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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4회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 4 - 갈(渴)
2020년 3월 8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マタイの福音書 5章6節
“義に飢え渇く者は幸いです。その人たちは満ち足りるからです。”


한국어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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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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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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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 主が望まれる人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는 네 번째 시간으로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義に飢え渇く者)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주보에는 한자 한 글자. ‘갈(渴)이라고 적어놓았습니다.

요한복음 18장 37절~38절에서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께 질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8장 37절~38절
“37.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38.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そこで、ピラトはイエスに言った。「それでは、あなたは王なのか。」イエスは答えられた。「わたしが王であることは、あなたの言うとおりです。わたしは、真理について証しするために生まれ、そのために世に 来ました。真理に属する者はみな、わたしの声に聞き従います。」
ピラトはイエスに言った。「真理とは何なのか。」こう言ってから、再びユダヤ人たちのところに出て行って、彼らに言った。「私はあの人に何の罪も認めな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진정으로 믿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진실인지 모른 채 헤매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믿음이 있다 또는 믿음이 없다,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모든 사람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 믿음의 대상이 어떤 신인 경우도 있고, 또는 학문이나 재물이나 경험인 경우도 있겠지요. 설령 본인 스스로도 나는 믿음이 없다,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계시지만, 결국 그 사람도 따지고 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의 생각을 굳게 믿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부터 일본은 수많은 신들이 일본을 지켜주고 있다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신들인가 하면 야오요로즈라고 해서 한자는 800만이라고 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나, 둘, 세어서 정확하게 800만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는 불교에서 나온 사상인데, 말하자면 대단히 많은 숫자라는 뜻이지요. 일본에 보면 도시나 지방을 막론하고 크고 작은 절이나 신사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이는 일본만이 그런 것은 아니죠. 한국도 마찬가지지요. 시골에 가면 절도 많고 성황당 같은 것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동양만 그런가 하면 서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그리스로 전도를 간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스라고 하면 신화가 얼마나 많습니까. 거기에 보면 남녀의 수많은 신들이 등장하지요. 그리고 그 신들을 믿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이 모든 것은 우상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복음이 필요했습니다. 이를 본 바울은 말합니다.


사도행전 17장 22절~23절
“22.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パウロは、アレオパゴスの中央に立って言った。「アテネの人たち。あなたがたは、あらゆる点で宗教心にあつい方々だと、私は見ております。
道を通りながら、あなたがたの拝むものをよく見ているうちに、『知られていない神に』と刻まれた祭壇があるのを見つけたからです。そこで、あなたがたが知らずに拝んでいるもの、それを教えましょう。

여기서 아레오바고라고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연설을 할 수 있는 언덕을 말하고, <아덴>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를 가리킵니다. 그렇게 학문이 발달할 만큼 지혜로운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이 그리스였으며, 그 수도에서 당당하게 바울은 예수님을 전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기를, 그리스 아테네에 와서 보니까 우상들도 많고, 하물며 “알지 못하는 신에게” 바친다는 제단도 많이 봤는데, 당신들이 모르는 신, 바로 그 신에 대해서 알려주겠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에 의하면 여기서 바울이 말하기를 <종교심이 많다>라고 한 것은 너무나도 많은 신들을 미신적으로 믿는다는 뜻이라고 해석하면서, 이는 칭찬이 아니라 비판하는 의미로 한 말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어떤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 집에 가봤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집은 경제적으로 좀 상당히 넉넉한 편이었습니다. 부모님은 그 학생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그 학생이 원하는 책은 다 사줬어요.

그런데 그 집에 딱 가서 그 학생이 쓰는 책장을 봤더니, 와, 이건 국어, 영어, 수학 뿐만이 아니라 물리, 화학, 생물을 비롯해서, 지리, 역사, 도덕, 음악, 미술 등 전과목 참고서 문제집이 다 있어요. 그리고 대학별 문제집도 수십 종류가 책장에 꽂혀 있었습니다.

만약에 그런 광경을 보셨다면, 여러분께서는 그 학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쉽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 학생, 공부를 하는데 문제가 없는 학생일까요? 아니면 있는 학생일까요?

저도 아이들을 몇 년 가르쳐봐서 압니다만,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우선 이 학생은 자신의 진로에 대해서 결정을 못하고 있습니다. 문과로 가야 할지 이과로 가야 할지, 그리고 어느 대학에 가야 할지도 모르고 있어요.

시중에 그렇게 책이 많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에는 대학도 많고 전공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맞는 공부법이 있습니다. 공부면 그냥 다 좋다고 해서 정말로 필요한 공부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한다면, 자신의 진로선택에도 실패하고, 그리고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살아간다고 하면 결국 자신의 인생도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그런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공평하게 남자와 여자, 한 사람씩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먼저 여자분입니다. 마가복음 5장 25절~29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5장 25절~29절
“25.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そこに、十二年の間、長血(ながち)をわずらっている女の人がいた。
彼女は多くの医者からひどい目にあわされて、持っている物をすべて使い果たしたが、何のかいもなく、むしろもっと悪くなっていた。
彼女はイエスのことを聞き、群衆とともにやって来て、うしろからイエスの衣に触れた。
「あの方の衣にでも触れれば、私は救われる」と思っていたからである。
すると、すぐに血の源が乾いて、病気が癒やされたことをからだに感じた。

이 여자는 12년 동안 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 많은 병원에 다녀봤겠지요. 그 때는 무슨 지금 같은 의료보험이 있나요. 그러니까 돈은 돈대로 깨지고, 이 병원 저 병원 다 다녀봤으니,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가는 병원마다 무슨 검사나 무슨 치료다 하면서 괴로웠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는데, 그녀에게 남편이 있었는지, 자녀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쩌면 모두가 다 떠나가버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5장 28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あの方の衣にでも触れれば、私は救われる」と思っていたからである。

그녀는 그토록 오랫동안 고통을 겪으면서 한 가지 결론을 내렸습니다. 내가 믿을 것, 내가 의지해야 할 것은 돈도 아니요, 의사도 아니요 오직 예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손을 내밀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다고요? 예수님께 그 손이 닿자 마자 그 여인의 질병이 모두 다 나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더 딱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5장 2절~9절 중반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5장 2절~9절 중반
“2.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エルサレムには、羊の門の近くに、ヘブル語でベテスダと呼ばれる池があり、五つの回廊がついていた。
その中には、病人、目の見えない人、足の不自由な人、からだに麻痺のある人たちが大勢、横になっていた。
(なし)한글판에는있음
そこに、三十八年も病気にかかっている人がいた。
イエスは彼が横になっているのを見て、すでに長い間そうしていることを知ると、彼に言われた。「良くなりたいか。」
病人は答えた。「主よ。水がかき回されたとき、池の中に入れてくれる人がいません。行きかけると、ほかの人が先に下りて行きます。」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起きて床を取り上げ、歩きなさい。」
すると、すぐにその人は治って、床を取り上げて歩き出した。……


예루살렘에 있는 베데스다라고 하는 연못에 어떤 한 사람이 누워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나이가 몇 살인지, 그 사람이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질병을 앓은 지가 38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38년이라고 하면 올해가 2020년이니까 1982년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걷지도 못한 채로 언제부터인지 그 연못 옆에 누워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믿는 것이라고는 무엇입니까. 거기에 가끔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바로 그 움직이게 했을 때 제일 먼저 물속에 들어가면 병이 낫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는 다리가 불편하니까 제일 먼저 못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말씀을 하셨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곧 나아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목이 마를 때에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그렇습니다. 물이 필요합니다. 물을 마셔야 합니다. 그런데 목이 마를 때 군고구마를 먹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팝콘을 먹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서 소금물 마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큰일납니다. 갈증은 해소되지 않고 갈증만 더욱 심해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좋은 의사를 만나면 병이 나을 줄 알았습니다. 돈을 많이 들이면 나을 줄 알았습니다. 좋은 약을 먹으면 나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의사를 찾아가도, 아무리 돈을 많이 써도, 아무리 좋은 약을 먹어봐도 몸과 마음은 괴로워져 갔습니다.

38년 동안 걷지 못하는 질병에 시달렸던 그 남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병이 낫지 않는 것은 사람들의 소문처럼 물이 흔들릴 때 내가 먼저 들어가지 못해서다. 물이 흔들릴 때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없어서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불편한 자기 다리 탓을 했을 것입니다. 도움을 주지 않는 매정한 세상 탓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탓, 남의 탓만 하면 병이 낫나요? 아니요. 낫기는커녕 몸과 마음은 점점 더 우울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천사라는 말이 나오면 다 성경적인 것인가요? 아닙니다. 뭐 요즘만이 아니라 옛날부터 여러 가지 신흥종교집단들이 많이 있었습니다만, 거기에 보면 꼭 나오는 것이 천사입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이런저런 계시를 주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받아 적은 것이 이 책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더 과감합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서 말씀을 하셨다는 거예요. 아니면 예수님이 이런저런 환상을 보여줘서 그것을 적으라고 했는데, 그게 바로 자기가 쓴 책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성경에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1장 7절~8절
“7.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ほかの福音といっても、もう一つ別に福音があ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あなたがたを動揺させて、キリストの福音を変えてしまおうとする者たちがいるだけです。
しかし、私たちであれ天の御使いであれ、もし私たちがあなたがたに宣べ伝えた福音に反することを、福音として宣べ伝えるなら、そのような者はのろわれるべきです。


요한계시록 22장 18절~19절
“18.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私は、この書の預言のことばを聞くすべての者に証しする。もし、だれかがこれにつけ加えるなら、神がその者に、この書に書かれている災害を加えられる。
また、もし、だれかがこの預言の書のことばから何かを取り除くなら、神は、この書に書かれているいのちの木と聖なる都から、その者の受ける分を取り除かれる。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기독교 서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책들이 나쁘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좋은 책들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난 다른 내용이 적혀 있다면, 이는 복음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약이 아니라 독입니다. 생명이 아니라 사망에 이르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영적인 갈증에 시달리고 있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しかし、わたしが与える水を飲む人は、いつまでも決して渇くことがありません。わたしが与える水は、その人の内で泉となり、永遠のいのちへの水が湧き出ます。」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채워주시는 물이 진정한 물입니다. 우리의 목마름을 해소해주시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생명의 물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주님을 바라보고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信仰の創始者であり完成者であるイエスから、目を離さないでいなさい。この方は、ご自分の前に置かれた喜びのために、辱めをものともせずに十字架を忍び、神の 御座の右に着座されたのです。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움 가운데에 있더라도 주님을 의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자면 또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わたしを見たから信じたのですか。見ないで信じる人たちは幸いです。」

이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아이구, 그 너무 무슨 하나님의 능력이다 기도 응답이다 하면서 보여달라고 하면 안돼. 그냥 안 보고 믿는 믿음이 더 크다고 하시잖아.

이게 맞는 말씀인가요? 여러분, 만약에 제가 하나님의 능력도 체험해 본적이 없고, 기도 응답도 받아본 적이 없다면, 제가 여러분께 뭐라고 말씀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능력이 있습니다……라고 합디다”
“여러분! 기도를 하면 응답을 해주십니다……라고 합디다”

이렇게 밖에 안 되지 않습니까.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이 크다는 것은, 2천년 전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을 직접 만나보지 않고 믿는다 하더라도, 축복이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 말씀을 하신 이유는, 나중에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제자들 사이에서도, 아, 나는 예수님을 직접 만났다. 너는 만나지 못하지 않았느냐 뭐 그러면서 서로 싸우는 일어나지 않도록, 예수님과 직접 동행했던 사도들에게 겸손함을 가르치려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표적인 사도 중 한 사람인 바울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어떤 사도들보다도 훨씬 큰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셨던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4장 18절~21절을 봅니다.

사도행전 4장 18절~21절
“18.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21.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そこで、彼らは二人を呼んで、イエスの名によって語ることも教えることも、いっさいしてはならないと命じた。
しかし、ペテロとヨハネは彼らに答えた。「神に聞き従うよりも、あなたがたに聞き従うほうが、神の御前に正しいかどうか、判断してください。
私たちは、自分たちが見たことや聞いたことを話さないわけにはいきません。」
そこで彼らは、二人をさらに脅したうえで釈放した。それは、皆の者がこの出来事 のゆえに神をあがめていたので、人々の手前、二人を罰する術がなかったからである。

자신들을 핍박하는 자들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말합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私たちは、自分たちが見たことや聞いたことを話さないわけにはいきません。」

그렇습니다. 우리는 보고 믿고, 듣고 믿고, 그리고 이를 우리 이웃들에게 전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20장 27절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それから、トマスに言われた。「あなたの指をここに当てて、わたしの手を見なさい。手を伸ばして、わたしの脇腹 に入れなさい。信じない者ではなく、信じる者になりなさい。」

도마는 자신이 직접 보기까지는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안 믿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보는 것만이 아니라, 이 십자가에 못 박힌 손과 옆구리를 만져봐라. 그렇게 해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에 적혀 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20절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行って、あらゆる国の人々を弟子としなさい。父、子、聖霊の名において彼らにバプテスマを授け、
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命じておいた、すべてのことを守るように教えなさい。見よ。わたしは世の終わりまで、いつもあなたがたとともにいます。」

우리는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정답입니다. 우리 마음의 갈증을 채워주실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을 보시겠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このように、あなたがたは悪い者であっても、自分の子どもたちには良いものを与えることを知っているのです。それならなおのこと、天におられるあなたがたの父は、ご自分に求める者たちに、良いものを与えてくださらない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것도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義に飢え渇く者は幸いです。その人たちは満ち足りるからです。

우리 모두, 세상에서 축복의 목마름, 은혜의 목마름, 믿음의 목마름에 시달릴 때, 좋은 것으로 배 부르게 채워주시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말씀이신 성경을 보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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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5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マタイの福音書 5章5節
“柔和な者は幸いです。その人たちは地を受け継ぐ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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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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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 말씀을 처음 전할 때인 지지난 주 주일에는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팔복은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8차 시험과 같다고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혹시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1차, 2차, 3차……이렇게 시험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나중 시험이 제일 어렵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시험에 따라서는 마지막 시험이 제일 어려운 경우도 있고, 또 어떨 때는 처음 시험이 어려울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지요. 그게 뭐냐 하면, 각 시험마다 그 시험의 특징이 있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시험을 1차, 2차, 3차……이렇게 반복해서 치르는 것은 시간 낭비겠지요. 그래서 예를 들어 똑 같은 필기시험이라고 해도 1차는 객관식, 2차는 주관식 등으로 나누어질 수도 있고, 면접이라 하더라도 실무진 면접, 임원면접이라는 식으로 그 시험마다 특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세 번째 시간인 오늘은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기 위한 시험,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시험으로 본다면 3차 시험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3차 시험에는 어떤 특징이 있는지, 그리고 이 3차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아봄으로 인해서 오늘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넘치도록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이 온유함에 대해서 3단계로 구분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첫 단계는 <온유함>이라는 뜻 속에 담긴 특징입니다.

그 전에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5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柔和な者は幸いです。その人たちは地を受け継ぐからです。

오늘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자>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째 시간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 둘째 시간에는 <애통하는 자>, 그리고 오늘은 <온유한 자>를 말씀하고 계십니다만, 이렇게 보면 그저 단순한 나열처럼 느끼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오늘 말씀에는 1차도 아닌, 2차도 아닌, 3차 시험답게, 이 말씀에는 대단히 흥미로운 특징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상대방이 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말씀인 <마음이 가난한 자>나 두 번째 말씀인 <애통하는 자>는 자기 혼자만이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내 마음이 가난하여 내 힘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내 힘만 가지고는 도저히 안 되기 때문에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고 하는 간절한 마음, 그리고 두 번째에는 나를 위해서, 나의 씻을 수 없는 죄를 해결해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죽으셨다고 하는 애통함,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예수님을 모르고 죽어가고 있는 우리 이웃의 영혼에 대한 애통함을 갖는다는 것, 이는 모두 내 안에 있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온유함>은 무엇입니까. 이는 자기 자신이 <나는 온유하다>라고 주장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성경을 조금 아시는 분은 다음 구절을 떠올리실지 모르겠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30절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わたしは心が柔和でへりくだっているから、あなたがたもわたしのくびきを負って、わたしから学びなさい。そうすれば、たましいに安らぎを得ます。
わたしのくびきは負いやすく、わたしの荷は軽いからです。」

아니,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온유하다고 말씀하고 계시지 않느냐.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 스스로를 가리켜서 온유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하고 말씀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잠시 후에 말씀 드리기로 하고,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기 자신이 온유하다는 말을 하지는 않지요.

기본적으로 이 온유함이라고 하는 판단은 자기 자신이 아닌 상대방이나 또는 제3자가 판단하는 기준이라는 점이 오늘 말씀에 있어서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단계에서 살펴볼 내용은 온유함의 의미, 다시 말해서 ‘온유함’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제목의 부제로 적은 ‘유’라는 한자, 이는 부드러울 유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에 부드러운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이요? 그건 우유부단한 것이지 온유한 사람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온유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착한 사람, 화를 안 내는 사람, 무섭지 않은 사람, 여러 가지 있을 수 있겠지요.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본다면 일반적으로 온유한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성경에서는 온유한 사람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요. 성경에는 너무나도 자세히 온유한 사람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팔복이 있는 마태복음 5장에서 후반부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39절~44절입니다.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悪い者に手向かっ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の右の頬を打つ者には左の頬も向けなさい。
あなたを告訴して下着を取ろうとする者には、上着も取らせなさい。
あなたに一ミリオン行くように強いる者がいれば、一緒に二ミリオン行きなさい。
求める者には与えなさい。借りようとする者に背を向けてはいけません。
『あなたの隣人を愛し、あなたの敵を憎め』と言われていたのを、あなたがたは聞いています。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自分の敵を愛し、自分を迫害する者のために祈りなさい。


이것이야말로 온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이 부분에 대해서 말씀을 전해드렸습니다만, 여기에는 큰 돈이나 수고가 들어가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너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하는데 저항하지 말라든지, 집이나 차를 빼앗으려고 하는데 가만히 있으라든지 하시는 게 아닙니다.

오른쪽 뺨을 툭 쳐서 자존심을 건드릴 정도는 그냥 참아줘라, 기껏해야 내가 입던 속옷을 빼앗으려고 하는 사람한테는 아예 내가 입던 겉옷까지 줘라. 누가 1킬로 정도를 억지로 가라고 하면 그 사람과 아예 2킬로 정도 같이 가줘라. 돈 몇 푼 꿔달라고 하는데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말고 그냥 꿔줘라……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내가 상대방에게 그렇게 한다 해서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내 자존심을 건드려요. 그래도 그래 내가 참는다 하고 다 받아줬어요. 그러면 그런다고 나한테 돈이 생겨요? 아니요, 그런 말씀이 없어요.

내가 가진 보잘것 없는 것들을 빼앗으려고 안달을 해요. 그런 사람한테 내가 가진 싸구려 겉옷까지 줘버렸어요. 그런다고 나한테 무슨 이득이 되나요?

돈 몇 푼 꿔달라고 해서, 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돈이니까 주는 셈치고 꿔졌어요. 그런다고 만약에 그 사람이 안 돌려준다면 다른 사람이 갚아 주나요?

이런 식으로 생각해본다면 성경에서 말씀하신 온유한 사람의 모습은 내가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해주는 대신 상대방이 나한테 무언가를 해줄 것을 바라지 않는 모습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서 살펴본 마태복음 5장 39절~44절에 보면, 온유한 사람이 무엇을 했다고 말씀 드렸는지 기억하시나요? 제가 드린 말씀을 자세히 들으셨나요?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사람은 뼈가 부러진 것도 아니에요. 어디 멍이 든 것도 아니에요. 오른손 잡이인 사람이 상대방 오른쪽 뺨을 때리려면 그렇게 세게 때리지 못해요. 툭 쳐서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정도입니다. 그 정도로 자존심을 상하게 할 정도였다면, 어떻게 하라고요? 예, 그냥 참아줘라,

내가 입던 싸구려 속옷을 빼앗으려고 하는 사람한테는 아예 내가 입던 겉옷까지 줘라.

누가 1킬로 정도를 억지로 가라고 하면 어떻게 하라고요? 예 그 사람과 1킬로가 아니라 아예 2킬로 정도 같이, 가줘라.

큰 돈도 아니고 작은 돈 몇 푼 꿔달라고 하면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말고 어떻게 하라고요? 그냥 꿔줘라……

참아줘라, 가줘라, 꿔줘라……. 그리고 마태복음 5장 43절~44절까지는 너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 어떻게 하라고요? 예, 기도해줘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이란 이처럼 상대방에게 주는 사람입니다. 대단한 자존심이나 많은 돈이나 긴 시간이나 고단한 힘이나 노력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를 위해서 40일 금식기도를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요만한 자존심, 몇 푼 안 되는 적은 돈, 적은 돈, 짧은 시간, 작은 수고 정도 되는 것을 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짧은 기도라도 해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께서는 온유한 자의 반대말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포악, 신랄 등 여러 의미가 있겠습니다만,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쉽게 생각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온유한 사람이란 상대방에게 주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반대는 어떻게든 자신의 것을 챙기고 남에게 주지 않으려는 사람이라는 말이 됩니다.

몇 번이나 말씀 드립니다만 자신의 재산을 지키면 안 된다는 게 아닙니다. 권리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게 아닙니다. 철저하게 자기 자신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조금도 도움을 주지 않으려는 사람,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지 간에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온유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이처럼 온유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3단계입니다. 자, 오늘의 문제입니다. 잘 생각해보시고 이거다 생각하시는 분은 큰 소리로 말씀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번 팔복 말씀의 주제를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만,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이와 같이 온유한 사람, 나누어줄 줄 아는 사람을 원하시는 것일까요.

역시 오늘도 여러분의 편의를 위해서 객관식으로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왜 주님께서는 나누어줄 줄 아는 사람을 원하시는 것일까요.

1번, 주님은 우리가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2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지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3번, 기타.


예, 항상 말씀 드립니다만, 제가 드리는 선택지 중에서 <기타>가 있으면 그게 정답입니다. 하지만 <기타>를 선택하셨다면 분명한 이유를 말씀해주셔야만 합니다.

즉, 쉽게 말씀을 드리자면, 주님께서 온유한 사람, 나누어줄 줄 아는 사람을 원하시는 이유는, 주님이 우리가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셔서도 아니요, 우리에게 억지로 착한 사람인 척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다른 종교 지도자는 무소유, 즉 소유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만,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고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神は彼らを祝福された。神は彼らに仰せられた。「生めよ。増えよ。地に満ちよ。地を従えよ。海の魚、空の鳥、地の上を這うすべての生き物を支配せよ。」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이 세상 모든 것을 주시고는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주라고 말씀하십니까.

누가복음 6장 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与え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も与えられます。詰め込んだり、揺すって入れたり、盛り上げたりして、気前良 く量って懐に入れてもらえます。あなたがたが量るその秤で、あなたがたも量り返してもらえるからです。」

그리고 바로 앞 누가복음 6장 35절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しかし、あなたがたは自分の敵を愛しなさい。彼らに良くしてやり、返してもらうことを考えずに貸し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の受ける報いは多く、あなたがたは、いと高き方の子どもになります。いと高き方は、恩知らずな者にも悪人にもあわれみ深いからです。

그렇습니다. 당장은 우리가 손해를 보는 것 같더라도, 우리에게 좋은 것, 큰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것이 누구십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채워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도 그냥 아무거나 대충 채워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107편 9절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まことに主は 渇いたたましいを満ち足らせ 飢えたたましいを良いもので満たされた。

요한복음 14장 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平安を残します。わたしの平安を与えます。わたしは、世が与えるのと同じようには与えません。あなたがたは心を騒がせてはなりません。ひるんではなりません。

우리 주님은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것은 이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이 바로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온유한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이란 단순히 착하고 손해 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스스로를 온유하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이는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단 하나, 우리에게 주시러 오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면서 자신을 위해서 집 한 채, 땅 한 평이라도 사지 않으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6절~8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복종하시고는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리시고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 내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온유하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를 위해 그토록 고난을 당하신 주님은 우리가 고난 당하기를 원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원하고 계신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흥미로운 말씀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10장 38절~42절
38.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41.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0장 38절~42절

さて、一行が進んで行くうちに、イエスはある村に入られた。すると、マルタという女の人がイエスを家に迎え入れた。
彼女にはマリアという姉妹がいたが、主の足もとに座って、主のことばに聞き入っていた。
ところが、マルタはいろいろなもてなしのために心が落ち着かず、みもとに来 て言った。「主よ。私の姉妹が私だけにもてなしをさせているのを、何ともお思いにならないのですか。私の手伝いをするように、おっしゃってください。」
主は答えられた。「マルタ、マルタ、あなたはいろいろなことを思い煩って、心を乱しています。
しかし、必要なことは一つだけです。マリアはその良いほうを選びました。それが彼女から取り上げら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마을에 오시자 언니 마르다가 예수님을 집으로 모셔드렸는데, 이제 손님이 오셨으니 음식도 준비하고 그래야 하기 때문에 정신 없이 일을 하고 있는데, 동생은 지금 언니 일을 도울 생각은 안 하고 예수님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르다 보기에 동생 마리야가 얼마나 얄밉겠습니까. 어쩌면 마르다는 예수님한테도 불만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아니, 내가 이렇게 자기를 위해서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나이도 어린 마리아를 데리고 말씀을 하고 계시면 어떡해요. 말씀 좀 있다가 하시던지 하고 내 일 좀 도우라고 말해주세요. 뭐 이랬는지도 모르지요.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누가복음 10장 41절~42절
41.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主は答えられた。「マルタ、マルタ、あなたはいろいろなことを思い煩って、心を乱しています。
しかし、必要なことは一つだけです。マリアはその良いほうを選びました。それが彼女から取り上げら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

이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것저것 다 하려고 하지 마. 다 할 수 없다면 한 가지만 해. 그러면서 뭐라고 하십니까.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했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가 좋은 것 택하시기를 원하고 계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 사람이 내 자존심을 상하게 했어요. 그러면 뭐가 어째고 어째, 하고 싸울 것인가, 아니면 그래, 네가 그렇게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싶으면 마음껏 해봐라. 내 자존심은 주님이 세우신다……라고 하시겠습니까.

저 사람이 내가 가진 별것도 아닌 것을 탐내요. 그러면 재판을 하고 고소를 하고 해서 끌까지 싸우겠습니까, 아니면 그래 그거 대수롭지도 않은데, 차라리 내가 가진 이것도 같이 가져라. 주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실 것이다 하고 줘버리시겠습니까.

저 사람이 나한테 귀찮은 일을 시키고 번거롭게 해요. 그러면 왜 나한테 힘든 일만 시키느냐고 따지겠습니까. 아니면, 그래, 주님께서는 내게 더 큰 평안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오히려 그 사람이 부탁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해주겠습니까.


여러분, 좋은 편을 택하시기를 주님께서는 원하고 계십니다. 좋은 편을 택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손해 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채워주신다는 것을 믿는 강한 믿음의 소유자인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이웃에게 나누어줍시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아이고. 내 코가 석자인데 내가 가진 게 있나요. 라고 하실 수도 있겠지요. 그런 분들을 위해서 여러분께 준비했습니다. 교회 나가시다 보면 전도지가 쌓여 있습니다. 이웃에게 뭔가를 주고 싶은데 줄 게 없어요. 그러면 그 전도지를 나누어 주십시오. 부족하다면 얼마든지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믿음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온유한 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는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아이구, 뭐 땅만 있으면 뭘 해. 돈이 있어야 집을 짓든지 씨를 심든지 하지. 그렇게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 하나님을 그렇게 과소평가 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그렇게 무책임한 축복이 아닙니다. 필요한 모든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서 원하시는 온유한 사람, 이웃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람, 좋은 편을 택하는 사람이 되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축복,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평안과 축복을 넘치도록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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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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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2회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 2 - 비(悲)
2020년 2월 2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マタイの福音書 5章4節
“悲しむ者は幸いです。その人たちは慰められる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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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 主が望まれる人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는 두 번째 시간으로서 <애통하는 자>(悲しむ者)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주보에는 한자 한 글자. ‘비(悲)’라고 적어놓았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기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슬플 때도 있습니다. 슬픈 일이라고 하면 여러분께서는 어떤 상황을 떠올리십니까. 사실 힘들다거나 괴로운 상황은 어느 정도 상상이 됩니다만, 막상 슬프다고 하면 딱히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래도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아무래도 사람의 죽음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족이나 또는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슬프다는 감정의 대표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悲しむ者は幸いです。その人たちは慰められるからです。

여기에 등장하는 “애통하는 자”는 원어에서 <호이 펜둔테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에 대해서 주석서에는 다음과 같이 해석되어 있었습니다.

이 단어는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 또는 자신과 타인의 죄에 대한 결과를 탄식하는 아픔을 묘사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보았을 때 저는 아, 참으로 절묘한 해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시 슬픔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애도를 뜻함과 동시에 자신과 타인의 죄에 대한 결과를 탄식하는 아픔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애통함에 대한 진정한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진정으로 애통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분명히 애통해야 하는 두 가지 죽음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죽음이요, 둘째는 우리 이웃의 죽음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면 어떤 분은 이상하게 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 음? 예수님의 죽음과 이웃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겨야 한다면, 그렇다면 빠진 게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내 죽음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제가 굳이 나 자신의 죽음을 뺀 데에는 이유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애통해야 할 내 죽음은 애통해야 할 예수님의 죽음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애통해야 할 첫 번째 죽음인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습니다. 그것도 그냥 단순하게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과 로마 군인들로부터 온갖 모욕을 당하고, 채찍에 맞고, 머리는 가시로 만들어진 관을 쓰심으로 인해서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피범벅이 되시고는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올라가셔서, 거기서 팔과 다리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사실 십자가에 사람을 매다는 형벌은 예수님만 당하신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 이전에도 있었고, 그리고 그 이후에도 있어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도 예수님과 함께 두 강도가 함께 십자가 형에 처해졌습니다.


이 십자가형이라고 하는 것이 형벌 중에서도 상당히 잔혹한 형벌이라고 하는데,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그것을 생각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십자가에 달리게 되면 왜 죽는 것일까요. 우리가 그냥 생각해본다면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출혈과다로 사망하거나, 아니면 팔과 다리를 못 박혔기 때문에 그 고통으로 인해서 목숨을 잃게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실제로 결정적인 사망 원인은 호흡을 쉴 수 없게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실 십자가에 사람을 매달게 되면 온몸이 축 쳐지게 되는데 이 상태로는 폐가 눌려서 호흡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몸을 위로 올려서 가슴으로 숨을 쉬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못에 박힌 팔과 다리로 인해서 온몸이 통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조금 무서운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상황에서라면 1분 1초라도 빨리 목숨이 끊어지는 편이 차라리 편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못 박힌 팔다리의 고통, 그리고 호흡을 할 수 없는 고통을 오랜 시간 동안 겪게 만드는, 대단히 잔인한 형벌이었던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는 얼마 후에 죽으셨을까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기까지 얼마 동안이나 십자가에 매달려 계셨을까요.

실제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기록을 살펴보면 성경에는 그 시간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을 봅니다.


마가복음 15장 25절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彼らがイエスを十字架につけたのは、午前九時であった。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 유의해야 하는 점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의 시간은 유대식 시간입니다. 그래서 삼시, 육시, 구시는 지금의 오전 아홉 시, 열두 시, 세 시가 됩니다. 다만 요한복음의 경우에는 로마식 표기이기 때문에 요한복음에 나오는 시간은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과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마가복음의 이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제삼시, 그러니까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죽으셨냐 하면, 다른 복음서에도 나옵니다만, 누가복음 23장 44절~46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누가복음 23장 44절~46절
“44.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45.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46.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さて、時はすでに十二時ごろであった。全地が暗くなり、午後三時まで続いた。
太陽は光を失っていた。すると神殿の幕が真ん中から裂けた。
イエスは大声で叫ばれた。「父よ、わたしの霊をあなたの御手にゆだねます。」こう言って、息を引き取られた。


예수님께서는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제육시, 그러니까 오후 12시가 되자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온 세상에 어둠이 임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 어둠은 제구시, 그러니까 오후 3시까지 이어지더니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숨지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무려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못이 박힌 채로 매달려 계셨습니다.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십시오. 머리는 가시관에 의해 피로 흐르고 온몸은 채찍에 의해 살이 찢긴 상태에서 피범벅이었습니다. 어디가 눈 코 입인지 알 수 조차 없습니다. 그 상태에서 골고다 언덕길을 십자가를 짊어지고 올라가셨습니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 언덕길을 올라가실 때 일곱 번이나 넘어지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언덕까지 오르시고는 팔다리에 못이 박힌 채로 힘들게 호흡을 하시면서 6시간 동안이나 매달려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했었나요. 사람들은 대단히 잔인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도 모욕을 당하셨던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도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습니다.

마태복음 27장 39절~44절을 봅니다.

마태복음 27장 39절~44절
“3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通りすがりの人たちは、頭を振りながらイエスをののしった。
「神殿を壊して三日で建てる人よ、もしおまえが神の子なら自分を救ってみろ。そして十字架から降りて来い。」
同じように祭司長たちも、律法学者たち、長老たちと一緒にイエスを嘲(あざけ)って言った。
「他人は救ったが、自分は救えない。彼はイスラエルの王だ。今、十字架から降りてもらおう。そうすれば信じよう。
彼は神に拠り頼んでいる。神のお気に入りなら、今、救い出してもらえ。『わたしは神の子だ』と言っているのだから。」
イエスと一緒に十字架につけられた強盗たちも、同じようにイエスをののしった。

참으로 끔찍한 시간입니다. 전날 밤 밤중에 체포된 다음부터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기까지 예수님은 육체적으로는 물론이거니와 정신적으로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를 두고 슬프다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슬프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기까지만 보고 느끼는 슬픔은 마치 영화나 소설에서 주인공이 죽거나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슬픔과 다르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느껴야 하는 슬픔은 다른 데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사야 53장 4절~5절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まことに、彼は私たちの病を負い、私たちの痛みを担った。それなのに、私たちは思った。神に罰せられ、打たれ、苦しめられたのだと。
しかし、彼は私たちの背きのために刺され、私たちの咎のために砕かれたのだ。彼への懲らしめが私たちに平安をもたらし、その打ち傷のゆえに、私たちは癒やされた。

베드로전서 2장 24절
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キリストは自ら十字架の上で、私たちの罪をその身に負われた。それは、私たちが罪を離れ、義のために生きるため。その打ち傷のゆえに、あなたがたは癒やされた。


그렇습니다. 다른 이들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그와 같은 끔찍한 형벌을 받았으나, 예수님은 예수님의 죄 때문이 아닌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경찰서에서 사람이 와서 우리를 끌고 갔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벌금 얼마 정도 내면 풀려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재판을 받았더니 사형도 아니에요. 지옥으로 떨어져서 영원한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형벌이 내려졌습니다. 이제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나라에서 제일 높은 사람의 아들이 재판을 받고 있는 자리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나를 대신해서 형벌을 받겠다고 해요. 그러면서 그 자리에서 채찍에 맞고 모욕을 당하고 피범벅이 되어서 십자가에 매달리고는 죽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이제 재판장이 나더러 말하기를, 너는 이제 가도 된대요. 네 죄가 모두 해결 되었으니까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고 해요. 그러면, 우리가 그 자리에 서 있다면 아무렇지도 않겠습니까? 아니요. 지금 내 눈앞에서 나를 위해, 나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고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멀쩡하게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때에 느끼는 마음이 바로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애통하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고통을 예수님은 스스로를 위해서 당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이는 우리 자신을 너무나도 사랑하셨기 때문에 당하셨던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애통을 알아야 사랑을 알 수 가 있습니다. 애통을 알아야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예수님의 사랑의 결과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 받고 기쁨과 감사와 찬송을 돌리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에는 우리가 애통해야 할 두 번째 죽음인 이웃의 죽음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받고 천국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が道であり、真理であり、いのちなのです。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だれも父のみもとに行くことはできません。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모두 해결해주신 예수님을 믿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예외가 전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낮이나 밤이나, 기쁠 때나 어려움을 겪을 때나 예수님을 의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답이요,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되신 인도자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많은 공부를 했다 하더라도, 아무리 그 사람의 인품이 훌륭하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완전하고도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신 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지옥은 참으로 끔찍합니다.


마가복음 9장 48절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ゲヘナでは、彼らを食らううじ虫が尽きることがなく、火も消えることがありません。

누가복음 16장 24절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金持ちは叫んで言った。『父アブラハムよ、私をあわれんでラザロをお送りください。ラザロが指先を水に浸して私の舌を冷 やすようにしてください。私はこの炎の中で苦しくてたまりません。』

그리고 마지막 심판에 대한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9장 6절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その期間、人々は死を探し求めるが、決して見出すことはない。死ぬことを切に願うが、死は彼らから逃げて行く。

우리가 전도를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서요? 교회에서 인정받기 위해서요?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애통함을 가져야 합니다.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는 영혼에 대한 애통함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교도소는 형기가 끝나면 나올 수나 있지요. 그러나 지옥에 한 번 떨어지면 영원히 나올 수가 없습니다.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거기에 들어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을 믿는 방법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나와는 아무런 상관 없는 사람들, 하물며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인가요? 예를 들어서 역에서 전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저쪽에서 전철이 들어옵니다. 그런데, 전혀 모르는 사람이 스마트폰을 보면서 선로 쪽으로 걸어가요. 가만히 있으면 선로 쪽으로 떨어져서 큰 일이 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잡아야죠. 그렇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더 극단적으로 생각해본다면 학교나 회사에서 내가 아주 미워하는 사람, 아니면 나를 아주 미워하고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역시 전철이 저쪽에서 들어오고 있는데 스마트폰만 보면서 선로 쪽으로 걸어가요.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고민이 되시나요? 고민될 게 뭐가 있습니까. 막말로 싸울 때 싸우더라도, 따질 때 따지더라도 일단 살려놓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나중에 화해할 기회도 생기고 화목해질 기회도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려주셨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이 우리가 그 사람보다 의롭기 때문인가요? 잘나서이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아직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손을 잡아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해주셨던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로마서 1장 14절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私は、ギリシア人にも未開の人にも、知識のある人にも知識のない人にも、負い目のある者です。

그와 같이 빚진 자라고 생각하니까 무엇을 해야 한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나 하면 바로 다음 구절,

로마서 1장 15절
“15.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ですから私としては、ローマにいるあなたがたにも、ぜひ福音を伝えたいのです。

그렇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중국은 물론이거니와 한국과 일본을 포함하여 전세계가 이른바 코로나19라고 하는 폐렴 바이러스에 의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인터넷에 보니까 이와 같은 현상들을 보고 여러 교회 목사님들이 하시는 말씀이, 중국이 기독교를 탄압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았기 때문에 폐렴이 발생했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그 동안 그래도 어느 정도 잘 막아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불과 며칠 전부터 갑자기 대구에서 이른바 신흥종교집단인 신천지를 통해서 갑자기 하루에도 몇 십 명씩 확진자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또 사람들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 사이비 종교집단들한테 벌을 내려서 이렇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중국이 기독교를 탄압하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종교집단이 잘하고 있다는 게 아닙니다. 거기는 분명히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왜곡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많은 교회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는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들에 대해서 기존 교회가 공격을 한다면 그게 올바른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공격이 아닙니다.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한국의 기존 대형 교단이나 대형교회들은 하나님 앞에서 떳떳할 정도로 의롭습니까. 아닙니다. 사실 그와 같은 신흥종교집단들이 생겨난 원인은 기존 교회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존 교회들이 돈에 눈이 멀고, 세상 권력에 눈이 멀고, 정욕에 눈이 멀어서 제대로 복음을 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말도 안 되는 신흥종교가 판을 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는 신천지만이 아니라 모든 신흥종교집단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나에게 물이나 빵이 있는데, 지금 나와 사이가 안 좋은 사람이 눈 앞에서 목말라 죽어가고 있는데, 내가 가진 물을 안 주겠습니까. 지금 이상한 신흥종교집단 사람이나, 하물며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내 눈 앞에서 배가 고파서 죽어가고 있는데, 내가 가진 빵을 안 나누어 주겠습니까.

여러분, 아무리 밉더라도 일단 살려놓고 봐야지요. 그래야 전도를 하든 화해를 하든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제대로 예수님을 모르는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 대하여, 하물며 기존 교회를 공격하기도 하는 나라나 신흥종교집단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애통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올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전도하는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빚진 자로서의 역할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희생에 대하여 애통하는 사람, 구원 받지 못한 이웃에 대하여 애통하는 사람을 주님께서는 위로해주십니다. 치유해 주십니다.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기도에 응답해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주님이 원하시는 진정으로 애통하는 사람이 되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와 치유와 문제 해결과 기도 응답과 축복을 넘치도록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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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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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1회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 1 - 빈(貧)
2020년 2월 1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マタイの福音書 5章3節
“心の貧しい者は幸いです。天の御国はその人たちのものだ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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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 主が望まれる人 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오늘부터 여덟 번에 걸쳐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의 첫 번째 시간으로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주보에는 한자 한 글자. ‘빈’이라고 적어놓았습니다.

이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7장 27절까지의 말씀을 이른바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이 산상수훈은 여덟 가지의 복 있는 사람, 이 또한 이른바 <팔복>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게 되는데, 이 여덟 가지의 말씀을 우리가 이해함으로써 우리에게 약속된 축복을 모두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빈, 이고 그 다음에는 悲, 柔, 渴, 憐, 清, 和, 害라는 식으로 총 여덟 번에 걸쳐서 말씀을 전해드릴 예정입니다. 물론 계획은 이렇게 잡고 있기는 하지만, 또 마음이 동해서 다른 말씀이 그 사이에 들어갈 수는 있겠습니다. 그러나 일단 지금으로서는 이와 같은 순서로 말씀을 전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팔복에 관한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간단히 서론적인 말씀부터 드리고자 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복음서 중에서도 상당히 긴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이 말씀의 내용을 보면 참으로 놀라운 내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들은 자주 들어보신 적이 있어서 그리 새롭게 느껴지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만, 당시 성경은 구약밖에 몰랐던 백성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너무나도 새롭게, 너무나도 놀랍게 들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제부터 하실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디일까요. 이는 바로 이 말씀을 시작하시기 전의 모습을 기록한 마태복음 5장 1절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절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その群衆を見て、イエスは山に登られた。そして腰を下ろされると、みもとに弟子たちが来た。

이 구절을 보시면 이제부터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으시지요?

예, 알고 있습니다. 감이 잘 안 오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농담으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바로 이 구절이야말로 이제부터 예수님께서 하실 말씀에 대해서 얼마나 무게를 두고 계신지를 알 수 있는 결정적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후인 신약시대에 있어서의 핵심이라고 하면 복음이라고 할 수 있는 데에 반해, 구약시대의 핵심이라고 한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선포하시는데, 처음 등장하는 곳이 출애굽기 20장에서 무려 31장까지 이어집니다. 여기에는 다양한 내용들이 포함되는데 그 중에서 핵심은 아무래도 십계명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출애굽기 20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도 십계명에 대해서부터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앞에서 말씀을 시작하기 전의 장면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모습을 확인하실 수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19장 16절~21절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16.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17.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서 있는데
18.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19.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20.여호와께서 시내 산 곧 그 산 꼭대기에 강림하시고 모세를 그리로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가매
2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경고하라 백성이 밀고 들어와 나 여호와에게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三日目の朝、雷鳴と稲妻と厚い雲が山の上にあって、角笛の音が非常に高く鳴り響いたので、宿営の中の民はみな震え上がった。
モーセは、神に会わせようと、民を宿営から連れ出した。彼らは山のふもとに立った。
シナイ山は全山(ぜんざん)が煙っていた。主が火の中にあって、山の上に降りて来られたからである。煙は、かまどの煙のように立ち上り、山全体 が激しく震えた。
角笛の音がいよいよ高くなる中、モーセは語り、神は声を出して彼に答えられた。
主はシナイ山の頂に降りて来られた。主がモーセを山の頂に呼ばれたので、モーセは登って行った。
主はモーセに言われた。「下って行って、民に警告せよ。彼らが見ようとして主の方に押し破って来て、多くの者が滅びることのないように。

자, 눈치 채셨나요?

여기서 특히 출애굽기 19장 20절과 20장 1절을 보시겠습니다.


먼저 출애굽기 19장 20절
“20.여호와께서 시내 산 곧 그 산 꼭대기에 강림하시고 모세를 그리로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가매”

主はシナイ山の頂に降りて来られた。主がモーセを山の頂に呼ばれたので、モーセは登って行った。

다음으로 출애굽기 20장 1절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それから神はこれらのことばを、ことごとく告げて仰せられた。

그리고 다시 마태복음으로 돌아와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시기 위해서 어떻게 하셨다고요.?

마태복음 5장 1절~2절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その群衆を見て、イエスは山に登られた。そして腰を下ろされると、みもとに弟子たちが来た。
そこでイエスは口を開き、彼らに教え始められた。

어떻습니까. 마치 구약에서 하나님이 율법을 말씀하시기 전에 시내 산에 내려오셨던 모습과 똑같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이와 같은 기록은 어쩌다 보니 우연히 일어났다거나, 하물며 예수님이 자신을 크게 보이시려고 하나님을 일부러 흉내 내서 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지를 나타낸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잠시 여기서 오늘의 문제를 하나 낼까 합니다. 어떤 회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학생이 이제 학교를 졸업하고 그 회사에 들어가고 싶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 회사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오늘은 여러분의 선택의 폭을 좀 넓혀 드리기 위해서 선택지를 3개 준비해보았습니다. 자, 그 회사에 어떻게 하면 들어갈 수 있을까요. 1번 학교 다닐 때 무조건 공부를 열심히 한다. 2번 학교 다닐 때 무조건 달리기를 열심히 한다. 3번 기타.

예, 이건 제 비밀입니다만, 제가 드리는 질문의 선택지 중에서 <기타>가 있으면, 대부분 그게 답입니다. 다만 <기타>를 선택하셨다면 거기에 맞는 자신의 생각을 말씀 하셔야 돼요.

이번 질문도 정답은 3번 기타입니다. 그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조건 공부만 열심히 해서도 안 되고요, 무조건 달리기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 회사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이 비결만 잘 알면 아무리 들어가기 힘든 회사라 하더라도 들어갈 수 있으니까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정답은 바로 그 회사에서 가장 높은 사람 마음에 들면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신입사원 채용에 대해서 그 회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정한 규정에 맞기만 하면 아무리 들어가기 힘든 회사라 하더라도 틀림없이 합격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생을 마치고 어디로 가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반드시 하늘나라 천국으로 들어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냐 하면, 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에서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규정, 예수님께서 정해 놓으신 규정에 맞기만 하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오늘부터 공부하게 될 바로 이 팔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이겠습니까.

오늘은 우선 첫 시간이니까 팔복이 기록된 부분을 모두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3절부터 12절까지입니다.
“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心の貧しい者は幸いです。天の御国はその人たちのものだからです。
悲しむ者は幸いです。その人たちは慰められるからです。
柔和な者は幸いです。その人たちは地を受け継ぐからです。
義に飢え渇く者は幸いです。その人たちは満ち足りるからです。
あわれみ深い者は幸いです。その人たちはあわれみを受けるからです。
心のきよい者は幸いです。その人たちは神を見るからです。
平和をつくる者は幸いです。その人たちは神の子どもと呼ばれるからです。
義のために迫害されている者は幸いです。天の御国はその人たちのものだからです。
わたしのために人々があなたがたをののしり、迫害し、ありもしないことで悪口を浴びせるとき、あなたがたは幸いです。
喜びなさい。大いに喜びなさい。天においてあなたがたの報いは大きいのですから。あなたがたより前にいた預言者たちを、人々は同じように迫害したのです。

어떻습니까. 어렵게 느껴지시나요? 괜찮습니다. 우리 하나하나 차근차근 배워나가면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이 말씀들을 가슴에 새기고,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모두가 천국에 들어가실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인 마태복음 5장 3절만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心の貧しい者は幸いです。天の御国はその人たちのものだからです。

여기서 ‘가난하다’는 것은 단순히 돈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구는 예수님을 올바로 믿으려면 돈이 없어야 한다고 해요. 하지만 이는 옳지 않습니다. 경제적인 가난은 이는 축복이 아닙니다. 아니, 재물이 있어야 하나님을 섬길 수도 있고, 교회를 섬길 수도 있고 이웃도 섬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선 무엇보다도 재물이 없다면 십일조, 감사헌금, 주일헌금을 어떻게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야고보서 2장을 봅니다.


야고보서 2장 15절~17절
“15.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兄弟か姉妹に着る物がなく、毎日の食べ物にも事欠いているようなときに、
あなたがたのうちのだれかが、その人たちに、「安心して行きなさい。温まりなさい。満腹になるまで食べなさい」と言っても、からだに必要な物を与えなければ、何の役に 立つでしょう。
同じように、信仰も行いが伴わないなら、それだけでは死んだものです。

이처럼 이웃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그냥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도움이 되는 행함을 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시고 계신데,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지 도울 수 있는 것이지, 조금 극단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지금 나 자신이나 우리 가족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이웃을 위해서 도움을 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물론 옳지 않는 방법으로 돈을 번다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정말로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어떤 시련을 특별히 허락하신 경우가 아니라면, 일반적으로 가난이 아닌 풍요로움이야말로 축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가난하다는 것은 경제적인 문제가 아닌 영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심령이 가난하다(心の貧しい者)’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제가 예전에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잠시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만, 거긴 정말 사막 한 가운데에 있는 도시입니다. 일본의 동경이나 우리 군마현 같은 경우를 본다면 일반적으로 건조주의보가 발생하는 것은 습도가 대략 25프로~30프로 정도라고 알고 있습니다. 서울의 경우를 보더라도 대략 비슷할 것입니다. 그런데 라스베가스의 경우를 보면 여름에는 습도가 어떻게 되냐 하면, 한 자리 수까지 떨어집니다. 그리고 기온은 40도를 넘어가지요. 그러니까. 이건 덥다기보다는 뜨겁다고 하는 듯한, 마치 드라이 사우나에 들어간 듯한 느낌이라고 하면 감이 오지 않을까 합니다.

거기는 아무래도 세계적인 관광지이다 보니까 한국에서 오신 관광객들도 만날 때가 있는데, 여름에 오시는 관광객들을 가끔 보면 머리가 아프다고 하시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두통약도 먹고 했는데도 이 아픈 것이 낫지 않는다고 호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조금 살다 보면 이 원인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해요. 몸 속에 수분이 모자라서 그러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럴 경우에는 물을 많이 마시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면 대부분 또 하시는 말씀이 뭐냐 하면, 목이 안 마르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럼 저는 또 말씀을 드리지요. 그래도 마셔야 합니다. 물을 마시고 싶지 않아도 제 말을 믿고 한 번 벌컥벌컥 마셔보라고 말씀을 드려요. 그러면 이제 고개를 갸우뚱 거리면서 마시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되냐 하면 조금 있으면 정말 머리가 안 아파집니다. 참 신기하지요.

요즘 보면 워낙 날씨가 따뜻해져서 아직 2월인데도 불구하고 얼마 전에는 기온이 17~18도까지 올라가고 그러더라구요? 며칠 전에 뉴스를 보니까 남극이 한 때 기온이 18도까지 올라갔대나요? 도대체 세계 기온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뭐 이러다 보면 금방 더워질 것 같습니다.


여름에 특히 야외에서 활동을 하다 보면 갈증이 나지요. 이는 몸이 물을 많이 필요로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물을 많이 마시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라스베가스에서는 여전히 똑같이 몸이 물을 필요로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갈증을 느끼지 않았던 것일까요.

이 또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서울이나 동경이나, 우리가 살고 있는 군마의 경우를 보면 여름에 바깥에서 운동을 하거나 활동을 하다 보면 어떻게 됩니까. 금방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집니다. 옷이 땀으로 범벅이 돼요. 그러면 이걸 보면 아, 지금 내 몸에서 물이 많이 빠져나가고 있구나 하는 것을 눈으로도 느낄 수가 있지요. 그러면 야, 이거 이대로 있다가는 안 되겠다. 어서 물을 마셔야겠다…….이런 식으로 몸이 반응을 하게 됩니다.

반면에 라스베가스 같은 경우는 어떤가 하면, 거긴 바깥에 있으면 기온이 여기보다 훨씬 더운데도 피부가 뽀송뽀송 합니다. 전혀 땀이 나지 않아요. 그렇다면 몸에서 수분이 안 나가고 있는 건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땀을 무척이나 많이 흘리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자기가 느끼지는 못해요.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워낙 습도가 낮다 보니까 땀을 아무리 많이 흘려도 곧바로 증발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깥에 있으면 아무리 움직여도 땀 범벅이 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호텔이나 관광시설 같은 곳에 들어가면, 또 냉방은 기가 막힙니다. 그러니까 바깥에 있건 안에 있건 땀을 흘리는 것을 느끼지 못해요. 그러니까 우리 몸도 갈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떻다고요? 예, 몸 안에서 수분이 엄청난 속도로 빠져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물을 안 마시니까 머리가 아파지고 몸에 이상이 오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내가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속해서 물을 안 마시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과는 뻔합니다. 몸에 심각한 이상이 초래되거나, 더 심해지면 생명의 위험까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운전하게 되면, 앞에 여러 가지 미터기가 있지요. 그 중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속도계도 중요하고, RPM이라고 하죠? 엔진의 분당회전수를 나타내는 회전계도 있습니다만, 뭐, 정말 엔진에 이상이 없는 게 아니라면 이 RPM 미터기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RPM에 나타날 정도로 엔진에 이상이 있다면, 그 미터기를 보기 전에 이미 소리로도 이상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또한 속도계가 만약에 망가졌다 하더라도 뭐, 빨간 신호 때 서고, 파란 신호 때 가고, 내 주위의 다른 차들과 비슷한 속도로 달리면 큰 문제는 없겠지요.

엔진오일도 중요합니다만, 제 차 같은 경우를 보면, 어느 날 딱 엔진을 걸고 운전대를 잡으면, 아, 엔진오일을 갈 때가 되었구나 하는 감이 옵니다. 그리고 그 메인터넌스 수첩을 확인해보면 거의 정확하게 맞아요.

하지만 아무리 노련해도 눈으로 밖에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기름이 얼마나 들어 있냐 하는 것이지요. 뭐, 정말 탁월한 청각을 가진 분들이라면 또 모를까,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소리만 듣고도 아, 기름을 넣을 때가 되었구나 하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건 제가 직접 운전할 때가 아니었는데, 어떤 분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는데, 이렇게 슬쩍 보니까 휘발유 미터기 바늘이 저 밑에 닿았는데도 아직 괜찮다는 거예요. 그래서 뭐, 저보다 운전경력도 길고 연배도 위이고 해서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조금 더 가니까 어떻게 됐겠어요. 그냥 길 한 가운데서 차가 서버리고 말았습니다. 아, 그때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몰라요.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합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한다면 힘이 부족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는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자기 스스로가 심령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 즉, <자신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고 하여야 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자전거나 자동차 운전을 잘 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어떤 사람을 떠올리십니까. 자전거는 두 손 놓고 타는 사람이요? 자동차는 한 손 만으로도 익숙하게 운전하는 사람이요?

그런데 가끔 텔레비전에서 하는 자전거나 자동차 경기를 보십시오. 예를 들어서 그런 세계적인 대회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정말 자전거나 자동차를 잘 타는 사람이겠지요? 그러면 그 사람들이 대회에서 경기를 할 때에 손을 놓고 타요? 아닙니다. 두 손으로 핸들을 꽉 잡고 타지요.

세계적인 등산가의 경우를 보면, 그 사람이 아무리 산을 잘 타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경험이 많고 능숙한 등산가라 하더라도, 암벽을 타는데 안전장치를 안 하고 타나요? 몇 천 미터 산을 올라가는데 그냥 대충 운동화만 신고 올라가나요? 아닙니다. 철저하게 안전장치를 하고, 그리고 등산장비들도 완벽하게 갖추고 산을 오릅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음 생활은 어떻습니까. 아, 요즘 보니까 이제 이만하면 내 힘만으로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제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더라도, 이제 내 힘과 능력만으로도 잘 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져요? 이게 믿음이 좋은 건가요? 아닙니다.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그것은 마치 내가 땀을 흘리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다고 해서 물을 안 마시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나 이제 운전 좀 할 줄 안다고 자전거나 자동차 핸들을 놓고 운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나 이제 산 좀 타봤다고, 안전장치도 없이, 제대로 된 장비도 없이 에베레스트나 히말라야에 오르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란, 그런 건조한 곳에 있으면 갈증을 느끼지 않더라도 규칙적으로 물을 마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운전을 잘 하는 사람이란, 핸들을 놓고 운전하는 것이 아니라 핸들을 단단히 잡고 운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산을 잘 타는 사람이란, 안전장치나 장비 없이 산을 타는 것이 아니라, 안전장치나 장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좋은 사람이란 하나님 없이 예수님 없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는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앞서 제가 이 팔복이라고 하는 말씀을 입사시험에 비유를 했습니다. 요즘은 입사시험이 몇 차까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를 알기 쉽게 본다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8차 시험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모든 시험이 1차 시험에 합격을 해야지만 2차를 볼 수가 있고, 2차를 합격해야지만 그 다음 시험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지 않는다면 2차도 없고 3차도 없습니다. 이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야지만 다음 기회도 주어지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가슴 깊이 새겨야 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 힘만으로는 안 됩니다. 내 능력만으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를 도와 주셔야만 합니다. 제게 능력을 주셔야만 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心の貧しい者は幸いです。天の御国はその人たちのものだからです。

심령이 가난한 자는 그럼 무엇을 할 수 있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천국을 차지할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어떤 곳이 천국입니까?

누가복음 17장 20절~21절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パリサイ人たちが、神の国はいつ来るのかと尋ねたとき、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神の国は、目に見える形で来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
『見よ、ここだ』とか、『あそこだ』とか言えるよう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見なさい。神の国はあなたがたのただ中にあるのです。」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안에 주님께서 계시면 우리 마음이 바로 하나님 나라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 요즘 왠지 보면 하나님 없어도 될 것 같아요? 예수님의 도움 없이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바로 그 때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할 때이고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로 그 때가 진정으로 예배가 필요하고, 진정으로 찬양이 필요하고, 진정으로 감사가 필요하고, 진정으로 은혜가 필요하고, 진정으로 기도가 필요한 때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언제 어디서 어떤 때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고 예수님의 도움을 구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천국을 차지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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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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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0회 의지해야 할 지혜와 능력
2020년 2월 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2절~25절
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第一コリント人への手紙 1章22節~25節
ユダヤ人はしるしを要求し、ギリシア人は知恵を追求します。
しかし、私たちは十字架につけられたキリストを宣べ伝えます。ユダヤ人にとってはつまずき、異邦人にとっては愚かなことですが、
ユダヤ人であってもギリシア人であっても、召された者たちにとっては、神の力、神の知恵であるキリストです。
神の愚かさは人よりも賢く、神の弱さは人よりも強い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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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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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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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의지해야 할 지혜와 능력” 頼るべき知恵と力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2월 4일이 절기상으로 입춘이었습니다만, 그 날 아침이 되자, 드디어 시작 되었습니다. 바로 꽃가루 알러지 증상입니다. 절기에 맞게 꽃가루가 날리기 시작한 것인지, 아니면 절기에 맞게 제 몸이 반응하기 시작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전에도 좀 코가 근질근질 거리기 시작했었거든요. 그래서 감기기운인가 했었는데, 아, 이제 확신이 왔습니다. 틀림없어요. 바로 그 증상이에요.

꽃가루 알러지를 앓기 시작한 게 제가 2015년 3월 일본에 오면서부터인데, 그러니까 이제 꽃가루 알러지도 5년 차가 되는 셈이지요. 그러다 보니 이제 좀 감기와 꽃가루 알러지의 분별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본래 코가 좀 신통치 않아서 맨날 코가 막히고 찌륵찌륵 거리기도 합니다만, 이 꽃가루 알러지 때는 좀 달라요. 뭐가 다르냐 하면 바로 그 냄새가 납니다.

이 냄새가 꽃가루 자체의 냄새인지 아니면 제 코 안에서 꽃가루 알러지 반응이 일어남으로 인한 냄새인지, 아마도 후자가 아닐까 합니다만, 아무튼 그 꽃가루 알러지 증세 특유의 냄새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예년 같았으면 그래도 좀 더 버텨보기도 했겠습니다만, 특히 지난 해에는 참 고생이 심했기 때문에 올해에는 좀 겁이 나서, 비교적 일찍 병원을 찾고는 처방을 받았습니다.

그 알러지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몸에 어떤 안 좋은 균이나 물질 같은 것이 들어왔을 때, 우리 몸은 우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이런 것들을 몸 바깥으로 몰아내려고 하는 증상, 말하자면 대단히 뛰어난 작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기침이나 재채기, 콧물 같은 것이 막 나오는 것도, 몸 속에 들어온 안 좋은 것을 바깥으로 내보내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알러지라고 하면 꽃가루나 아니면 특정 약에 대한 알러지도 있겠습니다만, 음식에 대한 알러지도 상당히 많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달걀 알러지나 우유 알러지 같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달걀이나 우유 같은 것은 본래 사람한테 있어서 해로운 게 아니지요. 해롭기는커녕 열반적으로 영양가가 높은 음식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 바로 달걀이나 우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한테 있어서는 이것이 전혀 해롭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해로운 물질로 몸이 판단해서 막 바깥으로 내보내려고 하는 증상이 일어나기도 하고, 또 그러다 보니 몸 여기저기에 이상이 일어나기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믿음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기 쉬운가요? 믿음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서 전혀 불편함이 없고,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항상 은혜와 감사와 찬송이 넘치나요? 그렇다면 물론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하지만 어떨 때보면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대단히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일요일에, 정말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꿀맛 같은 달콤한 일요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교회에 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예배만 드리나요? 노는 날에 그렇게 수고를 했으면 돈을 받아도 모자랄 판에, 십일조, 감사헌금, 주일헌금까지 내야 합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제가 한국에서 찬양대를 섬길 때에는 예배 시작 몇 시간 전까지 가서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린 다음에는 또 연습을 해야 했고, 또 주일만이 아니라 금요일에도 나와서 연습을 해야 해요. 가끔 보면 어떤 분은 또 찬양대를 하면 사례비를 받는 줄 아는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물론 지휘자님이나 악기를 연주하시는 분들에게는 사례비가 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일반 대원들한테 사례비는 무슨 사례비에요. 오히려 매달 운영회비를 내면서 섬깁니다.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교회를 보면 그것만이 아니지요. 구역 모임도 있고 여러 가지 봉사활동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게 정상이에요? 적어도 인간적인 생각으로 본다면 정상이 아닙니다. 남들은 불금이다 주말이다 일요일이다 하면서 재미있게 노는데, 이건 뭐 돈 바쳐, 시간 바쳐, 수고도 바치고, 정말 해야 할 일들이 이만 저만이 아니지요.

누구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지요. 아~ 그래도 기쁨으로 섬기고 은혜로 섬기고 감사로 섬기고……아, 물론 그래요. 좋은 말이지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어떻습니까. 교회 모임이라고 해서, 다툼이 없어요? 안 좋은 일들이 없어요? 없긴요. 왜 없습니까. 성가대도 그렇고 구역도 그렇고 어느 조직이든지 간에 크고 작은 다툼은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교회가 거룩해요? 거룩한 것은 하나님이 거룩한 것이죠. 예수님이 거룩한 것이죠. 성령님이 거룩한 것이죠. 조금만 알고 보면 사실 목사나 장로님이나 권사님이나 집사님이나 평신도나, 그리고 주일학교 아이들이나 다 똑같습니다. 굳이 따지고 본다면 주일학교 유년부 아이들이 그나마 좀 나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저도 평신도 일 때 정말 교회에 가기 싫어질 때가 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가는 것은 고사하고, 정말 세상에 살다 보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여러 모로 좀 불편할 때도 있었습니다.

정말 참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면 참 쉬운데, 눈 딱 감고 내 생각대로 하면 더 잘 될 것 같은데, 여러분은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 같은 경우에도 보면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요즘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안 믿었다면 어떤 인생을 보내고 있을까. 어쩌면 지금보다도 더 편안한 생활을 보내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오히려 내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질 때도 있겠습니다만, 이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알러지 증상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해요. 너무나도 좋은 것이에요. 그냥 좋은 것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한 번 보시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2절~25절
“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ユダヤ人はしるしを要求し、ギリシア人は知恵を追求します。
しかし、私たちは十字架につけられたキリストを宣べ伝えます。ユダヤ人にとってはつまずき、異邦人にとっては愚かなことですが、
ユダヤ人であってもギリシア人であっても、召された者たちにとっては、神の力、神の知恵であるキリストです。
神の愚かさは人よりも賢く、神の弱さは人よりも強いからです。


오늘 말씀 고린도전서 1장 22절에 보면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는다고 기록합니다. 이는 뭐냐 하면 유대인들은 무엇이든지 놀라운 일, 신기한 일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들은 성경에 많이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12장 38절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そのとき、律法学者、パリサイ人のうちの何人かがイエスに「先生、あなたからしるしを見せていただきたい」と言った。

마태복음 16장 1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パリサイ人たちやサドカイ人たちが、イエスを試そうと近づいて来て、天からのしるしを見せてほしいと求めた。

누가복음 11장 16절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니”

また、ほかの者たちはイエスを試みようとして、天からのしるしを要求した。

이게 뭐겠습니까.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야? 그럼 뭐 신기한 걸 보여줘 봐. 그럼 내가 믿을게. 이거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유대인들을 탓할 수만은 없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적혀 있었던 내용이지만, 그 때까지 아무리 성경을 열심히 연구한 율법학자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가 누추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는, 우리 인간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하여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달리신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지 못했던 것이지요.

물론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표적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출애굽기만 보더라도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까. 홍해를 가르시기도 했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40년 동안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사막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도 하셨습니다. 그 외에도 성경에 보면 수많은 하나님의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기적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야, 난 이렇게 신기한 일을 행할 수 있어. 그러니까 나를 믿어.”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 그러셨던 것인가요? 아닙니다. 그런 것은 싸구려 점쟁이나 사이비 종교집단들이 하는 속임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표적을 행하신 이유는 바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나타내시기 위해서 홍해를 가르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해주신 것입니다. 만나를 내려 주셔서 먹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표적은 모두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완성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1960년대, 당시 미국과 소련은 우주개발에 대한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1962년 미국 케네디 대통령은 텍사스 라이스 대학에서의 연설에서, 1960년대가 끝나기 전에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고 무사히 지구로 귀환시키는 목표를 달성할 것이라는 유명한 연설을 합니다.

불행히도 그는 그 이듬해인 1963년에 흉탄에 맞아 쓰러지고 맙니다만, 그러나 미국은 그의 약속대로 1960년대가 끝나기 전인 1969년 7월에 유인 달 착륙을 실행하고, 그리고 모두를 무사히 지구로 귀환시키는 놀라운 일을 달성하게 됩니다.

1960년대라고 하면 정말 옛날 일입니다. 그 로켓에는 컴퓨터가 탑재되어 있었습니다만, 일반 사람들은 컴퓨터라는 게 뭔지도 모를 시대였지요. 그 때 당시 아폴로 11호에 탑재되어 있던 컴퓨터 성능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스마트폰보다도 훨씬 떨어지는 정도의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그 정도 성능의 컴퓨터를 가지고 달에 무사히 착륙하고 돌아왔다는 것은 정말 기적이라고 하는 어떤 전문가의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도 이 점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혹이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여러분들 중에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정말 인류가 달에 간 게 맞냐는 거예요. 그러면서 어떤 사람들은, 사실 그 때 달에 갔다는 것은 완전히 NASA, 미 항공우주국의 거짓말이고, 달에 착륙한 사진이나 영상은 어디 스튜디오에서 찍은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니라, NASA에서 찍은 이런 영상, 저런 사진은 지구 밖 생물체인데, NASA는 이걸 숨기고 있다……이런 음모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NASA는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해명을 하고 설명도 하고 그래왔습니다만, 2001년부터는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한 반박을 모두 중단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아무리 증거를 제시하고 자세하게 설명을 해도 안 믿을 사람들은 안 믿는다는 거죠.

지금까지 사람이 달에 착륙한 것은 1969년 아폴로 11호만이 아닙니다. 1969년 11월에 12호, 1971년 1월에 14호, 1971년 7월에 15호, 1972년 4월에 16호, 1972년 12월에 17호까지 총 6번이에요. 6번이나 사람은 달에 착륙을 하고 여러 조사들도 하고 돌멩이를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50년 전에 사람이 달에 몇 번 씩이나 갔다 왔다고 하는 사실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16장 4절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悪い、姦淫の時代はしるしを求めます。しかし、ヨナのしるしのほかには、しるしは与えられません。」こうしてイエスは彼らを残して去って行かれた。

너희들은 무슨 표적을 본다 하더라도 어차피 믿지를 못해. 그러니까 요나의 표적. 즉 이는 큰 물고기에 삼켜졌다가 사흘 만에 나온 요나처럼 내가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는 표적 밖에는 보여줄 게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야말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해결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예수님의 부활이야말로 우리의 죄 사함을 증명해주시고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해주시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를 모르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전하면, 제대로 믿을 생각도 없으면서 맨날 표적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면 대단히 불편해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 자신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예수님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로 받아들이게 되면, 유대인 자신들은 구세주를 자기들 손으로 죽인 것이 되니 얼마나 받아들이기를 꺼려하겠습니까.

그렇다면 헬라인은 어땠냐 하면, 헬라인은 요즘 말로 하자면 그리스인이지요. 현대 학문의 출발점이라고 하면 바로 그리스를 꼽을 수 있을 만큼, 그리스는 학문이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당시 그리스에의 필수학문이라고 하면 무엇이었을까요. 이렇게 질문을 하면 <철학>이라고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동양에서 4서라고 하면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이라고 하겠습니다만, 서양에서의 4과라고 하면 천문학과 수론, 음악, 기하학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문법과 수사학과 변증론이 더해지고 해서 7과가 되는 것인데, 이처럼 그리스는 세상적인 학문이 상당히 발달한 나라였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한 마디로 수학……이라고 하면 무슨 문제를 수학 공식대로 풀어서 딱 답을 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어떤 수학자의 말에 의하면 그건 수학이 아니라 <산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수학은 뭐냐 하면 그것은 바로 <증명>이라고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중학교 때도 배우잖아요? 두 삼각형이 합동인 것을 증명하라, 닮은꼴인 것을 증명하라……그것이 바로 증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증명이 바로 이 그리스에서 발달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흥미로운데, 당시 그리스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따지기를 상당히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완벽한 논리가 아니라면 좀처럼 납득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바로 이 증명, 말하자면 수학이나 논리학이 발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적으로 보면 참 머리가 좋았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이렇게 논리석인 사람들한테,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시키냐 하는 것이죠. 이와 같이 세상 학문에 집착하는 사람들한테는 아무리 하나님의 이적을 보인다 한들, 마치 NASA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 중에서 고린도전서 1장 24절에는 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장 24절
“24.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ユダヤ人であってもギリシア人であっても、召された者たちにとっては、神の力、神の知恵であるキリストです。

여러분, 우리가 지금 예수남을 믿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머리 속으로 계산을 해보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이 정답인 것 같아요? 국영수를 공부해보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라고 하는 말씀이 믿어지기 시작했어요? 아닙니다. 이는 세상적인 지식이나 학문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
“44.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わたしを遣わされた父が引き寄せてくださらなければ、だれもわたしのもとに来ることはできません。わたしはその人を終わりの日によみがえらせます。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이유는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셨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표적을 보여라, 기적을 행하라. 논리로 증명하라, 이치로 설명하라고 하지만, 세상적인 감정이나 지식에 얽매이게 되면 아무리 놀라운 기적을 보여도, 아무리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설명을 해도 안 받아들이는 사람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유대인이건 헬라인이건 동양인이건 서양인이건 간에 예수님의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세상적인 잣대로 생각한다면 이는 우리 몸 안에서 알러지 반응이 일어납니다. 자꾸 이를 거부하려고 해요. 그러나 복음을 세상적으로가 아닌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에게 진정한 지혜와 진정한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마지막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5절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神の愚かさは人よりも賢く、神の弱さは人よりも強いからです。

이 세상에서 아무리 지혜롭다 하더라도 하나님보다 지혜로울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아무리 힘이 강하다 하더라도 하나님보다 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지혜롭고 누구보다 강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주십니다. 우리를 사랑해주십니다. 우리를 책임져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8장 37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8장 37절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しかし、これらすべてにおいても、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方によって、私たちは圧倒的な勝利者です。

우리 모두 아무리 어려운 일이 우리 앞에 막아 선다 하더라도, 모든 의심을 떨쳐 버리고,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세상과 싸워 넉넉히 이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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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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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9회 지혜 있는 자의 대비
2020년 2월 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전도서 7장 4절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伝道者の書 7章4節
“知恵のある者の心は喪中の家にあり、愚かな者の心は楽しみの家に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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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지혜 있는 자의 대비” 知恵ある者の備え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금 전세계는 이른바 신종 폐렴 때문에 떨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호주 산불 소식이 계속 보도되더니만, 지금은 온통 신종 폐렴에 대한 뉴스 뿐입니다.

하기야 그렇겠지요. 아무리 사상 유래 없는 화제로 인해서 그 넓은 숲이 불에 타버리고 수많은 동물들이 희생된다 하더라도, 무엇보다 사람이 먼저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어느 정도 안정 되어야 동물이고 자연이고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제 당장 사람들 자신이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는데, 그런 와중에 코알라나 캥거루한테까지 신경을 쓸 여유는 없어서인지도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처럼 신종 폐렴을 두려워 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책임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을 지키고, 그리고 자신의 국민을 지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만,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만, 이처럼 신종 폐렴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나날이 증가하는 확진자 수와 함께, 이 또한 나날이 늘어가는 사망자 수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비단 신종 폐렴 때문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 합니다. 몸 어딘가가 좀 안 좋아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갑자기 정밀검사를 좀 해보자고 해요. 그래서 검사를 했더니 의사가 하는 말이, 3개월 남았습니다. 라고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무리 믿음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할렐루야” 할 사람은 없겠이요.

자기 자신은 물론이지만 내 주변 사람의 죽음은 이는 슬픈 일임이 분명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슬픔일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 말씀은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과 그보다 조금 앞부분에 나와 있는 구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말씀이죠. 전도서 7장 4절입니다.

전도서 7장 4절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伝道者の書 7章4節
知恵のある者の心は喪中の家にあり、愚かな者の心は楽しみの家にある。

그리고 조금 앞에 있는 전도서 7장 2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祝宴の家に行くよりは、喪中の家に行くほうがよい。そこには、すべての人の終わりがあり、生きている者がそれを心に留めるようになるからだ。

이 두 말씀을 함께 생각해 본다면,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지혜자의 마음이 바로 초상집에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믿음 안에 있어서 생각해 본다면,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끝이 아닌, 누구나가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같은 경우를 보면, 일상생활에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가깝게 느낄 기회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반면에 일본을 보면 일반 주택가 여기저기에도 자연스럽게 크고 작은 공동묘지가 있어서, 한국보다는 비교적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가깝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지만, 한국 사람이든 일본 사람이든 간에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두려운 것은 당연하겠지요. 자, 그렇다면 왜 죽음이 두렵겠습니까. 여기에는 물론 남겨진 가족이나 해야 할 일들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는 죽음을 염려하는 이유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두려워하는 이유는 아니겠지요.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아, 죽을 때는 아프거나 괴롭지 않을까 하는 부분이 있겠습니다만, 글쎄요, 저도 다행이 아직 죽음을 경험해보지 못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씀을 드릴 수는 없겠습니다만, 그런데 우리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하는 점은,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어야만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 있는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가, 아, 죽을 때 아플까 봐, 괴로울까 봐 두려워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 다른 데에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히브리서 9장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사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어야 한다고 하겠습니다.


요즘 일본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남성 만담 콤비가 있습니다. 지금 현재 나이가 30대 중반인데 이 사람들이 콤비를 맺은 게 2007년이라고 하니까 이제 12년이 지났는데, 지금까지 이 12년 동안, 말하자면 한 번도 떠 본적이 없는 사람들, 자기들 말에 의하면 주변 사람들한테서 한 번도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작년에 텔레비전에 출연한 것이 잠깐 나온 것을 포함하면 2~3번 정도 밖에 안 되고, 텔레비전에서 자신들의 공연을 한 것이 연말에 있었던 만담 대회 딱 한 번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있던 전국적인 만담 대회 M1 이라고 하는 큰 대회에서 결승에 진출을 하고, 뿐만 아니라 우승을 하는 바람에 이 사람들의 인생은 단 하루 밤 사이에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뭐 텔레비전 출연 요청이 전국 각지에서부터 몰려들어서, 지금은 거의 잠을 잘 새도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저도 이 사람들 공연을 본 적이 있는데, 참 재미있어요. 그 중의 대표적인 공연제목이 <시리얼>을 주제로 한 것입니다만, 잠깐 내용을 소개 하자면 이렇습니다.

아, 자기 어머니가 좋아하는 아침 식사가 있는데, 그게 뭔지 기억이 안 난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럼 그게 어떻게 생긴 음식이냐고 물으니까, 딱딱하고 달짝지근한데 우유를 부어서 먹는 음식이라는 거예요. 아, 그래? 그럼 그거 시리얼이네……라고 하니까, 상대방이 하는 말이, 자기도 시리얼인줄 알았는데, 어머니가 하는 말이, 자기 인생 마지막 식사로 먹어도 좋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래? 그러면 시리얼은 아니겠네……그러면서 하는 말이 인생 마지막 식사가 시리얼이라도 좋을 리가 없잖아. 시리얼은 아직 수명에 여유가 있기 때문에 먹을 수 있는 거야……뭐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그게 무슨 재미 있냐고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다만, 실제 내용을 보면 참 재미있어요.


뭐, 시리얼이 수명에 여유가 있어야 먹을 수 있는 음식인지 아닌지는 제쳐놓더라도, 우리고 열심히 공부도 하고, 학위나 자격증도 따고, 취직이나 사업을 해서 돈을 벌고 하는 것은 모두가 다 수명에 여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에요.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을 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이 오직 그것으로 채워지기만 하면 충분한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만 하면 우리는 언젠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 앞에 있는 심판대에 섰을 때 당당할 수가 있겠냐 하는 것입니다.

한국 같은 경우에는 어디 취직을 하려고 한다면 그 응시자격 중 하나에 대부분 “해외여행에 결격사유가 없는 자”라고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뭐, 그렇다고 꼭 여권을 가지고 있어야만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결격사유가 없으면 된다는 것인데, 그런데 회사에 다니고 있는데 어느 날 당장 급하게 중요한 해외파견업무가 생겼어요. 여기만 갔다 오면 정말 출세코스라고 할 수 있는데, 회사 사장님이 자기를 불러서 당장 출발할 수 있냐고 합니다. 그래서 언제 가야 합니까 하고 물으니까. 당장 내일이라도 출발해야 한다는 거예요.

자, 이는 정말 좋은 기회인데 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여권이 없어요. 요즘 같으면 신규 발급의 경우에 보면 한국은 2주 정도는 걸린다고 합니다. 일본도 신규 발급은 아무리 빨라도 1주 정도는 걸릴 거예요.

그것도 옛날에 비하면 무척 빨라진 편이죠. 옛날에는 신원조회다 뭐다 해서 몇 개월까지 걸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 제가 아직 여권이 없습니다. 오늘 신청하면 아무리 빨라도 1~2주 정도는 걸릴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사장님이 하시는 말씀이, 아, 그러면 어쩔 수 없네. 다른 사람을 보내야지…… 이렇게 될 수도 있는 노릇이지요.

해외파견이 아니라 해외여행이라 하더라도 가장 처음에 해놓아야 하는 것은 여권 문제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외국어를 잘한다 하더라도 이 여권이 없으면 출국 자체를 할 수도 없고, 출국을 했다 하더라도 입국을 할 수 있는 나라는 아무데도 없습니다. 해외에 간다고 한다면 이 여권이나 특히 비자 문제 같은 것은 제일 나중이 아닌 제일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언제 부르실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세상에는 미래의 일에 대해서 말해주겠다는 사람들은 많아요. 토정비결(おみくじ)이다 뭐다 해서 장래 일을 맞춘다고 하는데, 성경에는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전도서 8장 7절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何が起こるかを知っている者はいない。いつ起こるかを、だれも告げることはできない。

전도서 7장 14절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順境の日には幸いを味わい、逆境の日にはよく考えよ。これもあれも、神のなさること。後のことを人に分からせないためである。

성경에는 분명히 우리는 장래 일을 알지 못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알지 못해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알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알지 못하게 하셨느냐 하면,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병행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어, 왠지 일이 잘 풀려요. 만사형통이에요. 그런가 했더니 이제는 또 일이 잘 안 풀려요. 이를 병행하게 해서 장래에 정말 내가 잘 될 것인지 안 될 것인지를 사람 스스로의 힘으로는 알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서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하나님께서 장래 일을 알지 못하게 하셨다는데, 그걸 자기는 안다고 하는 사람은 뭐겠습니까. 그건 거짓말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래 일이 궁금하다고 말씀하신다면, 이제 새해도 되었으니 제가 특별히 오늘은 여러분께 여러분의 장래 일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뭐냐 하면, 간단합니다.

예수님을 의지하면 잘 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을 의지하면 잘 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 그것이 진리입니다. 그 외에 답은 없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항상 말씀을 드리는 것처럼,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지금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는데 내가 5분 뒤에 신호에 걸릴지 안 걸릴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언제 부르실지, 누구를 먼저 부르실지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주님 앞에 섰을 때,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기쁨으로 주님을 만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지만 두려움이 없을 수가 있을까요. 우리는 무슨 준비를 해야만 할까요.

여러분들도 경험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뭐, 공항에서 자기 나라에 들어갈 때에는 그런 걱정은 없겠습니다만, 남의 나라에 들어갈 때에는 입국심사를 할 때 긴장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가 여권은 물론이고 비자도 있고, 필요한 게 다 갖춰져 있다고 하면 긴장할 일도 없겠지요.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여권과 비자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얼마나 공부했는지, 어느 학교, 어느 직장에 다녔는지, 어떤 학위나 자격증을 땄는지, 얼마나 재산을 얼마나 모았는지,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물어보실까요?

예수님의 판단기준은 간단합니다. 바로, 성경 말씀을 얼마나 지켰느냐 입니다. 쉽죠? 어려우신가요? 성경말씀, 어떻습니까. 너무 두꺼운가요? 괜찮습니다. 확, 줄여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2장 40절에 보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律法と預言者の全体)”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すべての律法と預言者)” 이것이 곧 성경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무엇이겠습니까.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이 성경은 단 두 마디로 줄인다면,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요, 둘째는 이웃 사랑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 중 어느 하나만 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에요. 요즘은 비자 없이 입국할 수 있는 나라들도 많다고는 하지만, 비자가 필요한 나라에 들어가는데, 여권만 있고 비자가 없다거나, 또는 비자가 있는데 여권의 유효 기간이 끊겼어요. 그러면 어느 쪽이라 한다 하더라도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이처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따라서 저 사람은 하나님만 사랑하는 사람이다? 저 사람은 이웃만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는 올바른 표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만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요, 이웃만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은 이웃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해야 마땅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도 올바로 사랑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웃을 올바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올바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과 “말씀”과 “행함”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어떻게 믿어야만 합니까. 그 믿어야 하는 방법이 바로 성경에 적혀 있습니다. 아무리 자신은 믿음이 좋다고 우겨봤자 성경에서 벗어난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을 믿습니까. 예수님이 왜 우리의 구주가 되였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려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왜 그것을 믿을 수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에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유일하고도 완전한 하나님 말씀이신 성경에 적혀 있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제 우리에게 믿음이 있습니다.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를 성경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끝인가요? 사랑하는 사람한테 대해서, 분명 사랑하는 마음은 있어요.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아무 것도 안 해.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거기에는 행함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고린도후서 5장 10절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私たちはみな、善であれ悪であれ、それぞれ肉体においてした行いに応じて報いを受けるために、キリストのさばきの座の前に現れ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성경은 분명히 우리가 행한 것을 따라 받는다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전도서 7장 4절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伝道者の書 7章4節
知恵のある者の心は喪中の家にあり、愚かな者の心は楽しみの家にある。

아직도 제가 기억에 남는 것이 있습니다만, 제가 아직 학생시절 때, 뭐, 남자 혼자 사는데 제대로 해먹는 게 있나요. 지금은 그래도 학생식당 밥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는데, 저 때까지만 하더라도 저희 학교 식당이 뭐, 좀 글쎄요. 좋게 말하자면 비만을 방지할 수 있는 상당히 건강한 식단이었습니다. 그러던 상황에서 어느 한참 위 선배가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이제 집들이를 하신다고 해서 갔습니다. 그랬더니 거 참 좋더군요. 뭐가 좋냐 하면, 그 때 중국 음식을 배달을 해주었는데 이 음식이 끝없이 나와요. 그 때 신혼집 아파트니까 그리 넓은 편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을 합니다만, 거기에 제법 꽉 차는 인원수가 모였는데, 그런데도 먹어도 먹어도 음식이 끝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 때 저 혼자서 적게 잡아도 4~5인분은 먹은 것 같아요.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그 때 제가 한 말이 있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집들이만 같아라. 저는 집들이라고 하는 것을 그 때 처음 가봤는데, 집들이가 그렇게 좋은 것인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말이에요. 그런 집들이나 잔칫집 같은 곳 지혜가 필요해요? 아니에요. 그냥 나오는 음식 먹고 마시고 즐기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지혜자의 마음이 어디에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초상집에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다른 사람 만이 아니라 나도, 언젠가 주님께서 부르시는 때가 되면 이와 같이 주님 앞으로 떠나게 된다는 것을 알고 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진정한 지혜자의 마음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대비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믿음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말씀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고, 그리고 행함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해감으로 말미암아, 언제라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여권과 비자를 마음에 품고,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는 삶을 살아가는, 진정한 지혜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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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8회 믿음의 목표설정
2020년 1월 2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ヘブル人への手紙 12章2節
“信仰の創始者であり完成者であるイエスから、目を離さないでいなさい。この方は、ご自分の前に置かれた喜 びのために、辱めをものともせずに十字架を忍び、神の御座の右に着座された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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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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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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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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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믿음의 목표설정” 信仰の目標設定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과거에는 여러 가지 기계를 써야지만 되었던 것이 요즘은 하나의 기계로 해결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스마트폰이지요. 1990년대 중반에는 휴대폰, 그러니까 전화기를 가지고 다닌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대단히 편리했습니다. 춥거나 더운 날에 공중전화 앞에 줄을 서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지 전화를 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는 전화가 뭐예요.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전화나 카메라는 물론이고 인터넷까지도 되는 게 이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되었습니다. 인터넷만 연결되어 있다면 국제전화까지도 무료로 할 수 있으니 참 편리해졌지요.

녹음기 하나만 보더라도 성능이 참 좋습니다. 어렸을 때보면 카세트 테이프에 마이크를 연결해서 막 복잡한 절차를 했어야 했지만, 이제는 역시 이 폰 하나만으로 해결이 가능합니다. 몇 년 전에 새벽예배를 할 당시 녹음기를 써봤는데 참 깨끗하게 녹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이런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글은 녹음을 하는 기계와 사람의 귀를 비교한 글이었습니다만, 조금 소란스러운 지하철이나 번화가에 있을 때 옆 사람과의 대화 내용을 녹음할 수가 있냐 하는 것이죠. 그와 같은 환경에서 녹음기를 사용해보면 아무리 성능이 좋은 녹음기를 사용해도 여러 소리가 한꺼번에 녹음이 되기 때문에 옆 사람이 웬만큼 큰 소리로 말하지 않는 이상 무슨 내용인지 제대로 녹음이 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람의 귀는 아무리 소란스러운 지하철이나 번화가 같은 곳에서도 내 옆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할 때에는 작은 소리로 말을 해도 알아 들을 수가 있다는 것이에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사람의 귀는 똑같은 크기의 소리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듣고자 하는 소리만을 들을 수 있는 기능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귀는 단순한 소리의 크기를 넘어서, 소리의 취사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옆 사람의 목소리가 주변 소음에 비해 작다 하더라도, 내가 그 목소리를 들으려고 한다면 들린다고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이 내용이 떠올라서 잠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만, 아, 정말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이는 비단 사람의 귀에 국한된 능력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사람의 눈도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나 마지막 만찬 같은 그림을 보면, 이른바 원근법이라고 하지요? 평평한 곳에 그림을 그리지만 이를 먼 곳과 가까운 곳을 나타내서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그림을 보면 실제와는 조금 다르다는 점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멀리 있는 것과 가까이 있는 것, 모두가 아주 자세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때요? 가까이 있는 것은 자세히 보이고, 멀리 있는 것은 자세히 안 보여요? 아니요. 꼭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눈앞에 손바닥을 펼쳐보시면 아실 수 있겠지요. 손바닥을 펴서 본다면 자신의 손바닥은 자세히 보이지만 먼 곳에 있는 것은 자세히 안 보입니다. 하지만 손바닥을 편 채로 먼 곳을 한 번 보십시오, 그러면 오히려 가까이 있는 손바닥이 흐릿하게 보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귀로 들리는 청각만이 아니라 눈으로 보는 시각적이 부분에 있어서도 역시 사람은 취사선택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오늘 제가 한 가지 고백을 하려고 합니다. 이는 아직 제 아내에게도 말을 하지 않은 부분입니다만, 아, 그렇다고 뭐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긴장하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사실 지난 주 주말쯤, 그러니까 이제 1주일 이상이 지났지요. 그날 밤에 제가 꿈을 하나 꾸었습니다. 그런데 뭐, 무슨 꿈이라고까지 자세히 말씀 드리기는 좀 뭐합니다만, 그 꿈은 세상적으로 보면 완전히 그런 꿈이에요. 어떤 꿈이냐 하면, 이건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뭔가 큰 재물을 얻을 수 있는 꿈이었습니다.

그날 아침부터 제 심정은 어땠을까요. 이제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나겠구나 하는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도 이틀이 지나도 별로 그런 기미가 안 보여요.

자, 분명 저는 어떤 큰 재물을 얻을 만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예, 복권을 사야 하지요. 그렇잖아요? 제 생각이 이상해요? 아니요.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놀라운 꿈을 꾸었습니다. 그래서 복권을 샀는데, 아이구, 이게 1등을 맞아서 정말 꿈을 꾼 대로 큰 재물을 얻게 되었다고 칩니다.

그러면 좋은 거예요? 안 좋은 거예요? 예,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좋은 것이죠. 지금 우리 교회에서 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제가 매주 설교말씀을 따로 한국어와 일본어로 촬영을 하고 전세계에 메일을 보내드리고 있는데, 이 때 선교후원에 대한 당부말씀을 매번 드립니다만, 큰 재물을 얻을 수 있어서 생활이 안정된다면 무엇보다 이 돈 이야기를 좀 안 하고 싶어요. 정말 그야말로 순수하게 복음만 전하게 된다면 참 얼마나 거룩해 보이고 은혜롭게 보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 그런데 말입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생각이겠어요? 예, 간단합니다. 내가 복권을 사는 게 옳은 것일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내가 재물을 얻을 만한 놀라운 꿈을 꿨어요. 복권을 사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제가 어떤 사람한테 이와 같은 의논을 했다면,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아니, 뭐 복권이 비싼 것도 아니고, 몇 백 엔이면 살 수 있는데, 그냥 한 번 사봐……라고 하지 않겠어요?

그랬더니 제가 뭐, 1등이 아니더라도 그래도 꽤 괜찮은 돈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보았습니다. 뭐, 생각은 자유니까요. 하지만 말입니다. 우리 일생 중에서 대표적인 어려움 중 하나가 이 경제적인 어려움 아니겠습니까. 이는 어찌 보면 돈이 많은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대기업 사장님이라고 돈 걱정을 안 하시겠어요? 예를 들어서 매출 100억원을 달성했던 회사가 올해는 매출 50억원 밖에 달성하지 못했다면, 아무리 50억원이 큰 돈이라고는 하지만, 이게 보통 심각한 문제겠습니까. 역시 돈 걱정은 다들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인생에 있어서도 이번에 복권을 사서 재물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에 또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으리란 법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또다시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쳤을 때, 저는 어떤 생각을 할까요. 1번. 하나님 생각. 2번 복권 생각.

그리고 제가 이렇게 간증을 합니다. 여러분, 제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꿈을 보여주셨는데, 그게 정말 큰 재물이 들어올만한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복권을 샀더니 정말로 큰 재물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라고 간증을 했을 때, 이를 듣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요. 1번 하나님 생각. 2번 복권 생각.

여러분, 이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느냐 하는 것이죠.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게 아니라 복권한테 영광을 돌리는 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복권이 무엇이 되냐 하면, 그렇습니다. 우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사야 42장 8절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わたしは主、これがわたしの名。わたしは、わたしの栄光をほかの者に、わたしの栄誉を、刻んだ像どもに与えはしない。

이사야 48장 11절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わたしのため、わたしのために、わたしはこれを行う。どうしてわたしの名が汚されてよかろうか。わたしの栄光を、ほかの者に与えはしない。

여러분, 우상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로 향하는 우리의 마음을 도중에 가로채서 자신들이 가져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영광을 받기 원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마귀 사탄에 굴복해서 그 영광을 우상들에게 빼앗기게 된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복권을 산다는 것이 죄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저도 가끔 사본 적이 있었어요. 재미 삼아서 가끔 한 두 장 사는 게 무슨 죄를 짓는 것도 아니지요. 그것도 무슨 불법도 아닌 합법적인 것인데요.

다만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복권 몇 장 산다 안 산다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주님을 의지할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의지할 것인가 하는 선택을 해야 할 때가 대단히 많습니다만,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믿음이 있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적인 방법을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에 목사라고 하는 제가 복권을 사서 1등이 맞았어요. 그래서 간증을 하게 됩니다. 목사라고 하는 사람이 간증을 했더니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정상인데, 목사가 설교를 하고 났더니 복음이 아닌 복권을 사러 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를 어떻게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군사용어에 보면 lock on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미사일을 쏠 때 옛날에는 목표물한테 조준을 맞추고 쏘는 것이 끝이었습니다만, 이럴 때 문제가 되는 것은, 해당 목표물이 가만히 있는 경우라면 괜찮습니다만, 목표물이 움직이는 경우라면 참 맞추기가 어렵겠지요. 그런데 요즘은 이 목표물한테 한 번 조준을 맞추고 고정을 시켜 놓으면 목표물이 움직이더라도 이 조준이 자동적으로 움직이면서 조준을 맞춰주는 시스템입니다. 이를 이용하면 예를 들어서 전투기를 타고 가는데, 앞에 적기가 나타났어요. 그럴 때 이 lock on을 해놓으면 그 적기가 어디로 움직이든 간에 조준이 자동적으로 맞춰져서, 미사일 발사 스위치만 누르면 확실하게 맞출 수가 있는 것이지요.

제가 그런 꿈을 꾸고는 복권을 살까 말까 고민을 참 많이 했던 그때에, 정말 신기한 건 말이에요. 복권이 딱 이렇게 머리 속에 lock on이 되니까, 동네를 지나가는데, 그 때까지는 안 보이던 복권 판매소가 글쎄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참 신기하지요? 뿐만 아니라 근처를 지나가니까, 작은 스피커로 복권 무슨 주제곡 같은 것이 들려오는데, 그게 그리 큰 소리는 아니었습니다만, 귀에 콕콕 꽂히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한 번 복권에 조준이 맞춰지니까 이제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정말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복권 판매점만 보이도다……

이렇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실까요. 히브리서 12장 2절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信仰の創始者であり完成者であるイエスから、目を離さないでいなさい。この方は、ご自分の前に置かれた喜びのために、辱めをものともせずに十字架を忍び、神の 御座の右に着座されたのです。

그렇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는 복권이 아닙니다. 로또가 아닙니다. 세상적인 방법이나 사람이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무참하게 십자가에 달리셔서 고통과 부끄러움과 죽음을 모두 감당하신 예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빌립보서 2장 6절~8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빌립보서 2장 6절~8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어떠한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는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리셨을까.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요? 예, 틀린 답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유가 그것뿐입니까?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요? 예, 맞습니다. 이 또한 틀린 답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분명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와 같은 고통을 겪으심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크나큰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단순히 돈 몇 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단순히 고급 차 몇 대, 큰 집 몇 채 정도의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그토록 무참하게 십자가에 달리셔서, 고통과 부끄러움과 죽음을 모두 감당하셔도 아깝지 않을 만큼 크나큰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8장 18절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今の時の苦難は、やがて私たちに啓示される栄光に比べれば、取るに足りないと私は考えます。

우리가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더라도 장차 우리가 얻을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信仰の創始者であり完成者であるイエスから、目を離さないでいなさい。この方は、ご自分の前に置かれた喜びのために、辱めをものともせずに十字架を忍び、神の 御座の右に着座されたのです。

우리가 믿어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온전하게 해주시는 분이 오로지 예수님 뿐이기 때문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위해서 부끄러움도 고통도 참으시고 십자가에 달려주신 예수님 뿐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면 주님이 안 보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볼 때만 주님은 보이는 것입니다. 믿음에 있어서도 취사선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을 제대로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언제 어디에서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세상이 아닌 오로지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분인 예수님을 향해서만 로크온 목표설정을 하고, 낮이나 밤이나 추울 때나 더울 때나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따라감으로써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신 놀라운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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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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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7회 기록된 이름
2020년 1월 1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19절~20절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ルカの福音書 10章19節~20節
“確かに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蛇やサソリを踏みつけ、敵のあらゆる力に打ち勝つ権威を授けました。ですから、あなたがたに害を加えるものは何一つありません。
しかし、霊どもがあなたがたに服従することを喜ぶのではなく、あなたがたの名が天に書き記されていることを喜び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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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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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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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기록된 이름” 記された名前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10장 1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70명을 선발하셔서 2인 1조로 선교여행을 보내십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단기선교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거기 가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지시하시는 모습을 보실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다녀온 제자들이 말합니다.

누가복음 10장 17절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さて、七十二人が喜んで帰って来て言った。「主よ。あなたの御名を用いると、悪霊どもでさえ私たちに服従します。」

이게 무슨 말이에요? 자기들이 선교를 가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니까 질병이 낫고 마귀들이 물러갔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주님! 정말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니까 이처럼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이를 보고 제자들은 신기해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흥미롭습니다. 누가복음 10장 19절을 봅니다.


누가복음 10장 19절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確かに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蛇やサソリを踏みつけ、敵のあらゆる力に打ち勝つ権威を授けました。ですから、あなたがたに害を加えるものは何一つありません。

제자들은 어쩌면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 곁에서 지켜보니까 예수님이 명하시면 질병이 낫고 마귀들이 물러가고 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아, 나도 저렇게 한 번 해봤으면……그런 마음이 들어도 이상할 것이 없겠지요.

그런데 막상 선교여행에 가서 해보니 정말 그와 같은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단지 기뻐했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무엇이 없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감사가 없었습니다. 찬양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의 능력에 감사를 드리거나 찬양을 들리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던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행한 일에 대해서 기뻐한 것이 다였습니다.

이들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선교를 갔을 때 마귀들이 물러가고 질병이 낫고 하는 것으로 기뻐하는데, 그걸 가지고 기뻐할 필요가 없어. 왜냐하면 그것은 너희들 힘이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들에게 능력을 주었기 때문이야. 그렇기 때문에 그건 신기해할 일도 아니고 기뻐할 일도 아니고, 오히려 당연한 일이야.


여기까지 들은 제자들은 좀 시무룩해졌을지도 모릅니다. 기껏 선교에 다녀와서 예수님처럼 자기도 할 수 있었다고 기뻐했었는데, 칭찬은 안 해주시고 당연하다고 하시니 좀 기분이 상한 사람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누가복음 10장 20절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しかし、霊どもがあなたがたに服従することを喜ぶのではなく、あなたがたの名が天に書き記されていることを喜びなさい。」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렇다고 너희들이 기뻐할 일이 없다는 말이 아니야. 귀신이 물러간 일을 가지고 기뻐하는 게 아니라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가지고 기뻐해야 돼……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을까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물리쳤으니까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놀라운 일을 행했으니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께서 명하신 일을 충실하게 감당했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서 우리 두 부류의 이름에 대해서 한 번 비교를 해볼까 합니다. 이는 가나안 정탐꾼과 여리고 정탐꾼입니다.

이제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마치고 탈출한 이스라엘 자손 광야 1세대, 그들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는 축복이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있을 때 하나님의 명에 따라 모세는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지휘관을 뽑아 총 12명의 정탐꾼을 보내게 됩니다.

그들이 한 일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민수기 13장 21절~24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민수기 13장 21절~24절
“21.이에 그들이 올라가서 땅을 정탐하되 신 광야에서부터 하맛 어귀 르홉에 이르렀고
22.또 네겝으로 올라가서 헤브론에 이르렀으니 헤브론은 애굽 소안보다 칠 년 전에 세운 곳이라 그 곳에 아낙 자손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가 있었더라
23.또 에스골 골짜기에 이르러 거기서 포도송이가 달린 가지를 베어 둘이 막대기에 꿰어 메고 또 석류와 무화과를 따니라
24.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서 포도를 베었으므로 그 곳을 에스골 골짜기라 불렀더라”

それで、彼らは上って行き、ツィンの荒野からレボ・ハマテのレホブまで、その地を偵察した。
彼らは上って行ってネゲブに入り、ヘブロンまで行った。そこにはアナクの子孫であるアヒマンと、シェシャイと、タルマイがいた。ヘブロンはエジプトのツォアンより 七年前に建てられていた。
彼らはエシュコルの谷まで来て、そこでぶどうが一房ついた枝を切り取り、二人で棒で担いだ。また、ざくろやいちじくの木からも切り取った。
その場所は、イスラエルの子らがそこで切り取ったぶどうの房にちなんで、エシュコルの谷と呼ばれた。

이렇게 지명만 보면 잘 감이 안 오시겠지만, 쉬운 말로 하자면 그 넓은 가나안 땅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열심히 정탐을 했습니다. 그것도 민수기 13장 25절에 의하면 무려 40일 동안이나 했다고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증거물로 여러 과일들까지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보고합니다.

민수기 13장 26절~27절
“26.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나아와 그들에게 보고하고 그 땅의 과일을 보이고
27.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彼らは、パランの荒野のカデシュにいるモーセとアロンおよびイスラエルの全会衆のところにやって来て、二人と全会衆に報告をし、その地の果物を見せた。
彼らはモーセに語った。「私たちは、あなたがお遣わしになった地に行きました。そこには確かに乳と蜜が流れています。そして、これがそこの果物です。

참 멋진 보고 아닙니까. 여기까지만 보면 그들은 정말로 충성되고 모범적인 정탐꾼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보고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민수기 13장 28절~33절
“28.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29.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주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주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주하더이다
30.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31.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32.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ただ、その地に住む民は力が強く、その町々は城壁があって非常に大きく、そのうえ、そこでアナクの子孫を見ました。
アマレク人がネゲブの地方に住んでいて、ヒッタイト人、エブス人、アモリ人が山地に、カナン人が海岸とヨルダンの川岸に住んでいます。」
そのとき、カレブがモーセの前で、民を静めて言った。「私たちはぜひとも上って行って、そこを占領しましょう。必ず打ち勝つことができます。」
しかし、彼と一緒に上って行った者たちは言った。「あの民のところには攻め上れない。あの民は私たちより強い。」
彼らは偵察して来 た地について、イスラエルの子らに悪く言いふらして言った。「私たちが行き巡って偵察した地は、そこに住む者を食い尽くす地で、そこで見た民はみな、背の高い者たちだ。
私たちは、そこでネフィリムを、ネフィリムの末裔アナク人を見た。私たちの目には自分たちがバッタのように見えたし、彼らの目にもそう見えただろう。」

열 두 명의 정탐꾼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カレブ)을 제외한 열 명은 이와 같은 보고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고 말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의 비관적인 보고를 듣고는 낙심하게 됩니다. 절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민수기 14장 1절~3절
“1.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2.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すると、全会衆は大声をあげて叫び、民はその夜、泣き明かした。
イスラエルの子らはみな、モーセとアロンに不平を言った。全会衆 は彼らに言った。「われわれはエジプトの地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あるいは、この荒野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のだ。
なぜ主は、われわれをこの地に導いて来 て、剣に倒れるようにされるのか。妻や子どもは、かすめ奪われてしまう。エジプトに帰るほうが、われわれにとって良くはないか。」

이에 하나님께서는 노하십니다. 이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민수기 15장 26절~38절에 걸쳐 판결을 내리십니다.

좀 길지만 이는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읽어드리겠습니다. 민수기 15장 26절~38절입니다.


민수기 15장 26절~38절
26.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7.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31.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32.너희의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33.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34.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
35.나 여호와가 말하였거니와 모여 나를 거역하는 이 악한 온 회중에게 내가 반드시 이같이 행하리니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
36.모세의 보냄을 받고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그 땅을 악평하여 온 회중이 모세를 원망하게 한 사람
37.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38.그 땅을 정탐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서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생존하니라


民数記 15章 26節~38節
主はモーセとアロンに告げられた。
「いつまで、この悪い会衆は、わたしに不平を言い続けるのか。わたしは、イスラエルの子らがわたしにつぶやく不平を聞いた。
彼らに言え。わたしは生きている──主のことば──。わたしは必ず、おまえたちがわたしの耳に語ったとおりに、おまえたちに行う。
この荒野におまえたちは、屍をさらす。わたしに不平を言った者で、二十歳以上の、登録され数えられた者たち全員である。
エフンネの子カレブと、ヌンの子ヨシュアのほかは、おまえたちを住まわせるとわたしが誓った地に、だれ一人入ることはできない。
おまえたちが『かすめ奪われてしまう』と言った、おまえたちの子どもについては、わたしは彼らを導き入れる。彼らはおまえたちが拒んだ地を知るようになる。
しかし、おまえたちはこの荒野に屍をさらす。
おまえたちの子どもは、この荒野で四十年の間羊を飼う者となり、おまえたちがみな、屍となるまで、おまえたちの背信の責めを負わなければならない。
おまえたちが、あの地を偵察した日数は四十日であった。その一日を一年と数えて、四十年 の間おまえたちは自分の咎を負わなければならない。こうして、わたしへの反抗が何であるかを思い知ることになる。
主であるこのわたしが言う。一つになってわたしに逆らったこの悪い会衆のすべてに対して、わたしは必ずこうする。この荒野で彼らは死に絶える。
また、モーセがあの地の偵察のために遣わした者で、帰って来て、その地について悪く言いふらし、全会衆にモーセに対する不平を言わせた者たちもだ。」
こうして、その地を悪く言いふらした者たちは、主の前に疫病で死んだ。
しかし、あの地を偵察しに行った者のうち、ヌンの子ヨシュアと、エフンネの子カレブは生き残った。


이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들 지금 뭐라고 했어?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다고 했어? 좋아.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행하마. 너희들,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게 되고 아직 자기 판단을 할 수 없는 미성년자들만 빼고 성인들은 모두 광야에서 다 죽게 된다. 그리고 정탐꾼들 중에서 하나님께 순종한 여호수아와 갈렙은 무사했지만, 나머지 열 명, 악평을 한 열 명은 재앙으로 죽어버렸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이번에는 광야 2세대라고 할 수 있는 여리고 정탐꾼을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로부터 40년이 흘렀습니다. 이제 그들은 본격적으로 가나안 정복을 시작할 때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 가장 처음으로 공략해야 하는 성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요단 강 건너편에 있는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여리고 성은 그 성벽이 높고 대단히 두꺼운데다가, 그것도 이중 구조로 되어 있어서 매우 견고하게 지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발견된 고고학 자료들에 의하면 상당히 풍요로운 도시였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이 전쟁. 누가 이길 것인가 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여리고 군의 압승. 이스라엘 군의 참패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일반적으로 이와 같이 방어가 완벽한 성을 공략하려고 할 때 이쪽에는 이를 공격할 만큼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취할 전술은 이른바 지구전을 택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지구전은 말 그대로 오래 버티기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 관건이 무엇이냐 하면 식량이 얼마나 넉넉히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전쟁은 안 하지만 군대는 계속 머물고 있기 때문에 양쪽에 있어서 식량은 반드시 필요해집니다. 그래서 성 안에 있는 식량이 다 떨어져서 굶어 죽는 지경에 이른다든지, 아니면 공격하는 쪽에서 식량이 떨어지게 되면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되어 후퇴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전쟁, 어느 쪽이 유리할까요. 성경에 의하면 당시 여리고 성 안에는 몇 명 정도의 사람이 살고 있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200만 명이었다는 점입니다. 이들이 매일매일 밥을 먹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려면 그 식량만 해도 얼마나 많이 필요했겠습니까.

그러면 또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 때까지 광야에서 지내면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었다면서요. 그러면 한 달이고 1년 이고 버틸 수 있는 것 아니겠냐.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 순서를 보시면 이렇습니다. 먼저 여호수아가 두 명의 정탐꾼을 보냅니다. 그리고 정탐을 마치고 돌아옵니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요단 강을 건넌 다음 거기서 유월절을 지키고, 그리고 여리고성 공략이 시작됩니다.

여기서 여호수아 5장 12절을 봅니다.

여호수아 5장 12절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マナは、彼らがその地の産物を食べた翌日からやみ、イスラエルの子らがマナを得ることはもうなかった。その年、彼らはカナンの地で収穫した物を食べた。


자, 큰일 났습니다. 중요한 점이 무엇인가 하면 200만 명에 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고 이제 여리고 성을 공략해야 하는데, 만나가 끊겨버렸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3장에 의하면 마치 홍해가 갈라지듯 요단강이 갈라져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 가운데를 건너왔습니다만, 이제 요단강도 다시 물이 흐릅니다. 돌아갈 수가 없어요. 이제 만나도 없습니다. 200만 명이 매일 먹을 식량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눈 앞에는 철통 같은 여리고성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사람은 많지만 충분한 무기도 전술도 없습니다.

반면에 여리고 성안에는 충분한 식량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승부는 뻔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많다고는 하지만, 이제 요단강도 다시 건널 수도 없고, 식량도 떨어져서 며칠만 지나면 굶어서 하나 둘 쓰러져갈 것이 분명합니다. 그 때를 틈타서 여리고 군이 총 공격을 가하게 된다면 이는 당해낼 도리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군은 꼼짝없이 그 자리에서 전멸하고 말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중요한 시점에 여리고로 침투한 두 정탐꾼. 그들은 그럼 얼마나 멋진 성과를 거두었을까요.

여호수아 2장에 기록된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두 명이 여리고에 들어가서는 라합이라고 하는 여자가 운영하는 숙소에 갑니다. 그런데 그만 누군가한테 들키고 말았어요. 그래서 여리고 왕이 라합한테 사람을 보내서 그들을 끌어내라고 합니다. 그러자 라합이 두 정탐꾼들을 보호해요.

정탐꾼은 이 때 라합과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 라합의 집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려주겠다고 계약을 맺습니다.

두 정탐꾼들은 그날 밤 창문으로 탈출하고는 산에 3일 동안 꼼짝없이 숨어 있다가 간신히 진영으로 돌아옵니다. 이게 다예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가나안 열 두 정탐꾼들은 40일 동안 그 넓은 가나안 땅을 모두 돌아다니면서 정보도 수집하고 증거도 가지고 오고 그랬습니다. 정말 열심히, 그리고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런데 반면 이 여리고 정탐꾼들은 기껏 여리고에 들어갔나 했더니만 금방 들키고 말았어요. 그리고 숙소에서 몰래 탈출하고는 산 속에 3일 동안 숨어있다가 아무 것도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게 다예요.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 이 두 정탐꾼들에게 점수를 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가나안 정탐꾼은 100점, 그리고 여리고 정탐꾼은 빵점입니다. 아니, 도대체 여리고 정탐꾼들은 한 게 없잖아요.

하지만 성경적으로 보면 어떻습니까. 열 두 가나안 정탐꾼들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정탐꾼들에 의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절망을 했습니다. 그들은 40년 뒤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못 들어갔습니다. 지금 당장 받을 수도 있는 축복을 40년 늦게 받은 것이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못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여리고 정탐꾼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여호수아에게 보고합니다.

여호수아 2장 23절~24절
“23.그 두 사람이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 강을 건너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나아가서 그들이 겪은 모든 일을 고하고
24.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하더라”

二人は帰途についた。山地から下り、川を渡り、ヌンの子ヨシュアのところに来て、その身に起こったことをことごとく彼に話した。
彼らはヨシュアに言った。「主はあの地をことごとく私たちの手にお与えになりました。確かに、あの地の住民はみな、私たちのゆえに震えおののいています。」

그들의 정탐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여리고 성을 공격하여 점령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하게 된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이 두 정탐꾼들의 그 차이가 무엇이었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그 차이는 단 두 구절이었습니다.

가나안 정탐꾼들은 민수기 13장 31절 중반부에서 이렇게 보고를 했습니다.

민수기 13장 31절 중반부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あの民のところには攻め上れない。

반면에 여리고 정탐꾼들은 다음과 같이 보고를 했습니다.

여호수아 2장 24절 중반부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主はあの地をことごとく私たちの手にお与えになりました。確かに、あの地の住民はみな、私たちのゆえに震えおののいています。」

이 차이가 무엇을 말합니까. 인간적으로 볼 때 누가 열심히 일했느냐, 누가 성과를 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는 다름 아닌, 순종과 불순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출애굽기 3장 8절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わたしが下って来 たのは、エジプトの手から彼らを救い出し、その地から、広く良い地、乳と蜜の流れる地に、カナン人、ヒッタイト人、アモリ人、ペリジ人、ヒビ人、エブス人のいる場所に、彼らを導き上るためである。

하나님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약속의 땅, 놀라운 축복의 땅을 주시겠다고 반복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리고 정탐꾼들도 분명히 그 땅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가나안 정탐꾼 중 열 명은 뭐라고요? 예, “못 한다. 우리는 할 수 없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무엇이었습니까.

민수기 15장 28절 후반부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わたしは必ず、おまえたちがわたしの耳に語ったとおりに、おまえたちに行う。

결국 불순종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들의 입이 말한 것처럼 광야에서 모두 죽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정말 참 우리는 범사에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자, 그렇다면 가나안 정탐꾼과 여리고 정탐꾼 중에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정탐꾼은 여리고 정탐꾼이라는 점은 이해가 가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오늘의 문제입니다. 가나안 정탐꾼과 여리고 정탐꾼, 이 두 정탐꾼 중에서 어느 쪽 사람들의 이름이 성경에 나와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가나안 정탐꾼에 대한 이름입니다.

옛날에 학교 다닐 때 보면, 떠든 사람, 나쁜 짓 사람, 이렇게 하고 칠판에 이름을 적어 놓은 경우가 있잖아요? 그런 식으로 이름이 이처럼 다 나와 있습니다.

민수기 13장 4절~15절에 보면 열 두 명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부정적인 보고를 한 열 명의 이름은 삼무아, 사밧, 이갈, 발디, 갓디엘, 갓디, 암미엘, 스둘, 나비, 그우엘입니다.

シャムア、シャファテ、イグアル、パルティ、ガディエル、ガディ、アンミエル、セトル、ナフビ、ゲウエル。

참 부끄럽겠지요.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에 따라서 충성된 보고를 했었더라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40년간의 광야생활 없이 곧바로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이 사람들의 불순종 때문에 결국 약속된 축복을 받지 못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반면에 여리고 정탐꾼에 대해서는 어떨까요. 40년 후에 여호수아가 보낸 여리고 정탐꾼이 두 명이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그 이름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짐작이 가는 사람이 몇몇 있기는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적힌 이름이 없어요.

항상 제가 말씀 드립니다만, 성경은 위인전이 아닙니다. 위인전은 훌륭한 사람, 뛰어난 사람들만 기록되어 있겠으나, 성경에서 높임을 받아야 할 분은 하나님이시요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민수기가 적힌 시기가 기원전 1450년 경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지금이 2020년이니까 무려 3470년 동안이나 이 열 명의 이름이 그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참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을 보면 정말 비석을 세우기도 하고, 동상을 만들고 싶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다 자기 이름을 좀 남겼으면 좋겠다, 인정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큰 돌에 이름을 새겨봤자, 아무리 큰 비석이나 동상을 세워봤자 그것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이름이 진정으로 기록되어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그렇습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5절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勝利を得る者は、このように白い衣を着せられる。またわたしは、その者の名をいのちの書から決して消しはしない。わたしはその名を、わたしの父の御前と御使いたちの前で言い表す。

그리고 또 성경은 기록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 17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耳のある者は、御霊 が諸教会に告げることを聞きなさい。勝利を得る者には、わたしは隠されているマナを与える。また、白い石を与える。その石には、それを受ける者のほかはだれも知らない、新しい名が記されている。』

예수님 앞에 서는 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새 이름을 받게 됩니다. 지금 있는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장차 주님으로부터 받을 새 이름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주님께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면 주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높이면 주님께서 우리를 높이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안 된다고 하면 그것이 불순종입니다. 정복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주셨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할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27절
27.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イエスは彼らをじっと見て言われた。「それは人にはできないことです。しかし、神は違います。神にはどんなことでもできるのです。」


누가복음 1장 37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神にとって不可能なことは何もありません。」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여러분, 불순종과 순종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실 때 “못합니다”라면서 따르지 않는 것이 불순종이요,

하나님께서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실 때 “할 수 있습니다”라면서 따르는 것이 순종이라고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불가능이 없으신 주님께 순종하고 의지할 때,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며, 내 이름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높이고,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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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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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6회 거듭난다는 것
2020년 1월 1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ヨハネの福音書 3章 3節
“イエスは答えら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人は、新しく生まれなければ、神の国を見ることはできませ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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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거듭난다는 것” 新しく生まれるということ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도 먼저 여러분께 질문을 한 번 해보려고 합니다. 자, 우선 가슴에 손을 얹으시고, 제가 드리는 말씀에 대해서 <그렇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께서는 큰 소리로 <아멘>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두 번째 질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세 번째 질문. 나는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 확신합니다.

네 번째 질문, 나는 주님 안에서 거듭났다고 확신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이런 질문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특히 마지막 질문, 저는 지금까지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저를 보고 하는 말이 예수 믿고 거듭 났냐는 거예요. 글쎄요.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런 질문을 들을 때면, 예전에는 좀 당혹스러웠고, 요즘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을 보면, 아, 이런 가엾은 어린 양을 어쩌면 좋을까……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 잠시 화제를 바꾸어서 모세의 기적에 대한 말씀을 떠올려볼까 합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 60여 명이 애굽으로 들어간 지 400여 년 만에, 모세의 인도로 다시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로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몇 백 년 동안 노예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도 그들의 할아버지도 모두가 태어나서부터 노예였습니다. 다른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그들은 자유의 몸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며칠을 가자 홍해가 그들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뒤에서는 애굽의 정예부대가 전속력으로 추격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절망했습니다. 좌절했습니다. 차라리 눈앞에 산이 가로막고 있었더라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넘어볼 수 있었을 텐데, 이건 노력하면 건널 수 있는 강이나 개천이 아닙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끝없이 펼쳐진 바다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지금 성인 남성만 60만 명이었습니다. 남녀노소 모두 합하면 200만 명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갓난 아기, 그리고 갓난 아기들을 업거나 안고 가는 여성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좀 어느 정도라야 어떻게 해보든지 하지요. 이는 99%가 아니라 100%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우리를 애굽에서 탈출시켜준 하나님이 대단한 분인 줄 알았는데, 정말 어마어마한 능력이 있는 분인 줄 알았는데, 기껏 여기까지 인도해놓고, 이게 뭘 어쩌자는 것인가……. 이거야말로 철저한 배신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안 들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홍해가 없는 길로, 조금 편안한 길로 인도하실 능력이 없으신 분이십니까. 아니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지금 이 순간도 천지만물을 다스리고 계신 분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홍해가 없는 길로 인도하실 정도가 아니라, 한 순간에 애굽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실 수도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오히려 차라리 그게 더 편하실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그런 만군의 주께서 왜 굳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번거롭게 홍해 앞으로 인도해오셨을까요.

여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아니, 반드시 그러셔야만 했던 세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탈출시키기 위해서, 애굽에서 열 가지 놀라운 재앙을 내리게 됩니다. 그 재앙들이 무엇이었습니까.

첫 번째 재앙은 온 나라의 물이 피가 되는 재앙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마실 물도 없어지고 온 나라에 악취가 가득하게 됩니다.

두 번째 재앙은 나일 강에서 개구리가 끊임없이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집안에도 들어오고 왕이 있는 궁 안으로도 들어오고 침실에까지 들어옵니다.

세 번째 재앙은 온 나라에 이가 가득 차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멀쩡히 있다가 막 여기저기가 가려워집니다. 목욕을 해도 소용이 없고 옷을 빨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가 사람과 짐승들을 낮이나 밤이나 괴롭힙니다.

네 번째 재앙은 이번에는 어디서 날라왔는지 온 나라에 파리가 가득해집니다.

다섯 번째 재앙은 질병으로 인해서 가축들이 죽습니다.

여섯 번째 재앙은 사람이나 짐승들에게 악성 종기가 생겨요.

일곱 번째 재앙은 우박이 내립니다. 그 모습을 출애굽기 9장 24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출애굽기 9장 24절
“우박이 내림과 불덩이가 우박에 섞여 내림이 심히 맹렬하니 나라가 생긴 그 때로부터 애굽 온 땅에는 그와 같은 일이 없었더라”

雹が降り、火が雹のただ中をひらめき渡った。それは、エジプトの地で国が始まって以来どこにもなかったような、きわめて激しいものであった。

애굽이 어디입니까. 아프리카 대륙이지요. 거기에 우박이 내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우박이 또 그냥 우박이 아닙니다. 불덩이가 우박에 섞여 내렸다고 하니 얼마나 난리였겠습니까. 이렇게 되니 사람도 다치고 짐승들도 다치고, 밭에 있는 농작물들도 모두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재앙은 이것으로도 끝나지 않습니다.

여덟 번째 재앙은 메뚜기 떼가 올려왔습니다. 출애굽기 10장 13절~14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출애굽기 10장 13절~14절
“13.모세가 애굽 땅 위에 그 지팡이를 들매 여호와께서 동풍을 일으켜 온 낮과 온 밤에 불게 하시니 아침이 되매 동풍이 메뚜기를 불어 들인지라
14.메뚜기가 애굽 온 땅에 이르러 그 사방에 내리매 그 피해가 심하니 이런 메뚜기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것이라”

モーセはエジプトの地の上に杖を伸ばした。主は終日終夜、その地の上に東風を吹かせた。朝になると東風がいなごの大群を運んで来た。
いなごの大群はエジプト全土を襲い、エジプト全域にとどまった。これは、かつてなく、この後もないほどおびただしいいなごの大群だった。


다음으로 아홉 번째 재앙은 온 나라를 흑암이 덮치게 됩니다. 갑자기 캄캄해지더니 어느 정도냐 하면 출애굽기 10장 23절에 보면 사람들이 서로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캄캄해졌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제 마지막 재앙입니다. 모든 나라의 장자, 그러니까 첫 아들이 다 죽는데 이는 사람만이 아니라 가축들 새끼들도 모두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끔찍한 재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하여 이제 애굽 왕 바로는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내보내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부분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열 가지 재앙을 아는 것은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입장에 서서 봤을 때의 일입니다. 이게 무슨 말씀인가 하면, 똑 같은 재앙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스라엘 자손의 입장에서 본다면 달라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어려운 말씀이 아닙니다.

애굽에서 일어난 열 가지 재앙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만, 반면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는 어땠는가 하는 것이지요. 그들도 역시 이 열 가지 재앙을 모두 경험했을까요?

출애굽기 9장 6절, 9장 26절, 10장 23절, 12장 23절 등의 기록에 의하면 이 열 가지 재앙 중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확실히 미치지 않은 재앙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적어도 네 가지 재앙입니다.

다섯 번째 가축이 죽은 재앙, 일곱 번째 우박이 내린 재앙, 아홉 번째 흑암이 덮인 재앙, 그리고 열 번째 장자가 죽는 재앙입니다. 다른 재앙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 네 재앙에 대해서는 분명히 이스라엘 자손들, 또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사는 지역에는 이와 같은 재앙이 미치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재앙이 미치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되면 또 어떤 일이 발생할 수가 있냐 하면, 다시 말해서 가축들이 죽은 재앙, 우박이 불덩이와 함께 내린 재앙, 흑암이 덮인 재앙, 그리고 장자가 죽는 재앙이 애굽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자손들은 몰랐을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습니까. 물이 벌겋게 피처럼 돼? 개구리나 파리나 메뚜기가 막 늘어나? 몸에 종기가 나? 이거 어쩌다 우연히 일어난 거 아니야? 왜냐하면 적어도 이것만은 자기들도 겪었고 다른 재앙은 겪지 못했거든요. 그러니까 이거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어쩌다가, 우연히 일어났을 뿐 아니야? 이런 생각을, 이스라엘 자손들 모두가 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해도, 믿음이 적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안 가졌다고는 장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냐 하면, 그렇습니다. 홍해로 인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보는 앞에서 홍해가 갈라지는 모습을 직접 보게 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홍해가 갈라진 게 아니라, 물이 점점 줄어들어서 얕은 곳에 길이 났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런 현상은 지금도 있으니까 기적이랄 것도 없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 분들은 성경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출애굽기 14장 21절~22절
“21.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22.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어가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モーセが手を海に向けて伸ばすと、主は一晩中、強い東風で海を押し戻し、海を乾いた地とされた。水は分かれた。
イスラエルの子らは、海の真ん中の乾いた地面を進んで行った。水は彼らのために右も左も壁になった。

그냥 물이 줄어들고 얕은 곳에 있는 길이 드러난 게 아닙니다. 바다 한 가운데에 길이 나고 바닷물들은 좌우에 벽이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금이 21세기라 하더라도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일이 이렇게 되면 그 때까지 1%의 의심을 가졌던 사람들도 안 믿을래야 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로 인해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리고 지혜 있는 사람, 지혜 없는 사람을 불문하고, 믿음이 있었던 사람, 믿음이 없었던 사람을 불문하고 모두가 100%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찬양하고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된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홍해를 통과해야 했던 두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홍해를 건넌 후에 일어난 일들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14장 23절~28절
“23.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들이 다 그들의 뒤를 추격하여 바다 가운데로 들어오는지라
24.새벽에 여호와께서 불과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애굽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25.그들의 병거 바퀴를 벗겨서 달리기가 어렵게 하시니 애굽 사람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앞에서 우리가 도망하자 여호와가 그들을 위하여 싸워 애굽 사람들을 치는도다
26.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물이 애굽 사람들과 그들의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라 하시니
27.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28.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エジプト人は追跡し、ファラオの馬も戦車も騎兵もみな、イスラエルの子らの後を海の中に入って行った。
朝の見張りのころ、主は火と雲の柱の中からエジプトの陣営を見下ろし、エジプトの陣営を混乱に陥れ、
戦車の車輪を外してその動きを阻んだ。それでエジプト人は言った。「イスラエルの前から逃げよう。主が彼らのためにエジプトと戦っているのだ。」
主はモーセに言われた。「あなたの手を海に向けて伸ばし、エジプト人と、その戦車、その騎兵の上に水が戻るようにせよ。」
モーセが手を海に向けて伸ばすと、夜明けに海が元の状態に戻った。エジプト人は迫り来る水から逃れようとしたが、主はエジプト人を海のただ中に投げ込まれた。
水は元に戻り、後を追って海に入ったファラオの全軍勢の戦車と騎兵をおおった。残った者は一人もいなかった。


애굽 군대들도 눈앞에 홍해가 펼쳐진 상황을 보고는 놀랐겠지요. 하지만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지금 애굽 왕 바로가 직접 군사를 지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애굽 군대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추격하여 그들도 역시 홍해 한 가운데에 난 길을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령하십니다. 다시 길을 막아버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무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스라엘 자손들은 한 사람도 남김 없이 모두가 홍해를 건너게 되고, 첨단 무기로 무장하고 말을 타면서 달려온 애굽 군대들은 이 또한 한 사람도 남김 없이 홍해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는 사실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만약에 이게 사실이라면, 여러분께서는 이런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믿음이 없었던 사람들마저도 모두를 믿게 만들었던 이 놀라운 홍해의 기적. 이제 애굽에는 그들을 추격할 왕도 군대도 없습니다. 그런 상황이라고 한다면, 홍해를 갈라진 그대로 놔둬도 되지 않겠어요? 나중에라도 홍해가 갈라져 있다고 하는 놀라운 광경을 사람들이 보게 된다면 그야말로 믿음이 없는 사람들도 대대로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추격해오는 애굽 군대들이 문제였다면 그들이 죽고 난 다음에 다시 한 번 홍해를 갈라놓으면 될 거 아니에요. 그런데 왜 홍해를 다시 닫아버리셨을까요. 홍해를 갈라놓은 채로 두면 하나님이 버티기 힘드시기 때문에요? 설마 하나님이 그 정도 가지고 힘들어 하셨겠습니까.

다시 말씀 드립니다만 홍해는 반드시 닫혀야만 했습니다.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큰 힌트가 바로 출애굽기 13장 17절입니다.


출애굽기 13장 17절
“17.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さて、ファラオがこの民を去らせたとき、神は彼らを、近道であっても、ペリシテ人の地への道には導かれなかった。神はこう考えられた。「民が戦いを見て心変 わりし、エジプトに引き返すといけない。」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목이 다른 길도 있었으나 굳이 홍해 쪽으로 인도해 오신 세 번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홍해 쪽으로 인도하신 세 번째 이유, 그것은 지름길로 가게 될 경우 거기에는 블레셋 사람들의 땅이 있는데, 괜히 이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 할까봐요? 그렇습니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 버릴까봐 굳이 홍해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돌아가려고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뻑 하면 노예로 살았던 세월, 종살이를 했던 세월을 그리워합니다.

출애굽기 16장 3절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イスラエルの子らは彼らに言った。「エジプトの地で、肉鍋のそばに座り、パンを満ち足りるまで食べていたときに、われわれは主の手にかかって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のだ。事実、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をこの荒野に導き出し、この集団全体を飢え死にさせようとしている。」

민수기 11장 5절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エジプトで、ただで魚を食べていたことを思い出す。きゅうりも、すいか、にら、玉ねぎ、にんにくも。

여러분, 이는 말하자면 교도소에서 나오게 해주었는데, 그 교도소 생활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이게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그들의 불평은 끊이지 않습니다.

민수기 14장 2절~5절

“2.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5.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イスラエルの子らはみな、モーセとアロンに不平を言った。全会衆 は彼らに言った。「われわれはエジプトの地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あるいは、この荒野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のだ。
なぜ主は、われわれをこの地に導いて来 て、剣に倒れるようにされるのか。妻や子どもは、かすめ奪われてしまう。エジプトに帰るほうが、われわれにとって良くはないか。」
そして互いに言った。「さあ、われわれは、かしらを一人立ててエジプトに帰ろう。」
そこで、モーセとアロンは、イスラエルの会衆の集会全体の前でひれ伏した。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를 버리고 또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처자가 사로잡힐 것이 분명하니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와 같은 불순종이 어떠한 결과를 낳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을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한 발 자국 들어가보지도 못한 채, 아니,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도 못해본 채, 그들은 광야에서 40년을 떠돌며 쓸쓸히 죽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걱정했던 그들의 자녀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홍해 바다가 막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불평 불만을 늘어놓고 뻑 하면 돌아가자고 하는데, 홍해 바다가 그대로 열려 있었다면 오죽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홍해 바다 외에도 그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여러 장치들을 마련해놓으셨습니다.

출애굽기 13장 21절~22절

“21.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22.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主は、昼は、途上の彼らを導くため雲の柱の中に、また夜は、彼らを照らすため火の柱の中にいて、彼らの前を進まれた。彼らが昼も夜も進んで行くためであった。
昼はこの雲の柱が、夜はこの火の柱が、民の前から離れることはなかった。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굽을 한 후 지도와 나침반을 주면서 인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을 뿐입니다.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이렇게 며칠만 이동을 하게 되면 자기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게 되는 것이지요.

누구는 이렇게 말하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지도나 나침반이 없었다 하더라도 옛날 사람들은 별을 보고 방향을 알았을 것이다……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여러분,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라고요? 예, 태어나서부터 지금껏 노예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노예한테 의무교육이 있나요? 천문학을 가르치나요? 아니에요. 노예들은 주인이 시키는 일이나 제대로 하면 그걸로 끝입니다. 그런 지식이 있을 리도 만무했습니다.

아니, 동서남북을 알아야 애굽으로 가든지 할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런 지식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애굽으로 가려고 해도 어느 쪽으로 가야 할 지 방향을 알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들은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식량문제였습니다. 우선 광야가 어떤 곳입니까. 강도 없고 호수도 없습니다. 출애굽 당시에 보면, 그들이 가는 곳마다 물이 없어서 그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 곳에서는 물을 가죽 부대 같은 곳에 담아서 간다 하더라도 얼마 버티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럼 또 어떤 분은 이러실지 모르지요. 아니, 홍해 물을 마시면 되지 않냐 하실지 모르지만, 홍해는 말 그대로 바다입니다. 소금물이에요. 제가 알아보니까 소금 농도가 다른 바다들보다도 높기 때문에, 이걸 사람이 벌컥벌컥 마시면 오히려 큰일 납니다.

그래요. 뭐, 애굽으로 돌아가기 위해, 물은 어떻게든 준비를 했다고 칩시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만나였습니다.

풀 한 포기 안 나는 광야에서 그들은 식량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식량을 준비해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만나>입니다.

성경에서는 만나를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출애굽기 16장 13절~15절
“13.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14.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15.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すると、その夕方、うずらが飛んで来て宿営をおおった。また、朝になると、宿営の周り一面に露が降りた。
その一面の露が消えると、見よ、荒野の面には薄く細かいもの、地に降りた霜のような細かいものがあった。
イスラエルの子らはこれを見て、「これは何だろう」と言い合った。それが何なのかを知らなかったからであった。モーセは彼らに言った。「これは主があなたがたに食物として下さったパンだ。

출애굽기 16장 35절
“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イスラエルの子らは、人が住んでいる土地に来るまで、四十年の間マナを食べた。彼らはカナンの地の境に来るまでマナを食べた。


이스라엘 자손은 먹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광야에서도 한 두 사람도 아닌 2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그것도 40일도 아니고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신비한 만나를 먹었다고 하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이 만나에는 재미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16장 19절~24절
“19.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20.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21.무리가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22.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지도자가 와서 모세에게 알리매
23.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24.그들이 모세의 명령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モーセは彼らに言った。「だれも、それを朝まで残しておいてはならない。」
しかし、彼らはモーセの言うことを聞かず、ある者は朝までその一部を残しておいた。すると、それに虫がわき、臭くなった。モーセは彼らに向かって怒った。
彼らは朝ごとに、各自が食べる分量を集め、日が高くなると、それは溶けた。
六日目に、彼らは二倍のパンを、一人当たり二オメルずつを集めた。会衆の上に立つ者たちがみなモーセのところに来て、告げると、
モーセは彼らに言った。「主の語られたことはこうだ。『明日は全き休 みの日、主の聖なる安息である。焼きたいものは焼き、煮たいものは煮よ。残ったものはすべて取っておき、朝まで保存せよ。』」
モーセの命じたとおりに、彼らはそれを朝まで取っておいた。しかし、それは臭くもならず、そこにうじ虫もわかなかった。


이 신비한 만나의 상미기간이 대단히 짧습니다. 딱 하루예요. 그러니까 하는 수 없이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만나를 거두고는 그날 동안에 다 먹어야지, 다음 날까지 두면 벌레가 생겨서 먹을 수가 없게 된대요. 그러면 조금 더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해서 좀 늦게 나가서 거두면 되겠지 하고 늦게 나가면 어떻게 되요? 예, 해가 높이 뜨고 햇볕이 뜨거워지면 없어져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게 그럼 자연 현상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고 하는 증거가 있지요. 매일매일 아침 일찍 나가서 만나를 거두는데, 그게 다음 날 아침까지 놔두면 벌레가 생겨요. 그런데 안식일은 일을 하면 안 되거든요. 그러니까 안식일 전날에는 안식일에 먹을 것까지 두 배를 거두어서 보관하는데, 그러면 안식일에는 그 때까지 두더라도 벌레가 안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연현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무리가 있지요. 자연이 어떻게 안식일과 평일을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이 기록을 보면 만나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 그것도 특별히 이스라엘 자손들만을 위해서 내리시는 양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있는 곳 외에는 만나가 안 내렸다고 봐야겠지요.

그런데 만약에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무리들이 있어요. 걸어서 며칠이나 가야 하는 거리입니다. 그렇다면 도시락이 있어야 하겠지요. 만나를 많이 거두었습니다. 유통기한이 얼마요? 예, 단 하루. 안식일에는 원래 먼 길을 가면 안 되지만, 안식일을 어긴다 하더라도 길어봤자 이틀입니다. 그 정도의 식량으로 그들이 어디까지 갈 수 있겠습니까. 애굽은 고사하고, 출반한지 얼마 못 가서 길 잃고 목 마르고 배 고파서 쓰러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여러 가지 장치를 마련해두심으로써 그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고생하는 꼴을 보고 싶어서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을 주시고자 하셨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축복을 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만에 하나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칩시다. 만약에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이구, 먼 길을 오시느라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애굽에서 편안하게 사세요……그랬을까요?

생각해보십시오. 탈출한 이스라엘 자손들을 추격하다가 애굽 왕 바로가 죽었습니다. 정예 애굽 군대가 홍해에 빠져 죽었어요. 애굽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렇게 만든 것이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렇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렇다면, 애굽 왕의 원수 애굽 군대의 원수인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이 살려두었겠습니까.

여러분, 사랑하는 자기 아이의 손목을 잡고 가는 엄마가, 빨간 신호 때 아이가 길을 건너려고 하면, 보내줘야 하겠습니까. 그게 사랑인가요? 아닙니다. 손을 잡아 끌어야지요. 그래도 가려고 막 난리를 쳐요. 그러면 보내줘야 되나요? 아닙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절대로 가지 못하도록 잡아야지요. 그게 사랑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에 있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다가도, 조금만 어려움이 닥치면 금새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지금까지 주님 안에 있으면서, 지금까지 주님과 동행하면서 수많은 주님의 능력을 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나약한 우리들은 금새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성경에서 애굽은 단지 그 나라가 아니라 <믿음>의 반대의 의미인 <세상>을 뜻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반복해서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31장 1절~3절
“1.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2.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의 말씀들을 변하게 하지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들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들을 치시리니
3.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ああ、助けを求めてエジプトに下る者たち。彼らは馬に頼り、数が多いといって戦車に、非常に強いといって騎兵に拠り頼 み、イスラエルの聖なる方に目を向けず、主を求めない。
しかし、主は知恵のある方。わざわいをもたらし、みことばを取り消さない。主は、悪を行う者の家と、不法を行う者を助ける者に対して立ち上がる。
エジプト人は人間であって神ではなく、彼らの馬も肉であって霊ではない。主が御手を伸ばされると、助ける者はつまずき、助けられる者は倒れて、皆ともに滅 び果てる。


예레미야 46장 25절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노의 아몬과 바로와 애굽과 애굽 신들과 왕들 곧 바로와 및 그를 의지하는 자들을 벌할 것이라”

エレミヤ書 46章 25節
イスラエルの神、万軍の主は言われる。「見よ。わたしは、テーベのアモン、ファラオとエジプト、その神々と王たち、ファラオと彼に拠り頼む者たちを罰する。

여러분, 돌아가려고 했던 발걸음을 멈춰야 합니다. 믿음을 버리고 세상으로 향하려던 발걸음을 멈춰야 합니다.

로마서 8장 5절~6절
“5.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肉に従う者は肉に属することを考えますが、御霊に従う者は御霊に属することを考えます。
肉の思いは死ですが、御霊の思いはいのちと平安です。

여러분, 믿음을 버리고 세상을 따르려고 하는 것은 육신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가져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바라보던 하와의 눈빛을 기억하십니까.

창세기 3장 6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そこで、女が見ると、その木は食べるのに良さそうで、目に慕わしく、またその木は賢くしてくれそうで好ましかった。それで、女はその実を取 って食べ、ともにいた夫にも与えたので、夫も食べた。

세상이라고 하는 것이 때로는 그처럼 아름답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탐스럽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육신의 생각, 사망의 생각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생각 영의 생각을 가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거듭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닫아버리셨던 것처럼 믿음을 갖기 전의 생각, 세상적인 방법에 젖어 살았던 자신의 생각을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바로 거듭난 사람의 모습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나는 거듭난 사람이다”라고 해서 거듭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본인의 주장인 것이지요. 본인이 주장한다고 해서 모두가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될 경우 잘못하면 신앙적인 교만에 사로잡힐 수가 있습니다. 이 신앙적인 교만에 사로잡히게 되면요 “나는 거듭난 사람이다. 그런데 넌 왜 제대로 못 믿냐” 뭐 이러면서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자신이 “나는 거듭난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은 이는 마치, 시험을 보고 나와서 “나는 합격했다”라고 외치는 사람과 다를 게 없습니다. 합격 여부는 본인이 주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에요. 합격 여부를 판단하는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거듭남도 마찬가지지요. 판단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주님께서 판단하시는 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판단하시는지 궁금하세요? 주님 앞에 설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겠어요?

그렇다면 끝으로 제가 주님의 판단을 미리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을, 몰래 오늘만 특별히 알려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거듭났다면, 이를 주님 말고 누가 먼저 알아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주변 사람들이 먼저 알아봅니다.

오히려 본인은 모를 수도 있습니다. 나야 뭐 교회 다니기 전이나 다닌 다음이나 똑같은데 뭘……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니야. 너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 믿으면서 뭔지 잘 모르겠지만, 참 괜찮아 진 것 같아……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그럼 한 번 교회 나가볼까?” 이런 말이 나오면 이는 정말 그 사람은 거듭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는 하는데,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을 들어보면, 아이구 난 교회에 다니고 싶다가도 저 사람만 보면 교회 다니고 싶어지지 않아……. 이렇게 되면 문제가 심각하겠지요.


에베소서 4장 21절~24절
“21.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ただし、本当にあなたがたがキリストについて聞き、キリストにあって教えられているとすれば、です。真理はイエスにあるのですから。
その教えとは、あなたがたの以前の生活について言えば、人を欺く情欲によって腐敗していく古い人を、あなたがたが脱ぎ捨てること、
また、あなたがたが霊と心において新しくされ続け、
真理に基づく義と聖をもって、神にかたどり造られた新しい人を着ることでした。

우리 모두 뒤로 돌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은 거듭난 사람으로서,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께서 인도해주시는 길을 따라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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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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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5회 주께 가까이
2020년 1월 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23장 8절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하기를 오늘까지 행한 것 같이 하라”

ヨシュア記 23章 8節
“ただ今日までしてきたように、あなたがたの神、主にすがり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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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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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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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주께 가까이” 主にすがる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송구영신예배도 무사히 드리고, 올해는 1, 2, 3일이 수목금,이었기 때문에 토요일과 일요일인 4일과 5일까지 합치면, 일본은 새해 들어서 5연휴라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설날이 있기 때문에 신정은 그리 연휴가 갈지는 않습니다만, 올해 일본의 경우를 보면 특히 연말을 보니까 지난 달 12월 28일 토요일부터 쉬는 분들도 꽤 계신 것 같더라고요. 그렇게 되면 12월 28일부터 1월 5일까지 무려 9일을 연속으로 쉬시게 됩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쉬고만 있을 수는 없겠지요. 이제 내일부터는 새로운 새해가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올 한 해 계획은 잘 세우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떻습니까.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셨나요?

물론 그와 같은 계획들이 항상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계획을 어느 정도 세운다는 것에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계획을 세우려면 일단 올 한 해 달력을 보게 되지요. 이 달은 이렇게 저 달은 저렇게 하면서 구상을 하게 되면, 막연했던 한 해가 조금씩 구체적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한국에 사시는 분들 같은 경우에는 아까 말씀 드렸던 구정이 있으니까, 하는 마음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참고로 올해 설날은 1월 25일입니다. 그러니까 그래, 아직 조금 더 여유가 있어. 설날이 지나야 진짜 새해지…….라고 아직 새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들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아니면 좀 더 심한 분들은 어떨까요. 한국은 새 학기가 3월에 시작하고, 일본은 4월에 시작하지요? 그래, 새 학기가 시작하고 새 년도가 시작해야 해가 바뀐 거지. 아직은 2019년이야. 3월이 되어야. 또는 4월이 되어야 새해가 된 거야. 하시는 분들, 혹시 안 계십니까.

여러분, 요즘 과학자들은 사람의 최대 수명을 대략 120세 정도로 잡고 있다는 신문기사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사실 이는 성경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6장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6장 3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そこで、主は言われた。「わたしの霊は、人のうちに永久にとどまることはない。人は肉にすぎないからだ。だから、人の齢は百二十年にしよう。」

이는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만, 어느 신학자는 이 말씀이 사람의 수명을 가리킨다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니까 과거에는 수명이 훨씬 길었지만 홍수 이후에는 사람들의 수명을 짧게 하시겠다는 뜻이라고 하는 것이죠. 물론 이 해석이 옳다고 하는 분들도 있고, 다른 해석을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실제로 노아의 홍수 이전에는 800세나 900세까지 사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홍수 이후에는 눈에 띄게 사람들의 수명이 짧아져서 이제는 800세나 900세가 아니라, 100세를 넘기면 대단히 장수했다고 여기게 된 것이지요.

어찌 되었든 인생 넉넉잡아 120년이라고 하고, 이를 12개월로 쳐서 알기 쉽게 1월은 10대, 2월은 20대라고 생각해 보시면 어떻습니까. 물론 성실하신 여러분들께서는 알차고 보람된 10대를 보내셨겠지만, 저를 포함해서 꽤 많은 분들이 아, 정말 10대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는 분들도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1월도 보내고 2월도 보내고, 그 때까지는 아무런 생각도 안 한고 있다가, 3월이나 4월에 가서, 자, 이제 올 한 해를 시작해 보자……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10대, 20대까지 아무 것도 안 하다가, 30대나 40대가 되고 나서야, 자, 이제 좀 인생을 시작해볼까……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자, 지금이 1월 초순입니다만, 이제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올 한해, 어떻게 살아볼까 하고 생각해본다고 해서 너무 이르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올 한해, 어떻게 살 것인가……

혹시 그렇게 생각되신다면, 여러분, 우리 한 번 성경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합니다. 성경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름들을 보면 동명이인들도 많고, 반대로 한 사람이 두 개 이상의 이름을 가진 경우도 많아서 정확히 몇 명이 등장하는지를 분석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만, 신학자들에 따라서 대략 1800~2600여 명 정도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는 놀라운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엘리야나 엘리사와 같이 놀라운 기적을 일으킨 선지자들도 있었고, 다윗이나 솔로몬 같은 뛰어난 왕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나 바울과 같이 주님의 충성된 사도로서 살아간 사람들도 많이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만약에 이제부터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면, 성경 속 등장인물 중 누구처럼 살아가고 싶으십니까.

사실 이 질문은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 아내에게 처음 물어봤었습니다.

제가 제 아내한테 말하기를, “당신이 이제부터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면 성경 속에서 누구처럼 살아가고 싶은……” 여기까지 말하고 있는데, 제 말이 다 끝나기 전에 제 아내가 하는 말이. “없어요.” 그러더라구요.

이 대답,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이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대답을 듣고 어땠을까요? 이 말을 듣고 저는 그 때는 말은 안 했지만, 제 마음 속으로는 “오, 역시 성경을 좀 아는데?”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아내가 말하기를 성경 속에 나오는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냐는 거죠. 아브라함과 사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가나안 땅으로 나왔습니다. 거기서 또 어려워지니까 애굽으로 갔다가 자신의 아내를 빼앗길 뻔한 위기를 맞기도 했지요. 그리고 또 고향을 출발하고 나선지 25년 만에, 100세라는 나이에 아들 이삭을 낳았는데, 이를 또 하나님이 자기한테 바쳐라……라고 하는 시험을 당하게 됩니다. 물론 이는 정말로 하나님이 바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이죠. 다행히 아들 이삭은 죽지 않고 오래 살았습니다만, 그 인생행로를 돌아보면 몸 고생, 마음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어떻습니까.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가고 있을 때였는데, 애굽 왕이 생각하기를 이스라엘 민족들이 너무 많아졌어요. 그래서 유대인이 딸을 낳으면 살려두지만 아들을 낳으면 버리라고 하는 말도 안 되는 법을 새롭게 만듭니다. 이에 따라 아들로 태어난 모세는 어쩔 수 없이 버려지지만, 이 아이가 애굽 공주에 ㅇ해 발견되어서는 40세까지 애굽 왕실에서 자라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대단히 좋았습니다만, 어쩌다가 사람을 죽이고는 모든 것을 버리고 광야로 도망칩니다. 그리고 거기서 또 40년을 살았는데, 나이가 80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부르시죠. 그렇게 해서 다 늙은 나이에 자기 형과 함께 애굽으로 가서는 또 40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게 됩니다.

다윗은 어때요? 이스라엘의 제2대 왕이고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긴 하지만, 20대 때에는 아무런 죄 없이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에게 쫓기게 됩니다. 서른이라고 하는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되지만 그의 인생은 평탄하지만은 않았지요. 여러 가지 잘못도 저지르고, 이로 인해서 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막판에는 자기 아들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기도 했지요.

그 외에도 성경의 등장인물들을 보면 평온한 삶을 살아간 인물들이 없습니다. 신약에 봐도 마찬가지죠. 앞서 말씀 드린 베드로도 그렇고 바울도 그렇고, 인간적으로 본다면 참으로 험난한 삶을 살아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간단합니다. 성경은 위인전이 아니기 때문인 것이지요. 한국이나 일본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보아도 이른바 위인전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의 뛰어난 부분을 중심으로 기록합니다. 그래서 가끔은 사실과 다르게 좀 과장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는 그래도 꽤 유명하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도 자기를 위인전으로 써 주는 사람들이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냐 하면, 예, 자서전을 쓰지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했다, 저렇게 했다, 뭐 그런 것을 씁니다만, 그렇게 되면 이 또 역시 좀 과장된 부분도 적지 않게 들어가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자서전, 무슨 회고록을 쓴 사람들의 말을 잘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위인전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높임을 받아야 하실 분은 사람이 아닌, 오직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럼 여기까지 와서, 여러분, 성경에는 우리가 목표를 삼을 만한 삶이 전혀 없습니다……이렇게 끝날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좀 여러 가지로 묵상을 해보았습니다만,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 우리가 목표로 삼을 만한 삶을 성경에서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 이렇게 살면 참 좋겠구나 하는 삶이,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무려 셋이나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성경은 놀라운 책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제가 몇 년 전에 이 자리에서 천사에 관한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만, 혹시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가진 원고를 찾아보니까 이에 대한 말씀을 전한 것이 2017년 11월 26일 주일예배 때였습니다만,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기억이 안 나시더라도 이 이야기를 말씀 드리면 기억이 나실지도 몰라요. 그 때는 천사한테 날개가 있을까 하는 것을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혹시 기억 하시나요?

다시 복습하는 의미에서 말씀을 드리자면 성경에 기록된 천사는 크게 세 종류가 등장합니다.

첫째는 그룹(ケルビム), 둘째는 스랍(セラフィム), 그리고 셋째로는 주의 사자라고도 불리는 천사입니다.

主の使い、または御使いといわれる、分かりやすく言えば天使です。

이 셋 중에서 날개가 있는 건 어느 천사라고 말씀 드렸는지 기억하시나요? 예, 날개가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룹(ケルビム)과 스랍(セラフィム)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반 천사에게 날개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늘은 좀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그룹(ケルビム) 천사, 스랍(セラフィム) 천사, 그리고 일반 천사라는 이름을 사용할까 하는데, 이 세 천사의 모습을 보면 참으로 우리의 삶에 있어서 목표로 삼을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저 그룹(ケルビム) 천사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그룹(ケルビム) 천사의 가장 큰 임무는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3장 24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창세기 3장 24절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ケルビム)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こうして神は人を追放し、いのちの木への道を守るために、ケルビムと、輪を描いて回る炎の剣をエデンの園の東に置かれた。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추방하시고는, 그들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룹(ケルビム)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 외에도 그룹(ケルビム) 천사는 등장합니다.

출애굽기 25장 20절
“그룹(ケルビム)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ケルビムは両翼を上の方に広げ、その翼 で『宥(なだ)めの蓋』をおおうようにする。互いに向かい合って、ケルビムの顔が『宥(なだ)めの蓋』の方を向くようにする。


출애굽기 26장 31절~33절을 봅니다.
“31.너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짜서 휘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ケルビム)들을 정교하게 수 놓아서
32.금 갈고리를 네 기둥 위에 늘어뜨리되 그 네 기둥을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싸서 네 은 받침 위에 둘지며
33.그 휘장을 갈고리 아래에 늘어뜨린 후에 증거궤를 그 휘장 안에 들여놓으라 그 휘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리라”

また、青、紫、緋色の撚(よ)り糸(いと)、それに撚り糸で織った亜麻布(あまぬの)を用いて、垂れ幕を作る。これに意匠を凝らしてケルビムを織り出す。
この垂れ幕を、金をかぶせたアカシヤ材の四本の柱に付ける。その鉤(かぎ)は金で、柱は四つの銀の台座の上に据えられる。
その垂れ幕を留め金の下に掛け、垂れ幕の内側に、あかしの箱を運び入れる。その垂れ幕は、あなたがたのために聖所と至聖所との仕切りとなる。

여기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그룹(ケルビム) 천사는 실제 천사가 아니라 조각이나 자수입니다만, 이는 모두가 그냥 사람들의 상상이 아닌, 하나님의 명에 따라 제작된 것인데, 그룹(ケルビム) 천사는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증거궤와 지성소를 지키는 곳에 바로 이 그룹(ケルビム) 천사를 그러넣으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처럼 그룹(ケルビム) 천사의 가장 큰 임무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을 하는 천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스랍(セラフィム) 천사입니다. 이 천사는 성경 전체 중에서 이사야서 6장에만 등장합니다.


이사야 6장 1절~4절까지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 6장 1절~4절
“1.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스랍(セラフィム)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ウジヤ王が死んだ年に、私は、高く上げられた御座に着いておられる主を見た。その裾は神殿に満ち、
セラフィムがその上の方に立っていた。彼らにはそれぞれ六つの翼があり、二つで顔をおおい、二つで両足をおおい、二つで飛んでいて、
互いにこう呼び交わしていた。「聖なる、聖なる、聖なる、万軍の主。その栄光は全地に満ちる。」
その叫ぶ者の声のために敷居の基は揺らぎ、宮は煙で満たされた。

한국이나 일본을 비롯해서 보면 찬양사역 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형식으로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사역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참 귀하신 사역들이지요.

그런데 가끔 보면요, 예를 들어서 찬양 같은 경우에는, 어떨 때 보면 이건 무슨 하나님을 찬양하려고 하는지, 아니면 자신의 노래 실력을 자랑하려고 하는지 모를 때가있습니다. 뭐, 그렇다고 다른 사람 험담하자는 게 아니라, 제 경우를 보더라도 좀 그럴 때가 있었습니다.


당시 제가 성가대에 있었을 때 보면, 아직 좀 경력이 부족할 때인데, 제가 무슨 성악을 전공한 것이 아니지만, 어떨 때 보면 제가 생각하기에도 목소리가 참 잘 나오는 날이 있어요. 특히 자신이 잘 아는 찬양을 부를 때요. 이미 몇 번 해본 적이 있으니까 화음을 넣기도 쉬어요. 몇 번이나 해봤거든요.

하지만 바로 그럴 때 조심해야 합니다. 차를 운전할 때도 그런 이야기가 있잖아요. 자기가 잘 알지 못하는 길에서보다도 자기가 맨날 다니는 길, 자기한테 아주 익숙한 길에서 사고가 많이 난다고 하는데, 이 찬양에 있어서도 바로 자기한테 아주 익숙한 찬양을 부를 때 종종 사고가 납니다.

성가대 찬양이라고 하는 게 자기 혼자 부르는 게 아닌데, 그럴 때 자기 혼자 막 신이 나서 소리를 막 지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아주 유치한 일이지요.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 그런다고 자기가 칭찬 받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전체 찬양의 균형이 깨져서 잘못하면 아주 엉망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스랍(セラフィム) 천사는 어떻다고 기록합니까. 이는 선지자 이사야가 본 환상을 기록한 것입니다만, 여기에 보면, 스랍(セラフィム) 천사한테는 날개가 둘도 아니고 무려 여섯 개나 있었다고 하는데, 두 날개로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또 다른 두 날개로는 자신의 발을 가리고, 그리고 마지막 남은 두 날개로 날아다니면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찬양 소리가 얼마나 큰지 온 성전이 흔들릴 정도라고 하니 놀랍지 않습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의 얼굴과 발을 가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합니다만, 이는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주님을 찬양할 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찬양한다는 의미로 이해가 됩니다.


여러분, 찬양을 왜 합니까. 자신의 목소리나 자신의 노래 실력을 뽐내기 위해서 하나요? 그건 찬양이 아니라 그냥 노래방이죠. 나 스스로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나타내는 찬양,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찬양,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이라고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주의 사자라고도 불리는 일반 천사에 대해서 말씀 드립니다. 조금 오해가 있을까봐 미리 말씀 드립니다만, <일반 천사>라고 해서 다른 그룹(ケルビム)천사나 스랍(セラフィム)천사보다 밑에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유다서 1장 9절에서 미가엘 전사에 대해서는 그를 천사장(御使いのかしら)라고 했으며, 다니엘 12장 1절에서는 미가엘을 가리켜 큰 군주(大いなる君)라고 할 정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는 누가 높고 낮고의 구분이 아니라 그 역할의 구분이라고 말씀 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천사들에 보면, 교회에 안 다니는 분들도 한 번은 들어보셨을 이름인 <가브리엘>이라고 하는 천사가 등장합니다. 이 천사 가브리엘은 무엇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까.

누가복음 1장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장 26절~27절
“26.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さて、その六か月目に、御使いガブリエルが神から遣わされて、ガリラヤのナザレという町の一人の処女のところに来た。
この処女は、ダビデの家系のヨセフという人のいいなずけで、名をマリアといった。


그렇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예수님의 탄생을 전해주었습니다.

천사들은 다른 곳에도 나옵니다. 누가복음 2장 10절~11절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御使いは彼らに言った。「恐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見なさい。私は、この民全体に与えられる、大きな喜びを告げ知らせます。
今日ダビデの町で、あなたがたのために救い主がお生まれになりました。この方こそ主キリストです。

그렇습니다. 천사들의 주된 임무 중 하나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 예수님이 이 땅에 임하신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세상 일을 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열심히 공부도 하고 열심히 일도 해야지요. 이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귀한 사명입니다.

하지만 공부도 하고 사업도 하고, 여러 가지 많은 일을 하는 그 이유를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서 살아간다면, 오로지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볼 때, 아,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살아왔을까 하고 허탈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 번 성경에 등장하는 천사들의 삶을 목표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세 천사들의 역할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그룹(ケルビム)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을 지키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을 맡았습니다.

다음으로 스랍(セラフィム) 천사는 하나님을 높이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의 사자인 천사들은 좋은 소식,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다고 하는 기쁘고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합니다. 주님, 함께 해주시옵소서. 주님, 동행하여 주시옵소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분은 하나님이시요, 예수님이시요, 그리고 성령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멀리 있어서는 안됩니다.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떨어지지 말고 꼭 붙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수아 23장 8절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하기를 오늘까지 행한 것 같이 하라”

ただ今日までしてきたように、あなたがたの神、主にすがりなさい。

이 말씀은 모세로부터 지도자적인 사명을 이어 받고, 가나안 땅 점령에 있어서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한 여호수아의 마지막 유언이라고도 할 수 있는 구절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우리가 이처럼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후에도 지금까지 충실히 해왔던 것처럼 여호와를 가까이 하라. 여호와를 의지하라……여호수아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 해서 이와 같이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천사들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 나오는 등장인물 중에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이 어떤 일을 했는가 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과 동행하고자 하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룹(ケルビム) 천사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삶,
스랍(セラフィム) 천사와 같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는 삶
주의 사자와 같이 하나님을 전하고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하고,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해결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장차 다시 오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주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삶, 주님을 의지하는 삶,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2020년. 아니, 2020년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부터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이 세 천사와 같이,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삶을 통해서 주님께서 폭포수처럼 부어주시는 축복을 넘치도록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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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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