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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7회 선에 속한 사람(3) - 사랑의 대상
2023년 1월 22 설교 - 로마서 강해 119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2절~13절
“12.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2章 12節∼13節
“12.望みを抱いて喜び、苦難に耐え、ひたすら祈りなさい。
13.聖徒たちの必要をともに満たし、努めて人をもてなし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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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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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19번째로 “선에 속한 사람(3) - 사랑의 대상” 善側の人(3)-愛の対象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두 구절입니다만, 12절과 13절 중에서 우선 두 13절부터 살펴보고 마지막에 12절을 살펴보도록 하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13절부터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2장 13절
“13.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2章 13節
“13.聖徒たちの必要をともに満たし、努めて人をもてなしなさい。”

이 말씀,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참으로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어쩌면 이 말씀은 지금까지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으로 여겨져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옳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올바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 우선 이 구절의 형식부터 살펴봅니다.

이 13절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앞에는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聖徒たちの必要をともに満たし)는 말씀과 뒤에는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努めて人をもてなしなさい。)라는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지요.

우선 앞부분부터 볼까요?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

(聖徒たちの必要をともに満たし)


자, 여러분께 누가 이 말씀을 들고 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여러분께 말하기를, 성경에 보면 우리가 쓸 것을 공급하라고 되어 있지 않느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러면서 또 한 구절을 인용합니다.

마태복음 5장 42절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求める者には与えなさい。借りようとする者に背を向けてはいけません。

성경에 보면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지 않느냐.

자, 이렇게 말을 했다면, 이 사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겠지요?

“내가 좀 요즘 많이 어렵다. 돈 한 100만엔 정도만 꾸어달라.”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번 성경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꾸어준다.
2번 성경은 성경이고 현실은 현실이니 안 꾸어준다.
3번 기타.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면서 항상 조심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성경 안에서 끝나버리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점입니다.

만약에 성경 따로 현실 따로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예수님은 성경 속에 있기만 한 이야기이고,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그건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가 사해졌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성경 속에 있는 이야기이지 현실에는 죄가 사해지지 읺았다……라고 하는 공허한 이야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 따로 현실 따로>라고 하는 2번은 좀 문제가 있겠지요.

그럼 이제 남은 것은 1번과 3번입니다.

돈이 많은 분들이야 100만엔, 한국 돈 1000만원 정도가 적을지는 모릅니다만, 우리 같은 서민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큰 돈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이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나한테 100만엔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게 그냥 빌려주기에는 아주 상당히 무리가 있어요.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도 <주여 믿습니다>하고 빌려줘요?

제가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왔대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아니, 교회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곳이 아니냐. 그렇다면 나 같은 사람을 도와줘야 한다. 내가 정말 절실하게 얼마가 필요하니까 돈을 좀 빌려달라……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교회에서 그 사람한테 돈을 빌려줘야 돼요? 아니에요?

자, 우선 13절 앞부분부터 다시 한번 자세하게 보도록 하겠습니다.

“13.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13.聖徒たちの必要をともに満たし、

여기서의 주어는 무엇입니까. 단순히 그저 <사람>이라고 되어 있나요? 아닙니다. 여기서의 주어는 <성도>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무엇입니까. 이는 교회 구성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사에서 본다면 총무부나 관리부 같은 곳에서 하는 일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그 회사 직원들이 쓸 물건들을 파악해서 공급하는 업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대표적인 것이 우선 책상이나 의자, 컴퓨터 등이지요. 어디 그 뿐인가요. 전화기, 필기도구, 서랍장, 그 외에도 다양한 문구류 같은 것들이 착착 공급됩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이 이뻐서예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 회사에서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물건이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공짜가 있어요? 의자, 책상, 컴퓨터 뿐만이 아니라 볼펜 하나, 지우게 하나까지 다 돈이잖아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공급해 주는 이유는, 그 물품들을 써서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 지나가다가 뭘 달라고 하면, 볼펜 하나라도 마음대로 줄 수 있나요? 아무리 그 회사에 돈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러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과 회사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반면에 회사에 도움이 되고 그 사람이 회사를 위해서 사용한다면, 아무리 비싼 장비라 하더라도 기꺼이 구입을 해서 그 사람에게 공급하게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성도>라고 하는 단어는 <교회>라고 하는 말과 하나가 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는 말씀은, 단순히 어떤 사람을 무작정 도우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교회 구성원이 쓸 것을 공급하라는 말씀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보면 정말 교회 물건을 안 아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교회에 있는 성경이나 찬송가 같은 것들을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가지고 가요.

그러면서 왜 그걸 가져가냐고 하면, 집에서 보려고 한다는 거예요.

아니, 회사에서 준 컴퓨터를 집에 가져가서 자기 마음대로 쓴다고 생각해봐요. 그게 정상입니까.

교회에 있는 성경이나 여러 물품들도 사실 그게 다 돈이잖아요. 교인들 헌금으로 구입을 한 것인데, 그걸 왜 자기 가방에 넣느냐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필요하면 자기가 돈을 내서 사면 되잖아요. 요즘 같은 경우에는 인터넷을 이용하면 얼마든지 구입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그냥 가지고 가요.

제가 한국에서 있을 때 보면 제가 섬기던 성가대에서도 그런 일이 있어요. 성가대에 보면 성가대 가운이 있잖아요. 그럼 동복이 있고 하복이 있어요. 그래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성가대원들이 자원해서 그 가운을 가져다가 드라이를 맡기고 난 다음에 가져와요. 그러면 그걸 교회에서 보관하게 됩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그 가운이 몇 벌 사라진다는 거예요. 언제 사라지냐 하면 누군가가 드라이를 맡긴다고 가져간 다음에 안 가져온다는 거죠. 물론 그게 누가 가져갔는지 체크를 하면 되겠지만, 그게 잘 안 됐나 봐요.

그렇다고 사실 그걸 체크를 꼭 해야 되요? 성가대 가운이라고 하는 게 무슨 외출복으로 입고 다닐 수도 없는 옷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운영위원으로 있을 때 보니까 회의시간 때 당시 총무님이 하는 말씀이, 아니, 무슨 집에서 잠옷으로 입나, 그걸 왜 안 가지고 오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건 예전에 말씀 드린 적이 있는지 모르지만, 요즘은 코로나 때문이 그런 일은 많이 줄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 성가대에서도 보면 연습 끝나고 식사를 하는데, 그러면 정말 열심히 식사 준비를 해오시거든요.

그런데 누구는 사람들이 아직 먹지도 않았는데 반찬을 자기 집에 가져간다고 챙기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거 별거 아닌 것 같지요? 예전에 보니까 다른 교회에서도 똑 같은 일들이 있더라고요. 그거 가지고 서로 다툼이 생기고 마음이 상하고 그럽니다.

아니, 사람들이 다 먹고 난 다음에 남은 반찬이나 음식을 싸가는 것은 문제가 없겠지요. 가만히 놔두면 버리게 되는데, 그럴 바에야 가져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성도들 대접하기 위해서 열심히 준비해왔는데 그걸 자기가 먼저 챙긴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마음이 안 좋겠습니까.

이처럼 13절에서 말씀에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는 말씀은 교회에서 성도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데에 있어서 필요한 것을 부족함 없이 공급하는 데에 힘쓰라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한 오해가 없도록 말씀을 드리면, 앞서 말씀 드린 마태복음 5장 42절 말씀도 살펴보고 넘어갈까요.


마태복음 5장 42절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求める者には与えなさい。借りようとする者に背を向けてはいけません。

여기서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무슨 큰 돈이나 재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이웃에게 비싸고 큰 돈을 주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어요.


마태복음 5장 40절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あなたを告訴して下着を取ろうとする者には、上着も取らせなさい。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으려고 고발까지 했어요.

그런데 뭘 빼앗으려고 해요? 예, 내가 입던 속옷이에요. 그렇다고 이건 이상한 의미가 아니라, 새옷도 아닌, 그리고 겉옷도 아닌 그냥 내가 입던 중고 속옷, 그야말로 값어치가 별로 없는 것인데도 이걸 빼앗으려고 난리를 쳐요.


그러면 어떻게 하냐 하면, 속옷만이 아니라 차라리 그냥 입고 있던 겉옷, 별로 값도 안 나가는 겉옷 헌 거까지 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 외에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0장 42절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わたしの弟子だからということで、この小さい者たちの一人に一杯の冷たい水でも飲ませる人は、決して報いを失うことがありません。」

자, 무엇을 주라고 하세요? 예, 냉수 한 그릇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것이 값어치가 없는 것을 주라는 말씀이 아니에요.

지금 목이 말라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큰 돈이 필요해요? 금은보석이 필요합니까. 아니에요. 물 한 그릇이 필요한 것이지요.

주님은 무슨 큰 돈이나 재산을 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런 의미에서 꼭 필요한 것을 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13절 뒷부분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努めて人をもてなしなさい。)

자, 여러분께서는 손님을 대접하는 것을 좋아하십니까. 물론 그런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는 이 말씀에 대해서 적지 않게 좀 부담이 있었습니다. 그게 어떤 거냐 하면, 예를 들어서 그런 경우입니다.

가끔 그런 메일을 받아요.

제가 이번에 일본에 가게 되었는데 이카호중앙교회에서 꼭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 말씀만 보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자세히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동경에 아는 분이 계셔서 일본에 처음 가게 되었는데, 그 때 우리 교회에도 와서 예배를 드리고 싶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동경에서 얼마나 걸립니까, 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에 저는 어떻게 해야 해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같은 동경이나 그러면 가능성은 있겠지요. 여차하면 택시를 타고 오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경에서 여기 군마까지 택시를 타고 오실 수도 없잖아요.

거기다가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 보시면 교회 주소도 다 나와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가 어디쯤 되는지 질문하시는 것을 보면, 인터넷 검색이나 일본 지리에 있어서 적지 않게 어려움이 있는 분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전에 우리 교회에 다녔던 자매가 얼마 전에 오랜만에 왔었잖아요? 그러면 약속하기는 어렵지 않지요. 무슨 무슨 역에 어디 출구에 몇 시까지 오면 데리러 가겠다고 하면 됩니다. 여기 군마에 4년 동안이나 살았는데 그게 어렵겠습니까.

그런데 일본에 처음 오시는 분, 군마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시는 분이라면 일본 지리는 물론이고 언어에 있어서도 어려움이 있으신 분이실 텐데, 그런 분께, 동경역이나 우에노 역에서 죠에츠 신칸센을 타고 다카사키까지 오시고는, 거기서 죠에츠센으로 갈아타서 시부카와 역으로 몇 시 몇 분까지 오시라고 할 수 있겠냐는 거죠.

사실 저 자신도 가끔 동경에 가면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는데, 일본에 처음 오시는 분은 오죽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어렵게 오셨다면 그냥 예배만 드리고 가시라고 할 수 있겠어요? 식사라도 하시고, 그리고 기왕에 온천으로 유명한 이카호까지 오셨다면 온천이라도 모셔다 드려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이 정도로 해야 좀 손님을 모셨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실제로 그 정도로 손님을 모신 적이 있습니다. 오신다고 하니까 다카사키나 시부카와가 아닌, 정말 하네다 공항까지 가서 모셔와서는 온천이나 식사는 물론이고 호텔까지 잡아드리고는 매일같이 제가 운전해서 관광도 해드리고 그랬던 적이 있었지요.

언제 그랬냐 하면 제가 결혼하기 전에 제 아내 될 사람과 장모님 될 분이 오셨을 때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많이 부족했었습니다만, 그래도 장모님이 오신다면 그야말로 열과 성을 다해서 모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결혼하기 전이었는데, 여기 왔다가 가신 다음에 만에 하나라도 장모님이, “에이, 그 홍 목사, 안 되겠어” 뭐 이러셨다가는 큰일 나는 거 잖아요.


하지만 다른 분들까지도 그 정도로 대접을 해드릴 시간이나 경제적 여건이 되냐 하는 것이지요. 큰 교회 같은 경우에는 손님을 모실 경우 비용이 나올 지는 모르지만, 우리 교회 같은 경우에는 다 개인 비용으로 충당해야 하는데, 경제적인 것도 그렇고 시간적인 면으로도 그렇고 현실적으로는 좀 어려움이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건 다 제가 부족해서입니다만, 그 정도로 대접을 해드렸다고 해요. 그렇다면 저는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내가 이 정도로 대접을 해드렸으면, 이 정도는 감사헌금이나 선교후원을 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그런 경우는 다른 교회에서도 보면 적지 않게 있다고 해요. 누가 와서 이렇게 극진히 대접을 하고 비용도 들었는데 그 사람은 헌금을 얼마 밖에 안 해서 서운했다……아마도 교회 운영에 조금 관여해보신 적이 있다면 이런 일들을 경험해보신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그게 정말 손님을 대접하는 진짜 의미가 있냐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일본에서 이렇게 목회를 하다 보면 단기선교를 보낼 수 있는지에 대한 문의를 가끔 받습니다. 제 생각에는 지금까지 한 3~4번은 받아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아무리 오시는 팀이 자기 비용으로 한다고 해도, 그럼 우리가 정말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는 게 아니잖아요.

여러 가지 일정이나 준비도 그렇고, 신경 쓸 일이 한 둘이 아니지요. 그리고 사실 교회 앞에서 이벤트를 해 봤자, 다들 차를 타고 다니고 무슨 지나 다니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지요.

그렇다고 시내에 나가서 한국처럼 노방전도를 한다고 해도, 실제 교회 부흥으로 이어질 것 같지도 않고, 오히려 불필요한 마찰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부터 됩니다.

그리고 사실 이 단기선교라고 하는 것이 선교지에 있는 교회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 단기선교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나, 아니면 이를 보내는 교회 쪽에서의 이벤트 성이 강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제가 들은 이야기로는 어떤 선교사님이 그러시더래요. 외국에서 선교를 하고 있는 선교사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 일은 단기선교를 안 오는 것이라는 말을 하더랍니다.

뭐, 그래도 큰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파송 나와 있을 경우는 다르겠지요. 그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월급이나 주거비, 수당, 애들 학비 같은 것이 꼬박꼬박 나오고 그런 곳이라면, 본 교회에서 단기선교를 보내겠다는데 그걸 거절할 수가 있겠습니까.

회사에서 본다면 자기 월급 주는 본사에서 자기가 있는 지사로 손님이 온다는데, 만사를 제쳐두고 최선을 다해서 신경을 써야겠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고 한다면, 우리 교회 사정으로 봐서, 이 단기선교 또한 좀 어려움이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개인적으로 오신다는 분께는 “저희 이카호중앙교회 주일 예배는 오전 11시부터 있고, 모든 분들께 열려 있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리고, 그리고 단기선교에 대한 문의에 대해서는, 저희 교회 사정을 말씀 드리고는 정중하게 좀 어렵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이런 일들이 혹시나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라고 하는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적이 있었어요.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에 대한 답은 역시 성경에 있었습니다.

자, 성경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오해 없이 들으시기 바랍니다.

자, 질문합니다.


목사님을 대접하면 복을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이게 무슨 사이비 같은 질문이냐 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지레 짐작하지 마시고,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자, 다시 질문합니다.

목사님을 대접하면 복을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예, 이 질문에 대해서 “목사를 대접해도 복을 안 받습니다”라고 하신다면 듣는 목사 기분 나쁘겠지요.


자, 그럼 당장은 동의하시기가 좀 어렵다 하더라도, 일단 <목사님을 대접하면 복을 받는다>라고 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질문입니다. 왜 목사님을 대접하면 복을 받습니까.

목사님은 주의 종이니까? 목사님은 하나님의 사람이니까?


자, 성경말씀에 보시면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4장 12절~14절
“12.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3.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4.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イエスはまた、ご自分を招いてくれた人にも、こう話された。「昼食や晩餐をふるまうのなら、友人、兄弟、親族、近所の金持ちなどを呼んではいけません。彼らがあなたを招いて、お返しをすることが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食事のふるまいをするときには、貧しい人たち、からだの不自由な人たち、足の不自由な人たち、目の見えない人たちを招きなさい。
その人たちはお返しができないので、あなたは幸いです。あなたは、義人の復活のときに、お返しを受けるのです。」


주님은 이 말씀에서 어떤 사람을 대접하라고 말씀 하십니까.

여기서 주님 말씀에 의하면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貧しい人たち、からだの不自由な人たち、足の不自由な人たち、目の見えない人たち)에게 대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돈이 많거나 힘이 있거나 하는 사람들한테 대접을 했을 때 그에 대한 보답을 받게 되면 나중에 하늘에서 상이 없다. 그러니까 차라리 상대방이 너에게 보답을 못해줄 사람한테 대접을 하라, 그래야 하늘에서 상을 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한국 같은 데에 보면 이른바 뇌물을 주거나 받았을 때에 <대가성이 있는지>가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돈이나 어떤 선물을 받았을 뿐이라면 죄가 안 되지만, 그걸로 인해서 어떤 특혜를 준 근거가 있게 되었을 때 죄가 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아니, 무슨 가족이나 친인척도 아닌데, 아무런 대가 없이 정치인이나 공직자들한테 큰 돈이나 비싼 물건을 줄 리가 있겠냐는 것이지요. 다만 그게 당장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다 자기가 받을 대가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바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차라리 갚지 못할 사람을 대접하라. 그러면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갚아주겠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교회에서 보면 글쎄요. 큰 교회에 보면 무슨 직분을 받기 위해서 목사님한테 돈도 갖다 바치고 선물도 보낸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받은 직분이 주님 앞에서 무슨 은혜가 되겠습니까.

뭐, 지금은 아직 그런 상황은 아니겠습니다만, 나중에 우리 교회가 커지고 중요한 직분을 임명할 일이 생기면, 그 때는 좀 특별한 방법을 써서 사람의 생각이 개입되지 않게 할 생각입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목사한테 대접을 해 봤자 무슨 받을 대가가 있겠습니까.

목사님이 돈을 빌려 드리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적인 권력으로 문제를 해결해 드리겠습니까. 그런 힘이 목사한테 있는 경우가 드물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목사님한테 대접을 하면 복을 받는다고 한다면, 이는 목사님이 무슨 주의 종이라서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아무런 도움도 드릴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복을 받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 말씀은 꼭 목사만이 아니라, 뭐예요?

예, 우리가 진정으로 대접해야 할 사람은 재력이나 권력이 있어서 나한테 인간적으로 보답을 해주거나 하는 사람들이 아닌, 오히려 나에게는 아무런 인간적인 보답을 해줄 수 없는, 그런 이웃을 우리가 정성을 다해서 섬겼을 때, 다른 사람이 아닌 주님께서 크나큰 축복으로 갚아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건 정말 간증입니다만, 2015년에 일본에 와서 우리 교회를 보니까 성도님이 딱 두 분 계시더라고요.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그 중에서 한 분이 안 오세요. 그러니 교회만으로는 도저히 생활을 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어떻게든지 인간적인 방법으로 돈을 좀 벌어보려고 했는데, 그랬더니 정말 이런 저런 문제들이 생깁니다. 나중에는 정말 심각한 상황까지 갔어요.

그래서 이제 안 되겠다 해서 정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주님의 일만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오랫동안 가능성이 안 보여요. 이대로 간 다면 머지 않아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 하는 생각 밖에는 안 들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제 비자가 종교자격이니까 목사로서의 일 말고는 할 수가 없거든요.

전도지도 만들어서 교회 주변에 돌려보았지만 무슨 사람이 있어야지요. 교회 주변을 돌아보아도 주택단지들이 좀 있긴 합니다만, 그 외에는 띄엄띄엄 집이 있을 뿐인데 별로 도움이 안 되더라고요.

그리고 대부분이 나이 드신 분들인데, 어떤 일본 분은 제가 찾아가니까 자기가 나이 들어서 이제 죽을 때가 다 됐기 때문에 왔냐고 그러더라고요.

잘못하면 이러다가 괜히 오해라도 생기겠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동영상으로 주일 예배 때에 전해드렸던 말씀을 다시 촬영하고 인터넷에 올리고는, 한국이나 일본을 비롯해서 전세계에 매주 메일을 보냈어요.

그렇다고 확고한 희망이 있어서 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한테 정말 입에 담지 못할 욕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일을 꾸준히 보냈던 이유는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먹고 살긴 해야겠는데 달리 방법이 없으니 거의 유일한 선택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조금씩 선교후원을 해주시는 분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정말 신기하지요.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분들이 후원을 해주시는 모습을 보면, 감사한 것을 넘어서 참으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어떤 분은요, 그 주일에는 선교후원을 해주신 분이 한 분도 안 계시다는 말씀을 했더니만, 그 날로 은행에 가셔서 비싼 수수료까지 내시면서까지 일본에 있는 은행으로 직접 보내주신 분도 계십니다. 그러니 감동이 안 되겠냐 하는 것이지요.

이런 일들을 겪게 되면, 좀 이상한 말이지만 진심으로 성경이 믿어집니다.

출애굽기에 보시면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이를 보고 어떻게 홍해가 갈라질 수 있느냐고 의심을 합니다.

근데 제가 살아온 것이 얼마 되지 않은 세월이지만,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한 과정만 보더라도, 홍해는 갈라지고도 남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하루하루 홍해가 갈라질 정도의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에 지금도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고 살았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정말 제 상황이 그래요.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무슨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광야에서의 삶처럼 하루라도 만나가 안 내리면 큰일날 것만 같은, 제게 있어서도 그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다 그와 같은 정말 만나와도 같은 후원의 손길 덕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후원해주시는 분들이 저한테 무슨 대가를 바라시겠습니까.

여기는 일본이고 하기 때문에 후원을 해주신 분들께 그 흔한 기부금영수증 하나 못 해드려요.

거기다가 대부분이 다 한 번도 뵌 적도 없는 분들인데, 제가 그분들께 인간적으로 무엇을 해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와 같은 인간적인 대가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정말 만나와 같은 후원을 해주시는 그런 분들이,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축복을 못 받는다면 누가 받겠냐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는 분명히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힘들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 저는 분명히 여러분께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이는 100프로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도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제가 돈을 꾸어드려요? 아니면 세상적인 권력으로 문제를 해결해드려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것은 바로 기도로 도움을 드리는 일입니다.

누가복음 18장 27절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イエスは言われた。「人にはできないことが、神にはできるのです。」

목사나 교회한테 세상적인 도움을 구하는 것은, 그것은 마치 변호사한테 가서 수술을 해달라거나, 의사한테 가서 재판을 도와 달라거나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돈이나 세상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누가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만군의 주가 계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능히 이루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믿음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12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2장 12절
“12.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2.望みを抱いて喜び、苦難に耐え、ひたすら祈りなさい。

우리가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듣고 이루어주실 줄 믿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믿음이 있기 때문에 어떠한 환난 중에서도 소망을 가지며 인내할 수 있고, 그리고 소망을 가지고 즐거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지 못하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으면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 믿음을 가지고 승리하며, 우리 이웃, 정말 인간적으로는 갚지 못할 우리 이웃을 주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신 그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길 때에, 주님으로부터 넘치는 축복 놀라운 축복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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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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