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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6회 열매 맺는 믿음 - 이루리라선교회
2024년 8월 11일 설교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3절~9절
“3.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31번째 시간으로서 “열매 맺는 믿음” (実りある信仰)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이지요.

오늘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깊이 이해함으로 인해서 더욱 주님의 말씀을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를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씨를 뿌립니다. 이 씨는 모두 같은 종류예요. 그런데 문제는 떨어진 곳이 다릅니다. 그 유형이 네 가지로 나와요.

첫째 씨는 길 가에 떨어졌습니다.
둘째 씨는 돌밭에 떨어졌어요.
셋째 씨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넷째 씨는 좋은 땅에 떨어졌다고 하십니다.


첫째로 길 가에 떨어진 씨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길 가의 특성은 어떤 점을 들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딱딱한 땅바닥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

길은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입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기 때문에 그 바닥이 아주 딱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래 뿌려진 씨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뿌리가 나와서 땅속으로 들어가야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는데 단단한 길가에 뿌려진 씨는 뿌리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바람이 불면 이리로 굴러갔다가 저리로 굴러갔다가 하니, 어떻게 뿌리를 내려서 영양분을 섭취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된다고 말씀하세요.

그냥 썩어버렸대요? 아니요.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고 하십니다.


이에 대해서 누가복음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8장 12절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道端に落ちたものとは、みことばを聞いても信じて救われないように、後で悪魔が来て、その心からみことばを取り去ってしまう、そのような人たちのことです。

예, 길가에 뿌려진 씨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가서 빼앗아버린다고 하세요.

다음은 돌밭에 떨어진 씨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돌밭은 <밭>이라고 하는 말이 들어가기는 해요. 그러니까 길 가 정도는 아니더라도 흙이 조금은 있다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그 깊이가 얕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뿌리가 나오기는 해요. 거기서 약간의 영양분을 섭취해서 싹이 나오기는 합니다.

하지만 더 이상 뿌리를 내릴 수가 없기 때문에 영양분이 충분하지 않아요.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게 되고 만다는 것이지요.


마태복음 13장 20절~21절
“20.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また岩地に蒔かれたものとは、みことばを聞くと、すぐに喜んで受け入れる人のことです。
しかし自分の中に根がなく、しばらく続くだけで、みことばのために困難や迫害が起こると、すぐにつまずいてしまいます。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요. 아, 할렐루야! 주님! 감사합니다! 하고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금방 식어버려요. 그리고는 무슨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다면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세상으로 돌아가고 우상으로 돌아가버리는 모습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어떻습니까. 이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졌다고 해요.

이에 대해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3장 22절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茨の中に蒔かれたものとは、みことばを聞くが、この世の思い煩いと富の誘惑がみことばをふさぐため、実を結ばない人のことです。

이렇게 보면 돌밭에 떨어진 씨와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가 비슷하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여기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돌밭에 떨어진 경우에는 흙 자체가 별로 없어요. 그래서 뿌리가 내리지 못합니다. 말씀을 들어도 금방 잊어버리고 믿음도 불면 날라가 버리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는 조금 다릅니다. 그것은 땅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땅은 좋아요. 흙도 많고 영양가도 풍부합니다. 그래서 싹도 나고 막 자라나요. 그런데 문제는 온갖 가시떨기 때문에 더 이상 싹들이 자라다가 멎어버려요.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라고 말씀하시잖아요.

무엇이 옳은 지 무엇이 옳지 않은 지 정도는 알아요. 믿음도 있어요. 하지만 뭐예요? 예, 아니, 어떻게 사람이 성경대로만 살아.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니야? 뭐 이러면서 결국 믿음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경우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경우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3장 23절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良い地に蒔かれたものとは、みことばを聞いて悟る人のことです。本当に実を結び、あるものは百倍、あるものは六十倍、あるものは三十倍の実を結びます。」

좋은 땅은 길 가나 돌밭처럼 바닥이 단단하지 않아요. 아주 포근포근합니다. 그리고 가시떨기들도 모두 걷어버렸습니다.

이제 말씀의 씨가 떨어지자 그 씨를 받아 안아 뿌리를 내리고 싹을 뻗어가며 마침내 풍요로운 열매를 맺게 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말씀을 들을 때 그런 생각을 해보신 적이 없으신 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그게 뭐냐 하면, 아니, 애초에 씨를 좀 좋은 땅에 뿌리지, 왜 이상한 데 뿌려서 문제를 일으킬까……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냐 하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가리켜서 이른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고 말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하지만 사실 내용을 보면, 이 말씀에서는 지금 씨를 뿌리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 사람에 의해 뿌려진 씨가 떨어진 땅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비유>라기 보다는 <뿌려진 씨가 떨어진 땅에 대한 비유>라고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의 핵심은 씨를 뿌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 씨가 떨어진 땅이 어떤 모습이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갈 가나 돌밭, 그리고 가시떨기가 있는 땅이나 좋은 땅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인 모습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 하는, 그러니까 우리 마음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상태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폭풍이 몰아치는 배 위에서 예수님께로 향해서 걸어가던 베드로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만, 오늘은 복습하는 의미에서 이 네 가지의 단계와 함께 살펴보면 더욱 잘 이해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우선 길 가에 떨어진 믿음을 가졌다면 어땠을까요.

싹은 고사하고 뿌리도 나지 않을 정도의 단단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아무리 귀한 씨가 떨어졌다고 해도 무용지물입니다. 놀라운 기도 응답이나 넘치는 축복을 기대조차 하지 않아요.


만약에 베드로가 길 가와도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는 물 위로 가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말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 단계는 아니었어요. 그는 기적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분명 나로 하여금 물위로 걸을 수 있게 하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는 돌밭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여러분께서는 혹시 그런 곳을 가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어요. 그, 어떤 높은 곳에 있는 다리나 통로인데 유리처럼 투명한 바닥으로 된, 그런 곳에 가 보시거나 한 적이 있으신지 있으십니까.

예전에 저도 한국에 있을 때 그런 곳을 본 적이 있어요. 꽤 높은 곳에 있는 전망대인데 거기에 보면 투명다리가 있었어요. 저는 생긴 것 답지 않게 겁이 좀 많은 편입니다. 그리고 세상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믿음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저는 기본적으로 번지점프의 밧줄에 대한 안전성을 믿지 않아요. 그리고 그런 투명바닥의 안전성은 믿지 않습니다.

제 앞에 투명바닥이 있고 아무리 튼튼한 강화유리로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저는 발을 앞으로 내딛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돌밭과도 같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베드로의 경우에도 만약에 돌밭 같은 믿음 밖에 없었더라면, 아무리 물위에 설 수 있었다고는 해도 그 다음에는 다리가 후들거려서 더 이상 앞으로 걸어갈 수가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베드로는 어땠습니까. 예,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참 대단하다고 할 수 있을지 않을까 해요. 그는 그 마음 안에 강한 믿음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됩니까.

마태복음 14장 30절 전반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ところが強風を見て怖くなり、沈みかけたので……

예, 그렇죠. 바람을 보고 무서워 했더니 그만 빠져갔다고 합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베드로는 내부적으로는 좋은 땅이었어요. 뿌리도 내리고 싹이 날 만큼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갔더라면 풍성한 믿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외부적으로 가시떨기를 만났을 때 그는 외부적인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게 되어 결국 넘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앞서 말씀드린 네 가지 땅의 모습은 우리 믿음 상태를 나타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자,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있어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믿음은, 어느 상태라고 생각되십니까.

첫째, 길 가의 믿음 상태
둘째, 돌밭의 믿음 상태
셋째, 가시떨기의 믿음 상태
넷째, 좋은 땅의 믿음 상태

이 중에서 우리가 이 시대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경계해야 할 믿음 상태라고 생각하십니까.


우선 넷째는 아니겠지요.

좋은 땅에 떨어진 믿음 상태가 경계 대상이 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땅과도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럼 세 개가 남았네요.

첫째, 길 가의 믿음 상태
둘째, 돌밭의 믿음 상태
셋째, 가시떨기의 믿음 상태

이 시대에 있어서 가장 경계 대상이 될 수 있는 믿음 상태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되십니까.

많은 분들은 가시떨기의 믿음 상태라고 말씀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믿음은 있으나 외부적인 요인에 막혀서 결국 믿음이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막혀버리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할 수도 있겠지요.

물론 맞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는 요즘이라기 보다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후로 지금까지 몇 백 년, 몇 천 년에 걸쳐 계속해서 경계가 되어온 상태가 아닌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는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상태는 바로 첫째 상태, 즉 길 가의 믿음 상태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던 그 이후로,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만큼 수많은 말씀이 뿌려진 시대는 없었지 않을까 합니다.

오늘 이 순간도 목회자나 선교사에 의해 얼마나 많은 말씀이 뿌려지고 있습니까.

하지만 그 말씀들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이런 말씀을 드리면 우리 자신은 상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예수님을 잘 믿고 있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하십니까.

자, 이 시점에서 우리 자신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성경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한국에서 제가 다니던 교회에 보면 적어도 몇 달만 다니면 외우게 되는 성경구절이 있지요. 바로 요한3서 2절입니다.

요한3서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愛する者よ。あなたのたましいが幸いを得ているように、あなたがすべての点で幸いを得、また健康であるように祈ります。


하지만 수십만명이 있다고 하는 그 교회 성도님들 중에서 이 성경구절을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분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성경말씀 중에서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구절을 올바로 이해하고 계신 분들은 또 얼마나 계실까요.

우리에게는 수많은 말씀의 씨들이 뿌려지고 있습니다. 어려울 것 없어요. 우리 주변에 있는 성경책만도 보세요. 교회 몇 년 다니신 분이시라면 집에 성경책이 어디 한 권 뿐이겠어요?

하지만 그 성경책을 몇 번이나 읽으셨으며 어느 정도 이해하고 계십니까.


그냥 교회 다니기만 하면 성경을 알게 되나요? 성경책을 들고 기도하거나 성경책만 들고 왔다 갔다 하기만 하면 성경이 머리 속에 들어옵니까.

주일설교 말씀만 들으면 성경을 이해하게 되나요? 직분을 받으면? 성경학교 과정을 몇 개월 하면 성경을 알게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일본에 있으면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일본어를 가르치기도 했었습니다만, 그분들 중에는 일본생활 10년이나 20년, 하물며 저보다도 일본생활이 오래된 분들도 계세요.

그런데 그 중에는 일본어 실력이 상당히 부족한 분들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 이유가 뭐예요? 예, 그렇죠. 더 이상 배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전에 강사 회의 때 보니까 어떤 고참 일본인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일본어능력시험은 평소에 쓰지 않는 단어들도 많이 나오기 때문에 일본어실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물론 저는 그 자리에서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만, 사실 그 말씀을 듣고 참 답답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 생각해보세요. 일상생활에서 쓰는 말만 쓰면 일본어실력이 느나요? 그냥 일본에 살기만 한다고 해서 늘어요? 아니에요. 안 늘어요.


한국어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외국인이 한국에만 산다고 해서 한국어가 느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외국인이 한국에서 생활을 하는데,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비싸요. 맛있어요. 그런 식으로 맨날 쓰던 말만 쓰고 다른 것은 모른다고 한다면, 수 십년간 한국에 산다고 해서 말이 늘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교회에 오래 다닌다고 믿음이 좋아지지 않습니다. 성경 여기저기를 부분적으로만 반복적으로 듣는다고 말씀을 이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13장 23절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良い地に蒔かれたものとは、みことばを聞いて悟る人のことです。本当に実を結び、あるものは百倍、あるものは六十倍、あるものは三十倍の実を結びます。」

그렇습니다. 말씀을 단순히 듣는 것만이 아니라 깨달을 때에 비로소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성경은 안 보고 그저 기도만 하려는 분들이 종종 계십니다. 간혹 보면 그 중에는 대단히 독특하게 기도하시는 분들 계세요.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불로 불로 불로 불로, 오~ 주여~ 렐렐렐렐렐…… 어떤 분은 또 보니까 계속해서 무슨 예수의 피, 예수의 피, 예수의 피……라고 하면서 기도만 해요. 그러면서 그렇게 기도하니까 응답 받았다는 거예요.

자, 그게 과연 믿음입니까. 기독교인가요? 아닙니다. 그건 또다른 우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건 무슨 주문이지 어떻게 그게 기도입니까.

사실 말씀이 길바닥에 떨어져서 그냥 거기서 굴러다니기만 한다면 문제가 작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된다고요?

누가복음 8장 12절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道端に落ちたものとは、みことばを聞いても信じて救われないように、後で悪魔が来て、その心からみことばを取り去ってしまう、そのような人たちのことです。


예, 그렇습니다. 길 바닥에 떨어진 말씀들을 마귀들이 가져간다고 하시잖아요.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보시면 얼마나 사이비 집단들이 많이 있습니까.

성경을 자기 멋대로 끼워 맞춰서 자기들이 재림예수라고 하고 자기들이 보혜사라고 하고 자기들이 메시야라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문제는 그런 집단들의 꾀임에 어떤 사람들이 넘어갑니까. 놀기 좋아하는 사람, 불성실한 사람들이 넘어가나요? 아니에요. 그런 집단에서 어떻게 사람들을 유인합니까. 예, 자기들과 성경공부를 같이 하자고 하면서 유인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기존 교회에서 성경을 올바로 가르치고 있다면, 지금 자기가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 공부하면 되니까 굳이 그런 곳에 넘어갈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자기 교회에서는 성경을 가르치지 않아요. 그러니까 성경말씀을 열심히 배우려고 하다가 그만 이단 사이비에 빠지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고 하지 않습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게 다 누구 책임이에요? 마귀들 책임인가요? 그것보다는 우리 스스로가 성경을 올바로 알지 못해서 아니겠습니까. 성경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성경을 올바로 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더 이상 말씀을 마귀들에게 빼앗길 수 없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귀한 영혼들을 마귀에게 빼앗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성경 말씀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인 것입니다. 그래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신앙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보다 성경 말씀을 올바로 알아 감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좋은 땅으로 가꾸어 감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30배 60배 그리고 100배 1000배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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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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