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6회 선에 속한 사람(2) - 사랑의 시작
2023년 1월 15 설교 - 로마서 강해 118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0절~11절
“10.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2章 10節∼11節
“10.兄弟愛をもって互いに愛し合い、互いに相手をすぐれた者として尊敬し合いなさい。
11.勤勉で怠らず、霊に燃え、主に仕え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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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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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18번째로 “선에 속한 사람(2) - 사랑의 시작” 善側の人(2)-愛の始まり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사랑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혹시 지난 주에 배웠던 사랑의 의미에 대해서 기억하고 계십니까.

세상 사랑들이 말하는 <사랑>과 주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은, 정말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 이상형이나 아니면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고 하겠지요. 이를 바꾸어 말하면 객관적으로 보아서 내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한편 주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바로 <내 사랑을 받을 만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신 것이 그와 같은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선한 사람을 위해서, 의인을 위해서, 구원을 받을 만한 사람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아닙니다. 도저히 자기들의 힘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만큼 우리를 사랑해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께서는 길을 잃은 양에 대한 비유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 4절~7절
“4.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あなたがたのうちのだれかが羊を百匹持っていて、そのうちの一匹をなくしたら、その人は九十九匹を野に残して、いなくなった一匹を見つけるまで捜し歩かないでしょうか。
見つけたら、喜んで羊を肩に担ぎ、
家に戻って、友だちや近所の人たちを呼び集め、『一緒に喜んでください。いなくなった羊を見つけましたから』と言うでしょう。
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それと同じように、一人の罪人が悔い改めるなら、悔い改める必要のない九十九人の正しい人のためよりも、大きな喜びが天にあるのです。


이 말씀에 의하면 우선 양 100마리 중에서 아흔아홉 마리는 있는데 나머지 한 마리가 어디 갔는지 안 보여요.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마태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2절
“12.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あなたがたはどう思いますか。もしある人に羊が百匹いて、そのうちの一匹が迷い出たら、その人は九十九匹を山に残して、迷った一匹を捜しに出かけないでしょうか。

그러니까 사라진 양 한 마리는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안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를 본다면 길을 잃지 않은 양들이 특별히 뛰어나서가 아니에요. 퍼센트로 하면 어떻습니까. 99%는 길을 잃지 않았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길을 잃지 않은 99%의 양들이 대단히 똑똑했다기 보다는 그저 평균 정도라고 할 수 있겠고, 오히려 나머지 1%의 양이 좀 부족했었다고 하겠지요.

99%는 멀쩡히 길을 잃지 않았는데, 나머지 1%가 길을 잃어버렸다고 한다면 오히려 이 1%에 문제가 있었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세상적으로 본다면 양 아흔아홉 마리와 양 한 마리, 어느 쪽이 귀하겠습니까. 더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길을 잃지 않은 평균적인 양들 아흔아홉 마리와 길을 잃은 좀 부족한 한 마리 양.

여기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겠지요? 당연히 아흔아홉 마리를 챙겨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멀쩡한 아흔아홉 마리 양을 내버려둔 채로 그 한 마리를 찾아 나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양을 찾고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는, 그것도 모자라서 친구들을 불러 잔치까지 벌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양은 본래 어깨에 메는 것이 아닙니다. 양의 무게는 새끼 양이라 하더라도 20킬로가 넘는다고 합니다. 20킬로라고 하면 잘 감이 안 올지도 모릅니다만, 요즘은 겨울이라 난로에 넣을 등유를 사가지고 오는데, 그 통 하나에 들어가는 기름 무게가 20킬로거든요. 이게 얼마나 무거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걸 어깨에 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바로 그 양을 발견한 기쁨이 그 무게보다도 훨씬 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그야말로 어깨에 메고 춤이라도 출 정도로 너무나도 기뻤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를 바꾸어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목자는 정말 똑똑하고 영리한 양들, 사랑 받아 마땅한 양들을 뒤로한 채, 참으로 미련하고 말 잘 안 듣고 불순종한 양, 정말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 양을 발견하고는 너무나도 기뻐했다는 주님의 마음을 말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럭비라는 운동경기를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에서는 그리 대중적이지는 않습니다만, 일본에서는 상당히 대중적인 스포츠라고 하겠습니다. 웬만한 고등학교나 대학교에는 럭비부가 있을 정도로 아주 활발합니다.


일본에서는 코시엔이라고 해서 전국고교 야구대회가 유명합니다만, 럭비도 전국 고교 대회가 있는데, 매년 겨울에 오오사카에 있는 하나조노 럭비경기장에서 열려요. 그래서 고교야구는 코시엔, 그리고 고교럭비는 하나조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럭비는 미식축구와 비슷하지만 좀 다릅니다. 우선 공 모양이 미식축구와 비슷한 타원형을 한 계란 모양인데 럭비가 좀 더 큽니다. 그리고 공을 들고 뛰는 것도 똑같은데, 미식축구는 헬벳에다가 이런저런 보호장비가 많지만 럭비는 그런 것을 쓰지 않고 그냥 맨몸으로 서로 부딪치고 넘어지고 하는, 상당히 좀 과격한 스포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경기를 뛰는 한 팀의 인원이 구기종목 중에서는 제일 많은 15명이에요. 그러니까 양쪽 팀을 다 합하면 서른 명이 동시에 경기를 하는 셈이지요. 축구가 골기퍼를 포함해서 11명이고, 미식축구도 11명인데, 한 팀에 15명이라고 한다면 상당히 많은 인원이라고 하겠지요.

그만큼 인원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한 번에 호흡을 맞춰야 하는 인원이 많다는 뜻이니까, 팀워크라고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뜻이 됩니다.

쿄토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 새로 체육 선생님이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그 선생님은 전 일본 국가대표 럭비선수였습니다. 이제 현역에서 물러나서 체육선생님으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그 선생님은 나중에 그렇게 회고했습니다. 자기는 이제 학교에 처음 가서 럭비부를 맡게 되면, 럭비부 학생들은 국가대표 출신 선생님이 왔다고 좋아할 줄 알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꿈과 기대에 부풀어서 다음날 학교에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럭비부 집합 시간이 됐는데 학생들이 하나도 안 나타났다는 거예요.

알고 보니 그 학교는 정말 문제아들만 모인 학교였다고 합니다. 학교 유리창은 여기저기가 깨지고, 그리고 럭비부 부실에 가보니까 여기저기에 담배꽁초가 쌓여 있었대요.

수업중에도 학생들은 자기들 하고 싶은 짓들이나 하고, 그리고 선생님들도 이미 포기를 해서 혼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괜히 건드렸다가 해코지라도 당하면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학교 꼴이 완전히 말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제 새롭게 부임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열정이 넘쳤겠습니까. 그래서 선생님들한테도 좀 잘 해보자고 말을 해봤지만 소용 없었다고 합니다. 이 선생님이 다른 선생님들한테 아무리 역설을 해 봤자 그 선생님들이 뭐라고 하냐 하면, 이미 다 해봤다는 거예요.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제 자기가 맡은 럭비부를 보면 그냥 애들이 와서 선배들이 후배를 괴롭히고, 연습이라고는 가끔 모여서 좀 시늉만 하다가 힘들면 그만 두고……그런 식이었으니 실력이 뭐가 있었겠습니까.

거기에다가 학생들 하고 다니는 것을 보면 정말 불량학생들의 소굴……완전히 그런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그럼 이 선생님도 포기를 했느냐 하면, 아뇨, 어떻게든 이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고 싶었어요. 그래서 한집 한집 찾아 다니면서 아이들을 연습에 나오게 하고, 그렇게 해서 정말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럭비부를 일으켜 세우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뭘 합니까. 아이들이 전혀 안 따라준다는 거예요. 맨날 동네에서 문제나 일으키고 경찰서에 끌려가면 그걸 또 가서 데려오고……그런 나날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안 되겠다, 좀 승부욕을 생기게 해줘야겠다 해서 다른 학교와 연습시합을 하기로 했대요. 그런데 웬만한 학교에서는 자기네 학교와 연습시합을 하기 싫어했다는 거예요. 아니, 실력도 없고 그런 학교와 연습시합을 해봤자 시간낭비라는 것이죠.

그래도 이 선생님이 가서 몇 번이나 머리를 숙여가며 어렵게 연습시합을 하기로 하고, 그리고 자기 사비까지 털어서 학생들 하나하나의 기차표를 다 사고 그 날 아침에 역에서 기다렸다고 해요. 그런데…? 예, 한 놈도 안 나타났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런 참 말로 할 수 없이 형편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 번은 정기체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선생님이 부임한 이후로 첫 공식대회예요.

거기서 처음에 붙은 학교가 어디였냐 하면 당시 럭비 명문 하나조노 고등학교였다고 합니다. 경기가 시작했습니다. 고교 럭비는 전반 30분, 그리고 후반 30분입니다.

경기가 이제 끝났습니다. 럭비 명문 하자조노 고등학교와 문제아들의 오합지졸인 이 고등학교의 승부는 어떻게 됐을까요. 점수 결과는 112대 0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점수가 야구나 축구처럼 1점씩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당시는 4점, 2점, 3점……이런 식으로 들어가게 됩니다만, 보통 럭비 점수라고 한다면 대충 20~30점대 30~40점 정도라고 할 수 있는데, 112대 0이라고 한다면 이는 참패도 보통 참패가 아니겠지요.

뭐, 굳이 비교한다면 프로팀과 초등학생 정도의 실력차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이 선생님이셨다고 한다면, 시합이 끝나고 돌아온 학생들한테 무슨 말을 해주시겠습니까.

저는 그 때까지 그 장면을 보면서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릅니다. 아니, 그렇잖아요. 선생님 말은 죽어라고 안 듣고, 지네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문제만 일으키고 하다가 결국 정말 수치스러운 점수로 지고 돌아왔는데, 이노무 자식들 꼴 좋다, 뭐 그러면서 하고 싶은 말이 정말 트럭 한 대 분은 되지 않겠습니까.

이 선생님, 자기 학생들이 낯뜨거울 정도로 비참한 경기를 하고 있는 모습들을 지켜 보면서 정말 화가 많이 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화가 났냐고 하면, 이 선생님 하는 말이, 자기가 그 아이들을 위해서 해준 것이 뭐가 있냐,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 하는 마음으로, 자기 자신한테 화가 났다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 이 말을 들고는 참 놀라웠습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열 받아서 험한 말이라도 퍼부어줘도 시원치 않았을 텐데, 이 선생님은, 자기가 그 아이들에게 해준 것이 없다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어디 가서 입 밖에 내기도 부끄러운 점수, 112대 0으로 지고 돌아온 아이들에게 이 선생님은 뭐라고 했냐 하면, 다른 말은 안 했다고 합니다.

“수고했어. 다친 데 없냐. 많이 속상했지?”

자신들은 선생님한테 심한 꾸중이라도 들을 줄 알았는데 이 말을 듣게 되자, 그 순간 아이들이 울면서 무너졌다고 합니다.

“선생님, 나 정말 이기고 싶어요. 정말 열 받아요. 어떤 일이라도 참을 테니 내년에 저 학교를 이기게 해주세요”라면서 모두가 다 울었다고 해요.

이 말을 들은 선생님은 말합니다. “좋아. 이기게 해줄게. 나만 따라와.”

그 다음날부터는 이제 맹훈련이 시작됩니다. 이제 연습은 심심풀이가 아니라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지쳐 쓰러질 때까지 계속되는 혹독한 훈련이었습니다. 그래도 학생들은 누구 하나 불평불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뛰라면 뛰고, 던지라면 던지고, 부딪치라면 부딪칩니다.

그 결과 1년 뒤 또다시 이 럭비명문 하나조노 고등학교와 붙습니다. 1년 전에 112대 0으로 진 그 학교와 붙었는데, 1뎐 뒤인 그 시합, 경기 막판에 역전을 해서 18대 12로 승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학교는 하나조노 전국대회에서도 우승을 하게 되었고, 오랫동안 럭비 명문학교로서 자리를 잡게 되고, 그리고 이 학교를 통해서 수많은 유명 럭비 선수들이 배출되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으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겠지만, 사실 일본에서는 꽤 유명한 이야기에요. 이 문제아들이 모였던 학교가 지금은 다른 학교와 합병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 학교 이름은 교토에 있는 후시미 공업고등학교이고, 이 선생님 이름은 야마구치 요시하루 선생님입니다. 아직도 살아 계세요.

이게 얼마나 유명하냐 하면 1984년에는 스쿨 워즈라고 하는 텔레비전 드라마로도 될 정도로 유명합니다. 이 드라마가 당시 엄청 히트를 했었고, 그리고 그 때 제가 중고등학생이었는데, 제 또래 중에서 럭비를 시작했다고 하면 거의 100프로 이 드라마에서 영향을 받고 시작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오늘은 좀 길게 이 럭비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여기서 제가 드리려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렇게 아이들이 바뀌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무엇이냐 하는 점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그렇게도 말을 듣지도 않고 하나부터 열까지 반항했던 학생들입니다. 선생님이 아무리 자기 직업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선생님들처럼 포기할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뭐냐 하면, 이 선생님은 모든 문제에 있어서 그 원인을 다른 데에서 찾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아이들을 꾸짖기는 쉬웠겠지요. 너 이 놈들아, 내 말을 안 들으니까 그런 게 아니냐 하는 말, 얼마나 하기 쉬운 말입니까.

그러나 이 선생님의 경우에는 어땠느냐 하면 그 모든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 돌렸던 것이지요. 저렇게 비참하고 부끄러운 시합을 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아, 정작 내가 이 아이들을 위해서 해준 것이 하나도 없구나. 다 나 때문이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제가 보니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남 탓을 하게 되면 발전이 없어요. 그러나 자기 탓을 하게 되면 발전을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일본어학원에서 가르칠 때도 보면 그랬습니다. 어떤 선생님을 보면 맨날 남의 탓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학생들이 공부를 안 한대요. 학생들이 자기 말을 듣지를 않는대요.

어디 그 뿐인가요. 학원 시간표에 자기 자리 글씨가 너무 작대요. 그래서 학생이 잘 안 온대요. 그리고 자기 사진이 어떻고 학원 시스템이 어떻고…… 자, 그런 선생님한테 발전이 있을까요?

주변 선생님들은 다 알고 있어요. 뭘 알고 있었느냐 하면, 자기 학생들 중에서도 그 선생님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 학생들이 있잖아요. 그래서 소문을 다 듣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 선생님이 수업을 너무 못한다는 거예요. 맨날 자기 혼자 떠들고, 그걸 못 알아들으면 성질을 낸다는 거예요. 아니, 학원이 무슨 졸업장을 주는 것도 아닌데 자기 돈 내고 왜 그런 수업을 듣겠습니까.

그래서 학생들이 그 선생님 수업을 안 듣는 건 그 자기 수업에 문제가 있어서인데, 그 선생님은 그런 생각을 안 합니다. 무조건 다 다른 사람 탓으로 돌려요. 그러면 절대로 발전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선생님은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뭐라고 하셨냐 하면, 무조건 학생이 옳다는 거예요. 학생들은 바보가 아니다. 자기가 자기 돈 내고 수업을 듣는데 당연히 좋은 수업을 듣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면서, 만약에 자기 수업에 학생이 줄었다고 한다면, 학생 탓을 하는 것도 아니요, 학원이나 교재 탓을 하는 것도 아니라 그 원인이 나한테 있다고 생각하면서 반성하고 그리고 새롭게 수업을 연구해야 한다는 선생님도 계셨습니다. 그런 선생님의 수업이 안 좋아질 리가 있겠습니까.

아까 그 학교 이야기로 잠시 돌아간다면, 이 선생님이 부임한 그 다음 해에 어떤 소문이 돌았대요. 그게 뭐냐 하면 그 지역에서 아주 유명한 불량배가 있는데 그 불량배 녀석이 자기네 학교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소문입니다.

불량배라고 해 봤자 다음 해에 고등학교에 들어온다면 중학생일거잖아요. 그런데도 아주 유명했다고 하니 뭐 대단했겠지요. 그 때 사진을 제가 봤는데, 정말 이게 무슨 중학생이야 할 정도로 좀 살벌하게 생겼습니다. 식당에서 옆자리에 앉았다고 한다면 좀 옮기고 싶을 정도의 인상이에요.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정말 입학식날 나타났다는 거예요. 그것도 혼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자기 꼬봉들을 몇 명 거느리고 나타났다는 것이지요.


이 야마구치라는 선생님이 그 불량배한테 어떻게 했냐 하면, 다짜고짜 가서 <너 럭비 하지 않을래?>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말이, <너 싸움 좋아하지? 럭비도 싸움이나 마찬가지야. 그냥 싸움은 나쁜 짓이지만, 럭비에서는 공만 가지면 뭘 해도 된단 말이야.>

이 말에 넘어가서 럭비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시작하고 보니 선생님 말과는 완전 다르더래요. 아니, 그렇죠. 아무리 과격한 럭비라고는 하지만, 다 룰이 있고 규칙이 있는데 공만 들었다고 뭐든 해도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시시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해 자기 선배들이 하나조노 고등학교에 18대 12로 이긴 다음에 기뻐서 서로 부둥켜 안고 우는 모습을 보고는, 야…이런 세계가 있구나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럭비를 계속 해서 고등학교 때 럭비 명문인 호주로 유학을 갔다 오기도 하고, 그리고 체육대를 졸업하고는 세상에, 그 불량배가 고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다고 하니 참 놀랍지 않습니까.

그 분도 인터넷에서 사진을 봤어요. 이제 그 불량배였던 선생님도 나이를 먹고 정년퇴임을 했지만, 여전히 럭비감독을 계속하고 있다고는 하는데, 그래도 사람 인상이 쉽게 바뀌지는 않는 것 같더라고요. 지금 봐도 글쎄요. 길 갈다가도 길을 묻고 싶어지지 않을 것 같아요.

그 사람의 인상은 안 바뀌더라도 인생은 놀랍게 바뀌지 않았습니까. 동네에서 유명한 불량배인 상태로 자랐더라면 그 인생이야 뻔했겠지요. 하지만 야마구치라는 선생님을 만남으로 인해서 불량배가 대학까지 나와서 고등학교 선생님까지 되었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 시작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남의 탓을 하지 않고,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기한테서 찾으려고 했던 이 선생님 한 사람한테서 시작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저는 어쩌면 성경과도 같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누가복음 5장 32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わたしが来たのは、正しい人を招くためではなく、罪人を招いて悔い改めさせるためです。」

요한복음 12장 47절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だれか、わたしのことばを聞いてそれを守らない者がいても、わたしはその人をさばきません。わたしが来たのは世をさばくためではなく、世を救うためだからです。

2000년 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의인을 부르기 위해서나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회개시키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회개를 시키셨습니까. 어떻게 해서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습니까. 너희들은 죄인이니까 너희들이 각자 십자가에 못 박혀서 자기들의 죄값을 치러야 한다……그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이, 너희들이 구원 받을 수 있도록, 누가 십자가를 진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가르치셨지만, 우리 탓을 하시거나 우리를 미워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고 주님 스스로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누가 남의 탓을 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남의 탓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 부모만 아니었더라면, 내 형제만 아니었더라면, 내 배우자만 아니었더라면, 내 친구만 아니었더라면……이렇게 남의 탓만 하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내 잘못을 깨닫지 못한 채로 나 스스로 홀로 남고 내 주면 사람들은 다 떠나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이제 누가 떠나가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 곁을 떠나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영화배우라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함께 영화를 찍는 배우들도 다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나는 이 배우가 마음에 안 든다, 저 배우가 마음에 안 든다……이렇게 불평불만을 해보십시오. 그건 누구에 대한 불평불만입니까. 그렇죠. 영화감독에 대한 불평분만 아니겠습니까.

영화감독이 자기 작품에 맞는 사람들을 불러서 캐스팅해놨는데 이 사람도 싫다 저 사람도 싫다고 한다면 그건 감독이나 연출을 맡은 책임자를 비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한 두 번이면 모를까, 맨날 남의 탓만 하는 배우를, 아무리 유명한 배우라 하더라도 그냥 지켜만 보겠습니까? 됐어. 싫으면 빠져. 다른 사람 쓸 거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항상 말씀 드리지요. 사람은 완벽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벽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왜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이 다 생각이 있어서 우리 주변에 어렵게 모셔다 놓으신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럼 그런 주님은 어떤 주님이세요? 그렇습니다. 완벽한 주님,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를 사랑하시는 주님? 그렇습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채찍에 맞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주님께서 우리 인생에 대해서 총감독을 맡고 계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떤 분은 어떻게 주님과 이웃을 동일시할 수 있냐고 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니, 눈에 보이는 이웃도 사랑할 수 없는데, 눈에 안 보이는 주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가 있겠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한량없는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하나 없는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사랑의 천분의 일, 아니, 천 만분의 일이라도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려고 한다면, 정말 우리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이웃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억지로 싫은데 좋은 척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보면 가끔 그런 사람들 계세요. 싫은데 억지로 좋은 척 해가면서, 그래도 할말 못할 말 다 하는 사람이 계신데, 그건 올바른 주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싫은 사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방법이냐 하면, 억지로 좋은 척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아, 내가 저 사람을 정말 싫어하는데, 그러면 내가 저 사람을 위해서 해준 것이 뭐가 있을까 하는 마음을 가져보는 것. 그것이 이웃 사랑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주신 주님은 오늘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너를 위해서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고 죽었는데, 너는 네가 미워하는 이웃, 네가 싫어하는 그 이웃을 위해서 무엇을 했느냐.

그렇다고 무슨 대단한 것을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인사도 안 하던 사이였지만 인사라도 한 마디 하는 것, 그것도 하기 어려우면 나 혼자 있을 때, 그 사람을 위해 기도라도 한 번 해보십시오. 이는 분명 우리 삶에 있어서의 큰 변화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지난 주 인용한 말씀을 다시 살펴봅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新しい戒めを与えます。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


이제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사랑을 깨닫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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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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