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6회 왜 예수님인가
2024년 1월 7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ヨハネの福音書 14章 1節
“「あなたがたは心を騒がせてはなりません。神を信じ、またわたしを信じ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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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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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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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제 오늘부터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를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복음서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이렇게 네 복음서가 있지요. 이는 모두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처음 오셨을 때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는 대단히 귀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네 복음서 중에서 앞에 있는 세 복음서, 그러니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을 보면 그 내용에나 순서에 있어서 유사한 부분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 복음서를 공통된 관점으로 기록된 복음서라고 해서 공관복음이라고 합니다.

저는 앞서 복음서 강해를 시작함에 있어서 우선 공관복음 강해를 먼저 하고 그 다음에 요한복음을 하려고 했습니다만, 막상 그러려고 했더니 요한복음에서도 다루어야 할 부분이 많이 있을 것 같더라고요.

첫 시간에 다루어야 할 부분이 요한복음이잖아요.

그래서 이번 강해는 공관복음에 한정 짓는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을 포함한 사복음서를 전체적으로 알아보는 식으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순서에 있어서는 너무 성경에 기록된 순서에 얽매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공관복음이라 하더라도 그 순서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따라서 이번 강해는 성경에 기록된 순서를 원칙으로 합니다만, 우선순위에 있어서는 그 내용에 더 중점을 두고 진행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첫번째 시간으로서 “왜 예수님인가” なぜイエス様なのか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록된 것입니다만, 왜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야 하는지를 한 번 짚고 넘어가고 난 다음에 예수님에 대해서 더욱 깊게 공부해보려고 합니다.

자,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왜 알아야 하는 것일까요.

이 부분에 있어서 여러분께서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아, 물론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기본이고 상식일 수 있겠지요.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성경에 다 써 있는데 그걸 무슨 새삼스럽게 묻나, 하고 생각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보통 이렇게 말씀하신 분들은 어떤 분들이냐 하면, 간단합니다. 전도를 안 해본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을 전혀 모르고 믿지 않는 사람들한테 전도를 하는데, 예수님은 당신이 태어나기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는, 당신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셨으니 예수님을 믿으시오……라고 하면, 그 복음을 쉽게 받아들입니까.

물론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면 그 말씀 한 마디로 주님을 영접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는 정말 그야말로 기적이지요. 하지만 이를 논리적으로만 설득하려고 한다면 이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여기서 좀 복습을 해볼까 합니다. <기독교>에서 <기독>은 무슨 뜻이었죠? 예,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사랑 즉 기독 사랑과 이웃사랑, 이렇게 해서 기린선교회인 거잖아요.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메시아, 구세주 즉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 기독교는 예수님을 그 믿음의 중심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요.

자신이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직접 말로 해보거나, 아니면 더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은 글로 한 번 써보는 것입니다.

저도 대학 때 경험이 있는데, 왠지 나 자신은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시험 때 보면 그 내용에 대해서 몇 페이지나 적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답안지에 써 내려 가려고 했더니 몇 줄 안 되어서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나 자신은 많이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그리 많이 알고 있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드리면 너무 막연해서 당황하실 수도 있겠으니까, 우리 질문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세상에는 <사이비>라는 말이 있지요? 이 뜻이 정확하게 무엇입니까. 이는 단순히 <다르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유사하지만 다르다> 그러니까 <비슷하게 보이기는 하는데 그 본질에 있어서는 완전히 다른 것>이 바로 <사이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독교에 보시면 <사이비>, 그러니까 비슷하게 보이기는 하는데 그 내용이 완전히 다른 것이 많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대부분은 <사이비>는커녕 <비이비> 뭐 그런 말은 없습니다만, 대부분 본질이 다를 뿐만 아니라 겉보기도 전혀 비슷하지 않은 이단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이요, 자기가 재림 예수요, 자기가 보혜사요, 자기가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성경을 조금 읽어보면 그와 같은 주장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게 어떻게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사이비, 본질은 완전히 다르긴 한데 겉보기는 비슷하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 드리면 좋을까 하고 생각을 해봤는데, 얼마 전에 아주 좋은 샘플을 발견했습니다.

자, 제가 지금부터 말씀드릴 내용은 어느 종교집단 사이트에 있는 글입니다.

이 주장에 대해서 여러분께서는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반박할 수 있는지 한번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글은 <거기서는 예수님을 믿습니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이에 대한 답변은 이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다. 그분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14:6)

우리는 예수께서 하늘에서 땅으로 오셔서 자신의 완전한 인간 생명을 대속 희생으로 바치셨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마태 20:28)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분에게 믿음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요한 3:16)

또한 우리는 예수께서 현재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왕국의 왕으로 통치하고 계시다는 점도 믿고 있는데, 그 왕국은 머지않아 온 땅에 평화를 이룩할 것입니다. (계시 11:15)


하지만 우리는 “아버지께서 나보다 더 크시다”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요한 14:28) 따라서 우리는 예수가 전능하신 하느님이라고는 믿지 않으며, 그분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はい,信じています。イエスは,「わたしは道であり,真理であり,命です。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だれひとり父のもとに来ることはありません」と述べました。(ヨハネ 14:6)

わたしたちは,イエスが天から地上に来て,完全な人間としての命を贖い(あがない)の犠牲として差し出してくださった,という信仰を抱いています。(マタイ 20:28)

イエスの死と復活により,イエスに信仰を働かせる人は永遠の命を得ら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ヨハネ 3:16)

わたしたちは,現在イエスが天で神の王国の王として統治しておられ,まもなく地球全体に平和をもたらすことも信じています。(啓示 11:15)

とはいえ,イエスが述べた「父はわたしより偉大な方」という言葉もそのとおりに受け止めています。(ヨハネ 14:28)イエスが全能の神であるとは信じていないため,イエスを崇拝することはしません。


자, 여러분께서는 이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반박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어? 그러고보니 그러네? 라고 이 주장을 받아 들이시겠습니까.

저는 이 글을 보았을 때, 조금 다른 의미로 대단히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역시 조금 다른 의미로 대단히 귀한 보화를 찾아낸 기쁨이었습니다. 좀 더 쉽게 표현하자면 <그래! 바로 이거다!>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진정한 사이비, 조금 이상한 말이지만 <누가 봐도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라 <겉모습은 비슷한데 그 본질은 다른 것>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세상에 있는 사이비들은 90프로가 비슷해요. 그러나 본질 부분에서 마지막 10프로가 다른 경우, 이는 분명 결정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 주장도 보세요. 앞부분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내용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머지않아 다시 오셔서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실 것입니다.

이게 이상한가요? 아니요. 이건 제가 항상 드리는 말씀이잖아요. 이상할 것 없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한 끗이 중요한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나보다 크시다고 하신 말씀 그 부분을 들어서, 예수님은 믿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주장은 그 홈페이지에서 세계 수 십 개국어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그만큼 자기들은 자신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이 문장은 글 구도에서부터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이 글은 처음에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다>라고 시작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마지막에 보면, <우리는 예수가 전능하신 하느님이라고는 믿지 않으며, 그분을 숭배하지 않습니다.>로 끝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으면서 이 짧은 글 마지막에는 믿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 문장이 얼마나 허술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일본에서 지금 문제시가 되고 있는 어떤 종교집단에서 기자회견을 했는데, 작년 2023년 11월 7일에 한 내용을 보니까 여기서 어떤 말이 나왔냐 하면, 먼저 자기들이 사과 말씀을 하겠다고 해요. 그래서 기자가 그 사과는 사죄냐 하니까, 사과는 하지만 사죄는 아니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궤변입니까.

앞서 말씀드린 그 내용도 그렇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믿지 않는다는 말로 끝나지 않습니까.

자,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서 반박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을 알아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성경 말씀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각 4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금식하고 계실 때 마귀가 나타나서 예수님을 유혹하지 않습니까. 그 때 예수님께서는 무엇으로 물리치십니까.


마태복음 4장 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イエスは答えられた。「『人はパンだけで生きるのではなく、神の口から出る一つ一つのことばで生きる』と書いてある。」

이는 신명기 8장 3절 말씀이고,

마태복음 4장 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試みてはならない』とも書いてある。」

라고 하신 말씀은 신명기 6장 16절 말씀이고,

마태복음 4장 10절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そこでイエスは言われた。「下がれ、サタン。『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礼拝しなさい。主にのみ仕えなさい』と書いてある。」

라고 하신 말씀은 신명기 4장 13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물리치실 때 무슨 영화처럼 십자가를 내보였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마귀를 물리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이지요.

그런데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니고 직분을 받았다거나, 하물며 교역자라 하더라도 이 성경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말을 들으면 이 말이 맞는 것 같고, 저 말을 들으면 저 말이 맞는 것처럼 들리게 되어서 결국 마귀들의 밥이 되고 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와 같은 주장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떤 말씀을 알아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あなたがたは心を騒がせてはなりません。神を信じ、またわたしを信じなさい。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라고 하세요.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말씀과 <나를 믿는다>라는 말씀에 있어서 한국어는 같은 말을 쓰고 있지만, 원어에서는 다른 말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헬라어 원어를 보더라도 <믿는다>라고 하는 뜻인 <피스튜에테>라는 단어가 <하나님>과 <나>에서 똑같이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원어상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면 역시 똑같이 나도 믿으라 하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그런데 앞서 홈페이지에 있는 주장은 어땠다고요? 하나님은 믿지만 예수님은 안 믿는다 아니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성경공부를 아주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이미 그 믿음이라고 하는 본질에서 예수님이 빠지게 된다고 한다면 아무리 성경공부를 많이 한들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일단 성경에 있어서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서 한 번 복습을 해볼까요. 예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성경에서 예수님은 언제 처음으로 등장하십니까.


요한복음 1장 3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によらずにできたものは一つもなかった。

여기서 <그>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씀이지요. 만물이 예수님에 의해 지어졌으며, 예수님 없이 된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어디에 처음 등장하게 되시냐 하면, 그렇습니다.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바로 여기에 이미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성경은 어떻게 끝이 납니까.

요한계시록 22장 21절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主イエスの恵みが、すべての者とともにありますように。

성경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 그리고 그 마지막 구절인 22장 21절에도 예수님이 등장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은 창세기 1장 1절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 22장 21절까지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은 모두 예수님에 대한 기록으로 시작해서 예수님에 대한 기록으로 끝나는,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 채워진 책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성경공부를 한다면서 예수님을 안 믿는다면 그건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건 말하자면 한국어를 배우겠다면서 가나다라는 안 배우겠다는 말, 일본어를 배우겠다면서 히라가나 카타카나, 한자는 안 배우겠다는 말, 영어공부를 하겠다면서 알파벳은 절대로 안 배우겠다는 말이나 무엇이 다르냐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아버지께서 나보다 더 크시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그와 같은 말씀을 하셨어요.


요한복음 14장 28절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わたしは去って行くが、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戻って来る』とわたしが言ったのを、あなたがたは聞きました。わたしを愛しているなら、わたしが父のもとに行くことを、あなたがたは喜ぶはずです。父はわたしよりも偉大な方だからです。

어디 그 뿐인가요.

요한복음 6장 38절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わたしが天から下って来たのは、自分の思いを行うためではなく、わたしを遣わされた方のみこころを行うためです。

요한복음 7장 16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そこで、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わたしの教えは、わたしのものではなく、わたしを遣わされた方のものです。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오셨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몇 번이나 하셨느냐 하면 요한복음에서만 보더라도 무려 서른 세번이나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가 나보다 높으신 분이니까 나는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이신가요?

일본 사람들에게 널리 존경받는 사람 중에 <야마모토 이소로쿠>라는 과거 일본 해군 사령관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일본 단카처럼 57577로 된 말인데 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해 보여주고 말로 설명해주고 시켜봐 주고, 칭찬해 주어야만 사람은 움직인다”

やってみせ 言って聞かせて させてみて ほめてやらねば 人は動かじ

이 말은 사람을 어떻게 가르치고 성장시킬 것인가에 대한 말이라고 하겠지요.

“해 보여주고 말로 설명해주고 시켜봐 주고, 칭찬해 주어야만 사람은 움직인다”

내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냐 하면, 무엇보다 내가 먼저 해 보여 주어야만 합니다. 그게 가장 효과적이라는 거예요.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말은 21세기 요즘 나온 말이 아니라 서슬 퍼런 군국주의가 팽배하던 시절, 그 정상에 있었던 사람이 한 말이라는 점이라는 사실이지요.

무조건 정신승리, 엄하게 맞아가면서 배워야 한다……뭐 이런 말들이 넘쳐났던 시대였음에도 이와 같은 말이 나왔다는 것이 참 놀랍습니다.

이는 제가 한국에서 일본어를 가르칠 때에도 도움이 된 말이기도 해요. 제가 먼저 이건 이렇게 발음을 한다고 해 보여 줍니다. 또는 이 한자는 이렇게 쓰는 것이라고 써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건 뜻이 뭐고 문법이 어떻고, 한자의 경우에는 훈독이 뭐다 음독이 뭐다 하고 설명을 한 다음에 마지막으로 자, 이제 네가 해봐. 하고 시켜보는 것이지요.

하지만 여기서 끝나면 안 됩니다. 반드시 뭐가 필요해요? 예, 칭찬해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내가 가르친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이지,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가르칠 수도 없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수영을 가르치려고 한다면 수영을 먼저 해 보여야 하는데, 자기는 수영을 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수영을 가르칠 수 있겠냐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은 무엇이었습니까.

이는 명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을 가르쳐 주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순종>인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최초로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불순종 아니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순종을 했더라면 우리는 아무런 걱정 근심 없이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 가운데 살아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인해서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게 되고 말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를 회복시켜야 해요. 불순종으로 인하여 죄에 물들었다면 이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온전한 순종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로마서 5장 19절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すなわち、ちょうど一人の人の不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罪人とされたのと同様に、一人の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義人とされるのです。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되었다면, 완전한 순종을 하나님께 바침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도록 하신 것이지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순종이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16장 25절 후반부~26절 전반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世々にわたって隠されていた奥義の啓示によって──
……今や明らかにされ、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다고 합니다. 누가요? 그렇죠. 예수님께서 나타내신 바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 눈 앞에 나타나신 그 1차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기를 원하셨던 것 그것이 뭐냐 하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순종>이었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예수님은 어떻게 순종하셨습니까.

마태복음 26장 39절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それからイエスは少し進んで行って、ひれ伏して祈られた。「わが父よ、できることなら、この杯をわたしから過ぎ去らせてください。しかし、わたしが望むようにではなく、あなたが望まれるままに、なさってください。」

마태복음 26장 42절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イエスは再び二度目に離れて行って、「わが父よ。わたしが飲まなければこの杯が過ぎ去らないのであれば、あなたのみこころがなりますように」と祈られた。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우리에게 순종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순종은 마지막 십자가까지 이어졌던 것입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은 궁금해 했습니다. 아니, 순종을 하라 순종을 하라고 그러는데 어떻게 하는게 순종하는 거야?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명확한 답을 주는 사람들이 없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이게 바로 순종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순종이다> 라고 우리에게 보여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보다 못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셨어요?

빌립보서 2장 6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고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 직접 나타내신 바 되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해서 그 순종을 보여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이걸 가지고 예수님은 하나님보다 못한 분이시니까 믿을 필요가 없다? 도대체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그런 논리가 나오냐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해서 알지 못했던 것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들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분명히 알게 해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순종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순종을 주님께 드렸을 때 주님께서는 칭찬해 주십니다.

마태복음 25장 21절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主人は彼に言った。『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おまえはわずかな物に忠実だったから、多くの物を任せよう。主人の喜びをともに喜んでくれ。』


이제 예수님을 끝까지 믿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순종을 본받아서, 마지막까지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칭찬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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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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