ願わず、むしろ、自分のために正しい訴えを聞き分ける判断力を願ったので、
見よ、わたしはあなたが言ったとおりにする。見よ。わたしはあなたに、知恵と判断の心を与える。あなたより前に、あなたのような者はなく、あなたの後に、あなたのような者は起こらない。
そのうえ、あなたが願わなかったもの、富と誉れもあなたに与える。あなたが生きているかぎり、王たちの中であなたに並ぶ者は一人もいない。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자, 그러면 솔로몬이 백성을 다스릴 지혜를 구했더니 이렇게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이처럼 놀라운 축복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일단 솔로몬처럼 1천 번제를 해야겠지요? 번제……그러니까 짐승을 불에 태워서 드리는 제사를 드렸다는 것인데, 여기서 말하는 1,000이라고 하는 숫자가 회수인지 아니면 1000마리라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고 합니다.

양이든 염소든 간에 집에서 1,000마리를 우리가 태울 수는 없고, 만약에 1000일 연속해서 드렸다는 것으로 한다면, 그래요. 편의상 1000일 새벽기도를 드린다고 합시다. 1000일이라고 하면 대략 2년 8개월 하고도 보름 정도 됩니다. 그 다음에는 이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야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짠~ 하고 나타나십니까. 그러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오~주님! 저에게도 이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것도 역시 솔로몬 흉내, 솔로몬 코스플레입니다.

솔로몬이 이처럼 놀라운 축복을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열왕기상 3장 10절에 적혀 있습니다.

열왕기상 3장 10절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これは主のみこころにかなった。ソロモンがこのことを願ったからである。

솔로몬이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솔로몬이 구한 그 기도가 하나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의 고집을 세우는 것이요? 그래, 하나님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한 번 해보자……이게 기도 입니까. 아닙니다.

기도는 바로 하나님 마음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도의 목적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 구할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를 알게 됩니다. 바로 그 때 구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는 마치 열쇠 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열쇠를 넣지도 않고, 아니면 열쇠를 넣었지만 돌리지도 않고 문을 열라고 아무리 해봤자 안 열립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마음도 모르는 상황에서 아무리 구하고 찾고 두드려봤자 몸만 피곤합니다. 두드리는 손만 아프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하나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면, 모세처럼 어떻게 되요? 예, 얼굴에서 광채가 납니다. 이는 바로 우리 마음에서 광채가 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빛이 나기 시작하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 주변의 물건들이 막 고장 나는 것을 보고, 아……이제 하나님께서 욥한테 주신 고난을 나한테도 주시려는구나……하고 생각했다면 저는 이제 뭘 해야 해요?

욥기 2장 8절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ヨブは土器のかけらを取り、それでからだを引っかいた。彼は灰の中に座っていた。

예, 몸을 긁을 깨진 질그릇 조각을 준비하거나, 아니면 좀 괜찮은 피부병 의료보험에 가입하던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ㅎㅎ

하지만 이렇게 하면 뭐라구요? 예, 욥 흉내내기, 욥 코스플레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지금은 안 좋은 일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믿음의 사람들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닮아감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듯, 하나님을 본 욥의 삶에서 빛이 남으로 인하여 큰 축복을 받은 것 같이, 하나님 마음을 알게 됨으로 인하여 우리 마음에도 빛이 나고, 우리 삶 속에서도 빛이 나게 되어,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놀라운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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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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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7회 창대한 축복의 시작
2019년 2월 1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욥기 8장 7절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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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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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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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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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창대한 축복의 시작” 大いなる祝福の始まり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욥기 8장 7절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あなたの始まりは小さくても、あなたの終わりは、きわめて大きなものとなる。

참 좋은 말씀이죠? 이 말씀은 욥기에 적혀 있는 말씀입니다만, 욥기를 모두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도, 아니, 성경을 잘 모르시는 분들, 예수님을 믿지 않으시는 분들도 들어본 적이 있을 수 있을 만큼 상당히 익숙한 구절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용품점 곳에 가보면 이 구절을 크게 써서 걸어놓는 것이나 액자 같이 해서 팔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참 좋은 말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살입니다.

욥기는 그 내용 중 대부분이, 아무런 이유 없이 어려움을 겪는 욥에 대해, 그의 어려운 상황을 듣고 위로해준답시고 온 세 명의 친구들이 결국은 위로는커녕 그를 맹비난 하는 말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욥기 8장에 있는 내용인데 한 번 볼까요?


우선 욥기 8장 1절~6절까지를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1.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3.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4.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5.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6.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次に、シュアハ人ビルダデが答えた。
いつまで、あなたはこのようなことを語るのか。あなたが口にすることばは激しい風だ。
神がさばきを曲げられるだろうか。全能者が義を曲げられるだろうか。
もし、あなたの子らが神の前に罪ある者となり、神が彼らをその背きの手に渡されても、
もし、あなたが熱心に神に求め、全能者にあわれみを乞うなら、
もし、あなたが純粋で真っ直ぐなら、今すぐ神はあなたのために奮い立ち、あなたの義の住まいを回復されるだろう。


그리고 이 다음에 오늘 말씀인

7.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あなたの始まりは小さくても、あなたの終わりは、きわめて大きなものとなる。

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선 6절까지의 내용을 정리해보도록 하면 이런 것이지요.

조금 길지만 일단 욥기 1장 13절~19절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13.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14.사환이 욥에게 와서 아뢰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15.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6.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양과 종들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7.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갈대아 사람이 세 무리를 지어 갑자기 낙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8.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들의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는데
19.거친 들에서 큰 바람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청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한지라”


ある日、彼の息子、娘たちが、一番上の兄の家で食べたりぶどう酒を飲んだりしていたとき、
一人の使者がヨブのところにやって来て言った。「牛が耕し、そのそばでろばが草を食べていると、
シェバ人が襲いかかってこれを奪い取り、若い者たちを剣(つるぎ)の刃で打ち殺しました。私一人だけが逃れて、あなたに知らせに参りました。」
この者がまだ話している間に、もう一人が来て言った。「神の火が天から下って、羊と若い者たちを焼き滅ぼしました。私一人だけが逃れて、あなたに知らせに参りました。」
この者がまだ話している間に、もう一人が来て言った。「カルデア人が三組になって、らくだを襲い、これを奪い取り、若い者たちを剣の刃で打ち殺しました。私一人だけが逃れて、あなたに知らせに参りました。」
この者がまだ話している間に、もう一人が来て言った。「あなたのご子息やお嬢さんたちは、一番上のお兄さんの家で食べたりぶどう酒を飲んだりしておられました。
そこへ荒野の方から大風が吹いて来て、家の四隅を打ち、それがお若い方々の上に倒れたので、皆様亡くなられました。私一人だけが逃れて、あなたに知らせに参りました。」

이 말씀을 보면 내용은 길지만 사실 정신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크게 나누어 네 가지 재앙들이 있는데, 이를 보면 우리의 인생 중에서 하나만 일어나도 크나큰 비극이 아닐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엄청난 재앙들이 네 개나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재앙에서는 큰 바람이 와서 건물을 쳤는데 그게 무너지는 바람에 자녀들이 몰사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하지만 이렇게 된 원인에 대해서 이 수아 사람 빌닷이 말하기를, 당신의 자녀들이 죽은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다. 하나님은 언제나 공의롭지 않으시냐. 네 자녀들이 괜히 죽은 것이겠는가. 분명히 지은 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네가 회개하고 그러면 지금은 이렇게 모든 것을 잃어서 미약하지만 나중에는 크게 축복해주실 것이다……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맞는 지적인가요?

욥기 1장 1절에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ウツの地に、その名をヨブという人がいた。この人は誠実で直ぐな心を持ち、神を恐れて悪から遠ざかっていた。

욥기 1장 5절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宴会の日が一巡すると、ヨブは彼らを呼び寄せて聖別した。朝早く起きて、彼ら一人ひとりのために、それぞれの全焼のささげ物を献げたのである。ヨブは、「もしかすると、息子たちが罪に陥って、心の中で神を呪ったかもしれない」と思ったからである。ヨブはいつもこのようにしていた。

이와 같은 욥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욥기 1장 8절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主はサタンに言われた。「おまえは、わたしのしもべヨブに心を留めたか。彼のように、誠実で直ぐな心を持ち、神を恐れて悪から遠ざかっている者は、地上には一人もいない。」

보십시오. 그리고 그의 아들이 하나님 앞에서 죽을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를 데려가신 것이라고 욥의 친구 비닷은 말하지만, 그의 주장은 전혀 근거 없는 말입니다. 완전히 잘못된 지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이런 욥기 8장 7절 같은 구절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걸어놓는 것은 너무나도 무지한 일이다. 아무런 근거 없이 욥을 비난한 말이 아니냐.

이렇게 말을 했다는 글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사실 성경 말씀을 인용할 때에는 조심해야지요. 무작정 성경에 적힌 말이라고 해서 이를 하나님의 말씀이라면서 믿으라고 한다면 이는 안 됩니다. 최소한 전후맥락은 이해하고 인용을 해야겠지요.

하지만, 그렇다면 이 말씀을 걸어놓는 것은 잘못된 일인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잘 아는 요한 3서 2절 말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愛する者よ。あなたのたましいが幸いを得ているように、あなたがすべての点で幸いを得、また健康であるように祈ります。


이 문구는 요한이 편지를 쓸 때 맨 처음에 안부인사를 쓴 것일 뿐이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하자면, 글쎄요. 요즘 잘 지내십니까. 안녕하십니까……회사 공문으로 본다면, “귀사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라는, 그저 형식적인 문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구절의 전후맥락을 살펴본다면 이는 어디까지나 “안부인사”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셨냐 하면, 아, 그렇구나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아서 우리의 영혼은 잘 되지만, 우리가 죽고 난 다음에 잘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도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주님께서 원하시고 계시구나……하고 이해한 것입니다.

그렇게 받아들이신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님이셨던 것이지요. 그 결과 그 분은 현재 70만이 넘는 세계 최대의 교회를 세우게 되셨습니다.

만약에 이 말씀을 그저 안부인사 만으로만 받아들이셨다면 그와 같은 어마어마한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즉, 비록 오늘 말씀은 아무런 잘못 없는 욥한테, 그의 친구가 아무런 근거 없이 비난하는 말이긴 합니다만, 그 내용에 숨겨진 뜻, 지금 우리는 미약한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심히 창대하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이는 우리 안에서 엄청난 큰 축복으로 다가오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俵万智 1987년 サラダ記念日 3000부, 280만부


1992년 4월 11일, 한국 텔레비전의 어떤 음악 방송에 한 가수 그룹이 등장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때는 그들이 처음으로 방송에 등장한 날이었습니다.

이 곡을 들은 네 명의 심사위원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먼저 첫 번째 분, “리듬은 좋은데 멜로디 라인이 약하다. 다른 곳에 비해 멜로디 라인 쪽은 신경을 좀 안 쓴 것 같다.”

두 번째 심사위원, “자신은 노래를 들을 때 습관적으로 노랫말부터 듣게 되는데, 이 때 생각하는 것이, 첫째로, 올바른 문장으로 되어 있는가, 둘째로 새로운 이야기인가 하는 점인데, 이 노래는 새로운 형식이긴 한데, 내용까지 새로움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새로운 형식의 노래이긴 한데 내용은 좀 새로움이 없다는 평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심사위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욕적인데, 동작 속에 노래가 좀 묻힌 것 같은 아쉬움이 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심사위원은 그래도 그나마 좀 나았습니다. “새로운 형식인데, 평가는 우리가 아니라 시청자들이 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하면서 점수를 주는데, 네 명의 심사위원들이 준 점수가 8점이 3명, 7점이 1명, 평균점수 7.8점이었다고 하는데, 이게 역대 가장 낮은 점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혹평, 정말 낮은 평가를 받은 그룹이 누구였냐 하면,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불렀던 곡이 “난 알아요”였죠.

워낙 유명한 동영상이니 어쩌면 이미 보신 분들도 많으실 것입니다.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 가요계는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적어도 80년대 생 이전의 세대라고 한다면 이 서태지와 아이들이 한국 가요계 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받은 상이나 음반 판매수 같은 숫자를 논한다는 거의 무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이 역대 신기록을 수립했을 뿐만 아니라, 1994년 대한민국 학계와 언론계가 뽑은 〈광복 50년 한국을 바꾼 100인〉에 가수로서는 최초로 선정되기도 했을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어떻게 됐냐 하면 서태지는 역사적인 스타가 된 반면, 그 네 명의 심사위원 중 특별히 혹평을 했던 심사위원들은 온데 간데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있어서 가장 상처를 받을 때는,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라고 합니다. 나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나도 노력하고 있는데,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고 인정해주지 않아요. 다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요. 이럴 때 사람들은 참 힘들어하고 외롭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 그렇게 가치가 없는 존재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치를 어느 정도로 여기고 계실까요.


요한계시록 5장 9절~10절을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 9절~10절
“9.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彼らは新しい歌を歌った。「あなたは、巻物を受け取り、封印を解くのにふさわしい方です。あなたは屠られて、すべての部族、言語、民族、国民の中から、あなたの血によって人々を神のために贖い、
私たちの神のために、彼らを王国とし、祭司とされました。彼らは地を治めるのです。」

예수님은 우리를 피로 사셨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의 피로 그 대가를 지불하셨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어떤 물건을 예를 들어서 1000원에 샀다고 하면, 그 물건은 1000원의 가치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100만원을 주고 샀다면 그 물건은 100만원과 동일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가치는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그 비용으로 지불하신 것이 예수님의 피라고 하는데 이는 결국 우리의 가치가 다름 아닌 예수님의 피와 똑같은 가치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피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신명기 12장 23절에서 피는 생명(血はいのち)이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피는 예수님의 생명 그 자체인 것입니다.

즉 우리의 가치는 어느 정도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를 예수님의 생명처럼 여기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말씀입니까.

이는 그냥 상징적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0장 11절~15절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1절~15절
“11.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わたしは良い牧者(ぼくしゃ)です。良い牧者は羊たちのためにいのちを捨てます。
牧者でない雇い人(にん)は、羊たちが自分のものではないので、狼が来るのを見ると、置き去りにして逃げてしまいます。それで、狼は羊たちを奪ったり散らしたりします。
彼は雇い人で、羊たちのことを心にかけていないからです。
わたしは良い牧者です。わたしはわたしのものを知っており、わたしのものは、わたしを知っています。
ちょうど、父がわたしを知っておられ、わたしが父を知っているのと同じです。また、わたしは羊たちのために自分のいのちを捨てます。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삯꾼과 선한 목자를 비유하고 계십니다. 똑같이 양을 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리가 양들을 공격해 왔을 때 삯꾼은 도망가지만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삯꾼 雇い人(にん), 그러니까 요즘 말로 하자면 월급쟁이 사장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예를 들어서 공장에 불이 났어요. 그러면 월급쟁이 사장은 어떻게 합니까. 어차피 월급쟁이잖아요. 거기 공장에 있는 건 자기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어쩌면 내 목숨 하나 살기 위해서 도망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사장은 어떻습니까.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건지려고 끝까지 노력하겠지요. 만에 하나 그 안에 사람이라도 남아 있는다면 끝까지 살려내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예전에 2014년에 일어났던 세월호 침몰 사고에서 학생들은 그 안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자기만 먼저 살아보겠다고 나오는 선장을 보십시오. 이게 말하자면 삯꾼이지요. 하지만 그 아이들을 데리고 온 선생님들은 어땠습니까.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더 살려보겠다고 끝까지 사투를 벌이다가 결국 자신은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 선생님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많은 분들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한 목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스스로를 십자가 위에 매다셨습니다.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의 목숨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토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공격해온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실 것입니다. 왜요?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바치셨을 정도로 우리를 너무나도 아끼고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살다 보면 외로우신가요? 불안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불안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바로 앞이 안 보이기 때문에 불안한 거죠. 정말 내가 가고 있는 길,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맞는 것일까. 어쩌면 길을 잘못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불안한 것 아니겠습니까.

마태복음을 잠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입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天の御国は畑に隠された宝のようなものです。その宝を見つけた人は、それをそのまま隠しておきます。そして喜びのあまり、行って、持っている物すべてを売り払い、その畑を買います。

이 말씀을 잠시 묵상해보았더니 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사람이 밭에 감추어져 있는 보화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숨겨두고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샀다고 하는데, 이 사람이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샀다고 한다면, 그 보화는 그 사람이 그 때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를 다 합한 것 보다 더 값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여기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이 사람은 어떻게 해서 그 보화를 발견할 수 있었을까요. 뭐, 여러 이유를 상상해볼 수는 있겠습니다만, 가장 확실한 이유, 이 사람이 그 보화, 값진 보화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사람 이전에 다른 사람이 그 보화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그 사람 이전에 왜 다른 사람이 그 값진 보화를 발견할 수 없었을까요. 그것은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거기에 그와 같은 값진 보화가 감추어져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잖아요? 그 사람보다 다른 사람들이 먼저 발견했더라면 그 사람은 그 보화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무도 거기에 있는 보화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그 값진 보화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처음에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천국은 마치 감추인 보화와 같다”(天の御国は畑に隠された宝のようなもの)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주님을 믿으면서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이 정말 천국에 가는 길이라고, 이 땅에서도 창대한 축복을 받는 길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나만 이 길을 가요. 그래서 외롭게 느껴질 지도 모릅니다. 불안해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으로 가는 보화를 얻는 길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 군마도 마찬가지지요. 선교사들의 무덤이라고 하는 일본선교. 그래도 그나마 좀 하려면 동경이나 좀 큰 도시로 가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 군마현, 그것도 군마 중에서 오지에 가까운 시부카와에 우리를 데려다 놓으셨는데……이게 맞는 길인지 아닌지 참 저도 불안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신다고요? 예, 우리가 가는 이 길이 바로 값진 보화를 얻는 길, 창대한 축복을 받는 길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이건 저한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 속에서 외로울 때, 불안할 때, 주변 사람들이 아무도 나를 안 알아줄 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아, 지금 나는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것이다.
아, 지금 주님께서 인도해주신다.
아,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
지금은 미약하더라도 마침내 창대하게 해 주실 것이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앞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첫 텔레비전 출연을 했을 때의 동영상이 지금도 유튜브 동영상 사이트에 올라와 있습니다만, 거기 댓글 중에 인상적인 글이 있었습니다.

전설의 시작임을 왜 그대들은 몰랐는가

이는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을 보고 혹평을 했던 심사위원들한테 한 말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텔레비전에 처음 등장했을 바로 그 날은 전설의 시작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전설의 시작,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는 축복의 시작 시점에 서 이는지도 모릅니다.

불안하십니까.
불안해하지 맙시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두려우십니까.
두려워 하지 맙시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이 지켜주십니다.

초조하십니까.
초조해 하지 맙시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이 창대하게 해주십니다.


지금은 불안하고 두렵고 초초하고 미약한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의심을 물리치고 주님을 의지할 때에, 주님과 동행할 때에, 마침내 욥이 받은 축복의 축복을 받는, 끝내는 우리를 심히 창대하게 하시는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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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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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6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2019년 2월 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イエス様を信じるということ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아멘?
아멘이세요? 자,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이렇게 질문을 하면 좀 어려우시다면 조금 다르게 물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보고 “아, 저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구나” 라고 하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볼 수 이을까요?

매주 교회에 다니는 것을 보면 알아요?
술 담배 안 하는 것이요?
식사하기 전에 기도하는 것을 보면, 아, 저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나요?

자, 그렇다면 반대로 물어보겠습니다.

매주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닌가요?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에요?
식사하기 전에 기도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닌가요?

여기에 대한 기준은 어쩌면 사람마다 제 각각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우리의 믿음은 성경에서 시작해서 성경으로 끝나는데 왜 이렇게 사람마다 다를까요.

그것은 뭐 성경의 해석차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물론 성경에 있어서의 견해나 해석 차이는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신학자들 사이에도 있습니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는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자기 주장을 하는 사람들, 그것도 아주 강력하게 자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신앙적으로 보았을 때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당연히 중요하지요.

그래서 믿음에 열성이 있는 분들을 보면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기도를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기도원도 많아요. 저도 한국에 있을 때 기도원에 가보기도 했습니다만, 정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밤새도록 기도를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또다시 질문을 드립니다. 간단하게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기도를 왜 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그야 당연히 응답을 받기 위해서 하지……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럼 둘째로. 기도를 오래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한 번 기도할 때 몇 시간이나 오랫동안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기도제목을 갖고 며칠 동안이나 기도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렇다면 기도를 그처럼 오래 하실까요.

이에 대한 답변도 단순합니다. 응답을 빨리 안 해주니까 그러는 거죠……라고 하시죠.

그러면서 성경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다니엘 10장 13절에 보면 다니엘이 기도를 한지 21일 만에 응답을 받았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보면 다니엘 기도회라고 해서 21일 동안 기도를 하는 집회가 열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질문입니다. 가끔 보면 큰 소리로 기도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큰 소리로 기도를 하는지 물어보면 이 또한 성경을 인용하십니다.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 (エレミヤ書)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わたしを呼べ。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に答え、あなたが知らない理解を超えた大いなることを、あなたに告げよう。』

그래서 기도를 큰 소리로 외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질문. 가끔 보면 방언으로 기도를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섬기던 교회에서도 보면 여기저기서 방언 소리가 크게 들려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방언으로 기도를 하시냐고 물으면 역시 성경을 인용해서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同じように御霊も、弱い私たちを助けてくださいます。私たちは、何をどう祈ったらよいか分からないのですが、御霊 ご自身が、ことばにならないうめきをもって、とりなしてくださるのです。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무엇을 기도 드려야 할지 몰라도 성령님께서 기도를 드린다는 거예요. 그래서 방언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질문과 그 답변.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두 수긍이 가시나요? 납득이 가시나요? 수긍이 가거나 납득이 가지 않더라도 최소한 이런 말씀들은 교회에 어느 정도 다녀보신 분들이라면 익숙한 말씀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첫번째 질문. 기도를 왜 하는가……이 부분에 대해서는 마지막에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째 질문. 기도를 왜 오래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빨리 응답을 안 해주시기 때문에 오래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는 기도를 오래 한다고 하면서 오래 하는 방법을 책으로 출판하신 분들도 계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또 누구는 기도를 몇 시간 한다, 자기는 몇 시간 하는 말씀도 들어보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6장 7절~8절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また、祈るとき、異邦人のように、同じことばをただ繰り返してはいけません。彼らは、ことば数が多いことで聞かれると思っているのです。
ですから、彼らと同じようにし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がたの父は、あなたがたが求める前から、あなたがたに必要なものを知っておられるのです。

예수님께서는 오랫동안 기도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기 또 하는 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것은 이방인들이나 하는 기도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세요.


그리고 세 번째 질문. 큰 소리로 기도를 해야 할 필요가 있나요?

이사야 59장 1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見よ。主の手が短くて救えないのではない。その耳が遠くて聞こえないのではない。

우리가 무슨 그림에 보면 하나님 얼굴이 수염도 나고 머리도 하얗고 하니까 노인이라서 귀가 잘 안 들리실까봐 큰 소리로 기도해야 하는 건가요? 성경에서 하나님은 도움의 손이 짧지도 않고 귀가 둔하지도 않다고 기록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어느 작은 교회에 다닐 때의 일인데, 거기서 찬양을 인도하는 자매가 있는데 매주 보면 목이 쉬어 있어요. 그러니 찬양이 제대로 될 리가 있겠어요? 고음은 고사하고 보통 음도 소리가 잘 안 나옵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목이 쉬어있냐고 하니까, 아~ 매일 밤 주님께 부르짖어보래요.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나……그러면서 마치 자신은 무슨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처럼 말을 하는 모습을 보고 참 안타까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니, 그래도 찬양을 한다는 사람이 자기 목소리 하나 관리 못해서 되겠습니까? 그러면서 그게 믿음이 좋다는 것인가요? 참으로 딱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요.

다음은 네 번째 질문. 방언으로 기도를 하시는 분들을 보면, 물론 이는 성경에 나옵니다. 사도 바울도 방언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8절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라고 고백합니다.

私は、あなたがたのだれよりも多くの異言で語っていることを、神に感謝しています。

그 뿐만 아닙니다.

같은 고린도전서 14장 39절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라고 까지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ですから、私の兄弟たち、預言することを熱心に求めなさい。また、異言で語ることを禁じてはいけません。

방언은 엄연히 성경에 기록된 은사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 교회를 보면 여기저기서 큰 소리로 방언을 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앞서 말씀 드렸던 기도원에서도 얼마나 많은 분들이, 그것도 한밤중에도 큰 소리로 방언기도를 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특별히 방언에 대해서 많이 적힌 고린도전서 14장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있습니다.

14장 13절~14절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そういうわけで、異言で語る人は、それを解き明かすことができるように祈りなさい。
もし私が異言で祈るなら、私の霊は祈りますが、私の知性は実を結びません。


이 말씀을 보면 바울은 방언을 하는 것도 좋지만 그 방언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는 통역의 능력도 달라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방언으로만 기도 하고 그 뜻을 모른다면 마음에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 (知性は実を結びません), 즉 유익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14장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절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愛を追い求めなさい。また、御霊の賜物、特に預言することを熱心に求めなさい。

14장 5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私は、あなたがたがみな異言で語ることを願いますが、それ以上に願うのは、あなたがたが預言することです。異言 で語る人がその解き明かしをして教会の成長に役立つのでないかぎり、預言する人のほうがまさっています。

방언만을 구하지 말고 오히려 예언하기를 구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교회에 몇 십 년을 다니면서 방언을 한다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이 봐왔습니다만, 방언을 통역한다는 분은, 그런 분들이 계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만, 아직 제가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습니다.

참고로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인터넷에 방언이나 방언을 통역한다는 은사를 흔히들 “통변의 은사”라고 하는데, 이를 검색해 보니까, 쪼금 요상한 사이트들이 많이 떠서 금방 닫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언을 한다”고 하는 분들은 특히나 만나본 적도 없고, 자기는 방언 통역이나 예언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는 사람들 역시 본 적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3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ですから、教会全体が一緒に集まって、皆が異言で語るなら、初心の人か信じていない人が入って来 たとき、あなたがたは気が変になっていると言われることにならないでしょうか。(気が狂っていると言わないでしょうか。)

14장 28절~29절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解き明かす者がいなければ、教会では黙っていて、自分に対し、また神に対して語りなさい。
預言する者たちも、二人か三人が語り、ほかの者たちはそれを吟味しなさい。

성경에는 분명히 이렇게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즘도 한국 교회에 보면 여기저기서 큰 소리로 막 방언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9절을 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同じようにあなたがたも、舌で明瞭なことばを語らなければ、話していることをどうして分かってもらえるでしょうか。空気に向かって話していることになります。

그리고 14장 19절
“그러나 교회에서 내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しかし教会では、異言で一万のことばを語るよりむしろ、ほかの人たちにも教えるために、私の知性で五つのことばを語りたいと思います。

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끔 보면 교회나 사람에 따라서는 방언 은사를 중요시하는 나머지 방언 은사가 없는 사람은 믿음이 적은 사람으로 보는 경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글쎄요. 제가 방언을 해본적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방언기도를 한다면서 다들 보면 “까라바리야 사라바리야 까라바리야 사라바리야” 하고 반복하거나 “렐렐렐렐렐……”하고 하는 모습을 보면 글쎄, 저게 정말 방언인가 하는 생각도 들기도 합니다.

성경 말씀대로 저도 방언을 금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방언 기도를 하신다면 먼저 성경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를 보시고 성경에 적힌 그대로 하셔야지만 은혜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첫 번째 질문입니다. 기도를 하는 이유는 응답을 받기 위해서입니까. 마침 요즘은 일본의 수능시즌인데, 만약에 예수님을 믿는 100명의 수험생이 1지망에 합격하게 해달라고 모두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누구는 합격을 했는데 누구는 합격이 안됐습니다.

그렇다면 합격할 수 없었던 사람은 기도를 헛한 건가요? 기도에 있어서 패배자인가요?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니, 그렇잖아요. 기도는 응답을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면, 합격할 수 없었다는 것은 응답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니 결국 기도의 실패자라는 뜻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입니까.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나는 것입니까.

여러분. 목사님 설교 말씀 몇 마디 듣고, 성경 구절 몇 마디 외우고, 그것이 믿음이라 생각하고, 나중에는 그저 죽어라고 기도만 하는 것. 이것이 믿음인가요?

저는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무엇이 빠졌습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이 빠졌습니다. 말씀이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자기가 드리는 기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어떻게 올바른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는 우리의 고집을 세우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고집을 이기기 위해서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에 술 담 배 안 하면서 사람한테 상처 입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금식 철야 한다면서 자기만 생각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이 어떻게 올바른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すべて疲れた人、重荷を負っている人はわたしのもとに来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休ませてあげます。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쉬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 속에서 쉼을 얻지 못했다면 이는 우리의 믿음을 한 번 점검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 응답, 소원 성취가 문제가 아닙니다. 기도를 하는데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철야를 합니다. 그래도 안 되니까 금식을 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어떻게 해요? 예,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이 살았다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한탄을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께서 최근에 장난감 가게에 가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저도 얼마 전에 우연히 지나가다가 장난감 가게에 한 번 들어가봤습니다만, 그러면 꼭 들려오는 소리가 뭐예요? 예, 가끔 보면 애들 울음 소리가 들려옵니다. 장난감을 사달라고 막 울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가 사달라는 것을 다 사주나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예요? 아니에요. 아이를 사랑합니다. 오히려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때로는 그렇게 아이가 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들어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그 부모를 원망해야 하나요? 엄마 아빠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안 사준다고 믿어야 하나요? 아닙니다. 그건 오히려 잘못된 생각이죠.

이를 모르는 어른들이 있어요? 아니요. 없습니다. 알죠. 그러면서 왜 자기는 하나님한테는 그렇게 고집을 부리십니까. 그리고 안 들어주면 왜 억지를 부리고 하나님을 원망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 안에서 쉼을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 생각에는 이게 이렇게 되어야 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이건 이렇게 되어야 하고, 저건 저렇게 되어야 해……이건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이 되겠다는 말이나 다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 생각을 따르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 대로 하나님이 움직여야 한다고 믿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얼마 전에 뉴스를 보니까 결혼생활이 힘들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 보면요. 회사 일이 너무나도 힘들어서 또 역시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참 안타깝죠. 그리고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결혼생활이 힘들면 좀 별거를 해본다거나, 그것도 안 되면 차라리 헤어지지.

회사? 아무리 좋은 회사, 아무리 힘들게 들어간 회사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힘들면 좀 쉬던가, 아니면 차라리 그만 두면 되지, 왜 그렇게 슬픈 결말을 맞이해야만 했을까.

사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보면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생각이 모자라서도 아닙니다. 오히려 좀 생각이 모자라거나, 생활 자체에 있어서도 좀 대충대충 하고 그런 사람들은 이런 경우가 드물어요. 반대로 정말 착실하고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사람들이 이런 안타까운 일들을 당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제가 좀 심하게 말씀 드렸는지 모르지만요, 솔직히 이런 고민을 하는 분들을 보면요, 그냥 대충대충 믿는 사람들은 이런 고민들도 안 해요. 믿음이 참 좋은 분들, 주님을 어떻게든 잘 믿어보려고 애를 쓰는 분들이 철야도 하고 새벽기도도 하고, 기도원에 가보기도 하고 금식도 하기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안 되니까 답답해하고 절망도 하고,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一人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요한일서 4장 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私たちは自分たちに対する神の愛を知り、また信じています。神は愛です。愛のうちにとどまる人は神のうちにとどまり、神もその人のうちにとどまっておられます。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냥 말로만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무참하게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나도 명확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쉼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우리는 잘 됩니다. 지금 잘 안 되더라도 결국은 잘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해주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61장 3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シオンの嘆き悲しむ者たちに、灰の代わりに頭の飾りを、嘆きの代わりに喜 びの油を、憂いの心の代わりに賛美の外套を着けさせるために。彼らは、義の樫(かし)の木、栄光を現す、主の植木と呼ばれる。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초조해하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찬송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생이 힘 드십니까. 고달프십니까. 정말 죽고 싶으십니까.

그 마음, 그 힘든 마음. 설령 아무도 못 알아준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항상 기다리고 계십니다. 힘 드시면 성경을 펴 보십시오. 두 눈을 감고 주님께 기도를 드려보십시오. 주님께서 주님의 마음을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피멍 든 가슴을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바로 주님 안에서 쉼을 얻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항상 불안해하고 항상 초조해한다면 이는 우리 믿음에 분명히 문제가 있다는 신호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우리는 결국은 잘 됩니다. 지금은 힘들고 어렵더라도 결국은 잘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 안에서 진정한 쉼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사랑의 하나님, 사랑의 예수님, 그리고 사랑의 성령님을 믿고 의지하며, 사랑의 주님 품 안에서 진정한 쉼을 얻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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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5회 꾸짖으신 예수님
2019년 1월 2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4장 35절~41절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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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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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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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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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꾸짖으신 예수님” 叱りつけたイエス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은 배에 타서 건너고 있는데 갑자기 큰 광풍이 불어왔다고 합니다. 지금처럼 무슨 튼튼한 배도 아니고 그냥 나룻배나 고기잡이 배였을 텐데 물 위에서 광풍이 부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배는 위아래로 오르락 내리락 합니다. 오른쪽 왼쪽으로 심하게 흔들려요. 그리고 무슨 지붕이 있는 배도 아니었을 것이기에 물들이 배 안으로 넘쳐옵니다.

그들 중에는 베드로를 비롯해서 요한이나 야고보처럼 오랫동안 고기잡이를 해왔던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배 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에요. 그러니 자신들의 자존심도 있겠지요. 그래서 그 때까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지식이나 경험으로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거 난리 났다고 하면서 뒤를 봤더니만, 뭐가 보여요? 예, 저 뒤편에서 예수님이 누워서 주무시고 계세요. 그 때 그 사람들의 심경이 어땠겠습니까.

아니, 지금 제정신이야, 뭐야. 자기가 선생이면 다야?
배를 좀 어떻게라도 해보려면 사람 손이 아쉬운 마당에 뒤에서 자고 있으면 어떡해?
이런 상황에서 잠이 와?

입으로 말이야 안 했겠지만 이렇게 다급한 상황에서 그런 생각이 안 들었겠습니까.

그래서 제자들이 뭐라고 했대요?


오늘 말씀 중 38절 후반부를 봅니다.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弟子たちはイエスを起こして、「先生。私たちが死んでも、かまわないのですか」と言った。

차마 심한 말은 못하고, 선생님, 우리가 이렇게 죽게 됐는데 그냥 그렇게 주무시고 계실 겁니까. 좀 어떻게 해보세요……라고 한 것이지요.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음 구절을 봅니다. 39절입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イエスは起き上がって風を叱りつけ、湖に「黙れ、静まれ」と言われた。すると風はやみ、すっかり凪になった。

예수님께서는 그제서야 깨어나시더니 바람과 바다를 향해 <잠잠하라 고요하라 黙れ、静まれ>라고 하셨더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해졌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오는 표현이 흥미롭습니다. <바람과 바다에게 명하여>라고 해도 될 것도 같은데 굳이 <꾸짖었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래요. 뭐 이를 두고 글을 쓴 마가의 문학적 표현이라고 하면 그럴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같은 장면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등장합니다.


먼저 마태복음부터 보도록 하시겠습니다. 마태복음 8장 26절 후반부입니다.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それから起き上がり、風と湖を叱りつけられた。すると、すっかり凪になった。

누가복음도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8장 24절 후반부입니다.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イエスは起き上がり、風と荒波を叱りつけられた。すると静まり、凪になった。

이렇게 보면 오늘 말씀을 적은 마가만이 아니라 마태와 누가도 역시 <꾸짖었다>는 표현을 똑같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큰 소리로 명하셨다……도 아닌 세 사람이 하나같이 <꾸짖었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두고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절묘한 것 같습니다.

복음서의 기록을 두고 신학자들 사이에는 정말 그들이 직접 보고 쓴 것인지, 아니면 누가 쓴 것을 보고 편집을 한 것인지 아직 다툼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런 어려운 논쟁들을 제쳐두고 단순히 생각해 본다면, 적어도 이 세 사람이 보기에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는 것처럼 보였다고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가 보통 꾸짖었다고 한다면 상대방은 무슨 잘못이 있는 경우이겠지요. 물론 우리들은 모두 완벽하지 않은 사람인지라, 사람이 아무리 상대방을 꾸짖었다 하더라도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에 잘못이 있는지는 따져봐야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친히 꾸짖었다고 하셨으니 이는 100프로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우리는 봐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상대방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분명 바람과 바다입니다. 바람과 바다가 잘못을 했으니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신 것이라고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다만, 자, 그렇다면 바람과 바다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 꾸짖으셨을까요. 오늘은 이 예수님의 꾸짖음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첫 번째로 바람과 바다의 잘못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이 좀 이상하긴 합니다만 일단 이해하고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바람과 바다가 잘못을 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들이 잘못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큰 돌풍과 파도 때문에 예수님께서 타신 배가 앞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즉, 돌풍과 파도는 결국 예수님의 앞길을 막았던 것이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옛날에 임금님이 가마를 타고 행차를 하는데 그 앞길을 막는다고 하면 살아 남겠습니까?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임금님도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가시고자 하는 그 앞길을 막는다고 하니, 제아무리 바람이나 바다다 할지라도 혼이 안 날 수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혼이 나야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뭐,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만, 제가 지금 하는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린다 하더라도 이해해주시고 잠시만 더 들어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 앞길을 막아 섰던 바람과 바다를 향해 꾸짖으셨습니다. 그 결과 바람은 고요해지고 바다도 잔잔해졌습니다. 그럼 이제 모두 해결된 건가요? 아닙니다.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시간을 조금 앞으로 되돌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큰 돌풍이 불어봅니다. 심하게 파도가 휘몰아칩니다. 온 천지가 흔들립니다. 배도 겉잡을 수 없이 흔들립니다. 하지만 흔들린 것은 그 뿐이었나요? 아니에요. 그 외에도 흔들리고 있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같이 타고 있던 제자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증거는 바로 그들의 말이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25절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弟子たちは近寄ってイエスを起こして、「主よ、助けてください。私たちは死んでしまいます」と言った。

마가복음 4장 38절 후반부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弟子たちはイエスを起こして、「先生。私たちが死んでも、かまわないのですか」と言った。

누가복음 8장 24절 전반부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そこで弟子たちは近寄ってイエスを起こし、「先生、先生、私たちは死んでしまいます」と言った。

제자들은 오늘 일을 겪기 전에 그 때까지 예수님의 설교도 많이 들었습니다. 기적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과 한 배를 타고 있음에도 그들은 하나 같이 지금 자기들이 죽게 되었다고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보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던 것, 좌로 흔들 우로 흔들 하고 있던 것은 그들이 타고 있던 배만이 아니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바로 그들의 믿음 또한 폭풍 위에 떠 있는 배처럼, 아니 그보다도 더욱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앞서서 바람과 바다가 잘못했다고 했습니다만, 사실 바람이나 바다가 잘못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바람은 단지 불었을 뿐이고, 그렇기 때문에 바다는 출렁거렸을 뿐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배도 흔들렸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서 무엇이 드러나게 되었냐 하면, 예수님과 같은 배에 타고 있던 제자들이 아직도 얼마나 믿음이 부족했는가 하는 것이 여실히 탄로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보면 모두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8장 26절 전반부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イエスは言われた。「どうして怖がるのか、信仰の薄い者たち。」……

오늘 말씀 중 마가복음 4장 40절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どうして怖がるのですか。まだ信仰がないのですか。」

누가복음 8장 25절 전반부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イエスは彼らに対して、「あなたがたの信仰はどこにあるのですか」と言われた。

사실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대상은 바람과 바다가 아닌 아직도 여전히 작은 믿음만 가지고 있던 제자들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렇게 함께 있어주고 그렇게 많이 보여주고 그렇게 많이 들려주었는데도, 아직도 믿음이 그것 밖에 안 되느냐 하시면서 제자들을 꾸짖으셨던 것입니다.

병원에서 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때 보면, 물론 작은 건 그냥 한다 하더라도 좀 큰 치료를 하거나 아니면 수술을 할 때 환자를 보통 마취를 하지요? 그렇다면 마취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죠. 물론 환자가 통증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만, 더욱 큰 이유는 환자가 움직이지 못하게, 난리 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술을 해야 하는데 환자가 아프다고 난리를 치고 도망가고 하면 어떻게 치료를 하겠습니까. 그래서 움직이지 못하고 꼼짝 못하도록 특별히 전신마취를 하는 것이지요.

출애굽 당시의 유대인들을 보면 어떻습니까. 애굽을 빠져 나왔을 때에 그들은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이제 몇 백 년에 걸친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서는 애굽 정예부대가 추격해봅니다.

출애굽기 14장 11절~12절
“11.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そしてモーセに言った。「エジプトに墓がないからといって、荒野で死なせるために、あなたはわれわれを連れて来たのか。われわれをエジプトから連 れ出したりして、いったい何ということをしてくれたのだ。
エジプトであなたに『われわれのことにはかまわないで、エジプトに仕えさせてくれ』と言ったではないか。実際、この荒野で死ぬよりは、エジプトに仕えるほうがよかったのだ。」


그러자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시지요.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 민족을 모두 건너게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추격해오던 애굽 군대를 모두 홍해 바다에 잠겨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출애굽기 15장 1절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そのとき、モーセとイスラエルの子らは、主に向かってこの歌を歌った。彼らはこう言った。「主に向かって私は歌おう。主はご威光を極みまで現され、馬と乗り手を海の中に投げ込まれた。

이제 언제 그랬냐는 듯이 (手のひらを返したように)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감사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같은 15장 22절~24절을 봅니다.

“22.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モーセはイスラエルを葦の海から旅立たせた。彼らはシュルの荒野へ出て行き、三日間、荒野を歩いた。しかし、彼らには水が見つからなかった。
彼らはマラに来たが、マラの水は苦くて飲めなかった。それで、そこはマラという名で呼ばれた。
民はモーセに向かって「われわれは何を飲んだらよいのか」と不平を言った。


아니, 얼마나 지났다고 또 모세를 원망합니까. 그 놀라운 기적을 직접 보고도 벌써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원망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들의 원망은 계속됩니다.

출애굽기 16장 2절~3절
“2.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そのとき、イスラエルの全会衆は、この荒野でモーセとアロンに向かって不平を言った。
イスラエルの子らは彼らに言った。「エジプトの地で、肉鍋のそばに座り、パンを満ち足りるまで食べていたときに、われわれは主の手にかかって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のだ。事実、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をこの荒野に導き出し、この集団全体を飢え死にさせようとしている。」

출애굽기 17장 3절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民はそこで水に渇いた。それで民はモーセに不平を言った。「いったい、なぜ私たちをエジプトから連 れ上ったのか。私や子どもたちや家畜を、渇きで死なせるためか。」


민수기 14장 3절~4절
“3.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なぜ主は、われわれをこの地に導いて来 て、剣に倒れるようにされるのか。妻や子どもは、かすめ奪われてしまう。エジプトに帰るほうが、われわれにとって良くはないか。」
そして互いに言った。「さあ、われわれは、かしらを一人立ててエジプトに帰ろう。」

그들의 불평 불만은 끝이 없습니다. 이처럼 흔들리는 믿음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들을 전신마취 시켜버렸습니다. 40년 동안 꼼짝없이 광야 안에 가둬버리시고는 집중적으로 그들을 훈련시켰던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일이 있을 때 기뻐하는 거요? 믿음이 있어야 기뻐하나요? 아니에요. 믿음이 없어도 좋은 일이 있으면 기뻐합니다. 이는 마치 어린 애들한테 맛있는 사탕을 주면 좋아하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자기가 좋아하는 맛있는 사탕을 주는데, 그걸 보고 좋아하기 위해서는 교양이 필요해요, 지식이 필요해요. 아니면 믿음이 필요해요? 아니요. 그런 것 없어도 기뻐합니다. 그냥 기뻐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진정한 믿음이 있느냐 하는 것은 그렇지 않을 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 보면 사람들이 아브라함이나 야곱 이야기는 많이 하는데 막상 그 사이에 있는 이삭 이야기는 별로 안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왠지 모르게 과소평가 하기 쉬운 것 같습니다만 이 이삭을 보면 진정한 큰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26장 19절~22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19.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20.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21.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22.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イサクのしもべたちがその谷間を掘っているとき、そこに湧き水の井戸を見つけた。
ゲラルの羊飼いたちは「この水はわれわれのものだ」と言って、イサクの羊飼いたちと争った。それで、イサクはその井戸の名をエセクと呼んだ。彼らがイサクと争 ったからである。
しもべたちは、もう一つの井戸を掘った。それについても彼らが争ったので、その名をシテナと呼んだ。
イサクはそこから移って、もう一つの井戸を掘った。その井戸については争 いがなかったので、その名をレホボテと呼んだ。そして彼は言った。「今や、主は私たちに広い所を与えて、この地で私たちが増えるようにしてくださった。」

너무나 대단하지 않습니까. 자신이 애써 우물을 팠어요. 그런데 다툼이 생겼어요. 다른 사람이 그걸 자기들 거라고 그런 거예요. 그러자 이삭은 싸웠대요? 아니요. 그냥 다른 곳에 우물을 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누가 시비를 걸어와요. 그랬더니 또다시 옮겨서 새로운 우물을 파고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는 이삭이 모자라서 그랬을까요? 아니요. 이러한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다툼을 피하고 평안을 추구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큰 믿음 아니겠습니까. 이삭의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그는 흔들리지 않는 안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까 한국이나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인기직업 1순위가 똑같다는 것이에요. 요즘 한국도 일본도 학생들 사이에서 공무원이 그렇게 인기라고 합니다. 물론 옛날에도 공무원 인기는 높았습니다만, 옛날에는 판검사나 외교관 같은 아무래도 고위공무원 인기가 높았지요. 하지만 요즘은 지방공무원, 중하급 공무원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며칠 전에는 이에 대해서 저희 집사람이랑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집사람 말이 이래요. 요즘 한국에서 9급 공무원이라도 되려면 조상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니, 목사 마누라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하고 따지려고 했더니, 그게 아니라, 한국에는 자기 집안 중에 국가유공자로 지정된 사람이 있으면 그런 취직시험 같은 데에 가산점이 붙는 제도가 있는데, 그런 가산점이라도 받지 않으면 하위직이라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기 어려울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이 공무원이라는 직업과 일반 회사 직원을 비교해보면 어떨까요.

일반 회사원의 경우 회사가 돈을 많이 벌게 되면 보너스를 받거나 아니면 무슨 특별 휴가 같은 것을 받는 경우도 있겠지만, 안 좋아지면 어떻습니까. 텔레비전을 보면 아무리 큰 회사라 하더라도 상황이 어려워지면 명예퇴직이나 정리해고를 한다는 말을 듣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반면에 공무원은 어떻습니까. 세금이 많이 걷힌다고 보너스를 받나요? 아니면 특별 휴가? 그랬다가는 큰일 나죠. 그건 다 국민들이 내는 혈세입니다. 하지만 반면에 자금 사정이 어려진다 하더라도 명예퇴직이나 정리해고 같은 것은 없지요.

한국이나 일본에서 공무원의 인기가 나날이 오르는 이유 중 하나는, 아무리 큰 회사라 하더라도 일반 회사는 경기가 안 좋아지면 나와야 하는 반면, 공무원은 이와 같은 안정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로 하나님 나라의 공무원이라고 하는 마음 가짐을 갖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고 모두가 목사나 전도사가 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안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안정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잠시 에스더서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에스더 4장 14절입니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もし、あなたがこのようなときに沈黙を守るなら、別のところから助けと救いがユダヤ人のために起こるだろう。しかし、あなたも、あなたの父の家も滅 びるだろう。あなたがこの王国に来たのは、もしかすると、このような時のためかもしれない。」


역적 하만이 유다인들을 다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모르드개가 왕비 에스더에게 말하지요. 네가 지금 아무 일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다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너와 너의 집 가문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는 말인데, 우리는 이 구절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안정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어떤 사람을 믿어서가 아닙니다. 어떤 재산이나 세상적인 어떤 기득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어쩌면 그런 것들은 언제든지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들이지요.

하지만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믿음, 그와 같은 흔들리지 않는 안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쓰셔서 주님의 일을 하실 수 있고,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큰 축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작은 배는 물이 조금만 출렁여도 흔들리고 뒤집힙니다만, 큰 배는 바람이 불어와도 파도가 몰아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작은 믿음은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 오더라도 믿음이 흔들리고 하나님을 원망하지만 큰 믿음은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와도 주님을 믿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 힘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해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의 작은 믿음을 보시고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 것처럼 우리를 꾸짖으시면 어쩌시겠습니까.

아니,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신 것처럼 전신마취라도 하시면 어쩌겠습니까. 이는 정말 큰일 납니다. 그러기 전에 우리는 정신을 바싹 차려야 하겠습니다. 気を強く持たなければなりません

우리 모두 큰 믿음, 안정적인 믿음, 강한 믿음을 갖고 주님께 감사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릴 때에 주님의 놀라운 축복, 큰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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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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