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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4회 소금의 변화
2019년 10월 2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マタイの福音書 5章 13節
“あなたがたは地の塩です。もし塩が塩気をなくしたら、何によって塩気をつけるのでしょうか。もう何の役にも立 たず、外に投げ捨てられ、人々に踏みつけられるだけ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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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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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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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소금의 변화”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이는 1517년 마틴 루터에 의해서 종교혁명이 시작한 날인 것입니다..

종교개혁주일을 기념하는 의미는 우리 믿음의 기준을 확고하게 하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믿음이 있고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 중에서도 신교와 구교의 구분을 잘 모르는 분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원래 하나님을 믿는 종교는 구교, 그러니까 카톨릭이었는데, 새로운 교리를 주장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개신교다……이런 말씀을 혹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는 대단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종교개혁, 종교혁명이 일어난 이유는, 구교가 잘 하고 있었는데, 마틴 루터가 마치 무슨 신흥종교집단처럼 일어나서 그 때까지 없었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구교가 성경에서부터 멀어지고 있기 때문에, ‘오직 말씀’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친 것이 바로 종교혁명의 핵심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멀어지는 믿음을 다시 성경으로 되돌리는 것, 성경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종교혁명을 이끌었던 이들이 추구했던 믿음이었던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개신교의 기본정신은 변화와 회복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믿음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아닌 성경입니다. 성경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성경 안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성경 안에 구원이 있으며 성경 안에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것이요,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구원을 믿는 것이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또한 예수님 스스로 보여주신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이 모두를 믿는 이유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지, 만약에 아무리 좋은 말, 아무리 아름다운 말, 아무리 듣기 좋은 말이라 하더라도 성경에 없다면 이는 우리 믿음 속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변화란 성경에서 벗어난 옛 것들을 본래 자리로 옮겨놓는 것,
우리에게 있어서 회복이란 성경에서 멀어진 옛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소금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マタイの福音書 5章 13節
“あなたがたは地の塩です。もし塩が塩気をなくしたら、何によって塩気をつけるのでしょうか。もう何の役にも立 たず、外に投げ捨てられ、人々に踏みつけられるだけです。”

여기서 소금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변화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 소금이 의미하는 변화에 대해서 살펴봄으로써 주님께서 주시는 변화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음식에 소금을 넣으면 일어나는 변화를 우리는 두 가지로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음식에 소금을 넣으면 그 맛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소금은 일반적으로 싱거운 음식에 넣습니다. 소금은 본래 짠맛이 납니다. 그 소금을 음식에 넣게 되면 싱거운 음식 맛이 짠 맛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상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에 소금이 그 맛을 잃게 되면 아무 쓸 데가 없어져서 밖에 버려지고는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소금이 그 맛을 잃는다는 것은 물론 소금을 가만히 놔두었는데 소금을 이렇게 손가락으로 찍어먹어 보니까 전혀 안 짜게 되었어요. 그렇게 된다면 이는 음식에 넣어볼 필요도 없지요. 그야말로 아무런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에 버려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를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것은 바로 소금을 찍어먹어 보니까 분명히 짠 맛이 나요. 그런데 음식에 넣어보았더니 이유는 모르겠으나 음식이 전혀 짜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 짠 소금을 넣어도 맛이 그대로예요. 만약에 이렇게 되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아무리 짠 소금을 싱거운 음식물에 넣어도 음식이 짜지지 않고 싱거운 맛 그대로 있었다면, 이는 분명 그 싱거운 음식에 의해서 오히려 처음에는 짰던 소금이 싱거워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에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면, 이는 소금이 그야말로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으로라면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는 너무나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예전에 미국에 처음 갔을 때 보면, 한국 젊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 미국인과 연애를 하게 되면 영어가 빨리 는다는 말을 합니다. 조금 있으니까 정말로 미국 여성과 연애를 하는 한국사람이 생기더라니까요. 거 참 대단해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났냐 하면 정말로 한국사람의 영어가 늘면 좋을 텐데, 어디서 뭐가 어떻게 잘 못됐는지, 한국인 남자는 영어가 거의 안 느는데, 오히려 미국인 여성의 한국어 실력이 나날이 늘어난다는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안타깝다고 해야 하는지 대단하다고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자,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소금이 안 들어가서 싱거운 음식을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소금’이라고 한다면, 이 싱거운 세상 속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우리가 ‘소금’으로서 들어가게 된다면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앞서 우리가 가진 상식으로 본다면 싱거운 음식에 짠 맛이 나는 소금이 들어가면, 그 음식이 짜진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공식이 사실이라면 ‘싱거운 음식 같은 세상’ 속에 ‘소금으로서의 나’라고 하는 존재가 들어가게 된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들도 싱거운 곰탕국물을 드셔보셨을 것입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들여서 우려낸 곰탕국물이라고 해도 소금이 들어가지 않으면 이게 곰탕인지 맹물인지 모를 정도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소금이 조금만 들어가면 어떻습니까. 그 넓은 그릇에 담긴 곰탕 국물에 소금이 조금만 들어가도 맛이 완전히 바뀌어서 멋진 음식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도 우리로 인해서 멋진 세상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짠 맛이 들어가서, 그 때까지는 싱겁고 맛도 없는 밋밋한 세상이 놀라운 맛으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항상 그렇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분명히 나는 예수님을 믿고 있는데, 나와 내 주변을 보니까, 내가 세상에 살아가면서, 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언제부터인지 내가 세상에 의해 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분명 이건 아닌데, 분명 이건 성경에 적혀있는 방법이 아닌데, 분명 이건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 아닌데……이처럼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경적인 방법, 신앙적인 방법을 버리고 언제부터인지 세상에 물들어 가고 있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또한 소금이 그 맛을 잃게 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까.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マタイの福音書 5章 13節
“あなたがたは地の塩です。もし塩が塩気をなくしたら、何によって塩気をつけるのでしょうか。もう何の役にも立 たず、外に投げ捨てられ、人々に踏みつけられるだけです。”

소금이 그 맛을 잃게 되면 밖에 버려질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한테까지도 버림을 받게 된다는 뜻이라고 우리는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일본보다도 몇 배나 많은 기독교인인 있는 한국 교회들을 보면 가끔 부끄러워질 때가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성실하고 그야말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소금의 역할을 다 하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교회가, 오히려 믿음이 없는 사람들보다도 더 심각한 일들을 저지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는 이런 일들이 한국에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일본 어떤 지역에서 제게 상담을 하는 전화가 걸려왔었습니다만, 이 분은 일본 목사님이셨는데, 이 목사님이 계신 지역에서도 일본 교회들 사이에서 참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일이 이 지경이 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밟힘을 당합니다. 우리가 변화시키지 못하면 세상이 우리를 삼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는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이 되라는 것도 아닌 이미 우리는 소금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이미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그 힘을 이미 주셨다는 말씀이라고 우리는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세상으로부터 삼킴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 시키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변화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음식에 소금을 넣으면 일어나는 두 번째 변화, 이는 음식 안에 소금을 넣으면 그 소금은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사라지게 됩니다. 녹아서 그 모습이 안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소금을 곰탕국에 넣었는데 맛이 좋아졌어요. 그러면 그 곰탕을 먹는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다. 곰탕을 먹으면서 보통은 “아, 이 곰탕이 참 맛이 좋다”라고 하지, “아, 이 소금이 참 맛이 좋다”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소금이 그 안에 들어가면 녹아서 없어지고, 그러면서 본래 음식 맛을 높여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어떤 음식에 소금을 넣었더니 온통 소금맛 밖에 안 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음식이 맛이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그런 음식은 역시 바깥에 내버려지고 말 것입니다.

이런 경우가 세상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소금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나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높여주는 지혜가 필요한데, 가끔 어떤 경우를 보면, 그 때까지 여러 사람들이 함께 일을 했었는데, 일이 잘 되면 그 공로를 다 자기한테로 돌리는가 하면, 일이 조금 안 되면 자기 탓은 안 하고, 다 남의 탓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소금이 제대로 음식 안에 녹아 들지 않고는, 소금 덩어리가 되어서 둥둥 떠다니는 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남의 탓만 하는 원조가 어디에 나옵니까. 예, 창세기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에 있는 어떤 열매든지 따먹어도 좋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따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 보면 뱀이 하와를 유혹해서 따 먹게 되고, 자신만 먹은 게 아니라 아담한테까지 줘서 결국 아담도 이 열매를 먹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이유를 물으십니다. 그 때 아담과 하와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창세기 3장 12절~13절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人は言った。「私のそばにいるようにとあなたが与えてくださったこの女が、あの木から取って私にくれたので、私は食べたのです。」
神である主は女に言われた。「あなたは何ということをしたのか。」女は言った。「蛇が私を惑わしたのです。それで私は食べました。」

지금 하와는 그 열매를 따먹은 이유가 뱀이 꾀어서 먹었다고 말하면서 뱀 탓을 합니다.

그리고 아담은 어떻습니까. 하와를 처음 보았을 때 아담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창세기 2장 23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人は言った。「これこそ、ついに私の骨からの骨、私の肉からの肉。これを女と名づけよう。男から取られたのだから。」

그런데 이제 아담은 그 열매를 먹은 것을 여자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담은 한술 더 떠서 하나님, 당신이 나한테 주신 여자 때문에 먹었다, 라고 하면서, 열매를 자기한테 준 하와만이 아니라 하나님 탓까지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갈은 아담의 변화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단순히 하와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된 것이 화가 나서 그랬을까요?


로마서 5장 12절을 봅니다.

로마서 5장 12절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こういうわけで、ちょうど一人の人によって罪が世界に入り、罪によって死が入り、こうして、すべての人が罪を犯したので、死がすべての人に広がったのと同様に──

그들이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셨던 열매를 먹었다는 것은 단순히 그 열매의 성분이 어쩌구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열매를 먹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다고 하는 죄가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가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사랑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그리고 내게 있어서 가장 가까운 사람, 내가 가장 아껴야 하는 사람한테 대한 사랑마저도 잊어버리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자 이제 아담과 하와는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금방 남의 탓, 하나님 탓, 그리고 이웃 탓을 하게 변하고 말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요한복음 12장에서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一粒の麦は、地に落ちて死ななければ、一粒のままです。しかし、死ぬなら、豊かな実を結びます。

여기서 죽는다고 하는 것은, 그 생명이 다 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을 낮춘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한 알의 밀알 크기가 커 봤자 얼마나 하겠습니까. 그런데 자기만 옳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 탓, 환경 탓, 세상 탓만 하고 있으면 그것은 자신을 낮춘다는 것이 아니지요. 그렇게 계속 하고 있으면 아무런 발전도 성장도 없습니다. 작은 한 알의 밀알은 영원히 그대로입니다.

제가 학원 강사를 하고 있을 때에도 느꼈던 것이 바로 이런 점입니다. 어떤 선생님들을 보면 학생이 줄어들고 그러면, 학원에서 이런 걸 안 해준다, 저런 걸 안 해준다. 요즘 정치인들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요즘 공부를 안 한다……등등 이런 불만 저런 불만을 하시는 분들이 가끔 계십니다. 하지만 다른 선생님들의 학생들은 늘어요. 그 선생님 반만 줄어들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 선생님의 학생 수가 줄어드는 게, 환경 탓이겠어요? 아니에요. 그 원인을 자기 자신한테서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이는 어떤 경우나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설령 정말로 환경에 문제가 있다거나, 다른 곳에 원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남의 탓, 환경 탓만 한다면 아무 것도 안 변합니다.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지만 발전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는 변화와 회복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 사정은 잘 알 수가 없겠지요. 하지만 우리 스스로의 사정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내가 좋은 소금으로 살아왔을까. 아니면 나쁜 소금으로 살아왔을까.

좋은 소금은 주님을 믿는 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소금이요,
나쁜 소금은 주님을 믿는대도 내가 세상에 물들어버리는 소금인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좋은 소금이면서 나쁜 소금? 내가 세상을 변화시키면서 내가 세상에 물들어버린다? 아니요. 여기에 중간은 없습니다. 좋은 소금이냐 아니면 나쁜 소금이냐. 이 둘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제 종교개역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스스로의 변화와 회복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벗어난 모든 것들을 본래 믿음의 자리로 돌려놓고, 성경에서 벗어나서 세상적으로 물들었던 모습을 믿음의 모습으로 회복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세상에 물드는 나쁜 소금이 아닌, 주님을 믿는 우리가 우리 주변을 변화시키고 우리 세상을 변화시키는 좋은 소금으로 변화되고 회복되어,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능히 감당하고, 마지막 날에 예수님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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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03회 틈새 없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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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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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3회 틈새 없는 믿음
2019년 10월 20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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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6장 29절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使徒の働き 26章 29節
“しかし、パウロはこう答えた。「わずかな時間であろうと長い時間であろうと、私が神に願っているのは、あなたばかりでなく今日私 の話を聞いておられる方々が、この鎖は別として、みな私のようになってくださること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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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틈새 없는 믿음” すきのない信仰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바울은 “모든 사람도 다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바울은 얼마나 좋은 상황에 있길래 다른 사람들도 자기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냐 하면, 어떻습니까.

지금 현재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결박된 상태로 끌려 나와서는 죄인 된 신분으로 심문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그가 말하기를, 자신이 이처럼 결박된 것만 뺀다면 모든 사람이 나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의 인생이 어땠습니까. 젊은 나이에 고급 관리로 등용된 그는 자신의 업무에 충실히 임했습니다. 시키는 일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적극적으로 일을 찾아서 하는 열성을 보였습니다. 대표적으로 그가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탄압하는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이는 그에게 있어서 당연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2장 3절
“3.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私は、キリキアのタルソで生まれたユダヤ人ですが、この町で育てられ、ガマリエルのもとで先祖の律法 について厳しく教育を受け、今日の皆さんと同じように、神に対して熱心な者でした。


빌립보서 3장 5절~6절
“5.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私は生まれて八日目に割礼を受け、イスラエル民族、ベニヤミン部族の出身、ヘブル人の中のヘブル人、律法についてはパリサイ人、
その熱心については教会を迫害したほどであり、律法による義については非難されるところがない者でした。

그는 철저한 유대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지금으로 본다면 좋은 학교에서 율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22장 27절에 의하면 그는 로마 시민으로 태어났다고 기록합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였으며, 또한 노예제도까지 있는 상황에서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지배계급에 속한다고 할 수 있었겠지요.

다시 말해서 그는 본인의 뛰어난 능력 뿐만 아니라 환경 면에 있어서도 많은 혜택을 받을 만한 위치, 말하자면 기득권 계층에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좋은 집안 좋은 환경에 있었고 유대교에 대한 교육도 철저하게 받아왔던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아직 예수님의 복음을 알지 못했던 그가 보기에는 이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탄압했습니다.


사도행전 22장 4절에 의하면 그는 이와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そしてこの道を迫害し、男でも女でも縛って牢に入れ、死にまでも至らせました。

그렇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결박하고 옥에 넘겼을 뿐만 아니라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권력을 탐하거나 돈을 바라거나 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것이 옳은 일인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인 줄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다음부터 그의 삶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을 탄압하던 그가 이제 예수님을 전파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파하게 되는 삶으로 완전히 뒤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어떤 일들이 벌어지냐 하면, 이제 양쪽으로부터 쫓기게 됩니다. 그렇겠지요. 기득권층에게 있어서는 이제 바울은 배신자입니다. 배신자를 잡아야 한다고 바울을 추격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가족이나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바울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기도 하고 죽임을 당하기도 했기 때문에 복수를 해야 한다고 그를 잡으려고 합니다.


그가 받은 고통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절 중반부~27절
23.......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労苦したことはずっと多く、牢に入れられたこともずっと多く、むち打たれたことははるかに多く、死に直面したこともたびたびありました。
ユダヤ人から四十に一つ足りないむちを受けたことが五度、
ローマ人にむちで打たれたことが三度、石で打たれたことが一度、難船したことが三度、一昼夜、海上を漂ったこともあります。
何度も旅をし、川の難、盗賊の難、同胞から受ける難、異邦人から受ける難、町での難、荒野での難、海上の難、偽兄弟による難にあい、
労し苦しみ、たびたび眠らずに過ごし、飢え渇き、しばしば食べ物もなく、寒さの中に裸でいたこともありました。

이처럼 유대인들에게 괴롭힘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로마인들에게 체포되어 결박 당하고 있는 상황이지요. 인간적으로 본다면 참으로 기구한 인생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어디를 가나 자기 편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같아지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는 진정한 자유를 알았기 때문, 진정한 사랑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あなたがたは真理を知り、真理はあなたがたを自由にします。」

우리는 진리를 알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진리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が道であり、真理であり、いのちなのです。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だれも父のみもとに行くことはできません。

그렇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진리인 것입니다. 그 누가 2중 3중으로 결박을 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알게 되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또 바울은 말합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私を強くしてくださる方によって、私はどんなことでもできるのです。


즉, 참된 진리 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에 의해서 쓰임을 받는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라고 하는 사실을 그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진정한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빌립보서 2장 6절~8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사랑, 의로운 것, 자랑할만한 것은 하나도 없고 죄로 시작하여 죄로 끝날 수 밖에 없던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자존심도 버리시고, 하늘의 영광도 버리시고 목숨까지도 버리신 예수님의 진정한 사랑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입에 달면 먹고 입에 쓰면 뱉어버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면 할렐루야 하고 찬양을 하다가도, 자신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나거나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습니까.


그랬던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애굽을 탈출했던 광야 1세대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찬양을 몰랐나요? 감사를 몰랐나요? 아니에요. 알았습니다. 출애굽기 15장 1절~2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고 그들을 무사히 건너게 해주신 놀라운 역사를 보고 찬양도 하고 감사도 했습니다.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그랬어요.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마실 물이 떨어지자 그 감사와 찬양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오로지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바랐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돈이었나요? 제물이었나요? 아닙니다. 오로지 순종이었습니다. 나는 너희를 이처럼 놀라운 역사로 애굽에서 인도해낸 하나님이다. 그러니 순종하라. 그러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주겠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어려운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만을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는 에덴에서도 마찬가지였지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바라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아침 일찍 일어나래요? 나를 위해서 밤낮없이 열심히 일을 하래요?

여러분, 에덴이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는 그 중에서 가장 좋은 것만을 골라서 한 곳에 모아 놓은 곳입니다. 무엇을 위해서요? 예,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도 특별히 사랑하는 우리를 위해서 마련해 놓으신 곳이 바로 에덴입니다. 에덴에서는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합니다. 하나님의 보호가 함께 하는 공간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장 16절~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神である主は人に命じられた。「あなたは園のどの木からでも思いのまま食べてよい。
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木から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다른 것은 다 해도 좋아. 어디를 가든, 무엇을 먹든, 내가 다 지켜줄게. 단,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그것만 따먹지 말아. 이것 하나만 지키면 돼. 이것 하나만 지키면 너희들이 나한테 온전히 순종한 것으로 쳐줄게. 나를 온전히 사랑한다고 쳐줄게. 딱 이거 하나만 지키면 돼. 그리고 그 보상으로 이 세상 모든 것을 영원히 너희한테 다 줄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요즘 뭐 가성비…라고 하지요? 아주 작은 것만 지키면 이 세상 모든 것을 영원히 주시겠다고 하는데, 이런 가성비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귀가 하와를 유혹합니다. 그 때의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창세기 3장 1절 후반부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さて蛇は、神である主が造られた野の生き物のうちで、ほかのどれよりも賢かった。蛇は女に言った。「園の木のどれからも食べてはならないと、神は本当に言われたのですか。」


이에 대한 하와의 대답이 흥미롭습니다.

창세기 3장 2절~3절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女は蛇に言った。「私たちは園の木の実を食べてもよいのです。
しかし、園の中央にある木の実については、『あなたがたは、それを食べてはならない。それに触れてもいけない。あなたがたが死ぬといけないからだ』と神は仰せられました。」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셨던 말씀, 그리고 하와가 알고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 이 두 말씀을 비교해보면 빠진 단어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반드시”입니다.

“반드시”는 예외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외 없이, 틀림없이……라는 뜻이 “반드시”입니다. 그런데 하와의 말에서는 이 “반드시”라는 단어가 빠져있었습니다.

여러분, 물이 어떤 곳에서 샙니까. 그렇죠. 작은 틈새에서 새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몇 방울입니다. 어쩌면 그 정도라면 처음에는 물이 새거나 안 새거나 별로 차이가 없다고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그렇게 새기 시작하면 그 틈새는 점점 더 벌어져서 나중에는 물 전체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노릇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100%라고 한다면 이는 100%로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1%가 빠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는 마치 하와가 “반드시”라는 말을 빼먹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라고 하는 1%가 빠지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마귀는 그 틈새를 치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작은 틈새로 인하여 하와만이 아니라 아담까지도 타락하게 되고, 그 아름다운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고 만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7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에베소서 4장 27절
“27.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悪魔に機会を与えないようにしなさい。

(新共同訳:すき)

우리는 이 틈을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광야를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들이 조금은 불평 불만을 하면서도 그나마 순종하면서 모세를 따라 왔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가나안 땅 점령을 앞둔 상황에서 12명의 정탐꾼들 중 10명이 말합니다.

민수기 13장 31절~33절
31.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32.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しかし、彼と一緒に上って行った者たちは言った。「あの民のところには攻め上れない。あの民は私たちより強い。」
彼らは偵察して来 た地について、イスラエルの子らに悪く言いふらして言った。「私たちが行き巡って偵察した地は、そこに住む者を食い尽くす地で、そこで見た民はみな、背の高い者たちだ。
私たちは、そこでネフィリムを、ネフィリムの末裔アナク人を見た。私たちの目には自分たちがバッタのように見えたし、彼らの目にもそう見えただろう。」

여러분, 모세가 가나안 땅으로 보냈던 정탐꾼이 총 12명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10명이 이처럼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나머지 2명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공격하자고 하지요.

자, 여기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12명의 정탐꾼 중에서 10명이 부정적, 그리고 2명이 긍정적이라고 하면, 10명이 다수 의견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착각입니다.

여러분, 이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들이 그 때까지 하나님의 역사를 안 본 게 아닙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만이 아니라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메마른 광야에서 물을 주시고 만나를 주셨습니다. 그들이 믿기에는 너무도 충분한 기적들이 넘쳐났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의 수가 몇 명입니까. 성인 남성만이 60만명, 전체 수는 200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200만 명 중에서 10명이면 몇 프로입니까. 그렇습니다. 200만분의 10. 퍼센트로는 0.0005프로입니다. 그야말로 바늘구멍 정도도 안 되는 틈새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나머지 99.9995프로인 1,999,990명이 0.0005프로인 10명한테, 무슨 소리야. 놀라운 역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탈출시켜주셨고 홍해도 갈라 주셨고, 물도 주시고 만나도 주시면서 이 곳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신다고 약속해 주셨잖아! 우리는 할 수 있어! 라고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 많은 무리들이 이 바늘구멍 정도도 안 되는 0.0005프로의 틈새로 인하여 어떻게 됩니까.


민수기 14장 1절~5절
1.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2.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5.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すると、全会衆は大声をあげて叫び、民はその夜、泣き明かした。
イスラエルの子らはみな、モーセとアロンに不平を言った。全会衆 は彼らに言った。「われわれはエジプトの地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あるいは、この荒野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のだ。
なぜ主は、われわれをこの地に導いて来 て、剣に倒れるようにされるのか。妻や子どもは、かすめ奪われてしまう。エジプトに帰るほうが、われわれにとって良くはないか。」
そして互いに言った。「さあ、われわれは、かしらを一人立ててエジプトに帰ろう。」
そこで、モーセとアロンは、イスラエルの会衆の集会全体の前でひれ伏した。

참 가지가지 합니다. 단 10명의 틈새로 인하여, 0.0005프로의 틈새로 인하여 200만 명의 믿음이 순식간에 무너진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들은 무려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그 틈새를 주어버린 당시 성인들은 모두 죽게 되어 영원히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땠습니까. 아무리 고난을 당하더라도 아무리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그는 조금이라도 믿음의 틈새를 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그의 믿음은 강해집니다. 그래서 당시 바울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결박을 당하고 심문을 받고 있는, 참으로 인간적으로 보면 부끄럽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할 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당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5장 36절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イエスはその話をそばで聞き、会堂司に言われた。「恐れないで、ただ信じていなさい。」

여러분, 아무리 믿음이 좋은 분이라 하더라도 시련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약 성경을 보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서신을 바울이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만, 그 중에서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마지막으로 쓴 서신이라고 해서, 또 다른 말로 이를 바울의 유언이라고도 합니다.

그 디모데후서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8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あとは、義の栄冠が私のために用意されているだけです。その日には、正しいさばき主である主が、それを私に授けてくださいます。私だけでなく、主の現れを慕い求めている人には、だれにでも授けてくださるのです。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자기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말한 바울의 참 뜻은, 자기처럼 결박 당하기를 바란다는 것도 아니요, 자기처럼 매를 맞거나 쫓겨 다니거나 하기를 바란다는 것도 아닌, 모든 사람들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 틈을 주지 않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의 면류관을 받기를 원한다는 뜻이라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어떤 어려움이 닥쳐 온다 할지라도, 아주 작은 틈새도 주지 않은 강한 믿음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틈새를 노리는 마귀 사탄과 싸워 이기고, 마침내 의로운 재판장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의의 면류관을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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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2회 나를 위한 고백
2019년 10월 1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시편 136편 26절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詩篇 136篇 26節
“天の神に感謝せよ。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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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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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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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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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나를 위한 고백” 私のための告白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먼저 이사야 43장 2절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 43장 2절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あなたが水の中を過ぎるときも、わたしは、あなたとともにいる。川を渡るときも、あなたは押 し流されず、火の中を歩いても、あなたは焼かれず、炎はあなたに燃えつかない。

이 말씀. 어떠십니까.

다시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이사야 43장 2절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あなたが水の中を過ぎるときも、わたしは、あなたとともにいる。川を渡るときも、あなたは押 し流されず、火の中を歩いても、あなたは焼かれず、炎はあなたに燃えつかない。

들으면 들을수록 은혜로우십니까. 물론 은혜로운 말씀이지요. 하지만 우리 여기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욕심을 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바꾸어서 조금 더 은혜롭게 만들어 보면 어떻게 될까 한 것이죠.


이렇게 바꾸면 어떨까요.

“네가 물 가운대로 지나지 않을 것이요, 강을 건넌지도 않을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나가지도 않으리라”

あなたが水の中を過ぎることもなく、川を渡ることもなく、火の中を歩くこともない。

어떠십니까. 제가 말씀 드린 것이 더 짧고 좀 더 은혜롭게 들리지 않으세요?

이 이사야 43장 2절 말씀을 하나하나 나누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첫 문장.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あなたが水の中を過ぎるときも、わたしは、あなたとともにいる。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물 가운데로 지난다는 것은 무슨 요만한 물 웅덩이 같은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홍해 한 가운데를 지나는 것과 같은 큰 어려움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신다고 하시는데, 그 이유는 뭐겠습니까. 그렇죠. 우리를 지켜주시기 위해서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川を渡るときも、あなたは押し流されず、


우리가 강을 건널 때에 침몰하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火の中を歩いても、あなたは焼かれず

이 말씀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

그리고 마지막 문장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炎はあなたに燃えつかない。

이도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말이죠. 아예 애초부터 이와 같은 위험한 상황이 닥치지 않도록 해주신다면 되지 않을까. 하나님도 바쁘실 텐데 처음부터 이런 위기상황, 물이나 불 가운데로 지난다거나 하는 상황을 완전히 피하게 해주신다면 하나님께서 번거롭게 우리를 지켜주실 필요가 없지 않을까.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말이 이상한가요? 그렇잖아요. 예를 들어서 넘어질 때도 다치지 않게 해주신다……라고 한다면, 그렇게 번거롭게 하지 마시고, 아예 안 넘어지게 해주시면 얼마나 좋아요. 이제 제 의문에 좀 공감이 가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이 시점에서 오늘 본문이 있는 시편 136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책을 가지고 계신 분께서는 시편 136편을 찾아봐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좀 길지만 시편 136편을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시편 136편은 1절에서 26절까지 있습니다만, 일단 25절까지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136편 1절~25절
1.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3.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4.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5.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6.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7.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8.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9.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0.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1.이스라엘을 그들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2.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4.이스라엘을 그 가운데로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5.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6.그의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7.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8.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9.아모리인의 왕 시혼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0.바산 왕 옥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1.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2.곧 그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3.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4.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5.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01 主に感謝せよ。主はまことにいつくしみ深い。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02 神の神であられる方に感謝せよ。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03 主の主であられる方に感謝せよ。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04 ただひとり 大いなる不思議を行われる方に。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05 英知をもって天を造られた方に感謝せよ。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06 地を水の上に敷かれた方に。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07 大きな光る物を造られた方に。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08 昼を治める太陽を。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09 夜を治める月と星を。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10 エジプトの長子を打たれた方に感謝せよ。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11 主はイスラエルをその地から導き出された。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12 力強い御手と伸ばされた御腕をもって。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13 葦の海を二つに分けられた方に感謝せよ。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14 こうして 主はイスラエルにその中を通らせた。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15 ファラオとその軍勢を葦の海に投げ込まれた。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16 荒野で御民を導かれた方に感謝せよ。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17 大いなる王たちを打たれた方に。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18 主は 力ある王たちを殺された。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19 アモリ人の王シホンを。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20 バシャンの王オグを。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21 こうして 彼らの地をゆずりとして与えられた。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22 主のしもべイスラエルにゆずりとして。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23 私たちが卑しめられたとき 主は心に留められた。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24 そして 主は私たちを敵から解き放たれた。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25 主はすべての肉なる者に食物を与える方。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시편 136편은 총 26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각 절마다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로 끝나고 있지요. 그렇다면 무엇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9절까지를 보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감사.

10절은 애굽에 재앙을 내린 것에 대해서 감사.

11절~12절은 인도해주신 것을 감사.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해요. 그런데 문제는 13절부터입니다.


13절~14절은 홍해를 가르고 통과하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

15절은 바로의 군대를 무찔러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

16절은 광야를 통과하게 해주셔서 감사.

17절~22절은 왕들을 죽이고 기업을 주신 것을 감사.

23절은 비천한 가운데 기억해주셔서 감사. 私たちが卑しめられたとき 主は心に留められた

24절은 대적에게서 이기게 해주셔서 감사
敵から解き放たれた
25절은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셔서 감사.
肉なる者に食物を与える方。

이처럼 감사, 감사, 감사……로 이어집니다. 물론 감사 드리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이것도 앞서 이사야서 말씀을 살펴본 식으로 하나하나 꼼꼼하게 보도록 할까요?

13절~14절에서 보면 홍해를 가르고 통과하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는데, 몇 백 년간에 걸친 노예생활을 끝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애굽을 탈출했던 이스라엘 민족,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 대략 200만 명 정도라고 추산되는 그 수많은 무리들이 홍해를 앞에 두고 얼마나 많은 걱정을 하고 가슴을 졸이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원망하고 갈등이 생기고 그랬습니까. 그렇게 되리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몰랐어요? 아니요, 그러실 리가 없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모르는 것이 없고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라면 다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민족을 좀 더 평화롭게 애굽에서 탈출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주시면 되잖아요. 왜 굳이 홍해 앞으로 인도하셔서 괜히 고생을 시키게 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고생을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지 앞길이 막혀 있어서가 아닙니다. 15절을 보시면 알 수 있듯이 바로의 군대가 뒤에서 쫓아왔기 때문이지요. 상대방은 첨단장비로 무장한 애굽 군대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민족은 무기라고는 없고, 있다 하더라도 써 본적도 없습니다. 평생 노예로 태어나서 노예로 자랐는데 무기가 있다고 한들, 그리고 아무리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들,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애굽 군대 앞에서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애굽 군대는 한 사람도 남김 없이 홍해에 빠져버렸고, 반면에 이스라엘 민족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무사히 홍해를 건널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도 역시 감사하지요.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와 같이 피를 말리는 순간들을 없앨 수 없으셨겠어요? 아니요. 분명히 가능하셨을 것입니다.

16절에는 광야를 통과하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합니다. 광야가 어떤 곳입니까. 먹을 만한 나무 열매는 고사하고 물 한 방울 안 나는 곳입니다. 이왕이면 조금 더 편한 곳으로 갈 수 있게 해 주셨을 법도 하지요.

17절~22절에 보면 왕들을 죽이고 기업을 주셨다고 합니다. 앞서 말씀 드린 거처럼 전쟁도 모르고 무기를 쓰는 것도 서툰 이스라엘 민족이었지요. 그들이 행군을 합니다. 그 길은 분명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는 길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3장 21절을 봅니다.

출애굽기 13장 21절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主は、昼は、途上の彼らを導くため雲の柱の中に、また夜は、彼らを照らすため火の柱の中にいて、彼らの前を進まれた。彼らが昼も夜も進んで行くためであった。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대충대충 자기들 멋대로 다닌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 그리고 밤에는 구름 기둥이 안 보이니까 불 기둥으로 인도해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는 의심의 여지 없이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는 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조금은 편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이렇게 행군을 하면 그 앞에 있던 장애물들이 알아서 없어지고, 방해하는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바람을 불어서 날려버리시든지 아니면 홍수로 어떻게 하시든지 방법이야 한 둘인가요. 그런데 이런저런 적들이 나타나서는 그들의 앞길을 막아서고, 결국 그 전쟁도 모르는 사람들한테, 무기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사람들한테, 고생스럽게 손수 전쟁을 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23절, 24절은 또 어떻습니까. 아니,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서요. 우리를 사랑하신다면서요. 그런데 왜 비천하게도 하시고 왜 대적을 만나게 하십니까. 그리고 25절, 먹을 것을 주시는 것은 감사합니다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제 먹지 않아도 배부르게 해주시면 안 되나요? 꼭 매끼 챙겨먹어야 하나요? 저도 혼자 살아봐서 아는데, 밥 문제를 해결하기가 얼마나 귀찮은지 모릅니다. 집에서 해 먹으면 그걸 또 치워야 하잖아요? 참 살기 힘듭니다.

하지만 만약에 이처럼 많은 제 투정, 제 불만, 이 근원들을 완전히 없애버렸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홍해가 갈라지지도 않았고 대적들도 없었고, 광야처럼 힘든 과정도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도 이 시편 136편은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 136편은 그 존재 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지요. 앞서 말씀 드렸듯이 이 시편 136편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무엇입니까.

예, 감사입니다. 감사가 사라졌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앞에 이처럼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어려움을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고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감사가 있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야죠. 그 질문이 뭐겠습니까.

아니, 감사가 뭔데? 하나님께서 감사를 그렇게 받고 싶으신 거야? 뭐 그런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정답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부터 감사와 찬송을 받고 싶어하십니다.

이사야 43장 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わたしのためにわたしが形造ったこの民は、わたしの栄誉を宣べ伝える。

이 말씀을 들으시면 어떻습니까. 아이구 참 하나님도 뭘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감사나 찬송을 받고 싶어 하실까. 이런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여러분께서는 믿음이 좋아서 안 해보셨을지 모르지만, 저는 해보았습니다.

좀 낯간지럽지 않나요?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찬송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만들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이 말씀을 들었을 때에는 정말 무슨 옛날 왕이나 독재자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옛날 무슨 황제들이나 왕들을 보면 그 한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그랬다고 하지요. 마치 그런 사람들처럼 하나님도 그런 것을 원하시나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만 읽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단순히 예배 때만 잠시 보고 마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 말씀 앞부분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 43장 19절~20절 말씀입니다.

이사야 43장 19절~20절
“19.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見よ、わたしは新しいことを行う。今、それが芽生えている。あなたがたは、それを知らないのか。必ず、わたしは荒野に道を、荒れ地に川を設ける。
野の獣、ジャッカルや、だちょうも、わたしをあがめる。わたしが荒野に水を、荒れ地に川を流れさせ、わたしの民、わたしの選んだ者に飲ませるからだ。

이 말씀이야말로 대단히 놀랍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신다고 합니다. 어떤 새 일이냐 하면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낸다고 하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본 들짐승들도 하나님을 보고 존경하리라고 하는 말씀은, 그 때까지는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들,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을 존경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하나님께서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그 드넓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을 내는 것을 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누가 놀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더욱 놀라운 부분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어마어마한 일을 하신다고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 백성,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에게 물을 마시게 하기 위해서, 물을 필요로 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를 위해서 광야에 길을 내고 물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낸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축복을 모두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놀라운 일을 해주시면,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면 되는 것입니까.

예나 지금이나 무슨 왕이다 황제다 독재자다 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에게 큰 것을 받고 작은 것을 돌려주거나, 아예 아니면 아무 것도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떠십니까.

여러분께서는 누군가를 위해 선물을 사신 적이 있으십니까. 생일선물이나 무슨 기념일 때 선물을 주고 받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선물을 주는 가장 큰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선물을 받는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기 위함이요, 고맙다는 말을 듣기 위한 것 아니겠습니까. 고맙다는 말은 받는 사람이 매우 만족을 했을 때 하는 말이지요.

하나님도 바로 그것을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리 고맙다는 말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한테서 듣고 싶겠습니까. 누구에게 줄 선물을 이걸로 할까 저걸로 할까. 색깔은 무엇으로 할까 하면서 오래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그 선물을 주었을 때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아니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내가 싫어하는 사람일 리가 있나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기뻐하는 모습, 그리고 사람으로부터 고맙다는 말 한 마디 듣고 싶어서 아니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우리의 감사와 우리의 찬송을 받고 싶어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셨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얼마 전에도 한국 뉴스에 보니까, 돈도 많고 가진 것도 많은 사람들이 도박이나 마약 같은 것 때문에 경찰 조사를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만, 마약이다 대마초다 도박이다 하는 것에 빠지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 마음에 감사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 43절~45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2장 43절~45절
“43.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汚れた霊は人から出て行くと、水のない地をさまよって休み場を探します。でも見つからず、
『出て来た自分の家に帰ろう』と言います。帰って見ると、家は空いていて、掃除されてきちんと片付いています。
そこで出かけて行って、自分よりも悪い、七つのほかの霊 を連れて来て、入り込んでそこに住みつきます。そうなると、その人の最後の状態は初めよりも悪くなるのです。この悪い時代にも、そのようなことが起こります。」

우리는 마음을 텅 비우게 할 수 없습니다. 비워두면 불안, 불평, 불만, 공허함, 허무함 등과 같은 오히려 악한 영이 들어와 자리를 잡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감사로 채워야 합니다. 주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강을 건너게 하시고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시는 고난을 허락하시고, 그리고 그 때마다 이를 극복하도록 도와주시는 이유는 우리 마음을 감사로 채우게 하기 위한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마음을 감사로 채우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백성이라는 증거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에게 물 한 먹음을 마시게 하기 위해서 광야에 길을 내고 물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입니까. 요한복음 7장 38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7장 38절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わたしを信じる者は、聖書が言っているとおり、その人の心の奥底から、生ける水の川が流れ出るようになります。」

죄인 되었던 너무나도 부족한 우리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까지도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 이름을 믿기만 하면 생수의 강을 내어 우리를 채우게 해주시겠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 마음을 감사로 채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하나님을 위한 고백이 아닌, 우리를 위한 고백을 할 시간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고백,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고백, 하나님께서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도록 해주시는 고백인 것입니다.

주보 또는 성경을 보시고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함께 읽어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시편 136편 26절입니다.

시편 136편 26절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天の神に感謝せよ。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시편 136편 26절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天の神に感謝せよ。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할렐루야!

우리 모두 우리 마음을 하나님에 대한 감사함으로 채움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되셔서, 우리를 위해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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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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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1회 지금
2019년 10월 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21절~22절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マタイの福音書 8章 21節~22節
“また、別の一人の弟子がイエスに言った。「主よ。まず行って父を葬ることをお許しください。」
ところが、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に従って来なさい。死人たちに、彼ら自身の死人たちを葬らせ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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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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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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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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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지금” 今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역사적으로 볼 때 많은 사람들에게 의아함을 느끼게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8장 21절~22절입니다.

마태복음 8장 21절~22절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また、別の一人の弟子がイエスに言った。「主よ。まず行って父を葬ることをお許しください。」
ところが、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に従って来なさい。死人たちに、彼ら自身の死人たちを葬らせなさい。」”

이 말씀에 의하면 어떤 제자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하는 말이, 내가 주님을 따라야 하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먼저 가서 내 아버지 장사를 지내고 난 다음에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자 이 말씀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흥미롭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오늘 본문 중에서 22절 말씀.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ところが、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に従って来なさい。死人たちに、彼ら自身の死人たちを葬らせなさ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장사 치르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아버지 장사가 중요한 게 아니야. 너는 나를 따라야 해……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 우리가 이를 생각해볼 때 예수님은 너무나도 가혹한 말씀을 하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물론 주님을 따르는 것은 중요하지요. 하지만 아버지 장사를 치르는 것은 중요하지가 않나요?

나사로가 죽었을 때나 기타 성경에 묘사된 당시 장례 풍습을 보더라도, 누군가가 돌아가시면 지금처럼 많은 조문객이 모여와서 함께 슬퍼하고 일을 처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 장사를 치르겠다는데, 그러지 말고 나를 따르라……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처럼 들린다는 것이지요.

이 구절에 대해서 많은 신학자들이 지금까지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해왔습니다. 그 중에는 정말 아무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하더라도, 장사를 지내는 것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하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말로 예수님은 지금 아버지가 돌아가셨음에도 불구하고 장례를 치르는 것을 다 내버려두고 나를 따르라 라고 하셨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요?

이를 위해서 우선 당시 상황을 조금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그 때는 예수님께서 무리들과 함께 길을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을 따르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과 길을 걸어가면서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가혹하게 들리는 이유는 뭘까요. 그것은 바로 이 제자라고 하는 사람의 아버님이 지금 막 돌아가셔서 장례를 올려야 하는데, 이를 예수님께서 하지 말아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성경 기록상으로 볼 때 그렇다고 하기에는 몇 가지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이 점에 대해서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 지금 이 제자의 아버지가 막 돌아가셨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는 그에게 있어서 상당히 다급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음도 추슬러야 할 뿐만 아니라 장례식 준비도 하여야 할 것입니다. 돌아가신 분이 자신의 친척도 아닌 아버지라고 하면 더더욱 정신이 없겠지요. 그와 같은 상황을 묘사한다면 이런 식의 기록은 어떻겠습니까.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한 제자가 황급히 달려와 이르되, 주여 지금 제 아버지가 죽었나이다 이에 저로 하여금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하지만 오늘 말씀은 어떻습니까. 이와 같은 긴박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만약에 지금 방금 이 제자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장사 재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한다면, 이는 단순히 윤리나 도덕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율법에 대한 문제까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십계명 중에서 제5계명은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20장 12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2절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あなたの父と母を敬え。あなたの神、主が与えようとしているその土地で、あなたの日々が長く続くようにするためである。

십계명이 모두 그렇듯이 이 제5계명도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아버지 장사를 지내지 말라는 말씀은 자칫하면 이 계명을 어기는 말씀처럼 들릴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또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 제자보다도 먼저 예수님께 말씀을 드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8장 19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8장 19절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そこに一人の律法学者が来て言った。「先生。あなたがどこに行かれても、私はついて行きます。」

여기서 서기관이라고 하는 사람은 다른 말로 율법학자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율법에 있어서 많이 연구를 하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지금 막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장사를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한다면, 거이 있던 이 서기관이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항의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니, 예수님, 그건 율법 특히 십계명에 어긋나는 말씀 아니신가요? 하고 질문이라도 한 번 했을 법도 한데, 성경 어디에도 그와 같은 기록이 없습니다.

이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본다면, 이 성경말씀에 대해서 어떤 한 흥미로운 해석이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1차 장사와 2차 장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차 장사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사람이 돌아가셨을 때 하는 것입니다만, 당시는 2차 장사라고 하는 풍습도 있었다고 합니다. 2차 장사는 무엇인가 하면, 사람이 돌아가시면 요즘 일본을 보면 99% 이상이 화장을 하고 한국도 점차 화장이 주류가 되고 있습니다만, 한국이나 일본이나 옛날에는 시신을 그대로 땅속에 매장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동굴을 파서 무덤으로 사용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산의 절벽 같은 곳을 파서 넓은 방처럼 만들어 놓고는 거기에 시신을 안치하고 나서 큰 돌로 그 입구를 막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놓은 상태로 1년 정도가 지나면 살은 완전히 썩고 뼈만 남는다고 합니다. 이제 그와 같은 상태가 되면 무덤 돌문을 열어서 유골을 유골함에 넣어서 다시 그 곳에 안치를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2차 장사라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 제자는 지금 예수님께 2차 장사를 허락해 달라,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그리 급하지 않는 일을 먼저 처리하게 해달라고 말씀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신학자의 주장에 의하면 여기에서 더 나아가, 2차 장사도 지금 당장이 아니라 몇 개월 뒤에 치러야 하는데, 그 몇 개월 뒤에 2차 장사를 치르고 난 다음에야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말일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이죠.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이는 전혀 다급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를 핑계로 해서 예수님을 좀 나중에 따르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혹시 기억하실 것입니다. 학교에 다니다 보면 시험기간이 있잖아요?

자, 오랜만에 오늘 문제 나갑니다. 잘 생각해보시고 마음 속으로 크게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학생이라면 평소에도 그래야겠습니다만, 특히 시험기간 때에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의 편의를 위해서 객관식으로 드리겠습니다. 자, 시험기간에 해야 할 것은 다음 중 무엇입니까. 1번 시험공부, 2번 평소에는 하기 싫었던 방 청소.

이 문제가 어렵다고 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다른 문제도 내 드리겠습니다. 자, 문제는 똑같습니다. 시험기간에 해야 할 것은 다음 중 무엇입니까. 1번 시험공부, 2번 기타.

성공적인 인생을 보내기 위해서는 그 때마다 해야 하는 <선택>만 잘하면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동서고금,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 문제를 물어보세요. 어떤 게 정답이냐고. 그러면 정상적인 분이라면 모두 1번 시험공부를 택하겠지요. 하지만 그게 그리 쉬운가요? 아니요. 쉽지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왜겠습니까. 왜 평소에는 하기 싫던 방 청소가 시험기간만 되면 하고 싶어지는 거예요. 그것은 다름아닌 시험공부를 하기가 싫으니까, 그 핑계를 찾다 보니 그나마 방 청소가 차라리 낫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거라도 하고 싶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쪽에서는 계속해서 핑계거리, 구실거리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또 그렇다고 자녀분들께, 아~ 핑계거리 구실거리 만들지 말고 공부하라고 닥달하지 마세요. 공부해라 공부해라 하고 자녀들에게 말을 많이 하시는 분들은, 공부가 얼마나 힘든지 몰라서 하는 말씀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면 또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르지요. “내가 공부를 안 해 본 줄 알아? 나도 옛날에 다 해봤어”

여러분, 우리가 교회 하루 이틀 다닙니까. 나도 옛날에 금식도 다 해보고, 기도도 다 해봤어……라고 하는 분들이 여러분 교회에 계시면, 그 모습이 은혜롭겠습니까.

신앙은 추억이 되면 안 됩니다. 신앙은 현재 진행형이어야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공부 안 하는 아이들에게 부모로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학원 보내주는 거요? 좋은 선생님 붙여주는 거요? 아니요. 부모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걸 잘 하려고 하지 않아요. 왜요? 자기도 힘들거든요. 그래서 부모님들도 자녀들의 교육에 대해서 또 다른 핑계거리, 구실거리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모님을 공경하려고 하는 것을 꾸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좀 뒤로 미루기 위해서 대고 있는 핑계거리, 구실거리를 꾸짖고 있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우리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요,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먼저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이 우선순위를 잘못 잡으면 나중에 크게 후회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를 보면 어땠습니까. 그가 어디에 방주를 짓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 정확한 언급은 없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물 위에 짓지는 않았습니다. 땅 위에 지었지요. 그 기간도 누구는 120년이라고 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나이로 계산해보면 대략 80년에 조금 못 미치는 기간이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짧은 기간은 아니지요. 노아는 그 오랜 세월 동안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렇다면 노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창세기 6창 9절에서는 노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창세기 6장 9절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これはノアの歴史である。ノアは正しい人で、彼の世代の中にあって全き人であった。ノアは神とともに歩んだ。

노아는 의인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완전한 자라고까지 합니다. 당시 방주 크기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창세기 6장 15절에 정확하게 나와있습니다.

창세기 6장 15절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それを次のようにして造りなさい。箱舟の長さは三百キュビト。幅は五十キュビト。高さは三十キュビト。

라고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방주의 크기를 본다면 1큐빗이 사람 발꿈치에서 손 끝까지 길이었다고 하는데 이를 대략 45센티 정도였을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계산을 해보면 방주의 앞뒤 길이가 135미터, 폭은 22.5미터, 높이는 13.5미터라고 하는 숫자가 나오는데, 이 크기는 축구장 넓이의 1.5배, 높이는 대략 7층 건물 정도가 되는 어마어마한 건축물이었지요.

그렇게 큰 배를, 그것도 바다 위도 아닌 땅 위에 짓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을 크게 벗어나는 일입니다. 노아가 70~80년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은 그를 보고 비웃었을 것입니다.

이봐. 하나님을 믿는 것도 좀 적당히 해. 자, 그런 황당한 배는 나중에 만들고 우리와 함께 놀자. 우리와 함께 사업을 하자. 우리와 함께 다른 것을 하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의인이었던 노아는 어떻게 말했을까요. 이봐. 이제 세상은 금방 망할 거야.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진다구. 자, 더 늦기 전에 자네도 나와 함께 배를 지읍시다. 그리고 마지막 날 우리 같이 방주에 들어가서 구원을 받읍시다. 그는 분명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노아가 평생 동안 전도를 몇 명 했습니까. 예, 그 오랜 기간 동안 자기 가족들, 자기 빼고 7명 외에는 한 사람도 전도를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께서도 지금까지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전도를 못했다 라고 해서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세상을 다음과 갈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4장 38절~39절
“38.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洪水前の日々にはノアが箱舟に入るその日まで、人々は食べたり飲んだり、めとったり嫁いだりしていました。
洪水が来て、すべての人をさらってしまうまで、彼らには分かりませんでした。人の子の到来もそのように実現するのです。

이것도 또 오해하시면 곤란한 것이,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세상 일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노아 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당시 세상 사람들은 세상 일들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 일들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지식과 재물과 지위와 권력과 명예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열심히 돈을 벌었습니다.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홍수 때는 어땠습니까. 세상 지식이 그들을 구원했습니까. 재물이 그들을 구원했습니까. 아니면 세상 지위나 권력이나 명예가 그들을 구원했습니까.

마지막 날에 그들을 구원한 것은 오로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를 몰랐습니다. 노아가 아무리 말을 해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언제 깨달았습니까. 그렇습니다. 방주의 문이 닫히고 지금까지 보지도 못했던 물들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나서야. 그리고 이제 물이 점점 차 올라서 이 세상에는 어디 하나 피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나서야 하나님에 대한 순종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방주에 못 들어가고 바깥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들이 저기 떠다니는 방주를 보고 뭐라고 했겠습니까. 이봐 노아! 내가 잘못했어! 너를 비웃었던 내가 어리석었어. 다시 한 번만 기회를 주게. 딱 한 번만 열어주게!

창세기 6장 14절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あなたは自分のために、ゴフェルの木で箱舟を造りなさい。箱舟に部屋を作り、内と外にタールを塗りなさい。

방주를 만들 때 하나님께서는 역청을 칠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말하자면 방수 처리지요. 이로 인해서 물은 배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렇다고 방음처리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배 안에서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수 많은 사람들의 비명소리, 외침소리도 들리지 않았을까 합니다.

만약에 그런 소리가 들렸더라면, 어떻게 해야 했겠습니까. 그래도 노아가 의인이었다고 하는데, 좀 열어줄 수도 있는 것 아니에요? 아무리 여러 짐승들을 태웠다 하더라도 그렇게 크고 넓은 방주였다고 하니, 최소한 수 십 명은 더 태우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노아가 문을 조금 열어서 몇몇 사람들을 건져 올렸더라”……라는 내용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거 막판에 노아가 너무 야박하게 군 건가요? 왜 문을 안 열어주었을까요. 잠깐 열어주면 됐을 거 아니에요? 그러나 노아는 아무리 의인이었다 하더라도 이제 방주의 문을 열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노아가 야박해서가 아닙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창세기 7장 16절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入ったものは、すべての肉なるものの雄と雌であった。それらは、神がノアに命じられたとおりに入った。それから、主は彼のうしろの戸を閉ざされた。

문을 누가 닫았다고요? 방주의 문을 노아가 닫았다면, 노아가 다시 열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방주의 문을 닫으신 분은 노아가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방주의 열쇠, 구원의 열쇠는 노아나 다른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을 믿으시라고, 교회에 나오시라고 하면, 바쁘다고 하십니다. 시간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번 주일에는 약속이 있다고 하십니다. 인터넷으로 전도를 하다 보면요, 더 심한 말씀을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래요. 바쁘시겠지요. 시간이 없으시겠지요. 약속도 있으시겠지요. 그리고 자기는 관심도 없는데 누군지도 모르는 목사라는 사람이 갑자기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노아의 홍수 때, 물론 신앙적으로는 죄로 가득 차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세상적으로는 머리도 좋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 나중에 갈게, 내 일 좀 다 하고 갈게. 사람들은 그러면서 함께 주님께 순종하자고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마지막 때가 이처럼 빨리 다가올지는 몰랐던 것입니다.

과거에 일제시대 때를 보면 조선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둘로 갈라졌습니다. 그것은 친일을 하거나 아니면 항일을 하거나 둘 중 하나였습니다.

해방이 되고 난 다음에 친일을 한 사람들을 체포해서 질문을 합니다. 당신처럼 그렇게 많이 배우고 지식도 많은 사람이, 왜 친일을 했습니까.

그러면 하나같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빨리 일제가 망할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하루는 24시간, 분으로는 1,440분. 초로는 86,400초입니다. 이를 1년 365일로 바꾼다면 1년은 8,760시간, 분으로는 525,600분, 초로는 31,536,000초입니다.

꽤 길죠? 하지만 정말 긴가요? 2019년. 어째요. 벌써 10월하고도 6일입니다. 이제 올해 2019년은 3개월도 안 남았습니다.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마지막 날이 임했을 때,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가 이와 같이 말할 것입니다.

“그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노아의 삶, 노아가 방주를 짓는 삶, 그와 같은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순종을 보여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입니다.

로마서 5장 19절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すなわち、ちょうど一人の人の不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罪人とされたのと同様に、一人の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義人とされるのです。

빌립보서 2장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が道であり、真理であり、いのちなのです。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だれも父のみもとに行くことはできません。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一人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으로 이르는 길, 방주의 문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열쇠, 그것은 바로 예수님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구원을 얻습니다. 그 이름을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순종하신 예수님께서 흘려주신 그 피를 믿으면 우리는 구원을 얻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2절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わたしの父の家には住む所がたくさんあります。そうでなかったら、あなたがたのために場所を用意しに行く、と言ったでしょうか。

천국은 넓습니다. 노아의 방주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넓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여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넓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곳입니다.

그리고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神は彼らの目から涙をことごとくぬぐい取ってくださる。もはや死はなく、悲しみも、叫び声も、苦しみもない。以前のものが過ぎ去ったからである。」

요한계시록 21장 23절~27절
“23.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24.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25.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26.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27.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都は、これを照らす太陽も月も必要としない。神の栄光が都を照らし、子羊が都の明かりだからである。
諸国の民は都の光によって歩み、地の王たちは自分たちの栄光を都に携えて来る。
都の門は一日中、決して閉じられない。そこには夜がないからである。
こうして人々は、諸国の民の栄光と誉れを都に携えて来ることになる。
しかし、すべての汚れたもの、また忌まわしいことや偽りを行う者は、決して都に入れない。入ることができるのは、子羊のいのちの書に記されている者たちだけである。

우리 모두 예수님이 십자가로 보여주신 순종을 우리 마음에 새기고, 더 늦기 전에 지금 바로 당장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예수님만을 따라감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때에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주님께서 주시는 영광스러운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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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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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0회 합당한 자
2019년 9월 3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5절~38절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マタイの福音書 10章 35節~38節
“わたしは、人をその父に、娘をその母に、嫁をその姑に逆らわせるために来たのです。
そのようにして家の者たちがその人の敵となるのです。
わたしよりも父や母を愛する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わたしよりも息子や娘を愛する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
自分の十字架を負ってわたしに従って来ない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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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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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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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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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합당한 자” ふさわしき者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5절~38절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マタイの福音書 10章 35節~38節
"わたしは、人をその父に、娘をその母に、嫁をその姑に逆らわせるために来たのです。
そのようにして家の者たちがその人の敵となるのです。
わたしよりも父や母を愛する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わたしよりも息子や娘を愛する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
自分の十字架を負ってわたしに従って来ない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온 가족이 불화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다”라고 까지 하시지요.

그렇다면 이 말씀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아하, 그래. 우리가 부모님을 공경해야 하지만 그보다는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구나. 이렇게 이해하면 될까요?

물론 그럴듯해 보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부모님을 공경하고 가족을 사랑한다 하더라도, 그러나 그 우선순위로 본다면 하나님을 더욱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 이렇게 이해하면 될까요? 하지만 이렇게 이해하고자 하면 또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합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이 말씀에 보면 두 계명을 말씀하시는데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라……입니다만, 여기서 잊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 바로 마태복음 22장 39절 전반부입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즉 이 말씀은, 첫째 계명이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으로 둘째 계명은 첫 번째 계명 다음으로 중요하다는 말씀이 아니라, 두 번째 계명도 첫 번째 계명과 똑 같이 중요하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즉,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둘째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첫째 계명과 똑같이 중요하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성경에 적힌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대원칙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에 물음표를 한 번 붙이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자칫 성경 내용에 있어서 혼란이 생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게 된다면 믿음 좋은 사람들 가정은 다 서로가 불화해해요. 그렇잖아요.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가 가족끼리 사이가 안 좋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시는데, 우리 가족을 보면 서로 너무나 사이가 좋아요. 이건 그러면 우리 가정이 예수님 말씀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리고 또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라는 말씀을 가지고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고~ 성경 말씀은 정말 맞아. 우리 애들이 얼마나 내 말을 안 듣는지 알아? 걔네 들이야 말로 정말 원수라니까. 아니면, 내 남편이 또는 내 부인이 내 속을 얼마나 썩이는지 몰라. 그야말로 내 원수가 따로 없어.

여러분, 이게 맞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오늘 저는 여러분께 새로운 도전을 드리고자 합니다. 자신의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시는 분들께서는 한 번 도전해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4장 42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です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あなたがたの主が来られるのがいつの日なのか、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ら。


마가복음 13장 33절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気をつけて、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その時がいつなのか、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からです。

누가복음 21장 36절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しかし、あなたがたは、必ず起こるこれらすべてのことから逃れて、人の子の前に立つことができるように、いつも目を覚まして祈っていなさい。」

골로새서 4장 2절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たゆみなく祈りなさい。感謝をもって祈りつつ、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

자, 이처럼 성경에서는 반복해서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좋으신 분들께서는 이제부터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밤이나 낮이나 깨어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이게 말이 되나요?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성경 좀 안다는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아, 홍 목사, 그것은 그대로 해석하면 안 되는 거야. 이것은 영적으로 이해해야지…… 이런 말씀 들어보셨지요?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과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다소 의아한 부분이 생기게 됩니다. 어떤 건 성경에 적힌 그대로 이해해야 하고, 또 어떤 건 적혀있는 대로가 아닌 영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궁금증이 생기지요. 아니, 어떤 건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또 어떤 건 영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그 경우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면 그 분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하면 성령님께서 알려주신다”

아, 참 멋진 말 아닙니까.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하면 성령님께서 알려주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예요? 내가 하는 말은 성령님께서 하신 말씀이니까 더 이상 따지지 말아라. 나한테 그런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너는 성경도 제대로 안 읽고 기도도 많이 안 했기 때문이다……. 이런 말 아니겠습니까.

가끔 목사님들 중에도 이런 분들이 계십니다. 그 분의 설교나 그 분이 쓰신 책을 보고 질문을 한다거나 하면, 아, 자기는 성령님께서 인도해주시는 대로 말을 하고 글을 쓰기 때문에 이런 건 따지면 안 된대요.

참 과감하신 말씀이십니다. 물론 저도 성령님께도 인도해주시는 대로 쓰임 받기를 간절히 원합니다만, 그렇다고 감히 제 입으로 그런 말을 할 용기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 너무나도 부족하거든요.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저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서울의 수돗물이 그게 문제라고 하지요? 물이 처음 공급되는 곳에서는 아주 깨끗하대요. 다만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도중의 수도관이 오래되거나 녹슬거나 해서 수질이 떨어진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완벽하시지요. 예수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성경은 완전한 하나님 말씀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전해 드리는 저는 그렇다면 정말 완벽한가. 나 자신이 정말 깨끗한 수도관이기에 주님의 말씀을 한 점 오류도 없이 전해드리고 있는가 하는지를 저 자신에게 묻는다면, 물론 그러려고 노력은 합니다만, 그렇다고 100% 언제나 그렇다고는 차마 자신 있게 말씀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제가 겸손해서가 아니라, 이를 판단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인 것이지요.

하지만 자신의 해석, 자신의 말이 성령님의 말씀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이는 교만이나 오만을 넘어서 그야말로 선지자 놀이, 선지자 코스프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말을 할래야 하 수가 없어요. 이것이 조금 더 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사이비 교주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계시를 받았다. 내가 선지자다. 내가 예수다. 내가 하나님이다. 내 말을 따르라. 이것입니다.

그래서 이른바 신흥종교집단을 보시면 거기 신도들의 가정이나 사회적인 환경에 문제가 많이 있다고 합니다. 내가 내 가족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로 인해서 문제가 생긴다면 이것도 주님의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가족이 반대하든 친구가 만류하든 그들의 집단을 위해서, 교주를 위해서 헌신해야 한다……. 이것 아니겠습니까.

성경 해석에 있어서 기본 원칙은 문어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만, 그렇다고 이를 오직 한글성경대로 해석한다거나 자기 상식대로, 막연한 느낌대로 이해하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 드린 “깨어 있으라”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문어적으로 본다면 수면을 취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방심하지 주의를 계속 기울이고 있으라는 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한글성경 그대로 이해하고 잠을 안 잔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그리고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5절~38절
“35.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マタイの福音書 10章 35節~38節

わたしは、人をその父に、娘をその母に、嫁をその姑に逆らわせるために来たのです。
そのようにして家の者たちがその人の敵となるのです。
わたしよりも父や母を愛する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わたしよりも息子や娘を愛する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
自分の十字架を負ってわたしに従って来ない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상황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요즘 시대는 어떻습니까. 옛날과 비교를 해본다면 부모님을 공경하는 자녀들은 늘어난 것 같습니까. 아니면 줄어든 것 같습니까.

아마도 한국이나 일본, 아니, 그 외 다른 나라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아마도 대부분 답이 비슷하지 않을까 합니다. 옛날에는 부모를 공경하고 그랬지만, 요즘은 그런 경향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렇지 않겠어요?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요즘 젊은 것들은 너무나도 교만하고 건방지고 버르장머리가 없어서요? 물론 그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를 사회적으로 보면 어떻습니까.

옛날 농경사회를 보면 특히 서민으로 태어난 사람의 일생은 뻔했습니다. 그 집 아버지가 농사꾼이에요. 그러면 자식도 농사를 하게 되겠지요. 그렇다면 그 일을 누구한테 배웁니까. 그렇죠. 아버지한테 배웁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아버지로부터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농민은 땅이 있었지요. 그 땅은 누구의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버지 것입니다. 형제들이 많이 있다면 나중에 이를 누구한테 물려줄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아버지 판단에 걸려 있었던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가족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농경이나 낙농업 같은 경우는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할 수가 없어요. 반드시 가족의 도움이 있어야지만 일을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당시 아버지의 존재는 자신의 부모이자 스승이자, 회사의 선배님이자 사장님과도 같은 존재, 그 뿐만이 아니라, 조금 더 극단적으로 말씀을 드린다면 자신의 운명을 좌우할 만한 큰 권한을 가진 존재였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만약에, 야, 너한테는 물려줄 땅이 없다……이렇게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면 이는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는 누구나 자신의 부모님을 공경했고 가족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시대 상황은 어떻습니까.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녀들이 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단지 정말 요즘 젊은이들이 못나서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발전을 하다 보니, 예전처럼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역할이 많지 않게 되었다는 점을 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차이를 무시한 채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려 한다면 뜻하지 않는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에베소서 4장 21절~24절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4장 21절~24절
"21.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ただし、本当にあなたがたがキリストについて聞き、キリストにあって教えられているとすれば、です。真理はイエスにあるのですから。
その教えとは、あなたがたの以前の生活について言えば、人を欺く情欲によって腐敗していく古い人を、あなたがたが脱ぎ捨てること、
また、あなたがたが霊と心において新しくされ続け、
真理に基づく義と聖をもって、神にかたどり造られた新しい人を着ることでした。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새 사람을 입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셨다면 새 사람을 입어야지요. 그렇다면 새 사람을 입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렇죠.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을 벗어 버리지 않고서는 새 사람을 입을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옛 사람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것이 바로 옛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 상황을 본다면 가족끼리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는 것은, 윤리나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하루하루 살아가기 위해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던 생각, 마치 목이 마를 때에는 물을 마셔야 한다……는 정도로 상식 중의 상식,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철칙 중의 철칙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그 철칙 중의 철칙. 상식 중의 상식을 깨버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옛 사람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내게 이득이 되면 좋은 것이요, 내게 손해가 되면 나쁜 것입니다. 내 입에 달면 먹고, 내 입에 쓰면 뱉어버리는 식으로, 기준은 항상 나 자신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철칙 중의 철칙, 상식 중의 상식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런 것 바로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새 사람을 입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내 기춘이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말씀 중심이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새 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작은 변화가 아닙니다. 내 철칙과 상식, 지금까지 쌓아왔던 내 가치관을 완전히 송두리째 바꾸는 변화인 것입니다.

제가 운전을 처음 배울 때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 운전을 하고 있으니까 자꾸 핸들을 움직이려고 해요. 조금 오른쪽으로 가면 왼쪽으로 돌리려고 하고, 조금 왼쪽으로 가면 오른쪽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옆에 있는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바로 코앞을 보는 것이 아니라 멀리 앞을 바라 보면서 운전하라고 했던 말씀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그리고 또 그런 운전하시다 보면 그런 경험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운전을 하고 있는데 유리창에 뭐가 좀 묻었어요. 그런데 그게 참 신경이 쓰입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그 먼지만 보고 운전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고가 나겠지요.

우리는 지금 눈앞에 있는 먼지 하나하나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 앞을 보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원하시는 본래 목적지로 도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 코앞이나 내 바로 앞 유리창에 묻은 먼지를 보느냐, 아니면 내가 나아갈 저 멀리 앞을 바라보느냐 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을 기준으로 생각하느냐, 아니면 내가 나아가야 길을 인도해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느냐 하는 차이인 것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기준이 아닌 우리의 앞길을 인도해주시는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모든 가치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나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 먼저, 예수님 먼저가 되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끔 집에서 제 아내와 이야기를 하다가 보면 제 학교 동창이나 선후배에 대한 말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이 그래도 신앙 안에서는 제일 출세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세상적으로 본다면 정말 참 출세를 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 학교 동기나 선후배가 아무리 판검사다, 변호사다, 국회의원이다, 청와대 무슨 고급 공무원이다, 하물며 무슨 장관이다 하더라도, 제 아내의 기준은 명확합니다.

제 아내는 제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 사람한테 우리 결혼식 청첩장을 보냈느냐. 그럼 보냈다고 그러죠. 그러면 다음 질문. 우리 결혼식에 왔느냐. 그런데 안 왔어요. 그럼 마지막 질문. 그럼 조금이라도 축하를 해줬느냐. 그러면 아니, 뭐, 그런 것 없었다고 하잖아요? 여기까지 들은 제 아내의 답은 간단합니다.

“그럼 됐어요.”

제아무리 대단한 사람이고, 예전에 아무리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결혼식에 안 왔을 정도라고 한다면 뭐 됐다는 말이지요. 참 명확하죠? 며칠 전에도 텔레비전을 보면서 제 아내가 하는 말이 “아이고, 저 사람이 우리 결혼식 때 와서 밥이라도 한 끼 먹고 가기만 했었더라도……쯧쯧쯧” 라고 하더라구요.

글쎄요. 저는 뭐 그 뜻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뭐, 워낙 바쁜 분들이기에, 사실 오려고 했었어도, 못 왔던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그런데 이렇게 지금 생각해 보면 분명 왔을 것도 같은데 안 온 사람이 있나 하면, 반면에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와준 사람도 있고 그랬습니다. 그럴 땐 참 반갑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지요.

그래요. 뭐, 제 결혼식에 왔다고 복 받고 그러는 게 아니지요. 제가 뭐 예수님이에요? 하지만, 어린 양의 혼인잔치, 천국은 다릅니다. 거기는 가도 되고 안 가도 되는 곳이 아니에요. 반드시 가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우리가 주님께 이렇게 말했다고 칩시다. 아, 주님, 저는 세상에 살 때에 이렇게 공부를 많이 했고, 이렇게 돈을 많이 벌었고, 이렇게 출세를 많이 했습니다. 그 뿐만 이나리 이렇게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이렇게 착한 일도 많이 했어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옆에 있는 천사한테 물으십니다. 이 사람한테 복음은 전해졌느냐. 그럼 천사가 예 누구누구를 통해서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음. 그래. 그러면 내 이름으로 교회나 이웃을 섬겼느냐, 그런데 천사가 대답하기를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내 이름을 믿고 새 사람을 입었느냐 하니까 그것도 “아니요” 하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럼 됐어.”

더 이상 무엇을 따지시겠습니까. 마태복음 25장 30절이 떠오릅니다.

마태복음 25장 30절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この役に立たないしもべは外の暗闇に追い出せ。そこで泣いて歯ぎしりするのだ。』

여러분,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5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イエスは答えら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人は、水と御霊によって生まれなければ、神の国に入ることはできません。

우리는 이제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가치관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요, 이것이 바로 새 사람을 입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까지는 나를 위해 살았습니다. 나 중심으로 살아왔습니다. 나의 만족을 위해 살았습니다. 나의 기쁨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주님 중심으로 살겠습니다. 주님의 만족을 위해 살겠습니다. 주님의 기쁨을 위해 살겠습니다.

이와 같이 고백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계시록 19장 9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계시록 19장 9절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御使いは私に、「子羊の婚宴に招かれている者たちは幸いだ、と書き記しなさい」と言い、また「これらは神の真実なことばである」と言った。

우리 모두 이제 썩어져 가는 옛 사람, 옛 가치관을 벗어 버리고 주님 중심의 새로운 가치관 새 사람을 입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자로 거듭나서, 마지막 날에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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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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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9회 믿음 성장의 출발점
2019년 9월 2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5장 12절~14절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ヘブル人への手紙 5章 12節~14節
“あなたがたは、年数 からすれば教師になっ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にもかかわらず、神が告げたことばの初歩を、もう一度だれかに教えてもらう必要があります。あなたがたは固い食物ではなく、乳が必要になっています。
乳を飲んでいる者はみな、義の教えに通じてはいません。幼子なのです。
固い食物は、善と悪を見分ける感覚を経験によって訓練された大人のも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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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믿음 성장의 출발점” 信仰成長の出発点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인생은 어떻게 됩니까. 만사형통? 혹시 우리 이웃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인생에 전혀 어려움이 없게 되고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100% 다 이루어진다. 이렇게 전하신 적은 없으십니까.

실제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정말로 모든 것이 만사형통, 우리가 원하는 대로 100% 다 이루어졌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어려운 일도 있고, 때로는 괴로울 때도 있지요.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대부분 믿음이 있으신 분들은 기도를 할 것입니다. 사업에 문제가 있을 때, 진로에 문제가 있을 때, 인간관계나 건강상의 문제가 있을 때 우리는 주님께 기도를 드리지요.

기도를 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냥 기도를 드리는 일이 착한 일이기 때문에요? 잘 모르겠지만 왠지 마음이 편해져서요?

어떠한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도를 드리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이지요. 제가 지금 이러이러한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이러이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해결해주세요. 이 어려움을, 이 고통을 제게서 물리쳐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기도를 드리는 이유는 단순히 그와 같은 문제가 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께 기도를 드리면, 주님께서는 응답을 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와 같은 믿음을 갖고 기도를 드리면 어떻습니까.

내가 드린 기도에 대해서 응답을 해주셨어요. 어려움이 있었는데 기도를 드렸더니 어려움이 해소되었어요. 건강이 회복되었어요. 문제가 해결 되었어요. 이렇게 된다면 정말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감사와 찬송이 넘쳐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도를 해도 자신이 원하는 응답을 받지 못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한국에서 옛날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쑤시개로 코끼리를 죽이는 세 가지 방법이라는 말씀을 혹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작은 이쑤시개로 큰 코끼리를 죽이는 방법, 생각만 해도 어려울 것 같지만, 그 방법이 한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나 있다고 하니 놀랍지 않습니까.

오늘은 이 방법만 알고 돌아가도 남는 장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이쑤시개로 코끼리를 죽이는 첫 번째 방법, 그것은 이쑤시개로 코끼리를 콕 하고 한 번 찌르고 죽을 때까지 기다린다.

두 번째 방법은, 코끼리가 죽기 바로 직전에 딱 한 번 찌른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죽을 때까지 찌른다.

예, 정말 뭐 추억의 우스개 소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해서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뭐 응답을 언제 해주실지 모르는 상황에서, 응답해주시기 직전에 딱 한 번 기도를 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그러면 기도를 딱 한 번 하고 이제 응답해주실 때까지 기다려요?

제가 생각하기에 대체적으로 믿음이 좋은 분들을 보면 주로 세 번째 방법을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게 뭐겠습니까. 그렇죠. 응답을 해주실 때까지 기도를 하는 것이죠. 우리 한국 사람들을 보면 기도를 얼마나 열심히 하십니까. 매주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 외에도 철야기도 수요예배, 새벽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무슨 다니엘 기도라는 것도 있지요? 그리고 또 그것도 모자라서 기도원에 올라가서 금식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금식도 3일 금식, 5일 금식, 뭐 경우에 따라서는 40일 금식을 하시는 분들도 계시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저도 예전에 금식도 해보고 그랬지요. 괜히 또 며칠까지 금식을 해 보았다고 하고 말씀을 드리면 교만도 될 것 같아서 자세한 말씀을 드리지는 않겠습니다만, 40일까지는 한참 못 미치더라도 그래도 금식기도는 몇 번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 참 배가 많이 고프더라구요.

자. 좋아요. 그렇게 기도를 열심히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100%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응답을 받을 수 있다고는 말하기 어렵겠지요.

그러면 그렇게 열심히 기도를 드렸는데, 금식기도도 해가면서 새벽기도 철야기도까지 드렸는데, 그래도 응답을 안 해주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상당히 쿨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좋았습니다만, 그의 행동이 모두 바람직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결점이 바로 밧세바와의 일이었지요.

밧세바는 다윗의 충신 우리아의 아내였습니다. 말하자면 자기 부하의 아내였던 것이지요. 우리아는 지금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었습니다.


사무엘하 11장에 의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 왕은 그 자기 부하의 아내인 밧세바와 잠자리를 함께 합니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하여 밧세바는 아이를 갖게 되었지요. 이를 숨기기 위해 다윗 왕은 한 계책을 생각해냅니다. 전쟁터에 나가 있는 우리아를 잠시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인 것이지요. 다윗 생각에는 그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가면 아내와 잠자리를 함께 할 것이요, 그렇게 되면 밧세바가 가진 아기는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 우리아의 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당시는 지금처럼 무슨 DNA 검사가 있는 것도 아니니, 어쩌면 성공할 수도 있는 작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기껏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였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우리아가 집으로 가지 않고, 바깥에서 자기 부하들과 함께 잠을 잡니다. 그래서 답답해진 다윗이 우리아를 불러서, 아니, 넌 왜 집에 안 들어가고 바깥에서 네 부하들과 잠을 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다윗의 부하 우리아 장군의 말이 기가 막힙니다.

사무엘하 11장 11절
“우리아가 다윗에게 아뢰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 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기로 왕의 살아 계심과 왕의 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나이다 하니라”

ウリヤはダビデに言った。「神の箱も、イスラエルも、ユダも仮庵 に住み、私の主人ヨアブも、私の主人の家来たちも戦場で野営しています。それなのに、私が家に帰り、食べたり飲んだりして、妻と寝るという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あなたの前に、あなたのたましいの前に誓います。私は決してそのようなことをいたしません。」


지금 우리 군대가 전쟁 중에 있고, 내 상관과 부하가 거기서 목숨을 건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어찌 내가 혼자 집에 가서 먹고 마시고, 편안한 잠자리를 잘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이처럼 놀라운 충신을 보았습니까.

자, 이 말을 들은 다윗. 자신의 작전이 실패한 줄 알게 된 다윗은, 이제 자신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 전쟁터에서 우리아를 일부러 죽이라고 명령을 합니다. 참 나쁜 사람이에요.

이 작전은 안타깝게도 성공을 합니다. 우리아는 아군이 일부러 쳐놓은 덫에 걸리게 되어 마침내 전쟁터에서 전사를 하게 됩니다. 그 이후 다윗 왕은 밧세바를 정식으로 아내로 맞이하지요.

하지만 이 일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이 일에 대하여 다윗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이번에 태어날 아이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여기서 조금 길지만 잠시 사무엘하 12장 15절~23절까지를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사무엘하 12장 15절~23절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그 곁에 서서 다윗을 땅에서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이레 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그러나 다윗의 신하들이 아이가 죽은 것을 왕에게 아뢰기를 두려워하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아이가 살았을 때에 우리가 그에게 말하여도 왕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셨나니 어떻게 그 아이가 죽은 것을 그에게 아뢸 수 있으랴 왕이 상심하시리로다 함이라

다윗이 그의 신하들이 서로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죽은 줄을 다윗이 깨닫고 그의 신하들에게 묻되 아이가 죽었느냐 하니 대답하되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그를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이 일이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第二サムエル記 12章 15節~23節
ナタンは自分の家へ帰って行った。主は、ウリヤの妻がダビデに産んだ子を打たれたので、その子は病気になった。
ダビデはその子のために神に願い求めた。ダビデは断食をして引きこもり、一晩中、地に伏(ふ)していた。
彼の家の長老たちは彼のそばに立って、彼を地から起こそうとしたが、ダビデは起きようともせず、彼らと一緒に食事をとろうともしなかった。
七日目 にその子は死んだ。ダビデの家来たちは、その子が死んだことをダビデに告げるのを恐れた。彼らは、「聞きなさい。王はあの子が生きているとき、われわれが話しても、言うことを聞いてくださらなかった。どうして、あの子どもが死んだことを王に言えるだろうか。王は何か悪いことをされるかもしれない」と言ったのである。
ダビデは、家来たちが小声で話し合っているのを見て、子が死んだことを悟った。ダビデは家来たちに言った。「あの子は死んだのか。」彼らは言った。「亡くなられました。」
ダビデは地から起き上がり、からだを洗って身に油を塗り、衣を替えて主の家に入り、礼拝をした。そして自分の家に帰り、食事の用意をさせて食事をとった。
家来たちは彼に言った。「あなたのなさったこのことは、いったいどういうことですか。お子様が生きておられるときは断食をして泣かれたのに、お子様が亡くなられると、起き上がり食事をされるとは。」
ダビデは言った。「あの子がまだ生きているときに私が断食をして泣いたのは、もしかすると主が私をあわれんでくださり、あの子が生きるかもしれない、と思ったからだ。
しかし今、あの子は死んでしまった。私はなぜ、断食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あの子をもう一度、呼び戻せるだろうか。私があの子のところに行くことはあっても、あの子は私のところに戻っては 来ない。」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 아이를 살려달라고 기도를 드립니다. 기도 내용은 우리도 짐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에게는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그 아이를 살려주시옵소서……하고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7일 동안 금식하면서 밤새도록 기도를 드렸는데, 결국 아이가 죽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이럴 때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제가 이렇게 간절히 금식까지 해가면서 철야까지 해가면서 기도를 드렸는데, 왜 하나님은 내 기도를 안 들어주십니까.

하나님이 계시긴 한 걸까? 하나님은 안 계실지도 몰라. 성경? 아이구, 이거 다 거짓말이야……이렇게 낙담을 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은 어땠다고 합니까. 그래. 내가 이렇게 기도를 드렸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들어주지 않으셨어. 그러면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여야지…… 그러고는 툭툭 털고 일어나서 밥을 먹었다는 것이지요.

다윗은 참 강했습니다. 무엇이 강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이 강했습니다.

그 아이가 태어났다면 어땠겠습니까. 그 아이는 아직 다윗이 정식으로 아내로 맞이하기 전, 우리아의 아내일 때 갖게 된 아이입니다. 아무리 비밀로 한다 하더라도 궁에서는 왕이 충신 우리아의 아내와 부정한 관계를 맺었고, 그 결과 갖게 된 아이라는 사실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태어나서 자랐다고 한다면, 다윗이나 밧세바에게는 물론이거니와 그 아이에게 있어서도 대단히 불행한 삶이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물론 이 부분은 제 추측입니다만, 결국 다윗의 그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죽고 말았는데, 다윗은 이를 너무나도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던 다윗은 밧세바를 통하여, 마침내 솔로몬이라는 자신의 진정한 후계자를 얻게 되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에 바울은 어떻습니까.

고린도후서 12장 7절~10절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第二コリント人への手紙 12章 7節~10節
“その啓示のすばらしさのため高慢にならないように、私は肉体に一つのとげを与えられました。それは私が高慢にならないように、私を打つためのサタンの使いです。
この使いについて、私から去らせてくださるようにと、私は三度、主に願いました。
しかし主は、「わたしの恵みはあなたに十分である。わたしの力は弱さのうちに完全に現れるからである」と言われました。ですから私は、キリストの力 が私をおおうために、むしろ大いに喜んで自分の弱さを誇りましょう。
ですから私は、キリストのゆえに、弱さ、侮辱、苦悩、迫害、困難を喜んでいます。というのは、私が弱いときにこそ、私は強いからです。”

이 기록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정확히 어떠한 질병인지는 모르지만 당시 바울은 어떤 건강상의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래서 이를 치료해달라고 기도를 세 번이나 드렸더니, 주님이 이를 거절하셨는데, 오히려 이로 인하여 크게 기뻐했다고 합니다.

이 또한 참으로 놀라운 믿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습은 어떻습니까.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는데, 정말 다른 건 몰라도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주셔야 했는데, 아이구 기도를 들여주지 않으셨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때로는 낙담을 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무슨, 내 기도 하나도 들어주지 않으면서 뭐가 전능하다는 거야. 내 기도가 혹시 안 들리신 것 아닌가? 좀 더 큰 소리로 기도를 드렸어야 하나? 뭐 그러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다 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어떻게 기록합니까.


이사야 59장 1절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イザヤ書 59章 1節
見よ。主の手が短くて救えないのではない。その耳が遠くて聞こえないのではない。

하나님은 모든 기도를 다 듣고 계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기도를 응답해주지 않으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한탄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고린도전서 3장 1절~2절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兄弟たち。私はあなたがたに、御霊に属する人に対するようには語ることができずに、肉に属する人、キリストにある幼子に対するように語りました。
私はあなたがたには乳を飲ませ、固い食物を与えませんでした。あなたがたには、まだ無理だったからです。実は、今でもまだ無理なのです。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합니까. 내가 너희들을 믿음 안에서 어른으로 대할 수가 없어. 너는 아직 어린애야. 너는 아직 밥을 먹을 수가 없고 젖먹이 밖에는 안 돼……. 이러는 것이지요.


여러분, 아이들이 누워서, 이거 줘. 저거 줘…….라고 하면 어떻습니까. 물론 갓난아이들은 충분히 그럴만하지요. 아기들의 발바닥을 보신 적 있으신가요? 어른 들의 발바닥은 평평하지만 갓난아기의 발바닥은 볼록합니다. 그리고 근육도 제대로 발달하지 못해서 걸어 다닐래야 걸어 다닐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것도 갖다 주고 저것도 갖다 줍니다. 혼자서 걸어 다닐 수도 없으니, 업어주기도 하고 안아 주기도 하지요.

그리고 어른들의 배를 엑스레이로 찍어보면 위장이 있지요. 이렇게 볼록한 위장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형태로 되어 있으니까 음식을 먹으면 그 공간에서 잠시 음식물을 머물게 해서 소화액으로 부드럽게 한 후에 내려 보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갓난아기의 배를 엑스레이로 찍어보면 위장이 없어요. 그냥 소장이나 대장처럼 한 줄기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단단한 것을 먹이면, 아직 이빨도 제대로 없으니까 꼭꼭 씹을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위장도 그렇게 생겼기 때문에 시간을 들여서 부드럽게 할 수가 없으니까 배탈이 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냐 하면, 처음에는 젖을 먹이거나 하고, 조금 지난다 하더라도 부드러운 이유식을 먹여야 하는 것입니다.

부드러운 음식을 먹으면 속은 편하지요. 굳이 힘들여서 소화를 시킬 필요도 없으니 얼마나 편합니까. 하지만 언제까지나 젖만 먹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내장이 약해집니다. 이제 젖이나 이유식이 아니라 제대로 된 단단한 음식을 먹고, 영양분도 충분히 섭취해야 하고 하는데도, 언제까지나 젖이나 죽만 먹고 있다거나, 아니면 이제 근육도 생기고 얼마든지 걸을 수 있을 만큼 성장했는데, 일어설 생각도 안 하고, 여전히 엄마, 이것 줘, 저것 줘……그리고 업혀 다니려고 한다는 생각을 해보십시오.

이렇게 되면 아무리 건강한 몸으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올바로 성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이거 주세요, 하면 이걸 주시고, 주님, 저걸 주세요, 하면 저걸 주신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순간적으로는 편하고 감사하게 느껴질 지는 몰라도 그런 상태로라면 믿음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걸음마 단계의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 분들에게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다시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5장 12절~14절
“12.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ヘブル人への手紙 5章 12節~14節
あなたがたは、年数 からすれば教師になっ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にもかかわらず、神が告げたことばの初歩を、もう一度だれかに教えてもらう必要があります。あなたがたは固い食物ではなく、乳が必要になっています。
乳を飲んでいる者はみな、義の教えに通じてはいません。幼子なのです。
固い食物は、善と悪を見分ける感覚を経験によって訓練された大人のものです。

이봐. 니가 지금 교회 다닌 지가 얼마나 됐어. 이제 단단한 음식도 먹고 그러면서 교회도 섬기고 이웃도 섬기고 그래야 할 거 아니야. 그런데 아직까지 젖먹이 아이처럼 나약한 믿음을 갖고 있으면 어떡하니……하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믿음의 성장은 언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기도의 응답을 받았을 때요? 아니요. 오히려 기도 응답을 받지 못했을 때부터 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때가 바로 믿음 성장에 있어서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여러분, 우리가 주님 안에서 얼마나 귀한 존재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를 흘리시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해주셨던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귀하게 여겨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치욕을 당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해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기도, 그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원하시는 우리의 마음을 주님은 분명히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물리치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랑해주시는 우리를 위해 더욱 더 큰 축복이 예비되어 있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第一ヨハネの手紙 4章 19節
私たちは愛しています。神がまず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

우리 모두 우리가 사랑하기보다도 먼저 우리를 사랑해주신 예수님을 믿고, 우리가 사랑하는 크기보다도 훨씬 더 큰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예수님을 믿고, 그 믿음이 성장하는 출발점, 믿음 성장의 갈림길에 섰을 때, 좌절하거나 낙담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큰 신뢰와 감사를 주님께 돌림으로 말미암아, 위대한 믿음의 용사로 성장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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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8회 말씀과 기도
2019년 9월 1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
“쉬지 말고 기도하라”

第一テサロニケ人への手紙 5章 17節
“絶えず祈り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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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말씀과 기도” みことばと祈り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세 가지가 중요하다는 말씀을 항상 드려왔습니다. 그것은 믿음과 말씀과 행함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이라고 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이신 성경, 마지막으로 말씀에 입각한 행함이 있어야지만 올바른 신앙으로서 굳게 설 수 있으며, 여기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게 된다면 그 신앙은 올바로 설 수가 없게 됩니다.

이는 마치 비행기에 달린 세 개의 날개와도 같습니다. 비행기가 날다가 엔진 몇 개가 고장이 나더라도 갑자기 떨어지는 일은 없다고 합니다. 제트기 같은 경우에는 엔진이 4개 달렸는데, 그 중에서 3개가 고장이 나더라도, 나머지 하나 만으로 무사히 착륙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른쪽, 왼쪽, 그리고 뒤에 달린 날개 중에서 하나라도 잘려나갔다고 생각해보세요.

만에 하나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 비행기가 아무리 크고 안전하게 설계되었다 하더라도 금새 균형을 잃고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지요.

이처럼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믿음과 말씀과 행함은 무엇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절대적인 3가지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기도’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지요. 흔히들 기도는 호흡이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믿음’과 ‘말씀’과 ‘행함’ 중 어디에 들어갈까요.


많은 분들이 ‘기도’라고 하는 것을 ‘믿음’ 안에 들어간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이 논리는 꽤 그럴 듯합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기도를 하는 것이요, 주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기도를 하는 것이요, 주님께서 기도에 응답을 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곧 믿음이다……라고 하는 공식에 문제가 없을까요?

요한복음 14장 14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何かをわたしに求めるなら、わたしがそれをしてあげます。

실제로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셨을 때 기도를 많이 하셨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이처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하라는 것 아니겠어요?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리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기도가 믿음이다>라고 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하루에 열 번 기도하는 사람이 하루에 한 번 기도하는 사람보다 믿음이 많은 것이요, 하루에 1시간 2시간 기도 하는 사람이 하루에 1분 기도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일까요? 성경에 보면 ‘기도를 많이 하는 자나 기도를 오래 하는 자는 믿음이 많으니라’ 이런 기록이 있나요? 아니에요. 없습니다. 즉 기도라고 하는 것을 하루에 몇 번이나 하느냐, 얼마 동안을 하느냐가 곧 믿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기도가 말씀이라고 한다면 기도를 많이 하게 되면 말씀을 알게 된다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가요? 만약에 기도를 많이 하기만 하면 말씀을 알게 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 없다는 말이 됩니까. 그렇습니다. 이 두꺼운 성경책은 필요가 없다는 말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굳이 필요하다고 하면, 기도를 안 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모를 테니까, 이 성경은 그렇다면 기도를 안 하는 사람들만을 위한 책이라는 말이 됩니다. 이게 사실인가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성경을 조금 아는 분께서 이러실지도 모르지요. 아니, 예수님도 성령님이 오시면 성경을 알게 해주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냐, 하고 말이에요.

물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하셨지요.

요한복음 14장 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しかし、助け主、すなわち、父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お遣わしになる聖霊は、あなたがたにすべてのことを教え、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話したすべてのことを思い起こさせてくださいます。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하게 되면 성경을 알게 된다고 하는 이 주장에는 두 가지 오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당시는 성경이 완성되기 전이었다는 점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하루 이틀도 아닌 3년이나 같이 다니긴 했지만 그 때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들을 모두 다 적어놓지는 못했지요. 무슨 스마트폰이 있어서 녹음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한 지금처럼 종이나 펜이 쉽게 누구나 쓸 수 있었던 시대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기록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능력이 필요했었다는 것이지요. 바로 그렇게 해서 이 성경은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이 성경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에게는 완성된 성경이 있습니다. 이제 꼭 기도를 해야지만 예수님 말씀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누구든지 성경책을 펴기만 하면 주님의 말씀을 들으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음으로, 기도를 하면 성경을 알게 된다는 주장의 두 번째 오류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실 때 “너희가 모르던 것을 알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라고 하셨던 것이지요.

즉, 이 말씀은, 내가 예전에 했던 말을 너희가 들었지만 지금을 잊어버렸겠지. 그러나 성령님의 능력으로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해줄 것이다……라는 말씀이지, “전혀 듣도 보지도 못한 말씀들이 떠오르게 하리라”라고 하신 말씀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그냥 기도만 하는 분들은 가끔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기도를 하니까 이러이러한 응답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하라는 것이에요. 이 말을 믿으라는 거예요.

일부 신흥종교집단을 보면 대체적으로 이 방법을 많이 씁니다. 내가 어디서 기도를 하니까 천사를 만났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천사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는 것이지요. 그게 이러이러한 것인데, 이걸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믿으시겠어요? 안 믿으시겠어요..


조금 더 극단적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앞에 갑자기 환하게 빛나는 천사가 나타났어요. 그러면서 자기는 하나님이 보낸 천사래요. 그리고 이제부터 자기가 하는 말이 하나님 말씀이라면서 무슨 말을 전해줘요. 그런데 그 내용은 지금까지 내가 알던 성경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에요. 그러면 여러분께서는 믿겠습니까 안 믿겠습니까.

망설여지나요? 하지만 망설일 필요가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4절~15절
“14.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しかし、驚くには及びません。サタンでさえ光の御使いに変装します。
ですから、サタンのしもべどもが義のしもべに変装したとしても、大したことではありません。彼らの最後は、その行いにふさわしいものとなるでしょう。

갈라디아서 1장 7절~8절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ほかの福音といっても、もう一つ別に福音があ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あなたがたを動揺させて、キリストの福音を変えてしまおうとする者たちがいるだけです。
しかし、私たちであれ天の御使いであれ、もし私たちがあなたがたに宣べ伝えた福音に反することを、福音として宣べ伝えるなら、そのような者はのろわれるべきです。


이와 같은 성경 말씀을 알았더라면, 아무리 빛의 천사처럼 보이는 것이 성경이 아닌 다른 것을 전한다면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이렇게 적혀있는데도 불구하고, 성경 외의 것들을 믿으라고 합니다. 천사한테서 받았대요. 그러니까 자기 말을 믿으라고 합니다. 성경이 아닌 자기가 쓴 책을 믿으라고 합니다.

이러한 단순한 말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넘어가는지 모릅니다. 왜 그와 같은 말에 넘어갑니까. 그것은 성경을 우리가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어디 그 뿐인가요. 자기가 선지자래요. 자기가 재림예수래요. 그러면서 자기를 믿으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2천년 전에 왔을 때 아무도 안 알아주었던 것처럼, 자기도 사실은 재림 예수인데 이 세상에서 아무도 안 알아준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그 말을 듣고, 어떻게 해야 해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못 알아봤습니다. 하고 그 사람을 믿어야 합니까.

마태복음 11장 13절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すべての預言者たちと律法が預言したのは、ヨハネの時まででした。


마태복음 24장 23절~27절
“23.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4.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25.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26.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7.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そのとき、だれかが『見よ、ここにキリストがいる』とか『そこにいる』とか言っても、信じてはいけません。
偽キリストたち、偽預言者たちが現れて、できれば選ばれた者たちをさえ惑わそうと、大きなしるしや不思議を行います。
いいですか。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前もって話しました。
ですから、たとえだれかが『見よ、キリストは荒野にいる』と言っても、出て行ってはいけません。『見よ、奥の部屋にいる』と言っても、信じてはいけません。
人の子の到来は、稲妻が東から出て西にひらめくのと同じようにして実現するのです。

마태복음 24장 30절
“30.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そのとき、人の子のしるしが天に現れます。そのとき、地のすべての部族は胸をたたいて悲しみ、人の子が天の雲のうちに、偉大な力 と栄光とともに来 るのを見るのです。


요한계시록 1장 7절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見よ、その方は雲とともに来 られる。すべての目が彼を見る。彼を突き刺した者たちさえも。地のすべての部族は彼のゆえに胸をたたいて悲しむ。しかり、アーメン。

성경에서 장차 올 선지자에 대해서는 세례 요한이 끝입니다. 그 후에는 성경에서 예언한 대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 이후에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성령님께서 임해주셨습니다. 그 다음에 무슨 선지자를 보내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성경 예언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예수님의 재림 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천년 전에는 정말 아무도 모르게 누추한 모습으로 오셨지만, 재림하실 때에는 심판의 왕으로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각 사람도 볼 것이요 그를 찌른 자들도 보겠다는 말씀은, 장차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한테 만이 아니라 안 믿는 사람들, 예수님을 학대한 사람들조차도 그 오시는 모습을 볼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만약에 “내가 재림 예수다”라고 한다면, 그 분한테는 이러시면 됩니다. 딱 한마디 “저는 당신이 구름을 타고 오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라고만 말씀 드리면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그게 무슨 소리냐”라고 물으면, 그야말로 그 사람은 성경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라는 게 들통나는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가 말씀을 알아야 하나님께서도 떠올리게 해주실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말씀을 읽지도 않고 말씀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크게 잘못될 수도 있는, 그와 같은 위험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들은 어떤 사람을 제일 잘 가지고 놀겠습니까. 바로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을 가지고 놉니다.

지금은 조금 잠잠합니다만, 이제 얼마 지나면 그게 고개를 들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시한부 종말론이지요. 1980년대 후반에 서서히 시작되더니 1992년 10월 28일에 세상이 종말하고 휴거가 일어난다고 하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에는 300개 이상의 교회가 있었고 성도 수도 2만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주장했던 1992년 10월 28일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교회에 모여서,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밤 12시가 되기까지 열광하면서 찬양도 하고 기도도 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에 여기에 심취한 신도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다 팔아서 교회에 바쳤습니다. 그렇잖아요. 이제 세상이 멸망하고 하늘로 올림을 받는다는데, 조금이라도 더 빨리 올림을 받으려면 헌금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나보죠. 그 뿐만이 아니라 직장도 그만두었습니다. 아니, 세상이 망하는데 지금 직장이 문제예요? 그리고 가정도 버렸습니다. 형제들도 버렸습니다. 그리고 또 인터넷에 찾아 보니까 3년 동안 아이를 갖기를 원했던 여성이, 간신히 임신을 했는데, 휴거를 할 때에는 임신하면 안 된다고 믿고는 그렇게 소망했던 아이를 임신 7개월 만에 중절했다고 합니다. 기가 막힌 노릇이지요.

여러분, 마귀들이 이런 모습을 보았을 때 얼마나 깔깔대고 좋아했겠습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이와 같은 유치한 주장에 그 많은 사람들이 넘어갔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경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24장 36절
“36.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ただし、その日、その時がいつなのかは、だれも知りません。天の御使いたちも子も知りません。ただ父だけが知っておられます。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 하늘의 천사들은 물론이고 예수님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무엇입니까. 예수님도 알지 못하는 것을 자기들은 안다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이 말은 성경보다도 예수님의 말씀보다도 자기들의 말이 맞다고 하는 소리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는 눈을 감고 하는 것이지만, 기도만 한다고 성경을 알게 되지는 않습니다. 눈을 뜨고 성경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우리 마음 안에 새겨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기도는 행함인 것입니다. 실천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기도라고 하는 것은 금식하면서 어두컴컴한 성전에서 무릎 꿇고 발이 저린 것을 참아가며 분위기 잡으면서 하는 것만이 기도가 아닙니다.

잠시 화제를 바꾸어보도록 하겠습니다.


2010년대에 보면 일본에 대조되는 두 사람의 학자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2012년에 iPS 세포에 대한 연구 성과로 노벨 의학생리학상을 수상한 야마나카 신야 교수였고, 또 한 사람은 2014년에 STAP 세포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던 한 여성 과학자였습니다.

보통 노벨상이라고 하면 젊었을 때 어떤 연구를 발표하고 난 다음에는, 오랜 세월 동안 그것이 맞는지 여부의 확인 과정을 거치고 난 다음, 다 늙어서 받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만, 이 야마나카 신야 교수가 발표한 iPS 세포 같은 경우는 어땠냐 하면, 이 교수님의 논문대로 하나하나 해보니까 누구나 다 iPS 세포를 만들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건 뭐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가 없어요. 그랬기 때문에 세계 여기저기에서 노벨상 심사위원들한테 이 교수에 대한 추천서가 날아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분이 노벨상을 받은 나이가 2012년 당시 불과 50세였다는 것이지요. 참 놀라운 일입니다.

하지만 2014년에 그와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더욱 획기적인 STAP 세포를 개발했다고 하는 어떤 일본 여성 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논문은 세계 유력 학술지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세계의 많은 학자들이 거기에 실린 논문대로 아무리 시도를 해보아도 그 STAP 세포를 만들 수가 없는 거예요.

조사결과 그 사람의 논문에는 조작의혹이 발견됐고 그 논문만이 아니라 박사학위 논문도 조작이 의심된다는 주장이 나와서, 결국 그 논문은 물론이고 박사학위까지도 취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 때까지 몸담고 있었던 대학에서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때까지 평생을 걸쳐 쌓아왔던 명예도 학위도 직장도 한 순간에 모두를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기도는 행함입니다. 실천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을 위한 행함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과학자들에게 있어서는 논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성경을 입증하기 위한 실천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을 입증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입증하는 것이요, 예수님을 입증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입증한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말씀을 이해하고 난 다음에 여기에 입각한 기도를 드려야 주님을 온전히 드러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기도를 통해 성경을 입증해왔습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예수님을 검증해왔습니다. 만약에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나타내지 못했다면 이 두꺼운 성경은 먼 옛날에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몇 천 년이라는 세월 동안 사라지지 않고 지금도 전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읽혀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성경 말씀대로 기도를 하면 누구에게나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주님의 역사가 나타남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검증되고 예수님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わたしはすぐに来る。あなたは、自分の冠をだれにも奪われないように、持っているものをしっかり保ちなさい。


요한계시록 22장 18절~19절
“18.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私は、この書の預言のことばを聞くすべての者に証しする。もし、だれかがこれにつけ加えるなら、神がその者に、この書に書かれている災害を加えられる。
また、もし、だれかがこの預言の書のことばから何かを取り除くなら、神は、この書に書かれているいのちの木と聖なる都から、その者の受ける分を取り除かれる。

우리가 말씀을 올바로 알아야 주님을 올바로 나타낼 수가 있고, 주님을 올바로 나타냈을 때에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것이지, 말씀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이를 왜곡하거나 자기 멋대로 조작하거나 하면, 앞서 말씀 드린 그 불행한 과학자처럼 그야말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생명의 면류관을 빼앗기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
“쉬지 말고 기도하라”

第一テサロニケ人への手紙 5章17節
絶えず祈りなさい。


우리는 어느 한 순간만 기도를 드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는 무슨 뜻이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주님께 기도를 드리라는 것,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쉬지 말고 주님을 나타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성경의 명령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세상에 나타내고 예수님을 세상에 나타내는 놀라운 실천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일생을 통해서 주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갖고, 주님의 온전한 말씀이신 이 성경을 마음에 새기고, 기도라고 하는 행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주님을 온 세상에 나타내고 주님을 온 세상, 땅끝까지 전파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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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7회 열매를 맺는 삶
2019년 9월 8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ヨハネの福音書 15章 5節
"わたしはぶどうの木、あなたがたは枝です。人がわたしにとどまり、わたしもその人にとどまっているなら、その人は多くの実を結びます。わたしを離れては、あなたがたは何もす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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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열매를 맺는 삶” 実を結ぶ人生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그 나뭇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고로 나무들이 자라면서 잎사귀가 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수분과 영양분을 섭취하고 태양열을 받으면서 광합성을 하며 성장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때가 되면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 같이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무리 입사귀가 많고, 아무리 크기가 크고 높다 하더라도 그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결국 그 나무는 번성하지 못하고 그 한 그루 만으로 멸종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삶의 가치라고 한다는 것은 내가 내 삶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이 큰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죽고 난 다음에는 그 회사도 사라지고 그 사람이 했던 사업도 완전히 문을 닫았다고 한다면, 아무리 그 사람이 생전에 돈을 많이 벌고 큰 회사를 세웠었다 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고 맙니다.

이는 돈도 그렇고 명예도 그렇죠. 어떤 학자가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를 해서, 평생을 걸쳐 논문도 쓰고 그랬는데, 그 사람이 죽고 난 다음에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또는 어떤 작가가 살아 있을 때에는 그가 쓴 책도 많이 팔리고 사람들로부터 선생님 소리도 듣기도 하고 상도 많이 받았는데, 조금 지나니까 아무도 그 사람의 책을 읽지도 않고, 그 사람 자체도 잊혀지고 말았다면, 그 사람이 살아간 인생의 의미는 그리 크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진정한 가치를 갖기 위해서는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 인생에 있어서의 열매란 과연 무엇일까요. 세상에서는 이른바 대를 잇는다고 합니다. 이는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였지요. 아브라함도 자신의 대를 이을 자식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어렵게 얻은 아이가 바로 이삭이지요.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가 되어서야 얻게 되었습니다.

이는 요즘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왕 같은 경우를 보면 후사 문제가 생기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꼭 자식이 있어야지만 대를 잇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큰 회사 같았으면 친자식이 아니라 하더라도 후계자를 세워서 그 사업을 계속해 나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기서부터는 조금 더 구체적인 내용으로 한 번 살펴볼까 합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열매란 정말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에게 아들이나 딸이 있다면, 내 육신적인 유전자를 남길 수가 있었다면, 그것으로 열매를 맺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 인생의 목표는 오직 좋은 자식을 낳는 것에 집중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좋은 열매 맺는 것이 진정한 가치 있는 삶이고, 좋은 열매라는 것이 훌륭한 자식이라고 한다면, 진정한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훌륭한 자식을 갖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 되지 않겠습니까.

성경에서는 어떨까요. 성경에 보면 베드로는 결혼을 해서 아내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어땠습니까. 성경에는 그에게 아내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그렇다고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 명확한 기록 또한 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들에게는 아들이나 딸이 있었는지는 기록이 없지요.

그렇다면 훌륭한 자식을 갖는 것이 진정한 가치 있는 삶이라고 한다면, 베드로와 바울은 열매 없는 삶, 가치 없는 삶을 살았다는 말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가요? 아니요. 어느 누구도 그들이 열매 없는 삶, 가치 없는 삶을 살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훨씬 더 많은 열매를 맺은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한 번 창세기를 살펴볼까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생물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창세기 1장 21절~22절
“21.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神は、海の巨獣と、水に群がりうごめくすべての生き物を種類ごとに、また翼のあるすべての鳥を種類ごとに創造された。神はそれを良しと見られた。
神はそれらを祝福して、「生めよ。増えよ。海の水に満ちよ。鳥は地の上に増えよ」と仰せられた。

그리고 사람을 창조하시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말씀하셨냐 하면 창세기 1장 27절~28절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28절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神は人をご自身のかたちとして創造された。神のかたちとして人を創造し、男と女に彼らを創造された。
神は彼らを祝福された。神は彼らに仰せられた。「生めよ。増えよ。地に満ちよ。地を従えよ。海の魚、空の鳥、地の上を這うすべての生き物を支配せよ。」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것만이 아니라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만약에 전쟁 같은 상황에서 상관이 부하들에게, 저 땅을 공격해서 점령하라! 이렇게 명령을 했다면, 이는 너희들이 열심히 노력을 해서, 저 땅을 빼앗으라는 말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에게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생물들을 다스리라……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우리더러 땅을 정복할 수 있도록, 생물들을 다스릴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라……라는 말씀아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이는 바로 우리에게 땅을 정복할 수 있는 권세, 그리고 천하의 모든 생물들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다는 뜻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휩쓸려 가는 삶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주님의 명령에 따라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참 감사한 일이지요.

신약이라고 하는 것, 이는 단순히 막연한 기준이 아니라 또 하나의 천지창조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

그리고 요한복음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初めにことばがあった。ことばは神とともにあった。ことばは神であった。

참 너무나도 멋진 천지창조 아닙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창세기 때의 타락을 바로잡기 위해 오셨다는 내용도 성경에 기록합니다.

로마서 5장 19절
“19.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すなわち、ちょうど一人の人の不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罪人とされたのと同様に、一人の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義人とされるのです。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타락하게 되었으나, 예수님 한 분이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처럼 신약은 또 하나의 시작, 새로운 천지창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생물들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와 똑같은 말씀이 신약에도 나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어디인가 하면 마태복음 28장 18절~20절과 마가복음 16장 15절~16절 말씀입니다.

먼저 마태복음부터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20절
“18.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イエスは近づいて来て、彼らにこう言われた。「わたしには天においても地においても、すべての権威が与えられています。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行って、あらゆる国の人々を弟子としなさい。父、子、聖霊の名において彼らにバプテスマを授け、
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命じておいた、すべてのことを守るように教えなさい。見よ。わたしは世の終わりまで、いつもあなたがたとともにいます。」

그리고 마가복음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16절
“15.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それから、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福音を宣べ伝えなさい。
信じてバプテスマを受ける者は救われます。しかし、信じない者は罪に定められます。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이른바 예수님의 지상명령 또는 선교 지상명령이라고도 하는 말씀이지요.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그럼 창세기 말씀에 대입을 시켜보면 어떻게 됩니까.

첫째, 온 천하에 다니면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의 제자를 삼는 것이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는 것이다.

둘째, 이는 우리더러 노력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를 능히 할 수 있는 권세를 주셨다.

이렇게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실천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그렇습니다. 베드로나 바울이, 그리고 그 외의 수많은 믿음의 용사들이 이와 같은 삶을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인생은 귀중한 것이요 진정한 가치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삶이야말로 진정한 열매를 맺는 삶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지금 당장 모든 직업을 포기하고 모두가 신학을 공부하고 안수를 받아야만 하는 건가요?

우리는 열매 맺는 삶, 열매 맺는 삶……이라고 하는데, 이 ‘열매’라고 하는 것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과 같이 많은 나무들은 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 잎사귀도 내고 광합성도 하고 성장도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 열매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 열매의 특징이 뭐죠?


물론 먹을 수 있다는 것도 되겠습니다만, 가장 큰 특징은 무엇보다 그 안에 들어있는 씨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열매가 크고 맛이 좋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든 씨가 없다면 번식을 할 수가 없겠지요. 사실 열매를 맛이 좋게 하는 이유는, 새들이나 짐승들이 열매를 먹고는, 그 씨를 널리 퍼뜨리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믿음 안에서 이 땅에 번성하고 이 땅을 정복하는 진정한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떠한 씨를 퍼뜨려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이라고 하는 씨를 퍼뜨려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씨 없는 믿음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교회에서 정치 이야기나 돈 이야기를 합니다. 권력이나 세상 윤리 도덕 이야기를 합니다. 무엇이 사라지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라고 하는 귀한 씨가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집 근처 자전거를 타고 나가면 작은 강이긴 하지만, 그 강가에 자전거 도로가 잘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초여름이 되니까 그 도로 옆에 보면 일대에 풀들이 무성하게 자랐습니다. 정말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 다에 그 풀들이 닿을 정도인데, 가만히 놔두면 길을 아주 덮어버릴 기세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제초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저기서 기계로 그 무성한 풀들을 깎아버립니다. 그러면 그 깎인 풀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 순간은 그래도 푸른 빛이 남아 있습니다. 잘린 풀들은 그대로 거기 놓여있고, 색깔도 그대로니까, 물론 잘려서 이렇게 누워있긴 합니다만, 여전히 흙이나 본래 줄기와는 붙어있긴 하지요. 아니, 붙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며칠 뒤에 가보니까 어떻게 되어 있었겠습니까. 여전히 땅바닥에 놓여 있고 그 풀들의 본래 줄기와 붙어 있긴 했습니다만, 잘려나간 풀들은 완전히 갈색으로 변해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わたしはぶどうの木、あなたがたは枝です。人がわたしにとどまり、わたしもその人にとどまっているなら、その人は多くの実を結びます。わたしを離れては、あなたがたは何もす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す。

교회에는 두 가지 부류의 성도님들이 계신 것 같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라고 하는 포도나무에 꼭 붙어 있는 성도님들. 또 하나는 예수님이라고 하는 포도나무에 꼭 붙어 있는……것처럼 보이는 성도님들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찰 티가 안 나요. 교회에 매주 나오고, 믿음 생활도 뭐 나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한쪽은 정말 꼭 붙어 있는 성도님이요, 다른 한쪽은 정말 꼭 붙어 있는……것처럼 보이는 성도님이라는 것이지요.

겉으로 보면 차이가 별로 안나 보이지만 조금 지나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자전거 도로에 나 있던 풀들처럼, 정말로 줄기에 붙어 있는 풀들은 여전히 푸르지만,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풀들은 얼마 지나자 갈색으로 시들어버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라고 하는 포도나무에 꼭 붙어 있는 사람은 열매를 맺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성장합니다. 내 주변에 예수님의 향기가 넘쳐납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라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점점점점 그 믿음이 식어갑니다. 시들어져 갑니다. 메말라 갑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나와 예수님 사이의 접착제가 말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접착제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이 성경 말씀인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교양을 쌓았다 하더라도, 아무리 세상 책을 많이 읽었다 하더라도 성경말씀이 우리 안에 없다면 이는 예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삶, 그야말로 전도서 기자처럼 헛되어 바람을 잡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진정한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예수님은 주님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앞서 읽어드린 요한복음 1장 1절을 기억하십니까.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初めにことばがあった。ことばは神とともにあった。ことばは神であった。

성경은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기록하십니다.


출애굽기 13장 9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9.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이 네 입에 있게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강하신 손으로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
10.해마다 절기가 되면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これをあなたの手の上のしるしとし、あなたの額の上の記念として、主のおしえがあなたの口にあるようにしなさい。力強 い御手で、主があなたをエジプトから導き出されたからである。

신명기 6장 8절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これをしるしとして自分の手に結び付け、記章として額の上に置きなさい。

신명기 11장 18절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을 너희의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このことばを心とたましいに刻み、それをしるしとして手に結び付け、記章として額の上に置きなさい。

이 말씀 때문에 유대인 남성들이 기도할 때 보면 성경이 적힌 작은 상자를 여기 이마에 묶거나 팔뚝에 칭칭 감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우리도 이렇게 성경을 작게 만들어서 이마에 매고 팔뚝에 칭칭 감아야 제대로 말씀을 지키는 것이 되나요?

머리와 손에 말씀을 달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머리로 하는 생각과 팔로 하는 행동에 있어서, 말씀을 기준으로 하라는 주님의 명령이리고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에서는 사람이 먼저다……라고 하는 말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무엇이 먼저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먼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먼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 말씀이 먼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와 같은 삶이야말로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믿음 안에서의 삶, 진정한 가치 있는 삶이란 바로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 예수님을 전하는 삶, 예수님을 나타내는 삶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이라고 하는 포도나무에 성경말씀으로 꼭 붙어 있는 나뭇가지가 되어서, 예수님이라고 하는 씨를 전파하고 주님의 말씀을 전파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을 통해서, 주님께서 주시는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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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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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6회 우리를 부르신 이유
2019년 9월 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43장 7절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イザヤ書 43章 7節
"わたしの名で呼ばれるすべての者は、わたしの栄光のために、わたしがこれを創造した。これを形造り、また、これを造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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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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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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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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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를 부르신 이유” 私たちを呼ばれた理由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보시도록 찬찬히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 43장 7절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わたしの名で呼ばれるすべての者は、わたしの栄光のために、わたしがこれを創造した。これを形造り、また、これを造った。

오늘 이 본문을 읽으시면, 여러분께서는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신이 받으실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이 뿐만이 아니지요. 오늘 본문과 같은 이사야 43장에서 21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이사야 43장 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わたしのためにわたしが形造ったこの民は、わたしの栄誉を宣べ伝える。

이 백성을 하나님께서 찬송 받기 위해 지으셨다고 하나님 스스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나타내시려는 곳이 여러 군데 나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십니다.

출애굽기 6장 5절~8절
“5.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6.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7.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8.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하셨다 하라”

今わたしは、エジプトが奴隷として仕えさせているイスラエルの子らの嘆きを聞き、わたしの契約を思い起こした。
それゆえ、イスラエルの子らに言え。『わたしは主である。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エジプトの苦役から導き出す。あなたがたを重い労働から救い出し、伸ばされた腕 と大いなるさばきによって贖う。
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取 ってわたしの民と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の神となる。あなたがたは、わたしがあなたがたの神、主であり、あなたがたをエジプトでの苦役から導き出す者であることを知る。
わたしは、アブラハム、イサク、ヤコブに与えると誓ったその地にあなたがたを連れて行き、そこをあなたがたの所有地として与える。わたしは主である。』」

자,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모세에게 하셨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생각해볼 때,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부터 이끌어 내시려고 하신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 일을 이루려고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셨고, 그의 형 아론과 함께 애굽으로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 길은 어떤 길입니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길,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길, 하나님께서 명하여 가라고 하신 길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99%가 아니라 100% 확실한 사실이지요.

그런데 말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좀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출애굽기 7장 3절~6절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7장 3절~6절
“3.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4.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5.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
6.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더라”

わたしはファラオの心を頑なにし、わたしのしるしと不思議をエジプトの地で数多く行う。
しかし、ファラオはあなたがたの言うことを聞き入れない。そこで、わたしはエジプトに手を下し、大いなるさばきによって、わたしの軍団、わたしの民イスラエルの子らをエジプトの地から導き出す。
わたしが手をエジプトの上に伸ばし、イスラエルの子らを彼らのただ中から導き出すとき、エジプトは、わたしが主であることを知る。」
そこでモーセとアロンはそのように行った。主が彼らに命じられたとおりに行った。


이 부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명하여 가라고 하신 길이라면, 그 길이 형통해야 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무슨 애굽에 놀러 간 사람들을 데리고 나오려고 하는 거에요? 아닙니다.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데려 나오려는 것입니다. 당시 노예나 종이라고 한다면 그 주인의 재산이나 마찬가지였지요. 그런데 이를 데리고 나오려고 한다는 것은, 그 재산을 주인한테서 빼앗으려고 하는 것, 마치 무슨 인질로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구출하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시죠.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왕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것, 좀 편하고 신속하게 되야 하는 아니겠습니까.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집트 왕 바로의 마음을 좀 부드럽게 만드셔서, 그래, 모세야. 너희들이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내달라고 한다면 그렇게 하자……뭐 이렇게 일이 술술 풀려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제 말이 이상하세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냐 하면, 출애굽기 7장 3절~4절을 다시 한 번 보세요.


7장 3절~4절
“3.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4.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わたしはファラオの心を頑なにし、わたしのしるしと不思議をエジプトの地で数多く行う。
しかし、ファラオはあなたがたの言うことを聞き入れない。そこで、わたしはエジプトに手を下し、大いなるさばきによって、わたしの軍団、わたしの民イスラエルの子らをエジプトの地から導き出す。

바로의 마음을 순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완악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사이비 점쟁이처럼, 처음에는 잘될 거야 하셨다가, 나중에 잘 안 되니까, 아, 사실 그건 내가 잘 안되게 한 거야…… 이런 식으로 나중에 말씀을 바꾸신 게 아닙니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바로 왕이 이스라엘 민족들을 쉽게 내보내지 않을 거야. 처음부터 너희들 말을 안 들을 거야. 내가 애굽에서 여러 가지 심판을 행한 다음에, 그제서야 내보낼 거야…… 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될 거라고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려고 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스스로 일을 꼬이게 만들겠다고 하시는 거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뭐래요?

다음 구절입니다.


출애굽기 7장 5절
“5.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

わたしが手をエジプトの上に伸ばし、イスラエルの子らを彼らのただ中から導き出すとき、エジプトは、わたしが主であることを知る。」

이 말씀은, 내가 이렇게 일을 일부러 어렵게 만드는 것은 애굽 사람들한테 나를 하나님이라고 알게 하기 위해서다……이와 같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들으면 “할렐루야”가 나옵니까. 아니요. 반대로 하나님께 따지고 싶어지지 않을까 합니다.

제가 모세였다면 이렇게 따졌을 거예요. 아니, 하나님. 지금 장난하십니까. 제가 언제 하나님더러 하나님 아니라고 그랬어요? 거, 괜히 일을 어렵게 만들지 마시고, 그냥 좀 쉽게 쉽게 합시다. 아니, 뭐,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든 말든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괜히 이상하게 일을 꼬이게 하지 마시고, 바로의 마음을 좀 부드럽게 만드셔서 일 좀 잘 풀리게 해주세요.

제 기도가 이상해요? 아니에요. 이상할 것 없습니다. 오히려 너무나도 당연한 기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사사건건이 자신을 드러내려 하시는 것일까. 그래, 좋아요. 애굽 사람들한테 하나님이심을 드러낸다면 그건 그렇다고 칩시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구절이 또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6장 7절
“7.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取 ってわたしの民と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の神となる。あなたがたは、わたしがあなたがたの神、主であり、あなたがたをエジプトでの苦役から導き出す者であることを知る。


지금 전능하신 하나님을 나타낸다는 것이 애굽 사람들한테 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들한테까지도 여호와 하나님을 드러낼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거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그렇지, 너무 자기 자신 만을 내세우려고 하시는 거 아니야? 그런 마음이 충분히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백 보 양보를 해서 적국인 애굽 사람들한테 전지전능하신 만군의 하나님을 나타낸다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왜 이스라엘 민족들한테까지, 그렇게 일을 어렵게 해가면서까지 그와 갈이 하나님 자신을 드러낼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사업을 하시는 사장님 같은 분들을 우리가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반 회사를 비롯해서 비즈니스를 하시는 분들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물론 사회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고 할 수도 있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최종적인 목표는 다를지 몰라도, 일차적으로는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돈을 벌기 위해서지요. 내가 돈을 벌기 위해서 내가 사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뭐 작은 사업체라면 자기 혼자 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직원들을 뽑아서 사업체를 운영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여러분이 사장입니다. 그리고 A와 B, 두 사람의 직원이 있어요. 이 두 사람, 모두 유능합니다. 그런데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A는 자기 만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장님이신 여러분이나 회사 생각을 하지 않아요. 오직 자기 방법대로 자기 생각대로, 자기 이득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B는 회사 생각을 하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사 사장님이신 여러분을 생각하면서 일을 해요. 무슨 일이 있으면 사장님이신 여러분과 의논을 하고 결정을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A와 B, 어느 쪽을 귀하게 쓸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이는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당연히 B지요. 아니, 사장님이신 여러분이 월급을 줘가면서 데리고 있는 직원이, 사장님이신 여러분 생각이나 회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일만 한다면, 그 사람이 아무리 유능해도 회사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운동경기 같은 것도 보세요. 저도 스포츠 같은 것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예를 들어서 야구를 보다면, 개인의 홈런이나 안타 같은 타율이 있지요. 그런데 자신이 속한 팀에 대해서는 자신의 팀이 이기든지 지든지 관심은 없고, 감독의 지시도 무시한 채, 오로지 자신의 기록에만 신경을 쓰는 선수라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선수가 아무리 능력이 탁월하다 하더라도, 정말 그야말로 류현진이나 일본의 이치로, 오오타니 선수 정도 되는 뛰어난 인재라 하더라도, 감독 지시에 따르지 않고, 팀의 승리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결국 팀에 남아 있을 수가 없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장님이에요, 그리고 여러분은 팀 감독이에요. 밤이나 낮이나 자신의 회사를 위해서 노력하고 자신의 팀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연구하고 있는데, 자기 회사의 사장이 누군지도 모르고, 팀 감독이 누군지도 모른다면, 그 사람은 쓸모가 없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신경 쓰지 않더라도, 우리가 인정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스스로 드러내려 하시는 것, 내가 너희들의 하나님이야, 내가 너희들을 만들었고 너희들을 인도하는 하나님이야, 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잘 되게 하기 위해서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글쎄요. 한국이나 일본에서 큰 회사다 라고 하면 어디가 있을까요. 뭐, 한국에는 삼성이 있겠지요. 일본에서는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님 정도 되는 분이라고 생각해보겠습니다.

삼성이나 소프트뱅크 같은 큰 회사의 회장님이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이봐. 내가 회장이야. 회장인 나를 위해서 일을 해주었으면 좋겠어.”

그런 분들이 이런 말씀을 하신다면, 누구한테 할까요? 그렇습니다. 그 회사 직원들한테 이런 말을 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님을 평소부터 존경하는 어떤 분이 있었다고 칩시다. 그 분을 위해서 내가 좀 일을 해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소프트뱅크 본사에 찾아갔습니다. 그런 큰 회사 같은 곳이라면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겠지요. 1층 안내데스크에 말합니다. 손정의 회장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럼 무슨 일이냐고 묻겠지요. 그러면 “아, 제가 평소부터 손 회장님을 존경하고 있었는데, 제가 꼭 손 회장님을 위해서 일을 하고 싶습니다” 라고 하면, 그 쪽에서 뭐라고 할까요? 아, 그러세요? 어서오세요! 그러겠습니까?

아닙니다. 어디서 별 이상한 사람이 왔다고 해서 쫓겨날지도 모르는 노릇이지요. 잘못하면 경비들한테 끌려나갈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화가 왔어요. 받아보니까 손정의 회장님이세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기를 위해서 일을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큰 회사 회장님이 그것도 직접 나한테 전화를 해서, 나를 위해 일을 해달라고 했다면, 그게 보통 일입니까? 그리고 일하게 될 직책이 무슨 대리나 과장 정도 되는 자리를 가지고 사장님이나 회장님이 직접 전화를 하겠습니까. 적어도 이사나 상무, 전무 정도는 되는 자리일 것이라고 하는 짐작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나를 위해서 일을 해달라.” 그런데 그 분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이 세상 누구와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분이 지금 나한테 말씀하시기를, “나를 위해 일을 해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이기적이라서 그런 건가요?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시겠다, 우리를 귀하게 써주시겠다는 말씀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어떤 말씀을 놓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시면서 하나님임을 나타내려고 하신다는 말씀을 모세에게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나 종처럼 하찮은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고 하셨나요?

출애굽기 6장 8절
“8.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하셨다 하라”

わたしは、アブラハム、イサク、ヤコブに与えると誓ったその地にあなたがたを連れて行き、そこをあなたがたの所有地として与える。わたしは主である。』」

출애굽기 7장 4절
“4.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しかし、ファラオはあなたがたの言うことを聞き入れない。そこで、わたしはエジプトに手を下し、大いなるさばきによって、わたしの軍団、わたしの民イスラエルの子らをエジプトの地から導き出す。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내시는 이유를, 축복의 땅을 주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야말로 <내 군대,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큰 회사 회장님이 “이제부터 내가 당신의 사장이다. 나를 위해서 일을 해달라”라고 부탁을 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그렇죠. 그 사장님은 상대방을 자신 회사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도 보통 직원이 아니라 임원급, 고위직책이라고 인정하고 있는 경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제부터 내가 너희 하나님이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가 너희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하겠다”는 말씀은 이기적인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내 나라, 천국의 군대, 천국 백성이다. 내가 하려는 일이 좀 어렵고 시간이 걸린다 하더라도 너희는 내 천국 군대, 천국 백성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된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축복을 받는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구원을 받는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13절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しかし、この方を受け入れた人々、すなわち、その名を信じた人々には、神の子どもとなる特権をお与えになった。
この人々は、血によってではなく、肉の望むところでも人の意志によってでもなく、ただ、神によって生まれたのである。

마태복음 10장 32절~33절
“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ですから、だれでも人々の前でわたしを認めるなら、わたしも、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の前でその人を認めます。
しかし、人々の前でわたしを知らないと言う者は、わたしも、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の前で、その人を知らないと言います。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독생자,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시고, 우리를 위해 하늘로 오르시고,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예수님을 찬양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기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되시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요,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 되시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요, 우리가 천국 백성이 된 것을 시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즘 많이 힘드십니까. 일이 잘 안 풀리고 꼬입니까. 어쩌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려고 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을 높이라고,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라고 우리를 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는 삶,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신 땅을 차지하고,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면서, 하나님의 군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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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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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5회 예수님의 부탁
2019년 8월 2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4절~5절
"4.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ルカの福音書 12章 4節~5節
"4.わたしの友である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からだを殺しても、その後はもう何もできない者たちを恐れてはいけません。
5.恐れなければならない方を、あなたがたに教えてあげましょう。殺した後で、ゲヘナに投げ込む権威を持っておられる方を恐れなさい。そうです。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この方を恐れ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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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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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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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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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의 부탁” イエス様の頼み事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참 인상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러셨고, 특히 구약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는 큰 위엄과 함께 무엇을 하라, 또는 무엇을 하지 말라 라는 식으로 강하게 명령하듯이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어떻습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의 상황에 대해서 누가복음 12장 1절 전반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누가복음 12장 1절 전반부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そうしているうちに、数えきれないほどの群衆が集まって来て、足を踏み合うほどになった。

지금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서로 밟힐 만큼 모여왔다고 기록합니다.

다음으로 검토해야 할 부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는 반드시 그 말씀을 누구한테 하셨는가 하는 점이죠.

다시 한번 누가복음 12장 1절 초반부에서 중반부까지를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そうしているうちに、数えきれないほどの群衆が集まって来て、足を踏み合うほどになった。イエスはまず弟子たちに話し始められた。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이처럼 말씀을 하실 때에는 참으로 사랑이 넘칩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1절부터 3절까지 한 번 살펴볼까요?

누가복음 12장 1절~3절입니다.
“1.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2.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そうしているうちに、数えきれないほどの群衆が集まって来 て、足を踏み合うほどになった。イエスはまず弟子たちに話し始められた。「パリサイ人のパン種、すなわち偽善には気をつけなさい。
おおわれているもので現されないものはなく、隠されているもので知られずにすむものはありません。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が暗闇で言ったことが、みな明るみで聞かれ、奥の部屋で耳にささやいたことが、屋上で言い広められるのです。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비밀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두고 한 사람은 그랬다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아니라고 합니다. 한 사람은 이게 사실이라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건 거짓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도대체 어느 쪽 말이 사실인지 알 수가 없어요.

잘잘못을 가린다면서, 사실을 밝힌다면서, 진실을 파헤친다면서 조사를 하고 수사를 하고 재판을 합니다. 그러나 1심, 2심이 아니라 대법원에서 확정이 되면 사실이 밝혀졌다고 100% 장담할 수 있나요? 경우에 따라서는 몇 년 또는 몇 십 년 뒤에 재판 결과가 뒤집어지는 경우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완전하게 밝혀지지 않은 사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뭐 유명한 사건 중 하나를 본다면 케네디 대통령 암살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 가지 설은 있지만, 정작 그 사건의 진실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고 하지요.

하지만 심판의 날이 온다면, 그리고 우리가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면 그 때에는 모든 것이 밝혀진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도 모르게 했었다고 믿었던 일들이 순식간에 모든 사람들 앞에서 들통이 나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런 말씀을 들으면 어떠세요? 우와, 정말 큰일 나겠다……라고 생각하는 건, 저만 그런가요?

그렇다고 미리미리 자가 비밀들을 주변 사람들한테 말하고 다니라는 것이 아니에요.

잠언 28장 13절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自分の背きを隠す者は成功しない。告白して捨てる者はあわれみを受ける。


마태복음 5장 23절~25절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ですから、祭壇の上にささげ物を献げようとしているときに、兄弟が自分を恨んでいることを思い出したなら、
ささげ物はそこに、祭壇の前に置き、行って、まずあなたの兄弟と仲直りをしなさい。それから戻って、そのささげ物を献げなさい。
あなたを訴える人とは、一緒に行く途中で早く和解しなさい。そうでないと、訴える人はあなたを裁判官に引き渡し、裁判官は下役に引き渡し、あなたは牢 に投げ込まれることになります。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면, 미리미리 하나님 앞에 죄를 자복하고 용서를 구해야 하지요. 그리고 사람한테 죄를 지었다면, 누구는 이럴 경우에도 하나님께 회개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그 형제한테 가서 직접 화해를 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8절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自分に関することについては、できる限り、すべての人と平和を保ちなさい。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여기서 특히 마태복음 22장 39절에서 “둘째도 그와 같으니”라고 하신 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 다음으로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도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과 똑같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듯 우리 이웃도 마음을 다해서 섬기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제 여기서부터가 드디어 본론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할까요?


누가복음 12장 4절~5절
“4.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わたしの友である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からだを殺しても、その後はもう何もできない者たちを恐れてはいけません。
恐れなければならない方を、あなたがたに教えてあげましょう。殺した後で、ゲヘナに投げ込む権威を持っておられる方を恐れなさい。そうです。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この方を恐れなさい。

오늘 말씀, 정말 처음부터 사랑이 넘치지 않습니까.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친구인 너희들에게 말한다고 하십니다.(わたしの友である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 이는 명령이나 지시, 가르침을 넘어서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간곡히 부탁하시는 말씀, 내가 너희들이 미워서 하는 말이 아니야. 너희들 힘들고 괴로워하라고 하는 말이 아니야. 너희들이 장차 반드시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 천국에 들어와야 하는데, 만에 하나 그러지 못할 까봐, 그러면 너무나도 내 마음이 아프니까, 혹시라도 그런 일이 있을 까봐 내가 미리 말하는 거야……이렇게 정말 사랑이 넘치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은 아마도 그랬겠지요. 아니, 도대체 무슨 어마어마한 말씀을 하려고 하실까, 얼마나 놀라운 비밀을 말씀해주시려고 이렇게까지 하실까. 어쩌면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있을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4.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わたしの友である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からだを殺しても、その後はもう何もできない者たちを恐れてはいけません。
恐れなければならない方を、あなたがたに教えてあげましょう。殺した後で、ゲヘナに投げ込む権威を持っておられる方を恐れなさい。そうです。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この方を恐れなさ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오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전에 회사 생활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저는 참 그 때까지 세상 물정도 모르고 그랬지요. 그런 상황에서 제 직속 상사 대리님이 계셨는데, 참 그 분은 아는 것도 많고 그러시더라구요. 그리고 저도 참 잘 챙겨주세요. 그래서 저는 멋도 모르고, 아, 이 분만 믿고 따라가면 괜찮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하루는 회사 업무에 있어서 사장님 결제를 받아야 할 일이 있었는데, 그 제 직속 상사 대리님이, 아~ 자기 말만 들으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지금 기억에 보면 애초에 사장님 지시와는 조금 다르게 일을 처리해요. 그러면서 사장님도 이렇게 하면 당연히 OK 하실 거라고 장담을 합니다. 만약에 자기 방법대로 해서 안 되면, 아주 그냥 뒤집어버린대나 뭐래나 하면서 아주 호언장담을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그 때는 참 그 대리님이 얼마나 멋있어 보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같이 결제를 받으러 사장실에 들어가니까, 사장님이 일언지하에 안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내심 아, 이제 드디어 이 대리님이 뭔가 멋지게 일을 벌이겠구나……라고 했는데, 제가 가만히 지켜보니까 이 대리님이 “예, 알겠습니다” 그러고 나오더라구요.

아니, 그래서 제가 좀 어이가 없어서 사장실에서 나와서는 대리님한테,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라고 물었더니, 그 대리님 하시는 말씀이, 뭐 어쩌겠냐, 사장님이 안 된다는데……시키는 대로 해야지…… ㅎㅎ그러더라구요.

하기사 말이야 바른 말이지, 자기가 무슨 부장이나 상무, 전무도 아닌 고작 대리가 사장님한테 어떻게 대항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순진하게 그것도 모르고, 사장님보다도 이 대리님 말만 들으면 되는 줄 알았었던 것이니, 참 제가 세상 물정을 몰라도 보통 모른 게 아니지요.

성경에도 보면 홍해에 가로막혔던 이스라엘 민족이 떠오릅니다. 지금 저 뒤에서는 애굽의 최정예부대가 추격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14장 16절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あなたは、あなたの杖を上げ、あなたの手を海の上に伸ばし、海を分けなさい。そうすれば、イスラエルの子らは海の真ん中の乾いた地面を行くことができる。


자, 선택의 길은 두 가지입니다. 단순합니다. 애굽을 의지할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을 의지할 것이냐 입니다. 애굽을 의지한다는 말은 지금 이 순간 왔던 길을 돌아서 애굽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당시 세상에 온 천하에서 애굽을 당해낼 나라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추격해오는 애굽 군대한테 두 손 들고 항복! 저희들이 잘못했습니다. 이번 한 번만 살려주신다면 또다시 애굽으로 들어가서 열과 성을 다해서 종으로, 노예로서 섬기겠습니다……. 이것이 애굽을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그 지긋지긋한 노예생활에서 해방을 시켜주셨는데, 그리고 이제 자유인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고 하는 위대한 계획이 있으신데, 이를 마다하고 다시 종살이로 돌아간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들을 이끌었던 모세는 다행히도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애굽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갈라진 홍해 가운데를 통과해서, 이스라엘 민족 모두가 구원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941년 12월에 시작한 미국과 일본 간의 태평양 전쟁은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라는 결과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전쟁 전과 전쟁 후를 살펴본다고 한다면 일본은 외적으로만이 아니라 내적으로도 대단히 큰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 때까지는 적대국이라고 여겨왔던 미국 군인들이 이제는 일본 안에까지 들어와서 통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일본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사람이, 바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맥아더 장군이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일본 사람들한테 있어서는 천황이야말로 가장 높은 왕이요, 신이라고 여겨왔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이상한 파이프를 물고 선글라스를 낀 사람 하나가 왔는데, 이게 보통이 아니에요. 어느 날 일본 신문에 사진 한 장이 실렸는데 이 사진을 본 일본 사람들은 경악을 했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왼쪽에는 맥아더 장군이 살짝 뒷짐을 지고 편안한 자세로 서 있었는데, 옆에 서 있는 몸집이 작은 일본 천황은 무슨 초등학생처럼 차렷 자세를 하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일본 사람들은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천황이 가장 높은 사람, 아니, 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신보다도 더 높은 신, 맥아더라고 하는 신이 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당시 맥아더 장군은 동경에 GHQ라고 하는 최고사령부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일본의 재벌을 해체시키고 헌법까지도 다시 만들게 했을 정도이니 말 다 했지요. 당시 자료에 의하면 맥아더 장군이 마음만 먹었다면 일본의 천황제도 자체도 없앨 수 있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일본 정치권에서는 이를 막기 위해서, 어떻게든 천황제를 존속시키기 위해서 맥아더를 설득하고 그랬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제 맥아더를 보면서, 아, 저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능력자, 진정한 권력자, 진정한 신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책에 의하면 당시 출세를 하기 위해서는 맥아더의 귀가 되어라……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라고 하니, 그 때 일본에서 맥아더 장군의 권력은 정말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또 웬일일까요. 당시 일본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왕 중의 왕이요 신 중의 신이라고 생각했던 맥아더 장군이 해임을 당했어요. 말하자면 해고가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놀랐지요. 자기들은 맥아더 장군이 천황보다도 높고,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사람인줄 알았는데, 그 위에 또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인가……하면서 말입니다. 맥아더를 해임시킨 게 누구입니까. 예, 바로 트루먼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을 지배하고 다스리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어떤 회사에 다닐 때에 보면, 사장님이나 회장님이 아니라, 내가 말단사원이라면 과장님이나 차장님 정도 되더라도 어렵지요. 무슨 업무 지시가 있으면 반드시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야 여러 가지 있습니다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내 인사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부장 회의에서, 아니면 사장 회의에서 말단사원인 나 하나를, 아무런 큰 잘못 없이 해고시키지는 못하더라도 이상한 부서로 발령을 내는 정도는 전혀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서 내 생활이나 내 미래에 대해서 어쩌면 큰 영향을 줄 수도 있는 일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인사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한테는, 꼼짝없이 업무지시에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만약에 그 회사를 나온 다음은 어떻습니까. 예, 이제는 상대방이 저한테 그런 인사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회사에 있을 때에는 하물며 밤중에 전화가 걸려와서 회사에 지금 중대한 문제가 생겼으니까 당장 나오라고 하면 허겁지겁 나갔겠지만, 그 회사에서 나온 후라면 예전 상사나, 하물며 사장님이나 회장님이 아무리 오라고 한다 해도 내가 가기 싫으면 안 가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는 있지만, 우리는 믿음이라는 것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회사에서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저를 다른 곳으로 발령 내거나, 징계를 내리게 할 수는 있겠지요. 하물며 경우에 따라서는 해고를 시킬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이상은 못합니다. 회사에서 이미 나왔는데 그런 나더러 서울에 가라, 일본에 가라……이렇게 지시할 수 있어요? 아니에요 없습니다.

이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힘이나 권력을 가진 자라 하더라도, 최악의 경우에도 나 자신을 죽이는 것밖에는 못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상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자기는 그럼 안 죽어요? 아닙니다. 자기도 역시 죽습니다. 그리고 생전에 아무리 큰 권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자신이 죽은 다음에 천국에 들어갈지 지옥에 떨어질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은 없습니다.


그 권한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있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의지해야 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도움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을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계시기에 예수님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신 것과 부활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처럼 아무리 큰 힘을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우리를 지옥에 던져 넣을 수 있는 권세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를 뒤집어 보면 아무리 큰 힘을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훌륭한 목회자나 신학자라 하더라도 사람의 힘으로는, 누군가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진 사람 또한 없습니다.

그 권세는 오로지 하나님께 있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 구원을 받아야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야만 됩니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が道であり、真理であり、いのちなのです。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だれも父のみもとに行くことはできません。

예수님께서 부탁하십니다.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からだを殺しても、その後はもう何もできない者たちを恐れてはいけません。
恐れなければならない方を、あなたがたに教えてあげましょう。殺した後で、ゲヘナに投げ込む権威を持っておられる方を恐れなさい。

그리고 또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부탁을 하십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そうです。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この方を恐れなさい。

우리 모두 구원에 이르는 참된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님, 왕 중의 왕이요 신 중의 신이신 예수님,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 죄를 모두 씻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 땅에서 기쁨으로 살아가며, 마침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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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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