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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1회 지금
2019년 10월 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21절~22절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マタイの福音書 8章 21節~22節
“また、別の一人の弟子がイエスに言った。「主よ。まず行って父を葬ることをお許しください。」
ところが、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に従って来なさい。死人たちに、彼ら自身の死人たちを葬らせ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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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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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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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지금” 今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역사적으로 볼 때 많은 사람들에게 의아함을 느끼게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8장 21절~22절입니다.

마태복음 8장 21절~22절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また、別の一人の弟子がイエスに言った。「主よ。まず行って父を葬ることをお許しください。」
ところが、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に従って来なさい。死人たちに、彼ら自身の死人たちを葬らせなさい。」”

이 말씀에 의하면 어떤 제자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하는 말이, 내가 주님을 따라야 하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먼저 가서 내 아버지 장사를 지내고 난 다음에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자 이 말씀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흥미롭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오늘 본문 중에서 22절 말씀.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ところが、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に従って来なさい。死人たちに、彼ら自身の死人たちを葬らせなさ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장사 치르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아버지 장사가 중요한 게 아니야. 너는 나를 따라야 해……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 우리가 이를 생각해볼 때 예수님은 너무나도 가혹한 말씀을 하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물론 주님을 따르는 것은 중요하지요. 하지만 아버지 장사를 치르는 것은 중요하지가 않나요?

나사로가 죽었을 때나 기타 성경에 묘사된 당시 장례 풍습을 보더라도, 누군가가 돌아가시면 지금처럼 많은 조문객이 모여와서 함께 슬퍼하고 일을 처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 장사를 치르겠다는데, 그러지 말고 나를 따르라……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처럼 들린다는 것이지요.

이 구절에 대해서 많은 신학자들이 지금까지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해왔습니다. 그 중에는 정말 아무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하더라도, 장사를 지내는 것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하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말로 예수님은 지금 아버지가 돌아가셨음에도 불구하고 장례를 치르는 것을 다 내버려두고 나를 따르라 라고 하셨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요?

이를 위해서 우선 당시 상황을 조금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그 때는 예수님께서 무리들과 함께 길을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을 따르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과 길을 걸어가면서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가혹하게 들리는 이유는 뭘까요. 그것은 바로 이 제자라고 하는 사람의 아버님이 지금 막 돌아가셔서 장례를 올려야 하는데, 이를 예수님께서 하지 말아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성경 기록상으로 볼 때 그렇다고 하기에는 몇 가지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이 점에 대해서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 지금 이 제자의 아버지가 막 돌아가셨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는 그에게 있어서 상당히 다급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음도 추슬러야 할 뿐만 아니라 장례식 준비도 하여야 할 것입니다. 돌아가신 분이 자신의 친척도 아닌 아버지라고 하면 더더욱 정신이 없겠지요. 그와 같은 상황을 묘사한다면 이런 식의 기록은 어떻겠습니까.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한 제자가 황급히 달려와 이르되, 주여 지금 제 아버지가 죽었나이다 이에 저로 하여금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하지만 오늘 말씀은 어떻습니까. 이와 같은 긴박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만약에 지금 방금 이 제자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장사 재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한다면, 이는 단순히 윤리나 도덕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율법에 대한 문제까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십계명 중에서 제5계명은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20장 12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2절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あなたの父と母を敬え。あなたの神、主が与えようとしているその土地で、あなたの日々が長く続くようにするためである。

십계명이 모두 그렇듯이 이 제5계명도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아버지 장사를 지내지 말라는 말씀은 자칫하면 이 계명을 어기는 말씀처럼 들릴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또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 제자보다도 먼저 예수님께 말씀을 드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8장 19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8장 19절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そこに一人の律法学者が来て言った。「先生。あなたがどこに行かれても、私はついて行きます。」

여기서 서기관이라고 하는 사람은 다른 말로 율법학자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율법에 있어서 많이 연구를 하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지금 막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장사를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한다면, 거이 있던 이 서기관이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항의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니, 예수님, 그건 율법 특히 십계명에 어긋나는 말씀 아니신가요? 하고 질문이라도 한 번 했을 법도 한데, 성경 어디에도 그와 같은 기록이 없습니다.

이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본다면, 이 성경말씀에 대해서 어떤 한 흥미로운 해석이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1차 장사와 2차 장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차 장사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사람이 돌아가셨을 때 하는 것입니다만, 당시는 2차 장사라고 하는 풍습도 있었다고 합니다. 2차 장사는 무엇인가 하면, 사람이 돌아가시면 요즘 일본을 보면 99% 이상이 화장을 하고 한국도 점차 화장이 주류가 되고 있습니다만, 한국이나 일본이나 옛날에는 시신을 그대로 땅속에 매장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동굴을 파서 무덤으로 사용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산의 절벽 같은 곳을 파서 넓은 방처럼 만들어 놓고는 거기에 시신을 안치하고 나서 큰 돌로 그 입구를 막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놓은 상태로 1년 정도가 지나면 살은 완전히 썩고 뼈만 남는다고 합니다. 이제 그와 같은 상태가 되면 무덤 돌문을 열어서 유골을 유골함에 넣어서 다시 그 곳에 안치를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2차 장사라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 제자는 지금 예수님께 2차 장사를 허락해 달라,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그리 급하지 않는 일을 먼저 처리하게 해달라고 말씀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신학자의 주장에 의하면 여기에서 더 나아가, 2차 장사도 지금 당장이 아니라 몇 개월 뒤에 치러야 하는데, 그 몇 개월 뒤에 2차 장사를 치르고 난 다음에야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말일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이죠.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이는 전혀 다급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를 핑계로 해서 예수님을 좀 나중에 따르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혹시 기억하실 것입니다. 학교에 다니다 보면 시험기간이 있잖아요?

자, 오랜만에 오늘 문제 나갑니다. 잘 생각해보시고 마음 속으로 크게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학생이라면 평소에도 그래야겠습니다만, 특히 시험기간 때에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의 편의를 위해서 객관식으로 드리겠습니다. 자, 시험기간에 해야 할 것은 다음 중 무엇입니까. 1번 시험공부, 2번 평소에는 하기 싫었던 방 청소.

이 문제가 어렵다고 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다른 문제도 내 드리겠습니다. 자, 문제는 똑같습니다. 시험기간에 해야 할 것은 다음 중 무엇입니까. 1번 시험공부, 2번 기타.

성공적인 인생을 보내기 위해서는 그 때마다 해야 하는 <선택>만 잘하면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동서고금,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 문제를 물어보세요. 어떤 게 정답이냐고. 그러면 정상적인 분이라면 모두 1번 시험공부를 택하겠지요. 하지만 그게 그리 쉬운가요? 아니요. 쉽지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왜겠습니까. 왜 평소에는 하기 싫던 방 청소가 시험기간만 되면 하고 싶어지는 거예요. 그것은 다름아닌 시험공부를 하기가 싫으니까, 그 핑계를 찾다 보니 그나마 방 청소가 차라리 낫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거라도 하고 싶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쪽에서는 계속해서 핑계거리, 구실거리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또 그렇다고 자녀분들께, 아~ 핑계거리 구실거리 만들지 말고 공부하라고 닥달하지 마세요. 공부해라 공부해라 하고 자녀들에게 말을 많이 하시는 분들은, 공부가 얼마나 힘든지 몰라서 하는 말씀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면 또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르지요. “내가 공부를 안 해 본 줄 알아? 나도 옛날에 다 해봤어”

여러분, 우리가 교회 하루 이틀 다닙니까. 나도 옛날에 금식도 다 해보고, 기도도 다 해봤어……라고 하는 분들이 여러분 교회에 계시면, 그 모습이 은혜롭겠습니까.

신앙은 추억이 되면 안 됩니다. 신앙은 현재 진행형이어야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공부 안 하는 아이들에게 부모로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학원 보내주는 거요? 좋은 선생님 붙여주는 거요? 아니요. 부모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걸 잘 하려고 하지 않아요. 왜요? 자기도 힘들거든요. 그래서 부모님들도 자녀들의 교육에 대해서 또 다른 핑계거리, 구실거리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모님을 공경하려고 하는 것을 꾸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좀 뒤로 미루기 위해서 대고 있는 핑계거리, 구실거리를 꾸짖고 있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우리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요,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먼저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이 우선순위를 잘못 잡으면 나중에 크게 후회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를 보면 어땠습니까. 그가 어디에 방주를 짓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 정확한 언급은 없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물 위에 짓지는 않았습니다. 땅 위에 지었지요. 그 기간도 누구는 120년이라고 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나이로 계산해보면 대략 80년에 조금 못 미치는 기간이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짧은 기간은 아니지요. 노아는 그 오랜 세월 동안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렇다면 노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창세기 6창 9절에서는 노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창세기 6장 9절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これはノアの歴史である。ノアは正しい人で、彼の世代の中にあって全き人であった。ノアは神とともに歩んだ。

노아는 의인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완전한 자라고까지 합니다. 당시 방주 크기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창세기 6장 15절에 정확하게 나와있습니다.

창세기 6장 15절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それを次のようにして造りなさい。箱舟の長さは三百キュビト。幅は五十キュビト。高さは三十キュビト。

라고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방주의 크기를 본다면 1큐빗이 사람 발꿈치에서 손 끝까지 길이었다고 하는데 이를 대략 45센티 정도였을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계산을 해보면 방주의 앞뒤 길이가 135미터, 폭은 22.5미터, 높이는 13.5미터라고 하는 숫자가 나오는데, 이 크기는 축구장 넓이의 1.5배, 높이는 대략 7층 건물 정도가 되는 어마어마한 건축물이었지요.

그렇게 큰 배를, 그것도 바다 위도 아닌 땅 위에 짓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을 크게 벗어나는 일입니다. 노아가 70~80년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은 그를 보고 비웃었을 것입니다.

이봐. 하나님을 믿는 것도 좀 적당히 해. 자, 그런 황당한 배는 나중에 만들고 우리와 함께 놀자. 우리와 함께 사업을 하자. 우리와 함께 다른 것을 하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의인이었던 노아는 어떻게 말했을까요. 이봐. 이제 세상은 금방 망할 거야.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진다구. 자, 더 늦기 전에 자네도 나와 함께 배를 지읍시다. 그리고 마지막 날 우리 같이 방주에 들어가서 구원을 받읍시다. 그는 분명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노아가 평생 동안 전도를 몇 명 했습니까. 예, 그 오랜 기간 동안 자기 가족들, 자기 빼고 7명 외에는 한 사람도 전도를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께서도 지금까지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전도를 못했다 라고 해서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세상을 다음과 갈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4장 38절~39절
“38.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洪水前の日々にはノアが箱舟に入るその日まで、人々は食べたり飲んだり、めとったり嫁いだりしていました。
洪水が来て、すべての人をさらってしまうまで、彼らには分かりませんでした。人の子の到来もそのように実現するのです。

이것도 또 오해하시면 곤란한 것이,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세상 일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노아 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당시 세상 사람들은 세상 일들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 일들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지식과 재물과 지위와 권력과 명예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열심히 돈을 벌었습니다.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홍수 때는 어땠습니까. 세상 지식이 그들을 구원했습니까. 재물이 그들을 구원했습니까. 아니면 세상 지위나 권력이나 명예가 그들을 구원했습니까.

마지막 날에 그들을 구원한 것은 오로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를 몰랐습니다. 노아가 아무리 말을 해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언제 깨달았습니까. 그렇습니다. 방주의 문이 닫히고 지금까지 보지도 못했던 물들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나서야. 그리고 이제 물이 점점 차 올라서 이 세상에는 어디 하나 피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나서야 하나님에 대한 순종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방주에 못 들어가고 바깥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들이 저기 떠다니는 방주를 보고 뭐라고 했겠습니까. 이봐 노아! 내가 잘못했어! 너를 비웃었던 내가 어리석었어. 다시 한 번만 기회를 주게. 딱 한 번만 열어주게!

창세기 6장 14절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あなたは自分のために、ゴフェルの木で箱舟を造りなさい。箱舟に部屋を作り、内と外にタールを塗りなさい。

방주를 만들 때 하나님께서는 역청을 칠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말하자면 방수 처리지요. 이로 인해서 물은 배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렇다고 방음처리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배 안에서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수 많은 사람들의 비명소리, 외침소리도 들리지 않았을까 합니다.

만약에 그런 소리가 들렸더라면, 어떻게 해야 했겠습니까. 그래도 노아가 의인이었다고 하는데, 좀 열어줄 수도 있는 것 아니에요? 아무리 여러 짐승들을 태웠다 하더라도 그렇게 크고 넓은 방주였다고 하니, 최소한 수 십 명은 더 태우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노아가 문을 조금 열어서 몇몇 사람들을 건져 올렸더라”……라는 내용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거 막판에 노아가 너무 야박하게 군 건가요? 왜 문을 안 열어주었을까요. 잠깐 열어주면 됐을 거 아니에요? 그러나 노아는 아무리 의인이었다 하더라도 이제 방주의 문을 열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노아가 야박해서가 아닙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창세기 7장 16절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入ったものは、すべての肉なるものの雄と雌であった。それらは、神がノアに命じられたとおりに入った。それから、主は彼のうしろの戸を閉ざされた。

문을 누가 닫았다고요? 방주의 문을 노아가 닫았다면, 노아가 다시 열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방주의 문을 닫으신 분은 노아가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방주의 열쇠, 구원의 열쇠는 노아나 다른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을 믿으시라고, 교회에 나오시라고 하면, 바쁘다고 하십니다. 시간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번 주일에는 약속이 있다고 하십니다. 인터넷으로 전도를 하다 보면요, 더 심한 말씀을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래요. 바쁘시겠지요. 시간이 없으시겠지요. 약속도 있으시겠지요. 그리고 자기는 관심도 없는데 누군지도 모르는 목사라는 사람이 갑자기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노아의 홍수 때, 물론 신앙적으로는 죄로 가득 차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세상적으로는 머리도 좋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 나중에 갈게, 내 일 좀 다 하고 갈게. 사람들은 그러면서 함께 주님께 순종하자고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마지막 때가 이처럼 빨리 다가올지는 몰랐던 것입니다.

과거에 일제시대 때를 보면 조선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둘로 갈라졌습니다. 그것은 친일을 하거나 아니면 항일을 하거나 둘 중 하나였습니다.

해방이 되고 난 다음에 친일을 한 사람들을 체포해서 질문을 합니다. 당신처럼 그렇게 많이 배우고 지식도 많은 사람이, 왜 친일을 했습니까.

그러면 하나같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빨리 일제가 망할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하루는 24시간, 분으로는 1,440분. 초로는 86,400초입니다. 이를 1년 365일로 바꾼다면 1년은 8,760시간, 분으로는 525,600분, 초로는 31,536,000초입니다.

꽤 길죠? 하지만 정말 긴가요? 2019년. 어째요. 벌써 10월하고도 6일입니다. 이제 올해 2019년은 3개월도 안 남았습니다.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마지막 날이 임했을 때,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가 이와 같이 말할 것입니다.

“그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노아의 삶, 노아가 방주를 짓는 삶, 그와 같은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순종을 보여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입니다.

로마서 5장 19절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すなわち、ちょうど一人の人の不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罪人とされたのと同様に、一人の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義人とされるのです。

빌립보서 2장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が道であり、真理であり、いのちなのです。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だれも父のみもとに行くことはできません。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一人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으로 이르는 길, 방주의 문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열쇠, 그것은 바로 예수님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구원을 얻습니다. 그 이름을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순종하신 예수님께서 흘려주신 그 피를 믿으면 우리는 구원을 얻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2절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わたしの父の家には住む所がたくさんあります。そうでなかったら、あなたがたのために場所を用意しに行く、と言ったでしょうか。

천국은 넓습니다. 노아의 방주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넓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여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넓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곳입니다.

그리고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神は彼らの目から涙をことごとくぬぐい取ってくださる。もはや死はなく、悲しみも、叫び声も、苦しみもない。以前のものが過ぎ去ったからである。」

요한계시록 21장 23절~27절
“23.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24.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25.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26.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27.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都は、これを照らす太陽も月も必要としない。神の栄光が都を照らし、子羊が都の明かりだからである。
諸国の民は都の光によって歩み、地の王たちは自分たちの栄光を都に携えて来る。
都の門は一日中、決して閉じられない。そこには夜がないからである。
こうして人々は、諸国の民の栄光と誉れを都に携えて来ることになる。
しかし、すべての汚れたもの、また忌まわしいことや偽りを行う者は、決して都に入れない。入ることができるのは、子羊のいのちの書に記されている者たちだけである。

우리 모두 예수님이 십자가로 보여주신 순종을 우리 마음에 새기고, 더 늦기 전에 지금 바로 당장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예수님만을 따라감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때에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주님께서 주시는 영광스러운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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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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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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