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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0회 항복선언과 감사
2021년 10월 2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7장 20절~25절
“20.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ローマ人への手紙 7章20節~25節
“20.私が自分でしたくないことをしているなら、それを行っているのは、もはや私ではなく、私のうちに住んでいる罪です。
21.そういうわけで、善を行いたいと願っている、その私に悪が存在するという原理を、私は見出します。
22.私は、内なる人としては、神の律法を喜んでいますが、
23.私のからだには異なる律法があって、それが私の心の律法に対して戦いを挑み、私を、からだにある罪の律法のうちにとりこにしていることが分かるのです。
24.私は本当にみじめな人間です。だれがこの死のからだから、私を救い出してくれるのでしょうか。
25.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を通して、神に感謝します。こうして、この私は、心では神の律法に仕え、肉では罪の律法に仕えてい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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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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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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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56번째 시간으로서 “항복선언과 감사” 降伏宣言と感謝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금은 천국에 가셨습니다만 한국의 옥한흠 목사님이라고 하면, 한국에서 사랑의 교회를 세우시고, 지금도 많은 분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목사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영상으로 목사님 설교 말씀을 들어본 적이 있는데, 그 때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목사님이 젊으셨을 때 미국의 희곡인 ‘세일즈맨의 죽음’ セールスマンの死 (Death of a Salesman) 이라고 하는 작품을 보시고는 연극에 대한 매력을 느끼셨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저도 역시 연극에 대한 매력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옥한흠 목사님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희곡을 접한 것은 아닙니다만, 여러분께서는 혹시 일본에 유리 가면이라는 만화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문학작품과 일개 만화라고 한다면 너무 수준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냐 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유리가면이라고 한다면 한국에서도 꽤 알려진, 그래도 만화 중에서는 비교적 수준이 있는 만화가 아닐까 합니다.

제가 처음으로 그 유리가면 만화 제1권을 다 읽고 난 다음에 들었던 느낌은, 아아, 나는 왜 연극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만약에 지금 제가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이고, 가슴에 열정이 불타오르고 있다고 한다면, 어쩌면 연극을 시작해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유리가면 제1권을 보면요, 지금은 사실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만, 아마 그 여자주인공이 연극 오디션을 보는데, 딱 면접실에 들어가니까, 앞쪽에 면접관들이 앉아 있고 가운데에 넓은 공간이 있는데 거기 의자가 하나 놓여 있어요. 보통 면접이라고 하면 그 의자에 앉아서 질문에 답하고 뭐 그러는 줄 알았는데, 그 의자를 보니까 옆으로 뉘여 있었습니다.

이 여자 주인공이 들어가자 면접관이 뭐라고 했냐 하면, 이 뉘여 있는 의자에 맞는 포즈를 취해보라고 한 것입니다.

이 여자 주인공은 그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이 여자 주인공이 순간적으로 지혜를 발휘해서 멋진 연기를 취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 장면을 보고, 아, 정말 연극이란 매력적이구나, 하고 당시 저는 꽤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왜 느닷없이 연극 이야기를 하냐 하면, 오늘 본문 중에서 24절을 보셨으면 합니다.

로마서 7장 24절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4.私は本当にみじめな人間です。だれがこの死のからだから、私を救い出してくれるのでしょうか。


여러분께서 연극 오디션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면접관이 이 성경구절을 주면서, 이 말씀에 감정을 담아서 연기를 해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있다가 나중에 다시 한번 여쭤볼 테니까요 그와 같은 내용을 한 번 생각해 보시면서 함께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자, 우선 그럼 20절부터 하나하나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7장 20절
“20.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0.私が自分でしたくないことをしているなら、それを行っているのは、もはや私ではなく、私のうちに住んでいる罪です。

바울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선을 행하고자 합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합니다. 의롭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선을 행할 수가 없어요. 자꾸만 악을 행하게 됩니다. 죄를 짓게 됩니다.

나는 착한 마음, 선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내 안에서 욕망이 끓어 오릅니다. 죄를 지으려는 욕구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나는 죄를 짓고 싶지 않은데, 자꾸 죄를 지으려고 합니다. 그 이유를 오늘 20절에서는 죄를 지으려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제 문제의 핵심에 다가가고 있습니다. 선과 악, 의와 죄의 문제에 대한 핵심에 다가가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21절을 봅니다.

로마서 7장 21절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1.そういうわけで、善を行いたいと願っている、その私に悪が存在するという原理を、私は見出します。

일반적으로 바울이 쓴 글에 등장하는 ‘법’이라고 하는 말은 율법이나 계명을 뜻합니다만, 여기에 등장하는 ‘법’이라고 하는 말은 ‘원리’ 또는 ‘법칙’이라는 뜻으로 이해를 하여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선을 행하고 싶어도, 내가 의롭게 살아가려고 해도, 자꾸만 나는 악을 행하게 되고, 자꾸만 죄를 짓게 되는 그 원리나 법칙, 쉽게 말하자면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결국 내 안에 악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결론에 이른 것입니다.

바울은 말을 이어갑니다.

로마서 7장 22절~23절
“22.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2.私は、内なる人としては、神の律法を喜んでいますが、
23.私のからだには異なる律法があって、それが私の心の律法に対して戦いを挑み、私を、からだにある罪の律法のうちにとりこにしていることが分かるのです。

여기서 바울은 흥미로운 대조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지체’와 ‘내 마음’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바꾼다면 육신과 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로마서 8장에서 주로 다루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께서는 혹시 그런 말씀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가 어딘지 하는 말씀입니다. 이 거리는 사람에 따라서는 평생 동안 도달하지 못하는 거리이기도 하는데, 그것은 바로 머리에서 가슴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자로 재보면 30~40센티 정도밖에 안되는 거리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거리가 생각보다 가깝지 않다고 하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머리로는 알고 있어요. 그러나 머리로 알고 있는 것이 가슴까지 와서 실천으로 옮겨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매일 운동하는 것, 그게 좋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 그게 좋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옳지 않은지를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습니다. 어디로 알고 있습니까. 그렇죠. 머리로는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게 가슴까지 도달해서 실천으로 옮겨지기까지는 그리 쉽지가 않다는 것이지요.

성경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잘 알고 있어요. 내 마음으로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옳지 않은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의이고 무엇이 죄인지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실천을 하지 못하느냐 하면 바로 내 지체 속에 있는 죄가 나를 사로잡습니다. 나를 방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옳은 일을 하려고 해도, 자꾸만 죄를 짓게 된다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오늘 본문 로마서 7장 20절~23절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앞서 제가 질문을 드렸던 24절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7장 24절을 단순히 앉아서 읽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표현하면서 읽어보라고 한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 이 24절은 이 한 구절만을 가지고는 그 감정을 느낄 수가 없고, 이 24절에 이르는 그 흐름을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예전에 특별히 로마서 7장은 영화 한 편과도 같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영화는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 하면 7장 7절부터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를 해왔으니까 오늘은 복습하는 의미에서 간단히 7절부터 23절까지의 그 흐름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 율법아 악한가요? 아니요 율법은 선합니다. 율법이 있기 때문에 죄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죄를 알고 보니까 내가 온통 죄만 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내가 했던 짓들을 계명에 비추어 보니까 모두가 다 죄입니다.
죄가 나를 속이고 나를 죽입니다.
나는 죄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그런데 마치 죄한테 팔린 종처럼 나는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내 마음으로는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의인지를 나는 알고 있지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 때문에 나는 선을 행할 수도 없고 의를 행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내가 내 힘으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리고 이 다음에 로마서 7장 24절이 오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 24절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4.私は本当にみじめな人間です。だれがこの死のからだから、私を救い出してくれるのでしょうか。

저는 이 흐름 속에서 24절을 보면 한 그림이 생각납니다.

여러분께서는 에드바르 뭉크(エドヴァルド・ムンク)의 절규라는 그림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그 그림을 어떻게 해석하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오랫동안 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는 사람이 절규를 외치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만, 얼마 전에 한 전문가의 말을 들으니까, 이 사람의 모습을 자세히 보면 그 손이 단순히 얼굴을 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귀를 막고 있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 그림은, 이 사람이 절규를 외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절규 소리를 듣고 놀라서 귀를 막고 있는 표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뭉크는 간혹 환각증세를 느끼곤 했다고 하는데, 당시 그는 이 그림에 대해서, 자연을 뚫고 들려오는 한없는 절규 소리를 들었다……이렇게 글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그림에 있는 사람은 그 절규 소리를 듣고 놀라서 귀를 막고 있는 뭉크 자신이라는 뜻이라는 거죠.

아, 정말 사람은 배워야 돼요. 그러고 보니까 이 그림이 다시 보여지더라고요.

저는 이 7장 24절에서 ‘오호라’라는 글을 보면 마치 바울의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죄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나지 못하는 바울이 머리카락을 쥐어 뜯고 바닥을 대굴대굴 굴러가면서 소리치는 절규 소리가, 정말 듣는 이로 하여금 이 그림의 등장인물처럼 귀를 막고 싶을 정도의 절규 소리, 정말 “아아악!!!” 하고 들려오는 절규 소리가 들려 오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 절규를 외치면서 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해요. 곤고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참으로 비참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리 노력을 해 봤자 이 죄악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정도로 비참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외칩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だれがこの死のからだから、私を救い出してくれるのでしょうか。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서 ‘사망의 몸(死のからだ)’이라고 합니다. 사망의 몸,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만히 내버려두면 선을 외면하고 악을 저지릅니다. 의에서 멀어지고 죄와 가까워지고 맙니다. 이대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으니 ‘사망의 몸’이라고 할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둘째로 바울은 ‘누가 나를 건져 내랴(だれが私を救い出してくれるのでしょうか。)’ 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던 바울이라 하더라도 자기 머리로는, 그리고 자기 힘으로는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죄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결국 내 힘과 능력으로 내 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이는 그야말로 바울의 항복선언, 아무리 연구를 하고 아무리 그 많은 지식을 총동원한다 하더라도 결국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 나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 뿐이었기에 바울은 두 손 들고 항복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나 스스로는 나를 구원할 수 없다면, 누군가가 나를 이 죄 가운데에서, 이 죽음으로 치닫고 있는 내 삶 속에서 나를 건져 주어야 할 텐데, 도대체 누가 나를 구원해줄 수 있겠는가, 하고 처절하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정답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마지막 로마서 7장 25절입니다.

로마서 7장 25절
“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25.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を通して、神に感謝します。こうして、この私は、心では神の律法に仕え、肉では罪の律法に仕えているのです。

우리는 아무리 우리가 발버둥을 쳐도 죄 안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신 분이 계시니, 바로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에베소서 1장 7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このキリストにあって、私たちはその血による贖い、背きの罪の赦しを受けています。これは神の豊かな恵みによることです。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공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주셨기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서 모든 저주를 다 받으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모든 채찍을 다 맞으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모든 피를 쏟으시고,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죄가 모두 용서 받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레위기 19장 4절
“너희는 헛된 것들에게로 향하지 말며 너희를 위하여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あなたがたは偶像の神々に心を移してはならない。また、自分たちのために鋳物の神々を造ってはならない。わたしはあなたがたの神、主である。

사도행전 4장 11절~12절
“11.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あなたがた家を建てる者たちに捨てられた石、それが要の石となった』というのは、この方のことです。
この方以外には、だれによっても救いはありません。天の下でこの御名のほかに、私たちが救われるべき名は人間に与えられていないからです。」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 외에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다른 것들은 모두 헛된 우상들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은 오로지 예수님 한 분이시라는 사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깨끗게 하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예수님,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 주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이제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충만한 삶,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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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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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9회 되찾아 주신 주님
2021년 10월 1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7장 14절~19절
"14.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15.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ローマ人への手紙 7章14節~19節
"14.私たちは、律法が霊的なものであることを知っています。しかし、私は肉的な者であり、売り渡されて罪の下にある者です。
15.私には、自分のしていることが分かりません。自分がしたいと願うことはせずに、むしろ自分が憎んでいることを行っているからです。
16.自分のしたくないことを行っているなら、私は律法に同意し、それを良いものと認めていることになります。
17.ですから、今それを行っているのは、もはや私ではなく、私のうちに住んでいる罪なのです。
18.私は、自分のうちに、すなわち、自分の肉のうちに善が住んでいないことを知っています。私には良いことをしたいという願いがいつもあるのに、実行できないからです。
19.私は、したいと願う善を行わないで、したくない悪を行っ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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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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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55번째 시간으로서 “되찾아 주신 주님” 取り戻してくださった主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완전히 지켜야지만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는데, 우리의 힘으로는, 우리의 노력으로는 율법을 지킬래야 지킬 수가 없습니다.

이 율법이라고 하는 것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저는 율법을 이 세상에 있는 여러 가지 법률과 비교해왔습니다만, 사실 법률보다도 더욱 엄격한 것이 율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성경에 보면 우리의 삶을 달리기 경주로 비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러분께서도 학교에 다닐 때 달리기를 하셨던 경험이 있으시겠지만, 우선 달리기 경주에서 이기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죠. 빨리 달려야 합니다. 10명이 달리는데 그 중에서 내가 이기기 위해서는 나머지 9명보다 빨리 달려서 결승점을 통과하는 것. 그것이 달리기에서 이기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도 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른 사람보다 앞서 나가려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조금이라도 더 발을 크게 벌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또 그래서는 안 되겠습니다만,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사람들이 앞서지 못하도록 방해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죠.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아니, 이를 좀 더 정확하게 말씀 드리자면 그렇게 하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관점이 조금 다릅니다.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 달리기에 대한 승리 조건은 무엇이 있는지 한 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24절~27절
24.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24.競技場で走る人たちはみな走っても、賞を受けるのは一人だけだということを、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ですから、あなたがたも賞を得られるように走りなさい。
25.競技をする人は、あらゆることについて節制します。彼らは朽ちる冠を受けるためにそうするのですが、私たちは朽ちない冠を受けるためにそうするのです。
26.ですから、私は目標がはっきりしないような走り方はしません。空を打つような拳闘もしません。
27.むしろ、私は自分のからだを打ちたたいて服従させます。ほかの人に宣べ伝えておきながら、自分自身が失格者になら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여기에 보시면 어떻습니까.

자, 24절에서는 달리기에서 상을 받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하라고 합니다.
첫째 요건으로는 25절, 모든 일에 절제를 하라고 하지요.
26절,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하지 말래요.
27절, 만약에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버림을 당할 수 있다고 성경을 기록합니다.

이를 정리하면 뭐예요? 달리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첫째로 절제를 하고, 둘째로 정해진 방향으로 달리라고 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빨리 달리라는 말이 없어요. 그렇다면 바울은 달리기에 대해서 몰라서 그랬겠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로 보자면 그는 당시 상당한 지식인 계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세상적으로 본다면 상당한 엘리트였지요.

그런데 그가 기록하기를 달리기에서 이기기 위한 조건으로 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절제’와 ‘방향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멋진 말씀 아닙니까.

이를 풀어 본다면 ‘절제’는 무엇입니까.

물론 양식 있는 선수들은 그렇지 않겠습니다만, 아무리 자기가 이기고 싶다고 해도 다른 선수를 방해해서는 안 되겠지요. 아무리 이기고 싶다고 하더라도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 정도는 가릴 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은 것이 절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방향성은 무엇입니까. 아무리 절제 있게 달린다 하더라도 엉뚱한 곳으로 달린다면 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정해진 코스에 맞춰서 결승점을 통과했을 때 진정으로 승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두 단어, ‘절제’와 ‘방향성’이라고 하는 것을 한 단어로 정리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는 바로 ‘규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운동 규칙을 보면 아마도 대부분의 규칙에서 ‘반칙’을 규정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중대한 반칙인 경우에는 ‘실격’이 되는 요건이, 그것도 몇 가지나 나와 있을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실격’을 당할만한 중대한 반칙 중에서 하나라도 위반을 하면, 아무리 다른 규칙들을 잘 지켰다 하더라도 실격처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고보서 2장 10절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律法全体を守っても、一つの点で過ちを犯すなら、その人はすべてについて責任を問われるからです。

우리 세상에서는 분명 가벼운 죄와 무거운 죄가 있습니다. 가벼운 죄를 지으면 가벼운 죄에 해당하는 책임, 무거운 죄를 지으면 무거운 죄에 해당하는 책임을 지면 됩니다.

그러나 율법에 있어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는 마치 달리기 선수가 아무리 빨리 달렸다 하더라도 중대한 반칙을 하나라도 어겼다면 실격이 되는 것처럼, 우리도 율법 중에서 하나라도 어긴다면 ‘율법을 어긴 죄인’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어긴 죄인이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지 않는 영혼, 의로 여기심을 받지 못하는 영혼, 구원을 받지 못하는 영혼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결론은 무엇입니까. 어렵지 않습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옥에 떨어져서 영원한 고통에 시달리게 되고 만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냐 하면, 간단하지요. ‘규칙’을 어기지 않으면 됩니다. 하나님이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하지 말면 되는 것이지요. 참 쉽죠?

자, 여기서 한 가지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세상에는 성선설과 성악설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성선설은 사람은 본래 선천적으로 선하게 태어난다는 것이고, 성악설은 본래 악하게 태어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느 쪽이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있으시겠습니다만, 질문은 여러분의 생각이 아닙니다. 질문은 무엇이냐 하면, 성경은 성선설과 성악설, 어느 쪽이라고 기록하고 있을까요.

이는 간단합니다.

창세기 8장 21절 중반부
“……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人の心が思い図ることは、幼いときから悪であるからだ。……


예전에 어떤 목사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기억납니다만, 자기 딸아이가 아직 어려서 말을 간신히 할 때였는데, 그 때 어디 놔두었던 과자가 있었는데, 그게 없어졌더래요. 분명 그 아이가 먹은 것은 확실했답니다.

그래서 장난으로 그 딸아이한테 말하기를 “여기 아빠가 먹으려고 했던 과자가 어디 갔지? 네가 먹었니?” 라고 물었더니, 그 아이가 하는 말이 “아니, 안 먹었더.”라고 하더랍니다. 그걸 보고 참 놀랐다고 해요.

아니, 그 조그마한 아이가, 아직 말도 서툰 그 어린 아이가, 누군가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벌써 ‘거짓말’을 할 줄 알았다는 거예요.

이 거짓말에 대한 역사는 깁니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거짓말을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성경에서 처음으로 거짓말을 한 사람은 바로 동생을 죽인 가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4장 8절~9절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カインは弟アベルを誘い出した。二人が野にいたとき、カインは弟アベルに襲いかかって殺した。
主はカインに言われた。「あなたの弟アベルは、どこにいるのか。」カインは言った。「私は知りません。私は弟の番人なのでしょうか。」

가인은 자신이 분명 아벨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아벨에 대해서 물으시자 자기는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잡아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최초로 거짓말을 한 사람이 가인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거짓말을 무엇이었습니까.

이는 지난 시간에도 알아보았던 것처럼, 에덴에서 뱀으로 가장한 마귀 사탄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 한 거짓말입니다.

창세기 3장 1절~5절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1.さて蛇は、神である主が造られた野の生き物のうちで、ほかのどれよりも賢かった。蛇は女に言った。「園の木のどれからも食べてはならないと、神は本当に言われたのですか。」
2.女は蛇に言った。「私たちは園の木の実を食べてもよいのです。
3.しかし、園の中央にある木の実については、『あなたがたは、それを食べてはならない。それに触れてもいけない。あなたがたが死ぬといけないからだ』と神は仰せられました。」
4.すると、蛇は女に言った。「あなたがたは決して死にません。
5.それを食べるそのとき、目が開かれて、あなたがたが神のようになって善悪を知る者となることを、神は知っているのです。」

솔직히 거짓말 중에서 모든 거짓말이 나쁘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쁜 거짓말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남을 해한다거나, 또는 악한 목적으로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하는 것이 바로 나쁜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가인의 거짓말이나 마귀의 거짓말은 무엇입니까. 가인은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모면하려는 악한 목적으로 거짓말을 했던 것이고, 마귀 사탄은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킬 목적으로 거짓말을 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 둘 모두 악한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악한 거짓말을 한 적이 없나요? 아니, 꼭 거짓말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가 죄를 지은 적이 없겠습니까.

자, 이론상으로 돌아가본다면 우리가 죄를 안 지을 수는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렸던 것처럼, 성경에서 하라는 것 하면 되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그게 가능하냐 하는 것이죠.

누구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래 율법은 지키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오셔서 좀 더 지키기 쉽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글쎄요. 그게 사실인가요? 성경을 보시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21절~22절
"21.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昔の人々に対して、『殺してはならない。人を殺す者はさばきを受けなければならない』と言われていたのを、あなたがたは聞いています。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兄弟に対して怒る者は、だれでもさばきを受けなければなりません。兄弟に『ばか者』と言う者は最高法院でさばかれます。『愚か者』と言う者は火の燃えるゲヘナに投げ込まれます。



이 말씀은 어떻습니까. 여기 22절에 나오는 ‘라가’라는 말은 욕설이라고 합니다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실제로 살인을 하지 않았더라도 형제에게 화를 내거나 욕설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치 살인을 저지른 것처럼 지옥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5장 27절~28절

마태복음 5장 27절~28절
"27.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7.『姦淫してはならない』と言われていたのを、あなたがたは聞いています。
28.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情欲を抱いて女を見る者はだれでも、心の中ですでに姦淫を犯したのです。

이 말씀에 의하면 그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간음을 하지 않았더라도, 단순히 음흉한 생각을 가지고 이성을 바라본 것만으로도 이미 간음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세요.

이렇게 본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율법을 좀 지킬 수 있도록 쉽게 해주셨다? 아니요. 오히려 지키기 어렵게 하셨으면 하셨지, 전혀 지키기 쉽게 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짓궂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인가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내가 나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율법을 지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율법의 본질을 말씀해주심으로 인해서, 네 힘과 노력으로는 절대로 지킬 수가 없다고 단언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중에서 우선 로마서 7장 15절~19절까지를 보겠습니다.

로마서 7장 15절~19절
“15.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15.私には、自分のしていることが分かりません。自分がしたいと願うことはせずに、むしろ自分が憎んでいることを行っているからです。
16.自分のしたくないことを行っているなら、私は律法に同意し、それを良いものと認めていることになります。
17.ですから、今それを行っているのは、もはや私ではなく、私のうちに住んでいる罪なのです。
18.私は、自分のうちに、すなわち、自分の肉のうちに善が住んでいないことを知っています。私には良いことをしたいという願いがいつもあるのに、実行できないからです。
19.私は、したいと願う善を行わないで、したくない悪を行っています。

15절에서 바울이 고백하기를, 나는 내가 원하는 것, 선한 일을 하려고 하는데, 실제로 내가 하는 일은 뭐래요? 내가 원하지 않는 것, 미워하는 일을 내가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16절은요.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 선하다는 것을 알아요. 그리고 그 율법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도 알아요. 그런데 정작 내가 행하는 일들이, 어떻게 된 게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것들만 하려고 해요.

17절. 아하. 이제 알겠어요. 내 머리로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옳지 않은지를 알고 있지만, 내가 원하지 않은 것을 행하는 이유, 내가 미워하는 일을 행하는 이유는, 나 스스로가 하는 짓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가 하는 것이에요.

18절. 내 육신 안에 있는 죄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이 있어도 내가 선을 행할 수가 없어요.

19절 그 결과 나는 선을 행하지 않고 오히려 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이렇게 고백하면서 괴로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차라리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 모르면 속이 편해요. 나는 어차피 모르니까 내가 편한 대로 하면서 살면 된다……뭐 이러면 자기도 좋겠는데, 그러면 바울이 율법을 몰라요? 예수님을 몰라요?

아니요. 바울은 누구보다도 율법에 정통하고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은 자기 안에 있는 죄 때문에 선을 행하고자 해도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까 너무나도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우리는 선을 행하려고 해도 자꾸만 죄를 지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가 바로 오늘 본문 중 14절에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 7장 14절
“14.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14.私たちは、律法が霊的なものであることを知っています。しかし、私は肉的な者であり、売り渡されて罪の下にある者です。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공부를 해왔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 선하다는 것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죄 아래에 팔렸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죄 아래에 팔린다는 말씀. 이는 마치 그런 것입니다. 좀 무서운 말입니다만, 자 어떤 사람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종으로 팔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이 사람이 선한 종으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악한 종으로 살아갈 것인지는 무엇으로 판가름 납니까.

그것은 바로 좋은 주인에게 팔려가면 좋은 일을 하는 종이 되겠지만, 악한 주인에게 팔려가면 악한 일만 하는 종이 되지 않겠습니까.

종은 자기한테 결정권이 없습니다. 그러니 항상 주인의 뜻대로 해야 하는 것이지요.

좋은 주인은 항상 좋은 일을 하도록 명령을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어려운 이웃이 있으면 도와 주라고 지시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좋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만 하 게 되니까 좋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지요.

반면에 악한 주인에게 팔려간 종은 어떻습니까. 살인을 하라, 도둑질을 하라, 간음을 하라고 명령을 합니다. 그러면 자기는 악한 일을 하기 싫은데도, 자기 주인이 악한 일만 시키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이 악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주인이 보기에 그 악한 주인 밑에서 고생하고 있는 종을 구원해주고 싶었어요.

그렇다면 악한 주인 밑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종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는 간단합니다. 종이라고 하는 것은 당시에는 물건처럼 매매가 되고 있었기 때문에, 악한 주인 밑에 있는 종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선한 주인이 팔려갔던 종을 다시 사오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면 다시 사올 수 있을까요. 물론 악한 주인이 생각하기에, 자기가 데리고 있는 그 종을 별로 탐탁치 않게 여겼더라면 헐값에 넘겨줄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악한 주인은 자기가 데리고 있는 그 종을 돈 몇 푼 가지고는 넘겨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대가로 지불할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 5장 7절~10절
“7.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8.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9.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7.子羊は来て、御座に着いておられる方の右の手から巻物を受け取った。
8.巻物を受け取ったとき、四つの生き物と二十四人の長老たちは子羊の前にひれ伏した。彼らはそれぞれ、竪琴と、香に満ちた金の鉢を持っていた。香は聖徒たちの祈りであった。
9.彼らは新しい歌を歌った。「あなたは、巻物を受け取り、封印を解くのにふさわしい方です。あなたは屠られて、すべての部族、言語、民族、国民の中から、あなたの血によって人々を神のために贖(あがな)い、
10.私たちの神のために、彼らを王国とし、祭司とされました。彼らは地を治めるのです。」

선한 주인이 악한 주인 밑에서 고통 받고 있는 종을 되찾기 위해서 지불한 대가는 바로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인한테 팔려간 종이 자기 힘이나 노력으로 주인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종이 아무리 노력을 해 봤자 자신의 주인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어요. 괜히 도망치기라도 했다가 붙잡히면 그야말로 죽음 뿐입니다.

우리가 그와 같은 악한 주인, ‘마귀 사탄’이라고 하는 이름, 또는 ‘세상적 세속적’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악한 주인 밑에 있는 한, 우리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악한 일을 저지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피를 흘려 주심으로 인해서, 우리를 악한 주인으로부터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우리를 이 땅의 왕처럼 높이 들어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면 스스로 죽임을 당하시면서까지 피를 흘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대가로 우리를 사서 구원해 주셨겠습니까.

이사야 52장 13절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見よ、わたしのしもべは栄える。彼は高められて上げられ、きわめて高くなる。


우리는 이제 악한 마귀 사탄의 종이 아니라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의 자녀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울 지라도, 주님만 믿고 주님만 의지하면 형통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지극히 존귀하게 해주시는 역사가 일어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주님의 피로써 구원 받은 우리, 악한 마귀 사탄 밑에서 거하다가, 세상 밑에서 거하다가 주님의 보혈로 되찾아온 우리는 더 이상 마귀 안에 거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 밑에 거할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にとどまり、わたしのことばがあなたがたにとどまっているなら、何でも欲しいものを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それはかなえられます。

시편 103편 5절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あなたの一生を 良いもので満ち足らせる。 あなたの若さは 鷲のように新しくなる。


이제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대가로 우리를 되찾아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리고, 주님께 순종하는 종이 되어서,

장차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독수리처럼 높이 들려 새롭고 존귀하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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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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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8회 천국의 합법체류자
2021년 10월 1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7장 10절~13절
“10.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2.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13.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7章10節~13節
“10.私は死にました。それで、いのちに導くはずの戒めが、死に導くものであると分かりました。
11.罪は戒めによって機会をとらえ、私を欺き、戒めによって私を殺したのです。
12.ですから、律法は聖なるものです。また戒めも聖なるものであり、正しく、また良いものです。
13.それでは、この良いものが、私に死をもたらしたのでしょうか。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むしろ、罪がそれをもたらしたのです。罪は、この良いもので私に死をもたらすことによって、罪として明らかにされました。罪は戒めによって、限りなく罪深いものとなり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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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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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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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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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54번째 시간으로서 “천국의 합법체류자” 天国の合法滞在者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우선 한 구절 한 구절씩 살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7장 10절
“10.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0.私は死にました。それで、いのちに導くはずの戒めが、死に導くものであると分かりました。

자, 우리가 뭐, 법에 대한 전문가는 아니라 하더라도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알 수 있겠지요.

좀 무서운 말이겠습니다만, 어떤 흉악범이 체포되어서 재판을 받았는데, 사형판결이 내려졌습니다. 그렇다면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무엇을 근거로 해서 재판장이 그 피고인에게 사형판결을 내립니까. 그것은 바로 현행법이지요.

대한민국 형법 제250조에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제250조 ①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일본 형법 제199조도 마찬가지입니다.

第199条 人を殺した者は、死刑又は無期若しくは5年以上の懲役に処する。


사실 판사가 되려면 열심히 공부해서 어려운 시험에도 합격해야 하고, 그리고 합격만이 아니라 우수한 점수로 합격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판사한테는 법률을 만들거나 바꾸는 권한이 없습니다. 법을 새로 만들거나 바꾸거나 아니면 없애거나 하는 건 기본적으로 국회에서 하는 일이죠. 그러면 판사는 뭘 하느냐 하면 법에 정해진 대로 판결을 내리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를 잘 모르는 사람은 판사는 너무 냉혹하다, 인간미가 없다는 등의 말을 합니다만, 생각해보세요. 똑 같은 죄를 지었는데, 어떤 사람은 판사가 보기에 참 착하게 생겼고, 또 어떤 사람은 판사가 보기에 되게 나쁜 사람처럼 생겼어요. 하지만 지은 죄가 똑같아요.

그런데 판사가 자기 마음대로 누구는 무죄, 누구는 사형……이렇게 한다면 얼마나 혼란이 오겠습니까. 그래서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판사는 대체적으로 기계적인 판단, 다시 말해서 법조문에 적힌 대로 판결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앞서 살펴본 법조문.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되십니까. 한국과 일본을 본다면 사람을 해하면 사형과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이 법조문에 대해서 어떤 분은 가볍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테고, 어쩌면 무겁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형이야 뭐, 알기 쉽지요. 죽음으로써 죄를 갚은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만, 우선 징역 몇 년 이라는 식의 유기징역인 경우는 예를 들어서 징역 5년이라고 한다면 최대한 5년을 교도소에서 살아야 합니다만, 이를 바꾸어 말하자면 그전에 가석방이 허가될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못해도 5년이 되면 교도소에서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기징역은 제한이 없어요. 교도소에서 말을 잘 듣고 행실이 좋으면 한 20년~30년 정도로 가석방이 되어서 나올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평생 동안 교도소에서 살게 됩니다.

그럼 사형수는 어떻습니까. 말이 좀 무서울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형수는 사형판결이 확정된 다음에도 언제 집행이 될지 모르는 공포에 떨어야 합니다. 일본에 보면 예전에는 집행 전날에 통보되었다고 하는데, 이렇게 되면 그 공포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다고 해서, 요즘은 당일 아침에, 교도관들이 갑자기 찾아와서는 이제부터 집행된다고 하면서 그대로 끌려 나간다고 합니다.

그러니 사형수는 바로 당일까지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형수들은 매일 아침 가슴을 졸이면서 교도관들의 발자국소리에 귀를 쫑긋 세운다고 합니다. 이런 생활이 얼마 동안이요? 예, 사형이 집행되는 그날까지 계속됩니다.

며칠 전 읽은 일본 신문에 의하면 1988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발생한 강도살인 혐의로 체포되어서 결국 사형판결을 받은 사람이 지난 2021년 10월 8일에 구치소에서 질병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당시 87살이었다고 해요. 그러니까 이 사람에 대한 사형판결이 확정된 것이 2006년 3월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적게 잡아서 2006년 3월부터 2021년 10월 8일까지, 단순계산으로 15년 이상을 매일 아침마다 죽음의 공포에 떨었다는 것인데, 그러다가 집행은 되지 않고 결국 질병으로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사형판결 확정은 2006년이라고 하지만, 체포된 것은 1988년. 그러니까 1988년부터 2021년까지를 본다면 33년 이상을 감옥에서 보내다가 결국 한 번도 나오지 못하고 거기서 생을 마감했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수감된 이유가 뭐냐 하면, 물론 그 사람이 지은 죄 때문에 그렇습니다만, 결정적인 이유는 일본의 형법에 그렇게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법이라고 하는 것은 참 무서운 것인데, 그렇다면 앞서 잠시 말씀드렸던 법조문 이야기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대한민국 형법 제250조나 일본 형법 제199조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人を殺した者は、死刑又は無期若しくは5年以上の懲役に処する。

이 법은 좋은 것일까요 아니면 나쁜 것일까요.

이를 다른 말로 해보면 어떨까요. 우리가 거리를 걷고 있을 때 경찰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거리에서 경찰아저씨를 보거나 경찰차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아, 우리가 사는 동네를 지켜주는 경찰을 보면 참 듬직하고 고맙고 그렇습니까. 아니면 왠지 경찰을 보면 나도 모르게 불안해지고 식은땀이 나고, 빨리 다른 곳으로 피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까.

경찰이 나쁜 것이라면 사회에서 반드시 없애야 하겠지요. 하지만 한국이나 일본만이 아니라 전세계를 본다 하더라도 없애기는 커녕 국민들의 막대한 세금을 써가면서까지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만약에 경찰이 일주일 정도라도 사라졌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강도가 자기 집이나 자기 사업장에 쳐들어와도 누구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범인을 잡아주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온 나라가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고 말 것입니다.

법률도 마찬가지지요. 형법은 준엄한 조항입니다만, 우리는 형법만이 아니라 모든 법에 의해서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에는 내가 미워하는 사람만 있나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만, 누군가가 나를 정말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그 사람이 나를 죽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와 같은 형법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 법률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법이나 경찰은 우리를 보호해주고 있고 우리를 지켜주는 존재입니다만, 한편으로는 법이나 경찰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일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죄인인 것입니다.


얼마 전에 경찰 24시라는 일본 방송을 보니까 참 흥미롭더군요. 경찰이 순찰차를 타고 동네 순찰을 하는데, 고참 경찰관이 무언가를 보더니 갑자기 차를 세우라고 해요. 그러고는 서둘러서 내리더니 누군가를 쫓아가서 잡습니다. 그 사람은 외국인처럼 보였는데, 그 사람한테 재류카드를 보여달라고 하는 거예요.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외국인 등록증이죠. 처음에는 이런 말 저런 말로 피하더니만 결국은 불법체류자였던 것입니다. 비자 없이 20년 가까이 일본에 있었다는 거예요. 참 재주도 좋아요.

그렇다면 이 사람을 그 경찰이 어떻게 발견할 수 있었냐 하면 경찰차에 부착된 카메라로 확인을 해보니까, 이 경찰차가 어느 골목길로 들어서니까 거기 양쪽 인도 쪽에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 한 외국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그 거리에 있는 의자에 앉으려고 하다가 경찰차를 힐끗 보더니만 다시 일어서서 슬그머니 저 안쪽으로 가서 숨으려고 했던 것이에요. 우리 같은 일반 사람들이 보면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것 같은데 이 프로 전문가 경찰관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잡아냈던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슬그머니 숨으려고 했던 사람이 등장합니다.

창세기 3장 8절
“8.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そよ風の吹くころ、彼らは、神である主が園を歩き回られる音を聞いた。それで人とその妻は、神である主の御顔を避けて、園の木の間に身を隠した。

당시 에덴에 살고 있을 때 아담과 하와는 마치 우리가 사람끼리 서로 대면하고 말을 나누듯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고 하나님께 말씀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아담과 하와는 이미 하나님께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 죄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말았던 것이지요.

성경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그들에게 어떤 축복을 주셨습니까.

창세기 1장 28절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神は彼らを祝福された。神は彼らに仰せられた。「生めよ。増えよ。地に満ちよ。地を従えよ。海の魚、空の鳥、地の上を這うすべての生き物を支配せよ。」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땅을 정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에덴을 정복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전세계 모든 땅을 정복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창세 이래로 지금까지 많은 나라들을 정복한 왕이 있어 왔습니다만, 아무리 알렉산더나 징기스칸이나 나폴레옹이라 하더라도 전세계를 정복했던 지배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태어나자 마자 아담과 하와에게 그와 같은 놀라운 축복, 지금까지 아무도 누리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축복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2장 16절~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神である主は人に命じられた。「あなたは園のどの木からでも思いのまま食べてよい。
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木から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다른 건 뭘 해도 좋아. 다만 이 규정을 위반하지 않는 한 너희들은 영원한 에덴의 주민이자 이 세상의 지배자로 세워 주겠어. 의식주에 대한 아무런 걱정 없이,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에 대한 걱정 없이 대대손손 영원히 기쁨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해 줄 거야.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놀라운 축복을 아담과 하와에게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어떻게 했습니까.

창세기 3장 6절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そこで、女が見ると、その木は食べるのに良さそうで、目に慕わしく、またその木は賢くしてくれそうで好ましかった。それで、女はその実を取って食べ、ともにいた夫にも与えたので、夫も食べた。

그러니까 어떻게 됐다고요?

다음 구절

창세기 3장 7절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こうして、ふたりの目は開かれ、自分たちが裸であることを知った。そこで彼らは、いちじくの葉をつづり合わせて、自分たちのために腰の覆いを作った。

우리가 이 구절을 읽고 느끼는 것은, 벗은 몸이 창피해서 무화과나뭇잎으로 가렸다고 생각하기 십상인데, 이걸 좀 더 자세히 생각해본다면, 누구에 대해서 내 벗은 몸이 부끄러웠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두 가지 사실, 첫째로 당시 동물들은 하늘을 나는 새와 바다의 물고기 등을 비롯해서 모든 생물들이 있었습니다. 둘째로 사람은 아담과 하와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동물들한테 내 벗은 몸을 보여주기가 부끄러워서? 아니면 내 배우자에게 보여주기가 부끄러워서?

아담과 하와가 자신의 벗은 몸 때문에 ‘부끄러워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숨은 아담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창세기 3장 10절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彼は言った。「私は、あなたの足音を園の中で聞いたので、自分が裸であるのを恐れて、身を隠しています。」

아담은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두려워서 숨었다고 말합니다. 즉 이 말은, 단순히 내가 벗었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오히려 외부로부터 내 몸을 지키기 위해, 즉 지금까지는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 주셨는데, 이제 하나님께 죄를 지음으로 인해서 나를 지켜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여기에 두려움을 느끼고는 그야말로 궁여지책으로 무화과나무 잎사귀로라도 내 몸을 지켜보려고 했다는 것이 더 현실감이 있지 않을까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있는 동안에는 그들은 에덴에 있어서 합법체류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축복을 누릴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보면 기쁨에 충만했을 것이요, 그 마음에서 평안이 넘쳐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은 순간, 그들은 에덴에서 한순간에 불법체류자로 전락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을 지켜주지 않습니다.

요즘도 가끔 일본 뉴스를 보면 불법으로 체류를 하면서 가짜 신분증을 만들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만, 마치 그런 것들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옷입니다.

인간의 부족한 생각으로 나 자신을 지켜보려고 하지만, 결국 그것은 나 자신을 완전하게 지쳐주지 못하고, 오히려 바싹 발라 부스러지는 잎사귀들이 내 살을 긁어서 상처를 내듯이, 불법적인 신분증 같은 것들은 나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의 죄를 더욱 무겁게 만들 따름인 것입니다.

지금도 불법으로 그 나라에 체류하는 것이 발각되면 강제추방 당하는 것처럼,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김으로 말미암아 불법체류자가 되는 순간 에덴으로부터 추방 당하고 말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그렇게 끔찍한 죄를 짓고 말았을까요.

여러분께서도 혹시 다른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전에 제가 어떤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꽤 여러 곳에서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죄’라고 하는 것은 원어로 보면 ‘과녁에서 빗나간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글쎄요. 이와 같은 말씀을 들으시면 여러분께서는 오옷. 그렇구나! 하는 깨달음이 있으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 기억으로는 성경말씀의 뜻을 원어로 된 해설로 보았을 때 더욱 깊은 깨달음을 얻은 적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죄’도 마찬가지에요. 헬라어로 보면 ‘하마르티아’라고 해서 과녁에서 빗나가는 것이 죄이다……라고 해도 별로 와 닿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와 닿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성경에 있는 기록입니다. 그것도 바로 오늘 본문 11절입니다.

로마서 7장 11절
“11.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罪は戒めによって機会をとらえ、私を欺き、戒めによって私を殺したのです。

정말 이 구절을 읽으면 죄가 무엇인지 한 번에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는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만,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죄를 짓게 되었습니까.


창세기 3장 1절~5절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さて蛇は、神である主が造られた野の生き物のうちで、ほかのどれよりも賢かった。蛇は女に言った。「園の木のどれからも食べてはならないと、神は本当に言われたのですか。」
女は蛇に言った。「私たちは園の木の実を食べてもよいのです。
しかし、園の中央にある木の実については、『あなたがたは、それを食べてはならない。それに触れてもいけない。あなたがたが死ぬといけないからだ』と神は仰せられました。」
すると、蛇は女に言った。「あなたがたは決して死にません。
それを食べるそのとき、目が開かれて、あなたがたが神のようになって善悪を知る者となることを、神は知っているのです。」

뱀이 하와에게 한 이 말이 진실인가요? 아니에요. 거짓말입니다. 마귀는 밤이나 낮이나 더울 때나 추울 때나 우리를 속이려고 덤벼듭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9절
“8.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身を慎み、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あなたがたの敵である悪魔が、吼えたける獅子のように、だれかを食い尽くそうと探し回っています。
堅く信仰に立って、この悪魔に対抗しなさい。ご存じのように、世界中で、あなたがたの兄弟たちが同じ苦難を通ってきているのです。

마귀들이 우리를 속이려고 우는 사자 같이 덤벼든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마귀의 말에 넘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예를 들어서 마귀가 우리 귀에 대고 속삭입니다.

“저 사람을 죽여라. 저 사람을 죽이면 네가 인정 받을 거야. 네 생활이 편해질 거야. 네가 저 사람 것까지 다 차지할 수 있을 거야.”


그러나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분명히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행법에도 살인죄를 엄하게 처벌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우리는, 이런 유혹이 온다면 당장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 사탄을 물리쳐야 하는데, 이런 말에 만의 하나라도 혹해서 큰 죄를 짓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면 마귀가 말한 대로 내 생활이 더 나아지나요? 내가 인정을 받나요? 내가 이득을 보나요? 아니에요. 그건 순전히 다 거짓말이에요. 그런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나는 율법에 의해서, 그리고 현행법에 의해서 엄한 처벌을 받게 되고 말 것입니다.

마귀들의 말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가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마귀 사탄의 유혹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담대하게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어서 12절~13절 말씀입니다.

로마서 7장 12절~13절
“12.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13.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12.ですから、律法は聖なるものです。また戒めも聖なるものであり、正しく、また良いものです。
13.それでは、この良いものが、私に死をもたらしたのでしょうか。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むしろ、罪がそれをもたらしたのです。罪は、この良いもので私に死をもたらすことによって、罪として明らかにされました。罪は戒めによって、限りなく罪深いものとなりました。”

하나님도 거룩하고 율법도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합니다. 법률도 올바르고 경찰도 올바릅니다. 모두가 나를 보호해주고 지켜주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마귀 사탄의 꾀임에 넘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마귀 사탄이 나를 속여서 죄를 짓게 하면, 그 때까지 나를 지켜주었던 계명과 율법이 이제는 나를 심판하기 위해 달려듭니다. 그 때까지는 나를 지켜주었던 경찰 아저씨들이 나를 붙잡기 위해서 쫓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 힘으로는 안 됩니다.


에베소서 1장 7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このキリストにあって、私たちはその血による贖い、背きの罪の赦しを受けています。これは神の豊かな恵みによることです。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려 주신 피를 의지할 때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죄인이면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로 모든 죄를 해결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영원한 천국의 합법체류자가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본 사람이 있나요? 예, 있습니다. 바로 모세가 그랬습니다.

출애굽기 33장 11절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主は、人が自分の友と語るように、顔と顔を合わせてモーセと語られた。モーセが宿営に帰るとき、彼の従者でヌンの子ヨシュアという若者が天幕から離れないでいた。


모세는 하나님과 마치 자기 친구처럼 이야기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바라보고 친구처럼 이야기하면 어떻게 될까요.

출애굽기 34장 29절
“29.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それから、モーセはシナイ山から下りて来た。モーセが山を下りて来たとき、その手に二枚のさとしの板を持っていた。モーセは、主と話したために自分の顔の肌が輝きを放っているのを知らなかった。

이 글을 보고 혹시 뭘 잘 먹어서 그런 게 아니야? 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니에요. 바로 앞 구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출애굽기 34장 28절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モーセはそこに四十日四十夜、主とともにいた。彼はパンも食べず、水も飲まなかった。そして、石の板に契約のことば、十のことばを書き記した。


지금 모세는 40일 동안 밥은 물론이고 물도 안 마시면서 금식하고 오는 길인데도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요?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대면 하였기 때문에(顔と顔を合わせて),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信仰の創始者であり完成者であるイエスから、目を離さないでいなさい。この方は、ご自分の前に置かれた喜びのために、辱めをものともせずに十字架を忍び、神の御座の右に着座されたのです。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죄를 짊어진 천국의 불법체류자가 아니라,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함 받고 구원 받은 천국의 합법체류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당당한 천국의 합법체류자로서, 마귀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고, 항상 우리 주님을 친구처럼 바라보며(顔と顔を合わせて), 우리 얼굴에서 영광의 광채가 나듯(輝きを放つように), 이제 우리 인생이 광채가 나는 삶으로 변화되어, 축복에 축복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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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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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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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7회 율법의 깨달음
2021년 10월 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7장 9절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ローマ人への手紙 7章9節
“私はかつて律法なしに生きていましたが、戒めが来たとき、罪は生き、私は死に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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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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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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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53번째 시간으로서 “율법의 깨달음” 律法の悟り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로마서 7장 7절부터 시작한 바울의 고민,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에 대해서 죽어 주셨으니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니까, 우리를 꽁꽁 묵어 두었던 율법은 이제 필요가 없다. 버려버리자……하면 대단히 편하겠지만, 그렇지가 않기 때문에 시작한 바울의 고민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9절에 보면 바울은 이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율법에 대해서 무지했다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이 자신을 소개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2장 3절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私は、キリキアのタルソで生まれたユダヤ人ですが、この町で育てられ、ガマリエルのもとで先祖の律法について厳しく教育を受け、今日の皆さんと同じように、神に対して熱心な者でした。


빌립보서 3장 5절~6절
“5.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私は生まれて八日目に割礼を受け、イスラエル民族、ベニヤミン部族の出身、ヘブル人の中のヘブル人、律法についてはパリサイ人、
その熱心については教会を迫害したほどであり、律法による義については非難されるところがない者でした。

그는 태어나고 팔일 만에 율법대로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그는 유대인이 아닌 집안에서 태어났다가 나중에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닌, 대대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증거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라고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뿌리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증거이지요. 말하자면 족보 있는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그야말로 율법을, 하나님께서 출애굽 당시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집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바울은 자신이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웠다고 합니다. 지금은 사실 어디 대학교를 나왔느냐, 어디 졸업장이 있느냐 하는 것을 많이 쳐준다고 한다면, 당시에는 누구에게 배웠느냐 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가말리엘이라는 선생님 밑에서 배웠다고 하는데,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인물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사도행전 5장 34절 전반부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ところが、民全体に尊敬されている律法の教師で、ガマリエルというパリサイ人が議場に立ち、

이 기록에 의하면 가말리엘이라는 선생님, 말하자면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교수님은 당시 일부 백성이 아니라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교수님한테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았겠지요. 하지만 혼자서 한 번에 수 백명, 수 천명을 가르칠 수는 없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까 미루어 짐작컨대 많은 사람들이 그 가말리엘 교수님에게 배우고 싶어했겠지만, 여기에는 선별작업이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알기 쉽게 말하자면 지금으로 본다면 입학시험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분들이 많습니다.

일본에서도 가장 들어가기 힘든 대학이 동경대입니다만, 왜 동경대가 가장 들어가기 힘들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리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들어가기 힘든 것이고, 동경대 졸업장을 가진다 하면 그것만으로도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웠다는 것은, 지금으로 본다면 명문대를 졸업했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가말리엘이 무슨 선생님이었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율법교사였습니다. 바울은 스스로 말하기를 그 저명한 율법교수님 밑에서 엄한 교훈을 받았다. 즉, 대단히 열심히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기를 “전에 내가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私はかつて律法なしに生きていましたが)”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렇게 열심히 율법을 공부해 놓고서는 자신이 율법을 몰랐었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겸손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しかし、人は律法の行いによっては義と認められず、ただキリスト・イエスを信じる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る、ということを知ったからこそ、私たちもキリスト・イエスを信じたのです。これは、律法の行いによってではなく、キリストを信じる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るためです。なぜなら、律法の行い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る者は、ひとりもいないからです。

자신은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당시 명문대학에서 율법을 철저하게 공부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율법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거기다가 자신은 이른바 뼈대 있는 이스라엘 집안 출신으로서 이 율법에 있어서는 출신 성분도 그렇고 학벌도 그렇고 모든 면에서 완전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알고 나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나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고 나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하, 지금까지의 나는 율법을 달달달달 외우고만 있었지 그 진정한 뜻, 하나님께서 율법에 담은 진정한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당당했습니다.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완전한 집안 출신이고 자타가 공인하는 엘리트, 율법 수재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이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잘못가르치는 유해분자라고 생각하고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모두 다 잡아들였던 것입니다.

이는 바울이 악한 인물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 스스로가 율법을 완벽하게 알고 있고, 자기가 지금까지 배워온 지식에 비추어 봤을 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죽이는 것이 율법적으로 완전한 행위이자,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게 되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제 진정한 율법이 무엇이고, 진정한 의가 무엇인지를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깨닫게 된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을 보시겠습니다.

빌립보서 3장 9절 중반부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私は律法による自分の義ではなく、キリストを信じることによる義、すなわち、信仰に基づいて神から与えられる義を持つのです。

자, 오랜만에 여러분께 질문을 드립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 받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뼈대있는 집안이고, 그야말로 당대 최고 명문대학에서 열심히 율법을 공부하고 수석으로 졸업했다 하더라도, 무엇이 없으면 안 됩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예수님을 믿어야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시 바울은 참 머리가 좋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렇게 긴 말을 바울은 단 한 줄로 정리를 해놓았습니다.

예습하는 의미로 로마서 10장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0장 4절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律法が目指すものはキリストです。それで、義は信じる者すべてに与えられるのです。

참 멋진 말씀 아닙니까.

이는 말하자면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해도, 아무리 율법 공부를 많이 해도, 결국 의를 이루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는 것 뿐,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것 뿐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이 고백하기를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내가 그래도 율법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는 줄 알았는데, 내가 그래도 꽤 의로운 줄 알았는데, 예수님을 알게 되니까 어떻대요?

디모데전서 1장 15절 후반부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私はその罪人のかしらです。


예, 오히려 내가 의인은 무슨 의인, 참으로 내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 그것도 죄인 중의 괴수였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내 안에서 죄가 살아나고 내가 죽어간다고 해요. 그럼 얼마 마다 죽는데요? 한 번만 죽는데요?

고린도전서 15장 31절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兄弟たち。私たちの主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私が抱いている、あなたがたについての誇りにかけて言いますが、私は日々死んでいるのです。

그렇습니다. 바울은 날마다 매일매일 죽는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자신을 돌아보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저를 감히 바울과 비교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만, 저 자신도 지금 생각해보면 과거에는 남에게 민폐도 끼치고, 남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그게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도덕적으로 보나 논리적으로 보나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고 하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도 보면, 왜 그렇게 자꾸 옛날 생각이 문득문득 나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면요 저 혼자 부끄러운 거예요. 아, 내가 왜 그 때 그랬을까. 내가 그러지 말걸 정말 내가 괜히 그 때 그래 가지고는……. 정말 어떤 때는요, 하루 동안에 떠오르는 후회의 가짓수 만도 한 두개가 아닙니다.

자, 그럼 이 시점에서 솔직해집시다. 이런 것. 과연 저만 그럴까요?

예전에 보니까 어느 만화 등장인물이 죽기 직전에 “내 생애에 한 점의 후회도 없다(我が生涯に一片の悔い無し)”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여러분께서는 그럼 천국 가기 전에 그런 말을 남기실 자신이 있으십니까.

이는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만, 만약에 실제로 어떤 사람이 그런 말을 남겼다면, 그 사람은 다음 둘 중의 하나, 아니면 두 가지 모두입니다.

그것은 첫째로, 정말 자신의 잘못을 느끼지 못하는, 얼굴 가죽이 두꺼운 사람이거나, 아니면 둘째로, 기억력이 부족한 사람이거나……이 둘 중의 하나, 아니면 둘 모두인지도 모르지요.

사실 그 만화 등장인물도요, 얼마나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많이 죽였는지 몰라요. 그런데 그러면서 한 점의 후회도 없다? 자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렸는데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까 했습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만화이긴 하지만요.

누구는 그렇게 말합니다. 자신은 후회하는 삶을 살기 싫다고, 자신의 인생에서 후회라는 말은 없다고 장담을 합니다. 그런 말을 하면 멋있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사실 그것은 대부분이 어쩌면 후회를 해야 하는데, 잘못을 뉘우쳐야 하는데 뉘우치지 못하는 인생, 회개하지 못하는 인생인지도 모르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가 단 한번도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 살아왔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지금까지 들키지 않았다고 해도, 단 한번도 죄를 짓지 않고 살아왔다는 사람이 계십니까. 아니요. 그런 사람들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바울도 자신을 되돌아보면 죄인, 그것도 죄인의 괴수였다고 하는데, 어느 누가 단 한번도 죄를 짓지 않고 살아왔다고 장담할 수가 있겠습니까.

2021년 현재 일본 돈 천엔짜리에 인쇄된 인물이 노구치 히데요입니다. 이 사람은 어렸을 때 한 손에 화상을 입어서, 손이 잘 펴지지 않았대요. 그럼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을 이겨낸 끝에 유명한 세균학자가 되어서 수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입니다.

이 정도 인물이 되니까, 당시 아직 살아 이는데도 이 사람에 대해서 위인전이 나왔다고 하는데, 이 책이 자신에게 보내져 왔다고 해요. 그래서 그 책을 읽어보았다고 하는데, 이 노구치 히데요 박사는 그 책을 읽고 대단히 불쾌해졌다는 것입니다.

노구치 히데요는 자신의 일대기에 대한 책을 읽고 난 다음에 뭐라고 했냐 하면,

“이 책은 정말 나쁜 책이다. 나는 이 책에 적힌 것처럼 완벽한 인간이 아니야. 나만이 아니라 누구도 이렇게 완벽한 사람은 없고, 나 또한 그처럼 완벽한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아. 이건 완전히 꾸며낸 이야기야” 라고 했다는 것이에요.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보면 이 분은 적어도 얼굴 가죽이 두껍거나 아니면 기억력이 부족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럼 이 박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이 분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특별히 부족해서였을까요?

사실 누구는, 아니, 우리 자신은 무슨 좋은 점만 있나요. 그리고 그러한 안 좋은 점들을 감추려고 한다면, 영원히 감추어 질 것 같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8장 17절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隠れているもので、あらわにされないものはなく、秘められたもので知られないもの、明らかにされないものはありません。

누가복음 12장 2절~3절
“2.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おおわれているもので現されないものはなく、隠されているもので知られずにすむものはありません。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が暗闇で言ったことが、みな明るみで聞かれ、奥の部屋で耳にささやいたことが、屋上で言い広められるのです。


로마서 14장 10절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それなのに、あなたはどうして、自分の兄弟をさばくのですか。どうして、自分の兄弟を見下すのですか。私たちはみな、神のさばきの座に立つことになるのです。


고린도후서 5장 10절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私たちはみな、善であれ悪であれ、それぞれ肉体においてした行いに応じて報いを受けるために、キリストのさばきの座の前に現れ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히브리서 9장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요한계시록 20장 12절
“12.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また私は、死んだ人々が大きい者も小さい者も御座の前に立っているのを見た。数々の書物が開かれた。書物がもう一つ開かれたが、それはいのちの書であった。死んだ者たちは、これらの書物に書かれていることにしたがい、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이처럼 우리는 반드시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고, 그 때에는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된다고 성경은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누구는 하나님을 믿으면 심판대 앞에 안 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는데, 누구는 서고 누구는 안 서고 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모두가 다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선 무엇부터 해야 할까요. 기도원에 들어가서 몇 날 며칠이고 금식하면서 회개해야 할까요. 뭐,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저는 훨씬 더 좋은 방법을 제안 드릴까 합니다.

훨씬 더 쉬운 방법이라고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더 쉬운 방법이 아닌 더 좋은 방법입니다.




로마서 12장 17절~18절
“17.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だれに対しても悪に悪を返さず、すべての人が良いと思うことを行うように心がけなさい。
自分に関することについては、できる限り、すべての人と平和を保ちなさい。

갈라디아서 5장 14절~15절
“14.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5.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律法全体は、「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一つのことばで全うされるのです。
気をつけなさい。互いに、かみつき合ったり、食い合ったりしているなら、互いの間で滅ぼされてしまいます。

나 자신이 내 힘만으로 의로울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는 이웃을 굴복시키거나 이용하려고 할 뿐이지, 이웃과 진정으로 화목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아무리 저 사람보다 나아 보인다 하더라도, 저 사람이 아무리 나보다 못나 보인다 하더라도, 결국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다 죄인이요, 내가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녔다 하더라도, 결국은 저 사람이나 나나 예수님 없으면 우리는 천국 문턱을 넘을 수 없습니다. 결국은 예수님을 붙잡아야 천국에 들어가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온 율법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律法全体は、「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一つのことばで全うされるのです。

이제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율법의 마침이 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 같이 사랑하고, 모두 함께 구원을 받고,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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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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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6회 승리를 위하여
2021년 9월 2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7장 8절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7章8節
“しかし、罪は戒めによって機会をとらえ、私のうちにあらゆる欲望を引き起こしました。律法がなければ、罪は死んだも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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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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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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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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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52번째 시간으로서 “승리를 위하여” 勝利のために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금 로마서를 공부하고 있습니다만, 여기서 보면 중대한 고비를 맞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 고비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이 로마서를 기록하고 있는 바울의 번민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 사도 바울이 번민을 하고 있는가 하면 바로 죄에 대한 번민입니다. 제가 보았을 때 이 부분은 정말 로마서 안에 있는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그렇다면 그 영화는 어디서부터 시작하는가 하면, 사실은 이미 시작했습니다. 그럼 언제 시작했는가 하면 바로 지난 주부터였습니다.

혹시 기억하시나요? 지지난 주까지 말씀 드리기를,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율법에 대하여 죽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를 꽁꽁 묵고 있었던 율법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생각 안해도 돼. 율법은 나쁜 거야. 구시대의 유물이다.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 자, 이제 율법을 버리자……이렇게 하면 가장 알기 쉬운 것이겠으나, 지난 주에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얼마나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어서 죽음에 이르게 되었고,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주심으로 인해서 어떠한 죄가 용서 받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율법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알아야지만 우리는 우리가 용서 받은 죄를 깨닫게 되고, 우리를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모든 것이 해결된 것 아니에요? 예수님이 율법에 대해서 죽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자유로움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기쁨을 누리면서 남은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참으로 기쁨과 감사로 넘쳐야 하는데……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에요.

우리가 용서를 받았으면 이제 죄를 짓지 말고 거룩하고 정직하고 순결하고 신실하고……또 뭐가 있죠? 아무튼 그렇게 살아야 하겠지요?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자, 주일날 교회 예배를 마치고, 이제 오늘부터는 성경에 적힌 말씀대로, 주님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에 품고서, 좀 거룩하고 정직하고 순결하고 신실하고……아무튼 그렇게 좀 살아보자……하는데, 그런데 사실 문제가 있습니다.

솔직한 말씀, 그게 되냐 하는 것입니다.

이 고민, 지금 누가 하고 있냐 하면, 바로 사도 바울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바울의 글을 보면서 감동을 안 받을래야 안 받을 수 없는 이유가 뭐냐 하면, 정말로 우리에게 와 닿는 내용이에요. 나는 거룩하고 순결하니까 너희들도 나처럼 죄를 짓지 말고 살아라……가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여러분, 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도 아무리 죄를 안 짓고 살아보려고 해도 그게 잘 안됩디다. 그래서 참 저도 고민이에요……이렇게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지난주부터 시작해서 로마서 7장 마지막까지 이어지고 있는, 정말 바울의 절절한 번민을 털어놓고 있는 휴먼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오늘은 8절 만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7장 8절
“8.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8.しかし、罪は戒めによって機会をとらえ、私のうちにあらゆる欲望を引き起こしました。律法がなければ、罪は死んだものです。

여기서 우리는 이 말씀을 조심해서 해석해야 합니다.

자, 일단 간단하게 본다면요, 우리 몸 안에 죄가 들어오게 되면 어떻게 되냐 하면,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탐심을 이루어 낸대요.


우리가 지난 번에 공부를 했지요? 성경에서 말하는 ‘죄’라는 것은 무엇에 대한 죄라고 말씀 드렸지요? 그렇습니다. ‘율법에 대한 죄’, 즉 윤리나 도덕적인 죄가 아니라, ‘율법적인 죄’, 율법에 명확하게 기록된 ‘죄’를 가리킵니다.

이를 분명하게 언급한 부분이 바로 8절 마지막 부분이에요.

로마서 7장 8절 마지막 부분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8……律法がなければ、罪は死んだものです。


이건 무슨 말씀이냐 하면, 우선 여기서 ‘죄가 죽은 것’이라고 하는 것은 ‘죄가 사라졌다’라는 뜻이 아니라, ‘죄인지 아닌지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있기 때문에 죄를 분간할 수 있는 것이지, 율법이 없었다면 무엇이 죄인지, 무엇이 죄가 아닌지 분간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죄라고 하는 것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된다면, 우리로 하여금 율법적인 죄를 짓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죄가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과정을 자세히 보면 어떻게 죄가 들어온대요?


예, 죄가 기회를 타서 들어온다고 합니다. 기회를 탄다는 것은 뭐냐 하면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이때다 싶을 때에 우리 몸 만으로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죄가 기회를 탄다……바울 서신 중 에베소서에 보면 바울은 다른 표현으로 흥미로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7절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悪魔に機会を与えないようにしなさ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을 절대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로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는 100% 마귀 짓입니다.

창세기에도 보시면 하나님이 절대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마귀가 유혹을 해서 하와가 먹고, 그리고 그 남편인 아담도 먹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라는 죄를 짓게 됨으로써, 그 놀라운 축복, 에덴이라고 하는 곳에서 쫓겨나게 되고 말었던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무술, 특히 검도 시합 같은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검도를 보면 서로 죽도가 막 부딪치는 격렬한 시합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어떤 때를 보면, 시합이 이미 시작했는데 서로가 마주보고 미동도 하지 않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건 둘이 그냥 힘들어서 쉬고 있는 거예요? 아닙니다. 서로 공격하는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떤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이냐 하면, 바로 상대방의 틈, 가장 약한 곳, 순간이라도 공격하기 쉬운 틈을 노리고 있다가, 잠깐이라도 방심한 부분이 발견되면 바로 그 곳을 치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틈을 보이지 않고 있어요. 그러면 상대방이 이쪽으로 치고 들어올 수 없으니까 꼼짝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이 코로나 사태가 2년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가끔 인터넷에 보면 특히 교회에서 이런저런 분들이 하시는 말씀이, 여러 가지 근거를 들면서, 하나님이 이러이러해서 우리에게 코로나라고 하는 환난을 겪게 하신다……그런 말씀을 종종 하신다고 해요.

그래서 좀 자세히 그와 갈은 말씀을 들어보니, 뭐 상상은 자유지요. 하지만 별로 성경적이지 않은 말씀을 명확한 근거도 없이 마치 자기가 무슨 선지자라도 되신 것처럼 예배 시간에 전한다는 것은, 자칫하면 성경해석에 있어서 적지 않은 오해를 던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말씀을 다시 한번 묵상하다 보니, 이는 마치 코로나처럼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잠시 우리가 긴 쇠사슬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쇠사슬이라고 하는 것은 작은 쇠로 된 고리가 서로 길게 연결된 것을 말합니다만, 그 쇠사슬의 강도는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하면 가장 약한 고리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쇠고리들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결국 가장 약한 고리가 끊어져버리면 그 쇠사슬은 제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경우는 거리 두기 몇 단계, 일본을 보면 경계 레벨 3단계, 4단계. 그 위는 만연방지 등 중점조치. 더 나아가 긴급사태선언 등이 있습니다만,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인 것 같습니다.

정부나 행정기관에서는 가급적 외출은 자제하고 손 소독과 마스크착용을 철저하게 하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평소부터 잘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해요. 아니, 지금까지 잘 지키고 있었는데, 더 이상 어떻게 잘 지켜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분들이 계십니다. 정말 요즘 같은 세상에서 본다면 참으로 모범적인 분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제아무리 코로나가 다른 사람들에게 병을 전염시킨다 하더라도, 평소부터 이처럼 철저하게 잘 지키는 사람들을 통해서는 좀처럼 확산되지가 않습니다. 이런 분들은 그야말로 쇠사슬 중에서도 강한 쇠고리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모두가 모두 이런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코로나 같은 건 그냥 감기다. 뭐 그러면서 마스크도 안 하고 손 소독도 안 합니다.


얼마 전 방송에서 어떤 의사 이야기를 들으니까, 코로나가 의심된다면서 어느 한 젊은이가 찾아 왔대요. 그래서 검사를 해보니까 역시 코로나라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해서 감염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얼마 전 여럿 친구들이랑 집에서 10시간 동안 술을 마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이 의사 선생님의 말대로 하자면, 정말 못 해먹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에요. 아니, 지금 코로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하고 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조심하라고, 방역에 신경을 쓰라고 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걸 듣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행동해서 결국 확진자가 되었다니 참으로 답답하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평소부터 철저하게 방역지침을 따르고 있는 사람 때문에 코로나가 확산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을 통해서 확산됩니까.

“에이, 내가 설마 걸리겠어? 나는 괜찮아. 걱정하지 마.”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확산한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약한 고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혹시 평소에, ‘나는 유혹에 강하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운전할 때에도 보면 ‘나는 운전을 잘 한다’. 그리고 누가 거짓말을 하거나 속이려고 해도 ‘나는 절대로 속아넘어가지 않는다’ 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실 수 있는 분, 계십니까.


나는 유혹에 강하다, 나는 운전을 잘 한다, 나는 절대로 속아넘어가지 않는다……이렇게 스스로를 믿고 있는 분들은, 얼핏 보기에는 쇠사슬 중에서도 강한 고리처럼 보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은 쇠사슬 중에서도 약한 고리, 그 중에서도 가장 약한 고리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누가 유혹합니까. 그렇습니다. 마귀가 유혹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힘으로 마귀를 이길 수가 있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마귀가 누구를 유혹하려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에 의하면 예수님까지도 유혹하려고 했던 놈들이 바로 마귀입니다.

예전에 어떤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목사님 말씀에 의하면,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정확하게 몰라서 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럼 제 생각은 어떠냐 하면, 제 생각은 제쳐놓고 성경적으로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1장 23절~26절
“23.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4.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ちょうどそのとき、汚れた霊につかれた人がその会堂にいて、こう叫んだ。
「ナザレの人イエスよ、私たちと何の関係があるのですか。私たちを滅ぼしに来たのですか。私はあなたがどなたなのか知っています。神の聖者です。」
イエスは彼を叱って、「黙れ。この人から出て行け」と言われた。
すると、汚れた霊はその人を引きつけさせ、大声をあげて、その人から出て行った。

예수님께서 가시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 알아보더라도 오히려 마귀들이 먼저 알아보고는 무서워 합니다. 지금 여기에 나오는 귀신이 어느 정도 힘을 가진 마귀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미루어 짐작컨대 앞서 말씀 드렸던 예수님을 직접 유혹하려던 마귀가 그냥 졸개 마귀였겠습니까. 그렇지는 않겠지요. 아마도 상당한 힘을 가진 마귀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러면 그냥 마귀들도 예수님을 알아보는데, 예수님을 직접 유혹하려고 달려드는 마귀가 예수님을 못 알아보았겠어요? 그건 마귀를 너무나도 마귀들을 과소평가하시는 것입니다. 마귀들이 지네들 자존심 상한다고 기분 나빠할 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마귀들은 감히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까지도 유혹하려고 달려드는 놈들입니다. 그런 마귀들을 우리 힘만으로 이길 수가 있을 것 같습니까. 아니에요. 그건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오늘날과 같이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소독도 안 하고 마스크도 안 하는 사람들 중에는 ‘나는 몸이 튼튼하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병에 걸리지 않는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자신감은 역시 강한 고리가 아니라 약한 고리입니다. 그와 같은 약한 고리, 그와 같은 틈을 타서 코로나가 퍼져간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나는 운전을 잘한다’ ‘나는 절대로 남들한테 속지 않는다’라고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어쩌면 이런 분들 또한 가장 약한 고리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강한 고리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런 것들을 뒤집어보면 알겠지요.

‘나는 운전을 잘한다’는 것이 약한 고리라면, 무엇이 강한 고리입니까. 그것은 바로 ‘나는 운전할 때 실수할 수도 있다’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 이것이 강한 고리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는 젊은 사람이나 나이 드신 분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얼마나 운전을 잘 하는지 알아? 지금까지 한 번도 사고를 일으켜본 적이 없단 말이야” 라고 하는 마음은 강한 것이 아니라 약한 것입니다. 사고를 일으킬 확률을 한도 끝도 없이 올리는 일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반면에 나는 실수할 수 있으니까, 라는 생각을 가지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항상 조심하면서 운전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그만큼 사고 위험도 낮출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나는 유혹에 강하다’라고 하는 것이 약한 고리였다고 한다면, 강한 고리는 그 반대인 ‘나는 유혹에 약하다’라고 하는 마음이 오히려 강한 고리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나는 유혹에 약하다’라고 하는 마음이 어떻게 해서 강한 고리가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나는 유혹에 약하다. 내 힘으로는 마귀를 이기지 못한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돼요? 그렇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마귀 사탄을 물리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얼마나 교회에 오래 다녔는지 알아? 내가 얼마나 금식을 많이 해봤는지 알아? 내가 얼마나 헌금을 많이 냈는지 알아? 내가 얼마나 성경을 많이 아는지 알아? 내가 몇 대째 기독교 집안인지 알아?”

이와 같은 마음은 강해보일지는 모르지만, 알고 보면 쇠사슬 중에서도 대단히 약한 고리이며, 이와 같은 틈을 통해서 죄가 기회를 타서 들어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잠언 16장 18절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高慢は破滅に先立ち、高ぶった霊は挫折に先立つ。

이사야 5장 21절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わざわいだ。自分を知恵のある者と見なし、自分を悟りのある者と思い込む者たち。

고린도전서 10장 12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ですから、立っていると思う者は、倒れないように気をつけなさい。


우리는 교만한 마음, 거만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특히 믿음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 교만과 거만이라고 하는 마음이 마귀들에게 틈을 주어 기회를 타서 죄악들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私を強くしてくださる方によって、私はどんなことでもできるのです。

나는 비록 약하고 둔하고 미련하나, 우리가 주님을 믿고 의지하면 주님이 내게 능력을 주시고,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마귀에게 틈을 보여주어서는 안 됩니다. 기회를 타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믿음과 말씀과 실천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첫째로 내 힘으로는 못하지만 주님을 의지하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주님만을 의지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하는 강한 믿음으로 무장하고,

둘째로 유일하고도 완전하신 주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무기로 삼아,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으며 소망을 가지고,

셋째로 믿음과 말씀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실천하는 삶을 통해서, 마침내 마귀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고, 승리하여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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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5회 율법과 죄와 사랑
2021년 9월 1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7장 5절~7절
“5.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7.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ローマ人への手紙 7章5節~7節
“5.私たちが肉にあったときは、律法によって目覚めた罪の欲情が私たちのからだの中に働いて、死のために実を結びました。
6.しかし今は、私たちは自分を縛っていた律法に死んだので、律法から解かれました。その結果、古い文字にはよらず、新しい御霊によって仕えているのです。
7.それでは、どのように言うべきでしょうか。律法は罪なのでしょうか。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むしろ、律法によらなければ、私は罪を知ることはなかったでしょう。実際、律法が「隣人のものを欲してはならない」と言わなければ、私は欲望を知らなかったでしょ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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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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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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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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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51번째 시간으로서 “율법과 죄와 사랑” 律法と罪と愛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우선 본문 말씀 5절~6절을 살펴 보고, 그 다음에 7절을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앞부분의 내용은 지난 2주 동안 전해드린 말씀을 들으셨다면 별로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먼저 5절~6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7장 5절~6절
“5.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5.私たちが肉にあったときは、律法によって目覚めた罪の欲情が私たちのからだの中に働いて、死のために実を結びました。
6.しかし今は、私たちは自分を縛っていた律法に死んだので、律法から解かれました。その結果、古い文字にはよらず、新しい御霊によって仕えているのです。

자, 5절에 기록하기를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私たちが肉にあったとき)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당연히 궁금해야 할 것이 있지요. 그게 뭐냐 하면, 뭐가 육신에 있을 때인데? 라고 하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뭐가 육신에 있을 때이겠습니까. 이는 바로 영혼이 육신에 있을 때라는 뜻입니다. 영혼이 육신에 있게 되면 어떻게 되지요?

여러분께서는 지금 영혼이 육신 안에 있으십니까? 예, 간혹 어떤 분은 자기 자신이 긴가 민가 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여기에 계신 모든 분들은 육신 안에 영혼이 있으신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그러면 육신 안에 영혼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이에요? 예, 그렇죠.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펴봤다면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 있지요? 여기서 살아있다는 뜻은 지금 우리처럼 물리적으로 살아있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에 대해서 살아 있다는 뜻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율법에 대해서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이제 성경이 좀 보이기 시작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5절 첫 부분은 이런 말입니다. “우리가 율법에 대해서 살아 있을 때에는”이라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중간 부분을 보아야 하겠지요.

로마서 7장 5절 중간 부분만 보겠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律法によって目覚めた罪の欲情が私たちのからだの中に働いて


이 또 역사하여……라고 하는 말씀, 꽤 자주 나오는 말씀입니다만, 성경에서 자주 나오는 ‘역사하다’가 사실 무슨 뜻이에요?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역사……는 왠지 아닌 것 같긴 하죠?

이는 간단하게 말씀 드리자면, 일을 하다, 어떠한 작용을 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다……는 뜻은 하나님께서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다 (罪の欲情が私たちのからだの中に働いて)’는 말이 나오는데, 우리 지체는 우리 몸이 되겠지요. 우리 몸 안에서 뭔가가 작용을 한데요. 그러면 뭐가 작용을 하냐 하면,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몸 안에서 작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도 나오긴 합니다만, 우리가 쉽게 말해서 ‘죄’라고 하는 것은 무엇에 대한 죄입니까. 그렇죠. 이는 윤리나 도덕적으로 보았을 때의 ‘죄’가 아니라 ‘율법적인 죄’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율법적으로 보았을 때의 죄, 정말 죄를 지으려고 하는 이 인간의 속성이 우리 몸 안에서 작용을 한다는 것이에요.

자,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냐 하면, 5절 마지막 부분입니다.

5절 마지막 부분을 보시면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実を結びました)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열매를 맺는다’ 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오랜 노력 끝에 무슨 좋은 일을 성취한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만, 성경에서는 좋은 뜻으로도 쓰이지만 안 좋은 뜻으로도 쓰입니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이해를 하면 되냐 하면, 이는 한국사람이나 일본사람이라면 너무나도 쉽게 이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한자로 생각하면 명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열매, 과실을 맺는다……이걸 한자로 쓰면 어떻게 됩니까. ‘맺을 결’, ‘열매 과’ 이렇게 해서 ‘결과’라는 한자가 됩니다. 그러니까 ‘열매를 맺는다’라는 ‘결과적으로 볼 때 좋게 되거나 안 좋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열매를 맺게 되냐 하면,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사망이라는 결과가 되다. 즉, 결과적으로 사망에 이르게 된다고 하는 뜻입니다.

자, 이렇게 보면 어떻게 됩니까.

로마서 7장 5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7장 5절
“5.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5.私たちが肉にあったときは、律法によって目覚めた罪の欲情が私たちのからだの中に働いて、死のために実を結びました。”

이 말씀은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율법에 대해서 살아 있을 때에는, 율법적인 죄가 우리 몸 안에서 작용을 해서, 결과적으로 사망에 이르게 되었더니……”

이런 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이제 5절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었지요?

그러면 이제 6절로 넘어가겠습니다.

로마서 7장 6절
“6.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6.しかし今は、私たちは自分を縛っていた律法に死んだので、律法から解かれました。その結果、古い文字にはよらず、新しい御霊によって仕えているのです。

6절은 앞부분과 뒷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6절 앞부분,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しかし今は、私たちは自分を縛っていた律法に死んだので、律法から解かれました。

이 말씀에 보면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해서 죽었대요.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합니다. 이 역시 지금까지 함께 공부해 오셨다면 금방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에 대해서 살아 있을 때는 율법이 우리를 지배했습니다. 우리를 속박했습니다. 우리를 정죄하고 심판하기 위해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노력을 해도, 아무리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보려고 해도 도저히 이 율법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어요. 우리는 꼼짝없이 율법 앞에서는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 주셨습니다.

신명기 21장 23절 후반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中盤)
木にかけられた者は神にのろわれた者だからである。

이사야 53장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しかし、彼は私たちの背きのために刺され、私たちの咎のために砕かれたのだ。彼への懲らしめが私たちに平安をもたらし、その打ち傷のゆえに、私たちは癒やされた。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십자가라고 하는 나무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대신해서 모두 다 받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 때문에 우리가 받아야 할 징계를 대신해서 받아 주시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우리가 맞아야 할 채찍을 대신 맞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대신해서 율법에 대해서 죽어주심으로 인해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지고, 우리는 율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 다음에 6절 뒷부분이요,

로마서 7장 6절 후반부
“6……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6……その結果、古い文字にはよらず、新しい御霊によって仕えているのです。

이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율법에 대해서 죽음으로써 율법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이라고 하는 오래된 포도주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가르침, 새 포도주를 새 가죽 부대에 듬뿍듬뿍 담아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여기까지는 지금까지 공부한 복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그 내용은 율법에 관해서 대단히 비판적입니다.

예수님 이전에는 율법이 사람들을 지배하고 정죄하고 심판하고 있었지만,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율법이라고 하는 족쇄에서 벗어났어요. 이제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완전히 자유로운 몸이 되었습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율법을 버려도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게 율법을 버리는 거예요?

까짓 거 쉽죠. 율법이 적혀 있는 성경책 부분을 찢어버리면 되잖아요. 그렇지 않아도 두껍고 무거운 성경책인데, 그리고 율법 내용은 얼마나 어렵고 지루해요? 레위기나 신명기 보세요. 읽다 보면 얼마나 잠이 잘 오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율법에서 벗어났다면서요? 그렇다면 그거라도 좀 줄여도 되지 않겠어요?

자, 성경은 여기서 다음 단락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기록합니까.

로마서 7장 7절을 봅니다.

“7.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7.それでは、どのように言うべきでしょうか。律法は罪なのでしょうか。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むしろ、律法によらなければ、私は罪を知ることはなかったでしょう。実際、律法が「隣人のものを欲してはならない」と言わなければ、私は欲望を知らなかったでしょう。”


이것도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첫 부분,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7.それでは、どのように言うべきでしょうか。律法は罪なのでしょうか。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

우리를 억압하고 우리가 지키지 못할 것들을 많이 만들어 놓고서는, 우리가 이를 지키지 못하면 정죄하고 심판하고 그런 율법, 더구나 우리는 이 율법 때문에, 이 율법으로 사형판결을 받아 지옥으로 떨어져야 마땅한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죄의 원흉, 우리의 원수는 바로 율법이다. 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바울은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그 이유가 뒤에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 7장 7절 후반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むしろ、律法によらなければ、私は罪を知ることはなかったでしょう。実際、律法が「隣人のものを欲してはならない」と言わなければ、私は欲望を知らなかったでしょう。”

이를 단계적으로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차적으로 본다면, 율법에서 이것을 하지 말라, 저것을 하지 말라, 이렇게 규정 되어 있으니까, 아, 우리가 무엇이 죄인지, 무엇이 죄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고,

2차적으로는, 우리가 어떠한 법을 여김으로 인해서 죽임을 당하게 되었고, 그리고 어떤 죄를 용서 받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율법인 것입니다.

이 율법이 없었다면 우리는 어떠한 죄를 짓고 어떠한 형벌을 받아야 마땅했는지, 우리는 어떠한 죄를 용서 받았는지,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이 율법을 통해서만 우리가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이 율법을 알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8장 23절~35절
“23.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23.ですから、天の御国は、王である一人の人にたとえることができます。その人は自分の家来たちと清算をしたいと思った。
24.清算が始まると、まず一万タラントの負債のある者が、王のところに連れて来られた。
25.彼は返済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ので、その主君は彼に、自分自身も妻子も、持っている物もすべて売って返済するように命じた。
26.それで、家来はひれ伏して主君を拝し、『もう少し待ってください。そうすればすべてお返しします』と言った。
27.家来の主君はかわいそうに思って彼を赦し、負債を免除してやった。
28.ところが、その家来が出て行くと、自分に百デナリの借りがある仲間の一人に出会った。彼はその人を捕まえて首を絞め、『借金を返せ』と言った。
29.彼の仲間はひれ伏して、『もう少し待ってください。そうすればお返しします』と嘆願した。
30.しかし彼は承知せず、その人を引いて行って、負債を返すまで牢に放り込んだ。
31.彼の仲間たちは事の成り行きを見て非常に心を痛め、行って一部始終を主君に話した。
32.そこで主君は彼を呼びつけて言った。『悪い家来だ。おまえが私に懇願したから、私はおまえの負債をすべて免除してやったのだ。
33.私がおまえをあわれんでやったように、おまえも自分の仲間をあわれんでやるべきではなかったのか。』
34.こうして、主君は怒って、負債をすべて返すまで彼を獄吏たちに引き渡した。
35.あなたがたもそれぞれ自分の兄弟を心から赦さないなら、わたしの天の父もあなたがたに、このようになさるのです。」


우선 여기에 달란트와 데나리온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화폐단위입니다. 먼저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하루 치 임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달란트는 데나리온의 6000배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라는 뜻이 됩니다.

요즘 일용직 노동자 하루 임금에 대해서는, 뭐 개인마다 다르겠습니다만, 편의상 10만원이라고 하지요. 하루 10만원, 일본 돈으로는 1만엔이라고 편의상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하루 임금 10만원을 1데나리온이라고 한다면, 백 데나리온은 1,000만원(100万円)입니다.

그럼 만 달란트는 얼마가 되겠습니까. 6000데나리온이 1달란트였잖아요. 1 데나리온이 10만원(1万円)이면, 6000데나리온은 6억원(6千万円)입니다. 6억원이 말하자면 1달란트에요. 그럼 만 달란트는 얼마냐 하면, 6억원에 0를 4개 붙이면 됩니다. 그러면 6조원(6千億円)입니다.

그러니까 백 데나리온은 1,000만원(100万円), 만 달란트는 6조원(6千億円) 정도가 된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자, 그럼 이 이야기로 되돌아가보면 어떻게 됩니까. 어떤 임금이 자기한테 6조원(6千億円)을 빚진 종, 아마도 신하(家来)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런데 그를 끌고 왔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너와 네 아내와 자식, 그리고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팔아서 6조원(6千億円)을 갚으라고 명합니다.

자기와 자기 아내와 자식을 판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평생 동안 노예로 살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신하가 엎드려 절하며 사정을 합니다. 제발 좀 봐달라고 다 갚을 테니까 참아달라고 합니다.

아니, 많은 빚을 진 사람이, 이제부터 무슨 일을 한다고 해서 6억원(6千万円)도 아니고 6조원(6千億円)이나 되는 돈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금액이 문제가 아니라 평생 일을 해도 절대로 못 갚을 만한 돈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러자 주인이 놀라운 결단을 합니다. 그래. 알았다. 됐어. 안 갚아도 돼. 이렇게 말을 합니다. 참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 종은 신이 나서 나갔습니다. 그런데 나가다가 동료를 만났는데, 이 사람은 이 종한테서 천 만원(100万円)의 빚을 지고 있었어요. 참 재주도 좋아요. 자기는 6조원(6千億円)이나 빚을 지고 있는 주제에, 그는 이 동료한테 천만원(100万円)을 꿔줬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동료를 만나자마자 멱살을 잡고 당장 천 만원(100万円) 갚으라고 다그칩니다.

그랬더니 이 동료가 역시 엎드려서 부탁하기를 내가 꼭 갚을 테니 좀 봐달라고 사정을 해요.

그러면 어떻게 했어야 합니까. 그래. 내가 6조원6조원(6千億円)이나 되는 빚을 탕감 받았는데, 그거 내가 탕감해주지 못하겠나, 하면서 안 갚아도 돼! 이렇게 했어야 하는데, 이 친구, 어떻게 했습니까.

탕감해주기는커녕 감옥에 가둬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를 지켜보던 동료들이, 야, 이거 해도해도 너무하다 라고 해서 주인한테 알립니다.

그랬더니 그 6조원(6千億円)을 탕감해준 주인이 당연히 화를 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했대요? 예, 그 6조원을 다 갚도록 옥에 가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8장 35절
“35.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35.あなたがたもそれぞれ自分の兄弟を心から赦さないなら、わたしの天の父もあなたがたに、このようになさるのです。」

이 말씀은 정말 보면 볼수록 절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6조원(6千億円)은 그야말로 재벌이라면 모를까 일반인들한테는 정말 감이 안 잡힐 만한 금액이에요.

어느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한국에서는 평생소득이 의사가 40억원 정도, 변호사가 35억원 정도라고 합니다. 한 명의 의사가 평생동안 40억원을 번다고 한다면 6조원(6千億円)은 의사 1500명이 평생 동안 한 푼도 안 쓰고 번 돈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고 백 데나리온. 얼마였죠? 예, 1,000만원(100万円)입니다. 1,000만원(100万円)이 적은 돈이에요? 아니에요. 적은 돈은 아닙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누구한테 1,000만원(100万円) 빌려줘 보신 적 있으신가요? 그리고 그 빌려주신 돈을 모두 탕감해 주신 적이 있으신가요?

웬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거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저는 여기서 돈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잠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비유에 등장하는 이 종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볼까 합니다.

자기가 큰 빚이 있었어요. 하지만 한 번에 그 많은 돈을 빚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조금씩 돈을 빌리다 보니 어느새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고 말았을 지도 모릅니다. 집에 돈도 없어요. 매달 월급을 받아도 그게 자기 돈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늘어가는 빚에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주인이 그 빚을 다 갚으라고 해요. 자기는 물론 가족이 모두 노예로 팔려나갈 지경이에요. 이는 정말 죽기보다도 괴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밑져야 본전으로 빌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빚을 다 탕감해주었어요.

자기만이 아니라 자기 가족들이 모두가 구원 받았습니다. 참 기뻤을 것입니다. 그런데 잠깐. 다 탕감해준 것은 고마운데, 그렇다고 내 수중에 돈이 들어온 것은 아니잖아요? 6조원을 탕감 받긴 했지만 그렇다고 돈 백 만원 정도라도 쥐어준 것은 아니란 말이에요. 여전히 자기 주머니는 비어 있어요.

그런데 마침 어쩌면 자기가 한 창 잘 나갈 때 1천만원(100万円)을 빌려준 동료를 만난 거예요. 100만원(10万円)도 아니고 1000만원(100万円)입니다. 이제 그 돈이 있으면 정말 내 돈이에요. 내 빚은 이제 다 탕감 받았으니까, 누군가한테 빼앗길 걱정도 없는 완전한 자기만의 돈입니다.

그 돈만 있으면 정말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 1000만원(100万円)을 받아내고 싶었는지도 모르지요. 그 마음? 저는 그런 6조원(6千億円)이나 되는 큰 빚을 져본 적은 없고, 그런 1000만원(100万円)이나 되는 돈을 꿔줘 본 적도 없지만, 그래도 왠지 그 마음, 돈 1000만원(100万円)을 꼭 받아내고 싶어했던 그 마음은 알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제3자인 우리가 보기에는 어때요? 야, 1000만원(100万円)이 적은 돈은 아니야. 하지만 자기는 6조원(6千億円)이나 탕감 받았잖아. 6조원(6千億円)에 비하면 1000만원(100万円)은 60만분의 1이야. 60만배나 되는 돈을 탕감 받았으면서 60만분의 1도 봐주지 못하냐……이런 생각이 드는 것 또한 당연하겠지요.

열심히 노력하면 1000만원(100万円) 정도는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사 1500명이 평생 벌 돈을 일반 서민이 혼자서 어떻게 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종이 부족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의리? 자비심? 믿음? 아니요. 그가 부족했던 것은, 바로 작은 기억력이었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큰 빚을 탕감 받았는지를 기억했었더라면 그는 자기 동료에게 그토록 무자비한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모르죠. 1년 정도 감옥에 있다가 탕감 되었다면, 그 감사한 마음이 컸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1년 정도 감옥에 있다가 탕감 받는 것이랑, 하루도 감옥에 안가고 탕감 받는 것이랑 무엇이 더 큰 은혜겠습니까. 당연히 하루도 감옥에 안 가고 탕감 받는 것이 더 큰 은혜지요.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죽은 다음에 1년 정도 지옥에 있다가 천국에 가는 것과, 곧바로 천국에 가는 것과 어떤 것이 더 큰 은혜겠습니까.

아휴, 1년이요? 성경에 적힌 지옥에 대한 기록을 보세요. 1년은 무슨, 1분 1초라도 거기 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살아서 이 세상에 있을 때에는, 구원의 값어치를 잘 몰라요. 왜냐하면 아직 살아 있거든요. 지옥에 가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무엇을 못해요? 그렇습니다. 용서를 못 합니다.

그래서 내가 탕감 받은 6조원은 기억하지 못하고, 내가 챙겨야 할 100만원, 내가 받아내야 할 1000만원만 생각하면서, 내 주머니를 챙기고 내 자존심을 챙기면서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무시하고 깔아뭉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율법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고, 내가 얼마나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고, 나야말로 잘나기는커녕 죄인 중의 죄인이구나 하는 것을 깨우쳐주는 것이 율법이요, 이를 해결해 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 아아, 정말 예수님 아니었으면 나는 큰일 났었겠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 이를 깨닫기 위해서 율법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알아야 우리는 우리의 죄를 알 수 있고,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오신 예수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주신 예수님,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 주신 예수님, 우리를 위해 죽어 주신 예수님, 우리를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 우리를 위해 하늘에 올라가신 예수님, 그리고 장차 우리를 위해 다시 오실 예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0장 8절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病人を癒やし、死人を生き返らせ、ツァラアトに冒された者をきよめ、悪霊どもを追い出しなさい。あなたがたはただで受けたのですから、ただで与えなさい。

이 말씀은 주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여러 이적을 행하였을 때 그 대가로 돈을 받지 말라고 하시면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셨습니다만, 우리가 거저 받는 것이 그와 같은 이적 뿐입니까.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것은 구원도 그렇고 축복도 그렇고 은혜로 그렇습니다만,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된 이유가 바로 ‘용서’를 거저 받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거저로 받았기 때문에 축복도 있고, 은혜도 있고 구원도 있는 것이지, 용서를 받지 못했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용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거저로 받았고, 십자가는 율법에 대한 죽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죄인 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이 율법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알게 하시고,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됨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은혜와 용서를 우리 이웃에게 거저로 베푸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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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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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4회 율법과 구원 (2)
2021년 9월 1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7장 1절~4절
“1.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3.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7章1節~4節
“1.それとも、兄弟たち、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私は律法を知っている人たちに話しています──律法が人を支配するのは、その人が生きている期間だけです。
2.結婚している女は、夫が生きている間は、律法によって夫に結ばれています。しかし、夫が死んだら、自分を夫に結びつけていた律法から解かれます。
3.したがって、夫が生きている間に他の男のものとなれば、姦淫の女と呼ばれますが、夫が死んだら律法から自由になるので、他の男のものとなっても姦淫の女とはなりません。
4.ですから、私の兄弟たちよ。あなたがたもキリストのからだを通して、律法に対して死んでいるのです。それは、あなたがたがほかの方、すなわち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った方のものとなり、こうして私たちが神のために実を結ぶようになるため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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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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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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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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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50번째 시간으로서 “율법과 구원(2)” 律法と救い(2)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먼저 지난 주의 복습부터 해보려고 합니다. 왜냐 하면 이 점은 이후의 전개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지금부터 두 가지 질문을 드릴 텐데, 이는 지난 주의 내용을 들으셨다면 전혀 어려울 것도 없는 문제입니다.

첫번째 질문입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다음으로 두번째 질문,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첫번째 질문.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두번째 질문,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근거는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로마서 7장 1절과 7장 4절 전반부에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 7장 1절과 7장 4절 전반부를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7장 1절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1.それとも、兄弟たち、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私は律法を知っている人たちに話しています──律法が人を支配するのは、その人が生きている期間だけです。

로마서 7장 4절 전반부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4.ですから、私の兄弟たちよ。あなたがたもキリストのからだを通して、律法に対して死んでいるのです。……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율법에 대해서 아직 살아 있을 때에는 율법이 우리를 체포해서 끌고 가서는 심판대 앞에 세우고 우리를 정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면,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체포할 수도 없습니다. 잡아 갈 수도, 심판대 앞에 세울 수도,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를 정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율법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율법 앞에서 죽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못 박혀 죽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에 얽매어서 율법에 의해 정죄 받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 주에 이미 살펴본 부분입니다만, 우리는 이 부분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보고자 합니다.

로마서 7장 2절~3절을 봅니다.

로마서 7장 2절~3절
“2.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3.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2.結婚している女は、夫が生きている間は、律法によって夫に結ばれています。しかし、夫が死んだら、自分を夫に結びつけていた律法から解かれます。
3.したがって、夫が生きている間に他の男のものとなれば、姦淫の女と呼ばれますが、夫が死んだら律法から自由になるので、他の男のものとなっても姦淫の女とはなりません。

이 말씀은 율법과 구원에 대한 비유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각각 무엇이 어떤 비유인지를 살펴보면 어떻게 될까요.

먼저 여기에 등장하는 단어들부터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단어는, 1. 남편(夫), 2. 여인(女), 3. 법(律法), 4. 다른 남자(他の男), 5.음녀(姦淫の女).

남편과 여인이 있는데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는 남편의 법으로 매인 바 된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남녀불평등이다 남존여비다 그러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여성의 선거권이 인정된 것 자체가 10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지금은 아무리 문명국이라 하더라도 과거에는 한국이나 일본을 비롯해서 많은 나라들이 남성중심의 사회였습니다. 더구나 이 성경은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쓰여진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지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는 그 시대적인 배경도 함께 이해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자, 본론으로 돌아가서 보면, 여인이 남편과 결혼을 했었다고 한다면 그 남편의 법에 따라야 했습니다. 만약에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 다른 남자에게로 갔다면, 이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음녀, 죄인이 되고 맙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음행을 한 사람에 대한 죄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죽음이었습니다.


레위기 20장 10절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人が他人の妻と姦淫したなら、すなわち自分の隣人の妻と姦淫したなら、その姦淫した男も女も必ず殺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

신명기 22장 22절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夫のある女と寝ている男が見つかった場合は、その女と寝ていた男もその女も、二人とも死ななければならない。こうして、あなたはイスラエルの中からその悪い者を除き去りなさい。

배우자가 있는 사람과 음행을 한 사람에 대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무조건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었어요. 그렇게 된다면 여인은 그 남편의 법에 얽매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얼마든지 다른 남자, 물론 여기서는 그 남자도 배우자가 없어야 하겠지요. 아무튼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서 다시 혼인을 한다는 것은 음녀가 아니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등장하는 단어들은 각각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다시 한 번 단어를 정리하자면, 1. 남편(夫), 2. 여인(女), 3. 법(律法), 4. 다른 남자(他の男), 5.음녀(姦淫の女).

먼저 남편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신앙입니다. 여인은 우리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고, 법은 율법을 말합니다. 다른 남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의 신앙이고, 마지막 음녀라는 것은 율법을 어긴 사람을 나타냅니다.

즉, 이를 풀어서 말하자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당연하게도 기독교가 없었습니다. 오직 완전한 신앙은 유대교 뿐이었지요. 그래서 그 전에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은 반드시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시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는 율법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마음이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9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イエスが、彼らの律法学者たちのようにではなく、権威ある者として教えられたからである。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들, 여기서 서기관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율법학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만, 그들의 해석이 곧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었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시는 가르침을 들으니까 정말로 새로워요. 기존의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이 했던 말들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말씀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들의 해석이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주장했던 율법 해석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이 아닌,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말하자면 왜곡된 율법해석이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3장 4절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また彼らは、重くて負いきれない荷を束ねて人々の肩に載せるが、それを動かすのに自分は指一本貸そうともしません。

당시 종교지도자이자 기득권자였던 그들은, 그렇지 않아도 지키기 어려운 율법을 더 어렵고 복잡하게 만들어 놓음으로써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하면 안된다, 저것을 하면 안 된다 하고 여러 규정을 자기들 멋대로 만들어 놓고는, 자기들은 안 지키면서 다른 사람들이 이를 어기면 엄하게 꾸짖거나 벌을 내리기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당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아직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셨기 때문에 율법은 지켜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셨다는 것은 무엇을 나타내느냐 하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아직 율법에 대해서 죽지 않은 상태, 다시 말해서 율법이 나를 언제든지 잡아갈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서 율법을 안 지키고 다른 것을 지킨다는 것은 마치 남편이 아직 살아 있는 상황에서 다른 남자에게로 가는 것과도 같은 음녀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에는 최소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은 반드시 지켜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해 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주셨습니다. 원래는 우리가 율법에 대해서 사형판결을 받아 죽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사형판결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어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예수님의 죽음은 율법에 대한 죽음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이 세상 법이 우리를 심판할 수 없듯이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죽음은 마치 남편이 죽어서 남편의 영향권에서부터 벗어나게 된 것처럼 우리는 이제 율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믿음, 예수님께서 주신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9장 17절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また、人は新しいぶどう酒を古い皮袋に入れたりはしません。そんなことをすれば皮袋は裂け、ぶどう酒が流れ出て、皮袋もだめになります。新しいぶどう酒は新しい皮袋に入れます。そうすれば両方とも保てます。」

가죽 부대는 말하자면 동물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거기에 음료를 담기도 했었는데, 이 가죽 주머니가 새로 만들었을 때에는 두껍고 탄탄하지만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두께는 얇아지고 강도도 떨어지게 됩니다.

한편 포도주를 새로 담그게 되면 아직 숙성이 덜 되었기 때문에 발효되는 힘이 너무나 강해서 이를 오래된 가죽 주머니에 넣게 되면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새로 담근 포도주는 반드시 새 가죽 주머니에 넣어야 한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상식 중의 상식이었습니다.

여기서 오래된 포도주는 무엇이고 새 포도주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되는데, 이는 오래된 포도주는 율법적인 가르침,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당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주장하는 가르침이요,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죽 부대는 우리의 신앙, 우리들의 믿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면, 우리는 이제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채우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이는 바로 낡은 가죽 부대가 아니라 새로운 가죽 부대가 필요하게 됩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구약 시대 때 율법을 지켰을 당시의 낡은 가죽 부대에 집어넣게 된다면, 이는 잠시 동안은 올바른 신앙생활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 모순에 빠져서 터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가 어떤 것이냐 하면, 사도행전에 보면 예를 들어서 먹는 것의 문제나 할례에 대한 논쟁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함께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면 이제 우리는 새로운 부대에 새로운 가르침을 담아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 일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새로운 가르침도 좋지만 그렇다고 율법을 버릴 수가 있느냐.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니 율법에서 먹지 말라고 한 것은 먹지 말아야 하고, 그리고 율법대로 할례도 받아야지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11장 28절~30절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すべて疲れた人、重荷を負っている人はわたしのもとに来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休ませてあげます。
わたしは心が柔和でへりくだっているから、あなたがたもわたしのくびきを負って、わたしから学びなさい。そうすれば、たましいに安らぎを得ます。
わたしのくびきは負いやすく、わたしの荷は軽いからです。」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다 나에게로 오면 내가 쉬게 하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삶 속에서 겪는 어려움을 가리키기도 합니다만, 1차적으로는 그 엄격하고 어려운 율법을 지키느라고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던 사람들도 예수님께로 나아가면,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희들은 율법을 무시해도 되니까? 아니요. 그것이 아니라 율법에 정해진 형벌에 대해서는 너희들을 대신해서 내가 다 받아줄 테니까 너희들은 자유함을 얻으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율법에서 벗어나서 예수님께서 새롭게 주시는 가르침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시대에도 이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더구나 이 세상에 넘치고 있는 것들이 뭐냐 하면 자기들만의 율법입니다. 특히 이는 교회 안에서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자신들만의 율법 해석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은 613개였습니다만,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이를 2134개까지 늘려 놓았습니다.

교회에 본다 하더라도 여러 규칙이 있습니다. 이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조직이나 그 운용에 있어서는 이에 필요한 규칙이 있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성경에도 없는, 또는 성경을 자기 멋대로 해석을 해서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 한 번 쉽게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여러분께서는 무엇이 우선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얼핏 생각하기에 당연히 하나님 사랑이 우선한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단히 흥미로운 말씀을 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23절~24절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ですから、祭壇の上にささげ物を献げようとしているときに、兄弟が自分を恨んでいることを思い出したなら、
ささげ物はそこに、祭壇の前に置き、行って、まずあなたの兄弟と仲直りをしなさい。それから戻って、そのささげ物を献げなさい。

하나님께 예물을 바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께 헌금을 바치는 그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배 전체를 뜻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우리 이웃과의 화해를 비교한다면 무엇이 중요하냐 하면, 당연히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고 생각하기 십상인데, 예수님은 오히려 예배를 드리다가도 이웃과 화해하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면, 우선 이웃과 화목한 다음에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율법이라는 것을 드리 대면서 이웃을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어서 터뜨려버리는 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런 경우를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일요일에 일을 쉬지 않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요일에 가게 문을 열거나, 아니면 일요일에 출근을 하거나 하는 것은 하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입니까.

그러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아니,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키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일요일은 반드시 안식해야 합니다.”

만약에 이렇게 주장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 또한 가죽 부대를 터뜨리는 일입니다.

구약에서 안식일은 토요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이 되면서 안식일이 일요일로 바뀐 것인가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안식일 다음날 즉 일요일에 모임을 가지기 시작한 것에서 비롯합니다.

그래서 일요일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서 예배도 드리고 구제도 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일을 하는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생업을 잠시 쉴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업무상 일요일에 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끔은 교회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요, 그리고 도저히 문을 닫을 수 없다면 예배 시간만이라도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다시 돌아갈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그런 분들이 많은 경우에는 꼭 일요일이 아니더라도 다른 요일에 예배를 드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가지고 안식일을 안 지킨다는 등 주일을 안 지킨다는 등 하는 식으로 비난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성경을 잘못 알면서 가죽 부대를 터뜨리고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일요일에 반드시 쉬어야 한다고 한다면, 업무에 따라서는 일요일날 당직을 서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요일은 모든 것을 쉬어야 하기 때문에 일요일 당직도 거절해야 하는 것인가요?

지금 한국이나 일본이나 코로나 때문에 의료진 뿐만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공무원들도 밤낮없이 쉬지 못하고 일에 쫓기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런 분들도, 아, 나는 주일을 지켜야 하니까, 안식일을 지켜야 하니까, 그러면서 일을 안 하는 것이 신앙을 지키는 것입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365일 24시간 운영을 해야 하는 편의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잖아요? 아니면 그 시간에는 다른 알바생한테 맡겨놓고 자기만 주일을 지켜요?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자기만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한테 주일을 지키지 못하게 만드는 것 아니겠어요?

그럼 또 그러실 지도 모르지요. 교회 안 나가는 사람한테 맡겨놓으면 된다. 뭐 그러시겠습니까? 아니, 믿음이 없는 사람은 전도를 해서 같이 교회에 나올 생각을 해야지, 자기 믿음 생활을 위해서 믿지 않는 사람한테 맡겨놓고 나온다면 그게 신앙인으로서 온전한 모습이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지금 이 순간도 여기저기에서 가죽 부대가 뻥뻥 터지고 있습니다. 율법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성경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이웃을 비판하고 주님께 슬픔을 안겨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율법에 대하여 죽으시고,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약의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말고도 율법을 지켜야지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만으로는 부족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만으로는 부족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만으로는 부족합니까. 아닙니다.

예수님 만으로 충분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만으로 충분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만으로 충분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이 말씀 중에서 39절 “둘째도 그와 같으니(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라고 하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는 이웃 사랑이 하나님 사랑 다음으로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도 하나님 사랑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이웃 사랑도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 사랑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온전히 하나님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온전한 이웃 사랑이 선행되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율법과 구원의 의미를 깨달아, 주님께서 주시는 가르침을 튼튼한 가죽 부대에 담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해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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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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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3회 율법과 구원 (1)
2021년 9월 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7장 1절~4절
“1.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3.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7章1節~4節
“1.それとも、兄弟たち、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私は律法を知っている人たちに話しています──律法が人を支配するのは、その人が生きている期間だけです。
2.結婚している女は、夫が生きている間は、律法によって夫に結ばれています。しかし、夫が死んだら、自分を夫に結びつけていた律法から解かれます。
3.したがって、夫が生きている間に他の男のものとなれば、姦淫の女と呼ばれますが、夫が死んだら律法から自由になるので、他の男のものとなっても姦淫の女とはなりません。
4.ですから、私の兄弟たちよ。あなたがたもキリストのからだを通して、律法に対して死んでいるのです。それは、あなたがたがほかの方、すなわち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った方のものとなり、こうして私たちが神のために実を結ぶようになるため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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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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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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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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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49번째 시간으로서 “율법과 구원(1)” 律法と救い(1)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부터는 드디어 로마서 7장으로 들어갈 차례입니다. 이제 이 정도 되면 로마서도 중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를 개론이라고 한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핵심적인 내용에 들어간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7장의 주제는 ‘율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고 어려울 것이라고 지루하고 어려울까 봐 겁먹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까지처럼 함께 살펴보시면 지루하고 어렵기는커녕 대단히 은혜가 넘치는 시간이 되시리라 믿습니다.

오늘부터 함께 살펴볼 7장, 사실 이 7장을 오늘은 어디서 어디까지로 잘라서 살펴볼까 망설였습니다만, 맛이 있는 과일은 어디를 잘라서 먹든 맛이 있는 것처럼 이 로마서도 어디서 잘라도 역시 참 놀랍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시간 관계상 1절~4절까지로 했습니다만, 이 1절~4절만 보더라도 그야말로 문장의 완전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도 몇 번이고 읽었을 로마서 7장 내용인데, 다시 한번 읽고 나서 느낀 것은, 좀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야, 이 바울 선생님은 정말 참 글을 잘 쓴다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만약에 바울 선생님이 강단에서 이 말씀을 하셨더라면, 정말로 옳은 말씀이라면서 마음 같아서는 그 자리에서 기립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자, 그러면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부터 보겠습니다.

로마서 7장 1절
“1.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1.それとも、兄弟たち、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私は律法を知っている人たちに話しています──律法が人を支配するのは、その人が生きている期間だけです。

사도 바울은 지금 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법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 우리는 당연하다고 여기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생각해보세요. 이 글은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쓰여졌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이와 같은 개념이 성립되어 있었다는 것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충격적입니다.

이는 당시의 율법에 대한 설명이라고 하겠습니다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의 법률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과거에는 부관참시라고 해서 죽은 사람까지도 무덤에서 꺼내서 다시 벌을 주는 끔찍한 제도가 있었습니다만, 당연하게도 현재에는 그와 같은 제도는 없습니다. 지금 한국이나 일본만이 아니라 웬만한 나라들을 보더라도, 아무리 중한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벌을 내릴 수 있는 대상은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잖아요. 이미 죽은 사람에 대해서 죄가 밝혀졌다 하더라도 그 사람을 살려내서 징역살이를 시킬 수가 있어요, 벌금을 먹일 수가 있어요. 하물며 옛날처럼 죽은 사람을 다시 끌어내서 벌을 주어요? 그건 지금 같은 사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도 말합니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벌을 주기도 하고, 우리의 행동을 제약할 수도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해당되는 일이지, 사림이 죽고 난 다음에는 법이라고 하는 올무에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무슨 예를 들었냐 하면 바울은 결혼제도를 가지고 말을 이어갑니다. 그것이 2절과 3절입니다.

먼저 2절입니다.

로마서 7장 2절
“2.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2.結婚している女は、夫が生きている間は、律法によって夫に結ばれています。しかし、夫が死んだら、自分を夫に結びつけていた律法から解かれます。

이른바 간음에 관해서는 율법에 보면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있습니다.


레위기 20장 10절
“10.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人が他人の妻と姦淫したなら、すなわち自分の隣人の妻と姦淫したなら、その姦淫した男も女も必ず殺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

쉽게 말해서 결혼을 하고 배우자가 있는 상태에서 바람을 피웠다면 남녀 모두는 죽이라고 율법에는 규정을 하고 있습니다. 참 무섭지요? 이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배우자가 있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가까이 했다고 하면 죄가 됩니다만, 배우자가 사망했어요. 이런 상태라면 이혼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혼인관계는 종료되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었다면 새롭게 좋은 사람을 만나서 재혼을 한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 다음에 3절을 봅니다.

로마서 7장 3절
“3.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3.したがって、夫が生きている間に他の男のものとなれば、姦淫の女と呼ばれますが、夫が死んだら律法から自由になるので、他の男のものとなっても姦淫の女とはなりません。

남편이 살아 있는데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 즉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 지금으로 본다면 사형에 해당하는 흉악한 범죄인이 됩니다만, 배우자가 죽었다면 이제 혼인이라고 하는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본다면, 음? 왜 갑자기 바울 선생이 결혼 이야기를 할까 하는데, 사실 사도 바울은 결혼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를 비유로 해서 율법과 구원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마지막 4절을 봅니다.

로마서 7장 4절
“4.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4.ですから、私の兄弟たちよ。あなたがたもキリストのからだを通して、律法に対して死んでいるのです。それは、あなたがたがほかの方、すなわち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った方のものとなり、こうして私たちが神のために実を結ぶようになるためです。

가끔 보면 예수님을 가리켜서 존경을 한다는 표현을 듣습니다. 존경을 한다는 표현이 나쁜 말은 아니지요. 좋은 표현이긴 합니다만, 이 존경을 한다는 말은 왠지 좀 나와 멀리 떨어진 말처럼 느껴집니다.


예를 들어서 놀라운 발명품을 만들어 냈어요. 어려움을 이겨내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어요.

그런 분들을 보고 우리는 얼마든지 존경을 할 수 있지요.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꼭 발명품을 만들어내려는 것은 아니잖아요. 이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를 본받아서 제가 이 나이에 이제부터 훈련을 해서 올림픽에 출전하려고 할 필요는 없잖아요?

꼭 내가 그 사람처럼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도 우리는 그와 같은 놀라운 일,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을 얼마든지 존경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우리와 별로 관련이 없어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それからイエスは弟子たちに言われた。「だれでもわたしについて来たいと思うなら、自分を捨て、自分の十字架を負って、わたしに従って来なさい。

그렇다고 예수님은 우리도 자신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착하고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이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의 죄를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온 천하에 예수님 밖에 없으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もはや私が生きているのではなく、キリストが私のうちに生きておられるのです。今私が肉において生きているいのちは、私を愛し、私のためにご自分を与えてくださった、神の御子に対する信仰によるのです。


갈라디아서 5장 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キリスト・イエスにつく者は、自分の肉を、情欲や欲望とともに十字架につけたのです。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죽을 죄를 지었기 때문에 사실은 내가 저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야 하는데, 나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저렇게 피를 흘리시고, 저렇게 고통을 겪으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고 가슴을 쳐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팔짱을 끼고 바라보고, 아이고 불쌍하게……쯧쯧쯧……이 아닙니다.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서, 이제 내 욕심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예수님께 감사하고,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후에도 나옵니다만, 예습하는 의미로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 쉽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원래……. 자 이 말이 중요합니다. 자, 원래 율법은 지켜야 합니까. 지키지 않아도 됩니까.

예, 율법은 지켜야 합니다. 무엇이 무너져도? 예, 하늘이 무너져도 지켜야 합니다.

사실 정확히 말씀 드리자면 하늘이 무너지면 안 지켜도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18절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わたしが律法や預言者を廃棄するために来た、と思ってはなりません。廃棄するためではなく成就するために来たのです。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天地が消え去るまで、律法の一点一画も決して消え去ることはありません。すべてが実現します。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없애거나 부정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완전하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이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지켜야 하겠지요. 그렇죠? 예수님도 이렇게 율법의 중요성을 말씀하고 계시잖아요,

자, 그렇다면 우리도 율법대로 다음부터 예배는 안식일인 토요일에 드리고, 남자 아이는 태어나서 8일만에 할례를 받게 하고, 유월절, 칠칠절. 장막절, 다 지키고, 교회에는 성소와 지성소를 만들어 놓고, 매주 양이나 염소를 잡아다가 불로 태워서 예배를 드리면 되는 것인가요?


그런데 이렇게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자, 지난 주에 배웠던 것을 잠시 복습해볼까 합니다. 지난 주에 돼지고기에 대해서 했던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율법에서는 돼지고기에 대해서 어떻게 규정하고 있다고 말씀 드렸지요?

레위기 11장 7절~8절
“7.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8.너희는 이러한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

豚。これはひづめが分かれていて、完全に割れてはいるが、反芻しないので、あなたがたには汚れたものである。
あなたがたは、それらの肉を食べてはならない。また、それらの死骸に触れてもいけない。それらは、あなたがたには汚れたものである。

그러니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돼지고기를 먹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되면 제게 있어서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제가 돼지고기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김치찌개에 있는 돼지고기도 좋아하고 그리고 수육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레위기 11장 10절
“10.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과 물에서 사는 모든 것 곧 강과 바다에 있는 것으로서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모든 것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라”

しかし海でも川でも、すべて水に群がるもの、またはすべて水の中にいる生き物のうち、ひれや鱗のないものはすべて、あなたがたには忌むべきものである。

율법에 말씀하시기를 물속에 사는 것 중에서 지느러미나 비늘이 없는 것을 먹지 말라고 하세요.

여러분께서는 스시, 생선초밥 중에서 무엇을 가장 좋아하십니까. 많은 분들은 참치나 연어 등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만, 제가 스시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게 뭐냐 하면, 바로 오징어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면 물속에 살면서 비늘이 없는 오징어나 문어는 먹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가끔 그런 분들 계십니다. 한국 음식 중에서 선지 있잖아요? 사실 그게 동물 피로 만드는 거잖아요?

뭐, 개인 취향에 따라서 안 잡수시는 분들도 계신데, 아니, 안 잡수시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런데 자기는 교회에 다니신다면서 하시는 말씀이, 성경에 보면 고기는 먹되 피는 먹지 말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해서, 피는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다고, 그래서 자기는 안 먹는다고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자, 그러면 성경에 피를 먹지 말라고 하는 말씀이 있어요? 없어요?

예, 있습니다.

창세기 9장 3절~5절
“3.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4.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5.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生きて動いているものはみな、あなたがたの食物となる。緑の草と同じように、そのすべてのものを、今、あなたがたに与える。
ただし肉は、そのいのちである血のあるままで食べてはならない。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のいのちのためには、あなたがたの血の価を要求する。いかなる獣にも、それを要求する。また人にも、兄弟である者にも、人のいのちを要求する。

신명기 12장 23절~24절
“23.다만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함께 먹지 못하리니
24.너는 그것을 먹지 말고 물 같이 땅에 쏟으라”

ただ、血は決して食べてはならない。血はいのちだからである。いのちを肉と一緒に食べてはならない。
血を食べてはならない。それを地面に水のように注ぎ出さなければならない。

이렇게 정말 피는 먹지 말라고 나와 있어요. 그럼 이제 우리는 피도 먹지 말아야 하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피를 먹지 말라고 성경에 적혀 있으니까 안 먹는다는 분이? 돼지고기나 오징어나 문어는 맛있게 드세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답은? 예,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렇다고 꼭 드시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드시기 싫으면 안 드셔도 돼요. 다만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나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안 먹는다고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하면서 괜히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렇게도 율법을 지키고 싶으시다면 율법의 모든 것을 지켜야지. 왜 이것은 지키고 저것은 안 지키고 자기 마음대로예요.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유대 절기를 다 지키고, 할례도 시키고, 짐승들을 불로 태워서 제사를 드리고 그러세요. 하지만 그러다가 경찰서나 소방서에서 신고가 들어와서 문제가 생겨도 저는 모릅니다.

또한 이는 그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율법의 중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율법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지금 돼지고기를 먹어도 되고 오징어나 문어도 먹어도 된다고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그럼 저는 반율법주의자 반성경주의자인 이단입니까?

아니에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하면, 자,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셨을까. 안 지키셨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셨습니까. 안 지키셨습니까.

정답은, 예. 지키셨습니다. 그것도 완전하고 철저하게 지키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율법을 지키셨다. 그것도 완전하고 철저하게 지키셨다는 증거가 무엇이었죠?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전히 철저하게 지키셨다는 증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먼저 기억하셔야 할 점이, 예수님은 예수님 스스로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적으로 보았을 때 유일하게 완전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율법을 어기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죠. 아까 말씀드렸던 간음만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같은 데에 기록된 율법들을 보면 ‘죽일지니’ 라는 말씀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이를 우리에게 대입시키면 어떻게 됩니까. 율법적으로 본다면 우리는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죽임을 당해도 마땅한 죄인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대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아 주셨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시려고 했다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만약에 예수님께서 그런 생각을 하셨다면 십자가에 달리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야, 우리 아버지가 율법에서 너희들이 죄인이라고 했지만, 아니야. 그거 무시해. 그거 안 지켜도 돼……. 라고 하셨겠지요. 그리고 율법을 무시하게 되면 우리도 율법적으로 죄인이 아니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벌을 받으실 필요가 없어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 의하면 우리 중에서 단 한 사람도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요? 그렇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받아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로마서 7장 4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7장 4절
“4.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4.ですから、私の兄弟たちよ。あなたがたもキリストのからだを通して、律法に対して死んでいるのです。それは、あなたがたがほかの方、すなわち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った方のものとなり、こうして私たちが神のために実を結ぶようになるためです。

예수님은 그냥 혼자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닌, 우리 자신도 예수님과 함께 율법에 대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입니다.

세상 법률에도 일사부재리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이는 쉽게 말해서 한 가지 범죄에 대해서 판결이 확정되면 다시 그 죄로 인해서 두 번 이상 재판을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우리는 유죄입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서 사형판결을 받으시고 율법의 규정에 따라 죽음이라고 하는 형벌이 모두 집행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이 세상의 법이 관여할 수 없듯이, 율법의 규정에 따라 예수님과 함께 죽은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렇게까지 해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에 의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께로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열매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믿음의 열매, 말씀의 열매, 그리고 행함의 열매를 맺어야 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믿음이 더욱 성숙해져서 감사함으로 충만해지고, 말씀으로 그리고 행함으로 열매를 맺을 때에 우리가 변하고 우리 이웃이 변하여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 크나큰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제 오늘부터 율법과 구원의 관계를 공부해감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주시는 크나큰 기쁨과 은혜로 충만해져서,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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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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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2회 자유와 해방
2021년 8월 2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6장 19절~23절
“19.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20.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21.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22.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23.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6章19節~23節
“19.あなたがたの肉の弱さのために、私は人間的な言い方をしています。以前あなたがたは、自分の手足を汚れと不法の奴隷として献げて、不法に進みました。同じように、今はその手足を義の奴隷として献げて、聖潔に進みなさい。
20.あなたがたは、罪の奴隷であったとき、義については自由にふるまっていました。
21.ではそのころ、あなたがたはどんな実を得ましたか。今では恥ずかしく思っているものです。それらの行き着くところは死です。
22.しかし今は、罪から解放されて神の奴隷となり、聖潔に至る実を得ています。その行き着くところは永遠のいのちです。
23.罪の報酬は死です。しかし神の賜物は、私たちの主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永遠のいのち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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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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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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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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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48번째 시간으로서 “자유와 해방” 自由と解放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은 말씀 제목에 대해서부터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자유’와 해방’이라고 정했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와 해방. 이는 거의 비슷한 말일 수 있겠습니다만, 이 제목을 더 자세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의에 대한 자유와 죄로부터의 해방’(義についての自由と罪から解放)이라고 하겠습니다.

먼저, ‘의에 대한 자유’라는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꽤 좋은 뜻처럼 들릴 수 있겠습니다만, 사실 별로 좋은 말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정리정돈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한다면 이는 무슨 말이겠습니까.

제가 한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에 보면, 당시는 가족 중에서 저만 한국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는 누가 뭐 잔소리하는 사람이 있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진정으로 정리정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정리정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냐 하면, 어느 날 제가 살던 오피스텔 아래층에 살고 있던 학교 후배가 제 방에 놀러 왔었는데, 그 때 방문을 딱 열고 제게 하는 말이, “형, 이사해요”라고 했었습니다.


물론 저는 그 때 이삿짐을 싸고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만, 방 꼴이 얼마나 어질러져 있었으면 후배가 제 방을 보고 이사 하느냐 하고 물었겠습니까. 말하자면 그 정도로 정리정돈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에 대한 자유’(義についての自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의롭거나 의롭지 않거나, 즉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지 안 맞는지 하는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으로 ‘죄로부터의 해방’(罪から解放)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죄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에 있는 대로 양이나 염소를 잡아서 죄를 대신 갚는다 하더라도, 이는 불완전한 제사였기 때문에 우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마지막 날 심판에서 구원받지 못하고 100프로 지옥으로 떨어져서 영원한 괴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 힘으로는 죄 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피를 흘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묶었던 죄의 사슬이 끊어지고 비로소 죄로부터 해방되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 부분을 염두에 두시고 오늘 말씀을 보시면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오늘 말씀도 차례대로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로마서 6장 19절입니다. 이는 오늘 본문 중에서 주제, 즉 핵심 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19절 전반부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로마서 6장 19절 전반부
“19.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19. あなたがたの肉の弱さのために、私は人間的な言い方をしています。

이는 말하자면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수준이 높으면 좀 어려운 말로 설명을 하겠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쉬운 말로 하겠다. 그런 뜻입니다.

저도 아직까지 그 기억이 있는데, 어렸을 때 교회에 다닐 때 보면 당시에는 여러가지 좀 풀리지 안는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있는 그 찬송가 257장에 보면, “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라는 가사가 있잖아요. 저는 어렸을 때 이 가사를 보고, 아, 교회에는 무슨 ‘사물함’ 같은 상자 같은 뭘 넣어두는 것이 있나 보다. 그럼 그게 우리 교회에는 어디 있나. 뭐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496장에 보면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라는 가사가 있잖아요. 그 가사를 제가 들었을 때도, 아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라면 단을 쌓아 하는게 아닌가. 그런데 단을 거둬버리면 예배를 드리지 않겠다는 거 아니야? 그런데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는 게 말이 돼?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니, 다 커서가 아니라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어린 아이들한테 신학의 어려운 개념을 말할 수가 없잖아요. 이는 마치 더하기 빼기 밖에 모르는 학생한테 미분이다 적분이다 하는 것을 설명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당신들은 아직 못 알아 들을 테니까, 내가 쉬운 말로 설명을 하겠습니다…라는 뜻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19절 후반부를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6장 19절 후반부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以前あなたがたは、自分の手足を汚れと不法の奴隷として献げて、不法に進みました。同じように、今はその手足を義の奴隷として献げて、聖潔に進みなさい。

이 말씀은 지금까지도 반복해서 나왔던 주제입니다.


로마서 6장 12절~13절
“12.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の死ぬべきからだを罪に支配させて、からだの欲望に従ってはいけません。
また、あなたがたの手足を不義の道具として罪に献げ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死者の中から生かされた者としてあなたがた自身を神に献げ、また、あなたがたの手足を義の道具として神に献げなさい。


로마서 6장 16절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あなたがたが自分自身を奴隷として献げて服従すれば、その服従する相手の奴隷となるのです。つまり、罪の奴隷となって死に至り、あるいは従順の奴隷となって義に至ります。

이와 같은 말씀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했던 말을 반복하겠습니까.


이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우리가 죄 아래에 있는 것인지, 의의 아래에 있는 것인지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요, 둘째로는 우리의 믿음의 능력이 약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각도로 이해를 해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마지막에 다시 한 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20절~21절까지를 보겠습니다.

로마서 6장 20절~21절
“20.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21.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20.あなたがたは、罪の奴隷であったとき、義については自由にふるまっていました。
21.ではそのころ、あなたがたはどんな実を得ましたか。今では恥ずかしく思っているものです。それらの行き着くところは死です。

이 구절을 보니, 저는 이른바 돌아온 탕자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이는 누가복음 15장 11절~32절까지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 중에서 시간관계상 11절~24절까지 읽어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1절~24절
“11.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11.イエスはまた、こう話された。「ある人に二人の息子がいた。
12.弟のほうが父に、『お父さん、財産のうち私がいただく分を下さい』と言った。それで、父は財産を二人に分けてやった。
13.それから何日もしないうちに、弟息子は、すべてのものをまとめて遠い国に旅立った。そして、そこで放蕩して、財産を湯水のように使ってしまった。
14.何もかも使い果たした後、その地方全体に激しい飢饉が起こり、彼は食べることにも困り始めた。
15.それで、その地方に住むある人のところに身を寄せたところ、その人は彼を畑に送って、豚の世話をさせた。
16.彼は、豚が食べているいなご豆で腹を満たしたいほどだったが、だれも彼に与えてはくれなかった。
17.しかし、彼は我に返って言った。『父のところには、パンのあり余っている雇い人が、なんと大勢いることか。それなのに、私はここで飢え死にしようとしている。
18.立って、父のところに行こう。そしてこう言おう。「お父さん。私は天に対して罪を犯し、あなたの前に罪ある者です。
19.もう、息子と呼ばれる資格はありません。雇い人の一人にしてください。」』
20.こうして彼は立ち上がって、自分の父のもとへ向かった。ところが、まだ家までは遠かったのに、父親は彼を見つけて、かわいそうに思い、駆け寄って彼の首を抱き、口づけした。
21.息子は父に言った。『お父さん。私は天に対して罪を犯し、あなたの前に罪ある者です。もう、息子と呼ばれる資格はありません。』
22.ところが父親は、しもべたちに言った。『急いで一番良い衣を持って来て、この子に着せなさい。手に指輪をはめ、足に履き物をはかせなさい。
23.そして肥えた子牛を引いて来て屠りなさい。食べて祝おう。
24.この息子は、死んでいたのに生き返り、いなくなっていたのに見つかったのだから。』こうして彼らは祝宴を始めた。

일단 구체적인 지적은 없습니다만, 글 맥락으로 볼 때 배경은 아마도 부유한 집안이 아니었나 합니다.

아버지에게 아들 둘이 있는데, 작은 아들이 글쎄, 아버지가 아직 살아있는데, 자기 상속분의 재산을 먼저 나눠달라고 아버지한테 요구를 합니다. 그래서 나눠줬더니만 그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돈을 자기 멋대로 펑펑 썼습니다.

그러자 돈이 다 떨어졌어요. 그랬더니 엎친데 덮친 격으로 크게 흉년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곳 경기가 좋다면 돈이 떨어졌다 하더라도 재기를 노려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경제상황이 최악이에요. 그렇게 되면 당연히 일자리도 줄어들지요. 더구나 거기는 먼 나라에요. 그는 거기서 외국인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조건이 같다면 내국인을 뽑지 외국인을 뽑아 주겠어요?

그렇게 되니까 이제 마땅히 일자리도 찾을 수 없어서 돼지를 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배가 고파요. 경기가 어려우니까 아마 일당도 제대로 받지 못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돼지가 먹는 사료라도 달라고 해봤는데 그마저도 주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 지경에 이르자 이제 과거가 그리워집니다. 내가 아버지 집에 있을 때에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잠잘 곳 걱정 없이 살았는데,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겼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것이 엄청난 축복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도 아까 자취생활을 할 때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제가 한국에 가기 전에 집에서 살 때에 보면 뻑 하면 밥을 먹으래요. 아니, 아직 밥을 먹은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밥 먹을 때라고 해서 밥을 먹으라는 거예요.

그래서, 아직 배가 안 고프다고 하면, 아이, 그래도 조금이라도 먹으래요. 그러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아니 내가 무슨 밥 먹는 기계에요? 배도 안 고픈데 밥만 먹게? 뭐 그러면서, 이게 참 어렸을 때에는 얼마나 귀찮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혼자 살게 되니까 어때요? 자취 생활 처음에는 그래도 자기가 해먹으려고도 해봅니다만, 금새 그게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되니까 밖에 있을 때에는 밖에서 사 먹습니다만, 집에 있을 때에는 맨날 시켜 먹어요. 이제 망설이지 않도록 순서도 아예 정해 놓습니다. 짜장면, 짬뽕, 볶음밥, 우동, 짜장면, 짬뽕, 볶음밥, 우동……가끔은 조금 변화를 준다고 짬뽕, 짜장면, 우동, 볶음밥, 짬뽕, 짜장면, 우동, 볶음밥……이렇게 되면요 아무리 맛있는 중국집이라 하더라도 정말 거기서 거기, 그 맛이 그 맛이지요. 지금은 모르지만, 당시에는 배달음식이 팅팅 불어서 올 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과거에 집에 있을 때, 내가 아무 것도 안 해도 제때에 밥을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 그야말로 어메이징 그레이스,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은혜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요즘도 아내가 차려주면 얼마나 감사가 넘쳐나는지 모릅니다.

자, 제 이야기는 그렇다고 치고, 이 둘째 아들이야기로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이 말씀입니다만, 자, 그렇다면 이 둘째아들은 왜 아버지로부터 돈을 받아서 먼 나라로 가고 싶어 했을까요. 여기에는 무슨 악의가 있었을까요? 다시 말해서 아버지가 미워서, 형에게 재산을 빼앗기기 싫어서 그런 일을 했습니까? 아니요. 그런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둘째 아들이 아주 큰 잘못을 한 것처럼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 말씀을 봅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왔다고 해서 아버지는 큰 잔치를 벌입니다. 이에 대해서 못 마땅한 것이 첫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첫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이 불만을 토로합니다.


누가복음 15장 29절~30절
“29.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29.しかし、兄は父に答えた。『ご覧ください。長年の間、私はお父さんにお仕えし、あなたの戒めを破ったことは一度もありません。その私には、友だちと楽しむようにと、子やぎ一匹下さったこともありません。
30.それなのに、遊女と一緒にお父さんの財産を食いつぶした息子が帰って来ると、そんな息子のために肥えた子牛を屠られるとは。』

바로 이 말 때문에 우리는 둘째 아들이 정말 못된 짓만 하고 돌아다닌 것으로 생각하기 십상인데, 이 말만 가지고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지 않나 합니다.

오늘은 제가 잠깐 이 둘째 아들에 대해서 변호를 해보려고 하는데, 그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13절에 의하면 우리말 성경에는 허랑방탕이라고는(放蕩) 되어 있는데 많은 돈을 소비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다른 번역본을 참고해본다면 이를 굳이 도덕적으로 안 좋은 곳에만 사용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둘째로는, 이 형이 말하기를 동생은 부도덕한 생활에 돈을 탕진해버렸다고 말하지만, 성경 말씀에 의하면 동생은 먼 나라로 갔었다고 합니다. 지금처럼 전화나 인터넷 같은 것도 없는 상황에서, 뭐, 있었다고 하더라도 서로 자주 연락을 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런 상황이라고 한다면, 먼 나라로 갔던 동생의 사생활에 대해서 형이 얼마나 알고 있었겠느냐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상황으로 볼 때 형이 동생에 대해서 한 말, 그러니까 부도덕한 곳에 돈을 다 써서 빈털터리가 되었다고 하는 말은, 동생에 대한 안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던 형의 추측인 것이고, 실상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둘째 아들은 아버지나 형에 대해서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부도덕한 일에 돈을 쏟아 붓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도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왜 둘째 아들은 아버지더러 큰 돈, 자신이 상속할 만한 큰 돈을 달라고 해서 떠났을까요.

그 이유는 어쩌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아버지는 자꾸 이걸 해라 저걸 해라. 이것을 하지 말라, 저것을 하지 말라, 라고 하는데, 나도 이제 어른이야. 나도 내 꿈이 있다고. 언제까지 아버지 밑에서 살 수 없잖아.

이렇게 해서 떠나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이 예수님의 말씀은, 함부로 부모 곁을 떠날 생각 하지 말고, 엄마 아빠 말 잘 듣고 얌전히 집에 있어. 이 말씀을 하려고 한 것일까요?

제가 둘째아들을 변호한다고 해서 그가 했던 행동이 다 옳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잘못한 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둘째아들이 했던 행동 중에서 근본적으로 잘못된 부분은 과연 어디일까요.

그 부분이 기록되 구절 역시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누가복음 15장 13절에 있습니다. 다시 본 구절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이 둘째아들이 한 행동 중에서 잘못한 부분은 어디일까요.

누가복음 15장 13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それから何日もしないうちに、弟息子は、すべてのものをまとめて遠い国に旅立った。そして、そこで放蕩して、財産を湯水のように使ってしまった。

자, 아시겠습니까. 둘째아들이 한 행동 중에서 잘못한 부분. 어디일까요. 돈을 많이 썼다? 아니, 사실 뭐 젊은 나이에 돈을 들여서 사업을 했는데 실패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걸 가지고 잘못했다고 몰아붙이기에는 너무 불쌍하지요.

그렇다면 그 외의 부분에 대해서 둘째아들이 잘못한 점은 어디일까요.

다시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3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それから何日もしないうちに、弟息子は、すべてのものをまとめて遠い国に旅立った。そして、そこで放蕩して、財産を湯水のように使ってしまった。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에서 ‘먼 나라에 갔다(遠い国に旅立った)’는 점에 주목을 하고자 합니다.

이는 단순히 거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말씀에 보면 돈을 다 써버렸더니, 그 때 마침 흉년이 들어서 오갈 곳이 없어진 둘째 아들이 했던 것이 무슨 일이었다고요?

누가복음 15장 15절~16절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5.それで、その地方に住むある人のところに身を寄せたところ、その人は彼を畑に送って、豚の世話をさせた。
16.彼は、豚が食べているいなご豆で腹を満たしたいほどだったが、だれも彼に与えてはくれなかった。


그가 갔던 ‘먼 나라’에서 그는 돼지를 치는 일을 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돼지를 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짐승들은 뭐 젖이나 털가죽을 얻기 위해서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돼지의 경우에는 이를 기르는 목적은 단 하나, 식용으로 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단순히 잡아먹기 위해서 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율법에 의하면 어떻게 되어 있었냐 하면, 레위기 11장 7절~8절을 봅니다.

레위기 11장 7절~8절
“7.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8.너희는 이러한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

7.豚。これはひづめが分かれていて、完全に割れてはいるが、反芻しないので、あなたがたには汚れたものである。
8.あなたがたは、それらの肉を食べてはならない。また、それらの死骸に触れてもいけない。それらは、あなたがたには汚れたものである。

여기에 보시면 돼지고기는 부정하기 때문에 먹지 말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고, 따라서 먹지 않는 돼지고기를 기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둘째 아들이 살았던 곳은 어디냐 하면, 그 장소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거기는 이스라엘이 아닌 곳,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곳이었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지리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적은 곳에서는 살면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일본에서 살면 안되겠지요. 그것이 아니라 이는 영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리적으로 한국에서 살든 일본에서 살든, 하물며 기독교인들만 사는 곳에서 산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이 하나님 안에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로부터 먼 곳에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둘째 아들, 그는 단순히 자신의 꿈을 이루고 싶어 했는지도 모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능력,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아버지나 형한테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뭐 꼭 부도덕한 데만이 아니라, 지금 식으로 본다면 부동산이다 주식이다 하면서 투자도 하고 사업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거기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인 것처럼, 그의 마음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내 힘만으로 성공할 줄 알았는데, 결국은 그 많은 돈을 탕진해버리고, 당시에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곳이라고 하는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돼지를 치는 일까지 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로마서 20절~21절까지를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6장 20절~21절
“20.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21.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20.あなたがたは、罪の奴隷であったとき、義については自由にふるまっていました。
21.ではそのころ、あなたがたはどんな実を得ましたか。今では恥ずかしく思っているものです。それらの行き着くところは死です。

이 말씀을 앞서 살펴보았던 둘째 아들 탕자한테 먼저 말해봅니다.

이봐 둘째 아들아, 네가 멀리 떨어진 나라까지 가서 살아봤지? 그 때는 자유로웠지. 왠지 알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죄의 나라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네 힘을 의지하고 살았기 때문이야.

너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안 지키고,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잘될 줄 알았지? 하지만 생각해봐. 거기서 무슨 열매를 얻었니? 만약에 네가 그대로 있었다면 너는 돼지나 치면서 결국 굶어 죽었을 거야.

그리고 그 다음으로 이 말씀을 우리에게 해보아야 할 차례입니다. 지금은 편의상 제 이름을 넣고 해보겠습니다만, 나중에는 여러분이 여러분 이름을 넣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봐 성필아, 네가 멀리 떨어진 나라까지 가서 살아봤지? 그 때는 자유로웠지. 왠지 알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죄의 나라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네 힘을 의지하고 살았기 때문이야.

너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안 지키고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잘될 줄 알았지? 하지만 생각해봐. 거기서 무슨 열매를 얻었니? 만약에 네가 그대로 있었다면 너는 돼지나 치면서 결국 굶어 죽었을 거야.

여러분, 창세기에 보시면 마귀가 하와에게 뭐라고 속삭이면서 유혹을 합니까.

창세기 3장 5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それを食べるそのとき、目が開かれて、あなたがたが神のようになって善悪を知る者となることを、神は知っているのです。」

마치 그와 같이 마귀 사탄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 귀에 대고 속삭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져서 너의 힘을 의지하고 너의 지식과 경험을 의지하게 되면, 너는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것이다. 너는 크게 성공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6장 21절 후반부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それらの行き着くところは死です。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6장 22절~23절
“22.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23.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22.しかし今は、罪から解放されて神の奴隷となり、聖潔に至る実を得ています。その行き着くところは永遠のいのちです。
23.罪の報酬は死です。しかし神の賜物は、私たちの主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永遠のいのちです。

우리는 주님 안에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사망이 아니라 영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4절~5절
“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4.わたしにとどまりなさい。わたしもあなたがたの中にとどまります。枝がぶどうの木にとどまっていなければ、自分では実を結ぶことができないのと同じように、あなたがたもわたしにとどまっていなければ、実を結ぶことはできません。
5.わたしはぶどうの木、あなたがたは枝です。人がわたしにとどまり、わたしもその人にとどまっているなら、その人は多くの実を結びます。わたしを離れては、あなたがたは何もす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す。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이 자유를 빼앗긴 것입니까. 나뭇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져나가는 것이 진정한 자유입니까. 아닙니다.

나뭇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어야지만 살 수가 있고 열매도 맺을 수 있습니다. 나뭇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면 그야말로 사망, 열매도 맺을 수 없고 그대로 말라 비틀어져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30절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すべて疲れた人、重荷を負っている人はわたしのもとに来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休ませてあげます。
わたしは心が柔和でへりくだっているから、あなたがたもわたしのくびきを負って、わたしから学びなさい。そうすれば、たましいに安らぎを得ます。
わたしのくびきは負いやすく、わたしの荷は軽いからです。」

앞서 둘째 아들이 돌아온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어떻게 하십니까.


누가복음 15장 22절~24절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2.ところが父親は、しもべたちに言った。『急いで一番良い衣を持って来て、この子に着せなさい。手に指輪をはめ、足に履き物をはかせなさい。
23.そして肥えた子牛を引いて来て屠りなさい。食べて祝おう。
24.この息子は、死んでいたのに生き返り、いなくなっていたのに見つかったのだから。』こうして彼らは祝宴を始めた。

아무리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벗어나 자기 멋대로 살다가 모든 것을 잃었다 하더라도, 아버지께로 돌아왔더니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지금 이 순간, 아무리 주님에서부터 멀리 떨어져있었다 하더라도, 주님께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주님은 우리를 쉬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인도해 주십니다.

그와 같이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이자 진정한 해방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로마서 6장 19절 후반부를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6장 19절 후반부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以前あなたがたは、自分の手足を汚れと不法の奴隷として献げて、不法に進みました。同じように、今はその手足を義の奴隷として献げて、聖潔に進みなさ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믿음을 버리고 나만을 의지하고 살아가려는 것은 그야말로 우리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서 불법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삶을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주님께로 돌아가고,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주님이라는 포도나무에 붙어서,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능력으로 충만해져서, 30배 60배 100배, 300배, 600배, 1000배의 크고 놀라운 열매를 맺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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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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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1회 축복의 무게
2021년 8월 22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6장 17절~18절
“17.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6章17節~18節
“17.神に感謝します。あなたがたは、かつては罪の奴隷でしたが、伝えられた教えの規範に心から服従し、
18.罪から解放されて、義の奴隷となり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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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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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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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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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47번째 시간으로서 “축복의 무게” 祝福の重さ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6장 17절~18절
17.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7.神に感謝します。あなたがたは、かつては罪の奴隷でしたが、伝えられた教えの規範に心から服従し、
18.罪から解放されて、義の奴隷となりました。”

바울은 지금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에 대한 감사인가 하면 자신이 전해준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인해서 죄로부터 해방되어서 의의 종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복음을 받아들여서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며, 그것만으로도 기적 중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임하게 되었습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一人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게 하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예수님의 보혈,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우리의 노력으로 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
44.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わたしを遣わされた父が引き寄せてくださらなければ、だれもわたしのもとに来ることはできません。わたしはその人を終わりの日によみがえらせます。


요한복음 15장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を選んだのではなく、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選び、あなたがたを任命しました。それは、あなたがたが行って実を結び、その実が残るようになるため、また、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父に求めるものをすべて、父が与えてくださ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요한1서 4장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私たちは愛しています。神がまず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

그 누가 하나님께 말하기를 내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해달라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이끌지 않으시면 아무도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많이 배워서, 우리가 열심히 연구를 한 결과 예수님을 선택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43장 1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だが今、主はこう言われる。ヤコブよ、あなたを創造した方、イスラエルよ、あなたを形造った方が。「恐れるな。わたしがあなたを贖ったからだ。わたしはあなたの名を呼んだ。あなたは、わたしのもの。

규모가 큰 대학이나 회사에 보면 1년에 신입생이나 신입사원을 수 백명 수 천명을 뽑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니까 그냥 대충, 뽑아요? 올해는 수험번호 짝수만 뽑을까? 아니면 홀수만 뽑을까? 그렇게 뽑습니까.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게 대충 뽑는다면 그 학교나 회사는 금방 망하게 되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뽑습니까.

아무리 사람이 많더라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면밀하게 검토해서 그 사람에 대해서 모두 알고 난 다음에, 정확하게 그 사람을 꼭 집어서 뽑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그냥 대충 부르시거나 대충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이름을 정확히 아시고, 우리의 모든 것에 대해서도 정확히 아신 다음에,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꼭 집어서 부르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까. 하지만 이 놀랍고 놀라운 감사를 우리는 종종 잊어버리고 맙니다.

창세기에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그의 아들 이삭이 나옵니다. 이삭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지요. 그의 아들은 쌍둥이였는데 큰 아들 이름은 에서이고, 작은 아들은 야곱이었습니다.

지금은 옛날에 비해서 장남의 권한이라고 하는 것이 많이 줄어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오히려 옛날에 비한다면 권리보다 의무가 더 늘어난 경우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한국이나 일본을 보아도 과거에는 장남에 대한 권한이 대단했습니다. 무엇보다 장남에게는 그 집의 상속권이 있었습니다. 물론 다른 자녀에 대해서도 상속권은 있었습니다만, 집안의 대를 잇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장남이 확고한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왕 같은 경우를 본다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간혹 예외도 있었습니다만, 어느 나라나 대부분 장남이 그 왕위를 잇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렇게 되면 왕의 동생은 2인자가 되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원칙적으로는 왕위에 오른 형과 그렇지 못한 동생은 엄격하게 말하자면 군신의 관계, 즉 왕과 신하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엄청난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장남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해서 장남으로 태어날 수가 있나요. 아니요. 그럴 수 없습니다. 요즘은 법적으로나 의학적인 방법으로 남녀 성별도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만, 그와 같은 방법으로 성별을 바꿀 수는 있을지언정, 그러한 방법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바로 형제의 순서인 것입니다.

야곱은 욕심이 대단했던 인물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안 믿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열성적으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조금 문제가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으로부터의 축복을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노력으로 얻고자 했었던 것입니다.

그는 믿음의 족보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에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으로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했냐 하면, 자기 자신이 꾀를 부려서 장자의 명분을 에서로부터 빼앗고자 했습니다.

창세기 25장 27절~34절에 보시면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빼앗기 위해서 어떻게 했는지를 자세하게 기록을 합니다.

조금 길지만 읽어드리겠습니다.



창세기 25장 27절~34절
“27.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28.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29.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30.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32.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この子どもたちは成長した。エサウは巧みな狩人、野の人であったが、ヤコブは穏やかな人で、天幕に住んでいた。
イサクはエサウを愛していた。猟の獲物を好んでいたからである。しかし、リベカはヤコブを愛していた。
さて、ヤコブが煮物を煮ていると、エサウが野から帰って来た。彼は疲れきっていた。
エサウはヤコブに言った。「どうか、その赤いのを、そこの赤い物を食べさせてくれ。疲れきっているのだ。」それで、彼の名はエドムと呼ばれた。
するとヤコブは、「今すぐ私に、あなたの長子の権利を売ってください」と言った。
エサウは、「見てくれ。私は死にそうだ。長子の権利など、私にとって何になろう」と言った。
ヤコブが「今すぐ、私に誓ってください」と言ったので、エサウはヤコブに誓った。こうして彼は、自分の長子の権利をヤコブに売った。
ヤコブがエサウにパンとレンズ豆の煮物を与えたので、エサウは食べたり飲んだりして、立ち去った。こうしてエサウは長子の権利を侮った。

사냥을 좋아했던 형 에서가 하루 종일 사냥을 하고 피로에 지쳐서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에 맞추어서 야곱은 그 길목에서 일부러 죽을 쑤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혹시 정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배가 고팠던 기억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최근에 있었던 것은 아마도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기 전이었으니까, 재작년 쯤이 아니었나 합니다.

그 때는 그 동안 게을리하던 운동을 좀 다시 해볼까 해서, 모처럼 자전거를 타고 집 근처 자전거 도로를 달렸을 때였는데, 오랜만에 하니까, 그 정도로 운동을 하면 체력이 얼마나 소모되는지를 제대로 계산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아직 밥을 먹기 전이었지만, 그래도 뭐, 괜찮겠지 하고 나가서 달렸는데, 한 40분쯤 달렸을 때였을까요. 거기서 이제 돌아오는 지점인데, 갑자기 허기가 집니다. 정말 거짓말이 아니라 자전거를 타고 있을 수가 없어요. 앉을 데도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자전거에서 내려서 자전거를 붙잡고 가만히 이렇게 웅크리고 서 있었습니다.


그랬더니만 도무지 안 되겠어요. 그래서 폰으로 황급히 편의점을 찾는데, 그럴 때 일수록 멀리 있는 것이 바로 편의점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래봤자 평소라면 자전거로 불과 5분도 안 걸릴 정도의 거리일 텐데, 그 때는 정말로 천리 길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무슨 몇 날 며칠 동안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황급히 들어가서 빵 2개와 딸기우유 하나를 사서 허겁지겁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저는 당시 에서의 기분을 알 것도 같습니다. 허기에 지쳐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마침 어딘가에서 맛있는 냄새가 솔솔솔솔 납니다. 그래서 다가가보았더니 자기 동생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사실은 기다린 것이겠습니다만, 아무튼 딱 거기서 팥죽을 쑤고 있어요.

그러니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그래서 에서는 동생한테 당장 그 팥죽을 달라고 말합니다. 그랬더니 동생 야곱이 묘한 말을 합니다.

창세기 25장 31절
“31.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するとヤコブは、「今すぐ私に、あなたの長子の権利を売ってください」と言った。

이 때 형 에서는 동생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갖고 싶어 한다는 생각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허를 찌르는 요구였는지도 몰라요.


에서는 말합니다.

바로 밑에 32절

“32.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エサウは、「見てくれ。私は死にそうだ。長子の権利など、私にとって何になろう」と言った。

이렇게 해서 에서는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여기서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해주고 있을까요. 사실 이 내용을 보면 여기서의 핵심 인물이 야곱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자세히 보시면 이 대목에서 성경이 주목하고 있는 인물은 야곱이 아니라 에서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이 대목에서 야곱이 중심인물이었다면 마지막 부분인 34절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어야 하겠지요.

34.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얻었음이더라”

ヤコブがエサウにパンとレンズ豆の煮物を与えたので、エサウは食べたり飲んだりして、立ち去った。こうしてヤコブは長子の権利を得ることができた。

그러나 실제로 성경에 보면 34절이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창세기 25장 34절
“34.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ヤコブがエサウにパンとレンズ豆の煮物を与えたので、エサウは食べたり飲んだりして、立ち去った。こうしてエサウは長子の権利を侮った。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겠습니다. 우선, 장자의 명분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자녀가 있는데 두 형제라고 해요. 꼭 쌍둥이 아니라도 괜찮아요.

그런데 어느 날 두 형제가 여러분께 와서 말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오늘부터 우리가 형제를 서로 바꾸기로 했어요. 그래서 형인 제가 내일부터는 동생이 되고, 동생인 쟤가 내일부터는 형이 되기로 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자녀가 그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면, 아, 그렇구나. 알았다……라고 할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놈의 자식들이 무슨 헛소리야! 하고 혼을 내지 않겠습니까.

당시는 더욱 심했겠지요.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지금보다도 훨씬 더 장남이 가진 역할이 중요했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부모의 허락도 없이, 자기들끼리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한다면 큰 꾸짖음을 당하고도 남을 일이지요.


그리고 더 나아가 만에 하나, 부모가 허락을 했다고 하더라도 형제 순서가 바뀔 수가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야곱이 형이 되고 에서가 동생이 되었다는 공식적인 기록이 성경에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성경은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여기서의 해심은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얻었다는 점이 아니라,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빼앗기고 말았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요? 그렇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에서는 왜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 장자의 명분에 대해서 축복의 무게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자기가 열심히 공부하거나 노력을 해서 어렵게 어렵게 장자의 명분을 따냈던 것이라면,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귀하게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이 장자의 명분을 얻기 위해서 아무런 노력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돈을 낸 것도 없습니다. 그냥 저절로 주어졌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고 은혜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성경이 야곱에 주목을 했었다면 “야곱이 팥죽으로 장자의 명분을 산 것처럼 너희들도 야곱을 본받아서 축복을 빼앗아야 하느니라” 뭐, 이렇게 기록이 되어야 하겠지만, 그와 같은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6절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이를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또 음란한 사람이나 한 그릇의 음식 때문에 맏아들의 특권을 팔아 버린 에서와 같은 불신앙의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하십시오.”

また、だれも、一杯の食物と引き替えに自分の長子の権利を売ったエサウのように、淫らな者、俗悪な者にならないようにしなさい。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무게를 모르는 사람을 성경은 바로 망령된 자, 불신앙의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축복의 무게를 몰랐기 때문에, 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 그야말로 아무리 많은 돈을 주고도 맞바꿀 수 없는 ‘장자권’이라는 크고 놀라운 축복을, 팥죽 한 그릇, 제가 허기가 졌을 때 편의점에서 사 먹은 빵 2개와 딸기우유 하나 정도에 팔아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에서가 그 하나님의 축복의 무게를 알았더라면 그렇게 했을까요? 아니요. 팥죽이 아니라 당장 그 자리에 쓰러져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팔아 넘기지 않았겠지요. 끝까지 자신이 받은 축복을 지켰을 것입니다.

‘망령된 자’, ‘불신앙의 사람’와 같이 축복의 무게를 모르는 사람은 또한 ‘감사’가 없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그렇겠지요. 크나큰 축복의 무게를 알았더라면 그 은혜에 감사를 드렸겠지만, 그 축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모르는 사람한테 있어서는, 감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こういうわけで、いつまでも残るのは信仰と希望と愛、これら三つです。その中で一番すぐれているのは愛です。

믿음도 좋습니다. 소망도 좋습니다. 사랑도 좋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감사가 빠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께서 지금부터 말씀 드리는 이 사람의 표정을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은 교회 생활을 오래 했는데 그 마음 안에 감사가 없어요. 소망이 있는데 그 마음 안에 감사가 없어요. 사랑이 있는데 그 마음 안에 감사가 없어요.

자, 이와 같은 사람의 표정이 어떨까요.

교회에 맨날 다니는데 감사가 없어요.
아휴, 헌금 내랴 십일조 내랴, 왜 이렇게 돈은 많이 내래.
아휴, 성경은 좀 쉽게 써 놓지, 왜 이렇게 어렵게 써 놔서 못 알아먹게 만들어?
아휴, 누구누구는 정말 꼴도 보기도 싫은데 왜 교회는 안 빠지고 부지런히 나오는지 모르겠어.
아휴, 주일학교 애들은 왜 저렇게 시끄럽게 난리를 치고 그래.

소망에 감사가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소망이라고 하면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기도 응답도 소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알기 쉽게 차를 달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응답을 해주셨다고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감사가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아휴, 차가 필요하다고 기도하니까 경차를 주시는 것 봐. 좀 남들처럼 좋은 차를 주시면 안 되나?
아휴, 차가 필요하다고 기도하니까 국산 차를 주시는 것 봐. 좀 남들처럼 외제차를 주시면 안 되나?
아휴, 외제차를 달라고 했더니만 한 대 밖에 안 주시는 것 봐. 우리 가족이 나 하나야?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가 없는 사랑은 질투와 시기가 생기게 됩니다. 의심이 생깁니다. 독점하고자 하는 욕심이 생기게 됩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감사가 없으면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 있는데도 그 사람을 소중히 여기지 않게 됩니다. 자기 멋대로 대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처럼 감사를 모르는 사람, 그 사람의 표정은 어떨 거라고 생각되십니까.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의 표정은 뻔합니다. 거기에는 감사가 없기 때문에 만족이 없습니다. 맨날 불평과 불만이 떠나지를 않아요.

그렇게 되면 낮이나 밤이나, 나가나 들어오나 항상 찡그린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건 뭐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그러면 믿지 않는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예수님을 믿고 싶어지겠습니까? 맨날 찡그린 얼굴을 하고 다니면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어요.

하이고, 나도 당신처럼 예수 믿으면서 찡그리고 다니라고? 됐네 이 사람아. 그러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면 감사가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무게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배고픔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판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 축복의 약속을 버리고 세상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배가 고프십니까. 어려우십니까. 그러시겠지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지금 코로나다 뭐다 해서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축복을 걷어차버리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지금 팥죽 한 그릇을 못 먹은 정도로, 빵이나 우유를 못 먹은 정도로 쓰러져 죽으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셨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그 사랑으로 우리는 값없이 죄에서 해방되어 구원에 이르게 된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그 축복의 무게를 모르고 가볍게 여긴다면 우리는 에서보다도 못한 사람, 크나큰 축복을 헌신짝처럼 내다버리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4장 12절~13절
“12.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不法がはびこるので、多くの人の愛が冷えます。
しかし、最後まで耐え忍ぶ人は救われます。


어려움이 더할수록 많은 사람들의 믿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운데 예수님은 믿어서 뭘 해.”

이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축복을 버리고 떠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주신 예수님을 끝까지 믿고 의지하면 그 너머에는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 그리고 우리에게 주실 축복의 무게를 깨닫고,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주님을 붙잡고 끝까지 견디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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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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