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9회 낡은 부대를 새 부대로 (2)
2024년 1월 28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9장 17절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マタイの福音書 9章 17節
“また、人は新しいぶどう酒を古い皮袋に入れたりはしません。そんなことをすれば皮袋は裂け、ぶどう酒が流れ出て、皮袋もだめになります。新しいぶどう酒は新しい皮袋に入れます。そうすれば両方とも保て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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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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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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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4번째 시간으로서 “낡은 부대를 새 부대로(2)” 古い革袋を新しい革袋に(2)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에는 경건이라고 하는 낡은 부대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경건이라고 하는 것은 경건 그 자체로 있는다면 아름다울 수 있겠으나 거기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빠지게 된다면 그것은 경건이 아니라 오히려 교만이라고 하는 죄가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이 외에도 우리가 그 동안 당연시해왔던 낡은 부대들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부터 해볼까요. 오늘은 성경책이나 십자가이라고 하는 낡은 부대부터 시작해볼까 합니다.

자, 교회에 걸려있는 십자가,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책에 능력이 있습니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 드려볼까요. 자동차에 성경책을 싣고 다니면 사고가 나지 않는다. 맞습니까. 틀립니까.


이에 대해서 틀리다고 하신 분들께 질문을 드립니다. 아니, 성경책에 능력이 없어요? 성경책에 능력이 있다면 성경책을 차에 싣고 다닐 경우 사고가 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십자가를 목걸이로 걸고 다니면 십자가 목걸이를 안 한 사람보다 좋은 일이 더 많이 일어난다. 맞습니까, 틀립니까.

이에 대해서도 틀리다고 하신 분들께 질문을 드립니다. 십자가에 능력이 없어요? 십자가에 능력이 있다고 한다면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니면 좋은 일들이 생기고, 십자가를 차에 매달고 다니면 사고도 안 일어나야 하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무엘상 4장에 보시면 흥미로운 장면이 등장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군은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어요.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치지는 못하고 오히려 사망자만 늘어 가서, 사무엘상 4장 2절에 의하면 이미 4천 명이나 죽임을 당한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이를 보다 못한 이스라엘 장로들은 그들이 신성시하고 있던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오자고 합니다.


언약궤는 무엇입니까.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직접 쓰신 돌판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주신 것인데, 광야에서 40년 동안 어디를 가든 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 언약궤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재 했었습니다.

지금 전쟁터에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지고 있어요. 그렇다면 거룩한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오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부랴부랴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져왔습니다.

사무엘상 4장 5절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主の契約の箱が陣営に来たとき、全イスラエルは大歓声をあげた。それで地はどよめいた。

자, 이제 우리는 전쟁에서 이긴다. 승리할 수 있다. 이제 하나님의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숙적 블레셋 군대를 물리쳐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군대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올랐습니다.


그런데 전쟁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예상했던 대로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였어요.

사무엘상 4장 10절~11절
“10.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11.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こうしてペリシテ人は戦った。イスラエルは打ち負かされ、それぞれ自分たちの天幕に逃げ、非常に大きな打撃となった。イスラエルの歩兵三万人が倒れた。
神の箱は奪われ、エリの二人の息子、ホフニとピネハスは死んだ。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오기 전에는 죽임을 당한 자가 4천 명이었는데, 오히려 언약궤를 가져오고 싸웠더니 그 희생자가 3만 명이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모자라서 언약궤 마저도 이방인인 적군한테 빼앗겨 버렸다고 합니다.

아니, 그들이 가져온 언약궤가 가짜였어요? 아닙니다. 진짜 하나님의 언약궤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군은 크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어디에 잘못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군이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그 언약궤를 믿었다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하나님의 그 언약궤를 우상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에 크나큰 문제가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앞서 말씀 드렸던 성경책이나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책이나 십자가 모두 소중한 것이지요. 하지만 이는 그 물건이 거룩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 물건 자체를 거룩하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우상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책이나 십자가는 경우에 따라서 우상이 되어 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상은 아무런 능력도 없습니다. 오히려 해악이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또 우리에게 우상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예수님 마저도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아니, 무슨 해괴한 소리냐. 어떻게 예수님이 우상이 될 수 있느냐고 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닙니다. 성경에도 이와 같은 장면이 등장합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든 사람을 치료하고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물리치고 하는 모습들을, 대단히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냥 민간인도 아니고 제사장 아들이에요. 그들은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모습이 부러웠나 보죠?

가만히 보니까 예수 이름으로 명하기만 하면 병이 낫고 귀신들이 물러가요. 그러면 사람들이 놀라고 기뻐하고 막 그래요. 그런 모습을 보고 옳지, 그래, 나도 한 번 해보자. 하는 마음이 생길 만도 하지 않겠어요?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다고 나와 있습니까.

사도행전 19장 13절~16절
“13.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14.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ところが、ユダヤ人の巡回祈祷師のうちの何人かが、悪霊につかれている人たちに向かって、試しに主イエスの名を唱え、「パウロの宣べ伝えているイエスによって、おまえたちに命じる」と言ってみた。
このようなことをしていたのは、ユダヤ人の祭司長スケワという人の七人の息子たちであった。
すると、悪霊が彼らに答えた。「イエスのことは知っているし、パウロのこともよく知っている。しかし、おまえたちは何者だ。」
そして、悪霊につかれている人が彼らに飛びかかり、皆を押さえつけ、打ち負かしたので、彼らは裸にされ、傷を負ってその家から逃げ出した。

이 글의 문맥으로 본다면, 제사장 아들들도 귀신 들린 사람한테 가서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일단 그들은 예수라는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바울이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치길래 그들도 바울이 하는 것처럼 따라하려고 했을 뿐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예수>라고 하는 우상의 능력을 의지하려고 했을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주님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귀가 뭐라고 했어요.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라고 하면서 오히려 귀신 들린 사람이 덤벼 들어서 이기더니만 그 사람들은 벗은 몸으로 도망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망신입니까.

이처럼 성경책이나 십자가와 같은 물건이 우리 눈에는 아무리 거룩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자칫하면 우상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와 같은 사실을 이미 알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놀랍게도 신약이 아니라 더 옛날 구약에 나오는 인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갈라져 있을 당시를 보면, 문제가 많은 왕들이 태반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우상을 섬겼던 왕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요.

하지만 그 중에도 마치 다윗처럼 하나님께 순종했던 왕이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몇 안 되는 왕 중에 하나님께 순종했던 왕 중 하나가 바로 제13대 유다 왕 히스기야라고 할 수 있겠지요.

히스기야 왕의 아버지는 아하스였습니다. 그도 역시 유다 왕이었는데 그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열왕기하 16장 2절~4절
“2.아하스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간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아니하고
3.이스라엘의 여러 왕의 길로 행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4.또 산당들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アハズは二十歳で王となり、エルサレムで十六年間、王であった。彼はその父祖ダビデとは違って、彼の神、主の目にかなうことを行わず、
イスラエルの王たちの道に歩み、主がイスラエルの子らの前から追い払われた異邦の民の、忌み嫌うべき慣わしをまねて、自分の子どもに火の中を通らせることまでした。
彼は高き所、丘の上、青々と茂るあらゆる木の下でいけにえを献げ、犠牲を供えた。


이처럼 히스기야 왕의 아버지인 아하스는 다른 불순종한 왕들처럼 우상을 섬기고 우상한테 제사를 드리고 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히스기야 왕은 어땠을까요.

자, 여기서 우리는 잠시 조금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볼까 합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모세가 만든 놋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를 행할 때 이스라엘 자손들은 뻑 하면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면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를 해서 그들의 소원을 들어 주기도 했었던 것이지요.

이와 같은 일들이 반복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자손들은 어쩌면 안 좋은 것을 학습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자신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면,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를 해서,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진다는 식의 대단히 비뚤어진 법칙을 터득했는지도 모르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래서인지 그 날도 그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합니다.


민수기 21장 5절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神とモーセに逆らって言った。「なぜ、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をエジプトから連れ上って、この荒野で死なせようとするのか。パンもなく、水もない。われわれはこのみじめな食べ物に飽き飽きしている。」

하지만 그들이 생각했던 법칙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망이나 불평 불만으로 역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민수기 21장 6절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そこで主は民の中に燃える蛇を送られた。蛇は民にかみついたので、イスラエルのうちの多くの者が死んだ。

하나님께서는 불뱀들을 보내셔서 불평불만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구 물어버리게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어떻게 했어요?

민수기 21장 7절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民はモーセのところに来て言った。「私たちは主とあなたを非難したりして、罪を犯しました。どうか、蛇を私たちから取り去ってくださるよう主に祈ってください。」モーセは民のために祈った。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혼이 나더니 그제서야 아이구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라고 애원을 합니다. 그러자 이제 모세가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민수기 21장 8절~9절
“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すると主はモーセに言われた。「あなたは燃える蛇を作り、それを旗ざおの上に付けよ。かまれた者はみな、それを仰ぎ見れば生きる。」
モーセは一つの青銅の蛇を作り、それを旗ざおの上に付けた。蛇が人をかんでも、その人が青銅の蛇を仰ぎ見ると生きた。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명하시기를 불뱀 같은 것을 만들어서 장대 위에 높이 매달고는 그것을 보게 하라고 하세요. 그래서 모세가 놋으로 불뱀처럼 만들어서 장대 위에 높이 매달아 놓고는, 뱀에 물린 사람들이 그것을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 놋뱀을 봤더니 불뱀에 물려서 괴로워했던 사람들이 회복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놋뱀이 달린 장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신명기 21장 23절 후반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木にかけられた者は神にのろわれた者だからである。……

즉 나무에 달렸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상하게 한 불뱀들이 나무에 달림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불뱀으로 인한 상처가 모두 나음을 입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채로 십자가라고 하는 나무에 매달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 되신 예수님이 저주를 받으셨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지고 구원으로 이르는 길이 열렸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다 제12대 왕이었던 아하스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우상을 섬기는 짓을 했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히스기야 왕은 오히려 하나님께 순종하는 왕이었습니다.


열왕기하 18장 3절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彼は、すべて父祖ダビデが行ったとおりに、主の目にかなうことを行った。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했길래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느냐 하면 다음 구절입니다.

열왕기하 18장 4절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高き所を取り除き、石の柱を打ち砕き、アシェラ像を切り倒し、モーセが作った青銅の蛇を砕いた。そのころまで、イスラエル人がこれに犠牲を供えていたからである。これはネフシュタンと呼ばれていた。

신학자들은 모세에 의해 놋뱀이 만들어진 시기를 대략 기원전 1410년 경으로 보고 있는데, 히스기야 왕이 즉위한 시기는 대략 기원전 720년 경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히스기야 왕이 즉위한 시기는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만든 시기로부터 대략 700년이 흐른 뒤라고 할 수 있겠지요? 
여기서 놀라운 것은 그 히스기야 왕이 즉위할 때까지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이 현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700년이라고 하는 세월도 세월이지만, 모세가 만든 놋뱀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뜻깊은 물건이었기 때문에,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그야말로 국보급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 놋뱀을 소중히 여겼을 뿐만 아니라 그 놋뱀한테 분향까지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백성들로부터 소중하게 여김을 받고,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대단히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왕으로서는 더욱 더 이를 잘 보존하기 위해 애를 써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히스기야는 어떻게 했냐 하면, 반대로 그 놋뱀을 완전히 부숴버리고 그것을 <느후스단(ネフシュタン)>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느후스단>이라는 것은 <놋조각> 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여러분께서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니까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부숴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 흔적을 아무런 가치가 없는 한낱 놋조각, 고철덩이에 불과한 것이라고 선언했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일은 어쩌면 백성들의 반감을 불러왔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와 같은 히스기야를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열왕기하 18장 5절~6절
“5.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6.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彼はイスラエルの神、主に信頼していた。彼の後にも前にも、ユダの王たちの中で、彼ほどの者はだれもいなかった。
彼は主に堅くつき従って離れることなく、主がモーセに命じられた命令を守った。

참으로 이런 찬사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히스기야는 모세가 만든 놋뱀을 부숴버렸는데 오히려 그것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킨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히스기야는 왜 굳이 모세가 만든 놋뱀을 부숴버리고 말았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그 놋뱀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으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들은 말입니다만, 한약재 중에서 어떤 약재는 그 효능이 탁월한데, 문제는 복용할 때 반드시 차갑게 먹어야 한다고 해요. 만약에 이를 따뜻하게 해서 먹게 된다면 오히려 독이 되어 경우에 따라서는 사망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님이라는 이름은 물론, 성경책이나 십자가가 중요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를 우리의 새로운 가죽부대에 담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무럭무럭 성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마치 우상이라고 하는 낡은 가죽부대에 담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머지않아 여기저기서 포도주가 새어 나오게 되어, 마침내는 그나마 있던 우리의 믿음 자체가 모두 사라지게 되거나 오히려 우리에게 해악을 끼치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 말씀에 성경책 자체에 능력이 있다고 되어 있나요?

신명기 8장 3절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それで主はあなたを苦しめ、飢えさせて、あなたも知らず、あなたの父祖たちも知らなかったマナを食べさせてくださった。それは、人はパンだけで生きるのではなく、人は主の御口から出るすべてのことばで生きるということを、あなたに分からせるためであった。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까지 40년 동안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게 해서 먹도록 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사람이 거두어서 먹는 떡이 아니라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시기 위해서라고 하는 것이지요.

아무리 맛이 있는 떡이나 빵이라 하더라도 이를 포장지에 넣어둔 채로 가지고만 있는다고 해서 배가 불러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가지고만 있으면 결국 배가 고파지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죠. 그 포장지를 뜯어서 먹어야지만 배가 부르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는 배우지 못한 어린 아이들도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다 큰 어른들, 배울만큼 배운 어른들이 그것도 모르고 그저 성경책만 들고 다닙니까. 그것 만으로는 아무런 능력이 없어요. 성경책을 펴서 그 안에 적힌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먹었을 때 진정한 능력이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 십자가를 보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흘려 주신 피를 기억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독생자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해야만 해결될 수 있었던 내 죄악을 기억하고, 뿐만 아니라 그렇게까지 하시면서 우리에게 사랑을 확실하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단순히 패션으로 걸고 다닌다거나 형식적으로 벽에 걸어 놓게 된다면, 이는 마치 모세가 만든 놋뱀이 <느후스단(ネフシュタン)> 그저 놋조각이 되어 버린 것처럼, 십자가도 역시 나무조각, 쇳조각, 고철덩어리가 되어 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4절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真理に基づく義と聖をもって、神にかたどり造られた新しい人を着ることでした。

성경은 우리에게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새 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어떻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골로새서 3장 9절~10절
“9.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互いに偽りを言っ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がたは古い人をその行いとともに脱ぎ捨てて、
新しい人を着たのです。新しい人は、それを造られた方のかたちにしたがって新しくされ続け、真の知識に至ります。


그냥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고 새로워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새 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그 지식에까지 새롭게 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케케묵은 오래된 관습이나 관행에서 벗어나, 주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새 사람을 입어 진정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어서, 새로운 가죽 부대에 새로운 믿음 진정한 믿음을 갖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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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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