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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1회 영적인 0의 발견
2019년 12월 1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20절~21절
“20.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エペソ人への手紙 5章 20節~21節
“20.いつでも、すべてのことについて、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名によって、父である神に感謝しなさい。
21.キリストを恐れて、互いに従い合い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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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영적인 0의 발견” 霊的0の発見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우선 몇 가지 말씀의 비교를 해볼까 합니다. 영화에서 병원 같은 곳이 등장하는 장면을 보면, 여러 명의 의사들이 모여서 엑스레이 필름을 환한 보드 위에 몇 장을 꽂아 놓고 회의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마치 그와 같이 오늘은 말씀 몇 구절을 엑스레이 필름처럼 꽂아 놓고 비교하고 분석을 함으로써 이 말씀 속에 담긴 놀라운 은혜를 깨닫게 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은 모두 네 가지입니다.

첫 번째 말씀은 마태복음 13장 44절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天の御国は畑に隠された宝のようなものです。その宝を見つけた人は、それをそのまま隠しておきます。そして喜 びのあまり、行って、持っている物すべてを売り払い、その畑を買います。

두 번째 말씀은 마태복음 7장 13절~14절입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狭い門から入りなさい。滅びに至る門は大きく、その道は広く、そこから入って行く者が多いのです。
いのちに至る門はなんと狭く、その道もなんと細いことでしょう。そして、それを見出す者はわずかです。

세 번째 말씀은 구약성경 하박국 3장 17절~18절

하박국 3장 17절~18절
“17.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ハバクク書 3章17節~18節
いちじくの木は花を咲かせず、ぶどうの木には実りがなく、オリーブの木も実がなく、畑は食物を生み出さない。羊は囲いから絶え、牛は牛舎にいなくなる。
しかし、私は主にあって喜び躍り、わが救いの神にあって楽しもう。

그리고 마지막 말씀은 다시 신약으로 돌아와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5장 20절~21절
“20.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エペソ人への手紙 5章 20節~21節
20.いつでも、すべてのことについて、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名によって、父である神に感謝しなさい。
21.キリストを恐れて、互いに従い合いなさい。

이처럼 얼핏 보기에는 각각 다른 말씀처럼 보이는 구절들을 오늘은 차근차근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은, 서로 모순이 없습니다. 서로 모순이 없다는 것은 한 쪽에서는 A가 옳다고 했는데, 다른 한 쪽에서는 B가 옳다는 식으로 서로 대립되는 부분이 하나도 없이, 모두가 일관된 내용을 담고 있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네 가지 말씀 또한 얼핏 보기에는 서로 다른 내용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 말씀 역시 일관된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과연 정말 그런지 어디 한 번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天の御国は畑に隠された宝のようなものです。その宝を見つけた人は、それをそのまま隠しておきます。そして喜 びのあまり、行って、持っている物すべてを売り払い、その畑を買います。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의문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하고, 이를 숨겨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그 때까지 자기가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모두 팔아서 그 보화가 감추어져 있던 밭을 샀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밭에 감추어져 있던 보화가 있었다면, 그리고 그 보화가 이 사람이 그 때까지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팔고도 남을 만한 보화였다고 한다면, 이는 분명 대단히 값어치가 있는 보화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까지 다른 사람들은 왜 그 보화를 발견하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을 안 가질래야 안 가질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두 번째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狭い門から入りなさい。滅びに至る門は大きく、その道は広く、そこから入って行く者が多いのです。
いのちに至る門はなんと狭く、その道もなんと細いことでしょう。そして、それを見出す者はわずかです。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두 가지 문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요, 또 하나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문으로 들어가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당연히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는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一人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우리가 하나님의 독생자 되신 예수님을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장차 영광된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느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두 말 하면 잔소리죠. 좁은 문으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말씀을 보겠습니다.

세 번째 말씀은 구약성경 하박국 3장 17절~18절입니다.

하박국 3장 17절~18절
“17.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ハバクク書 3章17節~18節
いちじくの木は花を咲かせず、ぶどうの木には実りがなく、オリーブの木も実がなく、畑は食物を生み出さない。羊は囲いから絶え、牛は牛舎にいなくなる。
しかし、私は主にあって喜び躍り、わが救いの神にあって楽しもう。

여러분, 그래요. 뭐 하나님을 믿는 것도 좋고 예수님을 믿는 것도 좋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아멘>으로 받아들여지시나요?

우리는 이 17절과 18절 사이를 유심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다고 해요.

いちじくの木は花を咲かせず、ぶどうの木には実りがなく、オリーブの木も実がなく、畑は食物を生み出さない。羊は囲いから絶え、牛は牛舎にいなくなる。

오랫동안 정성 들여서 나무를 심어도 열매를 맺지 못했어요. 그 이유가 가뭄 때문인지 홍수 때문인지, 벌레 때문인지, 지진 때문인지, 화산 때문인지 그 이유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무화과 나무를 심어도 포도나무를 심어도 감람나무를 심어도 거둘 양식이 없습니다.

이제 가축을 길러보려고 했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어야 해요. 가축을 치면 젖을 많이 얻을 수 있으면 그것을 팔 수 있고, 양 같으면 그 털을 깎아서 수익을 얻을 수 있겠지요. 그리고 서로 해가 갈수록 새끼도 낳고 그러면 가축들도 들어나고 그래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 말씀에 보면 어떻대요? 이건 무슨 질병 때문인지 아니면 천재지변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이 또 역시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다고 합니다.

완전히 다 망했어요. 예수님을 믿지 사람이면 또 모를까. 예수님을 잘 믿었는데 이렇게 되었으면 어떻게 해야 정상입니까. 그렇죠. 하나님 탓도 하고 예수님 탓도 해야죠. 내가 지금까지 교회에 다닌 게 몇 년인데, 내가 교회에서 봉사를 얼마나 많이 내고 내가 헌금을 얼마나 많이 내고, 내가 전도를 얼마나 많이 했는데, 주변에서는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 거야…… 이게 정상 아니에요? 제가 이상한가요?

그러니까 이 말씀은 17절에서 18절에 넘어갈 때 우리가 가진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이 정상이겠습니까.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기 때문에 내가 여호와를 원망하고 슬퍼하리로다……

いちじくの木は花を咲かせず、ぶどうの木には実りがなく、オリーブの木も実がなく、畑は食物を生み出さない。羊は囲いから絶え、牛は牛舎にいなくなる。
だから、私は主を恨み、悲しもう。

이게 우리가 가진 상식 아닙니까.

그런데 본문에 보면 17절과 18절이 어떻게 연결됩니까.

하박국 3장 17절~18절
“17.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ハバクク書 3章17節~18節
いちじくの木は花を咲かせず、ぶどうの木には実りがなく、オリーブの木も実がなく、畑は食物を生み出さない。羊は囲いから絶え、牛は牛舎にいなくなる。
しかし、私は主にあって喜び躍り、わが救いの神にあって楽しもう。

여러분, 이게 정상입니까. 아니에요. 저는 아무리 읽어도 이건 이해가 가지 않아요. 하지만 제가 이해가 안 간다고 성경이 바뀝니까.

사실 좀 바뀌었으면 하는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마태복음 5장 18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天地が消え去るまで、律法の一点一画も決して消え去ることはありません。すべてが実現します。

그렇습니다. 내가 이해를 하든 못 하든, 나한테 불만이 있든 없든, 성경에 적힌 하나님의 말씀은 단 일점 일획도 바뀌지 않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서 잠시 수학 이야기를 하나 해볼까 합니다. 서기 5세기 경의 인도에서는 대단히 큰 수학적 발견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0의 발견이었지요.

그 전까지는 0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생각해보세요. 0이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지요. 100에 0을 더해도 100이고, 100에서 0을 빼도 100 그대로입니다. 0에 0을 더해도 0이고, 0에서 0을 빼도 0이에요. 이게 뭐예요? 이런 숫자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인도에서 0이 발견된 이후에 수학은 어마어마한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아무 것도 없는 0, 아무런 의미도 없는 줄 알았던 0이었지만, 이제는 이 0이 없이는 수학은 고사하고 산수도 논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해진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흥미로운 내용이 나옵니다.

출애굽기 15장 22절~25절 중반부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15장 22절~25절 중반부
22.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5.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モーセはイスラエルを葦の海から旅立たせた。彼らはシュルの荒野へ出て行き、三日間、荒野を歩いた。しかし、彼らには水が見つからなかった。
彼らはマラに来たが、マラの水は苦くて飲めなかった。それで、そこはマラという名で呼ばれた。
民はモーセに向かって「われわれは何を飲んだらよいのか」と不平を言った。
モーセが主に叫ぶと、主は彼に一本の木を示された。彼がそれを水の中に投げ込むと、水は甘くなった。

당시에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들이 몇 명 정도였지요? 그렇습니다. 약 200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약 200만 명에 달하는 이스라엘 민족이 노예사리를 하고 있던 애굽을 탈출해서 광야를 헤매고 있을 때 목이 말랐는데 물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던 중 어떻게 해서 간신히 물을 찾아냈는데, 이게 써서 도저히 못 마시겠어요. 그래서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무 하나를 가리키셨대요. 그래서 그 나무를 그 쓴 물에 던졌더니 그 물이 달게 되어서 마실 수 있었다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내가 지금 0을 가지고 있어요. 거 참 여기저기를 둘러봐도 0 투성이에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는데도 어찌 된 게 0밖에 없어요. 주머니들 뒤져도 0밖에 없고, 서랍을 열어도 0밖에 없습니다. 통장에도 0이요, 가방 속에도 0입니다. 나한테는 온통 0 투성이에요. まみれ、だらけ、ずくし

그야말로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는 격이겠지요.

いちじくの木は花を咲かせず、ぶどうの木には実りがなく、オリーブの木も実がなく、畑は食物を生み出さない。羊は囲いから絶え、牛は牛舎にいなくなる。

이럴 때 많은 사람들은 절망을 합니다. 좌절을 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넓은 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이 넓은 문으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그 문은 어디로 통한다고요? 그렇습니다. 멸망으로 통하는 문입니다. 지옥으로 통하는 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그 문으로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들어가야 할 문은 좁은 문입니다. 생명으로 이어지는 문입니다. 그 문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박국 3장 17절~18절
“17.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ハバクク書 3章17節~18節
いちじくの木は花を咲かせず、ぶどうの木には実りがなく、オリーブの木も実がなく、畑は食物を生み出さない。羊は囲いから絶え、牛は牛舎にいなくなる。
しかし、私は主にあって喜び躍り、わが救いの神にあって楽しもう。


이것이 좁은 문입니다. 내게 있는 것이 온통 0일지라도, 이럴 때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야말로 좁은 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좁은 문을 많은 사람들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여기서 좌절하고 맙니다. 포기하고 맙니다.

여기서 마태복음 13장 44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天の御国は畑に隠された宝のようなものです。その宝を見つけた人は、それをそのまま隠しておきます。そして喜 びのあまり、行って、持っている物すべてを売り払い、その畑を買います。

어쩌면 이 감추어졌던 보화, 사람들이 그 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보화는 바로 이 0에 대한 감사와 찬송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가진 것이 온통 0이었을 때, 바로 그 때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는 것이야말로 천국이라는 이름의 값진 보화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인데, 사람들은 이를 모르고 모두 지나쳐버렸기 때문에, 모두 넓은 문으로 들어가버렸기 때문에 이 너무나도 귀한 천국이라는 이름의 보화를 발견하지 못했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0을 9를 생각해보십시오. 0은 작고 9는 큽니다. 많은 사람들은 0을 우습게 여기고 9를 귀하게 여깁니다. 한 사람은 비록 내가 가진 것이 0일지라도 그 가진 0에 감사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0을 멀리하고 인간의 생각으로, 인간의 방법으로 가장 큰 숫자인 9를 모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나무를 던지십니다.


비록 내 눈앞에 있는 물이 쓰다고 해서, 이를 원망이라는 이름으로, 절망이라는 이름으로 다 엎어버린다면, 이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모든 소망이 사라집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얻을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 쓴 물을 두고 주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은 나무를 던지셔서 그 쓴 물을 단번에 달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0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도 0이고 저기에도 0 밖에 없습니까. 바로 이 때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그 앞에 나무를 던지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0 앞에 1이 붙으면 10이 되고 100이 되고 1000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0이 몇 개입니까. 6개쯤 되십니까. 그 앞에 1이 붙으면 1,000,000입니다. 1 다음에 0이 10개 붙으면 얼마가 되는 줄 아십니까. 100억입니다. 이래도 0이 우스우십니까. 이 사실을 아는 것이야말로 영적인 0을 발견하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의 힘을 의지하면서, 사람의 생각으로 0을 버리고 9만 모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9가 10개 모이면 어떤 숫자가 되시는지 금방 아시나요? 자그마치 99억9천9백9십9만9천9백9십9가 됩니다. 대단히 큰 숫자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기서도 나무를 던지십니다. 그 던지신 나무가 만약에 소수점이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9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첫 9 뒤에 점 하나가 붙어버리게 되면 9.999999999가 됩니다. 그 뒤에 아무리 9가 100개 천 개 붙는다 하더라도 10이 못 됩니다. 만약에 제일 앞에 있는 9 앞에 소수점이 붙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0.999999999…… 이렇게 되면 10은 고사하고 1도 채 못 되는 일이 발생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게 지금 제가 지어낸 이야기 같습니까.

누가복음 12장 16절~21절
16.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それからイエスは人々にたとえを話された。「ある金持ちの畑が豊作であった。
彼は心の中で考えた。『どうしよう。私の作物をしまっておく場所がない。』
そして言った。『こうしよう。私の倉を壊して、もっと大きいのを建て、私の穀物や財産はすべてそこにしまっておこう。
そして、自分のたましいにこう言おう。「わがたましいよ、これから先何年分もいっぱい物がためられた。さあ休め。食べて、飲んで、楽しめ。」』
しかし、神は彼に言われた。『愚か者、おまえのたましいは、今夜おまえから取り去られる。おまえが用意した物は、いったいだれのものになるのか。』
自分のために蓄えても、神に対して富まない者はこのとおりです。」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세가 나무 하나 던진 것으로 몇 명이 물을 마셨습니까. 2~3명이요? 아니요. 당시 이스라엘 민족 200만 명이 물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평생토록 열심히 재산을 모아놓고 몇 십 년 동안 즐기자고 했더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다고요? 예, 몇 십 년은 고사하고 당장 그날 밤 네 영혼은 도로 찾을 수도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에베소서 5장 20절~21절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5장 20절~21절
“20.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いつでも、すべてのことについて、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名によって、父である神に感謝しなさい。
キリストを恐れて、互いに従い合いなさい。


우리 주머니가 9로 넘칠 때만 감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いつでも、すべてのことについて

9가 있으십니까.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것이 온통 0 투성이십니까. 그래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좁은 문, 생명으로 이어지는 문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천국이라는 보화를 얻을 수 있는 길입니다. 그 0에 대한 감사가 쌓였을 때 하나님께서 나무를 던지시면 100만이 되고 100억이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무화과나무가 무성하든 안 하든, 포도나무에 열매가 많든 없든, 우리나 외양간에 양이나 소가 많든 없든,

いちじくの木の花が咲こうが、咲くまいが、ぶどうの木に実りがあろうがなかろうが、囲いや牛舎に羊や牛たちがいようがいまいが、

영적인 0의 의미를 깨닫고, 나무를 던지시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의지하면서, 범사에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넘치는 축복, 100만의 축복, 100억의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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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0회 신앙의 절대평가와 상대평가
2019년 12월 8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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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46절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マタイの福音書 5章 46節
“自分を愛してくれる人を愛したとしても、あなたがたに何の報いがあるでしょうか。取税人でも同じことをしているではありません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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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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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신앙의 절대평가와 상대평가” 信仰の絶対評価と相対評価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평가를 하거나 평가를 받는 경우는 여러 상황을 고려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 평가 방법은 크게 절대평가와 상대평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이 둘의 구분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절대평가라고 하는 것은, 예를 들어서 어떤 성적을 메기는 구분이 A, B, C, D라고 되어 있는 경우에, 100명의 학생이 모두 90점 이상을 받았다면, 만약에 90점 이상이 A라고 했을 때, 100명의 학생 모두가 A학점을 받게 됩니다. 반대로 100명의 학생이 모두 40점 대를 받았어요. 50점 이상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100명 모두가 D학점을 받을 수 있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절대평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반면에 상대평가는 어떤 것이냐 하면, 점수가 어떻게 나왔다 하더라도 반드시 정해진 비율에 따라서 A부터 D까지 성적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앞서 살펴본 예처럼 어떤 시험에서 100명의 학생이 모두 90점 대를 받았거나, 반대로 모두 똑같이 40점 대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반드시 A부터 D까지의 성적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는 하물며 점수가 똑같았다 하더라도 다른 요소들, 예컨대 학교에서라면 무슨 과제나 출석률, 수업 태도까지 고려를 해서라도 무조건 이 비율에 맞게 성적을 메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 외에도 예를 들어서 어떤 시험 같은 경우에도, 무조건 몇 점이 넘으면 합격이라는 식으로 되어 있다면 이는 절대평가이고, 반면에 점수가 어떻게 나오든 몇 명만 합격시킨다고 하는 경우는 상대평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 신앙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평가하십니다. 성경에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좋은 평가를 하시면 축복을 많이 주시고, 나쁜 평가를 하시면 축복을 좀 적게 주시거나, 심할 경우에는 저주나 벌까지도 내리는 경우를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시험이나 성적에서 좋은 평가를 잘 받기 위해서는, 그냥 막무가내 식으로 열심히 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평가방법을 알아야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래야지만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 수가 있고, 그 중요한 것을 위해서 노력을 해야지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축복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여부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평가방법을 잘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노력을 아무리 해도 힘만 들고 축복을 못 받게 되는 최악의 경우도 일어날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절대평가로 판단하실까요. 아니면 상대평가로 판단하실까요.

이를 위해서 먼저 오늘 본문 앞에 나오는 말씀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5장 38절에서 42절까지만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38절~42절
38.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目には目を、歯には歯を』と言われていたのを、あなたがたは聞いています。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悪い者に手向かっ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の右の頬を打つ者には左の頬も向けなさい。
あなたを告訴して下着を取ろうとする者には、上着も取らせなさい。
あなたに一ミリオン行くように強いる者がいれば、一緒に二ミリオン行きなさい。
求める者には与えなさい。借りようとする者に背を向けてはいけません。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만, 먼저 38절 말씀부터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38절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目には目を、歯には歯を』と言われていたのを、あなたがたは聞いています。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출애굽기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하신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21장 24절~25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1장 24절~25절
“24.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25.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目には目を、歯には歯を、手には手を、足には足を、
火傷には火傷を、傷には傷を、打ち傷には打ち傷をもって償わなければならない。

이 부분은 세상적으로 보면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내용으로도 유명합니다만, 그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 등장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이처럼 유명한 말씀이다 보니 세상 사람들도 종종 이 구절을 인용하기도 합니다만, 대체적으로 보면 이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른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렇게 들으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경우를 보면, 예를 들어서 “내가 이만큼 당했으니까 반드시 복수를 해야 한다” 뭐 이럴 때 이런 대사를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더러 반드시 복수를 하라……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건가요?

그렇다면 좀 이상한 일이 발생합니다.

먼저 잠언 24장 29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잠언 24장 29절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그 사람에게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

「彼が私にしたように、私も彼にしよう。彼の行いに応じて、仕返しをしよう」と言ってはならない。

다음으로 로마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12장 19절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愛する者たち、自分で復讐してはいけません。神の怒りにゆだねなさい。こう書かれているからです。「復讐はわたしのもの。わたしが報復する。」主はそう言われます。

물론 출애굽기에 나온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고, 잠언은 솔로몬 왕이, 그리고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쓴 것이지요. 각각 다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을 믿습니까.

디모데후서 3장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聖書はすべて神の霊感によるもので、教えと戒めと矯正と義の訓練のために有益です。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 66권, 구약 39권 신약 27권은 모두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졌으며, 서로 간에 모순이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앞서 살펴본 출애굽기 21장 24절~25절에 나온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目には目を、歯には歯を 라는 구절이 복수를 하라는 말씀이라고 이해한다면, 앞뒤가 맞지를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무슨 뜻인가 하면, 이는 복수를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반대로 복수를 제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 하면,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피해와 똑 같은 분량의 보상이나 배상을 받아야 하겠습니다만, 이를 피해자인 내가 결정할 수 있을까요? 물론 여러분처럼 양심이 있으신 분들은 괜찮겠습니다만, 세상에 보면 내가 입은 피해를 조금 크게 부풀려서 상대방으로부터 받아내려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 출애굽기에 나온 규정은, 쉽게 말씀을 드리자면 조금 피해를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많이 받아내려고 하지 말고, 피해를 입은 만큼만 청구하라는 내용입니다. 이 또한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겠습니다만, 피해를 입힌 쪽에서는 조금만 물어주고 싶어할 것이요, 피해를 당한 쪽에서는 조금이라도 많이 받아내려고 하겠지요. 그렇다면 얼마만큼 피해를 입었는지에 대해서는 누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재판을 통해서, 객관적인 사람에 의한 합리적인 판단에 의존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복수를 권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적인 복수를 제한하신 것이라는 뜻으로 우리는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5장 38절~39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38.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目には目を、歯には歯を』と言われていたのを、あなたがたは聞いています。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悪い者に手向かっ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の右の頬を打つ者には左の頬も向けなさい。
あなたを告訴して下着を取ろうとする者には、上着も取らせなさい。

예수님께서는 복수를 하지 말라는 정도가 아니라,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누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고 하셨다는데, 이 말씀을 두고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대부분 보면 사람들은 오른손잡이가 많은데, 오른손 잡이인 사람이 상대방을 있는 힘껏 뺨을 때린다고 하면 맞는 사람은 왼쪽 뺨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가 너의 오른편 뺨을 치거든……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데, 이는 오른손 잡이인 사람이 손등으로 자신의 오른편 뺨을 쳤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해석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해석하게 되면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도 모두 이해가 됩니다.

여러분께서는 그런 뺨 맞아보셨습니까. 이렇게 때리는 뺨의 특징은 두 가지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통증만으로 본다면 그렇게 심하게 아프지는 않습니다. 주먹으로 있는 힘껏 얼굴을 때린다면 모를까, 그깟 손등으로 얼굴을 때린다고 해 봤자 뼈가 부러지거나 이빨이 나가거나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둘째로, 그런 맞은 뺨을 맞은 사람의 기분은 어떻습니까. 오히려 대단히 기분이 상하는 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계속해서 마태복음 5장 40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이를 또 잘못 이해 하는 경우가 있는데, 자, 여기서 오늘 질문이 나갑니다. 잘 들어보시고 판단해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저한테 왔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봐, 당신 목사지? 그러면 성경 말씀을 잘 지켜야 하잖아?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라고 하는데, 당신 살고 있는 집 있지? 그거 나한테 줘.

만약에 누가 저한테 이런 요구를 했다고 하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번, 그래. 성경에 그렇게 적혀 있으니, 비록 내 집은 아니라 월세이긴 하지만, 내가 내일 당장 이사를 갈 테니 당신이 들어와서 사십시오……라고 말한다.


2번, 성경은 성경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말아라. 라고 말한다.

3번, 기타

어떤 것이 정답이겠습니까.

이건 목사 만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경을 잘 지켜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지만 이는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5장 39절~40절을 다시 한 번 자세히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39절~40절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悪い者に手向かっ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の右の頬を打つ者には左の頬も向けなさい。
あなたを告訴して下着を取ろうとする者には、上着も取らせなさい。

40절 말씀은 어떻습니까.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 下着を取ろうとする者には、上着も取らせなさい。 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요즘 세상에서는 무슨 젊은 여자 속옷 도둑도 있다고 하는데, 당연하지만 이건 그런 말씀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그리 값이 나가지 않는 것, 뭐, 제가 무슨 뭐 BTS 같은 아이돌도 아닌데, 제가 입은 러닝 같은 속옷이 것이 값어치가 있겠어요?

그런데 그런 값어치가 거의 없는 네 속옷 하나를 빼앗기 위해서 누군가가 너를를 고발까지 했다면 어떻게 하냐. 예수님은 많은 것을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새 옷을 사서 주라는 것도 아니에요. 누가 너한테서 그런 값어치 없는 것들을 빼앗으려 한다면, 그 사람은 오죽 가진 것이 없으면 네가 입던 러닝 하나 빼앗기 위해서 고발까지 하겠니. 야, 차라리 네가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안 입는 겉옷 하나 있잖니. 러닝 만이 아니라 어차피 네가 안 입는 그 겉옷까지 줘라.

이러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마태복음 5장 41절을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41절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あなたに一ミリオン行くように強いる者がいれば、一緒に二ミリオン行きなさい。

여기서 5리라고 한국말로는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주석서에 보면 대략 성인 남성 1,000발자국 정도, 대체적으로 1미터가 조금 넘으니까 1.2킬로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5킬로나 10킬로 접도가 아니라 1.2킬로를 가게 할 정도의 수고를 요구하면 2.4킬로 정도를 갈 수고까지도 해줘라……이런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42절에 보면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求める者には与えなさい。借りようとする者に背を向けてはいけません。

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또 이것만 떼 내어서 내가 달라고 하는 것을 당신은 다 줘야 한다……이렇게 우기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제발 그런 억지를 부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군가가 제게 와서 말하기를, 이 보시오, 홍 목사. 내가 돈이 없는데, 목사인 당신이 나한테 100만엔 만 꿔줘. 성경에서는 꿔달라고 하는 사람한테 거절하지 말라고 적혀 있잖아? 뭐 그러면 또 어떻게 합니까.

이 구절을 두고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인 아우구스트 톨룩(アウグスト・トールック)이 말하기를 “만약에 구하는 자에게 모든 것을 줘야 한다면, 살인자에게 칼도 줘야 할 것인가” 하고 더 극단적인 표현을 했습니다.

지금 39절부터 이어지는 구절은 모두 한 가지의 내용을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계신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는 어쩌면 우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 그것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줘버리라고 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존심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존심, 어떠십니까. 별것 아닌 것 같습니까. 아니요. 이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다툼이 일어나고, 하물며 얼마나 많은 끔찍한 사건까지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자존심이 상할 때, 예수님을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여러 모로 보나 우리보다 좀 나은 사람한테 무시를 당해도 기분이 나쁜데, 씻지 못할 죄인들한테 하나님의 아들이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셨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어떠셨습니까.

이사야서에서 예언된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7절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しかし、彼は私たちの背きのために刺され、私たちの咎のために砕かれたのだ。彼への懲らしめが私たちに平安をもたらし、その打ち傷のゆえに、私たちは癒やされた。
私たちはみな、羊のようにさまよい、それぞれ自分勝手な道に向かって行った。しかし、主は私たちすべての者の咎を彼に負わせた。
彼は痛めつけられ、苦しんだ。だが、口を開かない。屠り場に引かれて行く羊のように、毛を刈る者の前で黙っている雌羊のように、彼は口を開かない。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우리를 위해서 채찍에 맞아 주셨고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죄 많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그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핍박을 통하여 자존심이 상하셨다 하더라도 우리를 위해 그 입을 열지 않으셨다고, 모든 것을 감당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7절~8절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正しい人のためであっても、死ぬ人はほとんどいません。善良な人のためなら、進んで死ぬ人がいるかもしれません。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사랑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내 자존심 챙길 것 다 챙기고, 어떻게 사랑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신앙 안에서도 절대평가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는 바로 믿음입니다.

사도행전 16장 31절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二人は言った。「主イエスを信じ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もあなたの家族も救われます。」

갈라디아서 3장 6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アブラハムは神を信じた。それで、それが彼の義と認められた」とあるとおりです。

이처럼 믿음에 있어서는 절대적 평가입니다. 우리가 믿으면 됩니다. 믿기만 하면 우리는 의로 여김을 받고 구원을 받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상대적 평가도 분명히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장 46절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自分を愛してくれる人を愛したとしても、あなたがたに何の報いがあるでしょうか。取税人でも同じことをしているではありませんか。

우리가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어떻습니까. 너희가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너희를 먼저 사랑하는데, 그 사람을 사랑해봤자 무슨 상이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세리도 이같이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세리라고 하는 것은, 요즘의 세무 공무원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죄인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던, 같은 이스라엘 민족이면서 동족의 피를 빠는 매국노적인 존재였습니다. 그와 같은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너희들이 받을 상은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은 끝이 아닙니다. 만약에 구원이 최종목표라면 이와 같은 두꺼운 성경은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냥 기도하고, 예배 출석하고, 십일조 내고, 가끔 금식하고, 뭐 그 정도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천국은 가만히 앉아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バプテスマのヨハネの日から今に至るまで、天の御国は激しく攻められています。そして、激しく攻める者たちがそれを奪い取っています。

빌립보서 3장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침노라고 하는 것은 있는 힘껏 공격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위해서 그 푯대를 향하여 걸어가는 게 아닙니다. 힘껏 달려간다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도 이처럼 달려간다고 하는데, 우리가 여유 부리고 쉬엄쉬엄 걸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이를 위해서 무엇을 하라고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상대평가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남들과 똑 같은 일을 해 봤자 받을 상이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하라고요? 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존심을 조금은 내려놓읍시다. 주님을 위해서 내려놓읍시다. 그리고 그 자존심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줍시다.


돈 많이 쓰라는 것도 아닙니다. 많은 희생을 하라는 것도 아니에요.

내가 별로 안 입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겉옷 값 정도입니다. 1킬로 가는 것을 2킬로 가는 것 정도입니다. 1킬로는 걸음걸이로 15분 정도 걸려요. 자동차로 가면 1분도 안 걸리죠. 그거 2킬로 가는 정도입니다. 그 정도의 자존심을 나누어 주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버리신 자존심과 비교해본다면, 나한테 있는 자존심이 대단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신앙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与え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も与えられます。詰め込んだり、揺すって入れたり、盛り上げたりして、気前良 く量って懐に入れてもらえます。あなたがたが量るその秤で、あなたがたも量り返してもらえるからです。」

우리가 작은 내 자존심을 이웃한테 나누어 주면, 그 빈 자리를 하나님께서 채워주십니다. 넘치도록 채워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크나큰 사랑을 기억하시고, 이웃한테 우리의 마음을 나누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누르고 흔들어 넘치는 축복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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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09회 두 형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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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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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9회 두 형제 이야기
2019년 12월 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31절~32절
31.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ルカの福音書 15章 31節~32節
31.父は彼に言った。『子よ、おまえはいつも私と一緒にいる。私のものは全部おまえのものだ。
32.だが、おまえの弟は死んでいたのに生き返り、いなくなっていたのに見つかったのだから、喜び祝うのは当然ではない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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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두 형제 이야기” 二人の兄弟の物語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부분은 누가복음 15장 11절~32절입니다. 여기에 보시면 3명의 등장인물이 있습니다. 먼저 아버지, 그리고 맏아들과 둘째 아들입니다. 그리고 본문에는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우선 이 두 아들에 대한 기록을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둘째 아들 이야기가 먼저 등장합니다. 이는 누가복음 15장 12절~24절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맏아들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그 다음 구절인 25절부터 32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보통 일반적으로 이 이야기를 돌아온 탕자. 帰ってきた放蕩息子 라고 하여 주로 둘째 아들에 대해서 초점이 맞춰져 있고, 맏아들에 대한 기록은 덤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만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앞서 비교해본 구절의 분량, 그러니까 둘째 아들과 첫째 아들 이야기에 대하여 차지하고 있는 구절의 분량을 비교해보면 어떻습니까. 둘째 아들에 대해서는 12절~24절. 분량으로는 13절, 그리고 맏아들에 대해서는 25절~32절이니까 8절입니다. 비율로 본다면 둘째 아들에 대한 기록이 60%라고 한다면 맏아들에 대한 기록은 40%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지요.

40%. 이는 덤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비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단순한 양의 비교에 의미가 있을까 하는 점부터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신학자들 사이에 있어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후 대략 33년 정도를 사셨다고 합니다만, 이 땅에서의 일대기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보면, 공생애를 대략 30세 정도에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공생애 기간은 대략 3년 정도이고, 33세 경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신 후 3일 후에 부활하셔서 40일 간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의 사역은 3년이라는 기간이었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이력서를 쓴다 하면 몇 년에 어디서 태어나서 어느 학교를 졸업하고 등등과 같은 내용이 있겠으나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10대 때 어디에 계셨는지, 20대 때 무엇을 하셨는지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저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의 직업이 당시 목수였다고 하니까 아마도 요셉의 일을 도우시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은 할 수 있겠으나, 여기에 대한 명확한 근거는 없고, 또한 근거가 없다 하더라도 별로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핵심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하셨던 3년 정도의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3년이라는 기간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느껴지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는 대단히 짧은 기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요즘처럼 무슨 인터넷이다 뭐다 해서 자신의 생각을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방법이 있었다면 모를까, 당시는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인간적인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3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여유로운 시간이라고 할 수 없었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짧은 3년 동안에 이스라엘 여러 곳을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시고 이적을 행하셨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는 그 짧은 시간을 쪼개서 말씀을 하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가하게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말씀을 전하신 적이 없습니다. 1분 1초를 아끼시면서 반드시 필요한 말씀을 전하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 두 형제 이야기 중에서, 돌아온 탕자, 즉 둘째 아들에 대한 비율이 60%인데 반해 맏아들에 대한 비중이 40%라고 한다는 것은, 맏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단순히 덤이 아닌,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은 이 두 형제 중에서 특히 맏아들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려고 합니다만, 이를 위해서는 당연하지만 60%에 해당하는 둘째 아들에 대한 내용을 빼놓고는 설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은 먼저 둘째 아들에 대한 부분을 간략히 살펴본 다음에, 오늘의 주인공인 맏아들에 대해서 조금 깊이 있게 생각해 봄으로 인해서, 여기에 담긴 놀라운 은혜를 깨닫게 되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둘째 아들 이야기입니다. 조금 길지만 성경 구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2절~24절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2절~24절

“12.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弟が父に、『お父さん。私に財産の分け前を下さい』と言った。それで父は、身代(しんだい)をふたりに分けてやった。
それから、幾日もたたぬうちに、弟は、何もかもまとめて遠い国に旅立った。そして、そこで放蕩して湯水のように財産を使ってしまった。
何もかも使い果たしたあとで、その国に大ききんが起こり、彼は食べるにも困り始めた。
それで、その国のある人のもとに身を寄せたところ、その人は彼を畑にやって、豚の世話をさせた。
彼は豚の食べるいなご豆で腹を満たしたいほどであったが、だれひとり彼に与えようとはしなかった。
しかし、我に返ったとき彼は、こう言った。『父のところには、パンのあり余っている雇い人が大ぜいいるではないか。それなのに、私はここで、飢え死にしそうだ。
立って、父のところに行って、こう言おう。「お父さん。私は天に対して罪を犯し、またあなたの前に罪を犯しました。
もう私は、あなたの子と呼ばれる資格はありません。雇い人のひとりにしてください。」』

こうして彼は立 ち上がって、自分の父のもとに行った。ところが、まだ家までは遠かったのに、父親は彼を見つけ、かわいそうに思い、走り寄って彼を抱き、口づけした。
息子は言った。『お父さん。私は天に対して罪を犯し、またあなたの前に罪を犯しました。もう私は、あなたの子と呼ばれる資格はありません。』
ところが父親は、しもべたちに言った。『急いで一番良い着物を持って来て、この子に着せなさい。それから、手に指輪をはめさせ、足にくつをはかせなさい。
そして肥えた子牛を引いて来てほふりなさい。食べて祝おうではないか。
この息子は、死んでいたのが生き返り、いなくなっていたのが見つかったのだから。』そして彼らは祝宴を始めた。

보통 우리가 생각하기로 아버지의 재산을 나누어 받을 때가 언제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 유산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지요.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에도 물론 어느 정도 자금을 도와달라거나 하는 말씀을 드릴 수는 있겠습니다만, 이 둘째는 단순히 돈을 어느 정도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재산 중에서 자기가 받을 몫을 달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 말은 무엇이냐 하면 쉽게 말해서, 아버지가 지금은 살아 계심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셨을 때 내가 받을 유산을 미리 앞당겨서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상식적으로 보아 문제가 많은 짓입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여기에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그냥 나누어 줍니다. 아마도 이 아버지는 부자였나 보지요. 그 많은 돈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재산을 낭비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다 허더라도 펑펑 돈을 쓰면 언젠가는 없어집니다. 거기에다가 흉년이 들었다고 합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불황, 불경기가 되겠지요.

자, 지금까지 돈을 벌 줄은 모르고 쓸 줄만 알았던 둘째 아들, 돈이 떨어졌으니 일을 하려고 합니다만 불황까지 겹치고 말았으니, 그렇잖아도 줄어든 일자리에다가, 아무런 경력도 없는 그가 제대로 된 곳에 취직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그는 먼 나라로 갔다고 하는데, 15절에 보니 돼지를 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율법으로 인해서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안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이 돼지를 기르는 일은 없었지요. 하지만 그 곳은 먼 나라에 다가 돼지를 치고 있었다고 하니, 분명 외국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지금 경기가 안 좋아지면 자기 나라 사람들도 일자리가 없어지는데, 어디인지 모르는 외국에서 온 사람, 그 뿐만이 아니라 경험도 없고 이제 가진 돈도 다 떨어진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정말 밑바닥 일, 이스라엘에서는 해 보지도 않았던 일, 그 일을 하는 것을 본 적도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 돼지 치는 일을 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하지만 근로환경이 그리 좋지는 않았나 봅니다. 너무나 배가 고픈데, 넉넉하게 먹을 수가 없어요. 아마도 혹독한 종살이를 하지 않았나 합니다. 오죽하면 사람들은 돼지 사료로 쓰였던 쥐엄 열매를 먹으려고 해도 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야말로 인생 밑바닥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비로소 과거 생각을 합니다. 내가 큰 죄를 지었구나. 내가 육신의 아버지에게 만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 정복 당시 각 지파마다 땅을 할당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민족이라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도외시하고 그는 먼 나라로 떠났던 것이었지요. 이 얼마나 큰 죄입니까.


그는 생각합니다. 내가 당연히 가지고 있는 줄 알았던 그 아들이라는 자리.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아버지 집에서의 생활. 그 때까지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그와 같은 생활이 알고 보니 놀라울 정도로 큰 은혜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그 자리에 다시 올라갈 수는 없겠지만, 아버지 집에서 가장 밑바닥 종으로 산다 하더라도 지금 이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래. 돌아가자.

그는 깨달았습니다. 과거에는 자신이 죄인인 줄 몰랐지만, 이제 자신이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과거에는 아버지 아들이라는 것이 대단한 줄 몰랐지만, 이제 그 자리가 얼마나 놀라운 자리인지, 얼마나 은혜로운 자리인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제 그에게는 더 이상 버릴 것이 없습니다. 아니, 딱 하나 버릴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존심이었습니다. 어쩌면 돈을 낭비하고 가진 것이 없어졌어도, 하물며 돼지를 치는 일까지 하면서도 그 때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이유, 그 때까지 집으로 향하려던 그의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자존심이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부잣집 아들로서 떵떵거리며 주인행세를 해왔었던 그가, 이제 가진 것 하나 없이 빈털터리로 돌아가서 종살이를 하게 된다면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결심합니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버리고는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저를 그냥 품꾼으로라도 받아주십시오. 이 말은, 종으로 고용되면 그나마 다행이지요.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품꾼으로 받아달라는 것은, 종도 아닌, 종의 아르바이트로라도 받아 달라. 말하자면 비정규직 종살이 아르바이트라도 하게 해주세요. 그렇게 부탁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가 어떻게 했습니까. 그래. 네가 그래도 과거에 내 아들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서 원래는 1년짜리 계약인데 너는 특별히 3년짜리 종살이 아르바이트로 고용해주겠다고 했나요?

여기 20절을 보면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누가복음 15장 20절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こうして彼は立 ち上がって、自分の父のもとに行った。ところが、まだ家までは遠かったのに、父親は彼を見つけ、かわいそうに思い、走り寄って彼を抱き、口づけした。

여기에 보면 아직도 거리가 먼데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그를 보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냥 우연히 아버지가 잠깐 밖에 나왔을 때 아들을 보고 달려왔다는 것일까요?

가까이 있으면 의식하지 않더라도 무엇이 있는지, 누가 거기 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거리가 먼 곳에 있다는 것은 의식하지 않으면 안 보일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아들이 먼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아들을 알아보았다는 것은, 아버지는 그 아들에 대해서 한 시도 잊지 않고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침이나 낮이나 저녁이나 밤이나, 아버지가 아직 살아있는데도 상속분을 달라고 해서 먼 나라로 가버린 둘째 아들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그 둘째 아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녀석은 남들보다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요, 제대로 일을 해서 돈을 벌 수도 없을 텐데,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나갔더라도 얼마 못 되어서 지금쯤은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을 텐데,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도 없으니 어떻게 되었을까. 어디서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을까. 이제 돌아올 때도 되었는데, 왜 아직 안 돌아올까 하고 내내 그 아들 걱정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돌아온 아들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22절을 봅니다.

누가복음 15장 22절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ところが父親は、しもべたちに言った。『急いで一番良い着物を持って来て、この子に着せなさい。それから、手に指輪をはめさせ、足にくつをはかせなさい。

빈털터리가 된 그가 좋은 옷을 입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겠지만, 이 사람의 몰골은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종들에게 명하기를 “발에 신을 신기라”라고 했습니다. 즉, 먼 나라에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신발도 신지 않고 걸어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그 모습이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보았습니다. 그것은 그토록 애타게 아들을 기다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아버지는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십시다. 이는 과거의 모든 지위를 회복해주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큰 잔치를 벌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잔치는 기쁨이 넘치는 잔치입니다. 과거의 모든 슬픔이 사라지고 놀라운 은혜로 충만한 잔치였을 것입니다.

자, 여기서 이 이야기는 얼마든지 해피 엔딩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충분히 완벽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의 주인공, 맏아들이 등장합니다.

누가복음 15장 25절~32절
25.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ところで、兄息子は畑にいたが、帰って来て家に近づくと、音楽や踊りの音が聞こえて来た。
それで、しもべのひとりを呼んで、これはいったい何事かと尋ねると、
しもべは言った。『弟さんがお帰りになったのです。無事な姿をお迎えしたというので、お父さんが、肥えた子牛をほふらせなさったのです。』
すると、兄はおこって、家に入ろうともしなかった。それで、父が出て来て、いろいろなだめてみた。
しかし兄は父にこう言った。『ご覧なさい。長年の間、私はお父さんに仕え、戒めを破ったことは一度もありません。その私には、友だちと楽しめと言って、 子山羊一匹下さったことがありません。
それなのに、遊女におぼれてあなたの身代を食いつぶして帰って来たこのあなたの息子のためには、肥えた子牛をほふらせなさったのですか。』
父は彼に言った。『子よ。おまえはいつも私といっしょにいる。私のものは、全部おまえのものだ。
だがおまえの弟は、死んでいたのが生き返って来たのだ。いなくなっていたのが見つかったのだから、楽しんで喜ぶのは当然ではないか。』」

맏아들이 밭에서 일을 하고 돌아오자 집에서 무슨 신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래서 무슨 일인지 종한테 물었더니 당신의 동생이 무사히 돌아와서 아버지가 큰 잔치를 벌였다고 하자, 이 맏아들. 오오! 그렇게 걱정했던 사랑스러운 내 동생이 돌아왔구나! 하고 반갑게 맞았대요? 아니요. 대단히 화를 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유가 뭐겠습니까. 아니, 아버지. 이게 지금 어떻게 된 노릇입니까. 평생 동안 열심히 아버지를 섬겨온 나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안 해주었으면서, 아버지의 재산을 펑펑 쓰고 돌아온 아들을 위해서는 이렇게 크게 잔치를 벌인다는 게 말이 됩니까. 뭐 이렇게 아버지에게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맏아들의 말로 비추어본다면 다음과 같은 추측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그는 동생을 미워했습니다. 그래요. 분명 그 동생은 잘못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아버지가 아직 멀쩡하게 살아계신 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상속분을 먼저 달라고 한 잘못.
둘째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땅을 버리고 이방 나라로 가버린 잘못.
셋째로,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을 허랑방탕했다, 즉, 그 많은 돈을 바람직하지 않은 데에 다 써버리고 말았다고 하는 잘못.

뭐, 이 정도면 맏아들이 동생을 미워할만한 이유가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놈이 돌아왔다고 한다면, 꼴도 보기 싫다고 하면서 내쫓아버려도 모자랄 판에, 아니면 그 돈을 다 갚을 때까지 평생 종살이를 시켜도 모자랄 판에, 집에 들여보내고는 큰 잔치를 베풀어요? 아버지, 이게 지금 말이 되는 일입니까?


이렇게 지금 맏아들은 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리시나요? 아니요. 이상하다니요.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요. 동생이 뭘 잘했다고 이렇게 환영만찬까지 베풀고 그러십니까.

이러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 31절~32절
31.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父は彼に言った。『子よ。おまえはいつも私といっしょにいる。私のものは、全部おまえのものだ。
だがおまえの弟は、死んでいたのが生き返って来たのだ。いなくなっていたのが見つかったのだから、楽しんで喜ぶのは当然ではないか。』」

여러분, 종이 아닌 아들로서, 그것도 맏아들로서 아버지 집에 있다는 것은 아버지 소유가 곧 자신의 소유였습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가는 아들한테까지도 재산을 나누어주었을 정도로 인자하신데, 하물며 같은 집에 있는 아들에 대해서 재산을 아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동생은 인생의 밑바닥을 보았습니다. 나에게 돈만 있으면 아버지를 떠나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습니까. 얼마 못 가서 참으로 비참하게 되었지요. 이 동생은 이제 깨달았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아버지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요 큰 은혜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이제 그는 절대로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왜 집을 나갔겠습니까. 불만이 있었기 때문에 나갔을 것입니다. 이제 동생은 자신이 과거에 가졌던 불만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그토록 뼈저린 경험을 동생이 두 번 다시 그와 같은 잘못된 불만을 갖지는 않겠지요.

반면 맏아들은 어떻습니까. 집을 나가는 동생을 바라보는 형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저런 나쁜 놈. 아니, 누구는 불만이 없는 줄아? 누구는 안 나가고 싶어서 안 나가는 줄 알아? 뭐 이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르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아버지를 떠나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켰던 그가 동생에 비해 의롭게 보일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어쩌면 맏아들은 동생이 집을 나가기 전의 모습, 그 때 동생이 가지고 있던 불만을, 형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만약에 동생이 먼 나라에 가고 오랫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면 어떻게 해야 마땅합니까. 돈이 많은 집이었다면 종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동생이 집을 나가고는 이렇게 몇 년째 돌아오지도 않고 소식도 없으니 몇몇 종들을 시켜서 알아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생이 무사히 돌아와서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고 한다면, 아버지, 동생 모습을 보십시오. 몇 년째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데 송아지 한 마리 가지고 어디에 붙입니까. 그러지 마시고 지금 제가 가진 송아지 두 마리를 더 잡아서 오겠습니다……이래야 사랑스러운 형의 모습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맏아들은 몰랐습니다. 무엇을 몰랐습니까. 그렇습니다. 감사를 몰랐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의 인생을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 모습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없이도, 예수님 없이도, 돈만 있으면, 세상적인 힘만 있으면 잘살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세상 속에서 절망하고 좌절하셨습니까. 모든 것을 잃고 예수님께로 돌아오니, 과거의 자신이 저지를 잘못을 깨닫게 되었습니까. 주님을 믿는 일이 귀찮은 일인 줄 알았는데, 이제 주님을 믿는 일이 은혜롭게 느껴지십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여러분은 둘째 아들입니다. 그런 여러분께 말씀 드립니다. 그 동안 참 고생 많으셨습니다.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그러나 축하 드립니다. 진정한 주님의 사랑을 깨달으셨습니다. 진정한 감사를 깨달으셨습니다.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리지 말라고 해도 돌리시겠지만, 남은 인생,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감사 속에서 주님을 찬양하며 살아가실 수 있기를 축원 드립니다.

한편, 내가 지금 별로 행복하지 않은 것 같습니까. 내 주위를 돌아보아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만한 게 별로 없을 것 같으십니까. 하나님이 없더라도, 돈이나 세상적인 힘만 있으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으십니까. 죄를 짓고 돌아온 사이나 ,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을 보면 이해할 수가 없고 사랑스럽지도 않고 가엾게 느껴지지도 않습니까.

조심하십시오. 당신은 얼마든지 둘째 아들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저지른 잘못을 똑같이, 아니 더 심하게 저지르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더욱 조심을 해야 합니다. 긴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늦기 전에 그 수많은 고생을 하고 난 다음에 둘째 아들이 깨달은 감사를 깨닫게 되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고 귀에는 들리지 않고 손에는 잡히지 않더라도, 주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해주신다는 기쁨으로 충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사랑, 주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기쁨을 가지고, 감사함으로 주님을 넘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섬김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놀라운 큰 축복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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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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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8회 영생과 영벌
2019년 11월 2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36절
31.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マタイの福音書 25章 31節~36節
31.人の子は、その栄光を帯びてすべての御使いたちを伴って来るとき、その栄光の座に着きます。
32.そして、すべての国の人々が御前に集められます。人の子は、羊飼いが羊をやぎからより分けるように彼らをより分け、
33.羊を自分の右に、やぎを左に置きます。
34.それから王は右にいる者たちに言います。『さあ、わたしの父に祝福された人たち。世界の基が据えられたときから、あなたがたのために備えられていた御国 を受け継ぎなさい。
35.あなたがたはわたしが空腹であったときに食べ物を与え、渇いていたときに飲ませ、旅人であったときに宿を貸し、
36.わたしが裸のときに服を着せ、病気をしたときに見舞い、牢にいたときに訪ねてくれた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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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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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영생과 영벌” 永遠のいのちと永遠の刑罰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먼저 본문말씀이 있는 마태복음에 앞서 누가복음부터 살펴볼까 합니다. 누가복음 16장 19절~24절입니다.

누가복음 16장 19절~24절
19.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ある金持ちがいた。紫の衣や柔らかい亜麻布(あまぬの)を着て、毎日ぜいたくに遊び暮らしていた。
その金持ちの門前には、ラザロという、できものだらけの貧しい人が寝ていた。
彼は金持ちの食卓から落ちる物で、腹を満たしたいと思っていた。犬たちもやって来ては、彼のできものをなめていた。
しばらくして、この貧しい人は死に、御使いたちによってアブラハムの懐に連れて行かれた。金持ちもまた、死んで葬られた。
金持ちが、よみで苦しみながら目を上げると、遠くにアブラハムと、その懐にいるラザロが見えた。
金持ちは叫んで言った。『父アブラハムよ、私をあわれんでラザロをお送りください。ラザロが指先を水に浸して私の舌を冷 やすようにしてください。私はこの炎の中で苦しくてたまりません。』

여러분께서 잘 아시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보면 돈이 많았던 부자와 가난했던 나사로가 죽게 되었는데 부자는 지옥에 떨어지고 나사로는 천국에 갔다는 이야기이지요.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사실 알고 보면 여기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대단히 놀라운 사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놀라운 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이 포함된 마태복음에도 숨겨져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46절까지 조금 길지만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46절

31.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人の子は、その栄光を帯びてすべての御使いたちを伴って来るとき、その栄光の座に着きます。
そして、すべての国の人々が御前に集められます。人の子は、羊飼いが羊をやぎからより分けるように彼らをより分け、
羊を自分の右に、やぎを左に置きます。
それから王は右にいる者たちに言います。『さあ、わたしの父に祝福された人たち。世界の基が据えられたときから、あなたがたのために備えられていた御国 を受け継ぎなさい。
あなたがたはわたしが空腹であったときに食べ物を与え、渇いていたときに飲ませ、旅人であったときに宿を貸し、
わたしが裸のときに服を着せ、病気をしたときに見舞い、牢にいたときに訪ねてくれたからです。』
すると、その正しい人たちは答えます。『主よ。いつ私たちはあなたが空腹なのを見て食べさせ、渇いているのを見て飲ませて差し上げたでしょうか。
いつ、旅人であるのを見て宿を貸し、裸なのを見て着せて差し上げたでしょうか。
いつ私たちは、あなたが病気をしたり牢におられたりするのを見て、お訪ねしたでしょうか。』
すると、王は彼らに答えま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が、これらのわたしの兄弟たち、それも最も小さい者たちの一人にしたことは、わたしにしたのです。』
それから、王は左にいる者たちにも言います。『のろわれた者ども。わたしから離れ、悪魔とその使いのために用意された永遠の火に入れ。
おまえたちはわたしが空腹であったときに食べ物をくれず、渇いていたときに飲ませず、
わたしが旅人であったときに宿を貸さず、裸のときに服を着せず、病気のときや牢にいたときに訪ねてくれなかった。』
すると、彼らも答えます。『主よ。いつ私たちは、あなたが空腹であったり、渇いていたり、旅人であったり、裸でいたり、病気をしていたり、牢 におられたりするのを見て、お世話をしなかったでしょうか。』
すると、王は彼らに答えます。『まことに、おまえたちに言う。おまえたちがこの最も小さい者たちの一人にしなかったのは、わたしにしなかったのだ。』
こうして、この者たちは永遠の刑罰に入り、正しい人たちは永遠のいのちに入るのです。」

여기 31절에 보면,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人の子は、その栄光を帯びてすべての御使いたちを伴って来るとき、その栄光の座に着きます。

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의 상황을 말씀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에 오셨을 때에는 고난 받는 종,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짊어지시는 종의 모습으로 오셨으나,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심판의 주로 오십니다.


이제 민족들을 모두 모아놓고 예수님께서 심판을 하시는데, 그 심판하시는 모습을 보면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우선 의인과 악인으로 나누시고는 의인은 영생에, 그리고 악인은 영벌에 들어가라는 하는 판결을 내리십니다.

역시 이 말씀도 우리에게 익숙한 내용이기 때문에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를 자세히 보면 역시 여기에도 대단히 충격적인 사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 먼저 이 두 이야기 중에 등장하는 형벌을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부자와 나사로에 등장하는 부자는 어땠습니까.

누가복음 16장 23절~24절
23.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金持ちが、よみで苦しみながら目を上げると、遠くにアブラハムと、その懐にいるラザロが見えた。
金持ちは叫んで言った。『父アブラハムよ、私をあわれんでラザロをお送りください。ラザロが指先を水に浸して私の舌を冷 やすようにしてください。私はこの炎の中で苦しくてたまりません。』

지금 이 부자는 그 손가락 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할 정도로 불꽃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요.

그리고 이제 마태복음으로 돌아와보면, 오른편과 왼편으로 나누신다고 하는데, 그 때 왼편에 있는 사람들이 받은 형벌은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마태복음 25장 41절
41.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それから、王は左にいる者たちにも言います。『のろわれた者ども。わたしから離れ、悪魔とその使いのために用意された永遠の火に入れ。

이 또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는 무서운 판결을 내리십니다.

여러분, 한국이나 일본을 보면 제일 무거운 형벌이 사형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 어떤 끔찍한 죄를 저지른 흉악범이라 한다 하더라도 그 이상의 형벌은 없습니다. 그리고 형 집행에 있어서도 지금은 가급적 고통을 주지 않는 방법이 연구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용서받지 못할 정도로 끔찍한 죄를 저지른 범인이라 하더라도 국가권력이 합법적으로 그 사람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서는 대단히 까다로운 법적 절차를 필요로 합니다. 보통 지법, 고법, 대법까지 올라가는 게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까지 가는 것만으로도 몇 년, 형이 확정될 때까지 길게는 10년 가까이 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확정된다 하더라도 재심청구를 할 수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기간이 많이 걸리게 됩니다.

사형보다 그래도 가벼운 형벌은 무기징역이지요. 이는 죽을 때까지 교도소에서 나올 수 없는 게 아닙니다. 보통 30년 이상 지나면 가석방 심사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심사를 해서 이제 사회에 나가도 되겠다 하고 판단이 되면 세상에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장 무거운 사형판결 정도를 받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무거운 죄를 범해야 하는가 하면, 이는 물론 여러 상황이 고려되어야 하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사람을 해치는 살인죄가 대표적인 중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일은 그야말로 무거운 범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런데 일반적으로 보면 단순히 한 사람을 해치는 정도 가지고 사형이 확정되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형이 아니라면 무기징역, 또 그 밑에는 징역 몇 년이라고 하는 유기징역, 금고, 집행유예, 벌금 등등 판결 종류는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살펴본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받은 형벌은 어떻습니까. 누가복음에 등장한 부자도 그렇고 마태복음에 등장한 사람들도 그렇고 영원히 불 속에 던져진다고 하는, 더할 나위 없이 무서운 형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요즘 세상에서, 아무리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뭐 예를 들어서 죽지 않을 정도로 뜨거운 사우나 속에 몇 년 동안 집어넣는다……만약에 그런 형벌을 만든다고 한다면, 이는 국내 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크나큰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차라리 사형이 백 번 낫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런데 성경에 등장하는 형벌은 어떻습니까. 이건 뭐 뜨거운 사우나 정도가 아닙니다. 꺼지지 않는 불, 영원히 타는 불 속으로 던져 넣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거기 던져진 사람은 어떻게 되요? 불 때문에 죽어버리나요? 아니요. 이미 죽었습니다. 이상한 말이지만 차라리 죽으면 고통은 끝이 나니까 다행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죽지 않습니다. 고통이 끝나지 않습니다. 언제까지 계속됩니까. 그렇습니다.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영원히 그 불 속에서 고통 속에 몸부림을 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형벌입니까.

자, 그렇다면 그들은 도대체 얼마나 무거운 죄를 저질렀기에 이처럼 무서운 형벌을 받게 된 것인지를 살펴봐야지요. 이게 참 놀랍습니다.


먼저, 불 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부자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살아 있을 때 어떤 무거운 죄를 저질렀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9절~21절
19.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ある金持ちがいた。紫の衣や柔らかい亜麻布(あまぬの)を着て、毎日ぜいたくに遊び暮らしていた。
その金持ちの門前には、ラザロという、できものだらけの貧しい人が寝ていた。
彼は金持ちの食卓から落ちる物で、腹を満たしたいと思っていた。犬たちもやって来ては、彼のできものをなめていた。

음? 이게 뭐예요? 부자가 사람을 죽였대요? 부자가 남의 것을 훔쳤대요? 부자가 남을 속였대요? 아니에요.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이 기록만 본다면, 부자는 자기 돈으로 좋은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답니다. 그게 다예요.

마태복음에서 왼편에 있는 사람들은 어땠습니까.
마태복음 25장 42절~45절
42.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おまえたちはわたしが空腹であったときに食べ物をくれず、渇いていたときに飲ませず、
わたしが旅人であったときに宿を貸さず、裸のときに服を着せず、病気のときや牢にいたときに訪ねてくれなかった。』
すると、彼らも答えます。『主よ。いつ私たちは、あなたが空腹であったり、渇いていたり、旅人であったり、裸でいたり、病気をしていたり、牢 におられたりするのを見て、お世話をしなかったでしょうか。』
すると、王は彼らに答えます。『まことに、おまえたちに言う。おまえたちがこの最も小さい者たちの一人にしなかったのは、わたしにしなかったのだ。』

여기에 보면 왼편에 있는 사람들은 아마도 지극히 작은 자,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별볼일 없는 사람들이 의지할 곳이 없어지거나, 헐벗었거나, 병 들었거나 옥에 갇혔거나 하는 것과 같은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도 도와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부자나 왼편에 있는 자들이나, 우리가 생각할 때 그들이 저지른 죄가 이 세상에 있는 사형판결을 받을만한 범죄보다도 더 가혹한 형벌을 받아 마땅할 정도로 무거운 죄를 지은 것 같이 보이십니까.

아니요. 정반대입니다. 윤리나 도덕적으로 본다고 한다면 비난을 받을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법적으로 보면 어떻습니까. 자신의 돈으로 좋은 옷을 입는 게 죄인가요? 자신의 돈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게 죄인가요? 가난한 나사로를 도와주지 않은 것이 죄인가요?

왼편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세상적으로 보았을 때 별볼일 없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해서 처벌 당해야 합니까?

흉악범은 고사하고 세상적으로 본다면 부자나 왼편에 있는 사람들은 무죄.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죄가 있다고 하십니다.

그것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속으로 던져 넣을 정도로 무거운 죄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게 여러분께서는 이해가 되십니까? 납득이 되시나요? 이해가 되시고 납득이 되신다는 분은, 그럼 여러분께서는 지금 이 순간 주님이 오시면 오른편에 있을 자신이 있으신가요?

성경을 조금 아시는 분들은 여기까지 들으시고, 어쩌면 로마서 3장 23절~24절을 인용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24절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すべての人は罪を犯して、神の栄光を受けることができず、
神の恵みにより、キリスト・イエスによる贖いを通して、価なしに義と認められるからです。

자, 봐라. 우리 모든 사람들은 영원한 불 속에 던져질 정도의 무거운 죄인이지만, 예수님을 믿으면 의롭게 된다고 기록되지 않느냐.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어떻게 주님으로부터 벌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누군가가 주장한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이 주장은 대단히 그럴듯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는 간단히 말해서 순서의 오류라고 하겠습니다.

만약에 이 부자에 대한 비유와 왼편에 있는 사람에 대한 비유가 구약에 나왔다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쓰여진 것이었다면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누가 하신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하셨습니다.

“너희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꺼지지 않는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한 죄인이지만 나를 믿으면 구원을 받아 영생에 들어갈 것이다.”

예수님께서 만약에, 너희들이 무거운 죄를 지은 죄인이지만 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취지로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자 했다면 이렇게 됐겠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끔찍한 형벌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큰 근거가 있습니다. 항상 제가 말씀 드리듯이, 특히 복음서를 읽을 때에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누구를 대상으로 하셨는지 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만약 이 비유가 아직 믿음이 없는 일반 회중들에게 하셨다면 믿음과 구원에 대한 말씀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두 비유는 주로 누구에게 말씀하셨냐 하면, 성경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 대상은 누구냐 하면 그 비유가 나와 있는 누가복음 16장 1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누가복음 16장 1절 초반부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イエスは弟子たちに対しても、次のように語られた。

그리고 마태복음 25장에 나와 있는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비유는 24장부터 시작합니다. 이 말씀을 시작하시는 마태복음 24장 3절 초반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절 초반부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イエスがオリーブ山で座っておられると、弟子たちがひそかにみもとに来て言った。

즉, 이 두 비유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두 말씀은 “나를 믿는 너희들에게 해줄 말이 있는데……”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부자도 아브라함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왼편에 있는 자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의 변명을 다시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2절~45절
42.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おまえたちはわたしが空腹であったときに食べ物をくれず、渇いていたときに飲ませず、
わたしが旅人であったときに宿を貸さず、裸のときに服を着せず、病気のときや牢にいたときに訪ねてくれなかった。』
すると、彼らも答えます。『主よ。いつ私たちは、あなたが空腹であったり、渇いていたり、旅人であったり、裸でいたり、病気をしていたり、牢 におられたりするのを見て、お世話をしなかったでしょうか。』
すると、王は彼らに答えます。『まことに、おまえたちに言う。おまえたちがこの最も小さい者たちの一人にしなかったのは、わたしにしなかったのだ。』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만약에 그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사람이 별볼일 없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당연히 도와드렸겠지요……. 그들의 변명은 마치 이와 같이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제가 지난 주, 토요일 쯤에 이빨이 좀 안 좋아졌어요. 원래 좀 어금니가 안 좋긴 한데, 영 좀 불편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주로 다니는 동네 치과병원이 있는데, 거기 원장님이 수요일에 나오십니다. 그래서 뭐 그럭저럭 견디다가 수요일에 가봤는데, 그 분은 제가 몇 년 동안 다니고 있기 때문에 제 이빨 사정에 대해서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잇몸에 염증이 생겼기 때문에 잇몸에 약을 넣어야 된대요.

그래서 알겠다고 그랬지요. 예전에도 약은 넣어준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게 곪았을 때 넣은 약은 좀 다른가 보더라고요. 미리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좀 아프대요. 그런데 이걸 넣어야지만 빨리 낫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가 보다 했지요. 그랬더니 거 참 이게 얼마나 아픈지 모릅니다. 아니, 약을 넣을 때도 그렇지만, 넣고 난 다음에도 너무너무 아파요. 이게 아픈 이유가 그만큼 염증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시던데, 아, 정말 지금까지 그렇게 오랫동안 통증을 느껴본 일도 별로 없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아팠습니다.

저녁 때 집에 와서 진통제를 먹고 누워서 잠을 좀 청해보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아요. 한 5시간 정도는 그렇게 아프지 않았을까 해요. 어느 쪽으로 누워도 아프고 그래서 앉았다가 누웠다가 하고 참 모처럼 아주 고생을 심하게 했습니다.

이처럼 제가 이 어금니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아, 그거 제대로 관리를 안 했기 때문 아니냐 하겠습니다만, 아니에요. 한국에 있을 때에도 꼬박꼬박 치과 다니면서 스케일링도 받고 검사도 받고 그랬습니다.

치아관리요? 저는 그 정도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냥 그렇게 양치질도 하고 그렇게 치과도 다니면, 그러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치과에 가니까 그러는 거예요. 이 이빨을 뽑고 임플란트를 해야 한다는 거죠. 아니, 내가 그 치과에 계속 다니고 있었는데 그 때까지는 그런 말을 한 마디도 안 하다가, 이제 지금 와서 갑자기 그러면 그게 어떻게 된 거예요?

결론은 하나입니다. 그 치과가 엉터리였던 거예요. 제대로 검사도 안 하고, 스케일링도 그냥 흉내만 내다가, 이제 치아가 제대로 나빠지니까 돈이 많이 드는 임플란트를 권해온 것이다……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그렇게 밖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그 치과는 그 이후로 가지 않았습니다만, 그렇다고 나빠진 제 이빨이 정상으로 돌아오지는 않지요.

치과 잘못 고른 대가로 얼마나 오랫동안 이 이빨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뭐, 이발이야 치료하면 됩니다. 치료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지요. 여차하면 빼버릴 수도 있겠지요. 맹장 같은 것도 빼버린다는데 그깟 이빨 몇 개 빼버린다고 생명에 지장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여러분, 우리 신앙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주일 예배 드리고, 헌금하고 그러면 되는 줄 알았다. 기도하고 찬양하고 가끔 금식하고, 그러면 되는 줄 알았다.

앞서 살펴본 왼쪽 사람들의 주장을 읽어보면 당황한 듯한 느낌이 전해져 옵니다. 아니, 지금 무슨 말씀이세요. 하면서, 설마 자신이 그렇게 끔찍한 벌을 받게 될 줄은 몰랐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믿음 생황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믿음과 말씀과 행함이 올바로 서 있는지를 점검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6절~17절
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あなたがたのうちのだれかが、その人たちに、「安心して行きなさい。温まりなさい。満腹になるまで食べなさい」と言っても、からだに必要な物を与えなければ、何の役に 立つでしょう。
同じように、信仰も行いが伴わないなら、それだけでは死んだものです。

야고보서 2장 22절
22.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あなたが見ているとおり、信仰がその行いとともに働き、信仰は行いによって完成されました。

이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죽은 믿음, 그러니까 이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아니, 있으면 오히려 해만 되는 믿음입니다. 행함이 함께 있어야 온전한 믿음이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누워서 아멘, 할렐루야, 하고 아무 것도 안 하다면, 그 믿음은 있으나 마나 한 믿음, 아니, 오히려 없느니만 못하는 믿음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또한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순간 예수님께서 오신다면 왼편이 아니라 오른편에 있을 자신이 있으십니까.

출애굽을 하려는 모세에게 바로는 말합니다.

출애굽기 8장 28절
“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ファラオは言った。「では、おまえたちを去らせよう。おまえたちは荒野で、おまえたちの神、主にいけにえを献げるがよい。ただ、決して遠くへ行ってはならない。私のために祈ってくれ。」

지금도 믿음과 말씀을 가지고 행함으로 실천하려는 우리들에게 마귀는 속삭입니다.
ほどほど
너무 멀리 가지 마, 적당히 해. 적당히 믿음생활도 하고, 적당히 말씀 묵상도 하고, 적당히 행함도 하라고 합니다.

여러분, 그러면 적당히 천국에 갑니까.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적당히 라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영생 아니면 영벌, 천국 아니면 지옥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5절~7절
5.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だからこそ、あなたがたはあらゆる熱意を傾けて、信仰には徳を、徳には知識を、
知識には自制を、自制には忍耐を、忍耐には敬虔を、
敬虔には兄弟愛を、兄弟愛には愛を加えなさい。

적당히 가 아니라 조금만 더 힘써 봅시다. 적당히 믿음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더 힘써 믿음생활을 하고, 조금만 더 힘써 말씀 묵상도 하고, 조금만 더 힘써 행함을 합시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주님의 왼편이 아닙니다. 오른편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지옥이 아니라 천국입니다.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은 영벌이 아니라 영생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축복을 받은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했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4절~36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4절~36절
34.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それから王は右にいる者たちに言います。『さあ、わたしの父に祝福された人たち。世界の基が据えられたときから、あなたがたのために備えられていた御国 を受け継ぎなさい。
あなたがたはわたしが空腹であったときに食べ物を与え、渇いていたときに飲ませ、旅人であったときに宿を貸し、
わたしが裸のときに服を着せ、病気をしたときに見舞い、牢にいたときに訪ねてくれたからです。』


이제 11월도 이번 주가 마지막입니다. 다음 주는 이제 12월이지요. 올해가 가기 전에 이제부터 조금만 더 힘써 믿음과 말씀을 가지고 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면서, 정말 언제 예수님이 오시더라도, 주님의 오른편에 서게 되어 영생의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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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7회 수확과 감사
2019년 11월 1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38절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ヨハネの福音書 4章 38節
“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自分たちが労苦したのでないものを刈り入れるために遣わしました。ほかの者たちが労苦し、あなたがたがその労苦の実にあずかってい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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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추수와 감사” 収穫と感謝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만, 이제 2019년 11월도 중순을 넘어섰습니다. 아직 올해는 한 달과 조금 더 남아 있습니다만, 올 한해, 여러분께서는 어떠십니까. 추수를 많이 하셨습니까. 아니면 아직 좀 더 추수를 해야겠습니까.

그렇다면, 추수라고 하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옛날에 농사를 짓는 상황이었다고 한다면 풍년이 되어서 많은 수확을 얻는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큰 추수겠지요. 수확이 많아지면 수입도 늘게 됩니다. 하지만 항상 그렇게 풍요로운 수확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올해 여름에 보면 일본 같은 경우에는 태풍 15호에 19호의 영향으로 상당히 많은 수해가 발생하였습니다.

뉴스를 통해서 보니, 한 번은 바람 때문에 피해가 컸는데, 그 다음은 비 때문에 피해가 심했다고 합니다. 같은 태풍이라 하더라도 그 당시 상황에 따라서 이처럼 피해도 다르게 나타나는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수확을 방해하는 것은 태풍만이 아니지요. 일본 같은 경우를 보면 때로는 지진이나 화산일 수도 있습니다. 여름에는 너무나 더워도 문제가 생기지만, 그렇다고 너무 안 더워도 농작물에 있어서는 안 좋다고 하지요.

축산물은 어떻습니까. 한국이나 일본을 보더라도 지난 여름에 豚コレラ 돼지열병 때문에 축산업계는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수산물 쪽도 마찬가지겠지요. 지금 보면 지구 전체의 기온이 상승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바다 속도 생태계의 변화가 생기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 뉴스를 보니까 해파리가 비정상적으로 번식을 했기 때문에 그 지역에서 수산업을 하시는 분들에게 피해가 상당히 컸다고 하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농수산이나 축산을 보더라도 정말 여러 가지 조건들이 맞아야지만 풍성한 수확을 얻을 수 있고, 여기서 조금만 문제가 생기더라도 금새 문제가 커져서 수확에 큰 지장을 초래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수라고 해서 그렇겠지만, 어디 농수산, 축산만이 수확일 수 있겠습니까. 직장생활을 하시는 분들, 자기 비즈니스를 하시는 분들도 모두가 풍성한 수확을 꿈꾸면서 열심히 일을 하시지요. 하지만 이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면 수입도 늘어나도 생활도 안정되고 하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얼마든지 있지요.

자, 그렇다면 우리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우리는 올 한해 동안, 무엇을 추수하였는지, 그리고 얼마나 추수하였는지를 한 번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어떠십니까. 많이 추수한 것 같으세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쉽게 빠지는 함정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자, 오늘의 문제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 중에서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어디가 이상한지 한 번 마음 속으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말씀 드리겠습니다.

추수감사절이 감사한 이유. 그것은 이만큼 노력해서 이만큼 추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감사하다.

収穫感謝祭が感謝な理由、それは、これくらい努力してこれくらい収穫できたから感謝ある

이 말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추수감사절이 감사한 이유. 그것은 이만큼 노력해서 이만큼 추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감사하다.

収穫感謝祭が感謝な理由、それは、これくらい努力してこれくらい収穫できたから感謝ある

어떻게 보면 이상한 곳이 없습니다. 사람이 노력하지 않고 추수할 수 있나요? 아니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지요. 그리고 그렇게 노력한 결과 추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감사하다는 말씀은,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일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이상한 점이 숨어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노력해서 그 결과로 추수할 수 있었다면 감사의 대상이 불분명하다는 점이요, 둘째는, 내가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추수할 수 없었다면 감사한다는 의미가 사라져버리고 만다는 점입니다.

먼저, 첫 번째 부분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올 한해 열심히 노력해서 그 결과로 추수를 했는데, 그렇다면 누구한테 감사를 해야 한다는 걸까요? 내가 나 자신한테 감사를 해요? 내가 내 힘으로 무엇인가를 이루었는데, 그렇다면 이는 감사가 아니라 자랑스러워해야 되지 않겠습니다. 감사는 다른 사람에게 드리는 것이지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힘이나 노력으로 수확을 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있을 수 없지요. 그러니까 <내가 내 노력으로 추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감사하다>라는 말은 이 점에서 이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내가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추수할 수 없었다면 감사할 것이 없다고 한다는 말씀은, 그렇다면 오늘 추수감사절 예배는, 그 해에 추수할 수 있었던 사람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예배이어야 합니다. 만약에 제가 앞서 드린 말씀, <이만큼 노력해서 이만큼 추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감사>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아무 것도 추수한 것이 없는 경우라면 무슨 감사를 드릴 게 있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살펴본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38절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自分たちが労苦したのでないものを刈り入れるために遣わしました。ほかの者たちが労苦し、あなたがたがその労苦の実にあずかっているのです。」

오늘 이 말씀, 은혜롭게 들리시나요? 여러분이 예를 들어서 회사생활을 하는데, 무슨 큰 성과를 거두었어요. 그래서 자랑스럽게 회사에 돌아가서, 사장님한테, 아~ 사장님, 제가 이러이러해서 이렇게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하고 말하는데, 사장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거 니가 노력해서 거둔 게 아니야. 다른 사람들이 지금까지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니가 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 뿐이야.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면 여러분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좀 김이 새겠지요? 사장님이 나를 좀 크게 칭찬해주실 줄 알았는데, 내가 노력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노력했기 때문에 내가 그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여기에 바로 추수와 감사의 중요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시는 분들 중에서 본인의 월급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아마도 100% 만족하고 있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나는 이만큼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데, 일한 만큼 월급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회사에서 한 사람을 고용한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 들어가는 비용이 그 사람의 월급 뿐일까요?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월급 300만원인 직원을 고용한다고 한다면, 회사에서 그 사람에게 들어가는 비용은 대략 월급의 3배 정도를 생각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월급 300만원인 직원 한 사람을 고용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쓰는 컴퓨터다, 책상이다 의자다, 전기세다, 교통비다 뭐다 해서 적어도 3배인 900만원 정도의 비용이 들어간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회사 쪽에서 봤을 때 그 직원의 월급이 300만원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한 달에 900만원 정도의 일을 해주어야지만 본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전만으로 회사 경영이 되나요. 그러니까 최소한 900만 원어치 이상 그 직원이 일을 해주어야지만 회사가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월급을 받는 입장에서는, 내가 받는 월급의 3배 정도의 수익을 회사한테 돌려주고 있느냐,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는 월급만큼만 일을 하면 되는 것인 줄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감사가 아니라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는 회사 쪽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원들이 충분히 성과를 올려주고 있다면 직원들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항상 직원들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고 욕심만 부린다고 한다면, 역시 그 회사 경영자한테는 이 또한 감사가 아니라 불만 밖에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로마서 4장 2절~8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4장 2절~8절
2.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もしアブラハムが行い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のであれば、彼は誇ることができます。しかし、神の御前ではそうではありません。
聖書は何と言っていますか。「アブラハムは神を信じた。それで、それが彼の義と認められた」とあります。
働く者にとっては、報酬は恵みによるものではなく、当然支払われるべきものと見なされます。
しかし、働きがない人であっても、不敬虔な者を義と認める方を信じる人には、その信仰が義と認められます。
同じようにダビデも、行いと関わりなく、神が義とお認めになる人の幸いを、このように言っています。
「幸いなことよ、不法を赦され、罪をおおわれた人たち。
幸いなことよ、主が罪をお認めにならない人。」

이 말씀이 좀 어렵게 들리실지는 모르지만, 이 말씀 하나 가지고도 하루 종일 설명을 드릴 수 있을 정도로 이 말씀에 담긴 내용이 많습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창세기 15장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アブラムは主を信じた。それで、それが彼の義と認められた。

여기서 “아브람”은 나중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꾸시게 되는데, 이는 그 이전,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초창기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셨다. 즉, 쉽게 말하자면 참 잘했다 하고 높이 평가하셨다는 것인데, 그 이유가, 아브라함이 스스로 열심히 노력을 해서 어떤 성과를 올렸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바로 그 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높이 평가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5절을 다시 한 번 보실까요.

로마서 4장 4절~5절
“4.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働く者にとっては、報酬は恵みによるものではなく、当然支払われるべきものと見なされます。
しかし、働きがない人であっても、不敬虔な者を義と認める方を信じる人には、その信仰が義と認められます。

이 말씀은, 내가 그만큼 일을 했으니까 이 정도로 돈을 받는다……이렇게 생각하는 사람한테는 감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냐 하면, 내가 그만큼 일을 하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높여주시는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이죠.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높이 평가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6절~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4장 6절~8절
“6.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同じようにダビデも、行いと関わりなく、神が義とお認めになる人の幸いを、このように言っています。
「幸いなことよ、不法を赦され、罪をおおわれた人たち。
幸いなことよ、主が罪をお認めにならない人。」

이는 나 자신이 일한 것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높이 평가해주셨다는 것에 대해서 다윗은 어떻게 말하고 있냐 하면, 내가 무엇인가를 잘하기는커녕 내가 죄를 지었다면 당연히 이에 상응하는 죄값을 치러야 하겠지만, 내 죄값을 치르기 위해 내가 한 일이 하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죄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이는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를 누가 해결해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형벌을 모두 받아주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만이 아니라 옛 선지자들도 포함해서, 우리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우리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형벌을 받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에도 이후에도 하나님의 독생자가 대신해서 형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 일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아 주셨고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심으로 인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해결해주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ずうずうしい、あつかましい

이 사실만 보면 너무나 좀 염치 없지 않으세요? 좀 뻔뻔하다고 생각되지 않으세요? 내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예수님이 그냥 알아서 와서 십자가에서 그렇게 비참한 형벌을 받음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가 해결되었어요. 하지만 성경은 이를 염치 없다거나 뻔뻔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4장 7절~8절
7.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幸いなことよ、不法を赦され、罪をおおわれた人たち。
幸いなことよ、主が罪をお認めにならない人。」

그렇습니다. 염치 없다거나 뻔뻔한 게 아니라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성경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장 12절~13절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しかし、この方を受け入れた人々、すなわち、その名を信じた人々には、神の子どもとなる特権をお与えになった。
この人々は、血によってではなく、肉の望むところでも人の意志によってでもなく、ただ、神によって生まれたのである。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밥을 해줍니다. 옷을 사 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이가 밥을 먹을 만큼 무슨 노력을 했기 때문에요? 옷을 사 입혀줄 만한 일을 했기 때문에 사줍니까. 아닙니다.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사랑을 받기 위해서 아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부모를 부모로 인정하는 것, 그게 전부 다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아직 5살 정도 밖에 안 된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부모님한테 와서 진지한 표정으로 하는 말이, 아버지, 어머니, 제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냥 맨입으로 밥도 먹여주고 옷도 사 입혀주고 그러시는 것을 그저 받기만 하면 너무나 죄송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제부터 밖에 나가서 좀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생활에 보탬을 드리려고 합니다……이렇게 말을 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말을 듣고, 어이구 그래. 내가 당장 일자리를 알아봐주마……라고 말할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야야, 됐다. 내가 언제 너한테 그런 걸 바랬냐. 그냥 주는 밥 잘 먹고, 주는 옷 잘 입고, 그리고 엄마 아빠 말 잘 들으면 그걸로 충분해……그러지 않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깨끗한 척 잘난 척 해 봤자 소용이 없어요. 우리의 노력으로는 내 죄의 천 분의 일, 만 분의 일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의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것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염치가 없어요? 뻔뻔해요? 아니요. 주님 안에서 이것이야말로 복된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욥기 41장 11절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だれが、まずわたしに与えたというのか。わたしがそれに報いなければならないほどに。天の下にあるものはみな、わたしのものだ。

온 천하에 있는 것은 누구의 것이라고요?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가지신 분입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봤자 하나님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 봤자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을 갚을래야 갚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어떤 것이 필요하겠습니까. 더 큰 노력이요? 아니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감사>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알기 전에는, 내가 가진 것, 내가 얻은 것이 모두 내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욕심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내가 10만큼 노력했으니까 이만큼 이루었어요. 그러면 내가 20만큼 일하면 두 배로 늘릴 수가 있고, 100만큼 노력하면 열 배로 늘릴 수가 있지 않겠어요? 하지만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만족이 사라집니다. 감사가 사라집니다. 그러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2장 16절~21절
16.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それからイエスは人々にたとえを話された。「ある金持ちの畑が豊作であった。
彼は心の中で考えた。『どうしよう。私の作物をしまっておく場所がない。』
そして言った。『こうしよう。私の倉を壊して、もっと大きいのを建て、私の穀物や財産はすべてそこにしまっておこう。
そして、自分のたましいにこう言おう。「わがたましいよ、これから先何年分もいっぱい物がためられた。さあ休め。食べて、飲んで、楽しめ。」』
しかし、神は彼に言われた。『愚か者、おまえのたましいは、今夜おまえから取り去られる。おまえが用意した物は、いったいだれのものになるのか。』
自分のために蓄えても、神に対して富まない者はこのとおりです。」

자신만을 알고 자신의 노력만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모르게 되면 아무리 부자라 하더라도 그의 인생은 이처럼 허망하게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추수로 감사하는 것은 우리 앞에 쌓인 많은 돈과 재산을 보아야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금은 보화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다면 이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마치 눈을 감고 고속도로에서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처럼 언제 사고가 나서 허망한 인생을 마치게 될 지 모르는 일인 것입니다.

어제 텔레비전을 보니까 피겨스케이트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예전에 김연아 선수가 어느 토크쇼에 출연했던 것이 기억이 나요. 사회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연기를 하는 것을 보면 무척 빨리 회전을 하기도 하던데, 그 횟수를 돌면서 다 세고 있는 거예요? 라고 물으니까, 김연아 선수가 뭐라고 했겠습니까.

당연하죠~ 심사위원들이 다 보고 있는데요~ 라고 하더라구요.

참 이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되기도 하고 도전이 되기도 하는지 모릅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욥은 그런 의미에서도 참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었나 합니다.

대단한 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다 잃었던 욥. 재산만이 아니라 자녀들까지도 모두 잃고, 자신은 온통 피부병에 걸려서 괴로워하고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욥기 2장 7절~10절
7.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8.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9.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10.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サタンは主の前から出て行き、ヨブを足の裏から頭の頂まで、悪性の腫物で打った。
ヨブは土器のかけらを取り、それでからだを引っかいた。彼は灰の中に座っていた。
すると、妻が彼に言った。「あなたは、これでもなお、自分の誠実さを堅く保とうとしているのですか。神を呪って死になさい。」
しかし、彼は妻に言った。「あなたは、どこかの愚かな女が言うようなことを言っている。私たちは幸いを神から受けるのだから、わざわいも受けるべきではないか。」ヨブはこのすべてのことにおいても、唇によって罪に陥ることはなかった。

저는 욥의 아내가 이렇게 심한 말을 한 것이, 그녀가 나쁜 사람이라서 라기보다는, 너무나도 자신의 남편 처지가 딱하고 안타깝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쌍한 처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욥이 어떻게 했다고요? 예,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이게 누가 보기에 그랬다는 것이이요? 그렇습니다. 이 순간, 하나님께서 보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욥은 이 사실, 하나님께서 그 순간도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추수감사절이라고 하는 것은 누가 열심히 노력했느냐, 누가 많은 재물을 받았느냐 하는 것을 비교하는 날도 아니요, 자랑하는 날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에 감사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에 감사하는 날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넉넉하십니까. 주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감사 드리시기 바랍니다. 채워주신 주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부족하십니까. 주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감사 드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넉넉히 채어주실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입술에서 감사가 나오는지 불평이 나오는지, 찬양이 나오는지 불만이 나오는지 주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오 천하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못 채워주실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우리의 노력이 아닌 사랑과 은혜와 축복으로 채워주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리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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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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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6회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
2019년 11월 1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4장 18절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4章 18節
“彼は望み得ない時に望みを抱いて信じ、「あなたの子孫は、このようになる」と言われていたとおり、多くの国民の父となり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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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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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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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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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 望み得ない時に望む信仰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에 보면 인내를 한 사람들이 참 많이 등장합니다. 먼저 아브라함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간절히 소망했던 것은 자기 자손을 갖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2장 1절~3절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主はアブラムに言われた。「あなたは、あなたの土地、あなたの親族、あなたの父の家を離れて、わたしが示す地へ行きなさい。
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なる国民とし、あなたを祝福し、あなたの名を大いなるものとする。あなたは祝福となりなさい。
わたしは、あなたを祝福する者を祝福し、あなたを呪う者をのろう。地のすべての部族は、あなたによって祝福される。」

여러분, 지금 자식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너에게 자식을 주겠다”라고 말씀하셨다면 그나마 좀 현실감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 비록 수 십 년 동안 자식이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하신다면 아이 하나 정도는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한 아이요? 아니요. 한 민족, 그것도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몇 살이요?

예, 창세기 12장 4절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アブラムは、主が告げられたとおりに出て行った。ロトも彼と一緒であった。ハランを出たとき、アブラムは七十五歳であった。

여러분, 우리는 지금 그래도 아브라함에 대해서 알기 때문에, 아, 그냥 그런가 보다……하고 넘어가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리 옛날 사람이 오래 살았다 하더라도, 아브라함이 결과적으로 175세까지 살긴 했습니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그 당시에도 젊은 날, 한창인 시절은 지나간 상태였습니다. 이제 노년을 준비하고 여유롭고 안정된 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고민을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시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전혀 알지도 못하는 땅으로 가겠다는 것은, 이는 지금 우리가 짐을 싸서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는 그 때까지 그가 살아오면서 쌓아두었던 경험이다 경력이다 하는 것들을 모두 버리고 새롭게 출발하는 것을 말합니다. 젊은 날이라면 얼마든지 새롭게 출발할 수 있겠지요. 부모 곁을 떠나서 새롭게 출발한다는 것은 용감하고 희망차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당시에도 이미 노년기에 접어든 나이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아무런 연고도 없는 지역으로 떠난다? 이는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확고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에 응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6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アブラハムは神を信じた。それで、それが彼の義と認められた」とあるとおりです。

인간적으로 보면 어이없는 결정이었을지 몰라도, 이 무모하기 짝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브라함은 굳게 믿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토록 기다리던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몇 살이었죠?

창세기 21장 5절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アブラハムは、その子イサクが彼に生まれたとき、百歳であった。

우리는 성경에 적힌 이 사실을 보고는, 정말 당시에도 75세 때 아이가 없었는데, 그로부터 25년이나 지난 후에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자 아이를 가질 수 있었구나……하는 점에 대해서 놀랄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그것만이 아니라 그 25년 동안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했던 아브라함의 믿음에 탄복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로마서에 적힌 기록이 오늘 말씀입니다.

로마서 4장 18절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4章 18節
“彼は望み得ない時に望みを抱いて信じ、「あなたの子孫は、このようになる」と言われていたとおり、多くの国民の父となりました。”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믿을 만한 근거는 하나도 없는데, 오직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말씀만 믿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얼마나 학문이 발전했었는지는 모르지만, 요즘으로 본다면 아무리 인문, 사회, 과학, 의학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어디 하나 믿을 만한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믿었다는 것입니다.

얼마 동안이나 믿었다고요? 예, 25년입니다. 25년. 잘 감이 안 오시나요? 올해가 2019년이니까 25년 전이면 언제예요? 1994년입니다. 1994년이라고 하면, 한국은 김영삼 대통령, 일본은 한 해에 여러 명이 총리가 바뀌었습니다. 호소카와 총리, 하타 츠토무 총리, 그리고 무라야마 총리였던 시절이지요.

그 때부터 지금 2019년까지 오로지 한 가지 기도제목을 붙잡고, 정말 현실적으로는 전혀 가망이 없는 기도제목을 붙잡고 있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말 세상적으로 보면, 내가 가진 상식으로 보면, 아무런 가능성도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까, 25년 동안 끝까지 그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면서 기다렸던 것입니다. 정말 아브라함이 괜히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 이전에 노아는 어떨까요. 성경에 적힌 사람 수명으로 계산해볼 때 대략 70년~80년에 걸쳐 노아는 방주를 지었습니다. 7, 80년 전이라고 하면 언제예요? 80년이라고 한다면 1939년입니다. 아직 해방되기도 전이에요. 그 때부터 지금까지 배를 지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건 보통 믿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노아를 생각할 때보면 좀 과소평가 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우리가 좀 잘못 알고 있는 점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합니다. 자, 그럼 오랜만에 문제를 나갑니다. 평소에 성경을 얼마나 열심히 읽으셨는지 한 번 보겠습니다.

저희 집사람한테는 얼마 전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기 때문에 제외하고요. 다른 분들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가 일어나기 70~80년 전에 노아에게 방주를 지을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제가 지금부터 말씀을 드릴 텐데, 잠깐 성경을 보지 마시고, 자세히 들어만 보시기 바라겠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 중에서 성경에 적힌 내용과 틀린 부분이 있습니다. 어디가 틀렸는지 한 번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자, 노아가 방주를 짓기 전에, 그러니까 배가 완성되기 70~80년 전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다음부터가 문제입니다.

“내가 땅에 비를 내려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わたしは、今、いのちの息のあるすべての肉なるものを天の下から滅ぼし去るために、地上に雨を降らそうとしている。地上のすべてのものは死に絶える。

자, 방주가 완성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만, 제가 일부러 틀리게 바꾼 부분이 있습니다. 어디인지 아시겠어요?

다시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방주를 짓기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땅에 비를 내려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わたしは、今、いのちの息のあるすべての肉なるものを天の下から滅ぼし去るために、地上に雨を降らそうとしている。地上のすべてのものは死に絶える。

여러분, 혹시 아셨습니까.

정답을 말씀 드리기 전에 한 가지 여쭤보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노아의 홍수. 정말 있었을 것 같으세요? 40일 동안 비가 내리니까 온 세상이 물 속에 잠겨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게 믿어지시나요?

일본에 사는 사람이라면 요즘 같았으면 믿어질 것 같기도 할 것입니다. 일본은 올해 유독 비 피해가 심했습니다. 태풍 15호, 19호, 그리고 그 후에도 이어지는 호우로 인해서 강의 제방이 터지자, 주변 집들이 물에 잠기는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그래, 비가 많이 오면 세상이 물에 잠길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겠지요. 하지만 구약에서 나온 비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흥미롭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창세기 2장 5절~6절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地にはまだ、野の灌木もなく、野の草も生えていなかった。神である主が、地の上に雨を降らせていなかったからである。また、大地を耕す人もまだいなかった。
ただ、豊かな水が地から湧き上がり、大地の全面を潤していた。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당시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저 땅에서 안개가 올라와서 수분을 공급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난 다음에 비에 대한 기록이 언제 나오는 것 같습니까. 그렇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 처음으로 비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아담이 창조된 해를 아담창조 1년이라고 잡고, 성경에 적혀 있는 사람의 수명에 따라서 하나하나 계산을 해보면, 노아의 홍수가 일어났던 해는 아담창조 1657년이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 동안 아담이 창조된 이후 적어도 만 1656년이라고 하는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모습을, 저 하늘에서 물이 쏟아진다는 광경을 단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노아와의 대화 순서를 차례대로 놓고 보면 기가 막힌 것이 보입니다.

먼저 제가 앞서 말씀 드린 내용을 다시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내가 땅에 비를 내려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わたしは、今、いのちの息のあるすべての肉なるものを天の下から滅ぼし去るために、地上に雨を降らそうとしている。地上のすべてのものは死に絶える。

그런데 이게 잘못 되었다고 했지요? 그게 어디냐 하면 앞부분입니다.

저는 앞서,

“내가 땅에 비를 내려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라고 읽었습니다만,

わたしは、今、いのちの息のあるすべての肉なるものを天の下から滅ぼし去るために、地上に雨を降らそうとしている。

창세기 6장 17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창세기 6장 17절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わたしは、今、いのちの息のあるすべての肉なるものを天の下から滅ぼし去るために、地上に大水を、大洪水をもたらそうとしている。

하나님께서는 땅에 홍수를 일으키겠다, 그러니까 큰 배를 만들어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게 다예요. 노아를 비롯해서 당시 사람들은 <비>라고 하는 것, <하늘에서 물이 땅 위로 떨어진다>라고 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그 때까지는 한 사람도 그런 광경을 본 일이 없었어요.


안개가 땅에서 올라와 지면을 적셨다고 하는데, 그것으로 홍수가 났겠습니까. 노아와 그 시대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도 보지 못했고, 아마도, 홍수도 경험해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이렇게 말씀해주셨으면 좋지 않았겠어요?

“이봐 노아야. 너는 지금까지 비가 온다는 것을 보지 못해서 모를 텐데 말이야. 나는 하늘에서 물이 쏟아지게 할 수 있어. 그래서 나는 장차 온 세상을 잠기게 할 정도로 사십 일 동안 내리 물이 쏟아지게 할 거야. 그러니까 너는 큰 배를 만들어서 그 때를 대비하도록 해라”

뭐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좀 이해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순서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보겠습니다.

창세기 6장 13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神はノアに仰せられた。「すべての肉なるものの終わりが、わたしの前に来ようとしている。地は、彼らのゆえに、暴虐 で満ちているからだ。見よ、わたしは彼らを地とともに滅ぼし去る。

이렇게 세상을 멸하실 것이라는 계획을 말씀하시고는, 6장 14절~16절까지는 배 크기에 대한 말씀, 그리고 6장 17절에 아까 읽어드린 말씀이 나옵니다.


창세기 6장 17절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わたしは、今、いのちの息のあるすべての肉なるものを天の下から滅 ぼし去るために、地上に大水を、大洪水をもたらそうとしている。地上のすべてのものは死に絶える。

그리고 18절~21절에는 방주 안에 무엇을 실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이게 끝이에요.

즉, 이것은 무엇을 뜻하냐 하면, 노아는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는 것도 모르고, 홍수가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 지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 큰 방주를 70~80년에 걸쳐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세상이 멸망한다 뭐다 하는 것 이전에, 이 땅 위에 홍수가 일어날 정도로 하늘에서 물이 쏟아진다는 것은, 지금으로 본다면 SF소설, 공상과학 영화,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한다, 뭐 이런 내용보다도 훨씬 더 기상천외한 이야기,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노아는 어땠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하고 그 오랜 세월 동안 묵묵히 큰 배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놀라운 믿음입니다.

그러면 주변 사람들이 많이 도와줬을까요?

이봐. 노아야. 왜 이렇게 큰 배를 만들어?

응. 하나님이 홍수를 일으켜서 이 땅에 있는 것들을 다 멸하시겠대. 그러니까 자네도 나와 함께 방주를 만들자.

아니, 어디서 그렇게 많은 물이 생겨서 이 땅을 멸하시겠다는 거야?


그럼 노아가 뭐라고 했겠습니까.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러는 노아에게 사람들이 도와줬겠어요? 오히려 주변 사람들은 그 오랜 세월 동안 노아를 비웃었겠지요. 어쩌면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게 당연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홍수가 일어나는지 어떻게 물이 불어나서 세상이 멸망하는지도 모른 채, 노아는 인내의 시간을 감당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노아가 불평 불만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 인내 세월이 성경에는 단 한 구절 나와 있을 뿐입니다.

창세기 6장 22절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ノアは、すべて神が命じられたとおりにし、そのように行った。

비록 짧은 구절이긴 하지만, 참 멋진 인생 아닙니까.

앞서 로마서 4장 18절에는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彼は望み得ない時に望みを抱いて信じ、

라고 되어 있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만, 이 노아 또한 역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됐나요.

마침내 70~80년이라고 하는 오랜 인내의 시간이 끝나고 방주가 완성되었습니다.


그 때야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7장 4절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あと七日たつと、わたしは、地の上に四十日四十夜、雨を降らせ、わたしが造ったすべての生けるものを大地の面から消し去る。」

마지막, 인내의 기간이 끝나자 하나님께서는 이제 모든 비밀을 그제서야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 인내의 기간이 구약에만 있는 것 같으신가요? 아니요. 똑 같은 일들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노아의 방주보다도 더 큰 배, 우리를 구원해주실 큰 배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입니다. 언제인지 아무도 모르는 심판의 날, 우리가 구원을 받을 길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에 구원 받을 길이 오직 방주 밖에 없었던 것처럼, 마지막 날에 우리가 구원 받을 길은 예수님 외의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방법은 예수님 뿐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방주를 모릅니다. 예수님을 모릅니다. 노아 때는 없었던 성경이 우리에게 이처럼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안 믿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때에,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모습으로 임했던 노아의 홍수처럼, 마지막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24장 42절~44절
42.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43.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です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あなたがたの主が来られるのがいつの日なのか、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ら。
次のことは知っておきなさい。泥棒が夜の何時に来るかを知っていたら、家の主人は目を覚ましているでしょうし、自分の家に穴を開けられることはないでしょう。
ですから、あなたがたも用心していなさい。人の子は思いがけない時に来るのです。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4장 18절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4章 18節
“彼は望み得ない時に望みを抱いて信じ、「あなたの子孫は、このようになる」と言われていたとおり、多くの国民の父となりました。”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이나 지식이 아닙니다. 성경에 적혀 있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시대의 방주 되신 예수님을 굳게 잡고, 어떠한 고난이 닥쳐와도, 노아와 아브라함과 같이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날에 한 사람도 빠짐 없이 구원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207회 수확과 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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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5회 거두기 위하여
2019년 11월 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ガラテヤ人への手紙 6章 9節
“失望せずに善を行いましょう。あきらめずに続ければ、時が来て刈り取ることにな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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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거두기 위하여” 刈り取るために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의 삶이 힘들게 느껴질 때를 보면 그 원인 중 하나가 바로 <불평등>을 느낄 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습니까. 주변을 바라보면 삶이 평등하다고 생각되시나요?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나보다 잘 사는 사람들이 아무래도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아니, 사실은 자기보다도 잘 사는 사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사람들 사정을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잘 사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요.

한국에서는 흔히들 금수저, 흙수저 라는 말을 쓰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인생, 시작부터 다르지 않습니까?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는지,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지,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정도의 경제 형편인지 알 수도 없지요.

누구는 큰 집도 몇 채나 가지고 있고, 돈도 넉넉한 집에서 태어나나 하면, 누구는 좁은 사글세 집, 정말 매달 집세 내는 것도 버거운 집에서 태어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벌써 이처럼 시작부터 다른데, 어떻게 이 세상이 평등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갈은 상황을 두고,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은 젊은이들을 앞에서, 희망을 잃지 말라, 꿈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면 길이 열린다……하고 강조를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무리 극심한 불평등 앞에서도 꿈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면 길이 열린다……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이 말은 제게 있어서 의문에서 시작하여 의문으로 끝나는 말처럼 여겨집니다. 꿈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면 길이 열린다…….

꿈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이요?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젊은 학생들에게 있어서는 열심히 공부하는 일이라고 해두지요. 그러면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되나요?

자, 정말 그런지 우리 한 번 생각해봅시다. 내가 변호사가 되고 싶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냐 하면, 옛날에는 학력이 필요 없었습니다. 대학교를 굳이 나오지 않더라도 사법시험을 치를 수가 있었어요. 그리고 응시비용도 대단히 저렴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하면, 한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고 로스쿨,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해야 합니다. 법학전문대학원은 말 그대로 대학원과정이기 때문에 4년제 대학을 졸업했거나 이와 동등한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로스쿨에 들어가서 3년간의 과정을 마쳐야지만 변호사시험 응시 자격이 주어집니다.

한국의 경우 4년제 대학등록금을 보면 1년에 대략 문과의 경우 700만원 정도 합니다. 그러면 4년 동안에 2,800만원이 들겠지요. 여기에 로스쿨 3년간의 등록금이 대략 6,000만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 벌써 여기까지만 보면 등록금만 9,000만원이 드는 계산이 나옵니다.

이는 그 동안의 생활비나 교재비가 아니라 순수 대학에 내는 등록금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금액으로 본다면 한국이나 일본이나 비슷하더군요.

자, 그렇다면 이와 같은 상황에서 앞서 말씀 드렸던 3단계, 꿈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면, 길이 열린다……. 이게 얼마나 가능성이 있는 일인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꿈을 가져야겠지요? 나는 변호사가 되고 싶다.

요즘은 학자금 시스템도 많이 갖춰져 있기 때문에 이를 어느 정도 이용할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보면 제한적인 부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무사히 졸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변호사시험에도 한 번에 붙을 수 있었습니다.

학자금 덕분에 졸업도 하고 변호사 시험에도 합격했습니다. 이제 빚이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1억이 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합니다.

자, 여기서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해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대형 로펌에 들어가는 것이지요. 그럼 연봉 1억 이상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모든 고민은 해결되고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야말로 꿈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을 하니까 길이 열렸어요. 그렇죠?

하지만 여기에는 숨겨진 진실이 있습니다. 대학입시도 그렇고 로스쿨도 그렇습니다. 모두가 열심히 공부를 했다고 해서 모두에게 동일한 결과가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대체적으로 보면 소수가 자신이 원하는 대학, 로스쿨에 들어가고 다수는 2지망, 3지망으로 하향조정을 하거나, 아니면 도중에 진로를 바꾸게 됩니다.

그리고 어렵게 대학에 들어가고 로스쿨을 나왔다 하더라도, 그리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하더라도 이른바 연봉 몇 억씩 되는 대형로펌에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명문 로스쿨을 나와서 변호사시험성적도 좋아야지요.

하지만 그런 사람은 역시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변호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자금을 갚기 위해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도 상당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도 이건 상대적으로 그나마 현실성이 있는 것인지도 의사가 되고 싶다거나 하면 대학교 등록금은 문과보다 2배 이상 들어갈 것이요, 그 문은 훨씬 더 좁아집니다. 아니면 대학 교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질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 또한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야말로 자기 집안에서 하는 대학이 있다면 또 모를까, 공부도 열심히 하고 실력이 있다 하더라도, 돈 안 되는 시간 강사 몇 년 동안 한다 하더라도 교수로 임용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지요.


자, 이렇게 본다면 어떻습니까. 꿈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면 길이 열린다……이 말이 아직도 희망적으로 들리시니나요? 누구는 꿈을 가지고 정말 열심히 노력했더니 좋은 대학, 직장……이처럼 길이 열렸겠지요. 하지만 이는 극소수입니다. 대다수는 어떻습니까. 정말 꿈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을 해도 길이 안 열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이런 젊은이를 두고 어른들은 뭐라고 합니까. 니가 열심히 노력을 안 했기 때문이다……여러분, 이 말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 줄 아십니까.

예전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링컨 대통령을 존경하는 어떤 아버지가 있었는데, 그 분에게 아들이 3명이 있었대요. 그런데 그 아들들이 아버지 마음에 안 들었나 봅니다. 하루는 이 아들 셋을 불러놓고는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첫째야, 링컨 대통령이 네 나이 때는 이러이러 했었어. 둘째야, 링컨 대통령이 네 나이 때에는 이러이러 했었어. 셋째야, 링컨 대통령이 네 나이 때는 이러이러 했었다구.

그러자 이 말을 듣고 있던 첫째가 뭐라고 했다고요? 아버지, 링컨 대통령이 아버지 나이 때에는 대통령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만하지요. 링컨 대통령은 51세 때 대통령이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어떤 학생에게 너의 꿈이 뭐냐고 물었대요. 그러니까 이 학생이 하는 말이, 제 꿈은 재벌2세입니다. 이 말을 듣고, 음, 그렇구나……했는데, 이 학생이 하는 말이, 그런데 좀 문제가 있대요. 그래서 뭐가 문제냐고 하니까, 자기가 재벌 2세가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재벌 1세가 되어야 하는데, 아버지가 노력을 잘 안 한대요.


꿈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을 하면 길이 열린다? 이 말은 희망을 심어주는 말이 아니라 대다수에게 절망감을 안겨줄 수도 있는, 대단히 위험한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떨까요. 역시 성경에도 열심히 노력하면 길이 열린다, 길이 안 열리는 건 노력이 부족해서 그렇다……이렇게 적혀 있을까요?

우선 성경에서 시편과 예레미야와 이사야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시편 139편 13절입니다.

시편 139편 13절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あなたこそ 私の内臓を造り 母の胎の内で私を組み立てられた方です。

다음은 예레미야 18장 4절~6절입니다.
예레미야 18장 4절~6절
“4.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5.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6.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エレミヤ書 18章 4節~6節
陶器師が粘土で制作中の器は、彼の手で壊されたが、それは再び、陶器師自身の気に入るほかの器に作り替えられた。
それから、私に次のような主のことばがあった。
「イスラエルの家よ、わたしがこの陶器師のように、あなたがたにすることはできないだろうか──主のことば──。見よ。粘土が陶器師 の手の中にあるように、イスラエルの家よ、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手の中にある。

마지막으로 이사야 29장입니다.

이사야 29장 16절
“16.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ああ、あなたがたは物を逆さに考えている。陶器師を粘土と同じに見なしてよいだろうか。造られた者がそれを造った者に「彼は私を造らなかった」と言い、陶器が 陶器師に「彼にはわきまえがない」と言えるだろうか。

이 세 말씀은 무엇입니까. 우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직접 지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으셨냐 하면, 토기장이가 자기 마음대로 진흙을 주물러서 그릇을 만들듯이 내가 너희를 하나님 마음대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면 어떻습니까. 아니, 좀 정성을 들여서 만드시든지 하시지, 내가 내 마음대로 만들었으니까 너는 그냥 순종해……. 만약에 이게 사실이라면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나도 좀 다른 사람들처럼 멋있게 잘 살고 싶은데, 정말 누구처럼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게 해주셨다면 참 좋을 텐데, 왜 나를 이렇게 넉넉하지 못한 가정에 태어나게 하셨을까. 외모도 보면 좀 예쁘고 잘생기게 만들어주시지 왜 이렇게 못 마땅하게 만들어주셨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의 등장인물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누구부터 해볼까요.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이요? 신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허허벌판 광야로 불러내어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가십니다. 그는 거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믿음의 조상이 되었으나 그의 부모가 그에게 해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지요.

다윗은 어땠습니까.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그는 양을 치는 이새의 여덟 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제 사무엘이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에게 기름을 붓기 위해 이새를 찾아갔을 때, 사무엘이 이새에게 그의 아들들을 부르라고 하지요. 그래서 이새가 그의 일곱 아들을 불렀는데,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여기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여기 있는 아들들이 전부냐고 물었더니, 막내 아들이 하나 남긴 했는데, 그는 지금 형들을 대신해서 양을 지킨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그 아들을 데리고 오라고 시켰더니, 그 막내 아들이 바로 다윗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막내라고 해서 형제들에게 무시를 당했습니다. 아니, 형제만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한테도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의 서른 살에 왕이 되어 40년간을 다스리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신약에 보면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무슨 금수저가 있었나요. 베드로나 요한이나 야고보 같은 사람들을 보면 다들 고기잡이 어부가 아니면, 세리라고 하여 동족한테까지 손가락질을 받는 일을 하는 마태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흙수저 중의 흙수저라고 할 수 있지요. 당시 사회적으로 보면 그들이 인생에 있어서 놀라운 반전이 있으리라고 하는 것은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름도 없이 왔다가 이름도 없이 사라질 뿐이라고 생각했던 그들의 인생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한낱 고기잡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으로서 거듭나고 하나님의 귀한 일을 감당하는 위대한 인물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1절~25절
21.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22.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24.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目が手に向かって「あなたはいらない」と言うことはできないし、頭が足に向かって「あなたがたはいらない」と言うこともできません。
それどころか、からだの中でほかより弱く見える部分が、かえってなくてはならないのです。
また私たちは、からだの中で見栄えがほかより劣っていると思う部分を、見栄えをよくするものでおおいます。こうして、見苦しい部分はもっと良い格好 になりますが、
格好の良い部分はその必要がありません。神は、劣ったところには、見栄えをよくするものを与えて、からだを組み合わせられました。
それは、からだの中に分裂がなく、各部分が互いのために、同じように配慮し合うためです。

제가 학교 다닐 때 제 대학 동기한테서 들었던 이야기가 아직도 생각납니다. 그는 저와 같이 대학에 들어갔는데 그 친구는 의대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자기가 해부실습을 했다는 거예요. 뭐 의대니까 그런 과정이 있겠지요. 그런데 해부를 하고 인체를 보니까 인체 구조가 너무나도 정교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친구가 당시 믿음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이 친구가 하는 말이, 아무리 하찮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냥 대충대충 만들어진 사람들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에요.

참 그 친구의 이 말은 오랫동안 제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정말 나쁜 사람, 정말 별볼일 없는 사람처럼 보일지는 모르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 받아 마땅한 사람, 미움 받아 마땅한 사람, 값진 인생을 살다 갈 사람, 값없는 인생을 살다 갈 사람……이런 식으로 구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태에서부터 정성 들여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몸에서 각 지체마다 역할이 있는 것처럼 우리도 모두가 변호사가 되거나 의사가 되는 것만이 목표가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을 감당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49장 15절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女が自分の乳飲み子を忘れるだろうか。自分の胎の子をあわれまないだろうか。たとえ女たちが忘れても、このわたしは、あなたを忘れない。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절대로 잊지 않는다고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나 자신이 흙수저처럼 보이고 귀하지 않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그 누구도 대충대충 만들어진 사람, 있으나마나 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우리 모두가, 그리고 우리 이웃 모두가 귀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노력은 그럼 이제 안 해도 되는 건가요? 아니요. 노력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노력은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는 노력이 되어야 진정으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욥기 23장 10절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しかし神は、私の行く道を知っておられる。私は試されると、金のようになって出て来る。

우리가 이웃만 부러워하면서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해주십니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이를 감당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힘을 다해 노력하여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노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20절~21절
20.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第二テモテへの手紙 2장 20절~21절
大きな家には、金や銀の器だけでなく、木や土の器もあります。ある物は尊いことに、ある物は卑しいことに用いられます。
ですから、だれでもこれらのことから離れて自分自身 をきよめるなら、その人は尊いことに用いられる器となります。すなわち、聖なるものとされ、主人にとって役に立 つもの、あらゆる良い働きに備えられたものとなるのです。

이 말씀을 참 은혜가 많이 됩니다. 금 그릇도 있고 은 그릇도 있고 나무 그릇이나 질 그릇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 구분 방법은 그게 아니라 귀하게 쓰는 그릇이냐, 아니면 천하게 쓰는 그릇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친히 창조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 안에서 맡은 역할이 있습니다. 그 역할을 바꾸어달라고 하나님께 원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금 그릇이나 은 그릇, 금 수저나 은 수저가 되게 해 달라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믿음 안에서 깨끗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여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ですから、だれでもキリストのうちにあるなら、その人は新しく造られた者です。古いものは過ぎ去って、見よ、すべてが新しくなりました。

우리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깨끗한 그릇이 되어 주님으로부터 귀하게 쓰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ガラテヤ人への手紙 6장 9절
失望せずに善を行いましょう。あきらめずに続ければ、時が来て刈り取ることになります。

우리가 아무리 힘들 때라도, 주님 안에 있으면 영원한 낙심도 없고 영원한 절망도 없습니다. 포기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주님께서는 때가 이르면 반드시 우리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거두게 해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우리를 깨끗게 하시는 주님 안에 머물므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그릇이 되어서, 주님께서 인도해주시는 푯대를 향해 힘차게 달려가서 마침내 30배 60배 100배로 거둘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206회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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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4회 소금의 변화
2019년 10월 27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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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マタイの福音書 5章 13節
“あなたがたは地の塩です。もし塩が塩気をなくしたら、何によって塩気をつけるのでしょうか。もう何の役にも立 たず、外に投げ捨てられ、人々に踏みつけられるだけ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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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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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소금의 변화”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이는 1517년 마틴 루터에 의해서 종교혁명이 시작한 날인 것입니다..

종교개혁주일을 기념하는 의미는 우리 믿음의 기준을 확고하게 하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믿음이 있고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 중에서도 신교와 구교의 구분을 잘 모르는 분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원래 하나님을 믿는 종교는 구교, 그러니까 카톨릭이었는데, 새로운 교리를 주장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개신교다……이런 말씀을 혹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는 대단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종교개혁, 종교혁명이 일어난 이유는, 구교가 잘 하고 있었는데, 마틴 루터가 마치 무슨 신흥종교집단처럼 일어나서 그 때까지 없었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구교가 성경에서부터 멀어지고 있기 때문에, ‘오직 말씀’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친 것이 바로 종교혁명의 핵심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멀어지는 믿음을 다시 성경으로 되돌리는 것, 성경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종교혁명을 이끌었던 이들이 추구했던 믿음이었던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개신교의 기본정신은 변화와 회복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믿음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아닌 성경입니다. 성경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성경 안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성경 안에 구원이 있으며 성경 안에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것이요,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구원을 믿는 것이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또한 예수님 스스로 보여주신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이 모두를 믿는 이유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지, 만약에 아무리 좋은 말, 아무리 아름다운 말, 아무리 듣기 좋은 말이라 하더라도 성경에 없다면 이는 우리 믿음 속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변화란 성경에서 벗어난 옛 것들을 본래 자리로 옮겨놓는 것,
우리에게 있어서 회복이란 성경에서 멀어진 옛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소금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マタイの福音書 5章 13節
“あなたがたは地の塩です。もし塩が塩気をなくしたら、何によって塩気をつけるのでしょうか。もう何の役にも立 たず、外に投げ捨てられ、人々に踏みつけられるだけです。”

여기서 소금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변화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 소금이 의미하는 변화에 대해서 살펴봄으로써 주님께서 주시는 변화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음식에 소금을 넣으면 일어나는 변화를 우리는 두 가지로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음식에 소금을 넣으면 그 맛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소금은 일반적으로 싱거운 음식에 넣습니다. 소금은 본래 짠맛이 납니다. 그 소금을 음식에 넣게 되면 싱거운 음식 맛이 짠 맛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상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에 소금이 그 맛을 잃게 되면 아무 쓸 데가 없어져서 밖에 버려지고는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소금이 그 맛을 잃는다는 것은 물론 소금을 가만히 놔두었는데 소금을 이렇게 손가락으로 찍어먹어 보니까 전혀 안 짜게 되었어요. 그렇게 된다면 이는 음식에 넣어볼 필요도 없지요. 그야말로 아무런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에 버려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를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것은 바로 소금을 찍어먹어 보니까 분명히 짠 맛이 나요. 그런데 음식에 넣어보았더니 이유는 모르겠으나 음식이 전혀 짜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 짠 소금을 넣어도 맛이 그대로예요. 만약에 이렇게 되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아무리 짠 소금을 싱거운 음식물에 넣어도 음식이 짜지지 않고 싱거운 맛 그대로 있었다면, 이는 분명 그 싱거운 음식에 의해서 오히려 처음에는 짰던 소금이 싱거워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에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면, 이는 소금이 그야말로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으로라면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는 너무나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예전에 미국에 처음 갔을 때 보면, 한국 젊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 미국인과 연애를 하게 되면 영어가 빨리 는다는 말을 합니다. 조금 있으니까 정말로 미국 여성과 연애를 하는 한국사람이 생기더라니까요. 거 참 대단해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났냐 하면 정말로 한국사람의 영어가 늘면 좋을 텐데, 어디서 뭐가 어떻게 잘 못됐는지, 한국인 남자는 영어가 거의 안 느는데, 오히려 미국인 여성의 한국어 실력이 나날이 늘어난다는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안타깝다고 해야 하는지 대단하다고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자,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소금이 안 들어가서 싱거운 음식을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소금’이라고 한다면, 이 싱거운 세상 속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우리가 ‘소금’으로서 들어가게 된다면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앞서 우리가 가진 상식으로 본다면 싱거운 음식에 짠 맛이 나는 소금이 들어가면, 그 음식이 짜진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공식이 사실이라면 ‘싱거운 음식 같은 세상’ 속에 ‘소금으로서의 나’라고 하는 존재가 들어가게 된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들도 싱거운 곰탕국물을 드셔보셨을 것입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들여서 우려낸 곰탕국물이라고 해도 소금이 들어가지 않으면 이게 곰탕인지 맹물인지 모를 정도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소금이 조금만 들어가면 어떻습니까. 그 넓은 그릇에 담긴 곰탕 국물에 소금이 조금만 들어가도 맛이 완전히 바뀌어서 멋진 음식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도 우리로 인해서 멋진 세상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짠 맛이 들어가서, 그 때까지는 싱겁고 맛도 없는 밋밋한 세상이 놀라운 맛으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항상 그렇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분명히 나는 예수님을 믿고 있는데, 나와 내 주변을 보니까, 내가 세상에 살아가면서, 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언제부터인지 내가 세상에 의해 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분명 이건 아닌데, 분명 이건 성경에 적혀있는 방법이 아닌데, 분명 이건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 아닌데……이처럼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경적인 방법, 신앙적인 방법을 버리고 언제부터인지 세상에 물들어 가고 있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또한 소금이 그 맛을 잃게 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까.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マタイの福音書 5章 13節
“あなたがたは地の塩です。もし塩が塩気をなくしたら、何によって塩気をつけるのでしょうか。もう何の役にも立 たず、外に投げ捨てられ、人々に踏みつけられるだけです。”

소금이 그 맛을 잃게 되면 밖에 버려질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한테까지도 버림을 받게 된다는 뜻이라고 우리는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일본보다도 몇 배나 많은 기독교인인 있는 한국 교회들을 보면 가끔 부끄러워질 때가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성실하고 그야말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소금의 역할을 다 하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교회가, 오히려 믿음이 없는 사람들보다도 더 심각한 일들을 저지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는 이런 일들이 한국에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일본 어떤 지역에서 제게 상담을 하는 전화가 걸려왔었습니다만, 이 분은 일본 목사님이셨는데, 이 목사님이 계신 지역에서도 일본 교회들 사이에서 참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일이 이 지경이 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밟힘을 당합니다. 우리가 변화시키지 못하면 세상이 우리를 삼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는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이 되라는 것도 아닌 이미 우리는 소금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이미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그 힘을 이미 주셨다는 말씀이라고 우리는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세상으로부터 삼킴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 시키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변화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음식에 소금을 넣으면 일어나는 두 번째 변화, 이는 음식 안에 소금을 넣으면 그 소금은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사라지게 됩니다. 녹아서 그 모습이 안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소금을 곰탕국에 넣었는데 맛이 좋아졌어요. 그러면 그 곰탕을 먹는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다. 곰탕을 먹으면서 보통은 “아, 이 곰탕이 참 맛이 좋다”라고 하지, “아, 이 소금이 참 맛이 좋다”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소금이 그 안에 들어가면 녹아서 없어지고, 그러면서 본래 음식 맛을 높여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어떤 음식에 소금을 넣었더니 온통 소금맛 밖에 안 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음식이 맛이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그런 음식은 역시 바깥에 내버려지고 말 것입니다.

이런 경우가 세상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소금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나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높여주는 지혜가 필요한데, 가끔 어떤 경우를 보면, 그 때까지 여러 사람들이 함께 일을 했었는데, 일이 잘 되면 그 공로를 다 자기한테로 돌리는가 하면, 일이 조금 안 되면 자기 탓은 안 하고, 다 남의 탓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소금이 제대로 음식 안에 녹아 들지 않고는, 소금 덩어리가 되어서 둥둥 떠다니는 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남의 탓만 하는 원조가 어디에 나옵니까. 예, 창세기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에 있는 어떤 열매든지 따먹어도 좋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따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 보면 뱀이 하와를 유혹해서 따 먹게 되고, 자신만 먹은 게 아니라 아담한테까지 줘서 결국 아담도 이 열매를 먹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이유를 물으십니다. 그 때 아담과 하와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창세기 3장 12절~13절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人は言った。「私のそばにいるようにとあなたが与えてくださったこの女が、あの木から取って私にくれたので、私は食べたのです。」
神である主は女に言われた。「あなたは何ということをしたのか。」女は言った。「蛇が私を惑わしたのです。それで私は食べました。」

지금 하와는 그 열매를 따먹은 이유가 뱀이 꾀어서 먹었다고 말하면서 뱀 탓을 합니다.

그리고 아담은 어떻습니까. 하와를 처음 보았을 때 아담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창세기 2장 23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人は言った。「これこそ、ついに私の骨からの骨、私の肉からの肉。これを女と名づけよう。男から取られたのだから。」

그런데 이제 아담은 그 열매를 먹은 것을 여자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담은 한술 더 떠서 하나님, 당신이 나한테 주신 여자 때문에 먹었다, 라고 하면서, 열매를 자기한테 준 하와만이 아니라 하나님 탓까지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갈은 아담의 변화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단순히 하와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된 것이 화가 나서 그랬을까요?


로마서 5장 12절을 봅니다.

로마서 5장 12절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こういうわけで、ちょうど一人の人によって罪が世界に入り、罪によって死が入り、こうして、すべての人が罪を犯したので、死がすべての人に広がったのと同様に──

그들이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셨던 열매를 먹었다는 것은 단순히 그 열매의 성분이 어쩌구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열매를 먹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다고 하는 죄가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가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사랑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그리고 내게 있어서 가장 가까운 사람, 내가 가장 아껴야 하는 사람한테 대한 사랑마저도 잊어버리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자 이제 아담과 하와는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금방 남의 탓, 하나님 탓, 그리고 이웃 탓을 하게 변하고 말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요한복음 12장에서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一粒の麦は、地に落ちて死ななければ、一粒のままです。しかし、死ぬなら、豊かな実を結びます。

여기서 죽는다고 하는 것은, 그 생명이 다 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을 낮춘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한 알의 밀알 크기가 커 봤자 얼마나 하겠습니까. 그런데 자기만 옳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 탓, 환경 탓, 세상 탓만 하고 있으면 그것은 자신을 낮춘다는 것이 아니지요. 그렇게 계속 하고 있으면 아무런 발전도 성장도 없습니다. 작은 한 알의 밀알은 영원히 그대로입니다.

제가 학원 강사를 하고 있을 때에도 느꼈던 것이 바로 이런 점입니다. 어떤 선생님들을 보면 학생이 줄어들고 그러면, 학원에서 이런 걸 안 해준다, 저런 걸 안 해준다. 요즘 정치인들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요즘 공부를 안 한다……등등 이런 불만 저런 불만을 하시는 분들이 가끔 계십니다. 하지만 다른 선생님들의 학생들은 늘어요. 그 선생님 반만 줄어들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 선생님의 학생 수가 줄어드는 게, 환경 탓이겠어요? 아니에요. 그 원인을 자기 자신한테서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이는 어떤 경우나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설령 정말로 환경에 문제가 있다거나, 다른 곳에 원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남의 탓, 환경 탓만 한다면 아무 것도 안 변합니다.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지만 발전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는 변화와 회복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 사정은 잘 알 수가 없겠지요. 하지만 우리 스스로의 사정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내가 좋은 소금으로 살아왔을까. 아니면 나쁜 소금으로 살아왔을까.

좋은 소금은 주님을 믿는 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소금이요,
나쁜 소금은 주님을 믿는대도 내가 세상에 물들어버리는 소금인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좋은 소금이면서 나쁜 소금? 내가 세상을 변화시키면서 내가 세상에 물들어버린다? 아니요. 여기에 중간은 없습니다. 좋은 소금이냐 아니면 나쁜 소금이냐. 이 둘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제 종교개역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스스로의 변화와 회복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벗어난 모든 것들을 본래 믿음의 자리로 돌려놓고, 성경에서 벗어나서 세상적으로 물들었던 모습을 믿음의 모습으로 회복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세상에 물드는 나쁜 소금이 아닌, 주님을 믿는 우리가 우리 주변을 변화시키고 우리 세상을 변화시키는 좋은 소금으로 변화되고 회복되어,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능히 감당하고, 마지막 날에 예수님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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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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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3회 틈새 없는 믿음
2019년 10월 2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6장 29절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使徒の働き 26章 29節
“しかし、パウロはこう答えた。「わずかな時間であろうと長い時間であろうと、私が神に願っているのは、あなたばかりでなく今日私 の話を聞いておられる方々が、この鎖は別として、みな私のようになってくださること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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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틈새 없는 믿음” すきのない信仰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바울은 “모든 사람도 다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바울은 얼마나 좋은 상황에 있길래 다른 사람들도 자기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냐 하면, 어떻습니까.

지금 현재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결박된 상태로 끌려 나와서는 죄인 된 신분으로 심문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그가 말하기를, 자신이 이처럼 결박된 것만 뺀다면 모든 사람이 나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의 인생이 어땠습니까. 젊은 나이에 고급 관리로 등용된 그는 자신의 업무에 충실히 임했습니다. 시키는 일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적극적으로 일을 찾아서 하는 열성을 보였습니다. 대표적으로 그가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탄압하는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이는 그에게 있어서 당연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2장 3절
“3.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私は、キリキアのタルソで生まれたユダヤ人ですが、この町で育てられ、ガマリエルのもとで先祖の律法 について厳しく教育を受け、今日の皆さんと同じように、神に対して熱心な者でした。


빌립보서 3장 5절~6절
“5.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私は生まれて八日目に割礼を受け、イスラエル民族、ベニヤミン部族の出身、ヘブル人の中のヘブル人、律法についてはパリサイ人、
その熱心については教会を迫害したほどであり、律法による義については非難されるところがない者でした。

그는 철저한 유대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지금으로 본다면 좋은 학교에서 율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22장 27절에 의하면 그는 로마 시민으로 태어났다고 기록합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였으며, 또한 노예제도까지 있는 상황에서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지배계급에 속한다고 할 수 있었겠지요.

다시 말해서 그는 본인의 뛰어난 능력 뿐만 아니라 환경 면에 있어서도 많은 혜택을 받을 만한 위치, 말하자면 기득권 계층에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좋은 집안 좋은 환경에 있었고 유대교에 대한 교육도 철저하게 받아왔던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아직 예수님의 복음을 알지 못했던 그가 보기에는 이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탄압했습니다.


사도행전 22장 4절에 의하면 그는 이와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そしてこの道を迫害し、男でも女でも縛って牢に入れ、死にまでも至らせました。

그렇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결박하고 옥에 넘겼을 뿐만 아니라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권력을 탐하거나 돈을 바라거나 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것이 옳은 일인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인 줄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다음부터 그의 삶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을 탄압하던 그가 이제 예수님을 전파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파하게 되는 삶으로 완전히 뒤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어떤 일들이 벌어지냐 하면, 이제 양쪽으로부터 쫓기게 됩니다. 그렇겠지요. 기득권층에게 있어서는 이제 바울은 배신자입니다. 배신자를 잡아야 한다고 바울을 추격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가족이나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바울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기도 하고 죽임을 당하기도 했기 때문에 복수를 해야 한다고 그를 잡으려고 합니다.


그가 받은 고통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절 중반부~27절
23.......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労苦したことはずっと多く、牢に入れられたこともずっと多く、むち打たれたことははるかに多く、死に直面したこともたびたびありました。
ユダヤ人から四十に一つ足りないむちを受けたことが五度、
ローマ人にむちで打たれたことが三度、石で打たれたことが一度、難船したことが三度、一昼夜、海上を漂ったこともあります。
何度も旅をし、川の難、盗賊の難、同胞から受ける難、異邦人から受ける難、町での難、荒野での難、海上の難、偽兄弟による難にあい、
労し苦しみ、たびたび眠らずに過ごし、飢え渇き、しばしば食べ物もなく、寒さの中に裸でいたこともありました。

이처럼 유대인들에게 괴롭힘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로마인들에게 체포되어 결박 당하고 있는 상황이지요. 인간적으로 본다면 참으로 기구한 인생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어디를 가나 자기 편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같아지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는 진정한 자유를 알았기 때문, 진정한 사랑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あなたがたは真理を知り、真理はあなたがたを自由にします。」

우리는 진리를 알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진리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が道であり、真理であり、いのちなのです。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だれも父のみもとに行くことはできません。

그렇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진리인 것입니다. 그 누가 2중 3중으로 결박을 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알게 되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또 바울은 말합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私を強くしてくださる方によって、私はどんなことでもできるのです。


즉, 참된 진리 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에 의해서 쓰임을 받는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라고 하는 사실을 그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진정한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빌립보서 2장 6절~8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사랑, 의로운 것, 자랑할만한 것은 하나도 없고 죄로 시작하여 죄로 끝날 수 밖에 없던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자존심도 버리시고, 하늘의 영광도 버리시고 목숨까지도 버리신 예수님의 진정한 사랑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입에 달면 먹고 입에 쓰면 뱉어버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면 할렐루야 하고 찬양을 하다가도, 자신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나거나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습니까.


그랬던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애굽을 탈출했던 광야 1세대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찬양을 몰랐나요? 감사를 몰랐나요? 아니에요. 알았습니다. 출애굽기 15장 1절~2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고 그들을 무사히 건너게 해주신 놀라운 역사를 보고 찬양도 하고 감사도 했습니다.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그랬어요.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마실 물이 떨어지자 그 감사와 찬양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오로지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바랐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돈이었나요? 제물이었나요? 아닙니다. 오로지 순종이었습니다. 나는 너희를 이처럼 놀라운 역사로 애굽에서 인도해낸 하나님이다. 그러니 순종하라. 그러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주겠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어려운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만을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는 에덴에서도 마찬가지였지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바라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아침 일찍 일어나래요? 나를 위해서 밤낮없이 열심히 일을 하래요?

여러분, 에덴이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는 그 중에서 가장 좋은 것만을 골라서 한 곳에 모아 놓은 곳입니다. 무엇을 위해서요? 예,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도 특별히 사랑하는 우리를 위해서 마련해 놓으신 곳이 바로 에덴입니다. 에덴에서는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합니다. 하나님의 보호가 함께 하는 공간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장 16절~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神である主は人に命じられた。「あなたは園のどの木からでも思いのまま食べてよい。
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木から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다른 것은 다 해도 좋아. 어디를 가든, 무엇을 먹든, 내가 다 지켜줄게. 단,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그것만 따먹지 말아. 이것 하나만 지키면 돼. 이것 하나만 지키면 너희들이 나한테 온전히 순종한 것으로 쳐줄게. 나를 온전히 사랑한다고 쳐줄게. 딱 이거 하나만 지키면 돼. 그리고 그 보상으로 이 세상 모든 것을 영원히 너희한테 다 줄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요즘 뭐 가성비…라고 하지요? 아주 작은 것만 지키면 이 세상 모든 것을 영원히 주시겠다고 하는데, 이런 가성비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귀가 하와를 유혹합니다. 그 때의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창세기 3장 1절 후반부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さて蛇は、神である主が造られた野の生き物のうちで、ほかのどれよりも賢かった。蛇は女に言った。「園の木のどれからも食べてはならないと、神は本当に言われたのですか。」


이에 대한 하와의 대답이 흥미롭습니다.

창세기 3장 2절~3절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女は蛇に言った。「私たちは園の木の実を食べてもよいのです。
しかし、園の中央にある木の実については、『あなたがたは、それを食べてはならない。それに触れてもいけない。あなたがたが死ぬといけないからだ』と神は仰せられました。」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셨던 말씀, 그리고 하와가 알고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 이 두 말씀을 비교해보면 빠진 단어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반드시”입니다.

“반드시”는 예외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외 없이, 틀림없이……라는 뜻이 “반드시”입니다. 그런데 하와의 말에서는 이 “반드시”라는 단어가 빠져있었습니다.

여러분, 물이 어떤 곳에서 샙니까. 그렇죠. 작은 틈새에서 새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몇 방울입니다. 어쩌면 그 정도라면 처음에는 물이 새거나 안 새거나 별로 차이가 없다고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그렇게 새기 시작하면 그 틈새는 점점 더 벌어져서 나중에는 물 전체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노릇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100%라고 한다면 이는 100%로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1%가 빠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는 마치 하와가 “반드시”라는 말을 빼먹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라고 하는 1%가 빠지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마귀는 그 틈새를 치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작은 틈새로 인하여 하와만이 아니라 아담까지도 타락하게 되고, 그 아름다운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고 만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7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에베소서 4장 27절
“27.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悪魔に機会を与えないようにしなさい。

(新共同訳:すき)

우리는 이 틈을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광야를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들이 조금은 불평 불만을 하면서도 그나마 순종하면서 모세를 따라 왔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가나안 땅 점령을 앞둔 상황에서 12명의 정탐꾼들 중 10명이 말합니다.

민수기 13장 31절~33절
31.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32.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しかし、彼と一緒に上って行った者たちは言った。「あの民のところには攻め上れない。あの民は私たちより強い。」
彼らは偵察して来 た地について、イスラエルの子らに悪く言いふらして言った。「私たちが行き巡って偵察した地は、そこに住む者を食い尽くす地で、そこで見た民はみな、背の高い者たちだ。
私たちは、そこでネフィリムを、ネフィリムの末裔アナク人を見た。私たちの目には自分たちがバッタのように見えたし、彼らの目にもそう見えただろう。」

여러분, 모세가 가나안 땅으로 보냈던 정탐꾼이 총 12명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10명이 이처럼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나머지 2명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공격하자고 하지요.

자, 여기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12명의 정탐꾼 중에서 10명이 부정적, 그리고 2명이 긍정적이라고 하면, 10명이 다수 의견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착각입니다.

여러분, 이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들이 그 때까지 하나님의 역사를 안 본 게 아닙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만이 아니라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메마른 광야에서 물을 주시고 만나를 주셨습니다. 그들이 믿기에는 너무도 충분한 기적들이 넘쳐났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의 수가 몇 명입니까. 성인 남성만이 60만명, 전체 수는 200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200만 명 중에서 10명이면 몇 프로입니까. 그렇습니다. 200만분의 10. 퍼센트로는 0.0005프로입니다. 그야말로 바늘구멍 정도도 안 되는 틈새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나머지 99.9995프로인 1,999,990명이 0.0005프로인 10명한테, 무슨 소리야. 놀라운 역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탈출시켜주셨고 홍해도 갈라 주셨고, 물도 주시고 만나도 주시면서 이 곳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신다고 약속해 주셨잖아! 우리는 할 수 있어! 라고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 많은 무리들이 이 바늘구멍 정도도 안 되는 0.0005프로의 틈새로 인하여 어떻게 됩니까.


민수기 14장 1절~5절
1.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2.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5.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すると、全会衆は大声をあげて叫び、民はその夜、泣き明かした。
イスラエルの子らはみな、モーセとアロンに不平を言った。全会衆 は彼らに言った。「われわれはエジプトの地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あるいは、この荒野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のだ。
なぜ主は、われわれをこの地に導いて来 て、剣に倒れるようにされるのか。妻や子どもは、かすめ奪われてしまう。エジプトに帰るほうが、われわれにとって良くはないか。」
そして互いに言った。「さあ、われわれは、かしらを一人立ててエジプトに帰ろう。」
そこで、モーセとアロンは、イスラエルの会衆の集会全体の前でひれ伏した。

참 가지가지 합니다. 단 10명의 틈새로 인하여, 0.0005프로의 틈새로 인하여 200만 명의 믿음이 순식간에 무너진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들은 무려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그 틈새를 주어버린 당시 성인들은 모두 죽게 되어 영원히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땠습니까. 아무리 고난을 당하더라도 아무리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그는 조금이라도 믿음의 틈새를 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그의 믿음은 강해집니다. 그래서 당시 바울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결박을 당하고 심문을 받고 있는, 참으로 인간적으로 보면 부끄럽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할 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당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5장 36절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イエスはその話をそばで聞き、会堂司に言われた。「恐れないで、ただ信じていなさい。」

여러분, 아무리 믿음이 좋은 분이라 하더라도 시련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약 성경을 보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서신을 바울이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만, 그 중에서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마지막으로 쓴 서신이라고 해서, 또 다른 말로 이를 바울의 유언이라고도 합니다.

그 디모데후서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8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あとは、義の栄冠が私のために用意されているだけです。その日には、正しいさばき主である主が、それを私に授けてくださいます。私だけでなく、主の現れを慕い求めている人には、だれにでも授けてくださるのです。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자기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말한 바울의 참 뜻은, 자기처럼 결박 당하기를 바란다는 것도 아니요, 자기처럼 매를 맞거나 쫓겨 다니거나 하기를 바란다는 것도 아닌, 모든 사람들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 틈을 주지 않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의 면류관을 받기를 원한다는 뜻이라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어떤 어려움이 닥쳐 온다 할지라도, 아주 작은 틈새도 주지 않은 강한 믿음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틈새를 노리는 마귀 사탄과 싸워 이기고, 마침내 의로운 재판장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의의 면류관을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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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2회 나를 위한 고백
2019년 10월 1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시편 136편 26절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詩篇 136篇 26節
“天の神に感謝せよ。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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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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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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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나를 위한 고백” 私のための告白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먼저 이사야 43장 2절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 43장 2절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あなたが水の中を過ぎるときも、わたしは、あなたとともにいる。川を渡るときも、あなたは押 し流されず、火の中を歩いても、あなたは焼かれず、炎はあなたに燃えつかない。

이 말씀. 어떠십니까.

다시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이사야 43장 2절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あなたが水の中を過ぎるときも、わたしは、あなたとともにいる。川を渡るときも、あなたは押 し流されず、火の中を歩いても、あなたは焼かれず、炎はあなたに燃えつかない。

들으면 들을수록 은혜로우십니까. 물론 은혜로운 말씀이지요. 하지만 우리 여기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욕심을 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바꾸어서 조금 더 은혜롭게 만들어 보면 어떻게 될까 한 것이죠.


이렇게 바꾸면 어떨까요.

“네가 물 가운대로 지나지 않을 것이요, 강을 건넌지도 않을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나가지도 않으리라”

あなたが水の中を過ぎることもなく、川を渡ることもなく、火の中を歩くこともない。

어떠십니까. 제가 말씀 드린 것이 더 짧고 좀 더 은혜롭게 들리지 않으세요?

이 이사야 43장 2절 말씀을 하나하나 나누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첫 문장.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あなたが水の中を過ぎるときも、わたしは、あなたとともにいる。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물 가운데로 지난다는 것은 무슨 요만한 물 웅덩이 같은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홍해 한 가운데를 지나는 것과 같은 큰 어려움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신다고 하시는데, 그 이유는 뭐겠습니까. 그렇죠. 우리를 지켜주시기 위해서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川を渡るときも、あなたは押し流されず、


우리가 강을 건널 때에 침몰하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火の中を歩いても、あなたは焼かれず

이 말씀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

그리고 마지막 문장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炎はあなたに燃えつかない。

이도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말이죠. 아예 애초부터 이와 같은 위험한 상황이 닥치지 않도록 해주신다면 되지 않을까. 하나님도 바쁘실 텐데 처음부터 이런 위기상황, 물이나 불 가운데로 지난다거나 하는 상황을 완전히 피하게 해주신다면 하나님께서 번거롭게 우리를 지켜주실 필요가 없지 않을까.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말이 이상한가요? 그렇잖아요. 예를 들어서 넘어질 때도 다치지 않게 해주신다……라고 한다면, 그렇게 번거롭게 하지 마시고, 아예 안 넘어지게 해주시면 얼마나 좋아요. 이제 제 의문에 좀 공감이 가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이 시점에서 오늘 본문이 있는 시편 136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책을 가지고 계신 분께서는 시편 136편을 찾아봐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좀 길지만 시편 136편을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시편 136편은 1절에서 26절까지 있습니다만, 일단 25절까지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136편 1절~25절
1.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3.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4.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5.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6.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7.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8.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9.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0.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1.이스라엘을 그들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2.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4.이스라엘을 그 가운데로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5.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6.그의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7.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8.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9.아모리인의 왕 시혼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0.바산 왕 옥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1.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2.곧 그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3.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4.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5.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01 主に感謝せよ。主はまことにいつくしみ深い。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02 神の神であられる方に感謝せよ。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03 主の主であられる方に感謝せよ。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04 ただひとり 大いなる不思議を行われる方に。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05 英知をもって天を造られた方に感謝せよ。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06 地を水の上に敷かれた方に。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07 大きな光る物を造られた方に。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08 昼を治める太陽を。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09 夜を治める月と星を。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10 エジプトの長子を打たれた方に感謝せよ。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11 主はイスラエルをその地から導き出された。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12 力強い御手と伸ばされた御腕をもって。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13 葦の海を二つに分けられた方に感謝せよ。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14 こうして 主はイスラエルにその中を通らせた。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15 ファラオとその軍勢を葦の海に投げ込まれた。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16 荒野で御民を導かれた方に感謝せよ。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17 大いなる王たちを打たれた方に。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18 主は 力ある王たちを殺された。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19 アモリ人の王シホンを。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20 バシャンの王オグを。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21 こうして 彼らの地をゆずりとして与えられた。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22 主のしもべイスラエルにゆずりとして。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23 私たちが卑しめられたとき 主は心に留められた。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24 そして 主は私たちを敵から解き放たれた。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25 主はすべての肉なる者に食物を与える方。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시편 136편은 총 26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각 절마다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로 끝나고 있지요. 그렇다면 무엇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9절까지를 보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감사.

10절은 애굽에 재앙을 내린 것에 대해서 감사.

11절~12절은 인도해주신 것을 감사.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해요. 그런데 문제는 13절부터입니다.


13절~14절은 홍해를 가르고 통과하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

15절은 바로의 군대를 무찔러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

16절은 광야를 통과하게 해주셔서 감사.

17절~22절은 왕들을 죽이고 기업을 주신 것을 감사.

23절은 비천한 가운데 기억해주셔서 감사. 私たちが卑しめられたとき 主は心に留められた

24절은 대적에게서 이기게 해주셔서 감사
敵から解き放たれた
25절은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셔서 감사.
肉なる者に食物を与える方。

이처럼 감사, 감사, 감사……로 이어집니다. 물론 감사 드리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이것도 앞서 이사야서 말씀을 살펴본 식으로 하나하나 꼼꼼하게 보도록 할까요?

13절~14절에서 보면 홍해를 가르고 통과하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는데, 몇 백 년간에 걸친 노예생활을 끝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애굽을 탈출했던 이스라엘 민족,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 대략 200만 명 정도라고 추산되는 그 수많은 무리들이 홍해를 앞에 두고 얼마나 많은 걱정을 하고 가슴을 졸이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원망하고 갈등이 생기고 그랬습니까. 그렇게 되리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몰랐어요? 아니요, 그러실 리가 없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모르는 것이 없고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라면 다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민족을 좀 더 평화롭게 애굽에서 탈출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주시면 되잖아요. 왜 굳이 홍해 앞으로 인도하셔서 괜히 고생을 시키게 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고생을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지 앞길이 막혀 있어서가 아닙니다. 15절을 보시면 알 수 있듯이 바로의 군대가 뒤에서 쫓아왔기 때문이지요. 상대방은 첨단장비로 무장한 애굽 군대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민족은 무기라고는 없고, 있다 하더라도 써 본적도 없습니다. 평생 노예로 태어나서 노예로 자랐는데 무기가 있다고 한들, 그리고 아무리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들,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애굽 군대 앞에서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애굽 군대는 한 사람도 남김 없이 홍해에 빠져버렸고, 반면에 이스라엘 민족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무사히 홍해를 건널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도 역시 감사하지요.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와 같이 피를 말리는 순간들을 없앨 수 없으셨겠어요? 아니요. 분명히 가능하셨을 것입니다.

16절에는 광야를 통과하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합니다. 광야가 어떤 곳입니까. 먹을 만한 나무 열매는 고사하고 물 한 방울 안 나는 곳입니다. 이왕이면 조금 더 편한 곳으로 갈 수 있게 해 주셨을 법도 하지요.

17절~22절에 보면 왕들을 죽이고 기업을 주셨다고 합니다. 앞서 말씀 드린 거처럼 전쟁도 모르고 무기를 쓰는 것도 서툰 이스라엘 민족이었지요. 그들이 행군을 합니다. 그 길은 분명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는 길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3장 21절을 봅니다.

출애굽기 13장 21절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主は、昼は、途上の彼らを導くため雲の柱の中に、また夜は、彼らを照らすため火の柱の中にいて、彼らの前を進まれた。彼らが昼も夜も進んで行くためであった。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대충대충 자기들 멋대로 다닌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 그리고 밤에는 구름 기둥이 안 보이니까 불 기둥으로 인도해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는 의심의 여지 없이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는 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조금은 편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이렇게 행군을 하면 그 앞에 있던 장애물들이 알아서 없어지고, 방해하는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바람을 불어서 날려버리시든지 아니면 홍수로 어떻게 하시든지 방법이야 한 둘인가요. 그런데 이런저런 적들이 나타나서는 그들의 앞길을 막아서고, 결국 그 전쟁도 모르는 사람들한테, 무기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사람들한테, 고생스럽게 손수 전쟁을 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23절, 24절은 또 어떻습니까. 아니,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서요. 우리를 사랑하신다면서요. 그런데 왜 비천하게도 하시고 왜 대적을 만나게 하십니까. 그리고 25절, 먹을 것을 주시는 것은 감사합니다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제 먹지 않아도 배부르게 해주시면 안 되나요? 꼭 매끼 챙겨먹어야 하나요? 저도 혼자 살아봐서 아는데, 밥 문제를 해결하기가 얼마나 귀찮은지 모릅니다. 집에서 해 먹으면 그걸 또 치워야 하잖아요? 참 살기 힘듭니다.

하지만 만약에 이처럼 많은 제 투정, 제 불만, 이 근원들을 완전히 없애버렸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홍해가 갈라지지도 않았고 대적들도 없었고, 광야처럼 힘든 과정도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도 이 시편 136편은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 136편은 그 존재 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지요. 앞서 말씀 드렸듯이 이 시편 136편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무엇입니까.

예, 감사입니다. 감사가 사라졌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앞에 이처럼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어려움을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고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감사가 있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야죠. 그 질문이 뭐겠습니까.

아니, 감사가 뭔데? 하나님께서 감사를 그렇게 받고 싶으신 거야? 뭐 그런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정답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부터 감사와 찬송을 받고 싶어하십니다.

이사야 43장 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わたしのためにわたしが形造ったこの民は、わたしの栄誉を宣べ伝える。

이 말씀을 들으시면 어떻습니까. 아이구 참 하나님도 뭘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감사나 찬송을 받고 싶어 하실까. 이런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여러분께서는 믿음이 좋아서 안 해보셨을지 모르지만, 저는 해보았습니다.

좀 낯간지럽지 않나요?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찬송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만들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이 말씀을 들었을 때에는 정말 무슨 옛날 왕이나 독재자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옛날 무슨 황제들이나 왕들을 보면 그 한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그랬다고 하지요. 마치 그런 사람들처럼 하나님도 그런 것을 원하시나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만 읽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단순히 예배 때만 잠시 보고 마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 말씀 앞부분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 43장 19절~20절 말씀입니다.

이사야 43장 19절~20절
“19.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見よ、わたしは新しいことを行う。今、それが芽生えている。あなたがたは、それを知らないのか。必ず、わたしは荒野に道を、荒れ地に川を設ける。
野の獣、ジャッカルや、だちょうも、わたしをあがめる。わたしが荒野に水を、荒れ地に川を流れさせ、わたしの民、わたしの選んだ者に飲ませるからだ。

이 말씀이야말로 대단히 놀랍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신다고 합니다. 어떤 새 일이냐 하면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낸다고 하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본 들짐승들도 하나님을 보고 존경하리라고 하는 말씀은, 그 때까지는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들,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을 존경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하나님께서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그 드넓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을 내는 것을 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누가 놀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더욱 놀라운 부분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어마어마한 일을 하신다고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 백성,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에게 물을 마시게 하기 위해서, 물을 필요로 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를 위해서 광야에 길을 내고 물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낸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축복을 모두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놀라운 일을 해주시면,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면 되는 것입니까.

예나 지금이나 무슨 왕이다 황제다 독재자다 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에게 큰 것을 받고 작은 것을 돌려주거나, 아예 아니면 아무 것도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떠십니까.

여러분께서는 누군가를 위해 선물을 사신 적이 있으십니까. 생일선물이나 무슨 기념일 때 선물을 주고 받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선물을 주는 가장 큰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선물을 받는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기 위함이요, 고맙다는 말을 듣기 위한 것 아니겠습니까. 고맙다는 말은 받는 사람이 매우 만족을 했을 때 하는 말이지요.

하나님도 바로 그것을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리 고맙다는 말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한테서 듣고 싶겠습니까. 누구에게 줄 선물을 이걸로 할까 저걸로 할까. 색깔은 무엇으로 할까 하면서 오래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그 선물을 주었을 때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아니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내가 싫어하는 사람일 리가 있나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기뻐하는 모습, 그리고 사람으로부터 고맙다는 말 한 마디 듣고 싶어서 아니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우리의 감사와 우리의 찬송을 받고 싶어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셨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얼마 전에도 한국 뉴스에 보니까, 돈도 많고 가진 것도 많은 사람들이 도박이나 마약 같은 것 때문에 경찰 조사를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만, 마약이다 대마초다 도박이다 하는 것에 빠지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 마음에 감사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 43절~45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2장 43절~45절
“43.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汚れた霊は人から出て行くと、水のない地をさまよって休み場を探します。でも見つからず、
『出て来た自分の家に帰ろう』と言います。帰って見ると、家は空いていて、掃除されてきちんと片付いています。
そこで出かけて行って、自分よりも悪い、七つのほかの霊 を連れて来て、入り込んでそこに住みつきます。そうなると、その人の最後の状態は初めよりも悪くなるのです。この悪い時代にも、そのようなことが起こります。」

우리는 마음을 텅 비우게 할 수 없습니다. 비워두면 불안, 불평, 불만, 공허함, 허무함 등과 같은 오히려 악한 영이 들어와 자리를 잡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감사로 채워야 합니다. 주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강을 건너게 하시고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시는 고난을 허락하시고, 그리고 그 때마다 이를 극복하도록 도와주시는 이유는 우리 마음을 감사로 채우게 하기 위한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마음을 감사로 채우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백성이라는 증거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에게 물 한 먹음을 마시게 하기 위해서 광야에 길을 내고 물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입니까. 요한복음 7장 38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7장 38절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わたしを信じる者は、聖書が言っているとおり、その人の心の奥底から、生ける水の川が流れ出るようになります。」

죄인 되었던 너무나도 부족한 우리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까지도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 이름을 믿기만 하면 생수의 강을 내어 우리를 채우게 해주시겠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 마음을 감사로 채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하나님을 위한 고백이 아닌, 우리를 위한 고백을 할 시간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고백,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고백, 하나님께서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도록 해주시는 고백인 것입니다.

주보 또는 성경을 보시고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함께 읽어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시편 136편 26절입니다.

시편 136편 26절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天の神に感謝せよ。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시편 136편 26절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天の神に感謝せよ。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할렐루야!

우리 모두 우리 마음을 하나님에 대한 감사함으로 채움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되셔서, 우리를 위해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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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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