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1회 떠나간 자와 보내심을 받은 자
2024년 2월 11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7장 11절~19절
“11.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ルカの福音書 17章 11節~19節
“11.さて、イエスはエルサレムに向かう途中、サマリアとガリラヤの境を通られた。
12.ある村に入ると、ツァラアトに冒された十人の人がイエスを出迎えた。彼らは遠く離れたところに立ち、
13.声を張り上げて、「イエス様、先生、私たちをあわれんでください」と言った。
14.イエスはこれを見て彼らに言われた。「行って、自分のからだを祭司に見せなさい。」すると彼らは行く途中できよめられた。
15.そのうちの一人は、自分が癒やされたことが分かると、大声で神をほめたたえながら引き返して来て、
16.イエスの足もとにひれ伏して感謝した。彼はサマリア人であった。
17.すると、イエスは言われた。「十人きよめられたのではなかったか。九人はどこにいるのか。
18.この他国人のほかに、神をあがめるために戻って来た者はいなかったのか。」
19.それからイエスはその人に言われた。「立ち上がって行きなさい。あなたの信仰があなたを救ったのです。」”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6번째 시간으로서 “떠나간 자와 보내심을 받은 자” 離れていった者と遣わされた者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먼저 오늘 본문 내용을 살펴보고 난 다음에 전체적인 주제를 공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1절부터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17장 11절
“11.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1.さて、イエスはエルサレムに向かう途中、サマリアとガリラヤの境を通られた。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지금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고 계셨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사마리아와 갈릴리는 인접해 있다고는 하나 질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지역입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갈릴리는 유대인이 살고 있었던 곳이지만 사마리아 지방은 유대인이 이방인 취급하는 지역이었거든요.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유대인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이요, 이방인은 도저히 구원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는 서로 말도 하지 않을 정도로 멸시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다음으로 12절~13절을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17장 12절~13절
“12.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2.ある村に入ると、ツァラアトに冒された十人の人がイエスを出迎えた。彼らは遠く離れたところに立ち、
13.声を張り上げて、「イエス様、先生、私たちをあわれんでください」と言った。

성경에 종종 등장하는 이 나병이라고 하는 질환인데, 과거에는 이를 한센병이라고 여겨왔습니다. 그래서 옛날 성경인 개역한글에 보면 <문둥병자>라고 되어 있어요.


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이 질환의 증상을 보면 우리가 아는 한센병이라고 딱 잘라서 말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특별히 레위기에 보시면 이 질환에 대해서 피부질환의 일종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만, 이 질환은 사람의 피부 뿐만이 아니라 옷에 퍼지기도 하고 그리고 레위기 14장 33절 이하에 의하면 집에까지 증상이 발생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와 같은 점으로 미루어 보아서 지금은 이 나병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한 한센병이 아니라 조금 더 넓은 의미로 악성 곰팡이의 일종이라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 질환의 특징으로서는 사람이 감염되면 첫째로 악성 피부염과도 같은 증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당시로 본다면 이는 대단히 완치되기가 어려운 질환이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둘째는 레위기 13장 46절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레위기 13장 46절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その患部が彼にある間、その人は汚れたままである。彼は汚れているので、ひとりで住む。宿営の外が彼の住まいとなる。

이 질환은 다른 사람에게 전염이 되는 질환이기 때문에 이 질환에 걸렸다는 판정을 받게 되면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진영 바깥에서 살아야만 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질환에 대해서는 그 원인이나 대처방법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당시에 이 질환에 대한 인식은 어떤 질병의 일종, 그러니까 약으로 치료하거나 하는 질병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결과로 얻게 되는 질환으로 여겨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보면 예수님은 마을에 들어가셨지만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마을에 들어가지 못한 채 그저 바깥에서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당장 그들에게 다가가서 고치신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7장 14절
“14.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4.イエスはこれを見て彼らに言われた。「行って、自分のからだを祭司に見せなさい。」すると彼らは行く途中できよめられた。

이 본문 말씀을 우리는 그냥 흘려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는 이 나병환자들의 놀라운 믿음을 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어요.

자, 주님께서는 나병환자 쪽으로 다가가지도 않으셨습니다. 손을 뻗지도 않으셨어요. 그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신 이유는 당시 나병환자가 나았을 경우에는 이를 판정하는 사람이 바로 제사장들이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순서로 보았을 때 어느 쪽이 먼저입니까. 내 나병이 낫는 것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제사장한테 내 몸을 보이는 게 먼저입니까.

당연히 낫는 것이 먼저이지요. 우선 내 몸이 다 나은 다음에 그 몸을 제사장한테 보여야 제사장이 그 나은 모습을 보고 완치판정을 내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시간상으로 본다면 아직 낫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볼 때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어땠겠습니까.

아니, 일단 나아야 제사장한테 보이든지 말든지 할 것이지, 아직 낫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제사장한테 보이라는 것이냐, 무슨 나병환자라고 놀리는 것이냐, 하고 화도 낼 만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이에 대해 큰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이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고 제사장한테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가복음 11장 23절~24절
“2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この山に向かい、『立ち上がって、海に入れ』と言い、心の中で疑わずに、自分の言ったとおりになると信じる者には、そのとおりになります。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が祈り求めるものは何でも、すでに得たと信じなさい。そうすれば、そのとおりになります。

이 나병환자들이 한 것이 바로 이것 아닙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후에도 여전히 몸은 여기저기가 헐어 있었고 바뀐 것이 하나도 없어 보여요. 하지만 그들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일어서서 제사장에게로 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누가복음 17장 14절 후반부
“14.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4. ……すると彼らは行く途中できよめられた。

그렇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했더니 정말로 나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야말로 믿음과 말씀과 행함의 본보기 아닙니까. 그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나음을 받을 수 있다고 그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이미 나았으니까 제사장한테 가서 보여라.


그들은 이 말씀을 받고 난 다음 의심하지 않고 이제는 행함으로 옮긴 것입니다.

여전히 자기는 나병환자예요. 전혀 바뀐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일어나 제사장에게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 제사장에게로 가는 길에 깨끗함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자, 이렇게 보면 이야기 흐름으로 보아서 어떻습니까. 나병환자들이 있었고 예수님이 지나가고 있어요. 나병환자들이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제사장에게 보이러 가라고 말씀하세요. 그 말씀에 의지해서 일어서서 가고 있는데 나음을 받았어요.

이렇게 본다면 이야기의 기승전결이 다 나왔어요. 그럼 여기서 끝나면 되잖아요. 그런데 신기하죠. 이 이야기는 11절부터 19절까지 아홉 구절인데 지금 네 번째 구절이에요. 그러니까 기승전결은 고사하고 아직 절반도 안 왔다는 것이지요.


그 다음 전개를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17장 15절~16절
“15.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5.そのうちの一人は、自分が癒やされたことが分かると、大声で神をほめたたえながら引き返して来て、
16.イエスの足もとにひれ伏して感謝した。彼はサマリア人であった。

나음을 받은 나병환자 중에서 한 사람, 이 사람은 놀랍게도 유대인이 아니라 오히려 유대인들로부터 차별을 받고 있었던 사마리아인이었는데, 자기가 나은 모습을 보고는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제사장에게로 가던 그 발걸음을 멈추고 예수님께로 돌아와서 발 아래 엎드리고 감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여기서 오해를 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다른 아홉 사람은 나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고맙다는 말을 안 했는데, 이 사마리아인은 고맙다는 말을 했다는 것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마리아인이 한 모습이 단순히 “아, 예수님, 정말 감사합니다”로 끝나고 있나요?

아니요. 이 사마리아인이 한 모습은 단순히 감사하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렸다고 기록하지 않습니까.

神をほめたたえ、イエスの足もとにひれ伏して感謝した。

이는 단순히 고맙다는 말 한 마디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영광을 예수님께도 돌리고 있다는 사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경배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습을 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7장 17절~19절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17.すると、イエスは言われた。「十人きよめられたのではなかったか。九人はどこにいるのか。
18.この他国人のほかに、神をあがめるために戻って来た者はいなかったのか。」
19.それからイエスはその人に言われた。「立ち上がって行きなさい。あなたの信仰があなたを救ったのです。」” 
여기서 일단 19절 말씀부터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저는 예전에 교회 예배 시간 때 목사님으로부터 19절 말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あなたの信仰があなたを救った)>는 말씀을 들어서, 다른 아홉 사람은 나병만 치유함을 받았는데, 이렇게 예수님께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인은 영혼까지 구원을 받은 것이다……라는 말씀을 몇 번이고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와 같은 말씀을 들어 보신 분들은 저 외에도 많으시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는 어떤 외국 주석서를 보니까 거기에도 그렇게 적혀 있더라고요.

물론 이야기 흐름을 감동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는 성경 해석에 있어서 다소 비약이 아닐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이라고 하는 말씀을 과연 <영혼의 구원>이라는 의미로 제한해서 사용하셨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6절 이후와 누가복음 18장 35절 이후에 보시면 앞을 볼 수 없는 사람, 마가복음 10장 46절에는 그의 이름이 <바디매오(バルティマイ)>라고 나와 있는데, 그는 역시 오늘 본문에서처럼 예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그 장면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가복음 10장 52절
“52.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そこでイエスは言われた。「さあ、行きなさい。あなたの信仰があなたを救いました。」すると、すぐに彼は見えるようになり、道を進むイエスについて行った。

누가복음 18장 42절~43절
“42.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見えるようになれ。あなたの信仰があなたを救いました。」
その人はただちに見えるようになり、神をあがめながらイエスについて行った。これを見て、民はみな神を賛美した。

바디매오(バルティマイ)는 주님의 능력으로 앞을 보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구원(救い)>이라는 말씀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만약에 이를 두고 영혼 구원에 대한 말씀이라고 이해를 하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하냐 하면, 바디매오는 영혼이 구원 받았기 때문에 앞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러면 앞을 보지 못한 채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있을 것 아니에요. 그런 사람은 뭐예요? 예, 다 구원받지 못했다는 뜻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장애가 있는 분이 있는데, 그 장애를 치료하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들은 구원받지 못했으니까 다 지옥에 떨어졌다는 것입니까.

더 나아가면 이야기가 어떻게 되냐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질병으로 돌아가시잖아요. 믿음이 있는 분들이었다면 살아 계실 때 그 병이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을 거예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셨어요. 그럼 그 분들은 나음을 받지 못했으니까 구원을 못 받은 것이 됩니까.


이제 이후에도 몇 번이고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성경 구약과 신약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으나, 비약은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는 농담이나 말장난이 아니에요. 사실 이와 같은 성경 해석의 비약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달리고, 때로는 상청 받고 고통 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 즉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은 영혼의 구원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앞서 설명 드렸던 그 나병환자들의 믿음, 아직 낫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일어서서 제사장에게로 향했던 그 믿음이 나병을 치료하게 하였다는 말씀인 것으로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셨나요?

자, 그 다음에 이제 드디어 오늘의 본론입니다.

여기서부터 좀 주목해서 보셨으면 합니다. 특별히 이 18절과 19절 말씀을 유심히 봐주시기 바랍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18절과 19절이야말로 오늘 본문에 있어서 핵심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발 앞에 엎드려서 경배하는 사마리아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냐, 다른 사람들도 나음을 받았는데 나한테 고맙고 말하는 사람이 왜 너 밖에 없느냐……하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뭐라고 하셨는지 18절~19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17장 18절~19절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18.この他国人のほかに、神をあがめるために戻って来た者はいなかったのか。」
19.それからイエスはその人に言われた。「立ち上がって行きなさい。あなたの信仰があなたを救ったのです。」”

자, 여러분, 우리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셨을 때 많은 사람들을 치료하셨습니다. 때로는 바디매오(バルティマイ)처럼 앞을 보게 하시고 때로는 오늘 나병환자처럼 병을 낫게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에서의 힌트는 바로 18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시면 주님께서 오늘 나병환자를 치료하신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7장 18절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8.この他国人のほかに、神をあがめるために戻って来た者はいなかったのか。」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나병을 치료하신 이유는 단순히 고맙다는 말 한 마디 듣고 싶어서가 아니에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오는 자를 찾고 계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에 흔히 있는 간증 한 번 말씀 드려볼까요.

경기가 안 좋아져서 다니던 직장도 짤렸습니다. 또는 하던 사업도 망했습니다. 이제 매달릴 곳이 주님밖에 없어요.

뭐, 어차피 직장도 짤렸겠다, 사업도 망했겠다 하니까 시간이야 많잖아요. 그러니까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겠다면서 부지런히 기도도 하고 교회에 나와서 예배도 드리고 성경도 읽고 봉사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어요? 예, 주님께서 길을 열어 주십니다. 새로운 직장을 주셨어요. 또는 주님께서 새로운 사업장을 주셨어요. 이전보다 훨씬 좋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했겠습니까. 할렐루야 하고 감사하면서 이제 직장생활을 열심히 합니다. 사업을 확장 시키기 위해서 불철주야 매진합니다.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 돼요? 예, 교회에 나올 새가 없어요. 기도할 시간도 없고 성경 볼 시간도 없습니다. 바빠 죽겠는데 일요일에 어떻게 교회에 나와요.

자,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이미 짐작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죠. 또다시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는 간증, 아마 교회에 오래 다녀보신 분들은 이런 간증을 한 두 번은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이 시점에서 여러분께서 좀 상상력을 발휘해 보시기를 원합니다.

이 마지막 18절~19절 말씀을 하시고 계신 예수님의 표정, 어떨 것 같습니까.

마치 아흔 아홉마리 양을 버려 두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았을 때처럼 기뻐하는 표정일 것 같습니까.


저는 오히려 대단히 서운한 주님의 표정을 떠올립니다. 그 이유는 바로 열 명 중의 열 명, 적어도 일곱 여덟 명은 돌아올 줄 알았는데, 어떻게 하나, 그것도 이방인이 하나 돌아왔을 뿐일까 하는 마음이 있으시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제 단순한 추측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이 나병환자들의 믿음을 보십시오. 아직 낫지도 않았는데 제사장한테 가라고 하니까 주저없이 일어나서 가지 않았습니까. 이 믿음이 보통 믿음이에요?

이는 마치 그런 것이지요. 지금 먹을 것이 없고 생활비 몇 푼이 없어서 큰 일입니다. 빚쟁이한테 쫓겨서 도망가야 할 판이에요. 그러면서 주님, 제발 10만원만 주세요. 10만원만 주시면 이 고비를 어떻게든 넘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는데,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지금 네 은행계좌에 100억원을 넣어주었으니까 그걸 당장 인출해서 써라……라는 말씀과 같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야말로 저주받은 병, 죽을 병이 지금 이 순간 나음을 받았다고 하는 데 그깟 100억원에 비하겠습니까.


이러한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은 초신자가 아니지요. 장로님 권사님 정도 되는 믿음, 적어도 교회 10년차 이상 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 정도 믿음의 사람들이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다면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홉 명은 다 주님 곁에서 떠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주님 품으로 돌아온 것은 이 사마리아인 한 사람 뿐이었다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교회에 오랫동안 다녔던 사람들은 다 뿔뿔이 떠나가고, 주님께로 돌아온 사람은 지난 주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주일학교 어린이 정도 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함께 생각해 보시기를 원합니다.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끝을 맺습니다.


요한복음 21장 25절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イエスが行われたことは、ほかにもたくさんある。その一つ一つを書き記すなら、世界もその書かれた書物を収められないと、私は思う。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예수님께서는 2천년 전에 오셔서 수많은 사람들, 정말 성경에 기록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치료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좀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치료하셨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돌아가실 분 아니겠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주님은 앞을 보이게 하시고 나병을 치료하시고 그랬을까요. 정말로 단순히 고맙다는 말 한 마디 듣고 싶어하셨기 때문일까요.

제가 지금 타고 있는 차, 사실 좀 오래된 차이긴 하지만 이 차를 받은 다음에 바로 며칠 후 엔진 시동이 안 걸려서 대단히 고생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보험에 가입한지 며칠 뒤라서 큰 돈을 들이지 않고 수리를 해서 해결할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리고 이는 지난 달이었습니다만, 얼마 전부터 바퀴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요. 그래서 유심히 봤더니만 거기에 나사 못이 박혀 있지 않겠습니까.

정말 이게 길 한 가운데에서 터지거나 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그래서 서둘러 카센터로 가서 바퀴를 수리했습니다. 나사가 박힌 곳이 옆쪽이라면 수리가 안 되고 다 바꾸어야 할 판이었는데, 다행히 앞쪽이라서 수리가 가능했었습니다. 참 여러모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저는 그 오래된 차를 왜 그냥 버려버리지 않고 수리를 했을까요.

당연히 그 차를 수리한다고 해서 천 년 만 년 고장이 안 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수리를 했어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죠. 더 써먹기 위해서 수리를 한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이 믿음의 사람 열 명, 지금은 비록 나병을 앓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믿음의 용사 열 명을 주님께서는 낫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사용하고 싶으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기껏 낫게 해주니까 그 중에서 나머지 아홉 명은 주님 곁을 모두 떠나버렸어요. 그러니 주님께서는 얼마나 그 마음이 안타까우셨겠습니까.

이제 주님께서는 주님 품으로 돌아와 그 발 아래에 엎드려 있는 사마리아인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일어나 가라”입니다.

(立ち上がって行きなさい。)


주님께서는 지금 발 아래에 엎드려 있는 사마리아인에게 <일어나>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그의 예배를 모두 다 받았다는 뜻이요, 그 다음으로 <가라>라는 말씀은 이제 주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가지고, 주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기 위해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뜻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부터 펼쳐질 이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의 첫 발자국은 주님 곁을 떠나간 나머지 아홉 명의 발걸음과 큰 차이를 보이게 될 것입니다.

시편 23편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たとえ 死の陰の谷を歩むとしても 私はわざわいを恐れません。 あなたが ともにおられますから。 あなたのむちとあなたの杖 それが私の慰めです。


아홉 명의 발걸음은 주님과 무관한 길이 될 수도 있겠으나, 주님의 사명을 받아 나서게 되는 이 사마리아인의 앞길은 그야말로 주님께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인도해주시는 놀라운 길이 될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으십니까. 주님을 의지할 때입니다.
절망과 좌절이 있으십니까. 주님을 의지할 때입니다.

그리고 기도 응답을 받으셨습니까. 병이 나았습니까. 문제가 해결되었습니까.

바로 지금 그 때야 말로 주님께로 돌아와야 할 때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43장 19절~20절
“19.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見よ、わたしは新しいことを行う。今、それが芽生えている。あなたがたは、それを知らないのか。必ず、わたしは荒野に道を、荒れ地に川を設ける。
野の獣、ジャッカルや、だちょうも、わたしをあがめる。わたしが荒野に水を、荒れ地に川を流れさせ、わたしの民、わたしの選んだ者に飲ませるからだ。


주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새로운 일을 행하시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주님의 곁을 떠났었다 하더라도 다시 주님의 품으로 돌아와, 이제부터는 주님의 곁을 떠난 자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쓰임을 받는, 놀라운 믿음의 용사로 거듭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今までは主のもとを離れていたとしても、再び引き返して主のもとに舞い戻り、これからは、主から離れていった者ではなく、主に遣わされる驚くべき勇士のとして生まれ変われ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主の御名においてお祈りいたします。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