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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9회 배와 아버지 - 이루리라선교회
2024년 9월 1일 설교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21절~22절
“21.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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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34번째 시간으로서 “배와 아버지”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실까요?

마태복음 8장 21절~22절
"21.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보시면 여러분께서는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말씀드리기를, 지금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을 치르고 난 다음에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아버지 장례식에 가기보다는 나를 따르라……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는 너무 심한 말씀처럼 들리지 않으세요? 물론 주님을 따르는 것은 중요하지요.


지금 주님께 말씀을 드리고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그도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자가 된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장례식을 치르고 오겠다고 하는데 그걸 막으셨다?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는 너무나도 매정한 말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혹시 나와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이를 슬퍼하는 것이 성경적이지 않은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23장 2절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여기에 보시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자신의 아내인 사라가 세상을 떠났을 때 슬퍼하며 애통해 했다고 적혀 있지 않습니까.

성경에 구체적인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평생을 아브라함과 함께 살아온 사라도 나중에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천국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나와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에 대해서 슬퍼하고 애통해 하는 것은, 이는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겠다고 하잖아요. 아버지 장례 때문에 예수님을 안 따르겠다는 것도 아니고, 장례를 치른 다음에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는데도 이를 막으셨다고 한다면 납득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해서 오해가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구약에서도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장례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점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막 장례를 치러야 할 상황이 아니었다고 해야 하는 것이지요.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까. 믿음을 가지고 싶고 교회에 나가려고 해도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바로 집안사정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자기가 종손이고 매년 명절 때나 제삿날에는, 조상님 영정이나 위패를 모셔 놓고 차례나 제사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돌아가신 조상님의 뜻을 기린다? 그것 만이라면 그나마 나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게 차례상이나 제사상을 차려 놓으면 조상님의 영이 와서 그 음식을 먹고는, 그렇게 잘 모셔 놓으면 그 조상님들의 영이 자기들을 지켜주고 복을 가져다 준다고 믿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사상은 일본에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오봉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는 간단히 말해서 조상님들의 영이 기간에 불러 들려서는 극진히 대접을 해서 돌려보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력 8월 중순 때가 되면 오이와 가지에 각각 이쑤시개 같은 것 네 개를 꽂아서 동물인형을 만듭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오이로 만든 인형은 말을 나타내고, 가지로 만든 인형은 소를 나타내요. 그래서 조상님이 올 때는 말을 타고 빨리 오시고, 그리고 대접을 받고 가실 때에는 소를 타고 천천히 가시라는 뜻을 담아서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세상적으로 본다면 죽은 사람이 다시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그러면 성경은 어떻습니까.

성경을 보면 한 번 세상을 떠난 사람이 다시 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낸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아들 이삭의 꿈이나 생시에 다시 나타나서 뭐라고 말을 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성경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부자는 살아있을 때에는 아주 호화스러운 생활을 했습니다. 반면에 나사로의 생은 아주 비참했어요. 그런데 이제 둘 다 죽은 다음에 보니까 부자는 불구덩이에 떨어져서 괴로워하고 있는 반면에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서 위로를 받고 있었어요.

이 때 이 부자가 하는 말을 잠시 들어볼까요?


누가복음 16장 27절~31절
“27.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자기는 살아있을 때에 이렇게 될 줄은 모르고 자기만 생각하며 호의호식 하고 살았는데, 죽은 나사로가 아직 살아 있는 자기 형제들한테 가서 증언하게 해서, 적어도 그들이 죽은 다음에는 자기처럼 고통을 받지 않게 해달라고 아브라함에게 간청을 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그들에게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의 모세는 ‘율법’을, 그리고 선지자는 ‘예언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율법과 예언서는 무엇을 뜻합니까.

그렇죠. 그것은 바로 성경을 뜻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굳이 천국에 있는 나사로가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한테 가서 말을 하지 않더라도 이미 이와 같은 내용에 대해서는 성경에 다 적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이 부자는 끝까지 우깁니다.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죽은 사람이 나타나서 말을 하면 믿고 회개할 거라니까요.

여기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단호합니다. 그들이 성경을 믿지 않는다고 한다면, 죽은 사람이 백날 가서 말을 해 봤자 어차피 안 믿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예요? 예, 목적이 어떻든 간에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 다시 가서 말해줘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어떤 분은 죽은 사무엘이 나타난 적이 있지 않냐고 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지난 제432회 2024년 2월 18일자 ‘세례요한 입문’이라는 설교에서 자세히 설명 드렸습니다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사무엘이 죽고 난 다음에 무당을 통해서 나타난 사무엘은 사무엘이 아니라 지옥에서 올라온 마귀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무엘상 28장에 등장하는 사무엘은 진짜 사무엘이 아니라 마귀가 사무엘인 척하고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이 말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냐 하면 성경적으로 본다면 한 번 세상을 떠난 사람이 아직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 앞에 나타나는 일은 없고, 만약에 아무리 그런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그것은 정말로 그 돌아가신 사람이 아니라, 마귀가 그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가 있다고 성경은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철저하게 살아있는 사람 위주로 기록되어 있어요. 다시 말해서 이미 죽은 사람,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에 대해서 성경은 전혀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시편 88편 10절~11절
“10.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셀라)
11.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죽은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까. 죽은 사람이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오로지 살아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이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도구로서 쓰임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한국에 와서 이렇게 전도지를 돌리고 있습니다만, 일본에 있을 때에도 전도지를 들고 집집마다 돌리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면 주위에서 묘지를 볼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만, 일본의 경우를 보면 동네 여기저기에서 공동묘지를 볼 수 있어요. 그럼 전도지를 들고 다니면서 제가 그 묘지에 묻힌 사람들한테 전도지를 나누어 주겠습니까.

아니요. 안 나누어 줍니다. 살아생전에 그 사람이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 부자였는지 가난했는지, 많이 배웠는지 아닌지, 그리고 그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이었는지 간에 저는 전도지를 나누어 주지 않지요.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이미 죽은 사람은 백날 복음을 전하더라도 읽을 수도 없고 받아 드릴 수도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살펴볼까요.

마태복음 8장 21절~22절
“21.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한 제자는 지금 예수님께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믿고 따라야 하는 줄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 아버지 때문에 제가 지금 당장 따를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제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 믿어도 되겠습니까.

사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구원이나 복음에 관심을 두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죽은 자가 아니겠느냐. 죽은 자들은 내버려두고 너는 살아 있는 하나님을 따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20장 38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하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10장 14절~15절
“14.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한복음 10장 25절~27절
“2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26.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예수님은 선한 목자라고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을 위해서 목숨까지 버린다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하지면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양을 위해서 목숨까지 버린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리 선한 목자라 하더라도 자기 양이 아닌 다른 양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까. 만약에 남의 양을 지키려고 하다가 정작 자기 양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기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아무리 선한 목자라고 해도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은 무엇보다 자기 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선한 목자가 자기 양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버린 것 같이, 예수님도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는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또 오해가 없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 아버지를 중요하게 여기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과 반대되는 구절을 한 번 살펴볼까요.

마태복음 4장 21절~22절
“21.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형제인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배를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비록 여기에는 ‘아버지를 버려 두고’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정말 갑자기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나왔겠습니까. 만약에 그랬다면 하루아침에 두 아들이 행방불명이 된 것이니 그 집에서는 난리가 났겠지요.

이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렸을 것입니다.

아버지, 이제 제 모든 일생을 걸고서라도 따라야 할 분은 만났습니다. 저는 이제 고기잡이를 그만두고 그 분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면 이 말을 들은 그의 아버지는 말했겠지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너네가 평생동안 고기잡이 밖에 안 해봤는데, 이걸 안 하면 어떻게 먹고 살려고 그래? 그 사람 따라 다니면 월급이라도 준다디?

그래, 좋아, 백 보 양보를 해서 그 예수인지 뭔지를 따라간다고 하자. 아니, 그래도 너희 형제 중 적어도 한 녀석은 남아서 집안을 돌봐야 할 것 아니냐.

뭐, 이런 말을 하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버지를 설득해서 결국 예수님을 따라 나서게 되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개역개정이나 개역한글에는 <버려 두고>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에는 <남겨 두고>라고 되어 있어요. 저는 이쪽이 더 본래 뜻에 가깝지 않을까 합니다.

사실 이 구절을 보면 참 의미심장합니다. 그들이 버려 둔 것, 아니, 그들이 남겨 두고 떠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죠. 바로 배와 아버지였습니다.


배라고 하는 것은 세상적인 생계수단, 말하자면 재물을 뜻하고, 아버지는 세상적인 구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이 두 가지를 미련없이 남겨두고 길을 나섰던 것 아니겠습니까.

이 배와 아버지. 사도 바울은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에베소서 4장 21절~24절
“21.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님의 가르침이 우리 안에 있다고 한다면 이제 남겨둘 것은 남겨두고 믿음의 길을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 욕심과 구습을 대단한 금과옥조라도 되는 것처럼 끌어안고 그 자리에 머물러 계실 작정이십니까.

요한계시록 3장에 보시면 주님은 사데교회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 1절~3절
“1.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우리가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니고 직분을 많이 받았다 하더라도 욕심과 구습에 사로잡혀 있으면 이는 결코 살아있는 믿음이 되지 못합니다. 이미 죽은 믿음인 것이지요.

주님의 말씀을 받아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열매를 맺을 수 있으나, 죽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것도 못합니다. 말 그대로 죽은 나무인데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더 늦기 전에 어서 회개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버려야 할 것은 빨리 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배가 침몰하고 있는데 욕심과 구습들을 버리지 못하고 붙잡고 있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얼마전 인터넷에서 흥미로운 말을 들었어요. 그것은 바로, 교회 안 갈 핑계는 죽을 때까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참 맞는 말 같아요.

하지만 교회에만 다닌다고 구원을 받습니까. 욕심과 구습을 안 버릴 핑계 또한 죽을 때까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것들을 버리지도 못한 채 교회에만 다닌다고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이사야 1장 12절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무작정 교회에만 다닌다고 능사가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른다면, 우리가 주님의 양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온전한 믿음을 갖는 것, 욕심과 구습을 버리고 새사람을 입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는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고 주님을 따름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죽은 자가 아닌 진정으로 살아있는 자, 주님의 진정한 양으로 거듭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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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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