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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1회 [면류관 강해 제2회] 최초의 축복과 저주 - 이루리라선교회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 23절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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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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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면류관 강해 2번째 시간으로서 “최초의 축복과 저주”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른바 구원의 취소, 그러나 저는 단순히 ‘구원의 취소’라기 보다는 더 구체적으로 ‘구원이라는 약속의 취소’라고 하는 편이 보다 적절하지 않을까 합니다.

구원이라는 약속의 취소. 이 점에 대해서 이를 긍정하는 의견,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약속은 취소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의 근거로 제시하는 구절이 히브리서입니다.

히브리서 6장 4절~6절
“4.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이 구절에 대해서도 면류관 강해 중에서 자세히 다루게 될 것입니다만, 사실 성경에 보면 이 외에도 대단히 많은 곳에서 ‘구원이라는 약속의 취소’에 대한 개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이 ‘구원이라는 약속의 취소’라는 내용을 담게 될 면류관 강해를 본격적으로 시작함에 있어서 이 강해의 핵심이 되는 구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본 구절에 의하면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즉 면류관을 빼앗기지 못하게 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지 않습니까.

지난 주에 알아본 바와 같이 면류관은 누가 주시는 것입니까.


디모데후서 4장 8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바울은 자신을 위해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하며, 그 면류관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주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주님께서 주시는 이 면류관을 빼앗기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어렵지 않습니다. 빼앗기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 그것은 바로 빼앗길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러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를 위해 예비된 면류관은 절대로 빼앗기는 일이 없다면 주님은 이와 갈이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시록에 의하면 주님께서는 친히 이를 빼앗기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요한계시록의 이 구절은 이 면류관 강해에 있어서 핵심이기 때문에 이 강해 동안에는 그 날의 본문구절과 함께 우선 이 핵심구절도 함께 읽고 본론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자, 요한계시록 3장 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예,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약속된 면류관을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창세기 1장 1절부터 보실까요.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 방송국에서 어떤 한 여성을 밀착취재를 했다고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아침에 그 여성이 일어나더니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서요. 그래서 어디를 가나 하고 카메라가 따라가 보았더니 시장에 갔습니다. 거기서 여러 가지 음식재료를 삽니다.

그 다음에는 마트에 가서 또 여러 가지 재료를 삽니다. 그것 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이제 백화점에 가서 실내외를 장식할 물건들도 사왔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집 안과 바깥을 아주 정성스럽게 꾸밉니다. 그리고는 구입해온 최고급 자료를 써서 그야말로 진수성찬을 차렸습니다.

몇 시간 동안 집도 꾸미고 음식도 열심히 했는데 이제 저녁 6시쯤이 되자 누군가가 집의 벨을 눌러요. 그래서 문을 열었더니 어떤 남성이 활짝 웃으면서 들어옵니다.

알고 보니 그 여성의 남편이 며칠 동안 먼 곳에 출장을 갔다가 그 날 돌아오는 날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 여성은 남편을 환영하기 위해 아침부터 정성스럽게 준비했던 것이지요.


도중까지 본다면 그 여성이 왜 그와 같은 준비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먹으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디 여행을 가려고 도시락 준비를 하는지 알 길이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제일 마지막까지 지켜보았더니 그제서야 모든 목적을 알 수 있게 되었던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그 여성이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서 여기저기 바쁘게 다니면서 쇼핑도 하고 그리고 집에 와서는 하루 종일 집도 꾸미고 요리도 하고 그랬던 것은 모두 다 누구를 위해서예요?


예, 그렇습니다. 모두 다 그의 남편을 위해서 준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앞에 있어왔던 모든 일들은 다 어디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그렇죠. 그의 남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여성의 모든 일은 다 그의 남편을 위한 일이었던 것이기 때문에 그의 남편을 제외해버린다면 모든 일들이 무의미해지고 만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창세기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기록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빛을 만드시고는 빛과 어둠을 나누세요. 물과 궁창을 나누시고는 육지를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채소와 나무들을 만드십니다. 해와 달을 만드세요.

뿐만 아니라 바다와 육지와 하늘 위에 많은 생물들도 만드셨습니다.

이런 표현이 적절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참 열심히 일을 하세요.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많은 것들을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까.

그것은 마지막 날에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창세기 1장 26절 이하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여섯째 날에 사람을 만드셨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천지창조는 모두가 다 ‘사람’이라고 하는 피조물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이는 무엇을 말해줍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은 바로 사람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에는 지금까지 다른 생물들을 만드셨을 때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다른 생물들을 만드셨을 때와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바로 사람의 창조 목적인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 모양대로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사람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이 세상에 수많은 생물들을 창조하셨다고는 하지만, 이와 같은 축복을 주신 피조물은 오로지 사람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말씀해 주고 계신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는 구체적인 축복도 주셨습니다.


창세기 1장 29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창세기 2장에 의하면 에덴 동산은 전체가 아름다운 귀금속이나 보석으로 넘쳐나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곳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의 · 식 · 주 문제, 뿐만 아니라 죽음도 질병도 없는 완전하고도 완벽한 세상에서 큰 기쁨과 함께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세상입니다.


누구는 그렇게 말합니다. 집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숲속에서 그냥 먹고 자고 하는 것인데 뭐가 좋겠냐는 거예요.

혹시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 질문을 드립니다. 제가 여러분께 종이를 나누어 드리고 시간을 충분히 드릴 테니까 여러분 집에 있는 것, 여러분 것이든지 여러분의 가족 것이든지, 아무튼 여러분 집에 있는 것을 모두 적어 보시기 바랍니다. 가능한 한 자세히 적는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몇 가지 정도를 적으실 수 있을까요. 실제로 적어보지는 않는다고 해도 한 번 구체적으로 자세히 하나하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 머리 속으로라도 여러분 집에 있는 것들을 자세하게 적으셨나요?

그럼 제가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지금 적으신 그 목록에 ‘지우게’를 적었나요? ‘양말’이라고 적으셨나요? ‘귀이게’라고 적으셨나요? ‘손톱깎이’라고 적으셨나요? ‘가위’라고 적으셨나요?

제가 지금 다섯가지를 말씀 드렸지요? 지우개, 양말, 귀이게, 손톱깎이, 가위……이 중에서 여러분 집에 하나도 없는 분 계십니까. 만약에 그런 분이 계시다면 저한테 말씀해 주세요. 언제 제가 여러분 댁에 심방 갈 일이 있다면 예쁜 것으로 하나 구입해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설령 이 다섯가지 전부가 다 집에 없다 하더라도 이 중에서 한 두가지 정도는 있지 않겠어요? 하지만 여러분 집에 있는 물건 목록을 적어 보시라고 했을 때, 이와 같은 것들까지 적은 분들이 얼마나 계시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것들을 안 적은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아니 뭐 그런 게 대단한 거라고 꼭 적어야 해. 그거 아니에요? 그야 맞는 말씀이지요. 지우개나 가위 같은 것이 무슨 대단한 재산이라고 재산목록에 적겠습니까.

자, 에덴이 어떤 곳이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그 곳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마련하신 가장 완전하고도 완벽한 세상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런 곳에 집도 없고 잘 곳도 없어요?

예를 들어서 성경에 집이 있었다거나 침대가 있었다거나 하는 언급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완벽한 세상에 그와 같은 것들보다 더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 있었으면 있었지, 그저 불편하게 맨날 흙위에서 먹고 자고 해서 온몸이 흙 범벅이었고 하는, 그와 같은 지저분한 생활을 아담과 하와가 보내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더 말이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내용, 구체적으로는 에덴에 어떤 시설이 있었고 얼마나 쾌적한 생활 공간이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전해주고자 하는 핵심 내용과 관련이 없기 때문에 굳이 그와 같은 점에 대해서 기록이 없는 것뿐이지, 실제로는 아무리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쾌적하다 하더라도, 그저 사람들이 만들어낸 불완전한 세상을, 당시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것을 창조하신 에덴 동산과 어떻게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간혹 보면 과거 에덴이 어디에 있었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여기다 저기다 하고 주장을 하는 분들이 계세요.


그러면서 창세기 2장 14절에 보면 “유브라데”라는 강 이름이 나오는데, 그 이름이 지금도 이라크나 시리아 쪽에 흐르고 있는 유프라테스 강과 이름이 같다고 해서 아마도 에덴은 그쪽에 있었을 것이라고 하는 분들도 계세요. 그래서 그 쪽을 잘 찾으면 과거 에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씀까지 하십니다.

하지만 성경 기록을 사실이라고 받아들이는 저희로서는 이는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노아 때에 일어난 홍수 때문인 것입니다. 당시 홍수는 그저 하늘에서 비가 많이 온 정도가 아닙니다.

창세기 7장 11절~12절
“11.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12.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지난 2011년 3월 11일에 일본에서 발생한 동일본대지진의 경우를 본다면 단 한 번의 지진과 쓰나미로 그 쪽 지형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노아 때 홍수를 보면 한 두 번도 아니고, 그리고 일부 지역에만 일어난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성경 기록에 의하면 깊음의 샘들이 터졌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는 단순히 하늘에서 비가 왔다는 정도가 아니라 지면에서도 지하수가 터져서 쏟아진 것이고, 그리고 어느 특정 지역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지구 전체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지각변동이 일어났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전세계적인 지진이나 홍수가 하루나 이틀만에 끝난 것이 아니라, 창세기 7장 24절에 의하면 물이 가득차 있었던 기간만 보더라도 150일이나 되었고,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에 들어갔다가 나온 날을 본다면 1년 이상이라고 하는 긴 기간입니다.


그러니 그런 상황에서 홍수 이전에 있었던 에덴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리고 그 모습이 어땠는지 찾아낸다는 것은 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이 좀 길어졌습니다만, 요컨대 에덴이라고 하는 곳은 첫째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시기 위해서 마련하신 곳이고, 둘째로 그 곳은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완벽하고 완전한 세상이었다는 점입니다.

사실 이와 같은 축복을 누려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최초의 사람이었던 아담과 하와 이후에는 노아의 홍수 이전이라 하더라도 에덴에 들어가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인 에덴에서 추방을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창세기 2장 16절~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에덴에는 수많은 각종 나무 열매들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은 먹어도 되지만, 단 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최초의 율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키기가 어려운가요? 수많은 열매를 먹지 말고 그것만 먹으라는 것도 아니에요. 다른 건 아무리 많이 먹어도 되지만, 유일하게 그것만 먹으면 안 된다고 하신 것이잖아요.

우리가 성경에 있어서 본다면 ‘사랑’만 강조하기 십상인데 사실 여기에는 사랑만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순종’인 것이지요.

사실 사랑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더할 나위 없는 순종이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순종의 책입니다. 사랑도 순종입니다. 순종과 구원은 뗄래야 뗄 수가 없는 불가분의 개념인 것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기록된 책이 바로 성경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경은 구약 창세기에서부터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래도 사람들이 못 알아들으니까 어떻게 하셨습니까.

빌립보서 2장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순종이 무엇인지 모르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순종인지 알아듣지 못하니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알고 계시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래서 에덴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많은 것을 원하지 않으셨던 것 아니겠습니까.


네가 무엇을 먹든 무엇을 마시든 어디서 무엇을 하든 괜찮아. 다만 단 하나, 내가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 열매만 먹지 않는다면, 그 작은 명령 하나만 지켜준다면, 네가 나에게 온전히 순종한 것으로 생각하고 너에게 누르고 흔들어 넘치는 축복을, 언제까지요? 예, 영원토록 부어 줄게.

하나님께서는 그러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사람은 그 작은 약속 하나를 지키지 못했지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에덴에서 마귀에게 유혹을 당했을 때의 모습을 보시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 5절~6절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사람이 유혹에 넘어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보다 어기는 것이 자기에게 더 유익하다고 판단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지금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악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세상에는 정말 좋은 사람들도 많지만 나쁜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그와 같은 나쁜 짓을 저지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말 자기는 악인이 되어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겠다고 작심했기 때문일까요.

물론 그런 사람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자기는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줄 알았어요. 그렇게 하는 것이 나에게 있어서 더욱 좋게 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그런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어기고 자신의 생각대로 판단하고 행동하게 된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7절~19절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세기 3장 23절~24절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이제 그들에게 주어졌던 놀라운 축복은 모두 빼앗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영원한 생명도 빼앗기고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를 두고서도 구원이라는 약속의 취소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한 번 주어진 면류관은 빼앗기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창세기 5장 5절에 의하면 아담은 930세까지 살고 죽었다고 합니다.

솔직히 아담과 하와가 천국에 갔는지 지옥에 갔는지는 알 수가 없지요. 여기에 대해서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큰 소리로 주장을 해봤자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장에 불과합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축복을 빼앗기고 결국은 에덴에서 쫓겨나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타락한 그들에게 또다시 축복이 회복되고 에덴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지 않습니까.


로마서 11장 21절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최초로 만드셨던 아담과 하와도 그들이 불순종을 하였을 때 가차없이 모든 축복을 빼앗아 버렸는데 하물며 우리가 불순종을 했을 때 우리에게서 빼앗지 않으신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히브리서 12장 28절~29절
“28.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9.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우리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약속, 구원의 약속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기서 안심하는 것이 아니라, 경건함과 두려움을 가지고 더더욱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을 섬기는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약속된 생명의 면류관, 구원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을 끝까지 지키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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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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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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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제 지난 주까지 이어온 복음서 강해는 44회로 일단 마무리를 하고, 오늘부터 저는 여러분과 함께 <면류관>을 주제로 해서 <지켜야 할 면류관>이라는 제목으로 새롭게 강해를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면류관 강해 그 첫 시간으로서 <믿음의 시작>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있어서 교회가 위기라고 합니다. 기독교 인구 수는 줄어가고 있으며, 반면에 이단이나 다른 종교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복음이 잘못되어서 그렇습니까. 성경이 잘못되어서 그렇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하고도 완전한,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의 기독교는 왜 이렇게 쇠퇴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요리책이 있다고 해요. 그 요리책은 아주 유명한 요리사가 쓴 것인데, 그 요리사가 운영하는 식당은 대단히 놀라운 성장을 하고 있다고 해보죠.

그래서 나도 어디 한 번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보자 하는 마음에 그 책을 샀습니다. 그리고 요리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요리가 정말 맛이 없어요.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요리책이 잘못 되어서요?


아니에요. 그 책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 검증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만든 요리가 맛이 없게 되고 말았다는 경험이 있으시다는 분 많이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요리책은 아니지만 어렸을 때 프라모델을 만들고 그럴 때 그와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분명히 설명서대로 한다고 했는데, 아무리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해도 이상하게 작동이 안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모든 원인이 다 요리책이나 아니면 프라모델 설명서에 있는 것입니까.

물론 간혹 가다가 그런 경우도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만, 대부분은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경우가 많겠습니까.

그렇죠.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것이죠.

분명히 넣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안 넣었다든지, 아니면 넣지 말아야 할 것을 넣어버렸다든지, 또는 넣기는 넣었는데 그 분량을 잘못 넣었다든지 하는 그 원인이 있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프라모델도 그렇지요. 설명서대로 하지 않고 엉뚱한 부품을 가져다가 붙이려고 했다거나 아니면 다른 곳에 연결을 해버렸기 때문에 작동하지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그 책이나 설명서를 보고 만들었다고 하는 그 요리나 프라모델이 이상한 이유는 그 책이나 설명서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한테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 교회가 쇠퇴하고 있는 이유도 그 원인이 복음이나 성경이나 하물며 예수님한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 나 자신에게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잘못하고 있기에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있어서 교회가 이처럼 문제 투성이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요리책이나 설명서 잘못이 아니라 요리책이나 설명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음식맛이 이상해 지는 것이요, 프라모델이 이상해지는 것인 것처럼, 성경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에 교회가 망가지고 복음이 오염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 것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15절~16절
“15.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여기에 등장하는 편지는 바울이 쓴 서한을 말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로마서나 고린도서, 데살로니가서나 갈라디아서 등의 성경은 모두가 다 바울이 쓴 편지입니다.


아직 신약성경이 없었던 당시에는 바울이 편지를 통해서 믿음을 심어주고 말씀을 풀어주고 그리고 행함을 인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간혹 그 내용을 본래 뜻이 아닌, 이상하게 풀어버리는 바람에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멸망에 이른다고 성경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오해한다고 하면 우리는 이단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대부분의 이단들은 어떻게 성경을 풀게 됩니까. 대표적인 예가 자신들의 교주는 재림 예수라고 하는 경우를 볼 수 있겠지요.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하는 말씀이 반복해서 기록되어 있지요.

그런데 성경을 자기들 멋대로 해석해서 주입시키고는, 장차 다시 오실 예수님이 바로 자기라고 하면서 자기를 떠받들면 구원 받고, 자기 말을 안 들으면 멸망한다면서 결국은 자기한테 돈 갖다 바치고 재산 갖다 바치고 그리고 시간이나 몸까지도 갖다 바치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다른 대표적인 주장이 바로 시한부 종말론입니다.

성경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말씀들을 억지로 왜곡해서 끼어 맞추어 놓고는 몇 년 몇 월 몇 일에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거나, 아니면 이 세상이 멸망할 테니까……그러면서 역시 교주 말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는 것, 각 이단 사이비들 마다 앞에 붙은 문구들은 좀 다를지 모르지만, 그 목적은 대부분이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와 같은 일은 한국만이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도 없이 있어 왔던 일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새롭다기보다는 식상하다는 말이 더 맞겠지요. 이러한 일들은 이후에도 또다시 반복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런데 말이에요. 이처럼 성경을 오해하거나 억지로 푸는 것이 과연 이단이나 사이비들만 그런가 하는 것이지요.

앞서 말씀 드렸듯이 성경을 올바로 받아들이고 이 말씀에 순종한다고 하면 교회는 나날이 부흥할 것이요,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교회는 나날이 쇠퇴하고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여기에 대한 결론은 하나, 이단이나 사이비가 아닌 우리 스스로에 있어서도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저는 몇 년 전부터 문제의식을 가져온 것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주장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지 그 동안 주저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목사 이전에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와 같은 부분에 대한 주장은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고, 그리고 이로 인해서 성경말씀이 올바로 우리 안에 심어지게 됨으로 말미암아 복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다고 한다면, 이는 더 이상 묵과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주장은 무엇인가 하면, 바로 구원의 취소입니다.


일반적으로 ‘구원의 취소’라고 하는 개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한 번 구원 받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구원이 취소되어 멸망하는 경우가 있는가.

더 쉽게 말하자면 한 번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는데 나중에 그 구원이 취소 되어져서 지옥에 떨어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이른바 ‘구원’이라고 한다면, 이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는 아직 천국 하나님 아버지 나라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입니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4장 3절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갈라디아서 3장 6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야고보서 2장 23절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 말씀은 구약성경의 한 구절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창세기 15장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의로 여기셨다는 것은 것 비록 아직은 이 땅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당장 천국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장차 천국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셨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장차 구원 받을 자격,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무엇을 하였기에 의로 여겨졌다고 되어 있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무슨 이유로 아브라함에게 구원 받을 자격을 주셨습니까.

성경에는 이점에 대해서 “여호와를 믿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무슨 선행을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더니 그것으로 인하여 의로 여기심을 받았다, 즉 구원 받을 자격이 주어졌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겠지요.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어떤 행위를 했을 때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을 때 바로 구원이 약속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원이 약속되었습니다. 누구는 세례를 받아야지만 비로소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이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세례라고 한다면 이는 신앙을 가졌다는 징표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세례를 받음으로써 정식교인이 된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이를 구약적으로 본다면 할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경우를 본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의로 여기신 그 시점이 할례를 받기 전이었을까요, 아니면 할례를 받은 다음이었을까요.

이는 성경을 보면 명확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셨다고 하는 시점이 15장 6절이라고 한다면, 한편 할례는 언제 등장하는가 하면 창세기 17장 10절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아직 할례를 받지 않은 시점에서 의로 여기심을 받았다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있어서도 구원을 받을 자격이 주어진 시점과 세례는 무관하다고 할 것이고, 오로지 주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한 그 시점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로 여기심을 받은 시점, 말하자면 구원을 약속 받은 시점이라고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약속을 받은 시점, 구체적으로 믿음의 시작을 어느 시점으로 보아야 하겠습니까.


요엘 2장 32절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로마서 10장 10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10장 13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와 같은 성경말씀에 비추어 보아 우리가 믿음을 시작한 시점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신앙을 고백한 시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신앙고백이 있다고는 하지만 대표적으로 사도신경을 꼽을 수 있겠지요.

세례를 받거나 특별한 형식을 갖추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마음으로 사도신경에 담긴 내용을 믿고 입으로 “전능하사 전치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라는 신앙고백을 했을 때 우리의 믿음은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였을 때 우리의 신앙은 시작되고,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마지막 날에 구원에 이르는 자격, 하나님 나라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약속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이 놀랍고도 기쁨에 찬 구원의 약속은 과연 절대적인가 하는 점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8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마지막으로 남긴 서신이라고 합니다.

이제 주님 앞으로 나아갈 날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았던 바울은 자신을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는 자신에게 만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도 이와 같다고 기록합니다.

우리가 신앙고백을 함으로써 주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고 이제 믿음을 갖게 되고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서게 되는 그 날까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보내게 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요.

우리는 기쁨으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요, 마지막 그 날에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비록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함으로 인하여 구원의 약속을 받았는데, 남은 생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버리고 믿음에서 벗어나 타락했을 때에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번 구원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 나중에 주님을 저버리고 신앙을 저버렸을 때에도 여전히 구원, 천국백성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구원의 약속은 취소가 되는 것인지 하는 문제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회개를 했다면 문제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3장 19절
“19.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에베소서 1장 7절
“7.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요한일서 1장 9절
“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예수님의 보혈에는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주님 앞에 고백하고 주님께로 돌아온다면 어떠한 죄라 하더라도 주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아 천국백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치만 문제는 회개를 하지 않았을 때에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이지요.


한 번 하나님을 믿어서 구원이 약속되었는데 그 다음에 타락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회개를 하지 않더라도 구원의 약속이 취소되지는 않는 것인지, 아니면 아무리 한 번 구원의 약속을 받았으나 죄를 짓고 타락을 하게 되면 한 번 받았던 구원의 약속은 취소가 되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일반 성도님들과 전문적 신학지식이 있는 분들과의 사이에서 견해가 갈리지 않을까 합니다.

짐작하건대 일반 성도님들이 생각하기에는, 아무리 처음에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나중에 믿음을 버리게 된다면 구원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처음에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생활을 했었다고는 하지만, 나중에는 신앙을 버리고 다른 우상을 계속 섬기다가 죽었어요. 그렇다면 그 사람도 역시 처음에 구원의 약속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천국에 간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기에 있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여기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런 의견을 가지고 있을까요. 만약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이번 주라도 교회에 가셨을 때 목사님께 한 번 여쭈어 보시기 바랍니다.


“한 번 받은 구원의 약속이 타락함으로 인하여 취소될 수 있습니까.”

그런 질문을 드리면 특히 장로교나 침례교의 대부분의 목사님들께서는 “한 번 받은 구원은 취소되지 않습니다”라는 놀라운 답변을 듣게 되실 것입니다.

아니, 그렇다고 이것이 이단이나 사이비라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정통 복음주의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회의 목사님이나 신학자 분들의 견해가 그렇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의견이 나오는 대표적인 견해는 장로회를 창시한 장 칼벵에서 볼 수 있습니다.


조금 어려운 말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장 칼벵의 5대교리라고 하는, 이를 영문 첫 글자를 따서 TULIP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 중에서 마지막 다섯 번째의 교리가 이른바 ‘성도의 견인’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성도는 구원의 취소가 없다고 보는 것이지요.

여러분께서는 이 의견에 동의를 하십니까. 한 번 주어진 구원은 죄를 짓는다고 해서,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았는데도 단지 한 번 구원이 주어졌다고 해서 취소가 되지 않는다는 의견에 동의가 되시나요?


어떤 분은 그럴 리가 있겠냐고 하실 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것이 장로교회 침례교에서 주장하는 엄연한 교리의 원칙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셨던 어떤 분은 제가 예전에 이런 말씀을 드렸더니 너무나도 생소한 의견이라고 하면서 제 말을 반신반의 하더라고요. 그렇지만 이와 같은 견해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자료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는 좀 지난 기사이긴 합니다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독교 일간지 국민일보 2017년 2월 23일자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목회자 500명에게 물었더니, 절반 가까이 "구원 잃어버릴 수도 있다"

이 내용에 의하면, 총신대학교 실천목회연구과정에서 약 1년에 걸쳐서 초교파로 목회자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다고 하는데, 이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할까. 아니면 중간에 잃어버릴 수도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52.5%가 “구원은 그래도 영원하다”라고 답한 반면, 절반에 가까운 47.5%가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조사는 오차범위가 ±5.75%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가’라고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오차범위 안에서 거의 절반이나 되는 목회자 분들이 “구원을 한 번 받았다 하더라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교리상으로 보면 구원은 취소가 없다고는 하기에 공식적으로 말을 할 수는 없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계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오늘부터 시작한 이 면류관 설교에 대해서 이제 이와 관련된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은 신학자나 목회자에 의해 적혀진 종교서적이 아니고 당연히 성경을 바탕해서 진행될 것입니다.

이제 이 성경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 올바로 심겨짐으로 말미암아 30배 60배 100배, 300배 600배 1000배의 복음의 열매, 축복의 열매를 맺게 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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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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