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합당한 자” ふさわしき者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5절~38절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マタイの福音書 10章 35節~38節
"わたしは、人をその父に、娘をその母に、嫁をその姑に逆らわせるために来たのです。
そのようにして家の者たちがその人の敵となるのです。
わたしよりも父や母を愛する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わたしよりも息子や娘を愛する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
自分の十字架を負ってわたしに従って来ない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온 가족이 불화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다”라고 까지 하시지요.
그렇다면 이 말씀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아하, 그래. 우리가 부모님을 공경해야 하지만 그보다는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구나. 이렇게 이해하면 될까요?
물론 그럴듯해 보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부모님을 공경하고 가족을 사랑한다 하더라도, 그러나 그 우선순위로 본다면 하나님을 더욱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 이렇게 이해하면 될까요? 하지만 이렇게 이해하고자 하면 또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합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이 말씀에 보면 두 계명을 말씀하시는데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라……입니다만, 여기서 잊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
바로 마태복음 22장 39절 전반부입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즉 이 말씀은, 첫째 계명이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으로 둘째 계명은 첫 번째 계명 다음으로 중요하다는 말씀이 아니라,
두 번째 계명도 첫 번째 계명과 똑 같이 중요하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즉,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둘째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첫째 계명과 똑같이 중요하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성경에 적힌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대원칙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에 물음표를 한 번
붙이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자칫 성경 내용에 있어서 혼란이 생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게 된다면 믿음 좋은 사람들 가정은 다 서로가 불화해해요. 그렇잖아요.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가 가족끼리
사이가 안 좋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시는데, 우리 가족을 보면 서로 너무나 사이가 좋아요. 이건 그러면 우리 가정이 예수님 말씀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리고 또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라는 말씀을 가지고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고~ 성경 말씀은 정말 맞아. 우리 애들이 얼마나 내 말을 안 듣는지 알아? 걔네 들이야 말로 정말 원수라니까. 아니면, 내
남편이 또는 내 부인이 내 속을 얼마나 썩이는지 몰라. 그야말로 내 원수가 따로 없어.
여러분, 이게 맞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오늘 저는 여러분께 새로운 도전을 드리고자 합니다. 자신의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시는 분들께서는
한 번 도전해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4장 42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です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あなたがたの主が来られるのがいつの日なのか、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ら。
마가복음 13장 33절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気をつけて、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その時がいつなのか、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からです。
누가복음 21장 36절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しかし、あなたがたは、必ず起こるこれらすべてのことから逃れて、人の子の前に立つことができるように、いつも目を覚まして祈っていなさい。」
골로새서 4장 2절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たゆみなく祈りなさい。感謝をもって祈りつつ、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
자, 이처럼 성경에서는 반복해서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좋으신 분들께서는 이제부터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밤이나
낮이나 깨어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이게 말이 되나요?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성경 좀 안다는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아, 홍 목사, 그것은 그대로 해석하면 안 되는
거야. 이것은 영적으로 이해해야지…… 이런 말씀 들어보셨지요?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과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다소 의아한 부분이 생기게 됩니다. 어떤 건 성경에 적힌 그대로 이해해야
하고, 또 어떤 건 적혀있는 대로가 아닌 영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궁금증이 생기지요. 아니, 어떤 건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또 어떤 건 영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그 경우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면 그 분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하면 성령님께서 알려주신다”
아, 참 멋진 말 아닙니까.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하면 성령님께서 알려주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예요? 내가 하는
말은 성령님께서 하신 말씀이니까 더 이상 따지지 말아라. 나한테 그런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너는 성경도 제대로 안 읽고 기도도 많이
안 했기 때문이다……. 이런 말 아니겠습니까.
가끔 목사님들 중에도 이런 분들이 계십니다. 그 분의 설교나 그 분이 쓰신 책을 보고 질문을 한다거나 하면, 아, 자기는 성령님께서
인도해주시는 대로 말을 하고 글을 쓰기 때문에 이런 건 따지면 안 된대요.
참 과감하신 말씀이십니다. 물론 저도 성령님께도 인도해주시는 대로 쓰임 받기를 간절히 원합니다만, 그렇다고 감히 제 입으로 그런 말을
할 용기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 너무나도 부족하거든요.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저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서울의 수돗물이 그게 문제라고 하지요? 물이 처음 공급되는 곳에서는 아주 깨끗하대요. 다만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도중의 수도관이
오래되거나 녹슬거나 해서 수질이 떨어진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완벽하시지요. 예수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성경은 완전한 하나님 말씀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전해 드리는 저는 그렇다면 정말 완벽한가. 나 자신이 정말 깨끗한 수도관이기에 주님의 말씀을 한 점 오류도 없이
전해드리고 있는가 하는지를 저 자신에게 묻는다면, 물론 그러려고 노력은 합니다만, 그렇다고 100% 언제나 그렇다고는 차마 자신 있게
말씀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제가 겸손해서가 아니라, 이를 판단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인 것이지요.
하지만 자신의 해석, 자신의 말이 성령님의 말씀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이는 교만이나 오만을 넘어서 그야말로 선지자 놀이, 선지자
코스프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말을 할래야 하 수가 없어요. 이것이 조금 더 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사이비
교주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계시를 받았다. 내가 선지자다. 내가 예수다. 내가 하나님이다. 내 말을 따르라. 이것입니다.
그래서 이른바 신흥종교집단을 보시면 거기 신도들의 가정이나 사회적인 환경에 문제가 많이 있다고 합니다. 내가 내 가족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로 인해서 문제가 생긴다면 이것도 주님의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가족이 반대하든 친구가
만류하든 그들의 집단을 위해서, 교주를 위해서 헌신해야 한다……. 이것 아니겠습니까.
성경 해석에 있어서 기본 원칙은 문어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만, 그렇다고 이를 오직 한글성경대로 해석한다거나 자기 상식대로, 막연한
느낌대로 이해하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 드린 “깨어 있으라”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문어적으로 본다면 수면을 취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방심하지 주의를 계속
기울이고 있으라는 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한글성경 그대로 이해하고 잠을 안 잔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그리고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5절~38절
“35.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マタイの福音書 10章 35節~38節
わたしは、人をその父に、娘をその母に、嫁をその姑に逆らわせるために来たのです。
そのようにして家の者たちがその人の敵となるのです。
わたしよりも父や母を愛する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わたしよりも息子や娘を愛する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
自分の十字架を負ってわたしに従って来ない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상황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요즘 시대는 어떻습니까. 옛날과 비교를 해본다면 부모님을 공경하는 자녀들은 늘어난 것 같습니까. 아니면 줄어든 것 같습니까.
아마도 한국이나 일본, 아니, 그 외 다른 나라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아마도 대부분 답이 비슷하지 않을까 합니다. 옛날에는 부모를
공경하고 그랬지만, 요즘은 그런 경향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렇지 않겠어요?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요즘 젊은 것들은 너무나도 교만하고 건방지고 버르장머리가 없어서요? 물론 그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를 사회적으로 보면 어떻습니까.
옛날 농경사회를 보면 특히 서민으로 태어난 사람의 일생은 뻔했습니다. 그 집 아버지가 농사꾼이에요. 그러면 자식도 농사를 하게
되겠지요. 그렇다면 그 일을 누구한테 배웁니까. 그렇죠. 아버지한테 배웁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아버지로부터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농민은 땅이 있었지요. 그 땅은 누구의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버지 것입니다. 형제들이 많이 있다면
나중에 이를 누구한테 물려줄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아버지 판단에 걸려 있었던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가족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농경이나 낙농업 같은 경우는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할 수가 없어요. 반드시 가족의 도움이
있어야지만 일을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당시 아버지의 존재는 자신의 부모이자 스승이자, 회사의 선배님이자 사장님과도 같은 존재, 그 뿐만이 아니라, 조금 더
극단적으로 말씀을 드린다면 자신의 운명을 좌우할 만한 큰 권한을 가진 존재였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만약에, 야, 너한테는 물려줄 땅이
없다……이렇게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면 이는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는 누구나 자신의 부모님을 공경했고 가족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시대 상황은 어떻습니까.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녀들이 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단지 정말 요즘 젊은이들이
못나서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발전을 하다 보니, 예전처럼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역할이 많지 않게
되었다는 점을 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차이를 무시한 채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려 한다면 뜻하지 않는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에베소서 4장 21절~24절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4장 21절~24절
"21.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ただし、本当にあなたがたがキリストについて聞き、キリストにあって教えられているとすれば、です。真理はイエスにあるのですから。
その教えとは、あなたがたの以前の生活について言えば、人を欺く情欲によって腐敗していく古い人を、あなたがたが脱ぎ捨てること、
また、あなたがたが霊と心において新しくされ続け、
真理に基づく義と聖をもって、神にかたどり造られた新しい人を着ることでした。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새 사람을 입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셨다면 새
사람을 입어야지요. 그렇다면 새 사람을 입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렇죠.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을 벗어 버리지 않고서는 새 사람을 입을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옛 사람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것이 바로 옛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 상황을 본다면 가족끼리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는 것은, 윤리나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하루하루 살아가기 위해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던 생각, 마치 목이 마를 때에는 물을 마셔야 한다……는 정도로 상식 중의 상식,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철칙 중의 철칙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그 철칙 중의 철칙. 상식 중의 상식을 깨버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옛 사람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내게 이득이 되면 좋은 것이요, 내게 손해가 되면 나쁜 것입니다. 내 입에 달면 먹고, 내 입에 쓰면
뱉어버리는 식으로, 기준은 항상 나 자신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철칙 중의 철칙,
상식 중의 상식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런 것 바로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새 사람을 입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내 기춘이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말씀 중심이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새 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작은 변화가 아닙니다. 내 철칙과 상식, 지금까지 쌓아왔던 내 가치관을 완전히 송두리째
바꾸는 변화인 것입니다.
제가 운전을 처음 배울 때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 운전을 하고 있으니까 자꾸 핸들을 움직이려고 해요. 조금 오른쪽으로 가면 왼쪽으로
돌리려고 하고, 조금 왼쪽으로 가면 오른쪽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옆에 있는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바로 코앞을 보는 것이 아니라 멀리 앞을 바라 보면서 운전하라고 했던 말씀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그리고 또 그런 운전하시다 보면 그런 경험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운전을 하고 있는데 유리창에 뭐가 좀 묻었어요. 그런데 그게 참
신경이 쓰입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그 먼지만 보고 운전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고가 나겠지요.
우리는 지금 눈앞에 있는 먼지 하나하나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 앞을 보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원하시는
본래 목적지로 도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 코앞이나 내 바로 앞 유리창에 묻은 먼지를 보느냐, 아니면 내가 나아갈 저 멀리 앞을 바라보느냐 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을 기준으로 생각하느냐, 아니면 내가 나아가야 길을 인도해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느냐 하는 차이인 것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기준이 아닌 우리의 앞길을 인도해주시는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모든 가치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나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
먼저, 예수님 먼저가 되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끔 집에서 제 아내와 이야기를 하다가 보면 제 학교 동창이나 선후배에 대한 말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이 그래도 신앙
안에서는 제일 출세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세상적으로 본다면 정말 참 출세를 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 학교 동기나
선후배가 아무리 판검사다, 변호사다, 국회의원이다, 청와대 무슨 고급 공무원이다, 하물며 무슨 장관이다 하더라도, 제 아내의 기준은
명확합니다.
제 아내는 제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 사람한테 우리 결혼식 청첩장을 보냈느냐. 그럼 보냈다고 그러죠. 그러면 다음 질문. 우리
결혼식에 왔느냐. 그런데 안 왔어요. 그럼 마지막 질문. 그럼 조금이라도 축하를 해줬느냐. 그러면 아니, 뭐, 그런 것 없었다고
하잖아요? 여기까지 들은 제 아내의 답은 간단합니다.
“그럼 됐어요.”
제아무리 대단한 사람이고, 예전에 아무리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결혼식에 안 왔을 정도라고 한다면 뭐 됐다는 말이지요. 참
명확하죠? 며칠 전에도 텔레비전을 보면서 제 아내가 하는 말이 “아이고, 저 사람이 우리 결혼식 때 와서 밥이라도 한 끼 먹고 가기만
했었더라도……쯧쯧쯧” 라고 하더라구요.
글쎄요. 저는 뭐 그 뜻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뭐, 워낙 바쁜 분들이기에, 사실 오려고 했었어도, 못 왔던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그런데 이렇게 지금 생각해 보면 분명 왔을 것도
같은데 안 온 사람이 있나 하면, 반면에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와준 사람도 있고 그랬습니다. 그럴 땐 참 반갑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지요.
그래요. 뭐, 제 결혼식에 왔다고 복 받고 그러는 게 아니지요. 제가 뭐 예수님이에요? 하지만, 어린 양의 혼인잔치, 천국은
다릅니다. 거기는 가도 되고 안 가도 되는 곳이 아니에요. 반드시 가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우리가 주님께 이렇게 말했다고 칩시다. 아, 주님, 저는 세상에 살 때에 이렇게 공부를 많이 했고,
이렇게 돈을 많이 벌었고, 이렇게 출세를 많이 했습니다. 그 뿐만 이나리 이렇게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이렇게 착한 일도 많이 했어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옆에 있는 천사한테 물으십니다. 이 사람한테 복음은 전해졌느냐. 그럼 천사가 예 누구누구를 통해서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음. 그래. 그러면 내 이름으로 교회나 이웃을 섬겼느냐, 그런데 천사가 대답하기를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내 이름을
믿고 새 사람을 입었느냐 하니까 그것도 “아니요” 하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럼 됐어.”
더 이상 무엇을 따지시겠습니까. 마태복음 25장 30절이 떠오릅니다.
마태복음 25장 30절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この役に立たないしもべは外の暗闇に追い出せ。そこで泣いて歯ぎしりするのだ。』
여러분,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5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イエスは答えら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人は、水と御霊によって生まれなければ、神の国に入ることはできません。
우리는 이제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가치관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요, 이것이 바로 새 사람을 입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까지는 나를 위해 살았습니다. 나 중심으로 살아왔습니다. 나의 만족을 위해 살았습니다. 나의 기쁨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주님 중심으로 살겠습니다. 주님의 만족을 위해 살겠습니다. 주님의 기쁨을 위해 살겠습니다.
이와 같이 고백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계시록 19장 9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계시록 19장 9절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御使いは私に、「子羊の婚宴に招かれている者たちは幸いだ、と書き記しなさい」と言い、また「これらは神の真実なことばである」と言った。
우리 모두 이제 썩어져 가는 옛 사람, 옛 가치관을 벗어 버리고 주님 중심의 새로운 가치관 새 사람을 입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자로 거듭나서, 마지막 날에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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