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3회 회개와 천국
2024년 2월 25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1절~3절
“1.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2.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3.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マタイの福音書 3章 1節~3節
“1.そのころバプテスマのヨハネが現れ、ユダヤの荒野で教えを宣べ伝えて、
2.「悔い改めなさい。天の御国が近づいたから」と言った。
3.この人は、預言者イザヤによって「荒野で叫ぶ者の声がする。『主の道を用意せよ。主の通られる道をまっすぐにせよ』」と言われた人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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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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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8번째 시간으로서 “회개와 천국” 悔い改めと天の御国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복음을 선포함에 있어서 그 첫마디가 회개와 천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하고 보면 이 두 단어의 조합은 적지 않게 특이합니다.

만약에 “회개하라 심판날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한다거나 “기뻐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한다면 좀 이해가 될 것도 같아요.

심판날이 다가왔으니 어서 빨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기뻐하라, 이렇게 본다면 좀 더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세례 요한은 굳이 <회개>아 <천국>이라는 두 단어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잘못된 단어선택을 한 것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성경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후 공생애를 시작하십니다. 그 때 예수님의 외침이 무엇이었습니까.


마태복음 4장 17절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この時からイエスは宣教を開始し、「悔い改めなさい。天の御国が近づいたから」と言われた。

이 말씀을 보세요. 이는 세례 요한이 외치던 것과 똑같은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를 보더라도 <회개>와 <천국>이라고 하는 조합은 잘못된 것이 아닌, 오히려 반드시 필요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외쳤던 <회개>와 <천국>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요. 이는 어렵지 않습니다. <회개>와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에 있어서 인과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과관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인 것이지요. A라고 하는 원인이 있었고 B라고 하는 결과가 있었어요.

만약에 A라고 하는 원인과 B라고 하는 결과가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A와 B는 인과관계가 없는 것이 되지만, A라고 하는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 B라고 하는 결과가 발생했고, 만약 A라고 하는 원인이 없었다면 B라고 하는 결과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을 때 A와 B는 인과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회개>와 <천국>이라고 하는 것이 서로 인과관계에 있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회개>가 있어야지만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고, <회개>가 없다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천국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 목적에서 흔들리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내일이라도 동네 대학 입시학원 앞에 가서 거기 오는 학생들한테 물어보세요. 너는 왜 이 입시학원에 오냐고 물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저희 집 근처에도 그 주변에서는 그래도 꽤 규모가 있는 편에 속하는 입시학원이 하나 있는데, 입시철인 경우 수업이 끝나는 시간대 쯤이면 그 주변 일대에 차들이 줄을 섭니다. 모두 아이들을 데리러 온 부모님의 차들이지요.

큰 도시 같은 경우는 대중교통수단이 많기 때문에 그런 일은 별로 없겠지만, 여기 군마는 자동차 사회이다 보니 멀리서도 부모님들이 다 데리러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학생 본인만이 아니라 부모님들까지도 고생하면서 대입학원에 다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공부가 좋아서 취미로 다니는 거라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집에 있으면 심심해서 친구들 만나기 위해서 다니는 거라고 하겠습니까.

대입학원에 다니는 학생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것 아니겠습니까. 입시학원에 다닌다면 그 목적이 흔들려서는 절대로 안 돼요. 자기가 들어가고자 하는 학교를 정했으면 거기를 향해서 매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믿음생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왜 나옵니까. 예배를 왜 드립니까. 성경을 왜 읽습니까. 믿음이 취미 생활이신가요? 일요일에 심심해서, 집에 혼자 있으면 뭔가 허전해서 나들이 삼아 교회에 나오고 예배도 드립니까.

생각해보십시오.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사도행전 20장 28절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あなたがたは自分自身と群れの全体に気を配りなさい。神がご自分の血をもって買い取られた神の教会を牧させるために、聖霊はあなたがたを群れの監督にお立てになったのです。

교회는 친목모임이 아닙니다. 동네 경로당이 아닙니다. 교회는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교회를 사신 것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말미암아 그 대가로 세워진 것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취미활동이나 친목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해결하고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목숨을 걸었어요. 아니, 실제로 목숨까지 내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뒤에서 심심풀이로 믿음을 생각하게 된다면 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입니까.

고린도전서 9장 24절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競技場で走る人たちはみな走っても、賞を受けるのは一人だけだということを、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ですから、あなたがたも賞を得られるように走りなさい。

우리도 주님께서 예비하신 상을 받을 수 있도록, 있는 힘을 다해서 믿음의 달음질을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받는 상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천국입니다. 대입학원에 다니는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노력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천국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달려가야 하는 것이지요.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 것처럼, 열심히 믿음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대학이야 다음 번에도 기회가 있을 수 있고, 그리고 요즘은 꼭 대학이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선택지가 많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믿음에 있어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천국에 가야만 해요.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야지만 되는 것이지, 그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인데, 천국이라고 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원인이 있어야 한다고 했었지요? 예,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인 것이지요.

<회개>와 <천국>이 서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 없이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사람들은 회개를 잘 안 하려고 하는 경향에 있습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에 회개는 어떤 사람이 해야 하는 것 같습니까. 그렇죠. 뭔가 잘못한 것이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 회개 아니겠습니까. 잘못한 것이 없다면 회개할 것이 없다고 하겠지요.

이와 같은 경향, 어디서 많이 보냐 하면 의외로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는 항상 옳아요. 다른 사람이 잘못했지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하는 특이한 믿음입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아직도 제가 기억이 남는 것이 있는데, 한국 어느 교회에서 담임목사님이 은퇴하면서 자기 아들에게 담임목사 자리를 물려주었어요. 사실 이와 같은 일은 그 이전에도 이미 다른 몇몇 교회에서 있어왔던 일이지요.


그런데 이를 가지고 주일날 그 교회 앞에서 마이크를 가지고 비판을 하고 그래요. 뭐, 그래요. 교회에는 다양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수는 있지요. 오히려 그런 사람들의 입을 막는다면 그것 또한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흥미로운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그 마이크를 들고 큰 소리로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 교회 교인이 아니라는 거예요. 다른 무슨 기독교 단체인지 하는 곳에서 나와서는, 자기가 다니는 교회도 아닌데도 남의 교회 앞에 와서 그렇게 마이크를 들고 큰 소리로 비판을 하고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주장을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만약에 그분들의 말이 100% 맞다고 가정을 해보죠. 사실관계부터 모든 주장이 다 합당하다고 가정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만약에 그 사람들이 비판하고 있는 그 교회에서 담임목사 위임이나 기타 여러 사항에 대해서 결정을 하는 데에 있어서 무슨 불법행위가 있었다고 한다면 어떨까요. 회의실에 흉기를 들고 들어가서 협박을 했다거나, 사람들 입을 틀어막고 손발을 묶어 놓거나 아니면 문을 잠거 놓고 부당하게 안건을 땅땅땅 하고 통과시켰다고 해봐요.

만약에 그럴 경우라면 이는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이와 같은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고 한다면 비난 정도가 아니라 형사고발까지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 교회에서 거기 규정대로 진행되어서 모든 것이 합법적으로 결정된 내용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비난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도 그 교회 성도도 아니고 외부인이 말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교회 앞에서 그렇게 비난하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 교회 사람들은 다 틀렸고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제가 설교를 동영상으로 촬영을 해서 인터넷에 올리고 하면 격려도 해주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간혹 메일이나 댓글을 통해서 지적을 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그와 같은 지적이나 비판이 좀 성경적이고 그러면 제게도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대부분 좀 다소 벗어난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20대 때 저라면 끝까지 논쟁을 벌일 수도 있겠지요.


그 때는 정말 특별히 시사적인 부분에 대해서 인터넷으로 논쟁을 많이 했었습니다.

하나하나 조목조목 근거를 제시해가면서 철저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반박하고 그랬었지요.

그와 같은 기억 때문에서 그런지 지금도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써 놓은 글을 보거나, 아니면 저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보면 그 글들의 허점이 보여요.

뿐만 아니라 이 사람에게 어떤 부분을 어떤 식으로 공격을 하면 가장 큰 상처를 입힐 수 있을까 하는 점까지도 대충 짐작이 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요즘도 그런 논쟁을 벌이느냐 하면, 아니요. 안 합니다.

얼마 전에도 인터넷에 어떤 분으로부터 그런 일이 있었는데, 누군가가 제게 어떠한 비판이나 부정적인 지적을 하면 제 답변은 하나입니다.

“귀하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이는 형식적인 말이 아니라 저의 본심입니다. 제가 항상 옳다고 감히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면 대부분 거기서 논의는 끝이 나요.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2절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あなたがたは、自分がさばく、そのさばきでさばかれ、自分が量るその秤で量り与えられるのです。

예수님께서는 비판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물며 교회에서까지 상대방에 대한 비판이 넘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기록합니까.

로마서 3장 10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義人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

그렇습니다. 의인은 없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의인의 반대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인이잖아요.


의인이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죄인이 아닌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죄인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피 없이 구원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남들은 틀렸고 자기 자신 만이 옳다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비난할 수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회개를 하지 않는 사람들의 두번째 이유는 좀 특별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것은 바로 회개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의 말을 한 번 들어볼까요? 여러분께서는 이 주장에 대해서 이상한 점이 있는지 없는지 자세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사해 주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7장 27절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イエスは、ほかの大祭司たちのように、まず自分の罪のために、次に民の罪のために、毎日いけにえを献げる必要はありません。イエスは自分自身を献げ、ただ一度でそのことを成し遂げられたからです。

과거에는 제사장들이 제물을 드리면서 속죄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구원 받은 의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단번에 완전한 제사를 드려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반복해서 회개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자, 이 주장에 대해서 이상한 곳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런 주장을 어떤 사람들이 하냐 하면 예전에 세월호 사건 때 많이 나왔던 이른바 구원파 사람들이 이런 주장을 해요.

자기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구원파에서는 자기들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하는데, 왜요. 저도 직접 그 사람들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와 같은 주장을 실제로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어떤 무슨 설교 영상 같은 것을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구원의 확신이 확 든다는 것이에요.

그건 뭐냐 하면 그게 바로 그 순간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증거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사람들은 자신이 몇 날 몇 일 언제 구원받았다는 것을 아주 외우고 다닌다고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정말 성경적이냐 하는 것이지요.

우리 오랜만에 그 질문을 한 번 해보도록 할까요. 지난 로마서 강해 때 몇 번이고 했던 질문입니다.

자,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라고 했지요?

예, 이는 바로 구원 받을 자격,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다는 뜻이지요.


로마서 5장 9절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ですから、今、キリストの血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私たちが、この方によって神の怒りから救われるのは、なおいっそう確かなことです。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지만,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즉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자격,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졌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그럼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천국인가요?

아니에요. 이는 말하자면 대학입시나 회사 입사시험에서 합격은 했지만 아직 들어가지는 않은 상황이에요.

합격을 해도 아직 안 들어갔다면 그 학교 학생이 아니고, 그 회사 직원도 아니에요. 마찬가지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은 있지만 아직 천국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아직은 천국백성이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안 지으려고 해도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이는 제 주장이 아니라 성경에도 기록합니다.

로마서 7장 22절~25절
“22.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私は、内なる人としては、神の律法を喜んでいますが、
私のからだには異なる律法があって、それが私の心の律法に対して戦いを挑み、私を、からだにある罪の律法のうちにとりこにしていることが分かるのです。
私は本当にみじめな人間です。だれがこの死のからだから、私を救い出してくれるのでしょうか。
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を通して、神に感謝します。こうして、この私は、心では神の律法に仕え、肉では罪の律法に仕えているのです。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고 해도 내 몸속에 있는 죄가 자신을 사로잡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믿음이 부족해요? 아니면 예수님이 아직도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셨나요?

아니요. 예수님은 벌써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시고는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어요. 그리고 바울은 지금 회심해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바울의 믿음을 따라갈 만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그와 같은 바울도 자기 안에 있는 죄로 말미암아 괴로워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땅에 사는 한 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옳은 일인지 무엇이 잘못된 일인지를 알고 있으면서도 죄를 짓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와 같은 경우에는 어서 빨리 회개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28장 13절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自分の背きを隠す者は成功しない。告白して捨てる者はあわれみを受ける。

시편 32편 5절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私は自分の罪をあなたに知らせ 自分の咎を隠しませんでした。 私は言いました。 「私の背きを主に告白しよう」と。 すると あなたは私の罪のとがめを 赦してくださいました。

세상 죄는 자복 그러니까 스스로 털어놓는다고 해서 어느 정도 가벼워질 수는 있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죄는 우리가 주님 앞에 죄를 내려놓게 되면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죄만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 보면 <강하도 담대하라 (強くあれ。雄々しくあれ。)>는 말을 아무데나 갖다 붙이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죄를 지어도, 이웃에 대해서 나쁜 짓을 했을 때에도, 성경에 봐라,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잖아.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라는 분이 계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걱정하지 말라고요? 이런 분들이야말로 오히려 정말로 걱정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죄를 지었어요. 나쁜 짓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강하고 담대하라고 성경에 기록하나요?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23절~26절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ですから、祭壇の上にささげ物を献げようとしているときに、兄弟が自分を恨んでいることを思い出したなら、
ささげ物はそこに、祭壇の前に置き、行って、まずあなたの兄弟と仲直りをしなさい。それから戻って、そのささげ物を献げなさい。
あなたを訴える人とは、一緒に行く途中で早く和解しなさい。そうでないと、訴える人はあなたを裁判官に引き渡し、裁判官は下役(したやく)に引き渡し、あなたは牢に投げ込まれることになります。
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最後の一コドラントを支払うまで、そこから決して出ることはできません。


내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려고 해요. 그런데 내가 내 이웃에게 죄를 지은 것이 생각났어요. 그럴 때에는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괜찮대요? 강하고 담대하래요?

아니에요. 예배를 드리다가 말고라도 좋으니까 빨리 가서 그 이웃과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세상적인 일로 나를 고발하는 사람과 재판을 하려고 해요. 그런데 걱정 마, 재판은 이길 거야. 그러면서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십니까.

아닙니다. 법원에 도착하기 전에 빨리 화해하라고 말씀을 하세요. 잘못하다가 지게 되면 다 빼앗길 수도 있을 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하라고 말씀하고 계시잖아요.

세상에는 죄를 지으면서도 강하고 담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불륜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면 어떻습니까. 정말 강하고 담대하지요. 괜찮아, 괜찮아. 그까짓 것 무서워해서 어떡해.

그러면서 아마도 자신들은 그와 같은 죄가 세상에 알려지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어떻게 적혀 있습니까.


누가복음 12장 3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が暗闇で言ったことが、みな明るみで聞かれ、奥の部屋で耳にささやいたことが、屋上で言い広められるのです。

이게 과장된 말씀인가요? 아니에요. 어두운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자기들끼리만 나누었던 은밀한 대화가 무슨 신문이나 주간지에 나와서 전국 아니, 인터넷으로 전세계 사람들이 알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작년 그러니까 2023년 10월에 일본 요코하마에서 일어났던 사건인데, 깊은 밤에 어떤 남성이 피곤에 지쳐서 길가 옆에 앉은 채로 잠이 들고 말았어요. 그런데 그 때 이 남성이 들고 있던 스마트폰이 도난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그 모습을 멀리서 촬영했던 CCTV가 있긴 한데 그것만 가지고는 얼굴도 파악할 수도 없고 무엇보다 그 범인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알 길이 없잖아요.


그런데 불과 얼마 뒤, 경찰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게 뭐냐 하면 도난 당한 스마트폰을 찾았다는 것이에요.

뿐만 아니라 절도그룹 세 명을 모두 체포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경찰이 이 도난당한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까지 하더래요.

아니, 자기는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 때 이 도난 당한 스마트폰이 인터넷에 생중계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도난 당한 사람은 말하자면 유튜버인데 그 때 인터넷 생중계를 하다가 지쳐서 그만 길가에서 잠이 들고 말았었는데, 스마트폰은 여전히 작동중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범인은 그것도 모르고 그 폰을 훔치고는 자신들의 아지트까지 계속 들고 다녔어요.

그러다 보니까 그 절도그룹 일당들 얼굴도 화면에 대문짝 만하게 다 나오고, 대화내용까지 들려요.

뿐만 아니라 그들이 차를 타고 이동을 하는데 그 대화내용을 들으니까 어디에 숨어 있는지도 추적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그런 상태로 무려 1시간 반 동안 그 폰이 켜진 채로 모든 것을 촬영했다고 하는데, 이게 인터넷으로 생중계가 되고 있었다고 하니까 그걸 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 아니에요.

그럼 몇 명이 그 장면을 보고 있었냐 하면 약 80명이나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절도범들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자신들의 얼굴이나 목소리를 수 십 명이 그것도 생중계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그저 강하고 담대하게 범죄를 저질렀던 것이지요.

여러분,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은 그렇게 나쁜 짓을 저지르거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때 쓰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의 일을 감당할 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서 제 경우를 본다면, 전도를 나갈 때나 인터넷으로 전도 메일을 보낼 때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솔직히 밖에 나가서 전도지를 돌리게 되면 기쁜 마음도 있지만, 때로는 누가 또 안 좋은 소리라도 할까 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메일을 보낼 때는 더 하지요. 또 무슨 싫은 소리, 험한 소리라도 듣게 될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고, 주님께서 주신 지혜대로 내가 감당하도록 하셨다고 한다면, 강하고 담대해야지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주님께서 지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감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있으면 그럴 때에는 더 늦기 전에 회개해야 하고 그리고 이웃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어서 사과하고 화목해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8절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自分に関することについては、できる限り、すべての人と平和を保ちなさい。

비판하고 비난하고 상처 주는 데에 담대해 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못을 발견하면 회개하고 사과하고 화목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천국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회개가 먼저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見よ、わたしはすぐに来る。それぞれの行いに応じて報いるために、わたしは報いを携えて来る。



주님은 곧 오신다고 말씀하세요. 속히 오신다고 하세요. 그리고 행한 대로 갚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제 더 늦기 전에 비판과 비난에 앞장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에게 회개와 화목의 본을 보이는 삶을 통해서, 장차 주님께서 예비하신 놀라운 상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主はすぐに来られるとおっしゃいます。そしてそれぞれの行いに応じて報いるとおっしゃっているのであります。

これからは手遅れになる前に、批判や非難に先走るのではなく、神様と隣人に対して悔い改めと和解の見本となる人生を通して、将来、主が備えられた驚くべき賞をすべて受けられる皆さまであらんことを主の御名においてお祈りいた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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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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