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8회 낡은 부대를 새 부대로 (1)
2024년 1월 21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9장 17절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マタイの福音書 9章 17節
“また、人は新しいぶどう酒を古い皮袋に入れたりはしません。そんなことをすれば皮袋は裂け、ぶどう酒が流れ出て、皮袋もだめになります。新しいぶどう酒は新しい皮袋に入れます。そうすれば両方とも保て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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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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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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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3번째 시간으로서 “낡은 부대를 새 부대로 (1)” 古い革袋を新しい革袋に (1)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이 기독교는 지금까지 적지 않은 변화를 겪어 왔습니다.

그 변화 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꼽는다면 무엇보다 구약에서 신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진정한 하나님을 믿는 종교란 유대교 밖에 없었지요. 그 외에는 다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유대교는 대단히 폐쇄적이었습니다. 이방인에게 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금지 되어 있었습니다. 유대교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유일한 민족이라고 믿었던 유대인들 만을 위한 종교로 여겨졌던 것이지요.

그러다가 이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이야 말로 진정으로 하나님 말씀을 잘 알고 있고, 자신들의 말대로 하면 틀림없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2천년 전에 오셨을 때, 그들에게 칭찬을 했을까요.

아니요. 오히려 대단히 심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3장 13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わざわいだ、偽善の律法学者、パリサイ人。おまえたちは人々の前で天の御国を閉ざしている。おまえたち自身も入らず、入ろうとしている人々も入らせない。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천국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아버리고서 자기들도 못 들어가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못 들어가게 만들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이와 같이 심한 꾸짖음을 들은 것일까요.

이어서 마태복음 23장을 계속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6절~22절
“16.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7.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9.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21.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2.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わざわいだ、目の見えない案内人たち。おまえたちは言っている。『だれでも神殿にかけて誓うのであれば、何の義務もない。しかし、神殿の黄金にかけて誓うのであれば、果たす義務がある。』
愚かで目の見えない者たち。黄金と、その黄金を聖なるものにする神殿と、どちらが重要なのか。
また、おまえたちは言っている。『だれでも祭壇にかけて誓うのであれば、何の義務もない。しかし、祭壇の上のささげ物にかけて誓うのであれば、果たす義務がある。』
目の見えない者たち。ささげ物と、そのささげ物を聖なるものにする祭壇と、どちらが重要なのか。
祭壇にかけて誓う者は、祭壇とその上にあるすべてのものにかけて誓っているのだ。
また、神殿にかけて誓う者は、神殿とそこに住まわれる方にかけて誓っているのだ。
天にかけて誓う者は、神の御座とそこに座しておられる方にかけて誓っているのだ。


이 말씀을 간단하게 정리를 해볼까요.

자, 맹세를 하면 지켜야 하는데, 그들은 사람들한테 어떻게 가르쳤냐 하면, 성전이나 제단을 두고 맹세를 하면 안 지켜도 되지만, 성전의 금이나 제단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를 하면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게 완전히 반대라는 것이지요.

사실 본래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는 성전이나 제단을 두고 맹세를 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는 그 사람들이 율법을 잘못 인용 했다고 하기 보다는 율법의 해석에 있어서 엉터리로 가르쳤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에도 만약에 이런 식으로 학교나 학원에서 가르쳤다고 생각해보세요. 한 선생님이 어떤 문제에 있어서 정답은 A인데 B라고 가르쳤다고 한다면 그 학생들이 그 문제를 맞출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그 선생님한테 안 배웠더라면 그 문제를 맞출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괜히 그 선생님한테 배우는 바람에 어이없게 정답을 못 맞추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게 무슨 학교에서 보는 간단한 시험이라면 대수롭지 않겠지만, 입학시험이라고 생각해보세요. 그 문제 하나 때문에 합격과 불합격이 갈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또한 당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사실 613가지였는데, 이를 2134가지까지 늘려서 사람들한테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어했겠습니까.

이처럼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와 같은 잘못을 버젓이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마치 자신들이 제대로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목에 힘을 주고 다녔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심한 말씀으로 꾸짖으셨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마치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시고는 이미 예고하셨던 바와 같이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실 때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가복음 16장 15절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それから、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福音を宣べ伝えなさい。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유대인들만 믿는 것이 아니라 만민, 그러니까 세계 모든 민족에게 전파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유대교에서 새롭게 탄생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회가 점점 성경에서 멀어집니다. 또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자꾸 사람들의 해석이 들어가더니 이제는 사람들의 생각이 하나님 말씀보다 더욱 권위를 갖게 되기에 이릅니다.

당시 성경은 라틴어 성경이었는데 문제는 사람들이 라틴어를 읽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라틴어 성경만이 있었던 것이고,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설교를 할 때에도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로 하고 있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은 성경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사제들만 성경을 알고 다른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성경을 가지고 있는 사제들이 하는 말이 곧 성경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처럼 여겨지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사제들만 성경을 알고 다른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게 함으로써, 사제들이 하는 말이 곧 성경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처럼 여겨지게 만들고는, 그런 식으로 해서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려고 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이는 그야말로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저질렀던 일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무엇이 일어납니까. 그렇죠. 1517년 독일의 마르틴 루터에 의해 종교혁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가 외쳤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오직 말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교회가 마치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했던 것처럼 말씀 즉 성경에서 멀어지고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해서 사람들한테 지키도록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종교혁명을 일으키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이냐 하면, 무엇보다 일반 성도들부터 성경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해서 성경을 자신들의 모국어였던 독일어로 번역한 것이죠.

이렇게 되니까 그제서야 무엇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무엇이 사람들 멋대로 갖다 붙인 엉터리 가르침인가 하는 것이 모두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종교혁명을 거치면서 그리스도교는 구교에서 나와 신교로 자리잡게 되어서 오늘날의 기독교가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되풀이하기 때문일까요. 이제 이 기독교가 문제입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생각이 아닌 사람들의 생각이 적지 않게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되면 무슨 문제가 생기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말씀이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정답이 아닌 것을 정답이라고 말하게 되기도 하는, 그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과거에는 일반 성도들이 성경을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 당시에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그리고 16세기에는 라틴어를 이해할 수 있었던 사제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이를 지키도록 강요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성경책이 웬만한 나라에서도 모국어로 읽을 수가 있습니다.

인쇄기술도 얼마나 좋아졌고 책 자체도 얼마나 튼튼한 지 모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옛날에는 가격도 꽤 비쌌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그래도 많이 내려간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 몇 년 다니신 분들이라면 그 집에 성경책이 한 두 권 이상은 보통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성경책을 구할 수가 없어요? 그럼 조금 큰 교회에 가서 부탁을 하면 거기 비치되어 있는 성경책 한 권 정도는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잖아요.

보통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교회라면 수 십 권, 수 백 권의 성경책이 있기 마련인데, 성경책을 읽고 믿어보려고 하는데 돈이 없어서 구하지 못한다고 하는 사람한테, 거기서 중고 성경책 한 권 못 주겠어요?

그리고 성경에 적힌 글이 너무 어렵다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과거에는 이른바 <가라사대> 라고 하는 비교적 좀 난해하다고 할 수 있는 한글 개역 성경밖에 없었고 더구나 세로쓰기였기 때문에 많은 분들에게 좀 읽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실 50년대,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전체 국민의 교육수준이 그리 높지 않았었잖아요.

그러니까 그 두꺼운 성경을 읽는 것보다는 그저 목사님이 해주시는 말씀이 성경 말씀이려니 했던 것이고, 그리고 성경말씀을 공부하는 것보다는 그저 금식하고 기도하고 그러면 방언이 나오고 병이 낫고 그리고 부자가 되고……그것이 할렐루야……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한국이나 일본을 보더라도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을 비롯한 고등교육기관에 대한 진학률이 70프로가 넘는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공부 잘 하는 일부 수제들만 들어갔던 대학인데, 지금은 학교 수도 늘어나고 반면에 인구는 줄어들어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학교 이름에 욕심을 내지 않는다고 한다면 솔직히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곳도 많다고 하지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책 종류도 다양해 져서, 현대인의 성경, 쉬운 성경, 새번역 성경 등 보통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 된 성경들도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몰라요.


하지만 이와 같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기독교에는 어쩌면 과거와 똑 같은 문제들이 생겨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 그리고 개신교로 발전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똑 같은 문제들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성경으로부터 멀어지고 말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누구나 성경을 손쉽게 읽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이 성경으로부터 멀어졌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인 것이지요.

아무리 책값이 떨어지고 아무리 말투가 쉬워지고, 아무리 책을 튼튼하게 만들고 아무리 사람들의 교육수준이 높아졌다 하더라도, 결국 사람들이 읽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일이 이렇게 되면 역시 문제는 다시 도지게 됩니다.

과거에는 바리새인들이나 사제가 <성경을 읽지 못하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해서, 하나님 말씀대로가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 가르치다가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면, 이제는 목사나 교역자가 <성경을 읽지 않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해서 자기 멋대로 가르치게 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무슨 일들이 일어나게 되느냐 하면 바로 낡은 가죽부대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말씀은 그렇지 않은데도 사람들의 낡은 생각에 사로잡혀서 마치 그게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사람들한테 인식이 되어서 결국 낡은 가죽부대들이 여기저기에서 펑펑 하고 터지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와 같은 낡은 가죽부대를 없애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경을 읽고 올바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정말로 성경을 읽기 싫어하는 것인가 하면,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싶어해요. 성경을 알고 싶어해요. 그런데 문제가 뭐냐 하면 기존 교회에서 제대로 성경공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지냐 하면 이상한 종교집단들이 사람들을 유인하게 되는데 그 미끼가 뭐냐 하면 바로 <성경공부>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너희들 교회에서는 성경을 안 가르치지? 하지만 우리 교회는 성경공부를 열심히 해……이렇게 해서 사람들을 유인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막상 그런 데에 가보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이상하게 해석해서 결국 자신들의 교주를 신격화 하게 만드는 세뇌교육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다 누구 책임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기존 교회 책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기존 교회에서 제대로 성경 말씀을 전하지 않고 무슨 자기 생각이나 자기 경험만을 전하고 그러니 사람들이 성경말씀에 대해서 갈망하게 되어서 결국 이상한 곳으로 빠지고 마는 것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이번에 저는 이와 같은 낡은 부대를 버리고 새 부대로 만들기 위해서 과연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낡은 부대가 무엇인지,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 지를 좀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오늘은 간략하게 한 가지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른바 낡은 부대 중에서 대표적인 낡은 부대가 무엇인가 하면 바로 <경건>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경건, 사실 이 경건이라고 하는 것을 안 좋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여기에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복음 18장 9절~14절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自分は正しいと確信していて、ほかの人々を見下している人たちに、イエスはこのようなたとえを話された。
「二人の人が祈るために宮に上って行った。一人はパリサイ人で、もう一人は取税人であった。
パリサイ人は立って、心の中でこんな祈りをした。『神よ。私がほかの人たちのように、奪い取る者、不正な者、姦淫する者でないこと、あるいは、この取税人のようでないことを感謝します。
私は週に二度断食し、自分が得ているすべてのものから、十分の一を献げております。』
一方、取税人は遠く離れて立ち、目を天に向けようともせず、自分の胸をたたいて言った。『神様、罪人の私をあわれんでください。』
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が、義と認められて家に帰ったのは、あのパリサイ人ではなく、この人です。だれでも自分を高くする者は低くされ、自分を低くする者は高くされるのです。」


여기에 나오는 “토색, 불의, 간음”이라고 하는 말씀은 남들 것을 빼앗거나 남들을 속이거나 윤리적으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奪い取る者、不正な者、姦淫する者) 바리새인은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도 드린다면서 감사 드린다고 해요.

사실 따지고 본다면 이정도의 경건함이 그리 쉽습니까. 하루에 한 끼만 걸러도 배가 고파서 정신이 혼미해질 수도 있는데, 일주일에 두 번이나 금식을 한대요. 그리고 십일조도 꼬박꼬박 드리고, 절대 나쁜 짓은 안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사람에 대한 본심을 정확하게 표현하십니다. 그는 뭐라고 기도합니까.

그렇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この取税人のようでないことを感謝します)>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가 경건이라고 생각한 그 모습은 경건 그 자체로 있었다면 아름다운 것이었겠으나, 자기 바로 옆에 있는 이웃을 멸시하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경건이라고 하는 이름의 낡은 부대가 터지는 순간 아니겠습니까.

경건이라는 이름의 낡은 부대가 터지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교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는 주님께서 주신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을 드릴 때 항상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이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이 이웃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똑같이 중요하다는 말씀인 것이지요.

세상에는 법률이나 조례, 규칙 등이 수 만 가지도 넘습니다만, 그 모든 법률이나 조례나 규칙 등은 어디에 위배되어서는 안 되는가 하면, 바로 헌법에서 벗어나면 안 됩니다.

만약에 헌법에서 벗어난다고 법원에서 판결이 나오면 그 즉시로 그 규정은 무효가 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주신 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말씀은 우리 믿음에 있어서 헌법과도 같습니다.

아무리 유명한 목사님이나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라 하더라도 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그 순간 그 가르침은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이웃은 누구입니까. 그것은 말 그대로 내 옆에 있는 사람, 내 근처에 있는 사람,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이 바로 내 이웃인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인 거리만이 아닙니다.

요즘은 인터넷이 일상화가 되면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손쉽게 연락이 되는 경우가 많지요. 이와 같은 사람들도 분명 우리의 이웃입니다.

이러한 이웃을 사랑하고 아껴주고 위로하고 그래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헐뜯고 멸시하고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도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점은, 이와 같은 일이 교회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에요.

나는 이렇게 좋은 일을 했다. 나는 저렇게 좋은 일을 했다. 참 감사하다……라고 하면서 그 마음 안에 교만이 깔려 있다면, 이는 그 순간 경건이 아니라 교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전에 한국의 어떤 기업 총수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하지요.

“모든 것을 다 바꿔야 한다.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라.”

어쩌면 이와 같은 말이 바로 지금 우리 기독교 모든 교회에 필요한 말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도 모든 것을 다 바꾸어야 합니다.

그럼 무엇을 빼고 다 바꾸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 성경 빼고 다 바꾸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야 낡은 부대를 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새 부대에 주님께서 주시는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부터 되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를 다시 점검해보면서, 우리 안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온전히 자리잡게 함으로 말미암아, 낡은 부대가 아닌 새 부대에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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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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