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38번째 시간으로서 “한 알의 밀과 열매”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우선 오늘 본문 말씀부터 다시 볼까요?
요한복음 12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여러분께서는 이 말씀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십니까.
여기서 우선 첫째로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서 우리를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죄값에 대한 형벌을 모두 받아 주시고는,
하나님께서 그 죄를 모두 사해주신 증거로서 예수님을 다시 살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는 예수님의 죽음,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무사하시겠지만 그 대신
대속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 예수님 한 분의 죽음을 통한 많은 사람들의 구원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게 되신다면 그 죽음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구원을 얻는 열매를 맺게 된다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여기서의 죽음이라고 하는 말씀을 단순히 예수님의 십자가에 한정시키게 되면 좀 문제가 생깁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이 고백하기를 자신은 날마다 죽는다고 합니다.
날마다 죽는다. 날마다 죽는다. 여러분께서는 이 바울의 고백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바울의 말을 바탕으로 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한 알의 밀알과 열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자, 우선 다음 말씀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호세아 6장 2절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고린도전서 6장 14절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일으키신다, 다시 살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다시 살리신다는 것은 단지 우리가 이전의 모습으로 살아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는 그래요. 아휴, 이렇게 사는 것도 지겨운데 다시 살아나서 뭐해. 그러니까 다시 살아난다는 게 별로 안 반갑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활할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요한계시록 7장 16절~17절
“16.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요한계시록 22장 3절~5절
“3.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5.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을 때의 고통과 고민을 모두 끌어안고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날은 어떤 날이라고 합니까.
부활한 그들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에 대해서 현대인의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요한계시록 22장 5절
“거기에는 더 이상 밤이 없을 것이며 등불이나 햇빛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빛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그들은 영원히 왕처럼 살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보시는 것처럼 부활한 우리는 왕처럼 살게 될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왕이라고 해서 또한 이 땅에 있는 왕을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해도 이 땅에서의 삶은 대부분
고작 100년도 못 되지 않습니까.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지배했다고 하는 몽골의 징기스칸도 64세까지 살았고, 최초로 중국 대륙을 통일한 진시황은 50세, 유럽의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은 고작 32세까지밖에 못 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부활한 다음에 왕으로서의 삶은 언제까지 이어진다고요? 100년이요? 200년이요? 아닙니다.
세세토록 즉 영원히 왕으로서 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우리는 왕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괴로움을 훌훌 털어버리고 이제 주님의 능력으로 영광된 왕으로 태어나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문제를 드리겠습니다. 부활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물론 예수님도 믿어야 하겠지요. 신앙생활도 열심히 해야 하겠지요. 말씀도 잘 알아야 하겠지요. 기도로 항상 주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하겠지요. 다 좋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부활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죽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잖아요.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가 있겠습니까.
자, 그렇다면 우리도 부활하기 위해서는 당장 지금 육체적으로 죽어야 하느냐 하면, 아이,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육체적인 생명은 주님의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사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생각해보세요. 지금 직장에 다니고 있는 분들은 그게 저주입니까. 물론 때로는 힘들 수도 있겠지만, 사실 거기 들어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들을 하셨습니까.
한편 회사 입장에서 본다면 어떻습니까.
회사에서는 아무런 이유 없이 여러분들을 뽑았겠습니까. 그렇지는 않겠지요.
최소한 여러분을 뽑았다는 것은 여러분께 그만큼 회사를 위해서 일해주기를 바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런 의미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주님의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에 그 사명을 가지고 우리는 태어났다고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도중에 자기 멋대로 죽고 만다면 이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지고 계셨던 기대를
저버리는, 큰 불순종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한 바울은 한 번도 아닌 날마다 죽는다면서요. 사람이 어떻게 육체적으로 날마다 죽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말이 안
되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 간단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존심을 죽이라는 말씀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실 이 죽음이라는 것이 자존심을 죽이는 일이라고 이해를 하게 된다면, 성경에서는 이에 대한 말씀이 반복적으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2절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태복음 6장 5절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태복음 6장 16절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우리가 어떤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도와주려고 할 때, 그 목적이 그 사람에게 도움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서
한다거나, 기도나 금식을 할 때에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에게 자신의 믿음이 좋다는 것을 과시하려고
한다거나 하게 된다면, 주님은 이에 대해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 네 자존심을 네 힘으로 스스로 높이려고 했지? 그래, 그러면 대신 내가 높여줄 자존심은 없다. 다시 말하자면 너는 이미 네가
원하는 상을 받았으니까 내가 줄 상은 없다.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4장 7절~11절
“7.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8.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10.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사실 어딜 갔을 때 대우 받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럿이 모인 자리에 있어서는 제일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 하고,
그리고 여럿이 모여서 사진을 찍는다거나 하면 센터에 서고 싶어하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세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우 받는 자리에 가서 앉아라? 제일 눈에 띄는 곳에 서라? 그러십니까.
아니에요.
괜히 네가 네 힘으로 높은 자리에 가서 앉았다가, 거기 주인이 와서 말하기를, 이봐, 거기는 자네 자리가 아니야. 저기 낮은 쪽에
가서 앉아.
그렇게 되면 남들 앞에서 무슨 망신이냐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오히려 낮은 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된다면 역시 주인이 와서 말하기를, 아이구, 당신 같은 분이 왜 여기
낮은 자리에 와서 앉아 계십니까. 제가 저쪽 높은 자리로 모시겠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영광을 받겠느냐 하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네가 네 힘으로 스스로 너를 높이려고 애쓰지 말고, 오히려 자존심을 죽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본다면 누가 자존심을 철저하게 죽였습니까.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예수님 자신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5절~8절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좀 이상한 말일지는 몰라도 원래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가진 것 없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나마 나을지는 몰라요. 뭐 그래도 기분은
나쁘겠지만요.
하지만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천하를 호령하던 왕이나 황제였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다 잃고는 남들 앞에서 멸시를 당하고
수모을 겪게 되었다면 이 얼마나 참기 힘든 치욕이겠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 다음 가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체시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영광된 자리를 버리시고 종의 형체로서 이 땅에 오시고는, 어떻게 십자가에서 죽으셨대요? 영웅처럼 멋있게 죽으셨다고
하십니까.
아닙니다.
자기를 낮추셔서 죽으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체포되자 그 주위에는 누가 있었습니까.
마가복음 14장 50절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을 대략 3년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만, 기껏 제자들을 3년 동안이나 가르쳐 놨더니 결정적인 순간이
되자 한 사람도 남김 없이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쳐 버렸대요.
결국 예수님은 철저하게 낮아져서 홀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됩니다.
그러자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환호성을 지르던 사람들은 다 없어지고 온통 예수님을 모욕하는
사람들만 가득 찼습니다.
마태복음 27장 39절~44절
“3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참 어쩌면 그 마지막 순간까지 이토록 험한 꼴을 당하실 수가 있습니까.
성경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시간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25절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누가복음 23장 44절~46절
“44.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45.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46.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이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제심시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제육시 쯤에 어둠이 임하더니 제구시에 숨지셨다고 되어 있어요.
이를 지금 시간으로 고치면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시고는 정오 쯤에 하늘이 어두워지고 오후 3시 경에 운명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몇 시간이에요? 예,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무려 6시간 동안이나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고난을 받으시면서, 그것도
모자라서 온갖 모욕을 당하고 계셨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누가요? 죄인이요. 아닙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그와 같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수모를 겪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나요? 아니에요. 그것은 바로 우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그와 같은 고통과 고난을
겪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게 된다면,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못 참겠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는 것 같습니다. 예,
충분히 이해하지요.
자기도 날마다 죽는다고 말한 바울의 심정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사실 바울은 인간적으로 본다면 얼마나 많이 배운 사람입니까. 지금으로 본다면 고시를 패스한 청년 관료로서 얼마든지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율법도 모르고 복음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들 잘났다고 하면서 바울을 무시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그런 모습을 보았다면
얼마나 속에서 부글부글 끓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바울이 그것을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저 바울은 자기를 낮추고 오로지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높이면서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가 자존심이 상했을 때, 그 자존심 어떻게 살리시겠습니까.
누구는 자기 힘으로 자기 자존심을 살리려고 합니다.
누구는 하나님의 힘으로 자기 자존심을 살리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무리 자기 힘으로 자존심을 살리려고 해 봤자 그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들 앞에서 겸손해져서 자신을 낮추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존심을 살려 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시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6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우리 스스로 낮추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마냥 지켜보고 계시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우리를 높이신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또 이렇게 반문하지요. 아니, 도대체 어느 세월에 우리를 높여 주실 건데?
이에 대해서 일본 신개역 성경에는 이 ‘때가 되면’이라는 말씀을 ‘가장 좋을 때에’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참 대단히 인상적이지
않습니까.
어느 세월에 우리를 높여 주시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좋을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크게 높여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을 다시 볼까요?
요한복음 12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여러분, 우리가 우리 힘으로 자존심을 살리려고 해봤자 아무런 소용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한 알의 밀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지요.
그깟 한 알의 밀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그 한 알의 밀보다도 못한 알량한 자존심을 죽이고 인내라고 하는 제물을 주님께 바쳤을 때, 주님께서는 수많은 열매로
우리에게 갚아 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가 스스로 자존심을 죽이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순종하게 된다면, 때가 되었을 때,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좋을 때에,
마침내 주님께서 우리를 친히 일으켜 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크게 높임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