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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7회 더 큰 일을 보리라 - 이루리라선교회
2024년 8월 18일 설교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45절~50절
“45.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7.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32번째 시간으로서 “더 큰 일을 보리라”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시면 예수님 외에 빌립과 나다나엘이 등장하지요. 여기서 빌립은 우리도 잘 아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만 나다나엘에 대해서는 공관복음 즉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등장하지 않고 요한복음에만 등장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어느 한 인물을 주목하게 됩니다. 성경에 보시면 한 인물이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베드로는 시몬이나 게바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바울은 그 이전에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리고 이 나다나엘은 누구냐 하는 점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공관복음에 등장하는 바돌로매라는 사도와 동일인물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빌립과 나다나엘은 친구인 것으로 보입니다. 빌립이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말합니다.

성경이라는 책은 감정적인 면을 상당히 자제해가며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 문장도 그저 평이하게 느껴질 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내용으로 본다면 아마도 빌립은 적지 않게 격양된 상태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는 친구 나다나엘에게 말합니다.

“이봐, 이봐, 내가 어떤 분을 만났는데 말이야, 그 분은 모세가 기록한 율법에도 나와 있는 분이고, 여러 선지자들의 글에 예언된 분인데, 그게 누구냐 하면 요셉이라는 사람의 아들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는 분이야.”

자, 이 말을 들으면 여러분께서는 이 빌립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말에 대해서 살펴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만약에 그가 율법도 모르고 선지자들의 글도 몰랐다면, 다시 말해서 당시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면 그는 이와 같은 말을 하지는 않았겠지요.

다시 말해서 당시 빌립은 성경에 대해서 깊이 알고 있던, 말하자면 상당한 지식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성경에 있어서 분명한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율법과 선지자의 기록 즉 성경에 기록된 바로 그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점입니다.

이는 대단히 놀라운 사실입니다. 당시에 있어서는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 율법학자들처럼 성경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조차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핍박하고 끝내는 십자가에 못 박아버린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 빌립을 보십시오. 사실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모습을 보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만, 빌립은 예수님을 만나고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예수님은 성경에서 예언되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빌립의 생각은 사실일까요?

누가복음 24장 44절~45절
“44.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이 말씀에 의하면 성경에서 예언된 분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시라고 밝히고 계십니다만, 이는 한참 뒤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말했던 말과 똑같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에서 예언된 분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렇죠. 그것은 바로 메시야, 구세주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빌립은 아직 예수님을 만난지 얼마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예수님이 성경에서 예언된 메시야, 하나님게서 보내주신 구세주라는 사실을 간파했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을 보더라도 이 빌립의 성경에 대한 깨달음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나다나엘은 어떨까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빌립의 말을 듣고 난 다음의 반응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말합니다.

내가 말이야 성경에서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분,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분을 만났어, 라고 말하자 그는 어떻게 합니까.

사실 그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분?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분? 그게 어떤 건데? 라고 물어볼 법도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그는 이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뭘까요? 예, 어렵지 않지요. 그것은 바로 나다나엘 또한 빌립 못지 않게 성경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빌립과 나다나엘은 둘 모두 당시에 있어서 남부럽지 않은 상당한 지식인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단,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만났느냐 아직 못 만나느냐 하는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빌립은 말합니다.

“그 분이 누구냐 하면 나사렛 출신 사람인데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야.”

자, 이 부분이 문제입니다. 뭐가 문제냐 하면 구약에는 이 부분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지 않아요.

미가 5장 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기록들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구약에는 구세주 메시야에 대한 기록이 분명 나오기는 합니다만, 그 분이 베들레헴에서 나신다는 기록은 있어도, 나사렛 출신이라는 언급은 없어요.

그리고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기록은 있으나 요셉의 아들이라는 언급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율법도 알고 선지자들의 예언도 아는 나다나엘이라고 해도, 음? 나사렛 출신? 요셉의 아들? 그런 기록은 없는데 어떻게 믿지? 라고 되어버린 것이지요.

더구나 메시아가 탄생한다는 베들레헴은 구약 그것도 창세기에서 이미 등장할 정도로 역사와 전통이 있는 곳입니다만, 나사렛이라고 하는 지역은, 구약에서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는 당시 시각으로 본다면 족보가 없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사실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애굽으로 피신을 가신 다음에 다시 돌아와서는 나사렛에서 성장을 하게 되셨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가만히 보면 아무리 지식이 많다고 해도 자칫하면 그 지식에 갇혀서 진리를 놓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바울도 역시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그는 공부도 많이 하고 그만큼 지식도 풍부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의 지식에 갇혀서 결국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박해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예수님을 믿지 않고 의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믿도록 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47절에 보시면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와서 보라”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빌립은 왜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말을 했을까요. 이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도 직접 가서 봤더니 믿게 되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말을 해도 안 믿어요. 그러자 빌립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 나도 그 마음 알아. 나도 안 믿어졌어.

하지만 직접 가서 보니까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니까. 그러니까 뭐예요? 그렇죠. 너도 와서 직접 만나봐. 그러면 믿게 될 거야.


이렇게 해서 빌립에게 이끌려 나다나엘이 예수님께로 옵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이 아직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예수님이 그를 보시고는 칭찬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1장 47절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은 칭찬을 받았다는 것이 기뻤다기보다는 좀 놀라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요한복음 1장 48절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아니, 어떻게 저를 아시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는 좀 알기 쉬운 말로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아니, 저를 언제 봤다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뭐 그런 뜻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언제 봤냐니,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내가 봤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잖아요.

여기서 일부 신학자들은, 과연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하는 점에 주목을 해가면서, 아마도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이러이러한 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면서, 성경에도 나와 있지 않는 것을 두고 다양한 주장을 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만, 저는 이와 같은 의견에 대해서는 조금 회의적입니다.

그보다 저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에 주목을 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요한복음 1장 48절 후반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예수님께서는 이미 나다나엘을 보시고 인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언제였냐 하면 빌립이 아직 나다나엘을 부르기 전에 보셨다고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를 풀어서 말씀을 드리자면, 우선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알게 된 경위를 보면 어떻게 됩니까. 빌립이 예수님을 만나고는 그 사실을 나다나엘에게 말합니다. 그 이전까지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말하기도 전에 이미 그를 보았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내가 예전부터 너를 알고 있었다……뭐, 그런 말은 마음만 먹으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믿기 위해서는 증거가 있어야 하잖아요.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부터 너를 보았다.

이 말을 들은 나다나엘은 놀랍니다. 그렇다면 왜 놀랐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 자리에 안 계셨을 뿐만 아니라 멀리서라도 보실 수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 아니겠어요.

아니, 어쩌면 그 때는 주위에 분명 아무도 없었을 때였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으로 자신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고, 그 때부터 이미 자신을 주목하고 계셨다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던 것이지요.

이렇게 되자 그는 예수님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요한복음 1장 49절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이 나다나엘의 고백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사실 우리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잘 알고 있지요?

마태복음 16장 16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하는 신앙고백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이 나다나엘의 고백도 놀랍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그래도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 했었습니다만,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나고는 몇 마디 말씀만 나누어 보았더니 곧바로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하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만, 오늘 주목하고자 하는 말씀은 다음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1장 5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보았다는 말을 듣고 나를 믿니? 하지만 놀라기는 아직 일러. 이제부터 너는 더욱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이는 어떻게 보면 성경 전체에 있어서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자, 조금 범위를 좁혀서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서만 알아보도록 할까요.

얼마 전에 말씀에서 언급했던 “예수님이 말씀하시니”라는 찬양 순서대로 한 번 볼까요?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습니다. 성난 파도를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앞을 볼 수 없었던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성경에 보시면 어디 그 뿐입니까.

마태복음 8장에 보시면 베드로의 장모님을 고치셨고, 마태복음 9장에서는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고치셨고, 마태복음 14장에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이 외에도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셨고 그리고 귀신을 쫓아내기도 하셨어요.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은 사역을 하셨을까요. 단순히 주위 사람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고 싶어서요? 아니면 예수님은 원래 그런 일을 하는 분이시니까요?

여기서 잠시 제가 한국으로 오는 날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볼까 합니다.

지난 8월 16일 금요일은 저희가 이제 약 10년에 걸친 일본선교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 상당히 불안한 상황이었습니다. 날씨가 조금 안 좋을 것 같다는 거예요.

그런데 날짜가 다가오자 점점 심상치 않습니다. 하나 둘 일본 주변에 태풍이 보이기 시작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걱정은 안 했습니다. 왜냐하면 5호 태풍이나 6호 태풍의 경우에는 예상 진로가 일본의 북부 쪽을 지나가는 것으로 나왔거든요.

저희가 비행기를 탈 나리타 공항이 있는 치바현이나 비행기 항로에 있어서는 영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7호 태풍 암필이었습니다.

남쪽에서 슬금슬금 올라오는 이 태풍의 진로를 며칠 전에 보니까 저희가 비행기를 타는 8월 16일 오전에 정확히 나리타 공항 상공 부근을 지나간다고 나온 거예요.

자, 큰일입니다. 뉴스에서는 이 기간에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재고하도록 독려합니다.


뭐, 그래요. 단순히 여행을 하는 일정이었다면 연기를 하든 취소를 하든 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미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이사를 하기 위해 여러 개의 스케줄이 모두 잡혀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비행기를 취소하면 되는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제 메일을 받아 보시는 몇몇 분들께 임시로 기도를 당부하는 메일을 보내 드렸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안전하게 예정대로 한국에 갈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 드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스마트폰 일기예보 앱을 보면 그날그날 날씨 모양이 그림으로 나오잖아요?

그런데 8월 16일의 예보를 봤더니 우산에 비가 오는 그림인데 폭풍이 부니까 대각선으로 비가 오는 그림에요. 그것도 폭우입니다.

여기에 또 번개 그림까지 있어요. 그것도 모자라서 <경보>라고 하는 시뻘건 글씨와 <폭풍우 100프로>라고 하는 문구도 곁들여져 있습니다.

제가 일본에서 사는 동안 10년째 그 앱을 쓰고 있는데, 그런 험악한 날씨 그림을 본 건 처음입니다.

뉴스 방송에서는 16일 하루 종일 도쿄와 나고야 간의 신칸센이 운행을 안 하기로 했다고 보도를 합니다.

자, 신칸센도 안 움직이는 그런 날씨에 저희는 뭘 하려고 해요? 예, 비행기, 그것도 국제선을 타려고 하는 것이지요.

제 아내는 제게 말합니다.

“우리 못 가면 어떡하지.”

하지만, 사실 우리끼리 솔직한 말로 하자면, 저한테 무슨 답이 있겠어요.


“괜찮아. 주님께서 길을 열어 주실 거야.”

이렇게 말을 하기는 했습니다만, 정말 제가 믿음이 부족해서 참 많이 불안했습니다.

저 혼자라면 결항이 된다 하더라도 공항에서 밤을 새든 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만, 제 아내까지 있으니까 참 불안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보도록 했습니다. 우선 결항이 되고 혼잡해 지면 공항에 있는 편의점은 동이 날 것이기 때문에, 집을 나서기 전에 빵이나 음료수를 넉넉하게 사가기로 했습니다.


이제 출발 전날인 15일입니다. 사실 비행기는 다음날이긴 했습니다만, 일본 집을 나서는 것은 해가 뜨지 않은 16일 새벽이니 실질적으로는 15일 밤이 되는 샘이지요.

손에 땀을 쥐면서 시시각각 발표되는 태풍 진로를 보았더니, 수직으로 올라오던 태풍의 예상 진로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동쪽 태평양 쪽으로 밀려 가기 시작해요.

그래서 저는, 그래, 조금만, 조금만 더 동쪽으로…… 주님, 조금만 더 밀어주세요……하고 간절히 바랬습니다.

그러나 아직 안심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주님, 제발 한국에만 가게 해주세요. 그러면서 참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결항이 되면 비행기 값은 환불이 될지 모르지만, 다른 여러 가지가 얽혀 있어서, 이미 더 이상 이 집에 머무르고 싶어도 머무를 수 없는 상황입니다.

예정대로 가지 못하면 이래저래 일이 복잡해 집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든 저 태풍을 동쪽으로 좀 더 밀어 주시든지 아니면 아예 없애 주시든지 해주셔서 비행기만 뜨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도해도 태풍이 사라지기는커녕 예상 진로가 더 이상 동쪽으로 밀려가는 것 같지가 않아요. 매정하게도 그냥 나리타 공항이 있는 북쪽으로만 계속해서 올라옵니다.

저희가 탈 비행기 스케줄을 보니까 그 항공사가 그날 세 편이 한국으로 출발하는데, 오후에 두 편은 이미 결항이 결정되었고, 저희가 탈 오전 비행기만 아직 정상표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야말로 풍전등화예요. 언제 오전 비행기도 결항이 될지 모르는 노릇 아닙니까.


이제 참 난감하게 됐구나 어쩌면 좋을까 했습니다. 결국 태풍이 없어지거나 아니면 동쪽으로 더 틀어지게 해달라는 제 기도는 응답 받지 못했어요.

그런데 변화는 다른 식으로 일어났어요.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하면, 태풍 속도가 떨어지는 거예요.

아까는 시속 40킬로로 올라온다고 했던 태풍이 어느새 시속 20킬로로 표시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정확히 비행기 이륙시간 경에 태풍이 상륙한다고 했던 것이 조금씩 늦어져요. 잘하면 저희 비행기가 출발할 오전 중에는 태풍의 영향을 아직 안 받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자, 이제 어쩌겠어요. 그래도 태풍이 온다고 하니, 가는 길에 비를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특히 컴퓨터 모니터 같은 것은 철저하게 포장을 하고는 이제 집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참 놀랍죠. 태풍이 오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저희가 차에 타면 비가 쏟아 부어요. 그런데 차에서 내리기만 하면 비가 개입니다. 나리타 공항까지 버스로 가는 내내 비가 쏟아 부었는데 도착하고 리무진에서 내리니까, 비가 그칠 정도가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 해가 나더라니까요.


그러더니 이제 짐을 부치고 출국수속을 마친 다음에 공항 바깥을 보니까 또다시 비가 내리쳐요.

정말 참 이륙하는 순간까지 정말 이륙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륙하고 나서도 잠시 동안은 정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하고 참 불안했어요.

그러고서 인천공항에 도착니까 얼마나 감사한 마음이 밀려오는지 모릅니다.

아, 정말 주님은 계시는구나. 우리를 위해 이렇게 섬세한 손길로 인도해 주시는구나. 주님! 믿습니다!


그러자 저에게 그런 마음이 듭니다.

“네가 태풍 속을 뚫고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는 것으로 나를 믿느냐.”

그러면서 무슨 마음이겠습니까.

그렇죠. “더 큰 일을 보리라”라는 주님의 말씀이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기쁘고 감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무슨 특별한 선지자라서, 아니면 주님께서 저희만 특별하게 사랑하셔서 이와 같은 마음을 주셨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점에서 앞에 했던 질문으로 한 번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와 같은 사역,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고 성난 파도를 잠잠하게 하시고, 앞을 볼 수 없었던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까. 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던 것입니까.

이유는 명백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지금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을 보고 나를 믿어?

파도가 잔잔해 진 것을 보고 나를 믿어?

병자가 낫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귀신들이 쫓겨난 것을 보고 나를 믿어?

아직 놀라기는 일러. 이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입니다. 태풍을 뚫고 한국에 올 수 있었다는 것으로 나를 믿어? 이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주님을 왜 믿습니까. 병이 나았습니까. 취직이 되었습니까. 돈을 벌었습니까. 그와 같은 기도를 들어 주셨기 때문에 주님을 믿습니까.

물론 그와 같은 응답을 받았다면 기뻐하며 감사를 드려야 하겠지요. 하지만 우리의 믿음이 거기서 멈추어 버리면 안 됩니다.


요한복음 1장 2절~3절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여러분, 우리 주님의 능력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온 천하를 만드실 때 함께 계셨고, 주님 없이 된 것은 하나도 없다고 기록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출에굽기에서 홍해를 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그 정도밖에 안 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고급 레스토랑에서 코스 요리를 시키면 처음부터 고기가 나오지는 않잖아요. 일단 야채나 간단한 것부터 나오고 난 다음에 마지막에 메인 요리가 나옵니다.

우리가 기도응답을 받았다고 한다면, 물론 그것 만으로도 너무나도 감사할 일이지만, 거기서 아, 이제 기도응답을 받았으니 됐다고 하면서 휙 돌아 나오게 된다면 그것은 마치 코스요리를 시켰으면서 처음에 나오는 샐러드만 먹고 나오는 것 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이보다 더 큰 일, 지금까지 보아왔던 주님의 어떤 일보다도 더 크고 놀라운 일을 보게 되실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 오더라도, 끝까지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이루시는 더욱 큰 일, 이제까지 경험해보지도 못한 더욱 크고 기쁘고 놀라운 주님의 일을 보게 되는,

더욱 크고 기쁘고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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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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