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3회 좋은 이웃 - 기린선교회
2024년 5월 5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29절~37절
“29.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29.しかし彼は、自分が正しいことを示そうとしてイエスに言った。「では、私の隣人とはだれですか。」
30.イエスは答えられた。「ある人が、エルサレムからエリコへ下って行ったが、強盗に襲われた。強盗たちはその人の着ている物をはぎ取り、殴りつけ、半殺しにしたまま立ち去った。
31.たまたま祭司が一人、その道を下って来たが、彼を見ると反対側を通り過ぎて行った。
32.同じようにレビ人も、その場所に来て彼を見ると、反対側を通り過ぎて行った。
33.ところが、旅をしていた一人のサマリア人は、その人のところに来ると、見てかわいそうに思った。
34.そして近寄って、傷にオリーブ油とぶどう酒を注いで包帯をし、自分の家畜に乗せて宿屋に連れて行って介抱した。
35.次の日、彼はデナリ二枚を取り出し、宿屋の主人に渡して言った。『介抱してあげてください。もっと費用がかかったら、私が帰りに払います。』
36.この三人の中でだれが、強盗に襲われた人の隣人になったと思いますか。」
37.彼は言った。「その人にあわれみ深い行いをした人です。」すると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も行って、同じようにしなさい。」”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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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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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18번째 시간으로서 “좋은 이웃” 善き隣人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은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이전 설교 내용에 있어서 좀 정정을 해야 할 뿐이 있어서, 이 부분에 대해서 우선 말씀 드리고 난 다음에 오늘 본론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지지난주, 그러니까 지난 4월 21일 주일 설교 내용에 있어서 달란트에 대한 말씀을 드리면서, 여기서 한 달란트는 30킬로 정도가 되고 금 30킬로는 1그램을 1만엔, 10만원으로 계산한다면 3억엔, 한국돈 30억원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좀 정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말씀 드리면,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어쩐지 너무 많더라 했지. 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조금 더 들어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계속 그런 줄 알았고, 그리고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내용을 보더라도, 인터넷으로 찾아보시면 아시겠지만 실제로 그렇게 말씀을 전하시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저도 큰 의심을 하지는 않았지요.

그런데 이제 제가 동영상 촬영을 하는 과정에서 한국어 설교를 마치고 일본어로 촬영을 막 하고 있는데, 도중에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일본어로 설교를 할 때에 보면, 한국어로 된 원고를 보고 이것을 이제 일본어로 바꾸어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그런데 성경 본문은 제마음대로 통역을 하게 되면 문제가 되기 때문에, 성경 본문에 대해서는 일본어 성경을 입력해 놓거든요.

이제 한국어 설교 촬영을 마치고 다음으로 일본어로 설교 촬영을 하는데, 그런데 문득 제 눈에 한 구절이 들어왔어요. 그게 어디냐 하면 마태복음 25장 15절입니다.

마태복음 25장 15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彼は、おのおのその能力に応じて、ひとりには五タラント、ひとりには二タラント、もうひとりには一タラントを渡し、それから旅に出かけた。

한국어 성경은 분명히 <금 다섯 달란트>라고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당연히 금, 그러니까 금은 골드이고, 무게는 대략 30킬로 정도라고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제가 사용하고 있는 일본어 성경 신개역 2017을 보니까 <금>이라는 말이 없는 거예요. 그냥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입니다.

그래서 일본어 설교 동영상을 촬영하다가 도중에 일단 좀 멈추고 난 다음에, 서둘러서 이것저것 자료를 찾아봤어요. 그랬더니 다른 일본어성경에도 <금>이라고 하는 표현이 없고, 그리고 영어 성경을 보더라도 <골드>라고 되어 있는 성경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원어 성경을 봤지요. 그랬더니 거기에도 금을 나타내는 헬라어 <크뤼시온>이라는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

그러니까 다른 번역본들을 보더라도 마태복음 25장에서 나온 달란트를 <금> 그러니까 말하자면 골드로 표현한 번역본들은 찾아볼 수 없었고, 오직 한글개역과 한글개역개정 성경에만 <금 다섯 달란트>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금>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는 <골드>의 금이 아니라 <돈>을 나타내는 <금>이라고 이해를 해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도 보면 예를 들어서 <금일봉>이라고 해도 그게 금이 아니라 사실 돈이잖아요.


그래서 영어성경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NIV 성경에 보면 이를 금을 나타내는 <골드>가 아니라, 돈을 나타내는 <머니>로 기록하고 있고, 그리고 한글 성경에서 본다면 공동번역 성경에 보니까 아예 <돈 다섯 달란트>라고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여러 자료들을 찾아보니까, 구약에서는 달란트라는 것을 무게로 사용해왔지만 신약에 있어서는 이를 화폐단위로 사용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 이를 귀금속인 <금>의 무게로 해서 말씀을 전하신 분들은 잘못 전하신 것이냐 하면,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전하셨다 하더라도 그 내용에 있어서의 본질은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신약시대에 있어서 화폐단위로 사용된 달란트라는 것은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었냐 하면, 한 달란트가 6000데나리온이었다고 합니다.

혹시 한 데나리온의 가치가 어느 정도라고 말씀드렸었는지 기억하시나요? 예, 일용직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 한 데나리온이라고 말씀을 드렸었지요.


그래서 이를 편의상 요즘 하루 일당을 대략 1만엔, 10만원으로 잡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한 달란트가 6000데나리온이고 한 데나리온이 1만엔이니까 한 달란트는 6000 곱하기 1만엔이잖아요. 그러면 6000데나리온 곱하기 1만엔, 10만원하면 어떻게 됩니까.

예, 한 달란트는 화폐가치로 본다면 지금의 6000만엔, 한국돈 6억원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를 무게가 아니라 화폐가치로 보게 된다면, 제가 지난 주에 말씀 드렸던 3천만엔, 3억원보다도 두 배나 많은 돈이 됩니다.

하지만 뭐 한 달란트가 3천만엔이든 6천만엔이든, 그리고 3억원이든 6억원이든 간에 큰 돈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무게로 이해를 하든 화폐가치로 이해를 하든 그 말씀의 본질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다고 말씀을 드린 것이지요.

하지만 이번 복음서 강해를 통해서 우리 이번 기회에 성경을 보다 깊이 이해한다는 의미에서 이 점을 기억하고 넘어가고자 해서 말씀을 드리기로 했습니다.

자, 그럼 이제 오늘 본론으로 넘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내용, 이는 착한 사마리아인, 또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善きサマリア人のたとえ)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에서 간과하고 있는 부분,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선 지금 이 상황을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 25절에 의하면 지금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고 있는 사람은 <어떤 율법교사>(律法の専門家) 입니다.

누가복음 10장 27절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내용이 나오고 난 다음에, 오늘 29절에 보니까 이 율법교사가 이웃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서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것이지요.

누가복음 10장 3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0.イエスは答えられた。「ある人が、エルサレムからエリコへ下って行ったが、強盗に襲われた。強盗たちはその人の着ている物をはぎ取り、殴りつけ、半殺しにしたまま立ち去った。


오늘 중요한 핵심내용은 사실 이 구절에 대부분이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단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되는 점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우선 이 강도를 만난 사람이 유대인인지 이방인이지, 나이든 사람인지 어린 사람인지, 그리고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적혀 있지 않다는 점이 첫째이고, 다음으로 이 사람이 가지고 있던 짐은 물론이고 옷까지도 빼앗겨버렸다는 점이 둘째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사람의 상태가 거의 죽은 것이었다는 점이 셋째입니다.

당시는 인종차별이 대단히 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철저하게 차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같은 유대인들 사이에 있어서도 여자와 미성년자들은 사람 수를 셀 때에 인구에도 포함이 되지 않을 정도로 홀대를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다음으로 이 사람은 현재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강도들이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버리고 말았어요. 하물며 이 사람이 입고 있던 옷까지도 벗겨버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이 사람은 거의 죽은 것 같다고 했지요. 이는 무엇을 말해주느냐 하면 이렇게 멀리서 보기만 한다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정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이와 같은 점을 염두에 두시고 다음 구절을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1절~32절
“31.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1.たまたま祭司が一人、その道を下って来たが、彼を見ると反対側を通り過ぎて行った。
32.同じようにレビ人も、その場所に来て彼を見ると、反対側を通り過ぎて行った。

여기서 제사장이라고 한다면 주로 사두개파 사람들이 맡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 정치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레위인이라고 하면 모세와 아론의 후손으로서 당시 성전을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등장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당대에 있어서 누구보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지금 이 강도를 만난 사람 옆을 지나가는데, 그를 도와주지는 않고 똑같이 피하여 지나갔다고 합니다.


사실 짐작해본다면 그 옆을 지나간 사람들이 어디 이 두 사람 뿐이었겠습니까. 그 외 많은 사람들도 이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 곁을 지나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누구 하나 이 사람을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어쩌면 이 사람이 유대인인지 이방인이지 알지 못해서, 아니면 어린애나 여자를 괜히 건드렸다가 골치 아픈 사건에 휘말리지나 않을까 불안해서, 그것도 아니라면 이미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옷까지 벗겨진 사람을 살려봤자 마땅한 대가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 옆을 그냥 지나갔는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있다고 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마저도 인정머리 없게 그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해서 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어떤 그림을 봤는데 이는 이 장면, 그러니까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이 사람 곁을 피해서 가는 모습을 그려 놓은 것이었는데, 그 그림을 보면,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이 사람 옆을 아주 몰래 들키지 않게 살금살금 지나가는 듯이 그려 놓은 그림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방금 이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해서 지나온 제사장이나 레위인을 멈춰 세우고는, 아니, 당신 지금 너무한 거 아니냐. 사람이 지금 저렇게 쓰러져 있는데 그걸 보고도 그냥 지나쳐오면 어떡하냐…… 만약에 이렇게 따졌다면 그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어떻게 말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어요.

아이구, 들켜버렸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정말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할까요?

저는 장담합니다. 지금 강도 옆을 피해서 지나간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절대로 죄를 지었다거나 잘못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은 옳은 일을 했다고 당당하게 주장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강도 만난 사람의 상태입니다. 지금 이 사람의 상태가 어땠다고 했습니까.

강도들이 때려서 거의 죽은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멀리서 이렇게 보기만 하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는 것이지요.

아니, 그렇다면 다가가서 흔들어 보기라도 하면 될 것 아닌가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일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이 제사장이나 레위인이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율법에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민수기 19장 11절~13절
“11.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12.그는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잿물로 자신을 정결하게 할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려니와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냥 부정하니
13.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것은 정결하게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하게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그대로 있음이니라”

死人に触れる者は、それがどの人のものであれ、七日間汚れる。
その者は三日目と七日目に、先の水で身の汚れを除いて、きよくなる。三日目と七日目に身の汚れを除かなければ、きよくならない。
死人、すなわち死んだ人間のたましいに触れ、身の汚れを除かない者はみな、主の幕屋を汚す。その者はイスラエルから断ち切られる。その者は汚れを除く水を振りかけられていないので汚れていて、その者の中になお汚れがあるからである。


이 말씀은 지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죽은 사람의 시신을 만지게 되면 그 사람은 하루도 아닌 7일 동안이나 부정하다고 해요. 그리고 정결하게 되지 않은 상태라면 하나님의 성막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게 무슨 큰 문제냐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렇죠. 제사장과 레위인 아니었습니까. 다른 사람들이라면 큰 지장이 없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하나님의 일을 직접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매일같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자신이 부정하게 되면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게 하루 뿐이냐 하면 7일 동안이나 부정하다잖아요. 다시 말해서 한 번 부정하게 되면 일주일 동안 일을 할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지나가다가 누가 땅에 쓰러져 있는데 움직이질 않아요. 살았는지 죽었는지 분간이 안 됩니다.

그런데 괜히 만졌다가 그 사람이 죽은 사람이라면 7일 동안 부정해져서 자기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잖아요.


그리고 그 일이라는 것이 그냥 개인적인 일이에요? 아니에요. 거룩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제사장으로서 그리고 레위인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맡고 있는데 그 일을 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다음과 같이 주장할 것입니다.

“분명히 율법에 그렇게 적혀 있지 않냐. 그러니까 그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데에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그 사람 옆을 피해 왔는데, 무슨 잘못을 했다는 것이냐. 오히려 율법을 잘 지켰다고,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데에 지장이 없도록 했다고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겠냐.”

이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분명 이처럼 당당하게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반면에 사마리아 사람은 어땠습니까.

당시에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로부터 말도 서로 하지 않을 정도로 대단히 심한 차별을 받아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사람은 어디 사는 누구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이든 사람인지 어린 사람인지, 재산이 있는 사람인지 없는 사람인지, 그리고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그 사람한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만졌나요? 예, 만질 정도가 아니지요.

누가복음 10장 34절~35절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4.そして近寄って、傷にオリーブ油とぶどう酒を注いで包帯をし、自分の家畜に乗せて宿屋に連れて行って介抱した。
35.次の日、彼はデナリ二枚を取り出し、宿屋の主人に渡して言った。『介抱してあげてください。もっと費用がかかったら、私が帰りに払います。』

이 사마리아 사람은 그 사람을 만졌을 정도가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정성껏 치료를 해주고는 자기 짐승에 태워서 주막까지 데리고 가서 거기서도 돌보아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음 날에 자기는 떠나야 하기 때문에 숙소를 나서게 되지만 이 다친 사람은 거동할 수가 없었나보죠? 그래서 거기 주인한테 2데나리온, 그러니까 2만엔, 한국돈 20만원 정도를 주면서 이 사람을 좀 돌보아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혹시 부족했다면 그 때가서 나머지도 자기가 갚겠다고 해요.

여기서의 2데나리온, 2만엔, 20만원이라는 돈이 꼭 적은 액수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다음 날 여행을 떠난 것으로 보아서, 그래도 이 사람의 여행에 있어서는 큰 지장이 없는 지출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여기까지 말씀을 마치시고 그 율법교사에게 물으십니다.

누가복음 10장 36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6.この三人の中でだれが、強盗に襲われた人の隣人になったと思いますか。」

예수님은 묻습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어려운 사람을 지나쳐버린 제사장과 레위인, 율법을 어기게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 사마리아 사람, 이 중에서 누가 진정한 이웃이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을 한 사람도 율법교사라고 할 정도이니까 당연히 율법을 잘 알고 있었겠지요. 만약에 이 중에서 누가 율법을 잘 지킨 사람이냐고 예수님이 물으셨다면, 이 율법교사는 어쩌면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라고 대답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율법교사는 절대로 그렇게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강도 만난 자의 이웃> 그러니까 어려움을 겪는 사람의 이웃이냐고 물으셨기 때문인데, 이유는 그 뿐만이 아닙니다. 더 큰 이유는 이 율법교사가 처음에 했던 질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29절 말씀을 다시 볼까요.

누가복음 10장 29절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29.しかし彼は、自分が正しいことを示そうとしてイエスに言った。「では、私の隣人とはだれですか。」

이 율법교사는 애초에 자기 이웃을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어떤 사람이 진정한 내 이웃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이 말씀을 하셨는데, 어쩌면 이 비유를 듣고 있던 율법교사한테는 이렇게 들렸을지도 모릅니다.

“율법교사야, 네가 이렇게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은 것 같이 되었을 때,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 너를 살려주지 않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율법을 어겨가면서까지 너를 살려줬어. 그럼 누가 너의 이웃이 되겠니.”

아마도 그의 귀에는 이렇게 들리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들은 율법교사는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아니, 지금 자기가 죽어가는 마당에 율법을 지키는 게 중요해요? 그러니까 무조건 자기를 살려준 사람이 자기 이웃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이 질문에 대해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철저하게 차별하고 있었는데, 그 사마리아 사람이 자기 이웃이라고 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 분명하거든요.


그래서 그는 간신히 <자비를 베푼 사람이 제 이웃입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その人にあわれみ深い行いをした人です。」

이 말을 들으셨다면, 예수님은 뭐라고 하셔야 해요? 그래. 맞다. 율법을 어기면서도 너를 살려준 사람이 네 이웃이다……이렇게 끝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극적 반전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풀이 죽어 있는 그에게 결정적인 일격을 가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0장 37절 후반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あなたも行って、同じようにしなさい。」

어쩌면 이 말씀을 들은 율법교사는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지금까지 율법교사는 자기가 강도 만난 피해자이고 나를 도와 주는 사람이 진정한 이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마지막에 보면 뭐예요?

율법을 어길 수도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도움을 받는 입장이 아니라 도움을 베푸는 입장이 되라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이지요.


예전에 어느 일본 텔레비전 방송에 보니까 그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거기 출연한 미혼 젊은 여성들에게 당신들의 이상형인 남성은 어떤 사람이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뭐, 대답이 뻔해요. 키는 몇 센티 이상, 학력은 어디어디 대학 이상이고 연봉은 얼마 이상에다가 외모는 어떻고 집안은 어떻고……하는 조건들이 줄을 잇습니다.


그 결과를 보고 거기 나온 강사가 하는 말이, 자, 여러분이 말씀하신 이 조건들을 모두 갖춘 남성, 그것도 미혼 남성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많이 잡아도 상위 5프로에 드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생각해봐라. 여러분이 자기자신을 생각했을 때, 이 나라에서 상위 5프로에 드는 남성이 당신을 선택할 것 같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남자만이 아니지요. 남녀를 떠나서 상대방도 바보가 아닌데, 단순히 계산해봐도 상위 5프로에 드는 상대방이 자기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자기도 상위 5프로에 들 정도는 되어야 하잖아요. 그러면 자기 자신은 정말 그 정도 수준이냐 하는 것이지요.

정작 자기는 거기에 전혀 미치지 못하면서, 상대방에 대한 조건만 높아진다면 그게 실현가능성이 있겠냐는 말입니다. 그것 참 맞는 말씀 같았습니다.

우리 자신을 비롯해서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자기에게 있어서 좋은 사람들이 좋은 이웃이 되어서, 우리가 그 사람들한테서 많은 도움을 받기 원합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이웃이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율법도 좋고 규례(命令)도 좋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예수님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즉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쩌면 율법을 빌미로, 규례를 빌미로 해서 우리 이웃에게 도움을 주기보다 핍박하고 비난하고 차별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시편 94편 20절
“율례를 빙자하고 재난을 꾸미는 악한 재판장이 어찌 주와 어울리리이까”

破滅をもたらす法廷が あなたを仲間に加えるでしょうか。 おきてに従いながら 邪悪なことを謀る者どもが。

때로는 율법을 빙자하고 규례를 빙자해서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비판하거나 공격하거나 차별하는 경우는 없습니까.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차별하면 주님은 우리를 차별하실 것입니다.


그 어떤 율법이나 계명이라 하더라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이는 마치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강도 만난 사람 옆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피해간 제사장과 레위인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이웃을 원하십니까. 우리가 어려움을 겪을 때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이웃을 원하십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좋은 이웃을 찾아 나서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이 좋은 이웃이 되라고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이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이웃에게 우리가 아낌없이 도움을 주는 좋은 이웃이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본이 되는 삶을 통해서, 장차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칭찬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みなさん、素晴らしい隣人が欲しいですか。私たちが困っているとき、私たちを助けてくれる隣人を望みますか。主は私たちにそのような素晴らしい隣人を探し求めなさいとはおっしゃいません。むしろ私たち自身が素晴らしい隣人になりなさいとおっしゃっているのです。

これからは、私たちを助けてくれる隣人を探し求めるのではなく、私たちの助けを必要とする隣人、私たちが助けてあげられる隣人に、私たちが惜しみなく助けてあげる素晴らしい隣人になることによって、神様に対する愛と隣人に対する愛の模範になるような人生を送り、やがて主から大きな称賛を受けられる皆さま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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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42회 구분하십니다 - 기린선교회
2024년 4월 28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46절
“31.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マタイの福音書 25章 31節~46節
“31.人の子は、その栄光を帯びてすべての御使いたちを伴って来るとき、その栄光の座に着きます。
32.そして、すべての国の人々が御前に集められます。人の子は、羊飼いが羊をやぎからより分けるように彼らをより分け、
33.羊を自分の右に、やぎを左に置きます。
34.それから王は右にいる者たちに言います。『さあ、わたしの父に祝福された人たち。世界の基が据えられたときから、あなたがたのために備えられていた御国を受け継ぎなさい。
35.あなたがたはわたしが空腹であったときに食べ物を与え、渇いていたときに飲ませ、旅人であったときに宿を貸し、
36.わたしが裸のときに服を着せ、病気をしたときに見舞い、牢にいたときに訪ねてくれたからです。』
37.すると、その正しい人たちは答えます。『主よ。いつ私たちはあなたが空腹なのを見て食べさせ、渇いているのを見て飲ませて差し上げたでしょうか。
38.いつ、旅人であるのを見て宿を貸し、裸なのを見て着せて差し上げたでしょうか。
39.いつ私たちは、あなたが病気をしたり牢におられたりするのを見て、お訪ねしたでしょうか。』
40.すると、王は彼らに答えま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が、これらのわたしの兄弟たち、それも最も小さい者たちの一人にしたことは、わたしにしたのです。』
41.それから、王は左にいる者たちにも言います。『のろわれた者ども。わたしから離れ、悪魔とその使いのために用意された永遠の火に入れ。
42.おまえたちはわたしが空腹であったときに食べ物をくれず、渇いていたときに飲ませず、
43.わたしが旅人であったときに宿を貸さず、裸のときに服を着せず、病気のときや牢にいたときに訪ねてくれなかった。』
44.すると、彼らも答えます。『主よ。いつ私たちは、あなたが空腹であったり、渇いていたり、旅人であったり、裸でいたり、病気をしていたり、牢におられたりするのを見て、お世話をしなかったでしょうか。』
45.すると、王は彼らに答えます。『まことに、おまえたちに言う。おまえたちがこの最も小さい者たちの一人にしなかったのは、わたしにしなかったのだ。』
46.こうして、この者たちは永遠の刑罰に入り、正しい人たちは永遠のいのちに入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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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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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17번째 시간으로서 “구분하십니다” 分けられます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도 지난 주에 이어서 마태복음 25장을 계속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도 조금 길긴 합니다만, 그래도 우리에게 익숙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지요.

마태복음 25장 31절~33절
“31.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1.人の子は、その栄光を帯びてすべての御使いたちを伴って来るとき、その栄光の座に着きます。
32.そして、すべての国の人々が御前に集められます。人の子は、羊飼いが羊をやぎからより分けるように彼らをより分け、
33.羊を自分の右に、やぎを左に置きます。


마지막 날에 예수님이 오셔서는 모든 민족을 앞에 모으시고 난 다음에 이를 양과 염소로 구분하신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이를 문자 그대로 모든 사람들을 양과 염소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상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상징이냐 하면, 34절과 41절에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양으로 구분된 오른쪽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34절
“34.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4.それから王は右にいる者たちに言います。『さあ、わたしの父に祝福された人たち。世界の基が据えられたときから、あなたがたのために備えられていた御国を受け継ぎなさい。

반면에 염소로 구분된 왼쪽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25장 41절
“41.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1.それから、王は左にいる者たちにも言います。『のろわれた者ども。わたしから離れ、悪魔とその使いのために用意された永遠の火に入れ。

그리고 마지막 구절,

마태복음 25장 46절
“46.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46.こうして、この者たちは永遠の刑罰に入り、正しい人たちは永遠のいのちに入るのです。」

이렇게 본다면 양으로 구분된 오른쪽 사람들은 영생을 얻은 사람들이고, 염소로 구분된 왼쪽 사람들은 저주를 받아 영벌 즉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외국에 보면 마귀들을 그릴 때에 염소뿔이 달린 것처럼 그리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바로 이와 같은 성경 구절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정말로 양은 구원을 상징하는 동물인 반면에 염소는 마귀나 지옥을 상징하는 동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실 그렇다고 보기는 좀 어려움이 있습니다.

구약에 보시면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은 당연히 거룩한 것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엄격하게 구체적으로 지정이 되어 있었습니다만, 구약에 보시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레위기 22장 18절~19절
“18.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스라엘 자손이나 그 중에 거류하는 자가 서원제물이나 자원제물로 번제와 더불어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려거든
19.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アロンとその子ら、またすべてのイスラエルの子らに告げよ。だれでも、イスラエルの家の者、またはイスラエルにいる寄留者がささげ物を献げ、誓願のささげ物あるいは進んで献げるものとして、全焼のささげ物を主に献げる場合、
あなたがたが受け入れられるには、それは牛、羊、あるいはやぎのうちの、傷のない雄でなければならない。


그 외에도 성경에 보시면 양과 염소를 항상 동등하게 취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양은 거룩하고 염소는 부정하다는 구절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굳이 구분하시는 과정에서 양과 염소로 표현하셨을까요.

한국이나 일본을 본다면 예를 들어서 양을 한자로 쓰시면 어떻게 됩니까. 예, 양 양자가 있지요. 이 글자 하나를 쓰면 이것이 곧 양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혹시 염소를 한자로 나타내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나요? 예, 이는 일본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습니다만 염소를 한자로 쓴다고 한다면 산양(山羊)이라고 씁니다.

이는 무엇을 가리키냐 하면 양과 염소는 분명 다른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실제로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법적으로 양과 염소를 동일하게 취급해오기도 해왔었다고도 하니 역시 이 점을 반증해주기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 큰 양이나 염소는 저 같은 비전문가라도 구분할 수는 있지만, 아직 어렸을 때에는 이게 양인이 염소인지는 대단히 구분하기가 어렵잖아요.


말씀을 준비하면서 인터넷으로 사진을 구분해봤는데 어렸을 때에는 정말 어느 쪽이 양인지 염소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중에서 주님이 굳이 양과 염소로 말씀하신 이유는, 우리가 사람의 눈으로 볼 경우 겉으로는 잘 분간이 안 간다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분명히 그 차이를 알아보시고 판단하신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무엇을 잘했고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알아보아야 하겠지요.

우선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 양으로 구분된 구원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35절~40절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35.あなたがたはわたしが空腹であったときに食べ物を与え、渇いていたときに飲ませ、旅人であったときに宿を貸し、
36.わたしが裸のときに服を着せ、病気をしたときに見舞い、牢にいたときに訪ねてくれたからです。』
37.すると、その正しい人たちは答えます。『主よ。いつ私たちはあなたが空腹なのを見て食べさせ、渇いているのを見て飲ませて差し上げたでしょうか。
38.いつ、旅人であるのを見て宿を貸し、裸なのを見て着せて差し上げたでしょうか。
39.いつ私たちは、あなたが病気をしたり牢におられたりするのを見て、お訪ねしたでしょうか。』
40.すると、王は彼らに答えま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が、これらのわたしの兄弟たち、それも最も小さい者たちの一人にしたことは、わたしにしたのです。』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들은 주님께서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돌보았다고 하지요. 하지만 이들은 자신이 그랬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25장 40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0.すると、王は彼らに答えま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が、これらのわたしの兄弟たち、それも最も小さい者たちの一人にしたことは、わたしにしたのです。』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 형제 중에서 가장 작은 사람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라고 하시지요. 여기서 작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몸집이 작다거나 아니면 나이가 어리다거나 하는 뜻이 아니겠지요.

그런 것이 아니라, 쉽게 말하자면 정말로 내 대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내 가족이나 친구들, 또는 권력자들이나 부자라고 한다면, 그런 사람들에게 대접하는 것은 죄인들도 하는 일이에요.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을 내가 잘해주었다면 그건 누구나 하는 일이지 않습니까.

누가복음 6장 33절~34절
“33.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自分に良いことをしてくれる者たちに良いことをしたとしても、あなたがたにどんな恵みがあるでしょうか。罪人たちでも同じことをしています。
返してもらうつもりで人に貸したとしても、あなたがたにどんな恵みがあるでしょうか。罪人たちでも、同じだけ返してもらうつもりで、罪人たちに貸しています。

그러나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하는 사람은 오히려 내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 그야말로 나한테 아무리 큰 돈이 거저 생기더라도 밥 한 끼 안 사주고 싶은 사람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내 이웃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이 사람들은 헌신적으로 사랑을 베풀었으며, 이를 주님께서는 기쁘게 받아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면에 왼쪽에 있는 사람들, 염소로 구분된 저주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42절~45절
“42.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2.おまえたちはわたしが空腹であったときに食べ物をくれず、渇いていたときに飲ませず、
43.わたしが旅人であったときに宿を貸さず、裸のときに服を着せず、病気のときや牢にいたときに訪ねてくれなかった。』
44.すると、彼らも答えます。『主よ。いつ私たちは、あなたが空腹であったり、渇いていたり、旅人であったり、裸でいたり、病気をしていたり、牢におられたりするのを見て、お世話をしなかったでしょうか。』
45.すると、王は彼らに答えます。『まことに、おまえたちに言う。おまえたちがこの最も小さい者たちの一人にしなかったのは、わたしにしなかったのだ。』

그들은 지극히 작은 자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지극히 작은 자가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에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지극히 작은 자, 너희들의 도움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에게 도움을 주지 않은 것은 곧 내가 어려움을 겪을 때에 도움을 주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이에 대해 꾸짖고 계신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자, 여기서 우선 오해를 없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여러분의 마음에 부담을 좀 덜어 드리기 위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여기서 이 사람들은 왜 그들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겠습니까. 이는 우리가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런 사람들 한 둘은 있지 않습니까. 정말로 미운 사람, 정말 나한테 해를 끼쳤던 사람, 내 인생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 얄밉고 이기적인 사람, 그런 사람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한테 선뜻 도움을 주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이렇게 적혀 있으니까 우리는 억지로라도 내일이라도 당장 그 사람을 찾아가서 밥 한 끼라도 사주고 그래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에요. 뭐 그래도 괜찮겠습니다만,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여기 보시면 당장 그 사람을 찾아가라는 말씀이 아니잖아요. 그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정말 어려움을 겪고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에 도와주라는 말씀인 것이지요.

그리고 또한 필요 이상으로 부담을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우리에게 거금을 빌려 달라고 한다거나 아니면 대단한 도움도 줘야 하느냐 하면, 아니요. 예수님은 우리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다 퍼주라는 것이 아니잖아요.

오늘 말씀에 보시면 언제 도움을 주었다고 하십니까.

그렇죠. 상대방이 주릴 때나 목마를 때, 나그네 되었을 때, 헐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잖아요.

(空腹であったとき、渇いていたとき、旅人であったとき、裸のとき、病気のときや牢にいたとき)

주릴 때라고 하다면 아주 배가 고플 때입니다. 그 때 무슨 고급 레스토랑에서 풀코스를 대접하라는 것이 아니라 밥 한끼나 빵 한 개라도 큰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목마를 때라고 한다면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비싼 무슨 음료수가 필요하겠습니까. 아니에요. 깨끗한 물 한 잔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오늘 당장 잠을 잘 때가 없거나 헐벗었을 때라고 한다 해도 마찬가지예요. 무슨 집을 대신 얻어주거나 비싼 새 옷을 사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집에서 하루 이틀 머물게 한다거나, 아니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나누어 줄 수 있는 옷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병들었을 때라고 해도 무슨 비싼 치료비를 대라는 것도 아니고, 옥에 갇혔을 때에도 큰 돈을 들이라는 것이 아니에요. 어려움이 있을 때에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돌보고 그리고 옥에 갇혔다면 외롭지 않게 찾아가 주거나 편지라도 써주라는 것이지요.

이를 간단하게 정리한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무슨 대단한 돈이나 많은 시간을 들이라는 것이 아니에요. 다만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움이면 충분하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웃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이라는 말씀을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이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내용인데, 항상 말씀 드리듯이 이는 하나님 사랑이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이 이웃 사랑이라는 말씀이 아니라고 했지요?

그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일하다. 즉,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중요하다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는 또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르겠지요.

아이고 주님, 제가 주님도 사랑하고 하나님도 사랑합니다만, 제가 그 인간은 아무리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해도 사랑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요한1서 4장 20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神を愛すると言いながら兄弟を憎んでいるなら、その人は偽り者です。目に見える兄弟を愛していない者に、目に見えない神を愛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눈에 보이는 그 형제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게 말이 되냐. 그것은 거짓말이다. 이렇게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0절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あなたがたは、この小さい者たちの一人を軽んじたりしないように気をつけなさい。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が、天にいる、彼らの御使いたちは、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の御顔をいつも見ているからです。

우리가 생각하기에 아무리 못 나고 아무리 부족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나한테 아무리 미운 짓을 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시켜가면서 관심있게 지켜보고 계세요.

이방인에 대한 전도를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사도행전 10장 15절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すると、もう一度、声が聞こえた。「神がきよめた物を、あなたがきよくないと言ってはならない。」


마찬가지입니다. 아휴, 주님, 그 인간 아시잖아요. 그 인간이 지금 아무리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해도 그건 다 벌을 받아서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인간한테 도움을 줄 필요가 전혀 없다니까요.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도움을 주라고 한 사람을 네가 도움을 줄 필요가 없다고 하지 말라.”

「神が助けてあげなさいと言った人を、あなたが助ける必要がないと言ってはならない。」

주님은 그러시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이 말씀에 대해서 또 하나의 오해를 하시는 분이 계신 것 같아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예전에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오늘 이 본문에 대해서 누가 얘기를 하면서 하는 말이, 오늘 성경에 보면 의인들이 하는 말이 자기들이 언제 착한 일을 했는지 모른다고 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아무리 착한 일을 하더라도 착한 일을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만약에 그런 생각을 갖고 착한 일을 하면 이기적인 것이고 교만이 생기게 된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 어려운 것을 생각하기 전에, 쉽게 한 번 생각해보세요. 누군가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제가 도움을 줬어요. 아니, 뭐, 대단한 게 아니라, 예를 들어서 버스나 전철에 탔을 때 나이 드시 분에게 자리를 양보해줬어요. 그것도 역시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준 것이잖아요.

그러면 그와 같이 일을 하면서도 “나는 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까. 그게 가능해요?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나쁜 일입니까. 그것이 교만이에요?

이 말씀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아무리 우리가 무심코 한 일이라 하더라도,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지켜보고 계신다고 하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비행기의 경우를 본다면 큰 비행기든 작은 비행기든 간에 기본적으로 두 가지 기록장치가 탑재되어 있다고 해요. 그것이 뭐냐 하면 비행음성기록장치와 비행자료기록장치라고 합니다.


우선 비행음성기록장치라고 하는 것은 비행기 측과 관제탑, 그리고 비행기 조종석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음성들이 자동적으로 녹음이 되고, 비행자료기록장치라고 하는 것은 비행기의 속도, 고도, 가속도, 기체방향, 엔진 동작, 날개 상태, 조종관 방향 등 모든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기록된다고 합니다.

이 기록장치들은 1100도 고온에서도 30분 동안이나 견딜 수 있고 바다 깊이 6000미터 수압에도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 이유는 비행기에 이어서 만약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그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른 사고와 달리 비행기 사고의 경우에는 한 번 발생하게 되면 대부분 큰 참사로 이어지게 되기 때문에 생존자들의 증언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기록장치가 우리 안에도 모두 장착되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의 모든 대화가 기록되고 우리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를 기록되는 장치가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는 제 상상이 아닙니다. 말과 행동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행위라고 할 수 있잖아요.


요한계시록 20장 12절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また私は、死んだ人々が大きい者も小さい者も御座の前に立っているのを見た。数々の書物が開かれた。書物がもう一つ開かれたが、それはいのちの書であった。死んだ者たちは、これらの書物に書かれていることにしたがい、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마지막 날에 우리는 자기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말과 행동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는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기록될 뿐만 아니라, 하늘에도 보고가 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비행기 기장이라 하더라도 앞서 말씀 드린 그와 같은 비행기록장치를 마음대로 바꿀 수가 없듯이 우리 안에 있는 기록장치도 우리 마음대로 바꾸거나 조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한 일을 하고 도움을 줄 때 우리도 모르게 해야 한다? 아니요. 오히려 저는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에 구원을 받기 위해서, 오로지 이를 위해서 이를 악 물고 힘껏 달려가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취미로 선교를 했습니까. 심심풀이로 여유 부리면서 복음을 전했습니까.

빌립보서 3장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받기 위해 이를 악물고 달려갔습니다. 이를 악물고 순종을 하며, 이를 악물고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를 악물지 않아요? 오히려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이를 악물고 기를 쓰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순종이잖아요.


여러분, 순종이 무엇입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하는 것이 무슨 순종이에요. 그것이 아니라 나는 하기 싫은데도 내 주인이 시키니까 이를 악물고 하는 것이 순종 아니겠습니까.

마지막 날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때 다가올 것입니다. 그 때가 임했을 때 서둘러 이것저것 준비하려고 해도 그럴 여유가 없어요.



마태복음 24장 40절~42절
“40.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そのとき、男が二人畑にいると一人は取られ、一人は残されます。
女が二人臼をひいていると一人は取られ、一人は残されます。
です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あなたがたの主が来られるのがいつの日なのか、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ら。

고린도전서 15장 51절~52절
“51.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聞きなさい。私はあなたがたに奥義を告げましょう。私たちはみな眠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が、みな変えられます。
終わりのラッパとともに、たちまち、一瞬のうちに変えられます。ラッパが鳴ると、死者は朽ちないものによみがえり、私たちは変えられるのです。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나팔이 불 때에 순식간에 홀연히(終わりのラッパの時たちまち、一瞬のうちに) 구분되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날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 날이 언제 임할 수도 있다고 했지요?

예, 하필이면 그 날 그 때,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때 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해요? 예, 그렇습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そうです。終わりのラッパの時たちまち、一瞬のうちに分けられると書かれているではありませんか。しかし私たちは、それがいつなのかを知ることはできません。

それはいつだと申し上げましたか?

そうです。よりによってその日、私たちが全く予想だにしなかった、まさにその日になるかもしれないということを信じ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します。

ですから、どう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か。そうです。目を覚ましていなければなりません。常に備え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더 늦기 전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대로 살아가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 동안, 우리의 생각보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을 통해서,

마지막 날, 그 나팔이 불어오고 주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시는 바로 그 날,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우리를 위해 예비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手遅れになる前に、主が私たちにおっしゃってくださったとおりに生き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私たちに残された時間のその時まで、私たちの考えより主のみ言葉に従いながら生きていく人生を通じて、

最後の日、そのラッパの音が響き渡り、主が雲に乗って来られるまさにその日に、一人も漏れることなく、あなたがたのために備えられていた天の御国に入ることができ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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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41회 결산을 합니다 - 기린선교회
2024년 4월 21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14절~30절
“14.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0.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マタイの福音書 25章 14節~30節
“14.天の御国は、旅に出るにあたり、自分のしもべたちを呼んで財産を預ける人のようです。
15.彼はそれぞれその能力に応じて、一人には五タラント、一人には二タラント、もう一人には一タラントを渡して旅に出かけた。するとすぐに、
16.五タラント預かった者は出て行って、それで商売をし、ほかに五タラントをもうけた。
17.同じように、二タラント預かった者もほかに二タラントをもうけた。
18.一方、一タラント預かった者は出て行って地面に穴を掘り、主人の金を隠した。
19.さて、かなり時がたってから、しもべたちの主人が帰って来て彼らと清算をした。
20.すると、五タラント預かった者が進み出て、もう五タラントを差し出して言った。『ご主人様。私に五タラント預けてくださいましたが、ご覧ください、私はほかに五タラントをもうけました。』
21.主人は彼に言った。『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おまえはわずかな物に忠実だったから、多くの物を任せよう。主人の喜びをともに喜んでくれ。』
22.二タラントの者も進み出て言った。『ご主人様。私に二タラント預けてくださいましたが、ご覧ください、ほかに二タラントをもうけました。』
23.主人は彼に言った。『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おまえはわずかな物に忠実だったから、多くの物を任せよう。主人の喜びをともに喜んでくれ。』
24.一タラント預かっていた者も進み出て言った。『ご主人様。あなた様は蒔かなかったところから刈り取り、散らさなかったところからかき集める、厳しい方だと分かっていました。
25.それで私は怖くなり、出て行って、あなた様の一タラントを地の中に隠しておきました。ご覧ください、これがあなた様の物です。』
26.しかし、主人は彼に答えた。『悪い、怠け者のしもべだ。私が蒔かなかったところから刈り取り、散らさなかったところからかき集めると分かっていたというのか。
27.それなら、おまえは私の金を銀行に預けておくべきだった。そうすれば、私が帰って来たとき、私の物を利息とともに返してもらえたのに。
28.だから、そのタラントを彼から取り上げて、十タラント持っている者に与えよ。
29.だれでも持っている者は与えられてもっと豊かになり、持っていない者は持っている物までも取り上げられるのだ。
30.この役に立たないしもべは外の暗闇に追い出せ。そこで泣いて歯ぎしりするの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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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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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16번째 시간으로서 “결산을 합니다” 清算をします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에 이어서 오늘은 마태복음 25장 14절~30절까지를 살펴보려고 하는데, 오늘 본문은 좀 길지만 말씀 자체는 우리에게 친숙한 내용이기 때문에 이해하시기에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은 이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한 다음에 이 말씀에 담겨진 뜻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종들의 주인이 먼 길을 떠나는데 그 전에 자기 소유를 그 종들에게 맡겼다고 하지요. 한 사람한테는 금 다섯 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다고 합니다.

예전에 제가 한 달란트라고 하는 것의 무게가 어느 정도라고 말씀 드렸는지 혹시 기억하시나요?


당시의 무게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씀 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한 달란트가 지금의 무게로 환산했을 때 신학자들은 대략 27킬로에서 34킬로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이를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30킬로라고 하지요.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뭐가 한 달란트래요? 예, 금이 한 달란트라고 합니다.

요즘은 금값도 많이 올랐다고 하지요? 그래서 금 1그램이 1만엔, 10만원이 넘는다고 하는데, 이것도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금 1그램에 1만엔, 10만원이라고 한다면, 1킬로는 몇 그램이에요? 예, 1킬로는 1000그램입니다.

그러면 1그램에 1만엔, 10만원이라고 한다면, 1킬로, 1000그램은 얼마입니까. 예, 계산 쉽지요? 1그램에 1만엔, 10만원이라고 한다면 1킬로, 1000그램이라면 1000만엔, 1억원이 됩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는 무게가 어떻게 되었지요? 예, 30킬로입니다.

금이 1킬로에 1000만엔, 1억원이었으니까 30킬로면 어떻게 됩니까.

예, 30배를 하면 되니까 3억엔, 30억원이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이게 몇 달란트요? 예, 한 달란트가 그 정도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서 종에게 한 달란트를 맡겼다고 해서 조금 맡겼다고 생각하면 이는 오해입니다. 제일 적게 맡긴 종이라 하더라도 3억엔, 30억원이라는 거금을 맡겼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큰 재산을 맡기고 주인은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오랜 후에 돌아와서 결산을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다른 종들은 주인이 맡긴 재산을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해서 그 재산을 불렸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칭찬을 하지요.

하지만 마지막 종은 어떻습니까. 그 종은 일을 하지 않고 땅에 묻어 놨었어요.

이 사실을 알았던 주인은 크게 화를 냅니다.


마태복음 25장 26절~30절
“26.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マタイの福音書 25章 26節~30節
26.しかし、主人は彼に答えた。『悪い、怠け者のしもべだ。私が蒔かなかったところから刈り取り、散らさなかったところからかき集めると分かっていたというのか。
27.それなら、おまえは私の金を銀行に預けておくべきだった。そうすれば、私が帰って来たとき、私の物を利息とともに返してもらえたのに。
28.だから、そのタラントを彼から取り上げて、十タラント持っている者に与えよ。
29.だれでも持っている者は与えられてもっと豊かになり、持っていない者は持っている物までも取り上げられるのだ。
30.この役に立たないしもべは外の暗闇に追い出せ。そこで泣いて歯ぎしりするのだ。』”

주인은 그를 가리켜서 악하고 게으른 종(悪い、怠け者のしもべ)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가졌던 것을 빼앗길 뿐만 아니라 바깥 어두운 데(外の暗闇)로 내쫓기고는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말씀하세요.

여기서 우리는 일단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부분을 확인하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확인해야 할 점은,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신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이 땅에 처음 오시고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6장 6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が言ったとおりです。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は今から後(のち)に、人の子が力ある方の右の座に着き、そして天の雲とともに来るのを見ることになります。」


그리고 이 말씀은 계시록에도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7절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見よ、その方は雲とともに来られる。すべての目が彼を見る。彼を突き刺した者たちさえも。地のすべての部族は彼のゆえに胸をたたいて悲しむ。しかり、アーメン。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2천년 전에 하늘로 올라가시고는 다시 이 땅에 오시게 되는데 그 때의 상황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라고 우리는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십니다. 이 때는 저기 이스라엘 시골 마구간에서 조용히 태어나시는 것이 아니라, 영광 중에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며, 이 모습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하물며 예수님을 박해했던 사람이나 모두가 보는 가운데 오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오신 다음에 무엇을 하신다고 말씀하세요? 나를 믿은 사람은 구원 받고 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뜨린다고 하시나요?


오늘 말씀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결산(清算)”을 하시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확인해야 할 두 번째 점입니다. 주님은 분명 “결산”을 하시겠다고 해요.

많은 사람들은 사실 이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자, 우선 오늘 본문 말씀 중에 등장하는 주인을 예수님이라고 한다면, 그 주인 밑에 있는 세 종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에요? 아니면 안 믿는 사람이에요.

예, 믿는 사람이지요.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누구한테 돈을 잠시 가지고 있으라고 맡긴다고 한다면, 아무리 적은 돈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디 사는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한테 돈을 맡기겠습니까.

그런데 여기 보세요. 그냥 푼돈이 아니에요. 자기마치 금 30킬로, 대략 3억엔, 30억원이나 되는 돈을 아무한테나 맡길 리가 있겠습니까.


에이, 뭐 그래도 부자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한국이나 일본에서 아무리 대기업 재벌 회장이라 하더라도 누군지 모르는 사람한테 3억엔, 30억원을 맡기겠어요?

그리고 자기 회사 사람이라 하더라도 말단 사원이나 대리, 과장한테 그 큰 돈을 맡기겠습니까. 적어도 부장이나 아니면 임원급한테 맡기지 않겠어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교회 돈 3억엔, 30억원이나 되는 돈을 교회에 나온지 얼마 안 되는 초신자한테 맡기지는 않을 것 아니에요. 아무리 못해도 교회 임원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 이렇게 본다면 여기에 나오는 종이라고 하는 사람은 모두가 다 그 주인과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함께 있어왔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도 그 종들이 분명히 성실하게 일을 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겠지요.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어떻습니까. 다른 종들은 열심히 맡은 바 소임을 감당했는데 마지막 종은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기껏 그 큰 재산을 맡겨 놨더니, 아무 일도 안 했어요.


이는 마치 그런 것이지요. 주인이 그 종을 위해서 3억엔이나 들여서 회사를 차려줬는데, 주인이 떠나자 셔터문 내리고 놀기만 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는 단순히 게으른 것만이 아니라 주인의 기대를 의도적으로 저버렸기 때문에 악한 종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종은 어떻게 되었다고 합니까. 그래도 예수님을 믿었으니까 구원을 받았다고 하시나요? 아닙니다.

마태복음 25장 30절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30.この役に立たないしもべは外の暗闇に追い出せ。そこで泣いて歯ぎしりするのだ。』”

생각해보십시오.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김을 당하고 거기서 슬피 우는 사람을 두고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하시겠습니까.

어떤 분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단순히 슬퍼한다는 것이 아니라, “슬피 우며 이를 간다(泣いて歯ぎしりする)”는 것은 자신은 전혀 예상하지 않은 일을 당한 상황을 뜻한다는 것이에요.


저는 이 주장에 대해서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종은 내가 주인이 맡겨준 돈을 땅에 묻어 놨다가 주인이 다시 왔을 때 그걸 파내서 주면 칭찬 받을 줄 알았던 거예요.

그런데 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반대로 크게 혼이 났을 뿐 아니라 내쫓김을 당하고 말았다고 하니 얼마나 놀라고 억울했겠습니까.

그래서 단순히 슬피 우는 것만이 아니라 이를 갈았다고까지 한다는 것이지요. 참 맞는 말씀 같아요.

그런데 저는 요즘 교회에 보면 마지막 날에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슬피 울며 기를 갈게 되지나 않을까 대단히 우려가 됩니다.

이는 이단 사이비 단체에서만이 아니라 복음주의 개혁주의 기독교 교회에서도 말합니다. 한 번 믿으면 죄를 지어도 괜찮아. 한 번 믿으면 그 때에 구원이 약속되는 것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얼마나 좋아요. 하지만 주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고 계시잖아요. 아무리 큰 재산을 맡길 만한 종이라 하더라도 마지막 날에 결산을 할 것이고 그 결과에 따라서는 축복이나 구원 대신 저주를 받을 수 있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열왕기상 13장에 보시면 흥미로운 내용이 등장합니다.

솔로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남북이 나뉘게 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이 있는 남쪽 유다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レハブアム)이 왕이 되지만 북쪽 이스라엘은 여로보암(ヤロブアム)이 통치를 하게 되지요.

그런데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도 우상을 숭배해요. 바로 그 때 남쪽 유다에서 한 선지자가 북 이스라엘 벧엘(ベテル)까지 와서 보자 여로보암이 우상한테 절을 합니다. 이 때에 이 선지자는 여로보암(ヤロブアム) 왕을 저주하고 죽음을 예언합니다.

이를 들은 여로보암(ヤロブアム) 왕은 이 유다에서 온 선지자를 대접하려고 하는데, 이 선지자는 이를 거부합니다.

그 이유를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열왕기상 13장 8절~10절
“8.하나님의 사람이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 절반을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 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9.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10.이에 다른 길로 가고 자기가 벧엘에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아니하니라”


すると神の人は王に言った。「たとえ、あなたの宮殿の半分を私に下さっても、私はあなたと一緒に参りません。また、この場所ではパンも食べず、水も飲みません。
というのは、主のことばによって、『パンを食べてはならない。水も飲んではならない。また、もと来た道を通って帰ってはならない』と命じられているからです。」
こうして、彼はベテルに来たときの道は通らず、ほかの道を通って帰った。


유다에서 온 선지자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여기서는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말고 오라고 하셨기 때문에 아무리 왕이 먹거나 마시라고 해도 못 마시겠다고 거절을 해요.

그런데 마침 그 벧엘에 어떤 한 늙은 선지자가 살고 있었다고 해요. 그의 아들들이 여로보암 왕과 유다에서 온 선지자 사이에 있었던 일을 보거나 들었나보죠? 이 일을 집에 가서 자신의 아버지인 나이 든 선지자한테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버지 선지자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 유다에서 온 선지자를 따라가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마침내 이 늙은 선지자가 지금 막 유다로 돌아가고 있는 선지자를 길가에서 만나요. 그러면서 이 늙은 선지자가 말하기를 자기 집에 가서 식사를 하자고 청합니다.

하지만 거긴 자기 고향이 유다가 아니라 아직 이스라엘 땅이에요. 왕의 명령도 거절했는데 그 사람의 부탁을 들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말하지요.

그러자 이 늙은 선지자가 유다에서 온 선지자한테 말합니다.


열왕기상 13장 18절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彼はその人に言った。「私もあなたと同じく預言者です。御使いが主のことばを受けて、私に『その人をあなたの家に連れ帰り、パンを食べさせ、水を飲ませよ』と告げました。」こうして彼はその人をだました。

이게 무슨 말이에요? 이 나이든 선지자가 말하기를, 나도 당신과 같은 선지자인데, 천사가 나한테 나타나서 말하기를 하나님 말씀에 당신을 집으로 초청하고는 함께 식사를 하라고 하셨다더라……이랬다는 거잖아요.

하지만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거짓말이에요. 하지만 유다에서 온 선지자는 이 말을 믿고 이 나이든 선지자를 따라가서 식사를 하게 됩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열왕기상 13장 20절~22절
“20.그들이 상 앞에 앉아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하니
21.그가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외쳐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22.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하신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彼らが食卓に着いていたとき、その人を連れ戻した預言者に主のことばがあったので、
彼は、ユダから来た神の人に呼びかけて言った。「主はこう言われる。『あなたは主のことばに背き、あなたの神、主が命じた命令を守らず、
引き返して、主があなたに、パンを食べてはならない、水も飲んではならないと言った場所でパンを食べ、水を飲んだので、あなたの亡骸は、あなたの先祖の墓には入らない。』」


유다 선지자가 나이든 선지자 집에 와서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영이 갑자기 이 나이 든 선지자한테 임하더니만, 너 왜 내가 하지 말라고 한 짓을 하느냐고 크게 꾸짖는게 아닙니까.

그러면서 그의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데, 결국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자한테 물려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유다에서 온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다는 것은 우리가 쉽게 알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이 나이 든 선지자가 왜 이런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이 유다에서 온 선지자를 집에까지 초청해서 식사를 했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나이든 선지자는 왜 이 유다에서 온 선지자를 집으로 초청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어쩌면 먼 길을 온 선지자를 만나고 싶어 하는 반가운 마음, 아니면 대담하게 왕한테까지 찾아가서는 그 면전에서 그와 같은 무서운 저주까지도 할 수 있는 선지자라고 하기에 존경하는 마음에서 초청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그 선지자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처참한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이야기 흐름 상으로 보았을 때, 악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만들어서 이 유다에서 온 선지자를 죽여버리자고 하는, 그와 같은 의도는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인간성이 그런 악한 사람 같지는 않아요. 그가 한 거짓말도 남의 것을 빼앗으려 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러나 그는 분명 잘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잘 못한 것입니까. 이는 단순한 거짓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했다고 하는 크나큰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왜곡되고 변질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요즘 이스라엘과 팔레스틴, 그리고 이스라엘과 이란 간에 있어서 전운이 감돌자 어느 목사님은 그런 말씀을 했다고 하지요.

이제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도할 때다. 예루살렘을 위해 기도할 때다.

이게 사실입니까. 여전히 저기 중동 이스라엘에 사는 사람들, 또는 유전자적 유대인만이 유대인입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는 이방인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경에 그렇게 적혀 있나요?


로마서 2장 28절~29절
“28.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外見上の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はなく、また、外見上のからだの割礼が割礼ではないからです。
かえって人目に隠れた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あり、文字ではなく、御霊による心の割礼こそ割礼だからです。その人への称賛は人からではなく、神から来ます。

성경에 이렇게 적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동에 있는 이스라엘이 어쩧다는 둥 예루살렘이 어쩧다는 둥의 주장을 한다면, 그 주장대로라면 예수님도 필요없고 신약도 필요 없고 당장 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배를 가르고 속죄제나 속건제를 드려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얼마 전에 한국에서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잖아요. 그런데 어떤 목사님이 강단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하는군요.

어느 특정 정당을 지지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위해 투표하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그 분들을 제가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이와 같은 주장을 하시는 분들, 인간적으로 본다면 나쁜 분들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말씀을 하신다 하더라도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해서,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하신 말씀은 아니지 않을까 해요. 사실 알고 보면 다 좋으신 분들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있어서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말씀이 없습니다. 주님은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어요.

그러면 꿈속에서 천사가 말을 했다고 하시겠습니까. 기도 중에 예수님이 나타나서 알려주셨다고 하시겠습니까.

교회에서도 보면 가끔 꿈 좋아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이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23장 25절~26절
"25.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꿈을 꾸었다 꿈을 꾸었다고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26.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

わたしの名によって偽りを預言する預言者たちが、『私は夢を見た。夢を見た』と言うのを、わたしは聞いた。
いつまで、あの預言者たちの心に偽りの預言があるのか。心の偽りごとを語る預言者たちのうちに。

예레미야 29장 8절~9절
“8.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고 믿지 말라
9.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まことに、イスラエルの神、万軍の主はこう言われる。『あなたがたのうちにいる預言者たちや、占い師たちにごまかされるな。また、あなたがたが見ている夢に聞き従ってはならない。
なぜなら、彼らはわたしの名を使って、偽りをあなたがたに預言しているからだ。わたしは彼らを遣わしていない──主のことば。』

하나님이 보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둥 예수님의 얼굴을 보았다는 둥 한다면, 이는 그야말로 이단 사이비 교주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고린도후서 11장 14절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しかし、驚くには及びません。サタンでさえ光の御使いに変装します。

성경에 이렇게 적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꿈이다 환상이다 하면서 이를 믿으래요. 그리고 더 심한 경우는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풀면서 또 그것을 믿으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15절~16절
“15.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また、私たちの主の忍耐は救いであると考えなさい。愛する、私たちの兄弟パウロも、自分に与えられた知恵にしたがって、あなたがたに書き送ったとおりです。
その手紙でパウロは、ほかのすべての手紙でもしているように、このことについて語っています。その中には理解しにくいところがあります。無知な、心の定まらない人たちは、聖書の他の箇所と同様、それらを曲解して、自分自身に滅びを招きます。


기도도 좋고 방언도 좋고 금식도 좋아요. 하지만 무엇보다 성경말씀을 올바로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을 모르고 목사님 설교를 포함해서 맨날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말이나, 성경이 아닌 다른 책에만 귀를 기울이다가, 마지막 날에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겨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우리는 성경 말씀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다른 것이 아닌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祈りや異言、断食もいいでしょう。しかし、何よりも聖書のみ言葉を正しく知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

聖書も知らずに、ただ、牧師先生の説教も含めて、あの人この人の言っていることとか、聖書以外のほかの本にばかり耳を傾けていて、最後の日に外の暗闇に追い出されて歯ぎしりをすることになったらどうしますか。

私たちは聖書を正しく学ばなければなりません。何よりも主のみ言葉に耳を傾けなくてはならないのであります。



이제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아니면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주님은 우리에게 결산을 하자고 하실 것입니다.

바로 그 마지막 날 주님 앞에서 결산을 하게 되는 바로 그 날에, 주님으로부터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라고 하는 크나큰 칭찬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これから先、主が来られるとき、あるいは私たちが主の御前に立つとき、主は私たちに清算をしようと言われるはずです。

まさにその最後の日、主の御前で清算することになるまさにその日に、『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といって大きな称賛を受けられ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主の御名においてお祈り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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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40회 슬기 있는 자 - 기린선교회
2024년 4월 14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1절~13절
“1.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マタイの福音書 25章 1節~13節
“1.そこで、天の御国は、それぞれともしびを持って花婿を迎えに出る、十人の娘にたとえることができます。
2.そのうちの五人は愚かで、五人は賢かった。
3.愚かな娘たちは、ともしびは持っていたが、油を持って来ていなかった。
4.賢い娘たちは自分のともしびと一緒に、入れ物に油を入れて持っていた。
5.花婿が来るのが遅くなったので、娘たちはみな眠くなり寝入ってしまった。
6.ところが夜中になって、『さあ、花婿だ。迎えに出なさい』と叫ぶ声がした。
7.そこで娘たちはみな起きて、自分のともしびを整えた。
8.愚かな娘たちは賢い娘たちに言った。『私たちのともしびが消えそうなので、あなたがたの油を分けてください。』
9.しかし、賢い娘たちは答えた。『いいえ、分けてあげるにはとても足りません。それより、店に行って自分の分を買ってください。』
10.そこで娘たちが買いに行くと、その間に花婿が来た。用意ができていた娘たちは彼と一緒に婚礼の祝宴に入り、戸が閉じられた。
11.その後で残りの娘たちも来て、『ご主人様、ご主人様、開けてください』と言った。
12.しかし、主人は答えた。『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私はあなたがたを知りません。』
13.です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その日、その時を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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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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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15번째 시간으로서 “슬기 있는 자” 賢い者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복음서 중에서도 마태복음에만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에 대해서 말씀을 시작하시는데, 여기에 보시면, 두 부류의 여성들이 등장을 합니다.


마태복음 25장 1절~2절
“1.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1.そこで、天の御国は、それぞれともしびを持って花婿を迎えに出る、十人の娘にたとえることができます。
2.そのうちの五人は愚かで、五人は賢かった。


이 여성들은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슬기 있는 여성과 슬기 없는 여성의 차이가 있겠지요. 그 차이가 3절과 4절입니다.

마태복음 25장 3절~4절
“3.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3.愚かな娘たちは、ともしびは持っていたが、油を持って来ていなかった。
4.賢い娘たちは自分のともしびと一緒に、入れ物に油を入れて持っていた。


여기서 슬기 있는 자들은 등과 함께 기름을 담아서 가져갔습니다. 그런데 슬기가 없는 자들은 어떻게 했냐 하면 등만 가져가고 기름은 가져가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아니, 미련해도 유분수지 어떻게 등을 가져가면서 기름을 안 가져갔나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본문을 읽어가면 그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자, 일단 이 열 명의 여성이 이제 신랑이 온다고 해서 맞으러 갔어요. 여기서도 아니, 신랑은 하나인데 왜 신부가 열 명이냐고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점도 역시 좀 뒤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이 열 명의 여성이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땠다고 합니까.

마태복음 25장 5절
“5.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5.花婿が来るのが遅くなったので、娘たちはみな眠くなり寝入ってしまった。

예, 온다고 한 신랑이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를 않아요. 그래서 어떻게 했냐 하면 다 졸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일이 터졌습니다.

마태복음 25장 6절
“6.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6.ところが夜中になって、『さあ、花婿だ。迎えに出なさい』と叫ぶ声がした。

신랑이 이제 온다는 소리가 났는데 그게 하필이면 밤중이었다는 것이에요.

마태복음 25장 7절
“7.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7.そこで娘たちはみな起きて、自分のともしびを整えた。


다들 졸고 있었는데 갑자기 연락이 오니까 서둘러 준비를 시작했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마태복음 25장 8절
“8.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8.愚かな娘たちは賢い娘たちに言った。『私たちのともしびが消えそうなので、あなたがたの油を分けてください。』

여기서 보면 미련한 자들이라 하더라도 기름을 아주 안 가져간 것이 아니에요. 그들도 등불을 켜기 위해서는 기름이 필요하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문제는 뭐예요? 예, 기름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이에요. 반면에 슬기 있는 자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가지고 있었던 기름이 넉넉했었나보죠? 그러니까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기름을 나누어 달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슬기 있는 자들은 어떻게 말합니까.


마태복음 25장 9절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9.しかし、賢い娘たちは答えた。『いいえ、分けてあげるにはとても足りません。それより、店に行って自分の分を買ってくださ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름이 서로 나누어 써도 충분할지 어떨지 모른다. 우리가 나누어 주면 둘 다 부족할 지도 모르니까, 그것보다는 어서 가서 기름을 파는 곳에 가서 사오는 게 낫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말을 들은 미련한 자들은 서둘러 사러 가지요.

그러자 어떻게 됩니까.

마태복음 25장 10절
“10.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0.そこで娘たちが買いに行くと、その間に花婿が来た。用意ができていた娘たちは彼と一緒に婚礼の祝宴に入り、戸が閉じられた。


하필이면 그 미련한 자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어요. 그래서 신랑은 그를 기다리면서 준비하던 슬기로운 자들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고는 어떻게 됐다고 합니까. 예, 문이 닫혔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제 얼마 후에 아까 그 기름을 사러 갔던 자들이 돌아왔습니다.

마태복음 25장 11절
“11.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1.その後で残りの娘たちも来て、『ご主人様、ご主人様、開けてください』と言った。

사실 이 사람들도 무슨 나쁜 짓을 저지른 게 아니잖아요. 따지고 보면 신랑을 기다리기 위해서 기름을 사러 갔다 온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그들에게 신랑의 말은 단호합니다.

마태복음 25장 12절
“12.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2.しかし、主人は答えた。『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私はあなたがたを知りません。』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을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13절
“13.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13.です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その日、その時を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ら。” 

자, 이렇게 끝나게 되는데, 이 말씀에 대한 가르침을 우선 전체적으로 살펴본 다음에 몇몇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 확인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여기서는 혼인잔치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혼인잔치는 말하자면 결혼식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는 사람에게 있어서 최대의 기쁨이자 인생에 있어서도 중요한 행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시면 이 혼인잔치를 천국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9절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御使いは私に、「子羊の婚宴に招かれている者たちは幸いだ、と書き記しなさい」と言い、また「これらは神の真実なことばである」と言った。

즉 성경에 있어서 우리의 신랑은 예수님이 되는 것이고 신부는 우리 모두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성별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부부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사람보다, 사실 부모자식이나 형제 자매보다도 가까운 존재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한국에도 부부간에는 촌수가 없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은 1촌입니다만, 부부간에는 촌수가 없어요.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은 ‘親等’이라고 하는데, 역시 부부간에는 촌수가 없어요.

부부라고 하는 것이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창세기 2장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それゆえ、男は父と母を離れ、その妻と結ばれ、ふたりは一体となるのである。

부부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두 존재가 아니라 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이처럼 마지막 날에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 가서 주님과 한 몸을 이루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두 사람들 슬기 있는 자들과 미련한 자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신랑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분명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요. 이는 분명 “신랑이 온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신랑이 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당연히 “신랑이 올 것이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는데도 나가서 기다릴 리가 없겠지요.

더구나 미련한 자들 만이 아니라 슬기 있는 자들도 신랑을 맞이러 나갔다고 하니, 이는 분명 곧 신랑이 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상황을 제가 항상 드리는 “믿음과 말씀과 행함”에 대해서 보면 어떻습니까.

그들은 모두에게 “믿음”이 있었어요. 그들에게는 신랑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씀”을 알았어요. 신랑이 곧 온다는 말씀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본다면 그들은 모두 흠잡을 곳이 없는 믿음과 말씀을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문제는 “행함”이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슬기 있는 자들 뿐만 아니라 미련한 자들이라 하더라도 등불을 켜기 위해 기름이 필요하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기름을 넣어 갔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신랑이 오지 않아요. 그래서 그들은 모두 잠이 들었다고 하지요.

그런데 한밤중에 갑자기 소리가 나기를 지금 신랑이 왔으니 맞으러 나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깜짝 놀라 서둘러 준비를 시작하지요.

6절에 보시면 “밤중에(ところが夜中になって)”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전에는 밤중이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테니까 아마도 그들이 신랑을 맞으러 나갔을 때에는 밝았을 것이기 때문에 등불을 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랑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 깨어보니까 주위가 캄캄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제서야 등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이제 온다고 하면 빨리 와야 할 것 아니에요. 하지만 온다는 소리가 들린 다음에도 좀처럼 그 모습이 안 보였나죠?

열 명이 모두 다 등을 켜고 기다리고 있는데 한쪽 등이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이는 바로 미련한 자들의 등불이었죠.

자, 큰 일 났습니다. 신랑이 도착할 때까지 불이 켜져 있어야 할 터인데, 등불의 기름이 떨어져가요. 그래서 그들은 슬기 있는 자들에게 말하기를 기름을 나눠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어떻게 말합니까. 슬기 있는 자들이 말하기를 그렇게 되면 우리 서로가 다 모자라게 될 지도 모른다고 하잖아요.

이는 당연하지요. 신랑이 언제 도착할 지 모르는데, 막상 도착했더니 둘다 불이 꺼져 있어봐요.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 기다렸던 것이 모두 헛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차라리 어서 가서 사오는 게 낫지 않겠냐고 말합니다. 그제서야 미련한 자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서둘러 달려가서 기름을 사러 갔는데, 하필이면 마침 그 때 신랑이 도착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제서야 기름을 사서 돌아온 여성들은 신랑이 들어간 집의 문을 두드립니다.

제발 문을 열어 주세요. 저희도 지금까지 기다렸었다고요. 이 날을 기다렸는데 이렇게 들어가버리면 어떡해요. 어서 빨리 열어주세요.

하지만 안에서 들려온 소리는 무엇이었습니까.


마태복음 25장 12절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2.しかし、主人は答えた。『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私はあなたがたを知りません。』

문 안에서 들려온 소리는 엄합니다. 너희는 내가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니 들어올 수 없다. 그러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이들에게는 모두 믿음과 말씀이 있었습니다. 신랑이 온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이는 분명 말씀, 그러니까 신랑이 올 것이라는 말씀을 알았다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문제는 “행함”에 있었던 것입니다.

행함? 물론 그들은 행함이 있었습니다. 신랑이 온다고 하니까 등을 들고 맞으러 갔잖아요. 하지만 여기서의 문제가 뭐냐 하면 기름이었던 것이지요.

그들은 등불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어떤 주석서에 보면 유대인들의 결혼식 행사에 등불을 켜는 관례가 있었다고 하는데, 만약에 이를 위해 그들이 등불을 준비했다고 한다면 그들은 모두 같은 분량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하지만 한쪽은 기름을 넉넉히 준비하고 다른 한 쪽은 기름이 부족했다고 한다면, 이는 그들이 생각하기를 등불은 어디까지나 비상용이라고 여기지 않았을까 합니다. 말하자면 신랑을 맞이하는 데에 있어서 등불과 넉넉한 기름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필수품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어느 분 주장에 의하면 이 때의 등은 우리가 생각하는 작은 등잔불 같은 것이 아니라, 불이 활활 타는 횃불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하시는데, 저는 오히려 이 주장에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형식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라면 작은 등불이라도 괜찮을 수 있겠습니다만, 정말 캄캄한 길을 오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라면 오히려 횃불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횃불의 경우에는 아무리 오래 탄다 하더라도 10분에서 15분 정도라고 해요. 그러고는 꺼지기 때문에 기름을 더 보충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저는 여기서 길을 나서기 전의 두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슬기 있는 자 다섯 명과 미련한 자 다섯 명이 이제부터 신랑을 맞으러 나갈 때에, 미련한 자들은 예비 기름을 전혀 준비하지 않은 반면, 슬기 있는 자들은 예비 기름을 몇 통이고 준비했을 지 모릅니다.

만약 이 때에 등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등잔불이 아니라 횃불이었다고 한다면 얼마나 많은 기름이 필요했겠습니까. 그야말로 두 손에 무겁도록 낑낑 매고 기름을 들고 나갔을지도 모르잖아요.

이 모습을 보고 미련한 자들은 뭐라고 했을까요.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해봐. 신랑이 온다면 아무리 늦더라도 초저녁일텐데 무슨 그렇게 무거운 기름을 준비할 필요가 있냐. 괜히 옷이나 지저분해지고 땀을 흘리면 화장도 지워질 수도 있는데 우리처럼 이렇게 깔끔하게 하고 가야하지 않겠냐……뭐 이러면서 똑똑한 척을 하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슬기로운 자들은 여기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기름을 여유롭게 준비해서 혹시 모를 일에 대비했던 것이지요.

마태복음 25장 13절
“13.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13.です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その日、その時を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ら。” 

예수님의 이 말씀은 곧 언제 올지 모르니 항상 대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지난 2009년 1월 15일 오후 3시 26분. 한 여객기가 뉴욕의 공항을 이륙하자 1분만에 두 번이나 새 떼와 충돌함으로 인해서 엔진 두 개가 모두 고장이 났다고 합니다. 관제소에서는 공항으로 회항하라고 했으나 비행기 상황으로 보아서 이는 도저히 불가능 하다고 판단한 설렌버거 기장은 (サレンバーガー:Sullenberger) 뉴욕 시내를 흐르는 허드슨 강에 비상착륙을 감행합니다.

이 허드슨 강에 대한 착륙은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155명의 승객과 승무원 모두가 무사히 구조가 되었다고 하지요.

셀런버거 기장은 허드슨 강에 착륙한 뒤에도 승무원과 승객들이 모두 밖으로 무사히 탈출했는지 비행기 안을 두 번이나 살피고 난 다음에야 마지막에 자신도 탈출했다고 하니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이 사건은 ‘허드슨 강의 기적’이라고 불리고 있어서 2016년에는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얼마 후 이 허드슨 강의 주역인 설렌버거 기장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었느냐고 하는 질문에 대해 그는 말합니다.

“나는 평소 훈련대로 했을 뿐이다.”

그렇죠. 그는 평소에도 그런 훈련을 해왔던 것이었습니다. 아니, 그 기장만이 아니라 다른 비행기 조종사들은 분명 그와 같은 비상착륙 훈련을 몇 번이고 해왔을 것이고, 그리고 지금도 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아휴, 세상에 항공기가 강 위에 착륙할 일이 얼마나 있다고 그런 훈련을 해……그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렇겠지요. 수많은 비행기 조종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평생동안 강 위에 착륙할 일이 있는 조종사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참고로 미국 국가교통안전위원회 (国家運輸安全委員会) (NTSB)의 자료에 따르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할 확률은 0.0009%이고, 이는 438년 동안 매일 탑승해서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정도라고 하지요.

말하자면 그만큼 비행기 사고는 극히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대비해서 철저하게 훈련을 해왔기 때문에 허드슨 강 비상착륙이라고 하는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을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이 순간도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파하고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럴 필요까지 없는데 쓸데 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적당히 믿는 자신은 지혜롭고 그와 같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있는 힘껏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미련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0장 16절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このように、後の者が先になり、先の者が後になります。」

저는 이 말씀이 이와 같이 들립니다.

“이와 같이 미련 자가 슬기로운 자가 되고, 슬기로운 자가 미련한 자가 되리라”

このように、愚かな者が賢い者になり、賢い者が愚かな者になります。

바울은 참으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9장 16절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私が福音を宣べ伝えても、私の誇りにはなりません。そうせずにはいられないのです。福音を宣べ伝えないなら、私はわざわいです。

고린도전서 9장 27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むしろ、私は自分のからだを打ちたたいて服従させます。ほかの人に宣べ伝えておきながら、自分自身が失格者になら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빌립보서 3장 13절~14절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兄弟たち。私は、自分がすでに捕らえたなどと考えてはいません。ただ一つのこと、すなわち、うしろのものを忘れ、前のものに向かって身を伸ばし、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그는 자신이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 정도 행함이면 내가 구원 받을 수 있으니까 이제 안심하고 다리 뻗고 쉬어도 된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직도 부족하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다. 내가 아직 부족해서 버림을 받을지도 모른다, 더 할 수 있다, 더 해야 한다, 그와 같은 마음으로 불타오르고 있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은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언제 오실까요. 이에 대해서 오늘 말씀에 보시면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 오시느냐 하면, 바로 “하필이면 그 때(よりによってそんな時)” 오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돼요? 예, 그렇습니다. 항상 대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미련한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혜로운 자, 슬기로운 자, 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일에는 지나침이 없습니다. 믿음과 말씀을 통하여 넉넉한 행함으로 대비함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주님 앞에서 슬기 있는 자로서 인정함을 받아, 마지막 날에 기쁨으로 넘치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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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39회 오병이어의 두 가지 은혜 - 기린선교회
2024년 4월 7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5절~11절
“5.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10.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ヨハネの福音書 6章 5節~11節
“5.イエスは目を上げて、大勢の群衆がご自分の方に来るのを見て、ピリポに言われた。「どこからパンを買って来て、この人たちに食べさせようか。」
6.イエスがこう言われたのは、ピリポを試すためであり、ご自分が何をしようとしているのかを、知っておられた。
7.ピリポはイエスに答えた。「一人ひとりが少しずつ取るにしても、二百デナリのパンでは足りません。」
8.弟子の一人、シモン・ペテロの兄弟アンデレがイエスに言った。
9.「ここに、大麦のパン五つと、魚二匹を持っている少年がいます。でも、こんなに大勢の人々では、それが何になるでしょう。」
10.イエスは言われた。「人々を座らせなさい。」その場所には草がたくさんあったので、男たちは座った。その数はおよそ五千人であった。
11.そうして、イエスはパンを取り、感謝の祈りをささげてから、座っている人たちに分け与えられた。魚も同じようにして、彼らが望むだけ与えら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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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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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부활절을 맞이해서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13번째 시간으로서 “거듭난 사람” 新しく生まれた人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2천년 전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부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는 단순히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더니 다시 살아나셨더라. 신기하다……로 끝나는 하나의 흥미로운 사건, 요즘 식으로 하자면 무슨 해외 토픽, 세상에 이런 일이……같은 방송에 나올 만한 그런 놀라운 사건으로 끝나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부활하셨습니까.

사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십자가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정작 부활의 의미에 대해서 물으면 긴가민가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부활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 기억해야 합니다.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는 우리의 죄가 해결되지 않아요. 말하자면 우리가 아직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가 아직 용서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잘못을 저질렀어요. 그렇다면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배상이든 보상이든 간에 돈으로 물어주어야 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민사상이든 형사상이든 간에 가해자인 내가 피해자인 상대방과 합의를 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필요한 절차가 뭐냐 하면, 내가 이렇게 사과를 하고 물어주니까 재판이나 기타 방법으로 더 이상 요구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반드시 들어가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기껏 내가 물어주었는데 또다시 재판을 하게 되면 이 쪽이 이중 삼중으로 물어주어야 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잖아요.

이와 같은 합의에 동의한다는 것은 그 합의 내용에 대해서 만족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데 100만원을 물어 주기로 했어요. 그리고 정중히 사과도 했습니다. 여기에 만족을 하면 상대방이 좋다. 그 정도 금액을 받고 사과도 했으니까 내가 용서해주마……라고 하면서 도장을 찍거나 사인을 하게 되면 이제 제가 잘못한 일은 상호간에 있어서 해결되는 것이지요.

로마서 5장 11절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それだけではなく、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私たちは神を喜んでいます。キリストによって、今や、私たちは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のです。

재판에서 원고와 피고로 나누어서 다투게 되면 하루하루가 피를 말립니다. 재판장에서는 온갖 지저분한 것들이 증거로 제시되어서 날을 거듭할수록 부끄러운 일들만 드러나게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상대방과 화해를 하고 합의를 하게 되면 그 다툼은 끝나게 됩니다. 이제 상대방은 적이 아닌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부끄러움이 사라지고 기쁨의 화해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버리면 아무것도 해결인 안 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하나님과 합의가 안됐거든요. 하나님이 아직 합의문서에 사인을 안 하셨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기쁘게 받으시고, 그 십자가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신 증거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어서는 부활이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부활은 바로 우리의 죄를 모두 다 해결해주신 하나님과 우리와의 합의문서인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에는 또 하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부활 하나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에 있어서도 공통되는 부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부활하셨을까요.

자, 학생들이 아침에 학교에 갔습니다. 교실에 들어가니까 칠판에 어려운 수학 문제가 적혀 있었어요. 그 문제를 어떻게 푸는지 아는 학생들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들어오시더니 그 문제 풀이를 처음부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문제 푸는 방법을 몰랐는데 그 풀이를 보고 나니까 이제 학생들도 그 문제를 이해하고 풀 수 있게 되었어요.

자, 그렇다면 선생님이 그 문제를 푼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선생님이니까 너희들과는 차원이 달라. 이 문제는 내가 선생님이니까 풀 수 있는 거야. 그런 마음으로 선생님이 이 문제를 푸셨을까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자, 이 문제는 이런 식으로 풀면 누구든지 풀 수 있어 하고 그 문제 푸는 방식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주려는 것 아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がたの信仰が薄いからで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もし、からし種ほどの信仰があるなら、この山に『ここからあそこに移れ』と言えば移ります。あなたがたにできないことは何もありません。」

누가복음 17장 6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すると主は言われた。「もしあなたがたに、からし種ほどの信仰があれば、この桑の木に『根元から抜かれて、海の中に植われ』と言うなら、あなたがたに従います。

겨자씨 크기는 1~2미리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그 나무는 2~3미터 크기의 나무가 되어 숲을 이룬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우리가 아주 작은 믿음의 씨를 심기만 해도 나무가 움직이고 산이 움직이는 역사가 일어난다고 말씀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 있었지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의롭게 보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의 희생으로는 그 누구의 죄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義人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

이 세상에 의인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죄인이 아닌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어느 누가 스스로의 희생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의 죄를 해결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피조물인 인간이 아무리 수백 번 십자가에 달린다 하더라도 우리 이웃은커녕 자기 자신의 죄도 해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능하십니다. 예수님 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 중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 이것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만이 감당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우리에게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라는 말씀은 안 하셨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외의 것, 그러니까 십자가를 제외하고 공생애 기간 동안에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모두 할 수 있는 일이요, 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 한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부활은 어떻습니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는 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까. 아니면 우리 모두가 해야만 하는 일입니까.

고린도전서 15장 13절~15절
“13.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もし死者の復活がないとしたら、キリストもよみがえらなかったでしょう。
そして、キリストがよみがえらなかったとしたら、私たちの宣教は空しく、あなたがたの信仰も空しいものとなります。
私たちは神についての偽証人(ぎしょうにん)ということにさえなります。なぜなら、かりに死者がよみがえらないとしたら、神はキリストをよみがえらせなかったはずなのに、私たちは神がキリストをよみがえらせたと言って、神に逆らう証言をしたことになるからです。

성경은 우리 스스로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부활이 없으면 예수님의 부활도 없었을 것이며,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복음도 믿음도 모두 헛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뒤집어집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부활도 있는 것이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복음도 믿음도 모두 진리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성경 중에서 한 가지 부분에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빌립보서 3장 11절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何とかして死者の中からの復活に達したいのです。

빌립보서를 기록한 바울은 어떻게 해서든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고백합니다.

아니, 바울 정도가 되었으면 당연히 부활은 따 놓은 단상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안심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부활에 이르려고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뿐만이 아니지요.


빌립보서 3장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고린도전서 9장 27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むしろ、私は自分のからだを打ちたたいて服従させます。ほかの人に宣べ伝えておきながら、自分自身が失格者になら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바울은 가만히 멈추어 있지 않습니다. 안심하고 있지 않아요. 지금도 주님이 위에서 주실 상을 위해 달려간다고 합니다. 이렇게 복음을 많이 전하고 주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한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반면에 우리는 믿음 안에서 어떠한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신앙 안에서 너무나도 안주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그냥 가만히 하루하루 보내고 있는 것 아닙니까.

지금은 로스쿨도 생기고 그래서 제도가 좀 바뀌고 그랬습니다만, 예전에는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2년 동안 사법연수원 과정을 거쳐야지만 법조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법대 동기 변호사가 제게 털어놓은 내용입니다만, 자기는 시험에 합격한 다음 사법연수원 과정에서 방심을 해서 공부를 좀 소홀이 했다는 거예요.

사실 시험에 합격하기가 어렵지 연수원이야 웬만하면 수료는 되기 때문이거든요.

그러나 시험에 합격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겠습니다만, 알고 보면 이 사법연수원 과정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사법시험 성적과 이 연수원 과정에서의 성적을 바탕으로 판사나 검사로 임용이 되고 그리고 그 성적이 관직에 있으면서 계속 따라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연수원을 마치고 난 다음 사법시험 성적과 연수원에서의 성적에 있어서 상위권은 판사로 임용되고 그 다음이 검사로 임용이 됩니다. 그 외에는 임용되고 싶어도 될 수 없어요. 연수원을 마치고 변호사 자격이 주어질 뿐입니다.


하지만 이 차이를 본다면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일단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연수원에 들어가면 공무원입니다. 5급이에요. 이 5급이라고 하는 것은 외무고시나 행정고시에 합격을 해서 사무관으로 임명되었을 때와 같지요.

5급 사무관이라고 하면 과장급인데, 사실 밑에 9급부터 시작하면 거의 정년퇴임 할 때쯤 잘하면 달 수 있는 것이 5급입니다. 그런데 고시에 합격하면 빠르면 20대 후반, 그리고 보통 30대 초반에 벌써 그 자리에 오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벌써 스타트 라인이 다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판사나 검사로 임용이 되면 그 급수가 어떻게 되냐 하면 갑자기 2단계가 뜁니다. 초임 판사나 초임 검사는 벌써 3급이에요.

보통 고시에 합격하고 5급부터 시작을 했다 하더라도 5급에서 3급까지는 빨라도 17년 이상이 걸리는데,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2년만 열심히 공부하기만 하면 연수원을 마치고 2년 만에 3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야말로 고속 출세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판사나 검사로 임관되지 못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냐 하면, 그냥 변호사 자격만 가지고 나오게 됩니다. 이제는 공무원도 아니니까 급수가 없어요. 단순히 변호사 면허만 취득한 것이 됩니다.

변호사가 되는 것도 물론 대단한 것입니다만, 그 자격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돈이 나오나요. 말하자면 운전면허나 같습니다. 운전면허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나라에서 돈을 주지는 않잖아요. 그 면허를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해야지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동기는 이걸 좀 더 잘 알았더라면 연수원 때 좀더 열심히 했었어야 했다면서 아쉬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어요. 이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참 잘하셨습니다. 그야말로 고시 패스한 것 보다 더 잘한 일입니다. 이건 농담이 아니라 정말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안심하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지금부터가 더 중요합니다. 지금부터 이제 열심히 뛰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열심히 해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자기는 열심히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믿은 지 얼마나 됐고, 자기가 무슨 직분을 받았고, 무슨 장을 몇 년 무슨 장을 몇 년 했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이와 같은 과거에만 집착하게 된다면 이는 우리 신앙의 목적을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마가복음 11장 12절~14절
“12.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翌日、彼らがベタニアを出たとき、イエスは空腹を覚えられた。
葉の茂ったいちじくの木が遠くに見えたので、その木に何かあるかどうか見に行かれたが、そこに来てみると、葉のほかには何も見つからなかった。いちじくのなる季節ではなかったからである。
するとイエスは、その木に向かって言われた。「今後いつまでも、だれもおまえの実を食べることがないように。」弟子たちはこれを聞いていた。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발견하고는 거기서 무엇을 찾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열매를 찾으셨습니다. 그런데 찾지 못했지요.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었기 때문에 저주를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분명 잘못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열매는 없으면서 잎사귀만 무성했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잎사귀라도 없었다면 예수님은 그 나무에게서 열매를 구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열매는 없으면서 잎사귀만 달려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여기에 대해서 꾸짖으셨던 것이지요.

여러분, 나무에 있어서 잎사귀는 무슨 역할을 합니까. 그것은 바로 광합성에 있습니다. 나무 뿌리는 땅속에서 물과 영양분을 빨아올리고 이를 바탕으로 잎사귀는 광합성을 통해서 그 영양분을 에너지로 바꾸고는 나무 전체에 공급하게 됩니다.

이 광합성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햇빛입니다. 나무는 그 잎사귀를 통해서 햇빛을 받아요. 이를 통해서 광합성이 일어나게 되는 것인데, 잎사귀가 이와 같은 작용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열매를 맺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나무에게 있어서 잎사귀가 나쁜 것이 아니듯, 교회에서 직분을 받는 것은 안 좋은 일이 아닙니다. 좋은 일이지요. 그리고 이 직분이라고 하는 것은 집사나 장로 권사만이 아니라 목사나 전도사, 그리고 사모도 역시 귀한 직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갈은 직분은 목에 힘을 주라고 받는 것이 아니잖아요.


마치 나무에 있어서의 잎사귀와 같이, 주님께서 주신 직분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받아 이를 에너지로 만들고는 교회 전체, 나아가 이 세상에 공급을 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잎사귀가 있다면 거기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그와 같은 잎사귀로 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고 무슨 헌금만 많이 하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섬기고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일들이 어디 한 둘입니까.

그리고 복음을 전해야 할 곳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전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정작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잎사귀에만 관심이 있어요. 이를 주님은 기뻐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2장 48절 후반부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多く与えられた者はみな、多くを求められ、多く任された者は、さらに多くを要求されます。


하나님으로부터 잎사귀를 많이 받았다면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고 하신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부활이라고 하는 목적에 초점이 맞추어 져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거듭나는 것, 즉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듭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3장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イエスは答えら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人は、新しく生まれなければ、神の国を見ることはできません。」

우리는 거듭나야지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을 하세요. 그러면서 거듭난 사람에 대해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8절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風は思いのままに吹きます。その音を聞いても、それがどこから来てどこへ行くのか分かりません。御霊によって生まれた者もみな、それと同じです。」

이 말씀에 의하면 거듭난 사람이란 성령으로 난 사람과 같은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사람 움직이는 것, 자동차 움직이는 것을 보면 그것이 어느 쪽에서 와서 어느 쪽으로 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람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사람의 생각으로는 짐작할 수가 없어요.

자, 여기가 바로 포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20절
“19.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その日、すなわち週の初めの日の夕方、弟子たちがいたところでは、ユダヤ人を恐れて戸に鍵がかけられていた。すると、イエスが来て彼らの真ん中に立ち、こう言われた。「平安があなたがたにあるように。」
こう言って、イエスは手と脇腹を彼らに示された。弟子たちは主を見て喜んだ。



요한복음 20장 26절~27절
“26.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八日後、弟子たちは再び家の中におり、トマスも彼らと一緒にいた。戸には鍵がかけられていたが、イエスがやって来て、彼らの真ん中に立ち、「平安があなたがたにあるように」と言われた。
それから、トマスに言われた。「あなたの指をここに当てて、わたしの手を見なさい。手を伸ばして、わたしの脇腹に入れなさい。信じない者ではなく、信じる者になりなさい。」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묘사한 부분입니다만, 모두 문이 닫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나타나셨어요. 그렇다면 영혼만 오셨나 하면 그 육신도 함께 오셔서 만질 수도 있는 존재이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에 있어서는 수많은 제약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공간의 제약입니다. 사람들은 이 공간의 제약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 공간의 제약을 모두 넘는 존재가 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공간의 제약을 뛰어 넘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냐 하면, 아니요. 그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우리가 이 세상이라고 하는 제약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우선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이 잘 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일단 태어나는 것부터 잘 태어나야 해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면 답이 없다고들 합니다. 쉽게 말해서 부잣집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교를 나온 다음에 좋은 회사에 들어가고 난 다음에는 돈 많이 벌고 좋은 사람과 결혼을 하고 등등……. 물론 다른 방법도 많이 있긴 하지만 대충 이런 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잘 사는 인생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믿음에 있어서도 그렇다면 바울도 그렇게 했어야죠. 지금으로 본다면 고시를 패스할 정도로 엘리트였는데, 그와 같은 길을 박차고는, 그 험난한 고생길을 선택했다면 이는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 생각으로는 바울처럼 살아가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좋은 머리와 그 좋은 배경, 그 좋은 집안과 그 좋은 경력을 가지고 왜 저렇게 사서 고생을 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바울은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정한 열매를 맺는 삶이란, 이 세상에서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난 사람, 성령으로 난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세상적인 제약, 세상적인 상식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직도 세상적인 제약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까. 아직도 세상적으로만 살아가려 합니까.

여러분, 우리에게는 잎사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잎사귀입니까.

나한테는 아무것도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이 육신이라고 하는 잎사귀, 그리고 시간이라고 하는 잎사귀가 있지 않습니까.



みなさん、未だに世俗的な制約から抜け出せずにおられますか。未だに世俗的に生きていこうとされていますか。

みなさん、私たちには葉っぱがあります。それではそれは、どのような葉っぱでしょうか。

自分には何もないとおっしゃるかもしれませんが、いいえ、そうではありません。いくら持っているものがない人だとしても、私たちにはこの体という葉っぱ、そして時間という葉っぱがあるではありませんか。



그것은 주님께서 주신 소중한 잎사귀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잎사귀로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열매는 맺지 않고 잎사귀만 기를 쓰고 모은다면 주님으로부터 나중에 무슨 말씀을 들으시려고 합니까.

이제 우리는 거듭난 사람, 성령으로 난 사람이 되어서, 모든 제약에서 벗어나 믿음의 열매를 맺는 사람, 주님께서 우리에게 열매를 찾으실 때, 그동안 맺었던 믿음의 열매를 한아름 안겨 드릴 수 있는 삶을 통해서, 마지막 날에 기쁨의 부활을 맞이하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これは主がくださった貴重な葉っぱだと言えます。しかし主が私たちに下さった発破で実を結ばなければなりませんが、実は結ばずに、せっせと葉っぱだけを集めているとしたら、のちに主からどのようなお叱りを受けるおつもりですか。
これからは新しく生まれた人、御霊によって生まれた人として、すべての制約から抜け出し、信仰を身を結ぶ者、主が私たちに実を求められたとき、それまで結んでおいた信仰の実をたくさんささげられるような人生を通して、最後の日に喜びの復活を迎えられるみなさんであらんことを主の御名においてお祈り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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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38회 거듭난 사람 - 기린선교회
2024년 3월 31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6절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マタイの福音書 28章 6節
“ここにはおられません。前から言っておられたとおり、よみがえられたのです。さあ、納められていた場所を見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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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부활절을 맞이해서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13번째 시간으로서 “거듭난 사람” 新しく生まれた人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2천년 전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부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는 단순히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더니 다시 살아나셨더라. 신기하다……로 끝나는 하나의 흥미로운 사건, 요즘 식으로 하자면 무슨 해외 토픽, 세상에 이런 일이……같은 방송에 나올 만한 그런 놀라운 사건으로 끝나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부활하셨습니까.

사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십자가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정작 부활의 의미에 대해서 물으면 긴가민가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부활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 기억해야 합니다.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는 우리의 죄가 해결되지 않아요. 말하자면 우리가 아직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가 아직 용서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잘못을 저질렀어요. 그렇다면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배상이든 보상이든 간에 돈으로 물어주어야 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민사상이든 형사상이든 간에 가해자인 내가 피해자인 상대방과 합의를 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필요한 절차가 뭐냐 하면, 내가 이렇게 사과를 하고 물어주니까 재판이나 기타 방법으로 더 이상 요구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반드시 들어가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기껏 내가 물어주었는데 또다시 재판을 하게 되면 이 쪽이 이중 삼중으로 물어주어야 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잖아요.

이와 같은 합의에 동의한다는 것은 그 합의 내용에 대해서 만족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데 100만원을 물어 주기로 했어요. 그리고 정중히 사과도 했습니다. 여기에 만족을 하면 상대방이 좋다. 그 정도 금액을 받고 사과도 했으니까 내가 용서해주마……라고 하면서 도장을 찍거나 사인을 하게 되면 이제 제가 잘못한 일은 상호간에 있어서 해결되는 것이지요.

로마서 5장 11절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それだけではなく、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私たちは神を喜んでいます。キリストによって、今や、私たちは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のです。

재판에서 원고와 피고로 나누어서 다투게 되면 하루하루가 피를 말립니다. 재판장에서는 온갖 지저분한 것들이 증거로 제시되어서 날을 거듭할수록 부끄러운 일들만 드러나게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상대방과 화해를 하고 합의를 하게 되면 그 다툼은 끝나게 됩니다. 이제 상대방은 적이 아닌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부끄러움이 사라지고 기쁨의 화해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버리면 아무것도 해결인 안 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하나님과 합의가 안됐거든요. 하나님이 아직 합의문서에 사인을 안 하셨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기쁘게 받으시고, 그 십자가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신 증거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어서는 부활이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부활은 바로 우리의 죄를 모두 다 해결해주신 하나님과 우리와의 합의문서인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에는 또 하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부활 하나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에 있어서도 공통되는 부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부활하셨을까요.

자, 학생들이 아침에 학교에 갔습니다. 교실에 들어가니까 칠판에 어려운 수학 문제가 적혀 있었어요. 그 문제를 어떻게 푸는지 아는 학생들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들어오시더니 그 문제 풀이를 처음부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문제 푸는 방법을 몰랐는데 그 풀이를 보고 나니까 이제 학생들도 그 문제를 이해하고 풀 수 있게 되었어요.

자, 그렇다면 선생님이 그 문제를 푼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선생님이니까 너희들과는 차원이 달라. 이 문제는 내가 선생님이니까 풀 수 있는 거야. 그런 마음으로 선생님이 이 문제를 푸셨을까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자, 이 문제는 이런 식으로 풀면 누구든지 풀 수 있어 하고 그 문제 푸는 방식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주려는 것 아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がたの信仰が薄いからで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もし、からし種ほどの信仰があるなら、この山に『ここからあそこに移れ』と言えば移ります。あなたがたにできないことは何もありません。」

누가복음 17장 6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すると主は言われた。「もしあなたがたに、からし種ほどの信仰があれば、この桑の木に『根元から抜かれて、海の中に植われ』と言うなら、あなたがたに従います。

겨자씨 크기는 1~2미리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그 나무는 2~3미터 크기의 나무가 되어 숲을 이룬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우리가 아주 작은 믿음의 씨를 심기만 해도 나무가 움직이고 산이 움직이는 역사가 일어난다고 말씀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 있었지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의롭게 보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의 희생으로는 그 누구의 죄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義人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

이 세상에 의인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죄인이 아닌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어느 누가 스스로의 희생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의 죄를 해결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피조물인 인간이 아무리 수백 번 십자가에 달린다 하더라도 우리 이웃은커녕 자기 자신의 죄도 해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능하십니다. 예수님 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 중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 이것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만이 감당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우리에게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라는 말씀은 안 하셨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외의 것, 그러니까 십자가를 제외하고 공생애 기간 동안에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모두 할 수 있는 일이요, 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 한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부활은 어떻습니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는 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까. 아니면 우리 모두가 해야만 하는 일입니까.

고린도전서 15장 13절~15절
“13.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もし死者の復活がないとしたら、キリストもよみがえらなかったでしょう。
そして、キリストがよみがえらなかったとしたら、私たちの宣教は空しく、あなたがたの信仰も空しいものとなります。
私たちは神についての偽証人(ぎしょうにん)ということにさえなります。なぜなら、かりに死者がよみがえらないとしたら、神はキリストをよみがえらせなかったはずなのに、私たちは神がキリストをよみがえらせたと言って、神に逆らう証言をしたことになるからです。

성경은 우리 스스로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부활이 없으면 예수님의 부활도 없었을 것이며,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복음도 믿음도 모두 헛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뒤집어집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부활도 있는 것이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복음도 믿음도 모두 진리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성경 중에서 한 가지 부분에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빌립보서 3장 11절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何とかして死者の中からの復活に達したいのです。

빌립보서를 기록한 바울은 어떻게 해서든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고백합니다.

아니, 바울 정도가 되었으면 당연히 부활은 따 놓은 단상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안심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부활에 이르려고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뿐만이 아니지요.


빌립보서 3장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고린도전서 9장 27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むしろ、私は自分のからだを打ちたたいて服従させます。ほかの人に宣べ伝えておきながら、自分自身が失格者になら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바울은 가만히 멈추어 있지 않습니다. 안심하고 있지 않아요. 지금도 주님이 위에서 주실 상을 위해 달려간다고 합니다. 이렇게 복음을 많이 전하고 주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한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반면에 우리는 믿음 안에서 어떠한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신앙 안에서 너무나도 안주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그냥 가만히 하루하루 보내고 있는 것 아닙니까.

지금은 로스쿨도 생기고 그래서 제도가 좀 바뀌고 그랬습니다만, 예전에는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2년 동안 사법연수원 과정을 거쳐야지만 법조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법대 동기 변호사가 제게 털어놓은 내용입니다만, 자기는 시험에 합격한 다음 사법연수원 과정에서 방심을 해서 공부를 좀 소홀이 했다는 거예요.

사실 시험에 합격하기가 어렵지 연수원이야 웬만하면 수료는 되기 때문이거든요.

그러나 시험에 합격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겠습니다만, 알고 보면 이 사법연수원 과정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사법시험 성적과 이 연수원 과정에서의 성적을 바탕으로 판사나 검사로 임용이 되고 그리고 그 성적이 관직에 있으면서 계속 따라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연수원을 마치고 난 다음 사법시험 성적과 연수원에서의 성적에 있어서 상위권은 판사로 임용되고 그 다음이 검사로 임용이 됩니다. 그 외에는 임용되고 싶어도 될 수 없어요. 연수원을 마치고 변호사 자격이 주어질 뿐입니다.


하지만 이 차이를 본다면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일단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연수원에 들어가면 공무원입니다. 5급이에요. 이 5급이라고 하는 것은 외무고시나 행정고시에 합격을 해서 사무관으로 임명되었을 때와 같지요.

5급 사무관이라고 하면 과장급인데, 사실 밑에 9급부터 시작하면 거의 정년퇴임 할 때쯤 잘하면 달 수 있는 것이 5급입니다. 그런데 고시에 합격하면 빠르면 20대 후반, 그리고 보통 30대 초반에 벌써 그 자리에 오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벌써 스타트 라인이 다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판사나 검사로 임용이 되면 그 급수가 어떻게 되냐 하면 갑자기 2단계가 뜁니다. 초임 판사나 초임 검사는 벌써 3급이에요.

보통 고시에 합격하고 5급부터 시작을 했다 하더라도 5급에서 3급까지는 빨라도 17년 이상이 걸리는데,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2년만 열심히 공부하기만 하면 연수원을 마치고 2년 만에 3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야말로 고속 출세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판사나 검사로 임관되지 못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냐 하면, 그냥 변호사 자격만 가지고 나오게 됩니다. 이제는 공무원도 아니니까 급수가 없어요. 단순히 변호사 면허만 취득한 것이 됩니다.

변호사가 되는 것도 물론 대단한 것입니다만, 그 자격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돈이 나오나요. 말하자면 운전면허나 같습니다. 운전면허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나라에서 돈을 주지는 않잖아요. 그 면허를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해야지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동기는 이걸 좀 더 잘 알았더라면 연수원 때 좀더 열심히 했었어야 했다면서 아쉬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어요. 이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참 잘하셨습니다. 그야말로 고시 패스한 것 보다 더 잘한 일입니다. 이건 농담이 아니라 정말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안심하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지금부터가 더 중요합니다. 지금부터 이제 열심히 뛰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열심히 해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자기는 열심히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믿은 지 얼마나 됐고, 자기가 무슨 직분을 받았고, 무슨 장을 몇 년 무슨 장을 몇 년 했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이와 같은 과거에만 집착하게 된다면 이는 우리 신앙의 목적을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마가복음 11장 12절~14절
“12.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翌日、彼らがベタニアを出たとき、イエスは空腹を覚えられた。
葉の茂ったいちじくの木が遠くに見えたので、その木に何かあるかどうか見に行かれたが、そこに来てみると、葉のほかには何も見つからなかった。いちじくのなる季節ではなかったからである。
するとイエスは、その木に向かって言われた。「今後いつまでも、だれもおまえの実を食べることがないように。」弟子たちはこれを聞いていた。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발견하고는 거기서 무엇을 찾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열매를 찾으셨습니다. 그런데 찾지 못했지요.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었기 때문에 저주를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분명 잘못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열매는 없으면서 잎사귀만 무성했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잎사귀라도 없었다면 예수님은 그 나무에게서 열매를 구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열매는 없으면서 잎사귀만 달려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여기에 대해서 꾸짖으셨던 것이지요.

여러분, 나무에 있어서 잎사귀는 무슨 역할을 합니까. 그것은 바로 광합성에 있습니다. 나무 뿌리는 땅속에서 물과 영양분을 빨아올리고 이를 바탕으로 잎사귀는 광합성을 통해서 그 영양분을 에너지로 바꾸고는 나무 전체에 공급하게 됩니다.

이 광합성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햇빛입니다. 나무는 그 잎사귀를 통해서 햇빛을 받아요. 이를 통해서 광합성이 일어나게 되는 것인데, 잎사귀가 이와 같은 작용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열매를 맺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나무에게 있어서 잎사귀가 나쁜 것이 아니듯, 교회에서 직분을 받는 것은 안 좋은 일이 아닙니다. 좋은 일이지요. 그리고 이 직분이라고 하는 것은 집사나 장로 권사만이 아니라 목사나 전도사, 그리고 사모도 역시 귀한 직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갈은 직분은 목에 힘을 주라고 받는 것이 아니잖아요.


마치 나무에 있어서의 잎사귀와 같이, 주님께서 주신 직분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받아 이를 에너지로 만들고는 교회 전체, 나아가 이 세상에 공급을 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잎사귀가 있다면 거기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그와 같은 잎사귀로 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고 무슨 헌금만 많이 하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섬기고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일들이 어디 한 둘입니까.

그리고 복음을 전해야 할 곳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전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정작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잎사귀에만 관심이 있어요. 이를 주님은 기뻐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2장 48절 후반부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多く与えられた者はみな、多くを求められ、多く任された者は、さらに多くを要求されます。


하나님으로부터 잎사귀를 많이 받았다면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고 하신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부활이라고 하는 목적에 초점이 맞추어 져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거듭나는 것, 즉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듭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3장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イエスは答えら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人は、新しく生まれなければ、神の国を見ることはできません。」

우리는 거듭나야지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을 하세요. 그러면서 거듭난 사람에 대해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8절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風は思いのままに吹きます。その音を聞いても、それがどこから来てどこへ行くのか分かりません。御霊によって生まれた者もみな、それと同じです。」

이 말씀에 의하면 거듭난 사람이란 성령으로 난 사람과 같은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사람 움직이는 것, 자동차 움직이는 것을 보면 그것이 어느 쪽에서 와서 어느 쪽으로 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람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사람의 생각으로는 짐작할 수가 없어요.

자, 여기가 바로 포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20절
“19.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その日、すなわち週の初めの日の夕方、弟子たちがいたところでは、ユダヤ人を恐れて戸に鍵がかけられていた。すると、イエスが来て彼らの真ん中に立ち、こう言われた。「平安があなたがたにあるように。」
こう言って、イエスは手と脇腹を彼らに示された。弟子たちは主を見て喜んだ。



요한복음 20장 26절~27절
“26.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八日後、弟子たちは再び家の中におり、トマスも彼らと一緒にいた。戸には鍵がかけられていたが、イエスがやって来て、彼らの真ん中に立ち、「平安があなたがたにあるように」と言われた。
それから、トマスに言われた。「あなたの指をここに当てて、わたしの手を見なさい。手を伸ばして、わたしの脇腹に入れなさい。信じない者ではなく、信じる者になりなさい。」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묘사한 부분입니다만, 모두 문이 닫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나타나셨어요. 그렇다면 영혼만 오셨나 하면 그 육신도 함께 오셔서 만질 수도 있는 존재이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에 있어서는 수많은 제약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공간의 제약입니다. 사람들은 이 공간의 제약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 공간의 제약을 모두 넘는 존재가 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공간의 제약을 뛰어 넘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냐 하면, 아니요. 그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우리가 이 세상이라고 하는 제약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우선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이 잘 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일단 태어나는 것부터 잘 태어나야 해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면 답이 없다고들 합니다. 쉽게 말해서 부잣집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교를 나온 다음에 좋은 회사에 들어가고 난 다음에는 돈 많이 벌고 좋은 사람과 결혼을 하고 등등……. 물론 다른 방법도 많이 있긴 하지만 대충 이런 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잘 사는 인생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믿음에 있어서도 그렇다면 바울도 그렇게 했어야죠. 지금으로 본다면 고시를 패스할 정도로 엘리트였는데, 그와 같은 길을 박차고는, 그 험난한 고생길을 선택했다면 이는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 생각으로는 바울처럼 살아가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좋은 머리와 그 좋은 배경, 그 좋은 집안과 그 좋은 경력을 가지고 왜 저렇게 사서 고생을 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바울은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정한 열매를 맺는 삶이란, 이 세상에서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난 사람, 성령으로 난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세상적인 제약, 세상적인 상식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직도 세상적인 제약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까. 아직도 세상적으로만 살아가려 합니까.

여러분, 우리에게는 잎사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잎사귀입니까.

나한테는 아무것도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이 육신이라고 하는 잎사귀, 그리고 시간이라고 하는 잎사귀가 있지 않습니까.



みなさん、未だに世俗的な制約から抜け出せずにおられますか。未だに世俗的に生きていこうとされていますか。

みなさん、私たちには葉っぱがあります。それではそれは、どのような葉っぱでしょうか。

自分には何もないとおっしゃるかもしれませんが、いいえ、そうではありません。いくら持っているものがない人だとしても、私たちにはこの体という葉っぱ、そして時間という葉っぱがあるではありませんか。



그것은 주님께서 주신 소중한 잎사귀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잎사귀로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열매는 맺지 않고 잎사귀만 기를 쓰고 모은다면 주님으로부터 나중에 무슨 말씀을 들으시려고 합니까.

이제 우리는 거듭난 사람, 성령으로 난 사람이 되어서, 모든 제약에서 벗어나 믿음의 열매를 맺는 사람, 주님께서 우리에게 열매를 찾으실 때, 그동안 맺었던 믿음의 열매를 한아름 안겨 드릴 수 있는 삶을 통해서, 마지막 날에 기쁨의 부활을 맞이하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これは主がくださった貴重な葉っぱだと言えます。しかし主が私たちに下さった発破で実を結ばなければなりませんが、実は結ばずに、せっせと葉っぱだけを集めているとしたら、のちに主からどのようなお叱りを受けるおつもりですか。
これからは新しく生まれた人、御霊によって生まれた人として、すべての制約から抜け出し、信仰を身を結ぶ者、主が私たちに実を求められたとき、それまで結んでおいた信仰の実をたくさんささげられるような人生を通して、最後の日に喜びの復活を迎えられるみなさんであらんことを主の御名においてお祈り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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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37회 눈물을 닦아 주시는 하나님
2024년 3월 24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18절~22절
“18.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1.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マタイの福音書 4章 18節~22節
“18.イエスはガリラヤ湖のほとりを歩いておられたとき、二人の兄弟、ペテロと呼ばれるシモンとその兄弟アンデレが、湖で網を打っているのをご覧になった。彼らは漁師であった。
19.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わたしについて来なさい。人間をとる漁師にしてあげよう。」
20.彼らはすぐに網を捨ててイエスに従った。
21.イエスはそこから進んで行き、別の二人の兄弟、ゼベダイの子ヤコブとその兄弟ヨハネが、父ゼベダイと一緒に舟の中で網を繕っているのを見ると、二人をお呼びになった。
22.彼らはすぐに舟と父親を残してイエスに従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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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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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11번째 시간으로서 “시험의 의미” 試みの意味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후에 이제 광야로 가서 금식하신 후에 마귀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게 되십니다.

이에 대해서는 2020년 5월에서 6월에 총 4회에 걸쳐서 시험 내용 하나하나에 대해서 말씀을 전해 드렸기에 혹시 궁금하신 분은 인터넷을 통해서 그 때 말씀을 참조해 주셨으면 하고, 오늘은 이 시험 내용 전반에 걸쳐서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신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어떻게 됩니까.

첫째 시험은 3절에 의하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하고,

둘째 시험은 5절에서 6절에 의하면 높은 데서 뛰어내려 보라고 하고,

셋째 시험은 8절에서 9절에 의하면 자신에게 경배하라고 합니다.

우선 여러분께서는 이와 같은 시험 내용을 들으시면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아, 나도 이런 시험을 받게 되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이 되십니까. 불안해 하십니까.

그런 분들을 위해 제가 안심을 시켜드리고자 합니다.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런 시험, 아무나 당하는 게 아니에요.

자, 마귀 사탄이 한 시험 내용을 자세히 좀 보세요.

첫째 시험은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와 같은 시험은 어떤 사람들에게 했을 것 같습니까. 아니, 복잡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조금 쉬운 비유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너 내일 너네 회사에서 100억원을 횡령하라는 시험을 마귀가 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렇다면 그런 시험을 아무한테나 하겠습니까.

우선 그 사람이 최소한 100억 정도는 있는 회사에 다녀야 하지 않겠어요? 회사에 100억도 없는데 어떻게 100억을 횡령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한 그 사람이 100억 정도가 있는 회사에 다닌다고 해서 그 돈을 횡령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회사에 갓 들어간 신입사원한테 그 정도의 돈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예컨대 회사에서 100억 정도의 돈을 횡령하라는 시험을 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로 요건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에 나온 마귀 사탄의 시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아무한테나 돌을 떡덩어리로 만들라는 시험을 하겠어요? 아니요. 그렇지는 않겠지요. 적어도 돌을 떡덩이로 만들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한테 그런 시험을 하지 않겠습니까.

다음 시험은 뭐였어요. 높은 데서 뛰어내려 보라고 하잖아요. 이 정도의 시험을 받기 위해서는 높은 데에 올라가 있는 사람이라야 하는데, 아직 밑바닥에서 바둥바둥 거리고 있는 사람한테 무슨 이런 시험을 하겠습니까.

마지막으로는 마귀가 자신한테 경배하라고 하지요? 자, 여러분께서는 누구한테 인사를 받으면 좋겠습니까. 동네에 있는 어린 애들이나 별볼일 없는 사람들한테 인사를 받고 대우를 받으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얼마 전에 그런 제목을 보았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겸손하다는 것예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미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은 별볼일 없는 사람들로부터 대우를 받지 않더라도 이미 자신의 지위는 확고해요. 그렇기 때문에 대단하지도 않은 사람들한테서까지 굳이 대우를 받을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사실 그야말로 별볼일 없는 사람들이나 아무한테서 인사를 받고 싶고 대우를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요? 예, 성경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5절~7절
“5.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彼らがしている行いはすべて人に見せるためです。彼らは聖句を入れる小箱を大きくしたり、衣の房を長くしたりするのです。
宴会では上座を、会堂では上席を好み、
広場であいさつされること、人々から先生と呼ばれることが好きです。

이 얼마나 소인배 같은 인물들입니까. 아주 작은 것까지도 대우 받기 좋아하고, 아주 작은 것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는 그런 인물들이 작은 인물들이지, 큰 사람들은 그런 작고 사소한 일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대단한 사람들한테서 대우를 받고 싶어할 수는 있겠지요. 마귀 사탄을 보십시오. 하물며 예수님으로부터 경배를 받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한가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 하시다고 하지 않습니까. 무소부재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바로 안 계신 곳이 없는, 모든 곳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 23장 24절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人が隠れ場に身を隠したら、わたしはその人を見ることができないのか。──主のことば──天にも地にも、わたしは満ちているではないか。──主のことば。

하나님께서는 온 천지에 충만하시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를 풀어서 말씀을 드리자면,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 전혀 제약을 받지 않으십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리고 온 우주 천지 공간에 충만하신 하나님, 한 순간에 모든 곳에 존재하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으면 큰 일입니다. 내가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옆 사람이 동시에 기도를 드리고 있어요. 그러면 옆 사람한테 양해를 구해야겠죠. 여보세요. 내가 지금 정말 급한 기도가 있어서 그런데, 일단 내 기도가 끝난 다음에 당신 기도를 좀 해줄 수 있겠냐 하고 양해를 얻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전세계 모든 사람들이 한 번에 기도를 드린다 하더라도 그 기도를 모두 그 순간에 다 듣고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보죠. 마귀 사탄은 무소부재 할까요? 말하자면 여기저기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천사는 어떨까요. 천사는 여기저기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을까요?

성경에 의하면 천사들은 자신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9절~10절
“9.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10.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御使いは私に、「子羊の婚宴に招かれている者たちは幸いだ、と書き記しなさい」と言い、また「これらは神の真実なことばである」と言った。
私は御使いの足もとにひれ伏して、礼拝しようとした。すると、御使いは私に言った。「いけません。私はあなたや、イエスの証しを堅く保っている、あなたの兄弟たちと同じしもべです。神を礼拝しなさい。イエスの証しは預言の霊なのです。」


요한계시록 22장 8절~9절
“8.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9.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これらのことを聞き、また見たのは、私ヨハネである。私は、聞いたり見たりした後に、これらのことを示してくれた御使いの足もとにひれ伏して、礼拝しようとした。
すると、御使いは私に言った。「いけません。私はあなたや、預言者であるあなたの兄弟たち、この書のことばを守る人々と同じしもべです。神を礼拝しなさい。」


천사들은 자기들에 대해서 스스로 ‘종(しもべ)’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천사들도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천사들도 우리처럼 동시에 여기저기에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마귀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동시에 여기저기 존재할 수가 없어요. 말하자면 그 수에는 절대적인 한계가 있다고 하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모든 사람들을 시험의 대상으로 삼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스스로를 생각할 때, 내가 별로 능력도 없고, 높은 데에 있지도 않고, 대단하지도 않은 인물이라고 한다면 안심하십시오. 마귀들은 그런 사람들한테까지 시험할 여유가 없습니다. 마귀들이 얼마나 바쁜데 그런 별볼일 없는 사람들까지 시험하고 있겠습니까.

자, 이게 정말 사실이라고 한다면, 마귀는 그럼 누구한테 시험을 하겠습니까. 일단 기본적으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마귀는 누구를 시험할 것인가에 대해서 면밀하게 선별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선택과 집중, 이 또한 마귀들의 전략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그 선별 기준이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들을 시험할 사람들로 삼는 것일까요.

이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바로 마귀들 나라에 대해서 위협이 되는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탄의 나라에 대해서 전혀 위협이 되지 않은 사람들까지 일일이 시험을 할 시간도 없고 여력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시험을 해서 넘어뜨려야 할 사람들을 선택해서 집중적으로 공략할 작전을 세우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열심히 하려고 해요. 주님의 일을 감당하려고 해요. 그러면 마귀들한테는 비상이 걸립니다. 아무리 바빠도 저 놈을 막아야 해. 그러면서 온갖 수작들을 다 부립니다.

주변 사람들을 동원해서 욕을 하고 박해하고, 어디 그 뿐이에요? 너는 안돼. 할 수 없어. 어서 포기해……. 이러면서 우리에게 총공격을 가해옵니다. 그리고 아주 우리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좌절과 절망을 안겨주려고 난리를 쳐요.

이처럼 정신적인 박해, 그리고 때로는 육체적인 박해까지도 우리에게 안겨주려고 마귀 사탄들이 발버둥을 칠 때가 있습니다.


공사다망한 마귀 사탄들이 엄격한 선별기준에 따라서 그 시험대상을 선정한 다음에, 그 없는 시간과 인력을 할애해가면서 그 사람에 대하여 시험을 한다는 것, 이는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이 마귀 사탄에게 있어서 그만큼 위협이 될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마귀 사탄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마귀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 그 정도로 큰 일을 하고 있는 사람, 나중에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상을 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뜻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5장 11절~12절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わたしのために人々があなたがたをののしり、迫害し、ありもしないことで悪口を浴びせるとき、あなたがたは幸いです。
喜びなさい。大いに喜びなさい。天においてあなたがたの報いは大きいのですから。あなたがたより前にいた預言者たちを、人々は同じように迫害したのです。


생각해보세요. 누군가가 우리 보고 욕하고 박해하고 그래요. 그런데 기뻐하래요. 이걸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읽는다면 말이 안 됩니다. 그런 정신 나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마귀가 어떤 사람들을 시험하려고, 그리고 넘어뜨리려고 달려드느냐 하는 그 비밀을 알면 이 말씀이 얼마나 큰 은혜가 되냐 하는 것이지요.

지금 마귀가 지들도 바빠 죽겠는데도 우리한테 욕을 하고 박해하고 그래요. 그것은 뭐냐 하면 바로 우리가 그만큼 자기들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경에는 이 비밀을 이미 알아차렸던 믿음의 선배들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5장 40절~42절
“40.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2.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使徒たちを呼び入れて、むちで打ち、イエスの名によって語ってはならないと命じたうえで、釈放した。
使徒たちは、御名のために辱められるに値する者とされたことを喜びながら、最高法院から出て行った。
そして毎日、宮や家々でイエスがキリストであると教え、宣べ伝えることをやめなかった。

사도들이 관리들에게 붙들려서 채찍질을 당했는데도 기뻐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것만 보면 그야말로 정신병자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이 기뻐한 것에는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5장 41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使徒たちは、御名のために辱められるに値する者とされたことを喜びながら、最高法院から出て行った。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래,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일했더니, 마귀 사탄들에 의해 이 정도로 박해를 받을 만한 인물로 인정을 받았구나! 하는 사실을 알고 기뻐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축구 시합에 나갔어요. 그런데 나한테 공도 없는데 상대 팀 선수들이 몇 명이나 몰려와서는 내 주위를 둘러싸고 어떻게든 나한테 공이 안 오게 방해를 해요. 내가 움직이려고 하면 일거수일투족 막아 서고 그럽니다.

만약에 그런 상황이라면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바로 나는 상대팀에게 있어서 그만큼 위협이 되는 뛰어난 선수라는 사실을 인정받은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된 게, 나한테는 상대팀 선수들이 아무도 방해를 안 해요. 나한테 공이 왔는데도 아무도 빼앗을 생각도 하지 않고 멀리서 실실 웃으면서 처다 보고만 있어요.

그건 뭐예요? 야. 저 놈한테 공이 가도 괜찮아. 어차피 골을 못 넣어……. 그렇게 무시 당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 삶 속에서 시험이 다가왔습니까. 크고 작은 시험 때문에 지치고 힘들고 괴롭습니까.

축하합니다. 이제 당신은 비로소 마귀 사탄에게 위협되는 사람으로 선정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렇습니다. 이제 당신은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상을 받을 후보로 선정된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넘어뜨리기 위해 달려드는 마귀 사탄들을 쌍수 들고 환영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물리쳐야죠.

그렇다면 어떻게 물리쳐야 하느냐 하면, 그 방법을 오늘 본문에서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마귀 사탄을 어떻게 물리치셨습니까.

마태복음 4장 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イエスは答えられた。「『人はパンだけで生きるのではなく、神の口から出る一つ一つのことばで生きる』と書いてある。」

마태복음 4장 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試みてはならない』とも書いてある。」

마태복음 4장 10절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そこでイエスは言われた。「下がれ、サタン。『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礼拝しなさい。主にのみ仕えなさい』と書いてある。」


예수님께서는 마귀 사탄을 어떻게 물리치셨습니까. 마귀 사탄한테 십자가를 드리 대셨나요? 아니면 무슨 성수 같은 것을 뿌리셨나요?

아닙니다. 세 번의 시험 모두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말씀으로 물리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지난 주 토요일에 다카사키 쪽 방문전도를 마치고 오는 길에 동네 마트에 들렀습니다. 그 때는 제 아내도 서울에 가 있었고 하니 혼자서 뭐라도 먹을 거리라도 사야겠다 싶어서 좀 늦은 시간에 마트에 갔습니다.

이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문을 닫고는 문 옆에 있는 스위치를 누르면 문이 잠기거든요. 그런데 그 날 따라 그 단추를 눌러도 문이 안 잠겨요.

이상하다 하고 아무리 이것저것 시도를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쩌겠어요. 이미 해는 저물어서 주차장은 어두컴컴했기 때문에 자동차 매뉴얼을 들고 마트 안으로 들어가서 그 구석에서 열심히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무슨 스위치를 누르면 될 것 같아요. 그래서 다시 자동차 쪽으로 나와서 핸드폰 라이트를 켜고 열심히 그 스위치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안 보여요. 분명 거기에 있다고 그림까지 그려서 설명이 되어 있는데도 도무지 보이질 않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저랑 똑 같은 차를 가진 사람이 있으면 좀 물어볼까 하고 주차장을 둘러 봤더니만, 평소에는 자주 보이던 그 흔한 차가 그날 따라 또 안 보이는 것 있죠.

그래서 저는 또 제 차가 워낙 오래된 거라서 없거나 아니면 옵션에 따라서 다른가 했었습니다만, 아니, 그 매뉴얼은 분명 그 차에 대한 것이니까 다르지는 않을 거거든요. 그리고 옵션에 따라서 다르다는 설명도 없어요.

그래서 어쩌겠습니까. 매뉴얼을 몇 번이나 다시 본 다음에 확인을 하고서는 이제 아주 그 운전석의 다리 쪽에 머리를 집어넣어서 샅샅이 뒤져봤죠.

그랬더니만 어떻게 됐겠습니까. 야, 거기 스위치가 있더라고요.

그게 어디 있었냐 하면, 운전하시는 분들이라면 아실 거예요. 가속페달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그 발등 바로 위쪽에 있었습니다.

거기 있는 스위치를 누르니까 이제 되더라고요.


솔직히 제가 자동차에 있어서 그리 해박한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지금까지 여러 대를 몰아 보긴 했었거든요.

하지만 그런데도 제가 가지고 있던 지식이나 경험으로는 거기에 스위치가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습니다.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곳에 스위치가 있었더라니까요.

제가 장담을 합니다. 만약에 그 자동차 매뉴얼이 아니었다면 아마 10년이 지나도 그 스위치는 찾아내지 못했을 거예요. 그러나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제가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 매뉴얼을 봤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우리 삶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평소에는 잘 되던 것이 안 됩니까. 이상하게 일이 안 풀리고 여기저기서 꼬이기 시작합니까. 골치 아픈 문제들이 동시에 여기저기서 터지기 시작합니까.

그것은 어쩌면 마귀 사탄이 우리를 자기네들 요주의 인물로 선별한 결과 달려들기 시작해서 그런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럴 때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의 영원하고도 완전한 매뉴얼, 바로 성경을 찾아봐야 할 때인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7절~8절
“7.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与えられます。探しなさい。そうすれば見出します。たたきなさい。そうすれば開かれます。
だれでも、求める者は受け、探す者は見出し、たたく者には開かれます。


주님은 우리에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구하고 찾고 어디를 두드리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에서 구하고 성경에서 찾고 성경을 두드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지식이나 내 상식으로 그리고 내 경험으로도 찾거나 구하지 못한 스위치를 성경에 의해 전혀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바로 성경에서 찾아낸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달려드는 마귀 사탄들을 물리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가 시험을 당하게 되었을 때, 근심하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큰 상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았다고 하는 그 시험의 의미를 올바로 깨달아서,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하고 그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마귀 사탄을 물리침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면류관, 놀라운 승리의 면류관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まさに聖書から探し出したそのみ言葉を通して、私たちを転ばせるために躍起になっている悪魔サタンを退かせ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いたします。

これから私たちが試みにあう時、苦しみ落胆し挫折し絶望し諦めるのではなく、主から大きな褒美を受けるに値する者とされたという試みの意味を悟り、むしろ喜び感謝をささげ、そして主のみ言葉により悪魔サタンを退かせることによって、主からいのちの冠、驚くべき勝利の冠をすべて受けられる皆さまであらんことを主の御名においてお祈り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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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36회 시험의 의미
2024년 3월 17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1절~11절
“1.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8.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マタイの福音書 4章 1節~11節
“1.それからイエスは、悪魔の試みを受けるために、御霊に導かれて荒野に上って行かれた。
2.そして四十日四十夜、断食をし、その後で空腹を覚えられた。
3.すると、試みる者が近づいて来て言った。「あなたが神の子なら、これらの石がパンになるように命じなさい。」
4.イエスは答えられた。「『人はパンだけで生きるのではなく、神の口から出る一つ一つのことばで生きる』と書いてある。」
5.すると悪魔はイエスを聖なる都に連れて行き、神殿の屋根の端に立たせて、
6.こう言った。「あなたが神の子なら、下に身を投げなさい。『神はあなたのために御使いたちに命じられる。彼らはその両手にあなたをのせ、あなたの足が石に打ち当たらないようにする』と書いてあるから。」
7.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試みてはならない』とも書いてある。」
8.悪魔はまた、イエスを非常に高い山に連れて行き、この世のすべての王国とその栄華を見せて、
9.こう言った。「もしひれ伏して私を拝むなら、これをすべてあなたにあげよう。」
10.そこでイエスは言われた。「下がれ、サタン。『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礼拝しなさい。主にのみ仕えなさい』と書いてある。」
11.すると悪魔はイエスを離れた。そして、見よ、御使いたちが近づいて来てイエスに仕え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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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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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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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11번째 시간으로서 “시험의 의미” 試みの意味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후에 이제 광야로 가서 금식하신 후에 마귀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게 되십니다.

이에 대해서는 2020년 5월에서 6월에 총 4회에 걸쳐서 시험 내용 하나하나에 대해서 말씀을 전해 드렸기에 혹시 궁금하신 분은 인터넷을 통해서 그 때 말씀을 참조해 주셨으면 하고, 오늘은 이 시험 내용 전반에 걸쳐서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신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어떻게 됩니까.

첫째 시험은 3절에 의하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하고,

둘째 시험은 5절에서 6절에 의하면 높은 데서 뛰어내려 보라고 하고,

셋째 시험은 8절에서 9절에 의하면 자신에게 경배하라고 합니다.

우선 여러분께서는 이와 같은 시험 내용을 들으시면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아, 나도 이런 시험을 받게 되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이 되십니까. 불안해 하십니까.

그런 분들을 위해 제가 안심을 시켜드리고자 합니다.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런 시험, 아무나 당하는 게 아니에요.

자, 마귀 사탄이 한 시험 내용을 자세히 좀 보세요.

첫째 시험은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와 같은 시험은 어떤 사람들에게 했을 것 같습니까. 아니, 복잡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조금 쉬운 비유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너 내일 너네 회사에서 100억원을 횡령하라는 시험을 마귀가 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렇다면 그런 시험을 아무한테나 하겠습니까.

우선 그 사람이 최소한 100억 정도는 있는 회사에 다녀야 하지 않겠어요? 회사에 100억도 없는데 어떻게 100억을 횡령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한 그 사람이 100억 정도가 있는 회사에 다닌다고 해서 그 돈을 횡령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회사에 갓 들어간 신입사원한테 그 정도의 돈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예컨대 회사에서 100억 정도의 돈을 횡령하라는 시험을 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로 요건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에 나온 마귀 사탄의 시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아무한테나 돌을 떡덩어리로 만들라는 시험을 하겠어요? 아니요. 그렇지는 않겠지요. 적어도 돌을 떡덩이로 만들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한테 그런 시험을 하지 않겠습니까.

다음 시험은 뭐였어요. 높은 데서 뛰어내려 보라고 하잖아요. 이 정도의 시험을 받기 위해서는 높은 데에 올라가 있는 사람이라야 하는데, 아직 밑바닥에서 바둥바둥 거리고 있는 사람한테 무슨 이런 시험을 하겠습니까.

마지막으로는 마귀가 자신한테 경배하라고 하지요? 자, 여러분께서는 누구한테 인사를 받으면 좋겠습니까. 동네에 있는 어린 애들이나 별볼일 없는 사람들한테 인사를 받고 대우를 받으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얼마 전에 그런 제목을 보았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겸손하다는 것예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미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은 별볼일 없는 사람들로부터 대우를 받지 않더라도 이미 자신의 지위는 확고해요. 그렇기 때문에 대단하지도 않은 사람들한테서까지 굳이 대우를 받을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사실 그야말로 별볼일 없는 사람들이나 아무한테서 인사를 받고 싶고 대우를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요? 예, 성경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5절~7절
“5.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彼らがしている行いはすべて人に見せるためです。彼らは聖句を入れる小箱を大きくしたり、衣の房を長くしたりするのです。
宴会では上座を、会堂では上席を好み、
広場であいさつされること、人々から先生と呼ばれることが好きです。

이 얼마나 소인배 같은 인물들입니까. 아주 작은 것까지도 대우 받기 좋아하고, 아주 작은 것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는 그런 인물들이 작은 인물들이지, 큰 사람들은 그런 작고 사소한 일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대단한 사람들한테서 대우를 받고 싶어할 수는 있겠지요. 마귀 사탄을 보십시오. 하물며 예수님으로부터 경배를 받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한가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 하시다고 하지 않습니까. 무소부재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바로 안 계신 곳이 없는, 모든 곳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 23장 24절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人が隠れ場に身を隠したら、わたしはその人を見ることができないのか。──主のことば──天にも地にも、わたしは満ちているではないか。──主のことば。

하나님께서는 온 천지에 충만하시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를 풀어서 말씀을 드리자면,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 전혀 제약을 받지 않으십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리고 온 우주 천지 공간에 충만하신 하나님, 한 순간에 모든 곳에 존재하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으면 큰 일입니다. 내가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옆 사람이 동시에 기도를 드리고 있어요. 그러면 옆 사람한테 양해를 구해야겠죠. 여보세요. 내가 지금 정말 급한 기도가 있어서 그런데, 일단 내 기도가 끝난 다음에 당신 기도를 좀 해줄 수 있겠냐 하고 양해를 얻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전세계 모든 사람들이 한 번에 기도를 드린다 하더라도 그 기도를 모두 그 순간에 다 듣고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보죠. 마귀 사탄은 무소부재 할까요? 말하자면 여기저기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천사는 어떨까요. 천사는 여기저기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을까요?

성경에 의하면 천사들은 자신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9절~10절
“9.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10.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御使いは私に、「子羊の婚宴に招かれている者たちは幸いだ、と書き記しなさい」と言い、また「これらは神の真実なことばである」と言った。
私は御使いの足もとにひれ伏して、礼拝しようとした。すると、御使いは私に言った。「いけません。私はあなたや、イエスの証しを堅く保っている、あなたの兄弟たちと同じしもべです。神を礼拝しなさい。イエスの証しは預言の霊なのです。」


요한계시록 22장 8절~9절
“8.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9.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これらのことを聞き、また見たのは、私ヨハネである。私は、聞いたり見たりした後に、これらのことを示してくれた御使いの足もとにひれ伏して、礼拝しようとした。
すると、御使いは私に言った。「いけません。私はあなたや、預言者であるあなたの兄弟たち、この書のことばを守る人々と同じしもべです。神を礼拝しなさい。」


천사들은 자기들에 대해서 스스로 ‘종(しもべ)’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천사들도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천사들도 우리처럼 동시에 여기저기에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마귀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동시에 여기저기 존재할 수가 없어요. 말하자면 그 수에는 절대적인 한계가 있다고 하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모든 사람들을 시험의 대상으로 삼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스스로를 생각할 때, 내가 별로 능력도 없고, 높은 데에 있지도 않고, 대단하지도 않은 인물이라고 한다면 안심하십시오. 마귀들은 그런 사람들한테까지 시험할 여유가 없습니다. 마귀들이 얼마나 바쁜데 그런 별볼일 없는 사람들까지 시험하고 있겠습니까.

자, 이게 정말 사실이라고 한다면, 마귀는 그럼 누구한테 시험을 하겠습니까. 일단 기본적으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마귀는 누구를 시험할 것인가에 대해서 면밀하게 선별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선택과 집중, 이 또한 마귀들의 전략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그 선별 기준이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들을 시험할 사람들로 삼는 것일까요.

이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바로 마귀들 나라에 대해서 위협이 되는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탄의 나라에 대해서 전혀 위협이 되지 않은 사람들까지 일일이 시험을 할 시간도 없고 여력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시험을 해서 넘어뜨려야 할 사람들을 선택해서 집중적으로 공략할 작전을 세우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열심히 하려고 해요. 주님의 일을 감당하려고 해요. 그러면 마귀들한테는 비상이 걸립니다. 아무리 바빠도 저 놈을 막아야 해. 그러면서 온갖 수작들을 다 부립니다.

주변 사람들을 동원해서 욕을 하고 박해하고, 어디 그 뿐이에요? 너는 안돼. 할 수 없어. 어서 포기해……. 이러면서 우리에게 총공격을 가해옵니다. 그리고 아주 우리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좌절과 절망을 안겨주려고 난리를 쳐요.

이처럼 정신적인 박해, 그리고 때로는 육체적인 박해까지도 우리에게 안겨주려고 마귀 사탄들이 발버둥을 칠 때가 있습니다.


공사다망한 마귀 사탄들이 엄격한 선별기준에 따라서 그 시험대상을 선정한 다음에, 그 없는 시간과 인력을 할애해가면서 그 사람에 대하여 시험을 한다는 것, 이는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이 마귀 사탄에게 있어서 그만큼 위협이 될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마귀 사탄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마귀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 그 정도로 큰 일을 하고 있는 사람, 나중에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상을 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뜻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5장 11절~12절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わたしのために人々があなたがたをののしり、迫害し、ありもしないことで悪口を浴びせるとき、あなたがたは幸いです。
喜びなさい。大いに喜びなさい。天においてあなたがたの報いは大きいのですから。あなたがたより前にいた預言者たちを、人々は同じように迫害したのです。


생각해보세요. 누군가가 우리 보고 욕하고 박해하고 그래요. 그런데 기뻐하래요. 이걸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읽는다면 말이 안 됩니다. 그런 정신 나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마귀가 어떤 사람들을 시험하려고, 그리고 넘어뜨리려고 달려드느냐 하는 그 비밀을 알면 이 말씀이 얼마나 큰 은혜가 되냐 하는 것이지요.

지금 마귀가 지들도 바빠 죽겠는데도 우리한테 욕을 하고 박해하고 그래요. 그것은 뭐냐 하면 바로 우리가 그만큼 자기들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경에는 이 비밀을 이미 알아차렸던 믿음의 선배들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5장 40절~42절
“40.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2.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使徒たちを呼び入れて、むちで打ち、イエスの名によって語ってはならないと命じたうえで、釈放した。
使徒たちは、御名のために辱められるに値する者とされたことを喜びながら、最高法院から出て行った。
そして毎日、宮や家々でイエスがキリストであると教え、宣べ伝えることをやめなかった。

사도들이 관리들에게 붙들려서 채찍질을 당했는데도 기뻐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것만 보면 그야말로 정신병자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이 기뻐한 것에는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5장 41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使徒たちは、御名のために辱められるに値する者とされたことを喜びながら、最高法院から出て行った。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래,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일했더니, 마귀 사탄들에 의해 이 정도로 박해를 받을 만한 인물로 인정을 받았구나! 하는 사실을 알고 기뻐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축구 시합에 나갔어요. 그런데 나한테 공도 없는데 상대 팀 선수들이 몇 명이나 몰려와서는 내 주위를 둘러싸고 어떻게든 나한테 공이 안 오게 방해를 해요. 내가 움직이려고 하면 일거수일투족 막아 서고 그럽니다.

만약에 그런 상황이라면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바로 나는 상대팀에게 있어서 그만큼 위협이 되는 뛰어난 선수라는 사실을 인정받은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된 게, 나한테는 상대팀 선수들이 아무도 방해를 안 해요. 나한테 공이 왔는데도 아무도 빼앗을 생각도 하지 않고 멀리서 실실 웃으면서 처다 보고만 있어요.

그건 뭐예요? 야. 저 놈한테 공이 가도 괜찮아. 어차피 골을 못 넣어……. 그렇게 무시 당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 삶 속에서 시험이 다가왔습니까. 크고 작은 시험 때문에 지치고 힘들고 괴롭습니까.

축하합니다. 이제 당신은 비로소 마귀 사탄에게 위협되는 사람으로 선정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렇습니다. 이제 당신은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상을 받을 후보로 선정된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넘어뜨리기 위해 달려드는 마귀 사탄들을 쌍수 들고 환영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물리쳐야죠.

그렇다면 어떻게 물리쳐야 하느냐 하면, 그 방법을 오늘 본문에서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마귀 사탄을 어떻게 물리치셨습니까.

마태복음 4장 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イエスは答えられた。「『人はパンだけで生きるのではなく、神の口から出る一つ一つのことばで生きる』と書いてある。」

마태복음 4장 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試みてはならない』とも書いてある。」

마태복음 4장 10절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そこでイエスは言われた。「下がれ、サタン。『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礼拝しなさい。主にのみ仕えなさい』と書いてある。」


예수님께서는 마귀 사탄을 어떻게 물리치셨습니까. 마귀 사탄한테 십자가를 드리 대셨나요? 아니면 무슨 성수 같은 것을 뿌리셨나요?

아닙니다. 세 번의 시험 모두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말씀으로 물리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지난 주 토요일에 다카사키 쪽 방문전도를 마치고 오는 길에 동네 마트에 들렀습니다. 그 때는 제 아내도 서울에 가 있었고 하니 혼자서 뭐라도 먹을 거리라도 사야겠다 싶어서 좀 늦은 시간에 마트에 갔습니다.

이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문을 닫고는 문 옆에 있는 스위치를 누르면 문이 잠기거든요. 그런데 그 날 따라 그 단추를 눌러도 문이 안 잠겨요.

이상하다 하고 아무리 이것저것 시도를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쩌겠어요. 이미 해는 저물어서 주차장은 어두컴컴했기 때문에 자동차 매뉴얼을 들고 마트 안으로 들어가서 그 구석에서 열심히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무슨 스위치를 누르면 될 것 같아요. 그래서 다시 자동차 쪽으로 나와서 핸드폰 라이트를 켜고 열심히 그 스위치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안 보여요. 분명 거기에 있다고 그림까지 그려서 설명이 되어 있는데도 도무지 보이질 않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저랑 똑 같은 차를 가진 사람이 있으면 좀 물어볼까 하고 주차장을 둘러 봤더니만, 평소에는 자주 보이던 그 흔한 차가 그날 따라 또 안 보이는 것 있죠.

그래서 저는 또 제 차가 워낙 오래된 거라서 없거나 아니면 옵션에 따라서 다른가 했었습니다만, 아니, 그 매뉴얼은 분명 그 차에 대한 것이니까 다르지는 않을 거거든요. 그리고 옵션에 따라서 다르다는 설명도 없어요.

그래서 어쩌겠습니까. 매뉴얼을 몇 번이나 다시 본 다음에 확인을 하고서는 이제 아주 그 운전석의 다리 쪽에 머리를 집어넣어서 샅샅이 뒤져봤죠.

그랬더니만 어떻게 됐겠습니까. 야, 거기 스위치가 있더라고요.

그게 어디 있었냐 하면, 운전하시는 분들이라면 아실 거예요. 가속페달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그 발등 바로 위쪽에 있었습니다.

거기 있는 스위치를 누르니까 이제 되더라고요.


솔직히 제가 자동차에 있어서 그리 해박한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지금까지 여러 대를 몰아 보긴 했었거든요.

하지만 그런데도 제가 가지고 있던 지식이나 경험으로는 거기에 스위치가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습니다.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곳에 스위치가 있었더라니까요.

제가 장담을 합니다. 만약에 그 자동차 매뉴얼이 아니었다면 아마 10년이 지나도 그 스위치는 찾아내지 못했을 거예요. 그러나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제가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 매뉴얼을 봤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우리 삶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평소에는 잘 되던 것이 안 됩니까. 이상하게 일이 안 풀리고 여기저기서 꼬이기 시작합니까. 골치 아픈 문제들이 동시에 여기저기서 터지기 시작합니까.

그것은 어쩌면 마귀 사탄이 우리를 자기네들 요주의 인물로 선별한 결과 달려들기 시작해서 그런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럴 때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의 영원하고도 완전한 매뉴얼, 바로 성경을 찾아봐야 할 때인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7절~8절
“7.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与えられます。探しなさい。そうすれば見出します。たたきなさい。そうすれば開かれます。
だれでも、求める者は受け、探す者は見出し、たたく者には開かれます。


주님은 우리에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구하고 찾고 어디를 두드리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에서 구하고 성경에서 찾고 성경을 두드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지식이나 내 상식으로 그리고 내 경험으로도 찾거나 구하지 못한 스위치를 성경에 의해 전혀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바로 성경에서 찾아낸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달려드는 마귀 사탄들을 물리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가 시험을 당하게 되었을 때, 근심하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큰 상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았다고 하는 그 시험의 의미를 올바로 깨달아서,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하고 그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마귀 사탄을 물리침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면류관, 놀라운 승리의 면류관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まさに聖書から探し出したそのみ言葉を通して、私たちを転ばせるために躍起になっている悪魔サタンを退かせ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いたします。

これから私たちが試みにあう時、苦しみ落胆し挫折し絶望し諦めるのではなく、主から大きな褒美を受けるに値する者とされたという試みの意味を悟り、むしろ喜び感謝をささげ、そして主のみ言葉により悪魔サタンを退かせることによって、主からいのちの冠、驚くべき勝利の冠をすべて受けられる皆さまであらんことを主の御名においてお祈り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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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35회 세례 받으신 예수님
2024년 3월 10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11절~17절
“11.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2.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13.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14.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16.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マタイの福音書 3章 11節~17節
“11.私はあなたがたに、悔い改めのバプテスマを水で授けていますが、私の後に来られる方は私よりも力のある方です。私には、その方の履き物を脱がせて差し上げる資格もありません。その方は聖霊と火であなたがたにバプテスマを授けられます。
12.また手に箕(み)を持って、ご自分の脱穀場を隅々まで掃ききよめられます。麦を集めて倉に納め、殻を消えない火で焼き尽くされます。」
13.そのころ、イエスはガリラヤからヨルダン川のヨハネのもとに来られた。彼からバプテスマを受けるためであった。
14.しかし、ヨハネはそうさせまいとして言った。「私こそ、あなたからバプテスマを受ける必要があるのに、あなたが私のところにおいでになったのですか。」
15.しかし、イエスは答えられた。「今はそうさせてほしい。このようにして正しいことをすべて実現することが、わたしたちにはふさわしいのです。」そこでヨハネは言われたとおりにした。
16.イエスはバプテスマを受けて、すぐに水から上がられた。すると見よ、天が開け、神の御霊が鳩のようにご自分の上に降って来られるのをご覧になった。
17.そして、見よ、天から声があり、こう告げた。「これはわたしの愛する子。わたしはこれを喜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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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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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10번째 시간으로서 “세례 받으신 예수님” 洗礼を受けられたイエス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중에서 11절과 12절의 내용을 본다면 세례 요한은 분명 예수님에 대해서 백성들에게 증거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서 11절과 12절을 보시면 이는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11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3장 11절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1.私はあなたがたに、悔い改めのバプテスマを水で授けていますが、私の後に来られる方は私よりも力のある方です。私には、その方の履き物を脱がせて差し上げる資格もありません。その方は聖霊と火であなたがたにバプテスマを授けられます。


이는 장차 오실 구세주 메시야의 위상과 능력에 대해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이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인지 여부를 알고 싶어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세례 요한은 명쾌하게 부인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의 신발을 관리한다는 일은 당시 하인들이 했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그 분의 하인 보다도 못한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신의 뒤에 오실 분은 자신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놀라운 능력을 가진 분이시고, 뿐만 아니라 이 또한 자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히 위대하신 분이라는 것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12절입니다.

마태복음 3장 12절
“12.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12.また手に箕を持って、ご自分の脱穀場を隅々まで掃ききよめられます。麦を集めて倉に納め、殻を消えない火で焼き尽くされます。」

이는 메시야에 의한 심판을 뜻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우리에 대한 심판은 누가 합니까. 이 세상에서 심판은 말하자면 재판은 재판관이 할 수 있겠습니다만, 영적인 재판 즉 구원이냐 멸망이냐 하는 재판은 바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세례 요한이 말하기를, 자기 다음에 오실 분은 우리에 대한 심판을 하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진 분이라고 증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자기 뒤에 오실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시라고 증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요, 이 예언대로 오신 분이 바로 성자 하나님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은 13절에서 15절까지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3장 13절~15절
“13.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14.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13.そのころ、イエスはガリラヤからヨルダン川のヨハネのもとに来られた。彼からバプテスマを受けるためであった。
14.しかし、ヨハネはそうさせまいとして言った。「私こそ、あなたからバプテスマを受ける必要があるのに、あなたが私のところにおいでになったのですか。」
15.しかし、イエスは答えられた。「今はそうさせてほしい。このようにして正しいことをすべて実現することが、わたしたちにはふさわしいのです。」そこでヨハネは言われたとおりにした。


이처럼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를 선포하고 세례를 베풀면서 메시야가 오신다는 예언을 전하고 있을 때 바로 예수님께서 그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이 점에 대해서 세례 요한은 흥미로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31절
“29.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0.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31.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その翌日、ヨハネは自分の方にイエスが来られるのを見て言った。「見よ、世の罪を取り除く神の子羊。
『私の後に一人の人が来られます。その方は私にまさる方です。私より先におられたからです』と私が言ったのは、この方のことです。
私自身もこの方を知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私が来て水でバプテスマを授けているのは、この方がイスラエルに明らかにされるためです。」


문맥상으로 볼 때 이 말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주위에 있는 백성들이나 제자들에게 했던 말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내 뒤에 오실 분이 계시다고 했는데, 그 분이 바로 이 분이다, 라고 말하면서 자신도 그를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그 때까지 일면식도 없는 관계였을까요. 아니요. 오히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그 이유는 누가복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 36절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見なさい。あなたの親類のエリサベツ、あの人もあの年になって男の子を宿しています。不妊と言われていた人なのに、今はもう六か月です。

누가복음 1장 56절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マリアは、三か月ほどエリサベツのもとにとどまって、家に帰った。


누가복음 1장에 의하면 이 한 장에서 두 아이의 탄생이 예언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세례 요한과 예수님에 대한 탄생입니다.

세례 요한의 어머니는 엘리사벳이고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는 마리아인데,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말하기를 네 친족 엘리사벳도 잉태했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친족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어느 정도 가까운 사이였냐 하면, 마리아가 잉태사실을 듣고는 엘리사벳한테 가서 석 달이나 함께 지냈을 정도로 그 관계가 가까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3장 23절 전반부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イエスは、働きを始められたとき、およそ三十歳で、……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나이가 서른 살 정도 되셨다고 하는데, 자, 어머니끼리 그 정도로 가까웠다면 그 아들인 요한과 예수님이 30년 동안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면 이는 오히려 부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이 점에 대해서 요한복음 1장 33절~34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장 33절~34절
“33.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私自身もこの方を知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水でバプテスマを授けるようにと私を遣わした方が、私に言われました。『御霊が、ある人の上に降って、その上にとどまるのをあなたが見たら、その人こそ、聖霊によってバプテスマを授ける者である。』
私はそれを見ました。それで、この方が神の子であると証しをしているのです。」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그처럼 가까운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이 그를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바로 구세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여기만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1장 2절~3절
“2.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さて、牢獄でキリストのみわざについて聞いたヨハネは、自分の弟子たちを通じて
イエスにこう言い送った。「おいでになるはずの方はあなたですか。それとも、別の方を待つべきでしょうか。」

당시 세례 요한은 옥에 갇혀 있었습니다만, 그 때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묻기를 장차 오시리라고 예언되었던 메시야가 예수님이 맞는지 여부를 묻게 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아니, 육신적으로 본다면 예수님과 대단히 가까운 친척관계에 있어왔고 예수님을 만나자 그가 바로 메시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심을 가지고 있었던 세례 요한의 모습을 본다면, 그는 영적으로 대단히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나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에 대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11장 11절 전반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女から生まれた者の中で、バプテスマのヨハネより偉大な者は現れませんでした。……

이 말씀은 세례 요한만한 선지자는 그 전에도 후에도 없다고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정도로 대단한 선지자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는 나중까지도 그 의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요.

이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서 세례 요한 조차도 예상을 못했을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를 비롯해서 메시야가 오신다는 예언은 구약에 끊임없이 등장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채로 저주를 받아 죽음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하게 되어,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이와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을 당시에는 그 누구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도 이는 세례 요한조차도 믿기가 어려울 정도로 정말 뜻밖의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구약 39권째 말라기서를 읽고 그 다음에는 곧바로 마태복음이 나옵니다. 참고로 말라기는 창세기나 출애굽기, 레위기처럼 책 이름이 아니라 “말라기”가 선지자 이름입니다.

말라기 선지자까지는 계속해서 선지자도 있었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장차 엘리야를 보내시겠다고 하는 예언으로 말라기서가 끝나게 되는데, 그로부터 오랫동안 그야말로 감감무소식입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메시야나 엘리야는 고사하고 선지자들도 나타나지 않아요.

그와 같은 기간이 얼마나 계속됐냐 하면 무려 400년 이상이나 이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됐겠어요.

아, 구약 때 예언은 그야말로 전설, 아니면 신화구나. 이제 메시야가 온다고 하는 것도 모두 헛것이구나. 하는 그와 같은 절망이 만연하고 있던 상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때 세례 요한이 나타나서는 회개와 천국을 선포하고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제 세례 요한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예수님도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겠다고 하세요.

예수님이 장차 오시리라고 하신 그 분이라는 사실을 알아보고서 요한은 놀랍니다. 아니, 내가 당신한테서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어찌 내가 세례를 베풀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는 것이 의를 이루는 것, 즉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이라고 요한에게 말을 함으로 인해서 마침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러자 어떻게 됩니까.

마태복음 3장 16절~17절
“16.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16.イエスはバプテスマを受けて、すぐに水から上がられた。すると見よ、天が開け、神の御霊が鳩のようにご自分の上に降って来られるのをご覧になった。
17.そして、見よ、天から声があり、こう告げた。「これはわたしの愛する子。わたしはこれを喜ぶ。」”

이 장면을 보시면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이 모두 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성령님을 받으신 예수님은 비로소 공생애를 시작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참고로 저는 성령님이 비둘기 같이 내려왔다는 점에 대해서 단순히 그냥 비유라고 생각했었습니다만, 사실 그게 아닌 것 같더라고요.

이 장면에 대해서 누가복음 3장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누가복음 3장 22절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聖霊が鳩のような形をして、イエスの上に降って来られた。すると、天から声がした。「あなたはわたしの愛する子。わたしはあなたを喜ぶ。」

여기 보면 분명히 ‘비둘기 같은 형체(鳩のような形)’라고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볼 때 최소한 비둘기 같은 그 무엇인가가 보인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자, 이 시점에서 우리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에는 중요한 ‘실’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실’과 ‘진실’과 ‘현실’입니다.

이 ‘사실’과 ‘진실’과 ‘현실’이라고 하는 개념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도 매우 유용합니다.

우선 ‘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객관적으로 일어난 사건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고,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실’에 내포되어 있는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며,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그 ‘진실’이 끼친 영향으로 인한 현재 상황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 진실은 의미가 없는 것이요, 진실을 이룰 만한 내포된 의미가 없는 객관적인 사건 또한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세례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일단 ‘사실’은 어떻습니까. 마태복음 3장 16절, 마가복음 1장 9절, 누가복음 3장 21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분명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진실’을 알아보아야 하겠지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고 하신 사실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우리는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알아본 바와 같이 세례 요한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러 온 인물입니다.

이사야 40장 3절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荒野で叫ぶ者の声がする。「主の道を用意せよ。荒れ地で私たちの神のために、大路をまっすぐにせよ。

마태복음 3장 3절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この人は、預言者イザヤによって「荒野で叫ぶ者の声がする。『主の道を用意せよ。主の通られる道をまっすぐにせよ』」と言われた人である。


400년 이상이나 계속된 영적으로 암울한 공백기간을 지나고 이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날이 다가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례 요한은 백성들에게 그 사실을 선포합니다.

예언은 전설이나 신화가 아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우리를 기억하시며 놀라운 권세를 가지신 분이 이 땅에 오신다. 그러니 어서 깨어 회개하고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라고 외친 것이 바로 세례 요한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비행기가 뜨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작은 비행기, 무슨 헬기나 특수 전투기가 아닌 거대한 여객기 같은 비행기가 뜨기 위해서는 반드시 활주로가 필요합니다.

활주로가 있어야 비행기가 그 활주로 위를 달리고는 마침내 날아오르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은 바로 그 활주로의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겠다고 하신 그 이유는, 세례 요한이 감당했던 그 사역을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그리고 그가 닦아 놓은 활주로를 통해서 높이 날아오르시겠다고 하는 주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일출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처음 일출을 본 건 20대 중반 쯤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그때 제가 PC통신, 그 때는 아직 인터넷이 없었을 때였거든요. 그래서 그때 PC통신에 있는 여행동호회에 가입해서 잠시 활동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 보니까 여행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밤에 전화가 한 통 걸려왔어요. 받아봤더니 그 동호회에서 그래도 좀 친하게 지냈던 형이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와서 하는 말이, 저더러 “야, 정동진 가자” 그러는 거예요.

저는 그 때까지 ‘정동진’이라는 곳을 몰랐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게 사람 이름인 줄 알고, 제가 김동진은 알고 박동진도 아는데, 정동진은 모른다고 했더니만, 무슨 헛소리냐고 하면서 그냥 따라오래요. 그래서 멋도 모르고 그 형 차를 타고 갔지요.

지금은 뭐 정동진이 개발이 되어서 상당하다고 합니다만,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냥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어요. 그런데 정말 신기하더라고요. 저는 그 형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갔었는데, 철도길 옆이 바로 바닷가 모래사장이잖아요. 정말 참 신기하더라고요.


거기 도착하니까 아직 어두웠는데 날이 밝아 지기 전에 서둘러 바닷가 쪽으로 갔죠.

저는 일출을 처음 볼 때까지는, 일출이라고 하는 것은 캄캄할 때 갑자기 태양이 떠오르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고요.

하늘은 다 밝아졌는데 아직 해가 안 뜨는 거예요. 그 때가 겨울이었나 그랬는데, 거기에 동해바다 바닷바람까지 있으니까 얼마나 추웠겠어요. 그래서 빨리 차에 가고 싶었는데 하늘은 환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해가 안 떠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일출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이 거의 다 밝아지고는 그 다음에 태양이 이렇게 떠오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벌벌 떨면서 기다렸더니 정말 그렇더라고요. 하늘이 아주 환하게 밝아진 다음에 저 멀리서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역할이 바로 그와 같은, 그러니까 태양이 떠오르기 전에 하늘을 밝히는 역할을 했던 것이 세례 요한이 감당했던 사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그가 밝힌 하늘 속으로 마치 아침 해가 떠오르듯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요한복음 1장 31절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私自身もこの方を知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私が来て水でバプテスマを授けているのは、この方がイスラエルに明らかにされるためです。」

요한은 주님을 이스라엘에 나타내기 위해서 세례를 베풀었으며, 그가 평탄하게 한 그 길로 이제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의 진정한 의미, 즉 진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현실’은 어떨까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말씀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 중에서 마태복음 3장 16절을 다시 볼까요?

마태복음 3장 16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6.イエスはバプテスマを受けて、すぐに水から上がられた。すると見よ、天が開け、神の御霊が鳩のようにご自分の上に降って来られるのをご覧になった。

저는 이 세례를 받으시고는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정말 그 때 동해바다에서 올라온 태양이 연상됩니다. 요한이 이 세상을 환하게 밝혀 놓고는, 그 속에서 예수님이 떠올라 이 세상에 나타내심바 되었다는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나타나고 계십니까.

만약 이 현실 속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고 아직 물 속에 가라앉고 계시다면, 이는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의 진실이고 사실이고 간에 이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했어요. 그런데 현실 속에서 결과를 얻은 것이 없다면 그렇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삶 속에서 예수님을 올라오시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예수님을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드실 작정이십니까.

우리가 우리 힘으로 우리 스스로를 높이면 우리는 높아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낮추는 것입니다.
考えてみてください。いくら一生懸命努力をしたとしても現実の中で結果を得られなかったというのであれば、そこに何の意味があるでしょうか。

私たちは私たちの人生の中でイエス様を上がらせなければなりません。イエス様を私たちの人生の中に現せ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いつまでイエス様を水の中で、もがき苦しませるおつもりですか。

私たちが私たちの力で自らを高めても高められません。

しかし私たちを高められる方法があります。それは私たちがへりくだることです。

야고보서 4장 10절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主の御前でへりくだりなさい。そうすれば、主があなたがたを高く上げてくださいます。

이제 우리 삶 속에서 우리를 낮추고는 예수님을 올라오시게 하고 나타내시게 하고 높이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높임을 받고 존귀함을 얻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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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34회 회개에 합당한 열매
2024년 3월 3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5절~9절
“5.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7.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マタイの福音書 3章 5節~9節
“5.そのころ、エルサレム、ユダヤ全土、ヨルダン川周辺のすべての地域から、人々がヨハネのもとにやって来て、
6.自分の罪を告白し、ヨルダン川で彼からバプテスマを受けていた。
7.ヨハネは、大勢のパリサイ人やサドカイ人が、バプテスマを受けに来るのを見ると、彼らに言った。「まむしの子孫たち、だれが、迫り来る怒りを逃れるようにと教えたのか。
8.それなら、悔い改めにふさわしい実を結びなさい。
9.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の父はアブラハムだ』と心の中で思ってはいけません。言っておきますが、神はこれらの石ころからでも、アブラハムの子らを起こすことができ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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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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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9번째 시간으로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 悔い改めにふさわしい実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세례를 베풀었더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로 왔다고 하는데, 오늘 본문에 보시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 부류는 6절에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3장 6절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6.自分の罪を告白し、ヨルダン川で彼からバプテスマを受けていた。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세례라고 하는 개념은 그 때까지 없었던 관행이었는데, 나중에 이 세례에 대해서 의미가 부여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만, 당시 요한에게 모여들어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요한이 외쳤던 회개에 대하여 순종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세례를 베푼 것은 세례 요한이 자기 마음대로 시작한 것이냐 하면,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장 33절 중반부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私自身もこの方を知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水でバプテスマを授けるようにと私を遣わした方が、私に言われました。……

이는 세례 요한의 말입니다만, 여기서 그는 자신이 스스로 판단해서 세례를 베푼 것이 아닌 세례를 베풀도록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례는 예수님까지도 받으셨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 요한이 베푸는 세례는 예수님도 분명 인정하셨다는 점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은 장로회를 비롯한 많은 교단에서 약식으로 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만, 본래 세례라고 하는 것은 침례, 그러니까 물속에 완전히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성경에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16절 전반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イエスはバプテスマを受けて、すぐに水から上がられた。

마가복음 1장 10절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イエスは、水の中から上がるとすぐに、

옛날 그림들을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 머리 위에 물을 붓고 있는 것도 있고 그런데, 그와 같은 그림이나 영화 같은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바로 성경 말씀을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를 들어서 다빈치의 마지막 만찬이라고 하는 그림을 본다면 어떻습니까.

이는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기념해서 만찬을 가졌을 때의 장면을 그린 작품이라고 하지요.

이건 좀 여담입니다만, 한국에서는 이를 ‘최후의 만찬’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적절하지가 않습니다.


아마도 일본에서 이를 한자로 표기했을 때 ‘최후의 만찬’이라고 해서 이를 그대로 한글로 옮기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데, 이는 의미상으로 볼 때 ‘최후’라고 하기 보다는 ‘마지막’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그림을 보고 아, 정말 그 때는 이랬었나 보다 하고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이 그림에는 분명한 오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식사할 때의 자세입니다.

그 그림에 보시면 예수님을 비롯해서 모두가 의자에 앉아 있는데,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처럼 의자에 앉아서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조금 비스듬하게 누운 자세로 식사를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영화나 그림을 보고 그것이 성경인 줄 알고 그대로 믿는다는 것은 자칫하면 성경 이해에 있어서 오해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 성경말씀을 중심으로 우리가 이해를 해야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자,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본래 세례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머리에 물을 조금 붓는 것이 아닌 물속에 완전히 들어갔다 나오는 방식이었다고 한다면, 이 세례가 주는 의미를 1차적으로 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기에는 세례 요한이 외쳤던 ‘회개’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하겠는데, 이 회개의 의미를 살펴본다면 세례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물에 풍덩 들어갔다 오면 당연히 온몸이 젖게 되겠지요. 지금도 비가 오면 우산을 씁니다만,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일단 옷을 안 젖게 하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사실 요즘 옷 같은 경우에는 비에 젖는다 하더라도 그리 심하게 모양새가 흐트러지지는 않는다고 하겠는데, 옛날 옷 같은 경우에는 옷이 물에 젖으면 아주 보기에 안 좋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옷을 벗어야 해요.

저도 어렸을 때 세례를 받았을 때를 보면 그 때는 강에 가서 침례로 받았는데, 그 때는 속옷차림에다가 흰 가운을 입고 강에 들어가서 세례를 받고 그랬습니다만, 그 모습은 어떻습니까. 아무리 점잖은 사람이 흰 가운을 입었다 하더라도 그 젖은 모습이 그리 보기 좋지는 않잖아요.

회개라고 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좋은 모습, 멋진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쓰지요.


예를 들어서 요즘 사람들을 보더라도 페이스북이나 인스타 같은 곳에 보면 자기의 안 좋은 모습을 올려놓고 싶어합니까.

자기가 잘 차려 입은 사진이나 멋진 모습들을 사진에 찍어서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겠어요.

하물며 자기의 흔한 일상모습이라고 하고 올려놓는 사진들을 보면, 옆에 슬쩍 명품 시계나 악세서리 같은 것이 나오게 찍는다거나, 운전하는 모습에는 슬쩍 자기 운전대에 찍힌 외제차 마크가 보기에 한다거나, 사실 좀 그런 건 보는 사람이 쑥스러울 수도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자기 좋은 모습을 그렇게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회개를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안 좋은 것, 마치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회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세요. 회개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무슨 많은 사람들을 앞에 두고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께 지은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내가 이웃에게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이웃에게 잘못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 그것이 회개 아니겠습니까.


여기에는 자존심이 없습니다. 변명이 없습니다.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는 것이 바로 회개의 본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은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며 세례를 베푸는 요한에게 와서 자신을 낮추고 회개의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만, 이 중에는 또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7절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7.ヨハネは、大勢のパリサイ人やサドカイ人が、バプテスマを受けに来るのを見ると、彼らに言った。「まむしの子孫たち、だれが、迫り来る怒りを逃れるようにと教えたのか。

요한이 세례를 베푸는데 그 곳에 많은 사람들이 왔고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도 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라고 하면 무슨 이방인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이 아니라 모두 유대인들입니다.

당시 유대교에는 세 가지 그룹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것은 바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그리고 성경에는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 에세네파라고 하는 그룹이 있었습니다.

이 차이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 좀 이야기가 복잡해질 수 있겠는데, 간단히 설명하면 바리새파 사람들은 형식에 있어서 강조했던 경향이 있고, 사두개파 사람들은 합리주의적인 경향이 있었다고 할 수 있었는데, 이들은 내세도 부활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에세네파로 불리는 사람들은 경건주의 금욕주의 그리고 비밀주의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들은 광야에서 살면서 철저한 경건, 금욕을 지키면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에 대해서 외부에 알리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기록들이 없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이 에세네파에서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세례 요한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기도 합니다.

이 세 개 종파 중에서 당시 종교적인 권력을 행사했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들이 오는 것을 보고 세례 요한은 크게 비난을 합니다.

아니,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다가, 왜 유독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는 심한 말로 꾸짖었던 것일까요.

이는 분명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요한의 말대로 자신의 죄에 대해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세례를 받기 위해 왔지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구경을 하러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는 자신들의 말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복종하고 그랬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더니 사람들이 다 그리로 몰려가요. 그리고 자신들은 전혀 주장하지도 않았던 회개를 말하자 사람들이 다 물로 세례를 받고 그럽니다.

일이 그렇게 되니까 도대체 누가 무슨 말을 하기에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갈까 하고 궁금해하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제 자신들의 기득권이 흔들리게 되지 않을까 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말하자면 정탐을 갔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제 자신을, 말하자면 구경하러 온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말합니다.


마태복음 3장 8절~9절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8.それなら、悔い改めにふさわしい実を結びなさい。
9.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の父はアブラハムだ』と心の中で思ってはいけません。言っておきますが、神はこれらの石ころからでも、アブラハムの子らを起こすことができるのです。


자신들의 기득권에 연연하는 그들에게 세례 요한은 회개할 것을 강권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하지 말라고 하지요. 하나님께서는 이 돌멩이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고 합니다.

당시 그들의 생활이 어땠길래 요한은 이처럼 험한 말로 그들을 꾸짖었던 것일까요.


마태복음 23장 5절~7절
“5.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彼らがしている行いはすべて人に見せるためです。彼らは聖句を入れる小箱を大きくしたり、衣の房を長くしたりするのです。
宴会では上座を、会堂では上席を好み、
広場であいさつされること、人々から先生と呼ばれることが好きです。


그들은 남들 앞에서 자신을 높이기 좋아했습니다.

경문 띠라고 하는 것은, 지금도 유대인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만, 율법을 기록한 경문을 작은 상자에 담아서 이마나 손목에 묶어서 고정을 시키고 기도를 하는데, 그 띠를 넓게 했다는 것은 사람들 눈에 잘 띄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옷술을 길게 했다는 것은 자신들이 입는 예복을 권위있게 꾸몄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는 실속이 없고 바깥 모습을 꾸미는 데에만 신경을 썼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디 그 뿐인가요. 잔치 자리에 가면 항상 높은 자리에 앉으면서 대우를 받으려고 했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선생님 소리를 들으면서 높임을 받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5절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また、祈るとき偽善者たちのようであってはいけません。彼らは人々に見えるように、会堂や大通りの角に立って祈るのが好きだからで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彼らはすでに自分の報いを受けているのです。


이처럼 사람들로부터 높임을 받으려고 했던 그들을 향해 세례 요한은 엄한 말로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들을 차별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면 말하자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자신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이라고 해서 다른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사람 취급도 안 했어요. 말도 안 섞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당시 이스라엘이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그들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자신들의 국권도 상실한 상태인 주제에 무슨 다른 체면으로 이방인들을 차별하고 그러냐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주제 파악도 못하고 사리분별도 못하는 그들에게 세례 요한은 뭐라고 말합니까.


마태복음 3장 9절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の父はアブラハムだ』と心の中で思ってはいけません。言っておきますが、神はこれらの石ころからでも、アブラハムの子らを起こすことができるのです。


너희들이 지금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서 잘난 척하고 있는데,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하나님은 이 돌멩이처럼 아무런 가치 없는 것으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만들 수 있어……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어떤 한 메일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제가 보내 드리는 전도메일을 받아 보신 분 같아요.


그런데 이 분이 하는 말이, 어디서 감히 자기한테 이런 메일을 보내냐는 것이에요.

그래서 저는 이 메일을 받고, 어디서 감히? 라는 말을 하기에 좀 어이가 없었습니다.

메일 내용을 보자 하니 변호사 같은데 도대체 얼마나 지체가 높으신 분이신가, 대법관이나 국무총리라도 역임하신 분이신가 하고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봤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분이셨냐 하면, 아직 30대 초반인 로스쿨 출신 변호사더라고요.


참 듣기도 민망해서, 혹시 저와 같은 법대나 대학교 후배라면 한 마디라도 해줄까 했는데, 뭐, 같은 법대도 아니고 같은 학교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래, 수고하세요……라고 생각하고 그냥 접었습니다.

옛날에는 사법시험을 보려면 응시자격이 없었습니다. 학력에 대한 제한도 없었고 그리고 응시료도 얼마나 쌌는지 몰라요.

90년대 초반의 경우에는 사법시험 1차 응시료가 2000원이고, 2차, 3차는 3500원이었습니다. 당시 운전면허 필기와 실기시험 응시료하고 똑같았어요.


물론 그 후에는 조금 더 오르긴 했지만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되지요. 한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습니다만, 지금은 변호사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로스쿨을 반드시 졸업을 해야 하는데, 이 등록금이 상당히 비쌉니다. 졸업하기 위해서는 등록금만 보더라도 몇 천만원이 들어요. 여기에 책값이나 뭐다 하면 어마어마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열심히 공부하고 비싼 돈도 들여서 변호사님이 되셨으니 얼마나 자랑스러웠겠습니까.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어디서 감히? 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을 보면, 이런 젊은 변호사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의뢰인의 입장이 되어서 사건이나 제대로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를 갖게 됩니다.

뭐, 이런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도 때로는 여러 가지 자부심을 가질 때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말도 있잖아요. 누구는 집에 금송아지 하나 없는 사람 있냐……라고 하기도 하잖아요.


내가 이래봬도 젊었을 때는 말이야……. 그리고 외국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그런 말을 많이 한다고도 하지요? 내가 한국에 있었을 때는 말이야…….

여러분, 성경에는 뭐라고 기록합니까. 성경에 그러라고 적혀 있습니까.

모세는 당시 유대인에 대한 핍박 때문에 갓난아기일 때에 나일 강에 버려졌지만, 그 아이를 통해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도록 하셨습니다.

다윗은 형제 중 막내였고 그의 아버지도 그를 중히 여기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그는 많이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어부 집안에서 태어나 어부로 살아갈 사람을 택해서 주님의 크나큰 사도로 세우지 않았습니까.

우리 마음 안에 좁쌀만한 자만심이 있습니까. 내가 이래봬도……라고 하는 오만함이 있습니까.


누가복음 14장 11절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なぜなら、だれでも自分を高くする者は低くされ、自分を低くする者は高くされるからです。」

고린도전서 10장 12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ですから、立っていると思う者は、倒れないように気をつけなさい。


우리는 그 오만함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높이기 보다는 낮추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포르투갈 항공사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고 합니다. 50대 가량 백인 여성이 비행기 이코노미석에 앉으려고 했는데 그 옆자리에 흑인 남성이 앉아 있더래요.

이 백인 여성은 역성을 내며 승무원을 부른 다음에 하는 말이, 자기 옆에 흑인이 앉아 있어서 대단히 불쾌하다면서 당장 자리를 바꿔 달라고 난리를 칩니다.

이 말을 들은 승무원은, 이 승객을 진정시킨 다음에 잠시 알아보고 오겠다고 해요.

그러고는 얼마 후에 돌아와서 말을 합니다.

“지금 이코노미석에 빈 자리가 없지만 퍼스트클래스에는 빈 자리가 있습니다. 자리를 옮겨드리는 일은 저희 항공사에서는 전례가 없는 일이지만, 저희 손님을 불쾌한 사람 옆에 앉도록 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 말을 듣고 백인 여성은 통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짐을 챙기고 일어나려고 하는데, 승무원은 백인 여성이 아닌, 말없이 옆자리에 앉아 있던 흑인 남성에게 말을 합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짐을 챙겨서 퍼스트클래스로 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주변 승객들은 박수를 치고 환호를 보냈다고 합니다.

여러분, 만약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상이 없으시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각자도생 해야겠지요. 아무도 나를 높여주지 않는다면 나 스스로라도 내 힘으로 높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요한계시록 22장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見よ、わたしはすぐに来る。それぞれの行いに応じて報いるために、わたしは報いを携えて来る。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실 상이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거만, 교만, 오만, 자만(あざけり、おごり高ぶり、横柄、思い上がり)을 버려야만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주시는 상을 받을 수 있다고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야고보서 4장 10절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主の御前でへりくだりなさい。そうすれば、主があなたがたを高く上げてくださいます。


베드로전서 5장 6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神の力強い御手の下にへりくだりなさい。神は、ちょうど良い時に、あなたがたを高く上げてくださいます。


거만과 교만과 오만과 자만(あざけり、おごり高ぶり、横柄、思い上がり)을 버리고 겸손의 열매를 맺는 것, 이것이야말로 요한이 말을 한 회개에 합당한 열매 아니겠습니까.

이제 세례 요한의 말처럼 회개에 합당한 열매, 주님 앞에 겸손하고 이웃에게 겸손한 열매를 맺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크게 높임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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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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