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3회 회개와 천국
2024년 2월 25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1절~3절
“1.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2.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3.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マタイの福音書 3章 1節~3節
“1.そのころバプテスマのヨハネが現れ、ユダヤの荒野で教えを宣べ伝えて、
2.「悔い改めなさい。天の御国が近づいたから」と言った。
3.この人は、預言者イザヤによって「荒野で叫ぶ者の声がする。『主の道を用意せよ。主の通られる道をまっすぐにせよ』」と言われた人である。”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8번째 시간으로서 “회개와 천국” 悔い改めと天の御国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복음을 선포함에 있어서 그 첫마디가 회개와 천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하고 보면 이 두 단어의 조합은 적지 않게 특이합니다.

만약에 “회개하라 심판날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한다거나 “기뻐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한다면 좀 이해가 될 것도 같아요.

심판날이 다가왔으니 어서 빨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기뻐하라, 이렇게 본다면 좀 더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세례 요한은 굳이 <회개>아 <천국>이라는 두 단어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잘못된 단어선택을 한 것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성경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후 공생애를 시작하십니다. 그 때 예수님의 외침이 무엇이었습니까.


마태복음 4장 17절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この時からイエスは宣教を開始し、「悔い改めなさい。天の御国が近づいたから」と言われた。

이 말씀을 보세요. 이는 세례 요한이 외치던 것과 똑같은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를 보더라도 <회개>와 <천국>이라고 하는 조합은 잘못된 것이 아닌, 오히려 반드시 필요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외쳤던 <회개>와 <천국>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요. 이는 어렵지 않습니다. <회개>와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에 있어서 인과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과관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인 것이지요. A라고 하는 원인이 있었고 B라고 하는 결과가 있었어요.

만약에 A라고 하는 원인과 B라고 하는 결과가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A와 B는 인과관계가 없는 것이 되지만, A라고 하는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 B라고 하는 결과가 발생했고, 만약 A라고 하는 원인이 없었다면 B라고 하는 결과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을 때 A와 B는 인과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회개>와 <천국>이라고 하는 것이 서로 인과관계에 있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회개>가 있어야지만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고, <회개>가 없다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천국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 목적에서 흔들리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내일이라도 동네 대학 입시학원 앞에 가서 거기 오는 학생들한테 물어보세요. 너는 왜 이 입시학원에 오냐고 물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저희 집 근처에도 그 주변에서는 그래도 꽤 규모가 있는 편에 속하는 입시학원이 하나 있는데, 입시철인 경우 수업이 끝나는 시간대 쯤이면 그 주변 일대에 차들이 줄을 섭니다. 모두 아이들을 데리러 온 부모님의 차들이지요.

큰 도시 같은 경우는 대중교통수단이 많기 때문에 그런 일은 별로 없겠지만, 여기 군마는 자동차 사회이다 보니 멀리서도 부모님들이 다 데리러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학생 본인만이 아니라 부모님들까지도 고생하면서 대입학원에 다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공부가 좋아서 취미로 다니는 거라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집에 있으면 심심해서 친구들 만나기 위해서 다니는 거라고 하겠습니까.

대입학원에 다니는 학생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것 아니겠습니까. 입시학원에 다닌다면 그 목적이 흔들려서는 절대로 안 돼요. 자기가 들어가고자 하는 학교를 정했으면 거기를 향해서 매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믿음생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왜 나옵니까. 예배를 왜 드립니까. 성경을 왜 읽습니까. 믿음이 취미 생활이신가요? 일요일에 심심해서, 집에 혼자 있으면 뭔가 허전해서 나들이 삼아 교회에 나오고 예배도 드립니까.

생각해보십시오.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사도행전 20장 28절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あなたがたは自分自身と群れの全体に気を配りなさい。神がご自分の血をもって買い取られた神の教会を牧させるために、聖霊はあなたがたを群れの監督にお立てになったのです。

교회는 친목모임이 아닙니다. 동네 경로당이 아닙니다. 교회는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교회를 사신 것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말미암아 그 대가로 세워진 것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취미활동이나 친목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해결하고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목숨을 걸었어요. 아니, 실제로 목숨까지 내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뒤에서 심심풀이로 믿음을 생각하게 된다면 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입니까.

고린도전서 9장 24절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競技場で走る人たちはみな走っても、賞を受けるのは一人だけだということを、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ですから、あなたがたも賞を得られるように走りなさい。

우리도 주님께서 예비하신 상을 받을 수 있도록, 있는 힘을 다해서 믿음의 달음질을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받는 상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천국입니다. 대입학원에 다니는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노력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천국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달려가야 하는 것이지요.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 것처럼, 열심히 믿음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대학이야 다음 번에도 기회가 있을 수 있고, 그리고 요즘은 꼭 대학이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선택지가 많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믿음에 있어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천국에 가야만 해요.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야지만 되는 것이지, 그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인데, 천국이라고 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원인이 있어야 한다고 했었지요? 예,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인 것이지요.

<회개>와 <천국>이 서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 없이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사람들은 회개를 잘 안 하려고 하는 경향에 있습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에 회개는 어떤 사람이 해야 하는 것 같습니까. 그렇죠. 뭔가 잘못한 것이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 회개 아니겠습니까. 잘못한 것이 없다면 회개할 것이 없다고 하겠지요.

이와 같은 경향, 어디서 많이 보냐 하면 의외로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는 항상 옳아요. 다른 사람이 잘못했지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하는 특이한 믿음입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아직도 제가 기억이 남는 것이 있는데, 한국 어느 교회에서 담임목사님이 은퇴하면서 자기 아들에게 담임목사 자리를 물려주었어요. 사실 이와 같은 일은 그 이전에도 이미 다른 몇몇 교회에서 있어왔던 일이지요.


그런데 이를 가지고 주일날 그 교회 앞에서 마이크를 가지고 비판을 하고 그래요. 뭐, 그래요. 교회에는 다양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수는 있지요. 오히려 그런 사람들의 입을 막는다면 그것 또한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흥미로운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그 마이크를 들고 큰 소리로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 교회 교인이 아니라는 거예요. 다른 무슨 기독교 단체인지 하는 곳에서 나와서는, 자기가 다니는 교회도 아닌데도 남의 교회 앞에 와서 그렇게 마이크를 들고 큰 소리로 비판을 하고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주장을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만약에 그분들의 말이 100% 맞다고 가정을 해보죠. 사실관계부터 모든 주장이 다 합당하다고 가정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만약에 그 사람들이 비판하고 있는 그 교회에서 담임목사 위임이나 기타 여러 사항에 대해서 결정을 하는 데에 있어서 무슨 불법행위가 있었다고 한다면 어떨까요. 회의실에 흉기를 들고 들어가서 협박을 했다거나, 사람들 입을 틀어막고 손발을 묶어 놓거나 아니면 문을 잠거 놓고 부당하게 안건을 땅땅땅 하고 통과시켰다고 해봐요.

만약에 그럴 경우라면 이는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이와 같은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고 한다면 비난 정도가 아니라 형사고발까지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 교회에서 거기 규정대로 진행되어서 모든 것이 합법적으로 결정된 내용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비난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도 그 교회 성도도 아니고 외부인이 말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교회 앞에서 그렇게 비난하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 교회 사람들은 다 틀렸고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제가 설교를 동영상으로 촬영을 해서 인터넷에 올리고 하면 격려도 해주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간혹 메일이나 댓글을 통해서 지적을 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그와 같은 지적이나 비판이 좀 성경적이고 그러면 제게도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대부분 좀 다소 벗어난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20대 때 저라면 끝까지 논쟁을 벌일 수도 있겠지요.


그 때는 정말 특별히 시사적인 부분에 대해서 인터넷으로 논쟁을 많이 했었습니다.

하나하나 조목조목 근거를 제시해가면서 철저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반박하고 그랬었지요.

그와 같은 기억 때문에서 그런지 지금도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써 놓은 글을 보거나, 아니면 저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보면 그 글들의 허점이 보여요.

뿐만 아니라 이 사람에게 어떤 부분을 어떤 식으로 공격을 하면 가장 큰 상처를 입힐 수 있을까 하는 점까지도 대충 짐작이 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요즘도 그런 논쟁을 벌이느냐 하면, 아니요. 안 합니다.

얼마 전에도 인터넷에 어떤 분으로부터 그런 일이 있었는데, 누군가가 제게 어떠한 비판이나 부정적인 지적을 하면 제 답변은 하나입니다.

“귀하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이는 형식적인 말이 아니라 저의 본심입니다. 제가 항상 옳다고 감히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면 대부분 거기서 논의는 끝이 나요.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2절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あなたがたは、自分がさばく、そのさばきでさばかれ、自分が量るその秤で量り与えられるのです。

예수님께서는 비판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물며 교회에서까지 상대방에 대한 비판이 넘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기록합니까.

로마서 3장 10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義人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

그렇습니다. 의인은 없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의인의 반대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인이잖아요.


의인이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죄인이 아닌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죄인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피 없이 구원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남들은 틀렸고 자기 자신 만이 옳다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비난할 수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회개를 하지 않는 사람들의 두번째 이유는 좀 특별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것은 바로 회개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의 말을 한 번 들어볼까요? 여러분께서는 이 주장에 대해서 이상한 점이 있는지 없는지 자세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사해 주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7장 27절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イエスは、ほかの大祭司たちのように、まず自分の罪のために、次に民の罪のために、毎日いけにえを献げる必要はありません。イエスは自分自身を献げ、ただ一度でそのことを成し遂げられたからです。

과거에는 제사장들이 제물을 드리면서 속죄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구원 받은 의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단번에 완전한 제사를 드려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반복해서 회개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자, 이 주장에 대해서 이상한 곳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런 주장을 어떤 사람들이 하냐 하면 예전에 세월호 사건 때 많이 나왔던 이른바 구원파 사람들이 이런 주장을 해요.

자기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구원파에서는 자기들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하는데, 왜요. 저도 직접 그 사람들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와 같은 주장을 실제로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어떤 무슨 설교 영상 같은 것을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구원의 확신이 확 든다는 것이에요.

그건 뭐냐 하면 그게 바로 그 순간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증거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사람들은 자신이 몇 날 몇 일 언제 구원받았다는 것을 아주 외우고 다닌다고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정말 성경적이냐 하는 것이지요.

우리 오랜만에 그 질문을 한 번 해보도록 할까요. 지난 로마서 강해 때 몇 번이고 했던 질문입니다.

자,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라고 했지요?

예, 이는 바로 구원 받을 자격,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다는 뜻이지요.


로마서 5장 9절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ですから、今、キリストの血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私たちが、この方によって神の怒りから救われるのは、なおいっそう確かなことです。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지만,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즉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자격,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졌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그럼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천국인가요?

아니에요. 이는 말하자면 대학입시나 회사 입사시험에서 합격은 했지만 아직 들어가지는 않은 상황이에요.

합격을 해도 아직 안 들어갔다면 그 학교 학생이 아니고, 그 회사 직원도 아니에요. 마찬가지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은 있지만 아직 천국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아직은 천국백성이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안 지으려고 해도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이는 제 주장이 아니라 성경에도 기록합니다.

로마서 7장 22절~25절
“22.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私は、内なる人としては、神の律法を喜んでいますが、
私のからだには異なる律法があって、それが私の心の律法に対して戦いを挑み、私を、からだにある罪の律法のうちにとりこにしていることが分かるのです。
私は本当にみじめな人間です。だれがこの死のからだから、私を救い出してくれるのでしょうか。
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を通して、神に感謝します。こうして、この私は、心では神の律法に仕え、肉では罪の律法に仕えているのです。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고 해도 내 몸속에 있는 죄가 자신을 사로잡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믿음이 부족해요? 아니면 예수님이 아직도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셨나요?

아니요. 예수님은 벌써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시고는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어요. 그리고 바울은 지금 회심해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바울의 믿음을 따라갈 만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그와 같은 바울도 자기 안에 있는 죄로 말미암아 괴로워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땅에 사는 한 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옳은 일인지 무엇이 잘못된 일인지를 알고 있으면서도 죄를 짓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와 같은 경우에는 어서 빨리 회개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28장 13절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自分の背きを隠す者は成功しない。告白して捨てる者はあわれみを受ける。

시편 32편 5절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私は自分の罪をあなたに知らせ 自分の咎を隠しませんでした。 私は言いました。 「私の背きを主に告白しよう」と。 すると あなたは私の罪のとがめを 赦してくださいました。

세상 죄는 자복 그러니까 스스로 털어놓는다고 해서 어느 정도 가벼워질 수는 있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죄는 우리가 주님 앞에 죄를 내려놓게 되면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죄만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 보면 <강하도 담대하라 (強くあれ。雄々しくあれ。)>는 말을 아무데나 갖다 붙이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죄를 지어도, 이웃에 대해서 나쁜 짓을 했을 때에도, 성경에 봐라,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잖아.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라는 분이 계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걱정하지 말라고요? 이런 분들이야말로 오히려 정말로 걱정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죄를 지었어요. 나쁜 짓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강하고 담대하라고 성경에 기록하나요?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23절~26절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ですから、祭壇の上にささげ物を献げようとしているときに、兄弟が自分を恨んでいることを思い出したなら、
ささげ物はそこに、祭壇の前に置き、行って、まずあなたの兄弟と仲直りをしなさい。それから戻って、そのささげ物を献げなさい。
あなたを訴える人とは、一緒に行く途中で早く和解しなさい。そうでないと、訴える人はあなたを裁判官に引き渡し、裁判官は下役(したやく)に引き渡し、あなたは牢に投げ込まれることになります。
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最後の一コドラントを支払うまで、そこから決して出ることはできません。


내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려고 해요. 그런데 내가 내 이웃에게 죄를 지은 것이 생각났어요. 그럴 때에는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괜찮대요? 강하고 담대하래요?

아니에요. 예배를 드리다가 말고라도 좋으니까 빨리 가서 그 이웃과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세상적인 일로 나를 고발하는 사람과 재판을 하려고 해요. 그런데 걱정 마, 재판은 이길 거야. 그러면서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십니까.

아닙니다. 법원에 도착하기 전에 빨리 화해하라고 말씀을 하세요. 잘못하다가 지게 되면 다 빼앗길 수도 있을 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하라고 말씀하고 계시잖아요.

세상에는 죄를 지으면서도 강하고 담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불륜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면 어떻습니까. 정말 강하고 담대하지요. 괜찮아, 괜찮아. 그까짓 것 무서워해서 어떡해.

그러면서 아마도 자신들은 그와 같은 죄가 세상에 알려지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어떻게 적혀 있습니까.


누가복음 12장 3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が暗闇で言ったことが、みな明るみで聞かれ、奥の部屋で耳にささやいたことが、屋上で言い広められるのです。

이게 과장된 말씀인가요? 아니에요. 어두운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자기들끼리만 나누었던 은밀한 대화가 무슨 신문이나 주간지에 나와서 전국 아니, 인터넷으로 전세계 사람들이 알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작년 그러니까 2023년 10월에 일본 요코하마에서 일어났던 사건인데, 깊은 밤에 어떤 남성이 피곤에 지쳐서 길가 옆에 앉은 채로 잠이 들고 말았어요. 그런데 그 때 이 남성이 들고 있던 스마트폰이 도난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그 모습을 멀리서 촬영했던 CCTV가 있긴 한데 그것만 가지고는 얼굴도 파악할 수도 없고 무엇보다 그 범인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알 길이 없잖아요.


그런데 불과 얼마 뒤, 경찰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게 뭐냐 하면 도난 당한 스마트폰을 찾았다는 것이에요.

뿐만 아니라 절도그룹 세 명을 모두 체포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경찰이 이 도난당한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까지 하더래요.

아니, 자기는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 때 이 도난 당한 스마트폰이 인터넷에 생중계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도난 당한 사람은 말하자면 유튜버인데 그 때 인터넷 생중계를 하다가 지쳐서 그만 길가에서 잠이 들고 말았었는데, 스마트폰은 여전히 작동중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범인은 그것도 모르고 그 폰을 훔치고는 자신들의 아지트까지 계속 들고 다녔어요.

그러다 보니까 그 절도그룹 일당들 얼굴도 화면에 대문짝 만하게 다 나오고, 대화내용까지 들려요.

뿐만 아니라 그들이 차를 타고 이동을 하는데 그 대화내용을 들으니까 어디에 숨어 있는지도 추적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그런 상태로 무려 1시간 반 동안 그 폰이 켜진 채로 모든 것을 촬영했다고 하는데, 이게 인터넷으로 생중계가 되고 있었다고 하니까 그걸 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 아니에요.

그럼 몇 명이 그 장면을 보고 있었냐 하면 약 80명이나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절도범들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자신들의 얼굴이나 목소리를 수 십 명이 그것도 생중계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그저 강하고 담대하게 범죄를 저질렀던 것이지요.

여러분,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은 그렇게 나쁜 짓을 저지르거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때 쓰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의 일을 감당할 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서 제 경우를 본다면, 전도를 나갈 때나 인터넷으로 전도 메일을 보낼 때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솔직히 밖에 나가서 전도지를 돌리게 되면 기쁜 마음도 있지만, 때로는 누가 또 안 좋은 소리라도 할까 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메일을 보낼 때는 더 하지요. 또 무슨 싫은 소리, 험한 소리라도 듣게 될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고, 주님께서 주신 지혜대로 내가 감당하도록 하셨다고 한다면, 강하고 담대해야지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주님께서 지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감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있으면 그럴 때에는 더 늦기 전에 회개해야 하고 그리고 이웃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어서 사과하고 화목해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8절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自分に関することについては、できる限り、すべての人と平和を保ちなさい。

비판하고 비난하고 상처 주는 데에 담대해 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못을 발견하면 회개하고 사과하고 화목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천국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회개가 먼저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見よ、わたしはすぐに来る。それぞれの行いに応じて報いるために、わたしは報いを携えて来る。



주님은 곧 오신다고 말씀하세요. 속히 오신다고 하세요. 그리고 행한 대로 갚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제 더 늦기 전에 비판과 비난에 앞장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에게 회개와 화목의 본을 보이는 삶을 통해서, 장차 주님께서 예비하신 놀라운 상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主はすぐに来られるとおっしゃいます。そしてそれぞれの行いに応じて報いるとおっしゃっているのであります。

これからは手遅れになる前に、批判や非難に先走るのではなく、神様と隣人に対して悔い改めと和解の見本となる人生を通して、将来、主が備えられた驚くべき賞をすべて受けられる皆さまであらんことを主の御名においてお祈りいたします。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32회 세례 요한 입문
2024년 2월 18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9절~21절
“19.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20.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21.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ヨハネの福音書 1章 19節~21節
“19.さて、ヨハネの証しはこうである。ユダヤ人たちが、祭司たちとレビ人たちをエルサレムから遣わして、「あなたはどなたですか」と尋ねたとき、
20.ヨハネはためらうことなく告白し、「私はキリストではありません」と明言した。
21.彼らはヨハネに尋ねた。「それでは、何者なのですか。あなたはエリヤですか。」ヨハネは「違います」と言った。「では、あの預言者ですか。」ヨハネは「違います」と答えた。”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7번째 시간으로서 “세례 요한 입문” 洗礼者ヨハネ入門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부터 몇 회에 걸쳐 세례 요한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려고 하는데, 오늘은 우선 세례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부터 알아볼까 합니다.

세례 요한의 잉태에 대한 내용은 누가복음 1장에 등장합니다.

당시 제사장 중에 사가랴(ザカリ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나이가 많았지만 아이가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1장 13절에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제사장 사가랴에게 나타나서 그의 아내 엘리사벳(エリサベツ)이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면서 이름까지 지어줍니다.

그의 아내 엘리사벳도 역시 나이가 많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브리엘이 알려준 것처럼 정말로 아이를 갖게 되었어요.


누가복음 1장 26절 이후에 의하면 엘리사벳이 잉태된 후 5개월이 지나고는 6개월 째가 되는 달에 역시 천사 가브리엘이 요셉이라는 목수와 약혼한 마리아를 찾아가서 하나님의 아들 즉 예수님을 잉태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와 같은 기록에 의하면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이 땅에 오신 순서로만 본다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보다 대략 5개월 정도 먼저 태어났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은 세례 요한에 대해서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우선 마태복음 3장 3절을 보실까요.

마태복음 3장 3절
“3.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この人は、預言者イザヤによって「荒野で叫ぶ者の声がする。『主の道を用意せよ。主の通られる道をまっすぐにせよ』」と言われた人である。

이는 이사야서 기록을 인용한 것인데, 이는 다음 말씀입니다.


이사야 40장 3절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荒野で叫ぶ者の声がする。「主の道を用意せよ。荒れ地で私たちの神のために、大路(おおじ)をまっすぐにせよ。

이 점에 대해서는 세례 요한 스스로도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23절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ヨハネは言った。「私は、預言者イザヤが言った、『主の道をまっすぐにせよ、と荒野で叫ぶ者の声』です。」

이와 같이 성경에 의하면 세례 요한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미리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 글을 보기만 하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겠습니다만, 알고 보면 이는 엄청난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어떤 인물이 태어나기 전에 이 세례 요한의 경우처럼 미리 이름을 정해준 경우가 있을까요. 예,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경우이겠지만, 이 외에도 창세기 16장 11절에서는 이스마엘의 이름을 지어 주셨고, 창세기 17장 19절에서는 이삭, 역대상 22장 9절에서는 솔로몬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시는 등 사실 출생하기 전에 이름을 붙여주는 경우는, 물론 그리 많지는 않지만 종종 있었던 일이긴 합니다.

그렇다면 출생에 있어서 다른 책에 예언되는 경우는 어떨까요. 태어나기 1년이나 그 정도 전에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식이 아니라, 아예 다른 책에 출생이 예언되는 경우는 누가 있었을 것 같습니까.

사실 알고 보면 그와 같은 인물은 예수님과 바로 이 세례 요한 밖에 없었다는 점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엘리야나 이사야 같은 선지자라 하더라도, 그리고 신약에 있어서는 베드로나 바울과 같은 위대한 사도라 하더라도 성경은 다른 책에서 그 출생을 예언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외에 이처럼 다른 책에서 그 출생이 미리 예언된 인물이 있었는데, 그 인물이 바로 세례 요한이었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성경 전체에서 차지하는 이 세례 요한의 비중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있어서 오해를 하시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 강에서 세례를 주면서 회개와 천국을 선포합니다. 그러자 많은 백성들이 그에게로 모여오는데 여기서 긴장했던 이들이 있겠지요. 그것은 바로 당시 종교적인 지도자들, 그러니까 기득권자들이었지요. 그래서 그들은 도대체 세례 요한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이 그것을 알고 싶어했겠습니까. 무슨 좋은 의도가 있었을까요? 아니요.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에서 였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9절~21절
“19.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20.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21.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ヨハネの福音書 1章 19節~21節
“19.さて、ヨハネの証しはこうである。ユダヤ人たちが、祭司たちとレビ人たちをエルサレムから遣わして、「あなたはどなたですか」と尋ねたとき、
20.ヨハネはためらうことなく告白し、「私はキリストではありません」と明言した。
21.彼らはヨハネに尋ねた。「それでは、何者なのですか。あなたはエリヤですか。」ヨハネは「違います」と言った。「では、あの預言者ですか。」ヨハネは「違います」と答えた。”


그들은 세례 요한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합니다. 너는 누구냐, 너는 엘리야냐, 마지막으로 너는 선지자냐 하는 질문을 하지요.

이 질문에 대해서 세례 요한은 모두 부인을 합니다. 그런데 조금 생각해보면 의문이 들 수도 있는 부분이 있어요.

우선 너는 누구냐에 대한 질문인데, 그 질문의 의도를 요한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네가 장차 오실 그리스도 메시야냐 하는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앞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왔기 때문에, 자신은 그리스도 메시야가 아니라고 이를 부인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지요.

문제는 두 번째 질문과 세 번째 질문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장 21절 초반부
“21.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21.彼らはヨハネに尋ねた。「それでは、何者なのですか。あなたはエリヤですか。」ヨハネは「違います」と言った。


그들은 왜 이와 같은 질문을 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구약 마지막 장인 말라기에 다음과 같은 예언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4장 5절~6절
“5.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見よ。わたしは、主の大いなる恐るべき日が来る前に、預言者エリヤをあなたがたに遣わす。
彼は、父の心を子に向けさせ、子の心をその父に向けさせる。それは、わたしが来て、この地を聖絶の物として打ち滅ぼす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ある。」

구약의 마지막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두려운 날, 즉 하나님의 날이 이르기 전에 엘리야를 우리에게 먼저 보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점에 대해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7장 10절~13절
“10.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すると、弟子たちはイエスに尋ねた。「そうすると、まずエリヤが来るはずだと律法学者たちが言っているのは、どういうことなのですか。」
イエスは答えられた。「エリヤが来て、すべてを立て直します。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エリヤはすでに来たのです。ところが人々はエリヤを認めず、彼に対して好き勝手なことをしました。同じように人の子も、人々から苦しみを受けることになります。」
そのとき弟子たちは、イエスが自分たちに言われたのは、バプテスマのヨハネのことだと気づいた。


구약에 있어서도 장차 메시야 구세주가 오신다는 말씀, 그리고 그 이전에 엘리야가 먼저 온다는 성경 말씀은, 서기관 정도 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가 다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여담입니다만, 성경 기록에 의하면 당시 세례 요한의 차림새는 엘리야와 비슷한 점이 있었습니다.

열왕기하 1장 8절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彼らが「毛衣を着て、腰に革の帯を締めた人でした」と答えると、アハズヤは「それはティシュベ人エリヤだ」と言った。

마가복음 1장 6절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ヨハネはらくだの毛の衣を着て、腰に革の帯を締め、いなごと野蜜を食べていた。

엘리야는 몸에 털이 많다고는 하는데,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성경 번역본에 따라서 몸에 털이 많았다는 것인지, 머리 숱이 많은 것인지, 아니면 털이 많이 달린 옷을 입었다는 것이지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한편 세례 요한에 대해서 보자면, 메뚜기와 석정을 먹었다고 하는데, 여기서의 석청은 말하자면 야생 꿀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은 허리에 가죽 띠를 띤 옷차림을 하고 있었고, 메뚜기와 야생 꿀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과연 어떤 외모였는지, 정확히 무엇을 먹었었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천국 가서 직접 물어봐야 알 수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허리에 가죽 띠를 띤 차림으로 기록된 인물은 신구약을 통 틀어서 구약에서는 엘리야 뿐이고 신약에서는 세례 요한 뿐입니다.


어찌 되었든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미리 보내 주시겠다고 하신 말라기의 예언 대로 이 땅에 오신 인물이 바로 세례 요한이라고 하는 점을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은 이 점에 대해서 부인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례 요한은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아직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종교에 의하면 죽은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하는, 이른바 환생이라고 하는 개념이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가 있지요.

사람이 죽고 얼마가 지나면 그 영혼이 다른 사람이나 동물한테 들어가서 다시 태어나게 된다고 하기도 한다는데 성경에는 그와 같은 말씀이 없어요.

그리고 또한 죽은 사람의 영혼이 꿈에 나온다거나 아니면 그 죽은 곳에 계속 붙어 있다거나 하기도 합니다만, 역시 그와 같은 주장들도 모두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아니, 생각해보세요. 사람이 죽으면 그 장소에 영혼이 계속 있게 된다? 그렇다면 동서를 불문하고 지금도 사람들이 제일 많이 죽어 나가는 장소는 어디입니까.

바로 병원이잖아요. 그럼 대형병원은 귀신들의 소굴입니까. 귀신들이 아주 우글우글 하겠네요? 그럼 그거 무서워서 어떻게 갑니까.

성경에 의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면 좀 이상한 말일지는 모르지만, 꿈에 나온다거나 환상으로 으흐흐흐 하면서 나올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그리고 그 심판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15절
“12.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また私は、死んだ人々が大きい者も小さい者も御座の前に立っているのを見た。数々の書物が開かれた。書物がもう一つ開かれたが、それはいのちの書であった。死んだ者たちは、これらの書物に書かれていることにしたがい、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海はその中にいる死者を出した。死とよみも、その中にいる死者を出した。彼らはそれぞれ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それから、死とよみは火の池に投げ込まれた。これが、すなわち火の池が、第二の死である。
いのちの書に記されていない者はみな、火の池に投げ込まれた。


생각해보세요. 이제부터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언제 구천을 떠돌고 언제 꿈에 나타날 새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돌아가신 분이 꿈에 나타나는 경우는 무엇이냐고 할 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는 어쩌면 자신의 기억이나 희망사항이 꿈으로 보일 수도 있거나, 아니면 다른 요인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최소한 그 돌아가신 사람의 진짜 영이 직접 내 꿈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의하면 죽은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경우를 본다면 이는 이른바 변화산 사건 때 예수님과 함께 했던 모세와 엘리야 뿐입니다.

마태복음 17장 3절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そして、見よ、モーセとエリヤが彼らの前に現れて、イエスと語り合っていた。

마가복음 9장 4절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また、エリヤがモーセとともに彼らの前に現れ、イエスと語り合っていた。


누가복음 9장 30절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そして、見よ、二人の人がイエスと語り合っていた。それはモーセとエリヤで、

이 장면을 목격한 것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인데, 그리고 이 말씀으로 보아 알듯이 모세와 엘리야는 그들에게 말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말을 나누고 있다고 기록하지 않습니까.

또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구약에 등장하는 사무엘을 떠올리시는 분이 계실까봐 잠시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사무엘상 28장 5절~6절
“5.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의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6.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サウルはペリシテ人の陣営を見て恐れ、その心は激しく震えた。
サウルは主に伺ったが、主は、夢によっても、ウリムによっても、預言者によってもお答えにならなかった。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왕으로 세움을 받았지만, 그는 하나님을 높이는 대신 자기 스스로를 높이기에 바빴습니다. 사울의 거듭되는 불순종으로 인해서 결국 하나님은 그를 버리시게 되지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한 그는 이제 두려움에 시달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시고 그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사무엘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어요.

그래서 그는 무당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그래서 죽은 사무엘을 불러내서는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어보겠다는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니까 죽은 사무엘을 불러내서 물어보려고 한다는데, 이게 얼마나 참 말이 안 되는 생각입니까.

하지만 이제 그에게는 이성적인 판단을 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는 신접한 무당(霊媒師)을 찾아가서 이미 세상을 떠난 사무엘의 영혼을 불러내라고 합니다.


사무엘상 28장 13절~19절
“13.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하니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하는지라
14.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의 모양이 어떠하냐 하니 그가 이르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하더라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의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15.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 하니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다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하지 아니하시기로 내가 행할 일을 알아보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하더라
16.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17.여호와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네게 행하사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18.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19.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라 하는지라”

王は彼女に言った。「恐れることはない。何を見たのか。」女はサウルに言った。「神々しい方が地から上って来るのを見ました。」
サウルは彼女に尋ねた。「どのような姿をしておられるか。」彼女は言った。「年老いた方が上って来られます。外套を着ておられます。」サウルは、その人がサムエルであることが分かって、地にひれ伏し、拝した。
サムエルはサウルに言った。「なぜ、私を呼び出して、私を煩わすのか。」サウルは言った。「私は困りきっています。ペリシテ人が私を攻めて来るのに、神は私から去っておられます。預言者によっても、夢によっても、もう私に答えてくださらないのです。それで、私がどうすればよいか教えていただくために、あなたをお呼びしました。」
サムエルは言った。「なぜ、私に尋ねるのか。主はあなたから去り、あなたの敵になられたのに。
主は、私を通して告げられたとおりのことをなさったのだ。主は、あなたの手から王位をはぎ取って、あなたの友ダビデに与えられた。
あなたが主の御声に聞き従わず、主の燃える御怒りをもってアマレクを罰しなかったからだ。それゆえ、主は今日(きょう)、このことをあなたにされたのだ。
主は、あなたと一緒にイスラエルをペリシテ人の手に渡される。明日、あなたもあなたの息子たちも、私と一緒になるだろう。主は、イスラエルの陣営をペリシテ人の手に渡されるのだ。」

이 기록을 보면 마치 사울 왕이 사무엘을 대면하고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가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사울 왕 앞에 있는 사람은 무당이고, 무당이 말하기를 한 노인의 영이 올라온다고 하잖아요. 그렇다면 그 노인이 어떻게 생겼냐 하면 얼굴 생김새에 대한 정보는 없어요. 그저 겉옷을 입은 한 노인이 보인다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무엇이 보이냐 하면 자기가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이고 자기가 듣고 싶어 하는 것만 들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사무엘을 만나고 싶어 하는데 무슨 겉옷을 입은 노인네가 보여요. 아니, 그것도 사울이 직접 본 게 아닙니다. 그저 무당이 보인다고 주장을 하고 있고, 사울은 눈앞에 있는 무당만 보고 있는 상황인 것이지요.

그리고 그 노인의 어디서 나타났대요? 예, 13절에 의하면 “땅에서 올라왔다(地から上って来る)”고 하잖아요.

백 보, 천 보를 양보해서 사무엘의 영이 나타났다고 하지요. 그러면 사무엘이 지옥에 있습니까. 아니요.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성전에 살면서 평생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충실하게 살아온 그의 영이 나타났다 하더라도, 그 영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면 또 모를까 어떻게 땅에서 올라올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무당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금하신 것인데, 하나님 나라에 있는 사무엘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무당이 부른다고 나타날 리가 있겠습니까.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사무엘상 28장 19절
“19.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라 하는지라”

主は、あなたと一緒にイスラエルをペリシテ人の手に渡される。明日、あなたもあなたの息子たちも、私と一緒になるだろう。主は、イスラエルの陣営をペリシテ人の手に渡されるのだ。」

이 말은 하나님께서 내일 너와 네 아들, 그러니까 사울 왕과 그의 아들들이 블레셋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사울 왕과 사무엘이 내일 함께 있게 된다고 하잖아요. 이것도 말이 안 됩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평생을 하나님께 순종한 사무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사울과 함께 있을 수는 있겠습니까. 만약 이 노인의 영이 말한 주장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사울은 죽은 후에 심판을 받아 지옥에 떨어질 것이 분명한데 그 곳에 함께 있겠다고 한다면 이 노인의 영은 틀림없이 마귀 사탄이라는 뜻이 된다는 것이지요.

귀신이 이 땅에 존재하나요? 예,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 악한 영으로서 등장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은 눈으로 보이는 생김새가 어떤 생김새로 나타나든지 간에 그것은 바로 악한 영이 나타나는 것이지, 죽은 사람의 영이 직접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사람이 죽은 다음에 그 영혼이 다른 사람에게 들어가서 다시 태어난다거나 하는 것도 성경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만약에 세례 요한이 그들의 질문에 대해서 내가 엘리야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지극히 성경적이지 않은 환생을 인정한 것이 되기 때문에 요한은 이에 대해 분명히 아니라고 부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또한 예수님 말씀 대로 틀림없이 엘리야로서 이 땅에 왔습니다.

사가랴에게 세례 요한에 대해서 말씀을 전할 때에 천사 가브리엘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누가복음 1장 17절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彼はエリヤの霊と力で、主に先立って歩みます。父たちの心を子どもたちに向けさせ、不従順な者たちを義人の思いに立ち返らせて、主のために、整えられた民を用意します。」

그러니까 그는 그 구약 때의 엘리야의 영혼이 다시 자기 몸에 들어와서 환생을 했거나 한 것이 아니라, 우상들이 판을 치고 있던 시기에 우상들과 싸워서 물리치고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던 엘리야와 같이, 세례 요한도 그와 같은 사명을 띠고 많은 백성들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며 주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은 세례 요한더러 세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요한복음 1장 21절 후반부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では、あの預言者ですか。」ヨハネは「違います」と答えた。”


그들은 세례 요한에게 당신이 선지자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이 질문에 대해서도 아니라고 답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11장 9절~11절
“9.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10.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そうでなければ、何を見に行ったのですか。預言者ですか。そうです。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預言者よりもすぐれた者を見に行ったのです。
この人こそ、『見よ、わたしはわたしの使いをあなたの前に遣わす。彼は、あなたの前にあなたの道を備える』と書かれているその人です。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女から生まれた者の中で、バプテスマのヨハネより偉大な者は現れませんでした。しかし、天の御国で一番小さい者でさえ、彼より偉大です。


이 말씀에서 주님은 세례 요한이 선지자, 아니, 다른 선지자들 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선지자이며, 예언의 말씀처럼 주님의 길을 준비하러 왔으며, 이 땅의 그 누구보다도 큰 인물이 바로 세례 요한이라고까지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은 의심할 여지 없는 선지자 중의 선지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은 왜 그들의 질문에 대해서 아니라고 부인을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들이 했던 질문을 자세히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21절 후반부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실까요.

요한복음 1장 21절 후반부
“21.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では、あの預言者ですか。」ヨハネは「違います」と答えた。”

만약에 그들이 묻기를 “네가 선지자냐”라고 했다면 요한은 어쩌면 그렇다 라고 대답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질문은 어떻습니까. 단순히 “네가 선지자냐”라고 한 것이 아니라 “네가 그 선지자냐”라고 했던 것이지요.


자, 구약에 보시면 장차 등장할 인물에 대한 예언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메시야, 그리스도이시요, 둘째가 엘리야가 다시 오겠다는 예언인데, 그 외에 나머지 하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이 어디 있냐 하면 신명기에 있는 말씀입니다.

신명기 18장 15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あなたの神、主はあなたのうちから、あなたの同胞の中から、私のような一人の預言者をあなたのために起こされる。あなたがたはその人に聞き従わなければならない。

이는 모세가 한 말입니다만, 그러니까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했던 질문은, 네가 장차 오실 메시야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야? 그럼 나머지 하나 남았네. 네가 그러면 신명기에 기록된, 하나님께서 장차 모세 다음으로 일으키시겠다는 바로 그 선지자야? 라고 물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 질문에도 세례 요한은 분명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이 신명기에 기록된 말씀 즉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일으키실 것이요 그 말을 들으라고 하신 그 인물은 다름 아닌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구약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따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그 때까지 억압받던 애굽에서 끌어내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 가나안으로 인도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그 때까지 죄악에 짓눌렸던 우리를 인도해 내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시고 장차 거룩한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로 인도해주실 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旧約においてモーセは神様の命に従って神様の民であるイスラエルを、それまで苦しめられていたエジプトから率いて、神様がお与えになったカナンの地へと導いたように、イエス様はそれまで罪によって苦しめられていた私たちを率いて神様の民としてくださり、来るべき時に聖なる天の御国へと導いてくださるということを信じ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します。




말하자면 네가 <그 선지자냐>라고 하는 질문은 마치 <네가 그리스도냐>라고 하는 질문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당시 그들은 이 둘이 별개인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세례 요한에게 이와 같은 질문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에 이어서 다음 주도 이 세례 요한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하는데, 우리는 분명 기억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도 역시 세례 요한과 똑 같은 시대라는 사실입니다.



세례 요한은 곧 이어 오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회개와 천국을 전파했다고 한다면, 우리도 역시 장차 다시 오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본다면 비록 세례 요한이 살고 있던 것은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이긴 합니다만, 당시 그 상황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와도 똑 같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세례 요한에 대해서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또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귀한 도구로 쓰임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これからこの洗礼者ヨハネをより深く理解していくことによって、主の道を備える尊い器として用いられる皆さまであらんことを主の御名においてお祈りします。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31회 떠나간 자와 보내심을 받은 자
2024년 2월 11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7장 11절~19절
“11.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ルカの福音書 17章 11節~19節
“11.さて、イエスはエルサレムに向かう途中、サマリアとガリラヤの境を通られた。
12.ある村に入ると、ツァラアトに冒された十人の人がイエスを出迎えた。彼らは遠く離れたところに立ち、
13.声を張り上げて、「イエス様、先生、私たちをあわれんでください」と言った。
14.イエスはこれを見て彼らに言われた。「行って、自分のからだを祭司に見せなさい。」すると彼らは行く途中できよめられた。
15.そのうちの一人は、自分が癒やされたことが分かると、大声で神をほめたたえながら引き返して来て、
16.イエスの足もとにひれ伏して感謝した。彼はサマリア人であった。
17.すると、イエスは言われた。「十人きよめられたのではなかったか。九人はどこにいるのか。
18.この他国人のほかに、神をあがめるために戻って来た者はいなかったのか。」
19.それからイエスはその人に言われた。「立ち上がって行きなさい。あなたの信仰があなたを救ったのです。」”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6번째 시간으로서 “떠나간 자와 보내심을 받은 자” 離れていった者と遣わされた者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먼저 오늘 본문 내용을 살펴보고 난 다음에 전체적인 주제를 공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1절부터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17장 11절
“11.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1.さて、イエスはエルサレムに向かう途中、サマリアとガリラヤの境を通られた。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지금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고 계셨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사마리아와 갈릴리는 인접해 있다고는 하나 질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지역입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갈릴리는 유대인이 살고 있었던 곳이지만 사마리아 지방은 유대인이 이방인 취급하는 지역이었거든요.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유대인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이요, 이방인은 도저히 구원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는 서로 말도 하지 않을 정도로 멸시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다음으로 12절~13절을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17장 12절~13절
“12.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2.ある村に入ると、ツァラアトに冒された十人の人がイエスを出迎えた。彼らは遠く離れたところに立ち、
13.声を張り上げて、「イエス様、先生、私たちをあわれんでください」と言った。

성경에 종종 등장하는 이 나병이라고 하는 질환인데, 과거에는 이를 한센병이라고 여겨왔습니다. 그래서 옛날 성경인 개역한글에 보면 <문둥병자>라고 되어 있어요.


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이 질환의 증상을 보면 우리가 아는 한센병이라고 딱 잘라서 말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특별히 레위기에 보시면 이 질환에 대해서 피부질환의 일종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만, 이 질환은 사람의 피부 뿐만이 아니라 옷에 퍼지기도 하고 그리고 레위기 14장 33절 이하에 의하면 집에까지 증상이 발생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와 같은 점으로 미루어 보아서 지금은 이 나병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한 한센병이 아니라 조금 더 넓은 의미로 악성 곰팡이의 일종이라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 질환의 특징으로서는 사람이 감염되면 첫째로 악성 피부염과도 같은 증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당시로 본다면 이는 대단히 완치되기가 어려운 질환이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둘째는 레위기 13장 46절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레위기 13장 46절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その患部が彼にある間、その人は汚れたままである。彼は汚れているので、ひとりで住む。宿営の外が彼の住まいとなる。

이 질환은 다른 사람에게 전염이 되는 질환이기 때문에 이 질환에 걸렸다는 판정을 받게 되면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진영 바깥에서 살아야만 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질환에 대해서는 그 원인이나 대처방법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당시에 이 질환에 대한 인식은 어떤 질병의 일종, 그러니까 약으로 치료하거나 하는 질병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결과로 얻게 되는 질환으로 여겨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보면 예수님은 마을에 들어가셨지만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마을에 들어가지 못한 채 그저 바깥에서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당장 그들에게 다가가서 고치신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7장 14절
“14.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4.イエスはこれを見て彼らに言われた。「行って、自分のからだを祭司に見せなさい。」すると彼らは行く途中できよめられた。

이 본문 말씀을 우리는 그냥 흘려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는 이 나병환자들의 놀라운 믿음을 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어요.

자, 주님께서는 나병환자 쪽으로 다가가지도 않으셨습니다. 손을 뻗지도 않으셨어요. 그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신 이유는 당시 나병환자가 나았을 경우에는 이를 판정하는 사람이 바로 제사장들이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순서로 보았을 때 어느 쪽이 먼저입니까. 내 나병이 낫는 것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제사장한테 내 몸을 보이는 게 먼저입니까.

당연히 낫는 것이 먼저이지요. 우선 내 몸이 다 나은 다음에 그 몸을 제사장한테 보여야 제사장이 그 나은 모습을 보고 완치판정을 내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시간상으로 본다면 아직 낫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볼 때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어땠겠습니까.

아니, 일단 나아야 제사장한테 보이든지 말든지 할 것이지, 아직 낫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제사장한테 보이라는 것이냐, 무슨 나병환자라고 놀리는 것이냐, 하고 화도 낼 만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이에 대해 큰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이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고 제사장한테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가복음 11장 23절~24절
“2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この山に向かい、『立ち上がって、海に入れ』と言い、心の中で疑わずに、自分の言ったとおりになると信じる者には、そのとおりになります。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が祈り求めるものは何でも、すでに得たと信じなさい。そうすれば、そのとおりになります。

이 나병환자들이 한 것이 바로 이것 아닙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후에도 여전히 몸은 여기저기가 헐어 있었고 바뀐 것이 하나도 없어 보여요. 하지만 그들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일어서서 제사장에게로 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누가복음 17장 14절 후반부
“14.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4. ……すると彼らは行く途中できよめられた。

그렇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했더니 정말로 나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야말로 믿음과 말씀과 행함의 본보기 아닙니까. 그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나음을 받을 수 있다고 그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이미 나았으니까 제사장한테 가서 보여라.


그들은 이 말씀을 받고 난 다음 의심하지 않고 이제는 행함으로 옮긴 것입니다.

여전히 자기는 나병환자예요. 전혀 바뀐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일어나 제사장에게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 제사장에게로 가는 길에 깨끗함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자, 이렇게 보면 이야기 흐름으로 보아서 어떻습니까. 나병환자들이 있었고 예수님이 지나가고 있어요. 나병환자들이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제사장에게 보이러 가라고 말씀하세요. 그 말씀에 의지해서 일어서서 가고 있는데 나음을 받았어요.

이렇게 본다면 이야기의 기승전결이 다 나왔어요. 그럼 여기서 끝나면 되잖아요. 그런데 신기하죠. 이 이야기는 11절부터 19절까지 아홉 구절인데 지금 네 번째 구절이에요. 그러니까 기승전결은 고사하고 아직 절반도 안 왔다는 것이지요.


그 다음 전개를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17장 15절~16절
“15.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5.そのうちの一人は、自分が癒やされたことが分かると、大声で神をほめたたえながら引き返して来て、
16.イエスの足もとにひれ伏して感謝した。彼はサマリア人であった。

나음을 받은 나병환자 중에서 한 사람, 이 사람은 놀랍게도 유대인이 아니라 오히려 유대인들로부터 차별을 받고 있었던 사마리아인이었는데, 자기가 나은 모습을 보고는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제사장에게로 가던 그 발걸음을 멈추고 예수님께로 돌아와서 발 아래 엎드리고 감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여기서 오해를 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다른 아홉 사람은 나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고맙다는 말을 안 했는데, 이 사마리아인은 고맙다는 말을 했다는 것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마리아인이 한 모습이 단순히 “아, 예수님, 정말 감사합니다”로 끝나고 있나요?

아니요. 이 사마리아인이 한 모습은 단순히 감사하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렸다고 기록하지 않습니까.

神をほめたたえ、イエスの足もとにひれ伏して感謝した。

이는 단순히 고맙다는 말 한 마디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영광을 예수님께도 돌리고 있다는 사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경배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습을 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7장 17절~19절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17.すると、イエスは言われた。「十人きよめられたのではなかったか。九人はどこにいるのか。
18.この他国人のほかに、神をあがめるために戻って来た者はいなかったのか。」
19.それからイエスはその人に言われた。「立ち上がって行きなさい。あなたの信仰があなたを救ったのです。」” 
여기서 일단 19절 말씀부터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저는 예전에 교회 예배 시간 때 목사님으로부터 19절 말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あなたの信仰があなたを救った)>는 말씀을 들어서, 다른 아홉 사람은 나병만 치유함을 받았는데, 이렇게 예수님께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인은 영혼까지 구원을 받은 것이다……라는 말씀을 몇 번이고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와 같은 말씀을 들어 보신 분들은 저 외에도 많으시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는 어떤 외국 주석서를 보니까 거기에도 그렇게 적혀 있더라고요.

물론 이야기 흐름을 감동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는 성경 해석에 있어서 다소 비약이 아닐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이라고 하는 말씀을 과연 <영혼의 구원>이라는 의미로 제한해서 사용하셨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6절 이후와 누가복음 18장 35절 이후에 보시면 앞을 볼 수 없는 사람, 마가복음 10장 46절에는 그의 이름이 <바디매오(バルティマイ)>라고 나와 있는데, 그는 역시 오늘 본문에서처럼 예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그 장면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가복음 10장 52절
“52.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そこでイエスは言われた。「さあ、行きなさい。あなたの信仰があなたを救いました。」すると、すぐに彼は見えるようになり、道を進むイエスについて行った。

누가복음 18장 42절~43절
“42.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見えるようになれ。あなたの信仰があなたを救いました。」
その人はただちに見えるようになり、神をあがめながらイエスについて行った。これを見て、民はみな神を賛美した。

바디매오(バルティマイ)는 주님의 능력으로 앞을 보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구원(救い)>이라는 말씀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만약에 이를 두고 영혼 구원에 대한 말씀이라고 이해를 하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하냐 하면, 바디매오는 영혼이 구원 받았기 때문에 앞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러면 앞을 보지 못한 채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있을 것 아니에요. 그런 사람은 뭐예요? 예, 다 구원받지 못했다는 뜻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장애가 있는 분이 있는데, 그 장애를 치료하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들은 구원받지 못했으니까 다 지옥에 떨어졌다는 것입니까.

더 나아가면 이야기가 어떻게 되냐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질병으로 돌아가시잖아요. 믿음이 있는 분들이었다면 살아 계실 때 그 병이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을 거예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셨어요. 그럼 그 분들은 나음을 받지 못했으니까 구원을 못 받은 것이 됩니까.


이제 이후에도 몇 번이고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성경 구약과 신약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으나, 비약은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는 농담이나 말장난이 아니에요. 사실 이와 같은 성경 해석의 비약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달리고, 때로는 상청 받고 고통 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 즉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은 영혼의 구원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앞서 설명 드렸던 그 나병환자들의 믿음, 아직 낫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일어서서 제사장에게로 향했던 그 믿음이 나병을 치료하게 하였다는 말씀인 것으로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셨나요?

자, 그 다음에 이제 드디어 오늘의 본론입니다.

여기서부터 좀 주목해서 보셨으면 합니다. 특별히 이 18절과 19절 말씀을 유심히 봐주시기 바랍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18절과 19절이야말로 오늘 본문에 있어서 핵심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발 앞에 엎드려서 경배하는 사마리아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냐, 다른 사람들도 나음을 받았는데 나한테 고맙고 말하는 사람이 왜 너 밖에 없느냐……하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뭐라고 하셨는지 18절~19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17장 18절~19절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18.この他国人のほかに、神をあがめるために戻って来た者はいなかったのか。」
19.それからイエスはその人に言われた。「立ち上がって行きなさい。あなたの信仰があなたを救ったのです。」”

자, 여러분, 우리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셨을 때 많은 사람들을 치료하셨습니다. 때로는 바디매오(バルティマイ)처럼 앞을 보게 하시고 때로는 오늘 나병환자처럼 병을 낫게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에서의 힌트는 바로 18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시면 주님께서 오늘 나병환자를 치료하신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7장 18절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8.この他国人のほかに、神をあがめるために戻って来た者はいなかったのか。」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나병을 치료하신 이유는 단순히 고맙다는 말 한 마디 듣고 싶어서가 아니에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오는 자를 찾고 계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에 흔히 있는 간증 한 번 말씀 드려볼까요.

경기가 안 좋아져서 다니던 직장도 짤렸습니다. 또는 하던 사업도 망했습니다. 이제 매달릴 곳이 주님밖에 없어요.

뭐, 어차피 직장도 짤렸겠다, 사업도 망했겠다 하니까 시간이야 많잖아요. 그러니까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겠다면서 부지런히 기도도 하고 교회에 나와서 예배도 드리고 성경도 읽고 봉사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어요? 예, 주님께서 길을 열어 주십니다. 새로운 직장을 주셨어요. 또는 주님께서 새로운 사업장을 주셨어요. 이전보다 훨씬 좋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했겠습니까. 할렐루야 하고 감사하면서 이제 직장생활을 열심히 합니다. 사업을 확장 시키기 위해서 불철주야 매진합니다.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 돼요? 예, 교회에 나올 새가 없어요. 기도할 시간도 없고 성경 볼 시간도 없습니다. 바빠 죽겠는데 일요일에 어떻게 교회에 나와요.

자,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이미 짐작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죠. 또다시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는 간증, 아마 교회에 오래 다녀보신 분들은 이런 간증을 한 두 번은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이 시점에서 여러분께서 좀 상상력을 발휘해 보시기를 원합니다.

이 마지막 18절~19절 말씀을 하시고 계신 예수님의 표정, 어떨 것 같습니까.

마치 아흔 아홉마리 양을 버려 두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았을 때처럼 기뻐하는 표정일 것 같습니까.


저는 오히려 대단히 서운한 주님의 표정을 떠올립니다. 그 이유는 바로 열 명 중의 열 명, 적어도 일곱 여덟 명은 돌아올 줄 알았는데, 어떻게 하나, 그것도 이방인이 하나 돌아왔을 뿐일까 하는 마음이 있으시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제 단순한 추측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이 나병환자들의 믿음을 보십시오. 아직 낫지도 않았는데 제사장한테 가라고 하니까 주저없이 일어나서 가지 않았습니까. 이 믿음이 보통 믿음이에요?

이는 마치 그런 것이지요. 지금 먹을 것이 없고 생활비 몇 푼이 없어서 큰 일입니다. 빚쟁이한테 쫓겨서 도망가야 할 판이에요. 그러면서 주님, 제발 10만원만 주세요. 10만원만 주시면 이 고비를 어떻게든 넘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는데,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지금 네 은행계좌에 100억원을 넣어주었으니까 그걸 당장 인출해서 써라……라는 말씀과 같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야말로 저주받은 병, 죽을 병이 지금 이 순간 나음을 받았다고 하는 데 그깟 100억원에 비하겠습니까.


이러한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은 초신자가 아니지요. 장로님 권사님 정도 되는 믿음, 적어도 교회 10년차 이상 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 정도 믿음의 사람들이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다면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홉 명은 다 주님 곁에서 떠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주님 품으로 돌아온 것은 이 사마리아인 한 사람 뿐이었다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교회에 오랫동안 다녔던 사람들은 다 뿔뿔이 떠나가고, 주님께로 돌아온 사람은 지난 주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주일학교 어린이 정도 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함께 생각해 보시기를 원합니다.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끝을 맺습니다.


요한복음 21장 25절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イエスが行われたことは、ほかにもたくさんある。その一つ一つを書き記すなら、世界もその書かれた書物を収められないと、私は思う。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예수님께서는 2천년 전에 오셔서 수많은 사람들, 정말 성경에 기록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치료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좀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치료하셨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돌아가실 분 아니겠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주님은 앞을 보이게 하시고 나병을 치료하시고 그랬을까요. 정말로 단순히 고맙다는 말 한 마디 듣고 싶어하셨기 때문일까요.

제가 지금 타고 있는 차, 사실 좀 오래된 차이긴 하지만 이 차를 받은 다음에 바로 며칠 후 엔진 시동이 안 걸려서 대단히 고생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보험에 가입한지 며칠 뒤라서 큰 돈을 들이지 않고 수리를 해서 해결할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리고 이는 지난 달이었습니다만, 얼마 전부터 바퀴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요. 그래서 유심히 봤더니만 거기에 나사 못이 박혀 있지 않겠습니까.

정말 이게 길 한 가운데에서 터지거나 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그래서 서둘러 카센터로 가서 바퀴를 수리했습니다. 나사가 박힌 곳이 옆쪽이라면 수리가 안 되고 다 바꾸어야 할 판이었는데, 다행히 앞쪽이라서 수리가 가능했었습니다. 참 여러모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저는 그 오래된 차를 왜 그냥 버려버리지 않고 수리를 했을까요.

당연히 그 차를 수리한다고 해서 천 년 만 년 고장이 안 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수리를 했어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죠. 더 써먹기 위해서 수리를 한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이 믿음의 사람 열 명, 지금은 비록 나병을 앓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믿음의 용사 열 명을 주님께서는 낫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사용하고 싶으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기껏 낫게 해주니까 그 중에서 나머지 아홉 명은 주님 곁을 모두 떠나버렸어요. 그러니 주님께서는 얼마나 그 마음이 안타까우셨겠습니까.

이제 주님께서는 주님 품으로 돌아와 그 발 아래에 엎드려 있는 사마리아인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일어나 가라”입니다.

(立ち上がって行きなさい。)


주님께서는 지금 발 아래에 엎드려 있는 사마리아인에게 <일어나>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그의 예배를 모두 다 받았다는 뜻이요, 그 다음으로 <가라>라는 말씀은 이제 주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가지고, 주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기 위해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뜻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부터 펼쳐질 이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의 첫 발자국은 주님 곁을 떠나간 나머지 아홉 명의 발걸음과 큰 차이를 보이게 될 것입니다.

시편 23편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たとえ 死の陰の谷を歩むとしても 私はわざわいを恐れません。 あなたが ともにおられますから。 あなたのむちとあなたの杖 それが私の慰めです。


아홉 명의 발걸음은 주님과 무관한 길이 될 수도 있겠으나, 주님의 사명을 받아 나서게 되는 이 사마리아인의 앞길은 그야말로 주님께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인도해주시는 놀라운 길이 될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으십니까. 주님을 의지할 때입니다.
절망과 좌절이 있으십니까. 주님을 의지할 때입니다.

그리고 기도 응답을 받으셨습니까. 병이 나았습니까. 문제가 해결되었습니까.

바로 지금 그 때야 말로 주님께로 돌아와야 할 때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43장 19절~20절
“19.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見よ、わたしは新しいことを行う。今、それが芽生えている。あなたがたは、それを知らないのか。必ず、わたしは荒野に道を、荒れ地に川を設ける。
野の獣、ジャッカルや、だちょうも、わたしをあがめる。わたしが荒野に水を、荒れ地に川を流れさせ、わたしの民、わたしの選んだ者に飲ませるからだ。


주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새로운 일을 행하시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주님의 곁을 떠났었다 하더라도 다시 주님의 품으로 돌아와, 이제부터는 주님의 곁을 떠난 자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쓰임을 받는, 놀라운 믿음의 용사로 거듭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今までは主のもとを離れていたとしても、再び引き返して主のもとに舞い戻り、これからは、主から離れていった者ではなく、主に遣わされる驚くべき勇士のとして生まれ変われ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主の御名においてお祈りいたします。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30회 낡은 부대를 새 부대로 (3)
2024년 2월 4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9장 17절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マタイの福音書 9章 17節
“また、人は新しいぶどう酒を古い皮袋に入れたりはしません。そんなことをすれば皮袋は裂け、ぶどう酒が流れ出て、皮袋もだめになります。新しいぶどう酒は新しい皮袋に入れます。そうすれば両方とも保てます。」”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5번째 시간으로서 “낡은 부대를 새 부대로(3)” 古い革袋を新しい革袋に(3)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시간에는 경건이라고 하는 낡은 부대에 알아보았고, 지난 주에는 십자가나 성경, 더 나아가 예수님 마저도 경우에 따라서는 우상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교회 내의 우상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세 번째 시간인 오늘은 바로 <열심(熱心さ)>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믿음생활에 있어서 <열심>이라고 한다면 어떤 생각을 갖게 되십니까. 이를 두고 나쁘다고 말씀하실 분들은 없으시겠지요.

열심히 기도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하는 것, 이는 나쁘기는 커녕 많은 분들이 본받아야 하는 자세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우리가 경계해야 할 낡은 부대 중에는 이 <열심>이라고 하는 덫이 얼마나 많이 깔려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은 이 <열심(熱心さ)>이라고 하는 낡은 부대를 버려버리고 새 부대에 주님의 말씀을 가득 담아갈 수 있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전에 제가 잠시 알던 분이 계셨는데, 이 분의 어머님은 권사님이셨는데, 이 권사님은 강하게 주장하시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새벽기도는 반드시 드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벽 5시에 일어나면 자기 아들을 깨워요. 그리고 잠이 아직 덜 깬 아들과 함께 새벽기도를 드리고 옵니다.

그렇게 새벽에 예배를 다녀오면 졸릴 것 아니에요. 하지만 이 권사님의 주장은 또 뭐냐 하면 새벽기도에 다녀왔다고 해서 아무리 졸립다고 하더라도 낮에 자면 안 되고, 밤에는 항상 성경을 읽고는 12시에 잠을 자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떠냐 하면 이 아드님은 밖에서 생활할 때 항상 시간만 나면 꾸벅꾸벅 졸아요.

그리고 이 권사님의 주장은 그것 만이 아닙니다. 기도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거예요. 기도를 하면 얼굴에서 환하게 빛이 나지만, 기도를 하지 않으면 얼굴이 아주 시커멓게 된다고 해요. 그래서 하루에 몇 시간이고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뭐, 다른 부분도 있습니다만, 이것 만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여러분께서는 공감이 가십니까. 그리고 이대로 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이렇게 믿고 있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금식을 얼마나 해야 하고 주일은 어떻게 해야 하고, 먹는 것 마시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고, 그리고 반대로 이것은 하면 안 되고 저것도 하면 안 되고…….

이런 사람들 주변에 있으면 어떨 것 같습니까. 믿음이 대단히 좋아질 것 같으신가요. 아니요. 제 솔직한 심정은 뭐냐 하면 대단히 피곤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잠시 이 아드님과 가까이 지낼 일이 있었습니다만, 얼마나 좀 측은하게 느껴졌는지 몰라요. 아니, 어머님은 연세도 있으시고 해서 수면시간이 짧아서 몇 시간 안 자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한테 이건 이렇게 해야 한다, 저건 저렇게 해야 한다고 강요를 하면 그 주변 사람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 분들 밑에 있었다고 한다면, 교회고 신앙이고 뭐고 솔직히 지겨워서라도 다 때려 치고 싶어 지지 않겠습니까.

이 분만이 아니라 세상에 보면 이와 같은 분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병에 걸렸거나 문제가 있을 때 금식을 하기도 하고 기도원에 가기도 하잖아요. 그렇다면 금식은 며칠이나 하면 될 것 같습니까. 하루에 기도는 얼마나 하면 될 것 같습니까.

누구는 또 그런 말도 합니다. 마귀를 물리칠 때에는 그냥 “예수의 이름으로 물러가라” 라고 하면 안 된대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 하면, 좀 혀를 굴려서 “예슈의 이름으로 물러가라” 라고 해야 물러간다고 하는 말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마귀는 복음성가를 부르면 물러가지 않는데 찬송가를 부르면 물러간다나? 그런 말을 웃지도 않고 진지한 얼굴로 하시니, 듣는 사람 입장으로서는 참으로 난처하지요.

예전에 그런 말씀을 제가 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교역자를 모집한다고 하기에 한 전도사님이 면접을 보았다고 하는데, 이 전도사님은 어머님께서 질병으로 일찍 돌아가셨다고 해요.

그런데 이를 두고 그 면접을 보는 담임목사라고 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 어머님께서 일찍 돌아가신 것은 전도사님의 기도가 부족해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잔인하고 사람 마음에 비수를 꽂는 말입니까.

그리고 이는 또 제가 30대 초반 때의 일입니다만, 무슨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일요일에 교회를 마치고 나가야 하는 시간에 일을 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 사실을 교회에서 말을 하니까 그 구역 리더라고 하는 형제가 하는 말이, 자기도 주일에 일을 하게 될 뻔한 적도 있었는데, 믿음을 가지고 그 일을 그만 두니까 이런 저런 좋은 일들이 일어났다고 하면서 간증을 합니다.

그건 뭐예요? 제가 그 일 때문에 교회에 안 나오겠다는 것도 아니고, 교회를 마치고 일을 하러 간다고 하는데도 그것이 잘못됐다고 하면서, 당장 그만 두라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주장들, 물론 그 사람들이 정말 나쁜 사람들이라서 그랬겠습니까. 그 진의는 제가 알지는 못하지만 저는 사실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좋은 의도를 가지고 말을 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 일이 발생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오늘은 잠시 사사기 말씀부터 살펴볼까 합니다.


사사기 17장 1절~5절
“1.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2.그의 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천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가졌나이다 하니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3.미가가 은 천백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매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기 위해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주리라
4.미가가 그 은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머니가 그 은 이백을 가져다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고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5.그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그가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그의 제사장으로 삼았더라”


エフライムの山地の出で、その名をミカという人がいた。
彼は母に言った。「銀千百枚が盗まれたとき、あなたはのろいの誓いをされ、私の耳にもそのことを言われました。実は、その銀は私が持っています。私がそれを盗んだのです。」すると母は言った。「主が私の息子を祝福されますように。」
彼が母にその銀千百枚を返したとき、母は言った。「私は自分の手でその銀を聖別して、主に献げていました。自分の子のために、それで彫像(ちょうぞう)と鋳像(ちゅうぞう)を造ろうとしていたのです。今は、それをあなたに返します。」
彼が母にその銀を戻したので、母は銀二百枚を取って銀細工人(ぎんざいくにん)に与えた。銀細工人はそれで彫像と鋳像を造った。こうして、それはミカの家にあった。
このミカという人には神の宮があった。彼はエポデとテラフィムを作り、その息子の一人を任命して、自分の祭司としていた。


여기서 단어를 몇 가지 설명 드리겠습니다.

1절에서 <에브라임 산지(エフライムの山地)>라고 나오는데 이로 보아 이 미가와 그 가정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중에서 에브라임 족속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5절에서 <에봇과 드라빔(エポデとテラフィム)>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에봇(エポデ)>은 당시 제사장이 입었던 옷을 말하는 것이고 <드라빔(テラフィム)>은 당시 이방인들이 섬겼던 우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사기 17장에서 18장에 있는 내용의 시작 부분입니다만,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에브라임 지파 가정에 미가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은 천백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난리를 쳤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이 돈을 훔친 것이 그 아들이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어머니가 하도 속상해 하니까, 그 돈이 여기 있다고 하면서 이 아들이 자수를 했어요.

그러자 어머니의 화가 금방 풀려서 아들더러 여호와의 복 받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들이 어머니에게 자기가 훔친 은을 돌려주었더니, 어머니가 그걸로 우상을 만들어서는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겠다고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자기 아들 중에서 하나를 뽑아서 제사장을 삼았다는 것이 이 본문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이 본문에서 이상한 점이 어디 있을까요. 사실 자세히 이 내용을 자세히 본다면, 문제가 있는 점이 한 둘이 아닙니다.

일단 이 어머니 입에서 <여호와>라고 하는 하나님의 성호가 나왔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는 분명 신앙이 있는 집안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일단 2절에 의하면 어떻습니까. 아들이 어머니의 돈을 훔쳤어요.

이 시점에서 본다면 아들은 이미 십계명 중에서 두 가지를 어겼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일단 자기 어머니의 돈을 훔쳤기 때문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あなたの父と母を敬え)> 라고 하는 제5계명을 어긴 것이 되겠지요.

뿐만 아니라 <도둑질하지 말라(盗んではならない。)> 라고 하는 제8계명도 어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어머니는 그 점에 대해서 전혀 지적을 하지 않고, 그저 아이구 이쁜 내 새끼……라고 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돈을 가지고 무엇을 하겠다고 하냐 하면 우상을 만들겠다는 것이에요. 그 우상을 왜 만드냐 하면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기 위해서, 말하자면 하나님을 위해서 우상을 만들겠다고 합니다.

이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あなたは自分のために偶像を造ってはならない。上の天にあるものでも、下の地にあるものでも、地の下の水の中にあるものでも、いかなる形をも造ってはならない。それらを拝んではならない。それらに仕えてはならない。)> 라고 하는 십계명 중에서 제2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다음으로 5절에 의하면 에봇과 드라빔(エポデとテラフィム)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 입는 옷을 입고서는 드라빔이라고 하는 우상을 섬기도록 하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5절 끝부분에 보시면 자기 아들 중에서 하나를 세워 제사장을 삼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사장은 모세의 형인 아론의 후손 즉 레위 지파만 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 가정은 에브라임 지파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이 짧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로 문제가 많이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영적으로 보자면 그야말로 지저분하고 문제 투성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이 어머니에게 악의가 있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요. 이 어머니는 하나님을 위해서 이렇게 했다고 하잖아요.

자기는 잘 믿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예, <열심히> 했습니다. 열심히 돈을 들여서 우상도 만들고, 열심히 제사장 옷도 만들고 열심히 자기 아들도 제사장으로 세워서 열심히 섬겨보려고 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그렇게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이는 오히려 하나님을 욕보이게 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결국 이들은 바로 다음 장인 18장에서 모든 것을 다 빼앗겨버리고 말지요.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항상 승리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저 내 생각만 가지고 막무가내로 열심히 하기만 하면 승리할 수가 있습니까.

달리기 경주에서 우승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냅다 뛰기만 하면 됩니까. 아닙니다. 정해진 규칙에 따라서 출발해야 하고 정해진 코스를 달린 다음에, 역시 정해진 결승점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잖아요.

이 어머니는 좀 잘 믿어보려고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문제가 많은 행동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는 하나님께 순종했던 유다 제13대 왕이었던 히스기야 왕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만, 오늘은 역시 하나님께 순종했던 유다 제16대 왕인 요시야 왕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열왕기하 22장에 의하면 요시야 왕은 하나님의 성전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 성전을 수리할 것을 명합니다. 그런데 그 때 성전에서 제사장 힐기야가 오래된 율법책이 하나 발견됩니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한 내용이 요시야 왕에게까지 보고가 되는데, 그 때 장면이 다음과 같습니다.


열왕기하 22장 8절~11절
“8.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힐기야가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
9.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돌아가서 보고하여 이르되 왕의 신복들이 성전에서 찾아낸 돈을 쏟아 여호와의 성전을 맡은 감독자의 손에 맡겼나이다 하고
10.또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사반이 왕의 앞에서 읽으매
11.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의 옷을 찢으니라”


そのとき、大祭司ヒルキヤは書記シャファンに、「主の宮で律法の書を見つけました」と言った。そしてヒルキヤがその書物をシャファンに渡したので、彼はそれを読んだ。
書記シャファンは王のもとに行って、王に報告した。「しもべたちは、神殿にあった金を取り出して、これを主の宮で工事している監督者たちの手に渡しました。」
さらに書記シャファンは王に告げた。「祭司ヒルキヤが私に一つの書物を渡してくれました。」シャファンは王の前でそれを読み上げた。
王は律法の書のことばを聞いたとき、自分の衣を引き裂いた。


하나님께 순종했던 요시야 왕은 이 율법책 내용을 듣더니 자기 옷을 찢었다고 합니다. 이는 대단히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진정한 율법,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까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 말하자면 지금까지 열심히 한다고 했었는데 그게 다 헛것이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요시야 왕은 이제 어떻게 했냐 하면 다음 장에 기록합니다.



열왕기하 23장 1절~3절
“1.왕이 보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를 자기에게로 모으고
2.이에 왕이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노소를 막론하고 다 왕과 함께 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성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
3.왕이 단 위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께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하매 백성이 다 그 언약을 따르기로 하니라”


王は使者を遣わして、ユダとエルサレムのすべての長老たちを彼のところに集めた。
王は、ユダのすべての人々、エルサレムのすべての住民、祭司と預言者、および下の者から上の者まで、すべての民とともに主の宮に上り、主の宮で見つかった契約の書のことばをすべて彼らに読み聞かせた。
それから王は柱のわきに立ち、主の前に契約を結び、主に従って歩み、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て主の命令と証しと掟を守り、この書物に記されているこの契約のことばを実行することを誓った。民もみなこの契約に加わった。


여기서 요시야 왕이 하고자 했던 말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지금까지 자기들 생각대로 지켜왔던 것은 다 헛것이다. 이제 여기에 적힌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는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말씀에 입각하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해왔던 그런 낡은 부대들은 다 버려버리고, 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새 부대에 믿음을 담아야 한다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업무상 때로는 여러 변호사들 홈페이지에 들어가보곤 합니다만, 거기에 보면 자기들 소개가 있잖아요.

그럼 그 내용이 어떤 것으로 채워져 있겠습니까.

뭐, 기본적으로 몇 년에 어디 학교를 졸업하고, 언제 사법시험이나 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는 내용이 있고, 그리고 그 외에는 대부분 자기 경력들이 나와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변호사님들의 소개 중에 “나는 법전을 몇 번 통독했습니다”라는 소개가 있을까요.

아니면 “나는 법정에서 재판장에게 몇 시간 동안 변론을 한 적이 있습니다”라는 소개가 있을까요?

지금 한국의 변호사 수가 대략 3만 4천명 정도라고 하는데, 제가 장담을 합니다만, 한국만이 아니라 전세계 어느 변호사라 하더라도 그와 같은 것을 자랑삼아 적어 놓은 변호사는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법전을 몇 번 읽었냐 하는 것이나, 재판장에게 변론을 몇 시간 했느냐 하는 것이 변호사의 실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교회에 보시면 다양한 자랑거리가 있는데 그 중에는 자기가 성경을 몇 번 읽었다거나 기도를 몇 시간 한다거나, 내가 금식을 얼마나 했다는 것을 자주 말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또 있는 것은 내가 교회에 몇 년 다녔다거나 내가 직분이 뭐라고 말하는 분들도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그 사람의 믿음을 간음할 수 있는 척도가 될 수 있을까요.

아니요. 오히려 그와 같은 말 중에 낡은 부대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은 아닌지 점검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변호사에게 있어서 법전을 몇 번 읽었는지, 변론을 몇시간 했는지가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순하게 말해서 재판에서 이길 수 있느냐 여부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기는 것, 우리 삶에 있어서 승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교회에 오래 다니기만 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까.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단순히 성경책만 많이 읽으면 승리할 수 있습니까. 기도나 금식을 오래 하기만 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까.

그와 같은 막무가내식 열심은 오히려 승리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10장 2절~3절
“2.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私は、彼らが神に対して熱心であることを証ししますが、その熱心は知識に基づくものではありません。
彼らは神の義を知らずに、自らの義を立てようとして、神の義に従わなかったのです。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니고 아무리 열심히 믿는다고 하더라도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내세우려고 하는 것이므로, 하나님께 순종하기는커녕 오히려 불순종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를 오래 하고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아무리 금식을 오래 했다고 하더라도, 무슨 어려움이 닥치면 기다렸다는 듯이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포기하면서, 아이구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이럴 수 없어……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인생을 원망하게 된다면 그것이 어떻게 해서 승리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법전만 많이 읽고 재판에서 말도 많이 하는데 재판만 하면 지는 변호사와 다를 바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 변호사한테 누가 사건을 맡기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올바로 알고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오더라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좌절하지 않습니다.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지금 눈앞에 크고 작은 문제들이 나를 가로막고 있다 하더라도, 아브라함을 부르셨던 하나님, 모세를 이끄셨던 하나님, 그리고 다윗과 함께 싸우셨던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125편 1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主に信頼する人々はシオンの山のようだ。 揺るぐことなく とこしえにながらえる。


이제 내 생각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나를 세우려는 낡은 부대를 버려버리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새로운 부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흔들리지 않고, 영적인 싸움에서 이기고 또 이기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29회 낡은 부대를 새 부대로 (2)
2024년 1월 28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9장 17절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マタイの福音書 9章 17節
“また、人は新しいぶどう酒を古い皮袋に入れたりはしません。そんなことをすれば皮袋は裂け、ぶどう酒が流れ出て、皮袋もだめになります。新しいぶどう酒は新しい皮袋に入れます。そうすれば両方とも保てます。」”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4번째 시간으로서 “낡은 부대를 새 부대로(2)” 古い革袋を新しい革袋に(2)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에는 경건이라고 하는 낡은 부대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경건이라고 하는 것은 경건 그 자체로 있는다면 아름다울 수 있겠으나 거기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빠지게 된다면 그것은 경건이 아니라 오히려 교만이라고 하는 죄가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이 외에도 우리가 그 동안 당연시해왔던 낡은 부대들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부터 해볼까요. 오늘은 성경책이나 십자가이라고 하는 낡은 부대부터 시작해볼까 합니다.

자, 교회에 걸려있는 십자가,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책에 능력이 있습니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 드려볼까요. 자동차에 성경책을 싣고 다니면 사고가 나지 않는다. 맞습니까. 틀립니까.


이에 대해서 틀리다고 하신 분들께 질문을 드립니다. 아니, 성경책에 능력이 없어요? 성경책에 능력이 있다면 성경책을 차에 싣고 다닐 경우 사고가 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십자가를 목걸이로 걸고 다니면 십자가 목걸이를 안 한 사람보다 좋은 일이 더 많이 일어난다. 맞습니까, 틀립니까.

이에 대해서도 틀리다고 하신 분들께 질문을 드립니다. 십자가에 능력이 없어요? 십자가에 능력이 있다고 한다면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니면 좋은 일들이 생기고, 십자가를 차에 매달고 다니면 사고도 안 일어나야 하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무엘상 4장에 보시면 흥미로운 장면이 등장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군은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어요.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치지는 못하고 오히려 사망자만 늘어 가서, 사무엘상 4장 2절에 의하면 이미 4천 명이나 죽임을 당한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이를 보다 못한 이스라엘 장로들은 그들이 신성시하고 있던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오자고 합니다.


언약궤는 무엇입니까.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직접 쓰신 돌판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주신 것인데, 광야에서 40년 동안 어디를 가든 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 언약궤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재 했었습니다.

지금 전쟁터에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지고 있어요. 그렇다면 거룩한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오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부랴부랴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져왔습니다.

사무엘상 4장 5절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主の契約の箱が陣営に来たとき、全イスラエルは大歓声をあげた。それで地はどよめいた。

자, 이제 우리는 전쟁에서 이긴다. 승리할 수 있다. 이제 하나님의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숙적 블레셋 군대를 물리쳐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군대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올랐습니다.


그런데 전쟁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예상했던 대로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였어요.

사무엘상 4장 10절~11절
“10.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11.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こうしてペリシテ人は戦った。イスラエルは打ち負かされ、それぞれ自分たちの天幕に逃げ、非常に大きな打撃となった。イスラエルの歩兵三万人が倒れた。
神の箱は奪われ、エリの二人の息子、ホフニとピネハスは死んだ。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오기 전에는 죽임을 당한 자가 4천 명이었는데, 오히려 언약궤를 가져오고 싸웠더니 그 희생자가 3만 명이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모자라서 언약궤 마저도 이방인인 적군한테 빼앗겨 버렸다고 합니다.

아니, 그들이 가져온 언약궤가 가짜였어요? 아닙니다. 진짜 하나님의 언약궤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군은 크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어디에 잘못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군이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그 언약궤를 믿었다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하나님의 그 언약궤를 우상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에 크나큰 문제가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앞서 말씀 드렸던 성경책이나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책이나 십자가 모두 소중한 것이지요. 하지만 이는 그 물건이 거룩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 물건 자체를 거룩하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우상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책이나 십자가는 경우에 따라서 우상이 되어 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상은 아무런 능력도 없습니다. 오히려 해악이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또 우리에게 우상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예수님 마저도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아니, 무슨 해괴한 소리냐. 어떻게 예수님이 우상이 될 수 있느냐고 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닙니다. 성경에도 이와 같은 장면이 등장합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든 사람을 치료하고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물리치고 하는 모습들을, 대단히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냥 민간인도 아니고 제사장 아들이에요. 그들은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모습이 부러웠나 보죠?

가만히 보니까 예수 이름으로 명하기만 하면 병이 낫고 귀신들이 물러가요. 그러면 사람들이 놀라고 기뻐하고 막 그래요. 그런 모습을 보고 옳지, 그래, 나도 한 번 해보자. 하는 마음이 생길 만도 하지 않겠어요?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다고 나와 있습니까.

사도행전 19장 13절~16절
“13.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14.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ところが、ユダヤ人の巡回祈祷師のうちの何人かが、悪霊につかれている人たちに向かって、試しに主イエスの名を唱え、「パウロの宣べ伝えているイエスによって、おまえたちに命じる」と言ってみた。
このようなことをしていたのは、ユダヤ人の祭司長スケワという人の七人の息子たちであった。
すると、悪霊が彼らに答えた。「イエスのことは知っているし、パウロのこともよく知っている。しかし、おまえたちは何者だ。」
そして、悪霊につかれている人が彼らに飛びかかり、皆を押さえつけ、打ち負かしたので、彼らは裸にされ、傷を負ってその家から逃げ出した。

이 글의 문맥으로 본다면, 제사장 아들들도 귀신 들린 사람한테 가서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일단 그들은 예수라는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바울이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치길래 그들도 바울이 하는 것처럼 따라하려고 했을 뿐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예수>라고 하는 우상의 능력을 의지하려고 했을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주님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귀가 뭐라고 했어요.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라고 하면서 오히려 귀신 들린 사람이 덤벼 들어서 이기더니만 그 사람들은 벗은 몸으로 도망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망신입니까.

이처럼 성경책이나 십자가와 같은 물건이 우리 눈에는 아무리 거룩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자칫하면 우상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와 같은 사실을 이미 알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놀랍게도 신약이 아니라 더 옛날 구약에 나오는 인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갈라져 있을 당시를 보면, 문제가 많은 왕들이 태반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우상을 섬겼던 왕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요.

하지만 그 중에도 마치 다윗처럼 하나님께 순종했던 왕이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몇 안 되는 왕 중에 하나님께 순종했던 왕 중 하나가 바로 제13대 유다 왕 히스기야라고 할 수 있겠지요.

히스기야 왕의 아버지는 아하스였습니다. 그도 역시 유다 왕이었는데 그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열왕기하 16장 2절~4절
“2.아하스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간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아니하고
3.이스라엘의 여러 왕의 길로 행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4.또 산당들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アハズは二十歳で王となり、エルサレムで十六年間、王であった。彼はその父祖ダビデとは違って、彼の神、主の目にかなうことを行わず、
イスラエルの王たちの道に歩み、主がイスラエルの子らの前から追い払われた異邦の民の、忌み嫌うべき慣わしをまねて、自分の子どもに火の中を通らせることまでした。
彼は高き所、丘の上、青々と茂るあらゆる木の下でいけにえを献げ、犠牲を供えた。


이처럼 히스기야 왕의 아버지인 아하스는 다른 불순종한 왕들처럼 우상을 섬기고 우상한테 제사를 드리고 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히스기야 왕은 어땠을까요.

자, 여기서 우리는 잠시 조금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볼까 합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모세가 만든 놋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를 행할 때 이스라엘 자손들은 뻑 하면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면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를 해서 그들의 소원을 들어 주기도 했었던 것이지요.

이와 같은 일들이 반복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자손들은 어쩌면 안 좋은 것을 학습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자신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면,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를 해서,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진다는 식의 대단히 비뚤어진 법칙을 터득했는지도 모르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래서인지 그 날도 그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합니다.


민수기 21장 5절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神とモーセに逆らって言った。「なぜ、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をエジプトから連れ上って、この荒野で死なせようとするのか。パンもなく、水もない。われわれはこのみじめな食べ物に飽き飽きしている。」

하지만 그들이 생각했던 법칙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망이나 불평 불만으로 역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민수기 21장 6절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そこで主は民の中に燃える蛇を送られた。蛇は民にかみついたので、イスラエルのうちの多くの者が死んだ。

하나님께서는 불뱀들을 보내셔서 불평불만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구 물어버리게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어떻게 했어요?

민수기 21장 7절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民はモーセのところに来て言った。「私たちは主とあなたを非難したりして、罪を犯しました。どうか、蛇を私たちから取り去ってくださるよう主に祈ってください。」モーセは民のために祈った。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혼이 나더니 그제서야 아이구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라고 애원을 합니다. 그러자 이제 모세가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민수기 21장 8절~9절
“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すると主はモーセに言われた。「あなたは燃える蛇を作り、それを旗ざおの上に付けよ。かまれた者はみな、それを仰ぎ見れば生きる。」
モーセは一つの青銅の蛇を作り、それを旗ざおの上に付けた。蛇が人をかんでも、その人が青銅の蛇を仰ぎ見ると生きた。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명하시기를 불뱀 같은 것을 만들어서 장대 위에 높이 매달고는 그것을 보게 하라고 하세요. 그래서 모세가 놋으로 불뱀처럼 만들어서 장대 위에 높이 매달아 놓고는, 뱀에 물린 사람들이 그것을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 놋뱀을 봤더니 불뱀에 물려서 괴로워했던 사람들이 회복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놋뱀이 달린 장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신명기 21장 23절 후반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木にかけられた者は神にのろわれた者だからである。……

즉 나무에 달렸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상하게 한 불뱀들이 나무에 달림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불뱀으로 인한 상처가 모두 나음을 입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채로 십자가라고 하는 나무에 매달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 되신 예수님이 저주를 받으셨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지고 구원으로 이르는 길이 열렸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다 제12대 왕이었던 아하스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우상을 섬기는 짓을 했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히스기야 왕은 오히려 하나님께 순종하는 왕이었습니다.


열왕기하 18장 3절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彼は、すべて父祖ダビデが行ったとおりに、主の目にかなうことを行った。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했길래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느냐 하면 다음 구절입니다.

열왕기하 18장 4절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高き所を取り除き、石の柱を打ち砕き、アシェラ像を切り倒し、モーセが作った青銅の蛇を砕いた。そのころまで、イスラエル人がこれに犠牲を供えていたからである。これはネフシュタンと呼ばれていた。

신학자들은 모세에 의해 놋뱀이 만들어진 시기를 대략 기원전 1410년 경으로 보고 있는데, 히스기야 왕이 즉위한 시기는 대략 기원전 720년 경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히스기야 왕이 즉위한 시기는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만든 시기로부터 대략 700년이 흐른 뒤라고 할 수 있겠지요? 
여기서 놀라운 것은 그 히스기야 왕이 즉위할 때까지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이 현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700년이라고 하는 세월도 세월이지만, 모세가 만든 놋뱀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뜻깊은 물건이었기 때문에,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그야말로 국보급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 놋뱀을 소중히 여겼을 뿐만 아니라 그 놋뱀한테 분향까지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백성들로부터 소중하게 여김을 받고,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대단히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왕으로서는 더욱 더 이를 잘 보존하기 위해 애를 써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히스기야는 어떻게 했냐 하면, 반대로 그 놋뱀을 완전히 부숴버리고 그것을 <느후스단(ネフシュタン)>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느후스단>이라는 것은 <놋조각> 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여러분께서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니까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부숴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 흔적을 아무런 가치가 없는 한낱 놋조각, 고철덩이에 불과한 것이라고 선언했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일은 어쩌면 백성들의 반감을 불러왔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와 같은 히스기야를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열왕기하 18장 5절~6절
“5.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6.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彼はイスラエルの神、主に信頼していた。彼の後にも前にも、ユダの王たちの中で、彼ほどの者はだれもいなかった。
彼は主に堅くつき従って離れることなく、主がモーセに命じられた命令を守った。

참으로 이런 찬사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히스기야는 모세가 만든 놋뱀을 부숴버렸는데 오히려 그것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킨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히스기야는 왜 굳이 모세가 만든 놋뱀을 부숴버리고 말았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그 놋뱀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으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들은 말입니다만, 한약재 중에서 어떤 약재는 그 효능이 탁월한데, 문제는 복용할 때 반드시 차갑게 먹어야 한다고 해요. 만약에 이를 따뜻하게 해서 먹게 된다면 오히려 독이 되어 경우에 따라서는 사망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님이라는 이름은 물론, 성경책이나 십자가가 중요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를 우리의 새로운 가죽부대에 담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무럭무럭 성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마치 우상이라고 하는 낡은 가죽부대에 담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머지않아 여기저기서 포도주가 새어 나오게 되어, 마침내는 그나마 있던 우리의 믿음 자체가 모두 사라지게 되거나 오히려 우리에게 해악을 끼치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 말씀에 성경책 자체에 능력이 있다고 되어 있나요?

신명기 8장 3절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それで主はあなたを苦しめ、飢えさせて、あなたも知らず、あなたの父祖たちも知らなかったマナを食べさせてくださった。それは、人はパンだけで生きるのではなく、人は主の御口から出るすべてのことばで生きるということを、あなたに分からせるためであった。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까지 40년 동안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게 해서 먹도록 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사람이 거두어서 먹는 떡이 아니라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시기 위해서라고 하는 것이지요.

아무리 맛이 있는 떡이나 빵이라 하더라도 이를 포장지에 넣어둔 채로 가지고만 있는다고 해서 배가 불러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가지고만 있으면 결국 배가 고파지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죠. 그 포장지를 뜯어서 먹어야지만 배가 부르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는 배우지 못한 어린 아이들도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다 큰 어른들, 배울만큼 배운 어른들이 그것도 모르고 그저 성경책만 들고 다닙니까. 그것 만으로는 아무런 능력이 없어요. 성경책을 펴서 그 안에 적힌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먹었을 때 진정한 능력이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 십자가를 보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흘려 주신 피를 기억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독생자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해야만 해결될 수 있었던 내 죄악을 기억하고, 뿐만 아니라 그렇게까지 하시면서 우리에게 사랑을 확실하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단순히 패션으로 걸고 다닌다거나 형식적으로 벽에 걸어 놓게 된다면, 이는 마치 모세가 만든 놋뱀이 <느후스단(ネフシュタン)> 그저 놋조각이 되어 버린 것처럼, 십자가도 역시 나무조각, 쇳조각, 고철덩어리가 되어 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4절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真理に基づく義と聖をもって、神にかたどり造られた新しい人を着ることでした。

성경은 우리에게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새 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어떻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골로새서 3장 9절~10절
“9.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互いに偽りを言っ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がたは古い人をその行いとともに脱ぎ捨てて、
新しい人を着たのです。新しい人は、それを造られた方のかたちにしたがって新しくされ続け、真の知識に至ります。


그냥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고 새로워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새 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그 지식에까지 새롭게 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케케묵은 오래된 관습이나 관행에서 벗어나, 주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새 사람을 입어 진정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어서, 새로운 가죽 부대에 새로운 믿음 진정한 믿음을 갖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28회 낡은 부대를 새 부대로 (1)
2024년 1월 21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9장 17절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マタイの福音書 9章 17節
“また、人は新しいぶどう酒を古い皮袋に入れたりはしません。そんなことをすれば皮袋は裂け、ぶどう酒が流れ出て、皮袋もだめになります。新しいぶどう酒は新しい皮袋に入れます。そうすれば両方とも保てます。」”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3번째 시간으로서 “낡은 부대를 새 부대로 (1)” 古い革袋を新しい革袋に (1)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이 기독교는 지금까지 적지 않은 변화를 겪어 왔습니다.

그 변화 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꼽는다면 무엇보다 구약에서 신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진정한 하나님을 믿는 종교란 유대교 밖에 없었지요. 그 외에는 다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유대교는 대단히 폐쇄적이었습니다. 이방인에게 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금지 되어 있었습니다. 유대교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유일한 민족이라고 믿었던 유대인들 만을 위한 종교로 여겨졌던 것이지요.

그러다가 이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이야 말로 진정으로 하나님 말씀을 잘 알고 있고, 자신들의 말대로 하면 틀림없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2천년 전에 오셨을 때, 그들에게 칭찬을 했을까요.

아니요. 오히려 대단히 심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3장 13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わざわいだ、偽善の律法学者、パリサイ人。おまえたちは人々の前で天の御国を閉ざしている。おまえたち自身も入らず、入ろうとしている人々も入らせない。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천국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아버리고서 자기들도 못 들어가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못 들어가게 만들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이와 같이 심한 꾸짖음을 들은 것일까요.

이어서 마태복음 23장을 계속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6절~22절
“16.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7.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9.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21.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2.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わざわいだ、目の見えない案内人たち。おまえたちは言っている。『だれでも神殿にかけて誓うのであれば、何の義務もない。しかし、神殿の黄金にかけて誓うのであれば、果たす義務がある。』
愚かで目の見えない者たち。黄金と、その黄金を聖なるものにする神殿と、どちらが重要なのか。
また、おまえたちは言っている。『だれでも祭壇にかけて誓うのであれば、何の義務もない。しかし、祭壇の上のささげ物にかけて誓うのであれば、果たす義務がある。』
目の見えない者たち。ささげ物と、そのささげ物を聖なるものにする祭壇と、どちらが重要なのか。
祭壇にかけて誓う者は、祭壇とその上にあるすべてのものにかけて誓っているのだ。
また、神殿にかけて誓う者は、神殿とそこに住まわれる方にかけて誓っているのだ。
天にかけて誓う者は、神の御座とそこに座しておられる方にかけて誓っているのだ。


이 말씀을 간단하게 정리를 해볼까요.

자, 맹세를 하면 지켜야 하는데, 그들은 사람들한테 어떻게 가르쳤냐 하면, 성전이나 제단을 두고 맹세를 하면 안 지켜도 되지만, 성전의 금이나 제단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를 하면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게 완전히 반대라는 것이지요.

사실 본래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는 성전이나 제단을 두고 맹세를 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는 그 사람들이 율법을 잘못 인용 했다고 하기 보다는 율법의 해석에 있어서 엉터리로 가르쳤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에도 만약에 이런 식으로 학교나 학원에서 가르쳤다고 생각해보세요. 한 선생님이 어떤 문제에 있어서 정답은 A인데 B라고 가르쳤다고 한다면 그 학생들이 그 문제를 맞출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그 선생님한테 안 배웠더라면 그 문제를 맞출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괜히 그 선생님한테 배우는 바람에 어이없게 정답을 못 맞추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게 무슨 학교에서 보는 간단한 시험이라면 대수롭지 않겠지만, 입학시험이라고 생각해보세요. 그 문제 하나 때문에 합격과 불합격이 갈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또한 당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사실 613가지였는데, 이를 2134가지까지 늘려서 사람들한테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어했겠습니까.

이처럼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와 같은 잘못을 버젓이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마치 자신들이 제대로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목에 힘을 주고 다녔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심한 말씀으로 꾸짖으셨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마치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시고는 이미 예고하셨던 바와 같이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실 때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가복음 16장 15절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それから、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福音を宣べ伝えなさい。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유대인들만 믿는 것이 아니라 만민, 그러니까 세계 모든 민족에게 전파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유대교에서 새롭게 탄생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회가 점점 성경에서 멀어집니다. 또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자꾸 사람들의 해석이 들어가더니 이제는 사람들의 생각이 하나님 말씀보다 더욱 권위를 갖게 되기에 이릅니다.

당시 성경은 라틴어 성경이었는데 문제는 사람들이 라틴어를 읽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라틴어 성경만이 있었던 것이고,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설교를 할 때에도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로 하고 있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은 성경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사제들만 성경을 알고 다른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성경을 가지고 있는 사제들이 하는 말이 곧 성경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처럼 여겨지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사제들만 성경을 알고 다른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게 함으로써, 사제들이 하는 말이 곧 성경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처럼 여겨지게 만들고는, 그런 식으로 해서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려고 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이는 그야말로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저질렀던 일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무엇이 일어납니까. 그렇죠. 1517년 독일의 마르틴 루터에 의해 종교혁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가 외쳤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오직 말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교회가 마치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했던 것처럼 말씀 즉 성경에서 멀어지고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해서 사람들한테 지키도록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종교혁명을 일으키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이냐 하면, 무엇보다 일반 성도들부터 성경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해서 성경을 자신들의 모국어였던 독일어로 번역한 것이죠.

이렇게 되니까 그제서야 무엇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무엇이 사람들 멋대로 갖다 붙인 엉터리 가르침인가 하는 것이 모두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종교혁명을 거치면서 그리스도교는 구교에서 나와 신교로 자리잡게 되어서 오늘날의 기독교가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되풀이하기 때문일까요. 이제 이 기독교가 문제입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생각이 아닌 사람들의 생각이 적지 않게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되면 무슨 문제가 생기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말씀이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정답이 아닌 것을 정답이라고 말하게 되기도 하는, 그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과거에는 일반 성도들이 성경을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 당시에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그리고 16세기에는 라틴어를 이해할 수 있었던 사제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이를 지키도록 강요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성경책이 웬만한 나라에서도 모국어로 읽을 수가 있습니다.

인쇄기술도 얼마나 좋아졌고 책 자체도 얼마나 튼튼한 지 모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옛날에는 가격도 꽤 비쌌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그래도 많이 내려간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 몇 년 다니신 분들이라면 그 집에 성경책이 한 두 권 이상은 보통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성경책을 구할 수가 없어요? 그럼 조금 큰 교회에 가서 부탁을 하면 거기 비치되어 있는 성경책 한 권 정도는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잖아요.

보통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교회라면 수 십 권, 수 백 권의 성경책이 있기 마련인데, 성경책을 읽고 믿어보려고 하는데 돈이 없어서 구하지 못한다고 하는 사람한테, 거기서 중고 성경책 한 권 못 주겠어요?

그리고 성경에 적힌 글이 너무 어렵다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과거에는 이른바 <가라사대> 라고 하는 비교적 좀 난해하다고 할 수 있는 한글 개역 성경밖에 없었고 더구나 세로쓰기였기 때문에 많은 분들에게 좀 읽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실 50년대,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전체 국민의 교육수준이 그리 높지 않았었잖아요.

그러니까 그 두꺼운 성경을 읽는 것보다는 그저 목사님이 해주시는 말씀이 성경 말씀이려니 했던 것이고, 그리고 성경말씀을 공부하는 것보다는 그저 금식하고 기도하고 그러면 방언이 나오고 병이 낫고 그리고 부자가 되고……그것이 할렐루야……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한국이나 일본을 보더라도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을 비롯한 고등교육기관에 대한 진학률이 70프로가 넘는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공부 잘 하는 일부 수제들만 들어갔던 대학인데, 지금은 학교 수도 늘어나고 반면에 인구는 줄어들어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학교 이름에 욕심을 내지 않는다고 한다면 솔직히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곳도 많다고 하지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책 종류도 다양해 져서, 현대인의 성경, 쉬운 성경, 새번역 성경 등 보통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 된 성경들도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몰라요.


하지만 이와 같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기독교에는 어쩌면 과거와 똑 같은 문제들이 생겨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 그리고 개신교로 발전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똑 같은 문제들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성경으로부터 멀어지고 말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누구나 성경을 손쉽게 읽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이 성경으로부터 멀어졌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인 것이지요.

아무리 책값이 떨어지고 아무리 말투가 쉬워지고, 아무리 책을 튼튼하게 만들고 아무리 사람들의 교육수준이 높아졌다 하더라도, 결국 사람들이 읽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일이 이렇게 되면 역시 문제는 다시 도지게 됩니다.

과거에는 바리새인들이나 사제가 <성경을 읽지 못하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해서, 하나님 말씀대로가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 가르치다가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면, 이제는 목사나 교역자가 <성경을 읽지 않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해서 자기 멋대로 가르치게 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무슨 일들이 일어나게 되느냐 하면 바로 낡은 가죽부대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말씀은 그렇지 않은데도 사람들의 낡은 생각에 사로잡혀서 마치 그게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사람들한테 인식이 되어서 결국 낡은 가죽부대들이 여기저기에서 펑펑 하고 터지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와 같은 낡은 가죽부대를 없애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경을 읽고 올바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정말로 성경을 읽기 싫어하는 것인가 하면,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싶어해요. 성경을 알고 싶어해요. 그런데 문제가 뭐냐 하면 기존 교회에서 제대로 성경공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지냐 하면 이상한 종교집단들이 사람들을 유인하게 되는데 그 미끼가 뭐냐 하면 바로 <성경공부>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너희들 교회에서는 성경을 안 가르치지? 하지만 우리 교회는 성경공부를 열심히 해……이렇게 해서 사람들을 유인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막상 그런 데에 가보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이상하게 해석해서 결국 자신들의 교주를 신격화 하게 만드는 세뇌교육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다 누구 책임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기존 교회 책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기존 교회에서 제대로 성경 말씀을 전하지 않고 무슨 자기 생각이나 자기 경험만을 전하고 그러니 사람들이 성경말씀에 대해서 갈망하게 되어서 결국 이상한 곳으로 빠지고 마는 것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이번에 저는 이와 같은 낡은 부대를 버리고 새 부대로 만들기 위해서 과연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낡은 부대가 무엇인지,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 지를 좀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오늘은 간략하게 한 가지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른바 낡은 부대 중에서 대표적인 낡은 부대가 무엇인가 하면 바로 <경건>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경건, 사실 이 경건이라고 하는 것을 안 좋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여기에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복음 18장 9절~14절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自分は正しいと確信していて、ほかの人々を見下している人たちに、イエスはこのようなたとえを話された。
「二人の人が祈るために宮に上って行った。一人はパリサイ人で、もう一人は取税人であった。
パリサイ人は立って、心の中でこんな祈りをした。『神よ。私がほかの人たちのように、奪い取る者、不正な者、姦淫する者でないこと、あるいは、この取税人のようでないことを感謝します。
私は週に二度断食し、自分が得ているすべてのものから、十分の一を献げております。』
一方、取税人は遠く離れて立ち、目を天に向けようともせず、自分の胸をたたいて言った。『神様、罪人の私をあわれんでください。』
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が、義と認められて家に帰ったのは、あのパリサイ人ではなく、この人です。だれでも自分を高くする者は低くされ、自分を低くする者は高くされるのです。」


여기에 나오는 “토색, 불의, 간음”이라고 하는 말씀은 남들 것을 빼앗거나 남들을 속이거나 윤리적으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奪い取る者、不正な者、姦淫する者) 바리새인은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도 드린다면서 감사 드린다고 해요.

사실 따지고 본다면 이정도의 경건함이 그리 쉽습니까. 하루에 한 끼만 걸러도 배가 고파서 정신이 혼미해질 수도 있는데, 일주일에 두 번이나 금식을 한대요. 그리고 십일조도 꼬박꼬박 드리고, 절대 나쁜 짓은 안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사람에 대한 본심을 정확하게 표현하십니다. 그는 뭐라고 기도합니까.

그렇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この取税人のようでないことを感謝します)>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가 경건이라고 생각한 그 모습은 경건 그 자체로 있었다면 아름다운 것이었겠으나, 자기 바로 옆에 있는 이웃을 멸시하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경건이라고 하는 이름의 낡은 부대가 터지는 순간 아니겠습니까.

경건이라는 이름의 낡은 부대가 터지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교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는 주님께서 주신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을 드릴 때 항상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이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이 이웃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똑같이 중요하다는 말씀인 것이지요.

세상에는 법률이나 조례, 규칙 등이 수 만 가지도 넘습니다만, 그 모든 법률이나 조례나 규칙 등은 어디에 위배되어서는 안 되는가 하면, 바로 헌법에서 벗어나면 안 됩니다.

만약에 헌법에서 벗어난다고 법원에서 판결이 나오면 그 즉시로 그 규정은 무효가 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주신 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말씀은 우리 믿음에 있어서 헌법과도 같습니다.

아무리 유명한 목사님이나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라 하더라도 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그 순간 그 가르침은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이웃은 누구입니까. 그것은 말 그대로 내 옆에 있는 사람, 내 근처에 있는 사람,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이 바로 내 이웃인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인 거리만이 아닙니다.

요즘은 인터넷이 일상화가 되면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손쉽게 연락이 되는 경우가 많지요. 이와 같은 사람들도 분명 우리의 이웃입니다.

이러한 이웃을 사랑하고 아껴주고 위로하고 그래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헐뜯고 멸시하고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도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점은, 이와 같은 일이 교회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에요.

나는 이렇게 좋은 일을 했다. 나는 저렇게 좋은 일을 했다. 참 감사하다……라고 하면서 그 마음 안에 교만이 깔려 있다면, 이는 그 순간 경건이 아니라 교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전에 한국의 어떤 기업 총수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하지요.

“모든 것을 다 바꿔야 한다.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라.”

어쩌면 이와 같은 말이 바로 지금 우리 기독교 모든 교회에 필요한 말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도 모든 것을 다 바꾸어야 합니다.

그럼 무엇을 빼고 다 바꾸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 성경 빼고 다 바꾸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야 낡은 부대를 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새 부대에 주님께서 주시는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부터 되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를 다시 점검해보면서, 우리 안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온전히 자리잡게 함으로 말미암아, 낡은 부대가 아닌 새 부대에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27회 물에서 포도주로
2024년 1월 14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 6절~11절
“6.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ヨハネの福音書 2章 6節~11節
“6. そこには、ユダヤ人のきよめのしきたりによって、石の水がめが六つ置いてあった。それぞれ、二あるいは三メトレテス入りのものであった。
7. イエスは給仕の者たちに言われた。「水がめを水でいっぱいにしなさい。」彼らは水がめを縁までいっぱいにした。
8.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さあ、それを汲んで、宴会の世話役のところに持って行きなさい。」彼らは持って行った。
9. 宴会の世話役は、すでにぶどう酒になっていたその水を味見した。汲んだ給仕の者たちはそれがどこから来たのかを知っていたが、世話役は知らなかった。それで、花婿を呼んで、
10. こう言った。「みな、初めに良いぶどう酒を出して、酔いが回ったころに悪いのを出すものだが、あなたは良いぶどう酒を今まで取っておきました。」
11. イエスはこれを最初のしるしとしてガリラヤのカナで行い、ご自分の栄光を現された。それで、弟子たちはイエスを信じた。”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2번째 시간으로서 “물에서 포도주로” 水からぶどう酒へ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대부분의 복음서 내용이 그렇듯이 오늘 본문 내용도 우리에게 익숙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간과하기 쉬운, 말하자면, 다 아는 얘기니까 하고 그냥 넘겨버리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6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2장 6절
“6.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6. そこには、ユダヤ人のきよめのしきたりによって、石の水がめが六つ置いてあった。それぞれ、二あるいは三メトレテス入りのものであった。

먼저 여기 있는 <유대인의 정결 예식>이라는 점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마가복음에 자세히 나와 있어요.

마가복음 7장 3절~4절
“3.(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4.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パリサイ人をはじめユダヤ人はみな、昔の人たちの言い伝えを堅く守って、手をよく洗わずに食事をすることはなく、
市場から戻ったときは、からだをきよめてからでないと食べることをしなかった。ほかにも、杯、水差し、銅器や寝台を洗いきよめることなど、受け継いで堅く守っていることが、たくさんあったのである。

지금 우리가 이 글을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밥 먹기 전에 손을 씻는다는 것, 특히나 혹독한 코로나 사태를 경험한 우리에게 있어서는, 틈만 나면 손소독도 하고 그리고 식사는 물론이고 밖에 갔다가 들어오면 우선 손부터 씻는 것은 생활습관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는다는 것에 있어서는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없다고 여겨지겠습니다만,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자, 이 위생에 있어서 가장 신경 써야 하는 장소는 어디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식당 같은 음식을 다루는 곳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는 중요하지요. 하지만 더욱 신경을 써야 하는 곳, 그곳은 바로 병원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수술실 같은 곳이라고 한다면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야말로 먼지 하나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는 특수한 세제로 손을 세 번 씻고는 손에 딱 붙은 전용장갑을 끼게 됩니다. 아무리 작은 세균이라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환자의 생명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지요.

하지만 이와 같은 생각이 자리잡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의사가 손을 씻어야 한다는 사실을 처음 주장한 사람은 헝가리 출신인 의사 이그나츠 제멜바이스(センメルヴェイス)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언제 사람이냐 하면 19세기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1800년대에 활동했던 산부인과 의사였습니다.

산부인과 의사였으니까 출산을 도우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런데 이 때 의사는 손을 씻어야 한다는 사실을 처음 주장한 것이 이 제멜바이스(センメルヴェイス)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전에는 어땠냐 하면 의사들이 손을 씻지 않았었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의사도 손을 씻어야 한다고 주장한 이 제멜바이스라는 의사 선생님은 당시에 어떤 대우를 받았을까요.

이 분은 놀라운 발견을 했다면서 높이 평가를 받았는가 하면, 그건 나중이고, 당시에는 정신병자 취급을 받아서 실제로 정신병원에 입원 당하기도 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19세기가 되어서도 여전히 그런 상황이었는데 예수님 당시에 무슨 위생이다 세균이다 하는 생각이 있었겠어요.

그렇다면 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이와 같은 정결의식을 했을까요. 혹시 율법에 그와 같은 규정이 있었기 때문일까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이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의식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손을 씻는다고 하더라도 지금처럼 물로 손을 비벼서 손에 묻은 세균을 씻어 낸다기 보다는 무슨 하나의 격식처럼 해왔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돌항아리가 여섯 개 정도 놓였다고 하는데, 이는 거기에 쓰이는 물을 담아두기 위한 통이었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이 돌항아리에 직접 손을 넣고 씻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물을 길러서 그릇에 담아가지고는 각자 손을 씻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냥 맹물을 넣어서 보관하는 것이었으니까 지저분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겠지요.

그리고 돌항아리가 두세 통이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에 있는 <통>이라고 하는 것은 단위로 사용된 것인데 원어에 의하면 <메트레테스>라고 되어 있어요.

1 메트레테스에 대해서는 신학자들에 따라서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한데, 지금 기준으로 보았을 때, 대체적으로 40리터가 조금 안 되는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38~39리터 정도입니다.

쉽게 계산하기 위해서 1메트레테스를 40리터라고 한다면, 두세 통, 그러니까 2~3메트레테스라고 하면 대충 80리터에서 120리터 정도라고 할 수 있겠지요?

여러분 혹시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만, 바퀴가 달리고 사람 허리 정도까지 오는 쓰레기 통 있잖아요. 그게 대략 120리터 정도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런 돌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7절~8절까지를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2장 7절~8절
“7.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7. イエスは給仕の者たちに言われた。「水がめを水でいっぱいにしなさい。」彼らは水がめを縁までいっぱいにした。
8.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さあ、それを汲んで、宴会の世話役のところに持って行きなさい。」彼らは持って行った。

여기서 <그들>이라고 하는 것은 밑에 9절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거기서 일하는 <하인들(給仕の者たち)>이었습니다.

하인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돌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하세요.

벌써 잔치는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음식을 먹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미 손님들은 손을 씻었겠지요. 그래서 아마도 돌항아리 안에는 물이 많이 줄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물을 채우라고 하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여기까지는 이상한 점이 없겠지요. 본래 거기는 물을 넣어두는 곳이고, 물이 줄었으니까 채우라는 것인데 무엇이 이상하겠어요.

그래서 하인들은 물을 채웠습니다. 그랬더니 이제 그 물을 떠서 연회장한테 갖다 주라고 하세요.

이 시점에서 하인들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이미 사람들은 다 손을 씻고 음식을 먹고 있는데 다시 물을 가져다 주라고 하니 의아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상대방은 손님이요 자신들은 하인이니 어쩔 수 없지요. 그들은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가져다 줍니다. 여기서 연회장이라고 하는 사람은 그 잔치에 있어서 책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상황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2장 1절~3절
“1.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それから三日目に、ガリラヤのカナで婚礼があり、そこにイエスの母がいた。
イエスも弟子たちも、その婚礼に招かれていた。
ぶどう酒がなくなると、母はイエスに向かって「ぶどう酒がありません」と言った。

이 자리는 결혼식인데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해요. 이는 대단히 심각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잔치에서 꼭 있어야 할 포도주가 부족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이 책임은 당연히 연회장(宴会の世話役)에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에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습니다만, 지금 이 잔치 책임자는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적지 않게 당혹스러워 하고 있지 않았나 해요.

그런데 하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떻겠습니까. 지금 아주 곤혹스러워 하고 있는 잔치 책임자에게 다시 손 씻는 물을 떠서 가져가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상상이긴 합니다만, 평상시 같았더라면 이 잔치 책임자는 하인더러 화를 냈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잖아요. 아니, 사람들은 이미 다 손을 씻고는 음식을 먹고 있는데, 왜 다시 손 씻을 물을 가져 오냐면서 꾸짖었을 수도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연회장은 포도주가 떨어져서 정신이 없어요.

어디 남은 포도주가 없냐면서 잘 찾아보라고 성화였는지도 모릅니다.

바로 그 때 하인이 무슨 물 같은 것을 떠왔어요. 그래서 연회장은 이게 바로 찾아낸 포도주인지도 모른다면서 덥석 맛을 보았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게 웬 일이에요. 그 맛이 참 기가 막혀요.

그래서 연회장은 신랑한테 말합니다.

요한복음 2장 10절
“10.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0. こう言った。「みな、初めに良いぶどう酒を出して、酔いが回ったころに悪いのを出すものだが、あなたは良いぶどう酒を今まで取っておきました。」


그리고 11절에 의하면 이와 같은 표적이 바로 예수님이 나타내신 첫 표적(最初のしるし)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 짧은 내용이지만 여기서 다룰 수 있는 내용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한 부분에 주목을 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에서 본다면 이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말씀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어디일까요.

예, 바로 9절에 있는 본문 중에 등장하는 <물이 된 포도주(ぶどう酒になっていたその水)>라는 말씀입니다.

자, 이제 드디어 본론에 들어가보고자 합니다.

이를 단순화시켜서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주님은 A를 B로 만드셨어요. 그렇다면 A가 좋은 것인가요? 아니면 B가 좋은 것인가요.

예, B가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굳이 좋은 것을 안 좋은 것으로 만드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지금 당장 필요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맹물을 이렇게 담아두면, 어느 정도 지나면 포도주가 되지요?

예, 맹물은 아무리 지나도 포도주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 또 한 가지 질문.

포도주를 만들 때 물을 몇 프로나 첨가할까요?

예, 답은 0프로입니다. 와인을 만들 때에는 물을 전혀 첨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물과 포도주>라고 하는 것은, 물론 둘 다 액체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이 둘은 전혀 별개의 것, 그러니까 맹물은 그 자체로 만으로는 포도주가 될 수 없고, 그리고 포도주에는 물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물과 포도주는 그 본질에 있어서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표적이 바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이었다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왜 이를 굳이 첫 표적으로 택하셨을까요.

이는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본질적인 변화>라는 점을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포도주에 대한 비유는 많이 등장합니다. 신학자들은 신학적으로 보았을 때 포도주라고 하는 것은 신약에 있어서의 기독교를 상징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보다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점은, 바로 주님을 믿기 전과 믿은 다음의 변화가 아닐까 합니다.

믿음이 있기 전인 우리는 맹물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게 된 다음부터 우리는 변화됩니다.

그것도 어떤 변화입니까. 그렇죠. 마치 물에서 포도주로 변하는 것처럼 질적인 변화, 완전한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믿음을 가지게 된 사람에게 있어서 볼 수 있는 질적인 변화라고 하는 것은 어떤 모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믿음을 갖기 전과 비교했을 때 어떤 부분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면 꽤 많은 분들이 하시는 말씀이, 술 담배를 끊는 것을 꼽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요. 뭐 술담배가 몸에 안 좋은 건 맞지요. 하지만 그것이 신앙에 있어서 핵심인가요?

제가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만, 술 담배 안 하면서 주님을 믿지 않는 것보다는, 술 담배 하면서라도 주님을 믿는 것이 백 번 천 번 낫습니다.

술담배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성경 해석상에 있어서인 것이지 술담배라고 하는 것이 곧 믿음을 저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담배 같은 것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 15세기 말에 미 대륙을 발견한 컬럼부스 때부터였다고 하는데 그보다도 1400년 전에 쓰여진 성경에 담배 이야기가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와 같은 것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매주 교회에 다니는 것? 아니면 주일에 일을 안 하는 것? 그것이 과연 믿음에 있어서 본질이자 핵심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 살다가 보면 주일에 급한 일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

몸이 안 좋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요즘은 업무상 일요일에 반드시 근무해야 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일요일에 일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면, 일요일에는 버스나 전철을 타서도 안 되고, 식당이나 편의점에 가서도 안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역시 그것도 본질적인 부분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과연 믿음에 있어서 본질이자 핵심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평소에 성경 말씀을 많이 묵상하시는 분들께서는 금방 아실 수가 있습니다.

우리 한 번 십계명을 보시겠습니다.

제1계명이 뭐였죠?

출애굽기 20장 3절
“3.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あなたには、わたし以外に、ほかの神があってはならない。

그리고 제2계명은 그 다음,


출애굽기 20장 4절~5절 전반부
“4.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あなたは自分のために偶像を造ってはならない。上の天にあるものでも、下の地にあるものでも、地の下の水の中にあるものでも、いかなる形をも造ってはならない。
それらを拝んではならない。それらに仕えてはならない。……

자, 이를 우리가 다 아는 말로 하자면 무엇을 하지 말라는 것이에요?

그렇습니다.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것이에요.

한국이나 일본이나 솔직히 법으로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면 술이나 담배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일요일에 어쩌다가 교회에 빠지는 것이 무슨 죄입니까.

그리고 업무상으로 일요일에 근무를 해야 하는 경우가 있어요.

하지만 그것을 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일요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구약 때 안식일이 신약에 와서 일요일이 된 것이 아닙니다.

일요일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해서 지키기 시작한 것이요, 주님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따라서 그 날은 반드시 일요일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나 우상숭배만은 절대로 안 됩니다. 그것은 명백한 죄악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주님과 우리는 신랑과 신부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사람 사이에 있어서도 혼인관계에 있어서 치명적인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서도 재판상 이혼을 청구할 수 있는 요건에 있어서 한국과 일본의 경우를 본다면 공통점이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민법 제840조
1. 배우자에 부정한 행위가 있었을 때
2. 배우자가 악의로 다른 일방을 유기한 때
5. 배우자의 생사가 3년 이상 분명하지 아니한 때

民法第770条
1.配偶者に不貞な行為があったとき。
2.配偶者から悪意で遺棄されたとき。
3.配偶者の生死が3年以上明らかでないとき。
이럴 때에는 재판상 이혼을 청구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를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로 바꾸어 보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주님의 사랑에 대해 배반하고, 우리가 악의로 주님을 섬기지도 않고 의지하지도 않은 채 내버려두고, 그리고 우리가 오랜 동안 주님 앞에 나타나지 않아, 우리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지 못하게 되어 버렸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혼을 청구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여기서 사랑을 배반하는 행위라고 하면 이는 무엇보다 바람을 피우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정당한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배우자가 아닌데도 배우자와 같은 관심을 갖고 만나게 된다면, 이는 진짜 배우자를 배반하는 행위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주님에 대한 부정행위, 즉 사랑의 배반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더도 말고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우상숭배야말로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주님의 그 사랑을 배반하는 행위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시게 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이 아닌 다른 이방 신들을 섬긴다고 생각해보세요.

이렇게 악의에 찬 배반 행위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호수아 24장 20절~21절
“20.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하니
21.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하는지라”

あなたがたが主を捨てて異国の神々に仕えるなら、あなたがたを幸せにした後でも、主は翻って、あなたがたにわざわいを下し、あなたがたを滅ぼし尽くす。」
民はヨシュアに言った。「いいえ。私たちは主に仕えます。」


우상숭배라는 것은 무슨 우상한테 절하는 것만이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애굽에서 이끌어낸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있는 주민들을 쫓아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신명기 9장 5절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あなたが彼らの地を所有することができるのは、あなたが正しいからではなく、またあなたの心が真っ直ぐだからでもない。これらの国々の邪悪さのゆえに、あなたの神、主があなたの前から彼らを追い出そうとしておられるのだ。また主があなたの父祖、アブラハム、イサク、ヤコブになさった誓いを果たすためである。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너희들한테 가나안 땅을 주는 것은 너희들이 잘 해서가 아니야. 너희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이 있었고, 그리고 지금 가나안 땅에 있는 민족들이 악하기 때문에 그들을 내쫓으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세요.


그렇다면 지금 가나안 땅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했길래 악하다고 말씀하십니까.

신명기 18장 9절~12절
“9.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10.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11.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12.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あなたの神、主があなたに与えようとしておられる地に入ったとき、あなたは、その異邦の民の忌み嫌うべき慣わしをまねてはならない。
あなたのうちに、自分の息子、娘に火の中を通らせる者、占いをする者、卜者、まじない師、呪術者、
呪文を唱える者、霊媒をする者、口寄せ、死者に伺いを立てる者があってはならない。
これらのことを行う者はみな、主が忌み嫌われるからである。これらの忌み嫌うべきことのゆえに、あなたの神、主はあなたの前から彼らを追い払われるのである。


그들은 이와 같은 점을 치거나 무슨 귀신을 불러 들인다거나 하는 짓들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내쫓는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즘같이 새해가 되면 여기저기서 점집이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이건 한국이나 일본 마찬가지이요.

그런 데를 왜 가냐고 하면 사람들 하는 말이 뭔지 아십니까. “아이, 뭐 정말 믿는다고 하는 건가. 그냥 재미로 보는 거지.”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우상을 숭배한다는 것이 성경에서 엄격하게 금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미삼아 죄를 저지르시겠습니까.

여러분께서는 내가 사랑하는 배우자가 재미삼아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우고, 재미삼아 다른 사람과 살림을 차렸다고 한다면 그냥 허허 하고 웃어 넘기시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겠습니까.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ですから、だれでもキリストのうちにあるなら、その人は新しく造られた者です。古いものは過ぎ去って、見よ、すべてが新しくなりました。


에베소서 4장 22절~24절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その教えとは、あなたがたの以前の生活について言えば、人を欺く情欲によって腐敗していく古い人を、あなたがたが脱ぎ捨てること、
また、あなたがたが霊と心において新しくされ続け、
真理に基づく義と聖をもって、神にかたどり造られた新しい人を着ることでした。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면 이제 온전히 주님을 믿고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진정으로 주님을 영접하여, 맹물이 아닌 최고의 포도주, 이전 것을 버린 새로운 피조물,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린 새 사람으로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함께 기쁨의 새해 2024년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右にも左にもそれてはならないのです。

これからは心から主を私たちの救い主として受け入れ、真水ではない最高の葡萄酒、古いものは過ぎ去り新しく造られた者、腐敗していく古い人を脱ぎ捨て、新しい人として生まれ変わることによって、主とともに喜びに満ちた新年2024年を生き抜く皆様であらんことを主の御名においてお祈りいたします。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26회 왜 예수님인가
2024년 1월 7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ヨハネの福音書 14章 1節
“「あなたがたは心を騒がせてはなりません。神を信じ、またわたしを信じなさい。”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제 오늘부터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를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복음서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이렇게 네 복음서가 있지요. 이는 모두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처음 오셨을 때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는 대단히 귀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네 복음서 중에서 앞에 있는 세 복음서, 그러니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을 보면 그 내용에나 순서에 있어서 유사한 부분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 복음서를 공통된 관점으로 기록된 복음서라고 해서 공관복음이라고 합니다.

저는 앞서 복음서 강해를 시작함에 있어서 우선 공관복음 강해를 먼저 하고 그 다음에 요한복음을 하려고 했습니다만, 막상 그러려고 했더니 요한복음에서도 다루어야 할 부분이 많이 있을 것 같더라고요.

첫 시간에 다루어야 할 부분이 요한복음이잖아요.

그래서 이번 강해는 공관복음에 한정 짓는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을 포함한 사복음서를 전체적으로 알아보는 식으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순서에 있어서는 너무 성경에 기록된 순서에 얽매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공관복음이라 하더라도 그 순서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따라서 이번 강해는 성경에 기록된 순서를 원칙으로 합니다만, 우선순위에 있어서는 그 내용에 더 중점을 두고 진행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첫번째 시간으로서 “왜 예수님인가” なぜイエス様なのか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록된 것입니다만, 왜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야 하는지를 한 번 짚고 넘어가고 난 다음에 예수님에 대해서 더욱 깊게 공부해보려고 합니다.

자,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왜 알아야 하는 것일까요.

이 부분에 있어서 여러분께서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아, 물론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기본이고 상식일 수 있겠지요.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성경에 다 써 있는데 그걸 무슨 새삼스럽게 묻나, 하고 생각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보통 이렇게 말씀하신 분들은 어떤 분들이냐 하면, 간단합니다. 전도를 안 해본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을 전혀 모르고 믿지 않는 사람들한테 전도를 하는데, 예수님은 당신이 태어나기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는, 당신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셨으니 예수님을 믿으시오……라고 하면, 그 복음을 쉽게 받아들입니까.

물론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면 그 말씀 한 마디로 주님을 영접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는 정말 그야말로 기적이지요. 하지만 이를 논리적으로만 설득하려고 한다면 이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여기서 좀 복습을 해볼까 합니다. <기독교>에서 <기독>은 무슨 뜻이었죠? 예,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사랑 즉 기독 사랑과 이웃사랑, 이렇게 해서 기린선교회인 거잖아요.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메시아, 구세주 즉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 기독교는 예수님을 그 믿음의 중심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요.

자신이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직접 말로 해보거나, 아니면 더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은 글로 한 번 써보는 것입니다.

저도 대학 때 경험이 있는데, 왠지 나 자신은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시험 때 보면 그 내용에 대해서 몇 페이지나 적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답안지에 써 내려 가려고 했더니 몇 줄 안 되어서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나 자신은 많이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그리 많이 알고 있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드리면 너무 막연해서 당황하실 수도 있겠으니까, 우리 질문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세상에는 <사이비>라는 말이 있지요? 이 뜻이 정확하게 무엇입니까. 이는 단순히 <다르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유사하지만 다르다> 그러니까 <비슷하게 보이기는 하는데 그 본질에 있어서는 완전히 다른 것>이 바로 <사이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독교에 보시면 <사이비>, 그러니까 비슷하게 보이기는 하는데 그 내용이 완전히 다른 것이 많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대부분은 <사이비>는커녕 <비이비> 뭐 그런 말은 없습니다만, 대부분 본질이 다를 뿐만 아니라 겉보기도 전혀 비슷하지 않은 이단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이요, 자기가 재림 예수요, 자기가 보혜사요, 자기가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성경을 조금 읽어보면 그와 같은 주장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게 어떻게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사이비, 본질은 완전히 다르긴 한데 겉보기는 비슷하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 드리면 좋을까 하고 생각을 해봤는데, 얼마 전에 아주 좋은 샘플을 발견했습니다.

자, 제가 지금부터 말씀드릴 내용은 어느 종교집단 사이트에 있는 글입니다.

이 주장에 대해서 여러분께서는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반박할 수 있는지 한번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글은 <거기서는 예수님을 믿습니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이에 대한 답변은 이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다. 그분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14:6)

우리는 예수께서 하늘에서 땅으로 오셔서 자신의 완전한 인간 생명을 대속 희생으로 바치셨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마태 20:28)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분에게 믿음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요한 3:16)

또한 우리는 예수께서 현재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왕국의 왕으로 통치하고 계시다는 점도 믿고 있는데, 그 왕국은 머지않아 온 땅에 평화를 이룩할 것입니다. (계시 11:15)


하지만 우리는 “아버지께서 나보다 더 크시다”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요한 14:28) 따라서 우리는 예수가 전능하신 하느님이라고는 믿지 않으며, 그분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はい,信じています。イエスは,「わたしは道であり,真理であり,命です。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だれひとり父のもとに来ることはありません」と述べました。(ヨハネ 14:6)

わたしたちは,イエスが天から地上に来て,完全な人間としての命を贖い(あがない)の犠牲として差し出してくださった,という信仰を抱いています。(マタイ 20:28)

イエスの死と復活により,イエスに信仰を働かせる人は永遠の命を得ら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ヨハネ 3:16)

わたしたちは,現在イエスが天で神の王国の王として統治しておられ,まもなく地球全体に平和をもたらすことも信じています。(啓示 11:15)

とはいえ,イエスが述べた「父はわたしより偉大な方」という言葉もそのとおりに受け止めています。(ヨハネ 14:28)イエスが全能の神であるとは信じていないため,イエスを崇拝することはしません。


자, 여러분께서는 이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반박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어? 그러고보니 그러네? 라고 이 주장을 받아 들이시겠습니까.

저는 이 글을 보았을 때, 조금 다른 의미로 대단히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역시 조금 다른 의미로 대단히 귀한 보화를 찾아낸 기쁨이었습니다. 좀 더 쉽게 표현하자면 <그래! 바로 이거다!>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진정한 사이비, 조금 이상한 말이지만 <누가 봐도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라 <겉모습은 비슷한데 그 본질은 다른 것>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세상에 있는 사이비들은 90프로가 비슷해요. 그러나 본질 부분에서 마지막 10프로가 다른 경우, 이는 분명 결정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 주장도 보세요. 앞부분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내용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머지않아 다시 오셔서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실 것입니다.

이게 이상한가요? 아니요. 이건 제가 항상 드리는 말씀이잖아요. 이상할 것 없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한 끗이 중요한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나보다 크시다고 하신 말씀 그 부분을 들어서, 예수님은 믿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주장은 그 홈페이지에서 세계 수 십 개국어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그만큼 자기들은 자신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이 문장은 글 구도에서부터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이 글은 처음에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다>라고 시작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마지막에 보면, <우리는 예수가 전능하신 하느님이라고는 믿지 않으며, 그분을 숭배하지 않습니다.>로 끝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으면서 이 짧은 글 마지막에는 믿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 문장이 얼마나 허술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일본에서 지금 문제시가 되고 있는 어떤 종교집단에서 기자회견을 했는데, 작년 2023년 11월 7일에 한 내용을 보니까 여기서 어떤 말이 나왔냐 하면, 먼저 자기들이 사과 말씀을 하겠다고 해요. 그래서 기자가 그 사과는 사죄냐 하니까, 사과는 하지만 사죄는 아니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궤변입니까.

앞서 말씀드린 그 내용도 그렇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믿지 않는다는 말로 끝나지 않습니까.

자,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서 반박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을 알아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성경 말씀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각 4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금식하고 계실 때 마귀가 나타나서 예수님을 유혹하지 않습니까. 그 때 예수님께서는 무엇으로 물리치십니까.


마태복음 4장 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イエスは答えられた。「『人はパンだけで生きるのではなく、神の口から出る一つ一つのことばで生きる』と書いてある。」

이는 신명기 8장 3절 말씀이고,

마태복음 4장 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試みてはならない』とも書いてある。」

라고 하신 말씀은 신명기 6장 16절 말씀이고,

마태복음 4장 10절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そこでイエスは言われた。「下がれ、サタン。『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礼拝しなさい。主にのみ仕えなさい』と書いてある。」

라고 하신 말씀은 신명기 4장 13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물리치실 때 무슨 영화처럼 십자가를 내보였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마귀를 물리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이지요.

그런데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니고 직분을 받았다거나, 하물며 교역자라 하더라도 이 성경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말을 들으면 이 말이 맞는 것 같고, 저 말을 들으면 저 말이 맞는 것처럼 들리게 되어서 결국 마귀들의 밥이 되고 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와 같은 주장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떤 말씀을 알아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あなたがたは心を騒がせてはなりません。神を信じ、またわたしを信じなさい。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라고 하세요.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말씀과 <나를 믿는다>라는 말씀에 있어서 한국어는 같은 말을 쓰고 있지만, 원어에서는 다른 말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헬라어 원어를 보더라도 <믿는다>라고 하는 뜻인 <피스튜에테>라는 단어가 <하나님>과 <나>에서 똑같이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원어상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면 역시 똑같이 나도 믿으라 하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그런데 앞서 홈페이지에 있는 주장은 어땠다고요? 하나님은 믿지만 예수님은 안 믿는다 아니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성경공부를 아주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이미 그 믿음이라고 하는 본질에서 예수님이 빠지게 된다고 한다면 아무리 성경공부를 많이 한들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일단 성경에 있어서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서 한 번 복습을 해볼까요. 예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성경에서 예수님은 언제 처음으로 등장하십니까.


요한복음 1장 3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によらずにできたものは一つもなかった。

여기서 <그>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씀이지요. 만물이 예수님에 의해 지어졌으며, 예수님 없이 된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어디에 처음 등장하게 되시냐 하면, 그렇습니다.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바로 여기에 이미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성경은 어떻게 끝이 납니까.

요한계시록 22장 21절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主イエスの恵みが、すべての者とともにありますように。

성경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 그리고 그 마지막 구절인 22장 21절에도 예수님이 등장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은 창세기 1장 1절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 22장 21절까지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은 모두 예수님에 대한 기록으로 시작해서 예수님에 대한 기록으로 끝나는,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 채워진 책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성경공부를 한다면서 예수님을 안 믿는다면 그건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건 말하자면 한국어를 배우겠다면서 가나다라는 안 배우겠다는 말, 일본어를 배우겠다면서 히라가나 카타카나, 한자는 안 배우겠다는 말, 영어공부를 하겠다면서 알파벳은 절대로 안 배우겠다는 말이나 무엇이 다르냐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아버지께서 나보다 더 크시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그와 같은 말씀을 하셨어요.


요한복음 14장 28절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わたしは去って行くが、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戻って来る』とわたしが言ったのを、あなたがたは聞きました。わたしを愛しているなら、わたしが父のもとに行くことを、あなたがたは喜ぶはずです。父はわたしよりも偉大な方だからです。

어디 그 뿐인가요.

요한복음 6장 38절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わたしが天から下って来たのは、自分の思いを行うためではなく、わたしを遣わされた方のみこころを行うためです。

요한복음 7장 16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そこで、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わたしの教えは、わたしのものではなく、わたしを遣わされた方のものです。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오셨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몇 번이나 하셨느냐 하면 요한복음에서만 보더라도 무려 서른 세번이나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가 나보다 높으신 분이니까 나는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이신가요?

일본 사람들에게 널리 존경받는 사람 중에 <야마모토 이소로쿠>라는 과거 일본 해군 사령관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일본 단카처럼 57577로 된 말인데 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해 보여주고 말로 설명해주고 시켜봐 주고, 칭찬해 주어야만 사람은 움직인다”

やってみせ 言って聞かせて させてみて ほめてやらねば 人は動かじ

이 말은 사람을 어떻게 가르치고 성장시킬 것인가에 대한 말이라고 하겠지요.

“해 보여주고 말로 설명해주고 시켜봐 주고, 칭찬해 주어야만 사람은 움직인다”

내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냐 하면, 무엇보다 내가 먼저 해 보여 주어야만 합니다. 그게 가장 효과적이라는 거예요.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말은 21세기 요즘 나온 말이 아니라 서슬 퍼런 군국주의가 팽배하던 시절, 그 정상에 있었던 사람이 한 말이라는 점이라는 사실이지요.

무조건 정신승리, 엄하게 맞아가면서 배워야 한다……뭐 이런 말들이 넘쳐났던 시대였음에도 이와 같은 말이 나왔다는 것이 참 놀랍습니다.

이는 제가 한국에서 일본어를 가르칠 때에도 도움이 된 말이기도 해요. 제가 먼저 이건 이렇게 발음을 한다고 해 보여 줍니다. 또는 이 한자는 이렇게 쓰는 것이라고 써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건 뜻이 뭐고 문법이 어떻고, 한자의 경우에는 훈독이 뭐다 음독이 뭐다 하고 설명을 한 다음에 마지막으로 자, 이제 네가 해봐. 하고 시켜보는 것이지요.

하지만 여기서 끝나면 안 됩니다. 반드시 뭐가 필요해요? 예, 칭찬해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내가 가르친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이지,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가르칠 수도 없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수영을 가르치려고 한다면 수영을 먼저 해 보여야 하는데, 자기는 수영을 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수영을 가르칠 수 있겠냐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은 무엇이었습니까.

이는 명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을 가르쳐 주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순종>인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최초로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불순종 아니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순종을 했더라면 우리는 아무런 걱정 근심 없이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 가운데 살아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인해서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게 되고 말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를 회복시켜야 해요. 불순종으로 인하여 죄에 물들었다면 이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온전한 순종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로마서 5장 19절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すなわち、ちょうど一人の人の不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罪人とされたのと同様に、一人の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義人とされるのです。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되었다면, 완전한 순종을 하나님께 바침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도록 하신 것이지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순종이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16장 25절 후반부~26절 전반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世々にわたって隠されていた奥義の啓示によって──
……今や明らかにされ、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다고 합니다. 누가요? 그렇죠. 예수님께서 나타내신 바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 눈 앞에 나타나신 그 1차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기를 원하셨던 것 그것이 뭐냐 하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순종>이었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예수님은 어떻게 순종하셨습니까.

마태복음 26장 39절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それからイエスは少し進んで行って、ひれ伏して祈られた。「わが父よ、できることなら、この杯をわたしから過ぎ去らせてください。しかし、わたしが望むようにではなく、あなたが望まれるままに、なさってください。」

마태복음 26장 42절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イエスは再び二度目に離れて行って、「わが父よ。わたしが飲まなければこの杯が過ぎ去らないのであれば、あなたのみこころがなりますように」と祈られた。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우리에게 순종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순종은 마지막 십자가까지 이어졌던 것입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은 궁금해 했습니다. 아니, 순종을 하라 순종을 하라고 그러는데 어떻게 하는게 순종하는 거야?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명확한 답을 주는 사람들이 없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이게 바로 순종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순종이다> 라고 우리에게 보여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보다 못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셨어요?

빌립보서 2장 6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고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 직접 나타내신 바 되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해서 그 순종을 보여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이걸 가지고 예수님은 하나님보다 못한 분이시니까 믿을 필요가 없다? 도대체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그런 논리가 나오냐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해서 알지 못했던 것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들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분명히 알게 해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순종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순종을 주님께 드렸을 때 주님께서는 칭찬해 주십니다.

마태복음 25장 21절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主人は彼に言った。『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おまえはわずかな物に忠実だったから、多くの物を任せよう。主人の喜びをともに喜んでくれ。』


이제 예수님을 끝까지 믿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순종을 본받아서, 마지막까지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칭찬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