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7회 물에서 포도주로
2024년 1월 14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 6절~11절
“6.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ヨハネの福音書 2章 6節~11節
“6. そこには、ユダヤ人のきよめのしきたりによって、石の水がめが六つ置いてあった。それぞれ、二あるいは三メトレテス入りのものであった。
7. イエスは給仕の者たちに言われた。「水がめを水でいっぱいにしなさい。」彼らは水がめを縁までいっぱいにした。
8.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さあ、それを汲んで、宴会の世話役のところに持って行きなさい。」彼らは持って行った。
9. 宴会の世話役は、すでにぶどう酒になっていたその水を味見した。汲んだ給仕の者たちはそれがどこから来たのかを知っていたが、世話役は知らなかった。それで、花婿を呼んで、
10. こう言った。「みな、初めに良いぶどう酒を出して、酔いが回ったころに悪いのを出すものだが、あなたは良いぶどう酒を今まで取っておきました。」
11. イエスはこれを最初のしるしとしてガリラヤのカナで行い、ご自分の栄光を現された。それで、弟子たちはイエスを信じ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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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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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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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2번째 시간으로서 “물에서 포도주로” 水からぶどう酒へ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대부분의 복음서 내용이 그렇듯이 오늘 본문 내용도 우리에게 익숙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간과하기 쉬운, 말하자면, 다 아는 얘기니까 하고 그냥 넘겨버리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6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2장 6절
“6.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6. そこには、ユダヤ人のきよめのしきたりによって、石の水がめが六つ置いてあった。それぞれ、二あるいは三メトレテス入りのものであった。

먼저 여기 있는 <유대인의 정결 예식>이라는 점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마가복음에 자세히 나와 있어요.

마가복음 7장 3절~4절
“3.(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4.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パリサイ人をはじめユダヤ人はみな、昔の人たちの言い伝えを堅く守って、手をよく洗わずに食事をすることはなく、
市場から戻ったときは、からだをきよめてからでないと食べることをしなかった。ほかにも、杯、水差し、銅器や寝台を洗いきよめることなど、受け継いで堅く守っていることが、たくさんあったのである。

지금 우리가 이 글을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밥 먹기 전에 손을 씻는다는 것, 특히나 혹독한 코로나 사태를 경험한 우리에게 있어서는, 틈만 나면 손소독도 하고 그리고 식사는 물론이고 밖에 갔다가 들어오면 우선 손부터 씻는 것은 생활습관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는다는 것에 있어서는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없다고 여겨지겠습니다만,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자, 이 위생에 있어서 가장 신경 써야 하는 장소는 어디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식당 같은 음식을 다루는 곳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는 중요하지요. 하지만 더욱 신경을 써야 하는 곳, 그곳은 바로 병원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수술실 같은 곳이라고 한다면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야말로 먼지 하나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는 특수한 세제로 손을 세 번 씻고는 손에 딱 붙은 전용장갑을 끼게 됩니다. 아무리 작은 세균이라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환자의 생명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지요.

하지만 이와 같은 생각이 자리잡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의사가 손을 씻어야 한다는 사실을 처음 주장한 사람은 헝가리 출신인 의사 이그나츠 제멜바이스(センメルヴェイス)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언제 사람이냐 하면 19세기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1800년대에 활동했던 산부인과 의사였습니다.

산부인과 의사였으니까 출산을 도우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런데 이 때 의사는 손을 씻어야 한다는 사실을 처음 주장한 것이 이 제멜바이스(センメルヴェイス)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전에는 어땠냐 하면 의사들이 손을 씻지 않았었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의사도 손을 씻어야 한다고 주장한 이 제멜바이스라는 의사 선생님은 당시에 어떤 대우를 받았을까요.

이 분은 놀라운 발견을 했다면서 높이 평가를 받았는가 하면, 그건 나중이고, 당시에는 정신병자 취급을 받아서 실제로 정신병원에 입원 당하기도 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19세기가 되어서도 여전히 그런 상황이었는데 예수님 당시에 무슨 위생이다 세균이다 하는 생각이 있었겠어요.

그렇다면 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이와 같은 정결의식을 했을까요. 혹시 율법에 그와 같은 규정이 있었기 때문일까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이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의식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손을 씻는다고 하더라도 지금처럼 물로 손을 비벼서 손에 묻은 세균을 씻어 낸다기 보다는 무슨 하나의 격식처럼 해왔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돌항아리가 여섯 개 정도 놓였다고 하는데, 이는 거기에 쓰이는 물을 담아두기 위한 통이었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이 돌항아리에 직접 손을 넣고 씻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물을 길러서 그릇에 담아가지고는 각자 손을 씻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냥 맹물을 넣어서 보관하는 것이었으니까 지저분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겠지요.

그리고 돌항아리가 두세 통이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에 있는 <통>이라고 하는 것은 단위로 사용된 것인데 원어에 의하면 <메트레테스>라고 되어 있어요.

1 메트레테스에 대해서는 신학자들에 따라서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한데, 지금 기준으로 보았을 때, 대체적으로 40리터가 조금 안 되는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38~39리터 정도입니다.

쉽게 계산하기 위해서 1메트레테스를 40리터라고 한다면, 두세 통, 그러니까 2~3메트레테스라고 하면 대충 80리터에서 120리터 정도라고 할 수 있겠지요?

여러분 혹시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만, 바퀴가 달리고 사람 허리 정도까지 오는 쓰레기 통 있잖아요. 그게 대략 120리터 정도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런 돌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7절~8절까지를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2장 7절~8절
“7.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7. イエスは給仕の者たちに言われた。「水がめを水でいっぱいにしなさい。」彼らは水がめを縁までいっぱいにした。
8.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さあ、それを汲んで、宴会の世話役のところに持って行きなさい。」彼らは持って行った。

여기서 <그들>이라고 하는 것은 밑에 9절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거기서 일하는 <하인들(給仕の者たち)>이었습니다.

하인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돌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하세요.

벌써 잔치는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음식을 먹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미 손님들은 손을 씻었겠지요. 그래서 아마도 돌항아리 안에는 물이 많이 줄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물을 채우라고 하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여기까지는 이상한 점이 없겠지요. 본래 거기는 물을 넣어두는 곳이고, 물이 줄었으니까 채우라는 것인데 무엇이 이상하겠어요.

그래서 하인들은 물을 채웠습니다. 그랬더니 이제 그 물을 떠서 연회장한테 갖다 주라고 하세요.

이 시점에서 하인들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이미 사람들은 다 손을 씻고 음식을 먹고 있는데 다시 물을 가져다 주라고 하니 의아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상대방은 손님이요 자신들은 하인이니 어쩔 수 없지요. 그들은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가져다 줍니다. 여기서 연회장이라고 하는 사람은 그 잔치에 있어서 책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상황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2장 1절~3절
“1.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それから三日目に、ガリラヤのカナで婚礼があり、そこにイエスの母がいた。
イエスも弟子たちも、その婚礼に招かれていた。
ぶどう酒がなくなると、母はイエスに向かって「ぶどう酒がありません」と言った。

이 자리는 결혼식인데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해요. 이는 대단히 심각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잔치에서 꼭 있어야 할 포도주가 부족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이 책임은 당연히 연회장(宴会の世話役)에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에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습니다만, 지금 이 잔치 책임자는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적지 않게 당혹스러워 하고 있지 않았나 해요.

그런데 하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떻겠습니까. 지금 아주 곤혹스러워 하고 있는 잔치 책임자에게 다시 손 씻는 물을 떠서 가져가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상상이긴 합니다만, 평상시 같았더라면 이 잔치 책임자는 하인더러 화를 냈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잖아요. 아니, 사람들은 이미 다 손을 씻고는 음식을 먹고 있는데, 왜 다시 손 씻을 물을 가져 오냐면서 꾸짖었을 수도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연회장은 포도주가 떨어져서 정신이 없어요.

어디 남은 포도주가 없냐면서 잘 찾아보라고 성화였는지도 모릅니다.

바로 그 때 하인이 무슨 물 같은 것을 떠왔어요. 그래서 연회장은 이게 바로 찾아낸 포도주인지도 모른다면서 덥석 맛을 보았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게 웬 일이에요. 그 맛이 참 기가 막혀요.

그래서 연회장은 신랑한테 말합니다.

요한복음 2장 10절
“10.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0. こう言った。「みな、初めに良いぶどう酒を出して、酔いが回ったころに悪いのを出すものだが、あなたは良いぶどう酒を今まで取っておきました。」


그리고 11절에 의하면 이와 같은 표적이 바로 예수님이 나타내신 첫 표적(最初のしるし)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 짧은 내용이지만 여기서 다룰 수 있는 내용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한 부분에 주목을 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에서 본다면 이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말씀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어디일까요.

예, 바로 9절에 있는 본문 중에 등장하는 <물이 된 포도주(ぶどう酒になっていたその水)>라는 말씀입니다.

자, 이제 드디어 본론에 들어가보고자 합니다.

이를 단순화시켜서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주님은 A를 B로 만드셨어요. 그렇다면 A가 좋은 것인가요? 아니면 B가 좋은 것인가요.

예, B가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굳이 좋은 것을 안 좋은 것으로 만드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지금 당장 필요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맹물을 이렇게 담아두면, 어느 정도 지나면 포도주가 되지요?

예, 맹물은 아무리 지나도 포도주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 또 한 가지 질문.

포도주를 만들 때 물을 몇 프로나 첨가할까요?

예, 답은 0프로입니다. 와인을 만들 때에는 물을 전혀 첨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물과 포도주>라고 하는 것은, 물론 둘 다 액체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이 둘은 전혀 별개의 것, 그러니까 맹물은 그 자체로 만으로는 포도주가 될 수 없고, 그리고 포도주에는 물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물과 포도주는 그 본질에 있어서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표적이 바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이었다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왜 이를 굳이 첫 표적으로 택하셨을까요.

이는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본질적인 변화>라는 점을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포도주에 대한 비유는 많이 등장합니다. 신학자들은 신학적으로 보았을 때 포도주라고 하는 것은 신약에 있어서의 기독교를 상징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보다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점은, 바로 주님을 믿기 전과 믿은 다음의 변화가 아닐까 합니다.

믿음이 있기 전인 우리는 맹물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게 된 다음부터 우리는 변화됩니다.

그것도 어떤 변화입니까. 그렇죠. 마치 물에서 포도주로 변하는 것처럼 질적인 변화, 완전한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믿음을 가지게 된 사람에게 있어서 볼 수 있는 질적인 변화라고 하는 것은 어떤 모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믿음을 갖기 전과 비교했을 때 어떤 부분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면 꽤 많은 분들이 하시는 말씀이, 술 담배를 끊는 것을 꼽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요. 뭐 술담배가 몸에 안 좋은 건 맞지요. 하지만 그것이 신앙에 있어서 핵심인가요?

제가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만, 술 담배 안 하면서 주님을 믿지 않는 것보다는, 술 담배 하면서라도 주님을 믿는 것이 백 번 천 번 낫습니다.

술담배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성경 해석상에 있어서인 것이지 술담배라고 하는 것이 곧 믿음을 저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담배 같은 것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 15세기 말에 미 대륙을 발견한 컬럼부스 때부터였다고 하는데 그보다도 1400년 전에 쓰여진 성경에 담배 이야기가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와 같은 것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매주 교회에 다니는 것? 아니면 주일에 일을 안 하는 것? 그것이 과연 믿음에 있어서 본질이자 핵심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 살다가 보면 주일에 급한 일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

몸이 안 좋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요즘은 업무상 일요일에 반드시 근무해야 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일요일에 일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면, 일요일에는 버스나 전철을 타서도 안 되고, 식당이나 편의점에 가서도 안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역시 그것도 본질적인 부분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과연 믿음에 있어서 본질이자 핵심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평소에 성경 말씀을 많이 묵상하시는 분들께서는 금방 아실 수가 있습니다.

우리 한 번 십계명을 보시겠습니다.

제1계명이 뭐였죠?

출애굽기 20장 3절
“3.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あなたには、わたし以外に、ほかの神があってはならない。

그리고 제2계명은 그 다음,


출애굽기 20장 4절~5절 전반부
“4.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あなたは自分のために偶像を造ってはならない。上の天にあるものでも、下の地にあるものでも、地の下の水の中にあるものでも、いかなる形をも造ってはならない。
それらを拝んではならない。それらに仕えてはならない。……

자, 이를 우리가 다 아는 말로 하자면 무엇을 하지 말라는 것이에요?

그렇습니다.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것이에요.

한국이나 일본이나 솔직히 법으로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면 술이나 담배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일요일에 어쩌다가 교회에 빠지는 것이 무슨 죄입니까.

그리고 업무상으로 일요일에 근무를 해야 하는 경우가 있어요.

하지만 그것을 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일요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구약 때 안식일이 신약에 와서 일요일이 된 것이 아닙니다.

일요일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해서 지키기 시작한 것이요, 주님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따라서 그 날은 반드시 일요일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나 우상숭배만은 절대로 안 됩니다. 그것은 명백한 죄악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주님과 우리는 신랑과 신부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사람 사이에 있어서도 혼인관계에 있어서 치명적인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서도 재판상 이혼을 청구할 수 있는 요건에 있어서 한국과 일본의 경우를 본다면 공통점이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민법 제840조
1. 배우자에 부정한 행위가 있었을 때
2. 배우자가 악의로 다른 일방을 유기한 때
5. 배우자의 생사가 3년 이상 분명하지 아니한 때

民法第770条
1.配偶者に不貞な行為があったとき。
2.配偶者から悪意で遺棄されたとき。
3.配偶者の生死が3年以上明らかでないとき。
이럴 때에는 재판상 이혼을 청구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를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로 바꾸어 보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주님의 사랑에 대해 배반하고, 우리가 악의로 주님을 섬기지도 않고 의지하지도 않은 채 내버려두고, 그리고 우리가 오랜 동안 주님 앞에 나타나지 않아, 우리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지 못하게 되어 버렸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혼을 청구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여기서 사랑을 배반하는 행위라고 하면 이는 무엇보다 바람을 피우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정당한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배우자가 아닌데도 배우자와 같은 관심을 갖고 만나게 된다면, 이는 진짜 배우자를 배반하는 행위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주님에 대한 부정행위, 즉 사랑의 배반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더도 말고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우상숭배야말로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주님의 그 사랑을 배반하는 행위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시게 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이 아닌 다른 이방 신들을 섬긴다고 생각해보세요.

이렇게 악의에 찬 배반 행위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호수아 24장 20절~21절
“20.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하니
21.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하는지라”

あなたがたが主を捨てて異国の神々に仕えるなら、あなたがたを幸せにした後でも、主は翻って、あなたがたにわざわいを下し、あなたがたを滅ぼし尽くす。」
民はヨシュアに言った。「いいえ。私たちは主に仕えます。」


우상숭배라는 것은 무슨 우상한테 절하는 것만이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애굽에서 이끌어낸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있는 주민들을 쫓아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신명기 9장 5절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あなたが彼らの地を所有することができるのは、あなたが正しいからではなく、またあなたの心が真っ直ぐだからでもない。これらの国々の邪悪さのゆえに、あなたの神、主があなたの前から彼らを追い出そうとしておられるのだ。また主があなたの父祖、アブラハム、イサク、ヤコブになさった誓いを果たすためである。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너희들한테 가나안 땅을 주는 것은 너희들이 잘 해서가 아니야. 너희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이 있었고, 그리고 지금 가나안 땅에 있는 민족들이 악하기 때문에 그들을 내쫓으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세요.


그렇다면 지금 가나안 땅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했길래 악하다고 말씀하십니까.

신명기 18장 9절~12절
“9.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10.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11.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12.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あなたの神、主があなたに与えようとしておられる地に入ったとき、あなたは、その異邦の民の忌み嫌うべき慣わしをまねてはならない。
あなたのうちに、自分の息子、娘に火の中を通らせる者、占いをする者、卜者、まじない師、呪術者、
呪文を唱える者、霊媒をする者、口寄せ、死者に伺いを立てる者があってはならない。
これらのことを行う者はみな、主が忌み嫌われるからである。これらの忌み嫌うべきことのゆえに、あなたの神、主はあなたの前から彼らを追い払われるのである。


그들은 이와 같은 점을 치거나 무슨 귀신을 불러 들인다거나 하는 짓들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내쫓는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즘같이 새해가 되면 여기저기서 점집이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이건 한국이나 일본 마찬가지이요.

그런 데를 왜 가냐고 하면 사람들 하는 말이 뭔지 아십니까. “아이, 뭐 정말 믿는다고 하는 건가. 그냥 재미로 보는 거지.”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우상을 숭배한다는 것이 성경에서 엄격하게 금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미삼아 죄를 저지르시겠습니까.

여러분께서는 내가 사랑하는 배우자가 재미삼아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우고, 재미삼아 다른 사람과 살림을 차렸다고 한다면 그냥 허허 하고 웃어 넘기시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겠습니까.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ですから、だれでもキリストのうちにあるなら、その人は新しく造られた者です。古いものは過ぎ去って、見よ、すべてが新しくなりました。


에베소서 4장 22절~24절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その教えとは、あなたがたの以前の生活について言えば、人を欺く情欲によって腐敗していく古い人を、あなたがたが脱ぎ捨てること、
また、あなたがたが霊と心において新しくされ続け、
真理に基づく義と聖をもって、神にかたどり造られた新しい人を着ることでした。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면 이제 온전히 주님을 믿고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진정으로 주님을 영접하여, 맹물이 아닌 최고의 포도주, 이전 것을 버린 새로운 피조물,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린 새 사람으로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함께 기쁨의 새해 2024년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右にも左にもそれてはならないのです。

これからは心から主を私たちの救い主として受け入れ、真水ではない最高の葡萄酒、古いものは過ぎ去り新しく造られた者、腐敗していく古い人を脱ぎ捨て、新しい人として生まれ変わることによって、主とともに喜びに満ちた新年2024年を生き抜く皆様であらんことを主の御名においてお祈りいた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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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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